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부터 30년 넘게 오로지 스포츠 취재 기자 한길을 걸었다. 동-하계 올림픽, 월드컵, 아시안게임 등 각종 국내외 대회를 현장 취재했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회식, 2012년 런던올림픽 폐회식 TV 생중계에서는 해설을 맡기도 했다. 2017년에는 제28회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체육회를 출입하고 있고 SBS 유튜브 채널인 <스포츠머그>에서 '별별스포츠' 코너를 진행하고 있다.
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 농구는 오랫동안 아시아선수권이나 아시안게임 등 각종 국제대회에서 중국과 메달 색깔을 놓고 숱한 명승부를 펼쳤습니다. 우리가 이긴 적도 꽤 있지만 패배한 적도 많습니다. 키가 커도 너무 큰 중국의 괴물 센터가 한국을 괴롭혔기 때문인데요. 우리의 뇌리에 아직도 남아 있는 중국의 거인 센터 계보를 하나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야오밍 이전 한국을 괴롭혔던 '목철주' 많은 사람들이 '중국 농구 선수' 하면 야오밍을 먼저 떠올릴 것입니다. '걸어 다니는 만리장성'으로 불리는 중국이 낳은 최고 선수이자 미 프로농구 NBA에서도 크게 활약했던 스타였습니다. 그런데 야오밍 이전에 중국에는 '목철주'가 있었습니다. 1980년대까지는 국내 언론에서 목철주로 불렀습니다. 중국어 발음으로 표기하면 '무티에주'입니다. '철주'란 한자 뜻은 철로 된 기둥, 영어로 'Iron Pole'. 사진을 보면 이름을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거대한 체구를 갖고 있습니다. 1949년에 태어나 만 59살이었던 지난 2008년에 심근 경색으로 세상을 떠난 원조 거인 센터였습니다. 왕년의 농구 스타 A 씨는 필자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국제대회에 나갔을 때 숙소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내 눈에 어떤 사람의 배만 보였다. 위로 쳐다보니 목철주였는데 머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였다." 목철주는 자신의 키를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대회에 출전할 때 나오는 책자에는 220cm, 225cm로 제각각이었습니다. 1979년 11월 일본 나고야에서 농구 아시아선수권대회가 열렸을 때 그는 자신의 키를 238cm로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장신 센터와 나란히 찍은 사진 등 여러 정황을 분석한 외국 언론들은 그의 키를 228cm로 보도했고 현재도 228cm로 알려져 있습니다. 야오밍과 거의 비슷한 것입니다. 목철주는 발도 엄청 커 농구화를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나고야 대회 때 아식스사가 그의 발을 측정했는데 37cm로 나왔습니다. 아식스사에 따르면 이전 기록은 34cm이었다고 하는데 이때 목철주는 자기 발에 맞는 고급 농구화를 5개 정도 선물로 받았다고 합니다. 1970년대 말 한국 남자 농구대표팀의 모토는 '타도 중공'. 일본은 한 수 아래로 보고 중공만 꺾으면 아시아 챔피언에 등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한국은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목철주의 괴력을 제대로 느꼈습니다. 우리 간판선수 김동광과 박수교의 얼굴은 목철주의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140kg이 넘는 그의 체구는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습니다. 움직임은 느렸지만 손을 뻗으면 림(골대)에 닿을 만큼 컸고 거의 서서 슛을 넣을 정도였습니다. 그의 활약으로 중국은 1977년부터 83년까지 아시아에서 가장 권위 있었던 ABC 대회를 4회 연속 제패할 수 있었고 1978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까지 거머쥐었습니다. 목철주의 공포에 시달리던 한국 남자 농구는 그가 불참했던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때 중국을 1점 차로 꺾고 극적으로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목철주가 바로 복귀한 1983년 11월 ABC 대회에서는 63:92, 29점 차로 초유의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일찍 세상 떠난 '여자 목철주' 진월방 목철주가 사라질 무렵 중국 여자 농구에도 '괴물 센터'가 등장했습니다. 그 선수가 바로 진월방입니다. 중국어 발음으로는 천위에팡. 1963년에 태어났는데 안타깝게도 2000년 9월 37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최근 장쯔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역대 중국 여자농구 선수 가운데 가장 키가 컸습니다. 그의 키는 최저 208cm에서 최고 218cm까지 보도됐는데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215cm로 알려졌습니다. 진월방과 동시대에 대결했던 한국의 대표적 선수가 박찬숙과 김화순, 그리고 당시 만 18살 막내였던 성정아입니다. 190cm에 가까웠던 박찬숙은 아시아 슈퍼스타로 한국 여자농구의 최고 전설입니다. 하지만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은 중국에 우승을 내줬습니다. 절치부심했던 우리 대표팀은 2년 뒤 1984년 LA 올림픽에서는 중국을 꺾고 결승에 올라 은메달을 차지했습니다, 중국은 동메달에 머물렀습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여자배구가 구기 종목 사상 최초의 동메달을 따냈는데, 여자 농구는 이것을 넘어 그때까지 구기 종목 최고 성적인 올림픽 은메달이라는 기적을 창조한 것입니다. '공포의 괴물 센터' 정하이샤 진월방의 선수 생활은 무척 짧았습니다. 1984년 LA 올림픽 이후 뇌혈전증과 빈혈로 인해 이듬해 1985년 22세의 나이로 일찍 은퇴해야 했습니다. 진월방에 이어 정말 '괴물 센터'가 나왔습니다. 그 선수가 바로 정하이샤. 진월방과 달리 선수 생활을 오래 했습니다. 16살이던 1983년에 국가대표가 된 뒤 10년 이상 중국을 대표해 간판스타로 뛰었습니다. 키 206cm에 몸무게는 거의 120kg이나 됐습니다. 엄청난 높이에다 풀타임을 뛰는 체력, 여기에 타고난 슈팅 감각까지 갖춰 진월방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그야말로 '공포의 센터'로 불렸습니다. 성취도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1984년 LA 올림픽 동메달,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은메달을 획득했고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도 1983년 동메달, 1994년 은메달을 따냈습니다. 1994년 호주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평균 26.4득점, 13.1리바운드, 야투율 83.5%를 기록하며 MVP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아시안게임에서는 1986년 서울에서 금메달, 1990년 베이징에서 은메달, 1994년 히로시마에서 동메달을 거머쥐었고 미국 여자 프로농구(WNBA)에 진출해 한 시즌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주니어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는데, 초기에는 우리나라 성정아-조문주가 주로 마크를 했고 이후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정은순과 센터 대결을 펼쳐 숱한 명장면을 연출했습니다. 우리 여자농구 선수들, 정하이샤를 막느라 10년 이상 힘들었는데요, 그래도 1990년과 1994년 아시안게임에서 정하이샤가 버틴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거머쥐는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대륙을 들썩인 최고 거인 장쯔위 2019년 초부터 중국 대륙이 한 소녀로 들썩이기 시작했습니다. 정하이샤는 만 12살 때 172㎝이었다가 다 성장한 뒤에는 206㎝이었습니다. 그런데 겨우 만 11살의 나이에 210㎝나 되는 소녀가 나타나 중국에서 큰 화제를 모았는데 이 소녀의 이름은 장쯔위(张子宇). 유명 영화배우 장쯔이와 발음이 비슷해 더 유명해졌습니다. 필자는 지난 2019년 이 선수에 대한 기사를 작성해서 국내에 가장 먼저 소개했습니다. (관련기사 보기) 그 당시 산둥성 지난의 한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같은 또래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보면 진짜 2배 정도 컸습니다. 장쯔위의 부모는 모두 장신입니다. 어머니 위잉은 산둥성 여자농구팀 코치로 활약했고 아버지도 농구 실력이 남달랐습니다. 부모 덕분에 장쯔위는 엄청난 키는 물론 농구에 대한 재능까지 물려받은 것입니다. 2019년 가을부터 본격적인 농구 훈련을 시작한 장쯔위는 중국인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하지만 스피드가 떨어지고 득점력이 부족해 기량이 늘지 못해 중국 16세 이하 대표팀에 뽑히지 못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잊혀져 가던 그는 지난해 6월 중국에서 열린 18세 이하 아시아컵에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결승전에서 호주에 져 준우승에 그쳤지만 만 17세의 장쯔위는 혼자서 42점에 14개의 리바운드를 몰아쳤습니다. 대회 MVP에 선정된 장쯔위는 이 대회에서 경기당 평균 35점, 12.8리바운드를 올렸는데 특히 일본전 44점은 대회 한 경기 최다 득점 신기록이었습니다. 혜성처럼 떠오른 장쯔위의 키도 각종 언론에서 제각각으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최소 220cm에서 최대 228cm까지 다양한데 228cm이면 야오밍과 같은 키입니다. 지난해 아시아컵에서 한국 대표팀은 중국에 크게 졌습니다. 그때 장쯔위도 맞대결했던 우리 대표팀 센터 송윤하(181cm)는 장쯔위를 온몸으로 막았는데 경기 후 "엄청나게 크다, 그 말밖에 할 수 없어요."라며 혀를 내두르기도 했습니다. 중국을 넘어 세계 여자 농구 사상 최장신인 장쯔위가 야오밍과 같은 슈퍼스타가 될지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지난달 중국 프로축구 산둥 타이산 팬들이 우리나라 광주FC와 경기 중에 상상하기 힘든 무례한 작태를 보여 큰 파문이 일었습니다. 2025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에서도 중국 쇼트트랙 선수들의 이른바 '나쁜 손'은 어김없이 나왔습니다. 우리나라를 방문한 중국 관광객(유커)도 볼썽사나운 행동을 많이 저질러 눈살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이처럼 중국인들이 스포츠에서나 관광에서나 '에티켓'을 잘 지키지 않는 사례는 허다합니다. 그럼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광주 팬 앞에서 '전두환 사진' 도발 지난 2월 11일 산둥 타이산의 홈구장에서는 광주FC와 산둥 타이산의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경기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기 중에 산둥 홈팬들이 광주 팬 쪽을 향해 전두환 씨 얼굴이 인쇄된 사진을 펼쳐 들며 도발을 했습니다. 광주 팬 앞에서 중국 관중이 전두환 씨의 사진을 펼쳐 보인 것이 어떤 의미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아실 것입니다. 광주 구단은 아시아 축구연맹(AFC)에 철저한 조사와 강력한 징계를 요구했습니다. 파문이 확산되자 산둥 타이산 구단 측은 강력한 규탄 성명을 내고 관련된 사람들의 홈 경기 영구 관람 금지령과 함께 광주FC에 공식 사과했습니다. 산둥 구단, 경기 2시간 전에 기권 이로부터 8일 뒤 산둥 구단은 또 상식 밖의 일을 저질렀습니다. 2월 19일 산둥은 울산에서 울산 HD와 방문 경기를 치를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산둥은 경기 2시간 전에 갑자기 출전을 포기했습니다. 선수들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누가 봐도 납득이 되지 않는 핑계였습니다. 미리 티켓을 구매했던 울산 팬들은 당연히 기다렸던 경기를 볼 수 없게 됐고 울산 구단도 입장권 환불 처리를 하는 등 불편을 겪어야 했습니다. 울산 팬과 울산 구단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중국인, 광주에서 '전두환 코스프레' 추태 이런 가운데 중국의 한 남성이 광주시에서 전두환 씨 흉내를 내며 영상을 찍어 또다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한 중국인은 '폭설과 함께 전두환이 돌아왔다'는 제목으로 SNS에 게시물을 올렸는데 해당 게시물엔 광주송정역 등 광주 곳곳에서 점퍼 차림에 군화를 신고 이마를 훤히 드러낸 남성의 모습이 보입니다. 누가 봐도 '전두환 코스프레'를 하며 광주 시민을 또다시 조롱한 것입니다. 중국 쇼트트랙, '나쁜 손'에 적반하장까지 지난달 중국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에서는 중국 쇼트트랙 선수들의 이른바 '나쁜 손'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중국 쇼트트랙 선수들의 '나쁜 손'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난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때는 결승선을 1위로 통과하는 박승희의 유니폼을 중국 판커신이 손으로 잡으려고 했다가 '반칙왕'이란 별명까지 생겼습니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여자 1천500m 결승에서는 양징루가 김길리를 잡으려는 듯 오른팔을 쭉 뻗었습니다. 다행히 탄력을 붙인 김길리가 잡히지 않고 치고 나가 금빛 질주를 완성했지만, 국제 대회마다 논란을 빚은 중국 선수들의 '나쁜 손'을 떠올리게 한 장면이었습니다. 남자 1천500m 결승에서는 박지원이 계속 선두를 달리자, 중국 쑨룽이 오른팔로 밀쳤는데 박지원이 중심을 잃지 않고 잘 버텨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중국 쑨룽은 남자 500m 결승에서는 팀 동료인 린샤오쥔(임효준)을 밀어줘서 금메달을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 명백한 반칙이었지만 대회 장소가 중국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심판들은 모른 체 했습니다. 쑨룽은 적반하장으로 남자 5천m 계주 결승이 끝난 뒤 공동취재구역을 빠져나가며 한국 대표팀을 향해 '더러워! 그냥 더럽다고!'라고 큰 소리를 지르는 몰상식의 극치를 보였습니다. 쓰레기 버리고, 침 내뱉고…중국 유커 행태 코로나19 이전 중국 관광객이 한창 한국을 방문할 때는 이들의 '비매너'가 큰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2016년엔 제주도에서 발생한 약 4천 건의 경범죄 가운데 절반 이상이 중국 여행객이 저지른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중국 여행객들이 면세 물품 포장을 마구 버려 제주공항 대합실이 '쓰레기장'으로 변한 사진과 영상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금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고 침과 가래를 공공장소에 함부로 뱉는 것은 예사이고 아이가 소변이 급하다고 매장 구석에서 그냥 누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중국인들도 에티켓을 중시한다 이런 상황을 보면 '중국인은 원래 에티켓을 지키는 것을 싫어하는 것일까?'라는 물음이 나오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중국어에 '아이지앙리마오'(愛講禮貌)란 게 있습니다. 예의 따지는 것을 중시한다는 뜻입니다. 중국인들은 실제로 상대가 무례하거나 버릇이 없을 때 '메이꿰이쥐'(沒規矩)란 말을 쓰는데 이것은 상대에 대한 큰 욕이나 다름없습니다. 중국인들도 에티켓을 중시합니다. 그럼 비록 일부이기는 하지만 중국 관광객들은 왜 추태를 보였던 것일까요? 이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면 중국인의 생각과 행동에 큰 영향을 끼치는 사회구조적-심리적 요소를 파악해야 합니다. 중국인은 오랫동안 '첫째: 지아(家) 둘째: 딴웨이(단위,單位) 셋째: 당(黨)' 이 3가지 제약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지아'는 직계 가족을 비롯해 친·인척까지 포함되는 개념입니다. '당'은 중국 공산당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생소한 게 '딴웨이'입니다. 1949년 사회주의 중국 건립 이후 도시 지역 주민에게 적용됐던 '단위 체제'(Danwei system)는 일반적으로 국가기관 단위, 사업 단위, 기업 단위로 나뉩니다. 국가기관 단위란 공산당, 행정부, 군대, 사법기관, 인민대표대회, 정치협상회의 등 국가를 구성하는 중앙과 지방의 각급 권력기관을 가리킵니다. 사업 단위는 국가가 국유자산을 동원해 설립한 조직으로, 주로 교육·과학기술·문화·위생 등과 관련된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각종 협회·연구소·학교·문화단체 등입니다. 기업 단위는 물질 생산을 목적으로 설립된 기업 조직으로, 크게 국유기업과 사영기업으로 구분됩니다. '딴웨이'에 소속된 중국 도시민의 생활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딴웨이'가 해결해 줬습니다. 사회·경제적 보장은 전적으로 '딴웨이' 소속 노동자에게만 배타적으로 제공되는 것으로, 외부인은 전혀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소속감은 대단했습니다. 이후 시장 개혁으로 1990년대 중반부터 '단위 체제'가 서서히 해체되며 '사구'(社區) 조직으로 바뀌었지만 '딴웨이'가 오랫동안 중국인의 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지배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시진핑 "중국인들 외국서 에티켓 지켜라" '지아'(家), '딴웨이'(단위·單位), 당(黨) 이 3가지의 특징은 상하 개념이 분명한 수직 구조란 점입니다. 여기서 무례하게 굴거나 에티켓을 지키지 않는 것은 곧 사회적 매장을 뜻합니다. 중국인들이 중시하는 '꽌시'(관계)나 '미엔쯔'(체면)도 이 3가지 구조를 비롯해 자신의 이익에 부합되는 상황에서만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중국인이 한국 관광을 왔다고 가정합시다. 한국이란 곳은 '지아'(家), '딴웨이(단위·單位), 당(黨) 3가지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따라서 '꽌시'(관계)나 '미엔쯔'(체면)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국 관광지는 그들에게는 일종의 해방구가 되는 셈입니다. 에티켓을 잘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남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뼈아픈 역사적 경험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20세기 이후 중국은 군벌시대, 국민당 1당 독재, 공산당 1당 독재를 차례로 거쳤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시민 사회'(Civil society)가 형성될 계기가 없었습니다.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무질서, 대혼란, 하극상을 연출했고 이후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은 황금만능주의, 이기주의란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남을 어떻게 배려하느냐'는 개인과 그 사회의 성숙도를 반영합니다. 이런 배려가 잘된 나라가 이른바 선진국이지요. 이런 점에서 중국은 갈 길이 너무도 멉니다. 경제력 측면에서는 미국과 함께 이른바 G2 반열에 올랐지만 그에 걸맞은 시민의식은 낙제점을 면하기 쉽지 않습니다. 중국 정부도 이런 점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습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2014년 9월 "물병을 아무 데나 버리면 안 되며 해외 여행 시 에티켓을 잘 지켜달라. 중국인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형성될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중국 최고 지도자의 당부로 이후 어느 정도 개선이 됐지만 획기적으로 나아진 것은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대이변이 일어났다." 지난 2월 28일 대한체육회 대의원총회가 열린 서울 올림픽파크텔은 충격과 흥분의 도가니였습니다. 2036 하계올림픽 유치 국내 후보 도시 투표에서 '다윗' 전라북도가 '골리앗' 서울시를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49표 대 11표라는 압도적인 승리였습니다. 이런 결과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투표 결과가 발표되자 오세훈 서울시장이 '이게 뭐지?'라며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 반면 전라북도 캠프는 김관영 지사를 비롯해 일제히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습니다. 전북이 대반전을 연출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전북은 나아가 본선에서도 더 큰 기적을 창조하며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48년 만에 하계올림픽을 대한민국에 선사할 수 있을까요? 절박했던 전북, 방심했던 서울 서울시의 승리는 일찌감치 기정사실처럼 보였습니다. 오세훈 시장이 몇 년 전부터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을 여러 차례 만나는 등 공을 들였고 1988년 서울올림픽 성공 개최 경험과 흑자·친환경 올림픽을 대대적으로 홍보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전북은 지난해 11월에야 뒤늦게 유치전에 뛰어들었습니다. 국제적 지명도와 인프라 등 종합적인 평가에서 전북은 서울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새만금 잼버리의 파행이란 아픈 기억도 감점 요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전북은 '절박'한 마음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지난해 말부터 투표권을 갖고 있는 대한체육회 올림픽 종목 단체 대의원들의 여론 흐름을 주시하며 대반전을 모색했습니다. 특히 김관영 지사와 2024 파리올림픽 대한민국 선수단장을 역임했던 정강선 전북 체육회장이 대의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올림픽 유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호소했습니다. 간절했던 전북과 달리 승리를 확신했던 서울은 막판에 방심했습니다. 투표 당일 김관영 지사는 개량 한복을 입은 채 몇 시간 전부터 현장에 도착해 만나는 사람마다 고개를 숙이며 한 표를 부탁한 반면 오세훈 시장은 프레젠테이션 시작 20분 전에야 투표장에 도착했습니다. 올림픽 유치라는 절체절명의 승부를 앞둔 양 측의 이런 모습이 투표를 앞둔 대의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전북의 필승 카드는 '지방 연대' "우리가 이긴다." 투표 3시간 전에 전북 관계자가 필자에게 한 말입니다.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지방 출신 대의원들이 전북을 찍기로 돼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막판 뒤집기에 성공한 전북의 필승 카드는 '지방 도시 연대'였습니다. 올림픽을 통해 지역 불균형을 해소해야 하며 이런 측면에서 전북 유치가 꼭 필요하다는 논리를 집중적으로 편 것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의 국가 정책이 서울 등 수도권 중심으로 이뤄졌던 틀을 깨고 비수도권에도 기회가 부여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김관영 지사와 정강선 회장은 "서울은 1988년 올림픽을 통해 국제적인 도시로 도약했고 경제 성장을 이뤘다"며 "지방 소멸 위기 상황에서 국가균형발전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비수도권에도 기회를 줘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김관영 지사는 프레젠테이션에서 "우리나라 전국 단위 스포츠 경기의 88.5%가 수도권 외의 지역에서 열리고 있다. 호주가 세 차례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멜버른, 시드니, 브리즈번으로 옮겨가면서 한 것도 나라의 균형 발전을 꾀한 것"이라며 대의원들에게 지지를 호소했습니다. 전북은 올림픽을 유치하면 육상 경기를 대구스타디움에서 개최하고, 광주(국제양궁장·남부대 시립국제수영장), 충남 홍성(충남 국제테니스장), 충북 청주(청주다목적실내체육관), 전남 고흥(남열해돋이해수욕장) 등에서 분산 개최한다는 계획을 내놓았습니다. 이는 IOC가 지향하는 인접 도시 연대를 통한 비용 절감 요구에 부합하고, 수도권에 집중된 인프라·경제력의 분산으로 균형 발전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선수촌과 숙박 어떻게 해결하나? "열정만으로 5성급 호텔을 지을 수 있을까?" 전북이 서울을 제치는 이변을 일으키자 대한체육회 관계자가 내뱉은 말입니다. 전북이 열정과 집요함을 바탕으로 국내 후보 도시가 됐지만 숙박 등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해 국제 경쟁력에서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입니다.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이 선수촌입니다. 올림픽에 참가하는 전 세계 선수단은 '테러' 문제 때문에 일반 호텔에서 잘 수 없습니다. 철통 안전이 보장된 선수촌이 반드시 마련돼야 해 대규모 아파트를 신축하는 것이 불가피합니다. 또 올림픽 주요 관계자들이 머무를 5성급 호텔도 다수 지어야 합니다. 문제는 인구가 많은 서울과 달리 전북에 이런 대규모 고급 시설을 지었을 때 사후 활용이 사실상 어렵다는 점입니다. 다른 시도와 분산 개최를 한다고 해도 올림픽을 치를만한 수준의 경기장이 현재 적다는 것도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각종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결국 엄청난 비용이 수반돼야 하는데 중앙 정부의 자금 지원이 어느 정도 이뤄질지는 미지수입니다. 서울에 비해 국제적 지명도가 크게 떨어지는 점도 보완해야 합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은 3수 끝에 유치에 성공했는데 외국인들이 북한의 평양과 강원도 평창을 확실히 구별하는 데 거의 10년이 걸렸다는 후문도 있습니다. 인도와 카타르 꺾어야 올림픽 개최 서울을 상대로 극적인 승리를 거둔 전북은 유치 신청서를 공식적으로 내기 위해 국내 절차 마무리에 들어갑니다. 우선 대한체육회의 주무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에 국제행사 개최 계획서를 제출한 뒤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문체부는 국제체육대회심사위원회를 열어 전북의 2036년 올림픽 유치와 관련해 심의한 뒤 큰 문제가 없으면 승인합니다. 이어 기획재정부의 국제행사심사위원회의 승인까지 받으면 정식으로 국제행사 개최 협약을 체결합니다. 이후 전북이 올림픽 유치 의향서를 대한체육회를 거쳐 IOC에 제출하면 치열한 본선 경쟁이 시작됩니다. 2036년 올림픽 유치전에는 인도와 인도네시아, 카타르, 튀르키예 등 약 10개국이 뛰어들 전망입니다. 이 가운데 강력한 후보로는 인도와 카타르가 꼽힙니다. 올림픽 첫 개최에 도전하는 인도는 유치 의향서를 이미 IOC에 제출했습니다. 인도는 개최 후보 도시로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2014년 연방정부 총리로 취임하기 전에 오랫동안 주 총리를 지냈던 서부 구자라트주의 아메다바드 또는 뉴델리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2022년 축구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던 카타르는 도하를 앞세워 도전할 계획입니다. 풍부한 '오일 머니'와 탄탄한 인프라가 강점입니다. 이밖에 인도네시아는 동남아시아 국가 최초의 올림픽 개최 명분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2036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는 내년 또는 2027년 IOC 총회에서 결정될 전망입니다. 오는 3월 18일에 개막되는 IOC 총회에서 선출되는 새 위원장도 변수로 꼽힙니다. 현재 국제육상경기연맹 회장인 세바스찬 코와 사마란치 주니어 IOC 위원이 유력한 신임 IOC 위원장 후보인데 '친한파'로 유명했던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전 IOC 위원장의 아들인 사마란치 주니어가 당선되는 게 전북에게 보다 유리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길었던 엄동설한이 서서히 물러나면서 봄 냄새가 풍기고 있습니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국내 프로야구 10개 구단들은 해외 스프링캠프를 거의 다 마치고 새 시즌을 기다립니다. 올 시즌 일정을 보면 시범경기는 3월 8일(토)부터 18일(화)까지 팀당 10경기씩 총 50경기가 치러집니다. 그리고 3월 22일부터는 프로야구 팬들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2025 정규리그 대장정에 들어갑니다. 팬들의 가장 큰 관심은 역시 어느 구단이 올 시즌 우승을 차지할 것인가에 쏠리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지난해 처음으로 관중 1천만 명 시대를 연 프로야구가 그 기세를 이어받아 새로운 신기록, 다시 말해 올 시즌엔 1천100만 명까지 돌파할 것인지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1천88만 7천705명. 2024년 프로야구 KBO리그 총 관중 수입니다. 1982년에 출범한 한국 프로야구는 지난해 43번째 시즌 만에 처음으로 대망의 1천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이 수치는 종전 한 시즌 역대 최다 관중이었던 2017년의 840만 688명을 크게 경신한 것입니다. 또, 한 경기당 평균 관중 수도 최초로 1만 5천 명을 넘어섰습니다. 이런 폭발적인 관중 증가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국가대표팀의 성적이 부진했고, 지난해 여름에는 야구가 빠진 2024 파리 올림픽이 열리면서 관심이 분산될 것이라는 예측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은 가운데서도 한국 프로야구 경기장에 최초로 1천만 관중이 들어오는 '흥행 대박'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이런 '상전벽해'의 변화를 불러온 것일까요? 그동안 야구는 미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도 '아저씨들의 스포츠'로 불렸습니다. 중년 이상의 남자들이 주로 보는 종목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종목에 비해 템포가 느리고, 경기 시간이 길다는 게 약점이었습니다. 2017년, 미국에서 메이저리그를 TV로 보는 시청자의 평균 연령은 57세. 미 프로농구(NBA)의 42세, 메이저리그 사커(MLS)의 40세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일본 야구팬의 '주류'도 '40대 이상의 남성'입니다. 그런데 이제 한국 프로야구는 더 이상 '아저씨들의 스포츠'가 아닙니다. 20대 청년, 특히 여성 관중이 획기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20대 점유율은 약 38%. 야구장 관중 10명 중 4명은 20대 팬이라는 것입니다. 2019년 전체 티켓 구매자 중 20대가 차지하는 비율은 21.8%로 35.1%의 30대, 28.3%의 40대에 상당히 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5년 사이에, 20대 관중의 점유율이 2배 가까이 높아진 것입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성비'입니다. 남성이 주류인 미국, 일본과 달리 KBO리그의 관중석에는 여성이 남성보다 많습니다. 2023년부터 티켓 구매자 중 여성의 비중이 50.7%로 남성을 앞질렀는데 지난해에는 그 격차가 더 커졌습니다. 특히 20대 여성의 증가율이 폭발적입니다. 2019년 전체 티켓 구매자 중 20대 여성의 점유율은 17.9%이었는데 해마다 높아져 2024년에는 약 24%이었습니다. 즉, 야구장 관객 4명 중 1명은 20대 여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이들을 야구장으로 끌어들인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가성비'를 꼽는 전문가가 많습니다. 평균 1만 5천 원의 돈으로 3시간 이상 즐길 수 있기 때문에 '가성비'가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지난해 '야구장을 찾는 이유'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응답자의 절반 이상인 56%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성적과는 상관없이 야구장을 더 자주 찾는다고 답했습니다. 그 이유는 응원 문화가 재미있어서(49.3%),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가기 위해서(39.2%), 나들이나 데이트 목적으로(31.1%), 그리고 치맥 같은 야구장의 식음 문화가 좋아서(29.4%)라는 순서로 나타났습니다. 이 밖에도 관중이 눈에 띄게 늘어난 요인은 많습니다. 경기장 여건이 좋아진 것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2014년 챔피언스필드(광주), 2016년 고척스카이돔(서울)과 라이온즈파크(대구), 2019년 NC파크(창원)가 새로 문을 열었습니다. 2015년 리그에 가입한 KT도 수원구장 환경을 대폭 개선했습니다. 올해에는 대전에 새 야구장이 들어섭니다. 서울, 부산, 인천에서도 새 야구장 건설이 추진 중입니다. 그럼 실제로 프로야구 구단을 운영하는 관계자들은 관중의 대폭 증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필자는 kt wiz 야구단을 비롯해 프로농구단 등 5종목 구단을 경영하고 있는 kt sports의 이호식 대표이사를 만나 그 이유를 직접 들어봤습니다. 이호식 kt sports 대표이사 "경기적인 요인과 경기 외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이른바 '타고투저' 현상으로 점수가 많이 나고 역전승이 늘어나며 팬들이 큰 흥미와 스릴을 느끼게 됐다. 또 ABS(자동 볼 판정 시스템) 도입으로 볼이냐 스트라이크냐는 판정 시비가 거의 사라지게 되면서 시간이 단축된 것도 박진감을 높였다. 각 구단이 신선한 아이디어로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도 큰 효과를 보았다. kt의 경우 몇 년 전부터 무더운 여름에 시원한 '물대포'를 쏘는 등 '워터 페스티벌' 이벤트를 개최해 호평을 받았다." "또 회사의 특성을 살려 국내 프로구단 최초로 팬들과 직접 소통할 수 있도록 위잽 애플리케이션을 출시해 야구팬들의 티켓 예매부터 발권, 입장까지의 절차를 간소화했고 구장 내 다양한 F&B(식음료) 매장 이용에도 편의성을 높였다. 불꽃 시구를 비롯해 드론, 로봇 시구 등 무인 시구를 선보였고, 특히 '스포츠+5G(5세대 이동통신) 융합'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적용한 '스마트 스타디움'을 국내 최초로 수원 kt wiz 파크에 구축함으로써 야구팬들에게 이제껏 접하지 못한 신선하고 전문화된 경험을 선사했다. 이른바 MZ세대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데는 SNS가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야구장에 와서 유니폼 입고 응원하는 것을 촬영해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 올리는 문화가 정착되고 있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야구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물론 가족과 친구들이 3-4시간 즐길 수 있는 '놀이 공간'으로 야구장이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는 시대의 대세인 AI(인공지능) 기술을 접목시켜 팬들이 야구장에서 좀 더 편하고, 더 재미있고, 더 다양한 방식으로 즐길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겠다." 국내 프로야구단은 오랫동안 '적자 기업'으로 인식돼 왔습니다. 대략 1년 운영비가 연간 500억 원 정도 필요한데 모그룹의 재정 지원이 없으면 '흑자 경영'은 사실상 어렵다는 것이 그동안의 통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양상이 크게 달라지고 있습니다. 지난해 KIA 타이거즈는 최고 스타 김도영 선수의 유니폼 매출 수익만 100억 원 이상을 올렸습니다. 김도영 연봉 1억 원의 100배 이상을 번 것입니다. 스타를 배출하고 참신한 마케팅을 이용해 관중을 야구장으로 오게 할 경우 이제는 프로야구단의 흑자 경영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동안 '마의 벽'으로 불리는 관중 1천만 명을 돌파한 한국 프로야구에 2025년 을사년은 무척 중요한 한 해입니다. 만약 올 시즌 관중 수도 지난해 수준이거나 그 이상이 된다면 프로야구는 그야말로 '국민 스포츠' 반열에 오를 수 있습니다. 올해에는 올림픽이나 축구 월드컵 등 대형 이벤트가 열리지 않아 야구 관계자들의 기대감은 더욱 증폭되고 있습니다. 프로야구 한 시즌 관중이 과연 1천100만 명을 돌파할지 궁금합니다.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2025년 을사년 새해를 맞으면서 문득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김종길 시인의 <설날 아침에>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시인의 노래처럼 세상이 여느 때보다 험난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을 고려하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이렇다 할 희망과 돌파구가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 스포츠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해 2024 파리 올림픽에서 역대 최고 성적을 거뒀지만 배드민턴 안세영 선수의 이른바 '작심 발언'이 불러온 후폭풍으로 지금까지도 큰 홍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변화의 바람도 거세게 불고 있습니다. 최근에 실시된 제42대 대한체육회장 선거에서 43살의 유승민 후보가 3선에 도전했던 이기흥 후보를 꺾는 파란을 일으키며 당선된 것입니다. 새해 스포츠계에는 혁신이라는 거대한 물결이 몰려올 전망입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에게 기쁨과 감동을 선사할 '젊은 피'들이 대거 비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연부역강'(年富力强). 중국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로, 그대로 번역하면 '해가 풍부하고 힘은 강하다'는 것입니다. 해가 풍부하다는 것은 살아갈 해가 많다는 뜻, 즉 젊다는 의미입니다. 을사년 2025년에는 국내 스포츠계에는 젊고 실력이 빼어난 '연부역강'한 샛별들이 즐비합니다. 양민혁 이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샛별은 양민혁. 2006년에 태어난 그는 지난해 그야말로 혜성처럼 떠올랐습니다. 프로축구 K리그1 강원FC 유니폼을 입고 구단 사상 역대 최연소 출장 기록을 세우며 데뷔 시즌을 시작했는데 38경기에 모두 출전해 12골 6도움의 놀라운 성적을 거뒀습니다. 'K리그 이달의 영 플레이어상'을 다섯 번이나 받은 끝에 압도적으로 2024시즌 '영 플레이어상'을 거머쥐었습니다. 양민혁의 MVP급 활약으로 강원은 19승 7무 12패로 승점 64를 쌓아 구단 사상 최고 성적인 준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슈퍼 루키' 덕분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으로부터 수십억 원의 이적료까지 챙길 수 있었습니다. 2024년 12월 16일 만 18살 양민혁이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런던으로 떠나는 날, 그보다 14살 많은 토트넘 주장 손흥민은 사우샘프턴과의 경기에서 전반전만 뛰면서 1골 2도움을 기록하며 5대 0 대승을 이끌었습니다. 이제 팬들의 관심은 대선배 손흥민과 같은 팀에서 뛰게 된 양민혁이 자신의 롤모델인 손흥민처럼 될 수 있는가에 쏠려 있습니다. 양민혁은 "아직 손흥민 선수와 많이 만나보지도 못했고, '형'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 같다"며 "좀 더 얘기를 나누고 친해진 후에 '형'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수줍게 말했습니다. 한국 축구 '레전드'인 손흥민과 함께 뛰는 모습도 상상했다는 양민혁은 "정말 영광스러울 것 같다. 얼른 빨리 가서 내 기량을 보여주고 같이 뛰고 싶다"며 "형한테 많이 배우고 더 열심히 할 테니 잘 챙겨주셨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습니다. 양민혁은 측면 공격수로 좌우에 모두 설 수 있습니다. 양발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데다 스피드가 뛰어나고 드리블이 탁월합니다. 문제는 국내보다 훨씬 강력한 피지컬이 요구되고 수준이 비교도 안 될 만큼 높은 잉글랜드 무대에서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토트넘의 치열한 2선·측면 자원 경쟁에서 살아남아 일단 출전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정현우-정우주 축구에 양민혁이 있다면 프로야구에서는 정현우-정우주 '루키' 듀오가 새해를 단단히 벼르고 있습니다. 두 선수 모두 2006년생으로 2025 KBO 신인 드래프트에서 나란히 1·2번 지명을 받은 한국 야구의 미래입니다. 정현우는 키움 히어로즈, 정우주는 한화 이글스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정현우는 최고 시속 150km를 던지는 왼손 투수로 '미래의 김광현, 양현종'이 될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정우주는 시속 160km에 이르는 강속구가 돋보이는 오른손 정통파 투수입니다. 정현우와 정우주는 야구를 시작한 뒤 줄곧 에이스로 주목받았던 선수입니다. 정현우는 덕수고, 정우주는 전주고를 이끌고 모교를 대표하는 선수로 활약했습니다. 정현우 소속팀 키움은 이른바 '빅리그 사관학교'라 불립니다. 강정호, 박병호, 김하성, 이정후에 이어 최근 김혜성까지 명문 LA 다저스 유니폼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정현우는 "김혜성 선배가 운동하시는 거 봤는데 확실히 다르더라. 그 정도 해야 메이저리그 갈 수 있구나, 더 열심히 해야 그 위치까지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KBO리그에 서기도 전에 벌써부터 빅리그라는 야무진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야구 전문가들은 변화구, 제구력을 포함한 전반적인 능력에서는 정현우가 조금 낫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잠재력 면에서는 광속구를 갖고 있는 정우주를 높게 평가합니다. 만 18살에 불과한 만큼 변화구 제구력을 키우면 '코리안특급' 박찬호처럼 대성할 재목이라는 것입니다. 윤이나 골프에서는 국내에서 이미 '뜬 별'이 국제 무대에서 '샛별'이 되려고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윤이나와 장유빈이 그 주인공입니다. 만 22세인 윤이나는 박세리-박인비의 뒤를 이을 대형 스타로 일찌감치 주목받아온 선수입니다. 마음먹고 치면 드라이버샷 비거리가 300야드에 육박할 만큼 폭발적인 장타력을 갖고 있어 골프장에서 구름 관중을 몰고 다녔던 최고 인기 스타입니다. 지난해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서 상금왕, 대상, 최저 타수상 등 주요 개인 타이틀을 석권하며 3관왕에 오른 윤이나는 2024년 12월에 미국 앨라배마주 모빌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퀄리파잉(Q) 시리즈에서 8위에 오르며 LPGA투어 출전권을 따냈습니다. Q 시리즈 '수석' 기대도 모았지만 이루지 못한 그는 일단 신인왕이 첫 번째 목표입니다. 한국 여자골프는 지난 1998년 박세리부터 2023년 유해란까지 14명의 신인왕을 배출했습니다. 윤이나의 목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장기적으로 세계 랭킹 1위에 오르고 2028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겠다는 포부까지 갖고 있습니다. 남다른 장타력과 정교한 아이언샷으로 존재감을 과시했던 윤이나가 미국 무대에서 성공하려면 쇼트게임을 보완해야 합니다. 윤이나는 2월 초 파운더스컵을 LPGA투어 공식 데뷔전으로 삼을 계획인데 미국 진출을 선언하며 대한골프협회(KGA)와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에 1억 원씩을 기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장유빈 여자골프에 윤이나가 있다면 남자골프에서는 장유빈이 단연 눈에 띄는 스타입니다. 필자가 지금까지 현장에서 지켜본 수많은 국내 선수들 가운데 가장 다이내믹한 플레이를 펼치는 골퍼가 바로 장유빈입니다. 그는 21살이던 2023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미국 PGA투어에서 뛰는 임성재와 김시우, 그리고 조우영과 함께 단체전 금메달을 합작했습니다. 프로에 입문해서도 거침이 없었습니다. 호쾌한 장타와 화려한 공격 골프를 내세워 2024시즌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상금과 대상 포인트, 평균 타수 등 주요 개인상을 휩쓸며 최고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KPGA투어 통산 3승을 올린 장유빈은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퀄리파잉스쿨 출전을 앞두고 사우디아라비아 자본이 후원하는 LIV골프행을 전격 선언했습니다. 장유빈은 "세계적인 선수들과 2025년부터 바로 경쟁을 할 수 있는 기회"라고 LIV골프를 선택한 이유를 밝히며 "PGA투어에 대한 꿈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PGA투어에서도 활동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2025년 을사년에는 동·하계 올림픽과 축구 월드컵 등 대형 이벤트는 열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국내는 물론 해외 무대에서도 한국 스포츠의 미래를 이끌 '젊은 피'들이 즐비해 2024년에 이어 시원한 승전보와 함께 진한 감동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비상계엄' 사태로 온 나라가 엄청난 충격과 함께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내란 수괴'로 지목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2월 14일 국회에서 탄핵을 당하며 직무가 정지돼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됐습니다. 올림픽과 더불어 지구촌 최대 축제라는 FIFA 월드컵이 군사독재정권의 비상계엄 속에 치러진 적이 있습니다. 승부 조작과 심판 매수 의혹으로 얼룩졌던, 역사상 가장 추악했던 월드컵으로 악명이 높은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입니다. 국민 불만을 월드컵으로 돌린 군사정권 1976년 아르헨티나 육군 총사령관이었던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사벨 페론 민간인 대통령을 축출하고 집권했습니다. 그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반대 세력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습니다. 인권 탄압과 유린이 극에 달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수만 명의 시민들이 군사정권에 의해서 살해되거나 실종됐습니다. 이른바 '더러운 전쟁'입니다. 아르헨티나의 비상계엄은 1976년부터 1983년까지 무려 7년간 이어졌습니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 패전으로 군부정권이 종식됐고 1983년 민간인 대통령 라울 알폰신이 집권한 이후 비상계엄은 해제됐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아픈 역사이자 '흑역사'였습니다. 1978년 당시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군사독재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민심이 흉흉해지자 국민들의 관심을 돌릴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고, 독재자 비델라 대통령은 자국에서 개최되는 1978년 월드컵을 그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우승이 절실했던 비델라 대통령은 대회 조직위원장에 자신의 심복인 카를로스 라코스테 해군 대령을 앉히며 직접 월드컵에 개입했습니다. 치졸한 '아르헨티나 우승 프로젝트' 가동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의 대회 방식은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당시에는 16개국이 출전했는데, 4개 조로 나뉘어 1차 조별 리그를 치렀습니다. 각 조 1, 2위 8개 팀이 다시 A, B 2개 조로 나뉘어 8강 2차 리그를 진행해 각 조의 1위 팀이 결승에 진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2승 1패로 이탈리아(3승)에 이어 조 2위로 8강 리그에 진출한 아르헨티나는 숙명의 라이벌 브라질, 폴란드, 페루와 같은 조에 속했는데 1차전에서 폴란드에 2대 0 승리, 2차전에서 브라질과 0대 0 무승부를 기록하며 1승 1무를 거뒀습니다. 브라질은 1차전에서 페루에 3대 0 승리, 2차전에서는 아르헨티나와 0대 0으로 비겨 역시 1승 1무를 기록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페루, 브라질은 폴란드와 마지막 3차전을 남겨놓고 있는 상황에서 1승 1무로 동률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첫 번째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지금은 조별 리그의 마지막 경기는 승부 조작과 담합을 막기 위해 동시간대에 열리는데, 이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국제축구연맹(FIFA)과 대회 조직위원회가 재량으로 경기 시간을 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대회 8강 리그 다른 조(A조)의 경우 마지막 두 경기가 같은 시간대에 열렸습니다. 그런데 아르헨티나가 속한 B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브라질과 폴란드의 경기를 먼저 치르도록 한 것입니다. 이유는 아르헨티나의 홈경기를 저녁 시간대에 치러 보다 많은 관중들이 와서 볼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브라질 측에서는 반발하며 같은 시간대에 경기를 치르게 해달라고 대회 조직위와 FIFA에 요청했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경기를 하는 아르헨티나가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브라질과 폴란드의 경기 결과를 보고 자신들의 전략을 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겨도 되는지 아니면 이긴다면 몇 골 차로 이겨야 하는지, 계산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회 조직위와 FIFA는 브라질 측의 요청을 묵살했습니다. 그래서 브라질과 폴란드의 경기가 현지 시간으로 오후 4시 45분에 먼저 열렸는데 이 경기에서 브라질이 3대 1로 승리해 브라질은 2승 1무에 6득점 1실점으로 골득실이 +5가 됐습니다. 비델라 대통령, 경기 직전 페루 라커룸 방문 아르헨티나는 페루와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1승 1무, 2득점 무실점이어서 페루를 4골 차 이상으로 이겨야만 브라질을 골득실로 제치고 결승 진출이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매우 작았습니다. 페루가 그리 만만한 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페루가 낳은 전설의 선수 테오필로 쿠비야스가 절정의 기량을 보였고, 조별리그에서도 강호 네덜란드를 제치고 조 1위로 올라올 만큼 강팀이었습니다. 게다가 페루는 직전 남미선수권이었던 1975년 코파아메리카 우승 팀이기도 했습니다. 페루가 낳은 전설의 선수 테오필로 쿠비야스 아르헨티나와 페루의 경기는 브라질-폴란드 경기가 끝나고 약 30분 후인 오후 7시 15분에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석연치 않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경기 전에 비델라 대통령이 페루 대표팀의 라커룸을 방문한 것입니다. 경기 직전에 국가 원수가 상대 팀 선수들의 라커룸을 방문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습니다. 명목상으로는 격려 차원의 방문이었지만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군사독재자인 비델라 대통령은 페루 선수들에게 두 나라 사이의 우호 관계에 대한 메시지를 낭독했다고 합니다. 페루를 6골 차로 꺾고 결승 진출 경기가 시작되자 아르헨티나는 전반 21분 만에 간판 공격수 마리오 캠페스가 선제골을 터뜨렸습니다. 이어 전반 43분 추가 골로 2대 0으로 앞선 채 전반전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후반 들어 골 폭풍을 몰아쳤습니다. 후반 4분과 5분, 연이어 골을 넣으며 일찌감치 4대 0을 만들었습니다. 거짓말처럼 결승 진출에 필요한 4골 차 리드를 잡은 것입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후반 22분과 27분 연달아 골을 추가하며 결국 6대 0 대승을 거뒀습니다. 브라질을 골득실에서 제치고 결승에 진출하자 홈 경기장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습니다. 페루 선수들은 경기 내내 소극적인 플레이와 무기력한 모습으로 일관해 일부러 져준 거 아니냐는 승부 조작 의혹이 강하게 제기됐습니다. 페루는 주축 선수 4명이 엔트리에서 제외됐고, 수비수가 공격수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또 6골을 허용한 페루의 라몬 퀴로가 골키퍼가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살았던 점도 의심을 받았습니다. 특히 아쉽게 탈락한 브라질 언론을 중심으로 승부 조작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브라질로서는 경악스러운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브라질 언론은 "비델라 군사 정권이 페루에게 부채 5천만 달러를 탕감해 주는 대가로 선수를 매수했다. 페루에 대규모 무상 곡물 지원을 해주었다"는 의혹을 보도했습니다. 1986년 영국의 '선데이 타임스'는 "아르헨티나 군사정부가 경기에서 져준다면 수백만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겠다고 페루 측에 제의했다"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당사자인 아르헨티나는 이를 부인했고, 페루 선수들 사이에서는 주장이 엇갈리며 확실하게 밝혀진 건 없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이미 2패로 탈락이 확정된 페루와 4골 차 이상으로 이겨야 했던 아르헨티나의 동기 부여의 차이가 이 같은 결과를 만들었다며 음모론적 시각을 강하게 부인했습니다. 네덜란드에 파울 55개 선언... 아르헨티나 논란의 첫 우승 세계 축구팬의 관심이 집중된 결승전도 뒷말이 많았습니다. 결승전 전날 군부정권에서 동원한 시위대가 네덜란드 선수단 호텔 앞에서 밤새 시끄럽게 농성을 하며 선수들의 수면을 방해해 컨디션 난조를 초래했습니다. 그리고 경기에서도 편파 판정 논란이 생겼습니다. 이탈리아인 주심 세르지오 고넬라가 네덜란드에 무려 55번의 파울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런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네덜란드는 선전을 펼쳤습니다. 전반 38분 아르헨티나 마리오 캠페스에게 선제골을 허용했지만, 후반 37분 나닝가의 극적인 동점골을 넣었는데 이 순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리버 플레이트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7만여 명의 관중은 침묵과 정적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후반 추가시간 네덜란드 렌젠브링크의 슈팅이 골대를 맞았는데 네덜란드로서는 통한의 순간이었습니다. 결국 승부는 연장전에 돌입했고 연장전에서 아르헨티나가 2골을 넣고 3대 1 승리를 거두며 정상에 올랐습니다. 사상 첫 월드컵 우승이었습니다. 비델라 정권으로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지만 지금까지도 찜찜한 우승으로 남아 있습니다. 트로피를 들어 올린 아르헨티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대회 페어플레이상까지 거머쥐었습니다. 승부 담합은 아르헨티나 월드컵에 이어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도 벌어졌습니다. 서독과 오스트리아가 담합해서 함께 조별 리그를 통과하고, 알제리를 떨어뜨렸다는 의혹을 받는, 이른바 '히혼의 치욕'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이로 인해 경기 방식 개선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다음 대회인 1986년 멕시코 월드컵부터 조별 리그의 마지막 2경기는 동시에 시작하도록 제도가 바뀌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진 : 게티이미지
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8강전에서 아르헨티나가 잉글랜드와 만났습니다. 그냥 맞붙어도 빅매치가 분명한데 4년 전인 1982년 두 나라가 900명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포클랜드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그야말로 세계의 관심이 온통 이 한 경기에 쏠렸습니다. 세계 축구사에 라이벌전은 수없이 많이 있었지만, 이 경기야말로 가장 유명했던 라이벌전으로 꼽을 수 있는, 그야말로 정말 많은 스토리와 논란을 남긴, 한마디로 '레전드 매치'였습니다. 마라도나의 선제골은 '신의 손' 유서 깊은 멕시코시티 아즈테카 스타디움에 무려 11만 4,580명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킥오프 휘슬이 울렸습니다. 경기 시작부터 잉글랜드 선수들은 당연히 마라도나를 집중 마크했습니다. 마라도나가 공을 잡으면 잉글랜드 선수들이 여러 명 달려들어 태클을 가했습니다. 마라도나는 여러 차례 넘어지며 파울을 유도했는데 전반전은 양 팀이 이렇다 할 결정적인 찬스를 만들지 못하고 득점 없이 끝났습니다. '신의 손' 골 장면 후반 6분 그 유명한 '신의 손' 골이 나왔습니다. 잉글랜드 골문 앞에서 수비수가 걷어낸 공이 튀어 오르자 마라도나가 점프한 뒤 머리를 갖다 대는 과정에서 슬쩍 왼손으로 쳐서 골을 넣은 것입니다. 이 장면을 눈앞에서 본 피터 쉴튼 골키퍼를 비롯해 잉글랜드 선수들이 일제히 핸드볼이라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주심은 골로 인정했습니다. 마라도나는 골을 넣은 왼손을 치켜들고 세리머니를 펼쳤습니다. 당시 영국 방송 중계캐스터도 처음에는 "잉글랜드 선수들이 마라도나의 오프사이드 반칙이라고 항의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리플레이 화면을 본 뒤 "핸드볼이 확실하다"고 말했습니다. 중계 방송의 느린 화면을 보면 마라도나의 핸드볼 반칙이 거의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잉글랜드 선수들의 거센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아르헨티나가 1대 0으로 앞선 채 경기가 재개됐습니다. 6명 제치고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골 잉글랜드 선수에 맞서 드리블하는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오른쪽) 그로부터 4분 뒤인 후반 10분, 마라도나는 하프라인 뒤에서 공을 잡은 뒤 환상적인 드리블을 선보였습니다. 무려 60m를 단독 드리블하면서 잉글랜드 선수 6명을 차례로 제치고 골망을 흔들었습니다. 영국 중계 캐스터도 탄성과 찬사를 쏟아낼 정도로 만화 같은 골이었습니다. 영국 중계 캐스터는 "정말 훌륭하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이 골에 대해서는 논란과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완전히 축구 천재입니다. 첫 번째 골이 불법이었다면 두 번째 골은 이번 대회 최고의 골입니다"라고 극찬했습니다. 이 골은 지금까지도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골, 가장 유명한 골로 꼽히고 있는데 2002년엔 FIFA가 '세기의 골(Goal of the Century)'로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마라도나는 4분 사이에 월드컵 역사상 '최악의 골'과 '최고의 골'을 모두 터뜨린 것입니다. '포클랜드 패전' 통쾌하게 설욕한 아르헨티나 2대 0으로 뒤진 잉글랜드는 교체 카드를 썼습니다. 보비 롭슨 감독은 후반 29분 왼쪽 윙어 존 반스를 투입했는데 이게 답답하던 잉글랜드의 흐름을 돌려놓았습니다. 당시 23살 신예 반스는 이 대회에서 처음으로 그라운드를 밟으며 월드컵 데뷔전을 치렀는데 장기인 스피드와 드리블을 발휘하며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쳤습니다. 후반 36분 반스가 왼쪽 측면을 돌파한 뒤 정확한 크로스로 리네커의 골을 어시스트했습니다. 상대 수비수 2명을 제친 뒤 리네커의 머리에 정확하게 공을 배달하자 리네커가 놓치지 않고 6호 골을 터뜨렸습니다. 멕시코 월드컵 득점왕을 차지한 리네커의 대회 마지막 골이었습니다. 아르헨티나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마라도나가 그림같은 '마르세유 턴'으로 잉글랜드 선수 2명을 한꺼번에 제치고 들어간 뒤 동료(타피아)에게 패스했습니다. 타피아가 강슛을 날렸는데 골대를 강타하는 바람에 아르헨티나로서는 쐐기 골 찬스를 아쉽게 놓쳤습니다. 가슴 철렁한 위기를 넘긴 잉글랜드는 후반 43분 또 한 번 존 반스의 발끝에서 결정적인 찬스를 만들었습니다. 반스가 왼쪽 측면을 돌파한 뒤 정확한 크로스를 리네커에게 연결했습니다. 머리에 살짝 갖다 대기만 해도 들어가는 상황이었는데 아르헨티나의 수비수 훌리오 올라르티코에체아가 말 그대로 간발의 차이로 머리로 걷어냈습니다. 잉글랜드로서는 정말 통한의 순간이었고, 올라르티코에체아가 아르헨티나를 구해낸 순간이었습니다.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린 마라도나 결국 2대 1 아르헨티나의 승리로 경기가 끝났고,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그라운드에 모여서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4년 전 포클랜드 전쟁 패전의 아픔과 울분을 씻어낼 수 있었습니다. 월드컵 4강 진출의 기쁨을 넘어 아르헨티나로서는 정말 통쾌한 승리였던 것입니다. 최대 고비를 넘은 아르헨티나는 준결승에서 벨기에, 결승에서 서독을 꺾고 8년 만에 통산 2번째 우승컵을 들어 올렸습니다. 우승을 이끈 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 국민 영웅은 물론, 펠레와 함께 축구 레전드 반열에 올랐습니다. 마라도나 "신의 손, 후회 안 해" 뜨거웠던 승부만큼이나 경기가 끝나고 그 후폭풍도 거셌습니다. 마라도나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논란의 첫 번째 골에 대해 "내 머리와 '신(神)의 손'이 함께 만들어낸 골"이라고 솔직히 털어놓았습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신의 손'이라는 말이 탄생한 것입니다. 반면, 패장이었던 보비 롭슨 감독은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울분을 토로했습니다. "그 골로 승부가 났다. 이렇게 매우 중요한 경기에서 나온 심판의 나쁜 판정이었다. 월드컵 레벨에서 이와 같은 판정은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또 '신의 손' 운운하는 마라도나를 겨냥해 "추악한 사기꾼의 손"이라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1986 멕시코 월드컵 당시 보비 롭슨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 그럼 '신의 손' 골 오심를 범한 심판은 뭐라고 말했을까요? 주심 알리 벤 나세르(튀니지)는 훗날 2001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해명했습니다. "나는 마라도나의 핸드볼을 보지 못했다. 그가 머리로 넣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심이 나보다 더 좋은 위치에 있어서 그의 판단을 믿기로 했다. 당시 부심의 시그널을 기다렸는데 없어서 골로 인정했다." 그는 이렇게 부심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발언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보그단 도체프(불가리아) 당시 부심은 2007년 인터뷰에서 이를 반박했습니다. "주심이 먼저 골로 인정해 버렸기 때문에 나는 깃발을 들 수 없었고, 그 골이 무효라고 말할 수 없었다. 결국 주심의 결정이 최종 결정이다." 벤 나세르 주심은 이 경기 이후 더 이상 월드컵에서 심판을 맡지 못했습니다. 마라도나와 벤 나세르 심판은 훗날 재회했습니다. '신의 손' 사건이 터지고 29년이 지난 2015년 8월 마라도나가 튀니지에 광고 촬영을 하러 갔다가 벤 나세르 심판의 집을 방문한 것입니다. 마라도나는 자신의 사인이 담긴 아르헨티나 대표팀 유니폼 티셔츠를 선물했는데 유니폼에는 '나의 영원한 친구 알리에게'라고 적었습니다. 벤 나세르 심판은 2020년 11월 마라도나가 타계했을 때 "마라도나는 아주 훌륭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며 애도를 표했습니다. 2005년 마라도나의 기자회견 마라도나는 시간이 한참 흘러서야 '신의 손' 골에 대해 자세히 언급했습니다. 그는 오랜 침묵을 깨고 2005년 8월 아르헨티나 TV 토크쇼에서 비화와 속내를 털어 놓았습니다. 당시 그 골은 눈속임을 위해 자신의 왼팔을 살짝 구부려 넣은 골이란 점을 '당당하게' 시인한 것입니다. 마라도나는 "잉글랜드의 피터 쉴튼 골키퍼는 키가 매우 크지만(185cm) 나는 키가 작아(167cm) 헤더로 그의 키를 넘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부심이 경기장 중앙에 위치한 것을 봤고 확실한 골이란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동료들에게 나를 어서 껴안아 달라는 부탁까지 했다"라고 스스럼없이 밝혔습니다. 잉글랜드 선수들이 주심에게 핸드볼 반칙이라고 항의하자 마라도나는 동료들에게 "어서 나를 껴안아. 머뭇거리면 심판이 항의를 받아들일 거야"라고 외쳤다는 일화가 이때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마라도나는 이어 "나는 손으로 골을 넣었다는 점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도둑의 것을 훔친 사람은 누구든 100년간 용서받는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여기서 마라도나가 언급한 '도둑'은 포클랜드 제도를 소유한 영국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됐습니다. <인디펜던트> 등 영국 언론은 "마라도나는 자신이 손으로 넣은 골이 1982년 벌어진 포클랜드 전쟁과 관련이 있음을 드러냈다"고 보도했습니다. 1978년 아르헨티나를 월드컵 우승으로 이끈 세사스 루이스 메노티 감독도 "정상적인 골보다 마라도나의 반칙 골이 영국인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잉글랜드에게는 억울한 패배였지만 아르헨티나로서는 '통쾌한' 승리였다는 것입니다. 마라도나는 이후 2008년 영국 신문 <더 선>과의 인터뷰에서는 "내가 사과함으로써 과거로 돌아가 역사를 바꿀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 하지만 골은 여전히 골이다"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사진 : 게티이미지
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축구는 전쟁 이상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최고 인기 스포츠인 축구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그 많은 축구 대회 가운데 최고봉은 역시 FIFA 월드컵입니다. 4년마다 슈퍼스타들이 조국의 명예를 걸고 일전을 벌이는 월드컵은 언제나 지구촌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리며 숱한 명승부를 연출했습니다. 그런데 월드컵에서 만난 두 팀이 실제로 전쟁을 치렀던 나라였다면 어땠을까요? 그야말로 '축구가 전쟁 이상이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불꽃 튀었던 세기의 대결이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벌어졌습니다. 포클랜드 놓고 격돌한 영국과 아르헨티나 포클랜드 제도는 남대서양에 있는 200여 개의 섬으로 1833년부터 영국령이었지만 아르헨티나의 앞마당에 위치해 있어 아르헨티나는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포클랜드'가 아니라 '말비나스'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 제도를 기습적으로 침공했습니다. 당시 포클랜드 제도에는 고작 100여 명의 영국 해병대원들만이 주둔하고 있어서 아르헨티나의 대대적인 공격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습니다. 아르헨티나가 침공한 데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습니다. 1976년 아르헨티나에서는 군부의 쿠데타로 이사벨 페론 민간 정권이 전복되고 군사 정권이 세워졌습니다. 이후 독재와 탄압이 자행됐고, 무리한 외채로 인해 극심한 경제난까지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민심이 매우 안 좋았는데 이를 타개하기 위해 1982년 당시 레오폴도 갈티에리 대통령은 국민들의 불만을 외부의 적으로 돌리려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그 대상은 아르헨티나 군부의 판단으로는 한물간 나라로 여겨졌던 '영국'. 당시 '영국병'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영국도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은 무력으로 포클랜드 제도를 점령하면, 영국이 국력 소모를 감수하고 멀리 떨어진 포클랜드를 수복하러 오기보다는 협상을 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설령 영국이 반격을 하더라도, 영국에서 너무나도 먼 포클랜드 제도가 전쟁의 무대이기에 보급의 문제 때문에 실질적으로 가용할 수 있는 군사력은 아르헨티나가 앞선다고 판단했습니다. '철의 여인'에 철퇴 맞은 아르헨티나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판단은 오래지 않아 오판으로 드러났습니다. 당시 영국 총리는 '철의 여인'으로 불렸던 마거릿 대처. 대처 총리는 일부 각료들의 반대와 최대 우방이었던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만류에도 전쟁을 통한 포클랜드의 탈환을 명령했습니다. 3만 명에 이르는 육해공 전력을 지구 반대편 포클랜드 제도로 보냈습니다. 영국 본토에서 포클랜드까지 거리가 무려 1만 3,000km. 75일에 걸친 전쟁 끝에 6월 14일 아르헨티나는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당시 전쟁에서 영국군 255명과 아르헨티나군 649명이 전사한 가운데 영국은 포클랜드 제도를 탈환했습니다. 이후 양국 지도자의 희비도 엇갈렸습니다. 대처 총리는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장기 집권의 발판을 마련한 반면 갈티에리 대통령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6월 17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이듬해인 1983년 군사독재 정권이 종식되고 민주적인 선거를 통한 문민 정부가 수립됐고 갈티에리 대통령은 문민 정부 수립 이후 집권 당시 인권 탄압 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수감됐습니다. 패전 충격 속 아르헨티나의 졸전 1982년 스페인 월드컵 개막전은 아르헨티나와 벨기에 경기로 치러졌습니다. 아르헨티나는 직전 대회인 1978년 월드컵 우승팀 자격으로 개막전에 나섰는데 경기가 열린 날은 6월 13일. 공교롭게도 포클랜드 전쟁에서 아르헨티나가 항복 문서에 공식 서명한 날(6월 14일) 하루 전이었습니다. 대회 출전 직전까지 군사 정권의 철저한 언론 통제 속에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자국이 포클랜드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스페인에 와서 전해 들은 포클랜드 전쟁 참상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특히 개막전 하루 전에 1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며 아르헨티나군이 영국에 큰 패배를 당했다는 소식에 침울한 분위기에 빠졌습니다. 훗날 마라도나가 밝힌 바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호텔 방에 틀어박혀 밤새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1982년 스페인 대회는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가 처음 출전했던 월드컵. 당시 22살 어린 나이로 아르헨티나 축구의 미래로 불리며 등번호 10번과 주전 자리를 꿰찼습니다. 직전 대회 우승 주역이자 득점왕(6골) 마리오 켐페스도 건재했고 수비의 핵이자 주장 다니엘 파사렐라도 4년 전에 이어 다시 출전했습니다. 하지만 개막전에서 벨기에에게 1대 0으로 패배하며 일격을 당했습니다. 이후 헝가리와 엘살바도르를 연파하고 2승 1패 조 2위로 조별리그를 통과했지만 이후 12강 조별리그에서 무기력한 경기 끝에 2패로 탈락했습니다. 이탈리아, 브라질과 함께 이른바 '죽음의 조'에 들어갔는데 이탈리아에게 2대 1 패배, 브라질에는 3대 1로 졌습니다. 특히 브라질전에서 마라도나는 후반 40분 상대 선수(바티스타)의 복부를 걷어차는 거친 반칙으로 다이렉트 퇴장(레드카드)을 당하며 쓸쓸히 대회를 마감했습니다. 이렇게 '디펜딩 챔피언' 아르헨티나는 12강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며 짐을 쌌습니다. 전쟁 4년 뒤 다시 만난 아르헨티나-잉글랜드 포클랜드 전쟁 4년 뒤인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이 열렸습니다. 마라도나가 26살로 절정의 기량을 보일 때로 그는 주장 완장을 차고 팀을 이끌었습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대한민국, 이탈리아, 불가리아와 A조에 속했는데 첫 경기에서 우리나라와 대결했습니다.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한국은 마라도나의 3어시스트 활약 속에 3대 1로 졌습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박창선 선수가 역사적인 월드컵 본선 1호 골을 기록하며 패전의 아쉬움을 다소나마 달랬습니다. 아르헨티나는 2차전에서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와 1대 1 무승부, 3차전에서 불가리아에 2대 0으로 승리하며 2승 1무 조 1위로 16강에 진출했습니다. 반면 잉글랜드는 극적으로 조별리그를 통과했습니다. 잉글랜드는 포르투갈, 폴란드, 모로코와 F조에 속했는데 첫 경기에서 포르투갈에 1대 0으로 일격을 당했고 2차전에서는 아프리카의 복병 모로코와 무기력한 경기 끝에 0대 0 무승부에 그쳤습니다. 1무 1패로 탈락 위기에 빠진 데다 마지막 3차전 상대는 직전 대회 3위를 차지했던 강호 폴란드여서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그런데 간판 스트라이커 게리 리네커가 전반에만 3골을 몰아치며 예상외로 3대 0 완승을 거두며 1승 1무 1패 조 2위로 16강에 올랐습니다. 16강 토너먼트에서 아르헨티나가 우루과이를 1대 0으로 꺾고 8강에 선착했고 이틀 뒤 잉글랜드는 리네커의 2골 활약 속에 파라과이를 3대 0으로 누르며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아르헨티나의 8강 상대로 결정됐습니다. 포클랜드 전쟁의 재판, 세계 언론의 뜨거운 관심 1986년 이 당시만 해도 포클랜드 전쟁에 대한 양측의 기억이 아직 생생할 때였습니다. 4년 전 전쟁을 치러 양측에서 900여 명이 희생됐던 두 나라가 월드컵 8강이라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것입니다. 게다가 축구는 두 나라 모두의 최고 인기 종목. 전 세계 주요 언론은 '포클랜드 전쟁의 재판(再版)'이라는 제목으로 두 나라 간의 경기를 묘사할 정도로 관심이 높았고 두 나라 국민 사이의 감정도 당연히 안 좋았습니다. 당시 승부도 예측 불허였습니다.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가 절정의 기량과 함께 슈퍼스타로서 경기 흐름을 좌우하는 지배력을 보여주고 있었고, 잉글랜드도 두 경기 연속 강호들을 상대로 3대 0 완승을 거두며 한껏 상승세를 타고 있었습니다. 특히 스트라이커 리네커가 2경기에서 5골을 몰아치며 절정의 골 감각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영국 언론에서는 잉글랜드가 자국에서 열린 1966년 월드컵 우승 이후 20년 만에 가장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당시 언론들은 '축구 전쟁', '축구 이상의 경기' 등으로 표현했습니다. 경기 전 인터뷰에서 보비 롭슨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에게도 관련 질문이 나왔습니다. "이 경기의 정치적인 의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에 대해 롭슨 감독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이런 질문으로 시간 낭비하지 마라. 나한테 정치, 외교에 관한 질문은 하지 마라. 우리는 축구를 하기 위해 여기에 있고, 이 두 가지 이슈를 혼동하지 마라. 내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고 일갈했습니다. 롭슨 감독은 8년간(1982~1990년)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던 명장. 영국에서는 '국민 감독'으로 불리며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 역시 경기 전 인터뷰에서 "이것은 축구 경기일 뿐이다"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정치적인 확대 해석을 경계한 것입니다. 경기 직전에는 이렇게 얘기했지만 훗날 인터뷰에서는 뉘앙스가 바뀌었습니다. <별별스포츠+> 다음 편에서는 세계 축구사에 길이 남을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아르헨티나-잉글랜드의 8강전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겠습니다. 사진 : 게티이미지
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16일 프로복싱 전(前) 세계 헤비급 챔피언 마이크 타이슨(58세)이 자신보다 무려 31살이나 어린 제이크 폴(27세)과 대결을 펼쳐 큰 화제가 됐습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처럼 경기는 기대 이하의 졸전이었습니다. 1980년대 세계 복싱계를 주름잡았던 전설 타이슨이었지만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며 3대 0(72-80 73-79 73-79)으로 판정패했습니다. 하지만 타이슨은 오랜만에 큰돈(2천만 달러)을 거머쥐며 두둑한 노후 자금을 마련하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타이슨이 환갑에 가까운 나이에 링에 오르면서 굴곡 많았던 그의 복싱 인생이 다시 소환됐습니다. 등장도 드라마, 몰락도 드라마 타이슨은 정말 무시무시했던 복서입니다. 그는 1986년 11월, 20살의 나이에 당시 WBC 헤비급 챔피언 트레버 버빅에게 도전해 2라운드 KO승을 거두고 챔피언에 등극했습니다. 최연소 헤비급 챔피언이었습니다. 이듬해 3월 제임스 스미스를 판정으로 꺾고 WBA, 같은 해 8월 토니 터커를 판정으로 누르고 IBF 타이틀까지 석권하며 3대 기구 헤비급 통합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명실상부한 지구촌 최강 주먹이 된 것입니다. 세계 복싱계는 '제2의 조지 포먼'이 나타났다면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후 그는 승승장구했습니다. 1990년 2월 10일까지는 그랬습니다. 2월 11일 일본 도쿄돔에서는 스포츠 역사상 최대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그를 꺾을 적수가 없을 거라고 봤을 때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무명의 약체 선수에게 무기력하게 KO패를 당한 것입니다. '핵주먹' 타이슨이 쓰러지는 모습에 전 세계 복싱 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때까지 타이슨은 37전 전승에 33KO로 KO율이 90%에 육박하고 있었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33KO승 가운데 25번이 3라운드 이내에 거둔 것이고 1라운드 KO승만 무려 17차례나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런 타이슨에 비해 도전자였던 제임스 버스터 더글라스는 무명에다 약체로 평가됐습니다. 더글라스의 전적은 29승 1무 4패 19KO. 1987년 5월 IBF 헤비급 챔피언 결정전에서 토니 터커에게 10라운드 TKO패를 당했는데 터커는 3개월 후 타이슨과 통합 타이틀전에서 12라운드 판정패를 당했습니다. 당시 도박사들은 무려 42대 1로 타이슨의 일방적인 승리를 예상했습니다. 더글라스가 몇 라운드나 버틸 수 있을지가 관심이었습니다. 팬들의 관심은 사실 이 경기보다 타이슨의 다음 경기에 쏠렸습니다. 타이슨이 이 경기 후 당시 떠오르는 강자 에반더 홀리필드(당시 23전 전승 19KO)와 빅매치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42대 1로 타이슨 승리 예상했지만... 그런데 공이 울리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경기가 펼쳐졌습니다. 타이슨의 키는 178cm. 헤비급 선수로는 작은 키였습니다. 리치도 71인치(180cm)로 짧았습니다. 대조적으로 더글라스의 키는 192cm, 리치는 83인치(211cm)로 타이슨보다 키가 훨씬 크고 리치가 길었습니다. 긴 팔을 이용한 더글라스의 왼손 잽에 타이슨이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고전했습니다. 더글라스가 4라운드에 왼손 잽을 연이어 성공시키자 타이슨의 머리가 뒤로 젖혀지기까지 했습니다. 이러자 중계진도 "우리가 본 더글라스의 경기 중에 최고로 잘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타이슨은 큰 것 한 방으로 분위기를 반전하고자 했지만 정확성이 떨어지고 빗나갔습니다. 5라운드는 더글라스의 일방적인 흐름으로 전개됐습니다. 중계진은 더글라스가 라운드를 거듭할수록 자신감이 붙고 있다고 했고, 타이슨이 이렇게 많이 맞는 거는 처음 본다고 혀를 내둘렀습니다. 5라운드가 끝나고 타이슨의 왼쪽 눈이 부어올랐습니다. 타이슨 측 코너에서는 라텍스 장갑에 얼음물을 채워서 타이슨의 부어오른 눈에 갖다 댔습니다. 타이슨이 당연히 이길 줄 알고 아이스팩조차 준비를 안 해서 급한 대로 라텍스 장갑을 활용한 것입니다. 전혀 예상외의 경기에 관중석도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글라스의 닉네임 "버스터"를 연호했습니다. 타이슨도 당황하고 초조해진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큰 것 한 방을 노리고 연이어 큰 주먹을 날렸지만 계속 빗나갔습니다. 6라운드 끝나고 타이슨의 왼쪽 눈이 더 부어올라 감긴 모습을 보였습니다. 중계진은 자기들이 보기에 타이슨이 이긴 라운드는 하나도 없다며, 더글라스가 점수 면에서 앞서 나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느려도 너무 느렸던 주심의 카운트 수세에 몰렸던 타이슨은 8라운드에서 회심의 한 방을 날렸습니다. 강력한 오른손 어퍼컷이 더글라스의 턱에 적중하자 더글라스는 그대로 뒤로 나가떨어졌습니다. 큰 충격을 받아 카운트 10 안에 일어나기가 힘들어 보였습니다. 이때 멕시코인 주심 옥타비오 메이란(Octavio Meyran)의 카운트가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카운트를 너무 천천히 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10초 정도에 카운트를 마쳐야 하는데 이 주심은 카운트 9까지 13초나 걸렸습니다. 더글라스는 카운트 9에 겨우 일어났지만 상당히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공이 살렸습니다. 일어나자마자 바로 8라운드 종료 공이 울리는 행운이 따른 것입니다. 더글라스는 천금 같은 1분 휴식 시간 동안에 충격에서 회복했습니다. 그리고 9라운드 시작하자마자 전광석화 같은 연타로 타이슨을 몰아붙였습니다. 이날 가장 큰 펀치를 맞은 타이슨은 그로기 상태에 몰렸고, 그의 왼쪽 눈은 이제 완전히 감겼습니다. 타이슨은 허우적거리면서 간신히 버티는 데 급급했습니다. 더글라스, 세계 복싱사 최대 이변 연출 이어 운명의 10라운드가 시작됐습니다. 1분 22초가 지났을 때 더글라스는 강력한 오른손 어퍼컷을 턱에 적중시킨 뒤 좌우 연타로 핵주먹 타이슨을 쓰러뜨렸습니다. 타이슨 생애 첫 다운. 전 세계 복싱 팬들은 이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타이슨은 마우스피스를 주워 물고 겨우 일어났지만 주심은 카운트 아웃을 선언했습니다. 중계 해설자는 연신 "unbelievable(믿을 수 없습니다)"을 외쳤습니다. 이렇게 타이슨은 생애 첫 다운과 38경기 만의 첫 패배를 맛봤습니다. 기적을 일으킨 더글라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습니다. 더글라스는 이 경기 23일 전 모친상을 당했는데 그 슬픔을 딛고 깜짝 헤비급 통합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예정됐던 기자회견을 취소한 채 보디가드들에 둘러싸여 도쿄돔을 떠났던 타이슨은 6시간 만에 다시 나타나 기자회견에 참석했는데 더글라스의 주먹에 부어올라 거의 감긴 왼쪽 눈을 가리기 위해 검은색 선글라스를 쓰고 나왔습니다. 타이슨은 "타이틀을 잃는 것은 좋다. 하지만 부정한 방법에 의해 잃고 싶지는 않다"며 "나는 8라운드에 이미 KO승을 거뒀다"고 주장했습니다. 주심의 느린 카운트에 큰 불만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혼과 성폭행, 그리고 '핵이빨' 사건 승리할 확률 99%이었던 타이슨이 처참하게 무너진 이유는 바로 그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이 경기를 앞두고 타이슨은 사생활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아내 로빈 기븐스(Robin Givens)와 불화, 폭행 그리고 이혼 소송을 겪었습니다. 트레이너 케빈 루니와도 불화를 겪다 해고했습니다. 한마디로 훈련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던 상황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엄청난 돈과 명예를 한꺼번에 얻었는데 이를 감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타이슨은 이후 재기를 노렸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991년 7월 미인대회 참가자였던 데지레 워싱턴(당시 18세) 양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돼 1992년 3월 26일 유죄를 선고받고 인디애나폴리스 교도소에서 6년 동안의 수감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1995년 3월 25일 형기의 절반(3년)을 마치고 가석방으로 출소한 뒤 링에 복귀해 세계 챔피언에 다시 오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홀리필드에게 11라운드 TKO패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홀리필드와 리턴 매치에서 그 유명한 '핵이빨 사건'으로 몰락의 구렁텅이에 빠졌습니다. 타이슨을 꺾은 더글라스도 '단명 챔피언'으로 끝났습니다. 8개월 후인 1990년 10월 25일 열린 1차 방어전에서 홀리필드에게 3라운드 KO패를 당하며 타이틀을 빼앗겼습니다. 타이슨전 때보다 딱 봐도 살이 엄청 찐 모습이었습니다. 훈련을 게을리했다는 증거였습니다. 타이슨전 때보다 7kg이나 체중이 더 나갔던 그는 홀리필드의 엄청난 오른손 카운터 펀치를 맞고 쓰러졌는데 주심의 카운트가 끝난 뒤에도 4분 동안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진 : 게티이미지
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기생유 하생량'(旣生瑜 何生亮). 하늘은 주유를 낳고서, 왜 제갈량을 낳았는가!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유명한 말로 주유가 끝내 제갈량이라는 거대한 벽을 넘지 못한 아쉬움을 나타낸 것으로 풀이됩니다. 1980년대 세계 유도에 제갈량과 주유 같은 선수 2명이 동시대에 출현했습니다. 일본 유도의 황금기를 이끌며 세계 유도 최중량급을 제패했던 두 전설, 일본의 야마시타 야스히로와 사이토 히토시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올림픽 2연패에 빛나는 사이토 히토시 지금은 유도 최중량급이 100kg 이상급 하나입니다. 그런데 두 선수가 활약했던 1980년대에는 95kg 이상급이 있었고, 이와는 별도로 '무제한급'이 올림픽과 세계선수권에 있었습니다. '무제한급'은 말 그대로 체중 제한 없이 60kg 선수도, 150kg 선수도 출전하는 체급이었습니다. '무제한급'이 있었기 때문에 야마시타, 사이토 둘이 각각 다른 체급으로 국제대회에 출전해서 나란히 우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두 선수는 1980년대 일본 유도를 이끌었던 쌍두마차로 숱한 명장면을 연출했습니다. 사이토 히토시는 1961년생으로 야마시타 야스히로보다 4살 어린 후배입니다. 1984년 LA, 1988년 서울 올림픽 2회 연속 금메달을 차지했던 전설입니다. 이 선수의 아들이 지난 파리 올림픽에 출전해 일본 유도 사상 첫 '부자(父子) 올림피언'으로 화제가 됐습니다. 최중량급인 100kg 이상급 준결승에서 우리나라의 김민종 선수와 대결했는데, 김민종이 시원한 업어치기 한판승을 거뒀습니다. 일본 '노골드' 위기 탈출시킨 주역 사이토 히토시는 1984년 LA 올림픽에는 95kg 이상급으로 출전해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때 야마시타는 이 대회 무제한급에서 금메달을 거머쥐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는 무제한급이 없어졌기 때문에 사이토는 95kg 이상급에 출전했습니다. 이때는 야마시타가 은퇴해 일본 방송국 해설위원으로 중계석에서 사이토의 경기를 해설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사이토가 받은 중압감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당시 일본 유도는 마지막 날까지 금메달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 명도 결승에 오르지 못하며 극도의 부진을 보인 것입니다. 유도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1964년 도쿄 올림픽 이후 처음으로 노골드의 수모를 당할 위기였습니다. 그래서 유도 경기 마지막 날 치러진 95kg 이상급의 사이토에게 전 일본 국민의 기대가 쏠렸는데 준결승이 최대 고비였습니다. 상대는 우리나라의 조용철. 당시 한국 유도 최중량급의 간판스타로 현재 대한유도회 회장입니다. 1984년 LA 올림픽 95kg 이상급 동메달리스트인 조용철은 1985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결승에서 사이토에 팔꺾기로 기권승을 거두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사실상 결승전이라 할 수 있는 두 라이벌의 준결승은 팽팽했습니다. 득점 없이 맞선 경기 막판 '그쳐' 상황에서 사이토가 중계석의 야마시타를 쳐다봤습니다. 이때 두 사람이 잠시 눈빛을 교환했는데 훗날 두 사람의 인터뷰에 따르면 사이토가 "누가 이기고 있는 거 같나요?"라고 눈빛으로 물어봤고, 야마시타는 "당신이 이기고 있어"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고 합니다. 결국 치열한 접전 끝에 난적 조용철을 꺾은 사이토는 결승에서 동독 선수를 물리치고 우승하며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한 뒤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사이토는 세계선수권에서는 1983년 무제한급에서 한 차례 우승을 기록했고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는 95kg 이상급에서 금메달을 손에 쥐었습니다. 탁월한 유연성을 바탕으로 시원시원한 유도를 구사했는데, 1984년 LA 올림픽 때는 4경기 중 결승전만 빼고 3경기에서 한판승,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는 5경기 중 3경기를 한판승으로 따냈습니다. 야마시타엔 7전 7패, 한 맺힌 사이토 일본은 '왕중왕', '꽃 중의 꽃'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컸던 무제한급을 더 중시했습니다. 야마시타와 사이토는 LA 올림픽에 출전할 일본 대표를 뽑는 선발전에서 나란히 무제한급에 출전했습니다. 접전 끝에 야마시타가 우세승을 거두고 무제한급 대표로 선발됐는데 당시 사이토가 판정에 억울함을 호소하며 논란이 일자 일본유도연맹은 사이토를 95kg 이상급 대표로 선발하며 무마하기도 했습니다. 두 선수의 진검 대결은 전(全) 일본 유도선수권대회에서 3차례나 벌어졌습니다. 당시 일본 선수들은 이 대회 우승이 올림픽 금메달보다 더 어렵다고 말할 정도로 치열했습니다. 전 체급을 통틀어 일본 유도 왕중왕을 가리는 대회였기 때문입니다. 사이토도 올림픽보다 전 일본 선수권 우승 타이틀을 더 가지고 싶었다고 말해왔습니다. 야마시타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지목된 사이토는 야마시타를 존경했지만, 반드시 그와 맞대결해서 승리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1984년 LA 올림픽에서 함께 금메달을 따고도 야마시타가 일본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는 것을 보며 내심 서운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전 일본 선수권을 제패해야 야마시타를 넘고 진정한 챔피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선수는 1983년부터 1985년까지 3년 연속 결승에서 대결했습니다. 1983년 결승에서 야마시타가 잡기 싸움에서 사이토를 압도했습니다. 사이토가 주특기인 메치기 기술을 시도하는 것을 원천 봉쇄하며 승리를 거뒀습니다. 1년 뒤 1984년 대회 결승에서 야마시타는 또다시 사이토를 물리쳤습니다. 야마시타가 LA 올림픽에서 부상 투혼을 발휘하며 우승한 이후 대부분 그가 은퇴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야마시타는 이듬해 1985년 전 일본 선수권에 출전하기 위해 은퇴를 미뤘습니다. 사이토를 꺾고 전 일본 선수권 우승 타이틀을 지킨 채 은퇴하는 것을 선수 인생의 마지막 목표로 세운 것입니다. 사이토로서도 야마시타를 이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야마시타의 주특기인 밭다리 후리기에 대비한 비장의 기술을 집중 연마했습니다. 야마시타가 밭다리 후리기를 시도할 때 중심이 흐트러진 틈을 타서 순간적으로 되치기 하는 기술이었습니다. 두 선수는 1985년 대회 결승에서 마지막으로 만났습니다. 사이토는 야마시타가 밭다리 후리기 기술을 시도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4분여가 흘렀을 때 드디어 그 순간이 왔습니다. 사이토의 번개 같은 되치기에 야마시타가 뒤로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심판은 점수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야마시타가 슬립, 즉 스스로 미끄러져 넘어간 것으로 간주해서 당시 규정에 따라 점수로 인정 안 한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사이토는 넘어지는 과정에서 다리를 다쳐 이후 제대로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야마시타가 적극적인 공격으로 경기를 주도하며 경기가 종료됐고, 결국 야마시타의 판정승으로 끝났습니다. 야마시타는 9연패의 위업을 달성하고 정상에서 명예롭게 은퇴한 반면 사이토는 3년 연속 결승에서 야마시타의 벽을 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결국 사이토는 야마시타가 은퇴한 지 3년이 지난 1988년, 평생 숙원이었던 전 일본 선수권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전 일본 선수권을 포함해 사이토는 야마시타와 총 7차례 맞대결을 펼쳤는데 한 번도 이기지 못했습니다. 매 경기 치열한 접전이었지만 정말 간발의 차이로 승부가 갈렸습니다. 특히 마지막 1985년 대회 결승은 일본에서 전설의 명승부로 길이 남았는데, 야마시타는 훗날 인터뷰에서 "심판이 사이토의 승리를 선언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경기"였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야마시타가 사이토의 되치기에 넘어갔을 때 점수를 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이 영웅 만들기를 좋아하는데 그런 점에서 야마시타가 이득을 본 측면이 있다는 시각도 있었습니다. 즉, 야마시타라는 영웅의 마지막 경기에서 8년간 이어져 온 연승 행진을 마감시키고 싶지 않았던 심리도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결국 사이토는 그토록 이기고 싶어 했던 야마시타를 결국 한 번도 못 이긴 채 유도복을 벗는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사이토는 은퇴 이후 지도자로 활동했습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과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일본 남자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습니다. 그가 2015년 1월 담관암으로 향년 54세를 일기로 별세하자 일본 유도계는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야마시타는 당시 일본유도연맹 부회장이었는데, 그의 사망을 애도하며 "사이토가 웃는 얼굴로 안심하고 볼 수 있는 그런 유도계를 만들 것"이라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사진 : 게티이미지,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