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부터 30년 넘게 오로지 스포츠 취재 기자 한길을 걸었다. 동-하계 올림픽, 월드컵, 아시안게임 등 각종 국내외 대회를 현장 취재했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회식, 2012년 런던올림픽 폐회식 TV 생중계에서는 해설을 맡기도 했다. 2017년에는 제28회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체육회를 출입하고 있고 SBS 유튜브 채널인 <스포츠머그>에서 '별별스포츠' 코너를 진행하고 있다.
육상에서 100m부터 400m까지는 단거리, 800m와 1,500m는 중거리, 그리고 5,000m 이상은 장거리로 분류됩니다. 현대 육상에서 단거리 선수가 중거리나 장거리 종목에 출전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중거리 선수가 단거리나 장거리에 도전하는 경우도 매우 드뭅니다. 그러나 예외는 물론 있습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내용은 세계 육상 사상 정말 보기 힘든 사례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최고의 무대 올림픽에서 중거리인 1,500m와 장거리인 5,000m를 같은 대회에서 제패한 모로코의 육상 영웅 히참 엘 게루즈(이하 게루즈) 선수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라이벌 모르셀리 발에 걸려 통한의 꼴찌 1974년에 태어난 게루즈가 본격적으로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린 대회는 1995년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열린 세계육상선수권. 1,500m에 출전했는데 당시 이 종목 세계 최강자는 알제리의 누레딘 모르셀리이었습니다. 모르셀리는 1970년생으로 게루즈보다 4살 많았고 둘 다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국가 출신이어서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습니다. 모르셀리는 1991년 도쿄, 1993년 슈투트가르트 세계선수권 1,500m 2연패를 달성했고, 1995년 7월 12일, 3분 27초 37로 자신의 두 번째 1,500m 세계 신기록을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한 달 뒤인 8월, 예테보리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모르셀리와 게루즈가 결승에서 대결했는데, 모르셀리가 게루즈를 여유 있게 제치고 우승하며 세계선수권 3연패를 이뤘습니다. 게루즈는 은메달을 획득했는데 골인 직후 두 선수가 얼싸안고 서로 축하해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1년 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을 앞두고 두 선수의 라이벌 대결에 큰 관심이 쏠렸습니다. 두 선수가 올림픽 전에 작성한 시즌 개인 최고 기록이 거의 비슷해서 예측불허의 접전이 기대됐기 때문입니다. '기존 챔피언'과 '떠오르는 해' 간의 대결에서 500m 정도 남기고 모르셀리가 선두로 달리고 있었고, 게루즈는 2위로 치고 올라왔습니다. 선두 모르셀리 뒤에 바짝 붙어서 달렸는데 한 바퀴 남기고 그만 모르셀리의 발뒤꿈치에 걸려서 게루즈가 넘어지는 예상하지 못한 불상사가 발생했습니다. 게루즈는 순식간에 최하위로 처졌습니다. 다행히 넘어지는 과정에서 부상을 입지는 않아 재빨리 일어나서 다시 뛰었지만 이미 한참 뒤처졌고 페이스를 잃었습니다. 결국 모르셀리가 우승했고 22살에 나이에 올림픽 금메달에 도전했던 게루즈는 최하위(12위)로 경기를 마치고 말았습니다. 게루즈는 극도의 실망감에 "내 인생의 어두운 순간"이라며 은퇴까지 고민했는데 당시 모로코의 국왕 하산 2세가 궁전으로 그를 초대해서 이런 말로 용기를 불어넣어 줬습니다. "당신은 모로코의 영웅이다. 결코 실망하지 마라." 시드니에서는 막판 역전패…통한의 눈물 애틀랜타 올림픽 한 달 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게루즈는 모르셀리를 꺾고 우승하며 1,500m에서 4년 만에 모르셀리를 꺾은 선수가 됐습니다. 이후에도 게루즈는 기량을 더 향상시키면서 모르셀리의 시대를 종식시켰습니다. 1997년부터 2003년까지 세계선수권 1,500m 4연패의 위업을 달성한 것입니다. 육상 중거리 종목에서 세계선수권 4연패는 게루즈가 유일합니다. 특히 1998년 7월 14일에는 모르셀리가 가지고 있던 세계 기록을 3년 만에 깨며 3분 26초 00의 세계 신기록을 작성했는데. 이 기록은 26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안 깨지고 있습니다. 100m를 평균 13초 7에 뛴 경이적인 기록이었습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이후부터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전까지 게루즈는 1,500m와 1마일 경기에 46번 출전해 45번 우승할 만큼 압도적인 기량을 발휘했습니다. 그래서 시드니 올림픽 우승 후보 0순위에 꼽혔습니다. 전성기가 지난 모르셀리도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했는데 준결승에서 최하위(12위)에 머물며 탈락했습니다. 우승 확률 99%인 상황이었지만 게루즈는 의외의 복병에게 발목을 잡혀 통한의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 복병은 바로 케냐의 20살 신예 노아 은게니. 게루즈는 900m 지점부터 선두로 올라선 뒤 이후 막판까지 선두를 유지했는데 마지막 직선 주로에서 결승선을 50m를 남기고 은게니와 경합을 벌이다, 25m를 남기고 추월을 허용해 금메달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결국 은게니가 3분 32초 070으로 올림픽 신기록을 작성하며 역전 우승을 차지했고 게루즈는 3분 32초 320으로 뼈아픈 은메달에 머물렀습니다. 막판 스퍼트에서 밀리면서 또 한 번 올림픽에서 고개를 숙인 것입니다. 2004년 아테네에서 기적의 2관왕 두 대회 연속 올림픽에서 좌절을 맛봤지만 게루즈는 포기하지 않고 다음 올림픽에 다시 도전했습니다. 시드니 올림픽 이후에 또다시 32연승 행진을 달렸습니다. 그러니까 올림픽만 제외하고는 다른 대회에서는 거의 천하무적의 기량을 과시한 것입니다. 게루즈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무관의 한'을 풀고 은퇴하겠다"며 금메달을 향한 의지를 다졌습니다. 아테네 올림픽 1,500m 결승에서 그는 이번에도 케냐 선수들의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됐습니다. 2004년 시즌 최고 기록(3분 27초 40) 보유자인 케냐의 버나드 라가트가 강력한 경쟁자이었습니다. 라가트는 4년 전 시드니 올림픽에서 게루즈에 이어 동메달을 획득했던 선수. 그리고 아테네 올림픽 20일 전 열린 대회에서 시즌 최고 기록을 세우며 게루즈를 꺾고 우승하기도 했습니다. 아테네 올림픽 1,500m 결승에서 라가트를 포함해 케냐 선수 3명이 결승에 올라 게루즈를 집중 견제했습니다. 4년 전 시드니 올림픽 때도 케냐 선수 2명이 결승에서 그를 견제했고, 결국 힘을 아낀 은게니에게 막판에 역전을 허용했던 뼈아픈 기억이 있었는데 게루즈는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았습니다. 게루즈는 초반에 슬로 페이스 작전을 펴는 케냐 선수 3명에 둘러싸였지만 이에 말려들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를 지킨 뒤 700m 지점부터 선두로 나섰습니다. 막판에 케냐의 라가트가 바짝 뒤쫓았고 마지막 직선 주로에서 두 선수의 불꽃 튀는 스퍼트 경쟁이 펼쳐졌습니다. 결승선을 40m 앞두고 라가트가 간발의 차로 추월했습니다. 4년 전 역전 허용의 악몽이 재연되는가 싶었던 순간, 게루즈는 이를 악물었고 필사적인 스퍼트로 라가트에 다시 앞섰습니다. 결국 3분 34초 180으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라가트는 3분 34초 300로 0.12초 차 2위. 마침내 올림픽 무관의 한을 푼 게루즈는 금메달이 확정되자 바닥에 엎드려 오열하며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막판까지 명승부를 펼친 2위 라가트도 게루즈를 안아주며 축하했습니다. 게루즈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트랙에 무릎을 꿇은 뒤 벌러덩 드러누우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게루즈의 금메달은 올림픽이 열린 그해(2004년) 초 태어난 딸에게 약속한 것이어서 더욱 뜻이 깊었습니다. 관중석으로 달려간 그는 딸을 안으며 함께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80년 만에 누르미 신화 재현한 게루즈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1,500m 우승 나흘 뒤에 5,000m 결승에도 출전했습니다. 경쟁 선수는 케냐의 엘리우드 킵초게. 2016년 리우, 2021년 도쿄에서 올림픽 2회 연속 남자 마라톤을 제패한 전설적인 선수입니다. 또 하나의 강력한 라이벌은 에티오피아의 케네니사 베켈레. 4년 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5,000m와 10,000m 2관왕에 오른 강자였습니다. 전문가들은 베켈레의 우세를 점쳤습니다. 베켈레가 아테네 올림픽 석 달 전이었던 2004년 5월, 5,000m 세계 신기록(12분 37초 35)을 작성한 데다, 이 경기에 앞서 열린 10,000m에서도 우승하는 등 페이스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뚜껑을 열어 보니까 베켈레, 게루즈, 킵초게 이 세 선수가 막판까지 치열한 경쟁을 펼쳤습니다. 승부는 마지막 직선 주로, 막판 스퍼트에서 갈렸습니다. 결승선 60m를 남기고 게루즈가 선두를 달리던 베켈레를 추월해 0.2초 차 역전 우승을 차지한 것입니다. 1,500m에 이어 5,000m까지 제패하며 2관왕에 오른 게루즈는 골인 직후 손가락으로 숫자 '2'자를 펼쳐 보였습니다. 2번째 금메달이란 뜻이었습니다. 올림픽과의 지긋지긋한 악연을 끊어내고 피날레를 정말 화려하게 장식한 것입니다. 게루즈는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 핀란드의 육상 영웅 파보 누르미 이후 무려 80년 만에 한 대회에서 1,500m와 5,000m를 동시에 석권하는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아테네 올림픽이 끝난 후 그는 더 이상 국제 대회에 출전하지 않았고, 2006년 5월 공식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게루즈는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남자 선수로는 사상 최초로 3년 연속 국제육상경기연맹(IAAF) '올해의 선수'에 선정됐습니다. 그리고 2004년부터 2012년까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2014년 국제육상경기연맹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자신의 이름을 딴 '히참 엘 게루즈' 재단을 설립해 모로코의 스포츠 유망주들을 지원하는 자선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사진 : 게티이미지
희비 엇갈린 한국과 인도네시아. 사진 : 게티이미지 역사에 길이 남을 한국 축구의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황선홍 감독이 이끄는 우리나라 올림픽 축구대표팀이 2024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아시안컵 8강전에서 신태용 감독이 지휘하는 인도네시아와 연장전까지 2대 2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패배해 오는 7월 파리 하계올림픽 본선 무대 진출이 무산됐기 때문입니다. 이번 대회 3위까지는 파리 올림픽으로 직행하고 4위는 아프리카의 기니와 플레이오프를 거쳐야 하는데, 결정적인 준준결승에서 허무하게 무너지며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10회 연속 올림픽 본선 진출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도 충격인 데다 더군다나 상대가 한 수 아래로 여겨졌던 인도네시아이었기에 대재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몰디브 쇼크'에 이어 '134위 인도네시아 쇼크' 2003년 10월 오만에서 열린 아시안컵 예선에서 움베르투 쿠엘류 당시 감독이 이끌던 우리 대표팀은 약체로 평가됐던 베트남에 1대 0, 홈팀 오만에 3대 1로 잇따라 패배했습니다. 이것이 '오만 쇼크'입니다. 이듬해 3월 독일 월드컵 2차 예선 몰디브 원정 경기에서는 0대 0 무승부에 그치는 이른바 '몰디브 참사'를 당했습니다. 몰디브는 당시 피파 랭킹 142위. 이 경기는 우리 시간으로 3월 31일 밤 8시에 열렸고 다음 날 4월 1일은 만우절이었습니다. 아시아축구연맹 홈페이지에서 한국과 몰디브의 무승부가 만우절날 가장 거짓말 같은 뉴스로 뽑히는 등 전 세계 축구팬들에게도 화제가 됐습니다. 이로부터 20년이 지난 뒤 한국 축구는 이번에는 '인도네시아 쇼크'를 겪고 말았습니다. 한국이 인도네시아와 23세 이하 대표팀 대결에서 승리하지 못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종전까지는 5전 전승을 기록 중이었습니다. A대표팀 성적만으로 매기는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에서 인도네시아는 134위로 23위인 한국보다 111계단이나 아래에 있습니다. 한국이 지난 도쿄 올림픽까지 9회 연속 본선에 진출한 반면 인도네시아는 1956년 멜버른 올림픽 이후 한 번도 올림픽 본선 무대를 밟은 적이 없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는 것입니다. 사진 : 대한축구협회 제공 황선홍호의 침몰로 1988년 서울 올림픽부터 매번 본선 무대에 올랐던 한국 축구는 10회 연속 올림픽 본선 진출에 실패했는데 우리나라가 올림픽 무대에 오르지 못한 것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LA) 대회 이후 40년 만입니다. 이번 참사는 파리행 티켓을 향해 부푼 꿈을 꾸었던 우리 선수들에게도 처절한 악몽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시안게임 금메달과 더불어 올림픽에서 동메달 이상의 성적을 내는 건 23세 이하(U-23) '유망주 태극전사'들이 병역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유이'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세계 축구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것은 물론 메달을 따면 받을 수 있는 병역 혜택, 연금 기회도 모두 한꺼번에 사라진 것입니다. 수비 불안에 불운까지 '겹악재' 인도네시아와 치른 황선홍호의 이번 대회 '최종전'은 그야말로 졸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수비 불안을 드러내며 전반에만 2골을 내준 것이 치명타였습니다. 연장전까지 인도네시아에 허용한 슈팅 수만 21개나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골을 넣으라고 후반 투입한 간판 골잡이 이영준(김천)이 저스턴 허브너의 정강이와 발목을 발로 밟는 불필요한 반칙을 저질러 후반 25분 퇴장당하면서 사기가 꺾였고 급기야 후반 추가시간에는 황 감독 본인이 항의하다가 주심에게 레드카드를 받아 선수들은 남겨두고 먼저 그라운드를 떠나는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해외파 선수들이 소속팀 사정으로 합류하지 못한 악재도 황 감독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황 감독은 전력 강화의 핵심인 해외파 차출을 위해서 직접 유럽 출장을 다녀왔는데, 각 선수의 소속 구단과 개별적으로 접촉해 차출 허락을 받아낼 때만 해도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선수들의 소속팀 사정이 급변하면서 황 감독이 공격·미드필더·수비진의 핵심으로 봤던 양현준(셀틱), 배준호(스토크 시티), 김지수(브렌트퍼드) 합류가 줄줄이 불발되는 악재를 막지 못했습니다. 특히 김지수가 합류하지 못한 가운데 조별리그 중국과 2차전에서 허벅지 뒤쪽 근육을 다친 서명관(부천)까지 이탈하면서 전문 센터백 자원이 부족해졌습니다. 조별리그 3경기에서는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수비에 대한 우려를 불식하는 듯했지만 결국 파리행 외나무다리인 인도네시아와 8강전에서는 극도의 수비 불안을 드러내며 아쉬움을 삼켜야 했습니다. '올인'해도 모자랄 판에 '투잡'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우리 대표팀의 전력은 객관적으로 파리행 직행 티켓을 잡을 수 있는 3위 이내 진입을 장담할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올림픽팀에 '올인'을 해도 모자랄 판에 황선홍 감독은 자의든 타의든 '투잡'을 뛰었습니다. 이는 대한축구협회의 책임으로 자연히 연결될 수밖에 없는 사안입니다. 사진 : 연합뉴스 축구협회는 위르겐 클린스만 대표팀 감독이 2023 AFC 카타르 아시안컵 이후 전격 경질된 뒤 정해성 위원장 체제로 국가대표전력강화위원회를 새로 꾸려 새 사령탑 선임 작업에 나섰습니다. 전력강화위는 지난 3월 태국과의 2026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2연전을 '임시 사령탑'에게 맡기기로 했고, 하필이면 다른 후보를 다 제쳐놓고 올림픽 최종 예선에 집중해야 할 황선홍 감독을 그 자리에 앉혔습니다. 황 감독이 위기에 빠진 A대표팀의 '소방수' 역할을 한 것입니다. '황선홍호' 국가대표팀은 지난달 태국과 두 차례 A매치에서 1승 1무를 거뒀고, 아시안컵 기간에 다툰 손흥민(토트넘)과 이강인의 갈등도 공식적으로 봉합했습니다. 위기의 순간 A대표팀 감독을 겸직하며 리더십을 발휘한 황 감독을 향해 대한축구협회 국가대표 전력강화위원회는 '호평'을 공개적으로 보냈습니다. 오는 5월 공식 선임할 A대표팀 사령탑 후보에 황 감독이 포함됐다는 사실을 알린 정해성 위원장은 "이런 말씀을 드려서 어떨지 모르겠지만, 흠을 잡을 데가 없었다"며 황 감독을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임무로 맡긴 올림픽 본선행에 실패하면서 호평이 무색하게 됐습니다. 사진 : 대한축구협회 제공 황 감독이 태국과의 2연전에서 1승 1무의 성적을 내던 기간에 이번 대회 전초전 성격으로 개최된 친선 대회인 서아시아축구연맹(WAFF) U-23 챔피언십이 열렸기 때문에 정작 이 중요한 기간에 황 감독은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핵심 목표인 올림픽 본선 진출이 좌절되면서 황 감독의 '두 마리 토끼 잡기'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축구협회의 '무리수'가 황선홍이라는 한국 축구의 소중한 자산까지 망가뜨린 셈이 된 것입니다. 2021년 9월부터 파리 올림픽을 준비하는 U-23 대표팀 사령탑으로 선임된 황 감독 자신도 2년 6개월여의 시간이 주어졌는데도 올림픽 본선행을 이루지 못했다는 호된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됐습니다. 엘리트 스포츠의 총체적 추락 한국 축구가 2024 파리 올림픽 본선 진출에 실패하면서 우리나라는 1976년 몬트리올 대회 이후 48년 만에 하계올림픽 출전 선수 수가 200명 아래로 내려가게 됐습니다. 한국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 선수 50명을 파견해 레슬링 양정모가 사상 첫 금메달을 획득했고, 1984년 로스앤젤레스(LA) 대회에 선수 210명이 출전해 금메달 6개로 종합 10위에 오르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이후 우리나라는 하계올림픽에 항상 200명 이상의 선수를 내보냈습니다. 1988년 서울 대회에는 개최국 이점을 살려 무려 477명의 선수가 출전했고 1996년 애틀랜타 때는 300명을 넘었습니다. 직전 대회였던 2021년 도쿄에는 선수 232명,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에는 204명의 선수가 출전했습니다. 하지만 올해 파리 올림픽에는 고작 150~160명 선이 될 전망입니다. 올림픽 출전 인원이 급격하게 적어진 것은 구기 종목이 대거 탈락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 열리는 단체 구기 종목은 축구와 농구, 배구, 하키, 핸드볼, 럭비, 수구가 있는데 우리나라가 본선행 티켓을 따낸 것은 여자 핸드볼이 유일합니다. 사진 : AP 한국 엘리트 스포츠는 현재 총체적 위기에 빠졌습니다. 오랫동안 진행된 '저출산'의 여파로 선수 자원 자체가 과거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해졌습니다. 특히 자녀 1명을 둔 부모들은 가급적 운동을 시키지 않겠다는 경향이 강합니다. 선수 숫자가 적어지면 당연히 국가대표 경쟁률이 떨어져 재능이 뛰어난 우수 자원 확보가 어렵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경기력을 끌어올리려면 결국 강도 높은 훈련을 해야 하는데 선수들이 '인권'을 들고 나올 경우 뾰족한 방법이 없습니다. 한 투기 종목의 경우 현 대표 선수들이 1980년대 국가대표 훈련량의 70%도 소화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난해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농구와 배구는 아시아권에서도 '2류'라는 사실이 다시 확인됐습니다. 농구와 배구는 프로 구단이 있는 종목입니다. 연봉을 몇억 원씩 받는 선수가 허다합니다.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서 메달을 딸 경우 받는 연금 혜택이나 포상금이 고액 연봉자에게는 인생을 걸고 뛸 만한 수준이 되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국가대표 경기에서 열심히 하다 큰 부상이라도 당하면 엄청난 금전적 손해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농구와 배구에 이어 이제 한국의 자존심이라 할 만한 축구도 동남아팀인 인도네시아에 패배하는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대한체육회는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 5개 정도를 따내 종합 15위에서 20위 안에 들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1976년 이후 최악의 수준입니다. 대한체육회와 엘리트 스포츠에 투입되는 정부 예산은 연간 약 4천억 원입니다. 이른바 '가성비'를 감안하면 현재 우리 선수들의 경기력은 낙제점입니다. 지난 40년 동안 스포츠 강국으로 평가되던 한국 엘리트 스포츠가 기로에 서 있습니다.
'독이 든 성배'. 한국 남자축구 대표팀 감독을 수식하는 말입니다. 2005년 8월 본프레레 감독이 경질된 직후 2006 독일 월드컵 공식 홈페이지에서 한국 축구 대표팀 감독직은 '독이 든 성배(Poisoned Chalice)'라고 표현하며 본프레레 감독의 사임을 보도한 데서 비롯됐습니다. '성배'는 천주교 미사 때 포도주를 담는 신성하고 거룩한 잔입니다. 축구 대표팀 감독이 그만큼 대단하고 매력적인 자리이지만, 잘못하면 독을 마시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홈페이지는 "한국 축구 대표팀 감독 자리는 거스 히딩크 감독이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이뤄낸 이후 '독이 든 성배'와 같은 자리가 되어 버렸다"고 설명했습니다. 본프레레 전 감독 월드컵 본선 티켓 따내고도 해임된 본프레레 움베르투 쿠엘류 감독이 불명예 퇴진한 뒤 원래 대한축구협회가 생각했던 감독은 브루노 메추(프랑스)였습니다. 그는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세네갈의 8강 돌풍을 이끈 주역으로 2004년 당시 메추는 아랍에미리트 알 아인 팀의 감독을 맡고 있었습니다.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들은 아랍에미리트 두바이까지 날아가 면접까지 봤고 며칠 뒤 기술위원회에서 메추를 새 사령탑에 내정했다고 발표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연봉 등 구체적 조건을 놓고 협상을 시작하자 일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의견 차를 좁히지 못하고 영입을 포기하는 촌극을 빚었습니다. 세부 계약 조건에 대한 합의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내정 사실을 발표했다가 빚어진 해프닝이었습니다. 대한축구협회의 어설프고 미숙한 대응, 그리고 수준 이하의 행정력과 영입 전략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며 거센 질타를 받았습니다. 메추가 무산된 가운데 축구협회가 부랴부랴 찾은 인물이 조 본프레레(네덜란드)였습니다. 그는 메추, 스콜라리, 매카시, 귀네슈 등 쟁쟁한 지도자들이 포함됐던 1차 후보군에는 없었던 인물이었는데 그의 대표적인 성과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때 나이지리아의 금메달을 이끈 것이었습니다. 1946년생으로 거스 히딩크와는 동갑내기 네덜란드 사람이었습니다. 본프레레 신임 사령탑이 지휘하는 우리 대표팀은 2004년 12월 부산에서 열린 독일과 평가전에서 3대 1로 승리하는 이변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독일 감독은 위르겐 클린스만. 아시아 국가 최초로 독일에 승리한 것이었습니다. 2006 독일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에서 우리 팀은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우즈베키스탄과 같은 조에 속했습니다. 경기 내용은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한 경기 남겨놓고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했습니다. 쿠웨이트를 상대로 홈에서 2대 0 승리, 원정에서 4대 0 승리. 우즈베키스탄을 상대로는 홈에서 2대 1 승리, 원정에서 경기 종료 직전 박주영의 천금 같은 동점골로 1대 1 무승부를 거뒀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는 2패를 당했는데 원정에서 2대 0 완패, 안방에서도 1대 0 패배의 쓴잔을 마셨습니다. 본프레레호는 3승 1무 2패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2위로 본선행 티켓을 거머쥐었습니다. 본프레레호는 2005년 6월 쿠웨이트 원정에서 4대 0 대승을 거두고 사우디와 최종전 결과와 상관없이 본선행을 확정했지만 그 이후가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다음 달인 7월에 우리나라에서 열린 동아시아선수권에는 한중일 그리고 북한 등 4개국이 출전했는데 개최국인 우리 팀은 2무 1패로 최하위에 머무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중국과 1대 1 무승부, 북한과 0대 0 무승부. 그리고 숙명의 라이벌 일본과 마지막 경기에서 1대 0으로 지면서 여론이 극도로 악화됐습니다. 다음 달인 8월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사우디아리비아와 월드컵 예선 최종전이 본프레레 감독에게는 단두대 매치가 됐는데, 설욕을 별렀지만 여기서도 1대 0으로 패배하면서 결국 월드컵 본선에 올려놓고도 사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시안컵이 '무덤'이 된 베어벡 감독 본프레레가 물러난 뒤 지휘봉을 잡은 사람은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에 실패한 뒤 바로 물러났습니다. 아드보카트의 뒤를 이은 지도자가 바로 핌 베어벡. 히딩크 감독을 보좌하며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를 썼던 인물이었습니다. 베어백이 사령탑에 오르자 국내 축구계에서는 "네덜란드가 다 해 먹는다"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히딩크, 본프레레, 아드보카트, 베어벡이 모두 네덜란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베어벡 전 감독 하지만 그에 대한 기대도 컸습니다. 한일 월드컵과 독일 월드컵에서 수석코치를 맡아 한국 축구에 대한 이해도가 있었던 감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도 '독이 든 성배'를 피해 가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도 아시안컵이 '무덤'이 되고 말았습니다. 2007년 7월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아시안컵에서 고비를 넘지 못했습니다. 대회 내내 답답한 경기력을 보였습니다. 조별리그 1차전에서 우승 후보 사우디아라비아와 1대 1 무승부를 거뒀습니다. 후반 21분 최성국의 선제골로 앞서가며 18년 만에 사우디전 승리를 눈앞에 뒀지만 후반 38분 페널티킥을 내주며 무승부에 머물렀습니다. 2차전에서는 바레인에 2대 1로 역전패했는데 바레인에게 당한 첫 A매치 패배이었습니다. 우리 대표팀은 1무 1패 조 최하위로 내려앉으며 조별리그 탈락 위기에 몰렸는데 3차전에서 만난 홈팀 인도네시아와 경기에서 1대 0으로 신승하며 힘겹게 8강 토너먼트에 진출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극심한 득점력 빈곤에 시달렸습니다. 무려 3경기 연속 120분 무득점. 8강 상대인 이란과 연장전 포함 120분을 치렀지만 0대 0으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이겨 4강에 올랐습니다. 준결승에서는 이라크를 만나 역시 120분 동안 0대 0을 기록한 뒤 승부차기에서 져 결승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일본과 3-4위전에서도 연장 120분을 0대 0으로 마친 뒤 승부차기에서 이겨 3위로 대회를 마감했습니다. 인도네시아와 조별리그 3차전 전반 34분 김정우의 골 이후 무려 417분간 무득점. 결국 베어벡 감독은 대회 직후 자진 사퇴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대회 기간에 고참 선수들이 음주까지 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엄청난 후폭풍에 시달렸습니다. 수뇌부와 갈등 끝에 경질된 조광래 감독 2010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허정무 감독이 다시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그는 이 대회에서 원정 월드컵 사상 첫 16강 진출이란 업적을 달성하며 10년 전인 2000년 성적 부진과 불운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나야 했던 아쉬움을 풀었습니다. 이후 축구 대표팀 사령탑을 맡은 인물이 조광래 감독이었습니다. 허정무 감독과 연세대학교 동기였던 조 감독은 선수 시절 '컴퓨터 링커'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패스 플레이를 중시했는데 상대에 따라 또는 경기 중에도 상황에 따라, 선수에게 변화무쌍한 작전을 지시해 이른바 '만화 축구'로 불렸습니다. 박지성, 이영표의 은퇴 무대였던 2011년 아시안컵 때는 인상적인 경기력으로 3위를 차지했지만 그해 8월 일본과 원정 평가전에서 3대 0 완패를 당했습니다. 일명 '삿포로 참사'였습니다. 그리고 11월 15일 브라질 월드컵 3차 예선 레바논 원정 경기에서 졸전 끝에 2대 1 충격패를 당하는 '베이루트 참사'를 겪자 결국 12월 7일 전격 경질 뉴스가 보도됐습니다. 조광래 전 감독 조광래 감독의 전격 해임은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무엇보다 대한축구협회의 절차를 무시한 경질이었다는 점이 드러나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기술위원회도 열지 않고 회장단 회의에서 해임을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조광래 감독에게는 뉴스가 나갈 무렵인 12월 7일 밤에 11년 후배인 황보관 기술위원장이 일방적으로 해임을 통보했습니다. 그동안 지켜본 결과 지금의 대표팀 경기력으로는 월드컵 본선 진출이 어렵다는 것이 주된 이유이었습니다. 조광래 감독은 협회의 결정에 극도의 분노를 드러내며 이에 반발하는 기자회견을 여는 등 한동안 거세게 저항했습니다. 한국 축구사에 경질된 감독이 반발하는 기자회견을 연 것은 이때가 처음으로 전무후무한 사건이었습니다. 조광래 감독은 "절차가 그래서 될 것인가? 뭐 조기축구팀 감독도 아니고. 그냥 뭐 말로 한마디 통보하는 것이었다. 결정이 났다고"라며 협회의 해임 통보를 비판했습니다. 조광래호의 경기력과 경기 결과가 좋지는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절차를 무시하며 전격 경질한 데는 조광래 감독과 협회 수뇌부와의 갈등이 결정적인 이유로 꼽혔습니다. 속된 말로 축구협회 수뇌부에게 조 감독이 찍혔다는 것이었습니다. '레전드' 홍명보도, 슈틸리케도 불명예 퇴진 홍명보 전 감독 한국축구 대표팀 감독 수난사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레전드' 홍명보 감독은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사령탑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도 선배 차범근의 전철을 피해 가지 못했습니다. 연이은 졸전으로 16강에 오르지 못한 데다 일명 '의리 축구'를 비롯한 갖가지 논란에 휩싸이며 온갖 비난 속에 물러나야 했습니다. 슈틸리케 전 감독 이후 7년 만에 다시 외국인 감독 체제로 돌아갔지만 이 역시 순탄치 않았습니다. 홍명보 감독의 후임은 독일의 울리 슈틸리케. 첫 시험대였던 2015년 아시안컵에서 개최국 호주에 이어 준우승을 하며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실용적인 축구를 한다고 해서 한때 '다산 슈틸리케' 신드롬까지 일었습니다. 하지만 2018 러시아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계속해서 불안한 경기력으로 신뢰를 잃었습니다. 2016년에 시리아와 원정 경기에서 0대 0 무승부, 이란 원정에서 1대 0 패배, 그리고 2017년 중국 원정에서 또 1대 0 패배. 이어 카타르 원정에서 3대 2로 지며 결정타를 맞았습니다. 비판 여론이 폭발했고 월드컵 본선 진출마저 불투명해지자 전격 경질되고 말았습니다.
축구는 '글로벌 스포츠'로 할 만큼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가 즐기는 종목입니다. 이 덕분에 4년마다 개최되는 FIFA 월드컵의 인기와 수입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한국에서도 축구는 야구와 더불어 양대 스포츠입니다. 국내에 수많은 축구팀이 있지만 역시 우리 국민의 이목은 남자 축구 대표팀에 집중돼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 축구 대표팀 사령탑에 대한 관심이 남다릅니다. 거의 대부분 축구인들이 원하는 자리이지만 성적에 따라 명암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어찌 보면 가장 힘들고 위험한 자리이기도 합니다. 카타르 아시안컵 축구가 끝난 뒤 전격 경질된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 사태가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첫 전임 사령탑은 김호 감독 한국 축구 역사는 100년이 훨씬 넘지만 전임 감독제가 실시된 것은 1992년부터였습니다. 그 이전에는 별도의 임기가 없었습니다. 성적이 부진할 경우 몇 달 만에 바로 해임하면 그만이었고 반대로 잘 하면 계속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해진 임기가 없었기 때문에 대표팀 감독은 장기적인 플랜을 세우기가 힘들었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대한축구협회는 1992년 7월 최초로 전임 감독을 선임하기로 했습니다. 그 첫 주인공은 김호 감독이었습니다. 김호 감독은 1960년대 김정남 감독(1986년 멕시코 월드컵 사령탑)과 함께 한국 중앙 수비를 이끌었던 스타 플레이어 출신이었습니다. 김호 감독의 계약 기간은 1994년 미국 월드컵까지 2년. 당시 계약금 2,000만 원에 연봉 3,600만 원, 매월 활동비로 200만 원을 받는 조건이었습니다. 김호 전 감독 김호 감독이 이끄는 우리 남자 축구 대표팀은 1993년 10월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미국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에서 '도하의 기적'을 연출하며 극적으로 본선에 진출했고, 본선에서는 2무 1패로 아깝게 16강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사상 최고 성적이었고, 경기 내용도 좋았습니다. 1차전에서 강호 스페인과 2대 2 무승부, 2차전에서 볼리비아와 0대 0 무승부, 3차전에서 클린스만이 2골을 넣은 독일에 3대 2 패배를 기록했는데 김호 감독은 미국 월드컵 직후 계약 기간 2년을 채우고 물러났습니다. '이란 참사'로 물러난 박종환 감독 '승부사', '호랑이'로 불렸던 박종환 감독은 1983년 멕시코 20세 이하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U-20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이끌며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당시 집권자는 '스포츠 대통령'으로 불렸던 전두환 씨. 전두환 정권은 선수단이 귀국하는 날 시내 도로에서 카퍼레이드를 펼치며 박종환 감독과 선수들을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전까지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박종환 감독은 이후 A대표팀 사령탑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의 '스파르타식' 지도 방법은 성인 대표들에게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일부 선수들의 '태릉선수촌 무단이탈 사건'에 이어 1995년 국제 대회 기간에는 이른바 '고참 선수 음주설'까지 나돌았습니다. 그의 마지막 무대는 1996년 아랍에미리트에서 열린 아시안컵. 12월 16일 밤 9시 45분부터 이란과의 8강전이 전국에 생중계됐는데 우리 팀은 6대 2로 대패하는 참사를 겪었습니다. 이란의 간판 골잡이 알리 다에이에게 4골이나 허용했던 치욕적인 경기였습니다. 대한축구협회에는 수천 통의 항의 전화가 빗발쳤고 필자가 당직 근무를 하던 그날 방송사에도 박 감독과 우리 대표팀을 비난하던 전화가 쇄도했습니다. 한국 축구 최악의 참사 중에 하나로 꼽힌 이 경기가 박종환 감독에게는 마지막 국가대표 경기가 됐고, 이 대회를 끝으로 감독직에서 사임했습니다. 그는 타계할 때까지 본인이 그토록 원했던 월드컵 본선 무대를 끝내 밟지 못했습니다. '레전드' 차범근, 초유의 현장 경질 수모 축구인 차범근 씨는 손흥민 선수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축구 최고 스타였습니다. 1997년 1월 지휘봉을 이어받은 그는 프랑스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그 유명한 '도쿄대첩' 등 승승장구하며 일찌감치 본선행을 확정했습니다. 이때만 해도 '역시 차범근'이란 찬사를 받으며 월드컵 본선 첫 승리와 16강 진출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습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우리 대표팀은 그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였습니다. 조별리그 1차전에서 멕시코에 3대 1로 역전패했는데 블랑코가 양발에 공을 끼우고 점프하는 기술로 우리 수비수들을 농락했습니다. 일명 '개구리 점프'였습니다. 그리고 2차전에서는 히딩크 감독의 네덜란드에 무려 5대 0 대패. 이른바 '마르세유의 참사'이었습니다. 국내 팬들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습니다. 여론이 워낙 좋지 않자 대한축구협회는 대회 도중에 차범근 감독을 현지에서 전격 경질하는 '극약 처방'을 내렸습니다. 차범근 전 감독 한국 축구의 레전드는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중도 귀국하는 불명예를 안게 됐는데 당시 김포공항에는 취재진들로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김평석 코치가 감독 대행으로 3차전 벨기에전을 지휘한 가운데 우리 선수들은 붕대 투혼까지 발휘하며 1대 1 무승부를 거뒀습니다. 억세게 불운했던 허정무 감독 1998 프랑스 월드컵이 끝난 뒤 새 감독 선정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회가 감독 후보 3명을 대상으로 공개 프레젠테이션과 면접을 실시했는데 허정무 전남 감독, 김호곤 연세대 감독, 이차만 부산 대우 감독이 참가했습니다, 기술위원들 앞에서 본인의 지도 철학, 대표팀 선발과 관리, 훈련 방법 등 운영 계획에 대해 후보당 15분씩 소견을 발표한 뒤 기술위원들과 질의와 응답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결과 1차 투표에서 허정무 4표, 김호곤 3표, 이차만 1표로 나왔는데 1, 2위 후보를 대상으로 2차 투표 끝에 5대 3으로 허정무 감독이 앞서 감독에 선임됐습니다. 일단 계약 기간은 2년이었지만 더 나아가 2002년 한일 월드컵까지 내다보고 맡긴 것입니다. 허정무 전 감독 하지만 허정무 감독도 아시안컵의 고비를 넘지 못했습니다. 2000년 10월 레바논 아시안컵 준결승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2대 1로 져 결승 진출에 실패하며 3위로 마감했는데 당시 경기력이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조별리그 1차전에서 중국과 2대 2 무승부, 쿠웨이트에는 1대 0 패배, 8강에서는 이란에 2대 1로 어렵게 승리하며 4년 전 6대 2 대패를 설욕했습니다. 당시 21살 이동국이 연장전에서 골든골을 터뜨렸습니다. 하지만 준결승에서 졸전 끝에 강호 사우디에 2대 1로 패배했습니다. 허정무 감독이 물러난 데는 아시안컵 한 달 전에 벌어진 2000 시드니 올림픽 8강 진출 실패도 작용했습니다. 당시 허 감독은 올림픽팀도 지휘하고 있었는데 시드니 올림픽 본선에서 2승 1패를 하고도 골득실에서 뒤져 탈락하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허정무 감독은 이에 앞서 2000년 2월 미국에서 개최된 북중미 골드컵에 출전했는데 한국은 코스타리카, 캐나다와 나란히 2무로 동률을 이뤘습니다. 특히 캐나다와는 승점, 골득실, 다득점이 모두 같아 '동전 던지기'로 8강 진출팀을 가렸는데 우리는 여기서 져 탈락하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허정무 감독에게 2000년은 정말 운이 없어도 너무 없었던 한 해였습니다. 142위 몰디브와 비긴 쿠엘류 감독 대한축구협회는 허정무 감독이 물러난 뒤 2002년 월드컵을 맡길 새 감독을 물색했는데 결국 거스 히딩크 감독이 부임했습니다. 히딩크 감독이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를 쓴 뒤 바통을 이어받은 인물은 포르투갈의 움베르투 쿠엘류 감독이었습니다. 그는 유로 2000에서 포르투갈을 4강으로 이끌며 널리 알려진 지도자였습니다. 전임자 히딩크가 너무 빛나서 쿠엘류는 처음부터 큰 부담을 안고 시작했고 축구팬들의 기대치도 엄청나게 높아졌습니다. 쿠엘류 전 감독 하지만 쿠엘류 감독은 두 번의 쇼크에 무너졌습니다. 2003년 10월 오만에서 열린 아시안컵 예선에서 한 수 아래로 평가됐던 베트남에 1대 0, 홈팀 오만에 3대 1로 잇따라 패배한 것입니다. 이것이 '오만 쇼크'입니다. 이듬해 2004년 2월 오만을 안방으로 불러들여 가진 평가전에서 5대 0 대승을 거두며 오만 쇼크에서 벗어나는가 싶었는데 다음 달 더 큰 쇼크를 겪게 됐습니다. 그해 3월에 열린 독일 월드컵 2차 예선 몰디브 원정 경기에서 0대 0 무승부에 그치는 이른바 '몰디브 참사'를 당한 것입니다. 몰디브는 당시 피파 랭킹 142위. 우리 팀은 경기 내내 단조로운 공격과 골 결정력 부족으로 몰디브의 밀집 수비를 뚫지 못했습니다. 안정환, 설기현, 이영표, 송종국 등 해외파가 총동원된 경기여서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몰디브 선수들은 월드컵 4강팀과 비겨서 관중과 함께 기쁨을 나눴고 감독을 헹가래쳐주기도 했습니다. 이 경기는 우리 시간으로 3월 31일 밤 8시에 열렸고 다음 날 4월 1일은 만우절이었습니다. 아시아 축구연맹 홈페이지에서 몰디브와 무승부가 만우절 날 가장 거짓말 같은 뉴스로 뽑히는 등 전 세계 축구팬들에게도 화제가 됐습니다. 대한축구협회 홈페이지에는 쿠엘류 감독의 퇴진을 요구하고, 일부 조기축구회에서 대표팀에 도전장을 내는 등 질타의 글이 빗발쳤습니다. 쿠엘류 감독은 결국 여론의 뭇매를 맞으며 경질됐습니다. 부임한 지 1년 2개월 만에 쓸쓸한 퇴장한 것입니다.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던 히딩크와는 달리 쿠엘류는 경질되면서 지원이 턱없이 부족했다고 불만과 섭섭함을 토로했습니다. 그는 한국을 떠나면서 "14개월 동안 실제 훈련장에서 훈련한 시간은 72시간에 불과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스포츠의 묘미는 역전 드라마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승리의 가능성이 1%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도무지 믿기 힘든 짜릿한 역전극이 펼쳐질 때 경기장은 흥분과 감동에 휩싸이기 마련입니다. 그럼 올림픽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역전승은 무엇이었을까요? 필자는 1972년 뮌헨 하계올림픽 육상 남자 800m에서 금메달을 거머쥐었던 미국의 데이브 워틀이 그 주인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몸이 약해 육상 시작한 데이브 워틀 데이브 워틀은 1950년 미국 오하이오주 켄턴에서 태어났습니다. 주 종목은 800m와 1,500m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매우 마르고 허약해 의사가 그에게 체력을 기르기 위해 달리기와 같은 운동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의사의 조언에 따라 육상을 시작한 워틀은 고등학교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1마일(약 1.6km) 달리기 종목에서 오하이오주 챔피언에 오르기도 했고, 대학교 때는 1970년 NCAA(미국 대학스포츠협회) 실외 육상선수권 1마일 경기에서 2위를 차지했습니다. 1970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하계 유니버시아드(세계대학경기대회) 800m 경기에 미국 대표로 출전했는데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습니다. 1971년에는 부상으로 한 시즌을 통째로 날렸는데 뮌헨 올림픽이 열린 1972년에 재기에 성공하며 잇따라 좋은 성적을 거뒀습니다. 1972년 NCAA 실외 육상선수권 1500m에서 우승했고 다른 미국 국내 대회에서는 800m 우승, 그리고 미국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800m 세계 타이기록(1분 44초 3)을 작성하며 정상에 올라 뮌헨 올림픽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습니다. '행운의 부적' 골프 모자 워틀의 트레이드 마크는 바로 '골프 모자'였습니다. 그의 분신과도 같았는데 모자를 쓰고 달려서 다른 선수들 사이에서도 눈에 잘 띄었습니다. 마라톤 선수가 모자를 쓰고 달리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트랙 육상 선수가 모자를 쓰고 달리는 모습은 보기 드물었습니다. 모자를 쓰면 불편하고 벗겨질까 봐 신경 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워틀은 모자를 썼습니다. 그는 머리를 길게 길렀는데 달릴 때 머리카락이 얼굴에 닿아 걸리적거리는 것을 막고 또 앞머리가 눈을 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모자를 쓴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 모자를 쓰다 보니까 자신의 '분신'으로 받아들였고, 또 행운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선수 생활 내내 모자를 쓰고 경기에 출전했습니다. 모자를 정말 소중하게 여겼는데, 어느 대회에서 한 팬이 그의 모자를 가지고 달아나자 경기장 밖까지 쫓아가서 모자를 되찾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그에게 모자는 '행운의 부적' 같은 것이었습니다. 뮌헨 올림픽에서 '인생 레이스' 1972년 뮌헨 올림픽 육상 남자 800m 결승에는 8명이 출전했습니다. 800m 경기는 400m 트랙을 2바퀴 달리는데 지구력과 스피드를 겸비해야 해 매우 어려운 종목으로 꼽힙니다. 골프 모자를 쓴 워틀은 3레인에서 출발했는데 처음부터 최하위로 처졌습니다. 바로 앞선 7위 선수와 격차가 10m나 날 정도였습니다. 워틀은 첫 번째 400m 구간을 돌 때도 꼴찌였는데 7위 선수와 격차는 조금 줄었습니다. 300m를 남기고 곡선 구간에 접어들 때 워틀의 믿기 힘든 질주가 시작됐습니다. 바깥쪽으로 달리면서 한 선수 한 선수 차례로 추월했고 결승선까지 120m 정도 남기고 순식간에 또 2명을 따라잡으며 4위까지 치고 올라왔습니다. 이 경기를 생중계하던 미국 중계진은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메달도 딸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마지막 직선 주로에 접어들자 워틀은 폭발적인 스퍼트를 펼쳤습니다. 결승선까지 50m를 앞두고 3위를 달리던 케나 선수를 추월해서 메달권에 접어든 뒤 5m를 남기고 2위 케냐 선수도 추월했습니다. 이제 그보다 앞선 선수는 소련의 예브게니 아르자노프 딱 1명. 하지만 금메달은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남은 거리가 워낙 짧았기 때문입니다. 워틀이 온 힘을 다해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극적인 장면이 연출됐습니다. 1위였던 아르자노프가 앞으로 넘어지면서 결승선을 넘어선 것입니다. 육안으로는 두 선수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간발의 차이. 최종 결과는 워틀의 승리였습니다. 그의 기록은 1분 45초 86. 0.03초 차 역전 우승이었습니다. 800m 경기에서 초반 500m를 꼴찌로 달리다 소름이 돋을 만큼의 엄청난 막판 스퍼트를 보이며 올림픽 역사에 길이 남을 대역전극을 펼친 것입니다. 아쉽게 2위에 머문 아르자노프는 800m에서 이 경기 전까지 4년 동안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무대인 올림픽에서 대역전극의 희생양이 됐습니다. 워틀은 훗날 인터뷰에서 "나는 운이 좋기도 했다. 왜냐하면 아르자노프가 골인지점 300m를 남기고 너무 일찍 스퍼트를 하는 바람에 막판에 힘이 빠졌기 때문이다. 그는 오버페이스했다. 나는 180m를 남기고 스퍼트를 해서 마지막에 힘이 남았다"고 말했습니다. 워틀의 이 금메달은 미국 육상 역사에서도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후 52년이 흘렀지만 미국이 이 종목(남자 800미터)에서 워틀 이후 지금까지 금메달을 따지 못하고 있습니다. 흥분한 나머지 골프 모자 쓰고 메달 받아 워틀은 대역전극에 너무 기쁘고 흥분한 나머지 시상식에서 메달을 받거나 국가가 연주될 때 모자를 벗는 걸 깜빡 잊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일부 사람들은 워틀이 일종의 항의와 시위의 의미로 모자를 벗지 않은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4년 전인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남자 육상 200m 시상식에서 미국의 두 흑인 선수 토미 스미스, 존 카를로스가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의미로 검은 장갑을 끼고 주먹을 치켜드는 퍼포먼스를 보여준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당시 시대 상황 때문에 워틀도 오해를 받았는데, 워틀은 곧바로 기자회견에서 관련 질문에 "항의한 게 아니고, 내가 모자 벗는 걸 깜빡한 것이다. 미안하다"고 해명했습니다. '포기는 금물' 교훈 남긴 워틀 꼴찌로 달리다 신화 같은 금메달 스토리를 쓴 워틀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뮌헨 올림픽을 앞두고 무릎 건염으로 몇 주간 훈련을 제대로 못했다. 처음에는 너무 뒤처져서 불안했다. 첫 200m 구간에서 8에서 10m 정도 뒤졌는데 이젠 틀렸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바퀴 곡선 구간에서 속도를 내면서 내 페이스를 되찾았다. 앞에 달리고 있는 선수들과 같이 뛸 수 있어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후 스퍼트를 시작한 마지막 코너에서는 오직 선두권과 근접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3위는 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워틀은 사람들이 4년 뒤 다음 대회인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때가 되면 자신의 레이스를 잊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5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그의 신화는 계속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워틀은 "희망이 없어 보일 때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하나의 좋은 사례이기 때문인 것 같다.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는 태도와 정신('never give up' attitude)에 주목한 거 같다. 나로서는 영광이고 흐뭇하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흔히 복싱에서 펀치력은 타고난다고 합니다. 엄청나게 노력하면 강화되기는 하지만 한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펀치가 세기로 소문났던 스타들은 대부분 타고난 '하드 펀처'였습니다. 그럼 복싱 역사상 주먹이 가장 강했던 선수는 누구였을까요? '핵주먹' 마이크 타이슨과 함께 거론되는 인물이 타이슨의 선배인 '원조 핵주먹' 조지 포먼입니다. 세계 헤비급 챔피언을 지낸 포먼은 무하마드 알리와 치른 '정글의 혈투'(RUMBLE IN THE JUNGLE)로 유명하지만 혼자서 5명을 상대하는 이른바 '5대 1 매치'로도 화제를 모았습니다. 1명이 5명과 겨루는 '5대 1 매치'라는 기상천외한 이벤트는 어떻게 이뤄질 수 있었을까요? 알리에게 KO 패한 포먼의 충격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냈던 조지 포먼은 이후 프로에 입문한 뒤 1973년 1월 자메이카 수도 킹스턴에서 열린 타이틀 매치에서 강력한 챔피언이었던 조 프레이저를 무려 6번이나 다운시킨 끝에 2라운드 KO승을 거두고 새 챔피언에 등극했습니다. 맷집 좋기로 소문난 프레이저가 6번이나 나가떨어지는 모습에 전 세계 복싱팬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2차 방어전에서는 알리와 1승 1패로 호각세였던 켄 노턴을 2라운드 KO로 눕혔습니다. 하지만 포먼의 시대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74년 10월 아프리카 자이레(현 콩고민주공화국) 킨샤사에서 열린 20세기 최고의 명승부에서 알리에게 8라운드 KO로 져 왕좌를 내줬습니다. 알리를 상대하기 전까지 40전 40승 37KO승을 달리던 포먼은 알리에게 프로 데뷔 후 첫 패배와 첫 다운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자신보다 7살이나 많고, 전성기가 지났다는 평가를 받던 알리에게 KO로 졌다는 사실을 포먼은 도무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그는 "알리와 경기 전 누군가가 내 물에 약물을 타서, 약에 취해서 졌다"는 근거 없는 음모론까지 제기했고 설욕을 벼르면서 알리와의 재대결을 줄기차게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기회가 오지 않자 기행을 부리기 시작했고 심지어 알리의 전기 영화 촬영장에 난입해서 욕설을 퍼붓고, 몸싸움을 벌이는 소동까지 일으켰습니다. 구겨진 자존심 회복의 길 '5대 1 매치' 포먼은 복싱팬들과 언론에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하루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습니다. 그 방법의 하나로 생각한 것이 5명의 프로 복서와 한꺼번에 대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전설적인 복싱 프로모터 돈 킹에게 이 대결을 성사시켜 달라고 부탁했고 결국 포먼이 알리에게 패배한 지 6개월 후인 1975년 4월 캐나다 토론토에서 기상천외한 이벤트가 펼쳐졌습니다. 과거 1930년대에 미국에서 '3대 1 대결'이 있었지만 '5대 1 매치'는 전무후무했습니다. 포먼으로서는 이를 통해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고 반등의 계기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3류 선수' 5명과 기괴한 대결 경기 방식은 포먼이 3분 3라운드로 5명의 선수를 차례로 상대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선수와 경기가 끝나면 휴식 없이 곧바로 다음 상대와 겨루는 형식이었습니다. '5대 1 매치'는 기록과 전적이 남는 정식 경기가 아니라 이벤트 경기로 치러졌습니다. 그런데 5명의 상대들은 모두 무명 복서였고 더군다나 포먼의 몸무게가 232파운드(105kg)인 반면 상대 선수들은 모두 포먼보다 10~20kg이나 가벼웠습니다. 미국 언론은 상대 선수들을 '불쌍한 영혼'이라 표현했고, '스포츠 역사상 가장 슬픈 광경 중 하나'라고 꼬집었습니다. 프로모터 돈 킹은 상대 선수들이 포먼에게 버티는 라운드 당 당시 돈 5,000달러를 지급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당시 미국의 대다수 여론은 알리를 향한 포먼의 어긋난 복수심, 뒤틀린 분노, 또는 엉뚱한 곳에 화풀이한다고 비판했습니다. 한마디로 '포먼의 광기'로 봤던 것입니다. 관중들도 포먼에게 계속 야유를 퍼붓고, 상대 선수들을 응원했습니다. 포먼은 5명 모두 3라운드 안에 KO 시키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흥행에서도 재미를 못 봤는데 경기가 열린 토론토 체육관(1만 6천 명 수용)은 3분의 1밖에 차지 않았습니다. 포먼 입장에서는 '얻을 건 하나도 없고, 잃을 것만 있는 경기'였던 것입니다. 해설자 알리와 충돌이 오히려 볼거리 이 경기는 미국 ABC 방송에서 중계했는데 전설의 스포츠 캐스터 하워드 코셀이 캐스터를 맡았고, 무하마드 알리가 현장에서 해설가로 나서 풍성한 볼거리와 들을 거리를 제공했습니다. 알리는 포먼의 상대 선수들을 응원하고 전술적으로도 조언하는 이른바 '편파 중계'를 대놓고 했는데 관중들은 포먼에게 야유를 퍼붓고, 알리를 연호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알리는 중계방송 내내 특유의 쇼맨십과 입담을 발휘했습니다. 포먼은 링 위에 오르자마자 링 바로 아래 중계석에 있던 알리와 서로 삿대질을 하며 말싸움을 벌였는데 알리는 당장이라도 링 위에 올라가 한 판 붙을 것 같은 동작을 취했습니다. 알리는 포먼을 꺾을 당시 '로프 어 도프'라는 즉 로프에 기대는 신출귀몰한 작전을 구사했는데, 포먼과 상대하는 5명에게도 "로프에 기대라"고 끊임없이 조언했습니다. 포먼의 1차전 상대는 알론소 존슨으로 그는 알리의 스파링 파트너 출신이었습니다. 경기 직전 포먼은 살벌한 눈싸움으로 상대의 기를 죽였는데 알리는 존슨을 향해 "커버 올려!"(Cover up), "로프로 가!"(Get on the rope), "로프에 기대!"(Lay on the rope)라고 계속 외쳤습니다. 포먼이 다운을 뺏은 다음에 알리에게 가서 조용히 하라고 하자 둘이 말싸움 벌이기도 했습니다. 포먼은 2라운드에 3차례 다운을 뺏었고 KO승을 거뒀습니다. 2차전 상대는 제리 저지였는데 포먼이 1라운드에 이어 2라운드에서도 다운을 뺏자 주심이 경기를 중단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직후 두 선수가 신경전을 펼치며 몸싸움을 벌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지가 포먼을 넘어뜨리기도 했고 양측 코너에서 트레이너들까지 링 위에 올라와 뜯어말리는 등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3차전 상대는 테리 대니얼스. 그의 몸무게는 195파운드(88kg)로 포먼보다 무려 17kg이나 가벼웠습니다. 1라운드에 포먼이 한 차례 다운을 뺏고, 2라운드에도 일방적으로 밀어붙였습니다. 포먼은 주심에게 경기 중단을 요구했고, 주심은 결국 경기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이에 불복한 대니얼스가 포먼에게 도발해 둘이 다시 펀치를 주고받으며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양측 벤치에서 링 위에 올라와 싸움에 가세했습니다. 또 한 번 난장판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코셀은 "당신이 본 가장 기이한 장면일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출처 : 게티이미지코리아 4차전 상대는 찰리 폴라이트. 포먼이 세계챔피언이 되기 전인 1970년 맞붙어 4라운드 KO로 이겼던 선수였습니다. 5명의 상대 중에서는 폴라이트가 가장 잘 싸웠습니다. 알리가 포먼을 이겼던 방법대로 로프를 활용하고,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했는데 폴라이트의 선전에 흥분한 알리는 '로프에 기대"라고 외치고,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서 직접 동작까지 보여줬습니다. 포먼은 경기가 뜻대로 풀리지 않자 풍차 돌리듯이 어퍼컷을 날리는 오버액션까지 하는 등 과장된 동작을 보였습니다. 결국 포먼은 호언장담과는 달리 폴라이트를 KO 시키지 못하고, 3라운드 끝까지 갔고 경기 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5차전 상대는 분 커크만. 이 선수도 포먼이 1970년에 맞붙어 2라운드에 KO로 이겼던 상대였는데 이번에는 포먼이 KO로 이기지 못했습니다. 경기 직후 포먼은 '아직 힘이 남아 있다'는 것을 과시하듯 깡충깡충 뛰는 세리머니를 선보였지만 관중은 야유를 보냈고 세계 복싱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기괴했던 '5대 1 대결'은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5대 1 매치가 끝난 뒤 포먼은 "알리는 나를 이길 수 없다. 로프에만 기대고 어떻게 챔피언이 될 수 있냐?"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알리와 다시 대결하고 싶다"며, 바로 옆에 있던 돈 킹에게 "빨리 경기 계약서에 사인하라, 내가 최고다! 난 아직 살아 있다"고 외쳤습니다. 많은 비판과 혹평에도 포먼은 지금도 이 경기에 대해서 "그날 밤은 매우 만족스러운 밤이었다. 나에게 복싱을 더 쉽게 만들어줬다. 그날 밤은 복싱 역사에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45살에 27살 챔피언 꺾는 기적 연출 포먼은 그토록 원했던 알리와 재대결은 하지 못하고 1977년 3월 지미 영에게 12라운드 판정패한 뒤 은퇴했습니다. 이후 기독교에 귀의하고 목사가 됐습니다. 어린 시절이 불우했고 문제아여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같은 비행 청소년들을 전도하고 올바른 길로 교화하는 데 힘을 썼습니다. 그리고 은퇴한 지 10년 만인 1987년 38살의 나이에 현역에 복귀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이후 1994년 11월 45살의 나이에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다시 획득해 세상을 더 놀라게 했습니다. 자신보다 18살이나 어린 27살 세계 챔피언 마이클 무어러(1967년생)를 10라운드 KO로 눕히고 역대 최고령 헤비급 세계 챔피언에 등극해 큰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필자는 오래 전에 국가대표 선수촌에서 선수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목숨을 거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올림픽 금메달에 도전할 생각이 있습니까?" 대부분의 국가대표 선수들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하지만 이 말에 '예'라고 답한 한 명은 실제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중국에도 이런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리샤오슈앙입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쌍둥이 형제 체조 스타 1973년에 태어난 리샤오슈앙은 쌍둥이 형제 체조 스타로 유명합니다. 그의 형은 리다슈앙. 두 선수 모두 1990년대를 풍미했던 남자 기계체조의 세계적인 별이었습니다. 둘 다 어린 시절부터 빼어난 운동 신경과 재능을 보이자 체조 코치가 7살 형제를 전문 체조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쌍둥이 형제는 체계적인 훈련과 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3년 뒤인 10살 때 고향인 후베이성 체조팀에 선발돼 정식으로 체조 선수가 되었습니다. 금메달 위해 위험천만 '백플립 3회전' 시도 국제무대에서는 동생 리샤오슈앙이 더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만 19살이던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인생 최대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당시 남자 마루운동의 강력한 우승 후보는 일본의 이케타니 유키오이었습니다. 이 선수는 직전 대회인 1988년 서울올림픽 마루에서 동메달을 따낸 쟁쟁한 선수였습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자 마루 운동 결선에는 중국의 리샤오슈앙과 리춘양, 일본의 이케타니, 그리고 우리나라의 유옥렬(바르셀로나 올림픽 도마 동메달), 이 대회 6관왕이었던 최고 스타 비탈리 세르보(벨라루스), 그리고리 미수틴(우크라이나) 등 모두 8명이 출전해 기량을 겨뤘습니다. 이케타니 선수가 먼저 경기를 했는데 당일 컨디션이 좋았는지 동작이 매우 경쾌했습니다. 고난도의 연기를 깔끔하게 펼친 끝에 그는 9.787이란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중국 대표팀은 리춘양에게 기대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뜻밖에도 큰 실수를 저지르며 무너졌습니다. 이제 남은 중국 선수는 리샤오슈앙 1명. 리샤오슈앙은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습니다. 자신이 금메달을 따려면 9.787점 이상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백플립 3회전'이란 매우 위험한 기술을 시도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기술을 중국에서는 '후공번삼주'(後空飜三周)라고 부릅니다. 쉽게 말하면 뒤로 공중 3바퀴를 도는 것입니다. 다이빙에도 똑같은 기술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이빙의 경우 실패해도 신체가 물과 접촉하기 때문에 심각한 부상을 당할 가능성은 낮습니다. 하지만 마루운동은 다릅니다. 착지할 때 만약 머리나 목이 바닥에 부딪힐 경우 치명적인 부상 우려가 있습니다. 실제로 리샤오슈앙은 1년 전인 1991년 대표팀에서 연습을 하다 이 기술을 시도했는데 머리가 먼저 떨어지면서 뇌진탕을 당한 아찔한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1주일 정도 병상에 있다가 회복됐지만 위험천만한 이 기술을 올림픽이란 큰 무대에서 시도한다는 것은 보통 담력으로는 어려운 일입니다. 안전한 기술을 구사해 은메달이나 동메달을 딸 것인지, 아니면 목숨을 걸고 금메달에 도전할 것인지,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는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리샤오슈앙은 연기를 시작하면서 첫 기술로 '백플립 3회전'을 시도했습니다. 엄청난 높이를 선보이며 깔끔하게 착지에 성공했습니다. 그 순간 관중석에서는 신기한 기술에 감탄한 듯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밖에도 리샤오슈상은 다양한 고난도 연기를 역동적으로 해내 탄성을 자아냈습니다. 그의 연기가 끝나자 당황한 사람들은 심판들이었습니다. 체조 역사상 처음 보는 '백플립 3회전' 기술을 놓고 몇 점을 줄 것인지에 대해 선뜻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랜 논의 끝에 점수가 발표됐습니다. 9.925점. 리샤오슈앙은 엄청난 고득점으로 일본의 이케타니를 큰 차이로 따돌리고 금메달을 거머쥐었습니다. 목숨을 건 승부수가 값진 결실로 이어진 것입니다. 중국 언론들은 '不要命的一跳'(목숨을 아랑곳하지 않은 점프)라는 표현으로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백문불여일견', 즉 백번 듣는 것이 한번 보는 것보다 못하다고 합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당시 리샤오슈앙의 연기를 감상할 수 있는 사이트를 알려드리겠습니다. (▶ 리샤오슈앙 백플립 3회전 영상 보러 가기) 개인종합 금메달도 짜릿한 역전으로 기적 같은 역전 금메달을 따낸 리샤오슈앙은 단숨에 깜짝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그는 4년 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도 또 하나의 신화를 만들어냈습니다. '기계체조의 꽃'으로 불리는 남자 개인종합에서 그는 러시아의 간판스타 알렉세이 네모프와 경쟁을 펼쳤습니다. 남자 개인 종합은 마루운동, 도마, 평행봉, 안마, 링, 철봉 6개 종목을 합산해 순위를 가립니다. 당시 필자는 현장에서 그 숨막히는 승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리샤오슈앙은 마지막 6번째 철봉 종목에서 빼어난 연기를 펼치며 네모프를 0.049점 차로 제치고 짜릿한 역전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경기장을 채운 3만 관중이 전율할 정도의 극적인 우승이었습니다. 중국의 '원조 체조 스타'인 리닝이 1984년 LA올림픽에서 3관왕에 올랐지만 개인종합우승은 일본 선수에게 내줬는데 그 아쉬움을 후배인 리샤오슈앙이 12년 만에 같은 미국 땅에서 말끔히 푼 것입니다. 중국 선수 최초로 올림픽 기계체조 개인종합에서 우승한 그는 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 은메달 3개, 동메달 1개를 획득한 뒤 은퇴했습니다. 이후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회식 때 메인 스타디움에서 성화 점화 직전에 봉송 주자로 나설 만큼 중국에서는 전설적인 스포츠 스타로 평가받았습니다. 형 리다슈앙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단체전에서 동생 리샤오슈앙과 함께 은메달을 획득했는데 두 선수는 24살이던 1997년 동반 은퇴했습니다. 동생 리샤오슈앙이 부상으로 전성기 때 기량을 회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은퇴를 결심하자 형도 선수 생활을 마쳤습니다. 은퇴 후에는 두 선수가 공동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딴 스포츠 용품 회사를 설립해 운영했고 고향 후베이성에 전문 체육학교를 설립해 유망주들을 육성하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이뤄지기 매우 어려운 일이 실제로 발생했을 때 우리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기적이 현실로 다가올 가능성은 아주 낮습니다. 스포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순간에 기적이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역도 여자 최중량급에서 나왔습니다. 장미란 vs 탕공홍, 용호상박 대결 당시 이 체급의 금메달 후보는 한국의 장미란과 중국의 탕공홍이었습니다. 두 선수는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미리 만났습니다. 당시 탕공홍이 금메달, 장미란은 은메달을 획득했습니다. 탕공홍은 합계 287.5kg(인상 120kg+용상 167.5kg)을 들었고 장미란은 합계 272.5kg(인상 117.5kg+용상 155.0kg)으로 15kg이나 뒤졌습니다. 이후 장미란의 기량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탕공홍과 금메달을 겨룰 정도가 됐습니다. 그리고 2년 뒤 두 선수는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외나무다리' 대결을 펼치게 됐습니다. 그때 장미란의 나이는 21살. 탕공홍은 4살 많은 25살이었습니다. 장미란, 인상에서 기분 좋은 출발 출발은 장미란이 좋았습니다. 인상 1차 시기에서 125kg, 2차 시기에서 130kg을 깔끔하게 성공했습니다. 반면 탕공홍은 1차 시기에서 122.5kg을 실패하며 불안하게 시작했습니다. 2차 시기에서 122.5kg을 성공했지만, 3차 시기에서 127.5kg을 들어 올리지 못했습니다. 결국 인상은 장미란 130kg, 탕공홍 122.5kg으로 장미란이 7.5kg 앞선 채 종료됐습니다. 장미란 선수가 탕공홍에 7.5kg이나 앞서자 금메달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부풀어 올랐습니다. 당시 장미란은 여자 역도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에 도전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남녀 통틀어서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전병관 이후 12년 만에 금메달을 노리는 것이었습니다. 용상에서도 장미란 쾌조... 첫 금 유력 이어 벌어진 용상은 세계 역도 사상 길이 남을 명승부였습니다. 용상에서도 장미란의 출발이 좋았습니다. 1차 시기에서 165kg을 성공했고 2차 시기에서는 170kg에 도전했습니다. 역기를 어깨까지 들어 올리는 '클린' 동작엔 성공했는데, 그다음 '저크' 동작에서 마지막에 버티지 못하고 바벨을 떨어뜨리면서 아쉽게 실패했습니다. 반면, 용상에서 7.5kg 차이를 뒤집어야 했던 탕공홍은 1차 시기부터 장미란보다 7.5kg 무거운 172.5kg에 도전했습니다. 그런데 클린 동작부터 불안했고 결국 일어서지 못하고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습니다. 이때부터 장미란과 탕공홍 양 측의 치열한 '수 싸움'이 시작됐습니다. 탕공홍은 곧바로 같은 무게인 172.5kg 2차 시기에 도전해 간신히 성공했습니다. 상당히 흔들렸는데 클린 동작 이후 한참 심호흡한 뒤 겨우 들어 올렸습니다. 용상 2차 시기까지 기록을 보면 합계에서 두 선수가 똑같았습니다. 그럴 경우 체중이 가벼운 장미란이 이기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장미란이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습니다. 모두가 경악했던 탕공홍의 용상 3차 시기 그런데 용상 3차 시기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먼저 장미란이 172.5kg로 3차 시기에 나섰습니다. 본인 최고 기록이자 한국 신기록에 도전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성공한 뒤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모으고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한국 신기록이자 올림픽 신기록이었습니다. 장미란은 코치진과 얼싸안고 감격을 누렸습니다. 현장에서 취재하던 필자는 장미란 아버지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고 우리 응원단도 열광의 도가니를 이뤘습니다. 당시 생중계를 하던 한국의 한 방송사 화면에는 이때 '장미란 금메달'이란 자막이 나왔고 중국 방송사 해설위원도 "사실상 장미란이 금메달을 따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몇 분 뒤 0.1%의 가능성도 없어 보이던 기적이 발생했습니다. 탕공홍이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는 3차 시기에서 장미란보다 7.5kg를 초과해서 들어야 했는데 탕공홍의 최고 기록은 175kg이었습니다. 이것은 세계 신기록이기도 했습니다. 당일 탕공홍의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았던 점을 고려하면 탕공홍이 역전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탕공홍은 3차 시기에서 한 번에 10kg을 올려서 무려 182.5kg에 도전하는 초강수를 뒀습니다. 탕공홍이 여태껏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무게였습니다. 심지어 훈련 때도 한 번도 들어 올리지 못한, 말도 되지 않는 무게였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계 기록(175kg)보다도 무려 7.5kg나 더 무거운 엄청난 중량. 이걸 들면 탕공홍의 역전 우승이 확정되고, 들지 못하면 장미란이 금메달을 차지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탕공홍은 힘찬 기합을 외치며 어깨 위에 바벨을 들어 올렸습니다. 중국 지도자의 힘에서는 "죽을힘을 쏟아라"란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탕공홍은 한참 동안 심호흡하고 기를 모은 뒤 팔을 쭉 뻗으며 바벨을 들어 올렸습니다. 옆으로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는 듯 보였지만 끝까지 버티면서 간신히 성공했습니다. 느린 화면을 보면 팔꿈치가 살짝 흔들리는 모습이었지만 심판들은 성공으로 판정했습니다. 비디오 판독이 발전한 현재의 기준을 볼 때는 실패로 판정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중국 코치진은 나라를 얻은 것처럼 기뻐서 펄펄 뛴 반면 대기실에서 초조하게 경기를 지켜본 장미란은 허탈하고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결국 탕공홍은 합계 305kg, 세계 신기록으로 역전 우승했고 장미란은 합계 302.5kg으로 2.5kg 차이로 은메달을 얻었습니다. 올림픽 이후 엇갈린 명암 또 하나 놀랄 일은 그 뒤에 일어났습니다. 기적 같은 역전 우승의 주인공인 탕공홍이 182.5kg를 성공한 직후 오히려 담담한 모습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관중들은 모두 의아해했습니다. 그가 크게 환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나중에 알려졌습니다. 어릴 때부터 심한 고혈압에 시달리던 탕공홍은 이 순간 혈압이 한계치에 이르러서 흥분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중국 팀 닥터는 우승 직후 바늘로 찔러서 피가 나오게 하는 등 응급 치료를 했습니다. 당시 중국에서는 이 장면을 보고 "탕공홍의 내장이 파열됐다", "인체 7개의 구멍에서 피가 나왔다"는 등의 소문이 퍼졌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이후 탕공홍은 내리막길을 걷게 됐습니다. 이듬해인 2005년 부상에 시달리다 중국 전국체전에 출전했는데 부진한 성적을 거뒀고 2007년에는 베이징 올림픽 중국 대표 선발전에서 3위를 차지하며 대표팀 훈련에 합류했지만 고강도 훈련 이후 고혈압 때문에 생명의 위험까지 있어 결국 훈련소에서 퇴소했습니다. 그리고 2009년 부상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뒤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결국 아테네 올림픽 이후 이렇다 할 성적을 전혀 거두지 못한 것입니다. 대조적으로 장미란은 아테네 올림픽 이후 자신의 시대를 활짝 열어젖혔습니다. 2005, 2006, 2007년 세계선수권 3회 연속 우승을 이뤘습니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는 탕공홍의 뒤를 이은 중국의 무솽솽에게 합계에서 2kg 뒤져 은메달을 획득했지만 무솽솽이 불참한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압도적인 기량으로 2위에 무려 57kg이나 앞서며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인상, 용상, 합계에서 총 5개의 세계 신기록을 작성했습니다. 이어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때도 중국의 멍수핑을 제치고 금메달을 거머쥐면서 세계선수권, 올림픽 금메달을 모두 합쳐 그랜드슬램을 달성했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야구계의 유명한 격언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이 골프에도 있습니다. “장갑 벗기 전에는 아무도 모른다”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승을 눈앞에 둔 선수가 마지막 라운드에서 도무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플레이로 무너지고, 심지어 마지막 한 홀을 남기고 이른바 ‘대참사’를 겪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골프팬들의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 믿기 힘든 장면들을 정리해 봤습니다. 양용은의 10타 차 뒤집기, 마지막에 무너진 노승열 2010년 10월 충남 천안 우정힐스컨트리클럽(파71·7213야드)에서는 국내 최고 권위의 코오롱 제53회 한국오픈골프선수권대회(총상금 10억 원)가 열렸습니다. 노승열 떠오르는 신예 유망주였던 노승열(당시 19세)은 3라운드까지 합계 9언더파로 2위에 5타나 앞선 단독 선두로 나서며 국내 무대 첫 우승을 눈앞에 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4라운드에서 악몽이 찾아왔습니다. 당시 골프 담당 기자였던 필자는 1번 홀부터 노승열을 따라다니며 경기를 지켜봤습니다. 노승열은 첫 홀부터 흔들렸습니다. 티샷한 공이 카트도로를 맞고 100야드를 표시하는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보기로 시작한 노승열은 하염없이 무너졌습니다. 5번 홀(파5ㆍ540야드)에서도 티샷을 왼쪽 숲으로 보내면서 보기를 기록했고 6번 홀 버디 후 7번 홀(파3)에서는 티샷이 벙커에 빠지면서 더블보기를 범했습니다. 결국 노승열은 이날 더블보기 2개와 보기 6개, 버디 2개로 8타를 잃는 최악의 플레이를 펼치며 공동 4위(1언더파)로 추락했습니다. 양용은 노승열이 완전히 무너지고 있는 사이 베테랑 양용은은 기적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노승열에 무려 10타나 뒤진 공동 12위로 출발했지만 무섭게 따라붙기 시작했습니다. 전반 9홀이 끝나자 이변이 발생했습니다. 앞서 경기했던 양용은이 9번 홀까지 버디 4개, 이글 1개로 6타를 줄이는 사이 노승열은 7번 홀까지 3타를 잃으면서 10타 차가 1타 차로 좁혀진 것입니다. 양용은은 후반에 버디 2개와 보기 3개를 기록하며 이날 5타를 줄였습니다. 양용은은 최종합계 4언더파 280타로 김비오와 최호성 등 공동 2위 그룹을 2타 차로 제치고 우승상금 3억 원을 거머쥐며 2006년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오픈을 제패했습니다. 한국프로골프투어 사상 10타 차 열세를 뒤집고 우승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종전 국내 대회 최다 타수 차 역전 우승은 8타 차로 모두 세 번 나왔습니다. '백상어' 그렉 노먼의 마스터스 잔혹사 그렉 노먼 미국 조지아주 오거스타에서 해마다 4월에 열리는 '꿈의 무대' 마스터스는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메이저 중의 메이저 대회입니다. 골퍼라면 누구나 그린재킷을 입기를 원하지만 오직 오거스타의 신(神)이 허용한 선수에게만 그 영광은 주어집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호주의 ‘백상어’ 그렉 노먼에게 마스터스는 그야말로 ‘잔혹사’였습니다. 1986년 3라운드까지 선두였던 노먼은 전반에 선두를 빼앗겼다가, 후반 14~17번 홀에서 4연속 버디를 잡으며 ‘황금 곰’ 잭 니클러스를 따라잡았습니다. 18번 홀에서 파만 잡으면 연장에 돌입할 수 있었지만 보기를 범해 46세의 니클러스에게 메이저 대회 최고령 우승의 영예를 갖다 바쳤습니다. 1년 뒤인 1987년에는 래리 마이즈에게 연장 두 번째 홀에서 지금까지도 전설로 남아 있는 드라마틱한 45야드짜리 칩 샷을 얻어맞고 땅을 쳐야 했습니다. 그렉 노먼 노먼의 진정한 마스터스 ‘흑역사’는 1996년 대회였습니다. 노먼은 1라운드에서 코스 기록인 9언더파 63타를 치는 등 3라운드까지 6타 앞선 단독 선두를 달렸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라운드에서 라이벌이었던 ‘스윙 머신’ 닉 팔도(잉글랜드)에게 뼈아픈 역전패를 당했습니다. 팔도는 다혈질이었던 노먼의 급한 성격을 이용해 일부러 욕이 나올 만큼의 ‘늑장 플레이’를 펼쳤습니다. 짜증이 난 노먼은 무려 6 오버파를 치며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대조적으로 너무나 느린 플레이를 의도적으로 펼친 팔도는 5언더파를 치며 노먼을 5타 뒤진 2위로 밀어내고 통산 세 번째 마스터스 우승을 짜릿한 역전승으로 장식했습니다. 결국 노먼은 은퇴할 때까지 한 번도 그린 재킷을 입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홀 대참사 '끝판왕' 장 방 드 벨드 장 방 드 벨드 프랑스의 장 방 드 벨드는 1999년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메이저대회인 디 오픈에 출전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이 선수를 아는 골프 팬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한 홀을 남기고 그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우승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499야드의 파4 18번 홀에서 대참사가 벌어졌습니다. 3타 차 선두였던 장 방 드 벨드의 티샷은 그런대로 잘 갔습니다. 문제는 두 번째 샷이었습니다. 무리하지 않고 3온을 시도해 보기나 더블보기만 해도 우승할 수 있었는데 그는 2온을 시도했습니다. 두 번째로 친 공은 심하게 밀리면서 그린 주변 갤러리 스탠드 아래 깊은 러프에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우승은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최악은 그다음부터였습니다. 세 번째 샷으로 그린 앞 실개천을 넘기려다 그만 공을 물에 빠뜨린 것입니다. 1벌타를 받고 다섯 번째 친 공은 벙커로 들어갔고, 결국 6타 만에 공을 그린에 올린 끝에 치명적인 트리플 보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스코틀랜드의 폴 로리는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하고 2위로 경기를 끝낸 뒤 짐을 싸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소식을 듣고 차를 돌려 다시 골프장으로 왔습니다. 폴 로리는 장 방 드 벨드, 저스틴 레너드(미국)와 연장전을 치러 극적으로 디 오픈 우승트로피를 품에 안았습니다. 장 방드 벨드는 골프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패배자로 불렸고 이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한 채 골프계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미국 <골프 매거진>은 장 방드 벨드를 ‘20세기 최악의 몰락’으로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에 빛나는 한국 축구가 총체적 난국이란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난 2월 11일 카타르에서 끝난 아시안컵 축구 졸전에 이어 주장 손흥민과 9살이나 어린 이강인이 요르단과 준결승을 하루 앞두고 몸싸움을 벌였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국민들은 극심한 충격과 분노에 휩싸여 있습니다. ‘5무 감독’ 클린스만의 허무한 종말 클린스만 감독 먼저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은 역대 최강 멤버라는 남자 축구대표팀이 철저하게 추락하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클린스만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당시 서독을 우승으로 이끈 세계적 스트라이커입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는 황선홍-홍명보가 뛰던 한국을 상대로 환상적인 터닝슛으로 골을 터뜨려 우리 축구팬들에게 낯익은 인물입니다. 하지만 지도자로서 그는 낙제점이었습니다. 이는 세계 축구 전문가의 거의 공통된 견해였습니다. 그가 한국에 온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우려했지만 대한축구협회는 1년 전 선임을 강행했고 이른바 ‘해줘 축구’의 결과는 최악이었습니다. 그럼 클린스만 감독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잘못했을까요? 대한축구협회 국가대표 전력강화위원회는 지난 15일 장시간 논의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1. 아시안컵 경기 관련해서는 준결승에서 2번째 만나는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전술적인 준비가 부족했다. 2. 재임기간 선수 선발과 관련해 감독이 직접 다양한 선수를 보고 발굴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3. 선수단 관리에 관련해서는 팀 분위기나 내부 갈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지도자로서 팀의 규율과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부족했다. 4. 국내 체류기간이 적은 근무 태도에 관련해서도 국민들을 무시하는 것 같다. 축구팬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분석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에 1가지를 더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는 신의가 없는 사령탑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1년 전 취임할 때 “대부분의 시간을 한국에서 보낼 것이다”고 했지만 이후 “여러분은 익숙해져야 한다. 대표팀 감독 생활이란 이렇다.”는 강변으로 자신의 ‘재택근무’를 정당화했습니다. 결론적으로 클린스만 감독은 지도자로서 이렇다 할 전술이 없었고 새 유망주를 발굴할 의지도 없었고, 내부 갈등을 해결할 능력도 없었고, 이른바 ‘재택근무’가 말해주듯 한국 축구에 대한 기본적 예의도 없었고, 자신의 말도 지키지 않는 등 ‘신의’가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5가지’가 없는 ‘5무’ 감독이었다는 혹평이 지배적입니다. ‘5무 감독’ 데려온 정몽규 회장 정몽규 축구협회 회장 ‘5무 감독’으로 끝난 클린스만 감독을 데려오는데 앞장 선 사람이 바로 대한축구협회 정몽규 회장입니다. 축구협회 규정에 따르면 국가대표팀 감독은 '전력강화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선임'해야 하지만, 클린스만을 뽑을 때는 강화위원회가 꾸려지기도 전에 정 회장이 직접 나섰습니다. 전임 벤투 감독 시절 강화위원회가 규정에 의거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던 것과 달리, 클린스만 재임 시절에는 애초 선임 때부터 체계가 무너졌기 때문에 강화위원회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졌습니다. 이렇게 되다 보니 클린스만에 대한 관리와 견제도 전혀 이뤄지지 않았고 클린스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재택근무’와 ‘외유’를 이어갔습니다. 이런 점에서 정몽규 회장은 원칙과 시스템을 무시했다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는 1년 전 비리 축구인을 사면했다가 여론의 호된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때도 대한축구협회 규정은 물론 대한체육회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가 수장으로 있는 회사의 아파트가 붕괴할 때도 원칙을 충실히 지키지 않은 것이 드러나 고개를 숙여야 했는데 축구대표팀 감독을 선임할 때도 결과적으로 마찬가지였던 셈입니다. ‘한 지붕 3그룹’ 클린스만호 1986년부터 94년까지 ‘한 지붕 세 가족’이란 일요 아침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서울을 배경으로 1채의 단독 주택에 사는 각자 다른 3가족들이 서로 이해하면서 정을 나누는 스토리를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 작품이었습니다. 클린스만호는 64년 만의 아시안컵 우승에 도전했습니다. 다 함께 똘똘 뭉쳐 ‘원팀’이 돼야 달성할 수 있는 목표였지만 나이별로 ‘3그룹’으로 나뉘어 이른바 ‘따로 국밥’이 돼버렸다는 게 축구 관계자들의 증언입니다. 이번 아시안컵 훈련장에서 그룹을 지어 훈련할 때 선수들은 같은 무리끼리 어울렸습니다. 1992년생인 주장 손흥민을 필두로 이재성, 김진수 등 일명 ‘92파’, 그리고 1996년생인 김민재, 황희찬, 황인범 등 ‘96파’, 이강인을 비롯한 젊은 선수로 이뤄진 ‘MZ파’ 는 주로 자기들끼리만 공을 주고받았습니다. 조별리그 1차전을 대비한 훈련 때부터 마지막 요르단전 훈련 때까지, 각 그룹의 면면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나이로만 분열된 게 아니라 해외파, 국내파 사이에도 갈등이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토너먼트 경기를 앞둔 훈련에서 한 해외파 공격수가 자신에게 강하게 몸싸움을 걸어오는 국내파 수비수에게 불만을 품고 공을 강하게 차며 화풀이하는 장면이 취재진에 포착되기도 했습니다. ‘슛돌이’는 왜 ‘국민 밉상’이 됐나? 이강인 이강인은 지상파 프로그램을 통해 어릴 때부터 국민에게 알려진 선수입니다. 2019년 20세 이하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한국이 준우승이라는 빛나는 성과를 거뒀는데 이때 혜성처럼 떠오른 스타가 바로 이강인이었습니다. 당시 대표팀에서 막내였던 그는 창의적인 플레이로 대회 MVP까지 선정됐습니다. 이강인보다 나이 많은 선배들은 “축구에서는 나보다 잘하면 형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강인을 막내 형이라 부른다”고 칭찬했습니다. ‘막내 형’은 이강인을 대표하는 찬사였던 것입니다. 당시에도 “선배를 무시한다. 선을 넘는 언행을 한다”는 인성에 관한 지적이 흘러나왔지만 그의 스타성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축구 대표팀 사정에 정통한 A 씨는 “지난해부터 선배와 고참을 대하는 태도가 더 심해진 것 같다.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우승해 병역 특례 혜택을 받은 것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제 태극마크를 달지 않아도 크게 아쉬울 게 없기 때문이다. 벤투 전 감독 때는 비교적 사고를 치지 않았는데 클린스만호에서는 황태자 대우를 받다 보니 그의 태도가 더 오만해진 것 같다. 결국 더는 이런 상황을 묵과할 수 없었던 손흥민이 ‘탁구 사건’을 계기로 해묵은 감정이 폭발해 이강인의 멱살을 잡았고 이강인도 이에 맞불을 놓으면서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진 것이다.”고 분석했습니다. 이강인은 충격적인 ‘하극상’으로 차기 에이스에서 졸지에 ‘국민 밉상’으로 추락하면서 축구 인생 최대 위기를 맞았게 됐습니다. 차기 감독은 홍명보? 황선홍? 홍명보 울산현대 감독(좌)과 황선홍 올림픽 대표팀 감독(우) 클린스만 감독이 부임 1년 만에 중도하차하면서 이제 관심은 차기 감독에게 쏠리고 있습니다. 축구대표팀은 다음 달 21일 한국에서 2026년 북중미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을 치러야 합니다. 1개월밖에 시간이 없는 셈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인 감독을 선임하는 것은 절차와 선수 파악 시간을 고려하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결국 여러 변수를 고려하면 대표팀을 조기에 장악할 수 있는 카리스마를 갖춘 국내파 감독이 선임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따라 홍명보 울산 HD 감독, 황선홍 현 올림픽 대표팀 감독이 1순위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홍명보 감독은 2009년 이집트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에서 8강 진출을 이뤘고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축구 사상 첫 동메달을 이끌었습니다. 2014년 브라질월드컵 때 사령탑에 올랐지만 불명예스럽게 물러난 아픔이 있습니다. 이후 오랫동안 '야인 생활'을 하다 K리그 울산에서 재기에 성공했습니다. 그는 2022년 17년 만의 K리그1 우승컵을 선물했고, 지난해에는 창단 후 첫 2연패를 달성했습니다. 홍명보 감독과 함께 2002년 4강 신화를 만들었던 황선홍 감독도 자격이 충분합니다. 하지만 오는 4월 파리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을 앞두고 있어 겸임을 해야 하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밖에 최용수 감독도 물망에 오르고 있습니다. 대표팀 지도자 경험은 없지만 FC서울과 강원FC에서 지휘봉을 잡는 등 프로무대에서 잔뼈가 굵습니다. 누가 새 사령탑이 돼도 하루빨리 대표팀 분위기를 다 잡고 월드컵 본선행 티켓을 거머쥔 뒤 2년 뒤 본선에서 8강 이상의 성적을 올려야 하는 무거운 과제를 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