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부 산업과학팀. 공정거래위원회와 유통 업계 현안을 취재합니다.
경기 화성의 한 빌라에 살고 있는 청년 A 씨. 2021년 집주인과 전세 계약을 맺었습니다. 계약 전 확인한 등기부등본은 당연히 깨끗했습니다. 집주인도 부동산도 모두 믿을 만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우연히 한 오픈채팅방에 자신의 전세거래를 중개했던 부동산의 명함이 올라와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이 채팅방은 부동산 리베이트 관련 정보를 주고받는 곳이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전세 계약 후 기존 임대인이 새 임대인에게 집을 팔아 집주인이 바뀐 상태였습니다. 계약 후 임대인이 갑자기 바뀐 과정이 석연치 않다고 생각한 A 씨는 여러 정황상 중개사가 전세사기에 가담했다는 의심이 강하게 들었고, 일단 경찰에 진정서를 넣었습니다. 바뀐 새 임대인에게도 연락을 시도했습니다, 우려했던 대로 새 임대인은 지금껏 단 한 차례도 연락이 닿지 않고 있습니다. 전세사기에 가담해 사실상 명의만 빌려준 이른바 ‘바지사장’ 집주인일 가능성이 큰 상황인데, 몇 달 뒤 돌아올 만기 때 전세보증금을 돌려받기 어려운 입장에 놓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A 씨는 전세보증보험에도 가입이 안 된 상태입니다. 보증보험 가입을 두 차례 신청했는데, 처음엔 전세가율이 높아 거절됐고, 두 번째는 새 집주인의 세금 체납으로 집이 압류에 걸려 또 거절됐습니다. A 씨의 현 상황을 정리하면, 바지사장으로 추정되는 집주인은 연락이 두절됐고, 계약 당시부터 매매가보다 전세가가 높은 깡통전세였고, 살고 있는 집은 각종 압류가 걸려 경매에 넘어갈 것이며, 보증보험 가입이 번번이 거절돼 전세보증금을 완전히 떼일 처지입니다. 이 정도면 전세사기 피해자라고 봐도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다수’가 아니라 ‘하나’라서 안 된다 그러면 A 씨는 최근 발의된 전세사기 피해지원 특별법의 적용 대상이 돼 구제받을 수 있을까요? 안타깝지만 불가능합니다. 결정적인 이유는 해당 임대인으로 인해 전세사기 피해를 입은 임차인이 ‘다수’가 아니라 A 씨 한 명이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피해 임차인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현 단계에선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는데, 지원 대상이 되려면 ‘다수’의 피해를 A 씨가 입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상황에 대해 A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번에 법안(기존 발의된 특별법)도 수정안(국토부가 제출한 수정의견)에도 제가 '다수'에 해당이 안 되거든요. (주변 피해자 중에) 찾아봤는데 없어요. 다른 데서 사기를 쳤는지 모르겠지만 공통된 바지사장의 이름은 없더라고요.” 기존 특별법 요건이 너무 까다로워 지원대상이 협소해진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정부는 지난 1일 열린 국회 국토위 법안소위에 수정의견을 들고 왔습니다. 수정안은 기존 법안보다 내용이 더 구체적으로 명시됐습니다. 개념이 모호하단 지적을 받았던 ‘보증금 상당액이 미반환될 우려’ 요건은 삭제됐고, 임대인의 사기 의도를 입증할 요건에 수사개시 외에도 ‘임대인의 기망’과 ‘바지사장에 대한 명의의전’ 사례가 추가됐습니다. 하지만, 피해 임차인이 ‘다수’여야 한다는 조건은, 처음 요건이 삭제됐지만, 다른 요건 뒤에 덧붙여져 그대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A 씨처럼 피해자가 다수인지 확인할 수 없는 경우에는 구제받을 수 없습니다. '임대인 박 ㅁㅈ 피해자 찾습니다’ 지난 4월 온라인 집 구하기 커뮤니티에 위의 제목으로 글이 올라왔습니다. 전세사기 피해로 집단소송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신고하려니 안 돼서 같은 상황에 처한 피해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5월 3일 한 일간지에는 이런 제목의 기사도 실렸습니다. ‘뭉칠수록 '피해자' 된다.’, '빌라왕' 김 모씨, '건축왕' 남 모씨처럼 대중에 잘 알려진 전세사기 외에 부각되지 않은 전세사기 사건 피해자들이 임대인의 이름을, 명예훼손 우려로 실명 대신 초성 정도만 담아, 임대인 찾기에 나선다는 내용입니다. 실제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경찰에 신고할 때부터 높은 현실의 문턱을 체감한다고 합니다. 혼자 힘으로는 신고도 소송도 쉽지 않고, 가까스로 진행된다고 해도 한 사람의 문제제기만으로는 임대인에게 합당한 처벌이 내려지지 않으니, 혼자가 아닌 집단의 힘을 통해 문제해결에 나서는 겁니다. 특히나 특별법 지원 대상에 ‘다수’라는 표현이 남아있는 한, 안 그래도 힘겨운 피해자들의 나와 같은 피해자 찾기는 계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차라리 다행이에요, 내 임대인이 유명해서” 그래서 임차인들 사이에선 요즘 이런 얘기까지 나옵니다. “제가 겪은 전세사기 피해 규모가 크고, 임대인이 유명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요?” 임대인이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피해자들은 또 이런 얘기를 하며 서글퍼진다고 합니다. “내 임대인이 더 많은 세입자 보증금을 떼먹길 바라고 계속 기다려야 하나요? 이게 맞는 건가요?” 지난 2월부터 4월까지, 석 달간 전세사기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한 많은 정부 대책이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천 미추홀구에서만 세 명의 전세사기 피해자가 잇따라 목숨을 끊었고, 이들이 각종 정부 지원책에서 배제돼 있었단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책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습니다. 전세사기 피해 유형이 각양각색이라 정부 대책의 사각지대가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피해자 중에도 우선순위가 있는데, 모든 피해자를 무슨 수로 한 번에 다 구제하느냐고 정부 입장에선 볼멘소리가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피해자 입장에서 보면 우선순위가 없습니다. 전 재산이 걸린 문제인데, 누군 더 급하고 누군 덜 급하지 않죠. 피해자가 한 명인지, 열 명인지, 백 명인지를 피해자가 일일이 확인한단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피해자 단체들은 그래서 정부 차원의 정확한 실태조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피해자가 적다는 이유로, 사기 의도를 입증할 서류가 충분치 않다는 이유로 대상에서 배제되는 일이 없도록, ‘일단 던져놓고 보자’식이 아니라 철저한 조사 뒤에 촘촘한 대책이 뒤따라야겠습니다. *[스프] '전세 사기 배후 추적단'에 자신이나 지인이 당한 전세 사기 피해 사례나 정보를 알려주세요. SBS 전세 사기 취재팀이 함께 추적하겠습니다. (아래 배너 클릭)
[ 김병진/전세사기 피해자 : 압류 걸리고, 가압류도 걸리고, 최근에는 압류가 하나 더 걸렸어요. ] [ A 씨 / 전세사기 피해자 : 임신 초기여서 가면서 넘어지고. 다리 풀려 가지고. 이거 매일 생각이 나서 두통약 먹으면서 잠자고… ] 이들에게 전셋집은 다리 쭉 뻗고 편히 쉴 수 있는 보금자리가 아닙니다. 세입자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은 전세사기 범죄는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서 시작합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4년 전 이곳엔 부동산이 하나 있었습니다. 부동산 대표는 바로 화곡동 일대에서 이름을 날리던 공인중개사 조 모 씨입니다. 2015년부터 부동산을 운영해 왔는데요, 조 씨는 평범한 공인중개사가 아니었습니다. [ 인근 가게 사장 : 처음에는 계약 한 건도 못 했어요, 없었어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빌라 전세한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북적거리기 시작하더라고. 강서에서 자기가 제일 잘나간다고. ] 파리 날리던 부동산이 어떻게, 그것도 갑자기 잘된 걸까요? 조 씨는 바지사장 강 모 씨를 앞세워서 화곡동 빌라 수십 채의 전세 거래를 주선했습니다. 부동산 임대사업을 하고 싶은데 돈이 없다는 일용직 노동자 강 씨에게 조 씨는 의도적으로 접근했습니다. 자본금이 없어도 부동산 여러 채를 소유할 수 있고, 건축주에게 받는 리베이트를 빌라 한 채당 150~200만 원씩 지급하겠다고 말하며 범죄 속으로 끌고 온 겁니다. [ B 씨/전세사기 피해자 : 조 씨가 다 계획한 것처럼 느껴졌고, 사실 저는 강 씨 목소리가 기억이 나지 않아요. 조 씨가 아예 판을 깔아놨다고 생각을 해요. ] 그런데 취재 과정에서 최근 사망한 40대 바지사장 김 모 씨가 이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숨진 김 씨가 과거 조 씨가 운영하는 부동산에서 중개보조원으로 일했다는 자료가 확인됐습니다. 정리하면 조 씨를 중심으로 동업자인 바지사장인 강 씨가 있고, 조 씨 밑에는 중개보조원으로 김 씨가 활동했던 셈인데, 숨진 김 씨는 이곳에서 일하며 사기 수법을 배웠을 걸로 추정됩니다. 김 씨는 훗날 적극적으로 전세사기 범죄에 가담해 천 채 넘는 빌라의 주인이 됐고, 전세사기 2세대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가 됩니다. 그렇다면 강 씨나 숨진 김 씨와 같은 바지사장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취재진은 먼저 김 씨의 행적을 찾아 나섰습니다. [ 김 씨 지인 : 어떻게 하다가 지금 그 부동산을 한다고 해서. 부동산을, 걔가 어떻게 부동산을 하지? ] 관련 기록들을 하나씩 살펴봤더니, 숨진 김 씨가 과거 보이스피싱 일당의 중간책으로 활동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김 씨는 사기 방조 혐의로 징역형까지 선고받았었습니다. 일당과 함께 주택 3,400여 채의 명의를 이전받은 뒤에 잠적한 또 다른 바지사장 권 모 씨도 전세사기 이전에 확인된 전과만 모두 3건. 이 가운데엔 바다이야기 불법게임장을 운영한 것도 있었습니다. 보이스피싱, 사기, 도박 같은 민생범죄를 저질렀던 이들이 전세사기 범죄에 다시 등장해서 피해자를 만든 셈이죠. 심지어 자신도 모르는 새 명의를 도용당해서 바지사장이 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 명의도용 피해자 A 씨 동생 : 아무것도, 빈손으로 갖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재산세가 날아오는가. 그래서 나는 '사기꾼한테 사기당한 것 같다' 이런 생각을 가진 거죠. ] [ 명의도용 피해자 A 씨 : 그럼 선생님은 그 집에 가보신 적은 없으세요? 없어요. 가봤으면 다 알지… ] 이렇게 수많은 피해가 이어질 동안 수사당국은 대체 뭘 하고 있던 걸까요. 초기 피해자들이 공인중개사 조 씨와 바지사장 강 씨를 고소한 뒤 검찰 기소까지 무려 3년 5개월이 걸렸습니다. 지난달 청구된 조 씨의 구속영장은 기각됐고, 조 씨의 공인중개사법 위반 혐의는 지난해 5월 공소시효가 지나 따져볼 수도 없게 됐습니다. 그 이유가 뭔지 묻자, 검찰은 리베이트를 받은 게 '중개 대가 초과 보수'는 아니라고 봤다고 답했습니다. 이 말, 여러분은 이해가 되십니까. [ 신중권 변호사 / 전세사기 피해자 대리인 : 법에는 명확하게 명목 여하 불문하고 돈을 법정 수수료 이상 받으면 불법으로 돼 있거든요. 공소시효 지난 다음 이제 와서 '어차피 혐의없음 할거였어', 이게 말입니까? ] 문제는 공인중개사법 위반이 아니면 공인중개사 자격을 제재할 방법이 없단 겁니다. 검찰의 늑장수사가 전세사기 이후에도 공인중개사 활동을 이어가도록 면죄부를 준 셈입니다. [ 신중권 변호사 / 전세사기 피해자 대리인 : 공인중개사법 위반이 돼야 자격의 정지가 되든 뭐든 간에 행정 처분이…. 리베이트 그렇게 많이 받았는데 공인중개사 그냥 그대로 하는 거예요. ] SBS 경제부 전세사기 취재팀은 이어지는 보도를 통해 정부는 전세사기 대란을 왜 막지 못했는지, 그리고 그 책임은 어디에 있는지 끝까지 규명해 나가겠습니다. ( 취재 : 이혜미, 안상우, 정반석, 조윤하 / 영상취재 : 이재영 / 편집 : 한만길 / 담당 : 김도균 / 제작 : D콘텐츠기획부 )
지난 10월, 서울 종로의 한 모텔에서 43살 김 모 씨가 숨졌다. 김 씨는 평소 당뇨 등 지병이 있었고, 사인은 지병이었다고 전해지는데, 젊은 나이에 돌연 세상을 떠난 김 씨의 죽음을 두고 뒷말이 무성하다. 김 씨는 서울과 수도권에 무려 1천 채가 넘는 다가구와 빌라를 보유해 이른바 '빌라왕'으로 불린 인물이다. 하지만,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그가 무슨 수로 그렇게 많은 주택을 보유할 수 있었던 건지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배후로 구체적인 이름이 언급되기도 하는데, 김 씨가 속칭 '바지사장 아니냐'는 설이 무성하다. 경찰도 김 씨 사망을 둘러싼 각종 의혹을 모르는 바 아니라서 범죄 혐의점 등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김 씨의 사망을 둘러싼 세간의 의혹과 궁금증은 차차 해소되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끝내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남는다. 김 씨가 보유한 수많은 주택에 살고 있는 세입자들과 돌려받지 못하고 있는 전세보증금에 대한 이야기다. 돈 없다며 연락두절…뒤늦게 알게 된 사망 소식 인천 남동구의 한 빌라에 거주하는 김병진 씨. 2020년 9월, 신혼집을 알아보던 중 현재 살고 있는 빌라의 매물을 보게 됐다. 집 내부가 깨끗했고, 전세금도 2억 원 미만이라 대출을 받으면 자금 조달에 큰 무리가 없었다. 집주인과 계약서를 썼고, 전세금 대부분은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신혼부부 대상 안심 전세대출을 통해 마련했다. 대출과 함께 전세금 반환보증보험에도 가입했다. 혹여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상황에 대비해 안전하게 보험을 들어 놓은 것이다. 안심 대출에 보험까지. 이 정도면 안전하다고 믿었다. 10월 5일 계약한 신혼집으로 이사했다. 그런데 이사 바로 다음 날인 10월 6일, 집주인이 정 씨에서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새 주인은 김 씨였다. '빌라왕' 바로 그 김 씨다. 물론 김병진 씨는 새 주인이 누군지 전혀 알지 못했다. 계약 만료를 다섯 달 앞둔 올봄, 김병진 씨는 집주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만기 전 이사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리기 위해서다. 그런데 집주인은 "신용이 막혀서 안 된다", "나는 돈이 없으니 알아서 하라"며 전세금을 돌려받고 싶거든 직접 부동산에 매물을 내놓으라 요구했다. 전화는 일절 받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집주인 앞으로 내용 증명을 보낸 뒤, 등기부등본을 떼 봤다. 계약 당시 깨끗했던 등기부등본에는 압류와 가압류 세 건이 걸려 있었다. 결국 만기까지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한 김병진 씨는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했다. 임차권등기는 세입자가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채 다른 주택으로 이사해야 할 경우, 기존 주택에 대한 '대항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등기부등본에 보증금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기재하는 것이다. 법적으로 세입자는 임대인, 즉 주인 동의를 받지 않아도 단독으로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할 수 있고, 김병진 씨는 임차권등기 승인을 확인한 뒤 절차에 따라 주택도시보증공사에 보증 이행을 신청했다. 하지만 보증은 이행되지 않았다. 대신 주택도시보증공사는 김병진 씨 앞으로 한 장의 서류를 보내왔다. 추가 심사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추가 심사를 언급한 서류의 일부다. 임차권등기명령 신청일과 임차권등기 등기일 사이에 임대인이 사망한 경우 임차권등기의 효력이 있는지에 대해 추가 심사가 진행 중임을 알려드립니다. 또한, 전세금 안심대출보증발급 약관 제9조에 의거 당해 추가 심사가 종료될 때까지 보증채무의 이행을 유보하고… (주택도시보증공사 서울서부관리센터) 이 부분에 대해 김병진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병진 씨는 집주인이 숨지기 전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했다. 이때까진 김병진 씨와 집주인 사이에는 권리관계가 성립한다. 하지만 등기가 결정된 시점에는 집주인이 이미 숨진 상태가 돼버렸다. 이 때문에 권리관계가 모호해진 만큼 추가 심사가 필요하다고 주택도시보증공사는 설명했다고 한다. 김병진 씨는 이미 권리관계가 형성된 목적물에 대해 추가 심사가 왜 필요한 것인지 이의를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추가 심사 상태로 어느덧 한 달 넘는 시간이 흘렀다. "30대 신용불량자가 될 처지가 됐어요" 비슷한 시기 전세 계약을 한 또 다른 30대 피해자의 사연은 더 딱하다. 이 모 씨(가명)는 2020년 5월, 서울 강북구 한 빌라에 전세를 들어갔다. 마찬가지로 계약 후 얼마 안 돼 집주인이 '빌라왕' 김 씨로 바뀌었다. 계약 만료가 돼도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던 김 씨는 연락을 했더니 자신은 신용불량자라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답했다.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이 씨 역시 주택도시보증공사에 보증이행을 신청했다. 그런데 또다시 보증은 이행되지 않았다. 주택도시보증공사는 전세 계약 기간 중 집주인과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입증할 자료를 요청했다. 하지만 이미 집주인은 망자인 상황. 이 씨는 주택도시보증공사에 그 어떤 자료도 제출할 수 없었다. 이 씨는 이달 23일 이후에는 대출 연체로 인해 신용불량자가 될지도 모른다. 급한 대로 은행에 대출 연장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주택도시보증공사의 보증 이행이 불가능하니 전세 대출을 상환할 방법도 없다. 이 씨는 이렇게 말했다. 전세 사기 피해자 이 모 씨(가명) "주택도시보증공사는 '상속을 하든지 아니면 재산 관리인이 임명돼 절차를 다시 밟든지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재산을 관리할 수 있는 누군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는 전면 스톱'이라고 얘기했어요. 이렇게 대형 사고가 처음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왜 아직도 전세에 대한 피해자에 대한 프로세스가 정확하게 구축이 안 되어 있는지 납득이 안 되죠 정말." 보증금 언제 얼마나 돌려받을 수 있나 따져보니 두 사람처럼 김 씨로부터 전세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 회원 수는 현재 5백 명이 넘는다. 실제 피해자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 씨와 임대차 계약을 맺은 세입자 가운데 주택도시보증공사 보증보험 가입자는 5백여 명. 이 가운데 2백 명가량이 계약 만기 이후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세입자들은 매달 수십만 원의 대출 이자를 부담하며 전전긍긍하고 있고, 대위 변제 책임이 있는 주택도시보증공사가 세입자들의 어려운 상황을 외면한 채 늑장을 부린다고 비판한다. 주택도시보증공사는 이렇게 항변한다. 보증 이행을 하려면 절차상 먼저 김 씨의 상속자가 정해져야 한다. 민법은 상속받을 권리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데, 상속 1순위는 배우자와 자녀, 2순위는 배우자와 부모, 3순위는 형제자매, 4순위는 4촌 이내 방계혈족이다. 숨진 김 씨는 배우자와 자녀가 없다. 그래서 현재 2순위인 김 씨의 부모가 상속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김 씨 부모는 상속 결정을 내리지 않은 상태다. 더욱이 부모가 상속을 받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피해자가 워낙 많은 데다 국민적 관심도 높은 사안이라, 주택도시보증공사 직접 부모를 찾아가 상속을 권유했지만 김 씨 부모는 "더 이상 연락하지 말라"며 회피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부모가 상속을 포기하면, 법원은 상속재산 관리인을 선임하고, 이 관리인이 법적 상속인의 지위를 물려받는다. 상속재산 관리인이 정해지면 보증보험에 가입한 세입자들은 비로소 계약 해지 절차를 밟고 보증 이행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상속재산 관리인이 선임되기까지 최소 6개월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지금까지 견뎌온 것 이상의 오랜 시간을 더 버텨야 한다는 얘기다. 보증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세입자들은 더욱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부동산이 경매로 넘어간 다음, 경매 낙찰 대금에서 돈을 돌려받아야 하는데, 선순위로 설정된 근저당권이 있으면 순위가 뒤로 밀린다. 이렇게 앞에서 다 가져가고 나면 남는 돈은 얼마나 될까. 숨진 김 씨는 종부세만 60억 원 넘게 체납했고, 빚이 상당한 걸로 알려졌다. 나라에서, 은행에서 먼저 밀린 세금과 빚을 떼가면, 많게는 3억 원까지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세입자들이 손에 쥘 돈은 소액일 가능성이 높다. 사후약방문이 무슨 소용 이런 상황에 정부가 마냥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최근 잇따라 전세 사기 대책을 발표했고,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난 일요일 직접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세입자들도 장관 말을 믿고 싶고, 걱정하지 않고 싶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전세대출 연장의 경우 은행과의 협의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아 실제 대출 연장을 신청하면 막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전세피해 지원센터도 보증보험에 가입한 세입자는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명시돼 있다. 앞선 전세 사기 피해자들처럼 보증보험에 가입한 경우에는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주택도시기금 예산 지원 역시 대출 금리만 조금 낮을 뿐, 전세 사기 피해자들이 자기 돈을 부담해야 한다는 점에선 여전히 부담이 적지 않은 사후 대책일 뿐이다. 국토부와 법무부 '합동법률지원 TF'를 만들어 전세 사기 피해자들을 지원하겠다는 추가 대책도 나왔다. TF에서는 지연되고 있는 보증금 반환을 앞당기는 방안을 강구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여전히 많이 부족하다. 애초 전세 사기가 발생할 수 없는 부동산 거래 구조를 만들어 놓는 것이 급선무 아닐까. 개인이 1천 채 넘는 부동산을 보유할 수 있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상황, 수십억 원을 체납한 투기꾼이 잇따라 부동산을 매수할 수 있는 비정상적 구조를 손대지 않은 채 피해 구제책만 내놓는다면 이것을 '뒷북'이 아니라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