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전문 기자, 공연 담당 기자. BTS도 조성진도 씁니다. 사회부, 편집부, 정치부, 국제부, SDF 기획 부서를 거쳤고, 문화부에서 가장 오래 일했습니다. 공연 관람과 수다, 피아노, 중국문화, 그리고 고양이 집사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쓴 책으로 <나도 가끔은 커튼콜을 꿈꾼다>, <천재들의 유엔 TED>가 있습니다.
스타벅스에서 판매된 아메리카노 11잔 가운데 1잔은 '디카페인' 커피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스타벅스는 한국에서 디카페인 커피 누적 판매량이 최근 1억 잔을 돌파했다고 밝혔습니다. 무슨 상황인데? 스타벅스 코리아가 디카페인 커피를 판매하기 시작한 것은 2017년 8월입니다. 디카페인 커피는 1년여 후인 2018년 11월 누적 1,000만 잔을 기록하며 국내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했습니다. 2019년부터는 매년 1,000만 잔 넘게 팔리면서 급격한 성장세를 보였습니다. 2022년에는 연간 2,000만 잔을 넘어섰고, 지난해 2,110만 잔, 올해는 4월까지 520만 잔이 팔린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스타벅스 측은 디카페인 커피는 오전보다는 오후에 많이 팔리고, 연령대가 상대적으로 높은 손님들이 주로 찾는다고 밝혔습니다. 아메리카노 중 디카페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8.9%로, 11명 중 1명은 디카페인을 마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스타벅스 디카페인 커피 중 가장 많이 팔리는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는 지난해 판매량이 2019년과 비교하면 79% 늘어, 거의 두 배로 증가했습니다.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는 지난해 스타벅스에서 판매하는 전체 음료 메뉴 중 판매량 4위를 기록했습니다. 다른 커피 브랜드에서도 디카페인의 인기가 확인됩니다. 투썸플레이스는 지난해 디카페인 음료 판매가 전년보다 20% 늘었고, 전체 커피 음료 가운데 디카페인 비중은 2020년 0.9%에서 지난해 6.5%로 확대됐다고 밝혔습니다. 이디야커피와 컴포즈커피 등도 디카페인 커피 판매량이 크게 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디카페인 생두, 원두 수입량은 지난해 6,521톤으로, 5년 전의 3.8배 수준으로 늘어났습니다. 좀 더 설명하면 - 디카페인 찾는 이유는 우선은 카페인에 유독 민감한 사람들, 그리고 태아에 미칠 영향을 걱정하는 임신 혹은 수유 중인 여성이 디카페인 커피의 수요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카페인에 민감한 사람들은 조금만 커피를 마셔도 불면증, 심박수 증가, 메스꺼움, 위산 과다 등 카페인 과다 섭취의 부작용을 겪게 됩니다. 또, 카페인에 민감하지 않더라도 디카페인 커피를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아침에 이미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마셨다면 오후에는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택하기도 하죠. 오후에 디카페인 커피가 많이 팔린다는 것은 수면의 질을 고려한 선택으로 보입니다. 카페인의 '각성 효과' 때문에 커피를 찾는 사람들도 많지만, 카페인에 지속적으로 의지해 잠을 쫓는 건 건강에 악영향을 미칩니다. 카페인의 반감기는 6시간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후 6시에 커피를 마시면 밤늦게까지 섭취한 카페인의 절반이 체내에 남아있게 된다는 얘기이고, 숙면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밤늦게 커피 마셔도 잠드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는 사람도, 실제 수면의 질은 떨어진다고 합니다. 국내 불면증 환자가 2021년 기준 68만 4,560명으로, 4년 만에 18% 증가했다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통계가 있습니다. 불면증으로 치료받은 경우만 계산한 것이니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빨리 잠들지 못하거나 깊은 잠을 자지 못하는 사람들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 같습니다. 불면증 발병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카페인도 불면증과 관련이 있습니다. 불면증 환자는 커피를 줄이라는 조언을 듣게 되는데, 저 역시 치료까지 받지는 않았지만 요즘 수면의 질이 부쩍 안 좋아진 걸 느끼고 되도록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 디카페인 커피는 어떻게 만드나 일반적인 커피는 생원두에 열을 가하는 로스팅 과정을 거치는데, 디카페인 커피는 로스팅 과정 전에 디카페인 공정이 추가됩니다. 공정이 추가되는 만큼 디카페인 원두의 가격은 일반 원두보다 비싸집니다. 디카페인 공정은 화학적인 용매를 사용하는 방법, 물을 이용한 추출법, 이산화탄소를 사용하는 추출법으로 나뉩니다. 단순하게 원리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화학적 용매를 사용하는 방식은 염화메틸렌 같은 휘발성 강한 용매제를 카페인과 결합시켜 증발하게 함으로써 카페인을 제거합니다. 전체 디카페인 시장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방식이죠. 화학적 용매제는 휘발성이 강하고, 로스팅 과정을 거치고 나면 커피 음료에 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화학물질을 이용하지 않고 물을 이용하는 방식은 유기농 커피에 많이 사용되는데요, 먼저 생두를 뜨거운 물에 넣습니다. 생두의 수용성 물질을 분리하기 위해서죠. 생두는 꺼내고 카페인과 향미 성분이 남은 물에서 탄소 필터로 카페인만 걸러내면 향미 성분만 남은 생두 추출물이 만들어집니다. 이 때 처음 추출한 생두는 폐기하고, 향미 성분만 남은 추출물에 새로운 커피 생두를 집어넣어 삼투압 방식으로 생두가 지닌 카페인만 용해시킵니다. 최근에 등장한 이산화탄소를 이용한 방식은, 화학용매제 대신에 이산화탄소를 사용한 초임계 추출법으로 카페인을 제거합니다. 이산화탄소는 독성이 없고 임계점이 낮아 카페인에만 선택적으로 반응하고, 알칼리 성분과 다른 성분은 방출하는 성질을 이용한 것입니다. 이 방식은 비용이 많이 들어 대량의 커피를 디카페인 처리할 때 주로 사용합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 디카페인 공정을 거쳐도 카페인이 약간은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국내에서 팔리는 디카페인 커피는 대략 일반 커피의 3~5% 정도의 카페인을 함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데요, 2021년 식품의약품안전처 고시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카페인을 90% 이상 제거한 제품을 '디카페인'으로 표기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국제적으로는 97%가 제거돼야 디카페인으로 명명합니다.) 그러니 디카페인 커피라고 해서 마음 놓고 여러 잔 벌컥벌컥 마시는 건 곤란하겠지요. 예전에는 디카페인 커피가 향미가 없는 밍밍한 맛이라는 통념이 있었는데, 디카페인 커피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공정이 발달하면서, 디카페인 커피의 향미도 좋아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커피는 마시고 싶고, 카페인의 부작용은 피하고 싶고, 그러니 디카페인 커피의 소비가 늘어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굴지의 K팝 기획사 하이브와, 걸그룹 뉴진스를 발굴 제작한 민희진 어도어 대표가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하이브는 민희진 어도어 대표가 '경영권 탈취 시도'를 했다면서 전격 감사에 착수하는 한편 민 대표의 사임을 요구했고, 민희진 대표는 하이브의 신인 걸그룹 아일릿이 뉴진스를 카피했다고 주장하며 반박했습니다. 어도어는 하이브 산하 레이블 가운데 하나입니다. 모기업과 산하 레이블 가운데 전례 없는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무슨 상황인데? 22일 오전 - 하이브 "어도어 경영권 탈취 의혹" 하이브가 산하 레이블인 어도어의 민희진 대표와 또 다른 경영진 A 씨 등을 대상으로 전격 감사에 착수합니다. 하이브는 민 대표와 A 씨가 투자자를 유치하기 위해 대외비인 계약서 등을 유출하고, 하이브가 보유한 어도어 주식을 팔도록 유도하는 방안을 논의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이브는 감사에 돌입하며 어도어 측 전산 자산을 확보하고, 민 대표의 사임을 요구했습니다. 22일 오후 - 민희진 대표 "아일릿의 뉴진스 카피'가 문제" 민희진 대표는 공식 입장을 내고 아일릿의 뉴진스 카피 의혹을 제기하자 자신을 해임하려 하는 것이라고 반박했습니다. 아일릿은 하이브의 또 다른 레이블인 빌리프랩 소속으로 방시혁 의장이 프로듀싱에 참여해 최근 데뷔한 5인조 신인 걸그룹입니다. 걸그룹 아일릿 데뷔 쇼케이스 민 대표는 '아일릿의 뉴진스 카피는 빌리프랩 레이블 혼자 한 일이 아니며 하이브가 관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아류'라는 단어까지 사용하며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또, '경영권 탈취 시도' 의혹은 '어이없는 언론 플레이'라며 '소속 아티스트인 뉴진스의 문화적 성과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항의가 어떻게 어도어의 경영권을 탈취하는 행위가 될 수 있느냐'고 부인했습니다. 민 대표는 '뉴진스가 일궈온 문화적 성과를 지키고, 더 이상의 카피 행위로 인한 침해를 막고자 모든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겠다"고 밝혀 사퇴할 뜻이 없음을 내비쳤습니다. 좀 더 설명하면 - 반박 또 반박 어제(23일) 이후 양측의 공식적인 입장 표명은 없는 가운데 이런저런 개별 보도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치열한 여론전이 벌어지고 있는 양상입니다. 박지원 하이브 CEO는 23일 직원들에게 메일을 보내 사내 분위기 다잡기에 나섰습니다. 그는 '이번 사안은 회사 탈취 기도가 명확하게 드러난 사안이어서 이를 확인하고 바로잡고자 감사를 시작하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또,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건들은 아일릿의 데뷔 시점과는 무관하게 사전에 기획된 내용들'이라고 했습니다. 민 대표가 공식 입장에서 '아일릿의 뉴진스 베끼기에 항의했더니 나를 해임하려 한다'고 주장한 데 대한 반박으로 보입니다. 하이브가 감사 과정에서 찾아낸 문건의 구체적인 내용도 알려졌습니다. 이 문건들은 민희진 대표의 측근 A 씨가 지난달 23일과 29일 작성한 업무 일지입니다. '외부 투자자 유치 방안', '하이브는 어떻게 하면 팔 것인가', '궁극적으로 빠져나간다', '우리를 아무도 못 건드리게 한다' 등의 문장이 등장합니다. 하이브는 민 대표 측이 하이브가 어도어 지분을 팔게끔 압박하는 방안을 고민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민 대표가 아일릿이 뉴진스를 따라 했다고 강하게 비판한 것도 이 '압박 방법' 가운데 하나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민 대표가 하이브 내부 면담 자리에서 '아일릿도, 투어스도, 라이즈도 뉴진스를 베꼈다'고 말했다는 얘기, 외부에서 '방탄소년단도 나를 베껴 만든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한 '정황'이 담긴 문건도 확보했다는 얘기도 전해지면서 해당 그룹의 팬들까지 동요했습니다. 또, 증권가에서는 민 대표와 하이브가 어도어의 스톡옵션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반면 어도어 민희진 대표는 일간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하이브에서 주장한 것처럼 어도어의 경영권 탈취를 시도하려 한 적이 없다. 제가 가진 18%의 지분으로 어떻게 경영권 탈취가 되나"라며 "80% 지분권자인 하이브의 동의 없이는 어도어가 하이브로부터 독립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반박했습니다. 그러면서 하이브의 감사 착수는 "제가 한 달여 전부터 지난주까지 하이브와 관련한 내부 고발을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감사 결과 발표도 아니고 감사 통보와 동시에 대외 기사를 내는 경우가 있는지 의아하다"고 말했습니다. 또, "돈이 목적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내부 고발,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하이브는 경영권 취득을 프레임으로 잡은 것 같다. 피프티 사건이 선례로 남지 않았나. 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경영권 탈취 시도' 정황이 담겼다는 내부 문건을 작성한 당사자도 의혹을 정면으로 부인했습니다. 어도어 부대표 A 씨는 "언론을 통해 알려진 '어도어 내부 문서'는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을 적은 것이며, 민희진 대표를 비롯한 어도어의 다른 경영진과 논의한 사항이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개인적인 고민을 담은 것"이라며, "하이브와 어도어 간의 오랜 갈등 상황에 대한 고민이 배경"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실행으로 이행한 적도 없는 사견인 '메모' 수준의 글이 단지 회사 노트북에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하이브에 유출되고, 그것이 마치 거대한 음모를 위한 '내부 문서'인 것처럼 포장돼 여러 기사에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덧붙였습니다. 한 걸음 더 - 사태 장기화되나 하이브는 민희진 어도어 대표에게 오늘(24일) 오후 6시가 시한인 감사 질의서를 보내놓은 상태입니다. 이 질의서에서 경영권 탈취 시도와 외부 접촉 의혹 등을 질의했는데요, 민희진 대표는 지금까지 이 질의서에 대한 답변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이브는 또, 어도어 경영진 교체를 위한 임시 주주총회 소집을 요구했는데요, 어도어는 상장회사가 아니고 주주 구성도 단순합니다. 하이브 80%, 민 대표 18%, 그리고 기타 2%로 구성돼 있죠. 만약 주주총회가 열린다면 최대 주주인 하이브가 경영진 교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민 대표 측이 장악하고 있는 어도어 이사회가 순순히 주총 소집 결의를 할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결국 이 사태는 법정 분쟁까지 가면서 장기화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민 대표 측은 법무법인 세종과 손잡았고, 하이브는 김앤장 등을 선임했습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 - 이번 사태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설명 ① '뉴진스 엄마' 민희진은 누구인가 민희진 어도어 대표는 2002년 SM엔터테인먼트 공채 평사원으로 입사해 비주얼디렉터로 활약하며 이사 자리까지 오른 스타 제작자입니다. SM에서 소녀시대, 샤이니, 엑소 등 유명 아이돌 그룹의 콘셉트와 브랜드를 맡아 독특한 감각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하이브로 이적한 뒤 용산 신사옥 공간 브랜딩과 디자인을 맡았고, 하이브의 산하 레이블인 어도어 대표로 뉴진스를 발굴해 키워냈습니다. 뉴진스는 기존 K팝 유행 공식이었던 아이돌 그룹의 '세계관'과 이에 맞는 안무, 일관된 컨셉 대신, 10대의 신선하고 청량한 매력을 극대화한 그룹으로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기존의 K팝과 차별되는 음악, 세련된 복고 감성이 폭넓은 세대에게 호응을 얻었습니다. 민 대표는 '뉴진스 엄마'라고 불릴 정도로, 자신이 키워낸 뉴진스에 대해 깊은 애정과 자부심을 드러냈고, 모기업인 하이브와 선을 긋는 모습을 보여왔죠. '씨네21'과 한 인터뷰를 볼까요. "사람들이 쉽게 '하이브 자본'을 외치는데, 개인적으로는 동의가 안 된다. 투자가 성사된 이후의 실제 세부 레이블 경영 전략은 하이브와 무관한 레이블의 독자 재량이기도 하거니와, 난 당시 하이브 외에도 비슷한 규모의 투자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내게는 다양한 선택지들이 있었고, 투자처가 어디든 '창작의 독립', '무간섭' 조항은 1순위였을 것이라, 사실 꼭 하이브여야 할 이유도 없었다." 민 대표는 자신의 작업에 대한 완벽주의와 자부심, 직설화법으로 종종 화제가 되었는데, 이 인터뷰도 그랬습니다. 하이브와 선을 긋고 어도어와 자신의 역량 덕분에 뉴진스가 성공했다는 뉘앙스입니다. 민 대표는 계속 어도어의 '독자성'을 강조해 왔는데요, 실제로 다른 하이브 소속 가수들이 팬 커뮤니티 플랫폼 '위버스'에만 입점한 것과는 달리 뉴진스는 자체적인 전용 앱 '포닝'을 사용해 왔습니다. ② 아일릿, 뉴진스를 카피했나? 민 대표는 공식 입장문에서 '아일릿은 헤어, 메이크업, 의상, 안무, 사진, 영상, 행사 출연 등 연예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뉴진스를 카피하고 있다. 아일릿은 '민희진 풍', '민희진 류', '뉴진스의 아류'' 등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과연 민 대표의 주장대로 아일릿이 뉴진스를 카피했을까요? 음악계에서는 이걸 '카피'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아일릿이 뉴진스처럼 여성 5인조이고 뉴진스를 연상하게 하는 지점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건 뉴진스가 K팝에 그만큼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며 성공했기에 후속 그룹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는 게 맞다는 겁니다. 만약 뉴진스에 자부심이 대단한 민 대표 입장에서는 '카피'로 느낄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같은 하이브 소속 레이블의 걸그룹을 공개적으로 '아류'라고 폄하한 건 부적절해 보입니다. "뉴진스 멤버 및 법정대리인들과 충분히 논의한 끝에 공식 입장을 발표하게 됐다"고 명시한 것도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민 대표가 그렇게 아끼는 뉴진스 멤버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이 사태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인 셈이 됐습니다. ③ '멀티 레이블' 체제? 지난 2005년 빅히트엔터테인먼트로 설립된 하이브는 소속 그룹인 방탄소년단이 월드스타가 되면서, 중소기획사에서 K팝 굴지의 기획사가 됐습니다. 하이브는 쏘스뮤직(2019), 플레디스(2020), 이타카홀딩스(2021), 빌리프랩, QC미디어홀딩스, 액자일뮤직(2023) 등을 인수하거나 지분을 확보해 몸집을 키우고 '멀티 레이블'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현재 하이브 소속 레이블로는 빅히트뮤직(방탄소년단·투모로우바이투게더), 플레디스(세븐틴·프로미스나인·투어스), 빌리프랩(엔하이픈·아일릿), 쏘스뮤직(르세라핌), 어도어(뉴진스), KOZ(지코·보이넥스트도어) 등이 있습니다. 멀티 레이블 체제는 기존의 '톱 다운' 방식 운영보다 더 많은 가수와 음악을 동시다발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방탄소년단의 완전체 활동이 잠시 중단된 2022년 이후 하이브가 르세라핌, 뉴진스, 보이넥스트도어, 투어스, 아일릿 등 신인 그룹들을 짧은 기간 안에 대거 데뷔시킬 수 있었던 것도 멀티 레이블 체제 덕분이었죠. 이번 사태는 멀티 레이블 체제의 첫 '파열음'인 셈인데요, 하이브는 멀티 레이블 체제를 '각 레이블이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레이블 간 협력과 경쟁이 이뤄지도록 설계했다'고 밝혀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이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음을 보여줬습니다. 사실 멀티 레이블 체제를 하이브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기업들도 많이 채택하고 있죠. 멀티 레이블 체제 자체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운영의 문제입니다. 박지원 하이브 CEO는 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이번 사태는 저희가 추구하는 방향성을 진정성을 갖고 실행해 왔기에 발생할 수 있는 또 다른 시행착오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개선해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④ 어도어와 하이브 사이의 오랜 갈등? 어도어 부대표 A 씨는 내부 문건을 개인적인 메모였다며 '하이브와 어도어 사이의 오랜 갈등 상황에 대한 고민이 배경'이라고 했습니다. 독자노선을 추구해온 민희진 대표와 모기업 하이브 간에 갈등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온 '정황'으로 본다면, 이 갈등이 궁극적으로는 어도어의 경영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현재까지 나온 '정황'만 갖고서 하이브 주장대로 민희진 대표가 '경영권을 탈취'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민 대표는 '18% 지분으로 80% 지분을 가진 하이브를 어떻게 상대하냐'고 부정했고요. 다만 민 대표가 '어도어는, 뉴진스는 내가 만들었는데 왜 하이브가 주인이냐'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었던 건 분명해 보입니다. 민 대표가 그동안 했던 인터뷰를 봐도 그렇고, 스톡옵션 문제로 갈등이 있었다는 얘기도 비슷한 맥락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민 대표가 제기한 '아일릿의 뉴진스 카피 문제'는 이번 사태의 직접적 원인이라기보다는 갈등의 여러 배경 중 하나로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⑤ 뉴진스는? 아일릿은? 팬들은? 뉴진스의 컴백은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당장 오는 27일 신곡 '버블 검' 뮤직비디오를 공개할 예정이고, 다음 달 24일 새 싱글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2024년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뉴진스 멤버들이 개별적으로 각종 행사에 참석했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는데요,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이번 사태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민 대표가 '뉴진스 아류'로 거론한 아일릿 역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요. 이를 의식한 듯 박지원 하이브 CEO는 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하이브는 아티스트와 구성원을 지키는 데 최우선의 가치를 두고 있다. 아티스트가 이번 일로 흔들리지 않도록 관계된 분들은 각별히 애써달라"고 했습니다. 팬들도 동요하고 있습니다. SM 인수전 때도 경영권 다툼이 길어지면서 K팝 산업을 함께 발전시켜 온 팬들과 아티스트는 뒷전이 됐던 게 기억납니다. 방시혁 하이브 의장이 사태 일단락 후 이에 대해 직접 사과를 한 적도 있죠. 이번에도 마찬가집니다. 사태가 길어지고 양측의 공방이 가열될수록 아티스트도, 팬들도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하이브 주가가 출렁인 것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하이브 그룹 전체에, 더 나아가 K팝 산업 전반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안입니다. 현재로서는 법정 분쟁까지 갈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어떻게든 더 이상 상처가 깊어지지 않는 선에서 사태가 잘 마무리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항상 젊은 채로 있고 이 그림이 나 대신 늙어가면 좋을 텐데. 그럴 수만 있다면 뭐든 다 바칠 수 있는데. 그래, 그럴 수만 있다면 내 영혼이라도 줄 수 있는데." 아름다운 자신의 초상화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리는 이 청년, 도리언 그레이의 소망은 이뤄집니다. 도리언 그레이는 영원히 늙지 않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얻는 대신, 아름답던 초상화는 그의 영혼이 쾌락을 좇으며 타락하는 만큼 추악하게 늙어갑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1890년 작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죠. 휴가 내고 찾아간 런던, 요즘 극장가 웨스트엔드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연극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을 봤습니다. 이 작품은 끊임없이 영화, 연극, 뮤지컬 등 다른 장르로 만들어져 왔는데요, 현재 런던 로열 헤이마켓 극장에서 공연 중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하 '도리언 그레이'로 표기)'은 호주의 시드니 시어터 컴퍼니에서 제작해 2020년 초연했던 작품입니다. 2016년 30살 때 이 컴퍼니 역사상 최연소 예술감독이 된 연출가 킵 윌리엄스가 각색과 연출을 맡았습니다. 연출가 킵 윌리엄스(출처 : 킵 윌리엄스 홈페이지) 런던 연극 화제작, 최고가 티켓 50만 원 '도리언 그레이'는 배우 한 명이 혼자 26개의 캐릭터를 맡아서 하는 1인극입니다. 런던 공연에는 드라마 'Succession'으로 에미상과 골든글로브 주연상을 받은 호주 출신의 유명 배우 사라 스누크가 출연 중입니다. 이른바 '스타 캐스팅'의 화제작이라 그런 건지 최고가 티켓은 무려 289파운드(우리 돈으로 50만 원 가까이 됩니다)에 이르러 현지에서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였죠. 그래도 일간 가디언 등 주요 매체들의 별 다섯 개 리뷰에다 본 사람들의 입소문까지 나서 빈 자리가 거의 없었습니다. '도리언 그레이'는 제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공연이었습니다. 공연이 시작되면 빈 무대에 대형 스크린 하나가 내려져 있고, 곧 배우가 걸어 나옵니다. 그런데 배우는 객석을 향해 연기하지 않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카메라 스태프들이 조작하는 여러 대의 카메라를 바라보고 연기하죠. 관객이 주로 보는 건 스크린에 비치는 배우의 모습입니다. 즉 관객은 배우의 라이브 퍼포먼스 '중계'를 보게 되는 셈이죠. 이후 스크린은 많을 때는 7개까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무대를 점령합니다. 1인극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영상이 배우 역할 배우는 순간순간 어투를 바꾸고 약간의 소품/분장 체인지만으로 내레이터에서 도리언 그레이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그리는 화가 바질로, 그리고 도리언 그레이의 타락에 일조하는 헨리 경으로, 이렇게 수많은 인물들을 옮겨 다닙니다. 처음에는 내레이션을 하던 배우가 붓을 들고 카메라 앵글을 바꾸면 화가 바질을 연기하는 식으로 가다가, 점점 더 미리 녹화해 놓은 영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바뀝니다. 출처 : 런던 공연 공식 트레일러 영상 이를테면 배우가 수염이 덥수룩한 바질, 쫙 빼 입은 헨리 경으로 분장해 미리 찍어놓은 영상을 스크린에 띄우고, 무대 위 배우가 도리언 그레이를 연기하며 헨리 경을 상대로 대화를 나누는 겁니다. 어찌 보면 영상이 또 다른 배우가 되는 셈입니다. 사실 무대 위 배우가 지금 하고 있는 연기조차 대부분 영상으로 중계되기 때문에 관객은 영상들끼리 주고받는 연기를 보게 됩니다. 몇몇 대목에서는 미리 녹화해 놓은 영상 속 배우와, 실제 라이브로 연기하는 배우가 똑같은 내레이션 대사를 동시에 해서 웃음을 자아냅니다. 서로 이건 내 대사라고 잠시 실랑이하다가 미리 녹화해 놓은 영상 속 배우가 '양보'해서, 무대 위 배우가 대사를 계속 이어가게 되죠. 이렇게 미리 찍어놓은 영상에 '리액트'하는 연기를 보고 있자니,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이어지려면 정교한 사전계획과 엄청난 연습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리 녹화된 수많은 영상 스크린과 라이브 중계 화면을 조화롭게 배치하고 운용하는 일 자체도 미학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만만해 보이지 않았고요. 보톡스 주사, 셀프카메라 필터…현대의 도리언 그레이 '도리언 그레이'는 19세기를 배경으로 하지만, 젊음과 외모를 절대적으로 중시하고, 자신을 끊임없이 남들 앞에 전시하려 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더욱 유효한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연극은 어둡지만 장난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신랄한 유머로 이야기의 효과를 더욱 강화합니다. 도리언 그레이의 타락에 일조하는 헨리 경은 대화를 나누면서 계속 얼굴에 주름을 펴주는 보톡스 주사를 맞습니다. 도리언 그레이는 화가 바질의 살해 장면에서 잠시 손거울을 들어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객석의 웃음을 가라앉히며 '저는 지금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하는 중이라고요!' 하고 외칩니다. 이 연극은 많은 장면에서 모공과 콧구멍까지 보일 정도로 배우의 얼굴을 극도로 클로즈업하고 다양한 각도에서 잡은 얼굴을 여러 개의 스크린에 띄웁니다.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하는 사라 스누크의 얼굴이 여러 각도에서 커다란 스크린으로 바로 눈앞에 다가옵니다. 나르시시즘의 위험, 혹은 불안정한 자아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출처 : 런던 공연 공식 트레일러 영상 요즘 많은 이들이 애용하는 '셀프카메라 필터'를 활용하는 방식도 흥미롭습니다. 필터를 거쳐 도리언 그레이의 얼굴은 우스꽝스러운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되었다가 흉측한 괴물처럼 변하기도 합니다. 영혼을 팔아넘기고 타락한 도리언 그레이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암시합니다. 이 연극 무대는 스크린이 중심이 되지만, 필요에 따라 간단한 세트와 소품, 무대 구석구석을 활용해 여러 장면을 재치 있게 연출해 냅니다. 도리언 그레이가 한때 사랑에 빠졌던 배우 시빌 베인의 연극 장면은 마치 인형극처럼 보여주고, 원작의 아편굴을 대신한 나이트클럽 장면은 배우가 무대 지하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고 이를 핸드헬드 카메라로 따라가며 중계하는 식입니다. 기립박수 보내고 나왔지만 이 연극은 쉬는 시간 없이 2시간 동안 거침없이 진행됩니다. 지루할 틈이 거의 없습니다. 하루 두 번 공연하는 날도 있던데, 어떻게 이렇게 폭발적인 에너지가 필요한 연극을 하루 두 번 할 수 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커튼콜 때 배우 사라 스누크뿐 아니라 카메라 스태프들도 함께 나와 인사했습니다. 카메라 스태프들도 이 연극의 또 다른 주인공이었으니까요. 이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동선과 앵글을 숙지하고 배우를 따라 무대 곳곳을 종횡무진했습니다. 많은 관객들이 환호성 속에 기립박수를 보냈고, 저도 이 분위기에 동참했습니다. 공연 보길 잘 했다는 만족감을 느끼며 공연장을 나서는데, 설명할 수는 없지만 희미하게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도 들었습니다. 공연 잘 봤는데 왜 이럴까 생각하다가, 시간이 좀 지난 후에야 그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제가 방문했던 미술관에서의 경험을 떠올려보니 이해가 되더라고요. 파리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에서 열린 마크 로스코 전을 보러 갔더니, 그림을 보는 것 자체보다는 사진을 찍는 데 열중하는 관객들이 많았습니다. 그림을 맨눈으로 보는 시간보다,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보는 시간이 훨씬 길어 보였습니다. 모네의 '수련' 대형 연작이 전시된 오랑주리 미술관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저도 처음엔 사진 찍는 데 열중하다가 문득 현실을 자각하고 카메라를 도로 집어넣었습니다. 사진으로 찍어서 보는 그림은 내 눈으로 직접 보는 그림과는 다르니까요. 내 눈으로 직접 찬찬히 보고 느끼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배우가 보이지 않았다…내가 본 건 무엇이었나 출처 : 런던 공연 공식 트레일러 영상 '도리언 그레이'도 비슷했습니다. 저는 배우의 연기를 거의 항상 스크린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습니다. 스크린에 집중하다 보면 이게 지금 배우가 하고 있는 연기인지 미리 녹화된 것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습니다. '어, 배우가 지금 어디에서 연기를 하고 있지?' 하고 찾아보려 해도 스크린이 워낙 크고 밝은 탓에 정작 실제 배우의 연기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중계하고 있는 카메라 스태프들 때문에 배우가 가려질 때가 많았고요. 그러니 저의 석연치 않음은 배우가 관객이 아니라 카메라를 향해 연기하고 있었다는 것, 관객이 맨눈으로 배우의 연기를 보기 힘들었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연극이라는 것은, 배우가 관객을 앞에 두고 하는 '날것'의 연기를 보는 것인데, '도리언 그레이'에서는 영상만 주로 보다 나온 셈이었으니까요. 돌이켜보니 이 공연이 제 예상과 너무 달랐기에, 재미있게 봤으면서도 '도대체 내가 뭘 본 거지?' 하고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도리언 그레이'에서는 미리 찍어둔 영상도 그렇지만, 배우의 라이브 퍼포먼스를 생중계하는 영상도, 연출자의 의도에 따라 한 개 또는 여러 개의 스크린 위에 증폭·변주됩니다. 돌이켜보니 영화의 편집, 특수효과와 비슷했고, 실시간으로 변하는 멀티미디어 전시 같기도 했어요. 영화는 아니지만 지극히 영화 같은 공연이었던 거죠. 영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공연들이 많지만, 제가 과문해서인지 '도리언 그레이' 같은 공연은 전에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이 외모에 집착하고 허상을 좇던 도리언 그레이의 파멸을 그려낸 이 작품에는 꽤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시대를 반영하는 공연예술…내용이든 형식이든 런던에서 진행 중인 이 연극에 대해 뉴욕타임스까지 리뷰 기사를 썼습니다. 영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무대에 접목한 이 공연이 그만큼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뉴욕타임스의 리뷰는 대체로 호평이었지만, 말미에 약간의 의구심도 덧붙였습니다. 관객의 눈길이 스크린에 고정되어 실제 배우의 존재가 거의 부수적으로 느껴지고, 공연의 신박함이 스토리 자체에 몰입하는 걸 방해할 우려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 혼자만 이런 생각을 한 건 아닌 것 같아 조금 반갑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눈 뜨고 일어나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핸드폰이든 컴퓨터든 TV든 광고판이든 수많은 스크린에 둘러싸여 살고 있습니다. 아직 30대인 킵 윌리엄스는 이런 환경에 일찍부터 친숙했던 영상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연극과 오페라 연출가일 뿐 아니라 단편 영화와 뮤직비디오를 찍은 영화감독이기도 합니다. 영상을 무대의 중요한 표현 수단으로 끌어들인 건 아마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겁니다. 저는 공연장에서만큼은 아날로그를 날것으로 즐기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만, '도리언 그레이'를 보는 것은 저에게도 분명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예술은 시대와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연 역시 내용이든 형식이든 시대를 반영해 변화해 갑니다. '도리언 그레이' 이후, 앞으로 저는 또 어떤 새로운 공연들을 만나게 될까요. 한국에서든, 해외에서든, 예상을 벗어나는 새로운 공연들이 계속 관객의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경험을 선사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영국에서 단계적으로 담배 판매를 제한해 '비흡연 세대(smoke-free generation)'를 만들겠다는 법안이 의회에서 1차 관문을 통과했습니다. 이 법안은 해마다 담배를 살 수 있는 연령을 1년씩 상향 조정해, 2009년과 그 이후 출생자들은 평생 영국에서 합법적으로 담배를 구입할 수 없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 법안을 추진하는 집권여당인 보수당 내에서 반대 목소리가 작지 않습니다. '(시가를 사랑했던) 윈스턴 처칠의 당이 시가를 금지하다니 미친 일'이라는 얘기까지 나왔습니다. 무슨 상황인데? 현지시각 16일 영국 하원은 '담배 및 전자담배 법안'에 대한 2차 독회에서 찬성 383표 대 반대 67표로 법안을 하원 심사의 다음 단계로 넘겼습니다. 이 법안은 흡연 행위 자체가 아니라 담배 판매를 제한하는 내용입니다. 다만 현재 담배를 합법적으로 살 수 있는 연령대의 사람들에게는 영향이 없고, 청소년과 이보다 어린 세대를 염두에 둔 법안입니다. 이 법안은 합법적으로 담배를 살 수 있는 연령(현재는 18살)을 해마다 1년씩 올리는 것이 골자입니다. 목표대로 2027년 시행되면 2009년과 그 이후 태어난 사람들은 평생 합법적으로 담배를 살 수 없게 되는 것이죠. 전자담배에 대한 규제도 시행됩니다. 영국 청소년들의 흡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1회용 전자담배를 금지합니다. 또 청소년이 좋아할 만한 전자담배의 향이나 포장, 판매 방식에 대해서도 제한을 두기로 했습니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 (사진=AP, 연합뉴스) 리시 수낵 정부는 이 법안으로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비흡연 세대를 만들면 21세기말까지 심장질환과 폐암 등 흡연 관련 질환 47만 건 이상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죠. 영국의 흡연자는 인구의 13퍼센트인 640만 명이며, 매년 8만 명이 흡연과 관련된 질병으로 사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합법적으로 담배를 살 수 없는 18살 아래의 청소년 중 20퍼센트가 전자담배 흡연 경험이 있다는 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좀 더 설명하면 빅토리아 앳킨스 보건장관은 하원 토론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흡연 때문에 수명 단축이나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변화를 겪고 있다'며, "중독에는 자유가 없다. 다음 세대를 보호하는 것은 우리의 책무"라고 강조했습니다. 정부는 담배 불법 판매 상점에 대해서는 적발 즉시 현장에서 100파운드(한화 약 17만 원)의 벌금을 물리는 등 강력한 단속 방안도 발표했습니다. 또 3천만 파운드의 예산을 담배 암시장 단속 등 이 법안의 원활한 시행에 투입할 예정입니다. 이렇게 강력한 영국의 정책은 뉴질랜드가 2022년 저신다 아던 정부 때 세계 최초로 제정한 담배규제법안을 벤치마킹한 것입니다. 뉴질랜드의 법안은 2008년과 그 이후 태어난 사람에 대해서는 평생 담배를 살 수 없게 하는 내용이었죠. 그러나 지난해 10월 집권한 크리스 럭슨 정부는 세수 부족 등의 이유로 이 법을 폐기했습니다. 한 걸음 더 영국의 제1야당인 노동당은 이 법안에 찬성하고 있지만, 집권여당인 보수당에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큽니다. 이유가 뭘까요? 보수당 내 자유주의 성향 의원들이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 이 법안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보수당답지 않은' 정책이라는 겁니다. 보리스 존슨 전 총리는 지난주 캐나다 방문 중에 '윈스턴 처칠의 당이 시가를 금지하다니 미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시가 애호가로 잘 알려져 있죠. 리즈 트러스 전 총리도 이 법안 지지자들은 '보건 경찰'이라면서, 지속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혀왔습니다. 실제로 하원 표결에서 보수당 의원 57명이 반대표를 던졌고 기권한 보수당 의원들도 106명이나 됐습니다. 그래서 노동당은 표결 직후 '수낵 총리가 보수당 내 리즈 트러스 파에 맞설 힘이 없어 자유투표를 허용함으로써 이 법안을 위험에 빠뜨렸다'고 했죠. 또 '법안 통과는 노동당 의원들 덕분'이라고 꼬집었습니다. 앞으로 전망은 보수당 내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국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금연국가'로 만들려는 이 법안은 일단 1차 관문을 통과했습니다. 앞으로 남은 절차는 이렇습니다. 위원회 심사와 전체 회의 보고, 3차 독회를 거쳐 하원을 최종 통과하면 상원으로 이송됩니다. 상원 최종 표결은 6월 중순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하지만 보수당 내 반대파가 법안 심사 과정에서 많은 수정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통과를 늦출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
사진 제공 : 레미제라블 코리아 빅토르 위고 소설이 원작인 뮤지컬 '레미제라블'에는 에포닌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장발장이 양딸로 곱게 길러낸 코제트는 어린 시절 사기꾼인 테나르디에 부부에게 맡겨져 학대받은 적이 있는데, 에포닌은 바로 이 사기꾼 부부의 딸입니다. 어릴 때는 코제트가 불쌍한 처지였지만 자라서는 처지가 뒤바뀝니다. 에포닌은 오가다가 알게 된 대학생 마리우스를 남몰래 연모하지만, 마리우스는 코제트를 보자마자 홀딱 반해버립니다. 에포닌은 코제트와 사랑을 속삭이는 마리우스를 먼발치에서 지켜보기만 할 뿐이죠. 마리우스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얼마든지 희생할 준비가 된 에포닌은 '나 홀로(On My Own)'라는 곡으로 절절한 짝사랑을 노래합니다. 인상적인 그 배우가 외국인이었다고? '나 홀로'는 '레미제라블'의 주옥같은 뮤지컬 넘버들 중에서도 특히 많은 사람들을 울리는 곡입니다. 에포닌의 출연 시간이 길지는 않지만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이유입니다. 에포닌은 끝내 마리우스의 사랑을 얻지 못하는 비극적인 인물이지만, 관객의 사랑은 코제트보다는 에포닌 쪽으로 기울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찾아온 '레미제라블' 한국어 공연에서도 '나 홀로'를 들으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는데요, 이번 공연의 에포닌 역은 두 명의 배우가 번갈아 연기했습니다. 이미 활발하게 활동 중인 배우 김수하와 함께 이 역을 맡은 배우는 루미나. 굉장히 인상적인 신인 배우였습니다. '레미제라블'이 데뷔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연기도 노래도 안정적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루미나는 일본에서 온 외국인 배우였습니다. 아버지는 인도인, 어머니는 일본인, 국적은 일본. 한국에 유학해 서울대 성악과 졸업. 궁금증은 더 많아졌습니다. 일본인이 왜 한국에 와서 성악을 공부하고 한국에서 뮤지컬 배우로 데뷔했을까요. SBS 보도국 팟캐스트&유튜브 프로그램인 골라듣는뉴스룸 커튼콜에 초대해 궁금증을 풀어봤습니다. 한국 뮤지컬에 반해서 "중학교 때 처음으로 한국 뮤지컬을 접하게 됐어요. '셜록 홈즈'라는 뮤지컬을 일본에서 일본 배우들이 라이선스 공연으로 했거든요. 그때 딱 보니 작품이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그래서 자꾸 영상을 찾아보게 되다가 원작이 한국 거라는 걸 처음 알았어요. 일본과는 다른 분위기로 연출이 되고 그런 것에 반해서 이걸 꼭 직접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루미나는 이렇게 한국 뮤지컬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한국에 와서 한국 뮤지컬 여러 작품을 봤습니다. 그때부터 한국에서 뮤지컬을 하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일본도 뮤지컬 공연이 많은데, 왜 한국에서 뮤지컬을 하고 싶었을까요. "일본하고 한국은 아무래도 언어가 다른 만큼, 분위기 자체가 달라요. 일본은 부드러운 느낌이 든다면 한국은 강렬한 느낌이 더 들어요. 아무래도 발음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한국 뮤지컬을 보면서 대사를 못 알아듣는 게 아쉽고, 다른 관객들이 웃을 때 같이 못 웃는 게 속상했다는 루미나는 일본에 돌아가자마자 한국어 공부에 돌입했습니다. "제가 웬만하면 열심히 했다는 말을 안 쓰는데,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때부터 한 1년 반쯤 한국분한테 1대1 과외를 받아서, 읽는 방법부터 문법, 대화까지, 집중적으로 공부했어요." (정말 그렇게 1년 반 만에 한국어를 배우셨다고요?) "그만큼 한국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만큼 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 같고…." 서울대 유학, 그리고 '레미제라블'로 데뷔 일본에서도 예술계 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하던 루미나는, 한국에서 성악을 배우면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한국 유학을 결정했습니다. 입학시험을 준비해 2019년 서울대 성악과에 입학했습니다. 지난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최연소로 성악 부문 우승한 바리톤 김태한이 루미나의 동기입니다. "코로나 시기라 성악 레슨도 영상으로 하고, 피아노 반주랑 잘 안 맞고, 노래하는 동안에 피드백이 오는데 그걸 못 듣고,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그래도 녹음해서 보내고 거기에 대해 피드백을 받고 하면서 잘 해결했어요. 대학 생활이란 게 엠티도 가고 동아리도 활동하고 그런 게 좀 없었던 게 아쉬웠어요. 엠티라는 걸 한 번도 못 가봤어요." 서울대에서 성악을 공부하며 뮤지컬 배우의 길을 준비하던 루미나는 맨 처음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마리아 역을 지망하며 오디션에 응시했지만 탈락했습니다. 하지만 '레미제라블' 오디션 공고가 뜨자 망설임 없이 지원했고, 합격했습니다. 에포닌은 너무나 하고 싶었던 역할이었습니다. "상견례 때 많이 봐 왔던 선배님들이 쭉 들어오시는 거예요. 와 이분이 계시네, 저분도 계시네, 난 또 왜 여기 같이 있지, 하면서 그저 신기하기만 했어요. 첫 무대를 했을 때도 너무 정신없이 지나가서 그 순간 내가 뭘 했는지 사실 기억이 안 나더라고요. 그래도 커튼콜 때 박수를 쳐 주시는데, 해냈구나, 내가 일단 첫걸음을 내디뎠구나, 하는 생각에 벅찼던 것 같아요." '나 홀로'를 부르고 나서 객석의 반응에 감격했던 기억도 들려줬습니다. "무대가 워낙 어두운 편이어서 객석이 정말 안 보여요. 그래도 웃음소리가 나면 그거도 잘 들리고요. 안 보여도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는 건 잘 느껴져요. 'On My Own(나 홀로)' 끝났을 때 객석에서 조명이 나가는데, 그때 처음으로 3층까지 모든 객석이 다 보이거든요. 무대에서 정말 감격스러워요. 이 눈빛들이 확 느껴지고, 느끼는 것과 동시에 다 보이니까요. 이 장면은 혁명으로 나아가는 장면이거든요. 그래서 '그래, 나 다녀오겠다' 이런 다짐을 하는 순간이기도 하고요. 그 다짐을 하게 만드는 집중력이랄까요? 집중해 주시는 에너지가 느껴져요." 루미나 '나 홀로', SBS 두시탈출컬투쇼 출연 영상 완벽한 한국어 비결? 그만큼 간절했다 루미나의 노래는 가창력뿐 아니라 한국어 딕션도 좋아서 에포닌의 감정이 고스란히 관객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대사보다는 노래 비중이 훨씬 큰 뮤지컬이니까 외국인도 할 수 있구나, 생각했는데 뮤지컬 아닌 일상 대화에서도 루미나의 한국어는 정말 자연스러웠습니다. 발음도, 쓰는 어휘도 그냥 그 나이 또래 한국인과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다시 한번 한국어 학습 비결을 물어봤더니, 한국어 선생님한테 1대 1 과외를 받고 나서 혼자서 똑같이 수업을 재현하는 연습을 계속했다고 했습니다. 선생님과 자신, 두 사람 역할을 하면서 문법은 이러니까 이렇게 되고, 이런 식으로 혼자 계속 말하면서 진행했다는 겁니다. 등하교 시간에도 계속 한국어 단어장을 들고 다니며 단어를 암기했고요. 그만큼 한국어를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던 겁니다. 물론 그 이후 한국에서 살았던 기간이 있으니 한국어가 더 능숙해지기도 했겠고요. '루미나'라는 이름은 본명입니다. '빛난다'는 뜻의 라틴어에서 온 이름으로, 빛나면서 보석 같은 이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부모님이 지어 주셨다고 합니다. "일본 성은 나카무라예요. 그러니까 나카무라 루미나거든요. 그런데 보면 나카무라가 너무 안 어울려요. 저도 어릴 때부터 거울 보면서 '나카무라? 이 얼굴로? 이건 아닌데' 했었어요. (웃음)" 루미나의 한국 친구들은 그를 '루미' 혹은 '미나'라고 부릅니다. 농반진반 '어디 루 씨냐'고 묻는 경우도 있었다고 해요. 루미나는 누군가 자신을 '루미나!' 하고 부르면 '나 뭐 잘못했더라?'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습니다. '미나야~' 부르는 것과 '루미나!' 하는 뉘앙스의 차이를 아니까 그렇겠죠? 한국에선 성과 이름을 붙여 부르면 뭔가 정색하는 느낌이 있잖아요. 루미나에게 '레미제라블' 이후 해보고 싶은 공연을 물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그리트, '지킬 앤 하이드'의 루시, '위키드'의 앨파바,' 미스 사이공'의 킴… 너무 많아서 다 얘기할 수 없다네요. 한국 창작 뮤지컬, 그리고 디즈니 계열의 작품도 언젠가는 해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한국 뮤지컬 시장의 성장 실감하다 과거에는 한국인 뮤지컬 배우들이 일본에서 활동하는 경우는 많았어도, 그 반대의 경우는 없었습니다. 사실 루미나의 고국인 일본은 뮤지컬 산업화가 우리보다 훨씬 빨랐습니다. 한국 뮤지컬 산업화의 시발점으로 꼽히는 게 '오페라의 유령' 한국 초연인데, 그게 2001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극단 시키가 '오페라의 유령' 런던 초연 불과 2년 이후인 1988년, 브로드웨이와 비슷한 시기에 '오페라의 유령'을 공연하기 시작했습니다. '토호'와 함께 일본 뮤지컬 시장의 양대 극단으로 꼽히는 시키는, 뮤지컬을 한해 3,500회까지 공연하는 아시아 최대의 뮤지컬 '기업'입니다. 시키는 한국인 배우들을 중용했는데, 한국인 단원이 많을 때는 70여 명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차지연, 오나라, 박은태, 김준현, 김지현 등 유명 뮤지컬 배우들이 시키에 몸담은 적이 있습니다. 시키는 2006년 한국 최초의 뮤지컬 전용 극장인 잠실 샤롯데 개막작으로 '라이언킹'을 제작했는데요, 디즈니가 당시 한국은 아직 제작 역량이 미흡하다고 보고 한국 제작사가 아닌 일본의 '시키'에 한국어 초연 프로덕션을 맡긴 겁니다. 그래서 '라이언킹' 한국어 초연에는 시키 소속 한국인 배우들과 오디션으로 뽑은 신인 배우들이 출연했습니다. 한국 뮤지컬 업계의 반발 속에 개막한 '라이언킹' 한국 초연은 한국 시장의 특성을 잘 파악하지 못했던 탓에 흥행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동안 한국 뮤지컬 산업은 급격히 성장했고 시장도 팽창했습니다. 이제 한국 뮤지컬은 미국, 영국, 일본에 이어 세계 4위권 시장이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일본 뮤지컬 시장 규모는 4,000억 원대인 한국 시장의 두 배 규모로 추산되는데, 해외 라이선스 뮤지컬의 의존도가 높습니다. 한국에도 웬만한 해외 유명 작품들은 다 들어왔을 정도로 라이선스 뮤지컬 매출이 절반 이상이긴 하지만, 한국 시장은 창작 뮤지컬 제작도 굉장히 활발하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중소 규모 뮤지컬 제작사들은 이미 대형 극단들의 경쟁이 치열한 영미권 뮤지컬 라이선스 제작보다, 가성비 높은 한국의 창작 뮤지컬에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2010년대 이후, 한국 창작 뮤지컬들이 투어 공연이나 라이선스 공연 형태로 일본 시장에서 활발하게 선보이고 있죠. 루미나가 봤던 '셜록 홈즈'도 그런 흐름 속에서 이뤄진 공연이었던 겁니다. 이름처럼 빛나는 미래 기대하며 그동안 한국에서 활동하는 해외 교포 출신 배우, 혹은 한국계 외국인 배우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한국 뮤지컬이 좋아서' 한국에서 데뷔한 외국인 배우는 루미나가 처음인 것 같습니다. 한국 뮤지컬 산업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됩니다. 루미나를 인터뷰하면서, 저는 문득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뮤지컬 배우들, 그리고 북미와 유럽 오페라 극장을 누비는 한국인 오페라 가수들을 떠올렸습니다. 외국 관객들을 상대로 외국어로 연기하고 노래하며 정상에 오른 이들이 얼마나 큰 노력을 쏟았을지, 루미나를 통해 새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의 분투에도 응원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루미나의 한국 무대 데뷔작이었던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부산, 서울을 거쳐 대구에서 마침표를 찍습니다. 루미나의 다음 출연작이 어떤 작품이 되든 또 찾아가서 보게 될 것 같습니다. '항상 성장하고 항상 배우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루미나의 미래가 그 이름처럼 빛나기를 기대해 봅니다. 골라듣는뉴스룸 커튼콜 207회 루미나 편 비디오머그 '서울대 나온 일본인 배우, 한국 뮤지컬 샛별로 떠오르다'
…허나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저기 부러진 나무등걸에 걸터앉아서 나는 봤지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 작은 배들이 연기 뿜으며 가고 이봐 고갯마루에 먼저 오르더라도 뒤돌아서서 고함치거나 손을 흔들어 댈 필요는 없어 난 바람에 나부끼는 자네 옷자락을 이 아래에서도 똑똑히 알아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야 또 그렇다고 괜히 허전해 하면서 주저앉아 땀이나 닦고 그러지는 마 땀이야 지나가는 바람이 식혀주겠지 뭐 혹시라도 어쩌다가 아픔 같은 것이 저며올 때는 그럴 땐 바다를 생각해 바다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라구 하여 친구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 속의 좁게 난 길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그래 친구여 바로 여긴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김민기 곡 '봉우리' 중에서 지난 14일 대학로 학전 소극장에서 열린 학전의 마지막 공연을 다녀와서 이 노래를 계속 듣고 있습니다. 지난달 28일부터 학전을 거쳐간 가수와 배우 33팀이 펼친 릴레이 콘서트의 피날레였던 이 공연은 '김민기 트리뷰트'로 진행되었습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권진원, 정동화, 알리, 박학기, 한영애, 배우 황정민, 그리고 학전 김민기 대표와 인연 깊은 대학로 '학림다방' 이충열 대표가 출연했습니다. 인상적인 순간이 정말 많았습니다. 가수 권진원이 '아름다운 사람'을 부를 때, 지난해 정재일 콘서트에서 정재일의 기타와 피아노 반주와 함께 울려 퍼지던 김민기의 육성이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되었습니다. 학림다방 이충열 대표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직하게 부른 김민기의 '그 날'에 제 마음도 떨려왔습니다. 황정민이 부른 '작은 연못'은 그 어느 뮤지컬 넘버보다도 눈앞에 보이듯 생생하게, 숲 속 작은 연못의 비극을 들려줬습니다. 특히 한영애가 부른 '봉우리'는 아직도 제 귓전에 생생하게 울리는 듯합니다. '봉우리'는 1984년 LA올림픽에 출전했다가 예선에서 탈락해 선수촌에도 남지 못하고 쓸쓸히 귀국하는 선수들을 위해 쓴 곡입니다. 당시 양희은의 노래로 한 방송 다큐멘터리 OST가 되었고, 후에 김민기가 불러 자신의 음반에 실었습니다. 김민기 '봉우리' 듣기, 한영애 '봉우리' 듣기(2021년 공연실황) 그는 패배하고 좌절한 이들에게 그는 '봉우리는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지금 여긴지도 모른다'고 나직하게 이야기해 줍니다. 원래도 좋아했던 곡이지만, 가사를 다시 한번 곱씹어보게 되었습니다. 긴 내레이션과 노래가 섞인 이 곡을 한영애는 관객 한 명 한 명한테 말을 걸듯 불러줬습니다. 한영애의 허스키한 목소리에 김민기의 낮은 목소리가 겹쳐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김민기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있었다 출연자들은 모두 김민기의 노래를 부르고, 김민기 선배님, 혹은 선생님, 혹은 형님 이야기를 했습니다. 김민기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존경과 애정, 감사가 듬뿍 담긴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니, 학전이 곧 김민기요, 김민기가 곧 학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민기의 노래에는 사랑이란 단어가 없다. 하지만 누구보다 이 세상과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사람이고, 음악의 길에 등불이 되어준 선배다' (권진원) '김민기 판을 틀었다가 혼났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분이었다' (이충열 학림다방 대표) '김민기 선생님한테 기본을 다시 배웠다. 그때 배운 게 지금까지 자부심 갖고 버틸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황정민) '한 노래 열 권의 책 안 부럽다. 김민기 음악을 들으면 사람다워지고 생각이 따뜻해진다' (알리) 이 공연의 앙코르는 출연자들과 관객이 함께 부른 '아침이슬'이었습니다. 출연자들은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다독이며 노래하는 듯 보였습니다. 저도 오랜만에 '아침이슬'을 따라 부르며 울컥하는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나 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아침이슬'의 마지막 소절까지 다 부르고 출연자들은 마치 노래 가사처럼, 객석을 향해 손을 흔들며 무대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진짜 끝이구나. 진짜 가는구나. 저는 객석을 일어나려 했지만 다시 주저앉았습니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퇴장하는 권진원의 모습을 보면서, 내내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학전의 마지막 밤, 극장을 떠나지 못했다 학전 소극장 문을 나섰지만, 저는 극장 앞마당을 한동안 떠나지 못했습니다. 김광석 노래비 앞에서 사진을 찍고, 극장 앞을 서성이며 출연자들이 하나둘씩 나오는 걸 지켜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와 같은 마음인지 극장 앞은 한동안 관객들로 북적였습니다. 공연장에서 만난 지인들과 함께 한동안 선 채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출연자들이 김민기 형님, 혹은 선생님, 혹은 선배님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우리도 모두 '김민기 대표' 이야기를 했던 겁니다. 저는 '지하철 1호선' 3천 회 공연 끝나고 뒤풀이에 따라갔던 기억을 꺼냈습니다. 학전 출신 배우들이 마치 고향집에 온 것처럼 오랜만에 모였던 그날, 황정민이 평소보다 더욱 빨개진 얼굴로 '우리 선생님 왜 이렇게 늙으셨어요. 주름이 쭈글쭈글해지셨네' 하며 김민기 대표의 손을 계속 잡고 놓아주지 않고, 김민기 대표는 '어허 참!' 하면서 껄껄 웃던 모습이 정말 따뜻했거든요. 오래전 김민기 대표를 인터뷰했던 한 기자는 '학전 출신 스타들이 많아서 흐뭇하시겠다'고 했더니 그가 '그보다는 잘 안된 사람들한테 마음이 쓰인다'고 대답했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봉우리'가 패배한 사람들을 위한 노래였던 것처럼 말이지요. 내 젊은 날이 있는 학전, 역사 속으로 학전은 공연 다음 날인 3월 15일, 33주년 기념일에 공식 폐관했습니다. 문화예술위원회가 건물주와 협의해 이 공간을 계속 극장으로 보전할 방침을 밝혔지만, 학전은 예정대로 퇴장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예술위는 학전이 있던 자리에 새로운 이름으로 극장을 다시 열고, 학전의 정체성을 계승하는 극장으로 운영해 나갈 계획입니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출처 극단 '학전' 공식 홈페이지) 저에게는 학전의 폐관이 한 시대의 종언처럼 다가옵니다. 학전은 날로 산업화하고 대형화하고 화려해지는 공연계 흐름과는 무관하게,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하지만 요즘 젊은 관객들에게 학전은 더 이상 친숙한 극장이 아닙니다. 학전의 대표작 '지하철 1호선'만 해도, 청량리 588도, 제비도, IMF 금융위기도, 복부인도 모르고, 그 시대 정서를 공유하지 않는 요즘 관객들에게는 그저 철 지난 옛날 노래처럼 들렸을 수 있습니다. 민주화 운동의 상징과도 같았던 학전 이전의 김민기를 기억하거나, 알고 있거나, 젊은 시절 학전에서 뮤지컬이나 콘서트를 즐겼던 사람들은 이미 나이가 들었습니다. 박학기는 '학전 곳곳에 30년 전의 박학기가 있더라'고 했습니다. 학전이라는 공간 구석구석에 남아있는 젊은 시절 자신의 기억을 만난다는 것이겠죠. 저도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학전을 거쳐간 가수나 배우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김광석 콘서트 본 것부터 치면 거의 30년 전부터 학전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학전의 시대는 저의 젊은 날들과 겹칩니다. 그래서 저는 학전의 마지막 밤, 극장 앞을 그렇게 오랫동안 떠나지 못했던 걸까요. '학전 어게인'…학전의 정신은 기억할 것 학전의 마지막을 장식한 릴레이 콘서트의 이름은 '학전 Again'이었습니다. 문을 닫는 학전 소극장에서 '다시 학전'이라니,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까요. 하지만 이 이름에는 공연을 하는 이들과 보는 이들 모두 학전의 추억을 다시 끄집어내고, 학전의 '정신'을 다시 마음에 새기기를 바라는 다짐을 담았습니다. 황정민은 슬프지만 슬프지만은 않다고 했습니다. '학전은 사라져도 학전의 정신은 모든 사람들이 기억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학전의 정신은 무엇이다'라고 황정민이 콕 집어서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김민기 대표를 빼고 학전의 정신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해 보였습니다. 김민기 대표는 항상 자신을 '뒷것'이라고 일컬었습니다. 항상 '앞것'이 빛나야지 '뒷것'들이 나서면 안되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앞것'들은 관객 앞에 서는 배우나 가수들이고, '뒷것'들은 그 뒤에 있는 스태프들을 가리킵니다. 학전은 '뒷것들의 우두머리' 김민기 대표가 앞것들이 마음껏 뜻을 펼치며 공연할 수 있도록 깔아준 판이었습니다. 180석 규모의 학전 소극장은 처음부터 상업성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지하철 1호선'이 연일 매진을 기록하던 전성기에도 김민기 대표는 돈이 막 들어오는 게 겁났다고 했습니다. 배우에게 출연료 대신 연극 표를 주는 곳도 많았던 그 시절, 그는 매달 공연 매출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기여도에 따라 단원들에게 월급을 지급했습니다. 매출이 없을 때에도 사재를 털어서라도 최소한의 기본급을 지급했습니다. 어린이 공연을 올릴 때는 직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안 그래도 저렴한 티켓 값을 더 낮추는 고집을 부렸습니다. 학전의 '뒷것' 김민기 김민기 대표가 학전 배우들을 거느리고 요즘 말로 '매니지먼트 사업'을 했다면 돈을 벌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학전을 배우들을 성장시켜 바깥세상에 내보내는 '못자리'로 여겼습니다. 배우들을 붙들어 두지 않고 기회만 있으면 내보냈습니다. 재즈 가수 나윤선, 배우 배해선, 이정은, '독수리 오형제'로 불리는 황정민, 설경구, 조승우, 장현성, 김윤석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학전이라는 '못자리'에서 자랐고 스타가 되었습니다. '아침이슬의 김민기'는 사실 유명 인사였고, 갖가지 사회 정치 이슈와 관련해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호명되는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는 그러나 자신을 드러내는 걸 꺼렸습니다. 인터뷰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대학로를 지키며 '뒷것'으로 살았습니다. 새로운 공연을 올릴 때마다 취재 가서 '이번 작품으로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그는 으레 '에이, 거창하게 무슨 메시지라고 할 만한 게 있나, 그냥 하는 거지' 하며 웃어넘기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공연을 하는 이유는 뚜렷했습니다. 밝고 화려한 곳만 보이고 보려 하는 세상이지만 어두운 곳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누군가는 해야 한다, 현재 어린이 문화는 너무 상업적인 것만 범람하고 있어서 어린이를 중심에 두고 어린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공연을 만들고 싶었다, 김민기 대표의 말들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권진원이 말한 대로 김민기 대표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많은 예술가였습니다. '남들이 안하니까 나라도 해야지' 같은 말을 종종 했습니다. 밝고 찬란한 곳보다는 그늘지고 소외된 곳에 관심을 쏟았습니다. 김민기 대표는 거창한 말을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사명감이나 소명의식 같은 단어를 빼고 그가 해온 일을 설명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학전과 아름답게 이별하는 법, 기억하기 저는 학전의 폐관 소식이 알려진 이후로 계속 나름의 방식으로 학전을 '기억'해 왔습니다. 그동안 제가 썼던 학전 관련 기사와 영상을 다시 꺼내보고, 관련된 책들을 찾아 읽고, 김민기의 음반, 정재일이 리메이크한 '공장의 불빛' 음반을 다시 들었습니다. 어쩌면 다 제가 학전과 '이별'하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학전의 마지막 공연을 보고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그 과정의 일부입니다. 이 '이별'은 떠나보내고 잊는 게 아니라 '기억'하는 것입니다. 학전의 마지막 밤, 저는 극장 앞에서 SBS 스페셜 팀을 마주쳤습니다. 지금 SBS 스페셜 팀은 4월 21일 일요일 밤을 시작으로 3주에 걸쳐 나갈 예정인 3부작 다큐멘터리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가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학전과 김민기를 본격적으로 다룬 다큐멘터리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제작진은 학전의 역사를 알려주는 수많은 문헌과 자료들을 모으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김민기와 학전에 관한 생생한 '증언'을 들었습니다. '전단지 알바'였던 설경구, '대기업 홍보실 직원'이었던 나윤선, '매표소 알바'였던 황정민, 학전의 총무부장이었던 강신일, 학전의 음악감독이었던 정재일 등 학전을 거쳐간 배우와 스태프들, 가수, 그리고 김민기의 오랜 지인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송창식, 조영남,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 등 모두 100여 명이 인터뷰이로 등장할 예정입니다. 제작진은 '이 다큐에 김민기 대표가 학전을 만들게 된 배경, 어렵고 험한 길을 선택해 온 '학전'의 노력과 사회적 의미를 담고자 한다'며 '단순히 학전의 자료를 아카이빙하는 차원을 넘어, 그 정신과 가치를 영원히 기록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제작에 임했다'고 밝혔습니다. 다큐에서 '아카이빙'한 자료에는 그동안 SBS 보도국에서 취재했던 영상들도 있다고 하니, 제가 취재하며 촬영했던 영상들도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이 다큐를 보는 것도 아마 제가 학전과 이별하는 중요한 과정이 될 것 같습니다. 다큐를 통해 학전에 대해 미처 몰랐던 사실도 더 알게 될 것이고, 학전을 더욱 충실하게 '기억'할 수 있게 될 테니까요.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학전을 '기억'함으로써, 학전과 아름답게 이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투병 중인 김민기 대표의 회복을 기원합니다. *지난 1월 골라듣는뉴스룸 커튼콜 202 박학기 이황의 편에서도 학전과 김민기 대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참고해 보셔도 좋겠습니다.
츠지이 노부유키. 지난 주말 한국을 다녀간 일본인 피아니스트의 이름입니다. 노부유키는 그 유명한 반 클라이번 콩쿠르의 우승자입니다. 이 콩쿠르는 가장 최근의 우승자 임윤찬, 그리고 그 이전 대회 우승자 선우예권으로 한국인들에게도 많이 친숙하죠. 2009년 스무 살이 된 노부유키는 이 대회에 참가해 중국인 피아니스트 장 하오천과 공동으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습니다. 당시 준우승은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차지했습니다. 츠지이 노부유키는 이보다 앞서 고교 재학 중이었던 2005년 쇼팽 콩쿠르에도 참가했습니다. 2005년 쇼팽 콩쿠르에선 임동혁 임동민 형제 피아니스트가 공동 3위를 차지하며 한국인 첫 수상 기록을 세웠는데, 노부유키도 비록 최종 결선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최연소로 비평가상을 받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노부유키의 이런 화려한 ‘수상 경력’은 그가 소안구증으로 선천적 시각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그의 음악 자체에 빠져들었다 지난 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노부유키의 솔로 리사이틀. 매니저가 그를 인도해 함께 무대로 나왔습니다. 그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 건반의 위치를 잠시 가늠하고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노부유키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꾸 의식했지만, 점점 음악 그 자체에 빠져들게 되었어요. 그는 유학 경험 없이 일본 내에서만 공부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음감이 뛰어났던 그는 오른손 왼손 따로 녹음된 테이프를 듣고 악보를 통째로 외워 새 곡을 연습했다고 합니다. 그를 가르친 일본인 피아니스트 가와가미 마사히로는 ‘내가 그에게 알려준 것은 악보에 적힌 음이 전부’라고 했죠. ‘악보에 적힌 것들만 알려주면 노부유키가 그걸 마음속에서 진정한 음악으로 빚어낸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빚어낸 노부유키의 음악은 굉장히 개성적이었습니다. 연주자마다 해석이 다른 건 당연한데, 노부유키의 연주는 특히 다르게 들리더라고요. 대범하다고 해야 할까요, 빠른 곡들에서는 힘차고 자신감 넘치는 타건과 속도감이 인상적이었고, 종종 감상적인 느낌으로 연주되는 곡들도 루바토 별로 없이 담백하게 연주했는데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노부유키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합창석까지 꽉 채운 관객들의 열화와 같은 함성과 박수에 굉장히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는데요, 커튼콜 때도 매니저의 인도로 무대 등퇴장을 반복하면서, 앙코르 세 곡을 들려줬습니다. 앙코르 첫 곡으로는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를 들려줬고, 이어 카푸스틴의 에튀드 11번, 그리고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까지였습니다. 그는 그의 방식으로 본다 마지막 앙코르 곡이었던 ‘라 캄파넬라’는 첫 부분을 시작하자마자 객석에서 ‘아~’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습니다. 놀라움과 기대감이 서린 탄성이었겠지요. 템포가 빠를 뿐 아니라 수많은 도약과 트릴이 나오는 이 난곡을, 그는 전혀 힘겨워하지 않는 기색으로, 깔끔하고 멋지게 연주했습니다. 마치 “아직도 내가 건반을 못 본다고 생각해?” 하고 묻는 듯한 연주였어요. 미국과 일본에서 방영된, 노부유키의 이야기를 다룬 ‘Touching the Sound’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노부유키가 종종 ‘본다’ ‘봤다’라고 말한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주변 사람들은 처음에는 시각 장애가 있는 노부유키가 이렇게 말하는 걸 어색하게 여기지만, 점차 그는 설명할 수 없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물을 보고 감각한다는 사실을 믿게 됩니다. ‘소리를 만진다’는 이 다큐멘터리 제목처럼, 그는 온몸의 감각으로 사물을 느끼고 받아들입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노부유키의 어머니가 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정상적(Normal)’이라는 게 뭘 의미하는지 종종 생각해 보곤 합니다. 저는 4월이면 꽃구경을 가곤 했는데, 처음에는 꽃을 볼 수 없는 아이를 그런 곳에 데려가다니,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제 잣대로 아이가 꽃을 볼 수 없다고 단정했지만, 아이는 나름의 방식으로 꽃을 볼 수 있었던 거예요. 아이가 최대한 이 세상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만 하면 그 경험을 함께 공유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런 어머니가 있어서 노부유키가 피아니스트로 대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노부유키는 다큐멘터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모님은 한 번도 피아노를 억지로 시킨 적이 없어요. 늘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게 해 주셨죠. 항상 감사하게 생각해요.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제가 눈이 안 보인다는 이유로 뭔가를 할 수 없을 거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여러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수영, 스키, 등산 같은 활동을 경험할 수 있었죠.” “이겨냈다고 생각해 본 적 없다” 노부유키는 ‘넌 눈이 안 보이니까 이건 할 수 없어’ 같은 말을 듣지 않고 자랐다는 겁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신체적 장애 아니라도 여러 가지 다른 조건 때문에 이것도 안돼, 저것도 안돼, 이런 얘기를 듣거나, 스스로에게 하면서 살고 있지 않은가요. 어쩌면 그러면서 가능성을 부정하고 삶 속에 장애물을 스스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요. 노부유키는 내한공연을 앞두고 한국 기자들과 진행한 인터뷰에서도 줄곧 밝고 긍정적인 답변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 인터뷰에서 나왔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볼까요. Q. 작곡도 하고 있는데, 어떤 방식으로 작곡하는지요? A. 제 안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토대로, 혹은 자연 속을 걷고 바람을 맞으면서 얻는 영감을 제 안에서 이미지화해서 작곡을 하고 있습니다. Q. 눈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당신의 음악, 연주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A. 음악은 장애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렸을 적엔 눈이 안 보이는 것에 대해 왜 이럴까 생각했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표현하고자 하는 것 모두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장애가 있다는 것이 저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아요. Q. 레퍼토리를 익히는 데 더 많은 노력을 쏟아부어야 하는 등 아무래도 많은 다른 연주자들과 동일한 조건에서 활동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고 어떻게 이겨냈는지요? A. “힘든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겨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노부유키의 명쾌한 답변에 큰 깨달음을 얻은 것 같습니다. 그의 답변이 편하게 노력 없이 여기까지 왔다는 뜻은 아닐 겁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세계 무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오랜 시간을 피아노 앞에서 보냈으니까요. 다만 이게 뭘 이겨내고 말고의 문제는 아니라는 겁니다. 행복한 피아니스트 츠지이 노부유키 츠지이 노부유키가 지난 3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하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츠지이 노부유키는 종종 ‘시각장애를 극복한’ 불굴의 피아니스트로 묘사됩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앞을 못 보는 고통 속에서’ ‘피나는 노력으로 극복’ 이런 표현들이 종종 등장하죠. 그런데, 이 모두가 어쩌면 지극히 ‘비장애인’ 입장에 치우친 시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애를 극복한다’는 표현은 국가인권위에서도 사용을 자제해 달라고 권고한 바 있습니다. 이 말 자체가, 장애를 질병이나 일시적 시련처럼 이겨내거나 헤쳐나갈 수 있는 대상으로 오인하게 하고, 장애인에 대한 선입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겁니다. 또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수용해 살아가는 장애인들의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는 표현이 될 여지도 있습니다. 노부유키는 자신의 방식으로 피아노를 느끼고 음악을 합니다. 독주가 아니라 협연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장에서 숨소리에 최대한 집중하고, 리허설을 여러 번 반복하며 다른 사람들과 호흡을 맞춰갑니다. 이렇게 할 수 있게 되기까지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는 ‘장애를 극복'한 음악을 한다기보다는, 자신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음악을 하고 있는 겁니다. 연주하는 내내 노부유키는 굉장히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는 '라 캄파넬라' 연주를 마치고 객석의 환호 속에 다시 무대 인사를 하고, 웃으며 피아노 뚜껑을 닫고 매니저와 함께 퇴장했습니다. 그의 연주를 보고 저도 행복해졌습니다. 그는 ‘기적의 피아니스트’로 종종 불리지만, 저는 그를 ‘행복한 피아니스트’로 부르고 싶어졌습니다. 행복한 피아니스트, 츠지이 노부유키를 다시 한국 무대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서 태국음식 전문 음식점을 새로 발견해서 며칠 전에 가봤습니다. 메뉴를 뒤적이는데, ‘똠양꿍’을 ‘세계 3대 수프 중 하나’라고 설명하고 있더라고요. ‘세계 3대 수프’라는 문구를 참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기억을 되살려 보니 똠양꿍 외에 중국의 샥스핀(상어 지느러미 요리), 프랑스의 ‘부야베스(해물 스튜)’가 ‘세계 3대 수프’였던 것 같아요. 이 ‘세계 3대 수프’는 어디서 나온 말일까요. 누가 이런 말을 처음 썼을까요. 아마도 일본에서 ‘世界三大スープ’라고 썼던 말이 건너온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찾아봐도 정확한 유래는 모르겠더라고요. 저는 똠양꿍을 좋아하긴 하지만 ‘세계 3대 수프’라는 데에는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똠양꿍을 주문해 먹으면서 저는 또 다른 ‘세계 O대’를 떠올렸습니다. 바로 ‘세계 4대 뮤지컬’입니다. ‘세계 4대 뮤지컬’은 ‘캣츠’ ‘오페라의 유령’ ‘레미제라블’ ‘미스 사이공’을 묶어 부르는 말입니다. 한국에서 ‘캣츠’ ‘오페라의 유령’ ‘레미제라블’이 잇따라 개막한 2023년은 ‘세계 4대 뮤지컬‘ 중에 세 작품을 만날 수 있는 특별한 해라는 기사가 나온 적도 있습니다. 이 중 레미제라블은 해를 넘겨 지금도 공연 중이고요. 그렇다면 ‘세계 4대 뮤지컬’은 어디서 나온 말일까요? 누가 정한 것일까요? ‘세계 4대 뮤지컬’은 영미권에서 쓰는 ‘뮤지컬 Big 4’을 번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세계 4대 뮤지컬’과 ‘뮤지컬 Big 4’는 따져 보면 똑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뮤지컬 빅4'에서 '세계 4대 뮤지컬'로 일반적으로 ‘세계 4대 뮤지컬’이라 하면 ‘세계 톱 뮤지컬 4편’ 정도로 받아들여집니다. 실제로 ‘세계 4대 뮤지컬’을 구글 번역에 넣으면 ‘The world’s top 4 musicals’라는 결과가 나옵니다. 그런데 뮤지컬 Big 4는 원래 그런 뜻이 아니고, 메가뮤지컬의 대표작 4편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메가뮤지컬’의 메가(Mega)는 ‘크다’는 뜻의 접두어입니다. 뮤지컬 중심지였던 미국에 1980년대부터 영국산 대형 뮤지컬들이 잇따라 상륙해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이런 작품들을 ‘메가뮤지컬’로 불렀던 게 유래입니다. 메가뮤지컬의 대표 인물은 영국 작곡가 앤드류 로이드 웨버, 프로듀서 카메론 매킨토시입니다. 특히 카메론 매킨토시는 뮤지컬 빅 4로 불리는 네 작품을 모두 프로듀싱했습니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 ‘에비타’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등으로 영국산 뮤지컬의 존재감을 드러냈던 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1980년 프로듀서 카메론 매킨토시와 팀을 이뤄 ‘캣츠’를 발표합니다. ‘캣츠’는 메가뮤지컬의 시조라 할 만한 작품인데요, 매킨토시는 ‘캣츠’가 관객에게 단순한 관람을 넘어 ‘고양이 세계 속에 들어가는 체험’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무대는 원형으로 제작했고, 고양이들이 객석 사이를 오가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다시 손잡은 ‘오페라의 유령’(1986) 역시 웨스트엔드에서 브로드웨이를 넘어 전 세계를 강타했습니다. 카메론 매킨토시 카메론 매킨토시는 또 클로드 미셸 쉔버그(작곡)-알랑 부블릴(작사) 팀과 함께 ‘레미제라블’을 내놓게 됩니다. ‘레미제라블’는 1980년 프랑스에서 처음 무대에 올랐는데, 음반을 접한 매킨토시가 새롭게 제작할 것을 제안했고, 이에 따라 1985년 음악과 대본을 대폭 수정한 버전이 런던에서 처음 공연됐습니다. 프랑스 초연 무대와는 굉장히 많이 달라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초연 무대였습니다. 이후 이 팀은 ‘미스 사이공‘을 런던에서 초연(1989)했고, ‘미스 사이공’ 역시 전 세계적인 흥행작이 되었습니다. 1980년대부터 90년대 브로드웨이를 강타했던 유럽산 메가뮤지컬은 이전의 미국 뮤지컬들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음악이 중심에 있고 대사는 거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오페라로 착각할 정도로 성악 발성이 필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무대에서 헬리콥터가 날아오르는 공연’으로 유명했던 ‘미스 사이공’에서 보듯 ‘스펙터클한 무대를 자랑합니다. 그리고 비극적인 내용이 주를 이뤘는데, 이 역시 기존의 브로드웨이 뮤지컬과는 차별되는 지점이었습니다. ‘뮤지컬은 미국의 것’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던 미국 평론가들은 영국산 대형 뮤지컬들이 브로드웨이로 몰려오기 시작하자 ‘영국의 침공(British Invasion)’이라며 경계하고 외면했습니다. 사실 ‘메가뮤지컬’이라는 말 자체도 처음에는 다소 조롱하는 느낌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작품성은 없고 무작정 크기만 하다’는 뉘앙스를 담았던 거죠. 그래서 브로드웨이에 상륙한 메가뮤지컬에 대한 미국 언론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토니상 같은 주요 시상식에서도 메가뮤지컬을 외면했고요. 하지만 평론가들이 혹평을 내놓든 말든 관객들은 새로운 영국산 뮤지컬들에 열광했습니다. 영국에서 탄생한 메가뮤지컬은 브로드웨이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이를 발판으로 전 세계 곳곳에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메가뮤지컬은 제작 과정을 철저하게 매뉴얼화해서 세계 어디에서 공연이 이뤄지든 동일한 공연을 볼 수 있게 했습니다. 물론 극장과 배우와 언어가 달라지면 완벽하게 똑같을 수는 없겠지만, ‘오리지널’을 최대한 복제한다는 겁니다. 또 출연 배우를 홍보하기보다는 작품 그 자체에 대한 마케팅에 주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전 세계 어디에서 공연해도, 누가 출연해도, 바로 그 작품이니까 보러 오는 관객을 만들겠다는 거죠. 강렬하고 상징적인 이미지가 인상적인 뮤지컬 포스터를 떠올려 보면 금방 이해가 가실 겁니다. ‘오페라의 유령’ 포스터에는 장미와 흰 마스크, ‘캣츠’는 고양이 눈, ‘레미제라블’은 삼색기 바탕 소녀의 모습, ‘미스 사이공’은 태양 앞의 헬리콥터... 세계 어디서 공연하든 포스터 이미지는 똑같습니다. 뮤지컬 OST 음반뿐 아니라, 뮤지컬 대표 이미지를 새긴 티셔츠, 머그컵, 문구 등등 부가상품도 다양하게 만들어 판매했습니다. 역시 전 세계에서 동일한 디자인으로 팔려 나갑니다. 메가뮤지컬은 이렇게 뮤지컬의 글로벌 산업화를 촉진한 1등 공신입니다. 메가뮤지컬이 택했던 라이선스 수출과 마케팅 방식은 뮤지컬 산업의 표준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브로드웨이에서도 메가뮤지컬에 영향받은 작품들이 많이 나왔는데요, ‘미녀와 야수’(1994)로 시작해 ‘라이언 킹(1997)’으로 단숨에 뮤지컬 시장 강자가 된 디즈니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1세기 들어 젊은 창작자들의 재기 발랄한 시도에 작품 소재와 주제도 더 다양해졌고, 메가뮤지컬의 기세가 예전 같지는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브로드웨이에서 최장기 공연이었던 ‘오페라의 유령’이 지난해 35년 만에 막을 내린 것은 메가뮤지컬의 퇴조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느껴집니다. (웨스트엔드에서는 아직 공연 중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세계 여러 곳에서 메가뮤지컬의 라이선스 공연, 투어 공연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개막한 '오페라의 유령'에 이어 '레미제라블'의 한국어 라이선스 공연은 서울뿐 아니라 여러 도시에서 공연되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뮤지컬, 하면 아마 메가뮤지컬의 이미지를 떠올릴 겁니다. 메가뮤지컬의 영향력은 그 정도로 컸습니다. '세계 4대 뮤지컬' 표현을 쓰지 않으려는 이유는 그러니 메가뮤지컬 중 대표작들을 가리키는 ‘뮤지컬 빅 4’가 한국에서 ‘세계 4대 뮤지컬’로 바뀐 사정이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뮤지컬 빅 4’가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알고 나면 이 말이 정확하다고 하긴 어렵습니다. 시대가 바뀌어서 ‘뮤지컬 빅 4’ 자체도 오래전 얘기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네 작품 중에 ‘미스 사이공’은 처진다고 생각합니다. 음악도 좋고 무대, 연출도 스펙터클 하지만,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그러낸 현대판 ‘나비 부인’인 이 뮤지컬은 서구 중심, 남성 중심 시각이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미스 사이공'은 많은 아시아 배우들의 등용문 역할도 해왔지만, 최근 영국에서 아시아 배우들로 구성된 한 극단이 ‘미스 사이공’을 공연하는 극장을 보이콧하겠다는 선언이 나온 적도 있습니다. (▶ 이와 관련해 황정원 작가의 글 '마침내 2023년, 새롭게 쓰인 그 이야기'를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연극 <무제 빌*먹을 미ㅅ 사*공 (untitled f*ck m*ss s**gon)>/ 출처: Royal Exchange Theatre 공식 홈페이지 '세계 4대 뮤지컬’은 여전히 한국에선 공연 홍보물이나 보도자료에서 빠지지 않는 문구이지만, 저는 그럴수록 이 말을 안 쓰려고 애를 씁니다. 이 작품들이 좋지 않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저 '세계 4대 뮤지컬'은 정확한 번역이 아닐뿐더러 이 말을 씀으로써 ‘세계 최고의 뮤지컬 4편’이라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홍보 담당자들이 이 말을 애용하는 건 반대로 이런 인상을 주고 싶기 때문이겠지만요. 저는 ‘세계 4대 뮤지컬’이라는 말을 안 쓰는 것을 넘어서, ‘세계 O대’라는 수사 자체를 되도록이면 쓰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기자 경력이 짧았을 때는 보도자료에 쓰인 ‘세계 O대’라는 문구를 크게 의심하지 않고 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 공연장의 비전 발표 기자회견에서 ‘세계 10대 아트센터’가 목표라는 문구를 보고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세계 10대 아트센터’는 어디인가?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누가 정하는 것인가? 현재 ‘세계 10대 아트센터’는 어디냐고 묻는 제 질문에 뚜렷한 답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취재 경험이 쌓이면서 이런 문구들은 대개 출처가 명확하지 않지만 한국처럼 ‘세계 O대’를 좋아하는 일본에서 온 것으로 짐작되며, 홍보담당자가 자의적으로 ‘세계 O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말들이 한번 매체에서 쓰이기 시작하면 다른 매체로도 확산되고, 이후의 홍보 담당자들도 매체 기사를 인용해 보도자료를 작성하는 관행상,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퍼져나가 굳어버리는 것도 보아왔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세계 O대' 한국인 우승자가 여럿 배출되면서 이제는 ‘상식’처럼 되어버린 ‘세계 3대 음악 콩쿠르’도 정작 클래식 본고장이라는 유럽과 북미에선 쓰지 않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쇼팽 콩쿠르,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를 ‘세계 3대 콩쿠르’로 부릅니다. 이 역시 일본에서 유래된 것으로 짐작됩니다. 세 콩쿠르 모두 역사와 규모, 명성 등의 측면에서 높은 위상을 자랑하는 건 사실이고, ‘세계 3대 콩쿠르‘라는 말 자체가 널리 통용되다 보니 저도 기사에 쓴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쓰더라도 단정적으로 쓰지 않고 ‘세계 3대 콩쿠르로 알려진’ 혹은 ‘이른바 세계 3대 콩쿠르’ 정도로 뉘앙스에 차이를 둡니다. 그래 봤자 남들 보기에 별 차이는 없겠지만 저로서는 신경 쓰는 일입니다. 그런데 차이코프스키 콩쿠르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제음악콩쿠르 세계연맹(WFIMC)에서 퇴출된 뒤엔 아예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위상이 확 떨어진 지금은 ‘세계 3대 콩쿠르’라는 말 자체가 무색해진 셈이니까요. 그래서 지난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바리톤 김태한이 우승했을 때에도 ‘세계 3대 콩쿠르’라는 말 대신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벨기에의 콩쿠르’ 정도로 썼습니다. 최근 저는 오래 전 한 콩쿠르에서 한국인 수상자가 처음 나왔을 때 홍보에 관여했던 모 인사로부터, 당시 어떻게 하면 이 성과를 더 잘 알릴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보도자료에 ‘세계 3대 콩쿠르’라는 카피를 처음 썼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처럼 ‘세계 O대’라는 수사는 많은 경우 홍보와 연관됩니다. 기자들도 기사의 주목도를 높이기 위해 이런 수식어를 쓰는 게 편리할 때도 있습니다만, 저는 너무 많은 ‘세계 O대’에 피로감을 느낍니다. 세계 5대 뮤지컬, 3대 발레단, 3대 오케스트라, 러시아 3대 발레단, 3대 피아노 콩쿠르... 이렇게 ‘세계 O대’ 수사가 난무하는 데에는 한국인들이 순위 매기기에 익숙하고 유명세나 권위를 추종하는 세태도 한몫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모든 ‘세계 O대’가 다 자의적으로 만들어진 홍보용 수사인 것은 아닙니다. 언론이나 평단에서 선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올해의 공연 열 편 혹은 월간 한국연극이 선정한 올해의 연극 베스트 7 같은 거죠. 출처가 명확하고 선정자의 권위가 인정되는 경우는 의미가 있고 참고할 만합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선정자의 주관이 작용하며 절대적인 순위는 아니라는 점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세계 O대’에 대한 기사를 전에도 쓴 적이 있는데, '세계 3대 수프’라는 똠양꿍을 먹다가 다시 생각이 났습니다. 똠양꿍에서 시작한 얘기가 멀리까지 왔습니다만, 돌이켜 보니 저는 ‘세계 O대’라는 수사보다는 자신의 취향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이른바 ‘세계 4대 뮤지컬’ ‘세계 3대 수프’ 아니라도, 좋은 뮤지컬, 맛있는 수프가 넘쳐나니까요. ▶ 관련 기사 - 취재파일 '세계 3대 발레단과 세계 3대 로맨스 소설' - [문화로] 한국에서만 통하는 '세계 3대' *메가뮤지컬과 뮤지컬 산업의 변화가 더 궁금하시면 골라듣는뉴스룸 커튼콜 198회를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뮤지컬의 탄생’ 저자이며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장인 고희경 교수가 출연해 흥미로운 뮤지컬 이야기 나눴습니다.
테너 이인선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제 강점기 동양 최고의 테너라는 호평을 받은 성악가. 오페라 개척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국 오페라의 선구자인 테너 이인선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왜 갑자기 테너 이인선(1907-1960)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요? 지금 이 사람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일 테노레’라는 뮤지컬이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어인 ‘일 테노레(Il Tenore)’는 ‘테너’라는 뜻입니다. '동양 최고의 테너' 이인선은 어떤 사람이었나 이인선은 의사이자 성악가였습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 문과 재학 시절에 미국 선교사로부터 피아노와 성악을 배웠고,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습니다. 의전 졸업 후 황해도 해주에서 병원을 열었지만 성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오케레코드 이철 사장 주선으로 1934년 이탈리아 밀라노 유학길에 오릅니다. 전설적인 테너 티토 스키파(Tito Schipa)가 활약했던 라 스칼라 극장이 있는 곳, 밀라노에 가는 것은 이인선의 꿈이었습니다. 스키파는 유성기 음반 시대, 경성에서도 꽤 알려진 스타였습니다. 이인선은 밀라노에서 스키파의 스승이었던 에밀리오 피콜리(Emilio Piccoli)와 테너 알프레도 체키(Alfredo Cecchi)를 사사했고, 틈틈이 밀라노 왕립의학원에서 의학 공부도 했습니다. 1937년, 밀라노에서 돌아온 이인선은 경성 부민관에서 귀국 독창회를 열었습니다. ‘이 땅에서는 처음 듣는 듯한 놀라운 성량과 세련된 선율에 도취경에 빠진 2천 청중은 자리를 떠날 줄 모르며 박수갈채로 열광적 감탄을 마지 아니하였고….’(조선일보 1937년 5월 22일)라는 기사가 나올 정도로 독창회는 대성공이었습니다. 그는 도쿄와 베이징, 칭다오에서도 독창회를 열어 ‘동양의 스키파’ ‘동양 최고의 테너’라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이탈리아 가곡과 오페라 관련 서적을 펴내며 한국의 오페라 개척에 나섰습니다. 광복 후인 1946년, 역시 성악가였던 동생 이유선과 박승유, 김자경, 송진혁, 김영순 등 제자들과 함께 ‘국제 오페라사’를 창립하고, 1948년 1월, 명동 시공관에서 한국 최초의 오페라, 베르디의 ‘춘희(라 트라비아타)’를 공연합니다. 이인선이 알프레도, 김자경이 비올레타를 노래했죠. 우리 음악사에 남을 역사적인 무대였습니다. 1950년 1월에는 비제의 ‘카르멘’ 총감독과 주역을 맡아 공연했습니다. 1948년 첫 오페라 춘희 포스터 / 출처: 연합뉴스 이인선은 ‘카르멘’ 공연을 마치고 한국전쟁 발발 전인 1950년 4월, 미국 내슈빌종합병원으로 연구차 가는 도중 도쿄와 하와이에 들러 독창회를 열었습니다. 1951년에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디션에 합격했지만 회비 1천 달러 낼 돈이 없어 출연을 연기해야 했습니다. 이후 그는 미국에서 의사 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성악을 놓지 않다가, 1960년 간암으로 타계했습니다. 미국에서 병원을 차리고 돈을 벌어 오페라 운동을 재개하겠다는 그의 꿈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일제 시대에 ‘동양 최고의 테너’로 불렸고, 한국 최초의 오페라 주역이었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디션에 합격했던 테너라니, 실존 인물 이인선의 삶은 그 자체로 드라마틱합니다. 창작자들이라면 탐낼 만한 소재가 될 수 있죠.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 ‘어쩌면 해피엔딩’으로 잘 알려진 작가 박천휴-작곡가 윌 애런슨 콤비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일 테노레’가 탄생했습니다. 일 테노레, 테너 이인선 아니라 윤이선 저는 처음에는 ‘일 테노레’가 이인선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뮤지컬에 어떤 오페라가 등장할지, 실제로 한국 최초 오페라였던 ‘라 트라비아타’가 나올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무대에 오른 뮤지컬 ‘일 테노레’는 제 예상과 달랐습니다. 뮤지컬은 이인선의 삶을 무대에 재현하지 않습니다. ‘일 테노레’에는 의학도였지만 오페라 가수의 꿈을 갖게 되는 윤이선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이인선에서 모티브를 따오긴 했지만 새롭게 창조된 인물이고, 주변 인물들도, 벌어지는 사건들도 모두 허구입니다. 먼저 시놉시스를 볼까요. 항일운동 모임인 '문학회' 멤버들은 점점 심해지는 총독부 검열을 피할 방법을 찾던 중 뜻하지 않게 이탈리아 오페라 공연을 계획합니다. 침략에 맞서 싸우는 베네치아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한 오페라 'I Sognatori-꿈꾸는 자들'이 경성 시민들의 항일 정신을 고취할 것이라 기대하며, 이 낯선 '서양 창극'을 공연하기 위해 뭉치는 사람들. 그 중심엔 자신도 몰랐던 특별한 테너의 목소리를 가진 의대생 윤이선, 지금 경성에서 가장 영민한 리더이자 연출 서진연, 자칫 위험할 정도로 열정적인 독립운동가이자 무대 디자이너 이수한이 있습니다. 하지만 점점 뜻하지 않게 흘러가는 상황 속, 이들의 ‘조선 최초 오페라’는 무사히 공연할 수 있을까요.. 극 중 오페라 '꿈꾸는 자들'은 어떤 작품인가 뮤지컬 일 테노레 (IL TENORE) - '꿈꾸는 자들' 1막 1장 & Aria Ⅱ (부민관 공연 ver)│서경수 / 출처 : OD COMPANY 유튜브 테너가 주인공인 뮤지컬 ‘일 테노레’에는 당연히 오페라가 등장합니다. 베르디의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가 대사로 언급되고, ‘리골레토’ 중 유명 테너 아리아인 ‘여자의 마음‘이 울려 퍼지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 테노레’에서 가장 중요한 오페라는 ‘꿈꾸는 자들’입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베네치아 사람들 이야기인데, 안토니오와 나탈리아라는 캐릭터의 러브 스토리도 나오는 이탈리아 오페라입니다. 그런데 ‘꿈꾸는 자들’은 누가 작곡한 오페라인가요? 처음 들어보는 것 같은데요? 사실 ‘꿈꾸는 자들’이라는 이 오페라는 현실에는 없습니다. ‘일 테노레’ 뮤지컬 속에서만 존재하는 오페라, 이 뮤지컬 창작진이 만들어낸 허구이니까요. 윤이선은 이 오페라 아리아를 우연히 듣고 마음을 빼앗겨 성악을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작곡가 윌 애런슨은 ‘꿈꾸는 자들’의 아리아 두 곡, ‘꿈의 무게’, ‘그리하여, 사랑이여’를 작곡했습니다. 이 오페라는 처음엔 이탈리아어로 불리지만, 우리말로 번역되어 ‘조선 최초 오페라’로 무대에 오르게 됩니다. 오페라 아리아 두 곡은 계속 다양하게 변주되며 이 뮤지컬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오페라 속 연인 안토니오와 나탈리아는 윤이선과 서진연의 관계로 연결됩니다. 암흑 같은 현실 속에 미래를 꿈꾼 젊은이들 오페라 제목이 ‘꿈꾸는 자들’인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소심한 의학도였던 윤이선은 오페라를 만난 후 자신의 목소리를 찾고, 오페라 가수라는 꿈에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붓습니다. 독립운동가 서진연과 이수한은 이 오페라가 애국심을 고취시켜 조국의 독립을 앞당기는 데 기여하기를 바라며 공연 제작에 참여합니다. 윤이선의 성악 선생으로 오페라 지휘를 맡는 베커 여사, 다양한 배경을 지닌 연주자들도 각자의 꿈이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바로 ‘꿈꾸는 자들’입니다. 이 뮤지컬은 결국 ‘현실이 암흑 같을수록 더 밝은 미래의 새로운 세상을 꿈꿨고, 우리가 애쓰면 그만큼 세상이 나아질 거라 믿었던, 나라를 빼앗겼지만 꿈은 빼앗기지 않았던’, 100년 전 이 땅을 살았던 젊은이들의 이야기입니다. 박천휴 작가는 ‘극도로 화려한 예술인 오페라와, 비극적이고 어두운 역사인 일제 강점기의 대비를 통해, 인생의 고통조차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려 애쓰며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이 공연의 무대는 스토리의 큰 줄기인 독립운동과 오페라가 모두 앞이 아닌 뒤에서, 단 한순간을 위해 준비한다는 공통점에 착안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무대 조명이 환하게 켜지는 그 순간을 위해 어두운 백스테이지에 일하는 사람들. 독립운동 거사도 이와 비슷합니다. '일 테노레'는 '오페라의 유령'과 닮았다 그런데 저는 ‘일 테노레를 보면서 문득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연상하게 되었습니다. 두 작품의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오페라를 하는 사람들 이야기라는 점, 오페라를 작품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많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일 테노레’는 ‘꿈꾸는 자들’을 조선 최초 오페라로 공연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니만큼, 오페라 공연을 준비하거나 공연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오페라의 유령’도 마찬가집니다. ‘유령’은 파리 오페라하우스 지하에 사는 작곡가이고, 그가 사랑하는 소프라노 크리스틴, 크리스틴의 약혼자 라울이 등장합니다. 역시 오페라 공연을 준비하고, 오페라를 공연하는 장면이 계속 나옵니다. ‘오페라의 유령’ 극중극으로 등장하는 오페라들은 ‘한니발’ ‘일 무토’ ‘돈 주앙의 승리’입니다. ‘일 테노레’의 ‘꿈꾸는 자들’이 그렇듯, 모두 실존 오페라가 아니라 ‘오페라의 유령’의 작곡가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쓴 허구의 작품입니다. ‘피가로의 결혼’이나 ‘박쥐’ 같은 기존 오페라를 연상하게 하는 장면들도 있는데요, 이 극 중 오페라들은 단순히 배경으로만 등장하지 않고, 사건 전개나 등장인물의 심리를 암시하는 역할도 합니다. 특히 유령이 직접 작곡하는 오페라로 설정된 ‘돈 주앙의 승리’는 ‘오페라의 유령’의 중반 이후 전개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죠. 유령은 이 오페라에 크리스틴을 캐스팅하고, 리허설을 지휘하고, 급기야 자신이 직접 무대에 올라 크리스틴과의 사랑을 이루려고 합니다. ‘오페라의 유령’의 극 중 오페라 ‘돈 주앙의 승리’는 ‘일 테노레’의 극 중 오페라 ‘꿈꾸는 사람들’처럼, 공연의 중심에 놓입니다. ‘오페라의 유령’은 극 중 오페라가 계속 등장하고 제목에 ‘오페라’가 들어있기도 해서, 실제로 오페라로 오해받을 때도 있습니다. 오페라 강의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한테 한 단체가 강의 요청하면서 ‘오페라의 유령’으로 해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일 테노레’도 이탈리아어를 제목에 써서 어쩐지 오페라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지금 예술의전당 외벽에 걸린 ‘일 테노레’ 광고물을 보고 오페라인 줄 알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뮤지컬과 오페라는 ‘음악극’ 형식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장르입니다. 뮤지컬은 현대에 등장한 비교적 젊은 공연 장르입니다. 오페라는 전문 성악 발성을 공부한 오페라 가수들이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고 공연하지만, 뮤지컬은 ‘배우’들이 마이크를 사용해 공연합니다. 일반적으로 오페라는 출연자를 ‘가수’라 하고, 뮤지컬은 ‘배우’라고 하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 오페라는 좀 더 음악이 중심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 테노레'가 오페라였다면 만약 ‘일 테노레’가 정말 오페라였다면? 테너 이인선 이야기로 오페라를 만들었다면? ‘이인선 탄생 혹은 서거 **주년 기념 창작 오페라 일 테노레’를 상상해 봅니다. ‘한국 오페라의 개척자’라는 이름의 무게 때문이라도, 오페라로 만들었다면 이 뮤지컬에서처럼 자유롭게 허구를 창작하는 데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을 겁니다. 아마도 고인의 삶 중 몇몇 장면들을 그려내면서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방향으로 만들어졌겠지요. 그것도 물론 의미가 있겠지만, 뮤지컬 ‘일 테노레’처럼 많은 관객을 만나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여러분, 난 실패했습니다. 내 인생의 의미라 생각했던 오페라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값비싼 흥밋거리도 못 되고, 난 평생 어떤 대단한 의미도 찾지 못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노년의 ‘오페라 가수’ 윤이선이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며 하는 독백 중 한 대목입니다. 짧은 언급이지만 이 말은 저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습니다. 윤이선처럼 오페라를 인생의 의미로 삼는 사람들, 오페라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지만, 오페라는 폭넓은 대중의 관심을 받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저는 뮤지컬도 오페라도 좋아하지만, 이 대사는 왜 테너 이인선 이야기가 지금, 오페라 아닌 뮤지컬로 만들어졌는지 알려주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뮤지컬은 뭐든 먹어치운다' 저는 ‘일 테노레’를 보면서 새삼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매력과 역동성을 실감했습니다. 뮤지컬은 정말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는, 커다란 용광로 같은 장르입니다. 그러고 보니 판소리가 소재이고 소리꾼이 등장하는 뮤지컬 ‘서편제’를 봤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오페라와 판소리뿐인가요, 힙합, 트로트, 케이팝까지, 모두 뮤지컬이라는 그릇에 담을 수 있습니다. ‘뮤지컬의 탄생’ 저자도 이런 수용성과 잡식성이 바로 뮤지컬 탄생과 발전의 비결이었다며 이렇게 썼습니다. 뮤지컬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먹어 치웠다. 장터의 저질스러운 요구뿐 아니라 오페라의 기법, 연극적인 실험도 마구 끌어들였다. 음악의 범주도 넓었다. 서아프리카흑인 음악부터 유럽의 오페라까지, 가스펠송부터 로큰롤, 힙합까지 거침없이 소화해 냈다. 술집에서 도시 노동자들이 막무가내로 즐기던 뮤직홀과 캬바레 음악부터 구노의 오페라까지 담아낼 줄 아는 무한한 수용성과 잡식성이 뮤지컬 탄생의 비밀이다. 뮤지컬의 수용성과 잡식성이 지향하는 곳은 변하는 세상과 새로운 관객이다. - 고희경, 뮤지컬의 탄생(p19-20) 1930년대 경성, 우리 이야기를 하는 뮤지컬 지금까지 대극장 창작 뮤지컬들은 외국에서 외국인 등장인물들이 펼치는 이야기인 경우가 많아서, 얼핏 보면 해외 작품과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창작 뮤지컬인데 왜 외국 이야기를 하나 싶지만, 한국 뮤지컬 시장은 대형 해외 라이선스 공연으로 커졌고 이런 작품들을 통해 뮤지컬과 친숙해진 관객이 많았기에, 창작 뮤지컬도 (특히 대극장 작품이라면) 이른바 '빠다 냄새나는' 작품들이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일 테노레’는 우리 이야기입니다. 조선 최초의 오페라 테너라는 신선한 소재를 다루면서 오페라를 작품 전체로 끌어들여, 기존의 많은 대극장 창작 뮤지컬과는 달라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뮤지컬은 항상 변하는 세상 새로운 관객을 지향해 왔으니까요. 2018년 낭독 공연으로 시작해 이번에 초연 무대에 오른 '일 테노레'는 탄탄한 완성도와 작품성, 홍광호·박은태·서경수 등 배우들의 열연이 어우러져, 대극장 창작 뮤지컬 ‘수작’이 탄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일 테노레’의 스토리는 허구이지만, 일제 강점기에 온갖 난관을 극복하며 오페라를 꿈꿨던 이인선이라는 테너가 실존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작품에 더욱 큰 호소력을 부여합니다. 뮤지컬 속에 생생하게 그려지는 윤이선의 오페라에 대한 열망, 식민지 청년으로서의 고민은 실존인물 이인선을 상상해 보게 합니다. 이 뮤지컬은 많은 대중이 모르고 있었던 한국 오페라 선각자의 존재를 역사책에서 끄집어내 알렸습니다. ‘일 테노레’를 본 덕분에 저도 테너 이인선에 관한 자료들을 새롭게 찾아보고, 그가 느꼈을 시대의 어둠 속 꿈의 무게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뮤지컬 ‘일 테노레’는 이인선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도 이인선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마스트미디어 제공)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얘깁니다. 1956년 폴란드 태생. 1975년 18살의 나이로 쇼팽 콩쿠르에 우승하면서 데뷔한 이래, 쇼팽 외에도 다양한 레퍼토리에서 완벽에 가까운 연주를 들려주며 지금까지 세계 최고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지메르만은 완벽주의자이며 까탈스러운 면모로 유명합니다. 요즘은 클래식 음악회에서도 커튼콜 때는 사진 촬영을 허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지메르만의 연주회라면 예외입니다. 사진 촬영 녹음 녹화 모두 절대 금지입니다. 2003년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첫 내한공연에선 무대 천장에 설치된 마이크를 보고 녹음한다고 오해해 직접 마이크 줄을 자르려고 해서 공연장 직원들이 기절초풍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2013년 독일에서 연주할 때는 한 관객이 카메라폰으로 찍고 있는 걸 발견하고 공연을 중단한 적도 있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함께 레스피기 소나타를 녹음할 때 피아노 위치를 10번이나 바꾼 것도 유명한 일화입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음향이 어우러지는 최상의 위치를 찾기 위해 그랬다는데, 정경화는 녹음을 마치고 그야말로 녹초가 되었다고 하죠. 지메르만, 피아니스트이자 엔지니어? 그랜드 피아노에서 액션 꺼내는 영상 (출처 : 유튜브 Upcycle Piano Craft) 지메르만의 까탈스러움은 자신이 연주하는 악기, 피아노에 관해서는 최고 수준입니다. 다른 악기 연주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악기를 갖고 다니면서 연주하지만, 피아니스트는 보통 그 공연장에 있는 피아노를 연주합니다. 피아노는 부피도 무게도, 갖고 다니기엔 너무나 불편한 악기이니까요. 그런데 지메르만은 피아노를 갖고 다닙니다. 피아노를 통째로 가져가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피아노 건반과 액션(건반과 연결되어 피아노의 현을 때리는 장치)은 갖고 갑니다. *공연장에서는 보통 ‘콘서트 그랜드’로 불리는 대형 그랜드 피아노를 사용합니다. 야마하, 파지올리, 가와이, 벡스타인 등 여러 브랜드가 있지만,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가장 많이 사용합니다. 스타인웨이의 ‘콘서트 그랜드 D-274’라는 모델은 신품 정가가 2억 5천만 원, 길이 274cm, 폭 156cm, 무게 480킬로그램에 이릅니다. 스위스 바젤에 거주하는 지메르만은 비행기 타는 걸 싫어해서 연주 여행도 웬만하면 차편으로 다닙니다. 주로 목재로 만들어진 피아노는 온도와 습도에 민감하죠. 비행기를 이용하면 피아노는 화물칸에 실어야 하는데 화물칸의 극히 낮은 온도가 피아노에 안 좋은 영향을 준다는 겁니다. 그는 피아노를 싣고 내리기 편하게 개조한 전용 밴을 갖고 있는데, 공연이 끝나면 바로 커다란 피아노 몸체를 해체해 차에 싣고 밤새 다음 목적지로 달립니다. 운전수를 따로 고용하지만 자신이 직접 운전할 때도 많습니다. 피아노는 복잡한 '기계장치'이기도 합니다. 지메르만은 어린 시절 이미 건반을 직접 제작해 본 경험이 있을 정도로 피아노의 '메커니즘'에 통달했습니다. 1970년대 초반, 그가 자란 폴란드 남부 지역에선 피아노 부품을 만들거나 수리하기가 쉽지 않았고, 그런 기술을 익힌 덕분에 부수입도 올릴 수 있었다고 하네요. 그 자신이 피아니스트이면서 테크니션 혹은 엔지니어이기도 했던 겁니다. 지메르만이 연주하는 곳에는 전문 조율사가 동행하지만, 지메르만 자신도 직접 피아노를 해체, 조립하고 조율합니다. 그는 각종 공구를 사용해 자신이 연주할 공연장의 음향 특성, 그리고 연주할 곡의 특성에 따라 피아노를 정교하게 조정합니다. 한국에 공수해 온 '스타인웨이 파브리니' 지메르만이 연주한 파브리니(Fabbrini) 지메르만의 이번 한국 공연에는 피아노 한 대와 건반 액션 한 세트가 왔습니다. 지난번 한국 공연에는 건반 액션만 가져와서 롯데콘서트홀이 보유한 스타인웨이 피아노에 장착해 썼지만, 이번에는 '스타인웨이 파브리니' 피아노 한 대를 통째로 공수해 왔습니다. 어차피 건반 액션은 가져오니까, 몸체가 될 피아노는 한국에 있는 스타인웨이 피아노 아무거나 써도 되는 거 아닌가 했는데, 그것도 맞는 것 안 맞는 것이 있어서 까다롭다고 하네요. '파브리니(Fabbrini)'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피아노 그룹 이름입니다. 3대째 피아노 조율과 수리, 개조에 종사하는 장인 가문이고 피아노 딜러이기도 하죠. 스타인웨이 파브리니는 스타인웨이 피아노 중에서도 파브리니의 손길이 닿은 제품인데, 자동차 성능을 끌어올리기 위해 하는 다양한 작업들을 '자동차 튜닝'이라고 하는 것처럼 파브리니도 스타인웨이에 그런 작업을 해서 특별하게 만들어낸 피아노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지메르만뿐 아니라 스타인웨이 파브리니를 선호하는 피아니스트들이 많은데요, 마우리치오 폴리니 같은 경우는 연주용 피아노로 오직 파브리니만 고집해서 전용 파브리노 피아노가 있습니다. 폴리니 역시 피아노를 연주 여행에 갖고 다닙니다. 파브리니처럼 스타인웨이에 이름을 덧붙인 브랜드가 또 있는데요, 스타인웨이 파사도리입니다. 파사도리(Passadori) 역시 이탈리아의 유서 깊은 피아노 장인 가문입니다. *부소니 콩쿠르 우승자인 피아니스트 박재홍이 콩쿠르에서 연주했던 피아노와 '파사도리 선생님' 이야기도 흥미진진합니다. ‘내 친구 에드워드, 퍼디난드, 헨리, 비앙카… 실은 피아노 이름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쓴 칼럼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스타인웨이 파브리니 운반하기 (마스트미디어 제공) 이 스타인웨이 파브리니는 지메르만이 지난해 독일 공연에서 선택해 연주한 피아노였는데요, 내한공연을 열흘 앞두고 항공편으로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피아노는 해체한 상태로 상자에 넣어 비행기 화물칸에 싣습니다. 낮은 온도의 화물칸에 실려왔기에 넉넉한 적응 기간이 필요했습니다. 이 피아노는 지메르만이 머물렀던 경남 밀양의 한 산속 펜션으로 옮겨졌습니다. 지메르만은 지난해 11월 3일부터 12월 16일까지 10회의 일본 공연 일정을 마치고 한국에 왔습니다. 일본엔 지메르만이 종종 쓰던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있어 건반 액션만 가져갔는데요, 그는 건반 액션을 비행기 화물칸에 넣기 싫어서 배멀미를 감수하고 배편으로 한국에 왔습니다. 내한공연 일정은 그래서 지난해 12월 27일 부산에서 시작해, 대전 대구 서울로 올라오도록 짜였습니다. 피아노만 충족되면 다른 건 상관없어 해체되어 들어온 피아노를 다시 조립하고, 조율하는 것은 연주 여행에 동행한 파브리니 소속 조율사뿐 아니라 지메르만의 일이기도 합니다. 지메르만은 공연 전까지 밀양의 펜션에서 머무르며 피아노와 씨름했는데, 여기엔 공연에서 연주할 곡을 연습하는 건 물론이고 원하는 소리를 낼 수 있도록 피아노를 완벽한 상태로 만들어놓는 일도 포함됩니다. 피아노를 공연장으로 이동시키려면 해체와 조립 과정이 반복되는데, 공연장에 아침 일찍 도착해 피아노를 다시 조립하고 조율할 때는 자신과 조율사 외에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게 합니다. 내한공연 주최사인 마스트미디어 김용관 대표는 '지메르만은 피아노와 관련된 요구만 충족되면 숙소나 식사 같은 건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피아노만 넣어주면 어디서나 잘 자고 아무거나 잘 먹는다는 겁니다. 2022년 내한공연 때는 7일간의 자가 격리 기간 동안, '피아노와 함께' 숙소에 틀어박혀 지냈습니다. 배달 치킨 메뉴를 10회 가까이 주문해 먹을 정도로 좋아했다고 하죠. 그리고 피아노를 실은 밴을 직접 운전해 한국의 고속도로를 누볐습니다. 이번 내한에서는 밀양 숙소를 거점으로 공연이 열린 부산과 대전, 대구, 서울을 오갔습니다. 이번에도 그는 밴을 직접 운전해 이동했는데요, 기사가 있어도 옆에 앉혀두고 자신이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고 합니다. '공연을 하면 아드레날린이 많이 분출돼, 운전을 하면서 진정시켜야 한다'고 했다네요. 식사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돈가스, 라면 같은 걸로 때워도 오케이였고요. 런던심포니 창고에 피아노와 함께 격리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쓸었던 2020년,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녹음했던 때의 일화도 인상적입니다. 당시 지메르만은 락다운 상태의 런던에 도착해, 여러 대의 피아노, 건반 액션 세트들과 함께 런던 심포니 창고에 들어가 격리 기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창고에서 지내면서 여러 대의 피아노를 다섯 곡의 피아노 협주곡 각각에 맞는 상태로 '커스터마이징'했습니다. 녹음이 시작된 후에도 지메르만은 해머를 이 건반에서 저 건반으로 옮겨보고, 때로는 건반에 톱질까지 하면서 피아노와 씨름하느라 밤을 새기도 했습니다. 모두 가장 완벽한 소리를 얻어내기 위한 집요한 노력이었던 거죠. 지메르만은 2021년 ‘Pianist' 매거진과 한 인터뷰에서 '정말 좋은 경험이었지만 거의 한 달을 머무르면서 이 많은 피아노들의 수준을 유지하는 게 어려웠다'고 했습니다. 또 '밤에 내가 피아노로 50년 동안 익힌 사운드와 온갖 트릭을 시험하는 광경을 본다면 믿을 수 없을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지메르만이 왜 피아노를 갖고 다니냐는 질문에 대해 답했던 인터뷰가 있어서 옮겨와 봅니다. ▶ 2017년 7월 연합뉴스 인터뷰 "플루티스트에겐 왜 본인 악기를 들고 다니는지 묻지 않으면서 왜 피아니스트들에게만 같은 질문을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좀 더 진지하게 답변을 해보자면, 제가 언제나 피아노를 직접 갖고 이동하진 않습니다.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 탄생한 작품들을 연주할 때만 제 피아노를 가져갑니다. 예를 들어 요즘 연주하고 있는 번스타인(1918~1990) 작품들은 지금의 피아노로 연주할 목적으로 쓰인 곡들이라 굳이 제 피아노를 준비하지 않습니다. 쇼팽, 슈베르트, 베토벤, 브람스 같은 작곡가 시대의 피아노와 지금의 스타인웨이 피아노는 완전히 다르므로 악기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까탈스러움이 최고를 만든다 유튜브 Deutsche Grammophon - DG 채널 화면 캡처 지메르만의 내한공연을 앞두고 주최 측은 관객들에게 정숙 관람, 촬영 금지를 다른 때보다 더 특별히 신신당부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공연 시작 전에는 '초긴장 모드'였습니다. 객석에서 소음이라도 나면, 어디서 벨소리라도 울리면 그냥 나가버리는 거 아닌가? 우리 모두 꼼짝 않고 '시체 관극'해야 하는 건가? 했었습니다. 그런데 공연이 시작되자, 일부러 그러려고 하지 않더라도 숨을 죽이고 무대에 초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만큼 연주가 좋았으니까요. 게다가 지메르만은 무대 위에서 까탈스럽기는커녕 유머 넘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요, 첫 곡이 끝나자 자신이 먼저 기침을 하고는 객석에도 마음껏 기침하라는 듯 손짓해서 객석에 '기침 떼창'과 함께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고요, 더 이상의 연주는 힘들다는 듯 지쳐 쓰러지는 동작을 해 보이고 들어가더니 다시 나와서 앙코르 연주를 더 선사했습니다. 지메르만이 연주를 마치고 피아노를 툭 치고 들어가는데, 마치 '수고했다'며 동료의 등을 두드리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이 스타인웨이 파브리니 피아노는 한국 다음 중국으로 이어진 지메르만의 연주 여행에 동행했습니다. 중국 투어가 끝나고 나면 이 피아노는 다시 한국에 돌아옵니다. 앞으로 지메르만이 공연하러 한국에 올 때마다 그의 '동료'가 될 예정입니다.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까탈스러움'은 최고의 연주를 만들어내는 힘이었습니다. 자신이 연주하는 피아노라는 악기를 속속들이 알고, 최고의 소리를 만들기 위해 칠순을 앞둔 지금도 쉬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피아노를 갈고 닦고, 자신을 갈고 닦습니다. 그의 '완벽주의'에 존경심이 생깁니다. 지메르만의 '까탈스러움' 덕분에 공연 커튼콜 사진 하나 없지만, 공연 시작 전에 찍은 무대 위 피아노 사진 한 장은 남았습니다. 그의 손길이 닿았던 스타인웨이 파브리니. 지메르만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그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