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대신 감각으로 쓰는 평론가. 영화와 문화에 대해 씁니다. 2016년 '씨네21'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등단.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영화 <승부>는 조금 지나간 이야기를 다룬다. 조훈현과 이창호. 한국의 전설적인 바둑 기사들의 대결. 위대한 스토리지만 실은 흘러간 이야기다.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바둑이라는 소재의 특성 때문이다. 이제 바둑은 더 이상 성인들의 국민 스포츠, 아이들의 필수 교양이 아니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 이후 AI가 바둑을 제패했다는 인식이 생기며 그 신비감은 더욱 줄어들었다. 그로부터 9년이 더 흘렀다. 이런 때에 <승부>는 왜 하필, 바둑을 들고 우리를 찾아왔을까. 시각을 조금만 바꾸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승부>는 사실 바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니까. 바둑을 매개로 서사를 이끌어 가지만, 이 영화가 진짜로 전하고픈 메시지는 따로 있다. 그에 관해 말해보려 한다. 아래부터 <승부>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다. 영화는 두 남자로부터 시작한다. 조훈현(이병헌)과 이창호(유아인)다. 초반에 영화는 거대한 스승과 천재 제자에게 관심을 둔다. 재능이 충만한 아이와 엄격한 스승. 전형적인 신동의 성장스토리다. 하지만 이창호가 제법 컸을 때, 서사는 꿈틀대며 변모한다. 제자를 위하는 마음에 자기 방식을 다그치는 조훈현과, 조용히 대치하며 자기 만의 기법을 완성하는 이창호. 스타일 혹은 정체성이 충돌한다. 결국 이창호는 스승으로부터 독립하며 자기만의 바둑을 손에 쥔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승부'의 막이 오른다. 이 영화는 바둑의 기보나 명승부를 복기하는 일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바둑판에서 벌어지는 일을 설명하는 데 무심하다. 대신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판 주변에 둘러앉은 인간들이다. 이창호에게 조훈현과의 승부란 여태 자신을 가르친 스승, 그리고 그와 함께 한 시간과 대결하는 일이다. 조훈현에게 승부는 직접 길러낸 제자의 도전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이것이 쉬울 리 없다. 바로 이 순간 카메라는 홀연히 등장해 그들 사이를 파고든다. 이 둘의 대결은 이세돌이 알파고와 펼쳤던 경기와 비교해 보면 더 분명하게 와닿는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대상으로 했던 것은 수 싸움이다. 그것이 빛나는 기술의 퍼포먼스다. 하지만 조훈현과 이창호의 대결은 차라리 난타전에 가까우며, 땀이 뚝뚝 떨어지는 육체의 활동이다. 이들이 치르는 '경기'를 기억해 보자. 조훈현은 노래를 부르거나 다리를 떨고 담배 연기를 쉴 새 없이 내뿜는다. 거기에 이창호는 특유의 무덤덤한 얼굴로 고요히 응수한다. 아무리 뛰어나다 하여도 AI는 절대 제공할 수 없는 이런 경험이야말로 둘의 경기를 구성하는 핵심이다. 이들의 승부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은 단순히 누가 이기고 지느냐의 문제를 넘어선다. 방금 맞붙었던 스승과 제자의 어색한 식사. 방 안에 흐르는 정적. 패배한 스승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떨림. 이기고도 웃지 못하는 제자의 굳은 표정. 지나가는 사람의 빈정거림. 결국 헤어지는 스승과 제자.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들 간의 이별. 이 모든 과정이 바로 조훈현과 이창호의 '승부'다. 그들은 한 판의 바둑을 넘어, 둘을 둘러싼 모든 시간과 관계를 내걸고 뜨겁게 맞붙고 있다. 여기에는 이세돌과 알파고의 차가운 대결에는 없는 끈적하고 뜨끈뜨끈한 숨결이 가득하다. 알파고가 걸어오는 싸움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오는 총알과 같다면, 조훈현과 이창호의 대결은 눈앞에서 상대의 일그러지는 표정과 피 냄새 섞인 입김까지 공유하며, 때로 끌어안으며 또 쓰러지며 이어가는 복싱이다. 이토록 덜컥대고 불편하며 눈물겨운 활동이 바로 이 영화가 포착하는 '승부'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왜 하필 지금, 바둑인가? 사실 이건 어리석은 질문이다. 바둑의 시대에서 출발해 오늘까지 이어지는 어떤 반짝임을 <승부>는 포착하니 말이다. 스승과 제자의 대결.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으나 언젠가 필연적으로 맞게 되는 그 순간. 냉정을 유지하기 힘든 이 싸움에는 마치 보드라운 맨살처럼 예민하고 투명하게 드러나는 감정과 반응이 있다. 이 모든 순간을 끌어안은 것이야말로 바로 '승부'라고, AI의 시대에 개봉한 어느 영화는 우리에게 말한다. <승부>는 마주 앉은 두 사람의 이미지로 끝을 맺는다. 비록 멀리서 찍은 장면이지만 그들을 둘러싼 공기를 알 것만 같다. 이 순간의 긴장과 떨림. 부스럭대는 몸과 형형한 눈. 조용히 방 안을 가로지르는 바둑알. 거기에는 승패를 넘어 지독히도 인간적인 부딪힘이 있다. 이토록 촌스럽고 낭만적인 영화를 싫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최근 전 세계 유수의 영화제를 들썩이게 만든 영화가 있다. 바로 <에밀리아 페레즈>다. 무수한 찬사와 야유가 동시에 쏟아지는 진풍경.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뜨거운 이슈의 중심에는 이 작품이 있다. <에밀리아 페레즈>는 여자가 되어 새 삶을 살고 싶은 잔학무도한 마약왕에 대한 이야기다. 스토리만 봐도 아찔한데, 스릴러와 블랙 유머가 더해졌다. 또한 뮤지컬 영화인데, 기존 관습과 달리 예상 못한 지점에서 춤과 노래가 터져 나오고 분위기도 독특하다. 감독 '자크 오디아르'는 일찍이 연출력을 인정받았고, 주연을 맡은 트랜스젠더 배우 '칼라 소피아 가스콘'은 훌륭한 연기를 선보인다. 여기까지만 보면 <에밀리아 페레즈>는 각종 영화제와 관객의 사랑을 휩쓸어 마땅하다. 무수한 상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지난해 제77회 칸영화제에서는 심사위원상과 여우주연상을, 올해 제50회 세자르상에서는 7관왕을 꿰찼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주연 배우 카를라의 인종 차별 논란 등이 불거지며 제97회 미국 아카데미에서는 2개 부문 수상에 그쳤다. 또한 멕시코 현지를 반영하지 못한 어색한 설정과 발음 등이 거론되며, 영화를 둘러싼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한 편의 영화가 안팎을 오가며 이토록 다양한 이슈를 만들어내는 일은 흔치 않다. 그런 점에서 <에밀리아 페레즈>는 실로 다면적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태도를 정하는 일은 까다롭고, 여기에 정답은 없다. 관객이 하나의 태도를 정해야 할 의무도 없다. 나 역시 어느 입장을 택하여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다만 <에밀리아 페레즈>에 담긴 그 독특하고 괴상한 매력과 아쉬운 논란 모두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아래부터 영화에 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나온다. <에밀리아 페레즈>가 평단에서 호평받는 이유는 간단히 말해 독창성 때문이다. 분명 뮤지컬 영화이면서, 이 작품은 노래나 가창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에밀리아 페레즈'를 연기한 카를라의 노래는 평범하거나 그에 못 미친다. 뮤지컬 영화가 이토록 가창에 무심하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다. 그러나 영화 속 넘버는 예상을 유려하게 빗나가며 신선한 충격을 던진다. 예를 들어 마약왕 델 몬테(칼라 소피아 가스콘)가 성전환을 결심한 뒤, 그의 변호사 리타(조 샐다나)가 수술을 집도할 의사를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의사가 할 수 있는 수술을 줄줄이 읊으며 어색한 노래를 부르는 순간이 등장한다. 이 장면은 트랜스젠더의 의미를 수술 행위로 좁히며 지나치게 가벼이 다룬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 지적에 흔쾌히 동의하지만, 이 장면의 진정한 의미는 역설적으로 그것이 의도되었다는 데 있다. 경박한 말을 뱉어내는 의사와, 수술대 위에 외설적으로 누워 광고의 한 장면처럼 과장되게 웃는 여인들. 이것은 누군가의 삶을 좌우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다른 누군가에게 상품을 찍어내는 작업처럼 경솔하게 다뤄지는 현실을 꼬집는다. 이 순간 느껴지는 기이하고 불쾌한 감정은 의도된 것이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의료 산업을 정조준하며 찐득찐득한 블랙 유머를 터뜨린다. 또한 <에밀리아 페레즈>에서 성전환은 그 사전적인 의미에 한정되지 않으며, 더 넓은 의미를 내포한다. 델 몬테는 성을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마약상이었던 과거 역시 벗어던진다. 그에게 성전환은 과거의 정체성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삶을 향해 가는 결단의 일환이다(오해를 막기 위해 강조하자면, 일반적 트랜스젠더가 아니라 델 몬테의 경우 그렇다는 의미다). 이런 설정은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 가능한가?'라는 질문까지 나아간다. 그래서 영화에서 묘사되는 성전환을 현실과 일대일로 비교하며 평가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 한편 <에밀리아 페레즈>의 서사는 한국의 막장 드라마를 연상시킬 정도로 강렬하다. 이 부분은 영화에서 직접 확인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최대한 언급을 자제하려 한다. 그 서사는 영화의 쾌감을 이끄는 주요한 동력이다. 이 과정이 촘촘하지 못하고 과장되었다는 시선도 있다. 이 말에 동의하면서도, 그 투박하고 급한 진행이야말로 자크 오디아르가 의도하는 난장의 블랙코미디를 완성한다고 덧붙이고 싶다. 그러니까 <에밀리아 페레즈>에 대해 가해지는 혹평과 호평은 실은 동전의 양면이다. 오히려 <에밀리아 페레즈>의 가장 큰 약점은 다름 아닌 논란이다. 영화가 실화를 다루며 멕시코의 실정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고, 이를 위한 노력도 부족했다는 비판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이런 논란을 피하기 위해 가상의 지역을 설정하는 시도를 하지 않은 점도 아쉽다. 주연 배우 카를라의 인종 차별 이슈도 그렇다. 그녀는 2021년 윤여정이 '미나리'로 여우주연상을 탔을 당시 "아프로-코리안(아시아와 아프리카 조상을 가진 이들) 페스티벌을 보는 건지" 모르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이후 공식 사과했다. 아무리 다양한 서사가 녹아있다 하더라도 결국 <에밀리아 페레즈>는 트랜스젠더라는 소수자의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영화 속 에밀리아와 현실의 배우 사이의 괴리는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영화를 사람에 비유할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둘 사이의 가장 큰 공통점은 그 복합성에 있다. 대부분의 인간이 좋은 면도 싫은 면도 모두 갖추었기에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것처럼 영화도 그렇다. 그래서 영화를 평하는 일은 늘 어렵다. 게다가 이토록 다면적인 영화라면 어떨까. 거기에다 장점과 단점 모두 다른 작품을 압도할 정도로 강렬하다면. 뭐, 아무렴 어떻겠는가. 평가의 어려움은 잠시 잊고 그저 영화를 느껴보기를 권한다.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기에 나만의 시선이 작동하고, 그 과정에서 나의 취향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 인생과 영화 모두 그런 것 같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는 그럭저럭 즐길 만한 평작으로 여겨지는 분위기다. 최근 마블의 부진에 실망한 팬들을 달랠 신작. 새로운 캡틴의 데뷔 무대. 혹은 꽤 정치적인 작품으로도 읽힌다. 분노 조절이 어려운 대통령과 그를 제압하는 블랙 히어로의 이야기는 해석하기 어렵지 않은 메타포다. 그러나 이런 반응을 볼 때, 한 가지 아쉬움을 느낀다. 이 작품은 기저에 중요한 메시지를 고이 각인해 두었는데, 이 부분에는 영 관심이 모이질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가 전하고픈 이야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 앞으로 마블 시리즈의 향방을 예고하는 힌트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아래부터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유의해서 읽어주기를 바란다. 영화가 시작되면, 첫 번째 주제가 제시된다. 그것은 바로 '증명'이다. 너 자신을 증명하라. 너의 위치에 어울리는 사람임을 입증하라.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묵직한 압박에 시달린다. 초반에 등장하는 성당 액션신은 제법 잘 연출된 장면이다. 신성한 예배당에서 거친 격투가 벌어진다. 이때 악당은 윌슨(앤서니 매키,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을 깔보는 말을 던진다. 기분 나쁠 상황이지만 그의 반응은 생각보다 담담하다. 비록 그 후에 두들겨 패긴 하지만. 이는 화려했던 1대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크리스 에반스)'를 잇는 윌슨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네가 캡틴 아메리카라고?'라는 시선을 견디는 일 말이다. 인정 투쟁에 시달리는 것은 윌슨뿐만이 아니다. 영화의 중요한 축인 로스(해리슨 포드)도 지독한 갈증을 겪는다. 그는 자신의 유산을 공고하게 구축하고 딸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로 인정받고 싶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도출된다. 자신을 증명하고 싶은 이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할까? 스스로를 입증하지 못하는 순간 빠르게 탈락하는 시대에서 영화는 공감할 만한 질문을 던진다. 인정 욕구로 앓는 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다. 자제하거나, 폭발하거나. 이 영화에서 많은 인물이 후자를 택한다. 대표적인 이는 로스다. 그가 운동을 하는 장면에서 '목표를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라는 내용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과연 그 가사대로 로스는 무엇이든 한다. 자신의 업적을 위해서 윤리의 선을 넘기도 한다. 또 분노를 폭발하는 바람에 자신의 일궈온 모든 것을 잃을 뻔한 위기에 처한다. 새로운 팔콘, 토레스(대니 라미네즈)도 전투 중에 실력을 보이려고 과한 액션을 감행하다 사고를 낸다. 창공에서 낙하하는 그의 모습은 '이카로스의 신화'와 겹친다. 인공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다가, 너무 높이 올라간 나머지 태양에 가까워져 녹은 날개와 함께 추락한 이카로스. 절제하지 못한 욕망이 가져온 비극. 이는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이다. 증명하고 싶다. 더 강해지고 싶다. 이런 욕망을 빠르게 채우고 싶을 때, 영화에 등장하는 것은 '약물'이다. 인체를 순식간에 강화하는 물질. 이것을 잘 보여주는 이가 스턴스(팀 블레이크 넬슨)다. 그는 두뇌에 헐크의 피가 섞이며 높은 지능을 가진 인물로 변이한다. 여기까지는 의도가 아니라 사고다. 그러나 이후 그는 그 좋은 지능으로 범죄를 일으키고, 이때도 약물을 활용한다. 그가 로스에게 건넨 심장병 치료약 속에는 감마선이 들어있다. 또 그는 타인을 세뇌해서 범죄를 저지르는데, 이때 활용되는 음악이나 플래쉬도 일종의 약물(외부에서 투입되어 신체에 변화를 일으키는 물질)로 기능한다. 스턴스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약물에 대해 부정적이다. 약을 쓰면 빠르게 강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수련'이 아니라 '처치'의 도구일 뿐이다. 약물은 강인한 인간이 아니라, 강력한 돌연변이를 탄생시킨다. 이것은 결국 '혈청'을 거부한 윌슨의 결단으로 이어진다. 그는 인위적인 물질 없이, 자기 모습 그대로 히어로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런 의미에서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는 윌슨이 혈청을 맞지 않는 이유에 대한 설명서라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시그널인데, 히어로에 대한 일종의 패러다임 변화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스티브는 슈퍼 솔저 혈청을 맞고 초인이 되었다. 스티브의 시대에서 혈청은 강인함과 우월함을 강조하는 도구였다. 하지만 MCU는 윌슨의 시대에 이르러 과거의 관행을 버린다. 그리고 불안을 겪을지언정 자신의 모습 그대로 히어로의 자리에 앉는 인물을 보여준다. 혈청 자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다만 그런 설정을 바라보는 시각과 취향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MCU의 시대가 변하였다. 그렇다면 약물을 거부한 윌슨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맨몸밖에 없는 것인가. 물론 윙 슈트,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 같은 첨단 장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얻은 것은 '동료'다. 고독한 싸움을 끝낸 윌슨에게 토레스는 '너와 같이 되고 싶다'는 말을 듣는다. 최고의 찬사가 아닌가. 비슷한 맥락에서 레드 헐크가 아닌 인간으로 되돌아온 로스도 딸의 애정을 되찾는다. 손쉬운 파워 대신 동료를 얻는다. 이것이 새로운 캡틴, 윌슨의 특성이자 강점이다. 그는 연대를 상징하는 히어로다. 그렇기 때문에 윌슨이야말로 '어벤져스를 재건하라'는 임무에 제격인 것이다. 묵묵한 모습으로 동료의 마음을 얻는 그는 어벤져스를 이어 붙일 만한 인물이다. 물론 재건 여부는 짐작하기 어렵지만. 조심스러운 예측이지만, 이런 패러다임 전환은 윌슨에 한정되지 않을 것 같다. 앞으로 마블 히어로를 관통하는 경향이 되리라 추측한다. 이전까지는 어떤 방식으로든 강력한 초인을 탄생시킨 뒤 이들의 활약을 관람했다면, 이제부터 영웅 간의 협력과 동맹, 그들 사이 케미스트리가 더욱 강조될 것이다. 초능력이 아닌 연대에 포커스가 놓일 것으로 예상된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지속되는 혹평은 이해되는 부분이 크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관객 역시 2010년대의 시선으로 MCU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화려한 시기를 뒤로 한 채 마블은 새로운 챕터를 준비하고 있다. 그 길목에 놓인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가 제기하는 메시지는 생각보다 묵직해, 시간이 흐를수록 의미 있는 작품으로 평가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중증외상센터>가 줄곧 1위를 차지하며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실제 의사가 집필한 웹소설이 원작인 작품. 뛰어난 실력의 외과 전문의 '백강혁(주지훈)'을 주인공으로 한 의학 드라마다. 천재를 내세운 메디컬 장르물이 인기를 끈 사례는 많다. 하지만 강혁은 어딘가 남다른 매력이 있어, 이목을 끈다. <중증외상센터>는 '전문직 히어로물'의 계보를 잇는다. 변호사, 의사 등 엘리트 전문 직종을 배경으로 괴물 같은 실력자가 활보하는 광경을 유쾌하게 풀어낸다. 이런 장르물은 전문직을 들여다보는 재미와 히어로가 전하는 쾌감을 동시에 느끼게 해서 늘 어느 정도 인기가 있다. 그런데 <중증외상센터>는 여기에 시청자를 유혹할 요소를 여러 가지 얹는다. '중증외상' 분야가 중심이므로 매 화마다 긴박한 수술이 진행된다. 이런 포맷이 기본적인 서스펜스를 만들어낸다. 거기에다 대학병원 내 여러 분과와 교수들의 파워 게임, 중증외상센터의 운영 상태(고질적인 적자)를 둘러싼 갈등, 예산을 따기 위한 충돌, 어떤 제자를 데려올 것인가를 둘러싼 경쟁 등을 흥미롭게 풀어낸다. 무엇보다 매력이 있는 것은 강혁이라는 캐릭터다. 별 볼 일 없는 학벌이지만 전장을 누비며 무수한 부상자를 살렸고, 오감이 매우 발달해 '초감각'을 지녔다. 또 선후배에게 무례하며 제멋대로이지만 누구보다 환자를 사랑하며 헌신적이다. 키도 크고 잘생겼다는 설정이다. 그는 '반전 매력'으로 무장한 인물로, 히어로물 주인공의 자격을 갖췄다. 주지훈 배우는 이런 모습을 적절하게 연기한다. 워낙 잘난 캐릭터라 자칫 잘못하면 과장되고 허무맹랑하게 보일 여지도 있었다. 웹소설에서는 괜찮았던 설정이 드라마로 건너오며 어색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주지훈은 웹소설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능숙하게 조율하며 매력적인 캐릭터를 완성한다. 그런데 강혁과 관련해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이야말로 <중증외상센터>를 한 끗 다른 히어로물로 만든다. 작품의 인기를 견인하는 요인. 그것은 강혁의 초인적인 능력 뒤에 숨은 뛰어난 처세술이다. 강혁은 어리바리한 천재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분야에서만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고, 다른 분야에는 무지하여 늘 누군가의 보조를 받는 인물이 아니다. 간혹 히어로물의 주인공이 매우 뛰어나지만 정치 감각이 없어 코너에 몰리고 모함받아 스러지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강혁은 이들과 다르다. 아래부터 <중증외상센터>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다. 강혁은 병원에 오자마자 중증외상팀의 병원 내 위상을 빠르게 간파한다. 그는 행동이 투박하고 말이 거칠지만 눈치가 백 단이다. 또 실력 있는 의사 양재원(추영우)을 알아보고, 그를 자기 밑으로 데려오기 위해 항문외과 과장과 경쟁도 서슴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간호사 천장미(하영)에게 팁을 얻어, 결국 스카우팅에 성공한다. 또 재난 상황에 과감하게 뛰어들어 환자를 살리고, 본인에게 관심이 집중됐을 때 중증외상센터의 예산을 확보하는 노련함을 보인다. 기조실장이 자신을 방해하자, 응급의학과를 설득해서 도움을 받아낸다. 이 과정에서 응급의학과와 자신의 이해가 일치한다는 점을 효과적으로 어필하기도 한다. 언뜻 보아 조직생활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백강혁은 사실 조직을 다루는 데 '빠꼼'이다. 개인의 신념이 조직의 목표와 어긋나는 경우는 우리에게도 흔하다. 누구나 한 번쯤 맞닥뜨리는 장애. 조직의 논리에 막혀 가치 있는 일을 하지 못한다는 좌절감. 그러나 강혁은 우리가 사는 너저분한 현실에서도, 충분히 히어로가 탄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 이면에는 크고 작은 문제를 섬세하게 대응하고 때로 과감히 쳐내는 강혁이 있다. 실은 이런 면모야말로 그의 진짜 초능력이다. 이것은 훌륭한 리더의 자질로도 읽힌다. 강혁은 가능성 있는 제자를 발탁해 초심을 일깨우고 성장시킨다. 또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센터의 구성원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그들이 인정받을 기회를 준다. 또한 이기적인 의사 때문에 화가 난 장미에게 "싸우는 것은 나의 일"이라며 갈등을 해결한다. 그는 무자비하고 혹독하지만, 동시에 섬세하고 따듯하다. 그래서 강혁은 함께 일하고 싶은 팀장이자 직장인의 추구미다. 그는 실은 환자가 아니라 직장인의 히어로라 할 만하다. 그렇게 강혁은 조직 내에서 한 번쯤 답답함을 느껴본 시청자를 사로잡는 데 성공한다. 이것은 지난번에 쓴 글 <달라진 세계·새로운 연애 판타지... <나의 완벽한 비서>의 성공 비결>에서 언급한 내용과도 연결된다. 최근 인기 드라마의 주인공은 매력 있고 능력 있을 뿐 아니라, 직장에서 훌륭한 리더의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완벽한 비서>에서 헤드헌팅 회사의 CEO로 등장하는 지윤(한지민)도 마찬가지. 훌륭한 리더를 향한 욕망이 여러 작품을 관통하고 있다. 이제 순진한 히어로의 시대는 갔다. 속물적인 방해를 돌파하며 현실의 벽을 넘어, 자기 이상을 당당히 펼쳐 보이는 히어로. 조직에 빠삭하고 문제 해결에 능해서 끝내 의지를 관철하는 초능력자. 그러면서 자기 사람을 확실히 챙기는 존경할 만한 리더. 빡빡한 조직 안을 요리조리 활보하는 수완 좋은 히어로의 시대다. 지금 사회가 원하는 영웅의 모습이 바로 여기 있다. 사진 : 넷플릭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최근 넷플릭스, 웨이브 등 OTT에서 드라마 부문 1위를 휩쓰는 작품이 있다. 올해 초 방영을 시작한 <나의 완벽한 비서>이다. 이 작품은 3회 만에 시청률 두 자릿수를 돌파하고, 주역을 맡은 한지민은 물론 이준혁까지 다시 주목받으며 신드롬을 일으키는 중이다. <오징어게임> 시즌2를 비롯해 쟁쟁한 작품이 활보하는 지금, <나의 완벽한 비서>가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2025년의 우리가 욕망하는 판타지가 숨겨져 있다. '오피스 로맨스'는 꾸준히 사랑받는 장르다. 멋지게 일하며 성공 가도를 달리면서 사랑도 쟁취하는 이야기. 하지만 장르물도 시대에 따라 조금씩 모습을 바꾼다. 예전과 지금 시청자의 욕망이 다르고, 그들이 꿈꾸는 로맨스가 다르기 때문이다. <나의 완벽한 비서>는 변화하는 시대의 공기를 감지하고 이것을 정조준하는 데 성공한 사례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 속에 녹아있는 이 시대의 욕망은 무엇일까. 특히 '지윤'이 대변하는 커리어 우먼들의 욕망은? 하나하나 이야기해 보자. <나의 완벽한 비서>는 한 헤드헌팅 회사를 배경으로 한다. 이곳의 CEO 지윤(한지민)은 일에 철두철미한 '본업 천재'이지만 평소에는 허당이다. 가방을 아무 데나 던져 놓고 물건을 빠트리는 등 허술 그 자체. 반면 그녀의 비서 은호(이준혁)는 섬세하면서도 프로페셔널한 면모를 발휘해 지윤이 챙기지 못한 것을 완벽하게 보강한다. 은호가 오며, 지윤은 그간 놓친 것이 채워지고 일에 완벽하게 몰입하는 경험을 한다. 여기에 이 드라마가 포착한 첫 번째 욕망이 있다. 그것은 '일상의 보살핌'에 대한 욕망이다. 이것은 경제적으로 의존하거나 커리어의 도움을 받고 싶다는 생각과는 다르다. 지윤은 '일잘러'이며 자기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아간다. 다만 필요한 때 따듯한 아메리카노를 갖다주고, 깜빡 잠이 들었을 때 춥지 않도록 챙겨주는 일. 어두운 침실에 켠 조그마한 수면등처럼, 때때로 찬바람이 드는 삶에 은은한 온기를 불어넣어 주는 일. 그런 '챙김'을 받고 싶다는 욕망은 은호를 통해 실현된다. 이건 기존의 로맨스물과 다른 부분이다. 그간 로맨스에서 남성 캐릭터의 신분이 더 높은 경우가 많았다. 남성은 여성을 신체적·경제적으로 보호하고(위험이나 궁핍에서 구해줌), 여성은 그를 정서적으로 케어하는(어릴 적 상처 등을 보살펴줌) 구도가 대부분이다. 이런 상호작용을 통해 둘은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나의 완벽한 비서>에서는 이런 구도가 역전되어 있다. 지윤은 일자리를 찾던 은호를 채용하고, 은호는 지윤의 숨겨진 상처를 알아본다. 게다가 이런 설정은 열렬한 호응을 얻고 있다. 시청자, 특히 여성들이 꿈꾸는 사랑의 형태가 달라지고 있다는 시그널이다. 또 한 가지 은호에게 독특한 설정이 있다. 그는 홀로 딸을 키우는 싱글 대디다. 그뿐만 아니라 "딸의 웃음을 지켜주고 싶다"며 육아 휴직까지 감행할 정도로 육아에 진심이다. 기존 로맨스물에서 찾아보기 힘든 설정이다. 대부분의 작품이 결혼 전 연애 단계를 다루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완벽한 비서>는 남자 주인공을 이혼남으로 설정하는 것을 감수하면서, 그가 얼마나 훌륭한 아빠인지를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좋은 남편을 넘어 '내 아이의 좋은 아버지'를 기대하는 심리를 정확히 조준한다. 무척 사랑해서 결혼한 커플도 출산 이후에 '육아'라는 새로운 전쟁을 맞이한다. 게다가 워킹맘과 맞벌이가 보편화된 요즘이다. 성별을 막론하고 결혼 전 단계에서 '저 사람은 육아에 잘 동참할 수 있는 사람인가' 여부를 고민하는 이들이 많다. <나의 완벽한 비서>는 은호를 통해 이런 니즈를 충족한다. 물론 이것은 이혼이 많아진 요즘을 반영하는 설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좀 더 방점이 찍힌 쪽은 은호의 육아 능력이다. 또한 지윤은 아버지에 대한 결핍이 있는 인물로 등장하는데, 다정다감한 은호는 지윤이 놓친 부성(父性)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나의 완벽한 비서>에는 또 하나 숨겨진 욕망이 있다. 그것은 직장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다. 이 드라마는 '헤드헌팅'이라는 소재를 통해 직장인의 애환을 들여다본다. 각 에피소드에서 인물들은 희생을 몰라주는 회사를 박차고 나가고, "그간 일하며 보낸 시간에 걸맞은 대우를 해드리겠다"라는 말에 감동해서 울먹인다. 모든 직장인이 염원하는 순간이다. <나의 완벽한 비서>는 한 편에서 요즘 시대에 최적화된 로맨스를 선보이면서, 다른 한 편에서 직장 판타지를 구현하는 협공 작전을 펼친다. 사랑 얘기에 매몰되지 않으면서도 시청자의 욕망을 다양하게 자극하는 영리한 전략은 성공한다. 나는 어떤 사람과 어떤 사랑을 하고 싶은가. 또한 어떤 곳에서 어떤 인재이고 싶은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을 질문이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답은 조금씩 변하는 것 같다. 욕망은 달라진 세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얼굴을 바꾸기 마련이니까. 그래도 괜찮다고, 원하는 것을 얼마든지 열망해도 괜찮다고 <나의 완벽한 비서>는 말한다. 일과 사랑을 관통하는 욕망을 우리 앞에 펼쳐 보이는 것이 오피스 로맨스의 속성이자 미덕 아닌가. 여기 이 시대의 은밀한 '연애 판타지'를 알아보고 즐겁게 유희하는 작품이 있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얼핏 보아 <페라리>는 카 레이싱을 소재로 한 스포츠 영화, 혹은 페라리 가문의 역사를 다룬 작품처럼 보인다. 영화가 시작되면,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간다. 하지만 괜찮다. 당신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감탄하게 될 테니까. <페라리>는 경영 위기에서 기업을 이끄는 '엔초 페라리' 회장의 실화를 다룬다. 자금은 부족하고, 경주 결과는 예측하기 힘든데, 레이서들은 자꾸만 다치고 죽는다. 아내는 자신을 증오하고, 몰래 낳은 사생아는 날로 커간다. 그러나 엔초(아담 드라이버)는 자기 팀 레이서에게 말한다. "무자비한 투지. 소름 끼치는 기쁨. 일단 내 차를 탔으면 이겨야 해. 브레이크는 나중에 밟아." 이것은 레이서 출신의 페라리가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태도를 긍정하지도, 부정하기도 힘들다. 영화는 그저 징그러울 정도로 집요한 그의 발걸음을 묵묵히 따라갈 뿐이다. 결국 <페라리>는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의 이름을 지키려는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아래부터 영화 결말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유의해 읽어주길 바란다. 엔초의 곁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아들 '디노'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아내 라우라(페넬로페 크루즈)의 얼굴에는 생기가 없다. 디노가 잠든 곳을 자주 찾는 이들 부부는 매일이 상중인 것처럼 느껴진다. 회사 '페라리'는 경영 악화로 벼랑 끝에 내몰린 상황. 게다가 페라리 팀의 레이서 '카스텔로티'는 사고로 죽고 만다. "(카스텔로티가) 그리울 것 같냐"는 질문에 엔초는 답한다. "그런다고 살아나?" 이 단순한 답에는 엔초의 가치관이 숨어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살아나는 것'이다. 이것은 그와 가족, 아끼는 레이서들, 그리고 회사 페라리를 관통하는 명제다. 과연 우리는 계속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 엔초는 누구보다 비정하다. 이것은 그가 삶을 지키는 방식이다. 카스텔로티가 죽자, 엔초는 곧바로 다른 레이서를 찾는다. 이런 비정함 위에서 페라리는 연명한다. 아내 라우라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곧바로 보험사에 낼 차량 보고서를 챙긴다. 이들은 서로를 증오하지만, 꽤 잘 맞는 커플이다. 이 장면은 둘이야말로 페라리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엔초가 죽음을 개의치 않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기 차를 타고 죽은 이들의 이름과 날짜를 외고 있다. 다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멈칫대는 것이 두려워 감정마저 차단한 채, 걷고 또 걷는다. 생존은 그의 유일신이다. 실은 엔초야말로 누구보다 '삶'을 경외하는 자다. 그럼에도 엔초는 비난받는다. 언론은 그가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다'라고 표현한다. 그가 자신의 레이서에게 무척 가혹하기 때문이다. 그는 죽음을 감수하고서라도 승부를 걸라고 말한다. 이는 그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엔초가 이런 태도를 견지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가 말하는 '삶'은 단순히 생명 연장이 아니라, 이름을 남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길게 이어져야 하는 것은 목숨이 아니라, 이름이다. 이 영화의 제목이 '페라리'인 이유다. 엔초가 자주 반복하는 말이 있다. 바로 '역사'. 레이싱 경기에서 대형 사고가 터진 이후, 엔초는 우승한 선수에게 전화해 말한다. "축하 인사를 전하고 싶어. (너의 경주는) 역사에 남을 거야." 아내 라우라와 이혼하라는 권유에도 그는 대답한다. "우리에게는 역사가 있어." 그가 말하는 '역사'란 시간 안에 새겨진 이름이다. 이것은 <페라리>의 마지막이 엔초와 라우라의 대화인 이유를 알게 한다. 이 장면은 얼핏 보아 긴장감이 떨어져 결말 부분으로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이 짧은 대화에는 그들이 지켜 온 가치가 넘실댄다. 라우라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돈을 조건 없이 내어주며 한 가지 부탁을 한다. 자신이 살아있는 한, 그 사생아에게 '페라리'라는 성을 물려주지 말라고. 삶, '페라리'라는 기업, 그리고 그 이름. 이들에게는 이것이 전부다. 영화 <페라리>가 수작인 이유는 오로지 한 가지에서 눈을 떼지 않기 때문이다. 그 집요함이 엔초라는 남자를 알게 한다. 이름을 위해 모든 것을 건 남자. 살기 위해 죽으려는 자. 이런 인간도 있다고 영화는 말한다. 감탄하든, 질색하든. 그를 보며 느낄 감상은 당신의 몫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라우라의 청은 지켜졌다. 그리고 그녀가 떠난 뒤, 마침내 사생아 피에로는 '페라리'라는 성을 물려받는다. 그러나 이것이 라우라의 패배는 아니다. 그녀가 엔초와 일군 그 이름 '페라리'는 이어지고 있으니까. 생은 짧으나 명성은 길고, 이름은 남아 역사가 된다. 여기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살았던 이들이 있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지금 극장가에서 사랑받는 <하얼빈>은 흥미로운 영화다. 내용에 관한 말이 아니다. 이 영화에 숨겨진 모순이 흥미롭다. <하얼빈>은 멋진 이미지를 자랑하지만, 여기에는 정작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있다. 끝내 <하얼빈>을 긍정할 수 없는 이유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아래부터 <하얼빈>에 관한 스포일러가 나오니, 유의해 읽어주길 바란다. <하얼빈>은 장점이 많다. 일단 촬영이 뛰어나다. 초반부터 필름 누아르를 향한 지향을 선언하고 시작한다. 그리고 누아르 특유의 미장센과 조명, 연기 등을 훌륭하게 구현한다. 한국의 근대기를 누아르의 창을 거쳐 볼 수 있다는 점이 신선하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서부극 형식도 마찬가지다. 또 <하얼빈>은 현빈, 이동욱, 박정민 등 젊은 스타 배우를 전격 기용한다. 이는 독립운동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고려하면 새로운 시도다. <영웅>(2022)에서 정성화가 연기한 안중근 의사 역을 현빈이 맡았다는 점도 그렇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가 고작 31살에 의거한 사실을 고려하면, 젊은 배우를 발탁한 점도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영화가 고전 장르에 너무 심취해 있다는 데 있다. 필름 누아르는 색채가 강한 장르다. <하얼빈>은 누아르를 추구하며 그것의 쾌감을 전달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 반대급부로 장면들이 어딘가 본 듯하다는 단점을 떠안게 되었다. 이것은 모든 장르 영화의 장점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만일 <하얼빈>이 누아르를 추종하는 동시에 독창적인 연출이나 문법도 제시했다면 평가는 달랐을 것이다. 장르의 외연을 넓힌 독특한 작품으로 인정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얼빈>은 거기까지 이르지 못하고, 한국의 역사를 누아르 장르 안에서 착실하게 선보이는 선에서 그친다. 영화 후반에 등장하는 '서부극' 형식도 마찬가지다. 공부인(전여빈)이 등장하며 영화는 본격 만주 서부극을 표방한다. 사실 이 부분은 영화의 맥락에서 다소 동떨어져 있고, 분량을 줄여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서부극을 보여주기 위해 넣었다는 인상이 강하다. 이 장면들도 '한국 영화가 서부극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상의 느낌을 주지 못한다. 앞선 누아르 장면들의 한계를 답습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얼빈>은 정작 '독립'에 관한 영화라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이 영화가 의사(義士)의 삶을 소재로 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정신까지 고민했다면, 이미 고안된 장르의 문법을 따라가는 데 만족하지 말고, 어느 지점에선가 자기만의 고유함을 보여주었어야 했다. <하얼빈>은 과연 그런 시도를 했을까. 혹시 특정한 장르를 재현하려는 욕망이 너무 커서 다른 고민을 압도해 버린 건 아닐까. 또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영화 속 김상현(조우진)은 끊임없이 '잊히는 일'을 두려워한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는 일. 이것은 관객을 향한 영화의 당부로 느껴진다. 독립운동가를 잊지 말자는, 그래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당부 말이다. 그런데, 정말로 기억되기 위해서는 이전의 역사를 소환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과거가 생명력을 지닌 채 되살아나기 위해서는 현재와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의 세대도 공감할 만한 정서와 메시지가 거기 있어야 한다. 과연 이 영화에는 그런 점이 있나? <영웅>과 달리 <하얼빈>은 고뇌와 좌절에 시달리는 독립운동가의 모습에 집중한다. 이것은 숙명적 죽음을 맞이하는 누아르의 주인공이나, 서부극 속 고독한 단독자의 모습과 가까워 보인다. 특별히 현시대의 인간상을 반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니까 <하얼빈>은 인물을 설정할 때 역시 현재보다 과거(의 장르물)를 더 의식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물론 이 글이 제기하는 의심이 과도한 부분도 있고,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영화의 고유함도 있을 것이다. 이는 나의 무능 탓이다. 하지만 <하얼빈>이 우리 역사의 한 구절을 누아르와 서부극의 형식으로 소화하겠다는 야심을 밀어붙일 때, 그 기세에 밀려 다른 중요한 질문이 잊힌다는 점이 안타깝다. 장르를 넘어 <하얼빈>만이 보여줄 수 있는 건 무엇인가. 그것을 오늘, 여기 소환한 이유는 무엇인가. 다시 말해 <하얼빈>은 왜, 무엇을 위해 우리를 찾아왔나. 영화의 진정성은 내용과 형식이 일치할 때 생겨난다. <하얼빈> 속에서 의사들은 자신의 토대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건다. 이 내용을 영화로 보여주는 것은 쉽다. 그러나 이 정신을 형식으로 품는 데는 보다 큰 노력이 필요하다. 흔치 않게 근사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하얼빈>에 아쉬움이 남는 이유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영화 <서브스턴스>는 제77회 칸영화제 각본상 등 각종 상을 받으며 주목받았다. 또한 전신 성형 이미지로 유명했던 '데미 무어'를 전면에 앞세우며 젊은 육신에 대한 끝없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표출한다. 그 외설성이나 잔혹함의 수위가 상당히 높은 것으로 회자되고 있다. 여러모로 이슈가 될 수밖에 없는 작품. 그런데 우리는 이런 자극에 휘말려, 정작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에 대해 집중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괜한 우려를 핑계 삼아 화려한 <서브스턴스>가 전하는 내밀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 아래부터 영화의 내용과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다. <서브스턴스>는 몸에 대한 영화다. 한때 아카데미상을 받은 스타였지만, 더 이상 "어리고 섹시하지" 않다는 이유로 TV 에어로빅 쇼 진행자에서 쫓겨난 엘리자베스 스파클(데미 무어)이 주인공이다. 그녀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지독히도 갈망하다가, 신기술로 자신을 닮은 수(마거릿 퀄리)를 탄생시킨다. 하지만 수는 점차 엘리자베스를 착취하며 자신의 삶을 화려하게 즐긴다. <서브스턴스>는 몸을 함부로, 아니 아무렇게나 다룬다. 수가 탄생하기 위해 엘리자베스의 살이 찢기고 골수가 빠져나가는 과정은 꽤나 징그러운데, 영화는 그걸 가감 없이 클로즈업하고 빤히 관찰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몸을 한낱 유기체 덩어리쯤으로 취급한다. 우리의 소중한 육신은 <서브스턴스> 안에서 조작할 수 있고 생성·폐기할 수 있는 재료일 뿐이다. 이 영화의 제목인 'substance(물질을 의미하는 영어)'가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인간의 몸, 그 자체다. 엘리자베스의 척추에서 태어난 수는 그녀의 상처난 등을 성의 없이 바느질한다. 그리고 수는 기절한 엘리자베스를 넣어둘 공간을 만든다. 이때 수가 벽에 못을 박는 조심성 없는 모습은 앞서 엘리자베스의 등을 기우던 모습과 겹친다. 수에게 엘리자베스의 몸은 이 집의 벽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 둘은 모두 그녀에게 윤택함을 제공하는 자원일 따름이다. <서브스턴스>는 노골적이고 외설스러운 영상을 반복한다. 엘리자베스의 주름진 피부, 그리고 수의 건강미 넘치는 몸을 보여줄 때 특히 그렇다. 이것은 관객을 현혹하는 동시에, 이 영화에서 몸이 가진 의미를 제시한다. 그것은 한때 건강했다가 곧 주름지는 살덩이다. 거기에 어떤 가치나 존중은 없다. 더 돈이 되는 몸과 아닌 몸이 있을 따름이다. 그녀들의 육신은 어떠한 존중도 받지 못한 채로 카메라 앞에 발가벗겨진 채 노출되고 평가받는다. 그 노골적인 장면들은 이 세계의 잔인한 룰을 폭로하며, 오늘날 우리 몸이 취급되는 방식을 고발한다. 수의 존재는 다양하게 읽힌다. 나에게서 태어났지만, 더 젊고 아름다운 존재. 내가 원했던 환상을 실현하고, 대신 나의 시간을 앗아가는 생명체. 비록 수처럼 눈앞에 현현하지 않더라도, 내가 만들었으나 차츰 "나를 먹어 치우는" 그 무언가가 바로 수다. 그것은 SNS에서만 존재하는 '온라인 속의 나'일 수도 있고, 우리가 꾸며낸 '사회적인 나'일 수도 있다. 우리가 이 세계의 잔인한 시선을 내면화하여, 자신을 착취한 끝에 탄생시킨 그 무언가는 모두 '수'인 셈이다. 수와 관련해, 영화가 거듭 강조하는 룰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엘리자베스와 수는 한 몸이며, 둘은 시간을 나누어 쓴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다 보면 둘이 '에너지'마저 나누어 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수가 만개할수록 엘리자베스는 피폐해진다. 이것은 우리 각자가 품은 '수'에 대한 풍자다. 그녀가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빨아먹으면서 커질 때, 우리는 결정해야 한다.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 그러니까 인생을 누구에게 쓸 것인지를. 나인가, '수'인가. <서브스턴스>는 빛나는 자리를 두고 나이든 여자와 젊은 여자가 대결한다는 점에서 <이브의 모든 것>의 계보를 잇는다. 다만 이전 영화들이 나와 타인 간의 경쟁을 그렸다면, <서브스턴스>는 나와 나 사이의 싸움에 집중한다. '관리'라는 이름으로 노화를 막는 것마저 능력이 된 지금, 외면의 아름다움을 향한 전쟁은 개인의 내부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개인이 고통을 얼마나 견딜 수 있느냐의 문제로 전환된다. 아름다움을 위한 자기 파괴의 굴레. 그 끝은 무엇이냐고 <서브스턴스>는 묻는다. 영화에 대한 평가를 덧붙이며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비록 지나치게 잔인하고 외설스럽지만 <서브스턴스>의 연출은 이유가 있고, 이 영화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관철한다. 메시지와 연출이 일치하는 영화. 그런 점에서 <서브스턴스>는 가식적이거나 이중적이지 않다. 다만 한 가지, 영화가 놓친 부분이 있다. 몸을 향한 집착과 욕망을 풍자하기 위해, 이 영화는 몸을 한없이 조작하고 망가뜨린다. 그리고 끝까지 간다. 이토록 파괴적인 마지막이 혐오와 맞닿아 있다는 점이 우려스럽다. 인간의 기괴한 욕망 아래 뒤죽박죽 엉망이 된 몸이 등장할 때, 이 장면의 충격은 기형적 신체에 대한 혐오를 전제한다. 선이 없는 채로 날뛰는 풍자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서브스턴스>는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반부에서 꽤 날카로운 풍자를 선보이던 <서브스턴스>가 뒤에서 힘이 빠진 채 속절없이 빛을 잃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최근 한 남자 배우의 혼외자에 대한 뉴스를 계기로, 결혼 없는 출산에 대한 논의가 빠르게 번지고 있다.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 사이에는 이전과 다른 분위기가 감지된다. 이제 연애, 성, 결혼, 그리고 출산을 어느 정도 독립적인 변수로 대하는 이들이 많아진 것 같다. 연애가 곧잘 결혼과 출산으로 이어지던 예전과 달리, 지금 우리는 보다 다양한 선택지를 손에 쥐게 되었다. 여러 선택지가 주어질 때, 사람은 찬찬히 생각하기 시작한다. 결혼이란 무엇이고, 사랑이란 무엇일까? 그래서인가. 이들을 각각 해체한 뒤, 그 본질을 탐구하는 콘텐츠가 늘었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시리즈 <트렁크>도 그런 작품이다. <트렁크>에는 계약 결혼 서비스를 제공하는 조직, 'NM(New Marriage)'이 등장한다. 이들은 의뢰인에게 기간제 배우자를 보내준다. 이 도발적인 설정은 동명의 원작 소설에 기반했다. 그러나 원작이 '결혼 제도'의 의미를 되묻는다면, 이 시리즈는 계약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에 천착한다. 거기에는 우리의 고민과 욕망의 한 단면이 비춰 보인다. 아래부터 <트렁크>와 <나의 해방일지>에 대한 스포일러가 나오니, 유의해 읽어주길 바란다. 정원(공유)은 전처 서연(정윤하)에게 버림받았지만, 여전히 그녀를 놓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서연이 제안한다. '1년 동안 다른 여자와 결혼 생활을 해. 그 시간을 무사히 견디면 너에게 돌아갈게.' 그러니까 전처가 전남편에게 계약 결혼을 권하는 상황.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녀를 붙잡고 싶은 정원은 제안을 받아들인다. 곧 기간제 와이프(?) 인지(서현진)가 나타난다. 하지만 정원은 그녀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지 역시 아내 역을 충실히 해내지만, 자신의 과거 얘기는 하지 않는다. 얼핏 보아 여느 부부와 다름없는 그들은 함께 공유하는 역사가 없다. 껍데기만 말끔한 결혼. 또 하나, 그들 사이에는 '성(性)'이 결여돼 있다. 정원은 인지에게, 당신이 정말 아내라면 함께 잘 수도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 하지만 이건 맘에 들지 않는 상대를 향한 도발일 따름이다. (후반부를 위한 복선이기도 하다) 성생활을 즐기는 서연과 달리, 정원과 인지 사이는 육체적이지 않다. (후반부에는 양상이 달라지지만, 이 글에서는 초반부에 집중하겠다) 관계의 물꼬를 트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정원이 위험한 상황에서, 인지는 몸을 던져 그를 보호한다. 기대하지 않은 희생. 정원은 미안함, 고마움, 그리고 부채감을 함께 느낀다. 우연히 생겨난 빚으로 관계는 활력을 얻기 시작한다. 인지의 행동은 그녀가 자주 언급하는 '매뉴얼'에 가깝다. 남편을 대하는 아내의 매뉴얼. 남편의 입가를 휴지로 닦아주는 일. 악몽에 시달릴 때 도닥이는 일. 그가 싫어하는 것을 함께 싫어하고, 공격당할 때 편들어주는 일. 중요한 날 넥타이를 만져주는 일. 그가 찾을 때 옆에 있는 일.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마치 탱고를 추듯 자연스럽고 리드미컬하게 수행하는 일. 그런데 이 단순하고 건조한 일련의 행동이 변화를 불러온다. 정원은 처음으로 수면제 없이 깊은 잠이 든다. 한없이 망가진 그가 회복하는 신호탄일까. 둘은 서서히 친해지고 가까워진다. 의무에서 시작된 일이지만, 한 인간을 보살피고 아끼는 그 손길은 기어이 삶을 바꾸어 놓는다. 이 결혼의 목적지는 아마도 탈출일 것이다. 정원을 지배하려는 서연으로부터, 그리고 인지를 옭아매는 스토커로부터. "습관처럼, 분리불안처럼" 이어지는 삶으로부터 독립하는 것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드라마는 <나의 해방일지>를 떠올리게 한다. 해방을 꿈꾼다는 점에서 그렇고, 인간이 인간을 챙기는 담백한 애정의 마법을 믿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의 해방일지>에서도 구 씨(손석구)와 미정(김지원)은 서로의 과거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서로를 '추앙'하겠다는 결심을 끝까지 우직하게 지켜낸다. 만남의 손익을 따지거나, 성적 충동을 앞세우지도 않는다. 그저 서로를 열렬히 응원하며, 그 힘으로 각자의 구원을 향해 간다는 점에서 두 드라마는 닮았다. 앞서 언급했듯 성, 결혼, 사랑이 따로 다뤄지는 요즘이다. 또 성에 대한 의식도 개방돼 꽤 높은 수위의 콘텐츠도 자주 보인다. 이런 때에 가족도, 연인도 아닌 이들이 만나 애정 행위도 절제한 채로, 오로지 '관계'에 침전하는 작품이 출몰하는 것은 흥미롭다. 우리의 어떤 욕망이 이런 작품을 불러오는 것일까. <트렁크> 속 인지와 정원은, 남들에게 관계를 인정받거나(결혼) 서로에게 사랑을 확인받는(성관계) 일에 관심이 없다. 그저 서로를 돌볼 뿐. 그런데 이것이 사람을 숨 쉬게 한다. 별거 아닌 물이 생명을 살리는 것처럼. 여기에는 거창한 제도나 어지러운 욕정이 아니라, 그저 '단출하고 애정 어린 챙김'을 갈망하는 우리의 내밀한 욕망이 들어 있다. 어쩌면 <트렁크>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슬며시 비춰 보이기 위해 우릴 찾아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화려하게 빛나는 여러 선택지 사이에서 말이다. 출처 : 넷플릭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장군에서 노예로 전락한 남자. 죽은 가족을 위해 복수를 기다리는 비애의 검투사. 한때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그 영화, <글래디에이터>가 돌아왔다. 무려 25년 만에. 뛰어난 이야기꾼 리들리 스콧 감독도 그대로다. 전편이 '러셀 크로우'라는 걸출한 스타를 배출했다면, 이번 편은 떠오르는 청춘스타 '폴 메스칼'과 손을 잡았다.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 조합. 뚜껑을 열어보니 <글래디에이터 Ⅱ>는 전편과 비슷한 듯 다르다. 1편의 세계관을 잇기 때문에 신선함은 떨어지지만, 보다 깊고 다양한 이야기를 전한다. 이 글에서는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1편과 2편이 결정적으로 무엇이 다른지, 이를 통해 리들리 스콧이 보여주려는 것은 무엇인지 말해 보려 한다. 아래부터 <글래디에이터> 1편과 2편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나온다. <글래디에이터 Ⅱ>는 전편과 같은 지점에서 시작한다. 긴 전쟁으로 지친 로마군. 주변국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지만, 너무 많은 생명이 희생당했다. 다만 두 영화는 이 상황을 바라보는 시점이 좀 다르다. 1편은 로마 장군 막시무스(러셀 크로우)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러나 2편의 주인공 루시우스(폴 메스칼)는 로마에 의해 점령당한 누마디아 출신이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지역에서 노예로 붙잡혀 온 이들도 종종 등장한다. 그러니까 로마 내부에 머물렀던 1편과 달리, 2편은 로마의 안팎을 두루 오가며 여러 사람의 시점에서 이 거대한 제국을 관찰한다. 그래서 <글래디에이터 Ⅱ>가 바라보는 로마는 전편에 비해 더 입체적이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지만 어느 곳보다 병들었다. 넘쳐나는 빈민을 구제하지 못한 채, 전쟁과 폭력이 가져다주는 흥분과 자극에 취한 상태. 한때 '힘과 명예'를 갖고자 했던 로마인의 이상은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글래디에이터 Ⅱ>는 표면적으로 루시우스의 복수극을 따라가지만, 그 이면에서 로마라는 무너진 제국을 뜯어본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로마'에 대한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 속 상황이 '지금 미국'과 상당 부분 일치하기 때문이다. 리들리 스콧은 고대 제국에 대해 말하며, 실은 현재 미국에 관해 이야기하는 중이다. 세계의 패권을 거머쥔 나라. 하지만 내부의 통증을 치료하지 못한 채, 폭력과 자극에 취해 비틀거리는 나라. 리들리 스콧은 지금의 미국이 위태롭다고 느끼는 것 같다. 영화에서 이런 혼란을 해결하는 이는 루시우스다. 이 캐릭터를 뜯어보면 흥미롭다. 그는 로마인의 피를 물려받았지만, 누미디아 인의 정신을 지녔다. 로마에 뿌리를 두고 누미디아에서 자랐다. 이를테면 이중국적자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제시하는 구원자는, 로마(혹은 미국)의 DNA를 가졌지만 주변국의 시선까지 장착한 이다. 제국에 갇혀 있지 않은 개방된 시선을 갖춘 인물인 것이다. 구원자가 있으면 파괴자도 있기 마련. 마크리누스(덴젤 워싱턴)는 로마를 파멸하려는 자다. 그는 말한다. "노예는 새로운 노예를 취하려고 한다"라고. 사실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는 진정한 길은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과 노예라는 폭력적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노예 신분을 벗어나더라도 이 폭력의 구조에 물든 이는, 또 다른 노예를 취함으로써 자신이 노예가 아니라 주인임을 끊임없이 증명하려 한다. 그러니까 어떤 위치에 있건 '지배-피지배' 구조를 벗어나지 못한 채로 반복하는 이가 바로 노예인 것이다. 리들리 스콧은 이런 설정을 통해, 미국을 망가뜨리는 이가 누군지를 지목한다. 그것은 타인을 지배하며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들이다. 아마도 마크리누스가 말하는 '노예'일 것이다. 한편 마크리누스와 정확히 대조적인 인물도 등장한다. 그는 검투사를 치료해 주는 의사(라고 불리는 자)다. 그는 한때 검투사였으나, 자유인이 된 뒤에도 로마에 남아 가정을 꾸리고, 죽을 위험에 빠진 이들을 치료하며 살아간다. 그는 자신을 옭아맸던 폭력의 구조에서 완전히 해방된 인물이다. 결과적으로 <글래디에이터>의 1편과 2편은 바라보는 지점이 다르다. 비록 스토리라인이 비슷하고 정서가 비슷하다 해도 말이다. 1편은 개인의 복수에 초점을 맞춘다. 막시무스는 복수를 마치고 마침내 그토록 원했던 휴식을 맞이한다. 그러나 2편은 국가의 재건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다. 영화는 루시우스의 개인적 복수에서 시작해, 로마라는 국가의 재건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루시우스는 이 과정을 진행하기 위한 땔감이다. 그래서 복수를 마친 막시무스가 사라지는 것과 달리, 국가 재건을 시작하는 루시우스는 왕좌로 복귀한다. "속삭이기만 해도 흩어질 것처럼 연약한 꿈이지." 이상적인 로마 제국을 꿈꾸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리처드 해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시민을 위한 도시. 가난한 자들의 안식처. 황제의 속삭임은 조심스럽다. 그런데 이건 먼 옛날 잠시 머물다 사라진 바람이 아니고, 리들리 스콧이 지금 꾸는 꿈이다. 그가 25년 만에 돌아와야 했던 이유도, 다시 한번 이 말을 전하기 위함이지 않을까. 긴 시간 끝에 로마에 돌아온 루시우스처럼. 리들리 스콧은 86세, 곧 90을 바라보는 나이다. 하지만 이상향을 향한 그의 눈빛은 노쇠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