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연예뉴스에서 영화 관련 글을 쓰고 있습니다. 감독과 배우들의 '영화로운 순간'들을 전하겠습니다.
윤태호 작가는 제목을 잘 짓는다. 대표작 '이끼', '내부자들', '미생', '파인' 등은 한 단어로 작품 전체를 압축한다. 은유적이고 상징적이기까지 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야기를 만들고 캐릭터를 구축하기 전에 제목부터 생각한다. 제목이 곧 작품의 테마기 때문이다. 시리즈 '파인:촌뜨기들'의 제목은 동음 반복이다. 파인(巴人)이라는 한자의 뜻이 곧 '촌뜨기'(지방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영어라고 생각했을 그 제목이 한자이고 부제와 동일한 뜻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작품에 대한 호기심도 배가된다. '파인:촌뜨기들'은 1977년, 바닷속에 묻힌 보물선을 차지하기 위해 몰려든 근면성실 생계형 촌뜨기들의 속고 속이는 이야기를 담은 범죄 드라마. 윤태호 작가가 2014년 7월부터 2015년 8월까지 연재한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다. 윤태호 작가는 플롯을 짜기 전 캐릭터부터 만든다고 했다. 독창적인 캐릭터와 탄탄한 빌드업은 유려한 이야기로 연결되며 화룡점정을 이룬다. 인물 한 명 한 명이 살아있고, 이야기가 밀도가 높아 한번 보기 시작하면 눈을 떼기 어렵다. '파인' 역시 오관석(류승룡), 오희동(양세종), 양정숙(임수정), 김교수(김의성), 천회장(장광), 송사장(김종수), 나대식(이상진), 장벌구(유노윤호) 등 주요 캐릭터들이 활어처럼 싱싱하게 날뛴다. 나쁜 놈 위에 나쁜 놈, 교활한 놈 옆에 더 교활한 놈이 나타나 바다에 수장된 도자기를 캐기 위한 욕망을 부끄럼 없이 드러낸다. 소재 고갈에 시달리는 방송가와 영화계에 웹툰 세상은 이야기의 보고다. 그중 윤태호 작가의 웹툰은 단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킬러 콘텐츠다. '이끼'를 시작으로 '내부자들', '미생'까지 그의 히트작을 원작으로 한 영화와 드라마는 모두 성공했다.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각색을 최소화하고 원작의 결을 그대로 살려냈다는 것이다. '파인' 역시 마찬가지다. 일부 캐릭터에 살을 붙이고, 결말의 톤 앤 매너를 살짝 바꿨을 뿐 원작의 정수를 살리는 데 집중했다. '파인'의 성공은 원작의 몫이 크다. 윤태호 작가는 어떻게 매번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까. 그 비결은 세상을 향한 호기심과 치밀한 취재력, 부지런한 손끝에 있었다. Q. 웹툰 연재 때부터 '파인'은 영상화를 염두에 둔 기획처럼 보인다는 의견이 많았다. A. 현 공동제작사인 '흥부네박씨네'가 '미생'의 영상화 제안을 먼저 했었는데 그때 이미 판권이 팔린 상태였다. 그래서 차기작은 무조건 같이 하겠다고 약속했다. '파인'의 경우 연재 3, 4회가 지났을 때 바로 '흥부네박씨네'와 영상화 계약을 맺었다. 사람이 참 이상한 게 영상화 계약을 맺고 작품을 쓰면 ‘실제로 (영상으로) 구현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만화적인 허용으로만 그려도 되는지 스스로에게 물음표를 던지게 된다. 물속 에피소드의 경우 영상화했을 때 배가 보여야 할 텐데, 서해는 뻘밭이고 물이 탁하지 않은가. 고민이 되더라. 서해의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 그 지역 어부들을 많이 인터뷰했다. 서해의 바닷속이 뿌옇긴 하지만 물살에 따라 갑자기 하얗게 보이는 순간이 생긴다더라. 그래서 이 점을 희동이가 바다에 들어갔을 때 보물선을 발견하게 되는 에피소드로 풀었다. Q. 1976년 신안 앞바다 보물선 사건을 모티브로 '파인'의 이야기와 캐릭터를 창조했다. 이 사건에 흥미를 느끼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A. 슬럼프에 빠졌을 때 뉴스 검색하는 게 일이다. 특히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들락날락하는 것을 즐긴다. 작가마다 관심이 가는 시절이 있다. 나의 경우 초등학생 무렵이었던 70년대에 애정이 많다. 그 시절 뉴스를 특히 많이 찾아봤다. 신안 보물선 사건은 늘 머릿속 아이디어 서랍에 있던 아이템이었다. 구상을 마치면 친구나 후배들과 술 한잔하면서 운을 떼보고 반응을 본다. 그들의 리액션이 좋으면 '한 번 해볼까' 하면서 두루뭉술했던 아디디어를 구체화한다. '파인'은 무법자들이 법을 지켜야 하는 상황, 사기만 치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서로 신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다. 이 테마가 잡히면서 '이건 해도 되겠다' 생각했다. 본격적으로 스토리를 짤 때도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1975년부터 77년까지 키워드 '신안'이 들어간 기사는 모두 읽었다. 인터넷 창을 수십 개 열어놓고 뉴스를 봐가면서 창작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Q. 윤태호의 취재력은 정평이 나 있다. '파인'의 경우 어떤 식으로 정보 수집과 취재를 해나갔나? A. 뉴스로 당시 사건을 파악했고, 신안 보물선 유물을 정리해 놓은 논문과 골동에 관한 책을 보며 윤곽을 잡아 나갔다. 목포 시청과 신안군청을 찾아가서 발굴 당시의 이야기를 듣고, 전시장을 관람하기도 했다. 지역분들의 소개로 신안 근처의 모든 섬을 돌아다녔고 드론팀을 섭외해 사진도 수백 장 찍었다. 헌책방에 가면 작은 출판사에서 나온 골동에 관한 별의별 책들이 많다. 업자들이 과거 골동 관련 일을 하면서 겪은 에피소드를 기록한 책이다. 비문으로 가득한 책이라 읽기가 쉽지 않지만, 업자들의 박력 넘치고 싱싱한 표현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그런 것도 다 읽고 날것의 말들은 모두 기록해 두었다. 극중 부산 김교수(김의성)가 "업자들은 여서 여까지 다 아도 치고 나오지. 물건을 흥정하지 않아"하는 대사도 그 책에서 따온 거다. Q. '파인:촌뜨기들'은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사투리가 생생하게 살아있다. 특히 전라도 사투리를 가장 사실적으로 구현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원작 웹툰에 섬세한 묘사가 돼 있었기에 드라마에 잘 옮겨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전라도 지역의 신안, 목포 등의 사투리 고증 과정을 듣고 싶다. A. 고향이 전라남도 광주인데 어릴 때부터 서울, 군산 등 여러 지역으로 이사를 다녔다. 이사를 많이 다니는 아이들은 그 지역의 언어를 빨리 습득하려고 애쓴다. 어릴 때 서울에서 군산으로 이사를 갔는데 꼬맹이가 서울말 하는 게 웃겼는지 동네 형들이 날 불러다가 괴롭히기도 했다. 그런 에피소드는 '이끼'에도 반영됐다. 뿌리깊은나무 출판사에서 나온 '한국의 발견'이라는 책이 있는데 지역별 사투리가 세세하게 기록돼 있다. 그 책을 구해서 열심히 읽고 기록해 뒀다. 또한 국립도서관에서 판소리 채록집을 빌려 진한 남도 사투리를 일일이 메모했다. 그러면서 전남과 전북 사투리의 특징, 영암과 여수 말의 차이 등도 알게 됐다. 기본적으로 고어를 좋아한다. 한자투 언어도 마찬가지다. 20대 초반, 이문열 작가의 책을 좋아했다. 문장이 유려하면서도 그 맛이 느껴진달까.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안 해서 뒤늦게 문장의 세계를 알게 됐다. Q. 윤태호 작품의 공통된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파인'도 캐릭터 하나하나가 살아있다. 이야기를 쓰고 캐릭터를 잡는지, 캐릭터를 먼저 만들고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지 궁금하다. A. 나는 기본적으로 플롯을 안 짜고 작업에 들어간다. 대신 다른 작가에 비해 캐릭터를 잡는 데 많은 시간을 쏟는다. 인물에 대한 가상의 역사를 구축한 뒤 세부적인 배경을 만든다. 그 인물에 몇 년도에 태어났고, 아버지는 뭐 하시고, 어머니는 어떤 성격인지 등 각 인물의 연보를 엑셀로 만든다. 거기에다가 인물의 나이대에 따라, 비고란을 만든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해외에 동시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 대외적인 일을 캐릭터들이 몇 살 때 겪었는지까지 기록한다. 이 작업만 반년 넘게 걸린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야후'란 만화를 할 때부터 이런 방식을 추구해 왔다. 그때는 다 수기로 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인물의 신체 사이즈부터 말하는 속도, 감정에 따라 짓는 표정까지 구축된다. 나는 캐릭터가 허공에서 헤엄치고 다니는 걸 싫어한다. 이야기가 다소 황당무계해도 인물만큼은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수준이 아닌 땅속에 목까지 파묻혀 있기를 원한다. 캐릭터가 살려면 인물이 전지전능하면 안 된다. 경계면을 만들어야 한다. '파인'의 관석(류승룡)을 예로 들면, 그는 어디서든 무조건 '오야'(상투를 쥐어야 하는 사람)여야 하는 인물이다. 전체적인 판을 짜고, 돈도 조달한다. 조카인 희동이(양세종)를 양정숙(임수정)에게 보내 유혹하려는 꾀도 낸다. 극 안에서 캐릭터의 노고가 생겨야 한다. 그게 캐릭터를 잘 살리는 방법이다. 캐릭터가 일을 많이 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못 하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다. 캐릭터의 결손이 많아야 작품이 컬러풀해진달까. Q. '파인'에는 착한 사람이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나쁜 놈이 나쁜 놈과 결탁하거나, 나쁜 놈이 나쁜 놈의 뒤통수를 치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같이 성실하다. 게다가 준법정신도 있다. A. 작품을 시작할 때 중요시하는 것 중의 하나가 테마다. 테마를 응축한 게 제목이다. 1970년대는 시대적 분위기도 그렇고 사람들도 근면·성실하지 않았나. 악인들도 마찬가지일 거로 생각했다. 불법도 열심히, 성실하게 행했을 것 같았다. 이 윤곽이 가장 먼저 잡혔다. 인물들은 하나같이 법을 어기거나 법 없이 행동하는 사람들인데 그 공간이 무법지대인 바다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배를 타고 나갈 때는 '내가 너를 죽이지 않겠다'라는 무언의 약속이 돼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무법자들이 만났는데 준법정신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 생기는 거지. 이 점이 흥미로울 것으로 생각했다. Q. 일부 시청자들은 '왜 빨리 그릇 캐러 가지 않느냐'라는 불만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빌드업이 길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A. 이 이야기의 시작은 인물의 등장부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초반부터 이들이 얼마나 보고 배운 게 없는지, 얼마나 숨 쉬듯이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인지 보여주려고 했다. 시청자들로서는 '왜 그릇 캐러 빨리 바다에 안 나가냐' 하시지만 나와 감독님은 '파인'은 사건이 아닌 캐릭터 중심의 드라마라고 생각했다. 도자기를 찾는 것이 아닌 사기 치는 게 핵심인 이야기다. 그릇의 진위가 핵심이었으면 이 작품의 제목은 '파인'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캐릭터들의 등장과 함께 이뤄진 것으로 생각했다. Q. 이 작품의 영상화를 앞두고 원작자로서 시리즈의 감독과 작가에 당부한 것이 있었다면? A. 판권을 팔고 나서는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원작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애초에 계약서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약서에 없는 걸 후에 말하는 건 반칙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 캐릭터는 왜 썼는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등에 대한 제작진의 질문이 왔을 때는 성실하게 답변을 해드렸다. Q. '파인:촌뜨기들'은 원작을 존중한 각색이라는 평가가 많다. 원작자로서 드라마에 대한 만족도는 어느 정도인가? A. 매회 공개될 때마다 가족들과 함께 밥 먹으면서 봤다. 나도, 우리 가족도 한 명의 시청자였다. 영상화된 작품이 원작의 재방송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강윤성 감독이 시나리오를 쓸 때 나보다 더 많이 반복해서 원작을 봤을 거다. 아침 10시에 출근해서 밤 10시에 퇴근하는 생활을 1년 넘게 하면서 각색 작업을 했다고 들었다. 이 정도면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도 생각하셨을 테고 이렇게, 저렇게 많이 주무르고 재세팅을 한 결과가 지금의 시리즈로 나온 거다. 만족스럽다. Q. 시리즈의 엔딩은 원작과 톤 앤 매너가 좀 다르다. 원작은 모든 인물이 파국을 맞는데 시리즈는 그렇지 않다. 시즌2를 염두에 둔 방향성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희동(양세종)과 선자(김민)의 로맨스는 원작에 없던 것이기도 한데 강윤성식 '낭만'을 드러낸 것처럼 보인다. 원작자로서의 평가를 하자면? A. 감독님께서 결말에 관해서 물어보신 적이 있다. 원작에서는 내일이 없는 사람이 나와 내일이 없는 끝을 맞는데 시리즈에서 이렇게 밝게 끝내도 되겠냐고.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만약 시즌2를 하게 된다면 인물들이 그때 처벌을 받아도 되니 시즌1에서는 그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살아있다고 해도 문제 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 몇몇 인물은 이야기 흐름상 죽은 것처럼 보이는데 시즌2를 대비해 손가락을 까딱이는 장면 같은 걸 추가로 찍었다고 들었다. 실제로 한 배우가 내게 '작가님 저 살았습니다'라고 자랑하기도 하더라. 희동과 선자의 로맨스는 내 유전자에는 없는, 나는 못 쓰는 영역이다. 그래서 감독님에게 '잘 봤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Q. 쿠키 영상에서 경주 장면이 나왔다. 시즌2가 만들어진다면 소재는 문화재 도굴이라고 예상해도 될까? A. 감독님께서 쿠키 장면에 대한 아이디어를 묻길래 '지상 위 최고 도굴이라면 문화재 도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씀을 드리긴 했다. 시즌1도 충분히 만족하지만, 속편이 나온다면 시즌3까지는 원작 격의 이야기를 써드릴 소재가 있다. Q. '이끼', '내부자들', '파인'에 이르기까지 나쁜 놈들에 대한 진득한 묘사가 독자들을 열광시켰다. 이 작품들의 성공은 피카레스크(picaresca : 주인공을 포함한 주요 등장인물을 도덕적 결함을 갖춘 악인으로 설정하여 이야기를 이끄는 장르)가 상업 작품의 주류로 정착한 계기가 됐다. 창작자로서 악인을 그리는 것의 매력은 무엇인가? A. 살다 보면, '나 혼자만 착한 거 아냐? 저 인간들은 저렇게 살아도 부자가 됐는데?' 하는 생각을 하며 분할 때가 있지 않나.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악인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것 같다. '내가 그 캐릭터에 빙의한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호기심이 생기는 거지. 나 역시도 머릿속에서는 윤리와 비윤리, 합법과 비합법을 왔다 갔다 할 때가 있다. 주호민 작가의 트위터에서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이 쓰레기를 주우면서 가더라'는 글을 봤는데 인상적이었다. 무단횡단을 하기에도 바쁜데 비닐쪼가리를 줍다니 '그래, 이게 인간이지.' 싶더라. 코엔 형제 감독의 영화 '파고'(1997)를 무척 좋아한다. 엇나감의 미학이 예술인 작품이다. 때로 인간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악마한테 영혼도 팔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되기도 쉽지 않다. 양심을 버리고, 윤리를 저버리고 악인이 되는 것도 되게 어려운 일이다. '파인'에서 관석이 희동이를 설득하면서 "경부고속도로를 사람 죽이려고 만들었겠냐. 짓다 보니 사람이 죽은 거지"라고 하지 않나. 내 머릿속 세계관을 바꾸지 않는 한 악마가 되기도 쉽지 않다. 내가 1970년대를 주목한 건 그 시대는 어떤 것이든 돈으로 치환되는 시대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Q. 작가 윤태호의 창작 루틴은 꽤 유명하다. '나만의 루틴'을 소개해달라. A. '미생' 시즌1 때는 주2회 연재 때문에 잠을 일주일에 3일밖에 안 자고 작업에 몰두했다. 작년 4월에 몸이 좀 아프면서 루틴이 바뀌었다. 의사가 몸이 안 좋아진 특별한 원인은 없다고 하면서 잠을 좀 자라고 수면제 처방을 해주더라. 그 이후 밤 10시에서 11시 사이에는 자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아침 6~7시에 일어난다. 이건 4년째 하는 건데 아침에 일어나면 10분 정도는 가만히 앉아서 명상한다. 술도 끊고 담배도 줄였다. 술을 끊다 보니 사람을 만나는 것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더라. 또한 옛날보다 책을 좀 집중해서 읽는 습관이 생겼다. 많이 읽기보다는 한 권을 읽더라도 문장 한 줄 한 줄에 집중하려고 한다. 책을 읽고 나서는 챗지피티(Chat GPT)나 제미니(Gemini)에게 내 생각을 물어본다. 질문이 좋아야 답이 좋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AI에게 내 생각을 쭉 말한 뒤 "칼 융 같은 심리학자의 관점에서 내 사고를 분석해 달라"고 부탁한다. 또한 AI에게 "할리우드에 있는 저명한 프로듀서의 관점에서 내 아이디어를 평가해 달라"고 묻기도 한다. 그런 걸 하다 보니 질문하는 법을 알게 되더라. AI는 친절해서 싸울 일도 없다. 그렇게 한두 시간을 보내는 게 창작 활동에도 도움이 되더라. Q. 웹툰 시장의 규모는 커지고 있고, 영상화도 전성기라고 볼 수 있다. 최전선에 있는 작가로서 IP의 미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하다. A. 만화방 시대를 생각해 보면, 유명 작가의 작품만 매대에 꽂혔다. 신인이나 무명작가의 작품은 책꽂이에 꽂힐 일이 없었다. 웹툰 시대가 도래하면서 어떤 변화가 생겼냐면, 플랫폼의 시대다 보니 작가의 모든 작품이 올라오고 아카이브가 형성된다. 웹툰 플랫폼에 들어가면 작가의 별점수, 댓글수 등 양질의 리서치 결과를 볼 수 있다. 플랫폼이 브로슈어 역할을 하는 것이다. 최근 웹툰이 많이 영상화된 데는 플랫폼 아카이브가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독자의 댓글이 작품을 압축해서 눈높이를 형성한다. 예를 들어 '파인'의 뒷부분에 대해 독자가 이런저런 점이 아쉽다고 댓글을 써두면 그게 영상화될 때는 어떤 가이드가 될 수도 있는 거다. 물론 작가로서는 멘털이 털릴 수도 있지만 아주 나쁜 악플만 아니라면 작가에게도 영상 업자에게도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개인적으로 웹툰 시장 계속 성장할 거라고 본다. 코로나 때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투자도 많이 이뤄졌다. 코로나가 끝나고 대중들이 집밖으로 나가면서 시장이 조금 어려워진 측면은 있다. 그러나 사이클은 돌아온다고 본다. 위기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절륜한 작품은 계속해서 나올 것이다. 디자인 : 채지우
여성판 '존 윅'을 표방하는 '발레리나'는 태생적으로 한계가 명확한 영화다. 그도 그럴 것이 '존 윅'은 성별만 바꿔 대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하나의 고유명사이자 브랜드다. 키아누 리브스가 늙고 둔해졌다 해도 그는 그 자체로 존 윅이다. '존 윅4'(2023)에서 그의 육체는 이미 예전의 것이 아니었지만, 나이 듦조차 서사의 한 요소로 녹여냈다. 우리는 모두 노화를 숙명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몸이 무기인 존 윅 역시 예외가 아님을 보여줬다. 오히려 늙고 힘에 부쳐 힘겹게 상대를 제압하는 모습은 관객에게 큰 울림이 됐다. 인기 시리즈의 장기화를 위해 스핀오프, 프리퀄 등을 활용하는 건 익숙한 방식이다. '존 윅' 역시 스핀오프를 통해 시리즈의 생명을 연장하고 세계관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 시작이 여성판 '존 윅'인 발레리나다. '발레리나'는 암살자 조직 루스카 로마에서 킬러로 성장한 '이브'(아나 데 아르마스)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진실을 쫓던 중 전설적인 킬러 '존 윅'(키아누 리브스)과 마주하고, 킬러들이 장악한 정체불명의 도시에서 피의 전쟁을 벌이는 이야기를 담았다. '존 윅'과 마찬가지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주인공의 강력한 동기다. 존 윅이 강아지(죽은 아내와의 추억을 공유한, 그 자체로 아내를 상징)를 죽인 이들에게 복수의 주먹을 날렸다면, 이브는 아버지를 죽인 이들을 향해 총과 칼을 겨눈다. 예나 지금이나 이 시리즈의 플롯은 단순하다. 느슨한 서사의 빈틈을 메우는 건 액션이다. 스턴트맨 출신인 채드 스타헬스키 감독은 '존 윅' 시리즈 네 편을 연출하며 액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줬다. 공간과 지형지물을 활용한 창의적이고 다양한 액션 시퀀스를 통해 액션도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그가 '발레리나'까지 직접 연출한 건 아니지만 제작자이자 액션 감독으로서 영화의 전반에 관여했다. 타이틀롤은 아나 데 아르마스가 맡았다. 아르마스는 '블레이드 러너 2049'(2017), '나이브스 아웃'(2019)을 통해 스타덤에 올랐고, '007 노 타임 투 다이'(2021)에서는 본드걸로 활약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배우다. 특히 007 시리즈에서는 남성의 보호를 받는 수동적인 본드걸이 아닌 역동적인 액션을 펼치는 색다른 본드걸의 면모를 보여줬다. 미모와 카리스마, 여기에 액션 감각까지 갖춘 아나 데 아르마스를 캐스팅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레리나'가 다소 시시할 거라 추측할 수밖에 없는 건 '이브'가 태생적으로 약자의 포지션에 있다는 점 때문이다. 생물학적 차이, 즉 물리적 힘의 대결에서 여성이 남성을 이길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은 없다. '발레리나'는 '존 윅'과 마찬가지로 개인이 집단을 파훼하는 식의 보복 구조를 띤 이야기다. 이브가 맞대결을 펼치는 대부분의 사람은 고도로 훈련된 남성들이다. 일 대 다(多)의 대결이 필수적인 액션 영화에서 한 명의 여성 캐릭터가 끝까지 살아남아 조직에 복수하는 과정을 설득할 수 있느냐가 성패의 관건이다. 전제는 '반드시 이긴다'가 아니라 '제대로 이긴다'가 되어야 한다. 관객이 '존 윅' 시리즈에 열광한 건 스턴트나 CG로 무장한 히어로 무비 속 비현실적 액션이 아닌 몸과 몸이 부딪히는 아날로그 액션이 주는 날것의 쾌감 때문이었다. '발레리나'를 연출을 맡은 렌 와이즈먼 감독과 제작자 채드 스타헬스키는 당연하게도 '액션'에서 답을 찾았다. '이브'는 여성이라는 신체적 한계를 다양한 무기를 이용해 극복한다. 각종 총기류는 물론이고, 칼, 스케이트 날, 화염방사기 등 도구와 무기를 활용하며 위기를 극복하고 상대를 제압한다. 특히 후반부 화염방사기를 활용한 액션은 잔인함의 강도가 높지만 그만큼 강렬하고 통쾌하다. 이 장면들의 카타르시스를 제대로 느끼고자 한다면 사운드특화관에서 관람할 것을 추천한다. '발레리나'는 존 윅을 등장시키는 '치트키'를 썼다. 대부분의 스핀오프가 세계관을 공유하되 독립적인 형태로 나아가는 것과 달리 '발레리나'는 존 윅을 조연으로 등장시키는 팬서비스를 한다. '존 윅' 시리즈의 향수를 자극하고 '발레리나'와의 연대를 마련한다는 측면에서 영리한 전략이다. 키아누 리브스는 아나 데 아르마스와 1:1 액션 대결을 펼치며 노익장을 과시했고, 후반부에는 조력자로서 활약하기도 한다. '존 윅' 시리즈와 '발레리나'는 특별한 영화다. '액션만으로 이뤄진 영화는 단조롭고 지루하다'는 선입견을 깨고 '액션만으로도 이야기가 된다'는 성공 신화를 만들어낸 작품이다. '발레리나'는 액션의, 액션에 의한, 액션을 위한 영화로서의 정체성을 '존 윅'에 이어 꽤 성공적으로 계승해 냈다. 화끈한 물량 공세로 규모를 확장했고, 촘촘하게 설계된 액션들을 쉼 없이 선사하며 오락성을 극대화했다. 물론 액션 영화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전설적인 브랜드가 된 '존 윅' 시리즈처럼 긴 생명력을 발휘할지는 의문이다. 냉정히 말해 존 윅과 비교해 이브의 존재감은 아쉽다. 존 윅과 이브의 대결은 영화의 백미였지만 '존 윅이 이 무대의 주인공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다행히도, '존 윅'은 다섯 번째 이야기로 돌아온다. 디자인 : 채지우
'주말에 뭐 볼까?'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스프가 알려드립니다. 수치가 성공의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숫자만큼 성공을 객관화할 수 있는 지표는 없다. 장성호 감독은 한국 영화가 북미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성적표로 보여줬다. 한국의 순수 기술력으로 완성한 애니메이션 영화 '킹 오브 킹스'로 북미에서만 6,000만 달러(한화 약 827억 원)의 극장 수입을 거두며 한국 영화 최고의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킹 오브 킹스'는 영국의 뛰어난 작가 찰스 디킨스가 막내아들 월터와 함께 2000년 전 가장 위대한 이야기 속으로 떠나는 여행을 그린 작품. 디킨스의 소설 '우리 주님의 생애'(The Life of Our Lord)에서 영감을 받은 기독교 애니메이션 영화다. 종전 최고 흥행작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북미 누적 매출 5,384만 달러)이었다. (북미 기준) 외국어 영화인 '기생충'은 아카데미 시상식 출품 요건을 갖추기 위해 북미 극장에 제한적으로 상영했다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석권하며 이른바 '영화제 버프'까지 받은 경우다. '킹 오브 킹스'는 사례가 다르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북미 시장을 겨냥했고, 영어 영화로 제작됐다. 북미 개봉 역시 제한 상영이 아닌 와이드 릴리즈였다. 여타 북미 영화들과 동등한 조건에서 출발해 박스오피스에서 기념비적인 성적을 거뒀다. 성공의 뒤편에는 모팩 스튜디오의 장성호 대표의 피, 땀, 눈물이 있었다. 국내 VFX(시각 특수효과) 분야의 1세대라 할 수 있는 장성호 대표는 약 10년간의 연출 준비를 끝에 이 영화를 완성했다. 장성호 대표는 영화 감독이기 전에 기술자였고, 사업가였다. 그는 영화 산업의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북미 시장에 '맨땅에 헤딩'하듯 무모한 도전을 하지 않았다. 영화 제작에 대한 노하우, 소재와 이야기에 대한 확신, 기술에 대한 자신감, 시장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기반으로 북미 시장을 공략했고, 보란 듯이 성공했다. 인터뷰 시작부터 끝까지 그는 '할리우드 스탠더드 퀄리티'라는 말을 자주 썼다. 말은 쉽다. 미국 관객의 눈에 맞춘 스탠더드 퀄리티라는 것은 그 기준이 모호하다. 영화라는 건 공장에서 찍어내는 공산품이 아니기에 공식 인증도 받기 어렵다. 결국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그에게는 '좋은 이야기에는 반응을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장성호 감독의 성공 비결을 따라가 봤다. Q. 북미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난 후, 드디어 한국 관객과 만나게 됐다. 소감이 어떤가? A. 미국에서 개봉할 때는 좀 담담했는데, 오히려 국내 개봉을 앞두고는 긴장이 된다. 미국에서는 배급사가 흥행 지표가 될 만한 데이터를 계속 제공해 줘서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했는데 국내 시장은 예측 불가다. 국내 극장 체인들도 우리 영화가 레퍼런스가 없는 특이 사례다 보니 예측이 어렵다고 하더라. 오늘 다행히 예매율 1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어 조금은 안심이 된다. Q. 북미에서는 지난 4월에 개봉했는데 국내 개봉은 7월에서야 이뤄졌다. 양국 개봉 시기를 각각 4월과 7월로 잡은 이유가 있나? A. 미국은 부활절 시즌이 대목이다. 게다가 예수 소재의 영화다 보니 부활절에 개봉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었다. 국내 개봉 시기는 미국 개봉 때도 결정을 못 하고 있었다. 연말에 해야 하나 하다가 북미에서 큰 성공을 거두다 보니 빨리 개봉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래도 한국은 더빙 준비도 해야 하기 때문에 빨리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다 여름 방학을 앞두고 하게 됐다. Q. '킹 오브 킹스'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북미를 타깃으로 한 작품인데 이례적인 기획이다. 또 VFX 분야의 1인자긴 하지만 애니메이션 영화에 참여한 경력은 없다. 애니메이션을 연출 데뷔작으로 택한 이유도 궁금하다. A. 영화감독을 하겠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운동을 처음 하는 사람이 헬스장에 가서 3대 500을 칠 순 없다. 오랫동안 준비하고 기다렸다. 2015년쯤부터 연출에 대한 마음을 먹었다. 실사 영화를 하지 않은 건 크리에이터로 증명되지 않은 내게는 저예산 규모 수준의 투자밖에 이뤄지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봉준호, 박찬욱이 아니지 않나. 그러나 애니메이션을 하면 기대치가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애니메이션의 경우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었다. 기술적인 자신감이 있었고 시장 조사도 오랫동안 했다. 기독교 콘텐츠가 절대로 돈을 잃지 않을 시장이라는 것을 알았고, 이 정도면 투자자들에게 민폐를 안 끼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국 애니메이션은 영유아물에 특화돼 있었고 예산을 많이 써도 50억 원을 내외일 것 같았다. 완성도를 높이려면 그보다 큰 예산이 필요했다. 그래서 북미 시장을 메인 타깃으로 하게 됐다. Q. 성경 기반의 이야기를 첫 영화의 소재로 잡은 것도 북미 시장을 공략하는데 주효했던 것 같다. A. '애니메이션은 오리지널 작품으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천하의 디즈니도 오리지널 작품 중 성공한 사례가 없다. 픽사가 나오고 나서야 오리지널이 잘 됐다. 그들(북미 관객)에게 친숙한 원작 베이스로 가야겠다고 해서 소재를 찾았다. 미국은 청교도가 세운 나라다. 이 소재라면 시장에서 충분히 반응하겠다고 생각했다. 예수를 주인공으로 한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이 한 번도 만들어진 적이 없는데, 이 작품이 잘 만들어지면 큰 상징성도 갖겠다고 생각했다. Q. 찰스 디킨스의 소설 '우리 주님의 생애'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했다. 어떤 것을 활용했고, 어떤 점이 다른가? A. 디킨스의 오랜 팬이라 모든 작품을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작품이 있다는 건 이번에 알았다. 다만 이 책에서 영감을 얻었지, 원작으로 한 건 아니다. 디킨스는 예수의 이야기를 도덕주의적인 관점으로 썼다. 그러나 나는 그게 입체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의미보다 재미, 신앙보다 이야기. 관객이 먼저 다가올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다만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형식은 재밌다고 생각해 그건 차용했다. 아이 입장에서는 예수의 기적과 모험이 환상적인 여정이 될 거라 생각했고 이 형식이 뻔한 이야기를 재밌게 보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Q. 성서 기반의 애니메이션 영화가 북미에서 와이드 릴리즈로 개봉한 게 '이집트 왕자' 이후 27년 만이라고 들었다. 그간 왜 이렇게 북미에서 제작이 뜸했다고 생각하나? A. 미국 영화의 수익 구조가 국내와 해외가 비슷했을 때는 성서 기반의 영화가 많이 제작됐다. 그러나 해외 시장의 비중이 커지면서 할리우드도 해외 시장을 겨냥한 작품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기독교 영화 콘텐츠 제작이 줄었다. 나로서는 오히려 메인 스트림에서 만들지 않기 때문에 틈새 공략이 가능하겠다 싶었다. 애니가 아무나 공략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할리우드 스탠더드 퀄리티를 맞출 수 있는 건 미국에서도 디즈니, 소니, 유니버설 등 5대 배급사뿐이다. 이걸 한국의 작은 회사에서 만들었다고 하니 미국에서도 놀라더라. Q. '킹 오브 킹스'는 개봉 첫 주 박스오피스 2위로 데뷔했고 약 4주간 박스오피스 10위권을 유지하며 북미에서만 6000만 달러 이상의 극장 수입을 거뒀다. 영화 자체의 힘도 있지만 와이드 릴리즈의 힘도 컸다고 생각한다. 미국 현지 배급사는 엔젤 스튜디오(Angel Studios, Inc.: 미국의 인디 기독교 미디어 회사이자 영화 배급 스튜디오)라는, 한국에는 사소 생소한 회사다. 이곳과 손잡게 된 배경은? A. 영화를 제작할 때부터 이 소재가 미국인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기에 좋다고 생각했고, 만듦새가 좋으면 시장이 반응할 거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래서 영화를 모두 완성한 후에 (배급) 비딩을 걸자는 오만함이 작동했다. 물론 메이저 배급사랑도 접촉했는데 엔젤 스튜디오의 조건이 더 매력적이었다. 과거 기독교 영화인 '사운드 오브 프리덤'을 와이드 릴리즈로 배급한 경험이 있다는 것도 장점으로 받아들여졌다. 무엇보다 우리가 갑의 위치에서 계약을 할 수 있었다. 내 요구사항은 ▲ 부활절 개봉 보장 ▲ 개봉 첫 주 최소 북미 2천 개 이상의 스크린 확보. 이 두 가지였는데 그들이 모두 수용했다. 영화 완성 후 북미 극장 체인들 대상으로 배급 시사를 열었고 반응이 좋아 개봉 첫 주에 3,200개 스크린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2주 차엔 3500개까지 늘어났다. 사실 초반 흥행 지표만 보면 더 잘될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인크래프트 무비'와 '시너스'가 복병이었다. '마인크래프트 무비'가 아니었으면 개봉 첫 주 북미 박스오피스 2위가 아닌 1위로 데뷔했을 거고, 2주 차에 '시너스'가 개봉하지 않았다면 박스오피스 1위를 했을 거다. Q. '킹 오브 킹스'의 성공엔 두 파트너의 공헌도 빼놓을 수 없다. 공동 제작자이자 촬영감독으로 함께한 김우형(한국 영화계 촬영 분야의 거장으로 불리는 인물로 '암살', '1987', '카트' 등을 촬영했으며 개봉을 앞둔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도 작업)감독과 기획자인 제이미 토마슨이다. 역할 분담을 어떻게 한 건지 궁금하다. A.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한 유이한 인물들이다. 감독이라서 인터뷰를 많이 하고 다니다 보니 '내가 다 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영화는 누구 한 사람의 힘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의 노력과 보이지 않은 운들이 작용한 결과다. 김우형 감독이나 저 모두 애니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실사 영화를 하면서 쌓아온 경험치가 많았다. 기존 제작방식을 애니메이션에서도 활용하기로 했다. 실사 영화와 같은 퀄리티 구현을 위해 버추얼 프로덕션 시스템과 카메라를 자체 개발했다. 언리얼 엔진 기반의 이 시스템은 배우의 실사 연기를 가상공간에 적용해 실제 촬영과 유사한 방식으로 구현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조이스틱 형태의 제어장치를 연결한 카메라를 자체 제작해 김우형 촬영감독이 직접 조정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고, 그 결과 애니메이션에서는 보기 드문 섬세하고 역동적인 카메라 무빙을 구현할 수 있었다. 김우형 감독의 경우 이 영화를 준비할 동안 본업(촬영)을 접고 저희 회사로 들어와서 일을 했다. 제이미 토마슨은 디즈니에서 15년 넘게 일한 업계 최고 전문가다. 할리우드 인맥을 통해 업계의 탑 전문가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그렇게 소개받은 사람이 토마슨이었다. 그와 처음 미팅을 했을 때 '좋은 기획이고, 잘 될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에이전트에 다이렉트로 대본을 보낼 순 있지만 대본이 후지면 끝이다'라고 하더라. 아시다시피 할리우드는 에이전트에게 대본을 보내면 바로 배우에게 건네는 게 아니라 검수부터 한다. 별로면 바로 쓰레기통행이다. 그걸 통과했다. Q. 할리우드 인맥은 어떤 인연과 사연을 통해 구축하게 된 건가? A. 과거 미국 드라마 '스파르타쿠스' VFX 작업에 참여하며 할리우드 스태프들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이후 국내 드라마 '태왕사신기' 작업을 했는데 그때 스태프 중에 '반지의 제왕'팀이 있어 또 인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이후 영화 '전사의 길'을 하면서 이 스태프들과 다시 만나 친해졌다. 이들은 아카데미에서 받은 오스카 트로피만 24개인 업계 최고의 선수들이었다. 선수는 선수들을 알아보다고 하지 않나. 그분들과의 관계가 좋았다. 그때부터 "장 대표는 할리우드에 와서 일해도 잘할 것 같다"는 말을 자주 들었고, "연출을 해 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어려서부터 할리우드가 막연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사람 사는 건 다 똑같고, 역량만 있으면 어디에서든 인정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Q. '킹 오브 킹스'에는 36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됐다. 이 중 소위 국내 메이저 투자배급사의 자본은 하나도 없다. 어떻게 이 자본을 조달한 건지 투자유치 과정을 듣고 싶다. A. 국내 투자 배급사들은 다 외면할 거라 투자를 받으려는 시도조차 안 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법에 저촉되지 않은 선에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 투자를 받았다. 초기에는 주변 지인들에게 부탁해 회사로 투자를 받았다. 그렇게 모으니 꽤 큰돈이 되더라. 그걸 종잣돈으로 활용해 콘텐츠 펀드에 투자했고, 그 레버리지로 초기 투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 무렵 중국 영화 시장에서 VFX 수주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회사의 매출도 커졌다. IPO가 가능한 업종이다 보니 회사의 지분을 팔아서 투자금에 보탰다. 여기에 개인 자산까지 투입했다. 장기 파는 거 빼고는 다했다고 볼 수 있다. Q. 지금까지의 말을 종합해 보면 '실력과 인맥, 운이 있다면 미국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로 들린다. 그러나 국내 수많은 영화인이 할리우드 시장에 문을 두드렸다가 실패했다. 당신은 어떤 점이 달랐다고 생각하나? A. '좋은 콘텐츠는 반응이 온다'고 생각한다. 좋은 기획을 했고, 그들의 허들을 넘을만한 시나리오를 썼기에 그들이 반응했다. 과거에 시도한 분들은 할리우드 인맥도 없고, 시장 돌아가는 상황을 잘 모르다 보니 그들이 소개해 주는 브로커, 로비를 거치게 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두세 다리씩 거치면 핵심에 도달하기가 어렵다. 나의 경우 A리스트를 통해서 상황을 꾸려냈기 때문에 직접적인 비즈니스가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Q. 개인적으로 국내 애니메이션의 글로벌화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작화라고 생각한다. '킹 오브 킹스'는 이를 극복했고, 국내외 관객들에게 소구할 만한 캐릭터들을 만들어냈다. A. 그렇다. 우리뿐만 아니라 해외 관객들 역시 디즈니에 길들여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외에는 다 마이너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아트웍에도 많은 시간을 쏟았다. 기조는 '디즈니의 수준에 도달하되, 아류가 되지 말자'였다. 저의 경우 미술을 전공했고, 이미 여러 작품의 VFX 작업을 통해 많은 경험이 있었다. 작업을 진행해 가면서 각본뿐만 아니라 아트웍 파트에서 할리우드 지인들의 의견을 구하고, 그들의 피드백을 반영하며 수준을 높였다. Q. '킹 오브 킹스'는 크게 두 가지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첫 번째는 아버지인 디킨스와 아들 월터의 관계 회복, 두 번째는 월터가 예수의 이야기에 몰입하고 그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이 둘의 균형을 어떻게 잡아 나갔나? A.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회복도 중요한 동시에 예수의 인류에 대한 사랑을 월터가 깨닫게 되는 것이 중요한 작품이다. 서브 플롯이 메인 플롯을 잡아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관객이 온전히 예수의 이야기를 보고 나온 느낌을 줘야 했다. 아기 예수가 탄생하자마자 월터와 눈을 맞추는 것을 시작으로 천천히 예수를 알아가는 과정이 나온다. 처음엔 디킨스가 개입을 많이 하는데 나중에는 서서히 빠진다. 그 자연스러움에 신경을 많이 썼다. Q. 캐릭터 중에선 고양이 윌라가 사랑스러웠다. 실제 고양이의 행동 양식을 관찰한 끝에 완성한 듯한 섬세한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A. 실제로 디킨스가 고양이를 키웠고, 이름도 윌라였다고 한다. 이 영화는 월터가 예수를 알아가는 과정을 담은 영화인 동시에 아버지 디킨스의 성장담이기도 하다. 보통 어른들은 아이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걸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이에게 소중한 존재면 어른들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디킨스가 윌라를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월터도 아버지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애니메이션적인 재미를 위해서도 윌라는 필요한 캐릭터였다. 과거 고양이를 세 마리 키운 적 있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윌라 캐릭터를 사실적으로 만들고자 했다. Q. 더빙 캐스팅을 할 때 영어판, 국내판에서 어떤 것을 고려했나. 국내 더빙의 경우 전문 성우가 아닌 스타 캐스팅에 주력했는데 그 이유는? A. 물론 성우들의 전문성을 존중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애니에 고정된 느낌보다는 생활 언어, 톤으로 편안하게 연기를 하는 방향을 원했다. 그래서 국내의 경우 배우 캐스팅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다. 물론 영어로 쓴 대본이라 미국 배우와 한국 배우의 느낌이 같을 순 없다. 그러나 한국 배우분들이 워낙 더빙을 잘해 주셔서 배우들이 참여한 더빙판 중에서는 최고의 퀄리티라고 자부한다. 이병헌, 이하늬, 진선규, 양동근, 차인표 등 최고의 배우진이 캐스팅 됐는데 이분들 모두 미국 개봉 전에 이미 캐스팅이 완료됐다. 주변 지인들의 도움도 많았지만, 대부분 시나리오를 읽고 선뜻 참여해 주셨다. Q. 한국 애니메이션이 미국 영화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킨 것에 대한 현지 언론의 반응도 뜨거웠던 것으로 안다. 현지 언론과 인터뷰를 했을 때 그들이 가장 흥미로워 한 건 어떤 것이었나? A. 한국 작품, 그것도 북미 메이저 배급사의 지원을 받지 않은 작품이 와이드 릴리즈로 개봉하고 대성공을 거둔 것에 가장 놀라더라. 우리나라로 치면 독립영화가 천만 영화를 한 것 같은 결과다. 관련 질문을 많이 받았다. 나는 '보편적인 게 세계적인 게 아닐까요?'라고 답하곤 했다. 한국 사람이라고 해서 한국적인 게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런 작품을 만들 생각이다. 최근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성공으로 알 수 있듯 한국 문화를 바탕으로 한 미국 애니메이션이 나올 수 있고, '뮬란'과 '쿵푸팬더'처럼 중국의 문화와 캐릭터를 활용한 미국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다. 소재를 누가 사용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서구를 향한 문화적 열등감은 사라진 것 같다. 그들과 같은 시선에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편적인 정서는 어느 세상이나 통하기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의 성공도 마찬가지다. 이야기가 소구된 역사는 유구하지만 결국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으로 귀결되더라. 소재 활용에 있어서도 경계나 거부감 없이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세상이다. Q. 한국 VFX 분야의 선구자로서의 견해도 궁금하다. VFX가 21세기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지금은 AI 시대가 도래했다. AI가 사람의 기술을 대체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건데 이 변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A. 제가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한 해에 150편의 영화가 제작된다고 치면 CG가 들어간 영화가 1,2편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안 들어가는 영화가 1,2편밖에 없을 정도로 CG 사용이 보편적이다. 이제는 AI 시대가 돼서 모든 걸 대체하리라고 본다. 생각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접근성이 좋아진다는 건데 그건 반대로 누가 해도 똑같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변별력이 없으면 관심도 떨어질 것이다. 실행은 쉬워지나 유니크한 아웃풋을 내긴 어렵다. 창의적이고 독특한 결과물을 낼 수 있는 크리에이터가 각광받는 시대가 올 거라고 생각한다. Q. 어떻게 영화 일을 시작하게 됐나. 그리고 영화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을 '장성호의 인생 영화'도 궁금하다. A. 어려서부터 워낙 영화를 사랑했고, 많이 봤다. 책 읽고, 그림 그리는 것도 마찬가지로 좋아했다. 영화인을 하는 것은 내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의 토토로'를 가장 좋아한다. 그의 작품 중 최고 걸작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라고 생각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건 '토토로'다. 또 '톰과 제리', '루니툰'도 좋아한다. 대사 없이 상황을 전달하는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극영화 감독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스탠리 큐브릭이다. 제가 추구하는 스타일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구로사와 아키라다. 일단 영화를 한 번 보면 끝까지 보게 되는 마력을 보여준다. 지금 봐도 하나도 촌스럽지 않은 걸작들이 많지 않은가. Q. 애니메이션으로 영화 연출의 첫발을 뗐는데, 실사 영화 연출에 대한 계획도 있을 것 같다. A. 극영화로 구상해 놓은 게 있긴 하다. 그러나 오리지널 콘텐츠를 하려면 제가 더 유명해져야 할 것 같다. 남의 돈을 투자받아 개인 예술을 하는 건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건 내 돈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음 계획은 아직 구체화진 않았지만 성서 기반은 아니다. 제가 즐겁고 재밌을 만한, 그러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영화를 해보고 싶다. 또한 중국 시장에서도 개봉할 수 있는 영화를 해보고 싶다. Q. 감독이 아닌 제작사 대표로서 답한다면, 모팩 스튜디오는 애니메이션 제작 비중을 늘릴 계획인가? A. 모팩 스튜디오는 VFX 회사로 출발했지만, 앞으로는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방향을 잡아 나갈 것 같다. '킹 오브 킹스'가 북미에서 한국 애니메이션이 성공한 최초의 사례이기 때문에 당분간은 애니메이션을 더 제작해 볼 생각이다. 게이트를 오픈했으니 여기서 좀 더 성과를 내고, 지평을 넓혀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디자인 : 채지우
'주말에 뭐 볼까?'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스프가 알려드립니다. "이 영화 속 사건, 지명, 인물 모두 허구임을 밝힙니다" 영화 '신명'은 오프닝 크레딧을 통해 앞으로 시작될 이야기가 허구임을 명시한다. 그러나 이런 고지는 그저 법적인 보호막일 뿐이라는 듯 대한민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인물과 사건을 대놓고 재현한다. 여타 정치 다큐멘터리처럼 품위 있는 척, 객관적인 척하지 않는다. 제작진은 문제적 영화임을 자처하며 거침없는 풍자와 조롱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하는데 집중한다. 또한 오컬트 정치 스릴러라는 혼종 장르를 내세워 창작과 묘사의 폭을 넓혔다. 검찰총장 출신의 대통령 김석일(주성환)과 주술에 심취한 그의 영부인 윤지희(김규리)가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인터넷 언론 기자 정현수(안내상)가 그들의 비밀과 비리를 추적한다. 허구의 매체인 영화에서 현실에 거울을 들이댄 것 같은 강력한 기시감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신명'은 모큐멘터리(Mockumentary) 영화다. 모큐멘터리는 허구의 내용을 마치 실제 상황인 것처럼 보이도록 제작한 영상으로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말로 통용되기도 한다. 이는 관객의 긴장감과 몰입감을 높인다. 다만 다큐의 톤으로 진행되는 만큼 관객이 실제인 것처럼 오해할 소지도 있다. 이태원 참사를 연상케 하는 사건을 보여주고 이 참사의 배경으로 영부인의 주술 행위를 제시한다. 또한 대통령이 관저를 옮기고도 3개월 후에나 들어간 행동은 액운을 피하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한다. 실제 사건으로 몰입감을 높인 뒤 음모론에 가까운 상상력으로 긴장과 충격의 강도를 높이는 식의 전개다. 인물을 다루는 방식도 거칠다. 영화가 초점을 맞춘 건 윤명자에서 윤지희로 이름을 바꾸고 영부인의 자리에까지 오른 한 여성의 드라마틱한 인생이다. 윤지희는 어린 시절 '분신사바' 사건을 시작으로 주술에 심취하게 된다. 성인이 된 뒤에는 남자를 이용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성형으로 얼굴을 바꾼 뒤 이름, 학력, 신분까지 위조한다. 그녀의 의심스러운 과거 행적과 현재의 비밀스러운 행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이를 근거로 악마화한다. 또한 이런 행위가 개인의 종교 활동이나 일탈이 아닌 대통령의 정책 결정에도 영향을 줬다는 설정이다. 특히 영화는 중, 후반부에 이르러 영부인과 대통령이 심취해 있다는 일본의 종교와 주술 의식을 집중적으로 묘사한다. 이때 오컬트라는 장르적 특징을 부각하며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강조된다. 영화의 구성에서 후반부는 아주 중요하다.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고, 해소의 카타르시스로 이어지는 이 구간에서 '신명'은 오컬트 장르의 분위기를 적극 활용한다. 그 과정에서 진실 추적에 집중하던 정치 다큐로서의 색깔은 희미해지고 소재주의와 선정성이 강화된다. 영화의 완성도에 있어서 치명적인 결함으로 지적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신명'은 최근 약 10년간 개봉한 모큐멘터리 영화 중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작품이 될 가능성이 크다. 개봉 3주 만에 전국 70만 관객을 돌파하며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제작비 15억 원이 투입된 이 영화의 손익분기점은 약 30만 명. 개봉 10일 만에 손익분기점을 가볍게 넘긴 이 영화는 투자 대비 두 배 이상의 수익을 올렸으며 여전히 극장가에서 순항 중이다. 현재의 흐름이 4주 차까지 이어진다면 '마의 100만' 돌파도 가능하다. "완성도로 보는 영화가 아니"라는 관람객의 평가에는 이 작품을 둘러싼 대중의 환호에는 영화 외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정치적 혼란, 검찰에 대한 불신, 언론의 무능 등으로 지친 대중들에게 이 영화의 날것의 통쾌함을 선사했고, 이는 상업적 성공으로도 이어졌다. 발 빠른 기획과 실행의 승리다. 영화는 지난 3월 14일에 촬영을 시작해 48일 만인 4월 30일 촬영을 마쳤다. 반드시 21대 대통령 선거 전에 개봉해야 한다는 제작진의 의지가 반영돼 영화는 대선 전날인 6월 2일에 개봉했다. '신명'은 ‘열린공감TV’ 산하 열공영화제작소가 제작, 배급한 영화다. 영화 전문 제작사 아닌 유튜브 채널 기반의 언론이 영화 제작에 나선 케이스다. 뉴스타파와 뉴스공장도 정치 다큐멘터리를 만든 바 있어 특기할 만한 일은 아니다. 다만 '신명'의 경우 확실한 차별화를 이뤄냈다. ‘열린공감TV’는 20대 대선 후보로 윤석열 검찰총장이 떠오르고 있을 때 처음으로 '쥴리 의혹'을 보도한 곳이기도 하다. 전 대통령 부부에 대한 오랜 취재로 이름을 알린 매체가 조기 대선을 앞두고 자신들의 취재 기록을 기반 삼아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어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릴지 관심이 집중됐다. 정권 교체 이후 위축된 보도 여건으로 인해 차마 다루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이번 영화를 통해 밝힐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었다. 그러나 열공영화제작소는 팩트 기반의 드라이한 보도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단적 상상력으로 점철된 페이크 다큐멘터리로 노선을 정했다. 물론 영화가 제시하는 극단적 상상력을 모두 진짜라고 받아들이는 관객은 없을 것이다. 저주의 굿판을 벌이는 후반부 윤지희의 발악을 보면서도 놀랍지 않은 건 '현실이 영화보다 더 비현실적이고, 영화보다 더 자극적인데?'라는 생각이 다수의 머릿속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화라는 매체는 창작을 기반으로 하며, 창작에는 성역도 경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성에 집중한 빠른 공정만큼이나 영화의 완성도에도 공을 들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기획의 성취과 영화의 도구화가 남긴 씁쓸한 뒷맛이다. 뜨거운 영화 '신명'도 언젠가는 극장에서 내려갈 것이다. 다행히 3대 특검이 본격 활동을 앞두고 있다. 설(說)과 음모론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즐겼던 시간을 넘어 뉴스에 집중할 시간이다.
'주말에 뭐 볼까?'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스프가 알려드립니다. "불가능한 모든 것을 제거했을 때, 마지막에 남은 것이 아무리 이상한 것이라도,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 추리 소설의 대가 아서 코난 도일은 미스터리를 푸는 열쇠로 이러한 방법을 제시한 바 있다. 사건이 벌어졌고, 진실은 미궁에 빠졌을 때 불가능성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 진실과 가장 빨리 마주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지난달 21일 공개된 디즈니+ '나인 퍼즐'이 후반부를 향해 가면서 흥미진진한 두뇌 유희의 시간을 선사하고 있다. '나인 퍼즐'은 10년 전, 미결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현직 프로파일러인 '이나'(김다미)와 그를 끝까지 용의자로 의심하는 강력팀 형사 '한샘'(손석구)이 의문의 퍼즐 조각과 함께 다시 시작된 연쇄살인 사건의 비밀을 파헤치는 추리 스릴러.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프로파일러가 돼 또 다른 살인 사건들을 추적한다는 설정, 여기에 주인공이 자신을 용의자로 지목한 형사와 공조하며 연쇄살인의 진실을 추적한다는 설정이 흥미로운 작품이다. 11부작인 '나인 퍼즐'은 공개된 9회까지 수많은 인물의 등장·퇴장과 엄청난 양의 떡밥을 던지며 거대한 미스터리와 흥미진진한 서스펜스를 구축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정통 추리물의 매력에 빼어난 만듦새, 개성파 배우들의 열연까지 더해져 웰메이드 드라마라는 호평을 받고 있다. "범인은 바로 당신"…고전적인 추리물의 매력 고교생인 이나(김다미)는 집에서 유일한 가족인 삼촌의 사망을 목격한다. 이 인물은 한강경찰서 서장 윤동훈(지진희)이다. 사건 현장에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라는 것과 알리바이가 모호했기 때문에 이나는 용의자로 지목되고, 경찰의 집중 수사를 받게 된다. 그러나 증거 불충분으로 이나는 용의 선상에서 빠져나가고 이 사건은 미제로 남는다. 이 사건을 수사하던 한샘(손석구)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이나를 끝까지 의심한다. 두 사람은 10년이 흘러 경찰과 프로파일러로 재회하게 되고 잇따라 발생한 살인 사건이 과거 윤 총경 사건과 연결돼 있다는 공통된 확신을 가지고 공조 수사를 펼친다. 사건의 복선은 살인 예고와 같은 퍼즐 조각이다. 이나는 삼촌의 시신을 발견한 그날 처음으로 퍼즐 조각을 발견했고, 10년 후 발생한 연쇄 살인 사건 수사 중에도 퍼즐 조각을 발견하거나 배달받는다. 이 퍼즐에 그려진 그림은 범인이 이나에 보내는 진실의 힌트인 동시에 '나를 찾아줘'라는 신호와 같은 기능을 한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 '공작'을 만든 윤종빈 감독의 첫 추리 스릴러인 '나인 퍼즐'은 고전적 매력이 가득한 추리물이다. 애거사 크리스티, 코난 도일, 에드거 앨런 포, 이든 필포츠의 추리 소설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인 탓에 등장인물 모두가 용의자가 되고, 사람의 성격이나 심리를 꿰뚫어 보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연출적으로는 노련하다. 음악과 미술로 장르적 무드를 강화했고, 촬영은 두 주인공의 상상력을 구체화하는 방식으로 연출됐다. 반전이냐 개연성이냐… 누구보다 중요한 건 왜? 이 작품이 흥미로운 건 모든 사건이 누군가에 의해 설계된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더원시티 개발과 비리라는 결정적 단서가 제시되고 경찰과 언론의 유착 관계를 의심할 만한 정황들도 고개를 들었다. 범인이 내부(한강경찰서)에 있을 가능성과 외부(이나 혹은 제3의 인물)에 있을 가능성이 동시에 제기되면서 미스터리의 강도는 세지고 있다. 윤종빈 감독은 매회 주인공에 버금가는 유명세를 가진 배우들을 카메오로 등장시켜 시청자들이 허투루 지나치지 않게 한다. 지진희, 예원, 이희준, 이성민, 백현진, 황정민, 박성웅 등이 연쇄 살인의 피해자로 등장했다. 단 2회만을 남겨둔 '나인 퍼즐'이 용두사미가 될지 유종의 미를 거둘지도 관심이 쏠린다. 시청자들 사이에선 벌써부터 갖은 추측들이 나오고 있다. 주인공 중 한 명이 범인일 가능성과 주인공들의 주변 인물 중 한 명일 가능성, 나아가 범인이 한 명이 아닌 복수일 가능성까지 제시하고 있다. 누구도 예측 못 할 반전보다는 1회부터 뿌려놓은 떡밥을 잘 회수하며 개연성 높은 결말을 제시하는 것이 '나인 퍼즐'의 완성도를 높이는 선택이다. 범인 찾기에 빠진 시청자들이 마주하게 될 결말은 무엇일까. '누구'만큼이나 '왜'에도 관심이 쏠린다. 이는 곧 감독과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주말에 뭐 볼까?'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스프가 알려드립니다. 영화 '해피엔드'(Happyend)의 초기 제목은 '지진'(Earthquake)이었다. 이 영화에서 지진은 일본에서 발생하는 물리적 재앙만을 뜻하지 않는다. 인간관계의 미세한 떨림과 균열, 일본 사회의 갈등과 붕괴라는 함의도 포함한다. 그러나 이 제목은 너무 직접적이고 투박하다. 영화를 연출한 소라 네오 감독은 오랜 고민 끝에 더 문학적이며 상징적인 '해피엔드'라는 제목을 선택했다. 유타, 코우, 아타, 톰, 밍은 고등학교 음악동아리에서 활동하며 우정을 나누는 사이다. 게릴라 디제잉 클럽에 다녀온 날, 다섯 친구는 흥에 취해 새벽까지 학교 동아리방에서 자신들만의 음악에 빠져든다. 유타는 학교를 나서면서 교장이 애지중지하는 노란색 스포츠카를 보고 장난기가 발동한다. 절친 코우를 꼬셔 차를 세로로 세운 후 도망친다. 교장은 이를 테러라 규정하며 범인 찾기에 혈안이 되고, 급기야 학교에 AI 시스템을 도입해 학생들을 감시하기 시작한다. '해피엔드'는 학생을 통제하려는 학교와 자유를 갈구하는 학생들의 대립에서 출발하는 영화다. 감독의 시선은 학교 안에만 머물지 않고 동시기 일본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도 주목한다. 극우화된 일본 사회에는 차별과 혐오, 갈라치기가 만연하다. 총리 키토는 "불법입국한 외국인과 반일 세력에 의한 흉악범죄가 대지진 때마다 증가한다"고 억지 주장을 펼치고, 지진의 위협으로부터 국민의 안전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비상계엄까지 발동한다. 이에 반발한 시민들은 거리로 나가 시위를 벌인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근미래로 설정돼 있다. '해피엔드'는 미래의 시간과 공간을 제시하면서도 CG 사용을 최소화했다. 도쿄의 빌딩 숲과 붉은빛의 네온사인 그리고 전광판에 등장하는 경고 시그널만으로도 근미래적인 분위기를 낸다. 푸른색과 붉은색을 테마로 한 촬영과 테크노와 일렉트로닉, 엠비언트 음악도 감각적인 무드를 형성한다. 몇몇 효과적인 장치와 설정만으로도 설득 가능한 시대적, 공간적 배경을 구축하며 이야기에 몰입감을 높였다. '해피엔드'가 제시하는 근미래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그리 다르지 않다. 실제로 과거 영화들이 명명했던 그 시기가 도래했거나 이미 지나갔음에도 현재는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어떤 건 과거에 비해 퇴보하기도 했다. 기술의 발전이 삶의 편리함을 가져왔을지언정 사회의 진화와 성숙까지 가져다주진 않았다. 사회를 이끄는 리더와 구성원 모두 선하거나 현명한 것은 아니란 것을 과거와 현재를 통해 경험해 오지 않았던가. 지진이라는 환경적 재난과 AI 감시라는 사회적 통제를 피부로 체감하는 유타와 코우는 각기 다르게 반응한다. 유토는 쉬이 바뀌지 않는 맞서지 말고 이 안에서 우리만의 행복을 찾자는 주의며, 코우는 사회에 반항하고 투쟁하며 불합리를 극복해보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은 처지가 다르다. 재일한국인(자이니치) 4세인 코우는 학교 안과 밖에서 자신이 이방인임을 자각할 수밖에 없다. 유타와 함께 사고를 쳐도 코우는 경찰에게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야 한다. 사회와 집단에 만연한 차별과 적대감으로 인해 언제든 테두리 밖으로 밀려날 수 있는 신세인 것이다. 오늘만 사는 유토는 비겁한가. 영화는 자기만의 방식과 용기로 세상에 목소리를 유토를 보여주며 관객의 속단과 오판을 거둬들인다. 그렇다면 이미 망해버린(것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소년에서 어른이 되는 성장통을 겪은 유타와 코우는 더 이상 같은 곳을 바라보고, 나란히 걸어갈 수 없다. 나만의 자아와 가치관이 확립된 그들은 행복의 기준도 달라져 버렸다. 롱테이크로 촬영된 엔딩 시퀀스는 따스함과 동시에 쓸쓸함을 선사한다. 그러나 청춘은 스스로의 길을 찾아나가는 시간이라는 니체의 말을 되새겨보면 유타와 코우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임이 틀림없다. '해피엔드'는 일본 사회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사회드라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명백한 청춘영화다. 학교라는 소우주, 친구라는 울타리 안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청춘의 한 페이지를 기록한 성장영화다. 이는 유토와 코우만이 아닌 누구에게나 있었던 시절이다. 영화를 아우르는 주요한 정서는 우정이다. 사랑을 알기 전 맞이한 가장 뜨겁고 순수했던 감정이다. '해피엔드'는 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순간들을 아름다운 영상과 감각적인 음악으로 기린다. 소라 네오는 미야케 쇼, 하야카와 치에 등과 함께 일본 영화의 차세대 기수로 꼽히기에 손색없는 재능을 보여줬다. 과거는 있지만 현재와 미래는 희미해진, 작금의 한국 영화계엔 부러운 일본 영화의 새로운 계보다.
'주말에 뭐 볼까?'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스프가 알려드립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악연'은 우리네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없을 것 같은 저열한 인간들의 향연이다. 비상식, 비정상적인 상황의 연속이지만 드라마는 갈등과 파국 그리고 막장 요소가 강할수록 재미있는 법이다. 이 시리즈는 자극적 설정과 극단적 전개, 충격적 반전으로 인해 한번 보기 시작하면, 쉽게 끊을 수 없는 강렬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삶은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다. 우연처럼 보이는 필연이 있는가 하면, 필연처럼 여겨지는 우연도 있다. 그 과정을 통해 인생의 희비가 교차한다. 누구나 선택의 결과를 예측하며,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유리한 결정을 하려고 하지만 인생지사 새옹지마다. '악연'은 7명의 주요 캐릭터를 통해 나의 선택이 오롯이 나의 삶만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는 나비효과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종국에는 인과응보, 자업자득이라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이 시리즈를 다 보고 나면 한글 제목인 '악연'과 영어 제목인 '카르마'(Karma: 업보)는 인과 관계처럼 여겨진다. 도덕적 결함을 갖춘 악인들이 주인공인 '악연'은 피카레스크 장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총 6부작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인물들의 개별 사연이 나열되지만, 중반부인 3회를 넘어서면 이들이 먹이 사슬처럼 엉켜있는 사이임을 알게 된다. 그야말로 '악연'이다. 1화의 주인공은 사채빚을 진 남자, 2화의 주인공은 시체를 유기한 남자, 3화의 주인공은 죄지은 자들, 4화의 주인공은 상처받은 여자다. 각 에피소드의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 '악연'에는 이름이 있는 캐릭터와 이름이 없는 캐릭터들이 혼재돼 있다. 캐릭터의 이름이 중요하지 않아 명명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의도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후반부 이들의 이름이 발화될 때 그 자체로 반전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악연'은 사건을 먼저 제시하고, 사건의 배경이 되는 원인을 나중에 공개하는 이야기 구조를 띤다. 이는 반전의 묘를 선사하고,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호기심을 증폭시킨다. '사채남'(이희준)은 사채로 인해 인생의 끝자락에 내몰리자, 아버지를 살해해 사망 보험금을 타 내려는 계획을 세우고 조선족 길룡(김성균)에게 뺑소니 사고를 의뢰한다. 사채남은 곧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지만, 길룡의 시행착오로 인해 당초의 계획이 틀어져 버렸음을 알게 된다. '안경남'(이광수)은 성공한 한의사로 아름다운 여자와 데이트하기 위해 돈을 번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는 연인인 유정(공승연)과 달콤한 하룻밤을 보내고 귀가하던 중 교통사고로 사람을 죽이고 만다. 예상치 못한 사고에 당황한 안경남은 시체를 유기하기로 하고 실행하던 중 '목격남'(박해수)를 발견하게 된다. 목격남을 돈으로 매수한 안경남은 그와 함께 시체를 야산에 묻고 현장을 벗어난다. 완전 범죄로 위기를 모면했다고 안심하던 찰나, 목격남은 안경남에게 비밀의 대가로 거듭 돈을 요구한다. 욕망과 이기로 가득한 '나쁜 놈들'만 모은 탓에 마음이 가는 캐릭터는 거의 없다. 시청자들은 거리두기를 하며 인물들의 만행을 목도하게 되고, 혀를 끌끌 찰 뿐이다.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짓밟는 비도덕적 행동을 하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이익을 가책 없이 누리며, 후회나 반성은 철저히 외면하는 인물들이다. 시리즈를 연출한 이일형 감독의 시선 역시 악인 캐릭터들을 이야기의 재료이자 토대로 충실히 사용할 뿐, 등장도 퇴장도 가차없다. 징글징글한 악인들이 활약하며 만들어내는 충격과 반전의 이야기는 다중 플롯의 구조와 만나 시너지를 낸다. 극본과 연출의 영리함도 돋보이지만 탄탄한 연기력을 자랑하는 배우들의 활약이 이야기의 재미를 배가시킨다. 사채남을 연기한 이희준은 부채의 악연에서 벗어나기 위해 패륜 범죄도 불사하는 금수의 모습을 동물적 연기 감각으로 소화해 냈다. 또한 여러 작품에서 지적인 이미지로 익숙했던 박해수는 '목격남' 역할을 맡아 양심도 염치도 없는 밑바닥 인생 캐릭터를 화려한 테크닉으로 연기해 냈다. 주요 캐릭터 중 가장 이질적인 인물은 외과의사인 주연(신민아)이다. 유일한 피해자 캐릭터인 주연은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해 드라마의 주제 의식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악연'은 주연을 통해 '사적 복수'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주연이 겪는 윤리적 딜레마를 통해 "괴물과 싸우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니체의 명언을 소환하게 한다. 그러나 평면적이고 수동적인 캐릭터로 설계된 탓에 시점이 주연으로 이동하는 파트에서 이야기의 활력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장르적 성격으로 봤을 때 이 작품에는 '눈눈이이'(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 결말이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르마'라는 또 다른 제목을 가진 '악연'은 피해를 입은 인간이 직접 가해자를 단죄하지 않아도, 결국 자업자득으로 귀결되는 불교의 순리를 보여준다. 예상과는 다른 방식이지만 이 또한 통쾌한 카타르시스다.
'주말에 뭐 볼까?'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스프가 알려드립니다. 스포츠를 다루는 영화는 소재 자체가 영화의 주제로 인식되기 쉽다. 경기나 게임이 영화의 구조가 되다 보니 승부의 과정과 결과가 곧 영화의 장르나 색깔로 규정되는 것이다. 잘 만든 영화는 소재에 함몰되지 않고, 소재와 이야기를 통해 주제를 자연스럽게 발현한다. '록키'는 단순한 권투 영화가 아니고, '머니볼'은 뻔한 야구 영화가 아니다. 영화 안에 삶이 있고, 사람이 있다. 최근 극장가에 바둑과 골프를 소재로 한 한국 영화가 잇따라 개봉해 관객의 흥미를 자극하고 있다. 두 영화 모두 다소 장벽이 높은 종목을 소재로 한만큼 해당 분야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이라면 흥미가 생기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두 영화 모두 바둑이나 골프는 소재일 뿐 막상 영화를 보면 바둑돌, 골프공보다 이야기와 인물이 크게 보인다. 바둑을 다루는 영화인데 바둑 영화가 아니고, 골프를 다루는데 골프 영화가 아니라는 두 영화에는 각각 어떤 영화적 재미가 있을까. '승부', 한국판 '퀸즈갬빗'…이병헌-유아인은 신의 한 수 우리나라 바둑계를 대표하는 두 레전드 조훈현과 이창호는 통산 314번 맞붙었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은 사제지간이다. 전적은 195승 119패의 성적을 거둔 제자 이창호의 우위다. 서로가 이기고 지기를 반복한 이 숱한 승부의 과정에는 어떤 비화가 숨겨져 있을까. '승부'는 스승과 제자로 만나 라이벌이 된 두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영화는 오프닝을 통해 한국 바둑 기사 최초로 세계 바둑을 제패했던 조훈현의 신화를 조명한 뒤, 내제자를 받는 에피소드로 이어진다.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오른 조훈현은 불과 6개월 만에 15살의 제자 이창호에게 뼈아픈 패배를 당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한 집에서 먹고 자며 사제 관계를 이어간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에 걸맞은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라 이야기만으로도 흡입력이 상당하다. 게다가 실존인물을 연기하는 배우가 최고의 연기력을 자랑하는 배우 이병헌과 유아인이다. 이병헌은 전신(戰神)이라 불렸던 조훈현 국수를, 유아인은 산신(算神)이라 불렸던 이창호를 연기했다. 외모만 놓고 보자면 두 배우 모두 실존 인물과 크게 닮지 않았다. 이병헌과 유아인은 실존 인물의 분위기와 자세 등을 분석하고, 헤어스타일과 의상을 더해 제법 그럴듯한 룩을 만들어냈다. 외형의 부족한 싱크로율은 연기력으로 보완했다. 이병헌과 유아인 모두 모사와 연기의 선을 절묘하게 탄다. 덕분에 영화를 보고 나면 두 배우가 실존인물과 꼭 닮아 보인다는 인상을 남긴다. 이병헌은 제자에게 패배한 후 느낀 분노와 절망, 좌절의 감정을 섬세한 연기로 표현해 내며 승부사의 흔들리는 마음을 인간적으로 묘사했다. 유아인은 '쪼'가 매우 강한 배우고, 항상 에너지가 넘치는 연기를 보여왔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는 절제의 미학을 발휘하며, 덜어내는 연기의 진수를 보여줬다. 조훈현 중심일 수밖에 없는 서사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유아인은 이병헌에게 뒤지지 않은 존재감을 발휘하며 대체불가한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는 조훈현과 이창호를 끊임없이 대비해 두 사람이 벌이는 승부에 몰입하도록 유도한다. 싸우는 바둑을 구사했던 '제비' 조훈현, 지키는 바둑을 구사했던 '돌부처' 이창호의 승부사로서의 면모를 바둑의 기품과 철학을 더해 재현하며 두 국수에 대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바둑돌이 움직이는 CG를 통해 양측의 대비되는 승부수를 조명하고, 바둑돌에 금이 가는 CG를 통해 파훼의 순간을 시각화하는 등 컴퓨터 그래픽 활용도 인상적이다. '승부'는 패배를 딛고 부활하는 조훈현의 재기의 서사인 동시에 '나만의 바둑'을 정립해 가는 이창호의 성장담이다. "또 너냐? 도리 없지. 이것이 승부니까." 두 사람의 국수전 관전기를 쓴 기자는 정상에서 다시 마주한 제자를 바라보는 조훈현의 마음을 이렇게 유추해 적었다. 영화에도 등장하는 이 말은 인생이란 바둑판 앞에 선 우리의 마음과도 닿아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상한데 재밌는 영화"…감독 하정우의 신작 '로비' 스타트업 대표인 창욱(하정우)은 4조 원이 걸린 스마트 주차장 국책사업 따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폭넓은 인맥을 자랑하는 라이벌 회사 대표 광우(박병은)와 입찰 경쟁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국책 사업의 실권자인 조 장관(강말금)과 그녀의 남편 최 실장(김의성)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접대 골프에 발을 디디게 된다. '로비' 역시 단순한 골프 영화는 아니다. 라이벌인 창욱과 광우의 악연을 소개한 뒤 본무대인 골프장으로 진입하는 영화는 라운딩 동안 벌어지는 일을 소동극처럼 다루며 블랙 코미디의 개성을 드러낸다. 영화의 원제는 '오비'(OB)였다. 'OB'는 'Out of Bound'의 약자로 골프에서 공이 정해진 코스 영역을 빠져나가는 것을 말한다. 골프 선수들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가 오비다. 오비가 났다는 것은 골프가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출과 주연을 겸한 하정우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인생은 다 우연"이라는 말로 영화를 압축하며 인생의 예측불가성과 불가항력성을 골프에 대입하고, 골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을 통해 웃음을 선사한다. 창욱팀 대 광우팀의 팀플레이가 된 라운딩은 우리네 사회생활의 축소판 같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실세에게 아부하고, 권력자는 그것을 이용한다. 누구나 그럴싸한 목표와 계획을 세우지만, 뜻하지 않은 변수로 미끄러지고 낙마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영화는 좌충우돌 에피소드들을 캐릭터들의 앙상블로 그려내며 웃음과 동시에 풍자에도 도달한다. 연출 데뷔작 '롤러코스터'(2013)에서 병맛 코미디로 마니아들의 호평을 받았던 하정우는 다시 한번 자신의 장기인 블랙 코미디 장르로 돌아왔다. '로비'는 하정우, 박병은, 김의성, 강말금, 강해림 등 10인의 개성 강한 배우들의 캐릭터 연기가 돋보인다. 이들은 마치 하정우의 아바타처럼 그가 의도한 대사의 말맛과 리듬감을 살려 소소한 웃음을 선사한다. '롤러코스터'가 B급 감성으로 무장한 야생의 코미디 같은 느낌이 있었다면 '로비'는 한층 정교하고 세련된 블랙 코미디다. "이상한데 재밌는 영화"라는 김의성의 말은 '로비'의 정체성을 가장 단순 명확하게 요약한 표현이다. 디자인 : 채지우
'주말에 뭐 볼까?'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스프가 알려드립니다. 교황이 선종한다. 전 세계 추기경들이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 모여든다. 콘클라베(Conclave)에 돌입한다. 콘클라베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교황을 선출하는 선거 제도로, 교황 선종 시 선거권을 가진 추기경단이 소집되어 교황을 선출하는 비밀 회의다. 공정한 선거를 위해 추기경들은 외부와 단절된 채 투표에 임한다. 선거인단 2/3의 표를 얻는 추기경이 나올 때까지 매일 투표를 진행하게 된다. 유력한 후보로 거론됐던 추기경들의 비밀이 드러나며 선거는 장기전이 된다. 선거를 총괄하는 동시에 또 한 명의 교황 후보이기도 한 로렌스(랄프 파인즈)는 리더의 자격을 검증하는 과정을 통해 딜레마에 빠진다. 영화 '콘클라베'는 정직한 제목을 보고 지루하고 딱딱한 종교 영화를 상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종교 영화의 외피를 쓴 정치 스릴러에 가깝다. 선거판이 휘청이는 몇 차례의 전복은 예측 불가의 긴장감을 선사하고, 마지막 반전은 충격과 탄식을 선사한다. '누가 교황이 될 것인가'라는 호기심에서 출발한 영화는 '리더의 자격'에 대한 담론을 제시하고 종교의 변화와 포용에 관한 넓고 깊은 질문까지 던진다. 선거 과정을 영화의 플롯에 녹였음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를 놓치지 않는다. 콘클라베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 지도자를 뽑는 선거다. 권력을 향한 경쟁에는 어김없이 정치가 작동한다. 종교의 영역에도 예외는 없다. 이는 현대 사회의 선거에 대입할 수 있으며, 영화는 세속 정치에 대한 은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각국을 대표하는 100여 명의 추기경들은 교황 후보인 동시에 유권자다. 출신 국가와 이념, 성향에 따라 보이지 않는 파벌이 형성되고, 선거의 흐름에 따라 균열이 생기기도 한다. 투표가 거듭될 때마다 시소의 무게 균형이 왔다 갔다 한다. "선거란 누굴 뽑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를 뽑지 않기 위해 투표하는 것이다." 프랭클린 P. 애덤스의 말처럼 선거는 최선의 선택이 아니라 차선, 최악을 피하고자 차악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신성해야 할 종교의 세계, 청렴이 몸에 밴 인물이라 여겼던 추기경들이 권력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고, 쟁투를 벌인다. 편향된 성향과 그릇된 인식을 가진 추기경이 있는가 하면 혐오와 갈등을 조장하는 추기경도 있다. 그러나 다수의 선택이 선도, 진리도 아니라는 건 숱한 역사의 기록을 통해 학습해 오지 않았던가. 영화는 관객의 멱살을 잡고 그 아슬아슬하고 위태한 과정을 함께 참관하게끔 한다. 랄프 파인즈를 필두로 스탠리 투치, 존 리스고, 이사벨라 로셀리니 등 관록의 배우들이 연기 배틀 같은 호연을 펼친다. 특히 로렌스를 연기한 랄프 파인즈는 클로즈업의 위력을 제대로 보여준다. 그는 이 바티칸 정치 스릴러에서 선거의 총책임자이자, 후보의 비리를 캐는 탐정이자, 교황이 되기를 잠시나마 꿈꾼 세속적이고 연약한 인간으로서 침묵 속 고뇌를 심연의 연기로 표현해냈다. 또한 한정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연극적 구성임에도 영화가 지루하지 않은 것은 동명의 원작 소설을 밀도 높은 정치 암투극으로 바꾼 각색과 연출의 힘이 세다. 교차 편집과 컷 분할, 다양한 앵글과 쇼트를 활용하는 등 리듬감이 돋보이는 편집(닉 에머슨)의 공도 상당하다. 강렬한 음악(볼커 베텔만)은 정적인 신에도 놀라운 마법을 부여한다. 영화를 연출한 에드워드 버거 감독은 '서부전선 이상 없다'(2022)에서부터 음악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며 긴장의 밀도를 높이고 극의 분위기를 이끄는 전략을 펼쳐왔다. 이는 '콘클라베'에서도 또 한 번 놀라운 효과를 낸다. "확신은 통합과 포용의 적"이라는 메시지는 설교조로 들릴 수도 있지만 '리더의 자격'을 끊임없이 묻고 검증하는 이 영화는 잘못된 선택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현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또한 영화가 내놓은 반전은 포용과 화합의 정의와 범위를 되묻는 질문이라는 점에서 충격을 넘어선 의미다. 너무 나아간 반전이 아니냐라고 인상을 찡그릴 수도 있지만 신의 뜻을 인간이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이 오히려 신에 대한 도전이나 반기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디자인 : 채지우
'주말에 뭐 볼까?'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스프가 알려드립니다. "저희끼리는 '발냄새 SF'라고 하곤 했어요." 가장 미국적인 장르인 SF와 한국적 정서로 세계적 거장이 된 봉준호의 결합, 평범한 작품이 나올 리 만무하다. 영화 개봉을 앞둔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신작 '미키 17'에 대해 '발냄새나는 SF'라 표현했다. '미키 17'은 위험한 일에 투입되는 소모품(익스펜더블)으로, 죽으면 다시 프린트되는 '미키'가 17번째 죽음의 위기를 겪던 중, 그가 죽은 줄 알고 '미키 18'이 프린트되면서 벌어지는 예측불허의 이야기를 그리는 영화. 한마디로 '죽어야 사는 남자'의 진짜 위기를 그린 SF 소동극이다. 에드워드 애슈턴이 2022년 발간한 SF 소설' 미키 7'를 영화화한 이 작품은 '휴먼 프린팅'이라는 소재를 통해 인간의 실존을 고찰하고, 과학 발전이 야기하는 윤리적 문제를 짚으며, 인간과 생태계의 갈등과 공존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한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화두인 계급 문제를 다루는 동시에 자본주의의 탐욕이 인류에 초래하는 비극을 신랄한 풍자와 짓궂은 유머로 풀어냈다. 베일 벗은 '미키 17'은 '설국옥자'?... '죽어야 사는 남자'에 담긴 메시지 미키(로버트 패틴슨)는 친구인 티모(스티븐 연)와 함께 마카롱 가게를 하다가 망해 사채업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 부닥친 그들은 지구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미키는 티모의 제안에 따라 우주 행성 니플하임 개척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되고 그중 경쟁자가 가장 적은 익스펜더블(Expendable: 소모품)에 지원한다. 익스펜더블은 임무 수행 중 사망할 경우 20시간 안에 과거의 기억과 감정을 그대로 가진 채 똑같이 '프린트'되는 숙명을 띤 직분이다. 원작 소설의 제목은 '미키 7'이다. 숫자가 의미하는 바가 미키의 프린팅 횟수라는 걸 감안하면 영화의 주인공은 원작 소설보다 10차례 더 죽는 셈이다. 영화에 더 폭력적인 상황을 부여해 미키의 비극성을 강조하고 과학 발전에서 경시되는 윤리 문제를 제기하려는 봉준호 감독의 의도가 엿보인다. 미키는 연구진에 의해 각종 실험을 당한다. 열여섯 차례의 죽음은 충격적이고 비극적이라기보다는 측은하고 짠하다. 봉준호 감독이 말한 '발냄새'는 미키의 '짠내' 나는 상황들을 말한 것이 아닐까 싶다. 미키는 무차별 사용되고 버려지는 소모품으로 우주 개척선에서 가장 천대받는 계급이라 할 수 있다. 노동자의 기본 권리인 보험이나 산업재해 등의 보호도 받지 못한다. 이런 미키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은 "죽는 건 어떤 느낌이야?"이라고 묻는다. 이 폭력적인 질문에 대해 미키는 "죽는 건 끔찍해. 여전히, 매번"이라고 답할 뿐이다. 미키는 탐사 임무 중 크레바스에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다.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순간, 니플하임의 생명체 크리퍼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한다. 뒤늦게 기지로 돌아온 미키는 또 다른 미키와 마주하게 된다. 연구진이 미키가 죽은 줄 알고 18번째 미키를 프린팅한 것. 니플하임에서는 익스펜더블은 허용하지만 멀티플은 금지한다. 소심한 17번 미키와 다소 과격한 18번 미키는 서로 살겠다고 싸우고 연인인 나샤의 중재를 통해 비밀리에 공존하기로 약속한다. 한편, 미키를 구해준 크리퍼는 보이는 게 다인 생물체가 아니다. '우주 식민지'는 지구인 관점에서는 개척이지만, 원주민인 크리퍼 관점에선 침략이다. 후반부엔 크리퍼들의 반격이 시작된다. 지금까지의 언급만으로도 기시감이 느껴질 것이다. '미키 17'은 '설국열차'와 '옥자'의 짙은 향기가 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세계를 관통하는 주제의식과 일관된 취향을 또 한 번 엿볼 수 있다. '설국열차'와 '옥자' 그리고 '괴물'의 기시감까지 느껴지는 '미키 17'은 봉준호의 자가 복제인가 종합판인가. 핵심은 기시감이 아닌 전작의 특징과 매력 요소들이 '미키 17'의 서사 안에서 잘 융합됐는가다. 이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미키 17'에 대한 평가가 나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풍자? 우리에겐 '그 사람'이 생각날 수도 영화에서 2명의 미키만큼이나 흥미로운 캐릭터는 마샬 부부다. 마샬은 우주 개척선의 대장이다. 그는 전직 국회의원으로 익스펜더블 복제 기술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인간에게는 하나의 영혼만 있고, 익스펜더블과 같은 복제인간은 영혼이 없는 괴물과도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니플하임에서 미키17과 18이 공존할 수 없는 이유다. 영화에서는 몇 차례의 집회 장면과 연설 장면이 나온다. 마샬의 캐릭터를 단번에 보여주는 장면으로 그의 야망과 광기가 드러난다. 그는 자기만의 세계와 철학에 갇혀 있고,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폭주하는 독재자다. 외신들은 우주에 식민지를 개척하려는 야욕과 이익 우선주의,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언어 사용, 과장된 제스추어 등에서 트럼프의 향기가 난다고 반응했다. 마샬 못지않게 탐욕과 집착을 드러내는 아내 일파도 낯설지가 않다. 일파는 원작에는 없는 캐릭터다. 마샬은 아내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쓰며 중요한 결정은 아내에게 의지하기도 한다. 한국 관객에게 이들 부부의 모습은 낯설지가 않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전작 '기생충'에서 친절하고 자비로운 부자와 악랄하고 폭력적인 빈자 캐릭터를 제시하며 사회적 고정관념을 깼다면, '미키 17'에서는 역사에서 봐온 여러 독재자 캐릭터를 섞어 다소 과장되게 묘사했다. 봉준호 감독은 '마샬'에 대해 "역사 속 나쁜 정치인들의 모습을 재밌게 섞어보고자 했다. 솔직히 참고한 한국과 미국 정치인도 있었다"면서 "과거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영화 본 분들은 요즘 실제 어떤 정치인을 상상하기도 하는 것 같다. 결국 역사가 반복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봉준호 최고의 영어 영화?... 제2의 '기생충'은 아니다 '미키 17'은 봉준호 감독의 여덟 번째 장편 영화이자 '기생충' 이후 6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이다. '기생충'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으며 유럽과 미국의 최고 영화상을 휩쓴 봉준호 감독은 차기작에서 할리우드의 손을 잡았다. '미키 17'은 봉준호 감독이 '설국열차', '옥자' 이후 선보이는 세 번째 영어 영화이자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인 워너브러더스의 자본 100%(제작비 약 2천158억 원)가 투입된 영화다. 베를린국제영화제를 통해 영화가 공개되자마자 외신들은 '기생충'과 완성도를 비교했다. "봉준호 최고의 영어 영화"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기생충'만큼은 아니다"라는 실망감 어린 반응도 나왔다. '기생충'이 봉준호 영화 미학과 세계관을 집약한 최고작이었기에 이 같은 잣대가 이상하다고는 볼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제2의 '기생충'을 생각한다면 실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세 영어 영화 중 두 편이 SF 장르였다. '설국열차'와 '미키 17' 모두 원작이 있는 영화였다. 계급 문제와 자본주의의 폐해 같은 그의 오랜 관심사와 맞닿아 있는 이야기였다. 여기에 자신만의 개성과 취향을 가미해 '봉준호스러운 영화'로 재탄생 시켜왔다. 그가 만든 한국 영화의 매력이 한국적 사회상을 반영한 리얼리즘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폭넓은 은유에 있었다면 미국 배경의 SF에서는 우화적 성격이 더욱 강하며, 은유보다는 직유의 화법을 선택했다. '미키 17'에도 봉준호의 개성과 취향은 살아있지만 '선', '냄새' 같은 무형의 개념을 통해 계급과 계층을 나누고 언어와 관계없이 세계 관객의 공감대를 형성했던 전작을 생각하면 단순하고 직접적인 풍자다. 재미와 볼거리 면에서도 다소 애매하다. 블록버스터가 규모의 영화, 볼거리의 영화라고 봤을 때 '미키 17'의 오락성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봉준호 감독의 독특한 연출 스타일과 특유의 짓궃은 유머에서는 B급 영화의 감성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예술 영화로 분류하기엔 그 개성과 깊이가 부족하다. 한마디로 오락 영화와 예술 영화 사이의 애매한 위치에 놓여있다. 봉준호라는 이름을 지우고 본다면,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좀 더 야박할 수도 있다. 이는 이야기의 배경이 해외로 설정되고, 언어가 영어로 바뀌었을 때 발생하는 한계일 수도 있다. 이는 많은 비영어권 감독이 할리우드 영화를 만들 때 겪는 어려움이기도 하다. 디자인: 채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