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감성의 의학전문기자' 조동찬 기자는 의사의 길을 뒤로 한 채 2008년부터 SBS에서 기자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언론계에서는 찾기 힘든 신경외과 전문의 출신으로, 깊이 있고 다양한 의학 정보와 함께 병원의 숨겨진 세계를 시청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13일, 의대 교수·전공의·의대생·수험생 18명이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가 진행하고 있는 의대 정원 증원 처분을 취소하고, 집행을 정지해 달라는 것이었다. 4월 4일, 1심 재판부는 의대 교수·전공의·의대생·수험생은 소송할 자격이 안 된다며 신청을 각하했다. 의대 증원에 대해 법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건 대학 총장들만 가능하다는 취지였다. 의료계는 즉시 항고했는데, 서울고등법원은 의대 교수·전공의·의대생·수험생의 소송 자격이 없다는 판단에 의문을 제기했다. 대학 총장은 의대 증원으로 수익을 낼 수 있어서, 정부가 극단적으로 잘못된 증원 규모를 제시해도 소송을 걸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바, 소송을 걸 수 있는 자격을 넓게 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정부에 두 가지를 주문했는데, 과학적 근거와 절차적 타당성을 입증할 보고서와 회의록이다. 그동안 보건복지부는 서울대, KDI,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보고서를 과학적 근거로 인용해 왔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정부가 인용한 보고서 3개는 이미 저자들이 보고서의 내용이 왜곡되었다고 언론에 발표했기에 그것으로 과학적 근거라고 할 수는 없으니, 다른 과학적 근거를 제출하라'고 주문했다. 또 '각 의과대학이 정부가 정한 숫자에 맞게 인적, 물적 시설을 갖추었는지 조사한 자료들, 현지 실사한 자료들 회의 자료, 회의록을 모두 제출하라'고도 했다. 보건복지부가 제출한 답변서 살펴보니 보건복지부가 제출한 답변서는 총 107페이지인데, 과학적 근거 자료는 18~51페이지에 걸쳐 쓰여 있었다. 재판부가 구체적으로 요구한 과학적 보고서에 대한 부분은 18~30페이지에 13개(3+6+4)를 정리해 놨다. 그런데, 13개 중 가장 앞부분에 가장 비중있게 언급한 건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서울대, KDI 연구였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과학적 근거라고 볼 수 없다고 명시한 보고서들이었다. 보건복지부는 재판부가 언론의 잘못된 보도를 통해 해당 보고서의 진위를 오해한 것으로 판단한 것 같다면서 제대로 설명하면 재판부가 이해해 줄 것이라고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서울대 보고서의 작성자 홍윤철 교수는 5월 14일 서울대 행정대학원 포럼에서 "주치의 제도를 의료 개혁 프로그램에 적용하면 의사 부족 추계는 1만 명이 아니라 2,600~3,300명이 된다. 의사 수 부족 숫자 1만 명은 진실된 숫자가 아니다"라고 거듭 밝혔다. 대한의학회는 보건복지부가 추가한 10개의 자료들을 분석한 결과 과학적 근거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주장했다. 보고서에 대한 의견은 보건복지부와 대한의학회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복지부가 인용한 연구를 해당 연구자가 부인하는 경우가 또 있다면 이건 어떻게 봐야 할까? 복지부의 답변서 29페이지에는 '가장 최근인 2023년 11월 연세대학교 박은철 교수는 의학한림원-바이오기자 주최 포럼에서 발표한 추계에서 2035년 1만 499명의 의사 부족을 전망했다'라고 기술돼 있다. 복지부는 가장 최근의 연구에서도 역시 같은 결론임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연세대 박은철 교수는 자신의 발표가 복지부 답변서에 실려 있는 줄 몰랐으며, 자신의 연구 핵심 내용과는 맞지 않는 인용이라고 밝혔다. "우선 의사 추계 방식은 너무 복잡해서, 저는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일주일 정도 시간을 들여서 계산했습니다. 2035년 의사 1만 명이 부족하다고 계산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2030년 의사 수 부족이 정점에 이르고 이후부터는 의사 부족의 폭이 완화되다가 2048년부터는 의사가 과잉이 되고 그 후부터는 과잉의 폭이 크게 커집니다. 그래서 2070년에는 9만여 명의 의사가 남게 됩니다. 의사 수를 탄력적으로 늘리고 줄여야 한다는 게 제 연구의 핵심입니다. 게다가 저는 의대 교육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의대 정원을 늘리는 것은 반대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현재 의대 증원 배정 결과를 보면 정상적인 의대 교육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보건복지부가 재판부에 제출한 추가 자료에 대해서도, 적어도 2명의 연구자는 복지부의 인용이 잘못된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이것만 봐도 보건복지부가 재판부의 요구에 합당하게 답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그럼에도 각하나 기각을 예상하는 법률가가 적지 않다. 증원 결정이 행정 처분에 해당하는지, 법률상 이해관계가 있는지 논란의 여지가 있고, 또 인용됐을 때 수험생 등이 겪을 사회적 혼란을 재판부는 고려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료 대란의 시비가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에서 마무리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보건복지부는 인용될 경우, 의료계는 각하나 기각될 경우 대법원에 재항고하겠다고 이미 밝혔기 때문이다. 사진 : 연합뉴스 병원 현장은 지금... 어제는 숨이 넘어갈 지경의 70대 남자 환자가 있었습니다. 저는 혼자였습니다. 그 와중에 119에서는 전화가 또 옵니다. 40대 남자, 심정지라고 CPR 중이랍니다. 저는 혼자 감당할 수 없기에 못 받겠다고 했습니다. 70대 환자는 다행히 살았는데, 40대 환자는 아마 살지 못했을 겁니다. 이런 일이 석 달째 벌어지고 있습니다. 환자를 못 받겠다는 말을 하는 게 너무 힘들고 가슴이 아픕니다. 제 마음에 죄책감이 제 삶과 영혼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습니다. 서울 소재의 한 대학병원 응급실을 지키고 있는 응급의학과 교수가 지난 일요일 자신의 SNS에 올린 글이다. 의료 대란 이전에는 진행된 암 환자는 진단 이후 한 달 이내에 수술 일정이 잡혔지만, 지금은 조직검사까지 마친 유방암 환자가 수술 일정을 잡는 데 두 달 정도 걸린다. 전립선암 환자의 방사선 치료 일정이 8월에 잡힌 사례도 있다. 지난 주말 대형 병원 간호사는 '위암 3기 환자의 수술 날짜를 잡지 못했다'며, '자신이 병원에 들어온 이후 이런 일을 처음 겪는다'고 제보해 왔다. 암 환자 환우회 조사에서도 '가장 급하게 치료를 받아야 하는 췌장암 환자 10명 중 6-7명은 진료 일정이 늦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파킨슨병 환자가 자신의 치료 일정을 잡지 못하고 있다며 절박한 문자를 보내왔다. 의료 대란의 강대강 대치가 법원으로 옮겨간 중에도, 환자의 절박함은 끊임없이 깊어지고 있다. 정부와 의료계가 법적 분쟁보다 더 집중해야 할 것은 바로 병원 현장이라는 말이다.
보건복지부가 6세에서 17세 사이 소아·청소년 6천2백여 명을 직접 만나 정신건강 실태를 조사했다. 국내 첫 표본 조사였는데, 불안증, 섭식 장애 등 정신 질환을 앓은 비율은 16.1%였고, 7.1%는 조사 당시에도 앓고 있었다. 특히 자살 생각이나 시도 등 자살 관련 행동이 2.2%에서 확인됐는데 1%는 조사 시점 기준 2주 이내였다. 책임 연구자인 서울대병원 소아정신건강의학과 김붕년 교수는 국내 어린이·청소년의 정신 건강 상태는 심각했고, 특히 자살 관련 행동은 위험한 수준이라고 진단했다. “실제로 아이들이 자살 계획을 굉장히 구체적으로 세우고, 자살 시도를 충동적으로 한 경력이 있으며, 특히 자살을 시행하는 방법이 정말 죽을 수 있는 그런 위험한 방법이었다면 가장 위험한 단계까지 이미 와 있다는 겁니다. 이런 게 없더라도 아이가 학업, 또래 관계 등에서 의욕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지 않고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에만 몰입돼 있는 패턴을 보인다면 이것 역시 응급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정신건강 치료를 받은 소아·청소년은 6.6% 불과했다. 오스트리아 47.5%, 미국 41.6%에 비해 턱없이 낮은 수치이다. 연구팀은 치료 기피 이유를 사회적 편견 때문으로 분석했다. 아이에게 정신과 치료 기록이 있으면 실손 보험을 못 들어 치료비 부담이 클 것이라는 이유가 40.9%, 취업에 불이익이 생긴다는 응답이 46.5%를 차지했다. 특히 ADHD, 자폐증 등의 발달 장애에는 진단과 치료를 더 꺼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 교수는 가장 심각하게 들여다봐야 할 구석이라고 분석했다. “자살 위험은 우울증에서만 높아지는 게 아닙니다. 자살 위험을 낮추려면 전반적인 아이들의 정신건강 문제를 함께 도와줄 수 있는 그런 체계를 만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ADHD(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장애), 자폐증 등 신경 발달 장애를 치료하는 데 있어서 적절하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코드(진료 차트에 입력하는 병명)를 사용하게 되면 그 코드 때문에 다른 종류의 실손보험이나 아동보험들이 제대로 지급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치료비를 부모님이 모두 부담해야 합니다. 국내외 연구에서 ADHD가 제대로 치료되지 않으면 자살 사고는 2배, 그리고 자살 시도는 무려 4배 이상 높아집니다. ADHD 문제만 잘 치료해 줘도 그 아이들이 충동적으로 자살 시도나 자살 위험의 행동을 할 가능성을 4분의 1 이하로 낮출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소아·청소년 자살 관련 행동이 방치되면 성인이 됐을 때 자살 위험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인데, 미국 피츠버그대 연구에서 어릴 때 방치된 자살 위험도가 성인이 되면 6배나 더 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십 년째 해결되지 않고 있는 우리나라의 높은 자살률의 해법은 어쩌면 우리나라 어린이 청소년 문제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 초등학교 고학년 기사내용과 관계없는 자료사진입니다. 2021년, 연세대학교 연구팀이 OECD 22개 국가의 어린이 청소년 행복지수를 비교 연구했다. 우리나라 아이들의 ‘주관적 행복지수’는 79.50점으로 조사 국가 중 가장 낮았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건강하다고 생각한다’와 ‘삶에 만족한다’는 항목이 꼴찌, ‘외롭다’는 항목이 꼴찌에서 2번째였다. 우리나라 아이들은 건강하지 않고, 삶에 만족하지 않으며, 외롭다는 것인데, 그것은 행복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 연구 말고도 여러 연구에서도 확인됐다. 많은 전문가들이 어른들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도 불행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김 교수는 좀 더 정확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핵심은 바로 소아와 청소년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소아와 청소년은 불행의 원인은 물론 행동 패턴도 다르다고 설명한다. 소아는 보호자의 불안이 그대로 전염되는 경우가 많고, 게임 및 스마트폰 중독 행동으로 나타난다. 반면 청소년은 학교 폭력이 불행의 중심에 있고, 그것이 불안 장애와 섭식 장애 등으로 표출됐다. 이것보다 더 큰 차이가 있다. 소아는 다른 나라에 비해 행복감이 높지만 청소년의 행복감은 가장 낮다는 점이다. 국내외 여러 연구들을 봤을 때 우리나라의 유아, 유치원 그리고 초등학교 저학년까지의 소아 행복지수는 OECD 국가 평균을 뛰어넘는다. 부모님을 통해서 평가한 것이나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간단한 질문으로 알아본 것 모두에서 행복감이 높게 나타난다. 하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행복감은 급격하게 떨어지고, 중학교부터는 OECD 바닥권으로 주저앉는다. 이런 이유로 소아·청소년을 통합해서 계산하면 가장 낮은 행복감을 보이고 있지만 우리 아이들의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은 초등학교 고학년에 있다. 압박감이 불행의 근원, 행복 비결은? 김 교수에게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받게 되는 공부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냐고 물었더니, 모든 걸 입시로만 생각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학년이 올라갈수록 받게 되는 여러 가지 압박감 중에는 입시에 대한 압박감도 있을 거고 비교에 의한 압박감도 있을 겁니다. 부모로부터 과도한 기대 때문에 생기는 압박감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어느 하나의 압박으로 단순화시키는 건 좋지 않습니다. 어른들 불행의 원인이 수십 가지이듯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이 압박감을 느끼는 건 바로 행복하지 않아서입니다.” 불행한 이유는 행복하지 않아서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아이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불행의 이유가 수만 가지인 것처럼 행복의 이유도 그럴 것이며, 그렇다면 그들에게 제시할 해법은 없는 것 아닐까? 허무한 결론으로 도달할 것을 우려한 기자의 표정을 감지한 김 교수는 해법은 있다며 단호하게 말을 이어갔다. “아이들이 느끼는 그 불행감의 원천인 압박감은 굉장히 여러 원인으로 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에서 오든 그것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여러 연구에서 확인됐습니다. 바로 문학, 예술, 체육 활동입니다.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듣고, 뛰어노는 시간은 아이의 삶의 과정 속에 어려움들을 극복하는 중요한 에너지가 됩니다. 아이들의 놀이 활동, 예술 활동, 체육 활동을 잘 보장만 해줘도 우리나라 아이들의 행복감이 이렇게까지 떨어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문학, 예술, 체육은 소아 청소년의 압박감을 막아주는 효과가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 시간을 아이들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계급장부터 뗍시다" 육군 27사단 79연대 의무중대장으로 복무할 때 일이다. 간부 5명, 사병 50여 명이 소속된 단체의 수장이 된 건 이번 생 가장 큰 영예였지만 공짜는 아니었다. 병사들의 사고 조짐을 수시로 파악해야 했는데, 특히 부대에 갓 배치돼 계급이 가장 낮은 이등병은 일주일마다 상담한 후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다. 어느 가을날 아침, 콧노래를 부르고 출근하는 과정에 두 병사가 눈에 띄었는데, 얼굴이 얼룩져 있었기 때문이다. 일병 5개월 차와 상병 1개월 차로 중대 내에서 가장 핵심적인 일을 하고 있어서 예사롭지가 않아 보였다. 두 병사를 따로 불러 물었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니?" "저는 어제 밤 근무 후 복귀하다가 넘어졌습니다." "저는 아침에 축구하다가 골대에 부딪혔습니다." 그들에게 불행하게도, 신경외과 전문의는 부딪치고 넘어졌을 때와 주먹질했을 때 상처의 차이를 감별할 수 있다. 연대장에게 부대 내 폭행 사고가 있었음을 보고하고, 자체 세미나를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연대장은 사흘을 허락했는데 모든 일과를 접고 '부대 폭력 줄이기 끝장 토론회'를 시작했다.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병장이 손을 들어 발언을 시작했다. "중대장님, 우리끼리 계급장 떼고 얘기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렴, 다만 마지막 날까지 나에게 A4 용지 반 장 이내로 결과물을 갖고 와라." 그들의 세미나에 직접 참여할 수 없었지만, 어떤 병사는 차분하게, 어떤 병사는 피를 토하듯 얘기하는 모습을 간간이 볼 수 있었다. 사흘 뒤 그들은 일곱 가지 정도 세부안을 가지고 왔다. 몇 가지가 지금도 기억나는데, '선임과 24시간 매칭됐던 이등병에게 취침 시간만큼은 그들끼리 잘 수 있게 하고', '병장 1개월 차부터는 서로 존대하며', '일반적으로 병사 간 얼차려는 없애지만, 녹색 견장을 찬 분대장에게는 허락한다'는 것 등이다. 이 안을 연대장에게 그대로 보고했고 연대장은 당시 폭력 병사에게 일반적이었던 징계를 면해주었다. 그 이후 의무중대에서 더는 폭력 사고를 감지할 수 없었다. 기자가 된 직후 부족한 인문 소양을 메우기 위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들었다. 뜬금없어 보이는 철학 문장들을 꾸벅꾸벅 졸며 넘기고 있을 때 눈에 확 띄는 구절이 펼쳐졌다. 존 롤스의 정의론에 나온다는 '무지의 장막'이라는 개념이었다. 무지의 장막은 어떤 문제에 대해 모든 조건을 백지화하고 따져 보자는 것인데 그래야 정의로운 결정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핵심 조건은 가장 약자의 의견이 반영되는 것이다. 계급장 떼고 얘기했더니, 이등병의 권익까지 반영된 결과가 도출되는 게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지혜는 가방끈의 길이, 나이 그리고 계급과 상관없다는 것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의료대란을 '무지의 장막'에서 의료대란 이전 서울의 대형 병원들은 조직 검사까지 마친 환자 중에서 침습성이 높으면 초진을 최대한 당겨 한 달 이내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급한 암 환자를 효율적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원칙이었다. 최근 한 지인이 2차 병원에서 암을 진단받았는데 조직 검사 결과 침습성이 높다는 소견이 나왔다. 서둘러 빅5 대학병원 진료를 알아봤는데 세 곳은 예약 날을 받을 수 없었고, 두 곳은 8월 이후로 잡혔다. 국내외 연구에서 침습성 암의 수술이 한 달 지연될 때마다 사망률이 대략 8%씩 높아진다. 빅5 병원은 포기하고 해당 암 수술이 가능한 수도권 모든 병원을 상대로 예약을 알아봤다. 가장 빠른 곳이 한 달 뒤라서 이미 사망률 8% 상승의 불이익을 안고 시작하는 것이다. 전공의의 공백이 가져온 여파만 해도 이미 대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 의대 교수의 사직이 시작됐다. 보건복지부는 '교수들의 사직서를 수리하지 않을 것이며, 의료 공백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런데 두 달 전 병원을 사직한 1만 명 넘는 전공의의 사직서도 수리된 게 현재까지 없다. 그 사이 50대 교수도 야간 당직을 열흘에 한두 번꼴로 서야 하는 판국이 됐다. 게다가 교수들의 사직 여파가 크게 우려되는 건, 병원에 남은 교수의 야간 당직이 더 늘어날 터이고, 그러면 연쇄 사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병원 현장은 더 가파른 의료대란의 변곡점을 맞고 있는데, 정부와 의료계의 강대강 대치 구도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 의료는 어디로 가고 있나 4월 30일 서울대병원에서 '대한민국 의료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는 심포지엄이 열렸다. 여기에는 서울의대 학생 대표, 서울대병원 전공의 대표 등 발언에 이어 안상호 선천성심장병 환우회 회장, 유미화 녹색소비자연대 상임대표 등 현 의료대란의 가장 약자들, 환자의 발제도 마련됐다. 먼저 서울대 의대생 대표와 서울대 전공의 대표에 기자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현 의료대란 쟁점의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여러 학문적 근거들을 활용하며 펼쳐 나갔다. 그런데 혈액종양내과를 전공하다가 사직한 전공의의 마지막 3분 발언에서 현장이 술렁거렸다. 그는 자신의 몸이 좀 더 힘들어지면 환자들이 좀 더 편해지는 게 좋았다고 했다. 암 환자에게서 마땅한 실마리를 찾지 못했을 때 '무엇을 놓쳤을까?' 하며, 모든 자료를 다시 검토했다고 한다. 그렇게 자신을 힘들게 하면, 환자는 어느새 완치 판정을 받았던 경험이 좋아서 혈액종양내과를 선택했다고 한다. 진단이 잘못되면 처음부터 다시 검토하는 게 의학의 기본이라며 병원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어떻게든 울음을 참아가며 말을 이어가던 그의 모습은 악마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현장에 있던 어떤 사람도 그가 병원에 돌아가기 위해 달라고 하는 명분을 약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선천성심장병 환우회 대표는 무거움을 가늠하기조차 힘든 표정으로 말을 시작했다. 그는 전공의 복귀를 이끌어 내기 위해 모든 걸 걸었다고 했다. 그는 환자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은 의사의 귀함도 안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의료대란이 이어져 의사들의 도제 시스템이 끊기는 게 어떤 일인지 정확히 간파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현재 자포자기 상태라고만 했다. 전공의들에게 병원으로 돌아와 달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몸 전체로 전공의 복귀를 울부짖고 있다는 것은 모를 수가 없었다. 이 현장이 무지의 장막인지는 모르겠지만, 울부짖는 전공의와 울음조차 내지 못하는 환자의 마음을 날것으로 볼 수 있었다. 절박한 사람들이 날것으로 계속 만난다면 어쩌면 희망이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서로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 이것이 의료대란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사진 : 연합뉴스
"의료 파업 관계자들은 출입 금지입니다" 서울의 한 유명 식당 사장이 "잠정적으로 당분간 의료 파업 관계자분을 모시지 않습니다. 정중하게 사양합니다"라는 글을 게시했다. 그 이유를 "최소한의 직업윤리에 대한 사명감마저 저버리는 행동은 비난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많은 의사들이 댓글로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다. 이 중에는 식당과 다른 병원의 현실을 자조적으로 드러낸 것이 많았다. 병원은 더 비싼 의료 재료를 쓰더라도 최소한 본전이거나 손해다. 예를 들어 의사가 처방한 약의 가격은 고스란히 제약사로 넘어가기 때문에 1억 원짜리 항암제를 쓰든 5천만 원짜리를 쓰든 병원이 취할 수 있는 이득은 없어서 본전이다. 수술 비용은 1억 원짜리 최신 뇌 수술 도구를 쓰더라도 기존 5천만 원짜리를 썼을 때와 같아서 병원은 비싼 걸 쓸수록 손해다. 수술실 침대도 안전도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지만 이에 대한 의료 수가는 책정되어 있지 않아서 비싼 것을 쓸수록 병원은 손해다. 그러나 식당 사장을 격려하는 댓글도 이어졌다. 병원에 의사가 없는 건 식당에 주방장이 없는 것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일일 터이고, 그런 공포를 느끼는 국민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의료 대란에 대한 국민 공포는 과장된 것이 아니다. 고관절 골절 수술 부위가 감염된 고령의 환자가 대학병원 중환자실 치료를 받을 수 없어 2차 병원에서 치료받다가 사망했고, 전립선 암이 콩팥으로 전이돼 응급 시술이 필요한데도 발을 동동 구르는 사례를 나는 직접 목도했다. 의사 출입을 금지시킨 식당의 게시글이 내게는 현재 의료 대란을 겪고 있는 국민 공포가 표출된 사례로 느껴졌다. 식당 출입을 금지당한 의사들의 서운함보다 병원을 못 가고 있는 국민의 공포감이 내게는 더 안쓰러웠다. 의사들이 식당 주인에 대한 서운한 댓글을 멈춰 주기를 바라면서 글을 읽어 내려갈 때, 식당 주인의 마지막 문장이 머리를 쳤다. "늦은 밤 새벽까지 애써주신 한양대병원 권역응급의료센터 이비인후과, 흉부외과 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게시글에서 언급된 한양대병원 권역응급의료센터 관계자분들은 대부분 이번 전공의의 집단 사직을 지지하고 있으며, 식당 주인이 출입을 금지시킨 의료 파업 관계자들은 각자의 병원에서 대부분 늦은 밤 새벽까지 애써주고 있기 때문이다. 거센 비난을 받고 있는 전공의들은 병원을 떠나기 전, 늦은 밤이나 새벽까지 환자를 치료했던 의료진이고, 그들이 사라지면 늦은 밤 새벽까지 치료받을 환자의 권리 역시 사라지기 때문이다. "사표 쓴 교수님, 그래도 계실 거죠?" "기자님, 환자들의 사생활을 보호해주세요." 방송사 로고가 쓰여 있는 커다란 카메라를 보자 폐암 환자는 신경이 곤두섰다. 서울아산병원 종양내과 최창민 교수는 서둘러 진정시킨다. "제가 전국의대교수협회 비대위원장을 맡고 있거든요. 저를 인터뷰하러 온 거고 환자분은 안 나옵니다." 취재진이 진료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간호사가 안으로 들어오라며 손짓한다. 환자가 얼굴을 가리고 목소리를 변조해준다면 인터뷰를 하겠다는 것이다. 잠깐 사이 어떤 대화가 오갔길래 환자의 마음이 180도 바뀐 것일까? 그 이유를 진료 현장을 취재하며 쉽게 알 수 있었다. "교수님, 사표 쓰신 건 아는데, 그래도 계속 계실 거죠?" "그러려고 이렇게 활동하는 겁니다." 진료 현장에서도 의사에 대한 원망과 고마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병원을 떠난 의사는 밉지만, 병원을 지켜주는 의사는 고맙다. 문제는 병원을 떠난 의사와 병원을 지키고 있는 의사의 생각은 대부분 같다는 것이다. 서울아산병원 의대 교수들은 4월 25일부터, 서울대병원 교수들은 5월 1일부터 사직이 현실화된다. 분당서울대병원 신경외과 교수는 사직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말한다. "저희들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렇게 환자한테 못된 짓을 하겠습니까? 정부가 하자는 대로 밀어붙이면, 5월 초로 들어가면 정말 의료 붕괴이기 때문에 그때는 완전히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교수들이 남아서 병원을 지킨다고 지켜질 게 아니거든요. 전공의들이 1년 뒤에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고, 교수들이 이대로 계속 버틸 수 있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 박민수 차관은 교수들의 사직은 가능하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의대 교수 사직서는) 수리하지 않으면 효력이 없는 거고요. 국립대 교수같은 경우는 국가공무원이 되겠고, 또 사립대 교수의 경우에도 국가공무원법을 준용하도록 돼 있어, (사직서를 내면 수리하지 않더라도 한 달 이후 자동적으로 효력이 생긴다는) 규정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인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습니다." 대형 병원의 '셧다운' 물결 실제로 사직할 교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지켜봐야 하겠으나 이와 별도로 대형 병원의 진료는 더 축소될 예정이다. 충남대병원과 세종충남대병원은 이번 주, 4월 26일부터 매주 금요일 휴진하기로 했고, 서울대병원은 4월 30일부터 매주 하루 외래와 수술을 중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런 현상은 전국 대학병원으로 확산되고 있다. 9주째 주 72시간을 넘게 근무해 온 교수들의 체력이 고갈됐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이지만 그 내면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의료 대란 형국에 대한 의대 교수들의 자포자기도 있다고 한다. 의료 대란에 대한 정부와 의료계의 강대강 대치를 보면서 마음이 무거울 때 의료계의 원로가 자신의 '뇌피셜'이라며 의견을 전달해왔다. "지금 대한민국 의료는 한국전쟁 이후 가장 큰 위기입니다. 시간이 별로 안 남은 것 같아요. 그런데도 여전히 정부나 의료계나 서로 각자 입장에서만 브리핑하고 있고, 강대강 구조가 해결될 기미가 안 보이는 것 같아요. 정부와 의료계가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끝장토론하는 자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특히 의료계 대표에는 전공의가 꼭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의료 대란의 해결책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무엇이든 시도해야 한다는 데 고개가 끄덕여졌다.
신비한 0과 1의 세상 0과 1을 더하면 1이 되고 이것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0, 1, 1이다. 여기서 마지막 두 번째 숫자인 1과 1을 더하면 2가 되는데, 이는 0, 1, 1, 2의 수열이 되고, 여기서 또 마지막 두 번째 수를 더해 나열하면 0, 1, 1, 2, 3이다. 이를 무한히 반복하면 '0, 1, 1, 2, 3, 5, 8, 13, 21, 34, 55, 89, 144, 233, 377, 610, 987, 1597, 2584, 4181, 6765, 10946, …' 그 유명한 피보나치 수열이 완성된다. 꽃들은 신비롭게도 피보나치 수열을 좋아한다. 꽃잎의 숫자가 나팔꽃은 1, 붓꽃은 3, 메밀꽃은 5, 코스모스는 8, 금잔화는 13, 치커리는 21, 데이지는 34, 쑥부쟁이는 55인데, 모두 위에 나열한 피보나치 수열의 숫자이다. 해바라기씨도 마찬가지다.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해바라기 씨앗이 한쪽 방향으로 배열된 나선의 개수가 21개이면 반대 방향의 나선 개수는 34개이다. 한쪽으로 34개이면 다른 방향으로는 정확히 55개이다. 피보나치 수열은 사람 몸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1개의 손가락에는 2개의 손가락 관절이 있고, 손가락 마디는 3개이며, 손가락은 5개이다. 그저 우연일 뿐이라고? 그렇다면 2015년 프랑스 연구팀이 발표한 논문을 살펴보자. 논문 제목은 'Deciphering Hidden DNA Meta-Codes -The Great Unification & Master Code of Biology'인데 '유전자의 숨겨진 코드에 대한 해석'쯤으로 해두자. DNA는 두 가닥으로 엉켜있는 유전자 실타래인데, 이게 한 가닥으로 분리되면 RNA가 되고, RNA를 통해 단백질이 만들어진다. DNA는 씨앗, RNA는 나무, 단백질은 최종 과실 정도로 비유하면 쉬울 것 같다. 코로나19 백신 중에서 아스트라제네카는 DNA, 화이자와 모더나는 RNA, 그리고 SK바이오사이언스는 단백질을 원료로 만들었다. DNA에 있던 유전자 정보가 RNA를 통해 단백질까지 도달할 때는 너무나 복잡한 요소들이 관여해서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최근 이 과정에서 일정한 파형과 떨림(공명), 조율 그리고 간섭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는데, 프랑스 연구팀 논문은 이 패턴에 관한 것이다. 놀랍게도 그것 역시 피보나치 수열이었는데, 불규칙해 보이던 유전자 정보의 흐름이 실은 수열이었던 것이다. 이 발견 이후 폐에서 기관지가 발달하는 과정, 대장 줄기세포가 교체되는 주기, 그리고 사람 복부의 구조 역시 피보나치 수열을 벗어나지 않다는 게 추가로 밝혀졌다(A Systematic Review of Fibonacci Sequence in the Human Abdominal Wall: Facts and Reality). 폐암을 미리 진단하는 AI 흡연력이 30갑년(30년간 매일 한 갑씩 흡연) 이상이면 저선량 폐 CT 검사를 받는 게 좋다. 일반 흉부 엑스레이 검진에 비해 폐암 사망률은 20%, 전체 사망률은 7% 감소하기 때문이다. 흡연력이 99갑년인 69세 미국인이 건강검진으로 저선량 폐 CT를 촬영했다(첨부 그림 A). 폐암을 의심할 만한 소견이 없어서 의사는 정상 판독을 내렸다. 그런데 미국 MIT 대학이 자체 개발한 인공지능 시빌(Sybil)의 판독은 달랐다. 사람 의사의 눈에는 정상처럼 보이는 곳을 가리키며 이곳에서 폐암이 발생할 확률을 75%라고 계산했다. 사람 의사와 인공지능의 대결은 2년 후에 판가름 났다. 2년 후 검사한 저선량 폐 CT에서 인공 지능이 지목했던 곳에서 2.2cm 크기의 암 덩어리가 발견됐고, 수술 결과 편평세포 폐암이었다(첨부 그림 B). 연구팀은 정상으로 판독된 2만 7천여 장의 폐 컴퓨터단층촬영(CT) 사진들을 시빌에게 다시 판독하도록 했다. 시빌은 평면으로 찍힌 CT 사진을 3차원으로 재구성했다. 단층촬영은 3차원 물체를 평면으로 잘라 나열한 것이라서 이를 다시 3차원으로 되돌리는 일이 시빌에게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단순한 작업이 놀라운 결과를 이끌어냈다. 시빌은 정상으로 판독된 폐 CT 사진을 보고 1년 이내에 폐암 발병 여부를 86%~94%까지 정확하게 예측했다(Sybil: A Validated Deep Learning Model to Predict Future Lung Cancer Risk From a Single Low-Dose Chest Computed Tomography). 폐암의 사망률이 유독 높은 것은 초기 진단이 어렵기 때문인데, 폐암의 사망률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는 성과였다. 인공지능의 기본이 수학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고, 그 기본이 되는 숫자는 바로 0과 1이다. 영화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초록색 숫자들은 모두 0과 1인데, 모든 디지털 신호는 0과 1의 조합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수학 없는 의사 과학자, 가능할까? 몇 년 전 국내 인공지능 대가의 사무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의 연구 성과를 국내 대기업은 물론 일본, 미국의 다국적 회사도 탐내고 있을 정도로 그는 유명 인사였지만 언론 노출을 극도로 꺼려 했고 내게도 기사화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는 공학을 전공했고, 특히 수학에 능했다. 그의 사무실에 있는 투명 유리 칠판은 온통 수학 공식으로 가득했다. "제가 만드는 로봇은 사람을 흉내 내는 거예요. 사람이 물건을 집어 올릴 때, 혹은 공을 던질 때 어떤 방정식이 적용되는지를 알아내는 게 핵심이죠. 그런데 그게 모두 수학이에요. 수학으로 팔과 다리의 움직임에 대한 방정식을 만들고 그걸 풀어내면 최고의 인공지능 로봇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조 기자님, 태아가 엄마 자궁 속에서 움직이는 걸 수학으로 풀어내면 어떤 게 나오는지 아세요? 바로 걸음걸이가 나옵니다. 아기는 엄마 배에서부터 걷는 연습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의 연구가 다국적 기업의 최신 의료기기로 세상에 등장했다는 기사를 읽으며 그의 칠판에 가득했던 숫자들이 떠올랐다. 의대 증원으로 시작된 의료 대란 중에 '의사 과학자'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의사 과학자란 의대를 졸업한 뒤 생리학, 약리학, 생화학 등 과학을 전공하는 의사를 말한다. 미국, 독일, 일본처럼 항암제, MRI, 중입자 치료기 등 현대 의학의 성과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의사 과학자를 양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 상위 제약회사 10곳의 최고기술책임자 중 70%가 의사 과학자이고, 화이자 코로나 백신도 의사 과학자가 개발했다며 의사 과학자 숫자만 늘리면 저절로 의료 강국이 될 것처럼 호들갑이다. 그런데 세계 상위 제약사의 의사 과학자 중에서 그 기술의 특허권을 갖고 있는 경우는 별로 없고, 화이자 코로나 백신은 의사 과학자만으로 개발된 게 아니다. 20년 넘게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 기초에 몰두한 과학자가 의사와 만나 시너지 효과를 낸 것이다. 폐암을 미리 진단하는 미국 MIT 논문의 저자 중에는 의사도 있지만 가장 핵심인 제1, 2저자는 모두 공학도이다. 그들은 단단한 수학 실력으로 무장돼 있다. 최종 과실이 의학이라면 나무는 기초 과학이고 씨앗은 수학인 셈이다. 의사 과학자가 활성화된 국가 중에서 수학과 과학을 천대하는 곳은 없다. 수학과 과학의 활성화 없이 의사 과학자를 양성한다는 것은 씨앗과 나무 없이 풍성한 과일을 꿈꾸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의사 과학자를 만들겠다는 돈으로 먼저 수학과 기초 과학을 전공한 사람이 돈 걱정 없이 연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차라리 낫다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병원 들어가려고 짐 싸 두었는데..." 지난주 지방 국립대 A 교수와 전공의들의 저녁 자리가 마련됐다. 주 90시간이 넘는 근무에 초췌해진 얼굴이었지만 엷은 미소를 띠며 A 교수가 먼저 말을 건넸다. "전공의 선생님들이 없으니까 응급실이 가장 문제야. 급한 어린이 환자는 외래 진료처럼 축소할 수 없으니까. 게다가 잠을 제대로 못 자는 날이 많아서 우리가 비몽사몽 상태이잖아. 응급 중증 환자가 왔다는 응급실 콜을 받으면 덜컹 겁부터 나더라." 주 90시간이 넘는 근무를 한 달 넘게 벗어났지만 전공의들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 전공의들은 의료 대란에 관련된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내부에서 어떤 생각을 공유하고 있으며, 어떤 논의들이 오가고 있는지 등 A 교수는 너무 궁금했지만 물을 수 없었다. 전공의들이 개별적으로 입장을 얘기할 수 없는 분위기라는 것을 교수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공의 개인 견해가 전체 의견처럼 보도되면서 겪었던 혼란에 대한 일종의 방어 기제였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의료 대란에 관한 얘기는 다음 날 있을 대통령 담화로 국한됐다. "여러 언론 보도를 보니까, 내일 2,000명 증원에 대해서 정부가 양보할 수도 있을 것 같던데?" 그날의 저녁 자리는 오랜만이었지만 짧게 끝났다. A 교수는 병원 당직실로 돌아와 병원 진료 시스템과 연동된 컴퓨터를 켰다. 모니터 옆에 붙어있는 종이에 전공의 B의 글씨가 쓰여 있다. 집에 가던 뒷모습이 유난히 쓸쓸했던 전공의 B, 그는 생활고에 시달린다며 가끔 택배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다음 날 예고대로 51분의 대통령 담화가 있었지만 교수는 아침부터 심폐소생술을 하느라 챙겨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전공의 B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 "교수님, 어제 교수님 말씀 듣고, 병원에 복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짐을 싸고 있었습니다. 다시 병원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설레기까지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정말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A 교수는 자신이 만나 본 전공의들 분위기는 '자포자기'와 '우울'이라고 했다. 대통령과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의 만남 이후 박 위원장의 SNS에 남겨진 '대한민국 의료의 미래는 없다'라는 문장을 접하며, 자포자기와 우울은 내게도 깊게 스며들었다. 주 100시간 넘게 일하는 의대 교수들 엄마 자궁에서 아기가 세상으로 나오자 의사는 먼저 하얀 천으로 아기 얼굴을 닦아 냈다. 한 손으론 아기를 가슴에 안고 다른 한 손으론 탯줄을 잡는다. 전공의의 빈 자리를 서울아산병원 원혜성 교수는 두 손으로 버텨내고 있다. 원 교수는 고위험 출산을 담당해 온 서울아산병원의 베테랑 산부인과 전문의인데 목숨 걸고 네 쌍둥이의 엄마를 구해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원 교수는 전공의들이 떠난 자리에서 당직을 서고 어렵게 수술을 하고 있다. 신경외과 뇌 수술도, 흉부외과 심장 수술도 교수 1명이 집도하고 있다. 전국의과대학교수 비상대책위원회가 의대 교수 1,654명에게 근무시간에 대한 설문 조사를 진행했다. 7개 대학병원별 통계라 결과는 구간으로 공개됐다. 주당 40~52시간 근무하는 비율은 8.3~15%, 주간 72시간 이상 근무는 40.4~59%, 주당 100시간 초과는 6.4~16% 였다. 100시간 넘게 근무하는 교수가 10명 중 1명 꼴이었다. 의대 교수들이 사직서를 제출하고 주 52시간만 근무하겠다고 했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그러면서 의대 교수들은 이런 말을 전해왔다. "이런 사태로 인해 수술이 예정돼 있다가 수술을 못 받고 있는 환자분들께 정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저희는 환자 곁을 끝까지 지키면서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호소합니다. 전공의들이 의료 현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래도 대한민국 의료의 미래는 있다" 의료계 내부에서 대통령과의 전공의 대표의 단독 만남을 비난하는 거친 말들이 오갔다. 대표적인 게 일부에서 나온 '박단 위원장에 대한 탄핵 문건'이었다. 한 목소리를 강조하던 대한의사협회 내부에서도 엇갈린 목소리들이 충돌했다. 대한의사협회 비대위는 '개원의, 봉직의, 의대 교수, 전공의, 의대생 등 전 의료계를 포괄하는 대표들이 모여 합동 기자회견을 열겠다'고 했지만, 박단 전공의 비대위원장은 '합동 브리핑 진행은 합의한 적이 없다'고 했다. 박 위원장은, 자신은 '대한의사협회 비대위원장 김택우 선생님, 전국의과대학 교수협의회 회장 김창수 선생님과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있다'고 했다.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있는 대상에 임현택 신임 의협 회장이 빠진 것이다. 이런 갈등은 의협 내부 공문으로도 확인됐다. 신임 의협 회장직 인수위원회는 '현 김택우 비대위원장 대신 임현택 당선인이 비대위원장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는 공문을 발송했다. 한 목소리를 내도 어려운 상황에서 의료계 내부 갈등은 고스란히 기사화됐다. 의료 대란이 대재앙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절망하는 순간 한 환자단체 관계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조 기자님, 이 말씀 꼭 드리고 싶어서요. 저희와 같은 환자 단체는 의사와 환자를 적대적으로 보고 있지 않아요. 환자를 지키는 것과 의사를 지키는 것이 저희에게는 똑같이 중요한 일이거든요. 환자를 버리고 의사를 지키겠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처럼 의사를 버리고 환자를 지키겠다는 것 역시 성립하지 않거든요. 물론 저희가 현 사태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지만, 저희 피해를 회복하려면 의사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조 기자님, 저희가 전공의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주시면 안 될까요? 저희 얘기를 듣는다면 '그래도 대한민국 의료의 미래는 있다'고 쓰실 것 같아서요." 의학전문기자 일을 15년째 해오면서 요즘처럼 환자들 고통이 극심했던 때를 본 적이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피해가 큰 희소 질환 환자에게서 '미래는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나왔다. 참혹한 전쟁 중에 태어난 아기 같았다. 이 목소리가 의료계 그리고 정부에도 울려 퍼졌으면 좋겠다.
세브란스병원 어린이 암병동에 들어서자, 위태로워 보이는 침상 하나가 환자용 엘리베이터로 향하고 있었다. 의료진 여럿은 모두 긴장된 표정으로 신음하고 있는 어린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어린이의 피부는 까맣고, 가슴과 배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팽창돼 있었다. "대장암이 많이 진행돼 가슴과 배에 물이 많이 고여 있어요. 이것 때문에 아이가 숨을 잘 못 쉬어요. 영상의학과 중재(intervention) 센터로 가서 당장 흉수와 복수를 빼내는 관을 아이 몸에 넣어 줘야 해요." 한정우 소아혈액종양과 교수는 어린 암 환자의 어머니보다 먼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심폐소생술을 할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서인데 언제라도 심장이 멈출 수 있을 만큼 아이는 위중했다. 보통이었다면 전공의가 있어야 할 자리이지만 지금은 한 교수가 직접 서 있어야 한다. 응급 시술이 이루어지는 중재 센터에 보호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엄마의 빈자리가 불안했는지 말이 없던 아이가 연신 말을 한다. 한 교수는 아이의 입에 귀를 밀착한다. 작고 아픈 몸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선명할 리 없었을 것이다. 한 교수는 토하고 싶은 건지 아이에게 몇 번이고 되묻는다. 토사물이 자칫 기도로 넘어가면 흡인성 폐렴이 생길 수 있다. 한 교수는 신속하게 아이를 옆으로 누인 후 토사물을 받아낼 그릇을 찾는다. 그런데, 한 교수의 말을 받아줄 사람이 없다. 인턴(의대를 졸업한 새내기 전공의로 전공과목을 선택하기 전 여러 진료 과에서 1년 동안 수련받는 의사)이 떠났기 때문이다. 중재술 준비에 바쁜 간호사가 하던 일을 멈추고 그릇을 내온다. 몇 번의 구역질을 하던 아이가 맘대로 되지 않았는지 심하게 보챈다. 몸을 많이 움직이는 상태로는 배액관을 정확하게 삽입할 수 없다. 한 교수는 미다졸람(진정제)을 준비해 달라고 말한다. 하지만 약물 처방은 간호사가 하면 불법이다. 파견 온 공중보건의가 해야 하지만, 그는 세브란스병원의 EMR 시스템에도, 소아과의 약 용량 처방법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소아 병동 간호사에게 물어 어렵게 처방은 냈으나 진정제를 투여하는 것도 문제였다. 어린이는 약의 용량뿐 아니라 투여 방법도 성인과 다르기 때문이다. 소아과 전공의의 빈 자리가 너무 컸지만, 한 교수는 지연되는 시간을 묵묵히 기다렸다. 본격적인 중재술을 위해 영상의학과 의료진이 아이 앞에 등장했다. 그런데 이들이 어린 환자에겐 그저 낯선 사람이었다. 신음하며 고통스럽게 몸을 가누던 아이의 손이 한 교수의 손목을 더듬는다. 한 교수는 아이의 손을 받아 꼭 잡는다. 그렇게 아이와 한 교수의 손은 시술이 끝날 때까지 감겨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저는 환자를 떠날 수는 없을 거고요. 대부분의 의사들이 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다만, 이런 상황에서 저희들의 사명감이나 자긍심이나 이런 것들도 모두 없어지는 그날이 온다면, 과연 이것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필요할까, 이런 고민은 아마 그때는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세브란스병원 어린이 암병동 병실은 38개다. 항상 만실이었는데, 이번 사태로 병실 4개가 비어 있었다. 한 교수는 암 환자 주치의를 가장 많이 맡고 있는데, 34명 중 19명이 한 교수 환자이다. 자신의 암 환자 응급 콜을 24시간 대기하며 받고 있다. 5주가 넘어가고 있는데도 그는 힘들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몹시 지쳐 보였고 환자의 어머니는 이걸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다. "진짜 불안해요. 한 교수님이 외래 진료 시간이면 저희 아이를 봐줄 의사가 병동에는 없어요. 한 교수님이 지금은 24시간 봐주시고 있지만 이게 언제까지 가능할까요?" 환자를 지키고 있지만... 세브란스병원에서 어린이 암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한정우 교수와는 개인적인 인연이 있다. 2006년부터 국군서울지구병원(지금은 미술관으로 바뀜)에서 그는 소아과 과장으로, 나는 신경외과 과장으로 3년 3개월(1년은 전방부대에 복무)의 군 복무를 함께 했다. 그는 이후 세브란스병원에서 내과 전공의 과정을 또 밟아 내과 전문의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의대 증원으로 야기된 이번 의료 대란에 한 교수는 '정부 정책에 항의하고 전공의를 지지한다'는 피켓 시위를 세브란스병원에서 가장 먼저 했다. 정부가 비상진료체계 지원 방안으로 내놓은 상급종합병원 교수의 중환자 진료 정책 지원금도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병원에서 가장 많은 어린이 암 환자를 치료하고 있고 환자 곁을 떠날 수 없다고 말한다. "항암 치료, 시술 등 이런 것은 교수들이 다 할 수 있고, 전공의가 하던 일들도 전공의보다는 굉장히 느리고 조금 체력적으로 힘든 부분이 있지만 교수가 다 할 수 있습니다. 병원에서 환자들이 안전하게 치료받는 환경은 최소한 계속 유지시킬 겁니다. 그래야 전공의가 자신의 의견을 표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교수는 사직서를 쓴 다른 교수들도 마찬가지라고 전했다. 질병과 생명을 다루는 분야의 교수들은 주 52시간 근무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전공의 의존도가 유독 높은 우리나라 대형병원의 특성상, 전공의의 빈 자리는 교수들이 주 90시간을 일해도 메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 동안 대통령은 담화문을 통해 병원을 떠나 있는 전공의의 복귀를 촉구했다. 이를 의료계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취재할 것이다. 다만 이와는 별개로 환자들의 호소를 전달해야 할 의무가 내게는 더 크다. 한 교수의 병원 현장이 SBS 8뉴스를 통해 방송된 뒤 기사에 달린 댓글에서 이를 찾을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고민 중인 의사분들.. 아픈 환자들이 선생님을 기다립니다. 그냥 환자만 생각하시고 원래의 자리로 가시면 될 것 같아요." 이 문장의 뒤에는 '환자만 생각한다면 의사의 얘기를 결국 국민이 들어줄 것'이라는 약속이 더 있는 것만 같았다. 착각일까? 착각이라도 할 수 없다. 병원 현장 취재를 하면 할수록 재난 영화를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의대 증원과 관련한 여러 주장들을 근거 중심으로 보도해 왔다. 그런데 지금은 옮고 그름을 따질 상황이 아닌 것 같다. 중증 환자들의 상황이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이다. 전공의가 정부 몰래라도 병원에 들어오기를 기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의대 교수 모친도 중환자실 못 가고 일반 병실에... 지난 금요일 한 의대 교수를 만났다. 그는 빅 5 대학 병원에서 30년 넘게 환자를 진료하면서 의대생과 전공의를 가르쳐왔고 지금은 진료과에서 가장 높은 직책을 맡고 있다. 예전 같으면 병원과 SBS가 있는 목동의 중간 지점에서 장소를 잡았을 텐데, 이번엔 병원 근처로 와 달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희 어머님께서 폐렴으로 입원하셨는데, 기도가 막혀서 중환자실로 옮겨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중환자실 여력이 안 돼서 일반 병실에 그냥 계시기로 했거든요. 다행히 막힌 기도가 조금 뚫리긴 했지만 상태가 언제 악화될지 몰라 제가 병원 근처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빅 5 대학병원 주임 교수도 지금의 의료 대란 상황에는 별 다른 묘책이 없으니 일반인으로서는 더 암담할 것이다. 지난주 다녀온 한 장례식장에서 의료 대란의 암담한 정황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어르신은 고관절 골절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었는데 수술 부위가 세균에 감염돼 결국 패혈증으로 돌아가셨다. 고령이라 수술 부위가 세균에 감염되면 3차 대학병원의 중환자실 치료를 받는 게 안전하다. 하지만 어르신에게는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대학병원에 진입조차 못했기 때문에 ‘의사 집단행동에 따른 피해 통계’에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유족들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장례식장이 마련된 지역의 거점 국립대병원에서는 정년퇴직을 1년 앞둔 64세 노교수도 야간 당직을 서고 있기 때문이다. 강건하기로 유명한 이 교수가 최근 후배 교수들에게 사과한 일이 있어서 의료계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교수는 전날 콜백 당직(집에서 대기하며 병원 응급 환자 상태를 보고받는 것)을 서느라 그 다음날 낮에 응급실 콜을 놓쳤던 것이다. 전화를 못 받은 이유는 깜빡 졸았기 때문이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외과 교수는 의사 3명이 달려들어 5시간 정도 걸리는 수술을 혼자 진행하고 있다고 근황을 알려왔다. 도저히 혼자서 감당이 안될 때에는 옆방에서 수술하고 있는 다른 교수에게 연락한다. 그러면 옆방 교수는 자신의 수술을 잠시 멈추고 들어와 거들어 주고 다시 돌아간다고 한다. 일종의 수술방 품앗이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전공의와 전임의의 빈자리가 한 달 넘게 이어지면서 국내 대형병원은 그야말로 그로기 상태로 보인다. 교수 사직 행렬, 지역 필수 의료진이 선두로 카톡 알람이 울렸다. 지역 국립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가 자신의 사직서를 보낸 것인데, 사진 한 장이 더 동봉됐다. 다른 교수의 사직서로 보였는데 글씨가 너무 작았다. 액정 화면을 손가락으로 펴며 글자를 확대했는데, 이름을 보고 깜짝 놀라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교수님, 동봉해 주신 사직서 이름이 000 교수님이던데, 제가 아는 그 교수님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저희 소아과 전문의의 대모, 바로 그분입니다.” 이력과 수상 내역을 언급하는 게 그에게 약속한 익명성을 보장할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한 교수였다. 환자를 대하는 마음도 자상했는데, 환아 맘 카페에는 그에 대한 칭찬이 너무나 오랫동안 많이 쌓여 있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사직서 제출일은 3월 25일이지만, 작성일은 3월 21일이었다. 해당 대학교 교수들이 사직에 대한 찬반 투표를 하자마자 바로 사직을 결심한 것이다. 00 교수의 사직서는 앞서 경북지역에서 혈관 외과를 지켜왔던 외과 교수, 충북 지역에서 심혈관 센터를 지켰던 심장내과 교수의 사직서만큼이나 무거웠다. 이들의 사직서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지역 의대를 졸업하고 핵심 지역의 필수 의료 현장을 지키던 데서 나왔다는 것이다. 00 의대 출신 00 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경북 의대 출신 경북대 병원 혈관 외과 교수, 충북 의대 출신 충북대 심장 내과 교수가 사직서 행렬에 가장 선두에 선 것이다. 충북대 심장내과 교수는 사직의 변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저는 청주에서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충북대학교에서 의과대학을 다니고 충북대학교병원에서 인턴과 내과 전공의를 했습니다. 심장병만은 우리 권역(충청북도)민들이 우리(충북대) 병원에서 양질의 모든 치료를 받게 할 수 있도록 우리 병원을 키워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아는 사람 없는 타지까지 힘들게 다니시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병원에서 심근경색증은 한국에서 가장 빨리 시술을 해보자, 낮이든 밤이든, 평일이든 추석연휴이든 뼈를 갈아 넣어 최대한 빨리 시술을 하였고, door to balloon time이 새벽 두시에도 52분이라는 성적을 이뤄냈습니다.” 정부는 지역 출신의 지역 필수 의료진을 양성하겠다며 증원된 의대생을 지역에 82%나 할애했다. 그런데 지역 출신의 지역 필수 의료진부터 사직하고 있다. 이것을 두고도 ‘밥그릇 지키기’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어색하다. 지역 국립대 병원의 소아감염센터, 혈관이식센터, 심혈관센터가 의사들이 '꿀물을 빠는 밥그릇'이 아닐뿐더러, 만약 이런 지역 센터들조차 밥그릇이라면 정부가 하려는 일은 결국 의사 밥그릇 강화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돌아갈 수 없는 길, 다리가 불타는 걸 지켜봐야만 하나? 정부의 2천 명 증원 배분 발표를 두고 의료계는 한 목소리로 ‘전공의와 의대생이 복귀할 다리가 끊겼고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건넌 것’이라고 평가했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 나오는 노랫말처럼 ‘우리가 건너온 다리가 불타는 걸 지켜봐’야만 하는 것일까? 많은 의사들은 대한민국 의료의 파국을 얘기한다. 정부의 의대 증원 배분 발표는 다리에 불을 지른 것이고 의대 교수들의 사직서는 다리가 재로 변하는 것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직서 이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00병원 소아 감염 교수는 동료 교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평생 지금처럼 이 자리에서 어린이 환자를 치료하고 싶어요. 제 사직서가 수리되더라도 여러분들이 저를 봉직의로 채용해 주세요. 제자들을 설득할 명분이 없어서 사직서를 안 낼 수는 없었지만...’ 정부의 말처럼 ‘의대 교수들의 사직은 국민과 환자를 향한 겁박’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사직서 뒷면에는 제자에 대한 죄책감과 환자 치료에 대한 의지가 더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행간에서는 제자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간절함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 정부의 강경책, 의대생의 휴학과 전공의의 사직 모두 환자를 위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당장 환자들의 생명 다리가 불타고 있다. ‘다리가 불타는 걸 지켜 봤노라’고 역사에 기록되지 않으려면 수많은 사직서들이 의대생과 전공의가 복귀하는 종이 다리가 될 수 있도록 어떤 방법이든 우리는 찾아야 한다.
의사를 품어 준 그때 그 환자들 10여 년 전 아버지가 폐암을 진단받고, 대학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일입니다. 암의 크기가 작지 않아서 바로 수술할지 아니면 방사선 치료와 항암제로 암의 크기를 먼저 줄여야 할지를 결정하기 위해 여러 검사를 진행했습니다. 담당 1년 차 전공의는 아버지에게 여러 정보들을 캐묻고 차트에 기록한 후 청진기를 꺼내 숨소리를 점검했습니다. 어떤 소리가 들렸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아버지에게 숨을 깊게 들여 마신 후 내쉬기를 반복하도록 했습니다. 그러고는 별말없이 자리를 떴는데, 얼마 후 3년 차 교육 담당 전공의가 의대생 여러 명과 함께 나타났습니다. 아버지에게 양해를 구한 후 의대생들이 돌아가며 아버지의 호흡 소리를 듣도록 했습니다. 폐암이 아버지의 기도를 좁게 해 특정 소리(wheezing, 공기가 좁은 기관지를 통과할 때 나는 소리)와 암이 염증을 일으켰는지 비누 거품 같은 소리(rale)가 났나 봅니다. 전공의는 의대생들에게 청진기로 들었던 소리가 무엇인지 설명한 후 인사하고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기관지 내시경, PET CT 등 여러 검사를 오가며 받았는데, 병실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꽤 길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의대생들이 두어 명씩 와서 청진기를 들이댔습니다. 아버지가 좋은 교재였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너무하다 싶어 이의를 제기하려는 순간, 아버지는 저를 가로막고 학생들이 숨소리를 잘 들을 수 있도록 흔쾌히 상의를 들어 올렸습니다. “너도 저렇게 배웠을 거 아니야. 아빠도 갚아야지. 저분들이 잘 배워서 훌륭한 의사가 되면 그게 다 세상 복이지.” 의대생과 전공의 시절, 자신의 몸을 흔쾌히 내주던 여러 환자들이 떠올랐습니다. 그중에서도 뇌 수술 후 폐렴 합병증으로 돌아가신 환자 가족의 말씀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사망 선고를 내리고 돌아서려는 저를 붙잡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젊은 의사 양반, 나는 뭔가 잘못돼서 남편이 죽은 것 같아. 우리 남편을 잘 공부해서 다음에는 이렇게 허망하게 환자가 죽는 일 없도록 해줘” 대한민국 의료가 OECD health data 지표에서 세계 톱클래스에 자리할 수 있었던 1등 공신이 바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정부의 2천 명 증원과 필수 의료 패키지에 대해서 의료계는 반박하면서 여러 다른 근거들로 따져 물었습니다. ▶ 관련 영상 하지만 이런 논리적 다툼에 앞서 대한민국 국민의 헌신을 의료계는 더 소중하게 생각했어야 합니다. 최근 전국의과대학교수 비대위원장이 한 방송에 나와 대국민 사과를 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풀이됩니다. 병원에 들어가는 전임의 가족의 편지 지방에 사는 한 의사의 어머니가 이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자신의 딸이 빅5 병원 내과 전임의(전문의를 취득한 후 교수 요원이 되기 위해 1-3년 동안 대학병원에서 연구와 진료를 담당하는 의사)인데, 집에서 나흘 동안 머물다가 병원에 들어가는 길을 배웅한 후 썼다고 합니다. 전공의가 없는 요즘, 병원은 전임의에게 휴가를 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전임의 계약 포기’라는 말은 없었지만 고향집에 내려온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전임의는 집에 있는 동안 방 안에서 뉴스만 검색했고, 정부의 브리핑을 보며 숨을 가쁘게 쉬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TV를 꺼놨지만, 딸이 불면증에 시달리며 불안 증세를 보이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충분히 쉬지도 못했는데 병원에 들어가는 건 아마도 병원에 남아 환자를 보고 있는 교수님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 전임의에게는 정부의 행정명령이 발동되지 않았으니까요. 어머니와 딸은 카페에 둘이 앉았지만 어떤 말도 어떤 눈빛도 주고받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의사로서 진짜 가슴을 맞대고 살고 싶다며 심장 내과를 선택한 딸이 병원으로 향하면서 건넨 말은 어머니를 한숨짓게 했습니다. “병원에서 저의 치료를 받고 환한 미소를 주었던 환자들은 저에게 이렇게 욕하는 분들이랑 다른 사람들인가요? 국민들이 이렇게 저를 싫어하시는데 제가 병원 들어가서 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상처의 크기는 사랑의 깊이와 비례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는 별로 아프지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흉터가 오래 남습니다. 젊은 심장내과 의사는 환자들이 보낸 환한 미소의 가치를 아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환자들이 젊은 의사에게 보내준 사랑이라는 것을. 그래서 자신을 향한 국민의 질책이 더 아팠던 모양입니다. 환자-의사의 신뢰 관계는 서울아산병원 폐암수술 명의가 자신의 SNS에 사직의 변을 올렸습니다. 국내 최대 병원에서 가장 활발하게 폐암 수술을 해왔던 흉부외과 전문의가 지금 큰 상처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폐암 환자들은 기약 없이 수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과 한 달 사이에 바뀐 그 차이가 너무 커서 정신을 온전하게 가다듬지 못하겠고, 당직이 아닌 날도 불면증에 시달리며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는 제 모습이 스스로도 낯설어 무섭습니다. 이 상황을 도저히 못 견디어 사직서를 냅니다.’ 흉부외과 전문의의 큰 상처 이면에는 역시 커다란 사랑이 있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환자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받다 보면, ‘내가 뭐라고 이렇게 쓰임을 받나.’ 분에 넘치는 선물에 몸 둘 바 모르는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만나는 전공의, 학생 누구에게나 흉부외과는 정말 좋은 과라고, 나의 노력이 그대로 환자의 생명으로 연결되는 일을 하는 사람은 평생에 걸쳐 자부심과 감사함을 느끼는 인생을 산다고 적극 권하였습니다.” ‘환자들이 예전처럼 자신의 몸을 내어주며 의사를 품어 줄 수 있을까?’ 의사들은 이런 걱정을 하고 반면 환자들은 “의사들이 예전처럼 자신들의 모든 걸 던져가며 우리를 치료할 수 있을까?’라고 걱정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번 의료 대란을 취재하면서 가장 크게 염려했던 게 바로 환자와 의사의 신뢰 관계가 다치는 것이었습니다. 신뢰 관계의 상처가 흉터로 남기 전에 새살이 돋는 기적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전공의에 이어 의과대학 교수들의 사직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의대 교수들도 밥그릇 지키기를 위한 카르텔에 동참한다는 비난이 쇄도한다. 이런 비난이 현 시점에서 국민의 전반적인 정서임을 의료계가 무겁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의대 교수들의 사직 물결이 국민에게 위협이 되고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의대 교수들은 잘못된 길로 가려는 것일까? 중범죄자에도 자신을 변호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취재가 제한된 영역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전반적인 분위기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얘기를 누구의 방해 없이 들었다는 것은 분명히 해둔다. '악마'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보니 전화번호에 등록되지 않은 발신자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 응급의학과 전문의라고 밝히면서 자신들이 마련한 행사에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줄 수 있는지를 물어왔다. 어떤 자리인지를 묻자 응급의학과 젊은 의사들과 대한민국 응급의료 현황을 논의하는 포럼이라고 하면서 얼마나 모일지는 모르겠으나 전공의와 의대생도 올 것 같다고 했다. 의료 담당 기자들이 요즘 가장 만나기 어렵다는 그들을 취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수락했다. 행사장에 도착했을 때 족히 300명은 되어 보이는 젊은 의사들이 모여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교수와 전문의도 섞여 있었지만 전공의와 의대생의 비율이 꽤 높은 듯했다. 세상은 이들을 환자의 생명을 볼모로 밥그릇만 챙기는 '악마'라고 부른다. 정부의 2,000명 의대 증원 정책에 홀연히 병원과 학교를 떠난 '악마'들이 이토록 많이 모여 있는 현장이 당황스러웠다. 그래서였을까? '악마'들의 얼굴이 유독 평범하고 앳되어 보였다. “저희(소아청소년과 전공의)들 모일 때마다 아이들(항암치료받고 있는) 얘기부터 해요. 병원에 계신 교수님과 간호사 선생님께 환자들 어떤지 자주 물어요. 병원을 떠나는 게 이렇게 가시방석 같을 줄은 몰랐습니다.” “저(내과 전공의)는 이 사태가 어떻게 되든 다시 대학병원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어요. 저희에게 환자분들이 다시 몸을 맡기실 수 있을까요?” “저희(응급의학과 전공의)도 병원에 돌아가고 싶어요. 기자님이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세요.” 욕설과 비난이 마땅한 젊은 '악마'들을 마주하면서 설명할 수 없는 죄책감의 기운이 몸을 휘감았다. 죄책감, 나는 19년 전 신경외과 전문의를 취득한 기성 의료인이자, 15년 동안 의학전문기자를 해온 보건복지부 출입 언론인이다. 국민의 생명이 볼모로 잡혀 있는 작금의 사태에 대한 내 죄의 무게는 젊은 '악마'들보다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2022년 뇌출혈로 쓰러진 서울아산병원 간호사의 죽음으로 개두술 의사가 부족한 현실이 드러났을 때 가장 앞장서서 ‘필수 의료 대책’을 주창했던 게 바로 대한전공의협의회였다는 기억도 떠올랐다. 필수 의료 회생에 앞장섰던 젊은 의사들이 정부의 필수 의료 대책에 가장 먼저 병원을 떠나는 건 역설이다.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 응급의학과 내과 등 바보 같은 진로를 선택한 젊은 '악마'들과 연락처를 주고받을 때는 대한민국 의료 현실의 키워드가 ‘부조리’인 것도 같았다. 의대 교수들은 왜 '악마'의 편에 서려 하는가? 의대 교수들의 의대 증원에 대한 의견은 다양하다. 2천 명 증원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지만, 의사 수를 늘려야 한다는 데 동의하는 교수들도 적지 않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난 것을 두고는 찬반이 더 격하게 충돌한다. 미래의 환자를 구한다는 명분이 현재의 환자 희생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을 의대 교수들이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서울대, 울산대, 부산대, 전북대, 경상대 등 주요 의대 교수들이 자발적 집단 사직을 결의했고, 이 물결은 전국 40개 의과 대학으로 확산되고 있다. 정치적인 이슈에 가장 몸을 낮춰왔던 삼성서울병원의 모교 성균관의대 교수들조차 500여 명이 모여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렸다. 의대 증원, 전공의 사직 등 현안에 대해 의대 교수들의 의견이 다양한 것과는 달리 사직의 물결은 거침없이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죄책감 때문일 겁니다. 우리가 방치해 온 대한민국 필수 의료 체계를 전공의와 의대생이 다 짊어지고 있는 상황이잖아요. 저도 병원 떠나는 건 반대입니다. 사직서를 내더라도 병원에서 환자는 계속 볼 겁니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어요.” “전공의와 의대 교수의 관계는 다른 사제 관계보다 더 끈끈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공의 비중이 월등하게 높은 대한민국 대형병원에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겠죠. 전공의들이 우리한테 말도 없이 사직했을 때에는 꽤 서운했어요.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저토록 무섭고 강도 높은 비난을 우리라도 나눠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저는 환자를 계속 진료할 겁니다.” 의대 교수들의 사직 행렬은 이어지겠지만, 의대 교수들이 진료를 그만두는 일은 적어도 당분간은 없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악마'의 편에 서는 이유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사직이 비난받는 길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비난의 길을 선택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제자들에 대한 깊은 죄책감 그리고 제자들에게 쏟아지는 거친 돌들을 함께 맞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 때문이었다. 3-4일에 한 번씩 밤샘 근무를 이어가고 있는 어느 50대 외과 교수는 이 말을 꼭 전해 달라고 했다. “필수 의료 체계 파국의 한 책임자인 제가 전공의에게 복귀하라고 말할 자격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미래의 환자 생명을 더 구하겠다는 이유로 현재의 환자 생명을 희생해도 된다는 생각에 저는 반대합니다. 정부가 밉더라도 당장 고통받는 환자들을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정부도 마찬가지예요. 5년 뒤 의사 1만 명을 더 증원하겠다면서 당장 의사 1만 명의 면허를 정지시키겠다는 건 잘 이해가 안 되니까요. 무엇보다 환자분들께 그리고 국민께 죄송하다는 말씀 좀 꼭 전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