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전문의이자 뇌과학자이다. 연세의대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병원에서 스트레스로 마음이 불안한 환자를, 스마일센터에서 범죄피해로 트라우마를 입은 내담자를 치료하고 있다. 때때로 마음에 관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산책만으로 생각이 정리되고,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 있다. 그림 by 노대영 취향이란 참 변덕스럽다. 항상 좋아했던 일에 점점 무심해지기도 하고, 절대 관심 없던 것에 느닷없이 몰두하게 되기도 한다. 어릴 적부터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말은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오른다’였다. 내게 “산이냐, 바다냐?”라고 물으면, 당연한 듯 반문했다. “어차피 내려올 걸 왜 굳이 오르는가?” 내 생에 자발적 등산을 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등산은 어느덧 가장 자주 하는 운동이자, 취미 활동이 되었다. 그렇다고 대단한 등산인도 아니고, 아직도 대청봉 한번 올라보질 못했다. 소소한 취미일 뿐이며, 여기에 과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산을 동경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겼다. 주말이면 틈틈이 산에 오른다. 갈대 같이 변덕스러운 취향 때문이라고 하기엔, 이 극적인 변화를 설명하기 어렵다. 내가 왜 ‘굳이’ 산에 오르고 있는지 이해해 보고자 글의 들머리에 나서본다. 산에 오르내림이 있듯이, 삶에는 변곡점이 있기 마련이다. 대학교 2학년 방학 때였다. 산악반 활동하던 동기 친구가 심심했는지 두세 명 모아서 북한산에 오르자 했다. 서울에 있는 산이니 다 고만고만한 줄 알았다. 테니스화 하나 신고 올랐다가, 당시 가드레일도 없었던 암벽을 타면서 거의 울 뻔했다.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나누며 우정이 깊어졌다면 좋았겠다. 그 친구와 이래저래 연락이 뜸한 지 오래다. 이후 산은 철저히 내 삶에서 배제되었다. 20년 만의 첫 산행길 정상에서 본 무지개 그 후로 20여 년이 지난 여름이었다. 아내와 함께 설악산에 가서 케이블카를 탔다. 그래도 설악산인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호텔 데스크에 가장 간단한 산행에 대해 물으니, 울산바위를 추천했다. ‘산도 아니고 바위니까 간단하겠군’ 싶어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섰다. 중반 즈음 올랐을까? 등산이라면 질색인 짝꿍의 등산화 양쪽 밑창이 떨어졌다. 나는 다시 호텔로 내려가 운동화를 들고 올라왔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흔들바위를 지날 즈음,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돌아가고 싶었지만 또 내려가는 건 더 싫었다. 내던져버리고 싶었던 2kg짜리 카메라를 가슴에 안고, 마지막 구간 철제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울산바위는 보통의 산보다 더 크고 높았다. 성급한 산행을 후회하며 가까스로 정상에 올랐다. 줄지어 서있는 거대한 바위들이 위엄 있는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광각렌즈로 풍경을 담으며 카메라를 가져온 스스로가 대견했다. 바위 건너편을 보니, 햇빛 떨어지는 속초시 위에 커다란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난 깨달았다. 다시 산을 오를 운명임을. 울산바위에서 등산에 대한 편견을 깼다. 그 후로도 난 왜 꾸준히 산에 오르고 있을까? 등산은 인생과 같다 오르막과 내리막의 비유는 뻔한 클리셰일 수 있다. 하지만 등산과 인생은 여러 가지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1) 가던 길은 다시 돌아서기 어렵다. 지금까지 올라온 게 어딘데 여기서 멈추는가? 나아갈 것인가, 멈출 것인가는 일생의 고민거리이다. 용감하게 올라가는 것도 좋다. 하지만 한계상황이 오면, 하산하는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2) 스스로의 힘으로만 나아가야만 한다. 산행은 일상에서의 길과 다르다. 힘들다고 중간에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부를 수도 없다. 그렇다고 자전거, 킥보드, 휠체어 같은 다른 탈것도 무용하다. 오로지 자신의 두 다리로만 움직여야 한다. 길이 좁아지면, 나란히 갈 수도 없다. 홀로 가야만 한다. 3) 한 발씩 나아가야 한다. 아무리 낮은 산도, 정상을 올려다보면 아득하고 멀게만 보인다. 한숨 쉴 필요 없다. 한 발 한 발에만 집중하면 된다. 걸음이 느려도 상관없다. 황급히 앞서 가던 사람이 종종 나중에 뒤처지곤 한다. 오로지 내 리듬에 맞춰 나아가면 된다. 문득 뒤를 돌아볼 때가 있다. 그러면 ‘언제 저길 가지?’가 ‘언제 여길 왔지?’로 바뀌어 있다. 내가 갈 길과, 온 길을 직관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는 것, 등산의 매력이다. 등산은 중독적이다 등산은 힘들다. 나같이 천성이 게으른 사람은 작은 수고도 회피한다. 등산은 본질적으로 나와 맞지 않다. 아무리 낮은 산을 오른다고 해도 평온한 등산은 없다. 힘든 여정을 견뎌냈다는 뿌듯함, 정상에 올랐다는 성취감만으로는 내 굼뜬 몸을 움직이기에 충분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복해서 산에 오른다. 미적 경험의 본질은 쾌감이다. 정상에서 보게 되는 풍경은 숭고미의 극단적 형태이다. 일상에서 거의 볼 수 없는 크기와 규모의 형상들을 바라보게 된다. 높이 오를수록 풍경은 더 장엄하고, 감흥은 더 벅차오른다. 특히 산 정상으로 갈수록 길은 좁고, 경사는 더 가파르다. 헐떡이며 숨이 차오르는 가장 큰 고통의 순간, 가장 큰 보상이 주어진다. 나 같은 탐미주의자에게 등산은 중독적일 수밖에 없다. 산에 오르는 가장 큰 이유는 그곳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산림은 뇌를 회복시킨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휴식을 얻는다”는 명제는 참에 가깝다. 산 위에 올라서 보면, 왠지 마음이 평온해진다. 진화심리학적으로 산은 “남에게 보이지 않고 볼 수 있는(opportunity to see without being seen) 환경” 즉 생존에 유리한 환경이기 때문이다. 가수 김동률은 ‘산행”이란 곡에서 “난 마음이 복잡할 때면 늘 찾아가네… 일렁이는 맘 잠재워준다”라고 노래했다. 흔히들 산에 오르면 잡생각이 줄고, 마음이 차분해진다고 한다. 스탠퍼드 대학 연구자들은 19명의 피험자들을 90분 동안 각각 숲길과 도심 속 길을 걷게 한 뒤, 자기공명뇌영상으로 뇌기능 변화를 비교했다. 그 결과 숲길을 걸은 사람들에서 반복적인 부정적 반추 생각이 줄어들고, 우울과 관련된 전전두엽 영역의 활성도가 감소했다. 막스플랑크 연구소에서도 최근 더 많은 피험자(63명)를 대상으로 더 짧은 시간(60분) 동안 걷게 한 뒤 비교해 보았다. 스트레스 자극에 따른 편도체(공포반응의 중추)의 활성도는 숲길을 걸은 사람들에서만 감소하였다. 즉, 숲길을 걸을 때, 머릿속 상념이 줄고, 뇌의 불안반응도 줄어든다는 의미이다. 가상현실로 구현된 ‘인제 자작나무 숲길’과, 걷기 전후 뇌파 변화 비교 실제가 아닌 가상현실로 구현한 산림은 어떨까? 최근에 공대 교수진과 함께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길”을 가상현실로 구현하여 도심 속 걷기와 비교해 보았다. 60여 명의 피험자를 대상으로 가상현실 속 30분 걷기 전후 변화를 분석했다. 그 결과 도심 속 길보다 숲길을 걸은 사람들에서 심리적 평온함이 증가했고, 전전두엽 부위 세타파도 뚜렷하게 증가된 소견을 보였다. 산림을 가상현실로 경험했을 뿐인데도, 정서적으로 평온해질 뿐 아니라 뇌도 안정화되도록 변화했다는 뜻이다. 자연에서 얻는 치유효과가 얼마나 근원적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산행은 최고의 스트레스 해독제이다 히포크라테스가 말했다. “기분이 좋지 않으면 산책을 해라. 그래도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으면, 다시 산책을 가라.” 생각은 생각보다 조절하기 어렵다. 마음 역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반면, 몸을 움직이면, 생각과 마음이 따라 움직인다. 최근 뇌과학 연구의 가장 큰 주제는 뇌와 몸의 긴밀한 연결성이다. 많은 연구들은 뇌가 생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움직이기 위해 존재한다고 역설한다. 로돌포 이나스는 인간의 생각을 “움직임이 진화를 거치며 내면화된 것”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인간이 가진 고도의 사고능력은 뇌가 움직임에 기민하게 반응하고 예측하기 위해 진화한 부산물이란 뜻이다. 몸이 움직이지 않으면, 뇌는 본래의 목적에 맞게 기능할 수 없다. 요즘 진료실에서 환자 분들에게 가장 많이 권유하는 말 중 하나는 “움직이세요”다. 운동이 뇌건강에 미치는 효능은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다. 운동을 하면, 스트레스 반응이 중화되고, 정서가 안정되며, 집중력과 기억력 그리고 창의성까지 높아진다는 근거는 차고도 넘친다. 알고 있지만, 실천을 못할 뿐이다. 등산은 유산소 운동과 근력 운동이 적절하게 결합된 대표적인 신체활동 중 하나이다.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 쓰는 근육이 전혀 달라 조화롭게 운동을 할 수 있다. 스틱을 쓰면서 걸으니, 상하체의 전신운동 효과도 탁월하다. 자연환경에서 운동을 하면, 실내에서보다 힘든 걸 덜 느끼고, 더 오래 버틸 수 있다. 하산 시 관절보호와 안전사고만 잘 대비한다면, 등산만한 운동을 찾기도 어렵다. 등산의 매력을 살펴봤으니, 이제 날머리로 내려와야겠다. 매사에 쉽게 싫증내는 나 같은 사람도 3년째 진득이 산에 오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등산은 누구라도 쉽게 즐길 수 있는 취미란 뜻이다. 등산을 하면 삶을 관조할 수 있고,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으며, 뇌를 잘 쉬게 하고, 심신의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다. 요즘 산행에 나서는 이들의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고 있는 듯하다. 산에 오르는 젊은 커플들을 보면 참 대견하다. 등산은 여행과 운동의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데이트도 하고, 건강도 챙기니, 요즘 젊은이들은 참 현명하다. 우울한가? 스스로에게 등산을 처방하라. 효과도 확실한데, 놀랍게도 무료이다. ▶ 참고문헌 - Sudimac S, Sale V, Kühn S. How nature nurtures: Amygdala activity decreases as the result of a one-hour walk in nature. Mol Psychiatry. 2022 Nov;27(11):4446-4452. - Bratman GN, Hamilton JP, Hahn KS, Daily GC, Gross JJ. Nature experience reduces rumination and subgenual prefrontal cortex activation. Proc Natl Acad Sci U S A. 2015 Jul 14;112(28):8567-72. - Nam SK, Kim SJ, Jang KW, Song C, Roh D, Psychological and neurophysiological effects of a virtual reality forest environment with mindfulness integration: a comparative study with urban environment, Environmental Research (in submission) 디자인 : 박수민
치료는 어둠 속에서 작은 불빛을 향해 함께 걷는 것이다. 그림 by 노대영 드라마를 의무감에 보는 것만큼 곤혹스러운 일은 없다. 특히 정신의학 소재의 국내 드라마는 점점 퇴행해 가는 느낌이 들어 거부감이 컸다. 하지만 기자나, 환자, 또는 지인들이 자꾸 물어보는 바람에 넷플릭스를 켰다. 기다려왔던 스위트홈 2를 미루고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보았다. 숙제하듯 보기 시작했지만,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아 즐겁게 시청할 수 있었다. 약 스포가 있으니, 보실 분들은 주의 부탁드린다. 본 드라마는 정신병동에 신규 간호사로 배정된 주인공 정다은(박보영 분)의 초반 성장기와 후반 낙인 극복기로 이어진다. 나의 초년병 시절 작중 주인공은 정신과 신규 간호사이지만, 자연스레 나의 정신과 전공의 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전공의 1년 차 첫 6개월을 폐쇄병동에서 시작했다. 첫 2개월간은 병원에만 있었고, 이후에도 집에 간 날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환경적으로는 환자와 다를 바 없이 갇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머리도 제때 못 깎고 퀭한 모습으로 병동을 누비고 다녔다. 병동 산책 때, 산책 구역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는데 (이때는 가운 대신 사복을 입는다), 실습 나온 간호대생이 조심스레 다가와 내게 말을 건넸다. “치료받느라 많이 힘드시죠?” 개인적으로는 슬픈 추억이지만, 환자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달까? 주인공과 같은 종류의 실수는 아니었어도, 나 역시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대부분 의욕이 앞서고, 기다릴 줄 몰라서 생긴 일들이다. 초짜 정신과 의사가 제 역할을 할 때까지 기다려 준 건 환자 분들이니, 늘 감사할 따름이다. 고난은 관계의 문제부터 환자의 가장 아픈 상처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나기 마련이다. 모든 임상과가 그렇지만, 특히 정신과 치료에선 환자-치료자의 관계가 중요하다. 환자는 이전과 다른 관계 맺기를 통해 교정적 재경험을 한다. 정신과 전공의 수련이 4년으로 긴 이유는, 정신과 약물이 많고 복잡해서만은 아니다. 다양한 환자들과 치료적인 관계를 잘 맺으려면, 충분히 훈련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치료자는 환자를 만날 때마다 본인만의 고유한 대인관계 패턴이 나타난다. 이를 역전이라고 하는데, 이를 객관화해서 들여다보고 다루려면 오랜 기간 훈련이 필요하다. 특히 주인공 정다은 간호사처럼 정이 많고, 내담자에게 감정이입을 많이 하는 선후배들이 가끔씩 있었다. 이들의 몸에 밴 따뜻한 태도는 장점이지만, 스스로 소진되기도 쉽다. 대개 수련 과정을 거치면서 환자와 적당히 거리두기 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극 중에서처럼 퇴원할 때 건네는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마요.”란 말은 매정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결국 환자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좋은 작별(Good-bye)이다. 본 드라마는 기존 정신의학 소재 드라마에 비해 꼼꼼한 자문을 받아서인지 전반적으로 어색함이 적었다. 다만 작중 옥에 티라면, 정다은 간호사가 김서완 님에게 개인 연락처를 남긴 행동이 끝내 극 중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점이다. 이는 치료적 중립성을 깰뿐더러, 환자의 의존욕구를 조장할 수 있다. 후회하는 회상씬에서 그 장면이 지나가기를 바랐지만, 결국 나오진 않았다. 통화를 끝낸 김서완 님은 거절 공포(fear of rejection) 또는 유기불안(fear of abandonment)까지 느꼈을 수 있다. 외로웠던 환자의 극단적인 행동화(acting-out)가 이해가 되는 지점이다.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스틸컷 / 출처: 넷플릭스 정신과 치료는 낙인과의 싸움 경험과 연륜 덕에 조금 여유가 생긴 지금, 치료자로서 가장 힘든 건 역시 낙인과의 싸움이다. “약을 먹으면 중독되는 것 아닌가요?”, “정신병동에선 툭하면 사람을 묶어둔다면서요?” 매일 반복되는 질문들이다. 낙인이란 본질적으로 두려움에서 출발한다. 두려운 이유는 우선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드라마는 이미 내용과 무관하게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노출될 수 없는 공간을, 이야기를 통해 흥미롭게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인은 정신병동(일명 폐쇄병동)을 모를뿐더러, 경험해 볼 일이 없다. 견학이나 체험 코스조차 불가능한 공간이다. 병동은 겉모습만으로는 제대로 알기 힘들다. 마음대로 외출할 수 없기 때문에 자유를 제한하는 두려운 장소로만 비칠 수 있다. 전공의 시절, 병동에 파견교육을 왔던 한 변호사는 2주간의 실습을 마친 뒤 소감을 말했다. “왜 멀쩡한 사람들을 가둬놓고 치료하는지 모르겠어요.” 정신병동은 외출 제한이 핵심이 아니다. 불필요한 자극을 줄이고, 위험을 최소화한 환경에서 온전히 치료에만 전념하는 공간이다. 이곳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다른 곳과 별반 다르지 않다. 회복이라는 같은 목표로 치료진과 환자들이 함께하는 하나의 커뮤니티일 뿐이다. 드라마에서 다양한 정신질환을 환자 입장에서 시각화하며 다룬 것도 괄목할만하다. 증상에 압도된 상태에서 의지만으로 벗어날 수는 없다. 우리의 감각은 미혹되기 쉽고, 이성도 불완전하다는 걸 인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연기자들의 멋진 연기를 통한 간접체험은 환자의 입장이라면 어떨지 상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약물중독자에 대한 일반인의 태도: 한국과 미국의 비교 노출과 체험이 갖는 효과는 작지 않다. 대단한 논문은 아니지만, 올해 약물중독자에 대한 일반인의 낙인과 차별을 조사해서 발표한 바 있다. 미국과 비교했을 때, 한국인은 약물 중독자를 가족 구성원으로 용인하는 정도는 비슷했으나, 직장동료나 세입자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성향은 더 심했다. 흥미롭게도, 담배를 많이 피우는 사람일수록, 약물중독에 대한 낙인과 차별이 모두 적었다. 흡연자는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다른 마약성 약물에 중독된 사람을 덜 적대시하고, 보다 포용하는 태도를 보인 셈이다. 자주 접하면, 덜 낯설어하고, 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자기 노출의 용기 최근 정신질환을 ‘커밍아웃’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여전한 사회적 편견을 생각하면, 이러한 자기 노출은 대단히 용감하고 멋진 일이다. 2016년 당대 최고의 팝스타 레이디 가가는 PTSD를 앓고 있음을 고백했고, 최근 apple TV+의 ‘당신이 보지 못하는 나’에서 여전히 투병 중인 사실을 공개했다. 국내에서는 유명인들의 고백 덕분에 공황장애는 ‘연예인병’이란 별칭을 얻기도 했다. 책으로 출판되는 예도 많다. 퓰리처상 작가가 쓴 “내 아들은 조현병입니다”(론 파워스, 2019)은 원제 ”No-one cares about crazy people”가 더 노골적이다. 상담치료내역을 글로 옮긴 베스트셀러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백세희, 2018)부터 시작해서, 의대생이 쓴 “당신이 ADHD라고 해서, ADHD가 당신은 아니다.”(김강우, 2022)와 “나의 조현병 삼촌”(이하늬, 2023) 등이 있고, 이 달에는 경조증을 앓는 현직 내과 전문의가 “가끔 찬란하고 자주 우울한”(2023, 경조울)란 책을 냈다.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글은 힘이 있고, 울림이 있다. 치료자는 환자 사례를 언급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들의 이야기는 소중하다. 이들의 용기 있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믿는다. 현실의 아침은 쉬이 오지 않는다 치료를 받으면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은 결코 헛되지 않다. 정신병동에서는 반드시 아침이 온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쉽게 아침이 오지 않는다. 생의 앞길이 곧 밝아질 거라 섣불리 이야기한다면, 환자에게 솔직하지 못한 태도이다. 아침이 오지 않아도, 앞길이 여전히 어두워도, 계속 함께 걸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극 중에 김서완 님이 무너진 것도 사실은 이러한 절망에서 일부 기인했을지도 모른다. 문명화되었다고 믿었던 지금,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앞에서 어떤 희망을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큰 희망이 없더라도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힘들지만 끝까지 이어가야 한다. 중요한 건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20년 전, 1993년 12월 방영된 미드 ‘프레지어(Frasier)’에서 정신과 의사는 갑자기 사망한 친구의 미망인에게 말했다. “제 생각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삶이 줄 수 있는 작은 즐거움과 놀라움을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I suppose the best we can do is live for the little joys and surprises that life affords us.)” 올 한 해 힘들었고, 2024년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작은 행복을 이어가며 살아낼 수 있기를! ▶ 참고 문헌 - Jang KW, Lee HK, Park BJ, Kang HC, Lee SK, Kim CH, Nam SK, Roh D. Social Stigma and Discrimination Toward People With Drug Addiction: A National Survey in Korea. Psychiatry Investig. 2023 Jul;20(7):671-680. doi: 10.30773/pi.2023.0065. PMID: 37525617; PMCID: PMC10397776. - https://www.kacl780.net/frasier/transcripts/season_1/episode_11/death_becomes_him.html 디자인 : 박수민
쉿, 저 소리가 들리나요? 얼마 전, 원주에 위치한 ‘뮤지엄 산’에서의 일이다. 긴 줄에 서서 지루함을 느끼며 전시관 입장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단풍이 짙게 물든 깊은 산중에 “툭~”하며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에 다시 “서걱”하는 소리가 났다. 작은 소리였지만 고요한 산 전체를 공명하는 듯 또렷했다. 무슨 동물이라도 있나 싶어 산중을 들여다보았다. 알고 보니 높은 나무에서 단풍잎이 떨어지면서 나는 소리였다. 그 순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얼얼했다.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평생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떨어지는 잎이 내는 소리가 적막한 산야를 울리듯 퍼져나갈 줄은 몰랐다. 나는 자연이 선사하는 신비로운 감각적 체험에 사로잡혀, 전시관 입장도 잊고 멍하니 빈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의 시간,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그림 by 노대영 우리 일상은 소음으로 가득하다. TV, 라디오에서는 같은 뉴스가 반복되고, 스마트폰은 알람으로 잠잠할 새가 없다. 이어폰에서는 (음악도 아닌) 유튜브 방송이 온에어 중이다. 말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말은 얼마나 될까? 소음은 단순히 소리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번쩍이는 빛과 퀘퀘한 냄새, 불쾌한 접촉 등 우리 감각을 과도하게 자극하는 일체의 것들이다. 누구를 탓하랴? 우리 스스로 잠깐의 지루함도 견디기를 거부한다. 심심할 틈이 생기면 스마트폰 화면을 의미 없이 스크롤한다. 쉼 없이 자극을 좇다 보니 침묵의 시간을 찾기 어렵다. 현대인은 점점 더 조용한 환경을 견디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2014년 science지에 실린 하버드대 연구팀의 실험에 따르면, 대학생들은 15분 동안 완전히 침묵하는 것보다 스스로에게 가벼운 전기 충격을 가하는 것을 더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의 선조들은 오랫동안 고요와 침묵의 시간을 누려왔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었다. 선택할 수는 없었지만, 고요한 휴식으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잠잠한 휴식의 시간은 어디에 있을까? 침묵의 효능 1) 몸과 마음의 회복 일상에서 자극이 계속되면 우리 몸은 늘 높은 경계 태세를 유지한다. 고요한 순간 우리 몸은 부교감 신경계를 활성화하여 이완을 돕는다. 미국심장협회는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 명상이나 마음 챙김을 연습하면, 고혈압을 관리하고 심장병 위험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음악을 듣고 2분간 침묵하면, 음악의 종류와 관계없이 피험자의 심박수와 혈압이 크게 감소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침묵은 자율신경의 균형을 맞추어 몸을 편안하게 한다. 침묵은 뇌 회복에 필수적이다. 침묵을 통해 뇌가 쉬고 활력을 얻는다. 대표적인 예가 수면이다. 먼저 조용해야 잠이 잘 온다. 잠자는 동안 뇌는 침묵을 이용하여 스스로를 청소하고 회복시킨다. 뇌는 침묵을 정보 부족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정보의 일종으로 처리한다. 이 과정에서 감각과 기억을 담당하는 뇌세포가 활성화된다. 뇌가 작업하지 않는 즉 멍 때리는 순간을 디폴트 모드(default mode)라고 한다. 이때, 뇌는 멈춰 있는 게 아니라 내부와 외부를 통합하여 자신의 위치를 이해하려는 상태다. 침묵은 우리가 누구인지 이해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제공하여 오히려 생각을 또렷하게 만든다. 2013년 쥐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매일 2시간씩 침묵에 노출시켰을 때, 기억과 관련한 해마 영역에서 새로운 뇌세포가 생성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한 기억상실증 환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조용하고 어두운 방에서 10분간 휴식을 취하는 것 만으로 기억력이 14%에서 49%까지 향상되었다. 이미 학습한 내용을 정리하고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침묵의 시간이 필요하다. 2) 대인관계 개선 현대 사회에 소통이 중요하지만, 현대인은 소통을 강요당하고 있다. 침묵은 원만한 소통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침묵 속에서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난다. 내가 침묵하는 순간 상대방에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대화에 집중하게 되고 상대의 관점을 이해하게 된다. 또한 침묵은 강력한 전달력을 지닌 도구이다. 때때로 가장 심오한 메시지는 ‘말 없는 말’의 형태를 띤다. 침묵은 잠시 멈추고 생각하며, 말하지 않은 말의 무게를 느끼도록 해준다. 소설가 김영하가 말했다. “인생에서 제일 고마운 사람들은 나를 기다려준 사람들입니다.” 힘든 이에게 건넬 수 있는 최고의 위로 중 하나는 침묵이다. 침묵으로 기다려 줄 때, “너를 믿는다.”는 묵직한 메시지가 전달된다. 진료실에서 환자 보호자가 묻는다. “제가 집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환자는 그 말 때문에 힘들어했다. 대개는 말을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 3) 창의력 증진 고요한 침묵의 순간, 우리는 마음을 비우고, 아이디어를 탐색하고, 새로운 연결고리를 만들 수 있다 외부의 간섭 없이 마음껏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을 얻는다. 또한 침묵을 통해 창의성의 4단계 중에서 특히 '부화 단계’에 필수적인 마음의 방황(mind to wander)이 일어난다. 부화 단계는 특별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더라도 뇌에서 무의식적으로 해결책을 찾는 과정이다. 마음의 방황을 통해 생각지도 못한 해결책이 나온다. 명상, 산책, 숙면은 모두 창의력을 키울 수 있는 훌륭한 원천이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더 높은 수준의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침묵의 가치 말러 교향곡 9번의 하이라이트는 악장 속에 있지 않다. 곡이 끝난 뒤에 찾아온다. 85분을 달려온 음들이 서서히 소멸된 뒤 이어지는 정적의 순간, 관객들은 침묵 속에서 숨죽인 채 카타르시스를 맞이한다 (2010년 아바도의 루체른 페스티벌 실황에서는 무려 2분 간 지속되었다). 침묵으로 음악이 완성될 때, 청중은 강렬한 정서적 체험을 하게 된다. 일상에서도 고요한 침묵의 시간 속에서 생각의 밀도가 가장 높아질 수 있다. 요즘 외부 소음을 없애 주는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 또는 헤드폰이 인기다. 그만큼 우리 일상에는 벗어나고 싶은 소음이 많다는 뜻이다. 고요한 자신만의 공간을 찾고 싶은 욕구가 반영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출발선 앞에 선 육상선수들은 모두 침묵하며 숨을 고른다. 침묵은 혼돈을 뚫고 자신과 만나게 하는 힘이 있다. 가을이 지고 있다. TV와 유튜브를 끄고, (이 글이 담긴) 스마트폰도 잠시 내려놓자. 번잡한 일상의 노이즈를 캔슬링하고, 마음속에 사뿐히 떨어지는 낙엽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 고요 속에 떠오르는 직관이 당신을 더 나은 선택으로 이끌 것이다. ▶ 참고 문헌 - Wilson TD, Reinhard DA, Westgate EC, Gilbert DT, Ellerbeck N, Hahn C, Brown CL, Shaked A. Social psychology. Just think: the challenges of the disengaged mind. Science. 2014 Jul 4;345(6192):75-7. doi: 10.1126/science.1250830. PMID: 24994650; PMCID: PMC4330241. - Dewar M, Garcia YF, Cowan N, Della Sala S. Delaying interference enhances memory consolidation in amnesic patients. Neuropsychology. 2009 Sep;23(5):627-34. doi: 10.1037/a0015568. PMID: 19702416; PMCID: PMC2808210. - Ritter SM, Dijksterhuis A. Creativity-the unconscious foundations of the incubation period. Front Hum Neurosci. 2014 Apr 11;8:215. doi: 10.3389/fnhum.2014.00215. PMID: 24782742; PMCID: PMC3990058. - Sun S, Yao Z, Wei J, Yu R. Calm and smart? A selective review of meditation effects on decision making. Front Psychol. 2015 Jul 24;6:1059. doi: 10.3389/fpsyg.2015.01059. PMID: 26257700; PMCID: PMC4513203.
나는 한 달에 두 번씩 교도소 환자를 진료한다. 진료 환자의 약 70%가 마약사범이다. 대마, 필로폰, 펜타닐, 공업용 본드 등 종류도 다양하다. 내원하는 환자도 점점 많아져서 요즘은 시간 내 진료하기도 벅차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soft drug(대마)에서 hard drug(필로폰, 펜타닐)로 옮겨가는 경우가 많다. 아주 작은 호기심과, 우연한 권유를 잘 넘겼다면 삶이 달라졌을 거라며 뒤늦은 한탄을 한다. 마약은 예방이 최선이다. 이미 hard drug의 맛을 본 사람들은 되돌아 나오기가 어렵다. 댐이 터지기 전에, 둑부터 막는 게 순서다. 이미 둑 여기저기 물 새는 조짐이 보이지만, 아직은 기회가 있다. 대마는 현재 알코올과 담배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향정신성 물질이다. 대마 사용을 비범죄화하는 국가는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국내에서도 2019년부터 의료용 대마 처방이 가능해졌다. 대마 사용 합법화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다만 극단적인 사례만을 단편적으로 논의해서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대마만큼 오해와 낭설이 많은 약물도 없다. 정확한 정보를 기반으로 스스로 판단해 볼 기회가 필요하다. 최신 지견을 바탕으로 대마에 대한 흔한 오해를 정리해 보았다. 자아(EGO)는 쾌락과 현실 사이에서 조율하는 기능을 하나, 중독은 이 기능이 망가진 상태이다. / 그림 by 노대영 대마는 마약이 아니다? 2020년 12월, UN 마약위원회(Commission on Narcotic Drugs, CND)가 대마를 마약목록에서 재분류하였다. 이를 근거로 온라인상에서 대마가 마약의 오명을 벗었다는 식의 언급이 많다. 하지만 의료용 대마의 가능성을 인정하여 치료 목적의 유용도가 낮은 스케줄 IV에서만 제외하였을 뿐이다. 여전히 스케줄 I(위험도가 가장 높은 마약)에는 계속 포함되어 있으며, 이 항목에는 LSD, 헤로인 등이 있다. 즉, 대마가 통제물질 중 가장 위험한 마약 중 하나라는 기존의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는 뜻이다. 대마 합법화는 전 세계적인 추세이므로 수용해야 한다? 대마의 고유한 성분을 카나비노이드라고 하며, 대표적으로 THC(테트라하이드로칸나비놀)와 CBD(카나비디올)가 있다. 이 두 성분의 비율에 따라 대마는 독특한 정신활성 효과를 나타낸다. 이 중에 THC는 강한 환각효과와 중독성을 지닌다. 대마가 안전하다는 대중적인 인식은 THC 함량이 3~4%에 불과했던 1970년대 이전의 대마 사용 경험에서 출발한다. 현재 개량된 품종의 THC 함량은 25% 이상이며, 농축된 대마추출물에서는 80%를 넘는 것도 있다. 게다가, 대마에는 100가지 이상의 카나비노이드가 섞여 있는 데다가 대부분의 작용기전은 여전히 잘 모른다. 최근 미국심장협회에서는 SNS 상에서 대마의 이점만 주로 강조하여 대중이 안전하다고 오해할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대마는 심혈관 질환 및 뇌졸중을 일으키거나, 다른 약물과의 상호작용이 생길 수 있음을 우려했다. 남미나 미국의 일부 지역에서 기호용 대마 사용을 합법화한 이유는 대마가 안전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미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대마 사용이 만연한 상태에서 부작용에 특히 취약한 청소년 집단을 보호하기 위함이 목적이었다. 지자체에서 거두는 관련 세금 수익이 막대하기 때문에 이제는 되돌리기 어려운 상태가 되어 버렸다. 최근에 대마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조금씩 변화의 흐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마의 합법화 여부는 유행 따라 결정할 성질의 사안은 아니다. 대마는 정신적으로 도움이 된다? 기호용으로 대마를 사용한 사람들은 고양감을 느끼고, 불안이 줄어들며, 이완이 되는 것 같다고 말하곤 한다. 이는 대마의 주성분인 카나비노이드가 스트레스, 기분, 식욕 및 수면을 조절하는 체내 카나비노이드 시스템에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주, 장기간 사용할 경우 오히려 체내 카나비노이드 시스템을 손상시킬 가능성이 높다. 특히, 대마의 THC는 청소년이나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에게 뇌 발달을 방해하고, 조현병 발병을 유발한다. CBD 성분은 불안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는 보고들이 있지만, 대부분 연구 설계가 미흡하고, 최근 연구일수록 효과가 미미했기 때문에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미국과 영국의 정신의학협회에서는 현재까지의 근거로는 이득보다 위험이 훨씬 크기 때문에 대마 관련 약물을 정신의학적 치료 용도로 사용을 권할 수 없다고 의견을 모았다. 대마는 더 위험한 마약 사용을 줄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의료용 대마가 허가되어 2019년부터 소아 간질이나, 난치성 통증 등에 한해 처방되고 있다. 다발성경화증이나 암과 같이 통증이 심한 질환에서는 오피오이드 계통 약물을 주로 사용한다. 진통 효과는 강하나, 내성과 의존성이 심해서 오남용 문제가 크다. 의료용 대마 사용의 역사가 20년이 넘은 미국에서는 대마가 오피오이드 약물 사용을 어느 정도 대체할 수 있기를 기대해 왔다. 2014년, 유력 학술지인 JAMA 내과의학에는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1999년부터 2010년까지 의료용 대마가 허용된 지역에서 오피오이드 과다사용으로 인한 사망률을 조사했더니 무려 25%가량 줄어들었다. 이 결과는 한동안 대마 합법화를 지지하는 주요한 근거가 되어왔다. 하지만 2019년 PNAS에 발표된 논문에서 이를 뒤집는 결과가 나왔다. 2010년 이후 2017년까지 약 7년을 더 추적조사 한 결과, 사망률이 오히려 약 23% 증가한 것이다. 여러 이유들이 있을 수 있으나, 합법화된 대마가 결국 더 심한 의존성 약물로 가는 관문(gateway) 역할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참고문헌: Shover CL, Davis CS, Gordon SC, Humphreys K. Association between medical cannabis laws and opioid overdose mortality has reversed over time. Proc Natl Acad Sci U S A. 2019 Jun 25;116(26):12624-12626. doi: 10.1073/pnas.1903434116. Epub 2019 Jun 10. 대마를 사용한다고 해서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대마의 합법화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대마는 다른 마약류에 비해 흥분이나 공격성을 유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근거로 삼는다. 대마가 폭력적 행동과 직접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란이 있다. 그러나 최근 많은 연구를 종합한 메타분석 결과에 따르면, 대마 사용이 신체적 폭력과 관련될 가능성이 높았고, 대마초를 사용하고 나면, 향후 폭력적 행위가 뒤따를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특히 대마 사용으로 초래되는 운전의 위험성은 공중보건의 관점에서 가장 큰 문제이다. 대마를 사용하면, 행동이 느려지고, 운전 시 조향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충돌사고의 위험이 거의 2배로 높아졌다. 사고 위험은 사용량에 비례하며, 대마 합법화 이후 해당 주의 자동차 사고가 증가한 사실 역시 관찰되었다. 대마 관련물질은 모두 위험하고, 항상 회피해야 한다? 대마가 전적으로 무용한 것은 아니다. 대마 덕분에 체내에 카나비노이드 시스템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이는 의학적으로는 매우 큰 진전이었다. CBD와 같은 일부 대마추출약물은 마땅히 다른 대안이 없는 난치성 질환 치료에 꽤 의미 있는 역할을 한다. 또한 분해효소를 억제하여 체내 유래 카나비노이드를 높이는 기전의 약물은 대마의 카나비노이드와 달리 내성과 의존성이 없다. 아직 개발 초기 단계이지만, 지방산아미드가수분해효소(fatty acid amide hydrolase, FAAH) 억제제는 불안을 줄여주고, 정신적 외상 기억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는 효과를 보였다. 실제로 임상에서 활용되기까지는 통과해야 할 관문이 많지만, 향후 검증과정을 충분히 기다려볼 만하다. 언젠가 진료 중에 교도소 환자가 물었다. 이런 것도 못하면 무슨 재미로 사냐고. 답을 줄 수는 없었다. 실은 쾌락을 좇는 법을 묻는 게 아니었다. 고통스런 감정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냐고 절실하게 되묻고 있었다. 비록 형사적 처벌을 받고 있지만, 이들 중에 상당수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대마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와 오해가, 이들을 치료와 재활이 아닌, 재발과 재범의 위험으로 내몰 수 있다. 대마는 여전히 청소년기 뇌손상과 중독성, 약물상호작용 위험이 높아 엄격한 관리가 필요한 중독성 물질이다. 대마가 의학적 효과와 위험성 사이에서 균형을 찾기 위해선 여전히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 참고 문헌 - Testai FD, Gorelick PB, Aparicio HJ, Filbey FM, Gonzalez R, Gottesman RF, Melis M, Piano MR, Rubino T, Song SY; American Heart Association Stroke Brain Health Science Subcommittee of the Stroke Council; Council on Arteriosclerosis, Thrombosis and Vascular Biology; Council on Cardiovascular and Stroke Nursing; Council on Lifestyle and Cardiometabolic Health; and Council on Peripheral Vascular Disease. Use of Marijuana: Effect on Brain Health: A Scientific Statement From the American Heart Association. Stroke. 2022 Apr;53(4):e176-e187. - Bachhuber MA, Saloner B, Cunningham CO, Barry CL. Medical cannabis laws and opioid analgesic overdose mortality in the United States, 1999-2010. JAMA Intern Med. 2014 Oct;174(10):1668-73. doi: 10.1001/jamainternmed.2014.4005. Erratum in: JAMA Intern Med. 2014 Nov;174(11):1875. - Shover CL, Davis CS, Gordon SC, Humphreys K. Association between medical cannabis laws and opioid overdose mortality has reversed over time. Proc Natl Acad Sci U S A. 2019 Jun 25;116(26):12624-12626. doi: 10.1073/pnas.1903434116. Epub 2019 Jun 10. - Dellazizzo L, Potvin S, Dou BY, Beaudoin M, Luigi M, Giguère CÉ, Dumais A. Association Between the Use of Cannabis and Physical Violence in Youths: A Meta-Analytical Investigation. Am J Psychiatry. 2020 Jul 1;177(7):619-626. doi: 10.1176/appi.ajp.2020.19101008. Epub 2020 May 27. - Dugré JR, Dellazizzo L, Giguère CÉ, Potvin S, Dumais A. Persistency of Cannabis Use Predicts Violence following Acute Psychiatric Discharge. Front Psychiatry. 2017 Sep 21;8:176. - Dugré JR, Potvin S, Dellazizzo L, Dumais A. Aggression and delinquent behavior in a large representative sample of high school students: Cannabis use and victimization as key discriminating factors. Psychiatry Res. 2021 Feb;296:113640.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 인생의 고민 중 어쩌면 가장 크게 다가올지도 모를 '연애', 이 둘이 결합했다면? '직장고민상담소-대나무슾'의 서브 코너 '비밀리'에서 연애전문가들의 발랄하고도 진지한 경험담과 조언을 들어보세요! (글 : 노대영 뇌과학자/한림의대 교수) 뇌과학으로 풀어본 사내 연애 당신은 하루를 누구와 함께 보내고 있나요?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라면, 우리 인생은 훨씬 수월할 겁니다. 하지만 평소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이들은 대개 절친이나, 형제, 배우자가 아니지요. 우리는 직장에서 동료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직장동료와의 관계는 참 묘합니다. 가깝기도 하지만, 또 한없이 멀 수도 있어요. 누군가와 진정한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200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직장 내 사람들과 강한 유대감을 느낀다면,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죠. 실제로 통계에 따르면, 10%에서 많게는 20%까지 직장에서 배우자를 만난다고 합니다. 심지어 “오피스 와이프”나 “오피스 허즈번드”란 용어도 낯설지 않습니다. 사내 연애 경험이 Covid-19 이후로 그전보다 늘었다는 통계도 있지요. 대부분 일반인은 연간 적어도 약 1,680시간 정도를 직장 내 사무실에서 보내게 됩니다. 40% 정도의 직장인은 직장에서 동료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네 명 중 한 명 꼴로 사내 연애를 할 용의가 있다고도 응답했습니다. 반면, 이보다 더 많은 직장인들은 사내에서 연애는 하지 않겠다고도 했지요. 그중 대부분은 사내 연애를 비밀로 하기를 원했습니다. 직장에서 누군가와 데이트를 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낙인(stigma)’을 의식한다는 뜻입니다. 직장인이 사내 연애를 조심스러워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연애와 일이 함께 얽히는 상황을 우려하기 때문이죠. 직장 내 자리를 잃거나, 일할 때 불편해지거나, 자칫 직업적인 평판에 흠집을 남길까 두려워합니다. 또한 직장 내 불필요한 소문에 휘말리고 싶지 않습니다. 특히 상사와의 관계에서는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진급이나, 급여, 또는 심지어 다른 동료와의 관계에서 불이익을 당할까 염려하기도 합니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감정입니다. 이 감정의 근원은 역시 우리 뇌이죠. 이 감정은 복잡한 논리적 추론의 결과가 아닙니다. 좋다, 나쁘다의 직관적인 판단인 거죠. 사랑은 생존의 필수품입니다. 물이나 음식과도 같지요. 뇌에서 일어나는 생존과 관련된 결정은 단순하고 빠르게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상술한 모든 위험에도 불구하고, 사내 연애는 기어이,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일어납니다. 특히 연애 초기 단계에서는 뇌에 있는 보상회로의 중추인 복측피개영역(Ventral tegmental area)이 활성화됩니다. 목마르거나 배고플 때, 욕구가 충족되는 상태와 같지요. 이때 행복이나 주의력과 관련된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이 보상회로를 통해 활성화됩니다. 애정 행동을 유지하고, 상대에게 더욱 집중하도록 합니다. 한편, 강박증상이나 불안과 관련된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이 감소합니다. 상대에 대한 생각이 침습적으로 반복해서 떠오릅니다. 사소한 단서에 집착하고, 쉽게 불안을 느끼게 되지요. 이 상태에서는 예측이나 합리적인 판단을 돕는 전전두엽의 기능은 상대적으로 감퇴됩니다. 사랑에 눈이 먼다는 옛말은 틀린 말이 아니죠. 한번 싹튼 연애의 감정을 누그러뜨리기란 어렵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사내 연애의 여러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인디아나 대학의 인류학자 헨리 피셔 박사는 직장을 연애를 위한 배지(Petri dish)로 비유했습니다. 직장은 자연발생적으로 연애가 일어나기 쉬운 조건을 갖추었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를 살펴볼까요? 가까이 자주 보면 정든다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을수록 친근해지고, 더 호감을 느끼는 심리적 성향이 있습니다. 이를 근접성 효과 (Proximity effect)라고 합니다. 또한 자주 접할수록 편안해지고, 이는 호감으로 이어지는 경향도 있죠. 이를 심리적 용어로는 단순노출효과 (Mere exposure effect)라고 부릅니다. 모두 대인관계에 공히 적용되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직장은 두 가지 원리에 모두 부합하는 환경입니다. 일상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뿐더러, 공간적으로도 가까이 지내는 대인관계는 직장에서 이루어집니다. 직장에서는 동료와 끊임없이 메시지를 주고받고, 수시로 대화하며, 같이 휴식을 취하기도 하지요. 근무 중에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친밀감이나, 일체감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관계에 있어서 경계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동료에서 연인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기 십상이지요. 양쪽 모두에서 이 선을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한데, 적어도 한쪽에서 경계를 넘어선다면, 관계는 급속히 전환될 수 있습니다. 유사성의 원리 우리는 심리적으로 공통점을 가진 상대에게 이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서로 닮은 점이 많을수록 오래 지속되는 성공적인 관계를 잘 유지한다고 합니다. 1,523쌍의 커플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86%가 비슷한 성격적 특성으로 나타났습니다. 결혼한 커플은 무작위로 선택된 커플보다 유전적으로도 훨씬 더 유사했습니다. 부모가 자신을 닮은 자녀를 양육할 때에도 자연스럽게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공통점이 많을수록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기 쉽고, 관계유지에 소요되는 에너지도 적게 들기 마련입니다. 회사는 본질적으로 회사에 적합한 개인을 직원으로 선발하게 됩니다. 선발 과정을 살펴보면, 지원자의 사고방식이나, 가치관, 신념, 관심사 등이 직장문화에 맞는지 파악합니다. 결과적으로 한 직장에 있는 직원들은 마음가짐이나 교육 수준 또는 배경이 서로 비슷할 가능성이 높죠. 또한 직업적으로 공통된 일을 하다 보면, 비슷한 특성을 공유하게 되지요. 서로 호감을 갖기 쉬운 조건이 마련된 셈입니다. 비밀연애의 즐거움 흔히들 감정에 따라 신체가 반응한다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신체 반응에 따라 감정을 알아차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카필라노(Capilano)의 법칙”이 있습니다. 위험하거나 불안한 상황에서 신체 반응의 변화를 사랑의 감정으로 착각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캐나다의 심리학자는 밴쿠버의 카필라노 강에 있는 출렁다리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출렁다리를 건넌 남성들은 일반다리를 건넌 남성들보다 여성에게 훨씬 더 큰 호감을 보였습니다. 위험한 상황에서는 아드레날린과 도파민 때문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가빠지며, 주의를 집중하게 됩니다. 이런 떨림과 흥분을 사랑의 감정으로 오인하기 쉽다는 거죠. 둘만의 비밀을 간직한 사내 연애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종의 길티 플레저로 작동합니다. 항상 들킬까 조마조마한 불안을 내재하고 있지요. 그렇기에 비밀스러운 사랑은 특별하게 느껴지고, 밀회의 즐거움은 더 크게 다가옵니다. 위험이 큰 만큼, 그 보상은 더 달콤한 법이지요. 역경을 뚫고 이뤄낸 사랑이라는 성취감도 한몫할 겁니다. 그림 출처 : 노대영 사내 연애는 양날의 검입니다. 활력을 얻고, 소통을 원활히 하면서 업무 생산성이 향상될 수도 있고, 동료 간 반목을 낳거나, 이별의 후유증으로 업무 성과가 떨어질 수도 있지요. 특히 서로 간 직급이 다를수록, 난처한 상황이 생길 가능성은 더 높습니다. 사내 연애는 두 사람 간 사적인 경험으로만 귀결되지 않습니다. 주변에 있는 모든 동료들이 연관될 수 있기에 참 어렵습니다. 비밀연애를 유지한다 해도 말이죠. 사내 연애는 관계에 대한 숙고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어차피 사랑은 어렵습니다. 최신이론에 따르면, 사랑은 끌림, 연결과 공명, 신뢰, 존중 4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합니다. 여느 영화의 대사와는 달리, 사랑은 계속 변하지요. 하지만 꾸준히 노력한다면 모양은 바뀌더라도 사랑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끌림은 어찌할 수 없다고 해도, 소통하고, 믿음을 쌓고, 서로를 존중하는 일은 온전히 노력의 영역입니다. 우리는 뇌의 반응에 따르지만, 뇌를 지배하는 것 역시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 참고 자료 Hall, J. A. (2019). How many hours does it take to make a friend? Journal of Social and Personal Relationships, 36(4), 1278–1296. Tobore TO (2020) Towards a Comprehensive Theory of Love: The Quadruple Theory. Front. Psychol. 11:862. doi: 10.3389/fpsyg.2020.0086 Helen E Fisher, Arthur Aron, and Lucy L Brown, Romantic love: a mammalian brain system for mate choice Philos Trans R Soc Lond B Biol Sci. 2006 Dec 29; 361(1476): 2173–2186. Cacioppo, S. (2022). Wired For Love: A Neuroscientist’s Journey Through Romance, Loss and the Essence of Human Connection. Hachette UK. *사내 연애에 대한 고민을 비밀리 커뮤니티에 남겨주세요. 사내 연애 고수들이 글을 통해 함께 고민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