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대신 감각으로 쓰는 평론가. 영화와 문화에 대해 씁니다. 2016년 '씨네21'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등단.
지금으로부터 26년 전에 시작된 시리즈가 다시 우리를 찾아왔다. 그러니까 아이일 때 만난 이 시리즈는 이제 사회인이 되어 돌아온 셈이다. 무슨 소리냐고? <아바타: 불과 재>(이하 '아바타 3') 이야기다. 방대한 이야기, 드넓고 황홀한 세계관을 그리는 데 정평이 난 제임스 카메론. 그가 야심 차게 준비한 이번 작품의 러닝타임은 무려 200분(정확히는 197분). 3시간 하고도 10분이 넘는 시간이다. 하지만 <아바타 3>에 대한 평가가 썩 좋지만은 않다. 그 이유는 다양하지만, 주로 산만한 전개와 반복되는 이야기 구조가 지적된다. 반면, 비주얼은 압도적이라는 평가다. 모두 일리 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기념비적인 텐트폴 영화가 어째서 스토리의 차원에서 자꾸만 지적받는지에 관해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글을 썼다. 여러 성취에도 불구하고, 대체 <아바타 3>의 스토리는 어떠한 측면에서 부족한 것일까? 아래부터 영화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다. <아바타> 시리즈는 처음부터 꾸준하게 '다양성'의 가치를 말해 왔다. 이 영화는 결국 공생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제이크 설리'는 나비족 '네이티리'와 만나 사랑에 빠지고 판도라 전체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인다. <아바타 3> 역시 같은 태도를 유지한다. 최근 미국의 갈등을 의식하듯 "피부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기도 한다. 다양성에 대한 포용은 신비한 생명체 '톨쿤'으로 확산하며 종을 뛰어넘는다. 모든 생명의 가치를 끌어안는 것이 <아바타 3>의 방향성이다. 하지만 영화의 태도를 의심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아바타 3>에서 제이크와 그의 부족은 크고 작은 전투에서 그들이 타고 다니는 동물을 잃는다. 말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이 동물들은 적과 싸우는 과정에서 희생당한다. 그런데 영화는 이런 순간을 그리는 데 별다른 주저함이 없다. 인간을 넘어 톨쿤에게까지 번진 연민은 어째서인지 이름 없는 동물에게 작동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바타 3>는 사실 장르적으로 '전쟁 영화'에 가깝다. 영화는 "싸우자" 혹은 "죽여라"라는 말을 노골적으로 내뱉으며, 적을 물리치는 과정의 쾌감을 관객에게 부지런히 전달한다. 다른 생각, 다른 종족과의 화합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만일 이 영화가 전쟁 영화를 표방한다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다양성과 포용을 강조하면서, 적들을 죽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전쟁 영화는 얼마나 모순적인가. 또한 <아바타 3>는 악역을 맡은 망콴족을 그리면서 고전영화에 등장하는 '못된 인디언'의 스테레오타입을 반복한다. <아바타> 시리즈는 1편부터 오리엔탈리즘을 담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덜 발달한 문명의 나비족을 신비화하는 방식이 그러하다. 그러니까 다양성을 강조하면서도, 이 영화는 사실 제3 세계를 대상화하는 시각을 버리지 못한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든다. 그러니 묻게 된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아바타 3>의 태도는 얼마나 진정성이 있냐고. 혹시 영화 안에서 전쟁을 펼치기 위하여 다양성을 끌어오는 것은 아닌가? 여전히 백인 남성과 나비족 여성, 혹은 판도라 행성의 이름 없는 생명들이 서로 다르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또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영화의 '이야기 전개 방식'이다. 카메론은 <아바타> 1편부터 '침략과 저항'의 스토리를 반복하고 있다. 등장하는 부족이 바뀌고, 캐릭터가 많아져도 결국 하는 이야기는 이것으로 수렴된다. <아바타> 1편은 '공격과 방어'를 줄기로 하면서도 영화에 여러 레이어를 입혔다. 판도라 행성에 처음 입장한 순간의 생경함과 경외, 나비족만의 질서를 학습하는 과정의 즐거움, '토루크 막토'를 통해 만들어내는 반전까지. 반면 2편과 3편은 영화 속 공간을 확장하고 종족을 늘리지만, 그 안에서 관객이 경험하게 되는 스토리는 오히려 단편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긴 러닝타임은 의미가 없다. 관객은 영화의 시간이 아니라 전개를 따라가기 마련이다. 이미 익숙한 전개 속에서 시간이 길어질 때 관객은 오히려 지루해한다. <아바타 3>의 실수는 세계관의 확장을 서사가 아니라 캐릭터의 측면에서 주력했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 다루지 않았지만, <아바타 3>는 여러 성취를 거두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단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화적 쾌감이 적지 않고, 각종 시각효과와 기술로 만들어낸 세계는 때때로 경이롭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휘황찬란한 스크린 앞에서 나는 영화의 근간은 서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제는 AI까지 가세하며 상상하는 온갖 것을 시각화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 세대 가장 화려한 비주얼을 선사하는 제임스 카메론의 작품 앞에서 스토리를 고심하게 되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반짝이는 판도라 행성에서 관객은 묻고 있다. 어떤 광경을 보여줄 것인지가 아니라,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냐고.
최근 전 세계 콘텐츠에서 한 가지 경향이 두드러진다. 바로 '여성과 여성의 관계'가 중요해졌다는 것.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올해 인기를 끌었던 <은중과 상연>이 대표적인데, 우정, 질투, 동정 따위로 정의할 수 없는 두 여자 사이의 복잡함을 탐구하며 반향을 일으켰다. 또 여성 버디물 <하얀 차를 탄 여자>나, 다음 달 개봉하는 <프로젝트 Y> 역시 여성-여성 관계에 집중한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물러나 있던, 혹은 이성 관계의 한 축에 머물렀던 그녀들은 이제 서로를 마주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넷플릭스 시리즈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자백의 대가>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서사도 치밀하고 배우들의 연기도 무척 훌륭하다. 그러나 <자백의 대가>를 이끄는 주요한 동력은 두 여성 사이를 오가는, 그 터질 듯이 팽팽한 감정이다. 그 감정을 우리가 익히 아는 단어로 정리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그녀들의 마음에 찬찬히 다가가 그 형태와 색채에 대해 말해보기 위하여. 대체 모은(김고은)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안윤수(전도연)가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아래부터는 <자백의 대가>의 결말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유의해서 읽어주기를 바란다. 이 시리즈가 본격적으로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모은이 윤수에게 어떤 제안을 하는 때부터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윤수를 대신해서 그녀의 혐의를 대신 자백해 주겠다는 제안. 하지만 대가가 있다. 보석으로 풀려나면 자기를 대신해 누구를 죽여달라는 것이다. 스토리의 측면에서 볼 때, 모은이 제안을 한 이유는 가족의 복수를 위해서다. 그러나 그 제안의 대상이 하필이면 유약하고 투명한 윤수라는 점. 개미 한 마리 죽이지 못할 것 같은 그녀라는 점은 의문스럽다. 차라리 일 잘하는 냉혈한과 손잡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물론 극의 진행을 위한 장치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나는 이 불투명한 지점 안을 헤매며 이야기를 이어갈 생각이다. 그러니까, 모은은 왜 하필 제안의 상대로 윤수를 택한 것일까. 모은이 윤수를 설득하는 과정은 가스라이팅의 교보재로 써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모은은 윤수의 모성애를 자극해 제안을 받아들이게 하고, 미리 준비한 시나리오를 착착 진행한다. 예상을 뛰어넘는 방법으로 일을 성공시키는 그녀의 모습은 신뢰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자아낸다. 모은은 무슨 일이든 해낼 것이라는 신뢰. 그러니 그녀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두려움. 모은은 또 윤수를 고립시킨 뒤(이렇게 비윤리적인 계획을 다른 이와 공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녀를 더 효과적으로 압박한다. 이것은 모은이 윤수를 지배하는 과정과 겹친다. 물론 모은은 자기 목표를 위해 이런 일들을 한다. 그러나 목표물을 지우고 두 여자의 관계만을 놓고 보면 어떤가? 모은은 은밀하게 지배를 시도하고, 윤수가 자기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이것이 모은의 또 다른 목표라고 상상해 보면 어떨까. 그렇다면 그 상대가 유약한 윤수라는 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녀의 유약함은 범죄를 수행하기에 불리하지만, (모은이 윤수를) 지배하려 들 때에 유리하게 작동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결말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 윤수가 살인을 거부하며 모은의 작업은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지배의 측면에서 보면 모은은 이미 목표를 달성했다. 혹여나 오해는 말아주었으면 한다. 나는 가스라이팅을 통해서라도 사람을 쟁취하면 그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현실에서 그건 죄일 뿐이다). 또 범죄를 애틋하게 낭만화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이 작품 안에서, 두 여자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과정을 통해 모은이 얻은 것은 무엇일까. 그녀는 윤수를 얻었다. 가족 모두 사라져 기댈 곳 하나 없던 그녀는 빛 한 줄기 없는 어두운 바닥에서 윤수와 만나는 데 성공한다. 이것은 모은이 윤수를 자기 계획 안으로 초대함으로써 가능했다. 이때 두 여자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무엇이라 불러도 상관없다. 그 감정에 레이블링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까. 다만 각자의 지옥에서 살던 두 여자가 모은의 제안으로 우연히 만나 손을 잡았다는 것, 그것만이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윤수는 살인하지 않음으로써 모은을 배신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는 절반만 맞는 말이다. 그녀는 모은의 유일한 파트너로서 그녀와 마지막까지 함께 한다. 무자비한 인물이라도 곁을 내주는 그녀의 대책 없이 투명하고 무방비한 성정. 그 덕분인가. 윤수는 아무도 해줄 수 없는 것을 모은에게 해준다. 그것은 내내 혼자였던 모은과 동행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모은은 윤수를 위해 희생하고 그녀의 품에서 죽는다. 남편을 죽인 비정한 아내. 사이코패스 살인마. 세상 모든 이들이 기피하던, 그래서 지독히도 외로웠던 두 여자는 가장 비극적인 방식으로 '함께'인 순간을 완성한다. 실은 이 순간을 위해 그다지도 많은 계획과 복잡한 실행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헤어질 결심>의 서래(탕웨이)는 말했다. 당신과 만나려면 살인 사건 정도는 일어나야 하죠. <자백의 대가>의 치밀한 전개는 우리로 하여금 서사에 집중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동안에 놓치게 되는 다른 이야기가 있다. 두 여자의 감정을 중심에 놓고 <자백의 대가>를 다시 보면 어떨까. 그녀들의 눈길과 마주침, 맞잡은 손에 관하여. 어쩌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질지도 모르겠다. 그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독자들의 몫으로 넘기고 이만 말을 줄여야겠다. 일렁이는 마음의 파도에 접속할 시간이다.
디즈니가 오랜만에 명작을 들고 나타났다. "흔치 않게 성공적인 후속작"이라 평가받는 <주토피아 2>가 그 주인공이다. 전작인 <주토피아>(2016)가 개봉한 지 약 10년 만에 다시 우리를 찾았다. 전작은 개성 있는 인물을 토끼, 여우, 나무늘보 등 동물로 표현하며 '주토피아'라는 세계관을 완성해 세대를 가로지르는 사랑을 받았다. 한편, 지난주 개봉한 <주토피아 2>는 개봉 4일 만에 누적관객수 140만 명을 돌파, 전작의 아성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지금처럼 얼어붙은 극장가에서 흔치 않은 일이다. <주토피아 2>가 이렇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계관을 성공적으로 확장했고, 음악도 훌륭하며, 머리에 콕콕 박히는 대사도 맛있다. 그런데 유독 감탄하게 되는 것은 풍성한 서사의 다발을 한 줄기로 쌓아가며, 지금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를 정면으로 다루는 방식이다. 이야기꾼으로서 디즈니의 역량은 정점에 올랐다. 서사는 이렇게 짜는 것이라고 레슨 하는 것만 같은 작품. 그래서 이 영화가 '무엇을, 어떠한 방식으로 이야기하는지'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아래부터 <주토피아 2>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다. 경찰 파트너가 된 '주디'와 '닉'. 이들은 파트너 워크숍에 참가한다. 여기에는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아웅다웅하는 동물들이 한가득이다. 쥐와 짝꿍이 된 코끼리는 파트너를 볼 때마다 기겁한다. 자꾸만 털 속의 이를 골라 먹는 파트너를 보며 소름 끼쳐하는 동물도 있다. 영화는 이 장면을 통해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그건 "불편할 정도로 나와 다른 이들과 어떻게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까"에 관한 고민이다. 맞다. <주토피아 2>는 다양성에 관한 이야기다. 주디와 닉은 신비로운 책을 훔친 푸른 뱀, '게리'를 추적한다. 주토피아에서 뱀을 비롯한 파충류는 동물들이 꺼리는 종족이다. 포유류와 생김새도, 습성도 다른 이들은 주토피아의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때 파충류는 우리 사회에서 차별받는 소수를 상징한다. 게리는 뱀이라는 이유로 곧잘 누명을 쓰며, 동물들은 그 모함을 쉽게 믿어버린다. 여기에는 음험한 모사꾼, 밀턴 링슬리의 계략이 한몫을 한다. 밀턴은 '프레임'의 힘을 안다. 그래서 파충류를 향한 혐오를 조장하며, 다시 그 혐오를 통해 자기에게 유리한 프레임을 짠다(이 영화에는 '누명을 씌우다'라는 의미로 'frame'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언론은 진실과 다른 뉴스를 전파하고, 시청자는 이를 비판 없이 취한다. <주토피아 2>는 가짜뉴스와 편파적 보도로 휘청이는 지금 사회를 풍자한다. 영화가 시종 날카롭게 비판하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툰드라 기후 장벽'이다. 기후를 핑계로 세워진 단단한 장벽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방점은 기후가 아니라 장벽에 있는 것.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툰드라 기후 장벽 동상을 실수인 척 박살 내 버린다. 주토피아 시는 이 장벽을 확장하려 한다. 이는 점점 더 번져가는 분리와 차별을 드러낸다. 링슬리는 이 장벽을 통해 당초 주토피아의 토대를 건설한 게리 집안을 쫓아내고, 더 넓은 영역을 차지하려 한다. <주토피아 2>는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이민자 차별과 디아스포라의 비극을 전면에 내세운다. 시대를 외면하지 않는 대담함은 박수받을 만하다. 그러니까 <주토피아 2>는 자꾸만 견고해지는 장벽과, 그것을 관통하는 용기 있는 자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이 작품의 주인공은 게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뱀인 게리는 걷는 대신 부끄럽게 미끄러지며 이런저런 경계를 투과한다. 그래서 게리의 부드러운 미끄러짐은 <주토피아 2>를 상징하는 움직임이다. 닉과 주디는 책을 훔쳐 달아난 게리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 과정은 서로 다른 동물들이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는 여정이다. 닉은 자주 강조한다. "여우는 단독 생활 동물이야." 주디는 말한다. "절대로 토끼의 귀를 잡아당기지 마." 하지만 투닥거리던 이들은 서로를 위해 조금씩 희생하며 결국 상대를 이해하게 된다. 자기 '종족'의 특성을 강조했던 뾰족한 말들은 마지막에 이르러, '나'의 못남과 진심을 드러내는 뜨거운 고백으로 바뀐다. 주디는 중얼거린다. "우린 너무 달라." 그렇다면 이 다름을 극복할 방법은 무엇일까? 영화가 제시하는 것은 하나, 바로 포옹이다. 이 영화는 허그(hug)의 이미지를 반복한다. 감옥에 갇힌 닉을 구해주는 비버 '니블스'는 그를 꼭 안아준다. 그리고 닉은 주디에게 이 행동을 반복한다. 포옹은 너와 나 사이의 경계를 지우는 움직임이다. 네가 누구든, 어떠한 종이든 인정하고 안아주는 태도.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비밀이 아닐까요? <주토피아 2>는 묻는다. 닉과 주디, 그리고 여러 동물의 용기로 결국 게리의 진실은 밝혀지고 장벽은 허물어진다. 축축하고 꿉꿉한 곳에 사는, 그래서 우리(포유류)와 너무 다른, 마치 징그러운 벌레만 먹고살 것 같은 파충류는 이웃이 된다. 이 여정을 통해 닉과 주디는 진정한 파트너로 거듭난다. 결국 <주토피아 2>는 '다른 이들과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치열하게 고민하는 영화이며, "우린 너무 달라"라는 중얼거림을 극복하는 무수한 포옹에 관한 이야기다. 이 영화의 포스터에서 게리는 동료들을 꼭 끌어안아 마치 꽃다발처럼 보이게 한다. 다름이 곧잘 혐오와 폭력으로 이어지는 시대. 우리는 서로를 증오하는 대신 한 다발의 꽃이 될 수 있을까. 깡충깡충 뛰는 주디, 새침하게 걷는 닉,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게리. 나아가는 방식도 제각각인 이들을 따라 여행하다 보면 어느새 가능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주토피아 3>은 10년보다 이른 시간 안에 우리를 다시 찾아왔으면 좋겠다.
홀로 종말을 맞는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이렇게나 화창한 날에. 모두가 행복해 보이는 때에. 불안할까, 외로울까, 혹은 담담할까. 곧 종말이 닥친다고 생각해 과격한 행동에 나서는 한 남자. 그에 관한 영화 <부고니아>는 생각보다 보편적인 감정을 다루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최근 개봉한 <부고니아>는 제작 단계에서부터 여러 겹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먼저 장준환 감독이 2003년 연출한 <지구를 지켜라!>를 리메이크했다. 당시 상상을 벗어나는 전개와 독특한 미학으로 주목받은 장준환은 충무로의 천재 신예로 불리다가 이후 <화이 : 괴물을 삼킨 아이>, <1987> 등을 연출했다. 한편 <부고니아>의 감독인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더 랍스터>, <킬링 디어>로 칸영화제에서 수상하다가 <가여운 것들>로 2023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으며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개성 강한 두 아티스트의 만남이라니, 호기심을 일으키기 충분한 이벤트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부고니아>는 <지구를 지켜라!>의 얼개를 따르지만 캐릭터와 스토리, 분위기까지 많은 점이 상이해서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보아도 좋을 정도다. <지구를 지켜라!>가 광기 어렸지만 어딘가 귀엽고 키치하다면, <부고니아>에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특유의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데, 서늘하고 긴장감이 팽팽하며 여기저기 고장 나서 삐걱대는 이상한 세계를 말한다. 또한 노동, 생태주의 등의 테마도 엿보인다. 하지만 오늘은 <부고니아>에서 특히 돋보이는 한 가지 정서에 대해 말해보려고 한다. 이 정서는 지금의 우리를 설명하는데 매우 유효해서, <부고니아>가 원작으로부터 22년이 지난 지금 우리와 새로이 접속하는 통로가 된다. 아래부터 영화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나오니 유의해 주기를 바란다. <부고니아>는 일종의 진실게임이다. 테디(제시 플레먼스)와 미셸(엠마 스톤)이 벌이는 진실게임. 테디는 그녀가 지구를 끝장내러 온 외계인이라고 주장하지만 미셸은 황당할 따름이다. 테디는 사촌 도니(에이단 델비스)를 제외하고 누구도 그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미셸과 홀로 사투를 벌이는 그는 고독한 단독자다. 시간이 흐르며 테디의 숨겨진 사연들이 밝혀진다. 미셸이 이끄는 기업 때문에 그의 가정은 해체되었다. 그는 이 모두가 외계인의 음모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얼핏 보아 그가 겪은 일들과 그가 내린 결론 사이에 큰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다만 그의 과거와 현재를 꾸준히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종말'이다. 테디는 곧 외계인이 지구를 파괴할 것이라고 여긴다. 비웃어도 상관없다. 그에게 이건 매우 시급한 지구적 문제다. 한편 테디는 그의 전부였던 엄마와 가족을 차례로 떠나보낸 경험이 있다. 단란했던 그의 가정은 종말을 맞았다. 그러니까 테디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가족의 안팎에서 시종 종말의 위험에 처해있다. 테디의 세계는 하나둘 무너지고 있으며 그는 완전한 끝을 막기 위해 버둥댄다. 러닝타임 내내 영화를 덮고 있는 것은 이 같은 '종말에 대한 두려움'이다. 도무지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두려움. 그런 불안, 좌절, 절망. 게다가 테디를 더 괴롭히는 것은 이걸 아는 자가 테디뿐이라는 점이다. 사촌 도니조차도 이 일의 중요성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에게는 시간도, 아군도 없다. 그래서 테디는 미친 것처럼 보일 위험도 감수한 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에. <부고니아>는 이토록 고독한 괴로움에 관한 영화다. 세상이 끝난 것 같이 힘든 날, 온 세상이 너무도 평온하여 황망한 감정을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 보았을 것이다. 그것은 나 홀로 맞는 종말이다. 이것은 반드시 사적인 경험에 국한되지 않는다. <돈 룩 업>이 보여줬듯이 세상이 위험하다고 아무리 외쳐도, 이 외침은 타인에게 쉽사리 닿지 않는다. 작든 크든, 이해받든 이해받지 못하든. 우리는 수시로 종말을 경험하며 세계의 일부를 조금씩 잃어버린다. 그런 마음을 함부로 이해한다고 말한다면 오만이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점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혼자만의 종말로 괴로워하는 일을 혼자 겪지는 않으리라는 점. <부고니아>는 이런 메시지를 의도한 것일까? 글쎄,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느새 틈입하여 영화를 온통 물들인 그 정서가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와의 접촉에 성공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올 하반기 화제작인 <프랑켄슈타인>과 <세계의 주인>. 이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관객의 이목을 끌고 있다. 먼저 <프랑켄슈타인>은 기예르모 델 토로의 신작이다. 그는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등에서 기묘하고 신비로운 존재, '크리처(괴생명체)'를 중심으로 환상적인 세계를 보여주었다. 크리처는 얼핏 보아 이질적이며 두려움을 안기지만, 그것의 진심을 꿰뚫어 본 인간은 교감에 성공한다. 두 세계의 만남. 우리는 낯선 존재와 마음으로 접촉할 수 있음을 기예르모는 강변하여 왔다. 한편, 한국영화 <세계의 주인> 역시 꾸준히 호평받아 온 윤가은 감독의 신작이다. 그녀는 <우리들>과 <우리집>에서 섬세하고도 치열한 아이들의 세계를 포착한다. 그녀의 영화에서 아이들은 조금 미숙하지만, 그만큼 투명하고 뜨겁게 마음을 내보인다. 두 편의 영화는 모두 자기 색깔이 뚜렷하며, 탄탄한 팬층을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결이 다른 둘을 하나로 묶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이 두 편을 관통하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 그것이 이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우리를 찾아온 두 편의 영화가 동시에 바라보는 곳을 찾아가려 한다. 아래부터 <프랑켄슈타인>과 <세계의 주인>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다. <프랑켄슈타인>에서 빅터(오스카 아이작)는 슬프고도 오만한 의사다. 그는 어릴 때 어머니를 잃은 후 죽음을 극복하겠다고 다짐한다. 마치 블록을 조립하듯, 신체를 조각조각 이어 붙이면 인간을 탄생시킬 수 있다고 믿는 빅터. 그는 과학과 기술만능주의에 빠진 현대사회를 은유한다. 빅터는 전쟁터에서 죽은 시체를 이용해 생명을 탄생시키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는 자기 작품을 혐오한다. 홀로 남겨진 크리처(제이콥 엘로디, '프랑켄슈타인'으로 알려졌지만 이 영화에서 그의 이름은 따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이전의 기록을 살펴보며 자기 탄생에 얽힌 비밀을 알게 된다. 그는 시쳇더미에서 태어난 생명. 크리처는 말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저 오점일 뿐. 하지만 그에게 삶의 의미를 찾아주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또 다른 인간이다. 눈먼 노인(데이비드 브래들리)은 그를 '친구'라 부르고, 엘리자베스(미아 고스)는 그와 손을 맞댄다. 부디 용서해 달라는 빅터의 마지막 유언. 그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그의 과오에 비해 사죄는 너무 약소하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처가 만난 모든 이들은 그에게 생의 의미를 조금씩 일깨워 준다. 크리처는 사실 우리 모두에 대한 비유다. 인간은 별 의미 없이 세상에 나와 시종 방황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삶의 이유를 스스로 찾아야 하며, 찾을 수 있다는 것. 그러다 끝내 실패하더라도 괜찮다는 것. 그 자체로 아름답기에(영화에서 크리처의 움직임은 괴이하지만 아름답다). 그것이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닐까. <세계의 주인>은 쪽지에 관한 영화다. 주인(서수빈)이 받는 성가신, 때론 폭력적인 쪽지. 동시에 그녀의 동생 해인(이재희)이 즐겨하는 놀이가 마술, 그중에서도 종이 뭉치를 사라지게 만드는 마술이라는 점은 공교롭다. 주인이 학교에서 쪽지를 받으며 과거의 상처를 떠올린다면, 해인은 자기 방에서 마술로 종이를 없애려 하지만 한다(하지만 자꾸 실패한다). 이때 남매의 가슴 한편에 남겨진 어두운 기억은 한 뭉치의 종이로 형상화된다. 그렇기에 영하 후반부에 주인이 손에 들고 있는 쓰레기 뭉치는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주인이 그동안 꾹꾹 눌러 온 상처의 더미를 나타내는 것 같다. 밝고 장난기 많은 주인에게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감정이 남아있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봉사모임 사람들은 한데 모여 쓰레기장 같은 집을 부지런히 청소한다. 또 세차장 신을 포함해 이 영화에는 유독 '청소' 장면이 자주 나온다. <세계의 주인>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누군가 아무렇지 않게 내게 던지는 쓰레기들. 방심하면 자꾸만 쌓이는 마음의 짐. 그것을 마술처럼 없앨 수는 없지만, 깨끗이 치울 수는 있다고. 그걸 함께해 줄 이들이 이렇게나 많다고. 그러니 홀로 힘겹게 감추지 말고, 여기 꺼내 놓으라고. <세계의 주인>은 주인이 맘의 멍울을 세계에 드러내는 과정을 응원하는 영화다. 나는 멋진 모습만 보이고 싶고, 아픈 곳은 감추고 싶다. 나는 부러움을 받고 싶고 동정은 원하지 않는다.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의 안으로, 안으로 자꾸만 숨어드는 조각들은 오래 감추어진 채 부패하여 쓰레기가 된다. 우리의 어딘가에는 지울 수 없는 얼룩이 묻어있다는 사실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지만 여기 두 편의 영화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 얼룩을 바라본다. 그리고 껴안으려 한다. 이런 시도 안에서 우리의 하루는 조금 더 환해질 것이다. 두 영화의 주인공 모두 마지막에 이르러 밝은 빛 아래에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올해 OTT에서 활발한 활약을 보여준 영화감독으로 '변성현'을 꼽을 수 있다. 하반기 <사마귀>에 이어 <굿뉴스>가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었다. 10월 말 기준으로, 한국 넷플릭스 영화 TOP 10 차트에는 변성현의 작품이 3개나 있다(<굿뉴스>, <킹메이커>, <사마귀>). 그러니까 우리는 일상에서 생각보다 자주 그의 작품을 접한다. 하지만 변성현에 대해 말해지는 것들은 많지 않다. 그가 스타일리시한 연출을 즐기며 킬러물, 형사물 등 독특한 세계관을 시도한다는 것 정도. 열성적인 마니아를 양산했던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전도연을 앞세운 여성 킬러물 <길복순> 정도. 하지만 사실 변성현은 제각기 다른 소재의 영화 속에서도 한 가지 주제에 꾸준히 천착해 왔다. 테마는 은밀하게 반복된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변성현 영화의 핵심이 있다. 그 숨겨진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아래에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일부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다. 변성현은 초기작인 <나의 PS 파트너>로 주목받았다. 지성과 김아중이 주연을 맡았고, 이들이 우연한 계기로 야릇한 전화를 하게 된다는 내용의 19금 로맨틱 코미디물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성에 관한 도발적인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낸다. 특히 성에 대한 말들을 가감 없이 쏟아내는 장면이 압권이다. 변성현은 <나의 PS 파트너>에서 경직된 한국 사회(이 영화는 2012년 개봉했다) 이면에 놓인 솔직하고 발칙한 커플들의 세계를 소개한다. 여기서부터 변성현의 관심사가 드러난다. 그건 현실에서 잘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이색적인 세계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언더커버 경찰과 마약 조직이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또한 두 조직 모두를 오가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마약조직 간부 재호(설경구)에게 접근하는 언더커버 경찰 현수(임시완)다. 어둠 속에 숨겨진 세계, 그 안에서 대립하는 여러 조직, 이들 사이를 오가며 진실을 깨닫는 한 명의 인물. 이런 구도가 변성현의 영화에서 중요하다. <킹메이커>는 같은 구도를 이어받는다. 여당과 야당이 등장하며, 영화는 화려한 선거판 이면의 어둡고 복잡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리고 양쪽 모두와 접촉하는 이가 있으니, 운범(설경구)의 그림자로 불리는 창대(이선균)다. 그는 정치판에 드리운 어둠 그 자체를 상징한다. 청부살인업자의 세계를 그린 <길복순>은 변성현표 킬러물의 포문을 연 작품이다. 소재 자체로 이미 지하 세계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도 여러 인물이 충돌한다. 대표적으로 차민규(설경구)가 세운 MK Ent(엠케이 엔터,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위장하고 있다)가 있고, 여기 속하지 못한 무직자들이 있다. 길복순(전도연)이 차민규에 대적하여 그의 세계를 타격하는 것이 이 영화의 내용이다. 여기서 이 세계의 질서에서 벗어나 이곳저곳을 오가는 인물은 다름아닌 복순이다. <길복순>이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는 영화라면 <사마귀>는 그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영화다. 복순의 다음 세대를 표방하는 한울(임시완)과 재이(박규영)는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변성현의 최신작 <굿뉴스> 역시 '가리어진 세계'를 다룬다. 이것은 역사에 남지 않아서 몰랐던 이야기다(이 영화는 픽션이지만,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비화를 표방한다). 변성현의 영화답게 여러 조직이 대립한다. 대한민국 정부, 일본 관료, 비행기 테러범 등. 이들 사이를 오가는 인물 역시 등장한다. 바로 아무개(설경구)와 서고명(홍경)이다. 아무개는 권력 작동의 어두운 비밀을 간직한 인물로, <킹메이커>의 창대와 비슷하다. 고명은 여러 장소를 오가며 세계의 진실을 깨닫는데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의 현수와 겹친다. 이 둘은 마치 아버지와 아들 같다. 아무개는 그가 아는 씁쓸한 진리의 조각을 현수에게 전달하고, 현수는 이들 받아들이거나 저항하며 성장해 나간다. 변성현은 이 둘을 통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관객에게 전한다. 이제 우리는 변성현의 영화에서 보이는 흐릿한 형체를 그려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그는 어둠 속에 숨겨진 세계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세계는 평범한 눈으로 보이지 않으며, 영화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접촉할 수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가려진 이면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이 세계는 여러 진영과 집단으로 나뉘어 반목하고 충돌한다. 이는 변성현이 생각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평화를 유지하던 룰은 깨지기 마련이고(<길복순>) 남겨진 인간들은 아귀다툼에 정신이 없다(<킹메이커>, <굿뉴스>). 그리고 아수라장 사이를 오가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 사람의 표정은 평온할 수도(<길복순>), 차가울 수도(<킹메이커>), 혹은 눈물이 가득할 수도 있다(<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그런데, 변성현이 이 모든 과정을 거쳐 닿고자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다. 그들은 충격적인 진실 앞에서 절망하기도, 냉소하기도 하지만 다른 인간과 부딪히고 타협하며 결국 자기 길을 찾는다. 밝은 빛의 세계는 말해주지 않는 진실. 그 앞에서 휘청거릴지언정 끝내 자기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버티는 인간들. 그들을 향한 애틋한 애정이 변성현의 영화에는 가득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인간을 믿는 휴머니스트다. 화려한 스타일, 도발적 소재, 감각적 연출. 변성현에 따라붙는 이런 수식어들은 이제 바뀔 때가 되지 않았을까. 어둡고 낯선 세계에서 새로운 진실과 마주하는 인간의 초상. 그것을 향해 뚜벅뚜벅 나아가는 변성현의 영화들을 더 많이 만나보고 싶다.
<부산행>, <반도> 등을 연출한 연상호 감독의 신작 <얼굴>이 최근 극장가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달성했다. 하지만 영화 자체는 큰 논의를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연상호의 흥미로운 시도' 정도로 일축되는 것 같다. 그러나 <얼굴>이 품은 메시지와 그것을 풀어내는 실력은 연상호의 작품 중에서도 뛰어나다. 특히 이 영화의 결말은 주제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어 관객의 사려 깊은 눈길과 해석과 요청한다. 오늘은 <얼굴>의 결말을 위주로 영화의 의미를 다시 이야기하려 한다. 아래부터 <얼굴>에 대한 스포일러가 나온다. 영화의 초반에 중요한 농담이 하나 등장한다. 전각 장인 영규(권해효)를 취재하러 온 다큐멘터리 PD 수진(한지현)이 묻는다. 아들 동환(박정민)을 키우는 과정이 힘들지 않았냐고. 이때 영규는 자식을 홀로 키운 자기 처지를 <심청전>의 '심학규(심 봉사)'에 비유한다. 얼핏 스쳐 지나가는 이 농담은 이상한 정념을 남긴다. 심학규가 누구인가. 자식의 희생으로 눈을 뜬 인물이 아닌가. 효녀의 아버지로 통용되는 이 남자의 스토리는 실은 잔혹하다. 영규의 비유는 단지 시각 장애라는 공통점만을 염두에 둔 것일까? 누군가의 희생에 대한 복선인가? 이 정도의 의문만을 남겨둔 채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로 하자. 우리는 잠시 후에 답을 찾을 것이다. 영규의 아내인 영희(신현빈)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녀는 한마디로 '진실을 드러내는 인물'이라 칭할 수 있다. 그녀는 어릴 때 아버지의 외도를 발설했다가 집에서 쫓겨난다. 공장에서 일할 때는 화장실 갈 시간조차 주지 않는 상황을 못 견디고 바지에 실례를 해 버린다. 요령을 부리지 못하고 열악한 업무 강도를 온몸으로 드러내는 영희. 그녀가 배설한 것은 '우리 안에 있지만 아무도 맨눈으로 보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그러니까 몸의 오물이자 사회의 더러운 진실이다. 영희는 백주상(임성재) 사장의 악행을 폭로하고야 만다. 자신을 홀대하는 사수 진숙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납득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위에서 보았듯이 영희는 그런 사람이다. 어떤 수모를 당하더라도, 진실을 만천하에 드러내고야 마는 사람. 하지만 결과는 참혹하다. 영희를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 누구인가를 판단하는 일은 쉽지 않다. 직접적인 폭력은 영규가 저질렀지만, 그녀의 손을 놓은 것은 진숙이다. 어렸을 때와 똑같은 구도. 영희는 폭력적인 남자와 이기적인(자기 자신을 위해 영희를 버리는) 여자의 합작으로 멍든다. 그녀는 집에서 쫓겨났던 어린 시절처럼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된다. 영규도 딱한 점이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사회의 폭력을 극복하기보다 깊숙이 내면화하여, 자기보다 약한 아내에게 퍼붓는 쪽을 택한다. 온 세상으로부터 받은 조롱으로 길러진 그의 수치심은 엉뚱하게도 아내에게 투사된다. 그는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못생긴 아내 때문에 수치스럽다. 그는 모른다. 자기를 위해주는 유일한 사람을 자기 손으로 죽였다는 것을. 일찌감치 들킨 범죄를 '아무도 모를 것'이라 자신할 때 느껴지는 부끄러움은 우리의 몫이다. 동환은 진실을 깨닫지만, 잠시 분노할 뿐 이를 묻기로 한다. 여기에서 이 영화의 주요한 장치가 빛을 발한다. 박정민 배우가 '젊은 영규'와 '동환'을 모두 연기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스토리상 다른 인물이지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동일 인물이라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결국 아버지를 따라가는 동환의 선택은 둘의 동일성을 강조하며 "동환 씨는 아버지를 닮았어요"라는 수진의 말은 그에 관한 확인사살이다. 그렇게 볼 때 영규는 아내의 죽음을 딛고 성공하여 동환으로 재탄생하며, 보이지 않던 '눈을 뜬다'. 심청이의 희생으로 눈을 뜨는 심학규의 설화는 이렇게 영규 위로 겹친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하나 더 남았다. 그건 영희의 얼굴에 관한 오래된 소문이다. '못생겼다'는 한 마디는 영화를 추동하는 큰 바람이다. 마지막 순간에 드디어 동환은 영희의 사진을 손에 쥔다. 이때 영화는 상당히 시간을 끌며 뜸을 들인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과연 <얼굴>은 어떠한 방식으로 끝을 맺을까. 충격받은 동환의 얼굴? 사진을 보지 않는 선택? 예상은 빗나갔다. <얼굴>은 영희의 얼굴을 그대로 보여주는 선택을 한다. 많은 이들이 이 장면의 의미를 궁금해한다. 그도 그럴 것이, 막상 드러난 영희의 얼굴은 평범하다. 우리는 찬찬히 뜯어보며 골똘히 고민한다. 정말로 못생긴 얼굴인가? 하지만 <얼굴>은 바로 그 순간의 우리를 포착한다. 영희의 얼굴을 판단하기 위해 스크린 앞에 모인 우리를. 그녀의 얼굴을 평가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우리는 영희에 관한 오랜 소문 안으로 초대되고, 빠져나갈 수 없는 공범이 된다. 아버지의 과오를 이어받는 동환, 여기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수진뿐만 아니라 그걸 지켜보는 우리 모두 영희를 둘러싼 폭력의 굴레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 여자의 사진 앞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것을 골똘히 바라보고 있는 우리 자신이다. <얼굴>이라는 제목이 지시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우리의 낯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결말에서 중요한 것은 영희의 얼굴이 아니다. 우리가 보낸 시선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는 순간이며, 그것이 부끄럽다는 깨달음이다. 그렇게 영희는 온 사회로부터 강요당한 수치심을 보는 이에게 다시 돌려준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건 영화의 연출이다. 담담한 표정의 영희 사진을 오래 비추는 선택. 그래서 <얼굴>의 마지막은 연출자로서의 연상호가 자기를 갱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은, 이 영화가 이러한 시선과 깨달음을 미리 설계하고 부추긴다는 것이다. "못생겼다"라는 반복적인 말. '똥걸레'라는 자극적인 용어. 보이지 않는 영희의 앞모습. 사진을 보기 전 뜸 들이는 시간. 이 모든 것이 관객으로 하여금 영희의 얼굴을 궁금해하고 마침내 판단하도록 만든다. 그런데 과연 영화는 그런 관객의 반응으로부터 결백하다 말할 수 있을까? 영희를 향한 괴롭힘에 동참한 것은 아닌가? 구조적 폭력을 드러내기 위해 관객을 연루시키는 전략은 좋다. 그러나 그것이 통하려면 '초대'의 선에 머물러야지 '부추김'으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얼굴>은 여전히 훌륭한 작품이다. 폭력적인 시선을 받아야 했던 누군가를 전면에 드러내는 과감한 결단. 결국 시선 자체를 생각하게 만드는 연출. 이런 마지막이 여태 연상호의 필모그래피에 있었던가? 여태 강도 높은 이야기와 강한 장르성을 보여주던 그가 사진 하나로 승부수를 던졌다는 것. 그건 연상호가 <부산행>의 성공을 반복하기보다 새로운 지대로 나아가길 염원하는 연출자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 그의 선택을 지지하고 싶다. 힘을 뺀 저예산 영화이지만 <얼굴>은 그의 어떤 작품보다 생기가 흐른다. 아마도 영화적 시도를 향한 야심이 빚어내는 밝은 기운이 아닐까.
2025년은 시리즈의 해인가? 올봄 <폭싹 속았수다>가 전국을 강타했고, 여름에는 <오징어 게임> 마지막 시리즈가 우릴 찾아왔다. 그런 와중에 <귀궁>, <미지의 서울>처럼 분명한 색깔로 알뜰하게 사랑받은 작품도 적지 않았다. 시리즈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행복한 한 해였을 것이다. 이런 행렬을 잇는 하반기의 기대작이 또 하나 있다. 최근 방영을 시작한 <사마귀 : 살인자의 외출>(이하 <사마귀>)이다. 이 작품은 일찍이 변영주 감독과 고현정 배우의 만남으로 기대를 모았다. 변영주는 최근 각종 예능에서 뛰어난 입담을 선보이고 있지만 실은 <낮은 목소리> 1, 2, 3편과 <화차>로 탄탄한 연출력을 인정받은 감독이다. 특히 이선균, 김민희 배우 주연의 <화차>는 여성의 서사와 스릴러 장르를 촘촘하게 엮은 수작이다. 그리고 고현정. 설명이 필요할까 싶지만 그녀는 미실, 아니 <선덕여왕>과 <여왕의 교실>, <마스크걸> 등을 통해 카리스마 넘치는 여성 주인공이 얼마나 넓은 스펙트럼에서 다채롭게 존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고만 일러두자. 두 장인의 만남은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 말도 안 되게 좋을 수도 있지만, 말도 안 되게 별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행히 변영주와 고현정은 전자에 가까운 것 같다. 이들은 깔아준 판 위에서 신나게 노니는 중이다. <사마귀>에 선명하게 찍힌 이들의 인장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아래부터 <사마귀>와 <화차>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다. 비록 변영주가 각본을 쓰진 않았으나 <사마귀>는 <화차>와 닮은 구석이 많다. 어쩌면 그 점이 변영주와 이 작품을 서로 만나게 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먼저 <사마귀>와 <화차>는 여성 살인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들은 맘에 드는 것이 있으면 피를 보더라도 취할 정도로 탐욕적이다. 또한 이들은 집요하다. 그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부르든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목표를 향해간다. 그래서 정이신(고현정)은 <화차> 속 살인자보다 더 독하고 거친 언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그건 두 작품이 집중하는 정서다. <화차>는 외부인의 시선으로 사건을 따라가는 작품이다. 여기에는 알 수 없는 사건을 바라보는 이의 두려움과 연민이 묻어있다. <사마귀>도 정이신이라는 희대의 살인마가 주는 두려움을 담는다. 그러나 <사마귀>는 살인자를 바라보는 아들 차수열(장동윤)의 시선에 자주 동조된다. 그래서 그녀를 마주하는 아들의 혼란, 그녀의 피를 받은 자신에 대한 공포가 중요한 축으로 작동한다. 두 작품의 소재는 비슷하지만, 집중하는 감정은 상당히 다르다. 변영주는 <사마귀>만의 정서를 절묘하게 쌓아 올린다. 이것은 주로 배우들의 연기로 재현된다. "피 냄새가 좋냐"는 수열의 물음에 이신은 "네가 태어날 때 나던 냄새잖니"라고 응수한다. 이 말은 정확히 수열의 공포를 정조준한다. 너는 나의 피를 받고 태어났어. 이건 경찰을 향한 도발일까, 아들을 향한 사랑의 언어일까. 여러 감정이 충돌하는 이 장면에서 고현정은 장동윤을 향해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돌진하며, 장동윤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가 쏘는 에너지를 피하고 자신의 페이스를 찾는다. 이토록 밀도 높은 장면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각본과 연출의 덕이며, 변영주가 강렬한 서사와 감정을 다루는 데 탁월하기 때문이다. 이제 고현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사마귀>에서 고현정은 이전에 보여주지 않았던 연기를 처음으로 보여준다. 그녀가 연기하는 이신은 품위 있어 보이지만 누구보다 본능적이고, 직선적인 한편 미스터리하다. 이를 위해 고현정은 퀭한 얼굴과 활활 타오르는 눈, 주술을 뱉어내듯 또렷하고 악랄한 말투를 장착하고 나타났다. 그리고 떨리는 손, 눈의 깜빡거림, 목소리 톤 등을 활용해서 불안하면서도 즐겁고 흥분되는 이신의 내면을 완벽하게 연기해 낸다. <사마귀>에서 고현정은 처음으로 속이 텅 빈 사람 같다. 그녀는 마치 이신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위하여 자기 내면을 모조리 불사른 사람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그녀가 연기하는 이신은 아무런 방해 없이 고현정 위로 투명하게 포개어지며 모든 감정을 마음껏 발산해 낸다. 이 작품에서 고현정은 너무나 '정이신'이라 좀 무서울 정도다. 이야기의 뼈대 위로 차근차근 정서를 쌓는 변영주. 그 푹신한 토대 위에서 작두 타는 고현정. 둘의 만남만으로 첫 스파크는 튀었다. 이 불이 마지막까지 유지될지는 지금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꽤 멋진 작업이라는 점만큼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제목 따라간다고 하던가. <사마귀>는 시청자를 짜릿하게 무는 데 성공했다.
최근 영화관, 안방 극장 할 것 없이 '스포츠물'이 사랑을 받고 있다. <트라이: 우리는 기적이 된다>와 <F1 더 무비> 얘기다. 예상하지 못했던 바람이다. 스포츠는 인기 있는 장르지만, 그만큼 식상하여 주목받지 못할 때도 많다. 그런데 지금 선전하는 두 작품은 특이하게도 같은 주제를 공유하며 극장과 TV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두 편의 작품 앞에서 묻게 된다. 우리는 지금 어떤 이야기를 쫓는 것일까? 그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아래부터 스포일러가 있다. <트라이: 우리는 기적이 된다>는 시청률 4.1%에서 시작해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며 화제가 됐다. 이 작품의 저력으로 여러 가지가 꼽힌다. 럭비라는 소재. 윤계상과 임세미, 김요한 등의 열연. 안정적인 스토리와 연출 등. 그런데 눈이 가는 요소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주가람(윤계상)이라는 캐릭터다. 그는 한때 주목받는 신예였지만, 마약 이슈로 퇴출당하고 말없이 잠적해 사회에서 지워졌다. 그는 가장 빛나는 무대 위에서 시커먼 나락으로 떨어지고 침묵 속에서 살았던 아픈 과거가 있다. 유쾌한 분위기에 가려졌지만 사실 주가람은 비극적인 추락을 경험한 인물이다. <F1 더 무비>도 마찬가지다. 소니(브래드 피트)는 주목받는 천재 루키였다가 사고로 F1의 무대에서 물러나고 만다. 그는 마지막 기회를 잡고자 최하위 팀인 APXGP에 복귀한다. 찬란한 성공을 맛보았으나 단 한 번의 실수로 사라졌던 영웅. 그의 간절한 복귀전을 그린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같은 뼈대를 공유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주가람과 소니는 모두 '리더'의 포지션이다. 그들은 과거에 천재적인 선수였지만 홀로 빛나는 별이었다. 주가람은 자기 팀원을 믿지 못했고, 소니는 천방지축이라 남들 사이에서 튀었다. 그러나 그들은 세월이 흐른 후 대장으로 귀환한다. 주가람은 럭비감독이며, 소니는 선수이지만 팀의 전략을 지휘한다. 그들이 자기 어린 시절과 똑 닮은 선수를 만나 때로 달래고, 때로 꾸짖으며 승리로 향하는 과정은 자못 큰 쾌감이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독특한 특징이다. 스포츠물은 '선수'의 장르다. 하지만 두 편의 작품은 '리더'로서 주인공의 면모를 강조한다. 뛰어난 플레이어의 독주가 아니라, 훌륭한 지도자의 지휘. 이것을 실현하는 캐릭터가 바로 주가람과 소니다. 그러니 이것은 재능 있는 선수가 노력해서 더 잘 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과거의 천재 선수는 고난을 거쳐 성숙한 뒤 진정한 리더로 복귀하여 새로운 세계를 연다. 지금 인기를 끄는 두 편의 작품, <트라이: 우리는 기적이 된다>와 <F1 더 무비>에는 우리 사회의 욕망을 꿰뚫는 코드가 숨어있다. 몰락했던 영웅이 참된 지도자로 귀환하여 승리의 길로 이끄는 스토리. 여기에서 젊은 층은 꼰대인 줄 알았으나 뭘 좀 아는 히어로를, 장년층은 허물어진 과거를 복구하는 데 성공한 애틋한 동료를 발견한다. 모두가 만족하는 그 무대 위에서 과거의 영광은 다시 재현된다. 전 세대가 인정하는 리더가 나타나 가장 빛나던 시대를 복원하는 것.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은밀하게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콘텐츠는 답을 알고 있다.
최근 극장가에서는 두 작품이 동시에 화제가 되고 있다. 이유는 좀 다르지만 말이다. 두 작품은 바로 <좀비딸>과 <전지적 독자 시점>이다. 웹툰을 원작으로 하였으며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다는 이유로 두 작품은 자주 비교된다. 그래서 후자와 다른 전자의 인기 요인으로 많은 이들이 원작을 충실하게 고증한 영상을 꼽는다. 하지만 <좀비딸>의 흥행이 원작에만 기대고 있다고 보기에는 서운한 구석이 있다. 이 작품에는 전통적인 극장가 흥행 공식들도 비춰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좀비딸>의 흥행을 견인한 요인에 대해 말해보려고 한다. 아래부터 <좀비딸>의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다. 글을 시작하기 전, 먼저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비록 인기 웹툰에 기반한 작품이지만 영화 <좀비딸>의 성취에 관해 다루며 영화에 등장하는 요인은 모두 영화의 성취로 취급하려 한다. 원작의 장점이 눈앞에 버젓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잘 살리는 것조차 영화의 역량이기 때문이다. 영화만을 볼 때 <좀비딸>은 상당히 고전미가 있는 작품이다. 먼저 <좀비딸>은 가장 보편적인 정서에 호소한다. 가족애, 부성애, 손녀를 향한 할머니의 애정 등이 그것이다. 이건 인류의 역사와 함께 무수한 예술 작품들이 다뤘던 바로 그 정서다. 너무 흔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흔한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스토리와 비주얼 등 나머지 요소가 괜찮다면 관객은 문턱 없이 쉽게 작품에 진입할 수 있다. 보편적 정서를 통해 최대한 많은 관객을 불러 모으는 것, <좀비딸>의 첫 번째 전략이다. 다음으로 <좀비딸>은 '반전'의 기술을 쓴다. 반전은 영화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요소다. <좀비딸>은 좀비에 감염된 딸 수아(최유리)의 변화를 따라간다. 처음 그녀는 다른 좀비들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러나 내용이 전개되며 그녀는 편견을 깨고 가족들과 무리 없이 잘 지낸다. 처음에는 음식을 먹고, 다음으로 사람을 물지 않고, 결국 소리 내어 말하는 등 좀비 수아의 변화 과정은 흥미롭다. 관객으로서 우리는 처음 좀비에게 거리감을 느꼈다가, 아빠 정환(조정석)이 바라보는 수아에 공감하며 그녀의 안녕을 바라게 된다. 이 모든 요소들이 반전이다. 수아를 보는 우리의 시각 변화, 수아의 변화, 그녀를 보는 세상의 변화까지. 게다가 영화의 마지막에 드러나는 반전이 하나 더 있다. 우리의 현실에는 반전이 많지 않으나, 예술 작품 안에서 판을 거꾸로 뒤집는 짜릿한 전개에 우리는 전율한다. 훈훈한 스토리에 쉽게 다가온 관객들을 반전 매력으로 꼭 잡아두는 것, <좀비딸>의 두 번째 전략이다. 마지막 전략은 바로 '조정석'이다. 전략으로 스타를 꼽게 될 줄이야. 물론 그가 연기하는 정환은 다정다감하며 딸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누가 보아도 좋아할 만한 캐릭터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나는 지금 조정석이라는 배우의 변화에 대해 말하고 있다. <건축학개론>을 통해 주목받은 그는 왕성한 활동을 이어 왔다. 그런데 지난해 개봉한 <파일러>을 계기로 조정석이라는 스타의 성격이 바뀌고 있다는 인상이다. <좀비딸>과 <파일럿>은 공통점이 있다. <파일럿> 역시 관객 수 471만 명을 동원하며 극장가 한파 속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뒀다. 두 작품 모두 조정석 배우가 코미디 대부분을 끌고 가는 희극이며, 조정석은 아이의 아빠로 출연한다. 예전에 이와 동일한 포지션에서 꾸준히 국민적인 사랑을 받은 배우가 있었는데, 그는 차태현이다. 친근한 이미지 뒤에 가려져 있지만 그는 <엽기적인 그녀>부터 시작해 <과속스캔들>, <신과 함께>까지 누구보다 많은 작품을 흥행시킨 대표적 스타다. 호감 가는 얼굴과 코미디 감각으로 조정석은 차태현을 능가하는 배우로 성장할 조짐을 보인다. 스타의 매력으로 관객을 마지막까지 끌고 가는 것이 바로 <좀비딸>의 마지막 전략이다. 어찌 보면 당연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위에서 언급한 요소들이. 보편적인 정서, 반전 있는 서사, 재밌고 편안한 스타 배우까지. 하지만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지겨울 정도로 익숙한 이 공식을 새로워 보이도록 적용하며 관객의 편안함과 설렘을 동시에 자극하는 것이다. 사랑스러운 가족, 좀비에 관한 반전, 조정석이라는 배우의 얼굴을 통해 <좀비딸>은 공식 적용에 성공한다. 익숙한 레시피로 새로운 맛을 내는 <좀비딸>이 어디까지 가는지 좀 더 지켜보려 한다. 이토록 익숙한데도 전망하기 어려워서 영화는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