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대신 감각으로 쓰는 평론가. 영화와 문화에 대해 씁니다. 2016년 '씨네21'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등단.
나는 '나는 솔로' 애청자다. 수요일 밤은 한 주를 보내게 하는 비타민(실은 도파민)이다. 매 화가 끝날 때마다, 반응은 뜨겁다. 방송이 인기를 타며 반응의 강도도 세진다. 화제성이 컸던 16기를 기점으로 분위기도 변했다. 출연자들은 이제 절반쯤 연예인이다. 시청자들도 자연스럽게 연예인에 준하는 검증과 평가를 가한다. 일부 출연자는 팬과 수익까지 생기니까, 이들이 준연예인이라는 것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나는 솔로'만의 현상은 아니다. 예능에 출연하는 일반인은 대개 유명해져서, 일반인과 연예인의 경계를 넘나드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솔로'가 여전히 '일반인이 출연하는 방송'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다. 이 프로는 연예인 데뷔가 아니라, 일반인의 만남을 관찰하는 것이 목적이다. 형식은 일반인, 실제로는 연예인. 모두가 느끼지만 짐짓 모른 척하는 간극이 여기에 있다. 이 간극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은 출연진도, 제작진도, 시청자도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는 일. 유명세를 타는 프로그램은 마치 생물과 같아서, 제멋대로 꿈틀대고 성장한다. 제작진조차 그 변화를 컨트롤하기 어렵다. 전 국민이 관람하는 방송의 출연자가, 일반인에 머무르기를 바라는 것은 과욕일지도. 출연자의 이중 지위(일반인이자 연예인)를 이해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문제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출연자에 대해 말하는 때다. 방송을 도마 위에 올리고 신나게 얘기할 때. 낯 모르는 사람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인기 프로 출연자의 숙명이다. 그것을 감안해도 어쩐지 께름칙하다. 일반인을 상대로 이래도 되나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이야기해 보자. '나는 솔로' 출연자에 대해 말할 권리, 어디까지인가. 보편적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터부시된다. 특히 사생활은 더욱 그렇다. 모르는 이의 사생활을 입에 올려 안줏거리 삼는 것은 무례다. 물론 누구나 참지 못하고 조금씩 뒷담화를 한다. 하지만 올바른 행위로 통용되지는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하는 암묵적 약속이다. 우린 서로의 사적 영역을 존중한다. 하지만 허들이 쑥 낮아지는 때도 있다. 바로 연예인. 이들은 자신의 사생활을 광장으로 가져와서 판다. 물론 팔지 않는 이들도 있다. 예술인으로서 재능만 파는 이들. 그외 자신의 사생활을 노출하지 않는 이들. 흔히 아티스트라 일컫는다. 이 글에서 말하는 연예인은 아티스트를 제외한 개념이다. 연예인은 인간적인 매력이 커서, 사생활조차 상품으로 둔갑한다. 여행을 가고, 친구와 놀고, 썸을 타고, 결혼 생활을 하는 것조차 상품이 된다. 남들은 '들어오지 마시오' 팻말을 꽂고 단단히 지키는 앞마당을 훤히 공개해서 돈을 번다. 이들이 자발적으로 공개하는 사생활에 대해 말하는 것은, 뒷담화가 아니라 소비자 평가에 가깝다. 일반인을 향해 "저 사람 실은 못돼먹었다"고 말하는 것은 폭력이다. 그러나 '착하다'는 이미지로 돈을 버는 연예인에 대해 "저 사람 실은 안 착하다"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리뷰다. 이 부분을 해명하는 것이 연예인의 직업윤리다. 이런 점이 부담스럽다면 직종을 바꾸어야 한다. (하지만 인격적인 모독이나, 스토킹 같은 불법 행위까지 감수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렇다면 말해보자. '나는 솔로' 출연진은 어떤가? 이들은 일반인과 연예인의 경계에 있으므로, 얼핏 헷갈릴 수 있다. 하지만 어려울 것 없다. 한 가지 원칙에 따르면 되니까. 기본적으로 사생활은 불문에 부친다. 하지만 '본인이 공개한 범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방송에 공개한다는 것은, 그에 대한 평가도 받아들인다는 것이니까. 그로 인한 혜택과 불이익 모두 떠안겠다는 약속이니까. 나는 솔로 출연진은 일종의 '영화 속 캐릭터'에 가깝다. 이들은 본명이 아닌 가명을 쓴다. 이런 설정은 상징적이다. 솔로나라의 인물을, 현실의 인물과 분리한다. 그리고 시청자가 솔로나라 속 인물에 집중하게 만든다. 물론 이 캐릭터는 현실의 인물과 닮았다. 출연자의 현실 모습을 반영한다. 어떤 이들은 종종 인터뷰에서 현실 속 자신에 대해 소개하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럼에도 선이 있다는 것이다. 어디에? 솔로나라의 테두리에. 그러므로 우리는 솔로나라에 출연해 보여주는 모습에 한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솔로나라를 벗어난, 현실 속 모습에 대해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출연자의 내밀한 사생활을 폭로하거나, 그 사람의 과거를 파헤치는 것은 지나치다. 그것은 시청자와 출연자 간의 암묵적인 약속을 깨는 일이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출연자는 시청자를 의식해 진정성 없이 방송에 임하고, 프로그램은 망가진다. 그럼에도 우리가 종종 선을 넘는 것은, 그런 욕망을 참기 어려운 때가 있어서다. 첫 번째로 출연자가 너무 강렬한 경우다. 현실에서 보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거나, 현실에서 응징하고 싶을 정도로 비호감이거나. 보통 후자가 문제다. 우리는 어떤 유형의 사람을 혼내주고 싶어서, 선을 넘어 당사자를 찾아간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다. 지켜져야 한다. 두 번째로 출연자가 먼저 선을 지우는 경우가 있다. 대중과 계속 소통하며 연예인처럼 활동하는 경우. 사실 '나는 솔로' 출연은 일종의 방송 데뷔와 비슷하다. 출연자는 솔로나라에 입소하며 데뷔하고, 퇴소하는 동시에 은퇴한다. 그러나 활동을 이어가는 이들은 은퇴를 미루는 것과 같다. 연예인 신분으로 남아있겠다는 선택이다. 이런 이들은 연예인처럼 대해도 문제가 없다. 이 경우 출연자들은 더 이상 '나는 일반인이니 사생활에 간섭하지 마'라는 방패를 쓸 수 없다. 행동과 책임은 늘 연동된다. 누구에게나 '울타리'는 중요하다. 모르는 사람들과 나 사이의 울타리.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편히 쉬지 못한다. 울타리의 크기는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정한 선은 지켜져야 한다. '나는 솔로' 출연자도 마찬가지다. 한마디 말을 덧붙이자면, 이 글이 어느 프로그램의 출연자를 비호하는 구호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은 '나는 솔로'를 경유해, 우리 사회의 약속에 대해 논의하는 일이다. 또 우리도 모르는 사이 남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침입자가 되지 않고, 우리 스스로의 품격을 지키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원래 재밌는 얘기를 할 때는 수위 조절이 중요한 법이다.
콘텐츠의 주인공 캐릭터는, 그 시대의 인간 군상을 대표한다. 쉽게 말하자면 이렇다. 자유를 외치는 주인공이 속속 등장하는 것은, 그 사회에 구속감을 느끼는 이가 많다는 뜻이다. 성공을 향해 질주하는 캐릭터가 자꾸 나온다면, 성공 신화의 열병을 앓는 사회라는 방증이다. 최근 몇 년간 K-콘텐츠에 등장한 주인공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오징어게임>(2021)의 참가자들은 재기를 노린다. 그들은 이 위험한 게임이 자신의 처지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느낀다. <기생충>(2019)에서 기우(최우식)네 가족들은 신분 상승을 꿈꾼다. '흙수저론'이 한바탕 사회를 휩쓸고 지나간 뒤, 대중의 염원을 담아 빚은 것 같은 캐릭터들이 속속 콘텐츠 속에 나타났다. 이들은 모두 가난하고, 가난에서 벗어나겠다는 욕망을 불태우며, 그 과정에서 피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 포기하지 못한다. 그랬던 K-콘텐츠의 주인공들이 달라지고 있다. 변화는 최근 공개된 두 편의 작품에서 드러났다. <기생수: 더 그레이>와 <댓글부대>. 아래부터는 두 편의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유의해 읽어주기를 바란다. 지난 5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기생수: 더 그레이>는 일본의 만화 <기생수>를 원작으로 한 스핀오프 작품이다. <부산행>(2016), <반도>(2020), <지옥>(2021) 등을 통해 디스토피아를 다룬 연상호 감독이 연출·각본을 맡았다. 한국의 토양에 정착한 기생수 시리즈에는 특징이 있다. 우선 이들은 '조직'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크게 세 개의 조직이 나온다. 준경(이정현)이 포함된 경찰 조직, 강우(구교환)가 몸담았던 폭력 조직, 그리고 목사(이현균)를 중심으로 한 기생 생물들의 조직.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모두 조직과 완전히 동기화하지 못한다. 그들은 조직에 적합하지 않거나, 조직으로부터 버려졌다. 수인(전소니)에 기생하는 기생 생물 '하이디'는 일종의 변종으로 동족을 피해 다닌다. 수인은 부모의 보호 없이 마트에서 일하며 살아간다. 가정은 가장 기본적인 조직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그녀는 조직으로부터 떨어져 살아가는 셈이다. 강우는 몸담았던 폭력 조직으로부터 배신당하고 버려졌다. 기생 생물에게 남편을 잃은 준경은 얼핏 보아 경찰 조직에 잘 적응한 것 같지만, 다른 조직원들과 근본적으로 결이 다르다. 그녀는 남편을 잃은 상처와 그에 대한 분노를 원동력으로 달린다. 때로 광기에 찬 눈을 번뜩이는 그녀는 조직에 있지만, 실은 조직이 추구하는 일원이 아니라 일종의 돌연변이다. 이들은 모두 자의 혹은 타의로 조직과의 동기화에 실패한, 조직 부적응자다. "기생 생물처럼 인간도 조직에 기생해 살아간다"는 대사가 나온다. 이 작품에 이르러 연상호는 '우리 모두 기생 생물'이라고 선언한다. 그가 생각하는 조직은 생존의 조건이다. 그렇다면 조직에 어울리지 못하는 이들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기생수: 더 그레이>는 스펙타클을 만드는 중에도 주제 의식을 놓지 않는다. 우리 모두에게는 조직과 불화하는 면이 약간 혹은 많이 존재한다. 내 안의 돌연변이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연상호는 묻는다. 그런 면에서 인간과 기생 생물의 경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고민하는 수인과 하이디는 우리 모두를 대변한다. 이 작품의 제목에는 흑과 백의 중간인 '회색'이 인용되었다. 그레이 존(gray zone)에서 우리는 만난다. 지난달 개봉한 영화 <댓글부대>의 주인공 임상진(손석구)은 조직으로부터 버림받은 기자다. 오보를 썼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거대 조직인 대기업 만전의 비리를 밝히려다 오보 소동으로 쫓겨난다. 그에게 어떤 이들이 접근한다. 찡뻤킹(김성철), 찻탓캇(김동휘), 펩택(홍경). 이들은 조직에 속해 있지 않지만, 온라인에서 사람의 심리를 움직여 조직적인 힘을 일으킨다. 이들은 모두 변종들이다. 영화는 조직의 언저리를 맴도는 이들의 수상한 협력을 쫓아간다. 한국 콘텐츠가 조직 부적응자에 주목하는 현상은 흥미롭다. 어째서 이런 작품들이 늘어나는지, 그 이유를 파악하는 것은 이 글의 한계를 넘어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다. 이런 캐릭터들이 지금 한국 문화의 중심부에 등장했다는 점. 조직과 동기화하는 데 실패한 이들의 생존기는 계속될 것이다.
<극한직업>(2019), <멜로가 체질>(2019)을 연출한 이병헌 감독이 돌아왔다. 게다가 이병헌 스스로 재미를 보장했던 작품이다. 그러니 얼마나 재미날지 기대가 컸다. 넷플릭스에서 최근 공개된 <닭강정> 이야기다. 하지만 뚜껑을 열고 보니 <닭강정>에 대한 반응이 좋지만은 않다. 호불호가 나뉜다. 실은 혹평이 더 많다. 까칠한 반응의 대부분은 이 작품이 이병헌식 코미디의 진수를 보여주지 못한다고 평가한다. 틀린 말도 아닌 것이 <닭강정>에는 이병헌 특유의 엉뚱하면서 귀여운, 말의 티키타카가 별로 없다. 있다 해도 적중률이 낮다. 원작 웹툰 <닭강정>도 특유의 B급 감성을 자랑하며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이라 안타까움이 더 크다. 재밌는 원작과 재밌는 감독의 만남. 그런데 결과는 어째서 생각과 다른 것일까. 그에 대한 답을 찾기 전, 먼저 원작 웹툰이 어떤 작품인지 살펴보면 좋겠다. 웹툰 <닭강정>은 나름의 매력이 또렷한 작품이다. "대체 어떤 작품인지 모르겠으나 재밌다"는 평이 넘쳐난다. 이 웹툰의 개그는 B급 감성이고, 처음 보면 약간 썰렁하다. '이게 개그가 맞나?' 싶은 순간도 있다. 그런데 마치 평양냉면 같은 그 심심하고 묘한 맛이 중독적이다. 너무 웃겨서 배를 잡고 뒹굴지는 않지만 자꾸 실실 웃게 된다. 또 개그는 빈 듯하지만, 작품의 서사는 풍성하기 때문에 개그와 스토리의 조합이 좋다. 썰렁한 유머에도 불구하고 <닭강정>은 팬층이 돈독했고 인기가 많았다. 1화에서부터 뚜렷한 색을 보여주며 코드에 맞는 독자층을 쓸어 모았다. 취향이 맞는 사람들은 충성 독자가 되었고, 맞지 않는 이들은 1화에서부터 탈락됐다. 그래서 큰 문제없이 사랑을 받았다. 작품을 전달하는 매체의 성격도 중요하다. '웹툰'의 특성상 개그가 썰렁해도 어색함이 덜하다. 반면 영상 콘텐츠의 개그가 썰렁하면, 취향에 맞지 않는 관객이 느끼는 어색함은 배가 된다. 소리·영상과 함께 입체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썰렁한 개그를 카톡으로 읽으면 덜 민망하지만, 누군가 내 얼굴 앞에서 직접 재현하면 재앙처럼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그러니까 확실한 색채, 충성 독자, 썰렁 개그에 유리한 웹툰이라는 매체의 특성이 잘 어우러지며, 웹툰 <닭강정>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았다. 이런 웹툰을 감독 이병헌이 영상화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병헌은 누구인가. 그의 감성은 병맛, B급 코드를 표방하는 웹툰 <닭강정>과 좀 다르다. 그의 코미디는 훨씬 대중적이다. 자기 스스로 B급이라고 인식할 수는 있다. 하지만 대중적인 범주 안에서 B급에 가까울 뿐, 이병헌의 코미디는 여러 관객층에 두루 먹혀들어 간다. <극한직업>의 전 국민적인 인기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병헌식 개그는 속도감이 좋다. 대사가 마치 탁구공처럼 인물 사이를 경쾌하게 오간다. 그리고 통통 튄다. 흔히 예상되는 대화의 클리셰를 깬다. 맥락이나 분위기를 살짝 깨트리며 약 올리듯 개그를 던진다. 그래서 이병헌의 개그는 약간 비현실적이지만(현실에서 저런 말을 쓰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지만) 웃기고 귀엽다. 그런 그가 웹툰 <닭강정>과 만난 것이다. 아마도 이병헌은 자기 색깔과 웹툰을 조합하는 방법을 고민했을 것이다. 그의 선택은 <닭강정>의 서사와 주요 개그 코드를 가져가며, 그 위에 자신의 색깔을 덧입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좋은 판단이 아니었다. 시리즈물 <닭강정>은 이병헌의 장점도, 웹툰의 장점도 살라지 못한 지루한 작품이 되고 말았다. 웹툰의 썰렁한 개그 사이사이에 이병헌 표 개그가 비집고 들어갔다. 그런데 이 둘의 성격은 태생적으로 다르다. 웹툰 <닭강정>은 한 박자 느리고 심심한데, 이병헌 표 코미디는 스피디하고 감각적이다. 속도도 다르고 스타일도 다르다. 둘의 속성은 물과 기름처럼 다르다. 그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 시작 부분이다. 고백중(안재홍)이 자작곡을 흥얼거리며 지나가자, 지나가던 여고생이 그런 그를 보며 놀란다. 원작에서는 고백중이 자작곡을 부르며 지나가는 것이 전부다. 그 노래는 재밌지도, 재미없지도 않아서 '뭐지?' 싶다가 피식하게 된다. 그런데 시리즈물 <닭강정>에서는 노래하는 고백중의 모습을 여고생이 관찰하며 마치 중계하듯 독백을 한다. 이런 중계식 내레이션은 이병헌 표 코미디의 특징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장면이 웹툰 <닭강정>의 B급 감성을 살리지도, 그렇다고 이병헌 특유의 감각을 살라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시리즈물 <닭강정> 안에서 웹툰과 이병헌의 감성은 합일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섞여 있다.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커플처럼 서로를 방해한다. 이런 점이 관객의 실망을 자아낸다. 이병헌식 코미디를 기대한 관객은 느닷없이 출몰하는 썰렁함에 당황한다. 그리고 이병헌의 개그가 예전과 달리 자꾸만 실패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대로 원작 웹툰의 감성을 기대하고 본 사람은 이 시리즈가 원작의 감성을 충분히 살려내지 못하고 지나치게 수다스럽다고 느낄 것이다. 어느 쪽의 관객도 잡지 못한 선택인 셈이다. 홍보도 아쉽다. 시리즈물 <닭강정>이 기존 이병헌의 작품과 달리 웹툰의 감성이 섞였다는 것을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리즈물 <닭강정>은 홍보 단계에서 천만 감독 이병헌이 연출한 또 하나의 작품이라는 점에 집중했다. 결과적으로 관객은 여태 본 작품과 같은 결의 재미를 기대하게 됐다. 관객의 기대를 미리 적정한 방향으로 조정해 주지 못한 것이, 박한 평가가 나오게 된 또 하나의 요인이다. 시리즈물 <닭강정>이 확실한 노선을 정했어야 한다고 본다. 이병헌식 코미디인가, 웹툰 <닭강정>의 B급 감성인가. 서사 줄기만 남기고 모두 바꿔서 이병헌의 색을 확실히 보여주든지, 이병헌식 개그는 접어두고 원작의 색을 더 확실히 살리든지. 그리고 선택의 결과를 홍보에서부터 관객에게 전달했으면 좋았겠다. 새로운 도전을 할 때에는, 관객이 그것을 소화할 수 있게 신경 쓰는 게 좋으니까. 그랬다면 시리즈물 <닭강정>에 대한 평가는 달랐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남았다. 최근 들어 웹툰에 기반한 영상이 많아지고 있다. 이제 웹툰 시장은 영상 콘텐츠를 위한 거대한 풀로 느껴질 정도다. 강한 개성과 탄탄한 서사로 중무장한 웹툰에 눈독 들이는 연출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런 경향은 앞으로 더 커질 것이다. 이때 연출자들이 유념할 부분이 무엇인지를 시리즈물 <닭강정>이 보여준다. 연출자는 자신에게 맞는 원작을 선별할 줄 알아야 한다. 대중이 보는 나의 색깔과 잘 부합하는 작품을 고르는 눈. 그 눈을 가졌는지 여부가 새로운 콘텐츠 시대의 자질이 될 것이다. 좋은 사람과 좋은 사람이 만난다고 반드시 좋은 케미스트리가 나오리란 보장은 없다. 재밌는 웹툰과 재밌는 감독이 만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궁합이 중요한가 보다. 막걸리와 전이 생각나는 오늘이다.
'가이 리치'라는 이름이 생소하게 들릴 수 있다. '그게 누군데?'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생각보다 우리에게 익숙하다. <캐시트럭>(2021), <알라딘>(2019), <셜록 홈즈>(2009), <스내치>(2001). 특히 데뷔작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1999)는 아는 사람은 아는 수작이다. 여러 패거리의 남자들이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서로 얽히고설키며 벌어지는 소동을 유쾌하게 풀어내는 재능이 그에게는 있다. 그러니까 가이 리치는 '마초들의 유쾌한 난장'을 즐기는 감독이다. 그런 가이 리치가 돌아왔다. 다름 아닌 시리즈로.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젠틀맨: 더 시리즈>는 그가 연출한 첫 번째 드라마다. 뚜껑을 열어보니 가이 리치의 향기는 여전하다. 전통 깊은 조직(가문). 나뉜 세력. 충돌. 시공간을 오가는 연출. 가이 리치가 모든 작품에서 호평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젠틀맨: 더 시리즈>는 그의 장점이 발현된 작품이라 할 만하다. 할스테드 공작이 사망한다. 그의 저택에 모인 자식들. 유언이 공개된다. 그런데 장남 프레디(다니엘 잉스)가 아닌 차남 에디(테오 제임스)가 공작의 작위와 저택을 포함해 모든 것을 상속받는다. 승계 구도에서 제쳐진 프레디(시리즈를 보다 보면 그럴 만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에게는 거액의 빚이 있다. 마약상에게 진 빚. 결국 에디(테오 제임스)는 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다. 그리고 에디는 물려받은 저택의 지하에서 글래스 일가가 대마초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 작품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야기다. 여러 인물의 서사를 복잡하게 얽으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가이 리치의 실력은 여전하다. 그는 이야기를 흩뜨린 다음, 마치 퍼즐을 맞추듯이 다시 짜 맞추기 시작한다. 여러 인물은 각자의 욕망에 맞춰 움직인다. 얼핏 보아 출구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시리즈는 생물처럼 움직이고, 새로운 국면이 등장한다. 그런 면에서 가이 리치는 문제를 냉철하게 해결해 나가는 에디와 닮았다. 그의 전작 중에서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나 <스내치>가 연상된다. 하지만 <젠틀맨: 더 시리즈>에서 가이 리치가 정말로 자랑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는 것 같다. 그것은 특정한 장면이나 스토리가 아니라 '어떤 태도'다. <젠틀맨: 더 시리즈>의 한 장면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야수성과 세련미의 조화. 야성과 교양의 역설적인 조화가 중요하다고. 세련되면서도 공격적인 태도 말이다. 비록 이 말을 내뱉은 인물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지만, 가이 리치는 작품 안에서 이런 태도를 몸소 실천한다. <젠틀맨: 더 시리즈>의 주인공들은 동물적인 본능으로 자신의 이익을 좇으며 야수같이 상대를 물어뜯는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매너를 놓지 않는다. 특히 주인공 에디와 수지(카야 스코델라리오)가 그렇다. 그들은 때때로 놀라고 분노하지만 마음의 파동을 모두 분출하지 않으며 냉철하게 행동한다. 야성적이지만 정제되었다. 작품의 연출도 그런 측면이 있다. 1화, 프레디가 사고를 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점프 컷은 이 순간을 마치 깨진 유리처럼 조각내어 전달한다. 긴장과 불안은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이때 가이 리치는 마치 잘 세공된 시계처럼 이 장면을 매끈하게 연출한다. 여기에는 첫 도전을 하는 신인의 불안정한 패기가 아니라, 이미 익숙한 과업에 임하는 프로의 안정감이 느껴진다. 그러니 '야수적이고도 세련된 태도'는 단순히 <젠틀맨: 더 시리즈> 속 캐릭터를 설명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이 리치가 현재 추구하는 이상적인 태도를 짚는 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냥 칭찬만 할 수는 없다. <젠틀맨: 더 시리즈>는 그의 전작 <젠틀맨>(2020)의 설정에 기반해 만들어졌다. 내용도, 연출도 이미 익숙하다. 가이 리치는 넷플릭스와 만나며 과감한 도전 대신 안전한 길을 택했다. 가이 리치라면 이렇게 만들겠다 싶은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미 아는 그 맛. 다만 알면서도 맛을 보니, 맛있다. 공격적이고 세련된 이야기꾼이 탄탄한 플랫폼과 만나며 준수한 작품을 만든 경우다. 최근 OTT에는 허술한 이야기를 과장된 액션과 자극적인 설정으로 포장한 작품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웰메이드 시리즈를 본 지 오래됐다. 그런 가운데 믿을 수 있는 장인의 작품을 만나니 반갑다. 이상적인 태도를 내세우고 있다는 점도 재밌다. 비록 약간의 기시감은 들지만 말이다. <젠틀맨: 더 시리즈> 모두가 즐겨볼 만한 시리즈는 아닐지 몰라도, 등장 자체로 반가운 작품이다.
최근 극장가에서는 희한한 영화 하나가 주목을 끌고 있다. 한국형 오컬트를 표방하는 <파묘>다. 관객 수 약 300만 명을 기록하며 순항 중이다. 최근 주춤했던 한국 영화가 다시 주목받는다는 점에서 <파묘>의 인기는 반갑다. <파묘>를 연출한 장재현은 오컬트에 잔뼈가 굵다. 장편 데뷔작 <검은 사제들>(2015), 전작 <사바하>(2019) 모두 같은 장르. 2014년에 만든 단편 <12번째 보조사제>도 마찬가지다. 처음 <검은 사제들>이 나왔을 때에는 단편적인 시도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음을 장재현은 연이은 작품으로 증명했다. 작품의 만듦새를 떠나, 좁은 길을 꾸준히 간다는 측면에서 그는 눈길이 가는 감독이다. 장재현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오컬트 외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감독이 어느 정도 주목을 받으면 '대중성', '흥행' 따위를 고려한 선택들이 영화에 보이기 시작한다. 투자금이 커지며 어쩔 수 없는 어른의 사정도 생기겠지. 그러면서 영화는 좋게 말해 쉬워지고, 나쁘게 말해 난잡해진다. 감독은 자신만의 색깔로 주목받았지만, 그것을 잃게 되는 딜레마에 처한다. 그런데 장재현은 그런 게 없다. 그의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그냥 오컬트다. '이쯤에서 질려하는 관객도 있을 테니 분위기를 환기해 볼까?' 따위의 타협도 없다. 미련해 보인다. 그런데 그 미련함이 흥미롭고 믿음직스럽다. 장재현의 필모그래피를 보며 놀라운 점이 있다. 생각보다 스타 배우를 많이 기용했다는 점이다. <검은 사제들>에는 강동원과 김윤식, <사바하>에는 이정재와 박정민, <파묘>에는 최민식, 김고은, 유해진, 이도현까지. 면면이 화려하다. 그런데 이들은 신기하게도 (홍보 단계에서 화제를 모을지언정) 영화가 시작되면 자연스레 영화에 동화된다. 그들의 존재감은 튀지 않고 작품 속에 흡수돼 버린다. 장재현은 이들의 스타성을 적극 활용할 의지도 없어 보인다. 그 심드렁한 태도가 놀랍다. 강동원, 이정재, 김고은을 앞에 두고 이런 선택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 하지만 이것은 스타들에게도 새로운 기회다. <검은 사제들>의 강동원은 좋은 사례다. 여태 강동원이 출연한 영화들은 강동원 앞에만 서면 그의 스타성을 찬양하는 방식으로 변모하곤 했다. 혹은 변질됐다. 그러다 보니 강동원의 스타성만 비추어 오히려 재미가 없었다. 하지만 <검은 사제들>의 강동원은 파리한 얼굴에 미숙하지만 신념 곧은 사제 그 자체다. 덕분에 우리는 강동원이라는 배우의 새로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강동원이라는 잘생긴 배우조차 자신의 오컬트 세계를 완성할 장기 말 중 하나로 보는 장재현의 그 무신경한 태도는 강동원에게 오히려 기회로 작용했다. 스타들은 이토록 흔치 않은 찬스를 통해 배우로 성장한다. <파묘>에 이르러 기회를 움켜쥔 이는 김고은이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내게 김고은은 <은교>(2012)에서 보여준 여리여리하고 청초한 이미지에 기반한 스타의 이미지가 강했다. 물론 그녀의 연기력은 동년배 중에서 뛰어난 축이다. 또한 그녀는 다양한 작품을 하는 부지런한 배우다. 하지만 그녀가 맡은 배역은 그 특유의 청초함에 뿌리를 두고 가지를 뻗은 것들이 많았다. 원류가 같으니 어딘가 비슷한 느낌을 준다. 멜로의 주인공이거나(<유미의 세포들>, <도깨비>), 파워풀한 존재에 처절하게 맞서거나(<영웅>, <몬스터>), 자기보다 큰 여성을 따르는(<계춘할망>, <차이나타운>) 캐릭터들. 이들은 김고은 특유의 여리고 사랑스러우며 나풀거리는 느낌을 공유한다. 그랬던 김고은이 달라졌다. <파묘>에서 김고은이 맡은 무당 '화림'은 그녀가 여태 맡았던 캐릭터들과 궤를 달리한다. 결이 다르다. 어리지도, 여리지도, 러블리하지도 않다. 화림은 어딘가 얄미우면서도 프로페셔널하고, 속물스러우면서도 진중하다. 화림을 볼 때 '당참', '카리스마', '실력자' 따위의 단어가 자연스레 연상된다. 물론 김고은이 연기한 다른 캐릭터도 야무지고 당돌한 순간들이 있었지만 일부분에 머물렀다. 자신보다 나이 지긋한 풍수사를 설득하고 법사를 이끌며 사건을 파헤치는 화림은, 자신의 힘으로 이야기를 끌고 갈 뿐 스타 김고은의 매력에 의존하는 면이 없다. 화림은 자기 일을 사랑하고, 때로 염려하며, 주변을 챙기는 직업인으로서 무당 그 자체다. 배우 김고은의 필모그래피에서 새롭게 등장한 캐릭터이자, 도약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장재현의 뚝심도 인정할 만하다. 물론 <파묘>는 단점이 없는 영화가 아니다.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이 뒷심이 약하다. 후반부에 나오는 특수효과는 수준이 높지 않아 몰입감을 깬다. 느닷없이 등장하는 희생정신도 조금은 뜬금없다. 하지만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신파나 값싼 감성에 호소하지 않고, 오컬트 세계의 규칙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우직함이 돋보인다. 장재현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인상 역시 우직함이다. 한 가지만 뛰어나도 이치에 이른다 하지 않나. 우직하게 한 길을 걷는 장재현에게 기대를 걸고 싶다.
OTT 드라마의 풍년이다. 넷플릭스, 티빙, 디즈니플러스… 바야흐로 한국의 OTT 콘텐츠 시장은 성장기를 맞았다. 영화관은 힘들다 하지만, 누군가의 불행은 다른 이의 행운. 극장이 빼앗긴 관객은 OTT로 옮겨간다. 탄탄한 각본에 풍부한 제작비, 화려한 배우진으로 무장한 시리즈들이 춘추전국시대, 그중에서도 최근 가장 주목받는 OTT 시리즈는 티빙의 'LTNS'와 넷플릭스의 '살인자ㅇ난감'이다. 두 작품은 모두 매력적이다. 특히 부부 관계를 전면에 내세운 발칙한 19금 드라마 LTNS는 올 상반기의 작품이라 할 만큼 만듦새가 좋다. 도발적이면서도 수위를 잘 지킨다. 19금 작품들이 자칫 드러내는 폭력이나 혐오도 없다. 일찍이 연출력을 인정받은 두 감독, '윤희에게'의 임대형과 '소공녀'의 전고운이 손을 맞잡은 덕이다. 살인자ㅇ난감은 장단점이 분명한 작품이다. 장면과 장면 사이 연결이 투박해 이창희 감독의 연출력에는 의문이다(이 작품은 서투름과 스타일리시함을 간혹 혼동하는 것 같다). 하지만 원작 웹툰에 기반한 쫀쫀한 각본이 무엇보다 강점이다. 무엇보다 LTNS와 살인자ㅇ난감에는 모두 생기가 느껴진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고민과 감정이 작품의 결에 녹아있다. 그래서 신선하고 트렌디하다. 동시대의 공기를 담은 살아있는 작품이 되는 것. 콘텐츠에서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런데 두 작품에서 느껴지는 중요한 특징이 하나 있다. 이들이 모두 '도망치는 인간'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방향과 방식은 다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삶의 난관과 위기로부터 달아나는 중이다. 때로 절박하게, 때로 유쾌하게. 가끔은 의식적으로, 자주 무의식적으로. 아래부터는 두 작품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유의해 읽기를 바란다. LTNS에서 주인공 우진(이솜)은 남편 사무엘(안재홍)과 섹스리스 부부다. 애초에 제목 자체가 'Long Time No Sex'의 약자다. 우진은 사무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허사다. 이런 상태가 익숙해진 어느 날, 그녀에게 부업이 생긴다. 우진과 사무엘은 호텔 프런트 직원으로 일하며 알게 된 불륜 커플을 협박해 돈을 뜯어내기 시작한다. 이때 그녀의 불만(섹스리스)은 일탈(불륜 커플 협박)을 추동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오해는 말기를 바란다. 우진이 부부 관계에 불만이 있어 남을 협박하고 다닌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 그녀의 상태가, 삶에 변화를 일으키는 에너지원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들 부부가 불륜 커플을 협박하는 과정은 코믹하고 귀엽게 그려진다. 하지만 이 과정 전부가 일종의 거대한 회피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진짜 문제를 잊은 채 다른 데 몰두하고 있다. 그리고 시리즈의 후반부, 새 재미에 빠져 살던 커플은 위기를 맞는다. 마지막에 이르러 이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가슴시리게 직시한다. 눌러왔던 것들이 폭발한다. 이 통증을 성장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LTNS는 자신의 문제로부터 도망치려 했던 사랑스러운 커플의 성장기다. 살인자ㅇ난감은 대놓고 도피를 소재로 삼는다. 이탕(최우식)은 우연히 살인을 저지른 뒤 형사 장난감(손석구)의 추적을 피해 도망다닌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이 작품에는 여러 층위의 '도망'이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다. 죽였던 이들이 모두 나쁜 인간들이었다는 핑계로, 이탕은 자신의 죄의식을 회피한다. 물론 범죄로부터 달아나는 것은 그의 능력이다. 하지만 그래도 좋은가? 이탕은 어느 순간부터 이런 상황에 안도해 버린다. 그는 자신이 감내해야 마땅한 형벌과 책임, 반성, 잘잘못에 대한 또렷한 인식으로부터 도망친다. 이런 상황에 대한 평가는 섣불리 내리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회피인지 성공적 도피인지에 대한 판단은 독자에게 맡긴다. 지금 우리에게 사랑받는 두 작품이 공통적으로 '도망치는 인간'을 다룬다는 점은 자못 흥미롭다. 그들이 물리적인 도주를 넘어 삶의 문제로부터 달아나고 있다는 점도. 그 과정은 코미디나 스릴러로 흥미롭게 연출되고, 우리는 그 과정의 짜릿함을 즐긴다. 하지만 문득 궁금해진다. 우리는 무엇에 공감하고, 또 즐거워하는 것일까.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핫한 남자 배우를 꼽자면 단연 '티모시 살라메'다. 제임스 딘, 리버 피닉스, 톰 크루즈,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영화계를 이끌어 온 청춘 배우의 명단에 이제 그가 있다. 샬라메는 필모그래피도 화려하다. 아름다운 영상으로 국내에도 마니아층을 보유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8), 지구 종말 시나리오를 유쾌하게 풀어낸 <돈 룩 업>(2021), SF 대하 시리즈 <듄>(2021)까지. 그런 그가 다시 주연을 맡은 <웡카>가 지난달 31일 개봉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웡카>에는 여태 보아왔던 티모시 샬라메의 마법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있기는 하지만, 이전만큼 뚜렷하거나 짜릿하지 않다. 물론 폴 킹 감독의 미진한 연출력이 가장 큰 원인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 연출에 대한 언급은 생략하겠다. 그보다 더 흥미로운 얘기가 있으니까. <웡카>를 보며 나는 배우 티모시 샬라메와 유독 잘 맞고, 잘 맞지 않는 장르가 따로 있음을 알았다. 모든 배우가 그렇듯, 샬라메에게도 상성이 맞는 장르가 따로 있는 것이다. 지금 영화계를 휘어잡은 매력남 티모시 샬라메의 강점, 그리고 숨겨진 약점은 무엇인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티모시 샬라메 티모시 샬라메는 매력이 뚜렷하다. 남자치고는 여리여리한 몸, 소년미를 간직한 얼굴, 어떤 배역이든 준수하게 소화하는 연기력. 그러나 무엇보다 강력한 그의 매력은 '분위기'다. 장난스러우면서 위태롭고, 귀여우면서도 서늘하다. 쉽게 가질 수 없는 양가적 매력이 그에게는 있다. 그렇기에 샬라메는 방황하는 청춘의 역할에 제격이다. 양면적이라는 것은, 빛과 어둠처럼 반대되는 두 속성을 지녔다는 뜻이다. 샬라메도 해맑은 얼굴 이면에 한 스푼의 우울을 지녔다. 그가 활약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레이니 데이 인 뉴욕>, <듄>, <본즈 앤 올>(2022) 모두 이런 특징을 공유한다. 물론 <레이디 버드>(2018)나 <돈 룩 업>에서 맡았던 어리고 밝은 배역도 잘 어울린다. 하지만 홈런을 친 작품들은 대개 샬라메의 몸에 깃든 우울을 낭만적으로 녹여내는 데 성공했다. 영화 <웡카>. 티모시 샬라메 다시 <웡카>를 보자. 이 작품은 마치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동화적이다. 고난과 역경은 있지만, 촉촉한 우울이나 어두운 그림자는 없다. 이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일관되게 밝은 무대 위에서 티모시 샬라메의 희뿌연 매력은 자취를 감춘다. 이것은 마치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매력적인 배우에게 시종 형광등을 들이대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물론 샬라메는 윌리 웡카를 충분히 훌륭하게 소화한다. 영화도 킬링타임으로 즐기기에 나쁘지 않다. 하지만 티모시 샬라메의 리스트에 올릴 만한 작품은 아니다. 일부 필모그래피에서 샬라메의 존재감은 다른 배우로 도저히 대체되지 않는다. 하지만 솔직히 <웡카>는 그에 미치지 못한다. 이것은 노력을 뛰어넘는 상성의 영역이다. 다른 말로 '궁합'. 그러니 배우 티모시 샬라메에게 <웡카>의 가장 큰 효용은, 그에게 잘 맞는 장르가 따로 있음을 알게 해 줬다는 점이다.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2005). 조니 뎁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있다. 바로 <찰리와 초콜릿 공장>(2005). 이 알록달록 신나고도 기이한 세계는 팀 버튼이 창조했다. 여기에서 주연을 맡은 조니 뎁은 웡카 역을 훌륭하게 소화할 뿐 아니라 강렬한 매력을 뿜어낸다. 배우 조니 뎁의 엉뚱하고 신비로운 분위기와, 어딘가 비밀을 품은 듯한 웡카 캐릭터는 서로 찰떡궁합이다. <가위손>(1991)에서부터 합을 맞춰 온 감독과 배우의 케미스트리는 남다르다. <웡카>와는 반대로, 장르와 배우의 특성이 제대로 맞아떨어진 사례라 하겠다. 이제 확실히 알았다. 티모시 샬라메에게는 앳된 느낌이 감돌지만, 그렇다고 그가 디즈니에 어울리진 않는다. 그는 어딘가에 소년미를 간직하고 있으나, 역설적으로 성숙한 감성의 영화에 훨씬 잘 어울린다. 샬라메가 필모를 훌륭히 쌓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맞는 장르를 알아보는 눈이 필요할 것이다. 특별한 매력을 가진 사람은, 자신에게 맞는 장소를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개성 강한 꽃은 알맞은 토질에 뿌리내릴 때 만개할 수 있다. 비단 티모시 샬라메에게만 적용되는 교훈은 아닐 것이다. 문득 서 있는 곳을 돌아보게 되는 오늘이다.
지난해 7월 〈외계+인〉 1부가 개봉한 지 6개월 만에 최동훈이 후속작을 들고 나타났다. 이달 개봉한 〈외계+인〉 2부는 전작보다 낫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외계+인〉 시리즈에 대한 냉담한 시선은 여전하다. 개봉한 지 약 일주일이 된 영화는 관객 수 70만을 막 넘겼다(17일 기준). 최동훈이 야심차게 시도한 SF·사극물은 아쉬움을 남긴 채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최동훈도 예전 같지 않네"라는 말로 지나치기는 좀 이상하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타짜〉(관객 수 596만), 〈도둑들〉(〃 1298만), 〈암살〉(〃 1270만)을 줄줄이 흥행시키며 충무로 최고의 흥행 보증수표로 인정받던 최동훈은 어째서 〈외계+인〉에서 이르러 처참한 성적표를 받게 됐나. 감독 최동훈에 대한 사형선고인가? 바이럴의 실패인가? 오해는 말길 바란다. 나는 지금 그를 부관참시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작금의 상황이 그의 패배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최동훈은 흥행작이 많지만, 어떤 작품이든 흥행시킬 수 있는 감독은 아니다. 그에게는 흥행을 위한 조건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최동훈이란 감독에 대해 한번 뜯어보면 좋을 것 같다. 최동훈의 히트작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개성 강한 캐릭터들. 이건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타짜〉의 고니(조승우), 정마담(김혜수), 고광렬(유해진), 곽철용(김응수), 〈도둑들〉의 애니콜(전지현), 씹던껌(김해숙) 등 모두 나열하기도 힘들다. 최동훈은 이들을 소재로 서사를 짠다. 그 서사는 꽤 현란하다. 그는 선 굵은 한줄기의 이야기를 따라가지 않는다. 마치 레고처럼 이리저리 조합되고 찢어지고 다시 맞춰지는 이야기를 사랑한다. 그 위에서 통통 튀는 캐릭터들을 저글링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쾌감이 꽤나 크다. 역동적인 서사와 살아있는 캐릭터야말로 최 감독의 무기다. 그런데 이 무기가 작동하려면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서사와 캐릭터를 떠받드는 세계관은 단순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동훈이 직조하는 서사는 괘 복잡한 편이라 따라가기 쉽지 않다. 〈범죄의 재구성〉(2004) 같은 영화가 대표적인데, 케이퍼 무비답게 여러 줄기의 이야기가 얽어지고 해소되는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관객에게도 도전이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가 펼쳐지는 배경은 쉬워야 밸런스가 맞다. 〈타짜〉, 〈도둑들〉 모두 쉬운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다. 도박, 도둑질 모두 우리 현실과 맞닿아있고 익숙하다. 그런 관점에서 〈외계+인〉을 보면 흥행 실패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일단 세계관이 생소하고 어렵다. 시공간이 교차한다. 최동훈의 특기인 복잡한 서사와 재기 발랄한 캐릭터를 선보일 여유가 없다. 혹은 이것들을 욱여넣다 보니 영화가 너무 어려워진다. 세계관도 이해되지 않은 관객은 어리둥절한 상태로 서사를 쫓아가야 한다. 지나치게 많은 정보로 경직된 영화에는 유머가 끼어들 틈이 없다. 유머는 맥락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그것을 비틀고 뒤집으며 이뤄지기 때문이다. 내용도 쫓아가기 버거운데 무슨 유머인가. 이 모든 문제가 〈외계+인〉 1부에서 나타났다. 〈외계+인〉 2부는 사정이 좀 낫다. 1부에서 이 세계관에 대한 설명을 해줬기 때문이다. 2부가 시작될 때 1부를 다시 한 번 요약해 주기도 한다. 최동훈 특유의 색깔은 조금씩 몸을 드러낸다. 하지만 영화는 1부의 호된 실패 이후 완전한 가족 영화로 방향을 틀은 탓인지, 다소 유치하다. 이런 점은 유머에서 두드러진다. 원래 최동훈의 유머는 꽤나 속물적이면서도 능청스럽고 스마트한데, 〈외계+인〉 2부의 유머는 직관적이고 단편적인 수준에 머문다. 최동훈표 웃음을 좋아했던 관객으로서 아쉬운 부분이다. 피자의 맛깔나는 토핑이 돋보이려면 도우는 슴슴해야 한다. 대신 무거운 토핑을 받쳐줄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해야 한다. 최동훈표 영화의 장기가 발휘되려면 세계관이 단순해서 관객의 시선을 빼앗지 않아야 한다. 그러니까 〈외계+인〉의 흥행 실패는 SF라는 장르에 있지 않다. SF든, 사극이든, 전쟁물이든 세계관이 쉽고 직관적이면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만으로 흥행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의 장기가 작동할 단단한 바닥은 마련된다. 흥행에 성공해야만 좋은 영화는 아니다. 〈외계+인〉 시리즈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다만 흥행을 목표에 두었다면 그것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관객의 반응 차이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명확히 아는 일은 중요하다. 〈외계+인〉 시리즈가 최동훈에게 그런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아니, 될 것이다. 그의 다음 작품을 기다린다.
지난 한 해 가장 인기를 끌었던 예능 프로그램을 꼽자면 단연 '나는 SOLO'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청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TV뿐 아니라 넷플릭스, 유튜브로도 소비되었으니까. 그러나 화제성을 고려할 때 '나는 SOLO'는 여타의 프로그램을 압도했다. 이런 열광의 이유는 뭘까. 그걸 알기 위해 프로그램을 다시 떠올려볼 필요가 있겠다. '나는 SOLO'의 가장 큰 특징은 리얼리즘의 끝을 달린다는 것이다. 한때 '무한도전' 등 다양한 예능이 '리얼(real)'을 표방하던 때도 있었다. 이제 누구도 그런 표현을 쓰지 않는다. 리얼이 기본인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트렌드를 감안해도 '나는 SOLO'는 한층 더 리얼하다. 출연자의 일상을, 민낯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한 말이 아니다. 남들에게 섣불리 들키고 싶지 않은, 마치 맨살처럼 연약한 맨 감정을 들추어낸다는 차원에서 그렇다. 이런 경향은 '나는 SOLO'뿐 아니라 다른 예능에서도 이어진다. 유튜브의 경우 최근 몇 년간 하이퍼리얼리즘을 표방한 예능이 관객의 선택을 받았다. '피식대학' 채널의 콘텐츠 상당수가 그렇다. 실제로 소개팅하는 듯한 콘셉트의 'B대면데이트', 아저씨들의 등산 모임에 함께한 듯한 '한사랑산악회'. 온라인 강의를 기막히게 재연하는 '빠더너스'의 문쌤(문상훈). 학교, 회사에 출몰하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사내뷰공업'의 김소정. 심지어는 'SNL 코리아' 조차 'MZ오피스' 등 현실을 사실적으로 고증한 코너들이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이제 예능은 관찰카메라를 넘어 인류 분석 리포트가 되어가고 있다. 과거와 비교해 보면 확연한 차이를 알 수 있다. 예전에는 바보 같거나, 버럭 하는 등 약간은 과장된 캐릭터들이 인기가 많았다. 혹은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직관적인 예능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관객들은 현실과 맞닿은 코미디를 사랑한다. 리얼 예능을 통해 나를 비춰보는 우리 이런 예능은 관객들이 살고 있는 현실을 재연해 다시 보여준다. 거울을 들이미는 것과 같다. 관객들과 거울을 함께 보며 노는 것이다. 리얼 예능은 어떤 방식으로든 관객의 감각에 선명하게 접촉한다. 그래서 '이 예능은 다름 아닌 내 이야기'라는 감각을 되살린다. 그러면서 '자, 한 번 봐봐. 너도 사실 이렇지 않아? 네가 겪은 일 같지 않아?' 따위의 말을 걸어온다. 이런 선호도를 보고 한 가지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지금 관객의 속성,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모습이다. 지금 관객들이 리얼한 예능을 선택한다는 것은, 그것이 걸어오는 대화가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지금의 관객들은 스스로를 비춰 보이는 콘텐츠를 좋아한다. 그들은 예능에서 자기 모습을 찾고, 자기 경험을 회고하며 쾌감을 느낀다. 그들은 예능을 보며 자신의 일부를 본다. 이런 태도는 좋게 말하면 탐구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유아적이다. 그러나 그 모두를 아우르는 특성은 이것이다. 끊임없이 자기 모습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지금의 관객인 우리는 이전보다 외롭다. 바보 캐릭터를 향한 웃음 뒤에는 지적인 인간에 대한 이상이 있고, 풍자 개그를 향한 웃음 뒤에는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있다. 무언가를 향한 반응 뒤에는 그에 상응한 결핍이 있기 마련이다. 리얼 예능의 인기 뒤에는 리얼하지 못한 현실이 있을 테다. 여기서 '리얼'은 나의 모습과 경험을 남들과 공유하는 감각이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 스크린 앞에 모여들고 있다. 웃음은 슬픔을 치료하는 약이라고 하던데, 지금 시대의 슬픔은 우리가 외롭다는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디자인 : 박수민
연말이 되면 평론가는 긴장된다. 한 해를 정리하며 지난 시간을 정리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다. 올 한 해, 우리는 어떤 영화를 찾았을까. 2023년 개봉한 영화들을 둘러보며, 유독 더 고민이 깊어졌다. 리스트 사이에서 어떤 경향성을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올해 한국에서 흥행한 영화를 순위대로 얘기해 보면 1위 범죄도시 3(관객 수 1068만), 2위 서울의 봄(〃 932만), 3위 엘리멘탈(〃 724만), 4위 스즈메의 문단속(〃 557만), 5위 밀수(〃 514만), 6위 더 퍼스트 슬램덩크(〃 479만), 7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 421만), 8위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 402만), 9위 콘크리트 유토피아(〃 385만), 10위 아바타: 물의 길(〃 349만) 순서다. 21일 기준,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통계를 참고했다. 생각에 잠겼던 나는 다른 통계 하나를 더 접하고서 비로소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올해 전 세계 박스오피스 순위다. 국내와 전 세계 관객을 비교해 보는 것이다. 더 넘버스(The Numbers)에 따르면 올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영화는 그레타 거윅이 연출한 <바비>였다. 이어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만강홍: 사라진 밀서> 등의 순서다. 영화 <바비> 포스터 리스트를 보다 보면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세계적으로 사랑받았지만, 한국에서 유독 사랑받지 못한 작품'들이다. 그러니까 선택이 아니라, 회피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성향을 드러내 보인다. 한국 관객에게 선택받지 못한 영화 중에는 <바비>와 <인어공주>가 있다. 두 영화는 다른 나라에 비해 국내에서 유독 인기가 없었다. <바비>는 관객 수 58만 명, <인어공주>는 64만 명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PC(정치적 올바름) 이슈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바비>는 젠더 이슈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고, <인어공주>는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인종 논란에 휩싸였다. 지금 한국의 관객은 영화관에서 PC 이슈와 만나고 싶지 않아 한다.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PC에 피로감을 느끼는 것일 수도, 익숙하지 않은 것일 수도, 혹은 다른 이유일 수 있다. 이 글에서 그 이유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영화 <인어공주> 스틸컷 PC를 피한 한국 관객들은 역사물을 찾아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예상 이상의 선전을 보인 <서울의 봄>과 <밀수> 모두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시대감이 명확히 느껴지지 않으나, 영탁(이병헌)만큼은 고전적인 주인공의 인상이 있다. 나머지는 액션, 애니메이션, 판타지 장르가 주를 이룬다. 그러니 이런 경향은 전 세계가 공통적이라 한국만의 성향이라고 꼬집기는 어렵다. 영화 <밀수> 스틸컷 한국은 젠더 갈등이 심한 국가라고들 말한다. 또 우리는 정치적 격랑의 시대를 살고 있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을 넓은 의미의 '정치(Politics)'라고 한다면, 국장에서만큼은 이와 분리되길 원하는 것이 관객의 마음인 것 같다. 그런 욕망이 박스오피스에서 읽힌다. 안도. 안타까움. 흥미로움. 어떤 감정으로 이런 현상을 바라보아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것이다. 지금 한국의 관객들은 현실의 예민한 이슈를 피해 과거로 여행을 떠나는 중이다. 디자인 : 박수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