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실 선임기자입니다. 정치부 기자와 파리 특파원 거쳐 ,국제부 유럽팀장, 뉴미디어 뉴스팀장, 정책문화부장 지냈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와인을 제대로 배워보겠다며 마음먹은 지 16년 만에, 드디어 와인 학원 강의실에 앉게 됐습니다. 저와는 달리 젊은(어린?)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와인'이라고 하면 대부분 나이든 사람들이 즐기는 것이고, 배우려 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내가 '물을 흐리는 사람'이 된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젊은 친구들이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앉아 있던 겁니다. 파리 특파원을 마친 뒤, 은퇴 후에는 프랑스의 와인 스쿨에 와서 공부해 보고 싶다는 꿈을 품고 서울로 들어왔습니다. 시간은 너무나 빨리 흘렀습니다. 아직 기자 생활 마무리까지는 좀 남았지만, 굳이 은퇴를 기다리지 않아도, 굳이 프랑스를 가지 않아도 먼저 시작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했고, 결국 서울에서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겁니다. (좌) 수업 장면, (우) 교재 영국에 본원을 두고 있는 세계적인 와인 인증기관(WSET: Wine & Spirit Education Trust)의 서울 분원에 등록을 하고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WSET 과정 레벨 1, 2, 3을 듣기로 했습니다. 파리 특파원 시절, 와인을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하면서 내가 마실 와인을 사기 위해 와인 라벨 공부도 하고, 프랑스 전역을 다니며 와인 산지도 가봤던 터라 굳이 <레벨 1>부터 수업을 들어야 하나 했는데, 이 학원은 <레벨 2>부터 시작할 수가 없었습니다. 수업 시간마다 4가지에서 6가지 정도의 와인 시음을 하는데, 시음 테스트 훈련을 위해서 1부터 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레벨 1, 2 통합 과정부터 듣기로 했습니다. 나중에 막상 시험을 보니 오히려 <레벨 1>이 더 어려웠습니다. <레벨 2>는 'Pass with Distinction: 우수 합격, A 학점'으로 통과했는데, <레벨1>은 그냥 'Pass'를 받는 데 그쳤으니까요. 레벨 2 합격증 오히려 쉽다고 생각한 레벨 1이 "시험"이라는 과정을 통과하는 것은 더 어려웠습니다. WSET 자격증은 레벨 4까지 있는데, 한국에서는 레벨 3까지 획득할 수 있고, 레벨 4는 학위 과정으로 영국 본원이나, 홍콩, 호주 등지에서 취득할 수 있습니다. 학위 과정인 만큼 최소 2년 반의 수업이 필요합니다. 영국 본원 학위 과정 졸업식. 출처 : WSET Global SNS WSET와 CMS 무엇이 다른가? 제가 와인 자격증 코스에 등록했다고 하니 지인들이 그럼 소믈리에가 되는 거냐고 묻던데요. WSET는 소믈리에가 아니라 와인 전문가 자격증을 공부하는 과정입니다. 와인업계 전반에서 일할 수 있는, 가장 널리 쓰일 수 있는 자격증이라고 합니다. 포도밭 관리, 와인 양조 등을 중점적으로 배워 이 와인이 왜 좋은 와인인지, 왜 비싸게 팔리는지 등을 공부합니다. 와인 라벨을 보고 시음을 통해, 이 와인이 어떤 와인인지, 어떤 품종으로 만들어졌는지,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그 품종으로 만들면 어떤 맛이 나는지, 그 지역에서 만들어지면 어떤 특성이 있는지, 어떤 양조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졌는지, 그런 과정을 거치면 와인 맛에는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왜 비싸게 팔리는지 등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반면 CMS(Court of Master Sommelier)는 소믈리에가 되려는 사람들이 준비합니다. 와인 서빙과 음식 페어링을 중점적으로 배우게 되는 거죠. 우리가 식당에서 만날 수 있는 소믈리에들은 음식에 맞는 와인을 권해 주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시험 난이도는 WSET보다 더 높다고 하네요. 시험도 영어로 보기 때문에, 거의 원어민과 비슷한 정도의 영어 실력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합니다. WSET 과정은 한국에서는 한국어로 수업을 듣고 시험을 볼 수 있습니다. CMS 수료자 대회. 출처 : WineVision 홈페이지 제가 선택한 WSET 과정은 1, 2, 3단계를 다 하려면, 단계별로 시험을 보면서 수업 듣는 데만 4~5개월 정도 걸리는 거 같습니다. 수업은 1회 3시간 정도, 주 2회로 돼 있습니다. 시음 테스트와 같이 합니다. 온라인 수업도 가능합니다. 온라인의 경우 시음 키트를 배송받아서 같이 답을 맞춰 보는 형식으로 합니다. 지방에 살거나, 수업 시간에 학원에 오기 힘들 경우 유용한데, 아무래도 시음 테스트는 학원에서 같이 하면서 피드백을 받는 게 요령을 터득하는 데 좋은 것 같습니다. 시음 테스트 요령을 익힌다는 측면에서 수업도 1, 2, 3단계를 듣는 것이 좋은 거 같습니다. 제 경우에도 와인을 비교적 많이 마셨지만, (파리 특파원 시절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했으니, 20년 정도 마신 셈입니다.) 와인에 대해 설명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처음입니다. 그동안에는 맛있는 와인과 맛없는 와인, 나의 예산에 맞춰 가성비 좋은 와인, 이 정도가 제가 생각하는 와인 분류였으니까요. 시음 수업 장면. 출처 : WineVision 홈페이지 WSET, 무엇을 배우나? 이론 시험을 위해서는 와인 생산지의 기후와 토양, 와인 품종 등을 공부하면서 왜 이런 와인이 만들어지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때문에 암기가 기본입니다. 물론 이해가 안 되면 암기도 안 되지요. 와인 산지 지도를 머릿속에 기본으로 넣고, 여기에 제대로 발음하기도 힘든 포도 품종과 지명 암기를 기계적으로 해야 합니다. 제 경우에는 그래도 제일 만만한 곳이 프랑스이고, 나머지 구대륙 이탈리아와 스페인 정도까지는 대략의 지도와 기후가 머릿속에 그려지긴 했지만, 신대륙인 미국, 아르헨티나, 칠레, 남아공, 호주 등은 처음 듣는 지명이 대부분이었고, 그 지역의 기후 등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이해하고 암기하려고 하니 정말 힘들었습니다. 저는 1, 2단계 시험을 통과한 뒤, 3단계 시험을 보기 위해서 한 달 정도 집중적으로 공부했습니다. 처음에는 예상 문제를 보고 책을 찾아가며 답안을 작성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결국은 반복 학습밖에 없지요. 학창 시절로 돌아가 암기 과목을 공부하는 것처럼 외워야 했습니다. 저는 지난해 9월쯤 수업을 듣기 시작해서, 올해 2월쯤 수업을 다 끝내고 3월 중순에 레벨 3 시험을 봤습니다. 그전에 레벨 1, 2를 통과했고요. 수업을 더 빨리 끝낼 수도 있었는데, 회사를 다니다 보니, 수업을 빠지면 보충하고 그러느라 좀 늦어졌습니다. 레벨 3 시험은 시음 테스트를 포함해, 객관식 100문제, 주관식 4문제(100점 만점)였습니다. 3시간 정도 시험을 봤습니다. 주관식이 어려웠지요. 길게 답을 써야 하니까요. 모르면 아예 쓸 수가 없는 겁니다. 연필로 답안을 작성해야 해서 연필도 사고, 답안 작성하는 연습도 해봤습니다. 학창 시절 이후 처음입니다. 컴퓨터만 쓰다가 연필로 답을 쓰려니 팔도 아프고, 컴퓨터 작업처럼 수정이 쉽지 않아서 머릿속에 잘 정리한 뒤 답을 써야 했습니다. 영국 본원으로 답안지를 보내서 채점하는데 결과가 나오는 데 석 달쯤 걸린다고 하네요. 3단계 시험을 통과하면 학위 과정인 4단계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 과정까지 할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일단 국내에서 할 수 없으니 쉽지 않습니다. 대신 국내에서는 지역별 전문가 과정을 따로 할 수도 있습니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저는 파리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프랑스 와인을 많이 접해본 터라, 프렌치 스콜라 과정에 도전해 보려고 합니다. 수업은 4회, 한 번에 3시간씩 듣고 시험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번에는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시음 테스트 연습 과정에 대해 써보려고 합니다. 디자인 : 안준석
최근 우연한 기회에 남프랑스 와인을 만나게 됐습니다.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와인인데…’ 하면서 라벨을 자세히 보니, 2년 전 갔던 프랑스 남부의 아름다운 마을 루시용(Roussillon)에서 온 와인이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고 하늘길이 열리자마자, 해외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어디를 갈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6월이라는 시기를 고려해, 프로방스의 보랏빛 라벤더와 니스 해변을 보자면서 떠난 길이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지역일 만큼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지만, 코로나가 끝난 뒤 첫 여행이라는 해방감 덕분에 눈에 보이는 모든 풍경이 그저 아름답기만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았던 ‘붉은 황토 마을’ 루시용의 와인을 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겁니다. 알퐁스 도데의 소설 ‘별’의 무대가 됐던 뤼브롱 산 루시용은 프로방스 알프스 꼬트 다쥐르(Provence-Alpes-Cote d’Azur) 지방의 뤼브롱(Luberon) 산맥을 끼고 있습니다. 루시용으로 가는 길에 이어지는 뤼브롱 산의 경치를 보면서 저는 알퐁스 도데의 소설 ’별’을 떠올렸습니다. 양치는 목동과 주인집 소녀의 순박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의 배경이 바로 뤼브롱 산입니다. “내가 뤼브롱 산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라는 문장으로 이 소설은 시작되죠. 뤼브롱 산 주변에는 프랑스 정부가 정한 ‘아름다운 마을’들이 몇 개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루시용’입니다. 우리 일행은 저녁 무렵에 루시용에 도착했는데, 마을의 명물인 붉은 황토 절벽이 석양을 받아 붉은색에서 황금색으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그 장관에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 절벽을 바라보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기 위해 와인을 주문했습니다. 남프랑스는 별로 유명한 와인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던 터라, 와인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웨이터는 ‘이 와인을 모르냐’면서 자랑스럽게 설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영화 ‘어느 멋진 순간(A Good Year)’에 나왔던 와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말로는 ‘어느 멋진 순간’으로 번역됐지만 원제 ’A Good Year’는 와인이 잘된 해, 즉 좋은 빈티지를 뜻하는 말로 이 영화가 와인을 소재로 한 영화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6년에 개봉됐는데, 저는 당시 특파원으로 파리에 있던 시절이라 영화를 보지 못했습니다. 웨이터는 러셀 크로우와 마리옹 꼬띠아르가 주연했고, 이 마을을 배경으로 찍었다면서, 거기에 나온 와인이라는 설명을 들려줬습니다. 루시용에서 맛본 화이트 와인 6월 말인데 남프랑스는 엄청나게 더웠고, 관광을 마치고 살짝 지친 저녁 무렵에 시원한 화이트 와인이 얼마나 맛있던지요. 별로 비싸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눈앞에 보이는 붉은 절벽은 다른 안주가 필요 없을 만큼 황홀했습니다. 이 화이트 와인은 우리가 잘 아는 샤르도네도 쇼비뇽 블랑도 아닌 다른 품종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남프랑스처럼 더운 곳에서는 샤르도네나 쇼비뇽 블랑이 잘 자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이곳에서 많이 재배되는 루산(roussanne), 마르산(marsanne), 그르나슈 블랑(grenache blanc), 그리고 프로방스 토착 품종인 클레레트(clairette) 등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여러 가지가 블렌딩돼 복합적인 맛이었는데, 청사과나 레몬 같은 산도가 높은 과일보다는 복숭아 같이 단향이 나 묵직하면서, 꽃향도 나는 섬세한 느낌이었습니다. 한국서 맛본 루시용의 레드 와인 그런데 한국에서 이번에는 루시용 지방의 레드 와인을 만나게 된 겁니다. 와인은 검붉은 색으로, 잘 익은 검은 과일(검은 체리, 검은 자두, 블랙베리 등) 향이 강했지만 산뜻했고, 매콤한 향신료(후추?) 향도 살짝 나는 듯했습니다. 오크 숙성은 안 했거나, 하더라도 오래된 큰 오크통에 살짝 들어갔다가 나온 듯 숙성으로 인한 향은 잘 느낄 수 없었습니다. 남프랑스 레드 와인의 대표 품종을 흔히 GSM으로 부릅니다. 그르나슈(grenache), 쉬라(syrah), 무르베드르(mourvedre)의 앞 글자를 딴 건데요. 그르나슈와 쉬라가 검은 과일 풍미와 색, 탄닌을 준다면, 무르베드르는 육류 풍미와 향신료 풍미를 주는 역할을 합니다. 무르베드르는 따뜻한 곳에서만 잘 익을 수 있어서 남프랑스에서 많이 재배됩니다. 영화 ‘어느 멋진 순간’에는 남프랑스 방돌(bandol) 지방에서 만든 와인도 나옵니다. 방돌 지방은 프랑스에서 거의 유일하게, 무르베드르 한가지 품종만으로 만든 와인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영화에서 이 와인에 대해 ‘권투 선수도 한 잔 마시고 쓰러질 와인’이라고 묘사돼 있는데, 그만큼 묵직하고 강한 와인이라는 뜻일 겁니다. 남프랑스 와인들은 그동안 별로 비싸지 않아서 잘 찾으면 가성비 좋고 맛있는 와인을 살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마신 와인 가격을 알아봤더니, 결코 싸지는 않았습니다. 프랑스 와인 박람회에서 와인을 잘 고르려면? 최근 프랑스 르 피가로 지는 봄에 열리는 프랑스의 와인 박람회를 소개하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박람회에서 좋은 와인을 사기 위한 10가지 팁을 소개했는데, 그 중 하나가 잘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와 지역을 고르라면서, 와인 박람회에서 점점 인기를 끌고 있는 지역으로 알사스, 루아르, 루시용을 꼽았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루시용은 물론이고 루아르 지방의 와인과 알자스의 화이트 와인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을 많이 수입하는 이유는 프랑스 와인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보르도나 부르고뉴 와인들 가격이 너무 올랐기 때문일 겁니다.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와인 시장이 커지고 저변도 넓어졌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다양한 와인들을 맛볼 수 있게 돼 좋은 일인데, 가격 부담도 낮아지면 더 바랄 것이 없겠죠? 디자인 : 안준석
최근 레드 와인 한 종을 시음해 보고 깜짝 놀란 경험을 했습니다. 아주 짙은 색깔로, 보르도 레드는 분명히 아닌데, 힘 있고 풍성한 과일 맛에 나파밸리 와인도 아닌 것 같고, 호주 쉬라도 아니고… 하면서 말입니다. 바로 아르헨티나의 말벡(malbec) 품종으로 만든 와인이었습니다. 과거에도 아르헨티나 말벡을 종종 마셔봤지만, 이번에 마신 와인은 텁텁한 담배 냄새로 거칠다거나, 지나치게 향이 강하지 않은, ‘절제된’ 구대륙 와인의 풍미까지 느껴졌습니니다. ‘아르헨티나 말벡이 엄청 좋아졌구나’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아르헨티나 말벡, 원산지는? 우리나라에서 인기 있는 레드 와인 품종 가운데 하나가 아르헨티나의 말벡입니다. 잘 익은 검은 자두 풍미에 적당한 산미와 부드러운 탄닌, 여기에 적당히 높은 알코올 도수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레드 와인의 요소를 다 갖췄습니다. 색깔도 아주 진하고 묵직합니다. 담배향과 불에 그을린 고기 냄새까지 살짝 나 육류는 물론 한식과도 잘 어울립니다. 이 말벡은 아르헨티나의 대표 품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말벡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국가도 남미 아르헨티나입니다. 그런데 말벡의 원산지가 프랑스이고, 한때는 보르도 와인보다도 더 유럽 전역을 매료시킨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검은 포도주는 검은 오리고기와 먹는다 20여 년 전 파리 특파원으로 프랑스에 간 직후, 레드 와인을 샀는데, 잔에 따라 보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그동안 보던 레드 와인의 루비, 가넷 빛보다 훨씬 색깔이 진해 검은색에 가깝더군요. 맛도 물론 달랐고요. 부드럽다기보다는 약간 거칠기도 하고, 향신료향이 나는 듯도 했습니다. 그들에게 물어보니 카오르(cahors) 지방의 검은 포도주(vin noir, black wine)라고 했습니다. 카오르는 보르도에서 더 동남쪽 내륙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검은 포도주와 함께 송로버섯이라고 불리는 트뤼프, 그리고 거위 간 푸아그라가 유명한 곳이기도 합니다. 세계의 3대 진미 가운데 캐비어를 제외한 두 가지가 다 만들어지는 곳이지요. 푸아그라를 만드는 곳이어서 거위, 오리 요리도 유명합니다. 거위 똥집 샐러드 프랑스인들은 그래서 “카오르의 검은 포도주는 검은색 오리고기(닭고기와 비교하면 검은빛이죠)와 먹는다”고 말합니다. 붉은색 소고기는 레드 와인과, 흰 살 생선은 화이트 와인과 먹는 것처럼 말이죠. 저는 특파원 시절 이곳에 잠깐 여행을 갔다가 거위 근위(똥집)를 곁들인 샐러드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우리는 닭똥집을 먹는데, 이들은 거위 똥집을 먹는구나’ 하면서 식도락가 프랑스인들은 정말 못 먹는 게 없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프랑스 '장수마을'의 특산물은? 카오르는 프랑스에서 손꼽히는 장수마을이기도 합니다. 포화지방산이 높은 거위의 지방간이 특산물인 곳이 장수 마을이라는 이유로, 포도주 덕분에 살찌지 않는다는 ‘프렌치 패러독스’의 사례로도 자주 인용됩니다. 이 장수마을 카오르의 검은 포도주가 바로 말벡으로 만들어집니다. 중세 시대만 해도 카오르의 말벡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와인 애호가들을 열광시켰습니다. 그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보르도에서는 보르도 와인이 다 팔리기 전까지 카오르를 비롯한 다른 지역 와인이 보르도 항구에서 선적되는 것을 금지하면서 보르도 와인 산업을 보호했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말벡은 보르도 와인의 색을 더 진하게 하고 바디감을 줘 맛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카베르네 쇼비뇽과 블렌딩하는 데도 쓰였습니다. 지금 보르도 와인 블렌딩시 메를로나 쉬라가 하는 역할을 했던 겁니다. 그런데 19세기말, 전 유럽을 휩쓸었던 필록세라(phylloxera)라는 곤충의 창궐로 말벡도 대부분 자취를 감췄는데, 카오르에서 그나마 프랑스의 말벡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말벡은 아르헨티나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필록세라를 피해서 프랑스 농학자가 말벡을 아르헨티나로 옮겨 심었는데, 보르도나 카오르보다 일조량이 좋고 온도도 높은 아르헨티나에서 훨씬 부드럽고 풍성한 맛으로 피어난 겁니다. 일조량 좋고 서늘한 안데스 산지서 꽃 피운 말벡 아르헨티나 말벡의 대표 산지는 멘도자(Mendoza)로 안데스 산지의 높고 서늘한 구릉지대입니다. 햇볕은 뜨겁고 고도가 높은 산지라 밤에는 서늘해 말벡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입니다. 세계 5위 와인 강국으로 부상한 아르헨티나는 전 세계에서 말벡을 가장 많이 생산하고 있는데, 전체 생산량의 75%를 차지합니다. 반면 말벡의 원산지인 프랑스 카오르의 말벡은 프랑스 내에서도, 세계적으로도 그 위상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아르헨티나 말벡에 자극받은 종주국 프랑스가 새로운 모습으로 카오르의 말벡을 다듬고 있어서 기대가 됩니다. 카오르의 말벡이 멘도자로 옮겨져 전혀 다른 품종처럼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서, ‘회수 남쪽의 귤을 북쪽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옛말을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말벡은 오히려 더 좋아졌으니 이건 ‘청출어람’이라고 해야 할까요? 다음에는 비슷한 맥락에서 쇼비뇽 블랑에 대해 써보려고 합니다. 디자인 : 안준석
몇 년 전부터 겨울에 두꺼운 패딩 코트를 입은 채 아이스커피 들고 출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아졌습니다.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는 단어가 생겨났을 정도니 말이죠.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얼죽화’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추운 겨울에도 ‘화이트 와인’을 찾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레드 와인이 13도에서 18도 온도로 서빙한다면 화이트 와인은 이보다 낮은 6도에서 10도 정도로 서빙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더운 여름에 시원한 맥주나 시원한 화이트 와인을 찾는 건 당연한데, 어째서 추운 겨울에 화이트 와인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을까요? 이건 우리나라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의 ‘건조한 겨울’이 그 원인인 것 같습니다. 겨울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찾는 사람들에게 이유를 물어보면 사무실이나 집에서 목이 마르기 때문에 시원한 커피를 마신다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겨울은 춥고 건조합니다. 거기에 실내 난방까지 잘 돼 겨울에 실내에 있으면 유난히 건조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추운 겨울 저녁, 난방이 잘 된 따뜻한 실내에서는 레드 와인보다 화이트 와인이 끌립니다. 순서대로 먹을 수 있다면 샴페인, 화이트, 레드 등으로 먹겠지만 그냥 한잔 정도로 그친다면 화이트 와인을 선택하게 됩니다. 반면 프랑스를 비롯해 이탈리아, 스페인 등 지중해 연안 국가들은 겨울 기온이 우리나라보다 높지만 비가 많죠. ‘지중해성 기후’의 특징입니다. 프랑스의 겨울은 한마디로 우울합니다. 햇볕 구경하기가 거의 힘들 뿐 아니라, 오후 4시부터 어둑어둑해지고 가끔씩 비도 뿌리는 을씨년스러운 날씨입니다. 여기에 실내는 난방이 잘 안 되고, 온돌이라는 것이 없으니 실내에 들어가도 바닥에서 냉기가 그대로 올라오는 곳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집에 들어가면 몸을 녹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날씨까지 흐리거나 비가 추적추적 오면 허스키한 목소리의 샹송을 들으며 레드 와인이나, 데워서 먹는 뱅쇼(vin chaud)를 곁들이고 싶은 생각은 더 커집니다. 여기까지가 제 기억에 남아 있는 프랑스의 겨울입니다. 세계적으로도 화이트 와인 인기 급등 그런데 겨울만이 아니라,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화이트 와인과 로제 와인 소비가 늘고 있다는 조사가 나왔습니다. 국제와인기구(OIV)에 따르면 화이트 와인 소비는 2010년 이후 빠른 속도로 증가했고, 로제 와인 소비도 느리지만 성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반면, 레드 와인은 2007년에 정점을 찍은 이후 감소하고 있다는 겁니다. 출처: OIV(Organization of International Vine and Wine) 출처: OIV(Organization of International Vine and Wine) 소비가 늘자 생산량도 늘어났습니다. 2013년부터 화이트 와인 생산량이 레드 와인을 넘어섰고, 최근 몇 년 사이에 화이트 와인 생산량은 전체 와인 생산량의 49%까지 올라섰습니다. 나머지가 레드와 로제 와인이니, 전체 와인의 절반이 화이트 와인인 셈입니다. 여기에는 스파클링 와인의 인기도 한몫했습니다. 가성비 좋은 이탈리아 스파클링 와인, 프로세코 덕분에 화이트 와인의 생산과 소비가 껑충 뛰어오를 수 있었습니다. 특히 미국, 독일, 영국의 스파클링 와인 시장이 화이트 와인 인기 상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미국은 레드뿐만이 아니라 화이트 와인도 전 세계 1위 소비국입니다. 독일은 맥주만큼이나 스파클링 와인에 대한 사랑도 각별하고, 추운 기후에서 잘 자라는 청포도 품종으로 스파클링 와인 생산도 많이 하는 나라입니다. 프랑스와 오래전부터 샴페인의 원조를 놓고 다퉈왔던 영국은 최근 온난화로 인해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기에 좋은 포도 수확이 가능해졌고, 덕분에 좋은 스파클링 와인도 많이 생산하고 있습니다. 즉, 미국, 독일, 영국이 화이트 와인 생산과 소비를 끌어올린 주역들인 셈입니다. 프랑스, 레드 와인 소비 절반으로 떨어져 반면 레드 와인은 프랑스와 스페인, 이탈리아 같은 유럽 국가들에서 소비가 감소했는데, 감소된 소비를 보완할 수 있는 다른 나라가 없는 상황입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는 파리 특파원 시절, 레드 와인을 즐겨 마시는 프랑스의 겨울 풍경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특히 21세기 초부터 세계에서 가장 많은 레드 와인을 소비했던 프랑스가 이제는 레드 와인 소비량이 절반까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프랑스에서도 젊은이들은 따서 마시기 편한 맥주를 즐기는 경향이 커졌습니다. 레드 와인은 시간이 많은 ‘어르신’들이나 마실 수 있는 술로 여기는 분위기입니다. 여기에, 지구 온난화로 더워진 유럽 대륙, 특히 지중해 연안 국가들에서 화이트, 로제 와인과 맥주 인기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레드 와인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보르도의 양조업자들은 남아도는 레드 와인을 쏟아부으며 시위를 벌이는 상황까지 벌어지게 된 겁니다. (▶ 참고 기사 : 포도밭 갈아엎고 공업용 전환하고.. 위기에 빠진 프랑스 와인) 시대적 상황에 따라, 기후 변화에 따라 사람들의 입맛은 변하고 있습니다. 또한 기후 변화는 포도 재배 환경을 바꾸고 있습니다. 신대륙 와이너리의 구대륙을 향한 추격세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과거 와인 종주국을 자처해 온 프랑스를 비롯해 스페인, 이탈리아 등 구대륙의 와인이 어떤 방향으로 살길을 모색할지 궁금해집니다. 디자인 : 박수민
송년 모임이 한창인 요즘 가장 가장 각광받는 술 가운데 하나가 샴페인일 겁니다. 병을 딸 때 나는 ‘펑’ 소리는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 주고, 플루트 모양의 가느다란 잔으로 올라오는 황금빛 기포는 눈을 즐겁게 해 주고, 입 속에서 터지는 차가운 탄산 거품은 혀를 자극하는 즐거움을 줘 그 어떤 술보다도 축제 분위기에 어울리기 때문이 아닐까요? “맛없는 와인은 있어도 맛없는 샴페인은 없다” 우리가 흔히 샴페인이라고 부르는 스파클링 와인은 사실 여러 종류가 있지만, 프랑스의 샹파뉴(champagne) 지방에서 만들어진 스파클링 와인에만 붙여지는 이름입니다. 프랑스에서도 다른 지역에서 만들어진 스파클링 와인은 크레망(crement)이나 뱅 무소(vin mousseux) 등으로 불리고, 그 외 스페인의 까바(cava), 이탈리아의 프로세코(prosecco), 독일의 젝트(sekt)등도 스파클링 와인이죠. 물론 신대륙에서도 스파클링 와인들은 쏟아져 나옵니다. 다양한 스파클링 와인들은 만드는 방법에 따라 가격도 천차만별입니다. 가장 비싼 건 샴페인입니다. “샴페인에 빠지면 패가망신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그런가 하면 “맛없는 와인은 있어도 맛없는 샴페인은 없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샴페인이 그만큼 맛있다는 뜻이죠. 그렇다면 샴페인은 왜 그렇게 비싼 걸까요? 그 비싼 샴페인 중에서도 ‘좋은’ 샴페인은 어떤 걸까요? 좋은 샴페인의 기준은? 좋은 와인을 평가하는 기준과 좋은 샴페인을 평가하는 기준은 거의 비슷합니다. 좋은 빛깔, 좋은 향, 여운, 알코올과 당분, 산미의 밸런스 등등. 여기에 샴페인은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바로 스파클링 와인에만 존재하는 ‘거품’에 대한 평가입니다. 거품이 ‘공격적이다’, ‘크림 같다’, ‘섬세하다’고 표현하는데, ‘섬세한’ 거품이 최상품입니다. 콜라나 사이다 같은 탄산음료에서 느껴지는 거품처럼 ‘톡’ 쏘는 거칠고 공격적이지만, 금방 없어져 버리는 거품이 있습니다. 반면 좋은 샴페인에서 느낄 수 있는 거품은 크림처럼 작은 거품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드는 느낌입니다. 좋은 샴페인일수록 좁고 긴 플루트 모양의 잔보다는 화이트 와인잔과 비슷한 좀 넓은 잔으로 마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와인 향기를 더 잘 느낄 수 있으면서도 좋은 샴페인은 거품이 오래 지속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와인잔과 샴페인 잔의 장점을 결합한 ‘튤립’ 모양 잔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좋은 샴페인 거품은 겨우내 묻어둔 동치미 국물처럼 거품 같지 않은 작은 거품이 계속 올라오는 그런 느낌입니다. 이 거품을 잘 보존하려면 온도가 중요하기 때문에 샴페인은 화이트 와인보다 더 낮은 온도에서 서빙하고, 마시는 동안에도 계속 차가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튤립잔(좌)과 플루트잔(우)/ 출처: Lehmann, crate and barrel 샴페인은 왜 비쌀까? 샴페인이 비싼 이유는 만드는 과정을 살펴보면 이해가 됩니다. 우선 샴페인용 포도는 수확 과정부터 다릅니다. 포도를 송이째 수확해 곧바로 압착해야 하기 때문에 기계 수확이 불가능하고 손으로 일일이 포도를 따야 합니다. 수확에 시간이 오래 걸리면 그동안 포도가 너무 익어버리기 때문에 단시간에 노동력을 집약해서 한꺼번에 수확합니다. 지구 온난화가 심해지면서 포도 수확도 더욱 빨리, 단시간에 해야 합니다. 지난해 여름, 샹파뉴 지방에서는 포도 수확하던 인부 몇 명이 일사병으로 숨지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폭염 속에서 장시간 포도 따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제조 공정도 복잡하고 손이 많이 갑니다. 블렌딩을 어떻게 하느냐는 샴페인 맛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포도 품종별, 수확 연도별, 포도밭 별로 어떻게 섞을지, 샴페인 메이커의 개성과 기술에 따라 품질이 달라집니다. 발효도 2번에 걸쳐 이뤄집니다. 와인처럼 1차 발효가 끝난 뒤 병에 넣고 2차 발효를 시키는데, 발효 후 남은 찌꺼기를 제거하는 과정에도 사람 손이 필요합니다. 샴페인 저장고에 가보면 수많은 병이 비스듬하게 꽂혀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효모 찌꺼기를 제거하기 위해 병을 수평 상태에서 점차 각도를 높여가며 천천히 세워 찌꺼기가 병 입구에 모이도록 하는 겁니다. 사람의 손으로 매일 조금씩 돌려세우는 이 과정은 길면 두 달이 걸립니다. 요즘은 기계로 며칠이면 가능한 데 사람 손만큼은 못하다는 것이 샴페인 제조사의 주장입니다. 즉, 대량 생산하는 스파클링 와인은 이 과정을 기계로 한다는 것이죠. 샴페인병을 손으로 돌리는 작업 / 출처: Canard-Duchêne 기계로 병을 돌리는 gyropalette / 출처: wikimedia 병 속에서 효모 찌꺼기를 없애려면, 냉각시켜 한꺼번에 제거하는 기계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찌꺼기를 제거한 샴페인은 기포로 인한 높은 압력을 견딜 수 있도록 마개를 만드는 과정도 중요합니다. 병 입구 지름의 3배 정도를 압축시켜 만든 코르크에, 철사 망까지 씌웁니다. 버섯 모양의 코르크 마개는 병 숙성 과정에서 압축돼 그렇게 만들어지는 겁니다. 샴페인이 비쌀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렇게 와인보다 몇 배나 사람의 손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설명해 줍니다. 샹파뉴 지방의 서늘한 기후와 백악질 토양이 큰 몫 여기까지가 사람의 손과 기술이 좌우하는 거라면, 샴페인 품질 평가의 중요한 요소인 ‘거품’은 좀 다릅니다. 이건 바로 샹파뉴 지방의 기후와 토양이 하는 일입니다. 샹파뉴 지방은 파리보다 더 북쪽에 위치한 대륙성 기후 지역입니다. 겨울에 엄청 춥고 여름은 짧고 뜨겁지만, 땅속으로 들어가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샹파뉴의 와인 저장고는 여름에도 서늘한데, 이런 서늘한 곳에서 만들어진 포도는 당분은 낮고 신맛은 강합니다. 샹파뉴의 와인 저장고는 단순히 저장만 하는 곳이 아니라 병 속에서 2차 발효까지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그 규모가 엄청납니다. 와인 저장고에 레일을 깔아서 운반용 기차들이 다니는 정도입니다. 잘못하면 와인 저장고에서 길을 잃을 수 있습니다. 샹파뉴 지역의 백악질 토양은 땅을 파내기가 쉽고 수분도 잘 저장할 수 있어서 온도 변화가 없이 오랜 시간에 걸쳐 와인이 발효될 수 있습니다. 와인이 땅속의 거대한 저장고에서 천천히 발효되면서 섬세한 작은 거품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마치 겨울에 땅속에 묻어둔 동치미가 작은 기포를 만들어내는 것처럼요. 출처: Moët & Chandon 지난해 5억 병 팔린 프로세코 좋은 샴페인이 비싼 이유가 이해는 되지만 연말 모임에 굳이 샴페인을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과일향이 풍부하고, 탄산까지 있는 스파클링 와인들은 가벼운 음식과, 한식과 대부분 잘 어울립니다.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스파클링 와인, 프로세코는 지난해 전 세계에서 5억 병이 팔릴 정도로 인기를 모았습니다. 우리나라도 스파클링 와인 시장 규모가 해마다 커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에 <샴페인 바>도 많이 생겼더군요. 이웃 나라 일본은 교자와 샴페인을 즐길 수 있는 체인점도 성업 중입니다. 굳이 샴페인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누구와 마시느냐가 더 중요하겠죠. 출처: japantimes 디자인 : 박수민
11월 셋째 주 목요일은 우리나라의 수능 시험일입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는 프랑스 보졸레 지방의 햇와인 <보졸레 누보(Beaujolais nouveau)>가 출시되는 날이죠. 프랑스 보졸레 지방에서는 그 해 9월 초 수확한 포도를 4주에서 6주 정도 숙성시킨 뒤 만들어낸 이 와인을 11월 셋째 주 목요일 자정을 기해 전 세계에 동시에 내놓습니다. 보졸레 포도밭 (출처 : 조르쥐 뒤뵈프 보졸레 공식홈페이지) '보졸레 누보가 왔어요!' (출처 : 조르쥐 뒤뵈프 보졸레 공식홈페이지) 와인이 우리나라 식탁에서 빠질 수 없는 발효 식품, 김치에 해당한다면 보졸레 누보는 '겉절이'인 셈입니다. 프랑스에서는 보졸레 누보가 상점에 도착하면 '보졸레 누보가 왔어요!' (Le Beaujolais nouveau est arrive!)라는 스티커를 붙이고 손님을 끌어들입니다. 해가 짧아지면서 우울한 겨울이 시작되는 11월 중순을 즐기는데 보졸레 누보는 톡톡히 그 역할을 합니다. 한때 호텔에서 10만 원에 팔리기도… 우리나라는 2000년 대 초반에 와인 붐과 함께 보졸레 누보가 불붙었습니다. 당시 파리 특파원들이 해마다 시기적으로 꼭 써야 하는 기사가 바로 보졸레 누보 출시 소식이었을 정도입니다. 시차 덕분에 한국, 일본 등은 프랑스보다도 먼저 보졸레 누보를 맛볼 수 있기 때문에 정작 파리 특파원들은 한국시간에 맞춰, 프랑스에서는 출시도 안된 보졸레 누보 기사를 써야 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습니다. 산지에서는 1만 원 정도에 불과한 이 햇와인은 마케팅에 힘입어 당시 호텔에서 10만 원 정도에 팔리기까지 했습니다. 비행기를 동원해 전 세계에 동시에 공수하려니 운송비가 많이 들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어마어마한 바가지입니다. 그러다가 와인 애호가들이 늘면서 오크 숙성을 안 한 이 가벼운 와인은 점점 돈값을 못하는 와인으로 인식되면서 인기가 시들해졌습니다. 일본에서 여전히 인기를 누리는 보졸레 누보, 그 이유는? 그런데 일본에서는 여전히 보졸레 누보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보졸레 누보 수출량의 1위를 일본이, 2위를 미국이 차지하고 있다는 통계가 이를 보여줍니다.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의 문화로 흡수해 버리는 일본은 보졸레 누보도 그들의 문화 속에 동화시켜 바로 온천탕에서 포도주를 마시는 이벤트로 발전시켰습니다. 일본 '보졸레 누보' 온천 파티 보졸레 누보를 마시며 파티를 즐기는데, 소믈리에는 보졸레를 탕 속에 쏟아 붓기까지 해서 ‘와인탕’을 만들기도 합니다. 와인이 아니고 포도주스라고 할 정도로 가벼운 보졸레 누보는 색깔도 보라색으로 포도주스와 비슷합니다. 또한 화이트 와인처럼 약간 차게 해서 마시면 신선한 과일향을 잘 느낄 수 있어서 뜨거운 온천욕을 하면서 마시기에 적당합니다. 오크 숙성을 하지 않아 바디감이 가벼울 뿐 아니라, 탄닌이 적어서 텁텁한 맛이 덜한 대신 과일향이 살아 있고, 발효 과정에서 바나나향이나 살짝 달콤한 풍선껌 향도 나옵니다. 이런 맛이 자극성이 덜하고 달짝지근한 일식과도 잘 어울려서 일본에서 인기는 지속되는 듯합니다. 전 세계에서 <샴페인> 다음으로 유명한 와인이 <보졸레 누보>라는데, '샹팡! 샹팡!'이라며 샴페인을 좋아하는 일본은 <보졸레 누보>도 이렇게 즐깁니다. 화려한 꽃무늬 라벨 보졸레 누보의 주인공은? (좌)뒤뵈프 (Georges Duboeuf) (우)폴 보퀴즈 (Paul Bocuse) 보졸레 누보를 이렇게 전 세계적인 와인으로 만든 사람은 조르쥬 뒤뵈프(Georges Duboeuf,1933년 생.작고)입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프랑스 와인 라벨과 확연히 다른, 화려한 꽃무늬가 그려진 단순한 라벨의 조르쥬 뒤뵈프 보졸레 누보는 우리에게도 익숙합니다. 지역적으로는 부르고뉴 지방에 속해있지만 보졸레에서는 피노누아가 잘 자라지 않아 오래전부터 가메(gamay)라는 품종으로 와인을 빚었습니다. 그런데 가메는 산도가 낮고 탄닌도 적어서 오래 숙성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아 막걸리처럼 테이블 와인으로 즐기는 그런 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해 담근 와인을 병에 넣지 않고 와인통에서 바로 따라 마시며 축제를 벌였는데, 이 축제를 전 세계적인 이벤트로 만든 인물이 바로 뒤뵈프입니다. 뒤뵈프는 프랑스 요리계의 위대한 셰프로 꼽히는 폴 보퀴즈(Paul Bocuse)를 직접 찾아가 만나면서 프랑스에서도 미식 도시로 꼽히는 리옹은 물론 파리까지 보졸레 누보 이벤트를 발전시켰고 그 이벤트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숙성시키지 않고 마셔야만 하는 품질이 떨어지는 와인'을 발상의 전환을 통해 세계적인 <이벤트 와인>의 자리에 올려놓은 겁니다. 보졸레에서는 싼 와인만 나온다? 왼쪽 플뢰리(Fleurie), 오른쪽 물랭-아-방(Moulin-a-vent) 가메 품종은 보졸레 누보만 만들어내는 게 아닙니다. 지역에 따라 충분히 숙성 잠재력이 있고, 그런 포도들로 만들어내는 이른바 보졸레 크뤼(Cru)도 생산됩니다. 10여 개 정도가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플뢰리(Fleurie), 물랭-아-방(Moulin-a-vent)등입니다. 이 와인들은 보졸레 누보와 달리 묵직한 바디감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보졸레 누보가 싼 와인이라는 이미지가 있어서, 보졸레 지역의 크뤼 등급 와인들은 <보졸레> 출신이라는 것을 숨겨야 제 값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와인 가격이 해마다 크게 오르고 있지만 보졸레 누보는 우리나라에서 가격 변동이 별로 없어서 오히려 가격이 떨어진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과거에 얼마나 바가지요금을 내고 마셨던 건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기간에 전 세계적으로 와인 시장은 엄청나게 성장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1월의 이벤트 와인이었던 보졸레 누보가 올해는 과연 얼마나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디자인 : 박수민
샤르트르 대성당에서 만난 와인 파리 특파원 시절,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9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샤르트르 대성당에 취재를 간 적이 있습니다. 이 성당은 고딕 양식을 집대성해서 지어져, 프랑스는 물론이고 유럽의 다른 성당들이 표본으로 삼았다고 일컬어지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입니다. 차를 타고 가면 멀리서도 들판 한가운데 우뚝 솟은 성당의 모습에 놀랄 정도입니다. 샤르트르 대성당 외관 실내에 들어서면 그 화려함과 규모에 다시 한번 놀랍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무신론자도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대성당 실내에 들어서면 저절로 하느님이 있다고 느낄 정도로 압도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작업을 하시던 김인중 신부님이 “이 성당은 인간이 만든 게 아니에요.”라면서 감탄하시던 모습이 저도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성당 내부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 샤르트르 대성당은 성모 마리아의 옷 조각으로 여겨지는 성물과 장미창을 비롯한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특히 유명합니다. 바로 그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에 한국 신부님이 작품을 만드신다고 해서 취재차 갔던 겁니다. 주인공은 지난 1973년 파리 개인전을 시작으로 재불화가로 활동하다가 최근 우리나라에 들어와 KAIST 석학교수로 임용된 김인중 신부님입니다. 김인중 신부(오른쪽) 성당 근처에 마련된 신부님의 작업실에서 작업하는 모습을 화면으로 담고, 성당으로 가서 스테인드 글라스가 설치될 장소 등을 둘러보면서 성당 전체 모습도 스케치하고 인터뷰를 하는 취재 스케줄이었습니다. 취재 도중 신부님과 함께 점심을 같이 하게 됐습니다. ▶ 관련 기사 덕분에 샤르트르 대성당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 ‘귀한’ 경험을 하게 된 겁니다. 우리나라 구내식당과 마찬가지로 식판을 들고 애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코스대로 음식을 각자가 담는 방식이었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바로 와인. 저녁이 아닌 점심 식사시간이지만, 와인 두 잔 정도가 들어갈 작은 유리병(carafe)에 담긴 와인을 각자가 식판에 가져가 놓는 겁니다. 식당에서 식판에 밥과 국을 담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역사적으로 와인을 세계적인 자리에 올려놓는 데 1등 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수도사와 신부님이고 그들의 안식처였던 수도원과 성당에서 와인을 마신 특별한 날. 이날 샤르트르 대성당에서의 식사는 ‘와인이 술이라기보다는 국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점심시간, 구내식당의 식판에서 ‘국’의 위치를 차지한 와인은 취하고 즐기기 위해 마시는 ‘술’ 이라기 보다는 물을 대신하고, 음료수를 대신하고, 식사 때는 국을 대신하는 존재였던 겁니다. 단순한 ‘국’이 아니다? 조지아의 크베브리 한식 차림에서 빠질 수 없는 국과는 달리 와인은 발효 식품입니다. 와인의 발상지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나라, 조지아에서는 ‘크베브리(qvevri)’라고 불리는 거대한 항아리를 땅에 묻어 와인을 숙성시켰습니다. 포도즙과 줄기, 껍질, 씨를 모두 크베브리에 넣고 밀봉시킨 뒤 몇 개월 숙성시켜 와인을 만드는데, 이건 우리가 겨울 동안 김칫독을 땅에 묻어 숙성시키는 것과 비슷합니다. 조지아에서는 집에 귀한 손님이 오면 밀봉된 크베브리를 열어서 와인을 대접했습니다. 이런 점들을 보면 와인은 ‘국’이 아니라, 밑반찬으로 빠질 수 없는 발효 식품인 ‘김치’ 같은 존재로도 여겨집니다. 또한 위스키나 다른 술은 곡류와 물을 섞어 만드는 반면, 와인은 포도 자체의 수분으로 발효를 시킨다는 점에서 ‘음식’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가장 사랑받는 ‘술’, 와인의 정체는? 최근 프랑스의 르 피가로지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술을 1위부터 10위까지 정리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미국의 투자 전문 전문지 INSIDER MONKEY의 조사를 인용한 이 기사에서 1위는 맥주, 2위는 와인이 차지했습니다. 그 뒤를 리큐어, 중국의 바이주, 위스키, 보드카, 시드르(사과주), 럼, 진, 데킬라가 기록했습니다. 1위를 차지한 맥주에 대해서 피가로지는 ‘물과 차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음료’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맥주와 와인은 중세 유럽에서는 ‘물’ 대신 마시는 ‘음료수’였습니다. 정수나 위생 시설이 제대로 없었던 당시에 콜레라 같은 전염병이 물을 통해 전염되거나, 물에 석회 성분이 많아서 그냥 마실 수는 없었기 때문에 맥주나 와인을 마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와인에는 물을 섞어 먹기도 했다고 하죠.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팔리는 ‘술’로 나타난 와인에 대해서 피가로지는 전 세계적으로 와인 소비가 줄고 있는 격변기 속에서도 프랑스가 최고의 와인 수출국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면서 위안을 삼고 있습니다. 고급 와인과 와인 여행지로서 프랑스가 인기를 끌고 있는 덕분이라는 설명과 함께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레드 와인 붐이 한참 불던 시기에 레드 와인은 항산화 물질인 <폴리페놀>이 들어 있어 심장병 예방에 도움이 된다거나, 프랑스 사람들이 심장병이 적고, 비만이 적은 이유를 설명하는 ‘프렌치 패러독스’가 레드 와인 덕분이라는 설명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인은 술임이 분명합니다. 알코올 도수가 15-16도에 이르고, 많이 마시면 취하는 술이 분명합니다. 와인도 과음은 안된다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디자인 : 박수민
와인 종주국 프랑스가 최근 와인을 대량 폐기했습니다. 폐기한 양도 어마어마해서 올림픽 규격 수영장 100개 분량에 해당합니다. 단순히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공업용 알코올로 전환하기도 해서 그 비용이 2억 1천6백만 달러(약 2천8백억 원)에 이릅니다. 프랑스는 앞서 지난 4월에는 프랑스 와인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보르도 포도밭을 갈아엎는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여기에는 5천7백만 유로(약 7백4십억 원)를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 관련 기사 보기) 와인 종주국인 프랑스, 그것도 최대 산지인 보르도에서 이런 조치들을 취할 만큼 프랑스에서 와인이 남아돌고 있다는 뜻이죠. 최근 몇 년 간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식당과 술집이 영업을 못하게 된 이유가 가장 컸습니다. 여기에 전 세계적으로 건강을 위해 알코올 섭취를 줄이는 분위기 속에서 와인도 예외가 아니게 된 탓도 있습니다. 1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가족들이 식탁에서 와인병을 따는 모습은 점점 찾아보기 힘들게 됐을 만큼 와인 소비는 전 세계적으로 줄고 있습니다. 반면 와인 생산에 드는 비용은 치솟고 있습니다. 인건비가 높아진 것은 물론, 지구 온난화로 인해 유럽은 더 뜨거워졌고, 가뭄이 심해지면서 관개가 힘들어졌을 뿐 아니라 산불까지 자주 발생해 포도밭 관리에 드는 비용은 갈수록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샹파뉴, 첫 와인 포도 수확 기간 동안 4명 사망 보르도 포도밭 최근 전례 없는 무더위 속에서 샴페인을 만드는 프랑스 샹파뉴 지역 포도밭에서는 포도를 수확하던 사람들이 일사병으로 숨지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포도 수확 시기는 포도주 품질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수확철에는 집중적으로 밤낮없이 작업이 이뤄질 경우가 많습니다. 더위가 계속되자 포도가 너무 익게 될까 봐 작업에 속도를 내면서 일어난 비극입니다. 이렇게 와인 재배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덩달아 비용은 올라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남아도는 포도주를 대량 폐기하고, 포도밭을 갈아엎는 극단의 조치들은 결국 '가격을 유지해 살아남기' 위한 조치들인 셈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잘’ 버리는 지혜가… 보르도 포도밭처럼 살아남기 위해 무언가를 버려야 하는 예는 생활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을 이사철을 앞두고 저한테도 그런 상황이 왔습니다. 좀 넓은 집으로 이사 온 지 4년. 그런데 집이 갈수록 좁아지는 겁니다. 집이 좁아지는 게 아니라 뭔가가 자꾸 늘어나면서 정리가 안 되는 거죠. '더 넓은 곳으로 옮겨야 하나? 수납장을 어디에 어떻게 더 짜서 넣어야 하나?' 하고 한참 고민을 했습니다. 하지만 둘러보니 '짐을 버리는 것'이 살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리의 기본은 ‘버리기’ '곤도 마리에: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출처: 넷플릭스 오래전 베스트셀러가 됐던 일본 작가 곤도 마리에는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는 명언을 남겼죠. 일본은 알다시피 우리보다 훨씬 국토는 넓지만 개개인은 우리보다 훨씬 좁은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일본 가정집들은 수납장이 너무 잘 짜여 있는데, 그 일본에서도 ‘수납의 달인’으로 불리는 그녀가 ‘정리의 기본은 버리기’라고 말했습니다. 수납을 잘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수납장에 쑤셔 넣어두기보다는 버리는 것이 정답이라는 거죠. 나아가 정리는 하나씩 하나씩 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해야 한다고도 하네요. 하나씩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다시 여기 있던 게 저기 가 있는 상황이 생겨서 정리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꺼번에 싹 정리하라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버리기 전에 온 집안을 발칵 뒤집어 꺼내 놓고, 버릴 것과 쓸 것을 한꺼번에 챙겨야겠죠. 나중에 울면서 다시 찾는 일이 없도록 말입니다. 이번 명절 연휴에는 집 안을 발칵 뒤집어 버릴 것은 무엇인지, 둬야 할 것은 무엇인지,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한번 챙겨봐야겠습니다. 개인도, 국가도 '버리는 지혜'가 중요합니다. 그것도 '잘' 버리는 지혜가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디자인 : 박수민
지구촌 축제라고 불리는 올림픽이 딱 1년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2020 도쿄 올림픽이 사상 유례없는 팬데믹 속에서, 1년을 연기하고도 결국은 무관중으로,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진 만큼 2024 파리 올림픽에 대한 지구촌의 설렘은 커 보입니다. 그만큼 주최국 프랑스의 기대도 큽니다. 2024 파리올림픽의 성화봉 (출처 : 2024 파리올림픽 공식 홈페이지) 성화 릴레이 지도 (출처 : 2024 파리올림픽 공식 홈페이지) 파리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올림픽 개막을 1년 앞두고 지난 7월 26일 성화 봉송에 사용할 성화봉을 공개했습니다. 철강으로 곡선미를 살려 날씬하게 만든, 정말 ‘프랑스다운’ 디자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화봉을 디자인한 작가는 “황금빛 도는 샴페인 색채에 프랑스의 우아함을 담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아랫부분에는 센강의 물결무늬를 그려 넣었습니다. 조직위 홈페이지에는 성화봉의 물결 부분이 나뉘며 배가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동영상으로 올라왔습니다. 2024 파리 올림픽은 프랑스에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프랑스는 1900년, 1924년에 이어 백 년 만에 다시 올림픽을 개최합니다. 백 년 만의 올림픽이라는 점에 프랑스도 큰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100년 만에 센 강에서 수영 출처 : 2024 파리올림픽 공식 홈페이지 개막식부터 남다릅니다. 올림픽 스타디엄이 아니라 센강에서 각국 선수단이 배를 타고 입장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개막식을 시작으로 센강에서는 철인 3종 경기, 마라톤, 수영, 장애인 철인 3종 경기 등이 열립니다. 센강은 수질 악화로 1923년부터 수영이 금지됐었습니다. 파리시 당국은 1억 유로(약 1410억 원)를 들여 20년 동안 수질 개선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그 결과 수영을 할 수 있을 만큼 수질이 개선된 겁니다. 센강에서 다시 수영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100년 만입니다. 2020 도쿄 올림픽 당시 수영대회가 열렸던 오다이바에서는 선수들이 수영을 마치고 나오면서 구토를 할 정도로 수질이 좋지 않았다고 해서 도쿄가 세계적으로 망신을 샀습니다. 파리 낚시 연맹 관계자는 “1900년에는 센강에서 잡은 물고기가 손바닥보다 큰 게 하나도 없었는데 최근에는 35종 정도의 물고기가 살고 있고, 2미터가 넘는 메기도 잡힌다.”면서 센강의 변화가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출처 : 2024 파리올림픽 공식 홈페이지 비치발리볼 경기장 이미지 (출처 : 2024 파리올림픽 공식 홈페이지) 과거 올림픽은 주로 체육관 운동장 등지에서 열렸지만 파리는 랜드마크가 되는 유적지, 관광지가 경기장이 되도록 했습니다. 에펠탑 앞 샹드마르스 광장에서는 비치 발리볼이 열립니다.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그랑 팔레에는 태권도, 펜싱 경기장이 만들어집니다. 그랑 팔레는 샤넬 패션쇼가 열리는 곳으로 1900년 프랑스가 만국박람회를 목표로 건설한 곳입니다. 프랑스혁명 중심지였던 콩코드 광장에서는 브레이크 댄스와 스케이트 보드 등 젊은이들의 스포츠 경기가 열립니다. 2024 파리 올림픽 마스코트 ‘프리쥬(Phryges)’ 프랑스혁명 역시 이번 올림픽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파리 올림픽 마스코트 ‘프리쥬(Phryges)’는 프랑스혁명 당시 시민군이 썼던 프리기아 모자(bonnets phrygiens)를 형상화했습니다. 화가 들라크루아의 걸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서 프랑스 혁명군을 상징하는 여성 마리안느가 쓰고 있는 바로 그 모자입니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혁명 정신을 캐릭터화했는데 동물 캐릭터가 아닌 ‘사회적 이상’을 캐릭터로 만든 것도 처음이라고 하네요. 승마가 열리는 베르사유 궁전 공원 이미지 (출처 : 2024 파리올림픽 공식 홈페이지) 그런가 하면 절대왕정의 상징이었던 베르사유 궁에서는 승마와 근대 5종 경기가, 나폴레옹의 유해가 안장된 앵발리드 북쪽 잔디공원에서 양궁 경기가 열립니다. 마라톤 코스는 파리의 핵심 유적지를 다 돌 수 있도록 짰습니다. 파리 시청인 오텔드 빌(hotel de ville)에서 출발해 프랑스 벨 에포크 시대의 대표적 유산인 ‘오페라 가르니에’ 극장, 나폴레옹 1세의 전승기념비가 있는 방돔 광장(코코 샤넬의 영광이 묻어 있다고도 하는)을 거쳐 베르사유 궁과 앵발리드까지, 파리를 찾는 관광객들이 필수적으로 들러보는 코스입니다. 많은 돈을 들여 새로운 경기장을 짓기보다는 과거 유적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자국의 문화적 유산을 자랑하는 데 올림픽 조직위의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입장권 가격이 비싸질 수밖에 없다는 변명도 나왔습니다. 올림픽 경기 티켓 패키지가 비싼 것은 1천 유로(백 40만 원)가 넘는다는 불평이 나왔는데, 대규모 관중이 입장할 수 있는 스타디엄이 있으면 입장권을 많이 팔 수 있지만 기존 관광지, 그것도 백 년 전에 지어진 곳들을 활용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것이 피에르 라바단 파리 부시장의 설명입니다. 명품 기업 LVMH의 협찬 프랑스를 대표하는 명품 기업 LVMH(루이뷔통모에헤네시)가 파리올림픽 공식 후원사로 결정됐습니다. 후원 계약 금액은 약 1억 5천만 유로(2127억 4800만 원) 정도라고 합니다. 팬데믹 기간, 명품 특수에 힘입어 LVMH 그룹 아르노 회장은 한 때 세계 1위 부자에 오르기도 했었는데, 이번 후원 계약은 아들인 앙트완 아르노가 맡았습니다. LVMH가 그룹 차원에서 올림픽을 공식 지원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입니다. LVMH 계열사는 이번 올림픽 후원에 총출동합니다. 보석상 쇼메(Chaumet)는 올림픽 메달을 디자인하고 루이뷔통 브랜드에서 프랑스 선수단 유니폼을, 샴페인 업체 모에 헤네시(Moet Hennessy)는 VIP라운지와 식음료를 제공하고, 코스메틱 업체 세포라(Sephora)는 성화 봉송 파트너로 참가합니다. LVMH의 후원 계약으로 파리 올림픽은 자금 조달 걱정을 한시름 놓게 됐을 뿐 아니라 ‘명품 올림픽’으로도 포장할 수 있게 됐습니다. 1900년, 1924년, 그리고 2024년 파리 올림픽 근대 올림픽의 아버지로 불리는 쿠베르탱 남작의 주창으로 1896년 제1회 근대 올림픽이 올림픽 발상지 그리스에서 열렸습니다. 그 뒤 제 제2회 근대 올림픽이 열린 곳이 바로 쿠베르탱의 나라, 프랑스 파리입니다. 1900년 2회 올림픽은 만국박람회 기간에 열렸고, 프랑스는 이 행사들을 통해 파리를 세계 최고의 도시로 만들겠다는 꿈을 품었습니다. 프랑스의 상징이 된 에펠탑도 그때 맞춰 건설됐습니다. 19세기말부터 1차 세계 대전 전까지, 전 유럽이 평화를 누리며 경제와 문화가 급속도로 발전하던 시기를 ‘벨 에포크’(Belle Epoque, 아름다운 시절)라고 하는데요. 에펠탑은 그 시기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꼽힙니다. 에펠탑을 비롯해 2024년 올림픽에서 경기장과 마라톤 코스로 쓰이게 되는 핵심 관광지와 건물들이 대부분 그때 정비된 겁니다. 특히 에펠탑은 1851년 런던 박람회에서 소개된 수정궁(Crystal Palace)의 영광을 넘어서겠다는 목표로 건설됐습니다. 310미터로 당시 최고 높이를 자랑하는 에펠탑은 1900년 만국박람회 때 1만 2천 개의 전등으로 점등식을 하면서 런던의 수정궁을 이긴 ‘전기 궁전’이 됐습니다. 에디슨의 전기 발명으로 당대 최고의 과학이자 신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전기로 세계 최고 건축물을 밝히며 프랑스의 상처받은 자존심은 회복됐습니다. 1924년 파리올림픽 반면 1900년 파리올림픽은 만국 박람회에 가려 큰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올림픽 위원회는 근대 올림픽의 토대를 세웠던 쿠베르탱 남작의 은퇴에 맞춰 1924년 올림픽을 파리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고, 파리는 1900년과 1924년에 이어 1백 년 만에 올림픽을 세 번째 개최하는 국가가 됐습니다. 2024 올림픽 관전 포인트 1. 보안 1900년 만국 박람회 이후, 프랑스가 역사적으로 가장 화려했던 벨 에포크 시대의 영광을 재현하려고 하는 2024 파리 올림픽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난관들이 아직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안전. 이민자 폭동과 테러로 인해 프랑스의 안전에 대한 전 세계의 우려가 커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올림픽은 전 세계 테러범들이 노리는 가장 큰 목표물이었던 만큼 이번 올림픽 역시 ‘보안’이 조직위의 가장 큰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센강 개막식 같은 경우 야외에서 치러질 예정이어서 안전에 대한 우려는 더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센강의 책 노점 가판대 조직위 측은 최근 센강변의 명물인 책 노점상(부키니스트 bouquiniste)들을 올림픽 기간에 철거하라고 지시했는데, 이것도 보안상의 이유입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까지 노리고 있는 부키니스트들의 반발이 어마어마합니다. 그런가 하면 지난 7월 27일에는 환경단체가 파리 시청 앞에 세워진 올림픽 오륜기 조형물에 가짜 피를 뿌리며 ‘신고식’을 치렀습니다. 파리 시청 앞 조형물 가짜피 테러 이 단체는 올림픽이 인간의 삶을 희생하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반사회적 행사라고 주장했습니다. 파리 올림픽 조직위 측은 파리 올림픽이 역대 가장 친환경적인 올림픽이 될 거라는 모토를 세웠는데도 말이죠. 2. 교통 파리 샤를 드골 공항을 비롯해 프랑스의 공항들도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선수단과 관광객이 안전하게, 시간에 늦지 않게, 올림픽을 치를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 때문입니다. 해마다 여름이면 몰려드는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는 샤를 드골 공항이 엔데믹과 올림픽이 겹치면서 이 수요를 어떻게 감당해 낼지가 관건입니다. 관광객은 물론 선수단이 가져오는 각종 대회용 기구, 용품 같은 대형 화물을 사고 없이 경기장으로 배달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기 때문이죠. 프랑스의 ‘명물’이 된 교통 파업이 올림픽 기간에는 어떻게 통제될 지도 관건입니다. 3. 더위 더위라는 변수도 생겼습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7월, 역대 가장 더운 여름을 보내고 있는 유럽과 프랑스가 내년에는 더하면 더하지 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죠. 그런데 ‘역대 가장 친환경적 올림픽’을 강조하는 조직위는 선수촌에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는다고 발표했습니다. 낮 기온이 40도가 넘는, 1년 중 가장 더울 때인 7월 말에,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친환경 올림픽>을 구현하기 위해서 에어컨이 없는 선수촌을 만든다는 겁니다. 대신 선풍기를 이용하면 된다는 겁니다. 엄청나게 더웠던 도쿄 올림픽 사례도 참고하겠지요. 물론 프랑스의 여름은 건조해서 그늘만 잘 만들고 단열을 잘 시키면 선풍기로 가능할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요? 4. 경제 효과 프랑스에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올림픽의 경제 효과입니다. 도쿄 올림픽은 17조 원 정도가 들었다고 하는데요. 1년 연기되는 바람에 비용이 눈더미처럼 불었던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무관중으로 치러지면서 입장권 수입도 없어 경제효과는 ‘제로’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당초 <부흥 올림픽>을 기치로 내걸었지만 결과는 처참했죠. 프랑스 역시 ‘벨 에포크(Belle Epoque)’ 시대의 영광을 재현하며, 제2의 도약을 노리는 올림픽입니다. 프랑스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 벨 에포크 시대에는 산업화로 신흥 부르주아가 된 집들이 저녁마다 샴페인을 터뜨렸다고 합니다. 덕분에 프랑스의 샴페인 산업이 이 시대에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었고요. 인지도에서, 대중성에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모엣 샹동’, 포뮬러 원 시상식 때 쓰는 ‘멈’, 처칠의 샴페인으로 유명한 ‘폴 로저’, 영국인이 좋아하는 007 샴페인 ‘볼링저’, 결혼식 샴페인으로 환영받는 페리에 주에의 ‘벨 에포크’ 등 이름만 들으면 다 아는 유명 샴페인들은 다 이 시대에 세계적 브랜드로 성장했는데요. 샴페인의 나라 프랑스가 2024 올림픽이 끝난 뒤 다시 한번 샴페인을 터뜨릴 수 있을지, 얼마나 큰 병을 딸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디자인 : 박수민
지난해 코로나 팬데믹이 거의 마무리되고, 하늘길이 막 열리던 무렵, 특파원을 지냈던 파리와 프랑스를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여행 날짜를 6월 마지막 주로 정하면서, 목적지는 자연스레 남프랑스로 결정했습니다. 보랏빛 라벤더를 보기에 딱 좋은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라벤더 산지인 프로방스는 일 년 내내 전 세계 관광객들이 넘치는 곳이지만, 6월 말, 7월 초는 끝없이 펼쳐지는 보랏빛 라벤더가 전 세계 관광객을 끌어 모으는 때이기도 합니다. 엄청난 기대를 품고 프로방스에 도착했는데, 라벤더는 이미 보랏빛에서 회색빛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절정기 지난 라벤더. 너무 뜨거웠던 프로방스 포도밭 더위 때문에 프로방스의 라벤더 절정 시기가 최소 10일 정도는 앞당겨졌다고 현지인들은 이야기했습니다. 정말 더워도 너무 더웠습니다. 딱 하루 프로방스의 아름다운 마을들을 걸어서 구경하고는 일행 모두가 지쳐 버렸습니다. 그 뒤 관광은 아침 일찍, 또는 오후 4-5시 이후부터 하고 낮 동안에는 숙소에서 쉬는 것으로 일정을 변경해야 했습니다. 지난해 유럽 대륙은 관측 사상 가장 더운 여름을 기록했습니다. 최고 기온 기록한 지난해 유럽, 더위로 1만 6천 명 숨져 전 세계 기온이 해마다 올라가고 있지만, 특히 유럽이 지구 온난화가 가장 빠르게 진행되는 대륙으로 꼽혔습니다. 세계기상기구, WMO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800년대 중반 이후부터 지난해까지 세계 평균 기온은 1.2도 상승했는데, 유럽은 같은 시기에 2.3도가 올랐습니다. 특히 지난해 유럽 대륙은 남쪽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은 물론 비교적 시원했던 영국과 프랑스, 독일까지도 가장 더운 여름을 기록했습니다. 이 더위로 유럽에서는 지난해 1만 6천 명 이상이 숨졌습니다. 때문에 올해 6월에도 심상치 않은 온도를 기록하고 있는 유럽에서 언론들은 벌써부터 공포 섞인 기사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영국의 가디언지는 6월 전 세계 기온이 이미 사상 최고를 기록한 만큼 지난해 기록을 경신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전 세계 평균 기온은 지난 1979년 이후 최고의 6월 기온을 기록했다고 가디언지는 덧붙였습니다. 스페인, 폭염 때 근로자 노동시간 조정 유럽에서 지구 온난화의 최전선에 있는 나라는 남쪽의 스페인입니다. 스페인에서도 남부 안달루시안 지방은 지난 6월 26일에 44도를 넘어서 올해 첫 폭염 경보가 발령됐고, 북쪽인 수도 마드리드도 38도를 넘어섰습니다. 안달루시안 지방에서는 폭염으로 인한 근로자들의 일사병을 피하기 위해 작업 시간을 조정했습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3시 반까지 일하던 것을 오전 7시부터 오후 2시 반으로 한 시간 앞당겼습니다. 지난해 스페인에서는 근로자 여러 명이 일사병으로 숨졌던 만큼 올해는 대책을 찾느라 분주한 모습입니다. 스페인 기상청은 10년 동안 스페인의 폭염 발생 빈도가 3배 늘었고, 1980년대 이후 10년 단위로 여름이 10일씩 길어졌다고 설명했습니다. 프랑스, 혁명기념일 불꽃놀이 금지 2003년 폭염으로 1만 5천 명의 노인들이 목숨을 잃었던 프랑스는 그 뒤 요양원 등 노인 시설을 중심으로 냉방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갖췄습니다. 기자의 특파원 시절에는 에어컨이 없는 건물이나 가정집이 많았고, 여름에도 아이스커피를 파는 가게가 거의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견딜 만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일찍 찾아온 폭염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갖가지 대책이 나오고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기념일 불꽃놀이 가장 눈에 띄는 조치는 프랑스 최대 국경일인 혁명기념일(7월 14일) 불꽃놀이 금지 조치입니다. 7월 14일 불꽃놀이는 파리는 물론이고 지방 도시에서도 중심가 광장이나, 바닷가 등지에서 일 년 중 가장 성대하게 펼쳐지는 행사입니다. 특파원 시절에도 에펠탑 위에서 펼쳐지는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몇 시간 전부터 자리를 깔고 간단한 저녁거리를 준비해 가서 먹으며 기다린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불꽃이 대형 화재로 번질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프랑스 몇몇 도시들에 불꽃놀이 금지령이 내려진 겁니다. 프랑스 보르도 인근에서 난 산불 (사진=프랑스 지롱드 지역 소방대 제공, 연합뉴스) 실제로 지난해 7월, 보르도 남부 소나무숲에서 시작된 대형 산불로 17,000 헥타르의 숲이 소실됐는데, 다행히 포도밭의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연기와 열 등으로 포도주 품질을 보장할 수 없다는 기사도 나왔습니다. ▶관련기사 불꽃놀이는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그동안 금지됐다가, 지난해부터 다시 시작됐는데 올해 특수를 노렸던 업계 관계자들은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프랑스, 냉방 온도 26도 놓고 논란 프랑스 파리 에펠탑 옆 분수에서 사람들이 더위를 식히는 모습 (AP=연합뉴스) 또 다른 대책은 실내 냉방 온도 26도를 유지하라는 지침입니다. 문을 닫고 실내 냉방은 26도까지만 해야 한다는 지침에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상인들의 불만이 큽니다. 특히 빵집을 비롯한 식료품 가게들은 상품의 변질까지 신경 써야 한다며 불만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또한 지하철 이용객들과 기차를 타고 장거리 여행을 하는 여행객들도 불만을 표시하고 있지만 프랑스 정부는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거리 곳곳에 분수와, 물 분사기를 설치한다는 대책들도 나왔습니다. 이는 2024년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파리시의 중점 사업이기도 합니다. 이런 가운데 아주 원시적(?)이라고 할 수 있는 권고도 나왔습니다. 르 피가로지는 "가장 경제적이면서도 효과가 높은 냉방법"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간편한 선풍기를 이용하고, 더워지기 전에 덧문(유리창 바깥에 달린 나무문)을 닫아 열기가 들어오는 것을 막고, 그리고 안 되면 에어컨을 켜는 방법으로 ‘경제적’으로 더위를 이길 수 있다고 조언했습니다. '열대야'는 다른 나라에서만 일어나는 것으로 여겼던 프랑스도 2040년 이후에는 이 단어에 익숙해질 것이라고 프랑스 기상청 전문가는 내다봤습니다. 이 전문가는 “심지어 그동안 비교적 시원했던 프랑스의 북쪽 절반 이상 지역이 ‘열대야’를 겪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재생 에너지 확대 움직임 커져 유럽이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것은 재생 에너지 확대 움직임입니다. 세계기상기구, WMO는 풍력과 태양광 발전 같은 재생 에너지를 사용한 발전 비율이 유럽 연합(EU)에서 지난해 22.3%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화석 가스 연료 발전 비율(20.0%)을 앞질렀다고 설명했습니다. 환경 문제에 대해서 좀 더 민감한 유럽 국가들이 지구온난화 해결을 위한 장기적인 대책에 대해서도 좀 더 앞서고 있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