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부터 30년 넘게 오로지 스포츠 취재 기자 한길을 걸었다. 동-하계 올림픽, 월드컵, 아시안게임 등 각종 국내외 대회를 현장 취재했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회식, 2012년 런던올림픽 폐회식 TV 생중계에서는 해설을 맡기도 했다. 2017년에는 제28회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체육회를 출입하고 있고 SBS 유튜브 채널인 <스포츠머그>에서 '별별스포츠' 코너를 진행하고 있다.
올림픽 여자 육상에서 2개의 금메달을 딴 선수가 있습니다. 그 선수는 몇 년 뒤 골프에 입문해 세계 여자 골프를 평정했습니다. 그리고 야구 농구 등 무려 10개가 넘는 종목에서 엄청난 재능을 뽐냈습니다. 20세기 스포츠 사상 최고의 여자 선수로 꼽히는, 신이 내린 스포츠 만능 원더우먼 자하리아스이었습니다. 공부만 빼고 다 잘했던 자하리아스 자하리아스는 1911년 6월 미국 텍사스주에서 태어났는데요, 1980년대에 8년간 미국 대통령을 지냈던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나이가 같습니다. 자하리아스의 부모는 노르웨이 출신의 이민자였습니다. 어릴 때 이름은 밀드레드 엘라 디드릭슨. 디드릭슨이 성입니다. 야구에 소질이 있었는데요, 한 경기에서 5개의 홈런을 치자 당시 최고 스타였던 베이브 루스의 이름을 따 '베이브 디드릭슨'으로 불렸습니다. 1934년 3월에는 메이저 리그 스프링 캠프 기간에 열린 시범경기 3경기에 나와 총 4이닝을 투구했다고 할 만큼 투타 모두 발군의 실력을 갖췄습니다. 27살 때인 1938년 프로 레슬링 선수인 조지 자하리아스와 결혼하면서 이때부터 남편의 성을 따서 '베이브 자하리아스'라고 불리게 됐습니다. 자하리아스는 스포츠를 위해 태어난 여성이었습니다. 천부적인 운동 신경에 강인한 체력까지 갖춰 엄청난 재능을 뽐냈습니다. 공부는 그렇게 잘하지 못해 고등학교 때 1년 유급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야구, 농구를 비롯해 테니스, 복싱, 수영, 다이빙, 볼링, 롤러스케이팅 등 거의 모든 종목에서 빼어난 실력을 뽐냈습니다. 안 해본 운동이 있느냐는 질문에 "네, 인형 놀이요"라고 말할 정도로 운동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줬습니다. 특히 20살이던 1931년 야구공을 90.2m나 던지는 괴력을 발휘해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이는 여성이 던진 가장 긴 거리였습니다. 의외로 체격은 그렇게 크지 않았습니다. 키 170cm에 체중은 57kg. 그런데 스포츠만 잘한 게 아니었습니다. 바느질에도 뛰어나 골프 복장을 포함하여 많은 옷을 직접 만들었습니다. 1931년 댈러스에서 열린 재봉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했고요, 노래도 잘 불러 가수로도 데뷔했습니다. 하모니카 연주자이기도 했던 자하리아스는 여러 곡이 담긴 음반을 제작하기도 했는데 "I Felt a Little Teardrop" 같은 히트곡을 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1932년 LA 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 1932년 21살이던 자하리아스는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전합니다. LA 올림픽 당시에는 한 선수가 참가할 수 있는 종목이 최대 세 종목으로 제한되어 있었는데요, 그는 80m 허들, 창던지기, 높이뛰기의 세 종목에 출전합니다. 자하리아스는 여자 창던지기에서 43m 69cm를 던지며 올림픽 신기록과 함께 자신의 첫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80m 허들 결선에서는 멋진 질주를 보여주며 또다시 금메달을 목에 걸었는데 11초7의 세계 신기록까지 작성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종목, 높이뛰기에 참가한 디드릭슨은 또 한 번 인상적인 경기를 펼치며 세계 기록과 타이인 1m 65.7cm를 뛰어넘으며 은메달을 받았는데요, 지금까지도 남녀 통틀어 올림픽 육상에서 달리기와 던지기, 그리고 도약 경기에서 모두 메달을 따낸 유일한 선수로 남아 있습니다. 골프 입문하자마자 여자 골프 평정 자하리아스는 거의 모든 종목을 다 해봤습니다. 이 가운데 그를 사로잡은 것은 단연 골프였습니다. LA 올림픽 기간에 처음 골프 배웠다고 합니다. 휴식기에 스포츠 기자들과 라운드를 하면서 골프를 알게 됐는데 첫 라운드에서 91타를 쳤고 드라이브샷 거리는 약 230m나 됐다고 합니다. 이후 목숨이 걸린 것처럼 훈련에 매진했습니다. 뉴욕타임스가 1956년 사망 기사에 "매일 14시간에 걸쳐 1,000개의 공을 쳤고 손이 아파서 붕대를 감아야 할 상황까지 골프를 쳤다"고 썼을 정도입니다. '땀은 결코 배반을 하지 않는다'라는 격언이 있는데요, 그는 첫 대회인 텍사스 아마추어대회부터 우승하며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마추어로 17개 대회 연속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작성했습니다. 이후 1947년 8월에는 브리티시 여자아마추어골프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최고의 화제를 뿌렸습니다. 1893년, 이 대회가 창설된 이래 미국 선수가 우승한 것은 자하리아스가 처음이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그는 엄청난 파워를 선보였는데 약 493m의 파 5홀에서 드라이버샷에 이어 4번 아이언샷으로 투온에 성공했다고 하는데요, 그때 골프채와 골프공은 지금보다 최소 10% 이상 거리가 덜 나갑니다. 그런데도 현재 남자 프로 선수들에 버금가는 장타력을 거의 80년 전에 여자 선수가 선보인 것입니다. 프로에 데뷔해서도 승승장구하며 믿기 힘든 위업을 달성합니다. US오픈 3회 우승을 포함해 메이저대회 10승을 차지하는 등 모두 41번이나 정상에 올랐습니다. 1950년이 최전성기인데요, 자하리아스는 당시 여자 메이저 3대 대회인 US 오픈, 타이틀홀더 챔피언십, 여자 웨스턴 오픈을 모두 석권하는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고, 그해 상금 리스트에서도 선두를 달리며 여자 골프계를 평정했습니다. 모든 대회를 합쳐 82회 우승이라는 불멸의 신화를 쌓으며 육상 무대에서와 똑같이 골프 코스에서도 경이로운 능력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암 수술을 받고도 최고 권위의 US오픈을 제패했다는 것입니다. '철의 여인' 자하리아스는 1953년 봄 대장암 수술을 받고 15개월 만에 컴백을 했는데요, 1954년 대회에서 베티 힉스를 12타차로 제치고 이 대회 세 번째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43세. 대회 사상 최고령 우승자이었습니다. 우승 직후 그는 "다시는 대회에 출전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병석에 누워 하느님께 다시 골프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제가 다시 우승할 수 있게 해준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자하리아스는 다음 해 불행하게도 암이 재발해 타이틀 방어전에 나오지 못했고 45살이던 1956년 아주 이른 나이에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하리아스는 여자 프로골프 협회, 즉 우리가 아는 LPGA의 창설에도 기여한 여자 프로골프의 최고 전설임이 틀림없습니다. 사상 최초로 남자와 맞대결해 컷 통과 여자 골프계에서는 더 이상 상대가 없었던 자하리아스는 남자 골프에 문을 두드립니다. 1938년에 처음 도전했지만 81타와 84타를 쳐 3라운드에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5년 캘리포니아의 리비에라 골프장에서 열린 PGA 투어 로스앤젤레스 오픈에서 새 역사가 창조됐습니다. 남자 프로대회에 유일한 여성인 자하리아스가 등장하자 갤러리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취재진들도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76타와 81타를 쳐 3회전에 진출했습니다. 사상 최초로 여자가 남자 대회에서 컷을 통과한 것입니다. 3라운드에서는 79타로 부진해 4라운드 진출에는 실패했습니다. 자하리아스는 이후에 열린 피닉스 오픈에서는 4라운드까지 진출해 합계 33위로 대회를 마쳤습니다. 당시 자하리아스는 감나무로 만든 드라이버로 평균 270야드를 날렸다고 하는데 요즘 장비(티타늄 드라이버)로 치면 300야드, 즉 약 270m가 넘는 엄청난 장타를 친 것이지요. 남자 선수에 전혀 뒤지지 않은 거리였는데요, 참고로 자하리아스가 드라이버샷을 가장 멀리 보낸 기록은 299m로 이는 당시까지 여자 선수로 최고 기록이었습니다. 폭발적인 장타로 아이돌 같은 인기를 누린 그는 당시의 여성골퍼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윌슨사와 10만 달러의 광고 계약을 최초로 맺기도 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여자 선수로 선정 자하리아스는 AP통신이 선정한 20세기 위대한 스포츠 선수 10명 가운데 9위입니다, 남녀 통틀어 9위, 여자 선수로는 최고 순위였습니다. 그는 AP 통신에 의해 올해의 여자 선수에 6회나 선정됐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역대 여자 골프 선수 가운데 이렇게 사랑받은 선수는 없었다"라고 극찬했는데요, LPGA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타계한 지 1년 뒤인 1957년엔 미국 골프 협회가 수여하는 최고의 영예인 바비 존스 상을 수상했습니다. 그의 고향인 텍사스주 보몬트에는 그의 이름을 딴 'Babe Didrikson Zaharias Museum'이라는 박물관이 세워졌고 여러 골프 코스가 그녀의 이름을 따서 건설되었습니다. 1976년에는 국립 여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1981년엔 미국 우정청이 자하리아스를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했습니다. 그리고 2021년 1월 7일, 자하리아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민간인에게 주어지는 최고 영예인 자유의 메달까지 받았습니다.
수영과 함께 대표적인 기초 종목 가운데 하나인 육상 경기는 올림픽에서 가장 많은 금메달(48개)이 걸려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육상은 남자 높이뛰기 우상혁을 비롯해 일부 선수를 제외하고는 아시아에서도 메달권과는 거리가 멀 정도로 낙후돼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트랙 중거리 종목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샛별이 무서운 신기록 행진을 펼치고 있어 육상계를 흥분시키고 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현재 국군체육부대에 소속돼 있는 이재웅 선수입니다. ‘이재웅이 누구지?’ 무명에서 깜짝 스타로 몇 달 전만 해도 이재웅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는 철저히 무명 선수이었습니다. 지난 5월 경북 구미에서 열린 2025 아시아 육상선수권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이 대회에서 그는 3분42초79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한국 선수가 아시아육상선수권 남자 1,500m에서 메달을 딴 것은 1995년 자카르타 대회에서 동메달을 차지했던 김순형 이후 30년 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한 달 만에 그는 다시 ‘사고’를 쳤습니다. 6월 14일 홋카이도 시베츠에서 열린 호크렌 디스턴스 챌린지 2차 대회 남자 1,500m 경기에서 3분38초55에 결승선을 통과해 1993년 12월 필리핀 마닐라 아시아육상선수권에서 김순형(당시 경북대)이 작성한 3분38초60을 0.05초 앞당긴 한국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1990년대 중거리 스타 김순형이 세운 이 기록은 좀처럼 깨질 것 같지 않았는데 23살의 이재웅이 대선배의 벽을 무려 32년 만에 넘은 것입니다. 그의 신기록 행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 달 뒤인 7월 16일 이재웅은 일본 홋카이도 기타미시에서 열린 2025 호크렌 디스턴스 챌린지 4차 대회 남자부 1,500m 경기에서 3분36초01에 달려, 3분36초58의 아라이 나나미(일본)를 제치고 우승했습니다. 한국신기록을 세운 지 한 달 만에 자신의 한국기록을 또 경신한 것입니다. 기록도 놀라웠습니다. 6월보다 2초54나 빨랐습니다. 마지막 100m 직선 주로에서 스피드를 올려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이재웅은 포효하면서 벅찬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그는 “마지막에 제가 들어오면서 소리를 질렀던 것은 저한테 더 이상 안 될 거라고, 못 할 거라고 얘기한 사람들한테 전하는 메시지였습니다”라며 환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유도에서 육상으로 전환..두 달 만에 6초나 단축 이재웅은 어릴 때 유도복을 먼저 입었습니다. 하지만 유도부가 해체되자 초등학교 5학년 때 육상에 입문했는데 곧바로 소질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상북도 영천 영동중 재학 시절에 주요 전국대회 800m부터 3,000m까지를 모두 휩쓸었고 중등부와 고등부 신기록을 차례로 수립하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올해 국군체육부대에 입대한 뒤 일반부 신기록에 이어 한국 신기록까지 작성하면서 1,500m의 모든 기록을 보유하게 됐습니다. 특히 두 달 만에 개인 최고 기록을 무려 6초나 줄이는 무서운 상승세를 타고 있어 육상 전문가들을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1,500m에서 이렇게 단기간에 6초 넘게 줄이는 것이 매우 이례적이기 때문입니다. 거짓말 같은 기록 단축에 대해 이재웅은 “한국 육상 안 된다 이런 말들이 되게 많았잖아요. 저는 그런 말이 되게 싫어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걸 꼭 증명하고 싶었어요”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경이적인 신기록 행진의 원동력으로는 엄청난 훈련량과 악바리 근성, 그리고 남다른 승부욕이 꼽힙니다. 그는 “저는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자신한테 지는 것도 정말 싫어하거든요. 훈련 때도 그렇고 자신과 타협하는 순간이 오는데 한심하게 느껴지고 반성하게 되고 그렇더라고요”라며 강한 정신력을 내보였습니다. 내년 아시안게임 첫 금메달도 가능 이제 스포츠계의 관심은 깜짝 스타로 떠오른 그의 질주가 어디까지 갈 것인가에 쏠리고 있습니다. 그의 1차 목표는 내년 9월 일본에서 열리는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금메달입니다. 2023년에 열린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우승한 카타르의 모하마드 알 가르니의 기록은 3분38초36으로 이재웅보다 한참 뒤집니다. 현재 이재웅은 2025 시즌 최고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2위는 인도의 걸비르 싱으로 이재웅보다 0.57초 느립니다. 결론적으로 내년 아시안게임에서 충분히 금메달을 따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김순형이 은메달을 얻었는데 만약 이재웅이 내년에 우승하면 한국 남자 선수로는 최초의 1,500m 금메달리스트가 됩니다. 그럼 세계 수준과 격차는 어느 정도일까요? 지난 2024 파리올림픽 결승에 진출하려면 최소한 3분 33초대를 뛰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재웅 선수가 지금보다 적어도 3초는 줄여야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에서 결승 진출이 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그의 잠재력과 강인한 의지를 고려하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이재웅은 “세계적인 선수들이랑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게 목표입니다. 분명 더 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아서 (기록을) 많이 줄이긴 해야 되는데 가능하다고 봐요. 계속해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고 앞으로 한국을 넘어 아시아, 세계를 향해 큰 목표를 가지고 달려가겠습니다”며 당찬 포부를 밝혔습니다. 참고로 남자육상 1,500m 세계신기록은 1998년 로마 그랑프리대회에서 ‘불멸의 스타’ 모로코의 히참 엘 게루즈가 세운 3분26초00으로, 이재웅의 한국 기록보다 10초01, 거리상으로는 약 70m 이상 앞서 있습니다.
체조는 피겨 스케이팅처럼 심판이 채점을 하는 경기입니다. 이처럼 채점을 하는 종목은 심판의 주관적 판단이 어느 정도 반영될 수밖에 없는데요, 그래서 다른 종목들에 비해 논란이 많이 생깁니다. 특히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여자체조에서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소련 감독이 자신의 제자인 소련 선수를 채점해 사실상 금메달을 만들어주는 황당한 사건이 발생해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전설의 선수가 제자를 채점해 금메달 선사(?) 당시 여자 체조의 강력한 우승 후보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차슬라프스카 선수였습니다. 그는 4년 전인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3개의 금메달을 따냈던 체조 여왕이었는데요,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소련 선수들과 금메달을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평균대 심판 구성에서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평균대 예선전의 심판위원장은 헝가리 사람이고 다른 심판 4명의 국적은 소련, 폴란드, 동독, 그리고 미국이었습니다. 그러니까 5명 가운데 미국 심판 1명을 빼고 4명이 동구 공산권 국가 출신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이 정말 극단으로 치닫고 있어 적대적 감정이 팽배할 때였습니다. 소련이 동구 공산권의 맹주였기 때문에 헝가리, 폴란드, 동독 심판은 체코슬로바키아보다는 소련 선수를 편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더 말이 안 되는 것은 당시 평균대 심판진에는 소련 심판까지 들어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소련 심판이 예선전에서 소련 선수를 채점하게 된 것인데 더군다나 이 사람이 보통 소련 심판이 아니었습니다. 이 심판의 이름은 라리사 라티니나. 올림픽 여자 체조에서 금메달 9개를 비롯해 무려 18개의 올림픽 메달을 따내 최고의 전설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현직 소련 여자 체조팀 감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소련 감독이 올림픽에서 자신이 가르치는 소련 선수를 채점한 것입니다. 소련 감독이 자신의 제자인 소련 선수를 채점하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정말 상상하기 힘든 일인데요, 당시에도 논란이 컸습니다. 이에 대해 해외 언론들은 이렇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정황상으로 보면 라티니나가 1966년에 은퇴한 뒤 심판이 먼저 됐고 이어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을 앞두고 소련대표팀 감독이 됐는데요, 당연히 국제체조연맹이 올림픽 심판 배정에서 현직 소련 감독인 라티니나를 배제했어야 했는데 그만 묵인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당시 국제 체조는 소련이 거의 주도하고 있어서 영향력이 무척 강했습니다. 게다가 라티니나가 올림픽 금메달 9개를 비롯해 18개의 메달을 따낸 최고 스타였어서, 국제체조연맹이 그냥 눈감아 주고 말았습니다. 라티니나가 소련 사람이 아니었고 슈퍼스타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4년 전 도쿄 대회에서 라티니나가 여자 개인종합에서 체코의 차슬라프스카에 밀려 은메달에 그친 점입니다. 라티니나의 시대를 마감시킨 선수가 바로 차슬라프스카였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봐도 자신의 제자인 소련 선수에게는 높은 점수를 주고 대조적으로 라이벌이었던 체코의 차슬라프스카에게는 점수를 깎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이었습니다. 예선 점수에서 소련의 쿠친스카야는 9.800, 체코의 차슬라프스카는 9.725를 받았고 결선에서는 두 선수가 9.850으로 같았습니다. 결국 소련의 쿠친스카야가 예선과 결선 합쳐서 19.650으로 금메달, 차슬라프스카는 19.575으로 은메달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더 황당한 것은 결선에서 소련의 쿠친스카야가 원래 9.850보다 낮은 점수를 받았는데 심판들이 점수를 다시 높게 수정했다고 합니다. 차슬라프스카로서는 금메달을 도둑맞은 셈이 됐습니다. 소련 선수 점수 뒤늦게 수정해 공동 금메달 만들기 심판들의 장난은 이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마루운동에서도 큰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차슬라프스카가 거의 완벽한 연기로 결승에서 9.9점을 받으며 금메달을 확정했습니다. 소련의 라리사 페트릭도 9.9점을 얻었지만 예선 점수에서 뒤져 2위가 됐습니다. 그런데 시상식 직전에 심판들이 모여서 회의를 한 뒤 깜짝 놀랄만한 발표를 했습니다. 소련 페트릭의 예선 점수가 잘못 채점됐다며 뒤늦게 점수를 더 올렸습니다. 결과적으로 19.675점으로 두 선수가 공동 금메달이 됐습니다. 차슬라프스카의 단독 금메달이 공동 금메달로 바뀐 것입니다. 체코 대표팀과 차슬라프스카는 엄청난 불만과 함께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미국 체조의 전설이자 1984년 LA 올림픽에서 2개의 금메달을 따냈던 바트 코너는 이를 두고 "체조에 정치가 개입했다"며 격렬히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시상식 맨 위에 두 선수가 나란히 섰습니다. 차슬라프스카는 시상식에서 소련 국가가 울리자 고개를 숙인 채 외면했습니다. 두 달 전 자신의 조국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한 소련과, 소련 선수의 금메달을 위해 심판들이 편파 판정을 한 것에 강하게 항의한 것입니다. 정치적 희생양 된 차슬라프스카 당시 차슬라프스카는 소련에 의해 시쳇말로 '위험인물'로 찍힌 상태였습니다. 1968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의 위성국가였습니다. 그런데 그해 초부터 민주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이것을 '프라하의 봄'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동구 공산권 종주국 소련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두면 다른 동구권 국가에서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련은 1968년 8월 체코를 무력으로 침략해 '프라하의 봄'을 좌절시켰습니다. 이때 소련 최고지도자였던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들고 나온 게 '제한 주권론' 즉 사회주의 전체 이익을 위해서는 개별 국가의 주권은 제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브레즈네프 독트린'이라고 합니다. 멕시코시티 올림픽을 2개월 앞두고 소련이 침공하자 체코슬로바키아의 영웅이었던 차슬라프스카는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당국의 감시가 심해지자 그는 '요주의 인물'이 됐고 어쩔 수 없이 몰래 숨어서 훈련했다고 하는데요, 소련과 체코, 두 나라의 감정이 최악인 상황에서 차슬라프스카가 올림픽 영웅으로 떠오르는 것을 소련은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차슬라프스카의 금메달은 가능한 줄이고 소련 선수의 금메달은 늘리기 위해 무리수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이런 최악의 조건에서도 차슬라프스카는 개인종합, 2단 평행봉, 도마, 마루운동 등 4개의 금메달을 따내며 4관왕에 올라 통산 7번째 올림픽 금메달을 거머쥐었습니다.
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스포츠에서 남성과 여성은 당연히 따로 경기를 합니다. 맞대결을 펼칠 경우 남성이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포츠 역사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정면으로 도전한 경우가 꽤 있습니다. 골프가 그 대표적 사례입니다. 지난 편에서 다뤘던 빌리 진 킹과 바비 릭스의 세기의 테니스 성대결 훨씬 이전에 골프에서 먼저 여성이 남자들과 기량을 겨룬 것입니다. 오늘은 남자 선수들과 성대결을 벌여 세계적 화제를 모았던 골프 스타들을 소개하겠습니다. 58년 만에 도전한 소렌스탐의 좌절 골프에서 성대결의 원조는 올림픽 육상에서도 금메달을 따냈던 스포츠 만능 원더우먼 '베이브' 디드릭슨 자하리아스입니다. 자하리아스는 1945년 미국 프로골프투어, 즉 PGA 투어에서 사상 처음으로 컷을 통과하는 위업을 세웠는데 그 뒤로는 도전하는 선수가 오랫동안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58년이 지난 2003년 당시 여자 골프 세계 최강 아니카 소렌스탐이 PGA 투어에 도전하겠다는 발언을 해 골프계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 선수들은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소렌스탐이 아무리 여자 최강이라고 하더라도 남자에게 비거리에서 크게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소렌스탐은 여자 선수로는 장타자였습니다. 드라이브샷 평균거리는 265야드로 LPGA 투어에서는 4위였습니다. 하지만 세계 정상급 남자 선수들의 무대인 PGA 투어에서 이 거리는 190위권으로 거의 최하위였고, 남자 선수 평균에도 약 20야드 정도나 뒤졌습니다. 그래서 필 미켈슨 등 남자 스타들은 거리상의 이유로 소렌스탐의 도전을 평가절하했습니다. 일부 남자 선수들은 소렌스탐이 쇼트 게임 능력과 샷의 정교함은 남자에 뒤지지 않는다며 상위권 진입이 가능하다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소렌스탐의 도전이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되자 대회 주최 측은 소렌스탐을 배려했습니다, 소렌스탐은 2명의 남자 선수와 동반 라운드를 했는데 그렇게 강자가 아니었고 비거리가 유난히 짧았습니다. 소렌스탐은 결혼식 때보다 더 긴장된다며 컷 통과를 자신했는데 도박사들은 1라운드 평균 76.5타를 예상하며 예선 탈락을 점쳤습니다. 소렌스탐은 2003년 5월 22일 미국 텍사스 주 포트워스에서 열린 콜로니얼 클래식이란 대회에 출전했는데요, SBS가 단독 위성 생중계를 할 정도로 관심이 많았습니다. 현지에 엄청난 취재진과 수많은 갤러리가 몰렸는데 시선은 온통 소렌스탐에게 쏠렸습니다. 소렌스탐도 엄청난 부담을 느꼈습니다. 첫 홀에서 드라이브샷을 날린 뒤 웃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익살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윌슨과 걷는 소렌스탐 첫 버디는 4번째 홀에서 나왔는데 4m 거리 버디퍼트를 성공시킨 뒤 주먹을 불끈 쥐고 기뻐했습니다. 소렌스탐의 샷은 정교했지만 비거리에서는 어쩔 수 없이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또 퍼팅이 33개로 하위권이었습니다. 버디 1개와 보기 2개로 1오버파, 소렌스탐은 선두에 7타 뒤진 공동 73위에 그쳤습니다. 그래도 같이 플레이한 윌슨과는 동타, 바버에는 1타를 앞섰습니다. 여자 선수로는 58년 만에 PGA 투어에 도전한 여자골프의 일인자 아니카 소렌스탐의 꿈은 2라운드에서 깨졌습니다. 2번 홀에서 첫 버디를 잡아내며 환호했지만 이후 5개의 보기로 무너졌습니다. 고비고비마다 퍼팅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합계 5오버파로 기준타수에 4타 뒤진 컷오프 탈락. 마지막 홀에서 마지막 퍼팅을 마친 뒤 소렌스탐은 큰 짐을 벗어버린 듯 겉으로는 환하게 웃었습니다. 수많은 갤러리의 뜨거운 기립박수가 쏟아졌지만 골프여왕은 그린을 뒤로 한 채 라커룸으로 향하며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던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까지 응원 메시지를 보내는 등 소렌스탐의 도전은 성공과 실패를 떠나 세계인의 관심사였습니다. 이후 소렌스탐은 더 이상은 PGA 투어에 도전하지 않았습니다. 박세리는 해냈다.. 국내 남자 대회에서 공동 10위 소렌스탐의 꿈이 좌절된 지 4개월 뒤인 2003년 9월 골프여왕 박세리 선수가 남자와 기량을 겨루겠다며 새로운 도전을 깜짝 발표했고 한 달 뒤 열리는 SBS 프로골프 최강전 남자대회에 출전해 국내 여자선수로는 최초로 성대결을 펼쳤습니다. 박세리가 누구입니까? 한국 최고의 선수이자 세계적으로도 소렌스탐, 그리고 카리 웹과 정상을 겨뤘던 골프 여왕 아닙니까? 당시 박세리는 LPGA 투어에서 메이저 4승을 포함해 통산 21승을 거둔 최정상급 선수. 박세리는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이라며 국내 남자선수 110여 명과 레이크사이드골프장 서코스에서 한판승부를 벌였습니다. 양용은과 악수하는 박세리 SBS 최강전 남자 대회 1라운드는 10월 23일에 열렸습니다. 그해 지구촌 골프계를 강타한 성대결 열풍이 박세리의 SBS최강전 도전으로 절정에 이르렀는데요, 그동안 높기만 했던 남자무대의 벽을 과연 박세리는 넘을 수 있을 것인지에 관심이 집중됐습니다. 박세리는 장타를 치는 신용진, 양용은 프로와 함께 같은 조에서 역사적인 성 대결을 시작했습니다. 양용은은 "10센티를 쳐도 한번 치는 거고 300야드를 쳐도 한번 치는 것이기 때문에 또 골프라는 게 알 수가 없는 게임이라 재밌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습니다. 박세리의 드라이브샷은 남자선수들보다 20야드 이상 짧았지만 정확한 아이언 샷으로 장타자들과 맞섰습니다. 파4 2번 홀에서 8m 버디 퍼트를 넣어 첫 버디를 기록했습니다. 파3 6번홀 171야드 거리에서 6번 아이언으로 친 티샷은 핀 옆 80cm에 붙어 갤러리들의 탄성을 자아냈습니다. 결국 박세리는 버디 3개, 보기 3개로 이븐파를 치면서 공동 13위를 기록했습니다. 심리적 부담을 이기지 못한 신용진과 양용은은 OB를 한 차례씩 내며 각각 이븐파와 7오버파로 부진했습니다. 2라운드에서 박세리 선수는 정말 긴장했습니다. 1945년 자하리아스 이후 58년 동안 그 누구도 넘지 못했던 컷 통과의 운명이 2라운드에 달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부담 탓인지 경기가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퍼팅이 몇 차례 홀을 돌아 나오며 갤러리들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파4, 13번 홀에서는 티샷이 벙커, 세컨샷은 물에 빠뜨리며 흔들렸지만 네 번째 샷을 멋지게 핀에 붙이며 위기에서 벗어나는 관리능력을 선보였습니다. 버디 1개에 보기 3개로 2타를 잃은 박세리는 합계 2오버파로 기준 타수에 4타 앞서 무난히 컷을 통과했습니다. 2라운드까지 선두와는 4타차, 공동 29위를 기록했습니다. 2003년 그해 박세리의 도전은 골프 성대결로는 7번째였는데 이전엔 다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박 선수가 처음으로 컷을 통과하자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 한 7천 명의 갤러리들도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58년 만에 남성의 벽을 넘어선 박세리 선수는 SBS 프로골프최강전에서 최종 합계 2언더파로 공동 10위를 차지하며 세계적인 스타임을 입증했습니다. PGA 투어보다는 코스가 쉬운 편이었지만 남자 프로들을 상대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습니다. 박세리는 "제1의 목표가 컷 통과였는데 목표를 달성해서 너무너무 기쁩니다. 오늘까지 좋은 성적 잘했다는 게 더더욱 기뻐요"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남자보다 더 멀리 친 '천재 소녀' 미셸 위도 컷 통과 소렌스탐이 성대결을 벌인 지 3개월 뒤인 2003년 8월 당시 만 13살의 골프 신동 미셸 위가 남자 대회에 출전해 성대결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컷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이로부터 3년이 지난 2006년 5월 미셸 위는 한국에서 열린 남자 프로골프대회 SK텔레콤오픈에 출전해 남자선수들과 기량을 겨뤘습니다. 이때 성대결이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남겼는데요, 1라운드에서 같은 조에 속한 남자 선수가 바로 당시 간판스타 김대섭이었기 때문입니다. 정교한 아이언샷과 쇼트 게임의 귀재이었던 김대섭은 드라이브샷 비거리가 짧은 선수였는데요, 미셸 위와 동반 라운드를 하게 되자 누가 더 멀리 치는지에 온통 관심이 쏠렸습니다. 1만 명에 가까운 갤러리가 보고 있고 TV 생중계가 되는 가운데 만 16살의 소녀 미셸 위는 300야드 이상을 펑펑 때렸습니다. 반면 남자 선수인 김대섭은 있는 힘껏 쳐도 미셸 위에 뒤졌습니다. 이 경기 이후 김대섭은 한동안 슬럼프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천재 골프 소녀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미셸 위는 1라운드에서 2언더파를 쳐 공동 28위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2라운드에서 1타를 줄여 합계 3언더파 공동 17위로 컷을 통과했습니다. 2003년부터 7번 성대결을 펼쳐 모두 실패했는데 8번째 도전 만에 즉 7전 8기 만에 컷을 통과한 것입니다. 세계 골프계는 처음엔 천재소녀의 장타력에 놀랐지만 번번이 컷 탈락하는 미셸 위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습니다. 여자대회로 돌아가라는 조롱까지 있었지만 미셸 위의 집념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7전 8기 만에 성 대결 컷 통과에 성공한 미셸 위는 최종합계 3언더파 공동 35위로 대회를 마감했습니다. 미셸 위는 "한국에서 처음 컷 통과한 게 너무 행복했고요. 더 연습 많이 해서 톱텐 많이 하고 꼭 우승도 하고 싶어요. 많이 응원해 주세요"라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2003년은 골프 성대결의 해였습니다. 여자 스타들은 남자 골프에 도전했습니다. 여자 골프 최강 소렌스탐은 미국 PGA 투어의 거대한 벽을 넘지 못했지만 박세리는 2003년에, 그리고 미셸 위는 2006년에 국내 남자대회에서 컷을 통과하는 새 역사를 썼습니다.
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스포츠에서 여성은 오랫동안 남성만큼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대회도 많지 않았고 상금도 남성에 비해 턱없이 적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973년 지구촌 스포츠팬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남성과 여성이 테니스 코트에서 맞대결을 펼쳤습니다. 지금까지 성대결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빌리 진 킹과 바비 릭스의 세기의 매치였습니다. 여성 인권 기수 vs 남성 우월주의자 1943년 미국에서 태어난 빌리 진 킹은 그랜드슬램 대회 우승만 무려 39회, 윔블던 우승은 통산 6회를 차지하며 1960년대와 70년대 세계 여자 테니스계를 주름잡았던 슈퍼스타입니다. 바비 릭스는 1918년에 태어난 미국 남자 테니스 선수로 윔블던에서 우승했고 6개의 메이저 타이틀을 거머쥐며 1940년대 세계 랭킹 1위까지 올랐던 유명 스타입니다. 1970년대 들어 여성의 인권 문제가 미국에서 큰 이슈로 등장했습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여전히 존재했기 때문에 여성 인권 신장 운동이 활발히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빌리 진 킹이 강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쉽게 말해 총대를 멘 것입니다. 테니스의 경우 남자 상금이 평균 8배 이상 많았기 때문인데요, 빌리 진 킹은 여성 차별이라는 불합리한 관행에 반기를 들고 나온 상징적 존재가 됐습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바비 릭스는 여전히 여성을 깔보는, 무시하는 언행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특히 말을 함부로 했는데요, 심지어 "여성의 실력이 떨어지니 적은 상금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까지 대놓고 했습니다. 이에 여성계가 강하게 반발하자 바비 릭스는 "내 나이가 지금 55살인데 지금도 30살의 빌리 진 킹을 가볍게 꺾을 수 있다"며 성대결을 먼저 제안했습니다. '어머니날의 학살', 더욱 우쭐해진 바비 릭스 마거릿 코트 꺾은 바비 릭스 바비 릭스가 도발적 제안을 해오자 빌리 진 킹은 처음엔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바비 릭스는 호주의 마거릿 코트에게 성대결을 제안했습니다. 코트는 빌리진 킹보다 1살 많은 당시 31살이었는데요, 1970년 여성 최초로 4대 메이저대회를 모두 석권하는 그랜드 슬램 위업을 달성했고 통산 메이저 대회 24번 우승한 전설의 스타입니다. 1972년 첫 아이 출산 이후 코트에 복귀해 1973년 그해 호주 오픈과 프랑스 오픈 타이틀을 모두 획득하며 절정의 기량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바비 릭스와 마거릿 코트의 성대결은 그해 5월 13일에 열렸고 CBS 스포츠가 중계를 했는데요, 예상과 달리 마거릿 코트가 무기력한 경기 끝에 6대 2, 6대 1, 2대 0 완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날 릭스는 드롭샷과 로브슛을 구사하며 코트를 완전히 무너뜨렸는데요, 하필이면 5월 13일 이날이 미국에서 '어머니날'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언론들은 이 경기를 '어머니날의 학살'이라고 불렀습니다. 1973년에 이뤄진 세기의 성대결 바비 릭스의 주가는 한층 올랐습니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ports Illustrated)' '타임(Time)'지의 표지를 장식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더욱 기고만장해졌습니다. 릭스는 "여성 선수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50대 중반의 남자에게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만큼 남자의 여성의 능력 차이는 엄청나다. 내가 오랫동안 주장해 온 말을 증명하지 않았느냐? 이제 빌리 진 킹도 가볍게 꺾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빌리 진 킹은 1972년 세계 1위, 성대결이 열린 1973년엔 세계랭킹 2위였는데요, 릭스가 강하게 도발해 오자 더 이상 성대결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거부할 경우 패배가 두려워서 그러는 것 아니냐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빌리 진 킹과 바비 릭스 남성 우월론자 바비 릭스, 여성 인권을 강조하고 성차별에 맞서온 빌리 진 킹, 두 유명 스타의 성대결이 성사되자 스포츠계는 후끈 달아올랐습니다. 언론의 관심도 정말 뜨거웠습니다. 릭스는 경기 전 기자회견에서 빌리 진 킹을 바로 옆에 두고 "집에서 음식하고 아이나 보라"며 조롱하기까지 했습니다. 세기의 성대결은 1973년 9월 20일 미국 휴스턴 애스트로돔에서 열렸습니다. 현장에 3만 명의 관중이 운집했고 ABC가 중계했는데 하워드 코셀 등 쟁쟁한 스타 캐스터들이 총 출동했습니다. 미국에서 5천만 명, 전 세계 40개국에서 9천만 명이 생중계로 이 경기를 지켜봤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약 2주 뒤인 10월 6일에 녹화 중계가 됐습니다. 여자 무시한 릭스 콧대 꺾은 빌리 진 킹 빌리 진 킹과 바비 릭스 빌리 진 킹의 심리적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훗날 그는 "내가 그 경기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50년 전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여자 투어를 망치고 모든 여성의 자존감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소문난 잔치 먹을 것 없다'는 속담처럼 경기는 의외로 싱거웠습니다. 2시간 4분 동안 두 선수가 기량을 겨뤘는데 6대 4, 6대 3, 6대 3, 빌리 진 킹의 세트 스코어 3대 0 완승이었습니다. 원래 빌리 진 킹은 공격적인 플레이로 유명했는데, 이날은 굉장히 안정적인 플레이, 쉽게 말해 실수하지 않는 작전으로 나섰습니다. 화려한 기량을 보여주는 것보다 무조건 이겨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비 릭스가 너무 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어떻게 보면 무성의했습니다. 아무튼 콧대 높던 바비 릭스를 꺾은 빌리 진 킹은 벅찬 감격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미국 여성들은 일제히 기쁨의 환성을 올렸습니다. 집집마다 거실에서 TV를 보며 크게 환호했습니다. 바비 릭스가 예상외로 너무 무기력하게 패배하자 이후 일부러 진 것 아니냐는, 쉽게 말해 승부 조작설이 나돌았습니다. 릭스가 원래 도박꾼으로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1939년 윔블던 대회에서 자신의 우승에 베팅해 엄청난 거액을 벌어들인 전적이 있었습니다. 릭스가 일부러 졌다는 구체적 폭로는 성대결 40년 후인 2013년에야 나왔습니다. 핼 쇼라는 사람이 플로리다 주 탬파의 골프 클럽의 프로샵에 있을 때 두 명의 마피아가 비밀스럽게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즉 마거릿 코트에게는 이기고 빌리 진 킹에게 일부러 지면 릭스의 도박 빚 10만 달러를 대신 갚아준다는 계획을 미리 짰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릭스의 지인들은 이를 전면 부인했고 빌리 진 킹도 "말도 안 되는 억측이다. 바비 릭스는 저를 반드시 이기고 싶어 했다. 그의 눈에서 승부욕을 봤다. 그건 확실하다"라며 일축했습니다. 상금 남녀 성평등 이룬 테니스 미국 프로골프투어 PGA와 여자프로골프투어 LPGA는 규모와 상금 면에서 여전히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테니스에서만 거의 성평등이 이뤄졌습니다. 1973년 성대결에서 빌리 진 킹이 이긴 이후 US오픈이 가장 먼저 남녀 상금 차별을 없앴습니다. 메이저 대회인 영국 윔블던, 프랑스 오픈, US오픈 등 나머지 3개 대회도 남녀 단식 우승 상금이 똑같습니다. 호주 오픈(2001년), 프랑스 오픈(2006년), 윔블던(2007년) 순으로 모든 메이저 대회 상금이 동일하게 바뀐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세계 1위 세르비아의 노바크 조코비치는 "남자 선수 경기에 관중이 더 많은데 우승 상금은 여자 선수와 똑같다"고 불만을 나타냈습니다. 이에 여자 테니스를 평정했던 세리나 윌리엄스가 "황당한 발언"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여자 테니스 선수들이 지금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된 데는 빌리 진 킹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는 세계여자프로테니스협회(WTA) 창설을 주도하며 여성 테니스 역사에 획기적 업적을 세웠습니다.
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전설이 최강을 담금질하고 있습니다. 지난 4월 대한민국 배드민턴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박주봉 감독은 선수 시절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자 복식 금메달과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혼합복식 은메달을 비롯해 숱한 국제 대회에서 메달을 휩쓸며 한국 배드민턴의 전성기를 이끈 주역이었습니다. 지도자의 길에 나선 뒤에도 배드민턴 변방 일본을 세계 정상급으로 이끌며 능력을 증명했습니다. 환갑이 넘은 61살의 사령탑은 이제 여자 단식 세계 최강 안세영의 조련사로 새로운 신화를 꿈꾸고 있습니다. 하루를 버티기 힘든 강훈련 박주봉 감독과 안세영 '레전드' 박주봉 감독이 부임한 이후 충북 진천 국가대표 선수촌의 분위기까지 확 달라졌습니다. 최근 합숙 훈련에서 선수들이 가장 먼저 느끼는 변화는 지옥 훈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엄청난 훈련량. 서승재(남자 복식 국가대표)는 "하루가 너무 긴 것 같이 느껴지고 있다"며 혀를 내둘렀고 김혜정(여자 복식 국가대표)은 "너무 힘들어요, 사실은... 근데 버티고 있습니다"라며 굵은 땀방울을 흘렸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체력왕'인 안세영(여자 단식 국가대표)조차도 "굉장히 힘들고요. 이번 주를 버틸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들 정도로"라고 털어놓았습니다. 박주봉 감독은 코트를 돌면서 선수마다 일일이 자세를 확인하고, 직접 라켓을 휘두르며 훈련 파트너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60대 지도자가 열정을 불태우자 선수들도 쉴 새 없이 몸을 날리며 셔틀콕을 받아내고 있습니다. 박 감독은 "좀 소리를 질러가면서 훈련을 해야지 선수도 따라오고 분위기도 살아난다. 그동안에 했던 좀 틀에 박힌 것보다는 조금 변화를 주고 있다"고 담담히 말했습니다. "안세영과 다른 선수들의 기량은 종이 한 장 차이" 왕즈이 꺾은 안세영 박주봉이 감독이 부임하자 관심은 2024 파리올림픽 여자 단식 금메달리스트인 세계 1위 안세영에게 쏠렸습니다. '전설' 박주봉 감독이 '진행형 전설' 안세영을 지도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안세영이 현재 최강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철옹성은 아닙니다. 안세영은 지난 6월 8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끝난 세계배드민턴연맹(BWF) 월드투어 슈퍼 1000 인도네시아오픈 결승에서 랭킹 2위 왕즈이를 2-1(13-21 21-19 21-15)로 꺾고 대회 정상에 올랐습니다. 올해 5번째 국제대회 개인전 우승이었습니다. 1세트를 내주고 2세트도 9-17까지 끌려갔지만 놀라운 뒷심으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습니다. 거의 졌던 경기를 뒤집은 것입니다. 직전에 열린 싱가포르 오픈 8강전에서는 숙적 중국의 천위페이에게 패배하기도 했습니다. 올 시즌 유일한 패배입니다. 안세영도 무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박주봉 감독 이에 대해 박주봉 감독은 "안세영 선수가 현재 세계랭킹 1위를 지키고 있지만, 사실 세계적인 선수들의 기량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대회 때마다 중국 선수 4명(왕즈이·한위에·천위페이·가오팡제)에 일본의 야마구치까지 1대 5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 그들 모두 안세영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우리도 상대에 대한 세밀한 파악이 필요하고 훈련 방식도 변화를 줘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안세영을 만나는 상대들은 '어차피 질 수 있다'는 마음으로 홀가분하게 덤비니 경기가 더 타이트해진다. 세영이는 오히려 부담을 갖고 임한다"면서 "세영이가 뒤늦게 발동 걸리는 슬로 스타터인데 페이스를 좀 빨리 끌어올려야 한다. 공격력도 보강해야 한다. 세영이가 어차피 힘으로 압도하는 스타일은 아니기 때문에 악력을 이용해, 순간적으로 탁 끊어 때리는 짧고 빠른 공격이 요구된다"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젠 수비형이 아니라 공격형 선수로 변신" 박 감독의 주문에 따라 안세영도 변신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안세영은 상대가 질릴 정도의 악착같은 수비력으로 정상에 올랐습니다. 코트 위로 몸을 던지는 수비와 뛰어난 반사 신경에 놀라운 투혼으로 탄성을 자아내는 플레이를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다른 구기종목도 그렇듯이 수비만으로 계속 정상의 자리를 지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안세영은 "이전까지는 수비형 선수를 추구했는데, 수비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힘은 많이 밀리기에, 정확성을 더 높이려 한다. 찬스가 왔을 때 확실하게 끝내는 연습을 많이 하고 있다"면서 "공격에서는 천위페이 수준까지 올리고 싶다. 공격과 수비 전부 다 세계 최고여야 계속 1위를 유지할 수 있다. 지금껏 잘해왔지만 앞으로도 지지 않는 선수가 되고 싶다. 그리고 다른 선수들에게 조금은 두려운 존재가 되고 싶다"는 각오를 드러냈습니다. 이를 위해 안세영은 훈련 방식에 변화를 줬습니다. 우선 영상 분석 빈도를 늘렸습니다. 안세영은 "그간 영상 분석은 잘 몰랐는데, 싱가포르오픈에서 천위페이에게 지고 나서 생각이 굉장히 많아졌다. 상대가 저의 약점을 찾으려 분석하는 만큼 저도 저를 잘 알고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박주봉 감독의 조언에 따라 악력을 키울 계획입니다. 박 감독은 "팔꿈치까지 쓰는 순간적인 스윙으로 빠른 공격을 하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악력을 좀 더 키워야 한다. 악력기를 옆에 두고 수시로 운동을 하라"고 주문했는데 제자 안세영은 스승의 명을 그대로 따를 생각입니다. 안세영은 지난해 파리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직후 "대표팀에 너무 많은 실망을 했다. 앞으로 함께 하기 어려울 것 같다"며 이른바 작심 발언을 쏟아내 한국 스포츠계를 발칵 뒤집어놓았습니다. 그는 대한배드민턴협회의 대표팀 운영 방식과 규정도 비판했습니다. 이 여파로 전 대표팀 감독과의 불화도 불거지면서 배드민턴협회도 대표팀도 큰 홍역을 치렀습니다. 이후 배드민턴 협회장도, 그리고 대표팀 감독도 새로 바뀌었습니다. 올림픽 이후 한동안 진천선수촌에 발을 들이지 않던 안세영은 지난 4월 강화 훈련부터 대표팀에 합류했습니다. 안세영은 "(발언 이후 갈등은) 그해에 다 털어버렸다. 올해부터는 새로운 마음가짐, 새로운 목표로 다시 들어왔고 생각하지 않았다.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내게는 터닝 포인트가 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긍정적인 것은 안세영이 신임 박주봉 감독을 신뢰한다는 점입니다. 안세영은 "감독님께서 정상의 자리를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다. 그래서 먼저 다가와 조언해 주고 소통하려 노력해 주시니 감사하고 편하다"며 지도자에 대한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61살 전설의 감독과 23살 배드민턴 여제의 만남. 새로운 스승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안세영은 앞으로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절대 강자'를 다짐하고 있습니다.
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마라톤은 스포츠에서 가장 힘든 종목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무려 42.195km를 달려야 하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선수들은 많은 유혹에 시달립니다. 이 가운데 최악이 마라톤 사기극입니다. 풀코스를 다 뛰지 않은데도 다 뛴 것처럼 속이는 것이지요. 오늘은 역대 마라톤 사기극 중에서도 '끝판왕'이라 불릴만한 희대의 사건을 소개합니다. 1904년 올림픽에서 나온 원조 '금메달 사기' 1904 올림픽 마라톤. 31번이 로즈 마라톤 '금메달 사기'의 원조는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했던 미국의 프레드 로즈 선수입니다. 출전 선수 33명 가운데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는데 찌는 듯한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땀방울이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이 관중석에서 내려와 월계관을 쓴 로즈와 기념사진까지 찍었는데 사기극이 곧바로 발각됐습니다. 1904 올림픽 마라톤 차량 로즈는 15km 지점에서 다리에 쥐가 나는 바람에 레이스를 포기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던 트럭이 로즈를 태워줬고 로즈는 결승선 근처에서 내려 달린 것입니다. 사건 전모는 트럭 운전사가 나타나 증언하면서 밝혀지게 됐는데 로즈는 15분 동안만 금메달리스트라는 기분을 맛봤습니다. 그는 이듬해 1905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해 구겨진 체면을 다소나마 만회했습니다. 1980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나온 역대급 사기극 미국 보스턴 마라톤은 한국과 인연이 깊은 대회입니다. 1947년 서윤복 선생이 처음으로 정상에 올랐고 1950년 대회에서는 함기용-송길윤-최윤칠 3명이 1~3위를 석권했습니다. 그리고 2001년엔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가 51년 만에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유서 깊은 보스턴 마라톤의 명성에 먹칠을 한 사건이 1980년 대회 때 터졌습니다. 로지 루이즈라는 여성이 희대의 사기극을 벌여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것입니다. 로지 루이즈는 1953년생으로 원래 쿠바 출신인데 9살 때 미국 플로리다로 이민을 왔습니다. 27살 때인 1980년 4월 21일, 루이즈는 보스턴 마라톤 여자 부문에서 2시간 31분 56초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보스턴 마라톤 역사상 가장 빠른 기록이자 당시 마라톤 역사상 세 번째로 빠른 기록이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완전 무명의 선수가 이런 기록을 낸다는 게 상상하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루이스는 1년 전 첫 출전한 뉴욕시 마라톤에서 2시간 56분 29초를 기록했는데 1년 만에 무려 25분을 단축한 것이어서 더욱 경이적인 기록으로 평가됐습니다. 언론들은 여자 마라톤 천재가 등장한 게 아니냐며 흥분까지 했습니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던 레이스 하지만 루이즈에 대한 의혹은 처음부터 커졌습니다. 수상한 점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마라톤 출전이 겨우 두 번째인 신인 중의 신인이 이런 대기록을 작성한 게 누가 봐도 이상했습니다. 42km 이상을 달린 사람치고는 땀도 거의 없었고 호흡도 너무 편해 보였습니다. 의심을 더욱 부채질한 것은 경기 직후 인터뷰입니다. 우승 직후 현장에 있던 기자가 "어떻게 기록을 단축한 거죠? 인터벌 트레이닝을 강하게 했나요?"라고 묻자 루이즈는 "인터벌이 뭔지 몰라요."라고 대답했고 이어 기자가 "어떤 코치로부터 지도를 받았나요?"라고 질문하자 "코치는 없어요. 혼자 연습했어요."라고 말해 주위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루이즈를 인터뷰한 기자도 즉석에서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현장에서 "우리는 모든 체크 포인트(확인 장소)에서 신비스러운 여성 챔피언을 놓쳤습니다. 2시간 31분이라는 환상적인 기록은 이 시점에서 확인할 필요가 있지만 아무튼 세계 수준을 뛰어넘는 기록을 보스턴 마라톤에서 작성했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더 큰 문제는 2시간 31분의 레이스 동안에 루이즈를 봤다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대회 주최 측과 취재진이 5km 체크 포인트마다 수천 장의 사진을 찍었는데 루이즈 얼굴이 나온 사진은 결승선 직전까지 단 한 장도 없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하버드 대학생 2명의 증언입니다. 이들은 결승선에서 800m 떨어진 곳에서 루이즈가 관중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사기극 부인 거의 모든 미국 언론이 이 문제를 파헤치기 시작했지만 로지 루이즈는 끝끝내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나는 조금의 의심도 없어요. 내가 한 일을 내가 알아요. 언젠가 다시 내 실력을 입증해 보이겠어요."라고 뻔뻔하게 말했습니다. 뉴욕의 한 신문사가 다시 풀코스를 다 뛰면 1000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거절했습니다. 대신 "거짓말 탐지기에 응할 용의는 있다, 나는 결코 속이지 않았다"는 변명만 계속 되풀이했습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우승한 기분은 1분밖에 느끼지 못했다. 이후로는 매 순간이 악몽이었다. 만약 (주최 측이) 제 우승을 박탈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흐느껴 울기까지 했습니다. 루이즈 스캔들이 터지자 1년 전에 있었던 뉴욕시 마라톤 주최 측도 진상 조사에 나섰습니다. 이 대회에서 루이즈가 2시간 56분 29초를 작성하면서 이듬해 보스턴 마라톤 출전 자격을 얻었기 때문인데요, 조사 결과 뉴욕 마라톤에서도 사기를 벌인 게 드러났습니다. 목격자인 프리랜서 사진작가의 증언에 따르면 루이즈는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내려 결승선까지 걸었고, 이후 부상당했다며 응급 처치소로 호송됐는데 자원 봉사자들이 완주한 것으로 표시해 보스턴 마라톤에 참가할 자격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뉴욕 시 마라톤 관계자는 루이즈가 부정행위를 저질렀다고 판단해 대회가 끝난 지 1년 뒤인 1980년 4월 25일에 소급해 실격 처리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3일 뒤인 보스턴 대회 측도 루이즈의 우승을 박탈하고 기록을 무효로 만들었습니다. 루이즈의 사기극은 일주일 만에 막을 내린 것입니다. 희대의 마라톤 사기극을 벌인 로지 루이즈는 이후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보스턴 마라톤 2년 뒤인 1982년, 자신이 일하던 부동산 회사에서 거액을 횡령한 혐의로 체포되었고 5년의 보호 관찰을 선고받았습니다. 이듬해에는 코카인 거래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되어 3년의 집행 유예를 선고받았습니다. 이후 결혼과 이혼을 거듭했고 한 회사에서 근무하다 2019년 7월 66세의 나이로 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마라톤 사기극을 연거푸 펼친 것에 대해 사과하거나 용서를 구하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습니다. 대선 떨어진 뒤 사기극 펼친 멕시코 정치인 2007년 9월 말 베를린 마라톤 대회에서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졌습니다. 평소 청렴과는 거리가 멀었던 멕시코의 대선 후보 출신 로베르토 마드라소가 마라톤에서도 부정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인데요, 그는 이 대회 55살 이상 부문에서 2시간 41분 12초라는 놀라운 기록으로 우승하며 1년 전 대선 패배의 아픔을 씻고 국민의 동정심을 얻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골인지점에서 찍힌 사진 한 장에 발목을 잡혔습니다. 다른 선수들은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이었지만, 마드라소는 바람막이 상의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러닝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사 결과, 레이스 도중 몰래 코스에서 벗어나 다른 길을 사용했음이 드러났습니다. 마드라소는 괴한들에게 7시간 동안 납치됐다고 주장했지만, 멕시코 국민들은 동정표를 얻기 위한 자작극이라면서 거센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2년 전엔 멕시코에서 1만 명 이상의 마라토너가 부정한 짓을 저질러 화제가 됐는데요,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마라톤 대회에서 전체 참가자 3만여 명 가운데 무려 1만 1천여 명이 코스를 제대로 달리지 않고 완주한 것처럼 속인 사실이 드러나 실격 처리됐습니다. 대회 주최 측은 마라톤 세계 기록을 웃도는 기록들이 나오자 이를 수상히 여기고 조사에 나섰는데 적발된 부정 행위자들은 5㎞마다 설치된 체크 포인트를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마라톤 중간에 참가번호를 바꾸거나 버스,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해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현지 관계자들은 이들이 마라톤 기록 단축보다 완주 메달을 받기 위해 부정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빼어난 기량과 함께 환한 미소로 팬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국내 여자 프로골프 인기스타 박현경 선수(25세)가 최근 훈훈한 소식을 전했습니다. 박현경은 지난 5월 25일 경기도 여주의 페럼클럽에서 끝난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E1 채리티 오픈(총상금 10억 원)에서 최종 합계 16언더파를 기록해 2위 이채은을 1타 차로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하며 통산 8승째를 거뒀습니다. 사흘 내내 보기 없는 완벽한 경기로 시즌 첫 승을 장식한 박현경은 경기 직후 우승 상금 1억 8천만 원을 전액 쾌척하겠다는 뜻을 밝혀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박현경이 통 큰 기부를 하면서 다른 스포츠 스타들의 아름다운 선행도 다시 소환되고 있습니다. '채리티 오픈' 대회 취지에 맞게 통 큰 기부 박현경이 정상에 오른 이번 대회의 명칭은 'E1 채리티 오픈'입니다. '채리티 오픈'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 대회에서는 선수들이 자발적으로 상금 일부를 기부할 수 있게 하고, 주최사 E1도 추가로 8천만 원을 기부합니다. 애초 박현경은 상금의 13%를 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가 우승 직후 상금을 모두 내놓았습니다. 그는 "이 대회 취지를 생각하면 기부 문화가 떠오르지 않나. 그것에 맞게 좋은 일에 동참하고 싶다"며 우승 상금 전액을 기부했습니다. 박현경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고 싶다고 늘 생각해 왔다. 10승을 채우면 어느 대회든 우승 상금 전액을 기부하고 싶었는데, 이번 대회에서 기회가 생기면서 혹시나 우승한다면 바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며 "실현돼서 정말 기쁘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박현경에 앞서 우승 상금 전액을 기부한 여자 골프 선수는 김해림(36세)입니다. 2009년에 데뷔한 그는 지난해 은퇴할 때까지 메이저 2승 포함 통산 7승을 거뒀는데 첫 승까지 만 7년이나 걸렸습니다. 그는 2016년 교촌 허니 레이디스 오픈에서 생애 첫 승을 차지한 뒤 우승 상금 1억 원 전액을 내놓아 아름다운 충격을 선사했습니다. 김해림의 통산 상금은 약 34억 원인데 이 가운데 그는 5억 원이 넘는 금액을 기부해 후배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국민 삐약이' 신유빈, 기부가 습관 최근 기부를 가장 많이 해 '기부 천사'로 불리는 선수는 2024 파리 올림픽 탁구 혼합복식 동메달리스트 신유빈(21세)입니다. 그는 대한항공 입단 당시 받은 생애 첫 월급으로 보육원 아이들에게 운동화를 선물한 것을 비롯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기부에 나서고 있습니다. 그동안 초등학생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 지원금을 내거나 유소년 탁구 선수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했고, 다문화 가정 청소년을 위한 성금을 기탁한 바 있습니다. 지난해 연말에는 "우리 모두의 일상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작지만 따듯한 온기를 전하고 싶다"며 사랑의 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억 원을 전달해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 됐습니다. 이어 3개월도 채 안 된 올해 3월 17일 경기도 수원시에 있는 가톨릭대학교 성빈센트병원을 찾아 의료비 후원금으로 1억 원을 기부했습니다. 광고 모델료로 받은 금액 가운데 거금을 환원한 것입니다. 신유빈은 "성빈센트병원으로부터 후원비가 의미 있게 사용됐고, 아이들이 건강을 되찾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행복하고 뿌듯했다. 더 많은 아이가 건강과 미소를 되찾을 수 있길 바란다"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5월 5일 어린이날에는 미래의 국가대표를 꿈꾸는 289명 어린이 선수들에게 자신이 디자인과 성능 테스트에 직접 참여해 만든 '신유빈 라켓'을 선물했습니다. 그는 "선물 받은 꿈나무 선수들이 기뻐할 생각에 마음이 따뜻해지고, 실제 사용하면서 만족하길 바란다"며 "앞으로도 기회가 될 때마다 유소년 선수들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신유빈은 우리 사회에 '해피 바이러스'를 널리 퍼뜨리는 대표적 스포츠 스타입니다. 구김살 없는 표정과 예의 바른 언행, 그리고 고운 마음씨를 갖춰 주위의 칭찬이 자자한 선수입니다. 그의 인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일화가 있습니다. 지난해 파리 올림픽 혼합복식에서 준결승에 오른 뒤 신유빈은 공동 취재구역에서 취재진을 향해 "안 힘드세요? 괜찮으세요?"라며 안부를 묻기도 했다. 이에 취재진이 "안 힘드냐고 우리가 물어봐야지"라고 하자 신유빈은 웃으며 "식사는 다 하고 계세요?"라고 물은 뒤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공동취재구역을 떠났습니다. 스포츠 취재기자만 35년을 했던 필자로서도 올림픽 같은 대형 국제대회에서 보도진을 이렇게 배려하는 말을 한 선수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누리꾼들은 "실력도 최고인데 인성도 최고네" "삐약이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다" "밝고 바르고 성실한 완벽한 인재" "저런 딸을 둔 부모님이 부럽다" 등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김연아 누적 기부액 50억 원 이상, 야구에선 추신수가 기부왕 그럼 스포츠 스타 가운데 기부를 가장 많이 한 선수는 누구일까요? 단연 '피겨 여왕' 김연아입니다. 김연아는 스타덤에 오른 2006년부터 거의 20년 가까이 정말 다양한 기부를 통해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누적 기부액은 50억 원이 넘습니다. 스포츠계 기부와 관련해 가장 관심이 쏠리는 종목은 프로야구입니다. 다른 종목에 비해 월등히 많은 연봉을 받기 때문입니다. 야구 스타 가운데서는 추신수가 단연 돋보입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크게 성공하며 부와 명성을 다 거머쥔 그는 지금까지 30억 원에 가까운 금액을 내놓았습니다. 지난해에는 모교인 수영초·부산중고에 야구 장학금, 야구장 시설 보완 등 총 6억 원을 지원해 화제를 모았습니다. 삼성 포수인 강민호는 경남 양산시에 2억 원을 기부해, 2016년 1월 물금읍에 '강민호 야구장'(양산시 3억원 부담)을 짓는 데 큰 보탬이 됐습니다. 류현진은 2023년 9월 '류현진 재단'을 설립해 야구 캠프 유망주 및 희소 난치병 환아 장학 사업을 돕고 있습니다. 롯데의 '안경 에이스' 박세웅은 매년 2,000여만 원을 들여 부산 지역의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안경을 제작해 주고 있습니다. 연봉 3,800만 원인 삼성 김영웅은 지난 연말 모교인 물금고에 후원금 및 야구용품 구입을 위해 2,500만 원을 기부하는 선행을 보여줬습니다. 12.3 계엄 사태와 최근 제21대 대통령선거로 갈등이 격화된 상황에서 스포츠 스타들의 훈훈한 기부가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드라이브 샷은 쇼이고 퍼팅은 돈이다.' 골프의 명언입니다. 300m를 날리는 드라이브 샷도 1타이고 30cm 짧은 퍼트도 1타이기 때문입니다. '퍼팅이 바로 돈이다'라는 것은 그만큼 순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뜻인데요, 골프 중계를 보다 보면 1m도 안 되는 짧은 퍼트를 놓쳐 우승을 놓치면서 수억 원의 상금까지 날리는 것을 허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골프 역사상 짧은 퍼트를 넣지 못해 참사를 겪은 대표적인 사례를 소개할까 합니다. 사상 최단 8cm 퍼트 놓친 토니 피나우 미국의 토니 피나우는 PGA 투어(미국 프로골프투어)에서 6번이나 우승을 차지한 선수로 장타자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지난 3월 30일 PGA투어 텍사스 칠드런스 휴스턴오픈 3라운드에서 황당한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당시 세계랭킹 32위이던 그는 파3 홀인 15번 홀에서 약 1m 파 퍼트를 남기고 있었는데 이 퍼트가 홀 왼쪽 끝을 맞고 튀어나와 홀 옆에 섰습니다. 거리는 8㎝가량. 피나우는 실망한 듯 걸어가며 한 손으로 공을 툭 쳐 홀에 넣으려 했는데, 살짝 뒤땅을 치는 바람에 공을 홀까지 절반도 보내지 못했습니다. 미국 프로골프 역사상 가장 짧은 퍼트를 놓친 것입니다. 결국 피나우는 1m에서 3퍼트를 하면서 더블 보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첫 라운드 첫 홀에서 6퍼트로 망친 '빅 이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어니 엘스는 1990년대 후반 이후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던 스타입니다. 별명은 '빅 이지'(Big Easy). 190cm의 거구인데도 스윙이 무척 부드러워 생긴 별명입니다. 미국과 유럽 투어에서 47회나 우승한 선수로 메이저대회인 US오픈 2회, 브리티시오픈 2회 우승에 빛나는 '황태자'였습니다. 그런데 2016년 마스터스에서 정말 쇼킹한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마스터스가 어떤 대회입니까? '명인열전', 메이저 중의 메이저로 불리는 꿈의 무대. 어니 엘스도 누구보다 '그린 재킷'을 입고 싶어 했는데요, 그 꿈은 첫 라운드에서 바로 깨졌습니다. 그것도 파4 첫 번째 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대회를 시작하자마자 망친 것인데요, 엘스는 약 60㎝의 파 퍼트를 남기고 있었습니다.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 클럽의 그린이 '유리알 그린'이라 불릴 만큼 빠른데,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쉽게 넣을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악몽이 시작됐습니다. 첫 퍼트가 왼쪽으로 흘러 30cm 남았는데요, 허탈감 속에 친 두 번째 퍼트도 빗나갔고 세 번째 퍼트도 왼쪽으로 흘렀습니다. 엘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는데요,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네 번째 퍼트에 나섰는데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빠졌습니다. 그야말로 멘붕에 빠진 엘스는 한 뼘 거리에서 한 손으로 툭 쳤지만 역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60cm 안에서 퍼트만 6번을 했습니다. 엘스는 이 홀에서만 9타를 적어내며 이름도 생소한 '퀸튜플 보기'를 기록했습니다. 1라운드가 끝난 뒤 그는 "퍼트를 아무리 해도 안 되니 나중에는 웃음이 나오는데 그렇다고 중단할 수도 없고… 뇌 이식 수술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라며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1번 홀 5 오버 파 기록은 오거스타 내셔널 코스 사상 최다 타수 기록입니다. 결국 엘스는 8 오버 파 80타, 하위권으로 1라운드를 마쳤는데 지금까지도 마스터스 우승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50cm 파 퍼트 놓쳐 마스터스 우승 놓친 호크 어니 엘스는 첫날 무너져 우승과는 상관이 없었는데, 최고 권위의 마스터스에서 짧은 퍼트를 어이없이 연이어 놓쳐 다 잡았던 우승을 못한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린 재킷' 문전까지 갔다가 끝내 챔피언이 되지 못한 선수가 여러 명 있었지만 이 선수만큼 뼈가 아프지는 않았을 겁니다. 바로 스코트 호크입니다. 그는 1989년 마스터스 대회 마지막 라운드 17번 홀에서 1.5m 파 퍼트를 넣지 못해 결국 연장전으로 끌려갔습니다. 연장전 상대는 '스윙 머신'이라는 불리는 영국의 닉 팔도. 호크는 플레이오프 첫 번째 홀인 10번 홀에서 50cm 파 퍼트를 놓쳤습니다. 넣었으면 우승인데 넣지 못해 땅을 쳤습니다. 다음 홀인 11번 홀에서 닉 팔도는 거의 10m나 되는 긴 버디 퍼트를 넣고 환호했습니다. 팔도는 마스터스에서 3회 우승했는데 이때가 첫 우승이었습니다. 그는 이 홀에서 1~4라운드 모두 보기를 했는데 연장전에서는 극적인 버디를 잡아냈습니다. 결국 호크로서는 연장 첫 홀이 너무 아쉬웠는데 올해 만 70세인 그는 마스터스는 물론 메이저 대회 우승 한번을 못했습니다. 30cm 퍼트 실패해 메이저 우승 놓친 김인경 한국 선수 가운데 짧은 퍼트에 실패해 통한의 순간을 맛본 대표적인 골퍼는 단연 미국 여자 프로골프 메이저대회 우승을 눈앞에서 날린 김인경 선수입니다. 이제 13년이나 지났는데도 지금도 이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정말 아쉬운 순간이었습니다. 2012년 4월 미국 LPGA 투어, 메이저 대회인 크래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 마지막 라운드. 김인경은 마지막 홀에서 30cm 우승 퍼트를 남기고 있었는데 공이 그만 홀을 돌아 나오고 말았습니다. 김인경 본인은 물론 중계진, 많은 갤러리가 도저히 믿기 힘든 장면이었습니다. 유선영과 동타를 허용한 김인경은 연장전으로 끌려갔는데 유선영은 파5, 18번 홀에서 열린 연장 첫 홀에서 세 번째 샷을 핀 4m에 올린 뒤 버디 퍼트를 홀에 떨궈 생애 첫 메이저 타이틀과 통산 2승째를 품에 안았습니다. 유선영은 대회 전통에 따라 캐디와 함께 18번 홀 그린 옆 연못에 시원하게 몸을 던졌는데 김인경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장면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승 상금 30만 달러도 날아갔습니다. 해외 언론도 골프 역사상 가장 뼈아픈 실수라고 보도했습니다. 김인경은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당신을 비롯해 사람들은 언젠가 실수를 하기 마련입니다. 저는 이것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메이저 한을 메이저 우승으로 갚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 김인경은 5년 뒤 메이저대회의 한을 메이저 우승으로 말끔히 씻어냈습니다. 2017년 8월 브리티시 오픈에서 데뷔 10년 만에 처음으로 메이저 퀸에 오르며 악몽을 완전히 털어낸 것입니다. 김인경은 5년 전 깊은 상처를 씻기 위해, '뒷심 부족'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기 위해 이를 악물었습니다. 악기 연주와 춤, 노래, 독서 등 다양한 취미 활동을 통해 부정적인 생각들을 떨쳐냈고, 자신만의 독특한 훈련으로 160cm 단신의 핸디캡을 극복했습니다. 4년 뒤인 2016년 10월, 6년 만에 다시 우승컵을 들어 올린 김인경은 2017년 들어, 메이저 우승 포함 두 달 사이에 3승을 몰아치며 제2의 전성기를 활짝 열었습니다. 김인경은 2017년 브리티시오픈 우승 직후 "그냥 비 온 뒤 무지개 뜬 느낌? 그런 느낌인 것 같아요. 이런 날도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라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드물지만 퍼팅에서 반칙을 저지른 유명 선수들도 있었습니다. '악동' 존 댈리는 자신의 퍼트가 그린의 경사를 타고 내려가자 움직이는 공을 툭 치는 행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타이거 우즈의 오랜 라이벌이었던 필 미켈슨도 믿기 힘든 추태를 벌인 적이 있습니다. 그는 PGA 투어 45승 등 총 57회 우승에 메이저 6승(마스터스 3회, PGA 챔피언십 2회, 브리티시오픈 1회)을 자랑하는 스타입니다. 하지만 그는 유독 US오픈과는 인연이 없었습니다. 준우승만 무려 6번이나 한 것입니다. US오픈 우승컵만 들어 올리면 4대 메이저대회를 석권하는 커리어 그랜드 슬램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는데 US오픈에서 번번이 발목을 잡혔습니다. 48살이던 2018년 US오픈에서 그는 스타답지 않은 '비매너'를 보여줘 눈살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파4 13번 홀에서 보기 퍼트가 2단 그린을 타고 아래로 하염없이 내려가자 이성을 잃은 듯 뛰어 내려가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 공을 건드렸습니다. 고의로 건드린 것인데요, 여기서 미켈슨은 4퍼트를 했는데 규정에 따라 2벌타를 더 부과받아 한 홀에서 무려 6타를 잃었습니다. 미켈슨은 이날 81타를 치며 무너졌는데요, 최악의 스코어보다도 돌이킬 수 없는 이미지 실추로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여자 대표팀의 이유빈 선수가 계주 준결승에서 레이스를 펼치다 넘어지고도 올림픽 신기록을 작성해 화제가 됐습니다. 우리 대표팀은 그 여세를 몰아 결승전에서 금메달을 따내고 환호했는데요, 올림픽 육상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레이스 도중에 넘어졌지만 끝내 금메달을 목에 건 경우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 주인공은 핀란드의 라세 비렌, 그리고 영국의 모 파라인데요. 평행이론이 딱 들어맞을 만큼 다른 시대에 거의 같은 명장면을 연출했습니다. 올림픽 데뷔 무대에서 넘어진 23살 핀란드 경찰관 라세 아르투리 비렌은 1949년 2월생으로 핀란드 경찰관 출신입니다. 그는 23살이던 1972년 뮌헨 올림픽에 처음 출전했습니다. 첫 경기는 남자 10,000m로 마라톤을 제외하면 최장거리 종목이지요. 이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알려지지 않았던 선수였는데요, 단 한 번의 레이스가 이 선수의 운명을 바꿨습니다. 당시 남자 10,000m 결승에 나선 선수는 모두 15명. 25바퀴를 도는 레이스에서 비렌은 경기 중반까지 중위권을 달렸습니다. 그런데 12바퀴째에서 예상치 못한 장면이 나왔습니다. 5위로 달리던 비렌이 직선 주로에서 뒤에 있는 선수와 발이 부딪치며 넘어지고 말았습디다. 이 여파로 비렌의 뒤에 뒤에 있던 선수가 쓰러져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고 결국 레이스를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비렌은 달랐습니다. 통증을 참고 재빨리 일어나 다시 달렸습니다. 순식간에 최하위로 처진 비렌과 선두 그룹과의 격차는 약 20m. 비렌은 안간힘을 다해 선두 그룹을 추격했는데요, 20여 초 만에 거의 따라잡았습니다. 관중석에서는 비렌을 응원하는 격려의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비렌은 나중에 이때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내가 일어나서 보니 선두 그룹은 이미 코너를 돌고 있었다. 무조건 따라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랐고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넘어지고도 세계신기록으로 역전 금메달 올림픽에 처음 나온 비렌, 특히 10,000m는 첫 번째 종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만난 비렌은 처음엔 당황했지만 이후 침착함을 되찾아 혼신의 레이스를 펼쳤습니다. 비렌은 16번째 바퀴부터 선두에 나섰습니다. 그러니까 넘어진 지 4바퀴 만에 선두를 꿰차는 괴력을 발휘한 것이지요. 핀란드 관중은 국기를 흔들며 뜨거운 응원을 펼쳤습니다. 비렌은 끝까지 선두를 지킨 끝에 27분 38초4라는 세계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정말 대단한 명장면을 연출한 것이지요. 레이스 중반에 넘어진 상황에서 이것을 극복하고 역전 금메달을 따낸 것만 해도 엄청난데 세계신기록까지 세운 것은 한마디로 경이적입니다. 비렌은 기세를 몰아 며칠 뒤에 벌어진 5,000m에서도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하며 2관왕의 영예를 차지했습니다. 사상 최초 장거리 2종목 2회 연속 우승 뮌헨올림픽 이후 스타가 된 비렌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는데요, 이번에도 5,000m와 10,000m에서 모두 금메달을 차지하는 금자탑을 쌓았습니다. 올림픽 육상에서 사상 최초로 장거리 2종목을 2회 연속 석권한 것이지요. 1920년대 핀란드의 파보 누르미는 육상에서 통산 9개의 올림픽 금메달을 따낸 레전드인데요, 비렌도 대선배 누르미의 뒤를 이어 전설이 됐습니다. 비렌은 더 욕심을 냈습니다. 체코의 전설 '인간 기관차'로 불렸던 에밀 자토펙이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5,000m와 10,000m, 그리고 마라톤까지 석권하는 신화를 창조했는데요. 비렌도 이 대기록에 도전했지만 마라톤에서는 5위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는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도 참가했지만 10,000m에서 5위에 머물렀습니다. 비렌은 이후 핀란드 국회에 들어가 국립 연합당의 의원(1999~2007, 2010~2011)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44년 만에 리우에서 재현된 평행이론 비렌이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첫 우승을 차지한 지 44년 뒤인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남자 10,000m 결승에서 거의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당사자는 바로 영국의 스타 모 파라였습니다. 1983년에 아프리카 소말리아에서 태어난 파라는 28살이던 2011년 대구에서 열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5,000m 금메달과 10,000m 은메달을 따면서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영국 국적의 파라는 자국 런던에서 벌어진 2012년 올림픽에서 10,000m를 제패하며 영국 선수로는 이 종목 첫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이어 5,000m까지 제패하면서 영국의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4년 뒤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장거리 육상의 최대 관심은 모 파라가 라세 비렌의 1976년 2종목 2연패 신화를 40년 만에 재현할 것인지에 쏠렸습니다. 10,000m 경기가 먼저 열렸고 이목은 역시 모 파라에 집중됐습니다. 그런데 모 파라는 10바퀴째를 달리다 가슴 철렁하는 순간을 맞았습니다. 코너를 돌다 바로 뒤에 있던 선수의 발에 걸려 넘어지고 만 것인데요. 모 파라는 재빨리 일어나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고 관중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 경기는 정말 명승부였는데요. 모 파라는 역주를 거듭한 끝에 2바퀴 반을 남기고 마침내 선두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300m 남기고 뜻밖의 장면이 나왔습니다. 케냐의 폴 타누이가 무섭게 스퍼트해 파라를 제치고 선두에 나선 것입니다. 파라의 우승이 쉽지 않아 보였는데요, 하지만 파라는 마지막 코너에서 믿기 어려운 스피드를 내며 90m를 남기고 다시 역전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역전을 허용하지 않고 1위로 들어왔습니다. 10,000m를 2연패 하는 순간이었는데요.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파라는 그라운드에 엎드려 벅찬 감격을 누렸습니다. 넘어지고도 극적으로 역전 금메달을 따낸 파라는 며칠 뒤에 벌어진 5,000m도 제패해 장거리 두 종목을 2회 연속 석권했습니다. 라세 비렌에 이어 40년 만에 두 종목 2연패 위업을 달성한 것입니다. 영국 영웅 파라의 충격적 고백 모 파라는 세월이 한참 지난 2022년에 충격적인 고백으로 다시 화제의 중심이 됐습니다. 파라는 "소말리아에서 태어났는데 8살 때 내전을 피해 부모와 함께 영국으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원래 런던에서 태어났고 직업은 IT컨설턴트로 영국 시민권이 있었다."고 알려졌는데요. 그런데 모 파라는 2022년에 이 모든 것이 다 거짓이라고 스스로 밝혔습니다. BBC 다큐멘터리 '진짜 모 파라(The Real Mo Farah)'에서 자신의 '진짜' 과거를 털어놓은 것입니다. 진실은 이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파라가 4살일 때 소말리아 내전으로 사망했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모 파라 본인은 9살 때 영국에 불법 인신매매로 입국해 강제로 가사 노동을 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진짜 이름은 '후세인 압디 카인'인데요. 모 파라는 위조 여권에 표기된 이름이라고 합니다. 협박 때문에 납치됐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던 어린 파라는 용기를 내 체육 교사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놨습니다. 이후 체육 교사는 사회복지국에 연락해 다른 가정으로 입양될 수 있도록 그를 도왔습니다. 그때부터 파라는 육상 선수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14세 때 영국 학생을 대표해 라트비아에서 열린 대회에 초청을 받기도 했습니다. 파라는 "인신매매의 위험에 대해 알리기 위해 내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다"면서 "나와 똑같은 일을 겪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나를 진정으로 구한 것은 달리기였고, 달리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달라졌다"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