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대신 감각으로 쓰는 평론가. 영화와 문화에 대해 씁니다. 2016년 '씨네21'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등단.
최근 영화관, 안방 극장 할 것 없이 '스포츠물'이 사랑을 받고 있다. <트라이: 우리는 기적이 된다>와 <F1 더 무비> 얘기다. 예상하지 못했던 바람이다. 스포츠는 인기 있는 장르지만, 그만큼 식상하여 주목받지 못할 때도 많다. 그런데 지금 선전하는 두 작품은 특이하게도 같은 주제를 공유하며 극장과 TV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두 편의 작품 앞에서 묻게 된다. 우리는 지금 어떤 이야기를 쫓는 것일까? 그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아래부터 스포일러가 있다. <트라이: 우리는 기적이 된다>는 시청률 4.1%에서 시작해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며 화제가 됐다. 이 작품의 저력으로 여러 가지가 꼽힌다. 럭비라는 소재. 윤계상과 임세미, 김요한 등의 열연. 안정적인 스토리와 연출 등. 그런데 눈이 가는 요소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주가람(윤계상)이라는 캐릭터다. 그는 한때 주목받는 신예였지만, 마약 이슈로 퇴출당하고 말없이 잠적해 사회에서 지워졌다. 그는 가장 빛나는 무대 위에서 시커먼 나락으로 떨어지고 침묵 속에서 살았던 아픈 과거가 있다. 유쾌한 분위기에 가려졌지만 사실 주가람은 비극적인 추락을 경험한 인물이다. <F1 더 무비>도 마찬가지다. 소니(브래드 피트)는 주목받는 천재 루키였다가 사고로 F1의 무대에서 물러나고 만다. 그는 마지막 기회를 잡고자 최하위 팀인 APXGP에 복귀한다. 찬란한 성공을 맛보았으나 단 한 번의 실수로 사라졌던 영웅. 그의 간절한 복귀전을 그린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같은 뼈대를 공유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주가람과 소니는 모두 '리더'의 포지션이다. 그들은 과거에 천재적인 선수였지만 홀로 빛나는 별이었다. 주가람은 자기 팀원을 믿지 못했고, 소니는 천방지축이라 남들 사이에서 튀었다. 그러나 그들은 세월이 흐른 후 대장으로 귀환한다. 주가람은 럭비감독이며, 소니는 선수이지만 팀의 전략을 지휘한다. 그들이 자기 어린 시절과 똑 닮은 선수를 만나 때로 달래고, 때로 꾸짖으며 승리로 향하는 과정은 자못 큰 쾌감이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독특한 특징이다. 스포츠물은 '선수'의 장르다. 하지만 두 편의 작품은 '리더'로서 주인공의 면모를 강조한다. 뛰어난 플레이어의 독주가 아니라, 훌륭한 지도자의 지휘. 이것을 실현하는 캐릭터가 바로 주가람과 소니다. 그러니 이것은 재능 있는 선수가 노력해서 더 잘 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과거의 천재 선수는 고난을 거쳐 성숙한 뒤 진정한 리더로 복귀하여 새로운 세계를 연다. 지금 인기를 끄는 두 편의 작품, <트라이: 우리는 기적이 된다>와 <F1 더 무비>에는 우리 사회의 욕망을 꿰뚫는 코드가 숨어있다. 몰락했던 영웅이 참된 지도자로 귀환하여 승리의 길로 이끄는 스토리. 여기에서 젊은 층은 꼰대인 줄 알았으나 뭘 좀 아는 히어로를, 장년층은 허물어진 과거를 복구하는 데 성공한 애틋한 동료를 발견한다. 모두가 만족하는 그 무대 위에서 과거의 영광은 다시 재현된다. 전 세대가 인정하는 리더가 나타나 가장 빛나던 시대를 복원하는 것.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은밀하게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콘텐츠는 답을 알고 있다.
최근 극장가에서는 두 작품이 동시에 화제가 되고 있다. 이유는 좀 다르지만 말이다. 두 작품은 바로 <좀비딸>과 <전지적 독자 시점>이다. 웹툰을 원작으로 하였으며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다는 이유로 두 작품은 자주 비교된다. 그래서 후자와 다른 전자의 인기 요인으로 많은 이들이 원작을 충실하게 고증한 영상을 꼽는다. 하지만 <좀비딸>의 흥행이 원작에만 기대고 있다고 보기에는 서운한 구석이 있다. 이 작품에는 전통적인 극장가 흥행 공식들도 비춰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좀비딸>의 흥행을 견인한 요인에 대해 말해보려고 한다. 아래부터 <좀비딸>의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다. 글을 시작하기 전, 먼저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비록 인기 웹툰에 기반한 작품이지만 영화 <좀비딸>의 성취에 관해 다루며 영화에 등장하는 요인은 모두 영화의 성취로 취급하려 한다. 원작의 장점이 눈앞에 버젓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잘 살리는 것조차 영화의 역량이기 때문이다. 영화만을 볼 때 <좀비딸>은 상당히 고전미가 있는 작품이다. 먼저 <좀비딸>은 가장 보편적인 정서에 호소한다. 가족애, 부성애, 손녀를 향한 할머니의 애정 등이 그것이다. 이건 인류의 역사와 함께 무수한 예술 작품들이 다뤘던 바로 그 정서다. 너무 흔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흔한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스토리와 비주얼 등 나머지 요소가 괜찮다면 관객은 문턱 없이 쉽게 작품에 진입할 수 있다. 보편적 정서를 통해 최대한 많은 관객을 불러 모으는 것, <좀비딸>의 첫 번째 전략이다. 다음으로 <좀비딸>은 '반전'의 기술을 쓴다. 반전은 영화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요소다. <좀비딸>은 좀비에 감염된 딸 수아(최유리)의 변화를 따라간다. 처음 그녀는 다른 좀비들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러나 내용이 전개되며 그녀는 편견을 깨고 가족들과 무리 없이 잘 지낸다. 처음에는 음식을 먹고, 다음으로 사람을 물지 않고, 결국 소리 내어 말하는 등 좀비 수아의 변화 과정은 흥미롭다. 관객으로서 우리는 처음 좀비에게 거리감을 느꼈다가, 아빠 정환(조정석)이 바라보는 수아에 공감하며 그녀의 안녕을 바라게 된다. 이 모든 요소들이 반전이다. 수아를 보는 우리의 시각 변화, 수아의 변화, 그녀를 보는 세상의 변화까지. 게다가 영화의 마지막에 드러나는 반전이 하나 더 있다. 우리의 현실에는 반전이 많지 않으나, 예술 작품 안에서 판을 거꾸로 뒤집는 짜릿한 전개에 우리는 전율한다. 훈훈한 스토리에 쉽게 다가온 관객들을 반전 매력으로 꼭 잡아두는 것, <좀비딸>의 두 번째 전략이다. 마지막 전략은 바로 '조정석'이다. 전략으로 스타를 꼽게 될 줄이야. 물론 그가 연기하는 정환은 다정다감하며 딸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누가 보아도 좋아할 만한 캐릭터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나는 지금 조정석이라는 배우의 변화에 대해 말하고 있다. <건축학개론>을 통해 주목받은 그는 왕성한 활동을 이어 왔다. 그런데 지난해 개봉한 <파일러>을 계기로 조정석이라는 스타의 성격이 바뀌고 있다는 인상이다. <좀비딸>과 <파일럿>은 공통점이 있다. <파일럿> 역시 관객 수 471만 명을 동원하며 극장가 한파 속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뒀다. 두 작품 모두 조정석 배우가 코미디 대부분을 끌고 가는 희극이며, 조정석은 아이의 아빠로 출연한다. 예전에 이와 동일한 포지션에서 꾸준히 국민적인 사랑을 받은 배우가 있었는데, 그는 차태현이다. 친근한 이미지 뒤에 가려져 있지만 그는 <엽기적인 그녀>부터 시작해 <과속스캔들>, <신과 함께>까지 누구보다 많은 작품을 흥행시킨 대표적 스타다. 호감 가는 얼굴과 코미디 감각으로 조정석은 차태현을 능가하는 배우로 성장할 조짐을 보인다. 스타의 매력으로 관객을 마지막까지 끌고 가는 것이 바로 <좀비딸>의 마지막 전략이다. 어찌 보면 당연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위에서 언급한 요소들이. 보편적인 정서, 반전 있는 서사, 재밌고 편안한 스타 배우까지. 하지만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지겨울 정도로 익숙한 이 공식을 새로워 보이도록 적용하며 관객의 편안함과 설렘을 동시에 자극하는 것이다. 사랑스러운 가족, 좀비에 관한 반전, 조정석이라는 배우의 얼굴을 통해 <좀비딸>은 공식 적용에 성공한다. 익숙한 레시피로 새로운 맛을 내는 <좀비딸>이 어디까지 가는지 좀 더 지켜보려 한다. 이토록 익숙한데도 전망하기 어려워서 영화는 흥미롭다.
수년 전부터 인기 있는 웹툰/웹소설이 영화화되는 경향이 쭉 이어지고 있다. 강풀 원작의 <이웃사람>부터 웹툰-영화의 포문을 열어젖힌 <신과 함께>까지. <중증외상센터> 같은 OTT 작품까지 고려하면 이제 이런 경향은 대세로 자리 잡았다. 웹툰과 웹소설을 영상화하는 이점은 적지 않다. 일단 검증된 작품이므로 리스크가 적고, 원작의 팬덤을 관객층으로 흡수할 수 있다. 이는 고전 명작의 재개봉, 또는 리메이크가 늘고 있는 극장가 트렌드와도 부합한다. 흥행을 보장할 수 있는 안전한 선택지다. 하지만 이런 기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인기작의 영화화는 흥행으로 이어진다'는 공식이 깨어지려 한다. 그간 작은 시그널은 있었다.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시리즈물 <광장>에 대한 대중의 심드렁한 반응이 그 사례다(그에 관해 '"이걸 빼다니"...'광장' 원작 팬들이 분노한 진짜 이유'에서 썼다). 그리고 <전지적 독자 시점>에 이르러 우렁찬 경고음이 울려 퍼지고 있다. 탄탄한 원작 팬덤을 둔 이 영화는 개봉과 함께 묵직한 비판에 직면했다. 팬들 사이에서는 "원작을 이해하지 못했다", "기존 세계관을 헤쳤다", 또는 "모욕감을 느낀다"라는 반응까지 나온다.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은 원작의 설정을 상당 부분 바꾸었다. 하지만 수정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그 아래 흐르는 어떤 핵심적인 부분을 이 영화가 잘못 건드렸다는 점이다. 그에 관해 말해보려 한다. 이는 앞으로 이어질 웹툰·웹소설 원작 영화를 위한 제언이기도 하다. 아래부터 <전지적 독자 시점>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다. 나는 앞서 '"이걸 빼다니"...'광장' 원작 팬들이 분노한 진짜 이유'라는 글에서 웹툰/웹소설을 영상화할 때 유념할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오리지널을 개작할 때 반드시 조심하여야 할 두 가지 요소가 있으니, 바로 '주제'와 '정서'다. 이 같은 분석은 <전지적 독자 시점>에서도 그대로 맞아떨어진다. 이 영화는 원작의 디테일을 많이 바꾸었다. 웹소설에 등장하는 무기, 배후성, 시나리오 등 많은 부분이 변했다. 그러나 2차 창작물에서 개작은 흔하다. 소설, 만화, 그리고 영상 사이의 아득한 거리를 생각한다면 수정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원작 팬덤을 잡고 싶다면 이 같은 수정은 디테일의 차원에서 머물러야 한다. 주제와 정서가 바뀌는 순간 팬들은 2차 창작물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전지적 독자 시점>도 같은 실수를 한다. 원작의 주제는 이 작품의 제목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전지적 '작가'가 아닌 '독자'의 시점. 그것은 작품을 읽는 독자의 활동으로 온 세상을 구원하는 새로운 질서, 새로운 세계를 지향한다.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했지만, 하나의 웹소설만큼은 빠삭하게 독파한 남자. 그리고 그가 즐긴 활동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세상. 세상의 축을 뒤엎고 재정의하는 그 전복의 과정이야말로 판타지의 핵심이다. 이 같은 주제는 작가-주인공-독자 사이의 경직된 관계를 재편하는 시도로 드러난다. 하지만 영화에 이르러 이런 주제는 희미해진다. 대신 영화는 '과도한 경쟁 사회에 대한 비판'을 전면에 내세운다. 주제가 바뀌었을 뿐 아니라 진부해졌다. 이 과정에서 정서 역시 변한다. 원작에서 주인공 '김독자'는 목표지향적이며, 협상과 심리전에 능한 복합적 캐릭터다. 하지만 영화의 독자(안효섭)는 윤리에 치중하는 납작한 인물이다. 원작과 달리 이 영화의 정서는 단편적이고 교과서적이다. 그러니 원작 팬은 물론 관객의 지지를 받기 어려운 것이다. 반면 윤태호 웹툰을 바탕으로 한 디즈니플러스의 <파인: 촌뜨기들>은 호평을 받고 있다. 캐릭터만을 보았을 때, 이 시리즈는 원작과 상당히 다르다. 그러나 '보물선을 둘러싼 탐욕과 암투'라는 주제를 견지하며, 영상 속 인물들의 결을 살리는 데 집중하기 때문에 원작 팬과 시청자 모두 잡는 데 성공했다. 물론 주제와 정서 모두 바꾸는 시도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 경우 원작 팬덤의 이탈을 각오한 상태에서 새로운 정면승부를 펼쳐야 한다. 이 싸움에서 감독은 원작 어드밴티지를 버리면서까지 보여주고픈 무언가를 펼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전지적 독자 시점>은 이 부분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 또 하나 안타까운 부분.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이 원작을 개작한 방식에서 한때 극장가를 휩쓴 '천만 영화'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가장 보편적인 정서를 건드릴 것. 선량한 주인공과 이기적인 빌런이 싸우게 할 것. 감동적인 결말로 마무리할 것. 하지만 '천만 영화 시대'는 이미 지나간 지 오래다. 지금은 다양하게 분화한 관객의 취향에 맞는 독특한 작품이 주목받는 때가 아닌가.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의 전략은 <신과 함께> 시절에 머물러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번 사례에도 불구하고 웹툰·웹소설을 영화화하는 시도는 이어질 것이다. 점차 쪼그라드는 영화판에서 여전히 승산 있는 선택지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말 영리한 선택이 되려면, 원작의 근간에 무엇이 흐르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흥행뿐 아니라, 하나의 세계를 빌려오는 창작자의 윤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눈 한 번 깜짝 하면 AI 기술이 온 세상을 바꾸는 시대. 이런 때에 히어로 계의 조상님, DC 코믹스의 시조새, '슈퍼맨'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슈퍼맨을 다룬 비교적 최근 영화인 <맨 오브 스틸>(2013)조차 개봉한 지 10년이 넘었다. 그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슈퍼맨 캐릭터는 어쩐지 지겨울 정도로 익숙하다. 오래전부터 영웅의 상징으로 꼽힌 슈퍼맨. 그의 이름 위에는 찬란한 시간만큼이나 두꺼운 먼지가 쌓여있다. 이를 훌훌 털어버리고 이 남자를 다시 비상하게 할 방법은 없을까? 최근 개봉한 영화 <슈퍼맨>이 당면한 과제다. 눈부신 전통을 이으면서 새롭게 보일 것. 이율배반적인 요청을 달성하기 위해 감독 제임스 건은 몇 가지 전략을 쓴다. 그의 전술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다시 돌아온 슈퍼맨과 인사를 나누는 건 어떨까. 아래부터 영화 <슈퍼맨>의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다. 그 이름이 상징하듯이, '슈퍼맨(Superman)'이라는 캐릭터는 애당초 평범한 인간(man)이 아니다. 그리고 역대 슈퍼맨은 자기의 압도적인 능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타고난 강함을 이용해 홀로 사람들을 구원하는 '초인'은 요즘의 트렌드와 맞지 않다. 지금 시대는 인간을 존중하면서 여러 목소리를 조율하는 영웅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슈퍼맨>은 다른 길을 간다. 영화에서 슈퍼맨(데이비드 코런스웻)은 꽤 인간적이다. 첫 장면에서 그는 피를 흘리며 고통에 신음한다. 게다가 그는 강아지를 통해 위기에서 벗어난다. 지쳤을 때 시골의 부모님 집을 찾아 휴식하며 회복하는 모습도 다분히 인간적이다. <슈퍼맨>은 히어로도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차별화를 꾀한다. 하지만 슈퍼맨은 시련을 맞는다. 렉스 루터(니콜라스 홀트) 일당은 그가 지구인과 다르다는 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이때 슈퍼맨은 자기의 방식대로 '인간'을 다시 정의하며 그가 여느 사람과 같다는 점을 강조한다. 결국 <슈퍼맨>은 슈퍼맨이 우리와 같은 인간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이에 답하는 영화다. 두 번째 전략. 이 영화에서 슈퍼맨은 마치 서부극의 단독자처럼 홀로 활약하지 않는다. 대신 팀이 있고 이들과의 협업을 추구한다. 이전에도 슈퍼맨은 <저스티스 리그>(2017) 등에서 다른 히어로와의 케미스트리를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슈퍼맨>에서 그는 확연하게 '저스티스 갱'의 일원이 되어 각 멤버들과 재밌는 조합을 보여준다. 저스티스 갱의 특징은 멤버들이 개인주의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기주의적인 것과 다르다. 이들은 팀이 되어서도 서로를 구출하는 일에 심드렁하다. 또한 이들은 서로를 크게 의식하지 않으며 애틋함은 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 하지만 마치 관성에 찌든 직장인처럼, 해야 하는 일은 확실하게 해낸다. 어딘가 평범하지 않은, 색다른 팀플레이는 제임스 건 감독의 특기다. 그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에서 이미 B급 감성이 물씬 묻은 캐릭터를 팀으로 묶어 저글링 한 경험이 있다. 구성원 한 명 한 명은 한심한데 기가 막히게 잘 굴러가는 조별 과제. 제임스 건은 <슈퍼맨>에서 다시 한번 생소한 팀을 조합하며, 이미 익숙한 '슈퍼맨' 캐릭터를 새로운 케미스트리 안에서 풀어낸다. 마지막으로 (이미 조금 말했지만) <슈퍼맨>에는 제임스 건의 인장이 묻어있다. 괴수의 눈알을 공격하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괴상한 장난스러움. 스멀스멀 몸을 침투하는 나노봇의 징그러운 이미지. 이는 모두 제임스 건의 트레이드 마크다. 이런 점들이 슈퍼맨과 만나며 오래된 시리즈는 2025년의 공기를 입는다. 그렇다면 제임스 건의 인장은 이 영화에서 충분히 드러났을까? 아쉽게도 그렇지 않다. 잔혹함, 천진난만함, 폭력성, 귀여움 등이 마구 뒤섞인 제임스 건 특유의 색깔은 이 영화에서 다소 옅다. 가끔 그것을 드러내는 장면조차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슈퍼맨 시리즈의 무게가 그에게 부담을 준 것일까? 차라리 자기 색을 확실하게 입히는 과감한 선택을 했다면 <슈퍼맨>은 훨씬 흥미로웠을 것이다. 약간의 아쉬움은 있지만, 이번 영화에 이르러 슈퍼맨은 드디어 헌 옷을 벗고 새 옷을 갈아입는 데 성공한다.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에서 기대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저스티스 갱이다. 똑똑하고 까칠한 미스터 테리픽(에디 가테지), 허세가 있지만 은근히 의리 있는 그린 랜턴(네이선 필리언), 쿨하지만 싸울 때는 광기가 보이는 호크걸(이사벨라 메르세드)의 활약이 기대된다. 낯설고 이상한 팀. 하지만 어쩐지 기대되는 조별 과제. 13년 만에 복학한 우리의 모범생, '슈퍼맨'은 2025년에 잘 적응하고 있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인기가 거세다. 지난달에 공개된 이후 2주가 다 되어 가지만, 여전히 넷플릭스 전 세계 차트 영화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6월 말 기준, FlixPatrol 참고). 여태 시청자의 사랑을 받은 작품은 많지만,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인기에는 특별한 구석이 있다. 시청자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방영 직후 유튜브에는 주인공의 공연 장면을 편집해 뮤직비디오 형식으로 올린 영상들이 줄줄이 업로드되었다. 이런 움직임은 제작사인 소니 픽처스 애니메이션이나 넷플릭스가 아니라, 팬덤 차원에서 먼저 일어났다. 댓글의 반응도 폭발적인데, "영화 속 아이돌의 공식 앨범을 내달라", "호랑이 굿즈를 내달라", "버추얼 아이돌로 데뷔해 달라" 등등 현실 아이돌의 인기를 능가한다. 이미 많은 이들이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인기 요인을 짚었다. 중독성 강한 사운드트랙, 세심하게 디자인된 캐릭터. 한국의 케이팝(K-pop) 문화도 잘 구현하였고, 홍보 영상으로 써도 좋을 만큼 한국적 요소도 훌륭하게 녹여냈다. 하지만 여전히 잘 얘기되지 않는 요인 하나가 있다. 이것은 <오징어 게임> 등 넷플릭스에서 열풍을 일으킨 다른 작품에서도 통용되는 이야기다. 그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매력으로 '한국적 요소'가 꼽힌다. 이를테면 라면, 목욕탕, 남산타워 등 한국인이 일상에서 즐기는 것들은 물론이고, '작호도'에서 튀어나온 듯한 호랑이, 저승사자를 떠올리게 하는 '사자 보이즈'의 콘셉트 등 한국 고유의 문화도 상당히 가미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한국적 요소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다고 보는 해석이 압도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절반만 사실이다. 그 이유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한국적인 소재를 활용하되, 그것을 너무 부담스럽거나 생소하지 않게, 다시 말해 글로벌 트렌드 위에서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국 문화'와 '글로벌 감성'의 절묘한 배합, 이것이 핵심이다. 일단 <케이팝 데몬 헌터스> 한국적 아이템을 차용하지만, 극의 정서는 지극히 보편적이다. '라면'과 '목욕탕'은 한국적이지만, 틈틈이 간식을 먹고 싶고 늘어져 쉬고 싶은 감정은 누구나 공감할 만하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은 케이팝의 대표적인 특성을 잘 고증했다. 카리스마, 시크, 귀여움의 매력을 고루 지닌 '헌트릭스' 멤버들, 데뷔곡은 청량하고 후속곡은 다크한 '사자 보이즈'의 노래 등이 그렇다. 하지만 치고받고 싸우는 와중에도 '최애'의 얼굴에 정신이 팔리는 주인공의 재밌는 모습은 한국을 넘어 전 세계 팬들이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신선함'과 '보편성'을 동시에 잡는 것. 이것은 넷플릭스와 같은 글로벌 플랫폼에서 특히 중요한 덕목이다. OTT의 시청자는 영화가 아니라 TV 프로그램을 보듯 일상 속에서 편안하게 콘텐츠를 접한다. 그렇기 때문에 OTT 시청자는 너무 생소하거나, 혹은 지루한 작품을 선호하지 않는다. 눈길을 잡아끌 만한 요소가 있는 대신에, 지나치게 에너지를 쏟지 않아도 될 만큼 친근한 스토리를 선호한다. 퇴마, 속죄, 정체성 등을 다루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서사 역시 이미 알고 있어서 더 맛있는 그 맛이다.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흥행한 <오징어 게임> 시리즈에도 적용되는 원리다. 이 작품의 첫 번째 시즌은 한국의 전통놀이, 화려한 세트장 등 신선한 소재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잔인한 본성, 극한의 자본주의 시스템 등 공감할 만한 서사를 줄기로 삼는다. 반대로 시즌 2, 시즌 3로 갈수록 혹평이 늘어난 것은 소재의 신선함이 떨어지며 스토리의 평범함만이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예상치 못하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으며 그 안의 한국 문화도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런 열기를 즐기는 한편, 작품의 인기 요인을 분석하는 시도도 필요할 것 같다. 낯선 재료로 요리할 때는 익숙한 레시피와 부재료를 활용하듯이, 새로운 문화를 소재로 삼을 때는 낯익은 것들을 잘 조합하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케이팝 데몬 헌터즈>에서 주목할 것은 낯섦과 친숙함을 맛있게 배합하는 그 노련함이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웹툰 '광장'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시리즈 <광장>이 화제다. 실은 화제라기보다 논란에 가깝다. 원작의 매력을 담아내지 못했다는 이유다. 개인적으로 두 작품을 보기 전까지 논란의 이유를 공감하지 못했다. 개작한 작품은 원작과 다른 것이 당연하고, 과감한 시도를 하는 것이 콘텐츠의 미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작품을 모두 본 후, 생각이 달라졌다. 만화나 소설을 영상화하는 도전은 여전히 응원한다. 하지만 <광장>에 관한 뭇사람들의 반응은 이해가 간다. <광장>에는 나름의 장점이 있으므로 평가절하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웹툰을 영상화한 사례 중에서도 유독 원작 팬들의 반응이 좋지 않은 <광장>을 다각도로 살펴보며 그 이유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만화나 소설을 영상화할 때 특히 유념해야 할 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고 싶다. 아래부터 <광장>에 대한 스포일러가 나오니 유념해 읽어주기를 바란다. 시리즈물 <광장>과 웹툰 '광장'은 여러 지점에서 다르다. 여기에는 긍정적인 변화도 있다. 가령 <광장>은 웹툰에 부족한 현실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세부를 추가한다. 주운과 봉산 사이 서사도 풍부해지고, 인물들의 대사도 늘었다. 반대로 웹툰의 강렬한 액션이 영상에서 다소 느슨하게 느껴져서 아쉬울 때도 있다. 하지만 이는 만화적 생략(예를 들어 만화에서는 액션을 단 하나의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이 어려운 영상의 자연스러운 한계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이런 보편적인 부분은 다루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도 있다. 웹툰과 다른 시리즈물 <광장>의 아쉬운 변화. 그것은 애초에 건드리지 말거나, 건드릴 것이라면 제대로 하여서 원작을 넘어서야 할 부분을 애매하게 건드렸다는 뜻이기도 하다. 통상 오리지널을 개작할 때 조심하여야 할 두 가지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원작의 주제와 정서다. 이것은 원작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요소이므로 바꾸지 않는 편이 좋다. 웹툰 '광장'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의 주제는 제목과 상통한다. 광장에서 시작된 치열한 전쟁으로 세계는 잠시 평화를 얻었으나, 방만한 실수로 밸런스가 깨어지며 다시 광장에서 지옥도가 펼쳐진다.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이 세계의 엄혹한 질서를 상징하는 단어가 바로 '광장'이다. 그러나 시리즈물 <광장>은 이 부분을 삭제한다. 광장은 다시 열리지 않으며, 존재감도 미미하다. 대신 봉산과 주운, 둘을 통칭할 때 '광장'이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여기에는 철학이 없으며 지시적인 의미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원작에서 주인공 기준의 모든 여정이 결국 광장으로 수렴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는 앙꼬 없는 찐빵 같은 느낌을 준다. 또한 시리즈와 웹툰은 정서도 다르다. 원작 팬들이 웹툰과 시리즈, 둘이 서로 다른 작품이라고 말하는 이유에는 이런 차이가 한몫을 한다. 웹툰 '광장'의 특징은 선이 굵으면서 묵직한 감성이다. 먼치킨(압도적인 능력을 갖춘 캐릭터) 주인공의 속 시원한 액션, "중2병이 다시 올 것 같다"는 즐거운 비명까지 나오는 멋진 대사 등이 이런 감성을 조각한다. 하지만 시리즈물 <광장>에는 이토록 서걱서걱하며 피비린내 나는 정서가 부족하다. 있긴 있는데 생각보다 옅다. 주제와 정서. 원작의 향기를 유지하는 것은 이 두 가지다. 그러므로 어떠한 변형을 거치더라도 이 두 가지는 유지되어야 시청자는 원작과의 연결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들은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다만 원작과의 끈을 끊어낼 정도로 타격이 큰 시도이므로, 그 결과물이 좋지 않을 때 거센 비판을 맞닥뜨리게 된다는 점을 고려하는 것이 좋다. 원작의 설정만 차용하며 전혀 다른 작품을 만드는 건 어떤가? 상관없다. 다만 이런 경우 원작을 이용해 홍보하는 것은 기만적으로 느껴질 수 있으므로, 예비 시청자와 원작 팬에게 충분히 설명하는 태도는 필요할 것이다. 시리즈물 <광장>이 원작의 장점을 버리면서 변화를 시도한 이유는, 아마도 서사 때문으로 추측한다. <광장>은 웹툰과 다른 방식으로 서사를 진행하고 새로운 캐릭터를 등장시키며 차별화를 꾀한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작품의 주제가 바뀐다. 또 달라진 부분에 대한 설명을 추가하다 보니 원작의 담백함이 사라져 정서도 달라진 것이다. 그 결과에 대한 평가는 시청자 개개인의 몫이다. <광장>에 대한 지적이 안타까운 이유는, 이것이 새로운 시도에서 뻗어 나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도전을 하지 않는 작품보다, 리스크를 안고서라도 그것을 감행하는 작품을 존중한다. 그러나 원작에서 유달리 사랑받은 요소는 그대로 유지하며 나머지 부분에서 도전하는 것이, 개작하는 이들에게 유용한 전략이 될 것 같다. 인기 있는 만화, 소설을 영상화하는 작품은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기억하라. 오리지널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사진 : 넷플릭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지난 4월 시작한 16부작 드라마 <귀궁>이 곧 종영을 앞두고 있다. <귀궁>은 1화부터 9.2%라는 높은 시청률로 출발해 꾸준히 8~10%대를 기록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멀리는 SBS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2016)부터 가까이는 SBS <홍천기>(2021), tvN <환혼: 빛과 그림자>(2022)까지, 판타지 사극은 꾸준히 인기 있는 장르에 속한다. 그러나 <귀궁>의 인기에는 장르의 특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이번 글에서는 오랜만에 돌아온 판타지 사극 <귀궁>이 시청자의 사랑을 받는 데 성공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아래부터 작품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다. 처음 시작할 때, <귀궁>은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볼거리로 주목받았다. 동양 판타지를 배경으로 로맨스, 무속, 퇴마 등을 고루 결합한 점, 그리고 육성재(비투비), 김지연(우주소녀) 등 아이돌 출신의 배우들이 주연을 맡은 점 등이다. 여러 요소를 혼합한 <귀궁>의 전략은 탁월했고 배우들도 연기, 화제성 등 모든 측면에서 자기 몫을 톡톡하게 해냈다. 그러므로 이런 요소들은 <귀궁>에 시청자를 유입시키는 첫 번째 매력으로 작동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드라마'라는 까다로운 매체는 시청자의 유입을 꾸준히 지속하지 못하면 결국에는 고사하고 만다. 그런 점에서 안정적으로 높은 시청률을 확보해 온 <귀궁>의 성취는 눈에 띈다.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가장 큰 비결은 <귀궁>의 짜임새 있는 각본이다. <귀궁>에는 서사의 낭비가 거의 없다. 첫 화부터 등장한 '외다리귀(이태검)'는 눈길을 사로잡으며 시리즈의 성격을 보여주는 소재에 그칠 것이라 짐작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귀신은 '팔척귀'에 얽힌 비밀의 실타래를 풀어내고, 왕 이정(김지훈)의 태도 변화를 이끄는 등 이중, 삼중으로 서사 전개에 기여한다. 관계성 위주의 캐릭터로 보였던 이무기 비비(조한결)와 최인선(신슬기)도 스토리를 견인하는 데 한몫을 한다. 귀여움을 담당하는 야광귀(박다온)까지 제 역할을 해내며, 처음 등장했을 때 던진 '신발'에 관한 떡밥을 회수하면서 사라진다. 주연은 물론 조연까지, <귀궁>에 등장하는 다채로운 인물들은 자기만의 색깔을 보여주며 작품을 풍부하게 수놓다가 '팔척귀'에 관한 서사의 큰 줄기에 통합되며 퇴장한다. 이는 한 캐릭터가 극 안에서 중층적인 역할을 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캐릭터조차 작품의 스토리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느껴지는 '반전'이 여기저기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시청자는 이런 순간마다 크고 작은 쾌감을 느끼며 작품에 다시 빠져든다. 또한 여러 인물이 등장해도 내용이 산만해지지 않으며 팔척귀에 관한 중요 서사 위주로 응집력 있게 흘러간다는 것은 <귀궁>의 큰 장점이다.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귀궁>이 로맨스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을 지나치게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이다. 로맨스와 관련해 <귀궁>은 절제된 태도를 유지한다. 연인이 서로의 마음을 오해하게 만들거나, 삼각관계를 등장시켜 피로감을 높이는 무리수를 택하지 않는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귀궁>의 인기를 단단하게 붙들어 맨다. 한때 한국 드라마를 묘사할 때, 어떤 스토리든 로맨스물로 만들어버린다는 말이 우스갯거리로 떠돌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K-드라마가 사랑 타령만을 반복하는 때는 지난 듯하다. 대중적으로 큰 사랑을 받은 작품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눈에 띄는 요소를 놓고 인기 요인을 분석하는 경향이 있다. 화려한 VFX(특수영상 및 시각효과), 주목받는 배우진, 상상력을 자극하는 장르적 특성까지. 이 모든 것이 지금 <귀궁>의 인기를 만들어낸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작품이 이리도 안정적으로 인기를 견인할 수 있었던 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역할이 컸다. 그것은 짜임새 있는 각본과 절제된 로맨스, 여기 더해 적절한 때 치고 빠지는 캐릭터와 주·조연 배우들의 연기력 등이다. 마치 튼튼한 뼈대가 건실한 건축물을 지탱하듯이, 보이지 않는 요소들이 합쳐 작품의 매력을 완성한다. 이런 장점이 마지막 빛을 발산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기를 바라며 <귀궁>의 마지막 화를 기다리는 중이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이 이야기를 한다면 분명 누군가는 반발할 것이다. 그래도 해 보겠다. 어쩔 수 없는 나의 일이니까. 최근 개봉한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은 예고된 흥행작이다.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은 시리즈, 톰 크루즈의 압도적인 인기, 몸을 사리지 않는 액션. '톰 형'이라는 애칭과 각종 밈까지 등장하며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은 관객의 인식 속에 이견 없이 지지할 만한 대작으로 자리 잡았다. 30년을 이어 온 시리즈가 자아내는 위엄은 모두의 환호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은 복합적인 영화다. 이 작품은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시대를 품는지, 또한 어떤 방식으로 그 흔적을 외부에 발산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나는 영화가 집중하는 두 가지 키워드에 관해 얘기할 생각이다. 그건 바로 'AI'와 '미국'이다. 아래부터 영화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다.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이 파악하는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위험은 AI이다. 영화에서는 전 세계 핵 통제권을 장악한 '엔티티'로 구체화된다. AI를 포함한 기술의 위험을 경고하는 영화는 흔하다. 수십 년 전부터 있어 왔고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을 정도다. 하지만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의 특별함은 AI를 둘러싼 갈등을 미학적으로 녹여내었다는 것이다. 영화는 AI 기술의 신비를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에단 헌트(톰 크루즈)는 엔티티와 대면하며 그것이 전달하는 이미지를 감지하고, 그 이미지는 스크린을 통해 우리에게 공유된다. 마치 챗GPT나 Gemini와 대화할 때 표시되는 화면 같은 이미지가 등장한다. 그것은 의미 없는 디지털 기호 같기도 하고, 무한한 별로 채워진 우주 같기도 하다. 그 이미지는 첨단 기술인 동시에, 자연(인간)과 맞닿은 AI의 속성을 드러낸다. 한편, 이와 상반되는 장면도 있다. 많은 이들이 극찬하는 '수중 액션 시퀀스'와 '항공 액션 시퀀스'다. AI는 근본적으로 디지털인 것과 달리, 이 장면에서의 에단은 철저히 아날로그적이다. 그는 덮쳐오는 물을 헤치고 바람에 맞서며 간신히 목표를 향해 간다. 그의 성실한 움직임은 눈 깜짝할 사이 여러 이미지를 조합하는 엔티티와 대비를 이룬다. 오로지 인간의 육신으로 추동되는 이 장면에 디지털이 끼어들 틈은 없다.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은 AI에 저항하는 에단의 외로운 싸움을,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액션으로 소화하여 재현한다. 이를 소화하는 톰 크루즈의 기량은 경이롭다. AI에 대해 이야기했으니, 이제부터 '미국'과 관련한 이야기를 해 보겠다. 여러 탁월한 지점에도 불구하고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의 어떤 부분은 수상하여 그냥 지나치기 힘들다. 그건 이 영화가 반복해서 언급하는 '미국의 역할'에 관한 부분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미국 대통령 에리카 슬론(안젤라 바셋)에게는 중요한 임무가 있다. 바로 전 세계를 핵전쟁으로부터 보호하는 것.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의 핵무기가 엔티티 때문에 무력화된 상황에서, 그녀는 선제공격할지 여부를 관료들과 고민한다. 대통령은 갈등한다. 공격하는 것이 미국에 유리하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고심하는 것은 전쟁과 그로 인해 희생될 사람들, 즉 '세계의 평화'다. 이때 그녀는 한 국가의 수장이지만 사실상 전 세계의 대통령으로서 기능한다. 그녀의 과감한 결단 덕에 세계는 피 흘리지 않고 평화를 유지한다. 언뜻 보아 웅장한 이 서사는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하다. 핵 공격을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서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대통령의 결정은 매우 중요하게 다뤄진다. 이런 연출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다소 과하다는 인상을 떨칠 수 없다. 그녀의 선택은 한 인간의 윤리적 결단이 아니라, 미국 대통령의 위대한 양보이자 절제로 그려진다. 여기서 미국과 같은 강대국이 핵 공격을 하지 않은 것은 그 자체로 영웅적인 행위가 된다. 평화가 아니라 '공격'이 디폴트(기본적으로 주어진 상태)이며, 공격을 포기하는 것은 숭고한 희생이다. 또한 에단이 소속된 IMF(Impossible Mission Force)는 틈틈이 나타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만난 적 없는 이들을 위해 뛴다는 철학을 들려준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전 세계를 지키는 미국.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은 패권국으로서의 자의식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할리우드 영화에 미국의 자의식이 드러나는 사례는 셀 수 없다. 이런 경향은 다른 국가의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반복된다. 그런데 나는 근래 개봉한 영화를 통틀어 단순히 공격하지 않는 것을 이토록 숭고한 일로 끌어올리며 패권국의 자의식을 드러내는 영화를 본 일이 없다. 트럼프 시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기저에 흐르는 의식은 흥미롭고 섬뜩하다. 사람이 그렇듯 영화도 하나의 측면으로 판단할 수 없다. 그것 안에 속한 요소들은 서로 얽어지고 지탱하며 영화를 만들어 낸다. 그 여러 가지 면을 찬찬히 둘러보는 일은 중요한 것 같다.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은 다양한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영화고, 여전히 당신의 발견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마블이 신작 <썬더볼츠>를 들고 나타났다. 대중의 시선이 쏠린다. <어벤져스> 이후 지루한 슬럼프에 빠졌던 MCU는 과연 왕좌를 되찾고 복권에 성공할 수 있을까? 평가는 제각각이고, 흥행 성적은 아직이다. 그러나 과감하게 "이제는 우리의 시대"라 선언하는 <썬더볼츠>의 탄탄한 전략에 대해서만큼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시대 가장 사랑받는 영화 브랜드인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지금의 감성을 영리하게 수집하여 작품에 녹아낸다. 그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아래부터 <썬더볼츠>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다. 영화에서 발렌티나(줄리아 루이스 드레이퍼스)는 새로운 히어로 군단 '썬더볼츠'를 소개하며 "뉴-어벤져스(New-Avengers)"라 일컫는다. 그러나 실은 '썬더볼츠'는 포스트-어벤져스에 가깝다. 눈부신 영웅들이 뭉친 어벤져스와 모든 면에서 차별화를 꾀하기 때문이다. 어벤져스는 MCU의 최대 역작이지만 이제는 (다른 작품에 자꾸만 그림자를 드리우는) 최고의 장애물로 바뀌어 버렸다. 그리고 MCU는 어벤져스를 잊지 못하는 팬들에게 그들의 닮은 꼴이 아니라 전혀 다른 무언가를 선사한다. 썬더볼츠는 어벤져스를 잇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화려한 유산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먼저 썬더볼츠는 멋지지 않다. 최정예 군단인 어벤져스와 다르게 이들은 모두 하자가 있다. 우리는 회생 불가라고 그들은 중얼거린다. 이처럼 희망도, 대책도 없이 암울한 루저의 감성을 <썬더볼츠>는 정조준한다. 기존 MCU에서 오합지졸의 대명사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였다. 그런데 이들은 비록 한심하지만 멋진 올드팝을 즐겨 듣고 B급 유머를 구사하며 자기만의 댄스를 즐길 줄 알았다. 이 작품의 루저들은 모자라지만 어딘가 웃기고 쿨하다면 <썬더볼츠> 속 루저들은 이런 쿨함조차 없다(그렇다. 루저도 종류가 다양하다). 이들은 자기가 저지른 한심한 짓을 곱씹으며 어둠 속으로 침잠한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한심함을 유머 코드로 활용했다면 '썬더볼츠'는 웃지 않는다. 대표적인 캐릭터를 살펴보아도 이런 차이는 뚜렷하게 감지된다. '썬더볼츠'의 얼굴인 옐레나(플로렌스 퓨)는 여러모로 '어벤져스'의 아이언맨(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상이하다. 이것은 단순히 배경, 성별, 인종에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아이언맨이 자신만만하게 매력을 내뿜는 캐릭터라면, 옐레나는 고민하고 방황하며 오래 묵은 상처에 눈물짓는다. 하지만 스스로의 모자람을 직시하고 투덜대면서도, 할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옐레나야말로 우리의 내일을 이끈다고 MCU는 말한다. 벌써 감성이 이렇게나 변한 것이다. 우리는 아이언맨의 시대에서 옐레나의 시대로 넘어왔다. 썬더볼츠와 어벤져스는 대적하는 상대도 다르다. 어벤져스는 무시무시한 빌런을 상대로 대전쟁을 치르고는 했다. 이때 적은 외부에 있었고 뚜렷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썬더볼츠는 그렇지 않다. 이 영화에서 발렌티나(줄리아 루이스 드레이퍼스)가 악역이긴 하지만 정작 진짜 싸움은 내부에서, 예상하지 못한 자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집중하는 감정도 다르다. 어벤져스를 포함한 많은 히어로가 적을 향한 '분노'를 품을 때, 썬더볼츠는 우리 안의 '공허'를 다룬다. 분노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대와 싸워야 하지만, 공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도와야 한다. 그 때문일 것이다. <썬더볼츠>에는 유독 협업에 관한 코드가 자주 등장한다. 중요한 건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고 이 영화는 말한다. 우리에게 닥친 위기를 함께 견디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제는 승리가 아니라 극복이 필요한 시기라고 말이다. 영화의 초반, 옐레나와 밥(루이스 풀먼) 등은 발렌티나의 함정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노력한다. 협력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들은 급기야 서로 팔짱을 낀 채로 벽을 오른다. 이토록 멋있지 않지만 끈끈하고 단단한 활동은 히어로물에서 간만이다. 이들은 결국 단단한 벽에서 빠져나와 외부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또한 이 장면은 썬더볼츠가 밥을 내면의 공허로부터 구출하는 장면과 공명한다. <썬더볼츠>에서 반복되는 모티프. 이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영원히 침잠할 것 같은 어두운 방을 빠져나와 밝은 밖에 발을 딛는다. 누군가는 이 영화가 이전의 히어로물만큼 짜릿하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썬더볼츠>의 특별한 점 때문이다. 이곳의 주인공은 멋지지도 쿨하지도 않다. 화려하게 비상하는 대신 엉뚱하게도, 자기가 만든 내면의 감옥에 갇히고는 한다. 그들은 적을 시원하게 때려눕히는 대신 한심한 협동이나 협상을 반복한다. 하지만 그들이 다음 세대 히어로로 느껴진다면, 그건 아마도 우리 안에 <어벤져스>가 다루지 못한 세계가 있으며, 이토록 누추한 썬더볼츠가 필요함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썬더볼츠>는 다음 세대의 히어로가 될 수 있을까. 나는 긍정적인 시그널을 감지하는 중이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디스토피아적 SF물의 대표주자. 기술을 잘못 사용하는 경우 닥쳐오는 어두운 세계를 그리는 시리즈물, <블랙 미러>가 돌아왔다. 2011년 영국 지상파인 Channel 4에서 시작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다가, 시즌 3부터는 넷플릭스를 통해 이어지고 있다. 실은 <블랙 미러>만큼이나 상상력이 풍부한 SF물, 혹은 우리의 암울한 상상을 자극하는 디스토피아적 작품은 많았다. 그러나 <블랙 미러>만큼 당대의 불안과 우려를 예리하게 포착하여 감각적인 이야기로 엮어내는 작품은 없는 것 같다. 그런 작품의 새로운 시즌이 귀환했다는 사실은 팬심을 들뜨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훌륭한 시리즈에도 업 앤 다운(up and down)은 있다. 모든 시즌이 기복 없이 좋기는 힘들기 마련. 떨리는 마음으로 확인한 시즌 7은 역대 시즌을 통틀어도 준수하다. 이 중에서 특히 완성도 높은 두 편을 골라 소개하려 한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기술과 미디어 뒤에 도사린 괴로움을 예리하게 잡아 증폭한 뒤, 스크린 위로 황홀하게 펼쳐내는 작품들이다. 아래부터 <블랙 미러> 시즌 7중 1화 '보통 사람들'과 3화 '레버리 호텔'의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다. 이번 시즌의 최전선에 자리한 1화 '보통 사람들'은 새 시리즈의 포문을 열 만한 작품이다. 이번 시즌의 정체성을 우리에게 또렷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제목에 어울릴 만한 평범한 부부가 등장한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여자는 어느 날 갑자기 뇌에 문제가 생겨 의식을 잃는다. 좌절한 남편 앞에 첨단 IT 기업 '리버마인드' 관계자가 접근한다. 자기 회사의 기술로 아내의 뇌를 살릴 수 있다며. 대신 매월 일정 구독료만 낸다면 말이다. 이 세계에서는 '뇌'도 구독할 수 있다. 아내와의 삶을 되찾고 싶었던 남자는 제안을 받아들인다. 아내의 상태는 호전되지만, 어느 날부턴가 알 수 없는 말을 하기 시작한다. 리버마인드가 구독자의 입을 통해 광고를 내보내는 것이다. 걸어 다니는 광고판이 되어 버린 것. 이들은 광고를 막기 위해 더 많은 구독료를 내고 '플러스'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한다. 하지만 이제 리버마인드는 시스템 서버를 위해 사용자가 자는 동안 뇌를 활용한다. 이를 끊어 내려면 더 비싼 요금제로 업그레이드해야만 한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막다른 길에 몰린 이들은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한다. 이 작품은 "흥미진진한" 구독 서비스가 어떻게 우리 삶을 서서히 옥죄다 마침내 잡아먹고야 마는지를 보여준다. 처음에는 적은 비용으로 획기적인 서비스를 제공해서 우리 삶을 그 기술에 이식한 다음, 이용자가 발을 뺄 수 없는 단계에서 참을 수 없는 불편을 주며 더 큰 비용을 지불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간신히 숨을 쉬며 기술을 쫓아가기 위해 허덕대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없다. 윤리가 실종된 곳에서 기술은 인간을 채찍질하는 도구로 작동할 뿐이다. 재밌는 건 이 작품이 구독 플랫폼으로 손꼽히는 넷플릭스에서 상영된다는 점이다. 이건 관대함일까, 자조일까, 혹은 그 모두를 초월한 자신감일까. 1화가 비관적인 미래를 상상한다면 3화 '레버리 호텔'은 그 반대다. 여기에는 기술 안에서 펼쳐진 빛나는 세계가 숨어있다. 한 업체는 첨단 기술을 활용해 레버리 호텔이라는 고전 영화를 리메이크하는 기획을 시도한다. 영화 속 세계와 똑같은 가상 세계가 만들어지고, 영화 속 캐릭터들은 마치 사람처럼 가상 세계 안에서 살아간다. 이 안에 현실의 배우가 접속하게 하여 영화를 찍는 것이다. 촬영이 시작되자 주연 배우 '브랜디'는 가상 세계에 접속한다. 그녀는 마치 영화 속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에 놀라워한다. 하지만 곧이어 시스템 오류로 가상 세계와 현실을 잇는 접속이 끊기며 브랜디는 가상 세계에 고립된다. 그녀는 영화 속 캐릭터 '클라라'에게 이 세계의 진실을 알려준다. 여기서부터 이 작품에서, 아니 이번 시즌을 통틀어서 가장 황홀한 장면이 등장한다. 자신이 만들어진 캐릭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클라라는 처음에는 방황한다. 하지만 곧 진실을 받아들이고 가상 세계 안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그녀는 곧 스스로의 존재를 유희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그녀에게 주어진 약간의 시간과 그녀가 속한 아름다운 세계를 있는 그대로, 진심을 다해 즐기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인생에서 때때로 마주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숨어있다. 자신은 유한하며 볼품없는 존재임을 깨달은 이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이 작품과 닮은 영화 <매트릭스>로 치환해서 얘기해 보겠다. 빨간 약을 먹은 이는 고통스러운 진실을 대면하게 되고 파란 약을 먹은 이는 포근한 거짓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는 또 하나의 선택지가 있다. 빨간 약을 먹고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말이다. 과연 우리는 그럴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블랙 미러>의 대답이 '레버리 호텔'에 담겨 있다. 클라라는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지만 그것을 담대하게 끌어안고 유희하며 산다. 여리게만 보였던 그녀의 결단은 눈물겹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몇 가지 변주를 거듭한다. 이 작품의 결론은 충분한 해피엔딩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세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행복을 추구하는 '리버리 호텔'의 태도가 녹아있다는 점에서 적절하고도 아름다운 결말이라 할 수 있겠다. 기술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우리의 삶을 뒤흔든다. 지축이 흔들리고 지표가 갈라질 때 땅 밑에 잠자고 있던 것들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기술이 가져오는 진동은 우리 의식의 수면 아래 감춰진 것들을 끄집어낸다. 거기에는 이기심, 탐욕 등 어두운 것들과 사랑, 자비, 생명의 활기 등 끝내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뒤엉켜 있다. <블랙 미러>는 눈부신 미래를 가운데 두고 우리 내면에 잠자고 있던 것들을 하나둘 펼쳐 보인다. 우리는 그중에서 매우 상반된 두 개의 이야기를 살펴보았다. 기업으로 대변되는 어떤 인간들의 잔혹한 이기심, 그리고 기술의 벽을 건너 이어지는 순수한 사랑. 두 가지에 관한 이야기. <블랙 미러>는 앞으로 길이 회자될 만한 걸작은 아니지만, 관객의 마음 깊숙이에 스며들어 잊고 살아가던 어느 날에 문득 떠오를 만한 작품이다. 그 이유는 <블랙 미러>가 결국 격변하는 세상 앞에서 몸을 떨다가 자기만의 답을 향해 서서히 가는 인간을 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 : 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