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부터 30년 넘게 오로지 스포츠 취재 기자 한길을 걸었다. 동-하계 올림픽, 월드컵, 아시안게임 등 각종 국내외 대회를 현장 취재했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회식, 2012년 런던올림픽 폐회식 TV 생중계에서는 해설을 맡기도 했다. 2017년에는 제28회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체육회를 출입하고 있고 SBS 유튜브 채널인 <스포츠머그>에서 '별별스포츠' 코너를 진행하고 있다.
2005년 11월, 당시 15살 2개월의 김연아는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피겨스케이팅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사상 첫 금메달을 차지하며 슈퍼스타의 등장을 알렸습니다. 이로부터 20년이 흐른 지금 한국 피겨는 16살 쌍둥이의 눈부신 활약으로 큰 기대감에 젖어 있습니다. 쌍둥이 자매 김유재와 김유성 두 선수가 다음 달 일본에서 열리는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 최초로 동반 진출이라는 쾌거를 달성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계기로 한국 스포츠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쌍둥이 스타들은 누구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축구 김강남-김성남 쌍둥이 국가대표, 형은 대표팀 감독 나이가 60살에 가까운 축구팬이라면 1970년대 국가대표로 나란히 뛰었던 김강남-김성남 쌍둥이를 기억하실 겁니다. 두 형제는 고등학교, 대학교는 물론 해병대까지 마치 한 몸처럼 함께 다녔습니다. 쌍둥이의 형이 바로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한국대표팀 사령탑이었던 김정남 감독입니다. 이들의 막내 동생까지 축구 선수로 활동해 4형제 축구인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프로야구에서는 OB 베어스의 구천서-구재서 쌍둥이 야수가 1982년 원년부터 그라운드를 누볐습니다. 남자 농구에서는 단연 조상현-조동현 형제가 눈에 띕니다. 조상현 감독은 현재 프로농구 창원 LG를 이끌고 있고 조동현 감독은 2022년부터 지난 5월까지 울산 현대모비스를 지도했습니다. 여자배구에서는 이재영-이다영 쌍둥이가 유명했지만 이른바 '학폭 논란'으로 국내 코트를 떠나야 했습니다. 여자 골프에서는 '버디 폭격기' 고지우가 통산 3승을 올리고 있고 쌍둥이 동생 고지원은 올 시즌에만 2승을 거두며 큰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주니어 그랑프리 메달은 언니 김유재가 먼저 현재 큰 관심을 끌고 있는 쌍둥이 선수는 피겨 소녀 김유재-김유성입니다. 두 선수는 2009년 6월 12일에 태어났는데 김유재가 6분 빨랐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나란히 스케이트화를 신은 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기량을 키워나갔습니다. 두각을 먼저 나타낸 것은 언니 김유재. 만 13살이던 2022년 8월 김유재는 자신의 국제대회 데뷔전이었던 주니어 그랑프리 1차 대회에서 트리플 악셀에 성공해 화제가 됐습니다. 트리플 악셀은 앞으로 3바퀴 반을 도는 고난도 점프. 김유재는 2022 베이징 올림픽에서 6위를 차지한 선배 유영에 이어 국제대회에서 트리플 악셀에 성공한 두 번째 한국 여자 싱글 선수가 됐고 이 대회에서 동메달을 따면서 주니어 그랑프리에서 메달을 획득한 역대 최연소(만 13세 76일) 한국 선수가 됐습니다. 언니가 먼저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목에 걸자 동생 김유성은 "언니가 메달을 따서 기쁘면서도 다음에는 나도 꼭 같이 대회에 나가 메달을 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며 각오를 다졌습니다. 금메달과 파이널 진출은 동생 김유성이 먼저 언니 김유재에게 자극을 받은 김유성은 이후 기량이 일취월장했습니다. 2023년 1차 대회와 5차 대회에서 은메달을 따내며 처음으로 그랑프리 파이널 티켓을 거머쥔 김유성은 2024년 9월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줬습니다. 주니어 그랑프리 4차 대회 프리스케이팅에서 완벽한 연기로 짜릿한 역전 우승을 거둔 것입니다. 주무기인 트리플 악셀을 깔끔하게 소화하며 합계 198.63점이라는 개인 최고점으로 생애 첫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바로 한 달 뒤에 벌어진 7차 대회에서는 은메달을 목에 걸며 또다시 파이널 출전권을 손에 쥐었습니다. 주니어 그랑프리는 한 시즌에 총 7차례 대회를 치르는데 한 선수는 최대 2개 대회에 출전할 수 있습니다. 선수들은 각 대회 순위에 따라 랭킹 포인트를 획득하고, 7개 대회에서 합산 점수가 많은 상위 6명이 '왕중왕전'인 파이널에 진출하게 됩니다. 첫 메달은 언니가 따냈지만 첫 금메달과 2연속 파이널 진출은 6분 늦게 태어난 김유성이 해냈습니다. 동생 김유성이 훨씬 앞서가자 언니 김유재는 "많이 부러웠어요. 집에서 열심히 응원하고 저도 내년에 꼭 나가자고 생각했어요."라며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서로 의지하고 자극도 받고..시너지 효과 이란성 쌍둥이 자매는 당연히 닮은 점이 많습니다. 키도 160cm로 똑같고 체중도 같습니다. 치킨과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것도 닮았습니다. 선수 생활에도 장점이 있습니다. 부상 불운에 시달리거나 부진을 겪을 때는 서로 의지할 수가 있고 한 명이 잘할 때는 '나도 저렇게 해야지'라는 동기부여가 돼 더욱 노력하고 분발할 수 있게 됩니다. 김유재-김유성 두 쌍둥이는 올 시즌 들어 시너지 효과를 제대로 보여줬습니다. 스타트는 동생이 먼저 끊었습니다. 1차 대회에서 5위에 그친 김유성은 지난 9월 27일 5차 대회에서는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올랐습니다. 쇼트 프로그램에서는 4위에 그쳤지만 배점이 거의 2배인 프리 스케이팅에서 펄펄 날았습니다. 영화 타이타닉 선율에 맞춰 혼신의 연기를 펼쳤습니다. 3바퀴 반을 도는 첫 점프 트리플 악셀은 회전수가 부족했지만, 이후 트리플 플립-트리플 토루프 연속 점프와 트리플 루프-더블 토루프 연속 점프를 깔끔하게 해냈고 트리플 살코도 군더더기가 없이 뛰었습니다. 가산점 10%가 붙는 후반부에서도 트리플 플립과 트리플 러츠 점프를 완벽하게 해냈습니다. 모든 스핀에서도 최고 레벨을 받은 김유성은 합계 185.99점으로 역전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특히 기뻤던 것은 2차 대회에서 언니 김유재를 누르고 금메달을 따냈던 일본의 오카 마유코에게 통쾌한 역전승을 거두고 2년 연속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는 점입니다. 동생의 맹활약을 지켜본 언니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1주일 뒤인 10월 4일 6차 대회에서 마침내 자신의 꿈인 첫 금메달을 거머쥐었습니다. 쇼트 프로그램에서 3위에 머물렀던 김유재는 프리 스케이팅에서 인생 최고의 연기를 펼쳤습니다. 첫 과제인 고난도 트리플 악셀부터 완벽했습니다. 기본점수 8점에 여기서만 2.29점의 가산점을 챙겼습니다. 이후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루프 연속 점프에서도 가산점을 받았고, 트리플 플립과 트리플 루프까지 깔끔하게 뛰었습니다. 후반부에서도 각종 어려운 점프를 실수 없이 해내 7차례 점프 과제에서 모두 가산점을 챙겼습니다. 반지의 제왕 OST에 맞춰 플라잉 카멜 스핀을 최고 레벨로 소화하며 뜨거운 박수 속에 최고의 연기를 마친 김유재는 프리 137.17점에 합계 199.86점으로 개인 최고점을 모두 경신했습니다. 그동안 주니어 그랑프리에서 동메달만 3개를 따냈던 김유재는 올 시즌 2차 대회 첫 은메달에 이어, 대망의 첫 금메달을 획득하며 벅찬 감격을 맛봤습니다. 다음 달 파이널서 동반 메달 도전 이로부터 1주일 뒤 7차 대회가 모두 끝나자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최종 점수를 합산한 결과 언니 김유재가 전체 2위(랭킹 포인트 28점)로, 그리고 동생 김유성은 6위(랭킹 포인트 22점)로 6명만이 겨루는 파이널에 진출한 것입니다. 김유재는 첫 출전이고 김유성은 3년 연속 진출입니다. 주니어 피겨 세계 최강을 가리는 꿈의 무대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은 다음 달 4일부터 7일까지 일본 나고야에서 열립니다. 전체 1위 일본의 시마다 마오를 비롯해 4명의 일본 선수가 파이널에 올랐는데 4시즌 연속 금메달이라는 대기록에 도전하는 시마다 마오가 우승 후보 0순위입니다. 만약 쌍둥이 자매 가운데 한 명이 금메달을 따낸다면 김연아 이후 20년 만에 신화를 재현하게 됩니다. 김유재는 "유성이랑 같이 파이널에 가게 돼서 너무 좋다. 둘 다 클린 연기하기 위해 파이팅 하겠다"며 힘주어 말했고 김유성은 "여러 가지 운까지 따라줘 모두 파이널에 올랐는데 유재와 함께 출전할 수 있어서 정말 큰 힘이 될 것 같다. 팬들의 응원에 보답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테니스는 사실상 백인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1968년 US오픈에서 한 흑인 선수가 혜성처럼 떠올랐습니다. 흑인 사상 처음으로 메이저 대회 정상을 차지한 것입니다. 1975년에는 최고 권위의 윔블던에서 흑인 선수로는 최초이자 유일하게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새 역사를 썼습니다. 극심한 인종 차별을 딛고 흑인의 영웅이 된 전설의 스타 아서 애시를 소개합니다. "흑인은 테니스 할 수 없다"는 곳에서 성장 아서 애시는 1943년 미국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에서 태어났습니다. 풀 네임은 아서 로버트 애시 주니어인데 흔히 아서 애시라 부릅니다. US오픈이 열리는 빌리 진 킹 내셔널 센터에 여러 코트가 있는데 가장 큰 경기장 즉 센터 코트 이름이 아서 애시 스타디움인데요, 이것만 봐도 이 선수가 미국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960년대 미국에서는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이 정말 심했습니다. 애시가 살던 버지니아 주에서는 "흑인은 테니스 경기에 참가할 수 없다"는 법까지 만들어졌습니다. 흑인이 테니스 하기가 무척 힘든 상황에서도 애시는 7살 때 라켓을 잡았는데요, 아버지가 테니스 코트가 포함된 공원의 관리인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천부적인 소질을 보인 애시의 기량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습니다. 하지만 어린 소년은 흑인은 대회에 나갈 수가 없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좌절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당시 상황을 회고했습니다. "12살인 저에게 남은 기억은 악법도 법이기 때문에 대회에 출전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출전할 수 없는 이유는 단 하나, 제가 흑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고향 버지니아 주의 흑인 차별에 따라 대회에 출전할 수 없었던 그는 세인트루이스로 이사해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대회에 나가는 길을 선택하기도 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처럼 아서 애시에게 은인이 나타났는데요, 그가 바로 흑인 의사였던 로버트 월터 존슨이었습니다. 존슨은 애시가 좋은 코치에게 지도를 받게 하고 테니스 선수가 가져야 할 정신과 자세를 가르쳤습니다. 쉽게 말해 인생의 멘토였던 것이지요. 은사의 도움으로 그는 명문 UCLA에 흑인 선수로는 유일하게 장학생으로 입학했고 이때부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남자테니스 국가대항전인 데이비스컵에 국가대표로 발탁되면서 '흑인 금지 규정'을 실력으로 깨부순 첫 번째 흑인이 됐습니다. 1968 US오픈에서 흑인 최초 우승 아서 애시는 1961년, 18살 때 처음으로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후 각종 대회에서 뛰어난 실력으로 1968년 US오픈 이전까지 31승이나 거두며 존재감을 키워나갔습니다. 1968년은 아서 애시 인생의 전환점이었는데요, 이 해는 전 세계적으로 그야말로 격동의 한 해였습니다. 미국에서는 1968년 4월 흑인 민권운동의 기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되는 비극이 일어나 흑인들이 크게 분노했고 이로부터 두 달 뒤에는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이자 당시 대통령후보인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돼 미국 사회가 일대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아서 애시는 미국 아마추어 챔피언십에서 우승했고 2주 뒤 열린 US오픈에서도 승승장구했는데요, 결승에서 네덜란드의 톰 오케르 선수를 만났습니다. 25살의 아서 애시는 강력한 서브로 상대를 제압했습니다. 26개의 서브 에이스를 터뜨리며 세트 스코어 3대 2로 이겼습니다. 이로써 애시는 US 오픈 챔피언에 오른 최초의 흑인 남성이자 같은 해에 아마추어 챔피언십과 US오픈을 모두 제패한 유일한 선수가 되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데이비스컵 출전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 아마추어 신분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14,000달러의 1등 상금을 받을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아무튼 아서 애시는 메이저대회인 US오픈을 제패하면서 일약 세계적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1975년 최고 권위 윔블던에서 기적의 우승 이후 아서 애시의 테니스 인생은 탄탄대로를 걸었습니다. 1968년 바로 그해 국가대항전인 데이비스컵에서 정상에 오르며 3년 연속 미국의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1970년에는 메이저대회인 호주 오픈에서 남자 단식을 제패하며 두 번째 그랜드 슬램 타이틀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긴 슬럼프에 빠졌습니다. 무려 5년 동안 큰 대회에서는 성적을 내지 못했는데요, 1975년에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테니스의 본고장 영국에서 열리는 최고 권위의 대회 윔블던 결승에 오른 것입니다. 하지만 우승 가능성은 희박했습니다. 상대가 너무 강했기 때문입니다. 아서 애시는 거의 32살이 된 전성기가 지난 선수로 평가된 반면 결승 상대 지미 코너스는 23살의 디펜딩 챔피언으로 최고 인기를 구가했습니다. 코너스는 결승까지 단 1세트도 내주지 않았고 이전 아서 애시와 3차례 맞대결에서 모두 이겼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봐도 코너스의 승리가 예상됐던 것이지요. 그런데 경기 결과는 예상을 완전히 깼습니다. 애시는 기존의 스타일을 완전히 바꿨습니다. 이른바 공격의 완급을 능수능란하게 조절했습니다. 빠르게 했다 느리게 했다 하면서 변칙 작전으로 나오자 코너스는 당황했습니다. 애시의 노련한 플레이에 말린 코너스는 성급하게 덤비다 숱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니까 제 기량의 절반도 발휘하지 못한 것이지요. 1-2세트에서 애시는 모두 6대 1로 이기며 승기를 잡았습니다. 3세트는 7대 5로 내줬지만 4세트를 6대 4로 따내 세트 스코어 3대 1로 승리했습니다.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했는데요, 흑인 최초로 세계 랭킹 1위에 오른 아서 애시, 이때가 테니스 인생의 절정이었습니다. 애시로서는 윔블던 도전 8번 만에 거둔 우승인데 만 31세 11개월의 우승기록은 2017년 로저 페더러가 경신할 때까지 42년 동안 단식 최고령 우승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1980년 은퇴 이후 인권 운동에 투신 극적인 우승을 차지한 이후에도 아서 애시는 이후 10개 대회에서 더 정상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메이저대회 타이틀과는 인연이 없습니다. 그는 평소 심장이 좋지 않았는데요, 1979년 12월 심장 수술을 받은 후 1980년 4월 16일 37살에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은퇴 후에는 타임지와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하고, 1980년대 초반부터 사망하기 몇 달 전까지 ABC 스포츠와 HBO에서 해설하고, 내셔널 주니어 테니스 리그를 창립했습니다. 그리고 1981년부터 1985년까지 미국 데이비스컵 팀의 단장을 역임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맡았는데 1985년엔 국제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사회운동, 인권 운동에 투신했습니다. 미국 곳곳에 극빈층을 위한 유소년 테니스팀을 창설하는 한편 남아공 정부의 인종분리정책과 부시 정부의 아이티 난민정책에 항의하다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평소 "나는 훌륭한 테니스 선수로 기억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세상을 바꾸는데 이바지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에이즈 감염 고백, 퇴치 운동에 앞장 애시는 1983년 심장 이상으로 수술을 받았는데요, 이때 수혈을 받다 인간 면역결핍 바이러스, 즉 HIV에 감염됐습니다. 하지만 그는 "집에 앉아 죽음을 생각하기보다는 불우한 이들을 위해 활동하는 게 낫다"며 더욱 열성적으로 사회에 뛰어들었는데요, 1992년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1988년 9월 뇌 수술 하면서 AIDS에 걸린 것을 확인했습니다. 1983년 심장 수술 과정에서 수혈을 하다 HIV에 감염됐습니다." 애시는 에이즈 퇴치를 위한 연구소에서 활동하며 에이즈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에이즈보다 흑인이라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 에이즈는 나의 몸을 죽이지만 인종차별은 나의 정신을 죽인다"는 말까지 했는데요, 병마와 싸우던 애시는 마지막까지도 인종차별 철폐에 자신의 몸을 내던졌습니다. 1993년 2월, 그가 50살의 나이에 에이즈로 인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자 뉴스 앵커가 그의 죽음을 전하며 눈물을 흘렸고, 당시 미 대통령 빌 클린턴은 "진정한 미국인의 영웅을 잃었다"며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영예인 자유의 메달을 추서했습니다. "왜 하필 나입니까"라고 묻지 않은 이유 그는 AIDS에 걸렸을 때 "하느님 하필 저입니까?"라고 묻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5천만 명의 어린이가 테니스를 시작했고, 500만 명이 테니스를 배웠고, 이 가운데 5,000명이 그랜드 슬램에 도전하고, 50명만이 윔블던에 출전한다. 4명이 준결승에 진출하고, 2명이 결승에 진출했고 내가 챔피언이 됐을 때 '하느님 수많은 선수가 가운데 하필 제가 우승했습니까?'라고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불행이 닥쳐온 이 순간 내가 '신이시여, 왜 저인가요'라고 묻지 않는 것은, 불행보다 훨씬 더 많았던 행복의 순간에 '왜 저인가요'라고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는 또 이런 명언을 남겼는데요, "당신이 있는 그곳에서 시작하라, 당신이 가진 그것을 사용하라, 당신이 할 수 있는 그것을 해라(Start where you are, use what you have, do what you can)" 즉 이는 매우 힘든 상황에서도 주어진 환경과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서 애시의 윔블던 우승이 1975년이니까 올해가 50주년이 되는 해인데요. CNN은 "그의 유산은 여전히 오늘날 선수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그는 단순한 챔피언이 아니라 스포츠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줬고 유색인종을 비롯한 수많은 후배에게 영감을 주며 세상의 변화에 앞장섰다"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대선배 아서 애시를 보며 꿈을 키웠고 36번이나 메이저대회를 제패했던 최고 스타 세레나 윌리엄스도 "저는 아서 애시가 간 길 덕분에 최고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라며 감사를 나타냈습니다. 아서 애시는 흑인 최초이자 지금까지도 유일한 흑인 윔블던 챔피언으로 남아 있는 전설의 스타입니다. 극심한 인종 차별과 에이즈 감염이라는 불운도 그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챔피언 이상의 위대한 인간이었습니다.
국대2구장 (대한축구협회 제공) 20년 넘게 경기도 파주에 둥지를 틀었던 한국 축구가 이제 '천안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숙원 사업이었던 대한민국 축구종합센터가 약 3년 반의 공사를 거의 마치고 조만간 공식 개장식만을 남겨놓은 상황입니다. 서울로 가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천안을 지나다 보면 입장거봉포도휴게소가 있는데, 이 휴게소 오른쪽 즉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가산리 일대 약 14만 5천 평 부지에 초대형 축구종합센터가 들어선 것입니다. 천연 잔디 7면과 인조 잔디 4면 등 11개의 축구장과 각종 부대시설을 갖춰 아시아에서도 보기 드문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서울에 있던 대한축구협회(회장 정몽규) 직원들은 이미 지난 9월 새 보금자리인 천안으로 이사를 마쳤습니다. 원로 축구인들은 이 장면을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지켜보며 기대감에 한껏 들떠 있습니다. "1970년대와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훈련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잔디 구장이 턱없이 부족해 고생을 정말 많이 했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자존심을 구겨야 했던 때도 있었다. 파주 NFC가 생길 때만 해도 후배들이 부러웠는데 파주보다 4배나 더 큰 이런 세계적인 시설이 들어선 게 믿어지지 않는다. 이제 국제대회에서 성적을 내지 못 하면 핑계를 대기 어려울 것 같다." 축구장 11면에 최신식 시설 완비 대표팀 훈련 (연합뉴스 제공) 공식 준공식을 앞두고 소집 훈련을 시작한 축구대표팀은 지난 11월 10일 천안의 잔디를 처음으로 밟았습니다. 홍명보 감독은 "이제는 선수들이 더 편안하게 쉴 수 있고, 훈련에 더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다"며 흡족해했고, 잔디 상태에 대해서도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잔디인데, 이 정도면 우리 선수들이 충분히 만족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이날 선수들이 훈련한 구장에는 하이브리드잔디가 새롭게 깔려 최상의 퀄리티를 자랑했습니다. 골키퍼 김승규는 "직접 와보니 규모도 생각보다 크고 시설도 다 새것이라 참 좋다. 앞으로 후배들이 이곳에 오려는 큰 동기부여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천안축구종합센터 숙소동 (연합뉴스 제공) 대한민국 축구종합센터에는 축구 훈련장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국제 경기를 치를 수 있는 4천 명 수용의 스타디움이 있어 각종 국제대회 개최가 가능합니다. KFA(대한축구협회) 아카데미가 설립돼 지도자, 심판, 의무, 피지컬 트레이너, 분석관을 대상으로 심도 있는 교육이 펼쳐집니다. 태극전사들이 마음껏 훈련하고 쉴 수 있는 여건도 마련됐습니다. 총 160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는 숙소 82개실이 지어졌고 230평이나 되는 피트니스센터에서 구슬땀을 흘린 뒤에는 냉온욕을 통해 피로를 풀 수 있습니다. 또 대형 스포츠센터가 건설돼 수영, 농구, 배드민턴, 테니스를 할 수 있고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유스호스텔까지 개장하면 상당한 금액의 수익도 올릴 수 있습니다. 대한축구협회는 내년부터 방문객이 점차 늘어나 오는 2030년에는 연간 67만 명이 천안을 방문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대한축구협회가 본격적으로 새로운 축구센터를 만들기로 결정한 것은 지난 2018년입니다. 2002 한일월드컵 준비 과정에서 만든 파주 NFC(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가 여러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우선 파주 NFC 시설이 노후화된 데다 무상임대 기간도 만료됐습니다. 또 지리적으로 국토 전체로 봤을 때 서북쪽에 치우친 곳에 위치해 선수단 이동에 상당한 불편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2018년 5월 18일 조현재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을 위원장으로 한 '제2의 NFC 추진위원회'를 발족했는데 2019년 1월 후보지 마감 결과 전국 24개 지자체가 참여할 정도로 뜨거운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후 서류심사와 프레젠테이션, 현장 실사 등을 거쳐 그해 5월 후보지가 천안, 상주, 경주로 좁혀졌고 2019년 8월 마침내 천안시가 최종 낙점돼 2022년 4월 첫 삽을 뜨게 됐습니다. 축구종합센터 기공식 (대한축구협회 제공) 이동이 편리, 축구협회 행정도 천안 이전 그럼 대한민국 축구종합센터는 왜 천안으로 갔을까요? 축구협회는 파주 NFC가 주로 국가대표 훈련에만 적합하다는 한계를 직시하고, 새로운 센터는 전국 축구인들의 이동이 편리한 위치에 만들어 다양한 연령대 대표팀과 심판, 지도자, 동호인들이 함께 사용하는 종합센터로 확대하겠다는 미래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천안의 강점은 국토의 정중앙에 위치하면서도 수도권과 근접해 전국의 축구선수, 동호인, 일반 팬이 가장 접근하기 좋은 곳이라는 것입니다. 서울 강남 지역에서 자동차로 1시간 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천안축구종합센터 (연합뉴스 제공) 또 단지 트레이닝센터의 개념이 아니라 협회의 행정 기능 전체가 천안으로 이전해 업무의 통합성과 시너지 효과를 기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됐습니다. 천안시 입장에서는 파격적인 투자를 약속한 것이 선택을 받은 요인이 됐습니다. 천안시는 '퍼주기'라는 일각의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다른 지자체를 압도하는 조건을 제시하는 승부수를 띄웠는데 이것이 적중한 것입니다. 스포츠 단체-지자체 협업 성공 사례 축구종합센터의 천안 이전은 스포츠단체와 지방자치단체가 협업해 새로운 롤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수도권 집중으로 인한 '지방 소멸'이라는 심각한 사회적 이슈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수도권 인구 비중은 이미 2020년 비수도권을 넘어섰고, 2052년에는 전체의 53.4%로 확대될 전망입니다. 특히 청년층(15~34세)은 해가 갈수록 수도권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이런 '지방 소멸' 현상을 막기 위한 정책적 대안의 하나로 체육계와 학계를 중심으로 스포츠 거점도시(또는 지역특화 스포츠도시) 개념이 등장했습니다. 즉 대규모 스포츠 시설을 확보해 국내외 스포츠 대회나 'MICE 사업'을 유치해 지역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전략입니다. 고원지대라는 점을 이용해 각종 여름 전지훈련이나 하계대회를 유치하는 강원도 태백, 국내 서핑의 성지로 부각된 강원도 양양 등이 대표적인 국내 사례이고 해외에서는 철강 산업의 퇴락 이후 스포츠로 부활한 영국 셰필드나 맨체스터, 자동차 산업의 쇠퇴를 스포츠로 보완한 미국의 인디애나폴리스 등이 사례로 꼽힙니다. 축구종합센터 스타디움 (대한축구협회 제공) 거액의 건설비가 투입되는 대한민국 종합축구센터가 완공될 수 있었던 결정적 힘은 대한축구협회와 천안시의 철저한 협업 정신입니다. 축구종합센터를 짓는 데 대한축구협회와 천안시는 가장 중요한 공사비를 분담했는데 축구협회가 1,783억 원을 천안시가 2,360억 원을 내놓았습니다. 양자간 협약서에 따라 '대한축구협회는 유-청소년 전국축구대회를 신설하고 해당 대회의 전 경기를 향후 10년간 천안시 관내에서 개최한다'고 명기하는 등 여러 가지 구체적인 사업계획도 마련했습니다. 쉽게 말해 두 단체가 수익을 내고 서로 '윈 윈'할 수 있는 탄탄한 주춧돌이 세워진 것입니다. 한국 스포츠 사상 축구처럼 영향력 있는 중앙 체육단체가 자발적인 정책적 판단 아래 지방으로 본사를 완전 이전해 '천안 시대'를 연 것은 사실상 처음입니다. 2024년 천안 축구센터를 방문한 세이크 살만 AFC(아시아축구연맹) 회장은 "천안센터처럼 좋은 시설은 카타르의 아스파이어센터를 제외하면 아시아에서 유일하다. 아스파이어센터는 국가에서 투자했지만 천안센터는 지방자치단체와 대한축구협회가 함께 투자해 만들었다는 것이 놀랍다."라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축구협회와 천안시의 협업이 앞으로 스포츠를 통한 지역 활성화의 모범 사례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완공을 눈앞에 둔 대한민국 축구종합센터는 국가대표팀 훈련 환경 개선, 유소년 및 K리그 육성, 스포츠 과학 도입, 일반 시민과의 축구 교류 증진 등 한국 축구의 저변 확대와 국제 경쟁력 강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할 전망입니다. 천안은 이제 한국 축구의 새로운 메카입니다. 이곳에서 한일 월드컵 4강을 뛰어넘는 새로운 기적의 씨앗이 뿌려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스케이팅 시즌이 한창인데요, 피겨 하면 떠오르는 선수가 있지요? 바로 피겨 여왕 김연아입니다. 그런데 김연아에 앞서 올림픽 금메달을 꿈꿨던 소녀가 있었습니다. 바로 재미동포 남나리 선수입니다. 13살에 깜짝 스타로 떠올랐지만 부상으로 너무나 일찌감치 꿈을 접어야 했던 비운의 천재이었습니다. 5살에 피겨 시작, 8살 때부터 폭풍성장 한국 이름은 남나리, 미국 이름은 나오미 나리 남입니다. 1985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태어났는데요, 김연아 선수보다는 5살 많습니다. 남나리 선수의 부모는 일찍이 미국에서 생활 터전을 잡았고 교포 2세인 남나리는 5살 때 처음으로 스케이트화를 신었습니다. 남나리의 외할아버지가 빙상선수 출신인데요, 외할아버지와 아이스링크에 가면서 피겨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것은 7살 때인데, 8살 때 동계올림픽 미국 피겨팀 코치였던 존 닉스에게 발탁되면서 기량이 급성장했습니다. 남나리의 어머니는 남편 월급의 30%에 이르는 2천 달러의 레슨비가 부담이 됐지만 워낙 천부적인 소질을 보여 이를 감수했다고 합니다. 결국 가족들의 헌신 끝에 남나리는 1995년 주니어 올림픽 1위를 차지했고 1997년에는 미국 신인선수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대성할 싹이 보이자 학교도 1주일에 한번 나가 과제와 검사를 받는 홈스쿨링으로 바꾸고 하루 3시간 이상 훈련을 집중적으로 하면서 정상급 선수로 발돋움했고 각종 대회를 휩쓸기 시작했습니다. 13살 재미동포 소녀 전미선수권에서 깜짝 은메달 1999년 전미선수권대회가 남나리의 인생을 바꿔놓았습니다. 이 대회는 그해 2월 7일 유타주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개막했는데, 3년 뒤 2002 동계올림픽이 예정됐던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당시 만 13세 7개월의 남나리는 이 대회가 생애 첫 시니어 출전이었습니다. 우승 후보는 단연 3회 연속 우승에 도전하는 미셸 콴이었습니다. 콴은 1년 전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은메달리스트였습니다. 쇼트 프로그램에서는 콴이 예상대로 1위, 남나리는 4위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프리 스케이팅에서 대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남나리는 트리플 플립, 트리플 토룹 등 3회전 점프를 깔끔히 뛰었고, 화려하고 빠른 스핀, 역동적이고 발랄한 연기로 탄성으로 자아내게 했습니다. 당시 중계 캐스터는 "이 스핀은 어떤 선수들보다 빠릅니다. 이 레이백 스핀 보세요. 어떻게 이렇게 할 수가 있나요? 정말 대단한 순간입니다."라며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클린 연기가 끝나자 남나리 자신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고 우레 같은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현장에서 딸의 연기를 지켜본 부모는 벅찬 감격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중계 캐스터도 흥분한 듯 "이제 13살인 이 선수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습니다. 엄청난 연기였습니다. 남나리의 부모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분입니다. 피겨계가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려온 것 같습니다."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선수 대기실에서 TV로 남나리의 연기를 지켜보던 미셸 콴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는데요, 남나리는 프리 스케이팅에서 2위를 차지해 종합 점수에서 미셸 콴에 이어 은메달을 차지하는 깜짝 성적을 거뒀습니다. 이때 남나리에 밀려 4위에 그친 선수가 사라 휴즈인데 휴즈는 3년 뒤 솔트레이크 시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이것만 봐도 남나리가 얼마나 잠재력이 컸던 선수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폭발적 인기, 한국에서도 '남나리 신드롬' 남나리의 깜짝 은메달은 한마디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거의 신드롬이었는데요, 1999년 청와대가 선정한 한국을 빛낸 인물에 야구스타 선동열, 박찬호와 함께 선정될 정도였습니다. 국내에서 인기가 치솟자 바로 귀국이 추진됐고 준우승한 지 20일도 안 돼 방한했습니다.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취재진 카메라 플래시를 한 몸에 받았는데, 엄청난 환영에 13살 소녀는 환한 미소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에서 와서 제일 하고 싶은 게 뭐예요?"(질문) "쇼핑하고 싶어요. 다음 올림픽이 2002년인데요, 올림픽 금메달 따고 싶어요." 도착 직후부터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과 팬들의 공연 요구로 박찬호, 박세리 못지않은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는데요, 국내 특급 호텔 초청으로 방한한 남나리는 스위트룸에 4박 5일 동안 묵으며 팬들을 위한 무료공연과 사인회를 가졌습니다. 남나리는 우리 피겨 국가대표 3명과 함께 20여 분 동안 공연을 펼쳐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때가 이른바 'IMF 시절'로 우리나라가 매우 힘들었는데요, 외국에서 큰 활약을 펼치고 있던 박세리, 박찬호에 환호하고 있던 때인데 13살의 앳된 재미동포 소녀가 혜성처럼 등장해 일약 동계올림픽 메달 후보로 떠오르자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습니다. 선풍적인 인기 덕분에 남나리는 국내 유명 가전회사의 광고 모델로 TV에 나왔을 정도였습니다. 13살 소녀는 뜨거운 관심 속에 출국하면서 "한국에 와서 재미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너무 행복해서 안 가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또 올게요."라는 인사말을 남겼습니다. 고관절 부상 불운, 올림픽 메달의 꿈 좌절 남나리는 전미선수권에서 은메달을 따냈지만 세계선수권 출전은 불가능했습니다. 국제빙상연맹의 15세 미만 국제대회 출전금지 규정 때문인데요, 나이가 어렸던 남나리는 2002년 동계올림픽을 내다보고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2000년에 큰 불운을 겪었습니다. 2000년 7월부터 고관절이 좋지 않았는데 몇 달 뒤 트리플 러츠 점프 훈련을 하다가 펑 하는 소리를 들었고 이후 골절 진단을 받았습니다. 고관절을 크게 다치면서 선수 생활에 최대 위기가 온 것이지요. 한동안 은반 위에 서지 못하던 남나리는 고난도 점프를 많이 뛰어야 하는 싱글을 포기하고 2005년 페어로 전향하며 복귀했습니다. 이후 남자 선수인 레프테리스와 짝을 이뤄 2006년 그랑프리 대회에서 동메달, 2007년 전미선수권에서도 페어 3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고질적으로 계속되었던 엉덩이뼈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2008년 10월 현역에서 은퇴하며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출전을 포기했습니다. 남나리는 이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케이팅을 할 때마다 엉덩이뼈 연골에 부담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스케이팅을 계속하면 부상이 재발할 수 있다는 주치의의 소견에 따라 건강을 고려해 현역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피겨는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을 차지하고 있다. 그동안 빙판에서 나에게 용기를 북돋워준 팬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러니까 13살 때 세계적 스타 가능성을 보였던 남나리는 너무나 일찍 부상 악재에 발목을 잡혀 선수로서 올림픽 출전이라는 자신의 꿈을 끝내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페어 지도자로 나섰지만 평창올림픽 출전 무산 남나리는 은퇴한 지 2년 뒤인 2010년 8월 캘리포니아주에서 결혼했는데요, 아들과 딸 1남 1녀를 낳았습니다. 김연아 선수가 밴쿠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이후 남나리와 찍은 사진을 공개해 한때 화제가 됐는데요, 이후 점차 잊히고 있다가 한국 언론에 다시 등장한 것은 2015년이었습니다. 원래 자신의 페어 파트너였던 레프테리스가 2015년 6월 한국의 지민지와 페어 파트너를 꾸리자 이들의 코치로 나선 것입니다. 6개월이 지난 2015년 12월, 레프테리스와 지민지가 한국에서 열린 랭킹대회를 통해 국내 데뷔전을 치르면서 남나리도 코치로 데뷔전을 펼쳤습니다. 이때 제가 대회 현장에서 이제는 지도자가 된 남나리 코치를 직접 인터뷰했는데 남나리 코치는 한국말로 "오늘 퍼포먼스 둘이 다 너무 잘했어요. 생각보다 너무 잘했어요."라며 기대감을 나타냈습니다. 이렇듯 남나리 코치는 자신의 못 이룬 올림픽 출전의 꿈을 레프테리스-지민지 조를 통해 풀고자 했는데요, 2년 가까이 지도를 했는데 평창 동계올림픽을 10개월쯤 앞둔 2017년 3월 말 팀 해체라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팀이 갑자기 해체된 이유에 대해 지민지 측은 "두 선수 간의 문화 차이가 컸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선수로서 올림픽에 나가지 못했던 남나리 코치는 지도자로서도 끝내 올림픽 무대에 서지 못하는 아쉬움을 겪었습니다. 피겨에 대한 관심이 많지 않던 1999년 재미동포 남나리는 혜성처럼 나타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피겨여왕 김연아가 등장하기 전에 팬들을 흥분시켰지만 그 기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13살에 잠시 천재적인 기량을 보여줬다가 끝내 부상에 발목이 잡힌 비운의 스케이터였습니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포츠에서도 여러 명이 동시에 순위를 다투는 종목에서 다른 선수들의 불운으로 뜻밖의 선수가 행운의 금메달을 차지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이럴 때 사자성어로 '어부지리'라고 하지요. 동-하계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 같은 대형 국제대회에서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된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꼴찌 브래드버리, 4명 넘어지는 덕분에 우승 흔히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을 씁니다. 운이 7할이고 기량은 3할이라는 뜻인데요. 운이 99%이고 기량은 1%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2002년 솔트레이크 시티 동계올림픽 쇼트트랙에서 금메달을 따냈던 호주의 스티븐 브래드버리 선수가 대표적 사례입니다. 준준결승부터 운이 따라줘 결승까지 왔는데, 남자 1,000m 결승에서 앞서 달리던 4명의 선수가 마지막 순간에 도미노처럼 서로 넘어지면서 꼴찌로 달리던 브래드버리가 유유히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하며 호주의 첫 동계 올림픽 금메달이자 남반구 최초의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는 말도 안 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이후 그는 억세게 운 좋은 사람의 대명사가 됐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자기 잘못이 아닌데도 남의 잘못 때문에 금메달을 놓치는 황당한 경우를 당한 불운의 스타도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 스타가 바로 대륙의 스프린터 류샹입니다. 류샹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육상 남자 110m 허들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단거리 종목을 제패해 그야말로 중국의 영웅이 됐습니다. 2006년에는 세계신기록인 12초88을 수립했고, 2007년 오사카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을 두 달 앞두고 쿠바의 다이론 로블레스가 무섭게 도약했습니다. 이때 그는 류샹의 세계기록을 100분의 1초 단축한 12초87이라는 세계신기록을 작성합니다. 그래서 베이징 올림픽 남자 110m 허들은 류샹과 로블레스 2파전으로 압축되며 명승부가 예고됐습니다. 하지만 류샹은 정작 자신의 조국에서 개최된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예선 레이스 시작 직전 오른쪽 아킬레스건이 아파 기권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13억 중국인들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습니다. 그를 '대회 최고의 영웅'으로 만들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메달은커녕 뛰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라이벌이 사라지자 다이론 로블레스가 가볍게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중국 류샹-쿠바 로블레스, 대구에서 외나무다리 대결 류샹은 베이징 올림픽 이후 슬럼프에 빠졌고 발목 수술 받은 이후로 한물갔다는 평가를 들었는데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계기로 조금씩 기록을 줄여 나가며 정상 탈환을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2011년 대구에서 열린 세계육상선수권 우승 후보는 로블레스와 류샹이었는데요, 예상대로 두 라이벌은 치열한 접전을 펼쳤습니다. 6번째 허들까지는 로블레스가 조금 앞섰습니다. 그런데 7번째 허들부터 류샹이 간발의 차로 선두에 나서 금메달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9번째와 마지막 10번째 허들을 넘으면서 류샹의 속도가 뚝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로블레스가 1위, 류샹은 3위로 들어왔습니다. 류샹으로서는 4년 만의 정상 복귀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는데요, 오성홍기를 흔들며 목이 터지게 응원하던 중국 응원단에서는 금메달을 놓친 것을 아쉬워하는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런데 두 선수의 표정이 묘했습니다. 금메달을 따낸 로블레스는 뭔가 찜찜한 얼굴이었고 류샹은 아쉬움보다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느린 화면을 보니까 의문점이 풀렸습니다. 바로 9번째 허들을 넘는 순간 옆 레인에서 달리던 로블레스의 오른팔이 류샹의 왼쪽 팔을 강하게 친 것입니다. 이 여파로 류샹의 속도가 뚝 떨어졌고 균형까지 무너졌습니다. 류샹의 왼쪽 허벅지 뒤쪽이 마지막 허들을 건드리며 3위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허들을 넘을 때도 로블레스는 류샹의 팔을 건드렸습니다. 13초14의 기록으로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한 로블레스는 쿠바 국기를 들고 트랙을 돌며 세리머니까지 펼쳤습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는데요, 류샹의 코치가 경기 직후 국제육상경기연맹에 항의했고 국제연맹은 비디오 재생 화면을 면밀히 판독한 끝에 로블레스의 실격을 선언했습니다. 규정에 따르면 '레이스 중 상대 선수를 밀거나 진로를 방해하면 그 선수를 실격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로블레스의 금메달은 박탈당했고 2위로 들어왔던 미국의 제이슨 리처드슨이 어부지리로 금메달을 차지했고 3위였던 류샹은 은메달로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류샹으로서는 그야말로 땅을 쳐야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로블레스의 반칙만 아니었으면 금메달은 거의 확실했는데 라이벌의 반칙으로 금메달을 놓치고 은메달에 그쳤기 때문입니다. 결승선 직전에 넘어진 디버스, 그리스 선수 행운의 금메달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으로 이어진 사례는 여자 허들에서도 있었습니다. 그 첫 번째 사례가 바로 미국의 게일 디버스입니다. 디버스는 1992년 바르셀로나, 1996년 애틀랜타에서 올림픽 여자 100m를 2연패했던 최고의 스프린터였는데요, 100m 허들에서는 지독한 불운이 겹쳐 4회 연속 메달을 따지 못했습니다. 그 저주의 시발점은 바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었습니다. 압도적 1위로 금메달을 눈앞에 뒀는데 그만 마지막 10번째 허들에 걸려 넘어지며 5위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디버스가 넘어지면서 행운의 금메달은 그리스의 파토울리도우 선수가 차지했습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습니다. 이때 강력한 우승 후보는 캐나다의 펠리시언. 2003년 세계선수권 챔피언이자 올림픽 직전에 시즌 최고 기록인 12초49를 작성해 금메달 0순위로 꼽혔는데요, 대항마는 미국의 조애너 헤이스였습니다. 결승전에서 출발 직전에 중계 카메라는 5레인의 펠리시언, 바로 옆 4레인의 헤이스, 두 선수에게 집중됐습니다. 2명 중에 한 명이 금메달을 차지한다는 예상이었지요. 그런데 출발 총성이 울리자마자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 나왔습니다. 펠리시언이 첫 번째 허들을 넘다 균형을 잃고 넘어지면서 6레인의 선수와 부딪혀 두 선수가 레이스를 망치고 말았습니다. 강력한 라이벌이 사라지자 미국의 헤이스는 부담감을 덜은 듯 쾌속 질주를 거듭했고 12초 37의 올림픽 신기록까지 작성하며 시상대 맨 위에 섰습니다. 허무하게 첫 허들에서 무너졌던 펠리시언은 은퇴할 때까지 올림픽 메달을 단 1개도 거머쥐지 못했습니다. 크라머 코치 실수로 이승훈이 첫 올림픽 금메달 한국 올림픽 역사에서 억세게 운이 좋은 선수는 빙속 장거리의 간판스타 이승훈입니다. 스피드스케이팅 최장거리 종목이 남자 10,000m인데요,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당시 금메달 후보 0순위는 네덜란드의 스벤 크라머로 적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5,000m와 10,000m 세계 기록을 세웠는데 특히 10,000m에서는 3연속 세계신기록을 수립한 절대 강자이었습니다. 10,000m에 앞서 5,000천m 경기가 먼저 열렸는데 예상대로 최강 크라머가 금메달을 따냈고 우리나라의 이승훈 선수가 역주하며 깜짝 은메달을 차지했습니다. 기세가 오른 이승훈은 스피드 스케이팅의 '마라톤'이라 불리는 남자 10,000m에서 12분58초55로 먼저 경기를 끝냈습니다. 올림픽 신기록까지 세웠지만 마음을 놓지 못했습니다. 바로 크라머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초반부터 힘차게 달린 크라머는 레이스 중반까지 이승훈보다 기록이 앞서 금메달이 유력해 보였습니다. 스피드스케이팅은 2명이 함께 경기를 치르는데 레이스를 방해하거나 충돌 사고가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서로 다른 레인에서 달립니다. 그리고 형평성을 위해 한 바퀴를 돌 때마다 인코스와 아웃코스를 번갈아가며 질주해야 합니다. 그런데 8바퀴 반을 남기고 확률 1%도 되지 않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6,600m쯤에서 레인 체인지를 해야 하는데 인코스를 달리던 크라머는 당연히 아웃코스로 나가야 했습니다. 크라머가 아웃코스로 빠지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크라머 코치인 제라드 캠커스 코치가 손가락으로 인코스로 들어가라고 가리키자 크라머는 급하게 방향을 바꿔 인코스로 다시 들어왔습니다. 인코스를 두 번 연속 타면 실격이 됩니다. 하지만 영문도 모르는 크라머는 계속 경기를 이어나갔는데 TV 중계 화면은 크라머의 규정 위반을 계속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2바퀴가 남게 되자 크라머 코치도 자신의 실수를 간파한 듯 머리를 감싸 쥐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고 이승훈과 우리 지도자들은 금메달 딴 것을 확신하고 환호했습니다. 크라머는 이승훈보다 빠른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한 뒤 자신이 금메달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두 손을 번쩍 들고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캠커스 코치가 급하게 달려와 실격 사실을 알리자 크라머는 고글을 바닥에 집어던지며 화를 참지 못했습니다. 코치는 "이승훈의 기록을 체크하느라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고 시인했지만 크리머 입장에서는 정말 억울했던 실격이었습니다. 크라머가 실수를 한 탓에 레이스 막판에는 크라머와 함께 레이스를 펼친 러시아의 스코브레프 두 선수가 같은 레인으로 결승선을 통과하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어이없이 금메달을 놓친 크라머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빨리 결정을 내려야 했다"며 "너무 비싼 실수를 저질렀고 믿기 힘들 정도로 괴롭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켐커스 코치 역시 "나의 경력에서 가장 최악의 실수"라며 괴로워했습니다. 크라머는 다음 올림픽인 2014년 소치에서 설욕을 별렀지만 팀 동료에 밀려 은메달에 그쳤고 결국 10,000m에서 단 한 개의 금메달을 쥐지 못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크라머 코치의 실수 덕분에 이승훈은 생애 첫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거는 엄청난 행운을 누렸습니다. 시상식에서 양 옆에 있던 은메달과 동메달 수상자들이 이승훈을 어깨에 올려 축하해 주는 장면이 방송을 통해 전해지며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금메달은 하늘이 낸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력이 물론 가장 중요하지만 운이 따르지 않으면 쉽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박주아 / 박주아 선수 제공 대한민국 최초의 여자 프로야구 선수 탄생이 초읽기에 들어갔습니다. 무대는 한국이 아니라 야구 종주국인 미국입니다. 미국 여자 프로야구 리그가 72년 만에 부활하기 때문입니다. 대망의 미국 입성을 눈앞에 둔 한국 선수는 모두 4명. 투수 김라경, 포수 김현아, 유격수 박주아, 그리고 야구 천재라 불린 박민서가 꿈의 무대에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미국 여자 프로야구 72년 만에 부활 '그들만의 리그'(A League of Their Own). 1992년에 개봉한 영화로 톰 행크스, 지나 데이비스, 그리고 팝스타 마돈나가 출연해 화제를 모았습니다. 이 영화는 2차 세계대전 시절인 1943년에 창립된 '전미여자프로야구리그'(All-American Girls Professional Baseball League·이하 AAGPBL)를 소재로 제작했습니다. AAGPBL에는 12시즌 동안 10개 팀에 걸친 600여 명의 여자 선수들이 참가했는데 1954년 9월을 마지막으로 리그가 종료됐습니다. 영화 '그들만의 리그'는 야구팬들의 기억 속에 사라졌던 여자 프로야구의 추억을 38년 만에 소환했고 이로부터 다시 34년 뒤인 2026년부터 미국에서 '여자 프로야구 리그'(Women's Pro Baseball League·이하 WPBL)가 새로 출범하게 됐습니다. 미국 여자 프로야구 리그는 내년에 6개 팀으로 시작합니다. 리그를 치르려면 최소한 팀당 25명, 6개 팀 전체를 합치면 150명의 선수가 필요합니다. 리그에 출전할 후보 선수를 뽑는 '트라이아웃'(선수 실력 평가하는 공개 테스트)은 지난 8월 22일부터 4일간 미 프로야구(MLB) 워싱턴 내셔널스의 홈구장에서 치러졌습니다. 전 세계 10개국에서 만 18세 이상의 선수 약 600명이 지원했고, 이 중 200여 명이 직접 미국을 찾아 현장에서 실전 테스트를 받았습니다. 이번 트라이아웃에서 선발된 150명의 선수들 오는 11월 개최될 예정인 '드래프트'(신인 선수 공개 선발 제도)에서 각 구단의 지명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험난한 트라이아웃 통과한 4명은 누구? 새로운 역사를 쓸 주역이 되기 위한 첫 관문은 그리 녹록지 않았습니다. 이번 트라이아웃의 첫 3일 동안 지원자들은 기본기와 체력을 테스트받았습니다. 주최 측은 선수들을 종합 평가한 뒤 1차 컷오프를 진행했습니다. 상당수의 선수들이 실전도 치르기 전에 탈락의 쓴잔을 마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인 8월 25일에는 워싱턴 홈구장 내셔널스 파크에서 실제 경기를 통해 최종 150명을 가려냈습니다. 치열한 기량 경쟁을 통해 험난한 관문을 통과한 한국 선수는 모두 4명입니다. 김라경 / 세이부 라이온스 레이디스 제공 먼저 투수 김라경(25세)은 중학생 시절부터 '여자 야구의 간판'으로 활약해 온 대표팀 에이스입니다. 한국 리틀 야구 최초의 여성 선수이자 대학리그 최초의 여성 선수입니다. 2015년 만 15살에 대한민국 여자야구 국가대표팀 최연소 선수로 발탁된 기록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야구 선수가 되기 위해 서울대에 진학했다는 일화로 유명합니다. 서울대 야구팀만이 특기생이 아닌 일반 학생도 대학 리그에 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라경은 일본 프로야구(NPB) 산하 여자팀인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투수로 뛰고 있다가 최근 4년 만에 국가대표팀에 복귀했습니다. 김현아 / 김현아 선수 제공 포수 김현아(25세)는 이번 트라이아웃에서 선발 포수로 출전해 4이닝을 뛰었습니다. 김현아는 여자야구 '살아있는 전설' 사토 아야미(일본)를 상대로 안타도 하나 뽑아내며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습니다. 박주아 / 박주아 선수 제공 유격수 박주아(21세)도 탄탄한 실력을 보이며 합격 통보를 받았습니다. 박민서 / 박민서 선수 제공 직접 트라이아웃에 참가해 관문을 뚫은 3명과 달리 박민서(21세)는 주최 측에 자신의 프로필과 플레이가 담긴 영상을 제출해 드래프트에 나설 티켓을 거머쥐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인 2016년 구속이 이미 100㎞를 넘었고, 그해 한국 여자 초등학생 중 첫 홈런을 날려 야구 천재로 불렸는데 이후 골프 선수로 전향했다가 야구의 꿈을 포기하지 못해 다시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여자 야구 불모지에서 피운 꽃 야구 본고장 미국에서도 여자 프로야구는 잠시 등장했다가 이내 사라졌습니다. 한국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국내 프로야구는 올해 처음으로 단일 시즌 1,200만 관중 시대를 열었고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 인기 스포츠입니다. 하지만 여자 야구는 오랫동안 불모지이었습니다. 여자 야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단연 개척자로 꼽히던 안향미. 당시 야구 담당 기자였던 저를 비롯해 SBS 뉴스는 안향미 선수에 대한 기획 기사를 타사보다 훨씬 많이 보도해 야구팬들을 관심을 이끌어냈습니다. 안향미는 대한야구협회에 등록된 국내 최초의 여성 야구 선수이었고 18살이던 1999년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에서 여성으로는 최초로 등판했던 투수이었습니다. 국내 프로야구 입단 테스트에서 떨어진 그는 일본 세미프로 여자야구팀 '드림윙스'에서 2년간 4번 타자로 활약하다 '비밀리에'라는 여자야구팀을 창단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지만 프로 선수의 꿈은 끝내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시대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올림픽에서도 남녀 성 평등이 이뤄져 금메달 종목 수가 거의 같고 2028년 LA올림픽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출전하는 여성 선수가 남성 선수보다 많을 전망입니다. 내년부터 미국에서 여자 프로야구 리그가 부활하게 된 것도 이런 시대적 흐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여성 스포츠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면서 여자 프로야구도 독자적으로 흥행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김라경 / SBS 제공 힘든 환경에서도 야구에 대한 사랑으로 열정을 불태워 온 우리 선수들은 지금 행복한 단꿈에 빠져 있습니다. 김라경은 "초등학교 때부터 '나는 프로야구 선수가 될 거야'라고 하면 다들 '네가 어떻게 돼?'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진짜 프로 선수가 되는 무대에 서 있지 않나. 이 과정이 너무 행복하고 즐거웠다"고 말했고 김현아는 "뭘 해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고 강조했습니다. 박주아는 "미국 메이저리그(MLB) 구장 잔디를 밟고, 더그아웃에 있는 내가 너무 신기했다. 정식 프로 선수로 미국 땅을 다시 밟고 싶다"며 환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대표팀 주축 선수인 김라경, 김현아, 박주아는 이달 말 중국 항저우에서 열리는 2025 아시아야구연맹(BFA) 여자야구 아시안컵 첫 결승 진출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달 WPBL 드래프트를 통해 미국 야구팀 유니폼을 입는 순간, 즉 '프로 선수'의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을 가슴 벅찬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꿈을 키워온 4명 모두 미국 6개 구단의 선택을 받아 새로운 신화를 쓰기를 기대해 봅니다.
복싱은 심판이 주관적으로 채점하는 종목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오심 논란에 휩싸여 왔습니다. 올림픽 복싱 역사에서 최악의 오심 중의 하나가 바로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수혜자이자 피해자였던 박시헌 선수가 당시 결승전 상대였던 미국 선수에게 금메달을 되돌려주는 영상이 최근 공개돼 37년 전의 사건이 다시 소환되고 있습니다. 오른손 다친 박시헌, 미국 선수에 일방적 열세 1988년 서울올림픽 복싱 라이트 미들급 결승전에서 한국의 박시헌 선수와 미국의 로이 존스 주니어 선수가 만났습니다. 결승전이 벌어진 날은 1988년 10월 2일, 이날이 서울올림픽이 폐막하는 즉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전날 10월 1일까지 한국은 금메달 10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0개로 종합 7위이었는데요, 마지막 10월 2일 결승에 오른 복싱의 김광선, 박시헌 두 선수에게 금메달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김광선의 가능성은 컸습니다. 하지만 박시헌은 녹록지 않았는데요, 상대 로이 존스 주니어가 너무 강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두 선수가 모두 금메달을 차지하게 되면 한국이 서독을 제치고 역대 최고 성적인 종합 4위까지 노릴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불운하게도 박시헌은 서울올림픽 개막 2주 전에 오른손을 다쳤습니다. 오른손잡이인 그에게 결정적인 악재이었습니다. 그래서 8강전에서도 이탈리아 선수에게 3대 2로 겨우 이겼습니다. 이탈리아 나르디엘로 선수가 탈의실에서 1시간 동안 통곡할 만큼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이겼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박시헌은 우여곡절 끝에 결승에 올랐는데요, 상대의 기량이 정말 뛰어났습니다. 스피드, 펀치력, 기술에서 모두 박시헌을 처음부터 압도했습니다. 2라운드에서는 로이 존스 주니어의 강한 주먹을 맞고 스탠딩 다운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미 오른손을 다친 박시헌은 이렇다 할 반격을 하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박시헌이 일방적으로 밀린 것이지요. 경기 후 비디오 분석에 따르면 로이 존스 주니어는 총 303회 주먹을 날려 86회의 유효 타격에 성공했습니다. 박시헌은 188회에 32회였습니다. 그러니까 공격 빈도와 유효타 모두에서 크게 뒤진 것입니다. 아마추어는 유효타를 중시하는데요, 여기서 86대 32, 로이 존스 주니어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봐도 로이 존스 주니어가 이긴 경기이지요. 마지막 3라운드가 종료되자 미국 측은 승리를 확신했고 현장에 온 로이 존스 가족들도 기뻐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반면 박시헌과 우리 코치진 분위기는 착 가라앉았습니다. 패배를 예감한 것입니다. 많이 맞은 선수가 금메달..경악할 만한 오심 결과가 발표되자 양측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주심이 박시헌의 선수의 손을 들어준 것입니다. 한국에서 열린 서울올림픽, 최고 영예인 금메달이 확정되면 엄청난 환호를 해야 정상인데, 박시헌 선수는 ‘이게 뭐지’ ‘뭐가 잘못됐나’는 표정을 지었고요, 로이 존스 주니어는 말도 안 되는 판정이라며 극도로 실망한 채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은 격앙된 반응을 보였고, 미국 NBC 중계진은 “박시헌이 금메달을 훔쳤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박시헌은 멋쩍어하면서 상대에게 다가가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이긴 줄 알고 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로이 존스는 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링에서 내려갔습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7천여 관중 반응도 갈렸는데요, 3분의 1은 박시헌의 금메달에 함성을 질렀고, 3분의 1은 어리둥절했고, 3분의 1은 거세게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5명의 부심 판정 내용을 보면, 소련과 헝가리 부심이 60-56, 4점 차로 로이 존스의 우세로 판정했고요, 우루과이와 모로코 부심은 59-58, 박시헌의 1점 차 우세로 채점했습니다. 마지막 우간다 부심은 59-59, 동점으로 채점하면서도 박시헌의 우세로 판정했습니다. 이로써 박시헌은 3대 2, 아슬아슬한 판정승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하지만 판정이 나오자 박시헌은 기쁨보다는 매우 송구하다는 반응을 보였고요, 어떤 한국팀 지도자는 서로 ‘주고받은 셈’이라는 말로 패배를 간접적으로 시인했습니다. 주고받았다는 것은 1984년 LA 올림픽에서 우리 복싱 선수들이 미국의 텃세 판정으로 억울하게 탈락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4년 전엔 한국이 당했는데 이번엔 미국이 당했다는 것이지요. 아무튼 박시헌의 금메달 덕분에 우리나라는 금메달 12개로 서독을 1개 차이로 제치고 종합 4위를 차지했는데요, 지금까지도 역대 최고 순위로 남아 있습니다. 만약 은메달에 그쳤다면 우리가 은메달 수에서 서독에 밀려 5위가 됐는데 박시헌의 금메달로 종합 4위에 올랐습니다. 서울올림픽 이전, 그리고 이후에도 한국이 동·하계올림픽을 통틀어 종합 4위를 차지한 적은 없습니다. 이례적으로 은메달리스트를 MVP로 선정 금메달을 눈앞에서 도둑맞은 미국 선수단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거세게 항의하며 국제올림픽위원회 IOC에 제소했습니다. 미국 복싱대표팀 코치는 NBC와 인터뷰에서 “한국 복싱 관계자가 9월 28일, 국적을 알 수 없는 심판에게 현금과 보석을 제공하려고 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국내 언론도 날카로운 비판을 쏟아냈는데요, ‘한국을 먹칠한 억지 금메달’, ‘부당한 승리’라는 비난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국내 언론사에는 항의 전화가 빗발쳤고 홈 어드밴티지로 따낸 금메달을 반납하라는 요구까지 나왔습니다. 박시헌이 이겼다고 판정한 심판도 무사하지 못했습니다. 3명이 모두 징계를 받았는데 이 가운데 2명은 영구 자격정지를 받아 복싱계를 떠나야 했습니다. 더 가관인 것은 국제아마추어복싱연맹의 행태입니다. 로이 존스 주니어에게 미안했던지 서울올림픽 복싱 최우수복서, 즉 MVP를 로이 존스 주니어에게 수여했습니다. 그전까지 MVP는 전 체급 금메달리스트들 가운데 1명을 선정하는 게 관례였는데요, 이 관례를 깨고 은메달리스트를 MVP로 선정하는 해프닝을 벌였습니다. 지금까지도 은메달리스트가 MVP가 된 것은 로이 존스 주니어 딱 1명입니다. ‘동독 개입’ 문서 공개, IOC는 ‘증거 불충분’으로 결정 박시헌 논란은 1996년 구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Stasi) 문서가 공개되면서 새 국면을 맞게 됩니다. 동독이 종합순위 경쟁국인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당시 부심들에게 뇌물을 제공한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결승 전날 10월 1일 메달 순위를 보면 동독이 소련에 이어 종합 2위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10월 2일, 미국이 복싱 3체급을 석권하고 다른 종목에서 1개를 보태 금메달 4개를 따내면 미국의 2위, 동독이 3위로 내려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동독이 심판을 움직여 미국을 견제했다는 것인데요, 공교롭게도 당시 국제아마추어 복싱연맹 사무총장이자 실세였던 칼 하인츠베어 씨가 동독 사람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동독은 금메달 1개 차이로 미국을 제치고 소련에 이어 종합 2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독일 슈피겔지는 “당시 판정에 한국 대기업 인사가 관여했다”며 한국 로비설을 주장했는데요, 1997년 IOC는 한국, 동독 모두 심판 매수에 관여한 명백한 증거가 없다며 이른바 심판 매수설을 인정하지 않았고 결과도 끝내 바뀌지 않았습니다. 박시헌은 은퇴, 로이 존스 주니어는 4체급 석권 신화 박시헌 대표팀 감독 올림픽 복싱 사상 최악의 오심은 두 선수의 인생에도 결정적 영향을 끼쳤습니다. 박시헌은 금메달을 받고도 이 사건의 피해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국내외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고, 선수 생활을 이어가지 못한 채 결국 은퇴했습니다. 은퇴 후에도 대인 기피증을 앓는 등 계속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습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 모임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2020년 인터뷰에서 “당시 2등으로 끝났더라면 인생이 훨씬 더 행복했을 것”이라며 “가끔씩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은퇴 이후 체육교사 생활을 했고 2001년부터 국가대표 코치를 맡았습니다. 2013년엔 국가대표팀 감독이 됐고 2016 리우올림픽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2023년 박시헌을 모티브로 한 진선규 주연의 영화 ‘카운트’가 개봉하기도 했는데 현재 제주는 서귀포시청 복싱팀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또 다른 피해자인 로이 존스 주니어 존스는 프로로 전향한 후 천재적인 기량을 발휘하며 4체급을 석권해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등 복싱계의 전설적인 인물로 남았습니다. 2020년 11월에는 전설 마이크 타이슨과 이벤트성 2분 8회전 경기를 했는데 싱겁게 무승부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코로나19 시절 오직 돈 때문에 링에 올랐는데 팬들을 실망시켰습니다. 로이 존스 주니어를 찾아가 금메달 전달한 박시헌 감독 로이 존스 주니어에게 금메달 주는 박시헌 감독 서울올림픽이 끝난 지 35년이 지난 2023년 박시헌 감독은 로이 존스 주니어가 살고 있는 미국 플로리다주 펜서콜라의 체육관을 직접 방문해 자신의 금메달을 전달했습니다. 로이 존스가 이 영상을 2년이 흐른 지난 9월 3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공개해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됐습니다. 로이 존스를 뜨겁게 포옹한 박시헌 감독은 “36년(실제로는 35년) 동안 당신을 기다렸다”며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이어 그는 금메달을 꺼내 들었는데요, 박 감독은 통역을 맡은 아들을 통해 로이 존스 주니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88년 서울 올림픽 금메달입니다. 88년도 서울에서 홈에서 이 금메달을 가져갔습니다. 지금은 내가 잘못된 걸 알고 로이 존스 주니어의 홈에서 내가 이 메달을 (돌려줍니다)” 단순한 인터뷰 촬영으로 생각했던 존스 주니어는 “믿을 수 없다”며 감정에 복받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SNS를 통해 “1988년 나는 복싱 역사상 가장 큰 논란 중 하나로 꼽히는 경기에서 금메달을 빼앗겼다. 하지만 신의 은총으로 그 메달을 차지한 선수가 내 고향까지 찾아와 메달을 돌려줬다”는 소감을 남겼습니다. 이 스토리는 미국 방송에도 화제가 됐는데요, 로이 존스 주니어는 두 명 모두 피해자이고 서로 고통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박시헌은 금메달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금메달을 돌려주고 싶다고 했고 저는 돌려받고 싶었습니다. 그 사건을 일으킨 사람은 박시헌이 아니라 심판들이었습니다. 심판들이 복싱에서 저지른 부당한 판정 때문에 박시헌과 나 모두 고통을 받았습니다.” 박시헌은 오랫동안 금메달을 돌려주고 싶다는 의사를 꾸준히 밝혀왔고 로이 존스 주니어 측에서도 몇 년 전부터 박시헌을 미국에 초청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35년의 기다림 끝에 마침내 금메달을 직접 전달한 박시헌은 마음의 짐을 덜어낼 수 있었습니다. 박시헌과 로이 존스 주니어, 두 선수 모두 심판들의 황당한 판정이 만든 피해자였습니다. 스포츠의 존재 의미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이런 사건은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수영은 기록 종목입니다. 100분의 1초라도 앞서는 사람이 금메달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평범한 상식이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는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가장 먼저 들어온 선수가 은메달을 받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수영에서 터치 패드가 도입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을 소개하겠습니다. 1960년 로마올림픽 수영에서 무슨 일이? 아래 선수가 랜스 라슨 육상의 꽃은 남자 100m이고 수영은 남자 자유형 100m입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빨리 헤엄치는 사람을 가리는 경기인데 1960년 로마올림픽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남자 자유형 100m의 우승 후보는 미국의 랜스 라슨과 호주의 존 데빗, 두 선수이었습니다. 데빗은 세계 기록 보유자로 당시 23살이었고요, 라슨은 20살의 떠오르는 신예였습니다. 1만여 명의 관중이 야외 경기장을 가득 채운 가운데 레이스는 시종 치열했는데요, 초반에는 뜻밖에도 브라질의 마누엘 산토스가 선두로 치고 나가 50m를 가장 먼저 돌았습니다. 이후에는 약 5명의 선수가 뜨거운 경쟁을 펼쳤습니다. 75m쯤에서는 3레인의 데빗이 조금 앞서는가 했는데 80m 이후부터 4레인의 라슨이 무섭게 치고 나왔습니다. 데빗은 필사의 추격전을 펼쳤는데요, 라슨과 데빗 두 선수가 거의 동시에 벽을 쳤습니다. 당시 중계 캐스터는 "데빗과 라슨이 정말 거의 똑같이 들어옵니다. 누가 우승했다고 말할 수 없는 정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언뜻 보면 미국의 라슨이 조금 앞선 것처럼 보였습니다. 현장에 있던 관중 거의 대부분도 라슨이 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데빗도 경기 직후 라슨을 축하해줬습니다. 선수들은 직감적으로 알거든요. 라슨은 훗날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10분이나 15분 동안 제가 올림픽 챔피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물속에서 우승을 즐기고 있다가 나와서 몸을 말리니까 심판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심판위원장이 2위를 금메달리스트로 결정 그런데 당시에는 지금 같은 터치 패드가 없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레인 당 3명의 계시원이 서서 스톱워치를 누르는 방식으로 기록을 측정했습니다. 3명의 계시원이 측정한 데빗의 기록은 55초20으로 모두 같았습니다. 하지만 라슨은 좀 달랐습니다. 한 계시원은 55초00, 다른 2명의 계시원은 55초10으로 측정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규정에 따르면 같은 두 기록이 인정되기 때문에 라슨은 55초10, 데빗은 55초20으로 결정됐습니다. 그러니까 라슨이 0.1초 빨랐던 것이지요. 하지만 1960년 로마올림픽의 수영 심판은 초시계를 그대로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규칙을 보면 양측에 12명씩의 심판이 서서 육안으로 누가 먼저 들어왔는지를 판단했는데요, 1등을 정하는 심판은 3명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누가 1등이냐고 묻자 2명은 데빗이, 1명은 라슨이 먼저 들어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다음에 2등을 정하는 다른 3명의 심판에게 누가 2등이냐고 묻자 2명은 데빗이라고 했고 1명은 라슨이라고 말했습니다. 결과적으로 3대 3으로 우열을 가릴 수 없었습니다. 당시 규정에 따르면 이렇게 심판들이 육안으로 판단했을 때 동등한 결과나 나올 때는 초시계, 즉 스톱워치를 따르도록 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심판위원장이었던 서독의 한스 런스트로머가 역사에 길이 남을 잘못된 판단을 했습니다. 그는 "존 데빗이 먼저 들어온 것을 봤다. 금메달은 데빗에게 돌아가야 한다"며 데빗의 우승을 자의적으로 결정했습니다. 당시 규정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지요. 그런데 당시 찍힌 사진을 보면 런스트로머는 5m 이상 떨어져 있어 정확하게 순위를 가릴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런스트로머의 말도 안 되는 결정에 미국은 항소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라슨은 "정말 치열한 접전이었다. 75m쯤에서 데빗이 조금 앞선다고 느꼈지만 결승선까지 아직 많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혼신의 힘으로 마지막 스퍼트를 했고 데빗을 15cm쯤 앞서 1위로 들어온 것 같다."고 훗날 회상했습니다. 시상식 (오른쪽이 랜스 라슨) 느린 화면을 보면 라슨은 언더 워터, 즉 물 아래에서 벽을 터치한 반면 데빗은 오버 워터, 즉 물 위에서 터치했습니다. 이럴 경우 사람의 눈으로 보면 오버 워터, 즉 물 위에서 터치한 게 훨씬 잘 보입니다. 금메달을 도둑맞은 라슨 선수는 시상식에서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습니다. 라슨의 기록을 0.1초 느리게 변경해 은메달로 확정 랜스 라슨 더 황당한 것은 라슨의 기록을 55초10에서 55초20으로 더 느리게 변경한 것입니다. 데빗의 기록이 55초20인데 금메달리스트의 기록이 은메달리스트보다 느리면 안 되기 때문에 두 선수 모두 공식 기록을 55초20으로 만드는 짓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한 외국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이때 공식적이지는 아니지만 실험적으로 전자 장비를 도입해 기록을 측정했다고 하는데요. 결과는 라슨이 55초10, 데빗이 55초16으로, 라슨이 0.06초 빨랐습니다. 그러니까 라슨의 기록은 수동 스톱 워치와 같았고 데빗은 스톱 워치보다 0.04초 빠르게 나왔습니다. 결론적으로 지금처럼 전자 장비를 썼으면 라슨이 금메달이 확실했다는 것이지요. 라슨은 로마 올림픽 남자 400m 혼계영에서 접영 주자로 유일한 금메달 1개를 따내 억울한 마음을 다소나마 달랬는데 지난해 1월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라슨의 희생이 전자 패드 도입 결정적 계기 희대의 논란 이후 스포츠계에 지각 변동이 일어났습니다. 국제올림픽위원회 IOC는 실수를 하는 사람 대신 전자 센서를 도입하기로 했습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부터 초시계와 심판의 육안으로 순위를 가리는 규정은 사라졌습니다. 이후에는 판정 논란이 거의 없었습니다. 어찌 보면 전자 패드 도입으로 고마워해 할 선수들이 많은데요. 그 대표적 선수가 역대 수영 사상 최고 선수인 미국의 마이클 펠프스입니다. 펠프스는 2004년 아테네부터 2016년 리우까지 올림픽 금메달 23개, 은메달 3개, 동메달 2개 등 총 28개의 메달로 역대 최다 올림픽 메달리스트인데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한 대회에서 8개의 금메달을 따내 이 부문 역대 최고 기록도 갖고 있습니다. 종전 기록은 펠프스의 대선배인 마크 스피츠가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수영 7관왕이었습니다. 오른쪽이 펠프스 마이클 펠프스가 전자 터치 패드 도입을 특히 감사해야 할 종목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접영 100m입니다. 펠프스는 자신의 7번째 금메달에 도전했는데요, 5레인의 펠프스와 4레인에 있었던 세르비아의 밀로라드 차비치는 치열한 접전을 벌였는데 육안으로 보면 펠프스가 늦게 들어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터치 패드는 0.01초 차 펠프스의 승리로 판정했습니다. 7번째 금메달을 목에 건 펠프스는 이후 1개의 금메달을 더 보태 마크 스피츠를 제치고 단일 올림픽 8관왕이라는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터치 패드는 수영선수들의 기록을 재는 정밀장치인데 1.5㎏의 힘만 가해져도 작동됩니다. 터치 패드에다 요즘엔 선수의 손이 패드에 닿는 순간 카메라까지 작동해 100장의 사진을 찍기 때문에 판정 논란이 생길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수영과 육상은 순위 결정 기준이 다른데요, 육상은 100분의 1초까지 같을 경우 사진판독으로 끝까지 순위를 가리지만, 수영은 100분의 1초까지만 인정합니다. 2016 리우올림픽 남자 접영 100m에선 마이클 펠프스 등 3명의 선수가 100분의 1초까지 같아 공동으로 은메달을 받는 이례적 장면도 나왔습니다.
흔히 올림픽 금메달은 하늘이 낸다고 합니다. 실력은 기본이고 운까지 따라야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인데요, 이 말이 딱 들어맞는 선수가 있습니다. 바로 중국의 탁구 스타 왕하오입니다. 올림픽을 제외한 모든 국제대회 남자 단식을 제패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올림픽에서는 3회 연속 은메달에 그치며 진한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중국에서 '천년간 2인자' 즉 '영원한 2인자'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면 타법의 완성자, '백플릭'으로 한 시대 풍미 왕하오는 1983년 12월 중국 창춘시에서 태어났는데요, 키 175cm, 체중 78kg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체구를 가졌습니다. 1990년대를 빛냈던 류궈량과 공링훼이 시대가 저물어 가던 2000년대 초반 혜성처럼 등장했습니다. 그는 마린, 왕리친과 함께 중국 남자 트로이카로 불렸는데요, 중국식 펜홀더 전형을 사용하는 스타일로 흔히 '이면 타법의 완성자'로 불리고 있습니다. 펜홀더는 세이크핸드 선수와 비해 일반적으로 라켓의 뒷면, 즉 이면을 이용한 공격이 그렇게 강하지 않는데요, 왕하오는 달랐습니다. 백핸드 드라이브를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파워도 대단했습니다. 특히 '백핸드 사이드스핀 플릭'이란 기술로 유명했습니다. 줄여서 '백핸드 플릭', 더 줄여서 '백플릭'이라고 하는데요, 손목을 이용해 회전을 주면 공이 마치 바나나처럼 빠르게 휘기 때문에 상대가 대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포핸드 공격도 무척 잘했습니다. 또 임기응변과 전술도 뛰어나 27개월 연속 세계 랭킹 1위를 달렸습니다. 금메달만 해도 무척 많이 목에 걸었는데요, 올림픽 단체전에서 2개, 세계선수권 9개, 월드컵 3개, 아시안게임 4개, 아시아선수권 5개, 기타 국제대회에서 38개 등 숱한 금메달을 따내며 한 시대를 풍미했습니다. 유승민의 천적이었지만 아테네 올림픽에서 충격패 왕하오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노렸습니다. 당시 1번 시드는 트로이카 중의 한 명인 장신의 왕리친인데 준결승에서 왕하오에게 졌습니다. 2번 시드의 마린은 스웨덴의 발트너에게 져 8강 진출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중국은 왕하오에게 모든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데요, 당시 왕하오는 상대 전적에서 유승민에게 6승 무패로 압도적 우세를 보였습니다. 그래서 중국은 금메달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왕하오가 결승전 상대인 유승민에게 너무 강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 밖으로 유승민의 승리였습니다. 대이변이 일어난 것입니다. 왕하오에 대비해 치밀하게 전략을 짰고 김택수 코치와 함께 피나는 맞춤형 훈련을 한 결과였습니다. 유승민이 1988년 서울올림픽 유남규 이후 16년 만에 남자 단식 금메달을 따내자 한국에는 다시 탁구 열풍이 불었습니다. 왕하오도 덩달아 유명 인사가 됐습니다. 당시 왕하오는 팬클럽 회원만 1천 명이 넘을 정도로 국내에서도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방한했을 때 뜨거운 사인공세를 받으며 유승민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유승민은 이후에도 왕하오에게 딱 1번 이겼습니다. 통산 전적에서 2승 18패로 절대 열세였지만 아테네 올림픽에서 1번 이긴 게 18번 진 것보다 훨씬 컸습니다.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통한의 은메달 한동안 실의에 빠진 왕하오는 자국에서 열리는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반드시 금메달을 거머쥐겠다면 단단히 별렀습니다. 베이징 올림픽 1년 전인 2007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월드컵이 열렸는데요, 이때 유승민을 4대 0으로 꺾고 정상에 올랐습니다. 바르셀로나가 고향인 사마란치 전 IOC 위원장으로부터 트로피를 받은 왕하오는 세계 1위로서 자타가 공인하는 베이징 올림픽 단식 금메달 후보 0순위로 꼽혔습니다. 탁구는 중국의 국기나 다름없고 오랫동안 세계 최강을 지켜왔습니다. 왕하오의 꿈은 자기 조국에서 처음 열리는 올림픽에서 당연히 단식 금메달을 따는 것이었습니다. 결승에서 만난 상대는 팀 동료 마린, 마린은 왕하오보다 3살 많은 당시 28살의 베테랑이었는데요, 까다로운 서브가 특기이고 번개 같은 포핸드 드라이브가 일품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왕하오의 장단점을 훤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마린은 노련한 플레이로 왕하오가 특기를 살릴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왕하오는 2게임 먼저 내주고 3번째 게임을 따냈지만 4번째, 5번째 게임에서 져 결국 4대 1 패배를 당했습니다. 2회 연속 은메달에 그친 왕하오는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올림픽 징크스에서 벗어나지도 못했습니다. 런던에서는 후배에게 패배, 3연속 은메달 불운 1980년대 1990년대 중국 최고지도자 등소평, 떵샤오핑의 별명이 '부도옹', 즉 오뚝이인데요, 왕하오도 그랬습니다. 베이징 올림픽 이듬해인 2009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식 결승에서 5살 많은 팀 동료 왕리친을 꺾고 정상에 올랐습니다. 이 경기가 손에 꼽히는 명승부였는데요, 왕하오 탁구의 진수를 보여준 경기였습니다. 왕하오는 이 대회 복식에서도 금메달을 차지해 2관왕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2010년 월드컵에서는 팀 후배 장지커를 제치고 월드컵 세 번째 우승을 거두면서 제2의 전성기를 여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2011년부터는 장지커에게 번번이 발목을 잡혔습니다. 장지커는 1988년 생으로 왕하오보다 5살 어린 떠오르는 신예였습니다. 그리고 왕하오처럼 백핸드 기술이 화려한 데다 공격이 변화무쌍했고 그 속도가 엄청 빨랐습니다. 2011년 세계선수권과 월드컵 대회에서 왕하오를 잇따라 누르고 정상에 오르며 세대교체 신호탄을 쏘아 올렸습니다. 이렇게 되자 모든 관심은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왕하오가 자신의 천적인 무서운 후배 장지커를 꺾을 수 있느냐에 쏠렸습니다. 새로운 최강자로 떠오른 장지커와 어느덧 30살을 눈앞에 둔 왕하오 두 선수가 결승에 올라 외나무다리 대결을 벌였는데요, 왕하오는 사실상 마지막 올림픽이었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경기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첫 게임이 정말 아쉬웠습니다. 10대 10으로 듀스에 들어갔고 왕하오가 16대 15로 앞서 경기를 끝낼 수 있었는데 여기서 뼈아픈 실수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16대 16에서 장지커가 그야말로 번개 같은 포핸드로 받아쳐 점수를 얻었습니다. 이어 왕하오의 서버를 절묘한 백플릭으로 응수했는데 왕하오가 받지 못해 결국 첫 게임을 18대 16으로 내주고 말았습니다. 왕하오는 2, 3게임을 내준 뒤 4번째 게임을 12대 10으로 따냈지만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5번째 게임에서 초반에 5대 0으로 앞서다가 듀스 끝에 졌는데요, 11대 11에서 왕하오가 백핸드 플릭을 시도하자 장지커가 번개 같은 백핸드 드라이브로 맞받아 친 장면이 압권이었습니다. 왕하오는 13대 11로 져 결국 4대 1로 패배했습니다. 단식 금메달을 따낸 장지커는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격한 세리머니를 펼쳤고 3회 연속 은메달에 머문 왕하오는 허탈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끝내 지긋지긋한 올림픽 징크스에서 벌어나지 못한 왕하오는 방송 카메라 앞에서 진한 눈물을 연신 흘려 보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그는 "아마도 이번(2012년 런던 올림픽)이 저의 마지막 올림픽인 것 같습니다. 매우 좋은 올림픽이었는데요, 마지막 올림픽에서 선수 생활의 마침표를 잘 찍은 것 같습니다.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따내 매우 기쁩니다."라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왕하오는 이듬해 2013년 세계탁구선수권에서 장지커에게 또 지며 4연패를 당했고 2014년 12월 은퇴를 선언하면서 16년간의 대표 선수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왕하오는 올림픽에서도 2008년과 2012년 금메달은 따냈는데 모두 단체전 우승이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선수권과 월드컵, 아시안게임, 아시아선수권 등 주요 국제대회에서는 모두 단식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한마디로 하늘이 그에게 올림픽 단식 금메달만은 허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때문에 왕하오는 영원한 은메달리스트, 'Forever Silver'라고 불리게 됐는데요, 중국에서는 '천년간 2인자'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천년간 2인자'라는 것이 쉽게 말해 영원한 2인자라는 것이지요. 애제자 판전둥 올림픽 금메달 통해 한풀이 왕하오가 2014년 은퇴하기 직전에 출전한 마지막 대회가 스웨덴 오픈인데요, 당시 31살의 왕하오는 17살의 샛별 판전둥에게 완패하면서 선수 생활의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왕하오는 판전둥이 대성할 재목이라는 점을 일찌감치 파악했습니다. 판전둥도 왕하오의 제자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왕하오는 자신의 훈련 파트너로 기용해 기술과 노하우를 전수했습니다. 이후 판전둥의 기량은 무럭무럭 자랐는데요, 2021년에 열린 2020 도쿄올림픽에서 판전둥은 결승에 올라 팀 선배 마룽과 대결하게 됐습니다. 판전둥은 24살, 마룽은 33살의 베테랑인데 마룽은 2016년 리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당시 세계 3위, 판전둥이 세계 1위였습니다. 하지만 상대 전적에서 15승 5패로 크게 앞서 있던 마룽은 노련한 플레이로 올림픽에 처음 나온 판전둥을 4대 2로 꺾고 2회 연속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중국 언론에서는 왕하오의 올림픽 은메달 징크스가 제자인 판전둥에게도 이어졌다며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왕하오는 다시 한번 속이 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2인자 징크스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왕하오는 2023년 초부터 중국 남자대표팀 감독이 됐는데요, 그해 가을 중국 항저우에서 아시안게임 열렸는데, 남자 단식 결승에서 판전둥이 팀 동료 왕추친에게 아쉽게 져 또 은메달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중국 언론들은 판전둥이 스승 왕하오에 이어 앞으로도 계속 은메달만 따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스승과 제자, 대를 이어 내려올 것 같은 2인자 징크스는 마침내 지난해 파리 올림픽에서 깨졌습니다. 여기에는 다분히 운도 따랐습니다. 판전둥의 라이벌인 세계 1위 왕추친이 혼합복식 금메달을 따낸 뒤 기념 촬영을 했는데 사진기자가 그만 왕추친의 라켓을 밟아 파손시켰습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왕추친은 예비 라켓으로 단식 32강전에 나섰는데 어이없이 스웨덴 선수에 패배해 조기 탈락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판전둥은 비교적 손쉽게 결승에 진출해 스웨덴 선수를 꺾고 꿈에 그리던 올림픽 첫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금메달이 확정되자 왕하오는 제자를 얼싸안고 벅찬 감격을 누렸습니다. 자신이 끝내 이루지 못했던 올림픽 단식 금메달의 한을 제자인 판전둥을 통해 마침내 풀었기 때문입니다.
농구에서 '3점슛' 도입은 1979년 미국 프로농구 즉 NBA가 그 시초입니다. 이전에는 림 바로 아래에서 넣든 20m가 넘는 장거리 슛을 집어넣든 모두 2점으로 처리했습니다. 3점슛 규정이 생기면서 플레이의 양상은 달라졌습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는 양궁에도 변화의 새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11점제'가 도입된 것입니다. 현재는 시험 단계이지만 2028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부터 '11점제'가 공식 채택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X10' 맞히면 1점 더해 11점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의 김경욱 선수는 여자 개인전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이때 김경욱은 만점인 10점 과녁 정중앙에 설치된 지름 1cm 카메라 렌즈를 두 번이나 깨트리면서 모두를 경악케 했습니다. 당시 현장에서 취재 중이던 필자를 비롯해 많은 관계자들은 "저런 때는 11점을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로부터 29년이 흐른 지난 5월 세계양궁연맹은 마침내 '11점제'를 시험 운영했습니다. 그 첫 무대는 튀르키예 안탈리아에 열린 양궁 월드컵 3차 대회이었습니다. 10점 과녁 안쪽에 있는 더 작은 원, 이른바 '엑스 텐'(X10)이라고 부르는 위치를 맞히면, 1점을 더해 11점으로 인정하기로 한 겁니다. 즉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10점과 11점을 처음으로 세분한 것입니다. '엑스텐'은 지름이 6.1cm에 불과합니다. 70m 떨어진 거리에서 500원짜리 동전 두 개 정도 크기의 원을 명중시키면 11점입니다. '11점제'에서는 세트 당 기존보다 3~6점까지 더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고 승패의 중요한 변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양궁의 재미를 더하기 위해 '11점제'를 한번 테스트한 것인데 결과는 어땠을까요? '11점제 유탄'..세계 최강 김우진 32강전 패배 사상 처음으로 '11점제'가 도입된 월드컵 3차 대회에서 최대 이변은 바로 남자 간판스타 김우진의 32강전 패배였습니다. 지난 2024 파리올림픽 3관왕에 올랐던 김우진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강. 하지만 김우진은 32강전에서 세계 랭킹 10위의 스페인의 안드레스 테미노와 맞붙어 패배했습니다. 만약 '11점제'가 없었다면 김우진이 승리하는 경기였습니다. 승부처인 3세트에서 김우진은 10-10-9를 쐈는데, 상대가 11-11-8, '엑스텐'을 두 발 쏘면서 1점을 앞서게 된 겁니다. 종전처럼 10점 만점제로 했으면 김우진이 29점, 상대가 28점으로 승부가 뒤바뀔 수 있었던 상황이었지만 11점제 탓에 패배한 경기였습니다. 반면, 여자부 세계 최강 임시현은 '11점제'의 이득을 보기도 했습니다. 16강전에서 우크라이나의 아나스타샤 파블로바에 6대 2로 승리했는데, 이때 임시현은 4세트까지 전체 12발의 화살 중 5발을 '엑스텐'(11점)에 명중시키며 3세트를 먼저 따냈습니다. 만약 10점제 방식이었다면, 이 경기는 5세트까지 가는 접전이 펼쳐졌을 것이고, 승패는 달라졌을 수도 있었습니다. '11점제' 한국 양궁에 다소 유리 '11점제'가 처음 도입된 월드컵 3차 대회에서 한국은 금메달 4개, 은메달 2개, 동메달 2개를 획득하며 세계 정상을 재확인했습니다. 대한양궁협회의 분석에 따르면 결론적으로 '11점제'는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전문가들은 '11점제'가 궁극적으로 한국 양궁에는 조금 유리할 수 있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지난 5월, 중국에서 열린 월드컵 2차 대회 단체전 기록을 분석해 보면, 리커브 남자 대표팀은 전체 화살의 59%를 10점에 꽂아 넣었고, 10점 중 47%가 '엑스텐'이었습니다. 반면, 외국 선수들의 10점 화살 비율은 40%로 한국보다 낮았고, 그중에서도 31%만이 '엑스텐'에 들어갔습니다. 여자 대표팀도 마찬가지인데, 한국 대표팀은 화살의 46%가 10점, 이 가운데 45%가 '엑스텐'이었던 것에 비해 외국 선수들은 10점 비율이 27%, '엑스텐'은 이 중 25%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10점을 많이 쏴야 '엑스텐'에 들어갈 확률도 높아지는데, 한국 양궁은 현재 10점 비율이 다른 나라 선수들에 비해서 매우 높습니다. 지난해 파리올림픽 결과를 놓고 분석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선수들이 '엑스텐'에 훨씬 더 많이 쏘았고 그 결과 한국 양궁은 전무후무한 5개 전 종목 석권 신화를 달성했습니다. '11점제' 도입에 대해 여자 최강 임시현은 "저희끼리는 살짝 우스갯소리로 '10점까지는 실력인데 엑스텐은 운이 아니냐' 이런 얘기를 했었는데, '아. 운이면 안 되는구나 이거, 열심히 집중해야겠다' 이 생각으로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밝혔고 김우진은 "우리 선수들이 항상 기록을 재면 10점과 엑스(엑스텐)의 개수는 항상 다른 나라 선수들보다 많이 쏴요. 의외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우리에게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 하나의 룰이지 않을까 생각을 갖습니다"라며 자신감을 드러냈습니다. LA 올림픽에 양궁 '11점제' 도입될까? '11점제'는 지난 7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벌어진 월드컵 4차 대회에는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9월 5일부터 광주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도 종전대로 10점제입니다. 하지만 세계양궁연맹은 '11점제'를 계속 검토할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11점제'가 처음 도입된 월드컵 3차 대회에서 세계 최강 김우진이 조기 탈락하는 이변이 발생한 점을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11점제'가 양궁의 의외성을 높일 수 있고 시청자의 흥미를 더 자극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한국 양궁이 절대 강자로 군림하자 세계양궁연맹은 한국을 견제하기 위해 경기 방식을 숱하게 변경해 왔습니다. 그때마다 우리 양궁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적응해 왔고 지난 40년 넘게 세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습니다. 대한양궁협회는 만약 내년 콜롬비아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에서 11점제가 도입된다면 2028년 LA 올림픽에서도 11점제를 채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양궁협회는 이미 LA 현지에서 올림픽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경기장과 훈련장, 숙소 등 올림픽 전반에 대해 꼼꼼하게 체크하고 있습니다. 경기 규칙에 대한 대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한양궁협회는 "세계 최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룰에도 빠르게 적응하고,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기력을 갖출 수 있도록 더욱 철저히 준비하겠다"라고 밝혔습니다. 호진수 양궁 대표팀 감독은 새로 도입된 11점제에 대해 "주요 대회 데이터를 시뮬레이션해 본 결과, 최종 순위에는 큰 영향이 없었다. 우리 선수들의 엑스텐 명중 수가 타국보다 많았던 만큼 더욱 자신감 있게 경기에 임할 것"이라며 각오를 다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