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스포츠취재부 기자. 2000년부터 스포츠 기자로 일했고, 기자 생활 대부분을 야구 담당기자로 살았다. 데이터로 야구를 조명하는 '세이버메트릭스'에 관심이 많고, 오랫동안 취재에 활용해 왔다. 저서로 '프로야구 스카우팅 리포트' 시리즈, 역서로 '인사이드 게임(하빌리스)'이 있다."
필자는 <야구수다>와 다른 매체들을 통해, 이정후가 대단히 독특한 유형의 선수라고 여러 차례 소개했다. 이정후처럼 콘택트 능력과 장타력을 둘 다 최고 수준으로 장착한다는 건 마치 '세모난 네모', '짠맛 딸기' 같은 '형용모순'이라는 거다. 스포츠의 사례로 비유하자면 '세계적인 높이뛰기 선수이면서 동시에 최고의 역도선수', 혹은 '최고의 스프린터인데 세계적인 마라토너' 같은 '불가사의'라는 거다. 이정후가 떠난 뒤, 한국 야구에 또 다른 '형용모순'이 등장했다. 지금의 김도영처럼 '현역 최고 수준의 스피드와 홈런 파워를 동시에 갖춘 선수'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지난해 11월 아시아프로야구챔피언십에서 손가락 인대가 파열된 김도영은 올 시즌 초반을 뛰기 어렵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래서 스프링캠프 내내 실전 타격을 하지 못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회복해 개막전에 출전했다. 아무리 야구 천재라도 완전치 않은 실전 감각으로 좋은 성적을 내기는 어려웠다. 3월 7경기에서 타율 0.154, 28타석에서 삼진만 10개를 당하는 부진을 보였다. 도루와 홈런은 한 개도 없었다. 그리고 4월이 되자, 김도영은 우리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활약을 시작했다. 김도영은 4월 2일에 시즌 첫 도루, 4월 5일에 시즌 첫 홈런을 기록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활약을 이어가 지난 4월 25일, KBO리그 사상 최초로 '월간 10홈런-10도루'의 대기록을 달성했다. 그리고 4월 25일까지, 단 24경기 사이에 10홈런과 14도루를 기록했다. '24경기 동안 10홈런-14도루'는 KBO리그에는 당연히 전례가 없고, 메이저리그에서도 1987년, 당대 최고의 호타준족 스타 에릭 데이비스(신시내티)가 딱 한 번 보여준 '미친 페이스'다. 그렇게 김도영은 홈런과 도루 모두, '4월 1위'가 됐다. '월간 홈런-도루 동반 1위'를 차지한 경우가 김도영이 처음인 건 아니다. 하지만 '김도영 스타일의 동반 1위'는 처음이다. KBO 최초 월간 10홈런-10도루 달성한 김도영에게 축하 꽃다발을 건네는 이범호 KIA 감독. 사진 : 연합뉴스 김도영이 계보를 잇는 '호타준족형 타자'의 대표 주자인 이종범이 3차례, 박재홍이 1차례 '월간 홈런-도루 동반 1위'를 차지한 적이 있다. 특히 이종범이 국내 타자의 역대 최고 시즌을 만든 1994년 5월에 기록한 '7홈런-22도루'는 지금 봐도 믿기 힘든 대활약이다. 하지만 위대한 두 선배도 김도영 같은 장타력은 갖고 있지 않았다. 두 선수 모두 위 표에 나온 시즌에 '홈런왕 경쟁'과는 거리가 있었다. 김도영은 다르다. 김도영의 올 시즌 타구 평균 속도는 시속 140.7km. 지난해(137.9km)보다 3km 가까이 빨라져 리그 타구 속도 '톱 10'에 진입했다. 즉, 리그에서 가장 강한 타구를 날리는 타자들 중 한 명이 됐다. 또한 타구의 평균 발사각도 지난해보다 2도 정도 높아져 20도를 넘어섰다. 잘 맞은 타구는 발사각이 높아질수록 장타가 될 확률이 올라간다. 즉, 김도영의 장타, 홈런 생산력은 지난해보다 꽤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사진 : 연합뉴스 이 칼럼에서 몇 차례 설명한 것처럼, 타구의 속도와 발사각 등 타구 데이터는 '가장 적은 표본 크기'로도 의미를 갖기 시작하는 기록이다. 세이버메트릭스계의 연구에 따르면 메이저리그에서는 '타구 70개'면 속도와 발사각이 '안정화'된다. 즉, 의미를 갖는다. KBO리그에서 타구 관련 정보가 안정화되기에 필요한 표본 크기는 진지하게 연구된 적이 없지만, 몇몇 지표를 보면 역시 꽤 적은 표본 크기로도 의미를 가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예를 들어, 타자들이 지난해 4월까지 기록한 평균 타구 속도와, 시즌 최종 평균 타구 속도와의 상관계수는 0.83에 달했다. 통계학에서는 이 정도면 '엄청나게 관련성이 높다'고 해석한다. 즉, 김도영이 4월에 보여준 '타구질 향상'은 우연이나 행운이 아닌, '실력 향상'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또한 부상이나 체력 급저하 같은 돌발변수가 없다면, 시즌 끝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더 인상적인 건, 김도영의 장타력 향상이 콘택트 능력을 희생해 얻은 결과가 아닌 것 같다는 점이다. 타자들의 장타력이 향상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다. 1. 체계적인 웨이트 트레이닝과 20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신체 성장에 따른 파워 증가 2. 콘택트보다 장타를 추구하는 스윙 변화 김도영은 전형적인 1번 사례로 보인다. 만약 김도영이 콘택트를 포기하고 '한 방을 노리는 큰 스윙'만 하고 있다면, 삼진이 늘어야 한다. 하지만 김도영이 정상 컨디션을 회복한 4월에, 115타석에 들어서 삼진을 17번만 당했다. 삼진 비율이 전체 타석의 14.7%. 지난 시즌 삼진 비율 16.1%보다 오히려 낮아졌다. 즉, 김도영은 콘택트와 장타력을 동시에 향상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장타력만 높아진 게 아니라, 타자로서 전체적 기량이 올라선 것이다. 이 모든 걸 종합하면? 김도영은 올 시즌 '홈런왕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김도영은 우리 눈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도루 능력도 역대 최고 수준이다. 김도영은 올 시즌 15번 도루를 시도해 14차례 성공했다. 그래서 통산 도루 성공률이 86.7%로 올라갔다. 프로야구 43년 역사에서 김도영보다 도루 성공률이 높은 선수는? 김지찬 한 명뿐이다. 김도영은 현재 도루 1위 박해민(20개)에 6개 뒤진 2위다. 하지만 위에 설명했듯, 4월만 놓고 보면 박해민(13개)보다 1개를 더 한 1위다. 그래서 시즌 끝까지 도루왕 경쟁을 펼칠 것이 거의 확실하다. 홈런왕과 도루왕에 둘 다 도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건 경이적인 일이다. 한국 프로야구 43년 역사에서 홈런왕과 도루왕을 모두 차지한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메이저리그와 일본 프로야구 역사에서도 단 한 번씩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맨 위에 쓴 것처럼, '홈런왕이면서 도루왕'은 '짠맛 딸기' 같은 형용모순이기 때문이다. 김도영이 몇 개의 타이틀을 차지할지를 예상하는 건 섣부른 일이다. 확실한 건, 김도영의 2024년이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을 역사적인 시즌이 될 것이며, '한 시대의 시작'이 될 거라는 점이다.
필자는 몇 년 전부터 '야구수다'를 비롯한 많은 매체를 통해 이정후가 대단히 보기 드문, 아마도 우리 인생에서 다시 보기 어려울 유형의 선수라고 소개했다. 당시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1. 이정후는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콘택트 히터로 보인다. 그리고 이정후의 콘택트 능력은 아마도 메이저리그에서도 최상위급일 가능성이 높다. 2. 그렇다고 이정후가 오직 콘택트에만 집중하는 건 아니다. 이정후는 빅리그에서도 준수한 장타력을 선보일 가능성이 높다. 오늘은 위의 첫 번째 가설을 다루어본다. 이정후의 콘택트 능력이 '메이저리그에서도 최상위급'이라고 쓰면서, 필자는 '빅리그 상위 5%' 정도를 추정했던 것 같다. 즉, 삼진 비율과 헛스윙 비율이 '가장 낮은 5%' 정도일 거라고 짐작했다. 리그의 수준 차이를 비롯해 수많은 난제들을 풀고 적응해야 하는 루키 이정후에게, 더 나은 성적을 기대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필자의 짐작은 틀렸다. 이정후는 첫 12경기를 통해,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삼진을 안 당하고 콘택트를 잘하는 '상위 1%' 혹은 '현역 최고 수준'의 능력을 선보이고 있다. 1. 이정후는 '존 안의 공'에 헛스윙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Z-Contact %'라는 기록이 있다. 스트라이크존 안으로 들어온 투구에 스윙했을 때 맞춰내는 비율을 말한다. 더 쉽게 풀자면 '타자가 칠 만한 공에 스윙했을 때 헛스윙을 하지 않을 비율'을 말한다. 이정후는 오늘(12일)까지 메이저리그 12경기 54타석에서 199개의 공을 지켜봤다. MLB 공식 측정 데이터 '스탯캐스트'에 따르면 이 중 스트라이크존 안에 들어온 공은 111개. 이정후는 이 중 52번 방망이를 내 타격을 시도했다. 이 중 헛스윙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이정후의 'Z-Contact %'는 100%다. 올 시즌 메이저리그에서 규정 타석을 채운 타자 197명 가운데 'Z Contact' 100%인 타자는? 이정후 한 명뿐이다. 이정후가 '존 안의 공'을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때려내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당연히 '소문난 콘택트 능력'이다. 그다음 이유는 '깐깐한 눈'인 듯하다. 이정후는 현재 스트라이크존에 들어온 공에 방망이를 내는 비율, 즉 'Z-Swing %'가 빅리그에서 가장 낮은 축에 속한다. 이정후는 지난 9일 샌디에이고전이 끝난 뒤 기자들과 만나, '지금은 초구를 가능하면 지켜보려 한다'고 말했다. 당연한 일이다. 이정후는 지금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세계 최고의 투수들과 날마다 승부를 벌이고 있다. 타자는 처음 보는 투수의 투구 하나를 관찰하면서 많은 정보를 얻는다. 투구 동작의 리듬, 투수가 공을 던지는 위치, 궤적의 특징 등등.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것과, '공 하나로 얻은 정보'를 가지고 승부하는 것은 천양지차다. 그러니까 이정후는 초구를 지켜보면서 얻은 정보를 이후에 공을 때려내는 데 쓰고 있는 걸로 보인다. 이정후도 사람인지라, 가끔 존 바깥의 '치기 나쁜 공'에 스윙을 한다. 존 바깥으로 나가는 공의 21.8%에 방망이를 냈다. 그런데 이런 공도 어떻게든 맞춰냈다. 존 바깥의 공에 스윙했을 때 맞춰내는 비율, 즉 'O-Contact %'가 79%로 규정 타석을 채운 타자 197명 중 16번째로 낮았다. 존 안에 들어온 공은 '백발백중' 쳐 내고, 존 바깥의 공에도 일단 스윙하면 어떻게든 쳐내는 빈도가 높다 보니, 이정후는 현재 '헛스윙 비율'이 빅리그에서 가장 낮은 타자다. 투수가 이런 타자를 삼진으로 잡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현재 이정후는 빅리그 전체에서 가장 삼진 잡기 어려운 타자들 중 한 명이다. 2. 그렇다고 이정후가 '어떻게든 맞춰내기'만 하는 '똑딱이 타자'인 것도 아니다. 이미 여러 매체에서 보도한 것처럼, 이정후는 꽤 강한 타구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정후의 올 시즌 최고 타구 속도는 시속 108.9마일(175.3km). 규정 타석을 채운 타자 197명 중 97위, 즉 '중간 이상'이다. 최고 타구 속도는 야구 기록들 중 표본 수가 적어도 의미가 생기는 대표적인 기록이다. 세이버메트릭스계의 연구에 따르면, 타자의 최고 타구 속도는 20개의 타구만으로도 '안정화'된다. 즉 타자의 첫 타구 20개를 보고 나면, 이 타자가 어느 정도의 파워를 갖고 있는지를 최고 타구 속도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미 54개의 타구를 때리며 '중간 이상'의 최고 타구 속도를 기록한 이정후는, '평균 이상'의 파워를 갖고 있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한 것이다. 이건 대단히 신기한 일이다. 타자가 최고 수준의 콘택트 능력을 보이려면, 강한 타구를 만드는 건 포기하는 게 일반적인 경우이기 때문이다. 현역 최고의 콘택트 히터 루이스 아라에스(마이애미)를 예로 들어보자. 지난해 타율 0.354로 빅리그 전체 1위를 기록한 아라에스는 콘택트 비율도 93.4%로 1위였다. 하지만 최고 타구 속도는 104마일에 불과했다. 규정 타석을 채운 타자들 중 꼴찌였다. 아라에스처럼, '최고의 콘택트 히터'들은 최고 타구 속도 순위에서는 최하위권에 위치하는 게 일반적이다. 즉, 이정후는 첫 12경기를 통해 우리의 기대를 넘어선 빅리그 최고 수준의 콘택트 능력과, 준수한 장타력의 잠재력을 함께 보여줬다. 이런 경우는 너무나 드물다. 앞선 글에서 쓴 대로, '네모난 동그라미', '짠맛 딸기' 같은 형용모순이다. MLB.com 등 많은 매체들이 이정후에게 강렬한 첫인상을 받았으며,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칠 거라는 장밋빛 전망을 줄줄이 내놓는 이유다. 자료 출처 : baseballsavant.com, fangraphs.com 디자인 : 권민재
이번 메이저리그 서울시리즈는 모든 야구팬들에게 특별한 선물이다. 필자처럼 야구 통계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노다지’를 만났다. 메이저리그의 공식 통계 사이트 ‘baseballsavant.com’에는 메이저리그 팀들과 경기를 치른 한국 선수들의 측정 데이터가 올라왔다. 미국의 모든 구단들과 야구 전문 매체들이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분석할 때 쓰는 측정 장비로 한국 선수들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메이저리거들과 한국 선수들을 같은 잣대로 비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고척돔에서 만난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기술 담당자는 이번에 올라온 데이터가 ‘트랙맨’으로 측정한 거라고 밝혔다. 최근 메이저리그에서 쓰고 있는 ‘호크아이’ 시스템도 고척돔에 설치는 했는데 비주얼 스카우트 및 코칭용으로만 쓴다고. 이 이야기를 들은 한 국내 구단 관계자는 ‘한국의 9개 구단이 엄두를 못 내는 장비를 고작 닷새 쓰려고 서울까지 가져온 메이저리그의 ‘머니 파워’에 혀를 내둘렀다) 이틀 동안 쏟아진 흥미로운 숫자들 중, 우리의 눈길을 잡아끄는 기록들에는 이런 게 있다. 2428 rpm : 김택연의 포심패스트볼 평균 회전수 아직 프로에 데뷔도 하지 않은 19살 신인 김택연은, 단 2타자만 상대해 세계 야구계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LA 다저스의 주축 타자인 테오스카 에르난데스와 제임스 아웃맨을 모두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고척돔에서 취재하고 있는 MLB.COM의 존 모로시 기자는 트위터에 “이제 김택연이라는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고 올렸다. 다저스의 데이브 로버츠 감독은 18일 경기에서 인상적인 한국 선수가 있었냐는 질문에 김택연을 지목했다. 18일 김택연은 공 11개 중 커브 한 개를 제외한 10개를 포심 패스트볼로만 던졌다. 패스트볼들의 평균 시속은 92.7마일(149.1km). KBO리그에서는 ‘광속구’지만, 메이저리그의 기준으로는 느린 편이다. 지난해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평균 포심 시속은 94.1마일. 구원투수들은 94.4마일이었다. 그런데 시즌 개막을 이틀 앞두고 타격감이 절정으로 올라온 다저스의 주축 타자들은, 김택연의 공을 건드리지도 못했다. 다섯 번 방망이를 냈는데 모조리 헛스윙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정답은 ‘속도가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투수가 던진 공에는 회전이 걸린다. 날아가는 공에 회전이 걸리면 휘어진다. 오버핸드 투수의 포심 패스트볼에 걸리는 회전, 즉 날아가는 방향의 반대쪽으로 돌아가는 '백스핀'은 공이 중력에 저항하게 만든다. 즉 중력 때문에 땅으로 떨어져야 하는 공이 ‘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회전수가 많을수록 이 ‘덜 떨어지는’ 효과도 커진다. 그래서 타자 눈에는 공이 ‘떠오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른바 ‘라이징 패스트볼’이 이렇게 만들어진다. 18일 김택연의 포심 패스트볼에는 최대 2483rpm, 평균 2428rpm의 회전이 걸렸다. 이날 경기에 등판한 두 팀 투수들 중 포심 평균 회전수보다 김택연보다 높았던 투수는? 아무도 없다. 위 표에 대표팀 투수들이 모두 상위권을 점령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공인구의 차이도 있을 것이다. 대표팀 투수들은 KBO리그 공인구를, 다저스 투수들은 메이저리그 공인구를 던졌다. 한국 공인구는 실밥이 조금 높고 표면이 덜 미끄러워서 투수들이 회전을 걸기에 조금 유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 변수를 감안해도 김택연의 회전수는 대단히 인상적이다. 김택연은 이 엄청난 회전으로 타자들의 눈에 공이 떠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를 만들었다. 이 착시 효과를 더 강하게 만드는 변수는, ‘속도와 회전수의 조합’이다. 트레버 바우어(전 야쿠르트)는 성추문 등 야구 외적 문제로 지금은 메이저리그 복귀가 힘든 처지가 됐다. 하지만 3년 전까지 바우어는 빅리그 최고 투수 중 한 명이었다. 바우어가 빅리그를 평정한 무기 중 하나가 바로 포심 패스트볼이었다. 평균 시속은 93~94마일 정도로 빅리그 평균 수준이었지만 회전이 어마어마했다. 시즌마다 리그 최고 수준의 회전량을 기록하며 떠오르는 효과를 만들어냈다. 보통 패스트볼의 회전수는 속도와 비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속도는 최정상급이 아닌데 회전은 최고 수준’인 바우어의 패스트볼은 대단히 특이했다. 타자 눈에는 ‘그 정도로 떠오를 수 없는 속도의 공이, 엄청나게 치솟아 오르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 것이다. 즉 ‘속도 대비 회전’이 매우 특이한 공이었던 것이다. 이후 연구들을 통해, ‘속도 대비 회전’은 패스트볼의 효과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밝혀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용어가 ‘바우어 유닛 Bauer Unit’이다. 공식은 간단하다. ‘회전수/속도’. 예를 들어 패스트볼 회전수가 2000rpm인데 속도가 90마일이라면 ‘바우어 유닛’은 22.2(2000/90)다. MLB의 ‘평균 바우어 유닛’은 24 정도다. 당연히 ‘바우어 유닛’은 높으면 높을수록 좋다. 타자 눈에 ‘더 떠오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공은 스트라이크 존 위쪽으로 던지면 헛스윙을 끌어낼 확률이 높다. 즉 ‘하이 패스트볼’로 활용하기 좋은 공이 된다. 위에 쓴 것처럼, 18일 경기에서 김택연의 포심 패스트볼은 평균 시속 92.7마일, 평균 회전수 2428rpm을 기록했다. ‘바우어 유닛’이 26.2(2428/92.7)다. 지난해 빅리그에서 포심을 200개 이상 던진 투수 360명 중에, ‘바우어 유닛’ 26.2를 넘긴 투수는? 25명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한국 프로야구에 데뷔도 안 한 19살 루키가, ‘바우어 유닛’을 기준으로 했을 때 지금 당장 빅리그에서도 최상위 8% 급의 ‘라이징 패스트볼’을 던진 것이다. 그런데 이번 대회에 한국 대표팀에는, ‘바우어 유닛’ 기준으로 김택연보다 위력적인 공을 던진 투수가 있다. 2522 rpm : 최준용의 포심패스트볼 평균 회전수 17일 샌디에이고 전 8회에 등판한 최준용(롯데)은 공 12개 중 11개를 포심 패스트볼로 던졌다. 평균 시속 91.9마일로 역시 빅리그 기준으로는 그리 빠르지 않다. 하지만 회전수를 기준 삼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포심 패스트볼의 평균 회전수가 분당 2522rpm. 메이저리그에도 이 정도의 회전이 걸린 포심은 매우 드물다. 지난해 메이저리그에서 포심 패스트볼을 200개 이상 던진 투수는 360명. 이 중 평균 회전수 2522rpm을 넘긴 투수는 21명에 불과하다. 즉 최준용의 포심 회전수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상위 6%’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위에서 설명한 ‘바우어 유닛’을 기준으로 보면, 최준용의 패스트볼은 더욱 돋보인다. 평균 시속 91.9마일, 평균 회전수 2522rpm인 최준용의 패스트볼은 ‘바우어 유닛’이 27.4(2522/91.9)다. 앞서 설명한 김택연의 26.2보다도 높다. 지난해 빅리그에서 포심을 200개 이상 던진 투수 360명 중에, 최준용의 ‘바우어 유닛’ 27.4를 넘긴 투수는? 단 5명에 불과하다. 즉 최준용의 패스트볼은 메이저리그 타자들의 눈에 대단히 생소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매니 마차도가 2볼 2스트라이크에서 지켜본 패스트볼은 땅에 깔려오는 것처럼 느껴졌겠지만 스트라이크 존 아래쪽을 통과해 루킹 삼진을 결정했을 것이다. 김하성과 호세 아소카르는 가운데 오는 공이라 느껴 방망이를 내밀었겠지만 공은 방망이 위쪽을 맞고 떠올라 평범한 뜬공이 됐다. 지난해까지 잦은 통증에 시달리다 타자 전향까지 고민했던 최준용은 오프시즌에 다시 투수에 전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투구 메커니즘에 변화를 줬다. 어릴 때부터 필라테스를 통해 만든 유연성을 이용해 온몸의 가동범위를 극대화하던 예전의 투구폼을 조금 단순화해서, 몸에 무리를 덜 가게 만들었다. 17일 경기의 데이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최준용이 이 변신을 통해 구위를 전혀 잃지 않았거나 오히려 향상시켰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게다가 최준용의 속도는 메이저리그에서는 느린 편이지만 KBO리그에서는 꽤 빠른 편에 속한다. 최준용이 예전의 펄펄 살아 오르던 직구를 회복할 희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98 rpm : 문동주의 포심패스트볼 평균 회전수 문동주의 포심 패스트볼은 김택연, 최준용과는 정반대 이유로 화제가 됐다. 문동주의 포심 패스트볼은 rpm이 1998에 불과했다. 평균 시속은 94.1마일(151.4km)로 준수했지만 회전수가 최준용보다 무려 600rpm가까이 낮게 찍힌 것이다. 지난해 빅리그에서 포심 패스트볼을 200개 이상 던진 투수 360명 중에 회전수가 1998rpm보다 적었던 투수는? 5명뿐이다. 즉 문동주는 빅리그에서도 대단히 희귀한 ‘저회전 패스트볼’을 던진 것이다. 어떤 성급한 사람들은 이걸 보고 문동주의 패스트볼이 밋밋한, 소위 ‘작대기 직구’라며 폄훼하기도 했다. 아직 ‘문동주 패스트볼’의 정체성에 대한 결론을 내기는 이르다. 타 구단 데이터에 따르면, 문동주의 지난 시즌 패스트볼 평균 회전수는 2289rpm 정도였다. 즉 17일 경기에서 무언가 다른 환경 혹은 긴장감 때문에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공을 던졌을 가능성이 있다. 즉 지금이 정규 시즌을 대비해 컨디션을 끌어올리고 있는 단계라면, 일주일 뒤 시즌 첫 등판에서는 더 나은 수치를 찍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즉 문동주가 정말로 꽤 회전이 적은 패스트볼을 던지는 투수라면? ‘빅리그 진출’ 같은 희망은 가져서는 안 되는 걸까? 결론은 ‘전혀 그렇지 않다’ 문동주의 엄청나게 낮은 회전수는 ‘약함’이 아닌 '생소함'의 증거일 가능성이 높다. 문동주의 ‘바우어 유닛’은 21.2. 지난해 빅리그에서 패스트볼을 200개 이상 던진 투수 360명 중에 문동주보다 ‘바우어 유닛’이 낮았던 투수는 단 7명뿐이다. 즉 문동주는 빅리그에서도 대단히 특이하게 ‘바우어 유닛’이 낮은 투수인 것이다. 문동주보다 ‘바우어 유닛’이 낮은 투수들 중에는 시애틀의 젊은 에이스 로건 길버트(바우어 유닛 20.9), 텍사스의 주축 선발 존 그레이(바우어 유닛 21) 같은 정상급 투수들도 있다. 이들이 빅리그를 호령하는 방법은? 저회전 패스트볼의 ‘희귀함’을 이용하는 것이다. 앞서 ‘고회전 패스트볼’은 스트라이크 존 위쪽에서 타자의 헛스윙을 끌어낼 가능성이 높다고 썼다. 반대로 ‘아주 특이하게 회전이 적은 패스트볼’은? 존 아래쪽에서 효과적이다. 타자가 상상한 궤적보다 ‘덜 떠오르기’ 때문에, 타자의 방망이 아래쪽을 맞거나, 아래쪽으로 지나간다. 이런 투수는 땅볼 유도 능력을 무기로 삼는다. 그래서 문동주와 ‘바우어 유닛’이 비슷한 투수들 대부분은 ‘땅볼 투수’다. 위 표에 등장하는 필라델피아의 주축 선발투수 레인저 수아레스는 17일의 문동주와 판박이 같은 패스트볼을 던진다. 평균 시속은 93.4마일로 문동주보다 아주 약간 빠르고, 회전수는 1976rpm으로 문동주보다 아주 약간 적다. 그래서 ‘바우어 유닛’은 21.2로 문동주와 똑같다. 수아레스는 지난해 전체 타구의 48.5%를 땅볼로 허용했다. 메이저리그 평균 37.5%보다 10%가 높다. 수아레스 외에도 위 표에 등장하는 ‘저회전 패스트볼 투수’들은 모두 리그 평균 이상의 땅볼 비율을 기록했다. 모두 ‘저회전 패스트볼’이 효과적인 코스, 즉 스트라이크존 아래쪽을 집중 공략하고, 커브와 슬라이더, 체인지업 등 떨어지는 변화구로 낮은 쪽을 염두에 둔 타자들을 현혹하는 피칭 전략을 가진다. 즉 위에 소개한 ‘고회전 패스트볼’ 투수들의 무기인 ‘위쪽 공략’과는 정반대의 생존 전략인 것이다. 아직 만 스무 살인 문동주가 어느 방향으로 성장해갈 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문동주가 엄청난 재능과 성실함, 야구에 대한 ‘학구열’을 가졌다는 점이다. 지금의 속도만으로 압도할 수 있는 KBO리그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큰 선수가 되기 위한 길을 찾아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자료출처 : baseballsavant.com, baseball-reference.com, fangraphs.com
이정후가 시애틀 매리너스와 첫 시범경기에서 안타를 치고 있다. AP=연합뉴스 (한국 시간) 2월 28일, 이정후는 여러모로 강렬한 시범경기 데뷔전을 치렀다. 시애틀 매리저스 전 1회 첫 타석에서 올스타 투수 조지 커비로부터 우전 안타를 뽑아내 ‘역시 이정후’라는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4회에는 다른 의미로 눈에 띄는 장면이 나왔다. 시애틀의 세 번째 투수 카를로스 바르가스에게 헛스윙 삼진을 당한 것. 바르가스가 평균 시속 159.6km의 ‘광속구’를 뿌리는 유망주이기는 하지만, 이정후의 삼진은 놀랍고 희귀한 결과였다. 앞서 여러 차례 소개한 대로 이정후는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콘택트 히터, 즉 삼진을 잘 당하지 않는 타자다. 이런 이정후가 첫 경기부터 삼진을 당하면서, ‘천하의 이정후라도 역시 메이저리그에서는 고전할 수밖에 없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됐다. ’빠른 공에 약점이 있다‘는 오랫동안 떠돌던 소문도 사실로 굳어지는 듯했다. 그 뒤로 비로 취소된 8일 LA 다저스 전 1회까지 이정후는 15타석 더 등장했다. 이 15타석에서 이정후가 당한 삼진은? 한 개도 없다. 시범경기 기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게 지배적 견해다. 하지만 야구 연구계에서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미가 있는 기록도 있다‘고 말한다. 세이버메트릭스 전문 사이트 ’팬그래프‘에 2012년 올라온 글을 보면, 시범경기의 삼진-볼넷 비율은 정규시즌 기록을 짐작하는 근거로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지난 정규시즌보다 시범경기에서 갑자기 삼진 비율이 낮아진 타자는, 시즌 중에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수학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시범경기와 정규시즌 삼진 비율의 ’상관 계수‘는 0.5다) 만약 이정후가 데뷔전처럼 시범경기 내내 삼진을 당했다면? 콘택트 능력을 최대 무기로 앞세워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이정후에게는 대단히 암울한 신호였을 것이다. 반대로 지금처럼 삼진을 계속 잘 피한다면? 이정후의 최대 강점이 메이저리그 투수들에게도 통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긍정적인 신호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세이버메트릭스계에서는 삼진 비율보다 ‘시범경기-정규시즌 상관관계’가 더 높은 기록이 있다고 말한다. 지난해 3월 ‘prospects live’에 실린 글에 따르면, 타자의 ‘최대 타구 속도’는 삼진 비율보다 더 ‘정규 시즌 예측력’이 높다. 시범경기에서 타구 10개, 정규시즌에서 타구 20개 이상씩을 기록한 타자들의 ‘최대 타구 속도의 상관 계수’는 0.578이다. 쉽게 말해서, 시범경기에서 강한 타구를 날린 타자는, 정규시즌에서도 강한 타구를 날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미국 현지의 많은 통계 분석 칼럼니스트들이 이정후가 첫 홈런을 친 지난 1일 경기를 주목한 이유다. ‘야후스포츠’에 올라온 글의 한 대목이다. “시범경기에서 단정적인 결론을 낼 수는 없지만, 이정후의 시속 109.7마일(176.5km) 짜리 홈런은 이정후가 최소한 메이저리그 평균 수준의 파워를 갖고 있다는 걸 뜻한다. 호세 알투베, 댄스비 스완슨, 브라이언 스톳은 모두 빅리그의 수준급 타자들이지만, 아무도 그렇게 빠른 타구를 치지 못했다.” 지난해 빅리그 최고 타율-최소 삼진 비율을 기록한 루이스 아라에스(마이애미)는 이정후와 가장 비슷한 유형의 타자로 꼽힌다. 하지만 지난해 아라에스의 최고 타구속도는 104마일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시범경기 기록만 봐도, 파워는 아라에스보다 이정후가 더 셀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이정후의 첫 홈런은 또 다른 화제도 만들었다. ‘baseballsavant.com’에 따르면, 그 타구는 메이저리그 30개 구장 중 29개 구장에서 홈런이 된다. 홈런이 되지 않는 단 하나의 구장이 바로 샌프란시스코의 홈구장 오라클 파크다. 우중간 가장 깊은 곳이 홈플레이트로부터 126미터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앞서 소개한 대로 오라클 파크는 좌타자, 더 정확히는 ’왼손 홈런 타자‘에게 매우 불리하다. 하지만 이런 홈구장의 특성이 이정후에게 불리하게만 작용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 오라클 파크의 우중간은 ‘Triples alley : 3루타 골목’이라고 불린다. 워낙 깊어서 우중간을 가르는 타구를 중견수와 우익수가 쫓아가기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다른 구장이었다면 2루타로 만족할 타자들이 3루로 가기에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정후는 ‘뜬공 타자’가 아닌 ‘라인드라이브’ 타자다. 왼손 라인드라이브 타자가 친 타구가 가장 자주 향하는 곳은 우중간이다. 빠른 라인드라이브 타구가 ‘3루타 골목’에 빠지면, 이정후의 스피드면 3루를 충분히 노릴 수 있다. 게다가 이정후는 홈런을 친 날, 속도도 우리의 생각보다 빠르다는 걸 검증받았다. 밥 멜빈 샌프란시스코 감독은 그날 경기 후, “이정후가 홈에서 1루까지 뛰는데 4.1초가 걸렸다”며 놀라워했다. 지난해 메이저리그에서 홈에서 1루까지 10번 이상 뛴 타자는 583명. 이 중 홈에서 1루까지 가는 평균 시간이 4.1초 이내였던 선수는 단 4명뿐이다. 즉 이정후가 ‘작정하고 뛰면’ 빅리그에서도 수준급의 스피드를 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3루타 골목’을 이용할 또 다른 재능을 갖춘 셈이다. 출처 :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소셜미디어 캡처 아직 단정적인 결론을 내기는 많이 이르다. 하지만 이정후가 지금까지, 빅리그에서 통하지 않을 거라는 단서를 전혀 주지 않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P.S) 삼진 비율이 눈에 띄는 한국 타자가 한 명 더 있다. 오클랜드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고 빅리그 스프링캠프에 초청된 박효준은 지금까지 15타석에서 삼진을 한 개도 당하지 않았다. 지난 6일, 메이저 캠프에서 16명이 마이너리그로 강등된 ‘1차 컷오프’에서 박효준이 살아남은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자료출처 : baseballssavant.com, fangraphs.com, prospectslive.com
‘3강’ 절대다수의 전문가들이 평가하는 올 시즌 판도다. 지난해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었던 LG와 KT, 그리고 KIA가 가장 좋은 전력을 갖췄다는 거다. 이범호 KIA 신임 감독도 이런 평가에 적극 동의한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선수들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다른 팀 9개 구단도 그렇게 평가한다면 그게 맞겠지요.” (2월 14일 인터뷰) KIA는 지난해 6위에 그쳐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6위 팀이 바로 다음 해 우승후보로 꼽히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사람마다 예측의 근거는 다를 것이다. 필자가 꼽는 이유는, 지난해 KIA가 어마어마한 불운에 시달렸다는 사실이다. 즉 특별한 전력 보강 없이 ‘운이 정상화’ 되기만 해도, KIA의 순위는 꽤 높아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기대 승률’보다 너무 낮았던 ‘실제 승률’ 야구는 상대팀보다 점수를 더 내야 이기는 경기다. 안타를 더 치거나 실책을 덜 해도, 점수를 한 점이라도 더 주면 진다. 그래서 득점이 많고 실점이 적어야 강팀이 된다. 이 원리에 착안해 ‘세이버메트릭스의 아버지’ 빌 제임스가 만든 지표가 이제는 널리 알려진 ‘피타고리안 승률’이다. 팀의 득점과 실점을 이용해 구하는 ‘기대 승률’이다. 공식은 몇 가지 버전이 있는데, 가장 대중적인 건 ‘득점²÷(득점²+실점²)’이다. 학창 시절 수학 시간에 배운 ‘피타고라스 공식’과 비슷한 모양새 때문에 ‘피타고리안 승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KIA는 지난해 726점을 내고 650점을 내줬다. 그래서 피타고리안 승률이 0.555. 우승을 차지한 LG에 이어 전체 2위였다. 그런데 실제 승률은 이보다 한참 낮은 0.514에 그쳤다. 실제 승률이 피타고리안 승률보다 0.041이나 낮았던 것이다. 이런 경우는 매우 희귀하다. 2015년 시작된 ‘10구단 체제’에서, 실제 승률이 피타고리안 승률보다 이보다 낮았던 경우는 한 팀뿐이다. 세이버메트릭스계에서는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본다. 1. 불운. 2. 허약한 불펜. 두 번째 이유부터 보자. 불펜이 약한 팀은, 당연히 접전을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 즉 전체 패배에서 ‘적은 점수차의 패배’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다. 접전, 즉 득실점차가 적은 패배는 피타고리안 승률보다 실제 승률에 상대적으로 더 큰 피해를 끼친다. 가령 ‘4대 5 패배’와 ‘1대 9 패배’는 실제 승률에서는 똑같은 1패다. 하지만 1대 9 패배가 ‘적은 득점과 많은 실점’ 때문에 피타고리안 승률을 더 깎아 먹는다. 그래서 불펜이 약한 팀은 실제 승률이 피타고리안 승률보다 낮은 경우가 많다. 그런데 지난해 KIA의 불펜이 약했다고 보기는 애매하다. 지난해 KIA 구원투수진의 평균자책점은 3.81. LG에만 뒤진 전체 2위였다. 구원 투수들의 WAR은 9.59로 LG, KT에 이어 3위였다. 즉 어떤 기준으로 봐도, KIA의 불펜이 약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마무리투수 정해영이 다소 흔들렸지만, 임기영이 리그 최고 수준의 롱릴리프로 활약했고, 전상현, 최지민, 장현식 등도 쏠쏠한 역할을 했다. 그러니까 피타고리안 승률보다 터무니없이 낮은 KIA의 실제 승률이, 불펜 탓이라고 보기는 무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는 건 ‘불운’이다. 726점을 내고 650점을 내줘 승률 0.550을 기록해야 마땅한 팀이, 엄청난 불운을 만나 6위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대승률 0.550’의 근거가 되는 ‘726득점과 650실점’ 역시, 불운의 흔적이 보인다. 너무 적었던 최고 타자들의 출전 시간 지난해 다른 매체에 쓴 것처럼, 나성범은 프로야구사에 남을 엄청난 위력을 뽐냈다. 야구인생 내내 약점이던 삼진을 극적으로 줄이면서, 약점이 없는 타자가 됐다. wRC+는 타자의 ‘리그 평균 대비 공격력’을 보여주는 지표다. 지난해 나성범의 wRC+는 208.2. 지난해 최고 타자 노시환의 159.3보다 한참 높다. 21세기 한국 야구에서 200타석 넘게 들어서 wRC+ 200을 넘긴 타자는 단 3명뿐이다. 그런데 나성범은 이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턱없이 부족했다. 두 차례 치명적인 부상 때문에 253타석에 들어서는데 그쳤다. 나성범만 그랬던 게 아니다. 팀 내 wRC+ 2위 최형우(153.8), 김도영(133.4) 모두 부상 때문에 규정타수를 채우지 못했다. 팀 내 최고 타자 3명이 합계 1146타석 밖에 들어서지 못한 것이다. LG의 최고 타자 3명(홍창기-오스틴-문보경)이 들어선 1768타석에 비해 무려 600타석 이상 모자란다. 지난 시즌 ‘최고타자 3인방’이 KIA보다 덜 뛴 팀은 키움밖에 없다. 이전 3시즌 연속 580타석을 넘긴 나성범의 지난해 부상이 ‘예견된 사태’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제 21살이 되는 김도영이 ‘유리몸’이라고 볼 근거도 빈약하다. 즉 나성범과 김도영의 부상 결장은 필연보다는 우연에 가깝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만약 나성범과 김도영이 다른 팀의 ‘보통의 중심타자’들처럼 500타석 정도 들어섰다면? 선수가 펼친 모든 플레이의 ‘득점 가치’를 더해, 선수가 창출한 (혹은 까먹은) 점수를 추정한 지표를 RC(Run Created)라고 한다. 고안된 지 40년이 넘은, 세이버메트릭의 ‘고전적 지표’지만 지금도 꽤 유용하다. 나성범이 지난해 253타석에서 창출한 RC는 66.9. 1타석당 0.26점을 생산한 것이다. 그런 나성범이 500타석에 들어섰다면 RC 132 정도를 기록했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같은 방식으로 계산하면 ‘500타석 김도영’은 RC 73 정도를 찍었을 것이다. 둘이 합쳐, 지난해 실제로 기록한 RC 125보다 80점가량 높은 205점을 생산했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들이 빠진 자리에 들어섰던 ‘대체 선수’들의 RC를 빼도, KIA의 팀 득점이 60점 가까이 높아졌을 거라고 계산할 수 있다. 지난해보다 60점을 더 냈다면 KIA의 총득점은 786점이 된다. 리그 1위 LG의 762점보다 24점이 많다. 실제로 KIA는 지난해 나성범과 김도영이 함께 뛴 6월 23일부터 9월 29일 사이에, 압도적인 리그 최강의 공격력을 뽐냈다. 즉 KIA로서는 ‘엄청난 행운’이 아닌 ‘보통의 운’만 따라줘도, 리그 최고의 공격력을 갖출 거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런데 지난해 KIA의 ‘불운의 흔적’은 공격에만 보이는 게 아니다. 또 하나의 불운, ‘외국인 투수 흉작’ 지난해 KIA의 ‘외국인 투수’ 농사는 엄청난 흉작이었다. 처음 뽑은 앤더슨과 메디나가 부상과 부진에 빠졌고, 대체 선수들 중에서도 산체스는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KIA 외국인 투수들의 기여도는 다른 팀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KIA 구단이 외국인 투수를 보는 눈이 유별나게 없는 거라면, 즉 지난해의 참사가 운이 아닌 실력이라면, 올해도 기대를 접는 게 맞다. 그런데 그런 결론을 낼 근거는 희박하다. 불과 4년 전, KIA는 애런 브룩스라는 ‘슈퍼 에이스’를 건졌다. 그해 KIA의 두 외국인 투수 브룩스와 가뇽이 기록한 WAR은 10. 두산(플렉센, 알칸타라)의 11.8에 이은 리그 2위였다. 2017년 KIA의 11번째 우승을 이끈 에이스 헥터 노에시는 리그 최고인 WAR 5.80을 찍었다. 야구계의 중론은 NC 정도를 제외하면 외국인 선수를 뽑는 실력은 ‘거기가 거기’다. 다시 말해, 많은 팀들에게 외국인 선발은 아직도 실력보다는 ‘로또’에 가깝다. 즉 지난해 KIA의 ‘외국인 투수 대흉작’은 ‘불운’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만약 KIA의 외국인 투수들이 ‘대박’까지는 아니더라도 리그 평균 정도의 활약만 해줬다면? 지난해 10개 구단은 외국인 투수들로부터 평균 WAR 6.03의 기여를 얻었다. 즉 KIA로서는 외국인 투수들이 ‘중간만 했어도’ 6승 정도를 추가했을 거라는 추정이다. 73승 69패 대신, 6승을 다해 79승 61패였다면? KIA는 KT와 2위를 다투었을 것이다. 결론은 이렇다. 지난해 KIA는 공수에서 어마어마한 불운에 시달렸다. 그 와중에도 실점보다 꽤 많은 득점을 올렸다. 그래서 0.550 정도의 승률을 올려야 마땅했으나, 또 불운에 발목을 잡혀 실제 승률이 0.514로 떨어졌다. 올해 야구의 신이 KIA에 노여움을 거두고, ‘평균 정도의 운’만 선사한다면? 즉 ‘깜짝 스타’의 무더기 등장, ‘주전 전원의 강철 부대화’ 같은 엄청난 행운 까지는 아니더라도, ‘남들만큼의 운’만 따라줘도, KIA는 곧장 우승후보가 된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디자인 : 권민재 자료 출처 : 스포츠투아이, 스탯티즈
2024년 프로야구는 ‘대격변의 해’가 될 것이다. 자동 볼 판정 시스템, 일명 ‘로봇 심판’이 세계 주요 프로리그 중 가장 먼저 도입되고, 시프트 수비가 금지되며, 베이스 크기가 커진다. 메이저리그에 지난해 시행된 ‘투구 간 시간제한’인 소위 ‘피치 클락’, 투수의 주자 견제 횟수 제한도 시범 운영된다. 모두 경기 양상을 크게 바꿔놓을 변화들이다. 이 중 오늘은 ‘커진 베이스’에 주목해 보자. 더 정확히는 ‘베이스가 커지면서 루 사이의 거리가 줄어 도루가 용이해질 것’이라는 추정에 대해 생각해 보자. 잘 알려진 것처럼, 지난해 메이저리그는 ‘도루 부활’의 시즌이었다. 도루의 개수와 성공률 모두 급증해 21세기 최고치를 찍었다. 야구에서 가장 역동적인 플레이 중 하나인 도루를 늘려 흥미를 높이겠다는 MLB 사무국의 구상이 완벽하게 실현됐다. MLB의 도루 폭증에는 당연히 ‘환경 변화’가 결정적 이유였다. 1. 예전에 투수들은 주자가 1루나 2루에 있을 때 셋포지션에서 공을 들고 멈춰 있는 시간을 투구마다 바꾸곤 했다. 오래 멈춰 있다 던지고, 그 다음 공은 후딱 던지는 식이다. 이렇게 ‘멈춤 시간’에 변화를 주면, 주자가 출발할 타이밍을 잡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찰나라도 늦으면 실패하는 게 도루다. 하지만 ‘피치 클락’ 때문에, 투수가 가질 수 있는 여유가 줄었다. 주자의 타이밍을 흐트러뜨릴 여유에 제한이 생긴 것이다. 2. 견제 횟수가 사실상 2번으로 제한되면서, 두 차례 견제를 당한 주자는 마음 놓고 뛸 수 있게 됐다. (김하성처럼 스마트한) 일부 주자들은 루상에서 일부러 리드 폭을 늘려 투수의 견제구를 유도해 손쉽게 뛸 기회를 만들기도 했다. (▶ 김하성의 2023년 시즌 30호 도루 / 영상출처 : mlb.com) 3. 그리고 오늘의 주제인 ‘커진 베이스’다. 전 세계 야구에서 쓰던 종전 베이스의 규격은 ‘면적 15제곱인치’다. 지난해 메이저리그에서는 이걸 18제곱인치로 늘렸다. MLB닷컴에 따르면 이 변화를 통해 루 사이 거리는 4.5인치가 줄었다. 센티미터로 환산하면 11.43cm다. 루 사이 거리가 줄어드는 건 당연히 도루를 시도하는 주자에게 도움이 되는 요소다. 중요한 건 ‘얼마나’다. 미국의 한 데이터 과학 전공 대학생이 2019년부터 2022년 사이의 메이저리그 경기들의 데이터를 이용해 ‘도루 성공률에 영향을 끼치는 변수’를 찾아 흥미로운 글을 썼다. ‘What actually affects the chances of a stolen base’라는 제목의 글에 따르면, 도루 성공률을 결정하는 변수들은 이런 것들이 있다. (▶ 자료 출처 : What actually affects the chances of a stolen base?) 다른 어떤 변수들보다 도루 성공률을 좌우하는 ‘결정적 변수’는 ‘Seconday lead’다. 이 글에서 정의하는 ‘Secondary lead’란 ‘투수의 손에서 공을 떠날 때, 주자와 출발 베이스의 거리’다. 즉 ‘셋 포지션 때 주자의 원래 리드 거리 + 투구 동작을 시작한 뒤 주자가 전진한 거리’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원래 리드를 얼마나 과감하게 했는지, 그리고 스타트를 얼마나 재빠르게 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이니까. 도루에 ‘스타트가 가장 중요하다’는 야구계의 상식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Secondary Lead’의 폭에 따라, 도루 성공률은 어떻게 변할까? ‘Secondary lead’가 18피트에서 19피트 사이일 때, 즉 약 5.5m에서 5.8m 사이일 때 도루 성공률은 57%에 불과했다. 일반적으로 프로야구에서 도루 성공률의 ‘손익 분기점’으로 계산되는 70%에 한참 못 미친다. 성공률 70%를 넘어서는 구간은 secondary lead가 21피트~22피트, 즉 6.4m~6.7m 이상부터다. ‘꽤 손해’에서 ‘이익’으로 바뀌기 위해, 80cm 이상의 향상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23피트(약 7m)가 되면 성공률이 80%를 넘어선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통산 도루 100개를 넘긴 선수들 중에 성공률 80%를 넘긴 선수는 단 4명뿐이다. 즉 ‘첫 리드와 첫 한두 발’로 7m를 전진할 수 있다면, 역사상 최고 수준의 ‘대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위의 <그림 2>를 다시 보자. Secondary lead가 1피트(약 30cm)가 늘어날 때마다, 성공률은 점진적으로 올라간다. 앞서 설명한 지난해 MLB의 환경 변화를 다시 보자. 견제구 제한은 주자의 ‘Seconday lead’ 향상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견제구 두 번이 날아온 뒤에, 모든 주자는 투구 동작을 시작하기도 전에 달리기 시작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30cm 이상의 ‘전진 거리 증가’가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피치 클록’ 도입도 주자들이 스타트를 과감하게 끊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베이스 간 거리’의 13cm 단축은? 위 표를 보면, 대단히 결정적인 변수가 됐을 거라는 추정에는 무리가 있다. 예를 들어 Seconday lead가 21피트, 즉 6.4m였던 선수가 6.5m가 된다고 해서, 도루 성공률이 드라마틱하게 올라가지는 않았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KBO는 최소한 올 시즌 전반기에는 견제구 횟수 제한과 ‘피치클록’을 도입하지 않을 예정이다. 그렇다면 ‘베이스 크기 증가’ 만으로 도루 성공률이 극적으로 올라갈 가능성은 낮은 게 아닐까? 디자인 : 김정연
지난해 KBO리그에서 타자들이 가장 치기 힘들었던 공은 어떤 투수의 어떤 구종일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공은, 에릭 페디의 스위퍼일 것이다. 오버핸드 투수의 공이라고는 믿기 힘든 ‘옆으로 휘는 폭’을 이용해 KBO리그를 평정하고 MVP를 차지한 페디는 결국 메이저리그 복귀에 성공했다. 지난해 페디의 스위퍼에 타자들의 방망이에 공이 맞는 비율, 즉 콘택트 비율은 57.7%. 페디의 스위퍼에 스윙을 10번 했을 때 6번도 맞춰내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지난해 KBO리그에서 페디의 스위퍼보다 타자들이 맞춰내기 어려워 한 공들도 있다. 타자들이 가장 때려내기 힘들어 한 공은 유영찬(LG)의 슬라이더였다. 콘택트 비율이 고작 52%. 페디의 스위퍼보다도, 메이저리그 진출에 성공한 고우석의 고속 커브(콘택트 비율 52.9%)보다도 낮았다. 그런데 위 표에는 유영찬이 두 번 등장한다. 유영찬의 또 다른 변화구, 포크볼도 콘택트 비율이 55.4%로 4번째로 낮았다. 즉 한국에서 타자들이 헛스윙 비율이 높았던 공 4개 중에 2개가, 유영찬의 변화구였던 것이다. 유영찬의 변화구들은 왜 이렇게 위력적일까?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속도다. 유영찬의 공들은 꽤 빠르다. 3가지 구종이 모두, 리그 상위권이다. 그런데 ‘최상위권’이 아닌 것도 확실하다. 지난해 50이닝 이상 던진 투수들은 105명. 유영찬의 직구 평균 시속은 147.3km로 105명 중 16위다. 슬라이더는 105명 중 23위, 포크볼은 7위였다. 즉 빠르긴 하지만, 리그에서 ‘압도적으로 빠른 속도는 아니었다는 거다. 그렇다면, 제구가 뛰어난 걸까? 그것도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난해 유영찬은 305타자를 상대해 40개의 볼넷을 내줬다. 볼넷 비율 13.1%. 리그 평균인 9.1%보다 꽤 높고, 50이닝 이상 던진 투수 105명 중 10번째로 높았다. 제구가 좋은 투수가 볼넷을 많이 내주는 경우는 없다. 즉 유영찬의 변화구들이 엄청나게 많은 헛스윙을 유도하는 이유가 ’압도적 속도‘도, ’칼 같은 제구‘도 아니라는 것이다. 구종들의 휘어지는 폭, 즉 ’무브먼트‘ 데이터에도 아주 특이한 점은 눈에 띄지 않는다. 정확한 이유를 찾는 건 필자의 깜냥 밖이다. 그런데 데이터로 보이는 흥미로운 대목도 있다. 구종별로 별 차이가 없는 유영찬의 ’릴리스 포인트 위치‘다. 투수들이 어떤 구종을 던지느냐에 따라, 공을 놓는 위치, 즉 릴리스 포인트는 미세하게 달라진다. 예를 들어, 절대다수의 투수들은 커브를 직구보다 높은 곳에서 던진다. 즉 커브의 릴리스 포인트가 직구보다 높다. 커브의 위력에서 중요한 ‘위에서 밑으로 떨어지는 궤적’을 만들려다 보니, 팔 스윙이 자연스럽게 달라져 발생하는 현상일 것이다. 슬라이더와 포크볼의 릴리스 높이는 투수마다 제각각이다. 공통점은 직구와는 꽤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유영찬처럼 직구와 슬라이더, 포크볼을 던지는 알칸타라(두산)의 예를 들어보자. 알칸타라가 슬라이더를 던지는 릴리스 포인트의 평균 높이는 182cm. 직구(175.1cm)보다 약 7cm가 높다. 포크볼은 직구보다 3cm가 높다. 이렇게 직구와 변화구의 릴리스 포인트가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위 표에서 보듯, 유영찬은 차이가 거의 없다. 직구와 슬라이더는 고작 2cm, 포크볼은 아예 소수점 한 자리까지 똑같다. ‘구종별로 거의 비슷한 릴리스 포인트’로 얻는 이득을, 유영찬은 알고 있다. “저도 모르고 있었는데 코치님이 그대로 말씀해 주셨어요. 릴리스 포인트가 비슷해서, '터널링(서로 다른 구종의 초반 궤적이 비슷해서 타자들을 속이는 효과)'이 잘 돼서 타자들이 힘들어할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 스브스스포츠 유튜브 ‘야구에 산다’ 128구 중 타자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타자는 투수가 던진 공의 초반 궤적을 보고, 스윙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한다. 공이 투수의 손을 떠나는 순간, 구종별로 ‘손의 좌표 차이’가 꽤 크다면? 타자가 어떤 구종일지를 파악하는 좋은 힌트가 될 것이다. 모든 투수들이 구종별로 릴리스 포인트의 ‘좌표 차이’를 줄이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이유다. 유영찬은 모든 투수들이 바라는 ‘모든 공을 같은 곳’에서 던지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런 특성을 십분 활용해 유영찬은 지난해 정규시즌에서 LG 불펜의 버팀목 역할을 했고, 특히 한국시리즈 3경기에서 결정적인 활약을 펼쳐 29년 만의 우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일찌감치 ‘고우석의 후계자’로 낙점됐다. (▶ 참고 기사 보기) 위에 설명한 불안한 제구라는 약점을 보완할 수 있다면, 유영찬은 디펜딩 챔피언의 마무리투수로 활약하기에 손색없는 무기들을 갖고 있는 걸로 보인다. 자료출처 : 스포츠투아이, 스탯티즈 디자인 : 김정연
샌프란시스코 구단과 미국 매체의 전망은 거의 비슷하다. 삼진을 좀처럼 당하지 않고, 높은 타율을 기록할 거라는 예측이다. 샌프란시스코 구단의 파르한 자이디 사장이 이정후의 입단식에서 한 발언을 다시 보자. “이번 오프시즌에서 우리 팀의 목표 중 하나는 콘택트 능력 향상입니다. 그건 메이저리그 업계 전체의 흐름이기도 합니다. 솔직히 이번 오프시즌에서 영입할 수 있는 선수들 중에, 이정후만큼 이 목표에 안성맞춤인 선수는 없습니다.” 앞선 글(▶ 최고의 콘택트 히터이자 최고의 장타자라는 '형용모순' 이정후)을 비롯해 여러 차례 소개한 것처럼, 이정후는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콘택트 히터일 가능성이 높다. 특정 리그에서 삼진을 잘 당하지 않는 타자는, 다른 리그에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여기 또 하나의 증거를 소개한다. 삼진 비율은 가장 적은 ‘표본 크기’로도 의미를 갖게 되는 기록으로 유명하다. 메이저리그의 경우, 타자의 삼진 비율이 ‘안정되는’ 즉 의미를 갖게 되는 표본 크기는 ‘70타석’으로 계산된다. 즉 특정 타자가 첫 70타석에서 기록한 삼진 비율은, 이후에도 비슷하게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첫 70타석의 ‘삼진왕’은 이후에도 ‘삼진왕’이라는 것이다. KBO리그에서 삼진 비율이 안정화되는 표본 크기는 메이저리그보다는 조금 크지만, 100타석이면 충분하다는 게 필자의 추정이다. 수학에서 ‘상관계수’는 서로 다른 두 변수 사이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수치다. 절댓값이 1에 가까울수록 관계가 밀접하고, 0에 가까울수록 관계가 없다. 가령 한 나라의 출산율과 인구증가율의 상관계수는 1에 가깝고, 출산율과 프로야구 경기당 득점의 상관계수는 0에 가깝다. 조금 더 현실적인 예를 들어보자. 낙천적인 사람은 비관적인 사람보다 행복하다고 느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즉 ‘낙관성’과 ‘행복감’이 연관돼 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서울대 행복연구센터 최종안 박사팀의 2017년 연구에 따르면, ‘낙관성’과 ‘안녕감’ 사이에는 높은 상관관계가 발견되었다. 상관계수가 0.55~0.59 사이로 측정됐기 때문이다. (▶ 관련 기사 보기) 2019년 이후 KBO리그에서 100타석, 그리고 직전 혹은 직후 시즌에 메이저리그에서 70타석 이상 들어선 타자는 (필자의 셈으로는) 17명이다. 이들이 KBO리그에서 기록한 삼진 비율과, 메이저리그에서 기록한 삼진 비율의 상관 계수는 0.80에 달한다. 쉽게 말해 미국에서 삼진을 많이 당한 타자는 한국에서도 많이 당하고, 한국에서 삼진을 잘 안 당하던 타자는 미국에 가서도 마찬가지일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말이다. 17명 중 메이저리그와 KBO리그에서 가장 낮은 삼진 비율을 기록한 선수는 호세 페르난데스(전 두산)다. 페르난데스가 한국에 오기 직전인 2018년 LA 에인절스에서 123타석에 들어서 당한 삼진은 겨우 15개. 삼진 비율 12.2%에 불과했다. 그해 빅리그에서 120타석 이상 들어선 타자 424명 가운데 23번째로 낮았다. 즉 ‘삼진 피하기’ 능력이 ’빅리그 최상위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한국에서도 삼진을 안 당했다. 2019년 KBO리그 데뷔시즌에 삼진 비율 8.4%로 위 표에 등장한 타자들 중 가장 낮았고, 그해 리그 전체에서 6번째로 낮았다. 그런데 지난해 이정후가 기록한 삼진 비율은, 2019년의 페르난데스보다도 꽤 낮은 5.9%에 불과하다. 이정후는 페르난데스와 함께 KBO리그에서 뛰었던 4시즌 동안 삼진 비율이 항상 페르난데스보다 낮았다. 이정후의 ’삼진 피하기 능력‘이 메이저리그에서도 최상위권일 거라는 추정의 또 다른 근거다. 이렇게 이정후의 콘택트 능력이 최상위권일 거라는 전망이 일치하는 것만큼, 장타력이 눈에 띄지 않을 거라는 전망도 공통적이다. 한국에서도 2022년을 제외하고는 ‘톱클래스’의 장타자가 아니었던 경력, 그리고 특히 좌타자에게 대단히 불리한 샌프란시스코의 홈구장 오라클 파크의 특성을 고려하면 ‘홈런 타자 이정후’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거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정후가 단타에만 주력하는 ‘이치로 스타일’의 ‘똑딱이’가 될까? 타구 데이터를 보면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보인다. 이정후는 프로 초창기에는 잘 맞추지만 타구 속도는 빠르지 않은 전형적인 교타자였다. 하지만 점점 타구의 속도가 빨라졌다. 지난해에는 생애 처음으로 평균 시속 140km를 돌파했다. 리그 전체에서 나성범과 노시환, 김재환에 이어 4번째로 빠른 타구를 날리는 타자가 된 것이다. 위에서 소개한 ‘한국과 미국 공통 경험자 17명’ 중, KBO리그에서 이정후보다 타구가 빨랐던 타자는? 삼성의 중심타자로 활약했고 샌프란시스코에서도 쏠쏠한 활약을 펼친 다린 러프 한 명뿐이다. 위 타자들의 KBO리그와 메이저리그 타구 속도의 상관계수는 0.41. 위에 소개한 삼진 비율처럼 ‘한 몸 같은’ 관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연관성이 있다. 즉 한국에서 빠른 타구를 친 타자가, 미국에서도 강한 타구를 칠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이정후가 위 타자들에 비해 미국에서 약한 타구를 칠 거라고 전망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표 〈'한미 공통 경험자'들의 타구 데이터〉에서는 절대다수 타자들이 한국보다 미국에서 타구 속도가 빠르다고 나온다. 이건 측정 장비, 즉 이 글에서 쓴 한국의 ‘PTS 시스템’과 미국의 ‘호크아이 시스템’의 작동 방식 차이일 것이 확실하다. 같은 타구라도 측정 방식과 위치에 따라 속도가 다르게 계측되기 때문이다.) 위 표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숫자는 발사각도다. 이정후의 평균 타구 발사각은 16.9도. 위 타자들 중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즉 이정후는 평균 발사각 20도 이상의 전형적인 홈런타자가 아니라, ‘강한 라인드라이브 타구를 치는 타자’로 정의된다. 이런 유형의 타자는, 오라클 파크의 ‘홈런 방해’에 덜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담장까지 거리가 먼 좌우중간을 뚫는 강한 타구로 2루타와 3루타를 양산할 수 있다. 구장이 특정 이벤트에 유불리 여부를 따지는 숫자가 ‘파크팩터’다. 100이면 중립이고, 클수록 그 이벤트가 나오기 유리하다는 거다. ‘Baseballsavant.com’에 따르면, 지난 3년간 오라클 파크의 홈런 파크팩터는 84. 리그에서 7번째로 낮았다. 즉 홈런을 치기에 7번째로 불리한 구장이었다는 뜻이다. 반면 2루타의 파크팩터는 105, 3루타는 108로 계산된다. 즉 2루타와 3루타를 치기에는 상대적으로 유리한 구장이었다는 뜻이다. 이정후 같은 ‘저탄도 라인드라이브 타자’가 제 기량을 펼치기에는 불리하지 않은 환경일 수 있는 것이다. 자료 출처 : baseballsavant.com, fangraphs.com, baseballprospectus.com 디자인 : 김정연
미국 매체들이 이정후를 소개하는 기사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Bat to Ball Skill’이다. 말 그대로 날아오는 공에 방망이를 갖다 대는 능력, 즉 ‘콘택트 능력’을 말한다. 또한 헛스윙을 피하는 능력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통산 타율 1위에 오른 이정후가 이 능력이 뛰어날 거라는 건 누구나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뛰어나다’는 단어는 이정후의 ‘공 맞추기 능력’을 표현하는 데 부족한 감이 있다. 배트로 공을 잘 맞추는 타자는 삼진을 잘 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당연히 이정후도 삼진을 잘 당하지 않는다. 프로 생활 7년 동안 3947타석에 들어섰던 이정후가 당한 삼진은 고작 304개. 전체 타석의 7.7%에서만 삼진을 당한 것이다. 현역 선수들 중에서는 당연히 ‘최소 삼진 비율’ 1위, 프로야구 전체 역사를 살펴도 6위에 해당한다. 하지만 위 표에는 함정이 있다. 이정후보다 위에 있는 5명이, 이정후보다 ‘삼진을 더 잘 피하는 타자’라고 결론을 내는 건 위험하기 때문이다. 선수들이 활약한 ‘시대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프로야구사를 관통하는 ‘장기 흐름’ 중 하나는 삼진의 증가다. 프로 첫 해인 1982년에는 전체 타석의 10.4%만 삼진으로 마무리됐다. 80년대 내내 10% 내외였던 삼진 비율은 90년대 이후 꾸준하게 늘어났다. 1996년에 15%, 2002년에 17%를 돌파했고, 2018년에는 18.8%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즉 지금 프로야구 경기에서는 40년 전보다 삼진이 발생하는 빈도가 두 배쯤 높아진 것이다. 이 현상은 해외에서도 마찬가지다. 1982년에 13.2%였던 메이저리그의 삼진 비율은 올해 22.7%가 됐다. 1982년 12.4%였던 일본 프로야구의 삼진 비율은 올해 19.3%로 올라갔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1. 장타를 노리는 타자가 늘었다. 단타만 치는 3할 타자보다, 홈런 40개를 치는 2할 5푼 타자가 더 많은 공격 기여를 한다는 게 밝혀졌고, 홈런 타자의 몸값이 높아졌다. 많은 타자들이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근육을 키웠고, 장타를 만드는 ‘풀 스윙’을 장착했다. 장타를 노리는 타자들은 일반적으로 헛스윙과 삼진을 세금으로 낸다. 2. 투수들의 구위가 몰라보게 좋아졌다. 40년 전의 투수들은 지금보다 공도 느렸고, 구종도 단순했다. 커터와 체인지업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말’이었고, 포크볼을 던지는 투수도 드물었다. 극소수의 에이스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때려낼 수 있는 투수’들이었다. 투수들 입장에서도 ‘맞춰 잡는 피칭’이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지금보다 파워가 부족한 타자들의 타구 속도는 지금보다 한참 느렸다. 방망이에 맞은 타구가 담장을 넘어가거나 장타가 될 확률이 지금보다 많이 낮았다. 즉 맞춰줘도 위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위의 <표1>에 나온, ‘이정후보다 삼진을 덜 당한’ 타자들은 모두 1980년대에 활약한 타자들이다. 당시에는 이들의 ‘삼진 피하기’ 능력이 대단히 특이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가 삼진을 안 당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가령 통산 삼진 비율 5.9%로 역대 최저치인 김일권은 1988년, 2.3%라는 ‘한 시즌 최소 삼진 비율’을 기록했다. 그런데 2.3%는, 1988년 리그 평균 삼진 비율 9.9%보다 고작 7.6% 낮은 수치였다. 이정후의 시대는, 그때와는 다르다. 지난해 리그 전체 삼진 비율은 18.7%, 1988년의 두 배에 가깝다. 그런데 이정후의 지난해 삼진 비율은 고작 5.1%. 1991년 백인호 이후 31년 만의 최소치였고, 리그 평균보다 무려 13.6%가 적었다. 삼진 비율이 리그 평균보다 13%나 낮았던 타자는? 프로야구 역사상 없었다. 그렇다고 이정후가 1980년대의 ‘콘택트 히터 선배들’처럼 ‘삼진 피하기’에만 집중하는 것도 아니다. 이정후의 올 시즌 평균 타구속도는 141.5km로 생애 최고치를 경신했다. 리그 전체에서 이정후보다 타구 속도가 빠른 타자는 나성범과 노시환, 김재환 단 3명뿐이다. 즉 이정후는 리그 전체에서 가장 강한 타구를 치는 타자 중 한 명이다. 강한 타구는 장타가 될 확률이 높다. 그래서 이정후는 장타력도 뛰어나다. 이정후가 ‘지금의 이정후’가 된 2021년 이후, 장타율은 0.527. 최정과 나성범에 이어 3번째로 높다. 즉 이정후는 리그 최고의 장타자 중 한 명이다. 그런데 이 3년 동안 삼진 비율은 6.1%로 리그에서 가장 낮다. 즉 이정후는 리그 최고의 콘택트 히터다. 리그 최고의 콘택트 히터가 동시에 최고의 장타자이기도 한, 마치 ‘네모난 동그라미’, ‘짠맛 딸기’ 같은 ‘형용 모순’을 창조한 것이다. 이 경이로운 능력으로 한국 야구를 평정한 바람이 이제 태평양을 건넌다. 디자인: 김정연
LG 트윈스의 29년 만에 우승을 마무리한 뒤, 고우석은 LG 구단으로부터 포스팅을 통한 빅리그 진출 도전을 허락받았다. 다만 조건이 붙었다. ‘계약 조건을 검토한 뒤’. 한 마디로 ‘헐값에는 보내지 않겠다’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2002년 진필중(당시 두산)을 시작으로 2015년 손아섭과 황재균, 2020년 김재환 등이 포스팅을 통해 빅리그 진출을 시도했다가 만족할 만한 계약을 제시받지 못해 꿈을 접었다. 터무니없는 조건으로 미국에 가는 건 친정팀의 전력에도, 선수의 성공 가능성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우석이 구단과 합의한 ‘기준선’을 넘는 계약을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다만 여러 정황으로 보면, 현재 미국 FA 시장의 상황은 고우석에게 불리하지 않다. 고우석에 대한 빅리그 팀들의 시선은 현지 보도와 업계의 분위기를 종합하면, 빅리그 팀들은 고우석을 이렇게 보고 있다. - 약간의 제구 불안이 있지만 뛰어난 탈삼진 능력을 가진, - 현재로서는 ‘쓸 만한 구원투수’이고, - FA 시장에 좀처럼 보기 힘든, 25살의 젊은 투수. 즉 발전 잠재력이 있는 투수. 당연한 일이다. 고우석은 지난해부터 2년 연속 탈삼진 비율 30%를 넘겼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서 4명밖에 달성하지 못한 기록이다. 역사에 남을 시즌을 보낸 뒤 미국과 일본 팀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에릭 페디의 탈삼진 비율은 29.5%였다.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좌타자 킬러로 활약했던 브룩스 레일리(당시 롯데)의 좌타자 상대 탈삼진 비율은 24.2%였다. 모두 고우석의 지난 2년간 시즌 탈삼진 비율보다 낮다. 즉 고우석은 탈삼진 능력만큼은 ‘빅리그급 투수’들 못지않거나, 더 나았던 것이다. 세이버메트릭스가 구단 운영에 도입된 후, 미국 구단들은 투수들의 ‘맞춰 잡는 능력’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졌다. ‘행운’의 비중이 높다는 것이 많은 연구를 통해 밝혀졌기 때문이다. 거꾸로 보자면, 탈삼진 능력에 대한 신뢰도는 높아졌다. 행운보다 실력의 증거이고, 기복이 적을 거라고 보는 것이다. 브룩스 레일리 (현 뉴욕 메츠 소속) / 출처 : 게티이미지코리아 레일리의 사례는 고우석의 계약 규모 예측에도 참고할 만하다. 미국으로 돌아가 준수한 중간 계투로 활약한 레일리는 지난해 탬파베이와 2년간 1천만 달러 보장에, 2024년 650만 달러의 팀 옵션이 포함된 계약을 맺었다. 레일리는 계속 잘 던졌고, 탬파베이는 내년 시즌에 대한 팀 옵션을 실행했다. 고우석보다 10살이 많은 레일리는 내년에 36세가 된다. 야구 선수로 황혼기에 접어드는 나이는 레일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던 걸로 보인다. 연평균 500만 달러가 조금 넘는 계약 규모가, 요즘 ‘준수한 구원투수’의 몸값치고는 높은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해 FA 시장에서 2년 이상의 계약을 맺은 ‘비 마무리’ 구원투수는 9명. 이 계약들의 연평균 액수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복귀한 스캇 맥고프(애리조나)의 312만 달러가 최저, 크리스 마틴(보스턴)의 875만 달러가 최고였다. 맥고프만 빼고는 모두 연평균 500만 달러 이상이었다. 연평균액의 평균은 668만 달러. 그리고 이들 모두는 30세 이상으로 고우석보다 나이가 한참 많았다. 아직 FA 시장 초반이지만, 올해 구원투수들의 몸값은 낮아지지 않은 듯하다. 올 겨울에 지금까지 2년 이상의 FA 계약을 맺은 ‘비 마무리 구원투수’는 4명. 이들의 연평균 계약액은 845만 달러. 작년보다 180만 달러 가까이 올라갔다. 메이저리그 FA 선수들의 ‘몸값 상승’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0년 전인 2023년 겨울, 모든 포지션의 FA 계약의 연평균액은 471만 달러. 지난겨울에는 그 3배에 가까운 1300만 달러를 넘었다. 아직 오타니 쇼헤이가 역대 최고액을 경신하기도 전인 올 FA 시장 초반에는? 1500만 달러를 돌파했다. 결론은 이렇다. 메이저리그 팀들은 고우석을 ‘정상급은 아니지만 좋은 탈삼진 능력을 가진 쓸 만한 구원투수’라고 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25살인 어린 나이를 매력적으로 느낄 것이다. 세인트루이스의 관심이 현지 언론에 보도되고, 포스팅 소식에 놀란 다른 구단들도 고우석에 대한 정보를 다급하게 수집하고 있는 이유다. 결정적으로, 위에서 설명했듯 FA 선수들의 몸값이 계속 올라가는 메이저리그의 시장 상황도 고우석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즉 내년 시즌 뒤 국내 FA 시장에서 받을 오퍼보다는, 나은 조건을 제시받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자료출처 : spotrac.com, fangraphs.com, baseball-reference.com, baseballprospectus.com 디자인 : 김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