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대신 감각으로 쓰는 평론가. 영화와 문화에 대해 씁니다. 2016년 '씨네21'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등단.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최근 한 남자 배우의 혼외자에 대한 뉴스를 계기로, 결혼 없는 출산에 대한 논의가 빠르게 번지고 있다.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 사이에는 이전과 다른 분위기가 감지된다. 이제 연애, 성, 결혼, 그리고 출산을 어느 정도 독립적인 변수로 대하는 이들이 많아진 것 같다. 연애가 곧잘 결혼과 출산으로 이어지던 예전과 달리, 지금 우리는 보다 다양한 선택지를 손에 쥐게 되었다. 여러 선택지가 주어질 때, 사람은 찬찬히 생각하기 시작한다. 결혼이란 무엇이고, 사랑이란 무엇일까? 그래서인가. 이들을 각각 해체한 뒤, 그 본질을 탐구하는 콘텐츠가 늘었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시리즈 <트렁크>도 그런 작품이다. <트렁크>에는 계약 결혼 서비스를 제공하는 조직, 'NM(New Marriage)'이 등장한다. 이들은 의뢰인에게 기간제 배우자를 보내준다. 이 도발적인 설정은 동명의 원작 소설에 기반했다. 그러나 원작이 '결혼 제도'의 의미를 되묻는다면, 이 시리즈는 계약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에 천착한다. 거기에는 우리의 고민과 욕망의 한 단면이 비춰 보인다. 아래부터 <트렁크>와 <나의 해방일지>에 대한 스포일러가 나오니, 유의해 읽어주길 바란다. 정원(공유)은 전처 서연(정윤하)에게 버림받았지만, 여전히 그녀를 놓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서연이 제안한다. '1년 동안 다른 여자와 결혼 생활을 해. 그 시간을 무사히 견디면 너에게 돌아갈게.' 그러니까 전처가 전남편에게 계약 결혼을 권하는 상황.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녀를 붙잡고 싶은 정원은 제안을 받아들인다. 곧 기간제 와이프(?) 인지(서현진)가 나타난다. 하지만 정원은 그녀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지 역시 아내 역을 충실히 해내지만, 자신의 과거 얘기는 하지 않는다. 얼핏 보아 여느 부부와 다름없는 그들은 함께 공유하는 역사가 없다. 껍데기만 말끔한 결혼. 또 하나, 그들 사이에는 '성(性)'이 결여돼 있다. 정원은 인지에게, 당신이 정말 아내라면 함께 잘 수도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 하지만 이건 맘에 들지 않는 상대를 향한 도발일 따름이다. (후반부를 위한 복선이기도 하다) 성생활을 즐기는 서연과 달리, 정원과 인지 사이는 육체적이지 않다. (후반부에는 양상이 달라지지만, 이 글에서는 초반부에 집중하겠다) 관계의 물꼬를 트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정원이 위험한 상황에서, 인지는 몸을 던져 그를 보호한다. 기대하지 않은 희생. 정원은 미안함, 고마움, 그리고 부채감을 함께 느낀다. 우연히 생겨난 빚으로 관계는 활력을 얻기 시작한다. 인지의 행동은 그녀가 자주 언급하는 '매뉴얼'에 가깝다. 남편을 대하는 아내의 매뉴얼. 남편의 입가를 휴지로 닦아주는 일. 악몽에 시달릴 때 도닥이는 일. 그가 싫어하는 것을 함께 싫어하고, 공격당할 때 편들어주는 일. 중요한 날 넥타이를 만져주는 일. 그가 찾을 때 옆에 있는 일.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마치 탱고를 추듯 자연스럽고 리드미컬하게 수행하는 일. 그런데 이 단순하고 건조한 일련의 행동이 변화를 불러온다. 정원은 처음으로 수면제 없이 깊은 잠이 든다. 한없이 망가진 그가 회복하는 신호탄일까. 둘은 서서히 친해지고 가까워진다. 의무에서 시작된 일이지만, 한 인간을 보살피고 아끼는 그 손길은 기어이 삶을 바꾸어 놓는다. 이 결혼의 목적지는 아마도 탈출일 것이다. 정원을 지배하려는 서연으로부터, 그리고 인지를 옭아매는 스토커로부터. "습관처럼, 분리불안처럼" 이어지는 삶으로부터 독립하는 것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드라마는 <나의 해방일지>를 떠올리게 한다. 해방을 꿈꾼다는 점에서 그렇고, 인간이 인간을 챙기는 담백한 애정의 마법을 믿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의 해방일지>에서도 구 씨(손석구)와 미정(김지원)은 서로의 과거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서로를 '추앙'하겠다는 결심을 끝까지 우직하게 지켜낸다. 만남의 손익을 따지거나, 성적 충동을 앞세우지도 않는다. 그저 서로를 열렬히 응원하며, 그 힘으로 각자의 구원을 향해 간다는 점에서 두 드라마는 닮았다. 앞서 언급했듯 성, 결혼, 사랑이 따로 다뤄지는 요즘이다. 또 성에 대한 의식도 개방돼 꽤 높은 수위의 콘텐츠도 자주 보인다. 이런 때에 가족도, 연인도 아닌 이들이 만나 애정 행위도 절제한 채로, 오로지 '관계'에 침전하는 작품이 출몰하는 것은 흥미롭다. 우리의 어떤 욕망이 이런 작품을 불러오는 것일까. <트렁크> 속 인지와 정원은, 남들에게 관계를 인정받거나(결혼) 서로에게 사랑을 확인받는(성관계) 일에 관심이 없다. 그저 서로를 돌볼 뿐. 그런데 이것이 사람을 숨 쉬게 한다. 별거 아닌 물이 생명을 살리는 것처럼. 여기에는 거창한 제도나 어지러운 욕정이 아니라, 그저 '단출하고 애정 어린 챙김'을 갈망하는 우리의 내밀한 욕망이 들어 있다. 어쩌면 <트렁크>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슬며시 비춰 보이기 위해 우릴 찾아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화려하게 빛나는 여러 선택지 사이에서 말이다. 출처 : 넷플릭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장군에서 노예로 전락한 남자. 죽은 가족을 위해 복수를 기다리는 비애의 검투사. 한때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그 영화, <글래디에이터>가 돌아왔다. 무려 25년 만에. 뛰어난 이야기꾼 리들리 스콧 감독도 그대로다. 전편이 '러셀 크로우'라는 걸출한 스타를 배출했다면, 이번 편은 떠오르는 청춘스타 '폴 메스칼'과 손을 잡았다.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 조합. 뚜껑을 열어보니 <글래디에이터 Ⅱ>는 전편과 비슷한 듯 다르다. 1편의 세계관을 잇기 때문에 신선함은 떨어지지만, 보다 깊고 다양한 이야기를 전한다. 이 글에서는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1편과 2편이 결정적으로 무엇이 다른지, 이를 통해 리들리 스콧이 보여주려는 것은 무엇인지 말해 보려 한다. 아래부터 <글래디에이터> 1편과 2편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나온다. <글래디에이터 Ⅱ>는 전편과 같은 지점에서 시작한다. 긴 전쟁으로 지친 로마군. 주변국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지만, 너무 많은 생명이 희생당했다. 다만 두 영화는 이 상황을 바라보는 시점이 좀 다르다. 1편은 로마 장군 막시무스(러셀 크로우)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러나 2편의 주인공 루시우스(폴 메스칼)는 로마에 의해 점령당한 누마디아 출신이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지역에서 노예로 붙잡혀 온 이들도 종종 등장한다. 그러니까 로마 내부에 머물렀던 1편과 달리, 2편은 로마의 안팎을 두루 오가며 여러 사람의 시점에서 이 거대한 제국을 관찰한다. 그래서 <글래디에이터 Ⅱ>가 바라보는 로마는 전편에 비해 더 입체적이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지만 어느 곳보다 병들었다. 넘쳐나는 빈민을 구제하지 못한 채, 전쟁과 폭력이 가져다주는 흥분과 자극에 취한 상태. 한때 '힘과 명예'를 갖고자 했던 로마인의 이상은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글래디에이터 Ⅱ>는 표면적으로 루시우스의 복수극을 따라가지만, 그 이면에서 로마라는 무너진 제국을 뜯어본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로마'에 대한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 속 상황이 '지금 미국'과 상당 부분 일치하기 때문이다. 리들리 스콧은 고대 제국에 대해 말하며, 실은 현재 미국에 관해 이야기하는 중이다. 세계의 패권을 거머쥔 나라. 하지만 내부의 통증을 치료하지 못한 채, 폭력과 자극에 취해 비틀거리는 나라. 리들리 스콧은 지금의 미국이 위태롭다고 느끼는 것 같다. 영화에서 이런 혼란을 해결하는 이는 루시우스다. 이 캐릭터를 뜯어보면 흥미롭다. 그는 로마인의 피를 물려받았지만, 누미디아 인의 정신을 지녔다. 로마에 뿌리를 두고 누미디아에서 자랐다. 이를테면 이중국적자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제시하는 구원자는, 로마(혹은 미국)의 DNA를 가졌지만 주변국의 시선까지 장착한 이다. 제국에 갇혀 있지 않은 개방된 시선을 갖춘 인물인 것이다. 구원자가 있으면 파괴자도 있기 마련. 마크리누스(덴젤 워싱턴)는 로마를 파멸하려는 자다. 그는 말한다. "노예는 새로운 노예를 취하려고 한다"라고. 사실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는 진정한 길은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과 노예라는 폭력적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노예 신분을 벗어나더라도 이 폭력의 구조에 물든 이는, 또 다른 노예를 취함으로써 자신이 노예가 아니라 주인임을 끊임없이 증명하려 한다. 그러니까 어떤 위치에 있건 '지배-피지배' 구조를 벗어나지 못한 채로 반복하는 이가 바로 노예인 것이다. 리들리 스콧은 이런 설정을 통해, 미국을 망가뜨리는 이가 누군지를 지목한다. 그것은 타인을 지배하며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들이다. 아마도 마크리누스가 말하는 '노예'일 것이다. 한편 마크리누스와 정확히 대조적인 인물도 등장한다. 그는 검투사를 치료해 주는 의사(라고 불리는 자)다. 그는 한때 검투사였으나, 자유인이 된 뒤에도 로마에 남아 가정을 꾸리고, 죽을 위험에 빠진 이들을 치료하며 살아간다. 그는 자신을 옭아맸던 폭력의 구조에서 완전히 해방된 인물이다. 결과적으로 <글래디에이터>의 1편과 2편은 바라보는 지점이 다르다. 비록 스토리라인이 비슷하고 정서가 비슷하다 해도 말이다. 1편은 개인의 복수에 초점을 맞춘다. 막시무스는 복수를 마치고 마침내 그토록 원했던 휴식을 맞이한다. 그러나 2편은 국가의 재건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다. 영화는 루시우스의 개인적 복수에서 시작해, 로마라는 국가의 재건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루시우스는 이 과정을 진행하기 위한 땔감이다. 그래서 복수를 마친 막시무스가 사라지는 것과 달리, 국가 재건을 시작하는 루시우스는 왕좌로 복귀한다. "속삭이기만 해도 흩어질 것처럼 연약한 꿈이지." 이상적인 로마 제국을 꿈꾸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리처드 해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시민을 위한 도시. 가난한 자들의 안식처. 황제의 속삭임은 조심스럽다. 그런데 이건 먼 옛날 잠시 머물다 사라진 바람이 아니고, 리들리 스콧이 지금 꾸는 꿈이다. 그가 25년 만에 돌아와야 했던 이유도, 다시 한번 이 말을 전하기 위함이지 않을까. 긴 시간 끝에 로마에 돌아온 루시우스처럼. 리들리 스콧은 86세, 곧 90을 바라보는 나이다. 하지만 이상향을 향한 그의 눈빛은 노쇠하지 않았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때로 가정은 어느 곳보다 치열한 전장이다. 문득 불행이 한 가정을 찾을 때, 교육 방송에 나올 법한 태도로 침착하게 합심해서 그 순간을 넘기는 경우는 많지 않다. 위기는 가정을 뒤흔들어 균열을 만들고, 친밀했던 이들 사이에 틈을 만든다. 어느 날 갑자기 가족 사이에 떡 하니 나타난 검은 틈새. 그 어두운 곳에는 과연 무엇이 숨겨져 있을까? 지금 한국의 인기 콘텐츠는 이 검은 계곡을 들여다보는 중이다. 최근 우리를 찾아온 세 편의 작품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지옥> 시즌2, <보통의 가족>은 모두 가정의 위기에서 시작한다. 주인공은 흔들리고 괴로워한다. 사랑하는 가족과, 지키고 싶은 가치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들. 지금 한국에서 사랑받는 세 편의 작품이 비슷한 주제 의식을 품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얼핏 무관해 보이는 세 작품 사이 공통점을 찾으며, 지금 한국 콘텐츠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은 어떨까. 아래부터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지옥> 시즌2, <보통의 가족>에 대한 약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유의해주길 바란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에서 태수(한석규)는 프로파일러다. 그는 자신의 딸 하빈(채원빈)과 관계가 좋지 못하다. 그들 사이에는 보편적인 부녀 사이에 있을 법한 신뢰와 믿음이 없는 것 같다. 그들의 저녁은 서먹하게 끝나곤 한다. 그러나 태수가 한 살인 사건을 맡은 순간, 그리고 딸 하빈이 이 사건과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된 순간부터 문제는 커진다. 태수는 본격적으로 하빈을 뜯어보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부녀 관계는 프로파일러와 분석 대상으로 변화한다. 살인 사건이 휩쓸고 간 가정의 밑바닥, '가족이지만 믿을 수 없다'는 어두운 생각이 고개를 든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가족에 대한 한 남자의 끈질긴 의심과, 그걸 품는 마음의 괴로움을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한편 <지옥> 시즌2에서도 한 가정에 불행이 닥친다. 그런데 그 불행은 양상이 좀 다르다. 미지의 존재가 인간에게 나타나 지옥에 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리는 '고지'로 혼란해진 세계. 비록 끔찍한 일이지만 발생할 확률은 낮아서, 많은 사람들은 평소대로 살아간다. 그러나 지원(문근영)은 그렇지 않다. 그녀는 이 비극을 자신도 겪을지 모를 실질적인 위험으로 받아들인다. 가정 밖의 비극이 내부에 스며든 것이다. 하지만 지원의 남편은 그녀의 괴로움을 이해할 수 없다. 생각의 차이는 괴리를 만들고, 좁혀지지 않는 틈새를 종교(혹은 사이비)가 채운다. 지원은 '화살촉'의 교리에 심취한다. <지옥> 시즌1이 이해할 수 없는 비극 앞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공포에 반응하는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면, 시즌2는 가정 내부로 눈을 돌린다. 거대한 비극으로 지축부터 흔들리는 가정과 끊어지는 연대. 그 사이사이에 틈입하는 새로운 믿음. 한편 지원의 가정은 위태롭지만, 혜진(김현주)이 만들어갈 대안적 관계에 희망을 걸어봐도 괜찮을 것 같다. 허진호 감독의 신작 영화 <보통의 가족>에서는 두 가족에게 예상 못 한 비극이 닥친다. 엘리트로 살아온 이들은 미처 몰랐던 자녀의 모습 앞에서 무너진다. 가치관이 산산이 부서져 황폐해진 가정. 위기에 처한 아이들. 이때 재완(설경구)과 재규(장동건)는 각자의 신념을 다시 세우며, 허물어진 가정을 재건하려 한다. 위의 두 작품이 위기 앞에 바스러지는 가정을 보여준다면, <보통의 가족>은 이를 복구하려는 인물들의 분투에 집중한다. 우리는 늘 가정의 안녕을 바라지만, 사건은 때때로 찾아오곤 한다. 그리고 지진이 일면 땅이 갈라져 지하가 드러나는 것처럼, 사건은 우리가 평소 보지 못했던 국면을 드러내고야 만다. 거기에는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의심이나(<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가족의 끊어진 연대를 대신하는 낯선 믿음(<지옥> 시즌2), 바닥에서부터 새로이 다져진 신념(<보통의 가족>) 등이 고개를 든다. 평온한 일상에서 볼 수 없는 것들, 그러나 문득 궁금해지는 그것을 지금 한국의 콘텐츠가 주목하고 있다. 지난 7월 나는 극장가 인기 작품을 조명하며, 영화로 본 지금 한국은 '생존게임'에 던져진 상태라고 분석했다("어떻게든 살아남아라"... 생존게임에 내던져진 이들의 공통점'). 올여름 한국 영화는 재난 상황 앞에서 생존을 향해 달려가는 인물을 지켜보았다.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나 계절은 가을로 바뀌었다. 이제 인기 작품 속 주인공은 '재난 상황'을 거쳐 '가족 내부에 닥친 위기' 앞에서 몸을 떨고 있다. 게다가 최근 한국에서 인기 있는 예능 프로그램은 대부분 서바이벌 포맷이다. 이쯤이면 '위기'와 '생존'은 대한민국의 주류 콘텐츠로 변모한 것 같다. 한국 관객을 위한 안전지대는 언제쯤 올까. 사진 : MBCdrama, 넷플릭스코리아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지난 11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전,란>은 그간 OTT가 제작한 한국 영화 중에서 이례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조선을 배경으로 한 시대극으로서 사극 액션, 강동원·박정민을 투톱으로 하는 연기 앙상블 등 재미 요소가 풍부하게 마블링되었다는 평가다. 또 차승원, 김신록, 진선규, 정성일 등 굵직한 배우들이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영화에 대한 반응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강동원에 대한 높은 평가다. 사실 <전,란>은 그가 연기하는 '천영'을 주인공으로 진행되는 영화이므로 그가 주목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강동원은 주연으로의 관심 그 이상을 받았다. 최근 그가 출연했던 <설계자>,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 <브로커>와 비교해도 그렇다. 이 영화가 강동원의 파격적인 면모를 끌어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마치 맞춤옷처럼 그에게 딱 맞는 작품을 입은 느낌만은 확실하다. <전,란>과 강동원, 둘 사이좋은 궁합이 시너지를 일으킨 것이다. 이제는 스타이자 배우로 자리 잡은 강동원이 유독 <전,란>에서 빛날 수 있었던 이유에 관해 이야기해 보는 일도 흥미로울 것 같다. 먼저 강동원은 사극이 잘 어울린다. 다만 엄격한 고증을 거친 역사물이 아니라, 픽션 사극에 잘 어울린다. 예를 들어 사극 돌풍을 다시 일으켰던 <고려 거란 전쟁>은 강동원이 뛰어놀기 적합한 놀이터가 아니다. 그에게 잘 맞는 사극은 판타지가 약간 가미된 것이다. 먼 옛날 어느 마을에 살았다는 전설적인 남정네. 그런 역할과 잘 맞는다. <전,란>은 강동원의 이런 매력을 정확히 포커싱한다. 푸른 도포 자락을 흩날리며 싸우는 '청의검신'. 웬만한 사람은 소화하지 못했을 캐릭터를 그는 자연스럽게 살려낸다. 도포의 푸른빛은 너무 도드라져 주변과 융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강동원은 이 색을 아름답게 흡수하며 그 이질적인 느낌을 판타지의 단계로 승화시킨다. 강동원이 좋은 평가를 받았던 <형사 Duelist>, <전우치>, <군도:민란의 시대>도 마찬가지다. 모두 픽션 사극에 속한다. 그러니까 강동원은 손에 닿지 않을 정도로 먼 시간대를 배경으로 뭇사람들이 품었을 머릿속 환상을 현실로 재현할 수 있는 배우인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판타지를 연기하는 데 제격인 배우다. 이것은 강동원이 <늑대의 유혹>이나 <검은 사제들>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던 이유를 설명한다. 물론 이 영화들에서 그의 연기도 준수하다. 그러나 두 작품이 모두 판타지에 기반한다는 점이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인터넷 소설이든 오컬트든, 그는 비현실적인 캐릭터를 연기했고 장기를 충분히 발휘하며 성공을 거머쥐었다. 강동원이 판타지에 잘 어울리는 가장 큰 이유는 두말할 것 없이 외양 때문이다. 큰 키에 작은 얼굴, 여전히 소년의 떨림을 담은 큰 눈이 판타지의 감성을 머금고 있다(강동원의 외모에 대한 긴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아서 생략하겠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그는 여러 연기 중에서도 특히 감정을 담아서 조용히 바라보는 연기를 잘하는데, 이 표정은 긴 여운을 남긴다. 게다가 강동원은 말의 속도도 미묘하게 느린데, 이것이 몽환적인 느낌을 주며 그의 비현실성을 증폭시킨다. 다음으로 <전,란>에서 강동원이 돋보였던 이유는, 그가 남자 배우와 합을 맞췄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수려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동성과 맞붙을 때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배우들이 있다. 강동원도 그러한 경우다. 작품 속에서 여성과 함께 있을 때 강동원의 역할은 주로 '매력적인 남자'에 집중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배우에게 일종의 제약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남성 무리 사이에 있을 때 그는 단순히 미남을 벗어나 다양한 얼굴을 선보인다. 그는 어딘가 수상하지만 마음 가는 동생이고(<의형제>), 강한 신념을 품은 파리한 얼굴의 사제(<검은 사제들>)다. <전,란>에서도 박정민 배우와 합을 맞추며, 그는 거칠지만 노련하고 속 깊은 사내로 변모했다. 이와 같은 케이스로 '정해인'도 꼽을 수 있다. 물론 그는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최근 필모그래피를 볼 때, 정해인은 남성 무리 사이에서 더욱 돋보인다. 그는 <서울의 봄>에서는 비중은 크지 않았으나 눈에 띄었고, <D.P.>에서 전혀 다른 매력을 선보이다가 <베테랑 2>에서 연기 변신에 성공했다. 멜로에 적합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그는 군대, 경찰서를 배경으로 연기할 때 자신만의 개성을 편안하게 뿜어낸다. <전,란>에서 박정민을 비롯해 정성일, 진선규 등 색이 뚜렷하며 연기력 좋은 배우와 맞붙을 수 있었다는 점이 강동원에게 호재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앞에서 강동원은 각각 애증 어린 동무, 신비롭고 재기 넘치는 무사, 믿을 만한 장수로 분할 수 있었다. 자신과 꼭 맞는 장르, 진면모를 끌어낼 상대 배우. 강동원이 <전,란>에서 유독 호평받은 이유는 결국 이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배우에게 통용되는 원칙이다. 그런데 사실 말이 쉽지, 이것을 현실에서 적용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려운 만큼 성사되었을 때 쾌감도 크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꼭 맞는 작품을 만나 훨훨 날아다니는 배우를 보는 기쁨도 크기 때문이다. 어려울 줄 알면서도 자꾸만 영화계 '환상의 커플'을 기대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빨간 정장 위로 찰랑대는 머리. 계단 위에서 추는 괴상하고 멋진 춤. 전 세계적으로 무수한 짭(?)조커를 양산했던 <조커>(2019)가 5년 만에 돌아왔다. <조커: 폴리 아 되>라는 낯선 이름으로. '폴리 아 되(Folie à Deux)'는 프랑스어로 '둘의 광기'라는 뜻이다. 언론도 앞다퉈 '미친 자'들의 '미친 사랑' 이야기라 일컬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영화가 그다지 미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아니, 오히려 이 영화는 지극히 제정신이며 관객의 이쁨을 받기 위해 치열하다. <조커: 폴리 아 되>에는 여러 문제가 있지만, 이 영화가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를 얼마나 무가치하게 소모해 버렸는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말해보려 한다. 아래부터 <조커: 폴리 아 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나온다. 실은 전작 <조커>에 대한 평가도 부풀려진 경향이 있다. 이 영화는 만듦새가 그다지 훌륭하다 말하기 어려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데는 주역을 맡은 호아킨 피닉스의 열연 덕이 컸다. 감독 토드 필립스도 이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지, 호아킨 피닉스의 얼굴과 움직임을 잡아내는 데 매달린다. 그러다 보니 영화 자체가 감독의 작품이라기보다 최애를 담은 덕후의 영상같이 느껴지는 측면이 있다(이런 영상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고, 영화가 그런 인상을 풍기는 것이 특이하다는 의미다). 이 작전은 오히려 먹혀들었다. 호아킨 피닉스는 제 몫을 제대로 해냈고, 완성도와 별개로 영화는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까. <조커>에서 가장 강하게 뇌리에 남는 장면은 단연 조커가 계단에서 춤을 추며 내려오는 장면이다.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춤사위인데, 호아킨 피닉스는 이 움직임을 또 찰떡같이 소화한다. 이 씬은 유튜브 영상, SNS 프로필 등에서 무수히 재생산되며 인기를 입증했다. 전작 <조커>(2019) 조커의 춤이 그다지도 강렬한 것은 단순히 호아킨 피닉스가 느낌 있게 소화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것이 아서 플렉의 실패와 좌절, 그로 인한 조커의 탄생, 그 이면에 담긴 슬픔과 짜릿한 해방감을 동시에 뿜어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관한 서사가 춤 장면의 앞뒤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 없이 단순히 춤만 덩실덩실 춘다면, 아무리 호아킨 피닉스라 할지라도 폭발적인 사랑을 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토드 필립스는 <조커>의 성공이 단순히 춤 때문이라 생각했는지, 후속작에 댄스를 꽉꽉 채우고 거기 어울리는 노래까지 가득 담아 가져왔다. 이런 추측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영화가 캐릭터 '조커'를 둘러싼 서사나 감정 일체에 무관심한 채로 조커의 춤을 자랑하는 데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조커: 폴리 아 되>는 <조커>의 계단 신을 2시간으로 늘려놓은 작품에 불과하다. 사실 조커에 관한 서사는 전작에서 충분히 나왔고, 후속작은 그 서사마저 뛰어넘는 조커만의 세계관을 보여주길 바랐다. 아서 플렉의 사연으로도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조커의 광기와 카리스마, 자신만의 철학, 그런 것들 말이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히스 레저)가 레전드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런 요소를 예리하고도 풍부하게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헛소리 중 진실은 무엇일까? 그가 말한 '악당의 품격'이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윤리적 딜레마를 꼬집는 질문에 우리는 뭐라 대답해야 할까?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무수한 의문과 그 뒤로 이어지는 긴 탄식을 자아냈다. 반면 <조커: 폴리 아 되>의 조커는 어떤가? 그는 아서의 망상 안에서 끊임없이 휘청대고 악쓰듯 노래한다. 그러나 이 유별난 몸부림은 정작 조커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 그가 환희에 차있든 사랑에 취해있든 마찬가지다. 그것은 조커가 약간 다른 상황에 처했을 때 짓는 약간 다른 표정을 얄팍하게 관찰할 따름이다. 이 소란스러운 장면들은 조커의 내면으로 들어가 그의 정체성을 탐구하지 못한다. 그저 앙상한 어깨와 메마른 얼굴의 표면에 달라붙어, 우리가 이미 아는 조커의 이미지를 거듭거듭 소진할 뿐이다. 이토록 소모적으로 과시되는 이미지는 공허하다. <조커: 폴리 아 되>가 이런 선택을 내린 이유는, 이런 방식이 관객에게 먹힐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상업 영화는 흥행을 노리고 제작된다. 하지만 캐릭터가 지나치게 흥행에 초점을 맞춘 채로 구성되는 것은 좀 다른 문제다. 만일 <조커: 폴리 아 되>가 조커에 대한 자기 만의 해석을 보여줬다면 그 나름의 평가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조커에 대한 해석이 앙상하다. 시작부터 캠프파이어를 하듯 조커의 이미지를 불사르고, 후반부에는 이해될 수 없는 이유로 캐릭터를 회수한다. 그렇게 조커 쇼는 막을 내린다. 그러므로 영화 속 조커가 아무리 심각한 표정을 지어도, 아무리 예술적인 춤을 선보여도, 이 모두가 실은 관객을 향한 아양에 불과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척하는 조커는 실은, 관객의 반응에 신경을 곤두세운 채 그들이 원하는 이미지를 주는데 정신이 팔려 있다. '세상과 불화하는 외톨이'는 자기 이미지를 열심히 팔아 가며 그 누구보다 세상에 잘 녹아들고 있다. 하지만 정작 관객이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그는 모르는 것 같다. 철학 없이 요란하기만 한 빌런이 얼마나 초라한지도. 나는 관심에 목말라 춤을 춰대는 아이가 아니라 진짜 조커가 보고 싶다. 영화의 마지막까지 현란한 움직임과 학대당한 몸, 기이하게 구겨진 얼굴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 이렇게 허무하게 하나의 캐릭터가 사라지는 것은 퍽 아쉬운 일이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팀 버튼은 재미있는 감독이다. 그의 작품에 대단히 감격한 적 없지만, 신작이 나올 때마다 또 기다려진다. 그건 아마도 하나의 장르가 되어 버렸을 정도로 그의 작품 세계가 독특하기 때문일 것이다. 팀 버튼은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2016),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10), <찰리와 초콜릿 공장>(2005), <가위손>(1991) 등 필모그래피도 화려하다. 그중에서도 젊을 적 손길이 느껴지는 <비틀쥬스>(1988)는 독특하다. 팀 버튼이 창조해 낸 기이하고도 유쾌한 사후 세계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상상력의 감독답게 저승마저 기이하고 사랑스럽게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작품이 무려 36년 만에 속편으로 돌아왔다. 이름은 <비틀쥬스 비틀쥬스>. 작품을 본 관객이라면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를 이해할 것이다. 이것은 주인공의 이름이자, 그를 호명하는 주문이다. 또 이어질 시리즈에 대한 예고이기도 하다(다음 속편의 이름은 당연히 '비틀쥬스 비틀쥬스 비틀쥬스'가 될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는 아주 오랜만에 돌아온 작품에서 아쉬움을 느낀다. <비틀쥬스 비틀쥬스>에서 팀 버튼의 저승은 더욱 화려해졌지만 특유의 감성은 오히려 옅어졌다. 이 점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이어지는 글에는 <비틀쥬스 비틀쥬스>와 전작 <비틀쥬스>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유의해 읽어주길 바란다. <비틀쥬스 비틀쥬스>에서 팀 버튼은 전작에 대한 '재탕'을 서슴지 않는다. 전작의 인물과 세계관은 물론, 주된 재미 요소가 그대로 반복된다. 그런데 사실 자기 복제 자체는 큰 문제가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재탕'할 부분과 '리뉴얼'할 부분을 영리하게 구분하는 능력이다. 시리즈의 핵심 가치는 이어져야 하고, 장식적인 부분은 과감하게 바꾸어 신선도를 유지해야 한다. <비틀쥬스 비틀쥬스>에서 전작에 이어 주인공 비틀쥬스(마이클 키튼)와 리디아(위노나 라이더)가 등장했다. 또 이 작품은 전작의 진행을 그대로 따라간다. 어린아이가 저승 세계에 대해 알게 되고, 어떠한 이유로 그곳에 가게 되고, 깜짝 반전 등장, 이승으로 돌아오는 구조다. '비틀쥬스' 시리즈에서는 이 '반전'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두 영화의 반전을 한번 비교해 보자. 1편 <비틀쥬스>의 경우 유령 아담(알렉 볼드윈)과 바바라(지나 데이비스)는 있는 힘껏 사람을 놀라게 하지만, 오히려 사람들은 그런 트릭을 재미있어한다. 심지어 리디아는 귀신에게 더 애착을 느끼고, 그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동분서주한다. 흔히 생각하는 유령은 무섭거나 인간에게 해를 끼친다. 그러나 이곳의 귀신은 어수룩하고 따듯해서, 인간보다 더 인간미 넘친다. 이것은 (유령에 대한) 인식의 반전이다. <비틀쥬스>의 마지막 장면에서 리디아는 유령 부부와 함께 춤을 춘다. 이 장면이 특히 신나는 이유는, 그녀가 함께할 수 없는 존재들과 춤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순간의 쾌감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허물어진 채로 다 함께 몸을 흔드는 그 순수한 유희에서 온다. 저승의 문을 조심스레 연 팀 버튼은, 마지막에 이르러 문짝을 완전히 떼어내고 두 세계의 구분을 지운 채로 즐거워한다. 한편 2편 <비틀쥬스 비틀쥬스>에서 반전은 아스트리드(제나 오르테가)의 남자친구에 숨어 있다. 돌아가신 아빠를 만나게 해 주겠다던 그의 말은 거짓으로 밝혀진다. 이것은 정체의 반전이다. 그러나 1편의 반전에 비교한다면, 이것은 다소 깊이가 얕다. 등장인물에 대한 생각이 바뀔 때(<비틀쥬스 비틀쥬스>) 보다는, 오랜 고정관념이 깨어질 때(<비틀쥬스>) 관객이 느끼는 충격과 쾌감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에서도 신나는 댄스 장면이 등장한다. 영혼들이 타는 기차, '소울 트레인'에서는 소울 음악이 울려 퍼지고 유령들이 어깨를 들썩인다. 하지만 이 역시 전작의 댄스 장면에 비해 인상적이지 않다. 두 세계의 경계 위에서 몸을 흔들던 팀 버튼은, 이제 '소울(soul, 영혼을 의미하는 동시에 음악의 한 장르를 지칭한다)'이라는 단어로 장난을 친다. 그 춤은 여전히 흥겹지만 어쩐지 싱겁다. 영화의 막바지 결혼식 장면은 전작에 비해 훨씬 화려하다. 모니카 벨루치의 등장도 이번 작품에 색을 덧칠한다. 마지막에 이르러 비틀쥬스를 비롯한 유령은 사라지고, 갈등은 완전히 봉합된다. 이승과 저승은 안전하게 분리된다. 아쉽지만 여기에는 전작에 감돌았던 여운이 없다. 팀 버튼은 줄기차게 크리쳐와 귀신이 오가는 으스스한 세계를 선보여 왔다. 그런데 이 세계가 매력적인 이유는 단순히 뛰어난 상상력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곳이 현실의 인식을 다각도로 엎는 기발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팀 버튼의 근사한 작품 <빅 피쉬>(2004)에서 진정한 감동은 마지막의 반전에서 오는 것처럼. 그렇다면 <비틀쥬스 비틀쥬스>는 실패한 작품일까?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사랑스럽고 징그럽고 조악하며 멋들어진 저승 세계는 여전하니까. 다만 이번 작품이 어쩐지 심심하다고 느낀 관객에게, 36년 전의 <비틀쥬스>를 조심히 권하고 싶다. 더 작고 초라하지만 진한 냄새를 풍기는, 팀 버튼 날 것의 세계가 여기 있다. 사진 : Warner Bros. Korea 유튜브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넷플릭스의 시리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이달 공개되기 전부터 주목받았다. <부부의 세계>를 연출한 모완일 감독 작품이고, 김윤석 배우가 17년 만에 복귀한 드라마다. 외진 숲속 펜션에서 벌어지는 스릴러 사건을 다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작품의 만듦새가 뛰어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드라마는 중간중간 길을 헤매고, 그때마다 긴장감도 떨어진다. 그러나 이 시리즈에서 정작 흥미로운 부분은 따로 있다. 바로 이 작품이 콕콕 건드리는 공포의 근원이다. 스릴러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포가 어디에서 오느냐의 문제다. 그렇다면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가 자극하는 두려움의 근원지는 어디일까? 어설픈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8월 말 기준으로) 넷플릭스 시리즈 1위를 달리고 있다. 만일 시청자가 이 작품 속 스릴에 반응했다면, 과연 그것의 실체는 무엇일까? 아래부터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으니 유의하기를 바란다. 전영하(김윤석)는 자신이 운영하는 펜션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졌음을 직감한다. 살인마는 펜션에서 묵었던 미스테리한 여인 유성아(고민시)다. 영하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하나다. 펜션의 안녕.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이 펜션은 어떻게 되는 걸까? 누구도 오지 않는 흉가가 되는 건가? 펜션 하나 관리하며 사는 내 인생은? 나의 가족은? 영하의 속마음을 눈치챈 성아는 점차 더 대범하게 다가온다. 그가 자신을 신고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그녀는 이윽고 펜션에 눌러앉아 그것을 빼앗으려 든다. 이때 영하는 하나의 감정에 휘말린다. 이건 내 펜션이야. 너 같은 것에게 빼앗길 수 없어.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가장, 영하. 그는 홀연히 나타난 살인마를 바라보며 생각을 거듭한다. 피해자는 안타깝지만 나까지 이 비극에 휘말릴 수는 없다고. 나의 소중한 펜션을 지키겠노라고. 피해자를 연민하면서도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무서워 몸을 웅크리는 영하의 모습은 그다지 낯설지 않다. 그렇다면 영하가 이다지도 두려움에 떠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어떤 생각이 전제돼 있다. 남의 불행에 휘말린 이들은 피해를 볼 것이라는 확신. 그렇게 입은 피해를 국가도, 사회도, 어느 누구도 보상해 주지 않으리라는 의심. 한마디로, 까닥 잘못하면 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이 세계에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인가. 이 작품에서는 정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누구도 정의감을 바탕으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이곳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밑바닥의 본능이다. 호기심, 복수심, 소유욕 같은 것들. 살인마도, 영하도, 심지어 경찰조차도 사명감보다는 살인에 대한 본능적 호기심으로 사건 주위를 어슬렁거린다. 이곳에는 시스템도 작동하지 않는다. 모든 정의 구현은 오로지 사적 복수를 통해 이뤄진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분노한 이들은 직접 총을 쏘고, 경찰은 한발 늦게 도착해 잔해를 더듬을 따름이다. 마지막에 인물들은 서로를 죽이고 용서하지만, 이것은 모두 사적인 차원에서 이뤄진다. 법, 규칙 따위를 바로 세우려는 노력은 없다. 시스템은 마지막까지 침묵할 뿐이다. 특히 충격적인 부분이 있다. 살인마를 처단한 이들은 결국 처벌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명은 자기만의 동굴에 들어가고, 다른 한 명은 제대로 언급조차 되지 않은 채 시리즈가 끝이 난다. 그러니까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사적으로 악인을 처단한 이들을 사실상 묵인한 채 끝을 맺는다. 통상 대중 예술에서 범죄를 저지른 이는 어떤 방식으로든 처벌받기 마련이다. 악인을 죽인 경우 정상 참작을 받아 가볍게 처벌받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고 아무런 벌도 받지 않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죄를 저지르면 어떤 방식으로든 벌을 받는다는 것이 대중 예술의 관행이자, 암묵적인 룰이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의 결말이 더 충격적이다. 사람을 죽이고도 벌받지 않는 인물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 삶을 흔드는 이를 만난다면 공격을 감행해서라도 자신을 지켜야 한다'라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 공유되고 있다는 시그널이다. 달라진 관객의 의식이 새 작품에 녹아든 것이다. 고장난 시스템과 너무 느린 공권력. 여기저기서 출몰하는 나쁜 놈들.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인생. 이런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 자기 손에 피를 묻힌 들, 과연 그를 욕할 수 있을까. 이것이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가 보여주는 지금 우리 사회의 무의식이다. 이런 기조는 내가 앞서 기고한 <"어떻게든 살아남아라"... 생존게임에 내던져진 이들의 공통점>이라는 글에서 짚은 맥락과 일맥상통한다. 당시 나는 올 상반기 흥행한 국내 영화를 통해 볼 때, 한국 사회는 현재 생존게임을 벌이고 있다고 해석했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을 볼 때, 한국 사회는 여전히 생존게임에 던져진 상태다. 다만 그 게임은 외롭고 잔혹하다. 언제 내 것을 빼앗길지 모르기 때문에 공포스럽고, 그 두려움조차 함부로 내색할 수 없다. 작품 속에는 '누군가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언제 돌에 맞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다음 수를 이어가는 개구리들의 세계가 여기 있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그 지적은 대체로 스토리의 개연성에 대한 것이었다. 살인마 캐릭터가 과하다거나, 그에 대한 영하의 반응이 과도하다는 지적은 별로 없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이 펼친 공포에 대해 시청자는 대체로 수긍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스릴러 작품에는 그 사회의 공포가 녹아 있다. 지금 우리가 감각하는 한국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사진 : 넷플릭스 공식 예고편
당신에게 한 가지 묻고 싶다. '인플루언서'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아주 좋지만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다. 이 단어는 반드시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맥락에서 튀어나오곤 하니까. 관심을 끌려다 사고 친 인플루언서, 콘텐츠 만들다 물의를 일으킨 인플루언서... 오해는 말길 바란다. 나는 지금 이런 인식이 타당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 사회가 '인플루언서'에 대해 품는 보편적인 인상에 대해 말한 것이다. 넷플릭스가 최근 공개한 예능 시리즈 <더 인플루언서>를 처음 접했을 때, 나의 인상도 이와 유사했다. 화려하고도 자극적인 예고 영상은 관심을 끌려는 시도가 소란스럽게 이어질 것이라 넘겨짚게 만들었다. 물론 이런 부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더 인플루언서>에는 몇 마디 말로 일축하기 어려운 성취가 담겨 있다. 그 이상한 반짝거림이, 이 프로그램을 다시 유심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더 인플루언서>는 내로라하는 국내 인플루언서 77인 중에서 단 한 명의 우승자를 뽑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흔히 '서바이벌 게임'은 그 구성을 통해 연출자의 지향을 드러낸다. 게임은 곧 연출자가 바라보는 세상의 축소판이다. 참여자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연출자가 생각하는 세계의 생존 능력과 일치한다. 지력, 체력, 정치력 같은 것들. 그러나 세팅된 룰을 뚫고 자기만의 독보적인 방식으로 승리하는 플레이어를 보는 것도 서바이벌 게임의 묘미다. 그러므로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핵심은 게임의 구성이다. 아래부터 <더 인플루언서>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유의해 읽어주기를 바란다. <더 인플루언서>는 자극적인 설정으로 시작된다. 유튜브, 틱톡, 아프리카 TV 등에서 활약하는 네임드(유명인을 뜻하는 인터넷 용어)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그들의 목에는 목줄을 연상케 하는 기구가 채워져 있다. 여기에는 각자의 팔로워 수를 돈으로 환산한 수치가 표시돼 있다. 이른바 '몸값'이다. 시작과 동시에 <더 인플루언서>는 자신의 지향점을 확실하게 선포한다. '이것은 인간의 영향력을 자본으로 계산하는 게임입니다. 더 많은 관심을 끄는 사람이 더 많은 돈을 벌게 될 거예요.' 물론 이 선언은 노골적이고 품위가 없다. 하지만 이런 점을 비판하기보다 "뭐, 현실은 더하니까" 정도의 말과 함께 수용하는 것이 지금의 경향인 것 같다. 이성적이라 할지, 서글프다 할지 모를 일이지만. 프로는 총 5개의 라운드로 진행된다. 1라운드는 '관심'을 끄는 능력. 2라운드는 '라이브 방송', 3라운드는 '시선', 4라운드는 '댓글'을 얻는 능력 등을 본다. 그리고 파이널 라운드에서는 최대한 많은 '판정단'의 마음을 얻는 자가 승리한다. <더 인플루언서>의 성격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1라운드다. 참가자들끼리 '좋아요'와 '싫어요'를 보내고, 마지막에 점수를 산정하는 게임. 그러나 놀이가 끝날 무렵 참가자들은 하나의 규칙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좋아요'와 '싫어요'를 구분하지 않고 합산해 점수를 내는 게임이었다는 점 말이다. 이 룰은 상대의 호감은 사고 비호감은 피한다는 보편적인 상식을 깬다. 이 적절한 반전은 현대 사회에서 인플루언서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을 잔망스럽게 드러낸다. 이어 각 라운드가 진행된다. 게임은 꽤 잘 짜였고, 자본의 냄새가 화려하게 진동한다. 하지만 이 와중에 가장 돋보이는 것은 참가자들의 플레이다. 이들은 긴장 속에서도 시선을 잡아끄는 기술, 팬들과 지루하지 않게 소통하는 노하우를 펼쳐낸다. 인플루언서로서의 실력을 가늠하는 진검승부. 그러나 라운드가 거듭될수록, 승부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 하나가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그것은 바로 게임의 핵심을 읽는 능력이다. 첫 번째 라운드를 보자. 이 게임이 통념을 벗어나기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은 살아남는다. 이목을 끄는 사진을 찍는 게임도 그렇다. 참가자들은 웃음, 노출 등 단순한 코드에서 머물다 점차 '시선 집중'의 근본 원리를 건드리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여타의 서바이벌 프로그램과 <더 인플루언서> 참가자의 가장 큰 차이는, 이들이 매우 유연하다는 것에 있다. 사진 만들기 게임에서 이들은 다른 이의 필승법을 보고, 그것을 바로 받아들여 발전시킨다. 어떤 이들은 필승법이 일반화될 것을 고려해,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을 차별화한다. 이들은 마치 실시간으로 바뀌는 환경에서 끈질기게 살아남는 카멜레온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그것이야말로 이들이 무자비하게 요동치는 플랫폼 산업에서 꿋꿋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일 것이다. 판의 흐름을 빠르게 감지하고, 그것을 유연하게 따라가며, 끝내 내 것으로 흡수해 버리는 능력. 그것이 인플루언서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임을 이 프로는 처음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라운드. 여태 선보였던 능력을 모두 발휘해야 하는 판이다. 덩그러니 놓인 무대 위에서 눈앞의 관객과 소통하는 시간은 무척 힘겨워 보인다. 하지만 이들의 진가가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최종 우승 후보들은 갖가지 방식으로 사람을 모은다. 특이한 설정으로 관객의 참여를 독려하고, 장기를 선보이고, 사람들에게 눈을 맞춘다. 치열한 승부. 결국 마지막 게임도 핵심을 간파한 이가 우승을 거머쥔다. <더 인플루언서>는 국내 서바이벌 프로그램 중에서 독특한 위상을 차지한다. 참가자가 뿜어내는 능력은 독특하고, 그것은 지금 가장 뜨거운 산업의 본질을 자연스레 노출한다. 넷플릭스가 이런 결과까지 예상했을지는 모를 일이다. 이것은 설령 의도했더라도 얻어내기 힘든 결과다. 다만 콘셉트가 분명한 게임과, 색이 분명한 참가자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시너지라는 점은 분명하다. 제철 재료는 기본 레시피만 충실히 따라가도 맛있는 요리가 된다. 마찬가지로, 지금 시대의 공기를 담뿍 담은 작품은 기본만 지켜도 맛깔스럽다. 어느샌가 탄생해 우리 곁을 맴도는 '인플루언서'는 여전히 익숙하고도 낯선 존재다. <더 인플루언서> 때로 지나치게 자극적이며 아쉬운 부분도 있다. 그러나 예능의 포맷 안에서 인플루언서, 그리고 산업의 진면모를 포착해 드러냈다는 점만으로도 <더 인플루언서>는 의미가 있다. 사진 : 넷플릭스 공식 예고편, 넷플릭스 홈페이지
7월 31일, 디즈니플러스는 올여름의 야심작, <노 웨이 아웃: 더 룰렛>을 공개했다. 이 작품은 흉악 범죄자에 공개적으로 현상금을 거는, 이른바 '공개 살인 청부'와 이를 둘러싼 경찰, 변호인, 정치인 간의 알력 다툼을 예고하며 주목받았다. 또 주연을 맡은 조진웅, 유재명을 비롯해 김무열, 염정아, 이광수 등 출연진도 화려하다. 처음 디즈니플러스는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마블, 스타워즈 시리즈 등을 주축으로 삼았다. 이때는 플랫폼의 매력도, 한계도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같은 흐름에서 탈피해 <무빙>, <카지노>, <삼식이 삼촌> 등 다양한 작품을 연달아 내놓으며 기존의 틀을 깨는 도전을 해나가고 있다. 그러니 다음 주자가 어떤 작품인지에 대한 기대가 큰 것도 당연했다. 뚜껑을 연 <노 웨이 아웃: 더 룰렛>은 우선 약간의 당혹감을 준다. 기존의 디즈니플러스에 기대하던 색깔과 다르기 때문이다. 아직은 두 편의 에피소드만 공개되어 일반화하기 어렵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서 판단 내리자면, 이것은 디즈니플러스의 넷플릭스 따라잡기로 느껴진다. 아래부터는 <노 웨이 아웃: 더 룰렛>에 대한 스포일링이 있으니 유의해 읽어주길 바란다. 작품이 시작되면 룰렛이 정신없이 돌아간다. 룰렛은 세 번 멈춘다. '윤창재', '10억', '귀를 자른다'. 그와 동시에 한 남자가 친근한 말투로 창재(이광수)에게 다가간다. 손에는 칼을 쥔 채로. 둘의 몸싸움은 아슬아슬하게 이어지고, 쓰러진 창재의 귀 가까이에서 칼날이 위험하게 번뜩인다. 결국 그는 한쪽 귀를 잃는다. 이 시퀀스는 단순히 창재에게 가해진 폭력을 보여주기에 지나치게 잔인하고 자극적이다. 칼날이 부딪치며 돌아가는 소리, 비명, 기어이 터지는 피, 칼이 살을 찌르는 순간까지. <노 웨이 아웃: 더 룰렛>은 시작과 동시에 선포한다. 잔인함의 적정선을 넘겠다는 다짐을. 이어지는 장면들도 마찬가지다. 성폭행이 적나라하게 그려지고(비록 피해자를 전시하지는 않았지만) 욕설, 비속어가 난무한다. 이런 장면이 단순히 자극적이어서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다지 필요 없는 순간에도 오로지 시청자의 말초 신경을 찌르기 위해 스스럼없이 선을 넘는 그 태도가 놀라운 것이다. 대체 어떤 욕망을 품어야 이런 모습으로 시청자와 만날 수 있을까. 물론 <노 웨이 아웃: 더 룰렛>은 흉악 범죄를 소재로 다루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잔인할 수밖에 없다. 또 자극적이라 하여, 디즈니플러스가 제작하였다 하여 무조건 비판받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넷플릭스가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작품으로 19금 플랫폼으로 자리 잡은 상황에서, 그 정반대 지점에 있던 디즈니플러스까지 특별한 이유 없이 넷플릭스 식의 폭력을 휘두르는 일은 무척 우려스럽다. 잦은 자극은 처음 시선을 집중시킬지 몰라도 종래에는 감각을 마비시킨다. 자극의 공격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며 안온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안전지대는 줄어들고 있다. 한편 <노 웨이 아웃: 더 룰렛>은 필자가 앞선 글에서 설명한 '최근 한국 영화의 경향'과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라"... 생존 게임에 내던져진 이들의 공통점'이라는 글에서 나는 <탈주>,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 <하이재킹>까지 올여름 극장가를 휩쓴 국내 작품들이 모두 일종의 생존 게임을 벌인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경향은 <노 웨이 아웃: 더 룰렛>에서도 이어진다. 다만 여기서 '생존 게임'은 악질 범죄자 국호(유재명)의 입장에서 본 세상이다. 반대로 그의 목숨값을 노리는 이들에게 이것은 '살인 게임'이며, 혼란을 막아야 하는 경찰에게는 '죽일 놈을 살려야 하는 게임'인 것이다. 영화 속 한국은 생명이 위태로운 전시 상황이라면, 콘텐츠 속 한국은 생사조차 내기 거리로 변질되어 땅에 떨어진 무법지대다. 2화까지 보았을 때 <노 웨이 아웃: 더 룰렛>은 <국민사형투표>, <오징어게임>, <시그널>, <세븐> 등 여러 작품을 연상시키며 넷플릭스의 자극성을 따라잡은 작품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면이 이 작품의 전부는 아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배우들의 열연에 있다. 특히 유재명 배우는 '국호'라는 인물로 완벽히 분한다. <응답하라 1988>의 유쾌함도, <비밀의 숲>의 진중함도 깨끗이 지운 그는 이제 강간 살인범의 모습이다. 찝찝한 미소, 비열한 친절, 사람을 앞에 두고 독백하는 것처럼 미묘하게 어긋나는 소통, 아둔한 건지 영악한 건지 모를 표정, 가끔 발악하듯 악다구니 쓰는 모습까지. 보다 보면 속이 메스꺼워질 정도로 훌륭한 그의 연기는, 이리저리 좌초하는 작품을 단단히 끌어 메고 목적지로 성큼성큼 향한다. 만약 배우가 죽어가는 작품을 살리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건 화려하거나 돋보이지 않아도 바위처럼 변함없이 안정적인 연기를 펼쳐 내는 배우에게 돌아갈 영광일 것이다. 사진: 디즈니플러스 코리아
요즘 극장가에 특이한 기운이 감돈다. 마치 낯선 안개가 틈입해 어느샌가 마을을 덮친 것처럼. 그 기류는 가까이에서 감지되지 않지만, 한 발짝 뒤에서 보았을 때 비로소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2024년 7월의 셋째 주, 장마를 맞은 한국에는 이런 영화가 인기다. <탈주>,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 <인사이드 아웃 2>, <핸섬가이즈>, 그리고 <하이재킹>. 그런데 이 중에서 <인사이드 아웃 2>와 <핸섬가이즈>를 제외한 세 편의 영화에는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모두 한국 영화이며, 비슷한 시기에 개봉해 여름 관객에게 선택받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다. 바로 '생존'을 향해 달려가는 영화라는 점이다. 영화 '탈주' <탈주>는 북한을 배경으로 새로운 땅을 향하는 규남(이제훈)과 그를 막으려는 현상(구교환) 사이 목숨 건 질주를 그린다. 여기서 탈주는 단순히 북을 벗어나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규남의 삶 전체를 결정짓는다. 영화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에서는 무고한 시민들이 도로에 갇힌 채로 재난을 맞는다. 비록 영화 자체는 식상한 전개와 클리셰의 늪에 빠져 재난을 피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달려드는 개와 무너지는 다리 사이에서, 인물들은 오직 생존을 향해 달린다. 영화 '하이재킹' 한편 <하이재킹>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객기 납치 사건에 관한 실화를 다룬 이 영화는, 납북 혹은 사망이라는 극한의 상황을 찾아 관객과 공유한다. 마치 끔찍한 게임처럼 승객들은 시시각각 더 큰 위험에 처한다. 과연 이들은 무사히 살아남아 삶을 지킬 수 있을까. 세 편의 영화는 장르도, 소재도 다르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 영화들이 자극하는 감각이 같다는 것이다. 이들은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라거나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감각을 정확히 조준한다. 세 편의 영화는 관객에게 생존게임을 제안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를 돌아보아도, 오로지 생존에 집중하는 한국 영화가 동시에 흥행 1~5위 안에 입성한 사례는 드물다. 최근 개봉한 영화와 콘텐츠까지 함께 보면 이 같은 경향은 더욱 짙게 느껴진다. 지난해 <콘크리트 유토피아>, <교섭>, <비공식작전>이 개봉했고, 최근 몇 년 사이 <오징어게임>, <The 8 Show>처럼 생존 자체에 집중하는 콘텐츠가 급증했다. 알다시피 영화는 현실과 다르다. 그러므로 이런 영화들이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말하기는 섣부르다. 그러나 장르와 소재를 막론하고, 영화는 당대 관객과 동일한 감성을 공유할 때 폭발적인 반응을 얻는다. 그러므로 2024년 한국에서 '생존'에 대한 감각과 감성을 자극하는 세 편의 영화가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나란히 걸린 상황이 예사롭게 보이지는 않는다. 어쩌면 지금 한국 관객의 심리는 생존게임 참가자의 그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는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인물에게 유독 공감하고 반응할 정도로 내면이 황폐해진 것은 아닐까. 우리가 각자 내밀하게 치르는 생존 전쟁이 스크린 위로 찾아왔다고 표현한다면 과장일까. 전시 상황을 방불케 하는 출산율, 어느 때보다 많아진 쉬는 청년, 폐업 위기의 자영업자 등 아찔한 지표들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하지만 때로는 예술이 어떤 수치보다 선명하게 현실을 반영한다. 제각각의 방향으로 헐레벌떡 도망치는 인물들. 쉴 새 없이 터지는 위기. 이건 마치 언제, 왜 켜진 줄 모른 채로 시종 울리는 시뻘건 비상벨을 연상하게 한다. 지금 영화로 본 한국은 생존게임에 던져진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