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칼럼니스트 메간 스택이 라스베이거스 북쪽에서 샌더스의 연설을 취재한 뒤 쓴 칼럼이다. 이른 시간부터 사람들은 라스베이거스 북쪽으로 모여들었다. 볕이 이미 따가운 평일 낮 근무 시간임에도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을 보려고 모인 사람들의 줄이 장사진을 이뤘다. 라스베이거스라는 이름을 듣고 으리으리한 호텔과 화려한 건물 조명이 불야성을 이루는 영화 속 모습을 떠올렸다면, 치장 벽토를 두른 집들과 허름한 연립주택 단지 사이로 상점과 식당들이 듬성듬성 들어섰고, 주위엔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공터가 제멋대로 방치된 라스베이거스는 분명 낯설 것이다. 하지만 버몬트주를 대표하는 무소속 연방 상원의원 버니 샌더스는 바로 이 버려진 공터에 반세기 가까운 자신의 정치 경력을 통틀어 가장 많은 청중을 불러 모았다. 네바다주는 샌더스 의원이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아코르테즈 하원의원과 함께 진행 중인 "과두정과의 싸움 전국 투어(Fighting Oligarchy Tour)"의 남서부 첫 목적지였다. 네브래스카, 아이오와, 애리조나, 콜로라도를 포함해 전국 방방곡곡 어디든 샌더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샌더스 의원의 인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 보였다. 그가 전하는 이야기의 핵심은 수십 년 동안 바뀌지 않고 그대로지만, 지금은 메시지의 울림이 아주 크다. 지난 20일 샌더스 의원의 연설을 들으러 네바다주 곳곳에서 모여든 다양한 사람들과 한참 이야기를 나눈 결과, 두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우선 여기에 온 모든 사람은 돈 때문에 크고 작은 위기를 겪고 있었다. 또 자신이 평생 믿고 의지해 온 미국이란 나라가 트럼프 대통령 때문에 서서히 망해가는 모습에 겁을 먹고 있었다. 이런 두려움은 난생처음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연설을 들으러 온 사람들이 평범한 미국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지금 미국은 분명 한계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미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하는 것도 빠듯해진 미국인들은 이러다 경기 침체라도 오면 상황이 얼마나 더 나빠질지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 사람들은 헌법을 대놓고 무시하고, 바위처럼 오래 단단히 버틸 것 같던 연방 정부 제도 여기저기를 마구 헤집고 파괴하는 트럼프 대통령을 보면서 메디케이드와 공립학교, 군에 복무한 이들이 받는 연금 등 각종 혜택, 그리고 사회보장 연금(Social Security)마저 끝내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걱정한다. 트럼프라면 제도를 파괴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표현의 자유도 빼앗아 갈지 모른다. 샌더스 집회 현장은 이 모든 감정으로 뒤엉켜 있다. 우선은 두렵지만, 동시에 화도 나면서 무언가 목적을 위해, 어딘가로 뿜어내고 싶은, 그러나 아직 분출된 적 없는 거대한 정치적 에너지가 날것 그대로 느껴졌다. 요즘 제 감정은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또 무엇이 사라지고 날아갈지 걱정부터 들죠. 판금(sheet metal) 노동자로 일하다 최근 은퇴했다는 켈리 프레스 씨가 내게 한 말이다. 디트로이트 출신의 건장한 남성 프레스 씨는 올해 65세로, 은퇴 전에는 서부 지역 곳곳의 건설 현장을 돌며 일했다. 자신이 속한 노조(판금노조 88 지부) 이름이 새겨진 모자를 쓰고 온 프레스 씨는 양손에는 큼직한 반지를 꼈고, 파란 눈을 가리기 위해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라스베이거스로 이사 온 뒤 잠시 도박장에서 딜러로 일하기도 했지만, 도박이 사람을 얼마나 처참하게 망가뜨리는지 직접 본 뒤로는 더는 그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이내 (카지노보다) 훨씬 더 평온한, 땀 흘린 만큼 돈을 벌 수 있는 건설 현장으로 돌아갔다. 프레스 씨는 만약 오늘 연단에 오른 누군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항의하는 뜻에서 워싱턴 D.C.까지 행진하자고 청중에게 제안한다면, 자신은 "신께 맹세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길로 따라나설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러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사람들에게 어떤 종류든 길을 제시하는 사람 말이에요. 그래서 미국인들은 더욱 혼란스러워하며 두려워하는 거예요. 2년 전 은퇴할 당시 프레스 씨는 한 달에 1,000달러면 기름과 먹을거리를 포함해 생필품을 충당하는 데 문제가 없을 거라고 계산했다. 실제로 한동안 은퇴 후의 삶은 계산대로 흘러갔다. 하지만 물가가 계속해서 오르더니, 매달 생필품을 사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도 1,400달러로 올랐다. 그는 자신의 동료 노조원 중에도 어디에 쓰이는지 알 수 없는 세금과 노조 회비 내는 데 지쳐서, 또 총기를 압수하려는 정부가 싫어서 트럼프에게 투표한 친구들이 있다며, 이들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트럼프를 찍은 사람들이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믿는다. 지금, 이 나라는 점점 더 러시아처럼 되고 있어요. 선거로 뽑은 정치인에 대해서 말할 때도 입조심해야 하는 걸 보세요. 프레스 씨의 표현을 빌리면, 지금 미국인은 법원의 판결을 깡그리 무시하고, 공무원들을 사방에서 위협하기 바쁘며, 시민의 자유를 아무렇지 않게 짓밟고 무시하는 백악관과 트럼프 행정부에 맞서 앞장서서 저항하고 싸우는 리더를 갈망하고 있다. 민주당은 지난 선거에서 노동 계급에 외면받은 이유를 찾느라 고심하고 있다. 당 주요 인사들은 팟캐스트, 방송 토론과 대담 등에 출연해 어떻게 하면 다시 노동 계급의 마음을 살 수 있을지 전략을 이야기하느라 바쁘다. 그러는 사이 미국인들 마음속에 쌓인 불만을 어루만지고 활용하는 방법을 이해한 사람은 샌더스 의원밖에 없는 것 같다. 그가 하는 말 중에 새로운 내용이 하나도 없다는 점은 특히 흥미롭다. 그는 지난 수십 년간 어쩌면 지겹도록 되풀이해 온 말과 구호를 또 한다. 전 국민 의료보험, 약제가 인하, 부자 증세, 주립대학 무상 교육, 노동조합 강화, 최저임금 인상 등이다. 샌더스를 아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한 번쯤은 들어본 말이다. 샌더스가 시류에 편승해 저런 주장을 난데없이 꺼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도 곧장 반박당할 것이다. 오히려 세상이 돌아가는 양상이 샌더스의 오랜 주장을 새삼 돋보이게 했다. 그가 오랫동안 경고해 온 것들이 하나둘 사실로 밝혀지고, 소스라치게 놀랄 만큼 정확히 현실에서 일어나자, 샌더스는 어느덧 선견지명의 대명사가 됐고, 그가 과거에 한 말이 잇따라 '성지글'로 조명받고 있다. 이제 그는 사람들이 견뎌 온 고통과 불안감, 그리고 오랫동안 무시돼 온 자신의 주장을 온전히 하나로 묶을 수 있게 됐다. 그는 치솟는 물가를 기업의 지배 구조와 부, 그로 인한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된 문제와 결부해 설명한다. 독재자의 자질을 마음껏 펼쳐 보이는 트럼프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인 일론 머스크로 대변되는 과두정의 득세는 부의 불평등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으면 미국 사회가 망할지 모른다던 샌더스 의원의 오랜 주장을 그대로 뒷받침한다. 샌더스는 이어 연방정부를 향한 트럼프 대통령의 끊임없는 공격이 지금 연설을 듣는 청중들의 가계 예산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즉, 과두정은 아무렇게나 멋대로 정부를 해체하는 게 아니라, 자신과 부자들의 세금을 수조 달러 아끼려는 목표 아래 철저히 계산된 공격을 편다는 것이다. 북부 라스베이거스의 선명하리만치 푸른 하늘 아래서 연설을 듣던 청중 사이에서 이따금 "부자에게 세금을!"과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티어스 포 피어스(Tears For Fears)의 노래 "모두가 세상을 지배하고 싶어 한다(Everybody wants to rule the world)"가 공원에 울려 퍼진다. 오카시아코르테즈 의원은 군중을 더욱 열광시킨다. 그는 열광하는 군중들을 향해 "우리는 우리를 위해 더 열심히 싸워줄 민주당을 원합니다! 그렇죠, 여러분?"과 같이 본인이 속한 정당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또 지금은 트럼프에게 투표한 사람이든 트랜스젠더 자녀를 둔 가족이든 다 같이 모이고 조직해야 할 때라고 주문했다. 이 운동은 당파적인 것도, 정치적 순수성을 시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운동은 계급의 연대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수많은 사람들의 외침은 다음 한 마디로 묶어낼 수 있을 겁니다. "우리의 생명은 존엄하다. 그리고 우리의 노동은 존중받아 마땅하다!"라고요. 이어 그 이름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샌더스 의원이 등장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계속해서 호통쳤다. 그는 테크 기업을 겨냥하며, 특히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일론 머스크와 제프 베조스, 그리고 마크 저커버그 세 명이 미국 사회에서 가난한 절반에 해당하는 1억 7천만 명의 자산의 합보다 더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극소수 갑부들이 매우 탐욕스럽고, 한없이 사치스러우며, 경제적 현실과 철저히 동떨어져 있다고 조롱하듯 비판했다. 이 사람들은 현실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통 몰라요. 우리는 미국 사회를 극소수 갑부들이 정부를 쥐락펴락하는 과두제로 전락하는 것을 절대 그냥 보고만 있지 않을 겁니다. 샌더스 의원은 미국이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상기하려는 듯 소리를 높였다. 헌법을 줄기차게 무시하고 공격하는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하다가 청중을 향해 물었다. 급여 생활자로 근근이 살아가는 게 어떤 의미인지 여러분들은 잘 아시죠? 사람들은 소리 높여 저마다 생각하는 바를 외쳤고, 샌더스 의원은 이를 하나하나 마이크에 대고 복창했다. 맞습니다. 자녀를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싶은데 막막하죠. 그렇죠, 약값과 이번 달 월세 중 하나는 포기해야만 하는 거죠. 신용카드 연체 이자율이 20%나 돼서 막막한 것도 그렇네요. 이때 내 옆에 서 있던 한 젊은 여성은 자기 옆에 선 남성을 향해 얼굴을 찌푸리며 "이자가 겨우 20%라니, 부럽네."라고 중얼거렸다. 샌더스 의원은 이 모든 사정을 하나하나 곱씹듯 나열한 뒤 청중에게 미국인의 기대 수명은 경제 수준이 비슷한 나라 사람들의 기대 수명보다 낮고, 심지어 미국 저소득층의 기대 수명은 다른 부자 나라의 저소득층 기대 수명보다 훨씬 더 낮다고 말했다. 청중들은 샌더스 의원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정확히 이해했다. 트럼프나 머스크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사람들은 주먹을 치켜들고 큰소리로 야유를 보냈다.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욕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카타르시스의 향연이 느껴졌다. 초등학교 2학년 교사인 디나 개러베이 씨는 내게 말했다. (샌더스 의원은) 지금 이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말해주는 사람이죠. 힘없는 사람들의 고충을 이해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사람이에요. 그는 모든 사람의 권리를 위해 기꺼이 싸울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사실 민주당도 늘 그러지는 않거든요. 올해 56세인 개러베이 씨의 정치적 배경은 이색적이다. 레이건 대통령 시절, 공화당을 지지했던 그는 공화당이 부자들만 너무 감싼다는 생각에 공화당에서 점점 멀어졌고, 자연스레 민주당으로 끌렸다. 그러나 민주당의 정책도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만약 공약만 보고 투표한다면 녹색당을 찍겠지만, 당선 가능성을 고려하면 사표가 될 게 뻔하기 때문에 그것도 싫다고 개러베이 씨는 말했다. 이런 상황일수록 그저 누군가 나서서 무언가를 해주기를 바랄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땅이 갑자기 꺼지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개러베이 씨는 트럼프 대통령이 교육부를 폐지하려는 걸 보고 경악했다. 그가 보기에 교육부가 폐지되면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볼 것이 뻔하다. 라티노 여성이자 성소수자로서 불법 이민자를 대거 추방해 버리자고 선동하는 데도 화가 나지만, 무엇보다 자신과 같은 성소수자(LGBTQ)가 권리를 빼앗기는 게 걱정된다고 개러베이 씨는 말했다. 동시에 개러베이 씨는 미국에서 가장 심각한 수준인 라스베이거스의 주택난에 시달리고 있다. 몇 년 전 그는 내 집 장만을 위해 애리조나를 떠나 라스베이거스로 이사 왔다. 그러나 집을 알아본 뒤 자신이 마련할 수 있는 돈으로는 라스베이거스에서 도저히 집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남편과 10대 딸과 함께 이동식 임대 주택에서 월세를 내고 사는데, 일주일에 장 보는 데 드는 비용만 120달러에서 200달러로 치솟는 바람에 생활이 더 힘들어졌다. 그는 동료 교사 중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퇴근 후에 우버 기사를 하는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제가 아는 모든 교사는 집을 살 형편이 안 돼요. 돈을 벌기 위해 다들 정말 뼈 빠지게 일하지만, 그래봤자 월급은 고스란히 다 월세로 나가는걸요. 이것 말고도 샌더스 의원을 보러 나올 이유는 차고 넘쳤다. 사람들에게 왜 오늘 연설을 보러 왔는지 물을 때마다 "얼마나 오래 들어주실 수 있는데요?"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만큼 다들 할 말이 오랫동안 쌓인 듯했다. 이제 샌더스 의원은 으슥한 건물 라운지에서 기업 로비스트들이 정치인의 주머니에 돈을 찔러주는 대가로 부정한 청탁을 하는 모습을 굳이 소리 높여 지적할 필요가 없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 모든 것을 만천하에 보여줬기 때문이다. 일론 머스크는 2억 7천만 달러 넘는 돈을 선거에 쏟아부었고, 그 결과 트럼프 행정부에서 가장 힘 있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한때 화성에 인간을 보내겠다는 꿈을 꾸던 괴짜 기업인은 이제 노인과 제대한 군인, 가난한 미국인을 지켜주는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마저 말 한마디로 제거해 버릴 수 있는 막강한 힘을 손에 넣었다. 샌더스 의원은 무대 뒤에서 내게 "미국 사람 중에 이를 두고 미쳤다고 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일론 머스크의 전횡 때문에 중도 성향의 민주당 지지자들도 샌더스가 오랫동안 좌파의 관점에서 분석한 경제적인 주장에 좀 더 귀를 기울이게 됐다. 사람들은 머스크와 트럼프가 어디까지 법과 제도를 망가뜨릴지 두려워하는데, 샌더스는 오래전부터 트럼프의 권위주의적인 성향을 경고해 왔기 때문이다. 샌더스는 또한, 트럼프가 다른 건 몰라도 물가는 잡아줄 거라고 기대하고 표를 준 노동자 계급의 마음을 다시 돌리는 데도 유리하다. 샌더스 의원은 트럼프 대통령을 맹비난하면서도 민주당을 향한 공격은 자제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민주당이 민권과 여성, 성소수자의 권리를 위해 노력해 온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 다만 민주당이 서민, 중산층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를 등한시했다고 평가했다. 샌더스 의원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트럼프가 노동 계급에서 어떻게 이렇게 많은 표를 받았을까요? 노동자들이 억만장자에게 세금을 더 깎아주자는 정책에 찬성해서 그럴까요? 전혀 아니죠. 그게 아니라 민주당이 이들의 요구를 자꾸 외면하고 무시하다가 노동자들의 신망을 잃었고, 트럼프가 그 공백을 잘 공략한 겁니다. 그는 자신이 미국 의회 역사상 무소속 의원으로 가장 오래 일한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민주당은 시대에 맞춰 변화하거나 그러지 못하면 유권자들에게 버림받을 수밖에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민주당이 과연 변화할지 못할지 지켜보죠."라고 덧붙였다. 민주당에 제가 거는 희망이 있다면 이런 거예요. 민주당은 1930, 40년대 루스벨트, 트루먼 대통령이 지녔던 세계관을 되찾을 필요가 있어요. 온 정당이 오직 기업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걸 당장 멈춰야 합니다. 당이 앞장서서 변하지 않는다면, 뜻이 있는 의원들은 민주당을 박차고 나와 진보적인 의제를 펴는 무소속 의원으로 선거를 치르고, 필요할 때만 민주당과 협력하는 식으로 정치하는 편이 낫습니다. 군중 속에서 나는 33세 수영장 청소부 샘 로렐 씨를 만났다. 그는 오늘을 위해 "부자들을 먹어 치우자(Eat the rich)"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왔다. 그는 "그동안 우리 정부가 오직 상위 1%의 이익을 위해서만 일하고, 다수인 우리를 위해선 아무것도 하지 않은 데 우리가 얼마나 참아왔는지 똑똑히 보여주고 싶었다"며 연설을 보러 온 이유를 밝혔다. 샌더스 의원과 마찬가지로 로렐 씨도 트럼프 대통령의 잘못과 자신이 경제적으로 겪는 시련을 한데 묶어 현재 정치에 관한 의견을 폈다. 그는 현재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집을 따로 장만할 여력이 없어 가족이 함께 살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그는 특히 "온갖 사기를 잡는 경찰"로 추켜세운 소비자금융보호국(CFPB, Consumer Financial Protection Bureau)이 사실상 와해된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수년간 의료보험 없이 살다가 마침내 의료보험을 제공하는 회사에 취직했는데, 그사이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나이에 비해 훨씬 일찍 머리가 하얗게 셌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회보장 연금과 메디케어에도 분명 손을 댈 것이다. 로렐 씨는 대학교에 가서 교사가 되고 싶지만, 학비를 마련할 방법이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정부는 다수 서민을 위해 존재하는 거 아닌가요? 우리는 빼앗기고, 뜯기고, 정말 많은 것을 잃으면서도 참을 만큼 참았다고요. 그는 요즘 부자들의 별장에 있는 정원을 청소하고 관리하는 일을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날카롭게 바라보게 되고, 불편할 만큼 뚜렷이 느끼게 된다. 겉은 번드르르하지만, 실은 사막 위에 세운 신기루 같은 도시 라스베이거스에서 그는 부자들의 수영장에 채우는 물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데 필요한 청소 노동자로 산다. 샌더스 의원이 늘 지적하는 노동자 계급의 힘겨운 삶과 한탕주의 신기루를 좇는 사람들의 욕망이 이토록 뚜렷하게 대비되는 공간이 또 있을까? 그가 관리하는 수영장이 딸린 별장 주인 중 한 명은 유명 연예인인데, 그는 라스베이거스에서 멀리 떨어진 데 살며, 수영장 물이 새는데도 이를 고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밑 빠진 독 같은 수영장을 볼 때마다 로렐 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한다. 이건 뭐 미드 호수(Lake Mead, 옮긴이: 라스베이거스 생활용수의 수원인 호수) 물을 다 퍼다 쓰려는 것도 아니고, 대체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어요. 저는 평소에 혼자 생각에 잠기는 걸 좋아하긴 하는데, 늘 그럴 수 있는 건 부잣집 뒷마당뿐이네요. 원문: Bernie Sanders Is Tapping Into a Deep Vein of Anger in America (c) 2025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뉴스페퍼민트
* 클라이브 어빙은 지난 30년간 항공우주 분야를 취재해 온 탐사보도 전문 기자다. 일론 머스크는 오로지 한 사람에게 의존하는 사업에 어떤 심각한 단점이 있을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전기차 생산 업체인 테슬라는 한때 진보주의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지만, 머스크가 강경 우파로 돌아서면서 많은 이들에게 독을 탄 브랜드가 되어버렸고 가치가 빠르게 하락 중이다. 우주를 향한 대도약이라던 신형 스타십 역시 두 차례 실험에서 잇달아 요란하게 실패했다. 머스크 본인의 경솔한 표현을 빌리자면, 머스크의 천재 지위는 "예정에 없던 급격한 해체"를 경험 중인지도 모른다. 이런 평가를 반박할 만한 사례도 있다. 국제우주정거장에서 우주 비행사 두 명을 무사히 데려올 수 있도록 우주선을 제공한 일이다. 이들은 보잉사가 제작한 승무원 캡슐 결함으로 9개월간 우주정거장에 고립돼 있었다. 보잉사의 기나긴 악재 목록에 새로 추가될 만한 사건이었다. 머스크와 보잉의 대비는 의지력이 강하고 위험을 무릅쓰는 기업가가 회피적인 태도의 기득권 경쟁자를 대체한다는 미국 기업계의 전설적인 영웅담에 완벽히 부합한다. 표면적으로는 사실이다. 머스크의 스페이스X는 우주항공 분야에서 보잉을 제쳤다. 테슬라가 적어도 한동안은 기존의 자동차 기업들을 앞질렀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런 단발적인 성과를 제쳐두고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머스크의 혁신적인 의지력이 대중의 눈에는 기업의 자산인 만큼이나 부채가 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전면적인 재사용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는 대형 로켓 스타십의 실패에서도 드러난다. 스타십은 두 차례에 걸쳐 카리브해 상공에 불붙은 잔해를 남기며 상업용 항공기의 진로를 방해해 우주 비행사의 무사 귀환보다 더 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머스크는 스타십 실험 실패를 별것 아닌 일로 가볍게 넘기려 했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우주선 제작에 대한 머스크의 접근 방식이 근본적으로 도전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발사 시험의 목표는 달 표면에 우주 비행사를 보내려는 나사(NASA)의 아르테미스 계획에 활용될 우주선을 제작하는 것이다. 궤도로 발사만 되면 될 일이 아니라, 달에 착륙하고서 다시 연료를 채울 수 있어야 한다. 2027년이라는 목표 기한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슈퍼헤비 보조 추진 로켓을 사용하는 비행의 첫 단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최근 발사대에서 이미 사용된 추진 로켓을 회수하는 장관을 연출하면서 확인을 마친 사실이다. 문제는 스타십을 궤도로 올리는 엔진 근처에서 발생한다. 이로 인해 우주선이 중간에 폭발하게 되는데,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그리고 어마어마한 비용이 드는 재설계가 불가피하다. 스페이스X는 '원맨쇼'였던 적이 없다. 현 사장인 그윈 샷웰은 일론 머스크만큼이나 스페이스X의 성공에 기여했다. 능력 있는 엔지니어들을 고용한 것, 뛰어난 경영 능력으로 머스크의 상상력과 모험 정신에 실체를 부여한 것, 그러면서도 머스크에게 집중된 조명을 방해하지 않은 것 모두 샷웰의 성취다. 그럼에도 스타십은 머스크에게 있어 일종의 남성 호르몬 주사, 달을 넘어 화성으로 가겠다는 의지의 가장 대담한 표현이 되어버렸다. 일론 머스크의 관심이 정부효율부(DOGE)로 넘어가자, 스페이스X는 더 큰 난관에 봉착한다. 취임 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별들을 향한 우리의 명백한 운명"을 추구할 거라며, 우주 비행사가 화성에 성조기를 꽂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트럼프는 그 시기를 자신의 임기 말로 보고 있지만, 스타십의 꼬여버린 궤적을 보면 그의 야망이 공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로서는 달에 우주 비행사를 보내는 정도가 나사(NASA)가 트럼프 임기 말까지 달성할 수 있는 최대치로 보인다. 달 식민지화는 상업적인 가치도 상당한데, 중국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1969년 7월, 달은 미국의 탁월한 도전 정신을 의미하는 상징이 됐다. 인류 최초의 달 착륙과 함께 아폴로 계획은 아날로그 시대의 승리로 기록됐다. 당시 달로 간 우주선을 제작한 기업은 보잉이었다. 2014년, 나사는 보잉의 명성을 믿고 새로운 세대의 승무원 캡슐을 발주하고 동시에 스페이스X와도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2014년은 당시 보잉의 수장이었던 제임스 맥너니가 보잉을 업계 아이콘으로 만들어 준 달 탐사에 준하는 리스크를 더는 감수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해이기도 하다. 맥너니는 획기적인 신모델을 만들어내는 기존의 전략이 "이 업계에 맞지 않는 잘못된 방식"이라며,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것을 만들어내야 하는 세상은 달 탐사를 추구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보잉은 토론과 팀워크, 공동의 의사결정을 중시하는 경영 방식에서 주주에게 돈을 가능한 한 많이 돌려주는 것을 우선시하는 경영 방식으로 전환하게 된다. 비용을 절감하자, 품질이 들쭉날쭉해졌다. 신형 737 맥스 기종이 두 차례 추락 사고를 내자, 보잉은 끝내 신형 제트기의 대명사 자리마저 에어버스에 내주고 말았다. 보잉의 운명은 머스크라는 전설의 탄생에도 기여했다. 높은 위험을 감수하는 스타일의 리더가 나사의 예산과 기한에 맞춰 일관되게 안전한 제품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스페이스X는 캡슐을 궤도에 쏘아 올린 후 지구로 돌아오는 팰컨 9를 발사해 보잉이 도달하지 못한 기술을 선보이는 데도 성공했다. 스타십의 실패는 이렇게 얼핏 완벽해 보이던 전설에 그림자를 짙게 드리웠다. 스페이스X의 다음 도전은 머스크에게 훨씬 더 어려운 과제가 될 거라는 신호와도 같다. 한편, 테슬라 역시 머스크에게 여전한 골칫거리다. 테슬라는 머스크가 트럼프 행정부에 깊이 관여하기 훨씬 전부터 참신함과 추진력을 잃고 있었다. 중국은 머스크의 독창적인 컨셉에 차를 만든 사람도 실제로 그 차를 구매할 수 있도록 하는 대량 생산 모델을 접목해, 값싸고 품질 좋은 전기차를 시장에 대량으로 내놓기 시작했다. 그래도 한때는 테슬라가 BMW 등의 기업과 함께 고급 차 시장에서 자리를 차지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머스크는 이제 유럽의 극우 정당에 지지를 보내고 워싱턴에서 훼방꾼 부대를 조직하는 일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런 행보는 대중의 반발을 샀고, 머스크 제국의 다른 부문(머스크는 기밀로 분류되는 일을 포함해 수십억 달러 규모의 정부 사업을 수주했는데, 여기에는 필수적인 스타링크 위성군과 미국 정보 수집의 최전선을 담당하는 스타실드 위성이 포함된다)과 달리 테슬라는 공격에 취약한 표적이 됐다. 구매자의 후회가 정치 운동으로 전환되는 사례는 드물다. 헨리 포드 역시 1920년대, 30년대의 여타 업계 거물들과 마찬가지로 광적인 반유대주의자였지만, 머스크처럼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진 인물은 아니었다. 머스크는 전혀 다른 거물이 되기로 결심한 사람이다. 실리콘밸리가 낳은 새로운 마법의 아바타와도 같은 인물이다. 로켓과 자동차 부문이 악재를 맞이함에 따라 그가 미국 정부에 가해온 공격도 같은 운명에 처하기를 바랄 뿐이다.
* 라니아 바트리스는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활동가로, 진보적인 의제를 세우는 전략가다. 리비 렌킨스키는 이스라엘계 미국인 활동가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다양한 문화 활동을 지원하는 단체 알비(Albi)의 창립자다. 영화 "노 아더 랜드"(No Other Land)의 아카데미 최우수 다큐멘터리상 수상은 진귀한 사건이었다. 영화를 같이 만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람이 권위 있는 시상식에서 상을 받고 함께 무대에 올라 수상 소감을 발표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두 나라 영화계가 축하할 만한 영광스러운 장면이었다. 하지만 축하 행렬에 모두가 동참한 건 아니었다. "노 아더 랜드"의 오스카 수상과 이에 대한 각계의 반응은 이 영화가 기록하고 보여준 투쟁의 축소판과 같았다. 이스라엘 문화부 장관은 "노 아더 랜드"의 오스카 수상을 "영화계의 슬픈 순간"이라며 깎아내렸다. "노 아더 랜드"는 2019년부터 2023년까지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마사페르 야타(Masafer Yatta)라는 마을에서 벌어진 폭력과 강제 이주를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이스라엘 사람들인 이주민(settlers)들은 정착촌을 짓겠다며 마을에 들어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괴롭히고 폭력을 앞세워 쫓아내는 사이,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집을 차례차례 부순다. 영화는 일련의 폭력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시선에서 담아냈다. 이 영화의 감독 네 명 가운데 두 명이 쌓아가는 우정은 가히 영화 속의 작은 반전이라고 부를 만한데, 둘 중 한 명은 이스라엘 사람이고, 다른 한 명은 팔레스타인 사람이라서 그렇다. 뛰어난 서사와 무자비한 폭력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일찌감치 주목을 받았고, 지난해 베를린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성공에는 반발이 따르기 마련이다. 베를린영화제 시상식에서 무대에 오른 팔레스타인 감독 바젤 아드라(Basel ADRA)는 독일에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수출을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함께 상을 받은 이스라엘 감독 유발 아브라함(Yuval ABRAHAM)도 우리가 고향에 돌아가면 다시 불평등한 현실이 펼쳐진다고 말했다. 즉, 이스라엘 사람인 자신은 어디든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지만, 형제나 다름없는 바젤 아드라는 이동의 자유가 철저히 제약된 삶으로 돌아간다는 말이었다. 아브라함은 작심한 듯 이를 아파르트헤이트로 규정했고, 이스라엘 언론은 분노했다. 자신들이 이스라엘에 저지른 과거의 만행에 대한 사죄를 중시하는 독일 사람들도 이 말에 동요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아브라함 감독은 살해 위협을 받았고, 그의 가족은 비난의 표적이 됐으며, 성난 군중이 그의 가족이 사는 집으로 몰려가기도 했다. 즉각적인 위협은 일단 사라졌지만, 이 영화는 아직도 미국에서 스트리밍 계약이나 극장 배급 계약을 체결하지 못했다. 아카데미 시상식 무대에 오른 영화감독들은 베를린에서 했던 말보다는 발언의 수위를 낮췄다. 바젤 아드라는 "노 아더 랜드는 우리가 수십 년 동안 겪어야 했던, 지금도 겪고 있는 참혹한 현실을 담아낸 영화"라고 말했고, 유발 아브라함은 "저는 민법에 따라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누리는 정권에서 살고 있지만, 똑같은 정권이 바젤한테는 군법을 적용해 전시 상황의 적군이나 포로 대하듯 합니다. ... 저희 두 사람의 운명이 서로 얽혀있는 게 보이지 않으시나요?"라고 말했다. 둘은 팔레스타인 사람, 둘은 이스라엘 사람인 총 네 명의 영화 제작자, 감독이 황금 트로피를 들고 손을 맞잡은 채 환히 웃는 모습에 우리만큼 감동한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상을 받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영화인들은 이 지역을 오랫동안 지배해온 제로섬의 논리, 즉 상대방을 억압하고 희생시켜야만 우리가 더 안전하고 자유로워진다는 논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카데미 시상식 이튿날 이스라엘의 미키 조하르 문화부 장관은 문화부가 후원하는 이스라엘 영화진흥위원회에 편지를 보내 "노 아더 랜드"를 상영하지 말라고 독촉했다. 조하르 장관은 "노 아더 랜드는 이스라엘의 주적이 내세우는 프로파간다를 반영한 콘텐츠로, 여기에 공공기금을 지원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영화는 자신이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국가 이미지를 왜곡하고 훼손하는 내용의 영화나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공공기금 지원을 제한하는 법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이유를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제작 과정에서 공공기금을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이스라엘 정부는 영화 제작을 가로막거나 방해하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 영화는 보란 듯이 성공을 거뒀다. 이는 오히려 반대 의견을 수렴하지 않고 힘으로 찍어 누르려 한 이스라엘 정부의 방침이 효과가 없음을 방증한다. 사실 이는 이스라엘에서는 지겨울 만큼 익숙한 패턴이다. 정부 관리가 분노를 표출하면,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극우 단체와 극렬 민족주의자 인플루언서들이 곧바로 반응해 익명의 텔레그램 채널에서 목표물을 추려낸다. 곧이어 소셜미디어는 이들을 향한 마녀사냥과 폭력을 부추기는 선동적인 밈으로 넘쳐난다. 폭력을 부추기는 선동에 관해서라면 인류의 기억 속에 가장 끔찍한 역사를 간직한 나라에서 이런 일을 단순한 수사로 치부해선 안 된다. 이는 또한 이스라엘에서 진실을 말하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섬뜩한 경고이기도 하므로, 이를 바꾸기 위해 모두가 행동에 나서야 한다. 다만 이번 영화에 대한 반발은 이스라엘 쪽에서만 나오지 않았다. 지난 5일, 학계와 문화계에서 이스라엘을 보이콧하는 팔레스타인 모임은 성명을 내고, "노 아더 랜드"를 보이콧하자고 주장하진 않았지만, 부족한 점이 많다며 우려 사항을 나열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이 현재 가자 전쟁에서 벌인 만행을 자세히 규탄하지 않은 점을 지적했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노력에 관여하는" 단체로부터 제작 지원을 받은 것도 문제 삼았다.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팔레스타인 영화 제작자들을 이스라엘 동료들에게 조종당해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쓰였다고 묘사하는 건 아드라를 꼭두각시 취급하는 발언이며, 아드라의 주체적인 행동과 결단을 굴복으로 깎아내리는 것이다. 사실 그는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안에서도 특히 폭력적인 정착민들에 둘러싸인 취약한 마을 중 하나인 아투와니(At-Tuwani) 출신의 언론인이자 활동가다. 문화 기획자로서 우리는 모든 예술, 특히 영화가 관객을 교육할 뿐만 아니라,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노 아더 랜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수십 년째 일상적으로 겪어 온 폭력의 단면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평생을 이런 현실 속에서 살아온 우리는 상황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이 영화를 지지하고, 영화를 만든 사람들과 연대하는 일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젤 아드라는 평생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만큼 진정성 있으면서도 현실에 단단히 발을 디딘 관점을 보여준다. 영화에 투영된 그의 관점은 또한, 위급하면서도 절박하다. 파괴되고 사라지는 마을과 공동체를, 무엇보다 거기 사는 가족과 이웃을,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아드라의 투쟁은 이론적이거나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물리적이고 즉각적인 투쟁이다. 실제로 그는 LA에서 열린 오스카 시상식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안지구의 또 다른 팔레스타인 마을이 정착민들의 폭력에 파괴되는 영상을 인스타그램 스토리로 올렸다. 유발 아브라함의 역할도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마사페르 야타 근처에 있는 수시야라는 마을의 촌장 지하드 알나와자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함께 꾸리는 잡지 +972에 이렇게 말했다. 수년간 팔레스타인 마을을 철거하고 파괴해 온 이스라엘 군과 정착민들의 폭력에 맞서 투쟁하고, 대치하고, 그러다 체포돼 폭력과 고문을 겪고 나서 저는 분명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건 제 생각이 아니라 분명히 알게 된 사실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데, 유발 아브라함을 비롯한 이스라엘 활동가, 그리고 의식 있는 전 세계 유대인들의 연대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당국은 벌써 마사페르 야타의 땅 절반을 손아귀에 넣었을 겁니다. 유발을 포함해 수십 명의 이스라엘 사람, 유대인들이 우리와 함께 지냈습니다. 이스라엘 군인과 정착민들이 무기를 들고 마을을 부수러 쳐들어올 때마다 우리와 함께 먹고 자던 이스라엘 사람, 유대인들이 우리 편에 서서 매일 지치지 않고 함께 싸워줬습니다. 저는 모든 영화 평론가에게 시원한 에어컨 나오는 사무실을 벗어나 차를 타고 저희 마을에 와서 딱 일주일만 저희와 같이 살아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러고 나서도 과연 이 영화를 보이콧하라고 말할 수 있을지 보죠.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투명 인간처럼 대하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 넣고,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연대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겐 반역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오랫동안 펼쳐 온 정책은 중동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큰 영향을 미친다. 영화가 아카데미에서 상을 받은 다음 주에 마이애미 비치의 스티븐 메이너 시장은 "노 아더 랜드"를 상영한 예술극장을 시 정부 소유 건물에서 쫓아내겠다고 위협했다. 이스라엘을 보이콧하고, 이스라엘 방산 기업에 대한 투자를 철회하고, 전쟁 범죄를 비호하는 세력을 제재하자는 운동의 목표는 명확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해방과 자결권을 쟁취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운동 세력은 원대한 목표에 집착한 나머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양심적인 활동가들이 힘을 합쳐 만든, 이스라엘 정부를 직접적으로 비판한 예술 작품을 결과적으로 깎아내렸다. "노 아더 랜드"는 단지 영화를 넘어,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절박한 선언이다. 이제 우리는 갈림길에 서 있다. 즉, 우리의 공동체가 지금의 순간을 발판 삼아 더 많은 이들과 연대하며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이스라엘 정부나 타협 없는 보이콧, 투자 철회, 제재(BDS)를 부르짖는 세력의 주장이 우리를 분열하도록 둘 것인가의 갈림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희망은 영화를 통해 확인한 연대와 협력에 있다. "노 아더 랜드"를 만든 이들은 이 행위를 "함께하는 저항(co-resistance)"이라고 불렀다. 아주 적절한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 데이비드 브룩스는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칼럼니스트다. 몇 해 전 나는 고위급 외교관으로 일하다 나온 친구에게 정부에서 일한 경험을 통해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 있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정부에서 일하기) 전에는 정책 결정의 75%가 관계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일하고 나서 보니, 75%가 아니더라. 95%야." 큰 일은 혼자 하기가 매우 어렵다. 지도자와 국가의 역량이란 곧 가치관과 역사, 신뢰의 공유를 바탕으로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것이다. 지도자와 국가는 시대의 큰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연합을 구축한다. 이 시대의 가장 큰 과제에서도 마찬가지다. 21세기는 '중국의 세기'가 될 것인가, 아니면 또다시 '미국의 세기'가 될 것인가? 이 문제에서 중국은 여러모로 유리한 점이 있지만, 최근까지만 해도 미국에는 결정적인 한 방이 있었다. 바로 세계 전역에 미국의 친구들이 더 많다는 점이었다. 불행히도 지난 한 달 반에 걸쳐 미국은 그 관계의 상당 부분을 아주 박살을 내버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내가 상대를 배신하고 괴롭히면 상대도 나를 비난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고, 아예 처음부터 신경 쓰지도 않는 듯하다. 지난 몇 주에 걸쳐 유럽인들의 반응은 충격에서 시작해 혼란으로 넘어갔다가 혐오에 이르렀다. 유럽인들에게 지난 몇 주는 환상이 깨지고 존재론적 위협에 노출되었다는 점에서 미국인이 경험한 9.11 테러에 비교할 만하다. 유럽인들은 우방이라 여겼던 미국이 실은 깡패나 다름없는 초강대국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캐나다와 멕시코에서는 이제 미국을 적으로 삼으면 인기인이 된다. 내 생각에 트럼프는 앞으로 몇 년 안에 중국과 모종의 협정을 맺고 타이완을 우크라이나 꼴로 만들 거다. 약한 쪽을 배신하고 강한 쪽에 아첨하는 행태를 보일 것이다. 아시아 국가들도 곧 유럽처럼 미국은 배신자라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는 트럼프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이라는 나라 전체의 평판이 박살이 났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환생해서 2029년 백악관에 입성한다 해도, 4년 후 또다시 권위주의적 허무주의자를 뽑을 가능성이 있는 나라를 신뢰할 외국 지도자는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지게 될까? 나토(NATO)는 끝났다. 조 바이든은 전후 자유주의 질서를 수호하고자 4년간 공을 들였다. 기존 체제는 특정한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의 고립주의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극을 낳았고, 이후의 국제주의는 80년간 적어도 강대국끼리는 전쟁을 벌이지 않는 평화로 이어졌다. 젊은 세대에 이 서사를 들려주면 무슨 14세기 이야기라도 듣는 듯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전후 체제는 역사적 성취이지만 해당 시대의 산물이고, 지금 그리로 회귀할 수는 없다. 딘 애치슨의 유령을 되살리려는 노력은 헛된 꿈이다. 새로운 글로벌 체제를 구상해 내야 한다. 서구는 (현재로선) 끝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서구(The West)'라는 개념은 소크라테스의 진리 탐구, 렘브란트의 연민, 로크의 계몽적 자유주의, 프랜시스 베이컨의 과학적 방법론 등으로 대표되며 수 세기에 걸쳐 이어져 온 대화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유산이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자신을 위대한 '서구 프로젝트'의 정점에 있는 존재로 이해했다. 서구라는 개념은 유럽과 북미 간 모든 동맹과 교류에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의 머릿속에는 '서구'라는 개념이 없는 듯하다. 트럼프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정신적, 지적 뿌리로부터 단절시키는 중이다. 어찌 보면 1987년 제시 잭슨과 진보 활동가들이 스탠퍼드대학에서 "서구 문명은 사라져야 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시작한 프로젝트를 트럼프가 완성하고 있는 셈이다. 새로운 문명 갈등은 '강(hard)'과 '약(soft)'의 대결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트럼프가 중국과의 동맹에서 러시아를 떼어내려는 건 4차원의 체스가 아니다. 미국의 외교 정책은 이제 그저 트럼프의 호르몬이 솟구치는 방향으로 향할 뿐이다. 트럼프에게는 남성성에 대한 평생의 집착이 있다. 마가(MAGA)의 정신세계에서 블라디미르 푸틴은 '강'이고, 서유럽은 '약'으로 분류되어 있다. 일론 머스크는 '강'이고, USAID는 '약'이다. WWE는 '강'이고, 대학은 '약'이다. 장악을 위한 투쟁은 '강'이고, 동맹은 '약'이다. 유럽은 부활하거나, 박물관이 될 것이다. 유럽이 저출생, 저혁신, 저성장의 대륙, 전 세계인의 휴양지 정도로 전락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지금이 미국과의 안보 관계를 끊어내고 자체적인 힘을 다시 키워야 하는 순간임을 알고 있다. 독일은 무기를 만들기 위한 역량을 강화하는 중이다. 마리오 드라기 전 이탈리아 총리는 시장 분열이 기술 혁신을 죽이고 있다는 주장으로 유럽을 놀라게 했다. 많은 보수주의자가 유럽은 너무 세속적이고 퇴폐적이어서 회복이 어려울 거라고 확신한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독일은 진지한 국가다. 프랑스의 공무원 집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엘리트다. 영국 국민은 어려울 때일수록 믿을 만한 사람들이라는 걸 역사가 증명해 왔다. 새로운 핵확산의 시대가 온다. 미국이 안보 우산을 철수함에 따라 폴란드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국가들은 스스로 핵무장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어떤 문제가 생길까? 중국이 그 공백을 메우려 들 것이다. 미국이 우방을 배신하면, 중국은 우방을 만들려고 할 것이다. 중국의 EU 주재 특별대표는 최근 트럼프 정부의 유럽에 대한 대우를 "끔찍하다"라고 평한 바 있다. 그는 "유럽의 친구들이 이 점을 잘 생각하고 트럼프 정부의 정책과 중국의 정책을 비교해 봐야 한다"며, "그렇게 하면 중국의 외교적 접근법이 평화와 우정, 선의, 상생 협력을 강조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호소가 회의적인 사람들의 귀에 가닿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주어진 두 선택지가 모두 초강대 깡패 국가일 때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은 위험을 분산시키며 양쪽 모두와 상대해야 한다는 냉엄한 현실을 맞게 된다. 전 지구적 문화 전쟁이 온다. 세계 가치관 설문(World Values Survey)에 따르면 서유럽과 미국의 민주당 우세 지역은 점점 더 초 개인주의적 포스트모던 문화로 이행 중이며, 세계 다른 지역의 전통적인 공동체 중심 문화와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필연적으로 정치적 갈등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컬럼비아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MAGA 보수주의자들이 푸틴을 우러러보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상정한 궁극의 적과 푸틴의 적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공동의 적을 둔 세력은 결국, 동맹이자 친구가 될 수 있다. 국가적 위대함의 시대가 돌아온다.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역사학자 로버트 케이건이 지적했듯이 미국은 고립주의와 개입주의의 시대를 오갔다. 또한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 냉소주의와 이상주의, 세속주의와 종교, 비합리적 비관주의와 비합리적 낙관주의 사이를 오가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현재 이 모든 양극 중 전자의 극단에 서 있다. 트럼프의 무능은 반작용을 불러올 것이고, 이는 기회이자 재탄생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트럼프가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진실을 들을 준비가 될 것이다. 그 진실이란 바로 미국을 거대한 강탈 기계로 만들어버리면 약한 국가들이 깡패 같은 행동에 굴복함에 따라 단기적으로는 승리를 얻어낼 수 있지만, 실제로는 미국의 장기적 힘의 원천인 국내외의 다양한 관계들을 불태워 버리는 셈이라는 것이다. 원문 : It Isn't Just Trump. America's Whole Reputation Is Shot. (c) 2025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 카를로스 로자다는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칼럼니스트다. 내가 스페인어와 영어를 처음으로 섞어 쓴 것은 세 살 때였다. 당연히도 그런 일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1975년, 우리 가족은 페루에서 캘리포니아 북부로 막 이민을 온 참이었다. 우리 집안 구전 설화에 따르면 나는 부모님과 누나들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Vamos a tener todo lo sinisario(우리 필요한 거 다 있죠)?" 문제는 내가 "necesario"라는 단어를 내 멋대로 바꾸어 "sinisario"라는 정체불명의 단어를 썼다는 점이다. 가족들이 웃음을 터트리자 나는 이렇게 변명했다. "Es que yo no sé inglés(영어를 몰라서 그래요)." 가족들은 더 크게 웃었다. 왜냐하면 내가 틀린 건 영어가 아니라 스페인어였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앞으로 50년간 펼쳐질 일의 예고편이나 다름없었다. 두 언어는 내 머릿속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늘 엎치락뒤치락했다. 나는 어린 시절 페루와 미국을 오가며 자랐기 때문에 그때그때 더 필요한 언어를 쓸 수밖에 없었고, 동시에 다른 언어를 잊지 않으려고 애썼다. 영어가 더 잘 되던 시기도 있었고, 스페인어가 우위를 점한 때도 있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언제 어떤 언어가 더 중요하다고 말해줄 필요도 없었고, 어떤 언어가 "공식 언어"라고 일러줄 필요도 없었다. 어디에 있건 자연스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3월 1일 행정명령을 통해 영어를 미국의 공식 언어로 지정하면서 하나의 언어를 공유하는 것이 "통합되고 단결된 사회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행정명령은 "의사소통이 간단해지고" 효율성이 높아지면 "새로운 시민들이 아메리칸드림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취지를 설명한다. 이 부분에 관해선 내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아버지를 포함해 내가 아는 미국 내 이민자라면 누구든 바로 그 이유로 영어를 배웠기 때문이다. 어릴 때 미국에 온 나와 누나들은 비교적 쉽게 영어를 배웠고, 어머니도 페루에서부터 미국 수녀님들께 영어를 잘 배웠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 새로운 언어를 접한 아버지에게 영어는 언제나 넘어야 할 산이었다. 아버지는 그 산을 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발음이 틀려도 굴하지 않고 영어로 말하고, 크고 당당한 목소리로 노래도 불렀다. 어린 시절 나는 그런 아버지가 조금 부끄러웠지만, 이제는 그걸 부끄러워하던 내 모습이 창피하다.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어느 날 행정명령을 내려 영어를 미국의 공식 언어로 선포했다면, 아버지의 영어가 더 빨리 늘었을까? 더 큰 동기 부여가 됐을까? 그렇지 않다. 영어를 해야 미국에서 일을 하고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아버지에게 영어를 열심히 배우고 익혀야 할 이유로 이미 충분했다. 아버지는 말년에 스페인어 인구가 많은 마이애미에 사셨지만, 그때도 영어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그것이 이민자로서 자신이 미국과 맺은 계약의 일부임을 알고 계셨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영어가 효율성을 높여주고 이민자에게 더 큰 힘을 실어준다는 주장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 행정명령까지 동원해 가며 굳이 그런 주장을 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 뿐이다. 내가 10년 전 미국 시민권을 딸 때 영어 시험을 보기는 했지만, 이민자에게 영어를 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이미 시장이 충분히 주고 있다. 정부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시장보다 명확하게 그런 메시지를 전달할 수는 없다. 트럼프의 행정명령이 이렇게 불필요한 수준을 넘어 혼란과 냉소로 이어지는 것은 다음과 같은 주장 때문이다. 대통령은 하나의 공식 언어가 "모두가 공유하는 미국 문화를 꽃피우고, 국가적인 가치관을 공유하는 밑바탕이 될 것"이라고 했다. 미국의 일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언어를 포함한 다양한 문화가 아니었나? 다양한 문화의 혼합이 곧 우리가 공유하는 문화 아니었나? 그런 식이라면 특정한 요리나 하나의 음악 장르, 문학 장르가 다른 것보다 더 미국적이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나는 이민자로 어린 시절을 보낸 덕분에 세르반테스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를 스페인어로, 셰익스피어와 토니 모리슨을 영어로 읽을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두 언어를 자연스레 구사하게 된 나는 남들이 외국어를 익히듯 제3의 언어를 배워두지 않은 걸 후회하곤 한다. 우리 모두 더 많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면, 다양한 언어의 영향력을 애써 거부하지 않고 수용한다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더 풍요로워지겠는가? 우리가 "공유하는 국가적인 가치관"이라는 건 또 무엇인가? 독립선언문에 명백히 쓰여있지 않은가? 정치적 평등, 천부인권, 국민 주권은 세상 어떤 언어로 써도 같은 뜻이다.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고 해서 갑자기 행복추구권을 포기하겠는가? 스페인어를 잘 한다고 해서 영어를 배우려는 의지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다른 언어가 영어를 잠식할 거라는 우려는 미국에서 역사가 깊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도 미국의 친이민 정책과 이민자 동화 필요성에 대해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에는 단 하나의 언어만이 있을 수 있고, 그 언어는 영어다. 영어가 확고히 뿌리를 내려야 미국인다운 미국인이 자라날 수 있다. 제각각 다른 언어를 쓰는 이들이 모두 한데 섞여 사는 용광로, 하숙집 같은 곳에서는 진정한 미국인이 나오기 어렵다." 최근 미국 공동체 조사(American Community Survey)에 따르면, 오늘날 미국에서는 5세 이상 시민의 80% 가까이가 집에서 영어만 쓴다. 집에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 중에서는 스페인어 구사자가 가장 많은데,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도 60% 이상은 영어를 "매우 잘" 안다. 루스벨트가 이야기한 하숙집은 아직 먼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JD 밴스 부통령은 상원의원으로 재직하던 2023년 영어 통일법(English Language Unity Act)을 발의했다. 그러나 공식 언어의 필요성에 관한 주장을 펼치다가 의도치 않게 법안의 불필요성을 강조하는 말을 하기에 이른다. 영어가 2세기 반에 걸쳐 미국 문화의 "초석"이 되어왔으며, "이 상식적인 법안은 영어가 이 나라의 언어라는 내재적 진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법안"이라고 한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미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을 굳이 법을 만들어가면서 보존할 필요가 있을까? 이대로 가다간 물은 축축하고 태양은 뜨겁다고 선언하는 법안도 발의할 기세다. 이번 행정명령에 따르면 연방기구와 연방정부의 예산을 지원받는 기관은 앞으로 영어를 못하는 사람들에게 번역된 문서나 통역 지원을 제공할 의무가 없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지원을 금지한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정책 변화의 상징적인 의미는 매우 크다. 이민을 줄이고 (트럼프 대통령의 표현에 따르면 미국의 핏줄에 독을 타는) 이민자들을 위험한 존재로 그리고 배척하려는 현 정부의 방향과 궤를 함께하기 때문이다. 행정명령은 "영어를 배우고 자녀에게 영어를 물려준 다중언어 미국 시민들의 오랜 전통"을 추켜세우고 있지만, 다문화주의를 파괴하면서 다문화주의를 찬양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자신의 문화를 과보호하는 태도는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다는 방증이다. 트럼프 정부는 이미 미국인의 입을 단속하려 들고 있다. 멕시코만을 아메리카만으로 명명한 행정명령이나 AP통신에 대한 보복 조치를 보라. 이번 행정명령으로 트럼프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말뿐 아니라 그 말을 하는 방식까지도 단속하려 하고 있다. (대통령이 지난 4일 밤 의회 연설에서 그 두 가지 조치를 함께 언급하며 강조한 것도 놀랍지 않다.) 이민자를 2등 인간으로 대하는 대통령이 이제는 2등 언어를 만들려 하고 있다. 하지만 언어는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변하기 마련이며, 언어가 담아내는 의미는 대통령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멕시코만의 이름을 바꾼 건 그저 단순하고 호전적인 조치로 보이지만, 그 새로운 이름이 꼭 트럼프가 의도한 뜻으로 읽히리라는 보장은 없다. "아메리카만"의 "아메리카"가 대륙의 북부, 중부, 남부를 모두 아우르는 아메리카 대륙을 뜻한다면? 앞으로 "아메리카만"이 어떤 언어로건 그렇게 읽히지 않으리란 법이 있을까? 역사는 트럼프의 행정명령이 "아메리카만"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하게 될지도 모른다. 스페인어로 "El Golfo de las Américas"라고 써보니 지도에도 썩 잘 어울린다. 원문 : America Doesn't Need an Official Language (c) 2025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 에릭 제이콥스타인은 바이든 행정부에서 국무부 서반구 담당 차관보를 지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초기 새로운 관세와 비자 제한 조치를 앞세워 콜롬비아를 위협할 때 베이징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미국과 콜롬비아 사이의 위기가 고조되자, 주콜롬비아 중국 대사는 X(옛 트위터)에 목적이 뚜렷한 메시지를 올렸다. "45년간 이어진 중국과 콜롬비아 간 관계가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는 게시글이었다. 마르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이번 달 중남미 5개국 순방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서구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로 포장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트럼프의 근시안적인 행동, 조처가 잇달아 나오면서 미국이 지금껏 쌓아 온 외교적 자산은 이미 약화했고, 이 지역에서 미국의 경쟁자들, 특히 중국에 파고들 틈을 허용했다. 이런 상황을 초래한 조치로는 알루미늄과 철강에 대한 관세, 북아메리카 이웃 나라를 향한 관세 위협, 대외 원조 중단, 강제 추방 중심의 외교 정책과 터무니없는 영토 주장 등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위협과 최후통첩을 쏟아내며 주변 국가들을 밀어내는 가운데, 중국은 그 틈을 파고들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지난 25년간 중국과 라틴아메리카의 경제 관계는 놀라운 속도로 발전했다. 2000년까지만 해도 중국은 라틴아메리카의 일곱 번째 수출 시장에 불과했다. 오늘날 중국은 남미의 주요 무역 파트너가 됐다. 남미 전역에서 중국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교역국이다. 라틴아메리카 및 카리브해 지역의 대중국 수출액은 2013년 1,120억 달러에서 2023년 약 2,080억 달러로 급증했다. 동시에 중국의 조건 없는 접근법은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기반 시설 및 정치적으로 유용한 건설 프로젝트의 매력적인 자금 조달법이라는 사실이 입증됐다. 중국은 엘살바도르에서 5,400만 달러 규모의 최첨단 도서관 건설 공사, 카리브해와 중미 전역에서 크리켓 및 축구 경기장 건설 공사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안타깝게도 아프리카에서 중국이 비슷한 일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중남미에서도 현지 노동권과 환경 기준은 대개 잘 지켜지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채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미국의 오랜 우방국으로부터 원성을 들어가며 동시에 중국에 커다란 문을 열어준 셈이다. 트럼프는 멕시코와 캐나다에 2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선언한 뒤 이를 유예하긴 했지만, 이 조치는 북미 전역의 소비자들에게 피해를 줄 뿐 아니라 중국이 이 지역에서 더욱 신뢰할 수 있는 무역 상대로 자리매김할 기회를 줄 수 있다. (2023년 미국 국제개발처(USAID)와 국무부를 통한 라틴아메리카 및 카리브해 지역 지원액만 20억 달러를 웃돈) 대외 원조를 완전히 끝장내겠다는 정책은 이웃 나라에 미국은 신뢰할 수 없는 상대라는 신호를 줄 뿐 아니라 미국의 국가 안보에도 위협이다. 중앙아메리카에서 미국의 원조는 과테말라와 온두라스, 엘살바도르로부터의 불법 이민을 억제할 뿐 아니라,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에서 범죄 행위를 일삼는 MS-13과 같은 국제적인 범죄 조직을 소탕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트럼프 정부의 "미국 우선주의" 기조의 핵심은 추방 우선주의다. 라틴아메리카 출신의 이민자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일은 지금까지 트럼프 정부의 라틴아메리카 정책의 최우선 순위다. 이는 콜롬비아를 상대로 한 관세 및 비자 제한 위협을 통해 더욱 명백해졌다. 이민자들을 범죄자 취급하며 군용기에 실어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조치는 일부에서 성공적인 홍보 사례로 평가받으며, 주변국에 끊임없는 위협의 메시지를 던진다. 이는 소셜미디어에서는 눈길을 끄는 게시물이 될지 모르지만, 조 바이든 행정부의 추방 전용기(이민자 추방 용도로 설계된 이민세관단속국의 항공기) 역시 실질적으로 동일한 결과물을 냈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단기적으로는 콜롬비아와 마찬가지로 이 지역의 여러 정부가 보복을 피하고자 강제 추방 요구를 수용함에 따라 트럼프 정부가 어느 정도의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이러한 괴롭힘이 역효과를 불러와 오랜 동맹국들이 미국 외에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강화하려고 할 것이 뻔하다. 미국의 대외 원조는 늘 그 규모와 속도 면에서 필요한 수준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원조가 활발히 진행되던 시절에도 그랬다. 트럼프 대통령의 첫 임기 때 개발도상국의 민간 부문 프로젝트에 투자하기 위해 설립된 국제개발금융공사(U.S. International Development Finance Corporation)의 라틴아메리카 누적 투자액은 중국 개발은행과 기업의 투자액에 미치지 못한다. 트럼프 정부가 개발금융공사에 대한 예산을 늘리겠다고 한 보도가 긍정적일 수 있지만, 이러한 예산 증액이 미주 지역에서 미국의 국익을 증진하는 데 필요한 국제개발처 예산을 깎아, 이른바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괴는 형식이 돼선 안 된다. 트럼프 행정부와 의회는 대외 원조를 동결하고 관세를 부과할 것이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투자와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국가 안보 강화에 도움이 된다. 1823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은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유럽 열강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먼로 독트린을 발표했다. 트럼프가 취임 연설과 이후 성명을 통해 내놓은 파나마 운하 반환 요구는 먼로 독트린을 연상케 하는 팽창주의적 이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가혹한 전술은 이웃 나라를 소외시키고 먼로 대통령의 비전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트럼프 정부가 조속히 방향을 틀지 않는다면, 라틴아메리카에서 미국의 영구적인 쇠퇴를 초래하는 위험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공백을 메우려고 개입하는 건 탐욕스러운 중국이 될 것이다. 원문 : An Opening for China, Made in America (c) 2025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 데이비드 윌러스웰스는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칼럼니스트다. 전 세계적으로 2천만 명 넘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코로나19 팬데믹이 창궐한 지 5년이 지났다. 첫 확진 사례는 2019년 12월에 나왔다. 세계보건기구는 2020년 1월,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관련해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미국 정부는 3월 13일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어 3월 16일에서 27일 사이 미국 모든 주 정부가 각급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거나 휴교를 권했다. 뒤이어 일어난 일은 우리에게 여전히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바이러스에 너도나도 감염되면서 비교적 안전하게 지내던 사람들의 삶도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다음 주에는 이 세계사적 소용돌이가 결국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돌아보는 칼럼을 쓸 계획이다. 공중보건 비상사태 자체보다도 세상을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로 완전히 갈라놓은, 지금도 믿기 어렵고 되돌아간다면 여전히 상상하기 어려울 이 전염병이 우리 삶에 명백히, 또 미묘하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두루 짚어보려 한다. 하지만 오늘은 우선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 이름조차 아직 생소하던 5년 전 이맘때로 돌아가 보자. 개인적으로는 2019년 12월 31일,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트위터를 통해 처음 접했다. 의학 전문기자 헬렌 브랜스웰이 중국에서 "원인 불명의 폐렴"이 발견됐다는 경고를 담은 트윗을 올렸다. 처음에는 할리우드나 공상과학 소설을 통해 지겹게 들어 온 공중보건 위기 이야기와 이를 극복하고 최악의 상황을 모면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해 다소 뻔한 전개가 이어질 것 같았다. 당장 나만 해도 전 세계를 휩쓰는 전염병은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믿었지, 우리가 실제로 전염병이 창궐한 세상에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심지어 적어도 선진국에서는 전염병은 이미 영원히 극복한 것, 즉 과거의 문제라고 확신하기도 했다. 과학자들이 미래에 전염병이 창궐할 수 있다는 이런저런 우려를 표할 때마다 나는 속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이를 일축했다. 두 달이 흐른 3월 초의 어느 날, 오랜 친구와 저녁 식사를 했다. 친구는 자기 아버지랑 이번 전염병으로 미국인이 얼마나 죽게 될지 가벼운 내기를 했는데, 아버지는 예상 사망자를 10만 명 이하로, 자기는 10만 명이 넘을 거로 예측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친구가 물었다. "네 생각은 어때?" 나는 얼굴을 좀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사망자가 100만 명 넘을 것 같아." 친구와의 일화를 다시 떠올린 건 최근 작가이자 팟캐스트 진행자인 샘 해리스가 팬데믹 초기에 (그때까지만 해도) 친구였던 일론 머스크와 자신이 비슷한 이야기를 나눈 사실을 언급한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이 끔찍한 위기를 두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재미 삼아', '가볍게' 내기를 했는지 생각하면 소름이 돋지만, 또 그 내기를 통해 그 사람의 특징을 짐작해 볼 수 있기도 하다.) 머스크는 이 모든 것이 금방 지나가고 말 거라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2020년 3월 19일, 그는 트위터에 "지금 추세를 보면, 4월 말쯤이면 더는 감염자가 나오지 않을 거로 보인다"고 썼다. 그러면서 (당시 캘리포니아주 상원의원이던) 해리스에게 이번 전염병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를 다 더해도 3만 5천 명이 안 될 거라고 장담하기도 했다. 4월에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가 3만 5천 명이 넘자, 해리스는 머스크에게 이제 당신이 내기에서 이겼다고 봐야 하는 거냐며 그를 에둘러 저격했다. 머스크는 여기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사실 이제 와서 해리스의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니, 바로 그때가 둘 사이의 우호적인 관계는 끝나고 서로 완전히 다른 길로 갈라선 시점인 것 같다. 현재 미국의 공식 코로나19 사망자 수는 122만 명이다. 다른 질병이나 사고로 숨진 사람 가운데 코로나19 팬데믹이 없었다면 제때 치료해 살릴 수 있었을 사람까지 추산해 집계한 숫자는 150만 명으로 더 많다. 다시 말해, 코로나19가 정말 위험한 전염병이 될 수 있다고 가장 진지하게 경고하던 사람들이 결국, 현실을 가장 정확히 예측한 것이다. 여기엔 2020년 3월에 미국인이 10만 명에서 많게는 20만 명까지 사망할 수도 있다는 전망을 내놓았다가 과장이 심하다며 욕을 잔뜩 먹은 앤서니 파우치 전 국립 알레르기감염병 연구소장도 포함된다. 영국의 과학자 니얼 퍼거슨도 비슷한 예측을 했는데, 퍼거슨의 임페리얼 칼리지 예측 모델은 미국인의 80% 이상이 코로나19에 걸리고, 220만 명 넘는 사망자가 나올 거로 예측했다. 다행히 전체 인구의 80%가 감염되기 한참 전에 대량으로 백신 접종이 이뤄져 사망자는 덜했지만, 2020년 3월만 해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백악관의 코로나19 대응을 돕던 데보라 버크스는 퍼거슨의 예측 모델이 내놓은 수치에 비하면, 정부가 내놓은 자가격리나 사업장 폐쇄, 재택근무, 여행 제한 같은 대책 덕분에 더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5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코로나19가 준 사망자와 질병의 상처가 남아 있다. 그러나 지난 팬데믹과 그에 대한 대응을 자세히 살펴보자고 주장했다가는 굳이 왜 또 상처를 들춰내느냐는 핀잔을 듣기 십상이다. 이제 미국 정부의 보건 당국은 코로나19의 피해는 과장됐다고 생각하는 백신 회의론자가 이끌고 있다. 하지만 우파들의 인식이 문제의 전부라고 보긴 어렵다. 이미 많은 주 정부가 미래의 전염병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주 보건 당국의 역량을 약화했고, 심지어 뉴욕주 같은 민주당 지지 성향이 강한 주에서도 마스크 착용을 의무로 명령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 통과됐다. 누구나 팬데믹 대응 방식에 불만을 품을 수 있다. 그 가운데 상당 부분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은 이미 수없이 억눌리고 부정되고 뒤틀린 끝에 누군가 코로나19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을 바꿔 말해도 이제는 그저 무덤덤하게 넘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난달 조 로건 쇼에 출연한 우디 해럴슨은 파우치 박사를 악마라고 불렀다. 또 지난해 같은 쇼에서 조 로건은 토니 힌치클리프와 나란히 앉아서 백신의 후유증, 부작용과 미국 사회 전체의 사망률 증가를 아무렇지 않게 연관 지었다. 이런 문제의 발언을 접하고도 별로 놀라지도 않는 내 모습이 사실 더 걱정스럽다.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면, 그들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되는 억지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그런 터무니없는 음모론을 공유하며 시시덕거릴 수 있는 이유가 백신 덕분이다.) 미국보다 백신 접종률이 훨씬 높아 거의 모든 국민이 빠르게 백신 접종을 완료한 영국 같은 나라는 훨씬 일찍 팬데믹으로 인한 비상사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 내가 2년 전 칼럼을 통해 지적했듯 전체 사망자 추이는 코로나19 확진자 추세와 긴밀히 연관돼 있다. 확진자 숫자가 늘어나면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도 늘어나고, 환자가 줄면 자연히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도 주는데, 그렇다고 정확한 사망 원인을 진단하지 못한 죽음의 원인이 코로나19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이라고 막연하게 예측하는 건 솔직하지 못한 태도다. 미국의 반대론자 가운데는 스웨덴의 사례를 아직 언급하며 미국도 덜 엄격하게 방역 대책을 펼 수 있었다는 주장을 되풀이한다. 하지만 스웨덴의 코로나19 방역 정책을 설계해 이른바 스웨덴 예외주의를 전 세계에 각인시킨 장본인이 벌써 5년째 스웨덴의 정책은 사실 다른 나라의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강조하고 있다. 팬데믹에 대한 대응은 완벽하지 않았다. 하지만 팬데믹은 실제로 일어났고, 정말 가혹했다. 무엇보다도 팬데믹은 우리의 생물학적, 사회적, 정치적 취약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리고 비상사태가 끝나자, 미국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수많은 사망자와 질병의 심각성에 대한 이야기는 점점 쉬쉬하고, 온 사회가 너무 민감했다거나 보건 정책이 과도했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어느덧 지난 팬데믹이 준 가장 큰 교훈으로 미생물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도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한다는 점을 꼽는 사람이 꽤 많아졌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의 진짜 후유증과 여파는 훨씬 더 광범위하고 미묘했다. 우리는 전염병과 그로 인한 죽음이 만연한 상태에서 온라인 공간에 갇혀 고립된 채 두려움에 떨며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절실히 느꼈다. 우리는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사라지거나 산산조각 난 세상을 살아내야 했다. 우리가 아무리 일상을 회복하기를 갈망하고 이제 다 끝났다고 되뇐들 끔찍했던 기억을 온전히 극복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팬데믹 초기 아주 비관적인 축에 드는 전망치가 내놓은 사망자만큼이 실제로 목숨을 잃었다. 그마저도 코로나19 초기에 보여준 놀라운 연대 의식이나 기적에 가까운 백신 개발 등 생명의학 분야의 혁신이 없었다면, 상황은 얼마든지 더 나빠졌을 거다. 어쨌든 150만 명을 잃은 채 5주기를 맞는 미국은 지쳐있고, 분노에 차 있으며, 불신과 착각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힘겨운 시련 속에서 다시 만들어진 세계에 살고 있다. 지금이 어떻게 다른 세계인지는 다음 주 칼럼에서 더 자세히 짚어보도록 하겠다. 원문 : The Covid Alarmists Were Closer to the Truth Than Anyone Else (c) 2025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 데이비드 프렌치는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칼럼니스트다. 국방부의 고위 군 지휘관 여럿을 느닷없이 해임한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에는 정상적인 면이나 용인할 수 있는 구석이 전혀 없다. 미군의 신뢰성과 정통성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행위다. 대통령이 장군을 해임하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는 말이 아니다. 때로는 필요한 일이고, 현명한 결정일 때도 있다. 에이브럼 링컨 대통령이 율리시스 그랜트를 북군 사령관에 앉히기 전까지 성과가 부족했던 사령관들을 잇달아 해임했을 때처럼 말이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도 한국전쟁이 가장 위험했던 시기에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자신의 명령을 거역하자 그를 해임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첫 임기 초반, 아프가니스탄 주둔군 사령관인 데이비드 맥키어넌 장군을 해임했고, 그 후임인 스탠리 맥크리스털 장군 휘하의 주요 인사가 롤링스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에게 공개적으로 무례한 태도를 보이자, 맥크리스털 장군마저 해임했다. 위에 언급한 해임 사례에는 모두 명백한 이유가 있었다. 가장 명확하고도 흔한 이유는 전장에서의 성과 부족 또는 항명이었다. 그러나 지난달 21일 국방부에서 일어난 일은 전혀 달랐다. 트럼프 행정부는 찰스 Q. 브라운 주니어 합참의장, 리사 프란체티 해군참모총장, 제임스 슬라이프 공군참모차장을 해임했다. 가장 불길한 것은 육, 해, 공군의 최고 법률 책임자들까지 무더기로 해임된 점이다. 이들 가운데 명령을 거부하거나 실패한 전쟁을 지휘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브라운 장군의 가장 큰 죄는 군대 내 다양성 확대 노력을 지지한 것이었다. 일례로 브라운은 조지 플로이드 씨가 경찰에 살해된 뒤 흑인 공군 장교로서 자신의 경험을 담은 4분짜리 영상을 촬영해 공개했다. 당시 폭스에서 뉴스 프로그램을 진행하다가 이번에 국방장관이 된 피트 헥세스는 브라운이 피부색 덕분에 합참의장에 오른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헥세스 장관은 오랫동안 군 법무관이라는 자리를 경멸해 왔다. 그는 2024년에 낸 저서 "전사들에 대한 전쟁(The War on Warriors)"에서 군 법무관들을 "무능하고 게으른 놈들(jackoffs)"로 비하하며, 지나치게 제한적인 교전 수칙과 미군이 전쟁범죄로 기소되는 게 군 법무관 탓이라고 비난했다. 트럼프의 이례적인 해임 조치는 이례적인 임명으로 이어졌다. 대통령은 브라운 장군의 후임으로 댄 '레이진' 케인 장군을 합참의장으로 지명했다. 케인은 은퇴한 공군 중장으로 중동 지역을 담당하는 중부사령부와 같은 주요 전투 사령부를 지휘해 본 경험이 없고, 주요 직책을 맡아본 적도 없다. 트럼프는 이전부터 케인 장군을 높이 평가해 왔다. 그는 케인이 첫 임기 때 자신에게 "ISIS와의 싸움을 단 일주일 만에 끝낼 수 있다"고 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케인이 트럼프를 "사랑"하며 트럼프를 위해서는 "사람도 죽일 수 있다"고 말했고, 자신 앞에서 MAGA 모자를 쓰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트럼프의 주장과는 다른 이야기들도 있다. CNN 보도에 따르면 케인 장군의 전 동료는 그를 겸손하고 청렴한 인물로 묘사했다. 해당 보도는 "케인과 함께 복무한 군 관계자"를 인용해 케인이 "MAGA 모자를 갖고 있지 않으며 쓴 적도 없다"고 전했다. 그러나 케인의 개인적인 면모와 관계없이 트럼프의 이번 임명은 그가 대통령으로서 반복해 온 행위와 그 패턴이 완벽히 일치한다. 더 유능한 인사를 해임하고 자격이 부족한 이례적인 인물을 후임으로 임명한 다음 "D.E.I.(다양성, 형평성, 포용성)"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하는 패턴이다. 문제는 단순히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로 자리가 채워지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트럼프가 고위급 장성들을 해임하고 자신이 충성파로 여기는 인물들로 그 자리를 채우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트럼프 1기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당시 트럼프의 가장 위험하고 잔인한 충동을 적극적으로 저지한 것은 바로 군의 고위급 장교들이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제임스 매티스 장군이 국방장관직에서 물러난 것은 트럼프가 시리아 북부에서 쿠르드 동맹군을 버리고 성급히 철수하라고 명령한 데 대한 반발이었다. 이후 러시아 용병들은 미군이 버리고 간 기지를 점령하고, 철수 중인 미군을 조롱하는 영상을 올렸다. 매티스 장관에 이어 국방장관이 된 마크 에스퍼 역시 2020년 트럼프가 내란법(Resurrection Act)을 발동해 미국 각지의 질서 유지에 군대를 동원하려 하자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대통령은 격노했다. 에스퍼는 백악관 밖에서 시위를 벌이던 시위대에 대한 발포를 요구한 트럼프의 명령을 거부하기도 했다. 에스퍼 전 국방장관은 2020년 6월 대통령 집무실에서 트럼프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시위대들) 그냥 쏴버리면 안 되나? 다리나 뭐 그런 델 쏘면 되잖아?" 트럼프는 국경을 넘어오는 비무장 이민자들을 향해 발포하자는 제안도 여러 차례 했다. 미국에 망명을 신청하는 이들을 침략자로 취급한 것이다. 트럼프는 마크 밀리 전 합참의장에 대해서도 특별한 적개심을 품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밀리는 트럼프 본인이 첫 임기 때 직접 합참의장으로 지명한 인물이다. '밀리의 죄'는 워싱턴 D.C. 라파예트 광장에 모인 시위대를 연방 경찰이 폭력적으로 진압한 직후 한 성공회 교회에서 군복을 입은 채 트럼프와 사진에 찍힌 점을 사과한 일이었다. 당시 트럼프는 밀리와 에스퍼를 대동한 채 공원을 가로질러 교회로 향했다. 2024년 대선 선거운동 기간 트럼프는 "밀리는 사형에 처해도 싸다"고 이야기했다. 죄목은 자신의 첫 임기가 끝나갈 무렵 밀리가 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인 리쭤청과 두 차례 통화했다는 것이었다. 밀리가 리쭤청에게 처음 전화를 건 것은 미국이 핵보유국인 중국을 공격할 계획이 없다는 점을 확실히 일러두기 위해서였다. 당시 중국이 미국의 공격을 우려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통화는 2021년 1월 6일에 있었는데, 미국의 상황이 안정적임을 중국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당시 밀리는 리쭤청에게 미국이 "100% 안정적"이라고 전했다. 고위급 군 장교들은 트럼프가 첫 임기 말에 내린 무모한 명령에도 반기를 들었다. 임기 전 아프가니스탄과 소말리아에서 완전 철수, 독일에서 미군 완전 철수를 지시했던 명령이 그렇다. 트럼프의 이런 명령은 군 수뇌부뿐 아니라 트럼프 본인이 직접 임명한 국가안보보좌관을 비롯한 행정부 인사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트럼프는 지시를 철회했고 갑작스러운 군 철수는 무산됐다. 여기서 잠시 한발 물러서서 각 사건을 돌아보자. 군 전문가들은 미국이 전 세계의 동맹국들을 저버리는 행위를 나서서 저지했고, 군을 동원해 민간인에게 발포하는 사태를 막아냈으며, 정치적 홍보를 위한 사진 촬영에 군 지도부를 동원하는 건 옳지 않다며 반기를 들었다. 대통령에게 항명한 것이 아니라 조언을 한 것이지만, 좋게 돌려 말하자면 대통령의 마음에 들지 않는 조언을 했던 것이다. 물론 군의 행위가 매번 적절했던 것은 아니었다. 엑시오스의 조너선 스완과 재커리 바수가 2021년에 보도한 대로, 시리아 주둔 미군 병력을 실제보다 적게 보고하는 등 트럼프를 "고의로 속인" 국방부 관계자들도 있었다. 해당 보도에 따르면 당시 트럼프의 시리아 특사였던 짐 제프리는 "우리는 늘 속임수를 써서 우리 병력 규모가 실제로 어느 정도인지 지도부가 알 수 없게 꾸몄다"고 말했다. 이는 명백히 부적절한 불복종에 해당하며, 이러한 기만에 가담한 이들은 해임되어 마땅하다. 그러나 트럼프가 지난주에 해임한 고위 군 장교들이 그런 행위에 가담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트럼프의 군 법무관 해임 조치를 살펴보면 속내가 명확히 드러난다. 나는 육군 예비군 소속 군 법무관으로 복무했고, 2007년 이른바 '서지(Surge) 작전'으로 불린 이라크 안정화 작전 때 파병되기도 했다. 또 북한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2010년 '키 리졸브(Key Resolve)' 한미 연합훈련 기간에는 한국에 배치된 경험도 있다. 나는 군에서 법무관들이 수행하는 역할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지휘관에게 법률적인 조언을 제공하는 참모로서, 전투에서 군을 지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법적 기준은 전투 작전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병사들이 사용할 전술에서부터 지휘관이 배치할 무기, 포로를 대우하는 방식까지 법률은 수많은 일에 적용된다. 군 법무관을 해임한다고 해서 법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지휘관이 제대로 된 법률 조언을 받지 못하게 될 수 있다. 군 소속 법률가들이 정치 지도자의 눈치를 보느라 솔직하고 객관적인 법률 조언을 못 한다면 미군이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은 급격히 높아진다. 잔인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군이 곧 더 강한 군이 되는 건 아니다.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벌어진 미군의 포로 학대는 오히려 미국의 전쟁 수행 능력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무자비한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우리 군을 위하는 길도 아니다.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군의 도덕성이 떨어지면 우리 병사들의 영혼에도 상처가 남는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파병 시절 가장 끔찍했던 순간 중 하나인데, 한 젊은 병사가 빠른 속도로 검문소를 향해 돌진해 오는 트럭을 향해 발포했다. 당시 우리 첩보부는 차량용 사제 폭탄을 실은 트럭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는데, 트럭의 모양이 비슷하기도 했다. 트럭이 정지 명령에도 멈추지 않자, 병사는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운전대를 잡고 있던 사람은 알카에다가 아니었다. 운전자는 여섯 아이의 아버지로, 시장에 양을 팔러 가는 길이었다. 우리 기지를 폭파하러 온 사람이 아니었고, 그저 실수로 길을 잃은 것뿐이었다. 눈 사이에 총알을 맞은 운전자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트럭은 길옆 배수로로 굴러떨어졌고 싣고 가던 양은 모두 죽어서 재산 가치를 잃었다. 조수석에 타고 있던 운전자의 친구도 다쳤다. 나는 총을 쏜 병사를 위로하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는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따지고 보면 교전 수칙을 완벽히 따른 그에게는 잘못이 없지만, 죄 없는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고통은 어마어마하다. 규칙은 불완전하지만, 이런 고통으로부터 군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명예를 지키면서 싸울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진정한 군인 정신은 무고한 이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트럼프는 주변을 아첨꾼들로만 채우고 있다. 이는 어떤 상황에서든 매우 위험하지만, 군에서는 특히 더 위험하다. 트럼프는 지구상에 존재했던 군 가운데 가장 강력한 군대의 통수권을 쥐고 있다. 군이 트럼프 1기 때 대통령의 본능적 충동에 즉각적으로 따랐다면, 우리는 끔찍한 장면을 목도했을 것이다. 군대가 시위대에 총을 쏘고, 미국 각지의 도시들이 군에 점령되고, 국경에서는 유혈 사태가, 해외에서는 미군이 철수하면서 발생한 힘의 공백으로 인해 온갖 참사가 일어났을 것이다. 군은 대통령의 합법적인 명령을 따를 의무가 있다. 그저 모든 명령에 경례하고 "예, 알겠습니다"를 외칠 일이 아니며, 명령이 비합리적이라고 판단되면 전문적인 군사적 조언을 제공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미군의 문화다. 지휘관이 실수하고 있다고 생각되면 예의를 갖춰 반론을 제기하는 부하들을 여럿 보았다. 훌륭한 지휘관 중에서 부하가 솔직하게 의견을 낼 때 그것을 환영하지 않는 이는 없었다. 최고의 지휘관들은 오히려 부하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구한다. 솔직한 조언을 제공하는 것은 미군 문화의 근간이다. 러시아군의 문화는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 트럼프가 두 번째 임기에서 보여준 모습을 요약해 보면, 그것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가 아니라 '미국을 러시아로 만들자'에 가깝다. 러시아군은 잔혹할 뿐 아니라 맹목적으로 복종한다. 지금 우리 대통령이 원하는 군대가 바로 그런 군대라는 점이 걱정스럽다. 원문 : Trump's Decision to Fire the JAG Generals Gives the Game Away (c) 2025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 브렛 스티븐스는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칼럼니스트다. 지난 2007년 봄, 나는 체코 프라하에 있는 체르닌 궁전 정원 벤치에 앉아 바츨라프 하벨을 인터뷰했다. 극작가이자 체코 대통령을 지냈던 하벨은 이라크 전쟁에 대한 자신의 의견 변화, 자유가 없는 국가에서 예술의 역할, 정치를 향한 집착과 무관심이 낳을 수 있는 위험, 담배를 끊은 지 11년이 지나도 여전히 참기 어려운 흡연 욕구 등에 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특히 국제 외교 문제에서 진실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저는 어떤 정치 지도자와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만 여기서 중요한 전제는 항상 진실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거죠"라고 말했다. 이어 블라디미르 푸틴 - 하벨은 그를 "라스(Ras)푸틴"이라고 칭했다 - 에 관해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저는 사실 그 사람(푸틴)이 점점 더 의심스러워요. 우리가 그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분명하게 말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푸틴에 대한 하벨의 평가 이후 많은 일이 있었다. 언론인 안나 폴리트코브스카야와 저명한 비평가 알렉산더 리트비넨코가 살해됐고, 러시아는 조지아를 침공하고 크름반도를 무력으로 점령했다. 말레이시아 항공 비행기가 격추됐고, 야당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는 정권의 독살 시도를 가까스로 피해 갔지만, 감옥에 갇혀 있다가 옥사했다. 또 전쟁을 일으킨 뒤에는 부차 학살과 마리우폴의 잔혹한 소거 작전도 있었다. 미국이 이번 주 UN에서 역사상 가장 추악한 투표를 한 뒤 나는 푸틴 대통령이 저지른 모든 일보다도 바츨라프 하벨이 18년 전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먼저 떠올렸다. 지난 24일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향해 무도한 침공을 개시한 지 3년째 되는 날이었다. 이날에 맞춰 우크라이나 정부는 "포괄적이고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는 정의로운 평화"의 기초로서 러시아가 군대를 철수하고 전쟁범죄에 대해 책임질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UN 총회에 제출했다. 93개국이 이 결의안에 찬성했다. 중국을 포함한 65개 나라는 기권했다. 결의안에 반대한 18개국은 러시아, 북한, 니카라과, 벨라루스, 적도기니 등이었는데, 이스라엘과 미국도 이 욕지기 나는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어 미국은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누가 이 전쟁을 시작했는지에 대한 언급을 쏙 빼놓고, 막연하게 전쟁 종식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따로 상정했다. 안보리 이사국 15개국 가운데 영국, 프랑스를 포함한 5개국이 기권하면서 결의안은 찬성 10, 반대 0으로 통과됐다. 러시아를 꾸짖고 전쟁 책임을 묻는 것이 외교적 해결을 가져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현실주의적 판단이 작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좀 더 넓은 차원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푸틴을 다시 서방으로 끌어당기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럼으로써 푸틴이 중국의 시진핑과 맺은 종속적인 협력 관계에 제동을 걸려 한다는 것이다. 외교 정책 전문가들은 이를 "리버스 닉슨(Reverse Nixon)" 전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닉슨 대통령이 당시 중국과 화해 무드를 조성하며 중국을 소련의 궤도 밖으로 끌어내려고 폈던 것과 기제는 같은데, 중국과 러시아(구소련)만 위치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건 지금의 러시아가 중국과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됐고, 트럼프 행정부가 러시아 앞에 서면 작아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지금의 러시아는 1970년대 중국과 다르다. 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으로 스스로 사회를 거대한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뜨렸고, 중소 분쟁으로 긴장이 고조돼 소련과 전면전까지 각오하던, 여러모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하벨이라면 더 깊은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했을 것이다. 하벨은 1978년에 쓴 "힘없는 자의 힘"이란 제목의 에세이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같은 공산주의 정권이 사회를 통제하는 방식에 관해 설명했다. 그저 무력의 위협으로만 되는 게 아니고, 심지어 무력은 가장 중요한 요인도 아니었다. 오히려 더 중요한 역할을 한 건 서로 뒷받침하는 "일련의" 구호들이었다. 사람들은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구호를 비판 없이 받아들였다. 심지어 시간이 흐른 뒤 이 구호들이 역사를 터무니없이 왜곡하고 명백한 거짓말로 가득 찼다는 걸 깨닫고 나서도 구호를 폐기하는 대신 거짓으로 쌓아 올린 구호 속 세계에 스스로 복종했다. 푸틴은 정치 이력 초기에 이런 억압적인 기제를 집행하는 일을 맡았다. 그가 권좌에 머문 지난 25년간 러시아는 온통 거짓뿐인 평행우주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푸틴의 독재는 "주권 민주주의"로 미화됐고, 푸틴에 대한 정치적 반대에는 "테러"라는 딱지가 붙었다.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대통령은 "네오 나치"가 됐고, 러시아 사람들은 80년 만에 유럽에서 일어난 가장 커다란 전쟁조차 '전쟁'이라고 부르지 못했다. 푸틴이 우크라이나 침공에 "특별군사작전"이란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전쟁을 일으킨 게 아니라, 끝없이 영토를 확장하려는 나토(NATO)의 야욕을 저지하고자 테러리스트를 처단하는 군사 작전을 벌였을 뿐이다. 푸틴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러시아 안에 '거짓으로 가득한 평행우주'를 쌓아 올릴 수 있었다. 조지 W. 부시부터 앙겔라 메르켈에 이르기까지 많은 서방 세계 지도자들은 푸틴이 벌이는 짓을 애써 못 본 척했다. 푸틴이 잘못하더라도 외교적인 예의를 차리며 눈을 감아주고 문제 삼지 않았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는 아예 차원이 다른, 사실상 공범이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푸틴의 기만적인 작전에 힘을 보태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위해 했던 도덕적, 역사적 왜곡에 전격 동조하고 나섰다. 지금 미국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공정한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지 않다. 대신 미국을 하루아침에 러시아가 저지른 전쟁범죄 또는 최소한 범죄를 정당화하는 거짓말에 동조하는 공범으로 만들었다. 닉슨 대통령은 최소한 중국을 끌어내 우리 편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 노력은 30년 가까이 이어졌다. 반대로 트럼프는 동맹국을 배신하고 나토를 내팽개친 채 미국을 러시아 쪽으로 갖다 바쳤다. 이쯤 되면 푸틴이 총애하는 충견이라고 할 수 있는 터커 칼슨이 국무부 장관이 되는 편이 더 나았을지 모른다. 하벨은 "힘없는 자의 힘"에서 독재정권이 무너지는 장면을 가슴 뭉클하게 묘사한다. 용감한 시민 몇 명이 "진실 속에서 살기"로 결심할 때 그들의 "자유는 구체적인 의미를 갖게 되고", 독재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허울뿐인 선거나 정권이 만들어낸 허구에 동조하기를 거부하는 시민의 용기 있는 행동은 처음에는 독재정권의 억압에 가로막힌다. 어느 정도 대가를 치를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독재정권이 만든 거짓된 일련의 구호들은 점차, 그러다 갑자기 와르르 무너지게 된다. 하벨이 정확히 예견한 대로 공산주의와 베를린 장벽이 11년 뒤에 무너진 것이 바로 그 예다. 트럼프 행정부는 얼마든지 UN 투표를 통해 러시아와 러시아의 잘못을 규탄하는 진실의 편에 설 수 있었다. 전임 정부가 해왔던 대로 하면 되는, 어렵지 않은 길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푸틴의 거짓으로 쌓아 올린 평행우주를 거짓이라 적시하고 해체하는 대신 이를 그대로 두고 오히려 더 공고히 하는 쪽을 선택했다. 이는 앞으로 오랫동안 미국을 괴롭히고 또 수치스럽게 만드는 선택이 될 것이다. 원문 : America's Most Shameful Vote Ever at the U.N. (c) 2025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 니콜 겔리너스는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칼럼니스트다. 일론 머스크가 '정부효율부(DOGE, Department of Government Efficiency)'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어떤 단어를 쓰는지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선 부처명에 사용된 단어 네 개 중 세 개가 의도적으로 착각을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DOGE는 부처(department)가 아니며, 정부(government)의 효율(efficiency)에 초점을 두는 곳도 아니다. 테크 업계가 줄곧 진실이라고 주장했지만, 알고 보니 진실이 아니었던 것들이 있다. 우버는 차량 '공유(sharing)'를 앞세웠다. 나눠 쓰는 것에 반대할 사람이 어딨겠는가? 우버가 앞세운 이 개념에 미디어는 물론 미국 전역, 나아가 전 세계 도시 및 국가 규제당국은 '차량 공유'가 실제로는 수십 년에 걸쳐 승객의 안전과 교통 체증 등 다양한 측면을 고려해 만들어진 법과 규제를 피해 가기 위한 주문형 택시 서비스라는 사실을 간과하게 됐다. 에어비앤비는 '손님(guest)'을 집에 '초대(hosting)'한다는 컨셉을 내세워 당국의 감시망을 피해 갔다. 실제로는 세계 여러 도시의 주택 공급분의 상당량이 실질적인 호텔방, 그것도 제대로 된 규제를 받지 않는 호텔방으로 둔갑해버렸다. 언어의 독창적인 사용과 오용이 빅테크 기업의 여러 성공 사례를 가능케 한 셈이다. 이제 머스크의 '부처'가 취하는 조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조차 이런 함정이 빠지고 있다. 우선 '부처'라는 단어를 살펴보자. 머스크의 DOGE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모호한 표현이다. 그러나 워싱턴에서 '부처'라는 단어는 매우 구체적인 의미를 갖는다. 의회가 만든 정부 기관으로, 상원의 공개 청문회를 거쳐 임명된 사람을 수장으로 두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와 트럼프의 법률 고문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DOGE라는 '부처'를 탄생시킨 행정명령의 세부 조항을 잘 살펴보면 DOGE는 기존 기관인 '미국 디지털 서비스(United States Digital Service)'가 간판을 바꿔 단 기관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DOGE에 '부처(department)'라는 이름을 달아주는 것은 이 기관에 실재하지 않는 무게를 부여한다. 둘째, '정부 효율'이라는 개념을 보자. '차량 공유'나 '손님 초대'처럼 트집 잡기 어려운 말이다. '효율'이라는 단어는 초당적이고 중립적이다. 더 낮은 비용으로 더 많은 일을 잘하겠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딨겠는가? 문제는 DOGE가 효율성에 집중하는 기관이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 국제개발처(USAID)처럼 의회가 만들고 자금을 지원하는 기관을 방해(disrupt)하는 것은 그 기관의 효율을 높이는 거라고 볼 수 없다. 사실 '방해(disrupt)'라는, 테크 업계가 좋아하는 이 단어야말로 DOGE가 USAID에게 한 짓을 설명하는 데 적격이다. '폐쇄(shut down)'나 '폐지(abolish)'와는 다르다. 트럼프 대통령은 애초에 국제개발처나 소비자금융보호국(CFPB, Consumer Financial Protection Bureau) 같은 기관을 폐지할 수 없다. 그 권한은 의회에만 있다. DOGE의 행태를 보면 머스크, 또는 머스크의 법률 자문팀은 그런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미국 국제개발처와 소비자금융보호국 모두 의회의 승인을 받았지만, 설립 과정에서 발생한 모순이 얼마든지 악용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운영되고 있다. 의회는 USAID를 "독립적인" 기관인 동시에 "국무부 소속"으로 정의하고 있고, 소비자금융보호국도 의회 세출에 의존하는 대신 연방준비은행에 자금을 요청해야 하는 이상한 자금 조달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 모든 말장난과 세부적인 내용은 모두 중요하다. 머스크가 트럼프와 의회로부터 정치적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교묘하게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여전히 기존의 방식대로 돌아가고 있다. 이른바 '테크 브로(tech bros)'들은 정부에 자금을 지원할 수도, 자금을 끊을 수도 없고, 정부 부처를 신설하거나 폐지할 수도 없다. 그런 권한을 갖고 있는 것은 오직 의회뿐이다. 진짜 위기의 원인 역시 그대로다. 진짜 위기는 일론 머스크나 DOGE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트럼프의 노예가 되어 미국 정부가 필요로 하는 정상적인 견제와 균형을 제공하지 못하는 의회에서 온다. 원문 : Pay Attention to the Words Elon Musk Uses With DOGE (c) 2025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사진 : 게티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