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에 음악에 빠져 21세기 내내 음악을 얘기하고 있다.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이며 음악콘텐츠 기업 일일공일팔에서 일한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흑백요리사>의 잔향이 가시지 않는다. 결승전은 물론이거니와 1차 예선 탈락자 중에서도 스타, 혹은 셀럽이 탄생했다. 출연자들이 풀어놓은 비하인드 스토리는 업로드와 동시에 유튜브 인기 급상승 동영상이 된다. 인기 출연자들의 레스토랑은 예악이 하늘이 별 따기가 된 나머지, 예약권이 암거래되고 있다. 한 끼에 몇십만 원짜리 디너를 프리미엄까지 주고 먹다니, 과연 최악의 경제위기가 맞나 싶기도 하지만 사회적 스트레스와 우울도가 높은 상황에서 그렇게라도 자기만족도를 높일 거리가 나타난 게 다행이라고 봐야 할까. 맛집탐방가이자 요리 애호가인 나에게 기존 요리 프로그램이나 유튜브 채널은 정보제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먼 옛날 요리 연구가 한복려가 나오던 프로그램부터 <편스토랑>까지 마찬가지다. 요리하는 법을 알려주고 그걸 따라 하면 그만인, 소중하지만 도파민 분비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 그런 정도. 그런데 <흑백요리사>는 요리 서바이벌, 또는 오디션을 표방한 캐릭터 서바이벌이었다. 다양한 미션을 설정해 놓고 참가자들이 어떤 캐릭터를 구축하는지, 요리라는 과정을 통해 그들이 어떤 서사를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주는 전개였다. <오징어게임>을 비롯한 서바이벌 배틀물이었던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순위를 막론하고 많은 스타를 배출할 수 있었던 요인이다. 인기를 끄는 모든 오디션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최종 결과가 나온 후에도 순위를 놓고 시청자들의 갑론을박이 멈추지 않은 이유 또한 여기서 기인할 것이다. 단순히 '요리'에만 포커싱을 뒀다면 감정이입을 할 일도 없을 테니 말이다. 출연진의 다양한 캐릭터, 요리 과정과 언행을 통해 구축되는 서사를 보면서 나는 그들이 음악 같다고 생각했다. 시각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요리 프로그램과 청각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음악은 상상을 통해 다른 감각을 소환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기 때문일까. 여러 뮤지션과 음반이 떠올랐지만, 그중 몇 명과 몇 장을 매치하고 싶다. 비록 결승에 진출하진 못했지만 가공할 조리 기술과 섬세함을 보여준 트리플스타는 존 콜트레인의 <Giant Steps>를 떠오르게 한다. 어린 나이에 미슐랭 3 스타 레스토랑에서 경력을 쌓은 과정부터 그렇다. 텔로니어스 몽크, 디지 길레스피, 그리고 마일즈 데이비스가 떠오르는 색소포니스트를 품었다. 재즈를 넘어 대중음악사에 길이 남을 걸작, 마일즈 데이비스의 <Kind Of Blue>에 참여한 이듬해 내놓은 솔로 작품이 <Giant Steps>이다. 찰리 파커가 개척한 비법을 완성했을 뿐 아니라 '콜트레인 체인지'라 불리는 특유의 연주를 더했다. 마일즈가 선법을 도입하여 조바꿈을 자유롭게 했다면, 그는 12음계 간의 새로운 질서를 발견했다. 메인 테마만 던져놓고 즉흥 연주를 통해서, 게다가 콜트레인의 현란한 속주까지 곁들여 만들어지는 세계는 재즈를 또 한 번 새로운 곳으로 인도했다. 함께 녹음하는 뮤지션들도 콜트레인의 연주에 어떻게 화답해야 할지 몰라 침묵하는 게 음반에서 느껴질 정도다. 밤새도록 신라 금속공예 장인처럼 재료를 손질하고, 자기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미분된 재료로 복잡하지만, 감탄이 나오는 요리를 적분하는 그의 모습이 꼭 <Giant Steps>시절의 존 콜트레인과 같다. 복잡하되 직관적이고, 섬세하되 단아한 음악과 요리다. OTT였기에 가능했던 비속어를 남발하고 그 누구보다 강렬한 얼굴과 본명(윤남노)으로 첫 회부터 주목을 끈 요리하는 돌아이. 초기의 힙합과 펑크에 가깝다. 그러나 결승행 티켓을 놓고 끝까지 다툴 수 있던 건 거친 언행에 가려진 노력과 열정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 모습에 반한 사람이라면 한국 펑크 불후의 명반인 노브레인의 <청년폭도맹진가>를 권하고 싶다. 한국 펑크가 태동하던 90년대 후반 '바다 사나이'로 데뷔, 2000년 첫 정규앨범으로 낸 작품이다. 더블 앨범으로 구성된 이 음반에는 25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세기말 청춘들의 여과 없는 분노와 패기가 고스란하다. 독립군 군가에서 영감을 받은 동명의 타이틀 곡뿐만 아니라 '잡놈 패거리' '호로자식들' 같은 질주하는 에너지가 필터링 없이 뿜어져 나온다. 이 앨범은 한국 대중음악 명반을 뽑는 작업에서 가장 최상위에 랭크되곤 했는데, 그 이유는 단순히 펑크의 거친 모습만 담겨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전면에 배치된 펑크 곡들이 지나간 후 등장하는 '이 땅 어디엔들' 같은 블루스 기반의 트랙, '성난 젊음' '너 자신을 알라' 같은 스카의 그루브, 그리고 '청춘은 불꽃이어라' 같은 발라드적 노래까지. 당시까지, 그리고 지금까지의 인디 밴드들이 도달하지 못한 다양한 장르적 소화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팀전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 다른 셰프들에 비해 정교함은 떨어져도 맛으로는 최상위 라운드까지 올라가는 모습, '돌아이'라는 언행에 가려진 서사와 섬세함이 딱 <청년폭도맹진가>다. 이 앨범이 LP로 재발매됐을 당시, 노브레인의 첫 기타리스트이자 작사 작곡을 주도했던 차승우의 말을 인용한다. "이것은 '응답하라 OOOO' 같은 류의 신파가 아닙니다. 당신의 '젊은 영혼에 불을 댕길' 펑크록 앨범입니다." 스스로를 검열하고 가공하여 완성된 모습만을 SNS에 전시하는 요즘, 요리하는 돌아이는 인류가 탄생한 이래 늘 존재해 왔던, 열혈 청춘의 음과 양을 보여줬다. 그리고 에드워드 리. 요리가 문학이자 철학이며 재미교포 서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경외의 주인공. 남들이 다른 요리사와 경쟁하고 심사위원을 의식할 때 스스로를 증명하고 탐구했던 사람. 재료의 본질을 재해석하고 응용해서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낸 사람. 두부 요리 전 과정을 하나의 코스로 구현하는 그를 보면서 떠오른 앨범은 하나다. 라디오헤드의 <OK Computer>. 블러와 오아시스가 주도하던 브릿팝 시대의 흐름을 바꾸고, 1997년이라는 세기말의 정서를 형상화했으며, 향후의 록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한 명반 말이다. 마일즈 데이비스의 <Bitches Brew>를 비롯하여 엔니오 모리코네, 1970년대 독일 크라우트 록 같은, 당대의 록과는 상관없는 음악을 바탕으로 하였으나 처음 들었을 때는 그 영향을 알아채기 힘든 독창적 해석력에 놀랐다. 역시 당대의 록의 고정관념을 깬 악기 사용 및 사운드 배치에 또 한 번 빠져들었다. 첫 싱글 'Paranoid Android'는 6분 30초에 달하는 대곡이지만 크게 3개의 파트로 나눠진 구성 내내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지 않는다. 무척이나 실험적이지만, 'No Surprise' 'Karma Police' 같은 아름다운 곡들이 여전하고, 그 외의 곡들도 대중이 좋아할 만한 곡이 아닌 대중이 좋아하게 만든 곡들로 가득하다. 노엄 촘스키의 철학,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가이드' 같은 인문학 레퍼런스를 따온 가사들은 난해하면서도 명징한 시적 은유로 듣는 이를 상상에 빠지게 한다. 에드워드 리가 꼭 그렇지 않은가. 요리라는 단순한 작업을 통해 문학을 써 내려가고 서사를 구축한다. 양식, 한식, 일식 등의 카테고리에 얽매이지 않는다. 두부, 떡볶이 같은 단어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본질을 꿰뚫고 다른 세계와 연결한다. 그리고 생각지 못한 해석을 요리라는 과정을 거쳐 음식이라는 결과로 탄생시킨다. 거장임에도 예능적 감각을 발휘하고 '경연'이라는 세속적 성공의 장치 속에서 스스로 설정한 미션을 수행한다. 그럼에도 독자적 세계를 고집하는 게 아니라, 그 독자성을 통해 심사위원과 시청자까지 사로잡았다. 두부 요리 배틀에서 최종 승리한 후 환호하며 수건을 던지는 모습에서 진정한 결승 승자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어떤 요리 프로그램, 아니 어떤 오디션에서도 보지 못했던 '세계'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를 넘어 2020년대인 지금까지도 <OK Computer>가 제시했던, 바로 그 세계를 말이다. 나는 그동안 음악과 연관 지어 다양한 대중문화를 연결해 왔다. 이 작업을 즐겼다. 하지만 요리와 음악을 연결하고 싶었던 건 <흑백요리사>가 처음이다. 잘 만든 콘텐츠는 장르를 막론하고 서로 연결된다. 그게 어쩌면 예술이 아닐까.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2024년 대중문화 최고의 히트 상품은 무엇이었을까. 몇 달 후에나 할 법한 질문임에도 나는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다. 바로 프로야구였다고. 극장과 한국 영화는 팬데믹 사태가 끝난 이후에도 과거의 명성을 찾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팬데믹 시절 헤게모니를 장악했던 OTT도 예년만 한 히트작이 없었다. 음악? 2024년 대중음악계의 1순위 키워드는 민희진-하이브 분쟁이었다. 이건 산업이지 음악은 아니다. 영화, 드라마, 음악 모두 핫이슈가 될 만한 히트작이 없었다는 얘기다. 반면 프로야구는 사상 최초로 1,000만 관중 시대를 맞이했다. 오랫동안 야구팬으로 살았던 나에게는 썩 달가운 소식만은 아니다. 평일 저녁, 생각이 복잡할 때마다 한적한 잠실야구장을 찾곤 했다. 조명 아래 푸르게 빛나는 잔디 위에서 공을 쫓아 달리는 흰 유니폼의 선수들을 보면 가슴은 뜨거워졌고 머리는 차가워졌다. 27살의 무라카미 하루키가 도쿄 진구구장에서 야쿠르트 스왈로우즈의 시합을 보며 '이제 소설을 써야겠다'라고 생각을 한 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집필했다는 전설적 에피소드를 이해할 것 같았다. 이 상황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는 '한적한'이라는 형용사다. 정규 시즌 주말에나 포스트 시즌에는 적용되지 않는 이 단어는 이제 평일 정규 시즌에도 마찬가지가 됐다. 사람이 정말 많아졌다, 젊은 여성 관객들이 많아졌다는 체감이 1,000만 돌파라는 숫자로 구체화했다. 도대체 왜 프로야구의 인기가 급등했는지를 두고 여러 분석이 있다. KBO도 긴급히 여론조사 및 연구를 거쳐 자료를 내놨다. 전통적인 인기 구단이었던 기아 타이거즈와 삼성 라이온즈의 높은 순위, 시즌 말까지 치열했던 역대급 순위 경쟁, 김택연과 김도영 같은 젊은 스타들의 탄생 같은 요인이 제기됐다. 슈카 같은 경제 유튜버들은 IMF 때도 프로 스포츠의 인기가 높았다며 현재의 프로야구 흥행을 경제 불황과 연결 짓기도 한다. 다 일리가 있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설명을 덧붙이려고 한다. 원인보다는 결과, 그 결과가 만들어내거나 만들어낼 현상에 대해서 말이다. 프로야구 인기에 대한 모든 분석에서 가장 확실한 건 20~30대 여성 팬의 증가다. 시대를 막론하고 대중문화 시장의 주 소비자이자 여론을 이끄는 계층이다. 또한 '덕질'에 가장 많은 시간과 돈, 그리고 에너지를 소비하는 계층이기도 하다. 요컨대 한국에서 '팬덤'이라고 하는 집단을 구성하는 계층이라는 얘기다. 팬덤을 기반으로 성장하고 운영되는 산업 분야는 아이돌이다. 1990년대 중반 H.O.T., 젝스키스 같은 1세대 아이돌의 등장과 함께 형성된 팬덤은 최소 30년간 대를 물려가며 성장하고 확산했다. 나름의 관행과 불문율이 생겨나고 유형에 따른 분류 체계도 형성됐다. 강력한 조직을 갖추고 문화를 파생시켰다. 이런 팬덤 문화는 아이돌뿐만 아니라 여러 산업과 영역에 영향을 끼쳐왔다. 프로야구도 마찬가지다. 아이돌과 스포츠의 공통 키워드가 있다면 '응원'이다. 일반적 리스너는 자기의 취향에 따라 음악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A라는 가수의 B라는 노래는 좋아하지만, 신곡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 멀어지게 된다. 그런데 특정 아이돌을 '응원'하는 팬덤은 다르다. B라는 노래에 꽂혀서 A에 '입덕'했다면 더 이상 신곡의 퀄리티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A가 좋을 뿐, 더 이상 무슨 노래를 하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 결과 A의 신곡이 나올 때마다 스트리밍을 돌리고 팬덤 차원에서 총공을 펼친다. 팬 사인회에 참석하기 위해 수십 장, 수백 장의 CD를 산다. 이것이 아이돌 팬덤의 응원 방식이다. 야구팬의 응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이기는 날보다 지는 날이 많을 때도 저녁 6시 반이 되면 스포츠 채널을 틀거나 직관 티켓을 산다. 8회 말까지 2점 차로 이기고 있던 9회 초, 마무리투수가 연속 2안타와 홈런을 맞아 역전당하고, 9회 말 상대 마무리투수를 상대로 선두 타자가 살아 나갔지만, 다음 타자가 병살을 쳐서 결국 역전패당하는 혈압 오르는 날조차, 내일 6시 반이면 어김없이 TV 앞에 앉아 있는 이 불쌍한 사람은 많은 야구팬의 응원 방식이다. 음악의 좋고 나쁨보다는 가수 때문에 응원하고, 성적보다는 팀 때문에 응원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인생의 태도다. 그러나 같은 응원이라도 결은 완전히 다르다. 아이돌 팬은 회사와 미디어에 의해 가공된 콘텐츠를 소비하기 마련이다. 음악뿐만 아니라 영상과 사진, 인터뷰 등 팬을 위한 부가적인 콘텐츠가 쏟아진다. 이 과정에서 팬을 분노케 할 콘텐츠는 없다. 사소한 어그로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열애설을 포함한 온갖 가공되지 않은 사적 이슈가 터질 때 팬덤은 흔들린다. '만들어진 신'의 몰락까지 이어진다. 반면 스포츠, 특히 야구는 어떤가. 아무리 잘하는 팀이라도 10게임 중 4번은 진다. 이기는 게임에서조차 위기 상황은 나온다. 그래서 야구팬은 늘 분노한다. 아무리 점잖은 사람이라도 운전할 때 쌍욕을 하는 것처럼, 야구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아이돌 팬에게 대상에 대한 욕이 금지돼 있다면, 야구팬에게 응원팀에 대한 욕은 필수인 것이다. 드라마로 비유하자면 아이돌의 세계가 악역 없는 로맨스라면, 야구의 세계는 욕하면서 보는 막장극이다. 40여 년간 펼쳐진 막장극의 소비층에, 로맨스의 소비층이 급격히 유입됐다. 문화의 충돌이 생겼다. 성적보다는 경기장 그 자체를 즐기거나, 팀보다는 선수 개인을 덕질하는 층이 늘어났다. 프로야구도 대중문화이자 콘텐츠이니 어떤 식으로 소비하든 문제는 없다. 다만 오랫동안 쌓여온 고인물들은 불편하거나 고깝다. 몇 경기째 블론을 저지르거나, 중요한 상황에서 연달아 아웃을 당하는 선수의 인스타에 '기죽지 마세요'라는 댓글을 다는 이들이 곱게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그날 경기의 역적으로 낙인찍혀 팬 커뮤니티에서 온갖 쌍욕을 먹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올드 팬덤은 신규 팬덤에 텃세를 부린다. 야구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는 극단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과연 그럴까. 음악의 역사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음악은 기존의 경향에 새로운 요소가 유입되며 발전해 왔다. 클래식을 기반으로 했던 재즈에 흑인 음악이 더해져 리듬 앤 블루스가 태어났고, 이는 곧 록으로 발달했다. 1980년대 흑인 슬럼가에서 태어난 힙합은 록을 비롯한 다른 장르가 더해지며 트랩, 개러지 같은 분파를 낳곤 했다. 야구 문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올드 팬덤을 상징하는 과거의 팬덤은, 즉 구단 버스를 불태운다든가 퇴근하는 선수들을 붙잡고 청문회를 개최한다든가 하는 행동은 현대 야구팬들에게 추억이나 조롱거리가 됐다. 여전히 열혈 야구팬이라 자처하는 이들조차 고작해야 관중석에서 소심하게 욕을 뱉는 정도다. 한국 사회의 시민 의식이 올라간 것에 더해, 야구장에 젊은 팬들이 많아지며 생긴 자연스러운 결과다. 여기에 아이돌 덕질에 익숙한 새로운 팬들이 급증했다. 당장은 아이돌 식 덕질 문화가 신규 콘텐츠의 주를 이룬다. 인스타에 야구장에 간 걸 인증하거나, 최애 선수의 활약상을 다룬 직촬 영상을 올리거나 하는 식이다. 하지만 출발은 달라도 결과는 같다. 앞서 말했듯 야구란, 스트레스 없이 이기는 날이 극히 드문 종목이다. 선발투수가 6이닝 3실점을 하고 야수들이 6회전에 10점 이상을 내는 경기는 거의 없다. 수많은 위기 상황이 발생하고 선수들은 끊임없이 맥을 끊는다. 그렇기에 야구팬들은 늘 화가 난다. 야구의 본질이자 종목의 특성이다. 덕질로 시작해도 결국은 이 거대한 본질에 흡수될 수밖에 없다. 오히려 덕질에 특화된 2차 콘텐츠 창작에 능한 계층과 세대는 야구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게 될 것이다. 한국에서 대를 이어가며 소비되는 유일한 스포츠는 프로야구고, 연고지가 가장 잘 정착돼 있는 스포츠 또한 마찬가지다. 여기에 기존 대중문화의 코어 소비자인 아이돌 팬덤이 들어왔다. 올드 팬덤과 뉴 팬덤이 융합될 때 펼쳐질 야구장, 그리고 온라인 콘텐츠의 모습은 무엇일까. 아마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궁금해할 새로운 트렌드가 되지 않을까. 사진 : 연합뉴스
스마트폰이 보편화된 2010년대 이후 세계 페스티벌 산업은 급성장해 왔다. 모바일 기반의 앱과 SNS가 생활화되면서 지리적 접근성이 좋아지고 정보의 실시간 유통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미국 코첼라 페스티벌은 2010년대 초반부터 유튜브로 행사를 실시간 중계하면서 급격히 지명도를 올렸고 후지록, 서머소닉 등 일본 페스티벌 또한 한국 관객이 유의미하게 증가했다. 음악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공연이란 형태가 역으로 첨단 기술의 혜택을 받은 셈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2006년 인천 펜타포트 록페스티벌이 개최될 당시만 해도 ‘록 마니아'들을 위한 것이었던 여름 록 페스티벌은 2009년 하반기 아이폰 국내 출시, 2010년 트위터 유행과 함께 전환기를 맞았다. 집에서 트위터를 들여다보다 타임라인이 지산밸리 록페스티벌, 펜타포트 록페스티벌로 도배되는 걸 보며 시장은 ‘마니아'에서 ‘소비자'로 넓어졌다. 오래전부터 대중문화시장의 주축인 20대 여성을 타깃으로 한 그랜드민트 페스티벌은 자라섬 재즈페스티벌과 더불어 ‘매진'이란 단어와 함께하는 행사가 됐고, 이런 현상에 주목한 여러 지자체와 기업이 뛰어들며 2010년대 초반에는 겨울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말에 어디선가 페스티벌이 열렸다. 특히 일본 페스티벌에 오는 라인업을 수급해야 하는 여름의 경우, 한 달 남짓한 기간에 4개 이상의 페스티벌이 열리는 제살 깎아먹기의 단계에 이르렀다. 그 결과, 대부분의 페스티벌이 단명했다. 페스티벌이란 이름이 주는 특별함도 사라졌고, 라인업도 그 나물에 그 밥인 상황이었으니 필연이었다. 한국 페스티벌 시장의 도화선 역할을 한 인천 펜타포트 록페스티벌이 지난 2일부터 4일까지 송도달빛축제공원에서 열렸다. 첫해부터 빠짐없이 이 행사를 지켜봐 온 나에게 올해는 ‘역대급'이란 단어를 쓸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잔나비와 데이식스가 메인스테이지의 헤드와 서브를 장식한 일요일은 사상 처음으로 티켓이 매진될 만큼 많은 인파가 몰렸다. 이미 흥행 가도에 올랐던 지난해보다도 사흘 내내 더 많은 인파가 체감됐다. 코로나19 이후 공연 시장이 커지기도 했지만 QWER과 데이식스가 출연한 점도 있다. 처음으로 아이돌 그룹이 펜타포트에 출연하면서 페스티벌 문화와 아이돌 팬덤 문화가 충돌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록페스티벌에 익숙한 층과 드림 콘서트 같은 아이돌 행사에 익숙한 계층이 섞이는 초유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려할 만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고, 역대급 관객 동원이라는 숫자만 남겼다. 역대급 더위기도 했다. 무대 앞은 물론이거니와 행사장 곳곳에서 소방차가 동원되어 물을 뿌렸다. 그럼에도 온열질환 환자가 속출했다. 첫 해 이래 펜타포트의 상징과 같았던 비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역대급 음향이었다. 올림픽공원, 한강 난지공원에서 열리는 페스티벌과 달리, 펜타포트는 라이브의 쾌감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특징이 있었다. 송도신도시가 다 개발되기 전부터 자리잡고 있었던 행사기 때문이다. 2010년대 중반부터 타워 크레인이 행사장 주변의 미장센을 차지하더니 어느덧 고층아파트가 이를 대체했다. 소음 민원이 증가했다. 결국 체감 데시벨이 확 줄었다. 백스테이지에서 대기하던 음악가들도 작년까지는 여기서도 소리가 잘 들렸는데 올해는 작은 것 같다는 의견이었다. 헤드라이너급 팀을 제외하면 단순 볼륨만 줄어든 게 아니라 중저음을 담당하는 우퍼 사운드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민원 발생을 예방하기 위함이었으리라. 이를 반영하듯 행사장 주변에선 소음측정기를 들고 실시간 데시벨을 기록하는 인원들도 배치됐다. ‘역대급'이란 단어가 결국 좋은 쪽으로만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역대급 상황'들은 펜타포트, 나아가 향후 여름 페스티벌의 방향성을 고민할 때가 왔음을 시사한다. 펜타포트가 표방하는 록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 음악 시장의 비주류 장르가 됐다. 스트리밍이 시장을 장악하면서 글로벌 스타의 출현은 힘들어졌다. ‘대중’의 시대는 ‘다중'의 시대로 전환됐고 저널이 주도하는 장르의 카테고리를 다중이 주도하는 해시태그가 대체했다. 이렇게 변한 환경에서 헤드라이너급, 즉 지명도와 시장성을 담보하는 스타들의 몸값은 계속 치솟고 있다. 페스티벌이 관이나 기업의 예산으로 열리는 ‘비즈니스'임을 떠올린다면 일본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스타급 뮤지션들을 섭외하기는 점점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하여 아이돌과 트로트가 장악하는 한국 음악 시장에서 주목받는 신예 밴드와 싱어송라이터의 등장도 드물다. 실리카겔, 잔나비, 새소년이 몇 년째 사실상 고정 출연인 상황이다, 이런 현상은 펜타포트뿐만 아니라 다른 페스티벌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밴드 라이브가 가능한 케이팝 아이돌 섭외는 지속 가능한 행사를 위해 고민 대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이돌 팬덤 문화와 페스티벌 문화의 충돌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가, 기존의 문화적 아이덴티티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펜타포트의 소프트웨어, 즉 라인업을 둘러싼 숙제다. 기후와 도시화라는 하드웨어적 숙제도 있다. ‘이번 여름이 가장 시원할 것'이라는 기후 전문가들의 우려가 현실화하고 있다. 가장 무더울 때 냉방시설이 존재하지 않는 야외에서 페스티벌을 계속 개최할 수 있을까? 온열질환 예방 및 응급처치 인력과 시설을 늘린다 해도 출연진 및 관객들의 체력적 심리적 고충도 상승할 게 분명한 상황에서 말이다. 몇 년 사이 아파트와 인구가 증가하는 지역적 특성을 감안한다면 새로운 환경을 고민할 이유는 더욱 깊어진다. 한국 공무원은 행사를 멋지게 개최하는 것보다는 민원의 최소화를 더 중시한다. 행사장 주변 고층 아파트의 밀도가 높아질수록, 민원도 폭증할 것이다. 허용 데시벨은 더욱 낮아질 것이고, 사운드 밸런스 체감은 더욱 악화할 것이다. 송도의 여름에서 지속적 행사를 해야 하냐는 근본적 고민의 주체는 인천광역시다. 라인업 구성상 8월을 피할 수 없다면, 인천에 존재하거나 건립 예정인 대형 레저 시설을 활용하는 방안을 고민할 때다. 송도달빛축제공원이 펜타포트 전용 부지로 만들어졌지만, 이젠 임계점이 코앞이다. 여름 록 페스티벌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지속 가능한 행사를 가능케 하는, 새로운 옷을 준비할 때다. 사진 : 연합뉴스
코로나19가 빠르게 과거처럼 된 이후, 그 이전과 비교해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건 페스티벌 시장이다. 모이고 부대껴서 한 방향을 보며 음악을 즐기는 경험에 대한 갈망은 이전에 페스티벌에 가본 적 없는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2006년 시작된 이래 관객 동원에 있어서 조금씩 우하향 곡선을 그렸던 펜타포트는 오프라인 행사가 재개된 지 2년 만인 지난해 역대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다. 봄의 서울재즈페스티벌, 가을의 그랜드민트페스티벌 역시 이전보다 매진 속도가 빨라졌다. 코로나 이전에도 야외 활동이 가능한 계절이면 늘 페스티벌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행사나 여가 산업 수준 이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컨셉도 없고 라인업도 거기서 거기였다. 주목할 만한 페스티벌을 한 손으로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코로나19 기간의 강제 멈춤 덕이었을까. 페스티벌 시장이 커진 만큼 행사 수준을 벗어나 주목할 만한 페스티벌들도 생겨나고 있다. 지난달 22일과 23일, 인천 파라다이스시티에서 열린 아시안팝페스티벌이 대표적이다. 쾌적했다. 여름의 초입에 열리는 페스티벌과 가장 안 어울린 단어인 쾌적함이 여기서 떠올랐던 것이다. 뙤약볕 아래 아스팔트길을 걸어 입구까지 향하는 여느 페스티벌과 달리, 호텔 정문으로 들어가 로비를 거쳐 행사장까지 가는 동선이 우선 그랬다. 넓은 잔디 광장과 2,000석 규모의 실내 공연장, 청담동 수준의 클럽, 그리고 라운지 형태의 공연장까지 야외와 실내를 두루 활용하되, 각 공간의 특성에 맞는 장르까지 모두 그랬다. 메인 스테이지가 있는 광장을 제외한 모든 스테이지에 냉난방 시설이 있고, 호텔에 입점해 있는 카페와 식당, 편의점까지 두루 한 동선처럼 이용할 수 있었다. 과거 파라다이스시티에서 열린 페스티벌이나 행사에 온 적은 있었지만, 행사장과 호텔과 철저히 분리된 동선이었던 반면 아시안팝페스티벌은 인프라와 행사가 유기적으로 연결됐다. 이 페스티벌이 파라다이스 문화재단과의 공동 주최로 열렸던 덕이다. 파라다이스그룹의 전필립 회장은 1980년대 한국 대중음악사의 씬 스틸러다. 정원영, 김광민, 한상원 등과 함께 버클리 유학 1세대였고, 유학 전부터 드러머로 활동했다. 버클리에서도 드럼을 전공했다. 귀국 후에도 여러 세션 활동을 했는데, 파라다이스그룹 입사를 전후하여 김민기의 명곡 '철망 앞에서'의 드럼 세션을 맡았던 게 이채롭다. 음악인을 꿈꿨던 재벌가의 일원이 아주 희귀한 건 아니지만, 전필립 회장은 그중에서도 가장 본격적으로 깊이 몸담았던 셈이다. 라인업 섭외와 진행 등은 공동주최사인 APF와 파라다이스 측 실무진들이 맡았겠지만 그럼에도 음향을 포함한 파라다이스시티의 인프라가 여느 리조트와 달리 '음악적'일 수 있던 이유는 오너의 음악적 배경도 무시 못 했을 것이다. 하드웨어가 쾌적했다면 라인업, 즉 소프트웨어는 신선했다. 백예린, 김창완밴드, 크라잉넛 같은 유명 국내 팀뿐만 아니라 일본, 대만, 태국 등 총 7개국에서 건너온 팀들은 아시아 음악의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를 두루두루 알게 해줬다. 케이팝으로 대표되는 아이돌뿐만 아니라 현지의 젊은이들과 함께 숨 쉬는 밴드와 싱어송라이터들이 함께했다. 특히 90년대부터 활동하며 동시대 한국 인디밴드들에게도 영향을 줬던 유라유라 테이코쿠의 리더, 야마시타 신타로의 무대는 일본 밴드 음악의 깊이와 내공을 느끼게 해줬다. 록과 댄스, 재즈와 포크 어느 장르로도 특정할 수 없으나 보는 사람을 사로잡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포크와 록을 기반으로 '카와이'하면서도 '스고이'한 아야노 카네코, 한국 인디신에서도 이제는 찾기 힘든 '정제되지 않은 분노'를 느끼게 해준 대만의 노 파티 포 카오 동(No Party For Cao Dong)등 아시안팝페스티벌이 아니었더라면 공연은커녕 음원으로도 접하기 힘든 팀의 무대는 발견의 순간이자 반성의 시간이기도 했다. 오랜 시간 음악 현장에 있었고, 글래스톤베리나 코첼라, 서머소닉을 비롯한 유수의 해외 페스티벌을 다니는 사이 어느덧 무뎌진 감각과 매너리즘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요약하자면 쾌적한 발견이었다. 대형 박람회나 전시 행사에서 적용할 문구를 페스티벌에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부디, 내년에도 이 페스티벌을 만날 수 있기를 하는 바람이다. 오는 8월 2일부터 3일간, 인천 송도달빛축제공원에서 열리는 인천펜타포트록페스티벌도 또 다른 기대를 갖게 한다. 3일권이 모두 매진되는 초유의 기록을 세웠다. 1회부터 이 페스티벌을 다녔지만 늘 넓다고만 생각했던 행사장이 작년에는 좁다고 느껴졌었다. 그만큼 사람이 많았다. 올해의 매진은 그 체감의 강도가 더 높아질 것 같다. 아시안팝페스티벌이 쾌적한 발견이라면 펜타포트는 고난의 확인이다. 여름에 열리는 어느 나라 어느 페스티벌에서나 비슷하다. 정상급 헤드라이너의 무대를 야외에서 만나는 건, 음원으로만 듣던 음악을 라이브로 '접견'한다는 의미가 크다. 특히나 펜타포트는 서울에서 열리는 다른 페스티벌과 달리 상대적으로 민원으로부터 자유로워 전체 볼륨도 크기에 라이브의 참맛을 더욱 잘 느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같은 음악, 같은 공연이라도 도파민 수치가 높다. 페스티벌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기도 했고, 라이브의 맛을 더 잘 느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킴 고든, 잭 화이트, 라이드 같은 록 역사의 굵직한 인물들이 헤드라이너로 참가하고 세풀투라, 다크 미러 오브 트레지디 같은 거물급 메탈밴드들을 페스티벌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도 펜타포트 아니면 없다. 오리사카 유타, 류오쿠오우슈오쿠 샤카이(녹황색사회 緑黄色社会)같은 일본 인디신의 현재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데이식스, QWER 같은 밴드형 아이돌들이 참가함으로써 록 페스티벌 시장을 대폭 확인시켰다. 이 라인업을 요일별, 무대별로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참가팀들과 관객이 위화감을 가진 채 뒤섞이는 것도 막은 섬세함 또한 돋보인다. 요컨대 메탈 레전드부터 케이팝 아이돌까지 '라이브'와 '밴드 사운드'로 펜타포트의 간판 아래 모으는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당연히 논란이 따를 수밖에 있지만, 관찰자의 입장에서 한편으로는 한국의 여름을 대표하는 페스티벌이 이 단계까지 성장했다는 생각이 우선 든다. 음악 시장이 해시태그와 플레이리스트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장르의 경계는 무의미해졌다. 하지만 선입견 아닌 선입견으로 인해 실제 공연 시장에서는 아이돌과 록, 힙합 등이 장르로 구분 지어진다. 올해 펜타포트는 장르의 상위에 존재하는 카테고리로 그 벽을 허물고 묶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데이식스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돌들도 자신들의 콘서트에서 하듯 MR 반주에 맞춰 춤을 추는 무대가 아니라 밴드 사운드에 맞춰 풀 라이브를 선보일 수 있는 기회의 시작이 될 것이다. 영미권의 라이브가 장르를 막론하고 밴드와 함께 무대에 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모니터 안에서 주로 소비되고, 공연 또한 모니터 안의 영상과 음악을 재현하는 데 우선을 두는 한국 대형 공연 시장에 전환점이 될 수 있기를 오랜 페스티벌 팬으로서 바라고 싶다. 사진 : 파라다이스시티 제공, 인천펜타포트록페스티벌 홈페이지
현대전쟁의 역사에서 가장 무의미했던 전술은 일본제국군의 카미카제였다. 2차대전기 일본군을 상징하는 전술로 알려져 있지만, 이름에 비해 얻은 건 전무하다시피 했다. 수많은 숙달된 청년들이 자폭으로 사라져 갔지만 정작 미 해군 전력에 입힌 피해는 경미했다. 물질적 피해보다는 차라리 정신적 피해가 컸던 정도다. 요컨대, 얻는 건 없이 오히려 자기 편의 전력을 무의미하게 소모했다. 화해 요청을 골자로 한 민희진 어도어 대표의 2차 기자회견 이후, 하이브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 물밑에서 진행되는 듯했던 전쟁에 다시 불이 붙었다. 하이브가 아닌, 역시 산하 레이블 빌리프랩이 뜬금없이 포격을 시작했다. 지난 11일, 빌리프랩 유튜브 공식 채널에 ‘표절 주장에 대한 빌리프랩의 입장’이라는 27분 50초짜리 영상이 업로드됐다. 빌리프랩 소속인 아일릿의 스태프들뿐만 아니라 NHN, 다음커뮤니케이션 등을 거친 김태호 대표, PR업계에서 커리어를 쌓은 최윤혁 부대표가 나서 아일릿이 뉴진스를 표절했다는 민희진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 발표했다. 문제는, 이를 증명하는 과정에서 악수 중의 악수를 남발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케이팝 업계의 암묵적 룰을 크게 어겼다. "우리가 표절이라면 이들도 표절"이라며 다른 아이돌 그룹을 끌어들였다. 뉴진스뿐만 아니라 여자친구, 엔믹스, 아이즈원, 아이브, 르세라핌 등 인기 있는 걸그룹이 사실상 모두 거론됐다. 해당 그룹의 팬덤뿐만 아니라 업계 관계자들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설령 경쟁 관계에 있는 아이돌이나 회사일지라도,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회사 차원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관례를 박살내면서 아일릿 지키기에 나섰다. 그런데 그 근거로 인용된 자료와 영상이 대부분 DC인사이드의 특정 갤러리에 올라왔던 자료들이다. 이번 사태에서 친 아일릿, 친 하이브 성향을 보였던 이들이 모인 커뮤니티다. 그들은 민희진의 주장을 반박하고 뉴진스를 공격하기 위해 많은 자료들을 올렸다. 하지만 이는 정작 케이팝 팬덤 내에서는 별 반향을 얻지 못했다. 대부분 반박되기도 했다. 왜냐, 악의적 편집과 보정을 거친 왜곡된 자료거나 맥락을 거세한 악의적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회사의 공식입장에 담기에는 적절치 않은 근거였다. 마치 나무위키를 바탕으로 쓰는 논문이었다. 여론전에서 불리한 상황, 반전을 노리고 올린 회심의 영상이다. 여기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쪽은 둘 중 하나다. 아일릿의 팬덤이거나, 하이브-민희진 분쟁에서 하이브 편을 들기로 마음먹고 있던 중장년층. 이들은 이 영상이 없었어도 어차피 하이브와 빌리프랩의 편이었다. 만약 이 영상으로 여론을 뒤집고자 했다면, 정치용어로 말하는 중도층을 공략했어야 했다. 문제는, 오히려 그들을 광범위 폭격했다는 것이다. 중립을 지키고 있거나, 관망 중이었던 팬덤들이 들고 일어났다. 민희진의 2차 기자 회견 이후 잠잠해지던 분위기가 또 한 번 요동쳤다. 이번에는 불꽃이 자신들에게까지 튀었으니, 이슈는 제3자들의 싸움이 아닌 당사자의 문제로 번졌다. 팬덤뿐 아니라 빌리프랩이 난사한 총탄에 맞은 엔터업계 관계자들도 부글부글 끓기는 마찬가지다. 그렇잖아도 하이브라는 거대 회사에 대해 가진 조용한 불만이, 업계 관계자들이 모인 카톡방마다 거센 불만이 되어 넘쳐흘렀다. 민심만 잃은 게 아니다. 누가 봐도 최악의 타이밍이었고, 최악의 발표 주체였다. 대중들의 피로도가 높아진 상황에서 민희진은 하이브에 화해를 제안했다. 하이브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빌리프랩이 폭탄을 터뜨렸다. 이미 민희진과 법정 다툼을 예고한 상황에서 무의미했다. 하이브의 언플은 최소한 전선 확산은 막았지만 빌리프랩은 전선을 사방으로 확장했다. 실제 전쟁이야 종전과 휴전이라는 선택이 있지만, 여론전이란 그렇지 않다. 한 번 찍히면 끝까지 가는 법이다. 그렇잖아도 아일릿에게 씌워진 '짭진스'라는 멸칭이 아일릿을 제외한 타 그룹 팬덤 사이에서 보편화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빌리프랩이 20여 분에 걸쳐 '아일릿은 뉴진스를 표절한 게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스트라이샌드 효과'까지 얻게 됐다. '찔리는 게 있으니 저렇게까지 무리수를 두는구나' 하는. 빌리프랩이 이런 ‘똥볼’을 차도록 방관한 하이브의 위기관리 능력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저 방관일까? 민희진이 전면에 나설 때 하이브는 보도자료로만 움직였다. 방시혁 의장은 물론이고, 민희진의 입과 카톡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박지원 대표도 침묵을 지켰다. 공식입장과 보도자료라는, 개인이 아닌 법인만 드러났을 뿐이다. 그 법인의 움직임마저 잠잠해진 상황에서 빌리프랩이 나타났다. 대표와 부대표가 얼굴을 드러내고 입장을 발표했다. 그리고 악수를 두고 똥볼을 찼다. 알다시피 아일릿은 방시혁이 직접 프로듀싱한 팀이다. 민희진이 뉴진스의 엄마라면, 방시혁은 아일릿의 아빠다. 민희진은 어도어 대표지만 방시혁은 빌리프랩의 최대주주다. '멀티 레이블로서의 빌리프랩'이 아닌, '하이브 산하 레이블로서의 빌리프랩'의 작품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빌리프랩 대표와 부대표가 나섰다. 이상하지 않은가? 조폭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보스를 대신해서 칼을 휘두른 후 감옥에 가는 행동대장'의 모습이 보이는 건 나뿐일까? 2000년대 초반 SM엔터테인먼트가 상장하며 '가요계'가 본격적으로 '음악산업'이라 불린 이래 시가 총액 1위 회사는 몇 번 바뀌었다. 오너 리스크는 언제나 존재했고 늘 사고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처럼 시총 1위 회사의 행보가 이상한 적은 없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스스로 불구덩이로 뛰어든 빌리프랩, 그리고 하이브의 행보는 그래서 카미카제를 연상케 한다. 입안도 무리수였고 성과도 무의미했던 카미카제 말이다. 아니, 실제 카미카제 작전은 그래도 미국 항공모함 한 척을 격침시키기라도 했다. 또한 대본영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지도 않았다. 하지만 빌리프랩의 카미카제 작전은 그런 성과조차 없었다. 오히려 하이브라는 본진을 향해 자폭하는 그림이 됐다.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아무 상관없는 커리어를 쌓아온 인물들이 C로 시작하는 직함을 달고 케이팝 팬덤 전체를 향해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뛰어든 희대의 촌극이 됐다.
여론전의 공세종말점, 즉 대중의 피로감 호소를 의식한 걸까? 이대로 가면 '상호 멸망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 판단한 걸까? 훗날 2024년 엔터테인먼트 산업계 최대 이슈로 꼽힐 게 분명한 하이브-민희진의 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드는 국면이다. 민희진 어도어 대표는 법원에서 완승을 거뒀다. 직후 두 번째 기자회견을 가졌다. 첫 회견이 '쇼미더머니'였다면 두 번째는 '세바시'였다. 하이브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는 내용이 여전히 많았지만, 어쨌든 핵심은 화해 제안이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하이브의 공식적인 대답은 없었지만, 사실상 하이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카드다. 불편한 동거일지라도 민희진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잃을 게 더 많아질 뿐이다. 바닥 밑에는 지하가 있으니까. 약 한 달간 이어진 이 공방전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케이팝 성공 신화 아래 가려졌던 '숫자를 위한 전쟁'이다. 사태가 표면화되기 직전, 어도어가 하이브에 보낸 시정 요청 메일이 여론전 상황에서 공개됐다. 그중 어도어가 가장 큰 문제점으로 제기한 건 음반 밀어내기였다. 팬사인회 개최권을 미끼로 유통사에게 과다한 물량을 넘기거나, 아니면 해외 자회사를 통해 사전 주문 수량을 떠넘기거나 하는 식으로 벌어지는 밀어내기가 업계 내부자를 통해 공식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몇 년 전부터 엔터 관계자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떠도는 농담 같은 이야기가 있다. 중국 고비사막과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는 케이팝 음반으로 가득 찬 컨테이너가 산처럼 쌓여있다는. 케이팝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지표로 여겨지는 앨범 초동 판매량을 뻥튀기하기 위해서 수요를 아득히 뛰어넘는 음반을 밀어내기 한 후, 이를 받는 해외 유통사에선 재고 비용이라도 줄이기 위해 사막이나 바다 밑에 버린다는 이야기다. 국내 유통사를 통해 밀어낸 음반들도 비슷한 운명에 처해진다. 온라인 사이트에서 음반을 구매할 시 옵션에 '미수령'이라는 항목이 있다. 구매 확인 증빙은 되지만 음반이 발송되지는 않는다. 팬으로서는 이런 증빙을 통해 이벤트 응모 기회를 잡되, 불필요한 짐을 늘리지 않는 선택이다. 판매처 입장에서도 택배 비용을 줄일 수 있으니 이득이긴 하다. 그렇다면 재고로 쌓인 음반들의 운명은? 반품 처리되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팬 이벤트 유치권을 주는 대신 반품 불가 조건을 거는 경우도 있다. 이때 고스란히 악성 재고가 된다. 이 음반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역시 관계자들 사이에 떠도는 농담 하나를 소개한다. 서해 앞 공해상에도 컨테이너가 잠겨 있다는.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는 수치다. 케이팝을 제외한 어떤 분야에서도 음반을 1천 장 이상 찍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케이팝은? 백만이라는 단위가 종종 나온다. 물론 해외 판매량까지 포함이라지만, 그럼에도 비정상적임은 틀림없다. CD 플레이어를 보유하고 있는 집도 희귀한 상황에서, 이런 판매량이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말이다. 멤버별로 패키지를 다르게 한다든가, 랜덤으로 포토 카드를 끼워 넣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팬으로 하여금 수십 장의 음반을 살 수밖에 없게 하는 상술을 감안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즉, 음반이 감상용 매체에서 '굿즈'로 넘어간 지 오래되었다지만 말이다. 이런 행위는 불법인가. 그렇지 않다. 어쨌든 유통사가 물량을 떠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기획사는 매출을 얻을 뿐, 어떤 리스크도 지지 않는다. 법 또한 어기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편법이라 해야 할까. 모두가 알고 있었다. 특정 아이돌 그룹이 초동 판매로 몇백만 장을 달성했다는 뉴스는 10여 년간 아이돌 그룹의 성공을 보여주는 증표에 다름 아니었다. 이에 따라 주가가 상승하고 기업 가치 또한 높아졌다. 한국 아이돌이 한류로 불리고, 한류가 케이팝으로 불리는 모든 시간 안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그 와중에 어린 팬들의 지갑을 털기 위해 벌어지는 상술, 팬덤끼리 경쟁하듯 벌어지는 무한 스트리밍 등의 실태도 드러났다. 하지만 '케이팝 신화'라는 달콤한 성공담에 취한 우리 모두, 그 사실을 외면했다. 미디어, 그리고 일부 평론가들 또한 케이팝이 달성하는 숫자에만 주목했다. 숫자의 이면은 보지 않거나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나도 그중 한 명이었을지 모른다. 한 단락의 마무리를 향해 가는 하이브-민희진 분쟁은 케이팝의 어두운 면을, 음악과 그에 따른 활동 대신 숫자와 실적이 주가 돼버린 이 산업의 민낯을 드러냈다. 마침, 이 글을 쓰는 와중 케이팝 음반 판매량이 전체적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는 소식도 접했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마케팅과 경영이란 미명하에 만들어진, 숫자의 거품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성공 신화의 단맛이 빠져가고 있다.
이스라엘에는 '삼손 옵션'이라는 전략이 있다. 전쟁으로 인해 국가가 멸망 위기에 처할 시, 핵무기를 포함한 전력을 적국뿐만 아니라 세계 주요 국가를 향해 투사함으로써 공멸을 꾀한다는 전략이다. 기존의 상호확증파괴 전략을 뛰어넘는, 무시무시한 계획이다. 4월 26일 오후, 모든 이슈의 블랙홀이 된 민희진 어도어 대표의 기자회견이 꼭 그랬다. '적국'이라 할 만한 하이브 경영진뿐만 아니라 케이팝 산업의 '공공연한 비밀'들이 업계 핵심관계자에 의해 폭로되는 순간이었다. 일주일에 걸쳐 행해진 하이브의 '언플 전략'이 한순간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여론도 요동쳤다. 폭풍의 일주일, 대미를 장식한 피의 금요일이었다. 나는 법을 잘 모른다. 주식도 늘 적자다. 그러니, 법적으로 하이브와 민희진의 운명을 판가름할 능력이 없다. 경영권 싸움 역시 마찬가지다. 이미 많은 전문가들이 충분히 예측을 내놨다. 다만, 케이팝 산업의 관점에서 하이브와 민희진이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법과 숫자로 드러나지 않는 것들 말이다. 하이브는 얻은 게 거의 없다. 배임, 경영권 찬탈, 급기야 무속까지 동원해 가며 '민희진 망신 주기'에 나섰다. 그 결과, 1조 원 가까운 시총이 우선 날아갔다. 하이브 주식에 물린 투자자들, 그리고 경영권과 법리 같은 '이성적 판단'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측이 민희진을 비판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케이팝 산업의 주된 소비자가 아니다. '음악' 회사가 아닌, 음악 '회사'의 관점에서 이 상황을 평가하는 이들이다. 민희진의 자진 사퇴 전략에 실패한 하이브가 향후 법원의 결정에 따라 주주총회를 소집하고 거기서 민희진의 해임이라는 목적을 이룬다 해도 외통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우선 뉴진스의 대체재로 여겨지고 있는 아일릿은 향후에도 '짭뉴진스'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힘들어졌다. 데뷔부터 빼어난 상업적 성과를 기록했지만 음악 산업에서, 특히 아이돌 산업에서 이미지는 시장 확장성에서 매우 중요하다. 보이 밴드가 팬덤 중심으로 움직이고, 걸그룹은 대중성이 더욱 핵심으로 여겨지는 현실을 감안하면 아일릿이 신세대 걸그룹의 대표주자로 자리 잡는 건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 사태의 핵심인 뉴진스는 하이브를 외통수로 몰아넣을 전망이다. 몇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첫째, 하이브가 민희진을 해임하고 뉴진스를 장악하는 상황이다. 뉴진스는 데뷔부터 '민희진의 작품'으로 여겨졌다. 제6의 멤버이자, 뉴진스의 엄마가 됐다. 여기서 민희진이 빠진다 치자. 뉴진스가 기존 콘셉트를 이어간다 치자. 250, 프랭크와 같은 프로듀서진은 물론이고 뮤직비디오도 계속 돌고래유괴단이 담당한다 치자. 대중은, 아니 뉴진스 팬덤은 어떤 생각을 할까. 하이브가 민희진을 토사구팽했다고밖에 여기지 않을 것이다. 또한 하이브가 창작과 혁신을 중시하는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아닌, '아이돌 공장'에 불과하다는 여론만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다. 둘째, 민희진 없는 뉴진스보다 아일릿을 비롯해 방시혁 의장이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는 걸그룹에 힘을 실어주는 경우다. 하이브가 지금 같은 위상을 갖기 전 일어났던 '여자친구 해체 논란'이 재발하게 된다. 당시에도 인터넷을 달궜던 반발은, 그때에 비교할 수 없는 온도와 열기로 하이브를 향하게 된다. 셋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만 민희진이 뉴진스와 함께 하이브를 떠나는 경우. 설명이 필요할까? 하이브가 민희진의 경영권 찬탈 시도 보도자료를 뿌린 첫날, 실종된 시가 총액이 푼돈처럼 느껴질 것이다. 첫 번째와 세 번째 경우의 수는 어쩌면 사내 리스크를 해소하고 경영 및 수익의 안정을 불러오는 방법일 수는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 사태로 인해 케이팝의 주요 소비층이 관망에서 적대적으로 돌아섰다. 이후 과거 사재기 관련된 판례가 재발굴되고, 종교단체와 관련된 음모론이 솟아났다. 오늘의 하이브를 만든 방탄소년단의 팬덤, 즉 아미가 트럭 시위를 하고 근조 화환을 보냈다. 해외 팬들이 하이브 사옥 앞에 모여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는 사진이 올라오기도 했다. 민희진 해임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이브가 무리수를 둔 결과다. 한두 달 후 주주총회를 통해 민희진을 해임한다 해도 하이브가 만날 건 피로스의 승리밖에 없을 전망이다. 그럼에도, 굳이 말하자면 두 가지는 얻었다. 증발한 시총 덕분에 대기업 지정을 피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게 전리품이라면 전리품이다. 또한 민희진의 기자회견 직후 공개된 뉴진스의 '버블검' 뮤직 비디오와 관련 티저 이미지들이 엄청난 찬사와 함께 폭발적 조회수를 올렸다. 올해 뉴진스가 기여할 하이브 매출도 우상향할 게 확실하다. 결과적으로 어떤 보도자료와 바이럴보다 저렴하고 강력한 마케팅이 된 셈이다. 역설의 전형이다. 민희진은 잃은 게 거의 없다. 행복회로를 넘어 '원영적 사고'를 돌려 어도어를 하이브에서 완전히 독립시키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법적 절차에 따라 해임이 된다 해도 국내외 투자자들이 돈다발을 들고 줄을 설 것이다. 최근 한국 영화와 OTT를 제외한 드라마 시장이 쪼그라들면서 케이팝 아이돌에 투자하고자 하는 자본이 넘쳐 난다. 여기서 민희진이 FA로 풀린다고? 혹시 민사소송으로 배상금이 발생하는 부정적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투자액이 쏟아질 것이다. 어쩌면 이 사태의 핵심이 될 수 있는 경업금지에 대한 조항 정도가 유일한 변수가 될 것이다. 전례없는 기자회견에서의 쌍욕 퍼레이드로 '이 구역의 미친년'이 됐지 않냐고? 엔터테인먼트 업계 내부에서 민희진의 평판은 원래 좋지 않았다. 하이브 내에서는 물론이고, SM 시절에도 그랬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같은 조직원'으로 일하기엔 매우 힘든 타입이다. 아티스트의 에고로 똘똘 뭉친 캐릭터가 다 그렇듯 말이다. 이번 기자회견에서 민희진에 열광한 사람이라도, 그런 상사와 일하라고 한다면 고개를 젓지 않을까. 반면, 나인투식스가 아니라 프로젝트 단위로 일한 크리에이티브 그룹의 평가는 다르다. 노동자가 아니라 창작자로서 함께 할 때 놀랐다는 이야기를 직접 간접적으로 들어왔다. 민희진이 담당했던 아이돌 멤버들한테도 같은 말을 들었다. 설령 민희진이 광야로 유배된다 치더라도 '조직원'이 아닌 '동료' 집단을 꾸리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케이팝 주 소비자들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음악 '산업'의 골칫거리일지는 몰라도 '음악' 산업이라는, 업의 본질을 고민하고 바꾸는 사람임을 민희진은 그간의 성과와 날것의 토크 콘서트 같았던 3시간으로 심었다. 법과 절차, 그리고 숫자로 계산할 수 없는 하이브와 민희진의 손익계산서다.
코로나19 시대, LP는 때아닌 호황을 맞이했다. 이와 관련한 여러 해석이 있었다. 본질에서 가장 빗나간 건 '복고 코드'였다. LP를 재생하기 위해서는 턴테이블이 필수다. 하지만 턴테이블 매출은 그만큼 올라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람들, 특히 MZ는 왜 LP를 샀을까. 이에 대한 정답은 오는 5월 개봉하는 영화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에 인터뷰이로 나오는 노엘 갤러거의 말이 가장 가까이 있다. "LP 커버는 대중이 가장 쉽게 소유할 수 있는 예술" 그리고 "새 앨범의 커버 이미지 회의를 하고 돌아왔는데, 우리 딸은 앨범 커버가 뭔지 모르더라". 그렇다. 가로X세로 약 30cm의 정사각형 안에 담긴 매혹적인 이미지는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너무나 좋은 예술작품이다. (인스타그램의 프레임 또한 정사각형 아닌가) 물성으로서의 음악, 그리고 이를 '소유'하고 있다는 인증으로서 LP는 최적의 매체다. 야외 활동과 사회적 관계가 봉쇄됐던 팬데믹 시대에 LP는 꽤 훌륭한 SNS 콘텐츠였던 것이다.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은 음반 커버를 예술로 승화시켰던 영국의 디자인 그룹, 힙노시스의 작품 세계를 조명한다. 1974년 발매된 후 가장 오랫동안 빌보드 앨범 차트에 머물렀던, 1970년대 록에 관심 없더라도 한 번쯤은 봤을, 검정 바탕에 빛이 투과되는 프리즘의 그래픽이 담긴 핑크 플로이드의 <Dark Side Of The Moon>을 비롯한 그들의 걸작들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다룬다. 핑크 플로이드의 친구이자 로열 컬리지 오브 아트 출신이었던 스톰 토거슨과 오브리 파월이 이끌었던 힙노시스는 핑크 플로이드의 2집 <Sauceful Of Secret>을 시작으로 핑크 플로이드의 명작들을 디자인했다. 레드 제플린부터 폴 매카트니까지 당대의 아티스트들과도 작업했다. 힙노시스로 인해 아티스트의 사진과 앨범 제목 정도가 담겨 있는 '포장재'였던 커버 디자인은 예술로 승화됐다. CD와 MTV가 없었던 1970년대, 앨범 커버는 음악을 시각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고, 힙노시스는 앨범 안에 담긴 사운드와 메시지를 신비로운 사진과 그래픽으로 구현했다. 영화는 힙노시스의 사진 담당이었던 오브리 파월을 시작으로 고인이 된 스톰 토거슨의 생전 인터뷰를 토대로 진행된다. 데이빗 길모어, 로저 워터스, 닉 메이슨 같은 핑크 플로이드 멤버는 물론이고 레드 제플린의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 그리고 폴 매카트니와 피터 가브리엘 등 힙노시스의 고객이자 그들의 수혜자였던 이들이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한다. 영국 음악을 다룬 다큐멘터리에 단골로 등장하는 노엘 갤러거 또한 특유의 입담으로 앨범 커버의 중요성과 힙노시스의 정신적 유산을 증명한다. 영화는 내추럴 본 디지털 세대에게는 충분히 신선하다. 오브리 파월은 힙노시스의 아트 북인 <바이닐. 앨범. 커버. 아트>에서 이렇게 쓴 바 있다. "당시에는 MTV도 VH1도 이렇다 할 뮤직비디오도 없었고 화려한 잡지나 타블로이드도 음악 주간지도 거의 없었다. (…) 그랬던 시절, 앨범 커버는 정보의 상징이자 안에 담긴 음악의 이정표, 그리고 각 밴드 특유의 이미지에 대한 시각적 해석이었다." 시각적 독점이라는 매혹적인 지위를 위하여, 힙노시스는 당대의 조명 기술과 사진술을 총동원하고 여러 사진을 자르고 붙이며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2차원과 3차원의 벽을 허물고, 우주의 풍경을 묘사했고, 무의식의 단면을 재현했고, 기술에 대한 긍정과 부정을 담아냈다. "노랫말이나 밴드 이미지 또는 음악 자체와 어떤 상관이 있든 없든, 좋은 디자인은 항상 흥미를 불러일으킨다"는 모토에 따라 단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이집트와 모로코로 날아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에베레스트에 올라가고 런던 상공에 거대한 돼지 모양 풍선을 띄웠다. 막대한 시간과 예산이 필요한 일이지만 한 장의 이미지를 위해 그들은 기꺼이 혁신적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계산기보다는 예술적 시도를 우선했던 아티스트들 또한 기꺼이 음반사 고위층을 설득했다. 아티스트들이 산업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즉 레코드 회사가 아니라 아티스트들이 직접 힙노시스와 클라이언트 관계를 맺고 있던 낭만의 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누구나 포토샵으로 이미지를 보정한다. 모든 사진 어플에는 손쉽게 다룰 수 있는 필터가 있다. 이미지의 재가공이 더 이상 특출난 무엇이 아니라는 얘기다. 포토샵은커녕 PC도 없었던 시대에 힙노시스는 자신들의 상상력을 오로지 아날로그적 수고를 통해 구현했다. 그것은 사진이 등장하기 전에 화가들이 현실을 캔버스에 옮기려 기울였던 노력과 같다. 기술이 진보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이전 세대 기술의 결과 말이다.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은 따라서 디지털이 보급되기 직전, 즉 PC와 CD가 등장하기 전 세상의 예술을 담아낸 풍속도다. 핑크 플로이드 <Wish You Were Here> 앨범 커버 예를 들어 불타고 있는 사람과 악수를 하는 핑크 플로이드의 <Wish You Were Here>가 지금 제작됐다고 가정해 보자. 악수하는 두 사람을 찍은 후 포토샵과 일러스트로 불을 합성하면 끝이다. 그러나, 그 시대엔 모든 게 실제 상황으로 연출되어야 했다. 미국의 스턴트맨을 고용해 찍은 이 커버는 <Dark Side Of The Moon> 못지않게 유명한 이미지가 됐다. 커버의 주인공인 스턴트맨은 촬영 당시 핑크 플로이드가 누군지도 몰랐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이 출연했던 어떤 영화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앨범을 통해 자신을 알게 됐다고 회고한다. 그뿐 아니다. 고대의 재단을 기어오르는 소녀들의 뒷모습이 담긴 레드 제플린의 <House of Holy>, 피터 가브리엘의 붕괴되는 얼굴이 담긴 <US> 같은 작품들이 아날로그 시대에 어떻게 구현됐는지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타이틀은 물론 아티스트 이름도 표기되지 않은 채, 그저 젖소 한 마리가 그려진 핑크 플로이드의 <Autumn Heart Mother>, 앨범 커버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타이핑되어 있는 게 전부인 XTC의 <Go2> 같은 시도가 가능했던 시대의 배경 또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기술의 유무가 아니라 산업과 자본의 논리보다는 예술의 용기가 우선되던 1970년대의 음악계 말이다. 힙노시스의 전성기는 MTV가 등장한 1980년대에 끝났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은 지금까지도 살아남았다. 아니, 단순한 앨범 커버를 넘어 시대의 이미지가 되고 현재의 젊은이들에게 브랜드가 됐다. 이 영화와 더불어 한국에서 진행 중인 힙노시스 전시회를 주로 MZ세대 관객들이 찾는다는 게 증거다. 성수동에서 핑크 플로이드와 레드 제플린 앨범 커버가 그려진 옷을 입은 20대를 종종 볼 수 있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따라서,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은 그 시대를 그리워하는 추억의 다큐멘터리에 머물지 않는다. 상상력을 구현할 도구와 수단이 제한되어 있던 때, 어떻게 힙노시스는 이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아이디어를 산업은 어떻게 수용할 수 있었는지, 대중은 왜 열광했는지 읽을 수 있는 예술·인문학적 교과서다.
선거의 시간이 정점에 올랐다. 꽤 오랫동안 애써 정치로부터 눈을 돌렸지만 이맘때 되면 어쩔 수 없이 뉴스를 살피고 유튜브 동영상을 찾아보게 된다. 주가보다 더 많이 들여보는 숫자는 여론조사 결과가 된다. 바야흐로 사회와 개인의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시간이자 어떤 계층이 어떤 정당을 지지하는지 숫자로 낱낱이 드러나는 시간인 것이다. 아 딱 한 계층, '음악계'를 제외하고. 2000년대 이후 한국 정치사에서 뮤지션들은 종종 정치의 현장에 있었다. 단순히 지지를 선언하는 경우도 있었고 특정 선거본부에서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 신해철처럼 거리와 방송에서 지지 유세를 하는 사례도 있었다. '모든 예술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라는 화두가 살아 있던 때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당대의 인기 음악가가 시민으로서의 발언을 하는 일은 사라졌다. 2016년 탄핵 정국 때 무대에 올라 공연했던 뮤지션들은 이미 정치적 발언을 했거나, 상징성을 얻었거나, 당장의 인기에 휘둘리지 않는 이들뿐이었다. 이번 선거에서는 특히나 그렇다. 크리스마스에 캐럴이 사라지듯, 선거철에 캠페인 송도 사라졌다. 물론 소음으로 인한 민원 여파도 있겠지만, 인기곡의 저작자나 원곡을 부른 가수 측에서도 자신의 노래가 캠페인 송으로 쓰이면서 발생할 수 있는 논란을 피하는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중문화 홍보의 전반적 분위기가 노이즈를 줄이는 쪽으로 흐르면서 생기는 현상일 것이다. 뮤지션이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적극적으로 움직일 때 주는 흥분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아쉬울 따름이다. 케이팝의 성공 지표가 된 빌보드의 고장, 미국의 경우를 살펴보자. 대선 시즌이 되면 미국 음악계는 요동친다. 어떤 장르의 뮤지션이 어떤 후보를 지지하느냐로 선거판이 달아오른다. 가장 뜨거웠던 때는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된 45대 대통령 선거였다. 그 기간 팝스타들은 트럼프의 당선을 막으려고 몸부림쳤다. 반(反) 트럼프 진영에 섰던 뮤지션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비욘세, 머라이어 캐리, 마돈나, 칸예 웨스트, 레이디 가가 같은 팝스타부터 닐 영, 로저 워터스,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같은 록 뮤지션과 인디 뮤지션 전부가 클린턴을 지지했다고 봐도 좋다. U2는 콘서트에서 트럼프 영상을 띄워놓고 정면으로 비판했으며, 마돈나는 선거가 임박할 무렵 길거리에서 클린턴을 지지하는 즉석 공연을 벌이기도 했다. 민주당 후보 경선 과정에서도 음악계는 힐러리와 샌더스 지지 세력으로 갈렸다. 힐러리 지지자들은 '팝스타'들이 많았다. 음악을 통해 막대한 부귀영화를 일궈낸, 즉 보다 상업적인 스타들이라는 얘기다. 칸예 웨스트,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비욘세, 머라이어 캐리, 존 본 조비, 엘튼 존, 퀸시 존스, 레이디 가가, 그리고 민주당 지지 음악인의 대모 격인 바버라 스트라이샌드 등이 대표적이다. 반면 샌더스 지지자들은 60~70년대 히피-프로테스탄트 시대의 음악인들과 90년대 이후의 인디 성향 음악인들이 많았다. 아트 가펑클이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America'를 샌더스의 캠페인송으로 사용하게 해준 것을 비롯하여 닐 영, 잭슨 브라운, 핑크 플로이드 출신의 로저 워터스,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톰 모렐로, 레드 핫 칠리 페퍼스, 슬립낫 등이다. 트럼프와 힐러리, 샌더스를 지지하는 뮤지션들의 장르, 세대와 따라 음악 장르의 지향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선거였다. 결코 숫자로 정량화될 수 없는, 문화인문학적 지리지였달까. 이런 지표들을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러웠다.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아니 그야말로 음악 산업을 견인하고 있는 테일러 스위프트는 특정 후보나 정당에 대해 공개적 지지 발언을 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선거철이 되면 스위프트가 누구를 지지할까에 대해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만큼 음악인이 시민사회의 일원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문화로 해석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해당 안 되는 이야기다. 특히 인기 있는 아이돌일수록 더욱 그렇다. 고작해야 투표 독려와 인증이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할 수 있는 최대치다. 단순히 노이즈를 줄이기 위해서일까. 그보다 본질적 이유는 케이팝, 혹은 아이돌 산업은 개인의 욕망이나 관념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기 때문일 것이다. 전통적 아티스트, 즉 자신의 음악과 메시지로 대중 앞에 서기보다는 대중이 원하는 기획과 음악 생산 과정을 거쳐 스타가 되는 산업이기 때문이다. 욕망의 주체보다는 객체에 가깝다는 이야기다. 산업이 고도화되고 트레이닝이라 불리는 기획 단계가 정교해질수록, 개인의 자아는 거세되고 기획사가 만든 컨셉이 중심에 선다. 그러다 보니 연애로 대표되는 사생활이 주가를 움직일 정도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의 자아가 극명화되는 정치적 발언은 언감생심이 될 수밖에 없다. 이건 아쉽다, 혹은 누구를 탓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고 싶다. 언젠가부터 아이돌을 아티스트라 부르는 게 당연시됐다. 그런데, 아티스트란 원래 무엇이었나. 자아 또는 사회적 고민을 예술 작품으로 표현하고 영향을 끼치는 직업 아니었던가. 꼭 아이돌이 아니더라도 직접 음악을 만들고 활동의 방향성을 정하는 젊은 음악 창작가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젊고 인기 있는 뮤지션과 배우들이 기꺼이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밝힐 수 있는 사회가 건전한 시민사회라는 건 두말할 것도 없다. 진영을 막론하고, 누가 그들의 정치적 소신을 얽매고 있는가. 케이팝, 아니 한국 대중음악의 미래를 위해 한 번쯤 생각해 볼 문제다.
김민기라는 이름을 한국 사회에 알린 ‘아침이슬'이 그와 33년을 함께 한 대학로 학전소극장의 마지막 노래가 됐다. 지난 3월 14일 오후 7시부터 약 두 시간 반 동안 진행된 ‘학전 어게인 콘서트'에서 박학기, 권진원, 황정민, 노래를 찾는 사람들, 한영애, 알리, 정동화 등 이날의 출연자들이 함께 마지막 곡으로 부른 이 노래를 들으며 ‘아침이슬'이 애국가와 같은, 의례곡처럼 들렸다. 공식 폐관일을 하루 앞둔 14일 ‘학전 어게인'의 마지막 공연을 찾았다. 2009년 봄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 참가를 위해 방문한 이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때는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풍경들을 유심히 살펴봤다. 입구의 김광석 동상, 지하로 내려가는 좁은 계단, 복도에 붙어 있는 1990년대의 공연 포스터들을. 개관 초기였던 1991년 4월 3일부터 7일까지 진행된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조동익, 고찬용, 배우 박상원, 변진섭, 윤상, 최성수, 이문세가 출연진이었다. 그 때도 큰 인기를 누리던 이들이 이 작은 무대에 설 수 있었던 당시 한국 대중음악계의 분위기가 새삼 읽혔다. 1995년 갓 데뷔한 윤도현, 댄스 음악 혁명에 밀려 TV에선 볼 수 없던 1997년 박학기의 공연 포스터도 있었다.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들 또한 그 자체로 1990년대 한국 대중문화의 기록지들이었다. 이 과거가 현재였던 때, 나와 그들과 우리가 30년만큼 젊었거나 어렸을 때, 대학로는 한국 공연의 본산지였다. 나는 홍대 앞에서 초기의 인디 밴드들과 어울리며 그 시절을 보냈다. 그때의 밴드들이 홍대앞에서 어느 정도 인기를 얻으면 대학로의 소극장에서 단독 공연을 열곤 했다. 공연자나 관객이나 신분 상승을 하는 기분이었다. 댄스 그룹을 제외한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들이 한 번쯤은 거쳐갔던 대학로 소극장의 시대는 2000년대 후반부터 저물었다. 대학로 공연 그 자체였던 연극 공연장이 조금 남아 있을 뿐, 개그 콘서트와 뮤지컬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학전 마지막 날도 대학로 곳곳에서 개그 콘서트 광고와 출연 배우의 얼굴이 크게 걸린 뮤지컬 플래카드만 보였다. 그러니 학전의 마지막 날은 단순히 대학로의 터줏대감이자, 소극장 문화의 상징이 없어지는 걸 넘어 콘서트를 보러 대학로에 가는 마지막 의식이기도 했다. 오후 7시, ‘올드 랭 사인'을 배경으로 깐 영상으로 공연이 시작됐다. “언젠가 이곳이 추억이 될 때면 당신은 무엇을 기억하고 싶나요?”라는 자막과 함께. 학전으로 오는 길이 과거의 추억을 떠올렸다면, 이날 또한 언젠가 추억이 되리라. 그래서 이날 공연을 더 생생히 머릿속에 남기고 싶었다. 올해 데뷔 40주년을 맞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시작으로, 출연자들은 모두 김민기의 노래를 자신들의 스타일로 재해석해서 불렀다. 노찾사는 ‘철망 앞에서'를, 김민기는 ‘친구'를, 권진원은 황정민과 함께 ‘이 세상 어딘가에'를, 정동하는 ‘천리길'을, 알리는 ‘바다'를. 여러 장르의 뮤지션들이 부르는 김민기의 노래를 들으며 어쿠스틱 기타 반주로 세상에 나왔던 그의 작품들이 얼마나 다양한 장르로 해석될 수 있는지 새삼 느꼈다. 밥 딜런의 노래가 그러하듯, 김민기는 화두를 던졌을 뿐 해석은 받아들이는 자의 몫이었던 것이다. 메시지뿐 아니라 리듬과 사운드조차도 말이다. 마지막 공연이고 마지막 날이니 혹시나 하는 기대가 있었다. 김민기 대표의 마지막 인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영애가 ‘내 나라 내 겨레'를 부를 때 중간에 김민기의 내레이션이 원곡 그대로 나오는 게 그의 육성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그렇기에 모든 이들이 학전을 그리워하고 김민기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전하는 게 더욱 와닿기도 했다. 권진원이 눈시울을 닦았을 때, 박학기가 “출연자들끼리 오늘 울지 말자고 대기실에서 다짐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단순한 세리머니가 아닌 마음으로부터의 환송이자 바람이었다. 마지막이라고 요란떨지 않는, 애써 의미 부여하지 않는, 그저 담담하고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시작과 끝을 이었다. 나도 담담히 공연장을 나섰다. 아쉬운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대단한 추억이 있던 건 아니지만 한국 대중음악사를 연구할 때마다 김민기와 학전 소극장이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를 깨달으며 이 공간이 어떤 형태로든 '학전'이라는 이름으로 유지되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는 법. 과거의 대학로, 그날의 학전을 추억으로 남겨둘 수 있는 것만 해도 충분히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쨌든 김민기가 학전에서 가장 공들였던 어린이극 전용 극장으로 이 공간은 지속될 전망이기 때문이다. 다만, 바라는 것이 하나 있다. 김민기의 집무실에는 1991년부터 오랫동안 나이테처럼 쌓여왔던 온갖 사진과 영상 자료들이 가득하다. 몇 년 전 디지털화도 됐다. 이 소중한 자료들이 온라인이나 책을 통해 세상에 선보였으면 하는 마음이다. 트렌드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사라지거나, 아니면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에서 ‘전설'이니 하는 단어로 상투화되는 과거들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대학로 12길 46 밖을 나와 도서관과 가정집에 퍼질 수 있으면 좋겠다. 추억은 각자의 것이지만 기록은 모두의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