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인권을 위해 일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사람과 세상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 업무 스트레스도 만만찮은데 '갑질'까지 당한다면 얼마나 갑갑할까요? 시민단체 '직장갑질 119'와 함께 여러분에게 진짜 도움이 될 만한 사례를 중심으로 소개해드립니다. 헌법 제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라고 하여 ‘평등권’을 천명하고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근로기준법은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지 않다. 근로기준법 제11조는 이 법의 적용 범위를 상시 5명 이상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사업 또는 사업장으로 하고, 5명 미만의 근로자를 사용할 때는 일부만 적용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즉 사업장 규모에 따라 차등적으로 법이 적용되는 것이다. 5인 미만 사업장에 적용되지 않는 규정은 어떤 것이 있을까. 근로시간, 연장근로의 제한, 연장·야간 및 휴일 근로에 따른 가산 수당에 관한 규정은 적용되지 않는다. 연차유급휴가도 적용되지 않는다. 5인 미만 사업장에서는 정당한 이유 없이 해고할 수 있고, 해고 사유를 서면으로 전달하지 않아도 되며, 노동자는 부당하게 해고되더라도 노동위원회 구제신청을 할 수 없다. 놀랍게도 직장 내 괴롭힘 규정 역시 5인 미만 사업장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과장해서 말하면,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돈도 안 주고 한도 끝도 없이 일을 시킬 수 있고, 휴식을 통한 건강권을 보장하지 않아도 되며, 마음대로 자를 수 있고, 또 마음대로 괴롭힐 수 있다는 뜻이다. 언론에서 5인 미만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가 자주 보도되니 차등적용 자체는 아는 사람이 많겠지만, 당연하게 생각되는 것조차 제외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2023년 6월 직장갑질 119가 2020년 1월부터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들로부터 제보받은 이메일 사례 216건을 분석한 결과,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들이 겪은 갑질은 해고·임금 체불이 147건(68%)으로 가장 많았고, 직장 내 괴롭힘이 100건(46.2%)을 뒤를 이었다(중복집계). (▶ 관련 기사) 직장 내 괴롭힘 관련 제보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회사나 고용노동부에 신고하더라도 5인 미만 사업장이니 조사할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거나, 괴롭힘을 통해 자진 퇴사를 유도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사례가 많았다. 괴롭힘은 사업장 규모를 구별하지 않고 발생하지만, 괴롭힘 금지 규정은 사업장과 소속 노동자를 구별한다. 상급자의 끝없는 구애갑질 C 씨가 일했던 곳은 5인 미만 사업장이었다. C 씨는 몇 년 동안 상급자로부터 성추행과 강압적 구애 피해를 당했다. 상급자는 여러 번 단둘이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었다. 지속적인 강요에 못 이겨 저녁 식사를 한 날, 집에 가는 차 안에서 상급자는 C 씨의 손을 강제로 잡았다. C 씨는 싫다고 했지만, '데이트하자', '모텔에 가자'는 말이 서슴없이 튀어나왔다. 집에 도착해서는 C 씨를 강제로 끌어안고 볼에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C 씨는 대표이사에게 피해 사실을 보고했다. 대표이사는 상급자가 무능하기도 하여 이 사건을 계기로 해고하려고 하니, C 씨에게 고용노동부 진정과 경찰 고소를 하라고 부추겼다. (직장 내 괴롭힘은 5인 이상 사업장에 적용되지만,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른 직장 내 성희롱은 상시 근로자 수에 따른 제한을 두고 있지 않아 고용노동부 신고가 가능하다.) 자신이 모두 책임지겠다는 대표이사의 말을 믿고 C 씨는 용기내 경찰에 고소했다. 가해자가 해고되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면 C 씨가 상담을 요청할 일도 없었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상급자와 친한 임원이 일련의 과정을 못마땅해하자, 대표이사의 태도는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 대표이사는 상급자가 불쌍하다며 C 씨에게 고소 취하와 합의를 종용했다. 그러고는 상급자를 위로금을 주는 조건으로 해고가 아닌 자진 퇴사하게 하였고, 이직 사유를 허위로 신고하여 구직급여(실업급여)를 수급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동시에 C 씨에 대한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새로 온 상급자는 온갖 트집을 잡으며 C 씨를 괴롭혔고, C 씨가 견디다 못해 자발적으로 퇴사하도록 압박했다. 대표이사는 한술 더 떠 고소 취하와 합의를 했으면 이럴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어느 날 대표이사는 C 씨에게 근무시간과 임금이 터무니없이 줄어드는 근로조건에 동의하라고 했다. C 씨는 거부하였고, 대표이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해고 통지서를 내밀었다. 그러면서 “5인 미만 사업장이라 해고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억울하면 법적으로 해 보든가”라며 비아냥거렸다. 소규모 사업장은 외면하는 근로기준법? 소규모 사업장은 직장 내 괴롭힘 및 성희롱을 전담하는 부서를 마련하거나 운영할 역량이 없고, 취업규칙 작성이 의무가 아니기에 관련 규정이나 체계도 부재하며, 무엇보다 사업장에서 우위가 있는 사람들이 친인척인 경우가 많아 사용자의 영향력이 매우 강하다는 특성이 있다. C 씨의 경우에도, 임원과 친한 가해자는 대표이사의 동정을 받으며 위로금에 구직급여까지 챙겨 나갔지만, 고립된 피해자인 C 씨는 피해 사실을 신고했음에도 적절한 조치는커녕 괴롭힘을 당하다가 부당하게 해고되었다. C 씨의 사례는 작은 사업장일수록 사업장 내 자율적 해결을 기대하기가 매우 어려워, 적극적이고도 선제적인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C 씨가 겪은 피해는 C 씨를 동료가 아닌 자신이 정복해야 할 성적 대상으로 취급한 가해자 때문이기도 하고, 법의 미비함을 악용한 대표이사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C 씨가 괴롭힘을 당하고 일터에서 내쫓아지도록 내버려 둔 것은, 구제하거나 구제하지 않을 수 있는 한계선을 그어버린 국가였다. 근로기준법은 근로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하고 향상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근로기준법 제1조). 그러나 현행법으로는 성희롱을 당하더라도, 제 발로 나가게끔 괴롭힘을 당하더라도 작은 사업장 노동자인 C 씨‘들’의 기본적 생활은 보장되고 향상될 수 없다. 국가의 역할은 국민이라면 누구나 어떤 이유로든 차별 없이 법과 제도에 따른 보호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최종 보스 나쁜 국가. 더 이상 노동자를 차별하지 말라. 디자인 : 고결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 인생의 고민 중 어쩌면 가장 크게 다가올지도 모를 '연애', 이 둘이 결합했다면? '직장고민상담소-대나무슾'의 서브 코너 '비밀리'에서 연애전문가들의 발랄하고도 진지한 경험담과 조언을 들어보세요! A 씨는 사내연애를 하다 헤어진 후 전 애인으로부터 스토킹을 당하다가 피해자인 자신이 되려 해고되게 생겼다며 상담을 요청해 왔다. 전 애인과는 4개월 정도 만나다가 헤어졌는데, 전 애인(가해자)은 A 씨의 집에 찾아와 몇십 분 동안 초인종을 누르고 현관문을 발로 차는 등 소란을 피웠고, 출근하려 집을 나서는 A 씨를 기다렸다가 따라와 자가용 문을 붙들고 닫지 못하게 했다. 전화를 받으라며 지속적으로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를 남기기도 했다. A 씨가 계속 거부하여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가해자는 “공과 사를 구분해라”(공과 사를 정말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본인이면서 저렇게 말했단다), “내가 시키는 일에 불만 갖지 말고 해라”, “싫으면 때려치워라”는 등의 발언을 거리낌 없이 했고, A 씨가 들을 수 있는 거리에서 친구와 통화하면서 “한 대 때리고 싶어”, “아직도 버릇 못 고쳤어”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A 씨의 업무용 메신저를 훔쳐보기까지 했다. A 씨는 가해자의 행위를 스토킹으로 경찰에 신고하여 법원으로부터 잠정조치 결정을 받았다. 그러자 가해자는 자신을 개인 친분으로 입사시켜 준 사장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A 씨가 해고되도록 만들었다. A 씨의 사례 외에도, 직장갑질 119에는 “직장 상사가 퇴근 후 저녁 식사를 하자며 불러서는 사적인 이야기를 했고, 부담스러워 피하자 정규직으로 채용해 주겠다고 했다”, “대표가 사귀자고 한 것을 거절했더니 업무에서 배제하고 폭언을 했다”는 등 사례가 다수 접수된다. 많은 경우 가해자는 상급자였고, 피해자는 거절의 결과 업무환경 악화를 경험하였으며, 퇴사를 고민하거나 실제로 퇴사하였고, 회사에 신고하더라도 보복으로 인한 2차 피해를 당하였다. 사적 영역으로 여겨지는 ‘연애’ 또는 ‘구애’가 공적 영역인 ‘직장생활’에도 직접적인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직장인 72% “사내연애 금지 필요하다” 직장에서의 연애나 구애가 직장생활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사례로 확인한 직장갑질 119는, 작년 11월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직장에서 우위에 있는 자와 후임 간의 사적인 연애를 금지하는 취업규칙을 제정하는 것에 동의하는지 물었다. 직장인 10명 중 무려 7명(72%)이 사내연애 금지 규정에 동의한다고 응답하였다. (남성은 70%, 여성은 74.7%로 여성이 약간 더 높았다.) A 씨를 포함한 다수 피해자가 경험한 원치 않는 구애와 만남 강요, 괴롭힘과 같은 거절 보복, 스토킹 등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 가는 결과다. 국내에서는 매우 생소하지만, 외국에서는 사내연애 금지 규정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미국 CNN 방송은 고용하거나 감독하는 관계에 있는 사람과 사적인 관계를 맺게 되면 인사팀에 보고하게 되어있어, 2022년 2월 CNN의 대표 제프 저커는 자신의 후임인 부사장과 연애하면서 이를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임하였다. 하버드 대학 역시 평가‧감독 권한이 있는 상급자와 직속 후임 간의 합의된 관계가 존재할 경우, 상급자는 이를 인사 담당자에게 보고하여 대안적인 평가‧감독 방안을 마련할 수 있도록 협조하여야 한다는 규정을 두고 있다. 구글은 감독 권한, 평가 권한 등 우위에 있는 자와 후임 간의 사적 관계를 금지하고 있고, 한술 더 떠 정직원뿐만 아니라 외부인력 직원(하청직원, 임시인력, 독립 계약자 등)과도 사적 관계를 금지하고 있다. 외국처럼 한국 기업에도 사내연애 금지 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 여러 반대 의견에 부딪힌다. 개인의 사생활에 회사의 지나친 개입과 간섭을 용인하는 것이라든가, 행복추구권을 침해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다. 실생활에서는 사내연애로 결혼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현실성이 없다는 의견도 있고, 사랑 때문에(?) 사람을 내보내는 것은 부당해고에 해당할 여지가 있으므로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모두 말도 안 되는 억지는 아니다. 보통의 연애와는 다른 사내연애 인간은 다면적이다. 노동하는 하나의 인간은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행복을 추구할 사회적 주체로서 권리도 가지지만, 안전한 환경에서 성취를 이루며 존엄하게 일할 노동자로서 권리도 가진다. 직장은 직위나 직급에 따른 우위뿐만 아니라 성별·학벌 등 인적 속성, 고용 형태, 업무 역량, 직장 내 영향력 등에 따른 여러 가지 우위가 촘촘하게 얽혀있어, 평등을 아무리 지향하더라도 직장은 어느 부분에서는 반드시 불평등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일하는 인간 사이는 필연적으로 불평등이 전제된다. 그렇기에 노동자는 직장에서의 안전과 존엄을 보장받아야 하는 것이다. 연애 관계를 맺는 사람 모두 어떤 종류든 우위에 기속된다. 사랑한다는 감정은 그 자체로는 순수할 수 있으나,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과 상황은 복잡하게 얽힌 우위 속에서 다면적인 인간이 만드는 것이므로 마냥 순수할 수 없다. 완전한 개인이 허상인 것처럼, 완벽한 동등함도 허상이다. 연애를 동등한 당사자들의 자유로운 의사에 기한 관계라고 상정하여 누구도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연애 관계에서의 문제들, 앞서 소개한 사례들에서 드러난 원치 않는 구애, 거절할 수 없는 상황, 거절로 인한 불이익 등 2차 피해 등에 대해 누구도 아무런 조치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 되어버린다. 더 나아가 “네가 좋아서 한 연애이니 그로 인한 문제도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라”며 피해가 발생하게 된 맥락과 상황을 삭제한 채 피해자를 탓하는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들 수도 있다. 위에서 소개한 설문조사에서 직장 내 성범죄의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순서대로 2가지를 응답해 달라는 질문에 대해, 직장인들이 가장 많이 선택한 3가지는 ‘스토킹이나 성희롱 등을 가볍게 대하는 사회적 인식’(50.8%), ‘회사에 신고해도 나아지지 않거나 오히려 불이익을 입을 것 같은 사회 분위기’(36.1%), ‘10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폭력적 연애관’(35.2%)이었다. 성범죄를 바라보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문제이며 피해자 보호와 구제에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연애가 분명히 일상을 다채롭게 하는 중요한 이슈이다. 하지만 상대방을 찍어 누르다 보면 정복할 수 있는 대상으로 취급하고, 성범죄를 가볍게 생각하며, 피해를 당했을 때 보호나 구제를 기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직장에서의 연애 관계를 마냥 낭만적으로 받아들이며 건강할 것이라 기대할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이 평등할 수 없는 이상 사회에 도달하지 않는 이상, 사내연애 금지 규정은 노동자의 안전을 위해 고려할 수 있는 선택지 중 가장 현실적인 수단인 것 같다. 사랑을 막겠다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막겠다는 것이다. 폭력에 노출될 걱정과 직장을 잃을 수 있다는 염려 없이 사내연애를 할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사내연애 금지 규정은 비로소 쓸모없어질 것이다. 그런 세상을 언제쯤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내 연애에 대한 고민을 비밀리 커뮤니티에 남겨주세요. 사내 연애 고수들이 글을 통해 함께 고민해 드립니다. 디자인 : 고결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 업무 스트레스도 만만찮은데 '갑질'까지 당한다면 얼마나 갑갑할까요? 시민단체 '직장갑질 119'와 함께 여러분에게 진짜 도움이 될 만한 사례를 중심으로 소개해드립니다. 직장이라는 곳은 본디 다종다양한 인적 속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만드는 공적 공간이며 관계다. 불특정 다수와 업무적으로 마주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가진 본연 그 자체의 인격이 아닌 사회생활용 인격을 가지게 된다. (일례로 나에게는 친구들을 만날 때와 직장에서의 MBTI가 네 자리 모두 달라지는 친구가 있다.) 저마다 서 있는 자리와 살아온 궤적이 다르기에 사회생활용 인격은 범용(汎用)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때문에 사회생활용 인격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어디서나 예의 바르지 않다. 직장 생활을 하며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인격, 자기 객관화가 안 된 인격, 자아가 비대한 인격, 약자를 무시하는 인격 때문에 고통받는 상황은 꼭 생긴다. 이러한 인격을 함양한 분들의 경우, 높은 확률로 사회화 과정을 거친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행하는 ‘공적’ 웃음과 친절을 구분하지 못한 채 착각의 늪에 빠진다. B 씨도 B 씨의 사회생활용 웃음과 친절을 두고 직장 내 성희롱을 한 상사 때문에 피해를 경험했다. “네가 나를 꼬신다” 상사의 도 넘은 성희롱 B 씨는 입사한 지 한 달 정도 된 신입사원이었다. 소속 부서에는 B 씨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유부남인 상사와 B 씨 단 두 사람뿐이었다. 상사와 조금씩 편해지면서 회식을 포함한 술자리가 잦아졌다. 언젠가부터 상사는 술이 들어갔다 하면 심한 성희롱 발언을 했다. 상사는 B 씨에게 “네가 나를 꼬신다, 너 나 좋아하냐”라며 헛소리를 하다가, “너에게 사심 있다, 연애하고 싶다”더니 심지어는 돈을 줄 테니 자신과 성관계를 하자는 암시가 담긴 말까지 했다. B 씨는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일에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상사와 부딪히고 싶지 않았다. B 씨는 억지로 웃으며 참았다. 그러면 안 된다는 식으로 장단을 맞춰주기도 했다. 어느 늦은 밤 상사는 B 씨에게 전화를 걸어, 왜 그렇게 퇴근 시간만 되면 빨리 가려고 하냐며 “혹시 너 밤에 다른 일 하니?”라고 물었다. B 씨는 기가 막혔다. B 씨가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느꼈는지, 상사는 갑자기 “네가 날 거절했으니 내 말 잊어라, 내일부터 넌 혹독하게 일할 준비 해라”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정말로 깐깐하게 굴기 시작했다. B 씨는 더 이상 억지로 상사의 비위를 맞추며 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퇴사를 결심했다. ‘성인지 감수성’ 높여야... 남녀고용평등법에서 규정하는 직장 내 성희롱이란, 사업주·상급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 내의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와 관련하여 다른 근로자에게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성적 언동 또는 그 밖의 요구 등에 따르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로 근로조건 및 고용에서 불이익을 주는 것을 말한다. B 씨의 상사는 본인의 지위를 이용하여 성적 굴욕감과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발언을 여러 번 했고, ‘자신을 거절했다’며 B 씨의 근무환경을 악화시켰다. 상사가 B 씨에게 한 발언과 행위는 의심할 여지없이 직장 내 성희롱에 해당한다. 누군가는 상사와 자주 술자리를 ‘가져주고’, 웃으며 장단 맞춰주고, 불쾌함을 티 내지 않은 B 씨를 탓할 수 있다. 만약 술에 취해 걸어가다가 별안간 뒤통수를 얻어맞고 금품을 갈취당하는 피해를 경험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누구도 피해자에게 왜 술을 마셨는지, 왜 범행의 대상처럼 보이게 행동했는지, 왜 그 길을 걸으며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는지를 결코 따져 묻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간극에서 분노를 느낀다. ‘성폭력’ 피해자에게는 다른 범죄의 피해자에게는 향하지 않는 잘못된 질문이 너무나 많이 꽂힌다. B 씨가 사내신고에 ㅅ자도 고려하지 않고 곧바로 퇴사를 결심한 배경에는 분명 피해의 책임을 B 씨에게 돌리는 사회적 인식이 자리했을 것이다. 대법원은 2018년 대학교수가 소속 학과 학생들에게 하였던 성적 언동이 성희롱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한 사건에서, 처음으로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피해자와 같은 처지에 있는 평균적인 사람의 입장에서 판단하여야 한다는 ‘합리적 피해자 관점’을 제시하였다. 해당 판결에서 대법원은, 성희롱 피해자는 피해를 당한 후에도 가해자와 기존 관계를 계속 유지하기도 하고, 즉시 신고하지 못할 수도 있으며, 신고했더라도 소극적으로 진술을 할 수 있어, 성희롱 피해자가 처한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쉽게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판시하였다. 피해자와 행위자의 권력과 지위가 불평등한 상황, 피해자와 행위자 사이의 관계는 물론 이를 둘러싼 수많은 공적 연결의 존재, 생계와 직결된다는 점 때문에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는 즉각적·직접적·적극적으로 대응하기가 매우 어렵다. B 씨는 유일한 사수이자 상사인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당했고, 다른 동료들의 도움을 구하기 어려운 고립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무엇보다 이 일을 계속하고 싶었고 잘하고 싶었다. 이러한 B 씨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B 씨의 사회생활용 인격이 보여준 모습만 가지고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다. 제대로 된 판단이 없다면 세상의 모든 B 씨들은 계속해서 회사를 떠나 지워질 것이다. B 씨는 상담 글에 감정 상하는 것 없이 평범하게 일하고 싶었다고 썼다. 당연하고도 소박한 바람이다. 그저 사회생활을 잘했을 뿐인데.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자기 객관화가 되지 않으며, 자아가 비대하고, 약자를 무시하는 사람 덕분에 여성 노동자의 자리가 없어졌다. 사회생활용 웃음과 친절을 두고 착각의 늪에 빠지지 말자. 당신은 직장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면 상종조차 하지 않았을 사람이다. 북 치고 장구 치며 제 발로 늪에 걸어 들어가 놓고 남 탓하지 말자. 그건 아마 나의 잘못은 아닐 거다. 착각한 네 잘못일 거다. 디자인 : 고결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 업무 스트레스도 만만찮은데 '갑질'까지 당한다면 얼마나 갑갑할까요? 시민단체 '직장갑질 119'와 함께 여러분에게 진짜 도움이 될 만한 사례를 중심으로 소개해드립니다. 우리는 ‘역고소-무새’*와 함께 살고 있다. 그 새는 위험을 감지하면 “무고... 무고...” 하고 운다. 때로는 상대를 위협하기 위해 “명예훼손... 명예훼손...” 하며 울기도 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관계를 구성하는 직장은 '역고소-무새'의 대표적인 서식지이며, 특히 ‘체면’을 중요시하는 한국 사회는 '역고소-무새'에게 매우 쾌적한 환경을 제공한다. *역고소-무새 : 역고소와 앵무새를 합친 말. 같은 얘기만 반복하는 앵무새처럼 ‘역고소하겠다’라고 반복하여 말하는 사람을 뜻한다. 직장 내 괴롭힘이나 성희롱에 관한 상담을 하다 보면 가해자로부터 무고죄나 명예훼손죄 등 소위 ‘역고소’ 당하는 것이 두렵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가슴 아프게도, 가해자가 그런 취지의 발언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피해자를 신고하는 사례가 생각보다 많다. 누구나 알 만한 직장에서 10년 넘게 근무하면서 지점장으로부터 직장 내 성희롱 피해를 당한 A 씨도 그중 하나다. A 씨는 한 직장에 다니는 동안 결혼을 했다가 이혼을 했다. 별 문제없던 직장 생활에 경고등이 켜진 것은 새로운 지점장이 온 다음부터였다. 지점장은 다른 직원들이 있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A 씨를 두고 “내가 결혼만 안 했으면 너 어떻게 해보고 싶었는데”, “(A 씨를) 재혼시키자”, “나랑 연애하자”라고 말했다. 거기서 더해 A 씨가 혼자 사는 아파트 옆집으로 사택을 구하려고 하여 A 씨는 이사를 가야만 했다. 어느 날 지점장은 A 씨에게 전화를 하여 “내가 연애하자고 하면 화낼 거냐”라고 물었고, A 씨는 이것을 녹음하여 본사 인사부서에 신고했다. 인사부서는 비밀유지와 피해자 보호를 위한 조치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약속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A 씨의 신고 사실은 다른 지점들에 소문이 났고, A 씨에게는 전화가 빗발쳤다. 지점장은 공공연히 A 씨를 무고죄로 고소하겠다고 말하고 다녔다. 높으신 어떤 분은 왜 본사에 이야기해서 일을 크게 만드느냐, 지점장이 잘리면 와이프에게 뭐라고 말하겠느냐며 성희롱을 신고한 A 씨를 죄인 취급했다. 괴롭힘이나 성희롱을 당한 피해자는 가해자에 비해 직장에서의 우위, 성별이나 연령과 같은 인적 배경, 지지 집단 유무 등에 있어 취약하다. 특히 A 씨는 ‘이혼녀’라는, 혼인제도 밖에 있는 여성이라는 배경을 가졌다. 인정하기도 싫고 이해할 수도 없지만, 결혼을 완성된 인간의 척도로 삼는 사회에서 이혼 경험이 있는 여성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비정상적인” 대상으로 치부되기 쉽다. A 씨 역시 내가 이혼하고 혼자 사는 여자라 만만했나 싶다고 했다. 반면 가해자는 결혼제도에 편입된 남성으로 지점장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다. 이혼 여성으로 일개 직원에 불과한 A 씨와 달리, 가해자에게는 지점의 장이라는, 기혼 남성이라는 ‘체면’과 ‘명예’가 있는 것이다. 역고소 무새는 바로 이 지점에서 탄생한다. 마땅히 보호되어야 할 ‘체면’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 ‘체면’은 사람에 따라 있기도 없기도 하며, 성희롱 가해자로 지목하는 것은 그 ‘체면’을 손상시키는 행위라는 사회적 인식이 '역고소-무새'를 만든다. '역고소-무새'는 “무고...”, “명예훼손...”하고 울면서 사건의 초점을 성희롱 사실이 아닌, 피해자의 신고가 자신과 조직의 ‘체면’을 손상시켰다는 것으로 옮겨간다. '역고소-무새'의 울음은 무죄를 증명해야 하는 책임을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아주 편리한 수단이다. 피해자는 도리어 '역고소-무새'를 해친 가해자가 되어 성희롱 피해 입증과 함께 무고 또는 명예훼손이 아니라는 입증을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성희롱 사실은 오간 데 없어진다. 그러나 '역고소-무새'는 성희롱 가해에 대해 별다른 변명을 덧붙이지 않고도 단지 우는 것만으로 자신의 가해 사실을 강력하게 부인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나의 ‘체면’ 손상 피해와 너의 성희롱 피해를 서로 무마하자는 합의 조건으로 삼기도 한다. 역고소는 정말 가성비가 좋다. A 씨는 '역고소-무새'의 공격 외에도, 회사의 법 위반 때문에 추가적인 피해를 당했다. 남녀고용평등법에서는 성희롱 발생 사실을 조사한 사람 등은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여 조사 과정에서 알게 된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여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제14조 제7항). 하지만 A 씨가 본사에 신고하자마자 다른 지점에 신고 사실이 퍼졌다. 또 법에서는 성희롱 피해자에게 폭언 등 정신적·신체적 손상을 가져오는 행위 등 불리한 처우를 하여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제14조 제6항), A 씨는 높으신 분으로부터 왜 일을 크게 만드느냐, 가해자가 집에 뭐라고 하겠느냐는, 조직과 가해자의 ‘체면’을 우려하는 발언을 들었다. 법을 위반한 것은 회사인데 법 위반 때문에 피해를 본 것은 피해자인 A 씨였다. 작년 10월 직장갑질 119가 직장인 1천 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직장에서 성희롱을 경험한 여성은 3명 중 1명 이상(37.7%)이었다. 성희롱을 당했을 때 대응에 대해서는 ‘참거나 모르는 척했다’라는 응답이 65.2%로 가장 많았고, ‘회사를 그만두었다’라는 응답은 32.7%였다. 그 이유는 A 씨의 사례가 선명하게 보여준다. 아무런 제재 없이 법을 위반하는 회사에서 '역고소-무새'의 공격을 견디며 신고를 결심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타인의 인권을 침해한 자의 ‘체면’과 ‘명예’가 보호되어야 한다는 '역고소-무새'의 사나운 울음소리는 피해자가 호소조차 할 수 없게 만든다. 이후 A 씨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맞서 싸웠을 수도,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직장을 떠났을 수도 있다. A 씨가 느꼈을 무력감과 고립감을 생각하면 너무나 슬프다. 무엇이 되었든 A 씨에게 최선의 선택이었기를, 피해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과정이 되었기를 바랄 뿐이다. '역고소-무새'에게 관심을 주지 말자. '역고소-무새'의 악에 받친 울음보다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가해자의 ‘체면’이 손상되었는지보다, 가해 사실을 밝히는 데에 집중하자. 관심을 받지 못하는 '역고소-무새'는 제풀에 지쳐 말라죽을 것이다. 디자인 : 고결 ▶ 관련 기사 - 경향신문,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정부, 직장인들 생각은 전혀 달랐다 - 연합뉴스, "여성 직장인 4명 중 1명 성폭력 경험… 스토킹 피해도 11%" - SBS, "여성 직장인 4명 중 1명 성폭력 경험… 스토킹 피해도 11%" - 한국일보, "상사가 옷 속에 손을"... 여성 직장인 3명 중 1명이 겪는 사내 성폭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