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부터 30년 넘게 오로지 스포츠 취재 기자 한길을 걸었다. 동-하계 올림픽, 월드컵, 아시안게임 등 각종 국내외 대회를 현장 취재했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회식, 2012년 런던올림픽 폐회식 TV 생중계에서는 해설을 맡기도 했다. 2017년에는 제28회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체육회를 출입하고 있고 SBS 유튜브 채널인 <스포츠머그>에서 '별별스포츠' 코너를 진행하고 있다.
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마라톤은 스포츠에서 가장 힘든 종목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무려 42.195km를 달려야 하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선수들은 많은 유혹에 시달립니다. 이 가운데 최악이 마라톤 사기극입니다. 풀코스를 다 뛰지 않은데도 다 뛴 것처럼 속이는 것이지요. 오늘은 역대 마라톤 사기극 중에서도 '끝판왕'이라 불릴만한 희대의 사건을 소개합니다. 1904년 올림픽에서 나온 원조 '금메달 사기' 1904 올림픽 마라톤. 31번이 로즈 마라톤 '금메달 사기'의 원조는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했던 미국의 프레드 로즈 선수입니다. 출전 선수 33명 가운데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는데 찌는 듯한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땀방울이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이 관중석에서 내려와 월계관을 쓴 로즈와 기념사진까지 찍었는데 사기극이 곧바로 발각됐습니다. 1904 올림픽 마라톤 차량 로즈는 15km 지점에서 다리에 쥐가 나는 바람에 레이스를 포기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던 트럭이 로즈를 태워줬고 로즈는 결승선 근처에서 내려 달린 것입니다. 사건 전모는 트럭 운전사가 나타나 증언하면서 밝혀지게 됐는데 로즈는 15분 동안만 금메달리스트라는 기분을 맛봤습니다. 그는 이듬해 1905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해 구겨진 체면을 다소나마 만회했습니다. 1980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나온 역대급 사기극 미국 보스턴 마라톤은 한국과 인연이 깊은 대회입니다. 1947년 서윤복 선생이 처음으로 정상에 올랐고 1950년 대회에서는 함기용-송길윤-최윤칠 3명이 1~3위를 석권했습니다. 그리고 2001년엔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가 51년 만에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유서 깊은 보스턴 마라톤의 명성에 먹칠을 한 사건이 1980년 대회 때 터졌습니다. 로지 루이즈라는 여성이 희대의 사기극을 벌여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것입니다. 로지 루이즈는 1953년생으로 원래 쿠바 출신인데 9살 때 미국 플로리다로 이민을 왔습니다. 27살 때인 1980년 4월 21일, 루이즈는 보스턴 마라톤 여자 부문에서 2시간 31분 56초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보스턴 마라톤 역사상 가장 빠른 기록이자 당시 마라톤 역사상 세 번째로 빠른 기록이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완전 무명의 선수가 이런 기록을 낸다는 게 상상하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루이스는 1년 전 첫 출전한 뉴욕시 마라톤에서 2시간 56분 29초를 기록했는데 1년 만에 무려 25분을 단축한 것이어서 더욱 경이적인 기록으로 평가됐습니다. 언론들은 여자 마라톤 천재가 등장한 게 아니냐며 흥분까지 했습니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던 레이스 하지만 루이즈에 대한 의혹은 처음부터 커졌습니다. 수상한 점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마라톤 출전이 겨우 두 번째인 신인 중의 신인이 이런 대기록을 작성한 게 누가 봐도 이상했습니다. 42km 이상을 달린 사람치고는 땀도 거의 없었고 호흡도 너무 편해 보였습니다. 의심을 더욱 부채질한 것은 경기 직후 인터뷰입니다. 우승 직후 현장에 있던 기자가 "어떻게 기록을 단축한 거죠? 인터벌 트레이닝을 강하게 했나요?"라고 묻자 루이즈는 "인터벌이 뭔지 몰라요."라고 대답했고 이어 기자가 "어떤 코치로부터 지도를 받았나요?"라고 질문하자 "코치는 없어요. 혼자 연습했어요."라고 말해 주위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루이즈를 인터뷰한 기자도 즉석에서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현장에서 "우리는 모든 체크 포인트(확인 장소)에서 신비스러운 여성 챔피언을 놓쳤습니다. 2시간 31분이라는 환상적인 기록은 이 시점에서 확인할 필요가 있지만 아무튼 세계 수준을 뛰어넘는 기록을 보스턴 마라톤에서 작성했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더 큰 문제는 2시간 31분의 레이스 동안에 루이즈를 봤다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대회 주최 측과 취재진이 5km 체크 포인트마다 수천 장의 사진을 찍었는데 루이즈 얼굴이 나온 사진은 결승선 직전까지 단 한 장도 없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하버드 대학생 2명의 증언입니다. 이들은 결승선에서 800m 떨어진 곳에서 루이즈가 관중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사기극 부인 거의 모든 미국 언론이 이 문제를 파헤치기 시작했지만 로지 루이즈는 끝끝내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나는 조금의 의심도 없어요. 내가 한 일을 내가 알아요. 언젠가 다시 내 실력을 입증해 보이겠어요."라고 뻔뻔하게 말했습니다. 뉴욕의 한 신문사가 다시 풀코스를 다 뛰면 1000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거절했습니다. 대신 "거짓말 탐지기에 응할 용의는 있다, 나는 결코 속이지 않았다"는 변명만 계속 되풀이했습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우승한 기분은 1분밖에 느끼지 못했다. 이후로는 매 순간이 악몽이었다. 만약 (주최 측이) 제 우승을 박탈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흐느껴 울기까지 했습니다. 루이즈 스캔들이 터지자 1년 전에 있었던 뉴욕시 마라톤 주최 측도 진상 조사에 나섰습니다. 이 대회에서 루이즈가 2시간 56분 29초를 작성하면서 이듬해 보스턴 마라톤 출전 자격을 얻었기 때문인데요, 조사 결과 뉴욕 마라톤에서도 사기를 벌인 게 드러났습니다. 목격자인 프리랜서 사진작가의 증언에 따르면 루이즈는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내려 결승선까지 걸었고, 이후 부상당했다며 응급 처치소로 호송됐는데 자원 봉사자들이 완주한 것으로 표시해 보스턴 마라톤에 참가할 자격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뉴욕 시 마라톤 관계자는 루이즈가 부정행위를 저질렀다고 판단해 대회가 끝난 지 1년 뒤인 1980년 4월 25일에 소급해 실격 처리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3일 뒤인 보스턴 대회 측도 루이즈의 우승을 박탈하고 기록을 무효로 만들었습니다. 루이즈의 사기극은 일주일 만에 막을 내린 것입니다. 희대의 마라톤 사기극을 벌인 로지 루이즈는 이후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보스턴 마라톤 2년 뒤인 1982년, 자신이 일하던 부동산 회사에서 거액을 횡령한 혐의로 체포되었고 5년의 보호 관찰을 선고받았습니다. 이듬해에는 코카인 거래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되어 3년의 집행 유예를 선고받았습니다. 이후 결혼과 이혼을 거듭했고 한 회사에서 근무하다 2019년 7월 66세의 나이로 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마라톤 사기극을 연거푸 펼친 것에 대해 사과하거나 용서를 구하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습니다. 대선 떨어진 뒤 사기극 펼친 멕시코 정치인 2007년 9월 말 베를린 마라톤 대회에서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졌습니다. 평소 청렴과는 거리가 멀었던 멕시코의 대선 후보 출신 로베르토 마드라소가 마라톤에서도 부정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인데요, 그는 이 대회 55살 이상 부문에서 2시간 41분 12초라는 놀라운 기록으로 우승하며 1년 전 대선 패배의 아픔을 씻고 국민의 동정심을 얻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골인지점에서 찍힌 사진 한 장에 발목을 잡혔습니다. 다른 선수들은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이었지만, 마드라소는 바람막이 상의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러닝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사 결과, 레이스 도중 몰래 코스에서 벗어나 다른 길을 사용했음이 드러났습니다. 마드라소는 괴한들에게 7시간 동안 납치됐다고 주장했지만, 멕시코 국민들은 동정표를 얻기 위한 자작극이라면서 거센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2년 전엔 멕시코에서 1만 명 이상의 마라토너가 부정한 짓을 저질러 화제가 됐는데요,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마라톤 대회에서 전체 참가자 3만여 명 가운데 무려 1만 1천여 명이 코스를 제대로 달리지 않고 완주한 것처럼 속인 사실이 드러나 실격 처리됐습니다. 대회 주최 측은 마라톤 세계 기록을 웃도는 기록들이 나오자 이를 수상히 여기고 조사에 나섰는데 적발된 부정 행위자들은 5㎞마다 설치된 체크 포인트를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마라톤 중간에 참가번호를 바꾸거나 버스,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해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현지 관계자들은 이들이 마라톤 기록 단축보다 완주 메달을 받기 위해 부정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빼어난 기량과 함께 환한 미소로 팬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국내 여자 프로골프 인기스타 박현경 선수(25세)가 최근 훈훈한 소식을 전했습니다. 박현경은 지난 5월 25일 경기도 여주의 페럼클럽에서 끝난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E1 채리티 오픈(총상금 10억 원)에서 최종 합계 16언더파를 기록해 2위 이채은을 1타 차로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하며 통산 8승째를 거뒀습니다. 사흘 내내 보기 없는 완벽한 경기로 시즌 첫 승을 장식한 박현경은 경기 직후 우승 상금 1억 8천만 원을 전액 쾌척하겠다는 뜻을 밝혀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박현경이 통 큰 기부를 하면서 다른 스포츠 스타들의 아름다운 선행도 다시 소환되고 있습니다. '채리티 오픈' 대회 취지에 맞게 통 큰 기부 박현경이 정상에 오른 이번 대회의 명칭은 'E1 채리티 오픈'입니다. '채리티 오픈'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 대회에서는 선수들이 자발적으로 상금 일부를 기부할 수 있게 하고, 주최사 E1도 추가로 8천만 원을 기부합니다. 애초 박현경은 상금의 13%를 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가 우승 직후 상금을 모두 내놓았습니다. 그는 "이 대회 취지를 생각하면 기부 문화가 떠오르지 않나. 그것에 맞게 좋은 일에 동참하고 싶다"며 우승 상금 전액을 기부했습니다. 박현경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고 싶다고 늘 생각해 왔다. 10승을 채우면 어느 대회든 우승 상금 전액을 기부하고 싶었는데, 이번 대회에서 기회가 생기면서 혹시나 우승한다면 바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며 "실현돼서 정말 기쁘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박현경에 앞서 우승 상금 전액을 기부한 여자 골프 선수는 김해림(36세)입니다. 2009년에 데뷔한 그는 지난해 은퇴할 때까지 메이저 2승 포함 통산 7승을 거뒀는데 첫 승까지 만 7년이나 걸렸습니다. 그는 2016년 교촌 허니 레이디스 오픈에서 생애 첫 승을 차지한 뒤 우승 상금 1억 원 전액을 내놓아 아름다운 충격을 선사했습니다. 김해림의 통산 상금은 약 34억 원인데 이 가운데 그는 5억 원이 넘는 금액을 기부해 후배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국민 삐약이' 신유빈, 기부가 습관 최근 기부를 가장 많이 해 '기부 천사'로 불리는 선수는 2024 파리 올림픽 탁구 혼합복식 동메달리스트 신유빈(21세)입니다. 그는 대한항공 입단 당시 받은 생애 첫 월급으로 보육원 아이들에게 운동화를 선물한 것을 비롯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기부에 나서고 있습니다. 그동안 초등학생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 지원금을 내거나 유소년 탁구 선수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했고, 다문화 가정 청소년을 위한 성금을 기탁한 바 있습니다. 지난해 연말에는 "우리 모두의 일상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작지만 따듯한 온기를 전하고 싶다"며 사랑의 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억 원을 전달해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 됐습니다. 이어 3개월도 채 안 된 올해 3월 17일 경기도 수원시에 있는 가톨릭대학교 성빈센트병원을 찾아 의료비 후원금으로 1억 원을 기부했습니다. 광고 모델료로 받은 금액 가운데 거금을 환원한 것입니다. 신유빈은 "성빈센트병원으로부터 후원비가 의미 있게 사용됐고, 아이들이 건강을 되찾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행복하고 뿌듯했다. 더 많은 아이가 건강과 미소를 되찾을 수 있길 바란다"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5월 5일 어린이날에는 미래의 국가대표를 꿈꾸는 289명 어린이 선수들에게 자신이 디자인과 성능 테스트에 직접 참여해 만든 '신유빈 라켓'을 선물했습니다. 그는 "선물 받은 꿈나무 선수들이 기뻐할 생각에 마음이 따뜻해지고, 실제 사용하면서 만족하길 바란다"며 "앞으로도 기회가 될 때마다 유소년 선수들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신유빈은 우리 사회에 '해피 바이러스'를 널리 퍼뜨리는 대표적 스포츠 스타입니다. 구김살 없는 표정과 예의 바른 언행, 그리고 고운 마음씨를 갖춰 주위의 칭찬이 자자한 선수입니다. 그의 인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일화가 있습니다. 지난해 파리 올림픽 혼합복식에서 준결승에 오른 뒤 신유빈은 공동 취재구역에서 취재진을 향해 "안 힘드세요? 괜찮으세요?"라며 안부를 묻기도 했다. 이에 취재진이 "안 힘드냐고 우리가 물어봐야지"라고 하자 신유빈은 웃으며 "식사는 다 하고 계세요?"라고 물은 뒤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공동취재구역을 떠났습니다. 스포츠 취재기자만 35년을 했던 필자로서도 올림픽 같은 대형 국제대회에서 보도진을 이렇게 배려하는 말을 한 선수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누리꾼들은 "실력도 최고인데 인성도 최고네" "삐약이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다" "밝고 바르고 성실한 완벽한 인재" "저런 딸을 둔 부모님이 부럽다" 등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김연아 누적 기부액 50억 원 이상, 야구에선 추신수가 기부왕 그럼 스포츠 스타 가운데 기부를 가장 많이 한 선수는 누구일까요? 단연 '피겨 여왕' 김연아입니다. 김연아는 스타덤에 오른 2006년부터 거의 20년 가까이 정말 다양한 기부를 통해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누적 기부액은 50억 원이 넘습니다. 스포츠계 기부와 관련해 가장 관심이 쏠리는 종목은 프로야구입니다. 다른 종목에 비해 월등히 많은 연봉을 받기 때문입니다. 야구 스타 가운데서는 추신수가 단연 돋보입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크게 성공하며 부와 명성을 다 거머쥔 그는 지금까지 30억 원에 가까운 금액을 내놓았습니다. 지난해에는 모교인 수영초·부산중고에 야구 장학금, 야구장 시설 보완 등 총 6억 원을 지원해 화제를 모았습니다. 삼성 포수인 강민호는 경남 양산시에 2억 원을 기부해, 2016년 1월 물금읍에 '강민호 야구장'(양산시 3억원 부담)을 짓는 데 큰 보탬이 됐습니다. 류현진은 2023년 9월 '류현진 재단'을 설립해 야구 캠프 유망주 및 희소 난치병 환아 장학 사업을 돕고 있습니다. 롯데의 '안경 에이스' 박세웅은 매년 2,000여만 원을 들여 부산 지역의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안경을 제작해 주고 있습니다. 연봉 3,800만 원인 삼성 김영웅은 지난 연말 모교인 물금고에 후원금 및 야구용품 구입을 위해 2,500만 원을 기부하는 선행을 보여줬습니다. 12.3 계엄 사태와 최근 제21대 대통령선거로 갈등이 격화된 상황에서 스포츠 스타들의 훈훈한 기부가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드라이브 샷은 쇼이고 퍼팅은 돈이다.' 골프의 명언입니다. 300m를 날리는 드라이브 샷도 1타이고 30cm 짧은 퍼트도 1타이기 때문입니다. '퍼팅이 바로 돈이다'라는 것은 그만큼 순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뜻인데요, 골프 중계를 보다 보면 1m도 안 되는 짧은 퍼트를 놓쳐 우승을 놓치면서 수억 원의 상금까지 날리는 것을 허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골프 역사상 짧은 퍼트를 넣지 못해 참사를 겪은 대표적인 사례를 소개할까 합니다. 사상 최단 8cm 퍼트 놓친 토니 피나우 미국의 토니 피나우는 PGA 투어(미국 프로골프투어)에서 6번이나 우승을 차지한 선수로 장타자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지난 3월 30일 PGA투어 텍사스 칠드런스 휴스턴오픈 3라운드에서 황당한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당시 세계랭킹 32위이던 그는 파3 홀인 15번 홀에서 약 1m 파 퍼트를 남기고 있었는데 이 퍼트가 홀 왼쪽 끝을 맞고 튀어나와 홀 옆에 섰습니다. 거리는 8㎝가량. 피나우는 실망한 듯 걸어가며 한 손으로 공을 툭 쳐 홀에 넣으려 했는데, 살짝 뒤땅을 치는 바람에 공을 홀까지 절반도 보내지 못했습니다. 미국 프로골프 역사상 가장 짧은 퍼트를 놓친 것입니다. 결국 피나우는 1m에서 3퍼트를 하면서 더블 보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첫 라운드 첫 홀에서 6퍼트로 망친 '빅 이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어니 엘스는 1990년대 후반 이후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던 스타입니다. 별명은 '빅 이지'(Big Easy). 190cm의 거구인데도 스윙이 무척 부드러워 생긴 별명입니다. 미국과 유럽 투어에서 47회나 우승한 선수로 메이저대회인 US오픈 2회, 브리티시오픈 2회 우승에 빛나는 '황태자'였습니다. 그런데 2016년 마스터스에서 정말 쇼킹한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마스터스가 어떤 대회입니까? '명인열전', 메이저 중의 메이저로 불리는 꿈의 무대. 어니 엘스도 누구보다 '그린 재킷'을 입고 싶어 했는데요, 그 꿈은 첫 라운드에서 바로 깨졌습니다. 그것도 파4 첫 번째 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대회를 시작하자마자 망친 것인데요, 엘스는 약 60㎝의 파 퍼트를 남기고 있었습니다.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 클럽의 그린이 '유리알 그린'이라 불릴 만큼 빠른데,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쉽게 넣을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악몽이 시작됐습니다. 첫 퍼트가 왼쪽으로 흘러 30cm 남았는데요, 허탈감 속에 친 두 번째 퍼트도 빗나갔고 세 번째 퍼트도 왼쪽으로 흘렀습니다. 엘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는데요,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네 번째 퍼트에 나섰는데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빠졌습니다. 그야말로 멘붕에 빠진 엘스는 한 뼘 거리에서 한 손으로 툭 쳤지만 역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60cm 안에서 퍼트만 6번을 했습니다. 엘스는 이 홀에서만 9타를 적어내며 이름도 생소한 '퀸튜플 보기'를 기록했습니다. 1라운드가 끝난 뒤 그는 "퍼트를 아무리 해도 안 되니 나중에는 웃음이 나오는데 그렇다고 중단할 수도 없고… 뇌 이식 수술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라며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1번 홀 5 오버 파 기록은 오거스타 내셔널 코스 사상 최다 타수 기록입니다. 결국 엘스는 8 오버 파 80타, 하위권으로 1라운드를 마쳤는데 지금까지도 마스터스 우승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50cm 파 퍼트 놓쳐 마스터스 우승 놓친 호크 어니 엘스는 첫날 무너져 우승과는 상관이 없었는데, 최고 권위의 마스터스에서 짧은 퍼트를 어이없이 연이어 놓쳐 다 잡았던 우승을 못한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린 재킷' 문전까지 갔다가 끝내 챔피언이 되지 못한 선수가 여러 명 있었지만 이 선수만큼 뼈가 아프지는 않았을 겁니다. 바로 스코트 호크입니다. 그는 1989년 마스터스 대회 마지막 라운드 17번 홀에서 1.5m 파 퍼트를 넣지 못해 결국 연장전으로 끌려갔습니다. 연장전 상대는 '스윙 머신'이라는 불리는 영국의 닉 팔도. 호크는 플레이오프 첫 번째 홀인 10번 홀에서 50cm 파 퍼트를 놓쳤습니다. 넣었으면 우승인데 넣지 못해 땅을 쳤습니다. 다음 홀인 11번 홀에서 닉 팔도는 거의 10m나 되는 긴 버디 퍼트를 넣고 환호했습니다. 팔도는 마스터스에서 3회 우승했는데 이때가 첫 우승이었습니다. 그는 이 홀에서 1~4라운드 모두 보기를 했는데 연장전에서는 극적인 버디를 잡아냈습니다. 결국 호크로서는 연장 첫 홀이 너무 아쉬웠는데 올해 만 70세인 그는 마스터스는 물론 메이저 대회 우승 한번을 못했습니다. 30cm 퍼트 실패해 메이저 우승 놓친 김인경 한국 선수 가운데 짧은 퍼트에 실패해 통한의 순간을 맛본 대표적인 골퍼는 단연 미국 여자 프로골프 메이저대회 우승을 눈앞에서 날린 김인경 선수입니다. 이제 13년이나 지났는데도 지금도 이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정말 아쉬운 순간이었습니다. 2012년 4월 미국 LPGA 투어, 메이저 대회인 크래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 마지막 라운드. 김인경은 마지막 홀에서 30cm 우승 퍼트를 남기고 있었는데 공이 그만 홀을 돌아 나오고 말았습니다. 김인경 본인은 물론 중계진, 많은 갤러리가 도저히 믿기 힘든 장면이었습니다. 유선영과 동타를 허용한 김인경은 연장전으로 끌려갔는데 유선영은 파5, 18번 홀에서 열린 연장 첫 홀에서 세 번째 샷을 핀 4m에 올린 뒤 버디 퍼트를 홀에 떨궈 생애 첫 메이저 타이틀과 통산 2승째를 품에 안았습니다. 유선영은 대회 전통에 따라 캐디와 함께 18번 홀 그린 옆 연못에 시원하게 몸을 던졌는데 김인경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장면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승 상금 30만 달러도 날아갔습니다. 해외 언론도 골프 역사상 가장 뼈아픈 실수라고 보도했습니다. 김인경은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당신을 비롯해 사람들은 언젠가 실수를 하기 마련입니다. 저는 이것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메이저 한을 메이저 우승으로 갚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 김인경은 5년 뒤 메이저대회의 한을 메이저 우승으로 말끔히 씻어냈습니다. 2017년 8월 브리티시 오픈에서 데뷔 10년 만에 처음으로 메이저 퀸에 오르며 악몽을 완전히 털어낸 것입니다. 김인경은 5년 전 깊은 상처를 씻기 위해, '뒷심 부족'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기 위해 이를 악물었습니다. 악기 연주와 춤, 노래, 독서 등 다양한 취미 활동을 통해 부정적인 생각들을 떨쳐냈고, 자신만의 독특한 훈련으로 160cm 단신의 핸디캡을 극복했습니다. 4년 뒤인 2016년 10월, 6년 만에 다시 우승컵을 들어 올린 김인경은 2017년 들어, 메이저 우승 포함 두 달 사이에 3승을 몰아치며 제2의 전성기를 활짝 열었습니다. 김인경은 2017년 브리티시오픈 우승 직후 "그냥 비 온 뒤 무지개 뜬 느낌? 그런 느낌인 것 같아요. 이런 날도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라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드물지만 퍼팅에서 반칙을 저지른 유명 선수들도 있었습니다. '악동' 존 댈리는 자신의 퍼트가 그린의 경사를 타고 내려가자 움직이는 공을 툭 치는 행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타이거 우즈의 오랜 라이벌이었던 필 미켈슨도 믿기 힘든 추태를 벌인 적이 있습니다. 그는 PGA 투어 45승 등 총 57회 우승에 메이저 6승(마스터스 3회, PGA 챔피언십 2회, 브리티시오픈 1회)을 자랑하는 스타입니다. 하지만 그는 유독 US오픈과는 인연이 없었습니다. 준우승만 무려 6번이나 한 것입니다. US오픈 우승컵만 들어 올리면 4대 메이저대회를 석권하는 커리어 그랜드 슬램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는데 US오픈에서 번번이 발목을 잡혔습니다. 48살이던 2018년 US오픈에서 그는 스타답지 않은 '비매너'를 보여줘 눈살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파4 13번 홀에서 보기 퍼트가 2단 그린을 타고 아래로 하염없이 내려가자 이성을 잃은 듯 뛰어 내려가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 공을 건드렸습니다. 고의로 건드린 것인데요, 여기서 미켈슨은 4퍼트를 했는데 규정에 따라 2벌타를 더 부과받아 한 홀에서 무려 6타를 잃었습니다. 미켈슨은 이날 81타를 치며 무너졌는데요, 최악의 스코어보다도 돌이킬 수 없는 이미지 실추로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여자 대표팀의 이유빈 선수가 계주 준결승에서 레이스를 펼치다 넘어지고도 올림픽 신기록을 작성해 화제가 됐습니다. 우리 대표팀은 그 여세를 몰아 결승전에서 금메달을 따내고 환호했는데요, 올림픽 육상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레이스 도중에 넘어졌지만 끝내 금메달을 목에 건 경우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 주인공은 핀란드의 라세 비렌, 그리고 영국의 모 파라인데요. 평행이론이 딱 들어맞을 만큼 다른 시대에 거의 같은 명장면을 연출했습니다. 올림픽 데뷔 무대에서 넘어진 23살 핀란드 경찰관 라세 아르투리 비렌은 1949년 2월생으로 핀란드 경찰관 출신입니다. 그는 23살이던 1972년 뮌헨 올림픽에 처음 출전했습니다. 첫 경기는 남자 10,000m로 마라톤을 제외하면 최장거리 종목이지요. 이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알려지지 않았던 선수였는데요, 단 한 번의 레이스가 이 선수의 운명을 바꿨습니다. 당시 남자 10,000m 결승에 나선 선수는 모두 15명. 25바퀴를 도는 레이스에서 비렌은 경기 중반까지 중위권을 달렸습니다. 그런데 12바퀴째에서 예상치 못한 장면이 나왔습니다. 5위로 달리던 비렌이 직선 주로에서 뒤에 있는 선수와 발이 부딪치며 넘어지고 말았습디다. 이 여파로 비렌의 뒤에 뒤에 있던 선수가 쓰러져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고 결국 레이스를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비렌은 달랐습니다. 통증을 참고 재빨리 일어나 다시 달렸습니다. 순식간에 최하위로 처진 비렌과 선두 그룹과의 격차는 약 20m. 비렌은 안간힘을 다해 선두 그룹을 추격했는데요, 20여 초 만에 거의 따라잡았습니다. 관중석에서는 비렌을 응원하는 격려의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비렌은 나중에 이때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내가 일어나서 보니 선두 그룹은 이미 코너를 돌고 있었다. 무조건 따라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랐고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넘어지고도 세계신기록으로 역전 금메달 올림픽에 처음 나온 비렌, 특히 10,000m는 첫 번째 종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만난 비렌은 처음엔 당황했지만 이후 침착함을 되찾아 혼신의 레이스를 펼쳤습니다. 비렌은 16번째 바퀴부터 선두에 나섰습니다. 그러니까 넘어진 지 4바퀴 만에 선두를 꿰차는 괴력을 발휘한 것이지요. 핀란드 관중은 국기를 흔들며 뜨거운 응원을 펼쳤습니다. 비렌은 끝까지 선두를 지킨 끝에 27분 38초4라는 세계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정말 대단한 명장면을 연출한 것이지요. 레이스 중반에 넘어진 상황에서 이것을 극복하고 역전 금메달을 따낸 것만 해도 엄청난데 세계신기록까지 세운 것은 한마디로 경이적입니다. 비렌은 기세를 몰아 며칠 뒤에 벌어진 5,000m에서도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하며 2관왕의 영예를 차지했습니다. 사상 최초 장거리 2종목 2회 연속 우승 뮌헨올림픽 이후 스타가 된 비렌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는데요, 이번에도 5,000m와 10,000m에서 모두 금메달을 차지하는 금자탑을 쌓았습니다. 올림픽 육상에서 사상 최초로 장거리 2종목을 2회 연속 석권한 것이지요. 1920년대 핀란드의 파보 누르미는 육상에서 통산 9개의 올림픽 금메달을 따낸 레전드인데요, 비렌도 대선배 누르미의 뒤를 이어 전설이 됐습니다. 비렌은 더 욕심을 냈습니다. 체코의 전설 '인간 기관차'로 불렸던 에밀 자토펙이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5,000m와 10,000m, 그리고 마라톤까지 석권하는 신화를 창조했는데요. 비렌도 이 대기록에 도전했지만 마라톤에서는 5위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는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도 참가했지만 10,000m에서 5위에 머물렀습니다. 비렌은 이후 핀란드 국회에 들어가 국립 연합당의 의원(1999~2007, 2010~2011)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44년 만에 리우에서 재현된 평행이론 비렌이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첫 우승을 차지한 지 44년 뒤인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남자 10,000m 결승에서 거의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당사자는 바로 영국의 스타 모 파라였습니다. 1983년에 아프리카 소말리아에서 태어난 파라는 28살이던 2011년 대구에서 열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5,000m 금메달과 10,000m 은메달을 따면서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영국 국적의 파라는 자국 런던에서 벌어진 2012년 올림픽에서 10,000m를 제패하며 영국 선수로는 이 종목 첫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이어 5,000m까지 제패하면서 영국의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4년 뒤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장거리 육상의 최대 관심은 모 파라가 라세 비렌의 1976년 2종목 2연패 신화를 40년 만에 재현할 것인지에 쏠렸습니다. 10,000m 경기가 먼저 열렸고 이목은 역시 모 파라에 집중됐습니다. 그런데 모 파라는 10바퀴째를 달리다 가슴 철렁하는 순간을 맞았습니다. 코너를 돌다 바로 뒤에 있던 선수의 발에 걸려 넘어지고 만 것인데요. 모 파라는 재빨리 일어나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고 관중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 경기는 정말 명승부였는데요. 모 파라는 역주를 거듭한 끝에 2바퀴 반을 남기고 마침내 선두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300m 남기고 뜻밖의 장면이 나왔습니다. 케냐의 폴 타누이가 무섭게 스퍼트해 파라를 제치고 선두에 나선 것입니다. 파라의 우승이 쉽지 않아 보였는데요, 하지만 파라는 마지막 코너에서 믿기 어려운 스피드를 내며 90m를 남기고 다시 역전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역전을 허용하지 않고 1위로 들어왔습니다. 10,000m를 2연패 하는 순간이었는데요.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파라는 그라운드에 엎드려 벅찬 감격을 누렸습니다. 넘어지고도 극적으로 역전 금메달을 따낸 파라는 며칠 뒤에 벌어진 5,000m도 제패해 장거리 두 종목을 2회 연속 석권했습니다. 라세 비렌에 이어 40년 만에 두 종목 2연패 위업을 달성한 것입니다. 영국 영웅 파라의 충격적 고백 모 파라는 세월이 한참 지난 2022년에 충격적인 고백으로 다시 화제의 중심이 됐습니다. 파라는 "소말리아에서 태어났는데 8살 때 내전을 피해 부모와 함께 영국으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원래 런던에서 태어났고 직업은 IT컨설턴트로 영국 시민권이 있었다."고 알려졌는데요. 그런데 모 파라는 2022년에 이 모든 것이 다 거짓이라고 스스로 밝혔습니다. BBC 다큐멘터리 '진짜 모 파라(The Real Mo Farah)'에서 자신의 '진짜' 과거를 털어놓은 것입니다. 진실은 이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파라가 4살일 때 소말리아 내전으로 사망했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모 파라 본인은 9살 때 영국에 불법 인신매매로 입국해 강제로 가사 노동을 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진짜 이름은 '후세인 압디 카인'인데요. 모 파라는 위조 여권에 표기된 이름이라고 합니다. 협박 때문에 납치됐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던 어린 파라는 용기를 내 체육 교사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놨습니다. 이후 체육 교사는 사회복지국에 연락해 다른 가정으로 입양될 수 있도록 그를 도왔습니다. 그때부터 파라는 육상 선수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14세 때 영국 학생을 대표해 라트비아에서 열린 대회에 초청을 받기도 했습니다. 파라는 "인신매매의 위험에 대해 알리기 위해 내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다"면서 "나와 똑같은 일을 겪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나를 진정으로 구한 것은 달리기였고, 달리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달라졌다"고 말했습니다.
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37살 '작은 거인' 신지애가 또 하나의 낭보를 전했습니다. 지난 5월 11일 끝난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 메이저 대회인 월드 레이디스 챔피언십 살롱파스컵에서 우승한 것입니다. 이날 신지애는 최종 합계 7언더파로 일본의 후지타 사이키와 공동 선두를 이룬 뒤 연장 첫 홀인 18번 홀(파5)에서 약 70m 세 번째 샷을 홀 30cm에 떨구는 절묘한 웨지 샷으로 약 2년 만에 일본 투어 정상에 복귀했습니다. 우승 상금 2천400만 엔(약 2억 3천만 원)을 받은 신지애는 JLPGA 투어 사상 최초로 통산 상금 14억 엔을 돌파해 14억 715만 8천71엔으로 늘렸습니다. 또 37세 13일에 우승하며 이 대회가 메이저로 승격한 2008년 이후 최고령 우승 기록인 2013년 모테기 히로미의 36세 17일을 1년 정도 늘려 놓았습니다. 남녀 통틀어 한국인 최다 66승 대기록 2018년 이후 7년 만에 살롱파스컵을 다시 품에 안은 신지애는 JLPGA 투어 통산 29승을 달성했습니다. JLPGA 투어 입회 전인 2008년에 거둔 2승을 더하면 31승이 됩니다. 일본 무대 31승 가운데 메이저 우승은 2018년 11월 리코컵 이후 이번이 5승째입니다. 신지애는 또 JLPGA 투어 영구 시드 조건인 30승에 1승만을 남기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한 번만 더 우승하면 평생 일본여자프로골프 대회에 출전할 자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우승으로 신지애는 통산 66승째를 거뒀습니다. 일본 31승 외에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21승,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11승, 레이디스 유러피언투어(LET) 6승, 호주투어 5승, 지금은 없어진 레이디스 아시안투어 1승 등을 기록했고 공동 주관 대회 등을 제외하면 승수는 66승이 되는데 최근 우승은 지난해 12월 호주여자오픈이었습니다. 통산 66승은 한국인 가운데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대기록입니다. 선배 박세리도 동갑내기 박인비도, 그리고 남자 골프의 전설 최경주와 최상호도 정규 투어에서 달성하지 못한 경이적 수치입니다. 아시아인 최초의 세계 1위, 상금만 300억 원 돌파 1988년 4월에 태어난 신지애는 3개월 늦게 출생한 박인비와 더불어 이른바 '박세리 키즈'라 불립니다. 박세리가 1998년 7월 '맨발의 투혼'을 발휘하며 최고 권위의 US오픈을 제패하는 모습을 지켜본 뒤 골퍼의 꿈을 키운 것입니다. 신지애는 17살이던 2005년 아마추어로 KLPGA 투어 SK엔크린인비테이셔널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혜성처럼 등장했습니다. 프로에 입문한 뒤에는 쟁쟁한 선배들을 모두 제치고 국내 무대를 평정했습니다. 2007년엔 KLPGA의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며 시즌 9승에다 최단기간 통산 누적 상금 10억 원을 돌파했습니다. KLPGA 대상-다승-상금-평균타수 1위를 내리 3년 연속 독차지했습니다. 2008년엔 한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의 대회까지 모두 출전하는 강행군을 펼치면서도 LPGA에서 3승을 거두는 저력을 보여주었는데 이 가운데는 메이저 대회인 브리티시 오픈이 있었습니다. 이해 그는 세계 4대 투어인 LPGA, JLPGA, KLPGA, LET에서 한 해에 모두 우승을 기록한 최초의 골퍼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듬해 2009년에는 LPGA에서 시즌 3승을 기록하며 신인상, 상금왕, 다승왕 등을 차지했는데 이는 '골프 여왕' 박세리도 이루지 못한 대기록이며, 1978년 낸시 로페즈의 달성 이후 31년 만에 나온 진기록이었습니다. 승승장구하던 신지애는 마침내 2010년 남녀 통틀어 아시아인 최초로 세계 랭킹 1위에 올라 골프 팬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이후 2016년부터는 JLPGA에서 주로 활동하며 일본 무대에서도 최고의 선수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벌어들인 상금도 어마어마합니다. 한국 무대 총상금은 약 21억 원, 미국에서는 우리 돈으로 약 151억 원, 일본에서는 약 135억 원을 손에 거머쥐었습니다. 한미일 3국 상금만 해도 300억 원이 훌쩍 넘습니다. 여기에 후원 업체와 맺은 계약금과 광고, 각종 부상과 기타 수입을 다 합치면 500억 원 이상이라는 게 골프계의 분석입니다. 믿을 수 없는 신기의 샷 '신(神)지애' 신지애가 이처럼 세계 무대에서 위업을 세운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정교함입니다. 신지애의 전성기 시절 일본 취재진이 한국을 방문해 그의 연습을 촬영한 적이 있습니다. 드라이버로 샷을 두 차례 했는데 페어웨이에 떨어진 공 2개의 간격은 1m에 불과했습니다. 깜짝 놀란 일본 취재진은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이어 약 115m 남은 거리에서 신지애는 8번 아이언을 가볍게 쳤는데 핀 2m 옆에 떨어졌습니다. 당시 골프 취재기자였던 필자가 9번 아이언으로 한 번 더 쳐줄 것을 부탁하자 신지애는 지체 없이 샷을 날려 이번에는 핀 1m에 붙였습니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도 도무지 믿기 어려운 장면이었습니다. '인간이 같은 거리에서 다른 아이언을 잡고도 이렇게 연거푸 송곳 같은 샷을 날릴 수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과 함께 소름이 끼칠 정도였습니다. 신기의 샷으로 '신(神)지애'라고 불리지만 그에게도 약점은 있습니다. 바로 드라이브샷 비거리가 짧다는 것. 미국 무대에서 그의 비거리는 하위권이었습니다. 골퍼로서는 엄청난 핸디캡입니다. 하지만 장타자가 숏 아이언을 잡을 때 그는 5번 우드로 핀을 맞힐 만큼의 정교함으로 경쟁력을 확보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키 180cm에 불과한 단신의 한국 농구 선수가 2m가 넘는 거한들이 즐비한 미국 프로농구(NBA)에서 득점왕에 오른 것입니다. 퍼팅과 어프로치 등 빼어난 숏 게임 능력도 비거리의 약점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무엇보다 155cm의 작은 키와 피지컬의 약점을 딛고 전설이 된 원동력은 강력한 멘탈입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며 어린 시절 불우했던 신지애는 하체 힘을 키우기 위해 15층짜리 아파트를 1층부터 15층까지 수없이 걸어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혹독한 훈련을 반복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정신력과 함께 언제나 웃으려고 하는 긍정 마인드를 길렀습니다. 오랫동안 '골프 지존'으로 불렸던 그의 신화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공개적으로 밝히지는 않고 있지만 신지애는 내심 여자 골프의 최고 레전드 아니카 소렌스탐의 통산 72승(LPGA)을 넘어서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고 있습니다.
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2005년 국내 스포츠계는 후끈 달아올랐습니다. 수영에서는 박태환, 피겨스케이팅에서는 김연아가 거의 동시에 출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박태환은 만 15세 6개월이던 2005년 3월 제77회 동아수영대회 자유형 남자 200m에서 1분 50초 41로 한국 신기록을 세우며 혜성처럼 등장했습니다. 2004년 9월 헝가리에서 열린 주니어 그랑프리에서 정상에 오른 김연아는 만 15세 2개월이던 2005년 11월 27일 깜짝 놀랄 만한 업적을 세웠습니다. 체코에서 벌어진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최초로 우승하는 쾌거를 달성하며 '김연아 시대'의 개막을 알렸습니다. 두 스타는 이후 승승장구하며 올림픽 금메달까지 거머쥐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 선수가 수영과 피겨스케이팅에서 세계 최고 선수가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기에 국내 스포츠의 한 원로 인사는 "박태환과 김연아는 한국 스포츠의 돌연변이"라고 평가하기까지 했습니다. 키 195cm, 양팔 길이 216cm의 김영범 이로부터 20년이나 흐른 2025년에 한국 스포츠는 다시 흥분에 휩싸였습니다. 수영 김영범과 쇼트트랙 임종언, 두 10대 '괴물'이 거의 동시에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19살인 김영범은 지난 3월 25일 경북 김천실내수영장에서 열린 KB금융 코리아 스위밍 챔피언십 남자 자유형 100m 결승에서 47초 98의 기록으로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이 대회는 오는 7월 싱가포르에서 개막하는 2025 싱가포르 세계수영선수권대회 국가대표 선발전을 겸했는데 김영범은 국제수영연맹 기준기록(48초 34)도 통과해 싱가포르행 티켓을 따냈습니다. 이날 결과가 특히 눈길을 끈 것은 김영범의 뒤를 이어 터치패드를 찍은 선수가 황선우(48초 41)였다는 점입니다. 황선우는 서울체고 3학년이던 2021년 7월 열린 2020 도쿄 올림픽 준결승에서 한국 기록이자 당시 아시아 기록(47초 56)을 세운 이 종목 국내 최강자였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김영범의 주종목이 자유형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김영범은 현재 남자 접영 100m 한국 기록(51초 65)을 갖고 있는데 지난해 6월 광주 전국수영선수권대회에서는 하루에 두 번이나 접영 100m 한국 기록을 새로 쓰기도 했습니다. 자유형 100m에서 국내에는 마땅한 적수가 없던 황선우에게 선의의 경쟁자가 생겼다는 것은 한국 수영에도 반가운 일입니다. 황선우는 경기 후 김영범의 경기력과 관련해 "시즌 초반인데도 엄청난 기록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면서 "후배가 이렇게 좋은 기록을 내는 걸 보니 저도 이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자극이 된다. 한국 수영이 더 올라가는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하다"고 말했습니다. 김영범은 역대 최고의 체격까지 갖췄습니다. 키 195cm, 윙스팬(팔을 벌렸을 때 양 손끝 사이의 거리) 216cm로 수영 선수로서 이상적인 신체 조건을 보유한 것입니다. 과거 중국의 간판스타였던 쑨양은 물론 미국과 유럽의 거한들과도 체격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 셈입니다. 한국 수영 사상 이렇게 '피지컬'이 뛰어난 선수는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그의 잠재력과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높은 평가를 받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황대헌도 박지원도 제친 17살 임종언 김영범 등장의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빙판에서도 '빅뉴스'가 전해졌습니다.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 올림픽에 나갈 쇼트트랙 국가대표를 뽑는 대회에서 '고교생 유망주' 임종언이 1위로 태극마크를 단 것입니다. 임종언은 4월 13일 서울 양천구 목동아이스링크에서 끝난 국가대표 2차 선발전에서 남자 1,500m 1위, 500m 3위를 기록했습니다. 그는 1차 선발전에서는 남자 1,500m 1위, 1,000m 2위를 차지했는데 1, 2차 선발전 종합 랭킹 포인트 102점을 마크해 남자부 전체 1위로 꿈에 그리던 올림픽 출전권을 거머쥐었습니다. 지난 2월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쇼트트랙 주니어 세계선수권대회 남자 1,000m, 1,500m에서 우승한 차세대 유망주 임종언이 성인 대표팀에 뽑힌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17살의 어린 나이로 쟁쟁한 선배들을 모두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는 점입니다. 임종언에 이어 2위를 차지한 선수는 2022 베이징 동계 올림픽 남자 1,500m 금메달리스트 황대헌. 최근 몇 년 동안 남자 쇼트트랙 최강자로 불렸던 박지원은 아예 대표팀에 뽑히지도 못했습니다. ISU 쇼트트랙 월드투어에서 세 차례나 종합우승을 차지했지만, 올림픽 시즌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번번이 낙방했던 박지원은 이번에도 고개를 숙였습니다. 박지원은 세계 선수권, 월드투어, 아시안게임 등 다양한 국제대회에서 많은 메달을 획득했으나 정작 올림픽 시즌 선발전마다 불운에 시달리면서 올림픽 무대를 밟지 못했습니다. 임종언의 등장이 더욱 반가운 것은 그가 기술과 체력은 물론 17살 선수라고는 믿기 힘든 레이스 운영 능력까지 갖췄기 때문입니다. 이번 대회의 백미는 1차 선발전 첫 레이스였던 남자 1,500m. 임종언은 레이스 중반까지 후미에서 기회를 엿보다가 아웃코스로 빠져나와 단숨에 선두를 꿰찬 뒤 전속력으로 질주했습니다. 임종언의 직전에 당황한 선배들은 뒤늦게 속도를 올렸지만 격차를 좁히지 못했습니다. 그는 "내 최대 강점은 체력"이라며 "코치님이 나 자신을 믿고 해 보라고 했는데, 체력이 버텨줘서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다"고 기쁜 표정으로 소감을 전했습니다. 대이변을 일으킨 임종언의 눈은 이제 내년 2월 개막하는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을 정조준하고 있습니다. 그가 넘어야 할 상대는 단연 윌리엄 단지누(캐나다). 단지누는 2025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 3개와 은메달 1개를 따낸 자타공인 세계 최고의 선수로 2024-2025 월드투어에서도 종합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외국 선수 중 경쟁자를 꼽아달라는 말에 임종언은 "현재 국제대회에서 윌리엄 단지누가 월등한 기량을 펼치고 있는데, 겨뤄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임종언은 중국으로 귀화한 린샤오쥔(한국명 임효준)과 경쟁도 기대된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임효준 선배가 금메달을 따는 모습을 보고 올림픽 출전의 꿈을 키웠다"며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올림픽에서 경쟁한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고 기대감을 나타냈습니다. '두 선수를 모두 꺾을 자신 있느냐?'라는 질문에는 "단지누와 린샤오쥔의 경기 영상을 분석하고 있다. 단지누는 장거리 경기 운영 능력이, 린샤오쥔은 단거리 인코스 주행 능력이 뛰어난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연구할 계획"이라고 힘주어 답했습니다.
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3월 12일 한국 스포츠계에 큰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1920년 조선체육회를 포함해 대한체육회가 출범한 지 105년 만에 처음으로 여성인 김나미(54) 전 국제바이애슬론연맹 부회장이 사무총장에 선임된 것입니다. 알파인 스키 국가대표 출신인 김나미 사무총장은 취임 일성으로 변화와 혁신을 이끌겠다며 '선수 중심의 스포츠 환경'과 '국제 경쟁력 강화'를 목표를 내걸었습니다. 이로부터 9일 뒤인 21일, 이번엔 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세계 스포츠 대통령'으로 불리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새 위원장에 짐바브웨의 커스티 코번트리가 선출되며 131년 만에 이른바 '유리 천장'이 깨진 것입니다. 여성 최초, 아프리카 최초의 위원장 탄생 코번트리의 당선은 그야말로 '쇼킹'했습니다. 1894년에 창설된 IOC는 '나이 많은 백인 남자 귀족'의 아성이라 할 만큼 보수 색채가 짙은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코번트리는 IOC 131년 사상 최초의 여성 위원장이란 점에서 신기원을 열었습니다. 나이도 41살로 매우 젊었습니다. 여기에다 역대 최초로 아프리카 출신으로 IOC 수장에 오르는 새 역사를 동시에 썼습니다. 로이터 통신은 "올림픽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의미한다"라고 평가했고 코번트리는 당선 후 기자회견에서 "이것은 정말 강력한 신호"라며 "우리는 진정으로 글로벌화하고 있으며, 다양성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음을 보여준다. 앞으로 8년 동안 그 길을 계속 걸어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2004 아테네 올림픽과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수영 여자 배영 200m를 2연속 제패한 코번트리는 올림픽 메달만 7개(금 2, 은 4, 동 1)로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며, 2012 런던 올림픽 기간에 IOC 선수 위원으로 당선돼 체육 행정가로 투신한 뒤 2023년에는 IOC 집행위원에 올랐습니다. 그는 일찌감치 12년간 재임한 토마스 바흐(독일) 현 IOC 위원장의 '후계자'로 낙점됐습니다. 바흐 위원장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지만 당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이번 선거에는 총 7명의 후보가 출마해 역대 최다를 기록했는데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전 IOC 위원장의 아들인 사마란치 주니어(65·스페인) IOC 부위원장과 육상 스타 출신인 서배스천 코(68·영국) 국제육상경기연맹 회장 등 쟁쟁한 인물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코번트리는 사람들의 예상을 보기 좋게 깨버렸습니다. 그리스 코스타 나바리노에서 열린 제144차 IOC 총회에서 1차 투표 만에 전체 97표 가운데 당선에 필요한 과반인 49표를 정확하게 얻어 6명의 남성 후보들을 압도적으로 제치고 제10대 위원장으로 당선된 것입니다. 사마란치 주니어가 28표로 2위였고, 강력한 후보로 거론됐던 서배스천 코는 8표에 그치는 망신을 당했습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1984년 LA 올림픽에서 연속 금메달을 따냈고 2012 런던올림픽 조직위원장까지 지낸 세계 스포츠계 거물인 그가 이처럼 초라하게 무너질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혁신과 변화에 대한 갈망' 그럼 코번트리가 대이변을 일으킨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화려한 스펙을 보유해 다소 거만해 보였던 서배스천 코와 달리 겸손하고 온화한 성격으로 빼어난 소통 능력을 갖췄다는 점이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근본적인 힘은 혁신과 변화에 대한 갈망이 투표권을 행사했던 IOC 위원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형성됐기 때문입니다. IOC 사정에 정통한 전문가가 필자에게 전한 분석은 이렇습니다. "올림픽의 위상과 인기가 예전만 같지 않다는 위기감은 IOC 위원들이 오래전부터 공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스포츠 클라이밍, 스케이트보드 등 청년들이 좋아하는 종목들을 올림픽에 집어넣는 등 대책을 마련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앞으로 기후 변화에 대처하는 IOC의 역할, 성평등, 다양성, 새로운 시장 개척 등 여러 이슈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코번트리 당선은 이젠 바뀌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강하게 형성되면서 이뤄진 것이다." 2036 전북 올림픽 유치에 호재? 이제 우리의 관심은 코번트리 위원장의 당선이 한국 스포츠에 유리할 것인가에 쏠립니다. 국내 체육계 인사들의 반응은 대부분 긍정적입니다. 무엇보다 신임 유승민 대한체육회장과 가까운 사이라는 점이 플러스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유승민 회장과 코번트리 위원장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는 공통점이 있고 두 사람은 2016년부터 4년간 IOC 선수위원으로 함께 활동하며 우의를 다졌습니다. 1982년생인 유 회장과 1983년생인 코번트리 위원장은 동년배로서 여성 리더를 존중하고 우대한다는 점도 닮았습니다. 전북이 도전장을 낸 2036년 하계 올림픽 개최지 선정이 코번트리 위원장이 주도하는 IOC 총회에서 투표로 결정되는 만큼 둘의 우호적인 관계가 올림픽의 국내 유치에 힘이 실릴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코번트리가 위원장으로 선출되면서 전북특별자치도의 대응도 빨라지고 있습니다. 전북은 '첫 여성 위원장'이라는 상징성을 활용하고 올림픽 철학을 분석해 기존의 전략을 보완, 부각, 발전시킨다는 구상입니다. 전북은 코번트리가 추구하는 올림픽 철학을 다변성, 저비용·고효율, 지속 가능성, 친환경, 선수 역량 강화, 여성 스포츠 보호 등으로 분석했습니다. 현재 2036 하계 올림픽 유치전에 뛰어든 나라는 인도(아메다바드)와 카타르(도하), 인도네시아(누산타라), 튀르키예(이스탄불), 칠레(산티아고), 헝가리(부다페스트) 등 10개국이 넘는데 이 가운데 인도와 카타르가 강력한 후보로 꼽힙니다. 대륙별 순환 개최 관례에 따라 2036 올림픽은 아시아에서 열릴 가능성이 큰데 우리나라는 인도, 카타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성 인권 감수성에서 강점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최지 선정 시기와 방법입니다. 과거에는 개최 후보 도시 3~5개 정도를 추린 뒤 전체 IOC 위원들의 투표로 개최지를 선정했습니다. 이후 제도가 바뀌어 현재는 '미래유치위원회'가 어느 한 도시를 우선 협상 도시로 선정한 뒤 총회에서 승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IOC 위원들의 상당수는 과거의 방법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바흐 현 IOC 위원장의 후계자로 불리는 코번트리가 바흐의 뜻을 이어받아 올림픽 개최지 선정 방식을 현행 미래유치위원회 심사·추천제로 유지할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코번트리가 현재의 방식을 유지한다면 개최지 선정 절차가 적어도 2년은 앞당겨지게 돼 전북으로서는 발 빠른 대처가 필요할 전망입니다.
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 농구는 오랫동안 아시아선수권이나 아시안게임 등 각종 국제대회에서 중국과 메달 색깔을 놓고 숱한 명승부를 펼쳤습니다. 우리가 이긴 적도 꽤 있지만 패배한 적도 많습니다. 키가 커도 너무 큰 중국의 괴물 센터가 한국을 괴롭혔기 때문인데요. 우리의 뇌리에 아직도 남아 있는 중국의 거인 센터 계보를 하나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야오밍 이전 한국을 괴롭혔던 '목철주' 많은 사람들이 '중국 농구 선수' 하면 야오밍을 먼저 떠올릴 것입니다. '걸어 다니는 만리장성'으로 불리는 중국이 낳은 최고 선수이자 미 프로농구 NBA에서도 크게 활약했던 스타였습니다. 그런데 야오밍 이전에 중국에는 '목철주'가 있었습니다. 1980년대까지는 국내 언론에서 목철주로 불렀습니다. 중국어 발음으로 표기하면 '무티에주'입니다. '철주'란 한자 뜻은 철로 된 기둥, 영어로 'Iron Pole'. 사진을 보면 이름을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거대한 체구를 갖고 있습니다. 1949년에 태어나 만 59살이었던 지난 2008년에 심근 경색으로 세상을 떠난 원조 거인 센터였습니다. 왕년의 농구 스타 A 씨는 필자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국제대회에 나갔을 때 숙소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내 눈에 어떤 사람의 배만 보였다. 위로 쳐다보니 목철주였는데 머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였다." 목철주는 자신의 키를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대회에 출전할 때 나오는 책자에는 220cm, 225cm로 제각각이었습니다. 1979년 11월 일본 나고야에서 농구 아시아선수권대회가 열렸을 때 그는 자신의 키를 238cm로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장신 센터와 나란히 찍은 사진 등 여러 정황을 분석한 외국 언론들은 그의 키를 228cm로 보도했고 현재도 228cm로 알려져 있습니다. 야오밍과 거의 비슷한 것입니다. 목철주는 발도 엄청 커 농구화를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나고야 대회 때 아식스사가 그의 발을 측정했는데 37cm로 나왔습니다. 아식스사에 따르면 이전 기록은 34cm이었다고 하는데 이때 목철주는 자기 발에 맞는 고급 농구화를 5개 정도 선물로 받았다고 합니다. 1970년대 말 한국 남자 농구대표팀의 모토는 '타도 중공'. 일본은 한 수 아래로 보고 중공만 꺾으면 아시아 챔피언에 등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한국은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목철주의 괴력을 제대로 느꼈습니다. 우리 간판선수 김동광과 박수교의 얼굴은 목철주의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140kg이 넘는 그의 체구는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습니다. 움직임은 느렸지만 손을 뻗으면 림(골대)에 닿을 만큼 컸고 거의 서서 슛을 넣을 정도였습니다. 그의 활약으로 중국은 1977년부터 83년까지 아시아에서 가장 권위 있었던 ABC 대회를 4회 연속 제패할 수 있었고 1978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까지 거머쥐었습니다. 목철주의 공포에 시달리던 한국 남자 농구는 그가 불참했던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때 중국을 1점 차로 꺾고 극적으로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목철주가 바로 복귀한 1983년 11월 ABC 대회에서는 63:92, 29점 차로 초유의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일찍 세상 떠난 '여자 목철주' 진월방 목철주가 사라질 무렵 중국 여자 농구에도 '괴물 센터'가 등장했습니다. 그 선수가 바로 진월방입니다. 중국어 발음으로는 천위에팡. 1963년에 태어났는데 안타깝게도 2000년 9월 37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최근 장쯔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역대 중국 여자농구 선수 가운데 가장 키가 컸습니다. 그의 키는 최저 208cm에서 최고 218cm까지 보도됐는데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215cm로 알려졌습니다. 진월방과 동시대에 대결했던 한국의 대표적 선수가 박찬숙과 김화순, 그리고 당시 만 18살 막내였던 성정아입니다. 190cm에 가까웠던 박찬숙은 아시아 슈퍼스타로 한국 여자농구의 최고 전설입니다. 하지만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은 중국에 우승을 내줬습니다. 절치부심했던 우리 대표팀은 2년 뒤 1984년 LA 올림픽에서는 중국을 꺾고 결승에 올라 은메달을 차지했습니다, 중국은 동메달에 머물렀습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여자배구가 구기 종목 사상 최초의 동메달을 따냈는데, 여자 농구는 이것을 넘어 그때까지 구기 종목 최고 성적인 올림픽 은메달이라는 기적을 창조한 것입니다. '공포의 괴물 센터' 정하이샤 진월방의 선수 생활은 무척 짧았습니다. 1984년 LA 올림픽 이후 뇌혈전증과 빈혈로 인해 이듬해 1985년 22세의 나이로 일찍 은퇴해야 했습니다. 진월방에 이어 정말 '괴물 센터'가 나왔습니다. 그 선수가 바로 정하이샤. 진월방과 달리 선수 생활을 오래 했습니다. 16살이던 1983년에 국가대표가 된 뒤 10년 이상 중국을 대표해 간판스타로 뛰었습니다. 키 206cm에 몸무게는 거의 120kg이나 됐습니다. 엄청난 높이에다 풀타임을 뛰는 체력, 여기에 타고난 슈팅 감각까지 갖춰 진월방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그야말로 '공포의 센터'로 불렸습니다. 성취도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1984년 LA 올림픽 동메달,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은메달을 획득했고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도 1983년 동메달, 1994년 은메달을 따냈습니다. 1994년 호주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평균 26.4득점, 13.1리바운드, 야투율 83.5%를 기록하며 MVP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아시안게임에서는 1986년 서울에서 금메달, 1990년 베이징에서 은메달, 1994년 히로시마에서 동메달을 거머쥐었고 미국 여자 프로농구(WNBA)에 진출해 한 시즌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주니어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는데, 초기에는 우리나라 성정아-조문주가 주로 마크를 했고 이후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정은순과 센터 대결을 펼쳐 숱한 명장면을 연출했습니다. 우리 여자농구 선수들, 정하이샤를 막느라 10년 이상 힘들었는데요, 그래도 1990년과 1994년 아시안게임에서 정하이샤가 버틴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거머쥐는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대륙을 들썩인 최고 거인 장쯔위 2019년 초부터 중국 대륙이 한 소녀로 들썩이기 시작했습니다. 정하이샤는 만 12살 때 172㎝이었다가 다 성장한 뒤에는 206㎝이었습니다. 그런데 겨우 만 11살의 나이에 210㎝나 되는 소녀가 나타나 중국에서 큰 화제를 모았는데 이 소녀의 이름은 장쯔위(张子宇). 유명 영화배우 장쯔이와 발음이 비슷해 더 유명해졌습니다. 필자는 지난 2019년 이 선수에 대한 기사를 작성해서 국내에 가장 먼저 소개했습니다. (관련기사 보기) 그 당시 산둥성 지난의 한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같은 또래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보면 진짜 2배 정도 컸습니다. 장쯔위의 부모는 모두 장신입니다. 어머니 위잉은 산둥성 여자농구팀 코치로 활약했고 아버지도 농구 실력이 남달랐습니다. 부모 덕분에 장쯔위는 엄청난 키는 물론 농구에 대한 재능까지 물려받은 것입니다. 2019년 가을부터 본격적인 농구 훈련을 시작한 장쯔위는 중국인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하지만 스피드가 떨어지고 득점력이 부족해 기량이 늘지 못해 중국 16세 이하 대표팀에 뽑히지 못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잊혀져 가던 그는 지난해 6월 중국에서 열린 18세 이하 아시아컵에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결승전에서 호주에 져 준우승에 그쳤지만 만 17세의 장쯔위는 혼자서 42점에 14개의 리바운드를 몰아쳤습니다. 대회 MVP에 선정된 장쯔위는 이 대회에서 경기당 평균 35점, 12.8리바운드를 올렸는데 특히 일본전 44점은 대회 한 경기 최다 득점 신기록이었습니다. 혜성처럼 떠오른 장쯔위의 키도 각종 언론에서 제각각으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최소 220cm에서 최대 228cm까지 다양한데 228cm이면 야오밍과 같은 키입니다. 지난해 아시아컵에서 한국 대표팀은 중국에 크게 졌습니다. 그때 장쯔위도 맞대결했던 우리 대표팀 센터 송윤하(181cm)는 장쯔위를 온몸으로 막았는데 경기 후 "엄청나게 크다, 그 말밖에 할 수 없어요."라며 혀를 내두르기도 했습니다. 중국을 넘어 세계 여자 농구 사상 최장신인 장쯔위가 야오밍과 같은 슈퍼스타가 될지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지난달 중국 프로축구 산둥 타이산 팬들이 우리나라 광주FC와 경기 중에 상상하기 힘든 무례한 작태를 보여 큰 파문이 일었습니다. 2025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에서도 중국 쇼트트랙 선수들의 이른바 '나쁜 손'은 어김없이 나왔습니다. 우리나라를 방문한 중국 관광객(유커)도 볼썽사나운 행동을 많이 저질러 눈살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이처럼 중국인들이 스포츠에서나 관광에서나 '에티켓'을 잘 지키지 않는 사례는 허다합니다. 그럼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광주 팬 앞에서 '전두환 사진' 도발 지난 2월 11일 산둥 타이산의 홈구장에서는 광주FC와 산둥 타이산의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경기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기 중에 산둥 홈팬들이 광주 팬 쪽을 향해 전두환 씨 얼굴이 인쇄된 사진을 펼쳐 들며 도발을 했습니다. 광주 팬 앞에서 중국 관중이 전두환 씨의 사진을 펼쳐 보인 것이 어떤 의미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아실 것입니다. 광주 구단은 아시아 축구연맹(AFC)에 철저한 조사와 강력한 징계를 요구했습니다. 파문이 확산되자 산둥 타이산 구단 측은 강력한 규탄 성명을 내고 관련된 사람들의 홈 경기 영구 관람 금지령과 함께 광주FC에 공식 사과했습니다. 산둥 구단, 경기 2시간 전에 기권 이로부터 8일 뒤 산둥 구단은 또 상식 밖의 일을 저질렀습니다. 2월 19일 산둥은 울산에서 울산 HD와 방문 경기를 치를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산둥은 경기 2시간 전에 갑자기 출전을 포기했습니다. 선수들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누가 봐도 납득이 되지 않는 핑계였습니다. 미리 티켓을 구매했던 울산 팬들은 당연히 기다렸던 경기를 볼 수 없게 됐고 울산 구단도 입장권 환불 처리를 하는 등 불편을 겪어야 했습니다. 울산 팬과 울산 구단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중국인, 광주에서 '전두환 코스프레' 추태 이런 가운데 중국의 한 남성이 광주시에서 전두환 씨 흉내를 내며 영상을 찍어 또다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한 중국인은 '폭설과 함께 전두환이 돌아왔다'는 제목으로 SNS에 게시물을 올렸는데 해당 게시물엔 광주송정역 등 광주 곳곳에서 점퍼 차림에 군화를 신고 이마를 훤히 드러낸 남성의 모습이 보입니다. 누가 봐도 '전두환 코스프레'를 하며 광주 시민을 또다시 조롱한 것입니다. 중국 쇼트트랙, '나쁜 손'에 적반하장까지 지난달 중국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에서는 중국 쇼트트랙 선수들의 이른바 '나쁜 손'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중국 쇼트트랙 선수들의 '나쁜 손'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난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때는 결승선을 1위로 통과하는 박승희의 유니폼을 중국 판커신이 손으로 잡으려고 했다가 '반칙왕'이란 별명까지 생겼습니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여자 1천500m 결승에서는 양징루가 김길리를 잡으려는 듯 오른팔을 쭉 뻗었습니다. 다행히 탄력을 붙인 김길리가 잡히지 않고 치고 나가 금빛 질주를 완성했지만, 국제 대회마다 논란을 빚은 중국 선수들의 '나쁜 손'을 떠올리게 한 장면이었습니다. 남자 1천500m 결승에서는 박지원이 계속 선두를 달리자, 중국 쑨룽이 오른팔로 밀쳤는데 박지원이 중심을 잃지 않고 잘 버텨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중국 쑨룽은 남자 500m 결승에서는 팀 동료인 린샤오쥔(임효준)을 밀어줘서 금메달을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 명백한 반칙이었지만 대회 장소가 중국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심판들은 모른 체 했습니다. 쑨룽은 적반하장으로 남자 5천m 계주 결승이 끝난 뒤 공동취재구역을 빠져나가며 한국 대표팀을 향해 '더러워! 그냥 더럽다고!'라고 큰 소리를 지르는 몰상식의 극치를 보였습니다. 쓰레기 버리고, 침 내뱉고…중국 유커 행태 코로나19 이전 중국 관광객이 한창 한국을 방문할 때는 이들의 '비매너'가 큰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2016년엔 제주도에서 발생한 약 4천 건의 경범죄 가운데 절반 이상이 중국 여행객이 저지른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중국 여행객들이 면세 물품 포장을 마구 버려 제주공항 대합실이 '쓰레기장'으로 변한 사진과 영상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금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고 침과 가래를 공공장소에 함부로 뱉는 것은 예사이고 아이가 소변이 급하다고 매장 구석에서 그냥 누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중국인들도 에티켓을 중시한다 이런 상황을 보면 '중국인은 원래 에티켓을 지키는 것을 싫어하는 것일까?'라는 물음이 나오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중국어에 '아이지앙리마오'(愛講禮貌)란 게 있습니다. 예의 따지는 것을 중시한다는 뜻입니다. 중국인들은 실제로 상대가 무례하거나 버릇이 없을 때 '메이꿰이쥐'(沒規矩)란 말을 쓰는데 이것은 상대에 대한 큰 욕이나 다름없습니다. 중국인들도 에티켓을 중시합니다. 그럼 비록 일부이기는 하지만 중국 관광객들은 왜 추태를 보였던 것일까요? 이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면 중국인의 생각과 행동에 큰 영향을 끼치는 사회구조적-심리적 요소를 파악해야 합니다. 중국인은 오랫동안 '첫째: 지아(家) 둘째: 딴웨이(단위,單位) 셋째: 당(黨)' 이 3가지 제약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지아'는 직계 가족을 비롯해 친·인척까지 포함되는 개념입니다. '당'은 중국 공산당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생소한 게 '딴웨이'입니다. 1949년 사회주의 중국 건립 이후 도시 지역 주민에게 적용됐던 '단위 체제'(Danwei system)는 일반적으로 국가기관 단위, 사업 단위, 기업 단위로 나뉩니다. 국가기관 단위란 공산당, 행정부, 군대, 사법기관, 인민대표대회, 정치협상회의 등 국가를 구성하는 중앙과 지방의 각급 권력기관을 가리킵니다. 사업 단위는 국가가 국유자산을 동원해 설립한 조직으로, 주로 교육·과학기술·문화·위생 등과 관련된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각종 협회·연구소·학교·문화단체 등입니다. 기업 단위는 물질 생산을 목적으로 설립된 기업 조직으로, 크게 국유기업과 사영기업으로 구분됩니다. '딴웨이'에 소속된 중국 도시민의 생활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딴웨이'가 해결해 줬습니다. 사회·경제적 보장은 전적으로 '딴웨이' 소속 노동자에게만 배타적으로 제공되는 것으로, 외부인은 전혀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소속감은 대단했습니다. 이후 시장 개혁으로 1990년대 중반부터 '단위 체제'가 서서히 해체되며 '사구'(社區) 조직으로 바뀌었지만 '딴웨이'가 오랫동안 중국인의 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지배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시진핑 "중국인들 외국서 에티켓 지켜라" '지아'(家), '딴웨이'(단위·單位), 당(黨) 이 3가지의 특징은 상하 개념이 분명한 수직 구조란 점입니다. 여기서 무례하게 굴거나 에티켓을 지키지 않는 것은 곧 사회적 매장을 뜻합니다. 중국인들이 중시하는 '꽌시'(관계)나 '미엔쯔'(체면)도 이 3가지 구조를 비롯해 자신의 이익에 부합되는 상황에서만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중국인이 한국 관광을 왔다고 가정합시다. 한국이란 곳은 '지아'(家), '딴웨이(단위·單位), 당(黨) 3가지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따라서 '꽌시'(관계)나 '미엔쯔'(체면)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국 관광지는 그들에게는 일종의 해방구가 되는 셈입니다. 에티켓을 잘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남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뼈아픈 역사적 경험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20세기 이후 중국은 군벌시대, 국민당 1당 독재, 공산당 1당 독재를 차례로 거쳤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시민 사회'(Civil society)가 형성될 계기가 없었습니다.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무질서, 대혼란, 하극상을 연출했고 이후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은 황금만능주의, 이기주의란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남을 어떻게 배려하느냐'는 개인과 그 사회의 성숙도를 반영합니다. 이런 배려가 잘된 나라가 이른바 선진국이지요. 이런 점에서 중국은 갈 길이 너무도 멉니다. 경제력 측면에서는 미국과 함께 이른바 G2 반열에 올랐지만 그에 걸맞은 시민의식은 낙제점을 면하기 쉽지 않습니다. 중국 정부도 이런 점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습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2014년 9월 "물병을 아무 데나 버리면 안 되며 해외 여행 시 에티켓을 잘 지켜달라. 중국인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형성될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중국 최고 지도자의 당부로 이후 어느 정도 개선이 됐지만 획기적으로 나아진 것은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대이변이 일어났다." 지난 2월 28일 대한체육회 대의원총회가 열린 서울 올림픽파크텔은 충격과 흥분의 도가니였습니다. 2036 하계올림픽 유치 국내 후보 도시 투표에서 '다윗' 전라북도가 '골리앗' 서울시를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49표 대 11표라는 압도적인 승리였습니다. 이런 결과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투표 결과가 발표되자 오세훈 서울시장이 '이게 뭐지?'라며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 반면 전라북도 캠프는 김관영 지사를 비롯해 일제히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습니다. 전북이 대반전을 연출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전북은 나아가 본선에서도 더 큰 기적을 창조하며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48년 만에 하계올림픽을 대한민국에 선사할 수 있을까요? 절박했던 전북, 방심했던 서울 서울시의 승리는 일찌감치 기정사실처럼 보였습니다. 오세훈 시장이 몇 년 전부터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을 여러 차례 만나는 등 공을 들였고 1988년 서울올림픽 성공 개최 경험과 흑자·친환경 올림픽을 대대적으로 홍보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전북은 지난해 11월에야 뒤늦게 유치전에 뛰어들었습니다. 국제적 지명도와 인프라 등 종합적인 평가에서 전북은 서울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새만금 잼버리의 파행이란 아픈 기억도 감점 요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전북은 '절박'한 마음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지난해 말부터 투표권을 갖고 있는 대한체육회 올림픽 종목 단체 대의원들의 여론 흐름을 주시하며 대반전을 모색했습니다. 특히 김관영 지사와 2024 파리올림픽 대한민국 선수단장을 역임했던 정강선 전북 체육회장이 대의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올림픽 유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호소했습니다. 간절했던 전북과 달리 승리를 확신했던 서울은 막판에 방심했습니다. 투표 당일 김관영 지사는 개량 한복을 입은 채 몇 시간 전부터 현장에 도착해 만나는 사람마다 고개를 숙이며 한 표를 부탁한 반면 오세훈 시장은 프레젠테이션 시작 20분 전에야 투표장에 도착했습니다. 올림픽 유치라는 절체절명의 승부를 앞둔 양 측의 이런 모습이 투표를 앞둔 대의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전북의 필승 카드는 '지방 연대' "우리가 이긴다." 투표 3시간 전에 전북 관계자가 필자에게 한 말입니다.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지방 출신 대의원들이 전북을 찍기로 돼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막판 뒤집기에 성공한 전북의 필승 카드는 '지방 도시 연대'였습니다. 올림픽을 통해 지역 불균형을 해소해야 하며 이런 측면에서 전북 유치가 꼭 필요하다는 논리를 집중적으로 편 것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의 국가 정책이 서울 등 수도권 중심으로 이뤄졌던 틀을 깨고 비수도권에도 기회가 부여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김관영 지사와 정강선 회장은 "서울은 1988년 올림픽을 통해 국제적인 도시로 도약했고 경제 성장을 이뤘다"며 "지방 소멸 위기 상황에서 국가균형발전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비수도권에도 기회를 줘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김관영 지사는 프레젠테이션에서 "우리나라 전국 단위 스포츠 경기의 88.5%가 수도권 외의 지역에서 열리고 있다. 호주가 세 차례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멜버른, 시드니, 브리즈번으로 옮겨가면서 한 것도 나라의 균형 발전을 꾀한 것"이라며 대의원들에게 지지를 호소했습니다. 전북은 올림픽을 유치하면 육상 경기를 대구스타디움에서 개최하고, 광주(국제양궁장·남부대 시립국제수영장), 충남 홍성(충남 국제테니스장), 충북 청주(청주다목적실내체육관), 전남 고흥(남열해돋이해수욕장) 등에서 분산 개최한다는 계획을 내놓았습니다. 이는 IOC가 지향하는 인접 도시 연대를 통한 비용 절감 요구에 부합하고, 수도권에 집중된 인프라·경제력의 분산으로 균형 발전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선수촌과 숙박 어떻게 해결하나? "열정만으로 5성급 호텔을 지을 수 있을까?" 전북이 서울을 제치는 이변을 일으키자 대한체육회 관계자가 내뱉은 말입니다. 전북이 열정과 집요함을 바탕으로 국내 후보 도시가 됐지만 숙박 등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해 국제 경쟁력에서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입니다.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이 선수촌입니다. 올림픽에 참가하는 전 세계 선수단은 '테러' 문제 때문에 일반 호텔에서 잘 수 없습니다. 철통 안전이 보장된 선수촌이 반드시 마련돼야 해 대규모 아파트를 신축하는 것이 불가피합니다. 또 올림픽 주요 관계자들이 머무를 5성급 호텔도 다수 지어야 합니다. 문제는 인구가 많은 서울과 달리 전북에 이런 대규모 고급 시설을 지었을 때 사후 활용이 사실상 어렵다는 점입니다. 다른 시도와 분산 개최를 한다고 해도 올림픽을 치를만한 수준의 경기장이 현재 적다는 것도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각종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결국 엄청난 비용이 수반돼야 하는데 중앙 정부의 자금 지원이 어느 정도 이뤄질지는 미지수입니다. 서울에 비해 국제적 지명도가 크게 떨어지는 점도 보완해야 합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은 3수 끝에 유치에 성공했는데 외국인들이 북한의 평양과 강원도 평창을 확실히 구별하는 데 거의 10년이 걸렸다는 후문도 있습니다. 인도와 카타르 꺾어야 올림픽 개최 서울을 상대로 극적인 승리를 거둔 전북은 유치 신청서를 공식적으로 내기 위해 국내 절차 마무리에 들어갑니다. 우선 대한체육회의 주무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에 국제행사 개최 계획서를 제출한 뒤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문체부는 국제체육대회심사위원회를 열어 전북의 2036년 올림픽 유치와 관련해 심의한 뒤 큰 문제가 없으면 승인합니다. 이어 기획재정부의 국제행사심사위원회의 승인까지 받으면 정식으로 국제행사 개최 협약을 체결합니다. 이후 전북이 올림픽 유치 의향서를 대한체육회를 거쳐 IOC에 제출하면 치열한 본선 경쟁이 시작됩니다. 2036년 올림픽 유치전에는 인도와 인도네시아, 카타르, 튀르키예 등 약 10개국이 뛰어들 전망입니다. 이 가운데 강력한 후보로는 인도와 카타르가 꼽힙니다. 올림픽 첫 개최에 도전하는 인도는 유치 의향서를 이미 IOC에 제출했습니다. 인도는 개최 후보 도시로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2014년 연방정부 총리로 취임하기 전에 오랫동안 주 총리를 지냈던 서부 구자라트주의 아메다바드 또는 뉴델리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2022년 축구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던 카타르는 도하를 앞세워 도전할 계획입니다. 풍부한 '오일 머니'와 탄탄한 인프라가 강점입니다. 이밖에 인도네시아는 동남아시아 국가 최초의 올림픽 개최 명분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2036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는 내년 또는 2027년 IOC 총회에서 결정될 전망입니다. 오는 3월 18일에 개막되는 IOC 총회에서 선출되는 새 위원장도 변수로 꼽힙니다. 현재 국제육상경기연맹 회장인 세바스찬 코와 사마란치 주니어 IOC 위원이 유력한 신임 IOC 위원장 후보인데 '친한파'로 유명했던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전 IOC 위원장의 아들인 사마란치 주니어가 당선되는 게 전북에게 보다 유리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