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연예뉴스에서 영화 관련 글을 쓰고 있습니다. 감독과 배우들의 '영화로운 순간'들을 전하겠습니다.
주말에 뭐 볼까?'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스프가 알려드립니다. "공주를 구한 왕자는 그다음 어떻게 되지? "그다음에는, 공주가 기사를 구해줘요." 1990년 개봉한 영화 '귀여운 여인'(Pretty Woman)은 신데렐라 판타지를 구현하며 전 세계적으로 흥행했다. 이 영화의 드라마틱한 엔딩은 동화를 실사화한 것처럼 로맨틱했다 에드워드(리처드 기어)는 이별을 고하는 비비안(줄리아 로버츠)에게 지금으로 치자면 일종의 '스폰서' 제의를 한다. 비비안은 자신은 신데렐라가 되길 바란다며 그 제안을 거절한다. 결국 에드워드는 비비안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그녀의 바람대로 공주를 구하는 왕자처럼 근사하게 프러포즈한다. 그토록 원하던 순간을 맞이한 비비안은 빈민가의 다락방에서 탈출해 에드워드의 품에 안긴다. 이 작품의 세계적 흥행 이후 '신데렐라 콤플렉스'라는 말이 재조명됐다. 물론 이 동화 같은 이야기를 현실적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영화란 지독한 현실을 그리기도 하지만 달콤한 꿈을 선사하기도 하기에 '판타지 충족'이라는 측면에서 '귀여운 여인'은 관객에게 특별한 영화로 자리매김했다. 지난 11월 6일 개봉한 '아노라'는 '귀여운 여인'의 판타지를 34년 만에 와장창 깨뜨린다. 이 영화의 이야기를 단 한마디의 비속어로 표현하자면 '신데 fuxxing 렐라'일 것이다.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총천연색 조명과 시끄러운 음악으로 가득한 스트립바를 비춘다. 카메라는 트레킹샷으로 남성 손님 앞에서 나체를 흔들며 웃음을 파는 여성들을 비춘다. 이 가운데 '애니'가 있다. 20대 초반의 여성인 애니는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해 손님들에게 인기가 높다. 그녀는 매일매일 성실하게 일하며 그 대가로 돈을 번다. 어느 날, 애니는 러시아말이 가능한 여성을 찾는다는 호출을 받고 젊은 남자 손님을 맞이하게 된다. 그의 이름은 이반, 러시아 부호의 아들로 부모의 간섭을 피해 미국에 머물고 있다. 애니의 능숙한 서비스에 반한 이반은 자신의 집으로까지 불러들인다. 이반은 자신을 쉼 없이 흥분시키는 애니에게 빠져들고, 애니는 가볍게 열리는 이반의 지갑에 반한다. 급기야 애니는 이반의 제안에 따라 일주일간 그의 연인이 되기로 한다. 두 사람은 라스베가스로 여행을 떠나게 되고 분위기와 흥에 취해 즉흥적으로 결혼 서약을 하게 된다. 단, 일주일 만에 인생이 바뀐 애니는 스트립바를 나와 이반의 대궐 같은 집에 들어가게 되고,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이반의 집안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고, 집안의 하수인 두 명이 이반의 결혼을 무효화하기 위해 급파된다. 술과 약에 취해 즉흥적으로 결혼을 했으나 뒷감당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이반은 애니를 남겨둔 채 도망쳐버린다. 덩그러니 남겨진 애니는 어떻게든 혼인 상태를 유지하려 하고, 이반 집안의 두 하수인은 애니와 사사건건 부딪치며 결혼 무효화를 위해 고군분투한다. 성 노동자가 러시아 부호의 아들과 결혼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소동극처럼 담아낸 '아노라'는 '귀여운 여인'의 냉혹한 현실 버전으로 볼 수 있다. 션 베이커의 대표작인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세계 최고의 놀이동산인 디즈니랜드 옆 빈민촌의 냉혹한 현실을 다룬 것처럼 '아노라'도 '꿈의 도시'라 불리는 뉴욕 맨해튼의 빌딩 숲이 아닌 그 공간 어딘가에 공존하는 스트립바에서 이야기가 출발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총천연색의 '찬란한 절망'을 그려 강렬한 충격을 안겼다면 '아노라'는 코믹 소동극의 탈을 쓰고 '달콤씁쓸한 비애'를 선사한다. 풍자와 해학을 강조한 영화인 만큼 시종일관 터지는 웃음 뒤에 남는 쓴맛이 꽤 진하다. 애니는 서비스를 돈과 교환하며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였으나 신데렐라가 될 수도 있다는 순진한 상상을 했다는 이유로 당하지 않아도 될 폭력과 멸시를 당하게 된다. 인생역전을 꿈꾼 사람에게 세상은 비정했다. 결혼 무효화 소동에서 당사자인 애니의 의사는 철저히 무시되며 그때마다 그녀의 직업은 괄시와 천대의 빌미가 된다. 무력에 의한 폭력보다 더 끔찍한 것이 언어 폭력이라는 것을 영화는 130여 분 내내 상기시킨다. 이런 폭력적인 상황에 내팽개쳐진 애니는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밖에 없다. (외부인이 보기에) 야생의 정글 같은 스트립바는 오히려 그곳만의 규칙과 그들만의 윤리가 작동됐다. 그러나 세상에 툭 던져진 애니는 성 노동자라는 낙인으로 인해 번번이 멸시와 조롱을 당한다. 아무리 자신을 변호해도 그 목소리는 상대에게 닿지 않는다. 자신의 호기심과 쾌락을 길게 즐기고자 아무 생각 없이 애니는 세상에 끌고 나온 이반은 너무나 무책임하고 유약하다. 부모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정작 부모의 울타리 밖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네포 베이비(nepo baby)의 전형이다. 자본주의의 민낯과 현대 사회의 계급성이 신랄하게 묘사된 영화다. 상승을 허용하지 않은 계급 사다리의 상층부 인물들은 신데렐라를 꿈꿨던 성 노동자를 멸시의 눈으로 깔아본다. 이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은 주인공의 적대자로 등장했던 두 인물이 종국엔 가까운 위치에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상기하게 될 때다. 계층의 사다리에서 애니나 토로스, 이고르는 누군가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대가를 받는 밑바닥 노동자라는 공통점, 피고용인으로서 고용인에 의해 움직일 수밖에 없는 인물이라는 점이 닮았다. 영화에서 이들은 시종일관 서로의 존재를 부인하고 경멸하지만 어느 순간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긴다. 계급의 연대 같은 드라마틱한 결말로 이어지진 않지만 같은 이유로 분노하고, 같은 이유로 연민하게 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영화의 제목인 '아노라'는 애니의 본명이다. 러시아식 이름인 '아노라'는 촌스러운 이름의 전형인 것으로 보인다. 애니가 신분증에 적힌 본명이 불리자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데서 유추할 수 있다. 아노라가 아닌 애니로 살고 싶었던 이 여성은 인생의 가장 치욕스러운 순간에 원치 않는 방식으로 자신의 본명과 마주하게 된다. 션 베이커는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무책임하고 무의미한 해피엔딩을 제시하지 않는다. '아노라'는 '신데렐라는 없다'고 말하면서도 '내 삶의 주인공은 나'라고 말하는 태도를 견지한다. 한여름 밤의 꿈과 같았던 나날과 악몽 같은 긴 밤이 지나고 난 후 창밖에는 함박눈이 내린다. 애니는 요란한 해프닝의 대가로는 너무나 적은 위자료를 받고 기찻길 옆에 위치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3분여의 엔딩씬은 '아노라'가 왜 특별한 영화인지를 보여준다. 창밖으로 흩날리는 눈, 애니와 이고르가 주고받는 증오와 연민을 담은 눈빛, 암전 속에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와이퍼 소리는 이 소동극이 이들 삶에 어떤 파장을 일으켰는가를 압축하는 듯하다. 이 엔딩이 불러일으키는 처연함에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없다. 애니를 연기한 미키 매디슨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영화를 연출한 션 베이커 감독은 이 작품으로 제77회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미국 감독이 황금종려상을 받은 건 2011년 테렌스 맬릭의 '트리 오브 라이브' 이후 13년 만의 일이었다. 트로피를 거머쥔 뒤 션 베이커는 "이 상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성 노동자 여러분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데뷔부터 지금까지 성 노동자의 삶을 꾸준히 다뤄왔다. 인간의 삶을 전시하지 않고 응시하는 그의 영화적 시선과 태도가 오늘날의 영광을 만들었다. 디자인 : 채지우
'주말에 뭐 볼까?'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스프가 알려드립니다. '보통의 가족'(A Normal Family)은 제목부터 역설이다. 영화는 사고처럼 터진 위기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두 가족을 보여준다. 언뜻 보면 이들은 대한민국 중산층(사실 상류층에 가까운)의 전형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어떻게 봐도 '보통의', '평범한', '정상적인' 가족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는 난폭 운전으로 실랑이를 벌이를 두 남자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딸을 태우고 운전을 하던 한 남성은 스포츠카를 난폭하게 모는 젊은 청년의 행태에 화가 나 차를 멈춰 세운다. 이 남성은 삿대질을 불사하며 상대를 비난한 뒤 다시 차에 오른다. 이에 분노한 청년은 차를 후진한 뒤 액셀레이터를 밟아 앞차를 들이받는다. 이 보복 운전으로 인해 남자는 즉사하고 어린아이는 생사를 헤매게 된다. 잘나가는 변호사인 재완(설경구)은 피해자 가족이 아닌 가해자 청년을 변호하게 된다. 이 청년은 재벌 2세다. 재완은 재벌 2세가 의도를 가지고 차를 들이받은 게 아니라 실수였다는 취지로 변호하고 피해자 가족과의 합의를 통해 사건을 무마하고자 한다. 공교롭게도 생사를 헤매는 피해자 딸의 주치의는 재완의 동생 재규(장동건)다. 두 형제는 정반대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형인 재완은 돈 되는 일이면 다하는 변호사고, 동생인 재규는 돈보다는 명예를 추구하며,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고 헌신하는 의사다. 관객은 당연히 이 에피소드가 영화의 핵심이 되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는 일종의 복선이고, 추후 발생할 사건의 거울 같은 기능을 한다. 두 가족의 평화로운 일상에 파열음을 내는 건 자식들이 일으킨 사건 때문이다. 재완의 딸과 재규의 아들이 연루된 폭행 사건이 발생하고, 두 가족은 이 일의 처리 방식을 두고 부딪히게 된다. CCTV는 방아쇠 역할을 한다. 영화는 크게 두 번의 CCTV 화면을 제시하는데 사건의 발단에서 등장하는 CCTV와 반전의 키가 되는 CCTV가 있다. 특히 두 번째 CCTV 화면은 클라이맥스가 돼 인물이 폭주하는 계기가 된다. 네덜란드 원작 소설 '더 디너'(헤르만 코브 作)에서는 두 형제의 직업이 교사와 정치인으로 설정돼 있다. 리메이크작인 '보통의 가족'에서 형제의 직업은 변호사와 의사로 바뀌었다. 각각 문과와 이과를 대표하는 전문직이자 성공한 사회인의 전형으로 제시될 수 있는 직업이다. 이들의 배우자 역시 한국 사회에서 낯설지 않은 캐릭터다. 연경(김희애)은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며 맏며느리 노릇하고, 지수(수현)는 능력 있는 남편과 결혼해 호화로운 삶을 사는 젊은 아내로 묘사된다. 영화는 이들뿐만 아니라 능력 있는 부모의 수혜를 누리며 자란 2세를 통해 우리 사회의 엘리트주의와 물질만능주의, 생명 경시와 도덕성 결여 등의 병폐를 제시하며 사회 풍자의 색채를 강화했다. 영화에는 재완 부부와 재규 부부가 함께하는 세 번의 저녁 식사(dinner)가 등장한다. 가족끼리의 정기적인 식사 자리지만 내내 미묘한 신경전이 펼쳐지고 그로 인해 긴장감이 감돈다. 아픈 모친을 모시지 않는 첫째 아들과 장남의 의무를 대신하고 있는 둘째 내외 간의 불편한 관계, 어린 형님을 고깝지 않게 보는 동서와 그런 동서가 못내 불편한 형님까지, 겉으로는 우애 좋은 형제 부부지만 그 속은 보이지 않게 곪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텐션은 영화의 주요한 사건을 기점으로 극대화되고, 서로가 애써 감추고 있던 민낯까지 드러내기에 이른다. '보통의 가족'은 '당신이라면?'라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확실한 건 내로남불로 요약할 수 있는 위선이라는 가면 아래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진실이다. 특히 부모에게 '자식'이란 금지옥엽이자 아킬레스건이기에 신념도 윤리도 힘을 쓰지 못한다. 영화는 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세밀하게 묘사하며 인간의 이중성과 도덕적 딜레마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덕분에 영화를 보는 관객들 역시 '미워도 내 새끼'라는 공감대와 '네 새끼 네 눈에나 예쁘지'라는 심리적 삿대질 상태를 오가며 영화가 던지는 딜레마에 때론 공감하고 때론 분노하게 된다. 영화는 극단적 설정을 통해 인물의 캐릭터를 뒤엎고 각자의 신념을 깨뜨리는 다소 도식적인 전개를 보여주지만, 연출의 노련함과 배우들의 열연으로 흥미진진한 서스펜스 드라마를 완성해 냈다. 무엇보다 네 배우의 앙상블이 훌륭하다. 설경구의 무게감과 김희애의 폭발력, 장동건의 진화, 수현의 안정감이 돋보이는데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어 영화 내내 강력한 시너지를 낸다. 특히, 자식을 위해서 자신이 추구해 온 신념과 도덕률조차 깨버리는 재규 역의 장동건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디자인 : 채지우
'주말에 뭐 볼까?'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스프가 알려드립니다. 최근 10년간 방송가를 휩쓴 '쿡방'(요리 방송) 열풍은 실로 대단했다. 미슐랭 셰프와 전국 각지의 명인, 재야의 고수까지 난다긴다하는 요리의 달인들을 끌어들인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은 '욕구'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대중의 '식욕'을 자극하며 시청률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반복과 범람은 지겨움을 낳았고, 어느 순간 레드오션이 되고야 말았다. 트렌드의 끝물에서 또 하나의 대박 프로그램이 탄생했다.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이다. 추석 연휴 공개된 '흑백요리사'는 지난달 22일까지 3,800만 시청수(시청 시간을 작품의 총 러닝 타임으로 나눈 값)를 기록하며 TV 비영어 부문 1위(넷플릭스 TOP 10 웹사이트 통계)를 달성했다. 또 다른 OTT 순위 전문 사이트 플릭스 패트롤에 따르면 25일 기준 미국에서도 6위에 오르면서 주목받았다. 닳고 닳은 아이템이건만 도대체 뭐가 달랐을까. 능력자들의 총망라, 심사위원의 스타성, 역대급 스케일, 룰의 파격 등 그야말로 요리 서바이벌의 '끝판왕'을 보여준 기획이자 재미다. 흑수저 vs 백수저, 요리에 계급이라니 흑백요리사는 100명의 요리사가 우승 상금 3억 원을 획득하기 위해 맛 대결을 펼치는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단순히 바둑 경기처럼 팀을 나누기 위해 도전자들을 흑과 백으로 나눈 것이 아니다. 이 네이밍에는 흙수저(=흑수저)와 금수저(=백수저)의 함의가 담겨 있다. 백수저에는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의 수석 주방장부터 세계 요리대회 우승자, 한국과 미국의 각종 요리 서바이벌 대회 우승자, 백악관 만찬 요리사, 대한민국 요리 명장 등 화려한 이력의 셰프들이 포진돼 있다. 흑수저는 미슐랭 스타와 같은 훈장보다는 독특한 이력으로 눈길을 끈다. 요리를 만화로 배웠다는 요리사, 중국집 배달부 출신의 중식 셰프, 140만 구독자를 보유한 요리 유튜버, 을지로와 신당동, 남영동, 연희동 등에서 MZ들의 폭발적 인기를 기반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신진 요리사 등이 포진돼 있다. 제작진은 셰프의 인기만큼이나 경력이나 명예의 정도에 따라 흑과 백을 나눈 것처럼 보인다. 물론 미슐랭 별이 140만 유튜버보다 유명하다거나 영향력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흑백의 비율과 적용되는 룰도 조금 달랐다. 제작진이 선택한 20명의 백수저들은 부전승으로 2라운드 진출권을 확보해 1라운드를 관전만 했다. 80명의 흑수저들은 20명만이 살아남는 1라운드를 통과해야 비로소 백수저들과 맞대결을 펼칠 수 있다. 제작진들은 "이 룰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리를 떠나도 좋다"고 말한다. 당연하게도 흑수저들은 불평등한 시작에 불만을 드러내지만 너나 할 것 없이 "(백수저들을) 밟아버리겠다"라고 전의를 불태우고, "맛으로 이기면 되는 거 아냐"라며 패기를 보여준다. 백수저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다. 만만찮은 저력의 흑수저들을 보며 '지면 쪽팔린다'고 되뇐다. '흑백요리사'는 요리 흙수저가 금수저에 맛으로 도전장을 내밀고, 금수저는 흙수저에게 연륜과 내공을 보여주고자 하는, 이른바 패기와 자존심의 대결로 점철된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차고 넘쳤던 쿡방 프로그램과 비교해 '흑백요리사'만의 특별함은 어디에 있을까. 우선 스케일이 역대급이다. 대인원의 셰프가 요리할 수 있는 대형 세트장을 찾아 상하수 수도관, 가스관을 설치하는 기반 공사를 했다. 프로 프로덕션에만 180일을 소요했다. 총 100명의 셰프들이 출전한 이 경쟁에서는 총 254개의 요리가 탄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프라이팬과 냄비, 접시 등 조리도구만 1,000개 이상 사용됐다. 요리가 탄생하는 생생한 과정을 담기 위해 촬영마다 300대가 넘는 카메라가 거치됐다. 카메라는 셰프들이 요리하는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잡는 것은 물론이고 80명 셰프들의 요리 현장을 부감으로 한 화면에 담아내는 장관을 연출했다. 뭐니 뭐니 해도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결국 '사람'과 '이야기'가 핵심이다. 도전자들의 다양한 이력은 '흑백요리사'의 최고 재미 포인트다. 여타 프로그램과 비교하자면, 개개인의 사연을 비중 있게 강조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고수들의 이력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흑수저들의 이색 백그라운드는 화려한 경력으로 무장한 백수저들과의 대결에서 극대화된다. 30년 중식 대가 vs 배달부 출신의 요리사, 이탈리아 미슐랭 레스토랑 출신 셰프 vs 최고의 리조또를 만든다는 한국 요리사가 맞붙는 식이다. 계급장을 떼고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흑수저와 백수저는 오로지 맛으로만 승부를 펼친다. 음식의 맛만 있다면 꼬리 칸도 머리 칸으로 이동할 수 있고, 머리 칸도 꼬리 칸으로 떨어지는 당락의 롤러코스터, 그것이 이 서바이벌의 묘미다. 백종원-안성재, 요식업계의 왕과 파인 다이닝 대가의 입맛 그렇다면 이 고수들을 누가 심사할 것인가. 어떤 기준으로 맛을 평가할 것인가. 제작진은 백종원과 안성재라는 양극단의 인물을 심사위원으로 선택했다. 백종원은 요식업계의 '미다스의 손'이고, 안성재는 대한민국 유일의 미슐랭 쓰리 스타 레스토랑의 셰프다. 대중이 좋아하는 표준적인 맛을 제시하는 사업가와 '파인 다이닝'이라 불리는 최고급 코스 요리의 장인이 '맛의 우열'을 가린다.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진 두 사람이 맛의 우위를 공정하게 가릴 수 있을까. 맛의 객관과 주관을 어떤 기준으로 정립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흑수저 도전자들의 이력과 장기가 소개된 1라운드가 재미를 위한 빌드업이었다면, 흑수저와 백수저가 본격적으로 맞붙는 2라운드부터는 재미의 하이라이트가 펼쳐졌다. 개인전과 팀전, 패자부활전 등 요리 서바이벌에서 즐겨 썼던 경쟁 방식을 그대로 가져왔지만, 약간의 변형도 가미했다. 특히 흥미로웠던 건 2라운드에 펼쳐진 블라인드 심사다. 제작진이 심사의 공정함을 위해 채택했던 이 룰은 '맛' 외의 요소가 평가에 관여되는 것을 배제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두 심사위원은 흑과 백의 음식을 맛본 뒤 한쪽에 투표하고, 동률이 나오는 경우 상의를 통해 최종 심사를 내린다. 이때 서로는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상대를 설득한다. 안성재는 요리에 창의의 개념을 넣어 손님에게 고가의 체험을 선사한 셰프라면, 백종원은 음식의 계량화를 통해 표준적인 맛을 대중에게 제시한 인물이다. '한 끼에 30만 원짜리 요리를 제공하는 셰프가 단가 6,000원짜리 식판 밥에 좋은 점수를 줄까', '7,000원짜리 짬뽕을 팔고, 1,500원짜리 커피를 파는 사업가가 파인 다이닝 요리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까'라는 일말의 우려는 이들의 심사를 보며 선입견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안성재 셰프는 급식 대가의 식판 밥을 맛본 뒤 "어린 시절 추억이 떠오르는 맛"이라며 극찬했고, 백종원은 트리플 스타의 음식을 맛본 뒤 "작은 음식에서 여러 가지 맛이 난다"며 단번에 합격을 외쳤다. 이들의 날카로운 심사를 통해 맛에는 계급과 등급이 없으며 고급진 맛과 저급한 맛도 없다는 것, 그저 맛있는 음식과 맛없는 음식만 있을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요리는 예술이고 음악이고 과학이구나' "제가 요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채소의 익힘이에요." "고기가 이븐(even)하게 익지 않았어요." 인터넷을 강타한 밈(meme)은 안성재 셰프의 심사평이었다. 채소와 고기의 익힘 그리고 음식의 간 등 요리의 기본기를 강조한 그의 심사평은 특유의 말투와 표정 그리고 진지한 태도가 합쳐져 하나의 예능으로 승화됐다. 대중에게 낯선 요리 대가를 관찰하는 재미와 그의 명성이 안겨다 주는 신비함도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이미 다수의 프로그램에서 확인된 백종원의 입담과 너스레 그리고 음식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경험치는 '역시'를 외치게 했다. 도전자들이 자신만의 철학으로 음식을 만들고, 심사위원들이 그 의도를 철석같이 알아차릴 때 발생하는 카타르시스는 '흑백요리사'의 진수다. 재료를 다루는 태도부터 음식을 완성하는 과정, 완성된 음식을 설명하는 프리젠테이션 등을 보고 있노라면 요리는 개인의 창의가 투영되는 예술이고, 화합의 결정체인 음악이고, 원인과 결과가 뚜렷한 과학이라는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흑백요리사'는 제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것을 보여주는 투명하고 정직한 여정이다. 또한 도전자들의 요리를 향한 철학과 열정에서 '왜 이들이 성공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답을 확인할 수 있다.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은 맞고, 또 틀리다. 땀과 노력은 언제나 숭고하다. 디자인 : 채지우
'주말에 뭐 볼까?'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스프가 알려드립니다. 2015년 개봉한 '베테랑'은 선이 악을 응징하는 사이다 액션으로 전국 1,341만 관객을 사로잡았다. 현실의 문제의식을 이야기의 주제로 삼아 관객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장르 영화의 문법으로 유려하게 풀어내며 영화적 쾌감을 안긴 수작이었다. 류승완 감독이 故 강수연이 사석에서 한 말에서 착안해 만들었다는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그해 최고의 대사로 각광받았고, "어이가 없네"라는 대사와 함께 보여준 유아인의 연기는 밈(Meme)으로 수년간 회자되기도 했다. 그로부터 9년, '베테랑'이 속편으로 돌아왔다. 데뷔 25년 차의 베테랑 연출자 류승완에게도, 데뷔 30년 차의 베테랑 배우 황정민에게도 생애 첫 속편이다. '베테랑2'는 성공한 영화의 속편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1편과의 비교가 불가피하다. 전편과의 연관성을 이어가면서 속편만의 개성과 색깔을 구축하는 것이 성패의 관건이다. "성공을 답습하고 싶지 않았다"는 류승완 감독의 말에서 속편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가 엿보인다. 실제로 '베테랑2'는 전편의 흥행에 취해 복사기에서 찍어낸 듯한 결과물을 양산하고 있는 여타 시리즈와는 달리 창작자의 고민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1편에서 "형사가 재벌을 때려잡는다" 식의 단순하고 직접적인 카타르시스에 열중했다면 2편에는 "사적 제재는 옳은가?", "정의란 무엇인가?" 등의 논쟁적 화두와 광범위한 질문을 던졌다. 영화는 주부 도박단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불법 도박장을 잠입하는 미스 봉(장윤주)과 이 작전을 진두지휘하는 서도철(황정민)을 위시한 형사들의 모습으로 문을 연다. 약 7분여의 오프닝을 통해 광역수사대에서 강력범죄수사대로 부서를 옮긴 형사 5인방의 건재를 알리고, 1편과의 연결고리도 보여준다. 오프닝의 박력은 배우들의 찰떡같은 호흡과 최영환 촬영감독의 수려한 카메라 워킹, 장기하의 경쾌한 음악이 더해져 단번에 관객을 이야기로 진입시킨다. '베테랑2'는 우리 사회에서 벌어졌거나 벌어질 법한 사건을 연이어 등장시킨다. 1편에서는 돈과 권력을 등에 업고 법 위에 군림하는 재벌의 범죄를 다뤘다면, 2편은 대중의 분노를 토대로 활개 치는 비질란테(Vigilante: 자경단)의 연쇄 살인을 재료 삼았다. 이 사건의 베일 뒤에는 이른바 '해치'라는 인물이 있다. 해치는 인면수심의 범죄를 저지르고도 법의 심판을 제대로 받지 않는 인물에게 사적 제재를 가해 대중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이 가운데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범죄자가 출소하고, 강수대는 해치의 타깃이 될 것을 우려해 보호관찰을 하게 된다. 인력 부족에 허덕이던 서도철은 UFC 선수 출신의 지구대 경찰 박선우(정해인)를 영입해 수사에 박차를 가한다. 영화는 '해치'의 존재를 초반부터 오픈한다. '베테랑2'는 수사 기법을 활용한 범인 잡기가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라 문제적 인물이 던지는 화두와 그의 범행이 남기는 논쟁적 질문이 핵심인 영화임을 알 수 있다. 2편의 빌런으로 등장하는 '해치'는 안하무인에 극악무도하며 법 위에 군림했던 1편의 빌런 '조태오'와는 다른 인물이다. 해치가 살인이라는 중범죄를 저지르고도 활개를 칠 수 있는 것은 대중의 사회를 향한 분노와 사법기관에 대한 불신을 기반 삼고 있기 때문이다. 해치의 행각은 '죽어 마땅한 인물을 죽인다'는 식의 자기 합리화와 살인을 게임처럼 즐기는 소시오패스적인 속성과 어우러져 점점 과감해진다. 영화는 사적 제재에 대한 화두를 던짐과 동시에 무분별한 온라인 정보의 폐해 그리고 언론의 책임도 묻는다. 해치를 영웅화하는 현상은 대중에게 언론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는 유튜브가 부추기고,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쉽게 꺼지는 대중의 속성을 이용하는 사이버 렉카들은 기승을 부린다. 이 중 '정의부장'이라는 유튜브 채널과 전직 기자 출신 유튜버 캐릭터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할 만큼 적극적으로 현실을 반영했다. 류승완 감독의 형사물은 땅에 발을 딛고 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사건과 인물 그리고 사회의 풍경은 허무맹랑한 판타지가 아닌 우리가 겪었거나 목도했던 것들의 연장선상이다. 이번에는 연쇄 범죄라는 이야기 구조를 활용해 성범죄, 학교폭력, 가짜뉴스, 사이버 마녀사냥 등의 여러 사건을 아우르며 이야기판을 키웠다. 나아가 서도철을 통해 '어른의 성찰'을 보여주고 '사과할 줄 아는 어른'이라는 모범 답안을 도출한다. '민중의 지팡이' 역할을 하느라 정작 '좋은 남편'이자 '따뜻한 아빠'이길 외면했던 '가장 서도철'의 반성의 시간까지 마련해 준 셈이다. 답을 선사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는 감독의 연출 의도는 이 영화의 결과물을 생각하면 다소 거창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대중이 범죄와 뉴스를 대하는 시선과 방식에 대한 질문은 꽤 묵직하게 다가온다. 논란과 현상에만 몰두하다 정작 진실과 거짓,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뀔 때는 태도를 바꿈으로써 자신을 변호하기에 급급했던 대중과 언론의 습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다만 류승완 감독의 의도가 영화의 결과물에 잘 투영됐는지는 평가가 나뉠 수 있을 것 같다. 감독이 다루려는 주제가 광범위한 것에 비해 평면적인 나열과 편의적인 마무리로 귀결된 감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안타고니스트에 사연을 부여하는 것을 경계했다는 류승완 감독의 말도 일견 이해는 가지만, 결국 인물의 동기에서 '왜'가 빠지면서 이 인물은 납작한 소시오패스에 그치고 만다. 또한 '비질란테'나 '노웨이 아웃' 등의 시리즈에서 이미 사적 제재를 다룬 바 있기 때문에 다소 식상하게 여길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테랑2'는 현 영화계를 이끄는 장인들이 만들어낸 준수한 결과물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지난해 '서울의 봄'의 전두광으로 관객들의 분노 게이지를 끌어 올렸던 황정민은 '베테랑'의 서도철로 돌아와 살아 숨 쉬는 형사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형사라는 직업인으로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는 서도철의 신념은 결국 류승완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다. "좋은 살인이 있고 나쁜 살인이 있어? 살인은 그냥 살인이야"라는 대사가 발화될 때 황정민이라는 배우의 역량이 오롯이 드러난다. 캐릭터를 체화하는 능력과 감독의 메시지를 캐릭터에 실어 보내는 에너지는 단연 발군이다. 정해인은 이번 영화로 커리어에서 하나의 전기를 마련했다. 말간 얼굴로 순정을 발산했던 로맨스 달인 이미지를 벗어나 격렬한 액션과 서늘한 얼굴을 보여주며 한 단계 성장을 이뤄냈다. '베테랑2'는 액션 영화로서의 진일보도 이뤄낸 작품이다. 폭우 속 옥상 액션, 남산의 계단 액션신은 '액션 장인' 류승완의 단단한 내공이 느껴진다. 또, 돋보였던 건 최영환 촬영감독의 촬영이다. 액션 장면도 인상적이지만 인물 클로즈업에서 스플릿 렌즈 효과를 활용해 긴장감을 높인 컷들은 특히 인상적이다. 디자인 : 채지우
'주말에 뭐 볼까?'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스프가 알려드립니다. 배우 윤여정은 '파친코'에서 자신이 연기한 '선자'를 '끼끗한 여자'라고 표현했다. 자신의 어머니가 즐겨 썼다는 이 말에 대해 "음... 영어 단어로 표현하면 디그니티(dignity)에 가까울 거예요. 얘는 그게 있어서 좋았어요. 프라이드(pride)랑 디그니티(dignity)는 또 다르잖아. 삶의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비굴하게 사는 사람도 있거든. 그런데 선자는 아니야. 저는 그걸 표현하고 싶었어요"라고 말했다. '끼끗하다'는 형용사는 ▲생기가 있고 깨끗하다, ▲싱싱하고 길차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지난달 23일부터 방송을 시작한 '파친코' 시즌2는 시즌1의 마지막 이야기로부터 약 7년 후인 1945년을 배경으로 한다. 일본 오사카에 정착한 선자(김민하)는 두 아들을 키우며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남편 이삭(노상현)은 감옥에 갇혀 감감무소식이고, 선자는 생계를 위해 거리에 나가 김치를 팔고 있다. "이제 어쩌시게요?" (창호) "버텨낼 깁니더. 항상 그런다 아입니껴. (선자) 삶의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는 선자의 방식은 '버텨낸다'다. 이건 방관이나 회피와 같은 수동적인 방식이 아니다. 선자는 불굴의 의지와 강인한 정신력으로 고난을 이겨낸다. 그리고 느리지만 나아간다. 더욱이 선자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자신의 목숨보다 귀한 두 아들, 노아와 모자수가 있다. 이 드라마의 원작 소설 '파친코'(이민진 作)는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라는 명문으로 시작한다. 이 한 문장에는 '파친코'의 이야기가, 선자의 삶이, 축약돼 있다. 선자는 배를 곯는 아이들을 위해 밀주 제조에 가담했다가 유치장에 갇히고 만다. 그러나 하루 만에 풀려나고 그 배후에 한수(이민호)가 있음을 알게 됐다. 14년 만에 마주한 한수는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떠나자고 제안한다. 이때 남편 이삭이 만신창이가 돼 집으로 돌아온다. 선자에게 또다시 고난과 선택의 시간이 펼쳐진다. '파친코'는 4대에 걸친 한인 가족의 이민사를 다룬 대서사시다. 훈이와 양진, 선자와 한수, 노아와 모자수,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4대의 서사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배제하고는 묘사할 수 없는 이야기다. 이 장대한 이야기에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희로애락이 함축돼 있다. 시즌2 역시 시즌1과 마찬가지로 선자의 과거와 선자의 손자 솔로몬의 현재 이야기를 병렬 구조로 전개한다. 별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이야기가 번갈아 나오는 건, 두 서사가 궁극적으로 같은 뿌리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선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개척해 왔던 것처럼 솔로몬도 세상과 부딪히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 현시대의 젋은 시청자들에게 보다 와닿는 고난은 한국과 일본, 미국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사회의 벽과 부딪히는 솔로몬의 이야기일 것이다. 선자의 고난이 가난이었다면, 솔로몬의 고난은 차별과 편견이다. 낯선 땅에서 자리를 잡는 게 관건이었던 1세대 자이니치(재일조선인)인 선자와 꿈을 펼치는 것이 중요한 3세대 자이니치인 솔로몬이 직면한 역경은 조금 다르다. 여기에 선자의 아들 노아와 모자수의 이야기가 더해져 보다 풍성한 재미를 더한다. 한 배에서 나온 형제지만 이들의 성격과 삶의 방식은 그들의 두 아버지처럼 달랐다. 노아는 공부로 세상에 우뚝 서기를 바랐고, 모자수는 부를 축적함으로써 사회의 차별과 편견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는 파친코로 큰 성공을 거둔다. 실제 1950년대 자이니치들이 일본에서 가장 많이 했던 사업이다. 아버지가 축적한 부의 울타리 안에서 안락하게 자랐지만 솔로몬은 윗세대들과는 또 다른 장벽에 부딪힌다. 솔로몬은 기회의 균등을 통해 자신의 역량을 펼치길 바라지만 세상은 이민자들에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처럼 시즌2에서는 선자뿐만 아니라 여러 인물의 이야기를 조명하며 풍성한 재미와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이 작품을 향한 글로벌 시청자들의 호평은 한국 문화와 민족의 특수성에 대한 관심보다는 이민자 서사에 대한 보편적 공감대 형성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파친코'는 한국 배우들과 자이니치 배우, 한국계 제작진이 힘을 합쳐 완성한 수작이다. 시즌1, 2의 제작과 각색에 참여한 수 휴와 시즌1을 연출한 코고나다와 저스틴 전 감독은 한국계 미국인이고, 시즌2 연출에 참여한 이상일 감독은 재일동포다. 이들에겐 한 번쯤 해보고 싶은 이야기였을 것이고, 누구보다 (정서적으로) 잘 아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김민하는 선자를 위해 태어난 배우처럼 보인다. 순수와 끈기가 동시에 보이는 얼굴, 그 시대에 태어난 것 같은 몸짓, 서울 태생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사투리 구사까지 신인 배우의 어설픔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시즌2를 촬영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연기로 '모성 표현'을 꼽았지만, 경험의 공백을 타고난 감성과 본능으로 보완해 냈다. 나이든 선자로 활약하는 윤여정은 더할 나위 없다. 오랜 시간과 경험이 축적된 관록의 연기는 '파친코'의 무게중심 역할을 한다. 멜로 드라마적 재미도 놓치지 않은 시즌2에서는 이민호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욕망과 결핍을 지닌 부유한 남성'이라는 전형적인 캐릭터를 특유의 남성적 카리스마로 소화해 냈다. * '파친코' 시즌1과 2를 관통하는 댄스 오프닝. 총천연색으로 꾸며진 파친코 업장 안에서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신명 나는 춤사위를 보여준다. 이 오프닝에서는 모든 캐릭터가 갈등과 반목 없이 한데 어우러진다. 느리고 깊은 호흡으로 전개되는 본편과는 180도 다른 신나고 경쾌한 시작이다. 우리는 예로부터 한의 민족인 동시에 흥의 민족이었다. 디자인 : 채지우
대한민국 격동의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10.26과 12.12 사건은 모두 1979년에 벌어진 일이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인 만큼 이 사건을 조명한 영화는 많이 나왔다. 대부분의 영화는 사건에 집중했다. 의견이 분분할 수 있는 인물에 대한 평가보다 사건에 그 자체에 현미경을 대는 것이 조금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를 사건보다 인물에 초점을 맞추려는 시도는 '서울의 봄'에서 어느 정도 이뤄졌고, '행복의 나라'에서도 이어지는 모습이다. 물론 '서울의 봄'은 12.12라는 사건을 전쟁 영화의 스펙터클로 풀어낸 장르적 쾌감이 인상적인 작품이고, '행복의 나라'는 법정 드라마라는 형식으로 더 진중하게 인물을 다룬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다만 이 승자라는 것은 시대와 평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승자든 패자든 영화에서는 스토리텔러가 될 수 있다. 또한 영화가 포커싱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주연이 되기도, 조연이 되기도 한다. 지난 14일 개봉한 '행복의 나라'는 1979년 10월 26일, 상관의 명령에 의해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된 '박태주'(이선균)와 그의 변호를 맡으며 대한민국 최악의 정치 재판에 뛰어든 변호사 '정인후'(조정석)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이선균이 연기한 박태주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수행비서였던 박흥주 대령을 기반으로 만들었으며, 조정석이 연기한 정인후는 박흥주 대령을 변호했던 변호인단의 여러 인물을 조합해 만든 가상의 캐릭터다. '행복의 나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김재규를 포커싱했던 종전 10.26 소재의 영화들과 달리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던 박흥주 대령과 그를 변호했던 이들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사건에 연루된 인물 중 유일한 현역 군인이었던 탓에 박흥주 대령은 군법에 따라 단심제 적용을 받았다. 내란 목적 살인죄로 기소된 박흥주 대령은 최후 진술에서 "현역 군인으로서 대통령을 시해(가담)한 데는 잘못을 인정한다. (중략) 당시 상황에서는 가장 적절하고 정확한 판단에 의해 행동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 결과 첫 공판 후 16일 만에 최종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영화를 보기 전 가지게 될 의문이 있다. '영화를 연출한 추창민 감독은 이 인물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다. 홍보 문구에서 강조하는 바는 '단, 16일 만에 졸속 진행된 대한민국 최악의 정치 재판'이다. 야만의 시대에 원칙이나 절차가 무시된 채 정해진 판결대로 진행된 정치 재판에 대해 비판하고, 불합리 속에서 고군분투한 사람들과 자신의 목소리를 내보지도 못한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어떤 인물에 대해서도 포커스를 맞춘다. 같은 사건을 다룬 영화가 많았기에 '행복의 나라'만의 노선을 걷고자 한 야심이 엿보인다. '행복의 나라'는 제2의 '변호인'과 같은 반향을 기대했을지 모르겠다. 실제로 정인후라는 인물의 변화, 각성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변호인'의 인권변호사 송우석(송강호)을 떠올리게 되는 지점이 있다. 정인후는 명예보다는 돈, 진실보다는 승리가 우선인 속물 변호사에서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고 불합리에 맞서는 인물로 변화한다. 그러나 '변호인'과 '행복의 나라'가 다른 점은 논쟁의 여지다. '변호인'의 경우 다루는 사건과 인물의 선악 구도, 가치 판단이 명확한 반면 '행복의 나라'는 그렇지 못하다. 박태주는 원칙주의자이자 청렴한 군인의 표상으로 그려진다. 돈보다 명예를 중시하는 군인이었고, 듬직한 남편이었으며, 따뜻한 아버지로 묘사된다. 실존 인물에 대한 인간적 면모는 부각되지만 정작 10.26 사건에서 그가 견해를 가졌고 어떤 자세를 취했는지는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물론 한정된 기록에 기반한 각색인 만큼 운신의 폭 자체가 크지 않았으리라 예상된다. 영화는 상관의 명령에 따랐다는 원칙과 소신만 강조할 뿐 그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대한 가치 판단은 유보한다. 박태주는 그를 변호하는 정인후에 의해 관찰되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그러다 보니 캐릭터의 입체화에 한계가 있고,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기에도 힘들다. 영화는 박태주를 정인후의 아버지에 대입하거나, 전상두와 대비하려는 듯한 시도를 하지만 이 역시 딱 떨어지는 조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전반적으로 제작진은 사실과 허구 사이에서 좀 더 과감하게 밀어붙일 용기까지는 없었던지 어느 정도 거리두기를 한 모양새다. 그러다 보니 이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문제의식이 머리로는 와닿으나 마음으로 동의하기 어려워진다. 시대의 야만성을 묘사하고 그로 인해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인물을 조명하지만, 관객의 마음을 쉽사리 울리지는 못한다. 이 영화에서 하나의 감정으로 몰입할 수 있는 대상은 전상두로 대변되는 시대의 괴물이다. 이 인물은 이견의 여지가 없는 역사의 악인이다. 영화는 후반부 정인후와 전상두의 골프장 대화 장면을 통해 '공분'이라는 감정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려고 한다. 정인후는 직접적 메시지를 담은 대사로 울분을 토해내고, 그에 맞선 전상두의 뻔뻔한 궤변은 분노를 자극한다. 그러나 전상두에 대한 공분이 정인후의 울분과 박태주의 비극과 만나 더 큰 분노가 된다거나 더 큰 슬픔으로 다가오는 시너지를 내지는 못한다. 분명 유기적으로 엮였다면 더 큰 영화적 효과를 낼 수 있었지만 두 쟁점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한 채 따로 공존한다. 이런 아쉬움들은 결국 '영화가 무엇을 이야기하려는가'와 같은 최초의 의문과 만나게 된다. 야만의 시대를 고발하는 이야기는 앞서 수많은 영화들이 해온 작업이라 동어반복이 되고, 역사의 뒷면을 파헤치는 이야기로서는 밀도가 높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의 나라'는 관객에게 형언할 수 없는 비애를 남기는 작품이다. 영화 안의 서사와 밖의 서사가 충돌하면서 묘한 감정을 발생시킨다. 이 작품은 박태주를 연기한 배우 이선균의 유작이다. 박태주와 이선균은 다른 삶을 살았고, 공통분모도 없지만 박태주의 뒤안길이 곧 이선균의 뒤안길처럼 포개진다. 이선균은 이 작품에서 정중동(靜中動)의 연기를 펼쳤다. 스스로 의도하지 않았으나 들이닥친 고난을 묵묵히 감내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대사의 공백을 채우는 건 표정이다. 그의 표정에서 복잡한 속내가 읽힌다. 박태주는 정인후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당신은 참 좋은 변호사야"라고 말한다. 영화를 본 어떤 관객들은 이선균에게 "당신은 참 좋은 배우야"라는 말로 되돌려주고 싶은 마음을 느낄 것이다. '행복의 나라' 엔딩 크레딧에는 한대수의 동명의 노래가 흐른다. 이선균을 향한 레퀴엠처럼 다가온다. 아, 나는 살겠소 태양만 비친다면 밤과 하늘과 바람 안에서 비와 천둥의 소리 이겨 춤을 추겠네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디자인 : 채지우
몇 해 전 개봉했던 애니메이션 영화 '짱구는 못 말려'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방송심의소위 권고를 받은 바 있다. 극 중 짱구가 여자친구를 향해 "홍일점이야", "드디어 방위대에도 예쁜 꽃이 피었네"라고 한 말이 문제가 됐다. 방통위는 '홍일점', '예쁜 꽃' 등의 표현이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심을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 세상이 달라졌다. 과거라면 크게 문제 되지 않았을 표현들이 이제는 문제가 된다. 성 평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성 역할의 고정관념을 타파하자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우리 실생활은 물론 대중문화 콘텐츠에서도 이를 적극 수용하는 분위기다. 어린이 관객이 주 타깃인 애니메이션도 예외는 없었다. 지난달 31일 개봉해 7일 만에 전국 2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파일럿'(감독 김한결)은 흥미로운 소재로 출발한 코미디 영화다. 회사 내 실언으로 하루아침에 해고당한 파일럿이 재취업을 위해 여장까지 감행하는 설정으로 크고 작은 웃음을 선사한다. 1인 2역을 감행한 조정석의 '코믹 원맨쇼'에 크게 기대고 있는 영화지만 다루고 있는 소재가 그렇게 가볍지 않다. 젠더 이슈를 끌고 와 의미 있는 화두를 던진다. 휘발되는 웃음 속에서도 생각할 무언가를 남긴다는 것은 '파일럿'의 미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소재를 다루는 방식이 다소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여름 극장가의 다크호스로 떠오르며 흥행 질주를 이어가고 있는 '파일럿'의 호불호를 따져봤다. 조정석의 여장 남자 코미디…'원맨쇼'는 통했다 파일럿 한정우(조정석)는 뛰어난 비행 실력으로 TV 프로그램까지 나올 정도로 신임을 얻은 인재다. 그러나 회사 회식 자리에서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재벌 2세를 막기 위해 실언을 해 구설에 오른다. 재벌 2세가 자사 승무원들의 외모를 품평했고, 한정우는 싸늘해진 분위기를 무마하고자 "꽃다발 같은 승무원"이라는 발언을 하고 만다. 이 현장은 누군가의 핸드폰에 기록되고, 온라인 커뮤니티로 퍼진다. 한정우는 여성 차별적 발언을 한 파일럿으로 낙인찍혀 하루아침에 해고되고 만다. 설상가상 아내에게 이혼당하고 집에서 쫓겨난 한정우는 다달이 나가는 양육비와 대출 이자 등 경제적 압박에도 시달린다. 재취업의 문을 두드리지만 업계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라가 있어 번번이 면접에서 탈락하고 만다. 어느 날, 한 항공사에서 성 비율에 맞춰 파일럿을 채용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동생의 이름을 빌려 지원서를 낸다. 동생의 도움으로 '한정미'로 변신한 한정우는 덜컥 면접에 통과하고 입사까지 하게 된다. 영화 '파일럿'은 미국 영화 '투씨'(1983), '미세스 다웃 파이어'(1994)를 연상케 하는 여장 남자 이야기를 그린 코미디 영화다. 이 작품의 웃음 타율은 한정우와 한정미를 연기하는 조정석의 원맨쇼를 받아들이는 관객의 자세에서 결정된다. 한정우가 여장 남자임을 들키지 않게 고군분투하는 모습 자체가 웃음 포인트기 때문이다. 각 잡고 싱크로율을 따질 관객에겐 허점이 많은 영화이고,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준비가 된 관객에겐 꽤 타율 높은 코미디가 될 것이다. 조정석은 코믹 연기에 능한 배우다. 영화 '건축학개론'(2012)에서 '납득이' 캐릭터로 스타덤에 올랐던 조정석은 코미디 영화에서 특유의 재기와 무표정, 대사를 뱉어내는 리듬감을 통해 말하는 사람은 진지한데 듣는 사람은 웃게 하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왔다. 940만 흥행작 '엑시트'(2019) 이후 5년 만에 코미디 영화로 돌아온 조정석은 '원맨쇼'에 가까운 활약으로 영화를 이끈다. 한정우에서 한정미로 변신한 후 벌어지는 일련의 해프닝들은 '조정석의, 조정석에 의한, 조정석을 위한' 장면들이다. 치마를 입고 아무렇지 않게 '쩍벌'을 하는 모습이라던가, 여자 목소리를 내다가 자기도 모르게 남자 목소리를 내는 장면, 클럽에서 플러팅해 오는 남자를 단번에 응징하는 과격함은 일차원적인 코미디임에도 조정석이라는 필터를 거치며 '확실한 웃음 한 방'으로 탈바꿈한다. 오히려 웃음을 방해하는 건 한정미가 된 한정우를 아무런 의심의 눈초리 없이 받아들이고, 과장되게 반응하는 주변 캐릭터들이다. 이들의 호들갑이 작위적이라 몰입을 방해한다. 이 영화의 허술함을 따지고 들자면 한도 끝도 없다. 여장으로 대기업 채용 절차를 가볍게 통과하는 말도 안 되는 전개라든가 숱한 위기에도 불구하고 동료가 끝까지 변신을 알아채지 못하는 허술함은 어쩔 것인가. 관객은 '그렇다 치고'를 눈감아줄 준비가 됐는데 영화가 자꾸 '감쪽같은 척'을 하는 것이 오히려 어색하게 다가온다. 물론 관객의 시선에는'(아무리 분장을 해도 도저히) 조정석이 여자 같지 않다'라는 외모 평가가 어느 정도 투영돼 있다. '누가 봐도 여자 같지 않은 데 웬 호들갑?'과 같은 반감이랄까. 이 반감은 '넓은 어깨', '근육질 다리', '이상한 목소리' 등 한정미에 대한 외모 평가가 작동했으며, 이는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젠더 이슈를 다룬 영화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소재의 날카로움, 이야기의 현실성을 따지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이 과정에서 캐릭터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서 고정관념과 편견을 발견하게 되다. '파일럿'이라는 영화가 선사하는 흥미로운 순간이다. 젠더 이슈, 시도는 좋았으나…얕은 웃음에 휘발된 깊이 상업 영화에서 젠더 이슈를 다룬 경우는 많지 않았기에 '파일럿'의 주제 의식은 꽤 도발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소재를 다루는 방법과 태도는 아쉬움을 자아낸다. 시의성과 주목도가 높은 젠더 이슈를 영화의 소재로 가져오는 영민함을 보였지만, 이 이슈를 다루는 날카로움은 발견하기 어렵다. 풍자보다는 일차원적인 코미디의 웃음 소재로 활용한다. '못했다'기보다는 '안 했다'에 가깝다. 감독과 배우가 가벼운 코미디와 묵직한 주제 사이에서 내놓은 절충점이 지금의 결과물이다. 다소 논쟁적이고 갈등을 야기할 수 있는 이슈인 만큼 영화는 핵심에서 발을 한 발 빼고, '여장 남자 한정우의 한정미 되기'라는 해프닝에 집중한 모습이다. 산발적인 에피소드를 연이어 나열하면서 크든 작든 웃음 잽을 날리는 데 집중했고, 이 구성 안에서 조정석의 원맨쇼가 빛을 발했다. 영화는 직장 사회에서 여성의 애환과 애로사항을 대변하는 인물로 '윤슬기'(이주명)라는 캐릭터를 내세운다. 한정우와 한에어 면접에서 경쟁한 윤슬기는 "남자친구도 없고 결혼 생각도 없다"며 사회생활에서 여성의 핸디캡으로 지적되는 요소를 미리 차단한다. 윤슬기는 한정우를 제치고 한에어에 먼저 입사했고, 추후 한정미로 변신한 한정우와 함께 특별한 우정을 나눈다. 남녀 사이일 때 경쟁자였던 두 사람은 같은 성(性)으로 재회해서는 연대한다. 윤슬기는 회식 자리에서 '예쁘다'는 말이 왜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에게 불편하고 부당한 평가인지를 상사에게 당차게 말하는 여성이다. 윤슬기의 롤은 한정미의 절친 동료에 그치지 않고 후반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파일럿'을 연출한 김한결 감독은 한정미와 윤슬기의 교감이 한정우가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고 인식을 전환하는 계기로 기능하길 의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후반부 한정우의 각성은 그 대상과 내용이 명확해 보이지 않는다. 영화 전체를 놓고 봐도 여장 남자 한정우의 애로사항은 부각되지만 여성 한정미의 애환은 크게 와닿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파일럿'은 젠더 이슈를 상업 영화에 과감하게 가져왔음에도 그 소재를 얄팍하게 풀어낸 데 그쳤다는 아쉬움도 남긴다. 디자인 : 채지우
실패한 코미디는 대부분 코미디언이 '웃기는 사람'이 아닌 '우스운 사람'으로 전락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만큼 사람을 웃기는 일은 울리는 일보다 어렵다. 위대한 코미디언은 위대한 배우이기도 하다. 인간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연기력이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기타노 다케시(北野武), 일본 대중문화계에서 '만능 엔터테이너'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로 코미디언이자 배우, 영화감독으로도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코미디언 시절 독설 개그로 이름을 알렸으며, 한국에선 혐한(嫌韓) 발언을 일삼은 대표적인 일본 인사로 알려지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배우로서 최고작이라 꼽히는 영화는 재일교포 최양일 감독이 연출한 '피와 뼈'(2004)였고, 다케시는 이 작품에서 재일 한국인 김준평을 연기해 찬사를 받았다. 그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알려진 건 1998년 1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전후다. 영화 개방의 경우 세계 4대 영화제 수상작이 기준이 되면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이었던 '하나-비'가 가장 먼저 개봉했다. '하나-비'는 기타노 다케시 감독이 여섯 번째로 연출한 영화이자 그의 대표작이다. 인기 코미디언이었던 기타노 다케시는 1989년 '그 남자 흉폭하다'로 영화감독으로 데뷔했고 '키즈 리턴', '소나티네', '하나-비', '기쿠지로의 여름', '자토이치', '아웃레이지' 3부작 등을 만들며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으로 우뚝 섰다. 넷플릭스에서 만날 수 있는 영화 '아사쿠사 키드'는 '코미디언 기타노 다케시'의 뿌리에 관한 영화다. 기타노 다케시의 동명 자서전을 바탕으로 한 '아사쿠사 키드'는 '비트 다케시'를 있게 한 스승 후카미 센자부로에 대한 헌사를 담은 작품이다. 이 영화의 감동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인 실화의 힘과 야기라 유야, 오오이즈미 요의 빼어난 연기에서 나온다. "우스운 사람이 아닌 웃긴 사람이 돼라"…사부의 철학 학생운동이 문제가 돼 대학에서 제적당한 다케시(야기라 유야)는 도쿄 아사쿠사에 위치한 프랑스좌라는 스트립쇼 극장에서 엘리베이터 보이로 일한다. 프랑스좌는 스트립쇼와 코미디 콩트를 하는 극장으로 아사쿠사의 인기 코미디언 후카미 센자부로(오오이즈미 요)가 이끌고 있다. 극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다케시는 무대를 휘어잡는 센자부로의 능력에 반해 그를 동경한다. 다케시의 강단을 눈여겨본 센자부로는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고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치기 시작한다. 무대 데뷔를 앞두고 광대에 가까운 여장 분장을 한 다케시에게 센자부로는 벼락같이 화를 낸다. "바보 녀석! 게닌(芸人: 타인을 웃기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직업인)이라면 웃음거리가 되는 게 아니라 웃게 만드는 거야!" 센자부로는 코미디언에게는 개인기 하나쯤은 필요하다며 탭댄스를 가르치고, 무대 연기의 기본기도 가르치지만, 그가 끊임없이 강조한 것은 코미디언의 철학이자 신념이었다. 그는 기타노에게 코미디언으로서의 기본자세는 물론이며 멋과 자존심을 지키며 희극 배우로 사는 법을 가르쳐 준다. 센자부로는 다케시의 개그에 반응하는 관객을 향해 "함부로 웃어주면 이 자식에게 독이 된다"며 웃음에 엄격해지길 요구하기도 한다. 영화에서 센자부로는 '낭만 광대'로 그려진다. 꿈과 생계 사이에서 주저 없이 꿈을 선택하는 사람, 돈과 자존심 사이에서 자존심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제자였던 다케시는 가슴에 뜨거운 꿈을 품은 청년이었지만 동시에 냉철한 현실주의자기도 했다. 무대에서 펼치는 콩트의 시대가 저물고 TV쇼에서의 만담이 흥하기 시작하면서 다케시에게도 인생을 바꿀 선택의 순간이 다가온다. '어떻게 살 것인가?'…꿈을 향한 열망과 인생의 방향에 관한 영화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청춘'과 '꿈'이다. 20대의 다케시는 꿈을 품었고, 꿈을 이뤘고, 꿈을 확장해 나갔다. "청춘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는 사무엘 울만의 말처럼 센자부로 역시 청춘의 한복판에서 늘 꿈을 꾸고 낭만을 추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센자부로는 '웃기는 사람'과 '웃는 사람'이 한 공간에 공존하는 극장 무대를 누구보다 사랑했고, 다케시가 이를 계승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다케시는 센자부로의 옛 제자인 키요시의 제안으로 만담에 도전한다. 프랑스좌를 떠난 다케시는 만담에 리듬(비트)을 접목한 개그로 TV에서도 대성공을 거둔다. 이렇게 만담 콤비인 '투 비트', 기타노 다케시의 또 다른 아이덴티티 '비트 다케시'가 탄생했다. 다케시의 성공 신화는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전형이 아닌 '기회가 있으면 잡아라'의 본보기에 가깝다. 물론 애드리브를 기반으로 한 공격적이고 빠른 말투, '빠카야로'(ばかやろう:바보)를 연발하는 거친 언행, 무대와 영화에서 선보인 탭댄스는 모두 스승 센자부로의 영향 아래서 완성된 트레이드 마크다. '아사쿠사 키드'는 코미디의 유행이 콩트에서 만담으로 넘어가는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고, 스승과 제자의 상반된 선택을 보여주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꿈의 형태와 인생의 방향에 관한 정답은 없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다만 흔들리는 청춘 앞에 나침반이 되어줄 스승이 있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이 영화는 보여준다. 다케시에겐 그런 존재가 있었고, 다케시는 그 존재를 잊지 않고 기렸다.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 하면 '야쿠자'를 다룬 영화로 일가를 이룬 거장으로 알려졌지만, 그는 청춘에 관한 영화도 만들었다. 바로 '키즈 리턴'(1996)이다. 어른 사회에 발을 디디는 청춘 군상을 그려내며 진한 감동을 선사한 작품이다. '아사쿠사 키드'를 보고 있자면, '리즈 리턴'의 끝을 장식한 명장면과 명대사가 떠오른다. "마쨩, 우리들 이제 끝난 걸까?" "바보'(ばかやろう), 아직 우리는 시작도 안 했어!" 기타노 다케시가 만담을 하면서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가 바로 '빠가야로'다. 진짜 바보를 지칭하는 말이 아닌, 상대를 꾸짖듯 일깨우는 표현에 가깝다. 이는 그의 스승 센자부로가 즐겨 쓴 말이기도 했다. 디자인 : 채지우
배우는 매 작품마다 캐릭터라는 가면을 쓴다. 감독이나 작가나 디자인한 가면을 쓴 배우는 타인의 삶을 연기하며 대중과 교감한다. '나'를 지우고 '캐릭터'로 사는 것, 이건 배우의 숙명이다. 이 역할극을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예능 프로그램에서 볼 기회가 생겼다. JTBC에서 방영되고 있는 '마이 네임 이즈 가브리엘'(이하 '가브리엘')이다. '가브리엘'은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세계 80억 인구 중 한 명의 이름으로 72시간 동안 '실제 그 사람'의 삶을 살아가는 관찰 리얼리티 예능이다. '그 사람'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사람, 영웅, 힘'이라는 뜻으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등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들에서 주로 하느님의 전령(傳令)으로 전해지는 대천사이다. 종교적 의미 부여라기보다는 성스러운 타인의 고귀한 삶을 체험한다는 의미를 담은 이름으로 해석된다. 방송의 포문을 연 가브리엘은 박보검이었다. 타인의 삶을 연기하는 것이 숙명인 배우이기에 프로그램에 콘셉트에 잘 부합하는 인물처럼 여겨졌다. 박보검은 아일랜드 더블린으로 건너가 합창단 램파츠의 단장 '루리'로 72시간을 살았다. 작품이 아닌 현실에서 누군가의 삶을 빌려 사는 건 흔치 않은 경험이다. 배우라 할지라도 이입과 적응이 쉽지 않은 도전이다. "그의 삶에 누가 되지 않겠다"는 각오로 임한 박보검은 특유의 친화력과 다정함, 예의와 배려로 '루리'의 삶에 빠르게 침투했고, 젖어 들었다. '지휘자 루리'에도 투영된 박보검의 무해함 더블린으로 날아간 박보검은 프로그램의 콘셉트에 맞게 철저히 '루리'의 삶을 살고자 했다. 프로그램의 장르는 예능이지만 박보검이라는 필터를 거치자 예능이 아닌 다큐멘터리가 됐고, 코미디가 아닌 드라마가 됐다. 그도 그럴 것이 '루리 보검'에게는 자연스레 박보검의 아이덴티티와 퍼스널리티가 투영됐다. '루리 보검'의 72시간을 담은 세 편의 에피소드에서는 '보검인 듯, 보검 아닌, 보검 같은 루리'를 만날 수 있었다. #1. 램파츠의 연습실. 단장 루리 보검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보면대 앞에 서서 자리한 멤버들을 쭉 둘러봤다. 어딘가 어색해 보인다. 단원들은 루리를 잘 안다는 듯 행동했지만, 루리는 그런 단원들이 낯설기만 하다. 그 어색함과 답답함을 극복하지 못한 루리 보검은 멤버들에게 자기소개를 부탁했다. 루리 보검은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단원들을 하나하나 아이컨택 하며 이름과 얼굴을 익혀나갔다. 낯설지 않은 모습이었다. 지난 6월 '원더랜드' 인터뷰 현장에서 본 그 모습이었다. 박보검은 인터뷰장에 들어선 기자들의 명함을 일일이 챙겼다. 그리고 자신의 탁자 위에 명함을 배열한 뒤 기자들과 눈을 맞춰 인사했다. 과거 한 차례라도 인터뷰를 나눴던 인연이 있는 기자에겐 안부를 물으며 '나는 당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 배우가 출석 체크하듯 기자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생경한 풍경이었지만, 무려 5년 만에 나선 언론 인터뷰에서 수년 전 만난 기자의 얼굴을 기억하는 것도 놀랍게 느껴졌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지라도 그 소중함을 아는 사람, 박보검은 그런 인물이었다. #2. 대망의 성패트릭 데이 버스킹 공연을 앞둔 루리는 마지막 연습에 앞서 램파트 단원들의 출석을 체크했다. 이틀 전의 루리가 아니었다. 그는 48시간 만에 램파츠 단원 24명의 이름을 모두 외웠다. 한 명 한 명의 눈을 바라보며 직접 호명했다. 그 순간에 대해 박보검은 말했다.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마이 네임 이즈 가브리엘'은 기획 의도는 참신했으나 아쉬움도 적잖은 프로그램이다. 이를테면 대중이 궁금해하는 건 '인간 박보검'이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단장 루리 오 달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낯선 기획 앞에서 '과연 시청자들이 보고 싶을 것일까'에 대한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물론 '보통의 삶'이 주는 특별한 감동이 있다. '유 퀴즈 온 더 블록'이나 '틈만 나면'과 같은 일반인 대상 예능이 주는 각본 없는 재미와 감동은 평범한 사람들의 살아내는 비범한 하루에서 출발한다. '가브리엘'의 애매함은 연예인과 일반인의 삶을 섞는다는 데서 비롯된다. 역할극과 진짜의 삶이 뒤섞일 때 드는 '가짜가 아닌가' 하는 자각은 순도 넘치는 감동을 일부 갉아먹는다. 대중은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사는 '루리 보검'이 아니라 '박보검'이 더 궁금하다. 이 기획의 불완전함을 채우는 것은 결국 인물이었다. 루리의 삶을 빌려, 그의 역할을 대신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인간 박보검'의 퍼스널리티는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재미였다. "보검 씨, 또 울어요?"…숱한 눈물의 의미 '가브리엘'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박보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몸에 밴 듯한 예의와 배려,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무해한 미소, 인격이 드러나는 정돈된 언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박보검이었다. 미처 몰랐던 것은 그의 섬세하고 여린 내면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박보검을 눈물을 여러 번 볼 수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눈물을 보인 건 김태호 PD와의 사전 인터뷰에서였다. '만약 연기자라는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다면?'이라는 질문에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사람의 눈물은 아주 많은 비율로 '사연' 혹은 '사정'으로 해석된다. 늘 웃는 얼굴로 대중에게 '행복 바이러스'를 선사해 온 박보검에게도 '터놓지 못한 이야기가 있겠구나'라는 해석이 가능한 장면이었다. 물론 그는 이 눈물의 의미를 애써 설명하지 않았다. 13년의 연예계 생활을 돌이켜 봤을 때 떠오른 상처와 아픔이 있음을 짐작할 뿐이다. 박보검의 이 눈물은 해사한 미소보다 더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또 다른 눈물은 루리의 부모님을 만나러 간 에피소드에서 나왔다. 세상에서 '나'라는 사람을 가장 잘 아는 존재가 부모이기에 이 이벤트는 '루리가 된 보검'을 인정받는 자리기도 했다. 그 어떤 자리보다 긴장했던 루리 보검은 은발의 두 노인의 정겨운 미소와 다정한 분위기에 스며들었다. 배우였던 두 사람이 극단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했으며, 가정을 이룬 가족의 역사를 들으며 박보검은 웃고 울었다. 가장 뜨거웠던 눈물은 램파츠와 이별하는 순간에 나왔다. 버스킹 공연을 마치고 멤버들과 술잔을 기울이던 박보검은 '마법 같은 순간'을 맞이했다. 팀원들은 '루리 보검'을 위해 즉석 아카펠라 공연을 준비했고, 프랭크 시나트라의 '컴 플라이 위드 미'(Come Fly With Me)를 선사했다. "나와 함께 날아봐요"라는 노랫말에 이르자, 그는 감격에 찬 눈물을 흘렸다. 박보검은 음악의 힘을 아는 사람이다. 어린 시절 한때 가수를 꿈꿨고, 대학에서 뮤지컬학을 전공했으며, 졸업 공연 때 연기가 아닌 음악감독을 맡지 않았던가. 그런 그에게 루리로서의 72시간은 음악의 마법과 인연의 힘 그리고 감정의 교감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박보검은 최근 인터뷰에서 자신만의 특별한 능력으로 '공감 능력'을 꼽은 바 있다. 타인의 삶을 체험하고 온 박보검은 루리를 통해 자신을 돌이켜봤다. 그리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박보검답게. "누군가가 만약 내 삶을 대신 산다면 '나는 잘 살아왔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램파츠 단원들이 '루리가 내 인생을 바꿔줬다'라고 했을 때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나(박보검)는 잘 살았나 싶었죠. 저도 루리처럼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잘 살아 보겠습니다." 디자인 : 채지우
사람들이 돈을 쓸 때 가장 중요시하는 요소가 가성비와 가심비다. '가격 대비 성능'과 '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을 뜻하는 이 말들은 지갑이 얇아진 시대에 더 까다롭게 적용된다. 영화의 재미로 관람료를 책정할 수 있다면, 최근의 한국 영화에 대한 관객의 적정 관람료는 얼마일까. 저마다의 기준으로 다른 가격을 제시하겠지만 확실한 것은 1만 5천 원까지 오른 관람료가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관객은 많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쳐온 영화계는 관객들의 가심비를 만족시켜 주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재미도 없는 영화를 1만 5천 원에 보라고?"라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관객들은 한 달에 1만 원 남짓한 돈만 내면 무제한으로 드라마와 영화를 볼 수 있는 OTT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위기의 극장은 관객의 발길을 돌리기 위해 여러 방안을 모색해 왔다. 영국의 좌석 차등제라던가 프랑스의 정액제 같은 이야기도 물밑에서 나왔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이 많고 실현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워 사담에 그칠 뿐이었다. 문제는 영화였다. 아무리 위기라도 영화가 재밌으면 관객을 찾는다는 것을 '파묘', '범죄도시4'의 천만 흥행이 보여줬다. 연중 가장 많은 영화들이 쏟아지는 여름 시장을 앞두고 국내외 기대작들이 잇따라 개봉하기 시작했다. 이 길목에서 매우 도전적인 시도가 있어 눈길을 끈다. 손석구 주연의 영화 '밤낚시'의 개봉과 선전이다. 12분 59초 분량의 단편 영화가 극장에 개봉을 한다는 것부터 화제였다. 관람료는 단돈 1천 원. 간식거리를 의미하는 '스낵'을 영화와 연결시켜 '스낵무비'라는 네이밍으로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가심비에 중점을 둔 흥미로운 시도다. 영화를 기획한 현대자동차와 공동제작한 스태넘과 마켄필름 아시아 그리고 과감하게 극장의 문을 열어준 CGV의 협업이 만들어낸 도전이다. '광고 영화' 한계 극복한 참신한 단편…제약이 만들어낸 독창성 '밤낚시'는 어두운 밤 전기차 충전소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다룬 휴머니즘 스릴러. 한 줄의 로그라인만 보면 뻔한 단편 영화가 예상되지만, 근래 보기 드문 신선도를 자랑한다. 이 작품은 현대자동차가 전기차 '아이오닉5'를 광고하기 위해 기획됐다. 태생적 한계로 인해 자동차의 디자인이나 기능을 부각한 '광고성 영화'가 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공개된 작품에서는 광고보다 영화가 먼저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자동차의 외형이 풀샷으로 나오지 않는다. '밤낚시'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콘셉트가 명확했다. 이른바 '자동차의 시선을 담은 영화'. 연출을 맡은 문병곤 감독은 이 콘셉트를 바탕으로 시나리오(문병곤·홍석재 공동 집필)를 개발했고, 조형래 촬영감독은 전기차에 달린 7개 카메라로 촬영을 진행했다. 자동차가 전면에 부각되는 일은 없지만 자동차 카메라의 동선 내에서 인물의 액션이 벌어지기 때문에 관객의 시선은 내내 자동차 언저리에 머물게 된다. 정체불명의 남자 로미오(손석구)는 외부로부터 어떤 지령을 받고 늦은 밤낚시에 나선다. 그가 당도한 곳은 인적이 드문 전기차 충전소다. 로미오의 본격적인 낚시가 시작되면 꽤나 역동적인 액션이 펼쳐지는데 자동차의 전면, 후면, 측면, 실내에 설치된 카메라 7대가 인물의 동선에 따라 교대로 움직인다. 스크린 상단에는 자동차 모양의 그림을 삽입해 현재 어떤 위치의 카메라가 움직이는지 표시가 된다. 콘셉트와 형식만 부각되는 건 아니다. 스토리텔링도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영화는 시작부터 미스터리한 무드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고 예측할 수 없는 전개로 관객의 허를 찌른다. 낚시의 대상 또한 반전 카드로 작용한다. 단편 영화는 장편과 달리 기승전결의 구조와 논리적 플롯을 요하지 않는다. 참신한 아이디어와 확실한 임팩트가 중요하다. '밤낚시'는 미니멀한 설정으로 제작 효율을 높였고, 적게 보여주면서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한다. 영화가 끝나고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건 덤이다. '칸의 총아' 문병곤 감독, 11년 만의 귀환 "경찰 보디캠서 영감" 영화를 연출한 문병곤 감독은 대중에게는 다소 낯설 수 있지만 영화계에서 오랫동안 주목받아 온 인물이다. 문병곤 감독은 2013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영화 '세이프'로 단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전 세계에서 가장 잘 만든 단편 영화들이 경합을 벌이는 이 부문에서 한국 영화가 최고상을 받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후 문병곤 감독은 국내외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여러 제안을 받았지만 장편 데뷔작 작업에 몰두했다. '세이프'의 장편화 작업을 꽤 오랫동안 준비했지만 결실을 맺지 못했고, 드라마와 영화 등 여러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오랜 지인인 손석구가 현대자동차의 이번 계획을 제안하며 '밤낚시'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자동차의 시선을 담은 영화'라는 기획은 제약이 아닌 장점으로 작용했다. 문 감독은 "이야기가 있어 영화를 찍자고 한 게 아니라 '자동차 영화'라는 기획이 있고 그에 따른 이야기를 찾다 보니 '뭐가 좀 더 적당할까'를 고민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 결과, 푸티지 영상 형식을 떠올렸다. 어떤 집단에서 증거 확보용으로 쌓아놓은 영상인데 그중 한 파일이 유출된 것처럼 연출하고 싶었다. 유튜브에서 본 경찰 보디캠 영상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기록 영상 포맷으로 보이기 위해 스크린에 시간, 위치, 목표물을 지칭하는 영어식 표기 등을 영상에 표기했다"고 밝혔다. 또한 영화의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낚시의 대상에는 '공생'의 메시지도 담았다. 로미오와 낚시 대상과의 사투는 유튜브에서 본 물개 구조 영상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전했다. 촬영은 강원도 홍천의 폐주유소와 인근 강가에서 이뤄졌다. 지난해 8월 촬영에 돌입해 총 3회 차에 촬영을 마쳤고, 약 4개월의 후반 작업을 통해 영화를 완성했다. 사운드는 영국, CG는 독일 업체에 맡길 정도로 공들인 공정을 거쳤다. 당초 유튜브나 OTT를 통한 공개를 계획하기도 했지만 사운드와 영상미가 두드러지는 영화의 특성상 극장이 최적의 환경이라는 판단으로 극장 개봉을 추진했다. 현대자동차는 마케팅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극장 개봉 추진과 함께 해외 영화제 공략에도 힘을 쏟았다. 지난 1월 열린 미국 선댄스 영화제의 프로그램 중 하나인 '셰프 댄스'를 통해 영화를 첫 공개했고, 판타지아 국제영화제를 비롯해 유수의 해외 영화제 출품 및 초청도 이뤄지고 있다. 단돈 1천 원에 유료 상영…'부율' 포기한 도전 영화계에서 '밤낚시'를 주목한 이유는 따로 있다. 보통의 단편 영화가 영화제에서 상영하고 마는 것과 달리 '밤낚시'는 유료로 극장에 정식 개봉했다는 점이다. 물론 과거에도 사례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33분 분량의 단편 '김광석: 못다 한 이야기'(2022), 26분 분량의 '에이핑크 스페셜 무비: 혼'(2022) 등도 유료로 개봉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타깃층이 확실한 음악 다큐 형식의 영화였고 관람료도 각각 6천 원과 5천 원이었다. '밤낚시'를 단독 상영 중인 CGV 측은 "최근 숏폼 콘텐츠에 대한 관객의 관심이 늘고 극장에서도 '한번 해보자'라는 생각을 한 끝에 나온 결과다. 현대자동차와 스태넘, CGV의 니즈가 맞아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손석구 주연의 영화라 관객들의 관심도 높았다"라고 전했다. 다만 스크린 편성과 극장 운영에 있어 들어가는 비용이 적잖기 때문에 부율(극장 매출을 배급사와 극장이 나눠 갖는 비율. 보통 한국 영화는 배급사와 극장이 5:5로 나눔)은 나누지 않고 모두 극장이 가져가는 것으로 결정됐다. 극장 입장에서는 13분짜리 단편 영화를 상영한다고 해도 회차마다 30분의 텀을 두기 때문에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19일 CGV에서 개봉한 '밤낚시'는 첫 주 3일 만에 1만 명을 돌파했으며 2주 차까지 3만 명에 육박하는 관객을 모았다. 3만 명에 육박하는 유료 관객 수도 고무적이었지만 1주 차 평균 60%, 2주 차 평균 40%를 돌파한 좌석 판매율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 좌석 판매율은 점유한 좌석에 실제 관객이 들어찬 비율을 뜻한다. 통상적으로 30%만 넘어도 상업 영화에서는 높은 수치로 평가된다. 보통 독립영화들이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에 상영되는 것과 달리 '밤낚시'는 관객이 몰리는 저녁 시간대에 주로 편성됐다는 것도 눈길을 끈다. CGV는 "현재 흥행 중인 '인사이드 아웃2', '하이재킹'을 보러 왔다가 이 작품을 연달아 예매하는 관객이 많다. 아무래도 영화 한 편에 13분 남짓이고 관람료도 1천 원이기 때문에 관객들이 부담을 안 가지는 것 같다. 2주 만에 3만 명에 육박하는 관객을 모은 건 유의미한 결과"라고 해석했다. 문병곤 감독도 "유료 상영을 결정할 때 '관객이 한 명도 안 들면 어쩌지?'라는 걱정을 했기 때문에 지금의 이 결과가 놀랍다"고 반응했다. 영화계에서도 이같은 시도가 다양한 형태의 한국 영화 기획이 이뤄지는 데 긍정적 영향을 끼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밤낚시'는 당초 6월 14~16일, 6월 21~23일까지 2주 동안 전국 15개 지점에서 한시적으로 상영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2주 차까지의 관객의 호응이 뜨거워 일주일 확정 상영을 결정했다. 2주 차까지 금, 토, 일만 상영했던 것과 달리 3주 차에는 24일(월)부터 30일(일) 7일간 확대 상영에 돌입했다. 디자인 : 채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