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평론가. 뮤직 텔러. 음악 여행가. 커피 애호가. 북유럽 문화 애호가. moderator / speaker / writer / critic
►[MV] 박종성 - 그대 내게 다시 '도-라-시𝄬-라-솔-시𝄬' 싸리비로 마음결 쓸어내듯 애잔한 음색에 가벼운 소름이 돋았습니다. 나도 몰래 '그대~ 내게~ 다시~' 하는 원곡 가사도 나지막이 따라 불렀지요. 지난달 12일 하모니카 연주자 박종성이 발표한 새 음반 '그대, 다시'의 첫 곡 '그대 내게 다시'의 첫 소절을 들으면서 말이에요. 원곡은 1992년 변진섭 5집에 실려 있었죠. 어린 시절만 해도 하모니카는 흔한 악기였습니다. 해질녘, 하늘이 붉어지면 동네 여기저기서 하모니카 소리가 정답게 담과 창 사이를 넘어 들려왔지요. 손바닥만 한 크기에 생각보다 큰 음량, 들숨과 날숨 모두 음표가 되고 선율과 화성마저 순식간에 넘나드는 이 신묘한 악기의 음향은 음악 이론을 몰라도 어린 마음을 깊게 파고들었습니다. ►김광석 - 이등병의 편지 단소나 리코더 같은 단선율 악기로는 뭔가 부족했습니다. 피아노는 또 너무 거대하고 어려웠죠. 소리나는 옥수수, 하모니카는 다루기 만만하면서도 음색은 풍성하고 케이스까지 있어 멋스러웠습니다. 평소엔 집안 어딘가에 소품처럼 전시했다가 '이거 사실 나 불 줄 아는데' 하며 꺼내 연주하는 '플렉스'까지 가능했죠. 그래선지 '엉아'나 동생 녀석의 보물 1호, 선물 1순위로도 꼽혔습니다. 머리가 더 커질 무렵이었을 거예요. 김광석의 하모니카를 접했어요. '이등병의 편지'를 여는 한 줄기 갈바람 같은 음표 무더기가 동네에 지던 땅거미의 색채를 불러냈죠. 과거에 대한 그리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같은 것들이 끊어질 듯 이어지는 들숨 하나, 날숨 하나에 담겨 폭풍처럼 가슴에 불어왔습니다. 휘휘 섞여 폭풍 쳤습니다. 요즘엔 웬일인지 하모니카가 잘 안 보이네요. 소리도 뜸하고요. 그러고 보면 바야흐로 가상 악기 전성시대입니다. 그래도 생존했습니다. 1970년대 신시사이저의 보급 이래 시퀀서(sequencer)와 미디(MIDI)의 시대까지 지나오면서도 아날로그 악기는 살아남았지요. 특히나 기타라는 악기는 컴퓨터로 재현하기 힘든, 손맛 나는 악기의 최후 보루처럼 여겨졌어요. 현(鉉)의 간섭 효과, 특유의 노이즈와 배음(倍音) 등이 가히 복잡계 물리학처럼 얽힌 기타 사운드의 특성만큼은, 키보드 눌러 소환하기 힘든 특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근년에 평론가들까지 깜빡 속인 노이즈 록(noise rock) 밴드 '파란노을'의 예에서 보듯, 가상 악기 기술은 전기기타의 굉음까지 컴퓨터로 그럴듯하게 모사하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파란노을 (Parannoul) - 아름다운 세상 (Beautiful World) 내년부터 인공지능(AI) 디지털교과서가 초중고교에 도입된다고 합니다. AI 교과서는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까요. AI 고도화 시대에 되레 인간의 판단력과 문해력이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읍니다. 미래의 음악 교과서는 또 어떤 모습일지도 궁금해집니다. 편리해지는 만큼 온기를 잃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버튼을 누르고 마우스로 클릭하는 대신,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불어 소리내는 악기에 대한 교육만큼은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생깁니다. 숨결과 촉감은 멜로디나 화성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기억 저장고요, 감성의 수용체라고 생각하니까요. 숨결과 촉감이 결부된 음악적 체험은 더 말할 나위도 없겠죠. 친구나 자녀가 옥수수를 뜯어먹을 때 이런 농담이 오가는 정겨운 동네 풍경을 10년, 20년 뒤에도 볼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너, 하모니카 부는구나?' ►오빠 생각 -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feat. 박종성)
"에스파 밟을 수 있죠? ㅎ" "걔들(방탄소년단)이 없는 게 나한테 이득일 것 같아서" 세상은 요지경 속입니다. 'K-문화 산업' 최고의 지성과 감성을 지닌 분들의 카톡을 통해 들여다본 세계가 어지럽습니다. 영상 미학, 철학적 세계관을 내세우던 고도의 시청각 예술가들이 벌이는 카톡 폭로전에서 진흙이 튑니다. 전산 자산, 그러니까 회사 지급 노트북을 회수한 뒤 PC 카톡을 포렌식해 언론에 가장 자극적인 부분을 전달한 하이브의 여론전, 직설과 욕설을 넘나든 민희진 대표의 2시간여 기자회견. 둘 다 연말 열릴 '2024 희박사 어워즈'의 '올해의 자극 콘텐츠 대상' 후보에 오른 것을 축하드립니다. 뉴진스 신곡 뮤비보다, 아일릿 댄스 챌린지보다 더 대단한 것들을 제작자 본인들께서 만들어버리셨습니다. 제3자로서 우리가 할 일은 뭘까요. 양측의 프레임 전쟁에서 한 발짝, 그들만의 전선(戰線)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면밀히 바라보는 일인지 모릅니다. 뮤직비디오 감상하듯, 화면에서 떨어져 가만히 턱을 괴고서 말이죠. 저 이전투구의 격투장은 월드컵 예선전이 아닙니다. 승패나 선악을 따지는 대신 경기장에서 튀어나오는 진흙 샘플을 받아봅시다. 수거해 성분 분석을 해보십시다. '음반 밀어내기' 등 내부 고발, 사태의 발단이었나 민희진 대표 기자회견 직후, '회사 경영자로서의 자격이 없음이 드러났다. 대부분 사실무근이라 반박할 가치도 없다'는 취지로 대응했던 하이브가 여론 반전에 실패하자 내놓은 2차 반박 보도자료는 '조목조목 반박'이라는 일부 언론의 수식어와 달리 조목조목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절반 가까이는 말꼬리 잡기에 불과했고, 심지어 언급 자체를 피함으로써 확전을 막고 프레임을 다른 곳에 설정하려는 듯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바로 '음반 밀어내기'입니다. 발매 일주일간의 판매량, 즉 '초동' 판매량을 인위적으로 늘리기 위한 편법적 행위죠. 음반 유통사나 자회사를 이용해 대량 주문을 넣는 방식, 팬 사인회 등 사행성을 부추기는 이벤트 등을 이용한다는 게 업계 안팎의 전언입니다. 사진 : 연합뉴스 민희진 대표의 주장에 따르면 흙탕물 싸움의 발단은, 한 달여 전 어도어의 하이브를 향한 내부 고발 관련 질의서 발송입니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자면 내부 고발은 '내부에서 하는 고발'이 아닙니다. '진실을 밝힐 목적으로 자신이 속한 기업이나 조직이 저지른 비리를 폭로하는 행위'입니다. 즉, 내부자가 외부를 향해 내부의 비리를 폭로하는 행위입니다. 이 내부 고발 질의서에 아일릿의 베끼기 문제, 뉴진스 차별 대우 문제와 함께 음반 밀어내기 등 K-팝 선도 기업으로서 기존 업계 병폐를 답습하고 있는 실태에 대한 고발도 함께 담겼다는 것이, 관련 문서를 열람해 본 분들의 증언입니다. 민희진 대표도 25일 기자회견 때 언급했지만 본인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쓰는 바람에 정작 외부자이자 관람자인 '우리들'에게 중요한 이 정보(시스템에 대한 내부 고발)는 무게감 있게 다루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향후 언론에서 이 부분이 집중 조명된다면 이번 사태는 또 다른 '핵폭발'로 2차 발화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2년 전 분출됐던 방탄소년단의 '찐고민' 우리가 살펴볼 두 번째 더러운 진흙은 멀티레이블 시스템의 허상입니다. 아일릿의 뉴진스 베끼기나 뉴진스 차별 대우 주장은 민 대표의 자의식 과잉, 사적인 억울함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민 대표의 본의와 상관없이 이 부분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화두를 던집니다. 근년에 이뤄진 K-팝의 글로벌 성공은 제2의 한강의 기적, 문화 버전 한강의 기적이라 할만합니다. 단, 국가 경제 측면에서 한강의 기적이 30, 40년을 두고 이뤄졌다면 K-팝이나 하이브 버전 한강의 기적(또는 용산의 기적)은 3, 4년 새에 폭발했다는 면에서 다릅니다. 아시다시피 2010년대 말 방탄소년단의 미국 진출, 2020년 'Dynamite'의 빌보드 싱글차트 1위, 하이브의 코스피 상장은 숨 가쁘게 이뤄졌죠. 'Dynamite'의 성공은 상징적이자 실질적이었습니다. 방탄소년단의 음악 세계를 따라온 많은 음악 팬과 전문가는 'Dynamite'에 대해 대단히 좋은 팝송이라고 평하는 한편, 방탄소년단의 세계관과 스토리 라인이 무너진 계기로 보기도 합니다. 영국인 2명이 오롯이 만들어 준(작사, 작곡, 프로듀스) 곡이었죠. 멤버 일부가 공동 작가로 이름을 올리던 방탄소년단 디스코그래피의 통례에서도, 청춘의 방황·갈등·폭주·사랑과 같은 기존 스토리라인에서도 한참 벗어났습니다. 당시 발매된 'Dynamite' 싱글 바이닐은 디지털 섬네일과 같은 디자인의 표지에 속지 하나 없이 골판지 안에 7인치 판 하나 덜렁 들어있는 부실한 구성이 돋보였습니다. 중국 제작사에 주문해 급하게 찍어냈습니다. 차트 성공을 위해 급조된 피지컬 판매량 증대용이란 의심을 살 만한 퀄리티를 자랑(?)했습니다. 상장을 앞둔 잰걸음이 느껴졌습니다. 2022년 6월 14일 저녁을 기억하시는지요. 방탄소년단의 유튜브 채널인 '방탄티비'에 올라온 영상 하나가 파문을 일으킵니다. '찐 방탄회식'이라는 이 영상에서 방탄소년단 멤버들은 '찐고민'을 앞다퉈 분출해 냅니다. 출처 : 방탄티비 "아이돌 시스템 자체가 사람을 숙성하게 놔두지 않는 것 같다.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RM) "계속 뭔가를 찍어야 하니 성장할 시간이 없다. 언젠가부터 번안 기계가 되면 제 역할은 끝난 것." (RM) "(데뷔한) 2013년부터 한 번도 재미가 없었다. 그때는 할 말은 있어도 스킬이 없었는데 지금은 할 말이 없다." (슈가) "기계가 되어버린 느낌." (진) 하나하나가 절절히 다가왔는데 저는 특히 RM의 말 가운데 '번안 기계'란 키워드에 꽂혔습니다. 작사나 작곡도, 번역도 아닌 '번안'이란 단어를 왜 썼을까요. K-팝에 일반화한 '인터내셔널 A&R(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쓰이는, 새로운 노랫말과 악곡을 수급해 조립하는 시스템)'은 표절 우려를 줄이고 음악적 질과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 기여했지만 때때로 독창적 국내 크리에이터들의 개성을 희석하거나 희생시키는 경우도 발생시켰습니다. RM이 말한 '번안 기계'가 뭘까요. 국내외 작곡가들이 단기간 한데 모여 합숙 훈련이나 수련회 느낌으로 신곡을 합작하는 이른바 송캠프에서는 트랙(비트) 메이커(작곡·편곡자)와 톱 라이너(보컬 멜로디 창작자)가 합을 맞춥니다. 톱 라이너는 트랙에 맞춰 즉흥적 느낌대로 멜로디나 플로(flow)에 어울리는 가사를 맥락 없이 지어 부르는 경우가 흔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데모(또는 가이드)는 국내 작사가에게 '되도록 원곡의 발음 흐름에 맞춰서 비슷한 음운의 한국어 가사를 붙여달라'는 권고와 함께 전달됩니다. 국내 작가들 입장에서는 이 작업이 창작이되, 제한이 분명한 창작이 되는 셈이죠. 왜 주체적 창작자였던 누군가는 '번안 기계'가 될까요. 성과주의 때문입니다. 하이브의 '레이블 쇼핑' 목적은 무엇이었나 민희진 대표가 던진 키워드 가운데 주석 달기가 필요한 또 하나가 바로 '군대 축구'입니다. 아일릿의 'Magnetic'을 만드는 과정에서 방시혁 하이브 의장이 직접 작사, 작곡, 프로듀스에 참여하고 전체 콘셉트 설정을 지휘한 것을 꼬집은 것으로 보입니다. 한때 JYP엔터테인먼트는 수장 박진영 프로듀서가 여러 그룹의 타이틀곡을 직접 만들었습니다. 지속가능성에 대한 지적이 나오자 10년 전부터 박 프로듀서도 여러 작곡가 중 하나, N분의 1로 백의종군해 신곡의 품질만으로 맞붙어 A&R 팀의 선택을 기다리는 '블라인드 테스트'를 자청했습니다. 그 이후 여러 회사가 제왕적 리더십에서 벗어나 이런 시스템을 채택했죠. 그러나 간혹 '제왕들'이 직접 등판할 때마다 '병장에게 볼 몰아주기 아니냐'는 의혹이 나왔습니다. 아일릿 데뷔 쇼케이스. 사진 : 연합뉴스 아일릿은 뉴진스와 다른 그룹입니다. 하지만 2022년 뉴진스의 등장과 함께 바뀐 가요계 트렌드가 십분 반영된 그룹이기도 합니다. (같은 레이블인 빌리프랩 소속의) '엔하이픈의 여동생 그룹'이 아니라 '하이브의 막내딸'로 마케팅됐고, 실제로 유사성으로 보면 엔하이픈보다 뉴진스와 더 닮아 있는 게 사실입니다. 빌리프랩의 독자성을 존중했다면 차라리 엔하이픈의 시청각적 특성이 아일릿과 희미하게라도 연결되는 게 더 자연스러웠겠지요. '엔하이픈의 동생'과 '하이브의 막내딸'은 그 인식의 차가 엄청납니다. 엔하이픈의 동생이라면 그 고유의 색깔이 천천히 피어나는 것을 지켜보고 물을 주며 기다려야겠지요. 하지만 '하이브의 막내딸'이라면 마음이 급해질 겁니다. 지금 시장에서 먹히는 트렌드를 좇아 만든 뒤 천문학적 마케팅 비용을 투여해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겠지요. 하이브는 왜 멀티레이블을 지향할까요. 상장과 함께 주주들은 이전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체제에서 방탄소년단이 전체 매출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리스크에 대해 못마땅해했습니다. 글로벌 성공으로 돈이 생긴 빅히트는 쇼핑하듯 레이블들을 사들입니다. 인위적으로 최단 기간에 방탄소년단의 매출 비중을 30%대까지 낮춥니다. 이러한 '쇼핑'의 목적이나 기준. 과연 레이블의 개성이나 색깔을 다채롭게 하는 데 집중됐을까요. 사세 확장과 리스크 분산에 치우쳤던 것은 아닐까요. 멀티레이블은 여러 개의 레이블이 각자의 색깔과 개성을 빛낼 때 건강한 팔레트가 돼 전체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높입니다. 모(母) 기업은 그 다채로움을 조용히 장려하는 게 좋습니다. 각 레이블의 제작 시스템에서 나오는 결과물을 기다렸다가 최종 단계에서 품질 관리와 판촉 전략 수립이라는 화룡점정을 찍는 컨트롤 타워의 역할에 충실할 때 더 빛납니다. 어머니(母)나 아버지가 여러 자식에게 똑같이 '공부 1등'만 강요하는 것보다, 각자의 개성을 장려해 진로 설정과 행복 도모를 돕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사진 : 게티이미지 K-팝의 '너무 많은 기적'을 생각해볼 시간이 왔다 이번 사태가 초유의 흥미로운 사태인 만큼 그것을 들여다볼 렌즈도 대단히 많습니다. 세대론, 젠더론, 미디어 트렌드…. 하지만 케이팝의 지속가능성이란 렌즈를 놓아선 안됩니다. 그들(하이브나 민희진 대표)의 뜻이나 방향 설정과 무관하게 마침 진흙이 튀고 있습니다. 차제에 연구하고 까발려야 합니다. 언젠가부터 K-팝에는 기적이 너무 많이 일어납니다. 빌보드 진입, 빌보드 정상, 세계 최다 판매량…. 기적이 흔해지니 억지로라도 기적을 만들어 내야 하는 압박이 제작사들을 기이하고 엄청난 압력으로 추동합니다. 기적에 무감해져 괴이쩍은 기적도 그냥 믿어버린 우리 관람자들에게도 잠시 '이런 기적은 어떤 것으로 구성돼 있는가'를 생각해볼 시간이 주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간을 허투루 써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구획한 전선이나 편 가르기 프레임에 참전하는 데 헛심을 쓰기엔 이 기회가 너무 귀합니다.
▶ 관련 영상 : Daft Punk - Get Lucky (Official Video) feat. Pharrell Williams and Nile Rodgers 찰랑찰랑, 이 애간장 태우는 사운드 아시죠? 16분 음표로 기타를 후려갈기는데 절묘하고도 정교한 저 스타카토와 당김음. 거대한 댄스 플로어 전체를 출렁이게 하는 전기기타 연주. 주인공은 바로 펑키한 기타 사운드의 전설, 나일 로저스(Nile Rodgers)입니다. '로봇 듀오'로 유명한 프랑스의 다프트 펑크가 2013년 'Radom Access Memories'를 만들 때, 그 차가운 디지털과 뜨거운 아날로그의 컨버전스라는 콘셉트에서 핵심 역할을 한 것이 로저스 옹이었습니다. 1952년생. 1977년 밴드 쉭(CHIC)의 멤버로 데뷔했죠. 쉭의 동료이기도 한 베이시스트 버나드 에드워즈의 어마어마한 베이스 사운드와 함께 디스코와 펑크(funk)를 넘어 팝계 전반에 걸쳐 '그루브(groove)'의 개념을 다시 썼습니다. ▶ 관련 영상 : Sister Sledge - We Are Family (Official Music Video) 이제 아시겠죠? 지금 딱 두 곡 들었는데도 '아, 이게 나일 로저스 사운드구나!' 하는 감이 오시리라 믿습니다. 다이애나 로스, 데이비드 보위, 마돈나, 듀란듀란을 비롯해 다프트 펑크, 아비치, 비욘세, 마이클 잭슨, 머라이어 캐리까지…. 수많은 음악가가 로저스 옹을 기타리스트나 프로듀서로 기용해 '역대급 펑크 마사지'를 받았습니다. 저는 2017년 미국의 한 페스티벌에 갔을 때 먼 발치에서 그를 알현한 적 있습니다. 텍사스주 오스틴, SXSW 뮤직 페스티벌의 기조연설자로 무대에 섰거든요. 버락 오바마, 레이디 가가도 이 페스티벌의 기조연설자를 맡은 바 있습니다. 로저스가 무대에 나타나자마자 전 세계 음악 관계자들이 벌떡 일어섰습니다. 객석에서는 그의 등장만으로도 오랫동안 기립박수가 이어졌습니다. "히트곡이야말로 진정한 컨버전스(융합)의 예라고 전 늘 생각해 왔습니다. 수백만 음악 팬의 가슴에 말을 거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그의 말에 설교라도 듣듯 현장의 많은 이들이 고개를 주억거렸습니다. ▶ 관련 영상 : LE SSERAFIM (르세라핌) ‘UNFORGIVEN (feat. Nile Rodgers)’ OFFICIAL M/V 그러니 작년 이맘때쯤 이 곡이 나왔을 때 저는 물론이고 국내 음악평론가와 관계자들이 경악했던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feat. Nile Rodgers)'. 괄호 안에 쓰인 몇 글자의 무게가 실로 대단했으니까요. 정작 재생 버튼을 누르고 난 뒤엔? 나일 로저스가 나타나기는커녕 사라졌다는 데 무게가 실렸어요. '나일 로저스의 기타는 도대체 어디에 들어간 거냐', '10번, 100번을 들어도 안 들린다'는 수군거림이 음악계에 퍼졌죠. 물론 곡을 끌어가는 메인 테마가 기타로 연주되긴 합니다만, 이건 나일 로저스스럽지도 않을뿐더러 다른 어떤 기타리스트도 소화할 수 있는 수준이었죠. 그래서 이 건은 '나일 로저스 피처링 사건'이 아니라 '나일 로저스 실종 사건'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 관련 영상 : Le Sserafim Coachella 2024 Weekend 1 - Unforgiven (Fancam) 13일(현지시간) 미국 코첼라 페스티벌의 르세라핌 무대에 나일 로저스가 깜짝 등장했을 때, 그래서 광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드디어! 나일 로저스가 정확히 어떤 파트를 연주했는지 알 수 있겠구나!' 그러나… 알 수 없었습니다. 메인 리프는 기존 르세라핌 밴드의 다른 기타리스트가 연주했고, 로저스 옹이 이런저런 연주를 열심히 하긴 했지만 사운드 믹스의 뒤편으로 밀려나 있었고 도드라지는 선율도 발견하기 힘들었습니다. 하이브, 쏘스뮤직, 르세라핌 입장에서는 코첼라가 절호의 기회였는데 말이에요. '자, 너희 음악 덕후들 이것도 못 듣니? 이거 봐! 로저스 옹이 여기서 이렇게 연주하잖아. 심지어 우리가 직접 불러왔다고. 자, 지켜봐. 그리고 들어봐!' 보란 듯이 보여주고 들려줄 수 있는 회심의 찬스요. 그걸 이렇게 넘겨버리나요. 저라면 뼈아픈 실기(失期)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가장 아쉬웠던 건 샤라웃(shout-out·언급, 헌사) 실종 사건이었습니다. 'UNFORGIVEN (feat. Nile Rodgers)'를 부르며 멤버들이 로저스 옹에게 다가가 에워싸며 15초 정도 춤을 춘 게 전부였죠. 공연 중간에도, 피날레에도 '전설의! 나일 로저스에게 박수를!' 같은 코멘트는 없었습니다. (못 드린 박수는 아래 링크로 대신드리겠습니다….) ▶ 관련 영상 : Nile Rodgers & CHIC - Good Times (Glastonbury 2017) '나일 로저스(의 여전한) 실종 사건'은 그러나 뜻밖의 이슈로 덮였습니다. 르세라핌 멤버들의 가창력 논란이죠. 노래를 못했냐고요? 못했습니다. 하지만 최악은 아니었습니다. 지금껏 수많은 케이팝 아티스트들은 라이브에서 'AR 떡칠'을 했습니다. AR은 'all recorded'의 약자. 반주 트랙은 물론이고 노래(보컬)까지 다 미리 녹음된 것을 튼다는 이야기입니다. AR과 립싱크 기술은 케이팝의 태동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공연 무대에 오르기 전에 스튜디오에서 술렁술렁 춤추면서 약간 달리는 호흡, 미세하게 불안정한 음정으로 라이브 버전 보컬을 따로 녹음해 둔 뒤 무대 위에서 재생하고 립싱크를 하는 방식이 널리 쓰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부분의 아이돌 레전드 라이브는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케이팝뿐 아닙니다. 충격적이지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진정성 있는 라이브 음악 프로그램(또는 콘텐츠)이라 불리는 여러 곳에서도 이런 립싱크는 매우 일반적입니다. 아이돌 댄스 그룹에 한정된 얘기도 아닙니다. ▶ 관련 영상 : "Wanna Be Startin' Somethin'" w/ the Stars! | Lip Sync Battle Live: A Michael Jackson Celebration 립싱크 논란, 라이브 가창력 논란은 케이팝만의 문제 역시 아닙니다. 1981년 MTV가 개국하고 댄스뮤직의 패러다임이 '듣는 사람이 춤추는 음악'에서 '춤추는 사람을 보는 음악'으로 넘어가기 시작했죠. 재닛 잭슨, 마이클 잭슨, 마돈나 같은 비디오형 댄스 가수들은 실제 자신의 평소 가창력과 별개로 라이브 가창력 논란, 립싱크 논란에 끝없이 휩싸였습니다. 사실 댄스와 노래의 완벽한 겸업은, 호모 사피엔스, 현생 인류의 발성 메커니즘과 성대 구조로는 완벽히 해결하기가 힘든 문제입니다. 가창에서 정확한 음정을 지속적으로 내는 데는 두 가지 조건이 필수입니다. 첫째는 음감, 둘째는 호흡입니다. 정확한 음감을 갖고 있다고 해도 호흡이 고르지 못하면 목표로 한 음을 정교하게 지속하기 힘듭니다. 사람이 그렇게 생겨먹었습니다. 케이팝 안무는 아크로바틱하기로 유명합니다. 미국 팝스타들의 안무보다 더 '빡센' 경우가 많습니다. 저런 안무를 소화하면서 정확한 음정으로 부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껏 많은, 대표적인 케이팝 스타들이 교묘한 AR과 라이브의 합성으로 '마술쇼'를 해왔습니다. 물론 똑같은 과업을 르세라핌보다 더 잘 해낼 수 있는 사람도 분명 있습니다. 연습량과 재능의 차이겠지요. 그러니 저에게 차라리 음 이탈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용기입니다. AR을 상당 부분 제거하고 라이브 가창 비중을 높인 르세라핌과 소속사의 담력(결과를 뻔히 예상할 수 있음에도)에 박수를 보냅니다. 위 이미지는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홈페이지에 등록된 아일릿의 'Magnetic'의 저작자 정보입니다. 작사자, 작곡자 각 15명씩입니다. 하지만 멜론이나 지니의 앨범 정보에는 저작자 정보가 누락돼 있습니다. 하이브 등 케이팝 기획사들은 음원 플랫폼 앨범 정보에 이렇게 저작자를 기록할 때도 있고 기입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저작자나 제작 관련자의 긴 리스트 대신, 아이돌 멤버의 슈퍼 IP에 대중과 팬덤의 관심과 애정도를 집중하도록 하는 것이 케이팝 산업 발전의 핵심기술이기 때문일까요. 르세라핌의 코첼라에서 또 하나 아쉬운 게 있었습니다. 이것도 대단히 케이팝스러운 특성인데요. 곡 사이에 멤버들이 서서 관객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시간. 뻔하고 짜여진 멘트만 반복한 것 말입니다. 멤버 각자의 인사말들 사이에는 어김없이 1초 정도의 어색한 포즈(pause)가 있었습니다. 잘 연출된 연극보다도 더, 대사간에 인위성이 돋보였습니다. 춤도 일면 그랬습니다. 특히 타이틀곡이나 활동 곡이 아니어서 타이트하게 안무가 짜여지지 않은 곡을 소화할 때요. 악곡의 흥을 제대로 북돋우지 않는 어설픈 몸동작들이 몰입을 방해했거든요. 한마디로 코첼라처럼 특별한 바이브의 무대와 공간에 걸맞지 않은 경직된 무대였죠. 되레 음정이 흔들리는 라이브 가창만이 (역설적이게도) 가장 격하게 '르세라핌이 라이브를 하고 있다'는 감각을 일깨워줄 정도였어요. 아, 맞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짜인 멘트 위주로 할 거였다면, 회사(하이브 또는 쏘스뮤직) 차원에서 "전설의 나일 로저스!" 한마디 정도 더 암기시켜도 되지 않았을까요?! 하이브가 케이팝을 대표하는 제작사로서 국내 엔터사 최초의 '대기업' 진입에 근접했다는 보도가 최근 나왔습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 음악 산업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기업, 음악을 중시하는 회사임을 천명하는 하이브가 케이팝을 대표해 음악 제작의 기본에 대한 충실한 리스펙트를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마지막 말은 말 대신 노래로 하겠습니다. ▶ 관련 영상 : Daft Punk - Give Life Back to Music (Official Audio) p.s. 참, 르세라핌은 20일(현지시간) 한 번 더 코첼라 무대에 섭니다. 한국시간으로는 21일(일) 오후 4시 50분 정도부터 유튜브의 코첼라 공식 채널에서 실시간으로 실황을 보실 수 있습니다. 르세라핌의 용기 있는 두 번째 코첼라 무대에 일단 박수를 먼저 보냅니다. 'Damn, I really make it look easy'(르세라핌 'EASY' 중)의 당찬 태도를 무대 위에서도 보여줄 수 있기를!
▶ 관련 영상 : YOUNG POSSE (영파씨) 'XXL' MV 영파씨라고 해서 처음엔 양파 씨인가 했습니다. 마침 얼마 전 가수 양파 씨를 잠깐 만났거든요. '아님 내가 모르는 내 친구 김영파가 있나?' 휴대전화 주소록을 뒤져 봤지만? 아니었습니다. 젊은 패거리(young posse)란 간판을 내건, 야심찬 신인 걸그룹이었죠. 솔직히 'XXL'을 재생하고 정확히 12초 뒤 오금이 저려 왔습니다. '이… 이것은 한국 대중가요사의 가장 힙한 비트 중 하나인… 커… 컴 백 홈?!?' 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XXL'은 '밤양갱'과 함께 2024년 1/4분기 최고의 곡이라고요. 특히나 단순히 'Come Back Home'을 오마주해서만은 아닙니다. 도입부와 중간 몇 곳에 'D 플랫 마이너' 음계의 멜로디 네 마디를 흘렸다가 저 'D 마이너'의 'Come Back Home' 루프로 반음 올림 조바꿈하는 방식으로 극적인 장면 전환을 하는 편곡 연출 방식이 대단합니다. 우리는 올해 연말, 이 두 곡을 테이블에 놓고 다시 논의하게 될 겁니다. ▶ 관련 영상 : [STATION] aespa 에스파 '시대유감 (時代遺憾) (2024 aespa Remake Ver.)' MV 잘파세대(Z세대+알파세대) 아이돌의 서태지와 아이들 '강제 소환'은 올 들어서도 벌써 두 번째입니다. 지난 1월 15일, 에스파가 '시대유감'을 리메이크해 발표했죠. 'Come Back Home'과 함께 서태지와 아이들의 마지막 정규앨범인 4집에 실렸던 곡이죠. 원곡 발표 연도는 1995년입니다. 에스파 멤버들의 생년은 2000년부터 2002년 사이, 영파씨 멤버들의 생년은 2004년부터 2009년 사이입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실시간으로 접하려야 접할 수 없었던 세대죠. 에스파의 '시대유감' 리메이크는 SM엔터테인먼트가 서태지 측에 리메이크 프로젝트 제안을 하면서 성사됐습니다. 제가 취재한 뒷이야기를 말씀드리자면, 처음부터 콕 찍어 '시대유감'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양측이 어떤 곡을 할지 논의를 계속하다 결국 '시대유감'으로 의견 합치를 봤다고요. 에스파가 지난 '쇠맛' 아이돌의 시청각적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곡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 관련 영상 : 드렁큰 타이거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 뮤직비디오 영파씨는 에스파보다 더 어린 그룹입니다. RBW 산하 DSP미디어와 비츠엔터테인먼트가 합작해 만든 그룹인데 비츠의 대표이자 영파씨의 메인 프로듀서, 이 곡의 공동 작사 작곡 편곡을 맡은 것이 1979년생 케이팝 작곡가 키겐입니다. 같은 1979년생 케이팝 프로듀서 라이언 전을 얼마 전 만났는데, 음악에 투신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서태지와 아이들이라고 하더군요. 서태지는 그 세대에게 그런 존재였습니다. 타이거 JK(1974년생·드렁큰 타이거)가 한국으로 날아온 것도 서태지와 아이들의 영향이었다고 들었어요. ▶ 관련 영상 : 2NE1 - COME BACK HOME M/V 앞서 2NE1이 2014년 발표 곡 'Come Back Home'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을 오마주했죠. 음악적으로는 유사점이 없었지만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였던 양현석 씨가 설립하고 운영한 YG엔터테인먼트의 산물이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습니다. 물론 노래와 뮤직비디오 곳곳에 헌정이 들어가 있습니다. 2017년에는 방탄소년단이 'Come Back Home'을 리메이크했습니다. 서태지 데뷔 25주년 기념 리메이크 프로젝트의 일환이었죠. ▶ 관련 영상 : BTS (방탄소년단) - Come Back Home MV 젊은 세대가 서태지와 관련해 적극적으로 헌정, 언급, 참조를 하는 현상의 배경에 대해서는 조금 더 들여다봐야 합니다. 특히 국내 힙합 신을 면밀히 살펴보신 분이라면 근 몇 년간 이런 현상이 도드라졌다는 것을 느끼셨을 겁니다. 래퍼 창모의 경우 2021년에 내 평단에서도 찬사를 받았던 앨범 'UNDERGROUND ROCKSTAR'에 트리플 타이틀 곡, 즉 앨범의 세 가지 타이틀 곡 중 하나로 '태지'란 곡을 내세웠죠. 특히 이 곡은 '난 내 삶의 끝을 본 적이 있어/내 가슴속은 갑갑해졌어'라는 'Come Back Home'의 첫 가사를 그대로 따왔습니다. '내 첫 시작 때 내 리 놈들한테/말했어 '나는 서태지'라든가 '나는 new 서태지' 등의 가사가 등장합니다. 많은 돈과 명예를 얻어 플렉스를 하는 것이 가사의 전체적인 내용인데 그 끝판왕이자 롤모델 격으로 서태지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이 곡은 2022년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힙합 노래'를, 한국 힙합 어워즈에서 '올해의 힙합 트랙'과 '올해의 뮤직비디오'를 수상하기도 했죠. 참고로 창모는 1994년생입니다. ▶ 관련 영상 : 창모 (CHANGMO) - 태지 (TAIJI) [Official Music Video] (ENG/JPN) 포스트-서태지 세대가 실시간으로 체험하지 못한 서태지에 대한 '존재하지 않는 향수'를 느끼는 현상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요. 태어나면서부터 케이팝의 시대(H.O.T.가 데뷔한 1996년~현재)를 살게 된 이들은 케이팝의 조상, 프로토(원형)-케이팝으로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존재를 후행 학습으로 알게 된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팬덤 비즈니스와 기획사 시스템에 강하게 묶여 있는 지금의 케이팝 아이돌과 달리 작사, 작곡, 편곡, 제작을 멤버가 다 담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활동 방식도 주체적으로 정하며, 7년 계약이나 소속사와 줄다리기 같은 것 없이 앨범 네 장 내고 은퇴를 선언한 뒤 헬리콥터를 타고 날아가 버린 서태지와 아이들의 스토리는 이들에게 마치 도시 전설처럼 느껴집니다. 동경하는 케이팝의 강렬함, 그리고 힙합의 주체적 플렉스를 합쳐 놓은 거대한 신화와도 같은 스토리죠. 만들어진 세계관이 아니라 진짜 신세계, 오래된 신세계이자 이상향 같은 이야기이자 그 주인공들이 서태지, 서태지와 아이들인 셈이죠. 정작 서태지는 2014년 정규 9집 'Quiet Night', 그리고 이듬해 실황 음반 발표 이후 긴 음악적 동면에 들어갔습니다. 더는 긴 말 않겠습니다. 태지 형, 이 노래 듣고 돌아와. 이젠 그만 됐어. 주위를 둘러봐. 널 기다리고 있어…. ▶ 관련 영상 : 서태지와 아이들(Seotaiji and Boys) - 컴백홈(COME BACK HOME) M/V
▶ 관련 영상 : BoA 보아 'No.1' MV 보아의 'No.1', 기억나시나요. 21세기 초, 한국인의 가슴을 '웅장'하게 만든 그 곡입니다. 뮤직비디오 인트로부터 잘 보셔야 합니다. 두 개의 소품이 등장합니다. 소품이라고 하기엔 좀 큰, 말하자면 대품입니다만. 달, 그리고 탑이죠. 석가탑, 다보탑, 롯데탑 아닙니다. 붉은빛으로 휘황한 저 탑은, 도쿄타워입니다. 그리고 보아는 저 도쿄타워를 배경으로 멋진 춤과 노래를 선보입니다. 그다음 장면은 어떤가요. 나선계단을 보무도 당당하게 오르는 보아를 둘러싸고 일본 현지 미디어가 벌이는 취재 경쟁이 등장합니다. 맞습니다. 저 노래를 듣고 가슴이 '웅장'해졌던 것은 첫째, 노래가 좋아서요, 둘째, 금의환향한 보아 때문이었습니다. 뮤직비디오와 노래 제목은 보아의 위업을 뽐내는 플렉스였죠. 2002년, 보아는 일본 첫 정규앨범 'Listen to My Heart'로 한국 가수 최초 오리콘 차트 1위를 달성합니다. 일간 앨범차트와 주간 앨범차트 모두 정상을 밟았고 100만 장 이상 팔려나가며 밀리언셀러가 됐죠. 말 그대로 신드롬이었습니다. '변한 그를 욕하진 말아줘/니 얼굴도 조금씩 변하니까'라며 보름달과 대화하는, 21세기판 정읍사('달하 노피곰 도다샤… 아으 다롱디리')라 할 수 있는 이 명곡은 그러나 '국산'은 아니었습니다. 작곡가는 노르웨이 유명 프로듀서 지기(Ziggy·본명 Sigurd Heimdal Røsnes)였죠. 더욱이 이 'No.1'이 플렉스하는 대상, 즉 오리콘 최초 정상을 달성한 일본 1집 'Listen to My Heart'는 일본 음반사 에이벡스가 음악적 주도권을 쥐고 에이벡스 산하 프로듀서들이 만들고 전곡을 일본어로 부른, 사실상 일본 내수시장에 철저히 맞춘 '일본 음반'이었습니다. ▶ 관련 영상 : NCT WISH 엔시티 위시 'WISH (Korean Ver.)' MV 그 뒤로 20여 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 의미심장한 신인 그룹의 신곡을 목도합니다. SM엔터테인먼트의 대형 프로젝트, NCT의 마지막 서브그룹(sub-group)이 되는 NCT WISH입니다. 2월 21일 데뷔이니 이제 갓 보름을 넘긴 루키죠. 6인조인데 일본인 네 명, 한국인 두 명으로 구성됐습니다. 데뷔곡 'WISH'를 한국어와 일본어로 발표하면서 사실상 한일 동시 데뷔를 선언했습니다. 작곡, 편곡의 핵심은 한국인 프로듀서 켄지와 드레스입니다. 총괄 프로듀서는 보아입니다. 맞습니다. 당시 열다섯 살 나이로 단군 이래 처음 오리콘의 벽을 무너뜨렸던 작은 거인, 보아가 맞습니다. 일본의 프로듀서 아래 어렵게 일본어를 연습해 냈던 일본 1집. 그리고 22년의 세월 뒤, 한국 작곡가들이 만든 한국어와 일본어 곡을 들고 이번엔 프로듀서로서 다시 한번 일본 공략에 나선, 이제는 37세의 보아. ▶ 관련 영상 : NCT WISH 엔시티 위시 'WISH (Japanese Ver.)' MV 올해는 일본 대중문화 전면 개방 20년째가 되는 해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나라에는 일본 문화 콘텐츠가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아픈 근현대사 때문입니다. 일본풍의 문화가 조금이라도, 서브컬처로라도 유행할라치면 '왜색의 침공' 같은 제목을 단 사회성 기사나 방송 꼭지로 비판받기 일쑤였습니다. 일본 문화의 수입은 법적으로도 제재 대상이었습니다. 1998년, 역사적인 일본 대중문화 1차 개방이 시작됐습니다. 당시엔 애니메이션이 먼저 들어왔습니다. 분야별로 단계적 개방을 거쳐 2004년, 마지막으로 제이팝 음반이 국내에 정식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됩니다. 그 전까지도 한일 문화 교류는 조금씩 있었지요. 조용필, 김연자 같은 가수가 일본에 진출해 팬덤을 일구기도 했고, 우리나라에서는 암시장을 통해 일본의 엔카 가수들부터 록 밴드 엑스저팬, 팝가수 아무로 나미에까지 다양한 음악가가 서브컬처 마니아들 사이에 팬덤을 형성했습니다. 그렇다 해도, 전면 개방을 앞두고는 청춘이 왜색으로 물들 것이다, 우리 문화 산업이 잠식되고 위축될 것이다 등의 반론도 대두됐지요. ▶ 관련 영상 : BTS (방탄소년단) 'Dynamite' Official MV 그러나 그런 반론들은 놀랍게도 기우에 불과했음이 이내 증명됐습니다. 21세기 초, 보아와 배용준이 이끌었던 한류는 이후 동방신기, 2PM, 그리고 카라와 소녀시대 같은 그룹들이 이어받았습니다. 일본 내에서 큰 팬덤을 일궈 도쿄돔, 부도칸 같은 일본 문화의 심장과 같은 공연장을 매진시키고 도쿄의 신오쿠보를 중심으로 한류 팬들이 모여드는 문화 거리가 조성되기도 했죠. 저도 그 무렵 매년 도쿄돔, 오사카돔, 부도칸 등의 케이팝 콘서트를 여러 차례 취재했는데 그 열기가 대단했습니다. 2012년 '강남스타일' 열풍은 일본 문화 관계자들의 간담을 다시 한번 서늘케 했지요. 1963년 일본 가수 사카모토 규가 '스키야키'란 곡으로 세웠던 아시아 가수 유일무이의 빌보드 싱글차트 1위 기록에 싸이가 턱밑까지 다가섰으니까요. 2020년 방탄소년단의 'Dynamite'가 드디어 그 벽을 무너뜨렸습니다. 이 곡의 빌보드 싱글차트 1위 이후 일본 내에서는 케이팝 성공의 비결이 뭐냐는 데 대한 탐색과 자성의 분위기가 이어졌습니다. 저도 당시 아사히신문 등 일본 매체에 방탄소년단과 케이팝 신드롬의 비결에 대한 자문을 해드렸습니다. 그들은 한국인의 거침없는 도전 정신을 케이팝 성공 비결로 자체 분석하더군요. ▶ 관련 영상 : 'SPECIAL STAGE' YOASOBI - Idol(아이돌) #엠카운트다운 EP.815 | Mnet 230921 방송 하지만 중요한 것은 문화란 결코 전쟁이 아니라는 겁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두 나라가 폭넓은 교류를 통해 문화의 토양을 더 넓히고 비옥하게 하며 삶을 윤택하게 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문화적 개방, 문화적 교류의 진정한 의미일 겁니다. 언제나 우리 문화인들 마음속의 'No.1'은 한국 문화도, 일본 문화도, 바이킹 문화도 아닌 그저 삶을 아름답게 해주는 그냥 문화(文化), 그 자체이니까요.
▶ 관련 영상 : IU 'Shh.. (Feat. HYEIN, 조원선 & Special Narr. - )' MV Teaser 또 아이유냐고요? 이번엔 조금 긍정적인 의미로 놀라서요. 오는 20일 발매되는 아이유의 새 미니음반 ‘The Winning’의 또 다른 수록곡 ‘Shh..’가 공개 전부터 화제입니다. 뮤직비디오에 배우 탕웨이가 나온다고 해서요. 일단 화면 ‘때깔’부터 뭔가 매우 영화적이지 않습니까? 요즘 케이팝 뮤직비디오 보는 재미가 좋습니다. 칼군무와 독특한 세계관, 그걸 반영한 세트장이 기존 케이팝 뮤비의 매력이었다면 근 몇 년 사이에는 영화를 방불케 하는 캐스팅과 스케일이 또 볼 맛을 높이네요. 지난해 뉴진스의 ‘Cool with you’에는 배우 량차오웨이(양조위)와 정호연이 나왔고, 정국의 ‘Seven’에는 배우 한소희가 출연했지요. 아이유의 신곡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게 된 탕웨이는 ‘색, 계’ ‘만추’ ‘헤어질 결심’ 등에 출연하며 인기를 모았고 김태용 감독의 아내로도 국내에 친근합니다. 또 한 명의 거물 배우가 케이팝 뮤직비디오 스크린을 장식하게 된 셈입니다. 요즘 안 그래도 세기말 세기초에 대한 복고 바람이 심상치 않은데…. 그 시절엔 이런 뮤직비디오를 ‘드라마타이즈 뮤직비디오’라고 불렀더랬지요. ▶ 관련 영상 : 조성모(Jo Sung Mo) - 불멸의 사랑 제 뇌 속에서만 일어난 플래시백을 이 귀한 지면에까지 펼쳐내 한편으론 송구합니다. 1998년 조성모 1집 ‘To Heaven’에 실렸던 ‘불멸의 사랑’이란 불멸의 명곡을 특별히 6:4 화면 비율, 360p 초고화질로 여러분께 꼭 다시 한번 보여드리고 싶었거든요. 진짜 ‘갬성’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설국(雪國), 일본 홋카이도를 배경으로 이병헌, 김승우 등 당시 톱 배우들이 총출동해 원래 곡 길이보다도 2분 이상 더 긴 6분 43초 동안 열연하는 이 비디오는 거의 한 편의 영화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지요. 이러한 ‘영화적 뮤비’들이 요즘 케이팝계에 늘고 있습니다. 특히 아이유는 이번에 ‘Shh..’ ‘Shopper’ ‘홀씨’까지 여러 곡의 뮤직비디오 티저를 연달아 공개했는데 이국적인 배경에 현지 배우 활용, 특수효과까지, 마치 영화 예고편을 보는 듯한 규모와 질감이 돋보입니다. ▶ 관련 영상 : IU '홀씨(Holssi)' MV Teaser 이런 영화적 뮤직비디오들은 출연자, 연출자 모두 스타급이라는 게 더 눈길을 잡아끄는데요. 연일 가요 종합차트 1위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는 아이유의 신곡 ‘Love wins all’의 경우,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로 호평을 받은 엄태화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습니다. 아이유와 함께 방탄소년단 뷔가 출연해 SF 영화 같은 디스토피아의 질감을 그려냈죠. 19일 미니 3집 ‘EASY’를 들고 돌아오는 르세라핌의 경우, 컴백 트레일러 영상부터 예술적이라는 평이 쏟아집니다. 서울 구도심의 다크한 곳을 누비는 힙하기 이를 데 없는 멤버들과 한국어, 영어, 일본어 내레이션이 명품 광고나 고예산 영화 예고편을 연상시키지요. 이 작품은 CF계 스타 감독인 유광굉 감독이 연출했습니다. 커피, 화장품 등 핫한 제품들의 광고를 많이 찍은 연출자이지요. 유 감독은 김동률, 이터널 모닝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한 바 있고, 근래 들어 아이브의 ‘Either Way’, 엔하이픈의 ‘DARK BLOOD’ ‘ORANGE BLOOD’ 앨범 콘셉트 예고편에서도 연출력을 과시했습니다. 또 다른 광고계 스타 연출자인 신우석 감독은 뉴진스의 ‘Ditto’ ‘OMG’ ‘ETA’ 등을 만들었죠. 신 감독이 ‘ETA’를 촬영하는 모습이 스마트폰 광고에 등장하기도 하면서 더욱더 대중에게 얼굴까지 알린 스타 연출자가 됐습니다. ▶ 관련 영상 : ENHYPEN (엔하이픈) 'DARK BLOOD' Concept Trailer 사실 한동안, 그러니까 특히 2세대와 3세대를 거치면서 케이팝 뮤직비디오는 아이돌 그룹의 미모와 안무를 부각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그래서 초현실적인 세트장을 중심으로 칼군무에 초점을 맞춰 촬영됐고 상징과 은유를 담은 소품들, 몽환적인 분위기로 승부하는 경향이 강했지요. 하지만 근래 케이팝이 글로벌로 시장을 확장하면서 톱 아티스트나 소속사의 제작비가 더 넉넉해졌고, 팬들의 연령대도 확장하면서 ‘고-퀄리티’나 ‘그 시절 스타’에 대한 수요가 는 것도 한몫했다고 봅니다. 더욱이 요즘엔 퍼포먼스 버전이란 이름으로 뮤직비디오와 별도의 안무 특화 뮤직비디오를 함께 공개하기 때문에 본편 뮤직비디오는 더 영상미, 예술성에 집중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영화적 뮤직비디오의 반대편 극단에 위치한 것이 쇼트폼이겠죠. 그들이 초 단위에 간단한 포인트 안무 동작으로 인기를 끄는 만큼, 그 반대급부로 본편의 무게감은 더 중요하며 묵직해지는 맥락도 엿볼 수 있습니다. 한편, 클래식계에서는 거의 반대의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 관련 영상 : 궁예 – 레퀴엠 KBS교향악단이 이달 8일 공식 유튜브 채널에 올린 ‘궁예-레퀴엠’ 영상이 조회 수 수십만 회를 올리면서 누리꾼들 사이에 요즘 화제입니다. 34초 분량으로 일종의 쇼트폼인데, 다음 달 7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정명훈 지휘로 열리는 기획공연인 ‘2024 마스터즈 시리즈’의 홍보 콘텐츠죠. 공연 레퍼토리 중 하나인 베르디의 ‘레퀴엠’ 중 ‘진노의 날(Dies irae)’ 도입부 음악에 ‘태조 왕건’(2000~2002) 드라마 장면과 대사를 편집해 넣은 것이죠. “저자의 머릿속에는 마구니가 가득하다!” “누구인가? 지금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 이런 명대사와 혼비백산하는 신하들의 모습을 연주 사이사이에 절묘하게 삽입해 웃음을 자아내네요. 작년 4월에는 KBS교향악단에서 정기연주회 가운데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1번 연주 중 팀파니가 찢어지는 영상을 공개해 조회수가 450만 회를 넘어서기도 했습니다. 서울시향은 예능성 콘텐츠인 ‘오늘도 서울 시향 출근’을 제작해 올립니다. 공연장 밖 단원들의 일상생활이나 쿠킹 클래스 같은 모습을 가볍게 담아 인기죠.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도 관객들을 위해 레퍼토리 예습을 위한 친절한 해설 콘텐츠인 ‘전지적 지휘자 시점’ ‘슬기로운 감상생활’ 등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영화적 뮤비이든, 클래식 쇼트폼이든, 콘텐츠가 다채로워지니 즐거운 건 역시나 우리들, 소비자요, 음악팬들입니다. 그래도 음악의 핵심 콘텐츠는 역시 음악 그 자체죠. 시각적 자극만큼이나 신선한 청각적 쾌감을 선사하는 좋은 음악이 살아남는다는 것. 이것이 여전히, 그리고 미래에도 진리이겠지요. 믿어봅니다. 기다려 봅니다.
▶ 관련 영상 : IU 'Love wins all' MV ‘아이유가 아이유했다.’ 이런 말이 또 나옵니다. 아이유가 24일 발표한 2년 만의 신곡 ‘Love wins all’ 때문입니다. 발표된 지 단 한 시간 만에 음원 플랫폼 멜론의 ‘톱 100’ 차트 1위에 오르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이게 왜 대단하냐고요. 멜론은 2021년 8월에 이 차트의 룰을 바꿨습니다. 팬덤의 이른바 ‘스밍총공’을 통해 몇몇 아이돌 그룹의 신곡이 발표와 동시에 1위에 오르는 일이 잦자, 24시간 이용량과 최근 1시간 이용량의 합산 값을 차트해 반영함으로써 그것을 매우 어렵게 만든 것입니다. ‘Love wins all’이 발표 한 시간 만에 1위에 올랐다는 것은, 따라서 다른 모든 곡의 24시간 이용량을 시간적으로 그 24분의 1에 해당하는 단 한 시간 동안의 이용량으로 압도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2022년 6월 방탄소년단이 ‘Yet To Come’으로 새 룰의 장벽을 처음 깼습니다. 아이유의 이번 기록은 여성 가수로는 최초, 남녀 통틀어서도 두 번째의 대기록인 것입니다. 출처: 아이유(IU) 공식 트위터 사실 이런 기록에는 ‘Love wins all’이 이미 발매 일주일 전부터 어마어마한 관심을 모았던 것도 작용했을 겁니다. 제목 논란 때문이죠. 아이유 측이 신곡 제목을 ‘스포’했는데 ‘Love wins’였던 겁니다.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비판이 나왔죠. ‘Love wins’는 근년에 성소수자들이 온라인 해시태그에, 오프라인 플래카드에 담으면서 그들의 대표적 캐치프레이즈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입니다. 2015년 미 연방 대법원의 동성 결혼 법제화 판결 때도, 2016년 올랜도의 동성애자 클럽 총기 난사 사건 때도 성소수자들은 이 문구를 들어 올렸죠. 이번에 ‘Love wins’를 둘러싸고 나온 목소리의 골자는 문화 전유(專有) 우려였습니다. ‘아이유처럼 영향력 있는 가수가 성소수자들의 구호를 가져다 쓰는 것은 문화 전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전유란 혼자 독차지해 가짐을 뜻합니다. 문화적 전유 또는 재전유란, 문화적으로 맥락화된 상징이나 목소리를 가져다 본래의 목적과는 다른 기호와 방식으로 작용하거나 다른 의미 체계를 갖도록 만드는 행위입니다. 출처: EDAM 엔터테인먼트 공식 인스타그램 논란이 불거지자마자 아이유는 자필 신곡 설명서까지 공개하며 해명에 나섰습니다. 도입부는 ‘누군가는 지금을 대혐오의 시대라 한다. 분명 사랑이 만연한 때는 아닌 듯하다’로 시작합니다. 전문의 골자는 ‘사랑이 미움을 이긴다’는 대승적이며 대의적인 메시지입니다. 설명서 또는 편지의 후반부는 오롯이 팬들에게 헌정됩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번번이 내 곁을 선택해 주어 정말 고맙다는 말도. 당신들이 내게 그래주었듯 나도 당신들의 떠오름과 저묾의 순간에 함께하는 사람이고 싶다’는 말과 함께 말이죠.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반론에 맞서 케이팝 업계 최대의 무기인 팬덤을 결집하겠다는 의지를 간접적으로 내비친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다고 해도 논란이 일자마자 발 빠르게 움직인 것 치고는 그 어떤 세부적이거나 특정한 해명은 담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뭐라 토 달기 힘든, 사랑의 위대함에 대한 모호한 지지문 같은 것이었습니다. 비틀스의 ‘All You Need is Love’ 같은 거지요. 논란이 계속되자 아이유 측은 결국 신곡 제목은 ‘Love wins all’로 바꿨습니다. 완성된 곡의 제목을 출시 직전 바꾸는 작업은 녹록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처럼 여러 가지의 콘텐츠가 동시다발적으로 사전 기획되는 시대엔 더더욱이요. ‘all’ 한 단어 붙이는 것도 쉽지는 않았을 거란 말입니다. 출처: HITEJINRO 공식 유튜브 아이유의 ‘Love wins’에 성소수자 커뮤니티 일각의 염려가 쏟아진 데는 그가 그동안 이성애적 판타지를 가장 충실히 보여주는 기호처럼 산업계, 광고계, 사회에 비쳐진 점도 일조했을지 모릅니다.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말이죠. 그간 금융 브랜드부터 생수, 아웃도어웨어까지 다양한 광고에 출연했지만 특히 주류, 침구류, 약품 광고에서 보여준 이미지, 그리고 자신의 뮤직비디오에서 보여준 설정 등은 ‘좋은 날’ 시절 국민 여동생의 성장 버전 정도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였을 수 있습니다. 만약 ‘Love wins’, 아니, ‘Love wins all’이 ‘all’이란 말처럼 더 커다란 품을 담은 곡으로 공개됐다면 어땠을까요. 하지만 예술가에게, 그가 영향력이 큰 인물이라고 해도 그의 작품에 사회적 메시지를 반드시, 직설적으로 담으라고 강요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출처: 힌두교 신 가네샤의 모습이 있는 블랙핑크의 뮤비(왼쪽)와 삭제된 후의 장면. [네티즌 트위터 캡처] 그렇다 해도 노래 제목을 정할 때부터 좀 더 신중할 수는 없었는지에 관한 질문은 남습니다. 근년 들어 케이팝이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문화 전유 논란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동안엔 주로 외국 문화에 대한 몰이해나 일방적 차용으로 인한 것이 주를 이뤘습니다. 블랙핑크가 ‘How You Like That’ 뮤직비디오를 공개하자 바닥에 놓인 소품이 힌두교 신상처럼 보일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고, 가수 측은 사과와 장면 삭제를 했습니다. 노라조는 2010년에 낸 ‘카레’ 때문에 뒤늦게 인도인들에게 사과해야 했습니다. (여자) 아이들 멤버들은 한 방송에서 편곡 방향을 논의하며 “아프리카 추장처럼 하고 아프리카 타악기처럼 소리를 만들자”고 했다가 아프리카를 비롯한 해외 팬들의 지적을 받기도 했습니다. 한 걸그룹은 방송 무대 배경으로 잠시 모스크를 송출했다가 무슬림 팬들에게 뭇매를 맞았고요. 다른 여성 그룹은 뮤직비디오의 배경에 인디언식 텐트인 ‘티피’를 배치했다가 미국 인디언계 팬들에게 보이콧 압력을 받았습니다. 이런 논란이 잇따르자 가요기획사들은 모든 콘텐츠에 대해 언론사 팩트체크팀을 방불케 하는 사내 전문 인력을 통해 여러 단계에 걸친 검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Love wins’ 같은 문구는 구글링 한 번으로도 논란의 소지를 감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논란을 예상하고도 충분한 설득력과 자신감을 갖고 밀어붙인 거였다면, 신곡 설명문에 직접적인 해명을 담는 방법도 있었을 것입니다. ▶ 관련 영상 : BLACKPINK - 'Kill This Love' M/V 우여곡절 끝에 공개된 ‘Love wins all’은 뮤직비디오로 한 차례 더 홍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극 중 주인공인 아이유와 뷔가 장애를 가진 커플로 설정돼 있는데 설정과 서사 모두 전형성에 그친다는 지적이 일각에서 나옵니다. ‘이건 답이 없는 Test 매번 속더라도 Yes/딱한 감정의 노예/얼어 죽을 사랑해/LET’S KILL THIS LOVE!’ 2020년, 태국 방콕 시내의 민주화 시위대 물결 사이로 한국 그룹 블랙핑크의 노래 ‘KILL THIS LOVE’가 울려 퍼졌습니다. 문화 전유 논란을 부른 ‘How You Like That’처럼 블랙핑크가 부른 노래였지만 이번엔 다르게 받아들여졌습니다. 당시 로이터통신은 ‘태국 젊은이들, 정부에 맞서는 수단으로 케이팝을 들이다’라는 기사를 통해 이를 조명했죠. 학생운동가 나차폴 찰로이클 씨는 “케이팝은 태국의 현재 상황에 대해 잘 모르는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인식을 고취할 수 있는 통로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르차흐를 인정해라!’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그해 아르메니아 소녀들은 카메라 앞에서 삐뚤빼뚤 한글로 직접 적은 팻말을 들어 올렸습니다. 아제르바이잔과의 전쟁을 멈춰 달라는 메시지를 한국어로 전한 것입니다. 케이팝은 본의든 아니든 그 힘이 세졌습니다. 바이럴 폭발력으로 치면 전 세계의 유수 팝 장르를 이길 정도로요. 케이팝이 내세운 가사가, 언어가 어떤 맥락에서 다른 의미로 재전유될지, 오히려 우리는 예측하기 어려워진 셈입니다. 이번 논란이 부디 케이팝을 건설적인 세계로 이끌었으면 좋겠습니다. 음악적으로는 충분히 훌륭한 모습을 보여준 ‘Love wins all’ 아닙니까. 언젠가 더 좋은 곳에 닿아 더 좋은 의미로 널리 불리는 장면을 기대해 봅니다. 디자인 : 박수민
▶ 서태지와 만난 에스파?... 20년 전 명곡 재해석하는 아이돌들 ▶ 영상 보러 가기 : NCT DREAM 엔시티 드림 'Candy' MV 이 모든 것들이 일시적인 현상은 아닐 겁니다. 근년에 문화계 전반에 불고 있는 뉴트로 열풍, 그중에서도 세기말 세기 초에 대한 복고 붐을 면밀히 살펴봐야겠습니다. 가요계만 해도 2021년 에스파는 1998년 S.E.S. 의 곡 ‘Dreams Come True’를, 지난해 NCT DREAM은 1996년 H.O.T. 의 노래 ‘Candy’를 재해석했죠. 물론 SM이 2021년부터 진행 중인 비디오 리마스터링 프로젝트와 연결된 부분도 있습니다. 원곡 뮤직비디오를 고화질로 다시 내놓으면서 현재 활동 중인 그룹에게 재해석시키면서 함께 조명받도록 한 것입니다. ▶ 영상 보러 가기 : aespa 에스파 'Dreams Come True' MV 그러나 SM을 넘어 다양한 그룹들이 다채로운 9505의 정서를 재소환하는 데는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세대에게는 낯선 듯 익숙한 재미를, 기성세대에게는 반가움을 환기시키는 고도의 전략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케이팝의 ‘헤비 유저’인 10, 20대의 부모는 현재 30~50대입니다. 1990년대 인기 가요나 케이팝 1, 2세대에 대한 향수를 강하게 품고 있는 세대죠. 지금의 10, 20대와는 이른바 ‘덕질’의 경험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모와 자식이 함께 콘서트장을 찾거나 같이 열광하는 일이 많아진 것도 요즘의 팬 활동 흐름 중 하나이고요. 돈이 많이 드는 요즘 ‘덕질’에 대해 최종 결정권, 즉 신용카드 결제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부모이다 보니 가요기획사 입장에서는 이들의 마음에 드는 것도 중요해졌습니다. 케이팝의 열혈 소비자들의 연령대가 더 이상 10, 20대에 머물지 않고 연령대가 전반적으로 상향화된 것도 한 요인입니다. ▶ 영상 보러 가기 : 임영웅 'Do or Die' Official M/V 아이돌 그룹들의, 연령대를 기준으로 한 이런 ‘위로의 확장’ 전략은 흥미롭습니다. 트로트계의 ‘아래로의 확장’ 전략과는 절묘한 데칼코마니를 이루죠. 이를테면 장년층에 팬덤이 집중된 임영웅이 ‘Do or Die’의 일렉트로닉 팝, ‘London Boy’의 모던 록으로 더 젊은 층을 겨냥하는 것과 나란히 놓고 보면요. 아이돌 팬덤의 부모는 ‘결제와 승인’을, 트로트 팬덤의 자녀는 ‘광클과 서포트’를 담당하는 중요한 서브팬덤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음악 시장 플레이어들이 지나칠 리 없겠지요. 실제로 서브팬덤에 속했던 이들 중 상당수가 코어팬덤 쪽으로 이동하는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감지됩니다. 출처: SBS 인기가요 ▶ 관련 영상 : 응급실 - 이지(IZI) (쾌걸춘향 ost) 어쩌면 지금까지 살펴본 시장적 관점에서의 분석만으로는 현재의 ‘AGAIN 9505’ 바람을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음악 시장에서 어떤 아티스트, 또는 어떤 트렌드가 붐을 일으킬 때 그 기저에는 의외로(또는 반대로 너무 당연히) 음악 그 자체의 힘이 자리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9505’의 노래들도 20년 세월을 깨부수는 특별한 힘이 있다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그 시기는 강하고 거침없는 ‘쇠맛’ 콘텐츠가 난무하던 세기말, 세기 초였죠. 그뿐 아니라 한국의 주류 발라드와 댄스 가요의 전성기였고요. 케이팝 2세대 아이돌이 나오기 전이기도 했죠. 케이팝 1세대가 태동(1996년 H.O.T. 데뷔)해 갖가지 실험을 벌이며 백가쟁명 하던 때였습니다. 독특하면서도 대중적인 노래가 많았죠. 한편으론 아이돌 팬덤의 ‘스밍 총공’이 가요 종합차트를 좌지우지하기 전입니다. 실제 대중의 취향이 많이 반영된 히트곡들이 많았고 히트가 스테디셀러로 넘어가며 오랜 기간 동안 대중성이 검증된 곡이 많았습니다. ▶ 관련 영상 : 스페셜 MV 'NewJeans - 아름다운 구속'ㅣ너의 시간 속으로ㅣ넷플릭스 2010년대 이후를 돌아볼까요. 대중적 히트곡의 절대적인 수도 매우 줄었을뿐더러 설령 대중적 히트를 기록하더라도 그 생명력이 매우 짧은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히트곡의 지구력’이 검증된 스테디셀러가 마지막으로 쏟아져 나온 시대. 그 최후의 보물창고 비슷한 것이 혹시 ‘9505’는 아니었을까요. 세대나 시대를 뛰어넘어 한국인이 보편적으로 좋아할 만한 감성 코드, 그리고 음악의 힘이 검증됐던 그 시절의 곡들은 아마 당분간 계속해 소환되리라 봅니다. 일전에 뉴진스와 ‘9000’에 대해 다루면서 말씀드렸듯, 그 시절은 네트워크와 개인화가 급속도로 진행된 시기이기에, 멀리 있지만 ‘오래된 미래’처럼 현재와 맞닿아 있기도 하고요. 다음 노래는 무엇일까요. 함께 간 노래방 친구의 다음 예약곡을 훔쳐보듯, 다음 소환 곡을 기대해 봅니다. 가슴에 몽글몽글 안개꽃이 피어납니다. 설렘이 차오릅니다. 출처: 성규특별시 ▶ 영상 보러 가기 : Kim Sung Kyu (김성규) - Feeling 디자인 : 박수민
▶ 관련 영상 : TIOT(티아이오티) '백전무패' MV 어디서 많이 들어본 노래 아닙니까. 아니, 첫 소절 듣자마자 너무 반가웠다고요? 맞습니다. 원곡은 2001년 클릭비 3집에 실려 있었죠. 이 버전은 신인그룹 티아이오티(TIOT)가 지난해 8월 내놓은 곡입니다. 강렬한 랩과 메탈이 뒤섞인 랩 메탈(또는 Nu Metal)은 세기말, 세기초에 매우 중요한 장르였습니다. 당시 림프 비즈킷, 콘,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쉰, 린킨 파크에 심취한 시절을 기억하시는 분 꽤 많을 거예요. 이 전형적인 세기 초 ‘랩 메탈 팝’(굳이 장르명을 붙이자면…)을 리메이크한 TIOT는 아직 데뷔도 안 한 그룹입니다. 지난해 8월 ‘프리 데뷔(pre-debut)’를 했지요. 그러고 보니 이 프리 데뷔란 독특한 개념에 대해서도 언젠가 한번 다뤄드려야겠네요. ▶ 관련 영상 : NewJeans (뉴진스) 'Ditto' Official MV (side A) 일전에 뉴진스의 1998년 뉴트로에 관해 이 칼럼에서 다룬 적이 있는데 기억하시는지요. 그때 제가 아마 ‘9000의 귀환’이라는 키워드를 붙였을 겁니다. 7080(70~80년대), 8090(80~90년대) 향수나 복고를 넘어 1990~2000년대가 현재 문화계를 대표하는 새로운 트렌드로 올라서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범위를 좁혀봤습니다. 9505, 즉 1995년부터 2005년 사이, 뉴 밀레니엄을 전후한 10년이 특히 그 복고와 향수의 타깃이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에스파가 서태지와 아이들의 1995년 노래 ‘시대유감’의 리메이크 버전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오는 15일 저녁 각종 음원 플랫폼을 통해 공개합니다. 이에 앞서 12일 저녁에는 원곡인 서태지와 아이들 버전의 ‘시대유감’도 음질을 개선한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먼저 공개했습니다. ▶ 관련 영상 : 서태지와 아이들 ‘시대유감’ 리마스터링 버전 ‘시대유감’은 1995년 서태지와 아이들 4집에 실려 발표됐는데 당시 의도적으로 보컬을 뺀 인스트루멘털 버전으로 공개해 화제와 논란을 모았습니다. 당시 존재했던 공윤(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에 항의하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행동이었죠. 이후 오랫동안 가요 사전심의제 철폐 운동을 했던 정태춘 박은옥 씨의 노력에 서태지와 아이들 팬들의 목소리까지 더해지면서 결국 사전심의 철폐 서명 운동이 거세게 불었고 결국 1996년 6월 7일을 기해 저 기이했던 제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립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이미 1996년 1월 해체했지만 ‘시대유감’은 사전심의제 폐지 직후인 6월 25일, 원래 의도한 가사와 노래가 들어간 완전한 버전으로 싱글로 발매했었죠. 싱글 음반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던 시절에 내용, 맥락, 형식에서 모두 신선한 시도였습니다. 더욱이 커리어를 끝내버린 해체 그룹이 발표한 싱글이었으니 더 특이했지요. ▶ 관련 영상 : BXB(비엑스비) - '검은 고양이 네로 (The Black Cat Nero)' Performance Video 서태지체로 말하면, 1995년이 ‘ㄱ나니?’ 터보가 1995년 발표한 1집에 실린 ‘검은 고양이’를 신인 그룹이 리메이크했습니다. 지난해 1월 30일에 데뷔한 4인조 보이그룹 ‘BXB’죠. 지난 4일 발표한 ‘검은 고양이 네로 (The Balck Cat Nero)’라는 곡. 뉴진스의 ‘Super Shy’, 르세라핌의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에 쓰인 저지 클럽 장르의 리듬을 얹어 터보의 노래를 재탄생시켰습니다. 사실 터보의 ‘검은 고양이’도 리메이크 곡이었죠. 1969년 이탈리아의 안토니아노 소년소녀 합창단이 발표해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누린 ‘Volevo un gatto nero’가 원곡. 일본, 한국에서도 번안돼 동요로서 큰 인기를 누렸던 노래입니다. ▶ 관련 영상 : RIIZE 라이즈 'Love 119' MV ‘백전무패’(2001년·이하 원곡 발표 연도), ‘시대유감’(1995년), ‘검은 고양이’(1995년)…. 그런데 ‘Love 119’는 초면이라고요? 잘 들어보시면 익숙한 뭔가가 스쳐가실 겁니다. 바로 2005년 곡, 이지의 ‘응급실’을 샘플링했기 때문입니다. 20년 가까이 한국인의 노래방 애창곡 베스트에서 내려오지 않는 ‘문제의’ 노래이지요. 이 곡은 노래 맨 처음에 ‘응급실’을 빨리 돌린 스페드업(sped-up) 샘플링이 등장하고요. 이후 이어지는 곡에서는 그 분위기, 그리고 세기말-세기초에 유행한 건반 사운드를 비롯한 복고풍 편곡 아이디어가 이어집니다. 한마디로 샘플링 한 조각에 ‘분위기 헌정’ 한 무더기를 담아 완성한 곡이 ‘Love 119’라는 이야기입니다. 정리해보면, 1월 4일 터보의 ‘검은 고양이’를 BXB가, 1월 5일 이지의 ‘응급실’을 라이즈가, 오는 15일 서태지와 아이들의 ‘시대유감’을 에스파가 재해석합니다. 새해 들어 무슨 약속이라도 한 듯, 단 며칠 간격으로 1995년부터 2005년 사이의 곡들이 재조명되는 흐름, 어떻게 봐야 할까요? 가요계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2편에서 계속) 디자인 : 박수민
▶ '1억 장 판매' '14주 연속 1위'... 걸그룹과 보이그룹이 함께 이끌어간 '2023 K-팝 월드' ▶ 관련 영상 : [MV] 이마세(imase) - NIGHT DANCER | 한글자막 뮤직비디오 이런 노래, 들어본 적 있나요. 일본 가수 이마세의 ‘NIGHT DANCER’입니다. 올해 한국 음원 플랫폼인 멜론의 종합 차트 10위권까지 오르면서 파란을 일으켰지요. 제이팝 차트가 아니라 종합 차트입니다. 웬만한 가요, 팝을 다 제치고 일본 노래가 신드롬을 일으킨 것이죠. 지역성이 사라진다… 로컬리즘(localsm)의 해체 지난 회에서 뉴진스가 빌보드 뮤직 어워즈 무대에 선 이야길 들려드렸죠? 빌보드 뮤직 어워즈는 올해 케이팝 부문에 총 4개의 상을 신설했습니다. 종전에도 라틴팝 부문은 있었지만 미국 내에 실제로 거주하는 히스패닉계의 비율을 생각하면 수긍이 가죠. 그런데 다른 어떤 나라도 아닌 한국 음악 부문에, 그것도 4개 부문이나 할애했다는 것은 파격입니다. 이는 케이팝의 선전이자 국위 선양을 떠나 세계 문화의 새로운 흐름을 방증한다고 저는 봅니다. 바로 로컬리즘, 즉 지역성 또는 지역색의 해체입니다. 초연결시대에 우리는 모두 부처님 같은 손바닥을 갖게 됐지요. 스마트폰 말입니다. 지구촌 삼라만상이 그 안에 훤히 내려다보이는… 플랫폼과 콘텐츠의 변화로 지역보다는 취향이, 맥락보다는 찰나의 감각이 중요해졌죠. 이것이 가장 직관적인 예술인 음악을 소비하고 인식하는 풍토를 변혁했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이마세를 비롯해 요아소비, 요네즈 겐시, 아이묭, 후지이 가제 같은 일본 가수들이 국내 음원과 동영상 플랫폼에서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심지어 베트남 팝(V-Pop)도 국경을 넘었습니다. 쇼트폼 챌린지 쪽에서 ‘팅팅탕탕송’으로 인기를 모은 베트남 가수 호앙 투 링의 ‘See Tinh(시 팅)’이 대표적이었죠. ▶ 관련 영상 : 베트남 도자캣???🔥틱톡에서 엄청 핫했던 띵띵땅땅 그 노래🔥 | [ 가사 / 번역 ] | Hoàng Thuỳ Linh - See Tình 역으로 생각하면 우리나라 신인 그룹 피프티피프티가 ‘Cupid’로 영미권 차트까지 접수한 것 역시 언어나 문화권의 장벽이 흐물흐물해지고 노래의 느낌 자체가 중요해진 현재 세계 음악 시장의 트렌드를 방증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케이팝의 인적 구성에서도 로컬리즘은 무너집니다. 하이브가 미국 게펜 레코드와 손잡고 진행한 ‘더 데뷔:드림 아카데미’(KATSEYE 데뷔), JYP가 미 리퍼블릭 레코드와 함께 한 ‘A2K 프로젝트’(VCHA 데뷔)는 케이팝의 중심은 케이휴먼(한국인)이라는 관념조차 허물고 있습니다. ▶ 관련 영상 : VCHA "Ready for the World" Performance Video ‘존재하지 않아도 좋아. 내 폰 안엔 존재하니까’… 버추얼리즘(virtualism)의 약진 2021년만 해도 우리와 그들 사이에는 깊디깊은 골짜기가 존재했습니다. 바로 버추얼 연예인과 불쾌한 골짜기 말입니다. 당시 로지, 한유아 같은 버추얼 셀러브리티들이 인스타그램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TV 광고 시장까지 올라올 때만 해도 그에 관한 인터넷 기사 댓글창에는 ‘불편하다’는 반응이 많았어요. 2020년 에스파가 거느리고 등장한 아이에스파(ae-aespa)는 어느샌가 존재가 희미해졌죠. 버추얼 아이돌로서 2021년 데뷔한 아뽀키, 이세계아이돌은 이제 무시할 수 없는 팬덤을 거느린 진짜 아이돌이 됐습니다. 올해는 플레이브, 메이브 같은 버추얼 그룹이 등장해 인기를 모았죠. 팬데믹 때 반짝한 메타버스 붐, 그와 함께 사라질 듯했던 버추얼 연예인 시장은 왜 오히려 더 커지는 걸까요. 앞서 지목한 로컬리즘 해체와 연결고리가 닿아 있습니다. 손바닥 안에서 짧게 보며 즐기기에는 실상, 가상이 큰 차이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게임 캐릭터에 자신을 동화하거나 그들에게 열광해 본 세대에게는, 차라리 사람과 덜 비슷하며 같은 인간으로서 열등감이나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필요조차 없는 확실한 가상의 캐릭터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 관련 영상 : PLAVE (플레이브) '기다릴게 (Wait For You)' M/V 숨 가쁘게 달렸는데 이제 겨우 ‘4대 뉴스’를 전해드렸네요. 6개나 더 남았는데, 어쩌죠. 사실 ‘희박사의 케이올’을 꾸준히 지켜봐 주셨으면 나머지는 다 짐작하실 겁니다. 페스티벌 시장의 폭발, 아이유와 테일러 스위프트가 이끈 콘서트 필름 붐, 한국 인디의 선전과 세계화, 임영웅 신드롬의 지속과 확장, 쇼트폼 지배력 강화, 음반 판매 1억 장 시대 등입니다. 2024년, 내년의 10대 뉴스는 뭐가 될까요. 내년이 갑진년이라지요. 제가 늘 강조하는 게 있습니다. 공짜에 가까운 비용으로 전 세계 수억 개의 노래를 손바닥 안에 놓고 들어볼 수 있는 지금이야말로 음악팬들의 화양연화라고요. 사실 10대 뉴스가 뭐가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그 어떤 장르도 분위기도 좋습니다. 여러분만의 10곡, 100곡, 아니, 1000곡에 ‘좋아요’를 찍는 풍성하고 ‘값진’ 음악 감상의 한 해를 보내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올 한 해도 감사했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p.s. 힘들었던 1년은 이제 묻어요. 새해의 기대만 난 물어요. 여러분께, 그리고 나 자신에게. ▶ 관련 영상 : 허회경 (Heo Hoy Kyung) - 난묻어요 (Buried) [Official Audio] 디자인 : 박수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