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중심으로 문화 분야를 담당합니다. 영화 칼럼 '씨네멘터리'를 포털에서 연재 중입니다. 인터뷰 에세이집 '그래도 당신이 맞다'를 썼습니다.
한 순간의 감동은 때때로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습니다. 이주형 논설위원의 '이 순간[The Moment]'은 영화 등 예술 작품 속의 인상 깊은 장면을 통해 작품이 관객과 독자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다양한 앵글로 들여다보는 스토리텔링 콘텐츠입니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안나 카레리나"만큼은 아니겠지만, 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도 꽤 유명합니다. 재미교포 작가 이민진이 영어로 쓴 이 소설은 2017년 전미도서상 후보에 올랐고,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2022년에는 할리우드에서 동명의 드라마로 제작됐고, 최근 시즌2가 공개되면서 다시 한번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부산 영도가 고향인 선자는 먹고 살기 위해 일본 오사카로 떠납니다. 아버지가 다른 두 아이의 엄마인 선자는 전쟁과, 차별과, 가난 속에서도 자식들만큼은 제대로 키우기 위해 자신의 운명을 헤쳐 나가는데... 이 이민자 가족의 삶은 선자의 손자 대에 이르러서도 녹록지가 않습니다. 역사가 저버렸지만 살아내야 하는 조선 여인과 그 가족의 삶을 유장하게 그린 이 8부작 드라마는 철저한 고증과 뛰어난 시각적 만듦새로 한국과 일본의 근현대 풍경을 재현해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만큼 작가와 감독은 물론 대부분의 기술 스태프도 외국인이지만, 의상 감독만큼은 한국의 채경화 디자이너가 맡았습니다. 할리우드 진출은 그의 오랜 꿈이었습니다. The Moment - 의상 감독 채경화의 할리우드 진출기 이주형ㅣ기자 제안이 온 건가요, 아니면 이 프로젝트를 알고 지원을 하신 건가요? 그 과정이 좀 궁금한데요. 채경화ㅣ"파친코" 의상 감독 그거는 아마 어떤 분들이 좀 서치를 하셨을 거예요. 제가 알기로는 쇼러너분이 제 작품 중에 "써니"하고 "킹덤", 저희(파친코)랑 연도나 분위기가 좀 (비슷한 게) 있잖아요. 그래서 킹덤 했던 거랑 써니 했던 부분을 좀 보셨던 걸로 알고 있어요. 좋게 보셨던 걸로. 여러 후보가 한국에서도 있었고 미국에서도 있었던 걸로 알고... 그래서 인터뷰 제안이 왔는데 제가 하고 싶다고 해서 인터뷰를 참여하게 됐죠. # 할리우드 이주형ㅣ기자 이 프로젝트에 뭘 보고 참여하시게 된 거예요? 왜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셨어요? 그 과정이 좀 궁금한데요. 채경화ㅣ"파친코" 의상 감독 막연히 이 일을 시작할 때 뭔가 할리우드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그런 게 이루어지거나 뭔가 성립이 될 거라고 생각한 사람도 없었고. 그런데 시작은 제가 그랬어요. 일단 유학도 제가 '영어를 공부해야 하고 뭔가 해외 것들도 알아야 해' 하면서 엄마한테 얘기하고 외국도 갔었고. 제가 "강원도의 힘"을 마치고 갔었거든요. 근데 이런 기회가 오는 거예요. 그래서 사실 저는 열일 제치고 하고 싶었고 꼭 이루고 싶었고 그래서 정말 진짜 간절하게 접근을 했었던 것 같아요. 제가 느끼는 그런 화이트, '백의민족'에 대한 화이트. 그리고 '역사적인 저항보다는 가족의 사랑 같은 게 베이스로 더 보여지는 것 같다'라는 말들을 했을 때 '그게 굉장히 자기와 맞다' 이런 말들을 작가가 했었던 것 같고... 마지막에는 그래도 믿지 못하잖아요. 동양의 어떤 한 여자를 그런 많은 일들을 한 분들이 어떻게 믿겠어요? 룩북을 좀 준비해달라고 했는데 그때 제가 진짜 열심히 했어요. 꼭 돼야겠다라기보다도 안 되든 되든 내가 열심히 해봐야겠다 해서 콘셉트에 대한 걸 하다 보니까 저희가 한 70~80장 되더라고요. 사실 제가 반대 입장으로 봤을 때도 열정이라고 보이고 사실 미국분이 얼마큼 해왔겠어요. 미국분이랑 아마 제가 경쟁했던 것 같아요. # 도전 이주형ㅣ기자 굉장히 거대한 규모의 프로젝트고 그만큼 또 의상이 소요되는 게 많을 거고 '야, 이거 나 잘할 수 있을까' 도전에 대한 두려움도 좀 있었을 것 같아요. 채경화ㅣ"파친코" 의상 감독 제가 뭐 육십 몇 편을 했지만 사실 한 편도 쉬운 건 없더라고요. 그거에 대해서 제가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내가 이 일에 안 맞는 건 아닌가, 나만 이렇게 어렵나, 나는 왜 왜 작품이 어렵지?' 그런 생각을 제가 한 40~50편 했을 때쯤 진지하게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작품이라는 거, 예술이라는 거는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힘든 거다, 나니까 힘든 게 아니다. 용기를 가지자'라고 생각한 시점이 있었어요. "황해", "써니" 할 때쯤이었던 것 같고 그러면서 생각의 전환을 갖게 됐어요. # 선자의 의상 채경화ㅣ"파친코" 의상 감독 한복에서부터 시작을 한 게 "파친코"이고 한복은 고향이나 또는 엄마의 사랑 이런 거를 상징해요. 그래서 한복을 입고 있었던 그녀의 시절, 그다음에 한복을 조금씩 벗기 시작한 독립 시절, 그리고 여기에서 적응을 하면서 아예 조금 더 일본 옷을 입게 되거든요. 처음에는 조금 더 서양 옷을 거기서 입고 있던,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던 경희의 옷을 조금 얻어 입게 되는 거예요. 콘셉트 자체가. 그런데 이제 전쟁 때고 자기들이 자식을 데리고 가야 되는, 두 여자가 이끌어야 되는 순간이 오게 되면서 그때부터는 둘 다 거의 일본 옷을 입고 직접적으로 농사에 참여한다든지. 그래서 제가 표현하는 건, 항상 옷이라는 건 TPO가 있잖아요. 그것처럼 그녀가 겪어야 되는 상황, 정도를 나타내는 수준으로 맞춰서 표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민하ㅣ젊은 선자 역 저는 이런 시대극을 처음 해보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뭔가 이렇게 분장을 하고 옷을 입는 순간 영감을 받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그 옷을 입고 현장에 가서 또 이제 세트장에 가면 정말로 거기에 살고 있는 것 같고 더 상상을, 조금 자세하게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같더라고요. 그 옷들은 사실 저한테는 의미가 너무 컸어서 시즌1 끝나고 의상 감독님한테 조금 달라고 그랬었어요. 그래서 집에 있습니다. 한복, 한복. 한복이요. 하하. # 한복 이주형ㅣ기자 그 옷들에서 공산품 옷들에서 느낄 수 없는, 그런 공예적인 아름다움, 수공업적인 아름다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옷이잖아요. 그런 데서 고귀하고 기품이 있고 인간적인 옷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사람들한테 준다고 생각하세요? 채경화ㅣ"파친코" 의상 감독 그런 느낌을 정확하게 받으셨다고 하면 너무 보람을 느끼는 부분이고... 그거를 직접 또 손으로 했었기 때문에도 그렇지만, 이 한복이라는 게 그때도 그렇고 다 만든 옷이잖아요. 저희 콘셉트 자체도 그렇고 이 땅에서 나오는 어스톤(earth tone)이라고 할 수 있는 컬러들이나 자연스러운 구김이라든지 그냥 축 걸친 듯한. (한복이) 막 다려지고 막 만들어지고 똑바르고 그런 사극들도 많이 나와 있잖아요. 해외 옷들도 많이 그렇게 되어 있고, 서양 옷들도. 그런데 우리는 곡선적이고, 자연 원단의, 색깔도 막 꼭 맞추지 않고 덜 물든 것 같은 옷에. 그리고 계속 빨잖아요. 한국 사람들은. 빨았잖아요. 그런 것들로 그 어떤 옷보다 내추럴한 게 한복이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실제 옷들도 다 제가 합성섬유나 공장에서 할 만한 걸 쓰진 않았고 아까 한복 안의 것도 보셨다시피 실제 그냥 무거운 면으로 해버렸거든요. 실제 많이 빨았고 그래서 그거야말로 계속 작가가 강조했던 진정성이 보여지는 게 아닌가. 정말 외국 사람들이 다 너무 예쁘다고 많이 했거든요. 한복을 우리가 볼 때는 사실 선자 한복 같은 거 되게 낡아가지고 그래 보이는데 너무 예쁘다는 말을 외국 사람들이 너무 많이 했어요. 제가 전시할 때도 느꼈고, LA에서. # 가장 애착이 가는 옷, 가장 어렵게 작업했던 옷 채경화ㅣ"파친코" 의상 감독 제가 진정성이나 이런 걸 말씀드리는 게 이런 것을 보통 미싱으로 누비잖아요. 이 옷은 원래 예전에는 다 손으로 누볐단 말이에요. 그래서 저희가 작품에 썼던 옷 두 벌은 직접 누벼주시는 분이 한 달 반 동안 손으로 누벼주셨어요. 시집갈 때 입었던 옷, 그리고 이 안에 입었던 그 결혼식 한복. 제일 애착이 가는 옷은 거의 이제 선자의 이런 옷으로 제가 생각하고 있고, 힘들었던 옷은 한수 첫 등장에 나오는 화이트 수트였던 것 같아요. 한수는 한복 속에서 보여지는 이질감의 수트잖아요. 그리고 거기서도 화이트를 쓰기로 또 작가님이랑 얘기를 했었고. 화이트라는 종류가 굉장히 많아요.사실 약간 아이보리도 화이트로 할 수 있고 정말 화이트도 화이트고. 어려운 컬러예요. 그리고 화이트 수트를 잘 만들지도 않기 때문에 정장으로 화이트가 잘 있지도 않고요. 그리고 굉장히 고급스러워야 되고 고풍스러워야 되고 그래서 그 화이트를 제가 진짜 많이 샀어요. 각종 나라에서 있는 화이트를 다 사봤어요. 그리고 쉬운 예로 속옷이 비쳐요. 화이트 수트는. 근데 한수가 입었던 화이트 수트는 속옷이 안 비치거든요. 컬러도 있고 그 두께감 때문에. 그래서 영국 원단으로 결국 결정을 해서 입게 됐는데 되게 여러 개를 만들어서 테스트해보고 그 핏도 정리를 해보고 그래서 만들어진 장면이어서 진짜 애착도 가고. 예고편 나왔을 때 진짜 저도 너무 짜릿했던 장면인 것 같아요. # 할리우드 사람들 채경화ㅣ"파친코" 의상 감독 쇼러너(show-runner)나 프로듀서들이나 일 안 하고 있는 시간이 거의 없더라고요. 연락이 안 되는 시간도 없고. 그리고 아트(디렉터)도 새벽 4시면 벌써 사무실에 나와 있고. 자기 혼자만의 시간을 갖다가 또다시 팀들이 오면 작업을 하고. 그래서 '아~ 최고가 되고 열심히 하고 한 사람들에서의 시간은 내가 생각하는 거랑 다르구나', 훨씬 더 열심히 일한다는 걸 알고 많이 충격을 받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오래 일해야겠다를 느꼈다기보다 저 노력이 저만큼을 만드는 거구나에 대한 느낌을 받았었던 것 같아요. # 크레딧 이주형ㅣ기자 오프닝 크레딧이 쭉 나오는데 배우가 끝나면 바로 의상 디자이너가 나오더라고요. (네네네, 맞아요.) 저는 이런 경우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영화건 뭐가 됐건. 채경화ㅣ"파친코" 의상 감독 너무너무 진짜 영광스럽고 진짜 좋았고 이렇게 영화에서 중요하게 의상을, 드라마나 영화에서 생각하고 있구나라는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았어요. 가족들도 다 많이 좋아했고 저는 또 그 장면만 보는 재미도 있고 우리 팀들도 막 좋아하고 시즌2도 그렇고요. 채경화 의상 감독의 '더 모먼트'. 진심은 통한다. 진정성은 힘이 세다. 채경화ㅣ"파친코" 의상 감독 진짜여야지 돼요. 배우를 대할 때는. 사실 그냥이 아니라 진짜로. 감독님도 마찬가지고. 제가 부족한 거는 다음 문제고 내가 이 캐릭터를 위한 진짜가, 그래도 더 맞는 답이나 아니면 더 훌륭한 결과를 내는 거에 도움이 된다라는 결론을 정말 시즌1 하면서 저 나름대로는 찾게 된 방법인 것 같아요. 이주형ㅣ기자 배우랑 직접 대면해서 같이 연기를 하지 않지만, 옷이라는 매개체로 배우를 만나지만, 그래도 진짜여야 된다. 채경화ㅣ"파친코" 의상 감독 그 순간에 나도 이 배우의 똑같은 그 상황이나 그 옷도 나이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이거는 오래돼서 물려준 옷이다라고 했을 때 그런 정도에 있으려면 그 사람이 입었을 때 이런 느낌, 중요한 인물에 대해서는 그거에 대해 생각을 하고, 그 사람 상황의 색깔, 그 옷의 나이 이런 것들에 대해서 조금 더 고민하고 진지하게 생각을 해보고 접근하지 않으면 배우도 제가 설득할 수 없고 입는 사람도 그렇게 느낄 수가 없고. 그래서 그렇게 한번 해봤어요. 그래서 저는 "파친코"가 어떤 의상적인 작업뿐 아니라 제가 가지고 있는 이 일이나 모든 과정에 있어서 진정성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그런 작품이었어서 저 자신도 많이 바꾸게 되는 그런 계기가 되는 부분에서 너무 중요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상 제공 : Apple TV+
한 순간의 감동은 때때로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습니다. 이주형 논설위원의 '이 순간[The Moment]'은 영화 등 예술 작품 속의 인상 깊은 장면을 통해 작품이 관객과 독자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다양한 앵글로 들여다보는 스토리텔링 콘텐츠입니다. 끝난 줄로만 알았던 LP의 부활 소식이 이따금 들려온 지도 꽤 됐습니다. 몇 해 전에는 CD의 생산량을 추월했다는 얘기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스트리밍의 시대. 다시는 LP가 곧 음악이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오브리 파월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브리 파월 그런 앨범 커버의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거예요. 그 시대는 끝났어요. 15년 간 지속된 그 시대에 힙노시스가 선두에 있었다는 건 행운이죠. 오브리 파월과 스톰 소거슨이 함께 창립했던 힙노시스는 ‘LP 커버의 전설’로 불립니다. LP음반의 전성기인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그들이 디자인한 사각형 앨범 커버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핑크 플로이드, 레드 제플린, 폴 매카트니 등등 지금까지도 최고의 록 그룹과 뮤지션으로 불리는 이들이 힙노시스에게 자신들의 앨범 커버 디자인을 맡겼습니다. 애플TV+에 있는 어느 음악 다큐멘터리 시리즈 제목처럼, 1970년대는 ‘음악이 모든 것을 바꾼’ 시대였습니다. 한국에서의 첫 전시를 위해 서울에 온 힙노시스의 디자이너 오브리 파월이 ‘더 모먼트’에서 그 시대를 증언합니다. “1970년대 앨범 커버의 중요성은 말이죠, 사진과 그래픽 디자인 분야의 아티스트가 처음으로 밴드의 음악과 가사를 통해서 아티스트로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는 거예요. 그땐 무엇이든 할 수 있었어요. 1946년 LP 앨범 커버가 처음 등장한 이후 70년대 이전까지는 밴드나 아티스트의 사진만 앞표지에 있었는데, 모든 것이 완전히 바뀌었고 힙노시스가 변화의 최전선에 있었죠.” 1970년대: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 “사람들은 단순한 사랑 노래가 아닌, 보다 지적인 개념에 대해 곡을 쓰기 시작했어요. 1970년대의 이런 움직임은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정치적이고, 감정적이고, 지성적인 운동이었기 때문에 젊은 세대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각 운동이었어요. 제네시스나 핑크 플로이드 같은 프로그레시브 록 음악도 정치적 색채를 띠기 시작했죠. 예를 들어 “더 다크 사이드 오브 더 문” 들어보면 광기에 대한 요소가 있고, 자본에 대한 요소가 있고, 상실에 대한 요소가 있습니다.” 더 다크 사이드 오브 더 문(The Dark Side of the Moon) -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록 앨범 “애비 로드 스튜디오로 핑크 플로이드를 보러 갔을 때 그들은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는 우리를 대표하는 단순한 그래픽 이미지 같은 뭔가 다른 것을 원해.’ 약 2주 후에 나는 빛의 물리학에 관한 잡지를 읽고 있었어요. 이 잡지에는 흰색 선이 있는 삼각형이 유리 프리즘을 통과해 무지개를 만드는 이미지가 있었어요. 스톰이 저를 보더니 핑크 플로이드에 딱 맞는 아이디어가 생각났다고 하더라고요. 바로 피라미드 이미지죠. 핑크 플로이드는 그게 바로 그들의 이미지라고 생각했어요. 그 단순한 이미지가 50년 후에 가장 유명한 앨범 커버 중 하나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저도 상상도 못 했죠.” LP커버는 그들에게 무엇이었나 “요즘 스포티파이나 유튜브에 가면 겨우 요만한 작은 사진 한 장을 볼 수 있고 그게 아무 의미도 없지만, 1970년대에는 앨범 커버가 모든 것을 의미했고 밴드에게 중요한 자산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토요일 아침에 음반 가게에 가서 음악을 듣고, 앨범 커버를 보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밴드와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모든 부분을 공부하곤 했어요.” BTS ‘불타오르네’ 핑크 플로이드 9집(좌)과 BTS '불타오르네'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 힙노시스, 하이브 “1970년대에 포토샵이 있었다면 환영했겠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할 거예요. 왜냐하면 핑크 플로이드의 “위시 유어 히어” 앨범 커버를 만들기 위해 실제로 스턴트맨에게 불을 붙였어요. 지금은 포토샵으로 2시간 만에 똑같이 할 수 있을 거예요. 악수하는 남자의 사진을 찍고 거기다 불을 좀 얹어서 만들면 되잖아요. 인공지능을 사용하면 훨씬 더 쉽게 만들 수 있겠죠. BTS 뮤비를 봤을 때 힙노시스의 ‘불타는 남자’에 대한 오마주라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우리가 한참 전에 만들었던 이미지에서 무언가를 취하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멋진 일이죠.” 힙노시스 창의성의 비밀 “우리는 동그랗게 둘러앉아 아이디어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는데, 때로는 방 안에 마약상도 있었고 매춘부도 있었고 다른 디자이너들도 있었고 그냥 우연히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어요. 칼 던지는 사람 등 온갖 이상한 사람들이 스톰의 아파트에서 하는 회의에 오곤 했어요. 우리는 밴드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아이디어를 이야기하곤 했죠. 스톰이 이런 얘기했던 게 기억나요. 스톰이 “내가 꿈을 꿨는데 바다가 있었고 양이 있었어.” 내가 무슨 소리냐고 물었죠. 그는 “나도 모르지만 바다는 정신, 양은 사람의 상징이고 소파는 정신의학의 상징이야. 뭔가 깊은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 저는 그게 뭔지는 몰랐지만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룹 10CC에게 아이디어를 팔러 갔을 때 “그게 우리 음악과 무슨 상관이죠?”라는 말을 들었어요. 10CC의 음악은 아주 팝적인 음악이었기 때문이죠. 우리는 “당신들 음악과는 관련이 없지만 아이디어가 좋잖아요.” 그러자 10CC는 “그래, 우리도 좋아”라고 하더니 어디에서 찍을 거냐고 물었어요. 영국 남부 해안이나 어딘가에서 찍을 거냐고 하길래 나는 “1월이잖아. 너무 추워. 하와이에서 찍고 싶어요”라고 했죠. 그랬더니 “그럼 하와이에 가야지”라고 하길래 하와이로 갔죠. 그 당시에는 ‘힙노시스 커버’에 대한 사고 과정이 매우 진지했어요. 앨범 커버가 밴드의 음악이나 가사와는 반드시 연관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었어요. 때로는 관련이 있었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었습니다.” 폴 매카트니는 달랐다. 비틀스는 비틀스. “이번 전시회에서 보신 작품 중 대부분은 스톰과 저, 피터 크리스토퍼슨의 아이디어였어요. 하지만 비틀스 멤버였던 폴 매카트니 같은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아이디어가 많았고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이게 내가 원하는 건데, 이렇게 좀 만들어줄래?” 스톰은 폴과 일하는 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건 힙노시스의 아이디어가 아니야. 안 할거야” 하지만 나는 폴 매카트니를 좋아했어요. 나는 그와 매우 잘 지냈고 힙노시스를 위해서 할 거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무엇보다 그는 폴 매카트니였고 둘째, 그가 많은 돈을 줬기 때문이죠. 그는 아마도 지금까지 일했던 뮤지션 중 자신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온 유일한 뮤지션이었을 거예요. 대부분은 모두 힙노시스 아이디어로 앨범 커버를 만들었지만 그는 예외였죠. 그는 비틀스잖아요.” 영화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을 찍게 된 이유 “어느 날 아침 콜린 퍼스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어요. 콜린 퍼스는 배우로서는 알지만 개인적으로는 몰랐죠. 그는 힙노시스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하더군요. 왜냐고 물었더니 그는 LP의 열렬한 팬이라고 하더군요. LP도 1,000장이나 수집하고 있고 제 책도 모두 가지고 있으며 힙노시스에 대해서도 많이 안다면서요. 그는 (영화로 만들면)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거라면서 점심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어요. 그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가 힙노시스 덕후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가 우리가 작업한 모든 앨범의 커버를 다 알고 있어서 정말 놀랐어요. 점심 식사 후 그가 이 영화를 만들고 싶냐고 제게 물었어요. 물론 만들고 싶다고 대답했죠. 그런데 당신 돈은 있냐고 물었죠.” 과거 VS. 현재 “1970년대와 오늘날의 창작에는 큰 차이가 있어요. 그때는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어떤 게 가장 좋은 사진이고, 구성이고, 색상인지 따져보고 결정을 내릴 만한 충분한 시간이 있었어요. 요즘엔 그럴 시간이 없어요. 내일까지 해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내일까지 받아낼 수 있다는 걸 아니까요. 누군가 아이디어를 가져와서 '이렇게 해주세요, 금요일까지요' 그럼 끝이에요. 지금은 사진이나 뮤직비디오나 뒤에서 곱씹는 과정이 없어요. 작품을 제대로 만들 시간,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을 사진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이 없어요. 저희에게는 그런 시간이 있었고,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특권이었습니다. 스포티파이에 가거나 만약에 30억 명이 들을 수 있는 히트곡이 있다면, 예를 들면 테일러 스위프트 같은 경우죠, 그 시장은 엄청나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듣는 거예요. 1970년대에는 앨범이 수천만 장 팔렸지만 사람들은 앨범 커버에 있는 사진을 보고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변화를 사진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예술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문화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 앨범 커버의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겁니다. 끝났어요. 15년 동안 이어졌던 그 시대에 힙노시스는 운 좋게도 그런 동향의 최전선에 있었습니다.” “LP는 가난한 이들의 미술 소장품이다.” 90년대 영국의 국민 밴드 오아시스의 리더 노엘 갤러거가 힙노시스 다큐영화에 나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군가가 한 말인데, 자기가 한 말이었다면 좋겠다고 하면서요. 오브리 파월의 말대로 LP의 시대는 갔습니다. 록 그룹이 전용기를 타고 다니며 수천만 장씩 LP를 팔던 시기도 끝났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 음악을 하고, 예술을 하고, 뭔가를 창조하던 과정, 그리고 그것들을 감상하고 음미하던 문화에서 오늘날의 우리가 되돌아봐야 할 만한 것들은 없을까요? 영상제공 : 티캐스트 사진제공 : 힙노시스, 그라운드시소
한 순간의 감동은 때때로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습니다. 이주형 논설위원의 '이 순간[The Moment]'은 영화 등 예술 작품 속의 인상 깊은 장면을 통해 작품이 관객과 독자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다양한 앵글로 들여다보는 스토리텔링 콘텐츠입니다. 어린 해성과 나영은 내색하진 않지만 서로 좋아하는 사이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영이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다고 하죠. 한국 사람은 노벨문학상을 못 받는다면서요. 소녀는 떠났지만 소년은 소녀를 잊지 못합니다. 청년이 된 해성이 나영을 잊지 못해 소셜미디어로 찾아낸 건 12년이 흐른 뒤였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또다시 12년이 흐른 뒤, 그러니까 서울에서 헤어진 지 24년 만에야 두 사람은 뉴욕에서 재회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름도 노라로 바꾸고 미국에서 작가가 된 나영에게는 이미 서양인 남편이 있습니다. 이들의 인연은 과연 어디까지일까요? 셀린 송 감독을 만나 "패스트 라이브즈"의 창작 과정을 들어봤습니다. 노라 한국에는 '인연'이라는 말이 있어. 섭리 또는 운명을 의미해. 구체적으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말인데, 내 생각에는 불교와 환생에서 온 개념 같아. 만약에 거리에서 낯선 사람과 우연히 옷깃만 스쳐도 인연인 거야. 왜냐하면 그들 사이에 전생에 뭔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거거든. 두 사람이 결혼까지 한다는 건 전생에서 8,000겁의 인연이 쌓였다는 거야. 불교에서 비롯된 한국말인 '인연'을 주제로 세계적 찬사를 이끌어낸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를 만든 셀린 송 감독. 아시아계 여성 감독 최초로 데뷔작을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려놓은 그녀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썼습니다. 한국어와 영어가 공존하는 이 영화의 대사는 각본가이자 감독인 셀린 송이 한국어가 먼저 떠오르면 한국어로 쓰고, 영어가 먼저 떠오르면 영어로 쓴 겁니다. 그러니까 때론 한국어 대사도 영어로 먼저 써놓고 한국어로 바꾼 거죠. 이런 방식의 창작은 셀린 송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12살까지 한국에서 살았고, 요즘도 종종 한국 예능을 시청하는 셀린이기에 가능한 독특한 작업 방식이죠. 셀린 송 거기서 저는 두 가지 언어로 다 쓰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한국말도 제가 컨트롤하고 싶고 영어도 하고 싶었기 때문에. 제가 생각이 영어로 되는 부분은 영어를 먼저 쓰고 한국말이 더 맞다고 생각이 드는 부분은 한국말을 쓰게 되는 것 같아요. '그때 보자'라고 하는 마지막 라인(대사)은 예를 들자면은 영어가 먼저 왔어요. 'See you then'. 그런데 'See you then'이 온 다음에 한국어를 하려고 했을 때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가 '그때 보자'가 가장 맞는 것 같아서 하게 된 것 같아요. 이주형 한국어 대사가 굉장히 현재적이어서 저는 좀 놀랐는데요. 예를 들면 뭐 미쳤다, 당근, 글쟁이해, 빡세네, 또라이 이런 단어를 다 평소에 알고 계셨던 단어예요? 셀린 송 네. 제가 그래도 한국 예능 같은 걸 좀 봐서. 그래서 그 TV 쇼들에서 좀 본 게 있어서 알게 된 것 같아요. 이주형 진짜요? 그런데 사실은 더 놀라운 거는 이 부분이었어요. 어떤 대사냐 하면, 이주형 사실은 거기는 '지금은'이 더 어울리는 단어고, 그 다음에 '몸적으로 아니면 정신적으로' 그러니까 피지컬리 또는 멘털리, 그 대사도 사실은 '육체적으로 아니면 정신적으로', 이렇게 해야 더 맞는데 이걸 코리안 아메리칸의 적당히 서툰 한국말로 바뀌어져 있단 말이죠. 이거 이걸 감안하고 쓰신 건가요? 셀린 송 네. 왜냐하면 노라는 코리안 아메리칸이고 한국어가 제가 생각하기에는 저보다 더 못한다고 생각해요, 저보다. 그래서 어떨 때는 '아 설마 노라가 '육체적'이라는 단어가 쉽게 나올까? 아니라고 생각하면 '몸적'이라고 하자' 이런 식으로 쓰게 됐던 것 같아요. 사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셀린 송의 자전적인 이야기입니다. 나영처럼 12살에 캐나다로 이민을 간 셀린 송 감독은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에 빛나는 송강호 배우의 출세작 "넘버3"를 만든 송능한 감독의 딸입니다. 역시 각본가이자 감독이었던 아버지를 닮아 셀린 송의 언어적 감각은 타고 난 듯 합니다. 조필 ("넘버3" 대사 중) "내가 현정화, 그러면 무조건 현정화야! 내 말 토토토토토 토토 토다는 새끼 전부 배반형이야, 배반형. 배신! 배반형!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앞으로 직사시켜 버리겠어, 직사." 이 장면이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넘버3"의 명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제가 "넘버3"의 주연이었던 최민식 배우에게 송능한 감독의 딸이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걸 알고 있냐고 물어봤습니다. 최민식 진짜 감개무량했어요. 그때 송능한 감독님 댁이 평촌이었거든요, 안양. 그때 감독님 댁에서 촬영한 적도 있어요. 그때 제가 본 기억이 나요. 꼬맹이. 근데 그 친구가 이렇게 또 감독이 돼서 아버지의 대를 이어서 외국에서 좋은 반응, 좋은 감독으로 성장한 것 같아서 정말 세월도 많이 흐른 것 같고 '야, 참 축하할 일이구나.' 이주형 근데 아파트에서 찍은 것도 기억을 하세요? 셀린 송 네. 그 씬이 있어요. 이주형 그 씬이 혹시 이 씬인가요? 이미연 씨랑… 셀린 송 아, 맞는 것 같은데요. 네 맞아요. 맞아요. 네네 맞아요. 맞아요. 이주형 아 이게 댁이었어요? 셀린 송 네, 우리 집이었어요. "패스트 라이브즈" 이전에 10년 동안 극작가로서 연극을 했던 셀린 송은 전혀 다른 장르인 영화, 그것도 데뷔작에서부터 활자를 뛰어넘어 마음을 움직이는 카메라 워킹으로 비주얼리스트로서의 재능을 보여줍니다. 해성과 나영이 24년 만에 뉴욕에서 재회하는 바로 그 장면입니다. 셀린 송 카메라가 결국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관객도 그렇게 바라볼 수가 있는데 팬을 왔다 갔다 할 때 그리운 사람을 위해서 카메라가 움직여서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 우리는 그리운 감정이 풀려요. 그래서 그 사람을 봐서 너무 행복한데 그다음에 또 바라보고 있다 보면은 이 사람이 그립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또 있는데 그 사람이 카메라에 없으니까 또 보고 싶어요. 그래서 그 보고 싶은 마음을 키우는 게 그 씬에서는 중요했다고 생각해요. 미국 ABC 방송의 베테랑 영화 저널리스트 피터 트래버스는 "패스트 라이브즈" 리뷰 기사에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을 훔치지 않는다면 심장이 뛰는지 검진을 받아보라"고 썼는데요, 바로 이 장면이죠. 해성이 나영, 아니 노라, 아니 나영을 짧게 만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 두 사람은 해성을 태우고 공항으로 갈 우버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아주 복잡한 심정에 빠집니다. 셀린 송 제가 큐를 할 거였어요. (우버가) 언제 올 건지를 제가 정할 거였어요. 그래서 배우들도 모르고 크루도 몰랐어요. 근데 사실은 저도 몰랐어요. 왜냐하면 제가 그 시간이 우버가 와야 되는 시간이 '너무너무 길다, 진짜 너무 길다, 이거 언제 끝나나' 이렇게 느껴야 되기도 하고 그래도 결국 우버가 오는 순간에는 '10초만 더 줘' 이런 감정이어야 돼요. 저는 언제 할 건지 아는 척했지만 저는 진짜 몰랐어요. 왜냐하면 그냥 제 안에 있는 시계가 정해져야 하는 거기 때문에 그래서 그냥 바라보다가 내가 딱 그런 마음이 들었을 때 부른 거예요. 그래서 배우들은 그때 좀 놀라잖아요. 좀 진짜 놀란 거예요. (우버가) 진짜 언제 오는지 몰라서. 유태오 (해성 역) '패스트 라이브즈'가 제 커리어의 인생 작품 중 하나가 된다면 그 한 장면이 저한테 인생에 제일 어려운 장면이었던 것 같아요. 대사도 대사지만 어떻게 그런 대사를…. 허, 뭔가 마음에 여한 없이 연기를 할 수 있으려나… 제 것만 주관적으로 준비하지 않고 그레타 리 님한테, 그러니까 그 순간에 노라한테 열려 있고 치고받아야 하는 호흡도 있기 때문에 반반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많은 연습을 해 갔지만 그 순간에 같이 재즈 음악을 하듯이 같이 연주하듯이 열려 있어야 되거든요, 그 호흡이. 단순하게 앞으로 바라보다가 우버를 보면서 45도 각도를 돌려야 되는데 그거를 어색하지 않게 하려고 하는 그 긴장도가 어마어마했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해성 만약에 네가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면 내가 널 찾았을까? 우리가 사귀었을까? 헤어졌을까? 부부가 됐을까? 우리는 아이들을 가졌을까? 뭐 그런 생각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숲속에 두 갈래 길 중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노래한 것처럼, 이 시를 번역했던 한국의 수필가 피천득이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안 만나고 살기도 하는데, 아사코와 세 번째는 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라고 후회한 것처럼, "패스트 라이브즈"는 '가지 못한 길'에 관한 영화고 '인연'에 대한 영화입니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더 모먼트' "여기가 우리가 다다른 곳이고,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야." This is where we ended up. This is where I'm supposed to be. 셀린 송 우리 인생에는 언제나 그런 게 있다고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 우리가 이 삶을 살면서 당연히 살지 않는 삶은 무한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건 사람 인생의 얘기를 할 때 항상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우리 인생은 결국은 우리가 하는 선택에 따라서 바뀌는 거기 때문에. 그래서 예를 들면 이민을 갔을 때 그리고 나영이가 이민을 갔을 때나 제가 이민을 갔을 때나 이민을 안 갔을 수도 있고, 그거에 대해서 언제나 두고 오는 어떤 인생의 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게 장소일 수도 있고 시간일 수도 있고 그게 사람일 수도 있다고. 이주형 꿈이나 희망일 수도 있고. 셀린 송 그렇죠. 꿈이나 희망일 수도 있고, 그때 생각했던 것일 수도 있고, 그때 느꼈던 감정일 수도 있고.
한 순간의 감동은 때때로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습니다. 이주형 논설위원의 '이 순간[The Moment]'은 영화 등 예술 작품 속의 인상 깊은 장면을 통해 작품이 관객과 독자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다양한 앵글로 들여다보는 스토리텔링 콘텐츠입니다. 태초에 편집이 없었습니다. 편집은 영화의 탄생과 동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발명된 거라는 얘기입니다. 최초의 영화로 일컬어지는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1895)”은 열차에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한컷에 담은 게 영화 내용의 전부입니다. 스틸 사진을 이어 붙인, 말 그대로 ‘활동 사진’에 불과했던 영화는 몇 년 뒤 편집이라는 개념이 도입되면서 비로소 영화로, 예술로 재탄생했습니다. 숏의 사이즈와 앵글을 달리해 숏과 숏을 이어 붙이자 편집에서 새로운 의미가 생겨나고 영화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는 풍성해졌습니다. 12.12. 군사 쿠데타 9시간을 오늘날 두 시간의 영화로 압축해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편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700만 관객을 돌파한 화제작 “서울의 봄”을 편집한 김상범 편집 감독은 “미술관 옆 동물원”부터 “서울의 봄”까지 200편 가까운 영화를 편집했고, 특히 “왕의 남자”와 “베테랑” 등 천만 영화 네 편과 “올드보이”와 “헤어질 결심” 등 박찬욱 감독의 모든 영화를 편집했습니다. 김상범 편집 감독과 만나 “서울의 봄” 편집 과정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흥행 숫자를 말하기는 참 부끄럽지만 한 천만 정도 찍어주고, 이 영화가 한 10년 후에도 모든 사람들이 ‘아 옛날에 '서울의 봄'을 봤는데...’ 이야기하는 그런 영화가 됐으면 참 좋겠죠." "아주 솔직히 이야기하면 제가 김성수 감독이랑 '아수라' 할 때, 콘티를 이렇게 보면서 ‘와 이거는 영화로서, 영화 이야기로서 관객하고 대화하는 게 아니라 감독의 기운과 관객이 그걸 받아들이는 것의 싸움이구나. 관객이 느낄 때 감독 기운한테 눌리면 어떻게 하지’ 그런 걱정을 했어요 사실은요. 그런데 이번 작품은 관객과 기 싸움 부분이 아니었어요. 관객한테 어떤 부분을 가장 효율적으로 전달할 것이냐." #교차편집 "사실은 그 작업을 할 때 굉장히 어려웠어요. 어려울 수밖에 없었던 거는 첫째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쉬운데 처음 본 사람은 같은 군복과 같은 아군이고, 이거를 처음에 직관적으로 느끼지를 못하거든요." "정총장 찾아갔을 때와 뒤에 헌병대 들어오고, 전두광은 국무총리를 찾아가고, 이태신은 연희동으로 가고, 영화 속에서 얘네들이 차지할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은 굉장히 한정이 되고, 한정이 됐다는 거는 아차 잘못하면 관객은 구분을 못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고. 그래서 그 부분 할 때 참 시간도 많이 걸리고 굉장히 공을 많이 들였던 것 같아요. 정총장 찾아가도 2명은 응접실에 앉아 있고, 2명은 보안대 애들은 또 저쪽에 앉아 있고, 이런 것까지 다 신경을 쓰면서 시간 배분을 해야 하거든요." #복도 씬 "감독님은 이 신을 꼭 찍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었던 신이고, 굉장히 단순하게 찍었는데 그만큼 더 효과가, 아마 나는 굉장히 효과를 봤다고 봐요. 하나회 떼거리로 뭐 전두광을 양쪽 보좌하면서 왔었던 것과 앞으로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혼자 모든 걸 대면하듯이 오는 그런 이미지가 마지막 부분과 같이 연관이 되잖아요. 그래서 저 신은 제가 참 좋아하는 신 중에 하나예요. 그러면서 힘을 주고 찍은 씬도 아니고." "그리고 정 청장은 바로 앞 씬에서 인사 부분에 개입하지 말아라 하니까 이쪽에 연결감이 복도 씬에 의해서 굉장히 좋아질 것 같아요. 그 복도 씬이 없어도 드라마는 연결감은 괜찮거든요. 왜냐하면 전두광이가 노태건을 추천하는데 “인사권은 총장 나 본인한테 있지 않냐” 하고 나서 이태신한테 이야기해도 흐름은 굉장히 좋거든요." #편집점 "저는 편집점을 잡기 위해서 더블 액션이라든가 그러니까 액션을 맞추는 거는 영화를 시작하면서까지 해 본 적이 없어요. 기본적으로 그 샷이 갖고 있는, 이 샷이 제일 중요한 때까지 써요. 액션 연결은 뭐 거의 그렇게 신경을 안 쓰고 하는데 그래도 아마 살짝 살짝 점프적인 느낌이 있을 텐데 그거는 의도적으로 한 거거든요." "제가 못된 버릇이 하나 있거든요. 굉장히 열심히 만들고 나는 참 열심히 하는데… 관객이 물론 대단하죠. ‘시간을 내서 표를 사서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등 기대고 편안하게 느긋하게 보는 거를 저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뭔가 순간 순간 깜짝깜짝 이렇게 화면에 좀 집중을 했으면 좋겠다’하는 그런 바람으로 이제 약간 좀 거칠게 느껴지지만 ‘이게 뭐지 어 왜 이렇게 되지’ 이러면서 보게끔 하는, 그건 아마 편집 감독들마다 스타일인데 저는 이런 게 과연 좋은가 반성도 하면서 근데 ‘아 내 성향은 이건데 뭐’ 하는 경우가 있죠." #화면분할 "시퀀스를 정리할 때 그 상황이 영화는 시간대별로 다 차지할 수 있는 시간이 있거든요. 그 물리적인 시간 내에 다 담을 수 있을까 그런데 물리적인 시간에 담더라도 효율이 뭐가 있을까. 컷, 컷, 컷해서 짧게 들어가면 얘네들이 철군하고 그 느낌을 못 살리거든요. 그런데 화면분할하면 돌아가서 그네들이 출동하려다가 하 아니다. 지휘관도 뭔가 고뇌의 모습도 같이 넣을 수 있고." #엔딩 시퀀스 "광화문에서 편집 수정을 많이 했던 거는 드라마적인 부분이 사실은 아니었어요. 하다 보니까 러닝 타임도 길고 사람들의 의견이 막 많이 넘어왔던 부분이 바리케이드를 타고 넘어가는 이태신(씬)이 길다 사실은. 근데 그 부분이 과연 긴가, 우리는 그냥 상대방이 왜 길게 느껴지는지를 생각해야지 우리가 옳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거든요." "그래서 쭉 보고, 사실은 그쪽 부분이 많이 단축이 됐고. 뭐 이태신이가 고생고생하고 쓰러지고 자빠지고 기고 뭐 등등 했는데 따지고 보면 딱 줄여놓고 보니까 이태신이가 그 많은 바리케이드를 넘어가는 거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상처받고 긁히고 헐떡이면서 넘어가는 것보다 전두광 앞에서 얼굴을 대면하고 한마디를 하는 그 의지가 더 살겠구나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걸 줄이다 보니까. 그래서 왜 처음에 이런 생각을 못 했지? 사실은 반성도 했는데. 거기에서 이태신이가 막 간다고 관객이 어우 저 사람 불쌍해 어떡해 이런 느낌을 주면 사실은 안 되거든요." #편집 철학 "타성에 붙은 컷 포인트는 안 하겠다는 거죠. 여기서는 아 여기가 컷일 거야. 보통 영화들을 보면 항상 집중을 못하는 가장 큰 게 남이 예측하는 데서 항상 컷이 바뀌어요. 그 부분에 대한 거는 절대로 나는 하지 말자. 그래서 내가 하는 영화에서 감독을 모두 존중하지만 다만 관객이 예측을 하면서 편하게 팝콘을 먹거나 시계를 보거나 나는 그런 걸 사실은 못 참아서 그 컷 포인트는 임의적으로 제가 설정을 해서 넘어가는 게 많아요." "어 이거 좀 기네 뭐 때문에 길지? 하다가 넘어가거나 조금 더 할 건데 여기서 훅 하고 다음 컷도 안 보여주네 이제 이런 식으로 넘어가거나. 축구 같은 거를 예를 들면 호날두가 잘하는 거는 남보다 바로 반보, 0.12초의 빠른 드리블과 정확한 슈팅이거든요. 편집도 비슷하게 남들과 조금 다른 어떤 드리블이라고 하면 그 포인트를 내가 나만의 그런 포인트를 가져야겠다 하고 내가 설정을 하는 거죠." 숏과 숏이 모여 씬이 되고, 씬과 씬이 모여 시퀀스가 되고, 시퀀스와 시퀀스가 모여 한 편의 영화가 됩니다.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가 되고,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편집 감독 김상범의 더 모먼트. “서울의 봄”도 첫 번째 숏부터, 0.1초에도 나만의 포인트가 있다.
한 순간의 감동은 때때로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습니다. 이주형 논설위원의 '이 순간[The Moment]'은 영화 등 예술 작품 속의 인상 깊은 장면을 통해 작품이 관객과 독자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다양한 앵글로 들여다보는 스토리텔링 콘텐츠입니다. 디자인 : 곽내원 #1 퀸시 존스, 브루스 스프링스틴, 팻 매스니, 존 윌리암스, 한스 짐머, 메탈리카, 클린트 이스트우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왕가위, 쿠엔티 타란티노, 올리버 스톤... 한 명 한 명이 세계 대중음악사와 영화사에서 각자의 지분을 갖고 있는 아티스트들. 이들이 한꺼번에 영화 한 편에 다 모였다. 영화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다큐 영화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엔니오가 자신의 인생을 말하고, 아티스트들은 엔니오를 말한다. #2 엔니오 모리꼬네는 편곡자로 시작했다. 편곡은 없고 ‘반주’가 있을 뿐인 시대였다. 그리고 ‘무법자 시리즈’로 본격적으로 영화에 뛰어들었다. 「황야의 무법자(1964)」, 「석양의 건맨(1965)」, 「석양의 무법자(1966)」 휘파람과 전기 기타로 ‘서부극’ 하면 떠올리는 선율을 썼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스타덤에 올랐다. 하지만 클래식에서 출발한 엔니오는 스승과 동료들에게 서부영화 음악을 한다는 걸 알리기가 싫어 처음에는 가명을 썼다. 그의 스승인 페트라시는 언론에 대고 말했다. “작곡가가 영화 음악에 참여하는 것을 어떻게 보십니까?” “전적으로 반예술적인 행동이라고 봅니다.” 자격지심으로 가득했던 엔니오는 그래도 영화 음악으로 승부를 걸었다. #3 「원스 어픈 어 타임 인 더 웨스트(1970)」.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은 엔니오의 이름도 할리우드에 각인시켰다. 「원스 어픈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 OST ‘데보라의 테마’는 지금도 회자된다. 한스 짐머 한참을 끄는 저음으로 곡이 시작돼요. 그리고 아주 천천히 다른 음이 이어지죠. 한 음을 길게 끌어서 이야기를 전하는 건데 상당히 과감해야 가능한 일이에요. - 한스 짐머 클래식 음악계도 엔니오를 인정하게 된다. 그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는데 탄식이 나오더군요. 뭔가 달랐어요. 영화 음악에 대한 통념을 뛰어넘은 걸작이었죠. - 보리스 포레나, 작곡가 1986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미션」은 엔니오의 천재성을 엿보게 한다. 영화 「미션」 롤랑 조페 감독의 전화 회상. - 롤랑이에요? - (네 그런데요) - 나 엔니오예요. 생각해 봤는데…이런 악상이 떠올라서요. "빠라바바밤- 다디따다 다다다 디다담~" ... 머리칼이 쭈뼛 서더군요. 음악을 들으니 영화가 펼쳐졌죠. 그렇다. 음.악.이. 보.인.다.는 게 엔니오의 특징이다. 환갑에도 엔니오는 감각적인 멜로디를 뽑아냈다. 「시네마 천국(1988)」은 우리를 시간 여행자로 만든다. 영화 「시네마 천국」 #4 엔니오 모리꼬네 하지만 머릿속이 악상으로 가득 찬 천재 음악가도 저절로 악보가 써지는 건 아니었다. “생각이 바로 곡이 되지는 않아요. 그게 문제죠. 작곡을 시작하면 늘 그 점 때문에 괴로워요.” “생각은 이미 있지만 더 다듬어야 하고 더 나아가야 하고 찾아내야 해요.”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의 ‘더 모먼트’는 엔니오의 말에 있다. 천재도 괴로워한다. 괴로워하니까 천재다.
한 순간의 감동은 때때로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습니다. 이주형 논설위원의 '이 순간[The Moment]'은 영화 등 예술 작품 속의 인상 깊은 장면을 통해 작품이 관객과 독자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다양한 앵글로 들여다보는 스토리텔링 콘텐츠입니다. 지난해 제75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슬픔의 삼각형》은 호화 유람선에 탑승한 인간 군상의 천태만상을 통해 현대 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하는 영화입니다. 크루즈 여행에 나선 유람선의 맨 위 층은 상위 0.1% 부자들이 활보하는 공간입니다. 베라(탑승객) : 이런 인생을 타고 난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나도 이유가 뭔지 궁금할 뿐이야. 인생 참 불공평하지. 우린 평등한데 말이야. 승무원 : 옳은 말씀이세요. 베라 : 모두 다 평등하지. 유람선의 중간층은 부자들에게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는 승무원들이 기거하는 곳이죠. (승무원 미팅 중) 사무장 : 언제나 이렇게 응대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네 고객님! 맨 아래층 어두컴컴하고 비좁은 공간은 청소부와 노동자들이 일하고 쉬는 곳이죠. 애비게일(필리핀계 청소부) : (객실을 노크하며) “청소해 드릴까요?” 칼 : 괜찮아요. 애비게일 : 30분 뒤에 올까요? 칼 : 더 이따가 오세요. 애비게일 : 네, 한 시간 후요? 야야(짜증 섞인 목소리로) : 그냥 나중에 올래요? 애비게일 : 나중에 오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손님. 그런데 말입니다. 갑판을 닦는 노동자든, 업무 중 잠깐 짬이 난 승무원이든, 총을 든 경비원이든, 춤추는 승객 앞에서 모른 척 일하는 바텐더든, 멋진 휴가를 즐기는 탑승객들과 달리 반쯤은 넋이 나간 모습들입니다. 그들의 모습에서 에드워드 호퍼 그림 속의 고독하고 공허한 현대인이 보입니다.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는 이 영화의 많은 장면에서 승무원과 노동자들의 머리를 프레임 밖에 두거나 이들을 주요 피사체로 취급하지 않는 미장센으로서 승무원과 청소원 같은 이들이 유람선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냅니다. 이 영화의 ‘더 모먼트’, ‘이 순간’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나옵니다. 모델이자 인플루언서인 여자 친구 야야가 협찬을 받아서 함께 유람선에 탈 수 있게 된 칼은 부자도 아니고 잘 나가는 모델도 아닙니다. 패션쇼 오디션에 참가한 칼은 소위 명품이라 불리는 발렌시아가를 입었을 때와 중저가 브랜드 H&M을 입었을 때 각각 그에 맞는 표정을 지어보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발렌시아가 룩은 도도하고 무게 잡는 표정, H&M룩은 세상 걱정 없다는 듯 마냥 즐거운 표정입니다. 칼은 진행자가 시키는 대로 표정을 180도 확확 바꿉니다. 그의 표정에도 영혼은 없죠. 하지만 진행자가 외치는 메시지는 거창합니다. #우정 #만인은평등하다 #해피라이프 #기후변화막자 #friendship #everyone'sequal #happylife #stop climatechange 진정성과 무관한 이미지 메이킹, 중요한 정치적 메시지마저 상품팔이에 이용하는 세태에 대한 감독의 통렬한 비판입니다. 그러니 칼은 ‘킬리만자로의 표범’에 나오는 가사처럼, ‘화려하면서도 쓸쓸하고, 가득 찬 것 같으면서도 텅 비어있는 내 청춘에 건배’ 할 수밖에요. 내용물보다 질소로 빵빵한 과자 봉지처럼 허풍 가득한 브랜드와 이미지의 시대. ‘발렌시아가 룩’과 ‘H&M 룩’이 보여주는 계층화된 세계.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제75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슬픔의 삼각형》의 더 모먼트가 보여주는 오늘입니다.
한 순간의 감동은 때때로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습니다. 이주형 논설위원의 '이 순간[The Moment]'은 영화 등 예술 작품 속의 인상 깊은 장면을 통해 작품이 관객과 독자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다양한 앵글로 들여다보는 스토리텔링 콘텐츠입니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 사이로 사선으로 길게 난 두피의 상처가 드러납니다. 카메라가 천천히 뒤로 빠지면 왠지 낯익은 백발의 노인이 앉아 있습니다. “시간은 쏜살 같고 되돌릴 수 없다” 이제는 완연한 노인이 됐지만 한눈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습니다. 왕년의 쿵후 스타 홍금보입니다. 제공 : 콘텐츠판다 7인의 홍콩 영화감독이 연출한 옴니버스 영화 “칠중주(25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는 1950년대 홍콩의 어느 건물 옥상을 비추며 시작합니다. 카메라가 붐 다운하면 이십여 명의 아이들이 다리를 벽에 기댄 채 늘어져 오수를 즐기고 있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한 소녀만 아래를 응시하면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망을 보고 있습니다. 아래층 사무실에서 쉬고 있던 사부님이 옥상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자마자 소녀는 부리나케 뛰어가 아이들을 깨웁니다. “사부님 오신다!” 벌떡 일어난 아이들은 잽싸게 물구나무 자세로 돌아갑니다. 머리를 박박 민(남자의 경우) 이 아이들은 경극 학교 수련생들입니다. 아침 7시부터 12시까지 쉬지 않고 하는 연습과 30분씩 계속되는 물구나무서기는 많아야 10대 초반인 아이들에게는 사실 너무 고된 훈련입니다. 무협 영화가 인기를 끌던 과거 홍콩에서는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경극 학교나 무술 학원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거의 학대에 가까운 영화 “패왕별희” 속 경극 수련만큼은 아니지만 홍금보의 어린 시절 무술 훈련은 매우 엄격하고 강도가 셌습니다. 제공 : 콘텐츠판다 옥상에 올라와 한참을 지도하던 사부는 큰형 격인 금보에게 아이들의 훈련을 맡기고 다시 쉬러 내려갑니다. 하지만 훈련이 지겨운 금보와 아이들은 꾀를 냅니다. 텀블링하는 박자에 맞춰 발소리를 내면서 훈련하는 시늉만 하는 것이죠. 사부님은 천장에서 울리는 발소리에 맞춰 아이들이 훈련을 제대로 하는지 파악하기 때문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어느 날 사달이 났습니다. 망보는 소녀까지 까무룩 잠이 들어버린 겁니다. “일어나! 이 녀석!” “죄송해요!” 옥상에 올라와 아이들이 자고 있는 모습은 본 사부는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큰형 금보가 결국 대표로 의자 위에서 물구나무서는 벌을 받습니다. 평소의 세 배인 한 시간 반 가까이 땡볕에서 벌을 받던 큰형 금보는 땀에 절고 팔이 후들거리다 미끄러져 떨어집니다. 떨어지면서 머리를 바닥에 찧는 바람에 두피가 찢어져 피가 이마를 타고 흘러내려오는데, 금보는 생각합니다. “땀이 왜 이렇게 뜨겁지?” “어릴 때 제대로 안 해 놓으면 나이 들어 후회하게 된다”는 사부님의 얘기를 이해했기 때문일까요, 그저 매가 무서워일까요… 그날 이후 금보와 아이들은 달라집니다. 사부님이 안 계서도 쉬지 않고 연습에 매진한 겁니다. 다시 엔딩 씬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카메라가 백발을 비춥니다. 백발 아래로 보이는 긴 상처. 픽션인 줄만 알았던 이야기는 실화였습니다. 어느덧 칠순의 노인이 된 홍금보가 말합니다. “시간은 쏜살 같고 되돌릴 수 없다 과거는 그저 추억일 뿐” 아시아를 휩쓸던 홍콩 영화의 빛나는 전성기가 있었습니다. 무협과 코믹 무술 액션, 그리고 ‘홍콩 누아르’라고 불린 범죄 액션물까지. 홍금보는 “용쟁호투(1973)”에서 이소룡의 상대역으로 시작해 성룡과 원표와 더불어 골든 트리오의 일원으로서, 배우이자 무술 감독·감독·제작자로서, 홍콩 영화계를 이끌어 왔습니다. 소싯적 쉬지 않고 부단히 연습에 연습을 더한 결과였습니다. 칠순의 홍금보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만든 “칠중주”의 첫 번째 에피소드 ‘수련’은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이라는, 유명하지만 뻔한 구절을 비로소 진심을 다해 다시 한 번 들여다보게 만듭니다. 홍금보의 ‘수련’, 허안화의 ‘교장선생님, 담가명의 ‘밤은 부드러워라’, 원화평의 ‘귀향’, 두기봉의 ‘노다지’, 임영동의 ‘길을 잃다’, 서극의 ‘심오한 대화’ 등 홍콩 영화 전성기를 빛내던 7인의 거장이 연출한 영화 “칠중주: 홍콩이야기”. 홍금보의 ‘더 모먼트’. “시간은 쏜살 같고 되돌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