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익 프레이만은 스탠포드대학교 후버 연구원이다. 휴고 브롬리는 케임브리지대학교 지정학 센터의 연구원이다. 지난달 중국군은 타이완 주변 해역에서 약 30년 만에 최대 규모의 군사훈련을 감행했다. 이를 막지 못한 걸로 미뤄 볼 때 미·중 관계는 점점 더 파국을 향해가고 있다. 중국이 타이완을 전격적으로 침공할 것이라는 전망도 점점 힘을 얻고 있다. 2023년 윌리엄 번스 중앙정보국(CIA) 국장의 말에 따르면, 시진핑 중국 주석은 전군에 오는 2027년까지 타이완 침공을 수행할 준비를 마치라고 지시했다. 중국의 타이완 침공이 불가피한 건 아니다. 타이완을 압도하는 해안경비대와 해군력을 활용해 중국이 타이완을 봉쇄한 뒤 타이완을 드나드는 상선이나 민간 항공기의 출입을 중국의 입맛에 맞게 통제하는 방법도 있다. 이는 중국이 이미 남중국해에서 쓰고 있는 전술이기도 하다. 중국 해안경비대는 미국과 군사조약을 맺은 필리핀의 영해를 넘나들고 산호섬에 접근하며 소유권을 주장해 왔다. 만약 중국이 자국 영토라 주장해 온 타이완과의 전면전을 각오하고 긴장 수위를 높인다면, 미국은 단호하고 신속하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 중국과 타이완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촉발된 충격보다 훨씬 더 심각한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가 발생할 것이 자명하다. 적어도 지금 상황만 놓고 보면, 미국은 대비가 부족하다. 2023년 하원 중국 특별위원회는 조사 보고서의 결론을 이렇게 내렸다. 미국은 중국과의 분쟁으로 인해 촉발될 경제적, 재정적 충격에 대비한 계획을 충분히 마련하지 못했다. 중국이 타이완을 침공할 때 벌어질 위기에 대한 대비가 부족한 상황은 당적을 불문하고 심각한 위기로 받아들여야 한다. 곧 취임하는 트럼프 행정부는 의회는 물론 동맹국 정부와도 적극적으로 협력해 분명한 대책을 발표해야 한다. 대책에는 미국의 경제적 리더십에 기대고 있는 전 세계 경제가 위기 전후에 어떻게 피해를 최소화할지 단계별로 분명한 전망과 대책이 담겨야 한다. 당장 반도체와 관련 분야에 큰 위기가 불어닥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타이완의 반도체 기업 TSMC는 전 세계 최고 사양 컴퓨터 칩의 90%를 생산한다. 그중 일부는 이제 애리조나에 세운 공장에서 만들지만, 가장 중요한 칩 대부분이 여전히 타이완에서 생산된다. 자동차부터 의료기기까지 수많은 산업에서 반도체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만약 타이완의 반도체 생산 공정에 차질이 빚어지면, 전 세계 경제는 바닥을 알 수 없는 침체기에 빠질 수 있다. TSMC의 주요 생산 공장이 (마찬가지로 TSMC가 생산한 칩을 사용하는) 중국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중국은 인공지능 기술을 포함한 첨단 기술 부문에서 미국, 유럽 기업보다 확고한 우위에 서게 될 것이다. 중국이 타이완을 침공하거나 타이완이 세계 경제와 단절, 고립되면 비단 반도체 생산이 차질을 빚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현재 타이완을 비롯해 인도-태평양 경제 질서의 근간을 이루는 대원칙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미국이 1979년 제정한 타이완관계법에서 명시한 경고다. 미국은 타이완의 정치적 경제적 자율성을 위협하는 그 어떤 폭력적인 시도도 "심각하게 우려"한다고 명시했다. 다른 하나는 중국이 1982년 천명한 원칙으로, 타이완과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해 하나의 중국을 완성한다는 목표다. 시진핑 주석도 타이완과의 평화 통일을 미·중 관계를 떠받치는 정치적인 토대라고 묘사한 바 있다. 만약 미국이 침공이든 고립이든 타이완의 주권이 위협받는 상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일본, 한국, 호주, 필리핀을 포함한 지역의 주요 동맹국이 모두 커다란 경제적 타격을 입게 된다. 자연히 미국과 동맹국의 관계도 균열이 불가피해진다. 그러므로 미국은 지금 당장 타이완이 위기에 처할 때 경제적인 피해를 어떻게 줄이고 관리할지 계획을 세워둬야 한다. 미국이 앞서 이란이나 러시아에 가했던 경제 제재는 겉보기엔 매력적인 수단처럼 보일 수 있지만, 중국이 전 세계 공급망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고려할 때 좋은 방법이 아니다. 중국이 경제적으로 곤궁에 처하면, 전 세계 무역 자체가 삐그덕거리고 흔들리게 된다. 실제로 중국을 향해 대대적인 경제 제재를 부과하면, 미국이 만들어 놓은 국제 경제와 무역 시스템 전반이 오히려 흔들린다. 미국으로선 시스템을 지키는 게 이득이다. 또한, 동맹국과 중립국 모두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 제재에 동참하지 않을 수도 있다. 중국과 이미 상당히 얽혀 있는 나라들이 많아서 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미국인들도 소비재 가격이 상승하는 걸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다. 현명한 지도자라면 현실을 냉철히 파악해야 한다. 이제 중국을 고립시키거나 세계 경제에서 쫓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대신 미국은 타이완에 위기가 발생하면 세계 경제를 지키기 위해 어떤 식으로 개입하고 피해를 최소화할지 계획을 적극적으로 밝혀야 한다. 이 계획에는 세 가지 요소가 꼭 담겨야 한다. 타이완에 위기가 발생하면 시장은 대혼란에 빠질 것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다른 나라 중앙은행들과 협의해 세계 금융시장에 꾸준히 유동성을 공급해야 한다. 그래야 금융시장의 붕괴를 막을 수 있다. 그리고 기업들이 국제 무역 제도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게 하기 위해 미국과 동맹국은 경제안보 협의체를 출범해야 한다. 협의체는 세계 시스템에 해를 끼치려는 불량 국가를 제외한 모든 국가에 열려 있어야 하며, 돈도 충분히 지원돼야 한다. 협의체는 회원국에 자금을 지원하거나 미국의 국가 안보가 걸린 사안에 있어서는 무역 규정을 준수할 수 있도록 제도를 운용하는 주체가 된다. 미국 정부는 또한, 동맹국과 함께 전략적 가치가 높은 제품의 중국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공급망을 다변화하려 노력해야 한다. 미국과 동맹국은 현재 몇몇 의약품 원료나 드론 등 일부 핵심 제품을 중국산만 쓰고 있다. (지난해 9월, 미국 하원은 바이오안보법을 통과시켰다. 바이오 기술에서 특히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전략을 명시한 법인데, 현재 상원에 계류 중이다.) 반면 전략적 핵심 제품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토스터나 장난감 같은 소비재의 경우 좀 더 천천히 대응해도 괜찮다.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예상 가능한 수준에서 천천히 올린다면 제조업체와 수입업체, 소매상들이 점진적으로 이런 제품의 제조원을 다양화해 인플레이션 압력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처럼 갑자기 높은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위협을 협상 카드로 활용하는 전략은 바람직하지 않다. 미국 정부가 핵심 제품이 아닌 것까지 누가 어디서 생산한 걸 사 오라고 지시할 필요는 없다. 대신 정부는 그저 무역과 공급망 전반을 공정하게 관리함으로써 중국 기업 말고 다른 생산업체가 물건을 만들어 미국 시장에 진출하도록 유도하면 된다.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건 분명 또 다른 난관이 될 거다. 중국은 당연히 보복에 나설 것이고, 중국에 진출한 미국 기업과 외국 기업이 직접적인 제재를 받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최대한 많은 나라가 동참한 경제안보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무역과 금융시장이 순식간에 주저앉지 않도록 하는 최고의 예방책이다. 국제적인 연대를 바탕으로 한 미국이 주도하는 연합은 중국의 경제적 보복 대상이 되는 모든 나라를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 이런 종류의 대책에는 적잖은 돈이 든다. 여기에 필요한 정치적인 지지를 얻어내는 일도 결코 쉽지 않다. 우선 미국 의회는 타이완에 군사적 위기가 발생하면 경제적으로 어떤 피해가 발생할지에 관해 청문회를 열 수 있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위기가 닥쳤을 때 단계별 대책을 법으로 제정해 놓아야 한다. 어떤 답을 내든 미국 정부는 실제로 문제가 닥치기 전에 이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중국이 타이완을 침공하거나 전면적인 봉쇄에 돌입한다면, 그 피해는 절대로 타이완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중국은 이를 기회로 인도-태평양의 지정학적 질서 자체를 새로 쓰려고 할 것이며, 규약과 규정을 바탕으로 한 세계 경제 질서에 균열을 내려 할 것이다. 적절한 대비책을 마련해 두지 않으면, 타이완에서 발생할 위기가 미국의 번영과 안보의 토대를 송두리째 뒤흔들 것이다. 원문 : A China-Taiwan War Would Start an Economic Crisis. America Isn't Ready (c) 2025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 토머스 프리드먼은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칼럼니스트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의 발언은 밤늦은 시각 방영되는 코미디쇼의 단골 소재다. 최근에는 그린란드와 파나마 운하를 미국이 양도받거나 필요하면 사들일 수 있다는 발언이 소재가 됐다. 코미디언들은 앞다투어 이를 비꼬고 조롱했다. "하하하! 진짜 보면 볼수록 웃긴 사람이죠, 트럼프가 또 트럼프 했네요. 정말 다음엔 또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군요. 그냥 신경 끕시다. 트럼프가 이러는 거 하루이틀도 아니잖아요. 내일은 아마 더 큰 헛소리를 할 테니까요." 이 소식에 신경을 끄지 않고, 오히려 트럼프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하고 있을 사람이 있다. 바로 시진핑 중국 주석이다. 만약 미국이 그린란드를,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차지하려고 나선다면, 대만을 점령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중국에 이보다 더 확실한 그린라이트는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만은 중국과 쓰는 언어도 같고, 역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훨씬 더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트럼프가 그린란드에 관한 발언을 한 지 불과 며칠 만에 중국 전문가들 사이에선 다음과 같은 농담이 돌았다. 질문 : 그린란드와 파나마 운하를 미국이 접수하겠다는 트럼프의 말을 들을 때 시진핑 주석이 느끼는 감정은? 답 : 배고픔. (대만을 꿀꺽하고 싶어서) 트럼프의 발언은 물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무모하고 멍청한 말이다. 당장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신임 중국 대사 데이비드 퍼듀가 중국이 대만을 향해 무력을 행사할 때 중국 외교부를 찾아가 항의한다고 생각해 보라. 중국 정부는 뭐라고 답할까? 아마 이런 식으로 답할 것이다. "귀국 대통령은 그린란드와 파나마 운하를 무력으로 점령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는데, 지금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어디까지나 중국 내부에서 해결할 일인 중국 통일에 항의하러 오신 겁니까? 대만은 원래 우리나라와 하나입니다. 물론 귀국의 현 정부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이는 1972년 상하이 공동선언에서 미국 측이 분명히 확인한 사안입니다. 그러는 귀국은 그린란드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대통령의 아들인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가 휴가차 한 번 들른 적이 있긴 하죠? 귀국 대통령께 분명히 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이 그린란드에 관해 주장하는 만큼의 권리는 중국, 러시아도 똑같이 가지고 있다고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생각도 똑같을 것이다. 트럼프가 그린란드를, 무력을 앞세워 점유하고 파나마 운하를 일방적으로 미국의 관할 아래 둔다면, 미국은 무슨 수로 푸틴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이 국제법 위반이며 부당한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크라이나의 영토는 한때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다. 크림반도도 마찬가지다. 푸틴의 러시아는 이미 우크라이나로부터 크림반도를 빼앗았다. 러시아의 드미트리 페슈코프 공보장관은 지난 9일 CNBC와의 인터뷰에서 예상대로 "러시아는 이 문제에 관해 미국 정부가 어떻게 나오는지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가 그린란드와 파나마 운하를 들먹인 건 그저 관심에 목마른 인물이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던진 농담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농담이 아니다. 엄청난 혼란을 야기할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열쇠다. 이미 이 말의 후과가 세상에 끼친 피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어마어마하다. 트럼프가 계속해서 이 주장을 거두지 않고, 실제로 행동에 옮기려 한다면 2차대전 이후 구축해 놓은 세계 질서가 무너지고, 그 피해는 결국 고스란히 우리 모두의 몫이 될 것이다. 원문 : Trump's Reckless Greenland Comments Are Not a Joke (c) 2025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 노스캐롤라이나 채플힐에 사는 기후과학자 피터 캘머스 박사는 극단적인 고온 현상이 인간의 건강과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다. LA 산불 소식에 참담한 마음이며, 분노와 슬픔을 금할 길이 없다. 이튼(Eaton) 산불로 최소 5천여 채의 건물이 피해를 보거나 전소된 것으로 알려진 패서디나(Pasadena) 근교의 앨터디나(Altadena)는 내가 14년간 살았던 동네다. 2년 전 나는 가족을 데리고 그 동네를 떠났다. 캘리포니아의 기후가 점점 건조하고 더워지는가 하면 산불이 잦아져 동네도 위협받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조차도 이런 규모와 강도의 산불이 이렇게나 빨리 LA의 넓은 지역을 휩쓸고 지나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번 주 앨터디나의 풍경은 무시무시한 선견지명을 담은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 '씨 뿌리는 사람의 우화(Parable of the Sower)'에 등장하는 지옥도를 연상케 한다. 기후변화는 우리에게 계속해서 나쁜 일이 생각보다 일찍 닥칠 수 있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기후 영향 예측 모델은 대체로 낙관적인 전망을 하지만, 이제 불행히도 기온이 올라가는 속도는 과학자들의 예측을 앞질렀다. 이제는 아무도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수년간 산불의 파괴력을 생생히 경험한 LA처럼 재난이 잦은 지역에서는 더욱 그렇다. 지금 우리는 매우 현실적인 선택지를 눈앞에 두고 있다. 머물 것인가, 아니면 떠날 것인가? 나는 떠나는 쪽을 택했다. 'LA가 감춰둔 보석'으로 불리는 앨터디나는 도시의 교통 체증을 벗어나 산기슭에 자리 잡은 독특한 동네다. 주민끼리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아름다운 이곳에 나는 지난 2008년 천체물리학 박사후과정을 밟기 위해 가족과 함께 정착했다. 당시에는 천국에 온 기분이었다. 뒷마당에 있는 아보카도 나무에서 딴 열매로 과카몰레를 원 없이 만들어 먹을 수 있고, 머리 위에서는 초록 앵무새가 지저귀고, 1월에도 아이들과 함께 누울 수 있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패서디나 캠퍼스의 푸른 잔디밭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기후변화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한 것은 2006년 대학원 재학 시절이었다. 지구가 점점 더워지면서 걱정도 함께 자라났다. 2012년, 문제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던 나는 원래 하던 중력파 연구를 접고, 기후과학으로 진로를 바꿨다. 이어 나사(NASA)의 제트 추진 연구소(Jet Propulsion Laboratory)에 취직했다. 이웃들처럼 닭을 키우고 벌을 치기 시작했고, 지역 내 기후 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하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기후변화에 관해 강의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기후위기는 악화 일로를 걸었다. 사람들에게 지구 온난화의 시급성을 알리기 위해 지붕 위에 올라가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쉽고 재미난 말투로 트윗과 기사도 써봤고, 기후 앱과 기후 미디어 그룹을 만들기 위해 비영리 단체를 공동 창립하기도 했다. 2020년 9월, 나는 폭염으로 인한 탈진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이튿날 메가급 산불인 밥캣(Bobcat) 산불이 우리 동네에서 불과 몇 마일밖에 떨어지지 않은 앨터디나 산기슭에서 발생했다. LA에서도 산이나 야생 지역에서 가까운 동네가 산불 위험에 더 많이 노출돼 있다. 당시 우리도 대피할 준비를 했지만, 지금과는 달리 산불이 주거 지역에 이르기 전에 다행히 불길이 잡혔다. 그렇지만 우리 가족은 몇 주간 매캐한 연기 속에서 지내야 했다. 폐가 타들어 가고 손가락은 계속해서 따끔거렸다. 밥캣 산불 이후 LA는 더 이상 안전한 장소로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가족들의 건강을 걱정하게 됐고, 동네로 불이 번지면 어떻게 대피할 수 있을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2022년 아내가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에서 직장을 잡게 되었고, 우리는 이사를 결심했다. 나는 현지 보도와 (실제로 집을 잃은 몇몇) 친구들의 문자, 영상을 통해 이야기를 종합하고 무엇이 타고 무엇이 남았는지를 파악하려고 애쓰며 이번 비극을 멀리서 지켜봤다. 우리 강아지가 다녔던 동물병원이 불타 사라졌다. 아이들의 현악 연주회가 열린 교회 건물도 사라졌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릴 때마다 궁금했던 이상한 토끼 박물관, 백 번은 갔던 친절한 철물점, 친구나 동료 기후활동가들과 만나던 카페도 모두 사라졌다. 목요일에는 예전 이웃이 자기 집과 우리가 살던 집을 포함해 막다른 골목에 모여있는 집 가운데 한 채를 빼고는 모두 불타버렸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아이들을 키운 아름다운 집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자 끝내 눈물이 났다. 이제 안전한 곳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몇 달 전, 허리케인 헬린이 한때 기후 안식처로 여겨졌던 노스캐롤라이나주 서부 지역과 애쉬빌을 강타했다. 태평양 북서부는 2021년 열돔 현상이 닥치기 전까지 안전해 보였다. 하와이 역시 2023년 마우이 산불 전까지 안전한 곳으로 여겨졌다. 기후 재난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이들에게 종말은 이미 닥친 일이나 다름없다. 지구가 더워질수록 기후 재난은 더 빈번해지고 더 강력해질 것이다. 화재로 인한 비용은 막대할 것이고 보험 업계나 부동산 시장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상황이 얼마나 더 나빠질지는 화석연료 산업이 얼마나 오랫동안 주도권을 놓치지 않을 것인가에 달렸다. 석유, 가스 및 석탄 기업은 지난 반세기 동안 자신들이 돌이킬 수 없는 기후 혼란을 초래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기업 경영진과 로비스트, 변호사는 허위 사실을 퍼뜨리고 청정에너지로의 전환을 차단하는 쪽을 선택했다. 2021년 몇몇 CEO들은 의회에 증인으로 나와 기후변화 대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겠다고 밝히며, 허위 정보에 대해서도 책임지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들은 자신의 부를 활용해 정치인들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여러 공화당 지도자의 심각한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후 혼란 속에서 깨어나고 있는 다양한 정치 성향의 모든 이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우리의 분노가 충분한 힘을 얻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잃은 것에 대한 진실과 그 손실을 일으키고 또 거기서 이득을 취한 이들에 대한 진실을 확인하고 나면 더 큰 분노는 산타 아나 바람(10월에서 이듬해 4월 사이 내륙 지역에서 태평양 쪽을 향해 부는 따뜻하고 건조한 바람. 이번 산불을 촉발한 원인 중 하나다.-역주)처럼 거세게 일어날 것이다. 원문 : As a Climate Scientist, I Knew It Was Time to Leave Los Angeles (c) 2025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 데이비드 모리스는 라스베이거스 네바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친다. 지난 20년간 문학 소설은 점점 더 여성의 전유물이 되었다. 소설을 쓰는 이도, 읽는 이도 갈수록 여성만 많아진다. 2004년 뉴욕타임스 소설 베스트셀러로 꼽힌 작품의 작가 성비는 남녀가 엇비슷했다. 올해는 베스트셀러 작가의 3/4 이상이 여성이다. 여러 기사에 따르면, 소설책을 사 읽는 사람도 무려 80%가 여성 독자다. 내가 8년째 가르치고 있는 문예창작 과정에서도 비슷한 경향이 보인다. 지원하는 학생의 60%가 여성이고, 어느 학번은 남학생이 한 명도 없다. 20년 전에 비슷한 문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을 때 내 동기를 생각해 보면, 남녀의 숫자가 같았다. 출판사 사이먼 앤 슈스터의 부회장이자 총괄 에디터인 이먼 돌란은 최근 내게 "젊은 남성 소설가는 희귀종이 됐다"라고 말했다. 불균형 자체는 문학계에서 낯선 일이 아니지만, 남성이 부족하고 과소대표된다는 우려는 사실 좀 불편한 주제다. 2022년, 소설가 조이스 캐럴 오츠는 트위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문학 에이전트로 일하는 친구가 내게 젊은 백인 남성이 쓴 소설은 작품의 질을 떠나 (작품을 읽고 평가해 줄) 편집자를 구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말했다." 대중은 곧바로 날카롭게 반응했다. 비판이 다수였는데, 비판들이 터무니없지도 않았다. 소설과 문학계의 압도적인 주류는 여전히 백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남성 작가가 사라지는 현실에 다들 이토록 무감각하고 별 관심이 없다는 점은 꽤 놀랍다. 한 가지 분명히 해두자면, 나는 문학계에서 남성이 모든 걸 지배하는 상황이 끝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성은 너무나 오랫동안 문학계를 지배했고, 그 때문에 수많은 위대한 여성 작가들이 쓴, 더 널리 읽혀야 할 책들이 줄곧 외면받았다. 나는 또한, 남성이 소설에서 더 잘 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남성은 여성이 오랫동안 견뎌야 했던 종류의 편견에서 벗어나 있었다. 게다가 젊은 남성 독자들이 샐리 루니나 엘레나 페란테의 작품을 읽어야지, 남자 독자들이 반드시 남성 작가의 소설을 읽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당신이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면, 특히 도널드 트럼프 시대가 다시 시작되면서 한창 부추기고 있는 이른바 왜곡된 남성성의 문제를 바로잡고자 한다면, 문학적인 남성이 줄어드는 현실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들어 젊은 남성은 교육적, 정서적, 문화적으로 퇴보했다. 4년제 공립대학에 입학하는 여학생은 절반가량이 학위를 마치고 졸업장을 받지만, 남성은 이 비율이 40%가 채 되지 않는다. 이 통계만 봐도 젊은 남성이 소설은 덜 읽고, 책 읽을 시간에 비디오게임이나 포르노에 빠지는 상황을 유추할 수 있다. 젊은 남성들은 여전히 세상을 향한 호기심을 충족하고 세상을 알아가기 위해 지적 자극을 갈구하지만, 이들을 설득하고 설명하는 이들은 앤드루 테이트나 조 로건처럼 주로 페미니즘을 혐오하고 철저히 남성 중심적인 세계관에 천착한 이들이다. 점점 소외되는 젊은 남성은 지난 (미국) 대선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젊은 백인 남성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에 단연 가장 큰 공을 세운 유권자였다. 트럼프는 히스패닉 남성에게도 많은 표를 받았고, 흑인 남성에게서도 표를 꽤 많이 받았다. 나는 2024년 선거가 일종의 "격투장 선거"였다고 생각한다. 소외당하고 주변부로 밀려난 남성들이 당혹감과 불안, 걱정을 싸움꾼을 통해 표출한 건데, 문제는 이 싸움꾼이 표를 준 유권자들이 기대하는 진짜 영웅이 아니라, 상상 속 인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머지않아 드러나리라는 데 있다. 젊은 남성들에게는 더 나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또한, 이들은 스스로 이야기의 세계에 소속감을 느끼며 받아들여져야 한다. 소설이 여기에 이바지할 수 있는 지점은 많다. 소설은 재밌고, 영감을 주며, 때로는 수수께끼를 풀고, 최면을 걸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소설을 읽는 건 한 사람의 정서적 IQ를 높이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소설은 우리가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고, 삶을 이해하는 좋은 길잡이가 된다. 다른 많은 X세대 책벌레가 그랬듯 나도 더글라스 쿠플랜드의 소설에 푹 빠져 성장기를 보냈다. X세대라는 이름도 쿠플랜드가 처음 고안한 건 아니지만, 그의 소설 제목이 큰 인기를 끈 덕분에 누구나 다 아는 단어가 됐다. 이 사례를 보면 우리의 문학계에는 더 포용적인 문화가 필요하다. 소외된 젊은 남성을 끌어안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나는 이제 여성 작가들의 발전, 진보는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으니, 이제 남성 작가에게 집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진지하게 던지는 질문은 이렇다. 남성이 더는 글을 쓰고 읽는 데 관여하지 않는다면, 우리 문학계는, 나아가 우리 사회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남성과 여성의 운명은 서로 얽히고설켜 있다. 그게 바로 내가 내 수업을 듣는 남학생들에게 반드시 마가렛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를 읽히는 이유다. 남성의 의식을 고양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사회에 훌륭한 남성이 많아지면 당연히 여성에게도 좋기 때문이다. 여기서 페미니스트 학자 벨 훅스가 쓴 다음 구절이 떠오른다. 남성에게 줄 것은 다 주었다고 강렬히 느끼는 페미니스트 사상가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이들은 오직 여성의 복지를 향상하는 데만 관심이 있다. 그러나 내가 지금껏 삶을 통해 반복적으로 겪으며 깨달은 사실은 좀 다르다. 남성 한 명이 가부장제의 경계를 감히 허물고 넘어오는 결단을 보일 때야말로 여성과 남성, 아이들의 삶이 모두 근본적으로 나아진다. 남성이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게 해주는 데 문학만큼 효과적인 수단은 없다. 원문 : The Disappearance of Literary Men Should Worry Everyone (c) 2025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 KC 데이비스는 텍사스주에 사는 심리치료사다. 저서로는 "물에 잠기는 집을 살려내는 법(How to Keep House While Drowning)"이 있다. 나는 정리 못 하는 사람들을 위한 집 정리 팁을 이야기하는 심리치료사다. 내가 세탁한 옷들을 개지 않은 채로 바구니에 던져넣고, 부엌에서는 바퀴 달린 거대한 쓰레기통을 굴리는 우리 집 광경을 영상으로 찍어 올리면 댓글은 나의 게으름을 꼬집는 비판과 비아냥으로 넘쳐난다. 하지만 메시지함은 다르다. 엉망진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가 자신의 삶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고백을 해오는 이들이 종종 있다. "제가 끔찍한 인간인 것도 아니고, 변명만 늘어놓는 인간도 아니라는 거죠?" "이 계정을 방금 알게 되었는데,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싶어서 안도의 눈물을 흘리고 있어요." 세상은 너저분한 사람들에게 가혹하다. 이해는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성숙하고 성공한 여성의 집이 부동산 전문 케이블 채널 HGTV의 유명한 인테리어 디자이너 조애나 게인스의 집처럼 채광이 좋고 통풍이 잘되는 안식처, 잘 정리된 침대와 말끔한 조리대가 놓인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예술 수준으로 라벨을 붙인 용기에 깔끔하게 정리돼 있고, 물건을 아무렇게나 쌓아둔 더미나 더러운 얼룩은 찾아볼 수 없는 그런 공간. 나는 그런 집을 가져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오랫동안 나는 스스로 '정리 정돈 잘하는 진짜 어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사람으로 여겼다. 하지만 4년 전 나는 내가 지저분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고, 이후 자유와 예상치 못한 기쁨이 찾아왔다. 지저분함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것을 고쳐야 하는 나쁜 습관, 집에 손님이 오면 정신없이 양해를 구하고 사과해야 할 무언가로 여긴다.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지저분한 나 자신을 '용서'하거나, '결함'을 농담거리로 삼아야 한다고 느낀다. 우리 문화가 지저분함을 곧 게으름과 연결 짓기 때문이다. 나는 수년간 정리 정돈을 못 하는 것이 도덕적 실패가 아니라는 복음을 전파해 왔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지저분함이야말로 좋은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려 한다. 모든 공동체에는 지저분한 사람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 모든 사람이 조애나 게인스가 될 수는 없다. 누군가는 사랑스러운 가족의 포근한 혼돈으로 넘쳐나는 집, 잡동사니로 가득 찬 벽장을 가진 몰리 위즐리(해리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해리의 단짝 친구 론 위즐리의 엄마-역주)일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가 마사 스튜어트가 될 수는 없다. 어떤 이들은 월든 호수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너무나 정신이 팔린 나머지 다른 누군가가 식사와 빨래를 대신 해주어야 하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이기 때문이다. 인정하자. 아무리 한참 물건을 바라보며 설레지 않는가 고민해 봐도 모든 사람이 곤도 마리에의 옷장처럼 정리 신공을 발휘할 수는 없다. 어떤 이는 그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책상을 평생 두고 살 것이다. 내가 르네상스 시대 의상을 수제로 만들 수 있게 해주는 내 뇌의 귀한 부분은 곧 온 식탁이 천 조각과 바느질 용품으로 가득 차도록 내버려둔 뇌이기도 하다. 나를 멋진 사람으로 만드는 특성과 나를 너저분한 사람으로 만드는 특성이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과학도 이를 뒷받침한다. ADHD 환자들이 정리 정돈을 잘 못 하는 이유는 시간 관리와 집중력 전환, 기억력 및 우선순위를 조절하는 영역인 뇌의 중추가 보통의 뇌와 다르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일부 연구에 따르면, 이같이 비정형적인 뇌의 기능은 오히려 더 높은 수준의 발산적 사고와 창의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너저분함이 생산성과 창의성에 방해가 된다는 주장도 자주 보이는데, 이 역시 틀린 이야기일 수 있다. 미네소타 대학의 한 연구는 학생들에게 탁구공 공장에서 탁구공의 새로운 용도를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을 주고, 한 집단은 잘 정돈된 깨끗한 공간에서, 다른 한 집단은 지저분한 공간에서 이 과제를 수행하도록 했다. 지저분한 공간에서 과제를 수행한 참가자들은 깔끔한 곳에서 일한 참가자들과 동일한 수의 아이디어를 냈을 뿐 아니라, 독립된 심사위원단으로부터 더 창의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우리 지저분한 인간들도 다른 사람을 배려할 의무, 나 자신과 가족에게 안전하고 위생적인 환경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다만 꼭 깔끔한 사람이 되지 않더라도 뇌를 거스르지 않고 나의 뇌에 적합한 방식을 통해 즐겁고 기능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크게 의식하지 않고도 물건을 잘 정리한다. 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뭔가를 아무렇게나 두고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 있다. 내가 쓰는 모든 물건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지저분함 자체보다 훨씬 더 피곤하다. 그것이 내게 변화를 시도하거나 노력할 깜냥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실은 정반대다. 쓰고 난 물건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집을 깔끔하게 유지하는 데 집중하는 대신, 나는 모든 방에 쓰레기통과 빨래 바구니, '다른 방에 있어야 할 물건 상자'를 둔다. 어떤 방이 괴로울 정도로 지저분해지면, 감당이 안 된다는 핑계로 외면하는 대신 물건들을 상자에 던져 넣고 하던 일을 계속한다. 보기 좋고 깔끔한 수납함 대신 바퀴가 달린 이동식 진열대를 사용한다. 그쪽이 물건을 보관하기도 편하고 미술 작업을 하던 식탁을 급히 치우고 밥을 먹어야 할 때도 편리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보다 내게 맞는 방식을 찾는 데 집중한다. 음식 찌꺼기가 붙어 있어 냄새가 나거나 해충이 꼬이지만 않는다면, 싱크대에 사용한 접시가 며칠씩 쌓여있어도 크게 거슬리지 않는다. 내가 필요할 때 찾아서 입을 수만 있다면 옷이 개어져 있지 않아도 큰 상관이 없다. 아이들이 어린 우리집에서는 싱크대 위에 물건이 마구 들어차 있어도 매일 사용하는 물건을 바로바로 찾아 쓸 수 있는 편이 누군가의 미니멀리즘 미학을 따라가는 것보다 훨씬 더 실용적이다. 집 정리 방법 가운데 특별히 복잡하거나 대단히 획기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 너저분한 나 자신을 깔끔한 사람으로 개조하기 위해 쏟던 노력을 중단하자마자 나는 나에게 맞는 집안일 방법을 찾는 데 필요한 창의력을 발견했다. 나의 지저분함을 받아들이자, 집안일은 오히려 더 쉬워졌다. 원문 : My Home Is Messy, and I Don't Feel Bad About It (c) 2025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 슬론 크로슬리는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다. 최근 저서로는 "사람을 위한 애도(Grief is for People)"가 있다. 처음 편지를 받았을 때 가장 놀랐던 건 편지의 길이였다. 에세이집을 몇 권 펴냈고, 그때마다 독자들은 내게 편지를 보내곤 했다. 잘 읽었다는 칭찬과 감사의 말도 있었고, 자신의 이야기를 편지에 털어놓기도 했다. 의도치 않게 실례를 범하는 이도 있었고, 대놓고 욕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독자들은 누구에게나 있는, 쉬이 드러내기 어려운 면들을 내 글에서 발견하고는 자기도 그럴 때가 있다며 일종의 동지애를 표했다. 그런 편지들을 많이 읽었다고 소위 낯짝이 두꺼워지진 않았다. 여전히 얼굴이 화끈거릴 때가 많다. 그래도 이제는 어떤 지적들은 무던히 흘려보낼 수 있게 됐다. 나름대로 내 몸 어디에 굳은살이 박였고, 어디는 아직 피부가 무른지 잘 알게 됐달까? 그런데 이번 책을 내고 나서 받은 편지들은 사뭇 달랐다. 이번에 낸 책은 자살로 목숨을 잃은 친구를 떠나보낸 뒤 쓴 회고록이다. 이번 편지들에는 내게 무언가를 바라는 말이 단 한 줄도 없었다. 커피 한잔하자는 말도,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말은 물론이고, 충고나 조언도 없었다. 나는 원래 스스로 자기 능력을 확신하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왜 그렇게들 조언을 구하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편지에는 어쨌든 그런 종류의 부탁이 없었다. 일종의 신호탄 같았다.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든 이메일이든 글은 순수한 상실감으로 가득했다. 많은 사람이 참고삼아 읽어보라며 주로 부고와 같은 슬픔 가득한 글들을 첨부했다. 부모님, 형제자매, 친구까지 잃어버린 대상도 제각각이었다. 소중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된 이도 있었고, 오랜 시간이 흐른 경우도 있었지만, 상실의 시기와 무관하게 글에는 생생한 고통이 절절히 묻어났다. 책을 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하루 평균 8통 정도의 편지나 이메일을 받던 때도 있었다. 나는 원래 누군가를 돕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 책을 읽은 사람이 매일 8명씩 내게 글을 보내는 상황은 매우 낯설고 놀라웠다. 편지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는 내 책의 성공을 재는 척도가 될 수 없다. 대신 내가 이렇게 많은 편지를 받았다는 건 우리가 소중한 사람을 죽음으로 (특히 자살로) 잃을 때 느끼는 정서적인 고통을 어떻게 덜어낼지 몰라 다들 힘들어한다는 방증이며, 사람들이 떠난 이를 솔직하고 잘 애도하는 법을 알고 싶어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부터라도 배워야 한다. 질병통제예방센터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살 관련 최근 통계인 2022년 통계를 보면, 미국에서 자살로 4만 9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1년 전 4만 8천100명보다 늘었다. 특히 자살에 관한 통계가 가리키는 숫자는 언뜻 와닿지 않을 거다. 이 숫자가 반으로 줄든 두 배로 늘어나든 당신은 아마 이렇게 생각할 거다. 그래서 이게 많은 건가? 아니면 적은 건가? 또 통계가 어떻든 그게 나한테 소중한 사람과 나의 상실감과는 무슨 관계람? 제도적으로는 많은 것이 갖춰져 있다. 자살예방전화 988 (옮긴이: 우리나라는 국번 없이 129) 등 자살 생각이 드는 사람을 위기에서 구해주기 위해 제도가 마련돼 있다. 그러나 지난 1년 동안 매일같이 이 문제에 관해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나눈 결과 자살 생각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얼굴을 맞대지 않고 도움받을 수 있는 상담전화 번호를 알려주는 것 외에 제도가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더 중요한 건 개개인의 몫이다. 자살 생각이 들거나 애도하는 사람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어떻게 도움을 줄지 확실히 준비돼 있어야 한다. 나는 자살로 사망한 전 직장 상사와의 우정, 상실의 슬픔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회고록을 출간했다고 해서 글을 쓰기 전보다 내가 이 주제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어떤 권위를 얻었다고 할 수는 없다. 대신 내게 가르침을 준 건 독자들의 편지였다. 우리가 이 문제를 충격에 꼼짝도 못 하거나 당혹감에 쉬쉬하지 않을 수 있는 의식의 최전선에 놓지 않는 한 위험은 두 갈래로 악화될 것이다. 즉, 침묵 속에 자살 생각으로 고통받던 이들은 더욱더 죽음으로 내몰리고, 소중한 이를 잃고 슬퍼하는 이들은 제대로 애도하는 법을 영영 배우지 못한다. 그래서 보통 예방과 치유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대화를 꺼리고 거부한다. 자살 생각을 비롯한 위험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까 봐, 또는 완벽하게 애도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 그렇다. 한 번은 아는 작가에게 독자들의 편지에 서툴게 어설픈 답변을 보내거나 독자들과 소통하려다 괜히 여기에 압도되는 건 아닐지 걱정이라고 고충을 털어놨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책을 쓸 때야 발언권이 궁극적으로 나한테 있지만, 책을 펴낸 뒤에는 그 발언권이 독자에게 있는 게 당연한 거지 뭐. 저자가 이제 와서 뭘 할 수 있겠어?"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편지들은 내 책을 읽고 쓴 독후감이나 답장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누군가 첫 직장에서 겪은 좌충우돌 성장기나 가슴 아픈 사연을 쓴 이도 없었다. 독자들은 책을 읽고 책의 내용에 반응하기보다 책을 읽고 하게 된 생각을 정리해 편지에 담았다. 한결같은 외로움과 무력감이 느껴졌다. 책이라는 매체의 특징 덕분에 처음부터 닫혀서는 안 됐던 방의 문을 독자들 스스로 열고 들어간 듯했다. 슬픔에 빠져 편지를 쓴 이들은 자신의 참담한 심정과 분노를 누군가 알아주길 원했다. 무엇보다도 가뜩이나 힘든 상황에 빠진 이들이 나 때문에 더 힘들어져서는 안 됐다. 그래서 한 번은 주말에 날을 잡고, 모든 편지에 일일이 답장을 썼다. 처음에는 쓰기가 너무 힘들었다. 내가 애도에 관해 전문 지식을 갖춘 상담사도 아니고, 어떤 일을 꾸준히 해내는 편도 아니며, 무엇보다 나는 진지하게 무언가를 하려 하면 정신적으로 두드러기 반응이 나타난다. 슬픔에 관해 이야기하기 부담스러워서 억지로 지어낸 말이 아니다. 원래 내 성격 중에는 고쳐야 할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 그래도 "여정(journey)"이란 단어를 도저히 진지하게 쓰지 못하는 건 단점은 아닌 것 같다. 처음에는 애도에 관한 용어들-절차(process)나 의미 부여(meaning making)-을 못 받아들이는 걸 그저 내 개인적인 선호의 문제나 작가의 괜한 고집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만약 편지들이 어떤 척도가 될 수 있다면, 이는 그저 내 문제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때로는 겉치레 같고, 또 어떤 때는 진부하다지만 대체로 어둡기만 한 방식으로 죽음을 이야기하고 다루는 건 결정적으로 그로 인한 고통을 유머로 승화해 이겨내는 사람들을 배제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당신은 내 책을 통해, 또 지금 이 글을 통해 그 방식을 지켜보고 있다. 나는 "시간을 내 당신의 친구에 관해 제게 얘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또는 "정말 재밌군요. 어떻게 아무도 그 사람을 체포하지 않은 건지 믿을 수 없네요"와 같이 시작하는 답장을 썼다. 누군가의 상실감을 너무 가벼이 돌려보내지 않고, 동시에 그들이 내게 전해준 심각한 감정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받아들이는 답장을 썼다. 사람들이 나를 직접 찾아와 이야기를 들려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자살이 가져다준 혼란스러운 상황에 사람들이 어떻게 갈피를 못 잡고 힘들어하는지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제가 왜 우는지 모르겠어요.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일인데 말이죠."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이제 시간이 흘렀으니, 더는 슬퍼하지 말라고 과연 누가 말할 수 있겠나? 아마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도 주변을 의식하다가 그렇게 생각하게 됐을 텐데, 이런 자격지심은 슬픔을 배출하지 못하게 막아 더 오랫동안 힘들게 한다. 누구한테 솔직하게 자기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을지 찾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영원히, 어디에도 마음을 열지 못한다. 편지는 점점 줄었다. 가장 최근에는 고통의 반대편에서 온 편지를 받았다. 한 문학 행사에서 젊은 여성 한 명이 내게 봉투에 든 편지를 건네주고는 홀연히 떠났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편지를 열었다. 처음에는 그가 사랑했던 누군가를 잃어버린 사연이 적혀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잃지 않았다.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사람이었다. 내가 책을 통해 다가가려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가 나를 찾아 내게로 왔다. 이제 이 편지에 어떻게 답장을 할지 고민하고 있고, 이를 통해 나 또한 스스로 배울 일이 남았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대단한 자격이 따로 있지 않다.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해야 하는 일이다. 원문 : I Wrote a Memoir About Grief. That Was the Beginning (c) 2024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 로저 로젠블라트는 여러 편의 소설과 회고록, 명상록을 쓴 작가다. 최근 저서로 "해변의 스타인웨이: 상처와 축복들"이 있다. 1843년 12월에 출간된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은 해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돌아오면 사랑받는 작품이다. 디킨스가 빈털터리일 때 돈을 벌기 위해 썼다고 알려진 이 단편 소설은 18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번도 절판된 적이 없고, 수십 차례에 걸쳐 알라스테어 심부터 더 머펫츠(The Muppets)에 이르는 스타를 기용한 영화와 연극, 뮤지컬,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오늘날에도 누구나 크리스마스가 되면 스크루지와 크래칫 가족, 크래칫 가족의 막내 팀의 마지막 대사("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축복하시길")를 떠올리곤 한다. 어떤 면에서 이 소설이 오랫동안 인기를 끄는 이유를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무엇보다 어느 시대에나 수요가 있는 유령 이야기다. 하지만 보다 흥미로운 점은 19세기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주는 도덕적 교훈이 해가 갈수록 더욱 호소력을 높이며 현대의 독자들에게 어필한다는 사실이다. 이야기의 핵심에는 우리가 누구나 가슴속에 품고 있는 여러 가지 마음, 즉 탐욕과 관대함, 증오와 사랑, 후회와 용서가 자리하고 있다. 문학사상 가장 강렬한 캐릭터 가운데 하나인 에비니저 스크루지가 등장한다는 점도 당연히 도움이 된다. 스크루지라는 이름은 인간 혐오자의 대명사가 됐다. 그는 자기 직원들을 함부로 대하고 자신보다 못 가진 자들을 업신여기며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걷는 이웃을 문전박대한다. 유일한 관심사라고는 재산을 불리는 것뿐이다. 이런 캐릭터가 오늘날까지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결점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스크루지의 구원을 바라게 될까? 내 생각에는 죄책감 때문이다. 스크루지가 우리에게 와닿는 이유는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가 스크루지와 별반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1980년 무렵, '최종 결산 결과(bottom line)'라는 표현이 성취의 기준으로 우리 문화 속에 자리 잡았다. 어느 정도는 우리 모두가 스크루지가 되었다는 의미다. 최근 대통령 선거를 떠올려보자. 선거운동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즉 그 모든 열정에서 건강한 거리를 유지하고 상황을 보면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가 어떤 의미에서는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고 비슷한 공감대를 끌어내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의 질문을 가장한 주장은 이랬다. "4년 전보다 지금 살림살이가 나아졌습니까?" 1980년의 로널드 레이건을 연상시키는 수사다. 카멀라 해리스는 미국 중산층의 재정 상황 개선을 이야기하며 "나는 중산층의 아이로 자랐다"라고 말했다. 트럼프는 거칠고 때로는 잔혹하지만, 해리스는 대체로 품위 있는 모습을 보였기에 두 사람의 스타일은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두 후보 모두 본질적으로는 미국인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진 셈이다. "당신의 물질적인 삶은 스스로 만족할 만한 수준입니까?" 정치가 늘 이랬던 것은 아니다. 1961년, 존 F. 케네디는 대통령 취임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묻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십시오." 조지 H. W. 부시의 1989년 대선 운동 슬로건은 '따뜻한 보수주의(compassionate conservatism)'이었다. 두 대통령 모두 개인의 만족과 국가적 번영이 우리가 타인을 위해 무엇을 하려 할 때 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했다. 누구나 편협함과 이기심, 탐욕에 빠질 수 있다. 물질적 풍요에 관심을 끊고 수도승처럼 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대단한 관대함과 이타심을 발휘할 능력 역시 누구에게나 있다. 디킨스는 이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캐럴'의 고요한 천재성이 빛을 발한 것도 바로 우리의 도덕적 양심을 드높이는 것의 이점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소설 속 스크루지는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와 더 나은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과거, 현재, 미래의 크리스마스 유령이라는 세 영혼의 방문을 받는다. 그는 허물이 많고 이기적인 인물이지만 자신이 본 것을 통해 마음이 움직이게 되고, 회개하여 친절하고 인정 있는 인물로 거듭난다. 하룻밤의 공포와 짧은 설교 세 번으로 구원이 비교적 쉽게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만큼이나 죄 많은 독자(즉, 우리 모두)를 만족시키는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회개하는 스크루지를 보며 생각한다. "저것이 곧 나구나! 앞으로는 다르게, 보다 명예롭게 살 것이다. 달라질 것이다." 세상 모든 종교가 스크루지의 경험과 그의 맹세를 기반으로 한다. 우리 사회가 점점 더 자기 중심적인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런 자기 중심성에는 어딘가 작위적이고 진실되지 못한 면이 있다. 우리 모두 스크루지처럼 고약하게 굴 수 있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나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남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스스로 묻지 않지만, 실은 남을 위해 살 때 가장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 이기심은 결국 우리를 고통으로 밀어 넣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디킨스가 약 200년 전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며, 그의 메시지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여전히 유효한 것은 우리가 우리 안의 더 나은 천사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느낄 수 있는 기쁨에 대해 알려주는 영원한 모범 사례이기 때문이다. 수백만 독자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 크리스마스 시즌에도 우리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크리스마스 캐럴'을 읽게 될 것이다. 우리의 내면이 더 선하고 관대하다고 믿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참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두가 그 내면의 착한 본성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뿐이다. 원문 : Why 'A Christmas Carol' Endures (c) 2024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 레이첼 그린리는 전직 테크기업 임원으로 현재 에세이집을 집필 중이다. 원격 근무에 관한 한 기업 경영진은 직원들이 자기들이 말하는 대로 잠자코 따라주기를 바란다. 반대로 자기들이 일하는 식으로 직원들이 일하는 걸 좋아하는 경영진은 거의 없을 거다. 세일즈포스의 최고경영자 마크 베니오프는 "나는 사무실에서는 일을 잘 못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세일즈포스는 다른 많은 기업처럼 직원들에게 일주일에 3~4일은 사무실로 출근해서 일하라고 지침을 바꿨다. 이 지침을 결재할 때 베니오프는 어디에 있었을까? 아마도 하와이 와이메아 제도의 섬 내륙에 있는 고풍스러운 별장에 마련한 홈오피스에 있었을 거다. 아니면 바다가 보이는 언덕 아래 저택에 있었을 수도 있다. 지난 10월 말, 스타벅스의 브라이언 니콜 신임 사장은 회사의 사무직 직원들에게 전부 오는 1월까지는 일주일에 최소 3일은 사무실로 출근해서 일하라고 통보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캘리포니아 뉴포트 비치에 있는 자택에 주로 머물고 있다. 스타벅스가 니콜 사장에게 사무 공간과 개인 비서를 제공하고, 필요하면 본사가 있는 시애틀까지 1천 마일을 당장 날아올 수 있도록 회사 전세기도 늘 근처에 대기시켜 놓기에 가능한 일이다. 스타벅스 측은 CNBC에 니콜 사장도 최소 주 3일 출근 요건을 따를 거라고 설명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세상이 봉쇄되면서 미국의 수많은 사무직 노동자는 갑자기 집에서 일할 수 있게 됐다. 팬데믹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유연한 근무 방식이다. 사람들은 훨씬 더 저렴한 곳으로 이사할 수 있게 됐고, 지역, 위치에 구애받지 않고 일자리를 구할 수 있게 됐으며, 일과 가정의 균형을 맞추기도 훨씬 더 수월해졌다. 이런 특권이나 다름없는 혜택은 전염병에 노출될 위험을 무릅쓰고 일터로 나가야 했던 다양한 필수 노동자들의 처지와 대조를 이루며 논란을 낳기도 했다. 여전히 사무실 곳곳에는 빈자리가 있지만, 점점 더 많은 사무직 노동자가 다시 사무실로 출근해 일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 집에서 일할 수 있는 권한은 원래 경제적으로 계층에 따라 달리 적용됐다. 이제 이 특권은 대개 가장 부유한 이들에게만 허락된다. 스탠퍼드 대학교의 경제학자이자 원격 근무 전문가인 닉 블룸의 연구를 보면, 팬데믹 이후 노동자들에게 허락된 재택근무 일수와 노동자들의 소득에는 상관관계가 있다. 1만 ~ 10만 달러 연봉을 받는 노동자들의 재택근무 일수는 16% 줄어든 반면, 연봉을 20만 달러 이상 받는 고소득자들의 재택근무 일수는 5%밖에 줄어들지 않았다. 소득과 노동자들이 직장에서 얼마나 가까이 사는지 사이에도 상관관계가 발견됐다. 연봉이 1만 ~ 5만 달러인 노동자 중에 출근해야 하는 본사에서 80km 이상 떨어진 데 사는 노동자는 5%에 불과했다. 그러나 연봉이 25만 달러를 넘어가면, 회사에서 80km보다 더 먼 데 사는 사람이 14%로 늘어난다. 유연한 재택근무는 노동자만 좋은 게 아니라 고용주에게도 이득이 많다는 연구 결과가 무색한 통계라고 할 수 있다. 블룸은 재택근무가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을 늘려 성별 격차를 줄이고, 구직자의 수가 늘어나 노동 공급이 확대되며, 장애인의 고용 격차도 줄어들고 노동자들이 소위 "워라밸"을 맞추기 좋은 장점이 있다고 설명한다. 블룸이 링크드인에 올린 연구 결과에는 이런 댓글이 달렸다. "근무 시간에 짬을 내 빨래를 돌려놓고 올 수 있다는 게 전반적인 행복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중국과 튀르키예의 콜센터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완전 원격 근무하는 사람과 일정 시간은 사무실에 나와서 일해야 하는 사람 사이의 차이를 비교한 연구 결과를 보면, 완전히 원격으로 근무하는 직원들이 병가도 덜 내고, 같은 시간 안에 더 많은 고객을 응대하는 등 성과 지표가 좋았다. 그러나 기업들은 데이터가 가리키는 결론을 무시하는 것 같다. 한때 내가 일했던 아마존은 직원들에게 "데이터를 거스르는 사례가 발견되면 일단 의심하고 보라"는 지침을 내리는 등 조직 전체가 철저히 데이터를 기반으로 운영된다는 점을 자랑스레 내세우는 회사다. 그런 아마존이 새해부터 전 직원들에게 일주일에 5일을 전부 사무실에 나와서 근무하라고 지침을 내렸는데, 여기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바로 그 중요하다던 데이터가 전혀 뒷받침되지 않은 공고였다는 점이다. 대신 아마존 웹서비스의 CEO 맷 가먼은 회사 전 직원이 참석한 회의에서 "내 느낌에는..." 또는 "우리가 믿는바"와 같은 표현을 써가며 주장을 폈다고 한다. 데이터를 그렇게 귀하게 떠받드는 회사가 정작 중요한 결정은 고위 간부의 직감에 의존하다니, 이상한 일이다. 최고위급 경영진, 임원들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의사 결정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은 무엇일까? 스탠퍼드 대학교 연구진이 지난 10월 원격근무 콘퍼런스에서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재택근무를 종식하고 사무실로 돌아오라고 근무 기준을 바꾼 1,200여 개 회사 가운데 상당수가 재무 실적이 부진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재택근무를 끝내거나 줄인 것으로 나타났다. 경영진이 출퇴근을 옹호하는 건 직원들이 실제로 사무실에 나와서 일을 해야 회사가 더 잘 굴러가서가 아니라, 그저 주주들에게 경영진이 뭐라도 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또한, 재택근무가 어려워지면 오래 일하면서 불만이 쌓인 직원들이 퇴사하거나 이직할 가능성도 커진다. 인원을 감축하면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인건비가 줄어 경영 실적이 올라가므로, 경영진으로서는 재택근무를 종식해 인건비를 줄일 수 있다면 일석이조다. 재택근무를 없애고 노동자를 다시 사무실로 불러내는 건 연구 결과만 봐도 안 좋지만, 특히 장애인과 간병인에게는 직접적인 손해를 끼친다. 팬데믹 기간 장애인의 고용률은 22%나 증가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클라우디아 골딘 교수는 올해 노벨상 수상자 강연에서 사무실에 있는 것과 비슷한 가상 오피스에서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늘어나면 전문 간병인, 특히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이 활발해진 데 주목했다. 돌봄노동을 하는 간병인이나 장애가 있는 노동자들이 임금이 낮거나 노동 조건이 불리한 일자리를 억지로 선택하지 않아도 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아마존, 스타벅스에서 일하면서 나는 육아와 일을 병행하던 동료들이 감수해야 했던 끔찍한 출퇴근, 이를 참다못해 전국 곳곳으로 이사하며 느낀 스트레스와 고충에 대해 익히 들었다. 특히 처음에 일을 시작할 때는 완전 원격 근무가 가능한 일자리로 알았는데, 어느 날 난데없이 사무실로 출근해야 한다고 일방적인 통보를 받는다면 황당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 사무실이 같은 주도 아니라 옆의 주까지 건너가야 한다면 막막한 일이다. 이런 불평등은 몬태나주 빅스카이나 콜로라도주 아스펜, 텔루라이드 같은 휴양지에 가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높은 급여를 받으며 원격으로 일하는 사치를 누리는 사람들은 물론 유능한 사람들이겠지만, 빈부 격차와 저렴한 주택을 구하기 점점 더 어려워진 주택난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이들이기도 하다. 웅장한 스키장이 기업 임원과 경영진을 유혹하고 끌어모으는 동안 리조트에서 일하는 서비스 노동자들은 (재택근무는 물론 불가능하기에) 먼 거리를 운전해 와서 눈을 치우고, 음료를 내린다. 도시 전체가 귀족과 평민으로 나뉘면서 미국 사회는 점점 더 고대 로마를 닮아가는 듯하다. 회사의 경영진은 집이나 휴양지에서 원격 근무를 계속하면서 일반 직원들에게만 출근을 종용하는 건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다. 특히 평직원보다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경영진이 같은 공간에 모이지 않고 멀리서 화면으로만 얼굴을 보고 전화로 통화하면서 일을 할 때 업무 효율이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를 고려하면 더 그렇다. 보스턴 칼리지의 랜 더친과 애리조나 주립대학의 데니스 소슈라가 원격으로 근무하는 기업 임원 900명의 업무 성과를 추적, 분석했더니 이들은 대체로 사무실에 출근해 일하는 다른 임원들보다 실적이 떨어졌다. 즉, CEO가 실제 거주하는 집과 회사 본사의 위치가 멀수록 업무 성과는 떨어지는 셈이다. 또 멀리 떨어져 오래 걸릴 수밖에 없는 출퇴근 시간을 전세기를 이용해 단축하는 건 결국, 계급 격차를 더 극명하게 벌리는 일일 뿐이다. 원문 : Packed Cubicles, Empty Corner Office: Remote Work Is Increasingly a Right of the Rich (c) 2024 The New York Times Company 번역 : 뉴스페퍼민트
* 프란치스코 교황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장이자, 로마의 주교다. 인생에는 필연적으로 슬픔이 존재한다. 이는 모든 희망의 길과 개종의 길에서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다. 하지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울함에 빠지는 것을 피하고 그 우울함이 마음을 좀먹지 않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울함에 빠져드는 것은 성직자들조차 피하기 어려운 유혹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불행히도 권위적이기보다는 권위주의적이고, 교회와 결혼한 사람이라기보다는 노총각, 목자라기보다는 공무원에 가깝고, 기쁨을 전하기보다는 거만해 보이는, 슬프고 비뚤어진 성직자들을 마주하게 될 때가 있다. 이 역시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성직자들은 보통 유머를 즐기고, 자신만의 농담이나 우스운 이야기를 많이 지니고 있다. 재미난 이야기를 잘하기도 하지만 농담의 소재가 되는 것을 즐기기도 한다. 교황들도 마찬가지다. 익살스럽기로 유명한 요한 23세는 한 담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밤에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럴 때면 아침에 교황과 대화를 나눠야지 하고 용감하고 단호하게 마음을 먹죠. 그런 다음 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나면... 그 교황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기억해 냅니다.” 너무나 이해가 가는 이야기다. 요한 바오로 2세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보이티와 추기경이던 시절, 콘클라베 예비 회의에서 나이가 많고 다소 엄격한 한 추기경이 그가 스키와 자전거를 타고 등산과 수영을 한다며 질책한 적이 있다. 나이 든 추기경은 그에게 “이런 활동은 당신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고, 미래의 교황은 이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폴란드에서는 추기경의 50%가 이런 활동을 하고 있는데 알고 계십니까?” 당시 폴란드에는 추기경이 단 두 명뿐이었다. 아이러니는 타인뿐 아니라 나 자신의 마음을 밝히고 끌어올리는 약과도 같다. 자기 조롱은 나르시시즘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쉬지 않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기 자신을 그리고 응시하지만, 거울 앞에 선 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조언은 자기 자신을 비웃으라는 것이다. 그것이 나 자신에게 이롭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죽은 사람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뿐이라는 옛말이 진실임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예수회가 하는 농담, 그리고 예수회에 대한 농담은 일정한 경지에 도달했다. 이탈리아의 특수 경찰대인 카라비니에리나 이디시 유머에서 유대인 어머니에 대한 농담 정도는 되어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적절한 자기 아이러니로 예방 가능한 나르시시즘의 위험성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니, 심장 수술을 받아야 했던 허영심 넘치는 예수회 수사에 대한 농담이 떠오른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그가 신께 물었다. “하느님, 저의 때가 왔습니까?” “아니다, 너는 앞으로 최소 40년은 더 살 것이다.” 신이 대답했다. 심장 수술 후 그는 그 40년을 최대한 누리자는 마음으로 모발 이식, 리프트 시술, 지방 흡입, 치아 및 눈썹 시술 등을 받고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병원을 나섰다. 하지만 병원을 나서자마자 그는 차에 치여 사망하고 만다. 신을 만난 그가 항의했다. “하느님, 제게 40년은 더 산다고 하셨잖습니까!” 신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어이쿠, 미안하다. 내가 그만 너를 알아보지 못하였구나.” 예수회 수사들은 나에 대한 농담, 즉 ‘미국에 간 프란치스코 교황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 방문을 위해 뉴욕 공항에 도착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거대한 리무진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교황은 그 웅장한 화려함에 조금 당황했지만, 직접 운전해 본지 꽤 오래됐고, 특히 이런 종류의 차량을 몰아본 적이 없다는 것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오겠어?” 교황은 리무진을 바라보며 운전사에게 물었다. “내가 직접 몰아봐도 되겠는가?” 운전사가 답했다. “성하, 정말 죄송합니다. 규칙과 규정이 있어서 그렇게는 안 됩니다.” 하지만 교황이 한 번 마음을 먹으면 어떤지 다들 알지 않나. 교황은 운전사가 포기할 때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프란치스코 교황은 운전석에 올라타 넓은 고속도로에 들어섰고, 운전을 즐기기 시작하면서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속도를 올렸다. 시속 50마일, 80마일, 120마일... 결국 경찰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고, 경찰차가 리무진을 길가로 불러 세웠다. 짙게 선팅된 창문 너머 젊은 경찰관이 등장한다. 다소 긴장한 교황이 창문을 천천히 내리자, 경찰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는 경찰차로 돌아가 상사에게 전화를 건다. “서장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문제인가?” 상사가 답했다. “제가 과속 차량을 세웠는데 엄청나게 중요한 사람이 타고 있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가? 시장인가?” “아닙니다... 시장보다 더...” “시장보다 더 높은 사람이면 주지사인가?” “아닙니다. 그보다 더...” “설마 대통령은 아니겠지?” “제 생각에는 대통령보다 더...” “아니, 대통령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어딨나?” “사실 누군지도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건 그 사람이 교황을 운전사로 부리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 어린아이가 될 것을 촉구하는 복음(마태복음 18:3)은 우리에게 미소 지을 능력을 되찾으라고 말한다. 오늘날 내게 어린이들을 만나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다. 어린 시절 나에게 웃는 법을 알려준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이가 든 지금은 아이들이 나의 멘토다. 아이들과의 만남이야말로 나를 설레게 하고 가장 행복하게 한다. 나이 든 이들과의 만남 역시 그렇다. 삶을 축복하며 모든 원한을 접어두고 잘 익은 와인 한 잔에서 기쁨을 찾는 노인들은 참으로 매력적인 존재다. 그들은 아이 같은 웃음과 눈물을 가지고 있다. 성 베드로 광장에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아이들을 품에 안으면 대부분은 웃지만, 흰옷을 입은 내가 의사인 줄 알고 주사를 놓으러 왔다고 생각해 우는 아이들도 간혹 있다. 이들은 자연스러운 즉흥성과 인간성의 살아있는 예다. 인간성을 포기하는 것은 곧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며 진지하게 울거나 열정적으로 웃는 것이 불가능해지면 그야말로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존재다. 그렇게 무감각해진 어른은 자신에게도, 사회에도, 교회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원문: Pope Francis: There Is Faith in Humor (c) 2024 The New York 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