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 에밀리 오스터는 임신과 출산, 육아에 관한 책 “Expecting Better”와 “Cribsheet”의 저자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육아 컨설팅 회사 패런트 데이터의 창업자다.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가 이번 달, 트럼프 2기 행정부는 공중 수돗물에서 불소를 빼도록 권고하겠다고 밝혔다. 불소가 안전하지 못한 물질임을 시사하는 이 발언에 많은 공중보건 전문가가 즉시 반과학적인 거짓 정보라며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나 불소에 대해 우려하는 모든 이를 음모론자로 몰아가는 건 위험하다. 수돗물에서 불소를 빼자는 주장이 옳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빼서는 안 된다) 불소가 매우 복잡한 주제인 만큼 (전문가나 정부 당국이 종종 그렇듯) 그 복잡함을 그냥 얼버무리고 넘어가면 많은 이들이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공중보건 당국은 시민들에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알려주지만, 자세한 이유나, 왜 다른 데서는 정부 권고안과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선순위를 제대로 정해주지 못하는 경우도 잦다. 그러니 메시지를 받는 쪽에서는 다양한 사안에 대한 권고가 모두 엇비슷한 신뢰도와 시급성을 가진 것처럼 느껴진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중 하나가 과장되었다고 여길 때, 다른 모든 권고에 대한 신뢰도로 급락해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공중보건 분야에서 대중의 관심을 받는 세 가지 대표적인 주제, 즉 홍역 백신, 생우유, 불소 수돗물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모두 공중보건 당국의 권고와 케네디를 비롯한 회의론자 무리가 서로 매우 다른 주장을 펴는 주제다. 양쪽 메시지의 차이점은 근거의 강도와 복잡성이다. 홍역 백신은 수십 년에 걸쳐 안전성 데이터를 쌓아왔고 매일 같이 생명을 구하고 있다. 홍역 백신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일으킨다는 우려는 신뢰할 수 있는 대량의 데이터를 통해 반박된 바 있다. 홍역은 전염성이 매우 높아, 대규모 접종 없이는 영아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감염 위험에 노출되고 일부는 사망에 이르게 된다. 생우유 문제는 더욱 복잡하다. 생우유는 살균 우유보다 질병을 일으킬 위험이 크다. 살균 과정을 통해 병원균을 죽이면 우유는 더욱 안전해진다. 오랜 기간에 걸쳐 수송이나 보관을 해야 할 때에는 더욱 그렇다. 1900년대 초에는 생우유가 결핵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생 유제품이 살균 유제품에 비해 질병을 유발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발병 건수는 적다. 미국에서 생우유를 섭취하는 사람은 약 1,100만 명이지만, 2017년 추산에 따르면 생우유로 인한 질병 사례는 연평균 760건에 불과하다. 2023년과 2024년 초에는 한 농장에서 생산된 생우유가 살모넬라 식중독을 일으킨 원인으로 지목됐지만, 비슷한 시기 멜론으로 인한 비슷한 식중독 발생에 비하면 건수가 적었다. 그러니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생우유가 건강에 좋다는 근거는 별로 없다. 다만 전반적인 그림을 보면 생우유에는 약간의 추가적인 위험성이 있으나, 다수, 특히 건강한 사람들이라면 생활 속에서 통상 감수하는 정도의 리스크에 불과하다. (생우유를 통해 조류독감에 걸릴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 적이 있는데, 쥐의 경우에는 가능한 것으로 보이지만 인간이 생우유를 통해 조류독감에 걸린 사례는 지금까지 없었다) 끝으로 수돗물 불소화를 살펴보자. 불소는 여러 연구를 통해 아동의 치아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 내 수돗물이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는 조금 부족하지만, 2014년 불소화를 종료한 이스라엘의 최근 데이터를 살펴보면 3~5세 아동의 치과 치료가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일각에서는 수도 불소화가 특히 임산부나 어린이에게 신경 발달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널리 연구가 이루어졌다. 높은 농도의 불소는 발달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는 물속의 불소 농도가 세계보건기구의 안전 기준보다 평균 4배까지 높은 지역이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불소의 증가가 IQ 감소와 연관이 있다. 그러나 불소 농도가 미국과 비슷한 경우에 관한 연구에서는 이런 연관성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불소 역시 양이 관건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수돗물 불소화에는 이득이 있고, 미국에서 사용하는 정도의 농도는 안전하다. 나는 보건 전문가들이 이런 주제로 질문을 받았을 때 최소한 위와 같은 정도로 자세히 설명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백신은 좋고 생우유는 나쁘다는 식의 답변은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구체적인 포인트를 놓치고 만다. 사람들이 직접 조사를 하다가 전문가가 이야기하는 생우유의 위험성이 과장되었다고 느끼면, 전문가에 대한 신뢰가 낮아진다. 그렇게 되면 전문가가 백신에 관한 이야기를 해도 잘 믿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정확한 정보를 더 이해하기 쉽게 제공하면 사람들이 생우유를 마시고 아이에게 백신을 맞힐 여지도 생겨난다. 그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다. 맥락을 알려주면 사람들이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된다. 2019년 캐나다에서 수돗물 불소화가 임산부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가 나오자 많은 이들이 경각심을 느꼈다. 이런 경우 사람들에게 그저 “불소는 안전하다”라고만 말해버리면, 듣는 사람은 여러 연구 결과가 서로 모순된다고 느끼고 그로 인해 신뢰는 낮아진다. 하지만 수많은 연구 결과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자세히 알려주면 사람들은 대부분의 연구가 불소의 안전성을 뒷받침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문제가 된 캐나다 논문에 대해 부연 설명하자면, 결과가 언어성 지능과 동작성 지능은 물론 성별에 따라서도 결과가 다르게 나와 연구 전체의 타당성에 대한 의심이 제기된 바 있다) 보건 당국의 책임 여부와 관계없이 당국은 지금까지, 특히 팬데믹 시기를 거치면서 시민의 신뢰를 상당 부분 잃어버렸고 그 신뢰를 되찾는 일이 매우 어려워졌다. 그러는 사이 그 틈을 노리고 들어온 이들이 있었다. 이에 대한 당국의 대응은 그저 같은 말을 더 크게 외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그래서는 소용이 없다. 보다 섬세하게 접근하는 일이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보건 당국은 대중을 좀 더 신뢰해야 한다. 때로 근거가 불확실하거나 복잡하기도 하며, 시간이 지나면서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야 한다는 뜻이다. 합리적인 사람들이 주어진 사안에 있어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또한, 당국은 메시지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일종의 타협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보건 전문가들이 생우유에 대해 보다 균형 잡힌 메시지를 전한다면 생우유를 마시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당연히 어느 정도의 위험이 따른다. 하지만 대신 홍역 백신을 맞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완벽한 시나리오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병에 걸려 죽는 사람이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보건 당국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원문 : There’s a Better Way to Talk About Fluoride, Vaccines and Raw Milk (c) 2024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 오렌 카스는 보수 성향 경제 싱크탱크 아메리칸 컴파스의 수석경제학자로, 뉴욕타임스 오피니언에 글을 기고한다. 새로 선출된 대통령 당선인은 누구나 급작스러운 역할 변화를 겪는다. 도널드 트럼프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유권자들의 표를 얻기 위해 모든 걸 바쳐야 했던 선거 캠페인은 선거 날로 끝이다. 동시에 후원자와 활동가, 로비스트들이 트럼프의 관심을 끌고 정부의 정책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 영향을 끼치기 위해 벌이는 치열한 경쟁이 곧바로 시작된다. 선거 기간 유권자들이 관심을 보인 이슈는 감세 혹은 암호화폐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런데 당선인 가까이에서 정책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 관여하려는 이들이 하는 말은 조금 다를 수 있다. 이들은 일자리를 과도하게 보호하는 규정을 없애고, 사회적 안전망을 좀 느슨하게 풀어도 미국인은 괘념치 않을 거라고 말한다. 여기서 길을 잘못 들면 대통령의 임기는 시작부터 삐그덕거릴 수 있다. 새 대통령이 내게 투표한 유권자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지 않고, 자기 생각과 선호가 곧 국민이 바라는 바와 같을 거라고 예단하는 순간이 문제의 시작이다. 특히 (미국처럼) 양당제하에서 치르는 선거라면, 대통령에 당선된 건 중도 성향의 부동층 유권자의 표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보통 대통령 당선인은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후원자 또는 정치인 출신이다. 당선인의 선호가 보통 유권자의 선호와 다를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그렇게 임기 첫 2년이 지나면, 정치 자본은 소진되고 선거에서 중요하게 다루겠다고 약속했던 의제들은 다 흐지부지되고 잊힌 지 오래다. 그런 상태에서 치르는 중간 선거는 보통 집권 여당에 참패를 안긴다. 두 번째 임기를 준비하는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우선 본인이 바라는 대로, 마러라고 자택에 모여드는 강성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하고 통치하는 길이다. 대통령의 지지율은 급격히 추락할 것이고, 금세 이루고 싶은 변화를 위해 정책을 추진할 동력도 함께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이 길의 끝은 공동의 목표를 잃고 제도도 기능하지 못하는 나라다. 성공적인 대통령을 위한 공식이 될 수 없고,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트럼프의 구호와도 거리가 멀다. 다른 길도 있다. 트럼프는 구태와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리더다. 평범한 미국인들과 직접 소통하는 데 능하고, "말만 요란한" 컨설턴트를 경멸해 온 인물이다. 그는 또한,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 이후 처음으로 연임하지 않고 두 번째 임기를 맞은 대통령이 됐다. 트럼프의 첫 번째 임기를 돌이켜 보자. 세제 개혁을 두고 씨름하다 취임 1년 만에 지지율은 36%까지 곤두박질쳤고, 대안 없이 건강보험 개혁법을 폐지하려고 애쓰다 귀한 시간을 허비한 끝에 2년 만에 찾아온 중간선거에서 하원 의석 40석 이상을 잃고 민주당에 다수당 자리를 내줬다. 선거 이튿날 아침, 사실상 승리 연설에서 트럼프는 "모든 미국인"에게 "나는 당신과 당신의 가족, 당신의 미래를 위해 싸우겠다"며, "미국의 황금기를 여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이 원대한 꿈을 이루려면 트럼프 대통령은 본인에게 투표한 유권자뿐 아니라, 앞으로 자신을 지지해 줄 수도 있는 사람들까지 고려해 미국인이 공유하는 가치를 존중하고, 미국인이 걱정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민을 예로 들어보자. 국경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치안을 유지하겠다는 공약은 트럼프가 오랫동안 해온 약속으로, 이제는 민주당도 국경 문제에서 점점 더 트럼프의 주장을 따라오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진정 미국 유권자를 위해 봉사하는 정부가 되고자 한다면, 국경 지역의 단속을 강화해 불법 이민자의 유입을 막고, 망명도 제한해 바이든 행정부 아래서 무법지대가 된 국경에 질서를 다시 심어야 할 것이다. 최근 유입된 불법 이민자를 추방하고, 무엇보다 기업들이 외국인을 고용한 경우 미국에서 일할 수 있는 정당한 비자나 자격을 취득했는지 확인해 보고하는 전자 검증 시스템을 의무화해야 한다. 이는 미국 노동자와 법을 지키는 미국 기업을 보호하는 정책으로, 불법 이민자로 인해 미국인들이 받은 피해를 직접 시정하는 조치라서 유권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최근 내가 속한 싱크탱크 아메리칸 컴파스가 유거브와 함께 미국인 2천 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미국인의 78%가 노동자의 취업 비자를 확인하는 전자 검증 시스템을 지지했고, 민주당 지지자 중에도 68%가 이 제도를 지지했다. 법을 지키는 기업들도 그동안 몰래 불법 이민자를 고용해 비용 경쟁에서 우위를 점해 온 경쟁자를 몰아낼 수 있으므로, 이 제도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방금 살펴본 사례가 바로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에게 정반대 주장을 펴는 이들이 적지 않을 거다. 특히 미국에서 일하고 돈을 버는 데 필요한 자격과 서류가 없는 이민자를 몰래 고용해 인건비를 줄인 덕분에 막대한 부를 쌓은, 주로 건설업과 숙박 및 요식업계, 일부 농업계 기업과 부자들, 그들이 고용한 로비스트들은 트럼프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다. 이들은 아마 국경 문제와 이민자를 향한 적대적인 수사를 앞세워 유권자들의 환심을 얻는 연극은 이제 그만해도 된다며, 지금 필요한 건 오히려 임시 취업비자 발급을 확대하는 일이라고 트럼프의 귀에 대고 속삭일 거다. 이미 발 빠르게 이런 움직임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 토마스 매시(켄터키, 하원) 의원은 정부의 모든 규제를 철폐해야 한다는 자유 지상주의자로서 노동자의 비자를 확인하는 전자 검증 시스템을 반대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그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농무부 장관 하마평에 오르는 인물이다. 이런 주장을 따르면, 트럼프는 마러라고의 골프 클럽을 찾는 부유한 후원자들의 찬사를 받을 거다. 대신 유권자들 사이에선 점점 더 트럼프 대통령을 향한 불만과 환멸이 쌓일 것이다. 미국의 산업 기반을 재건하는 일도 트럼프가 유세 중에 중요하게 여기는 의제로 내세웠지만, 이따금 트럼프 본인 스스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들리는 말을 내뱉는 의제이기도 하다. 관세를 포함한 정책들은 분명 국내 투자를 촉진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동시에 특히 중요한 기술과 산업 분야를 육성하는 일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바이든 행정부가 초당적인 지지를 끌어내 통과시킨 반도체지원법(CHIPS and Science Act)은 핵심적인 첨단 기술인 반도체 제조 역량을 미국으로 들여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22년 법이 통과된 뒤 세계 5대 반도체 제조 기업이 모두 미국에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특정 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반대를 외치는 공화당의 수구 자유시장주의자들은 이 문제에 관해서도 트럼프의 눈과 귀를 가리려고 할 것이다. 트럼프 당선인은 앞서 조 로건의 팟캐스트에 출연해 "그 반도체법 최악이잖아요"라고 말했다. 반도체지원법을 폐기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에 동조하며 한 발언이다. 실제로 트럼프의 참모진 가운데 적잖은 사람이 트럼프에게 정부가 나서서 특정 산업을 지원하고 육성하는 산업 정책에서 손을 떼고 그저 세금을 충분히 깎아주면 시장은 알아서 잘 돌아갈 거라고 얘기할 것이다. 그러나 반도체지원법은 지지 정당을 불문하고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 오죽하면 자신의 발언이 실언이었음을 깨달은 존슨 의장이 재빨리 반도체지원법 폐지 공약을 철회해야 했다. 아메리칸 컴파스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컴퓨터에 들어가는 칩을 만들거나 중요한 핵심 광물을 채굴하는 일에 국가가 나서서 자금을 지원하는 정책"에 74%가 찬성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정책이 이미 막대한 투자와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등 그 효과를 입증했다는 점이다. 대만의 반도체 기업인 TSMC는 지난달 애리조나주에 지은 반도체 공장의 생산 수율이 대만 본토에 있는 공장보다 높다고 발표했다. 이러자 자유시장을 극단적으로 지지하는 이들은 산업 정책을 종합적으로 비난하는 데서 긍정적인 효과가 산업 정책 덕분은 아니라는 식으로 주장을 바꿔야 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한 뒤 공장에 대한 실질 투자는 두 배 이상 증가했다. 특히 전자 산업의 경우 2022년 이후 투자 규모가 4배 가까이 급증했다. 반대로 트럼프 대통령의 경제자문위원회는 2017년 트럼프 행정부의 감세 조치가 투자를 촉진했다는 주장을 입증하려고 애를 썼지만, 효과는 거의 없었다. 다른 연구에서도 그나마 미미한 효과가 발견됐을 뿐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감세 조치는 법인세를 낮췄다. 기업 CEO들은 이번에도 당연히 법인세를 낮춰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미국의 황금기는 기업의 주가가 얼마나 높은지, 그래서 CEO들이 보너스로 얼마를 챙겨가는지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실질 투자다. 트럼프 대통령이 보통의 미국인들에게 변화를 체감하게 해주고 싶다면, 그의 정책은 당연히 후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와 정치적으로 견해가 다른 민주당 정부가 추진한 정책이라고 해도 실질 투자를 촉진하는 데 효과가 있다면, 당연히 받아들이고 발전시켜야 한다. 백악관은 모든 분야에서 이와 비슷한 갈림길 앞에 설 것이다. 정부의 효율성을 높이는 과제는 트럼프가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정부가 일을 똑바로 잘하도록 하는 것과 정부 자체를 없애버리는 일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아메리칸 컴파스가 올해 유거브와 진행한 또 다른 여론조사를 보면, 둘 사이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공화당 지지자들은 대체로 연방정부를 향한 시선이 아주 곱지 않다. 이는 중도 성향의 유권자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유권자들에게 정부가 어땠으면 좋겠냐고 물으면 매번 대다수 응답자가 거의 같은 답을 내놓는다. 정부가 "빈곤층이나 장애인, 생활 보조가 필요한 사람들을 지원하는 일, 그리고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의료 보험을 제공하는 일"을 하겠다고 하면, 크게 반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미국인이 과도한 규제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생각하는 "자유 시장"이 공화당의 일부 정치인이 선호하는 자유방임 모델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공화당원 가운데만 해도 "노동자가 공정한 임금과 안전한 노동 조건을 보장받는 자유 시장"이 "자신을 향한 처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장을 떠날 수 있는 자유"보다 더 낫다고 답한 사람이 65%나 됐다.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기업의 경영진을 대거 정부로 불러와 기업의 고객 서비스를 개선하고, 민간 부문의 혁신을 촉진하는 투자를 유치한다면 그건 당연히 칭찬받을 만한 일이 될 거다. 그러나 만약 대통령이 기업인들의 요구에 휘둘려 정부 기관을 폐쇄하고 규제를 잇달아 철폐해 미국인들이 상당 부분 의지해 온 복지 제도까지 다 없애 미국 사회가 아인 랜드의 소설처럼 극도의 자유방임 상태로 바뀌어 버린다면, 당장 공화당 내의 눈치 빠른 정치인들부터 트럼프를 손절하기 시작할 거다. 암호화폐 투기를 더 쉽게 만드느냐, 아니면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넉넉하고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는 경로를 만드는 데 집중할 것이냐?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나 비벡 라마스와미 같은 사람이 점심을 먹다 뜬금없이 내놓을 터무니없는 아이디어에 사로잡혀 자원을 허투루 쓸 것이냐, 아니면 J.D. 밴스 부통령 당선인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진지하게 제안해 온 것처럼 노동 계급이 아이를 키우고 가정을 꾸리는 걸 지원하는 정책을 확충하는 데 신경을 쓸 것이냐? 대통령 곁에는 항상 자기 개인의 영달이나 본인에게만 중요한 이념적 의제에 몰두하는 참모들이 있기 마련이다. 많은 대통령이 참모들이 만들어 낸 거품 밖에 사는 진짜 유권자들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리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지금껏 대부분 정치인이 걸어온 길과 분명 다른 길을 걸으며 자신의 정치 이력을 만들어 온 사람이다. 4년 만에 백악관으로 돌아가는 지금 트럼프는 자신의 정치 이력을 훌륭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잡았다. 원문 : Trump Is About to Face the Choice That Dooms Many Presidencies (c) 2024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 데이비드 브룩스는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칼럼니스트다. 우리 정치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지난 40여 년간, 우리는 정보의 시대를 살았다. 교육 수준이 높은 계층은 자신들이 후기 산업 경제의 중추이므로, 우리 같은 계층의 필요에 부합하는 사회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느 정도 일리 있는 주장이었고, 실제로 그에 따라 결정이 내려졌다. 교육 정책도 우리가 밟은 그 과정대로 사람들을 밀어 넣었다. 소위 '미래의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은 4년제 대학 교육을 받은 이들로 점점 더 제한되는 와중에 직업 훈련은 약화했다. 정치권은 고등 교육을 받은 이들이 이끄는 지식 경제에 에너지를 집중하기 위해 제조업 관련 일자리는 인건비가 싼 국가로 이전한 자유무역 정책을 수용했다. 제조업 부문의 고용이 줄어드는 동안 금융과 컨설팅 업계는 덩치를 불렸다. 지리는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간주됐다. 자본과 고급 기술을 갖춘 노동력이 오스틴과 샌프란시스코, 워싱턴으로 모여들기만 한다면, 여기에 끼지 못한 지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민 정책으로 인해 교육 수준이 높은 이들은 저임금 노동의 덕을 봤지만, 기술을 갖추지 못한 이들은 새로운 경쟁을 마주하게 됐다. 경제가 컴퓨터 앞에 앉아 일하는 사람들에게 유리한 녹색 기술로 중점을 옮기면서 화석연료에 생계를 의존하는 제조업, 운수업 종사자들은 불리한 위치로 내몰렸다. 이번에 우리 귓가에 울려 퍼진 큰 소리는 '리스펙트', 즉 존중이 재분배되는 소리였다. 학벌의 사다리를 올라간 이들은 찬사를 받았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들은 투명 인간 취급을 받았다. 남자아이들에게는 상황이 더욱 혹독했다. 고등학교에 가면 성적 상위 10% 학생 가운데 3분의 2가 여학생인 반면 하위 10% 가운데 3분의 2는 남학생이다. 교육 과정이 남성이 성공할 수 있도록 짜여있지 않고, 이는 평생 개인에게, 나아가 국가에 영향을 미친다. 사회 전체가 거대한 분리 시스템을 장착한 기계처럼 변했다. 우리 사회는 학업에 재능이 있는 이들을 나머지 모든 사람들 위로 올린다. 얼마 가지 않아 학위 소지 여부가 미국 사회에서 사람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됐다. 고등학교만 나온 이들은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보다 평균 수명이 9년 짧고, 오피오이드 과다 복용으로 죽을 확률은 6배나 더 높다. 혼인율은 낮은데 이혼율이나 혼외 출산을 할 확률은 더 높다. 고졸자는 대졸자보다 비만일 확률도 높다. 미국기업연구소(American Enterprise Institute)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고졸자 중 24%는 친한 친구가 없다고 한다. 대졸자보다 공공장소 이용률도 떨어지고, 지역사회 모임이나 스포츠 리그에 속해 있을 가능성도 작다. 사회 정의를 외칠 언어도 갖지 못한 이들에게 공적인 미덕이라 할 만한 신념을 지니는 것은 사치다. 이런 차이가 믿음과 신뢰의 상실로, 배신감으로 이어졌다. 대선을 9일 앞두고 나는 테네시주의 한 기독교 민족주의 교회를 찾았다. 예배는 진정한 믿음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씁쓸함, 공격성, 배신감도 팽배한 분위기였다. 목사가 우리를 파괴하려는 성경 속 유다와 같은 배신자들에 관한 설교를 이어가는 동안 "어두운 세상"이라는 표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들은 지속적인 위협과 극단적인 불신의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자기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들, 그리고 수많은 미국인은 카멀라 해리스를 비롯한 로스쿨 졸업생들이 제시하는 "기쁨과 희망의 정치"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민주당에 주어진 임무는 단 하나, 불평등과 싸우는 것이다. 바로 눈앞에 이토록 극심한 불평등이 보란 듯이 존재하는데, 많은 민주당 당원이 이를 보지 못했다. 다수의 좌파가 인종 불평등, 젠더 불평등, LGBTQ 불평등에 집중했다. 수십억 달러의 기부금을 받는 대학을 나와 대기업을 위한 환경 그린워싱 및 다양성 세미나를 듣는 삶을 살았다면 계급 불평등에 집중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겠다. 도널드 트럼프는 물론 괴물 같은 나르시시스트이지만, 사회라는 거울을 들여보면서도 거울 속에서 자기 자신밖에 보지 못하는 교육받은 계층도 뭔가 잘못됐다. 좌파가 정체성 행위 예술로 방향을 트는 사이 도널드 트럼프는 두 발 벗고 계급 전쟁에 뛰어들었다. 퀸즈 출신 트럼프의 맨해튼 엘리트에 대한 분노는 미국 전역의 시골 사람들이 느끼는 계급적 적개심과 마법처럼 맞아떨어졌다. 트럼프의 메시지는 간단했다. 이 사람들은 당신을 배신했을 뿐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라는 것이었다. 2024년 대선에서 트럼프는 한때 민주당이 만들고자 했던 것, 바로 인종을 불문하고 노동자 계급의 지지를 고루, 두루 받는 다수 연합을 만들어냈다. 트럼프에 대한 지지는 흑인 및 히스패닉 노동자들 사이에서 급등했다. 뉴저지, 브롱크스, 시카고, 댈러스, 휴스턴과 같은 지역에서 보인 득표율 상승세는 놀라울 정도다. NBC 출구조사에 따르면 유색인종 유권자의 1/3이 트럼프를 찍었다. 트럼프는 또 무려 20년 만에 공화당 후보로는 처음으로 전체 득표에서 50% 넘는 득표율을 기록했다. 민주당이 완전히 생각을 다시 해야 한다는 점은 명백하다. 바이든 정부는 지원금과 부양책으로 노동자 계층에 구애의 신호를 보냈지만 이른바 '존중의 위기'는 경제 정책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미국인들 안에 내재하는 인종 차별과 성 차별, 권위주의 때문에 트럼프가 이겼다고 주장하는 이도 좌파 쪽에서 반드시 나올 것이다. 그런 사람은 패배를 즐기고, 계속해서 지고만 싶어 하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나머지는 겸허한 마음으로 이번 선거 결과를 바라봐야 한다. 미국 유권자들이 늘 현명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는 분별력이 있고 늘 우리에게 뭔가를 알려준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나 자신의 전과를 살펴봐야겠다는 것이다. 나는 민주당 후보가 중도 노선으로 나올 때가 좋은 온건파다. 하지만 이번에는 해리스가 꽤 효과적으로 중도 노선을 밟았음에도 실패했다는 점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민주당은 나 같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 버니 샌더스 스타일의 격변을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민주당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대졸자의 정당, 부유한 교외 지역의 정당, 힙스터 도심 지역의 정당이 정말 그것을 해낼 수 있을까? 도널드 트럼프는 프롤레타리아의 반란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던 친기업 정당을 가로채고 장악해서 그것을 이루어 냈다. 우리 중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트럼프는 해냈으니, 오랫동안 그를 얕잡아보고 깔보던 우리는 모두 겸허함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급류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트럼프는 파시즘이 아니라 혼돈의 씨를 뿌리는 자다. 앞으로 몇 년간 무질서의 전염병이 미국과 전 세계를 강타하여 모든 것을 뒤흔들 것이다. 양극화가 싫은가? 전 세계적인 무질서를 경험해 보면 양극화의 끝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혼란 속에는 새로운 사회, 그리고, 트럼프의 정치적, 경제적, 심리적 공격에 맞설 새로운 대응의 기회가 있다. 우리의 영혼이 시험대에 오른 시대다. 우리는 조만간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진면모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원문: Voters to Elites: Do You See Me Now? (c) 2024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뉴스페퍼민트
* 다니엘 매카시는 "모던 에이지: 보수주의 리뷰"의 편집자다. 도널드 트럼프가 백악관에 다시 입성한다. 이 사실이 트럼프에 대한 비평가들의 생각을 바꾸지는 않겠지만, 그들은 적어도 자신을 자세히 돌아봐야 한다. 이번 선거는 트럼프가 승리한 만큼 비평가들이 완패한 선거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선거는 단순히 양대 정당이 내세운 후보 둘 사이의 대결이 아니었다. 유권자들이 받아 든 진짜 선택지는 트럼프 혹은 (트럼프를 공격하는) 나머지 모두였다. 즉, 대선 후보였던 카멀라 해리스와 그가 속한 민주당뿐 아니라 리즈 체니 전 의원, 마크 밀리 전 합참의장과 백악관 비서실장까지 지낸 존 켈리 장군을 포함한 공화당 인사들도 모두 트럼프를 비난했다. 정보기관 사람들도 성명을 냈고,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까지 연판장을 돌렸다. 이렇게 보면 이번 대통령 선거는 경제학에서 말하는 "창조적 파괴"의 좋은 예처럼 보였다. 트럼프의 반대편에 선 이들은 분명 트럼프가 미국 민주주의를 완전히 파괴할 거란 생각에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의 지지자들이 보기에 트럼프에게 투표하는 것은 실패한 기득권자에게서 권력을 빼앗고 미국이란 나라와 제도를 새로운 기준에 따라 다시 꾸려 미국인들에게 더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트럼프의 승리는 35년 전 냉전이 종식된 이래 미국 사회를 만든 리더와 제도 전반에 대한 미국인들의 불신임 투표가 통과된 것과 같다. 트럼프가 상대한 이들의 이름만 봐도 상징하는 바가 크다. 2016년 공화당 경선에서 부시 대통령 가문의 젭 부시 주지사를 꺾은 트럼프는 본선에서 클린턴을 만나 승리했다. 이번에도 넓게 보면 리즈 체니와 그의 아버지인 딕 체니 전 부통령의 연합을 물리쳤다. 트럼프는 워싱턴의 기존 관행을 근본적으로 거스르는 인물이다. 그는 마치 교회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무신론자 같다. 구체적인 행동보다도 권위가 의존하는 기본적인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그는 관행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부딪친다. 트럼프는 미국의 정치적인 정통성이 부패했다고 공격했다. 공공 부문은 말할 것도 없고 민간 부문까지 포함한 제도권 정치 지도자들은 전부 이 부패한 정통성에 충성을 다해왔기에 문제다. 이런 주장은 어쩌면 유권자들이 원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런데 해리스는 바로 이렇게 문제투성이에 인기도 없는 제도권 엘리트들과 열심히 동맹을 맺고 연대하며 제 살을 깎아 먹었다. 틈만 나면 트럼프를 비판하는 이들이 오랫동안 질질 끌다가 끝내 실패한 전쟁을 이끈 장군들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면 미국인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정보기관 수장들에게도 비슷한 질문들을 할 수 있다. 트럼프는 누가 보기에도 정책 전문가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유권자들이 트럼프에게 바라는 건 오히려 정확히 그 반대의 모습과 역할일지 모른다. 바로 워싱턴을 주름잡는 엘리트들이 내세운 소위 전문 지식을 부숴 버릴 반(反) 전문가 말이다. 트럼프의 승리는 그를 막으려던 모든 종류의 권위에 대한 유권자들의 심판이자 응징이다. 시장에 새로운 경쟁자가 나타나 기존의 기업들이 소비자의 수요를 얼마나 제대로 만족시키지 못하는지 여실히 드러내면 경제학에서 말하는 창조적 파괴가 일어난다. 시장 경쟁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경쟁도 이따금 비슷한 격변을 낳는다. 만약 지금 트럼프로 인한 혼란이 특별히 극적으로 보인다면, 이는 미국 정치가 지금까지 너무 오랫동안 경쟁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는 방증이다. 트럼프가 정치에 등장하기 전 제도권 정치의 권력은 소수의 정치적 카르텔이 나눠 갖고 있었다. 이들은 마치 애덤 스미스가 경고한 시장의 카르텔과 같아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대신 제대로 된 경쟁 상품이나 아이디어가 제도권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담합하고 외부 집단을 배제한다. 이런 카르텔이 만들어내는 비싸고 질 떨어지는 상품은 대중의 수요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어쩌면 트럼프와 트럼프가 가져온 마가 운동도 대중의 수요를 만족시키지 못할지 모른다. 기존의 관행을 깨는 첫 번째 기업은 보통 오래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의 소임은 시장에 기회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서 끝나고, 진짜 성공해서 이윤을 챙기는 기업은 보통 더 뒤에 뛰어든 기업이다. 트럼프의 부상으로 오바마 시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교착상태가 끝났다. 민주당 대통령 오바마는 외교 정책과 의료보험 개혁을 포함한 모든 분야에서 1990년대 양당의 전문가들이 내린 처방과 조금씩 다른 것들을 점진적으로 바꾸려 했다. 의회의 공화당도 오바마가 내세우는 변화에 무조건 반대만 외치면서 부시든 밋 롬니든 다시 백악관에 보내 같은 의제에 대해 크게 다를 것 없는 공화당의 처방을 내리려는 생각만 했다. 트럼프의 선거 캠프에는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털시 개바드 등 기득권과 기존의 메시지에 반대하는 정치인, 일론 머스크와 같은 기업인, 조 로건과 같은 팟캐스터들이 참여했다. 트럼프는 이들 중 누구와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 거다. 그러나 "대안 정치"를 주창하는 수많은 사람이 기꺼이 트럼프와 함께하며 주류에 반기를 든 데는 이유가 있다. 2016년부터 지금까지 트럼프가 거둔 잇단 성공은 이른바 주류 기득권이 이미 대중적 정당성을 상당 부분 잃었음을 입증한다. 트럼프의 성공에는 선거에서 잇달아 패배했지만, 그를 지지하는 연합과 세력이 무너지거나 약화하지 않은 것도 포함된다. 연방 법원, 주 법원이 트럼프를 기소했지만, 유권자들은 이번에도 이를 트럼프를 향한 기득권의 정치 공세로 보고 무시해 버렸다. 트럼프의 적들은 트럼프의 지지자와 마찬가지로 그가 아주 급진적인 변화를 일으킬 힘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트럼프 지지자도, 반대자도 모두 그가 대통령으로서 무얼 하고 싶어 하고, 어떤 걸 이룩하려 하는지에 관해 다분히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전쟁이라는 아주 예외적인 상황 때문에 임기 제한에 구애받지 않고, 대중으로부터 아주 많은 권한을 부여받은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대통령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당혹스러울 만큼 제한돼 있다는 사실을 알고 좌절하곤 했다. 루스벨트든 트럼프든 대통령 집무실에 누가 앉아 있든 상관없이 헌법은 결코 약하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연합이 자신이 파괴하고 대체한 것보다 나은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자신이 끌어내린 부시, 클린턴, 체니 왕조와 마찬가지 운명에 처할 수도 있다. 또 한 차례 창조적 파괴의 새로운 동력이 등장할 수도 있다. 이번엔 미국 좌파 진영에서 그런 움직임이 나오지 말란 법도 없다. 이를 방지하려면, 트럼프는 기존의 제도를 파괴하는 데 능했던 만큼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것도 잘해야 한다. 사실 첫 번째 임기 때 트럼프는 공화당과 민주당이 선거에서 받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이에 새로운 걸 보여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때 "미국인 대학살" 같은 메시지를 내지 말고 무언가 긍정적인 메시지를 통해 새 대통령은 기득권 정치와 분명 다르다는 걸 보여줄 수 있었다. 그는 2020년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서도 기어이 선거에서 이겼다. 심지어 1월 6일 의사당 테러에 연루됐거나 책임을 져야 할 상황만 없었다면 더 강력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과거 가장 많은 변화를 끌어낸 대통령들의 사례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때로 게임의 흐름을 바꾸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규칙을 따르는 거다. 원문: This Is Why Trump Won (c) 2024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뉴스페퍼민트
* 벤 긴즈버그는 선거 전문 변호사다. 그는 조지 W. 부시와 밋 롬니의 선거 캠프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했으며, 대통령 선거자문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모두 마음의 준비를 하자. 이번 선거일 밤은 매우 길어질 것이다. 어쩌면 하룻밤에 끝나지 않고, 여러 날 밤을 새워야 할 수도 있다. 2024년 대선은 애리조나, 조지아, 미시간, 네바다, 노스캐롤라이나, 펜실베이니아, 위스콘신, 이렇게 7개 경합주 대결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조지아, 미시간, 노스캐롤라이나의 승자는 그날 나올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나머지 네 곳, 특히 후보 간 격차가 작은 곳에서는 시간이 더 걸릴 수 있다. 주 단위에서 새로 제정된 법과 개표 과정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주 의회의 합작으로 인해 개표 과정은 언론이 선거가 끝난 지 나흘이 지나서야 당선자를 확정, 발표했던 2020년 대선 때보다 더 길어질 수도 있다. 선거일과 당선자 발표 사이의 긴 시차는 나라 전체를 시험에 들게 한다. 2020년에는 몇몇 경합주에서 개표가 지연되면서 가짜뉴스와 음모론이 판을 쳤다. 따라서 이번 선거일에는 상황이 어떻게 진행될지, 지연의 실체는 무엇인지, 또 지연의 일부를 방지할 방법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2020년 이후 애리조나와 네바다, 펜실베이니아, 위스콘신은 개표 속도를 늦출 수 있는 규칙을 추가하거나 2020년 개표 과정을 지연시키는 원인이 됐던 기존 규정을 그대로 유지했다. 미시간과 노스캐롤라이나만 실질적으로 개표 속도를 높일 수 있도록 법을 개정했다. (다행히도 조지아에서는 역사적으로 개표가 빠르게 진행되었으며, 최근 주 선거관리위원회의 친트럼프 위원들이 개표 과정을 지연시킬 수 있는 법을 제정해 적용하려 했지만, 조지아주 법원의 제동에 막혔다) 이렇게 일부는 고무적이지만, 대부분 골칫거리인 기존 법과 새로운 법들이 뒤섞인 상황에서 접전이 벌어진다면 지연과 혼란은 피할 수 없다. 선거 당일 밤에 공식적인 결과가 발표되는 일은 없지만, 언론 매체와 각 선거 캠프에서는 개표가 충분히 이루어지고 승자를 발표할 수 있을 만큼 표차가 크다고 판단되면 부분적인 개표 결과를 발표하면서 당선자를 확정한다. 공식 인증은 며칠, 나아가 몇 주가 걸릴 수도 있다. 이번에 명심해야 할 한 가지 중요한 사항은 득표율 일부 공개로 인해 2020년의 ‘붉은 신기루’ 또는 ‘푸른 변화’ 현상이 반복될 수 있다는 점이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역사적으로 우편투표를 더 많이 활용해 왔기 때문에 선거 당일에는 공화당이 앞서가는 것처럼 보이다가 이후 우편으로 들어온 투표용지가 집계되면서 민주당 표가 급증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올해 공화당은 지지자들에게 조기 투표를 독려하고 있지만, 우편투표에서 민주당이 많은 표를 받는 패턴이 바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2020년에 개표가 오래 걸린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선거가 워낙 접전인 데다 코로나19로 인해 우편투표가 증가하면서 개표를 담당하는 지역 선거관리 당국의 부담이 커졌다. 펜실베이니아와 위스콘신에서는 선거일 전에 우편으로 들어온 투표용지를 개표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이는 올해도 마찬가지다. 두 주에서 모두 법안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공화당의 방해로 무산됐다. 필라델피아의 새로운 고속 투표용지 처리 장비가 예상을 뛰어넘는 성능을 발휘하지 않는 한, 펜실베이니아와 위스콘신에서 2020년보다 빠른 개표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박빙의 승부가 예상되는 또 다른 경합주 네바다에서는 선거 당일 소인이 찍힌 우편 투표용지는 최대 선거일 이후 4일 안에 도착하면 개표할 수 있다는 주 법에 따라 개표가 또 지연될 가능성이 크다. 12개 이상의 주에서 선거일 이후 도착한 우편투표를 정당하다고 인정해 접수를 허용하는데, 하원의 다수당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되는 캘리포니아와 뉴욕도 여기에 속한다. 캘리포니아와 뉴욕은 선거일 7일 이후까지도 우편투표 접수를 허용하기 때문에 경합 지역구에서는 당선자 확정이 늦어질 수 있다. 2020년 노스캐롤라이나에서도 선거일 이후 도착한 우편투표 접수를 허용하는 주 법 때문에 일주일 넘게 선거 결과가 확정되지 못했다. 하지만 작년에 주의회 공화당 의원들이 주지사의 거부권 행사에도 불구하고 법을 개정해, 이번에는 선거일 저녁 7시 30분 이전에 들어온 우편투표만 유효한 것으로 처리된다. 작년 법 개정으로 인해 사전투표 기간에 들어온 투표용지 집계를 시작할 수 있는 시점이 선거일 당일이 아니라 투표 마감 이후로 미뤄지기는 했지만, 전반적인 집계 속도는 빨라질 것이다. 애리조나에서는 2020년이나 2022년(주지사 당선자가 확정되기까지 6일이 걸렸다)에 비해 개표가 더 오래 걸릴 가능성이 큰데,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주 전체, 특히 등록 유권자의 60%가 거주하는 마리코파 카운티에는 선거 당일에 부재자 투표용지가 많이 접수되는데, 이는 주 법에 따라 허용된다. 이들 투표용지는 주 당국의 철저한 확인 절차를 거치게 된다. 공화당이 다수인 애리조나 주의회는 선거 당일에 들어온 투표용지를 개표하기 전에 지역 선거관리 공무원이 투표용지 수를 확인해야 한다는 요건을 추가했다. 이에 더해 마리코파 카운티에서는 선거와 주민투표 건이 너무 많아 유권자들에게 투표용지가 두 장 주어지므로, 카운티 당국에서 처리해야 하는 투표용지의 수가 두 배로 늘어난다. 조지아는 역사적으로 빠르게 개표를 처리해 왔지만, 2020년에는 표차가 0.5%P 이내인 경우 재검표를 허용하는 법 때문에 개표가 늦어졌다. 또한 수작업으로 표를 집계하느라 개표가 11월 19일까지 이어졌다. 애리조나와 펜실베이니아 역시 표차가 0.5%P 이내면 자동 재검표를 실시한다. 위스콘신에서는 표차가 1%P 이내면 재검표를 요구할 수 있다. 노스캐롤라이나는 표차가 1만 표, 또는 총투표수의 0.5%P 가운데 적은 쪽 이내인 경우 재검표를 실시할 수 있다. 미시간에서는 표차가 2천 표 이하일 때만 자동 재검표가 실시되지만, 표차와 관계없이 후보자가 재검표를 요구할 수 있다. 네바다에는 자동 재검표와 관련된 규정이 없지만, 후보자가 비용을 지불하고 재검표를 요청할 수 있다. 격전지 가운데 일부 주에서 재검표가 실시될 경우 선거 결과 발표는 상당히 지연될 수 있다. 격전지인 애리조나와 네바다, 조지아, 미시간, 노스캐롤라이나는 선거 후 유권자들이 우편투표의 서명 누락 등 인증 문제를 수정할 수 있는 시간을 허용한다. 이 때문에 애리조나에서는 선거일 후 일주일, 네바다의 경우 6일, 조지아와 미시간에서는 3일까지 결과 발표가 지연될 수 있다. 노스캐롤라이나는 카운티 선거관리위원회가 수정 허용 기간을 결정하도록 하고 있다. ‘임시 투표용지’, 즉 투표소에서 투표 자격에 의문이 제기되어 선거 이후에 자격을 인정받은 유권자들의 투표용지가 얼마나 나오는지도 지연 요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선거 당일 밤에 박빙인 대선 결과를 알 수 있으리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이것이 각 주에서 내린 정책 결정에 따른 결과임을 이해해야 한다. 지연 자체는 음모론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개표가 오래 걸린다고 해서 불신을 조장해서는 안 된다. 후보 중 어떤 쪽이라도 개표가 완료되기 전에 승리를 선언한다면 이는 그저 정치적인 행위일 뿐이며, 각 주의 규칙에 따라 결과가 결정된다는 점을 잊지 말자. 원문 : I’ve Been Through a Lot of Election Nights. Here’s How Nov. 5 May Go (c) 2024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 브렛 스티븐스는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칼럼니스트다. "선거인단 때문이다, 여전한 백인들의 인종 차별이다, 흑인들 사이에 엄존하는 성차별이 문제다, 결국 바이든이 너무 인기가 없었다." 다음 주 대선에서 카멀라 해리스가 패한다면 민주당 지지자들이 손쉽게 꺼내 지목할 만한 원인이다. 결점투성이에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트럼프 같은 후보를 상대로 선거에서 (또) 진다면 패배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테니, 그만큼 변명을 댈 다양한 구실이 필요할 거다. 아니면 해리스가 처음부터 믿음직스러운 카드는 아니었다는 후회 섞인 볼멘소리도 새어 나올 거다. 펜실베이니아의 조시 샤피로나 미시건의 그레첸 윗머처럼 젊고 인기 많고 유능한 주지사를 내세웠다면 이길 수 있었을 거란 생각도 들 거다. 하나같이 일리 있는 지적이지만, 전부 다 훨씬 더 중요한 결정적인 원인 한 가지를 간과했다. 바로 정부, 학계, 언론을 주름잡고 있는 진보 진영 사람들이 오늘날 정치하는 방식이다. 진보 진영이 하는 말과 거기 깔린 전제를 하나하나 자세히 뜯어봤다. 잘난 척하는 정치(The politics of condescension)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10월 초 해리스에게 투표하기 주저하는 흑인 남성들을 향해 "혹시 여성을 대통령으로 뽑는 게 불편한 건 아닌지 스스로 돌아봐야 할 것"이라고 일갈한 장면이 대표적이다. 유권자들의 마음이 해리스와 민주당에서 떠난 이유는 어쩌면 훨씬 더 평범한 일상의 경험에서 비롯됐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세인트루이스 연준의 자료에 따르면, 흑인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은 도널드 트럼프 재임 중에 가파르게 오르다가 바이든 행정부 아래서는 거의 정체됐다. 이렇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는 설명을 놔두고 굳이 누군가를 꾸짖고 모욕 주는 논리를 찾는 이유는 뭘까? 낙인찍기 정치(The politics of name-calling) 트럼프 지지자들을 향해 인종차별주의자, 여성 혐오 집단, 괴상한 사람들, 온갖 공포증 환자, 무식한 사람들, 혹은 최근에는 (파시스트를 단죄하기는커녕 지지하므로) 파시스트라고 손가락질하며 낙인찍는 것도 문제다. 이는 그저 쓸데없는 제 살 깎아 먹기일 뿐이다. 생각해 보라. 세상에 어떤 유권자가 자신을 콕 짚어 비난하는 이들한테 표를 주겠는가? 트럼프 지지자의 절대다수는 단지 바이든과 해리스가 집권한 지난 4년이 미국에 좋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현재 진보 진영은 상대방을 조롱하고 깎아내리지 않으면서 건설적으로 토론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다. 가스라이팅(The politics of gaslighting) 올해 초 민주당 경선에서 관례를 깨고 재선 출마를 선언한 현직 대통령에게 도전했던 딘 필립스 하원의원은 다른 무엇보다 바이든 대통령의 나이(와 잠재적인 건강 문제)를 지목했다. 필립스 의원은 절대 적은 나이라고 볼 수 없는 바이든 대통령의 정신적인 예리함이 몇 년 새 눈에 띄게 무뎌졌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이 우려를 가장 앞장서서 일축하고 자신이 바이든을 잘 아는데 걱정하지 말라고 장담한 이들이 바로 MSNBC를 대표하는 뉴스쇼 진행자들이었다. 지금 해리스를 향해 똑똑하고 경험 많은 후보라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사람 중 상당수가 바이든은 멀쩡하다고 옹호하던 바로 그 사람들이다. 물론 해리스에 대한 이들의 평가가 맞을 수도 있다. 그런데 막상 깐깐한 잣대를 들이대 보면 걱정되는 지점이 없지 않다. 해리스는 제한적인 주제에 관해 미리 준비된 논점은 잘 대답하지만, 그 이상 깊게 들어가면 이야기를 잘 풀어가지 못하는 것 같다. 또 해리스가 경험이 많다지만, 정말 본인이 키를 쥐고 이뤄낸 정치적인 성과나 주도적으로 법을 제정하고 집행한 사례는 많지 않다. 고집불통의 정치(The politics of highhandedness) 진보 진영 사람들은 정말로 해리스가 제대로 된 당내 경선을 한 번도 거치지 않고 당 지도부와 영향력 있는 인사들의 승인을 일사천리로 받아 하루아침에 대선 후보가 돼버린 데 대해 불만 있는 사람이 없다고 믿을까? 사실 민주당 당원이나 민주당 지지자 대부분은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모두 알다시피 이번 선거는 워낙 치열한 접전이 펼쳐지고 있어 몇 안 되는 부동층 유권자들의 선택이 승패를 가를 수도 있는 선거다.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정당을 자처하는 민주당이 정작 민주적인 절차를 밟지 않고 추대한 후보로 선거를 치르는 모습에 마음이 떠난 유권자가 많다면 이는 치명타가 될 수 있다. 과도한 낙관론(The politics of Pollyanna) 민주당 내에는 지금이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칭송하는 이들이 있다. 치솟는 물가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도 인플레이션을 꼭 나쁘게만 볼 게 아니라는 사람,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라는 사람, 이미 지나간 일이며 누구도 신경 안 쓴다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다양하다. 이들은 치솟는 물가와 이자율 때문에 서민들이 받은 고통이 인플레이션이 어느 정도 잡힌 지금은 다 사라졌을 거로 생각한다. 같은 사람들의 입에서 미국에는 이민 위기가 없었다거나 이민 문제는 다 지난 얘기라는 말도 나온다. 이들은 또 차량을 훔치거나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거나 공공장소에서 너무 쉽게 접할 수 있는 마약, 노상방뇨와 배변 등 삶의 질을 결정적으로 떨어트리는 각종 범죄가 늘어난 탓에 일상적으로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난 현실에 철저히 눈을 감고 미국 사회의 범죄는 전반적으로 통제, 관리되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유령이 아니고선 동의해 줄 사람 찾기 어려운 공허한 주장을 되풀이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유권자들의 솔직한 우려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전통적인 규범에 적용하는 선택적인 이중잣대(The politics of selective fidelity to traditional norms) 진보 진영은 트럼프가 미국 정부의 제도적인 기반에 가하는 위협을 두려워한다. 어느 정도 일리 있는 우려다. 그러나 트럼프를 비난하는 민주당 정치인 중 상당수가 마찬가지로 할 수만 있다면 대법원을 진보적인 판사로 채우려 하고, 상원의 필리버스터나 선거인단 제도 자체를 없애려 한다. 엄연히 법원이 판단해야 할 사안인 퇴거 유예 명령을 연방정부 기관이 내릴 수 있게 한 것도, 의회의 동의 없이 수천억 달러에 이르는 학자금 대출을 일괄적으로 탕감하려 한 것도 하나같이 심각한 행정부의 직권남용이다. 진보 진영은 트럼프가 언론사를 공격하면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든다고 비난하면서 바이든 행정부가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의견을 검열해 걸러내도록 소셜미디어 기업들을 겁박했을 땐 환호했다. 이들은 또 정치적 경쟁자에게 죄를 묻겠다는 트럼프를 독재자라고 비난하지만, 정작 트럼프가 기소되고 유죄 판결을 받자 사필귀정이라며 기뻐했다. 이런 종류의 노골적인 위선은 해리스의 모든 것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계급을 뛰어넘는 정체성 정치(The politics of identity over class) 해리스가 대선 출마를 선언했을 때만 해도 그는 의도적으로 민주당이 너무 오래 집착해 온 정체성 정치를 멀리하는 듯했다. 그러나 흑인 남성 사이에서 지지율이 좀처럼 오르지 않자, 해리스는 곧바로 흑인 남성만 선별적으로 지원하는 재정 지원 공약을 발표했다. 왜 해리스 캠프는 기준 소득보다 낮은 계층 전체를 지원하는 방안을 낼 생각을 못 했을까? 그랬다면 노골적으로 '흑인만' 지원한다는 역차별 논란에 휩싸이지 않고도 실질적으로는 (저소득층에 유색인종이 많으므로) 흑인들을 효과적으로 지원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교육 수준이 높은 진보적 유권자들은 민주당이 갈수록 노동계급을 저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종종 간과하는데, 현실은 이렇다. 박빙 양상으로 펼쳐지는 선거에서 해리스가 승리할 가능성은 여전히 얼마든지 있다. 그럴 경우엔 해리스가 선거 과정에서 보여준 장점과 희망적인 메시지만 부각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민주당 지지자 가운데 현명한 사람이라면 다음 두 가지 질문을 스스로 던져야 한다. (해리스가 이겼더라도) 트럼프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표를 받고 선전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하면 평범한 사람들이 실망하지 않을 자유주의와 진보적 정책, 정치 제도를 가꿔나갈 수 있을까? 원문 : There's One Main Culprit if Donald Trump Wins (c) 2024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 네이트 실버는 책 "On the Edge: The Art of Risking Everything"의 저자다. 7개 경합주의 여론조사 결과가 모두 1~2%P 이내의 접전으로 나오는 상황에서 두 후보의 당선 가능성을 책임지고 예측하라고 하면 "50 대 50"이라고 답하는 수밖에 없다. 카멀라 해리스와 도널드 트럼프의 토론 이후 내 선거 결과 예측 모델이 꾸준히 내놓는 답도 비슷하다. 하지만 이처럼 만족스럽지 못한 뉴스를 전하면 꼭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다. "네이트, 그래도 네 촉이라는 게 있을 거 아냐?" 그 질문에 답하자면 내 촉은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를 가리킨다. 불안에 떠는 민주당 지지자 중에도 나와 비슷한 예감이 자꾸 드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촉은 물론이고 누군가의 직감을 크게 믿어서는 안 된다. 50 대 50이라는 조사 결과가 말 그대로 50 대 50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그런 예측이 빗나갈 가능성, 그리고 해리스와 트럼프 가운데 누구라도 승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직감이라는 개념 자체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포커 게임에서 직관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내가 만나본 프로 포커 선수 대부분은 직감이 추가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직감으로 경쟁자가 블러핑하는 패턴을 발견하면 나의 승리 가능성을 60대 40 정도로 높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포커 선수가 그 미묘한 느낌의 근거로 삼는 것은 최소 수천 번의 경험이다. 반면 대통령 선거는 4년에 한 번 돌아온다. 누가 이길 것 같냐는 질문에 많은 이가 트럼프를 꼽는 이유는 최신 편향(recency bias) 때문이다. 트럼프가 2016년에 예상을 깨고 승리했고, 2020년에는 여론조사에서 한참 뒤진다는 이야기가 있었음에도 거의 이길 뻔했으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2012년 대선을 떠올려보자. 당시 버락 오바마는 여론조사 결과를 뛰어넘는 압승을 거뒀다. 여론조사 오류의 방향을 예측하기란 이렇게 어렵다. 트럼프가 승리할 수도 있는 이유 (여론조사에서 트럼프의 지지세가 실제보다 낮게 나타나고 있을지 모르는 이유) 트럼프의 승리를 직감하는 사람들은 종종 '샤이 트럼프(shy Trump)', 즉 숨은 트럼프 지지자라는 개념을 언급한다. 영국의 여론조사가 보수당 지지세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설명한 '샤이 토리(shy Tories)'에서 따온 개념인데, 사람들이 사회적인 낙인 때문에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사실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경향으로 인해 발생하는 현상이다. 하지만 이 '샤이 유권자' 이론에는 근거가 별로 없다. 그리고 전 세계 선거판에서 우파 정당이 지속적으로 여론조사 결과를 뛰어넘는 성과를 낸 경향도 나타나지 않는다. (일례로 마린 르 펜의 국민 행진이 지난여름 치러진 프랑스 국회의원 선거에서 받아 든 결과는 여론조사 결과에 미치지 못했다.)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그 사실을 부끄러워할 거라는 주장에 담긴 일종의 우월의식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실은 트럼프 지지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고, 특히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낙인 효과가 약해진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무응답 편향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일 수 있다. 전화 여론조사는 아무리 잘해도 응답률이 한 자릿수에 불과하니, 어떻게 보면 전화 여론조사에 응하는 사람들이 특이한 축에 든다. 더구나 트럼프 지지자들은 시민 참여도와 사회적 신뢰가 낮은 경우가 많아서 언론사에서 실시하는 여론조사에 응할 가능성이 더욱 낮다. 여론조사 기관은 학력(대학 교육을 받은 유권자는 여론조사에 응할 가능성이 높다)이나 과거 투표 참여 여부에 따른 가중치를 두는 등, 더욱 공격적인 데이터 마사지 기법을 동원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 중이지만, 효과를 보장할 수는 없다. 트럼프가 실제 선거에서 여론조사를 뛰어넘는 성과를 낸다면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해질 것이다. 민주당은 더는 정당 지지율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하며, 이제는 공화당 지지를 자처하는 사람이 민주당 지지자만큼 많다는 사실이다. 해리스가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두 번째 흑인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에 도전하고 있다는 점도 트럼프 지지세가 여론조사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는 한 가지 요인일 수 있다. 198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지만, 여론조사 결과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표를 받았던 LA 시장 출신 톰 브래들리의 이름을 딴, 이른바 '브래들리 효과'라는 것이 있다. 사람들이 여론조사에서 흑인 후보자에게 투표하지 않을 거라고 차마 말하지 못해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고 답하는 경향을 일컫는 말이다. 2008년과 2012년의 버락 오바마는 브래들리 효과를 피해 갔지만, 민주당이 내세웠던 또 다른 여성 대선 후보의 경우에는 '마음을 정하지 못했던' 유권자의 표심이 실제로는 반대로 크게 기울었던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러니 해리스 후보는 '힐러리 클린턴 효과'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해리스가 승리할 수도 있는 이유 (여론조사에서 해리스의 지지세가 실제보다 낮게 나타나고 있을지 모르는 이유) 해리스 후보를 과소평가한 여론조사가 선거 결과를 잘못 예측할 가능성이 반대 경우보다 반드시 낮다고도 할 수 없다. 보통 여론조사는 평균 3~4%P 정도 빗나가므로, 해리스는 현재 여론조사의 오차 범위 안에서도 2008년 오바마 이후 전체 득표와 선거인단 득표에서 모두 가장 큰 격차로 승리할 수도 있다. 그런 일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2017년 영국에서 일어난 일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면 가능하다. 당시 선거를 앞두고는 보수당의 싹쓸이가 예상됐지만, 정작 보수당은 과반 의석을 잃고 말았다. 여론조사 기관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는데, 일부는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 기관이 '샤이 토리' 효과를 너무 오랫동안 걱정한 나머지 데이터를 믿지 못하고 과도하게 조정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여론조사는 점점 더 미니 모델처럼 변해가고 있다. 즉, 여론조사 기관이 전체 유권자를 대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원본 데이터를 토대로 유권자의 뜻을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도록 변환하는 방법을 놓고 갈수록 더 많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 여론조사 기관이 또다시 트럼프 지지세가 과소평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트럼프에게 유리한 가정을 하게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여론조사 기관이 도입한 새로운 기법을 과도하게 적용하게 될 수 있다. 지난 선거에서 누구에게 투표했는지를 물어 가중치를 두는 기법의 경우, 응답자들은 종종 자신이 실제로 누구에게 투표했는지를 잘못 기억하고 있거나, 실제로 누구에게 투표했는지와 관계없이 승자(2020년의 경우 바이든)에게 투표했다고 응답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지난 대선에서 바이든에게 투표했다고 답했지만, 실제로는 트럼프에게 투표한 응답자들은 사실과 달리 새로운 트럼프 지지자로 분류되기 때문에 응답 데이터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해리스에게 불리한 쪽으로 가중치가 적용된다. 2020년 여론조사의 오류가 부분적으로 코로나19 때문이었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팬데믹으로 인한 봉쇄 기간 민주당 지지자는 공화당 지지자보다 집안에 머무를 가능성이 더 크므로, 전화 여론조사에 응할 시간과 기회가 더 많았다는 것이다. 코로나19는 한 세기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인데, 이런 요인을 이번 여론조사에도 그대로 반영한다면 실제 지지 성향과 투표 결과를 정확히 예측하는 일은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끝으로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한 뒤 지난 2년간 민주당은 보궐선거와 주민투표, 2022년 중간선거에 이르기까지 계속 강세를 보이고 있지만, 이번 대선에서는 민주당이 그런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있다. 뉴욕타임스-시에나 여론조사와 같이 신뢰도 높은 여론조사가 투표율이 낮은 선거(대선이 아닌 중간선거 등)에서도 반드시 투표하는 가장 의욕적인 유권자 사이에서는 민주당이 강세를 보이지만 투표율이 높은 선거에서는 트럼프가 나머지 유권자의 대부분을 얻는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민주당은 투표율이 낮아지기를 바랄 것이다. '나머지 유권자'들이 투표장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해리스가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겠지만, 이들이 투표에 참여하면 선거는 트럼프에게 더 유리해질 수도 있다. 여론조사 기관들이 잘못된 합의에 이르렀을 가능성 직관에 반하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이번 선거가 박빙 승부가 되지 않을 가능성도 꽤 있다. 여론조사 평균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에 2016년이나 2020년에 여론조사 업계가 경험했던 것처럼 아주 작은 시스템적 오류로 인해 해리스나 트럼프가 선거인단 투표에서 의외로 낙승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나의 모델에 따르면 한 후보가 7개 경합주 가운데 6곳을 휩쓸 가능성도 60%나 된다. 요즘 여론조사 기관들이 이상치(outlier)로 여겨지는 결과를 내놓았다가는 소셜미디어에서 맹비난을 받는다. 그래서인지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기관이 여론조사 평균, 그리고 사람들의 직관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합의를 보게 된다. 뉴욕타임스-시에나 여론조사는 꾸준히 예외적인 결과를 발표하는 몇 안 되는 기관이다. 트럼프가 흑인과 히스패닉 유권자 사이에서 상당한 상승세를 보이지만, 반대로 미시간, 위스콘신, 펜실베이니아 등 푸른 장벽(blue-wall)으로 분류되는 주에서는 해리스에게 뒤처져 있다고 파악하는 등 다른 여론조사 기관과는 확연히 다른 표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두 후보 중 한 사람이 큰 승리를 거두거나, 2020년과 비교해 대다수의 직감보다 훨씬 더 큰 변화가 있더라도 부디 놀라지 마시라! 원문 : Nate Silver: Here's What My Gut Says About the Election, but Don't Trust Anyone's Gut, Even Mine (c) 2024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 마샤 체이틀린은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아프리카 연구 교수다. 책 “프랜차이즈: 흑인의 미국을 수놓은 황금 아치"를 썼다. 대통령 선거에 나선 후보는 부지런히 유권자들을 만나야 한다. 최대한 많은 유권자를 만나려면 당연히 유권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4년마다 전국의 교회, 대학 캠퍼스, 이발소에는 대통령 후보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올해 대선 후보들이 꼭 들러야 할 곳으로 한 군데가 추가됐다. 바로 맥도널드 주방의 튀김기 앞이다. 지난 20일, 트럼프 전 대통령은 펜실베이니아 벅스 카운티의 한 맥도널드 매장을 찾아 점주에게 일일 알바를 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서 “나는 언제나 맥도널드에서 일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맥도널드에서 일하는 종업원의 대중적인 이미지는 선거가 막바지로 치달을수록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어떻게든 마음을 사서 표를 얻고 싶어 하는 유권자의 전형이다. 물론 그런 ‘전형적인’ 유권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말이다. 트럼프와 해리스 캠프는 모두 미국의 산업과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돼 줄 기회를 제공하는 자본주의, 아메리칸드림에 관해 틈만 나면 미국인들에게 이야기해 왔다. 맥도널드를 둘러싸고 벌이는 경쟁도 누가 아메리칸드림을 이뤄줄 적임자인지에 관한 이야기와 맥이 닿아 있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선거 광고와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이 학생 때 맥도널드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밝힌 뒤 트럼프 측은 해리스가 진짜 빅맥에 관해 알지도 못하면서 거짓말을 한다고 비난했다. 심지어 해리스의 남편 더그 엠호프가 맥도널드에서 일했을 때 이달의 직원으로 뽑혔던 사실을 토크쇼에서 밝힌 뒤에도 트럼프에 비하면 민주당은 맥도널드의 황금빛 아치가 진정 의미하는 바를 모른다는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벅스 카운티의 맥도널드 주방에서 감자를 튀기면서도 트럼프는 해리스가 맥도널드에서 일한 적이 없다는 주장을 멈추지 않았다. 물론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아무것도 내놓지 않았다. 해리스와 엠호프가 맥도널드에서 일한 1980년대 초만 해도 최저임금이 시급 3.35달러가 채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맥도널드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딱 당시의 해리스, 엠호프처럼 용돈을 벌거나 학비에 보태려는 젊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굳어진 것도 이때다. 2021년 기준, 패스트푸드 체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평균 연령은 26세다. 1980년대의 트럼프는 맥도널드를 좋아하는 단골이었지만, 이미 뉴욕시의 부동산을 대대적으로 사들일 계획에 관해 TV 인터뷰를 할 만큼 잘나가는 사업가였다. 부유한 부동산 개발업자가 맥도널드 주방에서 감자를 튀기고 드라이브스루 주문을 받기까지 참 오랜 세월이 걸렸다. 맥도널드에 관해 이야기하는 해리스 부통령을 보면서 노동자, 서민 유권자들은 저임금 서비스직종에서 일하는 게 얼마나 고단한지 잘 아는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겠구나 기대할지 모른다. 맥도널드가 가장 최근 발표한 다양성 지표에 따르면, 맥도널드 매장에서 일하는 직원의 20%가 흑인이고, 협력 업체까지 포함하면 직원의 35%가 히스패닉이다. 두 인종 모두 선거를 앞둔 해리스에게 아주 중요한 유권자 집단이다. 트럼프가 자신의 최애 메뉴로 알려진 필레오피시 샌드위치 2개, 빅맥 2개와 밀크셰이크를 주문하는 즐거움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트럼프의 팬들은 트럼프처럼 돈 많은 사람이 소탈하게 패스트푸드를 먹는 모습에 박수를 보낼 거다. 물론 트럼프의 팬 가운데 부자들이 꿈꾸는 계층 이동은 맥도널드에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아 중산층이 되는 것보다 트럼프처럼 큰돈을 벌어 최소한 가맹점주가 되는 것이 다르긴 할 것이다. 맥도널드의 프랜차이즈 초창기인 1950년대에는 전후 경제 호황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공공정책 덕분에 중산층이 가맹점을 차릴 기회도 상대적으로 많았다. 물론 이런 기회를 활용할 수 있던 건 주로 백인 남성이었다. 흑인 남성에 비해 가맹점주가 되는 데 필요한 자본을 조달하기가 훨씬 쉬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맥도널드의 수장이던 레이 크록은 주로 가맹점을 백인들이 모여 사는 도시 근교에만 내는 전략을 썼다. 돈을 내고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소비자가 모여 사는 곳인지 아닌지가 가맹점 입지의 우선 조건이었던 거다. 1960년대 후반 들어 점점 늘어나던 인종 차별에 저항하고 정의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1968년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된 뒤 더욱 거세졌다. 맥도널드도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흑인 남성들을 가맹점주로 받기 시작했다. 특히 흑인들에게 경제적 기회를 확대한 닉슨 대통령의 흑인 자본주의 계획을 지원하는 기업이었다. 닉슨 대통령은 소수 인종 기업청을 설치해 정부 예산을 민간 기업에 지원했다. 예산은 사업 다각화, 소매업과 상업이 활성화되지 않은 낙후된 지역사회의 소상공인, 자영업자,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데 쓰였다. 이런 프로그램에 일찌감치 참여한 기업이 바로 맥도널드다. 몇 년 만에 시카고, LA, 세인트루이스, 캔자스시티를 포함한 많은 도시에 최초로 흑인 가맹점주가 운영하는 맥도널드 매장이 잇따라 문을 열었다. 이들은 대개 좋은 조건으로 대출을 받지 못했고,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인 만큼 매장 운영도 절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에겐 백인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맥도널드 안에서 흑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이들은 인내심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다른 지역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이렇게 흑인들이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자립하는 것을 닉슨 대통령은 자신이 이룩한 경제 정의이자, 주요 성과로 삼고 싶어 했다. 그는 새로운 세대 흑인 사업가들이 정부가 무엇을 지원해 줬는지 공동체 안에서 열심히 알리고 설명하기를 기대했다. 그동안 흑인들의 높은 실업률, 경찰들의 폭력과 모든 부문에서 사라지지 않는 인종차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쳤다. 닉슨 대통령은 여기에 맞서 새로운 사업이 자리를 잡으면 이 문제들이 다 해결될 거라고 이야기했는데, 닉슨이 말하는 새로운 사업의 대부분이 패스트푸드 식당이었다. 그는 자신이 흑인 사회에 경제적 자립의 기틀을 닦아주고, 그를 토대로 흑인 경제가 번영을 누리게 되면 주거 문제나 인종 간 학교 분리 문제처럼 훨씬 더 골치 아픈 일에 정부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라고 믿었다. 흑인 사회에 필요한 부의 기틀을 닦아주는 건 궁극적으로 흑인 유권자의 표를 얻고자 했던 닉슨의 전략이었다. 공화당은 자신들의 친기업 정책을 더 적극적으로 내세웠다. 특히 흑인이 소유한 기업들이 많아져 경제력과 정치력을 키우고 궁극적으로 흑인의 영향력을 키워야 한다고 믿던 이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해리스가 맥도널드 유니폼을 입고 매장에서 일하던 1980년대 초, 프랜차이즈를 포함한 식당은 소수인종이 가장 큰 희망을 품고 창업에 도전하는 분야였다. 그러나 동시에 인종 불문하고 식당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정당한 대우를 못 받고 소외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이후 패스트푸드가 인체에 얼마나 해로운지, 특히 흑인들의 건강에 얼마나 큰 문제를 일으키는지 지적하는 연구들이 쏟아져 나왔다. 흑인 가맹점주들은 계속해서 회사 안에 구조적인 인종차별이 있다고 주장했고, 노동자들은 노조를 조직하고자 쟁의를 벌였다. 이렇게 많은 비판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기업을 통해 경제가 살아나면 불평등도 해소하고 지역 사회가 번영할 수 있다는 믿음을 토대로 정부가 흑인 사회를 지원했던 경험과 역사는 이후 흑인 유권자들이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정당을 지지하는 이유가 됐다. 2024년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트럼프와 해리스는 모두 우리 정치의 맥도널드화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지난주 해리스 캠페인은 흑인 남성을 위한 경제 지원책을 발표했다. “흑인 기업가에게는 차후 요건을 만족하면 탕감받을 수 있는 대출을 최대 2만 달러까지” 총 100만 건 제공하겠다는 약속이 최상위 공약이었고, “암호화폐를 포함한 여타 디지털 자산을 더 폭넓게 보호하겠다”는 약속도 있었다. 이런 공약이 경제적으로 곤궁한 상황에 내몰린 수많은 흑인 가계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것 같지는 않다. 이들은 가뜩이나 역사적으로 인종차별을 받아온 데다 최근 들어 치솟은 집값과 인플레이션 때문에 크게 고통받고 있다. 기업과 창업을 지원해 선순환을 노리는 경제 정책은 트럼프가 2020년에 흑인 유권자를 염두에 두고 발표한 플래티넘 계획과 닮은 점이 많다. 플래티넘 계획에는 “흑인들의 신규 창업 50만 건 지원”, “흑인 사회에 총 5천억 달러 자본 조달” 같은 약속이 포함됐다. 공화당이 실제로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구체적인 조처를 했다는 증거는 많지 않다. 이는 트럼프가 대통령일 때도, 퇴임 후에도 비슷했다. 트럼프와 해리스가 서로 동의하지 않는 게 한둘이 아니지만, 경제적인 계층 이동에서 맥도널드가 어떤 역할을 하고 상징성을 지녔는지에 관해서는 두 후보의 생각이 겹치는 지점이 있는 것 같다. 다만 두 후보 모두 흑인 유권자들이 공정한 임금과 노동을 보호하는 것보다 자유시장경제의 약속에 더 홀딱 반했다고 가정하고 선거에 임하는 것 같은 점은 다소 의아하다. 패스트푸드 체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보통 단호히 거부하는 것이 바로 시장경제 원리를 통한 문제의 해결이기 때문이다. 원문 : Trump, Harris and the Enduring Symbolism of McDonald’s (c) 2024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 다론 아체몰루는 MIT 경제학과 교수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인플레이션은 어느 정도 잡힌 것 같다. 고용 시장도 여전히 견고하다. 저임금 직종을 포함한 임금 역시 오르고 있다. 그러나 현 상황은 일종의 소강상태일 뿐이다. 폭풍이 다가오고 있지만, 미국인들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다. 향후 몇 년간 미국 경제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인구 고령화와 AI의 부상, 세계 경제의 재편이라는 세 가지 획기적인 변화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이 모든 변화는 우리 눈앞에서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만큼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가 아직 파악하지 못한 것은 이 세 가지가 어떻게 결합하여 일하는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킬 것인가다. 그 변화는 아마도 임금 불평등이 치솟고 하위 계층의 임금이 정체되거나 오히려 하락했던 1970년대 후반 이후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변화가 될 것임에도 말이다. 이 상황에 제대로 대처한다면 우리 사회는 컴퓨터 혁명이 약속했지만 실현하지는 못했던 것, 즉 노동 개념의 재정립과 생산성의 향상, 임금 상승, 더 많은 기회를 현실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이 순간을 제대로 넘기지 못한다면 좋은 보수를 받는 양질의 일자리는 줄어들고 경제의 역동성은 떨어지게 될 것이다. 향후 5~10년,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길이 결정될 것이다. 국가의 비전을 점점 근시안적으로 만들고 있는 망가진 우리의 정치 시스템으로는 이러한 변화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대선 캠프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캠프도 이 문제를 진지하게 보지 않고 있다. 어느 쪽도 미국 노동자들이 새로운 도전에 대비할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필요한 투자를 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지 못했다. 미국의 노동력은 그 어느 때보다 나이 들었다. 2000년에는 한창 일할 나이(20~49세)에 해당하는 미국인 100명당 65세 이상인 미국인이 27명이었는데, 2020년에는 이 숫자가 39명으로 늘어났다. 2040년이 되면 54명에 달하게 된다. (노동 인구가 부양해야 할 노년층이 많아지는 거다) 이러한 변화는 대부분 출생률 감소에 따른 것이라 미국의 노동력 성장 속도도 둔화할 것이다. 대선에서 누가 이기든 미국으로 들어오는 이민자의 수는 줄어들 텐데, 이 역시 인구 고령화를 더 부추길 것이다. 제조업과 건설업 등 힘과 체력이 필요한 일자리는 여전히 많다. 사람들의 건강이 좋아지고는 있다지만, 힘이나 체력은 나이가 들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노동자의 생산성은 주로 40대에 최고조에 달한다. 미국은 물론이고 모든 국가에 필요한 기업가 정신이나 리스크를 지려는 태도 또한, 주로 젊은 사람들에게서 더욱 두드러지는 특성이다. 지난 30년간 일본과 독일, 한국은 현재 미국의 고령화 속도보다 두 배 더 빠르게 고령화된 만큼 우리에게는 따를 수 있는 모델이 있다. 좋은 소식은 이들 국가의 경제 성장 속도가 다른 선진국에 비해 뒤처지지 않았고, 자동차, 기계, 화학 등 노동력에 의존하는 부문도 크게 타격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 국가는 산업용 로봇과 기타 자동화 기술을 탑재한 새로운 기계를 도입해 젊은 노동자들이 하던 일을 대신하게 했다. 또한, 노동자들이 자동화를 보완하는 새로운 역할을 맡을 수 있도록 교육하는 데 투자했다. 독일의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수리, 품질 관리, 디지털 기계 작동 등 보다 기술적인 업무를 맡을 수 있도록 재교육했고, 그 결과 생산성이 급증하고 임금도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노동력 부족이 미국 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시나리오도 있다. 저학력 노동자의 임금은 1980년부터 2010년대 중반 사이 정체되거나 심지어는 줄어들었다. 노동력 부족이 설비와 사람에 대한 제대로 된 투자와 맞물리게 된다면 임금은 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시나리오는 미국의 상황에 적용하기 어렵다. 로봇에 대한 투자는 급격히 증가했지만, 사람과 노동자에 대한 적절한 투자가 수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술적인 업무나 고급 정밀 작업을 포함한 새로운 일에 투입될 노동력은 여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다. TSMC가 미국 첫 반도체 공장 설립을 미룬 이유도 바로 이런 노동력이 부족해서였다. 미국이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아 기술과 적응력을 갖춘 노동력을 새로운 기계와 결합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전통적으로 높은 임금과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해 온 미국의 제조업은 더 큰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AI 역시 비슷한 기회를 제공하지만, 이를 헛되이 흘려보낼 가능성도 마찬가지 이유로 크다. AI 만능론자들은 AI가 모든 기술 혁신의 어머니이자, 디지털 시대의 정점이라고 칭송한다. 하지만 초지능 알고리즘을 둘러싼 거품을 걷어내고 보면, AI가 가져오는 도전 과제는 고령화 적응 문제와 놀라울 만큼 유사하다. AI는 정보 기술이다. 케이크를 만들어주거나 잔디를 깎아주지 않는다. 기업을 운영해 주거나 과학 탐구를 대신해 줄 수도 없다. 대신 사무실이나 컴퓨터 앞에서 수행하는 인지 작업의 상당 부분을 자동화해 줄 수 있다. 또한 언젠가는 의사결정을 하는 인간에게 보다 나은, 어쩌면 훨씬 나은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아주 빨리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2024년 2월 현재 미국에서 AI를 활용하는 기업은 전체 기업의 5%에 불과하다. AI 기술도 여전히 완벽하다고 하기엔 부족한 점투성이다. (구글의 AI는 초기에 ‘돌을 먹는 것이 현명한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데도 어려워했다) AI가 확산하는 속도는 느릴 것이고, 2030년 중반까지 진정한 의미의 영향력을 실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기업과 노동자들의 준비 상태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AI가 업무를 자동화하고 노동자를 소외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업무와 역량을 만들어내도록 하려면 광범위한 국가 차원의 전략이 필요하다. AI를 기반으로 하는 급격한 자동화가 가져올 불평등 또는 그로 인한 실직으로 폭동이 일어날 거라는 기술 엘리트들의 두려움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다. 새로운 기술은 노동자와 함께 할 때 더욱 일관되게 생산성을 높여 더 나은 업무 수행과 새롭고 복잡한 업무 수행으로 이어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헨리 포드의 혁신적 자동차 공장의 비밀은 단순히 더 나은 기계를 더 널리 사용한 데 있지 않고, 이와 함께 수리나 유지·보수와 같이 기술적인 업무를 할 수 있는 노동자를 교육한 데 있다. 오늘날 대출이나 고용 결정을 내리는 사무직 직장인, 질문의 답을 찾으려는 과학자나 언론인, 기계 고장이나 다른 현실 세계의 문제를 다루는 전기수리공, 목수, 장인 등 대부분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관여하고 있다. 즉, 대다수가 더 나은 정보를 얻으면 생산성을 높이고 활약 범위를 넓힐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고령화보다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이 파도를 제대로 타지 못할 것 같다는 점이다. 업계 내 경쟁은 ‘인공 일반 지능’, 즉 인간과 똑같아서 인간의 모든 업무를 대신할 기계를 만들어내겠다는 원대한 꿈에만 집중되어 있다. 기업들은 디지털 광고 수익을 내거나 자동화를 위해 이 기술을 사용하는 데 몰두하는 중이다. AI의 진정한 가능성은 그 자체만으로는 실현되기 어렵다. AI 모델은 더 전문화되고 더 높은 품질의 데이터로 구동되어야 하며, 더 신뢰할 수 있고 현존하는 지식과 노동자의 정보처리 능력에 더 잘 부합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현재 빅테크 기업들의 최우선 과제가 아닌 듯하다. 고령화와 AI가 가져올 도전에 대응하기 위한 확실한 정책 하나를 꼽자면, 세금 공제나 교육 보조금 등을 통해 노동자 교육을 강화하고 이들이 새로운 업무와 일을 맡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해리스 후보의 경제 계획이 트럼프의 계획보다 이 부분을 훨씬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할 수 있는 일은 훨씬 더 많다. 노동자만 대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기술적 역량도 마찬가지다. 이 부분에서 연방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노동자의 생산성을 높이고 다가올 노동력 부족에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AI 기술의 유형을 파악하고, 여기에 필요한 자금을 제때 지원하는 새로운 정부 부서를 설립해야 한다. 세계화가 초래한 변화는 전혀 다른 차원의 주제 같지만, 비슷한 점이 많다. 소련 붕괴 이후 이어진, 급속하고 고삐 풀린 세계화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서구 소비자와 다국적 기업은 값싼 해외 노동력을 확보하면서 이익을 봤지만, 노동자는 그다지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무엇이 세계화를 대체하게 될지는 명확하지 않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것과 비슷한 흐름(중국과의 교역은 줄어들고 베트남과의 교역은 늘어나는 것 등)처럼 각국이 동맹이나 우방국과 교역하는 파편화된 시스템이 될 수도 있다. 관세는 높아지고, 교역이 줄어들 수도 있다. 무역 제한과 산업정책이 결합한 형태일 수도 있다. 투자를 독려하고 첨단 전자, 전기차, 재생 에너지 등의 산업을 미국 내에 유치하고자 한 바이든의 인플레이션감축법이나 반도체지원법이 그렇다. 이런 변화는 느리지만 노동자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새로운 제조 역량의 가능성은 새로운 일자리 기회나 더 높은 임금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반면 새로운 제조 역량은 하루아침에 구축될 수 없으며, 기술력이 부족하면, 산업이 재생하고 반등하지 못하게 발목을 잡을 수 있다. 다시금 안타깝게도, 미국, 특히 미국의 노동력은 여기에 대비되어 있지 않다. 좋은 소식은 우리에게 아직 시간이 있으며, 고령화, AI, 그리고 새로운 세계화가 주는 기회를 잘 잡는다면 그 세 가지가 서로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점이다. 기업과 학교가 이 세 가지 거대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매우 비슷하다. 나아가 적절한 종류의 AI는 고령화와 새로운 세계화가 가져올 과제를 잘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반면 나쁜 소식은 이러한 문제가 마땅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가 조작이나 팁에 대한 세금, 인플레이션이 1%P 높은지 낮은지에 대한 논쟁보다 우리의 미래에 훨씬 더 중요한 문제인데도 말이다. 우리가 이 문제에 집중하고 단호하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문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머지않아 끔찍한 미래를 맞닥뜨리게 될 수도 있다. 원문 : America Is Sleepwalking Into an Economic Storm (c) 2024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 오피니언 칼럼니스트 미셸 골드버그가 피닉스에서 보내온 글이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공화당 활동가 중 한 명인 찰리 커크는 매달 하루 날을 잡아 피닉스 외곽에 있는 오순절 대형 교회인 드림시티 교회에서 “미국 자유의 밤” 행사를 연다. 그는 이달 초 열린 행사에서 (성조기 색깔인) 빨강, 하양, 그리고 파란색 불빛이 수놓은 무대 위에 올라 1천 명 넘는 참가자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사실 하나님께서 이미 사전투표를 하셨다고 생각해요. 하나님께서는 이미 지난 7월 13일에 도널드 트럼프의 목숨을 구해주심으로써 투표를 마치셨죠.” 커크는 불과 18살의 어린 나이에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라는 이름의 조직을 설립하는 데 참여했다. 이 조직은 티파티의 일종의 청년 조직으로, 오랫동안 정부의 간섭에 저항하는 자유 지상주의 원칙에 입각한 세속적인 임무를 주로 수행했다. 그러나 트럼프의 정치사상인 마가(MAGA) 운동이 갈수록 기독교 국수주의와 노골적으로 결합하자, 커크의 발언도 점점 마가가 지향하는 바를 따라갔다. 그는 드림시티 교회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만약 당신이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래서 성경을 읽고, 스스로 기독교인이라 부른다면, 그렇다면 도저히 이번 대선에서 카멀라 해리스를 찍지는 못할 겁니다.” 터닝 포인트는 이제 엄연히 공화당의 한 축이 됐다. 특히 애리조나주는 이를 잘 보여주는데, 트럼프 선거 캠프가 중요한 경합주인 애리조나에서 실제 유권자를 만나 지지를 호소하는 선거운동을 사실상 이 단체에 맡겼기 때문이다. 터닝 포인트는 자신들의 선거운동 전략에 “표 좇기 전략(chase the vot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들이 좇는 표는 “투표할 마음이 딱히 없는 유권자”들의 표다. 대개 공동체와 소외되고 단절돼 있으며, 투표하기 귀찮아하지만, 만약 투표장에 가서 투표한다면 트럼프를 찍을 가능성이 큰, 주로 남성 유권자를 찾아 이들의 투표를 독려하는 전략이다. 커크는 “누군가 선거날 투표 결과를 조작하려 해도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많은 표를 모을 것”이라고 말했다. 터닝 포인트의 전략은 분명 검증되지 않은 접근 방식으로, 자칫 트럼프의 선거 전체를 망쳐버릴 수도 있다. 운동원들은 새로운 유권자들을 투표장으로 불러오는 일이 크게 어렵지 않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미 투표할 마음을 먹은 지지자들이 캠프에서 내놓는 선명하고 강력한 주장에 열광하는 데 취해 다른 유권자들도 동조해 줄 거라고 가정하는 거다.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2020년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버니 샌더스 캠프의 경험이 좋은 예다. 당시 샌더스 캠프는 샌더스의 열정적인 포퓰리즘 메시지가 정치적으로 소외당한 유권자들의 마음에 불을 지필 거로 기대했지만, 미시간주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막지 못하는 등 결과는 실패였다. 어쩌면 우파 유권 세력의 전략은 먹힐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건 투표함을 열어봐야 알 수 있는 만큼 터닝 포인트에 중책을 맡긴 결정이 트럼프에게 불확실한, 그래서 위험할 수 있는 결정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드림시티 교회에서 열린 행사를 보고 나는 왜 트럼프 캠프가 기존의 전통적인 공화당 지지자를 넘어 잘 투표하지 않는 사람들의 표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느꼈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날 10월 자유의 밤에 커크가 연사로 초청한 사람은 트럼프 행정부에서 주택부 장관을 지낸 벤 카슨이었다. 둘이 나눈 이야기 대부분은 마가 진영에서 늘 하는, 어쩌면 진부한 대화였다. 그러나 대화의 숨은 의미를 가만히 따져보면 놀라운 사실이 드러난다. 즉, 트럼프란 인물의 특징과 성격 때문에 공화당은 전통적인 지지자를 투표장으로 불러 모으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커크는 기독교인으로서 카멀라 해리스를 찍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물었다. “저들(민주당 사람들)이 '트럼프는 비열하다'는 식으로 늘 험담하는 거 아시잖아요.” 이어 그는 성경에서 삼손이 나귀의 턱뼈를 이용해 블레셋 사람 1천 명을 죽인 이야기를 예로 들며, 지금 미국에도 강력한 독재자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폈다. 그러다 이쯤에서 커크는 은연중에 인상적인 발언을 했다. 바로 보수 유권자들이 뽑는 건 트럼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트럼프가 대통령이 돼 주요 보직에 임명할 5천여 명의 일꾼이라고 강조한 거다. “사실 이 5천 명의 일꾼이 누가 되느냐가 어쩌면 ‘트럼프가 인간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싫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사실 나는 트럼프를 향한 훨씬 더 노골적인 찬사를 기대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 자유의 밤 행사는 트럼프 본인이 6월에 직접 연단에 오르기도 했던 행사로, 마가 영성의 성채와도 같은 행사라 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오히려 “트럼프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최악은 아닌 차악이니 뽑아달라.”는 식의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벤 카슨도 예수님이 직접 투표용지에 이름을 올리지 않는 한 우리는 모든 선거에서 차악을 현명하게 뽑아야 한다고 말했다. “트위터에 올리는 글이나 하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누군가를 싫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그 사람이 암만 싫더라도 당신의 아이들, 손주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앞세울 정도인가요? 그건 아니잖아요.” 해리스 캠프는 공화당원을 향해 광범위한 구애를 폈고, 여기에 민주당 안에서도 진보 성향 유권자들은 상당히 불편해했다. 민주당 지도부와 해리스 캠프는 전당대회에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활동가에게 연설 시간을 허락하지 않은 대신 애덤 킨징어 전 하원의원과 애리조나주 메사시의 존 자일스 시장 등 공화당원을 무대에 올렸다. 해리스 캠프는 또 (민주당 사람들에겐)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대의 대표적인 악당이라 할 수 있는 딕 체니 전 부통령의 지지를 받은 점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기도 했다. 여기에 매우 보수적인 성향으로 분류되는 제임스 랭포드(공화, 오클라호마) 상원의원이 주도해 쓴 이민법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다. 법안에는 국경을 더 강력히 통제하는 내용이 담겼고, 민주당 상원의원들은 이 법안을 공동 발의했다. 해리스는 지난주 애리조나에서 “건강한 양당제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며, 자신이 당선되면 당적을 뛰어넘는 초당적 자문위원회를 구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뉴욕 매거진의 자크 체니라이스는 한탄했다. “오늘부로 정치적 가능성의 지평을 넓히려는 열망은 사라졌다. 부통령이 늘 주문처럼 외는 ‘과거에 얽매여선 안 된다’는 말과 달리 그 가능성은 철저히 과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접근 방식에 사람들이 의구심을 표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지난 2016년, 민주당은 트럼프의 명백한 막말, 음담패설이 드러나자 공화당원들이 대거 힐러리 클린턴을 찍어줄 거라고 기대했었다. 민주당의 상원 리더인 척 슈머(뉴욕) 의원은 “펜실베이니아 서부 러스트벨트에서 블루칼라 노동자의 표 하나를 잃을 때마다 우리는 대신 필라델피아 근교의 중도 보수 성향의 공화당 표 두 표를 얻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상적인 것, 안정적인 것을 대변하고자 하는 민주당은 자연히 현상 유지를 대변하는 정당이 됐다. 그런데 현재를 떠올리면 온통 불만스러운 점밖에 생각나지 않아서 사람들은 점점 더 변화와 개혁을 원하고 있다. 하지만 다시 초점을 애리조나주의 선거운동 현장에 맞춰보면, 해리스 캠프가 왜 공화당 표를 공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다. 2016년에 슈머 의원이 지적한 역학관계는 분명 실재했다. 다만 클린턴에게 선거 승리를 안겨주기에는 부족했을 뿐이다. 트럼프 시절을 거치면서 공화당은 노동자 계층에서 점점 더 우위를 점했고, 민주당은 도시와 근교의 교육 수준이 높은 계층, 좀 더 넓게 보면 미국 정부나 공공기관을 기본적으로 신뢰하는 이들에게서 표를 얻었다. 이런 지지 성향의 재배치는 주요 경합주인 조지아, 과거엔 경합주였지만 더는 아닌 오하이오를 비롯해 여러 주의 정치 지형을 바꿔놓고 있다. 그러나 이런 지지 정당의 재편이 애리조나만큼 극적으로, 혁명적으로 일어나는 곳은 없다. 애리조나는 배리 골드워터를 배출한 주다. 1964년 대선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골드워터는 이후 현대 미국 정치에서 보수주의의 탄생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최근까지 애리조나주 정치에서 승자는 늘 공화당이었다. 1952년부터 2016년까지 애리조나주는 대선에서 딱 한 번(1996년)을 제외하고 항상 공화당 후보를 뽑았다.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취임했을 때 상원의원 두 명의 당적도 당연히 공화당이었다. 2008년 당의 대선 후보였던 거물 존 매케인과 극단적 보수주의자로 분류되는 제프 플레이크였다. 플레이크는 특히 피닉스에 있는 우파 싱크탱크인 골드워터 연구소의 사무총장 출신이었다. 주지사도 공화당 소속 덕 듀시였다. 듀시는 2023년에 임기를 마쳤는데, 2018년 재선될 때 민주당 후보를 14%P 차이로 따돌렸다. 오늘날 애리조나의 상황은 사뭇 다르다. 2020년 대선에서 조 바이든이 승리한 주 가운데 트럼프와 표 차이가 가장 작았던 주가 애리조나다. 바이든은 1만 1천 표도 안 되는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이겼다. 현재 상원의원은 민주당 소속 마크 켈리 의원과 민주당이었다가 무소속으로 당적을 바꾸고 재선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커스텐 시네마 의원이다. 시네마 의원의 자리를 놓고 민주당과 공화당 후보가 맞붙는데, 지금으로선 민주당의 루벤 가예고 하원의원이 선거에서 이길 가능성이 커 보인다. 주지사도, 검찰총장도 모두 민주당이다. 주 상원과 하원에선 공화당이 간신히 한 석 차이로 다수당 지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다음 달 선거에서 이마저도 민주당이 뒤집을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대선 레이스에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치열한 접전이 펼쳐지고 있다. 애리조나를 바꿔낸 데는 민주당 당직자들의 노력이 물론 큰 역할을 했다. 여기에 인구 변화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애리조나주는 매년 많은 인구가 새로 유입되는,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인구가 늘어나는 주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애리조나에서 민주당이 성장한 데는, 즉 공화당이 반세기 넘게 지켜 온 우위를 잃게 된 데는 트럼프와 트럼프 측근들의 실정도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애리조나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 메사시 시장실에서 자일스 시장은 내게 자신이 어른이 되고 난 뒤 모든 정치 경력을 공화당에서만 쌓았다고 말했다. “공화당에는 존 버치 소사이어티 같은 매우 보수적인 세력이 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죠.” 존 버치 소사이어티는 극우 성향 반고 단체로 여러 음모론의 진원지이기도 했다. “물론 그런 극우 세력과 함께 있는 게 저는 편했던 적이 없어요. 그래도 공화당은 다양한 성향을 품어주는 커다란 우산 같은 정당이었죠. 그래서 존 매케인을 지지하는 온건 성향의 공화당원도 얼마든지 공화당을 편안한 내 집처럼 여길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렇다고 할 수 없어요.” 현재 애리조나 공화당의 극단주의는 매우 심각하다. 주 공화당의 전 위원장 켈리 워드는 2020년 선거 결과를 전복하려 한 혐의가 인정돼 지난 4월 17명과 함께 기소됐다. 그럼에도 지난 선거를 도둑맞았다는 정서는 여전히 당내 곳곳에 팽배한다. 2022년 공화당은 극우 민병대 오스 키퍼스(Oath Keepers) 대원이었던 마크 핀쳄을 주무장관 후보로 추대했다. 핀쳄은 이번에는 주 상원의원 선거에 나섰는데, 최근에는 로스차일드 금융가가 남북전쟁을 일으켰다는 내용의 음모론을 담은 큐아넌(QAnon)의 영상을 리트윗했다. 주 하원의장을 지낸 극보수 성향의 러스티 바워스는 ‘부정선거 불복 운동’에 동참하지 않았다가 당에서 사실상 축출됐다. 예비선거에서 바워스를 꺾은 사업가 데이비드 판스워스는 2020년 선거를 두고 “실제로 악마가 판을 짠 진짜 음모”라고 주장했다. 2018년 본사를 피닉스로 이전한 터닝 포인트 역시 바이든이 부당한 방법으로 승리를 갈취했다는 주장에 모든 걸 걸고 싸워왔다. 이는 결과적으로, 애리조나주 보수 세력의 이념을 통제하는 데 아주 효과적이었다. 2022년 트럼프의 측근 제프 드윗은 워싱턴포스트에 “(터닝 포인트는) 내가 아는 어떤 공화당 유관 단체보다 더 막강한 영향력이 있다”고 말했다. 심지어 그는 터닝 포인트가 공화당 전국위원회보다 강력하다고 묘사했다. 한 정당이 선거 관련 음모론에 함몰되면, 선거에서 지고 나서도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공식 선거 결과는 우리 당을 향한 거대한 음모론이 진짜 있었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당 차원에서 음모론이 주류가 되면, 온건한 성향의 유권자들은 점점 주변부로 밀려난다. 다만 어느 정도는, 심지어 찰리 커크 본인도 애리조나주 공화당이 약화했다는 사실을, 거기에 커크가 매우 큰 역할을 했음을 알아야 한다. 극단적인 언사를 마구 쏟아낸 탓에 인기가 없는 공화당 상원 후보 캐리 레이크를 지금 이 자리까지 끌어올린 장본인이 바로 터닝 포인트다. 2021년 TV 앵커 출신인 레이크는 애리조나주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다. 처음에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한 군소 후보에 불과하던 레이크는 터닝 포인트가 피닉스에서 주최한 행사에서 한 발언으로 트럼프의 눈에 띄었다. 트럼프는 자신에게 찬사를 쏟아내는 레이크를 마음에 들어 했고, 레이크는 트럼프의 지지를 등에 업고 유력 정치인으로 급부상, 예비 선거를 뚫었다. 워싱턴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갑자기 공화당 후보가 된 레이크의 주지사 선거 본선을 치른 선거운동원 상당수가 터닝 포인트 직원들이었다. 레이크는 트럼프의 모든 것을 흉내 내고자 했다. 존 매케인을 향한 비판도 마찬가지였는데, 트럼프는 그런 레이크를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한때 레이크는 트럼프의 부통령 후보 하마평에도 올랐다. 그러나 애리조나주 공화당 내에서 매케인은 여전히 널리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런 매케인을 대놓고 비방하고 깎아내리는 태도로 일관하는 건 트럼프의 마음에 들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애리조나주 선거에 출마하는 사람으로선 좋은 전략이 될 수 없었다. 2022년 한 보수 정치 행사에서 레이크는 “우리는 매케인의 정치적 유산의 심장부에 말뚝을 박았다”고 떠벌리듯 말했다. 그해 주지사 선거 직전에는 유세에 온 사람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외치기도 했다. “지금 여기 계신 분 중에 매케인 지지하는 공화당원 없으시죠? 혹시 있으시면, 당장 꺼지세요!” 많은 사람들이 그 말대로 했다. 메사시 자일스 시장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2년 전 캐리 레이크는 저 같은 사람들을 향해 말 그대로 당에서 꺼지라고 소리를 쳤죠. 만약 MAGA의 관점을 받아들일 수 없는 공화당원을 찾아서 당에서 다 내쫓는 게 그들의 목표였다면, 그들은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자일스는 애리조나주에서 해리스를 지지한다고 선언한 구 공화당원 가운데 한 명이다. 플레이크 전 상원의원도 9월에 해리스 지지를 선언했다. 매케인 의원의 애리조나주 당협위원장을 지낸 베티나 나바는 내게 자기가 아는 한 매케인 의원을 옆에서 보좌했던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다 해리스를 지지한다고 귀띔했다. 그는 카멀라 해리스와 팀 월즈가 “단지 민주당을 대표하는 후보가 아니라, 당적을 뛰어넘어 폭넓은 가치를 수용하고 있기에 더 큰 가능성을 대변하는 후보”라고 말했다. 지난 8월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또 한 차례 트럼프 캠프가 참전 용사들과 껄끄러운 상황을 연출한 뒤, 매케인 전 의원의 막내아들인 짐 매케인은 해리스 지지를 선언하면서 아예 민주당에 입당했다.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연설한 뒤 자일스는 열성적인 마가 지지자들로부터 수많은 악플과 협박을 받을 각오를 하고 있었고, 예상대로 공격을 받았다. 메사시는 상당히 보수적인 지역이다. 메사가 속한 지역구의 연방 하원의원 앤디 빅스는 2020년 선거 결과를 거부하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이다. 그러나 오히려 자일스는 그 보수적인 지역의 동네 식당이나 마트에서 만나는 사람 중에 꽤 많은 이가 연설 잘 봤다면서 자일스에게 목소리를 내줘서 고맙다고 한 데 적잖이 놀랐다. 물론 그런 말을 건넨 이 중에는 민주당 당원이나 지지 정당이 없는 사람이 많았지만, 공화당원도 꽤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부정적인 반응, 온갖 악플은 각오했던 만큼 놀랍지 않았는데, 긍정적인 반응은 정말 생각 이상으로 많았어요.” 해리스 캠프는 애리조나에서 분명 승리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보고 있다. 애리조나주의 사전투표가 시작된 지난 9일, 팀 월즈는 짐 매케인과 레이크와 상원 선거에서 맞붙은 루벤 가예고 의원과 함께 유세했다. 이튿날 피닉스 외곽 챈들러에서 열린 유세에는 7천 명이 모였다. 영부인 질 바이든 여사를 비롯해 제니퍼 가너, 케리 워싱턴, 글렌 클로즈, 제시카 알바 등 해리스를 지지하는 유명 인사가 대거 참석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이번주에 유세를 벌인다. 민주당은 또 주 헌법에 임신중절권을 보장할지 묻는 주민투표가 “투표용지 효과”를 일으켜 민주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의 투표율을 높여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해리스는 지난 10일 유권자들을 향해 호소했다. “애리조나주 시민 여러분, 우리는 모든 전선에서 계속 싸워나가야 합니다. 이번 선거는 여러분에게 내 몸의 건강에 관한 결정을 스스로 내릴 수 있도록, 시민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보장해 주는 법제안 139조에 찬성표를 던질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139조 제안이 손쉽게 통과될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도 해리스는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미국인들이 바이든 행정부에 실망한 여러 가지 문제가 특히 애리조나에서 심각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2022년 한때 피닉스와 주변 지역은 미국 내에서 인플레이션이 가장 높았다. 팬데믹 때 천정부지로 치솟은 집값이 문제였다. 지금은 그나마 인플레이션이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경제 문제에 관해 바이든 행정부를, 고로 해리스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게다가 애리조나는 멕시코와 국경을 맞댄 주로서 유권자들은 불법 이민자 문제에도 민감하다. 주 경찰과 지방 경찰에 불법 이민자를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법을 제정할지 말지 묻는 주민투표도 진행되는데, 이변이 없는 한 통과될 것으로 예상된다. 공화당은 여전히 등록 유권자 수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공화당 다음은 무소속이다. 민주당으로 등록한 유권자는 애리조나 전체 유권자의 29%에 불과하다. 공화당 선거 참모 배럿 마슨은 “애리조나의 제반 경제 지표는 민주당에 불리하다. 게다가 애리조나는 트럼프 지지가 강한 주라고 보기는 어려워도 원래 보수 성향이 더 강한 주”라고 말했다. 마슨이 말한 대로 트럼프가 2016년에 애리조나에서 승리했을 때도 그의 득표율은 50%에 미치지 못했다. 공화당과 민주당 외의 후보들이 합쳐서 무려 7%를 득표했는데, 극단적인 보수 성향의 자유지상주의자가 제3 후보 중에는 표를 제일 많이 받았다. 마슨은 “만약 니키 헤일리가 공화당 대선 후보였다면, 애리조나는 경합주 축에도 못 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이 절대 못 이겼을 거란 뜻이다. 설사 트럼프가 11월 애리조나 선거에서 이기더라도 그가 주 공화당에 입힌 상처 때문에 공화당 정치인들은 당분간 여러 가지로 고전할 수 있다. 당의 모든 정강, 정책을 사실상 마가와 트럼프주의로 도배한 대가를 가장 극적으로 치르고 있는 예시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레이크 선거 캠프일 거다. 레이크는 심지어 노스캐롤라이나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 마크 로빈슨 후보와 비교되는 상황까지 내몰렸다. 레이크와 마찬가지로 로빈슨도 트럼프가 뽑은, 트럼프의 후보다. 물론 레이크로서는 로빈슨과 비교당하는 게 억울할 수 있다. 적어도 레이크는 공개적으로 자신을 나치라고 칭한 적도 없고, 노예제가 나쁘지 않다고 말한 적도 없으며, 포르노 사이트의 댓글난에 참담한 수준의 음담패설을 적은 적도 없다. 그런데도 로빈슨 같은 ‘최악의 후보’에 비견된다는 건 레이크의 평판이 얼마나 바닥에 떨어졌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최근 에머슨대학이 애리조나와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나란히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애리조나주 대통령 선거에서는 트럼프가 해리스를 50% : 47%로 앞섰는데, 상원 선거에선 가예고가 레이크를 무려 11%P 차이로 앞섰다. 에머슨대학 조사에 따르면, 트럼프를 찍겠다고 답한 유권자 가운데 10%가 상원 선거에선 가예고를 찍겠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노스캐롤라이나에서도 대통령은 트럼프를 뽑겠다고 답한 유권자 가운데 12%가 주지사 선거에선 로빈슨이 아니라 민주당 조시 스타인 후보를 찍겠다고 답했다. 물론 상원 선거가 좀 더 박빙으로 나오는 여론조사도 있다. 그러나 지지율 격차는 좀 좁아도 가예고가 레이크에 뒤지고 있다는 조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어떤 면에선 애리조나주 사람들이 레이크를 그렇게 싫어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특히 하나부터 열까지 트럼프를 최대한 따라 하려고 그토록 애를 쓴 레이크 후보의 노력을 생각하면 더욱 의아하다. 가예고는 라티노 남성에 해병대 전투병으로 참전했던 베테랑이다. 라티노 남성 유권자들에게 소구력이 있을 것이고, 반대로 레이크가 여성이다 보니, 여성을 향한 혐오도 일부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여기에 레이크는 설상가상으로 공화당 내에서도 적을 만들었다. 트럼프 참모 출신으로 2023년 애리조나주 공화당 의장이 된 제프 드윗과 레이크 사이에서 리얼리티 TV 쇼에나 나올 법한 사건이 벌어졌다. 레이크의 당선 가능성이 적다고 본 드윗은 사석에서 레이크에게 후보직에서 사퇴하면 고액의 연봉이 보장된 일자리를 알선해 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런데 레이크가 이 대화를 몰래 녹음했다. 녹음 파일이 유출된 뒤 드윗은 의장직에서 사임했다. 배럿 마슨은 이번 사건을 “트럼프 측근을 향한 폭력 조직의 제어되지 않은 공격”에 비유했다. 그러나 결국, 공화당은 애리조나주 상원 선거에서 2022년, 트럼프가 뽑은 벤처캐피털리스트이자, 총기를 거의 숭배하다시피 좋아하던 블레이크 마스터스를 후보로 냈다가 패배했던 것과 똑같은 이유로 질 가능성이 크다. 같은 해 조지아주 상원 선거에서도 가정폭력 혐의를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 허셜 워커를 선택했다가 민주당에 졌다. 트럼프는 자신을 향한 칭찬과 절대적인 충성심에만 관심을 보이므로, 자연히 사기꾼이나 광신도들이 주변에 꼬이기 마련이다. 그가 자신과 결함은 공유하지만, 파우스트의 악마인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카리스마는 없는 인물들을 자꾸 뽑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나는 트럼프가 선거에서 지면, 애리조나주 공화당원들이 반성의 시간을 가질 거로 생각하는지 사람들에게 물었다. 그렇다고 답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자일스는 “비관적으로 보자면, 지금 공화당은 가망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새로운 보수 정당이 등장할 가능성에 주목한다. “한동안 미국에 세 개 정당이 공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쨌든 강력한 정당이 하나 이상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고 볼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트럼프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연합이 어떻게 짜이고 재편될지 아직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해리스는 지금 상황에서 기회를 보고 있고, 그 기회를 어떻게든 잡으려 노력하고 있다. 원문 : America Is on the Brink of a Great Political Realignment. It’s Already Visible in Arizona. (c) 2024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