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에 음악에 빠져 21세기 내내 음악을 얘기하고 있다.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이며 음악콘텐츠 기업 일일공일팔에서 일한다.
이스라엘에는 '삼손 옵션'이라는 전략이 있다. 전쟁으로 인해 국가가 멸망 위기에 처할 시, 핵무기를 포함한 전력을 적국뿐만 아니라 세계 주요 국가를 향해 투사함으로써 공멸을 꾀한다는 전략이다. 기존의 상호확증파괴 전략을 뛰어넘는, 무시무시한 계획이다. 4월 26일 오후, 모든 이슈의 블랙홀이 된 민희진 어도어 대표의 기자회견이 꼭 그랬다. '적국'이라 할 만한 하이브 경영진뿐만 아니라 케이팝 산업의 '공공연한 비밀'들이 업계 핵심관계자에 의해 폭로되는 순간이었다. 일주일에 걸쳐 행해진 하이브의 '언플 전략'이 한순간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여론도 요동쳤다. 폭풍의 일주일, 대미를 장식한 피의 금요일이었다. 나는 법을 잘 모른다. 주식도 늘 적자다. 그러니, 법적으로 하이브와 민희진의 운명을 판가름할 능력이 없다. 경영권 싸움 역시 마찬가지다. 이미 많은 전문가들이 충분히 예측을 내놨다. 다만, 케이팝 산업의 관점에서 하이브와 민희진이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법과 숫자로 드러나지 않는 것들 말이다. 하이브는 얻은 게 거의 없다. 배임, 경영권 찬탈, 급기야 무속까지 동원해 가며 '민희진 망신 주기'에 나섰다. 그 결과, 1조 원 가까운 시총이 우선 날아갔다. 하이브 주식에 물린 투자자들, 그리고 경영권과 법리 같은 '이성적 판단'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측이 민희진을 비판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케이팝 산업의 주된 소비자가 아니다. '음악' 회사가 아닌, 음악 '회사'의 관점에서 이 상황을 평가하는 이들이다. 민희진의 자진 사퇴 전략에 실패한 하이브가 향후 법원의 결정에 따라 주주총회를 소집하고 거기서 민희진의 해임이라는 목적을 이룬다 해도 외통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우선 뉴진스의 대체재로 여겨지고 있는 아일릿은 향후에도 '짭뉴진스'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힘들어졌다. 데뷔부터 빼어난 상업적 성과를 기록했지만 음악 산업에서, 특히 아이돌 산업에서 이미지는 시장 확장성에서 매우 중요하다. 보이 밴드가 팬덤 중심으로 움직이고, 걸그룹은 대중성이 더욱 핵심으로 여겨지는 현실을 감안하면 아일릿이 신세대 걸그룹의 대표주자로 자리 잡는 건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 사태의 핵심인 뉴진스는 하이브를 외통수로 몰아넣을 전망이다. 몇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첫째, 하이브가 민희진을 해임하고 뉴진스를 장악하는 상황이다. 뉴진스는 데뷔부터 '민희진의 작품'으로 여겨졌다. 제6의 멤버이자, 뉴진스의 엄마가 됐다. 여기서 민희진이 빠진다 치자. 뉴진스가 기존 콘셉트를 이어간다 치자. 250, 프랭크와 같은 프로듀서진은 물론이고 뮤직비디오도 계속 돌고래유괴단이 담당한다 치자. 대중은, 아니 뉴진스 팬덤은 어떤 생각을 할까. 하이브가 민희진을 토사구팽했다고밖에 여기지 않을 것이다. 또한 하이브가 창작과 혁신을 중시하는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아닌, '아이돌 공장'에 불과하다는 여론만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다. 둘째, 민희진 없는 뉴진스보다 아일릿을 비롯해 방시혁 의장이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는 걸그룹에 힘을 실어주는 경우다. 하이브가 지금 같은 위상을 갖기 전 일어났던 '여자친구 해체 논란'이 재발하게 된다. 당시에도 인터넷을 달궜던 반발은, 그때에 비교할 수 없는 온도와 열기로 하이브를 향하게 된다. 셋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만 민희진이 뉴진스와 함께 하이브를 떠나는 경우. 설명이 필요할까? 하이브가 민희진의 경영권 찬탈 시도 보도자료를 뿌린 첫날, 실종된 시가 총액이 푼돈처럼 느껴질 것이다. 첫 번째와 세 번째 경우의 수는 어쩌면 사내 리스크를 해소하고 경영 및 수익의 안정을 불러오는 방법일 수는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 사태로 인해 케이팝의 주요 소비층이 관망에서 적대적으로 돌아섰다. 이후 과거 사재기 관련된 판례가 재발굴되고, 종교단체와 관련된 음모론이 솟아났다. 오늘의 하이브를 만든 방탄소년단의 팬덤, 즉 아미가 트럭 시위를 하고 근조 화환을 보냈다. 해외 팬들이 하이브 사옥 앞에 모여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는 사진이 올라오기도 했다. 민희진 해임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이브가 무리수를 둔 결과다. 한두 달 후 주주총회를 통해 민희진을 해임한다 해도 하이브가 만날 건 피로스의 승리밖에 없을 전망이다. 그럼에도, 굳이 말하자면 두 가지는 얻었다. 증발한 시총 덕분에 대기업 지정을 피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게 전리품이라면 전리품이다. 또한 민희진의 기자회견 직후 공개된 뉴진스의 '버블검' 뮤직 비디오와 관련 티저 이미지들이 엄청난 찬사와 함께 폭발적 조회수를 올렸다. 올해 뉴진스가 기여할 하이브 매출도 우상향할 게 확실하다. 결과적으로 어떤 보도자료와 바이럴보다 저렴하고 강력한 마케팅이 된 셈이다. 역설의 전형이다. 민희진은 잃은 게 거의 없다. 행복회로를 넘어 '원영적 사고'를 돌려 어도어를 하이브에서 완전히 독립시키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법적 절차에 따라 해임이 된다 해도 국내외 투자자들이 돈다발을 들고 줄을 설 것이다. 최근 한국 영화와 OTT를 제외한 드라마 시장이 쪼그라들면서 케이팝 아이돌에 투자하고자 하는 자본이 넘쳐 난다. 여기서 민희진이 FA로 풀린다고? 혹시 민사소송으로 배상금이 발생하는 부정적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투자액이 쏟아질 것이다. 어쩌면 이 사태의 핵심이 될 수 있는 경업금지에 대한 조항 정도가 유일한 변수가 될 것이다. 전례없는 기자회견에서의 쌍욕 퍼레이드로 '이 구역의 미친년'이 됐지 않냐고? 엔터테인먼트 업계 내부에서 민희진의 평판은 원래 좋지 않았다. 하이브 내에서는 물론이고, SM 시절에도 그랬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같은 조직원'으로 일하기엔 매우 힘든 타입이다. 아티스트의 에고로 똘똘 뭉친 캐릭터가 다 그렇듯 말이다. 이번 기자회견에서 민희진에 열광한 사람이라도, 그런 상사와 일하라고 한다면 고개를 젓지 않을까. 반면, 나인투식스가 아니라 프로젝트 단위로 일한 크리에이티브 그룹의 평가는 다르다. 노동자가 아니라 창작자로서 함께 할 때 놀랐다는 이야기를 직접 간접적으로 들어왔다. 민희진이 담당했던 아이돌 멤버들한테도 같은 말을 들었다. 설령 민희진이 광야로 유배된다 치더라도 '조직원'이 아닌 '동료' 집단을 꾸리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케이팝 주 소비자들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음악 '산업'의 골칫거리일지는 몰라도 '음악' 산업이라는, 업의 본질을 고민하고 바꾸는 사람임을 민희진은 그간의 성과와 날것의 토크 콘서트 같았던 3시간으로 심었다. 법과 절차, 그리고 숫자로 계산할 수 없는 하이브와 민희진의 손익계산서다.
코로나19 시대, LP는 때아닌 호황을 맞이했다. 이와 관련한 여러 해석이 있었다. 본질에서 가장 빗나간 건 '복고 코드'였다. LP를 재생하기 위해서는 턴테이블이 필수다. 하지만 턴테이블 매출은 그만큼 올라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람들, 특히 MZ는 왜 LP를 샀을까. 이에 대한 정답은 오는 5월 개봉하는 영화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에 인터뷰이로 나오는 노엘 갤러거의 말이 가장 가까이 있다. "LP 커버는 대중이 가장 쉽게 소유할 수 있는 예술" 그리고 "새 앨범의 커버 이미지 회의를 하고 돌아왔는데, 우리 딸은 앨범 커버가 뭔지 모르더라". 그렇다. 가로X세로 약 30cm의 정사각형 안에 담긴 매혹적인 이미지는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너무나 좋은 예술작품이다. (인스타그램의 프레임 또한 정사각형 아닌가) 물성으로서의 음악, 그리고 이를 '소유'하고 있다는 인증으로서 LP는 최적의 매체다. 야외 활동과 사회적 관계가 봉쇄됐던 팬데믹 시대에 LP는 꽤 훌륭한 SNS 콘텐츠였던 것이다.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은 음반 커버를 예술로 승화시켰던 영국의 디자인 그룹, 힙노시스의 작품 세계를 조명한다. 1974년 발매된 후 가장 오랫동안 빌보드 앨범 차트에 머물렀던, 1970년대 록에 관심 없더라도 한 번쯤은 봤을, 검정 바탕에 빛이 투과되는 프리즘의 그래픽이 담긴 핑크 플로이드의 <Dark Side Of The Moon>을 비롯한 그들의 걸작들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다룬다. 핑크 플로이드의 친구이자 로열 컬리지 오브 아트 출신이었던 스톰 토거슨과 오브리 파월이 이끌었던 힙노시스는 핑크 플로이드의 2집 <Sauceful Of Secret>을 시작으로 핑크 플로이드의 명작들을 디자인했다. 레드 제플린부터 폴 매카트니까지 당대의 아티스트들과도 작업했다. 힙노시스로 인해 아티스트의 사진과 앨범 제목 정도가 담겨 있는 '포장재'였던 커버 디자인은 예술로 승화됐다. CD와 MTV가 없었던 1970년대, 앨범 커버는 음악을 시각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고, 힙노시스는 앨범 안에 담긴 사운드와 메시지를 신비로운 사진과 그래픽으로 구현했다. 영화는 힙노시스의 사진 담당이었던 오브리 파월을 시작으로 고인이 된 스톰 토거슨의 생전 인터뷰를 토대로 진행된다. 데이빗 길모어, 로저 워터스, 닉 메이슨 같은 핑크 플로이드 멤버는 물론이고 레드 제플린의 지미 페이지와 로버트 플랜트, 그리고 폴 매카트니와 피터 가브리엘 등 힙노시스의 고객이자 그들의 수혜자였던 이들이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한다. 영국 음악을 다룬 다큐멘터리에 단골로 등장하는 노엘 갤러거 또한 특유의 입담으로 앨범 커버의 중요성과 힙노시스의 정신적 유산을 증명한다. 영화는 내추럴 본 디지털 세대에게는 충분히 신선하다. 오브리 파월은 힙노시스의 아트 북인 <바이닐. 앨범. 커버. 아트>에서 이렇게 쓴 바 있다. "당시에는 MTV도 VH1도 이렇다 할 뮤직비디오도 없었고 화려한 잡지나 타블로이드도 음악 주간지도 거의 없었다. (…) 그랬던 시절, 앨범 커버는 정보의 상징이자 안에 담긴 음악의 이정표, 그리고 각 밴드 특유의 이미지에 대한 시각적 해석이었다." 시각적 독점이라는 매혹적인 지위를 위하여, 힙노시스는 당대의 조명 기술과 사진술을 총동원하고 여러 사진을 자르고 붙이며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2차원과 3차원의 벽을 허물고, 우주의 풍경을 묘사했고, 무의식의 단면을 재현했고, 기술에 대한 긍정과 부정을 담아냈다. "노랫말이나 밴드 이미지 또는 음악 자체와 어떤 상관이 있든 없든, 좋은 디자인은 항상 흥미를 불러일으킨다"는 모토에 따라 단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이집트와 모로코로 날아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에베레스트에 올라가고 런던 상공에 거대한 돼지 모양 풍선을 띄웠다. 막대한 시간과 예산이 필요한 일이지만 한 장의 이미지를 위해 그들은 기꺼이 혁신적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계산기보다는 예술적 시도를 우선했던 아티스트들 또한 기꺼이 음반사 고위층을 설득했다. 아티스트들이 산업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즉 레코드 회사가 아니라 아티스트들이 직접 힙노시스와 클라이언트 관계를 맺고 있던 낭만의 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누구나 포토샵으로 이미지를 보정한다. 모든 사진 어플에는 손쉽게 다룰 수 있는 필터가 있다. 이미지의 재가공이 더 이상 특출난 무엇이 아니라는 얘기다. 포토샵은커녕 PC도 없었던 시대에 힙노시스는 자신들의 상상력을 오로지 아날로그적 수고를 통해 구현했다. 그것은 사진이 등장하기 전에 화가들이 현실을 캔버스에 옮기려 기울였던 노력과 같다. 기술이 진보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이전 세대 기술의 결과 말이다.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은 따라서 디지털이 보급되기 직전, 즉 PC와 CD가 등장하기 전 세상의 예술을 담아낸 풍속도다. 핑크 플로이드 <Wish You Were Here> 앨범 커버 예를 들어 불타고 있는 사람과 악수를 하는 핑크 플로이드의 <Wish You Were Here>가 지금 제작됐다고 가정해 보자. 악수하는 두 사람을 찍은 후 포토샵과 일러스트로 불을 합성하면 끝이다. 그러나, 그 시대엔 모든 게 실제 상황으로 연출되어야 했다. 미국의 스턴트맨을 고용해 찍은 이 커버는 <Dark Side Of The Moon> 못지않게 유명한 이미지가 됐다. 커버의 주인공인 스턴트맨은 촬영 당시 핑크 플로이드가 누군지도 몰랐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이 출연했던 어떤 영화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앨범을 통해 자신을 알게 됐다고 회고한다. 그뿐 아니다. 고대의 재단을 기어오르는 소녀들의 뒷모습이 담긴 레드 제플린의 <House of Holy>, 피터 가브리엘의 붕괴되는 얼굴이 담긴 <US> 같은 작품들이 아날로그 시대에 어떻게 구현됐는지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타이틀은 물론 아티스트 이름도 표기되지 않은 채, 그저 젖소 한 마리가 그려진 핑크 플로이드의 <Autumn Heart Mother>, 앨범 커버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타이핑되어 있는 게 전부인 XTC의 <Go2> 같은 시도가 가능했던 시대의 배경 또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기술의 유무가 아니라 산업과 자본의 논리보다는 예술의 용기가 우선되던 1970년대의 음악계 말이다. 힙노시스의 전성기는 MTV가 등장한 1980년대에 끝났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은 지금까지도 살아남았다. 아니, 단순한 앨범 커버를 넘어 시대의 이미지가 되고 현재의 젊은이들에게 브랜드가 됐다. 이 영화와 더불어 한국에서 진행 중인 힙노시스 전시회를 주로 MZ세대 관객들이 찾는다는 게 증거다. 성수동에서 핑크 플로이드와 레드 제플린 앨범 커버가 그려진 옷을 입은 20대를 종종 볼 수 있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따라서,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은 그 시대를 그리워하는 추억의 다큐멘터리에 머물지 않는다. 상상력을 구현할 도구와 수단이 제한되어 있던 때, 어떻게 힙노시스는 이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아이디어를 산업은 어떻게 수용할 수 있었는지, 대중은 왜 열광했는지 읽을 수 있는 예술·인문학적 교과서다.
선거의 시간이 정점에 올랐다. 꽤 오랫동안 애써 정치로부터 눈을 돌렸지만 이맘때 되면 어쩔 수 없이 뉴스를 살피고 유튜브 동영상을 찾아보게 된다. 주가보다 더 많이 들여보는 숫자는 여론조사 결과가 된다. 바야흐로 사회와 개인의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시간이자 어떤 계층이 어떤 정당을 지지하는지 숫자로 낱낱이 드러나는 시간인 것이다. 아 딱 한 계층, '음악계'를 제외하고. 2000년대 이후 한국 정치사에서 뮤지션들은 종종 정치의 현장에 있었다. 단순히 지지를 선언하는 경우도 있었고 특정 선거본부에서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 신해철처럼 거리와 방송에서 지지 유세를 하는 사례도 있었다. '모든 예술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라는 화두가 살아 있던 때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당대의 인기 음악가가 시민으로서의 발언을 하는 일은 사라졌다. 2016년 탄핵 정국 때 무대에 올라 공연했던 뮤지션들은 이미 정치적 발언을 했거나, 상징성을 얻었거나, 당장의 인기에 휘둘리지 않는 이들뿐이었다. 이번 선거에서는 특히나 그렇다. 크리스마스에 캐럴이 사라지듯, 선거철에 캠페인 송도 사라졌다. 물론 소음으로 인한 민원 여파도 있겠지만, 인기곡의 저작자나 원곡을 부른 가수 측에서도 자신의 노래가 캠페인 송으로 쓰이면서 발생할 수 있는 논란을 피하는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중문화 홍보의 전반적 분위기가 노이즈를 줄이는 쪽으로 흐르면서 생기는 현상일 것이다. 뮤지션이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적극적으로 움직일 때 주는 흥분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아쉬울 따름이다. 케이팝의 성공 지표가 된 빌보드의 고장, 미국의 경우를 살펴보자. 대선 시즌이 되면 미국 음악계는 요동친다. 어떤 장르의 뮤지션이 어떤 후보를 지지하느냐로 선거판이 달아오른다. 가장 뜨거웠던 때는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된 45대 대통령 선거였다. 그 기간 팝스타들은 트럼프의 당선을 막으려고 몸부림쳤다. 반(反) 트럼프 진영에 섰던 뮤지션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비욘세, 머라이어 캐리, 마돈나, 칸예 웨스트, 레이디 가가 같은 팝스타부터 닐 영, 로저 워터스,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같은 록 뮤지션과 인디 뮤지션 전부가 클린턴을 지지했다고 봐도 좋다. U2는 콘서트에서 트럼프 영상을 띄워놓고 정면으로 비판했으며, 마돈나는 선거가 임박할 무렵 길거리에서 클린턴을 지지하는 즉석 공연을 벌이기도 했다. 민주당 후보 경선 과정에서도 음악계는 힐러리와 샌더스 지지 세력으로 갈렸다. 힐러리 지지자들은 '팝스타'들이 많았다. 음악을 통해 막대한 부귀영화를 일궈낸, 즉 보다 상업적인 스타들이라는 얘기다. 칸예 웨스트,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비욘세, 머라이어 캐리, 존 본 조비, 엘튼 존, 퀸시 존스, 레이디 가가, 그리고 민주당 지지 음악인의 대모 격인 바버라 스트라이샌드 등이 대표적이다. 반면 샌더스 지지자들은 60~70년대 히피-프로테스탄트 시대의 음악인들과 90년대 이후의 인디 성향 음악인들이 많았다. 아트 가펑클이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America'를 샌더스의 캠페인송으로 사용하게 해준 것을 비롯하여 닐 영, 잭슨 브라운, 핑크 플로이드 출신의 로저 워터스,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톰 모렐로, 레드 핫 칠리 페퍼스, 슬립낫 등이다. 트럼프와 힐러리, 샌더스를 지지하는 뮤지션들의 장르, 세대와 따라 음악 장르의 지향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선거였다. 결코 숫자로 정량화될 수 없는, 문화인문학적 지리지였달까. 이런 지표들을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러웠다.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아니 그야말로 음악 산업을 견인하고 있는 테일러 스위프트는 특정 후보나 정당에 대해 공개적 지지 발언을 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선거철이 되면 스위프트가 누구를 지지할까에 대해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만큼 음악인이 시민사회의 일원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문화로 해석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해당 안 되는 이야기다. 특히 인기 있는 아이돌일수록 더욱 그렇다. 고작해야 투표 독려와 인증이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할 수 있는 최대치다. 단순히 노이즈를 줄이기 위해서일까. 그보다 본질적 이유는 케이팝, 혹은 아이돌 산업은 개인의 욕망이나 관념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기 때문일 것이다. 전통적 아티스트, 즉 자신의 음악과 메시지로 대중 앞에 서기보다는 대중이 원하는 기획과 음악 생산 과정을 거쳐 스타가 되는 산업이기 때문이다. 욕망의 주체보다는 객체에 가깝다는 이야기다. 산업이 고도화되고 트레이닝이라 불리는 기획 단계가 정교해질수록, 개인의 자아는 거세되고 기획사가 만든 컨셉이 중심에 선다. 그러다 보니 연애로 대표되는 사생활이 주가를 움직일 정도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의 자아가 극명화되는 정치적 발언은 언감생심이 될 수밖에 없다. 이건 아쉽다, 혹은 누구를 탓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고 싶다. 언젠가부터 아이돌을 아티스트라 부르는 게 당연시됐다. 그런데, 아티스트란 원래 무엇이었나. 자아 또는 사회적 고민을 예술 작품으로 표현하고 영향을 끼치는 직업 아니었던가. 꼭 아이돌이 아니더라도 직접 음악을 만들고 활동의 방향성을 정하는 젊은 음악 창작가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젊고 인기 있는 뮤지션과 배우들이 기꺼이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밝힐 수 있는 사회가 건전한 시민사회라는 건 두말할 것도 없다. 진영을 막론하고, 누가 그들의 정치적 소신을 얽매고 있는가. 케이팝, 아니 한국 대중음악의 미래를 위해 한 번쯤 생각해 볼 문제다.
김민기라는 이름을 한국 사회에 알린 ‘아침이슬'이 그와 33년을 함께 한 대학로 학전소극장의 마지막 노래가 됐다. 지난 3월 14일 오후 7시부터 약 두 시간 반 동안 진행된 ‘학전 어게인 콘서트'에서 박학기, 권진원, 황정민, 노래를 찾는 사람들, 한영애, 알리, 정동화 등 이날의 출연자들이 함께 마지막 곡으로 부른 이 노래를 들으며 ‘아침이슬'이 애국가와 같은, 의례곡처럼 들렸다. 공식 폐관일을 하루 앞둔 14일 ‘학전 어게인'의 마지막 공연을 찾았다. 2009년 봄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 참가를 위해 방문한 이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때는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풍경들을 유심히 살펴봤다. 입구의 김광석 동상, 지하로 내려가는 좁은 계단, 복도에 붙어 있는 1990년대의 공연 포스터들을. 개관 초기였던 1991년 4월 3일부터 7일까지 진행된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조동익, 고찬용, 배우 박상원, 변진섭, 윤상, 최성수, 이문세가 출연진이었다. 그 때도 큰 인기를 누리던 이들이 이 작은 무대에 설 수 있었던 당시 한국 대중음악계의 분위기가 새삼 읽혔다. 1995년 갓 데뷔한 윤도현, 댄스 음악 혁명에 밀려 TV에선 볼 수 없던 1997년 박학기의 공연 포스터도 있었다.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들 또한 그 자체로 1990년대 한국 대중문화의 기록지들이었다. 이 과거가 현재였던 때, 나와 그들과 우리가 30년만큼 젊었거나 어렸을 때, 대학로는 한국 공연의 본산지였다. 나는 홍대 앞에서 초기의 인디 밴드들과 어울리며 그 시절을 보냈다. 그때의 밴드들이 홍대앞에서 어느 정도 인기를 얻으면 대학로의 소극장에서 단독 공연을 열곤 했다. 공연자나 관객이나 신분 상승을 하는 기분이었다. 댄스 그룹을 제외한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들이 한 번쯤은 거쳐갔던 대학로 소극장의 시대는 2000년대 후반부터 저물었다. 대학로 공연 그 자체였던 연극 공연장이 조금 남아 있을 뿐, 개그 콘서트와 뮤지컬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학전 마지막 날도 대학로 곳곳에서 개그 콘서트 광고와 출연 배우의 얼굴이 크게 걸린 뮤지컬 플래카드만 보였다. 그러니 학전의 마지막 날은 단순히 대학로의 터줏대감이자, 소극장 문화의 상징이 없어지는 걸 넘어 콘서트를 보러 대학로에 가는 마지막 의식이기도 했다. 오후 7시, ‘올드 랭 사인'을 배경으로 깐 영상으로 공연이 시작됐다. “언젠가 이곳이 추억이 될 때면 당신은 무엇을 기억하고 싶나요?”라는 자막과 함께. 학전으로 오는 길이 과거의 추억을 떠올렸다면, 이날 또한 언젠가 추억이 되리라. 그래서 이날 공연을 더 생생히 머릿속에 남기고 싶었다. 올해 데뷔 40주년을 맞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시작으로, 출연자들은 모두 김민기의 노래를 자신들의 스타일로 재해석해서 불렀다. 노찾사는 ‘철망 앞에서'를, 김민기는 ‘친구'를, 권진원은 황정민과 함께 ‘이 세상 어딘가에'를, 정동하는 ‘천리길'을, 알리는 ‘바다'를. 여러 장르의 뮤지션들이 부르는 김민기의 노래를 들으며 어쿠스틱 기타 반주로 세상에 나왔던 그의 작품들이 얼마나 다양한 장르로 해석될 수 있는지 새삼 느꼈다. 밥 딜런의 노래가 그러하듯, 김민기는 화두를 던졌을 뿐 해석은 받아들이는 자의 몫이었던 것이다. 메시지뿐 아니라 리듬과 사운드조차도 말이다. 마지막 공연이고 마지막 날이니 혹시나 하는 기대가 있었다. 김민기 대표의 마지막 인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영애가 ‘내 나라 내 겨레'를 부를 때 중간에 김민기의 내레이션이 원곡 그대로 나오는 게 그의 육성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그렇기에 모든 이들이 학전을 그리워하고 김민기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전하는 게 더욱 와닿기도 했다. 권진원이 눈시울을 닦았을 때, 박학기가 “출연자들끼리 오늘 울지 말자고 대기실에서 다짐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단순한 세리머니가 아닌 마음으로부터의 환송이자 바람이었다. 마지막이라고 요란떨지 않는, 애써 의미 부여하지 않는, 그저 담담하고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시작과 끝을 이었다. 나도 담담히 공연장을 나섰다. 아쉬운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대단한 추억이 있던 건 아니지만 한국 대중음악사를 연구할 때마다 김민기와 학전 소극장이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를 깨달으며 이 공간이 어떤 형태로든 '학전'이라는 이름으로 유지되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는 법. 과거의 대학로, 그날의 학전을 추억으로 남겨둘 수 있는 것만 해도 충분히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쨌든 김민기가 학전에서 가장 공들였던 어린이극 전용 극장으로 이 공간은 지속될 전망이기 때문이다. 다만, 바라는 것이 하나 있다. 김민기의 집무실에는 1991년부터 오랫동안 나이테처럼 쌓여왔던 온갖 사진과 영상 자료들이 가득하다. 몇 년 전 디지털화도 됐다. 이 소중한 자료들이 온라인이나 책을 통해 세상에 선보였으면 하는 마음이다. 트렌드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사라지거나, 아니면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에서 ‘전설'이니 하는 단어로 상투화되는 과거들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대학로 12길 46 밖을 나와 도서관과 가정집에 퍼질 수 있으면 좋겠다. 추억은 각자의 것이지만 기록은 모두의 것이기에.
초유의 일이다. 아이돌의 연애가 주가를 폭락시켰다. 트럭 시위가 등장했다. 당사자는 사과문을 발표했다. 에스파의 카리나와 배우 이재욱의 연애 폭로 기사가 뜬 지 며칠 만이다. 아이돌을 포함, 핫한 연예인의 연애 및 결혼이 팬들의 마음을 흔드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디스패치>를 비롯한 가십 매체들의 조회수를 보장하는 이슈이기도 하다. 그렇다 해도 온라인에 머문다. 댓글이나 SNS에서 술렁이는 정도다. 당사자들이 연애를 인정할 때도 '사과문'이 아닌 기획사의 입장 발표가 전부였다. 주가가 눈에 띌 만큼 움직인 적도 없다. 이번에는 가십을 넘어 파장이라 할 만하다. 아이돌 덕질을 하지 않는 이들은 당연히 이해하지 못한다. 언론에서도 외신과 네티즌 댓글을 인용하며 '케이팝 팬덤이 성숙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쌀로 밥 짓는 얘기다. 케이팝 산업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음악 엔터테인먼트의 소비자, 즉 팬덤은 크게 두 부류로 구성된다. 첫째, 콘텐츠 소비자다. 좋은 노래나 뮤직 비디오에 끌려 해당 음악을 소비한다. 생각날 때마다 스트리밍하거나 플레이리스트에 넣어 두는 정도다. 노래는 아는데 가수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 또는 노래 자체의 인기가 가수의 충성도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여기 해당한다. 싸이와 '강남스타일'의 관계를 생각하면 쉽다. 이런 팬에게 중요한 건 '좋은 음악'이지 '누가 불렀는가'가 아니다. 둘째, 충성형 소비자다. 콘텐츠에 이끌려 입덕했다가 가수의 매력에 빠지게 되는 상황이다. 뮤직 비디오는 물론이고 직캠이란 직캠은 다 돌려보며, 채널을 구독하고 모든 콘텐츠를 소비한다. 팬카페 가입과 덕질 전용 SNS는 필수다. 팬미팅 당첨을 위해 수십 수백 장의 음반을 구매하는 행위는 이 단계에서 시작된다. 또한 여기서부터는 노래를 좋아하는 걸 넘어 가수 자체를 '응원'하게 된다. 노래가 좋기 때문에 듣는 게 아니라 가수에게 높은 음원 순위를 선물하기 위해 하루종일 스밍을 돌리는 행위가 대표적 응원 방법이다. 응원하는 가수에게 적대적 의견이 보일 경우 좌표를 찍어 팬을 결집시키는 데 주저함이 없다. 충성형 팬덤도 둘로 나눠 볼 수 있다. 유사연애형과 자아의탁형이다. 엘비스 프레슬리 이래 유사연애형 팬덤의 역사는 대중음악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자아의탁형 팬덤은 뭐랄까, 다마고치나 프린세스 메이커에 비유할 수 있다. 아무도 모르는 신인의 팬이 되어 응원과 후원을 보내며 가수가 커나가는 것에 뿌듯해하는 것이다. 비틀스부터 방탄소년단에 이르는 음악 역사의 신화적 존재들 뒤에는 늘 이런 강력한 지지세력이 있었다. 물론, 어떤 스타의 팬덤을 칼처럼 규정할 수는 없다. 한 팬덤 안에서도 일정 비율로 존재한다. 한 사람의 마음에도 여러 감정이 혼재되는 게 당연하다. 다만 케이팝, 혹은 아이돌 산업은 충성형 소비자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게 문제다. 케이팝 시장에서 통용되는 성공의 지표 중 '초동'이란 게 있다. 음반 발매 후 1주일 간의 판매량을 뜻하는 업계 속어였지만 어느덧 팬들이 가장 신경 쓰는 지표가 됐다. 한 주 동안 얼마나 많은 음반을 판매했느냐에 따라 데뷔 또는 컴백 활동의 성공 여부가 갈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 PC와 노트북에서조차 CD 드라이버가 사라진 지 오래다. CD로 음악을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환경이 태반이다. 스트리밍이 음악 소비의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여전히 초동 백만 장 이상의 앨범들이 나오는 게 이상하지 않나. 미국에서도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는 음반이 급격히 줄어든 현실에서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케이팝 팬덤에서 음반 구입은 아티스트에 대한 '지지'를 표현한다. 음반 안에 담겨 있는 포토 카드를 다 모야야 팬 미팅 응모 기회가 생기니 마치 드래곤볼을 모으듯 한 명이 수십 장의 음반을 사기도 한다. 따라서 초동은 콘텐츠 소비자와 구분되는 충성형 소비자의 규모이자 팬덤의 화력을 보여주는 바로미터가 된다. 이는 한국 케이팝 팬덤만의 특징이 아니다. 지난해 미국 음악 시장분석 업체 루미네이트의 보고서에 의하면 K팝 팬들은 좋아하는 가수를 지지한다는 목적으로 음반을 구입하는 경향이 다른 장르 팬보다 67%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모든 장르의 팬들이 각자의 문화를 갖고 있듯, 음반 구입이란 행위는 케이팝 팬덤의 '부족 문화'다. 기획사 매출에도 음반 판매가 음원이나 공연보다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건 물론이다. 따라서 케이팝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건 충성형 팬덤의 크기를 늘리고 붙잡는 것이다. 이를 위해 기획사는 커뮤니케이션 서비스나 SNS를 통해 유사연애 감정을 자극하고 자아의탁 심리를 극대화한다. 일상을 담은 자체 콘텐츠를 통해 친밀감을 극대화하고 아이돌과 팬이 미디어의 벽을 뛰어넘어 곁에 있는 존재라는 착각을 유발한다. 이성뿐만 아니라 동성 팬의 규모가 갈수록 커져가는 걸그룹 시장은 더욱 그렇다. 유사 연애 감정과 자아의탁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켜줘야 한다. '마음속의 여자친구'이자 '모니터 속의 롤모델'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암묵적 계약이다. 이 계약이 깨질 때 팬덤은 흔들린다. 후속곡이 기대에 못 미쳐도 응원할 수 있지만 원하는 역할에서 벗어나면 배신감으로 이어진다. 짝사랑하던 사람에게 연인이 생겼을 때의 좌절, 사춘기 딸이 남자친구가 생겼을 때 어떤 엄마들이 갖는 분노 같은 것과 유사한 반응을 보인다. 물론 팬의 이런 마음은 케이팝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단지, 앞서 말했듯 케이팝의 작동원칙이 다수의 콘텐츠 소비자보다 소수의 충성형 소비자에 의해 의존한다는 게 문제인 것이다. 차등의결권이 존재하는 미국 주식시장과 같다. 시간과 돈, 조직력을 겸비한 10명의 팬과 스트리밍만 즐기는 1천 명의 팬 중 누가 더 영향력이 크겠는가. 이런 시스템의 원조는 일본이지만 일본은 아이돌 외에도 다양한 음악 장르와 아티스트가 공존하는 시장이다. 반면 한국은 아이돌의 시장 지분이 절대적 우위를 가지는 기형적 구조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이돌을 제외하면 유의미한 시장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돌의 사전적 의미는 우상이다. 우상은 숭배의 대상이지만, 한국의 기형적 시장 구조 안에서 아이돌은 욕망의 대리자가 됐다. 욕망이란 종종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음악과 퍼포먼스라는 본질적 가치보다 그 외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게 중요한 케이팝 산업에서, 카리나의 연애는 온갖 좋은 말 아래 담겨 있는 산업의 본질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학전은 끝까지 학전이었다. 서울 대학로 학전소극장이 오는 3월 15일 문을 닫기로 했다. 한국예술문화위원회의 지원 방안을 거절했다. 1991년 3월 15일 개관 후 꼭 33년 만이다. 학전 운영이 어렵다는 건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었다. 적자는 일상이었다. 폐관 소식이 알려진 건 지난해 10월, 김민기 대표의 암 투병 소식과 함께였다. 김민기는 학전이었고, 학전이 김민기였다. 김민기가 물러난 학전은 학전일 수 있을까. 여기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학전에서 나고 자란 많은 대중문화인들이 소식을 듣고 모였다. 의미있는 공간이 사라질 때 으레 붙이기 마련인 ‘살리기’의 취지는 아니었다. 학전에서의 기억을 공유하고, 다시 알리며, 잘 보내드리기 위한… 그런 거였다. 어쨌든 사람도, 기업도, 공간도 종료의 절차를 밟아야 하니까. 관이 손 놓고 있던 건 아니다. 지난해 12월 한국문화예술문화위원회가 3월부터 학전 건물주와 임대차 계약을 맺고 민간 위탁 형태로 지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정체성을 계승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의외긴 했다. 역대 보수정권과 김민기의 관계는 영 좋지 않았다. ‘아침이슬’이 세상에 나온 1971년부터 그의 삶에 탄압이 시작됐다. 1972년 봄, 서울대 신입생 환영 행사에서 김민기는 ‘꽃 피우는 아이'를 비롯해 자신의 노래를 신입생들과 함께 불렀다. ‘우리 승리하리라’로 번안된 미국 프로테스탄트 포크송인 ‘We Shall Overcome’도 있었다. 대학마다 프락치가 있던 시절, 이 소식이 당국에 보고되자마자 김민기는 연행됐다. 그리고 ‘꽃 피우는 아이’가 즉시 금지곡으로 지정됐고 몇 달 전 나온 데뷔 앨범은 전량 회수됐다. ‘아침이슬’을 김민기보다 먼저 취입했던 양희은의 음반으로 이 노래는 살아남았다. 1973년에는 건전가요로 지정되기까지 했다. 1975년 유신의 폭주가 시작되며 공연윤리위원회의 데스노트, 즉 금지곡 리스트의 맨 위에 올랐다. 김민기는 입대했고 ‘아침이슬’을 비롯한 그의 노래는 트는 것도, 부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 김민기는 그렇게 금지된 이름이 됐다. 1978년 4월, 촉망받는 가수이자 MC였던 이수만이 밤무대에서 ‘아침이슬’을 불렀다가 한국연예협회의 징계 대상에 오를 정도였다. 도처에 프락치와 밀고자가 있었다는 얘기다. 박정희는 음악의 힘을 잘 알았던 대통령이다. 1980년대까지 아침마다 온 동네에 울려 퍼졌던 ‘새벽종이 울렸네/새 아침이 밝았네’를 기억하는가. 음악 교사 출신이기도 했던 박정희가 작사/작곡한 노래다. 박정희를 상징하는 새마을운동은 ‘새마을노래’로 국민의 뇌에 문신처럼 새겨질 수 있었다. ‘미인’으로 당대 최고의 스타가 된 신중현에게 유신 찬가를 만들어달라고 했다가 거부당한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유신은 김민기에게도 그랬다. 중앙정보부 요원이 입대한 김민기를 찾아가 비슷한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신중현이 ‘아름다운 강산’을 만들었듯 김민기는 “군인 가신 오빠는 몸 성하신지/아빠는 씻다 말고 먼 산만 바라보시네”라는 가사가 담긴 ‘식구 생각’이라는 노래를 건넸다. 중정 요원은 “안 되겠네”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서울시청 앞 1987년 '6월 민주항쟁' 전경. 출처 : 서울정보소통광장 5공화국이 들어섰지만, 악연은 계속됐다. 경기도 연곡에서 소작농 생활을 하던 1981년, 신군부가 관제 행사 ‘국풍81’에 그를 동원하려 했다. 물론 거절당했다. 1984년 서울로 올라와 어린이극을 만들었다. 김민기라는 이름을 내걸 수 없었다. 그 해 김민기가 기획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앨범 기획자는 김민기가 아닌 ‘민기형’이었다. LA올림픽 탈락선수들을 다룬 다큐멘터리엔 양희은이 부른 ‘봉우리’가 쓰였다. 작사/작곡자 없이 발표됐다. 양희은의 1985년 앨범에도 이 노래는 양희은 작사/작곡으로 표기됐다. 그리고 1987년 6월, ‘아침이슬’을 서울시청 앞에 모인 100만 시민들이 합창하며 5공화국이 끝났다. 노태우 정권이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과거의 금지곡들을 해제하는 거였다. 유신 때 금지곡 리스트에 ‘아침이슬’이 가장 먼저 나왔듯, 이번에도 ‘아침이슬 해금'이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비록 김민기의 과거는 해금됐어도 그의 창작 활동을, 검열은 가위를 들고 따라다녔다. 탄광촌 아이들이 화자인 <아빠 얼굴 예쁘네요>는 난도질당해 대본과 다른 모습이 됐다. <개똥이>도 그랬다. 1975년 탄생한 음반사전심의제도는 1996년 위헌 판결을 받고서야 6월에 사라졌다. 이 제도는 마지막까지 김민기를 괴롭혔다. 그 해 상반기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음반으로 내려 했을 때, 절반 이상을 잘라냈다. 이미 1991년부터 학전 소극장에서 잘만 상영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끝까지 블랙 코미디였다. '아침이슬' 수록된 김민기 1집 / 출처 : 연합뉴스 이후로도 김민기의 노래는 한국 사회의 무의식으로부터 소환됐고 또한 불렸다. IMF 때,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때 ‘상록수’가 있었다. 세월호 때 ‘금관의 예수’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는 ‘아침이슬’이 광장에서 불릴 일이 없으리라 믿었던 2016년에 결국 불렸다. 5공화국의 끝과 박근혜 정권의 끝을 상징하는 노래가 됐다. 그러니 현 정권에서 학전의 맥을 잇겠다 나선 게 의외였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제 김민기는 진보와 보수의 잣대로 잴 수 없는 존재가 됐다는 걸 상징하기도 한다. 진보 계열 정권일 때도 그의 음악이 불렸을 뿐 그가 정권에 동참하거나 자리에 앉은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시민단체나 운동권 출신들이 권력을 차지했을 때 그를 고위직에 쓰려고 하는 시도들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제안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성정을 알기에. 그리고 그가 1991년부터 오직 학전을 지켰던 것을 알기에. 가수, 싱어송라이터, 사회운동가 같은 단어보다 그에게 오래 붙은 직함은 학전 대표였다. 그가 인터뷰에 응하거나 발언을 할 때는 대부분 학전과 관련된 것이었다. 학전은 연극만 있던 대학로를 소극장 콘서트의 명소로 만들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만든 댄스 음악 혁명으로 방송에서 노래할 곳을 잃은 이들이 학전에서 노래했다. ‘업소’와 ‘밤무대’의 날품팔이 행사가 아닌 오직 음악으로 한 시간 이상을 채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1990년대 홍대 앞에서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린 밴드들도 비교적 큰 규모의 공연을 할 때는 대학로로 갔다. 단순한 콘서트만 있던 것도 아니다. 지금 ‘시즌스’로 이어지는 KBS 음악 토크쇼의 시작은 학전에서 진행된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다. 한국 공연역사에 길이 남을 김광석 1000회 공연도 학전에서 이뤄졌다. <기생충><오징어게임>의 정재일이 음악감독을 시작한 곳도 학전이다. 2004년 <공장의 불빛> 리메이크를 맡은 걸 계기로 꾸준히 학전의 어린이극에서 음악 감독을 맡았다. 세상을 떠난 유재하, 김광석을 추모하는 가요제와 다시 부르기 시리즈가 탄생한 곳도 학전이었고, 그들을 위한 장학재단도 김민기가 만들었다. <지하철 1호선>의 장기흥행, 한국 뮤지컬사에서의 의미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출처 극단 '학전' 공식홈페이지) 작품과 공연은 종종 큰 흑자를 올렸어도 학전은 만성 적자였다. 돈이 되는 것보다 의미 있는 것을 좇았기 때문이다. 흥행이 보장된 <지하철 1호선>을 어린이극을 하기 위해 2000년대 후반 종영했다. ‘김광석 다시 부르기’가 해를 거듭할수록 화제가 되자 ‘큰 데서 하라’며 다른 공연장으로 옮기게 했다. 학전, 김민기의 경제적 지분은 없었다. 배우들에게 월급을 지급하는 파격적 제도에 더해 작품 흥행에 따라 인센티브도 지급했다. 그 또한 처음이었다. 학전을 세우기 위해 넉 장의 앨범 계약금을 받아 보증금을 마련했고, 저작권 협회에 가입하여 그간 자신의 음악을 무단으로 사용해 온 노래방기기 회사들과 송사를 진행한 것도 학전 운영비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문화적 ‘지적재산’을 활용한 건 오직 학전을 위해서였다. 학전과 문화예술위원회 간에 어떤 구체적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어린이와 청소년, 신진 음악인을 위한 김민기 학전 대표의 뜻을 잇되, 학전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 독자적인 공간으로 운영해 나가길 바란다”는 학전의 최종 폐정 결정 입장문에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학전이 곧 김민기고 김민기가 곧 학전이다. 김민기 없는 학전의 이름을 누가 이을 수 있겠는가. 진영을 넘어서, 역량을 넘어서. 김민기 대표는 학전을 떠나는 마지막 인사로 “모두 다 그저 감사하다. 고맙습니다”란 말을 남겼다. 정작 감사해야 할 사람은 우린데도.
그래미 트로피에 술을 따르는 제이지의 모습 / 출처 : 피플(PEOPLE) X 계정 캡처 지난 5일 로스앤젤레스 크립토 아레나에서 열린 제66회 그래미 어워드. 힙합 뮤지션 제이지가 시상대에 섰다. 지난해부터 특별상의 하나로 신설된 ‘닥터 드레 글로벌 임팩트 어워드’의 수상자 자격으로. 의례적이건, 진심이건 수상자는 소감을 통해 영광과 감사를 전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제이지의 소감은 달랐다. 자신의 아내 비욘세가 그래미의 가장 큰 상 중 하나인 올해의 앨범 상을 받은 적이 없다며 그래미의 보수성을 꼬집었다. “여러분 중 일부는 상을 강탈당했다고 느끼실 겁니다. 실제로 강탈당한 분들도 있겠죠. 아예 후보에도 들지 못한 분들도 있을 거예요.”라는 멘트가 핵심이었다. 적어도 수상소감으로는 논란이 될 만했지만 제이지를 비난하는 여론은 적다.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는데 뒤쳐지고, 특정 장르(주로 힙합과 블랙 뮤직)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게 아니냐는 불만이 그만큼 컸다는 증거다. 그래미의 하이라이트는 제네럴 필드다. 올해의 레코드, 올해의 음반, 올해의 노래, 올해의 신인이 핵심이다. 올해의 프로듀서, 올해의 송라이터가 이번 시상식부터 추가됐다. 놀라운 건, 프로듀서와 송라이터를 제외한 나머지 ‘빅4’의 후보자가 대부분 여성 뮤지션의 작품들이었다는 것이다. 노래와 앨범, 레코드에 이름을 올린 존 바티스트와 신인 후보인 프레드 어게인, 코코 존스 등을 제외하면 전부 여성 뮤지션들이었다. 당연히 수상도 그들의 몫이었다. 반면 2023년 상업적으로 최고의 성과를 낸 모건 월렌은 주요 부문의 후보에도 들지 못했다. 그가 보수적 백인 남성을 상징하는 컨트리에 기반을 둔 음악을 하고 있으며, 인종차별을 비롯한 보수적 언행으로 비판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를 배제시킨 게 아니냐는 의혹이 생겼다. 대중문화계 전반의 흐름에 PC가 주요 키워드로 자리 잡은 걸 보여주는 것일까. 그렇게만 해석하기엔 문제가 좀 복잡하다. 그래미의 권위는 대중을 상대로 하는 인기투표가 아닌 음악계 종사자들 중 자격 요건을 갖춘 약 1만 5천 명의 투표인단을 상대로 한 해의 음악적 성과를 묻고 집계한다는 명분에서 나온다. 제66회 그래미 어워즈에서 '올해의 앨범'을 수상한 테일러 스위프트 2023년 팝계의 키워드 하나는 컨트리를 기반으로 대안 우파, 혹은 빈곤층 백인 남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는 것이다. ‘Rich Men North of Richmond’로 벼락 스타가 된 일용직 노동자 올리버 앤서니가 대표적이다. 이 노래는 빈곤층 백인의 절망 그 자체를 대변하지만 미디어는 그를 새로운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길 꺼려했다. 메시지와 다르게 그의 음악이 컨트리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컨트리가 그래미가 사랑하는 장르의 하나였음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테일러 스위프트가 올해의 신인 후보에 올랐던 2008년에 그녀는 컨트리 뮤지션으로 분류됐었다. 모건 월랜의 3집 <One Thing at a Time>은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17주간 1위를 달성했으며, 연말 차트에서도 1위에 올랐다. 몇 년 전 <미스터 트롯>의 인기에 힘입어 기성세대들이 스밍총공과 조공을 배웠듯, 최근 미국에서 컨트리의 부활은 기성세대가 음반뿐 아니라 스트리밍과 유튜브 등 새로운 플랫폼에 익숙해졌다는 증거이자 젊은 세대들 또한 컨트리에 귀를 열고 있다는 신호로 읽힐 수 있다. 따라서 모건 월랜을 비롯한 컨트리 뮤지션들이 제네럴 필드 후보에도 들지 못한 건 역차별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그래미를 둘러싼 논란은 오히려 역차별이 아닌 차별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제이지가 말했듯 2000년대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뮤지션인 비욘세는 단 한 번도 제네럴 필드의 트로피를 가져가지 못했다. 2010년대의 대표적 명반인 칸예 웨스트의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 켄드릭 라마의 <To Pimp A Butterfly>는 제네럴 필드 후보에 오르지조차 못했다. 그때마다 그래미의 보수성은 논란에 올랐다. 화룡정점은 2021년이었다. 2020년을 말 그대로 휩쓴 앨범은 더 위켄드의 <Afterhours>였으며 싱글 ‘Blinding Lights’는 미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큰 히트를 기록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이 음반에 평단 또한 찬사를 보냈다. 당연히 2021년 그래미는 그를 위해 바쳐질 거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결과는? 제네럴 필드는커녕, 그 어떤 부문에서도 더 위켄드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1만 5천 명의 관계자가 대중과 시장, 그리고 미디어와 다른 선택을 한다고? 말이 되나? 그런데, 그게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보수적 잣대라는 문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지 않는 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말이다. 비유하자면 1983년 그래미에 마이클 잭슨의 <Thriller>가, 1986년에는 ‘We Are The World’가 없는 형국이었다. 더 위켄드 / 출처 : 연합뉴스 당연히 음악팬과 미디어, 뮤지션들 모두가 분노했다. 더 위켄드와 힙합, 알엔비의 주요 뮤지션은 향후 그래미를 보이콧하겠다고 선언했으며 2021년 그래미의 시청률이 역대 최저였다는 사실은 그래미에 대한 실망을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다. 음악계의 거대한 비판과 외면에 당황한 그래미는 이듬해 신규 투표인단 대거 위촉, 막후의 권력자로 지목받은 ‘비밀위원회' 제도 폐지등 민심 수습에 나섰다. 올해 컨트리/백인 남성에 대한 홀대는 이런 여파가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논란 없는 시상식이란 없다. 누가 상을 받았냐보다는 못 받았다는 사실이 이슈가 되는 게 모든 시상식의 현실이다. 그래미 또한 끝없이 논란을 먹고 자라왔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의 그것은 이전과는 다르다. 음악계가 피씨와 백래시, 유튜브에 이어 틱톡의 득세, 이데올로기와 산업지형 양쪽에서 요동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트렌드가 변하고 음악을 바라보는 기준이 바뀌는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 음악을 접하고 소비하는 플랫폼이 파편화하면서 일년에도 수많은 음악 스타일이 떴다 지고 관계자들 또한 놓칠 수밖에 없는 현상들이 나타난다. 굵은 선을 중심으로 연결됐던 음악 산업은 수많은 점들로 파편화되고 있다. 케이팝의 득세 또한 이런 흐름의 연장이다. 이 격변의 시대, 그래미는 어떻게 흔들리는 권위를 다시 세울 것인가. ‘음악성’이라는 추상적 단어에 어떻게 다시 생명을 불어넣을 것인가. 그래미의 숙제일 뿐 아니라, 기술이 지배하는 시대에 대한 예술의 대답이 될 수 있으리라.
음악인이자 음악 저널리스트인 밥 스탠리는 그의 명저 〈모던 팝 스토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차트는 살아 있는 사회적 역사다.” 즉, 듣는 이들은 롤링 스톤스의 ‘(I Can’t Get No) Satisfaction’이나 도나 서머의 ‘I Feel Love’를 그냥 들어서는 그 음악이 얼마나 충격적인지에 대해 알 길이 없다. ‘Satisfaction’은 빌보드 차트 10위권에 함께 머물러 있었던 제이 앤 더 아메리칸스의 ‘Cara Mia’나 패티 페이지의 ‘Hush Hush Sweet Charlotte’ 같은 성인 취향의 톱 10 히트 팝송과 함께 듣고, ‘I Feel Love’는 그 위아래에 포진해 있던 스티븐 비숍의 ‘On And On’과 데비 분의 ‘You Light Up My Life’와 함께 들어야 이 음악들이 당시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차트에서 모든 것들은 콘텍스트가 된다. 차트란 대중의 무의식을 짚어낼 수 있는 지도이자, 한 시대의 날씨 기록지다. 미국의 빌보드, 영국의 오피셜 차트, 일본의 오리콘 차트… 케이팝 시대가 도래하면서 우리에게도 익숙한 선진국의 차트 이름들이다. 이런 차트들이 국내에 수시로 언급될 만큼 공신력을 가진 이유는 집계 방식이 정확하고 음악이 소비되는 다양한 과정을 반영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세력’의 개입에 의해 순위가 조작되거나, 산업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면 차트의 사회적 공신력은 땅에 떨어진다. 팬덤의 놀이터가 되거나 홍보, 바이럴 등으로 이익을 얻고자 하는 관계자들의 장사판이 된다. 지금 한국의 음원 차트가 그러하듯 말이다. 차트 집계 방식의 중요성과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건이 있다. 1991년 빌보드에서 벌어진 일이다. 현재 빌보드의 데이터는 음악판매 집계시스템인 ‘닐슨 사운드 스캔’을 통해 수집된다. 전산망을 통해 음반 및 다운로드, 스트리밍등의 판매 기록을 추적하는 시스템이다. 1991년 3월 1일부터 데이터가 수집됐고, 빌보드가 이를 반영한 차트를 내놓은 건 그 해 말부터다. 빌보드 차트 / 출처 : 빌보드(Billboard) 홈페이지 캡처 그렇다면 이전에는? 놀랍게도 전화를 통해 이뤄졌다. 빌보드 측에서 미국의 음반 소매상, 방송국 등에 전화를 걸어 담당자를 통해 판매 및 방송 횟수를 전달받아 이를 집계했다. 광대한 영토의 모든 업체 및 방송국에 연락할 수 없으니 일종의 샘플 조사 방식이었다. 동부와 서부의 취향이 다르고, 인종별 취향이 다르며, 대도시와 농촌의 취향이 다를 수밖에 없는 광대한 나라에서 이런 ‘샘플링’은 종종 과대/과소평가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음반 산업 협회(RIAA)도 판매량 통계를 갖고 있었지만 소비자가 구입하는 소매 데이터가 아니라 도매상에서 소매상으로 출하되는 도매 데이터였다. 실제 대중의 무의식을 낱낱이 들여다보기에는 여러모로 허술했다. 슈퍼 스타의 새 앨범은 과대 집계되고, 팬층이 뚜렷한 특정 장르는 소외받기 십상이었다. 닐슨 사운드 스캔에 의해 바코드를 통해 전국의 판매량이 집계되고, 라디오의 에어플레이 횟수가 전부 찍히기 시작하자 차트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 이전 빌보드 앨범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는 앨범은 연평균 10장 내외였다. 1983년과 1984년은 그 절정이었다. 마이클 잭슨의 〈Thriller〉, 폴리스의 〈Syncronicity〉, 프린스의 〈Purple Rain〉이 2년 중 76주 동안 정상을 차지했다. 1982년 MTV개국으로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시장이 지각변동하기 시작했는데도 말이다. 반면, 빌보드의 집계 방식이 변하자 1991년의 넘버원 앨범은 20장이 넘었으며, 이후에도 한 앨범이 1위에서 장기 집권하는 경우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뿐인가. 1980년대까지 발매 첫 주에 넘버원을 차지한 앨범은 단 여섯 장이었다. 마이클 잭슨, 스티비 원더, 엘튼 존, 휘트니 휴스턴, 브루스 스프링스틴 등 슈퍼스타 중의 슈퍼스타만이 차지한 타이틀이었다. 그런데 1991년 5월, 슈퍼스타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한 록 밴드의 2집이 1위로 데뷔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헤비메탈 밴드 스키드로우의 〈Slave To The Grind〉가 그 주인공이었다. 1989년 발매된 그들의 데뷔 앨범의 차트 최고 기록은 불과 6위였다. 이제는 인기 가수라면 당연한 ‘발매 첫 주 넘버원’의 시작이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집계 시스템은 수면 아래 머물렀던 장르들을 메인스트림에 편입시켰다. 1980년대까지 언더그라운드 장르로만 인식됐던 얼터너티브, 힙합 등이 세기말의 10년을 이끌었다. 너바나의 얼터너티브 혁명, 그린데이의 팝펑크 부활, 투팍이나 스눕 독 같은 힙합 스타의 등장으로 인한 힙합 전성시대 등이 빌보드 차트 시스템 이후 벌어진 일들이다. 록은 1990년대 마지막 전성기를 누렸고 힙합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시장의 주류를 차지할 수 있었다. 또한 케케묵은 백인 중년의 장르로 여겨졌던 컨트리 역시 가스 브룩스의 성공에 힘입어 빌보드 정상에서 노는 장르로 부활했다. 1990년대 청년기를 보낸 이들이 그때를 다양성의 황금시대라 기억하는 배경이다. 어업으로 치면 초음파 탐지기의 도입과 마찬가지였다. 수면에 머무는 물고기들의 동향을 파악하여 어획량을 늘리듯,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상승한 데이터는 대중의 무의식 전반을 읽게 해 줬던 것이다. 이후에도 빌보드는 산업이 변화할 때마다 계속 새로운 지표를 도입해 왔다. 21세기와 함께 음반의 시대가 저물고 아이튠즈가 다운로드 시대를 열었을 때, 스마트폰 혁명과 함께 스트리밍 시대가 찾아왔을 때, 유튜브와 틱톡 등 새로운 음악 소비 플랫폼이 대세를 차지했을 때마다 그랬다. 예컨대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유튜브 조회수 기록을 경신해가며 새로운 역사를 썼던 2012년에 빌보드 핫 100은 유튜브 조회수를 반영하지 않았다. 이 노래의 최고 기록이 2위였던 큰 이유다. 이로 인해 유튜브 조회수가 반영되기 시작했고, 이는 훗날 방탄소년단을 비롯한 케이팝 스타들이 북미 시장에서 성과를 얻는 주된 원동력이 됐다. 닐슨 사운드 스캔이 도입된 1991년은 따라서, 빌보드 차트의 구약과 신약을 나누는 기점이 된 셈이었으며 이후는 IT를 바탕으로 내용을 보완해 가는 과정이었다. 빌보드의 영향력은 하루아침에 구축되지 않았으며 공신력 확보를 위한 끊임없는 시도를 통해 유지되고 있다. 서클 차트 / 출처 : 서클 차트(CIRCLE CHART) 홈페이지 캡처 한국에도 이런 차트가 있다. 서클차트다. 국내외 음원 사이트는 물론, 음반 판매량과 노래방 등까지 세세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다양한 차트 서비스를 제공한다. 2010년 출범 이후 계속 보강을 거쳐 업계에서 제법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영향력은? 멜론 등 음원 사이트의 차트에 비할 바가 못된다. 불특정 다수에게 엽서를 보내 집계하던 〈가요톱텐〉에 비교해 봐도 그렇다. 왜 그럴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너무 늦었다. 음반의 시대가 끝나고 음원의 시대가 찾아왔던 2000년대 초중반부터 공신력 있는 차트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소리가 높았다. 관중은 무관심했다. 전문적 음악 미디어도 없었다. 제작사들은 눈앞의 이익만 좇았다. 미니홈피 BGM, 핸드폰 컬러링 순위가 차트의 전부였고 이는 결국 멜론 실시간 차트가 되며 한국 대중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됐다. 나서야 할 주체들이 손 놓고 있는 사이, 한국의 음악 차트는 대중의 무의식을 읽을 수 있는 콘텍스트가 아닌 팬덤의 화력 측정표가 됐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1990년대, 아니 2000년대에 공신력과 영향력 있는 차트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스밍총공' ‘사재기'같은 단어들이 시장을 교란하는 행위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한국 대중음악 시장의 스펙트럼 또한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케이팝 팬덤 문화가 해외 팝스타 팬덤에게도 영향을 끼치는 상황에서, 그 ‘다른 모습’이 좋은 걸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디자인 : 박수민
지난 연말 〈타임〉은 테일러 스위프트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이 기획이 시작된 1927년 이래 아티스트가 작품 및 공연 활동만으로 선정된 첫 사례다. 2023년 3월 시작, 올해 말까지 진행되는 ‘디 에라스 투어’가 음악 산업을 넘어 경제, 사회, 정치 전반에 미치고 있는 영향력에 대한 평가다. 영화 '테일러 스위프트: 디 에라스 투어' 속 한 장면 / 출처 : CJ CGV, 연합뉴스 애초 27회로 기획된 이 투어는 추가에 추가 일정이 더해지더니 올해 말까지 세계 각국에서 151회로 진행될 예정이다. 폭발적 반응이 있기 때문이다. 애리조나 스테이트 팜 스타디움에서 열린 개막일 콘서트 수익은 같은 경기장에서 한 달 전 개최한 ‘슈퍼볼’보다 더 컸다. 첫날 공연에 대한 관심이 전미 최고의 이벤트보다 높았다는 얘기다. 이 투어로 스위프트가 벌어들일 예상 수익은 13억 달러, 한화로 1조 7억 원에 이른다. 역대급이다. 아니, 2023년 수익으로도 이미 투어 산업의 기록을 갈아치웠다. 롤링스톤즈, U2가 보유하고 있던 역대 최고 공연 수익을 갱신했을 뿐 아니라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여성 아티스트가 됐다. 2023년 한 해만으로 이 정도니, 2024년을 포함한 이후의 기록을 더하면 남녀 통틀어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하는 아티스트의 자리에 오를 게 확실하다. 공연을 보러 장거리 여행을 불사하는 관객의 수도 많다 보니 숙박과 요식업, 쇼핑과 관광 산업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모든 투어가 2만 석 이상을 보유한 아레나급이라 그렇다. 〈포츈〉은 스위프트 팬들이 미국에서 지출하는 비용을 46만 달러로 추산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테일러노믹스’라는 신조어로 ‘디 에라스 투어’의 경제 효과를 정의했다. 미국연방준비제도는 ‘디 에라스’가 미국의 관광과 레저 산업을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으로 돌려놨다고 발표했다. 경제면에서나 보던 기관과 미디어가 단 한 명의 투어를 이야기할 정도인 것이다. 사람과 돈이 몰리는 곳에는 늘 이권을 노리는 얌체들이 꼬이는 법. 암표값도 상당하다. 평균 254달러의 티켓이 암표 시장에서 평균 2,183달러로 거래된다. 현재까지 보고된 가장 비싼 암표값은 89,000달러. 한화로 1억을 훌쩍 넘긴다. 급기야 테일러 스위프트가 직접 나서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이러한 문제가 발생할 것을 대비해 판매 사이트 관계자들에게 몇 번이고 확신을 받았지만 변명할 여지가 없다”라며 “팬들이 표를 얻기 위해 엄청난 고군분투를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는 글을 남겼다. 코로나19 이후 공연 산업은 팬데믹 이전의 규모로 급성장했다. 공기가 사라졌을 때 소중함을 느끼듯, 팬데믹으로 모든 공연이 멈추다시피 하는 걸 경험한 대중은 앤데믹과 함께 공연장과 페스티벌로 쏟아져 나왔다. 수요가 많으니 값은 오른다. 2023년 북미 시장의 티켓 평균 가격은 120.11달러였다. 전년대비 7.4%, 팬데믹 전인 2019년에 비해서는 29%가 올랐다. 한국도 비슷해서 2023년 티켓가격은 전년대비 5.6% 올랐다. 공연 시장 규모를 생각한다면 한국 시장의 상승률이 미국보다 훨씬 높았다 할 수 있다. 그만큼 공급에 비해 수요가 커졌다. 그러니, 자연스레 암표값도 치솟았다. 지난해 11월 열린 임영웅 콘서트 암표의 경우 최대 550만 원에 거래됐다. 정가가 16만 원인데 말이다. 임영웅뿐만 아니다. 김동률, 성시경, 아이유처럼 티켓 파워가 있는 아티스트들의 공연 티켓이 오픈하면 인터넷에서는 암표상, 또는 되팔이들이 올리는 어이없는 가격이 공연보다 화제가 되곤 한다. 정가보다 비싸게 팔리는 임영웅 티켓(좌)과 암표 제재 공지(우) / 출처: 연합뉴스 아티스트 측에서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대처하고 있다. 소속사 직원이 암표 거래에 응하고 직접 나가 덜미를 잡는 가내 수공업적 방법, 팬들에게 보상을 내걸고 적극적으로 제보를 요청하는 방법, 아예 팬클럽을 통해 사전에 검증된 인원만 티켓을 구입할 수 있게 하는 방법 등 다양하다. 장범준은 소극장 콘서트 티켓이 순식간에 암표업자들의 놀이터가 되자 아예 일정을 다시 잡고 추첨제로 전환하는 극단적 방법을 택하기도 했다. 선착순이나 추첨이나 ‘운빨'은 마찬가지지만 추첨은 매크로 조작이라도 막을 수 있으니 그래도 더 공정하긴 하다. 암표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90년대에도 관객이 많이 모이는 공연장 앞에는 암표 아저씨, 아줌마들이 있었다. 초대권을 포함, 현장에서 남는 표를 싸게 산 후 이문을 남겨 되파는 암표상들은 옛 공연장 미장센의 하나였다. 2000년대 후반에도 매크로 프로그램을 돌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속도로 좋은 좌석을 점령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유독 최근 들어 암표상 문제가 시끄러운 이유는 뭘까. 시장이 커지고, 팔기가 쉬워져서다. 앞서 말했듯 엔데믹 이후 공연 시장이 급격히 커졌다. 반면 판매할 수 있는 루트는 중고나라뿐만 아니라 당근마켓, 번개장터 등으로 넓어졌다. 합법 재판매 사이트인 티켓베이는 물론이다. 암표가 돈이 되니 ‘공급자’도 늘었다. 팬데믹 기간 동안 LP시장은 급격히 커졌다. 한정판으로 생산되다 보니 인기 품목의 경우 몇 배씩 치솟는 건 기본이었다. 그런데 엔데믹 이후 이 시장은 반토막이 났다. 실수요자만 남은 시장에서 메뚜기들이 떠나 도달한 곳이 암표 시장이다. 음반과 공연 모두 한정된 재화다. 매크로 프로그램으로 ‘싹슬이'가 가능하다. 지하 경제 활성화에 이만큼 좋은 상황이 어디 있겠나. 꾸준히 암표 문제가 이슈가 되는데도 불구하고 정부는 조용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현행법상 ‘암표’란 오프라인, 즉 현장에서 거래되는 종이 티켓만을 대상으로 한다. 온라인 예매가 도입된 지 20년이 넘어가는데도 그렇다. 그러다 보니 콘텐츠진흥원을 포함한 관계 기관도 신고만 받을 뿐 단속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신고된 암표는 2020년 359건에서 2022년 4,224건으로 폭증했다. 2023년 통계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지만 늘면 늘었지 결코 줄지 않았을 것이다. 그야말로 무법 지대에서 법 없이 사는 사람들이 ‘표테크'로 돈을 불리고 있는 상황이다. 다행히도 관련법이 개정되어 오는 3월부터 매크로를 이용한 입장권 부정 판매가 금지된다. 위반 시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 법적용 관행을 보자면 이 정도면 사실상 잡범 취급이다. 물론 암표 판매가 법적으로 중범죄는 아니지만 실구매자, 즉 팬들의 마음에는 이만한 중범죄자가 없으니 결국 지금처럼 기획사와 아티스트 측의 노력으로 최후의 방어선을 지키는 걸 기대할 수밖에 없다. 법은 언제나 현실의 뒤를 따라가기 마련이지만 너무 하지 않은가? 브라질 하원은 지난해 암표상에게 징역 4년과 티켓 판매 수익의 100배에 달하는 벌금을 징수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테일러 스위프트 브라질 공연을 앞두고 기승하는 암표상들 때문이다. 미국도 이 전대미문의 투어 때문에 티켓마스터 같은 거대 업체들이 정치권의 도마에 올랐다. 한국도 음악 산업뿐만 아니라 외교와 정치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디 에라스 투어’가 개최돼야 적극적으로 움직이려나? 아쉽게도 이 투어에 한국은 포함되지 않을 전망이다. 공연 규모에 맞는 행사장이 없어서다. 큰 공연장도, 암표 대책도 없는 케이팝 글로벌 시대 한국 공연의 현실이다. 디자인 : 박수민
2023년 음악계는 예년보다 단조로웠다. ‘제2의 방탄소년단’은 나오지 않았다. 뉴진스, 아이브, 르세라핌이 대세를 굳혔고 그들의 자리를 위협하는 신인 걸그룹도 나오지 않았다. 임영웅은 혼자 웬만한 거대 기획사 매출에 육박하는 행보를 이어왔다. 호사가들이 좋아할 만한 새로운 빅이슈가 없었다. 음악만으로 치면 그렇지만 ‘산업'에 방점을 둔다면 분명히 격변이라 할만한 해였다. 많은 이슈들 중 3가지를 골라봤다. 음악 산업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어떤 변화들을 읽을 수 있는 이슈다. 1. SM엔터테인먼트 인수전: ‘기업 드라마 플롯’의 새로운 형태 기업 드라마였다면 ‘재벌집 막내아들’을 능가하는 설정과 스토리였을 것이다. 기존 드라마의 중심 배경이었던 20세기의 재벌가는 한 명도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21세기 한국 산업을 상징하는 정보기술(IT)과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금융 기업이 숨 막히는 일전을 벌였다. ‘딴따라판’이었던 가요계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나아가 가요계를 산업으로 승격시켰으며, 결국 내수용이었던 대중음악을 글로벌 수출 산업으로 바꾼 거인이 있었다. 그의 가족으로 20대부터 고모부 회사에서 일을 시작, 공동 대표까지 올라간 이의 오이디푸스적 전개가 있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후발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마침내 시총 1위로 키워낸 신흥 최강자가 있었다. 기업 지배구조의 부당함을 폭로하고 약한 연결고리를 쳐내려는 금융 전문가 집단이 있었다. 이 더할 나위 없이 드라마틱한 인물들은 매일 문화면과 산업면, 경제면을 넘나드는 행동과 발표를 이어 나갔다. 관련 회사들의 주식은 요동쳤다. 문화부 음악담당기자들은 산업부 기자가 된 것 같다며 앓는 소리를 했다. 엔터테인먼트 역사상 전무후무할, 에스엠이라는 매물을 두고 카카오와 하이브가 벌인 ‘쩐의 전쟁’은 의외로 시시하게 끝났다. 양사의 주가가 ‘떡상’하며 주주들이 만세를 부르던 때, 하이브가 발을 뺐다. 몇 가지 딜이 있었지만 카카오는 SM의 새로운 주인이 됐다.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카카오는 피로스의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인다. 인수 과정의 무리한 승부수들은 카카오 내외부의 여러 상황과 맞물려 결국 당국의 조사대상이 됐다. 창업자 김범수까지 검찰에 송치되는 수모를 겪었다. 한동안 무성했던 카카오엔터테인먼트 IPO시나리오 또한 쏙 들어갔다. 신입그룹 RIIZE(라이즈) / 출처: SM엔터테인먼트 SM 또한 ‘이수만 체제 종식’ 이후의 후유증이 예상보다 깊다. 조직 정비 과정에서의 잡음은 무성했다. 소속 연예인들 중 계약 기간 종료 후 이탈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몇 년 전까지 시장을 선도하던 새로운 기획과 스타 파워도 예년만 못한 건 사실이다. 아이돌판이 세대교체가 되었건만, 그 선두에 SM 소속은 없으니 말이다. 드라마는 마지막 회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면 그만이다. 현실은 그때부터 또 다른 시작이다. ‘이수만 시대’의 공식적인 종언 이후, 새로운 질서가 찾아오려면 아직 먼 것 같다. 2. 피프티피프티 사태: ‘갑을 선악구도’의 종말 출처: 어트랙트 공식 SNS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는 ‘언더독의 성공담’을 사랑해 왔다. 무명 회사의 무명 신인이었던 피프티피프티는 이 서사의 새로운 주인공이 되기 충분했다. E.X.I.D, 크레용팝, 브레이브걸스로 이어져 온 스토리를 능가하는 거대한 성공이 눈앞에 있었다. 케이팝 시대, 해외 진출사의 분기점을 찍을만한 자격도 갖췄다. 그러나 벼락과 같은 성공에는 천둥과 같은 잡음도 딸려 오는 법. 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스캔들이나 멤버의 과거 같은 가십이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하필이면 ‘갑질 논란’이었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가장 민감하다는 갑(기획사)과 을(멤버)의 분쟁 말이다. 처음 이슈가 불거졌을 때 대중은 관성적으로 반응했다. 하지만 과거의 사례와는 다르다는 게 금방 드러났다. 단순히 갑을의 문제가 아니었다. 케이팝 산업이 거대화하면서 캐스팅부터 홍보에 이르는 여러 단계의 전문가들이 외주로 일을 진행하면서 이해관계도 복잡해졌다. 그 과정에서 부당한 이익을 챙기려 한 측과 거기 동조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게 드러났다. 예전 같으면 사건 초기 멤버들의 편을 들었을 팬 커뮤니티가 먼저 사건을 세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더기버스의 수상한 행적을 파해쳤다. 여론도 관행을 따르지 않았다. ‘갑을 프레임’으로 이 사건을 보도했던 ‘그것이 알고 싶다’의 관련 에피소드가 방영 직후 큰 반발에 휩싸였던 게 그 증거다. 결국 멤버 측과 어트랙트 간의 분쟁에서 법원은 어트랙트의 손을 들어줬다. 결과적으로 트로이의 목마가 된 키나는 피프티피프티의 영광을 홀로 누리는 멤버가 됐다. 어트랙트는 막대한 투자를 받아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기생충>이 말해줬듯, 약자는 무조건 선이 아니며 강자는 무조건 악이 아니다. 날로 복잡해져 가는 세상에서 언더독 도그마는 미시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걸림돌이 될 뿐이다. 피프티피프티 사태를 둘러싼 대중의 반응은 한국 사회가 강약의 이분법에 휘둘리는 걸 거부하기 시작했다는 상징으로 기록될 것이다. 3.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매진: 페스티벌의 새로운 시대 예고 출처: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공식 홈페이지 페스티벌이 매진되는 건 한국에서 드문 일이다. 그나마 서울에서, 봄과 가을에,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라인업으로 진행되는 페스티벌에나 있는 법이다. 그런데 인천에서, 한 여름에, 록을 내세우는 펜타포트가 매진됐다. 2006년 개최 이래 처음 ‘매진'이라는 단어가 붙었다. 록은 한국 페스티벌 시장의 시작을 알린 장르였다. 펜타포트가 록 페스티벌의 불모지인 한국에 가능성을 제시하자 여름 록 페스티벌 시장은 금방 과열됐다.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몇 개의 페스티벌이 열릴 정도로. 그러나 구조조정도 그만큼 빨랐다. 록의 자리는 힙합과 이디엠이 차지했고, 한국에서 페스티벌은 음악 산업보다는 피크닉 같은 여가 산업에 가까워졌다. 다른 록 페스티벌들이 흥행에 참패하며 하나둘씩 사라지는 동안 펜타포트만 생존에 성공했다. 2018년 이후에는 어쨌든 유일한 수도권 록 페스티벌이 됐다. 하지만 부흥과는 거리가 멀었다. 케이팝이 아시아를 넘어 북미를 향해 달려가는 세상에 록은 아저씨들의 음악이었으며 폭염의 야외에서 열리는 행사는 쾌적함을 내세우는 봄가을의 페스티벌에 비하면 돈 내고 하는 개고생 그 자체였다. 그뿐인가. 코로나19로 인해 한국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공연이 멈춰 섰다. 오고 싶었던, 매년 찾았던 이들조차 아예 모일 수 없는 시간. 펜타포트는 온라인으로나마 갈증을 달랬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신의 한 수가 됐다. 팬데믹 기간 동안 유튜브와 넷플릭스가 콘텐츠 시장을 빨아들였지만, 온라인이 발달할수록 오프라인에 대한 갈망도 커진 것이다. 팬데믹이 끝나고 우리가 마스크를 벗게 된 지난해, 펜타포트에는 사상 최대의 관객이 모였다. 10만 명 이상의 억눌렸던 욕망이 송도로 향했다. 한 해의 반짝 열기가 아니었다. 올해, 넓게만 보였던 송도달빛축제공원이 이렇게 좁은 줄 몰랐다. 라인업의 힘이었을까. 반만 맞다. 해외 라인업은 여름 록 페스티벌 전성기에 비하면 여전히 약했다. 대신 검정치마, 김창완밴드 같은 팀들이 적재적소에서 관객의 커다란 호응과 감동을 이끌어냈다. 장르에 걸맞은 커다란 볼륨, 난지한강공원이나 잠실에서는 민원 때문에 불가능한 거대한 라이브 음향으로 쾌감을 극대화했다. ‘록 이데올로기’에 갇히지 않고 한국의 대중이 원하는 기획을 하되, 대도시 한복판에서는 얻을 수 없는 소리의 경험을 선사한 것이다. 갈망과 호응, 경험과 피드백은 순환하며 그렇게 펜타포트의 절정을 만들어냈다. SNS 인증하기 좋은 콘텐츠가 곧 소비의 쏠림으로 이어지는 시대, 제한된 시간과 공간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은 늘 인스타그래머와 유튜버들의 표적이 됐다. 사람이 한 번 몰리기 시작하면 ‘나도 거기에 있고 싶다’는 욕망은 복리처럼 쌓이곤 한다. 오랜 역사 속에서 그 욕망의 바깥으로 밀려 나있던 펜타포트는 다시 중심으로 돌아왔다. 쾌적과 편의를 우선순위에 두던 한국 여가 산업에 특이점이 찾아오는 걸까. 디자인 : 곽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