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연예뉴스에서 영화 관련 글을 쓰고 있습니다. 감독과 배우들의 '영화로운 순간'들을 전하겠습니다.
'주말에 뭐 볼까?'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스프가 알려드립니다. 교황이 선종한다. 전 세계 추기경들이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 모여든다. 콘클라베(Conclave)에 돌입한다. 콘클라베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교황을 선출하는 선거 제도로, 교황 선종 시 선거권을 가진 추기경단이 소집되어 교황을 선출하는 비밀 회의다. 공정한 선거를 위해 추기경들은 외부와 단절된 채 투표에 임한다. 선거인단 2/3의 표를 얻는 추기경이 나올 때까지 매일 투표를 진행하게 된다. 유력한 후보로 거론됐던 추기경들의 비밀이 드러나며 선거는 장기전이 된다. 선거를 총괄하는 동시에 또 한 명의 교황 후보이기도 한 로렌스(랄프 파인즈)는 리더의 자격을 검증하는 과정을 통해 딜레마에 빠진다. 영화 '콘클라베'는 정직한 제목을 보고 지루하고 딱딱한 종교 영화를 상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종교 영화의 외피를 쓴 정치 스릴러에 가깝다. 선거판이 휘청이는 몇 차례의 전복은 예측 불가의 긴장감을 선사하고, 마지막 반전은 충격과 탄식을 선사한다. '누가 교황이 될 것인가'라는 호기심에서 출발한 영화는 '리더의 자격'에 대한 담론을 제시하고 종교의 변화와 포용에 관한 넓고 깊은 질문까지 던진다. 선거 과정을 영화의 플롯에 녹였음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를 놓치지 않는다. 콘클라베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 지도자를 뽑는 선거다. 권력을 향한 경쟁에는 어김없이 정치가 작동한다. 종교의 영역에도 예외는 없다. 이는 현대 사회의 선거에 대입할 수 있으며, 영화는 세속 정치에 대한 은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각국을 대표하는 100여 명의 추기경들은 교황 후보인 동시에 유권자다. 출신 국가와 이념, 성향에 따라 보이지 않는 파벌이 형성되고, 선거의 흐름에 따라 균열이 생기기도 한다. 투표가 거듭될 때마다 시소의 무게 균형이 왔다 갔다 한다. "선거란 누굴 뽑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를 뽑지 않기 위해 투표하는 것이다." 프랭클린 P. 애덤스의 말처럼 선거는 최선의 선택이 아니라 차선, 최악을 피하고자 차악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신성해야 할 종교의 세계, 청렴이 몸에 밴 인물이라 여겼던 추기경들이 권력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고, 쟁투를 벌인다. 편향된 성향과 그릇된 인식을 가진 추기경이 있는가 하면 혐오와 갈등을 조장하는 추기경도 있다. 그러나 다수의 선택이 선도, 진리도 아니라는 건 숱한 역사의 기록을 통해 학습해 오지 않았던가. 영화는 관객의 멱살을 잡고 그 아슬아슬하고 위태한 과정을 함께 참관하게끔 한다. 랄프 파인즈를 필두로 스탠리 투치, 존 리스고, 이사벨라 로셀리니 등 관록의 배우들이 연기 배틀 같은 호연을 펼친다. 특히 로렌스를 연기한 랄프 파인즈는 클로즈업의 위력을 제대로 보여준다. 그는 이 바티칸 정치 스릴러에서 선거의 총책임자이자, 후보의 비리를 캐는 탐정이자, 교황이 되기를 잠시나마 꿈꾼 세속적이고 연약한 인간으로서 침묵 속 고뇌를 심연의 연기로 표현해냈다. 또한 한정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연극적 구성임에도 영화가 지루하지 않은 것은 동명의 원작 소설을 밀도 높은 정치 암투극으로 바꾼 각색과 연출의 힘이 세다. 교차 편집과 컷 분할, 다양한 앵글과 쇼트를 활용하는 등 리듬감이 돋보이는 편집(닉 에머슨)의 공도 상당하다. 강렬한 음악(볼커 베텔만)은 정적인 신에도 놀라운 마법을 부여한다. 영화를 연출한 에드워드 버거 감독은 '서부전선 이상 없다'(2022)에서부터 음악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며 긴장의 밀도를 높이고 극의 분위기를 이끄는 전략을 펼쳐왔다. 이는 '콘클라베'에서도 또 한 번 놀라운 효과를 낸다. "확신은 통합과 포용의 적"이라는 메시지는 설교조로 들릴 수도 있지만 '리더의 자격'을 끊임없이 묻고 검증하는 이 영화는 잘못된 선택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현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또한 영화가 내놓은 반전은 포용과 화합의 정의와 범위를 되묻는 질문이라는 점에서 충격을 넘어선 의미다. 너무 나아간 반전이 아니냐라고 인상을 찡그릴 수도 있지만 신의 뜻을 인간이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이 오히려 신에 대한 도전이나 반기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디자인 : 채지우
'주말에 뭐 볼까?'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스프가 알려드립니다. "저희끼리는 '발냄새 SF'라고 하곤 했어요." 가장 미국적인 장르인 SF와 한국적 정서로 세계적 거장이 된 봉준호의 결합, 평범한 작품이 나올 리 만무하다. 영화 개봉을 앞둔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신작 '미키 17'에 대해 '발냄새나는 SF'라 표현했다. '미키 17'은 위험한 일에 투입되는 소모품(익스펜더블)으로, 죽으면 다시 프린트되는 '미키'가 17번째 죽음의 위기를 겪던 중, 그가 죽은 줄 알고 '미키 18'이 프린트되면서 벌어지는 예측불허의 이야기를 그리는 영화. 한마디로 '죽어야 사는 남자'의 진짜 위기를 그린 SF 소동극이다. 에드워드 애슈턴이 2022년 발간한 SF 소설' 미키 7'를 영화화한 이 작품은 '휴먼 프린팅'이라는 소재를 통해 인간의 실존을 고찰하고, 과학 발전이 야기하는 윤리적 문제를 짚으며, 인간과 생태계의 갈등과 공존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한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화두인 계급 문제를 다루는 동시에 자본주의의 탐욕이 인류에 초래하는 비극을 신랄한 풍자와 짓궂은 유머로 풀어냈다. 베일 벗은 '미키 17'은 '설국옥자'?... '죽어야 사는 남자'에 담긴 메시지 미키(로버트 패틴슨)는 친구인 티모(스티븐 연)와 함께 마카롱 가게를 하다가 망해 사채업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 부닥친 그들은 지구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미키는 티모의 제안에 따라 우주 행성 니플하임 개척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되고 그중 경쟁자가 가장 적은 익스펜더블(Expendable: 소모품)에 지원한다. 익스펜더블은 임무 수행 중 사망할 경우 20시간 안에 과거의 기억과 감정을 그대로 가진 채 똑같이 '프린트'되는 숙명을 띤 직분이다. 원작 소설의 제목은 '미키 7'이다. 숫자가 의미하는 바가 미키의 프린팅 횟수라는 걸 감안하면 영화의 주인공은 원작 소설보다 10차례 더 죽는 셈이다. 영화에 더 폭력적인 상황을 부여해 미키의 비극성을 강조하고 과학 발전에서 경시되는 윤리 문제를 제기하려는 봉준호 감독의 의도가 엿보인다. 미키는 연구진에 의해 각종 실험을 당한다. 열여섯 차례의 죽음은 충격적이고 비극적이라기보다는 측은하고 짠하다. 봉준호 감독이 말한 '발냄새'는 미키의 '짠내' 나는 상황들을 말한 것이 아닐까 싶다. 미키는 무차별 사용되고 버려지는 소모품으로 우주 개척선에서 가장 천대받는 계급이라 할 수 있다. 노동자의 기본 권리인 보험이나 산업재해 등의 보호도 받지 못한다. 이런 미키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은 "죽는 건 어떤 느낌이야?"이라고 묻는다. 이 폭력적인 질문에 대해 미키는 "죽는 건 끔찍해. 여전히, 매번"이라고 답할 뿐이다. 미키는 탐사 임무 중 크레바스에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다.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순간, 니플하임의 생명체 크리퍼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한다. 뒤늦게 기지로 돌아온 미키는 또 다른 미키와 마주하게 된다. 연구진이 미키가 죽은 줄 알고 18번째 미키를 프린팅한 것. 니플하임에서는 익스펜더블은 허용하지만 멀티플은 금지한다. 소심한 17번 미키와 다소 과격한 18번 미키는 서로 살겠다고 싸우고 연인인 나샤의 중재를 통해 비밀리에 공존하기로 약속한다. 한편, 미키를 구해준 크리퍼는 보이는 게 다인 생물체가 아니다. '우주 식민지'는 지구인 관점에서는 개척이지만, 원주민인 크리퍼 관점에선 침략이다. 후반부엔 크리퍼들의 반격이 시작된다. 지금까지의 언급만으로도 기시감이 느껴질 것이다. '미키 17'은 '설국열차'와 '옥자'의 짙은 향기가 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세계를 관통하는 주제의식과 일관된 취향을 또 한 번 엿볼 수 있다. '설국열차'와 '옥자' 그리고 '괴물'의 기시감까지 느껴지는 '미키 17'은 봉준호의 자가 복제인가 종합판인가. 핵심은 기시감이 아닌 전작의 특징과 매력 요소들이 '미키 17'의 서사 안에서 잘 융합됐는가다. 이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미키 17'에 대한 평가가 나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풍자? 우리에겐 '그 사람'이 생각날 수도 영화에서 2명의 미키만큼이나 흥미로운 캐릭터는 마샬 부부다. 마샬은 우주 개척선의 대장이다. 그는 전직 국회의원으로 익스펜더블 복제 기술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인간에게는 하나의 영혼만 있고, 익스펜더블과 같은 복제인간은 영혼이 없는 괴물과도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니플하임에서 미키17과 18이 공존할 수 없는 이유다. 영화에서는 몇 차례의 집회 장면과 연설 장면이 나온다. 마샬의 캐릭터를 단번에 보여주는 장면으로 그의 야망과 광기가 드러난다. 그는 자기만의 세계와 철학에 갇혀 있고,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폭주하는 독재자다. 외신들은 우주에 식민지를 개척하려는 야욕과 이익 우선주의,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언어 사용, 과장된 제스추어 등에서 트럼프의 향기가 난다고 반응했다. 마샬 못지않게 탐욕과 집착을 드러내는 아내 일파도 낯설지가 않다. 일파는 원작에는 없는 캐릭터다. 마샬은 아내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쓰며 중요한 결정은 아내에게 의지하기도 한다. 한국 관객에게 이들 부부의 모습은 낯설지가 않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전작 '기생충'에서 친절하고 자비로운 부자와 악랄하고 폭력적인 빈자 캐릭터를 제시하며 사회적 고정관념을 깼다면, '미키 17'에서는 역사에서 봐온 여러 독재자 캐릭터를 섞어 다소 과장되게 묘사했다. 봉준호 감독은 '마샬'에 대해 "역사 속 나쁜 정치인들의 모습을 재밌게 섞어보고자 했다. 솔직히 참고한 한국과 미국 정치인도 있었다"면서 "과거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영화 본 분들은 요즘 실제 어떤 정치인을 상상하기도 하는 것 같다. 결국 역사가 반복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봉준호 최고의 영어 영화?... 제2의 '기생충'은 아니다 '미키 17'은 봉준호 감독의 여덟 번째 장편 영화이자 '기생충' 이후 6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이다. '기생충'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으며 유럽과 미국의 최고 영화상을 휩쓴 봉준호 감독은 차기작에서 할리우드의 손을 잡았다. '미키 17'은 봉준호 감독이 '설국열차', '옥자' 이후 선보이는 세 번째 영어 영화이자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인 워너브러더스의 자본 100%(제작비 약 2천158억 원)가 투입된 영화다. 베를린국제영화제를 통해 영화가 공개되자마자 외신들은 '기생충'과 완성도를 비교했다. "봉준호 최고의 영어 영화"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기생충'만큼은 아니다"라는 실망감 어린 반응도 나왔다. '기생충'이 봉준호 영화 미학과 세계관을 집약한 최고작이었기에 이 같은 잣대가 이상하다고는 볼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제2의 '기생충'을 생각한다면 실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세 영어 영화 중 두 편이 SF 장르였다. '설국열차'와 '미키 17' 모두 원작이 있는 영화였다. 계급 문제와 자본주의의 폐해 같은 그의 오랜 관심사와 맞닿아 있는 이야기였다. 여기에 자신만의 개성과 취향을 가미해 '봉준호스러운 영화'로 재탄생 시켜왔다. 그가 만든 한국 영화의 매력이 한국적 사회상을 반영한 리얼리즘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폭넓은 은유에 있었다면 미국 배경의 SF에서는 우화적 성격이 더욱 강하며, 은유보다는 직유의 화법을 선택했다. '미키 17'에도 봉준호의 개성과 취향은 살아있지만 '선', '냄새' 같은 무형의 개념을 통해 계급과 계층을 나누고 언어와 관계없이 세계 관객의 공감대를 형성했던 전작을 생각하면 단순하고 직접적인 풍자다. 재미와 볼거리 면에서도 다소 애매하다. 블록버스터가 규모의 영화, 볼거리의 영화라고 봤을 때 '미키 17'의 오락성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봉준호 감독의 독특한 연출 스타일과 특유의 짓궃은 유머에서는 B급 영화의 감성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예술 영화로 분류하기엔 그 개성과 깊이가 부족하다. 한마디로 오락 영화와 예술 영화 사이의 애매한 위치에 놓여있다. 봉준호라는 이름을 지우고 본다면,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좀 더 야박할 수도 있다. 이는 이야기의 배경이 해외로 설정되고, 언어가 영어로 바뀌었을 때 발생하는 한계일 수도 있다. 이는 많은 비영어권 감독이 할리우드 영화를 만들 때 겪는 어려움이기도 하다. 디자인: 채지우
'주말에 뭐 볼까?'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스프가 알려드립니다. '서브스턴스'는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는 영화다. 이 영화를 두고 '미친 영화'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것은 도무지 어디까지 갈지 가늠이 안 되고, 상상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갈 데까지 간다. 이 영화는 자기 혐오라는 주제로, 미모 지상주의 사회를 풍자하며 놀라운 흡입력을 보여준다. 단, 임산부와 심약자는 주의할 것. 왜? 보고 나면 기가 쫙쫙 빨리니까. 엘리자베스(데미 무어)는 아카데미상을 받고 명예의 거리에까지 입성한 스타 배우지만, 지금은 TV 에어로빅 쇼 진행자로 전락했다. 한물간 배우임을 자각하며 현재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한순간에 깨닫게 되는 뒷담화를 듣고 만다. "어려야 해, 섹시해야 해. 바꿔!" 방송국 사장이 TV쇼 진행자 교체를 지시하는 전화 통화를 엿듣게 된 것. 엘리자베스는 좌절한다. 더 이상 젊지 않고, 관능적이지 않아 버려지게 된 그녀는 혼돈에 휩싸여 교통사고까지 내고 만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퇴원하려던 찰나, 한 남자 간호사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된다. "제 인생을 바꿔줬어요"라고 쓰인 쪽지와 '서브스턴스'라고 적힌 USB를 받는다. 이 물질(substance)의 실체(substance)는 무엇인가. 마법과 물약일까, 금단의 열매일까. 이를 통해 데미 무어가, 코랄리 파르자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여자는 예뻐야지"·"예쁜 여자는 웃어야 해"... 반기와 수긍 사이 달걀 한 알이 '톡' 하고 터트려진다. 노른자에 주사기 속 약물을 주입하니 똑같은 노른자가 복제된다. '서브스턴스'의 속성을 단순하고 선명한 이미지로 보여주는 오프닝 컷이다. LA 베벌리힐스 명예의 거리에 엘리자베스 스파클이라는 이름이 새긴 동판이 만들어지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세월은 속절없이 흐르고, 사람들의 수많은 발길이 닿은 동판에는 먼지가 쌓이고 그녀의 이름마저 흐릿해진다. 이어 현재의 엘리자베스가 화면에 등장한다. 총기를 잃은 눈과 주름 가득한 피부, 늘어진 가슴, 쌓인 세월의 무게는 화장과 옷으로도 가릴 수 없다. 대중 매체에 노출된 스타는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다. 외모와 끼, 인간적 매력 등 연예인을 좋아하는 이유는 각양각색이지만 외모의 우월성에서 오는 경외감은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스타는 하나의 상품이다. 상품의 외형이 곧 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의 경연장과 같은 속성을 띄는 쇼비즈니스 세계에서 나이 든다는 것은 곧 경쟁에서 도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이 세계 속 상품은 언제나 대체가 가능하다. 별은 수없이 뜨고 진다. 영화에서 외모 지상주의이자 시청률 맹신자인 방송국 사장 하비의 멘트가 폐부를 찌른다. 그는 여성의 성상품화를 부추기는 사회적 시선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캐릭터다. '여자는 어리고 예뻐야지', '예쁜 여자는 웃어야 해'와 같은 말은 강력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엘리자베스가 속한 세계를 생각하면 수긍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엘리자베스는 서브스턴스라는 약물을 받고 반신반의하며 테스트한다. 사용법에 따라 약물을 주입하자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이내 엘리자베스의 등가죽을 뚫고 '더 나은 나'인 수가 태어난다. 엘리자베스의 늙은 육체는 벗어 놓은 옷마냥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서브스턴스 1회분의 지속 시간은 일주일. 엘리자베스는 일주일 간격으로 젊고 아름다운 나와 늙고 추한 나를 오가는 삶을 시작한다. 서브스턴스의 대전제는 'You are the one'(너는 하나)이다. 나는 또 다른 나로 살아갈 수 있지만, 복제된 인간의 원천 소스도 나다. 이 한 문장에는 새로운 가능성과 함께 무시무시한 경고가 담겨 있다. 젊고 아름다운 나를 사랑할수록 늙고 추한 내가 혐오스럽다. 반대로 늙고 추한 내가 실제의 나라고 인정하고 나면, 젊고 아름다운 또 다른 나에 대한 끊임없는 질투와 증오가 불타오른다.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 파국을 맞이한 것처럼 영화는 과욕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처절하게 보여준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지만 그 반대로는 불가능하다는 것. 애초부터 하나인 엘리자베스와 수는 공존할 수도 있었으나 시간을 나눠 쓰는 경쟁 관계로 돌입하며 서로를 증오하고 경멸한다. 이것은 곧 스스로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로 이어진다. 데미 무어, 삶을 연기하듯... '자기 반영'→'자기 혐오' 극복하기 영화는 데미 무어와 마가릿 퀄리의 얼굴과 몸을 잔인하리만큼 비교한다. 늙어 추한 얼굴과 젊고 탱탱한 육체를 대비시켜 아름다움과 아름답지 않은 것을 시각적으로 재단하게끔 한다. 이 가차 없는 대비는 잘못된 유혹에 빠지는 엘리자베스의 심리를 이해하는 효과를 낸다. '단 하루만이라도 저 얼굴, 저 몸으로 살 수 있다면 악마와도 거래하겠다'와 같은 마음을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조소하긴 쉽지 않다. 이 영화의 설득력은 데미 무어라는 배우 그 자체에서 발생한다. 데미 무어가 누구인가. '사랑의 영혼'(1990)으로 스타덤에 올라 '어 퓨 굿 맨'(1992), '은밀한 유혹'(1993), '스트립티즈'(1996), 'G.I. 제인'(1997) 등의 작품으로 끊임없이 변신을 추구했던 1990년대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이다.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액션 스타인 브루스 윌리스와의 이혼, 18살 연하의 애쉬톤 커쳐와의 결혼과 이혼 등으로 할리우드 가십란을 빼곡히 채웠으며 옐로우 저널리즘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특히 성형에 대한 보도, 7억을 들여 전신 성형을 했다는 루머는 정설처럼 굳어졌다. 2000년대 이후 성형 중독으로 자멸한 할리우드 배우라는 이미지만 남긴 채 그녀는 서서히 잊혀졌다. 활동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매년 한 편 이상씩의 작품을 하며 배우 활동을 이어왔다. 다만 그저 그런 B급 영화에 출연해 존재감을 발산할 일이 없었다. 60대에 접어든 데미 무어에게 도착한 '서브스턴스' 각본은 일생일대 기회이자 모험이었다. '외모 강박으로 자신을 갉아먹는 여배우'라는 캐릭터는 자기 반영적 요소가 강했다. 데미 무어는 "이 대담하고 용감하고 미친 시나리오는 세계가 제게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녀는 모험을 기회로 받아들였다. 데미 무어는 이 작품으로 데뷔 45년 만에 처음으로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등락이 컸던 배우 인생을 회고한 듯한 수상 소감은 기립 박수를 받기에 충분했다. "30년 전에 한 프로듀서는 제게 팝콘 배우라고 말했고, 그때 저는 이런 상은 제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은, 제가 성공적인 영화를 찍고 많은 돈을 벌 수는 있지만, 배우로서 인정받을 수는 없다는 뜻으로 느껴졌어요. 이런 생각은 계속 저를 갉아먹었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다 했다고 생각했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대담하고, 용감하며, 완전히 미친 '서브스턴스'의 시나리오를 받았어요. 그때 세계는 제게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듯했죠." 장르와 메시지의 조화... 파격만 남지 않았다 '서브스턴스'는 전반적으로 과하다. 이야기의 흡입력과 경쾌한 속도감, 난사에 가까운 이미지의 향연은 도파민 지수를 최대로 끌어올리지만 후반부의 고어한 이미지와 피칠갑은 보는 사람을 괴롭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택한 장르와 연출 방식은 메시지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영화를 연출한 코랄리 파르자 감독은 강렬한 비주얼과 직선적인 화법으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다뤄왔다. 장편 데뷔작 '리벤지'(2020)가 여성이 당한 육체적 폭력을 주체적인 복수극 형식으로 다뤘다면, '서브스턴스'는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심리적 폭력을 바디호러 장르로 풀어냈다. 영화는 일차원적인 방식으로 관객의 말초신경을 자극하지만 파격을 위한 파격에 그치지 않는다. 메시지를 보여주기 위해 마련된 설정들이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그 설정들이 주인공의 욕망에 의해 흔들리고 깨지면서 메시지를 더욱 선명하게 한다. 엘리자베스의 그릇된 욕망과 속절없는 좌절을 보며 드는 생각은 분노가 아니다. 슬픔과 연민이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소설 '은교'(박범신 作) 속 문구처럼 젊음과 늙음, 아름다움과 추함은 상도 벌도 아니다. 꽃이 피고 지는 자연의 섭리와 같은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사회적 시선과 자기 부정의 굴레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 처절한 비극 앞에서 관객은 숙연해지고 만다. 몬스트로 엘리자수(몬스터+엘리자베스+수)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세상과 사람들을 앞에 두고 피의 칼춤을 춘다. 카메라는 다시 한번 오프닝에 등장한 명예의 거리를 비춘다. 전야의 혼돈은 찾아볼 수 없는 평화롭고 따사로운 한낮이다. 영화가 묻는 듯하다. '세상은 왜 이리 아름다운가, 세상은 왜 이리 추악한가.'
'주말에 뭐 볼까?'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스프가 알려드립니다. "속된 말로 똥개도 자기 집 오면 50%는 먹고 간다는데, 전 오히려 한국에 와서 50% 까고 들어가는 것 같네요. (웃음)" '오징어게임' 시즌2를 내놓은 황동혁 감독은 국내 시청자들의 박한 평가에 우스갯말로 반응했다. 한국인들의 영상 콘텐츠를 보는 안목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거장이 된 봉준호, 박찬욱 감독도 일찌감치 국내 관객의 냉철한 평가에 대해 언급했고, 그것이 오늘날 자신들을 만든 원동력 중 하나라고 말했다. 넷플릭스 흥행 역사를 바꾼 '오징어게임'도 예외가 없었다. 시즌1을 떠올려 보면 공개 초반 국내 혹평, 해외 호평 여론이 형성됐다. 이후 해외에서 폭발적인 인기와 수상 소식이 들려오면서 국내 여론도 역전됐다. 시즌1과 비교하면 정도는 덜하지만, 시즌2도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지난해 12월 26일 공개된 '오징어게임' 시즌2는 첫 주(12월 23~29일) 6,800만 뷰를 기록하며 공개 첫 주 역대 최고 기록을 달성했고, 2주 차(12월 30일~1월 5일)에는 5,820만 뷰를 기록했다. 2주 연속 글로벌 TOP 10 1위 자리를 지킨 것은 물론이고 11일간 기록한 시청 수(1억 2,620만 뷰)로만 넷플릭스 역대 최고 인기 시리즈(비영어) 2위에 이름을 올렸다. 이런 인기 질주와 별개로 시즌1과 비교하면 시즌2에 대한 호평 지수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전편의 신선함을 잃은 데다 개연성 떨어지는 전개가 아쉽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시즌2,3을 동시에 촬영해 나눈 탓에 시즌2는 이야기가 뚝 끊긴듯한 인상을 준다. 시청자들은 7회, 총 494분에 이르는 긴 시간을 투자하고도 게임의 결말과 주인공들의 운명을 확인하지 못했다. 불만이 나올만하다. 황동혁 감독은 이 작품을 향한 시청자들의 높은 관심과 냉정한 평가를 '왕관의 무게'라 표현하며 "왕관 덕에 누린 게 많으니 이 작품으로 받는 부담, 고통은 감내해야 한다"고 쿨하게 반응했다. 그러면서 작품 공개 이후 나오고 있는 호불호 반응에 솔직한 답변을 내놓았다. 탑 출연 논란의 피로감... "문제가 있다면 감독 탓" 적어도, 국내 언론은 탑(최승현)에 가장 몰두한 느낌이다. 시즌2 공개일 가장 많이 쏟아진 기사도 탑에 관한 것이었다. 정확히는 '탑이 '오징어게임2'을 망쳤다'는 요지의 평이었다. 맞는 말도, 틀린 말도 아니다. 탑은 시즌2에서 힙합 서바이벌 준우승자 출신 래퍼 타노스로 분했다. '오징어게임2'에 등장하는 수십 명의 출연진 중 한 명이다. 조연치고 비중이 크다? 맞는 말이다. 주연인 이정재, 이병헌을 제외하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탑의 발연기가 작품을 망쳤다? 틀린 말이다. 시즌1에 비해 캐릭터가 두드러지지 않은 시즌2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인물이 타노스다. 특히 해외 시청자들 사이에서 밈(Meme) 소비가 활발하다. 논란이 논란을 만드는 듯한 기사들의 반복 재생산에 대한 대중의 피로감도 상당하다. 황동혁 감독은 탑 출연과 관련해서 작품 공개 전부터 확실한 소신을 밝혔고, 이는 작품이 공개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황동혁 감독은 "최승현이 그렇게 용서받지 못한 줄 몰랐다"면서 "이 친구를 캐스팅할 때 마약으로 활동 중단하고 복귀한 분들을 찾아봤다. 이후 2000년대까지 마약, 복귀가 이어졌고 굉장히 유명한 분도 많았다. 최승현은 이미 6~7년이 지났을 때라 이 정도면 사람들이 용인해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캐스팅을 진행했다. 대중의 불호 반응을 보고 깜짝 놀라긴 했다"라고 솔직하게 답했다. 타노스는 코인 투자 실패 후 큰 빚을 진 데다 마약에 빠진 인물로 설정돼 있다. 대마초 흡연 혐의로 처벌을 받은 탑이 드라마에서 마약을 먹는 모습을 연기한 건 다소 충격적이었다. 캐스팅 자체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탑에게 자기 반영적 캐릭터를 부여한 황동혁 감독의 뚝심도 놀라웠다. 창작자는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얻기 위해 이렇게 독해지기도 한다. "이번 시즌에서는 코인 열풍과 그로 인한 몰락, 마약 문제 같은 MZ세대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다뤄보고 싶었다. 탑이 연기한 타노스는 마약 때문에 망한 래퍼 설정이라 안 한다고 할 줄 알았다. 자기를 희화화시킨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나. 그런데 오디션을 본다고 했고, 그 자리에서 가능성을 봤다. 제가 빅뱅 팬도 아니고 복귀를 도우려고 캐스팅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이 배우가 이 역할을 하는 게 메시지를 더 강화할 것 같았다. 연기력에 대한 논란도 있는데 그의 연기에 아쉬움을 느꼈다면 그건 제 탓이다. 제가 그렇게 디렉팅을 했다. 타노스에게 '쇼 미 더 머니'에 나오는 스웨그(Swag) 강한 래퍼 캐릭터를 부여하고 싶었다. 그래서 다소 과장된 몸짓과 연기를 주문했다. 나는 그가 연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국내와 달리 해외에서는 반응이 좋은 편이다." 세 가지 게임의 비하인드... '그대에게' 삽입 비화 시즌2에서는 총 세 가지 게임이 등장한다. 시리즈의 시그니처 게임이라 할 수 있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로 포문을 열고, 5개의 미니 게임으로 구성된 5인 6각 게임, 그리고 짝짓기 게임인 둥글게 둥글게가 등장한다. 황동혁 감독은 시즌1 때 6개의 게임을 만들고 남은 게임 리스트를 참고해 전체 게임을 구성했다고 밝혔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시리즈의 시그니처기도 하고, 영희도 나온다. 또한 게임에 재출전한 기훈이 처음 게임에 임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설정을 부여하기 위해 첫 번째 게임으로 넣었다. 두 번째 게임부터는 시즌1과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룹 내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고 싶어 시즌1 때 모아놓은 리스트 중에서 하나씩 넣기는 좀 작은 게임 5개를 모아 5인 6각 근대 5종 게임으로 만들었다. '둥글게 둥글게'는 어릴 때 유치원에서 많이 하는 게임이다. 아이들을 서로 끌어안게 해서 유대감을 형성시켜 주지만 누군가를 배제하고 버리기도 한다. 잔인한 면이 있는 묘한 게임이다." 게임의 재미가 상당한 작품이기에 새 게임에 대한 글로벌 반응이 올라오고 있다. 시즌1에서 딱지치기와 구슬게임이 히트했다면, 시즌2에서는 공기놀이가 챌린지처럼 유행 조짐을 보인다. '둥글게 둥글게'의 경우도 밈이 형성됐다. 특히 타노스와 남규가 음악에 맞춰 왈츠를 추는 동작과 빅뱅의 '뱅뱅뱅' 안무 동작을 떠올리게 하는 탑의 춤사위는 해외 시청자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 인기를 끈 장면은 기훈팀의 5인 6각 게임 장면이었다. 故 신해철의 대표곡 '그대에게'가 삽입돼 4050 시청자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황동혁 감독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응원가 아닌가. 기훈팀이 가장 마지막 팀이었고 아무도 안 보는 경기니 그 음악을 써보고 싶었다. 사용 허락도 어렵게 받았다"고 전했다. 시즌3에서는 영희의 남자친구인 철수의 등장이 예고됐다. 영희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에서 도전자들의 움직임을 감지해 내는 남다른 능력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철수에게도 비장의 필살기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황동혁 감독은 철수와 영희가 활약하는 새 게임에 대해 "시즌3의 가장 흥미진진한 순간이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낭비된 배우들?... 여성 캐릭터는 '모성애' 강조 시즌2는 시즌1보다 더 많은 캐릭터가 나온다. 웬만한 작품에서 주연으로 활약하는 배우들이 조연으로 대거 출연해 보는 즐거움을 선사했다. 다만 배우의 유명세나 무게감에 비해 비중이 작거나 빨리 퇴장해 '배우 낭비'라는 비판도 적잖다. "유명한 배우를 쓰려고 해서 쓴 건 아니다. 오디션을 많이 봤다. 박규영, 조유리, 원지안 등이 대표적으로 오디션을 통해 발탁한 경우다. 기준이라면 연기력과 외모, 누가 제일 적합하냐를 본다. 어차피 유명인을 뽑아도 외국 시청자들은 잘 모르니 그것이 가진 이점이 제게 중요하지 않았다. 시즌1 때는 유명하지 않은 배우가 많이 나왔지만 외국에선 전혀 문제가 안 됐다." 이진욱이 연기한 경석 캐릭터는 초반에 전사까지 삽입할 정도로 힘을 실었지만, 막상 게임에 돌입하자 비중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최귀화는 대사 한마디 없이 카메라에 스치듯 등장했다. 물론 이 캐릭터들은 시즌3에서 활약이 예정돼 있다. 황동혁 감독은 "시즌3를 기다려달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말을 아꼈다. 또한 이번 시리즈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대부분 모성애 설정이 있다. 빚쟁이 아들과 함께 끝까지 게임에 참여하는 금자(강애심), 임신한 아이와 함께 밝은 미래를 꿈꾸는 준희(조유리), 북에 두고 온 딸을 만나기 위해 진행요원이 된 노을(박규영)이 대표적이다. 이에 대해 황동혁 감독은 "여성 도전자들의 경우 강한 동기가 필요했다. 이런 엄청난 곳에 오려면 말도 안 되는 이유가 필요했는데 제가 남자라 그런지 '엄마', '모성애'보다 강력한 동기는 없을 것 같았다"고 답했다. 성기훈의 영웅놀이... "시즌3에서 아쉬움 풀릴 것" 성기훈이 게임에 다시 참여하는 건 시즌2 탄생에 있어 불가피한 설정이었다. 456억 원을 쟁취하고도 목숨을 건 게임에 다시 참여하는 기훈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시청자도 다수였지만, 황동혁 감독이 작품을 통해 그 점을 납득시키리라는 강력한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뚜껑을 연 시즌2는 성기훈의 무모한 영웅놀이에 몰두한 인상을 남겼다. 시즌2의 폭주는 작품 전체의 완성도와 균형을 깨뜨린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시즌1에서 언급이 됐지만 기훈은 공고를 나오고 자동차 회사에 취직한 블루칼라 노동자였으나 정리해고 당한 인물이다. 시즌1에서는 약간 철도 없고, 좀 루저 같은 캐릭터인데 인간의 선한 의지와 양심이라는 걸 갖고 있는 동네 아저씨였다. 이 인물이 많은 위기를 겪고 시즌2에서 변화하게 된다. 돈키호테처럼 이 시스템과 사회를 바꿔보겠다고 다시 게임에 뛰어든다. 현재 우리 사회에 이런 인물이 없지 않나. 예전에는 혁명, 제도를 바꾸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자기가 피해를 보지 않고 모두가 잘사는 것에 대한 담론이 사라졌다. 기훈은 그걸 여전히 좇으며, 그걸 통해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가 이렇게 된 건 저 위에 있는 사람들 때문이야. 우리가 분노를 표출해야 한다면, 뭔가 바꿔야 한다면 손가락질은 위로 향해야 돼'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비록 계란으로 바위 치기처럼 결국 실패하는 이야기가 되더라도 각자도생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직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시즌2의 성기훈이 탄생했다." 황동혁 감독은 성기훈의 변화가 이야기의 과정에 있음을 강조했다. 시즌2에서는 '실패한 영웅'으로 남았지만, 시즌3에서는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설계한 '오징어게임'이라는 거대한 게임 아래에서 성기훈이라는 '말'은 이렇게 쉽게 쓰러지진 않을 것 같다. '오징어게임'은 황동혁 감독이 약 10년간 품고 있던 아이템이다. 영화화를 꿈꿨으나 국내 대부분의 투자배급사에서 투자를 거부당했고 뒤늦게 넷플릭스 드라마로 탄생했다. 그 결과는 알다시피 대박이었다. 시즌1의 놀라운 성공과 함께 시즌2 제작은 당연한 일이 됐다. 10년에 걸친 집필이었던 시즌1과 달리 시즌2는 약 2년 만에 각본을 써야 했다. 각본과 연출이 분업화된 미국의 드라마 제작 시스템과 달리 황동혁 감독은 이번에도 각본을 직접 쓰고 연출까지 하는 일당백 역할을 해냈다. 시즌1을 만들며 6개의 이를 뽑아야 했던 황동혁 감독은 시즌2를 만들 때도 스트레스로 인한 치아 문제를 겪었다고 밝혔다. 공개 초반 혹평 우세의 반응에 적잖은 속앓이도 했지만, 이야기의 완결을 보여줄 시즌3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시즌2가 아무래도 시즌1보다는 완결성이 좀 떨어지는 이야기다 보니까 시청자들은 '여기서 끝내는 거야? 어떻게 기다리라고!'라는 반응을 보이시는 것 같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를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1위를 하고 있어서 안도하는 마음도 든다. 시즌3는 더 재밌을 것이다. 기대해달라." '오징어게임'의 대미가 될 시즌3는 6부작의 이야기로 올해 여름께 공개될 예정이다. 디자인 : 채지우
주말에 뭐 볼까?'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스프가 알려드립니다. 스포츠에서 1승은 연패의 끝이 될 수도, 연승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승부는 곧 기세, 1승의 의미는 그래서 특별하다. 영화 '1승'(감독 신연식)은 한국 영화 최초의 배구 영화다. 야구, 축구, 농구를 다룬 영화는 있었지만, 배구를 소재로 한 영화는 없었다. '1승'은 제목처럼 단순하고 명쾌하다. 1승을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제목이 의미하는 건 만년 꼴찌팀 핑크스톰 선수들이 갈망하는 목표이자, 실패를 거듭해 온 김우진 감독의 인생 목표다. 영화를 연출한 신연식 감독은 '배구'를 우리네 '인생'에 대입하고, '1승'을 실패를 극복할 투지와 희망의 상징으로 풀어낸다. 동네에서 파산 직전의 배구 교실을 운영하고 있던 우진(송강호)은 어느 날 프로 여자배구단 '핑크스톰'을 떠맡게 된다. '핑크스톰'은 선수들을 팔아치우며 해체 조짐을 보였지만 재벌 2세 정원(박정민)이 구단을 인수하며 부활의 날갯짓을 편다. 정원은 핑크스톰 인수 후 파격적인 공약 하나를 내건다. 핑크스톰이 단 한 번이라도 1승을 하면 시즌권 구매자 100명에게 총상금 20억 원을 풀겠다는 것. 시즌 전부터 최약체로 평가받은 핑크스톰은 개막과 함께 연패를 거듭한다. 우진은 열패감에 젖어있던 오합지졸의 핑크스톰을 보며 파직, 파산, 이혼 등 실패만 거듭해 온 자신의 인생을 떠올린다. 그리고는 단 한 번의 승리를 위해 이들을 일으켜 세워보자 결심하고 선수들을 한 명 한 명 지도하기 시작한다. 스포츠 영화에서 리얼리티는 중요하다. '그렇다 치고'가 아닌 '그럴듯한' 경기 구성과 플레이는 필수다. 그렇다고 해서 경기 연출에만 몰두하면 안 된다. 관객은 스포츠가 '소재'인 영화를 보고 싶을지언정 스포츠가 '주제'인 영화를 보고 싶어 하진 않는다. 목표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피땀 눈물, 승부의 세계가 선사하는 희로애락이 이야기, 캐릭터와 어우러져야 근사한 스포츠 영화가 탄생할 수 있다. '1승'이 추구하는 톤 앤 매너는 '머니볼'이 아닌 '슬램덩크'다. 다소 전형적일 수 있는 언더독 서사지만 좌충우돌 속 웃음과 거듭된 실패 속에서 우리네 인생을 거울처럼 마주하게 된다. 핑크스톰 선수로 분한 배우 중 얼굴이 익숙한 건 장윤주, 이민지 정도다. 그 외 대부분의 얼굴은 낯설다. 선수 캐릭터에 감정을 이입하며 승부의 클라이맥스까지 빠져들어야 할 관객에게 이는 꽤 큰 장벽이 될 수 있다. 각본을 쓰고 영화를 연출한 신연식 감독은 배구 선수를 연기하는 배우와 배우에 도전한 배구 선수들의 구성을 적절하게 짜 경기 장면의 리얼리티와 연기의 리얼리티를 상호 보완했다. 이로 인해 어떤 배우는 진짜 선수 같고, 어떤 선수는 진짜 배우처럼 보이기도 한다. 신연식 감독은 우진의 선수 시절 포지션을 세터로 설정했다. 농구로 치자면 가드, 야구로 치자면 포수와 같은 역할을 하는 포지션으로 경기 전체를 조율하는 지략가이자 야전 사령관이다. 이는 배우 송강호가 한 편의 영화에서 가지는 영향력에 대한 정확한 대입이다. 송강호는 영화를 쥐락펴락하며 이야기의 온도를 바꾸는 역할까지 하는 배우다. 이번 영화에서의 활약을 배구 플레이에 비유하자면, 절묘한 토스와 허를 찌르는 스파이크로 극의 온도를 조율하고, 이야기의 리듬감까지 살려냈다. '1승'에서는 우리가 가장 사랑했던 송강호의 연기를 만날 수 있다. 특유의 따스한 인간미와 자연스러운 코미디가 영화 곳곳에서 녹아난다. 대사의 톤 조절과 어미의 미세한 변형으로 캐릭터의 희로애락을 보여주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우진의 능청스러움을 표현했다. 송강호는 희비극에 모두 능한 최고의 배우지만, 희극에서 그의 인간적 매력이 유독 빛난다. 웃음을 낚기 위한 설정이나 과장 없이도 보는 사람을 미소 짓게 하는 생활 연기는 발군이다. 관종 구단주이자 철없는 재벌 2세 정원으로 분한 박정민은 장난꾸러기 같은 캐릭터 연기로 잔잔한 웃음을 유발한다. '1승'은 스포츠 영화로서의 장르적 매력도 놓치지 않았다. 우진의 맞춤 지도 아래 성장하는 선수들의 모습과 성장이 반영된 경기 속 선수들의 활약은 극이 전개될수록 박진감을 더한다. 하이라이트는 핑크스톰과 블랙퀸즈와의 재대결이자 시즌 마지막 경기다. 영화는 이 경기에 임하는 양 팀 감독의 전략과 전술, 선수들의 활약을 각종 이미지와 그래픽으로 상세하게 묘사하고, 이를 실행하는 경기 장면을 전면에 내세우며 아드레날린과 도파민을 폭발시킨다. 특히 배구 경기의 현장감을 극대화한 촬영이 돋보인다. 1분 이상 이어지는 랠리는 롱테이크 촬영을 통해 마치 현장에서 지켜보는 듯한 박진감을 선사한다. 제작진은 여자 배구의 묘미인 메가 랠리를 스크린에 생생하게 그려내기 위해 버추얼 리얼리티(VR) 기법을 이용했다. 촬영 현장에 총 7대의 카메라를 설치해 배우들의 움직임을 다각도로 담아냈으며, 매초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랠리를 역동적인 카메라 무빙으로 담아냈다. 또한 최고 속도 시속 120km를 자랑하는 배구공의 움직임은 컴퓨터그래픽(CG)의 힘을 빌렸다. 스포츠 영화가 취할 수 있는 두 가지 엔딩은 '통쾌한 역전극'이거나 '통한의 패배'다. 엔딩은 정공법이나 엔딩에 이르는 과정은 다 예상을 벗어난다. 경기 방식도 토너먼트(Tournament)가 아닌 리그전(League Match)이다. 넉아웃 스테이지(Knockout Stages)를 통해 끝내 우승에 이르는 비현실적 이야기를 그리지 않는다. 이들이 추구하는 건 '단 한 번의 승리'다. '고작 1승'이 아닌 건 패배가 당연했던 인생에서 '1승'은 '100승'과 같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배구 영화답게 김세진, 신진식, 이숙자, 한유미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들이 대거 나온다. 또한 영화 말미에는 여자 배구의 대명사가 된 '그 선수'가 카메오로 활약한다. 영화를 연출한 신연식 감독은 "'배구 영화에 내가 빠질 수 없지'라는 마음을 먹은 듯 흔쾌히 출연을 수락했다"라고 전했다. '1승'은 피와 자극으로 점철된 최근 한국 장르 영화 속에서 기분 좋은 발견 같은 영화다. 건강한 에너지와 따뜻한 감동,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디자인 : 채지우
주말에 뭐 볼까?'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스프가 알려드립니다. "공주를 구한 왕자는 그다음 어떻게 되지? "그다음에는, 공주가 기사를 구해줘요." 1990년 개봉한 영화 '귀여운 여인'(Pretty Woman)은 신데렐라 판타지를 구현하며 전 세계적으로 흥행했다. 이 영화의 드라마틱한 엔딩은 동화를 실사화한 것처럼 로맨틱했다 에드워드(리처드 기어)는 이별을 고하는 비비안(줄리아 로버츠)에게 지금으로 치자면 일종의 '스폰서' 제의를 한다. 비비안은 자신은 신데렐라가 되길 바란다며 그 제안을 거절한다. 결국 에드워드는 비비안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그녀의 바람대로 공주를 구하는 왕자처럼 근사하게 프러포즈한다. 그토록 원하던 순간을 맞이한 비비안은 빈민가의 다락방에서 탈출해 에드워드의 품에 안긴다. 이 작품의 세계적 흥행 이후 '신데렐라 콤플렉스'라는 말이 재조명됐다. 물론 이 동화 같은 이야기를 현실적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영화란 지독한 현실을 그리기도 하지만 달콤한 꿈을 선사하기도 하기에 '판타지 충족'이라는 측면에서 '귀여운 여인'은 관객에게 특별한 영화로 자리매김했다. 지난 11월 6일 개봉한 '아노라'는 '귀여운 여인'의 판타지를 34년 만에 와장창 깨뜨린다. 이 영화의 이야기를 단 한마디의 비속어로 표현하자면 '신데 fuxxing 렐라'일 것이다.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총천연색 조명과 시끄러운 음악으로 가득한 스트립바를 비춘다. 카메라는 트레킹샷으로 남성 손님 앞에서 나체를 흔들며 웃음을 파는 여성들을 비춘다. 이 가운데 '애니'가 있다. 20대 초반의 여성인 애니는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해 손님들에게 인기가 높다. 그녀는 매일매일 성실하게 일하며 그 대가로 돈을 번다. 어느 날, 애니는 러시아말이 가능한 여성을 찾는다는 호출을 받고 젊은 남자 손님을 맞이하게 된다. 그의 이름은 이반, 러시아 부호의 아들로 부모의 간섭을 피해 미국에 머물고 있다. 애니의 능숙한 서비스에 반한 이반은 자신의 집으로까지 불러들인다. 이반은 자신을 쉼 없이 흥분시키는 애니에게 빠져들고, 애니는 가볍게 열리는 이반의 지갑에 반한다. 급기야 애니는 이반의 제안에 따라 일주일간 그의 연인이 되기로 한다. 두 사람은 라스베가스로 여행을 떠나게 되고 분위기와 흥에 취해 즉흥적으로 결혼 서약을 하게 된다. 단, 일주일 만에 인생이 바뀐 애니는 스트립바를 나와 이반의 대궐 같은 집에 들어가게 되고,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이반의 집안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고, 집안의 하수인 두 명이 이반의 결혼을 무효화하기 위해 급파된다. 술과 약에 취해 즉흥적으로 결혼을 했으나 뒷감당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이반은 애니를 남겨둔 채 도망쳐버린다. 덩그러니 남겨진 애니는 어떻게든 혼인 상태를 유지하려 하고, 이반 집안의 두 하수인은 애니와 사사건건 부딪치며 결혼 무효화를 위해 고군분투한다. 성 노동자가 러시아 부호의 아들과 결혼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소동극처럼 담아낸 '아노라'는 '귀여운 여인'의 냉혹한 현실 버전으로 볼 수 있다. 션 베이커의 대표작인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세계 최고의 놀이동산인 디즈니랜드 옆 빈민촌의 냉혹한 현실을 다룬 것처럼 '아노라'도 '꿈의 도시'라 불리는 뉴욕 맨해튼의 빌딩 숲이 아닌 그 공간 어딘가에 공존하는 스트립바에서 이야기가 출발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총천연색의 '찬란한 절망'을 그려 강렬한 충격을 안겼다면 '아노라'는 코믹 소동극의 탈을 쓰고 '달콤씁쓸한 비애'를 선사한다. 풍자와 해학을 강조한 영화인 만큼 시종일관 터지는 웃음 뒤에 남는 쓴맛이 꽤 진하다. 애니는 서비스를 돈과 교환하며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였으나 신데렐라가 될 수도 있다는 순진한 상상을 했다는 이유로 당하지 않아도 될 폭력과 멸시를 당하게 된다. 인생역전을 꿈꾼 사람에게 세상은 비정했다. 결혼 무효화 소동에서 당사자인 애니의 의사는 철저히 무시되며 그때마다 그녀의 직업은 괄시와 천대의 빌미가 된다. 무력에 의한 폭력보다 더 끔찍한 것이 언어 폭력이라는 것을 영화는 130여 분 내내 상기시킨다. 이런 폭력적인 상황에 내팽개쳐진 애니는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밖에 없다. (외부인이 보기에) 야생의 정글 같은 스트립바는 오히려 그곳만의 규칙과 그들만의 윤리가 작동됐다. 그러나 세상에 툭 던져진 애니는 성 노동자라는 낙인으로 인해 번번이 멸시와 조롱을 당한다. 아무리 자신을 변호해도 그 목소리는 상대에게 닿지 않는다. 자신의 호기심과 쾌락을 길게 즐기고자 아무 생각 없이 애니는 세상에 끌고 나온 이반은 너무나 무책임하고 유약하다. 부모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정작 부모의 울타리 밖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네포 베이비(nepo baby)의 전형이다. 자본주의의 민낯과 현대 사회의 계급성이 신랄하게 묘사된 영화다. 상승을 허용하지 않은 계급 사다리의 상층부 인물들은 신데렐라를 꿈꿨던 성 노동자를 멸시의 눈으로 깔아본다. 이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은 주인공의 적대자로 등장했던 두 인물이 종국엔 가까운 위치에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상기하게 될 때다. 계층의 사다리에서 애니나 토로스, 이고르는 누군가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대가를 받는 밑바닥 노동자라는 공통점, 피고용인으로서 고용인에 의해 움직일 수밖에 없는 인물이라는 점이 닮았다. 영화에서 이들은 시종일관 서로의 존재를 부인하고 경멸하지만 어느 순간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긴다. 계급의 연대 같은 드라마틱한 결말로 이어지진 않지만 같은 이유로 분노하고, 같은 이유로 연민하게 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영화의 제목인 '아노라'는 애니의 본명이다. 러시아식 이름인 '아노라'는 촌스러운 이름의 전형인 것으로 보인다. 애니가 신분증에 적힌 본명이 불리자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데서 유추할 수 있다. 아노라가 아닌 애니로 살고 싶었던 이 여성은 인생의 가장 치욕스러운 순간에 원치 않는 방식으로 자신의 본명과 마주하게 된다. 션 베이커는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무책임하고 무의미한 해피엔딩을 제시하지 않는다. '아노라'는 '신데렐라는 없다'고 말하면서도 '내 삶의 주인공은 나'라고 말하는 태도를 견지한다. 한여름 밤의 꿈과 같았던 나날과 악몽 같은 긴 밤이 지나고 난 후 창밖에는 함박눈이 내린다. 애니는 요란한 해프닝의 대가로는 너무나 적은 위자료를 받고 기찻길 옆에 위치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3분여의 엔딩씬은 '아노라'가 왜 특별한 영화인지를 보여준다. 창밖으로 흩날리는 눈, 애니와 이고르가 주고받는 증오와 연민을 담은 눈빛, 암전 속에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와이퍼 소리는 이 소동극이 이들 삶에 어떤 파장을 일으켰는가를 압축하는 듯하다. 이 엔딩이 불러일으키는 처연함에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없다. 애니를 연기한 미키 매디슨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영화를 연출한 션 베이커 감독은 이 작품으로 제77회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미국 감독이 황금종려상을 받은 건 2011년 테렌스 맬릭의 '트리 오브 라이브' 이후 13년 만의 일이었다. 트로피를 거머쥔 뒤 션 베이커는 "이 상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성 노동자 여러분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데뷔부터 지금까지 성 노동자의 삶을 꾸준히 다뤄왔다. 인간의 삶을 전시하지 않고 응시하는 그의 영화적 시선과 태도가 오늘날의 영광을 만들었다. 디자인 : 채지우
'주말에 뭐 볼까?'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스프가 알려드립니다. '보통의 가족'(A Normal Family)은 제목부터 역설이다. 영화는 사고처럼 터진 위기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두 가족을 보여준다. 언뜻 보면 이들은 대한민국 중산층(사실 상류층에 가까운)의 전형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어떻게 봐도 '보통의', '평범한', '정상적인' 가족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는 난폭 운전으로 실랑이를 벌이를 두 남자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딸을 태우고 운전을 하던 한 남성은 스포츠카를 난폭하게 모는 젊은 청년의 행태에 화가 나 차를 멈춰 세운다. 이 남성은 삿대질을 불사하며 상대를 비난한 뒤 다시 차에 오른다. 이에 분노한 청년은 차를 후진한 뒤 액셀레이터를 밟아 앞차를 들이받는다. 이 보복 운전으로 인해 남자는 즉사하고 어린아이는 생사를 헤매게 된다. 잘나가는 변호사인 재완(설경구)은 피해자 가족이 아닌 가해자 청년을 변호하게 된다. 이 청년은 재벌 2세다. 재완은 재벌 2세가 의도를 가지고 차를 들이받은 게 아니라 실수였다는 취지로 변호하고 피해자 가족과의 합의를 통해 사건을 무마하고자 한다. 공교롭게도 생사를 헤매는 피해자 딸의 주치의는 재완의 동생 재규(장동건)다. 두 형제는 정반대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형인 재완은 돈 되는 일이면 다하는 변호사고, 동생인 재규는 돈보다는 명예를 추구하며,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고 헌신하는 의사다. 관객은 당연히 이 에피소드가 영화의 핵심이 되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는 일종의 복선이고, 추후 발생할 사건의 거울 같은 기능을 한다. 두 가족의 평화로운 일상에 파열음을 내는 건 자식들이 일으킨 사건 때문이다. 재완의 딸과 재규의 아들이 연루된 폭행 사건이 발생하고, 두 가족은 이 일의 처리 방식을 두고 부딪히게 된다. CCTV는 방아쇠 역할을 한다. 영화는 크게 두 번의 CCTV 화면을 제시하는데 사건의 발단에서 등장하는 CCTV와 반전의 키가 되는 CCTV가 있다. 특히 두 번째 CCTV 화면은 클라이맥스가 돼 인물이 폭주하는 계기가 된다. 네덜란드 원작 소설 '더 디너'(헤르만 코브 作)에서는 두 형제의 직업이 교사와 정치인으로 설정돼 있다. 리메이크작인 '보통의 가족'에서 형제의 직업은 변호사와 의사로 바뀌었다. 각각 문과와 이과를 대표하는 전문직이자 성공한 사회인의 전형으로 제시될 수 있는 직업이다. 이들의 배우자 역시 한국 사회에서 낯설지 않은 캐릭터다. 연경(김희애)은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며 맏며느리 노릇하고, 지수(수현)는 능력 있는 남편과 결혼해 호화로운 삶을 사는 젊은 아내로 묘사된다. 영화는 이들뿐만 아니라 능력 있는 부모의 수혜를 누리며 자란 2세를 통해 우리 사회의 엘리트주의와 물질만능주의, 생명 경시와 도덕성 결여 등의 병폐를 제시하며 사회 풍자의 색채를 강화했다. 영화에는 재완 부부와 재규 부부가 함께하는 세 번의 저녁 식사(dinner)가 등장한다. 가족끼리의 정기적인 식사 자리지만 내내 미묘한 신경전이 펼쳐지고 그로 인해 긴장감이 감돈다. 아픈 모친을 모시지 않는 첫째 아들과 장남의 의무를 대신하고 있는 둘째 내외 간의 불편한 관계, 어린 형님을 고깝지 않게 보는 동서와 그런 동서가 못내 불편한 형님까지, 겉으로는 우애 좋은 형제 부부지만 그 속은 보이지 않게 곪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텐션은 영화의 주요한 사건을 기점으로 극대화되고, 서로가 애써 감추고 있던 민낯까지 드러내기에 이른다. '보통의 가족'은 '당신이라면?'라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확실한 건 내로남불로 요약할 수 있는 위선이라는 가면 아래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진실이다. 특히 부모에게 '자식'이란 금지옥엽이자 아킬레스건이기에 신념도 윤리도 힘을 쓰지 못한다. 영화는 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세밀하게 묘사하며 인간의 이중성과 도덕적 딜레마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덕분에 영화를 보는 관객들 역시 '미워도 내 새끼'라는 공감대와 '네 새끼 네 눈에나 예쁘지'라는 심리적 삿대질 상태를 오가며 영화가 던지는 딜레마에 때론 공감하고 때론 분노하게 된다. 영화는 극단적 설정을 통해 인물의 캐릭터를 뒤엎고 각자의 신념을 깨뜨리는 다소 도식적인 전개를 보여주지만, 연출의 노련함과 배우들의 열연으로 흥미진진한 서스펜스 드라마를 완성해 냈다. 무엇보다 네 배우의 앙상블이 훌륭하다. 설경구의 무게감과 김희애의 폭발력, 장동건의 진화, 수현의 안정감이 돋보이는데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어 영화 내내 강력한 시너지를 낸다. 특히, 자식을 위해서 자신이 추구해 온 신념과 도덕률조차 깨버리는 재규 역의 장동건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디자인 : 채지우
'주말에 뭐 볼까?'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스프가 알려드립니다. 최근 10년간 방송가를 휩쓴 '쿡방'(요리 방송) 열풍은 실로 대단했다. 미슐랭 셰프와 전국 각지의 명인, 재야의 고수까지 난다긴다하는 요리의 달인들을 끌어들인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은 '욕구'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대중의 '식욕'을 자극하며 시청률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반복과 범람은 지겨움을 낳았고, 어느 순간 레드오션이 되고야 말았다. 트렌드의 끝물에서 또 하나의 대박 프로그램이 탄생했다.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이다. 추석 연휴 공개된 '흑백요리사'는 지난달 22일까지 3,800만 시청수(시청 시간을 작품의 총 러닝 타임으로 나눈 값)를 기록하며 TV 비영어 부문 1위(넷플릭스 TOP 10 웹사이트 통계)를 달성했다. 또 다른 OTT 순위 전문 사이트 플릭스 패트롤에 따르면 25일 기준 미국에서도 6위에 오르면서 주목받았다. 닳고 닳은 아이템이건만 도대체 뭐가 달랐을까. 능력자들의 총망라, 심사위원의 스타성, 역대급 스케일, 룰의 파격 등 그야말로 요리 서바이벌의 '끝판왕'을 보여준 기획이자 재미다. 흑수저 vs 백수저, 요리에 계급이라니 흑백요리사는 100명의 요리사가 우승 상금 3억 원을 획득하기 위해 맛 대결을 펼치는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단순히 바둑 경기처럼 팀을 나누기 위해 도전자들을 흑과 백으로 나눈 것이 아니다. 이 네이밍에는 흙수저(=흑수저)와 금수저(=백수저)의 함의가 담겨 있다. 백수저에는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의 수석 주방장부터 세계 요리대회 우승자, 한국과 미국의 각종 요리 서바이벌 대회 우승자, 백악관 만찬 요리사, 대한민국 요리 명장 등 화려한 이력의 셰프들이 포진돼 있다. 흑수저는 미슐랭 스타와 같은 훈장보다는 독특한 이력으로 눈길을 끈다. 요리를 만화로 배웠다는 요리사, 중국집 배달부 출신의 중식 셰프, 140만 구독자를 보유한 요리 유튜버, 을지로와 신당동, 남영동, 연희동 등에서 MZ들의 폭발적 인기를 기반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신진 요리사 등이 포진돼 있다. 제작진은 셰프의 인기만큼이나 경력이나 명예의 정도에 따라 흑과 백을 나눈 것처럼 보인다. 물론 미슐랭 별이 140만 유튜버보다 유명하다거나 영향력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흑백의 비율과 적용되는 룰도 조금 달랐다. 제작진이 선택한 20명의 백수저들은 부전승으로 2라운드 진출권을 확보해 1라운드를 관전만 했다. 80명의 흑수저들은 20명만이 살아남는 1라운드를 통과해야 비로소 백수저들과 맞대결을 펼칠 수 있다. 제작진들은 "이 룰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리를 떠나도 좋다"고 말한다. 당연하게도 흑수저들은 불평등한 시작에 불만을 드러내지만 너나 할 것 없이 "(백수저들을) 밟아버리겠다"라고 전의를 불태우고, "맛으로 이기면 되는 거 아냐"라며 패기를 보여준다. 백수저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다. 만만찮은 저력의 흑수저들을 보며 '지면 쪽팔린다'고 되뇐다. '흑백요리사'는 요리 흙수저가 금수저에 맛으로 도전장을 내밀고, 금수저는 흙수저에게 연륜과 내공을 보여주고자 하는, 이른바 패기와 자존심의 대결로 점철된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차고 넘쳤던 쿡방 프로그램과 비교해 '흑백요리사'만의 특별함은 어디에 있을까. 우선 스케일이 역대급이다. 대인원의 셰프가 요리할 수 있는 대형 세트장을 찾아 상하수 수도관, 가스관을 설치하는 기반 공사를 했다. 프로 프로덕션에만 180일을 소요했다. 총 100명의 셰프들이 출전한 이 경쟁에서는 총 254개의 요리가 탄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프라이팬과 냄비, 접시 등 조리도구만 1,000개 이상 사용됐다. 요리가 탄생하는 생생한 과정을 담기 위해 촬영마다 300대가 넘는 카메라가 거치됐다. 카메라는 셰프들이 요리하는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잡는 것은 물론이고 80명 셰프들의 요리 현장을 부감으로 한 화면에 담아내는 장관을 연출했다. 뭐니 뭐니 해도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결국 '사람'과 '이야기'가 핵심이다. 도전자들의 다양한 이력은 '흑백요리사'의 최고 재미 포인트다. 여타 프로그램과 비교하자면, 개개인의 사연을 비중 있게 강조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고수들의 이력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흑수저들의 이색 백그라운드는 화려한 경력으로 무장한 백수저들과의 대결에서 극대화된다. 30년 중식 대가 vs 배달부 출신의 요리사, 이탈리아 미슐랭 레스토랑 출신 셰프 vs 최고의 리조또를 만든다는 한국 요리사가 맞붙는 식이다. 계급장을 떼고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흑수저와 백수저는 오로지 맛으로만 승부를 펼친다. 음식의 맛만 있다면 꼬리 칸도 머리 칸으로 이동할 수 있고, 머리 칸도 꼬리 칸으로 떨어지는 당락의 롤러코스터, 그것이 이 서바이벌의 묘미다. 백종원-안성재, 요식업계의 왕과 파인 다이닝 대가의 입맛 그렇다면 이 고수들을 누가 심사할 것인가. 어떤 기준으로 맛을 평가할 것인가. 제작진은 백종원과 안성재라는 양극단의 인물을 심사위원으로 선택했다. 백종원은 요식업계의 '미다스의 손'이고, 안성재는 대한민국 유일의 미슐랭 쓰리 스타 레스토랑의 셰프다. 대중이 좋아하는 표준적인 맛을 제시하는 사업가와 '파인 다이닝'이라 불리는 최고급 코스 요리의 장인이 '맛의 우열'을 가린다.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진 두 사람이 맛의 우위를 공정하게 가릴 수 있을까. 맛의 객관과 주관을 어떤 기준으로 정립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흑수저 도전자들의 이력과 장기가 소개된 1라운드가 재미를 위한 빌드업이었다면, 흑수저와 백수저가 본격적으로 맞붙는 2라운드부터는 재미의 하이라이트가 펼쳐졌다. 개인전과 팀전, 패자부활전 등 요리 서바이벌에서 즐겨 썼던 경쟁 방식을 그대로 가져왔지만, 약간의 변형도 가미했다. 특히 흥미로웠던 건 2라운드에 펼쳐진 블라인드 심사다. 제작진이 심사의 공정함을 위해 채택했던 이 룰은 '맛' 외의 요소가 평가에 관여되는 것을 배제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두 심사위원은 흑과 백의 음식을 맛본 뒤 한쪽에 투표하고, 동률이 나오는 경우 상의를 통해 최종 심사를 내린다. 이때 서로는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상대를 설득한다. 안성재는 요리에 창의의 개념을 넣어 손님에게 고가의 체험을 선사한 셰프라면, 백종원은 음식의 계량화를 통해 표준적인 맛을 대중에게 제시한 인물이다. '한 끼에 30만 원짜리 요리를 제공하는 셰프가 단가 6,000원짜리 식판 밥에 좋은 점수를 줄까', '7,000원짜리 짬뽕을 팔고, 1,500원짜리 커피를 파는 사업가가 파인 다이닝 요리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까'라는 일말의 우려는 이들의 심사를 보며 선입견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안성재 셰프는 급식 대가의 식판 밥을 맛본 뒤 "어린 시절 추억이 떠오르는 맛"이라며 극찬했고, 백종원은 트리플 스타의 음식을 맛본 뒤 "작은 음식에서 여러 가지 맛이 난다"며 단번에 합격을 외쳤다. 이들의 날카로운 심사를 통해 맛에는 계급과 등급이 없으며 고급진 맛과 저급한 맛도 없다는 것, 그저 맛있는 음식과 맛없는 음식만 있을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요리는 예술이고 음악이고 과학이구나' "제가 요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채소의 익힘이에요." "고기가 이븐(even)하게 익지 않았어요." 인터넷을 강타한 밈(meme)은 안성재 셰프의 심사평이었다. 채소와 고기의 익힘 그리고 음식의 간 등 요리의 기본기를 강조한 그의 심사평은 특유의 말투와 표정 그리고 진지한 태도가 합쳐져 하나의 예능으로 승화됐다. 대중에게 낯선 요리 대가를 관찰하는 재미와 그의 명성이 안겨다 주는 신비함도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이미 다수의 프로그램에서 확인된 백종원의 입담과 너스레 그리고 음식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경험치는 '역시'를 외치게 했다. 도전자들이 자신만의 철학으로 음식을 만들고, 심사위원들이 그 의도를 철석같이 알아차릴 때 발생하는 카타르시스는 '흑백요리사'의 진수다. 재료를 다루는 태도부터 음식을 완성하는 과정, 완성된 음식을 설명하는 프리젠테이션 등을 보고 있노라면 요리는 개인의 창의가 투영되는 예술이고, 화합의 결정체인 음악이고, 원인과 결과가 뚜렷한 과학이라는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흑백요리사'는 제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것을 보여주는 투명하고 정직한 여정이다. 또한 도전자들의 요리를 향한 철학과 열정에서 '왜 이들이 성공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답을 확인할 수 있다.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은 맞고, 또 틀리다. 땀과 노력은 언제나 숭고하다. 디자인 : 채지우
'주말에 뭐 볼까?'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스프가 알려드립니다. 2015년 개봉한 '베테랑'은 선이 악을 응징하는 사이다 액션으로 전국 1,341만 관객을 사로잡았다. 현실의 문제의식을 이야기의 주제로 삼아 관객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장르 영화의 문법으로 유려하게 풀어내며 영화적 쾌감을 안긴 수작이었다. 류승완 감독이 故 강수연이 사석에서 한 말에서 착안해 만들었다는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그해 최고의 대사로 각광받았고, "어이가 없네"라는 대사와 함께 보여준 유아인의 연기는 밈(Meme)으로 수년간 회자되기도 했다. 그로부터 9년, '베테랑'이 속편으로 돌아왔다. 데뷔 25년 차의 베테랑 연출자 류승완에게도, 데뷔 30년 차의 베테랑 배우 황정민에게도 생애 첫 속편이다. '베테랑2'는 성공한 영화의 속편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1편과의 비교가 불가피하다. 전편과의 연관성을 이어가면서 속편만의 개성과 색깔을 구축하는 것이 성패의 관건이다. "성공을 답습하고 싶지 않았다"는 류승완 감독의 말에서 속편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가 엿보인다. 실제로 '베테랑2'는 전편의 흥행에 취해 복사기에서 찍어낸 듯한 결과물을 양산하고 있는 여타 시리즈와는 달리 창작자의 고민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1편에서 "형사가 재벌을 때려잡는다" 식의 단순하고 직접적인 카타르시스에 열중했다면 2편에는 "사적 제재는 옳은가?", "정의란 무엇인가?" 등의 논쟁적 화두와 광범위한 질문을 던졌다. 영화는 주부 도박단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불법 도박장을 잠입하는 미스 봉(장윤주)과 이 작전을 진두지휘하는 서도철(황정민)을 위시한 형사들의 모습으로 문을 연다. 약 7분여의 오프닝을 통해 광역수사대에서 강력범죄수사대로 부서를 옮긴 형사 5인방의 건재를 알리고, 1편과의 연결고리도 보여준다. 오프닝의 박력은 배우들의 찰떡같은 호흡과 최영환 촬영감독의 수려한 카메라 워킹, 장기하의 경쾌한 음악이 더해져 단번에 관객을 이야기로 진입시킨다. '베테랑2'는 우리 사회에서 벌어졌거나 벌어질 법한 사건을 연이어 등장시킨다. 1편에서는 돈과 권력을 등에 업고 법 위에 군림하는 재벌의 범죄를 다뤘다면, 2편은 대중의 분노를 토대로 활개 치는 비질란테(Vigilante: 자경단)의 연쇄 살인을 재료 삼았다. 이 사건의 베일 뒤에는 이른바 '해치'라는 인물이 있다. 해치는 인면수심의 범죄를 저지르고도 법의 심판을 제대로 받지 않는 인물에게 사적 제재를 가해 대중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이 가운데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범죄자가 출소하고, 강수대는 해치의 타깃이 될 것을 우려해 보호관찰을 하게 된다. 인력 부족에 허덕이던 서도철은 UFC 선수 출신의 지구대 경찰 박선우(정해인)를 영입해 수사에 박차를 가한다. 영화는 '해치'의 존재를 초반부터 오픈한다. '베테랑2'는 수사 기법을 활용한 범인 잡기가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라 문제적 인물이 던지는 화두와 그의 범행이 남기는 논쟁적 질문이 핵심인 영화임을 알 수 있다. 2편의 빌런으로 등장하는 '해치'는 안하무인에 극악무도하며 법 위에 군림했던 1편의 빌런 '조태오'와는 다른 인물이다. 해치가 살인이라는 중범죄를 저지르고도 활개를 칠 수 있는 것은 대중의 사회를 향한 분노와 사법기관에 대한 불신을 기반 삼고 있기 때문이다. 해치의 행각은 '죽어 마땅한 인물을 죽인다'는 식의 자기 합리화와 살인을 게임처럼 즐기는 소시오패스적인 속성과 어우러져 점점 과감해진다. 영화는 사적 제재에 대한 화두를 던짐과 동시에 무분별한 온라인 정보의 폐해 그리고 언론의 책임도 묻는다. 해치를 영웅화하는 현상은 대중에게 언론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는 유튜브가 부추기고,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쉽게 꺼지는 대중의 속성을 이용하는 사이버 렉카들은 기승을 부린다. 이 중 '정의부장'이라는 유튜브 채널과 전직 기자 출신 유튜버 캐릭터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할 만큼 적극적으로 현실을 반영했다. 류승완 감독의 형사물은 땅에 발을 딛고 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사건과 인물 그리고 사회의 풍경은 허무맹랑한 판타지가 아닌 우리가 겪었거나 목도했던 것들의 연장선상이다. 이번에는 연쇄 범죄라는 이야기 구조를 활용해 성범죄, 학교폭력, 가짜뉴스, 사이버 마녀사냥 등의 여러 사건을 아우르며 이야기판을 키웠다. 나아가 서도철을 통해 '어른의 성찰'을 보여주고 '사과할 줄 아는 어른'이라는 모범 답안을 도출한다. '민중의 지팡이' 역할을 하느라 정작 '좋은 남편'이자 '따뜻한 아빠'이길 외면했던 '가장 서도철'의 반성의 시간까지 마련해 준 셈이다. 답을 선사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는 감독의 연출 의도는 이 영화의 결과물을 생각하면 다소 거창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대중이 범죄와 뉴스를 대하는 시선과 방식에 대한 질문은 꽤 묵직하게 다가온다. 논란과 현상에만 몰두하다 정작 진실과 거짓,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뀔 때는 태도를 바꿈으로써 자신을 변호하기에 급급했던 대중과 언론의 습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다만 류승완 감독의 의도가 영화의 결과물에 잘 투영됐는지는 평가가 나뉠 수 있을 것 같다. 감독이 다루려는 주제가 광범위한 것에 비해 평면적인 나열과 편의적인 마무리로 귀결된 감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안타고니스트에 사연을 부여하는 것을 경계했다는 류승완 감독의 말도 일견 이해는 가지만, 결국 인물의 동기에서 '왜'가 빠지면서 이 인물은 납작한 소시오패스에 그치고 만다. 또한 '비질란테'나 '노웨이 아웃' 등의 시리즈에서 이미 사적 제재를 다룬 바 있기 때문에 다소 식상하게 여길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테랑2'는 현 영화계를 이끄는 장인들이 만들어낸 준수한 결과물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지난해 '서울의 봄'의 전두광으로 관객들의 분노 게이지를 끌어 올렸던 황정민은 '베테랑'의 서도철로 돌아와 살아 숨 쉬는 형사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형사라는 직업인으로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는 서도철의 신념은 결국 류승완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다. "좋은 살인이 있고 나쁜 살인이 있어? 살인은 그냥 살인이야"라는 대사가 발화될 때 황정민이라는 배우의 역량이 오롯이 드러난다. 캐릭터를 체화하는 능력과 감독의 메시지를 캐릭터에 실어 보내는 에너지는 단연 발군이다. 정해인은 이번 영화로 커리어에서 하나의 전기를 마련했다. 말간 얼굴로 순정을 발산했던 로맨스 달인 이미지를 벗어나 격렬한 액션과 서늘한 얼굴을 보여주며 한 단계 성장을 이뤄냈다. '베테랑2'는 액션 영화로서의 진일보도 이뤄낸 작품이다. 폭우 속 옥상 액션, 남산의 계단 액션신은 '액션 장인' 류승완의 단단한 내공이 느껴진다. 또, 돋보였던 건 최영환 촬영감독의 촬영이다. 액션 장면도 인상적이지만 인물 클로즈업에서 스플릿 렌즈 효과를 활용해 긴장감을 높인 컷들은 특히 인상적이다. 디자인 : 채지우
'주말에 뭐 볼까?'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스프가 알려드립니다. 배우 윤여정은 '파친코'에서 자신이 연기한 '선자'를 '끼끗한 여자'라고 표현했다. 자신의 어머니가 즐겨 썼다는 이 말에 대해 "음... 영어 단어로 표현하면 디그니티(dignity)에 가까울 거예요. 얘는 그게 있어서 좋았어요. 프라이드(pride)랑 디그니티(dignity)는 또 다르잖아. 삶의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비굴하게 사는 사람도 있거든. 그런데 선자는 아니야. 저는 그걸 표현하고 싶었어요"라고 말했다. '끼끗하다'는 형용사는 ▲생기가 있고 깨끗하다, ▲싱싱하고 길차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지난달 23일부터 방송을 시작한 '파친코' 시즌2는 시즌1의 마지막 이야기로부터 약 7년 후인 1945년을 배경으로 한다. 일본 오사카에 정착한 선자(김민하)는 두 아들을 키우며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남편 이삭(노상현)은 감옥에 갇혀 감감무소식이고, 선자는 생계를 위해 거리에 나가 김치를 팔고 있다. "이제 어쩌시게요?" (창호) "버텨낼 깁니더. 항상 그런다 아입니껴. (선자) 삶의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는 선자의 방식은 '버텨낸다'다. 이건 방관이나 회피와 같은 수동적인 방식이 아니다. 선자는 불굴의 의지와 강인한 정신력으로 고난을 이겨낸다. 그리고 느리지만 나아간다. 더욱이 선자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자신의 목숨보다 귀한 두 아들, 노아와 모자수가 있다. 이 드라마의 원작 소설 '파친코'(이민진 作)는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라는 명문으로 시작한다. 이 한 문장에는 '파친코'의 이야기가, 선자의 삶이, 축약돼 있다. 선자는 배를 곯는 아이들을 위해 밀주 제조에 가담했다가 유치장에 갇히고 만다. 그러나 하루 만에 풀려나고 그 배후에 한수(이민호)가 있음을 알게 됐다. 14년 만에 마주한 한수는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떠나자고 제안한다. 이때 남편 이삭이 만신창이가 돼 집으로 돌아온다. 선자에게 또다시 고난과 선택의 시간이 펼쳐진다. '파친코'는 4대에 걸친 한인 가족의 이민사를 다룬 대서사시다. 훈이와 양진, 선자와 한수, 노아와 모자수,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4대의 서사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배제하고는 묘사할 수 없는 이야기다. 이 장대한 이야기에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희로애락이 함축돼 있다. 시즌2 역시 시즌1과 마찬가지로 선자의 과거와 선자의 손자 솔로몬의 현재 이야기를 병렬 구조로 전개한다. 별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이야기가 번갈아 나오는 건, 두 서사가 궁극적으로 같은 뿌리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선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개척해 왔던 것처럼 솔로몬도 세상과 부딪히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 현시대의 젋은 시청자들에게 보다 와닿는 고난은 한국과 일본, 미국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사회의 벽과 부딪히는 솔로몬의 이야기일 것이다. 선자의 고난이 가난이었다면, 솔로몬의 고난은 차별과 편견이다. 낯선 땅에서 자리를 잡는 게 관건이었던 1세대 자이니치(재일조선인)인 선자와 꿈을 펼치는 것이 중요한 3세대 자이니치인 솔로몬이 직면한 역경은 조금 다르다. 여기에 선자의 아들 노아와 모자수의 이야기가 더해져 보다 풍성한 재미를 더한다. 한 배에서 나온 형제지만 이들의 성격과 삶의 방식은 그들의 두 아버지처럼 달랐다. 노아는 공부로 세상에 우뚝 서기를 바랐고, 모자수는 부를 축적함으로써 사회의 차별과 편견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는 파친코로 큰 성공을 거둔다. 실제 1950년대 자이니치들이 일본에서 가장 많이 했던 사업이다. 아버지가 축적한 부의 울타리 안에서 안락하게 자랐지만 솔로몬은 윗세대들과는 또 다른 장벽에 부딪힌다. 솔로몬은 기회의 균등을 통해 자신의 역량을 펼치길 바라지만 세상은 이민자들에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처럼 시즌2에서는 선자뿐만 아니라 여러 인물의 이야기를 조명하며 풍성한 재미와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이 작품을 향한 글로벌 시청자들의 호평은 한국 문화와 민족의 특수성에 대한 관심보다는 이민자 서사에 대한 보편적 공감대 형성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파친코'는 한국 배우들과 자이니치 배우, 한국계 제작진이 힘을 합쳐 완성한 수작이다. 시즌1, 2의 제작과 각색에 참여한 수 휴와 시즌1을 연출한 코고나다와 저스틴 전 감독은 한국계 미국인이고, 시즌2 연출에 참여한 이상일 감독은 재일동포다. 이들에겐 한 번쯤 해보고 싶은 이야기였을 것이고, 누구보다 (정서적으로) 잘 아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김민하는 선자를 위해 태어난 배우처럼 보인다. 순수와 끈기가 동시에 보이는 얼굴, 그 시대에 태어난 것 같은 몸짓, 서울 태생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사투리 구사까지 신인 배우의 어설픔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시즌2를 촬영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연기로 '모성 표현'을 꼽았지만, 경험의 공백을 타고난 감성과 본능으로 보완해 냈다. 나이든 선자로 활약하는 윤여정은 더할 나위 없다. 오랜 시간과 경험이 축적된 관록의 연기는 '파친코'의 무게중심 역할을 한다. 멜로 드라마적 재미도 놓치지 않은 시즌2에서는 이민호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욕망과 결핍을 지닌 부유한 남성'이라는 전형적인 캐릭터를 특유의 남성적 카리스마로 소화해 냈다. * '파친코' 시즌1과 2를 관통하는 댄스 오프닝. 총천연색으로 꾸며진 파친코 업장 안에서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신명 나는 춤사위를 보여준다. 이 오프닝에서는 모든 캐릭터가 갈등과 반목 없이 한데 어우러진다. 느리고 깊은 호흡으로 전개되는 본편과는 180도 다른 신나고 경쾌한 시작이다. 우리는 예로부터 한의 민족인 동시에 흥의 민족이었다. 디자인 : 채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