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조교수. 경영공학부 겸임교수와 카이스트 인공지능연구소 사회정책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공대에 입학해 외교학을 복수전공했다. 세계은행에서 근무하며 케냐, 인도 등 개발협력 현장에서 국가 경계를 넘어선 글로벌 도전 과제에 주목하게 되었다.
<예언자들>은 각 분야에서 연구 중인 KAIST 교수들이 특정 시점을 전제로 미래를 예측해 쓰는 가상의 에세이입니다. 그저 공상 수준이 아니라 현재 연구 성과와 미래의 실현 가능성을 정교하게 조율하기에, <예언자들>은 스프 구독자들에게 짧게는 10년, 길게는 50년 이상 과학이 내다보는 미래를 미리 살펴볼 수 있게 할 것입니다. 2042년 3월 5일 수요일. 24대 대통령 선거일 자정. “후....” 한숨 소리가 차 안을 가득 메운다. 자정을 기점으로 24대 대통령 공식선거운동이 종료되었다. 열세였던 선거 판세를 일거에 뒤집은, 선거 열흘 전 제3당과의 연정 선언은 유력한 야당 후보 A의 신의 한 수였다. 광화문에서의 마지막 유세를 마친 뒤 그는 곧바로 캠프 사무실로 돌아와 수행원들과 회포를 풀며 일정을 마무리한다. 당내 경선부터 정말 쉼 없이 달려왔다. 날이 밝으면 미디어들의 결과 예측 속에 인터뷰가 이어질 것이다. 훌륭한 레이스였다고 자평하며 그는 잠자리에 든다. 투표는 0시부터 전자투표 플랫폼에서 막 시작되었다. 2042년 3월 5일 01시 17분. 선거 개시 77분 후. 젊은 유권자들이 많이 찾는 메타버스 플랫폼 ‘유토피아’에서 하나의 홀로그램 영상이 확산되기 시작한다. 격한 언어로 연정을 파기하는 A의 긴급 기자회견이었다. 거짓이다. 하지만 누가 봐도 감쪽같은 딥페이크 영상에 사람들은 차분히 진실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자극적이고, 가십거리가 되면 일단 퍼 나르고 본다. A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며 영상을 띄우는 인플루언서들이 백 명이 넘어간다는 보고가 들어온다. 하지만 모두 해킹된 계정이다. 젊은 유권자층이 많은 제3지대의 유권자들은 동요하기 시작한다. 출처는 한 곳을 특정할 수도 없었다. 전 세계 각지에서 퍼져나갔으니까. 지난 선거에서 국외 사이버 공격으로 선관위의 투표 집계 시스템이 해킹된 충격으로 고도의 기술적 위협에 대비하는 적응형 방어시스템을 구축하였다고 하였지만 민간 플랫폼에서 벌어진 일들까지는 예방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02시 15분 “후보님. 후보님!” 수행원이 A를 깨웠다. 캠프에서는 긴급성명을 내기로 이미 중지를 모았다. 하지만 기자회견으로 가짜 영상 확산의 거센 파고를 막기에는 이미 늦은 감이 있다. 며칠이면 진실이 밝혀지겠지만 선거는 오늘 밤 종료가 되고 결과는 되돌릴 수 없다. 결국 최후의 수단, ‘라이프레코더’를 공개해 가짜 영상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로 한다. 극소형 카메라가 장착된 목걸이 형태인 라이프레코더는 사용자 시점의 모든 영상과 음성을 기록한다. 재작년 ITU-R (국제통신연합: 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 Union-Radio)에서 확정한 IMT-2040은 7세대 이동통신(7G) 기술의 시대를 열었다. 노이즈 필터링된 라이프레코더의 데이터는 6G보다 100배 빠른 속도로 클라우드로 저장되어 언제든 자연어처리 (Natural language processing) 과정을 거쳐 사용자의 모든 과거 대화를 언제든 키워드로 검색 추출할 수 있다. KPS(한국형위성항법시스템)를 이용해 위치정보 역시 기록되므로 데이터는 소송 과정에서 종종 증거로 제출되곤 했다. 하지만 촬영대상자 의사에 반하는 영상 유포와 사용은 법률로 엄격히 제한되고 라이프레코더 사용자에 도덕적 비난도 있어, 공인으로서 사용을 공개하는 것은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의미였다. 2042년의 선거 : 아바타와 전자투표 투표가 시작되고 투표율은 실시간으로 집계된다. 지난 20년 사이에 선거의 모습은 많이 변했다. 유권자들은 더 이상 신분증을 들고 투표소를 찾지 않는다. 선거는 'di-Korea (digital innovation)' 플랫폼에서 이루어진다. 얼굴 인식과 모바일, 음성 인증 절차를 거친 뒤 투표를 진행할 수 있다. 세금 납부나 공공기관의 인공지능 면접도 di-Korea 플랫폼에서 이루어진다. 선거 공보물과 벽보는 디지털 전환에 소외될 수 있는 계층을 위해 최소한만큼만 제공된다. di-Korea 플랫폼에는 지난 20년간 후보자들의 공적 발언과 법안 발의, 사회활동 등의 활동을 시각화 자료와 함께 확인할 수 있다. 국회의 속기록 공공데이터가 공개되고, 발의된 법안의 유사도, 정치인 발언의 팩트체크가 실시간으로 분석이 되면서 국회에서의 막말, 법안 발의의 남발, 쓸데없는 정쟁이 줄어들었다는 평가도 있었다. 자연어 이해(Natural language understanding: NLU)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정치인, 선거 후보자들은 앞다투어 오픈 도메인 챗봇(open domain chatbot)을 만들기 시작했다. 정당이나 기업에서도 인간 대변인의 자리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대변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문제가 되면 그를 경질하면서 책임을 묻던 풍경이 사라질 수도 있을 기세다. 중립적으로 보이는 각종 페르소나 음성 챗봇에 책임을 물으며 위기를 넘기는 것이 쉬울 수도 있다. 공직자의 윤리, 플랫폼의 책임성보다 24시간 소통이 가능하다는 편리성과 효율성이라는 가치가 더 주목받는 세상이다. 자동화된 선택 : 냉정한 알고리즘과 식어가는 참여의 열정 사이 정치적 의사 결정을 위한 수많은 인터페이스와 앱이 쏟아져 나왔다. 이는 일상에 바쁜 유권자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그 중 고도화된 지능형 소프트웨어 에이전트 ‘아바타’가 인기다. 사용자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최근 논란이 된 뉴스에 대한 입장을 짧은 설문을 거쳐 입력한다. 이마저도 라이프레코더의 음성데이터나 웹서핑 기록에 대한 개인정보 제공을 동의하면 보다 신속하게 이용할 수 있다. ‘아바타’는 자체적으로 후보자의 페르소나 챗봇을 만나 대화하며 학습을 하기도 하고, 후보자들의 기존 인터뷰, 국회 속기록 등 방대한 비정형 데이터를 기반으로 유권자의 꿈을 실현시켜 줄 후보자를 추천해준다. 데이터 편향과 개인정보 침해에 대한 지적이 있어왔지만 효율성과 편리함이라는 달콤함에 대다수 유권자들은 크게 논란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의 공론장 참여 최근 민주주의 공론장에서 가장 뜨겁게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주제는 바로 죽은 사람의 참여다. 망자에게 선거권이 부여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2030년대 후반부터 상용화된 '이터니티(E-ternity)' 기술은 생전의 음성 및 구술 데이터로 망자의 '인식'을 증강현실을 통해 가상공간에서 부활시켜 왔다. 이를 통해 가족을 잃은 슬픔에 잠겨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메타버스에서 죽은 나의 가족, 친구, 연인을 만나 대화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이터니티’로 탄생한 망자의 인식이 활동하는 것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아이디와 계정을 통해 포스팅과 댓글을 쓰기도 한다. 생전에 ‘디지털 발자국(digital footprint)’을 많이 남긴 계정일수록 포스팅과 디지털 활동이 많은 사실은 새롭지 않다. 이렇게 실재(實在)가 아닌 망자의 인식이 현실의 공론장에 참여하면서 유권자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악성 댓글과 가짜뉴스에 대한 소송에도 '이터니티' 계정이 적지 않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알고리즘은 처벌할 수 있을가? 도덕적 행위자로 볼 수 있을까? 정치권에서는 망자의 인식에 대한 활동권에 대하여 사후세계와 공론장이라는 주제로 어떠한 규제와 역할이 필요한지 논의하고 있다. 이는 디지털 세상에서 인간의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투표율 하락과 효율성 전면적인 전자투표의 도입은 투표율 하락에 기인한 바가 크다. 예전이면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하던 대통령 선거 후보자 토론회 방송도 토론 요약을 보여주기 위한 기계 학습을 위해 주로 이용될 뿐 인간 행위자들의 낮은 시청률에 허덕이고 있다. 공중파 TV의 점유율은 급속도로 추락해왔다. 예능보다, 월드컵보다 더 재미있는 토론이 되기 위해 TV 토론은 뿅망치까지 등장하며 점점 더 예능화되어 간다. ‘정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사회적 갈등을 풀어내는 예술로서 정치의 기능이 축소, 변질되면서 투표율은 갈수록 급감하고 있다. 전자투표의 전면 도입도 투표율 제고를 위함이었다. 2040년 초고령사회로 이미 진입한 대한민국은 전체 유권자 중 70세 이상의 인구는 35%를 차지하고 있다. 고령 유권자들에 대한 플랫폼 접근성, 디지털 격차의 문제와 보안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었음에도,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선거 투표율 제고의 목적으로 2040년부터 전자투표가 전면적으로 도입되었다. 시민단체 ‘참여를 위한 연대’를 중심으로 우려의 목소리가 제기되었고 아날로그 선거방식의 공존에 대한 요구는 헌법소원으로 연결되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전면 전자투표에 대한 합헌 판정을 내린다. 여기에는 전 세계적인 경기침체가 지속되는 과정에서 정부 예산 절감과 효율성 제고 방침이 큰 배경이 되었다. 20여 년 전 1차 글로벌 팬데믹(COVID-19)으로 전 세계 중앙은행들은 전례 없는 양적완화를 시행한 적이 있었다. 미국의 중국 봉쇄전략이 지속되고 국지적인 군사적 분쟁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면서 세계 경제는 고물가 경기침체에 허덕여왔다. 긴 터널을 간신히 빠져나오는 글로벌 경제에 COVID-29는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주었다. OECD 국가들도 대부분 제한적인 양적완화만을 단행하면서 빈곤 계층, 저개발국은 더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전개된 통화 긴축정책으로 효율과 비용 절감을 강조하는 행정 시스템의 전면적 자동화와 인력 대체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선거관리의 간소화 자동화, 저조한 투표율로 무산된 지방 자치정부의 탈중앙화 자율조직(decentralized autonomous organization: DAO)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디지털 민주주의는 어디로 디지털 기술이 하버마스가 이야기한 공론장을 제공하며 숙의 민주주의에 기여할 것이라는 한 때의 기술 낙관론이 컸었던 것은 사실이다. 소셜미디어로부터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들불처럼 번진 2010년 ‘아랍의 봄’이 그러했다. 하지만 이집트, 예멘, 시리아, 리비아 등 권위주의 국가로 회귀되거나 더 큰 정치 불안이 지속되는 과정을 보면서 이러한 낙관론은 사라졌다. 민주주의가 성숙된 사회에도 오히려 플랫폼의 ‘필터버블’에 갇힌 극단적 대립의 양상을 지켜보면서 디지털 기술에 대한 순진한 낙관론은 차츰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기술의 발전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지만 그것에 대한 사회적 규범, 윤리가 논의되고, 정책적으로 규제하고 관리하는 속도는 선형적으로 발전하기도 혹은 퇴화되기도 한다. 이 숙명의 차이를 극복하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데이터의 확산과 연산 능력의 발전은 정책 결정 과정의 합리성과 고도화를 하는 데 큰 기회를 제공하지만, 참여에 기반한 시민민주주의를 견인하는 방향으로 반드시 발전되지는 않고 있다. 결국 선거는 2% 포인트, 간발의 차이로 A의 승리로 끝난다.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닫는 사회 속에 2042년 새 정부에 던져진 과제는 많다. 선거와 다수결은 형식적 민주주의 장치일 뿐이다. 실질적 민주주의는 선거 결과 이후 49%와 소외된 영역을 바라보며 완성되어 간다. 사람과 기술이 공존하고,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함께하며, 시민의 참여와 연대의 가치를 되살릴 수 있는 세상을 그리며 A는 연설에 나선다. 더 궁금한 독자들을 위해 준비했어요! ► 함께 보면 좋은 주요 키워드 공공데이터 정부의 데이터를 기계판독이 가능한 형태로 개방하여 국민들이 보다 쉽게 데이터를 공유하고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개방형 API(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를 통해 제공하고 있다. 아랍의 봄 2010년 12월 튀니지 혁명 이후 촉발된 아랍권의 민주화 시위. 소셜미디어가 정보의 소통, 시민 참여에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기술만으로는 민주주의를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국제전기통신연합 (ITU) 제네바에 본부가 있는 유엔전문기구로 전기, 통신 분야의 국제협력과 표준화를 주도하고 있다. ► 함께 보면 좋은 참고자료들 영상 : KAIST-NYU 디지털 거버넌스 포럼 *컨트리뷰터의 요청으로 2022년 12월 13일 글 전반을 수정했습니다. 디자인: 박수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