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부터 30년 넘게 오로지 스포츠 취재 기자 한길을 걸었다. 동-하계 올림픽, 월드컵, 아시안게임 등 각종 국내외 대회를 현장 취재했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회식, 2012년 런던올림픽 폐회식 TV 생중계에서는 해설을 맡기도 했다. 2017년에는 제28회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체육회를 출입하고 있고 SBS 유튜브 채널인 <스포츠머그>에서 '별별스포츠' 코너를 진행하고 있다.
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기생유 하생량'(旣生瑜 何生亮). 하늘은 주유를 낳고서, 왜 제갈량을 낳았는가!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유명한 말로 주유가 끝내 제갈량이라는 거대한 벽을 넘지 못한 아쉬움을 나타낸 것으로 풀이됩니다. 1980년대 세계 유도에 제갈량과 주유 같은 선수 2명이 동시대에 출현했습니다. 일본 유도의 황금기를 이끌며 세계 유도 최중량급을 제패했던 두 전설, 일본의 야마시타 야스히로와 사이토 히토시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올림픽 2연패에 빛나는 사이토 히토시 지금은 유도 최중량급이 100kg 이상급 하나입니다. 그런데 두 선수가 활약했던 1980년대에는 95kg 이상급이 있었고, 이와는 별도로 '무제한급'이 올림픽과 세계선수권에 있었습니다. '무제한급'은 말 그대로 체중 제한 없이 60kg 선수도, 150kg 선수도 출전하는 체급이었습니다. '무제한급'이 있었기 때문에 야마시타, 사이토 둘이 각각 다른 체급으로 국제대회에 출전해서 나란히 우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두 선수는 1980년대 일본 유도를 이끌었던 쌍두마차로 숱한 명장면을 연출했습니다. 사이토 히토시는 1961년생으로 야마시타 야스히로보다 4살 어린 후배입니다. 1984년 LA, 1988년 서울 올림픽 2회 연속 금메달을 차지했던 전설입니다. 이 선수의 아들이 지난 파리 올림픽에 출전해 일본 유도 사상 첫 '부자(父子) 올림피언'으로 화제가 됐습니다. 최중량급인 100kg 이상급 준결승에서 우리나라의 김민종 선수와 대결했는데, 김민종이 시원한 업어치기 한판승을 거뒀습니다. 일본 '노골드' 위기 탈출시킨 주역 사이토 히토시는 1984년 LA 올림픽에는 95kg 이상급으로 출전해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때 야마시타는 이 대회 무제한급에서 금메달을 거머쥐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는 무제한급이 없어졌기 때문에 사이토는 95kg 이상급에 출전했습니다. 이때는 야마시타가 은퇴해 일본 방송국 해설위원으로 중계석에서 사이토의 경기를 해설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사이토가 받은 중압감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당시 일본 유도는 마지막 날까지 금메달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 명도 결승에 오르지 못하며 극도의 부진을 보인 것입니다. 유도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1964년 도쿄 올림픽 이후 처음으로 노골드의 수모를 당할 위기였습니다. 그래서 유도 경기 마지막 날 치러진 95kg 이상급의 사이토에게 전 일본 국민의 기대가 쏠렸는데 준결승이 최대 고비였습니다. 상대는 우리나라의 조용철. 당시 한국 유도 최중량급의 간판스타로 현재 대한유도회 회장입니다. 1984년 LA 올림픽 95kg 이상급 동메달리스트인 조용철은 1985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결승에서 사이토에 팔꺾기로 기권승을 거두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사실상 결승전이라 할 수 있는 두 라이벌의 준결승은 팽팽했습니다. 득점 없이 맞선 경기 막판 '그쳐' 상황에서 사이토가 중계석의 야마시타를 쳐다봤습니다. 이때 두 사람이 잠시 눈빛을 교환했는데 훗날 두 사람의 인터뷰에 따르면 사이토가 "누가 이기고 있는 거 같나요?"라고 눈빛으로 물어봤고, 야마시타는 "당신이 이기고 있어"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고 합니다. 결국 치열한 접전 끝에 난적 조용철을 꺾은 사이토는 결승에서 동독 선수를 물리치고 우승하며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한 뒤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사이토는 세계선수권에서는 1983년 무제한급에서 한 차례 우승을 기록했고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는 95kg 이상급에서 금메달을 손에 쥐었습니다. 탁월한 유연성을 바탕으로 시원시원한 유도를 구사했는데, 1984년 LA 올림픽 때는 4경기 중 결승전만 빼고 3경기에서 한판승,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는 5경기 중 3경기를 한판승으로 따냈습니다. 야마시타엔 7전 7패, 한 맺힌 사이토 일본은 '왕중왕', '꽃 중의 꽃'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컸던 무제한급을 더 중시했습니다. 야마시타와 사이토는 LA 올림픽에 출전할 일본 대표를 뽑는 선발전에서 나란히 무제한급에 출전했습니다. 접전 끝에 야마시타가 우세승을 거두고 무제한급 대표로 선발됐는데 당시 사이토가 판정에 억울함을 호소하며 논란이 일자 일본유도연맹은 사이토를 95kg 이상급 대표로 선발하며 무마하기도 했습니다. 두 선수의 진검 대결은 전(全) 일본 유도선수권대회에서 3차례나 벌어졌습니다. 당시 일본 선수들은 이 대회 우승이 올림픽 금메달보다 더 어렵다고 말할 정도로 치열했습니다. 전 체급을 통틀어 일본 유도 왕중왕을 가리는 대회였기 때문입니다. 사이토도 올림픽보다 전 일본 선수권 우승 타이틀을 더 가지고 싶었다고 말해왔습니다. 야마시타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지목된 사이토는 야마시타를 존경했지만, 반드시 그와 맞대결해서 승리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1984년 LA 올림픽에서 함께 금메달을 따고도 야마시타가 일본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는 것을 보며 내심 서운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전 일본 선수권을 제패해야 야마시타를 넘고 진정한 챔피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선수는 1983년부터 1985년까지 3년 연속 결승에서 대결했습니다. 1983년 결승에서 야마시타가 잡기 싸움에서 사이토를 압도했습니다. 사이토가 주특기인 메치기 기술을 시도하는 것을 원천 봉쇄하며 승리를 거뒀습니다. 1년 뒤 1984년 대회 결승에서 야마시타는 또다시 사이토를 물리쳤습니다. 야마시타가 LA 올림픽에서 부상 투혼을 발휘하며 우승한 이후 대부분 그가 은퇴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야마시타는 이듬해 1985년 전 일본 선수권에 출전하기 위해 은퇴를 미뤘습니다. 사이토를 꺾고 전 일본 선수권 우승 타이틀을 지킨 채 은퇴하는 것을 선수 인생의 마지막 목표로 세운 것입니다. 사이토로서도 야마시타를 이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야마시타의 주특기인 밭다리 후리기에 대비한 비장의 기술을 집중 연마했습니다. 야마시타가 밭다리 후리기를 시도할 때 중심이 흐트러진 틈을 타서 순간적으로 되치기 하는 기술이었습니다. 두 선수는 1985년 대회 결승에서 마지막으로 만났습니다. 사이토는 야마시타가 밭다리 후리기 기술을 시도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4분여가 흘렀을 때 드디어 그 순간이 왔습니다. 사이토의 번개 같은 되치기에 야마시타가 뒤로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심판은 점수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야마시타가 슬립, 즉 스스로 미끄러져 넘어간 것으로 간주해서 당시 규정에 따라 점수로 인정 안 한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사이토는 넘어지는 과정에서 다리를 다쳐 이후 제대로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야마시타가 적극적인 공격으로 경기를 주도하며 경기가 종료됐고, 결국 야마시타의 판정승으로 끝났습니다. 야마시타는 9연패의 위업을 달성하고 정상에서 명예롭게 은퇴한 반면 사이토는 3년 연속 결승에서 야마시타의 벽을 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결국 사이토는 야마시타가 은퇴한 지 3년이 지난 1988년, 평생 숙원이었던 전 일본 선수권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전 일본 선수권을 포함해 사이토는 야마시타와 총 7차례 맞대결을 펼쳤는데 한 번도 이기지 못했습니다. 매 경기 치열한 접전이었지만 정말 간발의 차이로 승부가 갈렸습니다. 특히 마지막 1985년 대회 결승은 일본에서 전설의 명승부로 길이 남았는데, 야마시타는 훗날 인터뷰에서 "심판이 사이토의 승리를 선언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경기"였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야마시타가 사이토의 되치기에 넘어갔을 때 점수를 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이 영웅 만들기를 좋아하는데 그런 점에서 야마시타가 이득을 본 측면이 있다는 시각도 있었습니다. 즉, 야마시타라는 영웅의 마지막 경기에서 8년간 이어져 온 연승 행진을 마감시키고 싶지 않았던 심리도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결국 사이토는 그토록 이기고 싶어 했던 야마시타를 결국 한 번도 못 이긴 채 유도복을 벗는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사이토는 은퇴 이후 지도자로 활동했습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과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일본 남자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습니다. 그가 2015년 1월 담관암으로 향년 54세를 일기로 별세하자 일본 유도계는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야마시타는 당시 일본유도연맹 부회장이었는데, 그의 사망을 애도하며 "사이토가 웃는 얼굴로 안심하고 볼 수 있는 그런 유도계를 만들 것"이라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사진 : 게티이미지, 연합뉴스
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복싱 경기에서 어떤 선수의 왼쪽 눈이 찢어지면 상대 선수는 바로 그 왼쪽 눈을 집중 공격합니다. 경기를 빨리 끝내고 이길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독 리시브가 약한 선수를 향해 송곳 같은 서브를 넣습니다. 이를 '목적타 서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동네에서 일반인들이 족구를 할 때도 흔히 '구멍'이라고 꼽히는 사람을 향해 공을 찹니다. 스포츠에서 약한 사람이나 약한 부분을 공략하는 것은 모두 승리하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인지상정'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1984년 LA 올림픽 유도에서는 이런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아름다운 장면이 연출됐습니다. 3수 끝에 1984년 LA 올림픽 첫 출전 LA 올림픽 유도의 최고 관심은 역대 세계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 일본의 야마시타 야스히로가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숙원을 풀 수 있는가에 쏠렸습니다. 야마시타는 1957년생으로 유도 종주국 일본에서 지금까지도 '황제'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최고의 업적은 203연승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남긴 것입니다. 하지만 압도적 기량에 비해 올림픽과는 좀처럼 인연이 닿지 않았습니다. 19살이던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때는 일본 대표 선발전에서 2위에 머물러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올림픽이 1년만 늦게 열렸다면 참가했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전성기 시절이던 1980년에 모스크바 올림픽이 열렸습니다. 그는 일본 대표로 선발됐지만 구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해 미국과 한국, 일본 등이 대회를 보이콧하면서 출전하지 못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야마시타의 첫 올림픽이자 마지막 올림픽은 1984년 LA 올림픽이었습니다. 불의의 부상, 극적인 금메달 올림픽 무대에 처음 나선 야마시타는 경기 도중 불의의 부상을 당했습니다. 8강전에서 서독의 아서 슈나벨 선수와 대결하다 오른쪽 종아리 근육이 파열된 것입니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힘겹게 경기를 이어간 그는 업어치기 한판승을 거뒀습니다. 준결승에서는 프랑스의 콜롬보 선수로부터 부상 부위인 오른쪽 다리를 공격받고 먼저 효과를 빼앗겼습니다. 이후 누르기 한판으로 역전승을 거두긴 했지만 그의 종아리 부상은 더 악화돼 걷기조차 힘든 상태가 됐습니다. 결승전에 출전하기 위해 매트에 오를 때 야마시타는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절었습니다. 극심한 통증을 참으며 천신만고 끝에 결승에 오른 그와 달리, 결승 상대였던 이집트의 모하메드 알리 랴슈완은 결승에 오르기 전까지 모든 경기를 한판승으로 끝냈습니다. 야마시타가 제아무리 훌륭한 선수라고 해도 오른쪽 다리를 못 쓰는 상황에서 전 경기 한판승으로 한껏 기세가 오른 라슈완을 이기기는 힘들어 보였습니다. 야마시타로서는 평생의 꿈이었던 올림픽 금메달이 사실상 날아가는 상황이었습니다. 라슈완으로서는 야마시타의 오른쪽 다리만 집중 공략하면 무난히 이길 것으로 보였지만 라슈완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야마시타의 오른쪽 다리 대신 왼쪽 다리를 걸려고 하다 되치기를 당해 매트 위에 나가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야마시타의 주특기인 굳히기 기술에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결국 경기 시작 1분 5초 만에 야마시타가 누르기 한판승을 거뒀습니다. 야마시타로서는 생애 첫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며 평생 숙원을 푸는 순간이었습니다. 은메달리스트의 아름다운 스포츠맨십 그런데 경기 직후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라슈완이 야마시타의 오른쪽 다리를 공격하지 않는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기자들이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야마시타가 오른쪽 종아리를 다쳤다는 사실을 알았나요?" 라슈완은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예, 알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저는 전력을 다할 수 없었습니다. 야마시타가 오른쪽 다리를 못 쓴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거기를 공격하면 이길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이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야마시타의 부상 때문에 이겼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라슈완으로서도 생애 첫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국 이집트에도 36년 만에 올림픽 금메달을 선사해 국민적인 영웅이 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라슈완은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등 메이저 대회 금메달은 없이 1984년 LA 올림픽 은메달 1개, 세계선수권 은메달 2개를 따내며 선수 생활을 마감했습니다. 시상식에서도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됐습니다. 야마시타가 다리가 아파 시상대에 오르지 못 하자 라슈완이 부축해서 맨 윗자리까지 올려주었던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광경에 관중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금메달은 놓쳤지만 라슈완은 이후 값진 상으로 보상받았습니다. 유네스코와 국제페어플레이위원회가 선정하는 '올해의 페어플레이상'을 수상했고 국제유도연맹도 메이저 대회 우승 경력이 없는 라슈완을 이례적으로 명예의 전당에 올렸습니다. 그 이유는 "라슈완은 명예(honour)와 존중(respect), 진실성(integrity)이라는 유도의 핵심 가치를 실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전 일본 선수권 9연패 신화 야마시타는 다른 국제 대회에서도 신화적인 업적을 세웠습니다. 세계선수권에서는 95kg 이상급 3연패를 달성했습니다. 1979년, 1981년, 1983년 세 대회 연속 우승했는데 1981년 대회 때는 무제한급까지 석권하며 세계선수권에서 총 4번 우승의 감격을 맛봤습니다. 무엇보다 1977년부터 1985년 은퇴할 때까지 8년간 무려 203연승이란 믿기 힘든 금자탑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일본 유도계가 그를 전설로 인정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데 바로 '전(全) 일본 유도선수권' 9연패라는 불멸의 기록입니다. 1977년부터 1985년 대회까지 9회 연속 우승을 차지한 것입니다. 전 일본 유도선수권은 매년 4월 일본 유도의 성지 부도칸에서 열리는 일본 최고 권위 국내 대회로, '무제한급' 한 체급만 열립니다. 모든 체급의 선수들이 출전해 그야말로 일본 유도의 '왕중왕'을 가리는 대회인데 이 대회 결승에서 또 한 명의 전설인 사이토 히토시를 3번 모두 꺾으면서 정상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야마시타는 허벅다리후리기와 굳히기가 뛰어났고, 경기 운영 능력은 도인의 경지라 할 만큼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하지만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린 그는 1985년 28살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퇴했습니다. 은퇴 이후에는 TV 해설위원과 지도자로 활약했습니다. 일본 유도 대표팀 감독을 여러 차례 역임했고 모교인 도카이대학 체육학부 교수로 후학을 양성했습니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국제유도연맹 이사로 활동했고 2019년부터 현재까지 일본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2020년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에 선출되며 유도를 넘어 일본 스포츠의 간판 인물로 국제 스포츠 무대를 누비고 있습니다.
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홍명보 축구 대표팀 감독 선임 과정에서 드러난 대한축구협회의 행정 난맥상이 한국 스포츠계를 흔들고 있습니다. 축구협회와 그 수장인 정몽규 회장이 국민의 호된 비판을 받자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가 부랴부랴 감사에 나섰는데 이것이 또 다른 논란을 낳았습니다. 문체부의 대한축구협회 감사와 관련해 국제축구연맹(FIFA)이 "대한축구협회가 외부의 부당한 간섭을 받을 경우 제재를 받을 수 있다"는 공문을 보내온 사실을 필자가 지난 10월 2일 특종 보도하면서 국내 스포츠계에 큰 파문이 일고 있는 것입니다. FIFA "부당한 간섭 있으면 제재받을 수도" 지난달 29일 FIFA가 아시아축구연맹(AFC)과 함께 대한축구협회에 발송한 공문의 내용은 크게 3가지입니다. 첫째: 대한축구협회는 자율적으로 사무를 관리하고 외부의 부당한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할 법적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FIFA 정관 제14조에 따라 대한축구협회는 제3자의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정관 15조에 따라 대한축구협회는 어떠한 정치적 간섭으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FIFA는 "이 규정을 위반할 경우 비록 대한축구협회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제재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하기 바란다"고 강조했습니다. 최악의 경우 자격 정지를 받아 2026년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경고한 것입니다. 실제로 FIFA는 지난 2015년 쿠웨이트 정부가 체육단체 행정에 개입할 수 있도록 법률을 개정하자 쿠웨이트 대표팀에 자격 정지 처분을 내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예선 잔여 경기를 몰수패 처리했습니다. IOC도 문체부-대한체육회 갈등 예의주시 FIFA와 더불어 현재 국제올림픽위원회(IOC)도 국내 스포츠계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문체부가 올해 들어 대한체육회의 '예산 배분권'을 박탈하는 등 사사건건 갈등을 빚고 있는 데다 이기흥 현 회장의 3연임은 안 된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지난 10월 17일 2024 전국체육대회가 열리는 경상남도 김해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한체육회와 문화체육관광부가 서로 갈등을 빚고 있는 원인에 대해 "IOC가 대한체육회에 문의를 해왔다"고 밝혔습니다. 이 회장은 또 "IOC가 최근 국내 상황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기흥 회장이 지적한 국내 상황에는 문체부가 대한체육회가 갖고 있던 시도체육회에 대한 예산 배분권을 박탈한 것, 문체부가 감사원에 대한체육회에 대한 감사를 청구한 것, 국무총리실의 체육회 조사 등이 포함돼 있습니다. 그런데 <올림픽헌장> 제27조 6항을 보면 '국가올림픽위원회는 정치·법·종교·경제적 압력을 비롯한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율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이 규정을 위반할 경우 IOC는 해당 국가의 자격을 정지시킨 뒤 국제 스포츠 행사 참가를 금지해 왔습니다. 실례로 쿠웨이트 정부가 올림픽 헌장을 어기고 자국 올림픽위원장을 비롯해 경기단체장들을 직접 임명해 IOC로부터 징계를 받자, 쿠웨이트 선수단은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개회식에서 자국 국기 대신 올림픽기를 들고 입장해야 했습니다. 문체부는 대한체육회를 관리 감독하는 정부 기관입니다. 그리고 대한축구협회는 대한체육회의 산하 종목 단체입니다. 따라서 문체부가 대한체육회와 대한축구협회 행정의 문제점을 조사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그리고 대한체육회와 대한축구협회는 마땅히 국내 법률을 준수해야 합니다. 그러면 FIFA 정관에 나오는 '간섭'과 IOC 올림픽 헌장에 있는 '정치적 압력'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IOC와 FIFA가 제재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잣대는 과연 무엇일까요?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A 씨의 분석은 이렇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정부가 스포츠단체의 인사권에 개입하는 것이다. 정부가 인사권에 직접 개입한다고 판단할 경우 IOC나 FIFA는 가차 없이 제재의 칼을 빼 들 것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 문체부 장관이 어느 스포츠단체 특정 인사에 대해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는 식의 개인적 평가를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이런 점에서 유인촌 장관의 최근 발언은 IOC나 FIFA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유인촌 장관 "이기흥 3선-정몽규 4선 승인 안 해" 한국 스포츠 행정을 총괄하는 유인촌 문체부 장관은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이 앞으로 3연임에 성공한다고 해도, 현재 3연임 중인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이 4번째로 회장에 당선된다고 하더라도 승인하지 않겠다"고 강조했습니다. 유인촌 장관이 공공기관인 대한체육회장 취임을 승인할 권한이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대한축구협회장 취임 인준은 대한체육회가 합니다. 이와 관련해 문체부 관계자는 "유인촌 장관이 이기흥 회장, 정몽규 축구협회장을 싸잡아 말하다가 그런 표현을 쓴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정몽규 축구협회장 승인 권한을 유인촌 장관이 직접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대한체육회의 한 관계자는 유인촌 장관의 발언을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한체육회장 선거에서 만약 부정이나 비리가 있을 경우에는 문체부 장관이 당선자에 대해 승인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공명하고 정상적인 선거로 당선된 회장을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승인하지 않으면 직권남용이 된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된다면 법적 소송이 불가피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IOC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대한체육회장과 축구협회장을 문체부 장관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유인촌 장관이 내년 1월 선거를 앞두고 벌써부터 이기흥 회장과 정몽규 회장은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선거 방해 행위로 경찰이나 검찰에 고발될 수도 있는 사안이다."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 이기흥 회장이 체육 정책을 놓고 공개 토론을 하자고 제의하자 유 장관은 "토론을 잘하는 문체부 과장이 나가서 이기흥 회장과 하면 될 것이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하기도 했습니다. 대한체육회장과 대한축구협회장은 유인촌 장관의 부하가 아니고 문체부 공무원도 아닙니다. 또 유인촌 장관이 누구는 안 된다며 해당 단체 회장 선거에 개입할 권한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회장 임기 규정 등이 담긴 현행 대한체육회와 대한축구협회 정관은 모두 문체부가 승인해 준 것이라는 점입니다. 지금 규정으로는 4선이 아니라 10선 이상도 가능한데 그것이 잘못된 정관이라면 이를 승인한 문체부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유 장관은 지금부터라도 스포츠단체의 선거나 인사권에 직접 개입했다는 의혹을 살 만한 발언은 자제해야 한다는 게 많은 체육인들의 목소리입니다. IOC와 FIFA가 유인촌 장관의 입을 계속 주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8월에 막을 내린 파리 올림픽에서 불멸의 업적을 세운 스타가 있습니다. 바로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최중량급(130kg급)에 출전한 쿠바의 미하인 로페스 선수입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을 시작으로 2012년 런던, 2016년 리우, 2020 도쿄, 그리고 이번 2024 파리 올림픽까지 무려 5회 연속 금메달을 거머쥐었습니다.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개인 단일 종목 5연패의 위업을 달성한 것입니다. 로페스는 도쿄 올림픽 이후 은퇴를 선언했다가 파리 올림픽에서 새 역사를 쓰겠다며 현역에 복귀해 불혹을 훌쩍 넘긴 42살의 나이에 대기록을 수립했습니다. '원조 레슬링 전설' 카렐린 세계 레슬링계에는 로페스에 앞서 '원조 전설'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카렐린입니다. 오랫동안 그레코로만형 최중량급의 최강자였습니다. 카렐린은 1967년생으로 로페스보다 15살 위로 정말 경이로운 선수였습니다. 그의 별명은 '영장류 최강'. 그가 얼마나 강한 선수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별명이었습니다. 1987년 20살 때 한 번 패배한 이후 2000년까지 13년 동안 무려 887연승. 1987년부터 은퇴 무대였던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까지 통산 전적이 경이적인 887승 2패였습니다. 카렐린은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당시 21살로 소련 선수단의 개회식 기수를 맡았습니다. 서울에서 그는 5전 전승으로 우승했는데 압도적인 기량으로 전 세계에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각인시켰습니다. 결승에서 불가리아의 게로프스키를 5대 3으로 물리치고 우승했는데 이 경기에서 3실점 한 이후 2000년 시드니 올림픽까지 무려 12년 동안 단 1실점. 1993년부터는 7년간 무실점 행진을 질주했습니다. 키 192cm, 몸무게 130kg. 골리앗을 연상시키는 카렐린 앞에 서면 상대 선수는 주눅이 들어 힘 한번 못 쓰고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주무기는 일명 '카렐린 리프트'로 불리는 '안아 넘기기'(상대 엉덩이를 손으로 감싸 뒤로 넘기는 기술)이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카렐린의 전성기가 활짝 열렸습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까지 석권하며 3연패. 특히,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는 5경기 중 4경기에서 폴승을 거뒀습니다. 세계선수권은 1989년부터 1999년 대회까지 9번 우승. 유럽선수권은 1988년부터 2000년까지 12회 우승을 기록했습니다. 어깨 수술 이후 출전했던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때는 홈 관중의 일방적인 응원을 받은 미국의 매트 가파리를 결승에서 1대 0으로 누르고 우승했습니다. 당시 카렐린은 어깨 수술 여파로 최상의 컨디션이 아니었고 갈비뼈까지 다쳐 결승에서는 한 손만 사용하며 경기에 나섰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파리는 내심 승리를 기대했지만 카렐린의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가파리는 동시대에 활약한 카렐린 때문에 비운을 겪어야 했습니다. 미국 국내 선수권에서 7차례나 우승하며 미국에서는 독보적인 1인자였지만 국제 무대에서는 카렐린의 벽에 번번이 막혔습니다. 카렐린과 상대 전적 23전 전패. 그래서 메이저 대회 우승 한 번 없이 올림픽 은메달 1개, 세계선수권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에 머물렀습니다. 얼마나 벽을 느꼈는지 가파리가 남긴 유명한 명언은 이것이었습니다. "카렐린을 이기려면 고릴라에게 레슬링을 가르쳐라." '카렐린 천하' 막 내리게 한 미국 목축업자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이때도 대회를 앞두고 카렐린의 우승에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결승까지는 순항했습니다. 그런데 결승에서 올림픽 역사상 최대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결승 상대는 미국의 룰론 가드너. 카렐린은 3년 전이었던 1997년 세계선수권 준결승에서 가드너에게 5대 0으로 승리했기 때문에 금메달이 유력한 상황이었습니다. 카렐린은 2피리어드 스탠딩 상황에서 먼저 그립을 풀고 다시 잡았는데 이게 반칙으로 인정돼 벌점 1점을 받았습니다. 개정된 규정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후 가드너는 카렐린의 공세를 끝까지 버텨내 1대 0 승리하며 최대 이변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마지막 4초를 남기고는 카렐린도 패배를 받아들이고 더 이상 공격을 하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카렐린으로서는 1987년 이후 무려 13년, 888전 만의 뼈아픈 패배이었습니다. 이 대회 이후 카렐린은 33살의 나이에 은퇴한 뒤 정계에 진출했습니다. 거함 카렐린을 침몰시킨 가드너의 이력이 독특했는데 그는 미국 와이오밍주 출신 목축업자로 소와 레슬링하는 것이 취미였고, 이를 통해 엄청난 힘을 키웠습니다. '올림픽 5연패 신화' 로페스 쿠바의 미하인 로페스는 1982년생으로 카렐린보다 15살 어렸습니다. 키 196cm, 몸무게 130kg으로 키는 카렐린보다 4cm 정도 컸습니다. 첫 올림픽 출전은 2004년 아테네 대회였는데 이때는 8강에서 탈락했습니다. 2005년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올림픽 성적만 놓고 봤을 때는 카렐린을 능가합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을 시작으로 2012년 런던, 2016년 리우, 2020 도쿄, 그리고 이번 2024 파리 올림픽까지 무려 5연패를 달성하며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개인 단일 종목 5연패라는 신화를 썼습니다. 2012년 런던, 2016년 리우, 2020 도쿄 올림픽 때는 전 경기 무실점으로 우승했고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도 4경기에서 20득점 2실점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파리 올림픽 1차전에서 우리나라의 이승찬 선수를 7대 0으로 물리쳤고, 결승에서는 칠레의 야스마니 아코스타(36세)를 6대 0으로 누르고 우승했습니다. 아코스타는 원래 쿠바 태생으로 로페스의 훈련 파트너를 9년 동안 한 선수로 로페스의 벽에 막혀 국가대표의 기회를 얻지 못하자 칠레로 귀화했습니다. 로페스는 파리 올림픽 우승 직후 감동적인 세리머니를 펼쳤습니다. 매트에 입을 맞춘 뒤 레슬링화를 벗어 매트 위에 올려놓고 관중의 기립 박수 속에 퇴장하며 완전한 은퇴를 알렸습니다. 로페스는 세계선수권에서는 5회 우승(2005년, 2007년, 2009년, 2010년, 2014년)과 3회 준우승(2006년, 2011년, 2015년)을 차지했습니다. 카렐린 vs 로페스 누가 더 강한가? 로페스가 올림픽 5연패 위업을 달성하자 이른바 'GOAT'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올림픽 기록과 세계 최강 자리를 지켰던 기간 즉, 롱런을 놓고 봤을 때는 로페스가 앞섭니다. 카렐린은 12년, 로페스는 19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계선수권 우승 횟수(카렐린 9회, 로페스 5회), 통산 경기 전적을 놓고 봤을 때는 카렐린(887승 2패)이 우위입니다. 두 선수를 모두 상대해 봤던 미국 가드너 선수의 말에 따르면 "둘 다 훌륭한 선수이지만 그래도 카렐린이 더 강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가드너는 말년의 카렐린. 그리고 초년의 로페스를 상대했는데 카렐린은 상대 선수를 끌어안는 긴 팔과 탁월한 유연성이 강점이고 로페스는 상체가 넓어서 상대 선수가 감싸안기가 어렵고 유연성이 좋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카렐린과 로페스,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130kg급 절대 강자였던 두 선수는 서로 다른 시대에 활약해서 맞대결은 없었습니다. 사진 : 게티이미지, 연합뉴스
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스포츠 대회에서 한 번 내려진 판정이 번복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최고의 무대 올림픽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 2024 파리 하계올림픽 기계체조에서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판정이 뒤집혀지는 아주 보기 드문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동메달의 주인공이 두 번이나 바뀌며 희비가 크게 엇갈렸습니다. 올림픽 사상 전대미문의 사건이라 할 만한 판정 번복의 여진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논란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웃은 루마니아 바르보수 파리 올림픽 기계체조 여자 마루운동의 강력한 우승 후보는 미국의 체조 여왕 시몬 바일스. 여자 체조의 꽃으로 불리는 마루운동은 그의 주 종목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선 1위로 결선에 진출한 바일스는 결선에서 실수를 범하며 은메달에 머물렀습니다. 금메달은 예선을 2위로 통과한 브라질의 레베카 안드라드에게 돌아갔습니다. 이런 가운데 루마니아의 안나 바르보수와 미국의 조던 차일스 선수가 동메달을 놓고 경쟁하게 됐습니다. 바르보수가 먼저 경기를 했는데 13.700점을 얻으며 안드라드, 바일스에 이어 3위에 자리했습니다. 마지막 9번째 순서로 나선 차일스가 연기를 마치자 다들 초조하게 점수 발표를 기다렸습니다. 차일스의 점수에 따라 최종 순위가 결정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내 차일스의 점수가 발표됐는데 13.666점으로 5위였습니다. 동메달이 확정된 바르보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환호하고 기뻐했습니다. 차일스가 동메달리스트, 바르보수는 4위로 변경 바르보수가 루마니아 국기를 들고 세리머니를 하려던 순간 정말 예상치 못한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장내가 술렁이면서 전광판의 순위가 뒤바뀌었습니다. 세리머니를 하던 바르보수는 돌아서서 전광판을 확인하고 또다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5위였던 차일스가 3위로 올라섰고, 자신은 4위로 내려앉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바르보수는 루마니아 국기를 손에서 떨어뜨린 뒤 아쉬움의 눈물을 펑펑 흘렸습니다. 이와 반대로 1분 만에 5위에서 갑자기 동메달의 주인공이 된 차일스는 팀 동료 바일스와 얼싸안으며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차일스가 동메달을 차지했던 이유는 차일스 점수 발표 직후 미국 코치진이 판정에 이의를 제기해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심판들이 차일스의 난도 점수를 낮게 잘못 채점했다는 것을 파악한 뒤 바로 항의하자 심판진도 이를 받아들여 차일스의 난도 점수를 0.1점 올렸습니다. 그 결과 차일스의 점수가 13.666점에서 13.766점으로 오르면서 바르보수를 0.066점 차로 제치고 동메달을 획득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상식까지 치렀는데 여기서 명장면이 나왔습니다. 시상대에 오른 2위 바일스, 3위 차일스 두 명의 미국 선수들이 금메달을 차지한 안드라드에게 무릎을 굽히고 존경을 표하는 축하 세리머니를 펼친 것입니다. 역대 올림픽 체조 종목에서 남녀 선수를 통틀어 흑인 선수 3명이 1, 2, 3위를 차지한 건 처음이어서 더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루마니아의 반격, CAS에 제소 판정 번복으로 3위에서 4위로 내려앉은 바르보수의 조국 루마니아는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마르첼 치올라쿠 루마니아 총리는 SNS를 통해 국제체조연맹(FIG)의 순위 변경을 공개 비판하며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그는 루마니아 선수단이 파리 올림픽 폐회식에 불참할 것이라고 밝히며 분노를 드러냈고 루마니아 체조협회는 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제소했습니다. 하지만 전망은 그리 밝지 않았습니다. CAS에 제소해도 판정이 번복된 사례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남자 기계체조 개인종합 양태영. 당시 심판들이 난도 점수를 0.1점 낮게 잘못 채점하는 바람에 원래는 금메달이었는데 3위로 내려앉았습니다. 당시 국제체조연맹도 오심을 인정하고 해당 심판에게 징계까지 내렸지만 판정 번복은 절대 안 된다고 버텼습니다. 정말 억울하고 황당한 경우를 당한 대한체육회는 CAS에 제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기각 이유는 이랬습니다. "경기 종료 전에 이의 제기를 했어야 했는데 경기 종료 후에 늦게 제기했다. 경기가 끝나고 나중에 밝혀진 심판 실수는 경기 결과를 뒤집을 근거가 될 수 없다." 한마디로 이의 제기를 늦게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단 4초 차이로 갈린 동메달의 주인공 루마니아는 20년 전 양태영 사건을 떠올렸습니다. 양태영이 억울했어도 이의 제기를 늦게 하는 바람에 판정 번복이 안 됐다는 점을 활용한 것입니다. 루마니아는 미국의 이의 제기가 규정보다 늦게 이뤄졌다는 점을 들고나왔습니다. 국제체조연맹(FIG) 규정(8.5조)을 보면 차일스처럼 마지막 순서로 나선 선수의 경우 이의 제기는 전광판에 점수가 발표된 후 1분 안에 이뤄져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루마니아는 미국 측이 정확히 1분 4초가 지나서 이의 제기를 했다고 주장했는데 결국 CAS는 루마니아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CAS는 판결문에서 "국제체조연맹 규정에 따르면 심판 판정에 따른 이의 제기는 판정 이후 1분 안에 이뤄져야 한다. 미국은 1분의 시간이 지난 뒤 이의를 제기했기에 무효"라고 밝혔습니다. 그러자 미국 체조협회에서는 47초 만에 이의를 제기했다고 주장하며 동영상 자료까지 제출하면서 항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CAS는 올림픽 공식 타임키퍼인 오메가의 협조로 미국 측이 1분에서 4초 지난 시점에 이의를 제기했다는 '명백한 증거'를 들어 미국 측의 항소를 기각했습니다. 차일스는 동메달 반납, 바르보수는 셀프 시상식 CAS의 판결에 따라 국제체조연맹도 최종 순위를 원래대로 다시 돌려놓았습니다. 바르보수 3위, 차일스 5위. 6일 만에 판정이 다시 번복된 것입니다. 두 선수의 희비도 다시 한 번 엇갈렸습니다. 차일스는 동메달을 목에 걸고 이미 미국으로 귀국한 뒤였는데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차일스에게 동메달을 반납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차일스는 자신의 SNS를 통해 "할 말이 없다. CAS의 판결은 부당하며 나뿐 아니라 내 여정을 지지해 준 모든 이들에게 엄청난 타격"이라며 반발했습니다. 반면, 바르보수는 루마니아에서 자신만을 위한 시상식을 갖고 동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활짝 웃으며 자신을 위해 싸워준 루마니아 체조협회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경기가 끝난 지 12일 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안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차일스는 지난 9월 16일 스위스 연방대법원에 항소했습니다. CAS의 판결이 부당하고 공정하지 못했다며 동메달은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차일스는 이의 제기가 1분 안에 이뤄졌다는 것을 입증하는 새로운 음성 자료를 증거물로 제출했습니다. 그리고 판결을 주도했던 CAS 중재위원장(Hamid Gharavi)이 10년 동안 루마니아의 변호인으로 활동했던 전력을 들어 심각한 '이해 충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스위스 연방대법원의 결정이 내려지면 더는 번복이 불가능합니다. 만약 스위스 연방대법원이 차일스의 손을 들어준다면 스포츠 역사상 최초로 판정이 3번 바뀌게 됩니다.
이번 2024 파리 하계올림픽은 1924년 이후 100년 만에 다시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올림픽입니다. 1900년에 첫 번째 올림픽을 치렀기에 이번이 파리로서는 세 번째 개최하는 올림픽입니다. 지금까지 하계올림픽을 3차례 개최한 도시는 영국 런던(1908년, 1948년, 2012년)이 있습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도 1932년과 1984년에 이어 오는 2028년에 세 번째 올림픽을 치르게 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올림픽을 정확하게 100년 만에 다시 개최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최근 프랑스 정치 상황이 어지러운 데다 테러 위험, 무더위 등 여러 불안 요소들이 있지만, 파리로서는 그야말로 뭔가 보여주겠다며 단단히 벼르고 있습니다. '흑역사'로 남은 1900 파리 올림픽 1896년 제1회 아테네 올림픽에 이어 1900년 2회 올림픽이 파리에서 열렸습니다.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바로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였던 프랑스인 피에르 드 쿠베르탱. 1회 올림픽을 고대 올림픽 발상지 아테네서 개최한 뒤, 두 번째 대회를 쿠베르탱 자신의 조국인 프랑스 파리에서 치르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올림픽은 역대 최악의 올림픽으로 꼽힐 정도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비둘기 사격' 금메달리스트 레온 드 룬덴 이때 별의별 기상천외한 종목들이 많았는데 예를 들어 '살아있는 비둘기 사격'(live pigeon shooting), '대포 쏘기', '인명구조' 등이 그것입니다. 이 종목들은 너무 잔인하고 위험하다는 혹평을 받으며 이때 딱 한 번 하고 폐지됐습니다. 특히 '살아있는 비둘기 사격' 종목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이벤트였습니다. 벨기에의 레온 드 룬덴이 비둘기 21마리를 명중시켜 1마리 차이로 2위를 제치고 금메달을 차지했는데 비둘기의 비명 소리와 함께 그 피가 경기장에 흘러넘쳐 그야말로 '목불인견'이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쿠베르탱 IOC 위원장으로서도 1900년 파리 올림픽은 본인의 '흑역사'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이를 만회하기 위해 24년 후인 1924년 파리에서 올림픽을 다시 유치했는데 쿠베르탱이 IOC 위원장으로 마지막으로 개최한 대회이기도 합니다. 첫 라디오 중계와 선수촌 첫 개장 1924 파리 올림픽 당시 선수촌. 사진 : 게티이미지 1924년 파리 올림픽은 올림픽 역사상 최초의 기록들을 여러 가지 남겼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최초로 올림픽 선수촌을 건설했다는 점입니다. 파리 올림픽 주경기장이었던 '스타드 올랭피크 이브 뒤 마누아르' 경기장 근처에 목조 오두막을 지어 전용 선수촌으로 사용했습니다. 수도 시설도 갖춰져 있었고, 우체국, 신문 판매점, 환전소, 미용실, 식당 등이 함께 있었습니다. 이 대회에서는 최초로 라디오 생중계도 이뤄졌습니다. 올림픽 취재를 공식적으로 허가받은 기자 724명이 경기 상황을 전했는데 대부분 해외에서 온 기자였습니다. 이는 올림픽의 인기와 전 세계적인 관심이 높아졌다는 증거이었습니다. 최초의 올림픽 주경기장도 건설됐습니다. 1924년 파리 올림픽 주경기장이었던 '스타드 올랭피크 이브 뒤 마누아르'는 이후 프랑스에서 열린 1938년 FIFA 월드컵 결승전이 열린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몇 차례 개보수를 거쳐 이번 올림픽에선 하키 경기장으로 사용될 예정입니다. 또, 최초의 50m 규격 수영장인 '투렐 수영장'이 지어졌는데 이번 올림픽에서는 수영 선수들의 훈련 장소로 이용됩니다. 최초의 폐회식이 열린 대회도 1924년 파리 올림픽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지금과 비슷한 폐막식 형식을 갖추게 됐는데 IOC 깃발, 1896년 제1회 올림픽 개최국 그리스의 국기와 더불어 개최국인 프랑스와 다음 개최국인 네덜란드의 국기가 나란히 게양되는 행사가 진행됐습니다. 1924 파리의 추억 '불의 전차' 영화 '불의 전차' 중 해변 달리는 장면 1981년 제작된 영국 영화 '불의 전차'(Chariot of Fire)는 지금까지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됩니다. 1982년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 음악상, 각본상, 의상상 등 4관왕을 차지했는데 특히 선수들이 해변을 달리는 장면에 깔린 음악, 즉 반젤리스가 작곡한 선율은 영화사에 명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조금 각색됐지만 이 영화는 바로 1924년 파리 올림픽에 출전했던 두 전설적인 영국 육상 선수 에릭 헨리 리델과 해럴드 에이브러햄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해럴드 에이브러햄스. 사진 : 게티이미지 에이브러햄스는 100m 결승에서 10.6초의 기록을 세우며 먼저 금메달 획득한 뒤 400m 계주에서도 활약하며 영국에 은메달을 선사했습니다. 에이브러햄스는 1년 뒤 다리 골절로 은퇴했는데 이후 언론계로 전향해 BBC 라디오의 올림픽 해설자가 됐습니다. 에릭 리델. 사진 : 게티이미지 에이브러햄스의 영국 국가대표 동료였던 리델은 종교적인 이유로 주종목 100m 결승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습니다. 리델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경기가 일요일에 열려 출전을 포기한 것입니다. 이후 리델은 200m에서 동메달을 획득했고 이틀 뒤 400m 결승에 출전했습니다. 자신의 주종목이 아니어서 우승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47초 6의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따내는 신화를 썼습니다. 하지만 파리 올림픽 이후 리델의 인생은 기구했습니다. 에든버러 대학 졸업 후 1925년 23살의 나이에 복음을 전하겠다며 중국으로 갔는데 톈진에서 12년, 산둥반도에서 7년 동안 선교사로 활동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진 다음 일본군의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1945년 2월, 43살의 나이에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에이브러햄스와 리델 두 선수의 이야기는 1981년 영화 '불의 전차'로 소개되며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이 영화는 엄청난 인기를 끌며 여러 패러디도 탄생시켰습니다. 영화상에서 에이브러햄스가 대학 교정에서 동료 학생들의 응원 속에 1대1 달리기 대결을 하는 명장면이 있는데 이것을 훗날 영국의 전설적인 육상 스타 세바스찬 코(현재 국제육상경기연맹 회장)와 스티브 크램 육상 중장거리의 라이벌 두 선수가 1988년 케임브리지대학 교정에서 그대로 재연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영화 '불의 전차'를 대표하는 최고의 명장면이 해변 달리기인데 이것을 2012년 런던 올림픽 개회식 때 '미스터 빈'으로 유명한 영국 코미디언 로완 앳킨슨이 익살스럽게 재연했습니다. 미스터 빈이 키보드를 연주하다 잠깐 상념에 빠졌는데, 본인이 해변 달리기 장면의 주인공이 되어 선수들과 나란히 달리는 장면이 나와 큰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습니다. 슈퍼스타 누르미 - 타잔 배출 영화 '타잔'에 출연한 와이즈뮬러 그 유명한 영화 '타잔'의 주인공도 1924년 파리 올림픽 스타였습니다. 미국의 수영 선수 조니 와이즈뮬러는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 자유형 100m, 400m, 800m 계영 금메달을 따내며 3관왕에 올랐고 수구 경기에도 출전해 동메달을 획득했습니다. 4년 뒤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도 자유형 100m와 800m 계영에서 우승하는 등 당시 최고 수영 스타였습니다. 영화계가 그의 수려한 외모와 수영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에 주목하자 와이즈뮬러는 1929년 영화계에 발을 들였고, 3년 뒤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1932년 영화 '유인원 타잔'의 주인공으로 나와 슈퍼스타가 됐습니다. 그래서 올림픽 수영 금메달리스트 와이즈뮬러보다 타잔으로 훨씬 더 많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됐습니다. 영화 '타잔'은 그 이후로도 여러 버전들이 개봉했고,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핀란드 육상 영웅 파보 누르미. 사진 : 게티이미지 최고의 육상 스타로 꼽히는 핀란드의 육상 영웅 파보 누르미도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 배출됐습니다. 그는 이 대회 1,500m, 5,000m, 3,000m 단체, 크로스컨트리 1만m 개인·단체 등 5종목을 휩쓸었는데 이때가 누르미의 전성기이었습니다. 특히, 1,500m와 5,000m를 같은 날에 제패하는 신화를 만들었습니다. 1,500m에서 올림픽 신기록(3분53초6)으로 우승한 누르미는 1시간 30분 뒤 5,000m에도 출전했는데 이번에도 올림픽 신기록(14분31초2)으로 정상에 올랐습니다. 올림픽에서 1,500m와 5,000m 동시 제패는 오랜 기간 불멸의 기록이었는데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모로코의 히참 엘 게루즈가 80년 만에 이를 재현했습니다. 누르미는 1920년 안트베르펜부터 1928년 암스테르담까지 3차례 올림픽에서 금메달 9개를 목에 걸었습니다. 3년 전 도쿄 올림픽 폐회식 때 차기 개최지 파리를 소개하는 동영상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파리에서 이원 생중계로 공연을 펼쳤는데 파리의 상징 에펠탑에 가로 90m, 세로 60m의 대형 파리 올림픽 깃발이 휘날리는 모습이 특히 눈길을 끌었습니다. 전투기들이 프랑스 국기를 상징하는 파란색, 흰색, 빨간색을 뿜어내며 장관을 연출하는 등 한 편의 영화 같은 '파리 초청장'이어서 도쿄 올림픽 폐회식의 진짜 주인공이었다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번 파리 올림픽은 역대 최초로 개회식을 주경기장 밖에서 치릅니다. 파리를 가로지르는 센강에서 참가국 선수들이 배를 타고 6km를 전진하는 수상 행진을 펼치는 등 독특하고 혁명적인 개회식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경기장도 역사적인 명소에 설치했습니다. 에펠탑 광장에서 비치 발리볼 경기가 열리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승마와 근대 5종 경기가 벌어집니다. 역사적 건축물이자 박물관인 그랑 팔레에서 펜싱과 태권도 경기가 치러지는 등 역사, 문화 유적과 스포츠를 결합한 프랑스만의 독창적인 대회 운영 방식이 화제입니다. 이미 100년 전인 1924년에 숱한 스토리를 낳았던 파리가 이번엔 어떤 올림픽 전설을 만들어낼지 자못 기대가 모아집니다.
올림픽과 월드컵을 비롯한 주요 국제 대회에서는 경기 전과 시상식에서 출전국의 국가를 연주하고 국기를 게양합니다. 그런데 이 모두가 사람이 하는 일이라 주최 측 실수로 엉뚱한 국가와 국기가 나와서 당사자들이 매우 당황한 사례들이 꽤 있었습니다. 대부분 단순 실수로 일어난 일이어서 주최 측에서 사과하는 선에서 마무리되기도 했지만, 어떤 경우는 파문이 커져서 개최국의 총리까지 나서서 사과하기도 했습니다. 애국가 대신 2회 연속 스페인 국가 1994년 미국 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에서 대한민국과 스페인과 대결했습니다. 당시 한국 대표팀에는 황선홍, 홍명보, 김주성, 고정운 등 스타들이 즐비했습니다. 그런데 경기 시작 전 국가 연주 때 일이 벌어졌습니다. 미국 댈러스 코튼보울 스타디움에서 경기가 열렸는데 먼저 스페인 국가가 연주됐습니다. 당시 스페인은 간판 공격수 살리나스, 그리고 현재 이강인의 소속팀 파리 생제르맹 감독인 루이스 엔리케, 스페인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던 페르난도 이에로, 당시 주장이었던 미구엘 앙헬 나달(스페인 테니스 스타 라파엘 나달의 삼촌) 등등 호화 멤버를 자랑했습니다. 스페인 국가 '왕의 행진곡' 연주는 정상적으로 끝났습니다. 이제 우리나라 애국가가 연주돼야 하는데 엉뚱한 음악이 나왔습니다. 들어보니까 방금 전 연주됐던 스페인 국가를 다시 연주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선수들은 당연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애국가 연주 때 하는 '국기에 대한 경례'도 할 수 없었고 관중석에 있었던 우리 관중들도 표정이 안 좋았고, 이렇게 스페인 국가가 다시 한 번 울려 퍼졌습니다. 잘못된 국가 연주가 끝나자 우리로서는 기분이 몹시 찜찜했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주최 측에서 곧바로 실수를 인지하고, 바로 제대로 된 애국가를 연주했습니다. 이때 인상적이었던 게 당시 댈러스 코튼보울 스타디움에 우리 응원단도 많이 왔는데 큰 목소리로 애국가를 함께 제창하며 한국 선수들에게 힘을 불어 넣어주었습니다. 우리 선수들도 당연히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고, 이렇게 애국가 연주가 마무리됐습니다. 그러니까 국가 연주를 원래는 2번 하는 건데, 주최 측 실수 때문에 3번을 하는 해프닝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런 예기치 못한 소동을 겪었지만 우리 선수들은 스페인을 상대로 멋진 경기를 펼쳤습니다. 후반에 먼저 2골을 내줘 패색이 짙었지만 후반 40분 이후 홍명보와 서정원이 두 골을 몰아치며 극적인 2대 2 무승부를 거뒀습니다. 2018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U-19 아시아 축구 챔피언십 우리나라와 요르단의 조별리그 경기 때는 우리 애국가 대신 북한 국가가 나오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우리 대표팀 코칭스태프가 곧장 항의하자 주최 측은 북한 국가를 중간에 끊고 다시 애국가를 틀었습니다. 대한축구협회가 아시아축구연맹(AFC)에 공식 항의하자, AFC는 사과했습니다. 우리 축구 대표팀의 공식 국제 경기에서 애국가 대신 북한 국가가 나오는 사고가 벌어진 건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출전도 하지 않은 칠레 국가 연주 우리나라에서 열린 국제 대회에서도 이와 같은 실수가 있었습니다. 2017년 수원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FIFA U-20 월드컵 우루과이와 일본의 조별리그 경기. 경기 전 국가 연주 때 우루과이가 아닌 칠레 국가가 연주된 것입니다. 심지어 칠레는 이 대회에 출전하지도 않았습니다. 칠레 국가가 연주되자 우루과이 선수들은 모두 어리둥절하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어? 이게 아닌데?', '이게 뭐지?'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선수들이 동요하자 한 선수가 나서서 "자, 자, 자, 중요하지 않아" 이렇게 말하며 동요하지 말라고 진정시켰습니다. 그러자 다른 선수도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야", "자, 자, 집중하자고!" 이렇게 말하며 마음을 다잡는 모습이었습니다. 벤치의 코칭스태프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우루과이 관중도 당황했습니다. 관중석에서 야유하는 소리도 들리는 가운데 엉뚱한 칠레 국가 연주가 끝났습니다. 이어서 상대팀 일본 국가는 제대로 연주됐습니다. 실수를 인지한 주최 측은 일본 국가 연주가 끝나자 곧바로 제대로 된 우루과이 국가를 연주했습니다. 이때 일본 국가 연주가 끝나고 평소처럼 양 팀의 대형 국기를 든 진행요원들이 퇴장했습니다. 그런데 우루과이 국가를 다시 연주한다는 얘기를 듣고 우루과이 국기를 든 진행요원들은 퇴장하다 말고 다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FIFA 관계자가 우루과이 벤치로 가서 우루과이 국가 연주를 다시 하겠다고 말해줬습니다. 장내 아나운서는 "재생 오류로 인해 우루과이 국가 연주를 다시 한번 재생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방송했습니다. 이렇게 제대로 자국 국가가 연주되자 우루과이 선수들은 힘차게 국가를 따라 불렀습니다. 우루과이 국가 연주가 끝나자 선수들은 파이팅을 외치고, 우루과이 관중도 박수치며 환호했습니다. 우루과이로서는 경기 전부터 언짢은 일을 당했지만 경기에서는 2대 0으로 승리하며 2연승으로 16강 진출을 확정했습니다. 북한 선수 소개하면서 태극기 표시 2012년 런던 올림픽 여자 축구 조별리그 북한과 콜롬비아의 1차전, 경기 시작 20분 정도 앞두고 정말 큰 사달이 났습니다. 북한 선수를 소개할 때 인공기가 아닌 태극기가 전광판에 표시된 것입니다. 이를 본 북한 선수들은 몸을 풀다 말고 경기장을 나갔습니다. 북한팀 관계자는 강하게 항의하며 경기를 거부했습니다. 조직위가 바로 전광판에 인공기를 띄우며 사태 수습에 나섰지만, 북한 선수들이 계속 경기장 입장을 거부하면서 경기 시작이 지연돼 관중과 기자들은 하염없이 북한 선수들의 입장을 기다렸습니다. 결국 경기는 예정보다 1시간 5분이나 늦게 가까스로 시작됐고 북한이 2대 0 승리를 거뒀습니다. 신의근 당시 북한 여자 축구 대표팀 감독은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다시 항의했습니다. "대표팀 경기에서 국기가 잘못 표기된 것은 대단히 큰 문제다. 이 문제가 완벽히 해결되지 않으면 경기장에 끝까지 나가지 않으려고 했다. 다행히 전광판의 실수가 바로잡혔고, 비록 시간이 걸리긴 했어도 대회 조직위원회와 국제축구연맹에서 사과의 뜻을 전해와 경기에 나가기로 결정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조직위 측에 경고하며, "우리 선수들이 다른 나라에서 온 것처럼 보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이 북한의 국기 소동은 현지에서 큰 이슈가 됐습니다. 이 소동은 영국 주요 방송과 일간지에 크게 보도되는 등 당시 큰 파문이 일었습니다. 런던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명백한 실수였다며 북한 선수단에 공식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고 대회 조직위는 우리 한국 선수단에도 인공기 대신 태극기를 잘못 게시했다고 사과 공문을 보내왔습니다. 자크 로게 당시 IOC 위원장도 이러한 실수가 벌어진 데 대해 유감의 뜻을 표명했고 데이비드 캐머런 당시 영국 총리까지 나서 사과의 뜻을 밝히고 재발 방지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여자 축구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이틀 뒤 개회식이 열렸습니다. 개회식 때 북한 선수단은 '태극기 소동'을 의식한 듯 보란 듯이 대형 인공기를 펼쳐 들고 입장했습니다. 참가국 가운데 유일하게 두 개의 대형 국기를 들고 입장한 것입니다. 맨 앞에서 기수 박성철(마라톤)이 조직위에서 제공한 인공기를 힘차게 휘둘렀고, 바로 뒤 선수단 한가운데에서 더 큰 인공기를 펼쳐 들었습니다. 입장이 끝난 뒤에도 북한 선수단은 인공기를 계속 흔들었습니다. 이틀 전 여자 축구 경기에서 태극기가 북한 국기로 잘못 게시된 사건을 의식해 인공기를 강조한 시위로 해석됐습니다. 그런데 이 북한 선수단 입장 사진이 IOC 트위터에 '팀 코리아(Team Korea)'로 소개돼 또 문제가 됐습니다. '팀 코리아'는 대한체육회가 정한 우리 한국팀의 공식 명칭입니다. 즉, IOC가 북한을 한국 선수단 공식 명칭인 '팀 코리아'로 소개한 것이어서 인터넷상에서 또 논란이 됐습니다. '한국의 김지연'을 '북한의 김지연'으로 소개 2012 런던 올림픽 펜싱에서는 정말 사고가 많았습니다. 여자 펜싱 신아람의 이른바 '1초 오심' 파동을 비롯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 연이어 터져 나왔습니다. 펜싱 여자 사브르 개인전에서 우리나라의 김지연 선수가 결승에서 이겨 금메달을 확정하자 경기장 장내 아나운서는 실수로 '북한의 김지연'이라고 크게 소리쳤습니다. "김지연! The People's Republic of Korea takes the gold medal"이라고 방송한 것입니다. 정확히 북한의 공식 명칭은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DPRK)'이고, 우리 대한민국은 'Republic of Korea(ROK)'인데 이를 혼동해서 장내 아나운서가 'The People's Republic of Korea'라고 말한 것입니다. 장내 아나운서는 곧바로 실수를 깨닫고 "김지연! The Republic of Korea takes the gold medal"이라고 정정해서 다시 방송한 뒤 사과를 하기도 했습니다. 오는 7월 26일 지구촌 축제 2024 파리 하계올림픽이 막을 올립니다. 이번 올림픽에서는 이런 웃지못할 해프닝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란 축구 대표팀의 카를루스 케이로스 감독은 지난 2013년 6월 울산에서 열린 2014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경기에서 한국 벤치를 향해 이른바 '주먹감자'를 날리는 비신사적인 행동을 저질러 엄청난 비난을 받았습니다. '주먹감자'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공통된 욕입니다. 이 제스처의 명칭은 나라에 따라 다양하지만 '브라 도뇌르'(bras d'honneur, 영광의 팔)라는 고상한 프랑스 이름으로 많이 불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폴란드에서는 '코자키에비치 제스처'라고 합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육상 남자 장대높이뛰기에서 금메달을 딴 브와디스와프 코자키에비치가 자신에게 야유를 퍼부은 소련 관중에게 '주먹감자' 제스처로 앙갚음을 한 것에서 비롯됐습니다. '반쪽 올림픽' 1980 모스크바 하계올림픽 1979년 겨울,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미국을 비롯한 서방 자유 민주주의 국가들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대거 보이콧했고 대한민국도 여기에 동참해 출전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이 보이콧했던 유일한 올림픽이었습니다. 모스크바 올림픽은 그래서 '반쪽 올림픽'으로 치러졌습니다. 폐쇄적인 분위기 속에 열린 이 대회는 특히 육상 종목에서 개최국 소련을 밀어주기 위한 노골적인 편파 판정이 이뤄져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육상 종목에 걸린 금메달 38개 중에서 소련이 가장 많은 15개를 가져갔고 동독이 11개로 뒤를 이었습니다. 당시 소련은 자국에서 열린 올림픽을 이용해 소련의 힘을 전 세계에 과시하려고 했는데 메달 순위에서도 소련은 금메달 80개로 압도적으로 종합 우승을 차지했고 2위는 동독(금메달 47개)이었습니다. 황당한 세단뛰기 편파 판정 최악의 편파 판정은 육상 남자 세단뛰기에서 벌어졌습니다. 이때 소련 선수 2명(야크 우드매에, 빅토르 사네예프)과 브라질(올리베이라), 호주(이안 캠벨) 선수가 우승을 다투던 상황이었습니다. 사네예프는 당시 나이 35살로 베테랑. 1968년, 1972년, 1976년 올림픽에서 세단뛰기 3회 연속 우승을 달성해 이 대회에서 4연패에 도전하고 있었습니다. 우드매에는 당시 26살로 올림픽에 처음 출전했습니다. 올리베이라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동메달, 1979년 육상 월드컵에서 금메달을 따낸 선수로 당시 세단뛰기 세계 기록(17m 89) 보유자이기도 했습니다. 이안 캠벨은 23살 신예로 1979년 육상 월드컵 동메달을 획득한 떠오르는 유망주였습니다. 호주의 이안 캠벨 그런데 심판들이 올리베이라와 캠벨에게 연이어 실격 판정을 내렸습니다. 세단뛰기에서 실격 판정을 받는 경우는 대부분 구름판을 넘어가서 밟을 때인데, 이때는 이것 말고도 'SCRAPE FOUL'이라는 것을 적용했습니다. 영어로 SCRAPE는 '긁다, 긁어내다'라는 뜻인데 도움닫기를 할 때 한쪽 발을 바닥에 끄는 행위를 하면 실격 판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육안으로 봐서는 별 문제가 없어 보였는데 심판들은 이들이 발을 끌었다며 실격을 선언했습니다. 이 규정은 이때 크게 논란이 된 이후 폐지됐습니다. 세단뛰기는 모두 6번 뛰어서 가장 잘 나온 기록으로 승부를 가립니다. 그런데 캠벨은 6번의 점프 중에서 무려 5번이 실격이었습니다. 딱 한 번, 2차 시기 16m 72만 기록으로 인정됐습니다. 그런데 실격 처리된 것 중에는 17m 60 정도 뛰었던 점프도 있었습니다. 당시 올림픽 기록이 17m 39였고, 이때 소련 우드매에의 우승 기록이 17m 35인 것을 고려하면 올림픽 신기록에 해당하고 우승까지도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점프가 무효 판정을 받은 것입니다. 캠벨은 결국 5위에 그쳐 메달을 따내지 못했습니다. 올리베이라도 6번의 점프 중에서 4번이나 실격당했습니다. 특히, 캠벨과 올리베이라 두 선수 모두 4차 시기부터 6차 시기까지 3연속 실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올리베이라도 실격 처리된 것 중에 18m가 넘는 세계 신기록도 있었습니다. 올리베이라는 결국 3차 시기에서 기록한 17m 22로 동메달을 얻는 데 그쳤습니다. 호주 언론 보도에 따르면 당시 심판들은 모두 소련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연히 국제육상연맹에서 파견한 제3국 심판들도 있어야 했지만 모스크바 조직위원회는 이들을 모두 철수시켰습니다. 이런 편파 판정 논란 속에 소련 선수 2명이 나란히 1, 2위를 차지했습니다. 우드매에가 17m 35로 금메달, 4연패를 노렸던 사네예프는 17m 24로 은메달을 따냈습니다. 특히 사네예프는 마지막 6차 시기에서 가장 좋은 17m 24를 기록하며, 2위를 달리던 올리베이라에 2cm 차로 역전했습니다. 올리베이라가 4차 시기부터 6차 시기까지 3연속 실격되는 상황에서 역전한 것입니다. 두 소련 선수는 실격 횟수도 2번(우드매에)과 1번(사네예프)에 불과했습니다. 코자키에비치, 소련 관중 향해 '주먹감자' 이렇게 세단뛰기에서 한바탕 판정 파문이 불거지고 6일 뒤에 문제의 남자 장대높이뛰기 결선 경기가 열렸습니다. 논란의 주인공은 폴란드의 브와디스와프 코자키에비치. 경기가 열린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모스크바 올림픽 주경기장, 2018년 러시아 월드컵 개막전과 결승전도 이곳에서 열림)은 7만 관중으로 가득 들어찼습니다. 코자키에비치는 1979년 유럽 실내육상선수권 우승자로 모스크바 올림픽 두 달 전인 1980년 5월에는 5m 72를 넘으며 세계 신기록을 작성했습니다. 코자키에비치는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유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는데 주요 경쟁자는 1980년 유럽 실내육상선수권 챔피언이었던 개최국 소련의 콘스탄틴 볼코프였습니다. 코자키에비치는 결선에서 쾌조의 컨디션으로 순항했습니다. 5m 70까지 5차례의 높이 모두 1차 시기에서 가뿐히 뛰어넘었습니다. 그런데 바를 성공적으로 넘은 이후에 사달이 났습니다. 5m 70 바를 넘고 착지한 다음에 기쁨의 세리머니를 하는데 팔동작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이른바 '주먹감자'를 날리는 동작이었습니다. 이어서 5m 75도 1차 시기에 성공하며 소련의 볼코프(5m 65)를 누르고 금메달을 확정했는데 이때도 관중석을 향해 똑같은 팔동작을 해 보였습니다. 이후 5m 78 세계 신기록에 도전했는데 2차 시기에서 성공한 뒤 환호했습니다. 1920년 안트베르펜 올림픽 이후 처음으로 올림픽 장대높이뛰기 종목에서 세계 신기록을 작성하며 정상에 올랐습니다. 소련 "코자키에비치 금메달 박탈해야" 개최국 소련이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소련과 폴란드 양국의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됐습니다. 소련 정부에서는 코자키에비치가 소련 국민들을 모욕했다며 그의 금메달을 박탈하라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폴란드 정부에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이에 대해 폴란드 측에서는 "코자키에비치가 팔 근육이 아파서 한쪽 손으로 감싸며 세리머니를 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그런 동작이 나온 것"이라고 해명하며 코자키에비치를 감쌌습니다. 결코 '주먹감자'가 아니었다고 부인한 것입니다. 결국 금메달 박탈까지는 안 이뤄지고 넘어갔습니다. 소련은 이후 코자키에비치를 자국 입국 금지자 명단에 올리는 조치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코자키에비치 "일부러 주먹감자 날렸다" 훗날 코자키에비치는 자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당시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소련 관중을 향해 이런 제스처를 했던 것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주먹감자'를 날린 게 맞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그는 "당시 경기장에 7만 관중이 가득 들어찼고, 이 가운데 6만 명 정도가 소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나를 포함해 외국 선수들이 경기할 때마다 휘파람을 불며 야유하고 방해했다. 이들을 향해 나는 이런 식으로 응수한 것이다"고 강조했습니다. 코자키에비치는 또 "게다가 앞서 논란이 됐던 세단뛰기를 비롯해 소련 측의 노골적인 편파 판정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심판과 관중이 모두 외국 선수들에게 적대적인 분위기에 맞서기 위해 이런 식으로 대응했다"고 말했습니다. '주먹감자'의 배경에는 이 선수의 성격도 한몫했는데, 그는 결코 고분고분하거나 순종적이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훗날 폴란드 육상연맹과 대회 출전을 놓고 갈등을 빚고 자격 정지 징계까지 당하자 이에 반발해 1985년 7월 서독으로 망명을 하기도 했습니다. 1980년 당시 미국과 소련의 첨예한 냉전 구도에서 폴란드는 소련의 동구권 위성 국가였습니다. 폴란드 국민들 사이에서는 반소 감정이 컸는데, 코자키에비치의 이런 세리머니는 폴란드 국민들 사이에서 큰 지지를 받았습니다. 당시 서슬 퍼렇던 강대국 소련, 공산권 대장 국가의 수도 한복판에서 감히 이런 제스처를 한 최초의 인물이라며 영웅 대접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폴란드에서는 주먹감자 동작을 그의 이름을 따서 '코자키에비치 제스처'라고 부릅니다. 사진 : 게티이미지
지난 5월 세계유도선수권 혼성 단체전에서 한국 대표팀이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우즈베키스탄과 8강전에서 세 번째 선수 원종훈이 매트에 올라간 뒤 부상을 이유로 기권하면서 팀 전체가 실격패를 당한 것입니다. 국제유도연맹(IJF) 규정에 따르면, 매트에 올라온 선수가 경기를 거부하면 해당 팀은 실격됩니다. 만약 출전 선수가 부상으로 경기에 나서기 어려울 경우 해당 체급을 처음부터 포기하고 1패만 안으면 되는데, 우리 대표팀은 이런 규정을 숙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국제유도연맹(IJF)도 이 규정을 인지하지 못해 경기를 계속 진행하는 촌극이 발생했습니다. 나중에 패자부활전에서 우리에게 패배한 독일이 한국의 규정 위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자 국제유도연맹도 뒤늦게 이를 인지하고 한국을 실격패 처리한 것입니다. 대한유도회는 우리 대표팀의 실수를 인정하고, 감독과 선수에게 경위서를 받았습니다. 처음 도입된 혼성 단체전, 숙적 일본과 8강전 이보다 더 황당했던 사건은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유도 혼성 단체전에서 벌어졌습니다. 유도 혼성 단체전이 아시안게임에 도입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혼성 단체전은 남자와 여자 선수 각각 3명씩 총 6명이 한 팀을 이뤄 상대와 1대 1 매치로 승부를 가립니다. 총 6개의 매치를 진행해 4승을 거두는 팀이 승자가 되고 만약 두 팀이 3승 3패가 될 경우에는 세부 점수를 따지게 됩니다. 당시 한국은 8강에서 숙적 일본과 만났습니다.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나라들의 실력을 고려하면 이 경기가 사실상 결승전이었습니다. 사실상의 결승전, 치열한 승부 우리의 첫 선수인 여자 57kg급 권유정은 타마오키 모모와 경기에서 지도 3개를 받아 반칙패(지도패)를 당했습니다. 두 번째 선수로는 남자팀 에이스인 73kg급의 안창림이 나섰습니다. 상대는 일본의 강호 에비누마 마사시. 에비누마는 2012년 런던, 2016년 리우올림픽 66kg급에서 2회 연속 동메달을 획득한 선수입니다. 그는 런던 올림픽 당시 조준호 선수와 8강에서 대결했는데 이때 조준호가 판정 번복 끝에 억울하게 패배하며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선수입니다. 에비누마는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에는 한 체급 올려 출전했는데 안창림은 연장 시작 9초 만에 시원한 빗당겨치기 한판승을 거뒀습니다. 양 팀의 단체전 스코어는 1대 1. 세 번째 선수인 여자 70kg급 정혜진은 니이조에 사키에게 연장전 골든스코어 한판패를 당해 다시 2대 1로 끌려갔습니다. 네 번째 선수로 남자 90kg급 곽동한이 나섰는데 곽동한은 이 대회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는 고바야시 유스케와 연장 접전 끝에 극적인 안다리걸기 되치기 절반승을 거두며 2대 2로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렸습니다. 이제 5, 6번 두 선수가 남았습니다. 남녀 모두 최중량급. 5번째로 나선 여자 78kg 이상급 김민정은 한국 여자 유도 간판으로 야마모토 사라와 연장 승부를 펼친 끝에 야마모토가 3번째 지도를 받으면서 반칙승(지도승)을 거뒀습니다. 우리가 3대 2로 앞서간 상황에서 등장한 마지막 선수는 남자 100kg 이상급 김성민. 김성민이 이기면 한국이 4대 2로 승리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김성민은 전날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따냈는데 일본 선수(오지타니 다케시)와 준결승에서 오른팔이 꺾이는 부상을 당했는데도 투혼을 발휘하며 금메달을 거머쥐었습니다. 하지만 전날 개인전 어깨 부상 여파와 체력 소모로 단체전 경기에서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 끝에 지도 3개를 받으며 가게우라 고코로에 반칙패(지도패)를 당했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우리 대표팀은 일본과 3대 3 동률을 이뤘습니다. 3대 3으로 끝난 승부, 점수 계산은? 경기 종료 직후 우리 팀은 이겼다는 표정이었습니다. 3승 3패로 동률일 경우에는 세부 점수를 따져 승자를 가리는데 국제유도연맹 규정상 우리가 앞섰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국제유도연맹 규정에 따르면 한판승, 부전승, 기권승은 10점. 절반승은 1점. 지도승은 0점으로 계산하게 돼 있었습니다. 한국은 한판승 1개(안창림)와 절반승 1개(곽동한)를 기록해 10+1=11점이 됐습니다. 일본은 한판승(니이조에 사키) 1개로 10점. 따라서 우리가 11대 10으로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양 팀의 지도승(한국 1개, 일본 2개)은 0점이니까 점수에 플러스가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일본 승리 선언, 한국 격렬한 항의 그런데 한국 대표팀의 계산과는 다르게 심판이 일본팀의 승리를 선언하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우리 코칭스태프가 강력하게 항의했고 선수들도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장내가 술렁이면서 본부석에 경기위원과 심판위원들이 모여서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양 팀 선수들은 매트 위에서 퇴장하지 않고 대기했는데 이렇게 5분 넘게 논의한 끝에 결국 일본의 승리로 다시 최종 선언됐습니다. 우리의 승리로 판정이 정정될 거라고 기대했던 한국 대표팀은 망연자실했습니다. 금호연 감독은 선수들에게 매트에서 내려오지 말고 앉아 있으라고 지시했습니다. 한 번 매트에서 내려오면 판정 번복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일본 선수들은 매트에서 내려와 퇴장하고 우리 선수들만 남아서 매트에 앉아 있는 상황에서 우리 코칭스태프는 본부석에 가서 거세게 항의했습니다. 이렇게 10분 가까이 시간이 흐른 뒤 아시아유도연맹 경기위원장이 판정에 문제가 없다며 우리 선수들에게 퇴장하라고 요구했고 결국 우리 선수들은 퇴장하면서 패배가 확정됐습니다. 하루 전에 바뀐 규정 통보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진 이유는 아시안게임 유도를 주관하는 아시아유도연맹이 국제유도연맹의 규정이 아니라 자체 룰(로컬 룰)을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유도연맹은 "상대 선수의 지도 3개로 이길 경우에는 반칙승이 되고, 반칙승은 부전승으로 간주해 10점을 부여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니까 반칙승은 한판승과 똑같은 10점이라는 것입니다. 이 규정대로 점수를 계산해서 일본이 30점(한판승 1개+반칙승 2개), 한국은 21점(한판승 1개+반칙승 1개+절반승 1개)으로 일본의 30대 21 승리라는 것입니다. 체퀑혼 아시아유도연맹 경기위원장은 SBS와 인터뷰에서 "규정을 갑자기 바꾼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이런 규정이었다. 규정은 명확한데 한국 대표팀이 이해를 잘못한 것 같다. 지도 3개면 반칙승. 반칙승은 한판승과 똑같은 10점을 부여한다"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우리 대표팀은 이런 규정을 사전에 전혀 듣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시아유도연맹은 "단체전 하루 전날 대진 추첨식에서 모든 출전국에게 이런 로컬 규정을 통보했다"고 주장했지만 우리 대표팀은 "이런 규정은 경기 후에 처음 들었다. 주최 측이 이런 사실을 사전에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고 항변했습니다. 당시 금호연 감독은 "만약 우리가 반칙승을 10점으로 매긴다는 룰을 알고 참가했다면 경기 작전 자체가 바뀌었을 것이다. 경기 운영위원들끼리 경기 직후 긴급 회의를 해서 반칙승을 10점으로 처리하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억울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일본 대표팀은 반칙승을 10점으로 인정하는 규정을 사전에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대표팀의 주장과는 달리 곤노 쥰 일본유도연맹 강화위원장은 "경기 전날 대진 추첨 때 아시아유도연맹이 출전국들에게 이러한 규정을 분명히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일본 언론에서도 "한국 측이 규정 해석을 잘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기 전날 대진 추첨 때 규정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준결승 진출에 실패한 우리 대표팀은 동메달 결정전에서 우즈베키스탄을 4대 0으로 꺾고 동메달로 대회를 마감했습니다. 라이벌 한국을 누른 일본은 결국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혼성 단체전 전날 대진 추첨식에 한국 측 관계자도 참석한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 측은 그날 국제유도연맹 규정과는 다른 아시안게임 규정을 전혀 듣지 못했다고 지금까지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아시아유도연맹이 공문을 각국 유도협회로 사전에 발송했거나 대진 추첨식 현장에서 규정이 담긴 문서를 배포했으면 그날의 진실을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공문이나 문서는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매우 중요한 규정을 구두로 통보했다는 것입니다. 국제유도연맹과는 다른 규정을 단체전 하루 전에, 그것도 구두로 통보한다는 것 자체가 아시안게임의 권위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행태이기 때문에 씁쓸한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남자 체조 도마에서 홍콩의 섹와이훙은 양학선과 리세광을 모두 꺾는 파란을 일으키며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2주 후에는 중국 난닝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도마에서 6위를 기록하며 자신의 세계선수권 최고 성적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는 내리막길을 걸었습니다. 이듬해 2015년 글래스고 세계선수권에서는 예선 10위로 결선 진출에 실패했고 어깨 부상으로 2016년 리우 올림픽에는 출전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어깨 수술을 받았는데 자신의 선수 인생에서 받은 두 번째 큰 수술이었습니다. 이듬해 복귀했지만 2017년 몬트리올 세계선수권 때는 예선 24위로 부진해 결선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2018년에도 섹와이훙은 관심 밖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양학선은 고질적인 햄스트링 부상으로 불참했습니다. 반면, 당시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북한의 리세광은 출전했습니다. 리세광은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좌절을 맛본 이후 다시 일어섰습니다. 2014년, 2015년 세계선수권 2연패, 그리고 양학선이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불참한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여유 있게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양학선의 뒤를 잇는 후배 김한솔(1995년생)에게 기대를 걸었습니다. 김한솔은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1년 전에 열린 2017년 세계선수권 도마에서 동메달을 획득해 리세광과 금메달을 놓고 멋진 승부를 펼칠 것으로 전망됐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김한솔 vs 리세광'의 남북 대결에 관심이 모아졌고, 섹와이훙은 관심 밖이었습니다. 왜냐하면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우승 이후 이 선수가 국제 무대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리세광 또 무너지다 김한솔은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도마 결선 하루 전에 열린 마루운동 결선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자신감이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그 기세를 몰아 2관왕에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8명의 결선 진출자 가운데 리세광이 두 번째 순서로 나섰습니다. 그런데 4년 전에 이어 이번에도 착지에서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1차 시기 착지에서 무릎을 꿇으며 0.3점의 큰 감점을 받습니다. 그래서 12.800점(난도 5.2)의 매우 저조한 점수에 그쳤습니다. 2차 시기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리세광' 기술(난도 6.0)을 시도했지만 이번에도 착지가 불안해 손으로 바닥을 짚었습니다. 2차 시기 착지 직후 발목에 통증을 느꼈는지 다리를 절뚝이기도 했습니다. 14.000점을 받으며 1, 2차 시기 평균 13.400점으로 극히 부진했습니다. 사실상 금메달이 날아간 것이었습니다. 김한솔 완벽한 연기로 금메달 확신 리세광의 난조로 김한솔에 대한 금메달 기대감이 한층 높아졌습니다. 김한솔은 다섯 번째 순서로 나섰는데 1차 시기에서 난도 5.6짜리 기술을 깔끔하게 성공했고 착지까지 안정적이었습니다. 김한솔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만족했고 우리 코칭스태프도 환호하며 좋아했습니다. 1차 시기 점수 14.875. 2차 시기에서는 난도 5.2 기술을 시도해 완벽하게 성공했고 착지까지 문제가 없었습니다. 김한솔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했고 관중석에서는 함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김한솔은 관중석을 향해 두 팔을 들어 올렸고 코치와도 얼싸안고 금메달을 확신했습니다. 북한의 리세광도 김한솔과 악수하며 멋진 연기에 축하를 보냈습니다. 날벼락 같은 0.3점 감점 그런데 점수가 발표되면서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습니다. 2차 시기 점수는 14.225로 1, 2차 시기 평균 14.550점을 받았습니다. 2차 시기 점수가 너무 낮게 나온 것입니다. 알고 보니 2차 시기에서 0.3점의 감점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김한솔도 점수 발표 순간 생각보다 점수가 안 나왔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언뜻 보면 2차 시기에서 감점 요소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0.3점이란 큰 감점을 받은 것입니다. 감점 이유는 규정 위반이었습니다. 2차 시기 연기를 마치고 심판에게 이른바 '종료 사인'을 보내야 하는데 이를 하지 않아서 감점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국제체조연맹 채점 규칙을 보면 '연기 전과 후에 심판에게 고지 의무'(acknowledging the judge before and after the exercise)가 있는데 이는 연기의 시작과 종료를 심판에게 알려야 한다는 의무입니다. "선수는 연기 시작 전에 팔을 드는 행위 등을 통해 심판에게 연기를 시작하겠다는 신호를 보내야 하며, 연기를 마친 후에도 이런 행위를 통해 연기를 마쳤다는 표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반했을 시 최종 점수에서 0.3점을 감점한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대개 여자 선수들은 연기를 마치고 심판을 향해 두 팔을 번쩍 들고, 남자 선수들은 심판을 향해 목례를 하며 연기를 마쳤다는 표시를 합니다. 그래서 당시 우리 언론에서는 '심판에게 인사를 안 해서' 감점을 받았다고 표현했습니다. 김한솔 같은 경우 2차 시기에서 연기를 마치고 너무 기쁜 나머지 심판석을 향해서 종료 사인을 보내는 걸 깜빡 잊었습니다. 그래서 안타깝지만 규정대로 0.3점 감점을 받은 것입니다. 경기 후에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김한솔은 인터뷰에서 아쉬움의 눈물을 흘리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섹와이훙 역전 금메달, 아시안게임 2연패 이런 가운데 지난 대회 챔피언 섹와이훙이 마지막 8번째 순서로 나섰습니다. 이때까지도 김한솔이 1, 2차 시기 평균 14.550점으로 선두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섹와이훙의 결과에 따라서 금메달이냐, 은메달이냐가 결정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섹와이훙은 1차 시기에서 난도 5.6 기술에 도전해 착지까지 깔끔하게 성공하며 14.775라는 높은 점수를 받습니다. 2차 시기도 난도 5.6 기술을 시도했는데 착지 때 살짝 삐끗했지만 무난한 연기를 펼쳤습니다. 섹와이훙은 만족한 듯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포효했고 금메달을 기대했습니다. 2차 시기 점수는 14.450으로 1, 2차 시기 평균 14.612점. 김한솔에 0.062점, 간발의 차로 앞서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아울러 아시안게임 2회 연속 우승을 달성하는 순간이었습니다. 4년 전에는 양학선을 0.016점 차로 따돌리더니 이번에도 매우 근소한 차이로 정상에 오른 것입니다. 김한솔은 은메달, 리세광은 5위에 그쳐 아시안게임에서 2연속 메달 획득에 실패했습니다. 섹와이훙은 두 번의 아시안게임에서 모두 직전 올림픽 챔피언들을 누르고 우승해 더 의미가 있었습니다. 2014년 인천 대회에서는 2012 올림픽 챔피언 양학선을, 이번에는 2016 리우 올림픽 챔피언 리세광을 꺾은 것입니다. 아시안게임 2연패 직후 섹와이훙은 "4년 전에 처음 금메달 땄을 때보다 이번이 더 기쁘다. 경기 중에 앞선 선수들의 연기를 거의 보지 못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말고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자고 스스로에게 말했고, 결국 해냈다"고 말했습니다. 섹와이훙은 이후 2020 도쿄 올림픽에도 출전했지만 예선 12위로 결선 진출에는 실패했습니다. 체조에서 '종료 사인'을 하지 못해 감점을 당하고 이로 인해 메달 색깔이 바뀌는 것은 확률이 1%도 되지 않는 매우 드문 일입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섹와이훙이 체조 사상 운이 가장 좋은 선수 가운데 한 명인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사진 : 게티이미지,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