뉴스페퍼민트는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전하고자 2012년 7월 미국 보스턴에서 시작했습니다. 외신 큐레이션 매체. 이효석 대표와 송인근 편집장, 유혜영 교수가 함께 시작했으며, 현재는 eyesopen님 등 여러 필진들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불평등이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오늘날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가 낳은 여러 문제와 부작용의 결과 갈수록 심각해진 부의 불평등은 그 자체가 다시 사회의 동력을 떨어뜨리고, 심할 경우 자본주의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중요한 원인이 됐습니다. 자칫 헤어 나오기 어려운 악순환의 굴레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UC 버클리 경제학과의 가브리엘 쥐크망 교수는 "21세기 자본"으로 잘 알려진 토마 피케티, 에마누엘 사에즈 교수와 함께 지구적인 차원에서 점점 심화하는 부의 불평등 문제를 연구해 온 젊은 학자입니다. 지난해에는 40세 이하 경제학자 가운데 앞으로의 연구 성과가 기대되는 학자에게 수여하는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 쥐크망 교수가 뉴욕타임스에 칼럼을 썼습니다. 더 늦기 전에 전 세계가 부자 증세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으로, 평소에 하던 주장에 비해 새로운 건 없었습니다. 그래도 문제가 지적된 지는 꽤 오래 지났지만, 여전히 이런저런 해결책이 잘 작동하지 않았던 상황을 고려하면, 시대의 사명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불평등을 줄이는 문제에 관해 우리 사회는 어디쯤 와 있는지 돌아보게 해주는 글입니다.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억만장자들이 최소한의 소득세도 내지 않는 이유, 세금을 걷는 방법 오늘은 현재 부의 불평등이 어느 수준인지 직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인터랙티브 그래프 한 편을 소개하고, 쥐크망이 제시한 해법의 실효성에 관해 따져보도록 하겠습니다. 독자가 글이나 기사, 콘텐츠와 상호작용한다는 뜻의 인터랙티브 콘텐츠는 이미 많은 언론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프 베조스나 일론 머스크 같은 사람들에게 세계 최고의 갑부라는 호칭이 붙곤 하는데, 정확히 이들이 얼마나 부자인지 보통 사람들은 체감하기 어렵습니다. 깃허브 유저 MKorostoff가 이해를 돕기 위해 제프 베조스의 재산을 예로 들어 그래프를 그리고, 이를 간단한 인터랙티브 그래프로 만들었습니다. 독자가 해야 하는 상호작용은 단순합니다. 엄청난 '스크롤의 압박'을 견디며 베조스의 재산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오른쪽으로 마우스 스크롤을 계속 밀어보는 겁니다. 그래프를 그릴 때 베조스의 재산은 1,850억 달러였는데, 지금은 2,100억 달러로 더 늘어났다는 점도 참고하시고, 오래 걸리지 않으니 꼭 한 번 직접 마우스를 스크롤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구와 태양의 크기를 비교해 이해하기 쉽게 써둔 기사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 밖에 여러 비유, 표현이 떠올랐지만, 이 그래프야말로 아무리 설명해 봤자, 직접 해보는 데 미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그래프 보기 그래프 중간중간 나오는 설명 가운데 인상적인 것 몇 가지를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1,000달러는 너무 작은 점이라 모니터에 붙은 먼지처럼 보인다. 아니, 먼지도 저 작은 점보다는 큰 경우가 많다. 미국 가계의 중위소득이 6만 8,000달러인데, 이 작은 사각형은 그래도 눈에 보인다. 이어 100만 달러, 10억 달러가 표시되고, 베조스의 재산 1,850억 달러가 등장한다. 옆으로 눕힌 거대한 막대그래프 아래 눈금이 있는데, 눈금 하나가 50만 달러다. 미국의 주택 중위가격이다. 베조스의 재산으로 평균적인 집을 40만 채 이상 살 수 있다. 중간에 아마존 물류창고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받는 연봉의 평균(3만 5,000달러)이 아주 잠깐 스쳐 간다. 미국의 모든 암 환자에게 항암 치료를 하는 데 드는 비용이 90억 달러다. 베조스의 재산은 2020년 7월 20일 (급등한 주가 덕분에) 하루에 130억 달러가 불어났다. 베조스 같은 갑부 중의 갑부 앞에선 우리가 흔히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재산 규모도 그야말로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 비욘세의 재산도 4억 달러밖에(?) 안 되고, 창업자가 아니라 전문경영인으로 합류해 지분이 적은 애플의 CEO 팀 쿡의 재산도 고작(?) 6억 2,500만 달러다. 의사의 평생 기대소득(670만 달러)나 변호사의 평생 기대소득(400만 달러)이 하찮게 느껴질 정도다. 부자의 재산을 빼앗거나 강제로 환원하자는 이야기가 절대로 아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시행에 옮겨 성공한 사람이 보상받는 건 당연하다. 다만 과연 이렇게 많은 부가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게 맞는지에 관해선 진지하게 논의해 봐야 한다. 베조스를 포함한 미국 최고 갑부 400명의 재산을 모두 합치면 3조 2,000억 달러다. 미국 전체 소득 수준 하위 60%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재산의 합보다 많다. 400명이 대략 2억 명보다 재산이 더 많은 거다. 스크롤만 해서 베조스의 재산을 표시한 막대그래프 끝에 이른 분은 없을 겁니다. 저도 중간에 아래 나오는 표시바를 보고는 포기했습니다. '증세 동맹' 가능할까? 가브리엘 쥐크망의 목적은 갑부가 얼마나 재산이 많은지 드러내 이들을 악마화하는 게 아닙니다. 법을 지키며 사업을 해서 부자가 됐다면 이는 비난보다 동경의 대상이 되는 게 당연합니다. 다만 준법과 범법, 편법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분야가 바로 세금인데, 쥐크망은 베조스 같은 갑부들이 세금을 안 내도 너무 안 내서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이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칼럼에 소개된 LVMH의 창업자 베르나르 아르노처럼 유럽의 갑부들도 마찬가지고, 우리나라도 재벌 총수 일가가 세금을 제대로 냈느냐 안 냈느냐는 늘 논쟁의 대상입니다. 쥐크망은 전 세계가 일종의 증세 동맹을 구축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피케티가 제안했던 전 지구적인 부유세와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제안인데, 조세 회피라는 미명 아래 지금도 버젓이 계속되는 사실상의 탈세를 억제하고 세수를 늘리기 위해 전 세계가 다국적 기업의 이윤에 최소한의 법인세를 매기고, 베조스나 아르노와 같은 갑부들의 재산에 최소한의 부유세를 매기자는 제안입니다. 이들이 올리는 소득이 대부분 비과세 대상이다 보니, 이들의 재산은 한도 끝도 없이 불어납니다. (워런 버핏은 이런 상식에 어긋나는 세제가 부의 불평등을 키우는 데 기여하는 걸 막기 위해 이른바 버핏 세제(Buffett Rule)를 제안하기도 했죠.) 정부가 세금을 거두면 필요한 데 돈을 잘 쓴다는 보장이 있냐는 지적과 비판은 이 글에서는 논외로 하겠습니다. 일리 있는 지적이고, 사회마다 치열한 토론을 벌여야 할 주제지만, 누진세와 같은 세제를 통해 부의 불평등을 적극적으로 개선하지 않고 오히려 작은 정부의 미덕을 과도하게 찬양하며 무책임하게 세금을 깎은 결과 지금처럼 불평등한 사회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세수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지는 그 나라 시민들이 활발한 정치 참여를 통해 제대로 감시할 거라고 가정하고, 오늘은 쥐크망이 제안하는 증세 동맹이 과연 실현 가능한지를 생각해 보고 글을 맺겠습니다. 상황을 단순화해서 생각해 보면 이렇습니다. 각국 정부는 증세 동맹에 참여하면 기대 세수가 늘어나는 점이 좋지만, 반대로 기업이나 갑부가 우리나라를 떠나 (증세 동맹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나라로 이주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을 수 있습니다. 증세 동맹에 참여하지 않고 지금과 같은 세제를 유지한다면, 세수는 그대로 유지되고 운이 좋으면 다른 나라 기업이나 부자들이 우리나라로 이주해 세수가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장기적으로 불평등 문제가 개선되지 않고 심화할 수도 있다는 건 단점이겠죠. 여기서 중요한 건 다국적 기업이나 부자들이 "세금 올리면 이 나라를 떠나버리겠다"는 위협이 과연 얼마나 현실적이냐는 겁니다. 기업 경영을 비롯해 부자들이 부를 쌓고 재산을 증식하는 과정에서 법인이나 개인은 이들의 주소지, 속한 공동체와 사회의 노동력, 거주 국가의 제도 전반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원칙적으로 정부가 세금을 거둬 예산을 집행하는 일은 결국 원활한 기업 활동에 필요한 토양을 만들고 제도를 정비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다국적 기업이나 부자들은 세금을 더 내야 하는 상황이 와도 그 나라를 "아예 떠나 버리지는" 못 합니다. 여러 국적을 얻어 그 가운데 세율이 가장 낮은 나라에서 최대한 납세의 의무를 해결하는 게 최선입니다. 그렇다면 이론적으로 모든 나라가 최저 세율을 부과하는 데 동의해 증세 동맹을 꾸린다면, 지금과 같은 조세 회피 또는 탈세를 막아낼 수 있을 겁니다. 다국적 기업이나 부자들이 사실상 세금을 안 내도 되는 곳에 유령 회사를 만들거나 주소지를 바꾸는 식으로 세금을 피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으로는 잃는 것보다 얻을 게 많아 보이는 정책이지만, 법을 바꾸거나 새로 만들고 시행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을 겁니다. 당장 미국만 해도 바이든 행정부는 증세 동맹을 구축하는 데 주도적으로 나섰지만, 트럼프는 이미 감세 정책을 대폭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선거를 치르고 있습니다. 트럼프 본인은 모두의 세금을 깎아준다고 주장하지만, 트럼프의 감세 정책은 철저히 부자들을 위한 감세였다는 것이 이미 데이터로 드러났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증세 동맹은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일 수 있습니다. 다만 지금 방울을 달아야 하는 건 목숨을 내놓는 정도의 대단한 각오를 해야 하는 나약한 개인이 아닙니다. 대신 전 세계 시민들이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하면 될 일입니다. 갑부들의 말도 안 되게 많은 재산의 극히 일부를 세금으로 돌려받아 공동체를 위해 쓰자는 주장이 급진적이지 않다는 쥐크망의 지적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다면 전 세계 시민들이 협력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겁니다.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최근 펴낸 책 "불안한 세대(The Anxious Generation)"가 다시 한번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많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전에 쓴 책 "나쁜 교육(*번역자 주: 원서의 영어 제목은 "The Coddling of the American Mind"로, "오냐오냐하며 키운 미국인"에 가깝다)"까지 함께 놓고 보면, 하이트는 어린 시절 경험하는 문화가 바뀌면서 미국의 청소년들이 이전 세대와 달리 정서적 불안을 겪고, 이게 우울증으로 이어져 자살률이 높아지는 등 정신건강 위기를 초래했다고 진단합니다. 그러면서 하이트는 문제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소셜미디어와 소셜미디어의 폭발적인 보급을 가능하게 한 스마트폰을 꼽습니다. 하이트는 청소년의 정신건강 문제에 주목하기 전부터 이미 소셜미디어의 해악을 꿰뚫어 보고 이를 적극적으로 비판해 왔습니다. 소셜미디어가 인간의 의사소통 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고, 자극적인 험담과 배제, 혐오의 언어를 여과 없이 배설하는 "분노 생산 기계"에 불과하다는 그의 지적은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 밖에도 소셜미디어의 해악이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워낙 많이 드러난 터라 사람들은 청소년들의 정신건강 위기가 소셜미디어 때문이라는 주장을 별 비판 없이 수용했습니다. "소셜미디어가 문제"라는 주장은 어느덧 통념이 됐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자연과학이 아닌 사회과학에서는 어떤 사회 현상의 원인을 하나로 꼽으면 설명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학계에선 당연히 반론과 비판이 잇따르죠. 사회적 통념의 지지를 받으며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 조너선 하이트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아이들이 우울해진 건 정말 스마트폰 때문일까? 뉴욕타임스의 데이비드 월러스웰스가 쓴 칼럼은 분량이 매우 길지만, 자세히 보면 계속 같은 구조의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논리를 짚어보면 이렇습니다. - 미국 청소년들의 정신건강이 나빠졌다는 데이터가 계속 나온다. - 조너선 하이트를 비롯해 그 원인을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에서 찾는 학자들이 있고, 이들의 주장이 거의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 그러나 복잡한 사회 현상의 원인을 하나로 추려내 단정짓는 건 매우 어렵고, 때론 위험한 일이다. - 다른 이유가 더 있을 수 있다. 진단 기준이 느슨해져 과거보다 문제가 더 선명하게 드러날 수도 있고, 정신건강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다소 싱거운 이야기일 수 있지만, 진실은 하이트의 주장과 그에 대한 반론의 중간쯤에 있을 겁니다. 오늘은 하이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경제학 논문을 한 편 소개하고, 그에 대한 반론을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이어 하이트의 주장을 좀 더 자세히 짚어보면서 하이트를 위한 변론을 덧붙여보려 합니다. 자연 실험으로 살펴본 소셜미디어와 정신건강 먼저 소셜미디어와 정신건강의 관계를 연구한 많은 논문 가운데 전미경제학회지에 실린 논문을 한 편 살펴보겠습니다. 보코니대학교의 루카 브라기에리, 텔아비브대학교의 로이 레비, MIT의 알렉세이 마카린이 함께 쓴 이 논문은 실험 대신 이미 일어난 사회 현상을 데이터로 분석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사회 현상에 관해서도 물론 설계를 잘 하면 의미 있는 실험을 할 수 있지만, 보통 사회 현상은 실험이 잘 맞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실제 사회가 실험실처럼 수많은 변인이 통제된 채 굴러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 사회 현상을 기록한 데이터는 반대로 여러 가지 변수가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으므로, 읽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엉뚱한 요인을 원인으로 짚을 수도 있고, 원인과 결과를 뒤집어 오인할 수도 있죠. 그래서 요즘 사회과학에서는 마치 실험실에서 실험한 것처럼 사회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경우 그 데이터를 가지고 연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연히 발생한 실험(natural experiment)을 기회로 삼는 거죠. 소셜미디어와 정신건강의 관계를 살펴본 브라기에리, 레비, 마카린의 연구도 그렇습니다. 이들은 페이스북이 대학교별로 단계적으로 도입됐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페이스북은 2004년 2월 하버드대학교에서 처음 만들어졌지만, 일반 대중에게 공개된 건 2006년 9월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약 2년 7개월간 페이스북은 대학교별로 무작위로 시차를 두고 공개됐죠. 페이스북이 열린 대학에서는 가입자가 빠르게 늘어났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대학들을 선정한 과정이 '무작위'였다는 겁니다. 자연 실험의 중요한 요건 중 하나로, 페이스북을 이용하게 된 대학생들과 아직 페이스북을 써본 적 없는 대학생들의 차이를 비교하기에 좋은 환경이 마련된 겁니다. 연구진이 내린 결론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페이스북이 도입된 대학교 학생들은 전국대학건강평가의 정신건강 지표에서 아직 페이스북을 써보지 않은 대학교 학생들보다 점수가 낮았습니다. 학업 성취도도 하락했습니다. 부정적 영향은 주로 학생들 사이에서 사회적 비교가 늘어난 데서 비롯됐습니다. 아직 '좋아요' 기능이 도입되기 전이지만, 이미 다른 이의 삶을 쉽게 들여다볼 수 있다 보니 남을 부러워하거나 내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연구진은 페이스북에 노출된 기간도 조사했는데, 노출 기간이 길수록 정신건강에 더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데이비드 월러스웰스가 소개한 하이트에 대한 반론 중에는 소셜미디어가 끼치는 부정적 영향이 아예 없다는 주장도 더러 있었는데, 적어도 이 논문은 소셜미디어가 정신건강에 끼치는 부정적 영향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신건강에 대한 인식 변화, 과잉 진단 가능성도 고려해야 다만 하이트도 정신건강 위기의 원인을 오직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월러스웰스도 이 점을 언급했죠.) 하이트는 청소년과 젊은 세대가 어린 시절 겪은 문화가 과거와 어떤 점이 달랐는지에 주목했는데, 그 근본적인 변화에 소셜미디어가 미친 영향이 10~15% 정도 될 거라고 추산했습니다. 학자들의 반론은 대개 10~15%도 너무 크다는 데 집중됩니다. 정말 이 모든 게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 때문이라면 소셜미디어를 개혁할 게 아니라 전면 금지하는 게 온당한 해결책일 겁니다. 그런 과격한 주장이 해법으로 제시되지 않는 건 소셜미디어의 문제를 줄기차게 지적하는 하이트 같은 학자도 문제의 원인을 단 하나로 돌리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또 생각해 볼 만한 지점은 하이트의 주장에 반대하는 학자들이 제기하는 주장입니다. 정신질환에 대한 낙인이 줄어들고, 정신건강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면서 특히 젊은 세대는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는 것처럼 마음이 아프거나 이상 신호가 생기면 전문가에게 치료나 상담을 받는 걸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인식의 변화가 예전에는 쉬쉬하거나 참고 넘어가느라 통계에 잡히지 않던 정신건강 문제를 드러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정신건강이 나빠졌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해결책도 그에 맞춰 달라져야 할 겁니다. 데이비드 월러스웰스는 미국에서 조울증 진단이 급증했던 일을 예로 들었습니다. 한국에서도 갑상선암 환자가 급격히 늘어난 적이 있는데, 이 가운데 적잖은 경우가 다른 나라였다면 암으로 진단받지 않았을, 일종의 '과잉 진단' 가능성이 있던 겁니다. 소셜미디어가 끼치는 해악은 분명 간과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합니다. 학계의 연구가 아니라 내부고발자의 용기로 페이스북과 마크 저커버그가 서비스 가운데 일부는 청소년들의 정신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는 걸 알면서도 이윤을 포기하지 않으려 문제의 서비스를 그냥 뒀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죠. 그러나 프랜시스 하우건 같은 내부고발자는 자주 등장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잠재적인 원인이 있을 때, 그 가운데 어떤 것이 더 큰 영향을 끼쳤는지 밝혀내기 어려울 때일수록 섣불리 예단해선 안 됩니다. 엉뚱한 요인을 원인으로 지목했다가 잘못하면 해결책도 이상한 걸 마련해 헛수고만 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뉴욕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시작된 반전 시위가 미국 전역으로 번졌습니다. 2주 차를 맞아 시위는 더 거세지는 양상입니다. 대학 측은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잇따라 정학 등 징계를 내렸고, 이에 반발한 학생들이 대학 본부 등 주요 건물을 점거하면서 항의하자, 대학 측이 다시 경찰의 진입을 요청해 학생들을 체포하고 여기에 저항하는 학생과 경찰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거나 맞불 시위대와 시위대 사이에서도 충돌이 빚어지는 등 상황은 악화일로입니다. 뉴욕, LA 등 대대적인 시위가 발생한 주요 도시의 시, 경찰 당국은 폭력적인 시위에는 관용을 베풀지 않겠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고, 백악관도 자제를 촉구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양측은 폭력을 부추긴 건 상대방이라며 대치를 거두지 않고 있고, 양측의 요구사항도 좁혀지기는커녕 더 어긋나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테러 공격을 감행하고, 이스라엘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 가자지구에 전쟁이 발발한 뒤 저는 줄곧 정말 어려운 과제지만, 어떻게든 공통분모를 찾고 대화를 통해 평화적인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칼럼과 주장을 소개해 왔습니다. 그런데 캠퍼스에서 정면으로 충돌한 시위대와 대학교, 맞불 시위대, 그리고 정치권의 반응을 보면, "공통분모 찾기"란 역시 쉽지 않은 과제라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합니다. 얼핏 보면 간단한 구호조차, 간단치 않은 사정과 맥락 시위대가 외치는 구호조차 양측이 전혀 다르게 해석하다 보니, 대화의 물꼬를 트기조차 어렵습니다. 팔레스타인을 해방하라는 구호 "Free Palestine"이 그렇습니다. 국경을 어떻게 그을지를 두고도 의견을 모으기 어렵겠지만, 어쨌든 지금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건국과 함께 멀쩡히 살던 땅에서 쫓겨나 요르단강 서안 일대와 가자지구의 좁은 땅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특히 가자지구의 경우 팔레스타인 사람 수백만 명이 쓰는 생필품을 비롯한 모든 물자를 통제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자국민 정착촌을 짓는다는 명목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땅을 빼앗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주둔하던 군대를 물린 것도 2005년의 일입니다. 그때까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점령군이나 다름없었죠. 팔레스타인 해방을 외치는 구호는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현재 이스라엘이 들어선 땅에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로, 자유를 누리고 존중받을 자격이 있으며, 이스라엘은 부당한 점령을 멈추고 군대를 거둬야 한다는 주장의 다른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구호의 의미를 달리 받아들입니다. 이들은 이 구호가 단지 팔레스타인 해방을 외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구호의 맥락을 살펴보면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의 존재를 부정한다며, 이 구호와 구호를 외치는 사람을 배격합니다. 문제가 되는 구호의 전문은 우리말로 "강에서 바다까지 팔레스타인은 아랍 사람들의 땅" 정도로 옮길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강은 요르단강, 바다는 지중해를 뜻합니다. 지금의 이스라엘 땅이죠. 여기를 아랍 사람들의 땅이라고 부르는 건 곧 이스라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기에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혐오 발언이자, 반유대주의의 망령이라는 겁니다. 한쪽의 해방이 반드시 다른 쪽의 멸족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해도 당사자들이 그렇게 받아들이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한 분쟁은 끊이지 않습니다. 잠시 총을 내려놓는 휴전은 있을 수 있겠지만, 분쟁의 불씨는 계속 남으므로, 영구적인 평화가 깃들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이번 시위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도 고민되는 지점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 가자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니 "반전 시위"라 부르면 가장 건조하고 객관적인 이름이 될 것 같은데, 시위대의 주장을 들어보면, 이들은 전쟁의 책임이 명백히 한쪽에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양측이 무기를 내려놓고 휴전이나 평화 협상에 나서라는 주장보다는 일방적인 가해자인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캠퍼스에서 농성을 벌이는 학생들이나 젊은이가 주축인 시위대 안에서는 말이죠. 그래서 미국 언론은 대부분 지금 시위대를 친팔레스타인 시위대(pro-Palestine protesters)라고 부릅니다. 폭스뉴스 등 보수 언론은 이들이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등 반유대주의 구호를 외친다고 주장하며 반이스라엘 시위대(anti-Israel protesters)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1일 미국 의회는 무엇이 반유대주의(anti-semitism)인지를 아예 법으로 명문화하겠다며, 반유대주의 인식법(Antisemitism Awareness Act)을 제정했습니다. 자주 이야기하지만, 미국은 법조문으로 옳고 그름을, 준법과 불법을 세세히 구분해 놓지 않는 보통법 전통을 따르는 나라입니다. 그런 미국에서 무엇을 반유대주의라고 규정하고, "뭐라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불법"이라고 명시해 놓은 법을 만들었다는 건 그만큼 사안이 이례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법을 만들어도 여전히 전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반유대주의 인식법 제정을 주도한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공화당)은 처음 경찰이 컬럼비아대학교 캠퍼스에 들어가 시위대를 끌어내고 체포한 뒤 그 현장을 찾아 "필요하면 주 방위군을 투입해서라도 폭력 시위를 진압해야 한다"고 말해 시위대의 주적이 됐습니다. 시위가 번진 데는 별다른 물리적 충돌 없이 캠퍼스 안에서 농성 중이던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뉴욕시 경찰(NYPD)에 캠퍼스 진입과 시위 진압을 요청한 대학교 당국과 네맛 샤픽 총장의 판단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가 가장 철저히 보장돼야 할 대학교에서 평화롭게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이 체포되고 대거 징계를 받자, 학생들 사이에서 여론이 급격히 나빠진 겁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에서 꼭 한쪽 편을 들지 않던 사람들도 대학 당국의 조치를 비판하며 시위대와 연대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시위가 다른 학교로 삽시간에 번져나간 것도 뉴욕 경찰이 100여 명의 학생을 체포하고 농성장을 강제로 철거한 뒤였습니다. 연방제 국가 미국에는 중앙(연방) 경찰청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비슷한 규모의 시위가 벌어졌다고 가정해 봅시다. 치안을 유지하는 정부의 책임자는 행정안전부 장관과 경찰청장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연방제 국가 미국에는 우리나라로 치면 중앙의 경찰청 자체가 없습니다. 연방 차원의 경찰은 우리가 아는 연방수사국(FBI)이 범죄 수사와 기소를 맡긴 하지만, 특히 치안 업무는 각 주 정부와 지방 정부 산하에 있거나 서로 협력하는 지방 경찰이 독립적으로 맡습니다. 즉, 만약 한국에서 경찰이 대학교 캠퍼스 내 시위를 과잉 진압한다면, 결국 비판의 화살이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에게까지 미치겠지만, 뉴욕 경찰이든 텍사스 보안관이든, LA 고속도로 순찰대 경찰이든 대통령의 임명권이 닿지 않는 철저히 독립된 조직입니다. 그래서 공권력에 대한 반발이 당장 오는 11월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따져볼 때 방정식이 한국처럼 간단하지 않다는 점은 염두에 둬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바이든 대통령은 이 문제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위에 참여하는 대학생을 비롯한 젊은 층 유권자들도, 시위대가 비판하는 유대인들도 모두 민주당의 핵심 지지층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경찰의 캠퍼스 진입을 요청한 네맛 샤픽 총장도 시위대와 의회(특히 공화당 정치인) 사이에서 옴짝달싹 못 하는 딜레마에 빠졌는데, 바이든 대통령의 상황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캠퍼스 시위는 물론 이번 전쟁 자체가 다루기 굉장히 어려운 사건입니다. 이를 엿볼 수 있는 칼럼이 한 편 실렸습니다. 지난주 틱톡 금지 법안과 함께 여러 가지 법안이 한꺼번에 일괄 처리됐는데, 그 가운데 우크라이나에 대규모 무기를 지원하기로 한 법안이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정확히는 미국의 동맹국과 우방에 필요한 군사 물자를 지원하는 법안이 통과된 것이고, 우크라이나 다음으로 많은 무기를 보내줄 수 있게 된 나라가 다름 아닌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원조, 무기 지원은 대대적으로 홍보해 온 바이든 행정부가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 원조와 무기 지원은 쉬쉬하는 듯한 모습입니다.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미국은 왜 떳떳하게 하지 못할까? 이스라엘을 지원하면서 왜 그럴까요? 닉 크리스토프가 칼럼에서 지적한 원인 가운데 민주당과 바이든의 지지층 가운데 이스라엘을 향한 지원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바로 지금 대학가에 번진 반전 시위와 맥이 닿아있기 때문입니다. 대학생이 포함된 젊은 세대는 대체로 민주당과 바이든에 우호적인 유권자들인데,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이스라엘의 공격과 이를 말릴 생각이 별로 없어 보이는 바이든 대통령에게 불만이 많은 이들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이번 전쟁을 바라보는 미국인의 생각을 물은 여론조사 결과에서 나타난 세대별 차이를 살펴보면 흥미롭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대인은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퓨리서치 센터가 올해 2월 13일부터 25일까지 미국인 1만 2,693명을 대상으로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에 대한 생각을 물었습니다. 응답자의 연령을 18~29세, 30~49세, 50~65세, 65세 이상으로 나눠 답변을 정리해 보면, 가장 젊은 세대이자 대학생이 포함된 18~29세는 이번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이 나머지 세대와 뚜렷이 다릅니다. 전체 세대에서 유일하게 이스라엘 사람(14%)보다 팔레스타인 사람(33%)에게 더 공감한다고 답했고, 팔레스타인 사람이 호감(60%)이라고 답한 비율이 이스라엘 사람이 호감(46%)이라고 답한 비율보다 높았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마스와 전쟁을 벌이는 이유가 타당하다고 답한 이들의 비율도 전 세대에서 가장 낮았으며, 10월 7일 테러 공격에 대한 보복 공격을 진행한 방식을 용납할 수 없다(46%)고 답한 사람이 이해된다(21%)고 답한 사람보다 두 배 이상 많았습니다. 전쟁에 대한 바이든 대통령의 정책도 너무 이스라엘 편을 들어서 문제(36%)라고 답한 사람이 너무 팔레스타인 편을 들어서 문제(10%)라고 답한 사람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모두 다른 세대의 답변과 차이가 명확합니다. 미국의 Z세대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백인의 비율이 50%가 되지 않을 만큼 인종 다양성이 높은 세대고, 아랍계 미국인도 많습니다. 본인이 아랍계 미국인이 아니어도 학교에서 같은 반에 아랍계 미국인 친구가 한두 명씩 있는 경우가 이전 세대보다 훨씬 많은 거죠. 이들에게 2차 세계대전과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 박해는 역사 교과서 속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보다는 지금 이미 부강한 나라 이스라엘이 주변의 힘없고 가난한 나라를 군사적으로 괴롭히고 공격하는데, 왜 미국이 이스라엘에는 아무런 조건도 없이 쩔쩔매며 원조를 해주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겁니다. 이건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등의 반유대주의로 보기 힘든, 그냥 세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현실 인식입니다. 분명 한 세대 전에는 모든 인류가 숙연해질 수밖에 없던 피해자였지만, 지금 자라나는 세대, 젊은 세대가 보기엔 오늘날의 이스라엘은 엄연한 가해자인 거죠. 바이든의 딜레마 일각에선 현대 캠퍼스 시위를 두고 1968년 베트남전쟁 반전 시위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반전 운동은 대학생과 젊은이들이 군대에 징집돼 전쟁터로 끌려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더 거세게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전쟁으로 국방비 지출이 너무 많아져서 미국 경제에 부담이 되기도 했죠. 지금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은 물론 미국의 중동 정책에 아주 중요한 전쟁이지만, 미군이 직접 참전한 전쟁이 아니고, 아무리 무기를 많이 지원해도 미국 경제를 뒤흔들 정도에는 훨씬 못 미치는 수준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들 사이에선 지지를 받을지 몰라도 과연 이번 시위가 전반적인 여론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바이든 대통령으로선 젊은 층 유권자도 외면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이스라엘과 냉랭하게 거리를 두기도 어려운 진퇴양난의 상황입니다. 젊은 유권자들이 바이든 대통령의 정책에 실망한다고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아예 투표를 하지 않는다면 경합주에서 치명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 외에 중요한 지역구 의석이 뒤집힐 수도 있고요. 유대인들의 선거자금과 영향력을 무시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유권자 숫자로만 따지면 많지 않지만, 유대인은 정치권은 물론 재계, 학계 등 엘리트 계층 전반에 막강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미국 대학은 5월에 학년이 끝나고, 긴 여름방학을 맞습니다. 학교들은 내심 얼른 방학이 돼 시위의 열기가 식고 긴장 상태도 알아서 풀리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공화당은 계속해서 대학교 총장들을 청문회 증인으로 세워 압박의 고삐를 늦추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에는 하원 교육위원회가 시위가 일어난 대학들이 연방정부 교부금을 어떻게 쓰는지 감사를 벌이겠다고 밝혔으며, 오는 23일 예일대학교와 UCLA 총장에게 청문회 출석을 요청했습니다. 진퇴양난에 빠진 민주당과 바이든 대통령이 지금의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을지, 아니면 전쟁에 발목이 잡히고 말지 지켜볼 일입니다. 사진 : 게티이미지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이종혁 싱가포르 난양공대 교수) 중국은 최근 환경 기술 분야에서 눈부신 진전을 이루며 글로벌 무대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특히 시진핑의 중국은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이며, 국제사회에서의 리더십 공백을 메우려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 미국이 파리기후협약 등 여러 국제 환경 협약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했을 때 중국의 이런 움직임은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시진핑은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로 인해 발생한 리더십 공백을 기회로 삼았습니다. 중국을 환경 기술 분야의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하며 국제적 리더십을 강화하는 전략을 폈죠. 중국이 중점적으로 투자하는 환경 기술은 재생가능 에너지, 전기차, 에너지 효율 향상 등 많은 부문에서 분명 기술 혁신을 이끌고 있습니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환경 보호와 지속 가능한 개발에 기여하고 있으며, 많은 나라가 중국이 주도적으로 개발해 상용화한 기술들을 도입해 탄소 발자국을 줄이는 등 효과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중국의 기술 발전이 인류 전체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긍정적인 효과 이면에 자리한 좀 더 복잡하고 전략적인 계획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시진핑의 환경 기술 정책은 그의 정치권력을 강화하고, 중국의 국제적 입지를 높이기 위한 많은 도구 중 하나로 쓰입니다. 시진핑 주석과 중국 공산당 정부는 이 문제를 순수한 "환경" 문제로 여기지 않습니다.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중국이 기후변화를 늦출 구세주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시진핑 혹자는 "시진핑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중국의 글로벌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 지구적인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게 왜 나쁜가?"라고 물을 겁니다. 그 의도가 정치적인 독재를 강화하는 데 있더라도 정책을 편 결과 실제로 환경 문제가 해결되거나 개선된다면, 그 또한 바람직한 일 아니냐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나 중국이 다른 나라와의 기술 협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정작 큰 관심이 없고, 환경 기술을 철저히 정치적, 외교적 수단으로 이용하려 한다면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중국이 자국 기술에 대한 종속을 통해 다른 나라에 외교적인 압박을 가할 수 있는 상황이 우려스럽습니다. 이미 한한령(限韓令)을 비롯한 경제 보복의 피해를 직접 체험한 우리 국민은 중국 정부의 '의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경제적 목적보다 정치적 목적이 더 중요한 중국의 기술 발전 시진핑은 과학기술 발전을 국가 전략의 핵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특히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파스퇴르의 말을 인용하면서 과학기술 발전을 통해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고, 국가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시진핑이 과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요구하는 것이 다름 아닌 애국심입니다. 과학기술을 단지 연구 영역에서만 바라보지 않고, 국가의 중요한 전략적 자산으로 활용하고자 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시진핑의 리더십 아래 중국의 과학기술 정책이 기초과학을 비롯한 장기적 연구보다 상용화 가능성이 큰 단기적인 프로젝트에 집중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이 국제 경쟁에서 빠르게 우위를 점하는 데는 혁신을 통한 근본적인 기술 발전보다 과학기술의 자립이 더 중요합니다. 자연히 과학기술 정책에서도 경제적인 목적보다 정치적인 목적이 우선시되고, 기술 진보라는 자체의 목적보다 정치적 도구로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실례로 중국의 주요 연구소 대부분은 정부 산하기관입니다. 최근에는 국가과학기술영도소조가 중앙과학기술위원회로 승격되는 등 과학기술 발전을 지휘, 총괄하는 기능이 정부에서 공산당으로 점차 이관되는 추세입니다. 중국의 과학기술 발전은 점차 정치적 신뢰성과 일관성을 가장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과학 혁신 주체들과 정책 사이에 괴리가 발생하는 것도 중앙집중화와 정치적 목적이 점점 더 중요해졌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환경 기술 전략도 정부 주도의 생산을 통해 주로 이뤄졌습니다. 그래서 태양광, 전기차, 수소기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근본적인 기술 혁신보다는 중국 자체 기술로 제품을 만들어 빠르게 상용화하는 데 더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중국의 생산력을 신속하게 향상하기 위한 전략으로, 낙후된 기술 수준을 한 단계 뛰어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화력발전소 건설을 건너뛰고 바로 신재생 에너지원이라 할 수 있는 태양광과 풍력에 집중하거나, 자동차 산업에서 기존의 디젤 엔진 자동차 개발을 넘어 곧바로 전기차 생산으로 전환하는 등의 조치가 그렇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원천 기술을 개발하고 기술로 경쟁하는 것보다 어떻게든 빠르게 시장에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중국이 기술 발전에 많은 투자를 한 데 비해 원천 기술에서 여전히 다소 뒤처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태양열 패널이나 전기차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나라가 됐지만, 여전히 중국은 관련 제품을 만들 때 서구의 원천 기술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협력"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이유 제이콥 드레이어는 칼럼에서 미국이 원천 기술을 계속 혁신하면서 중국과 외교적인 협력을 통해 건설적인 경쟁을 편다면, 중국이 원천 기술을 빠르게 상용화, 대량화해서 인류에게 시급한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드레이어는 미국이 중국과 협력을 모색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전략적 수단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중국은 기후변화 대응에 필요한 기술 개발에 많은 자원을 쏟아붓고 있으며, 글로벌 기후 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이미 올라섰습니다. 하지만 앞서 지적했다시피 미국이 중국과 환경 기술 협력을 시도하더라도 중국에는 미국과 협력해 인류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환경 기술은 중국의 전략적 자산이어야 하는데, 여기서 미국과 협력하는 것은 시진핑의 목적과 충돌합니다. 중국은 다른 나라와 기술을 공유하기보다는 독자적인 발전을 우선시하며, 국가 권력과 (다른 나라로부터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기술을 개발하려 합니다. 미국과의 협력이 중국의 전략적 목표와 배치될 수 있는 지점입니다. 시진핑 하의 중국은 여러모로 전형적인 이데올로기 국가로 회귀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중국과 소련 같은 사회주의 국가들은 늘 정부가 주도해 기술 발전을 추진했고, 이러한 정부 주도의 기술 투자는 결국,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내세우는 정치적 선전 도구로 전락하곤 했습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기술 발전과 투자 상황만 보고 중국과 미국이 힘을 합쳐 환경 문제를 해결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특히 중국의 의도와 전략적 계획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다소 순진한 생각이 될 수 있습니다. 중국은 환경 기술을 국제적인 협력의 수단보다 국가적 이익과 권력 강화의 도구로 인식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설사 미국과의 협력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더라도, 그 과정에서 미국이 중국의 기술적 우위에 종속될 위험이 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미국의 국가 안보와 기술 경쟁력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이는 미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이 중국의 권위주의적 기술 수출에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미국 연방 대법원은 6월 말이면 회기를 마치고 여름 휴지기에 들어갑니다. 지난주가 이번 회기에 예정된 구두변론을 진행하는 마지막 주였습니다. 5월은 대법관들이 진정인과 피진정인 또는 원고와 피고의 주장을 추가로 듣는 일 없이 기존에 들었던 의견을 다시 정리하며, 서로 토론과 숙의를 거쳐 판결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일찌감치 결론이 난 사안에 관해서는 5월 중에 판결을 발표하는 때도 가끔 있지만, 그러는 일은 정말 드물고 대부분 판결이 회기를 마치기 직전인 6월에 잇달아 나옵니다. 지난주 연방 대법원은 여러 굵직굵직한 사안에 관해 양측의 의견을 듣는 구두변론을 진행했습니다. 자신이 패배한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억지로 뒤집으려 한 트럼프 대통령의 행위가 대통령 임기 중에 일어난 일이므로 면책특권을 적용해야 한다는 트럼프 측의 주장을 듣기도 했고, 이번 대선에서 '뜨거운 감자'가 될 것으로 보이는 임신 중절권에 관한 사건의 구두변론도 열렸습니다. 그 가운데 사건 자체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았지만, 대법원 판결에 따라 미국 사회 전체에 미칠 파장은 작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사건이 뒤늦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바로 집이 없어 거리나 공공장소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을 정부가 범죄자로 규정하고 처벌하는 것이 헌법에 비춰 정당하냐는 다툼입니다. 오레곤주의 그랜츠 패스라는 인구 4만 명이 안 되는 작은 도시를 상대로 노숙자와 이들을 대변하는 시민단체가 소송을 제기해 진행된 그랜츠 패스 대 존슨(Grants Pass v. Johnson) 사건도 연방 대법원의 심리 목록 중에 있습니다. 이에 대해 UC버클리 로스쿨의 임상 프로그램 디렉터인 로라 라일리가 뉴욕타임스에 칼럼을 썼습니다.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길에서 자면 불법"…그들을 더는 벼랑 끝으로 내몰지 말라 라일리가 지적했듯 핵심은 노숙자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처벌하는 정부의 법 집행이 수정헌법 8조 위반이냐 아니냐입니다. 미국 수정헌법 8조의 내용이 무엇인지 우선 살펴보죠. 과도한 보석금을 요구하거나 과도한 벌금을 부과하거나 잔인하고 비정상적인 형벌을 부과해서는 안 된다. 범죄를 저질러 법을 어기면 물론 법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 하지만, 동시에 그 형벌이 잔인하고 비정상적이어선 안 된다는 내용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을 정부의 권력 남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조항입니다. 취지는 흠잡을 데 없지만, 무엇이 과도한지, 또 잔인하고 비정상적인 처벌은 정확히 무얼 말하는지 기준이 모호해 해석을 두고 다툴 여지가 늘 있습니다. 보통법 전통을 따르는 미국에서는 그래서 헌법을 판례에 비춰 해석하며, 그 해석을 두고 이견이 생기면 소송이 대법원까지 갑니다. 이번 사건도 그렇습니다. 그랜츠 패스가 처음이 아니다 미국에서 집을 잃고 거리에서, 공공장소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꾸준히 늘었습니다. 경제적인 불평등이 심해지고, 집값이 계속 올라 내 집은 고사하고 월세도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 되면서 집에서 쫓겨나는 사람들이 많아졌죠. 그런데 집을 잃은 사람들이 당장 몸을 뉠 만한 노숙자 쉼터 같은 시설은 태부족했습니다. 그랜츠 패스보다 앞서 노숙자를 처벌하는 것이 정당한지를 두고 소송이 진행된 바 있습니다. 아이다호주 보이즈(Boise) 시의 노숙자 로버트 마틴 씨를 시 정부가 공원 풀숲에서 노숙했다는 이유로 주법에 따라 입건, 처벌하자 마틴 씨가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마틴 대 보이즈(Martin v. Boise) 사건의 쟁점도 수정헌법 8조였습니다. 원고인 마틴 씨는 자신이 자발적으로 노숙자가 된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경제적인 사정이 어려워 집을 잃게 됐는데, 노숙자 쉼터 같은 시설이 없었다, 그런데 사람이 하루에 몇 시간이라도 잠은 자야 하는데 잘 데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노숙을 하게 됐다는 거죠. 다른 사람을 해치는 등의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사람의 본능 가운데 하나인 잠을 잤다는 이유로 범법자가 돼 처벌받는 건 가혹하다고 마틴 씨는 주장했습니다. 법원은 마틴 씨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노숙자 쉼터와 같은 시설을 충분히 마련해 놓지 않고 노숙자를 불법으로 규정해 처벌하는 건 수정헌법 8조 위반이라고 본 겁니다. 보이즈 시는 당시 법원의 결정에 항소했고,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그때는 대법원이 사건을 심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묵혀 있던 사건이 그랜츠 패스 대 존슨 사건과 병합돼 함께 대법원 판결을 받게 됐습니다. "숨 쉬는 걸 범죄로 규정할 순 없잖아요?" 구두변론에서 대법관들이 던지는 질문을 보면, 많은 경우 대법관이 어떤 판결을 내릴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현재 미국 대법원은 대법관 9명이 보수 6, 진보 3으로 분류되는 "보수 우위" 상황인데요, 이번 사건에서도 진보 성향 대법관들은 대체로 노숙자의 인권을 우선시하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엘레나 케이건 대법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잠을 자는 건 생물학적 필요에 따라 모든 인간이 하지 않을 수 없는 행위잖아요? 숨 쉬는 것처럼요. 그런데 공공장소에서 숨 쉬는 걸 범죄로 규정할 순 없죠. 집이 없는 사람들이 갈 데가 없어 어쩔 수 없이 거리에서 잠을 자는 건 거리에서 숨을 쉬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지 않나요? 사실 노숙이란 단어를 곱씹어 봐도 비슷한 전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는 "homeless"니까 단지 "집이 없는 상태"나 "집이 없는 사람"을 뜻하지만, 노숙의 한자어 "露宿"에서 이미 알 수 있듯 우리말로 노숙은 집이 없는 상태보다도 "이슬(露) 맞으며 잠을 잔다(宿)"는 뜻을 내포하고 있죠. 집이 없으면 당연히 밖에서 자는 수밖에 없는데,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일을 범죄로 규정한다면 그 규정이 잘못됐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노숙자를 처벌하려는 게 아니라 노숙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 오늘 전문을 번역해 소개한 칼럼도 그렇고 대체로 노숙자들의 인권이 침해된다는 우려는 충분히 소개한 것 같아 지금부터는 도시와 시 정부의 주장을 중점적으로 소개해 보려 합니다. 라일리도 칼럼에서 "정치적인 성향을 뛰어넘는 이례적인 도시 간의 단합이 이뤄졌다"고 평가했는데, 도시들의 하소연과 주장도 일리가 있습니다. 인권단체들이 노숙자를 위한 의견서를 제출한 것처럼 그랜츠 패스 시의 편에서 논리를 개진한 의견서도 접수됐습니다. 이 가운데 (전국에서 노숙자 문제가 가장 심각한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히는) 샌프란시스코시, 카운티 정부가 낸 의견서를 보면, 제9 순회 법원의 판결 때문에 노숙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 정부는 정책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졌다고 주장합니다. 노숙자 위기는 (시 정부가) 준비한 해결책들을 모두 무력화할 만큼 심각합니다. [제9 순회 법원의 판결은] 샌프란시스코시 정부가 노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련한 법을 집행하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정부에게서 사법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빼앗는 건 노숙자들을 도울 수 있는 권한과 역량까지 같이 빼앗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 결과 노숙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방치되면 주민 전체의 삶의 질과 직결되는 공중보건, 치안, 복지 전반의 서비스 지원도 차질을 빚게 됩니다. 시 정부가 법을 마련하고 집행하는 것이 노숙자를 처벌하거나 몰아내는 게 주된 목표가 아니라 노숙 문제를 해결해 도시 전반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목표라는 겁니다. "충분한" 노숙자 쉼터는 어느 정도? 노숙자 쉼터를 확충하는 문제도 보기보다 간단하지 않습니다. 앞서 순회 법원이 "충분한 임시 쉼터를 제공하지 못하는 경우" 노숙을 범죄로 규정해 처벌할 수 없다고 판결했는데, 여기서 "충분한" 쉼터를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합의하기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문제는 예산을 계획하고 집행하는 절차가 상당 부분 시 정부, 카운티 정부 등 지방정부 손에 맡겨져 있습니다. "우리 동네에 기껏 시설을 지었더니, 옆 동네 노숙자들이 대거 우리 동네로 넘어와 다시 과밀 상태가 되고, 침상이 부족해 공공장소에 노숙자 텐트촌이 늘어나면 어떡하나?" 누군가 이렇게 질문했을 때 그럴 리 없다고 장담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노숙자 쉼터가 일종의 공공재라면, 현실적으로 "공유지의 비극"이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죠. 또한, 정부가 아니라 종교단체나 비영리단체에서 지은 노숙자 쉼터도 있는데, 이 경우엔 노숙자들이 엄격한 규정을 지키기 싫어서 쉼터에 가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쉼터에 머무는 동안은 마약은 물론 술, 담배도 해선 안 되고 통금 시간을 엄수해야 하며, 반려견 등 동물을 데리고 올 수 없는 곳도 있습니다.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노숙자 쉼터는 종교 활동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곳도 있죠. 노숙자들이 이런 곳을 싫다고 할 경우 이런 시설은 "충분한" 노숙자 쉼터가 있는지 따질 때 계산에서 빼야 할까요? 아니면 넣어야 할까요? 얼핏 사소한 차이 같지만, 노숙자가 "비자발적으로" 노숙자가 됐는지를 판단할 때 중대한 차이를 낳는 사안이 될 수 있습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대법원은 구두변론을 진행했지만, 아직 판결은 내리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글 머리에 밝혔듯 이 사건의 판결도 6월에 나올 가능성이 큽니다. 보수 성향의 대법관들은 도시 편에 설 것으로 보이고, 진보 성향 대법관들은 노숙자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커 보이는데, 어떤 판결이 나오든 라일리 디렉터가 칼럼에서 지적한 대로 근본적인 해결책을 도입하고 시행하는 일도 더는 미뤄선 안 될 겁니다. 집을 잃고 쫓겨날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고, 정신건강 치료를 받고 퇴원한 사람들이나 교도소,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들에게 임시로 거처를 마련해 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일자리를 잃거나 수입원이 끊긴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알선하거나 마련해 주는 자활을 도와야 하며, 경범죄 이력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도 법률적 지원이 필요합니다. 좀 더 근본적으로는 경제적 불평등을 줄이는 데도 정부 차원에서 신경을 써야 합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했고, 경제적 취약계층은 벼랑 끝으로 더 몰렸습니다. 노숙자 문제도 심각해졌고, 여기에 마약 등 치안에 문제가 되는 문제가 겹치면서 도시들은 골머리를 앓게 됐습니다. 연방 대법원이 양측의 우려를 최대한 달랠 수 있는 판결을 내릴 수 있을지 지켜볼 일입니다.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권채령 뉴스페퍼민트 에디터) 주말 내내 세계 각지의 이상기후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에콰도르에서는 극심한 가뭄으로 에너지 비상사태가 선포되었고, 파키스탄과 두바이, 카자흐스탄에서는 이례적인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해수면 상승으로 삶의 터전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바닷가나 폭우로 매년 여름 피해를 보는 강가, 더욱 빈번해진 초대형 태풍의 경로 한복판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기후변화는 아직 크게 와닿지 않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는 그야말로 가랑비에 옷 젖듯 세계 어디에서나 조금씩 나타나고 있습니다.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우리는 기후변화의 영향력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나 환경 및 노동경제학을 연구하는 박지성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지난 16일 뉴욕타임스에 쓴 칼럼에서 바로 이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재난적인 피해 사례만큼이나, 서서히 누적되어 가는 작은 피해들로 인한 기후변화의 '숨겨진 비용'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죠. 박 교수가 칼럼에서 소개한 연구에 따르면 조금 더 더운 날이 며칠만 이어져도 산업재해 발생 건수가 늘어나고, 학생들의 학업 성적이 낮아집니다. 간담을 서늘케 하는 극적인 효과를 내는 재앙은 아니라도 모두 무시할 수 없는 기후변화의 위협입니다. 기록적인 폭염이나 태풍, 산불로 발생하는 직접적인 사망 건수만 기후변화의 피해가 아니라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박 교수는 역설합니다. 기후변화의 피해는 고루 미치지 않는다 또 다른 문제는 이처럼 "소소한" 기후변화의 피해마저 불평등하게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기후변화가 인류 전체의 문제임을 인식하고 국제적인 논의가 시작되자, 지금까지 탄소를 마음껏 배출하며 기후변화 문제에 더 크게 기여한 국가와 기후변화 기여도가 낮음에도 처한 환경이나 낮은 경제력으로 인해 더 큰 비용을 치러야 하는 국가 간의 불평등 문제는 꾸준히 제기돼 왔습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비재난적 피해"는 같은 국가 안에서도 지역별로, 또 사회경제적 집단별로 다르게 나타납니다. 폭염이 며칠간 이어질 때 에어컨이 돌아가는 실내에서 일하는 사무직 노동자와 야외에서 일하는 육체 노동자의 피해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폭우가 쏟아질 때 집에 머물 수 있는, 혹은 집에 있어도 되는 사람과 생계를 위해 폭우를 헤치고 오토바이를 몰고 나서야 하는 사람이 체감하는 피해도 다르겠죠. 원래 더운 지역에 사는 사람과 서늘한 지역에 사는 사람은 더위를 느끼는 정도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더운 지역 사람들은 여름 기온이 1도(칼럼 원문에서 기온의 기준으로 삼은 화씨는 대략 섭씨 0.5도 정도니까 더 미세한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라도 별 차이를 못 느낄지 모르지만, 서늘한 데 살던 사람은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할 겁니다. 영화 "기생충"은 이런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줬습니다. 지대가 낮고 배수시설이 열악해 비만 오면 침수되는 지역에 사는 주인공의 가족에게 폭우는 일상을 완전히 파괴하는 재난이었지만, 언덕 위 고급 주택가 주민들에게 평소보다 조금 많이 내린 비는 미세먼지를 씻어 내려주는, 고맙기까지 한 기상 현상일 뿐이었죠. 박지성 교수는 기후변화가 가져오는 복잡한 피해 양상을 다면적으로 이해하고, 맞춤형 대책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특히 기온이 오르는 건 피할 수 없는 미래이므로, 다양한 개인과 집단이 이에 효과적으로 적응해 갈 수 있도록 대비하는 것이 배출량을 줄이고 기후변화를 최소화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지적합니다. 기후변화를 아예 되돌리고, 원천적으로 막기엔 이미 늦은 만큼 기후변화와 현명하게 공존하는, 기후변화를 살아내는 법을 익혀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올해도 유난히 변덕스러운 봄 날씨를 경험 중인 우리 사회는 기후변화가 가져오는 장기적이고 미묘한 변화에 얼마나 잘 대비하고 있을까요?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첨단 기술에 대한 투자만큼이나 여름철 한낮 시간 야외 작업을 법적으로 제한하는 정책을 입안하는 등 대비책을 미리 세워두는 것도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나종호 예일대학교 정신의학과 교수) 저는 한국에서 의과대학 교육을 받고, 미국에서 일하고 있는 정신과 의사입니다. 미국에서는 정신질환 및 정신건강 서비스를 향한 낙인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제가 처음 태평양을 건너온 10년 전과 비교하면 피부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이제 미국 사람들은 꼭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만 심리 상담을 받지 않습니다. 평소에 '자기 관리' 차원에서 심리 상담을 받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이런 변화를 가장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연애 시장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많이 쓰는 데이팅 앱 중에 힌지(Hinge)라는 앱이 있습니다. 힌지가 이용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용자의 91%가 데이트 상대로 심리 상담이나 심리 치료를 받는 사람을 선호한다고 답했습니다. 오케이큐피드(OkCupid)라는 또 다른 데이팅 앱이 2022년 발표한 자료를 보면, 프로필에 '심리 상담을 받는 중'이라고 써놓은 사람의 비율이 이전 해보다 20% 이상 증가했습니다. 짝을 찾아주기 위해 하는 사전 질문 가운데 "심리 치료가 사람들에게 긍정적이거나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문항이 있습니다. 여기에 "그렇다"고 답하는 남성은 그렇지 않다고 답한 남성에 비해 '좋아요'를 두 배 가까이 더 받았습니다. 매칭될 확률도 1.5배 높았죠. 그러다 보니, 상대방에게 호감을 사려고 일부러 '심리 치료를 받는 중'이라고 거짓으로 프로필을 꾸며두는 남성도 있다고 합니다. 자칫 이해가 가지 않는 경향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몸의 근육을 키우기 위해 개인 트레이닝(PT)을 받는 것처럼 마음의 근육과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 정기적으로 심리 상담을 받는 거라고 생각하면 조금 이해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피부과에 가서 피부 관리를 받고, 꼭 치통이 없어도 주기적으로 치과에 가서 치아 건강을 확인하고 관리를 받습니다. 정신건강도 마찬가집니다. 미국은 정신건강을 위해 정기적인 상담을 받거나 정신과 진료를 받는 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사회로 점점 더 변해가고 있습니다.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아이들보다 훨씬 더 불안해하는 학부모들을 위한 조언 지난 8일, 뉴욕타임스 오피니언에는 보스턴대학교 의료서비스에서 오랫동안 대학생의 심리 상담과 치료를 해온 마틸드 로스 박사의 글이 실렸습니다. 글은 '정신건강에 대한 높은 경각심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진' 미국 대학 캠퍼스의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녀가 대학 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걱정이 지나친 부모들의 사례를 읽다 보면 과유불급이라는 사자성어가 절로 떠오릅니다. 혹 '아니, 저렇게 호들갑을 떨 바에야 정신건강에 대해 무던한 편이 더 나은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너무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지적하는 로스 박사조차 미국 청년들의 정신건강 상태가 심각한 문제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는 "통계를 보면 깜짝 놀랄 정도"라며, 미국 18~25세 청년 가운데 14%가 자살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로스 박사가 한국 청년들의 정신건강에 관한 연구 결과를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합니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올해 2월 발표한 '청년 빈곤 실태와 자립 안전망 체계 구축 방안 연구'에 실린 조사 결과를 보면, 19~34세 청년 4천 명 가운데 57.8%가 스스로가 '우울한 상태'라고 답했고, '자살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답한 청년도 37.1%나 됐습니다. 다섯 명 중 세 명꼴로 우울함을 호소하고, 세 명 중 한 명 이상 자살 생각을 한 적이 있다는 한국 청년층의 정신건강은 로스 박사가 깜짝 놀랐다고 말한 미국 청소년의 상황보다 몇 배 더 심각합니다. 이런 추세는 최근 5년 사이 급증한 10, 20대 자살률과도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현재 한국에서 10대, 20대, 30대의 사망 원인 1위는 모두 자살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심각한 정신건강 상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는 정신건강에 대해 대화하는 데 서툽니다. 아니, 대화 이전에 정신건강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지난해 세계 정신건강의 날 보고서에 따르면, "당신은 자신의 정신건강에 대해 얼마나 자주 생각하나요?"라는 질문에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브라질 사람들은 75%가 '자주 생각한다'고 답했습니다. 전체 응답자 중에도 나 자신의 정신건강에 관해 '자주 생각한다'고 답한 사람이 58%였습니다. 반면, 한국은 61%가 '별로/전혀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절반 이상이 '정신건강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한 유일한 국가가 바로 한국이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돌이켜보면, 저 또한 한국에서 자라면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으니까요. 나의 정신건강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 저는 일곱 살 아이의 아빠이기도 합니다. 아이에게 어릴 때부터 일찌감치 꼭 가르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힘든 감정에 관해 부모에게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마음을 먹은 것은 진료실, 응급실, 입원 병동에서 만난 소아 환자들과의 경험 때문인데요, 생각보다 너무나 많은 청소년이 부모에게조차 본인의 힘든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곪을 대로 곪은 염증은 마지막에 터지기 마련이었고, 외래에서 치료받을 수도 있었을 아이들이 정신적 응급 상황이 올 때까지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응급실 혹은 입원 병동에 오게 되는 것을 자주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만큼 힘든 마음에 대해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이 발생했을 때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평소에 하는 습관을 키워줘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평소에 정신건강이나 우울감에 관해 이야기를 전혀 해본 적이 없는 집안에서 아이가 우울증에 걸리거나 자살 생각이 들기 시작했을 때 부모에게 자신의 힘든 감정을 털어놓는 일은 훨씬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평소에 감정을 나누고, 서로의 힘든 마음을 격려해 주던 가정이라면 아이가 그나마 부모에게 도움을 청하기 더 쉬울 겁니다. 세상에 자녀가 심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응급 상황일 때 이를 돕고 싶지 않은 부모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 마음이 아무리 강렬한들 아이가 부모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부모는 영원히 아이들을 도와줄 수 없죠. 언젠가 미국의 코미디언 크리스 개사드가 자신의 우울증에 대해서 고백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10대부터 우울증과 공황장애, 자살 생각에 시달렸으며, 이에 대해 솔직히 고백한 다큐멘터리 커리어 수어사이드(Career suicide)를 제작하여 평단과 대중의 찬사를 받은 바 있습니다. 개사드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자신이 10대 때부터 우울증에 시달렸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자신이 전문적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실제로는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큰 두려움 중 하나는 바로 자신의 아버지를 실망시키는 것이었다고 덧붙였죠. 시간이 지난 후, 아들의 뒤늦은 고백을 들은 아버지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만약에 네가 고등학교 때에 나에게 너의 우울증에 대해서 털어놓았더라도) 나는 아마, 너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지 잘 몰랐을 거야... 하지만 너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벽이라도 뚫고 지나갔을 거란다." 세상의 어떤 부모든 같은 마음이 아닐까요? 아이가 우울해서 세상을 떠날 만큼 힘들다고 하는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를 해결해 주고 싶은 마음은 부모가 다 같을 거라 생각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방법을 모른다면, 어떻게든 그 문제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해 노력하겠죠. 이제는 우리 모두가 우리의 정신건강에 관해 대화를 나눌 때입니다. 우리의 정신건강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해결책을 고민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는 분들은 자유롭게 정신건강 서비스를 이용하고, 주변에서는 정신적인 힘듦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사회.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사회. 완벽하지 않다고 누구를 비난하고 약점 잡기보다는, 서로서로 힘듦을 보듬어줄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를 함께 만들고 우리 사회의 정신건강 위기에 함께 손을 잡고 맞서기 위해 저는 김용 전 세계은행 총재, 그리고 한국의 여러 전문가와 함께 전국적인 캠페인을 준비 중입니다. 그 발걸음에 함께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mindsos.org)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상대로 테러 공격을 벌인 뒤 그에 대한 반격으로 시작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군사 작전 혹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이 벌써 반년이 더 지났습니다. 평화적인 해결은커녕 잠시 총을 내려놓고 민간인들의 목숨부터 살리자는 휴전 논의도 번번이 무산되는 가운데 인도적 지원 활동을 펴던 구호단체 직원 7명이 이스라엘군의 명백한 실수로 숨지는 일도 있었고, 이란이 이스라엘을 향한 공격을 감행해 전선이 오히려 늘어날 조짐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의 의견을 모아볼 수 있다면, 싸움을 멈추고 어떻게든 평화롭게 공존하는 법을 찾기 바라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을 겁니다. 그러나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건 한쪽의 잘못과 책임이 압도적으로 크다는 주장도 얼마든지 접할 수 있습니다. 편을 가르고 상대방에 더 큰 책임을 묻는 주장이 아무래도 언론에 더 많이 보도됩니다. 지금 세상은 마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한쪽 편에 서기를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미국에서도 평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대부분이지만, 똑같이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도 문제의 원인을 다른 데서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이스라엘 친구나 이스라엘에 가족이 있는 유대인 친구들도 있고, 팔레스타인 혹은 아랍계로서 이스라엘, 특히 네타냐후 총리의 배타적인 민족주의 정책을 강력히 규탄하는 친구들도 있다 보니, 평범한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전쟁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조심하게 됩니다. 이 글의 첫 문장에도 지금 상황을 전쟁으로 봐야 할지, 압도적인 군사력을 앞세운 이스라엘군의 일방적인 군사 작전으로 불러야 할지 확신하기 어려워서 두 가지 용어를 같이 썼습니다. 이스라엘 친구 앞에서 하마스가 벌인 테러를 조금이라도 두둔하는 것처럼 오해할 소지가 있는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반대로 아랍 친구 앞에서는 이스라엘의 공격적인 정착촌 건설부터 가자지구에서 벌이고 있는 사실상의 민간인 학살을 간과하는 듯한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끔찍하게 목숨을 잃은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지금 이 순간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자연히 어느 쪽도 절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 가운데 이번에 새삼 눈에 띄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문제의 원인을 규탄하고 해결을 촉구하는 주장이 세상에 격문을 띄우는, '공개 서한(open letters)'의 형태로 세상에 나온다는 점입니다.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끊임없이 쏟아내기만 하는 "공개서한"의 시대, 이제는 끝내자 뉴욕타임스 오피니언에 글을 기고하는 작가 록산 게이가 "공개 서한의 시대"를 끝내자는 글을 썼습니다. 게이는 공개 서한의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오히려 해결책을 찾아가는 과정을 방해하기도 하는 등 한계가 명확하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요즘처럼 정치적 양극화가 극심해진 세상에서 상대방의 의견을 듣기보다 내 주장을 한 번 더 외치는 셈인 공개 서한의 범람은 갈등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늘은 공개 서한과 정치적인 용기에 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내 주장을 밀어붙이는 용기 공개 서한은 분명할수록 좋습니다. 수신인도, 메시지도, 주장도, 그래서 뭐를 어떻게 하자는 구체적인 행동 지침까지 명시할 수 있다면 더 좋습니다. 내가 주장하는 대로만 하면 해묵은 문제든 갑자기 불어닥친 문제든 말끔히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써야 합니다. 그래야 많은 지지 서명을 받고 세간의 이목을 끌어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테니까요. 색깔이 선명할 주장을 펴는 건 나와 생각이 비슷한 이들이야 환영할 일이지만, 반대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 무엇보다 내가 문제의 원흉으로 지목한 반대편 진영에서는 비난을 각오해야 하는 일입니다. 내가 저들을 적으로 몰아붙일수록 저쪽 진영에서는 내가 적이 될 수밖에 없다 보니, 공개 서한을 쓰고 위험을 감수하며 목소리를 내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공개 서한을 통해 편 주장에는 어느 정도 책임이 따르기도 합니다. 혼자서 머릿속으로 생각한 게 아니라, 또 친구들끼리만 주고받은 이야기가 아니라, 공론장에서 화두를 던지고 특정한 행동이나 변화를 촉구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 주장을 접고 타협하는 용기 그러나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용기는 직관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는 용기입니다. 바로 공개 서한을 통해 내 주장을 더 크게 내세우고 관철해 내는 용기가 아니라, 반대로 상대방 주장을 들어보고 내 주장을 일부 접고 양보하고, 상대방과 타협하는 용기입니다. 누가 옳으냐 그르냐를 두고 물러설 수 없는 논쟁에서 지는 것이나 다름없는 양보와 타협을 용기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지워버리는 게 지상목표가 될 수밖에 없는 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선 상대방에게 발언권을 허락하는 데도 적잖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양보와 타협을 용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현실적인 해법을 찾기 위해 우리 편으로부터도 욕을 먹고 손가락질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개 서한을 통해 '강 대 강'으로 부딪치기만 해서는 지금의 문제가 하나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상대방 주장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내 주장만 펴고 상대방을 억압하려 하면, 우리 편 안에서야 "속 시원한 사이다"라는 극찬이 쏟아질지 모르지만, 그저 양쪽 진영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갇힌 반향실의 외벽이 두꺼워질 뿐입니다. 상대방이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라는 자극적인 주장을 펼수록, 상대편에서도 나와 (내 말에 열광하는) 우리 편을 마찬가지로 지워버리겠다고 할 겁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공통분모 찾기' 하마스의 테러가 발생하고 이스라엘군이 보복 작전에 돌입한 10월 각각 프린스턴대학교와 컬럼비아대학교의 공공정책 대학원장인 아마니 자말과 케렌 야르히밀로가 함께 쓴 칼럼에 대해 쓴 해설의 제목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공통분모 찾기'"였습니다. 그만큼 어려운 일을 하기 위해 내디뎌야 하는 걸음걸음에는 당연히 커다란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말 교수와 야르히밀로 교수도 당연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문제를 바라보는 모든 시각이 같지 않습니다. 어쩌면 서로 생각이 다른 지점이 더 많아서 서로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을 찾는 과정이 상당히 괴로웠을지도 모릅니다. 몇 다리만 건너면 하마스의 테러 공격으로, 그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반격으로 가족을 잃은 피해자를 알 만큼 둘은 서로 다른 편에 서 있습니다. 그런 이들이 지치지 않고, 공통분모를 찾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는 건 정말 박수받아 마땅한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정치의 본질도 내 주장을 관철하는 용기보다 내 주장을 접고 타협을 통해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는 용기를 더 크게 쳐줍니다. 정치는 본질적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각을 정말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거야말로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겁니다. 그보다 생각이 달라도 서로 양보하고 합의할 수 있는 점을 찾아가는 과정이야말로 정치가 제대로 작동할 때 나타나는 이상적인 기제일 겁니다. 타협은 정치적으로 비겁하다고 손가락질받을 일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 일부를 내려놓고 공존하는 법을 찾는 과정에서의 타협은 오히려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일 때가 많습니다. 공개 서한의 시대에 내 마이크를 절대 끄지 않고, 내 할 말만 되풀이하겠다는 고집이야말로 비겁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해결책을 찾기 위해선 상대방 주장을 먼저 들어야 하는데, 그에 필요한 용기를 내지 못해서 그저 내 주장만 되풀이하는 거라면, 그게 더 비겁한 일입니다. 타협할 각오로 내 주장을 접고 양보하고 상대방 말을 듣다 보면, 당장은 내가 손해보고 지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무언가 잔뜩 얹힌 것처럼 더부룩하고 불편해서 사이다가 그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불편함을 이겨내고 공통분모를 찾고 이를 넓혀가야 합니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이를 통해 달성할 수 있는 성과를 믿고 타협을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미국 대선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반드시 언급되는 단골 소재가 바로 선거인단(electoral college)입니다. 우리나라처럼 대통령제를 채택한 나라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제도라서 더욱 그렇습니다. 투표권이 있는 유권자들의 표를 더해 가장 많은 표를 받은 후보가 당선되면 간단할 텐데, 미국은 굳이 선거인단이라는 절차를 한 번 더 거쳐서 대통령을 뽑는 방식을 건국 이후 250년 가까이 유지하고 있습니다. 선거인단이 유권자의 뜻을 한 번 걸러내 대통령을 뽑기 때문에 미국 대선을 "간접선거"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간접선거를 "유권자가 직접 지도자를 뽑지 않고, 유권자가 뽑은 누군가가 지도자를 뽑는 선거"로 정의한다면, 미국 대선은 간접선거로 분류하기 어렵습니다. 주마다 양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미국 유권자들이 오는 11월 받아 들 투표용지에는 조 바이든과 도널드 트럼프를 비롯한 대통령 후보 이름이 있을 겁니다. 유권자가 대통령을 직접 뽑는 셈입니다. 단지 표를 집계하는 방식이 다른 나라들과 좀 다를 뿐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미국이란 나라의 특징을 몇 가지 이해해야 합니다. 미국은 50개 주가 모여 연방을 이룬 연방제 국가라는 점, 그리고 보통법 전통을 따르는 관습법 국가라는 점이 그렇습니다. 1791년 제정된 미국 수정헌법 10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헌법에 의하여 미국 연방에 위임되지 아니하였거나, 각 주에 금지되지 않은 권력은 각 주나 국민이 보유한다. 보통 세계 최고 권력자를 꼽으라 하면 미국 대통령을 첫 손에 꼽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미국의 국방력을 비롯한 국력과 국제무대에서 영향력을 생각하면 이런 통념을 틀렸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국내적으로 보면 미국 대통령(연방 정부)의 권력과 권한은 곳곳에서 제약을 받습니다. 대표적인 게 위에 소개한 수정헌법 10조입니다. 대통령은 물론 국내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지만, 대통령의 결정을 견제하거나 뒤집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꽤 많습니다. 같은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선거 제도만 보더라도 우리나라와 미국의 대통령제는 차이가 큰데, 가장 큰 차이는 중앙 선거관리위원회의 존재 여부일 겁니다. 우리나라는 중앙 선관위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관장하는 역할을 진두지휘합니다. 각 지방 선관위는 중앙 선관위의 산하 조직이죠. 그런데 미국은 중앙 선관위가 없습니다. 그런 조직도 없고,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대통령을 포함해 연방 정부를 구성하는 데 선거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 선거를 관장하는 건 어디까지나 주 정부의 일입니다. 주마다 있는 주무부(Department of State of the State)가 주의 사무를 총괄하는데, 주무부의 일 중에 제일 중요한 일이 선거 관리입니다. 연방 정부(미국)의 사무를 총괄하는 부처는 국무부(Department of State of the U.S.)인데, 국무부는 우리나라로 치면 외교부가 하는 일을 합니다. 미국 대선에서 표를 집계하는 방식이 다른 나라들과 다르다고 설명드린 건 선거인단 제도 때문입니다. 미국에선 538명 선거인단 과반의 표를 얻은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선거인단은 주별로 나뉘어 배정되는데, 선거인단을 누구로 어떻게 꾸릴지 정하는 원칙을 관장하는 것이 주무부, 즉 주 정부의 소관입니다. 연방 선거법 어디에도 주 정부가 선거인단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꾸려서 수도로 보내야 하는지 정해놓지 않았습니다. 그런 법을 제정하려 했어도 수정헌법 10조 위반이기 때문에 어딘가에서 막혔을 겁니다. 50개 주 대부분이 선거인단을 배정할 때 '승자독식' 방식을 따릅니다. 주별로 득표를 집계해서 한 표라도 더 많이 받은 후보가 그 주에 배정된 선거인단을 독차지하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민주당과 공화당이 각각 사전에 우리 당이 이기면 누구를 선거인단으로 꾸릴지 명단을 제출합니다. 마치 우리나라 총선의 비례대표 후보 명부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예를 들어 선거인단이 20명 배정된 주라면 민주당이 20명, 공화당이 20명을 각각 정해놓고 선거를 치러서 민주당이 이기면 민주당이 정한 20명이 주를 대표하는 선거인단이 되고, 공화당이 이기면 공화당이 제출한 선거인단 20명이 워싱턴 D.C.로 갑니다. 주마다 선거인단 명부를 주무부 웹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는 주도 있고, 그렇지 않은 주도 있습니다. 주마다 규정이 다른 경우가 너무 많아서 일괄적으로 어떻다고 설명할 수 없는 것 또한, 연방제 국가 미국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아무튼 주 정부의 권한이 막강하기 때문에 대통령을 뽑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선거인단 제도를 운영하는 것도 결국, 주 정부의 몫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미국의 사법 체계는 보통법(common law) 전통을 따릅니다. 보통법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자세히 법조문에 써넣는 대륙법 전통과 반대로 상식과 관습을 존중하고, 법조문보다 법원의 판결, 즉 판례를 중시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대륙법 전통을 따르는 우리나라 사법 체계와 비교해 보면 법조문과 규정 자체가 훨씬 느슨한데, 문제가 생기면 그때 법원에서 잘잘못을 다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주 정부가 선거인단을 어떻게 구성하는지도 법이 정하기보다 관습을 따르는 것이 미국 민주주의를 운영하는 '최선의 방식'입니다. (적어도 미국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올해 대선에서 꽤 오래 유지돼 온 현행 선거인단 배분 방식에 작은 변화가 생길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50개 주 대부분이 선거인단을 승자독식으로 배정한다고 했는데, 정확히 말하면 메인주와 네브래스카주를 뺀 48개 주가 승자독식 방식을 따릅니다. 그런데 네브래스카주가 이번 선거에서 그동안 (하원) 선거구별로 선거인단을 나눠 배정하던 방식을 버리고, 대다수 주와 마찬가지로 승자독식 방식을 채택하려 하자,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자멜 부이가 이에 관해 칼럼을 썼습니다.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정치인들이 '과거의 전통'을 들먹일 때 기억해야 할 것 네브래스카주 정부의 움직임 이면에는 올해 대선을 앞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중요한 전략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 선거 규칙을 최대한 자기한테 유리하게 바꾸고, 선거 관리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겁니다. 지난 2020년 선거에서 심판(선관위, 특히 주요 경합주 주무부)이 자신에게 불리한 판정을 잇따라 내린 것을 결정적인 패인으로 여기고 있는 트럼프는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운동장을 자기 쪽으로 기울이고 있습니다. (트럼프 측에선 자신에게 불리하게, 불공정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맞추는 일이라고 설명할 겁니다.) 아무튼 네브래스카주에서는 이변이 없는 한 공화당 후보가 표를 더 많이 받습니다. 주지사도, 선거구가 따로 없는 상원의원도 모두 공화당 출신이고, 주 정부, 주 의회도 공화당 손아귀에 있습니다. 각 주에 배정된 선거인단의 숫자는 그 주의 상원 의석 수(모든 주가 똑같이 2명)에 하원 의석 수(인구에 비례해 10년마다 재조정)를 더한 숫자와 같은데, 네브래스카주는 5명의 선거인단을 상원 의석 수에 해당하는 2명은 전체 득표 결과에 따라, 나머지 3명은 지역구별로 표를 집계해 배정했습니다. 원칙적으로 5명이 4:1 또는 3:2로 나뉠 수 있는, 승자독식 규정에 예외가 날 수 있는 방식이고, 실제로 2020년 선거에서도 조 바이든이 도시 인구가 많은 2번 지역구의 선거인단 1명을 가져갔습니다. 워런 버핏이 사는 오마하가 2번 지역구에 있습니다. 미국 정치가 양당제를 따르므로, 선거인단을 나눠 가지는 건 철저히 제로섬 게임입니다. 우리 당이 빼앗긴 선거인단은 반드시 상대 당의 표가 되고, 반대로 상대편의 표를 빼앗아 오면 우리 표가 늘어납니다. 경쟁이 치열한 선거일수록 선거인단 한 명 한 명이 아쉬운데, 제도적으로 내 선거인단을 한 명 더 확보할 수 있는 움직임을 마다할 후보는 없을 겁니다. 네브래스카주 정부 공화당 인사들의 이런 시도는 노골적으로 자기편을 밀어주는 일이라고 손가락질받기도 하지만,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철저히 합법적인 일입니다. 앞서 길게 설명한 수정헌법 10조에 보통법 전통이 이를 보장합니다. 민주당은 물론이고, 자멜 부이와 같은 진보 성향 논객들도 공화당의 '꼼수'를 도덕적으로 비난하겠지만, 선거에서 트럼프가 이긴다면 이른바 "정치적으로 모든 게 다 용서되는" 상황이 마련될 겁니다. 제도 자체의 선악을 나누기는 어렵지만... 미국 대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만한 제도적 변화도 아니고, 지엽적인 영향만 끼치고 말 수도 있는 일에 제 개인적인 의견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습니다. 원래 모든 정치 제도, 특히 선거 제도는 그 제도를 설계하고 바꾸는 데 참여한 이해관계 당사자들이 각자 정치적인 셈법에 따라 타협을 거듭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선거인단 제도가 세상에 나온 구체적인 과정은 자멜 부이가 자세히 소개했습니다.) 그보다 오늘은 좀 더 원론적인 차원의 이야기를 보태고 싶습니다. 즉, 절대적으로 선한 제도나 악한 제도는 잘 없다는 겁니다. 애초에 제도를 만들 때 이해당사자의 의견을 얼마나 충실히 반영하고 조율했느냐에 따라 제도가 정당성을 인정받으면 오래갈 것이고, 그런 제도가 상대적으로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제도를 수정하고 개정하는 이유가 악법을 발본색원하는 작업이라면, 애초에 그런 제도가 태어나게 허용한 민주주의 시스템이 성숙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선거인단 제도는 건국의 아버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 문제를 둘러싼 각자의 셈법에 여러 우연이 겹쳐 탄생하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250년 가까운 미국 역사에서 어쨌든 사라지지 않고 명맥을 유지해 왔으니, 생명력 있는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관습법 전통이 강해 한 번 뿌리내린 제도가 잘 바뀌지 않는 특징이 미국 정치에 있기도 하지만, 세부적인 내용과 조항을 주마다 무수히 바꾸면서 변하는 시대상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도 선거인단 제도가 아직도 남아 있는 비결일 수도 있습니다. 선거인단 제도는 지난 2016년에 정당성 측면에서 가장 큰 도전에 직면합니다. 미국 전체 유권자 득표와 선거인단의 표가 극적으로 갈렸기 때문입니다. 도널드 트럼프는 힐러리 클린턴보다 300만 표 가까이 전체 표를 덜 받고도 주요 경합주에서 아슬아슬하게 승리하고 선거인단을 독차지한 제도 덕분에 선거인단 싸움에선 클린턴을 넉넉히 따돌렸습니다. 과연 선거인단이 표심을 제대로 반영하는 게 맞냐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지만, 그런 비판은 "지고 나서 규칙 탓한다"는 반론을 넘지 못하고, 선거인단 제도는 계속 살아남았습니다. 선거인단 제도의 정당성을 둘러싼 논쟁은 지난 2016년의 사례가 그랬듯 선거를 치른 뒤에 진 쪽에서 문제를 제기하면 이긴 쪽이 이를 묵살하는 방식으로 흐를 가능성이 큽니다. 근본적으로 제도가 바뀔 가능성은 특히 미국에선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말입니다. 그보다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도널드 트럼프가 정치 제도 전반의 허점을 파고들어 이를 악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트럼프는 정치에 입문한 뒤 곧잘 관행을 무시하고 철저히 자신의 이익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면 "부패한 기득권이 나를 시기하고 질투해서 견제하는 것"이라고 일축했죠. 그러나 그 정도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선거 절차에 관한 각종 불문율을 어기는 데 이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트럼프는 이번에 재선에 나서며 각 주무부 주요 인사와 선거 관리 위원들을 최대한 자기편 사람들로 채우는 데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그동안은 아무리 치열한 선거에서도 한쪽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선거 관리를 독식하려고 든 경우는 없었습니다. 2024년 미국 정치를 요약하면, 관습법 전통을 따르는 나라에서 관습을 일방적으로 무시해 버리는 권력자를 견제할 방도가 없어 난처해진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트럼프는 몇몇 불문율을 어기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정법을 어긴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아직 판결이 나기 전이지만, 사법 절차를 전부 다 자신을 향한 마녀사냥으로 몰아세우며, 지지자들을 향해 판사를 공격해 달라고 "좌표를 찍는" 트럼프는 선거에서 승리해도 패자에게 정치 보복을 하지 않는다는 미국 정치의 또 다른 불문율을 대놓고 어기는 중이기도 합니다. 제도 자체의 선악을 나누기는 어렵다고 하지만, 불문율과 관습이 다 무너지고 나면 오랫동안 유지돼 온 제도가 정당성을 잃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면 남는 건 유례를 찾기 힘든 정치적인 혼란과 불확실성일 겁니다.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로스 더우댓(Ross Douthat)은 지난해 말 대한민국은 사라지고 있는가?라는 칼럼을 쓴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입니다. 제목만으로도 당연히 한국에서 큰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던 글인데, 많은 선진국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저출생 경향이 유난히 두드러지는 나라가 한국이다 보니, 이를 소재로 삼아 글을 썼던 거죠. 원래는 저출생이나 육아, 가족에 관한 주제보다 주로 종교와 철학에 관한 주제로 글을 써온 더우댓은 2009년 보수 논객이던 빌 크리스톨의 자리를 이어받아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기명 필진에 합류했습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수정란도 생명체이므로, 임신 중절을 금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여러 차례 글로 쓴 적 있는 더우댓은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중에는 보수적인 성향으로 분류됩니다. 저출생 현상이 서구 사회를 비롯한 많은 선진국에서 나타나다 보니, 기저에 자리한 문화적, 구조적인 원인을 분석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글이 종종 올라오는데, 지난 5일에 더우댓이 새로 칼럼을 한 편 썼습니다. 그보다 나흘 전에 뉴욕타임스가 이탈리아 북부의 모범 사례를 소개하며 쓴 기사를 소재로 삼아 쓴 칼럼입니다.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스마트폰을 저출생 극복에 활용하자는 역발상, 그거 말이 되나요? 모범 사례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과 함께 (전국 평균보다) 높은 출산율로 평가하는 성공이 정책 덕분이라고 섣불리 예단하거나 확대 해석해선 안 되는 점을 두루 짚은 더우댓은 개인적인 견해임을 전제로 스마트폰 시대, 좀 더 넓게 보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화면에 파묻혀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종의 풍속을 문제로 꼽습니다. 스마트폰이라는 들고 다니기 편한 기기, 내 관심을 얻고 나를 플랫폼에 붙들어 놓으려는 소셜미디어나 많은 콘텐츠들, 그 기저에 있는 추천 알고리듬까지 분명 하나하나 문제가 많아 보이는 요소이긴 하지만, 사실 저출생의 원인이 스마트폰이라고 콕 집을 만큼 인과관계가 뚜렷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더우댓도 사견임을 전제하지 않았을까 싶고요. 스마트폰과 저출생 사이에 인과적인 연결 고리가 뚜렷하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지, 오늘날 우리의 스마트폰 사용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스마트폰의 문제를 지적한 조너선 하이트의 책과 연구는 얼마 전에 소개한 칼럼에서도 언급됐습니다. 자녀를 과잉보호하려는 완벽주의 성향의 X세대 부모들의 교육관에 소셜미디어를 통해 또래 집단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게 되는 덫의 굴레에 빠진 10대 청소년의 상황이 겹친 결과, 10대 청소년의 정신건강이 급격히 나빠졌고, 특히 여성 청소년들의 자살률이 급증했습니다. 하이트는 더우댓이 저출생과 스마트폰 사이에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고 주장한 것보다 몇 배 더 확신에 찬 어조로 미국 청소년들의 정신건강이 악화한 데는 소셜미디어의 책임이 매우 크다고 단언합니다.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가 사람들을 서로 더 많이 연결해 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화면 밖으로 몰아내 더 외롭게 만들었다는 지적을 새겨 들어야 합니다. 결국 문화를 바꾸지 못한다면 도루묵 스마트폰에 중독된 풍속도 결국은 아이를 낳고 기를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는 문화의 단면일 수 있습니다. 저출생 대책으로 세운 정책이 잘못됐거나 부족해서가 아니라, 기저의 문화 전반이 문제의 원인일 거라는 더우댓의 지적과 통찰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아무리 좋은 정책을 가져와서 젊은 부부 통장에 돈을 넣어줘도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돈이 없어서 아이를 안 낳거나 못 낳는다는 분석은 기껏해야 절반만 맞고, 나머지 절반은 틀린 이야기입니다. 저출생이 심각한 문제라는 데 여론이 대체로 동의하기 때문에 예산을 확보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관건은 이 예산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쓰느냐입니다. 그러려면 당장 시급한 지원도 물론 해야겠지만, 구조적인, 문화적인 걸림돌을 치우는 데도 돈을 잘 써야 합니다. 구체적인 걸림돌은 나라마다, 사회적으로, 문화권마다, 또 시대에 따라 다를 겁니다. 젊은 부부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출산과 육아의 과정을 면밀히 따라가 보기만 해도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기업이 제품이나 서비스를 새로 구상할 때 이를 사용할 고객이 되어 물건을 써보고 서비스를 이용해 보면서 불편한 점, 개선해야 할 점을 찾아내는 것처럼 정부도 탁상공론에 그치지 않는 현실적인, 실질적인 정책을 세워야 합니다.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일도 훨씬 더디고, 어렵지만 중요합니다. 위의 문단에서 출산과 육아의 주체를 저도 모르게 "젊은 부부"로 한정했는데, 젊은 사람만 아이를 낳는 것도 아니고, 결혼한 부부가 아니면 아이를 낳지 말라는 법도 없는데도 그렇게 쓴 건 무의식 중에 드러난 제 편견의 발로입니다. '정상적인 부부'가 아니면 출산과 육아에 도전하는 걸 장려하지 않는 사회는 그 자체로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는 데 걸림돌일 수 있습니다. 한 사회가 아이를 낳아 키우기 좋은 사회여야 하고, 아이를 기르고 싶은 환경이 마련돼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예산을 쏟아부어 여기저기 지원을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아이를 반겨주고 함께 키워주는 사회 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예산은 허투루 쓰일 것이고, 모든 게 도루묵이 되고 말 겁니다. 다양한 이유로 파괴되고 파편화된 공동체를 복원하는 데 예산을 쓰고, 육아의 책임을 부모에게만 맡길 게 아니라 마을이, 사회가, 정부가 뒤를 튼튼히 받쳐줘야 합니다. 돈도 돈이지만, 제도적으로 육아의 짐을 나눠서 지고, 문화적으로도 아이들을 배제하지 않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합니다. 총선 의제에 포함되지 못해 유감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건 어디까지나 오늘의 칼럼을 보고 떠올린 제 의견입니다. 누구나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열린 사회를 지향하는 민주주의 사회라면 서로 견해가 다른 이들이 치열하게 토론하고 생각을 조율해 가며 자원을 배분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를 위해 존재하는 대표적인 제도가 선거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지난 10일 대한민국은 총선을 통해 국회의원 300명을 새로 뽑았습니다. 아쉬운 건 한국에 대해 한국인보다 잘 알지 못하는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도 걱정하며 글의 소재로 쓴 한국 사회의 저출생 문제가 이번 총선 의제에선 사실상 배제됐다는 점입니다. 유권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정당들이 우리 사회의 인식과 문화를 어떻게 바꿔서 심각한 저출생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비전을 내놓고 경쟁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을까요? 물론 현실적인 제약이 한둘이 아니었을 겁니다. 정치인, 정당인으로서 선거를 치러보지 않고서는 짐작하기 어려운 고충도 많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또 다음 선거까지 기다리기엔, 그리고 아마도 다음번에도 또 이 문제보다 훨씬 덜 중요한 정쟁에 매몰돼 기회를 놓치기엔 한국 사회의 저출생 문제는 너무 심각합니다. 칼럼에서 소개한 기사에 사례로 등장한 이탈리아는 유럽연합 국가들 가운데 출산율이 낮아 국가 차원에서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런 이탈리아의 2021년 합계출산율이 1.25입니다. 우리는 이미 늦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것부터 바꿔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