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전문 기자, 공연 담당 기자. BTS도 조성진도 씁니다. 사회부, 편집부, 정치부, 국제부, SDF 기획 부서를 거쳤고, 문화부에서 가장 오래 일했습니다. 공연 관람과 수다, 피아노, 중국문화, 그리고 고양이 집사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쓴 책으로 <나도 가끔은 커튼콜을 꿈꾼다>, <천재들의 유엔 TED>가 있습니다.
이슈는 스프링이다! 스프링처럼 통통 튀는 이슈를 핵심만 골라 정리해드립니다. 걸그룹 뉴진스 멤버가 하이브 내에서 '따돌림'을 당했다는 의혹에 대해, 고용노동부가 근로기준법이 규정한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놨습니다. 고용노동부는 '하니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보기 어렵다'면서, 이 건을 조사해달라는 민원을 종결했습니다.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서울서부지청은 뉴진스 팬들이 뉴진스 멤버 '팜 하니'가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며 고용노동부에 제기한 민원에 대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보기 어려워 행정 종결했다'고 밝혔습니다. 무슨 상황인데? 뉴진스 하니는 지난 9월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통해 하이브 사옥 복도에서 대기하다가 지나가는 다른 연예인과 매니저에게 인사했는데, 해당 매니저가 '무시해'라고 말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니는 지난 10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이 내용을 증언하면서 눈물을 쏟기도 했습니다. 하니의 증언이 나온 이후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서울서부지청에는 뉴진스를 상대로 한 따돌림이 근로기준법에서 금지한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는지 조사해달라는 민원이 잇따라 접수됐습니다. 현행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괴롭힘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고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고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뜻합니다. 고용노동부의 직장 내 괴롭힘 예방·대응 매뉴얼에 따르면, 상사나 다수 직원이 특정한 직원과 대화하지 않거나 따돌리는 '집단 따돌림', 업무 수행 과정에서의 의도적 무시나 배제 등을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간 행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근로기준법은 상시 5인 이상 노동자를 사용하는 모든 사업장에 적용됩니다.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으려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여야 하는데, 정부는 2010년 연예인을 노동자보다는 기획사와 전속계약을 맺고 활동하는 '예외 대상자'라고 판단했습니다. 전속계약에 따라 기획사는 연예인의 활동을 관리하고 일정 비율의 수익을 나눕니다. 이는 기획사가 연예인의 업무를 위임받아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민법상 위임 계약이지 고용 계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좀 더 설명하면 정부는 진정이 접수되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성이 인정되는 경우에만 조사를 진행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체 종결해 왔습니다. 이번에도 서부지청은 하니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행정 종결했습니다. 즉, 하니가 실제로 소속사에서 따돌림을 받았는지에 대한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서부지청은 행정 종결의 이유를 '서로 대등한 계약 당사자의 지위에서 각자의 계약상 의무를 이행하는 관계에 불과해 사측의 지휘·감독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일반 직원에게 적용되는 회사 취업규칙 등 사내 규범, 제도나 시스템이 적용되지 않은 점', '일정한 근무 시간이나 근무 장소가 정해져 있지 않으며 출퇴근 시간을 정할 수가 없는 점', '연예 활동에 필요한 비용 등을 회사와 팜 하니가 공동으로 부담한 점' 등도 제시했습니다. 아울러 '지급된 금액이 수익 배분의 성격으로 근로 자체의 대상적 성격이라 보기 어려운 점', '세금을 각자 부담하고 근로소득세가 아닌 사업소득세를 납부하는 점', '연예 활동을 통한 이윤 창출과 손실의 초래 등 위험을 스스로 안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점'도 지적했습니다. 서부지청은 끝으로 대법원이 2019년 9월 연예인 전속계약의 성질을 민법상 위임 계약 또는 위임과 비슷한 무명 계약에 해당한다고 판시한 판결을 언급하며,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재차 밝혔습니다. 한 걸음 더 하지만 노동계에서는 무리한 스케줄에 시달리는 아이돌이 과로로 쓰러지는 노동자와 다르지 않다면서, 연예인의 '노동자성'을 인정하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저연차 연예인의 경우, 기획사와 사실상 '갑을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볼 여지가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아이돌 연습생이나 저연차 연예인은 회사의 일방적인 지시에 따라야 하고 수입 분배에서도 불리한 입장인 경우가 많아,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연예인처럼 자영업자의 성격이 있으면서 회사와 경제적 종속 관계에 있는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의 권리를 인정한 판례가 많아진 만큼, 연예인도 특수고용직 노동자로 본다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특수고용직 노동자는 근로 계약이 아니라 위임 또는 도급 계약을 맺고, 근로자는 아니지만 다른 사람의 사업을 위해 직접 노무 제공을 하고, 업무 수행 과정에 대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지휘·감독을 받지 않는 노동자를 말합니다. 보험설계사, 학습지 방문 강사, 택배원, 대출 모집인, 신용카드 모집인, 방문판매원, 방과 후 강사, 퀵서비스 기사, 대리운전기사 등이 특수고용직 노동자에 해당됩니다. 지난 5월 대법원은 골프 캐디로 일하던 배 모 씨가 상사의 직장 내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에 대해, 상사와 이를 방치한 회사의 불법 행위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캐디가 특수고용직으로서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직장 내 괴롭힘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하니가 지난 10월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참고인으로 출석해 증언한 뒤, 정치권에서도 아티스트가 소속사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노동법 사각지대를 없애고 아티스트의 '노동자성'을 법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여야가 큰 이견이 없었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식으로 제도가 보완될 수 있을지 주목됩니다.
‘피아노의 시인’ 프레데릭 쇼팽(1810~1849)의 신곡이 200년 만에 뉴욕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 2주가 넘었는데, 여전히 관심이 뜨겁습니다. 피아니스트 랑랑이 이 곡의 '월드 프리미어' 음원을 공개한 데 이어, 표트르 안데르제프스키의 연주도 나왔습니다. 쇼팽의 ‘신곡’은 뉴욕 맨해튼 소재 박물관인 ‘모건 라이브러리 앤드 뮤지엄(이후 모건 박물관으로 표기)’에서 발견됐는데요, 지난달 27일 뉴욕타임스의 보도로 처음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올봄 이 박물관의 음악 담당 학예사인 로빈슨 매클렐런이 수장고에서 이 악보를 처음 발견했습니다. 출처 : The Morgan Library & Museum 쇼팽의 악보는 왜 뉴욕에서 발견되었을까 모건 박물관이 어떤 곳이기에 쇼팽의 악보가 발견된 걸까요? 이 박물관 이름의 ‘모건’은 그 유명한 금융회사 ‘J.P. 모건’의 모건입니다. 미국 굴지의 기업가이자 ‘금융왕’이었던 존 피어몬트 모건(John Piermont Morgan. 1837~1913)은 1890년 무렵부터 각종 희귀 도서와 원고, 악보 등을 전 세계에서 수집했고, 뉴욕의 사저 주변에 개인 서재 겸 박물관을 지었습니다. 존 맥킴(John McKim)이 설계해 20세기 초에 지어졌고 현재 모건 박물관의 본관으로 사용되는 ‘맥킴’ 빌딩입니다. 출처 : The Morgan Library & Museum J.P. 모건 사후에 이 박물관은 공공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이 박물관은 본관인 맥킴 빌딩 외에 J.P. 모건이 살던 집, 장남인 J.P. 모건 주니어가 살던 집을 별관으로 편입하는 등 계속 규모를 확장해 왔습니다. 그리고 2006년 유명 건축가 렌조 피아노가 마지막 확장 공사를 맡아 모건 박물관은 공연장과 레스토랑, 숍 등을 갖춘 현재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모건 박물관은 건물 자체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희귀한 소장품을 볼 수 있는 관광 명소입니다. 25달러의 입장료를 내야 들어갈 수 있는데요, 대표적인 소장품으로 금속활자로 인쇄한 최초의 성경, 구텐베르크 성경이 있습니다. 15세기에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성경을 180권 인쇄했는데,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건 50권 정도에 불과하고 이 중 세 권이 모건 박물관에 있습니다. J.P 모건이 설립한 박물관, 음악 자료의 보고 모건 박물관에는 음악과 관련된 희귀 자료들도 많습니다. 베토벤과 모차르트, 슈베르트, 쇼팽, 브람스, 말러, 스트라빈스키 등 수많은 작곡가들의 자필 악보나 편지, 출판 악보의 초판 등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박물관에는 전문적인 음악 지식을 갖춘 음악 담당 학예사가 있었던 겁니다. 모건 박물관의 음악 담당 학예사 로빈슨 매클렐런은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매클렐런은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모건 박물관 소장 악보를 작곡가 이름에 따라 찾아볼 수 있는 온라인 아카이브를 구축했습니다. 그의 주요 업무는 음악 관련 전시를 기획하고 글을 쓰고, 새로 소장할 작품을 구입하거나, 기존 소장품을 분류 관리하는 일입니다. 그가 쇼팽의 미공개 악보를 발견한 것도 박물관의 기존 소장품을 분류 정리하는 과정에서였습니다. 가로 13센티미터, 세로 10센티미터, 인덱스카드 크기의 이 악보는 저명한 음악 교육자 아서 자츠(Arthur Satz)의 사후 이 박물관에 기증한 자료들 중에 있었습니다. 랑랑보다 먼저 쇼팽의 '신곡'을 친 사람 뉴욕타임스는 쇼팽의 미공개 악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피아니스트 랑랑의 첫 연주를 공개했지만, 매클렐런은 이 곡을 랑랑보다 앞서 직접 연주한 사람이었습니다. 최근 그는 독일의 클래식 음악 유튜버 칼 폰 무디와 인터뷰했는데, 그는 소장품들을 정리하다가 ‘쇼팽’이라고 쓰인 이 악보를 처음 발견하고, 사진을 찍어 출력한 악보 사본을 집에 가져와서 직접 쳐봤다고 했습니다. “저는 피아니스트는 아니지만, 제 연주는 멜로디를 듣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제가 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곡이라는 게 분명했죠. 제가 찾을 수 있는 쇼팽의 다른 A 단조 왈츠들을 모두 훑어봤는데, 그 어떤 곡하고도 매치되지 않았습니다. 바로 쇼팽 전문가인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제프리 칼버그에게 연락했습니다.” 오랫동안 묻혀 있었던 이 곡을 최초로 발견해 연주해 본 매클렐런의 소감은 어땠을까요? “저는 아마도 적어도 수십 년 안에는 이 곡을 최초로 친 사람일 거예요. 흥분됐지만, 그 시점에는 이 악보가 진짜 쇼팽인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의 깊은’ 흥분이었죠. 그래도 저는 그 순간을 마음껏 즐기기로 했어요. 그 곡의 멜로디가 제 머릿속에 콕 박혀서, 1주일 정도는 계속 재생되는 것 같았습니다.” 몇 달간 전문가들이 종이와 잉크 재질을 분석하고 낮은음자리표를 독특하게 쓰는 쇼팽의 필적과 대조한 결과, 모건 박물관은 이 악보가 쇼팽이 20대에 쓴 미공개 왈츠 악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다만 악보 위에 ‘쇼팽’이라고 쓰인 것은 다른 사람의 필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작은 악보는 쇼팽의 '선물' 출처: 연합뉴스 이 악보는 일반적인 악보들에 비해 크기가 굉장히 작은데, 쇼팽이 남긴 악보 중에는 이렇게 작은 종이에 쓴 곡도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쇼팽이 이렇게 작은 악보는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곤 했다고 말합니다. 이를테면, 디너 파티 초대를 받으면 와인 대신 이런 악보를 선물로 가져갔을 거라는 겁니다. '쇼팽이 와인 대신 악보를 선물로 가져오는 파티’의 참석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파티에선 즉석에서 그 곡의 연주가 펼쳐졌을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이 곡이 진짜 쇼팽의 곡인지 아직 100% 확신할 수 없다며 의구심을 나타내는 전문가들도 있습니다. 폴란드 국립 프레데릭 쇼팽 인스티튜트는 이 악보가 쇼팽 자필 악보가 갖는 전형적인 특징을 많이 갖고 있다고 하면서도, 정밀한 비교 연구를 거쳐야 한다며 최종 결론은 유보했습니다. 매클렐런은 현재 이 악보를 과거에 소유했던 컬렉터들이 누구인지도 조사하고 있습니다. 이 악보는 아서 자츠 이전에는 진 위튼이라는 줄리어드 출신 플루티스트가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진 위튼의 자녀들과 연락을 취하고 있다고 했는데요, 이런 식으로 과거의 컬렉터들을 확인하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이 악보의 ‘기원’을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확실한 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쇼팽의 작품으로 여기고,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연주 음원을 발표하고, 정식 공연 무대에서 이 곡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곡이 다른 긴 곡의 도입부라고 가정하고, 뒷부분을 쇼팽 스타일로 새롭게 작곡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왈츠는 없었다... 짧지만 많은 이야기 담아 출처 : Piano Street Magazine 저는 이 곡의 도입부를 처음 들었을 때 왈츠가 아니라 스케르초나 폴로네이즈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음으로 어둡고 무겁게 시작되는 이 곡은 멜로디를 반복하며 계속 커지다가, 크게 치라는 뜻의 포르테(f)가 세 개나 되는 포르테시시모(fff)로 폭발합니다. 쇼팽의 왈츠 중에 포르테시시모가 있는 경우는 이전에는 보지 못했습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 드라마틱한 도입부, 왈츠로서는 이례적입니다. 이 폭발 후엔 우아하고 감상적인 멜로디가 이어지면서 전형적인 세 박자 왈츠의 느낌을 찾습니다. 도입부에선 저음 쪽에서 반음씩 내려가는 음들이 들렸었는데, 중간 부분에선 고음 쪽에서 반음계 하향 음들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런 대목이 쇼팽 같다고 느껴졌어요. 우수에 찬 멜로디가 계속되다가 끝나기 직전, 제가 듣자마자 확 끌렸던 부분이 나옵니다. 조성이 잠깐 장조로 바뀌면서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는 듯한, 혹은 엷은 미소를 띠는 듯한 느낌을 주는 대목이죠. 안데르제프스키도 ‘마지막에 C장조로 바뀌는 부분은 쇼팽의 모든 것이 담긴 감동의 순간”이라고 했더라고요. 이 곡은 도돌이표로 반복하면 총 48마디, 연주 시간 1분 좀 넘는 짧은 곡이지만, 쇼팽의 다른 곡들이 그렇듯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멜로디를 반복하면서도 조금씩 변형해 강조하기도 하고, 조성 변화도 있습니다. 쇼팽의 다른 왈츠들과는 닮지 않았지만, 쇼팽의 느낌은 물씬합니다. 랑랑은 이 곡의 거친 도입부가 ‘폴란드 시골의 엄혹한 겨울을 떠올리게 한다’고 했는데, 그래서였는지 저는 A 단조로 조성도 같은 에튀드 Op. 25. No. 11 ‘겨울바람’도 연상했습니다. 이 왈츠는 쇼팽이 20대 초반이었던 1830년에서 1835년 사이에 쓴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바르샤바 음악원을 졸업하고 빈에 간 쇼팽은 1930년 조국 폴란드가 러시아에 맞서 무장봉기를 일으켰지만, 실패했다는 소식을 해외에서 듣게 됩니다. 쇼팽이 이 시기에 썼던 작품들에는 비통함과 고뇌가 묻어 나오는데요, 쇼팽 스스로 붙인 제목은 아니지만 ‘혁명’으로 알려진 에튀드 Op. 10 No. 12는 당시 그의 심경을 담은 듯한 비장한 분위기의 곡입니다. 이 왈츠의 어둡고 무거운 도입부 역시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쇼팽의 신곡은 딱 한 페이지 "시도해 보세요" 새롭게 발견된 쇼팽의 왈츠에 대한 관심은 학계나 음악계를 넘어선 것 같습니다. 매클렐런은 전문가들뿐 아니라 일반 대중도 이 곡을 두고 벌어지는 논의에 참여하고 있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쇼팽은 클래식 전문가가 아닌 대중에게도 굉장히 친숙한 작곡가입니다. “쇼팽이라는 작곡가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쇼팽, 그리고 쇼팽의 음악과 개인적인 인연을 맺고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예를 들어 제 어머니는 직업 피아니스트가 아니지만, 쇼팽의 곡들을 연주해 왔어요. 이 곡에 개인적인 의미도 깃들게 되는 겁니다.” 매클렐런은 이 곡이 많은 젊은 세대에게 클래식 음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많은 아마추어들에게 ‘쇼팽을 직접 연주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이 곡은 쇼팽의 다른 곡들에 비하면 비교적 쉽고 짧으며, 최근에 발견되었다는 화제성까지 있죠. 그는 ‘나도 한 번 쇼팽을 쳐보고 싶다’는 사람들에게 단 한 페이지인 이 곡이 훌륭한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저도 실력 있는 피아니스트가 아니지만 이 곡을 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해도, 악보를 인쇄해서 한 번 시도해 보기를 권합니다. 그냥 듣는 것만 해도 즐거울 거예요." 200년 만의 신곡, 모두에게 주어진 선물 저도 매클렐런의 이 말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쇼팽의 왈츠가 새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처음 접하고 랑랑의 연주를 듣자마자 ‘직접 쳐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니까요. 저는 어릴 때 피아노를 배우다가 그만뒀지만 성인이 되어 다시 취미로 피아노를 쳐왔습니다. 길이가 긴 난곡이라면 엄두를 내지 못했겠지만, 한 페이지짜리 악보가 빨리 쳐달라고 저를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주말에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나보다 먼저 이 곡을 쳐본 사람이 아직은 그리 많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묘한 흥분감까지 느끼며 곡을 연습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소에는 제 피아노 연주를 찍지 않지만, 어느 정도 곡을 손에 익히고 나니 기록을 남겨두고 싶었습니다. 무려 쇼팽의 ‘신곡’이잖아요. 휴대전화 녹화 기능을 켜고 제 연주를 담았습니다. 직업 연주자들뿐만 아니라 취미로 피아노를 치는 아마추어들도 이 곡을 연주하고 SNS에 올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수많은 연주를 들으며, 같은 악보를 두고 이렇게 짧은 곡에서도 다 달라지는 게 새삼 신기하고 흥미로웠습니다. 악보를 처음 발견한 매클렐런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 제 머릿속에선 며칠째 이 왈츠의 멜로디가 계속 맴돌고 있습니다. 쇼팽은 이 곡을 써서 누구에게 주었을까요? 이 악보의 원 소유자가 누구였는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200년 만에 세상에 나온 이 왈츠는 저를 포함해 쇼팽의 음악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선물이니까요. 사진 : 게티이미지
이슈는 스프링이다! 스프링처럼 통통 튀는 이슈를 핵심만 골라 정리해드립니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속옷 시위'를 벌이다 체포된 이란 여대생이 벽화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유명 팝아티스트가 이 여대생의 석방을 촉구하기 위해 이란영사관 인근 건물 외벽에 벽화를 그린 것입니다. 히잡 착용 단속에 항의해 속옷 시위를 벌인 것으로 알려진 이 여대생은 이제 이란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의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로 팔롬보 인스타그램 캡처 무슨 상황인데? 이탈리아의 팝아티스트 알렉산드로 팔롬보는 현지시각 10일 이탈리아 밀라노의 이란영사관 인근 건물 외벽에 그린 벽화를 공개했습니다. 벽화 속 여성은 이란 국기가 그려진 속옷 상의와 영어로 '자유(Freedom)'라는 단어가 적힌 속옷 하의를 입은 채 팔짱을 끼고 걷는 모습입니다. 팔롬보는 풍자적인 표현을 통해 사회 문화 현상을 날카롭게 꼬집는 작가로 유명합니다. 팔롬보는 지난 2일 속옷 시위 도중 체포된 이 여학생의 석방을 촉구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는데요, 그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벽화 사진을 올리고 "자유 - 이란 학생 아후 다르야에이가 밀라노 이란영사관 앞에서 속옷 차림으로 걷는다. 이란 정부는 이 학생의 행위는 '비도덕적'이고 이 학생의 사진을 퍼뜨리는 건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정당하지 않다고 한다"라고 썼습니다. 그는 또 "그녀의 몸짓은 심오하고, 그녀의 희생은 파괴적"이라면서, "그녀는 자기 몸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고, 이란 여성들의 자유와 용기의 외침을 이어가도록 우리를 초대한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공범이 되지 않도록, 무관심하지 않도록, 외면하지 말고 함께 싸워달라는 경고"라고 덧붙였습니다. 좀 더 설명하면 이름이 '아후 다르야에이'(Ahoo Daryaei)인 것으로 알려진 이 여대생은 지난 2일 이란 수도 테헤란의 이슬람 아자드 대학교 이과대학 캠퍼스에서 속옷 차림으로 돌아다니다가 체포됐습니다. '속옷 시위' 장면을 담은 동영상이 소셜미디어에 유포돼 전 세계에서 화제가 되었는데요, 이 동영상에는 이 여성이 팔짱을 끼고 걸어가거나, 앉아 있는 모습뿐 아니라, 남자들이 이 여성을 붙잡아 강제로 차에 태우는 장면까지 담겼습니다. 이 여성은 히잡을 부적절하게 착용했다는 이유로 도덕경찰에게 폭행당하자, 학교 안에서 이뤄진 히잡 착용 단속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속옷만 입고 교내를 걸어 다닌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대학 측은 단속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도덕경찰의 폭행은 없었다며, 오히려 학생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파리 주재 이란대사관은 성명을 통해 이 학생이 '전문치료센터'로 이송되었다고 밝혔습니다. 대사관은 이 학생은 심리적 장애가 있어서 앰뷸런스로 '전문치료센터'로 옮겨졌다고 했지만 그 센터가 어떤 곳인지 자세히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대사관은 또 이 여성은 남편과 별거 중인 두 자녀의 어머니라면서, '가족을 위해 이 학생은 보살핌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영상 속에서 침착하게 걷고 있는 이 학생의 모습을 보면, 정신장애라는 이란 당국의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미국에 기반을 두고 히잡 착용 의무 폐지 운동을 해온 마시흐 알리네자드는 이 학생의 동료들로부터 그가 '정신적으로 건강할 뿐 아니라 기쁨과 활력으로 가득 찬 활기차고 용기 있는 여성'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밝혔습니다. 인권운동가들은 이란 당국이 이 여성을 정신병원에 가둘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미니 사망 이후 여러 시위 참가자들이 국가가 운영하는 정신병원에 보내져 전기충격과 구타, 화학요법 등 고문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국제앰네스티는 '이란 당국은 히잡을 벗는 것을 치료가 필요한 정신장애와 동일시하고 있다'면서, '이 여성이 이름 없는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다는 보도는 매우 우려스럽다고 밝혔습니다. 한 걸음 더 '도덕경찰(지도순찰대)'은 이란 여성의 복장을 규제하는 조직입니다. 이란을 '신정일치 국가'로 만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여성이 히잡을 쓰지 않는 건 나체로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여성의 히잡 착용을 강제했습니다. 이란에서는 외국인을 포함해 만 9세 이상 여성은 공공장소에서 반드시 히잡을 써야 합니다. 히잡 착용을 강제하는 법이 1981년 제정되었고, 무제한의 체포, 구금 권한을 갖고 히잡 착용 위반을 단속하는 도덕경찰 조직이 생겼습니다. 2022년 9월, 히잡을 느슨하게 착용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22세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사흘 만에 감옥에서 사망했습니다. 경찰은 심장마비로 숨진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경찰이 진압봉으로 아미니의 머리를 때렸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2022년 9월 13일, '히잡 불량 착용'을 이유로 이란 풍속 단속 경찰에 체포돼 조사받다가 쓰러진 마흐사 아미니. 그녀는 사흘 만에 숨을 거뒀다. 이란 여성들은 분노했습니다. 이란 전역에서 "나도 아미니다"라는 절규가 쏟아졌고 많은 여성들이 '여성, 삶, 자유'라는 구호를 내걸고 항의 시위에 나섰습니다. 여성들의 시위는 반정부 시위로 확산됐습니다. 시위 참가자 2만여 명이 체포됐고 7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아미니의 사망 이후 이란 당국은 도덕경찰 조직을 해체하고 히잡법을 재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불과 몇 개월 만에 도덕경찰의 단속을 재개했습니다. 2023년 1월, 도덕경찰에 구타당한 16세 가라완드가 중태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경찰은 '가라완드가 객차 옆에 머리를 부딪힌 후 기절했다'고 했지만, 인권단체들은 "히잡을 쓰지 않고 열차에 탄 가라완드를 경찰이 밀쳐 넘어뜨리면서 머리를 심하게 다쳐 의식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 이란 여성들의 저항이 계속되는 가운데, 아미니 1주기였던 지난해 9월, 이란 의회는 여성들의 복장을 더욱 엄격하게 규정하고 처벌을 강화한 새로운 히잡법을 통과시켰습니다. 히잡 규정을 준수하지 않는 여성에게 최대 10년의 징역형을 선고할 수 있는 '히잡과 순결 문화에 대한 지원 법안'입니다. 이전에는 히잡 미착용 여성에 대한 처벌이 10일~2개월이었는데, 형량을 10년까지 대폭 늘렸고 벌금액도 커졌습니다. 이 법안은 3년 시범 적용 기간을 거쳐 2026년부터 본격 시행됩니다. 이렇게 이란 당국의 여성에 대한 억압이 날로 심해지는 가운데, 이란 여대생의 속옷 시위가 벌어진 것입니다. 이란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속옷 차림으로 사회·종교적 금기에 저항하는 모습은 전례를 찾기 어렵습니다. 그는 체포되면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상상해 보았을까요? 그의 속옷 시위는 흥미 거리 '해외 토픽'이 아니라, 정말 많은 용기와 희생이 요구되는 거사였습니다. 이 여성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이란 당국의 공식 발표 외에는 더 이상 알려진 게 없습니다. SNS에 올라온 속옷 시위 영상, 그리고 팔롬보의 벽화 사진에는 이 여성의 용기에 대한 찬사와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는 기원을 담은 전 세계인들의 댓글이 달리고 있습니다. 검은색 히잡을 착용한 다른 여성들 사이에서 속옷 차림으로 침착하게 팔짱을 끼고 걷는 이란 여성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란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의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김수현 SBS 문화예술전문기자가 전해드리는 문화예술과 사람 이야기. 드라마 <정년이>의 인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며 '여성국극'이라는 장르에 대한 관심도 커졌습니다. <정년이>는 여성들이 여성과 남성 역을 모두 맡아 했던 여성국극을 1950년대 대중예술의 총아로 그리고 있는데요, 여성국극은 1960년대부터 급격히 쇠락해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한동안 대가 끊기다시피 했죠. 하지만 '정년이'의 후예들이 지금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정년이> 오프닝에서 배역을 소개하는 목소리 많이 들어보셨죠?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여성국극 1세대 명인인 올해 91세 조영숙 선생입니다. 조영숙 선생의 제자들인 박수빈, 황지영이 바로 '정년이'의 후예들이라 할 만한 여성국극 3세대 배우들입니다. 이들은 '여성국극제작소'라는 단체를 만들어 여성국극의 보존과 창조적 계승에 헌신해 왔습니다. 여성국극 1세대 명인 조영숙 선생 (오른쪽) 여성국극 지켜온 정년이의 후예들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여성국극 '지킴이' 역할을 해온 이들은 현재 안산 문화예술의전당 상주단체로 선정되어 활동 중인데요, 여성국극제작소 박수빈 대표를 골라듣는뉴스룸 커튼콜에서 만났습니다. 드라마 <정년이>의 문옥경처럼 남성 역할 전문 배우입니다. 수트를 입고 씩씩하게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여성국극제작소 박수빈 대표 박수빈 대표는 어린 시절부터 풍물을 익히고, 중학교 때부터는 판소리를 배운 소리꾼입니다. 판소리를 가르친 박계향 선생의 권유로 여성국극 명인 조영숙 선생을 사사하며 여성국극과 발탈을 배웠습니다. 조영숙 선생은 방자 역할을 유명한 여성국극 스타였고, 발로 탈놀이를 하는 중요 무형문화재 '발탈' 기능 보유자이기도 합니다. "명창분들, 예인분들 중에 여성국극을 안 거친 분들이 없어요. 저희 선생님도 여성국극 배우로 계셨던 분이니까 너는 여성국극을 해야겠다, 해서 조영숙 선생님을 연결해 주셨어요. 1990년대 말 정동극장 전통상설무대에서 조금앵 선생님(여성국극 1세대 스타로 2012년 별세)이 이도령, 조영숙 선생님이 월매, 저는 향단이 역을 하게 됐죠." 박 대표는 2000년대 들어 (지금은 해체된) 월드뮤직 그룹 '들소리' 멤버로 해외 무대를 누비며 노래했고, 당시 인연으로 프랑스 재즈 연주자들과 한불 크로스오버 그룹을 결성해 활동했던 경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여성국극이 있었습니다. 끊길 듯 끊길 듯 이어온 여성국극의 명맥 저도 90년대 말, 2000년 즈음 여성국극을 직접 본 기억이 있는데요, 당시 '신세대 소리꾼'이었던 이자람 씨가 여성국극 중견 배우들과 함께 출연했던 '춘향전'을 취재해 기사를 쓴 적도 있습니다. 침체됐던 여성국극이 부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내용이었죠. 하지만 그 후로는 또 한동안 잠잠했어요. 여성국극의 '부활'은 금방 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2011년에 이소자 선생님이 사비 1억 원을 들여서 여성국극 '대춘향전'을 국립국악원 예악당 대관해서 했었어요. 누구도 도와주지 않으니까 직접 나선 거죠. 그때 돌아가신 여성국극 배우들을 추모하는 3시간짜리 공연을 했어요. 당시 반응이 좋았고 관객들도 다시 보고 싶다 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이후 또 멈춰졌죠." 박수빈 대표는 조영숙 선생의 또 다른 제자인 황지영 씨와 의기투합해 2019년 여성국극제작소를 설립합니다. 선생님 돌아가시기 전에 뭐라도 해야겠다,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 남들이 안 하니까 우리라도 해야지, 이런 생각으로 만든 단체였습니다. "사실 선생님들은 여성국극은 작게 하면 안 된다, 호화스럽게 해야 된다, 제대로 해야 된다, 이러시거든요. 그래서 도리어 아무것도 못 하고 지낸 세월이 너무 길어서, 단체(여성국극제작소)를 운영하면서는 일단 뭐라도 해 보는 걸로 바꿨어요. 뭐라도 해야 한다. 그래서 1인극도 하고 2인극도 하고요. 여성국극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가지 것들을 합니다." 여성국극제작소는 '대춘향전' 공연 10년 만인 2021년, 안산 문화예술의전당 '라이징 in 안산' 시리즈로 여성국극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제가 그랬어요. 뭐 수십 년 동안 '라이징(Rising)'이야, 이놈의 '라이징'은 언제까지 할 거야. 50년 전에도 '라이징'이고. 제가 그 단어를 쓰면서도 진짜 웃펐어요. 진짜 슬프다, 언제까지 '라이징'이라는 말을 써야 하나." 출처 : 여성국극제작소 인스타그램 "왜 하는데?"에서 "지켜줘서 감사합니다"까지 지난해 안산에서 공연한 '레전드 춘향전' 역시 박수빈 대표가 사비를 들여 한 공연이었습니다. 3천만 원은 개인적으로 빌리고 나머지 3천만 원은 펀딩과 지원으로 충당했습니다. 인기 웹툰 <정년이>를 원작으로 한 창극이 전석 매진 기록을 세우며 장안의 화제가 된 후였으니 이전과는 좀 달라진 분위기를 느끼지 않았을까요? "못 느꼈어요. 죄송해요 솔직해서. 진짜 힘들었어요. 1, 2, 3세대가 같이 하는 '레전드 춘향전' 만들려고 할 때, 정말 제 마음은 딱 하나였어요.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만 만들고 내려놓자. 너무 지쳐 있었고, 선생님들은 선생님들대로 연세도 있으신데, 사람들 만날 때마다 '여성국극이 이 세상에 왜 있어야 되냐? 여성국극이 이 시대에 있을 이유는 없다. 네가 무대에 서려고 그냥 하는 거 아니냐?' 이런 말들을 들었어요. <정년이> 웹툰 나온 거 저도 재미있게 봤고, 창극도 저희 선생님 모시고 가서 자문도 하고 그랬는데, 사실은 우리 진짜 여성국극 장르에까지는 (관심이) 유입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레전드 춘향전' 할 때만 해도 별로 느끼지 못했었어요." 레전드 춘향전은 생존해 있는 90대의 1세대 배우들, 70~80대의 2세대 배우들, 그리고 박수빈, 황지영 같은 3세대 배우들이 함께하는 무대였습니다. 어렵게 올린 이 공연에 '여성국극제작소' 만들 때부터 응원해 준 사람들뿐 아니라 여성국극을 처음 보는 관객들의 호응도 대단했습니다. 박수빈 대표는 '레전드 춘향전' 공연을 마치고 나서야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레전드 춘향전' 변사또 역의 이소자, 이몽룡 역의 박수빈, 춘향 역의 황지영 (왼쪽부터). 출처 : 여성국극제작소 인스타그램 "제가 매년 지원 사업에 응모하는데, 심사위원 면접 볼 때 눈빛과 태도가 달라요. 그전에는 '여성국극이 왜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세요?' 딱 이런 느낌이었는데 지난해 말 면접 보러 갔을 때는 '여성국극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질문하시더라고요. 레전드 춘향전 때문만은 아니고, 당연히 <정년이> 웹툰과 창극 때문일 거예요. 그렇지만 이렇게 변하고 있구나, 하고 체감한 게 그때였죠." 여성국극은 50년대 대중예술의 총아였다 요즘 여성국극제작소의 공연에는 극작가 고연옥, 혹은 '이날치'의 장영규 같은 내로라 하는 창작진이 참여합니다. 지난 8월 세종문화회관의 싱크넥스트 시리즈 중 하나로 무대에 오른 '조 도깨비 영숙'은 정가 가수 박민희와 장영규 음악감독이 여성국극 '선화공주'를 현대적으로 연출한 작품이었습니다. (장영규는 드라마 <정년이>에서도 음악감독을 맡았죠.) 국악계뿐 아니라 연극계에서도 여성국극을 주목합니다. "여성국극이 창극이나 마당놀이와 뭐가 다르냐, 이런 질문들 많이 하시는데, 여성국극은 연극적 요소가 가장 커요. 처음 만들 때부터 음악적으로는 국악을 기반으로 했지만, 무대를 만드는 모든 기준이 연극적이었거든요. 유학 다녀오신 분들, 극작 무대 장치 의상 이런 연극적 요소를 다 반영했기 때문에 연출이 굉장히 중요했어요." 여성국극은 시작부터 대중예술을 지향했습니다. 대중과 밀착하고 대중의 취향을 선도하는 장르였습니다. 당시 가장 첨단의 콘텐츠를 모두 흡수하고,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박수빈 대표는 1950년대 초반 영화가 1년에 15편 제작될 때, 여성국극은 신작이 24편 제작될 정도로 상업적인 장르였고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고 했습니다. 박수빈 대표는 여성국극의 수많은 '최초' 기록을 나열했습니다. "여성국극은 최초의 '시스루' 무대 의상을 도입했고요. '미러볼' 같은 무대 장치도 처음 사용했어요. 얼마나 환상적이었겠어요. 그러니까 제도권 안에서는 할 수 없었던 일들도 민간 단체니까, 대찬 여성들이 모였다 보니까 과감하게 시도한 것 같고요. 해외 작품을 번안해서 우리 식으로 무대화한 것도 최초이고, 판소리의 장단을 해체하기도 해서 악사들이 공연 전에 나 이거 못 하겠다, 하고 집에 가버리기도 했대요. 또 자료 화면 보면 무대 장치도 정말 그 공간을 다 상상할 수밖에 없게, 영화같이 재현해 놓고, 여성국극만의 분장술도 시도했고요." 절정 인기 누리던 여성국극, 급격한 쇠락 이유는? 박수빈 대표는 여성국극이 인기를 누렸던 것은 훌륭한 배우뿐 아니라 당대 최고의 연출가, 연주자, 무대 미술가, 안무가 등등 훌륭한 창작진이 함께했기 때문이었다며, 여성국극은 최초의 K-뮤지컬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여성국극은 왜 그렇게나 빨리 쇠락했을까요? "정말 다양한 원인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가장 크게 생각하는 부분은, '문화적 배제'입니다. 예전에 굿 하던 분들이 쉬쉬하듯이 여성국극 했다는 걸 쉬쉬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형성됐어요. 50년대 민속학이 들어왔고, 1960년대에 국립극장이나 국립국악원이나 이런 국가 예술기관들이 생기는데, 이렇게 국악을 살려보자 할 때 여성국극은 배제됐죠. 그냥 배제된 정도가 아니라 '여성국극 출신'이라고 얘기하면 수업조차 못 들어오게 했대요. 저 사람들하고는 같이 수업할 수 없다고. 저희 선생님들은 그런 설움을 겪으셨대요." "왜 그랬을까요?" "여성들끼리 한다는 것에 대한 비난을 많이 했죠. 여성국극을 최고의 뮤지컬이다, 초호화 오페라다, 극찬하던 신문들이 한순간에 변태 집단이라느니,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느니... 이런 문구가 다 있어요. 갑자기 프레임이 씌워지면서 이걸 하나의 예술적 장르로 보지 않고, 여성이라는 두 글자에 너무 집중하는 시각으로 바뀌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전통이 아니다, 예술도 아니다, 그런 식으로 철저히 비하했고, 한번 시작하니까 계속 심해졌어요. 그런 식으로 여성국극이라는 장르가 배제되기 시작했죠. 또 하나 큰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민간으로 시작했으니까, 대중문화였으니까, 계속 갔으면 됐을 거예요. 그런데 여성국극이 후계자 양성을 확실히 못 했던 것 같아요. 너무 스타 마케팅 중심이었기 때문에 그 스타가 무너지면 장르 자체가 무너지게 됐던 거라고 생각해요." 여성국극 사료 발굴... 조영숙 선생 다큐 나온다 오랫동안 여성국극에 천착해 온 정은영 작가도 지난해 창극 '정년이' 공연 당시 골라듣는뉴스룸에 출연해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정은영 작가는 여성국극 1세대 배우들을 인터뷰하고, 여성국극을 소재로 다양한 영상 설치 작업을 해온 미디어아티스트인데요,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여성국극의 성 역할 수행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의 '여성국극프로젝트'는 2018년 올해의 작가상 수상, 2019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 등으로 국내외에서 주목받았습니다. ▷ 골라듣는뉴스룸 커튼콜 정은영 작가 편 보기 박수빈 대표는 불과 4-5년 전만 해도 여성국극 자료를 찾으면 정은영 작가 것이 거의 유일했는데, 최근 여성국극의 의미에 주목하는 연구자들이 늘면서 사료들도 새롭게 발굴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2019년, 여성국극을 소재로 한 웹툰 <정년이> 연재가 시작되었고, 이후 창극과 드라마로 이어진 겁니다. "저도 지난해에야 (여성국극 선구자이자 최고 스타였던) 임춘앵 선생님이 걸어오는 모습, 무대 위의 모습들을 (영상으로) 겨우 봤어요. 말만 듣다가 실제로 보니까, 진짜 멋있었겠다, 지금 봐도 멋있을 것 같다 생각했어요. 아우라가 다르더라고요." 박수빈 대표의 스승인 조영숙 선생을 다룬 다큐멘터리도 제작되어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 다큐멘터리에 사용한 자료들은 대부분 해외에서 찾았다고 합니다. 조영숙 선생은 '조 도깨비 영숙' 공연에서 91세의 고령에도 여전한 카리스마를 보여줬는데요, 도깨비는 영특하고 장난기도 많아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다는 뜻으로 지어진 별명입니다. 박 대표는 스승과 함께 선 이 무대가 정말 감격스러웠다고 했습니다. 젊은 관객들이 열광했고, 커튼콜이 길게 이어졌습니다. 여성국극, '곁다리'에서 다시 주역으로 "선생님은 제가 어릴 때 만나서 무슨 장르를 하든 여성국극 이야기를 멈추지 않으셨어요. 작은 무대 하나만 있으면 어떻게든 여성국극을 보여주고 싶어 하셨어요. 저희는 그런 무대에 계속 같이 섰었고요. 번듯한 무대보다는 말 그대로 '곁다리', 여성국극은 언제나 사이에 껴서 기회가 되면 조금 보여줘야 하는 존재, '아직 살아있어요' 하고 계속 말해야 하는 장르였죠. 그런데 이제 선생님 이름과 별명을 걸고, 선생님을 주인공으로 하는 무대가 만들어진 거예요." 안산문화예술의전당 상주단체가 된 여성국극제작소는 올해 처음으로 여성국극 연수생 1기 오디션도 개최했습니다. 여성국극의 후계자들을 양성해서 '지속 가능성'을 보여주려는 노력입니다. 오디션 공고를 내면서 한 명도 안 오면 어떡하지 걱정했는데, 20대에서 70대까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지원했습니다. 직업도 다양했어요. 연극 하던 사람, 영화 연출 하던 사람, 싱어송라이터, 회계사도 있었습니다. 그중 7명을 선발해, 신인 배우들이 출연하는 신작 '화인뎐'을 최근 공연했습니다. 단원 김홍도를 소재로 한 이 공연에도 극작가 고연옥, 음악감독 장영규가 참여했습니다. 출처 : 여성국극제작소 인스타그램 박수빈 대표는 여성국극의 소리와 판소리의 차이를 들려줬는데요, 여성국극은 판소리보다 알아듣기 쉬운 '연극 소리'였다고 합니다. '연극 소리'는 한동안 비하의 뜻으로 쓰인 말이었습니다. 정통이 아니라는 거죠. 하지만 박수빈 대표는 '연극 소리'가 여성국극의 무대에 맞게 만들어진 '스타일'이었다고 했습니다. 여성국극 고유의 '멋'과 위로 "선생님들이 여성국극만의 특징이 있다고 하는데, 한 단어로 말씀은 못하세요. 그게 뭔지 찾으려고 저도 계속 공부해 왔는데, 첫 번째로 가장 많이 말씀하시는 건 여성국극은 '멋'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도대체 그 멋이 뭔지, 손짓 하나를 해도 다르게 해야 하고,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고 하세요. 또 한 가지는 여성국극은 마음을 춤으로 표현했던 거라고 하세요. 그래서 '춘향아!', '도련님!' 하고서 일단 춤을 추고 그다음에 노래를 시작했어요." 또 대사에도 리듬감을 넣어 노래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게 여성국극의 특징입니다. '조 도깨비 영숙' 공연을 보니, 조영숙 선생의 쩌렁쩌렁한 소리가 마치 랩처럼 들리는 대목도 있더라고요. 박수빈 대표는 이렇게 장르의 '기술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이 장르를 통해서 무엇을 전달하고 싶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여성국극의 의미는 '위로'였습니다. "여성국극이 만들어졌을 때가 전쟁 시기였고요. 대중을 대상으로, 대중을 위해 만들어진 장르이거든요. 그 장르가 준 메시지는 '위로'였어요. 판소리나 창극이나 어려운 말들이 많아서 대중이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여성국극은 알아듣기 쉬운 말로 듣기 편한 박자로 표현했어요. 그래서 5살부터 80살 노인까지, 누가 처음 보더라도 다 느끼고 공감할 수 있게 만든 장르였죠. 당시 고통스러운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줬던 장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도 작품을 만들 때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장르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시대와 호흡하는 오늘의 여성국극 출처 : 여성국극제작소 인스타그램 여성국극제작소는 전통의 '계승자'로서 무거운 책임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여성국극의 전통을 알려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대성을 어떻게 반영할지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상주단체 선정 이후 첫 기획 공연이었던 '삼질이의 히어로'도 그런 고민 속에 탄생했습니다. 이 작품은 조영숙 선생의 삶을 모티브로 만들어졌어요. 삼질이는 삼월삼짇날에 태어난 조영숙 선생의 별명입니다. "여성국극을 2인극으로 하는 걸 선생님들은 상상을 못 해요. 그런데 저희는 배우 두 명에 무용 선생님 한 분, 이렇게 세 명이 출연했고 악사도 두 명이었어요. 이게 그냥 음악극처럼 보이기만 하면 어떡하지, 그냥 연극처럼 보이면 어떡하지, 이런 고민이 많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국극 이야기를 여성국극 3세대 배우들이 했으니까, 우리가 전하려는 이야기는 표현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여성국극제작소는 내년 1월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 올라갈 신작을 준비 중입니다. '벼개가 된 사나히'라는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입니다. 구자혜 연출가, 고연옥 작가가 참여하는 이 작품은 여성국극 쇠퇴기에 남자 주역을 하고 싶어 극단에 들어가는 배우 이야기라고 합니다. 창작 신작 외에 과거의 여성국극 공연을 '복원'하는 무대도 계획 중입니다. 여성국극 전통의 원형을 알리면서도, 시대에 발맞춰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일을 병행하고 있는 거죠. "정말 중요한 시점인 것 같아요. 이렇게 관심을 받는 기회가 너무너무너무너무(그는 '너무'를 여러 번 반복했습니다) 드문 일이고 특별한 일이지만, 이게 지속될 거라는 보장도 없고, 이게 우리 여성국극 공연계까지, 진짜 우리 여성국극인들한테까지 미칠 거라는 장담도 할 수 없거든요. 이때 정말 좋은 작품들을 좋은 생각을 갖고 만들어 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사람들이 계속 관심을 주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서 어깨가 무겁고 두렵기도 합니다." 이 시대 청년들과 소통하는 여성국극을 만들고 싶다는 박수빈 대표는, 마지막으로 여성국극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사가 있다며 즉석에서 한 대목을 불렀습니다. "이 몸이야 천하다고 마음조차 천할쏜가. 입은 옷이 더럽기로 이 내 청춘 더러우랴! (노래 마치고) 그동안 여성국극을 만들었을 때도 천시를 당하기 싫다는 마음으로 여성들이 모여서 여성국극을 만들어냈고, 지켜온 분들도 끝끝내 그런 마음을 담고 지켜왔다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그 여성국극의 마음이 대중들께 그렇게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사실 저도 박수빈 대표에게 '그동안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여성국극 지켜줘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었습니다. 삶을 이끄는 무엇인가가 있고, 그에 헌신하는 열정적인 사람들을 만나는 건 항상 영감을 줍니다. 저는 '조 도깨비 영숙' 공연을 영상으로만 접했지만 감동을 느꼈습니다. 내년 1월 대학로에서 공연된다는 신작을 꼭 보러 가봐야겠습니다. *여성국극제작소 박수빈 대표가 출연한 골라듣는뉴스룸 커튼콜 239화에서 더 다채로운 이야기 확인해 보세요. '조 도깨비 영숙' 공연과 여성국극제작소 공연 영상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이슈는 스프링이다! 스프링처럼 통통 튀는 이슈를 핵심만 골라 정리해드립니다. 북촌한옥마을의 관광객 방문 시간 제한 정책이 시범 운영됩니다. 북촌 주민의 정주권 보호와 올바른 관광 문화 정착을 위해, 주거용 한옥 밀집 지역에 관광객은 낮 시간에만 드나들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내년 3월부터는 위반 시 과태료 10만 원이 부과됩니다. 서울 종로구는 11월 1일부터 북촌한옥마을에 관광객 방문 시간 제한 정책을 시범 운영한다고 밝혔습니다. 대상 지역은 북촌 특별관리지역 내 '레드존'(북촌로 11길 일대 3만 4천㎡)으로, 오후 5시부터 다음 날 오전 10시까지 관광객 출입이 제한됩니다. 단, 주민과 주민의 지인·친척, 상인, 투숙객, 상점 이용객 등의 출입은 허용됩니다. 무슨 상황인데? 종로구는 앞서 지역 주민과 상생하는 관광 문화 정착을 위해 지난 7월 1일 북촌을 '특별관리지역'으로 지정하면서 주민 불편 수준에 따라 레드존, 옐로우존, 오렌지존으로 나눴습니다. 레드존은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주거용 한옥 밀집 지역을 말합니다. 2025년 2월까지는 계도 기간입니다. 종로구는 시행 초기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관리 인력을 투입해 안내·홍보를 강화하고, 계도 기간 후에는 본격적인 단속에 들어갑니다. 2025년 3월 1일부터는 제한 시간에 레드존을 출입하는 관광객에게 10만 원의 과태료를 부과합니다. 종로구는 또 2026년 1월부터 전세버스(관광버스) 통행 제한 구역을 운영합니다. 버스 불법 주정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대상지는 버스 불법 주정차가 빈번한 북촌로, 북촌로 5길부터 창덕궁 1길에 이르는 약 2.3km 구간입니다. 종로구 관계자는 "지난 7월 1일 고시에서는 북촌로 일대만을 통행제한구역으로 발표했으나, 풍선 효과나 안전사고 우려를 고려해 어린이보호구역이 있는 재동초등학교 인근 도로까지 범위를 확대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종로구는 전세버스 통행 제한을 통해 버스는 마을 외곽에 주차하고, 관광객은 도보로 접근하는 보행 중심 관광 문화가 확산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정문헌 구청장은 '이번 정책은 북촌의 전통적 가치를 유지하면서도 주민들의 안락한 주거 생활을 보호하기 위한 필수 조치'라며 '주민 불편을 최소화하고 한옥마을의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총력을 다하겠다'라고 밝혔습니다. 좀 더 설명하면 북촌한옥마을은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 사이에 위치한 서울의 대표적인 전통마을입니다. 조선 시대부터 양반들이 많이 살았던 곳인데요, 1920년대 후반 서울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주택업자들이 양반들이 살던 대형 한옥 필지를 소규모 필지로 분할하고 구릉지도 개발해 도시 한옥을 대량으로 건설하면서, 지금과 같은 한옥 밀집 지역이 되었습니다. 1970년대 이후 강남 개발로 명문 학교와 공공기관들이 이전하면서 남겨진 필지에 대형 건물이 들어서고, 개인들도 한옥 아닌 일반 주택을 건설하면서 한옥들이 빠르게 멸실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000년 이후 서울시의 보존 정책에 힘입어 대표적인 한옥마을로 남아 있습니다. 2023년 기준으로 6천100여 명의 주민들이 이 마을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북촌한옥마을은 서울의 대표적인 관광지이기도 합니다. 특히 2020년 서울시가 이 지역에 건축 특례를 적용하고 관련 규제를 완화하면서 '한옥스테이'를 중심으로 관광객들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지난해 북촌한옥마을을 방문한 관광객은 무려 644만 명에 이릅니다. 특히 한복을 입고 한옥에 숙박하며 한국 전통문화를 직접 체험해 보려는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문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마을에 몰려드는 관광객들 때문에 쓰레기와 소음, 사생활 침해 등 주민들의 일상이 크게 방해를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신고제로 할 수 있는 한옥스테이 사업에 기업들이 뛰어들어 공격적으로 확장하면서 주민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습니다. 주거 환경이 악화하면서 마을을 떠나는 주민들도 늘고 있습니다. 지난해 기준 가회동과 삼청동 일대 북촌 거주 인구는 5년 전인 2018년에 비해 27.6% 줄어들었습니다. 종로구는 지난 7월 1일 북촌한옥마을 일대를 관광진흥법상 '특별관리지역'으로 지정했습니다. 전국 최초 사례입니다. 관광진흥법 48조에 따르면 자연환경이 훼손되거나 주민의 평온한 생활환경을 해칠 우려가 있어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는 지역을 특별관리지역으로 지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관광진흥법은 관광업 진흥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별도의 규제는 없습니다. 야간 시간대 관광객 통행금지나 전세버스 통행 제한 정도가 거주민 보호를 위해 종로구가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조치입니다. 북촌한옥마을에 지금 일어나는 일은 '오버투어리즘'의 문제를 잘 보여줍니다. 오버투어리즘(Overtourism)은 '과잉 관광', 즉 수용 가능한 범위를 넘어서는 수준으로 관광객이 몰리면서 주민들의 삶을 침범하는 현상을 뜻합니다. 뛰어난 자연경관, 역사적 명소뿐 아니라 실제 주민들이 거주하는 일상의 명소가 인기를 끌면서 관광업은 부흥하지만, 주민들의 생활은 오히려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겁니다. 한 걸음 더 연평균 3천2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는 지난 7월 도심 곳곳에서 150개 단체 3천여 명이 참여한 오버투어리즘 반대 집회가 열렸습니다. 일부 시위대는 관광객들에게 물총으로 쏘기도 했고 '관광객은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는 환영받지 못한다', '주민들이 쫓겨난다' 같은 구호를 외치며 일부 호텔과 식당 테라스를 봉쇄했습니다. 오버투어리즘 문제가 제기되자 바르셀로나 시의회는 방문객에게 부과하는 관광세를 인상하기로 했습니다. 주택들이 대거 관광용 숙소로 전환되면서 주민들이 주거난을 겪고 있다는 주장도 나왔는데요, 실제로 바르셀로나의 주택 임대료는 지난 10년 동안 68%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에 따라 바르셀로나 시장은 5년 안에 에어비앤비 등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단기 임대를 없애겠다고 했고, 시의회도 약 1만 개의 관광 숙박 허가를 철회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연간 3천만 명 이상이 찾는 이탈리아의 베니스 역시 오버투어리즘으로 몸살을 앓아온 곳인데요, 주민들은 떠나고 관광업 종사자들과 관광객들만 남은 '테마파크'가 되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죠. 이에 따라 베니스는 오버투어리즘을 막겠다며 지난 4월 세계 최초로 '도시 입장세'를 도입했습니다. 당일치기 여행객은 하루 5유로를 내야 하는데요, 내년부터는 입장세가 10유로로 오를 예정입니다. 하지만 일부 주민들은 이 정도로 과잉 관광을 방지하기는 어렵다며, 이보다는 에어비앤비 규제 등이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 부산의 감천문화마을 역시 오버투어리즘 사례로 자주 거론되는 지역입니다. 오랫동안 낙후 지역이었던 감천문화마을은 2009년 '마을 미술 프로젝트' 등 약 10년간 다양한 도시재생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관광지로 떠오른 곳입니다. 지난해 기준 276만 명이 방문하고 이 중 60%가 외국인 관광객이었습니다. 올해는 8월 중순까지 약 185만 명이 방문한, 부산 대표 관광지 중 한 곳입니다. 감천문화마을은 성수기에는 하루 평균 7천여 명, 비성수기에도 5천여 명의 관광객이 찾는 것으로 집계됐는데요, 2020년 국토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감천문화마을의 하루 수용 적정 관광객 수는 2천601명입니다. 수용 가능 인원을 넘어서는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주민들의 사생활 침해, 쓰레기와 소음, 악취, 교통 불편, 화재 위험 등의 문제가 제기되어 왔습니다. 감천문화마을은 도시재생 추진 때 만들어진 주민협의체가 주민과 관광 산업의 상생을 위해 노력한 곳으로도 주목받아 왔습니다. 주민협의체가 설립한 마을 사업장에는 지역 주민들을 채용했고, 마을 사업장 수익금으로 주민들에게 식료품과 종량제 봉투 등을 제공하고 무료 마을 빨래방을 운영했습니다. 관광 수익이 늘어나는 만큼 주민들도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겁니다. 관할 지자체인 부산 사하구는 최근 지역 주민과 관광 산업의 상생을 위한 재원을 마련해, 주민들과 청년을 문화해설사로 채용하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밝혔습니다. 또 주요 통행로를 확대해 주민들의 불편을 해소하고, 감천문화마을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천마마을을 새로운 관광지로 연계 개발해 관광객을 분산하겠다는 계획입니다. 북촌한옥마을의 관광객 야간 통행 제한과 과태료 부과는 관광에 대한 '규제'로서 사실상 국내 최초의 사례입니다. 오버투어리즘은 이번 조치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겁니다. 마을 주민인지 상인인지, 각자 처지에 따라 다른 의견이 나오고 있는데요, 북촌한옥마을의 주거 환경이 악화되면 관광 자원으로서의 가치 역시 떨어지게 됩니다. 주민들의 생활 보호와 관광업 진흥 그 사이 어디에선가 '상생의 균형점'을 찾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진 : 연합뉴스, 게티이미지
김수현 SBS 문화예술전문기자가 전해드리는 문화예술과 사람 이야기.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게 10월 10일이었으니 시일이 꽤 지났는데, 아직도 처음 소식 접했을 때의 흥분과 벅찬 감동이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관련 기사들이 지금도 계속 나오고 있고, 저도 이 코너에 <한강의 수상이 통쾌했던 이유... '노벨상 시즌'의 헛고생을 떠올리다>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습니다만, 또다시 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문학 번역 지원 사업을 민간에서는 교보생명이 설립한 대산문화재단이, 공공에서는 한국문학번역원이 진행하고 있는데요, 지난 5월 임기를 마친 곽효환 전 한국문학번역원장을 골라듣는뉴스룸 커튼콜에 초대했습니다. 그는 시집을 여러 권 낸 시인이기도 한데요, 한국문학번역원 이전에는 1992년부터 대산문화재단에서 번역 지원 업무를 해왔습니다. 한국 문학 번역의 역사와 현재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죠. 저는 그가 대산문화재단에 재직하던 201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 직후에 만나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노벨문학상 받고 안 받고가 문제가 아니다. 한국 작가들은 지금 작품을 따라 읽는 독자층이 무너진 상태에서 혼자 작품을 쓰고 있는 것'이라며,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던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번에도 흥미롭고 의미 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줬는데요, 그중 일부를 문답 형식으로 간추려 전해드립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을 예언했다? Q. 노벨문학상 수상 예상했나? '예언했다'는 얘기도 나오던데. A. 최근 1-2년 사이에 '한국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가시권에 들어와 있다'는 이야기는 많이 했다. 그게 '예언'으로 와전된 것 같다. 하지만 올해 받을 줄은 몰랐고, 한강 작가가 받을 것으로 예측하지 못했다. 한강 작가가 상을 받을 자격은 충분하지만 노벨문학상의 성격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다. 노벨문학상은 '작품상'이 아니라 '공로상' 성격이 강하고, 작가의 작품 세계 전체를 평가해 주는 상이다. 그래서 한강 작가는 아직 젊으니 좀 기다려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Q. 노벨문학상 수상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판단한 이유는? A. 한국 문학 번역이 이제 1년에 200종 이상이 됐다. 이 200종은 '공급자'가 고르는 게 아니라, 수요자, 그러니까 해외 문학 출판사와 독자가 원해서 번역된 것이다. 시장이 그렇게 바뀌었다. 초창기에는 '공급자'인 우리 쪽에서 해외에 소개하고 싶은 작품을 정하고 번역가를 모집해 번역을 했다. 번역이 끝나면 그 원고를 들고 보따리 장사처럼, 책을 출판해 줄 외국 출판사를 찾아다녔다. 잘 안 될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 제도를 바꿔서 외국 출판사도 작품 선택권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처음에는 미미했는데 2020년 이후부터는 외국 출판사가 한국 작가나 한국 출판사와 원하는 작품의 저작권 계약을 하고 선인세를 주고, 그 계약서를 갖고 번역원에 번역 지원 신청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 문학 번역이 2020년에 100종 정도였는데, 단기간에 급속히 늘었다. 뉴욕타임스라든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 이런 각국의 유명한 매체에서 한국 작가들의 작품 리뷰가 나오는 경우도 굉장히 늘었다. 특히 2016년 한강 작가가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은 이후부터 매년 한국 작가들이 해외 여러 문학상 후보로 올라간다. 적어도 한 해에 2-3개, 많을 때는 7-8개의 문학상을 받는다. 이런 변화가 정말 놀랍다. 노벨문학상 수상도 압축 성장으로 이뤘다? Q. 한국 문학 위상이 전반적으로 높아졌는데, 그중에서도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결정적 이유는? A. 아무래도 부커상 받은 게 컸다. 한강 작가가 해외 무대에 소개되기 시작한 게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2010년 <채식주의자>가 베트남에서 번역 출판되었는데 파급 효과가 크지는 않았고, 2015년에 영국에서 영문판이 나왔다. 대산문화재단에서 당시 영국 출판사에 번역 출판을 지원했다. 그 이듬해 바로 <채식주의자>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았다. 영어권에 처음 소개된 그 작품이 상을 받은 것이다. <채식주의자>는 일반 독자가 읽기에 쉬운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서구의 전문 독자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놀라운 작품이다. 채식을 선언한 이 여성은 스스로 자기가 나무가 되어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 여성은 채식을 선언하면서 아버지로부터 남편으로부터 굉장히 폭력을 당한다. 가부장적 질서라든지 한국 사회의 완강한 유교적 질서를 이야기하면서, 희생자가 된 개인의 수난, 고통을 아주 탁월하게 보여준다. 당시에는 채식이 한국 독자들에게 좀 낯선 것이었지만, 유럽 독자들에게는 낯익은 소재이고, 그게 한국의 여성, 유교적 질서 이런 것들과 맞물리면서 아주 매력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채식주의자> 이후 해외 독자들이) 한강 작가의 다음 작품을 주목해서 봤을 텐데,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가 나왔다. 앞의 작품(채식주의자)가 개인으로서의 희생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뒤의 두 작품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제주 4.3과 연관되어, 거대한 권력이 빚어낸 참극 속에서 한 개인이 겪게 되는 고통, 비극을 그려낸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소년이 온다>가 탁월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서구 독자들, 혹은 세계 문학의 중심축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작품들이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준 것 같다. 그러니까 한 번에 된 건 아니지만 이런 작품의 단계들이 굉장히 효과적으로 묶였던 것 같다. 서점에 진열된 한강 작가의 책들 Q. 노벨문학상도 압축 성장? A. 한강 작가의 작품이 총 28개 언어 82건 번역 출판되었다. 일본과 비교하자면, 일본에서 가장 최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게 1994년 오에 겐자부로 선생이었다. 겐자부로 선생이 노벨상 받기 전까지 17개 나라 79종이 번역 출판되었다. 번역된 숫자가 겐자부로 선생과 비슷하다. 그런데 한강 작가 작품은 2010년부터 따지면 14년 정도, 그것도 실제로는 <채식주의자> 영문판이 주목받은 2015년 이후 대부분 번역되었다. 그러니까 짧은 기간 '선택과 집중의 승리'라고도 볼 수 있다. 일본 노벨상 수상 후 번역 지원 시작...해외 관심은 1990년대부터 Q. 한국 문학 번역의 역사는? A. 한국 문학 번역은 18세기에 시작되었다. 18세기 말에 미국에서 영어로 된 한국 민담집이 나왔다. 또 후에 김옥균을 암살한 홍종우가 프랑스에 있으면서 1892년쯤에 <춘향전>, <심청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초창기에는 주로 선교사들이나 한국에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 한국 고전을 많이 번역했다. 우리가 번역 출판을 정책적으로 지원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1968년에 한국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이 하나 생겼다. 바로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노벨문학상을 탄 것이다. 인도 타고르에 이어 두 번째로 아시아에서 받은 건데, 인도만 해도 우리한테는 멀게 느껴지지만, 일본은 다르다. 왜 우리는 노벨문학상 못 타냐,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그래서 1974년 지금 예술위원회 전신인 문예진흥원에서 번역 출판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6년 후 황순원의 <별>이라는 단편집이 영국도 미국도 아니고 홍콩에서 나왔다. 시작은 그랬다. 그렇게 투자하는 기간이었고, 그러다가 한국 문학이 해외에서 처음 주목받은 건 1990년대 프랑스에서였다. 영어권에서는 2010년대 이후였다. Q. 프랑스에서 처음 한국 문학이 관심을 받은 이유는? A. 한국 문학 번역의 흐름을 봐야 한다. 198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는 외국 문학을 전공한 한국인들이 주로 번역을 했다. 1세대 번역가들이다. 이들의 노력으로 한국 문학의 존재를 어느 정도 알리기는 했지만 예술 텍스트로 전달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1990년대 대산문화재단을 설립하면서 실무 책임을 맡았는데, 파격적으로 번역비를 인상하면서 '공동 번역' 제안을 했다. 외국어에 밝은 한국인과 한국어·한국 문화에 밝은 외국인이 팀을 이뤄서 번역하는 것이다. 2세대 번역가의 출범이고, 한국 문학이 비로소 예술 텍스트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이때 이청준, 이문열 작품들을 프랑스에 소개한 탁월한 공동 번역자들이 나온 것이다. 소설가 최윤은 본명이 최현무로 유명한 번역가이기도 하다. 최현무 선생이 프랑스 사람인 부군과 같이 이문열, 이청준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해서 주목받았다. 오정희, 최인훈도 소개됐다. 2000년대 초반에는 최미경-장 노엘 쥬떼라는 새로운 번역팀이 등장해 이승우와 황석영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당시 스위스에 출장 갔더니 한 출판사 편집인이 '이승우 읽었는데 좋더라' 해서 우쭐했던 기억이 난다. 이건 번역의 승리다. 그다음, 2010년대 들어서 3세대 번역가가 등장한다. 3세대 번역가를 '원어민 번역가'라고 하는데, 국적이나 인종 상관없이 '도착어'인 영어 표현 능력이 아주 뛰어나고, '출발어'인 한국어에 대한 이해도 뛰어난 번역가들이다. 3세대 번역가 맨 앞에 있는 사람이 2012년에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를 영어로 번역한 김지영이다. 김지영이 번역한 <엄마를 부탁해>는 미국의 아주 큰 상업 출판사인 크노프 출판사에서 나왔고, 뉴욕타임스에도 베스트셀러로 소개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신경숙 작가가 그 이듬해 지금은 없어진 맨부커 아시아상을 받았다. 3세대 번역가의 등장과 함께, 가장 영향력 크고 독자가 많은 영어권에서 2010년대 초,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한국문학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3세대 번역가로 김지영뿐 아니라 허정범(안톤 허), 데보라 스미스, 김소라, 이런 번역가들이 등장했다. 번역가의 진화가 한국 문학 세계화와 아주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은 한강 작가(오른쪽). 나란히 선 데보라 스미스가 번역을 맡았다. 3세대 번역가들, 한국 문학 세계화에 큰 힘 Q. 한국인은 한강 작가의 작품을 '원어'로 읽을 수 있지만, 외국 독자들은 번역을 거쳐 읽는다. 뛰어난 번역가의 역할이 정말 중요할 것 같다. A. 신문에 AI 번역과 전문 번역가의 번역을 비교하는 기사도 실렸던데, AI 번역은 기본적인 속성이 다르다. AI 번역은 정확성과 표준성을 강조하지만, 예술 텍스트가 지향하는 건 독창성과 유일성이다. 근본적으로 AI가 할 수 없고, 사람이 할 수 있는 번역이다. 그래서 뛰어난 번역가들이 있는 게 정말 중요하다. 예술 텍스트 중에 문학은 독특한 특성이 있다. '문학은 한 집단 혹은 한 시대의 삶과 정신의 지형도'라는 말이 있다. 러시아 문학이나 프랑스 문학을 읽으면, 당시의 프랑스 사회, 러시아 시대를 이해하게 된다. 가장 평등하면서도 가장 온전하게 예술, 정신문화의 세계를 그대로 옮겨갈 수 있는 게 문학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번역이 따른다. 근대화 과정을 겪으면서 문화의 주도권을 서구 사회가 가져갔기 때문에, 서구 사회로부터 문화적 근친성이 멀수록 불리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중국 소설이나 일본 소설을 읽으면 금방 이해가 된다. 문화적 근친성이 있어서다. 그런데 러시아 소설을 읽으면 끝날 때쯤 되어야 주인공 이름이 익숙해진다. 주변국이고 근대화 후발국일수록 번역이 어렵다. 그만큼 많은 거리를 뛰어넘어야 하니까. 그러니까 정책적 지원 30-40년 만에 그 벽을 뛰어넘었다는 게 굉장히 놀라운 일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후에 '한강 작가의 수상이고, 그다음에 한국 문학과 번역의 수상이고, 그다음에 한국 문화예술의 수상이다'라는 글을 썼었는데, 그만큼 번역이 중요하다. 한국 문학 수요 늘어나는데... 번역가 절대 부족 Q. 앞으로 한국 문학 수요가 더 늘어날 것 같은데, 번역 인력은 충분한가? A. 가장 큰 문제가, 수요는 늘어나는데 번역자가 없는 것이다. 해외 출판사에서는 보통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수준이 되면 선인세 2만 달러, 그러니까 책 찍기도 전에 무조건 2만 달러를 계약금으로 준다. 굉장히 큰 돈인데 선인세 2만 달러 받는 한국 작가가 10명이 넘는다. 한국 작가들이 인기 있고 수요가 많다는 얘기다. 아까 1년에 200종 이상 나온다고 했지만, 번역 출판 지원 신청은 300건 이상 된다. 그런데 신뢰할 수 있는 번역가가 손에 꼽을 수준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한국 문학이 세계 문학의 일원으로서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 첫 번째는 번역 출판의 지속적인 지원, 두 번째는 미래를 준비하는 것, 바로 번역가를 양성하는 것이다. Q. 한국문학번역원에 번역가 양성하는 아카데미가 있는데, 어떻게 운영되나? A. 번역 아카데미에서는 영어, 불어, 독일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 이렇게 사용자가 많은 7개 언어를 대상으로 한다. 한 해에 한 언어당 6명에서 8명 정도씩 학생을 받는다. 80% 정도가 해외에서 한국학과를 마치고 온 외국 학생들이고, 한국인은 20% 정도다. 그런데 한국문학번역원장으로 부임해서 번역 아카데미 졸업생이 지금 뭐 하고 있나 전수조사를 했더니, 절반이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사실 번역 아카데미 입학생들은 해외 한국학과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들인데, 이 학생들이 번역 아카데미에서 2년간 공부해도 갈 곳이 없다. 그러니까 파트타임으로 번역 일을 하거나, 다시 다른 대학원을 간다든지 이런 식이다. 이건 낭비다. 그래서 번역 아카데미를 번역대학원 대학교로 바꾸자는 제안을 했었다. 번역대학원으로 바꾸고 학위를 주면, 한국인이 외국 유학 마치고 대부분 귀국하는 것처럼, 그 사람들도 번역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서 교수가 되거나 문화계 종사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한국 문학 갖고 얘기하게 될 거다. 민간에 한류 포스트가 생기는 거다. 이대, 외대도 통번역대학원이 있는데, 뭐 하러 정부까지 번역대학원을 만드냐는 얘기가 나왔는데, 현재 통번역대학원은 한국인 학생들이 대부분이고 번역은 거의 가르치지 않는다. 원어민 번역가를 양성하는 번역대학원과는 완전히 다르다. 번역대학원은 한국문학번역원장 재임 시 법안 발의해서 국회 상임위원회 토론까지 시작했지만 정치적 상황 속에 더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폐기됐다.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세계 문학으로서의 한국 문학'이다! Q. 논문을 통해 한국 문학 발전 단계를 세 단계로 구분했는데? A. 1단계는 한국 문학의 해외 소개다. 아무도 모르니까 자기 소개하는 거다. 저는 누굽니다, 하고. 1980년대, 90년대 초까지 그랬다. 2단계가 한국 문학 세계화 단계다. 세계 독자들에게 한국 문학을 알리겠다는 것. 1단계, 2단계는 다 전제가 있다. 내가 주변에 있다는 것, 그러니까 중심에서 나를 좀 봐 달라, 나는 중심으로 가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문학번역원장에 취임하면서 말을 바꿨다. '세계 문학으로서의 한국 문학'으로 가야 한다. 이건 내가 100% 만든 말이다. 개념이 뭐냐 하면, 우리가 보통 세계 문학, 하면 맨 앞에 뭘 떠올리게 되나? 그리스 로마 신화, 셰익스피어, 이런 거 떠오르지 않나? 그다음에 프랑스 가면 폴 발레리, 빅토르 위고, 독일은 괴테, 러시아는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미국은 헤밍웨이, 그다음 남미에 가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에서 끝난다. 그다음 (문학에) 아주 밝은 사람한테 물어보면 오에 겐자부로. 여기까지 얘기하면 한국 문학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세계 문학 지형도를 그리려면 한국 작가들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고, 세계인들이 문학 작품을 읽을 때 한국 문학 작품을 읽어야 전체적으로 읽었다고 느낄 수 있는 단계, 이게 내가 말하는 3단계, 세계 문학으로서의 한국 문학이다. 한국 문학에 대한 시선이 전과는 달라진 게 행복하다. 한강 말고도 황석영, 이승우, 최근에 등장한 천명관, 정보라, 김연수 등등, 노벨문학상 후보에 근접했거나, 미래 세계 문학이 될 수 있는 한국 문학 작가들이 많아졌다. "제비 한 마리가 아니라 봄을 부르러 간다" Q. 지금 거론한 작가들은 국내만이 아니라 해외 문학계에서도 그렇게 보고 있나? A. 한국 문학이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초반, 고은 시인이 처음 거론됐고 이후에 이승우, 황석영, 김혜순 이런 작가들이 같이 거론됐다. 한강 작가가 수상한 건 정말 기쁜 일인데, 황석영이나 김혜순, 이승우 같은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한국 문학의 층위가 두터워졌다. 번역원장 처음 취임할 때 이렇게 얘기했다. "저는 제비 한 마리를 부르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제비 한 마리가 아니라 봄을 부르러 갑니다." Q. 시적이다. 시인다운 표현이다. A. '제비 한 마리'는 노벨문학상이다. 예를 들면 나지브 마흐푸즈가 노벨상을 받았다고, 이집트 문학이 세계 문학인가? 데릭 월코트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세인트 루시아 문학이 세계 문학인가? (세인트 루시아는 영어를 사용하는 서인도제도연방 10개국 중 하나. 데릭 월코트의 시도 영어로 쓰였다.) 그러니까 '제비 한 마리'가 아니라, 봄을 부르면 제비도 오고 꽃도 피고 강물도 흐르고 숲이 우거진다. 그 '봄'을 만들면 노벨문학상은 저절로 따라온다고 한 거다. Q. 노벨문학상 후보로 2000년대 초반부터 한국 작가들이 거론됐다고 했는데, 노벨문학상 시상하는 스웨덴 한림원에서 후보를 공개하지는 않는다. 어떻게 이 작가가 후보라는 걸 알 수 있나? A. 한림원 관계자가 아니라서 정확하게 얘기는 못 하지만, 말들이 흘러나온다. 그래서 도박 사이트가 있는 거고. 실제로 도박 사이트에서 수상 확률 높다고 한 작가들이 상을 받은 경우도 많다. Q. 오래전에 취재한 적 있는데, 영국 도박 사이트 운영하는 회사에 노벨문학상 담당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은 노벨문학상 관련 정보를 계속 따라가며 공부한다고 들었다. A. 이번에는 못 맞춘 거 보니까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나 보다. (웃음) 이번 노벨문학상을 아시아에서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는 좀 나왔다. 노벨문학상이라는 게 여러 가지 요소들을 고려하는 건 맞다. 후보 추천 과정도 마찬가지고. '쪽집게' 같았던 겐자부로의 예언, 어떻게 나왔나 Q. 노벨문학상 후보 추천은 누가 하나? A. 첫 번째로, 전 세계 어느 나라든 펜 클럽이 있는 나라는 다 추천할 수 있다. 그건 누구나 하는 거다. 그래서 사실 펜 클럽에서 추천해서 노벨문학상 후보라는 건 그냥 수백 명 중에 하나인 거다. 그 외에 노벨문학상 수상자들도 추천할 수 있고, 한림원 측에서 후보 추천해달라고 의뢰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겐자부로의 예언'이라는 말이 있다. 2005년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 선생이 대산문화재단에서 개최한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왔다. 그때 오셔서 뭐라 그랬냐면, 이 자리에 이미 노벨상을 받아야 될 1명의 작가와 앞으로 받게 될 3명의 작가가 있다고 그랬다. '이미 받아야 할 한 명의 작가'는 르 클레지오였고, 앞으로 받게 될 3명의 작가는 오르한 파묵, 모옌, 그리고 황석영이었다. 그런데 황석영만 못 받고 다 받은 셈이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겐자부로 선생이 괜히 그런 얘기를 한 게 아니었다. 오에 겐자부로 선생 댁에 2008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겐자부로 선생이 자기도 노벨문학상 후보를 추천하는데, 가까운 사람들하고 상의해서 추천한다 했다. 겐자부로 선생이 '나 요즘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일본 문학에서 오에 겐자부로는 정통 문학, 무라카미 하루키는 대중 문학으로 대척점에 있었는데, 겐자부로 선생이 하루키를 읽는다고 하는 거다. 겐자부로 선생이 '서점에 내 책은 없어도 하루키 책은 있다. 하루키 읽어보니 좋더라'고 하시더라. 그런데 정말 1~2년 후부터 하루키가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후보 추천하는 사람들도 있고,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 과정들이 토론하면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것 아닌가, 또 과거에 후보로 거론됐던 사람, 이런 것들이 종합되면 후보가 누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후보로 거론됐던 사람들이 꽤 있었다. 이번에 한강 작가 수상에 대해서 재미있는 분석도 나오는데, 아시아 작가가 받을 타이밍이었고, 여성이 받을 차례였다는 거다. 최근 노벨문학상을 보면 한 해는 남성, 한 해는 여성, 이렇게 번갈아 주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 올해는 아시아 여성 작가, 그렇다면 중국의 찬쉐, 한국의 한강과 김혜순. 그렇게 보면 한국 작가 수상 확률이 3분의 2나 됐던 셈이다. 또 한 가지는, 일본은 이미 노벨문학상 작가가 둘 나왔고, 중국은, 중국에선 부인하지만 가오싱젠이 받았고, 다음에 모옌이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전 세계적으로 문화의 중심에 서 있는 한국을 그냥 지나가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이렇게 분석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나중에 끼워 맞춘 얘기이지만 그럴싸한 추론이긴 하다. 그만큼 세계 속에 한국 문화의 전반적 위상이 높아진 게 기여한 바도 있을 것 같다. 소잉카 "내 소설은 두통거리"... 한강도 그렇다 Q. 그래도 가장 중요한 간 한강 작가 작품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A. 맞다. 한강 작가의 작품들은 서구에서 기존의 한국 문학을 접했던 독자들에게도 굉장히 신선했을 것이다. 한림원이 한강 작품에 대해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생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얘기하지 않았나. 이건 기존의 한국 문학 문법에 별로 없는 것이다. 김명인 평론가가 한국 문학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황석영이라든지 기존의 남성 서사 중심 작가들은 예측 가능한 얘기를 한다. 그리고 작가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풀어나가서 독자들은 잘 모르지만 작가는 결론을 알고 있다. 그런데 한강은 계속 질문한다. 자기도 잘 모르는 것들을 계속 질문한다." 한강 작가의 소설은 만만치 않다. 쉽게 안 읽힌다. Q. 정말 그렇다. 한강 작가의 작품은 계속 생각하게 만든다. A. 아프리카에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월레 소잉카라는 나이지리아 작가가 있다. 소잉카가 이런 말을 했다. "내 소설은 치료약이 아니라 두통거리다. 왜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지, 왜 이것밖에 안 되는지 아주 고통스럽게 질문하는 두통거리다." 한강 작가의 작품은 소잉카가 말한 쪽에 가깝다. 아마 이런 면들도 굉장히 새롭고 신선하게 느꼈을 것이다. 노벨문학상 열망 가장 뜨겁지만 가장 책 안 읽어 Q. 2012년 처음 만났을 때 '좋은 작품을 따라서 읽어줄 독자층이 무너진 상태에서 한국 작가들이 혼자 작품을 쓰고 있다'고 한 얘기가 인상적이었다. 당시 독서량 통계를 보니 한 달에 0.8권 정도로 굉장히 적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때는 많이 읽었던 거였다. A. 가장 최근의 국민 독서 실태 조사를 보면 종이책 기준으로 우리나라 성인들이 1년에 책 1.7권 읽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노벨문학상 받았다고 환호하는 것도 좋지만, 그러지 말고 한국 문학을 좀 읽어달라. 몇 년 전부터 '한국 사람들이 노벨문학상에 대한 열망이 전 세계에서 가장 뜨겁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가장 안 읽는 사람들이다'라고 얘기하곤 했다. 한국문학번역원장으로 부임해서 해외에서 출판된 한국 문학 작품 판매량 전수조사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이미 한강 작가의 작품이 전 세계에서 16만 부 이상 팔렸다. <82년생 김지영>은 30만 부 이상 팔렸다. 그러니까 해외에서 한국 문학 독자는 계속 늘어나고 베스트셀러에도 오르는데, 정작 한국 독자들은 줄어든다. 세상에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나. 이번에도 한강 작가 수상 이후에 베스트셀러 랭킹 1위에서 10위까지가 다 한강 작품인데, 반가운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스럽다. 이 열풍이 지나가고 도로 제자리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경우라도 독자가 없는 문학은 있을 수 없다. 작가는 끊임없이 독자를 의식하고 독자와 소통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기반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한국 문학의 미래를 만들 수 없다. 문학 작품은 삶과 정신의 지형도라고 하지 않나. 문학을 통해 시대를 이해하고 정신세계를 받아들이는 건데, 우리 사회가 너무 즉물적이고 가벼워지는 것이 안타깝다. 그래서 노벨문학상 수상이 한바탕 떠드는 잔치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우리 문학을 다시 생각하고 문학이 더 풍요로워지고, 문학 토양이 건실해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Q. 2012년 당시엔 노벨문학상은 정말 먼 얘기로 느껴졌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났는데 이렇게 노벨문학상을 탈 수 있게 된 것은 한국 독자와는 상관이 없었다는 얘기다. 달라진 건 이전보다 좋은 번역가가 많아졌다는 사실인가. A. 아까 말씀드린 대로 번역의 힘이다. 그리고 그 뒤에 한국문학번역원과 대산문화재단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좋은 정책과 인내심, 일관성이다. 이게 없으면 문학뿐 아니라 문화예술에 대한 그 어떤 지원도 제대로 할 수 없다. 우리는 너무나 조급하고 자꾸 정책을 바꾼다. 전문가에게 맡겼으면 자꾸 바꾸지 말고 지속적으로 지원해 줘야 한다. 예산 지원과 관련 인력 처우 개선 시급하다 Q. 문체부에서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한국 문학 번역 출판 예산을 전년 대비 몇 퍼센트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이 예산이 이미 많이 줄어 있던 상황이라고 하던데. A. 문학 출판 분야 예산을 말씀드리자면, 2022년이 정점이었다. 그게 2023년으로 넘어오면서 20% 정도 깎였다. 한국문학번역원 예산은 그나마 14% 정도 깎여 나은 편이었다. 2024년 들어오면서 과거 수준으로 되돌려놓겠다 했는데, 좀 늘기는 했지만 그래도 2022년보다는 적다. 그러니까 사실 수치는 퇴행인 거고, 중요한 건 늘렸다고 말하는데 총액에서 줄었다. 번역 출판 예산은 늘었는데 번역가 양성 예산은 반으로 줄었다. 아랫돌 빼서 윗돌 끼우는 식이다.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을 파격적으로 늘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국격이다. 문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다루느냐가 신문이나 잡지 같은 매체들의 퀄리티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문화예술 역량이 한 국가의 국격을 결정한다고 본다. 우리도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콤플렉스를 벗고, 한국 문학이 세계 문학 일원이 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해야 한다. 덧붙여 하고 싶은 얘기는 한국문학번역원 직원들의 처우 문제다. 임금 수준이 문체부 산하 공공기관 중에 가장 낮다. 평직원들 기준으로는 최저임금 조금 넘는 수준이다. 직원들 대부분이 대학에서 어문학 전공하면서 최상위권에 있던 분들인데, 꿈을 갖고 번역원에 왔다가 처우가 너무 열악하니까 이직률이 가장 높은 기관이 됐다. 큰 보상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생활은 할 수 있도록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 Q. 번역가들의 상황은 어떤가? A. 번역가들도 어렵다. 작품 하나 번역하면 보통 1,500만 원 정도 번역비를 받는다. 그런데 생계를 유지하려면 최소한 1년에 2, 3권은 번역해야 한다. 그런데 그 정도 번역하기가 쉬운 일인가. 그러니까 실력 있는 사람들이 자꾸 통역으로 빠지려고 한다. 곽효환 전 원장은 노벨문학상은 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관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문학이 세계 문학으로서 위상을 갖기 위해 통과해야 할 관문이었다는 거죠. 그는 또 노벨문학상은 '제비 한 마리'이지 봄 자체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제비 한 마리'가 진정 봄의 전령사이기를, 꽃 피고 새들 지저귀고 신록이 푸르른 '한국 문학의 봄'이 세계 속에 펼쳐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한국 문학의 봄'을 위해서는 번역가를 양성하고, 번역 지원 사업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고, 출판 산업을 지원하는 등 정책적인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하지만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거창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책을 읽는 건 아니죠. 우리는 일상 속에 책을 읽으면서 위안을 얻고, 나를 돌아보고,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나아가 우리 사회를 성찰하고 보다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그저 우리의 삶이 문학과 더 가까워지고, 책을 읽으면서 더 많은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는 잔치도, 기자회견도 열지 않았던 한강 작가도 이렇게 말했잖아요. '저는 제가 쓰는 글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는 사람이니,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써가면서 책 속에서 독자들을 만나고 싶다'고요. *1시간 넘게 나눈 얘기를 요약했기에 다 쓰지 못한 얘기가 많습니다. 골라듣는뉴스룸 커튼콜 영상이나 팟캐스트로 더 자세히 들어보셔도 좋겠습니다.
이슈는 스프링이다! 스프링처럼 통통 튀는 이슈를 핵심만 골라 정리해드립니다. 지난달 오스트리아 총선에서 1위를 차지한 극우 자유당이 정부 구성에 참여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다른 주요 정당들이 모두 자유당과 협력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오스트리아 자유당은 1950년대 나치 독일에 부역했던 인사들이 설립한 극우 정당입니다. 현지시간 지난 3일 오스트리아 빈 대학 앞에서 열린 극우 반대 시위 무슨 상황인데? 로이터 통신은 오스트리아 차기 정부 구성을 감독하는 알렉산더 판데어벨렌 대통령이 총선 1위 자유당이 아니라, 2위를 기록한 보수 국민당의 칼 네함머 총리에게 연정 구성 임무를 맡긴다고 보도했습니다. 판데어벨렌 대통령은 총선 1-3위 정당 대표들과 회담을 갖고 나서, 헤르베르트 키클 자유당 대표가 총리가 될 수 있는 연정 파트너를 찾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분명하다고 밝혔습니다. 나치 계열의 극우 정당인 자유당은 지난달 29일 치러진 오스트리아 총선에서 29.2%를 득표해 1위에 올랐습니다. 네함머 총리가 이끄는 중도 보수 성향의 국민당은 26.5%로 2위에 올랐고, 중도 좌파 성향의 사회민주당이 21%로 3위를 기록했습니다. 자유당은 2차 세계대전 이래 처음으로 오스트리아 총선에서 승리했지만, 과반 의석 확보에는 실패해 연정을 위한 파트너가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총선 2위 국민당을 비롯한 대부분의 정당들이 자유당과 협력을 거부하거나, 키클 대표를 총리로 임명하는 것에 반대해, 자유당의 정부 구성은 쉽지 않을 거라는 전망이 나왔습니다. 이런 가운데 판데어벨렌 대통령이 네함머 총리에게 자유당을 배제하고 총선 3위를 차지한 사회민주당과 연정 협상을 진행할 것으로 요구한 것입니다. 칼 네함머 오스트리아 총리 좀 더 설명하면 판데어벨렌 대통령은 자유당을 배제한 결정에 대해, 총선 2, 3위 정당들이 모두 키클 대표와 협력하기를 거부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총선은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정당이 자동으로 정부를 구성하게 되는 경주가 아니다. 만약 한 정당이 혼자서 통치를 하고 싶다면 (득표율) 50%의 허들을 넘어야 한다. 10, 20% 혹은 30%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현재 국민당과 사회민주당이 확보한 의석수로는 과반을 1석 차로 겨우 넘기는 정도입니다. 따라서 두 당이 안정적인 연정을 구성할 수 있을지 여부는 불확실합니다. 양당 간의 적지 않은 이념 차이를 극복하는 것도 과제입니다. 이런 우려에 대해, 네함머 총리는 제3의 파트너를 물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네함머 총리는 총선 직후에는 자유당과 연대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지만, 극단적인 친러시아, 반이민 정책을 주장하는 키클 대표의 총리 임명은 반대하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었습니다. 하지만 네함머 총리는 현지시간 22일 의회 연설에서 '안정적인 의회 과반을 확보하기 위해 제3의 파트너가 필요하다'면서, '평상시와 같은 상황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는 네함머 총리가 현재 연정을 구성하고 있는 녹색당 대신, 진보 성향의 네오스 당과 협력할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고 로이터 통신은 분석했습니다. 만약 세 정당이 연정 구성에 합의하게 된다면, 오스트리아에는 1955년 독립 이후 처음으로 세 개의 정당이 참여한 연정이 들어서게 됩니다. 연정 구성에서 배제된 자유당의 키클 대표는 '모욕적인' 결정이라고 반발했습니다. 그는 페이스북에 올린 성명을 통해 판데어벨렌 대통령이 총선 1위 정당에 정부 구성 임무를 맡기지 않음으로써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정상적인 절차'를 깨뜨렸으며, '이는 많은 이들에게 모욕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는 이어 '그러나 약속하건대 마지막 말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오늘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라면서, '연정 협상 결과를 지켜보면서 다른 소수 정당들과 접촉을 이어가겠다고 밝혔습니다. 총선 승리 후 기뻐하는 키클 자유당 대표 한 걸음 더 나치의 창시자이자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총통이던 아돌프 히틀러는 원래 오스트리아 출신입니다. 히틀러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뮌헨으로 이주해 독일군에 자원 입대했고 독일 국적을 취득했습니다. 히틀러는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합쳐야 한다고 생각했고, 오스트리아는 1938년 독일에 합병되어 나치 독일이 패망하기 전까지 독일의 일부로 존재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주민들은 독일 국민으로서 독일군에 입대해 참전했고, 상당수는 나치 당원이 되었습니다. 홀로코스트 등 전쟁 범죄에 가담한 경우도 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2차 대전 후 독일에서 분리 독립했는데요, 독일은 전범국으로 지목되었지만,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일부였으면서도 이제 다른 나라라는 이유로 별다른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독일에서는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사회적 화두가 되었지만, 오스트리아에서는 달랐습니다. 쿠르트 발트하임 오스트리아 전 대통령(1918~2007)은 2차 대전 당시 나치에 복무했을 뿐 아니라 민간인 학살에도 관여했다는 정황으로 논란에 휩싸였던 인물입니다. 발트하임은 유엔 사무총장으로 재직 후 오스트리아 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고, 선거운동 중 나치 복무 경력이 폭로되며 논란이 확산됐지만 1986년 대통령으로 당선됐습니다. 오스트리아 자유당은 1950년대 나치 잔당들이 설립한 극우 민족주의 정당입니다. 오스트리아 자유당의 전신인 '독립연맹'으로, 옛 나치 당원들과 동유럽에서 추방된 독일인들의 권익을 대변하겠다며 1949년 창설되었고, 군소 정당인 자유당과 합병해 1956년 오스트리아 자유당으로 출범했습니다. 초대 당수는 2차 대전 때 나치 친위대(SS) 여단장을 지낸 안톤 라인탈러였습니다. 오랫동안 비주류 정당이었던 자유당은 반이민 정서가 강해지기 시작한 2017년 원내 제3당으로 약진했습니다. 2021년 당권을 쥔 헤르베르트 키클 대표는 코로나 시기 정부 방역 정책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 이민자 범죄에 대한 두려움, 높은 인플레이션에 대한 분노 등을 이용해 세를 확장했고, 지난 9월 총선에서 처음으로 1위를 차지했습니다. 키클 대표는 친러 성향으로 우크라이나 지원과 러시아 제재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 정부 구성에서는 배제되더라도, 극우 정당인 자유당이 오스트리아 원내 1당으로 부상한 것은 유럽의 극우 정당 바람을 잘 보여줍니다.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오스트리아의 극우화는 유럽에 또 다른 우려'라며 '포퓰리스트 세력 급증이 가라앉을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는 신호'라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 지난해 네덜란드 총선에서 헤이르트 빌더르스가 이끄는 극우 성향 자유당이 1위를 차지했고, 그게 앞서 2022년 이탈리아 조기 총선에서는 조르자 멜로니가 이끄는 극우 정당 이탈리아형제들이 승리했습니다. 키클 대표는 지난 7월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와 안드레이 바비스 체코 긍정당 대표 등과 극우 노선 연대체인 '유럽을 위한 애국자들' 창설 계획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6월 유럽의회 선거에서도 강경 우파와 극우 정당이 차지한 의석수를 합치면 총 167석, 전체 의석의 23.2%로 2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높은 지지를 얻었습니다. 극우 정당의 약진을 예전처럼 단순히 '인종주의 때문'이라고만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입니다. 인플레이션, 코로나19 여파, 이주민 문제 등 다양한 요인이 결합되어 있다는 겁니다. 또 경제 호황기를 누리지 못하고 집권 여당에 불만을 가진 젊은이들이 민족주의와 포퓰리즘이 결합된 정책에 매력을 느끼고 표를 던진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습니다. 사진 : 연합뉴스
이슈는 스프링이다! 스프링처럼 통통 튀는 이슈를 핵심만 골라 정리해드립니다. 한강이 한국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서점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한강의 책들이 품절 사태를 빚고 있다고 합니다. 불황 속 출판계에 반가운 소식입니다. 사실 한국인들 평소에 책 많이 읽지 않습니다. 독서율과 독서량은 계속 떨어지고 있고, 성인에 비하면 그나마 책 많이 읽는 학생들도 도서관 이용이 줄고 문해력이 점점 떨어진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무슨 상황인데? 교육부는 지난해 초·중·고교생 한 명이 1년간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본 책이 17.2권이라고 발표했습니다. 10년 전의 21.9권과 비교하면 21.5%가 줄어든 수치입니다. 학생들의 도서관 대출이 감소한 것은 SNS 등에 시간을 빼앗기거나, 디지털 매체 이용이 늘고 있는 게 주요 원인으로 꼽힙니다. 과거에 비하면 학교 도서관 형편이 눈에 띄게 좋아졌는데, 오히려 이용은 줄어들어 선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지난해 학교 도서관의 학생 1인당 장서 수는 39.9권으로, 10년 전의 25.7권보다 50% 이상 늘어났습니다. 학생 1인당 학교 도서관 자료 구입비는 3만 4,407원으로 10년 전보다 66.7%, 국공립학교 사서 교사는 519명에서 1,570명으로 세 배 늘었습니다. 좀 더 설명하면 독서와 깊은 관계가 있는 문해력 저하 문제도 심각합니다. 교육부가 중3, 고2를 대상으로 매년 실시하는 국가 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에 따르면 고2 국어 과목에서 '보통 학력 이상'을 획득한 학생 비율은 2019년 77.5%에서 불과 4년 만인 지난해 52.1%로 뚝 떨어졌습니다. 중3에서는 같은 기간 82.9%에서 61.2%로 떨어졌습니다. '기초 학력 미달' 비율은 고2는 같은 기간 4%에서 8.6%로, 중3은 4.1%에서 9.1%로, 모두 두 배 이상으로 늘었습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최근 전국 초·중·고 교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학생들의 문해력 부족을 보여주는 웃지 못할 사례들이 알려졌습니다. 사건의 '시발점(始發點)'이라고 했더니 '선생님이 왜 욕하느냐'고 따져 묻거나, 두발 자유화 토론에서 '두발'이 '두 다리'인 줄 알았다고 한 학생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족보'를 '족발 보쌈 세트'로 알거나, '왕복 3회'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교육부 관계자는 학생들의 도서관 이용이 줄어든 것에는 "온라인, e북(전자책) 이용이 가능한 영향도 있을 것'이라며 "학생뿐 아니라 전 세대에서 독서량이 감소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교육부는 2028년까지 적용되는 학교 도서관 진흥 기본계획에 따라 사서 교사 정원을 확대하고 독서 교육을 강화할 계획입니다. 이주호 장관은 노벨상 수상이 독서 교육 활성화로 이어지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한 걸음 더 사실 학생들의 독서 실태는 성인에 비하면 양호한 편입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2년에 한 번 발표하는 국민 독서 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성인의 종합 독서율은 43%로 나타났습니다. 1년에 한 권이라도 책을 읽은 사람의 비율이 43%, 즉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의 비율이 57%라는 뜻이죠. 다시 말하자면 성인 10명 중 6명이 1년에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독서율은 계속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10년 전인 2013년 72.2%에서 2015년 67.4%, 2017년 62.3%, 2019년 55.7%, 2021년 47.5%, 그리고 2023년 43%로 떨어졌습니다. 10년 전에는 그래도 1년에 책 한 권도 안 읽는 사람들이 10명 중 3명 정도였는데, 10년 만에 10명 중 6명이 되었네요. 책 안 읽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난 겁니다. 책을 읽는 사람들의 연간 독서량도 크게 줄어, 2013년 9.2권에서 2023년 3.9권으로, 10년 전 독서량의 절반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치로 쪼그라들었습니다. 한 달로 따져보면 0.3권 정도이네요. (종합 독서율은 최근 1년 내 종이책, 전자책, 오디오북 중 1권 이상 읽은 비율을 뜻합니다. 이 조사는 교과서, 수험서, 잡지, 만화를 제외한 일반 도서를 대상으로 합니다. 오디오북은 2019년부터 통계에 포함됐습니다.) 독서 장애 요인으로는 일(공부)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책 이외의 매체를 이용해서, 책 읽는 습관이 들지 않아서, 등등이 꼽혔습니다. 한국인들 예나 지금이나 참 바쁘게 사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유튜브 보고 SNS 보는 시간 줄이면 책 읽을 시간을 조금이라도 낼 수 있지 않을까요. 한강은 스스로 '나는 쓰는 사람이기 전에 읽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고단한 날에도 한 문단이라도 읽고 잠들어야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했는데요(10월 11일 매일경제신문 인터뷰),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한강 소설 특수'에 그치지 않고, 책 안 읽는 한국인들의 생각과 습관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수현 SBS 문화예술전문기자가 전해드리는 문화예술과 사람 이야기. 문화부에서 근무하면서 매년 '노벨문학상 시즌'을 맞이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노벨문학상은 스웨덴 한림원이 선정해 매년 10월 둘째 주 목요일에 발표하는 게 관례인데, 스웨덴 현지에서 오전에 발표하면 한국 시각은 저녁 8시쯤이 됩니다. 8시 뉴스가 진행되는 도중 수상자가 발표되기 때문에 발표를 보고 기사를 쓰기 시작한다면 시간이 굉장히 빠듯합니다. 만약 한국인 수상자가 나온다면 큰 뉴스이니, 가능하다면 미리 여러 건의 기사를 준비해 두는 게 좋습니다. 2024년 노벨문학상의 영예는 우리나라 소설가 한강에게 돌아갔다. 사진 : 노벨상 홈페이지 캡처 고은 수상에 대비한 '헛고생'을 반복했다 2000년대 초중반부터 외신 보도 등에서 고은 시인이 후보로 거론되었고, 2005년부터 본격적인 '노벨문학상 시즌'이 시작됐습니다. 2005년은 세계 최대 도서전인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이 열리는 해였고, 한국이 주빈국이었습니다. 유럽에서 한국 문학을 조명하는 행사들이 열렸고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분위기였죠. 유력 후보로 거론되던 고은 시인 역시 해외의 시 낭송회나 작가와의 만남 행사에 많이 초청받았습니다. 한국인 첫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면서, 유력 후보로 거론된 고은의 자택 앞에 중계차까지 배치했습니다. 하지만 2005년 노벨문학상은 영국의 극작가 해롤드 핀터에게 돌아갔습니다. 기자들은 헛고생을 한 셈이죠. 당시 '고은 노벨문학상 수상 실패'라는 제목으로 속보를 내서 빈축을 산 매체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후에도 '헛고생'은 계속됐습니다. 매년 10월 초만 되면 '노벨문학상 시즌' 대비 회의가 열렸습니다. 고은이 수상할 경우, 황석영이 수상할 경우 등등 경우의 수에 맞춰 작가 소개, 작품 세계 소개, 한국 문단 큰 경사, 한국 문학 번역 현황 등등 여러 건의 관련 기사를 기자들에게 배당하고, 관련 영상을 촬영하고, 작품 세계와 관련한 전문가 인터뷰를 하고, 리포트를 미리 만들었습니다. 연례 행사 같았던 노벨문학상 시즌의 풍경 다음 해가 되면 전년도 기사를 다시 꺼내서 업데이트합니다. 기사도 손보고, 더 찍을 영상은 찍고, 인터뷰 새로 할 건 또다시 합니다. 2012년이었던가요, 문화부에서 다른 부서 갔다가 몇 년 만에 복귀해 보니, 제가 2005년에 썼던 기사들이 아직도 '면면히' 전해져 오고 있는 걸 보고 쓴웃음이 났습니다. 노벨문학상은 후보가 공개되지 않지만 어쩄든 해오던 것이니 하는 '연례 행사' 느낌이 들었지요. 고은 자택 앞 중계차 담당 역시 몇 년째 같은 기자가 배치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계속 사장되는 기사 말고 의미 있는 기사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2012년 수상자 발표 다음 날, 저는 '왜 못 타나'에 초점을 맞춘 기사를 썼습니다. ▷ 한국은 왜 노벨문학상 못 타나? (2012.10.14. SBS 8뉴스) 100명 가까운 취재진이 후보로 거론된 고은의 자택 앞에 '뻗치기'하다가 수상자가 발표되자 허탈한 표정으로 철수하는 '웃픈' 풍경이 몇 년째 반복되고 있다는 내용으로 시작한 이 기사에서, 저는 한국 문학 번역 현황이 미흡하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또 한국인의 독서량은 OECD 꼴찌 수준이고, 훌륭한 작품과 작가를 계속 배출해 낼 수 있는 토양을 갖췄다고 보기 어렵다고도 썼습니다. 한국 문학 번역 작업을 지원해 온 대산문화재단 곽효환 사무총장(후에 한국문학번역원장을 지냈습니다)은 당시 인터뷰에서 번역의 문제도 있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지금 우리는 좋은 작품을 따라 읽는 독자층이 무너진 상태에서 작가 혼자 작품을 쓰고 있는 것'이라고 신랄하게 지적했습니다. 저는 기사에서, 한국인들이 하도 순위 매기기와 경쟁에 익숙해지다 보니 노벨문학상도 무슨 국가별 대항전쯤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고, 상 자체보다 우리 문학에 더 관심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썼습니다. 2013년, 저는 다시 문화부를 떠나 다른 부서로 가면서 '노벨문학상 시즌'에서 벗어났습니다. 그 후에도 예전 기사들이 끄집어져 나왔다가 다시 서랍에 들어가는 일들이 몇 번 반복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고은과 한림원의 성추문... '헛고생'이었던 게 다행 2016년 문단의 미투 운동이 시작됐고, 2017년 말 최영미 시인이 '괴물'이라는 시를 발표하며 고은의 성추행을 폭로했습니다. 이 시는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진다'는 'En' 시인을 언급했고,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이 나라를 떠나야지/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라고 했습니다. 고은은 2018년 최영미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고, 패소했습니다. 오랫동안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됐고, 한국 문단의 중심에 있었던 고은은 이렇게 무너졌습니다. 고은이 노벨문학상을 탈 경우를 대비한 기사를 몇 년간 반복적으로 써왔던 저는, 더욱 환멸을 느꼈습니다. 기사 쓰면서 '이제 헛고생 그만하게 상 좀 받지' 생각했던 걸 떠올리니 찜찜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노벨상을 받았다면?' 생각하니 말 그대로 오싹해졌고, 제가 했던 고생이 '헛고생'이었던 게 다행이라고 안도했습니다. 2018년은 스웨덴 한림원이 성추문에 휘말려 노벨문학상 시상을 취소한 해이기도 했습니다. 미투 운동이 한창이던 2017년 11월, 여성 18명이 한림원 종신위원인 카타리나 프로텐손의 남편 장 클로드 아르노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했습니다. 아르노는 아내를 통해 한림원에 두터운 인맥을 쌓고 문화계에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었고, 한림원은 이 사건에 적극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종신위원들이 항의의 뜻으로 사퇴했고, 파문이 커지면서 노벨문학상 시상도 취소됐습니다. 한강의 수상 소식에 후련하고 통쾌했다 고은도 아르노도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타인에게 폭력을 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이후 한동안 노벨문학상에 신경을 끄고 지냈습니다. 노벨문학상 자체에 환멸이 느껴졌다고 할까요, 게다가 지금 저는 디지털뉴스부서 소속으로 문화부에 있을 때처럼 속보를 챙겨야 할 필요도 없으니, 이즈음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된다는 사실 자체도 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10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저에게 더욱 놀랍고 기쁜 소식으로 다가왔습니다. 한강은 2016년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채식주의자), 지난해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작별하지 않는다), 올해 프랑스 에밀 기메 아시아 문학상(작별하지 않는다)을 받아 세계적으로 주목받았지만,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지는 않았습니다. 회사에서 저녁에 잡힌 다른 녹화 일정을 마치고 나와 보니, 말 그대로 난리가 났더라고요. 예상하지 못했던 수상이라 당일 SBS 8뉴스에는 급히 쓴 기사 하나만 나갔습니다. 하지만 워낙 중요한 사안이라 곧 뉴스 속보까지 편성해 수상 소식을 더 자세히 전했고, 마감 뉴스인 나이트라인에서도 여러 건의 기사로 비중 있게 다뤘습니다. 그날 중요한 공연을 보러 갔던 타사의 공연 담당 기자들이 공연 도중 호출을 받고 다 회사로 복귀했다고 하니, 정말 문화부 기자들이 총동원되어야 하는 큰 뉴스인 셈입니다. 이렇게 극적으로 드디어 한국인 수상자가 나왔고, 그 주인공이 한강 작가이고, 아시아 여성 작가 최초 수상이라니, 제 속이 다 후련하고 통쾌했습니다. 제가 경험했던 노벨문학상 시즌의 찜찜했던 기억을 한 방에 날려버렸습니다. 한강은 '문학의 본령은 폭력의 반대편에 서는 것'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그는 2014년 발표한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로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2012년에 낸 '작별하지 않는다'로 제주 4.3 사건을 다루면서, 국가 폭력이 개인에게 남긴 상처를 서정적인 문체로 형상화했습니다. 한강을 처음 국제적인 작가로 만든 '채식주의자'는 어린 시절 폭력의 트라우마로 육식을 거부하며 가족과 갈등을 빚는 여성이 등장합니다. 이 여성은 가족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가부장의 폭력에 저항하며, 금식을 통해 동물성을 벗어 던지고 차라리 나무가 되기를 꿈꿉니다. 독서량은 여전히 꼴찌... 이제 책을 읽을 시간 2012년 기사에도 썼지만 한국인의 독서량은 여전히 OECD 꼴찌 수준이고, 계속 줄고 있습니다. 2023년 통계를 보면, 1년에 책 한 권도 읽지 않은 성인이 10명 중 6명이고, 연간 독서량이 3.9권에 불과합니다. 2021년의 4.5권에서 0.6권 줄어든 수치입니다. '좋은 작품을 따라 읽는 독자층이 무너진 상태에서 작가 혼자 작품을 쓰고 있다'고 했던 2012년보다 나아진 게 없습니다. 다만 K팝과 드라마 영화 등 한류 영향으로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실력 있는 번역가들이 늘면서 더 많은 한국 작가들이 해외 독자들을 만나게 된 것이 노벨문학상 수상에 긍정적인 작용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곽효환 전 한국문학번역원장은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한국 문학이 뛰어난 번역에 힘입어 최근 몇 년 사이에 놀라울 정도로 세계 무대 중심으로 진입했고 그 결과가 이번에 나왔다'고 평가했습니다. 한강의 작품은 28개 언어로 번역돼 전 세계에서 76종의 책으로 출간되어 있습니다. 한강은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기자회견을 하지 않았습니다. 부친인 한승원 작가에 따르면 '러시아,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이 치열해서 날마다 죽음들이 실려나가는데 무슨 잔치를 하고 기자회견을 하겠느냐'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도 한강 작가다운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강은 12월 10일로 예정된 시상식에서 수락 연설을 통해 자세한 소감을 전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시상식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지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앞으로도 한동안 관련 기사들이 쏟아질 것 같습니다. 상을 받아야만 문화 뉴스가 주요 뉴스가 되는 현실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요. '노벨문학상 특수'로 한강의 책이 품절 사태라는 기사도 벌써 나왔습니다. 이렇게라도 독서량 좀 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책을 읽을 시간입니다. 저부터 한강의 소설 중 읽은 건 다시 읽고, 읽지 못한 건 새롭게 읽어보려 합니다. 그동안 제가 읽었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작품들은 모두 번역을 거친 것이었죠.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을 번역 없이 '한국어 원서'로 읽는 기쁨을 생전 처음으로 누려봐야겠습니다.
이슈는 스프링이다! 스프링처럼 통통 튀는 이슈를 핵심만 골라 정리해드립니다. 기사와 직접 관련 없는 자료사진입니다. 무주택 저소득층을 위한 임대아파트에 거주하는 입주민 가운데 300명 이상이 임대아파트 자격 기준을 상회하는 고가 자동차를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1억 8천만 원 상당의 포르쉐를 보유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무슨 상황인데? 기사와 직접 관련 없는 자료사진입니다. 현재 한국토지주택공사(LH) 임대주택 입주민 가운데 311명이 입주 및 재계약 자격 기준 이상의 차량을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국회 교통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김희정 의원이 LH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서 나온 내용인데요. 고가 차량 보유자 311명 가운데 135명은 수입차를 갖고 있었습니다. 수입차 브랜드별로는 BMW가 50대로 가장 많았고, 메르세데스-벤츠 38대, 테슬라 9대, 아우디 9대, 포르쉐 5대 등이었습니다. 충북 청주시 청원구의 한 국민임대 아파트 입주민은 1억 8천만 원(인정가액 기준)에 이르는 2023년식 포르쉐 카이엔 터보를 갖고 있었고, 전북 익산시 오산면의 한 임대아파트 입주민은 1억 원 넘는 2022년식 포르쉐 카이엔을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BMW iX xDrive50(9천800만 원, 2022년식), 벤츠 S650(8천700만 원, 2018년식), 카이엔 쿠페(7천800만 원, 2022년식), 레인지로버(6천300만 원, 2021년식), 볼보 XC90(6천200만 원, 2023년식), 벤틀리 콘티넨탈 GT(4천600만 원, 2014년식) 등이 입주자들이 보유한 차량 명단에 포함돼 있습니다. 국산차 중에서는 제네시스 모델이 78대로 가장 많았습니다. 국산 전기차 브랜드 중 최대 6천만 원에 이르는 EV6 20대, 아이오닉 5 8대 등도 있었습니다. 한 걸음 더 기사와 직접 관련 없는 자료사진입니다. 임대아파트 입주민의 고가 차량 보유는 이전에도 종종 문제가 되어 왔습니다. 지난해 12월에는 한 LH 임대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주차된 고급 차량의 사진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적이 있는데, 주차장에 BMW, 포드, 캐딜락 등 고급 수입차와 제네시스 GV70 등이 주차된 모습이 공분을 샀죠. 이렇게 고가 차량을 가진 사람이 LH 임대아파트에 어떻게 살 수 있는 걸까요? LH의 임대아파트 자격 기준을 보면 세대가 보유한 모든 차량의 합산 가액이 3천708만 원(올해 기준) 이하가 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요, 입주 자격 심사를 통과해 입주한 후에 고가의 차량을 취득했거나, 다른 사람 명의로 취득한 차량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LH는 임대아파트 입주민의 고가 차량이 문제가 되자, 올해 1월 5일을 기준일로 그 이전 입주자는 차량 가액이 초과하면 1회에 한해 재계약을 허용하고, 이후 입주자는 재계약을 거절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했는데요, 이 제도에 따르면 현재 고가 차량을 보유한 입주민 중 271명은 최초 입주 연도가 지난 1월 5일 이전이어서 고가 차량을 보유하고 있어도 임대차 계약 종료 후 재계약이 가능합니다. 이 271명 중 76명은 최대 2028년까지 거주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계약 기간이 종료됐는데 불법 거주하는 입주민도 40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들 중 4명은 1년 이상 장기 거주 중인 것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 임대아파트 입주민의 고가 차량 보유는 지난 2020년 3,076대에 비하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래도 근절되지 않고 있는 건 제도 운용상 허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LH는 재계약을 할 때 계약 만료 3∼4개월 전 사회보장 정보원에 입주자 자격 조회를 요청하고 있는데요, 이는 임대아파트의 고가 차량 문제가 반복되는 이유 중 하나로 지적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격 조회 기간에만 고가 차량을 보유하지 않으면 재계약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김희정 의원은 '국민의 세금으로 지어진 임대아파트에 거주하면서 고가 차량을 보유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면서, 정부와 LH는 입주자 자격 조회를 더욱 강화하는 등 제도의 미비점을 적극 보완해서 정말 지원이 절실한 취약계층에 주거복지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자격 조회를 강화하는 것은 물론이고, 등록 차량 조사와 고가 차량 주차 제한 등의 조치를 수시로 해서 더 엄격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