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틸드 로스는 보스턴대학교 의료서비스의 선임 정신과 의사다. 이번 달, 미국 전역의 대학교에서 합격자 발표가 있을 예정이다. 그리고 최근의 추세대로라면 9월 신학기에는 캠퍼스 내 불안 증세를 호소하는 이들이 또 한 번 신기록과 함께 최고조에 달하게 될 것이다. 캠퍼스 안의 이야기라고 했지만, 대학 신입생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바로 대학생을 자녀로 둔 학부모들 이야기다. 아이들은 대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설명하면 이렇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불쾌한 감정까지 포함해 대부분 정상 범주 안에 있다. 그러나 캠퍼스 내 정신건강 문제가 증가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오자, 부모들은 걱정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 통계를 보면 깜짝 놀랄 정도다. 2022년에는 18~25세 청년 가운데 14%가 자살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학부모들이 지나친 불안감에 사로잡히는 것은 자녀는 물론이고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 아이가 집에 전화를 너무 자주 하는데, 이거 큰일 아닙니까? 아이가 집에 전화를 안 해요, 무슨 큰 문제가 있는 걸까요! 이런 부모님들이 모두 전화기를 붙들고 대학 상담소에 전화를 걸어온다. 나는 정신과 의사로 16년째 큰 대학 캠퍼스 내 정신건강 클리닉에서 일하고 있다. 다음 신학기에 입학할 신입생들은 대부분 내가 여기서 근무를 시작한 이듬해에 태어난 친구들일 것이다. 언제나 방문을 열어둔 채 크건 작건 어려운 상황에 처한 학생들을 돕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간 경험을 통해 학생뿐 아니라 불안을 느끼는 학부모들에 대한 진단과 치료법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정리한 바가 있다. 학부모로부터 걸려 오는 전화는 대개 이렇게 시작된다. "제 아들/딸이 불안증인 것 같아요." 그러면 나는 대체로 이렇게 답한다. "이런 환경에서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일반적인 일입니다. 처음으로 집을 떠나서 생활하는 것과 같은 큰 변화가 있을 때는 불안감이 커지기 마련이거든요." 예전에는 부모들이 이런 대답에 만족하며 감사 인사를 하곤 했다. 그러고는 자녀에게 전화를 걸어 이 또한 지나갈 일이니, 상황을 장기적으로 보자며 격려했다. 그리고 대부분은 큰 문제 없이 대학 생활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렇게 대답했다가는 학부모가 내 자격을 의심하고 만다는 인상을 받는다. 일종의 순환논리인데, 임상의가 상황에 따른 불안감이 일반적이며 일시적이라고 안심을 시키면 학부모는 임상의가 뭔가 아주 심각한 정신질환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학부모들은 '불안증에 대한 불안증'을 앓고 있다. 불안증 자체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다. 이 증상은 자기실현적인 데다가 '대부분 학생들이 결국은 대학에 잘 적응하는 현실'과 같은 논리적인 근거를 아무리 대도 좀처럼 달래지지 않는다. 불안증에 대한 불안증이 얼마나 심각해졌는가 하면, 일부 학부모는 자녀가 불안해하지 않는다고 걱정할 정도다. 부모가 그런 이유로 불안해하면 불안을 느끼지 않는 자녀는 압박감을 느끼게 되고, 이는 불안증에 대한 불안증에 대한 불안증으로 이어진다. (진짜로 늘 일어나는 일이다. 학부모가 정말이지 선의로, 멀쩡한 자녀에게 정신 상담을 통해 대학에 잘 적응하고 있는지 확인받게 하는 것이다.) 자녀가 괜찮다고 해도, 부모는 아이가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건 아닌지를 걱정한다. 불안증에 대한 불안증이라는 난제는 여기서 비롯된다. 치료법도 마땅치 않다. 하지만 그런 학부모에게 몇 가지 조언을 드릴 수는 있겠다. 내가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정말 최대한 친절하게 돌려서 드리는 말씀이다. "정신 좀 차리세요!" 그 또래의 자녀에게 적절한 조언도 알려드리겠다. 신학기 초에 자녀가 전화를 걸어와 불안감을 호소하면 다음과 같은 대응을 추천한다. "잘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지금 그렇게 마음이 불안한 건 아주 정상이란다", "추수감사절 때쯤 되면 그때 왜 그랬나, 하면서 웃고 있을걸?" (미국 추수감사절은 대학 생활을 시작한 지 3개월쯤 지나고 나서다.)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했을 때 나에게 가장 도움이 되었던 말을 건네 보는 것도 좋다. 혹은 아무 말 없이 잘 들어주기만 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정신과 의사가 하는 일의 기본도 일단은 잘 듣는 것이니 말이다. 자녀가 학업 때문에 불안감을 느끼는 경우, 그러니까 예를 들어 수업을 따라가기가 어렵고 동급생이 모두 나보다 똑똑하다고 느끼는 경우라면 예습을 하라고 조언하자. 나는 매 학기 마침내 대학 생활의 비결을 알아냈다는 학생들을 만나곤 하는데, 이들이 상담 시간에 쑥스럽다는 듯 작은 목소리로 털어놓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미리 준비하고 수업에 들어가면 된다는 것! 발표 수업에 대한 불안감도 흔한 증세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발표 리허설을 미리 해보세요." 부모님들도 그렇게 말씀하시면 된다. "얘야, 연습을 하면 정말 도움이 많이 된단다." 심화 문제로 넘어가 보자. 자녀가 항상 지쳐있고 아침 수업에 늘 지각을 한다면? 자신에게 수면 장애와 같은 질환이 있는 게 아닌지 걱정하고 있다면 어떻게 할까? 취침 시간을 앞당기라고 조언하자. 상식적인 해결책은 여전히 유효하다. 룸메이트가 너무 시끄럽거나 너무 조용해서, 너무 지저분하거나 너무 깔끔해서 문제라면 어떻게 할까? 룸메이트와 문제점에 대해 대화를 나눠보라고 조언하자. 학사 경고로 인한 제적 같은, 좀 더 심각한 문제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입학 초기에 그런 문제로 걱정하는 학생들은 생각보다 많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첫 학기에 모든 수업에서 낙제점을 받고 그 결과로 퇴학당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그런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하는 학생 중에 실제로 퇴학당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행정적인 절차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아직 등록금도 조금밖에 내지 않은 시점이 아닌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내가 하는 일이 너무 쉬워 보이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학생들이 겪는 문제가 단순하다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그것도 사실이 아니다. 학생들의 정신건강 관리는 곧 내 삶이다. 정말로 큰 고통을 끌어안고 내 방문을 두드리는 학생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않다. 대다수는 그저 책임감 있는 성인의 도움이 필요할 뿐이다. 내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어느 정도 인생을 겪은 어른이라면 누구나 해줄 수 있는 일이다. 즉, 부모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이야기다. 정신건강에 대한 높은 경각심이 트렌드가 되면서, 성인 자녀에게 일상적인 문제에 관해 얼마든지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모들에게는 오히려 방해되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정상적인 감정을 느낄 때도 뭔가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닌지 걱정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성인 자녀가 조금 힘들어 보인다고 즉시 정신건강 전문가에게 보내버리는 건 오히려 자녀와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 기회를 날려버리는 셈이다. 조언을 하고 길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성인 자녀와 관계를 맺는 첫걸음이다. 대학 신입생 시절은 설렘과 흥분으로 가득 찬 시기다. 불안감은 설렘과 흥분의 사촌 격이다. 나는 매년 이런 통과의례를 겪는 젊은이들을 도우면서 큰 기쁨을 느낀다. 학부모님들도 그런 기쁨을 느껴보시면 좋겠다. 원문 : Anxious Parents Are the Ones Who Need Help (c) 2024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록산 게이는 뉴욕타임스 오피니언에 글을 기고하는 작가다. 서로 견해가 전혀 다른 사람들이 모여 치열하게 토론을 벌인 끝에 소중한 공통분모를 찾아낸다는 이야기, 들어보셨는가. 다 "좋았던 시절" 이야기다. 너무 까마득해서 옛날옛적 일처럼 들릴 수도 있다. 다른 의견을 낸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꼭 토론이 진행되지 않더라도 지난한 정치적인 토론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만약 우리가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모든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서로 간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래가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장밋빛 색안경을 끼고 과거를 바라보는 실수를 범하곤 한다. 마치 옛날에는 정중함과 예의를 잃지 않는 신사숙녀들만 모여 (물론 숙녀는 별로 없고, 거의 다 신사였겠지만) 늘 타협을 이끌어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과거에는 모든 게 더 예의 바랐을 거란 가정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저 자기가 바라는 대로 만들어낸 과거를 믿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만 효용이 있는 거짓말이다. 사실 공개 서한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부터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버밍엄 감옥으로부터의 편지"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두 세기 동안 공개 서한은 줄곧 수사학적인 도구로 쓰였다. 공개 서한은 사람들의 개인적인 역량을 강화하고,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주며, 자신이 따르는 대의를 지지하고, 중요한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끌어모으며, 분노를 표출하거나 결정을 지지하고, 무지를 질책하며, 인간성을 지키는 데 쓰였다. 공개 서한은 남을 설득하는 글이지만, 동시에 간청하는 글이기도 하다. 편지를 쓰는 이는 제발 내 목소리를 들어달라고 간청한다. 제발 행동에 나서달라고 절절이 호소한다. 제발 바꿔 주세요, 제발요. 나는 공개 서한이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 공개 서한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지난 몇 년간 시급하고 긴요한 일이라 생각한 몇몇 공개 서한에 내 이름을 보태기도 했다. 그러나 편지가 (원래 목적대로) 공개되고 나면, 이제는 어디에 내 주장을 전하고, 나아가 같이 행동하자고 간청해야 할지 다소 막막해졌다. 공개 서한이라는 방식 자체가 이렇게 매우 제한적이다.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주장을 편다. 그러고 나면 이제 뭘 해야 하나? 우리가 관심을 쏟는 문제에 반드시 해결책을 찾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공개 서한을 끊임없이 쏟아낸다고 문제의 원인을 더 잘 찾는 것도 아니고, 해결책이 절로 나오는 건 더더욱 아니다. 어떨 때는 공개 서한이 범람해서 사람들이 오히려 새로운 정보에 귀를 닫고 기존 생각을 고수하게 되는 부작용도 있다. 설사 공개 서한을 읽고, 누군가 그 주장에 동조해 마음을 바꿨다고 해보자. 그럼 이제 그 사람은 새로운 관점과 신념을 가지고 무얼 어떻게 해야 하나? 편지에 목표를 위해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면, 그렇게 투표로 의사를 모으거나 인식을 제고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변화를 우리 사회에 어떻게 접목할 것인가? 1962년, 제임스 볼드윈은 조카가 성인이 되면 겪게 될 인종 차별투성인 세상을 경고하는 격문을 썼다. 편지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네가 태어난 곳을 바꿀 수는 없어. 네가 흑인이 아니었다면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됐을 온갖 인종 차별의 경험을 피하지 못했겠지. 아마 그 과정에서 네 야망은 단단한 벽에 부딪쳐 꺾이고 수없이 쪼그라들었을 거야. 너는 네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는 끔찍한 메시지를 에두르지도 않고 수도 없이 반복해 들려주는 사회에 태어났단다. 누구도 너가 탁월한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지 않아. 너는 그저 평범하게, 중간만 가도 만족하는 삶을 살게 될 거야. 편지는 분명 이제 막 태어난 조카를 향한 글이었지만, 엄존하는 인종 차별이란 현실 앞에서 전쟁 같은 삶을 사는 모든 흑인과 유색인종을 향한 메시지이기도 했다. 또한, 편지를 읽는 백인들에게는 사회의 편견과 차별이 어떻게 흑인들의 상상력과 열망을 억누르는지 고발한 글이기도 하다. 바로 여기에 공개 서한의 묘미가 있다. 즉, 편지에 수신인을 명시해 놓지만, 동시에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개 서한이므로) 이 편지를 접하게 될 부수적인 독자들이 있다. 그러나 공개 서한이 늘 심오하거나 고상하거나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지는 않다. 최악의 경우, 공개 서한은 작성자가 자기와 생각이 비슷한 이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의견과 불만을 정제하지 않은 언어로 토로하는 있으나 마나 한 기회에 불과하다. 얼핏 보면 특정 독자를 대상으로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전하는 듯한 편지는 많은 경우 절제되지 못한 혼잣말일 뿐이다. 이런 사람은 연단 위에 선 설교자로, 자기가 하는 말에나 신경을 쓰지 듣는 이의 반응에는 별 관심이 없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공개 서한의 파괴력은 대단했다. 많은 청중에게 자기 생각을 전할 통로를 갖춘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틱톡에 올리는 말, 사진, 이모티콘이 전부 다 어떤 의미에선 사소한 공개 서한이다. 우리는 암암리에 내 말을 들어 달라며, 나를 봐 달라며 관심을 갈구한다. 이는 수십 년째 이어진 갈등이자, 지금껏 누구도 풀지 못한 숙제다. 여기에 내가 감히 어떤 평결을 내릴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러나 지난 몇 달간 내가 받은 전례 없이 많은 공개 서한을 생각하면, 공개 서한에 관해 뭐라도 얘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전쟁을 지지하는, 반전 운동에 동참을 호소하는, 당장 휴전을 촉구하는, 조건 없는 휴전에 반대하는 편지 등 그야말로 온갖 종류의 격문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 대화나 토론을 시도하는 대신 청중을 정교하게 선별한 다음 이들에게 반박할 여지를 최대한 없앤 일방적인 주장을 펴는 쪽을 택했다. 편지를 받아보는 이들은 굳이 쓸데없이 내 생각을 펴고 편지의 내용에 조목조목 반박하는 대신 그저 남이 써준 "크게 문제 될 것 없는, 대체로 동의하는" 말에 서명 한 번으로 이름을 보탠다. 중요한 일에 동참하면서 내게 미칠 피해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지난해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잔인무도한 테러 공격을 감행한 지 벌써 반년이 더 지났다. 하마스는 지금도 100명 넘는 이스라엘 시민을 인질로 잡고 있다. 팔레스타인 보건부에 따르면 이스라엘군의 반격으로 숨진 팔레스타인 민간인 숫자는 3만 3천 명이 넘는다. 보복이 또 다른 보복을 부르는 피의 악순환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지긋지긋한 분쟁 앞에서 무기력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우리는 누구나 옳은 일을 하고 싶고, 바른말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정확히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공개 서한은 우리 손에 허공을 향해 외칠 수 있는 마이크를 쥐여 줬다. 끔찍한 고통을 낳는 분쟁을 제발 멈춰 달라는 공허한 외침이 끝없이 울려 퍼진다. 가자지구를 염두에 둔 공개 서한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14년, 의사와 과학자들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과 학살을 비난하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구명하자는 공개 서한을 썼다. 지난해 말엔 국경없는의사회를 비롯한 여러 인도주의 지원 단체들이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부 장관에게 공개 서한을 보냈다. 전쟁으로 인한 민간인 사상자가 너무 많이 발생할까 우려된다며, 가자지구 민간인을 지키기 위해 미국이 나서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였다. 뉴욕주의 선출직 정치인 가운데 유대인들도 전쟁이 자기 지역구 유권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염두에 둔 공개 서한을 썼다. 이들은 이스라엘 정부에 보낸 편지에서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가하는 폭력으로부터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지키는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아 달라고 촉구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직원과 자원봉사자들도 가자를 향한 폭격과 공습을 중단하라며, 팔레스타인 예술 작품을 더 많이 전시하기로 하고 공개 서한을 썼다. 미국 지명직 정치인들도 바이든 대통령에게 이스라엘을 향한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비판하는 공개 서한을 썼다. 이런 '공개 서한 열풍'이 미국에만 부는 건 아니다. 영국의 비정부기구 및 조직 60여 곳이 영국 의회에 가자지구의 인도주의 위기를 지적하며, 휴전을 위해 나서줄 것을 촉구하는 공개 서한에 서명했다. 전 세계 언론인들도 전쟁의 참상을 세상에 더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도록 가자지구의 안전한 취재를 보장해 달라며, 공개 서한을 썼다. 할리우드에도 공개 서한이 넘쳐났다. 10월 7일 하마스의 테러 공격 직후 배우들과 엔터테인먼트 업계 임원들은 이스라엘을 옹호하고 하마스를 맹렬히 비난하는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 이들은 하마스에 잡혀간 이스라엘 인질들을 즉각 석방하라고 주장했다. 배우와 예술가들은 바이든 대통령에게 별도로 공개 서한을 보내 휴전을 촉구했다. 시인과 작가들도, 대학 교수들도, 변호사, 예술가, 예술업계 종사자, 자선활동가, 대학생, 연구자, 의회 직원, 철학자들도 각각 공개 서한을 썼고, 홀로코스트 생존자들도 공개 서한을 냈다. 저마다 날카로운 주장을 진심을 담아 명확히 써내려 간 글이다. 주장하는 건 조금씩 다를지 몰라도 편지를 쓴 사람이나 서명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나 모두 자기가 옳고, 자기주장대로 하는 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라고 믿고 있었다. 전쟁이 계속될수록 공개 서한도 쌓여만 간다. 우리 시대에 맞이한 최악의 인도주의 위기에 맞서 우리가 어떻게 대응했는지 모두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기록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위기를 해결하고 극복하는 일이다. 우리는 단합된 목소리를 내고 내 생각과 주장을 더 많이 알리려는 바람에 따라 행동하면서 내가 옳다는 확신을 절대로 버리지 않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는 갈등과 분쟁의 속성과 닮았으며, 공개 서한의 가장 큰 취약점이기도 하다. 즉, 우리는 공개 서한을 쓴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안다. 그러나 이 편지를 과연 사람들이 읽는지, 이 절절한 문장이 과연 의미 있는 행동으로 이어질지 전혀 모른다. 즉, 우리는 공개 서한을 통해 일방적으로 자기 말만 하는 대신 우리가 정말로 다른 사람의 말을, 상대방의 주장을 듣고 그에 맞춰 내 의견을 펴며 대화를 하고 토론을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해보지 않아서 모른다. 변화는 어렵다. 모든 변화는 점진적이다. 때로는 내 의견을 내려놓고 희생하고 타협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모두가 각자 원하는 걸 다 얻어내는 경우는 흔치 않다. 나는 모두가 원하는 걸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다 이뤄내고 싶은 욕망이 공개 서한의 시대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이는 모두에게 발언권을 준다는 면에서는 좋은 일일지 몰라도, 현실적인 해법을 찾는 데는 도움이 안 된다. 공개 서한을 아무리 많이 쓴다고 가자지구 민간인들이 구호물자나 의약품을 더 잘 받게 되는 게 아니다. 공개 서한이 모자라서 하마스에 잡혀간 인질이 돌아오지 않거나 휴전이 요원한 게 아니다. 지금 부족한 건 서로 의견을 희생하고 양보해야 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만족스럽지 못할 수밖에 없는 타협안을 찾기 위한 노력이다. 신념이라는 게 반드시 공개적으로 만천하에 천명할 때만 지켜지는 게 아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무기력함을 떨쳐낼 수 있는 건 더 강한 어조로 내 주장을 내세우는 것보다 현실적인 성과를 내는 일이다. 원문 : The Age of the Open Letter Should End (c) 2024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자멜 부이는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칼럼니스트다. 현행 제도를 따르면, 오는 11월 대선에서 미국 48개 주는 각자 일반 투표(popular vote) 결과에 따라 선거인단을 배정하게 된다. 표차에 상관없이 주별로 더 많은 표를 얻은 후보가 각 주에 배정된 선거인단 표를 전부 얻게 된다. 한편 메인(ME) 주와 네브래스카(NE) 주는 절차가 조금 다르다. 여기서는 주어진 선거인단 일부를 일반 투표 득표율에 비례하여 나눠 갖는다. 네브래스카주는 선거인단 5명 가운데 2명을 주 전체에서 표를 더 많이 받은 후보에게 주고, 나머지 3명은 네브래스카주의 하원 선거구 3곳의 승자를 따로 집계해 각각 배정한다. 메인주도 마찬가지로 선거인단 4명 가운데 2명은 주 전체에서 표를 더 받은 후보가, 나머지 2명은 하원 선거구에서 이긴 후보가 각각 가져간다. 2020년 대선 때는 두 후보가 네브래스카주 선거인단을 나누어 가져갔다. 이처럼 표가 나뉜 것은 1991년에 이 제도가 도입된 이후 두 번째였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후보가 주 전체에 할당된 표와 제1, 제3선거구의 표를 가져가고, 조 바이든 당시 후보가 오마하시와 그 부근을 아우르는 제2선거구 표를 가져갔다. 2020년 대선에서 바이든은 선거인단 306명을 확보해 대선에서 승리했다. 네브래스카주에서 얻은 한 표가 차이를 만들어내지는 못한 셈이다. 하지만 엄청난 접전이 일어날 경우, 예를 들어 인기 없는 현직 대통령과 똑같이 인기 없는 도전자(이자 전직자)가 붙는 선거에서는 선거인단 한 명 한 명이 아쉽다. 네브래스카주의 몇 표가 전체 결과를 바꿀 수도 있다. 네브래스카주 공화당원들이 트럼프의 지원을 받아 선거인단을 지역구별로 나눠 배분하는 현행 제도(준-비례할당제)를 폐지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네브래스카주 공화당원들은 그 시도가 너무 당파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명분으로 건국의 아버지들의 전통을 내세운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공화당 소속의 짐 필렌 주지사는 (트럼프가 "아주 영리한 편지"라고 칭찬한) 성명서에 이렇게 썼다. "네브래스카는 나머지 48주와 함께, 건국의 아버지들의 뜻을 더 확실히 반영해 대선에서 하나된 목소리를 내게 될 것입니다." 대부분 주가 시행하는 승자독식 방식을 도입하는 것은 네브래스카주 의회의 당연한 권한이다. 주의깊게 보아야 할 것은 제도의 내용이 아니라, 정책 변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들이 내세우는 명분이다. 현행 선거인단 제도가 미국 헌법을 작성하고 승인한 이들의 의도를 담고 있다는 것은 어디서나 통용되는 상식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상식이 틀렸다는 데 있다. 선거인단 제도가 건국의 아버지들의 의도였다고 포장하려는 시도에는 우선 아주 기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 부분이 헌법의 다른 조항들보다 훨씬 더 막판에 서둘러 추가된, 도저히 좁힐 수 없는 의견 차를 에둘러 가려는 타협안이었다는 점이다. 1787년 필라델피아 제헌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은 대통령 선출 방식을 둘러싸고 격론을 펼쳤다. 회의 초반에 이 문제를 두고 첫 번째 투표가 있었는데, 대부분 참석자가 의회가 대통령을 뽑는 방식을 선호했다. 하지만 버지니아주의 제임스 매디슨을 비롯, 몇몇 영향력 있는 대표들이 의회 선출 방식은 분권의 원칙에 위배되며, 나아가 새 정부의 기본적인 구조를 위협한다고 주장했다. 매디슨은 당시 메모에 "자유 정부의 근본 원칙은 입법, 행정, 사법의 권력이 분산되어야 하며, ... 독립적으로 행사되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썼다. 따라서 "대통령 선출은 방식과 임기 면에서 대통령에게 입법부로부터 독립된 자유 의지를 보장하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펜실베니아주의 제임스 윌슨과 구버너 모리스 등 매디슨의 주장에 동조한 이들은 전 국민 투표 방식을 선호했다. 이들은 "국민(물론 재산을 가진 백인 남성에 한정된 국민이지만)에 의한 직접 선거"만이 대통령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특별한 성품과 봉사심을 갖춘" 사람을 뽑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반면 남부 주를 대표하는 이들은 모든 자유민이 참여하는 보통선거가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여겼다. 북부의 자유민 수가 남부의 자유민 수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의회 선출 방식을 선호하는 대표들이 적지 않았다. 역사학자 알렉산더 키사르의 책 "왜 선거인단 제도가 유지되고 있는가?(Why Do We Still Have the Electoral College?)"에 따르면 제헌회의 기간 동안 다른 여러 방식도 논의됐다.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각 주의 주지사 또는 주 의회에 의한 선출, 제비뽑기로 선정한 의원 15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에 의한 선출((의원으로 선정된 즉시 모의 활동을 중단해야 함), 보통선거를 실시하되 유권자가 2~3인의 후보에게 중복 투표하는 방식(자기 주 출신의 후보는 1명만 뽑을 수 있음), 각 주가 주민에 의해 선출된 1인의 후보를 각자 내세우고 연방 의회가 선출하는 방식 등이 있었다. 제헌회의가 막바지에 접어들자, 토론에 지친 참석자들은 결국 "다른 누군가가 결정하게 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들은 "지연된 부분"을 다룰 위원회에 이 사안을 떠넘기기로 했다. 이렇게 꾸려진 위원회는 가장 저항이 적은 옵션을 찾고자 했다. 우선, (제헌회의 기간에도 나왔던 아이디어인) 대중과 대통령 선출 사이에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선거인을 두기로 했다. 의회 선출 방식을 지지한 사람들에 대한 타협안으로, 선거인들은 특정한 목적을 가진 기구를 만들어 결정을 내리도록 했다. 선거인단을 상, 하원 대표 수에 비례해 배분한다는 것은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은) 남부 주의 우려를 달래기 위한 조치였다. 위원회의 권고안에는 한 가지 중요한 수정 사항이 있었다. 어떤 후보도 과반의 표를 확보하지 못하면 상원이 아니라 하원이 결정권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제헌회의는 이 권고안을 받아들였다. 실제로 선거인단 제도가 어떻게 시행될지 감을 잡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이 선거 결과는 어쨌거나 하원이 결정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반인들이 누구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건, 자신들의 첫 번째 선택은 조지 워싱턴이 되리라는 사실도 자명했다. 헌법을 제정한 사람들이나 비준한 사람들이나 제도는 인물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믿었다. 그렇게 치른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선거인단 제도는 대체로 의도한 대로 작동했다. 일부 주는 보통선거로 선거인단을 뽑았고, 주 의회가 선거인단을 뽑은 주도 있었다. 이후 선거인단은 대통령이 될 사람(조지 워싱턴)에게 표를 던졌고, 부통령 후보(존 애덤스)를 지정했다. (수정헌법 12조가 비준되기 전까지 선거인단은 대통령과 부통령에게 각각 별개의 표를 던질 수 없었기 때문에 약간의 조정이 필요했다) 그러나 워싱턴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 동안 파벌 정치가 부상하고 워싱턴이 퇴임하면서 각 당파의 조직 역할을 하던 주 의회는 선거인단 제도를 악용하려 들었다. 역사학자 키사르는 "각 주가 유연한 헌법 구조를 이용해 선거 때마다 절차를 바꾸려고 했다"고 설명한다. 주 의회가 선호하는 후보에게 어떤 방식이 유리한지에 따라, 의회가 선거인단을 선출하는 방식을 택했다가, 지역구별로 선거인단을 배분하는 방식, 또는 승자독식 제도를 택하기도 했다. 일례로 버지니아주는 1800년 토머스 제퍼슨을 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지역구별로 선거인단을 배분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정당들이 만들어지고 미국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면서, 선거인단 승자독식제를 채택하는 주가 더 늘어났다. 또 선거인단이 자신을 선출한 정당으로부터 독립적으로 투표할 수 없게 하는 장치들도 생겨났다. 제퍼슨이 재선에 도전한 1804년에 이르러서는 선거인단이 (제헌회의의 의도대로) 하원이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도록 후보자들을 걸러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당파적인 현실에 맞춰진, 아예 다른 제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키사르의 설명은 이렇다. 대통령 및 부통령 후보는 의회 중심으로 정당이 내세우게 됐다. 선거운동을 조직하는 것도 정당이었다. 대부분 주에서 선거운동의 전략적 목표는 주 전체의 의회 표 또는 일반 투표의 과반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17개 주 가운데 4개 주를 제외하면, 한 후보에게 전체 선거인단의 표를 몰아줬기 때문이다. 선거인단은 주도에 모여 직접 표를 던졌지만, 메신저의 역할을 할 뿐이었다. 숙의도 토론도, 심지어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아는 오늘날의 선거인단 제도는 헌법을 제정한 사람들의 통찰과 설계의 산물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공화국이 건국한 지 첫 10년간 만들어진 정치판에 맞게 그때그때 수정된 제도에 가깝다. 물론 세상은 1820년대와 30년대 들어 앤드루 잭슨의 부상, 백인 남성 보통선거권의 도입, 대중 정당의 등장과 함께 또다시 변화를 맞이하고, 선거 제도는 다시 그에 맞춰 달라진다. 1837년이 되자, 사우스캐롤라이나주를 제외한 모든 주가 당파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선거인단 승자독식제를 채택했다. 전체 유권자의 표를 얼마나 득표했는지도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일반 투표가 선거 결과에는 기여하지 못했더라도 승자에게 권력의 정당성을 의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네브래스카주 공화당원들이 선거인단 제도를 바꿀 수 없다는 말은 헌법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다. 이들이 받게 될 가장 큰 비난이라고 해봐야, 절차를 악용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미국 정치의 불문율을 어겼다는 비난 정도일 것이다. 이들이 헌법 정신을 들먹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 미국인들이 늘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건국의 아버지들이라면 이렇게 했을 거라는 주장에 논리적인 근거를 씌우는 일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건국의 아버지들에 관해 이후 역사가들이 만들어낸 온갖 신화와 전통, 관습들을 들먹여 주장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반대 의견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러나 건국의 아버지건, 건국의 아버지에 관한 신화건 어떤 결정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내리는 결정을 정당화해 줄 수 없다. 자치의 미덕이자, 어쩌면 저주는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통치한다는 사실 그 자체일 것이다. 우리의 선택은 우리 자신의 것이므로, 우리 자신의 언어로 그 선택을 설명해야만 한다. 과거를 지침으로 삼는 것이 필요하고 유용할 때도 많지만, 과거가 지금 우리 질문에 답을 내려주거나 현재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새로운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전히 먼지 쌓인 과거의 유산이 아닌 우리 자신의 방식으로 현재 상황을 해결할 의무가 있다. 원문 : When Politicians Invoke the Founding Fathers, Remember This (c) 2024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로스 더우댓은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칼럼니스트다. 이번 주 뉴욕타임스 편집국의 제이슨 호로비츠와 가이아 피아니쟈니 기자가 이탈리아 북부 알토아디제-수티롤(Alto Adige/Südtirol) 주의 가족 친화적 육아 지원 정책의 효과를 다룬 훌륭한 기사를 썼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며 인구가 정체될 위기에 처한 이탈리아에서 가장 높은 출산율을 기록하는 지역의 비결을 짚은 기사는 그 자체로 큰 관심을 받았다. 기사는 특정 저출생 대책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정책이 바꿔놓은 문화 전반을 여러모로 살폈다. 특히 기사는 주 정부가 아이를 낳은 부모에게 직접 지급하는 지원금이 얼마나 되고, 금전적인 혜택이 뭐가 있는지 일일이 설명하는 데 너무 많은 지면을 쓰지 않았다. 기사에는 아이를 여섯 명이나 낳은 가족이 사례로 등장하는데, 이 가족은 중앙정부가 제공하는 각종 육아 지원 혜택에 더해 주 정부로부터 아이가 만 3세가 될 때까지 매달 아이 한 명당 200유로를 받는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온 사회가 합심해서 아이를 키우기 편한, 아이가 잘 자라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점이다. 알토아디제-수티롤주에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보육원, 각종 아기용품, 식료품, 의료보험, 에너지 요금, 대중교통, 방과 후 활동, 여름 캠프 등 다양한 항목에서" 할인 혜택을 받는다. 교사들은 (마을 공동체가 육아를 도울 수 있도록) "아파트 전체를 작은 보육원처럼 바꾸라고 권장"하고, 직장에서는 모유 수유에 필요한 휴식 시간을 별도로 보장한다. 한 회사 1층 로비에는 "신생아용 아기띠 광고 전단지와 함께 처음 부모가 된 이들을 위한 육아 팁이 빼곡히 적힌 메모, 어린이용 그림책"이 잔뜩 쌓여 있다. 현대 사회는 여러모로 출산을 권하지 않는 사회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가족 친화적인 정책과 그로 인한 효과를 보여주는 건 워싱턴 이그재미너에 칼럼을 쓰는 미국 기업연구소 선임연구원 팀 카니의 책 "가족 꾸리기 힘든 사회: 어쩌다 우리 사회에선 아이를 기르는 일이 이토록 힘든 일이 됐을까(Family Unfriendly: How Our Culture Made Raising Kids Much Harder Than It Needs to Be)"에서 제시하는 해법에 꼭 들어맞는 사례다. 카니는 책에서 미국 사회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을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그래서 제대로 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버렸다고 꼬집는다. 카니가 묘사하는 문화적인 현상 중에는 아무리 정책을 잘 세워도 어찌할 수 없는 관행이 있다. 예를 들어 정부가 부모더러 "당신 자녀들을 향한 기대치를 좀 낮추세요."라고 설득할 방법은 딱히 없어 보이는데, 책의 각 장 제목 중에 제일 눈에 띄는 제목이 딱 저 얘기다. 그러나 오늘날 소위 부모 역할로 기대되는 것 중에는 기준이 너무 과한 것들이 많다. 이를 바로잡아 육아를 좀 더 해볼 만한 일로 만들려면, 1년에 한 번 연말정산 때 받는 세제 혜택보다도 삶의 모든 부문에서 작은 지원과 돌봄을 꾸준히, 빈틈없이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작은 지원의 예는 얼마든지 있다. 장 볼 때 가족 할인, 가정 보육을 더 쉽고 편리하게 할 수 있게 지원하는 것, 열린 놀이공간,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는) 유연한 근무 공간 등이 대표적이다. 오늘날 선진국들이 공통으로 직면한 노령화, 인구 감소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으려면, 뉴욕타임스 동료 칼럼니스트인 제시카 그로스가 지난해 칼럼에 쓴 것처럼 "육아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부모와 사회의 기대치가 모두 조금씩 재조정될 필요가 있는데, 이탈리아의 알토아디제-수티롤주는 어느 정도 이를 달성한 것 같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어느 정도" 달성했을 뿐이다. 지난주 파이낸셜타임스의 데이터 전문가 존 번 머독은 "가족 친화적인 정책이 출산율 증가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알토아디제-수티롤주의 사례를 생각하면 잘못된 주장으로 들릴 수 있지만, 번 머독이 저출생 대책이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다만 아무리 많은 대책과 정책을 내놓아도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으로 아이를 낳고 기르기 어렵게 하는 요인들이 여전히 워낙 많아서 출산율은 결국 인구 대체 출산율인 2.1은커녕 이보다도 훨씬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한다. 이탈리아의 사례에서도 비슷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호로비츠와 피아니쟈니 기자의 기사에 따르면, 알토아디제-수티롤주 바로 남쪽으로 이웃한 트렌티노주도 비슷한 가족 친화적인 정책을 도입했으나 결과는 훨씬 실망스러웠다. "합계출산율은 1.36으로 더 떨어졌다. 이는 이탈리아 전체의 암울하게 낮은 출산율에 훨씬 가까운 수치다." 사실이다. 그러나 또한, 1.36은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 주에 비하면 그래도 높은 출산율인 것도 사실이다. 트렌티노주가 이웃한 알토아디제-수티롤주 만큼 인상적인 결과를 내지 못한 점, 출산율 하락을 막지 못한 점은 실패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정책도 도입하지 않은 데와 비교해 보면 선방한 지점도 없지 않다. 저출생이라는 큰 흐름에 굴복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일상적인 문화에서는 중요한 차이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출생이란 거대한 흐름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차 없이, 냉혹하게 보면 "방법이 없다"고 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좀 더 낙관적으로, 넓게 생각해 보면, 의미와 사명을 찾아 정립할 수 있다면 저출생이란 흐름을 낳은 문화를 극복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호로비츠와 피아니쟈니 기자는 기사에서 알토아디제-수티롤주가 원래 독일 땅이었다가 20세기에 이탈리아로 병합된 곳이라는 역사에 주목한다. 다른 나라에 병합된 만큼 '우리 문화'를 지키기 위해 문화를 전수해야 할 대상인 자손을 많이 낳으려는 '문화적 생존' 동기가 작용했을 수 있다는 거다. 팀 카니의 책에도 비슷한 사례가 나온다. 대개 부유한 선진국들은 저출생 문제를 겪는데, 이스라엘은 예외적으로 출산율이 높다. 여기에도 '문화적 생존' 기제가 작용했을 수 있다. 세속적인 유대인이든 종교적으로 유대교 계율을 엄격히 따르는 초정통파 유대인이든 유대인의 나라 이스라엘을 잃을 수 없다는 국가적인 사명감이 기저에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미국 가톨릭대학교의 캐서린 루스 파칼룩이 쓴 "한나의 아이들: 출산 열풍에 조용히 저항하는 여성들(Hannah’s Children: The Women Quietly Defying the Birth Dearth)"에서 또 다른 사례를 볼 수 있다. 책은 미국 여성 가운데 자녀를 다섯 명 이상 낳은 무척 예외적인 이들을 살펴보는데, 이들이 대개 일종의 사명감으로 아이를 많이 낳았다고 결론지었다. 그 사명감의 뿌리는 보통 종교인 경우가 가장 흔했다. (이쯤에서 나는 오는 29일 워싱턴에 있는 가톨릭대학교에서 파칼룩, 카니와 함께하는 대담의 사회를 맡았다는 점을 밝혀둔다.) 이렇게 일부 소수의 집단에서 발견되는 사명감을 좀 더 보편적인 집단 전체에 적용하는 방법은 없을까? 작은 지역의 성공 사례를 나라 전체로 확대하거나 종교적인 신념에서 비롯된 성공 요인을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이식할 수 있을까? 사실 여기에 분명한 답을 내리기 어렵다 보니, 비관적인 전망이 고개를 들곤 한다. 적어도 저출생이라는 흐름을 제대로 극복하는 일은 현재의 기대치와 가치관의 구조, 가족을 꾸리는 관습과 현대인의 삶의 방식 전반을 훌쩍 뛰어넘을 때만 가능하다. 지금은 누구도 어떻게 해야 그게 실제로 가능한지 잘 모른다. 나는 여기서 스마트폰에 주목한다. 퍼스트 띵스의 리아 리브레스코 사전트는 카니의 책에 대한 뛰어난 서평 중 하나를 썼는데, 조너선 하이트의 신간 "불안한 세대(The Anxious Generation)"와 함께 묶어 쓴 서평에서 사전트는 스마트폰과 화면, 소셜미디어가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미치는 영향을 짚었다. 카니는 너도나도 화면에 파묻혀 사는 세상이 가족의 삶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지적했고, 하이트는 스마트폰의 시대가 도래한 뒤 서구 아이들의 유년기가 어디서, 어떻게 잘못됐는지 썼다. 즉, 스마트폰 때문에 독립심을 기르지 못하고, 즉흥적으로 놀면서 사회성을 키울 기회도, 또래 친구들과 얼굴을 맞대고 소통할 일도 박탈당했다는 거다. 이는 "가족 꾸리기 힘든 사회"의 지적과 일치한다. 이 설명들을 종합하면, 우선 사전트는 화면에 몰두하는 문화가 어쩌다 보니 가족의 친근함을 대체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즉, 아이들의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와 아직 어리다 보니 하게 되는 많은 실수와 시행착오를 책임지고 제대로 같이 겪어주기는 싫은 사회가 아이들을 다루는 일종의 손쉬운 방법을 스마트폰에서 찾았다는 거다. 스마트폰은 아이를 어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는 데 붙잡아두면서 조용히 있게 해주는 마법 같은 도구다. 혹은 아이가 뭘 하는지 몰라도 분명한 장점이 있다. "애들은 스마트폰만 쥐여주면 딴짓 안 하고 화면만 본다. 조용히 있으며, 다른 사람한테 방해가 되지도 않고, 굳이 사람들 눈에 띄는 데 두지 않아도 된다." 화면만 보던 아이들이 자칫 불행해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바람직한 더 큰 사회적 변화를 대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아이들을 쉽게 다루게 해준다는 측면에서는 장점도 있다. 이번 주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팟캐스트에서는 조너선 하이트의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물론 그의 주장과 여러 반론에 관해서도 할 이야기가 많지만, 오늘은 우선 화면을 통해 아이들을 다루는 방법에 관한 질문에 초점을 맞춰 보자. 내가 스마트폰을 거부하고 반대하는 주장에 동조하는 건 아마도 내 편견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나는 스마트폰이 만들어낸 문화가 아이들은 물론 지금의 20대 성인에게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며, 최근 들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저출생 현상의 중요한 원인도 스마트폰에 있다고 의심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나의 편견이 반영된 주장이므로, 합리적인 반론을 두루 살피며 검증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사전트의 주장을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면,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아이들을 다루기가 더 쉬워진다면,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도 더 쉬워지는 것 아닌가?"라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렇다. 현시대의 육아와 스마트폰의 관계를 생각할 땐 헬리콥터 부모(아이들의 삶에 시시콜콜 간섭하고, 아이를 과보호하며 키우는 부모), 성적과 성공에 집착하는 교육, 여기에 사회 전반적으로는 여전히 아이를 반기지 않는 문화를 같이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단순히 아이를 기르는 부모가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상황만 생각해 보자. 가뜩이나 육아로 지친 부모들에게 자동차나 비행기를 오래 타고 가야 하는 가족 여행에서 아이들 손에 아이패드를 쥐여주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또 없을 거다. 아이와 같은 또래의 부모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도 육아에 아주 중요하다. 여러 집 아이 여럿을 한데 모아 같이 놀게 하고, 함께 키우는 일정을 조율할 수 있어서다. 아이들이 보이는 데 있어 주기만 하면, 뭐를 보고 듣고 있든지 크게 상관없는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저녁상을 차려야 할 바쁜 시간에 아이들이 조용히 동영상을 시청해 준다면 그만큼 고마울 때가 없다. 스마트폰 화면에 파묻혀 있는 성인들도 문제다. 내가 화면을 집중해서 보고 있다는 건 그만큼 내 눈앞의 아이에게 신경을 못 쓰거나 덜 쓴다는 뜻이고, 아이들은 화면에 파묻혀 주변의 자극에 반응하지 않는 부모 모습을 보고 그대로 따라하니 또 문제다. 그러나 스마트폰 덕분에 예전에는 불가능하던 일과 육아의 병행이 어느 정도 가능해진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재택근무의 확산은 부모에게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 준 것으로 보인다. 인구 밀도가 너무 높아 출산과 육아를 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도시에서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집, 또래 아이들과 뛰어놀 이웃 가까이로 일터를 옮길 수 있게 된 건 아주 중요한 변화다. 인터넷은 또 어린 시절 호기심에서 비롯된 온갖 특이한 관심사를 파고들 수 있는 정보를 주고, 원한다면 홈스쿨링에 필요한 자료와 단체를 연결해 주기도 한다. 아이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멀리 살더라도 영상통화 덕분에 손주 얼굴을 자주 볼 수 있다.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팟캐스트에서 나는 다른 참석자에 비해 스마트폰 없이 아이를 기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좀 더 낙관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실 세상에 종말이 오지 않는 한 사회에서 스마트폰을 없애버리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가족 친화적이고 아이들을 더 반기는 문화를 상상하고 만들어가는 일은 곧 스마트폰을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하되, 이른바 화면에 파묻혔을 때 나타나는 효과를 정확히 이해하고, 화면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지금까지 우리가 이룩하지 못한 수준의 목표를 설정해야 하는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원문 : The Birth Dearth and the Smartphone Age (c) 2024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셰프 호세 안드레스는 구호단체 월드센트럴키친(World Central Kitchen)의 창립자다. 허리케인, 지진, 폭격, 총격 등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닥칠 때야말로 인간성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어쩌다 한두 번 그러는 게 아니라, 매번 그렇다. 지난 1일 가자지구에서 사망한 월드센트럴키친(World Central Kitchen) 직원 7명은 인류애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들이었다. 이들에게는 얼굴과 이름이 있다. 구호요원이라는 일반 명사로 묻혀서도, 전쟁의 부수적인 피해로 취급받아서도 안 된다. 사이페딘 이삼 아야드 아부타하(Saifeddin Issam Ayad Abutaha), 존 채프먼(John Chapman), 제이콥 플리킹어(Jacob Flickinger), 조미 프랑콤(Zomi Frankcom), 제임스 헨더슨(James Henderson), 제임스 커비(James Kirby), 데미언 소볼(Damian Sobol).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가장 기본적인 활동, 즉 음식을 타인과 나누는 일을 하기 위해 모든 위험을 감수한 이들의 이름이다. 우크라이나와 터키, 모로코, 바하마, 인도네시아, 멕시코, 가자, 이스라엘의 현장에서 나와 함께 일했던 이들로, 영웅 그 이상의 존재다. 이들의 신념은 단순명료하다. 음식이 보편적인 인권이라는 믿음이다. 음식은 나쁜 사람이건 착한 사람이건, 부자건 가난하건, 좌파건 우파건 조건 없이 누려야 하는 인권이다. 우리는 음식을 나누면서 종교를 묻지 않는다. 음식이 얼마나 필요한지 물을 뿐이다. 현장에 투입된 첫날부터 우리는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인을 가리지 않고 음식을 나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스라엘 전역에서 175만여 끼니의 따뜻한 음식을 제공했다. 북부에서는 헤즈볼라 폭격으로 집을 잃은 가족들을 돌봤고, 남부에서는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 이들의 식사를 챙겼다. 인질로 잡혔다가 가족들과 재회하는 이들을 먹이기 위해 병원으로 음식을 나르기도 했다. 우리는 일관되게, 반복적으로, 열과 성을 다해 모든 인질을 석방하라고 호소했다. 일을 하는 내내 이스라엘군, 그리고 정부 관계자들과 쉴 새 없이 소통했다. 동시에 가자지구의 지역사회 지도자들은 물론 역내 아랍 국가들과도 긴밀히 협력했다. 그런 소통 없이 가자 지구로 음식을 트럭째 실어 나르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우리는 가자지구에서 식사 4,300만 인분을 제공했다. 팔레스타인인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공동 주방 68곳에서 따뜻한 식사를 준비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음은 똑같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들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음식이 전쟁 무기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이스라엘은 지금 이 전쟁을 치르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나쁜 나라가 아니다. 민간인에게 제공할 음식과 의약품을 차단할 정도로, 이스라엘 방위군과 사전에 이동 경로를 협의한 구호요원들을 죽여버릴 만큼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오늘 당장 음식과 의약품을 수송할 수 있는 육로를 더 개방해야 한다. 민간인과 구호요원 살해를 멈춰야 한다. 평화를 향한 멀고 어려운 여정을 오늘 당장 시작해야 한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테러 공격이 일어난 직후의 가장 끔찍한 순간이야말로 이스라엘이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할 때다. 가자의 모든 건물을 폭격한다고 인질을 살릴 수 있는 게 아니다. 팔레스타인인을 몽땅 굶겨 죽이는 것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우리는 월드센트럴키친의 가족들이 왜, 어떻게 죽었는지 수사하겠다는 이스라엘 정부의 약속을 환영한다. 수사는 실무선이 아니라 꼭대기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이번 사건을 두고 "전쟁 중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언급했다. 이스라엘 방위군이 이동 경로를 알고 있는, 소속이 명백하게 표시된 차량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었는데도 말이다. 이번 참사는 인도주의적 구호 활동을 매우 어렵게 만드는 정책의 직접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이번에 공격을 받은 우리 팀은 바닷길을 통해 400톤에 달하는 구호물자를 수송하던 중이었다. 아랍에미리트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고 키프로스의 도움을 받았으며, 이스라엘 방위군의 승인을 받은 두 번째 수송이었다. 통합식량안보단계분류 시스템(Integrated Food Security Phase Classification global initiative)에 따르면 가자지구 주민의 절반, 그러니까 110만여 명이 당장 기아의 위기에 놓여 있다. 우리 팀이 목숨을 걸고 수송에 나섰던 이유도 이번 수송이 매우 드물고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육로를 통해 가자지구 주민들에게 충분한 음식이 전달되고 있었다면, 이번 수송에 나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민족과 종교를 불문하고 지중해와 중동 지역 사람들은 인류애와 환대의 상징, 더 나은 내일을 위한 희망으로써 음식이 갖는 가치를 공유한다. 이 시기 기독교인들이 부활절 달걀을 만들고 무슬림이 라마단 기간의 이프타르 만찬에서 달걀을 먹고 유대교인들이 유월절 세데르 만찬 접시에 계란을 놓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봄철에 다시 태어나는 생명과 희망의 상징은 문화와 종교를 초월한다. 나도 유월절 만찬에서 이방인이었던 적이 있다.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 되었던 고대 유월절의 이야기, 이스라엘인이 한때는 노예였다는 사실을 눈앞에 놓인 만찬을 보며 기억하라는 의미임을 들은 적이 있다. 이방인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은 나약함의 상징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강인함의 상징이다. 이처럼 어두운 시기에 이스라엘인들은 진정한 강함이 무엇인지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원문 : José Andrés: Let People Eat (c) 2024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닐 그로스는 콜비 카릴지의 사회학과 교수로 지적 생명체의 사회적 측면을 연구한다. 만약 당신이 어떤 사람이 공화당원인지, 민주당원인지 예측해야 한다면, 그 사람에 관한 기본적인 사실 몇 가지를 아는 게 도움이 될 수 있다. 그 사람의 인종, 성별, 학력이나 도시, 근교, 시골 중에 어디에 사는지 등이다. 예를 들어 2016년과 2020년 사이에 한 조사를 보면, 미국에서 대학 졸업장이 없는 백인 중에는 공화당 지지자가 (민주당 지지자보다) 24%p 더 많았다. 내가 사는 메인주 중부 시골에 사는 사람과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면, 그 사람은 공화당의 주장에 동조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성별에 따라 범죄, 치안에 관한 정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생각해 보자. 남성은 여성보다 사형 제도에 찬성하는 비율은 10%p 더 높고, 반대로 총기 규제를 지지하는 비율은 10%p 낮다. 인종, 민족에 따른 불법 이민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는 또 어떤가? 라티노 미국인에 비해 라티노가 아닌 미국인은 이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불법 이민자를 "더 많이 추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22%p 더 높다. 물론 일반화하기 어려운 이례적인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긴 하지만, 인구통계학적 경향은 분명 한 사람의 신념을 예측하는 데 유용한 지표가 된다. 특히 오늘날 선거가 점점 더 투표율에서 승부가 갈리는 설득의 게임이 된 현실에선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렇게 인구 통계에 따라 정치 성향을 예측하다 보면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맞닥뜨리게 된다. 만약 우리의 정치적인 관점과 행동이 (우리가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인종이나 (계급, 계층, 부모의 소득에 따라 상당 부분 제약이 따르는) 교육 같은 특징에 따라 결정되는 거라면, 정치적인 성향을 따져볼 때 남들의 성향 말고 내 정치적인 성향에 관해, 자기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는 사람은 우리 중에 과연 얼마나 될까? 오늘날 미국 정치에서는 정치적인 견해가 다른 '상대편' 사람들이 합리적인 사고나 윤리적인 추론을 못 하고 있다는 주장을 흔히 접할 수 있다. 진보 진영에서는 대학 졸업장이 없는 백인들이 공화당의 핵심 지지층을 이루는 상황을 두고, 그 유권자들이 정보가 부족해서 그렇다거나 심지어 지능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면 도널드 트럼프가 늘어놓는 거짓말에 도대체 왜 넘어간단 말인가? 반대로 공화당 지지자들은 "진보 진영의 (편향된) 집단 사고" 문제를 지적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미국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경찰 예산을 깎고 아예 경찰 조직을 해체해 버리자는 단순하면서도 실현 불가능한 주장을 한 목소리로 외칠 수 있단 말인가? 방금 든 예는 좀 더 넓게 보면 지지 정당에 따른 고정관념이 드러나는 주장이다. 미국에서 정치적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이런 고정관념도 강화됐다. 서로 상대 진영 사람들이 자기 성찰이 부족하다고 손가락질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2022년의 민주당원은 공화당원들을 가리켜 폐쇄적이고, 정직하지 않으며, 도덕적으로 낙제를 면치 못하는 수준이라고 말할 가능성이 6년 전 민주당원보다 훨씬 더 크다. 공화당원이 민주당원에 관해 느끼는 바도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적인 견해에 지적인 혹은 도덕적 미덕 외의 요인이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에 관해선 놀랍게도 다들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대학 졸업장이 있는 전문직 유권자들은 자신들이 민주당에 더 끌리는 이유가 어느 정도는 민주당이 공화당보다 교육 수준이 높고 전문성이 있는 이들을 더 우대하는 정책을 펴기 때문이라는 꽤 자명한 사실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이들은 계급적 이해관계가 다분히 반영된 자신들의 정치 성향을 국가의 미래를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순수한 이타주의로 포장한 다음 이를 철석같이 믿는다. 마찬가지로 복음주의 기독교 신자들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건 트럼프가 기독교적인 가치를 신봉하거나 최소한 기독교에 우호적인 판사를 연방법원의 주요 보직에 임명하리라는 기대, 또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더 유리한 교육 정책을 펴주리라는 기대가 다분히 반영돼 있다. 그런데도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 성향을 애국으로 포장하며, 자신이 속한 종교 집단의 이해관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처럼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 중에 누구도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고 믿는 정치적인 견해는 우리의 사회적인 지위, 계층, 그에 따른 사회적 압박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우리가 지적이고 도덕적인, 심지어 때로는 영적인 탐구를 포함한 숙고의 과정을 거쳐 지금의 정치적인 견해를 갖게 됐다고 믿는다. 물론 자기의 믿음과 견해의 뿌리를 굳이 자세히 돌아보지 않아도 되는 다양한 상황이 있을 수 있다. 심지어 그러는 편이 더 나을 때도 있다. 낯선 도시에서 익숙하지 않은 길을 운전할 때 휴대전화의 길 안내를 따르다 보면 인지적 손실이 발생하겠지만, 그 덕분에 안전하게 운전해서 목적지에 효율적으로 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편이 더 나은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병에 걸리면 의사를 찾아간다. 건강을 되찾기 위해 의사가 내리는 진단과 처방을 믿기 때문에 의사, 좀 더 넓게는 의료 시스템이 나 대신 나에 관해 생각하고 들여다볼 수 있게 허락하는 셈이다.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한 전문가의 조언을 듣고 따를 때 일반적인 통념을 따르는 것보다 결과가 낫다는 사실은 코로나19 백신을 거부한 사람들 사이에서 사망률이 높았던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인 문제는 좀 다르다. 우리의 정치적 견해를 사회적 계층이나 지위에 따라 섣불리 예단하도록 내버려 두는 건 어떤 의미에서 개인적인 책임을 방기하는 일이다. 물론 우리의 집단적 정체성이나 이해관계, 경험이 어느 정도 정치적인 성향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사회적 환경과 경험을 통해 어떤 신념을 갖게 됐는지 끊임없이 되돌아보고 확인하는 건 결국 각자의 몫이다. 즉 내가 믿는 가치나 정치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기계적인 통념이나 분류에 의해 정해진 것이 아니라 건전하고 합리적인 추론을 바탕으로 내가 내린 결정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안타깝게도 당파성이 모든 걸 결정하는 사회는 이와 같은 독립적인 사고와 결정을 장려하기보다 짓누른다. 진보도 보수도 자기들이야말로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유일하게 깨어 있는 진영이라고 외치지만 둘 다 아니다. 나의 정치적 견해와 행동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사회적으로 어떻게 형성됐는지 겸손하게 돌아보는 것만 해도 보기 드물게 훌륭한 일이다. 심지어 당신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신념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당신이 홀로 이를 자축할 자격은 없을 수도 있다. 당신이 느끼는 도덕적 고결함이 우연히 생겨났거나 그저 사회적으로 운이 좋아서 그랬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경우에 정치적으로 견해가 다른 상대편 사람들을 단지 지금껏 살아온 환경이 다르다는 이유로 은근히 헐뜯고 우월감을 느껴도 되는 걸까? 도덕적 상대주의는 여기서 적용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다른 이를 칭찬하거나 비난할 때 훨씬 더 신중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견해를 밝힐 때 늘 신중해야 한다는 건 곧 다른 이들의 의견이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진실을 포함하고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부디 공적인 영역인 선거에서 투표를 통해 원 없이 싸워 보자. 당신은 당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당신이 믿고 따르는 가치를 위해 싸우고, 나는 내 것을 위해 싸우는 거다. 그게 바로 크고, 다양하고, 시끌벅적한 이 나라 민주주의의 본질이다. 그러나 우리가 때로는 우리 스스로 가장 굳게 믿고 잇던 신념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의 정치 담론은 좀 더 교양 있고 친밀하게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나 다른 여러 측면에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라는 점을 공유하는 존재다. 이 점을 절대로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중요한 기준을 하나 세울 수 있다. 원문 : When It Comes to Politics, Are Any of Us Really Thinking for Ourselves? (c) 2024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피터 코이는 오피니언 칼럼니스트다. 바닥 청소부터 눈썹 다듬기, 철학 강의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로봇과 인공지능이 인간을 추월하는 날이 온다고 가정해 보자. 그때도 인간에게 일자리가 남아 있을까? 경제학자 노아 스미스는 그렇다고 말한다. 스미스는 서브스택에 올린 글에서 이렇게 썼다. AI가 지배하는 시대에도 보통의 인간이 얼마든지 높은 급여를 받는 직업을 가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것도 대부분은 지금 하는 일을 그대로 하면서 말이다. 나는 이 주제를 깊이 다루는 몇몇 경제학자에게 스미스의 주장을 검토해 달라고 부탁했다. 반응은 대체로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일자리의 미래에 대한 암울한 이야기가 넘쳐나는 요즘인지라, 스미스의 의견이 한 줄기 햇살처럼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스미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검토해 보기로 했다. 스미스가 주장하는 바의 근간은 경제학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론 가운데 하나인 '비교우위'다. 비교우위를 간단히 설명하면 "각자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을 한다"는 의미다. 이 이론에 따르면 마사 스튜어트가 세계에서 셔츠를 가장 잘 다리는 사람이라도, 즉 셔츠 다리기에 절대우위가 있더라도 직접 다림질을 하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낫다. 그가 더 잘하는 일, 그러니까 TV 프로그램 제작 같은 일에 시간을 쓰는 쪽이 더 낫기 때문이다. (이 예시는 온라인 교육 프로그램 '마지널 레볼루션 유니버시티'의 유튜브 영상에서 빌려왔음을 밝힌다.) 인공지능과 일자리 문제에서 비교우위를 거론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인공지능의 소유주들이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100만 배는 더 잘하는 일들을 인공지능에 맡기지, 인간보다 두 배쯤 잘하는 일을 굳이 맡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배급을 받으며 살아가는 대신 계속해서 생계를 위해 일을 하게 될 거라는 추측은 여기서 비롯된다. 스미스의 주장에 따르면 인공지능의 가격이 아무리 내려도 비교우위는 변하지 않는다. 인공지능에 할당되는 컴퓨팅 파워가 무한한 자원이 아닌 이상, 인공지능의 소유주는 가장 유용한 곳에만 인공지능을 쓰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에도 인공지능이 요가를 가르치거나, 이런 뉴스레터를 작성하는 일을 맡지 않을 거라고 추측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문제가 해결됐다고 할 수 있나? 그렇지 않다. 스미스도 자신의 주장에 "중요하고 무서운" 한계가 하나 있음을 인정한다. 인간과 컴퓨터가 자원을 놓고 경쟁하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사무실 전기와 같이 인간을 고용하는 데 드는 자원이 더 큰 이익을 위해 인공지능을 돌리는 데 들어가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스미스는 경제학자 타일러 코웬이 2013년에 쓴 논문을 언급한다. 당시 코웬은 말이 짐을 끄는 데 있어 (절대우위는 아닐지라도) 비교우위를 갖고 있음에도, 트럭이 발명된 이후 기업은 더 이상 제품 운송에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쓸모가 없어진 말들은 도살장으로 끌려갔다. 인간 노동자들도 같은 운명에 처한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썩 좋지 않다. MIT 소속 경제학자인 데이비드 오터도 나의 이메일 문의에 답장하며 '쓸모 없어진 말'의 예시를 언급했다. 인간 노동자 역시 "실질적인 유지 비용" 때문에 "모든 생산 활동에 있어 경쟁력 없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터는 우리가 여기서 고려하는 시나리오, 즉 로봇과 인공지능이 모든 일을 인간보다 잘하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런 날이 온다면 "인간을 고용하는 것이 너무 비싸지는 날, 또는 자신을 부양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돈을 버는 날이 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오터는 동료 경제학자 대런 아세모글루, 사이먼 존슨과 함께 MIT 부속 '미래의 일자리 연구소(Shaping the Future of Work Initiative)'의 공동 소장을 맡고 있다. 아세모글루 역시 이메일 답변에서 오터와 마찬가지로 미래 노동시장에서 인간의 역할에 대해 낙관적으로 예측한다고 밝혔다. "향후 10년 안에 인공지능과 컴퓨터 비전 기술의 영향을 받을 일자리는 최대 10% 안쪽"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터와 마찬가지로 아세모글루 역시 인공지능이 모든 일을 인간보다 더 잘하게 되는 날에는 인간의 노동력이 시장 지배력을 갖지 못할 수도 있고, 나아가 자신을 부양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고 했다.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와튼 경영대학에서 혁신과 기업가 정신을 강의하는 이선 몰릭 교수는 최근 저서 "공동 지능: 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가고 일하기(Co-Intelligence: Living and Working with A.I.)"에서 인공지능이 진짜 잘하는 분야가 바로 인간 스스로 인간적인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분야라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창의력 같은 것이다. 몰릭은 "경제학자 에드 펠턴과 마나브 라지, 롭 시먼스의 연구에 따르면 인공지능이 대체할 영역은 가장 보상이 크고, 가장 창의적이며, 가장 높은 교육 수준이 요구되는 일자리와 가장 많이 겹친다"고 썼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허용할 영역은 허드렛일뿐일까? 몰릭도 그렇게까지 비관적이지는 않지만, 인공지능을 깊이 연구한 사람은 누구나 "최소 한 차례 존재론적 위기를 경험한다"고 답했다. 자기 육체의 경제적 가치가 얼마나 될지 의문을 품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스미스에게 이메일을 보내 오터와 아세모글루, 몰릭의 답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스미스는 인간 노동의 미래는 인공지능이 모든 에너지를 쓸 수 있도록 허용할지 말지에 달렸다고 답했다. 인공지능이 모든 에너지를 쓸 수 있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면 "인간에게도 소비할 수 있는 에너지가 남을 것이고, 그렇다면 비교우위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정부가 인간의 일자리를 보호하는 방법은 특정 직군에 적용되는 다양한 규제라기보다 오직 하나의 규제입니다. 바로 데이터 센터가 잡아먹는 에너지의 비중에 제한을 두는 것이죠." 이 말을 듣고 나는 일자리의 미래에 대해 낙관하게 됐다. 하지만 오터의 추천으로 파스쿠알 레스트레포 보스턴대 경제학과 교수를 인터뷰하고는 또 생각이 바뀌었다. 레스트레포 교수는 최근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의 역할을 주제로 강연을 했는데, 강연 제목은 "아무도 당신을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다"였다. 레스트레포는 인공지능이 노동시장을 점령하는 과정을 밀물에 비유했다. 돌이 하나씩 물에 잠기다가 결국은 모든 돌이 물 아래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때도 뭔가에 시간을 쏟으면서 그걸 일이라고 부를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 '일'이 가치가 생산되는 가치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작아질 것입니다." 비교우위는 실존하는 개념이지만, 인공지능이 모든 분야에서 인간을 뛰어넘고 컴퓨팅의 비용이 낮아진다면 비교우위로 인공지능의 노동시장 점령을 막을 길은 없다고 레스트레포는 주장한다. 인간은 여전히 일을 하겠지만, 우리가 하는 일이라는 것은 인공지능이 쓰는 컴퓨팅 자원을 조금 아껴주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인간이 '보잘것없는' 뇌를 사용해 1시간 동안 문제를 해결해 봤자, 인공지능에는 수천, 수만 분의 1초 정도 시간을 아끼게 해주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인공지능은 다림질을 직접 하지 않는 마사 스튜어트처럼 우리가 일을 대신해 준 수만 분의 1초를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에 활용할 것이다. 그 일이 생산해 낼 가치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것이라, 오늘날의 인간은 그저 어렴풋이 상상만 해볼 수 있을 뿐이다. 인공지능의 소유주들은 인간이 제공하는 그 정도 서비스에도 기꺼이 돈을 지불할 것이다. 레스트레포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 인간이 그런 식으로 받게 될 급여는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상당한 양의 재화와 서비스일 것이다. 대부분 인공지능에 의해 창출될 사회 전체의 부에서 인간에게 주어질 급여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작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일자리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노동은 더 이상 우리 삶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밝은 미래가 펼쳐질까? 부가 고루 나누어지기만 한다면 모든 인간이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사치를 누리게 되겠지만, 그렇게 될지는 확신할 수 없는 노릇이다. 원문 : Will A.I. Take All Our Jobs? This Economist Suggests Maybe Not. (c) 2024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우키 고니는 아르헨티나 작가, 수필가, 언론인이다. 이 글은 그가 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썼다. 아르헨티나의 새 대통령 하비에르 밀레이(Javier Milei)가 취임한 지 100일이 막 지났다. 지난해 12월 10일 임기를 시작한 극우 자유지상주의자 밀레이 대통령은 전임 행정부가 남긴 "아르헨티나 역사상 최악의 유산"을 청산하겠다는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최악의 유산이란 "공공부문 지출을 미친 듯이 흥청망청 늘린" 결과 아르헨티나가 직면한 경제 상황을 뜻한다. 밀레이는 여러 면에서 도널드 트럼프를 연상시키며, 실제로도 트럼프와 끊임없이 비교된다. 극단적인 자유지상주의 정책이 아르헨티나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 거라는 말부터 헝클어진 머리 스타일, 아무 말이나 거침없이 내뱉는 언사에 당사자인 트럼프는 물론이고, 전 세계의 많은 유명인이 밀레이 대통령에게 찬사를 보냈다. 일론 머스크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밀레이 대통령이 한 연설을 가리켜 "너무 섹시해서 섹스 행위에 집중하기 어려웠을 정도"였다고 평했다. 그러나 정치 신인인 밀레이 대통령은 아르헨티나 국민에게 자신의 비전을 설득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자신을 "무정부주의 자본주의자"라고 소개해 온 밀레이는 자유시장경제를 전면적으로 도입해 천정부지로 치솟은 인플레이션을 잠재우겠다는 공약을 앞세워 지난해 11월 대선에서 당선됐다. 그러나 적어도 첫 100일간의 성적표를 보면, 밀레이 대통령은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물가는 그가 취임한 첫 달 만에 두 배로 뛰었다. 다행히 그 뒤로는 좀 둔화했지만, 여전히 다른 나라에선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수준의 인플레이션이다. 빈곤율도 치솟았고, 소비 심리는 얼어붙어 소매 경기도 죽었다. 밀레이 대통령은 거리에서 시민들의 저항에, 국회에서는 다수당인 야당의 저항에 가로막혀 아무것도 못 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를 다시 한번 세계적인 강대국 반열에 올리는 데 필요하다"며 경제 개혁안을 발의했지만, 의회가 벌써 두 차례나 이를 부결했다. 곳곳에서 거센 저항과 역풍을 맞는 밀레이 대통령과 행정부를 보면, 다음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하비에르 밀레이란 인물은 누구인가? (적어도 4개월 전 대선에선)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었고, 일론 머스크에게 "아르헨티나의 번영이 머지않았다"는 찬사를 부른 경제적 비전을 정말 실행할 수 있는 난세의 영웅인가? 아니면 거리에 쏟아져 나온 수많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나라를 팔아넘길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라!"고 맹렬한 비난을 들어도 싼, 권력에 굶주린 악당에 불과할까? 우선 하나 확실한 건 밀레이는 도널드 트럼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기득권을 끔찍이 싫어하며, 자기가 싫어하는 대상에 막말을 퍼붓는 걸 보고는 밀레이를 트럼프와 판박이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밀레이는 오히려 권위주의가 당연하고, 민주주의 경험은 매우 드문 남미의 오랜 역사가 낳은 산물에 가깝다. 밀레이 대통령은 북미에서 시작해 아메리카 대륙 전체로 퍼진 트럼프식 포퓰리즘을 여기저기 차용했다. "나를 밟지 마세요(Don't tread on me)"라는 문구가 쓰여 있는 개즈덴 깃발 앞에서 종종 사진을 찍는 게 대표적이다. (옮긴이: 개즈덴 깃발은 노란색 바탕에 똬리를 틀고 있는 방울뱀 그림이 있고, 그 아래 "나를 밟지 마세요"라는 문구가 적힌 깃발로, 미국 독립혁명 당시 처음 고안돼 미 해병대에서 쓰이기도 했다. 미국의 독립과 자유를 상징하던 깃발은 시간이 흐르며 점점 더 자유지상주의, 극우 이념을 대변하는 깃발로 바뀌었다. 지난 2021년 1월 미국 의사당 테러에 가담한 폭도들 사이에서도 개즈덴 깃발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밀레이 대통령은 트럼프의 모든 것을 닮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기보다 남미의 전형적인 권위주의 군사독재자(caudillo)에 가깝다. 밀레이는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려면 자신이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듯하다. 그래서 이념적으로는 정반대지만, 베네수엘라의 독재자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에 버금가는 권력을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수십 년간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은 진보적인 (혹은 급진적인) 경제 정책이 어떻게 한 나라를 재앙으로 이끌 수 있는지 설명할 때마다 주저 없이 아르헨티나를 대표적인 예로 꼽았다. 아르헨티나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중 하나였다. 보수 세력이 집권하던 시절의 일이다. 그러다 좌파 성향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거대한 사회복지 정책을 잇달아 도입했고, 이때부터 아르헨티나 경제는 늘어나는 정부 부채에 만성적인 인플레이션 문제를 떠안았다. 12월 10일 취임사에서 밀레이 대통령은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이자, 서구의 등대와 같은 나라였다"고 직설적으로 말하며,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실은 예전의 아르헨티나도 낙원은 아니었다. 1874년부터 1916년까지 집권한 보수 세력은 잇단 부정 선거를 통해 틀어쥔 권력을 내려놓지 않았다. 이 시기에 농업 강국 아르헨티나가 부유했던 건 사실이지만, 동시에 이때 아르헨티나에는 부패가 만연했고, 해외에서 빚을 너무 많이 졌으며, 주기적으로 금융 위기가 불어닥치는 통에 국고는 비어 있었다. 당시 정부도 국영 기업 민영화를 통해 경제를 정상화하려 했다. 1983년, 군사독재가 막을 내리며 시작된 이번 아르헨티나의 민주주의는 208년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독재 정권도,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도, 좌우를 막론하고 누가 와도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아르헨티나 경제는 망가져 버렸다. 1816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래 아르헨티나 경제는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에 채무 불이행 선언, 수없는 채권 전환 계획으로 점철됐다. 밀레이는 지난해 대선에서 만성적인 경제적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근본적인 적폐라 할 수 있는 "사회 정의의 일탈"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가 꺼내 든 경제 정책은 상당 부분 20세기 미국의 자유지상주의 경제학자 머리 로스바드의 주장을 차용한 것이다. 그런데 로스바드는 홀로코스트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과 친분을 쌓았으며, 인종우월주의를 바탕으로 한 인종 분리 정책을 지지했다고 비판받는 사람이다. 밀레이 대통령이 선거 중에 내세운 공약 중에는 로스바드의 원칙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세금은 강도질"이라는 주장과 중앙은행을 없애버리겠다는 공약이다. 밀레이는 또 현재 아르헨티나가 겪는 어려움의 상당 부분을 진보 성향의 전임 정부 탓으로 돌린다. 대표적인 게 2007년부터 2015년까지 집권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키르츠네르 대통령이다. 병든 아르헨티나를 치료하기 위해 밀레이는 이미 아르헨티나의 수많은 복지 제도를 하나씩 해체하기 시작했으며, 교육이나 의료 등에서 정부의 역할을 대폭 삭감하거나 발을 뺐다. 지금까지 밀레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면, 자유지상주의 낙원을 건설하기 위한 자신의 정책이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할 만큼 커다란 정치적 저항에 부딪히는 것을 별로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 3월 14일, 아르헨티나 상원은 밀레이 대통령이 앞서 공표한 대통령령을 뒤집어 무효로 만들었다. 밀레이는 대통령령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의회의 승인 없이도 수많은 부문의 비용을 절감하는 개혁을 추진할 수 있도록 여러 권한을 부여했다. (다만 하원이 투표를 통해 대통령령을 무효로 하기 전까지는 일단 대통령령의 효력이 유지된다. 하원은 상원에 비하면 밀레이가 자신에 동조하는 표를 더 많이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곳이다.) 앞서 지난 2월, 야당이 주축을 이룬 의회는 밀레이 대통령이 입안한 일련의 자유시장경제 추진법을 일괄 철회시켰다. 밀레이 대통령이 내건 경제 개혁의 핵심 공약이 다 담긴 이 법안들은 국영기업 민영화나 환경 보호, 노동시장 등 경제의 다양한 분야에서 규제를 완화하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했다. 현지 매체에 따르면, 밀레이 대통령은 자신의 경제 개혁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주지사나 지방정부 관료가 있다면 그 사람을 향해 "오줌을 갈겨버리겠다"라고 말했으며, 의회를 해산해 버리는 방법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법안에 반대표를 던진 의원들을 "기생충"이라고 비난했다. 밀레이 대통령이 아르헨티나 유권자들이 원하는 바를 잘못 넘겨짚었을 수도 있다. 즉, 경제가 되살아나는 걸 마다하는 국민이야 없겠지만,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국민들이 밀레이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어쩌면 밀레이는 지금 아르헨티나의 민주주의를 시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밀레이의 눈에 지금의 아르헨티나는 사회적인 권리를 요구하는 이들만 가득한 병든 복지국가다. 연약한 이 나라는 포퓰리즘에 찌들었다. 밀레이는 이런 아르헨티나를 자유주의 지상낙원으로 바꿔내고자 한다. 새로운 아르헨티나에서는 애써 이룬 것을 사회에 억지로 환원하거나 빼앗길 걱정이 없다. 그래서 능력 있는 사람은 자기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고자 노력한다. 밀레이 대통령의 정책이 마침내 인플레이션을 잠재우고, 생필품 가격을 낮출지도 모른다. 다만 그 대가로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오랫동안 당연한 것처럼 누려 온 의료보험을 잃게 될 수도 있으며, 대통령이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의회를 강제로 해산할 수도 있다. 사실 아르헨티나는 현재 밀레이나 그와 생각이 비슷한 이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심각한 경제적 재앙을 겪고 있지 않다. 산업 기반도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고, 많은 농산물을 수출하는 주요 농업 국가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가운데 인력 개발지수가 두 번째로 높으며,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필요하면 강고히 싸움에 나설 교육 수준 높은 중산층이 여전히 두터운, 라틴아메리카 세 번째 경제 대국이다. 지난 1월 취임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밀레이 대통령은 다보스 포럼에서 전 세계 기업인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던졌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 누구도 당신의 야망을 부도덕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이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입니다. 오늘 이 순간부터 아르헨티나는 여러분의 확고한, 무조건적인 동맹국임을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머스크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밀레이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특히 부자들 사이에서 반응이 아주 좋았다. 다만 밀레이는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을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일에도 마찬가지로 온 힘을 다 해야 한다. 진짜 주인공은 바로 아르헨티나의 거리에 나선 이들, 하루하루를 살아내며 지금 상황을 예의주시하는 국민들이다. 아르헨티나는 역사상 인플레이션이라는 괴물을 제대로 길들인 적이 잘 없다. 인플레이션을 잠재우지 못한다면,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인내심은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바닥날지도 모른다. 트럼프나 머스크는 밀레이를 자유지상주의를 부르짖은 천재로 추켜세우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실패한다면 밀레이는 그렇게 기억되지 못할 거다. 대신 그는 그저 약속한 것을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애꿎은 사람들의 삶만 팍팍하게 만든, 독재자를 꿈꾸다 사라진 수많은 실패한 정치인의 목록에 부질없이 이름을 올리고 끝날 것이다. 원문 : 100 Days of Javier Milei (c) 2024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애슐리 구달은 딜로이트와 시스코 시스템즈에서 임원을 지냈으며, 곧 출간될 책 "변화에 따르는 문제(The Problem With Change)"를 썼다. 다양한 기술 혁신은 물론 직장 문화 혁신의 발원지인 실리콘밸리에 또 다른 변화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바로 불필요한 해고다. 실리콘 밸리에서는 작년 한 해 동안 26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20년 전 닷컴 버블 붕괴 이후 최대 규모였다. 주요 테크 기업들은 대부분 수익을 잘 내고 있음에도 2024년 이런 기조를 이어나갈 기세다. 그들의 언어를 빌리자면 기업 구조를 핵심 우선순위에 맞게 조정하는 과정을 밟는 것이라고 한다. '탈바꿈', 또는 '미래에 대비'라는 표현도 등장한다. 하지만 일부 테크 기업들은 이런 두리뭉실한 표현 뒤에 숨어 시장 심리를 잠깐 바짝 끌어올리기 위한 극단적인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 투자자들은 열광한다. 인력 감축 논의가 진행 중인 가운데 메타의 주가는 170%나 올랐다. 주가가 가는 곳으로 회사 경영진도 따르기 마련이라, 조만간 또 다른 상장 회사에서 불필요한 해고가 또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최근의 해고 열풍은 전 세계 모든 기업의 업무 환경을 끊임없이 뒤흔들고 있는 변화의 바람이다. 작건 크건 회사에 다녀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결과로 나타나는 '믹서기 속의 삶', 즉 오늘날 회사 생활에서 하나의 상수가 되어버린 끊임없는 불확실성과 격변이 익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새로운 사장이 오자마자 조직 개편이 이어지고, 익숙한 보고 체계가 바뀌어 버리는 경험. 컨설턴트가 새로운 전략을 제안하면 모두가 거기에 적응하느라 수개월을 낭비하다가 뜬구름 잡는 비전만 나열해 놓은 PPT 자료만 남긴 채 예전 방식으로 돌아가는 일. 아, 최고봉은 이거 아닐까? 인수합병 계획이 발표되고, 이후 앞서 언급한 모든 일, 또 그 이상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 물론 제자리에 머무르는 기업이 잘 되는 일은 없고, 변화 없이는 발전도 없다. 경로를 수정하고 조직을 개편하며, 전략을 바꿔야 할 때가 당연히 있다. 기술적인 발전으로 주요 산업의 구조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중이다. 그러나 지난 25년 정도를 돌아볼 때, 변혁에 대한 아이디어는 일종의 컬트처럼 변질되어 모든 것은 항상 바뀌어야 하고 전부를 바꾸지 않으면 패배하고 만다는 신념으로 바뀌었다. 변화에 대한 수업은 스탠퍼드나 코넬, 컬럼비아,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인기 과목이자 단골 주제다. 주요 비즈니스 잡지의 표지에서도 "변화를 위한 리더십 구축: 기업의 미래가 여기에 달렸다"는 기사 제목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혼돈의 교리문답서를 원한다면 영감을 주는 포스터를 구입하고 슬로건을 외치면 된다. 빠르게 실패하라, 변화하거나 변화를 강요당하거나 둘 중 하나다, 빨리 움직이고 파괴하라! 물론 일부는 실리콘밸리 기술주의자들의 오만함의 산물이다. 그러나 리더의 근본적인 역할이 곧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라는 믿음도 이런 분위기에 일조하는 게 사실이다. 그것 말고도 회사를 경영하는 방법이 존재했던 시절을 떠올리기 힘들 정도다. 나아가 대부분 경영자가 이들에게 자문을 제공하는 컨설턴트와 뱅커들, 이들을 부추기는 행동주의 투자자들, 이들을 평가하는 애널리스트들과 함께 이런 신념으로 무장할수록 승진을 거듭했기 때문에 끊임없는 변화는 일종의 플라이휠(flywheel)이 되었다. 리더가 변화를 추구하는 이유는 그것이 리더가 할 일이기 때문이라는 식이다. 자문과 투자자, 애널리스트는 여기에 긍정적으로 반응한다. 변화는 늘 좋은 것이라 배웠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평판이나 주가, 또는 둘 다 즉각 오르고 (대부분 주식으로 보상받는) 리더는 자신이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했으니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는다고 느끼게 되며, 이후 모두가 다음 변화를 찾아 재빨리 넘어간다. 하지만 이로 인해 바람직한 결과가 나왔는지는 대개 명확하지 않다. 인수합병 활동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인수합병이 주주 가치를 높이기는커녕 파괴하는 경우가 60~90%에 이른다. 스탠퍼드 경영대학원 제프리 페퍼 교수는 해고가 비용 절감, 생산성 향상, 기업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조직 개편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급작스러운 생산성이나 창의력 향상으로 이어지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최전선에 선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이렇게 의도와 결과 사이에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더욱 명확하다. 주변 사람들이 '전환 배치'되거나 갑작스럽게 나의 역량을 잘 모르는 새로운 상사 아래서 일하게 되면, 이 모든 변화와 혼란이 개선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받아들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너무 피곤하죠." "영혼이 빨려 나가는 기분이에요." 일터에서 이런 변화를 겪고 있는 사람들의 말이다. 두 부서가 하나로 합쳐진 후 부하 직원들이 자동차 불빛에 놀란 사슴처럼 굳어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더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10년 사이 19명의 관리자를 경험한 사람도 있었다. 끊임없는 변화가 에너지를 고갈시킨다고 털어놓은 사람도 있었다. "회의에서는 맞는 말을 하지만, 그걸 실현하기 위해 뭔가를 실천에 옮기지는 않는 거죠." 관리자가 찾아오거나 의사소통을 중단하면 위험 신호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도 있다. "쓰나미가 오기 전에 물이 쫙 빠져나가는 것과 같아요. 물이 사라지면 뒤이어 쓰나미가 옵니다. 갑자기, 세게요. 그러니까 사방이 조용해지면 저는 걱정이 되기 시작해요." 내가 인터뷰한 수십 명의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바꾸려다 망한 이야기'를 공유해 줬다. 이들의 반응은 단순히 좌절이나 불만이 아니다. 안정감이 사라지고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느낄 때 인간이 경험하는 심리적인 반응이다. '믹서기 속의 삶'이 왜 힘든지 알려주는 과학적 연구도 많다. 일례로 한 실험은 인간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는 순간은 불편함이 아니라 불확실성이 최고조에 달하는 때라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다. 불확실성이야말로 회사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잘 표현하는 말일 것이다. 주도성의 문제도 있다. 1960년대 스티븐 마이어와 마틴 셀리그먼이 수행한 유명한 실험에 따르면, 사람들은 스스로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면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게 된다고 한다. '학습된 무력감'이 찾아오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소속감에 대한 근본적인 욕구가 있음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인간에게는 사회적 집단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속해 있던 팀이 해체되거나, 개편되거나, 재조립되는 것을 싫어한다. 인간은 또한 (놀랍지 않게도) 내 주변 환경을 구성하는 것들이 이치에 맞고 말이 되기를 원한다.일터에서의 변화를 알리는 흔한 CEO 성명이나 과장된 응원 구호들이 종종 간과하는 부분이 바로 이 점이다. 불확실성과 혼란에 대한 반응은 인간의 본성인 반면, 우리의 일터에 도입되고 있는 변화의 정도는 그렇지 않다. 본능적인 것이 아니라, 선택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비즈니스 업계가 변화는 순수한 선(善)이며, '도가 넘는 변화'란 존재할 수 없고, 변화를 위한 비용은 아무리 치러도 아깝지 않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 많은 경영인이 변화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나 최전선에 있는 직원들이 하는 이야기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인다면 안정성이야말로 발전의 토대임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일터에서 사람들의 심리적인 욕구를 조금 더 존중해, 또 다른 변화로 넘어가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고 우리의 노력이 유용한 방향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하는 관행이나 관계에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만 기업 역시 그 모든 것에 앞서 인간의 기여로 이루어진 플랫폼이라는 간단한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원문 : Mass Tech Layoffs? Just Another Day in the Corporate Blender. (c) 2024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Joel Saget *크리스토퍼 콜드웰은 뉴욕타임스 오피니언에 글을 기고하는 작가이자, "자격의 시대: 1960년대 이후의 미국(The Age of Entitlement: America Since the Sixties.)"의 저자다.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푸틴의 야욕이 우크라이나에서 멈추리라 생각하는 분이 계신다면 제가 하나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푸틴은 절대 멈추지 않습니다." 지난 7일 연두교서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한 말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어 연두교서에 귀빈으로 초대한 나토(NATO)의 신규 회원국 스웨덴의 울프 크리스터르손 총리를 환영하며, 유럽이 "위험에 처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바이든은 유럽을 지키기 위해 미군이 유럽에 진주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확고하다"고 덧붙였다. 이어 백악관 대변인이 유럽에 미군 지상군을 투입하는 의제는 "전혀" 논의된 바 없다고 한 번 더 확인하기도 했다. 크리스터르손 총리로서는 꽤 혼란스러운 밤이었을 것이다. 미국은 스웨덴 같은 나라를 새로 나토 회원국으로 받아들이고, 나토가 직접 참전하는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고 으름장을 놓을 때마다 러시아의 추가 침공 가능성을 지목했다. 그런데 러시아가 정말로 우크라이나를 넘어 유럽을 침공한다면, 지상군 투입 없이 러시아군의 진격을 막는 건 불가능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에 나토가 개입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명확히 제시되기를 기대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오히려 근거와 논리는 갈수록 모호해지고 있다. 이건 간과해선 안 되는 문제다. 미국인과 마찬가지로 유럽 사람들도 전쟁에 지쳐가고 있다. 그들은 갈수록 우크라이나가 과연 러시아를 물리칠 수 있을지 회의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무엇보다 유럽은 미국을 믿지 못하고 있다. 미국이 20년 전 이라크를 독단적으로 침공했을 때 유럽에선 미국의 의도와 능력에 관한 회의론이 일었다. 미국은 그 회의론을 불식하기 위해 사실상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고, 불신은 가시지 않았다. 미국 사람들은 종종 정치적 양극화가 미국에만 있는 독특한 현상이라고 여기지만, 모든 서구 사회에는 저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의 양극화가 있다. 유럽의 "엘리트"들은 나토가 러시아의 침략 야욕을 꺾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거라고 본다. 그러나 "포퓰리스트"들의 생각은 다르다. 그들은 미국의 엘리트가 그저 미국에 도전하는 세력을 저지하고 미국의 패권을 공고히 하려고 전쟁을 주도할 뿐이며, 거기서 발생하는 부수적인 피해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믿는다. 미국의 리더십은 추락하고 있고, 실패했다. 올해 들어 프랑스 도서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꾸준히 지켜오고 있는 다소 기이한 신간 "서구의 몰락(La Défaite de l’Occident)"도 같은 주장을 펴고 있다. 책의 저자 엠마누엘 토드(Emmanuel Todd)는 역사학자이자 인류학자로, 1976년에 저서 "최후의 추락(La Chute Finale)"에서 영아사망률 통계를 근거로 소련의 붕괴를 예측해 유명해졌다. 그때부터 엠마누엘 토드가 시사에 관해 쓰는 글은 유럽에서 일종의 예언으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미국 중심의 질서가 무너질 것"이란 예측을 담은 책 "제국의 몰락(Après L'empire)"은 9.11테러 이후 미국이 한창 국가적 결속력을 높이던, 그러나 아직 이라크를 침공하기 전인 2002년에 출간됐다. 그는 미국의 독단적인 이라크 침공을 강력히 반대했는데,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을 때만 해도 영국과 미국에 대체로 우호적이던 그는 특히 미국에 점점 더 환멸을 느끼게 됐으며, 마침내 반미주의에 가까운 사상을 드러냈다. 토드는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개입하는 걸 비판한다. 그러나 그의 비판은 존 미어샤이머와 같은 정치학자가 내세우는 역사적 관점에서의 비판과 결이 다르다. 미어샤이머와 마찬가지로 토드는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나토를 열성적으로 확장한 일이나 전 세계에 민주주의를 확산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러시아를 끝없이 악마화했던 네오콘의 사상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토드가 미국의 우크라이나 개입에 반대하는 이유는 좀 더 근본적인 데 있다. 그는 미국의 제국주의가 전 세계를 위험에 빠트리는 데 그치지 않고, 미국 스스로 품격을 갉아먹었다고 생각한다. 토드는 지난 1년간 인터뷰를 통해 꾸준히 서구 사회가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한 가지 사실에만 너무 열광적으로 반응했다고 지적한다. 그 한 가지는 압도적으로 강하리라던 러시아군을 막아낸 우크라이나군의 놀라운 능력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주목하지 않지만, 놀라운 사실은 또 있다. 바로 미국 주도로 러시아 경제를 파괴하고자 가한 온갖 제재, 압류가 거의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한 점이다. 서유럽 대부분 국가가 경제 제재에 동참했지만, 러시아는 어렵지 않게 제재를 피하거나 무력화했다. 미국이 세계 경제에 중요한 영향력을 끼치게 된 신흥 국가들을 통제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인도는 러시아산 에너지가 판로가 막혀 가격이 내려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에너지를 사들여 숨통을 틔워줬고, 중국은 러시아가 경제 제재로 구할 수 없게 된 전자제품 등 각종 품목을 조달해 줬다. 이어 미국과 유럽 동맹국들의 현재 제조업 생산 설비는 우크라이나가 전쟁에서 승리는커녕 현 상황을 유지하기 위해 방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무기, 특히 포탄을 제공하는 데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으로선 외교적 약속을 지킬 방법이 없는 난처한 상황이 됐다.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 올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며, 그중엔 토드보다 권력의 중심부에 가까이 있던 사람도 있다. 예를 들어 조 바이든은 2017년 자신의 회고록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정부에 너무 많은 걸 약속해 줘선 안 된다"고 말했다고 썼다.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토드는 미국이 세계 경제에 무턱대고 뛰어든 것이 실수였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 가운데 일부는 다른 저자들에게도 익숙한 내용이다. 미국은 1980년대보다 자동차를 덜 만들며, 밀 생산량도 줄었다. 그가 내놓는 주장은 한 국가의 번영과 관련 있는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문화적 변화에 대한 지적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이를 타락(decadence)이라고 불렀다. 현재 미국처럼 교육 수준이 높은 이들이 많아진 발전된 사회에서는 무언가를 경영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지시를 내리는 일만 하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 탈이라고 토드는 주장한다. 다들 정치인, 예술가, 경영자가 되려고 한다. 지적으로 매우 복잡한 것을 배우고 익히지 않더라도 대개 할 수 있는 일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교육의 진보가 교육의 쇠퇴를 가져왔다. 교육받은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역설적으로) 교육을 선호하는 가치가 점점 사라졌기 때문이다. 토드는 미국이 러시아보다 배출하는 엔지니어 숫자가 적다고 추산한다. 전체 인구에 비례한 수치만 적은 게 아니라 절대적인 숫자 자체도 부족하다. 그래서 미국은 "사회 내부에서 두뇌 유출"을 겪고 있다. 젊은이들이 어려운 고숙련 노동을 익혀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일자리를 기피하고 법률, 금융을 비롯해 그저 경제의 한 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가치를 이전하는, 심지어 어떨 때는 가치를 파괴하고 갉아먹는 일자리를 선호한다. (그는 오피오이드 산업의 폐해를 예를 들어 생각해 보라고 권한다.) 토드는 미국이 산업의 기반을 다른 나라, 다른 사회에 아웃소싱한 결정은 그저 전략적으로 나쁜 결정일뿐 아니라, 다른 세계를 착취하려는 계획의 명확한 근거라서 더 문제라고 비판한다. 물론 미국 주도의 세계화는 단지 이윤을 창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보편적인 인권과 같은 자유주의 가치를 전파하는 역할도 한다. 그렇지만 가족 인류학을 전공한 엠마누엘 토드는 미국이 세상에 퍼뜨리는 가치의 상당 부분이 미국인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보편적인 가치가 아니라고 일축한다. 예를 들어 영미식 가족 구조는 원래 전통적으로 세계 어느 곳의 가족 구조와 비교해도 가부장적인 요소가 적었다. 그러던 미국이 현대의 성(性)과 젠더 개념을 주창하고 옹호하는 나라가 됐는데, 이는 다른 전통적인 가족 구조(예를 들면 인도)나 현대 사회에서도 더 가부장적인 문화(예를 들면 러시아)와 잘 맞지 않는다. 토드가 도덕주의자는 아니다. 다만 그는 전통적인 문화에 익숙한 진영에서 서구의 진보적인 가치를 두려워하고, 나와 맞지 않아 불편한 가치를 선으로 포장해 선교하듯 퍼뜨리려는 이들과 외교 정책에서 동맹을 맺기를 꺼리거나 저항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냉전 시대에 소련이 주창한 공산주의 가치와 이념에 호의적이던 사람들에게 소련의 공식적인 무신론 기조가 소련을 지지하는 데 적잖은 걸림돌로 작용한 것과 비슷한 이치다. 토드는 또 미국의 가치관 중 어떤 것은 "대단히 부정적"이라고 지적한다. 그가 근거로 드는 것은 서구 사회가 어린 생명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반세기 전 소련의 붕괴를 예측하는 근거가 됐던 영아사망률을 다시 한번 지표로 삼았는데, 놀랍게도 바이든의 미국의 영아사망률은 1천 명당 5.4명으로 푸틴의 러시아보다 더 높다. 기시다 총리의 일본의 영아사망률보다는 무려 세 배 이상 높은 수치다. 토드는 성(性)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지적이 없지만, 지적인 수준에 관해선 신랄한 비판을 남긴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나타난 고비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가 엄연한 현실과 자기들의 희망 사항을 구분하지 못하는 모습에서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다. 전쟁 초기 미국은 자신들이 주도한 대러시아 경제 제재에 중국이 동참해 줄 거라고 막연히 기대했다. 그런데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 제재란 결국, 언젠가는 미래에 중국을 겨냥할 수 있는 미국의 창끝을 날카롭게 다듬고 벼리는 일이나 다름없다. 거기에 중국이 협력해 주리라 기대하는 것 자체를 토드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베트남 전쟁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토드의 책 곳곳에서 로렌 바리츠가 1985년에 쓴 고전 "역효과(Backfire)"를 떠올렸을 거다. "역효과"는 대중문화와 애국주의 신화, 그리고 경영 이론을 바탕으로 미국이 베트남에서 무엇을 잘못했는지 설명한 책이다. 책에서 바리츠는 린든 존슨 대통령이 자신의 의지를 베트남 사람들에게 함부로 이식할 수 있다고 오판한 것이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고 썼다. 베트남에서 가장 큰 문제는 결국, 우리 자신이었다.... 미국이 아무리 선한 의지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미국적인 가치를 계속해서 강요했다면, 베트남의 모든 문화는 철저히 파괴됐을 거다. 신문과 뉴스는 블라디미르 푸틴이 서구 사회가 구축한 질서에 위협이라는 이야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보도한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서구의 질서에 더 큰 위협은 바로 그 질서를 구축하고 운영하는 이들의 오만일지도 모른다. 가치를 기반으로 전쟁을 벌이려면, 그 가치는 좋은, 훌륭한 것이어야 한다. 적어도, 최소한 그 가치가 전파되고 널리 퍼지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명제에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미국이 주창하고 대변하는 가치는 그런 합의에 전혀 이르지 못했다. 심지어 남북전쟁 직전의 미국보다도 보편적인 가치에 가깝다고 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때때로 미국이란 나라는 국가적인 대원칙 없이 그저 당파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굴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 상대방은 정부를 운영하는 데 관심이 없고, 국가를 장악하려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현재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의 민낯을 완전히 가리고 있다. 가치를 지키고 전파하기 위해 나라가 똘똘 뭉쳐 있는 미국, 국내적으로 안정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미국은 실재하지 않는 허상이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허상을 토대로 한 미국의 약속을 믿었다가 너무나 큰 대가를 치르고 있다. 원문 : This Prophetic Academic Now Foresees the West’s Defeat (c) 2024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