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스포츠취재부 기자. 2000년부터 스포츠 기자로 일했고, 기자 생활 대부분을 야구 담당기자로 살았다. 데이터로 야구를 조명하는 '세이버메트릭스'에 관심이 많고, 오랫동안 취재에 활용해 왔다. 저서로 '프로야구 스카우팅 리포트' 시리즈, 역서로 '인사이드 게임(하빌리스)'이 있다."
SBS 스포츠취재부 야구조 기자들이 매주 색다른 관점으로 야구를 들여다 봅니다. 지난해 이맘때쯤, <야구수다>에 KIA를 우승 후보라고 전망하는 글을 썼다. 요지는 이랬다. "KIA는 2023년에 엄청나게 불운했다. 특히 외국인 투수 농사가 '대흉작'이었다. 외국인 선수들의 활약은 '로또'에 가깝다. 엄청난 행운이 아닌 '다른 팀만큼'의 운만 회복되어도, KIA는 당장 우승 후보가 된다." 2023년 3.79였던 KIA 외국인 투수들의 WAR(승리 기여도)은 2024년 '효자 용병'으로 자리매김한 제임스 네일의 대활약 속에 8.73으로 급등했다. KIA가 정규시즌에 2023년보다 14승을 더 올려 결국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다. 전년도 6위 팀이 다음 해 1위에 오른 경우는 프로야구 역사상 KIA가 처음이다. 같은 관점으로 볼 때, 올 시즌 두산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보인다. 2023년의 KIA처럼, 2024년 두산의 외국인 투수 농사는 재앙이었다. 2023년 좋은 활약을 펼쳤던 브랜든 와델과 라울 알칸타라가 나란히 부상으로 쓰러졌다. 그들을 대신할 발라조빅과 시라카라의 기량도 기대 이하였다. 그래서 두산 외국인 투수들의 WAR 합계는 5.5. 10개 구단 중 압도적인 꼴찌였다. 10개 구단의 외국인 투수 WAR 평균치는 9.0. 그러니까 외국인 투수 농사가 '평년작'만 됐어도 두산은 3.5승 정도를 추가했을 것이다. 지난해 4위 두산과 3위 LG의 게임 차는 2경기. 2위 삼성과는 4경기 차였다. 즉, 두산이 '외국인 투수 평타'만 쳤어도, 와일드카드전으로 내몰려 '사상 첫 업셋'의 수모를 당하는 일은 피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7월, 두산의 새 외국인 투수로 잠실 마운드에 올랐던 조던 발라조빅. 사진 : 연합뉴스 물론 지난해의 불운이 올해의 반등을 확신할 만한 근거는 될 수 없다. 지난해에서 계속 이어지는 전력의 기반, 즉 국내 선수들의 전력이 탄탄해야 '외국인 운'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지난해 두산의 '국내 선수 전력'은 꽤나 탄탄했던 걸로 보인다. 두산 토종 선수들의 높은 WAR이 특히 인상적인 이유는, 지난해 두산의 '백업 전력'이 궤멸됐기 때문이다. '오재원 파문' 때문에, 1군 백업 요원을 맡을 예정이었던 여러 선수들이 전력에서 이탈했다. 유난히 덥고 뜨거웠던 지난해 여름, '뎁스'의 붕괴는 치명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주전들은 무리할 수밖에 없었고, 아직 무르익지 않은 선수들이 더 많이 뛰어야 했다. 이 모든 악재에도 불구하고, 두산의 토종 선수들은 '디펜딩 챔피언' LG에 버금가는 활약을 펼쳐 보인 것이다. 두산 강승호와 김재환. 사진 : 연합뉴스 물론 두산의 '토종 전력'이 작년 수준으로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다. 지난해 두산에서 가장 높은 WAR을 기록한 야수 6명은 모두 30대 선수들이었다. 특히 팀 내에서 가장 높은 wRC+를 기록한 2명(김재환, 양의지)은 36세를 넘어섰다. 언제 기량이 하락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에 접어든 것이다. 30대 베테랑들이 여전히 타선의 주축을 맡는 동안, 20대 초중반 야수들의 활약은 미미했다. 두산의 25세 이하 야수들이 기록한 타석(433)과 WAR(-0.92)은 리그 전체에서 압도적인 꼴찌다. 지금의 25세 이하 선수들은 이른바 '베이징 세대'라 불린다. 이들은 그 이전 6~8년 선배들보다 훨씬 나은 재능으로 빠르게 각 팀의 주축으로 성장했다. 김도영, 문보경, 윤동희, 김지찬, 이재현, 노시환, 김영웅, 이주형, 고승민, 나승엽 등 수많은 젊은 스타 야수들이 각 팀의 주축이자 리그의 새 얼굴, 국가대표급 선수로 등장했다. 그런데 '화수분 야구'로 불렸던 두산에서만 유독 젊은 야수들이 크지 못한 것이다. 올해 두산은 떠나간 '왕조의 흔적' 허경민과 김재호의 공백을 메워야 한다. 특히 팀 내 출루율 1위(0.391)였고, 리그 최고 수비력의 3루수인 허경민의 공백은 뼈아플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두산은 이미 지난해 '뼈아픈 공백'을 '십시일반'으로 버텨 최고 수준의 '토종 전력'을 구축한 바 있다. 그리고 지난해 붕괴됐던 두산의 '뎁스'가 올해는 정상 가동된다. 위에 소개한 '외국인 불운의 정상화'와 함께, 조심스럽게 두산의 반등을 상상할 수 있는 근거들이다. 반등을 위한 가장 큰 관건이자 변수는 어린 야수들의 성장 여부다. 자료 출처 : 스탯티즈, 디자인 : 안준석
SBS 스포츠취재부 야구조 기자들이 매주 색다른 관점으로 야구를 들여다 봅니다. 지금까지 KBO리그에서 뛰다 메이저리그 진출에 성공한 타자들은 공통점이 있다. 당대 최고 수준의 장타력을 보여줬다는 사실이다. 강정호와 김현수, 박병호와 이대호, 황재균과 김하성과 이정후까지, 모두 전성기 시절 리그 최고 수준의 장타력을 보였고 국가대표 타선의 핵심으로 활약했다. (이정후는 역대 최고 수준의 '콘택트 히터'지만, <야구수다>에서 여러 번 다룬 것처럼 당대 최고 수준의 장타자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2022년 리그 장타율 1위, 순장타율(장타율-타율) 3위가 이정후다.) 즉, 장타력 대신 '기동력과 2루 수비력, 콘택트 능력'이 장점인 김혜성은, 역대 가장 독특한, 전례 없는 유형의 'KBO리그 출신 메이저리거'가 될 것이다.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와 계약한 김혜성이 지난 14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을 통해 미국으로 출국하기에 앞서 취재진과 인터뷰하고 있다. 김혜성은 지난 4일 다저스와 3년 보장 1천250만 달러, 5년 최대 2천200만 달러에 계약했다. 사진 : 연합뉴스 김혜성의 빠른 발과 수비력은 설명이 필요 없는 경지다. 김혜성은 KBO리그 역사상 통산 200도루를 넘긴 '역대급 대도' 28명 중 한 명이다. 이들 중 만 25세 이전에 200도루 고지를 밟은 선수는 단 2명(정수근, 김혜성)뿐이다. 더 놀라운 건 성공률이다. 김혜성의 통산 도루 성공률은 85.1%. 통산 100도루를 넘긴 84명 중 단연 1위다. 도루만 잘하는 게 아니다. 2017년 데뷔 이후, 김혜성은 '가장 빠르고 공격적인 주자'였다. 야구 통계 사이트 <스탯티즈>에는 '추가 진루 : 최소 진루 가능권보다 한 베이스를 더 가는 경우'라는 기록이 있다. 예를 들어 1루 주자가 후속 타자의 단타 때 2루를 넘어 3루까지 가는 경우가 '추가 진루'다. 2017년 데뷔 이후 김혜성은 가능 상황의 27.2%에서 '추가 진루'에 성공했다. 지난 8년간 김혜성보다 자주 '추가 진루'에 성공한 주자는 없다. 공격적으로 달리면서도, 실수도 적었다. 전체 주루 상황의 2%에서만 주루사를 기록했다. 추가 진루 시도 빈도가 가장 많은 10명 중 가장 낮은 수치다. 즉, 가장 자주 '한 베이스 더'를 노리면서, 실수가 가장 적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기간 '주루 득점 기여'도 압도적인 리그 1위다. 주루 능력이 'KBO리그 역사상 최고 수준'이라면, 2루 수비력은 '당대 최고'다. 김혜성은 2022년과 2024년, 2루수 부문 '수비 득점 기여' 1위에 올랐다. 고척돔의 인조잔디가 '메이저리그 수준'으로 업그레이드되기 전인 2023년까지, 타구 속도를 엄청나게 빠르게 만드는 '내야수들의 악몽'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더욱 인상적인 성취다. 현지 매체가 꼽는 김혜성의 3가지 장점 중 마지막, '콘택트 능력'은 '역대급'인 주루와 수비력의 경지만큼은 아니다. 김혜성의 삼진 비율 10.9%(규정 이닝 타자들 중 최소 6위), 콘택트 비율 86.8%(규정 이닝 타자들 중 12위)는 '상위권'이지만 '정상권'은 아니다. 이 정도의 콘택트 능력은 메이저리그에서 어떻게 '변환'될까? 이 칼럼에서 여러 차례 쓴 것처럼, 삼진 비율은 '가장 적은 표본 크기'로도 의미를 갖는 기록 중 하나다. 세이버메트릭스계의 연구에 따르면 메이저리그에서 타자의 삼진 비율은 '70타석'이면 안정화되기 시작한다. 즉, 70타석만 보면 이 선수가 얼마나 자주 삼진을 당하는 타자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난 5년간 메이저리그에서 70타석을 소화하고, 그 직전 혹은 직후 시즌에 KBO리그에서 100타석 이상 들어선 타자들은 19명이다. 이들의 '빅리그-KBO 삼진 비율'의 상관계수는 0.718. 쉽게 말해, '꽤 관계가 많다.' 빅리그에서 '선풍기'였던 타자는 KBO리그에서도 삼진을 자주 당하고, 한국에서 콘택트를 잘했던 타자는 빅리그에서도 삼진을 잘 당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KBO리그에서 역대 가장 낮은 수준의 삼진 비율을 기록했던 이정후가 지난해 메이저리그에서도 8.2%의, 150타석 이상 들어선 타자들 중 '타격왕' 루이스 아라에스(4.3%)에 이어 두 번째로 낮은 삼진 비율을 기록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거다. 바로 위의 <표5>를 보면, KBO리그에서 김혜성(10.9%)과 비슷한 삼진 비율을 기록한 타자로는 페르난데스와 터커, 아수아헤, 김하성, 마차도, 라가레스 같은 선수들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이 직전 혹은 직후 시즌에 빅리그에서 찍은 삼진 비율은 최소 12.2%(2018년 페르난데스)부터 최대 23.8% (2021년 김하성)까지 다양하다. 삼진 비율이 12%대라면 매우 낮은 수준, 23.8%면 대략 리그 평균(22.6%) 정도다. 즉, 김혜성의 삼진 비율은 비관적으로 추정해도 '빅리그 평균 언저리'일 것이 유력하다. (야구 통계 사이트 Fangraphs는 내년 김혜성의 삼진 비율을 16.2%일 거라고 예측했다.) 어쩌면 다저스 구단은, 김혜성의 '지금'보다 '장기 추세'를 눈여겨봤을 수도 있다. 2018년, 첫 풀타임 시즌을 치른 김혜성의 삼진 비율은 25.2%. 리그 평균(18.2%)보다 한참 높고, 300타석 이상 들어선 타자 84명 중 10번째로 높았다. 즉, 김혜성은 리그에서 콘택트 능력이 가장 낮은 타자들 중 한 명이었다. 위에 쓴 대로 '이 나라에서 선풍기는 저 나라에도 선풍기'일 가능성이 높고, '한 번 선풍기는 영원히 선풍기'일 가능성이 높다. 즉, 콘택트 능력은 타자의 몸에 어린 시절부터 새겨지는 '고유한 경향'처럼 보인다. 현재 리그에서 가장 낮은 삼진 비율을 기록하는 타자들 절대다수는, 데뷔 때부터 '콘택트 귀신'들이었다. 허경민, 김지찬, 김선빈, 신민재, 정수빈, 양의지, 권희동, 그리고 메이저리거가 된 이정후 등은 데뷔 시절부터 삼진을 잘 당하지 않았던 타자들이었다. 그러니까 김혜성처럼, 데뷔 때 콘택트 능력이 매우 약했던 타자가 시간이 흐른 뒤 최상위권의 콘택트 능력을 장착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한 케이스라는 거다. 올 시즌 리그 최저 삼진 비율 타자 10명 가운데, 6년 전보다 삼진 비율이 14% 넘게 낮아진 타자는 김혜성(25.2% → 10.9%)뿐이다. 김혜성이 '오직 콘택트 향상'에 주력하느라 장타력을 포기한 것도 아니다. 2018년 126.7km/h로 리그 최하위권이었던 김혜성의 평균 타구 속도는, 지난해 135.7km/h까지 향상됐다. 아직 최상위권까지 올라오지는 못했지만, 꾸준한 우상향 곡선을 그린 것이다. 이 '향상의 추세'는, 김혜성의 재능과 성실성을 모두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그러니까 다저스 구단은, 김혜성의 현재만큼이나 미래의 발전 가능성에 베팅을 한 게 아닐까. 그것도 빅리그 평균 연봉도 안 되는, 다저스 구단의 재력에는 큰 부담이 되지 않는 액수에. 디자인 : 안준석
SBS 스포츠취재부 야구조 기자들이 매주 색다른 관점으로 야구를 들여다 봅니다. 지난 스토브리그에서 KIA는 가장 자주 2024년의 우승 후보로 거론된 팀이었다. 필자도 그렇게 말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지난 2월, <야구수다>에 '지난해 6위 KIA가 올해 우승 후보인 또 하나의 이유'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요약하자면, "2023년에 KIA는 엄청난 불운에 시달렸기에, 특별한 전력 보강 없이 '운의 정상화'만으로도 우승 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KIA는 정규시즌부터 압도적인 레이스를 펼쳤고, 결국 12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KIA의 우승은 예상됐던, 그리 놀랍지 않은 사건으로 느껴진다. 이 글은 그렇지 않다는 설명이다. 오히려 KIA가 이례적인 악조건, 혹은 불운을 이겨냈다는 이야기다. 시즌 개막 직전, 모두가 예상한 KIA의 선발 로테이션은 이랬다. 1. 윌 크로우 2. 양현종 3. 제임스 네일 4. 이의리 5. 윤영철 이범호 감독이 구상한 선발 로테이션은 시즌 초반부터 붕괴됐다. 4월에 이의리, 5월에 크로우, 7월에 윤영철이 차례로 부상으로 전력으로 이탈했다. 이 중 이의리와 크로우는 수술대에 올라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8월 말에는 네일마저 타구에 맞아 턱이 골절됐다. 결국 시즌 전 구상했던 선발 로테이션에서 규정 이닝을 채운 투수는 최고참 양현종 한 명뿐이었다. 규정 이닝 채운 유일한 선발투수 양현종 프로야구의 페넌트레이스에서 선발진은 '경쟁력 있는 투구로 많은 이닝을 버티는' 역할을 맡는다. 그래야 타선의 힘으로 경기를 이길 기회를 만들 수 있고, 불펜진의 혹사를 방지해 6개월 동안 144경기를 치르는 장기 레이스를 버틸 수 있다. 지난 글에서 쓴 것처럼, 한국시리즈를 우승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정규시즌 우승이다. 프로야구 역사 내내, 정규시즌 1위 팀은 푹 쉬고 치른 한국시리즈에서 7할에 가까운 승률로 상대 팀을 압도했다. 거꾸로 말하면, 선발진이 붕괴된 팀은 정규시즌을 버텨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한국시리즈를 제패하기도 덩달아 어렵다. 그러니까, 망가진 선발진으로 정규시즌을 제패하고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차지한 올 시즌의 KIA가, 대단히 희귀한 경우라는 이야기다. 올 시즌 KIA 선발진의 퀄리티스타트는 단 40번. SSG와 함께 꼴찌였다. 선발진이 책임진 이닝은 709와 1/3이닝. 10개 구단 중 7위에 불과하다. 팀 투수진이 던진 전체 이닝 1,288이닝의 55.1%밖에 책임지지 못한 것이다. 2015년 시작된 '10구단 시대' 이후, 선발진의 기여가 올해의 KIA보다 낮았던 우승팀은? 없다. 올 시즌의 KIA보다 선발진의 기여가 미미했던 우승팀을 찾으려면 22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2002년, 구단 사상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삼성 선발진은 625이닝을 던져 팀 전체 1197.2이닝의 52.2%를 책임지는 데 그쳤다. (여기에는 고려해야 할 변수가 있다. 마무리투수 노장진이 무려 123이닝을 던진 것. 당시 프로야구에는 구대성과 임창용, 노장진 등 '초특급 전천후 투수'들이 100이닝을 넘기는 경우들이 있었다. 이런 투수를 보유한 팀들은 선발진의 노동량이 자연스레 줄어든다. '마무리투수의 100이닝 돌파'는 이때의 노장진 이후로 사라졌다가, 2015년 권혁(한화)이 17세이브-112이닝을 기록하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 KIA의 우승이 '불운을 극복한 결과'라는 근거는 또 있다. 올 시즌 KIA의 '외국인 농사'는 '풍년'과는 거리가 멀었다. 크로우의 부상 때문에 두 번이나 교체 카드를 썼고, 소크라테스의 위력은 준수했지만 압도적이지 않았다. 네일마저 시즌 막판 이탈하면서, KIA 외국인 선수들이 기록한 WAR은 12.2에 그쳤다. 10개 팀 중 6위로 '중하위권'이었다. '10구단 시대'의 챔피언 10개 팀 중에는 7위에 불과하다. 즉, 올 시즌의 KIA는 '외국인 농사가 한 해를 좌우한다'는 야구계 통설의 '반대 사례'에 가깝다. 악조건을 극복한 원동력에는 여러 가지가 꼽힌다. 김도영의 역사적인 시즌, 외국인 공백을 최소화한 프런트의 발 빠른 대응과 투자, 그리고 격랑 속에서 흔들리지 않았던 이범호 감독의 '큰 리더십'.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이유였는지를 밝히는 건 필자의 깜냥을 넘어선다. 확실한 것은, 올해 KIA의 우승이 '행운의 결과'라기보다는 '불운을 극복한 결과에 가깝다'는 것. 이 사실은 다른 팀들에겐 악몽이다. 내년에 KIA 선발진이 올해처럼 궤멸하지 않고 '중간만 가도', 혹은 외국인 농사가 조금 '덜 불운'해도, KIA는 올해보다 더 강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진 : 연합뉴스, 디자인 : 안준석
SBS 스포츠취재부 야구조 기자들이 매주 색다른 관점으로 야구를 들여다 봅니다. "일단은 일본 가는 게 목표." 프리미어12 야구 대표팀 류중일 감독이 9일 오후 타이완 타이베이 톈무야구장에서 열린 첫 훈련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류중일 야구 대표팀 감독이 지난 9일 프리미어12 1라운드가 열릴 타이완으로 출국하면서 밝힌 목표다. '조별리그 통과'는 21세기 한국 대표팀의 목표치고는 꽤 소박하다. 대회 전에 '우승', '메달 획득', '4강 진출' 등을 목표로 내걸지 않았던 경우는, 모든 게 미지수였던 2006년 제1회 WBC가 마지막이었던 듯하다. (당시 대회 전 김인식 감독이 밝힌 목표는 '8강 진출'이었다. '김인식호'는 일본과 미국을 연파하고 4강에 진출하는 이변을 일으키며 '한국 야구 국제대회 전성기'의 서막을 열었다.) '이례적으로 겸손한 목표'를 팬들도 충분히 납득하는 듯하다. 대표팀은 최근 아시안게임을 제외한 주요 국제대회에서 부진을 거듭하고 있다. 게다가 현재 '세대 교체' 중이다. <스탯티즈> 기준 올 시즌 국내 타자 WAR 상위 20명 중에 대표팀에 승선한 선수는 6명뿐이다. 에이스 역할을 맡을 예정이던 원태인과 문동주마저 부상으로 이탈했다. 타선과 선발진 모두 예년보다 무게감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팬들이 눈높이를 낮추는 건 당연하다. 프리미어12 야구 대표팀 선수들이 9일 오후 타이완 타이베이 톈무야구장에서 열린 첫 훈련에서 몸을 풀고 있다. 게다가 다른 나라들의 전력이 과거 프리미어12 대비 약해진 것 같지도 않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현역 메이저리거들은 출전하지 않지만, 지난 10년간 미국과 일본 야구계를 휩쓴 '구속 혁명' 속에, 다른 나라 팀들은 (한국 기준) '광속구' 투수들이 늘었다. 지난 10년간 KBO리그의 직구 평균 시속이 2.5km 빨라지는 동안, NPB는 5.5km, MLB는 6km 빨라진 영향이 '비 메이저리거' 투수들에게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류중일호'에 희망은 없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불펜진의 위력이 '역대 최고 수준'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투수의 위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표는 '탈삼진 비율'이다. 타자가 칠 수 없을 정도로 위력적인 공을 던지는 투수는 당연히 삼진이 많기 때문이다. 올 시즌 KBO리그의 평균 삼진 비율은 18.9%. 프로야구 출범 이후 최고치다. 리그 최고의 '토종 K 머신'이었던 안우진이 병역 복무 중이고, 고우석이 미국에 진출했지만 삼진이 늘어난 이유는? 삼진을 잘 잡는 젊은 투수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그 투수들이 지금 대표팀 불펜에 모여 있다. 올 시즌 KBO리그에서 25이닝 이상 소화한 국내 투수들 137명 중, 탈삼진 비율 25%를 넘긴 투수는 6명. 이들 중 대표팀에 승선하지 않은 선수는 김영규(NC. 26.2%로 5위) 한 명뿐이다. 즉, 리그 최고의 '닥터 K'들이 대부분 태극마크를 단 것이다. 위 표의 상위 5명은 이번 대표팀 불펜의 핵심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10일 오후 타이완 타이베이 톈무야구장에서 열린 프리미어12 한국 야구 대표팀과 타이완 프로야구팀 웨이취안 드래곤스와의 연습 경기에서 조병현이 역투하고 있다. 삼진 비율 25%를 넘긴 투수 5명이 대표팀에 승선한 경우는? 2015년 프리미어12 이후 9년 만에 처음이다. 2015년 프리미어12는 한국 대표팀이 마지막으로 '세계 정상'에 오른 대회다. 여기에 KIA의 12번째 우승을 마무리한 정해영의 탈삼진율도 23.8%로 수준급이다. 게다가 퓨처스리그에서 복귀한 7월 이후, 김서현의 탈삼진율도 28.3%에 달했다. 즉, 류중일 감독은 경기 중후반에 상대 타선을 압도할 무기를 손에 꽤 많이 쥔 것이다. 게다가 4차례 평가전을 통해 이 투수들 모두가 정규시즌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나은 구위를 보여줬다. 국제대회는 대부분 '평생 처음 보는 투수와 타자들의 대결'로 채워진다. 이런 승부에서는 당연히 투수가 유리하다. 타자가 낯선 투수를 상대로 고전한다는 건 야구 연구계에서 여러 차례 증명된 진실이다. 거기에 대해, '불펜 벌떼 작전'을 펼쳐 상대 타자가 모든 타석에 각기 다른 투수를 상대하게 한다면? '낯섦 효과'는 더 강해진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6년 WBC다. 당시 김인식 감독은 박찬호, 김병현, 구대성, 봉중근, 오승환, 김선우 등 '전현직 메이저리거'들을 '보직 파괴-벌떼 작전'으로 투입해 '야구 강국'의 강타선을 무력화했다. 그래서 류중일 감독은 지금 이런 희망을 품고 있을 것이다. 선발진이 3~4이닝을 최소 실점으로 버틴 뒤, 역대 최고 수준의 탈삼진 능력을 가진 불펜이 중후반을 봉쇄하고, 타선이 '필요한 만큼의' 점수를 내 이기는 시나리오. 아주 강하지 않은 타선과, 강력한 불펜이 특징인 팀의 경기는 '저득점의 접전'이 되는 경향이 있다. 즉, 승패 여부와 상관없이, 이번 대회 우리 대표팀은 모든 승부를 손에 땀을 쥐는 접전으로 펼칠 가능성이 높다. 사진 : 연합뉴스, 디자인 : 안준석
SBS 스포츠취재부 야구조 기자들이 매주 색다른 관점으로 야구를 들여다 봅니다. KBO리그 사상 최고의 흥행을 기록한 43번째 시즌에, 타이거즈와 라이온즈가 한국시리즈에서 맞붙게 된 건 '역사적 상징'처럼 보인다. 한국시리즈에 11번 진출해 '불패 신화'를 이어가고 있는 최다 우승팀 타이거즈와, 역대 최다인 '17차례 진출'과 7번의 우승을 일군 라이온즈의 맞대결은 단연 '최고 흥행 카드' 중 하나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두 팀은 한국시리즈에서 1986년과 1987년, 1993년 세 차례 맞붙었다. 3번 모두 해태가 승리해, '왕조'를 이어갔다. 해태에 발목을 잡혀 '한국시리즈 7연속 준우승'의 오명을 썼던 삼성은, 2002년 이승엽과 마해영의 드라마틱한 백투백 홈런으로 징크스를 깬 뒤, 21세기 최다 우승팀이 됐다. 그래서 이번 한국시리즈는 '20세기 대표 왕조'와 '21세기 대표 왕조'의 대결이기도 하다. 객관적 전력은 당연히 KIA의 우세다. 근거는 다음과 같다. 20일 오후 열린 한국시리즈 미디어데이. 양 팀 감독과 선수들이 우승의 향방이 5차전에서 결정될 거라며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쳐 보이고 있다. 1. KIA는 명실상부한 2024년 최강팀이다. KIA는 유일하게 승률 6할을 넘기며 정규시즌을 제패했다. 총득점과 총실점을 바탕으로 팀의 '실제 전력'을 보여주는 '피타고라스 승률'도 0.561로 1위다. (삼성은 0.534로 3위였다.) 2. 한국시리즈에서는 이변이 잘 벌어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치러진 41번의 한국시리즈 가운데, 프로야구 초창기의 '전후기리그', 혹은 99년의 '양대리그'가 아니라 현재처럼 '단일리그 체제'에서는 34번의 한국시리즈가 열렸다. 이 중 정규리그 1위 팀은 29번 정상에 올랐다. 이변이 일어난 경우는 5번에 불과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정규리그 1위 팀은 이 34번의 '단일리그 한국시리즈'에서 123승 61패 5무를 기록해 승률 0.688을 기록했다. 이 팀들의 정규시즌 평균 승률은 0.597에 '불과'했다. 즉, 한국시리즈에서 정규시즌보다 훨씬 높은, 7할대에 육박하는 승률을 찍은 것이다. 즉, 정규시즌 우승팀은 한국시리즈에서 '더 강해진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국시리즈 상대팀이 약체가 아니라, 해당 시즌의 최강 팀 중 하나라는 걸 감안하면 더욱 인상적인 대목이다. 2015년 이후의 '10구단 시대'로 범위를 좁혀 봐도 상황은 비슷하다. 9번의 한국시리즈에서 이변은 2015년의 두산과 2018년의 SK, 단 2번뿐이었다. (이 중 2015년에는 정규시즌 우승팀 삼성이 한국시리즈 직전 '원정 도박' 파문으로 전력이 궤멸한 변수가 있었다.) '10구단 시대' 한국시리즈에서 정규시즌 우승팀의 승률은 0.689 (31승 14패). 위에 소개한 프로야구 통산 기록과 거의 똑같다. 이 팀들의 정규시즌 평균 승률 0.614보다 꽤 높아졌다.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휴식 효과'일 가능성이 높다. 한국시리즈 우승팀은 정규시즌이 끝난 뒤 3주 정도의 휴식을 누린다. 이 기간 동안 '경기 감각'이 저하되는 손해보다, 전력을 정비하며 부상을 치료하며 체력을 충전하는 이득이 훨씬 큰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 중 하나가 투수들의 '구속 증가'다. 2년 전 다른 매체에 쓴 것처럼, 한국시리즈 직행팀 투수들의 80%는 정규시즌보다 빠른 공을 던졌다. 더 싱싱한 구위로 상대 타자들을 힘으로 찍어 누른 것이다. 반면 플레이오프를 치르고 올라온 팀의 투수들은 정규시즌보다 구속이 느려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 3. 게다가 삼성의 '투타 간판'이 부상 중이다. 삼성은 최근 전력에 큰 타격을 입었다. 에이스 코너와 백정현, 최지광이 이탈한 데 이어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구자욱이 무릎 부상으로 쓰러졌다. 코너는 결국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제외됐고, 플레이오프 때 무릎을 다친 구자욱의 출전 여부도 불투명하다. 반면 KIA는 에이스 네일이 돌아와 1차전에 선발로 나서고, 임기영을 제외하면 전력 공백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두 팀의 전력 차는 정규시즌 때보다 더 크게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삼성에게는 희망이 없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단기전에는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다만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1. 구자욱의 빠른 회복 : 설명이 필요 없다. 2. 김윤수의 '각성'이 진짜여야 한다. 지난 글에 쓴 내용을 다시 옮겨본다. 2007년 발간된 '세이버메트릭스 개론서' 성격의 'Baseball Between the Numbers'라는 책이 있다. 지금은 데이터 기반 저널리즘 사이트 'Fivethirtyeight'을 창업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네이트 실버와 데인 페리는 이 책에서,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 승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변수로 3가지를 꼽았다. 1. 마무리 투수의 능력 2. 투수진 전체 탈삼진 능력 3. 팀 수비력 물론 이 가설은 진리가 아니고, 한국의 가을야구에서 객관적 증명을 거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직관과 어느 정도 일치. '큰 경기는 수비 싸움', '포스트시즌은 투수 싸움' 같은 가을야구의 '클리셰'를 우리는 수없이 들어왔다. 위의 '3가지 변수' 중 1번은 세이브왕 정해영을 보유한 KIA의 우세다. 2번도 KIA가 꽤 앞선다. 정규시즌 KIA 투수진의 탈삼진 비율은 19.5%로 17.2%의 삼성보다 꽤 높았다. KS 엔트리에 포함된 투수들 중 탈삼진 비율 20%를 넘긴 투수가 7명(곽도규, 라우어, 정해영, 장현식, 네일, 김대유, 이준영)이다. 삼성은 한 명도 없다. 삼성은 플레이오프에서, '결정적 위기를 힘으로 제압할 넘길' 희망을 봤다. 3경기 연속 LG의 최고 타자 오스틴과 대결해 무서운 강속구로 '3전 전승'을 올린 김윤수다. 최근 2년간 퓨처스 기록을 보면, 김윤수의 탈삼진 능력은 '진짜'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김윤수의 각성이 '진짜'라면, 삼성은 경기 후반 불펜 싸움을 대등하게 펼칠 무기를 얻게 되는 셈이다. 3. '팀 수비'라는 견고한 발판 위 3가지 변수 중, 삼성이 확실하게 앞서는 대목이 팀 수비력이다. 플레이오프 중계방송에서 여러 차례 소개된 것처럼, 삼성은 올 시즌 최강의 팀 수비를 자랑했다. 81개의 실책만 기록해 최소 실책 1위, 98.4%의 팀 수비율로 전체 1위를 차지했다. KIA는 146개로 최다 실책 1위, 그래서 수비율 97.3%로 꼴찌였다. 삼성의 팀 수비가 '안정적이기만' 했던 것도 아니다. 이 칼럼에서 여러 차례 소개한 것처럼, 팀 수비의 가장 큰 목표는 '인플레이된 타구를 아웃으로 연결하기'다. 이 목표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지표가 DER(수비 효율. 인플레이 아웃/인플레이 타구)이다. 삼성의 정규시즌 DER은 68.3%. 즉, 인플레이 타구의 68.3%를 아웃으로 연결했다. 압도적인 리그 1위다. 66.7%로 5위인 KIA보다 꽤 앞섰다. 유격수 이재현, 3루수 김영웅, 중견수 김지찬 등 젊은 주전 야수들이 뛰어난 운동 능력과 판단력, 안정된 타구 처리로 폭넓은 수비망을 구축한 것이다. 삼성의 견고한 수비력은 플레이오프에서도 잘 드러났다. 즉, 젊은 주전 야수들이 생애 첫 가을야구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좋은 수비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즉, 삼성이 이변의 가능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큰 경기는 수비 싸움'이라는 격언대로, 트레이드마크인 '질식 수비'로 KIA의 가공할 공격력을 억제해야 한다. 자료 출처 : 스탯티즈, KBO 홈페이지 사진 : 연합뉴스, 디자인 : 안준석
SBS 스포츠취재부 야구조 기자들이 매주 색다른 관점으로 야구를 들여다 봅니다. '사상 첫 천만 관중'이라는 놀라운 흥행이 KBO리그 정규 시즌을 지배했다면, 가을 야구의 초입은 'KT의 마법'이 지배하고 있다. 와일드카드 결정전 2경기 내내 단 한 점도 내주지 않는 '철벽 방패'로 두산을 압도하며, 사상 처음으로, 5위 팀의 준플레이오프 진출이라는 새 역사가 만들어졌다. 이제 지난해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었던 LG와 KT의 재대결이 플레이오프로 무대를 옮겨 펼쳐진다. 당연히 객관적 전력은 LG가 우세다. LG는 정규시즌에서 KT보다 많은 점수를 냈고, 훨씬 적은 점수를 내줬다. 즉, 공수 모두 KT보다 나았다. 그래서 실제 승률과 피타고라스 승률 모두 KT보다 꽤 앞섰다. 상대 전적에서도 9승 7패로 우위를 점했다. 이변이 많지 않은 준플레이오프의 역사도 LG 편이다. 포스트시즌이 지금의 체제(와일드카드 결정전부터 한국시리즈까지)가 된 2015년 이후, 준플레이오프에 선착했던 정규시즌 3위 팀은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치르고 온 상대 팀을 압도했다. 2015년 이후 9시즌에서 3위 팀의 준플레이오프 승률은 0.647(22승 12패). 준플레이오프 상대 팀과의 정규 시즌 상대 승률 0.512보다 훨씬 높다. 즉, 정규시즌 때 비등비등했던 전력의 균형이, 준플레이오프에서는 3위 팀 쪽으로 확 기우는 것이다. 4위 팀이 와일드카드전에서 전력을 소모하는 동안, 3위 팀이 잠시 휴식을 취하며 전력을 정비하는 효과가 이렇게 큰 것이다. 3위 팀이 플레이오프에 오르지 못한 경우는 단 2번(2018년 한화, 2021년 LG)뿐이다. KT 선발진의 상황도 LG에 유리함을 더한다. 9월의 부진을 떨치고 와일드카드 2차전에서 눈부신 호투를 펼친 웨스 벤자민은 리그 최고의 '좌타 킬러' 중 한 명이다. LG 타선은 올 시즌 전체 타석의 64%가 좌타자였다. 43년 프로야구 역사에서 올해의 LG보다 좌타 비율이 높았던 팀은 지난해의 LG(65%)뿐이다. 즉, LG는 리그 역사상 가장 '좌편향'이 심한 타선이다. 올가을에도 주전 라인업 9명 중 오스틴, 박동원을 제외한 7명을 좌타자로 채울 것이다. 그래서 만약 벤자민이 1차전과 5차전을 던질 수 있었다면, LG로선 꽤 곤란한 상황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어제(3일) 88구를 던진 벤자민은 최소한 2차전까지는 나올 수 없을 것이고, 준플레이오프 선발 등판은 한 번뿐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KT에겐 희망은 없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숫자를 자세히 보면, 또 한 번의 '마법의 근거'도 충분하다. 2007년 발간된 '세이버메트릭스 개론서' 성격의 'Baseball Between the Numbers'라는 책이 있다. 지금은 데이터 기반 저널리즘 사이트 'Fivethirtyeight'의 창업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네이트 실버와 데인 페리는 이 책에서,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 승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변수로 3가지를 꼽았다. 1. 마무리 투수의 능력 2. 투수진 전체 탈삼진 능력 3. 팀 수비력 물론 이 가설은 진리가 아니고, 한국의 가을야구에서 객관적 증명을 거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직관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위 3가지 요소 중, KT가 확실히 뒤지는 건? 없다. 1. 마무리 투수의 능력 유영찬(LG)은 리그 정상급의 마무리 투수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생생하게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박영현(KT)의 구위가 유영찬에 뒤진다고 보기는 애매하다. 특히 후반기의 성적을 보면 더욱 그렇다. 물론 유영찬은 일주일 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했고, 박영현은 5위 결정전부터 3일 연속 등판해 체력을 더 소모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KT의 마무리 투수가 LG에 뒤진다는 근거는 없다. 범위를 불펜 전체로 넓혀보면 KT의 우위가 더 커진다. 지난해 우승 뒤 고우석과 이정용이 이탈하고, 정우영과 박명근이 부진, 함덕주가 부상에 시달린 불펜은 올 시즌 LG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올 시즌 LG의 불펜 승리기여도(WAR)는 3.18. 10개 팀 중 9위에 불과했다. 반면 KT는 박영현 외에도 김민, 우규민, 김민수 등이 쏠쏠한 활약을 펼치며 쓸만한 불펜을 구축했다. 게다가 지난해 맹활약을 펼쳤지만 올 정규시즌에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손동현까지 가을 들어 구위가 살아난 것으로 보인다. 지난 와일드카드 1차전에서 손동현이 기록한 직구 평균 시속은 144.6km. 정규시즌 때의 142.5km보다 2km 넘게 빨라졌다. 2. 투수진 전체 탈삼진 능력 정규시즌 때 LG 투수진의 탈삼진 비율은 19%. KT는 19.5%였다. LG의 새 외국인 투수 에르난데스가 28.2%의 최정상급 삼진 비율을 기록 중이라는 걸 감안해도, 역시 LG가 확실히 앞선다고 볼 근거는 부족하다. 3. 팀 수비력 KT 수비진은 정규시즌에 116개의 실책을 범했다. LG의 102개보다 꽤 많다. 하지만 실책 수는 수비력을 보여주는 데 한계가 많은 지표다. 수비 범위가 넓고 공격적인 수비를 하는 선수나 팀은 실책도 많은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가장 수비 범위가 넓었고 어깨가 강했던 유격수 중 한 명으로 꼽히는 1994년의 이종범이 리그 실책 1위였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아직 수비 관련 지표가 발달하지 않은 국내에서, 팀 수비력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는 숫자 중 하나는 DER(Defense Efficiency Rating. 수비 효율)이다. 팀 수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인플레이 타구를 아웃으로 연결하기'다. DER은 '인플레이 타구를 아웃으로 연결한 비율'이다. 팀 수비의 가장 중요한 능력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숫자인 셈이다. 올 시즌 리그 평균 DER은 66.6%다. 즉 전체 인플레이 타구의 66.6%가 아웃으로 연결된 것이다. 올 시즌 전반기, KT 수비진의 DER은 64.6%. 리그 평균보다 꽤 낮은 전체 8위에 불과했다. LG의 66.9%보다 꽤 낮았다. 그런데 후반기에는 달라졌다. KT의 DER이 66.2%로 꽤 향상됐다. 후반기 LG의 DER 66%보다도 약간 높았다. 후반기에 KT에 있었던 일은? 병역을 마친 주전 유격수 심우준이 복귀했다. 그리고 전반기에 중용됐지만 수비에 아쉬움이 있었던 신예 천성호 대신, 수비가 탄탄한 베테랑 김상수와 오윤석이 2루수로 투입됐다. 그러니까 지금 KT는 LG와 큰 차이가 없는 수비력으로 준플레이오프를 치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디자인 : 이희문
SBS 스포츠취재부 야구조 기자들이 매주 색다른 관점으로 야구를 들여다 봅니다. 지난해 항저우 아시안게임과 11월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문동주는 '차세대 국가대표 에이스'로 공인받았다. 프로 데뷔 후 2번째 시즌까지 아직 리그를 평정하지는 못했지만, 누구보다 싱싱한 구위를 가졌기에 잠재력을 꽃피우는 건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래서 문동주가 올 시즌 전반기에 겪은 심각한 슬럼프는 놀라웠다. 전반기 14경기에서 문동주의 평균자책점은 6.26. 50이닝 이상 던진 투수 42명 중 40위였다. 탈삼진 비율 14.8%는 42명 중 39위였다. 즉, 문동주는 전반기에 가장 위력이 없는, 리그 최악의 투수 중 한 명이었다. 그래서 후반기에 보여주고 있는 반등은 더 놀랍다. 후반기 5차례 이상 선발 등판한 국내 투수 25명 중, 문동주는 평균자책점과 탈삼진 비율, 삼진/볼넷 비율 1위에 올라와 있다. 쉽게 말해 후반기에 문동주보다 잘 던지고 있는 토종 선발투수는 없다. 프로야구 43년 역사 전체를 살펴봐도, 후반기의 문동주 수준의 위력을 보인 토종 선발투수는 드물다. 한 시즌 10차례 이상 선발 등판해 삼진 비율 27% 이상, 볼넷 비율 5% 미만, 평균자책점 2.7 미만을 모두 기록한 국내 투수는 1991년의 선동열 단 한 명뿐이다. 그러니까 전반기 최악의 투수 중 한 명이, 갑자기 역대 최고 수준의 에이스로 재탄생한 것이다. 문동주는 지난 3일 두산전을 마친 뒤, 반등의 이유를 '건강 회복'이라고 꼽았다. 견갑골 쪽 통증이 있어서 직구 구위가 예전 같지 않았고, 그 통증이 사라지면서 직구가 살아났다는 것. 한화 팀 관계자들에 따르면 문동주는 지난해 아시안게임 이후부터 견갑골에 미세한 통증을 느껴온 것으로 알려졌다. 전반기 부진으로 퓨처스리그로 내려간 뒤, 충분한 휴식과 보강 운동으로 이 통증을 마침내 제거했다는 것이다. 통증이 사라진 문동주의 직구는 몰라보게 빨라졌다. 지난해 (PTS 기준) 시속 150.9km였던 문동주의 직구 평균 속도는 올 시즌 전반기 내내 140km 후반대에 머물렀다. 그리고 후반기 들어 지난해의 속도를 회복했다. 타자들은 국내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엄청난 속도에 다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전반기보다 조금 더 일찍 스윙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타자들의 머릿속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변수가 하나 더 추가됐다. 문동주는 원래 강속구와 슬라이더, 커브가 주무기였다. 슬라이더와 커브는 모두 우타자의 바깥쪽으로 휘어지는 궤적을 그린다. 모든 타자는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즉 바깥쪽으로 휘어지는 변화구에 약하다. 즉, 문동주 같은 오른손 투수에게 슬라이더와 커브는 우타자를 효과적으로 잡아내는 무기다. 반면 좌타자에게는 효과가 떨어진다. 좌타자의 몸쪽으로 휘어져 들어오기 때문에 좌타자로서는 대처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그래서 우투수가 좌타자를 잘 잡으려면 슬라이더/커브 계열이 아닌, 좌타자의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변화구가 필요하다. 투수가 '반대 손 타자'를 잡는 대표적인 무기 중 하나는 체인지업이다. 우투수의 체인지업은 좌타자의 바깥쪽으로 휘면서 떨어지는 궤적을 그린다. 원태인, 이재학 등 '체인지업 장인' 우투수들이 좌타자에게 강한 이유다. 체인지업은 문동주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좀처럼 마음먹은 대로 제구가 되지 않았고, 너무 많이 빠져 볼이 되거나 가운데로 몰려 난타당했다. 프로 생활 내내, 문동주가 좌타자에게 고전한 이유다. 그래서 문동주는 다른 길을 가기로 했다. 말을 안 듣는 체인지업을 버리고, 포크볼을 선택했다. 포크볼은 보통 체인지업보다 약간 빠르고, 조금 더 직구와 비슷한 궤적으로 오다가 급격하게 떨어진다. 체인지업과 공통점은 '반대 손 타자'의 바깥쪽으로 휘며 떨어지는 궤적이다. 그래서 반대 손 타자를 잡아내는 무기가 된다. PTS 데이터에 기반한 네이버 문자중계에 따르면, 문동주는 8월 1일 KT전 3회, 로하스를 상대로 포크볼을 처음 선보여 유격수 앞 병살타로 유도했다. 이후 지난 3일 두산전까지 51개의 포크볼을 던졌다. 결과는 경이롭다. 51개 중 22개의 볼과 5개의 루킹 스트라이크를 빼고, 타자들은 24번 방망이를 냈다. 이 중 13번이 헛스윙으로 끝났다. 스윙했을 때 방망이에 맞춰내는 확률이 46%에 불과했던 것이다. 콘택트 비율이 50% 미만이라는 건 프로야구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다. 현재 KBO리그 최고의 '마구'로 꼽히는 변화구들의 콘택트 비율을 살펴보자. 리그 전체에서 타자들이 가장 방망이에 맞추기 어려워하는 구종은 장현식의 슬라이더다. 콘택트 비율이 45.5%에 불과하다. 다른 구종들은 모두 콘택트 비율 50%를 넘는다. 사실 위 표에서 보듯, 콘택트 비율이 60% 초반 정도만 되어도, 리그 최정상급의 유인구로 평가된다. 그런데 문동주의 '초보 포크볼'이, 위의 '리그 대표 마구'들에 못지않은 헛스윙 유도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헛스윙이 아닌 나머지 결과들도 놀랍다. 위의 '문동주 포크볼 51개의 결과' 표에서 보듯, 방망이에 맞춰낸 11번의 경우 중, 안타가 된 경우는 딱 1번뿐이었다. 8월 27일 롯데전 3회 황성빈에게 허용한 유격수 쪽 내야안타다. 즉 아직 문동주의 포크볼을 받아쳐 외야로 뻗어 나가는 안타를 만드는 데 성공한 타자가 단 한 명도 없는 것이다. 문동주의 포크볼로 타석이 마무리된 경우는 17차례다. 그중 땅볼 아웃이 5번, 뜬공 아웃이 2번이었다. 나머지 10번은? 모조리 삼진이었다. (헛스윙 삼진이 9회, 루킹 삼진 1회) 볼넷은 한 번도 없었고, 안타는 위에 쓴 황성빈의 내야안타 1개뿐이었다. 앞으로도 문동주의 포크볼이 이 정도로 '전례 없는 수준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일 가능성은 물론 낮다. 타자들이 몇 번 지켜보고 나면, 대응 능력도 향상될 것이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것처럼, 문동주에게는 이미 리그 최상위급의 3가지 구종, 직구-슬라이더-커브가 있다. 포크볼에 신경 쓰는 타자는, 거꾸로 문동주의 다른 구종에 당할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것이다. 결론은 이렇다. 지금 문동주는, 우리가 오래전부터 예상하고 기대한 '대한민국 에이스'로 진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드래프트 동기 김도영이 리그 최고 스타로 떠오른 2024년, 조금 늦게 '문동주의 시간'도 시작됐다. *위 글에 사용된 데이터는 2024년 9월 5일 기준입니다. 사진 : 연합뉴스 디자인 : 안준석
김도영(KIA)이 아니었다면, 2024년 KBO리그는 '김택연의 시간'으로 기억됐을 것이다. 19살 신인 투수가 김택연처럼 리그를 압도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김택연의 2024년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수많은 방법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야구 통계 사이트 '스탯티즈'에서 볼 수 있는 지표 'ERA-'는 '리그 평균 대비 평균자책점'이다. 예를 들어 ERA-가 50이라면, 평균자책점이 리그 평균 대비 딱 절반이라는 뜻이다. 김택연의 ERA-는 40.9다. 올 시즌 극심한 타고투저 현상에 시달리는 리그 전체 평균자책점이 4.87인 반면, 김택연의 평균자책점은 그 40.9%인 1.94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프로야구 43년 역사상, ERA-가 50 이하인 19살 투수는? 김택연뿐이다. 김택연의 구위보다 더 놀라운 건, 진화 속도다. 김택연은 지난 6월 13일, 두산의 새 마무리 투수로 낙점됐다. 김택연은 마무리 낙점 이후, 그 전보다 훨씬 더 잘 던지고 있다. 더 중요한 보직을 맡아 중압감에 흔들리기는커녕, 삼진은 늘고 볼넷과 실점은 줄었다. 특히 놀라운 것은 탈삼진 능력이다. 이미 지난 5월부터 SBS를 비롯해 여러 매체에서 주목한 대로, 김택연은 프로야구 역사상 19살 투수로는 가장 뛰어난 탈삼진 능력을 보이고 있었다. 김택연의 시즌 탈삼진 비율 29.5%는 역대 규정이닝의 30% 이상 던진 19살 투수들 중 1위다. ▷ SBS 8뉴스 리포트 <'첫 세이브' 김택연…무시무시한 '19세 닥터K'> <표2>에서 보듯, 김택연의 탈삼진 비율은 마무리 전환 이후 더 올라갔다. 6월 13일 마무리 낙점 이후의 탈삼진 비율 32.1%를 시즌 내내 찍었다면, 규정이닝의 30% 이상 던진 투수들 중 앤더슨(SSG. 33.7%)에 이어 2위이자 국내 투수들 중 1위가 됐을 것이다. 즉, 현역 최고의 'K 머신'이 19살 투수인 것이다. 그래서 6월 13일 이후, KBO리그 최고의 마무리 투수는 김택연이다. 김택연은 어떻게 시간이 갈수록 더 잘 던질까?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구속 향상이다. 스프링캠프 연습경기와 시범경기에서 호투쇼를 펼치며 개막전 1군 엔트리에 이름을 올린 김택연은 3월 3경기에서 직구 평균 시속 146.7km를 찍었다. 잠시 2군에 내려갔다 온 4월에는 145.9km로 조금 내려갔지만, 이 정도로도 고졸 루키로는 대단히 훌륭한 속도였다. 하지만 기온이 올라가면서 김택연의 강속구는 점점 빨라졌다. 5월에 시속 148km를 돌파하더니, 8월에는 149km도 넘어섰다. 8월에 직구 평속이 김택연보다 빠른 국내 투수는 문동주와 김서현(한화. 둘 다 151.2km)뿐이다. (야구팬들이 잘 아는 것처럼, 다른 측정 시스템에는 이 글에서 사용한 PTS보다 더 빠른 속도가 찍히고 있을 것이다) 즉, 시간이 갈수록 지치기는커녕 진화하고 있는 김택연은 현재 국내 최고의 '파이어볼러 클로저'일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청소년 대표팀에서 혹사 논란이 불거질 정도로 많은 공을 던졌고, 지금도 팬들이 걱정할 정도로 막중한 임무와 노동량을 짊어지면서도, 점점 더 뛰어난 투수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이렇게 압도적이고, 강속구처럼 무서운 속도로 커나가는 19살 투수는 우리 인생에 처음이다. *위 글에 사용된 데이터는 2024년 8월 22일 기준입니다. 사진 : 두산 베어스 제공, 연합뉴스 디자인 : 안준석
프로야구에서 시즌을 치르다 보면, 시즌 시작 전에 구단이 짠 전력 구상대로 흘러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주전으로 낙점됐던 누군가는 부상과 부진에 빠진다. 기존 주전의 공백은 다른 누군가에게 기회가 된다. 부상과 부진을 완벽하게 피해가는 팀은 없다. 그래서 선수층, 이른바 '뎁스'는 팀 성적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변수 중 하나다. 주전의 부상과 부진을 후보들이 어느 정도 메우면서, 혹은 더 나은 실력으로 기존 주전을 위협하고 자리를 빼앗는 과정에서, 팀이 강해진다. 주전과 후보를 명확히 구분하는 기준은 없다. 일부 '붙박이'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입지가 유동적이다. 하지만 KBO리그에는 각 팀이 시즌 초반에 누구를 주전으로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단서가 있다. 지난 5월 8일까지 각 팀은 '올스타 후보' 명단을 KBO에 제출했다. 선발-중간-마무리투수, 그리고 야수 9명까지 포지션별 최고 선수 12명씩을 제출했다. 이들 중 야수 9명은 그 시점까지 각 팀이 '주전'이라고 평가했던 선수이다. 반대로 올스타 후보 명단에 포함되지 않은 선수는 그 시점까지 각 팀이 '벤치 요원'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올스타 후보에 포함되지 않았던 야수들의 활약을 계산해 보면, 각 팀이 시즌 초반에 '이가 아닌 잇몸'으로 생각했던 야수들의 기여도를 짐작할 수 있다. 즉, '야수진 뎁스'의 양과 질을 추정할 수 있다. 1. 롯데, '비 올스타 후보 타석 1위' 롯데 김태형 감독은 시즌 내내 골머리를 앓았다. 시즌 전 주전으로 점찍었던 야수들이 4월에 집단 부진으로 2군으로 내려갔고, 시즌 내내 부상 악령이 팀을 괴롭혔다. 롯데의 포지션별 최다 출전 야수 9명(유강남/나승엽/고승민/손호영/박승욱/레이예스/황성빈/윤동희/전준우)이 모두 함께 선발 출전한 경기는? 놀랍게도 단 한 경기도 없다. 그래서 롯데는 올 시즌 현재까지 '잇몸 의존도'가 가장 높은 팀이다. '올스타 후보'에 포함되지 않은 롯데 야수들은 올 시즌 1,100타석에 들어섰다. 위 표에서 보듯 10개 구단 중, '비 올스타 후보 야수'가 1,000타석 넘게 소화한 팀은 롯데밖에 없다. 박승욱과 정훈, 최항, 이학주가 100타석을 넘겼고, 지난해 주전급으로 활약한 김민석과 노진혁이 70타석 이상씩 들어섰다. 이들이 창출한 RC*는 124.5. 당연히 10개 구단 중 1위다. 롯데의 팀 득점이 443점이니까, 대략 팀 공격력의 28%를 '잇몸'이 책임진 것이다. *RC : Run Created 혹은 '득점 창출'. 각 플레이의 '득점 가치'를 모두 더해, 해당 선수 혹은 팀이 창출한 공격 기여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어떤 선수의 시즌 RC가 10이라면, 그 선수는 10점 정도의 '공격 기여'를 한 것이다. wRC+, WAR 등 요즘 많이 쓰는 '2차 스탯'들의 할아버지 격인 RC는 지금도 꽤 유용하다. 예를 들어 개별 타자들의 RC를 모두 합치면, 팀의 총득점과 비슷해진다. 현재 롯데의 팀 득점은 5위, 팀 OPS(0.775)는 3위다. 하지만 KBO리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롯데 타선을 '리그 최고 수준'으로 느낀다. 당연한 일이다. '올스타 후보', 즉 '시즌 초반 주전'들의 OPS만 보면, 롯데는 KIA를 근소하게 제치고 리그 1위다. 시즌 초반 부진했던 올스타 후보 3루수였던 한동희가 전력에서 이탈했고, OPS 0.733으로 (200타석 이상) 유격수 중 3위인 박승욱이 새로 주전 자리를 꿰찬 것까지 감안하면, 롯데의 '주전 공격력'은 위 표의 숫자보다 조금 더 강해진다. 즉 '완전체 타선'의 파괴력은 롯데가 최고일 가능성이 높다. 2. KIA '잇몸 성능' 1위 위에 설명한 것처럼, 전반기에 KIA는 '주전 공격력'은 롯데에 살짝 뒤졌다. 소크라테스와 나성범이 오랫동안 지난해의 위력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 결정적 이유로 보인다. 하지만 KIA가 팀 득점과 OPS 등 대부분의 팀 공격 지표에서 1위에 오른 이유는? '어지간한 이만큼 강력했던 잇몸' 때문이다. KIA의 '비 올스타 야수진'이 기록한 OPS는 0.770. 리그 전체 평균 OPS 0.767보다 조금 높다. 즉, 기아의 '잇몸'은 리그의 '평균 야수'들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공격력을 뽐낸 것이다. 시즌 초반 후보였던 한준수가 기존 주전 김태군보다 월등한 공격력으로 출전 시간을 추월하고, 서건창과 이창진, 홍종표가 웬만한 다른 팀들의 '이보다 나은 잇몸'으로 쏠쏠한 활약을 펼친 결과다. 3. LG와 NC, '높은 주전 의존도'의 의미는? 롯데와는 반대로, 시즌 초반의 야수진에 균열이 덜 간 팀도 있다. LG와 NC가 대표적이다. 작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 그대로인 LG의 '올스타 후보' 야수들은 2,857타석에 들어섰다. 롯데의 주전들보다 무려 915타석이 많다. 유격수 오지환을 제외하면 대부분 장기 부상 없이 제 위치를 지켰다. 오지환의 빈자리를 메운 구본혁, 백업 포수와 1루수, 대타 요원으로 활약한 김범석을 제외하면 100타석을 넘긴 '비 올스타 후보 야수'가 없다. 즉, LG는 이가 튼튼해서 잇몸으로 버틸 일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LG에 이어 '주전 의존도'가 높은 팀은 NC였다. 올스타 후보 대부분이 주전 자리를 지켜내며, '주전 타석' 2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NC에게 후반기는 '잇몸'의 시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 팀 내 타석 1위인 손아섭이 십자인대 파열로 이탈한 공백을 '뎁스'로 메워야 한다. 5월 30일, '포지션 중복'의 의아함 속에 키움에서 김휘집을 데려온 트레이드의 진가가, 지금부터 발휘되어야 한다. 자료 출처 : 스포츠투아이, 디자인 : 안준석
오랫동안 세계 야구계의 고민은 팬층의 '노령화'였다. 다른 스포츠 경기에 비해 템포가 느리고, 시간이 길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시간이 많은 특성 때문에 야구는 젊은 층에게 갈수록 외면받았다. 자극적이고 도파민 분비를 촉진하는 콘텐츠가 갈수록 늘어가는 세계에서 야구가 설 자리는 갈수록 좁아졌다. 2017년 메이저리그를 TV로 보는 시청자의 평균 연령은 57세. NBA의 42세, MLS의 40세보다 한참 높았다. 야구가 '노령층의 스포츠'라는 증거 중 하나였다. 야구의 '콘텐츠 경쟁력' 강화를 위해, 메이저리그부터 나섰다. 피치클락 도입, 견제구 횟수 및 마운드 방문 횟수 제한 등 많은 규칙 변경을 통해 경기시간 단축에 사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시청자와 관객이 젊어지는 등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지만, 그래도 아직 갈 길이 멀다. 광고, 마케팅 전문 업체 'Colormatics.com'에 따르면, 미국 야구팬들은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다. - 남성 57%, 여성 43% - 중위 연령 47세 - 가구 소득 7만 5천 불 이상 : 47% MLB 팬들의 중위 연령 47세는 NBA의 34세보다 무려 13살 높았다. 그리고 평균 소득이 높은 편인 남성들이 주류였다. 즉, 여전히 '남성-고소득-고령층'의 스포츠라는 것이다. 일본도 상황은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개막 직전에 이뤄진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일본 검색 엔진에서 프로야구 관련 키워드 검색자의 70%가 남성, 30%가 여성이었다. 그리고 야구 관련 키워드를 가장 열심히 검색하는 세대는 40대와 50대였다. 최근 일본에서도 젊은 세대, 그리고 여성 팬들의 비율이 과거 대비 다소 늘긴 했지만, 여전히 일본 야구팬의 '주류'는 '40대 이상의 남성'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얼마 전까지, 이런 통념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야구란 젊은 층에게 인기를 잃어가는, 아재들의 스포츠' 그런데 이제 이 통념은 한국에서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데이터를 보면, 사상 첫 시즌 1천만 관중을 향해 달려가는 한국 프로야구 '흥행 폭발'의 주역은 명확하게 '20대 청년, 그리고 여성'이다. 야구장 관중석의 주류는 '20대'다 먼저 LG, KIA, SSG, KT, 삼성, 한화의 티켓 판매 대행을 맡고 있는 티켓링크의 데이터를 보자. 이미 지난해, 프로야구 티켓 구매자들 중 가장 큰 세대 집단은 20대였다. 33.0%로 30대와 40대보다 8%p 정도 앞섰다. 그리고 20대의 점유율은 올해 더 늘어났다. 지난해보다 5.1p%가 늘어난 38.1%가 20대 관객이다. 그러니까 지금 야구장 관객 10명 중 4명은 20대 팬이라는 것이다.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야구장 객석의 '최대 지분 세대'는 20대가 아니었다. 키움과 두산의 티켓을 판매하는 인터파크의 데이터를 보면, 2019년 전체 티켓 구매자 중 20대가 차지하는 비율은 21.8%였다. 35.1%의 30대, 28.3%의 40대에 상당히 뒤져 있었다. 즉, 2019년까지만 해도 한국 프로야구는 일본, 미국과 마찬가지로 '중장년층'이 사랑하는 스포츠였던 걸로 보인다. 그런데 불과 5년 사이에 20대 관객의 점유율이 2배 가까이 높아진 것이다. 입장권을 구단 자체 애플리케이션에서 판매하는 NC 구단의 데이터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담겨 있다. 2022년, NC 구단 티켓 구매자들 중에는 40대가 가장 많았다. 하지만 2년 사이에 20대의 점유율이 5.2%p 높아져 '최대 점유율'을 갖게 됐다. 20대가 관객의 주류가 되다 보니, 프로야구 관객의 '중위 연령'도 미국, 일본과 비교해 매우 젊어졌다. 티켓 구매자의 출생연도별 정보를 공유한 롯데 자이언츠의 데이터를 보면, 올 시즌 티켓 구매자의 중위 연령은 29세다. 위에 소개한 메이저리그 티켓 구매자 중위 연령 47세보다 무려 18살이 어리다. 다른 구단의 데이터로는 중위 연령을 정확하게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전체적인 상황은 비슷해 보인다. 20대 후반 혹은 30대 초반이 입장권 구매자의 중위 연령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즉, 미국과 일본에서 프로야구는 '중장년층'의 볼거리지만, 한국에서는 명확하게 청년들의 콘텐츠다. 데이터에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성비'다 남성이 주류인 미국, 일본과 달리, KBO리그의 관중석에는 여성이 남성보다 많다. 티켓링크 데이터를 보면, 이미 지난해부터 티켓 구매자 중 여성의 비중이 50.7%로 남성을 앞질렀다. 그리고 그 격차는 올해 더 커졌다. 여성 관객의 비중이 3.7%가 높아져 54.4%에 이르렀다. 남성 관중보다 9%p 가까이 많다. 관객 100명 중 55명이 여성, 45명이 남성이라는 거다. 특히 20대 여성의 점유율이 돋보인다. 올 시즌 전체 관중의 23.4%가 20대 여성이다. 지난해에도 19.6%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올해는 점유율이 3.8%p 더 높아진 것이다. 모든 세대·연령 집단 중 가장 점유율 증가 폭이 컸다. 2019년 치부터 제공해 준 인터파크의 데이터를 보면, 20대 여성 관객의 증가 추이를 알 수 있다. 2019년 전체 티켓 구매자 중 20대 여성의 점유율은 17.9%, 이후 해마다 높아져 올해는 25%에 육박했다. 즉, 지금 야구장 관객 4명 중 1명은 20대 여성이다. 티켓 판매 대행업체들로부터는 개별 구단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데이터를 받았다. 하지만 KIA 타이거즈 구단에 대한 이야기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워낙 놀라운 경향을 보였고, 구단에서 기사로 다루는 걸 흔쾌히 허락해 줬기 때문이다. 사실, 구단 마케팅의 엄청난 성과일 가능성이 높기에, 어느 팀이든 자랑할 만한 내용이다. 올 시즌 KIA 홈경기 입장권 구매자 중 66.4%는 여성이었다. 33.6%인 남성의 거의 2배다. 쉽게 말해 광주 KIA 챔피언스필드 관중 3명 중 2명은 여성이다. 작년에도 이미 여성 관객이 59.1%로 남성보다 꽤 많았는데, 올해 7.3%p나 늘어난 것이다. 여성 관객이 남성의 2배인 프로야구단은 전 세계에서 KIA밖에 없을 것이 확실하다. 50대 이상의 노령층을 제외한 모든 연령대에서, '여초 현상'이 뚜렷하다. 결론은 이렇다. 미국, 일본과 달리 한국 프로야구는 '아재들의 스포츠'가 아니다. 지금 KBO리그는 20대 청년, 그리고 여성들이 사랑하는 콘텐츠다. 전 세계 모든 스포츠구단, 리그가 부러워할 만한 사실이다. 자료 제공 : 티켓링크, 인터파크, KIA 타이거즈, NC 다이노스, 롯데 자이언츠, 디자인 : 권민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