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연예뉴스에서 영화 관련 글을 쓰고 있습니다. 감독과 배우들의 '영화로운 순간'들을 전하겠습니다.
"우린 서로 생각이 다른 거 같아"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토피아 2'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대사다. 주디는 닉에게 여러 번 생각의 차이를 언급한다. 다르다와 틀리다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주디는 고집이 세고 완벽주의를 추구하며, 닉은 여유롭고 능글맞다. 두 사람은 성격과 가치관이 다를 뿐 어느 누가 맞고 틀린 것은 아니다. 영화는 주디와 닉의 갈등과 화해를 보여주며 '다름을 포용할 때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1편에서 닉과 의기투합에 연쇄 실종 사건을 해결한 주디(지니퍼 굿윈)는 경찰서에서 인정받게 되고, 수사에 공은 세운 닉(제이슨 베이트먼)은 정식 경찰로 임명된다. 그러나 보고 서장은 여전히 두 사람을 못 미더워하며 사건을 배정해 주지 않는다. 불만을 품은 주디와 닉은 독자적으로 잠입 수사에 나서고 주디는 현장에서 뱀의 허물을 발견하게 된다. 이 가운데 주토피아의 기후 장벽 발명 100주년 기념 파티에서 의문의 뱀 게리(키 호이 콴)가 등장해 기후 장벽을 발명한 링슬리 가문의 일기장을 훔쳐 달아나는 일이 발생한다. 주디는 게리와 링슬리 가문의 관계를 파고들며 여러 차례 위험에 빠지고 닉은 위험한 수사를 이어가는 주디와 갈등을 빚게 된다. '주토피아 2'는 잘 만든 속편의 좋은 예로 꼽힐 만하다. 앞서 성공한 디즈니 시리즈물이 그랬던 것처럼 속편에서 규모를 키우고, 볼거리를 강화하고, 메시지를 부각해 단순히 웃고 즐기고 마는 것 이상의 진화한 우화를 내놓았다. 동물의 외형적 특징이나 양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해 웃음을 유발하고, 인간이 동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스테레오 타입의 이미지를 캐릭터화한 것은 여전하다. 이는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다양성과 편견에 관한 이슈를 선명화하는 데 필수적인 작업이다. 주토피아는 세상 모든 동물이 어우러져 사는 도시다. 총 12개의 지역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툰드라 타운, 습지 마켓, 사하라, 파충류 주거지 등을 주디와 닉의 수사 무대로 등장시키며 이야기와 스펙터클의 규모를 키웠다. 특히 반수생 동물과 해양 포유류가 사는 습지 마켓의 등장은 2편의 가장 큰 볼거리다. 해양 테마파크가 떠오르는 거대한 공간에는 수십 종의 동물들이 등장해 각자의 생태적 특성을 뽐낸다. 동물의 특징을 섬세하게 묘사하며 이야기에 녹여낸 제작진의 기술력은 전편보다 더 진화해 마치 극장에 앉아 동물원을 감상하는 듯한 풍성한 재미를 선사한다. 또한 주토피아에서 사실상 쫓겨나다시피 한 파충류들이 형성한 군락지는 지하 공간에 있는 은밀한 클럽처럼 묘사해 눈길을 끈다. 영화의 확장된 세계를 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이 투입됐을지 상상이 간다. 실제로 이번 작품에는 디즈니 버뱅크와 밴쿠버 두 캠퍼스를 합해 약 700명의 아티스트와 기술자가 투입됐다. 또한 '대부', '샤이닝', '스타워즈', '양들의 침묵' 같은 할리우드 명작을 오마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라푼젤', '라따뚜이'와 같은 디즈니의 유산을 패러디하며 영화를 사랑하고,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애정하는 관객에게 보너스 같은 순간을 선사한다. '주토피아 2'의 모든 장면, 모든 캐릭터에는 등장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는 알아도 좋고 몰라도 좋다. 그 의미를 발견하면 보다 다층적인 재미를 느낄 수 있지만 모른다 해도 영화가 선사하는 재미를 만끽하는 데 문제가 없다. 2편은 사회적 메시지가 더 두드러진다. 1편이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의 갈등을 통해 편견과 차별의 문제를 언급했다면, 2편은 주토피아의 탄생 과정에서 지워지다시피 한 파충류의 과거를 보여주며 미국 역사의 어두운 이면을 투영한다. 게리로 대표되는 파충류는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편견과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이민자 같기도 하고, 그 옛날 침략자에 의해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밀려난 아메리카 원주민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캐릭터의 목소리 연기를 한 배우가 중국계 베트남 이민자인 키 호이 콴인 것도 의미가 있는 선택이다. '주토피아'의 풍자와 해학은 예나 지금이나 선을 잘 탄다. 관객을 가르치려 하지 않고, 메시지를 주입하려 들지 않는다. 이는 최근 디즈니가 실사 프로젝트에서 보여준 뼈아픈 실패와 대비되는 미덕이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에 함몰돼 원작 파괴에 가까운 흑인 인어공주를 내세우고, 라틴계 백설공주를 내세우는 식의 주입식 PC가 아니라 다채로운 동물로 다양성을 보여주고, 종마다 다른 생물학적 특성을 묘사하며 다름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보고, 느낀다'에 충실한 영화적 접근이다. 주디와 닉의 관계 설정은 속편에서도 열어놨다. 훌륭한 파트너인 동시에 썸 타는 남녀 관계로 설정해 보는 사람을 설레게 하고 흐뭇하게 한다. 9년 만에 돌아온 '주토피아'가 더 반가운 건 디즈니의 핵심 가치인 창의성을 살린 기획이라는 것이다. 일찍이 월트 디즈니가 천명한 상상력과 혁신은 스크린에 동물원을 펼쳐내게 했으며, 관객의 마음에 동심을 심었다. '주토피아 2'는 아이디어와 기술의 결합이 이뤄낸 최고 수준의 시각적 체험이다. 1시간 48분, 어린이는 마냥 즐겁고 어른이도 잠시나마 행복해지는 시간이다. 디자인 : 채지우
미국으로 출처 불명의 ICBM(대륙간 탄도 미사일)이 발사된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출근한 워킹맘 올리비아 워커(레베카 퍼거슨) 대령은 백악관 상황실에서 이 사안을 확인하고 대통령, 장관 등을 연결한 긴급 화상 회의를 연다. 미사일의 발원지는 미확인 상태이며 발사 방향으로 미뤄봤을 때 북한, 러시아, 중국 혹은 다자간 공격 가능성도 열려있다. 일촉즉발의 위기에 국제 정세는 요동친다. 미국은 국민이 희생당하는 참극을 막아야 하지만 지정학으로 엮인 국가 간 이해관계가 충돌해 어떠한 판단도, 결정도 쉽지 않다. 이미 발사된 미사일이 목적지인 시카고에 당도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20여 분 남짓. 안보 보좌관은, 국방부 장관은, 대통령은 이 상황을 막을 수 있을까. 팍스 아메리카나의 종말과 신냉전의 대두로 국가 간 힘겨루기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2025년,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의 설정은 실감 나는 공포로 다가온다. 영화는 백악관의 대응을 다각도로 비추며 다이너마이트 심지가 타들어 갈 때 느낄 법한 긴장감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영화는 총 3막 구조로 돼 있다. ▲ 1막은 기울기가 완만해진다, ▲ 2막은 총알로 총알 맞추기, ▲ 3막은 다이너마이트로 가득 찬 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그런데 사건의 발생과 초기 대응을 다룬 1막이 지나가면, 또다시 같은 상황과 동일한 대사가 등장한다. 2막을 지나 3막 역시 마찬가지다. 동일한 시간대지만 카메라가 비추는 장소와 시점만 다르다.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의 연출적 개성은 하나의 사건을 세 개의 시점으로 보여준다는 데 있다. 일찍이 일본의 영화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라쇼몽'(1950)에서 사용하며 유명해진 연출 방식이다. 일촉즉발의 순간을 다룬 정치 스릴러물에서 이 구조를 선택한 감독의 전략은 성공했을까. '라쇼몽 효과' 있다? 없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인물에 따라 서로 다른 입장을 띠는 '라쇼몽 구조'는 관찰자일 수밖에 없는 관객에게 사건을 다각도로 보는 재미를 선사하며 '모호한 진실'을 능동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이런 이야기 구조를 택한 영화에서 중요한 건 사건의 결말이 아니다. 결과보다는 과정, 그 상황에 직면한 인물의 선택과 내면의 갈등이 곧 영화의 텐션이고, 서스펜스가 된다.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의 핵심은 미사일 공격을 받은 미국의 대응과 선택이다. 9.11 테러의 트라우마가 남아있는 미국에게 주요 도시 중 하나인 시카고가 통째로 날아갈 법한 규모의 ICBM 공격을 받는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사실적이고 차가운 연출로 유명한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은 이 가정을 총성 한 방, 포탄 한 방 쏘지 않고도 진짜 같은 공포로 재현해 냈다. 세 시점이 펼쳐지는 주요한 공간은 워커 대위(레베카 퍼거슨)와 상임 국장 마크 밀러 장군(제이슨 클라크)이 관할하는 백악관 상황실, 브래디 장군(트레이시 레츠)이 이끄는 전략 사령부, 제49대 미사일 방어 대대 곤잘레스 소령(앤서니 라모스)이 근무하고 있는 알래스카 미군 기지, 포투스 대통령(이드리스 엘바)의 동선인 여자 어린이 농구장과 대통령 전용기 안이다.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역사나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 않았음에도, 이 같은 사건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몰입감과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한다. 라쇼몽 구조의 반복과 중첩이 가지는 한계는 리드미컬한 편집과 핸드헬드에 가까운 촬영 그리고 긴장감을 배가시키는 음향과 음악으로 보완한다. 돌림노래를 세 번이나 불렀는데 결말이 없다니 미국을 이끄는 각 분야의 전문가이자 책임자들이지만 실제 상황 앞에선 누구도 섣불리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최고 결정권자인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안보 보좌관들을 통해 북한의 실상을 확인하고, 러시아의 동향을 파악하면서 잘못된 정보를 확인하기도 하고 확신할 수 없는 약속의 수락 여부를 고민하게 된다. 이처럼 영화는 최선의 선택을 위해 중지를 모으는 이어달리기와 같은 전개를 보여준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영화가 전진하지 않고 제자리만 도는 팽이처럼 여겨진다는 데 있다. 1부부터 거두절미하고 사건을 등장시킨 속도감 있는 전개는 2부 중반을 지나 3부에 이르면 지지부진해진다는 인상을 준다. 그도 그럴 것이, 2부부터 개개인의 사연이 머리를 들며 드라마를 보강한다.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의 작품으로는 다소 낯선 전개다. 테러는 당연하다고 여겼던 일상의 파괴이며, 그 피해의 범위에는 내 가족도 포함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구성이라고 볼 수 있다. 놀라운 건 이 영화에는 결말이 없다. 미사일은 영화 시작과 함께 발사됐는데, 최초 경로대로 시카고에 떨어졌는지 경로를 이탈해 불시착했는지를 보여주지 않은 채 막을 내린다. 관객으로선 사건의 발생만 있고 매조지가 없다는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 또한 보기에 따라선 기·승·전만 있고 결이 없는 불완전한 영화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캐서린 비글로우의 연출은 성공인가 실패인가 미국은 매년 국방비에 천조 이상을 써 '천조국'(千兆國)으로 불리는 나라다. '다이너마이트로 만든 집'이라는 영화 제목 역시 이 같은 미국의 단면을 빗댄 표현이다. 핵을 가진 나라가 공격을 해온다면 더 큰 보복을 감행할 힘과 자본이 있는 나라다. 3막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미사일 방어 대대가 시카고로 날아오는 미사일 요격에 실패하고 착탄까지 1분도 안 남은 상황, 포투스 대통령은 보복 공격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에어포스 원에 동석하고 있던 리브스 중령은 대통령에게 두꺼운 책자 한 권을 건넨다. 그 책엔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미사일이 리스트업 돼있다. 대통령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식당 메뉴판 같군요"라고 말한다. 미사일을 체크해 지시만 하면 국면은 전환되겠지만, 이는 곧 세계 전쟁을 의미한다. 게다가 미사일의 발사국은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다. 엄청난 오판을 감수해야 하는 선택이다. 대통령은 그 짧은 순간에 고민을 거듭한다. 슈팅 버튼에 담긴 무게와 파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영화는 '미국에 미사일이 발사됐다'는 설정 하나만 던져두고 이해관계에 얽힌 이들의 고뇌를 다각도로 조명한다. 이 무시무시한 가정이 유발하는 현실 공포와 긴장감은 뉴스의 그것과 견줄 만하다.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은 비현실적 전개와 결론으로 최종장에서 '미국 만세'를 외치는 안일한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어쩌면 결말을 공란으로 둔 것이 전쟁이 만연한 작금의 시대에 내릴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결론일지 모른다. 감독은 영화를 승자와 패자가 명확한 게임처럼 그려 쾌감만 선사하는 대신 묵직한 질문과 함께 대화의 장을 열어젖히는 선택을 했다. * 옥에 티: 영화 초반 미사일 경로를 나타내는 지도 화면에 동해를 '씨 오브 재팬'으로 표기했다. 아직도... 디자인 : 정유민
*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세계의 주인'이라는 영화 제목은 세계 안에 속한 주인공을 뜻하기도 하고, 주인공을 둘러싼 세계를 지칭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은 홀로 살아가지 않고 끊임없이 누군가와 관계 맺음 속에서 성장하고 나아간다. 고등학생 '주인'(서수빈)은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많다. 최대 고민은 연애 문제, 남자친구와의 관계가 좀처럼 쉽지 않다. 어느 날 반 친구 '수호'는 출소하는 아동 성폭행범의 동네 주거를 반대하는 서명을 받으러 다니기 시작한다. 전교생이 이미 서명을 마쳤지만, 주인은 거절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 수호가 설득을 시도하자 주인은 '피해자의 영혼을 파괴하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문구에 동의할 수 없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이 실랑이 이후 주인에게 발신자를 알 수 없는 익명의 쪽지가 배달되기 시작한다. 동시에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던 주인의 삶에도 파동이 일기 시작한다. '세계의 주인'은 자신의 세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한 소녀의 성장담이다. 윤가은 감독은 '우리들'(2016)과 '우리집'(2019), 두 편의 영화를 통해 아이들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관계와 성장에 관한 섬세한 드라마를 써낸 바 있다. 세 번째 장편 영화에서는 어린이가 아닌 10대 소녀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성폭력 피해자를 다룬 영화들은 고통스러운 과거와 과거가 남긴 트라우마를 그리는 데 집중했다. 과거와 과거가 영향을 끼친 현재로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불가피하게 피해자의 피해를 묘사하고, '사건의 진상'에 집중하는 연출을 보여줬다. '세계의 주인'은 아동 성폭력 피해자의 '현재'와 '지금'을 그린다. 10대 후반의 소녀가 겪는 첫사랑의 성장통과 진로에 대한 고민, 가족과의 갈등, 친구와의 우정과 균열 등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며 주인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삶의 지도를 펼쳐 보인다. 보여주는 것과 보여주지 않는 것이 명확하다. 주인은 타인의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 자신의 깊은 상처를 꺼내보여야 하는 상황에 놓이지만 영화는 주인에게 일어난 일이 어떤 것인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도, 설명하지도 않는다. 또한 주인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설정도 나오지만 그것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감독의 선택을 관객은 영화의 미스터리로 생각하고 짐작해 보지만 헛된 노력이다. 이 영화가 주목한 건 주인의 과거가 아닌 주인의 현재기 때문이다. 감독이 그토록 많은 비중을 할애해 주인의 현재와 일상을 그리는데 집중한 건 '내가 나로 살아가는 삶'을 만들어가고 있는 인물의 단단한 내면과 성장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티 없이 밝고 건강한 주인을 보면서 관객 역시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듯 함께 '까르르' 웃게 된다. 그러다 반 친구와 벌인 사소한 실랑이, 그 이후 배달되는 쪽지의 언어들로 인해 물음표가 발생한다. 특히 고백인지 장난인지 헛갈리게 한 주인의 한마디는 그녀의 눈부셨던 밝음에 의심의 눈초리까지 보내는 결과로 이어진다. 영화에서 '쪽지'는 주인의 심리를 자극하고 상처에 소금을 붓는 트리거 기능을 한다. 보이지 않는 빌런처럼 여겨졌던 쪽지의 발신자를 끝까지 공개하지 않음으로써 연출의 목적은 분명해진다. '쪽지'는 언뜻 주인과 동일한 아픔을 겪은 어떤 이의 질타처럼 보이지만 그것에 머물지 않고 보다 광범위한 기능을 한다. 이는 반 아이들과 관객까지 포함하는 우리 모두의 시선이다. 이 시선에는 피해자에 대한 고정관념 혹은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폭력성도 내포하고 있다. 또 다른 면도 있다. 엔딩에서 이 쪽지의 발화를 특정인이 아닌 반아이들의 목소리로 읊으면서 주인을 향했던 시선의 폭력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낸다. '세계의 주인'은 윤가은 감독의 한층 진화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진짜 같은 인물과 삶을 포착하는 시선은 선명하고, 인물의 눈높이에서 화두를 던지는 사려 깊음이 돋보이며, 관객의 다채로운 사유를 끌어내는 너른 포용력까지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주인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사건 그 자체에만 집중해 관심 가지지 않았던 피해자의 '회복'과 '행복'을 언급한다. 또한 여전히 고정관념과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시선에 싸워야 하는 인물의 힘겨운 순간들도 그려내 '나' 그리고 '우리'를 되돌아보게끔 한다. 윤가은 감독은 사건 자체를 다루는 영화를 넘어 사건 이후의 피해자의 삶에 관한 사실적이고 핵심적인 담론을 꺼내놓으며 성폭력 소재 영화에 대한 또 다른 챕터를 열어젖혔다. 그렇다면 감독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매듭짓고자 했을까. 주인의 입을 빌어 '사랑'의 힘과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주인이가 가장 갈망하는 가치다. '사랑'의 범주는 이성간의 사랑 뿐만이 아니다. 가족간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등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을 포함한다. '세계의 주인'의 영어 제목은 'The World of Love'다. 주인은 세계의 주인에서 사랑의 세계로, 그렇게 나아간다. 디자인 : 채지우
'얼굴'은 2억 원의 제작비, 13회 차의 촬영, 20여 명의 소수 정예 스태프로 완성한 영화다. 영화 '부산행'(2016)과 '반도'(2020)를 잇따라 만들며 한국형 좀비 블록버스터의 지평을 연 연상호 감독의 초기작을 떠올리게 하는 소박한 규모의 결과물이다. 영화의 크기를 줄이고, 제작 방식에 변화를 준 연상호 감독은 독립영화 시절의 패기와 날카로움을 보여줬을까. 참신한 아이디어에도 불구하고 몇몇 요소로 인해 완성도에 있어서는 아쉬움을 남긴다. 영화는 방송사의 다큐멘터리 제작진이 한 전각 장인을 인터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시각장애인인 임영규(권해효)는 아들 임동환(박정민)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회고한다. 이후 부자(父子)는 40년 전 실종된 아내이자 어머니인 정영희(신현빈)의 백골 사체가 발견됐다는 연락을 받는다. 경찰이 정영희가 살해됐을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임영규와 임동환 그리고 다큐멘터리 PD 김수진(한지현)은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임영규는 빛나는 영광과 불편한 진실이 뒤섞인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얼굴'이 유발하는 긴장감은 연출의 설정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영화는 영희의 얼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눈이 보이지 않는 영규의 시야를 관객도 공유하는 셈이다. 주인공의 얼굴이 등장하지 않는 영화라는 호기심 어린 설정과 또 다른 주인공이 연루된 살인 사건이라는 미스터리의 중첩은 이야기를 따라가게끔 하는 동력이 된다. 다만, 거칠고 헐거운 서사와 중반 이후 무너져버린 개연성으로 연상호 영화의 대표적 단점 중 하나인 뒷심 부족이 노출된다. '얼굴'은 이야기의 촘촘함보다는 메시지의 강렬함으로 승부수를 띄운 작품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감독의 의도는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고 볼 수 있다. 관객은 영희의 얼굴을 모른다. 그녀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타자의 표정과 평가에 의해 유추만 할 뿐이다. 그들에 의해 재단된 영희의 얼굴은 추하고 흉한 것, 괴물과 다를 바 없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외모와 달리 영화 속에 그려지는 영희는 마음이 올곧고 따뜻한 사람이다. 공장의 악덕 기업주가 여성 노동자에게 가하는 폭력에 대해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문제를 제기한다. 사장의 눈 밖에 날까 쉬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바른말을 하는 영희는 별종으로 취급된다. 이쯤 되면 관객들은 영희의 얼굴이 일그러진 것인지, 영희의 미추(美醜)를 외형으로만 판단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그러진 것인지 헷갈린다. '얼굴'은 연상호 감독이 2018년 발간한 동명의 그래픽 노블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감독은 성과에 집착하는 자신을 반성하다 떠올린 이야기라고 밝힌 바 있다. 자아반성은 1970년대 한국의 고도성장 아래 외면당한 개인의 삶이라는 영화의 아이디어로 확장됐다. 장애를 딛고 장인으로 거듭난 임동규는 한국 사회를, 추한 얼굴 탓에 멸시당한 정영희는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개인에게 자행된 무유형의 폭력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임동규가 고생 끝에 기적을 이룬 부모 세대를 상징한다면, 임동환은 부모의 유산을 누리다 뜻밖의 진실로 혼돈에 빠지는 자식 세대를 대변한다. 다만, 청계천 미싱 공장의 풍경과 못생긴 여자를 향한 조롱이 시대라는 거시와 인간사라는 미시를 그럴듯하게 은유했는가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생긴다. 이런 대입은 거친 연출과 맞물려 다소 작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연상호 감독은 사람들의 왜곡된 시선과 언어폭력들을 나열하고, 시선과 말이 선사하는 불쾌함까지 관객에게 전이시킨다. 영희는 연상호 감독의 초기 대표작 '사이비'(2013)의 민철처럼 관객을 시험에 들게 하는 캐릭터다. 민철이 진실을 말하는 악인이었다면 영희는 정의를 부르짖는 추인이다. 인간을 향한 편견과 혐오가 진실과 진심을 어디까지 호도할 수 있는가를 관객 스스로에게 묻게끔 하는 인물이다. 다만 정영희라는 인물은 감독이 좀 더 공들여 다뤄야 함에도 메시지를 강화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한 뒤 가차 없이 버려진다. 이로 인해 영화 속 타자들이 영희를 다룬 것과 마찬가지로 영희를 다룬 감독의 태도 역시 폭력적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이 역시 의도하는 바가 있다. 자격지심과 열등감, 피해의식으로 폭주하는 진짜 괴물을 등장시키기 위함이다. 영화는 전반부에는 추녀를 향한 사람들의 혐오를 전시하고, 후반부에는 자격지심과 피해의식에 절어 넘어서 안될 선을 넘은 한 악인의 궤변을 늘어놓는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개인의 부도덕과 비윤리를 시대의 야만성으로 퉁치는 건 너무 쉬운 선택이다. 풍자는 유머와 비꼼, 과장, 역설, 비유 등을 활용해 사회나 개인의 부정적인 면을 비판하면서도 모욕적이지 않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효과가 있다. '얼굴'의 풍자는 숨 쉬듯 편견과 혐오를 일삼는 인간을 향한 증오와 조소를 바탕으로 한다. '얼굴'은 분명 도전적인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설정이 유발하는 영화적 효과가 분명하고, 메시지로 연결시키는 과감함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아이디어를 받추지 못하는 이야기의 구성과 밀도는 아쉽다. 영화는 원작과 달리 엔딩에서 영희의 얼굴을 공개한다. 영화적이지 않은 선택이지만, 감독의 의도는 분명하다. 과거 사람들의 왜곡된 시선에 대한 일침인 동시에 그것을 바라보는 현재 관객을 향해 던지는 질문이다. 관음증에 가까운 시선으로 영희의 뒷모습을 좇았던 관객은 마침내 공개된 영희의 어떤 얼굴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혹은 당연하게도 '얼평'을 하고 있는 스스로를 마주하게 된다. 'The Ugly'라는 영어 제목의 완성인 동시에 인간을 향한 연상호의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이 시퀀스는 "우리, 인간은 못 돼도 괴물은 되지 말자"라는 모 영화의 명대사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디자인 : 채지우
윤태호 작가는 제목을 잘 짓는다. 대표작 '이끼', '내부자들', '미생', '파인' 등은 한 단어로 작품 전체를 압축한다. 은유적이고 상징적이기까지 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야기를 만들고 캐릭터를 구축하기 전에 제목부터 생각한다. 제목이 곧 작품의 테마기 때문이다. 시리즈 '파인:촌뜨기들'의 제목은 동음 반복이다. 파인(巴人)이라는 한자의 뜻이 곧 '촌뜨기'(지방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영어라고 생각했을 그 제목이 한자이고 부제와 동일한 뜻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작품에 대한 호기심도 배가된다. '파인:촌뜨기들'은 1977년, 바닷속에 묻힌 보물선을 차지하기 위해 몰려든 근면성실 생계형 촌뜨기들의 속고 속이는 이야기를 담은 범죄 드라마. 윤태호 작가가 2014년 7월부터 2015년 8월까지 연재한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다. 윤태호 작가는 플롯을 짜기 전 캐릭터부터 만든다고 했다. 독창적인 캐릭터와 탄탄한 빌드업은 유려한 이야기로 연결되며 화룡점정을 이룬다. 인물 한 명 한 명이 살아있고, 이야기가 밀도가 높아 한번 보기 시작하면 눈을 떼기 어렵다. '파인' 역시 오관석(류승룡), 오희동(양세종), 양정숙(임수정), 김교수(김의성), 천회장(장광), 송사장(김종수), 나대식(이상진), 장벌구(유노윤호) 등 주요 캐릭터들이 활어처럼 싱싱하게 날뛴다. 나쁜 놈 위에 나쁜 놈, 교활한 놈 옆에 더 교활한 놈이 나타나 바다에 수장된 도자기를 캐기 위한 욕망을 부끄럼 없이 드러낸다. 소재 고갈에 시달리는 방송가와 영화계에 웹툰 세상은 이야기의 보고다. 그중 윤태호 작가의 웹툰은 단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킬러 콘텐츠다. '이끼'를 시작으로 '내부자들', '미생'까지 그의 히트작을 원작으로 한 영화와 드라마는 모두 성공했다.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각색을 최소화하고 원작의 결을 그대로 살려냈다는 것이다. '파인' 역시 마찬가지다. 일부 캐릭터에 살을 붙이고, 결말의 톤 앤 매너를 살짝 바꿨을 뿐 원작의 정수를 살리는 데 집중했다. '파인'의 성공은 원작의 몫이 크다. 윤태호 작가는 어떻게 매번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까. 그 비결은 세상을 향한 호기심과 치밀한 취재력, 부지런한 손끝에 있었다. Q. 웹툰 연재 때부터 '파인'은 영상화를 염두에 둔 기획처럼 보인다는 의견이 많았다. A. 현 공동제작사인 '흥부네박씨네'가 '미생'의 영상화 제안을 먼저 했었는데 그때 이미 판권이 팔린 상태였다. 그래서 차기작은 무조건 같이 하겠다고 약속했다. '파인'의 경우 연재 3, 4회가 지났을 때 바로 '흥부네박씨네'와 영상화 계약을 맺었다. 사람이 참 이상한 게 영상화 계약을 맺고 작품을 쓰면 ‘실제로 (영상으로) 구현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만화적인 허용으로만 그려도 되는지 스스로에게 물음표를 던지게 된다. 물속 에피소드의 경우 영상화했을 때 배가 보여야 할 텐데, 서해는 뻘밭이고 물이 탁하지 않은가. 고민이 되더라. 서해의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 그 지역 어부들을 많이 인터뷰했다. 서해의 바닷속이 뿌옇긴 하지만 물살에 따라 갑자기 하얗게 보이는 순간이 생긴다더라. 그래서 이 점을 희동이가 바다에 들어갔을 때 보물선을 발견하게 되는 에피소드로 풀었다. Q. 1976년 신안 앞바다 보물선 사건을 모티브로 '파인'의 이야기와 캐릭터를 창조했다. 이 사건에 흥미를 느끼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A. 슬럼프에 빠졌을 때 뉴스 검색하는 게 일이다. 특히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들락날락하는 것을 즐긴다. 작가마다 관심이 가는 시절이 있다. 나의 경우 초등학생 무렵이었던 70년대에 애정이 많다. 그 시절 뉴스를 특히 많이 찾아봤다. 신안 보물선 사건은 늘 머릿속 아이디어 서랍에 있던 아이템이었다. 구상을 마치면 친구나 후배들과 술 한잔하면서 운을 떼보고 반응을 본다. 그들의 리액션이 좋으면 '한 번 해볼까' 하면서 두루뭉술했던 아디디어를 구체화한다. '파인'은 무법자들이 법을 지켜야 하는 상황, 사기만 치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서로 신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다. 이 테마가 잡히면서 '이건 해도 되겠다' 생각했다. 본격적으로 스토리를 짤 때도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1975년부터 77년까지 키워드 '신안'이 들어간 기사는 모두 읽었다. 인터넷 창을 수십 개 열어놓고 뉴스를 봐가면서 창작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Q. 윤태호의 취재력은 정평이 나 있다. '파인'의 경우 어떤 식으로 정보 수집과 취재를 해나갔나? A. 뉴스로 당시 사건을 파악했고, 신안 보물선 유물을 정리해 놓은 논문과 골동에 관한 책을 보며 윤곽을 잡아 나갔다. 목포 시청과 신안군청을 찾아가서 발굴 당시의 이야기를 듣고, 전시장을 관람하기도 했다. 지역분들의 소개로 신안 근처의 모든 섬을 돌아다녔고 드론팀을 섭외해 사진도 수백 장 찍었다. 헌책방에 가면 작은 출판사에서 나온 골동에 관한 별의별 책들이 많다. 업자들이 과거 골동 관련 일을 하면서 겪은 에피소드를 기록한 책이다. 비문으로 가득한 책이라 읽기가 쉽지 않지만, 업자들의 박력 넘치고 싱싱한 표현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그런 것도 다 읽고 날것의 말들은 모두 기록해 두었다. 극중 부산 김교수(김의성)가 "업자들은 여서 여까지 다 아도 치고 나오지. 물건을 흥정하지 않아"하는 대사도 그 책에서 따온 거다. Q. '파인:촌뜨기들'은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사투리가 생생하게 살아있다. 특히 전라도 사투리를 가장 사실적으로 구현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원작 웹툰에 섬세한 묘사가 돼 있었기에 드라마에 잘 옮겨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전라도 지역의 신안, 목포 등의 사투리 고증 과정을 듣고 싶다. A. 고향이 전라남도 광주인데 어릴 때부터 서울, 군산 등 여러 지역으로 이사를 다녔다. 이사를 많이 다니는 아이들은 그 지역의 언어를 빨리 습득하려고 애쓴다. 어릴 때 서울에서 군산으로 이사를 갔는데 꼬맹이가 서울말 하는 게 웃겼는지 동네 형들이 날 불러다가 괴롭히기도 했다. 그런 에피소드는 '이끼'에도 반영됐다. 뿌리깊은나무 출판사에서 나온 '한국의 발견'이라는 책이 있는데 지역별 사투리가 세세하게 기록돼 있다. 그 책을 구해서 열심히 읽고 기록해 뒀다. 또한 국립도서관에서 판소리 채록집을 빌려 진한 남도 사투리를 일일이 메모했다. 그러면서 전남과 전북 사투리의 특징, 영암과 여수 말의 차이 등도 알게 됐다. 기본적으로 고어를 좋아한다. 한자투 언어도 마찬가지다. 20대 초반, 이문열 작가의 책을 좋아했다. 문장이 유려하면서도 그 맛이 느껴진달까.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안 해서 뒤늦게 문장의 세계를 알게 됐다. Q. 윤태호 작품의 공통된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파인'도 캐릭터 하나하나가 살아있다. 이야기를 쓰고 캐릭터를 잡는지, 캐릭터를 먼저 만들고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지 궁금하다. A. 나는 기본적으로 플롯을 안 짜고 작업에 들어간다. 대신 다른 작가에 비해 캐릭터를 잡는 데 많은 시간을 쏟는다. 인물에 대한 가상의 역사를 구축한 뒤 세부적인 배경을 만든다. 그 인물에 몇 년도에 태어났고, 아버지는 뭐 하시고, 어머니는 어떤 성격인지 등 각 인물의 연보를 엑셀로 만든다. 거기에다가 인물의 나이대에 따라, 비고란을 만든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해외에 동시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 대외적인 일을 캐릭터들이 몇 살 때 겪었는지까지 기록한다. 이 작업만 반년 넘게 걸린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야후'란 만화를 할 때부터 이런 방식을 추구해 왔다. 그때는 다 수기로 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인물의 신체 사이즈부터 말하는 속도, 감정에 따라 짓는 표정까지 구축된다. 나는 캐릭터가 허공에서 헤엄치고 다니는 걸 싫어한다. 이야기가 다소 황당무계해도 인물만큼은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수준이 아닌 땅속에 목까지 파묻혀 있기를 원한다. 캐릭터가 살려면 인물이 전지전능하면 안 된다. 경계면을 만들어야 한다. '파인'의 관석(류승룡)을 예로 들면, 그는 어디서든 무조건 '오야'(상투를 쥐어야 하는 사람)여야 하는 인물이다. 전체적인 판을 짜고, 돈도 조달한다. 조카인 희동이(양세종)를 양정숙(임수정)에게 보내 유혹하려는 꾀도 낸다. 극 안에서 캐릭터의 노고가 생겨야 한다. 그게 캐릭터를 잘 살리는 방법이다. 캐릭터가 일을 많이 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못 하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다. 캐릭터의 결손이 많아야 작품이 컬러풀해진달까. Q. '파인'에는 착한 사람이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나쁜 놈이 나쁜 놈과 결탁하거나, 나쁜 놈이 나쁜 놈의 뒤통수를 치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같이 성실하다. 게다가 준법정신도 있다. A. 작품을 시작할 때 중요시하는 것 중의 하나가 테마다. 테마를 응축한 게 제목이다. 1970년대는 시대적 분위기도 그렇고 사람들도 근면·성실하지 않았나. 악인들도 마찬가지일 거로 생각했다. 불법도 열심히, 성실하게 행했을 것 같았다. 이 윤곽이 가장 먼저 잡혔다. 인물들은 하나같이 법을 어기거나 법 없이 행동하는 사람들인데 그 공간이 무법지대인 바다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배를 타고 나갈 때는 '내가 너를 죽이지 않겠다'라는 무언의 약속이 돼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무법자들이 만났는데 준법정신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 생기는 거지. 이 점이 흥미로울 것으로 생각했다. Q. 일부 시청자들은 '왜 빨리 그릇 캐러 가지 않느냐'라는 불만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빌드업이 길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A. 이 이야기의 시작은 인물의 등장부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초반부터 이들이 얼마나 보고 배운 게 없는지, 얼마나 숨 쉬듯이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인지 보여주려고 했다. 시청자들로서는 '왜 그릇 캐러 빨리 바다에 안 나가냐' 하시지만 나와 감독님은 '파인'은 사건이 아닌 캐릭터 중심의 드라마라고 생각했다. 도자기를 찾는 것이 아닌 사기 치는 게 핵심인 이야기다. 그릇의 진위가 핵심이었으면 이 작품의 제목은 '파인'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캐릭터들의 등장과 함께 이뤄진 것으로 생각했다. Q. 이 작품의 영상화를 앞두고 원작자로서 시리즈의 감독과 작가에 당부한 것이 있었다면? A. 판권을 팔고 나서는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원작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애초에 계약서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약서에 없는 걸 후에 말하는 건 반칙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 캐릭터는 왜 썼는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등에 대한 제작진의 질문이 왔을 때는 성실하게 답변을 해드렸다. Q. '파인:촌뜨기들'은 원작을 존중한 각색이라는 평가가 많다. 원작자로서 드라마에 대한 만족도는 어느 정도인가? A. 매회 공개될 때마다 가족들과 함께 밥 먹으면서 봤다. 나도, 우리 가족도 한 명의 시청자였다. 영상화된 작품이 원작의 재방송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강윤성 감독이 시나리오를 쓸 때 나보다 더 많이 반복해서 원작을 봤을 거다. 아침 10시에 출근해서 밤 10시에 퇴근하는 생활을 1년 넘게 하면서 각색 작업을 했다고 들었다. 이 정도면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도 생각하셨을 테고 이렇게, 저렇게 많이 주무르고 재세팅을 한 결과가 지금의 시리즈로 나온 거다. 만족스럽다. Q. 시리즈의 엔딩은 원작과 톤 앤 매너가 좀 다르다. 원작은 모든 인물이 파국을 맞는데 시리즈는 그렇지 않다. 시즌2를 염두에 둔 방향성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희동(양세종)과 선자(김민)의 로맨스는 원작에 없던 것이기도 한데 강윤성식 '낭만'을 드러낸 것처럼 보인다. 원작자로서의 평가를 하자면? A. 감독님께서 결말에 관해서 물어보신 적이 있다. 원작에서는 내일이 없는 사람이 나와 내일이 없는 끝을 맞는데 시리즈에서 이렇게 밝게 끝내도 되겠냐고.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만약 시즌2를 하게 된다면 인물들이 그때 처벌을 받아도 되니 시즌1에서는 그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살아있다고 해도 문제 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 몇몇 인물은 이야기 흐름상 죽은 것처럼 보이는데 시즌2를 대비해 손가락을 까딱이는 장면 같은 걸 추가로 찍었다고 들었다. 실제로 한 배우가 내게 '작가님 저 살았습니다'라고 자랑하기도 하더라. 희동과 선자의 로맨스는 내 유전자에는 없는, 나는 못 쓰는 영역이다. 그래서 감독님에게 '잘 봤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Q. 쿠키 영상에서 경주 장면이 나왔다. 시즌2가 만들어진다면 소재는 문화재 도굴이라고 예상해도 될까? A. 감독님께서 쿠키 장면에 대한 아이디어를 묻길래 '지상 위 최고 도굴이라면 문화재 도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씀을 드리긴 했다. 시즌1도 충분히 만족하지만, 속편이 나온다면 시즌3까지는 원작 격의 이야기를 써드릴 소재가 있다. Q. '이끼', '내부자들', '파인'에 이르기까지 나쁜 놈들에 대한 진득한 묘사가 독자들을 열광시켰다. 이 작품들의 성공은 피카레스크(picaresca : 주인공을 포함한 주요 등장인물을 도덕적 결함을 갖춘 악인으로 설정하여 이야기를 이끄는 장르)가 상업 작품의 주류로 정착한 계기가 됐다. 창작자로서 악인을 그리는 것의 매력은 무엇인가? A. 살다 보면, '나 혼자만 착한 거 아냐? 저 인간들은 저렇게 살아도 부자가 됐는데?' 하는 생각을 하며 분할 때가 있지 않나.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악인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것 같다. '내가 그 캐릭터에 빙의한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호기심이 생기는 거지. 나 역시도 머릿속에서는 윤리와 비윤리, 합법과 비합법을 왔다 갔다 할 때가 있다. 주호민 작가의 트위터에서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이 쓰레기를 주우면서 가더라'는 글을 봤는데 인상적이었다. 무단횡단을 하기에도 바쁜데 비닐쪼가리를 줍다니 '그래, 이게 인간이지.' 싶더라. 코엔 형제 감독의 영화 '파고'(1997)를 무척 좋아한다. 엇나감의 미학이 예술인 작품이다. 때로 인간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악마한테 영혼도 팔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되기도 쉽지 않다. 양심을 버리고, 윤리를 저버리고 악인이 되는 것도 되게 어려운 일이다. '파인'에서 관석이 희동이를 설득하면서 "경부고속도로를 사람 죽이려고 만들었겠냐. 짓다 보니 사람이 죽은 거지"라고 하지 않나. 내 머릿속 세계관을 바꾸지 않는 한 악마가 되기도 쉽지 않다. 내가 1970년대를 주목한 건 그 시대는 어떤 것이든 돈으로 치환되는 시대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Q. 작가 윤태호의 창작 루틴은 꽤 유명하다. '나만의 루틴'을 소개해달라. A. '미생' 시즌1 때는 주2회 연재 때문에 잠을 일주일에 3일밖에 안 자고 작업에 몰두했다. 작년 4월에 몸이 좀 아프면서 루틴이 바뀌었다. 의사가 몸이 안 좋아진 특별한 원인은 없다고 하면서 잠을 좀 자라고 수면제 처방을 해주더라. 그 이후 밤 10시에서 11시 사이에는 자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아침 6~7시에 일어난다. 이건 4년째 하는 건데 아침에 일어나면 10분 정도는 가만히 앉아서 명상한다. 술도 끊고 담배도 줄였다. 술을 끊다 보니 사람을 만나는 것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더라. 또한 옛날보다 책을 좀 집중해서 읽는 습관이 생겼다. 많이 읽기보다는 한 권을 읽더라도 문장 한 줄 한 줄에 집중하려고 한다. 책을 읽고 나서는 챗지피티(Chat GPT)나 제미니(Gemini)에게 내 생각을 물어본다. 질문이 좋아야 답이 좋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AI에게 내 생각을 쭉 말한 뒤 "칼 융 같은 심리학자의 관점에서 내 사고를 분석해 달라"고 부탁한다. 또한 AI에게 "할리우드에 있는 저명한 프로듀서의 관점에서 내 아이디어를 평가해 달라"고 묻기도 한다. 그런 걸 하다 보니 질문하는 법을 알게 되더라. AI는 친절해서 싸울 일도 없다. 그렇게 한두 시간을 보내는 게 창작 활동에도 도움이 되더라. Q. 웹툰 시장의 규모는 커지고 있고, 영상화도 전성기라고 볼 수 있다. 최전선에 있는 작가로서 IP의 미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하다. A. 만화방 시대를 생각해 보면, 유명 작가의 작품만 매대에 꽂혔다. 신인이나 무명작가의 작품은 책꽂이에 꽂힐 일이 없었다. 웹툰 시대가 도래하면서 어떤 변화가 생겼냐면, 플랫폼의 시대다 보니 작가의 모든 작품이 올라오고 아카이브가 형성된다. 웹툰 플랫폼에 들어가면 작가의 별점수, 댓글수 등 양질의 리서치 결과를 볼 수 있다. 플랫폼이 브로슈어 역할을 하는 것이다. 최근 웹툰이 많이 영상화된 데는 플랫폼 아카이브가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독자의 댓글이 작품을 압축해서 눈높이를 형성한다. 예를 들어 '파인'의 뒷부분에 대해 독자가 이런저런 점이 아쉽다고 댓글을 써두면 그게 영상화될 때는 어떤 가이드가 될 수도 있는 거다. 물론 작가로서는 멘털이 털릴 수도 있지만 아주 나쁜 악플만 아니라면 작가에게도 영상 업자에게도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개인적으로 웹툰 시장 계속 성장할 거라고 본다. 코로나 때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투자도 많이 이뤄졌다. 코로나가 끝나고 대중들이 집밖으로 나가면서 시장이 조금 어려워진 측면은 있다. 그러나 사이클은 돌아온다고 본다. 위기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절륜한 작품은 계속해서 나올 것이다. 디자인 : 채지우
여성판 '존 윅'을 표방하는 '발레리나'는 태생적으로 한계가 명확한 영화다. 그도 그럴 것이 '존 윅'은 성별만 바꿔 대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하나의 고유명사이자 브랜드다. 키아누 리브스가 늙고 둔해졌다 해도 그는 그 자체로 존 윅이다. '존 윅4'(2023)에서 그의 육체는 이미 예전의 것이 아니었지만, 나이 듦조차 서사의 한 요소로 녹여냈다. 우리는 모두 노화를 숙명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몸이 무기인 존 윅 역시 예외가 아님을 보여줬다. 오히려 늙고 힘에 부쳐 힘겹게 상대를 제압하는 모습은 관객에게 큰 울림이 됐다. 인기 시리즈의 장기화를 위해 스핀오프, 프리퀄 등을 활용하는 건 익숙한 방식이다. '존 윅' 역시 스핀오프를 통해 시리즈의 생명을 연장하고 세계관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 시작이 여성판 '존 윅'인 발레리나다. '발레리나'는 암살자 조직 루스카 로마에서 킬러로 성장한 '이브'(아나 데 아르마스)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진실을 쫓던 중 전설적인 킬러 '존 윅'(키아누 리브스)과 마주하고, 킬러들이 장악한 정체불명의 도시에서 피의 전쟁을 벌이는 이야기를 담았다. '존 윅'과 마찬가지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주인공의 강력한 동기다. 존 윅이 강아지(죽은 아내와의 추억을 공유한, 그 자체로 아내를 상징)를 죽인 이들에게 복수의 주먹을 날렸다면, 이브는 아버지를 죽인 이들을 향해 총과 칼을 겨눈다. 예나 지금이나 이 시리즈의 플롯은 단순하다. 느슨한 서사의 빈틈을 메우는 건 액션이다. 스턴트맨 출신인 채드 스타헬스키 감독은 '존 윅' 시리즈 네 편을 연출하며 액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줬다. 공간과 지형지물을 활용한 창의적이고 다양한 액션 시퀀스를 통해 액션도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그가 '발레리나'까지 직접 연출한 건 아니지만 제작자이자 액션 감독으로서 영화의 전반에 관여했다. 타이틀롤은 아나 데 아르마스가 맡았다. 아르마스는 '블레이드 러너 2049'(2017), '나이브스 아웃'(2019)을 통해 스타덤에 올랐고, '007 노 타임 투 다이'(2021)에서는 본드걸로 활약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배우다. 특히 007 시리즈에서는 남성의 보호를 받는 수동적인 본드걸이 아닌 역동적인 액션을 펼치는 색다른 본드걸의 면모를 보여줬다. 미모와 카리스마, 여기에 액션 감각까지 갖춘 아나 데 아르마스를 캐스팅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레리나'가 다소 시시할 거라 추측할 수밖에 없는 건 '이브'가 태생적으로 약자의 포지션에 있다는 점 때문이다. 생물학적 차이, 즉 물리적 힘의 대결에서 여성이 남성을 이길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은 없다. '발레리나'는 '존 윅'과 마찬가지로 개인이 집단을 파훼하는 식의 보복 구조를 띤 이야기다. 이브가 맞대결을 펼치는 대부분의 사람은 고도로 훈련된 남성들이다. 일 대 다(多)의 대결이 필수적인 액션 영화에서 한 명의 여성 캐릭터가 끝까지 살아남아 조직에 복수하는 과정을 설득할 수 있느냐가 성패의 관건이다. 전제는 '반드시 이긴다'가 아니라 '제대로 이긴다'가 되어야 한다. 관객이 '존 윅' 시리즈에 열광한 건 스턴트나 CG로 무장한 히어로 무비 속 비현실적 액션이 아닌 몸과 몸이 부딪히는 아날로그 액션이 주는 날것의 쾌감 때문이었다. '발레리나'를 연출을 맡은 렌 와이즈먼 감독과 제작자 채드 스타헬스키는 당연하게도 '액션'에서 답을 찾았다. '이브'는 여성이라는 신체적 한계를 다양한 무기를 이용해 극복한다. 각종 총기류는 물론이고, 칼, 스케이트 날, 화염방사기 등 도구와 무기를 활용하며 위기를 극복하고 상대를 제압한다. 특히 후반부 화염방사기를 활용한 액션은 잔인함의 강도가 높지만 그만큼 강렬하고 통쾌하다. 이 장면들의 카타르시스를 제대로 느끼고자 한다면 사운드특화관에서 관람할 것을 추천한다. '발레리나'는 존 윅을 등장시키는 '치트키'를 썼다. 대부분의 스핀오프가 세계관을 공유하되 독립적인 형태로 나아가는 것과 달리 '발레리나'는 존 윅을 조연으로 등장시키는 팬서비스를 한다. '존 윅' 시리즈의 향수를 자극하고 '발레리나'와의 연대를 마련한다는 측면에서 영리한 전략이다. 키아누 리브스는 아나 데 아르마스와 1:1 액션 대결을 펼치며 노익장을 과시했고, 후반부에는 조력자로서 활약하기도 한다. '존 윅' 시리즈와 '발레리나'는 특별한 영화다. '액션만으로 이뤄진 영화는 단조롭고 지루하다'는 선입견을 깨고 '액션만으로도 이야기가 된다'는 성공 신화를 만들어낸 작품이다. '발레리나'는 액션의, 액션에 의한, 액션을 위한 영화로서의 정체성을 '존 윅'에 이어 꽤 성공적으로 계승해 냈다. 화끈한 물량 공세로 규모를 확장했고, 촘촘하게 설계된 액션들을 쉼 없이 선사하며 오락성을 극대화했다. 물론 액션 영화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전설적인 브랜드가 된 '존 윅' 시리즈처럼 긴 생명력을 발휘할지는 의문이다. 냉정히 말해 존 윅과 비교해 이브의 존재감은 아쉽다. 존 윅과 이브의 대결은 영화의 백미였지만 '존 윅이 이 무대의 주인공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다행히도, '존 윅'은 다섯 번째 이야기로 돌아온다. 디자인 : 채지우
'주말에 뭐 볼까?'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스프가 알려드립니다. 수치가 성공의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숫자만큼 성공을 객관화할 수 있는 지표는 없다. 장성호 감독은 한국 영화가 북미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성적표로 보여줬다. 한국의 순수 기술력으로 완성한 애니메이션 영화 '킹 오브 킹스'로 북미에서만 6,000만 달러(한화 약 827억 원)의 극장 수입을 거두며 한국 영화 최고의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킹 오브 킹스'는 영국의 뛰어난 작가 찰스 디킨스가 막내아들 월터와 함께 2000년 전 가장 위대한 이야기 속으로 떠나는 여행을 그린 작품. 디킨스의 소설 '우리 주님의 생애'(The Life of Our Lord)에서 영감을 받은 기독교 애니메이션 영화다. 종전 최고 흥행작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북미 누적 매출 5,384만 달러)이었다. (북미 기준) 외국어 영화인 '기생충'은 아카데미 시상식 출품 요건을 갖추기 위해 북미 극장에 제한적으로 상영했다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석권하며 이른바 '영화제 버프'까지 받은 경우다. '킹 오브 킹스'는 사례가 다르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북미 시장을 겨냥했고, 영어 영화로 제작됐다. 북미 개봉 역시 제한 상영이 아닌 와이드 릴리즈였다. 여타 북미 영화들과 동등한 조건에서 출발해 박스오피스에서 기념비적인 성적을 거뒀다. 성공의 뒤편에는 모팩 스튜디오의 장성호 대표의 피, 땀, 눈물이 있었다. 국내 VFX(시각 특수효과) 분야의 1세대라 할 수 있는 장성호 대표는 약 10년간의 연출 준비를 끝에 이 영화를 완성했다. 장성호 대표는 영화 감독이기 전에 기술자였고, 사업가였다. 그는 영화 산업의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북미 시장에 '맨땅에 헤딩'하듯 무모한 도전을 하지 않았다. 영화 제작에 대한 노하우, 소재와 이야기에 대한 확신, 기술에 대한 자신감, 시장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기반으로 북미 시장을 공략했고, 보란 듯이 성공했다. 인터뷰 시작부터 끝까지 그는 '할리우드 스탠더드 퀄리티'라는 말을 자주 썼다. 말은 쉽다. 미국 관객의 눈에 맞춘 스탠더드 퀄리티라는 것은 그 기준이 모호하다. 영화라는 건 공장에서 찍어내는 공산품이 아니기에 공식 인증도 받기 어렵다. 결국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그에게는 '좋은 이야기에는 반응을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장성호 감독의 성공 비결을 따라가 봤다. Q. 북미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난 후, 드디어 한국 관객과 만나게 됐다. 소감이 어떤가? A. 미국에서 개봉할 때는 좀 담담했는데, 오히려 국내 개봉을 앞두고는 긴장이 된다. 미국에서는 배급사가 흥행 지표가 될 만한 데이터를 계속 제공해 줘서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했는데 국내 시장은 예측 불가다. 국내 극장 체인들도 우리 영화가 레퍼런스가 없는 특이 사례다 보니 예측이 어렵다고 하더라. 오늘 다행히 예매율 1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어 조금은 안심이 된다. Q. 북미에서는 지난 4월에 개봉했는데 국내 개봉은 7월에서야 이뤄졌다. 양국 개봉 시기를 각각 4월과 7월로 잡은 이유가 있나? A. 미국은 부활절 시즌이 대목이다. 게다가 예수 소재의 영화다 보니 부활절에 개봉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었다. 국내 개봉 시기는 미국 개봉 때도 결정을 못 하고 있었다. 연말에 해야 하나 하다가 북미에서 큰 성공을 거두다 보니 빨리 개봉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래도 한국은 더빙 준비도 해야 하기 때문에 빨리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다 여름 방학을 앞두고 하게 됐다. Q. '킹 오브 킹스'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북미를 타깃으로 한 작품인데 이례적인 기획이다. 또 VFX 분야의 1인자긴 하지만 애니메이션 영화에 참여한 경력은 없다. 애니메이션을 연출 데뷔작으로 택한 이유도 궁금하다. A. 영화감독을 하겠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운동을 처음 하는 사람이 헬스장에 가서 3대 500을 칠 순 없다. 오랫동안 준비하고 기다렸다. 2015년쯤부터 연출에 대한 마음을 먹었다. 실사 영화를 하지 않은 건 크리에이터로 증명되지 않은 내게는 저예산 규모 수준의 투자밖에 이뤄지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봉준호, 박찬욱이 아니지 않나. 그러나 애니메이션을 하면 기대치가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애니메이션의 경우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었다. 기술적인 자신감이 있었고 시장 조사도 오랫동안 했다. 기독교 콘텐츠가 절대로 돈을 잃지 않을 시장이라는 것을 알았고, 이 정도면 투자자들에게 민폐를 안 끼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국 애니메이션은 영유아물에 특화돼 있었고 예산을 많이 써도 50억 원을 내외일 것 같았다. 완성도를 높이려면 그보다 큰 예산이 필요했다. 그래서 북미 시장을 메인 타깃으로 하게 됐다. Q. 성경 기반의 이야기를 첫 영화의 소재로 잡은 것도 북미 시장을 공략하는데 주효했던 것 같다. A. '애니메이션은 오리지널 작품으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천하의 디즈니도 오리지널 작품 중 성공한 사례가 없다. 픽사가 나오고 나서야 오리지널이 잘 됐다. 그들(북미 관객)에게 친숙한 원작 베이스로 가야겠다고 해서 소재를 찾았다. 미국은 청교도가 세운 나라다. 이 소재라면 시장에서 충분히 반응하겠다고 생각했다. 예수를 주인공으로 한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이 한 번도 만들어진 적이 없는데, 이 작품이 잘 만들어지면 큰 상징성도 갖겠다고 생각했다. Q. 찰스 디킨스의 소설 '우리 주님의 생애'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했다. 어떤 것을 활용했고, 어떤 점이 다른가? A. 디킨스의 오랜 팬이라 모든 작품을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작품이 있다는 건 이번에 알았다. 다만 이 책에서 영감을 얻었지, 원작으로 한 건 아니다. 디킨스는 예수의 이야기를 도덕주의적인 관점으로 썼다. 그러나 나는 그게 입체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의미보다 재미, 신앙보다 이야기. 관객이 먼저 다가올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다만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형식은 재밌다고 생각해 그건 차용했다. 아이 입장에서는 예수의 기적과 모험이 환상적인 여정이 될 거라 생각했고 이 형식이 뻔한 이야기를 재밌게 보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Q. 성서 기반의 애니메이션 영화가 북미에서 와이드 릴리즈로 개봉한 게 '이집트 왕자' 이후 27년 만이라고 들었다. 그간 왜 이렇게 북미에서 제작이 뜸했다고 생각하나? A. 미국 영화의 수익 구조가 국내와 해외가 비슷했을 때는 성서 기반의 영화가 많이 제작됐다. 그러나 해외 시장의 비중이 커지면서 할리우드도 해외 시장을 겨냥한 작품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기독교 영화 콘텐츠 제작이 줄었다. 나로서는 오히려 메인 스트림에서 만들지 않기 때문에 틈새 공략이 가능하겠다 싶었다. 애니가 아무나 공략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할리우드 스탠더드 퀄리티를 맞출 수 있는 건 미국에서도 디즈니, 소니, 유니버설 등 5대 배급사뿐이다. 이걸 한국의 작은 회사에서 만들었다고 하니 미국에서도 놀라더라. Q. '킹 오브 킹스'는 개봉 첫 주 박스오피스 2위로 데뷔했고 약 4주간 박스오피스 10위권을 유지하며 북미에서만 6000만 달러 이상의 극장 수입을 거뒀다. 영화 자체의 힘도 있지만 와이드 릴리즈의 힘도 컸다고 생각한다. 미국 현지 배급사는 엔젤 스튜디오(Angel Studios, Inc.: 미국의 인디 기독교 미디어 회사이자 영화 배급 스튜디오)라는, 한국에는 사소 생소한 회사다. 이곳과 손잡게 된 배경은? A. 영화를 제작할 때부터 이 소재가 미국인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기에 좋다고 생각했고, 만듦새가 좋으면 시장이 반응할 거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래서 영화를 모두 완성한 후에 (배급) 비딩을 걸자는 오만함이 작동했다. 물론 메이저 배급사랑도 접촉했는데 엔젤 스튜디오의 조건이 더 매력적이었다. 과거 기독교 영화인 '사운드 오브 프리덤'을 와이드 릴리즈로 배급한 경험이 있다는 것도 장점으로 받아들여졌다. 무엇보다 우리가 갑의 위치에서 계약을 할 수 있었다. 내 요구사항은 ▲ 부활절 개봉 보장 ▲ 개봉 첫 주 최소 북미 2천 개 이상의 스크린 확보. 이 두 가지였는데 그들이 모두 수용했다. 영화 완성 후 북미 극장 체인들 대상으로 배급 시사를 열었고 반응이 좋아 개봉 첫 주에 3,200개 스크린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2주 차엔 3500개까지 늘어났다. 사실 초반 흥행 지표만 보면 더 잘될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인크래프트 무비'와 '시너스'가 복병이었다. '마인크래프트 무비'가 아니었으면 개봉 첫 주 북미 박스오피스 2위가 아닌 1위로 데뷔했을 거고, 2주 차에 '시너스'가 개봉하지 않았다면 박스오피스 1위를 했을 거다. Q. '킹 오브 킹스'의 성공엔 두 파트너의 공헌도 빼놓을 수 없다. 공동 제작자이자 촬영감독으로 함께한 김우형(한국 영화계 촬영 분야의 거장으로 불리는 인물로 '암살', '1987', '카트' 등을 촬영했으며 개봉을 앞둔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도 작업)감독과 기획자인 제이미 토마슨이다. 역할 분담을 어떻게 한 건지 궁금하다. A.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한 유이한 인물들이다. 감독이라서 인터뷰를 많이 하고 다니다 보니 '내가 다 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영화는 누구 한 사람의 힘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의 노력과 보이지 않은 운들이 작용한 결과다. 김우형 감독이나 저 모두 애니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실사 영화를 하면서 쌓아온 경험치가 많았다. 기존 제작방식을 애니메이션에서도 활용하기로 했다. 실사 영화와 같은 퀄리티 구현을 위해 버추얼 프로덕션 시스템과 카메라를 자체 개발했다. 언리얼 엔진 기반의 이 시스템은 배우의 실사 연기를 가상공간에 적용해 실제 촬영과 유사한 방식으로 구현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조이스틱 형태의 제어장치를 연결한 카메라를 자체 제작해 김우형 촬영감독이 직접 조정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고, 그 결과 애니메이션에서는 보기 드문 섬세하고 역동적인 카메라 무빙을 구현할 수 있었다. 김우형 감독의 경우 이 영화를 준비할 동안 본업(촬영)을 접고 저희 회사로 들어와서 일을 했다. 제이미 토마슨은 디즈니에서 15년 넘게 일한 업계 최고 전문가다. 할리우드 인맥을 통해 업계의 탑 전문가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그렇게 소개받은 사람이 토마슨이었다. 그와 처음 미팅을 했을 때 '좋은 기획이고, 잘 될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에이전트에 다이렉트로 대본을 보낼 순 있지만 대본이 후지면 끝이다'라고 하더라. 아시다시피 할리우드는 에이전트에게 대본을 보내면 바로 배우에게 건네는 게 아니라 검수부터 한다. 별로면 바로 쓰레기통행이다. 그걸 통과했다. Q. 할리우드 인맥은 어떤 인연과 사연을 통해 구축하게 된 건가? A. 과거 미국 드라마 '스파르타쿠스' VFX 작업에 참여하며 할리우드 스태프들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이후 국내 드라마 '태왕사신기' 작업을 했는데 그때 스태프 중에 '반지의 제왕'팀이 있어 또 인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이후 영화 '전사의 길'을 하면서 이 스태프들과 다시 만나 친해졌다. 이들은 아카데미에서 받은 오스카 트로피만 24개인 업계 최고의 선수들이었다. 선수는 선수들을 알아보다고 하지 않나. 그분들과의 관계가 좋았다. 그때부터 "장 대표는 할리우드에 와서 일해도 잘할 것 같다"는 말을 자주 들었고, "연출을 해 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어려서부터 할리우드가 막연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사람 사는 건 다 똑같고, 역량만 있으면 어디에서든 인정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Q. '킹 오브 킹스'에는 36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됐다. 이 중 소위 국내 메이저 투자배급사의 자본은 하나도 없다. 어떻게 이 자본을 조달한 건지 투자유치 과정을 듣고 싶다. A. 국내 투자 배급사들은 다 외면할 거라 투자를 받으려는 시도조차 안 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법에 저촉되지 않은 선에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 투자를 받았다. 초기에는 주변 지인들에게 부탁해 회사로 투자를 받았다. 그렇게 모으니 꽤 큰돈이 되더라. 그걸 종잣돈으로 활용해 콘텐츠 펀드에 투자했고, 그 레버리지로 초기 투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 무렵 중국 영화 시장에서 VFX 수주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회사의 매출도 커졌다. IPO가 가능한 업종이다 보니 회사의 지분을 팔아서 투자금에 보탰다. 여기에 개인 자산까지 투입했다. 장기 파는 거 빼고는 다했다고 볼 수 있다. Q. 지금까지의 말을 종합해 보면 '실력과 인맥, 운이 있다면 미국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로 들린다. 그러나 국내 수많은 영화인이 할리우드 시장에 문을 두드렸다가 실패했다. 당신은 어떤 점이 달랐다고 생각하나? A. '좋은 콘텐츠는 반응이 온다'고 생각한다. 좋은 기획을 했고, 그들의 허들을 넘을만한 시나리오를 썼기에 그들이 반응했다. 과거에 시도한 분들은 할리우드 인맥도 없고, 시장 돌아가는 상황을 잘 모르다 보니 그들이 소개해 주는 브로커, 로비를 거치게 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두세 다리씩 거치면 핵심에 도달하기가 어렵다. 나의 경우 A리스트를 통해서 상황을 꾸려냈기 때문에 직접적인 비즈니스가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Q. 개인적으로 국내 애니메이션의 글로벌화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작화라고 생각한다. '킹 오브 킹스'는 이를 극복했고, 국내외 관객들에게 소구할 만한 캐릭터들을 만들어냈다. A. 그렇다. 우리뿐만 아니라 해외 관객들 역시 디즈니에 길들여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외에는 다 마이너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아트웍에도 많은 시간을 쏟았다. 기조는 '디즈니의 수준에 도달하되, 아류가 되지 말자'였다. 저의 경우 미술을 전공했고, 이미 여러 작품의 VFX 작업을 통해 많은 경험이 있었다. 작업을 진행해 가면서 각본뿐만 아니라 아트웍 파트에서 할리우드 지인들의 의견을 구하고, 그들의 피드백을 반영하며 수준을 높였다. Q. '킹 오브 킹스'는 크게 두 가지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첫 번째는 아버지인 디킨스와 아들 월터의 관계 회복, 두 번째는 월터가 예수의 이야기에 몰입하고 그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이 둘의 균형을 어떻게 잡아 나갔나? A.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회복도 중요한 동시에 예수의 인류에 대한 사랑을 월터가 깨닫게 되는 것이 중요한 작품이다. 서브 플롯이 메인 플롯을 잡아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관객이 온전히 예수의 이야기를 보고 나온 느낌을 줘야 했다. 아기 예수가 탄생하자마자 월터와 눈을 맞추는 것을 시작으로 천천히 예수를 알아가는 과정이 나온다. 처음엔 디킨스가 개입을 많이 하는데 나중에는 서서히 빠진다. 그 자연스러움에 신경을 많이 썼다. Q. 캐릭터 중에선 고양이 윌라가 사랑스러웠다. 실제 고양이의 행동 양식을 관찰한 끝에 완성한 듯한 섬세한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A. 실제로 디킨스가 고양이를 키웠고, 이름도 윌라였다고 한다. 이 영화는 월터가 예수를 알아가는 과정을 담은 영화인 동시에 아버지 디킨스의 성장담이기도 하다. 보통 어른들은 아이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걸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이에게 소중한 존재면 어른들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디킨스가 윌라를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월터도 아버지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애니메이션적인 재미를 위해서도 윌라는 필요한 캐릭터였다. 과거 고양이를 세 마리 키운 적 있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윌라 캐릭터를 사실적으로 만들고자 했다. Q. 더빙 캐스팅을 할 때 영어판, 국내판에서 어떤 것을 고려했나. 국내 더빙의 경우 전문 성우가 아닌 스타 캐스팅에 주력했는데 그 이유는? A. 물론 성우들의 전문성을 존중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애니에 고정된 느낌보다는 생활 언어, 톤으로 편안하게 연기를 하는 방향을 원했다. 그래서 국내의 경우 배우 캐스팅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다. 물론 영어로 쓴 대본이라 미국 배우와 한국 배우의 느낌이 같을 순 없다. 그러나 한국 배우분들이 워낙 더빙을 잘해 주셔서 배우들이 참여한 더빙판 중에서는 최고의 퀄리티라고 자부한다. 이병헌, 이하늬, 진선규, 양동근, 차인표 등 최고의 배우진이 캐스팅 됐는데 이분들 모두 미국 개봉 전에 이미 캐스팅이 완료됐다. 주변 지인들의 도움도 많았지만, 대부분 시나리오를 읽고 선뜻 참여해 주셨다. Q. 한국 애니메이션이 미국 영화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킨 것에 대한 현지 언론의 반응도 뜨거웠던 것으로 안다. 현지 언론과 인터뷰를 했을 때 그들이 가장 흥미로워 한 건 어떤 것이었나? A. 한국 작품, 그것도 북미 메이저 배급사의 지원을 받지 않은 작품이 와이드 릴리즈로 개봉하고 대성공을 거둔 것에 가장 놀라더라. 우리나라로 치면 독립영화가 천만 영화를 한 것 같은 결과다. 관련 질문을 많이 받았다. 나는 '보편적인 게 세계적인 게 아닐까요?'라고 답하곤 했다. 한국 사람이라고 해서 한국적인 게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런 작품을 만들 생각이다. 최근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성공으로 알 수 있듯 한국 문화를 바탕으로 한 미국 애니메이션이 나올 수 있고, '뮬란'과 '쿵푸팬더'처럼 중국의 문화와 캐릭터를 활용한 미국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다. 소재를 누가 사용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서구를 향한 문화적 열등감은 사라진 것 같다. 그들과 같은 시선에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편적인 정서는 어느 세상이나 통하기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의 성공도 마찬가지다. 이야기가 소구된 역사는 유구하지만 결국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으로 귀결되더라. 소재 활용에 있어서도 경계나 거부감 없이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세상이다. Q. 한국 VFX 분야의 선구자로서의 견해도 궁금하다. VFX가 21세기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지금은 AI 시대가 도래했다. AI가 사람의 기술을 대체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건데 이 변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A. 제가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한 해에 150편의 영화가 제작된다고 치면 CG가 들어간 영화가 1,2편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안 들어가는 영화가 1,2편밖에 없을 정도로 CG 사용이 보편적이다. 이제는 AI 시대가 돼서 모든 걸 대체하리라고 본다. 생각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접근성이 좋아진다는 건데 그건 반대로 누가 해도 똑같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변별력이 없으면 관심도 떨어질 것이다. 실행은 쉬워지나 유니크한 아웃풋을 내긴 어렵다. 창의적이고 독특한 결과물을 낼 수 있는 크리에이터가 각광받는 시대가 올 거라고 생각한다. Q. 어떻게 영화 일을 시작하게 됐나. 그리고 영화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을 '장성호의 인생 영화'도 궁금하다. A. 어려서부터 워낙 영화를 사랑했고, 많이 봤다. 책 읽고, 그림 그리는 것도 마찬가지로 좋아했다. 영화인을 하는 것은 내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의 토토로'를 가장 좋아한다. 그의 작품 중 최고 걸작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라고 생각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건 '토토로'다. 또 '톰과 제리', '루니툰'도 좋아한다. 대사 없이 상황을 전달하는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극영화 감독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스탠리 큐브릭이다. 제가 추구하는 스타일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구로사와 아키라다. 일단 영화를 한 번 보면 끝까지 보게 되는 마력을 보여준다. 지금 봐도 하나도 촌스럽지 않은 걸작들이 많지 않은가. Q. 애니메이션으로 영화 연출의 첫발을 뗐는데, 실사 영화 연출에 대한 계획도 있을 것 같다. A. 극영화로 구상해 놓은 게 있긴 하다. 그러나 오리지널 콘텐츠를 하려면 제가 더 유명해져야 할 것 같다. 남의 돈을 투자받아 개인 예술을 하는 건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건 내 돈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음 계획은 아직 구체화진 않았지만 성서 기반은 아니다. 제가 즐겁고 재밌을 만한, 그러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영화를 해보고 싶다. 또한 중국 시장에서도 개봉할 수 있는 영화를 해보고 싶다. Q. 감독이 아닌 제작사 대표로서 답한다면, 모팩 스튜디오는 애니메이션 제작 비중을 늘릴 계획인가? A. 모팩 스튜디오는 VFX 회사로 출발했지만, 앞으로는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방향을 잡아 나갈 것 같다. '킹 오브 킹스'가 북미에서 한국 애니메이션이 성공한 최초의 사례이기 때문에 당분간은 애니메이션을 더 제작해 볼 생각이다. 게이트를 오픈했으니 여기서 좀 더 성과를 내고, 지평을 넓혀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디자인 : 채지우
'주말에 뭐 볼까?'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스프가 알려드립니다. "이 영화 속 사건, 지명, 인물 모두 허구임을 밝힙니다" 영화 '신명'은 오프닝 크레딧을 통해 앞으로 시작될 이야기가 허구임을 명시한다. 그러나 이런 고지는 그저 법적인 보호막일 뿐이라는 듯 대한민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인물과 사건을 대놓고 재현한다. 여타 정치 다큐멘터리처럼 품위 있는 척, 객관적인 척하지 않는다. 제작진은 문제적 영화임을 자처하며 거침없는 풍자와 조롱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하는데 집중한다. 또한 오컬트 정치 스릴러라는 혼종 장르를 내세워 창작과 묘사의 폭을 넓혔다. 검찰총장 출신의 대통령 김석일(주성환)과 주술에 심취한 그의 영부인 윤지희(김규리)가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인터넷 언론 기자 정현수(안내상)가 그들의 비밀과 비리를 추적한다. 허구의 매체인 영화에서 현실에 거울을 들이댄 것 같은 강력한 기시감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신명'은 모큐멘터리(Mockumentary) 영화다. 모큐멘터리는 허구의 내용을 마치 실제 상황인 것처럼 보이도록 제작한 영상으로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말로 통용되기도 한다. 이는 관객의 긴장감과 몰입감을 높인다. 다만 다큐의 톤으로 진행되는 만큼 관객이 실제인 것처럼 오해할 소지도 있다. 이태원 참사를 연상케 하는 사건을 보여주고 이 참사의 배경으로 영부인의 주술 행위를 제시한다. 또한 대통령이 관저를 옮기고도 3개월 후에나 들어간 행동은 액운을 피하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한다. 실제 사건으로 몰입감을 높인 뒤 음모론에 가까운 상상력으로 긴장과 충격의 강도를 높이는 식의 전개다. 인물을 다루는 방식도 거칠다. 영화가 초점을 맞춘 건 윤명자에서 윤지희로 이름을 바꾸고 영부인의 자리에까지 오른 한 여성의 드라마틱한 인생이다. 윤지희는 어린 시절 '분신사바' 사건을 시작으로 주술에 심취하게 된다. 성인이 된 뒤에는 남자를 이용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성형으로 얼굴을 바꾼 뒤 이름, 학력, 신분까지 위조한다. 그녀의 의심스러운 과거 행적과 현재의 비밀스러운 행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이를 근거로 악마화한다. 또한 이런 행위가 개인의 종교 활동이나 일탈이 아닌 대통령의 정책 결정에도 영향을 줬다는 설정이다. 특히 영화는 중, 후반부에 이르러 영부인과 대통령이 심취해 있다는 일본의 종교와 주술 의식을 집중적으로 묘사한다. 이때 오컬트라는 장르적 특징을 부각하며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강조된다. 영화의 구성에서 후반부는 아주 중요하다.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고, 해소의 카타르시스로 이어지는 이 구간에서 '신명'은 오컬트 장르의 분위기를 적극 활용한다. 그 과정에서 진실 추적에 집중하던 정치 다큐로서의 색깔은 희미해지고 소재주의와 선정성이 강화된다. 영화의 완성도에 있어서 치명적인 결함으로 지적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신명'은 최근 약 10년간 개봉한 모큐멘터리 영화 중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작품이 될 가능성이 크다. 개봉 3주 만에 전국 70만 관객을 돌파하며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제작비 15억 원이 투입된 이 영화의 손익분기점은 약 30만 명. 개봉 10일 만에 손익분기점을 가볍게 넘긴 이 영화는 투자 대비 두 배 이상의 수익을 올렸으며 여전히 극장가에서 순항 중이다. 현재의 흐름이 4주 차까지 이어진다면 '마의 100만' 돌파도 가능하다. "완성도로 보는 영화가 아니"라는 관람객의 평가에는 이 작품을 둘러싼 대중의 환호에는 영화 외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정치적 혼란, 검찰에 대한 불신, 언론의 무능 등으로 지친 대중들에게 이 영화의 날것의 통쾌함을 선사했고, 이는 상업적 성공으로도 이어졌다. 발 빠른 기획과 실행의 승리다. 영화는 지난 3월 14일에 촬영을 시작해 48일 만인 4월 30일 촬영을 마쳤다. 반드시 21대 대통령 선거 전에 개봉해야 한다는 제작진의 의지가 반영돼 영화는 대선 전날인 6월 2일에 개봉했다. '신명'은 ‘열린공감TV’ 산하 열공영화제작소가 제작, 배급한 영화다. 영화 전문 제작사 아닌 유튜브 채널 기반의 언론이 영화 제작에 나선 케이스다. 뉴스타파와 뉴스공장도 정치 다큐멘터리를 만든 바 있어 특기할 만한 일은 아니다. 다만 '신명'의 경우 확실한 차별화를 이뤄냈다. ‘열린공감TV’는 20대 대선 후보로 윤석열 검찰총장이 떠오르고 있을 때 처음으로 '쥴리 의혹'을 보도한 곳이기도 하다. 전 대통령 부부에 대한 오랜 취재로 이름을 알린 매체가 조기 대선을 앞두고 자신들의 취재 기록을 기반 삼아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어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릴지 관심이 집중됐다. 정권 교체 이후 위축된 보도 여건으로 인해 차마 다루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이번 영화를 통해 밝힐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었다. 그러나 열공영화제작소는 팩트 기반의 드라이한 보도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단적 상상력으로 점철된 페이크 다큐멘터리로 노선을 정했다. 물론 영화가 제시하는 극단적 상상력을 모두 진짜라고 받아들이는 관객은 없을 것이다. 저주의 굿판을 벌이는 후반부 윤지희의 발악을 보면서도 놀랍지 않은 건 '현실이 영화보다 더 비현실적이고, 영화보다 더 자극적인데?'라는 생각이 다수의 머릿속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화라는 매체는 창작을 기반으로 하며, 창작에는 성역도 경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성에 집중한 빠른 공정만큼이나 영화의 완성도에도 공을 들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기획의 성취과 영화의 도구화가 남긴 씁쓸한 뒷맛이다. 뜨거운 영화 '신명'도 언젠가는 극장에서 내려갈 것이다. 다행히 3대 특검이 본격 활동을 앞두고 있다. 설(說)과 음모론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즐겼던 시간을 넘어 뉴스에 집중할 시간이다.
'주말에 뭐 볼까?'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스프가 알려드립니다. "불가능한 모든 것을 제거했을 때, 마지막에 남은 것이 아무리 이상한 것이라도,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 추리 소설의 대가 아서 코난 도일은 미스터리를 푸는 열쇠로 이러한 방법을 제시한 바 있다. 사건이 벌어졌고, 진실은 미궁에 빠졌을 때 불가능성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 진실과 가장 빨리 마주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지난달 21일 공개된 디즈니+ '나인 퍼즐'이 후반부를 향해 가면서 흥미진진한 두뇌 유희의 시간을 선사하고 있다. '나인 퍼즐'은 10년 전, 미결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현직 프로파일러인 '이나'(김다미)와 그를 끝까지 용의자로 의심하는 강력팀 형사 '한샘'(손석구)이 의문의 퍼즐 조각과 함께 다시 시작된 연쇄살인 사건의 비밀을 파헤치는 추리 스릴러.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프로파일러가 돼 또 다른 살인 사건들을 추적한다는 설정, 여기에 주인공이 자신을 용의자로 지목한 형사와 공조하며 연쇄살인의 진실을 추적한다는 설정이 흥미로운 작품이다. 11부작인 '나인 퍼즐'은 공개된 9회까지 수많은 인물의 등장·퇴장과 엄청난 양의 떡밥을 던지며 거대한 미스터리와 흥미진진한 서스펜스를 구축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정통 추리물의 매력에 빼어난 만듦새, 개성파 배우들의 열연까지 더해져 웰메이드 드라마라는 호평을 받고 있다. "범인은 바로 당신"…고전적인 추리물의 매력 고교생인 이나(김다미)는 집에서 유일한 가족인 삼촌의 사망을 목격한다. 이 인물은 한강경찰서 서장 윤동훈(지진희)이다. 사건 현장에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라는 것과 알리바이가 모호했기 때문에 이나는 용의자로 지목되고, 경찰의 집중 수사를 받게 된다. 그러나 증거 불충분으로 이나는 용의 선상에서 빠져나가고 이 사건은 미제로 남는다. 이 사건을 수사하던 한샘(손석구)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이나를 끝까지 의심한다. 두 사람은 10년이 흘러 경찰과 프로파일러로 재회하게 되고 잇따라 발생한 살인 사건이 과거 윤 총경 사건과 연결돼 있다는 공통된 확신을 가지고 공조 수사를 펼친다. 사건의 복선은 살인 예고와 같은 퍼즐 조각이다. 이나는 삼촌의 시신을 발견한 그날 처음으로 퍼즐 조각을 발견했고, 10년 후 발생한 연쇄 살인 사건 수사 중에도 퍼즐 조각을 발견하거나 배달받는다. 이 퍼즐에 그려진 그림은 범인이 이나에 보내는 진실의 힌트인 동시에 '나를 찾아줘'라는 신호와 같은 기능을 한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 '공작'을 만든 윤종빈 감독의 첫 추리 스릴러인 '나인 퍼즐'은 고전적 매력이 가득한 추리물이다. 애거사 크리스티, 코난 도일, 에드거 앨런 포, 이든 필포츠의 추리 소설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인 탓에 등장인물 모두가 용의자가 되고, 사람의 성격이나 심리를 꿰뚫어 보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연출적으로는 노련하다. 음악과 미술로 장르적 무드를 강화했고, 촬영은 두 주인공의 상상력을 구체화하는 방식으로 연출됐다. 반전이냐 개연성이냐… 누구보다 중요한 건 왜? 이 작품이 흥미로운 건 모든 사건이 누군가에 의해 설계된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더원시티 개발과 비리라는 결정적 단서가 제시되고 경찰과 언론의 유착 관계를 의심할 만한 정황들도 고개를 들었다. 범인이 내부(한강경찰서)에 있을 가능성과 외부(이나 혹은 제3의 인물)에 있을 가능성이 동시에 제기되면서 미스터리의 강도는 세지고 있다. 윤종빈 감독은 매회 주인공에 버금가는 유명세를 가진 배우들을 카메오로 등장시켜 시청자들이 허투루 지나치지 않게 한다. 지진희, 예원, 이희준, 이성민, 백현진, 황정민, 박성웅 등이 연쇄 살인의 피해자로 등장했다. 단 2회만을 남겨둔 '나인 퍼즐'이 용두사미가 될지 유종의 미를 거둘지도 관심이 쏠린다. 시청자들 사이에선 벌써부터 갖은 추측들이 나오고 있다. 주인공 중 한 명이 범인일 가능성과 주인공들의 주변 인물 중 한 명일 가능성, 나아가 범인이 한 명이 아닌 복수일 가능성까지 제시하고 있다. 누구도 예측 못 할 반전보다는 1회부터 뿌려놓은 떡밥을 잘 회수하며 개연성 높은 결말을 제시하는 것이 '나인 퍼즐'의 완성도를 높이는 선택이다. 범인 찾기에 빠진 시청자들이 마주하게 될 결말은 무엇일까. '누구'만큼이나 '왜'에도 관심이 쏠린다. 이는 곧 감독과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주말에 뭐 볼까?'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스프가 알려드립니다. 영화 '해피엔드'(Happyend)의 초기 제목은 '지진'(Earthquake)이었다. 이 영화에서 지진은 일본에서 발생하는 물리적 재앙만을 뜻하지 않는다. 인간관계의 미세한 떨림과 균열, 일본 사회의 갈등과 붕괴라는 함의도 포함한다. 그러나 이 제목은 너무 직접적이고 투박하다. 영화를 연출한 소라 네오 감독은 오랜 고민 끝에 더 문학적이며 상징적인 '해피엔드'라는 제목을 선택했다. 유타, 코우, 아타, 톰, 밍은 고등학교 음악동아리에서 활동하며 우정을 나누는 사이다. 게릴라 디제잉 클럽에 다녀온 날, 다섯 친구는 흥에 취해 새벽까지 학교 동아리방에서 자신들만의 음악에 빠져든다. 유타는 학교를 나서면서 교장이 애지중지하는 노란색 스포츠카를 보고 장난기가 발동한다. 절친 코우를 꼬셔 차를 세로로 세운 후 도망친다. 교장은 이를 테러라 규정하며 범인 찾기에 혈안이 되고, 급기야 학교에 AI 시스템을 도입해 학생들을 감시하기 시작한다. '해피엔드'는 학생을 통제하려는 학교와 자유를 갈구하는 학생들의 대립에서 출발하는 영화다. 감독의 시선은 학교 안에만 머물지 않고 동시기 일본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도 주목한다. 극우화된 일본 사회에는 차별과 혐오, 갈라치기가 만연하다. 총리 키토는 "불법입국한 외국인과 반일 세력에 의한 흉악범죄가 대지진 때마다 증가한다"고 억지 주장을 펼치고, 지진의 위협으로부터 국민의 안전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비상계엄까지 발동한다. 이에 반발한 시민들은 거리로 나가 시위를 벌인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근미래로 설정돼 있다. '해피엔드'는 미래의 시간과 공간을 제시하면서도 CG 사용을 최소화했다. 도쿄의 빌딩 숲과 붉은빛의 네온사인 그리고 전광판에 등장하는 경고 시그널만으로도 근미래적인 분위기를 낸다. 푸른색과 붉은색을 테마로 한 촬영과 테크노와 일렉트로닉, 엠비언트 음악도 감각적인 무드를 형성한다. 몇몇 효과적인 장치와 설정만으로도 설득 가능한 시대적, 공간적 배경을 구축하며 이야기에 몰입감을 높였다. '해피엔드'가 제시하는 근미래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그리 다르지 않다. 실제로 과거 영화들이 명명했던 그 시기가 도래했거나 이미 지나갔음에도 현재는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어떤 건 과거에 비해 퇴보하기도 했다. 기술의 발전이 삶의 편리함을 가져왔을지언정 사회의 진화와 성숙까지 가져다주진 않았다. 사회를 이끄는 리더와 구성원 모두 선하거나 현명한 것은 아니란 것을 과거와 현재를 통해 경험해 오지 않았던가. 지진이라는 환경적 재난과 AI 감시라는 사회적 통제를 피부로 체감하는 유타와 코우는 각기 다르게 반응한다. 유토는 쉬이 바뀌지 않는 맞서지 말고 이 안에서 우리만의 행복을 찾자는 주의며, 코우는 사회에 반항하고 투쟁하며 불합리를 극복해보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은 처지가 다르다. 재일한국인(자이니치) 4세인 코우는 학교 안과 밖에서 자신이 이방인임을 자각할 수밖에 없다. 유타와 함께 사고를 쳐도 코우는 경찰에게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야 한다. 사회와 집단에 만연한 차별과 적대감으로 인해 언제든 테두리 밖으로 밀려날 수 있는 신세인 것이다. 오늘만 사는 유토는 비겁한가. 영화는 자기만의 방식과 용기로 세상에 목소리를 유토를 보여주며 관객의 속단과 오판을 거둬들인다. 그렇다면 이미 망해버린(것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소년에서 어른이 되는 성장통을 겪은 유타와 코우는 더 이상 같은 곳을 바라보고, 나란히 걸어갈 수 없다. 나만의 자아와 가치관이 확립된 그들은 행복의 기준도 달라져 버렸다. 롱테이크로 촬영된 엔딩 시퀀스는 따스함과 동시에 쓸쓸함을 선사한다. 그러나 청춘은 스스로의 길을 찾아나가는 시간이라는 니체의 말을 되새겨보면 유타와 코우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임이 틀림없다. '해피엔드'는 일본 사회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사회드라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명백한 청춘영화다. 학교라는 소우주, 친구라는 울타리 안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청춘의 한 페이지를 기록한 성장영화다. 이는 유토와 코우만이 아닌 누구에게나 있었던 시절이다. 영화를 아우르는 주요한 정서는 우정이다. 사랑을 알기 전 맞이한 가장 뜨겁고 순수했던 감정이다. '해피엔드'는 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순간들을 아름다운 영상과 감각적인 음악으로 기린다. 소라 네오는 미야케 쇼, 하야카와 치에 등과 함께 일본 영화의 차세대 기수로 꼽히기에 손색없는 재능을 보여줬다. 과거는 있지만 현재와 미래는 희미해진, 작금의 한국 영화계엔 부러운 일본 영화의 새로운 계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