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부터 30년 넘게 오로지 스포츠 취재 기자 한길을 걸었다. 동-하계 올림픽, 월드컵, 아시안게임 등 각종 국내외 대회를 현장 취재했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회식, 2012년 런던올림픽 폐회식 TV 생중계에서는 해설을 맡기도 했다. 2017년에는 제28회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체육회를 출입하고 있고 SBS 유튜브 채널인 <스포츠머그>에서 '별별스포츠' 코너를 진행하고 있다.
복싱은 심판이 주관적으로 채점하는 종목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오심 논란에 휩싸여 왔습니다. 올림픽 복싱 역사에서 최악의 오심 중의 하나가 바로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수혜자이자 피해자였던 박시헌 선수가 당시 결승전 상대였던 미국 선수에게 금메달을 되돌려주는 영상이 최근 공개돼 37년 전의 사건이 다시 소환되고 있습니다. 오른손 다친 박시헌, 미국 선수에 일방적 열세 1988년 서울올림픽 복싱 라이트 미들급 결승전에서 한국의 박시헌 선수와 미국의 로이 존스 주니어 선수가 만났습니다. 결승전이 벌어진 날은 1988년 10월 2일, 이날이 서울올림픽이 폐막하는 즉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전날 10월 1일까지 한국은 금메달 10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0개로 종합 7위이었는데요, 마지막 10월 2일 결승에 오른 복싱의 김광선, 박시헌 두 선수에게 금메달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김광선의 가능성은 컸습니다. 하지만 박시헌은 녹록지 않았는데요, 상대 로이 존스 주니어가 너무 강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두 선수가 모두 금메달을 차지하게 되면 한국이 서독을 제치고 역대 최고 성적인 종합 4위까지 노릴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불운하게도 박시헌은 서울올림픽 개막 2주 전에 오른손을 다쳤습니다. 오른손잡이인 그에게 결정적인 악재이었습니다. 그래서 8강전에서도 이탈리아 선수에게 3대 2로 겨우 이겼습니다. 이탈리아 나르디엘로 선수가 탈의실에서 1시간 동안 통곡할 만큼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이겼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박시헌은 우여곡절 끝에 결승에 올랐는데요, 상대의 기량이 정말 뛰어났습니다. 스피드, 펀치력, 기술에서 모두 박시헌을 처음부터 압도했습니다. 2라운드에서는 로이 존스 주니어의 강한 주먹을 맞고 스탠딩 다운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미 오른손을 다친 박시헌은 이렇다 할 반격을 하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박시헌이 일방적으로 밀린 것이지요. 경기 후 비디오 분석에 따르면 로이 존스 주니어는 총 303회 주먹을 날려 86회의 유효 타격에 성공했습니다. 박시헌은 188회에 32회였습니다. 그러니까 공격 빈도와 유효타 모두에서 크게 뒤진 것입니다. 아마추어는 유효타를 중시하는데요, 여기서 86대 32, 로이 존스 주니어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봐도 로이 존스 주니어가 이긴 경기이지요. 마지막 3라운드가 종료되자 미국 측은 승리를 확신했고 현장에 온 로이 존스 가족들도 기뻐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반면 박시헌과 우리 코치진 분위기는 착 가라앉았습니다. 패배를 예감한 것입니다. 많이 맞은 선수가 금메달..경악할 만한 오심 결과가 발표되자 양측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주심이 박시헌의 선수의 손을 들어준 것입니다. 한국에서 열린 서울올림픽, 최고 영예인 금메달이 확정되면 엄청난 환호를 해야 정상인데, 박시헌 선수는 ‘이게 뭐지’ ‘뭐가 잘못됐나’는 표정을 지었고요, 로이 존스 주니어는 말도 안 되는 판정이라며 극도로 실망한 채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은 격앙된 반응을 보였고, 미국 NBC 중계진은 “박시헌이 금메달을 훔쳤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박시헌은 멋쩍어하면서 상대에게 다가가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이긴 줄 알고 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로이 존스는 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링에서 내려갔습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7천여 관중 반응도 갈렸는데요, 3분의 1은 박시헌의 금메달에 함성을 질렀고, 3분의 1은 어리둥절했고, 3분의 1은 거세게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5명의 부심 판정 내용을 보면, 소련과 헝가리 부심이 60-56, 4점 차로 로이 존스의 우세로 판정했고요, 우루과이와 모로코 부심은 59-58, 박시헌의 1점 차 우세로 채점했습니다. 마지막 우간다 부심은 59-59, 동점으로 채점하면서도 박시헌의 우세로 판정했습니다. 이로써 박시헌은 3대 2, 아슬아슬한 판정승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하지만 판정이 나오자 박시헌은 기쁨보다는 매우 송구하다는 반응을 보였고요, 어떤 한국팀 지도자는 서로 ‘주고받은 셈’이라는 말로 패배를 간접적으로 시인했습니다. 주고받았다는 것은 1984년 LA 올림픽에서 우리 복싱 선수들이 미국의 텃세 판정으로 억울하게 탈락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4년 전엔 한국이 당했는데 이번엔 미국이 당했다는 것이지요. 아무튼 박시헌의 금메달 덕분에 우리나라는 금메달 12개로 서독을 1개 차이로 제치고 종합 4위를 차지했는데요, 지금까지도 역대 최고 순위로 남아 있습니다. 만약 은메달에 그쳤다면 우리가 은메달 수에서 서독에 밀려 5위가 됐는데 박시헌의 금메달로 종합 4위에 올랐습니다. 서울올림픽 이전, 그리고 이후에도 한국이 동·하계올림픽을 통틀어 종합 4위를 차지한 적은 없습니다. 이례적으로 은메달리스트를 MVP로 선정 금메달을 눈앞에서 도둑맞은 미국 선수단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거세게 항의하며 국제올림픽위원회 IOC에 제소했습니다. 미국 복싱대표팀 코치는 NBC와 인터뷰에서 “한국 복싱 관계자가 9월 28일, 국적을 알 수 없는 심판에게 현금과 보석을 제공하려고 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국내 언론도 날카로운 비판을 쏟아냈는데요, ‘한국을 먹칠한 억지 금메달’, ‘부당한 승리’라는 비난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국내 언론사에는 항의 전화가 빗발쳤고 홈 어드밴티지로 따낸 금메달을 반납하라는 요구까지 나왔습니다. 박시헌이 이겼다고 판정한 심판도 무사하지 못했습니다. 3명이 모두 징계를 받았는데 이 가운데 2명은 영구 자격정지를 받아 복싱계를 떠나야 했습니다. 더 가관인 것은 국제아마추어복싱연맹의 행태입니다. 로이 존스 주니어에게 미안했던지 서울올림픽 복싱 최우수복서, 즉 MVP를 로이 존스 주니어에게 수여했습니다. 그전까지 MVP는 전 체급 금메달리스트들 가운데 1명을 선정하는 게 관례였는데요, 이 관례를 깨고 은메달리스트를 MVP로 선정하는 해프닝을 벌였습니다. 지금까지도 은메달리스트가 MVP가 된 것은 로이 존스 주니어 딱 1명입니다. ‘동독 개입’ 문서 공개, IOC는 ‘증거 불충분’으로 결정 박시헌 논란은 1996년 구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Stasi) 문서가 공개되면서 새 국면을 맞게 됩니다. 동독이 종합순위 경쟁국인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당시 부심들에게 뇌물을 제공한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결승 전날 10월 1일 메달 순위를 보면 동독이 소련에 이어 종합 2위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10월 2일, 미국이 복싱 3체급을 석권하고 다른 종목에서 1개를 보태 금메달 4개를 따내면 미국의 2위, 동독이 3위로 내려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동독이 심판을 움직여 미국을 견제했다는 것인데요, 공교롭게도 당시 국제아마추어 복싱연맹 사무총장이자 실세였던 칼 하인츠베어 씨가 동독 사람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동독은 금메달 1개 차이로 미국을 제치고 소련에 이어 종합 2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독일 슈피겔지는 “당시 판정에 한국 대기업 인사가 관여했다”며 한국 로비설을 주장했는데요, 1997년 IOC는 한국, 동독 모두 심판 매수에 관여한 명백한 증거가 없다며 이른바 심판 매수설을 인정하지 않았고 결과도 끝내 바뀌지 않았습니다. 박시헌은 은퇴, 로이 존스 주니어는 4체급 석권 신화 박시헌 대표팀 감독 올림픽 복싱 사상 최악의 오심은 두 선수의 인생에도 결정적 영향을 끼쳤습니다. 박시헌은 금메달을 받고도 이 사건의 피해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국내외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고, 선수 생활을 이어가지 못한 채 결국 은퇴했습니다. 은퇴 후에도 대인 기피증을 앓는 등 계속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습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 모임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2020년 인터뷰에서 “당시 2등으로 끝났더라면 인생이 훨씬 더 행복했을 것”이라며 “가끔씩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은퇴 이후 체육교사 생활을 했고 2001년부터 국가대표 코치를 맡았습니다. 2013년엔 국가대표팀 감독이 됐고 2016 리우올림픽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2023년 박시헌을 모티브로 한 진선규 주연의 영화 ‘카운트’가 개봉하기도 했는데 현재 제주는 서귀포시청 복싱팀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또 다른 피해자인 로이 존스 주니어 존스는 프로로 전향한 후 천재적인 기량을 발휘하며 4체급을 석권해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등 복싱계의 전설적인 인물로 남았습니다. 2020년 11월에는 전설 마이크 타이슨과 이벤트성 2분 8회전 경기를 했는데 싱겁게 무승부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코로나19 시절 오직 돈 때문에 링에 올랐는데 팬들을 실망시켰습니다. 로이 존스 주니어를 찾아가 금메달 전달한 박시헌 감독 로이 존스 주니어에게 금메달 주는 박시헌 감독 서울올림픽이 끝난 지 35년이 지난 2023년 박시헌 감독은 로이 존스 주니어가 살고 있는 미국 플로리다주 펜서콜라의 체육관을 직접 방문해 자신의 금메달을 전달했습니다. 로이 존스가 이 영상을 2년이 흐른 지난 9월 3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공개해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됐습니다. 로이 존스를 뜨겁게 포옹한 박시헌 감독은 “36년(실제로는 35년) 동안 당신을 기다렸다”며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이어 그는 금메달을 꺼내 들었는데요, 박 감독은 통역을 맡은 아들을 통해 로이 존스 주니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88년 서울 올림픽 금메달입니다. 88년도 서울에서 홈에서 이 금메달을 가져갔습니다. 지금은 내가 잘못된 걸 알고 로이 존스 주니어의 홈에서 내가 이 메달을 (돌려줍니다)” 단순한 인터뷰 촬영으로 생각했던 존스 주니어는 “믿을 수 없다”며 감정에 복받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SNS를 통해 “1988년 나는 복싱 역사상 가장 큰 논란 중 하나로 꼽히는 경기에서 금메달을 빼앗겼다. 하지만 신의 은총으로 그 메달을 차지한 선수가 내 고향까지 찾아와 메달을 돌려줬다”는 소감을 남겼습니다. 이 스토리는 미국 방송에도 화제가 됐는데요, 로이 존스 주니어는 두 명 모두 피해자이고 서로 고통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박시헌은 금메달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금메달을 돌려주고 싶다고 했고 저는 돌려받고 싶었습니다. 그 사건을 일으킨 사람은 박시헌이 아니라 심판들이었습니다. 심판들이 복싱에서 저지른 부당한 판정 때문에 박시헌과 나 모두 고통을 받았습니다.” 박시헌은 오랫동안 금메달을 돌려주고 싶다는 의사를 꾸준히 밝혀왔고 로이 존스 주니어 측에서도 몇 년 전부터 박시헌을 미국에 초청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35년의 기다림 끝에 마침내 금메달을 직접 전달한 박시헌은 마음의 짐을 덜어낼 수 있었습니다. 박시헌과 로이 존스 주니어, 두 선수 모두 심판들의 황당한 판정이 만든 피해자였습니다. 스포츠의 존재 의미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이런 사건은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수영은 기록 종목입니다. 100분의 1초라도 앞서는 사람이 금메달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평범한 상식이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는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가장 먼저 들어온 선수가 은메달을 받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수영에서 터치 패드가 도입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을 소개하겠습니다. 1960년 로마올림픽 수영에서 무슨 일이? 아래 선수가 랜스 라슨 육상의 꽃은 남자 100m이고 수영은 남자 자유형 100m입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빨리 헤엄치는 사람을 가리는 경기인데 1960년 로마올림픽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남자 자유형 100m의 우승 후보는 미국의 랜스 라슨과 호주의 존 데빗, 두 선수이었습니다. 데빗은 세계 기록 보유자로 당시 23살이었고요, 라슨은 20살의 떠오르는 신예였습니다. 1만여 명의 관중이 야외 경기장을 가득 채운 가운데 레이스는 시종 치열했는데요, 초반에는 뜻밖에도 브라질의 마누엘 산토스가 선두로 치고 나가 50m를 가장 먼저 돌았습니다. 이후에는 약 5명의 선수가 뜨거운 경쟁을 펼쳤습니다. 75m쯤에서는 3레인의 데빗이 조금 앞서는가 했는데 80m 이후부터 4레인의 라슨이 무섭게 치고 나왔습니다. 데빗은 필사의 추격전을 펼쳤는데요, 라슨과 데빗 두 선수가 거의 동시에 벽을 쳤습니다. 당시 중계 캐스터는 "데빗과 라슨이 정말 거의 똑같이 들어옵니다. 누가 우승했다고 말할 수 없는 정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언뜻 보면 미국의 라슨이 조금 앞선 것처럼 보였습니다. 현장에 있던 관중 거의 대부분도 라슨이 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데빗도 경기 직후 라슨을 축하해줬습니다. 선수들은 직감적으로 알거든요. 라슨은 훗날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10분이나 15분 동안 제가 올림픽 챔피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물속에서 우승을 즐기고 있다가 나와서 몸을 말리니까 심판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심판위원장이 2위를 금메달리스트로 결정 그런데 당시에는 지금 같은 터치 패드가 없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레인 당 3명의 계시원이 서서 스톱워치를 누르는 방식으로 기록을 측정했습니다. 3명의 계시원이 측정한 데빗의 기록은 55초20으로 모두 같았습니다. 하지만 라슨은 좀 달랐습니다. 한 계시원은 55초00, 다른 2명의 계시원은 55초10으로 측정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규정에 따르면 같은 두 기록이 인정되기 때문에 라슨은 55초10, 데빗은 55초20으로 결정됐습니다. 그러니까 라슨이 0.1초 빨랐던 것이지요. 하지만 1960년 로마올림픽의 수영 심판은 초시계를 그대로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규칙을 보면 양측에 12명씩의 심판이 서서 육안으로 누가 먼저 들어왔는지를 판단했는데요, 1등을 정하는 심판은 3명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누가 1등이냐고 묻자 2명은 데빗이, 1명은 라슨이 먼저 들어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다음에 2등을 정하는 다른 3명의 심판에게 누가 2등이냐고 묻자 2명은 데빗이라고 했고 1명은 라슨이라고 말했습니다. 결과적으로 3대 3으로 우열을 가릴 수 없었습니다. 당시 규정에 따르면 이렇게 심판들이 육안으로 판단했을 때 동등한 결과나 나올 때는 초시계, 즉 스톱워치를 따르도록 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심판위원장이었던 서독의 한스 런스트로머가 역사에 길이 남을 잘못된 판단을 했습니다. 그는 "존 데빗이 먼저 들어온 것을 봤다. 금메달은 데빗에게 돌아가야 한다"며 데빗의 우승을 자의적으로 결정했습니다. 당시 규정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지요. 그런데 당시 찍힌 사진을 보면 런스트로머는 5m 이상 떨어져 있어 정확하게 순위를 가릴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런스트로머의 말도 안 되는 결정에 미국은 항소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라슨은 "정말 치열한 접전이었다. 75m쯤에서 데빗이 조금 앞선다고 느꼈지만 결승선까지 아직 많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혼신의 힘으로 마지막 스퍼트를 했고 데빗을 15cm쯤 앞서 1위로 들어온 것 같다."고 훗날 회상했습니다. 시상식 (오른쪽이 랜스 라슨) 느린 화면을 보면 라슨은 언더 워터, 즉 물 아래에서 벽을 터치한 반면 데빗은 오버 워터, 즉 물 위에서 터치했습니다. 이럴 경우 사람의 눈으로 보면 오버 워터, 즉 물 위에서 터치한 게 훨씬 잘 보입니다. 금메달을 도둑맞은 라슨 선수는 시상식에서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습니다. 라슨의 기록을 0.1초 느리게 변경해 은메달로 확정 랜스 라슨 더 황당한 것은 라슨의 기록을 55초10에서 55초20으로 더 느리게 변경한 것입니다. 데빗의 기록이 55초20인데 금메달리스트의 기록이 은메달리스트보다 느리면 안 되기 때문에 두 선수 모두 공식 기록을 55초20으로 만드는 짓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한 외국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이때 공식적이지는 아니지만 실험적으로 전자 장비를 도입해 기록을 측정했다고 하는데요. 결과는 라슨이 55초10, 데빗이 55초16으로, 라슨이 0.06초 빨랐습니다. 그러니까 라슨의 기록은 수동 스톱 워치와 같았고 데빗은 스톱 워치보다 0.04초 빠르게 나왔습니다. 결론적으로 지금처럼 전자 장비를 썼으면 라슨이 금메달이 확실했다는 것이지요. 라슨은 로마 올림픽 남자 400m 혼계영에서 접영 주자로 유일한 금메달 1개를 따내 억울한 마음을 다소나마 달랬는데 지난해 1월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라슨의 희생이 전자 패드 도입 결정적 계기 희대의 논란 이후 스포츠계에 지각 변동이 일어났습니다. 국제올림픽위원회 IOC는 실수를 하는 사람 대신 전자 센서를 도입하기로 했습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부터 초시계와 심판의 육안으로 순위를 가리는 규정은 사라졌습니다. 이후에는 판정 논란이 거의 없었습니다. 어찌 보면 전자 패드 도입으로 고마워해 할 선수들이 많은데요. 그 대표적 선수가 역대 수영 사상 최고 선수인 미국의 마이클 펠프스입니다. 펠프스는 2004년 아테네부터 2016년 리우까지 올림픽 금메달 23개, 은메달 3개, 동메달 2개 등 총 28개의 메달로 역대 최다 올림픽 메달리스트인데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한 대회에서 8개의 금메달을 따내 이 부문 역대 최고 기록도 갖고 있습니다. 종전 기록은 펠프스의 대선배인 마크 스피츠가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수영 7관왕이었습니다. 오른쪽이 펠프스 마이클 펠프스가 전자 터치 패드 도입을 특히 감사해야 할 종목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접영 100m입니다. 펠프스는 자신의 7번째 금메달에 도전했는데요, 5레인의 펠프스와 4레인에 있었던 세르비아의 밀로라드 차비치는 치열한 접전을 벌였는데 육안으로 보면 펠프스가 늦게 들어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터치 패드는 0.01초 차 펠프스의 승리로 판정했습니다. 7번째 금메달을 목에 건 펠프스는 이후 1개의 금메달을 더 보태 마크 스피츠를 제치고 단일 올림픽 8관왕이라는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터치 패드는 수영선수들의 기록을 재는 정밀장치인데 1.5㎏의 힘만 가해져도 작동됩니다. 터치 패드에다 요즘엔 선수의 손이 패드에 닿는 순간 카메라까지 작동해 100장의 사진을 찍기 때문에 판정 논란이 생길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수영과 육상은 순위 결정 기준이 다른데요, 육상은 100분의 1초까지 같을 경우 사진판독으로 끝까지 순위를 가리지만, 수영은 100분의 1초까지만 인정합니다. 2016 리우올림픽 남자 접영 100m에선 마이클 펠프스 등 3명의 선수가 100분의 1초까지 같아 공동으로 은메달을 받는 이례적 장면도 나왔습니다.
흔히 올림픽 금메달은 하늘이 낸다고 합니다. 실력은 기본이고 운까지 따라야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인데요, 이 말이 딱 들어맞는 선수가 있습니다. 바로 중국의 탁구 스타 왕하오입니다. 올림픽을 제외한 모든 국제대회 남자 단식을 제패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올림픽에서는 3회 연속 은메달에 그치며 진한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중국에서 '천년간 2인자' 즉 '영원한 2인자'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면 타법의 완성자, '백플릭'으로 한 시대 풍미 왕하오는 1983년 12월 중국 창춘시에서 태어났는데요, 키 175cm, 체중 78kg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체구를 가졌습니다. 1990년대를 빛냈던 류궈량과 공링훼이 시대가 저물어 가던 2000년대 초반 혜성처럼 등장했습니다. 그는 마린, 왕리친과 함께 중국 남자 트로이카로 불렸는데요, 중국식 펜홀더 전형을 사용하는 스타일로 흔히 '이면 타법의 완성자'로 불리고 있습니다. 펜홀더는 세이크핸드 선수와 비해 일반적으로 라켓의 뒷면, 즉 이면을 이용한 공격이 그렇게 강하지 않는데요, 왕하오는 달랐습니다. 백핸드 드라이브를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파워도 대단했습니다. 특히 '백핸드 사이드스핀 플릭'이란 기술로 유명했습니다. 줄여서 '백핸드 플릭', 더 줄여서 '백플릭'이라고 하는데요, 손목을 이용해 회전을 주면 공이 마치 바나나처럼 빠르게 휘기 때문에 상대가 대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포핸드 공격도 무척 잘했습니다. 또 임기응변과 전술도 뛰어나 27개월 연속 세계 랭킹 1위를 달렸습니다. 금메달만 해도 무척 많이 목에 걸었는데요, 올림픽 단체전에서 2개, 세계선수권 9개, 월드컵 3개, 아시안게임 4개, 아시아선수권 5개, 기타 국제대회에서 38개 등 숱한 금메달을 따내며 한 시대를 풍미했습니다. 유승민의 천적이었지만 아테네 올림픽에서 충격패 왕하오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노렸습니다. 당시 1번 시드는 트로이카 중의 한 명인 장신의 왕리친인데 준결승에서 왕하오에게 졌습니다. 2번 시드의 마린은 스웨덴의 발트너에게 져 8강 진출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중국은 왕하오에게 모든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데요, 당시 왕하오는 상대 전적에서 유승민에게 6승 무패로 압도적 우세를 보였습니다. 그래서 중국은 금메달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왕하오가 결승전 상대인 유승민에게 너무 강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 밖으로 유승민의 승리였습니다. 대이변이 일어난 것입니다. 왕하오에 대비해 치밀하게 전략을 짰고 김택수 코치와 함께 피나는 맞춤형 훈련을 한 결과였습니다. 유승민이 1988년 서울올림픽 유남규 이후 16년 만에 남자 단식 금메달을 따내자 한국에는 다시 탁구 열풍이 불었습니다. 왕하오도 덩달아 유명 인사가 됐습니다. 당시 왕하오는 팬클럽 회원만 1천 명이 넘을 정도로 국내에서도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방한했을 때 뜨거운 사인공세를 받으며 유승민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유승민은 이후에도 왕하오에게 딱 1번 이겼습니다. 통산 전적에서 2승 18패로 절대 열세였지만 아테네 올림픽에서 1번 이긴 게 18번 진 것보다 훨씬 컸습니다.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통한의 은메달 한동안 실의에 빠진 왕하오는 자국에서 열리는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반드시 금메달을 거머쥐겠다면 단단히 별렀습니다. 베이징 올림픽 1년 전인 2007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월드컵이 열렸는데요, 이때 유승민을 4대 0으로 꺾고 정상에 올랐습니다. 바르셀로나가 고향인 사마란치 전 IOC 위원장으로부터 트로피를 받은 왕하오는 세계 1위로서 자타가 공인하는 베이징 올림픽 단식 금메달 후보 0순위로 꼽혔습니다. 탁구는 중국의 국기나 다름없고 오랫동안 세계 최강을 지켜왔습니다. 왕하오의 꿈은 자기 조국에서 처음 열리는 올림픽에서 당연히 단식 금메달을 따는 것이었습니다. 결승에서 만난 상대는 팀 동료 마린, 마린은 왕하오보다 3살 많은 당시 28살의 베테랑이었는데요, 까다로운 서브가 특기이고 번개 같은 포핸드 드라이브가 일품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왕하오의 장단점을 훤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마린은 노련한 플레이로 왕하오가 특기를 살릴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왕하오는 2게임 먼저 내주고 3번째 게임을 따냈지만 4번째, 5번째 게임에서 져 결국 4대 1 패배를 당했습니다. 2회 연속 은메달에 그친 왕하오는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올림픽 징크스에서 벗어나지도 못했습니다. 런던에서는 후배에게 패배, 3연속 은메달 불운 1980년대 1990년대 중국 최고지도자 등소평, 떵샤오핑의 별명이 '부도옹', 즉 오뚝이인데요, 왕하오도 그랬습니다. 베이징 올림픽 이듬해인 2009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식 결승에서 5살 많은 팀 동료 왕리친을 꺾고 정상에 올랐습니다. 이 경기가 손에 꼽히는 명승부였는데요, 왕하오 탁구의 진수를 보여준 경기였습니다. 왕하오는 이 대회 복식에서도 금메달을 차지해 2관왕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2010년 월드컵에서는 팀 후배 장지커를 제치고 월드컵 세 번째 우승을 거두면서 제2의 전성기를 여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2011년부터는 장지커에게 번번이 발목을 잡혔습니다. 장지커는 1988년 생으로 왕하오보다 5살 어린 떠오르는 신예였습니다. 그리고 왕하오처럼 백핸드 기술이 화려한 데다 공격이 변화무쌍했고 그 속도가 엄청 빨랐습니다. 2011년 세계선수권과 월드컵 대회에서 왕하오를 잇따라 누르고 정상에 오르며 세대교체 신호탄을 쏘아 올렸습니다. 이렇게 되자 모든 관심은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왕하오가 자신의 천적인 무서운 후배 장지커를 꺾을 수 있느냐에 쏠렸습니다. 새로운 최강자로 떠오른 장지커와 어느덧 30살을 눈앞에 둔 왕하오 두 선수가 결승에 올라 외나무다리 대결을 벌였는데요, 왕하오는 사실상 마지막 올림픽이었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경기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첫 게임이 정말 아쉬웠습니다. 10대 10으로 듀스에 들어갔고 왕하오가 16대 15로 앞서 경기를 끝낼 수 있었는데 여기서 뼈아픈 실수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16대 16에서 장지커가 그야말로 번개 같은 포핸드로 받아쳐 점수를 얻었습니다. 이어 왕하오의 서버를 절묘한 백플릭으로 응수했는데 왕하오가 받지 못해 결국 첫 게임을 18대 16으로 내주고 말았습니다. 왕하오는 2, 3게임을 내준 뒤 4번째 게임을 12대 10으로 따냈지만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5번째 게임에서 초반에 5대 0으로 앞서다가 듀스 끝에 졌는데요, 11대 11에서 왕하오가 백핸드 플릭을 시도하자 장지커가 번개 같은 백핸드 드라이브로 맞받아 친 장면이 압권이었습니다. 왕하오는 13대 11로 져 결국 4대 1로 패배했습니다. 단식 금메달을 따낸 장지커는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격한 세리머니를 펼쳤고 3회 연속 은메달에 머문 왕하오는 허탈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끝내 지긋지긋한 올림픽 징크스에서 벌어나지 못한 왕하오는 방송 카메라 앞에서 진한 눈물을 연신 흘려 보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그는 "아마도 이번(2012년 런던 올림픽)이 저의 마지막 올림픽인 것 같습니다. 매우 좋은 올림픽이었는데요, 마지막 올림픽에서 선수 생활의 마침표를 잘 찍은 것 같습니다.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따내 매우 기쁩니다."라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왕하오는 이듬해 2013년 세계탁구선수권에서 장지커에게 또 지며 4연패를 당했고 2014년 12월 은퇴를 선언하면서 16년간의 대표 선수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왕하오는 올림픽에서도 2008년과 2012년 금메달은 따냈는데 모두 단체전 우승이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선수권과 월드컵, 아시안게임, 아시아선수권 등 주요 국제대회에서는 모두 단식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한마디로 하늘이 그에게 올림픽 단식 금메달만은 허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때문에 왕하오는 영원한 은메달리스트, 'Forever Silver'라고 불리게 됐는데요, 중국에서는 '천년간 2인자'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천년간 2인자'라는 것이 쉽게 말해 영원한 2인자라는 것이지요. 애제자 판전둥 올림픽 금메달 통해 한풀이 왕하오가 2014년 은퇴하기 직전에 출전한 마지막 대회가 스웨덴 오픈인데요, 당시 31살의 왕하오는 17살의 샛별 판전둥에게 완패하면서 선수 생활의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왕하오는 판전둥이 대성할 재목이라는 점을 일찌감치 파악했습니다. 판전둥도 왕하오의 제자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왕하오는 자신의 훈련 파트너로 기용해 기술과 노하우를 전수했습니다. 이후 판전둥의 기량은 무럭무럭 자랐는데요, 2021년에 열린 2020 도쿄올림픽에서 판전둥은 결승에 올라 팀 선배 마룽과 대결하게 됐습니다. 판전둥은 24살, 마룽은 33살의 베테랑인데 마룽은 2016년 리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당시 세계 3위, 판전둥이 세계 1위였습니다. 하지만 상대 전적에서 15승 5패로 크게 앞서 있던 마룽은 노련한 플레이로 올림픽에 처음 나온 판전둥을 4대 2로 꺾고 2회 연속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중국 언론에서는 왕하오의 올림픽 은메달 징크스가 제자인 판전둥에게도 이어졌다며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왕하오는 다시 한번 속이 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2인자 징크스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왕하오는 2023년 초부터 중국 남자대표팀 감독이 됐는데요, 그해 가을 중국 항저우에서 아시안게임 열렸는데, 남자 단식 결승에서 판전둥이 팀 동료 왕추친에게 아쉽게 져 또 은메달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중국 언론들은 판전둥이 스승 왕하오에 이어 앞으로도 계속 은메달만 따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스승과 제자, 대를 이어 내려올 것 같은 2인자 징크스는 마침내 지난해 파리 올림픽에서 깨졌습니다. 여기에는 다분히 운도 따랐습니다. 판전둥의 라이벌인 세계 1위 왕추친이 혼합복식 금메달을 따낸 뒤 기념 촬영을 했는데 사진기자가 그만 왕추친의 라켓을 밟아 파손시켰습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왕추친은 예비 라켓으로 단식 32강전에 나섰는데 어이없이 스웨덴 선수에 패배해 조기 탈락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판전둥은 비교적 손쉽게 결승에 진출해 스웨덴 선수를 꺾고 꿈에 그리던 올림픽 첫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금메달이 확정되자 왕하오는 제자를 얼싸안고 벅찬 감격을 누렸습니다. 자신이 끝내 이루지 못했던 올림픽 단식 금메달의 한을 제자인 판전둥을 통해 마침내 풀었기 때문입니다.
농구에서 '3점슛' 도입은 1979년 미국 프로농구 즉 NBA가 그 시초입니다. 이전에는 림 바로 아래에서 넣든 20m가 넘는 장거리 슛을 집어넣든 모두 2점으로 처리했습니다. 3점슛 규정이 생기면서 플레이의 양상은 달라졌습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는 양궁에도 변화의 새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11점제'가 도입된 것입니다. 현재는 시험 단계이지만 2028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부터 '11점제'가 공식 채택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X10' 맞히면 1점 더해 11점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의 김경욱 선수는 여자 개인전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이때 김경욱은 만점인 10점 과녁 정중앙에 설치된 지름 1cm 카메라 렌즈를 두 번이나 깨트리면서 모두를 경악케 했습니다. 당시 현장에서 취재 중이던 필자를 비롯해 많은 관계자들은 "저런 때는 11점을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로부터 29년이 흐른 지난 5월 세계양궁연맹은 마침내 '11점제'를 시험 운영했습니다. 그 첫 무대는 튀르키예 안탈리아에 열린 양궁 월드컵 3차 대회이었습니다. 10점 과녁 안쪽에 있는 더 작은 원, 이른바 '엑스 텐'(X10)이라고 부르는 위치를 맞히면, 1점을 더해 11점으로 인정하기로 한 겁니다. 즉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10점과 11점을 처음으로 세분한 것입니다. '엑스텐'은 지름이 6.1cm에 불과합니다. 70m 떨어진 거리에서 500원짜리 동전 두 개 정도 크기의 원을 명중시키면 11점입니다. '11점제'에서는 세트 당 기존보다 3~6점까지 더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고 승패의 중요한 변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양궁의 재미를 더하기 위해 '11점제'를 한번 테스트한 것인데 결과는 어땠을까요? '11점제 유탄'..세계 최강 김우진 32강전 패배 사상 처음으로 '11점제'가 도입된 월드컵 3차 대회에서 최대 이변은 바로 남자 간판스타 김우진의 32강전 패배였습니다. 지난 2024 파리올림픽 3관왕에 올랐던 김우진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강. 하지만 김우진은 32강전에서 세계 랭킹 10위의 스페인의 안드레스 테미노와 맞붙어 패배했습니다. 만약 '11점제'가 없었다면 김우진이 승리하는 경기였습니다. 승부처인 3세트에서 김우진은 10-10-9를 쐈는데, 상대가 11-11-8, '엑스텐'을 두 발 쏘면서 1점을 앞서게 된 겁니다. 종전처럼 10점 만점제로 했으면 김우진이 29점, 상대가 28점으로 승부가 뒤바뀔 수 있었던 상황이었지만 11점제 탓에 패배한 경기였습니다. 반면, 여자부 세계 최강 임시현은 '11점제'의 이득을 보기도 했습니다. 16강전에서 우크라이나의 아나스타샤 파블로바에 6대 2로 승리했는데, 이때 임시현은 4세트까지 전체 12발의 화살 중 5발을 '엑스텐'(11점)에 명중시키며 3세트를 먼저 따냈습니다. 만약 10점제 방식이었다면, 이 경기는 5세트까지 가는 접전이 펼쳐졌을 것이고, 승패는 달라졌을 수도 있었습니다. '11점제' 한국 양궁에 다소 유리 '11점제'가 처음 도입된 월드컵 3차 대회에서 한국은 금메달 4개, 은메달 2개, 동메달 2개를 획득하며 세계 정상을 재확인했습니다. 대한양궁협회의 분석에 따르면 결론적으로 '11점제'는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전문가들은 '11점제'가 궁극적으로 한국 양궁에는 조금 유리할 수 있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지난 5월, 중국에서 열린 월드컵 2차 대회 단체전 기록을 분석해 보면, 리커브 남자 대표팀은 전체 화살의 59%를 10점에 꽂아 넣었고, 10점 중 47%가 '엑스텐'이었습니다. 반면, 외국 선수들의 10점 화살 비율은 40%로 한국보다 낮았고, 그중에서도 31%만이 '엑스텐'에 들어갔습니다. 여자 대표팀도 마찬가지인데, 한국 대표팀은 화살의 46%가 10점, 이 가운데 45%가 '엑스텐'이었던 것에 비해 외국 선수들은 10점 비율이 27%, '엑스텐'은 이 중 25%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10점을 많이 쏴야 '엑스텐'에 들어갈 확률도 높아지는데, 한국 양궁은 현재 10점 비율이 다른 나라 선수들에 비해서 매우 높습니다. 지난해 파리올림픽 결과를 놓고 분석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선수들이 '엑스텐'에 훨씬 더 많이 쏘았고 그 결과 한국 양궁은 전무후무한 5개 전 종목 석권 신화를 달성했습니다. '11점제' 도입에 대해 여자 최강 임시현은 "저희끼리는 살짝 우스갯소리로 '10점까지는 실력인데 엑스텐은 운이 아니냐' 이런 얘기를 했었는데, '아. 운이면 안 되는구나 이거, 열심히 집중해야겠다' 이 생각으로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밝혔고 김우진은 "우리 선수들이 항상 기록을 재면 10점과 엑스(엑스텐)의 개수는 항상 다른 나라 선수들보다 많이 쏴요. 의외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우리에게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 하나의 룰이지 않을까 생각을 갖습니다"라며 자신감을 드러냈습니다. LA 올림픽에 양궁 '11점제' 도입될까? '11점제'는 지난 7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벌어진 월드컵 4차 대회에는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9월 5일부터 광주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도 종전대로 10점제입니다. 하지만 세계양궁연맹은 '11점제'를 계속 검토할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11점제'가 처음 도입된 월드컵 3차 대회에서 세계 최강 김우진이 조기 탈락하는 이변이 발생한 점을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11점제'가 양궁의 의외성을 높일 수 있고 시청자의 흥미를 더 자극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한국 양궁이 절대 강자로 군림하자 세계양궁연맹은 한국을 견제하기 위해 경기 방식을 숱하게 변경해 왔습니다. 그때마다 우리 양궁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적응해 왔고 지난 40년 넘게 세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습니다. 대한양궁협회는 만약 내년 콜롬비아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에서 11점제가 도입된다면 2028년 LA 올림픽에서도 11점제를 채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양궁협회는 이미 LA 현지에서 올림픽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경기장과 훈련장, 숙소 등 올림픽 전반에 대해 꼼꼼하게 체크하고 있습니다. 경기 규칙에 대한 대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한양궁협회는 "세계 최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룰에도 빠르게 적응하고,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기력을 갖출 수 있도록 더욱 철저히 준비하겠다"라고 밝혔습니다. 호진수 양궁 대표팀 감독은 새로 도입된 11점제에 대해 "주요 대회 데이터를 시뮬레이션해 본 결과, 최종 순위에는 큰 영향이 없었다. 우리 선수들의 엑스텐 명중 수가 타국보다 많았던 만큼 더욱 자신감 있게 경기에 임할 것"이라며 각오를 다졌습니다.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피겨 여왕'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딴 이후 한국 피겨 스케이팅에 숱한 '김연아 키즈'가 속출했습니다. 지난 15년 동안 '제2의 김연아'로 기대를 모았던 유망주가 꽤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김연아 반열에 오른 선수는 없었습니다. 세계 남자 골프계에서도 '제2의 타이거 우즈'가 될 것으로 꼽혔던 선수가 여러 있었지만 우즈처럼 '골프 황제'가 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세계 랭킹 1위 스코티 셰플러가 지난달 시즌 마지막 대회인 디 오픈 챔피언십 정상에 오르면서 '제2의 우즈'같은 황제에 등극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우즈를 연상시키는 '절대 강자' 셰플러 지금은 분명히 셰플러 시대입니다. 지난 2006년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디 오픈에서 타이거 우즈는 부친상을 당한 슬픔을 딛고 통산 세 번째로 클라레 저그(우승컵)를 들어 올렸습니다. 당시 우즈는 완벽한 플레이로 압도적인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지난달 셰플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치 다른 코스에서 '나 홀로' 플레이를 하는 듯 빈틈없는 샷으로 까다로운 코스를 정복했습니다. 완벽한 디 오픈 우승은 19년 전 우즈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의 압도적인 경기력에 외신들은 "전성기 타이거 우즈와 똑같다"는 찬사를 쏟아냈습니다. 영국 BBC는 "셰플러가 첫 메이저 우승을 차지한 이후 메이저 4승을 이루기까지 우즈와 똑같이 1197일 걸렸다"며 "압도적으로 우승하는 모습이 우즈와 흡사하다"고 칭찬했습니다. 뉴욕타임스 디 어슬레틱은 "30세 이전에 4대 메이저대회 중 3개 대회를 우승한 선수는 우즈, 잭 니클라우스(이상 미국), 게리 플레이어(남아공)에 이어 4번째"라며 "그들은 모두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세계 정상급 선수들도 혀를 내둘렀습니다.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지만 7타 차 공동 7위로 대회를 마친 세계랭킹 2위 로리 매킬로이는 "지난 24개월에서 36개월 동안 셰플러가 보여준 활약과 비슷한 흐름을 보인 선수는 골프 역사상 2, 3명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매킬로이가 지목한 2, 3명에는 타이거 우즈와 잭 니클라우스가 포함됩니다. 매킬로이는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수준이다"고 평가했고 지난해 디 오픈 우승자 잰더 쇼플리는 "우즈처럼 지배적인 선수를 이렇게 빨리 다시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단순히 상승세라고도 할 수 없다. 그는 최근 2년 넘게 완벽하게 경기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1, 2라운드에서 셰플러와 함께 경기한 셰인 라우리는 "그는 매 홀 버디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만약 셰플러 발의 위치가 더 안정적이고 스윙이 애덤 스콧처럼 보인다면, 그를 타이거 우즈와 같은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나쁜 샷마저도 좋다. 그게 바로 그가 얼마나 뛰어난 선수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특이한 스윙에도 약점이 없는 절대 강자 셰플러는 매우 특이한 스윙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드라이버샷 다운 스윙 이후 오른발이 뒤로 빠지면서 왼쪽으로 급격히 이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아름답거나 정석적인 스윙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골프공을 잘 때립니다. 셰플러는 스윙의 모양에 신경을 쓰지 않고 공이 어디로 나갈 지에만 집중합니다. 다운 스윙이 이상하다고 느낄 경우에는 본능적으로 스윙 궤도를 바꿔 최대한 공을 직각으로 맞히는 이른바 '페이스 컨트롤'이 천부적입니다. 티샷을 할 때는 세컨 샷이 가장 편한 곳에 떨어뜨리고, 어프로치 샷을 할 때는 쉽게 버디를 잡을 있는 곳에 공을 갖다 놓습니다. 티샷, 아이언 샷, 그린 주변 쇼트게임, 퍼팅이 모두 정상급입니다. 압도적인 장타자는 아니지만 평균 305.6야드의 드라이버샷 비거리를 기록하고 있어 많은 버디를 잡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지간해서는 흔들리는 법이 없는 강철 멘털도 그의 큰 강점입니다. 이렇듯 약점이 없기 때문에 2022년부터 지금까지 약 3년 반 동안 17승을 쓸어 담았습니다. 이 가운데 메이저대회 4승과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2승, 그리고 아놀드 파머 인비테이셔널과 메모리얼 토너먼트 등 특급 대회가 각각 2번씩 포함됐습니다. 2024 시즌엔 그야말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발휘했습니다. 마스터스에서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고 시즌 대미를 장식하는 투어 챔피언십까지, 무려 7승을 거뒀습니다. 여기에 8월에 열린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까지 차지하며 사실상 모든 걸 다 손에 쥐었습니다. 우즈와 비교되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였습니다. PGA투어에서 한 시즌 7승을 쓸어 담은 것이 2007년 우즈 이후 17년 만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전성기 우즈와 비교는 헛소리" 연일 찬사가 쏟아지고 있지만 정작 당사자인 셰플러는 손사래를 치고 있습니다. "전성기 우즈 같다는 말은 헛소리라고 생각한다"고 겸손히 말했습니다. 그는 "타이거는 골프계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내가 성장하는 데도 많은 영감을 줬다. 우즈는 정말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고 특별한 선수였다"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자신이 아직 우즈와 비교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즈는 메이저를 15번 우승했다. 난 이제 겨우 네 번째다. 겨우 4분의 1지점에 도달한 셈이다." 1960년대 혜성처럼 등장한 잭 니클라우스는 메이저대회에서 역대 최다인 18승을 거두며 한 시대를 풍미했습니다. 1980년대 이후 사람들은 '제2의 니클라우스'가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했지만 그와 겨룰 만한 스타는 아주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1997년 최고 권위의 마스터스에서 타이거 우즈가 각종 기록을 갈아치우며 정상에 올라 새로운 골프 황제의 등극을 알렸습니다. 이제 팬들은 또 하나의 전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많은 팬들은 셰플러가 현재 타이거 우즈에 가장 근접한 선수라는데 큰 이의를 제기하고 않고 있습니다. 가능성도 적지는 않습니다. 셰플러가 가야 할 길은? 셰플러가 우즈와 같은 반열에 오르려면 먼저 그랜드슬램이라는 산을 넘어야 합니다. 이미 마스터스 토너먼트에서 두 차례(2022년, 2024년) 우승한 그는 앞으로 US 오픈만 우승하면 4대 메이저대회를 모두 석권하는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게 됩니다. 커리어 그랜드 슬램은 진 사라젠, 벤 호건, 게리 플레이어, 잭 니클라우스, 타이거 우즈, 로리 매킬로이 등 골프 역사상 6명만 작성한 대기록입니다. 타이거 우즈는 통산 82승으로 샘 스니드와 함께 최다승 부문에서 역대 타이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셰플러는 현재 통산 17승입니다. 세계 랭킹 1위도 아주 오래 유지해야 합니다. 셰플러는 2025년 8월 18일 기준으로 남자 골프 세계 랭킹에서 117주 연속 1위 자리를 지켰습니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에 이어 두 번째입니다. 우즈는 1999년 8월부터 2004년 9월까지 264주 연속 1위를 유지했고, 2005년 6월부터 2010년 10월까지는 281주 연속 1위를 지켜 이 부문 최고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셰플러는 우즈처럼 '역전 불패'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번 디 오픈까지 최종 라운드를 단독 선두로 시작한 14차례 대회에서 11번 우승했는데 최근에는 10번 연속입니다. 타이거 우즈는 전성기 시절 3라운드까지 선두일 경우 37번 연속 우승을 차지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처럼 셰플러가 '제2의 우즈'가 되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하지만 스코티 셰플러는 이제 29살에 불과합니다. 새로운 신화를 쓰기에는 시간은 충분합니다. 세계 골프계가 그의 샷 하나하나를 주목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올림픽 여자 육상에서 2개의 금메달을 딴 선수가 있습니다. 그 선수는 몇 년 뒤 골프에 입문해 세계 여자 골프를 평정했습니다. 그리고 야구 농구 등 무려 10개가 넘는 종목에서 엄청난 재능을 뽐냈습니다. 20세기 스포츠 사상 최고의 여자 선수로 꼽히는, 신이 내린 스포츠 만능 원더우먼 자하리아스이었습니다. 공부만 빼고 다 잘했던 자하리아스 자하리아스는 1911년 6월 미국 텍사스주에서 태어났는데요, 1980년대에 8년간 미국 대통령을 지냈던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나이가 같습니다. 자하리아스의 부모는 노르웨이 출신의 이민자였습니다. 어릴 때 이름은 밀드레드 엘라 디드릭슨. 디드릭슨이 성입니다. 야구에 소질이 있었는데요, 한 경기에서 5개의 홈런을 치자 당시 최고 스타였던 베이브 루스의 이름을 따 '베이브 디드릭슨'으로 불렸습니다. 1934년 3월에는 메이저 리그 스프링 캠프 기간에 열린 시범경기 3경기에 나와 총 4이닝을 투구했다고 할 만큼 투타 모두 발군의 실력을 갖췄습니다. 27살 때인 1938년 프로 레슬링 선수인 조지 자하리아스와 결혼하면서 이때부터 남편의 성을 따서 '베이브 자하리아스'라고 불리게 됐습니다. 자하리아스는 스포츠를 위해 태어난 여성이었습니다. 천부적인 운동 신경에 강인한 체력까지 갖춰 엄청난 재능을 뽐냈습니다. 공부는 그렇게 잘하지 못해 고등학교 때 1년 유급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야구, 농구를 비롯해 테니스, 복싱, 수영, 다이빙, 볼링, 롤러스케이팅 등 거의 모든 종목에서 빼어난 실력을 뽐냈습니다. 안 해본 운동이 있느냐는 질문에 "네, 인형 놀이요"라고 말할 정도로 운동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줬습니다. 특히 20살이던 1931년 야구공을 90.2m나 던지는 괴력을 발휘해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이는 여성이 던진 가장 긴 거리였습니다. 의외로 체격은 그렇게 크지 않았습니다. 키 170cm에 체중은 57kg. 그런데 스포츠만 잘한 게 아니었습니다. 바느질에도 뛰어나 골프 복장을 포함하여 많은 옷을 직접 만들었습니다. 1931년 댈러스에서 열린 재봉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했고요, 노래도 잘 불러 가수로도 데뷔했습니다. 하모니카 연주자이기도 했던 자하리아스는 여러 곡이 담긴 음반을 제작하기도 했는데 "I Felt a Little Teardrop" 같은 히트곡을 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1932년 LA 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 1932년 21살이던 자하리아스는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전합니다. LA 올림픽 당시에는 한 선수가 참가할 수 있는 종목이 최대 세 종목으로 제한되어 있었는데요, 그는 80m 허들, 창던지기, 높이뛰기의 세 종목에 출전합니다. 자하리아스는 여자 창던지기에서 43m 69cm를 던지며 올림픽 신기록과 함께 자신의 첫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80m 허들 결선에서는 멋진 질주를 보여주며 또다시 금메달을 목에 걸었는데 11초7의 세계 신기록까지 작성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종목, 높이뛰기에 참가한 디드릭슨은 또 한 번 인상적인 경기를 펼치며 세계 기록과 타이인 1m 65.7cm를 뛰어넘으며 은메달을 받았는데요, 지금까지도 남녀 통틀어 올림픽 육상에서 달리기와 던지기, 그리고 도약 경기에서 모두 메달을 따낸 유일한 선수로 남아 있습니다. 골프 입문하자마자 여자 골프 평정 자하리아스는 거의 모든 종목을 다 해봤습니다. 이 가운데 그를 사로잡은 것은 단연 골프였습니다. LA 올림픽 기간에 처음 골프 배웠다고 합니다. 휴식기에 스포츠 기자들과 라운드를 하면서 골프를 알게 됐는데 첫 라운드에서 91타를 쳤고 드라이브샷 거리는 약 230m나 됐다고 합니다. 이후 목숨이 걸린 것처럼 훈련에 매진했습니다. 뉴욕타임스가 1956년 사망 기사에 "매일 14시간에 걸쳐 1,000개의 공을 쳤고 손이 아파서 붕대를 감아야 할 상황까지 골프를 쳤다"고 썼을 정도입니다. '땀은 결코 배반을 하지 않는다'라는 격언이 있는데요, 그는 첫 대회인 텍사스 아마추어대회부터 우승하며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마추어로 17개 대회 연속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작성했습니다. 이후 1947년 8월에는 브리티시 여자아마추어골프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최고의 화제를 뿌렸습니다. 1893년, 이 대회가 창설된 이래 미국 선수가 우승한 것은 자하리아스가 처음이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그는 엄청난 파워를 선보였는데 약 493m의 파 5홀에서 드라이버샷에 이어 4번 아이언샷으로 투온에 성공했다고 하는데요, 그때 골프채와 골프공은 지금보다 최소 10% 이상 거리가 덜 나갑니다. 그런데도 현재 남자 프로 선수들에 버금가는 장타력을 거의 80년 전에 여자 선수가 선보인 것입니다. 프로에 데뷔해서도 승승장구하며 믿기 힘든 위업을 달성합니다. US오픈 3회 우승을 포함해 메이저대회 10승을 차지하는 등 모두 41번이나 정상에 올랐습니다. 1950년이 최전성기인데요, 자하리아스는 당시 여자 메이저 3대 대회인 US 오픈, 타이틀홀더 챔피언십, 여자 웨스턴 오픈을 모두 석권하는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고, 그해 상금 리스트에서도 선두를 달리며 여자 골프계를 평정했습니다. 모든 대회를 합쳐 82회 우승이라는 불멸의 신화를 쌓으며 육상 무대에서와 똑같이 골프 코스에서도 경이로운 능력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암 수술을 받고도 최고 권위의 US오픈을 제패했다는 것입니다. '철의 여인' 자하리아스는 1953년 봄 대장암 수술을 받고 15개월 만에 컴백을 했는데요, 1954년 대회에서 베티 힉스를 12타차로 제치고 이 대회 세 번째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43세. 대회 사상 최고령 우승자이었습니다. 우승 직후 그는 "다시는 대회에 출전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병석에 누워 하느님께 다시 골프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제가 다시 우승할 수 있게 해준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자하리아스는 다음 해 불행하게도 암이 재발해 타이틀 방어전에 나오지 못했고 45살이던 1956년 아주 이른 나이에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하리아스는 여자 프로골프 협회, 즉 우리가 아는 LPGA의 창설에도 기여한 여자 프로골프의 최고 전설임이 틀림없습니다. 사상 최초로 남자와 맞대결해 컷 통과 여자 골프계에서는 더 이상 상대가 없었던 자하리아스는 남자 골프에 문을 두드립니다. 1938년에 처음 도전했지만 81타와 84타를 쳐 3라운드에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5년 캘리포니아의 리비에라 골프장에서 열린 PGA 투어 로스앤젤레스 오픈에서 새 역사가 창조됐습니다. 남자 프로대회에 유일한 여성인 자하리아스가 등장하자 갤러리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취재진들도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76타와 81타를 쳐 3회전에 진출했습니다. 사상 최초로 여자가 남자 대회에서 컷을 통과한 것입니다. 3라운드에서는 79타로 부진해 4라운드 진출에는 실패했습니다. 자하리아스는 이후에 열린 피닉스 오픈에서는 4라운드까지 진출해 합계 33위로 대회를 마쳤습니다. 당시 자하리아스는 감나무로 만든 드라이버로 평균 270야드를 날렸다고 하는데 요즘 장비(티타늄 드라이버)로 치면 300야드, 즉 약 270m가 넘는 엄청난 장타를 친 것이지요. 남자 선수에 전혀 뒤지지 않은 거리였는데요, 참고로 자하리아스가 드라이버샷을 가장 멀리 보낸 기록은 299m로 이는 당시까지 여자 선수로 최고 기록이었습니다. 폭발적인 장타로 아이돌 같은 인기를 누린 그는 당시의 여성골퍼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윌슨사와 10만 달러의 광고 계약을 최초로 맺기도 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여자 선수로 선정 자하리아스는 AP통신이 선정한 20세기 위대한 스포츠 선수 10명 가운데 9위입니다, 남녀 통틀어 9위, 여자 선수로는 최고 순위였습니다. 그는 AP 통신에 의해 올해의 여자 선수에 6회나 선정됐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역대 여자 골프 선수 가운데 이렇게 사랑받은 선수는 없었다"라고 극찬했는데요, LPGA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타계한 지 1년 뒤인 1957년엔 미국 골프 협회가 수여하는 최고의 영예인 바비 존스 상을 수상했습니다. 그의 고향인 텍사스주 보몬트에는 그의 이름을 딴 'Babe Didrikson Zaharias Museum'이라는 박물관이 세워졌고 여러 골프 코스가 그녀의 이름을 따서 건설되었습니다. 1976년에는 국립 여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1981년엔 미국 우정청이 자하리아스를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했습니다. 그리고 2021년 1월 7일, 자하리아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민간인에게 주어지는 최고 영예인 자유의 메달까지 받았습니다.
수영과 함께 대표적인 기초 종목 가운데 하나인 육상 경기는 올림픽에서 가장 많은 금메달(48개)이 걸려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육상은 남자 높이뛰기 우상혁을 비롯해 일부 선수를 제외하고는 아시아에서도 메달권과는 거리가 멀 정도로 낙후돼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트랙 중거리 종목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샛별이 무서운 신기록 행진을 펼치고 있어 육상계를 흥분시키고 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현재 국군체육부대에 소속돼 있는 이재웅 선수입니다. ‘이재웅이 누구지?’ 무명에서 깜짝 스타로 몇 달 전만 해도 이재웅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는 철저히 무명 선수이었습니다. 지난 5월 경북 구미에서 열린 2025 아시아 육상선수권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이 대회에서 그는 3분42초79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한국 선수가 아시아육상선수권 남자 1,500m에서 메달을 딴 것은 1995년 자카르타 대회에서 동메달을 차지했던 김순형 이후 30년 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한 달 만에 그는 다시 ‘사고’를 쳤습니다. 6월 14일 홋카이도 시베츠에서 열린 호크렌 디스턴스 챌린지 2차 대회 남자 1,500m 경기에서 3분38초55에 결승선을 통과해 1993년 12월 필리핀 마닐라 아시아육상선수권에서 김순형(당시 경북대)이 작성한 3분38초60을 0.05초 앞당긴 한국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1990년대 중거리 스타 김순형이 세운 이 기록은 좀처럼 깨질 것 같지 않았는데 23살의 이재웅이 대선배의 벽을 무려 32년 만에 넘은 것입니다. 그의 신기록 행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 달 뒤인 7월 16일 이재웅은 일본 홋카이도 기타미시에서 열린 2025 호크렌 디스턴스 챌린지 4차 대회 남자부 1,500m 경기에서 3분36초01에 달려, 3분36초58의 아라이 나나미(일본)를 제치고 우승했습니다. 한국신기록을 세운 지 한 달 만에 자신의 한국기록을 또 경신한 것입니다. 기록도 놀라웠습니다. 6월보다 2초54나 빨랐습니다. 마지막 100m 직선 주로에서 스피드를 올려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이재웅은 포효하면서 벅찬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그는 “마지막에 제가 들어오면서 소리를 질렀던 것은 저한테 더 이상 안 될 거라고, 못 할 거라고 얘기한 사람들한테 전하는 메시지였습니다”라며 환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유도에서 육상으로 전환..두 달 만에 6초나 단축 이재웅은 어릴 때 유도복을 먼저 입었습니다. 하지만 유도부가 해체되자 초등학교 5학년 때 육상에 입문했는데 곧바로 소질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상북도 영천 영동중 재학 시절에 주요 전국대회 800m부터 3,000m까지를 모두 휩쓸었고 중등부와 고등부 신기록을 차례로 수립하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올해 국군체육부대에 입대한 뒤 일반부 신기록에 이어 한국 신기록까지 작성하면서 1,500m의 모든 기록을 보유하게 됐습니다. 특히 두 달 만에 개인 최고 기록을 무려 6초나 줄이는 무서운 상승세를 타고 있어 육상 전문가들을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1,500m에서 이렇게 단기간에 6초 넘게 줄이는 것이 매우 이례적이기 때문입니다. 거짓말 같은 기록 단축에 대해 이재웅은 “한국 육상 안 된다 이런 말들이 되게 많았잖아요. 저는 그런 말이 되게 싫어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걸 꼭 증명하고 싶었어요”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경이적인 신기록 행진의 원동력으로는 엄청난 훈련량과 악바리 근성, 그리고 남다른 승부욕이 꼽힙니다. 그는 “저는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자신한테 지는 것도 정말 싫어하거든요. 훈련 때도 그렇고 자신과 타협하는 순간이 오는데 한심하게 느껴지고 반성하게 되고 그렇더라고요”라며 강한 정신력을 내보였습니다. 내년 아시안게임 첫 금메달도 가능 이제 스포츠계의 관심은 깜짝 스타로 떠오른 그의 질주가 어디까지 갈 것인가에 쏠리고 있습니다. 그의 1차 목표는 내년 9월 일본에서 열리는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금메달입니다. 2023년에 열린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우승한 카타르의 모하마드 알 가르니의 기록은 3분38초36으로 이재웅보다 한참 뒤집니다. 현재 이재웅은 2025 시즌 최고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2위는 인도의 걸비르 싱으로 이재웅보다 0.57초 느립니다. 결론적으로 내년 아시안게임에서 충분히 금메달을 따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김순형이 은메달을 얻었는데 만약 이재웅이 내년에 우승하면 한국 남자 선수로는 최초의 1,500m 금메달리스트가 됩니다. 그럼 세계 수준과 격차는 어느 정도일까요? 지난 2024 파리올림픽 결승에 진출하려면 최소한 3분 33초대를 뛰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재웅 선수가 지금보다 적어도 3초는 줄여야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에서 결승 진출이 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그의 잠재력과 강인한 의지를 고려하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이재웅은 “세계적인 선수들이랑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게 목표입니다. 분명 더 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아서 (기록을) 많이 줄이긴 해야 되는데 가능하다고 봐요. 계속해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고 앞으로 한국을 넘어 아시아, 세계를 향해 큰 목표를 가지고 달려가겠습니다”며 당찬 포부를 밝혔습니다. 참고로 남자육상 1,500m 세계신기록은 1998년 로마 그랑프리대회에서 ‘불멸의 스타’ 모로코의 히참 엘 게루즈가 세운 3분26초00으로, 이재웅의 한국 기록보다 10초01, 거리상으로는 약 70m 이상 앞서 있습니다.
체조는 피겨 스케이팅처럼 심판이 채점을 하는 경기입니다. 이처럼 채점을 하는 종목은 심판의 주관적 판단이 어느 정도 반영될 수밖에 없는데요, 그래서 다른 종목들에 비해 논란이 많이 생깁니다. 특히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여자체조에서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소련 감독이 자신의 제자인 소련 선수를 채점해 사실상 금메달을 만들어주는 황당한 사건이 발생해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전설의 선수가 제자를 채점해 금메달 선사(?) 당시 여자 체조의 강력한 우승 후보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차슬라프스카 선수였습니다. 그는 4년 전인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3개의 금메달을 따냈던 체조 여왕이었는데요,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소련 선수들과 금메달을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평균대 심판 구성에서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평균대 예선전의 심판위원장은 헝가리 사람이고 다른 심판 4명의 국적은 소련, 폴란드, 동독, 그리고 미국이었습니다. 그러니까 5명 가운데 미국 심판 1명을 빼고 4명이 동구 공산권 국가 출신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이 정말 극단으로 치닫고 있어 적대적 감정이 팽배할 때였습니다. 소련이 동구 공산권의 맹주였기 때문에 헝가리, 폴란드, 동독 심판은 체코슬로바키아보다는 소련 선수를 편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더 말이 안 되는 것은 당시 평균대 심판진에는 소련 심판까지 들어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소련 심판이 예선전에서 소련 선수를 채점하게 된 것인데 더군다나 이 사람이 보통 소련 심판이 아니었습니다. 이 심판의 이름은 라리사 라티니나. 올림픽 여자 체조에서 금메달 9개를 비롯해 무려 18개의 올림픽 메달을 따내 최고의 전설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현직 소련 여자 체조팀 감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소련 감독이 올림픽에서 자신이 가르치는 소련 선수를 채점한 것입니다. 소련 감독이 자신의 제자인 소련 선수를 채점하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정말 상상하기 힘든 일인데요, 당시에도 논란이 컸습니다. 이에 대해 해외 언론들은 이렇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정황상으로 보면 라티니나가 1966년에 은퇴한 뒤 심판이 먼저 됐고 이어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을 앞두고 소련대표팀 감독이 됐는데요, 당연히 국제체조연맹이 올림픽 심판 배정에서 현직 소련 감독인 라티니나를 배제했어야 했는데 그만 묵인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당시 국제 체조는 소련이 거의 주도하고 있어서 영향력이 무척 강했습니다. 게다가 라티니나가 올림픽 금메달 9개를 비롯해 18개의 메달을 따낸 최고 스타였어서, 국제체조연맹이 그냥 눈감아 주고 말았습니다. 라티니나가 소련 사람이 아니었고 슈퍼스타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4년 전 도쿄 대회에서 라티니나가 여자 개인종합에서 체코의 차슬라프스카에 밀려 은메달에 그친 점입니다. 라티니나의 시대를 마감시킨 선수가 바로 차슬라프스카였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봐도 자신의 제자인 소련 선수에게는 높은 점수를 주고 대조적으로 라이벌이었던 체코의 차슬라프스카에게는 점수를 깎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이었습니다. 예선 점수에서 소련의 쿠친스카야는 9.800, 체코의 차슬라프스카는 9.725를 받았고 결선에서는 두 선수가 9.850으로 같았습니다. 결국 소련의 쿠친스카야가 예선과 결선 합쳐서 19.650으로 금메달, 차슬라프스카는 19.575으로 은메달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더 황당한 것은 결선에서 소련의 쿠친스카야가 원래 9.850보다 낮은 점수를 받았는데 심판들이 점수를 다시 높게 수정했다고 합니다. 차슬라프스카로서는 금메달을 도둑맞은 셈이 됐습니다. 소련 선수 점수 뒤늦게 수정해 공동 금메달 만들기 심판들의 장난은 이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마루운동에서도 큰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차슬라프스카가 거의 완벽한 연기로 결승에서 9.9점을 받으며 금메달을 확정했습니다. 소련의 라리사 페트릭도 9.9점을 얻었지만 예선 점수에서 뒤져 2위가 됐습니다. 그런데 시상식 직전에 심판들이 모여서 회의를 한 뒤 깜짝 놀랄만한 발표를 했습니다. 소련 페트릭의 예선 점수가 잘못 채점됐다며 뒤늦게 점수를 더 올렸습니다. 결과적으로 19.675점으로 두 선수가 공동 금메달이 됐습니다. 차슬라프스카의 단독 금메달이 공동 금메달로 바뀐 것입니다. 체코 대표팀과 차슬라프스카는 엄청난 불만과 함께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미국 체조의 전설이자 1984년 LA 올림픽에서 2개의 금메달을 따냈던 바트 코너는 이를 두고 "체조에 정치가 개입했다"며 격렬히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시상식 맨 위에 두 선수가 나란히 섰습니다. 차슬라프스카는 시상식에서 소련 국가가 울리자 고개를 숙인 채 외면했습니다. 두 달 전 자신의 조국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한 소련과, 소련 선수의 금메달을 위해 심판들이 편파 판정을 한 것에 강하게 항의한 것입니다. 정치적 희생양 된 차슬라프스카 당시 차슬라프스카는 소련에 의해 시쳇말로 '위험인물'로 찍힌 상태였습니다. 1968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의 위성국가였습니다. 그런데 그해 초부터 민주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이것을 '프라하의 봄'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동구 공산권 종주국 소련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두면 다른 동구권 국가에서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련은 1968년 8월 체코를 무력으로 침략해 '프라하의 봄'을 좌절시켰습니다. 이때 소련 최고지도자였던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들고 나온 게 '제한 주권론' 즉 사회주의 전체 이익을 위해서는 개별 국가의 주권은 제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브레즈네프 독트린'이라고 합니다. 멕시코시티 올림픽을 2개월 앞두고 소련이 침공하자 체코슬로바키아의 영웅이었던 차슬라프스카는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당국의 감시가 심해지자 그는 '요주의 인물'이 됐고 어쩔 수 없이 몰래 숨어서 훈련했다고 하는데요, 소련과 체코, 두 나라의 감정이 최악인 상황에서 차슬라프스카가 올림픽 영웅으로 떠오르는 것을 소련은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차슬라프스카의 금메달은 가능한 줄이고 소련 선수의 금메달은 늘리기 위해 무리수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이런 최악의 조건에서도 차슬라프스카는 개인종합, 2단 평행봉, 도마, 마루운동 등 4개의 금메달을 따내며 4관왕에 올라 통산 7번째 올림픽 금메달을 거머쥐었습니다.
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스포츠에서 남성과 여성은 당연히 따로 경기를 합니다. 맞대결을 펼칠 경우 남성이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포츠 역사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정면으로 도전한 경우가 꽤 있습니다. 골프가 그 대표적 사례입니다. 지난 편에서 다뤘던 빌리 진 킹과 바비 릭스의 세기의 테니스 성대결 훨씬 이전에 골프에서 먼저 여성이 남자들과 기량을 겨룬 것입니다. 오늘은 남자 선수들과 성대결을 벌여 세계적 화제를 모았던 골프 스타들을 소개하겠습니다. 58년 만에 도전한 소렌스탐의 좌절 골프에서 성대결의 원조는 올림픽 육상에서도 금메달을 따냈던 스포츠 만능 원더우먼 '베이브' 디드릭슨 자하리아스입니다. 자하리아스는 1945년 미국 프로골프투어, 즉 PGA 투어에서 사상 처음으로 컷을 통과하는 위업을 세웠는데 그 뒤로는 도전하는 선수가 오랫동안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58년이 지난 2003년 당시 여자 골프 세계 최강 아니카 소렌스탐이 PGA 투어에 도전하겠다는 발언을 해 골프계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 선수들은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소렌스탐이 아무리 여자 최강이라고 하더라도 남자에게 비거리에서 크게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소렌스탐은 여자 선수로는 장타자였습니다. 드라이브샷 평균거리는 265야드로 LPGA 투어에서는 4위였습니다. 하지만 세계 정상급 남자 선수들의 무대인 PGA 투어에서 이 거리는 190위권으로 거의 최하위였고, 남자 선수 평균에도 약 20야드 정도나 뒤졌습니다. 그래서 필 미켈슨 등 남자 스타들은 거리상의 이유로 소렌스탐의 도전을 평가절하했습니다. 일부 남자 선수들은 소렌스탐이 쇼트 게임 능력과 샷의 정교함은 남자에 뒤지지 않는다며 상위권 진입이 가능하다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소렌스탐의 도전이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되자 대회 주최 측은 소렌스탐을 배려했습니다, 소렌스탐은 2명의 남자 선수와 동반 라운드를 했는데 그렇게 강자가 아니었고 비거리가 유난히 짧았습니다. 소렌스탐은 결혼식 때보다 더 긴장된다며 컷 통과를 자신했는데 도박사들은 1라운드 평균 76.5타를 예상하며 예선 탈락을 점쳤습니다. 소렌스탐은 2003년 5월 22일 미국 텍사스 주 포트워스에서 열린 콜로니얼 클래식이란 대회에 출전했는데요, SBS가 단독 위성 생중계를 할 정도로 관심이 많았습니다. 현지에 엄청난 취재진과 수많은 갤러리가 몰렸는데 시선은 온통 소렌스탐에게 쏠렸습니다. 소렌스탐도 엄청난 부담을 느꼈습니다. 첫 홀에서 드라이브샷을 날린 뒤 웃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익살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윌슨과 걷는 소렌스탐 첫 버디는 4번째 홀에서 나왔는데 4m 거리 버디퍼트를 성공시킨 뒤 주먹을 불끈 쥐고 기뻐했습니다. 소렌스탐의 샷은 정교했지만 비거리에서는 어쩔 수 없이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또 퍼팅이 33개로 하위권이었습니다. 버디 1개와 보기 2개로 1오버파, 소렌스탐은 선두에 7타 뒤진 공동 73위에 그쳤습니다. 그래도 같이 플레이한 윌슨과는 동타, 바버에는 1타를 앞섰습니다. 여자 선수로는 58년 만에 PGA 투어에 도전한 여자골프의 일인자 아니카 소렌스탐의 꿈은 2라운드에서 깨졌습니다. 2번 홀에서 첫 버디를 잡아내며 환호했지만 이후 5개의 보기로 무너졌습니다. 고비고비마다 퍼팅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합계 5오버파로 기준타수에 4타 뒤진 컷오프 탈락. 마지막 홀에서 마지막 퍼팅을 마친 뒤 소렌스탐은 큰 짐을 벗어버린 듯 겉으로는 환하게 웃었습니다. 수많은 갤러리의 뜨거운 기립박수가 쏟아졌지만 골프여왕은 그린을 뒤로 한 채 라커룸으로 향하며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던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까지 응원 메시지를 보내는 등 소렌스탐의 도전은 성공과 실패를 떠나 세계인의 관심사였습니다. 이후 소렌스탐은 더 이상은 PGA 투어에 도전하지 않았습니다. 박세리는 해냈다.. 국내 남자 대회에서 공동 10위 소렌스탐의 꿈이 좌절된 지 4개월 뒤인 2003년 9월 골프여왕 박세리 선수가 남자와 기량을 겨루겠다며 새로운 도전을 깜짝 발표했고 한 달 뒤 열리는 SBS 프로골프 최강전 남자대회에 출전해 국내 여자선수로는 최초로 성대결을 펼쳤습니다. 박세리가 누구입니까? 한국 최고의 선수이자 세계적으로도 소렌스탐, 그리고 카리 웹과 정상을 겨뤘던 골프 여왕 아닙니까? 당시 박세리는 LPGA 투어에서 메이저 4승을 포함해 통산 21승을 거둔 최정상급 선수. 박세리는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이라며 국내 남자선수 110여 명과 레이크사이드골프장 서코스에서 한판승부를 벌였습니다. 양용은과 악수하는 박세리 SBS 최강전 남자 대회 1라운드는 10월 23일에 열렸습니다. 그해 지구촌 골프계를 강타한 성대결 열풍이 박세리의 SBS최강전 도전으로 절정에 이르렀는데요, 그동안 높기만 했던 남자무대의 벽을 과연 박세리는 넘을 수 있을 것인지에 관심이 집중됐습니다. 박세리는 장타를 치는 신용진, 양용은 프로와 함께 같은 조에서 역사적인 성 대결을 시작했습니다. 양용은은 "10센티를 쳐도 한번 치는 거고 300야드를 쳐도 한번 치는 것이기 때문에 또 골프라는 게 알 수가 없는 게임이라 재밌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습니다. 박세리의 드라이브샷은 남자선수들보다 20야드 이상 짧았지만 정확한 아이언 샷으로 장타자들과 맞섰습니다. 파4 2번 홀에서 8m 버디 퍼트를 넣어 첫 버디를 기록했습니다. 파3 6번홀 171야드 거리에서 6번 아이언으로 친 티샷은 핀 옆 80cm에 붙어 갤러리들의 탄성을 자아냈습니다. 결국 박세리는 버디 3개, 보기 3개로 이븐파를 치면서 공동 13위를 기록했습니다. 심리적 부담을 이기지 못한 신용진과 양용은은 OB를 한 차례씩 내며 각각 이븐파와 7오버파로 부진했습니다. 2라운드에서 박세리 선수는 정말 긴장했습니다. 1945년 자하리아스 이후 58년 동안 그 누구도 넘지 못했던 컷 통과의 운명이 2라운드에 달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부담 탓인지 경기가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퍼팅이 몇 차례 홀을 돌아 나오며 갤러리들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파4, 13번 홀에서는 티샷이 벙커, 세컨샷은 물에 빠뜨리며 흔들렸지만 네 번째 샷을 멋지게 핀에 붙이며 위기에서 벗어나는 관리능력을 선보였습니다. 버디 1개에 보기 3개로 2타를 잃은 박세리는 합계 2오버파로 기준 타수에 4타 앞서 무난히 컷을 통과했습니다. 2라운드까지 선두와는 4타차, 공동 29위를 기록했습니다. 2003년 그해 박세리의 도전은 골프 성대결로는 7번째였는데 이전엔 다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박 선수가 처음으로 컷을 통과하자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 한 7천 명의 갤러리들도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58년 만에 남성의 벽을 넘어선 박세리 선수는 SBS 프로골프최강전에서 최종 합계 2언더파로 공동 10위를 차지하며 세계적인 스타임을 입증했습니다. PGA 투어보다는 코스가 쉬운 편이었지만 남자 프로들을 상대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습니다. 박세리는 "제1의 목표가 컷 통과였는데 목표를 달성해서 너무너무 기쁩니다. 오늘까지 좋은 성적 잘했다는 게 더더욱 기뻐요"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남자보다 더 멀리 친 '천재 소녀' 미셸 위도 컷 통과 소렌스탐이 성대결을 벌인 지 3개월 뒤인 2003년 8월 당시 만 13살의 골프 신동 미셸 위가 남자 대회에 출전해 성대결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컷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이로부터 3년이 지난 2006년 5월 미셸 위는 한국에서 열린 남자 프로골프대회 SK텔레콤오픈에 출전해 남자선수들과 기량을 겨뤘습니다. 이때 성대결이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남겼는데요, 1라운드에서 같은 조에 속한 남자 선수가 바로 당시 간판스타 김대섭이었기 때문입니다. 정교한 아이언샷과 쇼트 게임의 귀재이었던 김대섭은 드라이브샷 비거리가 짧은 선수였는데요, 미셸 위와 동반 라운드를 하게 되자 누가 더 멀리 치는지에 온통 관심이 쏠렸습니다. 1만 명에 가까운 갤러리가 보고 있고 TV 생중계가 되는 가운데 만 16살의 소녀 미셸 위는 300야드 이상을 펑펑 때렸습니다. 반면 남자 선수인 김대섭은 있는 힘껏 쳐도 미셸 위에 뒤졌습니다. 이 경기 이후 김대섭은 한동안 슬럼프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천재 골프 소녀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미셸 위는 1라운드에서 2언더파를 쳐 공동 28위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2라운드에서 1타를 줄여 합계 3언더파 공동 17위로 컷을 통과했습니다. 2003년부터 7번 성대결을 펼쳐 모두 실패했는데 8번째 도전 만에 즉 7전 8기 만에 컷을 통과한 것입니다. 세계 골프계는 처음엔 천재소녀의 장타력에 놀랐지만 번번이 컷 탈락하는 미셸 위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습니다. 여자대회로 돌아가라는 조롱까지 있었지만 미셸 위의 집념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7전 8기 만에 성 대결 컷 통과에 성공한 미셸 위는 최종합계 3언더파 공동 35위로 대회를 마감했습니다. 미셸 위는 "한국에서 처음 컷 통과한 게 너무 행복했고요. 더 연습 많이 해서 톱텐 많이 하고 꼭 우승도 하고 싶어요. 많이 응원해 주세요"라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2003년은 골프 성대결의 해였습니다. 여자 스타들은 남자 골프에 도전했습니다. 여자 골프 최강 소렌스탐은 미국 PGA 투어의 거대한 벽을 넘지 못했지만 박세리는 2003년에, 그리고 미셸 위는 2006년에 국내 남자대회에서 컷을 통과하는 새 역사를 썼습니다.
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스포츠에서 여성은 오랫동안 남성만큼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대회도 많지 않았고 상금도 남성에 비해 턱없이 적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973년 지구촌 스포츠팬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남성과 여성이 테니스 코트에서 맞대결을 펼쳤습니다. 지금까지 성대결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빌리 진 킹과 바비 릭스의 세기의 매치였습니다. 여성 인권 기수 vs 남성 우월주의자 1943년 미국에서 태어난 빌리 진 킹은 그랜드슬램 대회 우승만 무려 39회, 윔블던 우승은 통산 6회를 차지하며 1960년대와 70년대 세계 여자 테니스계를 주름잡았던 슈퍼스타입니다. 바비 릭스는 1918년에 태어난 미국 남자 테니스 선수로 윔블던에서 우승했고 6개의 메이저 타이틀을 거머쥐며 1940년대 세계 랭킹 1위까지 올랐던 유명 스타입니다. 1970년대 들어 여성의 인권 문제가 미국에서 큰 이슈로 등장했습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여전히 존재했기 때문에 여성 인권 신장 운동이 활발히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빌리 진 킹이 강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쉽게 말해 총대를 멘 것입니다. 테니스의 경우 남자 상금이 평균 8배 이상 많았기 때문인데요, 빌리 진 킹은 여성 차별이라는 불합리한 관행에 반기를 들고 나온 상징적 존재가 됐습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바비 릭스는 여전히 여성을 깔보는, 무시하는 언행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특히 말을 함부로 했는데요, 심지어 "여성의 실력이 떨어지니 적은 상금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까지 대놓고 했습니다. 이에 여성계가 강하게 반발하자 바비 릭스는 "내 나이가 지금 55살인데 지금도 30살의 빌리 진 킹을 가볍게 꺾을 수 있다"며 성대결을 먼저 제안했습니다. '어머니날의 학살', 더욱 우쭐해진 바비 릭스 마거릿 코트 꺾은 바비 릭스 바비 릭스가 도발적 제안을 해오자 빌리 진 킹은 처음엔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바비 릭스는 호주의 마거릿 코트에게 성대결을 제안했습니다. 코트는 빌리진 킹보다 1살 많은 당시 31살이었는데요, 1970년 여성 최초로 4대 메이저대회를 모두 석권하는 그랜드 슬램 위업을 달성했고 통산 메이저 대회 24번 우승한 전설의 스타입니다. 1972년 첫 아이 출산 이후 코트에 복귀해 1973년 그해 호주 오픈과 프랑스 오픈 타이틀을 모두 획득하며 절정의 기량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바비 릭스와 마거릿 코트의 성대결은 그해 5월 13일에 열렸고 CBS 스포츠가 중계를 했는데요, 예상과 달리 마거릿 코트가 무기력한 경기 끝에 6대 2, 6대 1, 2대 0 완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날 릭스는 드롭샷과 로브슛을 구사하며 코트를 완전히 무너뜨렸는데요, 하필이면 5월 13일 이날이 미국에서 '어머니날'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언론들은 이 경기를 '어머니날의 학살'이라고 불렀습니다. 1973년에 이뤄진 세기의 성대결 바비 릭스의 주가는 한층 올랐습니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ports Illustrated)' '타임(Time)'지의 표지를 장식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더욱 기고만장해졌습니다. 릭스는 "여성 선수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50대 중반의 남자에게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만큼 남자의 여성의 능력 차이는 엄청나다. 내가 오랫동안 주장해 온 말을 증명하지 않았느냐? 이제 빌리 진 킹도 가볍게 꺾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빌리 진 킹은 1972년 세계 1위, 성대결이 열린 1973년엔 세계랭킹 2위였는데요, 릭스가 강하게 도발해 오자 더 이상 성대결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거부할 경우 패배가 두려워서 그러는 것 아니냐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빌리 진 킹과 바비 릭스 남성 우월론자 바비 릭스, 여성 인권을 강조하고 성차별에 맞서온 빌리 진 킹, 두 유명 스타의 성대결이 성사되자 스포츠계는 후끈 달아올랐습니다. 언론의 관심도 정말 뜨거웠습니다. 릭스는 경기 전 기자회견에서 빌리 진 킹을 바로 옆에 두고 "집에서 음식하고 아이나 보라"며 조롱하기까지 했습니다. 세기의 성대결은 1973년 9월 20일 미국 휴스턴 애스트로돔에서 열렸습니다. 현장에 3만 명의 관중이 운집했고 ABC가 중계했는데 하워드 코셀 등 쟁쟁한 스타 캐스터들이 총 출동했습니다. 미국에서 5천만 명, 전 세계 40개국에서 9천만 명이 생중계로 이 경기를 지켜봤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약 2주 뒤인 10월 6일에 녹화 중계가 됐습니다. 여자 무시한 릭스 콧대 꺾은 빌리 진 킹 빌리 진 킹과 바비 릭스 빌리 진 킹의 심리적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훗날 그는 "내가 그 경기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50년 전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여자 투어를 망치고 모든 여성의 자존감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소문난 잔치 먹을 것 없다'는 속담처럼 경기는 의외로 싱거웠습니다. 2시간 4분 동안 두 선수가 기량을 겨뤘는데 6대 4, 6대 3, 6대 3, 빌리 진 킹의 세트 스코어 3대 0 완승이었습니다. 원래 빌리 진 킹은 공격적인 플레이로 유명했는데, 이날은 굉장히 안정적인 플레이, 쉽게 말해 실수하지 않는 작전으로 나섰습니다. 화려한 기량을 보여주는 것보다 무조건 이겨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비 릭스가 너무 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어떻게 보면 무성의했습니다. 아무튼 콧대 높던 바비 릭스를 꺾은 빌리 진 킹은 벅찬 감격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미국 여성들은 일제히 기쁨의 환성을 올렸습니다. 집집마다 거실에서 TV를 보며 크게 환호했습니다. 바비 릭스가 예상외로 너무 무기력하게 패배하자 이후 일부러 진 것 아니냐는, 쉽게 말해 승부 조작설이 나돌았습니다. 릭스가 원래 도박꾼으로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1939년 윔블던 대회에서 자신의 우승에 베팅해 엄청난 거액을 벌어들인 전적이 있었습니다. 릭스가 일부러 졌다는 구체적 폭로는 성대결 40년 후인 2013년에야 나왔습니다. 핼 쇼라는 사람이 플로리다 주 탬파의 골프 클럽의 프로샵에 있을 때 두 명의 마피아가 비밀스럽게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즉 마거릿 코트에게는 이기고 빌리 진 킹에게 일부러 지면 릭스의 도박 빚 10만 달러를 대신 갚아준다는 계획을 미리 짰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릭스의 지인들은 이를 전면 부인했고 빌리 진 킹도 "말도 안 되는 억측이다. 바비 릭스는 저를 반드시 이기고 싶어 했다. 그의 눈에서 승부욕을 봤다. 그건 확실하다"라며 일축했습니다. 상금 남녀 성평등 이룬 테니스 미국 프로골프투어 PGA와 여자프로골프투어 LPGA는 규모와 상금 면에서 여전히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테니스에서만 거의 성평등이 이뤄졌습니다. 1973년 성대결에서 빌리 진 킹이 이긴 이후 US오픈이 가장 먼저 남녀 상금 차별을 없앴습니다. 메이저 대회인 영국 윔블던, 프랑스 오픈, US오픈 등 나머지 3개 대회도 남녀 단식 우승 상금이 똑같습니다. 호주 오픈(2001년), 프랑스 오픈(2006년), 윔블던(2007년) 순으로 모든 메이저 대회 상금이 동일하게 바뀐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세계 1위 세르비아의 노바크 조코비치는 "남자 선수 경기에 관중이 더 많은데 우승 상금은 여자 선수와 똑같다"고 불만을 나타냈습니다. 이에 여자 테니스를 평정했던 세리나 윌리엄스가 "황당한 발언"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여자 테니스 선수들이 지금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된 데는 빌리 진 킹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는 세계여자프로테니스협회(WTA) 창설을 주도하며 여성 테니스 역사에 획기적 업적을 세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