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대신 감각으로 쓰는 평론가. 영화와 문화에 대해 씁니다. 2016년 '씨네21'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등단.
올해 OTT에서 활발한 활약을 보여준 영화감독으로 '변성현'을 꼽을 수 있다. 하반기 <사마귀>에 이어 <굿뉴스>가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었다. 10월 말 기준으로, 한국 넷플릭스 영화 TOP 10 차트에는 변성현의 작품이 3개나 있다(<굿뉴스>, <킹메이커>, <사마귀>). 그러니까 우리는 일상에서 생각보다 자주 그의 작품을 접한다. 하지만 변성현에 대해 말해지는 것들은 많지 않다. 그가 스타일리시한 연출을 즐기며 킬러물, 형사물 등 독특한 세계관을 시도한다는 것 정도. 열성적인 마니아를 양산했던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전도연을 앞세운 여성 킬러물 <길복순> 정도. 하지만 사실 변성현은 제각기 다른 소재의 영화 속에서도 한 가지 주제에 꾸준히 천착해 왔다. 테마는 은밀하게 반복된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변성현 영화의 핵심이 있다. 그 숨겨진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아래에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일부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다. 변성현은 초기작인 <나의 PS 파트너>로 주목받았다. 지성과 김아중이 주연을 맡았고, 이들이 우연한 계기로 야릇한 전화를 하게 된다는 내용의 19금 로맨틱 코미디물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성에 관한 도발적인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낸다. 특히 성에 대한 말들을 가감 없이 쏟아내는 장면이 압권이다. 변성현은 <나의 PS 파트너>에서 경직된 한국 사회(이 영화는 2012년 개봉했다) 이면에 놓인 솔직하고 발칙한 커플들의 세계를 소개한다. 여기서부터 변성현의 관심사가 드러난다. 그건 현실에서 잘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이색적인 세계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언더커버 경찰과 마약 조직이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또한 두 조직 모두를 오가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마약조직 간부 재호(설경구)에게 접근하는 언더커버 경찰 현수(임시완)다. 어둠 속에 숨겨진 세계, 그 안에서 대립하는 여러 조직, 이들 사이를 오가며 진실을 깨닫는 한 명의 인물. 이런 구도가 변성현의 영화에서 중요하다. <킹메이커>는 같은 구도를 이어받는다. 여당과 야당이 등장하며, 영화는 화려한 선거판 이면의 어둡고 복잡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리고 양쪽 모두와 접촉하는 이가 있으니, 운범(설경구)의 그림자로 불리는 창대(이선균)다. 그는 정치판에 드리운 어둠 그 자체를 상징한다. 청부살인업자의 세계를 그린 <길복순>은 변성현표 킬러물의 포문을 연 작품이다. 소재 자체로 이미 지하 세계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도 여러 인물이 충돌한다. 대표적으로 차민규(설경구)가 세운 MK Ent(엠케이 엔터,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위장하고 있다)가 있고, 여기 속하지 못한 무직자들이 있다. 길복순(전도연)이 차민규에 대적하여 그의 세계를 타격하는 것이 이 영화의 내용이다. 여기서 이 세계의 질서에서 벗어나 이곳저곳을 오가는 인물은 다름아닌 복순이다. <길복순>이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는 영화라면 <사마귀>는 그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영화다. 복순의 다음 세대를 표방하는 한울(임시완)과 재이(박규영)는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변성현의 최신작 <굿뉴스> 역시 '가리어진 세계'를 다룬다. 이것은 역사에 남지 않아서 몰랐던 이야기다(이 영화는 픽션이지만,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비화를 표방한다). 변성현의 영화답게 여러 조직이 대립한다. 대한민국 정부, 일본 관료, 비행기 테러범 등. 이들 사이를 오가는 인물 역시 등장한다. 바로 아무개(설경구)와 서고명(홍경)이다. 아무개는 권력 작동의 어두운 비밀을 간직한 인물로, <킹메이커>의 창대와 비슷하다. 고명은 여러 장소를 오가며 세계의 진실을 깨닫는데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의 현수와 겹친다. 이 둘은 마치 아버지와 아들 같다. 아무개는 그가 아는 씁쓸한 진리의 조각을 현수에게 전달하고, 현수는 이들 받아들이거나 저항하며 성장해 나간다. 변성현은 이 둘을 통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관객에게 전한다. 이제 우리는 변성현의 영화에서 보이는 흐릿한 형체를 그려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그는 어둠 속에 숨겨진 세계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세계는 평범한 눈으로 보이지 않으며, 영화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접촉할 수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가려진 이면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이 세계는 여러 진영과 집단으로 나뉘어 반목하고 충돌한다. 이는 변성현이 생각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평화를 유지하던 룰은 깨지기 마련이고(<길복순>) 남겨진 인간들은 아귀다툼에 정신이 없다(<킹메이커>, <굿뉴스>). 그리고 아수라장 사이를 오가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 사람의 표정은 평온할 수도(<길복순>), 차가울 수도(<킹메이커>), 혹은 눈물이 가득할 수도 있다(<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그런데, 변성현이 이 모든 과정을 거쳐 닿고자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다. 그들은 충격적인 진실 앞에서 절망하기도, 냉소하기도 하지만 다른 인간과 부딪히고 타협하며 결국 자기 길을 찾는다. 밝은 빛의 세계는 말해주지 않는 진실. 그 앞에서 휘청거릴지언정 끝내 자기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버티는 인간들. 그들을 향한 애틋한 애정이 변성현의 영화에는 가득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인간을 믿는 휴머니스트다. 화려한 스타일, 도발적 소재, 감각적 연출. 변성현에 따라붙는 이런 수식어들은 이제 바뀔 때가 되지 않았을까. 어둡고 낯선 세계에서 새로운 진실과 마주하는 인간의 초상. 그것을 향해 뚜벅뚜벅 나아가는 변성현의 영화들을 더 많이 만나보고 싶다.
<부산행>, <반도> 등을 연출한 연상호 감독의 신작 <얼굴>이 최근 극장가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달성했다. 하지만 영화 자체는 큰 논의를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연상호의 흥미로운 시도' 정도로 일축되는 것 같다. 그러나 <얼굴>이 품은 메시지와 그것을 풀어내는 실력은 연상호의 작품 중에서도 뛰어나다. 특히 이 영화의 결말은 주제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어 관객의 사려 깊은 눈길과 해석과 요청한다. 오늘은 <얼굴>의 결말을 위주로 영화의 의미를 다시 이야기하려 한다. 아래부터 <얼굴>에 대한 스포일러가 나온다. 영화의 초반에 중요한 농담이 하나 등장한다. 전각 장인 영규(권해효)를 취재하러 온 다큐멘터리 PD 수진(한지현)이 묻는다. 아들 동환(박정민)을 키우는 과정이 힘들지 않았냐고. 이때 영규는 자식을 홀로 키운 자기 처지를 <심청전>의 '심학규(심 봉사)'에 비유한다. 얼핏 스쳐 지나가는 이 농담은 이상한 정념을 남긴다. 심학규가 누구인가. 자식의 희생으로 눈을 뜬 인물이 아닌가. 효녀의 아버지로 통용되는 이 남자의 스토리는 실은 잔혹하다. 영규의 비유는 단지 시각 장애라는 공통점만을 염두에 둔 것일까? 누군가의 희생에 대한 복선인가? 이 정도의 의문만을 남겨둔 채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로 하자. 우리는 잠시 후에 답을 찾을 것이다. 영규의 아내인 영희(신현빈)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녀는 한마디로 '진실을 드러내는 인물'이라 칭할 수 있다. 그녀는 어릴 때 아버지의 외도를 발설했다가 집에서 쫓겨난다. 공장에서 일할 때는 화장실 갈 시간조차 주지 않는 상황을 못 견디고 바지에 실례를 해 버린다. 요령을 부리지 못하고 열악한 업무 강도를 온몸으로 드러내는 영희. 그녀가 배설한 것은 '우리 안에 있지만 아무도 맨눈으로 보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그러니까 몸의 오물이자 사회의 더러운 진실이다. 영희는 백주상(임성재) 사장의 악행을 폭로하고야 만다. 자신을 홀대하는 사수 진숙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납득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위에서 보았듯이 영희는 그런 사람이다. 어떤 수모를 당하더라도, 진실을 만천하에 드러내고야 마는 사람. 하지만 결과는 참혹하다. 영희를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 누구인가를 판단하는 일은 쉽지 않다. 직접적인 폭력은 영규가 저질렀지만, 그녀의 손을 놓은 것은 진숙이다. 어렸을 때와 똑같은 구도. 영희는 폭력적인 남자와 이기적인(자기 자신을 위해 영희를 버리는) 여자의 합작으로 멍든다. 그녀는 집에서 쫓겨났던 어린 시절처럼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된다. 영규도 딱한 점이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사회의 폭력을 극복하기보다 깊숙이 내면화하여, 자기보다 약한 아내에게 퍼붓는 쪽을 택한다. 온 세상으로부터 받은 조롱으로 길러진 그의 수치심은 엉뚱하게도 아내에게 투사된다. 그는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못생긴 아내 때문에 수치스럽다. 그는 모른다. 자기를 위해주는 유일한 사람을 자기 손으로 죽였다는 것을. 일찌감치 들킨 범죄를 '아무도 모를 것'이라 자신할 때 느껴지는 부끄러움은 우리의 몫이다. 동환은 진실을 깨닫지만, 잠시 분노할 뿐 이를 묻기로 한다. 여기에서 이 영화의 주요한 장치가 빛을 발한다. 박정민 배우가 '젊은 영규'와 '동환'을 모두 연기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스토리상 다른 인물이지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동일 인물이라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결국 아버지를 따라가는 동환의 선택은 둘의 동일성을 강조하며 "동환 씨는 아버지를 닮았어요"라는 수진의 말은 그에 관한 확인사살이다. 그렇게 볼 때 영규는 아내의 죽음을 딛고 성공하여 동환으로 재탄생하며, 보이지 않던 '눈을 뜬다'. 심청이의 희생으로 눈을 뜨는 심학규의 설화는 이렇게 영규 위로 겹친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하나 더 남았다. 그건 영희의 얼굴에 관한 오래된 소문이다. '못생겼다'는 한 마디는 영화를 추동하는 큰 바람이다. 마지막 순간에 드디어 동환은 영희의 사진을 손에 쥔다. 이때 영화는 상당히 시간을 끌며 뜸을 들인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과연 <얼굴>은 어떠한 방식으로 끝을 맺을까. 충격받은 동환의 얼굴? 사진을 보지 않는 선택? 예상은 빗나갔다. <얼굴>은 영희의 얼굴을 그대로 보여주는 선택을 한다. 많은 이들이 이 장면의 의미를 궁금해한다. 그도 그럴 것이, 막상 드러난 영희의 얼굴은 평범하다. 우리는 찬찬히 뜯어보며 골똘히 고민한다. 정말로 못생긴 얼굴인가? 하지만 <얼굴>은 바로 그 순간의 우리를 포착한다. 영희의 얼굴을 판단하기 위해 스크린 앞에 모인 우리를. 그녀의 얼굴을 평가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우리는 영희에 관한 오랜 소문 안으로 초대되고, 빠져나갈 수 없는 공범이 된다. 아버지의 과오를 이어받는 동환, 여기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수진뿐만 아니라 그걸 지켜보는 우리 모두 영희를 둘러싼 폭력의 굴레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 여자의 사진 앞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것을 골똘히 바라보고 있는 우리 자신이다. <얼굴>이라는 제목이 지시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우리의 낯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결말에서 중요한 것은 영희의 얼굴이 아니다. 우리가 보낸 시선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는 순간이며, 그것이 부끄럽다는 깨달음이다. 그렇게 영희는 온 사회로부터 강요당한 수치심을 보는 이에게 다시 돌려준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건 영화의 연출이다. 담담한 표정의 영희 사진을 오래 비추는 선택. 그래서 <얼굴>의 마지막은 연출자로서의 연상호가 자기를 갱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은, 이 영화가 이러한 시선과 깨달음을 미리 설계하고 부추긴다는 것이다. "못생겼다"라는 반복적인 말. '똥걸레'라는 자극적인 용어. 보이지 않는 영희의 앞모습. 사진을 보기 전 뜸 들이는 시간. 이 모든 것이 관객으로 하여금 영희의 얼굴을 궁금해하고 마침내 판단하도록 만든다. 그런데 과연 영화는 그런 관객의 반응으로부터 결백하다 말할 수 있을까? 영희를 향한 괴롭힘에 동참한 것은 아닌가? 구조적 폭력을 드러내기 위해 관객을 연루시키는 전략은 좋다. 그러나 그것이 통하려면 '초대'의 선에 머물러야지 '부추김'으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얼굴>은 여전히 훌륭한 작품이다. 폭력적인 시선을 받아야 했던 누군가를 전면에 드러내는 과감한 결단. 결국 시선 자체를 생각하게 만드는 연출. 이런 마지막이 여태 연상호의 필모그래피에 있었던가? 여태 강도 높은 이야기와 강한 장르성을 보여주던 그가 사진 하나로 승부수를 던졌다는 것. 그건 연상호가 <부산행>의 성공을 반복하기보다 새로운 지대로 나아가길 염원하는 연출자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 그의 선택을 지지하고 싶다. 힘을 뺀 저예산 영화이지만 <얼굴>은 그의 어떤 작품보다 생기가 흐른다. 아마도 영화적 시도를 향한 야심이 빚어내는 밝은 기운이 아닐까.
2025년은 시리즈의 해인가? 올봄 <폭싹 속았수다>가 전국을 강타했고, 여름에는 <오징어 게임> 마지막 시리즈가 우릴 찾아왔다. 그런 와중에 <귀궁>, <미지의 서울>처럼 분명한 색깔로 알뜰하게 사랑받은 작품도 적지 않았다. 시리즈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행복한 한 해였을 것이다. 이런 행렬을 잇는 하반기의 기대작이 또 하나 있다. 최근 방영을 시작한 <사마귀 : 살인자의 외출>(이하 <사마귀>)이다. 이 작품은 일찍이 변영주 감독과 고현정 배우의 만남으로 기대를 모았다. 변영주는 최근 각종 예능에서 뛰어난 입담을 선보이고 있지만 실은 <낮은 목소리> 1, 2, 3편과 <화차>로 탄탄한 연출력을 인정받은 감독이다. 특히 이선균, 김민희 배우 주연의 <화차>는 여성의 서사와 스릴러 장르를 촘촘하게 엮은 수작이다. 그리고 고현정. 설명이 필요할까 싶지만 그녀는 미실, 아니 <선덕여왕>과 <여왕의 교실>, <마스크걸> 등을 통해 카리스마 넘치는 여성 주인공이 얼마나 넓은 스펙트럼에서 다채롭게 존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고만 일러두자. 두 장인의 만남은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 말도 안 되게 좋을 수도 있지만, 말도 안 되게 별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행히 변영주와 고현정은 전자에 가까운 것 같다. 이들은 깔아준 판 위에서 신나게 노니는 중이다. <사마귀>에 선명하게 찍힌 이들의 인장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아래부터 <사마귀>와 <화차>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다. 비록 변영주가 각본을 쓰진 않았으나 <사마귀>는 <화차>와 닮은 구석이 많다. 어쩌면 그 점이 변영주와 이 작품을 서로 만나게 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먼저 <사마귀>와 <화차>는 여성 살인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들은 맘에 드는 것이 있으면 피를 보더라도 취할 정도로 탐욕적이다. 또한 이들은 집요하다. 그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부르든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목표를 향해간다. 그래서 정이신(고현정)은 <화차> 속 살인자보다 더 독하고 거친 언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그건 두 작품이 집중하는 정서다. <화차>는 외부인의 시선으로 사건을 따라가는 작품이다. 여기에는 알 수 없는 사건을 바라보는 이의 두려움과 연민이 묻어있다. <사마귀>도 정이신이라는 희대의 살인마가 주는 두려움을 담는다. 그러나 <사마귀>는 살인자를 바라보는 아들 차수열(장동윤)의 시선에 자주 동조된다. 그래서 그녀를 마주하는 아들의 혼란, 그녀의 피를 받은 자신에 대한 공포가 중요한 축으로 작동한다. 두 작품의 소재는 비슷하지만, 집중하는 감정은 상당히 다르다. 변영주는 <사마귀>만의 정서를 절묘하게 쌓아 올린다. 이것은 주로 배우들의 연기로 재현된다. "피 냄새가 좋냐"는 수열의 물음에 이신은 "네가 태어날 때 나던 냄새잖니"라고 응수한다. 이 말은 정확히 수열의 공포를 정조준한다. 너는 나의 피를 받고 태어났어. 이건 경찰을 향한 도발일까, 아들을 향한 사랑의 언어일까. 여러 감정이 충돌하는 이 장면에서 고현정은 장동윤을 향해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돌진하며, 장동윤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가 쏘는 에너지를 피하고 자신의 페이스를 찾는다. 이토록 밀도 높은 장면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각본과 연출의 덕이며, 변영주가 강렬한 서사와 감정을 다루는 데 탁월하기 때문이다. 이제 고현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사마귀>에서 고현정은 이전에 보여주지 않았던 연기를 처음으로 보여준다. 그녀가 연기하는 이신은 품위 있어 보이지만 누구보다 본능적이고, 직선적인 한편 미스터리하다. 이를 위해 고현정은 퀭한 얼굴과 활활 타오르는 눈, 주술을 뱉어내듯 또렷하고 악랄한 말투를 장착하고 나타났다. 그리고 떨리는 손, 눈의 깜빡거림, 목소리 톤 등을 활용해서 불안하면서도 즐겁고 흥분되는 이신의 내면을 완벽하게 연기해 낸다. <사마귀>에서 고현정은 처음으로 속이 텅 빈 사람 같다. 그녀는 마치 이신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위하여 자기 내면을 모조리 불사른 사람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그녀가 연기하는 이신은 아무런 방해 없이 고현정 위로 투명하게 포개어지며 모든 감정을 마음껏 발산해 낸다. 이 작품에서 고현정은 너무나 '정이신'이라 좀 무서울 정도다. 이야기의 뼈대 위로 차근차근 정서를 쌓는 변영주. 그 푹신한 토대 위에서 작두 타는 고현정. 둘의 만남만으로 첫 스파크는 튀었다. 이 불이 마지막까지 유지될지는 지금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꽤 멋진 작업이라는 점만큼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제목 따라간다고 하던가. <사마귀>는 시청자를 짜릿하게 무는 데 성공했다.
최근 영화관, 안방 극장 할 것 없이 '스포츠물'이 사랑을 받고 있다. <트라이: 우리는 기적이 된다>와 <F1 더 무비> 얘기다. 예상하지 못했던 바람이다. 스포츠는 인기 있는 장르지만, 그만큼 식상하여 주목받지 못할 때도 많다. 그런데 지금 선전하는 두 작품은 특이하게도 같은 주제를 공유하며 극장과 TV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두 편의 작품 앞에서 묻게 된다. 우리는 지금 어떤 이야기를 쫓는 것일까? 그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아래부터 스포일러가 있다. <트라이: 우리는 기적이 된다>는 시청률 4.1%에서 시작해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며 화제가 됐다. 이 작품의 저력으로 여러 가지가 꼽힌다. 럭비라는 소재. 윤계상과 임세미, 김요한 등의 열연. 안정적인 스토리와 연출 등. 그런데 눈이 가는 요소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주가람(윤계상)이라는 캐릭터다. 그는 한때 주목받는 신예였지만, 마약 이슈로 퇴출당하고 말없이 잠적해 사회에서 지워졌다. 그는 가장 빛나는 무대 위에서 시커먼 나락으로 떨어지고 침묵 속에서 살았던 아픈 과거가 있다. 유쾌한 분위기에 가려졌지만 사실 주가람은 비극적인 추락을 경험한 인물이다. <F1 더 무비>도 마찬가지다. 소니(브래드 피트)는 주목받는 천재 루키였다가 사고로 F1의 무대에서 물러나고 만다. 그는 마지막 기회를 잡고자 최하위 팀인 APXGP에 복귀한다. 찬란한 성공을 맛보았으나 단 한 번의 실수로 사라졌던 영웅. 그의 간절한 복귀전을 그린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같은 뼈대를 공유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주가람과 소니는 모두 '리더'의 포지션이다. 그들은 과거에 천재적인 선수였지만 홀로 빛나는 별이었다. 주가람은 자기 팀원을 믿지 못했고, 소니는 천방지축이라 남들 사이에서 튀었다. 그러나 그들은 세월이 흐른 후 대장으로 귀환한다. 주가람은 럭비감독이며, 소니는 선수이지만 팀의 전략을 지휘한다. 그들이 자기 어린 시절과 똑 닮은 선수를 만나 때로 달래고, 때로 꾸짖으며 승리로 향하는 과정은 자못 큰 쾌감이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독특한 특징이다. 스포츠물은 '선수'의 장르다. 하지만 두 편의 작품은 '리더'로서 주인공의 면모를 강조한다. 뛰어난 플레이어의 독주가 아니라, 훌륭한 지도자의 지휘. 이것을 실현하는 캐릭터가 바로 주가람과 소니다. 그러니 이것은 재능 있는 선수가 노력해서 더 잘 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과거의 천재 선수는 고난을 거쳐 성숙한 뒤 진정한 리더로 복귀하여 새로운 세계를 연다. 지금 인기를 끄는 두 편의 작품, <트라이: 우리는 기적이 된다>와 <F1 더 무비>에는 우리 사회의 욕망을 꿰뚫는 코드가 숨어있다. 몰락했던 영웅이 참된 지도자로 귀환하여 승리의 길로 이끄는 스토리. 여기에서 젊은 층은 꼰대인 줄 알았으나 뭘 좀 아는 히어로를, 장년층은 허물어진 과거를 복구하는 데 성공한 애틋한 동료를 발견한다. 모두가 만족하는 그 무대 위에서 과거의 영광은 다시 재현된다. 전 세대가 인정하는 리더가 나타나 가장 빛나던 시대를 복원하는 것.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은밀하게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콘텐츠는 답을 알고 있다.
최근 극장가에서는 두 작품이 동시에 화제가 되고 있다. 이유는 좀 다르지만 말이다. 두 작품은 바로 <좀비딸>과 <전지적 독자 시점>이다. 웹툰을 원작으로 하였으며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다는 이유로 두 작품은 자주 비교된다. 그래서 후자와 다른 전자의 인기 요인으로 많은 이들이 원작을 충실하게 고증한 영상을 꼽는다. 하지만 <좀비딸>의 흥행이 원작에만 기대고 있다고 보기에는 서운한 구석이 있다. 이 작품에는 전통적인 극장가 흥행 공식들도 비춰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좀비딸>의 흥행을 견인한 요인에 대해 말해보려고 한다. 아래부터 <좀비딸>의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다. 글을 시작하기 전, 먼저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비록 인기 웹툰에 기반한 작품이지만 영화 <좀비딸>의 성취에 관해 다루며 영화에 등장하는 요인은 모두 영화의 성취로 취급하려 한다. 원작의 장점이 눈앞에 버젓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잘 살리는 것조차 영화의 역량이기 때문이다. 영화만을 볼 때 <좀비딸>은 상당히 고전미가 있는 작품이다. 먼저 <좀비딸>은 가장 보편적인 정서에 호소한다. 가족애, 부성애, 손녀를 향한 할머니의 애정 등이 그것이다. 이건 인류의 역사와 함께 무수한 예술 작품들이 다뤘던 바로 그 정서다. 너무 흔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흔한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스토리와 비주얼 등 나머지 요소가 괜찮다면 관객은 문턱 없이 쉽게 작품에 진입할 수 있다. 보편적 정서를 통해 최대한 많은 관객을 불러 모으는 것, <좀비딸>의 첫 번째 전략이다. 다음으로 <좀비딸>은 '반전'의 기술을 쓴다. 반전은 영화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요소다. <좀비딸>은 좀비에 감염된 딸 수아(최유리)의 변화를 따라간다. 처음 그녀는 다른 좀비들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러나 내용이 전개되며 그녀는 편견을 깨고 가족들과 무리 없이 잘 지낸다. 처음에는 음식을 먹고, 다음으로 사람을 물지 않고, 결국 소리 내어 말하는 등 좀비 수아의 변화 과정은 흥미롭다. 관객으로서 우리는 처음 좀비에게 거리감을 느꼈다가, 아빠 정환(조정석)이 바라보는 수아에 공감하며 그녀의 안녕을 바라게 된다. 이 모든 요소들이 반전이다. 수아를 보는 우리의 시각 변화, 수아의 변화, 그녀를 보는 세상의 변화까지. 게다가 영화의 마지막에 드러나는 반전이 하나 더 있다. 우리의 현실에는 반전이 많지 않으나, 예술 작품 안에서 판을 거꾸로 뒤집는 짜릿한 전개에 우리는 전율한다. 훈훈한 스토리에 쉽게 다가온 관객들을 반전 매력으로 꼭 잡아두는 것, <좀비딸>의 두 번째 전략이다. 마지막 전략은 바로 '조정석'이다. 전략으로 스타를 꼽게 될 줄이야. 물론 그가 연기하는 정환은 다정다감하며 딸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누가 보아도 좋아할 만한 캐릭터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나는 지금 조정석이라는 배우의 변화에 대해 말하고 있다. <건축학개론>을 통해 주목받은 그는 왕성한 활동을 이어 왔다. 그런데 지난해 개봉한 <파일러>을 계기로 조정석이라는 스타의 성격이 바뀌고 있다는 인상이다. <좀비딸>과 <파일럿>은 공통점이 있다. <파일럿> 역시 관객 수 471만 명을 동원하며 극장가 한파 속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뒀다. 두 작품 모두 조정석 배우가 코미디 대부분을 끌고 가는 희극이며, 조정석은 아이의 아빠로 출연한다. 예전에 이와 동일한 포지션에서 꾸준히 국민적인 사랑을 받은 배우가 있었는데, 그는 차태현이다. 친근한 이미지 뒤에 가려져 있지만 그는 <엽기적인 그녀>부터 시작해 <과속스캔들>, <신과 함께>까지 누구보다 많은 작품을 흥행시킨 대표적 스타다. 호감 가는 얼굴과 코미디 감각으로 조정석은 차태현을 능가하는 배우로 성장할 조짐을 보인다. 스타의 매력으로 관객을 마지막까지 끌고 가는 것이 바로 <좀비딸>의 마지막 전략이다. 어찌 보면 당연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위에서 언급한 요소들이. 보편적인 정서, 반전 있는 서사, 재밌고 편안한 스타 배우까지. 하지만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지겨울 정도로 익숙한 이 공식을 새로워 보이도록 적용하며 관객의 편안함과 설렘을 동시에 자극하는 것이다. 사랑스러운 가족, 좀비에 관한 반전, 조정석이라는 배우의 얼굴을 통해 <좀비딸>은 공식 적용에 성공한다. 익숙한 레시피로 새로운 맛을 내는 <좀비딸>이 어디까지 가는지 좀 더 지켜보려 한다. 이토록 익숙한데도 전망하기 어려워서 영화는 흥미롭다.
수년 전부터 인기 있는 웹툰/웹소설이 영화화되는 경향이 쭉 이어지고 있다. 강풀 원작의 <이웃사람>부터 웹툰-영화의 포문을 열어젖힌 <신과 함께>까지. <중증외상센터> 같은 OTT 작품까지 고려하면 이제 이런 경향은 대세로 자리 잡았다. 웹툰과 웹소설을 영상화하는 이점은 적지 않다. 일단 검증된 작품이므로 리스크가 적고, 원작의 팬덤을 관객층으로 흡수할 수 있다. 이는 고전 명작의 재개봉, 또는 리메이크가 늘고 있는 극장가 트렌드와도 부합한다. 흥행을 보장할 수 있는 안전한 선택지다. 하지만 이런 기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인기작의 영화화는 흥행으로 이어진다'는 공식이 깨어지려 한다. 그간 작은 시그널은 있었다.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시리즈물 <광장>에 대한 대중의 심드렁한 반응이 그 사례다(그에 관해 '"이걸 빼다니"...'광장' 원작 팬들이 분노한 진짜 이유'에서 썼다). 그리고 <전지적 독자 시점>에 이르러 우렁찬 경고음이 울려 퍼지고 있다. 탄탄한 원작 팬덤을 둔 이 영화는 개봉과 함께 묵직한 비판에 직면했다. 팬들 사이에서는 "원작을 이해하지 못했다", "기존 세계관을 헤쳤다", 또는 "모욕감을 느낀다"라는 반응까지 나온다.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은 원작의 설정을 상당 부분 바꾸었다. 하지만 수정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그 아래 흐르는 어떤 핵심적인 부분을 이 영화가 잘못 건드렸다는 점이다. 그에 관해 말해보려 한다. 이는 앞으로 이어질 웹툰·웹소설 원작 영화를 위한 제언이기도 하다. 아래부터 <전지적 독자 시점>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다. 나는 앞서 '"이걸 빼다니"...'광장' 원작 팬들이 분노한 진짜 이유'라는 글에서 웹툰/웹소설을 영상화할 때 유념할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오리지널을 개작할 때 반드시 조심하여야 할 두 가지 요소가 있으니, 바로 '주제'와 '정서'다. 이 같은 분석은 <전지적 독자 시점>에서도 그대로 맞아떨어진다. 이 영화는 원작의 디테일을 많이 바꾸었다. 웹소설에 등장하는 무기, 배후성, 시나리오 등 많은 부분이 변했다. 그러나 2차 창작물에서 개작은 흔하다. 소설, 만화, 그리고 영상 사이의 아득한 거리를 생각한다면 수정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원작 팬덤을 잡고 싶다면 이 같은 수정은 디테일의 차원에서 머물러야 한다. 주제와 정서가 바뀌는 순간 팬들은 2차 창작물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전지적 독자 시점>도 같은 실수를 한다. 원작의 주제는 이 작품의 제목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전지적 '작가'가 아닌 '독자'의 시점. 그것은 작품을 읽는 독자의 활동으로 온 세상을 구원하는 새로운 질서, 새로운 세계를 지향한다.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했지만, 하나의 웹소설만큼은 빠삭하게 독파한 남자. 그리고 그가 즐긴 활동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세상. 세상의 축을 뒤엎고 재정의하는 그 전복의 과정이야말로 판타지의 핵심이다. 이 같은 주제는 작가-주인공-독자 사이의 경직된 관계를 재편하는 시도로 드러난다. 하지만 영화에 이르러 이런 주제는 희미해진다. 대신 영화는 '과도한 경쟁 사회에 대한 비판'을 전면에 내세운다. 주제가 바뀌었을 뿐 아니라 진부해졌다. 이 과정에서 정서 역시 변한다. 원작에서 주인공 '김독자'는 목표지향적이며, 협상과 심리전에 능한 복합적 캐릭터다. 하지만 영화의 독자(안효섭)는 윤리에 치중하는 납작한 인물이다. 원작과 달리 이 영화의 정서는 단편적이고 교과서적이다. 그러니 원작 팬은 물론 관객의 지지를 받기 어려운 것이다. 반면 윤태호 웹툰을 바탕으로 한 디즈니플러스의 <파인: 촌뜨기들>은 호평을 받고 있다. 캐릭터만을 보았을 때, 이 시리즈는 원작과 상당히 다르다. 그러나 '보물선을 둘러싼 탐욕과 암투'라는 주제를 견지하며, 영상 속 인물들의 결을 살리는 데 집중하기 때문에 원작 팬과 시청자 모두 잡는 데 성공했다. 물론 주제와 정서 모두 바꾸는 시도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 경우 원작 팬덤의 이탈을 각오한 상태에서 새로운 정면승부를 펼쳐야 한다. 이 싸움에서 감독은 원작 어드밴티지를 버리면서까지 보여주고픈 무언가를 펼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전지적 독자 시점>은 이 부분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 또 하나 안타까운 부분.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이 원작을 개작한 방식에서 한때 극장가를 휩쓴 '천만 영화'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가장 보편적인 정서를 건드릴 것. 선량한 주인공과 이기적인 빌런이 싸우게 할 것. 감동적인 결말로 마무리할 것. 하지만 '천만 영화 시대'는 이미 지나간 지 오래다. 지금은 다양하게 분화한 관객의 취향에 맞는 독특한 작품이 주목받는 때가 아닌가.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의 전략은 <신과 함께> 시절에 머물러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번 사례에도 불구하고 웹툰·웹소설을 영화화하는 시도는 이어질 것이다. 점차 쪼그라드는 영화판에서 여전히 승산 있는 선택지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말 영리한 선택이 되려면, 원작의 근간에 무엇이 흐르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흥행뿐 아니라, 하나의 세계를 빌려오는 창작자의 윤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눈 한 번 깜짝 하면 AI 기술이 온 세상을 바꾸는 시대. 이런 때에 히어로 계의 조상님, DC 코믹스의 시조새, '슈퍼맨'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슈퍼맨을 다룬 비교적 최근 영화인 <맨 오브 스틸>(2013)조차 개봉한 지 10년이 넘었다. 그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슈퍼맨 캐릭터는 어쩐지 지겨울 정도로 익숙하다. 오래전부터 영웅의 상징으로 꼽힌 슈퍼맨. 그의 이름 위에는 찬란한 시간만큼이나 두꺼운 먼지가 쌓여있다. 이를 훌훌 털어버리고 이 남자를 다시 비상하게 할 방법은 없을까? 최근 개봉한 영화 <슈퍼맨>이 당면한 과제다. 눈부신 전통을 이으면서 새롭게 보일 것. 이율배반적인 요청을 달성하기 위해 감독 제임스 건은 몇 가지 전략을 쓴다. 그의 전술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다시 돌아온 슈퍼맨과 인사를 나누는 건 어떨까. 아래부터 영화 <슈퍼맨>의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다. 그 이름이 상징하듯이, '슈퍼맨(Superman)'이라는 캐릭터는 애당초 평범한 인간(man)이 아니다. 그리고 역대 슈퍼맨은 자기의 압도적인 능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타고난 강함을 이용해 홀로 사람들을 구원하는 '초인'은 요즘의 트렌드와 맞지 않다. 지금 시대는 인간을 존중하면서 여러 목소리를 조율하는 영웅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슈퍼맨>은 다른 길을 간다. 영화에서 슈퍼맨(데이비드 코런스웻)은 꽤 인간적이다. 첫 장면에서 그는 피를 흘리며 고통에 신음한다. 게다가 그는 강아지를 통해 위기에서 벗어난다. 지쳤을 때 시골의 부모님 집을 찾아 휴식하며 회복하는 모습도 다분히 인간적이다. <슈퍼맨>은 히어로도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차별화를 꾀한다. 하지만 슈퍼맨은 시련을 맞는다. 렉스 루터(니콜라스 홀트) 일당은 그가 지구인과 다르다는 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이때 슈퍼맨은 자기의 방식대로 '인간'을 다시 정의하며 그가 여느 사람과 같다는 점을 강조한다. 결국 <슈퍼맨>은 슈퍼맨이 우리와 같은 인간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이에 답하는 영화다. 두 번째 전략. 이 영화에서 슈퍼맨은 마치 서부극의 단독자처럼 홀로 활약하지 않는다. 대신 팀이 있고 이들과의 협업을 추구한다. 이전에도 슈퍼맨은 <저스티스 리그>(2017) 등에서 다른 히어로와의 케미스트리를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슈퍼맨>에서 그는 확연하게 '저스티스 갱'의 일원이 되어 각 멤버들과 재밌는 조합을 보여준다. 저스티스 갱의 특징은 멤버들이 개인주의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기주의적인 것과 다르다. 이들은 팀이 되어서도 서로를 구출하는 일에 심드렁하다. 또한 이들은 서로를 크게 의식하지 않으며 애틋함은 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 하지만 마치 관성에 찌든 직장인처럼, 해야 하는 일은 확실하게 해낸다. 어딘가 평범하지 않은, 색다른 팀플레이는 제임스 건 감독의 특기다. 그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에서 이미 B급 감성이 물씬 묻은 캐릭터를 팀으로 묶어 저글링 한 경험이 있다. 구성원 한 명 한 명은 한심한데 기가 막히게 잘 굴러가는 조별 과제. 제임스 건은 <슈퍼맨>에서 다시 한번 생소한 팀을 조합하며, 이미 익숙한 '슈퍼맨' 캐릭터를 새로운 케미스트리 안에서 풀어낸다. 마지막으로 (이미 조금 말했지만) <슈퍼맨>에는 제임스 건의 인장이 묻어있다. 괴수의 눈알을 공격하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괴상한 장난스러움. 스멀스멀 몸을 침투하는 나노봇의 징그러운 이미지. 이는 모두 제임스 건의 트레이드 마크다. 이런 점들이 슈퍼맨과 만나며 오래된 시리즈는 2025년의 공기를 입는다. 그렇다면 제임스 건의 인장은 이 영화에서 충분히 드러났을까? 아쉽게도 그렇지 않다. 잔혹함, 천진난만함, 폭력성, 귀여움 등이 마구 뒤섞인 제임스 건 특유의 색깔은 이 영화에서 다소 옅다. 가끔 그것을 드러내는 장면조차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슈퍼맨 시리즈의 무게가 그에게 부담을 준 것일까? 차라리 자기 색을 확실하게 입히는 과감한 선택을 했다면 <슈퍼맨>은 훨씬 흥미로웠을 것이다. 약간의 아쉬움은 있지만, 이번 영화에 이르러 슈퍼맨은 드디어 헌 옷을 벗고 새 옷을 갈아입는 데 성공한다.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에서 기대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저스티스 갱이다. 똑똑하고 까칠한 미스터 테리픽(에디 가테지), 허세가 있지만 은근히 의리 있는 그린 랜턴(네이선 필리언), 쿨하지만 싸울 때는 광기가 보이는 호크걸(이사벨라 메르세드)의 활약이 기대된다. 낯설고 이상한 팀. 하지만 어쩐지 기대되는 조별 과제. 13년 만에 복학한 우리의 모범생, '슈퍼맨'은 2025년에 잘 적응하고 있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인기가 거세다. 지난달에 공개된 이후 2주가 다 되어 가지만, 여전히 넷플릭스 전 세계 차트 영화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6월 말 기준, FlixPatrol 참고). 여태 시청자의 사랑을 받은 작품은 많지만,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인기에는 특별한 구석이 있다. 시청자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방영 직후 유튜브에는 주인공의 공연 장면을 편집해 뮤직비디오 형식으로 올린 영상들이 줄줄이 업로드되었다. 이런 움직임은 제작사인 소니 픽처스 애니메이션이나 넷플릭스가 아니라, 팬덤 차원에서 먼저 일어났다. 댓글의 반응도 폭발적인데, "영화 속 아이돌의 공식 앨범을 내달라", "호랑이 굿즈를 내달라", "버추얼 아이돌로 데뷔해 달라" 등등 현실 아이돌의 인기를 능가한다. 이미 많은 이들이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인기 요인을 짚었다. 중독성 강한 사운드트랙, 세심하게 디자인된 캐릭터. 한국의 케이팝(K-pop) 문화도 잘 구현하였고, 홍보 영상으로 써도 좋을 만큼 한국적 요소도 훌륭하게 녹여냈다. 하지만 여전히 잘 얘기되지 않는 요인 하나가 있다. 이것은 <오징어 게임> 등 넷플릭스에서 열풍을 일으킨 다른 작품에서도 통용되는 이야기다. 그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매력으로 '한국적 요소'가 꼽힌다. 이를테면 라면, 목욕탕, 남산타워 등 한국인이 일상에서 즐기는 것들은 물론이고, '작호도'에서 튀어나온 듯한 호랑이, 저승사자를 떠올리게 하는 '사자 보이즈'의 콘셉트 등 한국 고유의 문화도 상당히 가미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한국적 요소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다고 보는 해석이 압도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절반만 사실이다. 그 이유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한국적인 소재를 활용하되, 그것을 너무 부담스럽거나 생소하지 않게, 다시 말해 글로벌 트렌드 위에서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국 문화'와 '글로벌 감성'의 절묘한 배합, 이것이 핵심이다. 일단 <케이팝 데몬 헌터스> 한국적 아이템을 차용하지만, 극의 정서는 지극히 보편적이다. '라면'과 '목욕탕'은 한국적이지만, 틈틈이 간식을 먹고 싶고 늘어져 쉬고 싶은 감정은 누구나 공감할 만하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은 케이팝의 대표적인 특성을 잘 고증했다. 카리스마, 시크, 귀여움의 매력을 고루 지닌 '헌트릭스' 멤버들, 데뷔곡은 청량하고 후속곡은 다크한 '사자 보이즈'의 노래 등이 그렇다. 하지만 치고받고 싸우는 와중에도 '최애'의 얼굴에 정신이 팔리는 주인공의 재밌는 모습은 한국을 넘어 전 세계 팬들이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신선함'과 '보편성'을 동시에 잡는 것. 이것은 넷플릭스와 같은 글로벌 플랫폼에서 특히 중요한 덕목이다. OTT의 시청자는 영화가 아니라 TV 프로그램을 보듯 일상 속에서 편안하게 콘텐츠를 접한다. 그렇기 때문에 OTT 시청자는 너무 생소하거나, 혹은 지루한 작품을 선호하지 않는다. 눈길을 잡아끌 만한 요소가 있는 대신에, 지나치게 에너지를 쏟지 않아도 될 만큼 친근한 스토리를 선호한다. 퇴마, 속죄, 정체성 등을 다루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서사 역시 이미 알고 있어서 더 맛있는 그 맛이다.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흥행한 <오징어 게임> 시리즈에도 적용되는 원리다. 이 작품의 첫 번째 시즌은 한국의 전통놀이, 화려한 세트장 등 신선한 소재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잔인한 본성, 극한의 자본주의 시스템 등 공감할 만한 서사를 줄기로 삼는다. 반대로 시즌 2, 시즌 3로 갈수록 혹평이 늘어난 것은 소재의 신선함이 떨어지며 스토리의 평범함만이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예상치 못하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으며 그 안의 한국 문화도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런 열기를 즐기는 한편, 작품의 인기 요인을 분석하는 시도도 필요할 것 같다. 낯선 재료로 요리할 때는 익숙한 레시피와 부재료를 활용하듯이, 새로운 문화를 소재로 삼을 때는 낯익은 것들을 잘 조합하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케이팝 데몬 헌터즈>에서 주목할 것은 낯섦과 친숙함을 맛있게 배합하는 그 노련함이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웹툰 '광장'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시리즈 <광장>이 화제다. 실은 화제라기보다 논란에 가깝다. 원작의 매력을 담아내지 못했다는 이유다. 개인적으로 두 작품을 보기 전까지 논란의 이유를 공감하지 못했다. 개작한 작품은 원작과 다른 것이 당연하고, 과감한 시도를 하는 것이 콘텐츠의 미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작품을 모두 본 후, 생각이 달라졌다. 만화나 소설을 영상화하는 도전은 여전히 응원한다. 하지만 <광장>에 관한 뭇사람들의 반응은 이해가 간다. <광장>에는 나름의 장점이 있으므로 평가절하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웹툰을 영상화한 사례 중에서도 유독 원작 팬들의 반응이 좋지 않은 <광장>을 다각도로 살펴보며 그 이유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만화나 소설을 영상화할 때 특히 유념해야 할 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고 싶다. 아래부터 <광장>에 대한 스포일러가 나오니 유념해 읽어주기를 바란다. 시리즈물 <광장>과 웹툰 '광장'은 여러 지점에서 다르다. 여기에는 긍정적인 변화도 있다. 가령 <광장>은 웹툰에 부족한 현실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세부를 추가한다. 주운과 봉산 사이 서사도 풍부해지고, 인물들의 대사도 늘었다. 반대로 웹툰의 강렬한 액션이 영상에서 다소 느슨하게 느껴져서 아쉬울 때도 있다. 하지만 이는 만화적 생략(예를 들어 만화에서는 액션을 단 하나의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이 어려운 영상의 자연스러운 한계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이런 보편적인 부분은 다루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도 있다. 웹툰과 다른 시리즈물 <광장>의 아쉬운 변화. 그것은 애초에 건드리지 말거나, 건드릴 것이라면 제대로 하여서 원작을 넘어서야 할 부분을 애매하게 건드렸다는 뜻이기도 하다. 통상 오리지널을 개작할 때 조심하여야 할 두 가지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원작의 주제와 정서다. 이것은 원작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요소이므로 바꾸지 않는 편이 좋다. 웹툰 '광장'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의 주제는 제목과 상통한다. 광장에서 시작된 치열한 전쟁으로 세계는 잠시 평화를 얻었으나, 방만한 실수로 밸런스가 깨어지며 다시 광장에서 지옥도가 펼쳐진다.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이 세계의 엄혹한 질서를 상징하는 단어가 바로 '광장'이다. 그러나 시리즈물 <광장>은 이 부분을 삭제한다. 광장은 다시 열리지 않으며, 존재감도 미미하다. 대신 봉산과 주운, 둘을 통칭할 때 '광장'이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여기에는 철학이 없으며 지시적인 의미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원작에서 주인공 기준의 모든 여정이 결국 광장으로 수렴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는 앙꼬 없는 찐빵 같은 느낌을 준다. 또한 시리즈와 웹툰은 정서도 다르다. 원작 팬들이 웹툰과 시리즈, 둘이 서로 다른 작품이라고 말하는 이유에는 이런 차이가 한몫을 한다. 웹툰 '광장'의 특징은 선이 굵으면서 묵직한 감성이다. 먼치킨(압도적인 능력을 갖춘 캐릭터) 주인공의 속 시원한 액션, "중2병이 다시 올 것 같다"는 즐거운 비명까지 나오는 멋진 대사 등이 이런 감성을 조각한다. 하지만 시리즈물 <광장>에는 이토록 서걱서걱하며 피비린내 나는 정서가 부족하다. 있긴 있는데 생각보다 옅다. 주제와 정서. 원작의 향기를 유지하는 것은 이 두 가지다. 그러므로 어떠한 변형을 거치더라도 이 두 가지는 유지되어야 시청자는 원작과의 연결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들은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다만 원작과의 끈을 끊어낼 정도로 타격이 큰 시도이므로, 그 결과물이 좋지 않을 때 거센 비판을 맞닥뜨리게 된다는 점을 고려하는 것이 좋다. 원작의 설정만 차용하며 전혀 다른 작품을 만드는 건 어떤가? 상관없다. 다만 이런 경우 원작을 이용해 홍보하는 것은 기만적으로 느껴질 수 있으므로, 예비 시청자와 원작 팬에게 충분히 설명하는 태도는 필요할 것이다. 시리즈물 <광장>이 원작의 장점을 버리면서 변화를 시도한 이유는, 아마도 서사 때문으로 추측한다. <광장>은 웹툰과 다른 방식으로 서사를 진행하고 새로운 캐릭터를 등장시키며 차별화를 꾀한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작품의 주제가 바뀐다. 또 달라진 부분에 대한 설명을 추가하다 보니 원작의 담백함이 사라져 정서도 달라진 것이다. 그 결과에 대한 평가는 시청자 개개인의 몫이다. <광장>에 대한 지적이 안타까운 이유는, 이것이 새로운 시도에서 뻗어 나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도전을 하지 않는 작품보다, 리스크를 안고서라도 그것을 감행하는 작품을 존중한다. 그러나 원작에서 유달리 사랑받은 요소는 그대로 유지하며 나머지 부분에서 도전하는 것이, 개작하는 이들에게 유용한 전략이 될 것 같다. 인기 있는 만화, 소설을 영상화하는 작품은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기억하라. 오리지널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사진 : 넷플릭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지난 4월 시작한 16부작 드라마 <귀궁>이 곧 종영을 앞두고 있다. <귀궁>은 1화부터 9.2%라는 높은 시청률로 출발해 꾸준히 8~10%대를 기록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멀리는 SBS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2016)부터 가까이는 SBS <홍천기>(2021), tvN <환혼: 빛과 그림자>(2022)까지, 판타지 사극은 꾸준히 인기 있는 장르에 속한다. 그러나 <귀궁>의 인기에는 장르의 특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이번 글에서는 오랜만에 돌아온 판타지 사극 <귀궁>이 시청자의 사랑을 받는 데 성공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아래부터 작품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다. 처음 시작할 때, <귀궁>은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볼거리로 주목받았다. 동양 판타지를 배경으로 로맨스, 무속, 퇴마 등을 고루 결합한 점, 그리고 육성재(비투비), 김지연(우주소녀) 등 아이돌 출신의 배우들이 주연을 맡은 점 등이다. 여러 요소를 혼합한 <귀궁>의 전략은 탁월했고 배우들도 연기, 화제성 등 모든 측면에서 자기 몫을 톡톡하게 해냈다. 그러므로 이런 요소들은 <귀궁>에 시청자를 유입시키는 첫 번째 매력으로 작동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드라마'라는 까다로운 매체는 시청자의 유입을 꾸준히 지속하지 못하면 결국에는 고사하고 만다. 그런 점에서 안정적으로 높은 시청률을 확보해 온 <귀궁>의 성취는 눈에 띈다.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가장 큰 비결은 <귀궁>의 짜임새 있는 각본이다. <귀궁>에는 서사의 낭비가 거의 없다. 첫 화부터 등장한 '외다리귀(이태검)'는 눈길을 사로잡으며 시리즈의 성격을 보여주는 소재에 그칠 것이라 짐작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귀신은 '팔척귀'에 얽힌 비밀의 실타래를 풀어내고, 왕 이정(김지훈)의 태도 변화를 이끄는 등 이중, 삼중으로 서사 전개에 기여한다. 관계성 위주의 캐릭터로 보였던 이무기 비비(조한결)와 최인선(신슬기)도 스토리를 견인하는 데 한몫을 한다. 귀여움을 담당하는 야광귀(박다온)까지 제 역할을 해내며, 처음 등장했을 때 던진 '신발'에 관한 떡밥을 회수하면서 사라진다. 주연은 물론 조연까지, <귀궁>에 등장하는 다채로운 인물들은 자기만의 색깔을 보여주며 작품을 풍부하게 수놓다가 '팔척귀'에 관한 서사의 큰 줄기에 통합되며 퇴장한다. 이는 한 캐릭터가 극 안에서 중층적인 역할을 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캐릭터조차 작품의 스토리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느껴지는 '반전'이 여기저기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시청자는 이런 순간마다 크고 작은 쾌감을 느끼며 작품에 다시 빠져든다. 또한 여러 인물이 등장해도 내용이 산만해지지 않으며 팔척귀에 관한 중요 서사 위주로 응집력 있게 흘러간다는 것은 <귀궁>의 큰 장점이다.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귀궁>이 로맨스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을 지나치게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이다. 로맨스와 관련해 <귀궁>은 절제된 태도를 유지한다. 연인이 서로의 마음을 오해하게 만들거나, 삼각관계를 등장시켜 피로감을 높이는 무리수를 택하지 않는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귀궁>의 인기를 단단하게 붙들어 맨다. 한때 한국 드라마를 묘사할 때, 어떤 스토리든 로맨스물로 만들어버린다는 말이 우스갯거리로 떠돌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K-드라마가 사랑 타령만을 반복하는 때는 지난 듯하다. 대중적으로 큰 사랑을 받은 작품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눈에 띄는 요소를 놓고 인기 요인을 분석하는 경향이 있다. 화려한 VFX(특수영상 및 시각효과), 주목받는 배우진, 상상력을 자극하는 장르적 특성까지. 이 모든 것이 지금 <귀궁>의 인기를 만들어낸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작품이 이리도 안정적으로 인기를 견인할 수 있었던 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역할이 컸다. 그것은 짜임새 있는 각본과 절제된 로맨스, 여기 더해 적절한 때 치고 빠지는 캐릭터와 주·조연 배우들의 연기력 등이다. 마치 튼튼한 뼈대가 건실한 건축물을 지탱하듯이, 보이지 않는 요소들이 합쳐 작품의 매력을 완성한다. 이런 장점이 마지막 빛을 발산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기를 바라며 <귀궁>의 마지막 화를 기다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