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페퍼민트는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전하고자 2012년 7월 미국 보스턴에서 시작했습니다. 외신 큐레이션 매체. 이효석 대표와 송인근 편집장, 유혜영 교수가 함께 시작했으며, 현재는 eyesopen님 등 여러 필진들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이 2기 행정부 인사를 속속 발표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비서실장을 비롯해 백악관에서 대통령을 보좌할 참모들은 대부분 상원의 인준 없이 대통령 취임과 함께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반면 정부 부처 장관과 연방기관장 등 독립성과 전문성이 요구되는 보직을 맡게 될 이들은 대통령이 지명하더라도 인사청문회를 포함한 상원의 인준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각 부처 장관과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 의장과 이사, 증권거래위원장, 연방거래위원장 등 독립 기관, 중앙정보국(CIA)장과 연방수사국(FBI)장 등 정보기관, 국세청(IRS)장, 식품의약국(FDA)장 등이 여기 포함됩니다. 트럼프 당선인이 지명한 후보들의 면면을 보면, ‘파격 인사’라 부를 만한 인사가 많습니다.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 내 전통적인 정치인들과도 인재 풀이 완전히 다른 트럼프인 만큼 모두를 놀라게 하는 지명이 이어졌죠. 자연히 이를 둘러싼 논란도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는데, 모두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선거에서 승리한 대통령이 정부를 꾸리는 데 필요한 고유의 권한인 인사권을 행사한 것이고, 의회도 공화당이 모두 다수당을 차지한 만큼 논란은 논란일 뿐 인사를 철회할 이유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대통령의 인사를 검증하고 필요할 경우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상원이 주어진 역할을 어디까지, 얼마나 행사할지 정도에 관심이 쏠릴 뿐입니다. 오늘 글도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인사 전반을 짚어보는 글은 아닙니다. 트럼프 당선인과 공화당은 선거를 통해 행정부와 입법부에서 다수당 지위를 확보했습니다. 선거 중에 약속한 것들을 정책으로 만들어 펴기 위해 알맞은 인물을 적재적소에 앉히는 건 대통령의 권한입니다. 논란이 있더라도 옳고 그름을 논하기 어려운 ‘정치적인 논란’에 그칠 겁니다. 그런데 많은 보직 가운데 정치적인 논란뿐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에 속하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 보직도 있습니다. 특히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가 그 피해가 사람의 목숨과 직결될 가능성이 큰 분야이기도 하죠. 바로 보건복지부(U.S. Department of Health and Human Services, HHS) 장관 자리입니다. 트럼프 당선인은 제3 후보로 대선에 뛰어들었다가 중도에 후보를 사퇴하고 자신을 지지한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를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지명했습니다. 케네디 주니어 장관 후보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로버트 케네디 전 상원의원의 아들입니다. 뉴욕주를 대표하는 연방 상원의원 전에는 형인 존 F. 케네디 정부의 법무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케네디 의원은 1968년 민주당 대선 경선에 나섰다가 중간에 암살당했습니다. 그러니까 케네디 주니어 장관 후보는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조카죠. 민주당을 대표하는 정치 가문인 케네디 집안에서 트럼프 지지자가 나온 것도 특이하지만, 케네디 주니어 장관 후보는 이미 오래전부터 민주당과 사이가 멀어졌습니다. 환경 운동에 매진할 때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지만,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일 때 백신의 안전성을 문제 삼은 각종 회의론과 음모론을 신봉하고 퍼뜨리는 데 앞장서면서 일부 대중에겐 지지를 받았지만, 민주당 사람들과 공중보건 전문가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에게 큰 비판을 받았죠. 그런 케네디 주니어에게 트럼프 당선인은 통 큰 논공행상으로 보건복지부 장관 자리를 맡겼습니다. 상원 인준 절차가 남았지만, 트럼프 지지를 선언하며, 구호까지 마가와 운율을 맞춘 마하(MAHA, Make America Healthy Again)로 바꿨던 케네디 주니어에게 오랫동안 주장해 온 것들을 정책으로 옮길 기회가 찾아온 겁니다. 보건복지부 장관은 미국 행정부의 공중보건 정책을 총괄하는 수장입니다. 케네디 주니어 후보가 장관이 되면 당장 백신에 대한 신뢰가 떨어져 접종률이 낮아지고, 이 때문에 전염병을 막을 수 있는 집단 면역이 형성되지 않을 경우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비용 절감을 최우선 과제로 외치는 트럼프 대통령의 코드에 맞는 인사인 만큼 보건복지 관련 부처, 기관의 예산도 대대적으로 삭감할 텐데 그 결과 미국인의 공중 보건이 악화할 수 있을 거란 우려도 제기됩니다. 그 밖에도 임신중절 약이나 시술의 접근성을 제약하거나 보건복지 정책을 집행한 경험이 부족한 점, 부처의 정치화도 우려됩니다. 보건복지부가 하는 일과 기능 중에는 정치적인 논란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특히 과학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보건 정책을 수립하고 대책을 내야 할 때 데이터를 잘못 읽거나 근거 없는 낭설을 토대로 한다면 피해가 막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케네디 주니어 장관 후보의 이력이 특히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가짜뉴스와 음모론으로부터 과학의 영역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는 보건 당국이 당면한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경제학자 에밀리 오스터 교수가 케네디 주니어의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 지명에 맞춰 쓴 칼럼에서 그 문제를 짚었습니다.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불소 수돗물은 위험하다?" 논쟁에 시끌... 진짜 필요한 소통은 오스터 교수는 임신과 출산, 육아에 관한 통념들 가운데 과학적인 근거가 부족한 내용들을 날카롭게 짚어낸 책 “Expecting Better”로 많은 주목을 받은 경제학자입니다. (우리나라에선 “산부인과 의사에게 속지 않는 25가지 방법”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습니다.) 건강, 공중보건 분야에서 흔히 알고 있는 통념이 과학적인 근거가 부족한 경우, 심지어 가짜뉴스나 음모론의 영향을 받아 걸러내야 할 정보인 경우를 찾아내 설명해 온 오스터 교수에게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장관 후보는 ‘할 말이 많은’ 분석 대상일 겁니다. 오스터 교수는 홍역 백신에 대한 우려와 수돗물에서 불소 성분을 빼야 한다는 주장, 그리고 살균을 거치지 않은 생우유가 몸에 좋다는 케네디 주니어 후보의 평소 주장을 예로 듭니다. 다만 가짜뉴스 또는 음모론에 경도돼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는 사람이 공중보건 정책을 총괄하는 수장이 됐으니 큰일 났다는 개탄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오스터 교수는 잘못된 정보를 어떻게 바로잡고, 보건 당국이 어떻게 해야 대중의 신뢰를 받는 공중보건 정책을 펼 수 있을지 방법을 찾는 데 글의 많은 부분을 할애했습니다. 부처를 막론하고, 행정부 전반이 대중으로부터 신뢰를 점점 더 잃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스터 교수도 보건 당국이 신뢰를 회복할 기적적인 비결을 귀띔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과학적인 방법으로 수행한 연구 결과를 투명하게, 자세히 공개해야 한다는 원칙을 다시 상기했습니다. 대부분 전염병에 대한 백신은 부작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새로 창궐한 전염병에 대항해 만든 신규 백신일수록 더 그렇죠. 부작용이 있어도 이를 최소화하고 백신을 통해 빠르게 집단 면역을 형성해 전염률, 궁극적으로 치사율을 낮춰 희생자를 최소화할 수 있다면 보건 당국은 이를 권고하고 추진해야 합니다. “과학적인 실험을 통해 확보한 데이터를 통계적으로 분석한 뒤 정무적인 판단을 내리고 정책을 수립, 집행”하는 거죠. 코로나19 팬데믹은 전 세계가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던 유형의 신종 바이러스 때문에 창궐한 역병이었습니다. 과거 비슷한 사례와 비교하면 놀랄 만큼 빠른 속도였지만, 그래도 백신이 보급되기까지 1년 넘게 걸렸죠. 아직 쌓인 데이터가 부족한 상황에서 급히 백신 접종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정보의 공백은 대중의 불안을 조장하고, 잘못된 정보, 거짓말, 가짜뉴스가 활개 치는 걸 막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오스터 교수는 케네디 주니어 후보를 “가짜뉴스나 음모론을 믿는 멍청이”로 몰아세우는 일만큼은 절대로 해선 안 된다고 지적합니다. 문제의 소지가 큰 주장을 하더라도 그 말을 하는 사람을 인신공격하는 건 대중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런 사람이 보건 당국의 수장이 된다면, 더더욱 사실을 토대로 잘못된 주장을 기반으로 한 정책을 수립하지 못하게 안에서 싸워나가야지 사실을 덮어놓고 입을 막으려고 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과학적 사실을 둘러싼 논쟁에도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할까? 좀 더 근본적인 질문도 해볼 수 있습니다. 지난달 초 부통령 후보 토론에서 J.D. 밴스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민주당 정부의 검열을 비판하며 두 가지 사례를 들었습니다. 하나가 2020년 선거 결과에 대해 합리적인 의심을 제기할 수 있지 않느냐, 그것도 못 하게 하는 건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코로나19 팬데믹 때 정부의 공중보건 정책에 대해 마찬가지로 의문을 제기하면 입을 다물게 억압하거나 심지어 처벌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부정선거 논란은 각급 법원에서 수십 차례 같은 판결을 내리며 일단락됐죠. 조직적인 부정선거는 없었습니다. 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제가 있다고 믿고, 그런 주장을 펼 권리는 수정헌법 1조의 표현의 자유 원칙에 따라 보장됐고, 지금도 보장됩니다. (부정선거 주장을 믿고 폭력 사태를 일으킨 1월 6일 의사당 테러는 이야기가 전혀 다르지만, 그마저도 트럼프 2기 행정부는 관련해 형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사면해 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정부와 보건 당국이 팬데믹에 맞서 방역 수칙을 정하고 집행하는 것도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검열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정답은 없겠지만, 분명 순전히 정치적인 논란이 전부가 아니라,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점에서는 다른 기준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잘못된 근거를 바탕으로, 또는 데이터를 엉뚱하게 분석하고 해석해 도출한 오답을 토대로 한 과학적으로 틀린 정책이라면, 공중보건 정책으로서 합격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염성이 매우 강한 홍역 백신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일으킨다는 음모론은 수많은 연구를 통해 여러 차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습니다. 그럼에도 음모론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죠. 수돗물에서 불소를 제거하는 것도, 살균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생우유를 권장하는 것도 모두 득보다 실이 많은 것으로 예상되는 정책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과학적으로 틀린 주장을 하는 사람을 향해 인신공격을 가하면 안 된다는 오스터 교수의 지적은 새겨들을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전문 지식을 많이 쌓은 이들과 보건 당국이 해야 할 일은 대중들의 오해와 잘못된 상식을 바로잡아 잠재적인 피해를 줄이는 일이지, 그 대중들 면박을 주고 비난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국과 비교해 미국 사회는 표현의 자유를 정말 존중해 준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한국에선 과학적 실험을 통해 사실이 아닌 것으로 입증되면, 혹은 사실임을 입증하지 못하면 그를 바탕으로 한 주장을 펴보지도 못하고 차단되기 일쑤인데, 미국에선 그런 상황에도 상대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건 표현의 자유이므로 보장되곤 합니다. 한국 기준에선 “틀린” 게 미국에선 “다른” 의견으로 취급될 때가 있죠. (반대로 “다른” 거로 봐줄 수 있는 걸 “틀린” 거로 속단하는 사회라면, 그 경직된 사고도 문제일 겁니다.) 트럼프 당선인이 처음 지명한 후보들은 결정적인 하자가 드러나지 않는다면 대통령의 뜻대로 장관, 기관장으로 임명될 겁니다. 케네디 주니어 후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케네디 주니어가 백신 회의론을 설파하고 다닐 때 음모론이라고 손가락질받고 무시당하면서도 법적인 처벌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혐의를 입증하기는 매우 어렵겠지만, 공중보건 정책을 집행하는 데 백신 회의론과 음모론이 끼친 폐해를 생각하면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케네디 주니어가 장관이 된 뒤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되면 좋겠습니다. 본인이 믿는 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되, 부처 안에서, 또 공중보건 전문가들이 제기하는 주장은 편견 없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검증해 받아들일지 말지를 정했으면 합니다. 정부가 지향하는 바와 달라도 억지로 재갈을 물리거나 검열, 처벌해서는 물론 안 될 테고요. 케네디 주니어 후보가 꿈꿔 온 대로 미국이 다시 건강해지는 데 중요한 주춧돌을 놓는 장관이 되면 좋겠습니다. 보건 당국의 수장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것과 같습니다. 내 주장을 너무 앞세우지 않고, 전문가들의 조언을, 과학적인 연구 결과에 귀를 기울이는 겁니다. 사진 : 연합뉴스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미국 45대이자 47대 대통령이라는 진기한 타이틀을 달게 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을 가까이서 취재한 미국 기자들이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어떨지 예상해 달라는 질문을 받으면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습니다. "트럼프는 선거에서 이기는 건(winning) 정말 좋아하지만, 통치(governing)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평생을 성공한 사업가로 부유하게 살았고, 누군가의 지시는커녕 조언을 듣고 이를 토대로 중요한 결정을 내린 적도 많지 않을 그의 삶을 고려해 보면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선거는, 특히 대선은 리더(대통령 후보)를 중심으로 정당, 캠프가 똘똘 뭉쳐야 하는 싸움입니다. 캠프 안에서 의견이 대립하면 대체로 후보의 뜻에 모두가 맞추기 마련입니다. 트럼프 개인의 인기와 카리스마가 특히 큰 동력이던 트럼프 캠프에는 트럼프에 충성하는 사람만 가득했습니다. 그 안에서는 더더욱 "트럼프의 말이 곧 법"이었을 겁니다. 이렇듯 선거를 치르는 과정은 트럼프에게 익숙한, 트럼프가 편하게 느낄 만한 세팅입니다. 반면 트럼프가 두 달 뒤 당선인 타이틀을 떼고 대통령으로 다시 돌아갈 백악관의 삶과 기대되는 역할은 세팅부터 다릅니다. 행정부의 수장이자, 미국이란 나라의 군 통수권자, 헌법의 수호자가 될 트럼프가 이끌어야 하는 조직과 구성원 중에는 트럼프에게 충성하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지금 마라라고 저택에서 '예스맨'에게 둘러싸여 누리는 수많은 '프리패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전체 득표에서 카말라 해리스 부통령을 300만 표가량 앞섰고, 상원과 하원 모두 공화당이 장악했습니다. 이 정도면 8년 전보다 훨씬 강력한 권한을 손에 쥔 채 정권 인수 작업에 돌입했다고 할 수 있지만, 트럼프는 여전히 성에 차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정부와 관료 조직이 자신이 공약을 추진하는 데 제동을 걸지 모른다며 여러 차례 불만을 드러냈고, 마라라고 저택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외국 정상들의 축하 전화를 받으며, 장관, 연방기관 수장 등 주요 인사들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선거가 유권자에게 통치 비전을 설명하고 선택받기 위해 경쟁하는 시간이라면, 이제는 통치의 시간입니다. 선거에서 승리한 트럼프는 이제 선거 기간 했던 약속을 이행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검증받게 됩니다. 검증하는 이는 이번에도 유권자입니다. 2년 뒤 중간선거에서 처음 받아 들 성적표의 기준은 부동산 프로젝트의 수익률이나 회사 주식 가격이 아닙니다. 유권자들은 트럼프의 임기 첫 2년 내 삶이 어땠는지 돌아보고 투표할 겁니다. 2년은 보기에 따라 긴 시간일 수 있지만, 또 어떤 의미에선 금방 지나가기도 합니다. 유권자들이 만족하며 이번처럼 표를 줄지, 아니면 실망해 표를 거둘지는 트럼프 하기에 달렸습니다. 이미 8년 전, 관료주의와 한바탕 부딪쳤던 좋지 않은 기억을 잊지 않았을 트럼프는 이번에는 훨씬 더 신속하고, 어쩌면 간절히 자기와 마음이 맞는, 본인에게 충성하는 이들로 정부를 채우려 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초반 인사부터 잇달아 제동이 걸리는 등 좌충우돌 끝에 2년이 흘러 받아 든 성적표가 낙제에 가까웠습니다. 2018년 중간선거를 통해 하원 과반을 되찾은 민주당은 이후 2년 안에 트럼프를 두 차례나 탄핵했습니다. (상원 2/3가 찬성해야 하원에서 올라온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기에, 트럼프 대통령은 두 번 다 상원에서 구제됐습니다.) 트럼프 2기 인사의 절대 기준: 충성 글을 쓰는 중에도 예상했던 인사와 뜻밖의 인사들이 한데 섞여 속속 발표되고 있습니다. 일단 이번 글에서는 트럼프 당선인이 지명한 후보의 면면에 관해 자세히 살펴보지 않겠습니다. 인사청문회를 거쳐야 하는 장관들의 경우 내년 1월 2일까지 상원 다수당인 민주당이 인준해 줄 가능성이 크지 않기도 하고, 몇몇 장관 후보는 논란이 너무 많아서 글을 한 편씩 따로 써야 하는 수준이라 그렇기도 합니다. 인사청문회를 거치지 않아도 되는 백악관 참모들은 1월 20일에 취임한 후에야 정식으로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미리 준비야 할 수 있겠지만, 1월 20일 오전까지 대통령은 조 바이든입니다. 아무튼 지금까지 발표된 인사에서 트럼프 당선인이 확실히 보여준 원칙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백악관 참모진이든 행정부 장관이든 다 적용할 수 있는 원칙인데, 트럼프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보인 이들만 선택받았습니다. 법무부 장관 지명자인 맷 게이츠 하원의원, 국토안보부 장관 지명자인 크리스티 노엠 사우스다코타 주지사, CIA 국장으로 지명된 존 랫클리프 전 국가안보국장 등 전부 다 2020년 선거는 부정선거로 민주당과 바이든이 트럼프의 승리를 빼앗아 갔다고 주장해 온 인물입니다. 마가(MAGA) 운동의 선봉에 섰거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이들로, 미국 우선주의를 비롯해 트럼프 당선인의 철학과 원칙을 온몸으로 체화한 이들입니다. 한때 하마평에 올랐던 니키 헤일리 전 UN 대사나 마이크 폼페이오 전 국무장관이 아예 고려조차 되지 않았던 이유도 같습니다. 트럼프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이나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트럼프는 4년간 대통령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난 뒤에도 워싱턴 정치권을 한데 묶어 부패한 기득권의 온상이자, 미국을 막후에서 쥐락펴락하는 딥스테이트라고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트럼프가 생각하는 것처럼 워싱턴 관료들이 트럼프 행정부의 성공을 바라지 않는다면, 부처나 기관장을 자기한테 충성하는 사람들로 채우려는 트럼프의 마음도 이해가 갑니다. 동시에 일론 머스크에게 정부 부처와 각 기관의 효율성을 평가해 불필요한 규제를 철폐하는 권한을 준 것도 이미 선거를 치르며 내비친 구상을 따른 것이고, 지지자들도 기대가 크니 트럼프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지금 발표한 인사가 아무리 상식에 어긋나고 이상해 보여도 선거에서 이긴 건 트럼프와 공화당입니다. 인사를 두고 하는 비판이 아무리 일리가 있더라도 지금은 먹히지 않습니다. 다만 아무리 트럼프와 머스크가 정부 조직을 줄여 효율성을 높이더라도, 할 수 있는 데까지 입법, 행정, 사법부를 트럼프에게 충성하는 마가를 심장에 아로새긴 인물로 채우더라도 여전히 미국 정부는 트럼프 캠프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선거를 잘 치르는 능력과는 좀 다른, 통치를 잘하는 정치력을 보일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말로만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할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생각이 다른 사람도 포용하고 양보할 건 양보하며 내가 원하는 걸 얻어내는 진짜 "거래의 기술"이 필요한 겁니다. 트럼프가 내정한 인물의 면면보다도 우려스러운 점은 자신의 인사를 검증받기조차 꺼리는 트럼프의 태도입니다. 13일 오전 상원 공화당 의원과 당선자들은 비밀 투표로 존 쑨 의원(사우스다코타)을 공화당 원내대표를 뽑았습니다. 그런데 언론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당선인과 캠프 측에서 밀던 후보는 릭 스캇 의원(플로리다)이었습니다. 대통령의 인사를 검증하는 건 헌법이 정한 상원의 핵심 임무 중 하나인데, 트럼프는 인준 절차가 오래 걸리는 게 싫다며, 상원 다수당인 공화당이 앞장서서 휴회 중에 대통령이 원하는 인사를 전격적으로 진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존 쑨 신임 원내대표는 트럼프 대통령의 인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밝히면서도 트럼프가 검증 절차 없이 마음대로 인사를 하지는 못할 거라고 사실상 선을 그었습니다. 상원의 권한을 지키고 대통령의 거수기로 전락하지 않는 쪽을 택한 겁니다. 트럼프 당선인도 일단 한발 물러선 듯하지만, 인사를 둘러싸고 시작부터 벌어지는 잡음을 미국인들이 어떻게 바라볼지 잘 생각해야 합니다. 선거에서 완승했으므로 강력한 권한을 위임받은 건 맞지만, 유권자들은 트럼프가 기존의 관행을 어디까지 무시하고 파격을 택하는지, 그렇게 고른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검증해 보니 어떤지, 검증 자체를 막으려는 건 왜인지 전부 다 지켜보고 있습니다. 특히 트럼프가 뭘 해도 좋아하고 무조건 지지할 강성 지지층과 과거에 민주당을 찍었다가 이번에 표를 안겨준 중도 성향, 부동층 유권자들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어쩌면 독이 든 성배'... 두 번째 임기 트럼프 앞에 놓인 갈림길 보수 성향의 싱크탱크 아메리칸 컴파스의 수석 경제학자 오렌 카스가 칼럼에서 지적한 이야기도 같습니다. 자신을 지지한 유권자들이 바라는 걸 외면하고, 마라라고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말만 듣고 정책을 편다면 트럼프는 실패로 가는 지름길을 밟는 셈입니다. 사실 이건 트럼프만 그런 게 아니라 지금껏 많은 당선자가 범한 실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글의 제목도 직역하면 "많은 대통령을 파멸로 이끈 선택지 앞에 선 트럼프"입니다. 카스의 제언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바이든과 민주당에 실망하고 트럼프와 공화당에 기대한 대로 투표한 유권자들이 다시 등 돌리지 않도록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하라는 겁니다. 선거 유세 현장에서 큰 호응을 끌어낸 이슈가 아닐 수도 있고, 같은 이슈라도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다 보면 세부적인 사항을 조정해야 할 일도 생깁니다. 그렇더라도 예를 들어 기업들이 정당한 취업 비자 없는 외국인을 채용하지 못하도록 전자 검증 시스템을 도입하는 건 민주당 지지자들도 대다수 찬성하는 정책이므로,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합니다. 제도가 정착되고 나면 민주당과 바이든 행정부가 못한 일을 해낸 것으로 홍보할 수도 있어 다음 선거에도 활용할 수 있는, 공화당에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주는 정책이 될 겁니다. 복잡하지 않은 제언이지만, 많은 대통령이 잘못된 선택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대통령 주변에 남은 사람들이 선택지를 제대로 보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전부 다 아첨꾼이거나 무능하고 부패한 사람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분명 정부가 성공하는 것보다 대통령의 눈과 귀를 장악한 기회를 활용해 내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또한, 선거가 끝나고 나면 부동층 유권자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강성 지지자를 비롯한 정치적 고관여층은 계속해서 정부 정책을 하나하나 평가하고 반응을 내놓죠. 그러다 보니, 선거에서 더 중요한 유권자들이 원하는 것을 자꾸 잊게 됩니다. 공화당 안의 목소리에만 귀 기울여도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한 가장 큰 요인은 경제였습니다. 바꿔 말하면, 경제가 나아지지 않는다면 다음에 심판받을 여당은 공화당과 트럼프라는 뜻입니다. 특히 치솟은 물가 때문에 체감 경기가 너무 나빴고, 갈수록 심해지는 경제적 불평등도 이슈였습니다. 불평등을 완전히 해소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만, 적어도 트럼프 대통령이 불평등을 완화할 수만 있다면 이번 선거에서 확인한 유권자들의 연합을 계속 이어갈 수도 있을 겁니다. 앞으로 몇 달이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성패를 가를 중요한 시간이 될 겁니다. 앞서 말했듯 정책을 편 결과에 대해서는 중간선거에서 책임지면 됩니다. 거기서 참패하기 싫다면 듣기 좋은 말만 골라 듣지 말고, 나와 다른 생각에도 어느 정도 마음을 열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트럼프 대통령더러 민주당 혹은 진보 진영과 담판을 지으라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어쨌든 선거를 통해 다수를 확보한 만큼 이를 잘 이용해 주어진 권한은 법만 어기지 않으면 마음껏 쓰면 됩니다. 대신 민주당 주류 엘리트들이 이번 선거에서 범한 실수를 피하고자 한다면, 트럼프 대통령도 다소 불편한 이야기에도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나마 가장 덜 불편할 사람들이 트럼프와 생각이 다른 공화당 의원들일 겁니다. 공화당 의원들은 기본적으로 트럼프 정부가 잘 돼야 자기도 재선할 가능성이 커지는 사람들입니다. 정치자금으로 후원한 돈의 몇 배를 특혜와 이윤으로 회수할 궁리하는 사람이 제안하는 정책보다는 자기 지역구에서 유권자들이 무엇을 우려하고 걱정하는지 파악해 대통령과 당 지도부에 전달하는 의원들이 내놓는 정책이 더 좋을 가능성이 명백히 큽니다. 몸에 좋은 약이 입에는 쓰다는 말을 트럼프 당선인이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수많은 권한과 권력을 손에 쥔 리더일수록 말은 줄이고 귀를 열 필요가 있습니다. 주변에서 하는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고, 시종일관 자기 말만 하다가 모두의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정치인을 우리는 수도없이 많이 봤습니다. 정부는 기업과 다릅니다. 자기가 아는 답이 정답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이 쉴새없이 자기 얘기만 하면 똑똑해 보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정말 똑똑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훌륭한 정치지도자가 되는 일은 드뭅니다. 오히려 훌륭한 리더는 자기가 모르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주변에 묻고 듣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공한 정부에는 잘 들어주는 리더와 리더에게 사실을 정확히 전달하는 유능한 보좌진이 있습니다. 사실 트럼프 대통령이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인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트럼프는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파악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언급하는 데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임기인 만큼 마지막 4년이 될 텐데, 자기만의 유산을 남기고 싶은 욕심도 클 테고요. 그래서 불편한 조언도 최대한 듣고 이를 반영해 정책을 펴는 트럼프 행정부가 되면 좋겠습니다. 어느 정도 성과를 내야 민주당도 더 긴장하고 다시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 더 노력할 테니까요. 그러지 못하고 첫 단추라 할 수 있는 인사 과정부터 혼돈 속에 비난이 난무하고 진흙탕에 빠진다면, 미국인들은 지금보다 몇 배 더 심한 정치 혐오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미국 선거가 끝난 지 닷새가 지났습니다. 아직 하원 선거구 가운데 여전히 개표가 진행 중인 곳이 있어 과반 의석을 확보한 정당이 공식적으로는 나오지 않았지만, 공화당이 다음 회기에도 아슬아슬한 하원 과반 의석을 차지할 가능성이 매우 커 보입니다. (하원 전체 435석으로 218석이 최소 과반. 현재 확정된 의석은 공화 214석, 민주 203석.) 4년 전은 말할 것도 없고, 선거인단 싸움에선 이겼지만 전체 득표에선 졌던 8년 전보다도 더 확실한 승리를 거둔 트럼프 당선자와 공화당은 사기가 한껏 오른 상황에서 두 번째 임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선거를 총괄했던 수지 와일스 공동 선거대책위원장을 여성 최초 백악관 비서실장으로 내정했습니다. 인수위원회도 바이든 행정부와 필요한 조율을 진행하며 정무직 인선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반면 민주당은 여전히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해리스 부통령이 패배를 시인한 뒤 당 안팎에서 패배의 원인을 찾기 시작했는데, 좀처럼 의견이 모이지 않는 듯합니다. 실제로 한 가지 원인 때문에 선거에서 졌다고 보기는 어려우니,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을 살펴보는 건 필요한 과정이고 바람직합니다. 다만 지목되는 요인들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은데, 둘 중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얻을 수 있는 교훈과 앞으로의 전략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선거 패배의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갈림길에 선 민주당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먼저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둘 중 하나가 절대적으로 옳고, 다른 하나는 틀렸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두 가지 요인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고, 분명 둘 다 영향을 끼쳤을 겁니다. 선거를 앞두고 스브스프리미엄에 쓴 글만 보더라도 경제적 요인을 강조한 글("나 땐 좋았어" 반복하는 트럼프, '경제'에 발목 잡히는 해리스)도 있었고, 문화적 요인과 정체성 정치가 끼칠 영향을 진단한 글("응원하는 야구팀보다 강한" 지지 정당 대물림... 근데 '대전환' 올 수 있다고?)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둘 다 맞다고 하고 넘어가는 것보다 좀 더 자세한 분석이 필요한 시점이므로, 오늘은 어디에 방점을 찍고 선거 결과를 분석하느냐에 따라 결론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짚어보겠습니다. 첫 번째 분석은 경제 문제에 대한 유권자의 인식이 승패를 갈랐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문화적인 요인과 정체성 정치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합니다. 편의상 이 글에서는 줄여서 '경제'와 '문화'로 부르겠습니다. 인플레이션을 비롯해 경제 문제에서 해리스 후보와 민주당은 계속해서 유권자의 마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경제 문제에 관해 공약도 내고 유권자를 설득하고자 애썼지만, 끝내 트럼프의 공세를 막지 못했습니다. 반면 민주당은 여성의 임신중절권을 내동댕이친 보수 세력과 선거 결과에 불복했던 트럼프의 비민주적인 면모를 부각해 부동층 유권자를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가장 최근 치러진 2022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선전할 수 있던 요인도 저 두 가지로 꼽혔기에 민주당의 전략이 터무니없는 기대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결과를 보면 이번 선거는 '문화'보다 '경제'가 핵심적인 요인으로 작동한 선거였습니다. 민주당이 경제에 관해 쌓인 유권자들의 불만을 너무 간과했다는 지적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졌습니다. 단지 치솟은 집값과 생활비 때문에 여당을 표로 심판한 것을 넘어 민주당의 경제 정책 때문에 노동 계급, 서민 유권자들이 대거 트럼프를 지지했다는 지적까지 나옵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의 글도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트럼프 당선 이후 깨달은 것들... 엘리트들, 이제 내가 좀 보이나요?" 제목부터 직역하면, "유권자가 엘리트에게: 이제야 내가 좀 보이나요?"입니다. 여기서 엘리트는 민주당 주류와 핵심 지지층을 아우르는, 주로 양쪽 해안가 대도시에 사는 고학력자들입니다. 지난 글에서 소개했듯이 민주당은 리즈 체니와 같은 공화당 정치인을 포섭해 겉만 번지르르한 "빅텐트"를 꾸리는 사이 유권자 집단의 외연을 넓히는 데는 철저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나와 사회경제적 처지가 다른 동료 시민들이 어떤 점을 문제로 여기고, 어떤 태도에 분노하는지 별 관심을 두지 않은 대가로 다수결 원칙을 따르는 결정적인 순간에 명백한 소수로 전락한 겁니다. 실제로 선거 전 여론조사를 보면 후보의 지지율, 선호도는 계속해서 조금씩 바뀌었지만, 어떤 분야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투표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만큼은 부동의 1위가 있었습니다. 바로 경제였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치솟은 생활비, 집값, 교육비 등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리고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고충을 토로하는 유권자들은 당연하게도 부자보다는 중산층과 저소득층이 많았고, 지금의 경제 구조를 고려하면 이들 대부분이 학력 수준이 낮은, 도시보다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란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민주당은 정답이 뻔한 질문지를 받아 들고서도 고집스럽게 다른 답을 적어낸 셈입니다. 브룩스의 칼럼 마지막에도 잠깐 언급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지난 주말 민주당의 선거 패배 원인을 분석하는 목소리 가운데 언론의 주목을 가장 많이 받은 주장을 폈습니다. 민주당의 선거 참패는 놀라울 게 전혀 없다. 민주당은 투표장에서 자신이 먼저 저버린 노동 계급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지난 선거에서는 백인 노동자들의 표를 잃더니, 이번에는 라티노, 흑인 노동자들의 표까지 잃었다. 미국인들은 지금의 부조리에 분노하고 변화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 지도부는 현상 유지를 우악스럽게 고집했다. 유권자들의 선택은 옳았다. 첫 문단부터 강력한 비판을 쏟아낸 샌더스가 성명을 통해서 하려는 말은 그가 늘 해오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극심한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민주당은 절대로 다시 집권할 수 없다는 겁니다. 샌더스 의원은 일요일 NBC 시사 프로그램 밋 더 프레스에 출연해 "조 바이든 대통령은 불평등을 시정하기 위해 노동자의 편에 서겠다는 공약을 실천에 옮겼다. 그래서 나도 바이든 대통령을 지지해 왔다. 그러나 민주당이 당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걸 다 했냐고 묻는다면 노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최저임금을 올리는 문제나 의료보험 부담을 줄여주는 문제는 계속해서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그런 상황에서 유권자들이 트럼프에게 기대하게 되는 건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랫동안 샌더스가 유권자들에게 해온 말과 토씨 하나 바꾸지 않은 지적이 이번 선거 결과를 놓고 보면 더욱 시의적절해 보입니다. 그런데 민주당 일각에선 샌더스를 강력히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별 영향력 없는 인물이 아니라, 명예 하원의장이자 당내 원로원의 의장 격인 낸시 펠로시가 그랬습니다. 펠로시 의원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결과만 놓고 그런 지적을 하는 건 민주당의 분열만 일으키는 꼴이다. 그러는 샌더스 의원은 버몬트주 상원 선거에서 해리스 부통령이 버몬트주 대선에서 받은 표보다도 덜 받지 않았나"라고 비판했습니다. 중도 노선을 이끌어 온 펠로시 의원의 이력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는 가지만, 경제라는 명백한 요인을 눈앞에 두고도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아론 아체몰루 교수도 비슷한 지적을 했습니다. 사실 스브스프리미엄에 처음 쓴 해설에도 아체몰루 교수의 인터뷰가 등장합니다. 거기서도 아체몰루 교수는 자동화와 기술 발전의 혜택을 받기는커녕 그로 인해 소외되고 도태된 노동자들이 트럼프처럼 포퓰리즘을 주창하는 정치인들을 향한 지지가 계속 강해질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아체몰루 교수가 선거 이후에 쓴 트윗도 화제가 됐습니다. 철저히 고학력자 중심의 엘리트 정당이 되어버린 민주당이 아직도 스스로 노동자의 정당인 줄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는 날카로운 지적이었습니다. 아체몰루 교수도 샌더스 의원처럼 바이든 정부의 경제 정책이 소기의 성과를 거둔 점을 인정했습니다. 노동자들의 임금도 올랐고, 이민 문제와 산업 정책, 노동조합에 대한 정부의 지원 등 정부 정책에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반영되기 시작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체몰루 교수가 보기에 민주당의 주류가 된 엘리트들은 노동자들의 고통을 끝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간단한 사고 실험을 이야기합니다. 만약 (일반적으로 석사 이상의 학위가 있는 양쪽 해안가 도시 사는 전문직 또는 관료인) 민주당 엘리트가 미국 중서부의 한 작은 마을에 발이 묶였다고 치자. 민주당 엘리트는 다음 두 명 가운데 한 명과 4시간 동안 이야기를 해야 한다. 한 명을 골라야 한다면 누구를 고를까? 첫째, 중서부에서 고등학교까지만 졸업한 미국인 노동자. 둘째, 멕시코, 중국 또는 다른 나라 출신의 대학원 교육을 받은 전문가. 나도 그랬지만, 내가 물어본 모든 민주당 지지자는 후자를 택했다. 민주당 엘리트와 미국 노동자들 사이의 심리적인 거리는 이미 너무 멀어졌다. 아체몰루 교수는 민주당이 이번 패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특히 제조업 노동자와 소도시, 시골에 사는 노동자와 거리를 좁히지 못해 이들을 계속 트럼프와 마가(MAGA) 운동의 지지자로 남겨둔다면 미국 민주주의도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을지 모른다고 우려합니다. 포용적인 경제 제도를 통해 불평등을 줄이고, 좀 더 평등한 경제 제도가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선순환을 회복할 가능성이 점점 낮아지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고 아체몰루 교수는 우려했습니다. 또 다른 석학인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분석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칼럼니스트 에즈라 클라인은 선거 이후 자신의 팟캐스트에서 지금 민주당 앞에 놓인 갈림길을 'C'로 시작하는 두 단어로 축약했습니다. 먼저 'Contempt'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경멸, 멸시, 무시' 정도가 되죠. "트럼프 같은 범죄자, 파시스트, 인종차별주의자, 여성혐오주의자를 두 번이나 뽑다니, 미국은 정말 한심한 나라였구나!"와 같은 반응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다수의 유권자가 표시한 뜻을 부정하고 무시하며, '선거에서 졌어도 내가 전적으로 옳다'는 생각을 강화하는 태도입니다. 선거에서 패배한 충격을 잠시 잊거나 달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끝내 외면하는 자세이므로, 중요한 교훈을 얻기는 힘들 겁니다. 'Curiosity'로 가는 길도 있습니다. 4년 전에 700만 표나 더 받은 민주당이 아무리 후보가 바뀌었다고 해도 어떻게 이번 선거에선 400만 표를 덜 받게 됐을지, 붉은 파도의 근본적인 원인을 겸허한 자세로 알아보는 겁니다. 에즈라 클라인은 아예 "연 소득이 5만 달러가 되지 않는 이들의 삶을 제대로 이해해 보려 노력하지 않는 한 트럼프에게 간 유권자들의 마음을 돌릴 만한 전략을 생각해 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했습니다. 불평등 문제를 더 잘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 선거에서 유권자들에게 선택받기는 쉽지 않습니다. 물론 많은 기대를 받으며 재선에 성공한 트럼프도 유권자들에게 실망만 안겨줄 수 있고, 그 경우 민주당이 반사이익을 누려 당장 2년 뒤 중간선거에서 의회 다수당을 탈환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선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민주당은 제대로 된 대안을 내지 못할 겁니다. 여당도 야당도 다 싫은 유권자들에겐 정치 혐오만 남습니다. 민주당이 트럼프의 지지자 연합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전략과 정책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에 따라 앞으로 미국 정치의 향방이 결정될 겁니다.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다시 백악관으로 갑니다. 글을 쓰는 현재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인단 295명을 확보해 당선을 확정했습니다. 주요 경합주 7개 가운데 5개에서 승리를 확정했고, 개표가 진행 중인 애리조나와 네바다도 근소한 차이지만, 승리할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 4년 전 바이든 대통령에게 전체 득표에서 700만 표 이상 뒤졌는데, 이번에는 해리스 부통령에게 전체 득표에서도 500만 표 이상 앞섰습니다. 미국 초대 워싱턴 대통령이 취임한 게 235년 전인 1789년의 일입니다. 그때부터 대통령 임기는 4년이었으니까 계산해 보면 58명의 대통령이 있어야 하는데, 트럼프는 이번 당선으로 47대 대통령이 됐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45대이자 47대 대통령입니다. 4년 중임제로 연임이 가능한 미국에서는 대통령 앞에 숫자를 붙일 때 연임한 대통령은 한 번으로 칩니다. 예를 들어 가장 최근에 연임해 8년 임기를 채운 오바마는 44대 대통령입니다. 4년 임기를 두 번 따로 마친 대통령은 미국 역사에서 트럼프가 처음이 아닙니다.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다만 22대와 24대 대통령이었던 클리블랜드의 임기는 19세기 말(1885~1889, 1893~1897)로 한참 전입니다. 해리스 부통령은 6일 패배를 시인하고, 트럼프 당선자에게 축하 전화를 걸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지지자들에게 자신의 이상을 위해, 우리가 목표하는 것을 위해 포기하지 말고 싸워 나가자고 독려하면서도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는 건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는 시민의 책무라고 강조했습니다. 2021년 1월 6일, 당시 부통령이던 마이크 펜스는 선거 결과를 추인했다가 의사당을 습격한 트럼프 지지자들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았지만, 이번에 해리스 부통령은 그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트럼프의 승리, 해리스의 패배를 설명하는 분석 기사와 칼럼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선 모던 에이지의 편집자 다니엘 매카시가 쓴 칼럼을 번역했습니다.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이게 트럼프가 승리한 이유... 트럼프와 해리스의 싸움이 아니었다" 트럼프의 정치를 민주당은 물론 냉전 종식 후 부시와 체니로 대변되는 전통적인 공화당과도 거리를 둔 "대안 정치"이자, 경제학에서 말하는 "창조적 파괴"에 빗대 설명한 매카시는 공화당의 유력 정치인들이 해리스를 지지했음에도 공화당 지지자들이 해리스 대신 트럼프에게 투표한 데 주목합니다. 4년 전과 비교했을 때 전국적으로 '붉은 파도'가 거세게 일었다. 지도 : 뉴욕타임스 실제로 트럼프가 선거인단 과반을 확보한 경로만 놓고 보면 2016년과 닮았지만, 2016년의 공화당과 지금의 공화당은 꽤 다릅니다. 지금의 공화당은 트럼프가 2020년 선거에서 바이든한테 진 걸 인정하지 않는 트럼프를 두둔한 이들만 남은, 사실상 트럼프에 충성하는 이들로만 채워진, 트럼프의 정당입니다. 이번에 투표한 유권자들 가운데 민주주의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투표했다고 한 유권자가 적지 않았지만, 마가의 기세를 꺾지 못했죠. 리즈 체니 전 의원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선거 결과에 불복하고 1월 6일 의사당 테러를 방조 내지 부추긴 혐의로 하원이 임기가 열흘 남짓 남은 트럼프 대통령을 탄핵했을 때 여기에 찬성표를 던진 공화당 의원 7명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 일로 트럼프의 미움을 사고 트럼프가 말하는 "내부의 적"이 됐죠. 체니 전 의원의 아버지인 딕 체니 전 부통령도 포함입니다. 해리스 캠프는 선거 중에 체니 부녀를 비롯해 무려 200명 넘는 공화당 소속 정치인의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광고했습니다. 외연을 확장하며 트럼프를 궁지로 몰아넣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위의 지도나 선거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지지 세력의 외연을 확장한 건 해리스와 민주당이 아니라 트럼프의 공화당이었습니다. 심지어 전통적인 공화당 세력의 상당수가 떨어져 나갔지만, 타격은커녕 더 다양한 유권자로부터 더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경합주인 애리조나주가 대표적입니다. 유권자 지형의 대전환(great realignment)이 올 수도 있다는 분석을 소개한 글에서 트럼프의 강성 지지자인 캐리 레이크 상원 후보가 고(故) 존 매케인 의원을 지지하는 온건 성향 공화당원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는 점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른바 '매케인 공화당원'이 대거 해리스와 민주당 지지로 돌아설 것으로 예상됐지만, 개표가 약 70% 진행된 현재 트럼프는 해리스에게 5% P 차이로 앞서서 이변이 없는 한 애리조나도 승리할 것으로 보이고, 레이크 후보도 완패할 거란 예상을 뒤엎고 민주당 후보 루벤 가예고에게 2% P 뒤져 있습니다. 트럼프 2.0, 마가 운동이 지지 세력의 외연을 확장하는 데 성공한 요인은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매카시의 분석대로 양대 정당이 모두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자, 기득권 정치에 염증을 느낀 유권자들이 트럼프를 대안으로 여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록적인 인플레이션 때문에 여당을 심판하는 정서가 강했는데, 해리스가 바이든과 충분히 거리를 두지 못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특히 인종이나 성별, 세대를 기준으로 정치 성향을 분류, 분석하는 이른바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 분석에서 라티노, 흑인 젊은 남성 사이에서 트럼프 지지가 늘어난 데 주목하는 사람이 많은데, 여기서도 숨은 요인이 경제라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됩니다. 선거인단 싸움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경합주 안에서 집값이 치솟아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서민이 누구였는지 살펴보면, 유색인종의 비중이 높습니다. 이는 얼마 전 브렛 스티븐스가 칼럼에서 지적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다시 돌아온 트럼프 시대 어쨌든 트럼프는 권토중래에 성공해 백악관으로 돌아갑니다. 아직 하원은 개표가 끝나지 않아 다수당이 누군지 정해지지 않았지만, 공화당이 다수당이 될 가능성이 커 8년 전처럼 행정부와 입법부를 모두 공화당이 장악한 단점정부(unified government)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강력한 권한을 손에 쥐고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할 가능성이 큽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정책을 펼지 주제별, 분야별로 간략히 살펴봅니다. 이민과 국경, 치안 선거를 치르면서 인플레이션과 함께 트럼프가 가장 강조한 공약이 바로 이민과 국경, 치안 문제입니다. 미국에 들어와 있는 불법 이민자를 샅샅이 찾아내 남김없이 추방하겠다고 여러 차례 공약한 트럼프 대통령은 이민세관단속국(ICE) 직원 숫자를 대폭 늘리고, 난민이나 불법 이민자들을 수용할 시설을 만들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지난 행정부 때 공포한 행정명령을 전부 다 되살린다면, 무슬림 국가 출신 사람들의 미국 입국을 일방적으로 제한하는 법령, 일명 "무슬림 밴"이 다시 발동될 수도 있습니다. 사법부 장악과 정적 처단 트럼프를 향한 기소, 재판은 당연히 취임과 함께 곧바로 전부 다 기각 또는 중지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어 트럼프는 자신을 '마녀사냥' 해온 사람들을 향한 복수를 시작할 겁니다. 트럼프는 자신의 범죄를 추궁하고 기소했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과 정치적인 견해가 다른 사람들까지 모두 국가의 적이라며 복수하겠다고 공언해 왔습니다. 바이든 대통령 가족을 향한 수사를 시작하고, 자신을 기소하고 비판한 검사, 변호사, 판사들을 타깃으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백악관 기밀문서 유출이나 1월 6일 의사당 테러 관련 연루 혐의를 조사해 기소한 잭 스미스 특별검사는 바이든 대통령이 임명한 메릭 갈랜드 법무장관이 임명했는데, 트럼프가 임명하는 법무장관의 첫 번째 임무가 스미스 특검을 해임하는 일이 될 겁니다. 제왕적 대통령 미국 대통령은 물론 세상에서 가장 힘센 권력자일 수 있지만, 대통령의 인사권은 상원의 인준을 받아야 하고, 정부 예산은 하원이 다 쥐고 관리합니다. 대법관을 비롯해 연방 판사를 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이 인준)한다지만, 대통령이 최선을 다해 지켜야 하는 헌법을 해석하고 고치는 일은 궁극적으로 대법원(사법부)의 몫입니다. 트럼프는 이러한 견제와 균형 원칙에 균열을 낼 것으로 보입니다. 입법부 의원들은 이미 자신에게 충성하는 이들이 주류가 된 공화당이 장악했습니다. 사법부도 자신이 임명한 대법관 3명 덕분에 대법원이 보수화됐습니다. 대법원은 지난 7월 대통령이 재임 중 한 일에 폭넓은 면책특권을 인정한 판결을 통해 트럼프에게 큰 힘을 실어준 바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건이 일어나면 재판을 통해 잘잘못을 다투겠지만, 예를 들어 트럼프 대통령이 정보기관을 동원해 야당 인사 혹은 언론인을 사찰했다 하더라도 이는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게 됩니다. 대통령보다 제왕에 가까운 권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역과 외교: America First 국제무대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은 지난 1기 행정부와 비슷한 행보를 보일 것으로 전망됩니다. 관세를 대폭 올려 미국에 수출하는 기업들의 경쟁력을 떨어트리고, 특히 중국 기업과 중국과 관련 있는 산업을 철저히 견제하고 압박하며, 미국 기업이 어려움을 겪는 규제가 있으면 앞장서서 풀어주려 할 것입니다. 미국 내 규제는 직접 철폐하고, 다른 나라가 미국 기업에 하는 규제는 무역 전쟁이나 경제 보복 위협을 불사하고도 양보를 받아내는 원칙을 내세울 가능성이 큽니다. 트럼프가 우리나라에도 늘 하던 말, 즉 '그동안 너희가 동맹이라며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서 편하게 경제 발전하고 단물만 쏙쏙 빼갔으니, 이제는 정당한 비용을 지불해라. 그렇지 않으면 미국 덕에 누리던 유, 무형의 혜택을 당장 거두어가겠다'는 식으로 나올 가능성이 큽니다. 트럼프도, 밴스도 아닌 일론 머스크의 세상 이번 선거의 진짜 승자는 트럼프나 J.D. 밴스, 마가 운동도 아닌, 일론 머스크라는 분석도 많습니다. 슈퍼팩을 통해 최소 1억 3천만 달러를 기부한 것으로 알려진 머스크는 공공연히 이번 선거에 트럼프의 당선을 위해 "모든 걸 걸었다(All-In)"고 말해 왔습니다. 당장 머스크가 트럼프 지지를 공식화한 뒤로, 전기차 규제에 대한 트럼프의 발언이 상당 부분 누그러졌습니다. 이 밖에도 트럼프 행정부가 기업을 향한 규제 가운데 어떤 걸 먼저 철폐할지 숙고하는 과정에서 머스크의 입김이 작용할 가능성이 큽니다.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오늘은 본 주제를 논하기에 앞서 최근 미국 정치에서 나온 몇 가지 장면을 소개하려 합니다. 먼저 지난해 낸시 펠로시 전 하원의장과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가 CNN과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한 인터뷰 중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펠로시의 말을 그대로 옮깁니다. (영상 2분 30초부터 하는 말입니다.) (트럼프가) 처음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날이었어요. 정말 역사적인 순간이잖아요. 저는 이 사람의 취임 일성이 무엇일지 궁금했죠. 국민한테 전하는 메시지에 무슨 말을 할까? 미국 헌법? 역사? 시를 가져올까? 아니면 성경의 구절을 인용할까? 그런데 트럼프의 취임 일성이 뭐였는 줄 아세요? “내가 전체 득표에서도 클린턴한테 이겼다”였어요. 그래서 제가 말했죠. “대통령님,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2016년 선거 이야기입니다. 트럼프는 선거인단에선 클린턴을 넉넉히 앞질렀지만, 전체 득표에서는 287만 표 차이로 졌습니다. 과반의 선거인단 표를 받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한다는 미국 헌법에 따라 대통령이 된 사람의 첫마디가 헌법 절차에 따라 문제없이 운영된 제도에 커다란 흠집을 내는 말이었습니다. 헌법을 지키겠다고 방금 전에 선서한 사람이 한 말로는 적절하지 못했죠. 이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이후 트럼프는 기존의 제도와 마찰을 빚을 때마다 제도 전체를 부패하고 무능한 것으로 묘사하고 핵심 기능을 빼앗거나 할 수 있다면 아예 제거해 버리는 쪽을 택합니다. 그러다 2020년 대선에서 패하고 나서는 부패한 선거 제도가 자신의 승리를 부정하게 빼앗아 가는 민주당을 막기는커녕 방조했다고 주장합니다. 트럼프는 어쩌면 지금까지도 미국의 헌법, 정치 제도와 싸우는 중입니다. 그래서 보게 된 인상적인 장면이 지난달 초 부통령 후보 토론에서 나왔습니다. 이날 토론에서 전반적인 토론 태도나 편안하게 답변을 이어가는 모습 등만 보면 트럼프의 러닝메이트 J.D. 밴스 의원이 이긴 토론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토론 막판에 나온 한마디 궤변 때문에 밴스는 애써 쌓은 점수를 다 잃습니다. 바로 2020년 선거에서 트럼프가 졌냐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답하지 못한 겁니다. 밴스도 실은 트럼프가 선거에서 졌다는 사실을 잘 알 겁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순간 트럼프 지지자들이 찾아내 처단하려 했던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과 다르지 않은 처지가 되리라는 걸 잘 알기에 억지로 말을 돌렸을 뿐입니다. 2020년 선거가 부정선거였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트럼프의 러닝메이트가 되지도 못했을 겁니다. 올해 선거에 임하는 트럼프의 핵심 전략은 물론 더 많은 표를 받아 승리하고 당당하게 백악관에 다시 입성하는 겁니다. 이는 2020년의 바이든, 2024년의 해리스를 포함해 여느 대선 후보와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런데 트럼프에겐 중대한 전략이 하나 더 있습니다. “플랜 B”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은데, 유권자, 특히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향해 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지지 않을 수 있다는 의구심을 계속 불어넣는 일입니다. 의구심이 쌓이면 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이를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 선거에서 만약 트럼프가 패한다면, 플랜 B는 즉시 발동될 겁니다. 개표 과정에서 부정이 있었다는 주장은 4년 전 60번 넘는 소송에서 전부 다 패했지만,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트럼프가 패하는 순간 곧바로 부활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가짜뉴스를 부지런히 뿌려 사람들의 마음에 의구심을 심기 위한 트럼프의 노력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바이든과 민주당, 이른바 딥스테이트가 선거 승리를 찬탈하지 못하게 막자는 구호 “Stopping the Steal”은 같은 이름의 다큐멘터리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부정선거가 또 일어나지 않는지 감시하고, 선거의 진실성, 완결성(election integrity)을 지키자는 운동은 특히 2020년 선거에서 근소한 표차로 승부가 갈린(그 가운데 물론 트럼프가 진) 조지아와 애리조나 등지에서 크게 일어났습니다. 지지자들이 선거관리 업무를 하는 지방정부 담당자들을 위협하는 일도 있었죠. 이후 경합주를 중심으로 선거가 공정하게 관리되는지 감시하는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납니다. 여기에 참여하는 트럼프 지지자들의 인터뷰를 보면 진심으로 부정선거가 일어나는지 걱정해서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이 많아 보이지만, 트럼프 지지 단체나 슈퍼팩이 돈을 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어디까지 자발적인 단체로 봐야 할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사실 지난 선거 개표 과정에서 대대적인 부정이 있었고, 이번에도 심각한 조작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열심히 알리면서 그나저나 선거에선 우리 후보를 뽑아달라고 말하는 게 논리적으로 모순이긴 합니다. 그래도 트럼프 캠프는 두 가지 상황을 다 대비하는 차원에서 다소 모순적일 수 있는 구호를 내세워 유권자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이죠. “엄청나게 많은 표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몰아줍시다! (Swamp the Vote!) 표 차이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서 자잘한 개표 부정으로는 승리를 빼앗아 갈 엄두도 못 낼 만큼 우리의 힘을 보여줍시다. 할 수 있다면 선거일까지 기다리지 말고 미리 투표하세요. 주변의 가족, 친지에게 공화당 찍도록 설득하시는 거 잊지 마시고요!” 걸린 게 많은 선거가 치열하게 전개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개표 과정도 순탄치 않을 겁니다. 공화당 대선 캠프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던 선거 전문 변호사 벤 긴즈버그가 뉴욕타임스에 칼럼을 썼습니다. 주요 경합 주별로 선거 관련 법, 규정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본 다음 어느 주가 특히 개표가 길어질 수 있는지 꼼꼼하게 분석하고 전망한 글입니다.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초박빙 승부, 당일 밤엔 결과 알 수 없을 것"... 마음의 준비 필요한 미국 대선 관전 지침 그런데 우선 미국의 선거 개표 과정이 왜 길어질 수 있는지, 심지어 자칫 한없이 늘어질 수도 있는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몇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는데, 우선 미국은 연방제 국가라서 그렇습니다. 연방제 국가라는 건 강력한 중앙정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선거관리 업무도 중앙이 아니라 각 주 정부 또는 지방 정부의 소관입니다. 중앙 선거관리위원회가 최고 헌법기관 중 하나인 우리나라와 사뭇 다릅니다. 수정헌법 10조에 “헌법에 의하여 미국 연방에 위임되지 아니하였거나, 각 주에 금지되지 않은 권력은 각 주나 국민이 보유한다.”라고 돼 있는 미국에선 주 정부가 중요한 업무를 우선 맡아서 처리합니다. 선거로 뽑는 공무원이 50만 명이 넘는 미국에서 선거관리 업무는 당연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주마다 주무부(State Department of the State )가 있고, 주무부가 하는 가장 중요한 업무가 바로 선거 관리입니다. (참고로 우리나라 외교부에 해당하는 국무부는 “U.S. Department of the State”입니다. 다른 나라와 외교 문제는 연방 정부가 처리하도록 주 정부가 권한을 위임한 거죠.) 대통령 선거에서 주무부의 업무는 투표를 집계해 12월 11일 전에 결과를 발표하고, 12월 17일에 선거인단 투표를 진행, 12월 25일까지 연방 의회에 보내는 것까지입니다. 똑같이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를 보장하기 위해 만든 규정이라 해도 주마다 선거법과 규정, 제약이 조금씩 다릅니다. 또 유권자 지형, 여론, 개표 환경과 제약까지 달라 선거 결과를 확정하는 데 오래 걸리는 주가 나올 수 있습니다. 승자독식 방식으로 선거인단을 배분하는 독특한 원칙도 개표가 늦어지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주에서 아슬아슬하게 한 후보가 이기더라도 어차피 다른 주의 투표 결과와 다 합쳐서 선거의 승패를 가른다면 큰 부담 없이 선거 결과를 연방에 보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주별로 표를 집계해 한 표라도 더 많이 받는 후보가 그 주에 배정된 선거인단을 전부 다 차지하는 방식을 따릅니다. (네브라스카, 메인 제외) 그래서 표 차이가 작을 경우 자동으로 검표를 다시 하도록 규정이 마련된 주도 있고, 아슬아슬하게 진 후보가 재검표를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2020년 선거에서 트럼프가 패배한 결과를 뒤집으려고 조지아주 브래드 라핀스버거 주무장관에게 전화해 “내게 모자란 11,779표를 어떻게든 찾아내라”고 닦달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검표를 한 뒤에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주무장관과 주지사 모두 공화당 소속으로 선거에서 당선된 인물이었습니다. 이 통화 내용은 트럼프의 조지아주 선거 개입 혐의의 결정적인 증거가 됐고, 현재 트럼프는 기소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트럼프의 심정도 이해가 갑니다. 500만 명이 투표한 선거에서 고작 0.23% P 차이로 승패가 갈렸는데, 11,779표만 가져오면 상대방에게서 선거인단을 16명이나 빼앗아 올 수 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미국이 관습과 판례를 중요시하는 보통법 국가라 그렇기도 합니다. 이 또한, 가능한 한 일어날 만한 모든 문제를 다 법에 명시해 놓고, 이를 어기지 못하게 하는 걸 일종의 이상향으로 여기는 우리나라와 다른 점입니다. 미국에선 큰 줄기의 원칙만 정해놓고 제도를 운영하다가 문제가 발생하면 원고와 피고가 나뉘어 법원에서 잘잘못을 가립니다. 위에 쓴 12월 11일, 17일까지 선거 결과를 확정하고 선거인단 투표를 해야 하는 일정표가 큰 줄기의 원칙입니다. 그런데 개표를 어떻게 할지, 그전에 유권자 명부를 어떻게 관리할 지부터 많은 부분이 관습에 따라 ‘해오던 대로’입니다. 너무 박빙의 승부가 펼쳐져 몇 번이고 재검표를 거듭해야 하는 상황이거나 투표용지가 손상되는 등 사고가 발생하면 개표는 계속 늦어질 수 있습니다. 만약 12월 11일까지 선거 결과를 확정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어떻게 될까요? 여기는 아직 오늘날 미국이 가본 적 없는 길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한다는 규정이나 법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일단 해놓고 나중에 법원에 판단을 맡겨야 할 텐데, 여기엔 엄청난 시간과 돈이 듭니다. 트럼프가 준비한 “플랜 B”는 선거에서 지더라도 개표를 늦추고 부정선거 주장을 끊임없이 폄으로써 혼란을 일으키고 그사이에 경합 주 주무부보다 먼저 “내가 이겼다”고 마침표를 찍는 겁니다. 이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지는 사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 선거인단의 투표 결과를 비준해 차기 대통령을 확정하는 1월 6일에 또 한 번의 폭력 사태가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어 걱정됩니다. 트럼프는 오랫동안 부정선거 논란에 불을 지폈습니다. 게다가 실제로 몇몇 경합 주는 박빙의 승부가 나 개표가 지연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차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에서 투표를 독려하는 광고가 나왔습니다. “11월 5일은 투표 개시일이 아니라, 투표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다. 그날 투표해도 좋지만, 가능하면 미리 사전 투표에 참여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 반대로 11월 5일은 1월 6일 의회 비준, 이어 20일 취임까지 어쩌면 선거 유세 기간보다도 훨씬 혼란스러울 수 있는 시기의 시작일 수도 있겠습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가 패배한다면, 미국 정치제도는 또 한 번의 부정선거 논쟁을 어떻게 겪어낼까요? 이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가 될 겁니다. 사진 : 연합뉴스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영화 “기생충”의 후반부 클라이맥스는 박 사장네 아들 다송의 생일파티 장면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 장면 속 기택(송강호 분)이 박 사장(故 이선균 분)을 칼로 찌르기 직전 표정에서 드러나는 감정이 트럼프 지지자들이 공유하는 정서를 표현하는 데 알맞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바로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은연중에 무시하는 이들, 세력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입니다. 자신이 한 어떤 행동이나 실언이 무시당하는 게 아니라 숨길 수 없는 서민의 냄새가 무시당하는 이유입니다. 또 상류층이 이를 무시하는 태도도 노골적으로 잘못을 지적한다기보다는 그냥 불편하고 이상하다는 반응이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식입니다. 공화당 부통령 후보 J.D. 밴스의 자전적 회고록인 책 '힐빌리의 노래'에는 밴스가 로스쿨에서 겪은 탄산수와 관련한 일화가 등장합니다. (링크는 해당 부분을 발췌한 글) 불우한 환경에서 어렵게 자라 예일대학교 로스쿨에 입학한 밴스는 부푼 꿈을 안고 인턴을 뽑으러 온 로펌의 채용 이벤트에 지원합니다. 이 가운데 한 로펌에서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를 받아 난생처음 값비싼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게 됩니다. 식사 중에 밴스는 태어나 처음 탄산수를 마시게 됐는데, 입에 대자마자 뱉어버렸습니다. 기포가 있는 물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반짝이는(sparkling) 물이라고 생각하고 주문했다가 놀랐던 거죠. 다행히 밴스가 당황했다는 사실은 동기생 한 명밖에 눈치채지 못했지만, 밴스는 자기가 평생 보고 자란 세상과 달라도 너무 다른 엘리트들이 사는 세상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졌다고 말합니다. 누군가에게 무시당하는 일은 다행히 없었지만, 그냥 남한테 폐 끼치지 않고 열심히 살아온 자기 인생이 누군가에게는 괜한 비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서글펐다고 밴스는 말합니다. 유권자들이 투표할 때 어떤 점에 반응해 마음을 정하고 후보를 고를까요? 물론 유권자마다 기준이 다를 테고, 선거 때마다, 또 쟁점이 되는 이슈에 따라서도 다를 겁니다. 그러나 정치에 관심이 많아서 두 후보의 특징과 공약을 꼼꼼히 따져보고 심사숙고 끝에 결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어떤 한 가지 사건 혹은 계기에 반응해 투표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겁니다. 그 이유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이죠. 그렇다면 더욱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감을 표에 담았다는 분석이 일리가 있습니다.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트럼프의 승리라면 일등공신은 이것? 진보 진영이 간과한 한 가지"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브렛 스티븐스가 쓴 칼럼도 바로 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스티븐스는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중에는 보수적인 편에 속하지만, 미국 언론 전체를 놓고 보면 중도 성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스티븐스가 만약 트럼프가 이번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가장 큰 문제는 진보 진영의 “잘난 척”과 트럼프 지지자들을 향한 뿌리 깊은 무시 때문일 거라고 주장했습니다. 다분히 논쟁적인 주장이지만, 수긍이 가는 지점도 많았습니다. 우선 잘난 척, 낙인찍기, 가스라이팅, 과도한 낙관론을 지적한 부분은 일리 있는 지적, 아니 날카로운 통찰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보 진영과 민주당 지지자들은 종종 트럼프 지지자들을 동료 시민이 아니라 괴물처럼 묘사하곤 합니다. 물론 다양성이 높은 도시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비칠 수도 있지만, 어쨌든 트럼프 지지자들 대부분은 그냥 평범하게 살았을 뿐인데 공화당을 지지하고 트럼프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인종차별주의자에 천하에 몹쓸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도 일을 열심히 해서 가정을 꾸리고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하겠다고 생각하는 젊은 남성도 시대에 뒤처진 사람 취급받습니다. 심지어 여성혐오주의자 딱지를 막 붙이기도 하죠. 게다가 트럼프 지지자들 보기에, 이 진보주의자들은 잘난 척이 몸에 배어 있어서 사사건건 자신이 정답을 다 안다며 오만하게 남을 가르치려 듭니다.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지표와 체감 경기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는데, 실제로 내 월급은 오르지 않아서 장 보러 가서 계란이나 우유, 빵을 사기도 부담스러워졌는데 오히려 간단한 그래프도 이해 못 한다며 나를 꾸짖습니다. 고통받는 건 난데 내 고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내 고통을 재단하려 합니다. 트럼프는 적어도 우리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는데 말이죠. 다만 나머지 세 가지, 즉 고집불통의 정치, 이중잣대, 정체성 정치를 지적한 부분은 동의하기 어렵거나 너무 사소한 부분을 침소봉대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해리스가 경선을 거치지 않고 대선 후보가 된 건 전례를 찾기 힘든 일이긴 하지만, 법적으로 문제가 없고, 민주당 안에서도 필요한 절차를 밟은 만큼 일단락된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이 점을 문제 삼는 사람은 대부분 트럼프 지지자가 많습니다. 이중잣대에 대한 비판도 전혀 비슷하다고 볼 수 없는 문제를 동일 선상에 놓고 양비론을 폈기에 문제가 많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대법원을 자기와 같은 성향의 판사들로 채우려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공화당은 2016년 스칼리아 대법관이 사망했을 때 그 자리를 메릭 갈랜드 현 법무장관으로 채우려 한 오바마 대통령의 대법관 지명을 인사청문회도 열지 않고 버티며 무산시켰습니다. 자그마치 선거까지 9개월을 버텼죠. 이건 트럼프의 잘못이 아니라 상원 공화당 리더였던 미치 매코널 의원의 작품입니다. 같은 상원은 2020년 9월 긴스버그 대법관이 사망한 지 불과 38일 만에 일사천리로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을 임명했습니다. 임기 4년 동안 무려 세 명이나 대법관을 임명한 트럼프가 운도 좋았지만, 이중잣대를 적용해 대법원을 보수화하는 데 앞장선 공화당의 전략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해 2022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심판을 받았고, 이번 선거에서도 트럼프의 최대 약점이기도 하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고, 자기랑 성향 비슷한 판사 임명하려는 건 민주당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하는 건 균형 잡힌 지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언론사를 향해 원색적인 비난을 일삼는 트럼프와 바이든 행정부가 소셜미디어 기업을 검열했다는 사실을 동일 선상에 놓은 것도 억지입니다. 통치자의 일거수일투족을 투명하게 취재하기 위해 정당한 질문을 던지는 언론사를 비난하고 겁박하는 트럼프의 태도는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납니다. 반면 바이든 행정부가 소셜미디어를 검열했다며 예로 든 기사는 코로나19 팬데믹 때 백신 음모론을 비롯한 가짜뉴스를 걸러내 국민들이 정확한 방역 수칙을 접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한 겁니다.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릅니다. 정체성 정치에 관한 비판은 합리적인 지적이지만, 스티븐스가 글의 다른 부분에서 언급한 점, 즉 이번 선거가 워낙 박빙이다 보니 유권자들에게 좀 더 직접적으로 와닿는 공약을 던지려고 내놓은 전략으로 보입니다. 장기적으로는 인종을 콕 집어 지원 대책을 발표하는 것보다 저소득층 전반을 대상으로 필요한 지원을 확충하는 정책이 물론 낫습니다. 그런데 둘 중에 그런 정책을 더 잘 마련한 쪽은 해리스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물론 평가는 지지 후보에 따라 극명하게 갈리겠지만요. 뉴욕타임스 독자의 댓글 스티브스의 이번 칼럼에 대한 뉴욕타임스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댓글이 인상적이어서 옮겨봤습니다. 코네티컷주 그리니치에 사는 스테파니라는 독자가 남긴 댓글입니다. 한마디로 제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사람의 논리적으로 허점투성이인 칼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트럼프 지지자들은 8년 전 처음으로 트럼프를 지지했던 사람들과 다르지 않아요. 트럼프가 집권했을 때 경제가 “눈부시게” 좋아서, 바이든 때는 경제가 나빠서 마음을 바꿨거나 새로 유권자가 된 사람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민주당이 트럼프를 실제 모습 그대로 인종차별주의자에 여성혐오자, 파시스트라고 부를수록 트럼프 지지자들을 소외시킨다는 끝없는 불평은 지겹습니다. 이건 낙인찍는 게 아니라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을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트럼프가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향해 반역자니, 미쳤다느니 뒤틀린 사람, 거짓말쟁이, 패배자라고 욕하고 비아냥대는 거야말로 진짜 낙인찍기입니다. 트럼프가 승리하면 그 원흉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바로 트럼프를 뽑은 사람들입니다. 그는 명백히 부도덕하고 무지하고 이기적이며, 공직을 맡을 일말의 자격도 갖추지 못한 사람입니다. 지난 선거에서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 결과를 뒤집고 흠집 내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습니다. 미국의 적국에 기밀 정보를 제공했고, 자신의 정적을 처단하는 데 군대를 동원하겠다는 말을 공공연히 내뱉고 있습니다. 이건 트럼프의 측근만 아는 정보가 흘러나온 게 아닙니다. 틈만 나면 공개적으로 트럼프가 입에 담는 말입니다. 트럼프에게 표를 던지는 사람은 나중에 트럼프가 했던 말과 행동을 보고 놀라선 안 됩니다. 자신이 오해했다고 나중에 변명해서도 안 되고, 진짜 그런 사람인지 몰랐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트럼프가 정치에 뛰어든 지 10년이 다 돼가는) 지금 시점에선 그렇다는 겁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민주당의 정치나 태도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민주당은 분명 트럼프보다 명백히 국가를 위해 더 나은 비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다시 집권한다면, 그 주범은 트럼프를 선택한 어리석은 유권자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지도자를 선출하는 데 대한 책임은 결국 유권자가 집니다. 마치 유권자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애꿎은 피해자가 된 것처럼 묘사하려는 시도는 당장 그만뒀으면 좋겠습니다. 민주당 지지자 가운데 얼마나 이 글에 동의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칼럼을 읽은 뉴욕타임스 독자 중에는 2천 명 넘는 사람이 추천한 댓글입니다. 물론 스티븐스가 이 댓글을 보면 또다시 바로 이런 태도가 트럼프 지지자들을 무시하는 문제의 “잘난 척”이라고 주장할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를 꾸짖고 면박 주면서 그들에게 표를 얻을 생각을 하는 건 앞뒤가 안 맞는다고도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극심한 정치적 양극화 속에 치러지는 이번 선거에서 상대방 유권자의 마음을 돌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고, 중요한 건 오히려 우리 편을 찍어줄 사람들의 투표율을 높이는 것이라는 점은 지난 글에서 짚은 대로입니다.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제일 걱정되는 건 특히 트럼프 지지자들이 선거에서 졌을 때 결과를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4년 전에 일어난 폭력 사태가 또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어서 더 그렇습니다. 심지어 표 차이가 크지 않을 경합 주에서는 개표가 예상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선거 이후 며칠이, 어쩌면 몇 주가 무척 혼란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선거 결과를 결정한 일등 공신이 무엇이었는지는 결국, 선거가 끝나봐야 분석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 분석조차도 완벽할 수 없을 만큼 아주 근소한 차이로 승패가 갈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승패와 상관없이 민주당과 진보 진영은 엘리트주의가 정치적 양극화를 더 조장한다는 지적을 진지하게 곱씹어봐야 합니다. 반대로 공화당과 트럼프 지지자들도 법치의 근간이 되는 원칙에 승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과 거짓이 명백히 드러날 때 내가 지지한 후보가 졌더라도 거기에 승복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큰 기둥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엘리트주의라고 비판받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편이 지면 부정선거고, 우리 편이 이겨야 문제없다고 말할 거면 애초에 선거에 나설 자격이 없습니다. 이미 2020년 선거에 조직적인 부정이 있었다는 소송이 60번 넘게 있었는데, 트럼프 측은 전부 다 패소하거나 소송이 아예 기각됐습니다. 그래서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이 되면 사법부까지 장악해 입법부와 사법부 위에 군림하는 제왕적 대통령을 꿈꾸는 겁니다. 이건 명백한 민주주의의 위협으로 보이는데, 스티븐스는 이 또한 트럼프를 향한 낙인찍기라고 부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진 : 연합뉴스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11월 5일 미국 대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미 우편 투표와 부재자 투표가 시작된 주도 많고, 직접 투표소에 가서 할 수 있는 사전 투표를 시작한 주도 있습니다. 미국은 선거일이 공휴일이 아닌 만큼 전체 50개 주 가운데 43개 주와 수도 워싱턴 D.C.가 사전에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기간을 일주일 이상 법으로 보장해 놓고 있습니다. 제가 사는 뉴저지주도 지난 토요일(26일)부터 사전 투표가 시작됐는데, 첫날에만 13만 명 이상이 투표했고, 우편으로 투표한 유권자들도 60만 명이 넘습니다. 선거를 앞두고 선거 관련 기사를 읽는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건 단연 선거 결과입니다. 자신의 대표자를 뽑는 미국인은 말할 것도 없고, 누가 미국 대통령이 되느냐, 공화당과 민주당 중에 어느 당이 여당이 되느냐에 따라 전 세계가 사뭇 다른 영향을 받기 때문에 모두의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기사가 길면 어김없이 '그래서 누가 이긴다는 건데?' 같은 질문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번 선거는 정말 누가 이길지 예측하기 어려운 박빙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언론사가 판세를 정확히 읽고자 쉼 없이 여론조사를 하지만, 나오는 조사 결과마다 확실한 승자를 예측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게다가 미국 대선은 전체 득표에 따라 승패가 나뉘는 게 아니라서 예측이 더 어렵습니다. 과반의 선거인단, 즉 전체 538명 중 270명 이상의 선거인단을 확보해야 이기는데, 주별로 한 표라도 더 많이 받은 후보가 그 주에 배정된 선거인단을 모두 차지하는 승자독식 방식이라서 그렇습니다. 이번 선거에서는 누가 이길지 예단하기 어려운 경합주(swing states)가 7개입니다. 경합주를 빼면 해리스도, 트럼프도 확보할 수 있는 선거인단이 270명에 못 미칩니다. 경합주를 어떻게 나눠 갖느냐에 따라 내년 1월 20일에 취임할 대통령이 달라질 수 있고, 그래서 예측이 어렵습니다. 경합주 민심이 누구를 선택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박빙 양상이므로, 7개 경합주 투표 결과가 어떻게 조합되느냐에 따라 다양한 경우의 수가 나올 수 있습니다. 한 후보가 살짝 더 앞서는 것처럼 보이는 주도 있지만, 7개 경합주 모두 예상 득표율이 오차 범위 안에서 엎치락뒤치락합니다. 그러니까 동전 던지기나 다름없다고 말하는 게 전혀 과장이 아닌 겁니다. 선거를 일주일 앞둔 시점에서 이런 만큼, 앞으로 일주일 사이에 아주 극적인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 이번 선거는 정말 "투표함을 까봐야" 알 수 있는 선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종종 "그래도 어느 한쪽이 조금이라도 우세하지 않느냐?", "그러지 말고 근소한 차이라도 앞서 있는 후보를 짚어달라", "동전 던지기나 다름없다는 소리는 무책임한 발언 아닌가?"라는 핀잔 섞인 반응을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앞서 장황하게 설명한 것처럼 이번 대통령 선거는 여론조사를 보면 볼수록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팽팽한 양상이 이어져 누가 이긴다고 단정하는 게 사실을 바로 보지 않고 뒤트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이번 대선, 박빙 아닐 수도?... 누구의 직감도 믿지 말아야 할 이유" [네이트 실버 칼럼] 여론조사와 통계 전문가 네이트 실버도 같은 생각입니다. 실버는 자신의 블로그에 선거 관련한 여론조사 분석을 주로 올리고 있는데, 거기에 23일 뉴욕타임스에 위의 칼럼을 올린 뒤에도 비슷한 글을 계속 썼습니다. 그러나 원문에 제목으로 쓴 "선거 결과에 관해 그 누구의 직감도 믿지 말라"는 당부는 본문 내용에 잠깐 언급한 한 문장 때문에 묻혔습니다. 바로 "OK, I'll tell you. My gut says Donald Trump" 이 문장, "좋다, 내 촉은 트럼프의 승리를 가리킨다"라고 언급한 부분입니다. 실버로선 만약 선거에서 해리스가 승리한 뒤에 사람들이 자신의 예측이 틀렸다고 비판한다면, "그러게 내가 누구의 직감도 믿지 말랬지? 내 직감도 포함해서..."라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놓은 겁니다. 그러나 소위 '제목으로 뽑기 좋은' 미끼를 던져놓고, 예상대로 언론이 그 미끼를 물자 (국내 언론이든 미국 언론이든 마찬가지) "핵심은 50 대 50일 거라는 말"이었다고 발뺌할 준비를 마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실버는 발표된 여론조사 여러 개를 자신의 모델에 넣고 분석해 결과를 예측하는데, 여기서는 최근 트럼프가 선거인단 과반을 확보할 확률이 꾸준히 50%를 웃돌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델을 활용한 예측의 기반이 되는 여론조사가 오차 범위 안에서 움직이더라도 결과가 뒤바뀔 수 있기에 실버도 트럼프가 이긴다고 장담하지 못하는 겁니다. (오차 범위 안에서 움직이는 건 표본을 추출해 질문하고 응답을 모아 분석하는 여론조사에서 당연한 겁니다. 심지어 오차 범위를 벗어나는 결과가 나오더라도 여론조사가 틀렸다, 잘못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두 가지 시나리오 결국, 이번 선거를 분석하고 전망하는 모든 이들의 상황은 9회 말 동점 상황을 지켜보는 야구 기자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쪽의 승리가 확실한 상황이라면 경기가 끝나기 전에 미리 기사를 어느 정도 써놓을 수 있겠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습니다. 어느 쪽이 이겨도 승리를 이끈 결정적 장면부터 원동력까지 다 찾을 수 있습니다. "해리스가 이겨도, 트럼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은 선거"라는 말에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두 가지 시나리오를 다 써보겠습니다. 지난 여론조사들이 빗나갔던 원인 여러 가지 가운데 투표율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점이 눈에 띄고, 트럼프도 해리스도 아닌 제3의 후보가 미칠 영향이 주목되는 만큼 두 가지를 위주로 시나리오를 써보겠습니다. 1. 트럼프 승리 2016년 선거에서 트럼프에게 깜짝 승리를 안겨준 원동력도, 2020년 선거를 '졌잘싸 선거'로 만들어준 것도 경합주 유권자들, 특히 교육 수준이 낮은 남성 유권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투표율이 (다른 유권자보다) 높게 나오면 이번에도 트럼프는 승리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실버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론조사 결과를 뛰어넘을 수(beat the polls)" 있습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대개 기성 언론이나 여론조사 기관을 신뢰하지 않아서 여론조사에 응하는 비율이 낮습니다. 그래서 전체 응답을 단순히 더해 지지율을 계산하면 안 되고, 이들의 목소리에 가중치를 더 줘야 합니다. 여론조사에는 잡히지 않지만, 의견이 같은 사람이 더 많은 셈이니까요. 2016년과 2020년에는 결과적으로 이 작업을 잘 못했습니다. 이번 대선을 앞두고 여론조사 기관들은 물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신경을 썼겠지만, 경험이 많지 않아서 또 같은 실수를 해도 놀랍지 않습니다. (실버가 지적한 대로 직감이나 촉을 진지하게 믿어보려면 프로 포커 선수처럼 관련 경험이 적어도 수천 번은 쌓여야 합니다. 4년에 한 번 있는 미국 대선에서 여론조사를 제대로 하기 시작한 건 길게 잡아도 50년이 안 됩니다. 열 번 남짓한 경험에서 쌓인 촉은 믿지 않는 편이 현명해 보입니다.) 해리스의 표를 깎아 먹는 효과가 있으므로, 트럼프에게 도움이 되는 제3당 후보는 녹색당의 질 스타인 후보입니다. 스타인 후보는 네바다를 제외한 6개 경합주 투표용지에 이름을 올렸는데, '트럼프는 절대로 안 찍지만, 그렇다고 해리스도 도무지 미덥지 않은 유권자들'이 표를 줄 겁니다. 스타인 후보의 지지율은 1% 정도에 불과하지만, 만약 트럼프가 어떤 주에서 해리스를 아슬아슬하게 이겼는데, 스타인이 받은 표를 해리스에게 더하면 트럼프를 앞지를 수 있는 결과가 나온다면 트럼프는 스타인에게 정말 고마워할 겁니다. 2. 해리스 승리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는 7,422만 표를 받았습니다. 2016년까지 그 어떤 대선 후보가 받은 표보다도 훨씬 더 많은 표였습니다. 트럼프 본인은 아직 인정하지 않지만, 그런 트럼프가 2020년 선거에서 진 건 "뛰는 트럼프 위에 나는 바이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이든은 트럼프보다 700만 표 이상 많은 8,128만 표를 받았습니다. 물론 전체 득표가 곧바로 선거인단으로 직결되는 건 아니지만, 선거인단 대결에서 306:232로 압승을 거둘 수 있던 원동력은 결국 '트럼프에게 4년을 더 맡길 수 없다'는 유권자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여론조사에 잘 잡히지 않는 지지층은 트럼프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거죠. 대선은 아니지만, 2022년 중간선거 때 여론조사는 해리스 캠프가 내심 재현되길 기대하는 시나리오일 겁니다. 이때 공화당이 많은 의석을 늘릴 것이라는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간 데는, 이른바 "투표용지 효과(down ballot effect)"가 적잖은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2022년 트럼프가 임명한 대법관 3명 때문에 절대적인 보수 우위 구도로 변한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며, 임신 중절권을 보호하지 않기로 한 데 분노한 젊은 세대, 여성 유권자들의 투표율이 높았습니다. 또 1월 6일 의사당 테러가 난 지 (당시 기준으로) 2년이 지나도록 선거 결과에 승복하기는커녕 부정선거 음모론을 부추기던 트럼프가 손수 뽑은 후보들은 대체로 고전했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고 답했거나 투표할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 유권자 중에는 투표장에 간다면 결국 해리스에게 표를 던질 이들이 꽤 있을 겁니다. 해리스가 어떻게든 이들의 마음을 돌린다면 경합주에서 아슬아슬하지만 승리할 수 있을 겁니다. 트럼프가 속으로 응원할 제3당 후보가 질 스타인이라면, 반대로 해리스에겐 자유지상주의당(Libertarian Party)의 체이스 올리버 후보와 이미 사퇴하고 트럼프 캠프에 합류했지만, 그 시점이 늦는 바람에 미시간과 위스콘신주 투표용지에는 이름을 올리게 된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후보가 희망입니다. 이들이 트럼프의 표를 많이 빼앗아 갈수록 해리스의 당선 가능성은 높아집니다. 3. 여론조사가 '틀릴' 가능성 마지막으로 여론조사가 아예 '틀렸다'라고 하려면 어떤 상황이 벌어져야 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계속해서 "50 대 50"이란 말만 되풀이하는 여론조사 기관이나 저를 포함해 "이번 선거는 정말 뚜껑 열어봐야 안다"라고 말하는 이들을 위한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2억 명이 넘는 전체 유권자의 마음을 일일이 조사할 수 없는 상황을 고려하면 염두에 둬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보통 텍사스주는 보수 성향이 강한 주(red state)로 분류합니다. 그럼, 현재 텍사스주의 대선 여론조사를 한 번 볼까요? 텍사스 주립대학교가 지난 18일 발표한 투표할 가능성이 큰 유권자(LV, Likely Voters) 1,091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트럼프가 51%, 해리스가 46%를 득표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런데 이 여론조사의 오차 범위는 ±3%입니다. 이 말은 곧 해리스의 예상 득표율은 43~49%, 트럼프의 예상 득표율은 48~54%라는 말입니다. 즉, 해리스가 49%, 트럼프가 48%를 받아 해리스가 이길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텍사스는 선거인단이 40명이나 되므로, 만약 해리스가 텍사스를 이기면 나머지는 볼 것도 없이 게임은 끝입니다. 그런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이 여론조사를 틀렸다고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여론조사가 틀렸다고 하려면 더 확실한 주, 즉 장담할 수 있다고 여긴 주에서 이변이 일어나야 합니다. 뉴욕주를 예로 들겠습니다. 시에나 대학교가 지난 22일 발표한 투표할 가능성이 큰 유권자(LV, Likely Voters) 872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해리스가 58%, 트럼프가 39% 득표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 여론조사의 오차 범위는 ±4.1%입니다. 해리스는 아무리 못 받아도 52.9%는 득표할 것이고, 트럼프는 아무리 잘 받아도 43.1%에 그칠 테니, 뉴욕에 배정된 선거인단 28명은 해리스에게는 떼어 놓은 당상입니다. 뉴욕에서 만약 트럼프가 이긴다면 여론조사 기관은 실수를 분석하고 다음번엔 더 잘하는 수준으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문을 닫아야 합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에즈라 클라인은 지난 13일 "여론조사 무시하세요"라는, 어쩌면 다소 선정적인 제목의 칼럼을 썼습니다. 너무 박빙인 선거인 만큼, 또 선거인단 집계 방식 때문에 경합주에서 벌어지는 아주 작은 오차로도 결과가 요동칠 수 있기 때문에 여론조사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클라인은 글을 읽을 대다수 미국인 유권자를 향해 "여론조사 결과에 휘둘려 감정 기복을 겪을 바엔 그 시간에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더 의미 있는 일을 찾아서 하시라. 경합주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에게 후원금을 내거나 그 후보 캠프에 참여해 동료 시민들에게 지지를 독려하는 전화를 돌리는 자원봉사를 하는 것도 좋다. 주위에 아직 마음을 못 정했거나 투표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설득해 보는 것도 좋다"라고 썼습니다. 후원금이나 자원봉사 이야기가 해당하지 않는, 일종의 참관인으로서 제게는 시시각각 변하는 결과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조언이 와닿습니다. 어쨌든 일주일만 있으면 올해 여론조사들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판정할 수 있는 결과가 나올 겁니다. 여론조사에 대한 분석과 비판은 그때 해도 늦지 않습니다. 사진 : 연합뉴스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미국 대선이 2주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선거인단 과반인 270명 이상을 어느 후보가 확보할지 여전히 오리무중인 가운데 트럼프와 해리스 두 후보는 7개 경합주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이미 우편투표를 비롯해 사전 투표, 부재자 투표를 시작한 주가 많습니다. 정치적 양극화가 뚜렷한 상황에서 치르는 선거인만큼 지금 시점에서 유권자들이 지지 후보를 바꿀 가능성은 매우 작습니다. 특히 투표할 마음을 먹은 유권자라면 이미 자신의 한 표를 어디에 던질지 마음을 정했을 겁니다. 아직 누구를 찍을지 정말 모르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투표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민주당과 공화당도 상대 정당, 후보를 지지하는 유권자의 마음을 돌리는 것보다 우리 정당과 후보에 표를 던질 만한 사람들이 꼭 투표하게 설득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특히 경합주에서 평소 정치에 참여도가 낮고, 투표도 반드시 하지는 않던 유권자들(low-propensity voters)이 얼마나 투표하러 오느냐가 대선 결과를 결정할 것으로 보입니다. 경합주에 사는 투표 성향이 높지 않은 유권자 가운데 흑인, 히스패닉, 아시아계 미국인 등 유색인종이 있습니다. 유권자 지형도 주마다 다른 만큼 모든 유색인종을 하나로 뭉뚱그려 어떻다고 단정하긴 쉽지 않지만, 대체로 유색인종 유권자들 사이에선 민주당 지지세가 강했는데, 이번 선거를 앞두고 해리스는 이전 후보만큼 압도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같은 인종이라고 반드시 지지하라는 법은 없지만, 흑인이자 아시아계 미국인인 해리스가 4년 전 조 바이든보다도 유색인종 사이에서 지지율이 낮은 건 다소 의외라는 반응이 많습니다. 물론 트럼프가 (인종을 가리지 않고) 젊은 남성 사이에서 지지율이 높은 건 후보의 성별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젊은 남성이 해리스를 외면하는 이유를 그저 “여자라서”라고 설명하는 건 충분하지 않습니다. 보충 설명의 근거로 꼭 알맞은 주제가 선거를 앞두고 유권자들이 늘 가장 중요한 문제로 꼽는 ‘경제’입니다.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맥도널드서 감자 튀기고 "알바 했었다"는 대선 후보들, 그 의미는 미국 사회에서 흑인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에 관한 연구를 해온 펜실베이니아대학교의 마샤 체이틀린 교수가 이번 선거를 바라보는 창으로 맥도널드를 고른 건 당연해 보입니다. 체이틀린 교수는 저서 “프랜차이즈: 흑인의 미국을 수놓은 황금 아치”로 이미 맥도널드의 역사를 통해 미국 사회를 조망했고, 이 책으로 퓰리처상과 제임스 비어드상(저술 부문)을 받았습니다. 지난 주말 트럼프 전 대통령은 최대 경합주 펜실베이니아, 그 안에서도 경합 카운티로 꼽히는 벅스 카운티의 맥도널드 매장을 찾았습니다. 일일 알바로 나선 트럼프는 감자튀김도 직접 튀기고 드라이브스루 주문도 받고 처리하며 유권자를 만났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선거철만 되면 재래시장을 찾는 모습이 떠올랐는데,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 나누는 모습은 ‘트럼프 같은 부자도 맥도널드를 좋아하는구나.’ 하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기에 적합했습니다. 다만 해리스가 젊었을 때 맥도널드에서 일했다는 경험을 내세운 걸 자꾸 의식한 듯 계속 “해리스는 사실 맥도널드에서 일한 적 없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억지로 되풀이하는 모습은 트럼프다우면서도 보기 불편한 장면이었습니다. 해리스는 학생 때 맥도널드 매장에서 일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어 해리스의 남편 더그 엠호프는 젊었을 때 맥도널드에서 일한 적이 있다며, 이달의 직원으로 뽑힌 적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1980년대 젊은이들이 맥도널드에서 시간제 혹은 계약직으로 일하는 건 흔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맥도널드는 이미 성공한 프랜차이즈로 한창 성장하고 있었고, 맥도널드에서 일해 번 돈을 용돈이나 학비에 보태는 건 중산층 젊은이들에게도 특이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해리스 부통령 부부가 유권자들에게 넌지시 알리고자 했던 것도 자신들은 트럼프 같은 갑부와 달리 유권자들과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이야기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맥도널드에서 아르바이트한 경험은 없고, 그저 젊어서부터 맥도널드 단골이었다는 점밖에 내세울 수 없던 트럼프가 유독 예민하게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고요. 경제 문제에서 계속 발목 잡히는 해리스 맥도널드에서 과연 알바를 했느냐 아니냐를 두고 헛된 진실 공방을 벌이려는 트럼프의 모습은 애석하지만, 사실 경제 전반에 관해서라면 이번 선거 내내 수세에 몰리고 초조한 건 분명 해리스입니다. 경제 공약의 타당성을 검토, 비교하기도 전에 이미 바이든 행정부 때 치솟은 물가 때문에 사람들은 경제 문제에 관한 한 해리스 후보와 민주당에 높은 점수를 주지 않습니다. 아무리 잘 짠 공약을 내놓아도 “장 보기 두렵다”, “주유소에서 기름 넣을 때마다 걱정이다”, “다음 달 월세, 공과금 낼 걱정에 잠이 안 온다”는 유권자들에겐 들리지 않습니다. 이미 정부가 취할 수 있는 경제 정책과 제도에 대한 신뢰는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반대로 트럼프는 쉬운 공략법을 따르면 됩니다. “내가 집권했을 땐 경제가 좋았다, 바이든이 다 망쳐놨다, 해리스도 똑같이 책임이 있다.”는 이야기를 반복하면 되죠. 물론, 이건 사실을 두고 다툴 여지가 적지 않은 주장입니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 마지막 해인 2020년에 코로나19 팬데믹이 발생해 경제가 크게 위축됐고, 그로 인해 트럼프가 집권한 내내 경제가 좋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트럼프는 여전히 “팬데믹 전까지는 좋았잖아?”라고 말하면 그만입니다. 바이든 행정부가 팬데믹으로 인한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돈을 풀어야 했고, 그래서 인플레이션이 높아진 것도 사실이지만, 정치와 선거에서 운이라는 요소를 따지기 시작하면, 트럼프는 ‘코로나19만 없었어도 내가 어렵잖게 재선에 성공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바이든과 거리를 두는 데 한계가 있는 해리스 캠프는 경제 문제에서 더 적극적으로 유권자들의 불만에 대책을 내놓았어야 합니다. 물론 해리스 캠프는 최선을 다해 경제 공약을 만들고 이를 알리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트럼프가 먼저 제안한 공약이지만) 식당 서버들이 받는 팁에 붙는 세금을 면제하겠다는 약속부터 연방 최저임금을 올리는 문제를 논의하겠다, 노동조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는 대통령이 되겠다, 집을 처음 사는 사람과 건축업자들에게 지원금을 줘서 집값을 잡겠다, 가격을 올려 부당 이득을 챙기는 기업을 제재해 물가를 관리하겠다는 약속까지, 분명 기대할 만한 요소가 없지 않은 공약들입니다. 그러나 결국, 유권자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소용없죠. 경제 문제가 의제로 떠오를 때마다 트럼프와 밴스가 “해리스는 부통령으로 바이든 행정부에서 일하는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인플레이션이 이 지경에 이르게 해 놓고서는 이제 와서 무슨 공약을 그렇게 요란하게 내놓습니까?”라고 일축하면 거기서 토론이 끝나버립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인플레이션은 모든 국민이 투표장으로 향하는 순간에도 피부에 와닿는 현실입니다. 주유소 간판의 기름값, 어젯밤 슈퍼에서 계란, 우유 사고 낸 장바구니 비용, 떨어지면 큰일 나는 아이 기저귓값까지 생필품 가격은 품목을 가리지 않고 다 올랐습니다. 집값이 불과 5년 전인 코로나19 이전과 비교해 두 배, 심지어 세 배나 더 올라 저축은커녕 가족에게 돈을 빌리든 대출을 받든 급히 월세를 마련하지 못하면 거리에 나앉게 생긴 경합주 유권자들에게 경제보다 시급한 문제는 없습니다. 이들이 이 사태를 막지 못한 바이든 행정부에 실망해 ‘트럼프는 다르겠지’라고 생각하는 건 당연합니다. 거기에 대고 “인플레이션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평균 임금이 올랐다”는 경제 지표를 보여주면 역효과만 날 뿐입니다. 그렇다고 경제 문제를 애써 외면한 채 다른 이슈를 이야기하는 것도 별 효과가 없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선거가 열흘 남짓 남은 시점에 유권자들이 지지 후보를 바꿀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은 나를 찍어줄 가능성이 큰 유권자가 어떻게든 잊지 않고 투표하게 하는 게 중요합니다. 트럼프 캠프가 쉼 없이 “인플레이션 때문에 얼마나 삶이 팍팍해지셨습니까?”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건 당연한 전략입니다. 반대로 민주당은 트럼프 대통령의 백악관 비서실장을 오랫동안 지낸 사람이 직접 “트럼프는 파시스트”라고 말한 데 잠깐 기대를 걸었을지 모르지만, 역시나 별다른 파장이 없습니다. 경제 문제는 경제로 풀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쉽지 않은 과제를 끝내 제대로 풀지 못한 해리스 캠프가 선거 막바지 수세에 몰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이번 선거는 여전히 누가 이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11월 5일 대선에서 해리스가 패배한다면, 경제 문제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민주당 후보를 찍었을 텐데 투표하지 않은 유권자들의 표를 끝내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아마도 가장 유력한 원인으로 꼽힐 겁니다. 경제 문제가 가장 클지, 아니면 해리스 캠프가 내심 경제 문제를 덮어주기를 기대할 임신중절권이나 민주주의(지난 선거 결과에 불복한 트럼프) 문제가 얼마나 영향을 발휘할지에 선거의 향방이 달렸습니다. 사진 : 연합뉴스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미국 친구들과 정치 이야기를 하다가 지지 정당을 물어보면, 적잖은 경우 "우리 집이 대대로 민주당 지지하거든." 혹은 "부모님이 다 공화당 지지하셔서 나도 자연스레...."와 같은 답을 듣게 됩니다. '지지 정당도 집안 내력을 따른다는 소린가?' 한 가족이라도 세대에 따라 정치 성향이 갈라지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좀 이상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보다 땅덩이가 넓어 물리적 이동이 덜하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날 기회도 상대적으로 드문 환경에서 사는 사람이 더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치 성향뿐 아니라 전반적인 가치관이 대물림되기 쉬운 환경일 거란 생각도 듭니다. 사회·경제적 계층의 이동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큰데, 큰 변화가 없는 곳도 많을 겁니다. 그래서 1960년대 캘리포니아의 대학 캠퍼스와 진보적 커뮤니티에서 민권운동을 하다 만난 부모님 사이에서 나고 자란 해리스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된 것도, 부동산 재벌가에서 나고 자란 트럼프가 정치에 뛰어들기 전까지 평생 사업가로 지내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거를 치르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순리처럼 보입니다. 제가 느슨한 관찰을 통해 내린 가벼운 결론은 "미국인의 지지 정당은 종교보다는 약하지만, 응원하는 야구팀보다는 강력하게 대물림된다"쯤 됩니다. 보통 미국에서 사는 지역, 성별, 인종, 학력, 재산, 소득 수준 정도를 알면 거의 예외 없이 그 사람의 정치적 성향, 지지 정당을 맞출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식처럼 적용할 수 있던 기준이 거시적인 관점에서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중서부 제조업 노동자들이 노조를 통해 조직돼 있던 시절에는 민주당을 지지하던 성향이 두드러졌는데, 이제는 노조 조직률이 낮아지는 등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백인, 남성, 제조업 노동자"라는 키워드만 준다면 공화당(트럼프) 지지자라고 예측하는 게 정답일 확률이 높아졌죠. 이를 "정치적 대전환" 혹은 "유권자 지형의 대전환"이라고 부릅니다. 영어로 "Great Political Realignment"인데, 이를 그대로 옮기면 정치적 대전환이고, 당연히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성향이 개인이 아니라 특정 유권자 집단 수준에서 바뀌므로, 거시적인 관점에서 의역하면 유권자 지형이 근본적으로 바뀐다고 볼 수 있어서 그렇게 썼습니다. "대전환"은 커다란 변화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순식간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보통 적어도 10년에 걸쳐 변화가 일어나는데, 가장 최근 미국의 유권자 지형 대전환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60년대를 관통한 민권운동의 결과 1964년 민권법, 1965년 투표권 법이 통과되자 이를 탐탁잖게 여긴 남부의 보수적인 백인 유권자들이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지지 정당을 바꿉니다. (그때는 아직 TV 방송사에서 민주당을 파란색, 공화당을 빨간색으로 표시하기 전이었지만, 블루 스테이트가 빨갛게 변한 겁니다.) 이어 공화당은 "작은 정부", "경제적 보수주의"를 앞세워 더 많은 보수적 유권자를 끌어들였습니다. 인종 문제가 직접적인 정치적 대전환의 계기가 된 건 그보다 100여 년 전의 일입니다. 1850년대 휘그당이 분열 끝에 사라지면서, 노예제에 반대하는 북부의 산업 세력이 주도하는 정당이 탄생했는데, 그 정당이 바로 공화당입니다. 그리고 1860년대 공화당 소속으로 대통령에 당선돼 (이후 내전까지 치르면서) 노예제를 철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입니다. 현재 공화당과 트럼프를 지지하는 세력 중에는 소수지만 백인우월주의 조직이 있는데, (100년 넘는 세월이 물론 짧지는 않지만,) 현재 공화당을 지지하는 이들 중 일부의 증조부, 고조부 대에선 노예제를 철폐하려는 공화당 소속 "북부 양키놈들"을 향해 총칼을 겨눴을 이들이 적지 않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트럼프와 정치적 대전환 앞서 언급했듯 대전환은 순식간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는 곧 대전환이 한창 진행 중이라도 이를 정확히 느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는 대대로 공화당만 찍었다는 사람 중에 트럼프가 아니라 해리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더러 눈에 띕니다. 반대로 원래대로라면 민주당을 찍을 법한 유권자들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현상도 보이죠.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마가(MAGA) 싫으면 당장 꺼지세요!" 그 이후... 미국 유권자 지형 대전환 오나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미셸 골드버그가 애리조나주에서 트럼프와 공화당을 위해 선거운동을 하는 터닝 포인트라는 단체를 취재하고 나서 쓴 장문의 칼럼을 보면, 분명 대전환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트럼프가 처음 당선된 8년 전에 그 문턱에 발을 들여놓았다면, 4년 동안의 첫 집권기, 2020년 선거에서의 패배와 불복으로 인해 일어난 정치적 폭력과 혼란을 거치며, 트럼프와 트럼프주의를 뜻하는 마가(MAGA) 지지층은 더욱 굳어졌습니다. 이들은 전통적인 공화당 지지층과 몇 가지 특징에서 뚜렷이 구분됩니다. 트럼프가 마가 운동을 이끌 후계자로 지목했다는 평을 받는 부통령 후보 J.D. 밴스가 내세우는 주장이 지난 1960년대 대전환 이후 공화당의 가치, 비전, 정치적 강령과 비슷하면서도 엄연히 다른 부분이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밴스는 무조건 작은 정부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대신 세계화와 기술 발달로 소외되고 배제되고 낙후된 지역에 사는 미국인들을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이들을 지원해 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기 위해 값싼 노동력을 찾아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는 기업이나 이윤을 노동자와 나누지 않고 독차지하는 대기업을 규제하고. 필요하면 처벌해야 한다는 말도 합니다. 반독점 규제당국의 상징과도 같은 리나 칸 연방거래위원장의 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죠. 트럼프가 내세우는 관세 정책도 트럼프의 말대로 실현될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어쨌든 "당신의 삶을 힘들게 한 세계화주의 엘리트들을 응징할 적임자는 나"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에 직관적으로 알맞은 공약입니다. 기술 발전과 세계화가 낳은 승자와 패자 트럼프가 대변하는 지금의 정치적 대전환은 어디서 시작됐을까요? 그 힌트를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다론 아체몰루, 사이먼 존슨, 제임스 로빈슨 교수의 연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방대한 분량의 역사와 자료를 검토하고 분석해 실로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는 연구를 해온 정치경제학자들이지만, 이들의 연구를 대표하는 저서 두 권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와 "권력과 진보"를 중심으로 거칠게 요약해 보면 이렇습니다. 먼저 "권력과 진보"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옵니다. 지난 몇십 년 사이 컴퓨터의 놀라운 발달로 소수의 사업가와 기업계 거물이 지극히 부유해졌다. 그러는 동안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대부분의 미국인은 뒤로 밀려났고 많은 이들의 실질소득이 심지어 감소했다. 아체몰루와 존슨 교수는 기술이 발전한다고 그 혜택과 번영을 모두가 알아서 공유하게 되는 건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기술 발전은 오히려 필연적으로 극소수의 승자와 대다수의 패자를 낳습니다. 이를 고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면 경제적 혜택을 독점하는 이들은 정치적 권력마저 독점하게 되고, 억압적인 체제가 등장합니다. 사회의 권력이 소수에 집중돼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에서 다수가 배제되면, 불만이 쌓이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집니다. 아체몰루와 로빈슨 교수가 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는 기술 발전의 혜택과 번영을 공유하기에 더 좋은 제도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즉, 더 많은 사람이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경제적인 이윤을 더 많은 사람이 공평하게 나눠 갖는 포용적인 제도(inclusive institutions)가 있는데, 포용적인 제도를 가꾸고 유지하는 나라는 번영에 이르고, 반대로 의사결정 과정을 소수의 엘리트 권력이 독점하고, 이들이 경제적인 이윤과 사회 전반의 부를 독점하는 착취적인 제도(extractive institutions)에 잠식되는 나라는 실패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로 든 사례 가운데 남·북한을 비교한 장도 있어 주목을 받기도 했죠.) 두 점을 이어 현재 미국 정치에 적용해 보면, 기술 발전과 세계화가 승자와 패자를 나눠 놓았는데, 미국의 경제 체제는 충분히 포용적인 제도가 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사는데도 자꾸만 뒤처지고, 심지어 부모 세대보다도 먹고사는 게 힘들어진 데 좌절한 사람들의 불만과 분노가 마른 장작처럼 쌓여있던 겁니다. 트럼프의 등장은 거기에 불을 지른 셈이죠. 물론 트럼프가 제시하는 비전이나 실제로 첫 번째 행정부에서 보여준 정책이 민주당과 미국의 경제 엘리트가 편 정책보다 더 포용적인 제도였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대규모 부자 감세, 일방적인 규제 완화, 외국인이나 사회적 약자를 조롱하고 혐오하는 권위주의적인 성향은 착취적인 제도에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이 된 백인 노동자들은 늘 입을 모아 "트럼프는 적어도 우리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고, 우리의 어려움에 공감한다"고 말합니다. 골드버그도 칼럼에서 유권자 지형이 바뀌고 있다는 부분을 직접 언급합니다. 트럼프 시절을 거치면서 공화당은 노동자 계층에서 점점 더 우위를 점했고, 민주당은 도시와 근교의 교육 수준이 높은 계층, 좀 더 넓게 보면 미국 정부나 공공기관을 기본적으로 신뢰하는 이들에게서 표를 얻었다. 원문에서 골드버그는 "civic institutions"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를 "시민적 제도"라고 옮기면 뜻이 와닿지 않을 것 같아 정부 또는 공공기관이라고 썼습니다. 그러나 아체몰루 교수가 지적한 대로 (포용적인) 제도의 효능을 경험했거나 신뢰하는 이들이 권위주의의 부상을 제어하고 민주주의를 지키는 동력이 된다는 점과의 연관성을 생각하면 글자 그대로 "시민적 제도"라고 옮기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이번 선거에서 해리스와 트럼프, 또 2020년대 들어 민주당과 공화당을 가르는 기준이 바뀌고 있다는 겁니다. 이제는 "뉴딜과 복지국가 대 경제적 보수주의와 규제 완화"와 같은 도식적인 기준이 더는 들어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도를 보는 시선", 즉 제도를 신뢰하느냐 아니면 정치·경제 제도를 (민주당과 좌파, 워싱턴 D.C.의 딥스테이트, 여기에 월스트리트를 포함한 금융 부문의) 엘리트들이 나 같은 사람을 착취하기 위해 물린 재갈로 보느냐, 그래서 "우리를 여기서 구원해 줄 트럼프를 지켜내느냐"가 이번 선거뿐 아니라 앞으로 한동안 미국 유권자를 나누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아체몰루 교수를 비롯한 노벨상 수상자들의 분석이 맞다면, 혹은 민주당과 해리스 캠프가 이 분석을 인정하고 반영해 선거 전략을 짠다면 우선 경제에 관한 메시지를 지금보다 더 솔직하게 낼 필요가 있습니다. 해리스 캠프가 물론 경제 공약도 발표했고, 트럼프와 차별점을 드러내려 애쓰고 있지만, 잘 먹히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해리스 캠프의 메시지에 여전히 트럼프 지지자들이 가진 근본적인 불만과 거기서 비롯된 분노를 겸허히 인정하는 모습이 담겨있지 않아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인정하지 않은 채 지금처럼 트럼프의 독재자 같은 면모, 분노를 참지 못하고 쏟아내는 막말만 물고 늘어지는 건 자칫 민주당 행정부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유권자들을 향해 도덕적으로 훈계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번처럼 치열한 선거 국면에선 실질적인 역효과가 날 수도 있습니다. 포용적인 제도를 만드는 일은 물론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제도를 가꿔나가고 유지, 발전하는 일은 더 어렵습니다. 그렇더라도 해리스와 민주당이 트럼프를 꺾는 것뿐 아니라 마가가 엄연한 운동으로 자리 잡은 지금의 상황을 바꿔나가고 싶다면, 더 솔직하게 시민들을 설득해야 하며, 당선된 뒤에도 포용적인 제도를 지키고 시민들이 혜택을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제도를 향한 시민들의 신뢰가 떨어지는 경향을 위기로 받아들이고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사진 : 연합뉴스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지난주부터 노벨상 수상자가 속속 발표되고 있습니다. 이번 주 경제학상 발표만 남겨둔 가운데 한국에선 한강 작가의 문학상 수상이 단연 가장 큰 관심을 받고 있지만, 그에 앞서 물리학상과 화학상이 각각 인공지능 개발에 기여한 과학자와 인공지능을 활용해 큰 진전을 이룩한 과학자에게 수여돼 지금은 '인공지능(AI)의 시대'임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꼭 과학자나 개발자, 테크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일상에서 점점 더 인공지능을 자주 접하고, 인공지능과 부대끼며 사는 시대입니다. 인공지능을 단연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채널은 챗GPT로 대표되는 챗봇일 겁니다. 챗GPT의 성능은 눈부시게 빠른 속도로 좋아지고 있는데,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쌓이는 사용자 데이터를 이용해 지금 이 순간도 학습하고 축적하는 것이 가장 큰 비결입니다. 챗GPT를 개발해 운영하는 오픈AI뿐 아니라 구글과 메타 등 인공지능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빅테크 기업들은 전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 많은 데이터를 확보하는 데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이용자가 원하면 내 데이터를 학습에 쓰지 못하게 설정할 수 있지만, 고객이 자신의 데이터를 양도하도록 기본적으로 설정해 둔 경우가 많아 소용이 없습니다. 눈부시게 발전한 인공지능의 성능 덕에 챗봇은 이미 다양한 곳에 도입됐습니다. 거의 모든 서비스 기업의 고객센터는 챗봇을 통해 상담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특히 문자로 주고받는 대화라면 꼭 사람이 직접 하지 않더라도 챗봇이 인간을 대신해, 인간을 흉내내 내놓을 수 있는 답변이 꽤 많습니다. 물론 중요한 정보는 인간의 검수가 필요하고, 중요한 의사결정도 사람이 내려야 하지만, 그래도 챗봇의 쓰임새는 분명 빠르게 늘어났습니다. 이제 문자로 주고받는 대화뿐 아니라, 음성으로 하는 대화도 가능해졌습니다. 물리적인 질량을 가진 로봇을 만들어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게 하는 건 여전히 어렵지만, 음성은 문자와 마찬가지로 데이터로 만들어내기 훨씬 쉽죠. 특히 아무 목소리가 아니라 특정 인물의 목소리도 데이터만 충분히 주어지면, 얼마든지 복제해 낼 수 있습니다. 팟캐스트 "셸 게임(Shell Game)"을 진행하는 에반 래틀리프가 자기 목소리를 학습해 흉내 내는 AI판 에반 래틀리프를 만들어 가족, 지인들과 통화를 시도했습니다.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텔레마케터 전화를 AI에게 받게 했다... '괜찮은데?' 싶다가 깨달은 교훈 좋은 데이터를 많이 모아 학습할 수 있는 분야에서는 점점 더 인공지능이 능력을 발휘하는 세상이 올 겁니다. 특히 물리적 세계의 복잡성에 노출되지 않아도 되고, 순전히 데이터만 분석할 수 있는 분야부터 바뀔 겁니다. 유발 하라리는 자율주행 자동차가 현실에 도입되지 못하는 이유로 물리적 세계와 상호작용을 하는 일이 인공지능에 여전히 어려운 과제이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반대로 모든 것이 숫자와 데이터로 이뤄지는 금융은 인공지능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훨씬 수월한 분야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한국으로 100달러를 보낼 때 100달러 지폐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지 않습니다. 그저 보내는 사람 통장 잔고에서 100달러가 줄고, 받는 사람 통장 잔고에 100달러(에 해당하는 원화)가 늘어나면 끝입니다. 적어도 금융에선 숫자와 데이터로 모든 게 움직이죠.) AI 래틀리프는 이내 간파당했습니다. 그러나 래틀리프의 데이터를 더 많이 학습하고 나면 인공지능 음성봇은 머지않아 '전화 튜링 테스트'를 통과하게 될 겁니다. 그러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음성봇이 전화를 걸어올 겁니다. 인공지능과의 대화라도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궁금한 질문에 답변을 해준다면 분명 쓸모가 있는 일이겠죠. 정교해지는 음성봇이 걱정되는 것도 당연합니다. 당장 보이스피싱이 더욱 감쪽같아지면 그로 인한 피해가 막심할 겁니다. 내 목소리나 말투를 똑같이 따라 하는 음성봇이라면 내 가족이나 지인을 속이기도 좋을 겁니다. 물론 기술이 발전할수록 그로 인한 피해나 부작용을 막기 위해 우리는 계속해서 보호장치를 마련할 겁니다. 기계의 방식을 새로 뛰어넘는 인간의 방식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아무리 인간을 감쪽같이 흉내내는 인공지능이라도 인공지능과의 대화가 인간에게 더 큰 외로움을 안겨준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좀 더 근본적인 과제를 던집니다. 음성봇의 쓸모가 많아지면, 온 세상에 대화가 넘쳐날 테고, 역설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대화, 교류는 빠르게 줄어들 겁니다. 잠을 잘 필요도 없고, 감정의 소모도 느끼지 않는 인공지능이 대화를 만들어내는 속도는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를 테니까요. AI 오물의 오디오 버전이 범람하는 세상에서 사람은 역설적으로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외로움을 달래고 덜기 위해서는 인공지능이 아무리 정교해지더라도 사람과 사람의 대화를 보장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아직 오지 않은 세상이기에 정답을 미리 알 수는 없지만, 인간(人間)이란 단어의 의미처럼 서로 소통하고 교류할 때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는 본질은 시간이 흘러도 바뀌지 않을 겁니다. 기술 자체를 거부하는 건 어렵겠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마련하고 기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여담으로 사람과 사람의 대화라는 게 얼굴을 마주 보고 하는 대화나 전화 통화, 채팅 말고 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나서 어쩌면 문학도 아주 고차원적인 인간의 대화 방식 중 하나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설가를 직접 만나보지 못했더라도 그 작품을 읽으면 마치 작품 속 주인공, 나아가 그 주인공을 만들어내고 그려낸 작가와 끊임없이 대화하고 감정을 주고받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기계 번역의 수준이 놀라울 만큼 좋아졌는데도 여전히 번역기가 가장 잘 옮기지 못하는 텍스트가 행간에 수많은 뜻과 생각과 이야기가 담긴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작품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미 한강 작가의 작품 세계에 대한 평론을 학습한 챗GPT는 한강 작가에 관한 질문에 곧잘 답하고, 심지어 한강 작가의 문체와 톤으로 시를 써보라고 하면 시도 단번에 써내려 갑니다. 그러나 결국 이건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쓴 글이라는 걸 인지하는 순간 글을 보고 느끼는 감정도 단조롭게 시듭니다. 음성봇이 점점 더 많아지면, 일상에서 노출되는 대화도 훨씬 더 많아질 겁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인간을 흉내낸 인공지능과의 대화만 많아진다면,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끊어지고, 대화와 교감도 실종되며 우리는 전부 다 더 외로워지고 말 겁니다. 어쩌면 이를 막아줄 안전장치 중 하나가 문학작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노벨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책 주문이 말 그대로 폭발했다고 합니다. 부디 이번 수상이 더 많은 사람이 문학을 가까이하고, 그래서 사람과 사람의 대화도 늘어나고, 공동체의 연결 고리도 더 튼튼해지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사진 : 게티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