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페퍼민트는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전하고자 2012년 7월 미국 보스턴에서 시작했습니다. 외신 큐레이션 매체. 이효석 대표와 송인근 편집장, 유혜영 교수가 함께 시작했으며, 현재는 eyesopen님 등 여러 필진들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나종호 예일대학교 정신의학과 교수) 저는 한국에서 의과대학 교육을 받고, 미국에서 일하고 있는 정신과 의사입니다. 미국에서는 정신질환 및 정신건강 서비스를 향한 낙인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제가 처음 태평양을 건너온 10년 전과 비교하면 피부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이제 미국 사람들은 꼭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만 심리 상담을 받지 않습니다. 평소에 '자기 관리' 차원에서 심리 상담을 받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이런 변화를 가장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연애 시장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많이 쓰는 데이팅 앱 중에 힌지(Hinge)라는 앱이 있습니다. 힌지가 이용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용자의 91%가 데이트 상대로 심리 상담이나 심리 치료를 받는 사람을 선호한다고 답했습니다. 오케이큐피드(OkCupid)라는 또 다른 데이팅 앱이 2022년 발표한 자료를 보면, 프로필에 '심리 상담을 받는 중'이라고 써놓은 사람의 비율이 이전 해보다 20% 이상 증가했습니다. 짝을 찾아주기 위해 하는 사전 질문 가운데 "심리 치료가 사람들에게 긍정적이거나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문항이 있습니다. 여기에 "그렇다"고 답하는 남성은 그렇지 않다고 답한 남성에 비해 '좋아요'를 두 배 가까이 더 받았습니다. 매칭될 확률도 1.5배 높았죠. 그러다 보니, 상대방에게 호감을 사려고 일부러 '심리 치료를 받는 중'이라고 거짓으로 프로필을 꾸며두는 남성도 있다고 합니다. 자칫 이해가 가지 않는 경향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몸의 근육을 키우기 위해 개인 트레이닝(PT)을 받는 것처럼 마음의 근육과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 정기적으로 심리 상담을 받는 거라고 생각하면 조금 이해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피부과에 가서 피부 관리를 받고, 꼭 치통이 없어도 주기적으로 치과에 가서 치아 건강을 확인하고 관리를 받습니다. 정신건강도 마찬가집니다. 미국은 정신건강을 위해 정기적인 상담을 받거나 정신과 진료를 받는 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사회로 점점 더 변해가고 있습니다.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아이들보다 훨씬 더 불안해하는 학부모들을 위한 조언 지난 8일, 뉴욕타임스 오피니언에는 보스턴대학교 의료서비스에서 오랫동안 대학생의 심리 상담과 치료를 해온 마틸드 로스 박사의 글이 실렸습니다. 글은 '정신건강에 대한 높은 경각심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진' 미국 대학 캠퍼스의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녀가 대학 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걱정이 지나친 부모들의 사례를 읽다 보면 과유불급이라는 사자성어가 절로 떠오릅니다. 혹 '아니, 저렇게 호들갑을 떨 바에야 정신건강에 대해 무던한 편이 더 나은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너무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지적하는 로스 박사조차 미국 청년들의 정신건강 상태가 심각한 문제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는 "통계를 보면 깜짝 놀랄 정도"라며, 미국 18~25세 청년 가운데 14%가 자살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로스 박사가 한국 청년들의 정신건강에 관한 연구 결과를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합니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올해 2월 발표한 '청년 빈곤 실태와 자립 안전망 체계 구축 방안 연구'에 실린 조사 결과를 보면, 19~34세 청년 4천 명 가운데 57.8%가 스스로가 '우울한 상태'라고 답했고, '자살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답한 청년도 37.1%나 됐습니다. 다섯 명 중 세 명꼴로 우울함을 호소하고, 세 명 중 한 명 이상 자살 생각을 한 적이 있다는 한국 청년층의 정신건강은 로스 박사가 깜짝 놀랐다고 말한 미국 청소년의 상황보다 몇 배 더 심각합니다. 이런 추세는 최근 5년 사이 급증한 10, 20대 자살률과도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현재 한국에서 10대, 20대, 30대의 사망 원인 1위는 모두 자살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심각한 정신건강 상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는 정신건강에 대해 대화하는 데 서툽니다. 아니, 대화 이전에 정신건강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지난해 세계 정신건강의 날 보고서에 따르면, "당신은 자신의 정신건강에 대해 얼마나 자주 생각하나요?"라는 질문에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브라질 사람들은 75%가 '자주 생각한다'고 답했습니다. 전체 응답자 중에도 나 자신의 정신건강에 관해 '자주 생각한다'고 답한 사람이 58%였습니다. 반면, 한국은 61%가 '별로/전혀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절반 이상이 '정신건강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한 유일한 국가가 바로 한국이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돌이켜보면, 저 또한 한국에서 자라면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으니까요. 나의 정신건강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 저는 일곱 살 아이의 아빠이기도 합니다. 아이에게 어릴 때부터 일찌감치 꼭 가르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힘든 감정에 관해 부모에게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마음을 먹은 것은 진료실, 응급실, 입원 병동에서 만난 소아 환자들과의 경험 때문인데요, 생각보다 너무나 많은 청소년이 부모에게조차 본인의 힘든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곪을 대로 곪은 염증은 마지막에 터지기 마련이었고, 외래에서 치료받을 수도 있었을 아이들이 정신적 응급 상황이 올 때까지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응급실 혹은 입원 병동에 오게 되는 것을 자주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만큼 힘든 마음에 대해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이 발생했을 때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평소에 하는 습관을 키워줘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평소에 정신건강이나 우울감에 관해 이야기를 전혀 해본 적이 없는 집안에서 아이가 우울증에 걸리거나 자살 생각이 들기 시작했을 때 부모에게 자신의 힘든 감정을 털어놓는 일은 훨씬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평소에 감정을 나누고, 서로의 힘든 마음을 격려해 주던 가정이라면 아이가 그나마 부모에게 도움을 청하기 더 쉬울 겁니다. 세상에 자녀가 심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응급 상황일 때 이를 돕고 싶지 않은 부모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 마음이 아무리 강렬한들 아이가 부모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부모는 영원히 아이들을 도와줄 수 없죠. 언젠가 미국의 코미디언 크리스 개사드가 자신의 우울증에 대해서 고백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10대부터 우울증과 공황장애, 자살 생각에 시달렸으며, 이에 대해 솔직히 고백한 다큐멘터리 커리어 수어사이드(Career suicide)를 제작하여 평단과 대중의 찬사를 받은 바 있습니다. 개사드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자신이 10대 때부터 우울증에 시달렸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자신이 전문적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실제로는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큰 두려움 중 하나는 바로 자신의 아버지를 실망시키는 것이었다고 덧붙였죠. 시간이 지난 후, 아들의 뒤늦은 고백을 들은 아버지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만약에 네가 고등학교 때에 나에게 너의 우울증에 대해서 털어놓았더라도) 나는 아마, 너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지 잘 몰랐을 거야... 하지만 너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벽이라도 뚫고 지나갔을 거란다." 세상의 어떤 부모든 같은 마음이 아닐까요? 아이가 우울해서 세상을 떠날 만큼 힘들다고 하는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를 해결해 주고 싶은 마음은 부모가 다 같을 거라 생각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방법을 모른다면, 어떻게든 그 문제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해 노력하겠죠. 이제는 우리 모두가 우리의 정신건강에 관해 대화를 나눌 때입니다. 우리의 정신건강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해결책을 고민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는 분들은 자유롭게 정신건강 서비스를 이용하고, 주변에서는 정신적인 힘듦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사회.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사회. 완벽하지 않다고 누구를 비난하고 약점 잡기보다는, 서로서로 힘듦을 보듬어줄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를 함께 만들고 우리 사회의 정신건강 위기에 함께 손을 잡고 맞서기 위해 저는 김용 전 세계은행 총재, 그리고 한국의 여러 전문가와 함께 전국적인 캠페인을 준비 중입니다. 그 발걸음에 함께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mindsos.org)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상대로 테러 공격을 벌인 뒤 그에 대한 반격으로 시작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군사 작전 혹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이 벌써 반년이 더 지났습니다. 평화적인 해결은커녕 잠시 총을 내려놓고 민간인들의 목숨부터 살리자는 휴전 논의도 번번이 무산되는 가운데 인도적 지원 활동을 펴던 구호단체 직원 7명이 이스라엘군의 명백한 실수로 숨지는 일도 있었고, 이란이 이스라엘을 향한 공격을 감행해 전선이 오히려 늘어날 조짐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의 의견을 모아볼 수 있다면, 싸움을 멈추고 어떻게든 평화롭게 공존하는 법을 찾기 바라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을 겁니다. 그러나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건 한쪽의 잘못과 책임이 압도적으로 크다는 주장도 얼마든지 접할 수 있습니다. 편을 가르고 상대방에 더 큰 책임을 묻는 주장이 아무래도 언론에 더 많이 보도됩니다. 지금 세상은 마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한쪽 편에 서기를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미국에서도 평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대부분이지만, 똑같이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도 문제의 원인을 다른 데서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이스라엘 친구나 이스라엘에 가족이 있는 유대인 친구들도 있고, 팔레스타인 혹은 아랍계로서 이스라엘, 특히 네타냐후 총리의 배타적인 민족주의 정책을 강력히 규탄하는 친구들도 있다 보니, 평범한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전쟁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조심하게 됩니다. 이 글의 첫 문장에도 지금 상황을 전쟁으로 봐야 할지, 압도적인 군사력을 앞세운 이스라엘군의 일방적인 군사 작전으로 불러야 할지 확신하기 어려워서 두 가지 용어를 같이 썼습니다. 이스라엘 친구 앞에서 하마스가 벌인 테러를 조금이라도 두둔하는 것처럼 오해할 소지가 있는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반대로 아랍 친구 앞에서는 이스라엘의 공격적인 정착촌 건설부터 가자지구에서 벌이고 있는 사실상의 민간인 학살을 간과하는 듯한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끔찍하게 목숨을 잃은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지금 이 순간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자연히 어느 쪽도 절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 가운데 이번에 새삼 눈에 띄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문제의 원인을 규탄하고 해결을 촉구하는 주장이 세상에 격문을 띄우는, '공개 서한(open letters)'의 형태로 세상에 나온다는 점입니다.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끊임없이 쏟아내기만 하는 "공개서한"의 시대, 이제는 끝내자 뉴욕타임스 오피니언에 글을 기고하는 작가 록산 게이가 "공개 서한의 시대"를 끝내자는 글을 썼습니다. 게이는 공개 서한의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오히려 해결책을 찾아가는 과정을 방해하기도 하는 등 한계가 명확하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요즘처럼 정치적 양극화가 극심해진 세상에서 상대방의 의견을 듣기보다 내 주장을 한 번 더 외치는 셈인 공개 서한의 범람은 갈등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늘은 공개 서한과 정치적인 용기에 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내 주장을 밀어붙이는 용기 공개 서한은 분명할수록 좋습니다. 수신인도, 메시지도, 주장도, 그래서 뭐를 어떻게 하자는 구체적인 행동 지침까지 명시할 수 있다면 더 좋습니다. 내가 주장하는 대로만 하면 해묵은 문제든 갑자기 불어닥친 문제든 말끔히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써야 합니다. 그래야 많은 지지 서명을 받고 세간의 이목을 끌어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테니까요. 색깔이 선명할 주장을 펴는 건 나와 생각이 비슷한 이들이야 환영할 일이지만, 반대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 무엇보다 내가 문제의 원흉으로 지목한 반대편 진영에서는 비난을 각오해야 하는 일입니다. 내가 저들을 적으로 몰아붙일수록 저쪽 진영에서는 내가 적이 될 수밖에 없다 보니, 공개 서한을 쓰고 위험을 감수하며 목소리를 내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공개 서한을 통해 편 주장에는 어느 정도 책임이 따르기도 합니다. 혼자서 머릿속으로 생각한 게 아니라, 또 친구들끼리만 주고받은 이야기가 아니라, 공론장에서 화두를 던지고 특정한 행동이나 변화를 촉구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 주장을 접고 타협하는 용기 그러나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용기는 직관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는 용기입니다. 바로 공개 서한을 통해 내 주장을 더 크게 내세우고 관철해 내는 용기가 아니라, 반대로 상대방 주장을 들어보고 내 주장을 일부 접고 양보하고, 상대방과 타협하는 용기입니다. 누가 옳으냐 그르냐를 두고 물러설 수 없는 논쟁에서 지는 것이나 다름없는 양보와 타협을 용기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지워버리는 게 지상목표가 될 수밖에 없는 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선 상대방에게 발언권을 허락하는 데도 적잖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양보와 타협을 용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현실적인 해법을 찾기 위해 우리 편으로부터도 욕을 먹고 손가락질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개 서한을 통해 '강 대 강'으로 부딪치기만 해서는 지금의 문제가 하나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상대방 주장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내 주장만 펴고 상대방을 억압하려 하면, 우리 편 안에서야 "속 시원한 사이다"라는 극찬이 쏟아질지 모르지만, 그저 양쪽 진영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갇힌 반향실의 외벽이 두꺼워질 뿐입니다. 상대방이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라는 자극적인 주장을 펼수록, 상대편에서도 나와 (내 말에 열광하는) 우리 편을 마찬가지로 지워버리겠다고 할 겁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공통분모 찾기' 하마스의 테러가 발생하고 이스라엘군이 보복 작전에 돌입한 10월 각각 프린스턴대학교와 컬럼비아대학교의 공공정책 대학원장인 아마니 자말과 케렌 야르히밀로가 함께 쓴 칼럼에 대해 쓴 해설의 제목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공통분모 찾기'"였습니다. 그만큼 어려운 일을 하기 위해 내디뎌야 하는 걸음걸음에는 당연히 커다란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말 교수와 야르히밀로 교수도 당연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문제를 바라보는 모든 시각이 같지 않습니다. 어쩌면 서로 생각이 다른 지점이 더 많아서 서로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을 찾는 과정이 상당히 괴로웠을지도 모릅니다. 몇 다리만 건너면 하마스의 테러 공격으로, 그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반격으로 가족을 잃은 피해자를 알 만큼 둘은 서로 다른 편에 서 있습니다. 그런 이들이 지치지 않고, 공통분모를 찾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는 건 정말 박수받아 마땅한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정치의 본질도 내 주장을 관철하는 용기보다 내 주장을 접고 타협을 통해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는 용기를 더 크게 쳐줍니다. 정치는 본질적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각을 정말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거야말로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겁니다. 그보다 생각이 달라도 서로 양보하고 합의할 수 있는 점을 찾아가는 과정이야말로 정치가 제대로 작동할 때 나타나는 이상적인 기제일 겁니다. 타협은 정치적으로 비겁하다고 손가락질받을 일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 일부를 내려놓고 공존하는 법을 찾는 과정에서의 타협은 오히려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일 때가 많습니다. 공개 서한의 시대에 내 마이크를 절대 끄지 않고, 내 할 말만 되풀이하겠다는 고집이야말로 비겁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해결책을 찾기 위해선 상대방 주장을 먼저 들어야 하는데, 그에 필요한 용기를 내지 못해서 그저 내 주장만 되풀이하는 거라면, 그게 더 비겁한 일입니다. 타협할 각오로 내 주장을 접고 양보하고 상대방 말을 듣다 보면, 당장은 내가 손해보고 지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무언가 잔뜩 얹힌 것처럼 더부룩하고 불편해서 사이다가 그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불편함을 이겨내고 공통분모를 찾고 이를 넓혀가야 합니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이를 통해 달성할 수 있는 성과를 믿고 타협을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미국 대선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반드시 언급되는 단골 소재가 바로 선거인단(electoral college)입니다. 우리나라처럼 대통령제를 채택한 나라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제도라서 더욱 그렇습니다. 투표권이 있는 유권자들의 표를 더해 가장 많은 표를 받은 후보가 당선되면 간단할 텐데, 미국은 굳이 선거인단이라는 절차를 한 번 더 거쳐서 대통령을 뽑는 방식을 건국 이후 250년 가까이 유지하고 있습니다. 선거인단이 유권자의 뜻을 한 번 걸러내 대통령을 뽑기 때문에 미국 대선을 "간접선거"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간접선거를 "유권자가 직접 지도자를 뽑지 않고, 유권자가 뽑은 누군가가 지도자를 뽑는 선거"로 정의한다면, 미국 대선은 간접선거로 분류하기 어렵습니다. 주마다 양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미국 유권자들이 오는 11월 받아 들 투표용지에는 조 바이든과 도널드 트럼프를 비롯한 대통령 후보 이름이 있을 겁니다. 유권자가 대통령을 직접 뽑는 셈입니다. 단지 표를 집계하는 방식이 다른 나라들과 좀 다를 뿐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미국이란 나라의 특징을 몇 가지 이해해야 합니다. 미국은 50개 주가 모여 연방을 이룬 연방제 국가라는 점, 그리고 보통법 전통을 따르는 관습법 국가라는 점이 그렇습니다. 1791년 제정된 미국 수정헌법 10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헌법에 의하여 미국 연방에 위임되지 아니하였거나, 각 주에 금지되지 않은 권력은 각 주나 국민이 보유한다. 보통 세계 최고 권력자를 꼽으라 하면 미국 대통령을 첫 손에 꼽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미국의 국방력을 비롯한 국력과 국제무대에서 영향력을 생각하면 이런 통념을 틀렸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국내적으로 보면 미국 대통령(연방 정부)의 권력과 권한은 곳곳에서 제약을 받습니다. 대표적인 게 위에 소개한 수정헌법 10조입니다. 대통령은 물론 국내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지만, 대통령의 결정을 견제하거나 뒤집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꽤 많습니다. 같은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선거 제도만 보더라도 우리나라와 미국의 대통령제는 차이가 큰데, 가장 큰 차이는 중앙 선거관리위원회의 존재 여부일 겁니다. 우리나라는 중앙 선관위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관장하는 역할을 진두지휘합니다. 각 지방 선관위는 중앙 선관위의 산하 조직이죠. 그런데 미국은 중앙 선관위가 없습니다. 그런 조직도 없고,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대통령을 포함해 연방 정부를 구성하는 데 선거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 선거를 관장하는 건 어디까지나 주 정부의 일입니다. 주마다 있는 주무부(Department of State of the State)가 주의 사무를 총괄하는데, 주무부의 일 중에 제일 중요한 일이 선거 관리입니다. 연방 정부(미국)의 사무를 총괄하는 부처는 국무부(Department of State of the U.S.)인데, 국무부는 우리나라로 치면 외교부가 하는 일을 합니다. 미국 대선에서 표를 집계하는 방식이 다른 나라들과 다르다고 설명드린 건 선거인단 제도 때문입니다. 미국에선 538명 선거인단 과반의 표를 얻은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선거인단은 주별로 나뉘어 배정되는데, 선거인단을 누구로 어떻게 꾸릴지 정하는 원칙을 관장하는 것이 주무부, 즉 주 정부의 소관입니다. 연방 선거법 어디에도 주 정부가 선거인단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꾸려서 수도로 보내야 하는지 정해놓지 않았습니다. 그런 법을 제정하려 했어도 수정헌법 10조 위반이기 때문에 어딘가에서 막혔을 겁니다. 50개 주 대부분이 선거인단을 배정할 때 '승자독식' 방식을 따릅니다. 주별로 득표를 집계해서 한 표라도 더 많이 받은 후보가 그 주에 배정된 선거인단을 독차지하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민주당과 공화당이 각각 사전에 우리 당이 이기면 누구를 선거인단으로 꾸릴지 명단을 제출합니다. 마치 우리나라 총선의 비례대표 후보 명부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예를 들어 선거인단이 20명 배정된 주라면 민주당이 20명, 공화당이 20명을 각각 정해놓고 선거를 치러서 민주당이 이기면 민주당이 정한 20명이 주를 대표하는 선거인단이 되고, 공화당이 이기면 공화당이 제출한 선거인단 20명이 워싱턴 D.C.로 갑니다. 주마다 선거인단 명부를 주무부 웹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는 주도 있고, 그렇지 않은 주도 있습니다. 주마다 규정이 다른 경우가 너무 많아서 일괄적으로 어떻다고 설명할 수 없는 것 또한, 연방제 국가 미국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아무튼 주 정부의 권한이 막강하기 때문에 대통령을 뽑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선거인단 제도를 운영하는 것도 결국, 주 정부의 몫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미국의 사법 체계는 보통법(common law) 전통을 따릅니다. 보통법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자세히 법조문에 써넣는 대륙법 전통과 반대로 상식과 관습을 존중하고, 법조문보다 법원의 판결, 즉 판례를 중시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대륙법 전통을 따르는 우리나라 사법 체계와 비교해 보면 법조문과 규정 자체가 훨씬 느슨한데, 문제가 생기면 그때 법원에서 잘잘못을 다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주 정부가 선거인단을 어떻게 구성하는지도 법이 정하기보다 관습을 따르는 것이 미국 민주주의를 운영하는 '최선의 방식'입니다. (적어도 미국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올해 대선에서 꽤 오래 유지돼 온 현행 선거인단 배분 방식에 작은 변화가 생길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50개 주 대부분이 선거인단을 승자독식으로 배정한다고 했는데, 정확히 말하면 메인주와 네브래스카주를 뺀 48개 주가 승자독식 방식을 따릅니다. 그런데 네브래스카주가 이번 선거에서 그동안 (하원) 선거구별로 선거인단을 나눠 배정하던 방식을 버리고, 대다수 주와 마찬가지로 승자독식 방식을 채택하려 하자,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자멜 부이가 이에 관해 칼럼을 썼습니다.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정치인들이 '과거의 전통'을 들먹일 때 기억해야 할 것 네브래스카주 정부의 움직임 이면에는 올해 대선을 앞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중요한 전략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 선거 규칙을 최대한 자기한테 유리하게 바꾸고, 선거 관리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겁니다. 지난 2020년 선거에서 심판(선관위, 특히 주요 경합주 주무부)이 자신에게 불리한 판정을 잇따라 내린 것을 결정적인 패인으로 여기고 있는 트럼프는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운동장을 자기 쪽으로 기울이고 있습니다. (트럼프 측에선 자신에게 불리하게, 불공정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맞추는 일이라고 설명할 겁니다.) 아무튼 네브래스카주에서는 이변이 없는 한 공화당 후보가 표를 더 많이 받습니다. 주지사도, 선거구가 따로 없는 상원의원도 모두 공화당 출신이고, 주 정부, 주 의회도 공화당 손아귀에 있습니다. 각 주에 배정된 선거인단의 숫자는 그 주의 상원 의석 수(모든 주가 똑같이 2명)에 하원 의석 수(인구에 비례해 10년마다 재조정)를 더한 숫자와 같은데, 네브래스카주는 5명의 선거인단을 상원 의석 수에 해당하는 2명은 전체 득표 결과에 따라, 나머지 3명은 지역구별로 표를 집계해 배정했습니다. 원칙적으로 5명이 4:1 또는 3:2로 나뉠 수 있는, 승자독식 규정에 예외가 날 수 있는 방식이고, 실제로 2020년 선거에서도 조 바이든이 도시 인구가 많은 2번 지역구의 선거인단 1명을 가져갔습니다. 워런 버핏이 사는 오마하가 2번 지역구에 있습니다. 미국 정치가 양당제를 따르므로, 선거인단을 나눠 가지는 건 철저히 제로섬 게임입니다. 우리 당이 빼앗긴 선거인단은 반드시 상대 당의 표가 되고, 반대로 상대편의 표를 빼앗아 오면 우리 표가 늘어납니다. 경쟁이 치열한 선거일수록 선거인단 한 명 한 명이 아쉬운데, 제도적으로 내 선거인단을 한 명 더 확보할 수 있는 움직임을 마다할 후보는 없을 겁니다. 네브래스카주 정부 공화당 인사들의 이런 시도는 노골적으로 자기편을 밀어주는 일이라고 손가락질받기도 하지만,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철저히 합법적인 일입니다. 앞서 길게 설명한 수정헌법 10조에 보통법 전통이 이를 보장합니다. 민주당은 물론이고, 자멜 부이와 같은 진보 성향 논객들도 공화당의 '꼼수'를 도덕적으로 비난하겠지만, 선거에서 트럼프가 이긴다면 이른바 "정치적으로 모든 게 다 용서되는" 상황이 마련될 겁니다. 제도 자체의 선악을 나누기는 어렵지만... 미국 대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만한 제도적 변화도 아니고, 지엽적인 영향만 끼치고 말 수도 있는 일에 제 개인적인 의견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습니다. 원래 모든 정치 제도, 특히 선거 제도는 그 제도를 설계하고 바꾸는 데 참여한 이해관계 당사자들이 각자 정치적인 셈법에 따라 타협을 거듭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선거인단 제도가 세상에 나온 구체적인 과정은 자멜 부이가 자세히 소개했습니다.) 그보다 오늘은 좀 더 원론적인 차원의 이야기를 보태고 싶습니다. 즉, 절대적으로 선한 제도나 악한 제도는 잘 없다는 겁니다. 애초에 제도를 만들 때 이해당사자의 의견을 얼마나 충실히 반영하고 조율했느냐에 따라 제도가 정당성을 인정받으면 오래갈 것이고, 그런 제도가 상대적으로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제도를 수정하고 개정하는 이유가 악법을 발본색원하는 작업이라면, 애초에 그런 제도가 태어나게 허용한 민주주의 시스템이 성숙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선거인단 제도는 건국의 아버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 문제를 둘러싼 각자의 셈법에 여러 우연이 겹쳐 탄생하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250년 가까운 미국 역사에서 어쨌든 사라지지 않고 명맥을 유지해 왔으니, 생명력 있는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관습법 전통이 강해 한 번 뿌리내린 제도가 잘 바뀌지 않는 특징이 미국 정치에 있기도 하지만, 세부적인 내용과 조항을 주마다 무수히 바꾸면서 변하는 시대상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도 선거인단 제도가 아직도 남아 있는 비결일 수도 있습니다. 선거인단 제도는 지난 2016년에 정당성 측면에서 가장 큰 도전에 직면합니다. 미국 전체 유권자 득표와 선거인단의 표가 극적으로 갈렸기 때문입니다. 도널드 트럼프는 힐러리 클린턴보다 300만 표 가까이 전체 표를 덜 받고도 주요 경합주에서 아슬아슬하게 승리하고 선거인단을 독차지한 제도 덕분에 선거인단 싸움에선 클린턴을 넉넉히 따돌렸습니다. 과연 선거인단이 표심을 제대로 반영하는 게 맞냐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지만, 그런 비판은 "지고 나서 규칙 탓한다"는 반론을 넘지 못하고, 선거인단 제도는 계속 살아남았습니다. 선거인단 제도의 정당성을 둘러싼 논쟁은 지난 2016년의 사례가 그랬듯 선거를 치른 뒤에 진 쪽에서 문제를 제기하면 이긴 쪽이 이를 묵살하는 방식으로 흐를 가능성이 큽니다. 근본적으로 제도가 바뀔 가능성은 특히 미국에선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말입니다. 그보다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도널드 트럼프가 정치 제도 전반의 허점을 파고들어 이를 악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트럼프는 정치에 입문한 뒤 곧잘 관행을 무시하고 철저히 자신의 이익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면 "부패한 기득권이 나를 시기하고 질투해서 견제하는 것"이라고 일축했죠. 그러나 그 정도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선거 절차에 관한 각종 불문율을 어기는 데 이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트럼프는 이번에 재선에 나서며 각 주무부 주요 인사와 선거 관리 위원들을 최대한 자기편 사람들로 채우는 데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그동안은 아무리 치열한 선거에서도 한쪽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선거 관리를 독식하려고 든 경우는 없었습니다. 2024년 미국 정치를 요약하면, 관습법 전통을 따르는 나라에서 관습을 일방적으로 무시해 버리는 권력자를 견제할 방도가 없어 난처해진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트럼프는 몇몇 불문율을 어기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정법을 어긴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아직 판결이 나기 전이지만, 사법 절차를 전부 다 자신을 향한 마녀사냥으로 몰아세우며, 지지자들을 향해 판사를 공격해 달라고 "좌표를 찍는" 트럼프는 선거에서 승리해도 패자에게 정치 보복을 하지 않는다는 미국 정치의 또 다른 불문율을 대놓고 어기는 중이기도 합니다. 제도 자체의 선악을 나누기는 어렵다고 하지만, 불문율과 관습이 다 무너지고 나면 오랫동안 유지돼 온 제도가 정당성을 잃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면 남는 건 유례를 찾기 힘든 정치적인 혼란과 불확실성일 겁니다.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로스 더우댓(Ross Douthat)은 지난해 말 대한민국은 사라지고 있는가?라는 칼럼을 쓴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입니다. 제목만으로도 당연히 한국에서 큰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던 글인데, 많은 선진국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저출생 경향이 유난히 두드러지는 나라가 한국이다 보니, 이를 소재로 삼아 글을 썼던 거죠. 원래는 저출생이나 육아, 가족에 관한 주제보다 주로 종교와 철학에 관한 주제로 글을 써온 더우댓은 2009년 보수 논객이던 빌 크리스톨의 자리를 이어받아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기명 필진에 합류했습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수정란도 생명체이므로, 임신 중절을 금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여러 차례 글로 쓴 적 있는 더우댓은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중에는 보수적인 성향으로 분류됩니다. 저출생 현상이 서구 사회를 비롯한 많은 선진국에서 나타나다 보니, 기저에 자리한 문화적, 구조적인 원인을 분석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글이 종종 올라오는데, 지난 5일에 더우댓이 새로 칼럼을 한 편 썼습니다. 그보다 나흘 전에 뉴욕타임스가 이탈리아 북부의 모범 사례를 소개하며 쓴 기사를 소재로 삼아 쓴 칼럼입니다.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스마트폰을 저출생 극복에 활용하자는 역발상, 그거 말이 되나요? 모범 사례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과 함께 (전국 평균보다) 높은 출산율로 평가하는 성공이 정책 덕분이라고 섣불리 예단하거나 확대 해석해선 안 되는 점을 두루 짚은 더우댓은 개인적인 견해임을 전제로 스마트폰 시대, 좀 더 넓게 보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화면에 파묻혀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종의 풍속을 문제로 꼽습니다. 스마트폰이라는 들고 다니기 편한 기기, 내 관심을 얻고 나를 플랫폼에 붙들어 놓으려는 소셜미디어나 많은 콘텐츠들, 그 기저에 있는 추천 알고리듬까지 분명 하나하나 문제가 많아 보이는 요소이긴 하지만, 사실 저출생의 원인이 스마트폰이라고 콕 집을 만큼 인과관계가 뚜렷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더우댓도 사견임을 전제하지 않았을까 싶고요. 스마트폰과 저출생 사이에 인과적인 연결 고리가 뚜렷하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지, 오늘날 우리의 스마트폰 사용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스마트폰의 문제를 지적한 조너선 하이트의 책과 연구는 얼마 전에 소개한 칼럼에서도 언급됐습니다. 자녀를 과잉보호하려는 완벽주의 성향의 X세대 부모들의 교육관에 소셜미디어를 통해 또래 집단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게 되는 덫의 굴레에 빠진 10대 청소년의 상황이 겹친 결과, 10대 청소년의 정신건강이 급격히 나빠졌고, 특히 여성 청소년들의 자살률이 급증했습니다. 하이트는 더우댓이 저출생과 스마트폰 사이에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고 주장한 것보다 몇 배 더 확신에 찬 어조로 미국 청소년들의 정신건강이 악화한 데는 소셜미디어의 책임이 매우 크다고 단언합니다.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가 사람들을 서로 더 많이 연결해 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화면 밖으로 몰아내 더 외롭게 만들었다는 지적을 새겨 들어야 합니다. 결국 문화를 바꾸지 못한다면 도루묵 스마트폰에 중독된 풍속도 결국은 아이를 낳고 기를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는 문화의 단면일 수 있습니다. 저출생 대책으로 세운 정책이 잘못됐거나 부족해서가 아니라, 기저의 문화 전반이 문제의 원인일 거라는 더우댓의 지적과 통찰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아무리 좋은 정책을 가져와서 젊은 부부 통장에 돈을 넣어줘도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돈이 없어서 아이를 안 낳거나 못 낳는다는 분석은 기껏해야 절반만 맞고, 나머지 절반은 틀린 이야기입니다. 저출생이 심각한 문제라는 데 여론이 대체로 동의하기 때문에 예산을 확보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관건은 이 예산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쓰느냐입니다. 그러려면 당장 시급한 지원도 물론 해야겠지만, 구조적인, 문화적인 걸림돌을 치우는 데도 돈을 잘 써야 합니다. 구체적인 걸림돌은 나라마다, 사회적으로, 문화권마다, 또 시대에 따라 다를 겁니다. 젊은 부부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출산과 육아의 과정을 면밀히 따라가 보기만 해도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기업이 제품이나 서비스를 새로 구상할 때 이를 사용할 고객이 되어 물건을 써보고 서비스를 이용해 보면서 불편한 점, 개선해야 할 점을 찾아내는 것처럼 정부도 탁상공론에 그치지 않는 현실적인, 실질적인 정책을 세워야 합니다.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일도 훨씬 더디고, 어렵지만 중요합니다. 위의 문단에서 출산과 육아의 주체를 저도 모르게 "젊은 부부"로 한정했는데, 젊은 사람만 아이를 낳는 것도 아니고, 결혼한 부부가 아니면 아이를 낳지 말라는 법도 없는데도 그렇게 쓴 건 무의식 중에 드러난 제 편견의 발로입니다. '정상적인 부부'가 아니면 출산과 육아에 도전하는 걸 장려하지 않는 사회는 그 자체로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는 데 걸림돌일 수 있습니다. 한 사회가 아이를 낳아 키우기 좋은 사회여야 하고, 아이를 기르고 싶은 환경이 마련돼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예산을 쏟아부어 여기저기 지원을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아이를 반겨주고 함께 키워주는 사회 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예산은 허투루 쓰일 것이고, 모든 게 도루묵이 되고 말 겁니다. 다양한 이유로 파괴되고 파편화된 공동체를 복원하는 데 예산을 쓰고, 육아의 책임을 부모에게만 맡길 게 아니라 마을이, 사회가, 정부가 뒤를 튼튼히 받쳐줘야 합니다. 돈도 돈이지만, 제도적으로 육아의 짐을 나눠서 지고, 문화적으로도 아이들을 배제하지 않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합니다. 총선 의제에 포함되지 못해 유감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건 어디까지나 오늘의 칼럼을 보고 떠올린 제 의견입니다. 누구나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열린 사회를 지향하는 민주주의 사회라면 서로 견해가 다른 이들이 치열하게 토론하고 생각을 조율해 가며 자원을 배분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를 위해 존재하는 대표적인 제도가 선거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지난 10일 대한민국은 총선을 통해 국회의원 300명을 새로 뽑았습니다. 아쉬운 건 한국에 대해 한국인보다 잘 알지 못하는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도 걱정하며 글의 소재로 쓴 한국 사회의 저출생 문제가 이번 총선 의제에선 사실상 배제됐다는 점입니다. 유권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정당들이 우리 사회의 인식과 문화를 어떻게 바꿔서 심각한 저출생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비전을 내놓고 경쟁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을까요? 물론 현실적인 제약이 한둘이 아니었을 겁니다. 정치인, 정당인으로서 선거를 치러보지 않고서는 짐작하기 어려운 고충도 많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또 다음 선거까지 기다리기엔, 그리고 아마도 다음번에도 또 이 문제보다 훨씬 덜 중요한 정쟁에 매몰돼 기회를 놓치기엔 한국 사회의 저출생 문제는 너무 심각합니다. 칼럼에서 소개한 기사에 사례로 등장한 이탈리아는 유럽연합 국가들 가운데 출산율이 낮아 국가 차원에서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런 이탈리아의 2021년 합계출산율이 1.25입니다. 우리는 이미 늦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것부터 바꿔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올해는 전 세계 수많은 나라에서 다양한 층위의 선거가 치러지는 해입니다. 우리나라도 총선을 치르고, 스브스프리미엄을 통해 자주 관련 소식을 전해드린 미국 대선도 오는 11월입니다. 오늘날 여러 민주주의 국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정치적 양극화일 겁니다. 나라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갈수록 상대방을 향한 비판의 수위가 높아지고, 지금 우리가 겪는 문제의 원흉이 오직 상대편에 있다며 손가락질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비판이 점점 격해지다 못해 "나는 잘못한 게 전혀 없고, 모든 문제는 저쪽 편의 잘못"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하다 보니, 서로 건설적인 토론은커녕 기본적인 소통도 잘 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바이든과 트럼프의 재대결이 확정된 올해 미국 대선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겁니다. 두 후보를 지지하는 이들이 과연 동의할 수 있는 원칙이나 전제가 얼마나 있을지 궁금할 만큼 이번 대선은 "지면 끝장"인 승부,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이겨야만 하는" 최후의 결전이 됐습니다. 선거는 냉엄한 승부입니다. 아무리 원대한 뜻을 품은 정치인이라도 선출직에 도전한 이상 유권자의 선택을 받아야 하고, 선택받지 못하면 꿈을 펼칠 기회조차 얻지 못합니다. 상대방을 비판하고, 내가 상대방보다 나은 점을 드러내는 것 자체를 문제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선거에 나선 두 후보, 두 정당 가운데 한쪽이 정말 사라져야 할 문제의 원흉이고, 다른 쪽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고결한 존재인 경우가 실제로 얼마나 있을까요? 그런 경우는 정말 흔치 않다는 걸 다른 누구보다 유권자들이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상대방을 비판하는 잣대를 우리 편에, 나한테 들이댔을 때 떳떳하지 못한 경우를 보면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냉철한 자기 객관화는 오늘날 정치에서 정말 보기 드문 현상이 됐습니다.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남 비판하기 전에 나부터 돌아보는 일이 가능할까? 정치에서. 미국을 비롯해 이민자들이 많이 모여 사는 서구 사회에서는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가 낯설지 않습니다. 관련한 논의의 역사도 깊죠. 주로 인종, (이민 1, 2세대인 경우) 출신 국가에 따라 비슷한 경험을 하며 정치적인 가치관이 형성되는 만큼 같은 인종이나 같은 언어를 쓰는 이민자 집단 안에서는 지지하는 정치인과 정당이 비슷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다인종 국가라고 보기 어려운 한국에선 정체성 정치가 다소 낯선 개념입니다. 지역주의와 일견 비슷한 면이 있지만, 미국의 인종, 출신 국가, 지역 등에 비하면 그 차이가 훨씬 작습니다. 인구통계학적 정체성을 기준으로 한국 정치를 바라볼 때 적용할 만한 기준은 세대와 성별 정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개인의 이념이나 신념에 따른 정치적 지향을 정체성 정치가 덮어버릴 만큼 미국 사회에서 정체성 정치는 강력한 지표입니다. 예를 들어 독실한 기독교 혹은 가톨릭 신자로 성소수자의 권리나 여성의 임신중절권을 현재 민주당의 진보 인사들이 주장하는 정도로 보장해주는 데 동의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라도 흑인과 라티노 남성 유권자 사이에서는 백인 남성 유권자에 비해 민주당 지지율이 높습니다. 정체성이 이념을 덮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체성이 이념에 앞서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은 같은 집단 안에서도 나타납니다. 흑인들은 1960년대 이후 민주당 지지율이 압도적으로 높은데, 누군가 보는 눈이, 그것도 나와 같은 흑인이 지켜보고 있을 땐 민주당을 꼭 지지해야 할 것만 같은 압력을 느낀다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흑인들에게 흑인 면접관이 직접 어느 정당을 지지하는지 설문조사를 하면 95%가 민주당이라는 답이 나오지만, 온라인으로 조사하거나 흑인 아닌 면접관이 대면으로 조사하면 민주당을 지지한다고 답하는 비율이 85%로 낮아졌습니다. 한국 축구팬들 사이에서 박지성 선수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할 땐 "제한맨", 손흥민 선수가 토트넘으로 이적한 뒤엔 "제한토"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제발 한국인이라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혹은 토트넘)를 응원하자"는 말의 준말이었죠. 개인적으로는 응원하는 클럽팀을 고르는 데 국적이 굳이 영향을 미쳐야 할까 생각이 들지만, 어쨌든 응원하는 스포츠팀을 고르는 건 개인의 자유라 생각합니다. 다만 정치는 그래선 안 된다고 지적한 닐 그로스 교수의 주장에 저도 동의합니다. 정치 성향은 정체성에 따라 공식처럼 정해지는 것보다 개인이 스스로 책임의식을 가지고 숙고한 끝에 만들어가는 편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그런 책임 있는 판단이 모여 선거의 향방이 결정될 때 정치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책임 있는 판단이란 남을 욕하기 전에 나부터 먼저 돌아보는 자세에서 비롯됩니다. 점점 더 평행우주 가까워지는 미국의 양극화된 정치 미국의 정치적 양극화는 한국보다 훨씬 심각해 보입니다. 특히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서 기존 정치권과의 갈등이 잦아졌고, 2020년 자신이 패배한 대선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의사당 테러를 사실상 방조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뒤에는 양측 지지자들이 서로 반감을 갖고 적대시하는 수준을 넘어 아예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과 과정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아시다시피 땅덩이도 넓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 동선이 좀처럼 겹치지 않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이를 평생 마주치지 않는 경우도 여전히 많고, 각기 펼쳐진 평행우주에서 평생 살다가 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미국에 비하면 한국의 정치적인 견해 차이는 미미해 보이는 수준입니다. 물론 한국에서도 정치적인 가치관이 달라 가족이나 친구와 싸우고 서먹해지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한국에선 그렇게 생각이 다른 사람과 애초에 부딪치고 엮일 일이 벌어지곤 한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에선 흔치 않은 일입니다. 그나마 '나와 의견이 다를 뿐 틀리지 않았음'을 헤아려볼 수 있는 기회는 한국이 훨씬 더 많습니다. 미국 정치에 관한 글을 자주 쓰다 보니, 민주주의와 민주주의 선거에 관해 했던 이야기를 자꾸 반복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 특히 선거가 "지면 끝장"인 승부, 소위 '멸망전'이 되어선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한 번 더 강조하며 글을 맺으려 합니다. 선거에서 이기는 건 상대편을 밟고 올라가는 것도,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대신 나와 마찬가지로 나라를 사랑하고, 공동체를 위하는 마음을 지닌 동료 시민이 생각한 비전과 내가 생각하는 길 사이에서 조화와 공존을 모색하는 일입니다. 제로섬 게임이 아닙니다. 다 같이 좋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권력을 위임하는 민주적인 절차인 선거를 치르는 유권자의 마음가짐에 달렸습니다. 나의 고상한 의견은 언제나 옳고, 상대방의 의견은 늘 틀렸다고 치부하는 한 민주적인 토론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토론이 없는 선거는 민주적일 수 없습니다. 정치적 양극화는 우려스럽지만, 미국을 한국과 비교했을 때 부러운 전통 한 가지는 평화적인 정권 교체의 역사가 아주 길다는 점입니다. 단지 역사가 긴 데 그치지 않고, 그래서인지 정치 보복의 문화가 거의 없습니다. 선거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인 상대방 후보라도 정적(政敵)으로 부르는 게 어색하기도 합니다. 정적이라고 하면 어딘가 제거해야 할 대상처럼 느껴지는데, 미국에서 선거에서 진다고 제거될 걱정을 하지는 않아도 됩니다. 실제로 져도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요. (물론 트럼프는 이번에도 관행을 깡그리 무시하고, 자신이 당선되면 곧바로 자신을 "마녀사냥"한 세력을 철저히 응징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반면 한국은 미국보다 정치적 양극화가 덜한데도 여전히 정권이 바뀌면 전 정권에 대한 보복이 우려되곤 합니다. 정치 보복을 어느 정도 막고 견제해 줄 수 있는 보루 가운데 하나가 유권자들의 각성 아닐까요? 나와 상대편의 견해 차이라는 것이 크게 보면 다르지 않은 목표를 향해 가는 접근법만 달랐던 것이라면, 내가 권력을 쥐었다고 상대방을 제거하거나 지워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민주 시민에게 선거는 나와 다른 생각을 조율해 보고, 내 의견을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게 잘 다듬어서 꺼내보고, 필요하면 고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억지로 토론을 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번 기회를 살려보는 건 어떨까요? 다른 거창한 담론과 이론은 잠시 접어두고 딱 하나만 전제하고 대화를 나눠봅시다. 나와 지지하는 정당이 다른 상대방도 나처럼 나라를 사랑하고, 주변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이 가득한 사람이라는 전제 말입니다.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인공지능(AI), 범용 인공지능(AGI) 같은 단어가 더는 낯설지 않은 용어가 된 요즘입니다. 인류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강력하고 새로운 기술인 만큼 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논의하고 대비해야 할 것들도 많습니다. 그 가운데 우선순위로 꼽히는 것이 일자리가 어떻게 바뀔지, 인간의 노동은 얼마만큼의 가치를 인정받을지일 겁니다. 인공지능이 생산성과 인간의 노동, 일자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두고는 모든 종류의 예측이 쏟아져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간이 기계에 일자리를 빼앗겨 노동시장의 주도권을 잃고 스스로 부양하지 못할 만큼 궁지로 몰리게 되리라는 전망도 있고, 반대로 그런 어두운 전망은 대개 과장됐으며, 기술의 발달로 높아진 생산성을 토대로 인류는 더 큰 번영을 누리게 될 거란 주장도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자리를 모조리 앗아가리라는 디스토피아를 점치는 말과 글은 우리의 두려움을 자극하는 만큼 많은 관심을 받곤 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의 등장과 기술의 발전은 우리의 일자리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가지 요소 가운데 하나일 뿐 기술 발전에 따라 반드시 정해진 결과가 있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나치게 비관적인 전망은 정확도가 높지 않아 보입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피터 코이가 인공지능 시대의 도래가 지금의 일자리가 모두 사라지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한 경제학자들의 의견을 모아 정리했습니다.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AI는 우리 일자리를 다 빼앗아 갈까? 경제학자들 의견은 이렇다 노아 스미스는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일을 더 잘하는 분야가 많아지더라도 인간의 모든 노동이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며, 그 이유로 '비교우위' 논리를 듭니다.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아주 뛰어나지 않은 분야에선 굳이 인간의 노동을 기계로 대체하고 자동화하지 않을 거란 전망입니다. 데이비드 오터, 대런 아세모글루, 사이먼 존슨이 공동 소장을 맡고 있는 MIT 미래의 일자리 연구소는 기술의 발전이 인류의 일자리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 왔는데, 이들도 미래를 대체로 낙관적으로 봅니다. (이에 관해서는 팟캐스트 아메리카노에서도 자세히 다룬 바 있습니다.) 이들이 가장 경계하는 건 일종의 '기술 결정론'입니다. 흔히 기술의 발전 정도에 따라 미래가 정해진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현실에선 우리가 제도를 어떻게 만들고 운용하느냐에 따라 기술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MIT 미래의 일자리 보고서는 단점을 줄이고, 장점을 극대화한 방향으로 기술 발전을 유도한다면 인간과 기계(인공지능)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고 내다봅니다. 지금 있는 일자리 가운데 일부는 줄어들거나 사라지겠지만, 동시에 더 늘어나거나 새로 생기는 일자리도 있을 수 있다는 거죠. 사람과 기계가 같이 운전대를 잡고 서로 도와주며 앞으로 나아가는 '코파일럿'이 활성화된 미래는 낙관적으로 볼 이유가 많습니다. 기술 혁신만큼 중요한 제도 혁신 요즘 대세가 된 범용 인공지능 기술만 봐도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닙니다. 세상에 그런 식으로 발전하는 기술은 없습니다. 기술의 발전, 채택, 접목, 보완, 다시 발전에 이르는 모든 과정과 그 속도는 사실 우리가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의 산물이며, 그래서 정책과 규제가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습니다. 원치 않는 결과를 피할 수 있게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일도, 많은 이에게 이로운 결과를 위해 인센티브를 적절히 설정하는 일도 그렇고,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지점이 많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인간과 인공지능이 공존하는 코파일럿이 인류 전체에 이로운 방향으로 운영되기 위해 갖춰야 할 조건은 뭐가 있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를 정리해 보자면 기술 혁신 못지않게 중요한 제도를 혁신하는 일이 될 겁니다. 인공지능 기술이 곳곳에 접목된 노동, 생산 현장에 20세기의 산업 구조에 맞춰 짜놓은 지금의 제도를 그대로 방치해 두면 노동 생산성은 떨어지고, 불평등이 심화할 게 불 보듯 뻔합니다. 새로 생겨나는 기회와 혜택을 극소수가 독점하고, 대다수 노동자는 기회도 얻어보지 못한 채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시나리오를 원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겁니다. 대런 아세모글루 교수가 브루킹스 연구소를 통해 펴낸 짧은 보고서에서 좋은 예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세제는 대체로 로봇을 도입하고 공정 자동화를 추진하는 결정에 많은 혜택을 줍니다. 반대로 노동자를 고용해 생산하는 데는 세금을 훨씬 많이 매깁니다. 지금과 같이 세율이 정해진 데는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자동화를 권장하는 세제가 노동자들에게 괜찮은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로봇이나 기계를 도입해 공정을 자동화하는 투자에 세금을 더 매겨서 세수의 일부를 노동자들의 실업 급여나 재취업에 필요한 교육 예산으로 쓰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생산성의 향상과 경제 성장의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지 못한다면 사회적으로 치러야 할 비용이 무척 클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적, 지역적 분열과 갈등이 커지고, 제도를 향한 불신도 높아질 것이며, 나아가 혁신 자체를 두려워하고 거부하는 성향까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름만 요란할 뿐 혁신이 결국 내 밥그릇이 위험해지는 변화라면 누구나 거부감, 나아가 적대감을 드러낼 겁니다. 마찬가지로 기술이 발전해 봤자 부자만 더 부유해지고 서민들의 삶은 피폐해진다는 인식이 팽배하면, 기술 발전을 제도적으로 지원하고 혜택을 분배하는 논의조차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회는 결국 변화에 무뎌지고, 뒤처질 가능성이 큽니다. 노동자에게 충분한 경제적 보호 장치를 제공하면서 기술 혁신을 유도하는 일은 못 잡을 두 마리 토끼가 아닙니다. 새로운 기술이 접목됐을 때 필요한 일자리에 어울리는 기술을 배우고 익히도록 지원해야 합니다. 기존 일자리가 사라졌을 때 생계를 걱정하지 않으면서 필요한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도덕적 해이를 부를 수 있는 무분별한 지원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자동화된 세상은 한동안 오지 않으리란 현실을 고려했을 때 새로운 기술이 있어도 이를 함께 조종하고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기술은 무용지물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일자리에 어울리는 노동자를 교육하는 것이 제도 혁신의 핵심입니다. 기술 개발에 어울리는 제도를 갖추고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혁신이자 성공적인 코파일럿을 위한 중요한 전제입니다.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지난 3월 초, 엿새간 아르헨티나에 다녀왔습니다. 다소 촉박하게 일정이 잡혀서 처음 가보는 나라, 지역임에도 미리 충분히 공부하고 준비하지 못한 채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사실 열정적인 축구팬인 저는 "현재 월드컵 챔피언"인 나라에 가서 "여기가 메시의 나라인가요?"라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일이었습니다. 예상대로, 또 알려진 대로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 곳곳은 메시와 마라도나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지금의 아르헨티나를 이해하기 위해 꼭 알고 넘어가야 한다고 귀띔해 준 인물은 따로 있었습니다. 원래 알던 아르헨티나 친구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새로 사귄 친구도 입을 모아 가리킨 인물은 바로 지난해 말 당선된 신임 대통령 하비에르 밀레이였습니다. 부랴부랴 밀레이 대통령에 관해, 또 정치인으로서는 이력이 전무한 괴짜를 당선시킨 아르헨티나의 상황에 관해 찾아봤습니다. 물론 기사를 읽고, 역사를 찾아보는 것도 도움이 됐지만, 마침 그 나라에 머무니 짧지만 겉핥기라도 그곳에서의 일상을 관찰해 보기로 했습니다. 환전은 '작은 나무'를 찾아라? 대단히 주의 깊게 관찰할 필요도 없이 독특한 점들이 이내 눈에 띄었습니다. 아르헨티나를 여행해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여행자나 방문객의 첫 과제 가운데 하나인 현지 화폐로 돈을 바꾸는 일부터 쉽지 않은 나라가 바로 아르헨티나입니다. 환전이 어렵고 복잡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환율이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다양하다는 게 환율이 그냥 들쭉날쭉 널을 뛴다는 말이 아닙니다. 기준 환율이 있고, 암시장에서 통용되는 환율이 따로 있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아르헨티나 안에서도 외국인 여행객에게 적용하는 환율과 농업에 종사하는 수출업자, 공산품을 수입하는 기업, 외환 업무를 하는 금융기관에 적용하는 환율이 제각각 다 다릅니다. 그래서 "1달러에 몇 페소인가요?"라는 질문에 대한 정답은 "당신이 뭐 하는 사람이냐에 따라 다르다오"가 됩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거야 원래 환율의 속성이니 그렇다 쳐도, 애초에 한 통화의 환율이 여러 가지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는 한참 걸렸습니다. 아니, 사실 아직도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환율이 이렇게 불안정하고 복잡하게 운영되는 건 만성적인 인플레이션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플레이션의 원인을 찾아보면, 이미 오래전에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커진 막대한 정부 부채 문제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높은 정부 부채에 세금은 잘 안 걷히니 자연히 재정 적자는 심각한 수준입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그때마다 손쉽게 돈을 더 찍어내는 미봉책을 택했습니다. 유통되는 돈이 늘어나니, 인플레이션은 더 심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됐습니다. 재정 정책으로 해법을 찾지 못한 아르헨티나 정부는 종종 통화 정책에 무리하게 개입했고, 그때마다 문제가 해결은커녕 더 심각해지곤 했습니다. 대통령궁인 분홍빛 저택(casa rosada) 바로 길 건너에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이 있는데, 마치 중앙은행의 독립, 자율적인 통화 정책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걸 건물 배치로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91년에 페소화와 미국 달러화의 가치를 1:1 등가로 고정한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한 페그제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달러화가 강세를 보일 때는 한동안 아르헨티나 경제도 호황을 누리는 듯했지만, 아르헨티나 경제 상황과 전혀 무관한 이유로 달러화 가치가 하락하자 아르헨티나 경제는 금세 휘청이고 맙니다. 유통되는 페소화 전체를 바꿔줄 만한 달러화를 충분히 보유하지 않은 채 섣불리 페그제를 시행한 아르헨티나 정부와 "통화위원회"의 판단도 문제였지만, 재정 정책의 실패를 통화정책으로 풀어보려는 '꼼수'는 처음부터 성공하기 어려운 억지였습니다. 결국, 정부 부채를 줄이지 못한 아르헨티나에서 인플레이션은 경기 변동에 상관없이 늘 사라지지 않는 상수가 됐습니다. 마치 감기를 달고 사는 환자처럼 말이죠. 빠르게 하락하는 페소화 가치를 공식 환율이 따라잡지 못하자, 외환 시장은 둘로 나뉘어 이원화됩니다. 특히 페그제가 처참하게 실패한 뒤 2001년 채무 불이행을 선언한 아르헨티나 정부가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은행 잔고에 맡겨놓았던 미국 달러를 강제로 페소화로 바꿔버린 사건이 일어난 뒤에는 아르헨티나 국민의 제도권 금융을 향한 신뢰마저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울고 싶은데 뺨을 맞은 것처럼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그때부터 달러를 절대 은행에 맡기지 않습니다. 대신 페소화가 생기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달러로 바꿔 집집이 미국 달러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집에 쌓아놓은 미국 달러가 2,500억 달러가 넘는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암시장에서 사고파는 달러를 푸른 달러(Dólar blue)라고 합니다. 어원에 관해선 의견이 분분하지만, 아무튼 여행자들이 좋은 환율로 페소화를 환전하는 방법도 암시장을 통하는 겁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를 걷다 보면, 스페인어(cambio)나 영어로(change money?) 관광객들에게 접근하는 환전상들을 어렵잖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돈을 바꿀 수도 있고, 아르헨티나 친구가 있으면 친구에게 부탁하면 일사천리로 환전해 줄 겁니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가족, 친지, 친구, 최소한 지인의 지인 정도까지 살펴보면 반드시 환전상을 한 명쯤은 알고 있습니다. 제가 묵은 에어비앤비 관리인도 환전이 필요하면 환전상을 연결해 주겠다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푸른 달러를 받고 페소화를 내주는 환전상을 스페인어로 아르볼리토스(arbolitos)라고 합니다. '작은 나무들'이라는 뜻인데, 몸에 두르듯 입은 긴 코트를 열면 수많은 안주머니에 돈이 나뭇가지에 붙은 잎처럼 주렁주렁 달려있다고 해서 붙은 별명입니다. 암시장을 통한다는 게 엄밀히 따지면 불법이지만, 아르헨티나 정부도 이를 묵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2,500억 달러에 가까운 돈을 불법으로 규정해 버리면, 가뜩이나 돈이 돌지 않는 경제는 순식간에 파탄 나고 말 겁니다. 제가 방문했던 시기 푸른 달러 환율은 1달러에 1,000페소였습니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고지하는 공식 환율은 1달러에 850페소 정도였고, 여행객에게는 환율을 우대해서 1달러에 910페소 정도였습니다. 해외 신용카드를 쓰면 여행객 환율이 적용됐습니다. 친구에게 600달러를 바꾸고 싶다고 미리 부탁했더니, 자기가 아르볼리토스한테 페소를 받아서 가져다주겠다고 했습니다. 봉투에 600달러(100달러 6장)를 넣어 건넸는데, 친구는 제게 장볼 때나 쓸 법한 장바구니에 페소화를 담아 왔습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큰 지폐 단위가 1천 페소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1천 페소 100장을 고무줄로 묶은 돈뭉치 여섯 다발이 60만 페소였습니다. 30여 년 전에 1:1로 교환되던 화폐 가치가 1/1000로 하락한 셈입니다.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1990년대 초반 원/달러 환율을 찾아보니, 1달러에 약 700원이었습니다. 페소화를 가져다준 아르헨티나 친구는 미국에서 유학을 하면서 저와 알게 된 친구인데, 미국으로 유학 나온 6년 전만 해도 환율이 대략 1달러에 30페소 정도였다고 합니다. 기록적인 인플레이션 탓에 아르헨티나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몇 가지 있습니다. 슈퍼마켓이나 가게 진열대에 물건은 있는데, 가격표가 붙어있지 않은 곳이 많습니다. 식당에 가도 메뉴판에 음식 이름은 쓰여 있는데, 가격이 안 쓰여 있는 곳도 많았습니다. 오늘 가격을 내일도 유지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매번 가격표를 새로 붙이거나 인쇄하기 번거로우니, 그냥 안 써둔 겁니다. 마음에 드는 메뉴가 얼마나 하는지 물어봤더니, 오늘 일하기 전에 새로 고지받은 가격이 있다며, 두꺼운 수첩을 한참 넘기더니 가격을 일러줬습니다.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전기톱 들고 나왔던 아르헨티나의 '트럼프'? 취임 100일 지났는데 어떻게 됐을까 아르헨티나 작가인 우키 고니가 뉴욕타임스에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의 첫 100일을 평가하는 칼럼을 썼습니다. 이런저런 방법을 다 써봤지만, 만성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으니, 더 극단적인 방법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괴짜 같은 정치인에게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기회를 줬습니다. 다만 1차 투표에선 29.99%를 득표해 2위를 차지했고, 결선 투표에서 페론당의 세르히오 마사 후보를 56:44로 꺾었으니,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칼럼이 대체로 밀레이 후보의 문제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으므로, 오늘은 밀레이 후보를 위한 변명을 몇 가지 해보려 합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교통 체증이 심한데, 한 번은 도시를 가로지르는 택시를 1시간 넘게 타게 돼서, 그때 택시기사와 나눈 이야기를 참고했습니다. 제가 아는 미국에 사는 아르헨티나 친구들은 거의 빠짐없이 밀레이 대통령을 비판하거나 적극적으로 싫어했습니다. 극우 성향에 괴짜에 인종 차별, 성 차별 등 21세기에 해서는 안 될 요소를 두루 갖춘 인물이라는 거죠. 그런데 이 택시기사는 축구 얘기, 부에노스아이레스 명소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주제가 정치로 넘어가자 먼저 밀레이 대통령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페론당 사람들 이제 안 믿어요. 다 거짓말쟁이예요. 옆 나라 좌파 지도자들, 사회주의자들이랑 결국 다 같아요. 약속을 하나도 안 지키죠. 밀레이가 다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 문제가 뭔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밀레이를 뽑았어요. 뭐라도 해내겠다 싶어서요." 사실 천정부지로 치솟은 물가를 어떻게 잡느냐가 밀레이 정권의 존폐를 가를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밀레이 대통령은 지금의 인플레이션에 책임이 크지 않습니다. 책임 소재를 따지자면, 몇십 년째 이어진 포퓰리즘 정책을 그대로 답습해 선거 전에는 돈을 마구 풀어 온갖 보조금을 지급해 온 전임 페론당에 더 큰 책임을 물어야 할 겁니다. 그러나 그런 페론당이 대통령 선거에서는 졌지만, 여전히 의회에서는 다수당입니다. 정치적으로 아웃사이더였던 밀레이는 당을 급조해 선거를 치렀는데, 개인의 카리스마로 승부를 볼 수 있는 대선에선 이겼지만, 더 많은 인물과 조직이 필요한 의회 선거에서는 불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회가 사사건건 밀레이 대통령의 정책을 가로막는 것도 문제지만, 어쩌면 더 큰 장애물은 포퓰리즘에 너무 익숙해져서 모든 공공재와 사회적 자본을 공짜로 누려야 한다고 믿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심리일지도 모릅니다. 밀레이 대통령의 정책에 날선 비판을 하던 아르헨티나 친구도 제도 곳곳에 문제가 많다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면서 예로 든 게 전기세, 수도세 등 공공요금이었습니다. 집집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 아르헨티나 사람은 전기를 아끼지 않습니다. 전기를 펑펑 써도 전기세가 너무 싸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방 두 개 딸린 아파트에 여름철에 하루 종일 에어컨을 방마다 틀어놓아도 한 달 전기세가 4천 페소, 약 5천 원이라고 합니다. 수도세는 1천 페소입니다. 싸도 너무 싸죠. 각종 공과금과 세금은 원래 잘 걷히지 않는데, 선거철만 되면 더 줄어드니, 사람들은 아껴 쓸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휴가 갈 때 깜빡하고 에어컨을 끄지 않고 며칠씩 집을 비우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대중교통도 너무 쌉니다. 버스는 110페소, 지하철도 125페소였습니다. 교육은 대학교까지 무상교육입니다. 병원도 거의 공짜입니다. 그 많은 돈을 어디서 충당할까요? 모자라면 정부가 더 찍어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이 모든 것이 포퓰리즘의 잔재이고, 페론주의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올해가 후안 페론 전 대통령 사망 50주년인데, 페론의 유산은 여전히 아르헨티나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밀레이는 아르헨티나의 트럼프인가? 이 질문에는 우키 고니가 칼럼을 쓴 뒤 얼마 뒤에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월러스웰스가 쓴 칼럼의 몇몇 구절을 인용해 답을 대신하려 합니다. 우키 고니의 칼럼에도 설명돼 있지만, 밀레이와 트럼프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밀레이는 트럼프에 비해 경제적으로는 정부의 개입을 더 싫어하는 우파이며, 정치적으로는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 자유주의(liberalism)와 구분해 이 글에서 자유지상주의로 썼습니다) 사조를 신봉하는 사람답게 극우 논리를 거리낌 없이 가져옵니다. 다만 아르헨티나와 미국의 처지가 다른 점이 밀레이와 트럼프의 차이를 낳은 면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밀레이가 신케인즈주의자와 나치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며, 사민주의자, 파시스트, 진보주의자, 공산주의자, 포퓰리스트, 세계주의자 등 사회를 통제하려는 목표를 지닌 모든 정치가는 본질적으로 같다고 비판하는 대목에서는 밀레이와 트럼프의 생각이 같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밀레이 기준에서 보면 정부는 무조건 작은 것이 좋습니다. 밀레이는 이 점을 수없이 강조합니다. 최근 문화전쟁에 관한 글을 많이 쓴 소랍 아라미도 "밀레이는 미국 포퓰리스트와 선진국 전역의 아날로그 운동이 주장하는 거의 모든 것을 거부한다"고 말했습니다. 즉, 트럼프는 세계화의 패배자들을 어루만지며 보호주의 무역을 약속해 이들의 표를 얻었는데, 밀레이는 이들을 위로하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밀레이는 1970년대나 1980년대 라틴아메리카 독재자들과 닮은 점이 더 많습니다. 밀레이가 부르짖는 "아르헨티나를 다시 위대하게"는 어쩌면 훨씬 더 위험한 목표를 추구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밀레이가 올해 초 다보스 포럼에서 깊은 인상을 남기긴 했지만, 여전히 밀레이의 정책과 비전은 아르헨티나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더 퍼지지 못하고 묻힐 운명입니다. 한창 선거를 치를 때는 페소화를 아예 버리고, 미국 달러를 아르헨티나의 화폐로 채택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지만, 이는 현실성도 떨어지고, 득보다 실이 많은 정책이 될 겁니다. 과거 아르헨티나 정부가 시도했던 다양한 통화 정책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재정 정책의 실패를 통화정책으로 풀어보려는 '꼼수'는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이 모든 일의 원흉은 너무 많은 정부 부채입니다. 부채를 줄여야 적자 폭도 줄이고, 인플레이션도 잠잠해질 텐데, 복지 제도가 축소하는 데 대한 국민의 저항이 매우 큽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나 다름없던 긴축 정책이 번번이 실패했던 겁니다. 그렇다고 민주주의 원칙을 저버리면서까지 고강도 개혁을 밀어붙이다가는 자칫 민주적으로 선출된 독재자의 길을 걷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포퓰리즘과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너무 가까워진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면서 국민들을 설득해야 합니다. 다양한 집단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갈등을 중재하면서 경제 개혁을 이뤄내는 일이 정말 쉽지 않겠지만, 아르헨티나가 가야 할 유일한 길일 겁니다.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경영대학원 회계 수업에서 교수님은 늘 같은 질문으로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이건 학생의 의견을 묻거나 토론을 위한 발제를 기대하고 하는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답이 정해져 있는, 전형적인 '답정너' 문항이었죠. "주주 이익의 극대화입니다." "좋아요. 그럼 다음 질문..." 적어도 그 수업 시간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정해진 답을 외우듯 뱉어내야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고, 비로소 그날의 수업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회계 수업은 어찌어찌 수료했지만, "이 명제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 수업을 들을 수 없다"며, 매시간 읊어야 했던 '주어진 정답'을 저는 그때도, 지금도 온전히 수긍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주주 이익의 극대화" 자본주의, 시장 경제라고 가치를 창출하고 이윤을 나눠 갖는 방식이 다 같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기업의 존재 이유를 "주주 이익의 극대화"로 이해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가장 가까운 나라가 있다면 바로 미국일 겁니다. 기업을 경영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 방식으로써 주식회사는 대단한 발명품이었습니다. 미국 경제가 이만한 발전을 이룩하는 데 주식회사 제도가 기여한 바는 절대 작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한, 주주 이익의 극대화를 다른 모든 가치보다 우선에 놓음으로써 발생한 부작용과 문제도 적지 않습니다. 나라마다, 사회마다, 문화에 따라 주주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희생해도 괜찮은 것들은 같지 않습니다. 변화를 통해 혁신을 추구하는 건 대개 어디서나 장려할 만한 일로 여겨지지만, 누구나 그 과정에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변화가 무조건 좋다는 신화에 가까운 믿음이 팽배한 미국에서 지난해부터 종종 관찰되는 현상 중 하나가 빅테크 기업에서 시작해 테크 기업 전반으로 퍼진 구조조정, 그에 따른 대량 해고 열풍이었습니다. 미국은 원래 노동자 입장에서 볼 때 고용 안정성이 매우 낮은 나라이긴 합니다. (여기에 사회 안전망도 부족해서 문제죠.) 그러나 최근 테크 기업들의 구조조정은 "경기가 안 좋아서", "긴축 경영이 불가피해서", "고통 분담 차원에서"와 같은 예의 뻔한 이유만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올해 들어서는 "경기가 더는 나쁘지 않은데", 그래서 "긴축 경영을 할 이유도 딱히 없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미국 기업들은 상시 구조조정을 이야기하며, 추가로 더 많은 해고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분담할 고통" 자체가 없는 상황에서 해고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걸 보면, 최근의 잇따른 해고 바람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리더십 전문가로서 오랫동안 컨설턴트로 일했고, 시스코 시스템즈의 임원을 지내기도 했던 경영 부문 작가 애슐리 구달은 뉴욕타임스에 쓴 칼럼에서 주주 자본주의의 원칙이 선을 넘을 만큼 너무 강조돼 탈이 났다고 지적합니다.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인간을 '믹서기 속의 삶'으로 몰아넣는 테크업계의 또 다른 유행 물론 기업을 경영하다 보면 변화가 불가피한 순간이 자주 있을 겁니다. 특히 미국 시장은 경쟁이 세상에서 가장 치열한 곳인 만큼 환경에 재빨리 적응하지 못하고 변화가 필요할 때 굼떴다가는 기업의 생존이 위협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만큼 더 멀리 내다봐야 하는 경영진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도 많습니다. '변화와 혁신'의 좋은 본보기로 찬사 받는 기업의 사례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그렇지만 기업이 세상의 전부는 아닙니다. 기업은 아무리 중요해도 사회라는 집을 떠받치는 기둥, 사회라는 자동차를 굴리는 엔진일 뿐입니다. 설사 기업이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명제가 맞다고 해도, 세상 사람의 목표가 기업의 목표와 일치해야 하는 이유는 없습니다. 주주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주주가 아닌 사람들이 부당하게 손해를 보고 희생당한다면, 사회 전체적으로는 이를 조정하고 중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주 이익의 극대화를 외치다가 주객이 전도되는 순간은 없는지,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우를 범하는 일은 없는지 늘 살펴야 합니다. 주객이 뒤바뀌면 실질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구달이 칼럼에서 지적한 것처럼 잇단 구조조정을 통해 단기적으로는 인건비를 줄여 일시적으로 주가를 뻥튀기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한창 일해야 할 직원들이 불확실성에 갈팡질팡하게 된다면 조직은 아무것도 못하고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게 될 겁니다. 결국, 조금만 멀리 내다봐도 효율성이 전혀 없는 악수를 두게 만드는 것이 경영진의 인센티브 구조 탓이라면 그 구조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경영진의 성과급이 단기적인 어느 시점의 주가에 연동된다면 경영진이 1년 뒤, 10년 뒤를 내다보고 결정을 내리기를 기대할 수 없을 겁니다. 최근 사고 잇따른 보잉도 주객이 뒤바뀐 사례 아닐까? 최근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비행기 제조사 보잉의 사례는 주객이 바뀐 대표적인 예로 보입니다. 물론 최근 발생한 보잉 비행기 안전사고의 원인이 최종적으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알려진 정황을 토대로 한 추측에 불과하지만, 엔지니어들이 회사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던 '좋은 시절의 보잉'은 비용 절감과 효율성 제고, 그로 인한 주주 이익 극대화만을 고려한 회사와 합병 이후 전혀 다른 회사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커다란 비행기가 도대체 어떻게 하늘을 날 수 있는지 사실 저는 아직도 믿기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만큼 비행기는 엄청난 기술이 집약된 복잡한 장치죠. 그런 장치를 제대로 만드는 일은 당연히 간단할 리 없습니다. 주주 이익을 극대화하려면 비용을 줄여야 하는데, 비용 절감이란 목표에 몰두하다 보면 가장 먼저 거슬리는 것들이 안전 규제입니다. 보잉이 비행기를 건조하는 과정에서 있던 문제를 폭로한 보잉 출신 내부고발자 존 바넷 씨의 증언에 따르면, 보잉은 비행기 생산 기일을 맞추기 위해 규격에 맞지 않는 부품을 여기저기 썼고, 심지어 오래 기다려야 하는 새 부품 대신 폐품 처리장에서 떼온 낡은 부품을 가져다 쓴 적도 있다고 합니다. 비행 중에 사고가 났을 때 기내에 산소를 공급하는 시스템의 고장률이 25%에 이르렀다는 폭로도 있습니다. 부품 하나 잘못 끼워서 사고가 날 확률, 아주 드문 비상 상황에나 작동할 산소 시스템의 문제가 드러날 확률은 모두 매우 낮을 겁니다. 예를 들어 그 확률이 원칙을 다 지켰을 때 0.0001%인데, 원칙에 슬쩍 눈을 감는 대신 비용을 수백, 수천만 달러 아낄 수 있다면 보잉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요? 시장 논리를 신봉하는 이들은 주주 이익의 극대화만 고려해도 여기서 적절한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할 겁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기체 결함으로 인해 항공기 안전사고가 발생한다면, 그 비행기를 만든 제조사의 주가는 폭락할 수밖에 없을 테니, 이를 고려해서 안전 점검을 소홀히 하지 않으리라는 거죠. 논리적으로는 빈틈이 없는 말이지만, 현실에서는 고려 사항이 좀 다릅니다. 특히 지금 미국처럼 단기적인 성과에 집착하게 인센티브 구조가 짜인 자본주의에서는 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비용을 줄이는 게 최선입니다. 규제 당국에 발각돼 벌금을 내지 않을 만큼만 하면 됩니다. 소비자를 비롯해 시장에 참여하는 더 많은 사람을 생각한다면 적어도 주주 이익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안전, 고용 안정, 사회 안전망에 대한 고려는 낄 자리가 없습니다. 구달은 이를 두고 경영진, 이들에게 자문하는 컨설턴트, 금융기관과 애널리스트들, 행동주의 투자자들이 자기들만의 세상에 갇혀 균형 잡힌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가장 마지막에 줄여야 하는 비용이 있다면? 사실 미국 노동자들에게 잦은 해고와 일터에서의 차별은 낯설지 않습니다. 대형 마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가운데 비정규직, 계약직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데, 이들은 이미 여러모로 부당한 대우를 받지만 다른 대안이 없다는 소설가 아델 왈드먼의 칼럼을 소개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미 파편화된 채 거대한 시스템의 부품으로 전락한 긱 노동자들에게 노동자의 권리는 언급하는 것조차 사치로 느껴지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단결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은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실리콘밸리의 빅테크 기업에서 예고 없이 구조조정 대상으로 내몰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어쩌면 목소리를 모아내 정치력을 발휘할 수도 있을 겁니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수많은 원칙을 무력화한 채 범람하는 주주 자본주의 가치에 맞서 이들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겁니다. "가장 마지막에 줄여야 하는 비용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인건비"라고 말이죠. 회계 수업 시간에는 저 때문에 수업이 진도를 못 나가고 정체되면 안 되니 입 밖에 내지는 못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던 말을 지금도 혼자 합니다. "주주 이익의 극대화"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인류가 여기까지 발전하는 데 커다란 원동력이 되어준 위대한 원칙이라고 해도 될 겁니다. 다만 단기적인 성과에 집착하는 식의 주주 자본주의가 유일한 정답이 될 필요는 없다, 그럴 수도 없다는 점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하고 싶었습니다. "주주 이익의 극대화"라는 원칙이 주는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좀 더 멀리 내다보고 정책이 가져올 결과와 효과를 염두에 두고 제도를 운용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이종혁 싱가포르 난양공대 교수) 엠마누엘 토드의 책 "제국의 몰락(Après L'empire)"은 2002년 출간될 당시에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직역하면 "제국, 그 이후"에 가깝지만, "제국의 몰락"이란 제목으로 번역됐습니다.) 당시 미국은 9.11 테러 이후 국내적으로 내부 결속을 한창 강화하는 동시에 국제사회에서는 힘의 논리를 더욱 노골적으로 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미국을 바라보는 세계 시민들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았는데, 한국에서도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반미 감정이 높아지던 시기였습니다. 도덕적, 정치적으로 신망을 잃어가는 미국과는 대조적으로, 그 당시 중국은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뒤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빠르게 성장하며 리더십을 잃어가는 미국을 대체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까지 들게 했습니다. 제가 중국 정치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의 일입니다. 국내외의 민주주의 제도는 어딘가 불안정해 보였습니다. 특히 필리핀이나 멕시코, 인도 등에서 나타난 미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들의 상황을 목도한 뒤 서구식 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롭고 안정된 정치 체제를 갈망하는 분위기가 사회적으로는 물론 학계에도 있었습니다. 학계에서는 특히 "권위주의의 유연성"이라는 주제로 중국의 성공적인 권위주의 사례를 연구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권위주의 국가는 민주주의 국가와 달리 대중의 환심을 살 필요가 없습니다. 대중이 자신들의 리더를 직접 뽑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런데도 중국 정부는 상당히 많은 복지 혜택을 중국 인민에게 제공했습니다. 비결은 무엇일까요? 학자들은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중국 인민을 잘 살게 하는 것이 우선 목표가 아니었지만, 중국 공산당 내에서 이익을 재분배하는 과정에서 그 부산물로 인민들이 부유해졌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또 권위주의 체제 아래서도 경제 발전을 위해 노력할 인센티브를 얼마든지 제공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발생한 이익을 누리는 것일 뿐 권위주의의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반대로 새로운 정치 체제에 대한 열망을 지닌 학자들은 서구식 민주주의 제도 없이도 정부가 신뢰받을 수 있는 조직이 되고, 그런 정치를 펼 수 있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서로 다른 정치 파벌들이 견제와 균형을 통해 경쟁하면 권위주의 정부도 대중의 의견에 반응하며 운영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고, 중국 지도자들의 개별 역량, 유교 문화에서 비롯된 도덕 중심의 관료 양성 방식이 이른바 "유능한 권위주의" 국가 형태의 핵심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었습니다. 원인이 무엇이 됐든 중국의 발전은 동양의 부상뿐 아니라 미국을 위주로 하는 "서구식" 민주주의의 효용에 대한 폭넓은 질문과 의문으로 이어집니다. 중국과 서구에서 사뭇 다른 개념으로 쓰이는 '민주주의' 중국인들에게 민주주의는 절차적 측면보다도 결과적 측면, 즉 대중주의와 합쳐진 형태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마오쩌둥을 비롯한 많은 중국 지도자가 "경제적 자유 없이는 정치적 자유도 없다"는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을 기반으로 한 관점을 오랫동안 공유해 왔습니다. 즉, 경제 발전이 민주주의 강화로 이어진다는 주장이 서구에서와는 다른 맥락으로 인정받는 셈입니다. 인민이 더 잘 살게 되면, 그게 곧 민주주의라는 인식은 덩샤오핑 이후 더욱더 확고해졌습니다. 반대로 소위 "서구식" 민주주의는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 다른 국가들을 설득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중국 사람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서구 국가들을 제외하면, 서구식 민주주의를 받아들인 뒤 성공적으로 발전한 민주주의 국가는 전 세계에 한국을 포함한 몇몇 동아시아 국가들을 제외하면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서구식 민주주의의 가치는 특히 최근 들어 미국의 거듭된 모순적인 행동으로 인해 점점 더 설득력을 잃고 있습니다. 21세기 들어 미국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등지에서 독단적으로 전쟁을 벌였는데, 이 전쟁들로 인해 미국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하기보다 그저 자국의 패권을 지키는 데만 몰두하는 국가로 낙인찍혔습니다. 세계적으로 정치적, 경제적인 패권은 계속 유지하고 있다지만, 미국 국민의 삶의 질이 과연 나아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인민이 더 잘 살게 되는 게 민주주의라고 생각하는 중국인들은 점점 심해지는 빈부 격차, 마약 문제, 총기 사고 등 미국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이 곧 미국 모델의 실패를 가리키는 증거로 여깁니다.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예언마다 적중시켰던 그 학자, 이제는 서구의 쇠퇴를 예상한다 - 엠마누엘 토드 올해 프랑스 서가에서 꾸준히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엠마누엘 토드의 새 책 "서구의 몰락(La Défaite de l’Occident)"을 소개한 칼럼에서 크리스토퍼 콜드웰은 가치를 중심으로 동맹을 구축해 온 미국이 가치를 잃어가며 쇠락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미국은 실제로 미국적인 가치를 다른 나라, 전 세계에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미국 언론은 종종 미국 국내에서 활발히 논의되는 이념과 가치를 정답으로 상정한 다음 인권이나 성소수자 권리 등 미국에서 통하는 다양성 기준을 손쉽게 보편적인 가치로 삼아 다른 국가에 쉽게 씌우려 합니다. 나라마다 독특한 문화적 배경, 경제적 상황, 역사가 있는데 뭐든 일관적인 기준을 일방적으로 적용하려는 미국의 접근 방식은 자칫 국제 관계에서 매우 오만한 태도로 비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이 일방적으로 미국적인 가치를 보편적인 가치로 포장해 전파하려는 데 피로감을 느끼는 나라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세계화"라고 써놓고 실은 "미국화"에 지나지 않는 미국 주도 문화에 피로감을 느낀 많은 나라에서 대체재로 인정받습니다. 토드가 "제국의 몰락"에서 중국을 염두에 둔 건 아니었지만, 많은 나라들이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로 이어진 중국의 개혁개방과 이데올로기적 유연성을 성공적인 "중국식 모델"로 치켜세우며 따라 하고자 했습니다. 심지어 2000년도 초반에는 북한이 중국식 모델을 채택할지가 화두가 되기도 했죠. 빛바랜 '중국식 모델' 토드가 패권국가 미국의 문제를 지적하고, 그에 따른 미국의 쇠락을 예측했다면, 저는 한때 미국의 대안으로 각광받던 중국이 최근 들어 다시 빛바래고 있는 이유를 살펴보려 합니다. 중국은 시진핑 시대에 들어서면서 국제적인 패러다임이나 대안적인 제도로서의 역할과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한때 민주주의 국가들보다도 더 많은 공공재를 제공하며 글로벌 무대에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기수 역할을 하던 나라가 이제는 배타적이고 보수적인 노선을 확고히 택해 많은 사람을 절망에 빠트렸습니다. 개발도상국에서 중등 국가로 발전하기 위해 중국이 제시했던 많은 정치적, 경제적 패러다임이 시진핑 시대의 강압적인 정치, 경제적 위기 속에 자취를 감췄습니다. 시진핑은 관례를 깨고 세 번째 임기를 시작하면서 권력의 정당성을 억지로 만들기 위해 덩샤오핑 이후 개혁개방 정신을 버리고 중국을 스스로 고립시키는 길을 택했습니다. 한때 개방적이고 유연한 국제 관계, 평화적인 국제 질서 구축을 위해 노력하던 중국의 모습은 시진핑 시대 들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덕분에 미국은 동맹국들을 다시 끌어모아 중국을 견제할 수 있게 됐습니다. (말의 수위나 겉으로 보이는 행동은 달라 보일지 몰라도 중국을 견제하고 억제하려는 기조는 트럼프나 바이든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시진핑 시대의 중국 외교 정책은 공격적으로 변했고, 국내적으로도 정권 장악과 반대 목소리는 물론 경쟁자도 허용하지 않는 강압적인 정치를 펴는 탓에 많은 외국 자본과 인력이 중국을 기피하고 있습니다. "중국식 모델"은 더는 관심을 끌지 못하는 구식 취급을 받습니다. 토드가 관찰한 서구의 문제점, 몰락을 예측하며 제시한 근거 가운데는 일리 있는 것이 있습니다. 다만 20년 전과 달리 몰락하는 서구의 대안으로 보편적인 가치를 담보하는 기수가 될 만한 국가로 중국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확실해지고 있는 최근입니다.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경제 지표만 보면 미국 경제는 분명 호황인데, 미국 사람들이 느끼는 체감 경기는 왜 이렇게 나쁜 걸까? 지난해 말부터 이 질문에 대한 직·간접적인 답을 찾는 칼럼과 해설만 벌써 여러 번 소개해 드렸습니다. 모든 사회, 경제 현상이 그렇듯 한 가지 원인으로 완벽히 설명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당장 아무리 경제가 좋아졌다고 해도 몇십 년 만에 찾아온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올라도 너무 많이 올라 (지표에 나타나는) 호황을 체감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물건 가격이나 세금에 관한 한 심리적으로 ‘손실 회피 성향’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게다가 선거가 있는 해라서 정치적인 성향에 따른 의견이 개입할 여지도 큽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바이든 행정부의 경제 성적표에 낙제점을 주고 싶어 하고, 반대로 민주당 지지자들은 상대적으로 좀 더 관대할 겁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의 타격이 저소득층에 집중됐고, 팬데믹을 지나면서 경제적인 불평등이 심해진 점도 생각해야 합니다. 경제 지표가 잡아내지 못하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 즉 노동과 생산, 이윤을 분배하는 전체 메커니즘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심각한 공중보건 위기였던 동시에 많은 나라의 경제 구조를 새로 짜거나 적어도 대대적으로 수정하게 만든 외부 충격이었습니다. 미국을 예로 들어보면, 전통적으로 자원의 배분을 대체로 시장에 맡겨 온 미국에서 전형적인 복지국가에나 있을 법한 제도들이 속속 등장했습니다. ‘긴급 지원’ 명목으로 서둘러 시행된 사회보장제도, 정책, 임시법안의 수명은 길지 않았고, 공중보건 위기가 어느 정도 잠잠해지자, 정부가 주도했던 사회보장제도들은 이내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런데 매우 이례적이던 그 몇 달의 경험이 미국인들의 눈을 뜨게 해 줬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브라이스 코버트 기자가 그에 관한 칼럼을 썼습니다. ▶ 뉴욕타임스 칼럼 보기 : 사회 안전망이 갑자기 없어졌을 때 나타나는 일 코로나19로 발생한 비상사태를 타개하기 위해 정부는 자원의 배분 과정에 직접 개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장 실패로 자원 배분이 왜곡됐거나 정부 실패로 효율성이 낮아진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경제 자체가 멈춰버렸기 때문에 세상을 다시 굴리려면, 최소한 유지해야 할 것을 유지하려면 정부가 나서야 했습니다. 바이러스 때문에 사람들이 늘 해오던 것을 갑자기 못 하게 되면서 세상을 굴리는 근본적인 동력이 어디에 있었는지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또 사람들의 삶이 어려워졌을 때 어디부터 지원해야 하는지도 확인됐습니다. 몇 가지 핵심적인 부문들을 살펴보면 2020년 미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복기해 볼 수 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오기 전 실업률은 3%대 중반으로 매우 낮았습니다. 그러다 팬데믹으로 경제가 얼어붙자, 실업률은 갑자기 20% 가까이 치솟았습니다. 아예 일자리를 잃은 사람도 많고, 일감이 없어져 일시 해고(furlough)당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바이러스가 잦아지지 않는 한 언제 다시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다 보니 심리는 더욱 위축됐습니다. 일을 못 하면 당장 수입이 끊기고, 저축해 둔 돈이 없는 사람들은 금방 생계를 걱정해야 하게 되죠. 이때 필요한 게 갑자기 끊긴 수입을 일정 부분 보조해 줄 수 있는 실업 보험입니다. 칼럼에 설명됐듯 미국은 원래 실업 보험 제도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나라였습니다. 50만 명 정도가 실업 급여를 받고 있었는데, 코로나19 이후 그 수치가 10배 이상 급증했죠. 그만큼 생계를 위해 최소한의 비용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았던 겁니다. 갑자기 신청자가 몰리다 보니, 웹사이트가 마비되고 전화로 실업 보험에 가입, 급여를 신청하는 데 수십 시간이 걸리는 등 초반엔 문제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에게 급한 대로 구명줄이 됐던 실업 보험이 몇 달 지나지 않아 서서히 끊긴 겁니다. 예산이 부족한 게 문제였지만, 정부가 결단을 내렸다면 더 오래 유지할 수도 있었을 텐데 연방정부와 많은 주 정부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당장은 급여가 문제지만, 미국에서 실직하면 의료보험이 없어지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미국의 의료비가 터무니없이 비싸고, 병원 문턱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높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가뜩이나 팬데믹으로 병원들이 마비된 터에 의료보험까지 잃게 되면 “아프면 정말 큰 일”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 됩니다. 연방정부는 저소득층에 제공하는 정부 의료보험인 메디케이드(Medicaid)를 확대해 더 많은 가입자를 받고, 기존 가입자가 혜택을 잃지 않도록 자격 심사를 완화했습니다. 그 덕분에 2천만 명 넘는 사람이 메디케이드에 새로 가입했고, 그나마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팬데믹이 끝난 뒤 정부가 다시 메디케이드 심사 요건을 강화하면서 1,780만 명이 메디케이드를 잃었습니다. 팬데믹 초기에 새로 가입한 사람 대부분이 얼마 안 가서 다시 의료보험 보장을 받지 못하게 된 겁니다. 물론 이들이 전부 다 의료보험을 잃은 건 아닐 겁니다. 다시 일자리를 찾아 직장 의료보험에 가입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수입이 생겨 비싼 민간 의료보험에 든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GDP의 1/6이나 차지하는 의료 부문을 사실상 시장 논리에 맡겨 놓은 결과, “병원비, 약값 걱정에 웬만큼 아파도 병원 가지 않고 참아야 하는” 미국의 치부가 팬데믹을 거치며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급여와 의료보험이 해결되더라도 살 집이 없으면 문제입니다. 특히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가보다 월세를 내고 사는 세입자들인데, 매달 나가는 월세는 보통 실업 급여로 충당하기 어려운 금액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미국 정부가 이례적으로 조처를 했습니다. 의회가 월세를 못 내도 쫓겨나지 않도록 한시적으로 465억 달러의 예산을 긴급 편성해 지원했습니다. 미국 연방정부가 임대료를 낼 수 있게 지원금을 지급한 건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물론 긴급 재난 상황에서 편성한 일시적인 예산이었지만,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정부가 월세를 보조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경험했습니다. 의회는 육아비 지원도 늘렸습니다. 아동 세액 공제 혜택을 대폭 확대한 겁니다. 2021년 하반기에 아이를 키우는 집 가운데 소득이 높지 않은 가계는 세금을 250~300달러 감면받았습니다. 아이 키우는 집의 경제적 부담을 크게 덜어준 이 조치가 더 놀라운 건 미국의 아동 빈곤율이 무려 절반 가까이 줄었다는 점입니다. 안타깝게도 아동 세액 공제 제도가 다시 코로나19 이전으로 회귀하면서 아동 빈곤율도 다시 높아졌습니다. 칼럼에서 예로 든 주요 분야 외에도 수많은 부문에서 비슷한 패턴이 나타납니다. 워낙 긴박했던 위기 상황에 부랴부랴 마련했던 탄탄한 사회보장제도는 빈곤율을 낮추고, 경제적 불평등을 눈에 띄게 완화해 주는 등 곧바로 효과를 냈지만, 예산 부족을 이유로, 또는 정치적인 판단에 따라 제도가 사라지면서 도루묵이 됐습니다. 빈곤층이 먹을거리를 구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푸드 스탬프 제도도 확대하고, 학생들에게 무상 급식을 제공하다가 다시 없앴습니다. 정치적 판단이었다면, 선거에서 책임지게 될 것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나고, 일상이 회복됐지만, 미국 사람들은 코로나19 전에는 겪어본 적 없는 사회보장제도를 직접 경험했습니다. 사회보장제도는 빈곤, 불평등, 시장 논리가 효율적으로 작동되지 않는 부문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완화하는 데 효과적인 처방이었음을 증명했습니다. 사람들은 잠시나마 누려 본 사회적 안전망이 사라지자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사회보장제도의 존재 자체를 제대로 몰랐던 때와 직접 겪어본 지금은 완전히 다릅니다. 특히 이런 경제적 불안과 불만은 올해 말 선거에서 사회보장제도를 앞다퉈 없앤 정치권을 심판하는 표심으로 분출될 수 있습니다. 부리나케 도입한 제도라고 해도 그 효과가 확실했는데, 예산 부족을 핑계로, 미국답지 않다는 이유를 들며 제도를 폐기한 정치권은 누구를 위한 정치를 하는 건지 따져보려는 심리가 작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유권자들의 표심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다양하지만, 경제만큼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없다고 알려졌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발발한 것 자체는 정부가 막을 수 없던 일입니다. 그러나 팬데믹으로 생활이 무너질 위기에 처한 국민들을 지원하는 제도를 만들고 확대하거나 반대로 축소하고 폐기하는 일은 결국 행정부와 의회가 내린 판단의 결과입니다. 아마도 팬데믹이 없었다면, 복지국가에 준하는 강력한 사회보장제도가 일시적으로나마 도입되는 일은 미국에 없었을 겁니다. 이유야 어쨌든 미국 사람들은 사회보장제도를 몸소 체험해 봤습니다. 앞으로 체감 경기를 논할 때는 팬데믹과 사회적 안전망에 관해 한 이 경험을 빼놓아선 안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