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김민정 기자입니다. "흔들리는 나침반은 방향을 잃지 않는다." 상식으로 알아 온 모든 것을 의심하겠습니다. 묻고 또 묻겠습니다. 옳다고 믿는 방향을 한결 같이 가리키겠습니다.
"인류 문명의 첫 증거가 무엇일까요?" 1950년대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가 강의시간 한 학생에게 물었다는 것으로 알려진 이 유명한 질문의 답은 고고학 발굴 현장에서 찾아낸 1만 5천 년 된 '인간의 부러졌다 다시 붙은 대퇴골'입니다. 부러진 대퇴골이 자연적으로 다시 붙기까지 6주가 넘게 걸리는데 누군가 그동안 부상자가 사냥을 못해 굶어 죽지 않도록 옆에서 돌봤음을 알리는 표식이란 것입니다. 역경에 처한 누군가를 돕는 것에서 인류 문명이 시작됐다고 한 이 일화는 경쟁적이고 야만적인 무리의 유해에선 이런 '부러진 대퇴골'이 발견되지 않았다고도 부연하고 있습니다. 문명의 시발로도 여겨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일생에 몇 번은 반드시 필요로 하는 '돌봄'은 그동안 우리 사회에선 주된 의제가 되지 못해왔습니다. 경제 성장률, 부동산 정책, 금융 정책, 입시 정책 같은 '보다 중요한' 문제가 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각한 저출생과 초고령화를 맞닥뜨린 우리 사회는 이제야 돌봄의 영역에서 켜진 시뻘건 경고등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지난 5일 한국은행에선 이런 보고서가 발표됐습니다. 간병인이나 육아 돌보미를 구하는 비용이 30~50대 가구 중위소득의 50%를 훌쩍 넘긴다는 통계, 20년 뒤 돌봄 서비스직 노동 공급이 수요의 30% 수준에 머문다는 전망치가 담긴 보고서입니다. 보고서대로라면 세 집 중 두 집은 부모님을 간병할, 아이를 돌볼 사람을 구하지 못할 수도 있게 된단 뜻입니다. 이 보고서 말고도 다가올 미래 돌봄 수요의 폭증을 경고하는 신호는 차고 넘칩니다. 예정된 '돌봄 대란'에 대해 지금까지 논의된 우리의 해법은 무엇일까요? 사실 어떤 일자리의 수요가 폭증하는데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면 공급의 가격, 한마디로 그 일자리의 몸값이 올라가는 게 보통 시장 질서가 작동해 온 방식이었는데요, 돌봄 노동만큼은 열외였습니다. 겪어 보지 못한 돌봄 절벽을 앞두고도 우리 사회는 열악한 돌봄 일자리의 처우나 질을 높이는 고민 대신 외국에서 값싼 노동력을 들여오는 것을 그 해법으로 논의하고 있습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여전히 최저임금보다 싼값에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들여올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고, 한국은행 보고서 역시 최저임금 밑으로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들여올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죠. 이런 논의가 국내 돌봄 노동 일자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또 장기적으로 돌봄 대란을 해결해 줄 해결책이 될 수 있을지, 이번 <더 스피커>에서는 이 문제를 당사자로서, 또 연구자로서, 활동가로서 각각 오랫동안 고민해 온 최영미 가사돌봄유니온 위원장과 김진석 서울여대 복지학과 교수(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장),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봤습니다. 정말로 숫자가 문제인가? Q. 국내 돌봄 노동자의 수가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외국에서 가사도우미를 도입해야 된다는 논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시나요? 최영미 위원장 초고령 사회에 접어든 우리 사회는 50대 후반, 60세 이상 퇴직자 등에서 구직자가 늘어나고 있어요. 그리고 취업자가 빠르게 늘고 있는 60대 여성들의 20% 이상은 돌봄 노동 일자리로 오고 있습니다. 돌봄 노동이 고령자 노동의 중요한 일자리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과연 인력 부족의 문제냐, 아니면 일할 사람들은 있는데, 들어왔다가 처우가 너무 안 좋으니까 자꾸 빠져나가게 되는 게 문제냐는 거예요. 통계청 자료 등을 분석한 2023년 한국노동연구원의 <돌봄서비스업노동시장 구조와 외국인인력공급> 보고서를 보면 2013년부터 2021년까지 돌봄 노동 종사자는 56.6만 명에서 75만 명으로 빠르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이들 중 여성의 비율은 줄곧 95% 내외를 유지해오고 있습니다. 최영미 위원장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최저임금이나 그 밑으로 데려온다면 우리나라 가사도우미 등 돌봄 노동자들의 임금도 억제되겠죠. 그렇다면 지금 일하려고 나오는 국내 인력들이 과연 그 일자리로 더 유입이 될 수 있겠느냐는 거예요. 60대 이상 노인들이 계속 일해야 먹고 살 수 있는 사회에서 특히 50대, 60대 여성의 주된 일자리로 자리 잡은 돌봄 노동의 조건이 더 열악해진다는 것입니다. 국가가 싼값에 돌봄을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일하는 사람에게 비용을 전가하고 있는 셈인데 접근 방법이 틀렸습니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도입하기 전인 지금도 2021년 기준 돌봄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은 127만 5,000원으로 전체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264만 9,000원)의 절반 정도에 불과한데, 돌봄 노동을 제외한 다른 일자리에 비해 시간당 임금도 6,000원 정도 적습니다. 비정규직 비중도 76.6%로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몹시 높은 수준입니다. Q. 국내 돌봄 노동시장에 미칠 영향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요? 최영미 위원장 가사 돌봄 노동자들은 지금도 10년을 일하나 1년을 일하나 대부분 최저임금이에요. 오래 일해도 전문성을 인정받지도 못하고요. 그래서 자꾸 도중에 일자리에서 이탈하죠. 그런데 이보다도 싸게 들어오는 인력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노인 고용의 중요한 축인 돌봄 노동 일자리가 망가지면 지금 가뜩이나 심각한 노인 빈곤 문제를 이런 초고령 사회에서 어떤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겠어요? 김진석 교수 우리나라에서 돌봄 노동을 필수 노동으로 인정하고 사회적 인정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논의가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조금씩 물꼬를 틔우고 있었어요. 이런 논의의 핵심은 돌봄 노동 일자리 조건의 향상이 반드시 포함되는 것이고요. 돌봄 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정 없이는, 돌봄 노동의 질이 좋아질 수 없고, 돌봄 노동의 질이 좋아지지 않으면 다수 시민의 삶이 나아질 수 없다는 인식이 어느 정도 생겨나고 있는 상황에서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데려오겠다는 논의로 찬물을 끼얹은 것이죠. 왜 돌봄 노동 일자리는 '값싸게' 유지해도 될까? Q. 노동을 값싸고 질 낮은 일자리로 유지해도 된다는 일종의 사회적 합의, 인식이 왜 생겨났고 왜 이렇게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는 걸까요? 돌봄 대란을 겪는 이 와중에도요. 김진석 교수 돌봄 노동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가 형성되던 시기에서부터 여성에 의한 부불노동(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노동)으로 취급해 오던 영역이었죠. 가사 노동을 포함해 재생산 노동이라고 하는 영역이 여성에 의해 100년 가까이 행해진 겁니다. 그러다 여성의 노동력 역시 시장으로 유입하려는 흐름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여성이 노동시장으로 나오니 기존에 여성에 의해서 이뤄지던 가내 재생산 노동에 공백이 생기잖아요. 한동안은 여성이 밖에서도 일하고 집에 가서도 노동하는 방식으로 메꿔졌는데 그것도 한계가 온 거죠. 그러면 이제 누군가가 그 노동을 해야 되는데 그 과정에서 이 노동은 원래 여성들이 부불노동으로 하던 거니까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다, 이런 사회적 인식,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은 거예요. 이 노동에 값어치를 많이 쳐주지 않으려고 했던 자본의 의도도 있었겠죠. 그러다 보니 이 노동은 전문성도 필요 없고, 그냥 집 안에서 여성이 하던 대로 아무나 하면 되는 건데 왜 돈을 많이 줘야 되냐는 말이 나오게 된 거죠. 질 좋은 돌봄을 너무나 필요로 하는 지금 시장의 조건과는 정말 맞지 않는 상황인 거잖아요. 이런 인식의 전환을 강제하기 위한 제도적 전환이 없으면 지금 돌봄 대란 문제는 절대 풀리지 않을 거예요.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도입해서 해결하자는 쪽으로 논의가 전개된다면 돌봄 노동시장이 사회적 인정을 통해서 정상화되는 과정은 그만큼 지연이 될 겁니다. 배진경 대표 혹시 10년차 돌봄 노동자에게 '저숙련'이란 말이 가능하다고 보시나요? 돌봄 노동은 복합적인 노동이란 특징이 있어요. 육체노동인 동시에 돌봄 대상자의 감정과 필요를 세심히 살펴야 하는 서비스 노동이에요. 돌봄 대상자에 대한 대응도 빨라야 하죠. 이런 노동을 1년차와 10년차가 동일하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떤 노동은 10년의 경험을 경력이란 이름으로 임금을 더 인정해 주는 것이고, 어떤 노동에 대해선 그런 경력에 대한 인정을 해주지 않는 경향이 있을 뿐인 거예요. 원래부터 여성이 해왔던 노동이란 차별적 인식 아래서요. 돌봄을 시장에만 맡길 수 없는 이유? 돌봄의 질을 높이기 위해 열악한 우리나라 돌봄 노동자들의 처우와 노동 조건이 개선돼야 하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높아지는 비용을 사용자에게만 오롯이 전가할 수 없는 이유는 돌봄은 인간의 존엄한 삶과 직결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일생에 몇 번은 반드시 필요로 하는 서비스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든 없든 간에요. '돌봄의 공공성' 이야기가 여기서 나옵니다. Q. 돌봄 일자리 처우를 개선하는 게 필요하지만, 비용이 올라가면 저소득층, 또 중산층이 돌봄 서비스를 이용하기 어려워질 텐데요. 이걸 어떤 방식으로 풀어 가야 할까요? 김진석 교수 취약계층도 질 좋은 돌봄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도록 국가의 역할을 확대해야 합니다. 이 논의를 우리 사회도 이미 20년 넘게 해 왔고요. 의미 있는 시도를 하지 않은 바가 아닙니다. 오랫동안 논의됐던 돌봄 노동의 공공성 강화 기조가 정책화돼서 드러났던 것이 바로 사회서비스원의 설립이었습니다. 5년 전 취약계층 아동과 노인 등에게 공공돌봄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서울시사회서비스원이 세워졌습니다. 돈이 없어도 질 좋은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이곳에 정규직으로 고용된 요양보호사, 보육교사, 장애활동지원사들이 공공돌봄을 제공한단 취지였죠. 그러나 최근 서울시에선 돈이 들고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등의 이유로 이 사회서비스원 예산을 대폭 삭감한 데 이어, 지금은 서울시의회에서 아예 폐지 조례까지 발의된 상태입니다. 배진경 대표 누구에게 돌봄을 맡길 것이고 그 돌봄에 얼마만큼의 대가를 지불을 할 거냐라는 것을 결정하는 건 그 국가의 시스템이에요. 근데 그 국가 시스템이 여성 노동에 대한 차별적 편견에 의거해 돌봄 노동에 대한 저평가를 유지하면서, 비용은 민간으로, 잘살든 못살든 개별 가정의 책임으로 떠넘기겠다는 생각에 이런 정책이 나오는 거거든요. '돌봄 시장 가격 낮춰줄게, 대신 가정에서 각자 해결해" 이런 얘기인 거죠. 결국 돌봄의 공공성이 훼손될 수밖에 없어요. 모든 서비스의 질은 그 노동자를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결국 이용자에게도 좋지 않은 결과이고요. Q. 해외에 정책적으로 저희가 참고할 만한 사례들이 있을까요? 김진석 교수 예를 들면 스웨덴 같은 경우는 돌봄 노동이라는 사회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의 80% 이상이 전부 다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입니다. 공무원으로 채용해 이들이 직접 돌봄 노동을 제공하도록 하고 있어요. 국가의 개입을 통해 이들의 고용이 안정되고 생활이 안정되면 사람들에게도 질 좋은 돌봄을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유럽 사회에 있는 겁니다. 미국을 제외하면 우리나라처럼 돌봄을 민간에 의존하고 있는 나라가 없어요. 예를 들면 우리나라는 장기 요양기관 가운데 국공립 운영 비율은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2020년 기준)입니다. 예상치 못한 사회적 갈등의 씨앗도 또,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생길 거란 시각도 있습니다. 한국노동연구원 등의 기존 여러 연구들을 보면 이미 고용허가제로 농어업 분야에 들어 온 여성 근로자의 경우 성폭력에 노출되는 등 열악한 근로 환경과 낮은 임금 수준 때문에 업무지 이탈률이 높은 것으로 분석됐는데요. 임금 수준이나 처우가 다른 직종보다 낮으면 이 정보를 공유하고 합리적 선택을 내리게 될 이주 노동자로선 이탈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단 겁니다. Q. 외국인 돌봄 노동자가 들어 왔을 때 예상되는 부작용은 없나요? 김진석 교수 외국인 돌봄 노동자들이 이민자 자격으로 한국 노동시장으로 유입된 이후 그들이 어떤 방식의 결정을 하든 그걸 우리가 막을 수는 없어요. 관리 인력도 마땅치 않고요.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 필요에 의해 문을 확 열어 버리고, 나중에 가서 미등록이 된 돌봄 노동자들을 막겠다고 또 '토끼몰이' 식으로 단속에 나서는 순간 우리 사회는 아주 전형적인 반인권, 반이민 사회로 전환될 겁니다. 유럽의 역사를 통해서도 살펴본 바이고요. ▶ 관련 스프 전문 보기 : 동료들의 "살려주세요" 외침에 차 돌렸던 기사, 선처 탄원이 쏟아진 이유는 최영미 위원장 최저임금은 최저 생계비고 이주 노동자들은 우리나라에서 생활을 하는 거잖아요. 본국에 비해 몇 배 높다는 것만 강조하는데 일하는 동안 본국에서 사는 것 아니잖아요. 하루에 8시간 일해서 최저임금을 월급으로 하면 206만 원 선이에요. 그 밑으로 준다고 하면 서울에서 생활하는 체류비, 차비, 식비 이런 것들은 어떻게 할까요? 물가가 높은 스위스가 최저임금이 시급 3만 원 정도에요. 거기서 힘든 일자리에 사람 부족하니 한국 사람 받겠다, 대신 최저임금은 한국 수준으로 9,800원 주겠다면 스위스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돈을 더 많이 주는, 처우가 좋은 다른 사업장으로 가고 싶지 않겠어요? 예고된 돌봄 대란을 해결하기 위해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특히 최저임금 밑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제안은 일부 국회의원들과 서울시장, 최근에 한국은행 보고서까지 줄곧 한목소리를 내는 상황에서 그 무게감이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특히 이창용 총재까지 참석해 발표한 이 한국은행 보고서는 외국인에게만 임금을 낮게 줄 수 없다면 최저임금을 돌봄 노동 업종 자체에 차등 적용하는 방식까지 노골적으로 거론한 상태입니다. 이 논의의 끝,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요. 돌봄 일자리에 대한 근본적 고민 없이 더 값싼 인력을 계속 수입하는 방식으로 터지는 둑을 막을 수 있을까요? 돌봄의 책임을 각자에게 지운 채 고강도, 저임금, 낮은 처우라는 돌봄 노동 일자리의 '게토화'를 지속시켰을 때, 고령 구직자의 상당수가 유입될 국내 돌봄 노동자의 삶, 돌봄 서비스의 질은 어떻게 될까요? 앞으로 더 많은, 더 안정적인 양질의 돌봄 서비스를 필요로 하게 될 우리 모두는 어떻게 될까요? 초고령화와 돌봄 절벽의 파고가 마침내 몰려오는 순간, 그동안의 숱한 경고음에도 불구하고 돌봄 노동을 천대해 온 역사의 영수증을, 우리와 미래 세대가 '돌봄의 역습'이란 형태로 고스란히 받아 들게 될 것이란 게 지금 가장 두려운 지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디자인 : 권민재
서울대 출신의 대학교수 의사 부부, ‘강남 8학군’ 출신의 자녀. 남들이 보기엔 흠 하나 없이 그저 완벽해 보이는 삶이었을 겁니다. 자식의 성취는 내세우고, 흠결은 감추는 데 익숙한 우리 사회에서 이 ‘완벽한 가족’이라는 보기 좋은 허울을 엄마 스스로 깨트리고 자녀의 양극성 인격장애 투병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데는 분명 용기 이상의 것이 필요했을 겁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이 주인공인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선풍적 인기를 끌고, 정신과 병동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따스한 시선으로 다룬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가 화제작이 되는 사회. 동시에, 늘어나는 ‘묻지마 범죄’의 원인으로 가해자의 정신병력이 지목되고 전시되는 사회, “임대주택에 못 사는 사람이 많아서 정신질환자들이 나온다”는 여당 정치인이 버젓이 주요 당직을 차지하는 사회. 착하고 순수한 정신질환자와 정신 이상 흉악범 사이의 간극만큼이나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과 낙인이 깊고 큰 우리 사회에서 정신질환자의 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환자의 가족이자 한 명의 의사로서 바라 본 정신질환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에 대한 성찰을, 〈딸이 조용히 무너져 있었다〉의 저자 김현아 한림대 성심병원 류마티스내과 교수를 만나 들어 봤습니다. 혼자가 아니라고 말을 건네기 위하여 - 어떤 마음으로 책을 낼 결심을 하셨나요? “책으로 낼지 사실은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정신 질환에 대한 어마어마한 그 편견, 그리고 정신질환 환자들이 계속 사지로 내몰린다고밖에는 볼 수 없는 상황들을 보면서 누군가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꼭 내가 되어야 하냐는 고민은 했지만... 그래 내가 하는 게 어떻겠냐, 하고 생각했지요. 이 문제가 저희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가 저에게 힐링의 효과도 있었고요.” - 당사자인 둘째 딸은 자신의 정신 질환이 공개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나요? “딸이 양극성 질환 판정 5년째 됐을 때쯤 정신질환에 의한 장애 신청을 하려다 거부된 일이 있었거든요. 이때 정신 질환자에 대한 국가의 제도적 지원이 미비하다고 딸이 무척 고발하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책을 한 번 내보겠다는 엄마의 얘기에 동의하더라고요. 다만 책이 나오기 전에 너무 개인사적인 이야기들은 딸의 검수를 거쳐 많이 빼기도 했어요.” 시종 초연한 자세로 담담하게 딸의 투병 사실을 말하는 그도 처음엔 딸이 아프단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세 차례 부인한 베드로처럼, 김 교수도 딸이 아프다는 여러 증거를 마주칠 때마다 “아냐, 우리 딸은 아니야”라고 수 차례 부인했다고 했습니다. 정신질환은 우리 가족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결국 아이의 자해를 보고서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습니다. - 양극성 장애는 어떤 질병인가요? “조현병과 함께 중증 정신질환으로 분류되는 병입니다. 조증(기분이 비정상적으로 들뜨는 현상)과 울증이 번갈아 나타나는데 조증이 아주 심한 경우에는 현실과의 연결이 끊어져 버리는 거거든요. 저희 아이는 우울증이 심한 타입이었어요.” - 그래서 자해의 위험이 높았던 것이군요. “네. 그래서 병이 상당히 심해서 입원을 여러 번 할 정도였을 때도 누구한테 해코지하려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해하려는 마음이 컸던 게 문제였어요.” - 딸이 처음 발병해 양극성 정신질환을 앓았던 기간은 가족에게 어떤 시간이었나요? “거의 10년이에요. 진단받은 지는 7년이 됐고요. 그동안 정신병동에 16번 입원했습니다. 그 기간은... 망망대해에서 폭풍우가 치는데 배에는 큰 구멍이 났고, 남편은 조타를 하고 저는 선실에서 물을 푸고 그러면서 우리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서로 우스갯소리를 했죠. 그래도 딸이 비교적 순한 환자의 경과를 보여서 다행이었어요.” 각자도생 경쟁 사회… 약자에게 ‘누칼협’이라고 한다 치료 의지가 강했던 딸 덕에 인터뷰 내내 “그래도 우리 가족은 운이 좋았다”고 한 김 교수의 책에는 그러나, 자해와의 결전에서 번번이 패해 만신창이가 된 딸을 그때마다 입원병동(옛 폐쇄병동)에 데려다 놓고 돌아설 때의 좌절감이 절절히 드러나 있습니다. 정신질환이 발병하는 데는 유전적 소인이 강하지만, 최근 딸처럼 1020의 정신질환이 급격히 늘어나는 배경에는 과열된 경쟁, 각자도생 사회의 각박한 현실이 분명 작용했을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습니다. - 둘째 딸의 발병 요인 중 하나로 ‘강남 8학군’에서 만난 ‘프레너미(친구인 것 같은 적이란 뜻)’을 꼽기도 하셨지요. 지금의 경쟁 일변도 사회적 분위기가 10대, 20대 정신질환 발병률을 높이는 데 영향을 끼쳤다고 보시나요? “예를 들어 볼게요. 기관지가 약해 천식에 걸렸어요. 그런데 인헤일러라는 흡입기만 주고 유해 환경에서 계속 일하라고 하면 증상이 좋아질 리가 없겠죠. 정신 건강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시대의 키워드가 우울, 불안, 공황이 된 것 같아요. 상대방을 말로 난도질하는 사회라고 할까요. 의과대학생 중 우울증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나요? 이 시대가 점점 유해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확신을 하게 됩니다. 이 사회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른들의 직무 태만이에요.” 젊은 층이 갈수록 정신 질환에 취약해진다는 것은 김 교수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자해·자살로 응급실에 입원한 사람의 숫자는 2012년 5,375명에서 지난해 9,813명으로 늘었는데 특히 10대(615명→1,786명)와 20대(1,041명→2,744명)에서 폭증했습니다. 자해와 자살의 주된 이유로 가족, 친구와의 갈등을 꼽았던 10년 전과 달리 지금은 정신과적 문제가 꼽힌 것(44.1%)도 두드러지는 변화입니다. 한국의 20대 여성들에게서 자살의 코호트 효과가 두드러지게 관찰된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습니다. (2019년, 장숙랑 중앙대학교 적십자간호대학 교수) 젊은 층의 정신 건강이 붕괴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 지금의 사회 분위기가 젊은 층을 더 사지로 내몬다고 보시는 것이지요? “우리나라는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사회예요. 영국의 수상이었던 마가렛 대처가 ‘사회라는 것은 없고, 너와 나, 개인이 있을 뿐(1987년, ‘Women’s Own magazine’)’이라고, 고로 개인의 삶은 개인에게 책임이 있다고 했던 것처럼 말이죠. 이 신자유주의라는 게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 서구사회에서는 파산 선고를 받았는데, 우리나라에선 거꾸로 더 팽배해진 것 같아요. 사회가 완전히 분쇄되어, 죽을 때까지 경쟁하고 각자도생 하는... 곁이라는 게 없는 사회로 느껴지거든요. 젊은이들이 바로 그 미래를 어둡게 보는 것 아닐까 싶어요. 저출생의 이유 역시 멀리서 찾을 게 아닌 것 같고요.” 시설로 들어갈 수도, 자립할 수도 없는 정신질환자 둘째 딸은 발병 이후에도 대학 생활을 하거나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등 부모를 떠나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자립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병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연락이 두절돼 집으로 찾아가면 심각한 자해로 응급실에 실려가 있길 여러 번. -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아주 상태가 안 좋을 때는 매일 너무 불안한 거예요. 애가 무슨 이상한 짓을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미 성년이 다 된 아이이고 부모가 24시간 붙어있을 수도 없는 거잖아요. 장기 입원을 시켜야 하나, 시설에 수용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될 정도였죠. 그런데 가족끼리 그런 얘길 했어요. 만약에 얘가 어디에 수용이 된다면 그건 그걸로 그냥 사회적으로 죽는 거다, 지금도 한 달 입원하고 나오면 다시 사회에 적응하고 돌아가기 힘든데, 장기 수용 된다면 이건 그냥 또 하나의 죽음이나 마찬가지다, 라고요.” 설사 최악의 상황을 감수해야 하더라도 딸을 시설에 수용하진 않겠다고 다짐한 건 딸이 한 명의 사회인으로서의 존엄함을 영영 잃게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딸을 시설에 보낼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딸이 자립할 수 있는 방편도 찾기 어려웠습니다. - 중증 정신질환자에 대한 국가의 제도적 지원이 미비하다는 점도 지적하셨던데요? “딸이 양극성 장애 진단 이후 7년째 투병 중인데 장애 인정을 두 번 거부당했어요. 정신질환 호발 연령이 조현병이나 양극성 장애 모두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거든요. 이때 발병하면 학교도 못 마치죠. 병원 생활만 하다 앞으로의 삶을 꾸려나가야 하는데, 만약 가정환경이 넉넉하지 못하다면 정말 어렵겠죠. 미국이나 유럽, 일본도 양극성 장애나 조현병을 1년 이상 치료하면 대부분 장애로 인정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신질환자 중 아주 중증인 사람들 10퍼센트만 인정된다고 하더라고요. 지금의 상황에서는 기초수급을 받거나, 시설로 들어가거나 둘 중에 하나뿐인 거예요.” 장애인의 재활과 취업 등을 지원하는 장애인복지법은 최근까지 신체장애인만을 장애인으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지난해 12월에야 법이 개정돼 비로소 정신장애인도 이 법의 보호 대상으로 포함됐죠. 그럼에도 장애로 인정받고 국가로부터 필요한 지원을 받는 건 여전히 녹록하지 않은 일이라고 합니다. 국내 중증 정신 질환 환자는 50만 명. 그중 6만 명 넘는 정신 장애인이 정신병원에, 또 1만 명 넘는 이들이 정신 요양시설에, 마땅한 대책도 없이 수십 년 간 수용되고 있습니다. 이들이 시설에서 나와 안정적으로 지역사회에서 직업활동과 사회활동을 할 수 있도록 교육과 취업 훈련 등을 돕는 정신재활시설은 전국에 349곳에 불과합니다. 시설에 수용되거나, 나와도 자립하지 못한 채 경제 취약 계층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김 교수는 지적했습니다. - 다른 나라는 중증 정신질환자에 대한 정책이 어떻습니까? “이탈리아 같은 경우 격리병동 수용소라고 하죠. 수용소 환자들이 그냥 집에서 가족이 포기하면 수용소로 들어가는 거거든요. 이 수용소를 최근 아예 없애 버렸습니다. 환자들을 다 사회로 돌려보냈는데 그러면서 이제 환자들에게 일자리를 줍니다. 주거를 해결해 주고요. 그걸 사회가 해낸 거예요. 스웨덴 같은 국가에서는 우리가 흔히 발달장애라고 하는, 지능지수가 낮은 분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주는 그런 프로그램이 있어요. 다림질을 할 수가 있다면 다림질을 하도록,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이분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모습들이 굉장히 필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미친 게 아니라 아픈 것”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은 2018년 한 방송에서 정신질환과 무관한 만취 남성이 여고생을 벽돌로 가격한 사건을 두고 “조현병 환자에 의한 느닷없는 폭행”이라고 말했습니다. 국민의힘 성일종 의원은 2022년 6월 임대주택 거주 환경을 거론하며 “여기 못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정신질환자들이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망언들을 가능케 한 우리 정치인의 인식 수준에 대해 그는 책에서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 정신 질환자 혐오를 부추기는 정치인들을 보면 당사자와 당사자 가족들은 어떤 기분이 드나요? “저는 미쳤다는 말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 정신 질환자는 아픈 거죠. 미친 사람은 따로 있어요.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치고 주변을 피폐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들 중에 정신 질환 진단받은 사람이 있나, 없을 거예요. 그럼 과연 누가 미친 사람인 건가요?” - 정신 질환을 다루는 언론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없나요? “예를 들어 암 환자가 범행을 저질렀어요. 몇 년 전에 암을 치료받고 완치된 암 환자 아무개 씨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안 하지요? 심장질환 환자 아무개가 범행을 저질렀다고도 하지 않고요. 그런데 정신 병력이 있으면 정신질환 환자의 범행이라는 딱지를 꼭 붙입니다. 마치 이 사람은 정신질환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인과관계를 언론이 나서서 확증해 주는 것처럼요. 정신질환자 중에 중증 질환만 놓고 봐도 범죄율이 일반인 범죄율보다 훨씬 낮습니다. 언론의 범죄 보도 관행 하나만 개선해도 인식이 훨씬 좋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많이 알려진 통계이지만, 2017년 대검찰청이 발간한 범죄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정신질환자의 강력범죄율(0.014%)은 전체 인구의 강력범죄율(0.065%)에 훨씬 못 미칩니다. 전체 범죄율을 놓고 보면 차이는 더 커집니다. (전체 인구 범죄율 3.93%, 정신질환자 범죄율 0.136%). 사회 문제가 생겼을 때, 그 구조적 이유를 파헤치기보다, 원인을 쉽고 선명하게 지목하는 관행이 정신질환자에게 주홍글씨를 붙여 왔던 겁니다. “우리는 모든 정신질환자다” - 책에서 신경 다양성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는데 낯설었습니다. 어떤 개념인가요? “정신과 의사들의 정신질환 진단 기준 리스트를 보면 누구든 이 중 몇 개는 본인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할 거예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신경적 특징을 갖고 있고, 그중에서도 특별히 운이 안 좋아서 증상이 심한 쪽으로 발현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죠. 조금 다른 사람들을 포용해야 한다, 더 나아가 정신질환은 없다, 이건 그냥 이 사람의 고유한 특질이다, 이렇게 보는 개념인 것입니다. 서구사회에선 논의가 벌써 이렇게까지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김 교수는 어떤 사람은 평균보다 유독 키가 크고, 어떤 사람은 발이 작고, 어떤 사람은 어깨가 넓은 것처럼, 우린 서로 각기 다른 신경적 특징을 안고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주의력이 부족한 사람, 쉽게 불안해지는 사람,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힘이 드는 사람처럼 말이죠. 양극성 장애를 앓았던 걸로 추정되는 윈스턴 처칠을 비롯해 커트 코베인, 빈센트 반 고흐 등 정상에서 벗어나 정신질환을 앓았던 걸로 알려진 사람들이 인류, 사회에 기여한 부분도 적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그는 이들을 포용하는 사회가 분명 더 나은 사회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 힘든 날만 있진 않았을 텐데 딸이 병과 싸우는 모습을 옆에서 함께 하면서 좋은 날은 없었나요? “저는 제일 좋은 날은 오늘이라고 생각해요. 조금 이따 딸과 만나기로 했거든요. 같이 밥 먹기로 했어요. 딸과 함께 하는 평범한 오늘이, 저는 제일 좋아요.” 국내 중증 정신질환자 50만 명. 이 중 7만 7천 명이 정신의료기관과 요양시설에 입원해 있고, 42만여 명이 지역 사회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을 “미친 게 아니라 다른 것”, “미친 게 아니라 아픈 것”이라고 접근할 때 더 많은 환자들이 사회에서 제 몫을 하고 보다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디자인 : 김정연
명절 연휴를 앞둔 지난달 20일, 관내 119 구급차로 이송 중이던 20대 여성을, 구급차에 동승한 30대 남성 소방관이 성추행하고 이를 휴대전화로 불법 촬영까지 했단 사실이 보도됐습니다. 해당 소방서는 이 소방관을 직위해제했고 경찰은 소방관을 준강제추행 및 성폭력처벌법상 카메라등이용촬영 위반 혐의로 긴급 체포했습니다. 사람들은 취약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보호해야 할 공간인 구급차에서까지 성범죄가 일어났다는 점에 크게 공분했습니다. 특히 디지털 성범죄에 있어 성역은 없다는 점이 충격이었죠. ‘N번방 사건’ 이후에도 패륜적인 디지털 성범죄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이렇게 우리 사회를 크게 떠들썩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뿌리 깊은 디지털 성범죄는 우리나라에서 대체 언제 처음으로 시작된 것일까요? N번방 이전의 N번방… 디지털 성범죄의 역사 전문가들은 디지털 성범죄의 탄생을 1990년대 후반으로 보고 있습니다.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촬영물이 불법으로 복제, 전국으로 유통돼 큰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던 빨간 마후라*사건이 하나의 변곡점이었습니다. 〈성폭력범죄처벌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법률〉에 ‘촬영물’ 관련 규제 조항이 추가된 게 이 사건 직후인 1998년이었으니까요. 〈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도 이때 이후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빨간 마후라 사건: 1997년 미성년자들이 촬영한 성관계 영상이 불법 비디오의 형태로 전국적으로 불법 유통, 거래되면서 큰 사회적 논란을 낳았던 사건 이후 디지털 성범죄는 융성했습니다. 공고한 성차별, 성인지 감수성 결여라는 문화적 토대 위에서 디지털 성범죄는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오히려 더 진화했죠. 워터파크와 공공화장실에서의 연이은 불법 촬영 사건, 소라넷*과 다크웹*에서의 불법촬영물 유통 등 디지털 성범죄는 법의 철퇴를 맞을 때마다 방식과 도구를 바꿔가며 질긴 생명력을 이어왔습니다. 특히 가장 취약한 아동과 청소년들을 착취하는 잔혹함을 보여 왔습니다. 이 뿌리 깊은 디지털 성범죄의 가장 최신판 버전이 바로 우리가 4년 전 목격했던 ‘N번방 사건’이었습니다. *소라넷: 소라넷은 서버를 해외에 두고 각종 불법 촬영물을 공유하는 회원수 1백만 명의 한때 국내 최대 음란물 사이트였다. 해외 서버를 통해 운영진을 은폐하면서 17년간 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하며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해 왔다. 2015년 수사가 시작돼 관련자 일부가 검거 됐지만 핵심 운영진임에도 징역 4년을 선고받는 등 피해의 규모와 정도에 비해 가벼운 판결을 받았다. 현재는 소라넷에 대한 국내 접속이 완전히 차단돼 있다. *다크웹: 특별한 도구와 소프트웨어가 필요한 암호화된 네트워크. 다크웹은 다양한 검색 엔진에 숨겨져 있으며, 사용자에게 철저한 익명성을 제공한다. 2019년 ‘N번방 사건’은 강압적으로 찍은 성착취물 유포를 빌미로 미성년 피해자 70여 명을 마치 성 노예처럼 다뤄 공분을 샀습니다. 사회적 분노가 들끓었고 당시 대통령까지 나서 “한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잔인한 행위”라며 엄정한 경찰 조사를 주문했습니다. 이후 주범 조주빈은 대법원에서 징역 42년형이 확정됐고, 다른 공범들도 잇따라 법의 철퇴를 맞았습니다. ‘N번방 방지법’* 등 관련 입법도 뒤따랐고요. *N번방 방지법: N번방 성착취물 제작 및 유포 사건의 재발 방지를 위해 국회를 통과한 법들을 포괄해 일컫는 표현. 성폭법, 형법, 범죄수익은닉규제법 등 7개 법안이 포함돼 있다. 그로부터 몇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관심도 옅어졌습니다. 과연 ‘N번방 사건’ 이후, 지금의 우리 사회는 어떻게, 얼마나 바뀌었을까요? 디지털 성범죄는 유의미하게 줄어들었을까요? N번방 이후 디지털 성범죄는 줄었나? 안타깝게도 최근의 여러 보고서와 통계를 보면 디지털 성범죄에 관한 한 우리 사회는 여전히 나아지지 않은 모습입니다. 2022년엔 N번방과 유사한 수법의 ‘제2의 N번방’ 사건이 보도되기도 했죠. 범행 건수는 갈수록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경찰청 ‘디지털 성폭력범죄 수사 현황’에 따르면 성폭력처벌법의 통신매체 이용 음란죄로 입건된 피의자 수는 2017년 1,324명에서 2020명 2,300명으로 74% 늘었습니다. 2021년 입건자 수는 4,991명으로 전년 대비 117% 늘었습니다. 대표적인 디지털 성범죄로 꼽히는 통신매체이용음란죄의 발생건수 역시 2020년 2,070건으로 전년대비 40.3% 증가했습니다(〈한국의 범죄현상과 형사정책 2021〉 한국형사정책연구원).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서 집계한 디지털 성범죄 피해발생 건수도 매년 늘고 있는데, 지난 2021년 한 해에만 1만 353건이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에 피해 접수됐습니다. 피해 유형 중에는 촬영물 유포 불안을 호소하는 비중이 25.7%(2,660건)으로 가장 높았습니다. 불법촬영, 유포, 유포협박 등 접수되는 항목별 디지털 성범죄 피해사례가 대체로 매년 큰 수치로 늘었습니다. 피해 대상도 이전보다 더, 더 어리고 취약한 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가 N번방 사건을 계기로 도입한 선제적 삭제지원을 통해 삭제한 아동청소년성착취물은 2021년에 3만 3,437건, 2022년엔 더 늘어 3만 4,860건에 이릅니다. 피해자의 신상정보나 일상사진 같은 개인정보 유출 건수도 10대에서 폭증(2018년 246건 → 2022년 1만 8,857건, 한국여성인권진흥원)했습니다. 2018년부터 2022년까지 딥페이크나 몸캠 피싱, 온라인 그루밍* 등 디지털 성범죄 피해를 입어 센터가 삭제지원을 한 사례의 연령대도 10대, 20대에 집중됐는데 특히 온라인 그루밍으로 피해를 입어 센터가 삭제지원을 한 건수(2만 2,564건) 가운데 10대 피해 비중이 50% 이상(1만 2,402건)을 차지했습니다. *온라인 그루밍: 온라인 채팅, 모바일 메신저, SNS를 통해 아동 청소년에게 접근해 피해자를 유인하고 길들여 성 착취 행위를 하고 피해 폭로를 막는 행위. 지난달 19일 열린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 5주년 기념 토론회에서 센터 관계자는 “N번방 이후 피해자가 줄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며 “피해발생 현황을 집계해 보면 아동 청소년 피해자 수의 증가와 집단피해의 심화를 확인할 수 있다”고 콕 짚어 지적했습니다. N번방 이후, 정부 대책은? 물론, ‘N번방 사건’ 이후 정부와 국회가 손 놓고 있었던 것만은 아닙니다. 앞서 ‘N번방 방지법’으로 잠깐 언급한 대로 디지털 성착취 관련 주요 법률이 제·개정됐습니다. 주요 내용을 소개해보면 이렇습니다. 아동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에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이란 용어가 ‘아동청소년성착취물’로 변경된 게 하나의 상징적 변화였고요. 아동청소년성착취물을 제작하고 배포, 소지, 운반, 광고하는 행위의 법정형도 상향됐습니다. 상습적으로 아동 성착취물을 제작하고 수입, 수출한 사람에 대해선 가중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도 마련됐습니다. 특히 음지에서 ‘온라인 그루밍’이 이뤄지고 있는 아동 청소년 성착취 범죄의 특성을 감안해 ‘위장수사제도’처럼 공권력의 사전 개입이 가능하도록 하는 법도 새로 만들었습니다. 여성계의 해묵은 과제였던 미성년자 의제강간 연령도 이때 상향이 됐습니다.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을 통해 불법 촬영물을 찍거나 복제, 반포하는 행위의 처벌 역시 강화했습니다. N번방 사건처럼 촬영물을 이용해 협박하고 강요하면 처벌할 수 있도록 한 것이죠. 촬영물을 소지하거나 구입, 저장, 시청하는 것만으로도 처벌할 수 있도록 했고, 상습적이면 가중처벌도 가능토록 했습니다. 자기가 자신의 신체를 직접 찍었더라도 그 촬영물을 찍은 사람 의사에 반해 퍼뜨릴 경우 처벌을 할 수 있도록 명확히 규정해 N번방 사건에서 드러났던 사각지대를 보완하기도 했습니다. 인터넷 사업자에게는 불법촬영물을 삭제하고 유통을 방지하도록 하는 기술적, 관리적 의무를 부과했죠. 이런 노력들은 실제로 법 체계의 패러다임을 일부 변화시켰다고 평가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진보입니다. 그런데도 왜, 디지털 성범죄는 자꾸 더 늘어나기만 하는 걸까요? 돈이 되는 착취의 비즈니스… 근절하려면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공고한 성차별 토양과 아동차별적 구조, 성평등의식의 부재가 문제의 근원이라고 지목합니다. 거기다 불법촬영물 유통으로 여전히 큰돈을 벌 수 있다 보니 디지털 성범죄가 피라미드형 범죄구조로 고착됐다는 것이죠. 최약자인 아동과 청소년들에 대한 착취가 돈이 되는 비즈니스로 이어지는, 하나의 음성 산업 생태계가 조성됐다는 것입니다. 또, 국내의 법은 강화됐지만 해외, 특히 개발도상국의 서버에 기반을 둔 사이트는 수사나 삭제, 차단이 여전히 용이하지 않은 점도 디지털 성범죄를 여전히 융성하게 하는 요인으로 꼽힙니다.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인식과 문화를 바꿔내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겁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동안 할 수 있는 정책적 대안을 우선 고민해야 할 텐데요. 지금의 현실을 살펴보면 국정과제에 포함돼 있는 ‘범죄 피해자 보호지원 시스템 확립’마저도 유의미한 진척 없이 제자리걸음인 실정입니다. 현재 불법 촬영물 삭제와 피해자 보호를 지원하고 있는 국가기관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는 전국에 여전히 단 2곳뿐입니다. 기관에 대한 법적 근거도 아직 마련되지 않아 예산과 전문 인력 확보 측면에서 지속 가능성이 떨어지고 있고요. 디지털 불법정보 대응이 여가부, 방통위, 경찰청에 여전히 각각 분산된 채 이뤄져 즉각적 삭제와 차단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도 여전히 지적되는 문제입니다. 불법촬영물 삭제 신고 이후 실제 삭제, 차단까지 최소 24시간 이상, 많게는 2~3일까지 걸려 유포 피해가 커지는 걸 여전히 막기 어렵다는 것이 현장의 목소리입니다. 그 결과는, 극심한 2차 피해 우려와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피해자들의 존재일 것이고요. 디지털성범죄피해지원센터, 조사기간: 2023.8.23~9.3, 대상: 상담 및 삭제지원 피해자 100명 이에 대해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 5주년 기념 토론회에서는 영국의 국가범죄수사국 산하 아동착취온라인보호센터(CEOP)가 하나의 참고할 모델로 제시됐습니다. 아동·청소년 대상 범죄에 대한 신고접수와 조사, 분석, 관계 부처 간 협조, 국제 공조 등의 업무를 전문적으로 전담하고 있는 좋은 사례라는 것입니다. 아동 청소년 성착취물에 대한 24시간 상시 감시, 신고, 삭제 지원 기관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다는 것이죠. 늘어나는 해외 디지털성범죄 사이트에 대응하기 위해, 콘텐츠전송네트워크사업자 등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에게 불법 해외사이트 접속 차단 의무를 부과하도록 한 정보통신망법 일부개정법률안이 이번에 국회를 통과하는지도 주의 깊게 지켜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 법안은 ‘누누티비’로 인한 불법 스트리밍이 논란이 된 뒤에야 지난달 말 상임위(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듯 디지털 성범죄는 근본적으로 사회의 성차별적 문화, 성인지 감수성 결여라는 불건강한 사회적 토양을 먹고 자랍니다. 이게 개선되지 않고서는 범죄를 완전히 뿌리 뽑기 어렵겠죠. 게다가 AI 시대를 맞아 불법 성착취물 제작과 유포의 위험성은 앞으로 더 높아질 일만 남았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이 뿌리 깊은 디지털 성범죄와 어떤 자세로, 어떻게 싸우는지가, 앞으로 맞이할 미래 디지털 세상의 모습을 결정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디자인 : 김정연
미사여구로 치장된 정부 정책 발표 때 종종 떠올려보는 글귀입니다. 요란하게 홍보된 선의 뒤에 놓친 디테일이 누군가를 지옥에 빠트리진 않을지 짚어보면서요. 정치권이 띄운 외국인 가사근로자(정부의 시범사업 명칭에 따라 ‘가사근로자’란 단어를 쓴다는 점을 밝혀둡니다.) 이슈를 보면서도 저도 모르게 이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렸습니다. 개발도상국 출신 노동자에겐 100만 원도 큰돈이라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식의 논리를 폈던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의 법안이 가로막히자, 고용노동부는 서울시와 협의를 거쳐 우선 최저임금법을 적용해 하반기에 필리핀 등 외국인 가사근로자 100명 정도를 고용허가제(E-9) 비자로 서울 시내에 시범 도입하겠다는 안을 공표했습니다. 그러면서 오세훈 서울시장은 자신의 SNS에 “문화도 다르고 말도 서툰 외국인에게 아이를 맡기며 200만 원 이상 주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장기적으론 내국인보다 돈을 덜 주는 방향으로 정책을 펴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고요. 이 시범 사업, 아직까진 국내 이해 당사자들에게도 그리 환영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용이 싸지 않아 실효성이 없을 거다, 문화적 차이 때문에 아이를 맡기기 어렵다, 국내 가사근로자 수가 부족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들의 일자리를 잠식할 거다 등 다양한 이야기가 7월 31일 열린 공청회에서 나왔고, 언론에도 많이 다뤄졌습니다. 여러 말들이 오가고 있지만, 정책의 또 다른 주된 대상자가 될 쪽의 목소리는 완전히 빠져 있습니다. 바로, 이 사업을 통해 국내 들어오게 될 외국인 가사근로자들의 입장입니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이 사업을 통한 한국행을 택하겠지만, 이는 결코 우리가 그들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며, 국내의 넘치는 (그러나 자체적으로는 충족하지 못하는) 필요를 외국의 풍부한 공급으로 충족시키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인위적으로 조성한 일자리를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공적 권위가 개입된 일자리에서라면 더더욱 노동자가 최소한의 기본적 인간의 권리를 지키고 부당한 권리 침해에 방어할 수단이 보장되어야 함이 당연한 일이겠죠. 하지만 그동안 이주민 노동력을 활용하는 제도의 설계에서 제도를 이용하는 중요한 한 축인 이들의 입장은 진지하게 고려된 적이 없었고, 그 결과는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알 법한 광범위한 인권 침해로 귀결돼 왔습니다. 그래서 잘 들리지 않는 비주류의 목소리에 마이크를 갖다 대는 〈더 스피커〉 코너에서, 다른 누가 아닌 바로 이들의 관점에서 하반기 예정된 외국인 가사근로자 도입 시범사업이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을 짚어보려고 합니다. 원곡법률사무소 최정규 변호사*와 법무법인 덕수 조영관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최정규 변호사: 신안 염전 노예 사건, 고 김홍영 검사 사망 사건 등 여러 공익 사건의 법률 대리인을 맡았다. 이주민, 장애인, 국가폭력 피해자 등 사회적 약자의 기본권과 공익을 대변하는 소송을 주로 맡고 있다. 경기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소장이다. 2015년 한국장애인인권상, 2020년 참여연대 공익제보자상 등을 수상했다. <불량 판결문>, <얼굴 없는 검사들>을 썼다. *조영관 변호사: 출입국/이민법(이주 및 비자) 전문 변호사, 법무부 인권정책 자문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이주민센터 ‘친구’ 센터장,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차장이다. 혐오와 차별에 노출된 이주민의 권익을 대변하는 소송을 주로 맡고 있다. 농어촌보다 더 폐쇄적인 가정 내 일자리… 성범죄 일어난다면? 과거 농업 이주여성노동자의 12.4%, 제조업 이주여성노동자의 11.7%가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는 국가인권위원회 등의 조사(2016, 2017년)가 있었습니다. 성폭력뿐 아니라 원치 않는 신체 접촉과 외설적인 농담, 술 강권 등 경중을 망라했습니다. 특히 농촌은 고용주가 마련해 준 일터 내 숙소 역시 폐쇄적인 환경이었고, 당시 법이 정한 사업장 변경 사유에 성폭력과 같은 부당한 처우를 받은 경우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 노동자의 경우 성범죄를 당해도 합법적으로 가해자로부터 떨어져 일터를 옮기기가 몹시 어려웠습니다. 외국인 노동자의 사업장 변경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미등록이 될 결심을 하지 않는 이상, 혹은 낯선 언어로 고용주를 경찰에 고소를 할 결심을 하지 않는 이상 가해자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었던 것인데, 실제 심각한 성범죄 사례들로 논란이 되자 고용노동부는 지난 2018년에 이르러 외국인 근로자가 사업장에서 성범죄를 당하면 다른 일터로 옮길 수 있도록 지침을 수정했습니다. 자, 이제 성범죄 피해를 입은 이주노동자가 고용노동부 고용센터에 피해를 접수한 뒤 경찰에 고소하면 사업장을 바꿔 가해자와 분리될 수 있게 되긴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맹점이 있다고 합니다. 사업장을 바꿀 때, 소송 결과에 따라 강제 퇴거될 수 있다는 점을 노동자에게 사전 경고하도록 정부 지침을 만든 게 독소로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증거 부족 등 이유로 가해자의 혐의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강제 퇴거까지 당할 위험을 안고 경찰에 신고하거나, 범죄를 당해도 여전히 감내해야 하는 현실이라는 것이죠. 최정규 변호사는 “일선에서는 혐의 인정이 안 되면 출국한다는 각서까지 받고 있는 실정”이라고 했습니다. 허위 신고를 막기 위해 만든 지침인 것이냐는 질문에 최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업장을 옮기는 데 걸리는 기간 동안 돈도 못 벌고, 새로 옮기는 사업장 역시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선택하는 게 아니라 임의 배정을 받는 방식인데, 돈 벌러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이 왜 그걸 감수하고 거짓 신고를 하겠습니까?” 여전히 고용주 쪽에 무게추가 기울어진 지침 탓에 이주노동자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는 겁니다. 이런 제도를 통해 이주 가사근로자가 들어옵니다. 만에 하나, 이런 일이 주변에 동료들이 있는 농촌이나 제조업 현장보다 더 은밀하고 폐쇄적인 가정 내에서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외국인 가사근로자들은 스스로를 보호할 충분한 방어책을 가질 수 있을까요? 자신을 파견한 서비스 제공기관에 피해 사실을 알리는 등 적극적인 대응에 나설 제도적 보호막이 있을까요? '갑질 피해' 입어도 이주 가사근로자는 보호 대상 아냐 이들이 갑질 피해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란 점도 우려스러운 대목입니다.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서 가사와 아이 돌봄을 맡게 되는 가사근로자 일의 특성상 업무의 범위를 무 자르듯 정확하게 정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거기에 상대가 언어가 서툰 이주여성노동자라면 선을 넘는 요구와 갑질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고 단언할 수 없죠. 그러나 앞서 언급한 장관 고시(‘외국인근로자의 책임이 아닌 사업장변경 사유’)에는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괴롭힘이 포함 돼 있지 않습니다. 이주노동자가 필요한 일자리는 대체로 5인 미만 사업장이 많을 테니 애초에 포함시킬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일 텐데요. 때문에 외국인 가사근로자가 심한 갑질을 당했을 때 사업장을 바꿔달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지침에 따르려면 갑질로 사업장을 바꿀 때는 반드시 고용주가 동의를 해줘야 하는데 이것이 여의치 않아 결국 일을 그만두면 사업장 무단이탈이 되는 구조인 셈인 겁니다. 가사와 돌봄이란 가사근로자 업무의 특징과 최대 3번까지만 사업장을 바꿀 수 있도록 한 고용허가제가 본질적으로 ‘미스 매치’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가사근로는 고용주와 피고용인 간 개인적 성향과 스타일이 잘 맞아야 하는 업무의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여러 차례 사업장을 바꾸는 게 되는 불가피한 부분도 있다는 것이죠. 조영관 변호사는 “고용주 마음에 들지 않아 이주노동자를 해고할 수도 있는데 이때 고용주 사유로 계약을 해지하면 다시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며 “때문에 실제로 농촌이나 제조업 현장에서도 고용주가 원해 계약을 해지하더라도 노동자와 합의 해지인 것처럼 유도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습니다. 갑질을 당해도 참거나, 고용주가 나가 달라고 하면 3회까지 손가락 접어 카운트 다운을 하거나, 이게 마지막(3회 차)이라면 더는 고용주 눈 밖에 나지 않도록 눈칫밥을 먹거나... 정부가 주선한 일자리로 합법적으로 일하러 들어온 건데, 존엄을 지키며 일하기에 참으로 어려운 환경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고용주의 선의에 기댈 수밖에요. 이런 이유로 사업장 변경 횟수 제한을 둔 E-9 제도는 그 자체로, UN 자유권 규약과 ILO 강제노동 금지 원칙에 위배된다는 국제사회 비판에 오랜 기간 직면해 있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비용까지 더 낮추게 된다면 만약 계류돼 있는 조정훈 의원의 법안이 통과돼서 최저임금도 안 되는 1백만 원 대 돈으로 이들을 고용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현장에서 오랜 기간 이주 노동자들을 법률 지원해 온 조영관 변호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돈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사업장으로 이탈할 가능성이 커지겠죠. 똑같이 일하고도 돈을 더 주는 곳이 눈에 보일 테니까요. 그렇게 되면 정부에선 이탈하지 못하게 인권 침해적인 수단을 동원하게 될 겁니다. 여권을 압수해 둔다든가, 이탈할 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추천인들의 신원보증을 세우게 한다든가... 음으로, 양으로 비인간적 제도들이 생겨날 것이란 말이죠. 그동안 여러 차례 다른 종류의 이주 노동 비자에서도 목격했던 일입니다.” 돌봄 노동의 외주화, 국내 가사근로자 처우 악화 등 외국인 가사근로자 도입 문제를 둘러싼 여러 쟁점들이 있겠지만, 오늘은 철저하게 외국인 노동자의 입장에서 제도의 위험성을 살펴봤습니다. 물론 선의를 가진 고용주가 대부분일 것이나, 존엄하게 일할 권리를 누군가의 선의에 기대야만 실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틀린 제도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출생률을 높이기 위한 명목이라는 이 외국인 가사근로자 정책, 출생률이 올라간다는 근거도 없다는 게 중론입니다.(외국인 가사근로자를 앞서 도입한 홍콩과 대만 등도 합계출산율이 계속 떨어져 한 명 미만입니다.) 출생률을 높이기 위한 다른 본질적 대안을 찾기보다, 디테일에 대한 고민 없이 무턱대고 도입부터 하고 본다면, 이 제도로 들어온 가사근로자 중 일부는 반드시 예견된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가 겪게 될 희생을 감수하고 세운 ‘일-가정 양립’이란 탑은 모래알처럼 무너져 내릴 것이 자명해 보이고요. 디자인 : 김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