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감성의 의학전문기자' 조동찬 기자는 의사의 길을 뒤로 한 채 2008년부터 SBS에서 기자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언론계에서는 찾기 힘든 신경외과 전문의 출신으로, 깊이 있고 다양한 의학 정보와 함께 병원의 숨겨진 세계를 시청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삶을 위한, 믿을 수 있는 의학 정보! '주간 조동찬'에서 전해드립니다. 대학병원에서 쫓겨날 위기의 필수 의료 과목들 지난주 서울에서 대한고혈압학회 추계 학술대회가 열렸다. 예년처럼 축제 분위기는 찾기 어려웠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병원과 학교를 떠난 지 8개월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리라. '고혈압 관리와 만성질환 정책' 세션에서는 비장한 분위기까지 감돌았다. 그것은 최근 시행된 상급종합병원 구조 전환 지원 사업과 관련이 깊었다. 고혈압과 상급종합병원 구조 전환 사업의 상관관계를 간파하기는 쉽지 않다. 정부를 포함해 그 누구도 공개적으로 설명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내용을 내부적으로 들여다보면 단번에 알아챌 수 있다. 상급종합병원 구조 전환이라 함은 서울아산병원, 분당서울대병원 같은 대학병원들이 병실을 현재의 85%까지로 줄이고, 중증·응급·희소 질환 환자의 비율을 높이는 것이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이 7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상황실에서 의사 집단행동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병실을 15% 줄이고, 비중증·비응급·비희소 질환 환자를 줄이면 병원은 손실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11월 7일 기준, 47개 상급종합병원 중 65%인 31개 병원이 참여했다. 상급종합병원 구조 전환 사업에 참여하면 중환자실, 응급실 등의 병실료와 중증·응급·희소 질환의 진료 수가를 올려 주겠다고 정부가 발표했기 때문이다. 전공의의 공백이 너무 길어 전문의 중심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급작스럽게 내놓은 대책이지만 얼핏 보면 좋은 방향처럼 보이고 실제로 그런 측면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여기에는 무서운 칼날이 숨겨져 있다. 예를 들어 국내 최대 병원인 서울아산병원은 현재 2,424개 병상을 336개 줄이고, 분당서울대병원도 현 1,133개 병상을 104개 축소해야 한다. 병상을 줄이면 그만큼 진료 환자와 해당 의료 인력도 줄여야 한다. 병원 경영진의 선택은 뻔하다. 상대적으로 높은 수가를 받을 수 있는 중증·응급·희소 질환의 의료 인력은 그대로 두거나 보강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진료 과목의 의료 인력은 줄일 것이다. 대학병원에서 고혈압을 진료하는 의사들은 고혈압이 중증·응급·희소 질환임을 입증하지 못하면 신규 의료진을 채용하지 않는 방법을 통해 자신의 진료 과목이 퇴출될 위기에 봉착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학회에서 만난 한 대학병원 고혈압 진료 교수는 역설적인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필수 의료라는 말이 모호한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심근경색과 뇌졸중의 원인인 고혈압 진료는 필수 의료라고 할 수 있잖아요. 상급병원 구조 전환 정책은 필수 의료를 보강하겠다는 것인데 오히려 저희 같은 필수 의료진이 쫓겨나게 생긴 건 역설 아닙니까?" 이런 위기감은 정형외과, 척추신경외과, 내분비내과, 재활의학과, 영상의학과, 안과 등의 진료 과목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역시 돈 문제였다 정부는 필수 의료의 질을 높이겠다며 30조 원+알파라는 돈을 쓰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 돈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잘 따져봐야 한다. 그래야 정부 정책의 디테일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30조 원 중 첫 번째 10조 원은 2년 전 뇌출혈로 다른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사망한 대형병원 간호사 사건 이후 책정된 금액으로, 출처는 국민건강보험금이다. 두 번째 10조 원은, 올해 의료 대란으로 수술과 진료가 줄어들면서 상급종합병원의 건보공단 청구 금액이 예년보다 10조 원이 줄었는데 바로 이 돈으로, 역시 국민건강보험금이다. 세 번째 10조 원은 상급종합병원 구조 전환 시범을 통해 병실과 환자 수가 줄어들면 남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금액이다. 즉, 필수 의료 지원 금액 30조 원의 출처는 모두 국민건강보험금이다. 그런데 내년 국민건강보험료 인상률은 올해에 이어 '0'%로 결정됐다. 건강보험료가 동결된 건 네 번째 있는 일이고 연속 동결된 건 처음인데, 정부가 경제 악화, 고령화 등 여러 상황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물가 상승률 등을 보정하면 국민건강보험의 총액은 당분간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다면 정부가 필수 의료 지원으로 책정한 30조 원만큼 비필수 의료에 책정될 금액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필수 의료에 포함되지 않으면 수가가 종전에 머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삭감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진료 과목 학회에서 정부가 던진 키워드 '중증', '응급', '희소'에 들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은 이런 구도가 너무 쉽게 보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초에 열렸던 대한신경외과 학회에서 나온 말이다. "필수 의료란 말이 의학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아무리 의학적 근거를 들이밀어도 소용없을 것 같습니다. 보건복지부 및 여러 관계자들의 '오프 더 레코드'를 종합해 보면 '상급종합병원에서 진료 비율이 월등히 높은 진료가 필수 의료에 포함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대학병원에서 생존하려면 로컬(비대학병원을 일컫는 말)에서 보는 환자를 저희는 안 보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발언은 나의 취재와 일치했다. 현재는 질환의 중증도에 A, B, C로 나누고 이에 따라 수가를 달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게 기계적인 분류라며 그동안 불만이 많았고, 최근 상급종합병원 구조 전환 사업이 발표되면서 중증도 분류에 따른 수가 격차가 더 벌어질 기미가 보이자 의료계 현장에서 저항이 극에 달했다. 그래서 정부는 새로운 중증도 분류 체계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는데, 이는 사실상 의료 현장을 달래기 위함으로 보였다. 의료 현장이 기꺼이 받아들일 새로운 중증도 분류 체계를 마련하려면 어마한 연구가 필요하고 그러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정부 핵심 관계자 취재원은 내게 '분류 체계를 당장 마련하려면 상급종합병원의 진료 비율 중심으로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럴 경우 대학병원에서만 주로 보는 류마티스 진료는 필수 의료에 포함될 것으로 보이지만, 척추관 협착증 같은 전문병원에서 많이 보는 관절 질환은 필수 의료에 포함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흐름에 대해 척추 전공 신경외과 교수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류마티스 질환은 로컬에서는 안 보니까 상급종합병원 진료 비율이 당연히 높겠죠. 그런데 류마티스 경증 환자와 비교하면 척추관 협착증 환자의 중증도가 더 높은 것 아닙니까? 정부는 척추관 협착증 환자라도 고령, 만성병 동반 등 고위험 요소가 있으면 중등도를 인정해 주겠다고 하는데, 고위험 환자는 몇십 프로(%) 올려 주는 것 갖고는 수지타산이 맞을 수 없습니다." 결국은 돈 문제였다. 고령화에 접어들면서 의료비 지출은 가파르게 늘고 있는데, 국민건강보험료를 올리지 않고 필수 의료를 지원하려면 비필수 의료 수가를 삭감하는 방법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정부의 필수 의료 보강 정책이 가시화될 경우 필수 의료와 비필수 의료, 상급종합병원과 비상급종합병원 사이에서 커다란 갈등이 생길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기도 한다. 이게 일반 국민에게 과연 좋은 건지 그리고 국민적 합의 없이 진행해도 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무엇보다 고령화 의료에 대한 고비용 문제를 국민에게 털어놓고 함께 방안을 모색하는 게 정부가 먼저 해야 할 일로 보인다. 사진 : 연합뉴스
건강한 삶을 위한, 믿을 수 있는 의학 정보! '주간 조동찬'에서 전해드립니다. 위고비만으로 살을 뺄 수 있을까? 운동을 많이 하면 살이 빠진다는 말이 팩트인 적도 있다. 하지만 식사량 조절 없이 운동만으로는 살이 빠지지 않는다는 게 여러 코호트 연구에서 입증됐다. 그 이유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운동을 할 때는 주로 탄수화물을 에너지로 사용하기 때문에 체지방은 줄지 않는다. 자칫 몸속 탄수화물이 과도하게 소모되면 배고픔을 느끼게 된다. 이때 당 지수가 높은 음식을 먹으면 췌장에서 인슐린이 분비된다. 인슐린은 탄수화물을 지방으로 바꿔서 저장할 뿐만 아니라 체지방이 분해되는 것도 방해한다. 체지방이 분해되려면 인슐린의 농도가 12시간 이상 낮게 유지되어야 한다. 저탄고지, 간헐적 단식은 모두 인슐린의 농도를 낮게 유지해 체지방의 분해를 최대한을 끌어 올리려는 시도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혈당이 떨어지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되는데, 이러면 식욕을 유발하는 호르몬이 과도하게 분비되고, 포만감을 느끼는 시상하부는 마비된다. 어떤 다이어트 법이든 그것이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순간 무용지물이 되기 십상이다. 스트레스는 우울감과 과다 식욕을 유발해 살을 찌게 만들고 이게 또 스트레스를 증가시키는 악순환의 고리는 이미 증명됐다. 비만의 가장 큰 원인을 스트레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 스트레스와 관련 없는 삶의 영역이 없듯이 비만은 전반적인 삶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최근 비만 유전자(MC4R gene variant)에 관한 연구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비만 유전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지만 심각한 어린이 비만 환자의 4~5%에서 발견된다. 그러네 이 유전자는 비만에만 관여하는 게 아니었다. 뇌전증 증세로 병원을 찾은 7살 어린이의 사례 보고서를 살펴보자. 이 어린이에게 의료진은 뇌전증 약을 처방했지만, 오히려 증세가 악화했다. 어린이는 심각한 수면 장애도 앓고 있었다. 연구팀은 어린이가 아기 때부터 비만이었던 것을 토대로 유전자 검사를 해봤더니 비만 유전자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팀은 뇌전증 치료 약을 중단하고 수면 호르몬이라 불리는 멜라토닌을 처방했다. 멜라토닌이 비만 유전자 효과를 억제한다는 연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7개월 만에 뇌전증 증세가 호전됐고, 뇌파 검사에서도 비정상적인 파형이 사라졌다. 불면증과 비만도 나아졌다. 이 연구는 비만이 수면과 뇌파에도 관련된 단순히 칼로리의 개념으로 접근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보여줬다. 이런 관점에서 위고비로 손쉽게 살을 뺄 수 있다는 말을 살펴보고자 한다. 위고비 열풍에 가려진 것 테슬라 CEO인 일론 머스크가 몸무게를 13kg 줄인 비법으로 소개한 다이어트 주사제가 최근 우리나라에도 출시됐다. 한 통에는 주당 1회씩 4회 분량, 즉 한 달 치 주사제가 들어 있는데, 한 통 시장 가격이 80만 원 안팎으로 알려졌는데, 병원과 약국마다 매물 확보 경쟁이 한창이다. 병원에서는 하루에 100통 넘는 문의 전화가 오지만 물량이 부족해 대부분 처방받지 못하고 있다. '위고비'의 세계적인 열풍은 지금까지의 다이어트약 중 가장 효과가 뛰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5월 네이처 메디슨에 게재된 논문을 보면 위고비를 매주 맞은 환자는 52주 이후부터 원래 체중의 10% 이상 몸무게가 줄고, 이 효과가 무려 208주, 4년간 유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 결과는 '위고비가 비싸긴 해도 손쉽게 살을 빼고 요요 현상도 없다'는 보도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 연구는 잘 봐야 할 구석이 있다. 처음 위고비를 맞은 환자는 8,800명이 넘었는데, 4년 후에는 921명뿐이었다는 것이다. 연구 참가자 중 8,000명 가까이 투약을 중단한 걸로 보이는데, 연구팀은 그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의학계는 고비용과 부작용 때문으로 추정한다. 강남세브란스병원 내분비내과 강신애 교수는 위고비 부작용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매우 드물지만 급성 췌장염이 나타날 수 있는데 췌장에서 소화 효소가 새어 나오면 그것에 닿은 장기들은 녹아내리는 무서운 부작용입니다. 그래서 전문의약품이고, 전문가의 면밀한 관찰 하에 투약이 이뤄져야 합니다. 구토, 오심, 설사, 두통 등의 부작용은 흔하게 나타나는데, 가볍다고는 해도 4년 동안 지속한다면 환자의 생활은 어떻게 될까요?" 짚어야 할 점은 또 있는데, 2년 동안 맞은 환자 중에서 목표 체중을 유지하지 못한, 즉 효과가 나타나지 않은 환자의 비율이 47.6%였다는 것이다. 위고비 초기 임상에서 약에 반응하지 않는 비율 10.2~16.7%에 비하면 3배가 넘는 것이다. 이는 약에 내성이 생겨서 중단한 경우가 상당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이때 투약을 중단하면 어떻게 될까? 영국 리버풀 대학은 68주 동안 매주 위고비를 맞고 평균 17% 몸무게를 뺀 환자들을 연구했다. 위고비를 중단한 환자들은 곧바로 살이 찌기 시작해 52주 후에는 결국 6% 빠지는 데 그쳤다. '손쉽게 살이 빠지고 이 효과가 4년 동안 유지된다'는 위고비 열풍에는 이렇게 가려진 것들이 있다. 위고비를 매주 4년 동안 맞은 환자는 매우 드물다는 것, 부작용과 내성이 있다는 것, 그리고 중단하면 요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비만은 삶의 균형의 문제 비만 유전자(MC4R gene variant)는 특정 유전자(MCR4 gene)가 변형돼 이것이 본래 하던 일에 차질을 빚게 만든다. 특정 유전자가 본래 하던 일은 수면, 혈당, 혈압, 자율신경계, 식욕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다. 위고비(GLP-1)는 특정 유전자의 기능을 돕기 때문에 식욕을 억제할 뿐만 아니라 당뇨병, 심혈관계 질환 위험까지 낮춘다. 이런 점에서 위고비는 고도 비만으로 인한 당뇨병, 심혈관 질환자에게는 현존 최고의 약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비만 지수(BMI) 30 이상의 고도비만 환자나 비만 지수 27 이상의 심혈관, 성인 당뇨병 환자에게 쓰라고 허가했다. 하지만 의사의 재량에 따라 살을 빼는 목적으로 처방이 이뤄질 수 있고, 다른 나라들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목적의 처방이 더 많을 걸로 보인다. 위고비는 비만도 27 이하의 사람에게는 임상 시험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더 위험할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비만이 전반적인 삶의 균형이 깨진 상태의 결과물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위고비의 한계는 분명해 보인다. 수면제로 불면증을 해결하려 했던 과거 현대 의학의 시도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좋은 수면제로도 가장 깊은 잠의 단계에 도달할 수 없고, 특히 뇌와 오장육부를 회복시키는 멜라토닌을 충분히 만들어 내지 못했다. 가장 좋은 멜라토닌은 숙면할 때만 만들어지고 숙면하려면 전반적인 삶의 균형이 바로잡혀야 가능했다. 비만도 마찬가지이다. 삶의 균형을 회복시키지 않고 일시적으로 살을 빼는 것은 그 무엇이든 요요를 피할 수 없다. 위고비로 손쉽게 비만을 탈출할 수 있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경계해야 하는 이유이다.
건강한 삶을 위한, 믿을 수 있는 의학 정보! '주간 조동찬'에서 전해드립니다. 식당의 '특별한 배려' 얼마 전 가족 여행으로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방문했는데, 우연히 축제 기간과 겹쳤다. 유명한 광장과 거리마다 공연과 행사가 진행돼 따로 돈을 내지 않고도 카탈루냐 전통춤과 뮤지션들의 노래를 만끽할 수 있었다. 다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원하는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게 불편했다. 여행 마지막 날은 공교롭게도 토요일이었고, 만찬을 대충 때우고 싶지 않다는 의견이 있어서 구글 지도를 펼쳤다. 근처에 평점 최고인 타파스 식당이 있어 도착했더니, 마침 창문 안쪽으로 빈자리가 보였다. 문 앞에서 한참 동안 기다리니 누군가가 나타나 예약자가 누구인지를 묻는다. 예약하지 않았고 빈자리가 있어서 기다린 것이라고 답했더니, 빈자리에는 오후 7시 30분부터 예약자가 오기로 되어 있단다. 7시 30분까지 식사를 끝낼 수 있다고 맞받아쳤더니, 주방 인력에 여유가 없다며 되받아친다. 그 찰나에 망연자실한 우리 가족의 표정을 알아챘을까? 주인은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주변에서 비슷한 식당을 하는 친구였는데, 8시까지 가능하다며 거기라도 괜찮겠느냐?'라고 묻는다. 우리는 고개를 적극적으로 끄덕였는데, 역시 예약 불가 상태의 최고 평점 맛집이었기 때문이다. 주인은 따라오라고 했고, 자신은 '한국을 가본 적이 없는데 너무 멀기 때문'이라고 했다. 5분 정도를 걷자, 반대편에서 다른 식당의 주인이 우리를 건네받았다. 두 번째 식당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2인 탁자 하나가 비어 있었고, 주인은 의자 하나를 더 놓아주었다. 식사하는 동안 발길을 되돌리는 많은 손님을 보면서, 우리는 두 식당이 우리에게 특별한 배려를 해준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형병원 간호사 사망 사건과 '특별한 배려' 2년 전 서울아산병원 간호사에게 뇌출혈이 발생했는데, 서울대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전국민적인 성토가 이어졌고, 대책으로 정부는 의대 증원을 발표했으며, 이로 인해 전공의와 의대생이 병원과 학교를 떠나면서 의료 대란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인구 10만 명당 신경외과 전문의 숫자(4.75명)는 OECD 평균(1.33명)의 3배가 넘지만, 왜 국내 최대 병원의 뇌수술 의사는 2명뿐인지, 그 구조적인 문제는 충분히 보도됐다. 그런데 당시 의료진들의 특별한 배려는 보도된 적이 없는 것 같다. 당시 서울아산병원 신경외과 주치의는 간호사의 뇌동맥류를 코일로 막으려고 했다가 동맥류가 파열됐다. 매우 드문 일이지만, 제아무리 능숙한 신경외과 의사라도 완벽히 피할 수는 없다. 이럴 경우 예후는 안 좋지만 그래도 개두술을 해봐야 한다. 그런데 같은 병원 뇌수술 의사 2명은 휴가를 내고 해외 학회와 지방에 있었다. 주치의는 본인이 가장 편한 동료인 고대구로병원 뇌수술 의사에게 전화했고, 그 동료는 '지금 출발하면 병원까지 1시간 걸리는데, 병원에 가고 있을 터이니 그사이 더 빨리 되는 곳 있으면 그곳에 부탁하라'고 답했다. 주치의는 바로 서울대병원 동료에게 전화했고, 다행히 '1시간보다 빠르게 수술이 준비될 수 있다'는 답변을 들어 서울대병원으로 옮긴 것이다. 뇌출혈 환자가 병원을 옮겨 1시간 이내에 수술받는 건 미국, 영국, 일본, 독일 등 보건 선진국에서도 불가능한 일이다. 결과가 좋지 않아서 이 과정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지만, 당시 사건의 이면에는 의료진의 특별한 배려가 있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 "선생님, 소송 안 거실 거죠?" 군의관 시절, 오랜만에 초등학교 동창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자신의 어머니가 심정지로 쓰러졌고, 나의 모교 대학병원에서 심폐소생술을 받았으며, 중환자실이 없어 다른 병원으로 옮겨야 하는데, 중환자실 있는 병원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1년 후배인 모교 병원 심장내과 주치의에게 조심스럽게 전화를 걸었는데 단호하게 거절하며, '함께 중환자실 있는 병원을 찾아보자'고 말한다. '맨땅에 헤딩'하듯이 이곳저곳 문의를 해봤지만, 받아 주겠다는 곳은 없었다. 30여 분이 지난 후 주치의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다. "선생님, 이 환자를 제가 입원시키려면 일반 병실 처치실에서 받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결과가 잘못돼 환자 보호자가 소송하면 저는 질 수밖에 없어요. 선생님도 잘 아실 테지만, 중환자를 일반 병실로 받는 건 규칙을 어기는 거잖아요... 환자 보호자가 결과가 어떻든 소송 걸지 않겠다고 선생님이 보장해 주시면 제가 병원을 설득해 보겠습니다." 규칙을 어겨가며 환자를 입원시키려면, 내과 과장 혹은 병원장의 허락까지 필요할 것이다. 게다가 본인의 업무가 아닌데도 중환자를 감당해야 할 일반 병동 간호사들의 특별한 양해도 구해야 한다. 병원의 특별한 배려로 친구 어머니는 일반 병실 처치실에서 치료받다가 며칠 후 중환자실로 옮겼고, 최선의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숨졌다. 나는 그 과정을 친구에게 설명했고, 친구는 의료진의 특별한 배려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외과 전문의의 '특별한 배려'와 10억 원 2017년 3월, 생후 5일 된 신생아가 녹색 구토로 병원을 찾았다. 소아과 전문의는 '중장 이상 회전과 꼬임이며 응급수술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장이 오래 꼬여 있으면 꼬인 장이 썩어 들어가 패혈증에 빠지고 그럴 경우 사망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병원에는 당시 소아외과 의사가 없었고, 소아외과 의사가 있는 다른 병원을 찾기도 어려웠다. 현재 외과 전문의 8,800명 가운데 외과학회가 인정한 소아외과 전문의는 73명뿐이기 때문이다. 외과 교수는 '특별한 배려'로 본인이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다. 교수는 신생아의 뱃속에 가득 찬 농을 깨끗이 씻어내고 꼬인 장을 풀어낸 후 수술을 마쳤다. 그런데 수술 후 신생아의 장이 다시 꼬였고, 이틀 뒤 재수술했지만, 소장 대부분이 괴사해 15~20cm만 살릴 수 있었다. 이 결과는 소송으로 이어졌다. 1심 재판부는 '소아외과 세부 전문의가 아니더라도 외과 전문의라 수술에는 결격이 없고, 다른 병원에 보내 시간을 지체했으면 더 나빠졌을 것'이라며 병원 측의 손을 들었다. 반면 2심 재판부는 '신생아에서 발생하는 특징적인 질환에는 정해진 수술법이 있는데, (성인 외과 전문의가) 그걸 안 해서 재발 및 장 절제를 하게 됐다'며 환자에게 10억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장이 짧아진 신생아는 뇌 이상이 생겨 발달 지연, 사지마비, 인지 저하 등이 있는 상태라고 하니 보호자에게 10억 원은 턱없이 부족한 돈일 것이다. 환자 가정의 안타까운 앞길이 눈에 훤하다. 이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가 벌어지고 있다. 이 사건을 대법원이 1년 넘게 심리 중이라는 사실이 최근 알려지면서 외과계가 크게 출렁이고 있기 때문이다. "성인 외과 의사, 앞으로는 절대로 소아 환자를 수술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병원장으로 있을 때는 성인 외과 의사가 소아를 수술하는 일은 없게 할 겁니다." 좋은 식당을 완벽하게 하는 건 사람의 마음으로만 할 수 있는 특별한 배려였다. 의료 분야는 식당보다 더 그렇다. 제아무리 좋은 의료 시스템을 도입해도 의료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으면 공허한 일일 뿐일 것이다. 특히 신경외과, 소아외과 등 생명과 직결된 분야의 의사가 상당 기간 부족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특별한 배려한 의료진에게 더 큰 피해가 돌아오는 사건들이 있어서 참 안타깝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환자를 충분히 보상하면서도 특별한 배려를 한 의료진 탓을 하지 않는 묘수가 나타났으면 좋겠다. 사진 : 연합뉴스
건강한 삶을 위한, 믿을 수 있는 의학 정보! '주간 조동찬'에서 전해드립니다. 민간 대학병원에서 발길 돌린 군의관들 최근 A 대학병원 권역응급의료센터에 B 군병원에서 파견 온 C 군의관이 도착했다. 그는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를 취득한 후 입대해 대위로 군 복무 중이었는데 군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A 대학병원은 성인 응급실 당직 스케줄이 허물어진 터라, 군의관에게 성인 응급실 당직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해당 대학병원은 전문 진료과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갓 의대를 졸업한 후 입대한 C 군의관은 응급의학과가 아닌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지만, 그래도 전문의를 응급실에 투입하는 게 낫다고 병원은 판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C 군의관은 권역응급의료센터, 그러니까 다른 병원에서 중증이라고 확인된 성인 환자가 전원오는 이곳에서, 자신이 근무하는 것은 자신이 진료가 가능한 범위 밖이라고 판단했다. C 군의관은 부대에 보고했고, 해당 부대는 복귀를 명령했다. 수많은 언론이 병원에 파견된 군의관들이 응급실 근무를 거부했다고 보도했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보건복지부는 국방부와 징계를 협의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이 답변이 논란이 되자 복지부는 이후 "잘못된 서면 답변이었다"고 정정했다. 하지만, 군 관계자는 "군인 신분인 군의관이 부대에 보고 없이 명령을 스스로 어겼다면 징계 사유가 되지만, 이번 사안은 그렇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으로 파견된 군의관 (이 글과 직접적인 관련 없음) 이후 B 군병원은 대신 외과 전문의인 D 군의관을 A 대학병원에 다시 파견했다. 이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9월 5일, 광주광역시 조선대 교정에 쓰러져 있던 심정지 대학생이 100m 앞에 있는 조선대병원으로 이송되지 못했다. 이유는 당시 외과 교수가 응급의학과 교수를 대신해서 응급실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과적 수술에만 특화된 외과 전문의에게 어떤 질환 때문에 심정지가 온 건지 알 수 없는 상태의 젊은 환자를 진료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외과 전문의인 D 군의관도 부대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A 대학병원은 B 군병원에 응급의학과 전문의를 파견해달라고 다시 요청했다. "저희 군병원도 24시간 비상진료체계를 책임지고 있는데, 저희도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부족합니다. 저희 군의관을 파견하면 저희의 응급실 당직 체계가 깨지거든요." 군병원도 민간병원과 다르지 않다. 생명을 다루기 때문에 24시간 마음을 졸이며 사는 걸 운명으로 달게 받아들이는 진료 과목인 응급의학과, 여기 의사들은 부족했다. 이건 의료대란 이후에 생긴 문제가 아니다. 적어도 20년 전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시작된 일이다. 2년 전 서울아산병원 간호사가 뇌 수술을 받기 위해 다른 병원으로 옮겨간 사건에서도 드러난 바 있지만, 이런 문제를, 자칫 의사 수 부족 때문이라고 단순화하는 것은 위험한 접근이다. 우리나라 신경외과 의사는 인구 10만 명당 4.75명으로, OECD 국가 중 2위다. OECD 평균 1.3명의 3배가 넘지만, 뇌 수술을 하는 의사는 턱없이 부족하다. 신경외과 전문의 10명 중 9명은 척추 수술을 하기 때문인데, 척추 수술 의사의 삶도 힘겹지만, 뇌 수술 의사만큼 삶의 질을 포기하진 않아도 된다. 원망과 미움 기자 일을 하면서 죽비로 맞은 것처럼 고마운 말을 들을 때가 있다. 누구나 아는 유명한 분과 우연히 딱 한 번 자리를 같이했는데, 그분이 주신 말씀을 여전히 가슴에 간직하고 있다. "조 기자가 쓴 기사를 보면 가끔 원망과 미움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어떤 사안에 몰입해 취재하다 보면 당연히 그럴 때가 있겠지만, 원망과 미움은 합리적인 판단을 흐리게 할 수 있어요. 파급력이 큰 기사를 쓸 때 특히 주의하세요. 조 기자 마음속에 원망과 미움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을." 여섯 달 전 전공의와 의대생들이 병원과 학교를 떠났다. 내게도 충격이었다. 경찰은 누군가의 입김 때문이라고 생각해, 박단 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을 비롯해 '빅5 병원' 전공의 대표들을 참고인으로 소환조사하고 있다. '그들의 병원 이탈'은 전체적이며, 자발적인 분위기에서 비롯된 일로 봐야 할 것이다. 특별히 나쁜 놈만 골라서 의대를 보내는 게 아니라면, 그들의 목소리를 우리는 세세하게 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정부 관계자들은 그들을 '생명을 볼모로 불법 행동을 하는 나쁜 사람들'인 것처럼 규정했다. 그들은 정부의 압박에 두려웠을 것이고, 자신들을 향한 일부 국민들의 비판에 답답했을 것이며, 그것이 지속되면서 원망과 미움이 '촘촘하고 두텁게' 쌓였을 것이다. 여섯 달 전,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의대 증원 2,000명'을 전격 발표했다. 역시 충격이었다. 조 장관은 얼마 전 국회에서 의대 증원의 규모와 시기는 "내가 결정한 것이며, 윤석열 대통령이 개입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국회의원 선거와 관련 없이 국가의 필요에 따라 과학적인 추계에 근거한 보건복지부의 정책적 결단이었다는 뜻이다. 의료계는 '증원 발표'를 총선용이라고 비판했고, 위급한 시기엔 복지부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전공의들이 병원을 이탈한 뒤 복귀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부는 전공의와 처벌, 사직 등을 놓고 갈등을 이어왔다. 15년 동안 보건복지부를 출입한 터라 제법 많은 관계자들과 '오프 더 레코드' 대화가 가능하다. 전공의들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관계자들의 말도 많이 들었다. 급진적 의대 증원을 반대한다고 말했던 한 복지부 관계자도 마찬가지였다. 신경외과, 소아과 등 배후 진료 의사가 부족하고, 이제는 응급실을 지키는 당직 의사도 부족해 국민은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고 있지만,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의정 갈등의 실타래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원망하고 미워함'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리라. 전공의와 대통령 최근 가장 듣기 거북했던 말들이 있다. "(6개월 버티면) 이긴다." (이주호 사회부총리가 최근 국회에서 한 발언이 기사화된 건데, 이후 '6개월 버티면'이란 말은 하지 않았고, '이긴다'라는 표현도 의사들을 이긴다는 뜻이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전공의와 의대생들이 더 버티면) 결국 의료계가 이긴다." (이런 표현이 그 뒤로 의사들 커뮤니티에 종종 등장한다.) 이긴다는 말은 전쟁 중에는 끔찍한 문장으로 돌변할 수 있다. <서부전선 이상없다>란 영화를 보면, 독일과 프랑스의 휴전 협상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지휘관이 '이기라'는 명령을 내려 수많은 젊은이들이 명분없이 죽어가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다. 이기고 지는 싸움 속에서 국민의 피해는 더 커지고, 의료계 안을 들여다봐도 전공의와 의대생의 피해가 선배 의사들보다 훨씬 크다. '이런데도 이기는 게 정말로 이기는 걸까?' 나는 의문이다. 어느 병원 전공의 대표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선택이 무엇이든지 (전공의) 선생님들이 후회 없는 선택을 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원망과 미움을 버리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저도 소중한 분께 들은 말이에요." 같은 말을 대통령에게도 하고 싶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의 '2026년 의대 증원 보류', '여야의정 협의체 구성' 같은 여러 중재안들이 나오는데도 더 얽혀만 가는 이 상황을 풀어갈 당사자는 대통령과 전공의(의대생)로 보이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박단 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 4월 만난 적이 있다. 하지만, 딱 한 번뿐이었고, 그때보다 상황은 악화했다. 서로 원망과 미움을 버리고, 서로를 이기려는 마음 없이 여러 번 만났으면 좋겠다. 사진 : 연합뉴스
어느 저녁 서울대병원 응급실 앞, 대구에서 올라온 구급차가 3시간째 기다리고 있다. 구급차에는 마비 증세가 있는 암 환자가 타고 있었다. 구토 증세까지 있어 위험해 보이지만 의료진은 '위중하지 않다'며 치료를 거부했다고 한다. 다른 구급차에서는 인천에서 온 뇌경색 환자가 2시간 동안 기다리다가 다른 병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최근 어느 방송 뉴스는 병원이 응급 환자를 거부하는,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 현장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그 뉴스를 보면서 '도대체 응급실 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길래, 응급실 밖의 사정을 저토록 모르는 체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2024년 8월 25일 일요일, 한양대구리병원 응급의학과 김창선 교수는 오프였지만 가족들과 나들이는 아예 계획하지 않았다. 오프 때 잠을 자 두지 않으면 강도 높은 근무를 견뎌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나기 전, 그는 응급실 빈 병실이 없는데도 심정지 환자를 받아 살려낸 이력이 있다. 심폐소생술실이 비어 있는 한 심정지 환자를 마다하지 않는 김 교수, 그가 쉬는 날인지 모르고 질문을 던졌다. "응급실 바깥에선 마비된 암 환자가 3시간 넘게 기다리고, 뇌경색 환자가 2시간 기다리다 발길을 돌리는데 그때 응급실 안에서는 어떤 사정이 있었던 걸까요?" 무시해도 될 기자의 질문에 그는 적극적으로 답을 해왔다. "당시 서울대병원 응급실의 사정은 모르지만, 저의 요즘 생활을 말씀드리면 충분히 답이 될 것 같습니다." 그는 며칠 전 119로부터 심장정지 환자를 받았던 날의 이야기를 꺼냈다. 심폐소생술을 해서 일단 살려둔 후 심정지 원인을 찾아야 했다. 중장년층의 급작스러운 심정지는 대개 심근경색이거나 뇌졸중이라서 두 가지 질환에 대해 빠르게 검사를 진행했는데 심근경색으로 확인됐다. 심장의 주요 혈관이 막힌 터라 막힌 혈관을 빠르게 뚫어주지 않으면 환자의 심장은 또 멈출 것이다. 김 교수는 재빨리 응급 심장내과팀에 연락했는데, 그 팀은 다른 환자의 심장 혈관을 뚫는 중이었다. 이럴 땐 기다릴지 아니면 다른 병원으로 옮겨야 할지(이건 응급실 뺑뺑이에 속한다) 빠르게 판단해야 하는데, 다행히 마무리 중이어서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그동안 환자의 상태가 악화한다면 김 교수는 법적 소송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 그러던 중 뇌졸중이 의심되는 환자를 받아야 한다는 연락이 도착했다. 대학병원 응급실은 심장정지, 중증 외상, 흉통(심혈관 질환), 뇌졸중(뇌혈관 질환) 등 4가지 중증 응급 질환에 대해서는 수용 거부할 권한이 기본적으로 없다. 그는 뇌졸중 중에서 뇌경색(뇌혈관이 막혀 약물로 막힌 혈관을 뚫는 치료가 필요함)이기를 바랐다. 이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김 교수가 직접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환자 병명은 뇌출혈이었다. 응급 개두술을 할 수 있는 신경외과 팀은 다른 수술을 방금 시작한 상태였다. 급하게 다른 병원을 알아봐야 했는데, 이것도 응급실 뺑뺑이다. 다섯 번째 병원에 전화를 걸고 있을 때 뇌출혈 환자의 상태가 악화했다. 두개강 내 뇌의 압력이 높아진 탓일 것이다. 급하게 뇌압을 낮게 하는 약물을 투여했다. 그러는 중에 심정지에서 회복했던 환자의 혈압이 다시 떨어진다. 혈압 상승 약물을 투여하고 심정지에 대비해 심폐소생술 기구들을 챙기며 응급심장내과 팀에 재촉 전화를 넣는다. 이러는 사이 1시간 넘게 대기하는 환자가 10명을 넘어섰고, 응급실 밖에는 새로 온 구급차들의 불빛이 번쩍이고 있다. "제가 심정지 환자와 뇌출혈 환자에 동분서주할 때 응급실 밖에서는 뺑뺑이가 벌어지고 있었겠죠. 응급실 뺑뺑이의 본질은 응급실이 아닙니다. 단언컨대 구급차 타고 온 중증 응급 환자를 여력이 있는데도 이리저리 뺑뺑이 돌리는 응급의학과 의사는 없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응급실 뺑뺑이는 뇌출혈, 중증 외상 등을 치료하는 의료진이 부족해서 나타나는 거예요." '응급실 뺑뺑이' 사건 처리가 '응급실 뺑뺑이'를 악화시키다 지난해 3월 대구에서 17세 청년이 4층 건물에서 추락했다. 목격자의 신고를 받고 119가 출동했을 때 환자는 의식이 있었으며 간단한 대화 정도는 가능했고 혈압, 맥박, 산소포화도 등 바이털 사인도 양호했다. 4층 높이에서 추락하면 그 누구라도 중증 외상을 피할 수 없다. 운이 나쁘면 바로 목숨을 잃지만, 운이 좋으면 이 청년처럼 당장은 상태가 양호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청년이 4층에서 추락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게 했고, 결국 비극적 결말로 이어지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청년을 실은 구급차가 여러 병원을 거친 후 경북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응급실엔 빈 병실이 없었고 이 이유를 들어 의료진은 청년을 수용하지 않았는데, 경북대 병원 관계자는 바로 이 지점을 무척 안타까워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4층 건물에서 떨어진 환자라고 연락을 받았다면 응급실에 없는 자리를 만들어서라도 수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회에서 만난 당시 경북대 권역외상센터 당직 응급의학과 교수는 그때의 상황을 설명했다. "나중에 확인을 해보니 추락 환자가 우리 병원에 도착한 시간에 저는 전공의랑 병원 옥상에 있었습니다. 타 지역에서 뇌졸중 환자가 구급 헬기를 타고 도착했거든요. 그럼에도 그 청년이 4층에서 떨어진 걸 알았다면 저와 전공의 둘 중 한 명은 그 친구에게 달려갔을 겁니다." 이 사건으로 경북대병원을 포함한 4개 병원이 행정처분을 받았는데, 환자가 병원을 들렀는데도 적절한 처치를 하지 않았다는 게 이유이다. 특히 대구파티마병원 전공의는 개인 자격으로 기소됐다. 반면 중증 환자 진료 중이어서 추락 환자를 수용할 수 없다고 전화로 얘기한 두 개 병원은 처벌에서 제외됐다. 정부가 현장 조사를 통해 신중하게 내린 결론이겠지만, 현장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수도권 어느 대학병원 의료원장은 다음 날 바로 아래와 같은 지시를 내렸다. "신경외과, 외과 등 여력이 안 될 것 같으면 중증 환자 문의가 전화로 왔을 때 아예 안 된다고 하세요. 괜히 환자를 직접 보고 결정하겠다는 알량한 의협심 같은 거 하고 싶거든 본인이 병원 만들어서 직접 하세요." 지난해 응급의료법이 개정된 이후 4대 중증 응급 질환일 경우 대형 병원 응급실 여력이 없어도 환자를 수용해야 한다. 법적 책임은 환자를 수용한 병원 의료진에게 남아있게 되고 이런 까닭에 의료진의 태도는 더욱 방어적으로 가고 있다. 법보다 신뢰 관계 코로나19 팬데믹 시절, 젊은 뇌출혈 환자가 지방대학 응급실을 찾았다. 빈 병실이 없었지만, 의료진은 보호자가 환자를 싣고 온 개인 자동차에서 진료를 시작했다. 의료법으로 따지면 불법일 테지만, 촌각을 다투는 젊은 생명을 두고 의료진은 주저 없이 진료하고 수술실로 인계했다. 이 청년은 결국 사망했지만, 보호자는 의료진에게 소송을 걸지 않았고, 여전히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말콤 글라드웰이 쓴 '블링크'에는 미국의 의료 소송 변호사의 얘기가 나온다. 그는 미국에서 의료 소송을 가장 많이 담당하고 있는데, 그가 내린 결론은 다소 동화 속 이야기 같다. "명문 의대를 졸업하고, 좋은 병원에서 경험이 많은 의사는 의료 소송이 없을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의료 소송은 의사의 의술과는 상관이 없어요. 심지어 오진하거나 잘못된 수술을 한 걸 알아도 소송을 걸지 않는 환자도 있어요. 의사가 진심으로 최선을 다한 결과라는 걸 알면 환자는 그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소송을 걸지 않습니다. 제 고객은 제 방문을 열면서 천편일률적으로 '저는 담당 의사가 싫어요.'라고 말하죠. 결국 의사-환자 사이의 신뢰 관계가 깨졌을 때 의료 소송으로 연결되는 것이죠." 나는 최근에 있었던 의료분쟁 세미나에서 이 이야기를 꺼냈다가 어느 의사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 의료 소송을 줄일 수 있는 대안으로 '의사-환자 신뢰 회복'을 얘기했으니 현장 의사에게는 철없는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의사-환자 신뢰 회복'이 의료 소송은 물론 응급실 뺑뺑이를 줄일 수 있는 열쇠라고 여전히 믿는다. 사진 : 연합뉴스
첫 번째 시선 20여 년 전 의대 졸업생 환송회였다. 의사 첫걸음을 내딛는 주인공들을 축하하기 위해 졸업한 선배들도 자리를 함께했다. 1차 장소에서는 유난히 말이 없던 한 산부인과 전문의 선배가 2차 감자탕집에서 소주를 연거푸 들이켠 후 '더는 못 하겠다'는 말을 꺼낸다. 그는 고해성사하듯 말을 이어갔다. "분만만으로는 병원을 유지하기 힘들어. 병원을 유지하려면 임신 중단(당시에는 낙태라고 했다) 수술은 필수야. 나야 종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나한테 받으면 엄한 데서 받는 것보다 임신부가 안전할 테니까. 지난번 임신 중단 수술도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갔어. 초음파를 보며 11주 된 태아를 꺼내려고 하는데, 그 녀석이 그 도구를 피하는 것 같은 거야. 아니 분명히 회피 반응이었어. 그 순간 내가 뭘 하는 것일까? 살려고 발버둥 치는 생명을 기어이 쫓아가 끄집어내는 일을 바로 내가 했던 거야." 두 번째 시선 10여 년 전 낙태죄에 관해 취재하느라 산부인과 전문의를 만났다. 그는 다소 격양된 어조로 '낙태죄'라는 굴레 때문에 임신한 여성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불구덩이에 뛰어들고 있는 게 대한민국 현실이라고 강조했다. "한 번은 임신 12주 된 20대 여성이 낙태를 원한다고 찾아왔어요. 혼자 왔길래 섣부르게 판단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가족이나 친구들과 조금 더 상의한 후에 다시 오라고 말했죠. 그런데 그 임신부가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불법 낙태 시술자에게 찾아갔다가 결국 목숨을 잃었어요. 그 임신부의 죽음에 제 책임이 없을까요? 저는 태아의 생명을 구하지도 못하면서 임신부의 생명까지 잃게 한 것 같아 한동안 죄책감에 시달렸어요. 그 친구가 낙태를 선택한 건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 모든 책임을 본인이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거예요. 혼자서 출산, 육아 등 모든 걸 감당하는 건 태아나 여성 자신에게 더 불행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겠죠. 그리고 그게 맞잖아요. 그런 친구에게 알량한 생명 존중 사상이나 강조하는 게 현실적인가요?" 왜 36주 태아의 숨지는 과정을 영상으로 제작했을까? 한 유튜버가 36주 만삭인 상태에서 임신 중절 수술을 하는 과정을 브이로그 영상으로 올렸다. 영상 속 초음파를 보면 태아 머리의 직경은 8.89cm였고 심장 소리도 들렸다. 관심을 끌기 위한 거짓으로 생각했지만 경찰 조사 결과 사실로 확인됐다. 이 뉴스를 접하며 강한 궁금증이 생겼다. 영상 속에는 산부인과 전문의가 영상 찍는 것을 거부하는 모습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살인죄로 기소하겠다는 입장인데, 자신의 병원이 살인죄의 현장으로 카메라에 찍히는 걸 가만히 지켜보는 건 납득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산부인과 전문의는 '임신 중절하는 의사 사이에는 사실상 낙태죄가 사라진 것으로 인식된다'고 밝혔다. 그 시점은 20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헌법재판소는 자기낙태죄와 의사 등의 업무상촉탁낙태죄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모든 낙태를 전면적이고 일률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임신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제한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태아가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점인 '임신 22주' 내외에서 낙태죄를 물을 수 있는 기간을 사회가 합의해서 정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5년 넘도록 관련 법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전염병, 모체 생명 위협 등 다섯 가지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 모든 낙태에 죄를 물었던 모자보건법은 사라졌는데, 그 이후 법률이 나오지 않았으니 '사실상 낙태죄가 사라졌다'는 건 팩트였다. 이는 실제 판례에서도 드러난다. 2019년 임신 34주 여성이 낙태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고 의사는 제왕절개로 꺼낸 아기를 태어나자마자 물속에 넣어 질식사시켰다. 경찰은 여성과 의료진 모두에게 적용되는 낙태죄를 묻지 않았고, 의료진만 살인죄로 기소했다. 살인죄로 기소된 것도 태아를 엄마의 몸속에서 꺼낸 후 질식사시킨 게 확인됐기 때문이다. 만약 의사가 엄마의 자궁 안에서 태아를 숨지게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다수의 변호사는 의료진도 처벌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낙태죄는 사라졌고, 태아가 엄마 몸속에서 숨진다면 어떤 죄도 물을 수 없게 된 것이다. 36주 태아의 낙태 과정이 버젓이 영상으로 제작돼 유포된 데에는 이런 법률적인 공백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예상했던 대로 36주 태아의 임신 중절을 집도한 70대 병원장이 언론 인터뷰에서 "사산된 아이를 꺼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병원 기록부에는 사산한 것으로 표기됐으며, 태아는 화장됐고, CCTV는 현재 없는 상태이다. 이번에도 경찰은 낙태죄가 아닌 살인죄로 기소하겠다고 했는데, 그것도 입증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권익 생명을 언제부터 볼 것인지는 여전히 논란이다. 헌법재판소는 태아가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기를 22주 정도로 봤지만, 의학의 발달로 22주 이내에 800g으로 태어난 아기도 살아가고 있다. 이런 이유로 자유로운 임신 중단 수술의 기간도 나라마다 다르다. 프랑스 12주, 스페인 14주, 뉴질랜드 20주인데 최근 프랑스는 여성의 낙태할 자유를 헌법에 보장하기로 했고 반면 일본은 자유로운 낙태 자체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 의학계에서는 자유로운 낙태 기간을 10주 이내로 주장하고 있다. 10주 이내면 생명이 아니라고 보는 건 아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 결과 국내 낙태 수술의 90%가 10주 이내에서 이뤄지고 있는데, 이것이라도 양성화시켜 위험한 임신 중단을 막기 위함이다. 하지만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까지 여전히 여성이 감당해야 하는 현실에서 24주가 넘더라도 자유롭게 임신 중단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논쟁 탓에 헌법재판소가 사회적으로 잘 합의하라고 제안한 지 5년이 넘었지만, 관련법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학계에서는 해마다 20만 건 이상의 임신 중단 수술이 집도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관련 통계는 전무하다. 20만 명의 태아 중 살릴 수 있는 아이가 한 명도 없을까? 이런 기자의 질문에 대한의사협회 대변인인 최안나 산부인과 전문의는 이렇게 답한다. "36주 태아의 임신을 중단시킨 산부인과 전문의를 편들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의협은 해당 의사를 징계할 겁니다. 다만, 산부인과 전문의가 분만을 하면 병원을 유지하지 못하고 임신 중단 수술을 해야 직원들 월급을 줄 수 있는 현장에서 어떻게 임신부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는 대화가 오갈 수 있을까요?"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자료사진입니다. 패혈증을 연구하는 공대생들 서울대 전기공학부 실험실. 주혜린 연구원이 패혈증 환자의 혈액을 조심스럽게 꺼낸다. 이 환자 몸 속 혈액까지 패혈증이 퍼진 상태라서 혈액에 세균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균의 양이 너무 작아서 어떤 세균인지는 당장 알 수가 없다. 주 연구원은 소독된 솜방망이를 환자의 혈액에 담근 후 세균이 잘 자라도록 조성된 플라스크 배지에 골고루 바른다. “이틀 후면 배지에서 어떤 균이 자라는지 확인할 수 있어요. 포도상 구균 혹은 폐렴 구균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 녀석이 어떤 항생제에 잘 듣는지 또 확인해야 하는데 하루 정도 더 걸립니다. 지금 병원에서 이렇게 하고 있는데요. 그래서 패혈증 환자에게 알맞은 항생제를 찾기까지 3일이나 걸립니다. 패혈증의 사망률이 한 시간마다 9% 올라가는 것을 생각하면 환자에게는 너무나 절박한 시간입니다.” 국내 패혈증 사망률은 최대 38%로, 보건 선진국의 사망률 20~30%보다 다소 높다. 그 이유로 항생제 오남용으로 인한 내성세균증가, 최신 항생제의 뒤늦은 도입 등이 꼽히고 있다. 게다가 국내 10만 명당 패혈증 사망자 수는 2011년 3.7명에서, 2021년 12.5명으로 10년 새 4배 가까이 껑충 뛰었다. 패혈증을 얼마나 빨리 진단해 치료하느냐의 문제는 전 세계적인 관심사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더 시급하다. 정해욱 연구원이 서울대병원에서 공급받은 패혈증 환자 190명의 혈액을 나노 자석 막대로 분리한 뒤 이를 피펫으로 급속 배양판에 나눠 넣는다. 나노 자석 막대, 이 간단한 단어 속에는 서울대 공대의 최첨단 과학기술이 배어 있다. “저희가 개발한 나노 자석 막대로 소량(1개에서 10개)의 세균을 붙잡아 둔 후, 이를 농축해서 분리합니다. 그리고 급속 배양기에 골고루 뿌리는데, 이 과정이 몇 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패혈증 환자에게 적합한 항생제를 찾는 첫 번째 과정이 마무리됩니다.” 강준원 연구원은 급속으로 배양된 세균을 작은 원이 수십 개 모여 있는 판에 배분했다. 작은 원에는 여러 항생제가 각각 들어 있는데, 세균의 반응에 따라 미세한 변화가 생긴다. 하지만 이 변화가 너무 미세하고 불규칙해 사람의 눈으로는 어떤 세균인지를 알아내기란 불가능했다. 서울공대 연구팀은 이를 인공지능에 학습시켰다. “세균의 유전자(DNA)가 여기 작은 원(마이크디스크) 위에 부착이 되면 작은 원은 신호를 발산해서 이게 어떤 균인지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이 정보는 실시간으로 옆 기계로 전달되는데요. 이 기계는 수백 종류의 항생제 중에서 패혈증 원인 세균에 잘 듣는다고 알려진 수십 종류의 항생제를 추려서 이 세균과 직접 반응하게 합니다. 그러면 어떤 약이 잘 듣는지 바로 알 수 있게 됩니다.” 서울대 공대와 서울대병원 감염내과의 공동연구는 패혈증에 딱 맞는 항생제 찾기에 걸리는 시간을 13시간으로 단축했다. 기존 3일 검사와도 결과는 거의 비슷해, 둘의 일치율은 94%로 나타났다. 서울대병원 임상 결과에 따르면, 검사 시간을 24시간으로 줄이기만 해도 30일 기준 24.4%의 치사율이 9.5%로 뚝 떨어졌다. 이 연구는 세계 최고 권위의 네이처지에 실렸고, 네이처 홈페이지에 주요 논문으로 소개됐다. 권성훈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이번 성과를 세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는 반도체 공정 기술로 미세한 걸 만들어내는 반도체 칩 기술을 바이오 쪽에 적용한 바이오칩 기술이고, 둘째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판단을 해내는 인공지능 기술, 셋째는 균을 분리해 내는 나노 입자 기술 이렇게 세 가지를 융합해서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좋은 의료 기술도 쉽게 쓸 수 없는 대한민국 연구에 참여했던 서울대 공대생들과 연구 성과에 대한 뒷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의대 교수와 공동 연구를 한 것이 처음이라며 대한민국 의료의 현실을 알게 된 것도 소득이었다고 말했다. “병원에 임상 시험하러 많이 다녔는데... 병원은 실질적으로 24시간 운영이 되기 어렵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패혈증 검사) 실험실에 방문했을 때 야간에 불이 꺼진 걸 보고 ‘이 시간에도 진짜 환자들이 많이 위급해질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1분 1초가 급한 패혈증 환자의 혈액 검사가 대한민국 병원의 야간과 휴일에는 거의 멈춘다. 혈액 배양에 필요한 전문 의료인을 야간과 휴일까지 고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대학병원 진단검사 의학과 교수는 그 이유는 간단하다고 설명했다. “수술, 심폐소생술 등은 병원이 하면 할수록 손해입니다. 원가 보존율이 85%가 채 안 되니까요. 반면 진단검사의학과에서 이뤄지는 검체 검사는 원가 보존율이 135.7%로, 하면 할수록 이득이죠. 그런데도 병원장은 왜 야간과 휴일에는 하지 않을까요? 정규 시간에 많은 검사를 몰아서 해야, 즉 박리다매해야 이득을 볼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역시 손해이기 때문입니다.” 공대생들은 자신들의 연구가 성공하면 야간과 휴일에도 끊이지 않고 패혈증 검사가 진행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넘어야 할 장벽은 또 있었다. 김태현 박사후과정 연구원은 의사들이 흔히 말하는 ‘심평 의학’의 벽을 느꼈다. 의사가 의학적으로 타당하다고 판단해 환자에게 어떤 약을 쓰더라도 이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인정하지 않으면 삭감당하는데 이를 의사들은 ‘심평 의학’이라고 부른다. 의료 서비스가 과도하고 불필요하게 공급되는 걸 막고자 함이지만, 천차만별인 환자의 개별 상황이 고려되지 않아 환자에게 도움을 주고도 삭감을 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게다가 제아무리 좋은 의료 기술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수가를 인정받지 못하면 무용지물로 전락하기 일쑤다. “애초에 저희가 이 연구를 시작할 때 좋은 논문을 쓰고 싶은 욕심도 있었지만 ‘실제로 환자를 살릴 수 있는 기술을 만들 수 있겠다’라는 동기가 가장 강했고 그래서 지금까지 연구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희와 공동 연구한 의사들은 ‘얼마나 좋은 기술을 발전시킬 것이냐’만 생각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좋은 기술이 환자에게 가는 여러 경로도 생각해야만 했습니다. 그걸 알게 된 게 컸습니다. 공대와 의대의 협업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서울대 공대와 의대의 세계적인 성과가 환자에게 실질적으로 쓰이려면 일반적으로 식약처의 허가를 받고, 한국보건의료원에서 신의료기술로 인정받은 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수가를 받아야 한다. 이 과정이 너무 과다하다고 생각해 아예 미국 FDA 과정을 선택하는 국내 연구진도 최근엔 적지 않다. 패혈증에 관한 세계적인 업적만으로 공대생들에게 기립박수를 보내는 바이지만, 이들이 대한민국 의료의 불합리성까지 간파해줘서 고맙기도 했다. 사진 : 연합뉴스
심폐소생술 가격 13만 원의 의미 "김 선생님은 CPR 분당 100회를 유지해 주시되 늑골이 골절되지는 않게 주의해 주세요. 박 선생님은 에피네프린 원 앰플 정맥으로 다시 슈팅해 주시고, 이 선생님, 환자 따님은 아직 안 오셨어요?" 응급의학과 전문의 K는 5명의 응급심폐소생술 팀원들을 진두지휘하면서 보호자의 도착 여부를 계속 묻는다. 심장이 멎은 상태로 온 70대 환자의 보호자로 아내가 있었다. 20분 넘게 심폐소생술을 진행했지만 심장은 다시 뛸 생각이 없었다. 사망 선고를 하려는 순간, 환자의 아내는 '외동딸이 오고 있는 중이라며 그때까지만 심장이 뛰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평소 깐깐한 K는 의학적으로 의미 없는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평소와 달리 보호자를 위한 심폐소생술을 진행했다. 지난달 대구 학회에서 마주한 K는 40분 넘게 진행한 심폐소생술 얘기를 어렵게 꺼냈다. "제가 딸 바보이잖아요. 제 심장이 멎었을 때 제 딸이 오고 있다면 저도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살아있고 싶을 것 같았어요. 아빠의 임종도 못 지켰다는 죄책감을 딸에게 남겨 주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K는 소주잔을 벌컥 들이켜더니 깍두기를 어물어물 씹으며 말을 이어갔다. "중증 환자가 오면 대기하고 있던 응급의학과 교수를 콜 하거든요. 저보다 연조가 어려서 편하게 얘기를 한 것 같아요. 심폐소생술을 계속하다가 딸이 도착해서 사망 선고를 했고요, 참았던 용변을 보려고 화장실에 갔는데, 그 젊은 교수가 토하고 있더라고요. CPR 힘들게 하면 토 나오는 거 아시죠?" 나도 전공의 때 경험했다고 대답한 후 그의 빈 잔에 소주를 채웠다. 그는 단번에 들이키며 한숨을 길게 내쉰다. "조 기자님, 저희 심폐소생술 수가가 얼마인지 아세요? 13만 원입니다. 돈 벌자고 하는 건 아니지만, 5명의 심폐소생술 팀이 토하도록 일하는 값이 13만 원이라니, 너무 한 것 아닌가요?" 뇌 컴퓨터단층촬영(CT)은 하지만 뇌 수술은 안 한다 60대 환자가 지역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2주 전부터 시작된 두통이 최근 심해졌기 때문이다. 의사가 환자의 의식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이것저것 물었더니 정확하게 대답했다. 이번엔 팔과 다리의 감각과 운동 신경을 살펴보았다. 좌측의 팔다리 힘이 약간 떨어져 있었다. 이럴 경우 만성 경막하 출혈을 의심해야 한다. 의사는 뇌 CT 검사를 진행했고, 예상대로 뇌출혈이 확인됐다. 만성 경막하 출혈은 뇌출혈 치고는 경미한 것에 속한다. 급작스럽게 악화하지 않고, 수술 테크닉도 높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얕볼 수는 없다. 자칫 뇌를 잘못 건드리면 환자에게는 치명적이기 때문에 중환자실이 확보되지 않으면 수술 진행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역 병원은 환자를 중환자실이 없다는 이유로 상급종합병원에 전원시켰다. 상급종합병원 의사는 환자가 가져온 뇌 CT와 진료 의뢰서를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오른쪽 뇌를 짓누르는 뇌 혈종의 양은 수술이 필요한 정도였다. 진료 의뢰서에 기술된 것처럼 환자의 의식은 명료했고, 왼쪽에 편마비가 약하게 있었다. 의사는 보호자에게 '수술을 바로 하겠다'라고 하며, '다만 그전에 뇌 CT를 한 번 더 찍어봐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이 환자는 뇌 수술을 받은 후 편마비가 완전히 사라졌고 건강하게 퇴원했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뇌출혈 환자의 사례는 지난달 부산에 개최된 한 학회에서 발표됐다. 대한민국 의료 체계의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 불편한 진실을 들춰내는 데 필요한 질문은 딱 두 개뿐이다. 첫 번째, 왜 지역 종합병원은 CT 검사 장비는 확충하면서 중환자실 수는 늘리지 않았을까? 두 번째, 왜 상급종합병원에서는 환자의 신경학적 상태가 변하지 않았는데도 불필요하게 뇌 CT를 또 찍었을까? 우리나라 CT 보유 숫자는 인구 100만 명당 42대로 OECD국가 중 8번째로 많다. 인구 1천 명당 CT 검사 건수는 281건으로 OECD 국가 중 압도적인 1위이다. 올해 초 질병관리청의 자료에 따르면 의료 방사선 검사로 인한 전 국민의 연간 피폭선량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데, 2022년 기준 141,831맨시버트(man·Sv)로 세계 평균에 비하면 5배가량 높고, 미국, 유럽연합 등과 비교해도 압도적이다. 일반 엑스레이 촬영이 2억 8,200만 건으로 전체 검사 건수의 80.2%를 차지하지만, 피폭선량은 컴퓨터단층촬영(CT)이 65.6%로 가장 많았다. 필요한 검사로 받는 피폭선량이야 감수해야 하는 것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지난달 대한영상의학회 학회에서는 '불필요한 영상 검사 줄이기'라는 세션이 따로 마련됐다. 이 세션에서 '빅5를 포함한 국내 최고 대학병원에서조차 불필요한 영상 검사가 적지 않게 이뤄지고 있는 현실'이 공개됐다. 대한영상의학회 회장 정승은(은평성모병원 영상의학과) 교수는 단지 CT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비급여 검사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서 통계에 잡히지는 않지만, 국내 MRI 검사 건수도 세계 최고로 많고, 저희 영상의학과 학회가 판단하기엔 불필요한 검사도 적지 않습니다." 대형 병원의 생존전략 지난 3월,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과 빅5 병원장들이 비공개로 만나 현행 의료 수가에 대해 논의했다. 필수 의료를 살리기 위해서는 의료 가격을 제대로 교정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뇌 수술을 포함해 수술 분야 수가는 원가의 81.5%, 심폐소생술, 기관 절개술 등 처치는 원가의 83.8%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가 기관의 조사에서도 나온 것이니, 필수 의료는 할수록 손해라는 의사들의 투정이 거짓말이 아닌 게 또 확인된 것이다. 반면 혈액 검사 등 검체 검사의 원가 보전율은 135.7%, CT 촬영 등 영상 검사는 117.3%이다. 이런 구조 탓에 병원은 뇌 수술, 심폐소생술을 할수록 손해이고, 반면 혈액 및 영상 검사를 할수록 이득이다. 뇌 CT는 찍으면서 뇌 수술은 하지 않으려 하고, 뇌 CT 기계는 더 사들이면서 중환자실은 늘리지 않은 것은 '병원장이 바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왜곡된 의료 수가 체계가 필수 의료를 망치고 있다는 목소리는 적어도 23년 전부터 나왔고, 2001년 이후 세 번의 상대 가치 개편 작업을 거치면서도 정부와 의료계는 교정하지 않았다. 정부는 이번만큼은 바로 잡겠다고 했지만, 실현 가능성이 커 보이진 않는다. 지난주 만난 상급종합병원장은 전공의가 떠난 후 대형 병원의 생존 전략을 간단하게 요약했다. "저희 병원은 전공의가 떠나기 전과 비교해, 처음엔 마이너스 40%까지 갔다가 지난달에는 마이너스 15%까지 회복했어요. 생존전략은 간단합니다. 수술과 처치를 줄이고, 혈액 검사와 영상 검사를 늘렸죠. 싼 인건비로 효율이 높았던 전공의의 빈자리를 다른 인력으로 대체하는 건 당장 불가능하니까요."
20년 전 제주도에서 열렸던 대한신경외과 춘계 학술대회, 그때의 장면이 여전히 선명한 건 당시 받았던 '충격' 때문일 거다. 충격적인 장면은 '고령화와 의료'라는 특별 세션에서 발생했다. 한 전문가는 고령화 사회를 대비해야 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했다. 고령화의 첫 번째 원인은 장수, 즉 오래 사는 것인데, 이는 '정년 퇴임한 후 돈을 못 버는 상태로 살아가는 기간이 연장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고령화의 두 번째 원인인 저출생은 '돈 못 버는 노인을 먹여 살릴 젊은이가 적다'는 것을 뜻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다녀온 유럽 국가의 인터뷰 동영상을 틀었다. 거기에는 90대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60대 딸의 적나라한 문장이 담겨 있었다. "제 현재 삶은 재난(disaster)입니다." 60대 딸의 재난은 어머니가 걷는 게 불편해지면서 시작됐다. 어머니는 어딘가 가고 싶을 때면 딸을 불렀다. 딸의 팔에 기대면 어머니는 그럭저럭 걸을 수 있었지만, 그만큼 딸의 무릎에는 어머니의 무게가 보태졌다. 어머니에게 생겨난 치매 증세는 그 어떤 대책으로도 해결할 길이 없었다. 정부가 치매 노인을 위한 위탁 시설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그 시설에 어머니를 모시고 오가는 일이 60대 딸에게는 버거웠다. 치매 노인을 완전히 돌봐주는 고품격 사설 요양원은 정부의 보조를 받을 수 없었다. 연금이 유일한 소득인 어머니와 딸의 주머니로는 그저 생존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절대 오래 살지 않고 싶어요. 딱 걸을 수 있을 때까지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고령화로 의료 수요는 증가하지만 세계보건기구 보고서에는 "The aging population has contributed to an acute global shortage of doctors and nurses"라는 문구가 있다. 보건복지부가 2,000명 의대 증원 정책을 발표하면서 그 첫 번째 이유로 한국의 고령화 문제를 꼽은 것도 세계보건기구와 같은 맥락이었다. 고령화가 되면 의료 수요가 늘어날 것은 '의학 및 보건학 박사 학위 따위'가 없어도 쉽게 전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보다 고령화를 먼저 겪은 나라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먼저 영국을 살펴보자. 영국의 공공의료제도(NHS)는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모범 사례로 평가돼 왔다. '이상하게도'라고 한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인데, 심지어 영국 자체 평가도 마찬가지이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영국 최고 권위 의학자는 '영국의 공공의료시스템은 국가적인 비리(스캔들)'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세계 3대 의학 저널인 란셋에 발표했고, 영국 내에서 갑상선 암 환자가 2년 넘게 기다리다 사망한 경우도 기사화된 바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영국의 공공의료시스템은 붕괴 중이고, 그것이 영국의 고령화로 더 빨라질 것으로 분석했다. 이에 대해 영국은 어떤 대책을 내놓았을까? 그것은 영국 공공의료시스템의 변화를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영국 의료 시스템의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바로 외국인 의사 도입이다. 최근 그 증가세가 가파른데, 2021년 기준 영국에서 배출된 의사의 62.4%가 외국 출신이다. 요즘 국내에서도 외국 의사를 도입하자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 이미 영국은 그렇게 하고 있었다. 영국의 의사 수입 국가를 살펴보면 1위 인도, 2위 파키스탄, 3위 이집트, 4위 나이지리아, 5위 수단이다. 특히 나이지리아와 수단에서 의사를 수입하는 것을 두고 국제적인 비판이 강하다. 이들 국가는 인구 대비 의사 숫자가 영국의 1/3에 불과한데, 자국의 의사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보건 후진국의 사정은 '나 몰라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국제적 비난에도 외국 의사를 수입하는 이유를 영국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해마다 영국에서 배출된 의사 중 10%가 영국 공공의료시스템을 떠났고, 이 비율은 30%까지 치솟을 전망인데 그들을 붙잡으려면 돈이 많이 든다.' '외국에서 의사를 수입하면 그들의 학비를 대지 않았기 때문에 비용은 영국 전공의보다 싼 것이다.' '외국 의사가 많아지면 영국 공공병원 의사들이 임금을 올려달라고 파업하는 명분도 약하게 할 것이다.' 결국, 돈 때문이었다. 결국, 돈 때문이었다. 고령화로 의료 수요가 늘어나는 건 맞다. 하지만, 그걸 지금의 퀄리티로 감당하는 건 돈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외국 의사를 수입한 것이다. 15년 동안 외국 의사를 수입하고 교육하는데, 24억 파운드(4조 2천억 원)의 예산을 배정했다. 그렇다면 영국 공공의료시스템을 떠나는 영국 출신 의사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가장 많은 곳은 호주인 것 같은데, 호주 정부는 영국을 떠난 의사들 5명 중 1명이 호주로 오고 있다고 자료를 배포한 바 있다. 반면 국내 영국 전문가들은 호주보다 영국 내로 옮기는 것이 더 많을 것이라고 분석했는데, 바로 영국 사설 병원(private hospital)이다. 돈을 한 푼도 내지 않은 공공병원 대신 개인 돈을 내야 하는 사설 병원이 영국에서 늘고 있다. 영국 런던에 있는 대표적인 사설 병원의 홈페이지를 들여다보면, 이런 문구가 나온다. '나쁜 (공공)의료 서비스를 기다리느라 수개월 혹은 수년을 낭비하기엔 당신의 인생은 너무 소중합니다. 당신의 비용을 직접 낼 결심을 했다면 바로 연락하세요.' 영국의 사설 병원의 비용은 미국만큼 비싼 곳도 있는데, 이런 곳에는 영국 명문 의대를 졸업한 의사들이 많다고 국내 전문가들은 말한다. 고령화로 엄청나게 늘어난 의료 수요를 감당하려면 돈이 훨씬 많이 드는데, 그 돈을 충당할 수가 없으니 외국 의사를 수입했고, 외국 의사를 못 미더워하는 영국 부자들은 사설 병원을 찾게 되고, 그러다 보니 영국 자국 의사는 영국 사설 병원으로 이동한 것이다. 영국 부자들에게는 자국 의사에게 진료받는 비용이 높아진 것에 그치겠지만, 영국의 평범한 사람에게는 그 기회가 사라질 위기인 것이다. 모든 재난이 그렇듯 '고령화 재난'도 약자에게 더 타격을 준다는 게 영국에서도 증명되고 있다. 주재원으로 3년 동안 영국에서 살았던 한 대기업 임원의 증언이다. "저희 회사는 꽤 든든한 보험을 가입해 줬는데도, 영국 최고 사설 병원은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수술이 필요한 큰 질병은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와서 받는 게 최선이었어요." 우리는 누가 돈 얘기를 할 것인가? 우리나라 GDP 대비 의료비 지출은 영국보다 적고, 아직 OECD 평균 수준이다. 하지만, 그 증가세는 가파른데 가장 큰 이유가 고령화이다. 건강보험공단 자료에 따르면, 2021년 기준 65세 이상 1명이 쓰는 의료비는 41만 5천 원으로, 전체 평균 15만 1천600원의 두 배가 넘는다. 65세 이상 연령층의 의료비 지출은 2025년 59조 원, 2035년 130조 원, 2060년에는 390조 원으로 추산된다. 우리가 현재 남겨둔 건강보험 누적 금액은 25조 원인데, 지금의 상태로만 유지되어도 2028년에는 고갈될 것이다. 정부가 필수 의료를 강화하겠다며 내세운 '10조 플러스알파' 원도 7조 원은 이미 정부가 발표한 수가 인상 등에 반영돼 있어서 여지는 '3조 플러스알파' 원에 불과하다. 고령화로 늘어날 의료 수요를 감당하려면 돈은 엄청나게 많이 필요하지만, 우리는 현재 적립해 놓은 돈이 거의 없다. 이런 상황에서의 해결책은 경제학의 '경'자도 모르는 나도 알 것 같다. 늘어난 고령화 의료 수요를 감당하지 않거나 우리(베이비붐 세대)가 65세 이상이 됐을 때 한창 돈을 벌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에게 그 비용을 부담시키는 것뿐일 것이다. 이런 불편한 진실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이 막대한 돈을 누가 어떻게 댈 것인지에 대해 아무도 얘기하지 않고 있다. 고령화는 재난인데, 여태껏 나는 낭만적인 기사만 쓰고 있었음을 뼈저리게 반성한다는 말로 이 칼럼을 마무리한다.
죽기 직전까지 먹지 않는 어린이 청소년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이 배가 아프다며 소아청소년과 소화기내과를 찾아왔다. 복통을 호소하는 어린이에게 소아과 전문의는 '배가 언제부터 어떻게 아팠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하지만 의사는 다른 질문부터 꺼냈다. "(여학생의 손목을 보며) 지금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나요?" "네, 하지만 (자신의 손목을 가리키며) 이것 때문에 온 건 아니에요." 배가 아프다는 청소년에게 자살 생각이 있는지를 물었던 것은 그녀의 손목에 있는 자해 흔적 때문이었다. 그녀의 팔은 너무 말라 있어서 자해 흔적들이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녀는 위험해 보일 정도로 깡말랐지만 '배가 아파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고 말한다. 의사는 그런 그녀에게 '배 아픈 것만 치료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하며 입원장을 발부했다. 뒤이어 초등학교 5학년 소녀가 엄마와 함께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역시 배가 아프다고 한다. 하지만 의사는 복통보다 체중을 먼저 묻는다. "지금 체중이 얼마예요?" "19kg이요..." 소녀의 대답에 엄마가 한숨을 쉬며 말을 잇는다. "5개월 전까지는 26kg이었는데, 지금은 7kg이나 빠졌어요. 아이가 배가 아프다고 해서 여러 병원에서 온갖 검사를 다 했는데도 정상이라고 해서 큰 병원 찾아왔어요." 이유 없이 체중의 10%가 줄면 성인도 심각한 질병을 의심해야 한다. 성장기 어린이가 27%나 체중이 빠진 건 매우 위중하다는 걸 의미한다. 의사는 엄마가 가져온 복부 CT, MRI 등을 꼼꼼하게 다시 살폈다. 하지만 어떤 이상 소견도 없다. 소녀는 복부에 이상이 있어서 먹지 못한 것이 아니다. 정신건강 질병으로 먹기를 거부한 것이다. 섭식장애라고 하는데, 대표적인 게 거식증과 폭식증이다. 거식증은 '신경성 식욕 부진증'라고 하는데 비만이 아닌데도 스스로 비만이라고 생각하고 먹는 것을 극도로 꺼리면서 먹고 토하는 일을 반복한다. 폭식증은 '신경성 대식증'이라고 하는데, 자제력을 잃고 과도하게 먹은 후 의도적으로 구토와 설사를 한다. 섭식장애 환자는 우리나라에서 가파르게 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2018년~2022년) 섭식장애로 5만 213명이 진료받았는데, 2018년 8,321명에서 2022년 1만 2,477명으로 49.9%나 껑충 뛰었다. 성별로 보면 여성이 남성보다 4.2배 많았고, 특히 신경성 폭식증의 경우 약 13배 많았다. 나이별로 보면 20대 여성이 43.5%로 가장 많았고, 30대 여성 21.1%, 40대 여성 11.5%, 10대 여성 8.8% 순이었다. 섭식장애가 왜 발병하는지 그리고 최근 왜 급증했는지 밝혀진 게 없다. 소아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이 통계의 이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섭식장애 자체가 늘었다기보다는 발견이 증가한 것으로 보여요. 과거에는 극단적인 증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병원을 찾지 않아서 진단 환자 수는 실제 환자 수보다 적었으니까요. 20대 여성 환자가 가장 많은 것도 고민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환자들을 진료해 보면 사춘기 시절에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춘기 시절에는 부모의 개입으로 간신히 정상처럼 보이는 생활을 유지하다가 20대 때 부모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급격히 악화해 병원을 찾게 되는 현상일 수 있습니다. 20대 환자가 가장 많다는 것은 아직도 10대 때 제대로 진단받는 환자가 적다는 걸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의료 대란, 섭식장애를 병원 밖으로 몰아내다 거식증과 폭식증은 증세가 약간 다른 것 같지만, 그 결과는 유사하다. 심각한 저체중, 생리불순, 저성장뿐만 아니라 심각한 영양실조와 면역 저하이다. 마치 백혈병 환자처럼 모든 혈액 성분들이 감소돼 있다. 예를 들어 백혈구 정상 수치는 4천-1만 개/uL인데, 위의 중3 여학생, 초5 소녀는 이 수치가 1천 개/uL 정도에 불과했다. 이런 까닭에 감기와 독감에 잘 걸리고, 걸려도 심각한 폐렴으로 악화하기 쉬워 목숨을 잃는 경우도 흔하다. 섭식장애의 폐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심각한 우울증을 동반해 자살로 악화할 위험이 크다. 미국 마이애미 대학 연구에서 자살 위험도가 거식증은 18배, 폭식증은 7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Eating Disorders and Suicidality: What we know, what we don't know, and suggestions for future research). 심각한 영양실조, 면역 저하 그리고 높은 자살 위험도를 보이는 섭식장애 어린이 청소년은 입원 치료가 필수적이다. 소아청소년과 전문의가 비뚤어진 영양과 면역을 회복시키면서 동시에 소아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자살 위험도를 낮춰야 하기 때문이다.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의료이지만 섭식장애 환자를 많이 입원시킬수록 병원의 수익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19일 오전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 관계자가 이동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의료 대란으로 적자가 누적되자 대형 병원들은 소아청소년 정신과 병동부터 규모를 줄이기 시작했다. 경남 지역 유일 소아청소년 정신병동인 양산부산대병원 53병동도 넉 달 전 문을 닫았다. 소아청소년과 이연주 교수는 섭식장애 환자가 올 때마다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최근 생명이 위중할 수 있는 심각한 아이들을 4명 입원시켜 내과적인 치료를 하면서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도 같이 했어요. 하지만 충분히 입원시킬 수 있는 병동이 폐쇄돼 당장 사망에 이르지 않을 정도로 급한 불만 끄고 퇴원시켜야만 했습니다. 외래 추적 관찰 중인데요, 그 아이들은 여전히 체중에 대한 강박, 부모와의 갈등으로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더라고요. 하지만 그냥 끌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는 원래부터 전공의가 별로 없어서 의료 대란에 대한 타격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백종우 교수는 성인 환자의 처지도 다르지 않다고 토로했다. "다른 질병 없이 자살 위험도가 높은 환자는 지금도 지역 정신병원에서 응급 입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암, 류마티스 질병 등 중증 질환과 함께 동반된 자살 위험도는 내과적인 치료도 필요해서 대학병원에서 감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의료 대란 이후 이게 안 되고 있습니다." 대한상급종합병원협회 소속의 한 병원 경영진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정부가 의료 대란 이후 비상진료체계를 유지하려고 5월까지 9천억 원을 지원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걸 47개 상급종합병원으로 나눠보면 교수들 야간 및 주말 당직 비용으로도 모자랍니다. 대형 병원들은 이미 1천억 원 넘게 적자가 누적됐고, 이러다 병원 자체가 망하게 생겼어요. 정신병동, 재활병동은 의료 대란 이전부터 적자였는데, 병원 생존을 위해 이것부터 정리하는 게 병원장들 잘못인가요? 특히 정신병동은 소송 위험까지 높아서 전공의 없는 상태에서는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병원 경영진과의 대화 중 마지막 한 문장이 머리를 때렸다. "수십 년 동안 전공의 독박 시스템으로 운영되던 대형 병원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전문의 중심 병원으로 바뀝니까? 그 돈은 누가 대고요?" 의료 대란은 우리 의료계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의료 현장에서는 드러난 치부를 '뉴노멀'로 받아들이자는 말까지 나온다. 자살 위험이 큰 섭식장애 어린이 청소년이 그 위험을 안고 그냥 살아가는 것이 뉴노멀의 첫 장면일까? 취재하면서 한숨이 끊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