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지연구소 빙하환경연구본부에서 빙하코어를 활용하여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지구환경 변화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북쪽과 남쪽 끝 극단적인 곳에서 극한 체험하면서 연구하는 '극적인 사람들'. 보통 사람들은 일생에 한 번 가기도 힘든 남극과 북극을 수시로 오가며 연구 활동을 펼치는 극지연구소 사람들과 스프의 콜라보 프로젝트! 기후 변화의 최전선에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바다가 먼저? 빙하가 먼저? 빙하는 바다에서 증발한 수증기가 육상에 눈으로 내려 다져져서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빙하가 녹으면 그 물은 대부분 다시 바다로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바다가 먼저일까요? 아니면 빙하가 먼저일까요? 물은 순환합니다. 인류를 비롯한 많은 생명체가 이 물 순환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그 중요성 때문인지 초등학교 교과서나 더 어린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에서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순환이라는 말이 내포하듯 물 순환에는 출발지도 종착지도 없습니다. 따라서 바다와 빙하 중 무엇이 먼저인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다만, 지구상에 있는 물 97% 정도가 바다에 있으니 편의상 물 순환의 시작점을 바다로 봐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교육용 교재들도 대부분 바다에서 증발한 물이 다시 바다로 돌아오는 과정으로 물 순환을 설명합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지구 표면에서 바다는 물의 고향 같은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다를 떠난 수증기가 모두 빙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남반구의 예를 들면, 증발한 수증기가 긴 거리를 여행하여 남극 대륙에서 눈으로 내려야만 빙하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수증기는 일찌감치 비나 눈으로 바뀌어 바다로 돌아가고, 극히 적은 양만이 극한의 남극 내륙에 도달하여 마침내 빙하의 구성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남극에서 마주하는 빙하는 험난한 여정의 기억을 간직한 수증기의 결정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고향인 바다로 돌아가기를 보류하고 남극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오래된 빙하는 무려 백만 년 이상 남극에 머물고 있습니다. 빙하가 간직한 기억들.. 잃어버릴 수 있다 우리 연구소는 이 빙하가 간직한 기억에 주목합니다. 서로 다른 시점에 눈으로 내려 빙하의 일원이 된 이들은 각기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의 기억을 가진,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얼음이 되지 못한 눈(snow) 또는 편(firn)으로부터 아주 오래 전 기억을 간직한 얼음(ice)까지, 그들이 가진 기억으로부터 우리가 사는 지구의 과거 환경을 복원하여 배우고 지구 시스템을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증발하여 여행을 시작할 때 그 바다는 어디쯤이었는지, 온도는 어땠는지, 바람은 많이 불었는지, 어떤 바람을 타고 어떤 경로로 이곳까지 왔는지, 먼저 바다로 돌아간 수증기들은 얼만큼이었는지, 여정을 함께한 에어로졸들이 있었는지, 눈이 되어 내릴 때 기상 조건과 대기 환경이 어땠는지, 내린 후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들은 우리에게 들려줄 다양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학의 도움을 받아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습니다. 죽음이나 사후세계를 소재로 다루는 판타지 드라마나 영화들은 살았을 때의 기억이 삭제되는 설정을 즐겨 활용합니다. 죽음 후에 어떤 강을 건넌다든지, 어떤 문을 들어가거나 또는 특별한 물을 마시면 살았을 때의 기억을 다 잃는다는 설정으로, 이들을 활용해서 보통 시청자나 관객의 슬픔과 안타까움을 자아내곤 합니다. 빙하는 언젠가는 바다로 돌아갑니다. 빙하가 흘러내려 빙붕(ice shelf)처럼 바다에 맞닿게 되면 이제 곧 빙하는 오래된 여정을 마치고 고향인 바다로 돌아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다로 돌아가는 순간 그들이 간직한 기억은 대부분 사라집니다. 빙하의 감소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해수면 상승이라는 시급한 위험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하지만 기후변화 때문에 보다 빠르게 바다로 돌아가는 빙하와 그와 함께 소멸하는 그들의 기억을 바라보고 있자면 약간은 다른 관점에서 슬픔을 느낍니다. 우리는 아직 빙하가 들려줄 이야기들을 충분히 듣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