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이현정 기자입니다.
비주류란 이유로, 마이크를 가지지 못했던 사람들의 스피커가 되는 저널리즘. 부모와 떨어져 아동양육시설이나 공동생활가정(그룹홈)에서 자라다가 만 18세가 돼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자립준비청년은 해마다 2천500명 정도 됩니다. 가진 것도, 의지할 곳도 없는 이들의 홀로서기는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한 몸부림'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자립준비청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면서, 지원은 조금씩 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올해 1명을 포함해 지난 5년간 22명의 아까운 청춘이 자립을 시작한 지 5년도 안 돼 스스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동복지시설 퇴소 후 5년이 지난, 즉 자립준비기간이 끝난 청년들의 현황은 파악조차 되지 않습니다.) '자살 고위험군'인데 아무도 몰랐다 지난해 9월에도 또 한 명의 자립준비청년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숨진 A 씨가 불과 넉 달 전, 자립지원전담기관(이하 지원기관)과의 정기 상담에서 전한 근황은 이렇습니다. "일을 하면서 지내고 있다. 그래서 현재 경제적 어려움은 없고, 대출금이 있긴 한데 스스로 해결이 가능하다. 진학을 계획하고 있다." 유서조차 남기지 않았기에, 그가 짧은 생을 마감한 이유를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취재를 해보니 지난해 7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정부가 관리하는 위기발굴시스템상 A 씨가 '자살 고위험군'으로 분류된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자살 고위험군'은 자살이나 자해를 시도해 병원을 찾은 경험이 있거나 관련 기관 상담에서 위기 징후가 포착됐을 때 분류된다는 걸 고려하면, 이 무렵 A 씨가 정신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걸로 추정됩니다.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린 그를 진작 도울 방법은 없었던 걸까요. 지원기관은 추후 상담에서 A 씨와 진학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계획이었습니다. 정작 그가 자살 고위험군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정부 시스템상 A 씨의 기록을 공유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잘못 적힌 전화번호만 아니었어도" 2023년의 마지막 날, 짧은 생을 마감한 B 씨. 그는 2020년 그룹홈에서 퇴소한 후 대학을 다니던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학업에 대한 의지가 매우 강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학교를 휴학해야 했습니다. 그룹홈에서부터 겪어온 우울증이 발목을 잡은 겁니다. 지난해 여름, 지원기관의 도움을 받아 정신과 치료도 받았지만 끝내 사고를 막지 못했습니다. ○○자립지원전담기관 관계자 B 씨와는 라포 형성을 꽤 했어요. 저희가 집에도 찾아가고, 근처에 가서 만나고요. 심리 상담을 받을 수 있게 지원하고, 정서적인 지지도 해주고, 또 교육적인 욕구가 컸기 때문에 교육비도 지원해 줬어요. 병원도 같이 갔고요. 전화로 물어보고 카톡도 보내지만 약을 진짜 복용했는지 확인할 수가 없어요. 같이 사는 것도 아니고, 너무 어려워요. 하루가 멀다 하고 연락을 주고받으며 정서적 유대를 쌓던 B 씨의 죽음은 지원기관 담당자에게도 한동안 심리 상담이 필요할 만큼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B 씨를 좀 더 일찍 치료했더라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도 있습니다. 지난 2022년 지원기관이 관할 지자체에서 B 씨의 정보를 넘겨받았을 때, 전화번호가 잘못 기재된 탓에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합니다. 수소문 끝에 우연히 B 씨와 접촉할 수 있었고, 어렵사리 첫 상담을 한 게 지난해 여름의 일입니다. ▷ 관련 기사 <상담 땐 "잘 지낸다"더니…홀로서기 나선 청년들의 비극> (SBS 8뉴스, 2024.10.19.) 자립지원 확대 약속했지만... 2021년 7월, 정부는 자립지원전담기관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전담 인력을 배치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보호종료아동' 대신 '자립준비청년'으로 용어도 바꿨는데, 아동복지시설을 퇴소하더라도 '보호가 끝난' 게 아니라 '홀로서기 연습을 돕겠다'는 점에서 중요한 인식의 변화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보완할 점이 많습니다. 지원기관이 문을 연 지 2년이 넘었지만 지원 대상인 청년들의 정보가 부실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자립지원전담기관 관계자 자립준비청년들이 "저 옛날에 정신과 약 먹었어요"라고 얘기를 안 하면, 조현병이 있는지 약을 먹었는지 아무것도 몰라요. 아동복지시설에 전화해서 물어보면 어떤 곳은 말해 주지만, 어떤 곳은 그 친구한테 혹시 피해가 갈까 봐 숨기세요. △△자립지원전담기관 관계자 저희 기관의 입지가 그런 것 같아요. 저희는 이 친구들을 보호했던 시설이 아니고, 성인이 돼서 만났기 때문에 아무런 법적 권한이 없잖아요. 저희가 전산망이 있어서 해당 자립준비청년에게 '이러이러한 과거력이 있다'는 걸 살펴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자립준비청년이 사망하고 자살로 결론이 나도, 경찰에 물으면 저희에게는 안 알려 주세요. 돌아 돌아서 파악한 걸 적어 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진정한 자립을 위해선, 어린아이가 청년이 될 때까지 생애 과정을 연속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처럼 성장 과정 따로, 자립 과정 따로 관리하는 방식으로는 한 사람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더 많은 청년을 지킬 수 있게 지난 2014년 질병과 실직 등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던 일가족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송파 세 모녀 사건' 이후, 정부는 위기가구 발굴에 힘쓰고 있습니다. 보건복지부는 각종 요금 체납같이 위기 징후를 포착하는 데 도움이 되는 수집 정보를 45종까지 확대했습니다. 위기 정보가 중첩되면 해당 가정을 밀착 관리하는 식입니다. 이런 정부의 위기발굴시스템은 자립준비청년의 위기도 알아채고 있을까요. 취재를 해보니 지난 5년간 세상을 떠난 자립준비청년 22명 중 10명만 생전에 포착된 위기 정보(중복 포함)가 있었습니다. 소득이 일정 기준을 넘어서서 '기초생활보장·긴급복지 대상에 탈락'한 경우가 가장 많았고(8명), '주거 위기'(5명), '고용 위기'(3명), '통신비 체납', '건보료 체납'(각 2명) 순으로 많았습니다. 물론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이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고 단정하긴 어렵습니다. 세금 납부 등에 미숙한 청년들이 의도치 않게 체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한편 자립준비청년들의 높은 우울감은 이미 잘 알려진 문제이지만, '자살 고위험군'으로 분류된 건 A 씨를 포함해 2명뿐이었습니다. B 씨처럼 기록에 남지 않았지만 정신건강에 위기가 온 사례가 더 있을 가능성도 큽니다. 더 많은 청년을 지키기 위해선 이들이 자립하는 과정에서 위기가 닥쳤을 때 정부 시스템상에서 이를 포착할 수 있는 지표를 폭넓게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저임금·고강도 업무 환경 때문에 이직이 잦은 자립지원 인력의 처우를 개선해, 세심한 지원이 이뤄지도록 해야 합니다.
비주류란 이유로, 마이크를 가지지 못했던 사람들의 스피커가 되는 저널리즘. 한여름 대중교통을 타고 베이비박스를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가파른 언덕을 등산하듯 10분쯤 걸어 올라가야 했습니다. 베이비박스가 있는 위기영아보호상담지원센터에 도착해 뒤를 돌아보니 이 까마득한 오르막길을 성치 못한 몸으로 올라왔을 임산부들이 떠올랐습니다. 2009년 겨울 문을 연 뒤 지금까지, 그렇게 2천 명 넘는 아기가 엄마 품을 떠나 이곳에 놓였습니다. "더 이상 굴비상자에서 발견되는 아기가 없도록" 이종락 목사가 처음 베이비박스를 만든 건, 누군가 교회 앞에 두고 간 아기를 발견한 일이 계기가 됐습니다. 아기가 놓인 굴비상자를 길고양이가 긁어대는 걸 보고, 아기를 두고 가더라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튼튼한 상자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쌍둥이가 포개져 있는 걸 보고 더 넓은 지금의 상자로 바꿨습니다. 베이비박스가 유기를 손쉽게 만든다는 비판도 있지만, 절박한 사정의 산모에겐 유일하게 도움을 요청할 곳이기도 합니다. 베이비박스의 바깥쪽 문이 열리면 센터에는 벨이 울립니다. 센터 직원이 안쪽 문을 열어 아기를 꺼내는 사이, 다른 직원은 서둘러 건물 밖으로 뛰어나갑니다. 두고 간 사람을 붙잡지 않으면 아기는 영영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사정으로 이곳에 왔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황민숙 주사랑공동체 위기영아보호상담지원센터장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상담받고 가세요" 그러면서 베이비룸으로 모시고 가거든요. "얼마나 힘드셨어요. 아기 잘 지켜줘서 감사합니다" 하면 엄청 울어요. 그동안 쌓였던 게 눈물로 나오는 거죠. 임신 사실을 주변 사람들한테도 말 못 하고 혼자 고민했던 거잖아요. 누구한테도 지지 한 번 못 받아보고요. 센터의 작은 상담실에는 2명이 마주앉을 수 있는 1인용 회색 소파가 있습니다. 소파에는 까만 방석을 두고 앉습니다. 집에서, 또는 병원 밖 어딘가에서 아기를 낳자마자 후처리도 하지 못한 산모가 피를 쏟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태반이 그대로 달려있는 채로 아기를 안고 오기도 합니다. 센터에서 확인한 이런 병원 밖 출산이 올해에만 8건 있었습니다. 산모와 신생아에게는 너무 가혹한 일입니다. 여기까지 오기 전 지난 열 달 동안 이들을 도울 방법은 정말 없었던 걸까요. "유기가 아니라 지키기 위해서 오는 거예요" 아기 엄마들이 남기고 간 편지에는 이런 선택을 하기까지 고민과 좌절이 묻어납니다. 꼭 돈을 벌어 찾으러 오겠다고 약속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다시 만나지 못할 아기에게 용서를 구하는 내용입니다. 황민숙 주사랑공동체 위기영아보호상담지원센터장 2019년에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 헌법 불합치 판결이 나고, 국회에서 법을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 손 놓고 있는 상황이잖아요. 낙태는 합법도 아니고 불법도 아니고, 부르는 게 값이에요. 돈이 없는 분들은 낙태를 생각해서 병원에 가더라도 비용이 비싸고, 또 초음파를 보고 아기 심장 소리 듣거든요. 그래서 지방에서부터 베이비박스를 찾아오는 거예요. 사람들은 자꾸 '유기'라고 얘기하는데 엄마들은 아기를 지키기 위해서 오는 거거든요. 유기할 것 같으면 얼마나 주변에 할 데가 많아요. 그래도 여기에 오면 아기 생명은 살리고, 어딘가 입양을 가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고 오는 거죠. 센터에선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임산부를 3년간 지원하고 있습니다. 한 달에 많으면 150가정에 두 차례 기저귀, 분유, 옷 등 육아용품을 보내줍니다. 필요하면 산전 진료와 출산도 돕습니다. 정부 지자체와 달리 지원 대상을 선별하지 않고 상담을 마치면 곧바로 지원하기 때문에 외국인 위기임산부들의 요청도 많다고 합니다. 이렇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면, 아기를 두고 가려던 10명 중 3명이 직접 양육하기로 마음을 바꾼다고 합니다. 취재 당시 센터에는 8월에 들어온 신생아 6명이 머물고 있었는데, 그중 2명이 조만간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습니다. 뿌리를 알 수 없다는 한계 베이비박스에 들어온 아기는 2013년 252명으로 가장 많았다가 이후 조금씩 줄어 최근에는 100명대로 떨어졌습니다. 지난해에는 79명으로 유독 줄었는데, 정부의 전수조사 영향이 컸습니다. 지난해 6월 수원에서 냉장고에 영아를 유기한 사건이 뒤늦게 드러난 뒤, 경찰은 출생 신고가 되지 않은 아동에 대해 대대적인 수사에 나섰습니다. 그러자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두고 오면 처벌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임산부들의 발길이 끊겼습니다. 수원 사건을 계기로 올해 7월부터 '보호출산제'가 시행되면서, 이제 '긴급전화 1308'로 상담을 받으면 병원에서 익명으로 출산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집에서 아기를 낳고, 베이비박스를 찾아오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하지만 제도 시행 이후 베이비박스로 오는 아기는 8월 말까지 12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4명보다 늘었습니다. 시행 초기라 아직 제도에 대해 잘 모르는 임산부가 많은 걸로 보입니다. [관련 기사] 너무나 어렵게 찾은 친모의 첫 말은 "소송 취하해달라"였다... '그림자 아이'까지 보호하려면 ('더 스피커' 2024.07.25.) 베이비박스에 들어온 아기는 길게는 6개월까지 센터에 머물다가 아동양육시설로 보내지거나 입양을 가게 됩니다. 보호출산제를 이용하더라도 아기가 가게 될 곳은 같지만, 하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두고 도망치거나 상담을 거부하면 아기는 영영 자신의 뿌리를 알 길이 없다는 겁니다. 이런 이유로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2019년 우리 정부에 베이비박스 금지를 권고했습니다. 그래서 베이비박스는 정부 미인가 시설입니다. 위기임산부의 최후의 수단인 보호출산제가 갓 시행된 만큼, 당분간은 베이비박스가 사각지대를 메울 걸로 보입니다. 생명의 소중함만큼이나 고민해야 할 것 정부는 위기임산부에게 상담을 통해 필요한 지원 정보를 제공하고, 검진 및 출산 비용 등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나이와 소득에 관계없이 한부모가족시설 입소도 가능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대책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 보호출산제의 원래 취지는 위기임산부가 국가 상담을 받고 양육을 결정하도록 조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한부모가 된 다음에 지원해 줄게'가 아니라 '위기임산부 때부터 지원해 줄게'여야 돼요. 임신 6개월이 지나면 이때부터 주거, 생계비, 의료비 등에 대한 지원이 있어야 '아기를 낳고도 잘 키울 수 있겠구나'라는 확신을 가질 겁니다. 이런 제도가 미비한 상황에서 아이를 안전하게 출산하는 것에만 목적을 둔다면 보호출산제를 도입하면서 우려했던, '아기를 유기하기 쉬운 제도를 만든 것 아니냐' 하는 부분이 현실화될 수 있는 거죠. [관련 기사] 5년 동안 단 1만 원 인상... 빈곤에 떠밀리는 '한부모 아이' ('더 스피커' 2024.08.01.) 베이비박스를 맡기 전, 미혼모시설에도 근무했다는 황 센터장은 취재를 마칠 무렵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기 아빠는 어디에 있을까요? 엄마 혼자 아기를 만든 게 아니잖아요. 사회는 여성에게만 책임을 전가하고 질타해요."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두고 가는 사람 중엔 어린 커플도, 홀로 아기를 떠맡은 아빠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갓 출산을 한 엄마들입니다. 임신과 출산 과정을 오롯이 맡아야 하는 여성은, 그래서 뜻하지 않은 임신일 때 가장 큰 고통을 받습니다. 여성단체들이 앞장서서 임신 중단권 보장과 한부모 지원 강화, 양육비 미지급 문제 해결을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생명의 소중함은 그 어떤 가치보다 중요합니다. 그런 생명을 지켜낸 임산부 역시 존중받아야 합니다. 적어도 사회·경제적인 외부의 이유로 생명을 포기하는 일이 없게 하려면, 가장 취약한 존재인 임산부와 아기의 짐을 사회가 나눠 져야 합니다.
지난달 구독자 수 1천만 명이 넘는 인기 유튜버 '쯔양'이 수년간 교제 폭력을 당했다고 고백한 뒤, 온라인에선 온갖 2차 피해를 낳는 발언이 쏟아졌습니다. 공개된 증거만으로도 그가 심각한 교제 폭력의 피해자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일부 누리꾼들은 확인되지 않은 과거 사생활을 들먹이며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했습니다. 황당하지만 성별에 기반한 '젠더 폭력' 사건에서 어김없이 벌어지는 일입니다. 젠더 폭력 사건에 어김없이 따라붙는 '2차 피해' 지난 2018년 고(故) 구하라 씨가 전 남자친구 최종범 씨의 교제 폭력을 폭로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 씨는 성관계 영상을 유포하겠다는 협박을 받았다며 최 씨를 경찰에 고소했는데, 잘 알려진 연예인에게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겁니다. 피해자인 구 씨는 해당 동영상을 둘러싼 대중들의 2차 가해에 고스란히 노출됐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난 2022년 일면식도 없는 남성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한 '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피해자는 한 20대 남성으로부터 지속적인 2차 가해를 당했습니다. 가해자는 지난 5월 성폭력처벌법 위반(통신매체이용음란), 협박,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는데, 그가 피해자에게 보낸 SNS 메시지 내용은 '자신을 만나면 맞아 죽을 것'이라는 위협이었습니다. 젠더 폭력 피해자의 행실을 문제 삼고, 피해자다움을 강요하고, 피해 사실 자체를 의심하는 공격은 과거에도 존재했습니다. 1964년 자신에게 강제로 입을 맞춘 남성의 혀를 물어 잘랐다는 이유로 사법당국과 언론, 이웃들로부터 각종 2차 피해를 당한 최말자 씨는 60년이 지난 지금도 재심을 통해 무죄를 다투고 있습니다. ▷ 관련 스프 글 : [더 스피커] 성폭력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성폭력은 지금도 있다 (2023. 8. 20.) 고질적인 '2차 피해'가 사회 문제로 부상한 건 2018년 '미투(#Me Too, 나도 당했다) 운동' 때입니다. 유명 정치인 등 각계 권력자들에 대한 폭로일수록, 폭로자에 대한 매서운 반격이 이어졌습니다. 문제는 재판에서 폭로 내용이 사실로 인정된 뒤에도 공격은 계속됐단 점입니다. 폭로자들은 온라인을 통해 무분별하게 퍼지는 비방과 신상 털기, 신변 위협에 떨어야 했습니다.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2차 가해로 거리에 나뒹구는 온갖 거짓들을 정리하고 평범한 노동자의 삶으로 정말 돌아가고 싶습니다. 제발 이제는 거짓의 비난에서 저를 놓아주십시오.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2019년 9월 9일,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유죄 확정 판결 후 피해자 김지은 씨 입장문 중에서)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2019년 9월 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안희정 전 충남지사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대법원은 이날 상고심에서 안 전 지사에게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불특정 다수의 공격 피해자를 비난하고, 사건을 은폐·축소하려는 시도 때문에 여성 폭력(*성별에 기반한 폭력 피해자의 대다수가 여성인 점 등을 고려해 이하 '젠더 폭력' 대신 '여성 폭력' 용어를 사용) 사건의 신고율은 매우 낮은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폭력을 끊기 위해 '2차 피해'를 처음으로 법률에 정의한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이 2018년 말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법은 여성 폭력의 피해자가 △ 수사·재판·보호 등 과정에서 입는 정신적·신체적·경제적 피해 △ 집단 따돌림, 폭행·폭언 등으로 인한 피해 △ 사용자로부터 당한 신분상의 불이익 조치나 인사 조치 등을 '2차 피해'로 정의했습니다. '여성에 대한 폭력 방지'와 '피해자 보호 지원'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명백히 한 만큼, 과거처럼 수사기관에서 2차 피해를 입는 등의 부조리는 줄어들 걸로 기대됩니다. 반면 온라인을 통한 불특정 다수의 2차 피해는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나아가 '사이버렉카(논쟁이 되는 사건에 몰려들어 자극적으로 영상을 제작하고 이득을 취하는 유튜버)'로 불리는 유튜버들에 의해 돈벌이로 진화했습니다. 공갈 등 혐의로 각각 구속기소된 유튜버 '구제역(본명 이준희)', '카라큘라(본명 이세욱)', '주작 감별사(본명 전국진)' 앞서 언급한 쯔양 사건에서 유튜버 구제역(본명 이준희)과 주작 감별사(본명 전국진) 등 '사이버렉카'들은 지난해 쯔양에게 "사생활 관련 의혹을 제보받았다"며 수천만 원을 갈취한 혐의로 최근 구속기소됐습니다. 검찰은 이들에 대해 "'사적 제재'를 내세워 특정인의 약점이나 사생활에 관한 콘텐츠를 제작해 유튜브에 유포하는 사이버렉카 활동을 하면서 구독자 증가에 따른 광고 수입 외에도 약점 폭로와 맞바꾼 금품수수 등 공갈 범행을 수익 모델화한 약탈적 범죄를 자행했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성명을 내고 "여성들의 고통을 이용해 남성의 얼굴을 한 유튜버들이 돈을 벌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조회수와 구독자 수가 증가할수록 금전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유튜브 플랫폼 환경에서 사이버렉카는 여성의 피해가 '돈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새로운 일은 아니다. 성폭력 피해를 폭력으로 이해하고 사회적 대응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 방법을 자극적으로 묘사하며 소비하는 문화는 이미 만연했다. (중략) 남성연대가 여성을 착취해서 수익을 얻는다는, 웹하드카르텔과 N번방에서 보아온 구조가 사이버렉카와 유튜브를 통해 되풀이되는 셈이다. 수익으로 직결되는 조회수 올리기에 큰 기여를 하는 혐오, 차별 콘텐츠를 방조하는 유튜브 플랫폼도 이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2024년 7월 23일,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명 중에서) 폭력을 끊어내려면 유튜브 코리아는 사이버렉카들이 쯔양을 협박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이들의 수익 창출을 곧바로 중지했습니다. 유튜브의 정책은 타인에게 악의적으로 해를 입히려고 했거나, 실질적으로 해를 입힌 경우 콘텐츠 제작자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습니다. 이번 사건이 국민적 관심을 모은 만큼 빠른 조치가 이뤄졌지만, 유튜브를 비롯한 온라인 플랫폼에는 여전히 2차 피해 콘텐츠가 넘쳐납니다.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는 콘텐츠는 왜곡된 인식을 만들고 젠더 폭력을 부추깁니다. 폭력의 피해는 자극적으로 소비되며 또 다른 피해를 낳습니다. 이런 폭력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선 플랫폼 사업자의 책임을 강하게 물어야 합니다. 플랫폼이 인권 침해를 막기 위한 운영 정책을 만들어 안전한 공간을 제공하고, 피해물 삭제를 비롯해 수사 협조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합니다.
지난 6일 필리핀 여성 100명이 우리나라에 입국했습니다. 서울시와 고용노동부가 처음 도입한 ‘외국인 가사관리사’들입니다. 이들은 내년 2월 말까지 서울시내 12살 이하 자녀가 있거나 출산을 앞둔 신청 가정에서 ‘아이 돌봄과 관련된 가사노동’을 하게 됩니다. 총 751개 가정이 신청했는데, 첫 시범사업임을 감안하면 흥행에는 성공한 셈입니다. 무슨 상황인데?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은 엄격한 자격 요건을 갖췄습니다. 모두 24~38세로 현지 직업훈련원에서 780시간 이상의 교육을 이수하고 정부 인증 ‘돌봄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이번 선발 과정에서 한국어능력 시험·건강검진·체력검사 등을 거쳤고, 약물 중독·전과 여부도 확인했습니다. 이들은 입국 후 한 달간 교육을 거친 뒤 각 가정에 투입됩니다. 출·퇴근 편의를 위해 서울 역삼역 인근 공동 숙소(1~2인실)에서 지내며, 월 40만 원 안팎의 주거비를 포함한 생활비는 본인이 부담합니다. 가사관리사는 서울시와 고용노동부가 선정한 시범사업 서비스 제공기관 2곳을 통해 각 가정과 맺어집니다. 이용 가정은 한부모·다자녀·맞벌이·임신부 등에 우선순위를 두고, 자녀연령과 이용기간 등을 고려해 이달 중 최종 선정됩니다. 각 가정은 서비스 이용 시간과 횟수(하루 4·6·8시간, 주 1~5회)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용 요금은 최저임금과 4대 보험을 포함해 시간당 1만 3700원 꼴로, 시세(시간당 1만 5000원 이상)보다 다소 저렴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주 5일 기준으로 하루 4시간씩 서비스를 이용하면 월 119만 원, 하루 8시간씩은 월 238만 원을 내야 합니다. 한국과 필리핀 정부가 협의한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가사관리사의 업무는 ‘아동이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당 가족의 아동 및 임신부에게 돌봄을 제공’하는 겁니다. 옷 입히기, 목욕, 청소, 음식 준비, 요리, 음식 먹이기 등이 포함됩니다. 필리핀 정부가 사전에 승인한 직무설명서에 명시된 업무를 넘지 않는 한에서, 동거가족을 위해 부수적이며 가벼운 가사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설명하면 사업 성패를 논하기는 이르지만, ‘업무범위가 모호하다’는 점에서 시작부터 우려가 나옵니다. 서비스 제공기관 한 곳의 공고를 보면 필리핀 가사관리사가 쓰레기 배출, 어른 음식 조리, 손걸레질, 수납 정리 등은 할 수 없다고 돼 있습니다. 하지만 육아 관련 범위에서 동거가족에 대한 가사 업무를 ‘부수적으로’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부수 업무인지 현장의 혼란이 예상됩니다. 필리핀 가사관리사의 임금이 기존의 국내 가사관리사와 비교해 큰 차이가 없다는 불만도 있습니다. 영어가 유창하고 한국어 소통이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문화적 차이가 있는 외국인을 굳이 선택할 유인이 적다는 겁니다. 앞서 필리핀 등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도입한 홍콩이나 싱가포르는 최저임금 적용을 달리 하거나 제외해, 월 100만 원도 안 되는 비용으로 서비스 이용이 가능합니다. 한 걸음 더 ‘외국인 가사관리사’ 도입은 지난 2022년 오세훈 서울시장의 제안으로 시작됐습니다. 당시 오 시장은 “국무회의에서 저출생 문제 대책으로, 경제적 부담이 적은 ‘외국인 육아도우미’ 도입을 건의했다”고 밝혔습니다. 한국에서 고용하면 월 200만~300만 원이 들지만, 싱가포르의 외국인 가사관리사는 월 38만~76만 원 수준이어서 경제적 부담이 적다는 겁니다. 이후 조정훈 의원이 외국인 가사관리사에게 최저임금을 적용하지 않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해, 차별 논란이 거셌습니다. 고용노동부는 서울시와 고용허가제(체류자격 'E-9')를 통한 외국인 가사인력 도입 시범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외국 인력에게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 최저임금을 적용해, 내국인과 동일한 노동법의 보호를 받도록 했습니다. 믿을 만한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가사인력 자격증 제도를 운영하는 필리핀을 우선 검토했습니다. 당초 시범사업은 늦어도 지난해 말 시행될 것으로 예고됐지만, 필리핀 정부와의 협의가 지연되면서 이번에 시행된 겁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 고용노동부는 오는 9월 필리핀 가사관리사가 업무를 시작하는 대로 사업 평가를 거쳐, 연내에 본 사업 시행 여부를 결정한다는 계획입니다. 가사관리사의 체류기간(‘E-9’ 비자)은 4년 10개월로 한 차례 연장을 거쳐 최장 9년 8개월까지 한국에 머물 수 있습니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내년 상반기까지 외국인 가사관리사 도입 규모를 1천200명까지 늘리는 방안을 내놨습니다. 우리나라는 내국인 가사·육아인력의 경우 취업자 수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고, 92.3%가 50대 이상(2022년 기준)으로 고령화가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번 시범사업은 저출생·고령화로 돌봄 노동의 수요가 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새로운 시도입니다. 외국인이 대체하는 돌봄 노동이 ‘육아 부담으로 인한 저출생 문제’와 ‘여성의 경력단절’을 해결하는 하나의 해법이 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립니다.
혼자 아이를 낳아 키우는 '미혼모(부)'가 받는 정부 지원금이 얼마인지 아시나요? 한 달에 '21만 원'입니다. 요즘 물가를 생각하면 넉넉하다고 할 수 없는 금액입니다. 이마저도 5년 만에 '1만 원'이 오른 겁니다. 2016년까지 월 10만 원이던 지원금은 2017년 12만 원, 2018년 13만 원, 2019년 20만 원으로 조금씩 올랐습니다. 처음엔 금액도 적었지만 지원 기준 연령도 낮아서, 지금처럼 자녀가 만 18세가 될 때까지 주는 건 2019년부터입니다. 이런 지원에는 공통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미혼모(부)가 '저소득'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녀 1명을 키우는 경우 월 소득이 232만 원 이하(중위소득 63%)여야 합니다. "우린 수급자에 머물러야 하나요" 9년째 홀로 아이를 키우고 있는 미혼모 이다해 씨도 매달 21만 원의 지원금을 받고 있습니다. 정식 명칭은 '한부모가족 아동양육비'입니다. 팍팍한 살림에 도움이 된 건 분명하지만, 더디게 늘어난 지원이 체감되진 않는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아이가 만 8세가 지나면서, 월 10만 원씩 나오던 아동수당(한부모가정과 무관하게 모든 아동에게 지급)이 끊긴 게 타격이 큽니다. 누군가는 "미혼모(부)에 대한 지원이 충분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각종 지원 제도를 이용하고자 미혼모인 척, 혼인 신고를 꺼리는 사례도 있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다해 씨는 언제까지고 지원을 받기만 하는 저소득층에 머물고 싶지 않습니다. 수급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좀 더 벌이가 나은 일자리를 찾아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다해 씨 힘들면 한 번씩 '이런 고생을 하면서 왜 아이를 키우고 있을까' 생각하죠. 그래도 아이가 있으니까 이만큼 성장하려고 발버둥 치기도 하고, '어떻게든 발판을 딛고 올라가야지', '이 순간도 지나가겠지' 하면서 버티고 있거든요. 뭐든 내가 가지려고 하면 신청해서 선발돼야 하고, 그러니까 '수급자'라는 자격을 잃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는 상황 같아요. 결국 '너는 다시 (저소득층으로) 내려와야 돼'라는 느낌을 받아요. 정부가 '이 지원 금액으로 2인이 버티세요'라고 하기보단 좀 더 소득을 벌 수 있도록, 돈을 모을 수 있도록 유예 기간을 주면 버티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의 지원 방식은 최소한의 생계만을 유지할 수 있게 합니다. 다해 씨의 월 소득이 232만 원을 넘는 순간 지원받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당장 소득을 확 늘리기도 어렵습니다. 아이를 키우느라 학업이나 경력이 단절되기 일쑤인 미혼모에게 급여가 넉넉하면서 근무 시간이 짧은 ‘좋은 직장’은 많지 않습니다. 맞벌이할 수도, 양육 부담을 나눌 수도 없는 한부모가정은 경제적 어려움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부모가족 지원’이라는 사회보장제도가 작동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갈 길이 멉니다. 지난 2021년 기준, 우리나라 한부모가족의 아동 빈곤율은 47.7%로 OECD 회원국들 가운데 네 번째로 높습니다. 가장 빈곤율이 낮은 덴마크의 5배입니다. 더 심각한 건 부모와 함께 사는 아동과의 격차입니다. 한부모가정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4.5배 더 빈곤에 노출됩니다. 주: 성인 연령은 18~64세, 아동 연령은 0~17세임. 빈곤선은 각국의 균등화 처분가능소득의 중위소득 50%를 기준으로 함. 자료: OECD, 「OECD Family Database: CO2.2: Child Poverty」, 2021. 임신기부터 현금 지원하는 덴마크 지난달 아동권리보장원에서 열린 '위기임산부 공적 지원 체계 강화 방안 모색을 위한 정책토론회'에서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외국의 한부모가족 지원 제도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 작년에 여성가족부 국정감사 질의 중 하나가 '한부모가족 아동 양육비 지원이 너무 적은 것 아니냐, 좀 인상하라'는 거였어요. 여성가족부 답변이 '20만 원에서 21만 원으로 1만 원 올렸다, 앞으로 계속 협의하겠다'라는 거예요. 덴마크나 노르웨이 같은 나라는 현금 지원을 많이 해주고 있어요. 덴마크는 임신 12주가 경과된, 그러니까 임신기부터 지원하고 있고 소득도 한 달에 242만 원으로 상당합니다. 우리나라 한부모 지원 제도는 한부모가 된 이후부터, 아기를 낳고 나서부터 지원하겠다는 거고요. 노르웨이에서 직업이 없다면 한 달에 278만 원을 지급하고요. 호주는 부모급여가 한 달에 184만 원, 가족수당이 54만 원 정도로 총 238만 원을 한부모가 받을 수 있고, 여기에다 의약품비·통신비·교육비·교통비·주거 지원금·13세 미만의 자녀에 대해 보육시설 이용 요금을 제공하고 있어요. 이러면 키울 수 있겠죠. 여성가족부에 한부모가족 지원이 부족한 것 아닌지 묻자 '아동양육비 지원 대상을 계속 확대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2022년 9월까지 기준중위소득 52%였던 것을 58%(2022년 10월), 60%(2023년), 63%(2024년)로 확대했다는 겁니다. 또 양육 부담을 덜고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 단가를 높이고, 지원 기준을 완화해 나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여성가족부는 다른 나라의 한부모가족 지원 금액에는 우리나라의 부모급여(영아수당), 아동수당 등 각종 수당이 포함된 것으로 봐야 하므로 단순 비교는 어렵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해당 수당을 감안하더라도 지원 규모에 차이가 큽니다. '부모급여'는 자녀 출산과 양육으로 손실되는 소득을 보전하고 영아기 돌봄을 두텁게 지원하기 위해 지난해 도입된 보편수당으로, 0세와 1세에 각각 월 100만 원, 50만 원씩(올해 인상된 기준) 지원합니다. '아동수당'은 만 8세 미만 모든 아동에게 월 10만 원씩 지급합니다. 기로에 선 위기임산부 미혼모에 대한 지원에 새삼 주목하는 이유는, 최근 '보호출산제'가 시행됐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아동의 출생 신고 여부를 확인하도록 하는 '출생통보제'가 도입되면서, 이를 피하려 병원 밖 출산을 감수하려는 위기임산부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만든 게 '보호출산제'입니다. 문제는 익명 출산을 가능케 한 '보호출산제'가 손쉬운 아동 유기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겁니다. 지금처럼 미혼모와 그 자녀가 빈곤의 수렁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면, 보호출산제를 통해 자녀를 포기하는 안타까운 사례가 늘 수 있습니다. '보호출산제'의 진짜 목적은 위기임산부에게 상담을 통해 자녀를 직접 양육할 수 있는 각종 지원 제도를 안내하고 이를 독려하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읍니다. 하지만 지금의 지원 제도가 양육할 능력과 여건이 되지 않는 위기임산부에게 와닿을 만한지, 태어날 아동의 건강한 성장을 담보할 수 있는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모든 책임을 홀로 져야 하는 위기임산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양육비 문제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지난 2022년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한부모가족 실태 조사'에 따르면, 만 18세 이하 자녀를 양육하는 한부모 10명 중 8명은 비양육자로부터 양육비를 못 받고 있습니다. 미지급된 양육비를 국가가 먼저 주고, 비양육자로부터 나중에 받아내는 '양육비 선지급제' 등이 거론되는데 관련 법안은 지난 국회에서 자동 폐기된 상태입니다. 지난 2019년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헌법 불합치 판결을 내린 이후 정부와 국회가 손 놓고 있는 임신중지권도 조속한 입법이 필요합니다. 디자인: 안준석
지난 몇 년간 코로나19 유행으로 모두가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청년층의 우울과 자살 문제는 특히 도드라졌습니다. 이는 수치로도 증명됩니다. 지난해 말, 정부는 청년들의 정신건강 문제에 집중하는 내용을 담은 정책을 발표했습니다. 그날 저는 서울의 한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에서 30대 여성 환자 A 씨를 만났는데, 그는 치료 과정에서 느낀 어려움과 아쉬움을 진솔하게 털어놨습니다. 정부 정책에는 미처 담기지 않은 내용이 많았습니다. <더 스피커>는 A 씨의 사례를 통해 우리 사회가 '청년들의 정신건강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병원에 가야 하는데 돈 때문에..." A 씨가 우울증 진단을 받은 건 20대 중반의 일이었습니다. 우울한 감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어느 날, '나는 쓸모가 없다. 사라지고 싶다. 죽고 싶다'라는 생각에까지 미치자 그는 스스로 병원을 찾았습니다. 현명한 결단이었지만,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약을 챙겨 먹으며 몇 년을 지내다가, 자살 시도로 한 달 넘게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습니다. 자해와 자살 시도가 빈번해지면서 A 씨는 경계성 인격장애 진단까지 받았습니다. "약의 부작용이 있다 보니까, '약을 끊고 싶다' '병원을 그만 가고 싶다'라는 생각이 강해요. 지금은 관리해야 하는 병이라고 생각하고, 당뇨처럼 생각하고 계속 약을 병행하고 하지만 사실 불편하거든요. 약을 안 먹으면 활동이 안 되니까요." 치료에 대한 의지가 강하고, 주위의 지지를 받고 있는 A 씨조차도 머뭇거리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부담스러운 치료비 때문입니다. "입원하면 당장 나가고 싶어요, 돈 때문에. 너무 비싸요. 집중 치료를 하는 게 입원병동만한 데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엄두가 안 나요. 병동에서 만난 친구는 저처럼 경계성 장애여서 입·퇴원이 잦았는데, 자해를 하면 흥분도가 굉장히 높은 상태에서 응급실로 실려가거든요. 그 상황이 잦은 사람은 응급입원비가 부담이 돼요." 밤에 찾아오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더 위태롭습니다. A 씨는 그때마다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기보다 의료진을 찾아가 치료를 받는 게 효과적이란 사실을 알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저 스스로 119를 눌러서 '제가 지금 죽고 싶은 상황이라 상태가 안 좋으니 병원에 좀 데려가 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기존에 그 병원에서 외래진료를 받지 않았으면, 약 처방이 안 돼요. 약을 먹지 못한 상황에서 계속 대기하다가, 응급실이니까 피검사나 심전도 검사 같은 걸 필수로 하잖아요. 결국 아무것도 처치받지 못하고 비용만 10만 원 넘게 나와서, 나중에는 응급실도 안 가게 되죠." 팬데믹에 급증한 청년 자살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부동의 1위입니다. 삶의 만족도와 주관적 건강 상태는 최하위입니다. 특히 A 씨 같은 청년층의 정신건강 문제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대 우울증 환자 수는 2018년 9만 9,796명에서 2022년 19만 4,322명으로 2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국립중앙의료원과 중앙응급의료센터에 따르면, 2022년 전국 응급실 이용자의 0.56%는 자해·자살 시도자(4만 3,268건)였습니다. 이 중 46%가 10~20대로, 이들 세대의 자해·자살 시도는 최근 수년간 급증하는 추세입니다. 코로나19 유행으로 청년층의 정신건강은 사회적 상황에 취약하다는 사실이 극명히 드러났습니다. 팬데믹은 진정됐지만, 그 영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A 씨가 다니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에도 청년층 환자가 많습니다. 대부분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불면 등을 겪고 있습니다. "젊은 분들은 아무래도 취업 준비하면서 많이 와요. 취업을 해도 문제인 게, 사회초년생이다 보니까 '내가 잘하고 있는 게 맞나' 이런 생각도 많이 하고요. SNS가 발달해 있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스트레스받아서 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요즘에는 선택지가 너무 많고, 상황이 불확실하다 보니까 과거보다 더 사람을 힘들게 만들 수 있는 거죠.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고 느끼는 게, 회사에서 '여기 괜찮으니까 가봐라'라고 해서 같은 회사분들이 정신과에 같이 다니는 경우도 있어요." (허규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심각성을 인지한 정부는 최근 '20~34세 청년층의 정신건강검진 주기를 기존 10년에서 2년으로 단축해 조기에 개입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건강검진을 할 때 2년에 한 번씩 우울증·조현병·조울증 등에 대한 검사 문항을 추가해, 위험군으로 분류되면 심층 검사를 진행하는 방식입니다. 보건복지부는 청년층을 우선 대상으로 삼은 이유에 대해 "조울증·조현병 등 발병 시기가 20~30대이고, 조기 발견 시 적절한 치료를 거쳐 회복할 수 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더 취약한 청년들 전문가들은 지난 몇 년간 관찰된 청년들의 정신건강의 문제를 코로나19 유행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합니다. 독립·결혼·직업선택 같은 발달과업을 마주하는 청년기 특성에 더해 경제 불황과 취업난, 낮은 고용 지위, 상대적 박탈감 같은 다양한 사회적 요인이 원인으로 거론됩니다. 팬데믹 이후 여러 전문가들과 청년 자살에 대한 책을 쓴 김현수 서울시 자살예방센터장(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교수)은 최근 다른 나라에서도 청년 정신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말합니다. '1인 청년 가구'가 늘어난 점도 눈여겨봐야 합니다. 요샌 형제자매가 없는 경우가 많은 데다, 부모의 이혼이나 별거로 홀로 고립되는 청년이 많단 겁니다.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을 위한 우리의 정책은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사회적 문제라는 인식 앞서 언급한 A 씨는 오랜 정신과 치료로 일을 그만둔 상태였습니다. 상태가 조금 괜찮다 싶으면 몸이 아파 병원을 드나들어야 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은 A 씨를 더 힘들게 했습니다. "치료 내내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더라고요. 결국에는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로 계속 병원만 다니게 된 것 같아요." - 생계에 지장을 받으시나요? "많이 받죠. 그것 때문에 또 죽고 싶다고 생각하니까요. 경제활동을 할 수가 없으니 결국 부모님의 돈으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어요." '88만 원 세대', 'N포 세대', '수저 계급론' 같은 우울한 수식이 따라붙는 지금의 청년들에게 우울은 더 이상 개인의 일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사회·경제적 기반이 약한 이들에게 정신적 어려움은 곧 생존의 문제가 됩니다. 청년들이 건강한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디자인 : 권민재
2019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N번방' 등 텔레그램 대화방 성착취 사건 이후에도 디지털 성범죄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불법 촬영', '유포 협박' 같은 몇 가지 단어를 검색하면 매일같이 최신 기사가 쏟아집니다. "짧은 바지 또는 원피스를 입은 여성들에게 접근해 휴대전화로 치마 밑을 불법 촬영하고…" "교실에서 교사 신체 부위를 44차례에 걸쳐 촬영하고, 여교사 전용 화장실에 불법 카메라를 설치해…" "모델로 채용할 것처럼 속여 점차 노출 정도를 높인 사진을 요구하고, 모텔로 오라는 강요에 피해자가 거부하자 지인에게 노출 사진을 전송해…" "성관계하는 장면 등을 동의 없이 촬영하고 온라인에 게시한 데 이어 다른 이용자들에게 이를 내려받고 재배포하길 권유해…" "여학생들을 몰래 찍거나 SNS에서 사진을 다운받은 뒤 '딥페이크 봇'이 합성해 만든 신체 노출 사진을 친구들에게 전송하고…" 불법 촬영 피해는 그 자체로 수치스러운 경험이지만, 온라인에 유포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낳습니다. '완전한 삭제'가 힘든 디지털 성범죄의 특성은 피해자가 목소리를 내기 어렵게 만듭니다. 특정 사건이 회자되는 것만으로도 해당 불법 촬영물을 주고받으려는 시도가 늘기 때문입니다. <더 스피커>는 전면에 나서기 어려운 피해자들의 작은 목소리에 집중했습니다. 피해 사실을 부각하기보다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에 집중하기 위해, 특정 사건 피해 당사자가 아닌 수많은 피해자를 지원해 온 전문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난해에만 24만 5천여 건의 디지털 성범죄 영상을 삭제한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의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이하 디성센터) 강명숙 상담연계팀장입니다. 전 세계 사이트를 추적한다 Q. 어디까지가 '디지털 성범죄'인가요? A. 저희는 법적으로 처벌되는 걸 '디지털 성범죄'라고 명명하고 있어요. 디지털 기기를 이용해서 불법 촬영을 하거나, 그걸 유포, 합성·편집, 유포 협박, 시청·소지·저장하는 것까지 포괄합니다. 즉, 디지털 기기를 이용해서 사람의 신체를 촬영하거나 그 촬영물을 가지고 생산, 유통, 소비하는 것 자체가 다 '디지털 성범죄'입니다. Q. 뉴스에 나오는 사건들이 워낙 충격적이지만, 그외 일상에서도 디지털 성범죄가 많이 벌어지고 있죠? A. 예전에는 많은 분들이 '디지털 성범죄가 내 일상에 침투했다'라고 생각을 안 한 것 같아요. N번방 사건 이후 '나도 이런 범죄에 노출될 수 있다'라는 사회적 인식이 높아졌어요. 숙박업소를 가거나, 뭔가 촬영기기가 반짝거리는 걸 본 경험을 했을 때 '나도 혹시 피해에 노출된 게 아닐까' 하고 연락을 주는 분들이 있어요. 실제로 유포 협박을 당하거나, 친밀한 관계에서 불법 촬영 피해를 경험해 상담 요청을 하는 경우도 굉장히 많습니다. Q. 센터로 상담 요청이 오면, 유포된 불법 촬영물을 찾아내서 삭제까지 한다고요. 온라인에서 그런 촬영물은 어떻게 찾는 건가요? A. 기술적으로 찾아내는 방법이 있고, 숙련된 삭제 지원자들이 노하우를 바탕으로 삭제하는 방법이 있어요. 저희가 영상 DNA 분석 기술이 탑재된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는데, '피해 촬영물'과 온라인에 '유포된 촬영물'의 DNA를 분석해서 유포 여부를 검출해내는 게 기술적 조치에요. 그걸로 찾아낼 수 있는 건 극히 일부분이고요. 나머지는 삭제 담당자들이 각각의 사이트에 들어가서 유포가 됐는지 확인하고, '피해 촬영물'과 '유포물'을 비교합니다. Q. 영상 DNA란 게 뭔가요? 피해 영상 원본을 갖고 있어야 유포물과 DNA도 대조할 수 있겠네요? A. 사람의 몸에 DNA가 있는 것처럼 영상에도 고유한 값이 있어요. 그걸 '영상 DNA'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저희 피해 지원 기준 자체가 영상 확보가 원칙이에요. 피해자가 URL(사이트 내 피해 촬영물이 게시된 게시물 등의 구체적인 주소)을 주면, 저희가 어떤 방식으로든 영상 원본을 확보한 이후 지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피해자가 '남자친구 휴대전화에 내 촬영물이 있다'라고 하면, 경찰 신고 후 경찰이 촬영물을 확보하고, 저희에게 촬영물을 전송해 줍니다. Q. 영상을 편집하거나 합성하는 식으로 변형하면 DNA 값도 바뀔 텐데, 그것도 찾아낼 수 있나요? A. 저희가 갖고 있는 기술로 약간의 값이 바뀌더라도 그 비율(%)을 설정해서 찾아낼 수 있어요. 요즘 디지털 성범죄가 진화되고 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찾아낼 수 있는 부분은 한계가 있다 보니, 인력이 직접 찾아내서 비교하고 삭제 조치까지 하고 있습니다. 삭제팀 인력이 숙련된 노하우를 가지려면 적어도 몇 년 정도는 업무를 진행해야 돼요. 새로 들어오는 분들한테도 교육을 깊이 있게 하고 있어요. Q.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듯 찾는 거네요. 성인 사이트, 웹하드 같은 데를 일일이 들어가 찾는 건가요? A. 웹하드는 작년에 유포가 0건이에요. 저희가 2019~2020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함께 웹하드에서 촬영물을 찾아낼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서 계속 모니터링하고 있어요. 현재는 웹하드에 촬영물을 올렸을 때 자신의 가해 행위가 특정되기 때문에 거기에 올리는 사람은 없어요. '텔레그램 성착취(N번방 사건)' 이후 법이 개정되면서 국내에서는 유포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어요. 저희는 '해외 서버로의 이민'이라고 부르는데, 지금은 국내법 적용을 받지 않는 해외 성인 사이트에서의 유포가 더 심각합니다. 다른 피해자의 촬영물을 삭제하려고 성인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거기에 다수의 피해자들이 있는 걸 발견하고 삭제를 하기도 합니다. Q. 해외 사이트에 올린 걸 삭제하려면 그 나라 협조가 필요하겠네요? A. 해외 불법 사이트라고 하더라도 저희가 삭제 요청을 했을 때 바로 조치하는 사업자가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불법 사이트를 관리하는 호스팅 사업자에게 '이 사이트에 불법성이 있으니 우리의 피해 촬영물을 삭제할 수 있게 강제 조치를 해 달라'고 해요. 그것도 불응하는 경우, 사이트의 서버지를 분석합니다. 어느 나라인지 IP를 확인해서, 해당 국가에 협력 요청을 하는 거죠. 국가도 불응하면 해당 국가 피해 지원 기관과 접촉해 조치 방안을 함께 모색합니다. Q. 해외 서버를 자주 옮겨 다니면서 촬영물을 퍼뜨린다고 들었는데, 최근에 많이 이용하는 곳이 있나요? A. 계속 서버지 IP를 옮겨 다니고 있기 때문에 오늘은 미국이었다가 내일은 중동, 이런 식으로 바뀌는 상황이에요. 아동·청소년의 경우 모든 나라가 보호의 대상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피해 조치를 해요. 유포물에 대한 삭제 요청에 협력이 잘 되는 편인데, 성인의 경우 각 국가의 정책과 법이 다르다 보니 협력에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올해 7월에 유엔여성기구(UN WOMEN)와 공동으로 아동·청소년 성착취뿐 아니라 성인 불법 촬영물에 대한 지원 필요성에 대해 발표를 준비하고 있어요. Q. 우리나라는 불법 촬영의 피해 형태가 좀 다른가요? A. 우리나라는 워낙 인터넷 사용률이나 인구 밀도가 높잖아요. 피해 촬영물이 유포됐을 때 '누가 이걸로 나를 알아보겠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상담을 해보면 유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주변에서 '이거 너 아니냐'라고 연락받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고 해요. 직장생활을 할 수 없어서 실직하거나 퇴사하고, 다른 회사에 재취업하더라도 거래처 사람이 알아본다든가 해서 또다시 회사생활을 하는 게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불법 촬영물을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 Q. 디지털 성범죄 촬영물을 완전히 삭제하는 게 가능한가요? A. 불법 촬영물이라는 게 1건이 유포돼 1분 뒤에 삭제됐다 하더라도, 1분 안에 누군가는 다운로드를 받았을 거고, 그게 몇 년 뒤 재유포되는 상황도 발생하거든요. 완전한 삭제라는 건 정말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피해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도 '끝이 없다'라는 것, 이 피해가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거예요. 오프라인 성폭력은 피해가 종결되고서 지원을 받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디지털 성범죄는 가해자가 이미 집행유예로 처벌이 끝났더라도, 피해 촬영물은 여전히 유포되고 있어요. 피해자들이 '다시 한번 힘을 내서 일상생활을 해야겠다'라고 생각해도, 누군가는 또 '피해 촬영물을 봤다'라고 연락해 오는 상황이 반복되는 거예요. 이 촬영물을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피해자들을 굉장히 힘들게 합니다. "그 영상을 딱 접하자마자 나는 이제 끝났구나, 이제 내 인생은 끝났구나. 이제 나는 어떻게 살지라는 생각을 모든 생존자가 할 텐데 저도 당시에 그랬어요. 정말 너무 난 이제 끝났구나. 결혼은 고사하고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못 하겠구나. 나는 사회생활 자체를 못 하고 밖에 나돌아 다니지 못하겠구나." "어쩌다 한 번씩 남자친구를 사귀더라도 '얘도 알까', 아니면 직장 동료랑 친해졌을 때 '이 사람도 그때 봤을까, 나를 알아봤는데 모른 척하는 건가, 아니면 그때 봤는데 너무 오래돼서 까먹은 건가,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건가', 그냥 그런 생각들을 누군가를 만날 때 한 번씩은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누군가가 나를 건드는 것 자체가 공포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런 게 조금 많이 무서워서 사람을 만나는 건 아직까지는 많이 못 하고. 사람 많은 곳에 가는 지하철을 탄다거나 할 때는 저는 눈을 감고 그냥 있거든요."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디지털 성범죄 유포 및 유포 불안 피해 경험에 관한 연구> 중에서) Q. 피해자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지원이 뭔가요? A. 작년에 유포 피해자 100명에게 설문조사를 했어요. 가장 필요로 하는 건 '완벽한 삭제'였고, 그와 거의 차이가 없는 게 '강력한 처벌'이었어요. 3~4년이 지나도 계속 피해가 발생하고 있는데 가해자들은 집행유예를 받았다든가, 1년 뒤에 출소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피해자는 마음이 무너질 거예요. '강력한 처벌'이 아니라 '피해에 상응하는 처벌'이 됐으면 좋겠다는 게 피해자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처벌은 강화됐습니다. 2020년 개정된 성폭력처벌법은 '카메라로 타인의 의사에 반해 신체를 촬영하거나, 촬영물 또는 복제물을 반포·판매·임대·제공·전시·상영하면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기존 5년 또는 3천만 원 이하)에 처합니다. 불법 성적 촬영물을 소지·구입·저장·시청하는 것에 대한 처벌 규정도 신설했습니다. 검찰은 성착취물을 가지고 있으면 원칙적으로 징역형을 구형하기로 했습니다. Q. 아직은 처벌 수위가 낮다고 생각하세요? A. 'N번방' 이후에 법적 처벌이 상향됐지만, 법적 실효성 확보가 필요합니다. 피해가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피해자가 재취업을 하더라도 일을 할 수 없는 요소가 곳곳에 숨어있어요. 지금부터는 경제적 지원에 대한 방안도 논의할 단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Q. 피해자의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는 것 같아요. 요즘은 학교 폭력이 디지털 촬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A. 오프라인 폭력이 곧 디지털화돼서 디지털 범죄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2018~2019년에 피해자 중 10대가 10% 내외였는데, 2023년에는 거의 25% 정도예요. 피해자 4명 중 1명은 10대인 거죠. 10대는 피해가 발생해도 정말 급박한 상황이 아니면 상담 요청을 잘 하지 않는 편이에요. 가해자가 온라인 그루밍(심리적 지배)으로 영상물을 탈취하고 나면 유포·협박 수위가 굉장히 높아져요. 대부분은 '그냥 빨리 주고 끝내자' 하면서 영상물을 계속 찍어서 보내는데, 그러다 너무 힘든 경우 저희 센터로 전화를 해요. 저희는 그 전화 이후에는 피해자들이 도움 요청을 안 한다는 걸 알거든요. 그래서 전화 한 통화에 심리적 안정화를 지원하고, 증거 확보 방안을 설명하고, 바로 피해 접수를 통해서 삭제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요. 예전에는 아동·청소년이 피해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부모 동의가 있어야만 했어요. 2020년 'N번방' 사건 이후로 아동·청소년이 부모 동의 없이도 지원 요청을 할 수 있게끔 체계를 많이 바꿨어요. Q. 피해자가 여성만 있는 것은 아닐 텐데, 남성의 피해 사례는 어떻게 지원하고 있나요? A. 피해자 중 여성이 75%, 남성이 25% 정도예요. 남성 피해 유형의 70% 정도가 '몸캠 피싱'이에요. 신체 촬영물을 찍게 하고 그걸 빌미로 금전 협박을 하는 건데, 지인들에게 유포하기 때문에 인터넷상에 유포되는 비율은 극히 낮아요. 그래서 남성 피해자들은 협박이 지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피해라고까지 생각을 안 하기 때문에, 단기 상담 위주로 대처 방법을 말씀드리고 있어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이름으로 Q. 하루종일 피해자 상담하고, 불법 촬영물을 봐야 하는 게 참 힘든 일일 것 같아요. A. 피해자들을 지원하겠다고 마음먹은 분들이라, 일이 많아서 힘들다는 생각은 안 하는 것 같아요. 힘든 건 정말 어렵게 삭제 창구를 만들었는데 하루아침에 사라져서 삭제를 할 수 없게 되거나, 플랫폼 사업자의 정책이 바뀌어서 삭제가 이행되지 않을 때예요. 그때마다 굉장히 무력감을 느끼지만, 다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 없으니 빨리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라고 말해요. Q. 지금도 수사기관이나 정부 부처의 기술적 지원을 받고 있는데, 좀 더 협조가 필요하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A. 국내에서 초소형 카메라 같은 불법 촬영기기에 대해 관리가 필요하단 생각이 들어요. 피해자들이 경찰 신고를 굉장히 고민하는데, 그 이유가 신고 이후 가해자 조사 전까지 유포되지 않을까 하는 거거든요. 신고 후 촬영물이나 유포물에 대한 임시 조치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디지털 성범죄는 평생 재유포되면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피해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와 협력해서 아동·청소년뿐 아니라 성인 피해에 대한 대안도 마련했으면 좋겠습니다. 또 이런 범죄에 대해선 끝까지 국가가 지원할 거라는 메시지를 주는 게 굉장히 중요할 것 같아요. 피해자의 불안감을 낮추고, 가해자는 언젠가 잡힌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준다면 조금이나마 범죄가 줄지 않을까요. Q. 특정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면 그 피해 영상을 찾아보려는 사람들이 늘어서, 널리 알려야 하는 문제임에도 알릴 수 없다는 딜레마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디지털 성범죄 사건이 회자되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보세요? A. 네, 문제가 많다고 생각해요. 디지털 성범죄는 사건명 하나만으로도 촬영물을 찾는 키워드가 될 수 있어요. 피해자의 단서가 하나라도 나오는 건 지양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많은 정보가 노출되지 않았으면, 피해에 집중하기보다 가해자에 대해 조명했으면, '가해자 누구의 사건' 이런 식으로 이름을 바꿨으면 좋겠어요. 얼마 전 기사를 보니 한 불법촬영 용의자가 공개 수배되자 지인이 그걸 알아봤고, 결국 용의자가 자수를 했더라고요. 저희가 아침에 받는 상담 전화 대부분은, 전날 밤 누군가가 피해자의 촬영물을 보고 연락을 해서 피해자가 패닉에 빠진 거예요. 피해자에게 '이거 너 아니야?'라고 할 게 아니라, 가해자를 찾는 전단지가 더 많이 부착됐으면 합니다. "모든 생존자들,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숨어요. 자기의 목소리를 내지도 않고 모든 걸 바꾸려고 하고 이름도 얼굴도 번호도 친구들도 싹 다 끊고, 그냥 정말 아무런 생활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는 생존자들도 너무 많아요. 저는 하고 싶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온 거였고 저 같은 생존자들이 또 생기지 않길 바라기도 하고 생겼다고 해도 보호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어요."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디지털 성범죄 유포 및 유포 불안 피해 경험에 관한 연구> 중에서) ※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라면 누구나 지원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상담과 삭제 모두 무료이고, 지원 기간에 제한이 없습니다. 수사 과정과 의료, 법률 지원도 연계합니다.
아파트에서 만난 70대 청소노동자 “내 나이가 70대인데 누가 써주노. 청소일밖에 할 수가 없는데, 이것도 이제 나이 많다고 그만 나오라고 그러면...” 아파트 청소를 하는 1954년생 여성은 음력설이 지나 만 70세가 됐습니다. 이 일을 시작한 건 재작년 겨울. 휴대전화 애플리케이션으로 은행 거래를 하다가 우연히 구인 광고를 보고 지원했습니다. 그전까진 자식 여럿을 키우느라 돈벌이를 해본 적이 없어서 일자리를 어디서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 막막했습니다. 잠시 공공근로도 해봤지만, 젊은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나이든 사람은 적게 일하고 적게 받는 자리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매일 점심시간을 포함해 하루 7시간 아파트 한 동을 혼자 청소합니다. 층마다 걸레질을 반복하다 보면 겨울에도 내복이 땀에 젖습니다. 140만 원 남짓한 월급을 받을 때면 너무 적다 싶으면서도, 언제까지 이 일을 시켜줄지 걱정입니다. “전에 본사에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쓰라고 해서, 내가 우리 월급을 좀 올려달라고 그랬어요. 한 200만 원은 받았으면 싶어서. 그런데 그거는 내 생각이지 뭐. 이제 내가 만 70살이잖아요. 전에 70살 넘은 사람 확 다 잘랐다 그러더라고.” 당장 일이 없으면 매달 국가에서 받는 기초연금 33만 원으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데, 월세를 내면 끝입니다. 국민연금은 한 달에 2만 원 남짓 내다가 진즉 중단하고 찾아 썼습니다. 먹고살기가 빠듯하니 최소가입기간(10년)을 채우는 일은 사치였습니다. 이렇게 노후준비가 되지 않은 노인에게 일자리는 당장 생존의 문제입니다. 연금으로 여생을 보낸다는 ‘꿈같은 이야기’ 노인 3명 중 1명이 일을 하지만, 이들은 젊은 노동자들과 달리 일자리를 잃어도 실업급여를 받지 못합니다. 고용보험법상 ‘65세 이후에 고용된 사람’은 적용 제외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노인 단체들은 고령노동자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나라는 65세 이상 취업률이 굉장히 높고, 일하고 싶어 해요. 노후 소득 보장이 돼 있지 않으니까 뭔가를 해서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거죠. 그 사람들이 어찌 보면 가장 취약한 계층이잖아요. 사회 보험에서 보호해줘야 하는 주요한 대상인데 정작 그 부분들이 빠져 있는 거죠.” (이상학 노후희망유니온 정책위원장) 지난 2018년 헌법재판소에서 이 문제를 판단한 적이 있습니다. 만 68세에 입사해 7년 뒤 퇴사한 고령노동자 A씨는 근로복지공단에 실업급여를 신청했다가 거부당하자 헌법소원을 제기했습니다. 고용보험법의 적용 제외 조항이 ‘65세 이전에 고용된 사람’과 ‘65세 이후에 고용된 사람’을 합리적 이유 없이 차별해 평등권을 침해하고, 과잉금지원칙을 위반해 재산권과 근로 권리를 침해했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근로의 의사와 능력이 있는지를 일정한 연령을 기준으로 하는 게 특별히 불합리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우리 사회보장체계는 65세 이후 ‘소득상실’이라는 사회적 위험이 보편적으로 발생한다고 보고, 고용에 대한 지원이나 보장보다 노령연금이나 기초연금 같은 사회보장급여 체계를 통해 노후생활이 안정될 수 있도록 설계됐다는 설명입니다. 쉽게 말해 65세가 넘으면 실업급여 대신 연금으로 어느 정도 소득을 보장하는 만큼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처음 언급한 70대 청소노동자처럼 현실 속 고령노동자의 삶은 결코 ‘안정적’이지 않습니다. 통계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은 2009년부터 OECD 국가 중 줄곧 1위, 특히 한국 여성 노인은 남성보다 더 가난합니다. 주로 돈을 벌었던 남성에 비해 연금 급여는 적고, 기대수명은 길기 때문입니다. 노인의 가처분소득이 적다 보니, 일자리에 뛰어든 사람은 많습니다. 65~69세 고용률은 50.4%로 일본(50.9%)에 이어 두 번째로 높았는데, OECD 평균의 두 배가 넘습니다. OECD는 “한국의 연금 제도가 아직 미성숙하며, 고령 노인이 받는 연금은 매우 낮은 수준”이라고 평가했는데, 실제로 연금의 소득대체율은 31.6%에 불과합니다. 일할 때 벌었던 평균소득의 3분의 1도 안 되는 돈으로 살아야 하는 겁니다. 실제로 연금을 받는 노인의 77.3%가 월 60만 원 미만의 적은 금액을 받는 데 그칩니다. 그나마도 노인 4명 중 1명은 노령연금을 받지 못합니다. 노후가 불안정하다 보니 노인 자살률은 OECD 평균의 2.7배로 높습니다. “노인 빈곤은 시급한 인권 현안”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는 “노인 빈곤 해소는 시급히 개선해야 할 인권 현안”이라며 정부에 대책 마련을 권고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고용보험법상 실업급여 수급자 연령을 높이는 겁니다. 앞서 연령 제한을 만 65세에서 70세로 늦추거나 아예 폐지하는 내용의 고용보험법 개정안이 여러 건 발의됐지만 국회에 머물러 있습니다. 고용노동부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단 입장입니다. 외국의 사례를 보더라도 실업급여는 공적연금을 받기 시작하는 때까지만 주고 있다는 겁니다. 법에 65세로 연령 제한을 둔 게 1996년인 만큼, 내년부터 국민 5명 중 1명이 노인인 초고령사회를 맞는 현실을 고려해야 한단 반론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복지가 잘 돼 있는 유럽 국가와 단순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연금만 받아도 생활이 되는데 우리는 그게 안 되는데다 아예 못 받는 사람도 있거든요. 65세 이상이라고 고용보험을 적용하지 않는 건 차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보험의 기본적인 역할, 국가의 역할을 재검토해야 합니다.” (이상학 노후희망유니온 정책위원장) “65세 이상 고령자들의 고용이 대체로 비정규직 또는 저소득 직종에서 간접 고용 형태로 이뤄지고 있음을 감안하면, 65세 이후에 실업급여를 받더라도 최소한의 생활수준을 보장받기는 어려울 겁니다. 부족한 소득을 고용을 통해 보충해야 되는 상황에서 ‘국민연금이냐, 실업급여냐’ 양자 간 선택을 하도록 하는 제도는 상당히 부적절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박은정 인제대 법학과 교수) 실업급여와 공적 연금 모두 ‘국민의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라는 점을 다시 한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도가 미처 껴안지 못한 가난한 노인은 엄연히 존재하고, 노후를 버텨야 하는 이들에게 밥벌이는 ‘생존’ 그 자체입니다. “고령자들이 실업 문제에 놓이는 건 결국 적절한 은퇴 연령이라는 게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노동시장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65세 이상의 고령자가 증가하게 된 거죠. 소득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인 겁니다. 따라서 65세 이상 고령자에게 실업급여를 지급해야 하느냐에 문제의 핵심이 있는 게 아닙니다. 연령으로 인해 ‘소득 상실’이라는 사회적 위험을 맞이하는 고령자들에게 실효적인 사회보장 체제가 현재 충분한가, 실업급여 제도를 확대해야 되는가를 논의해야 합니다.” (박은정 인제대 법학과 교수) 디자인 : 김정연
지금 대한민국은 전 세계가 주목할 만큼 ‘아이를 낳지 않는 나라’입니다. 출산율은 매번 신기록을 세우며 바닥을 찍고 있고, 앞으로 펼쳐질 인구감소는 ‘중세 흑사병’에 비유될 정도입니다. 그러니 아이를 낳겠단 의지만 있으면 어떻게든 돕겠단 게 우리 사회 분위기인데, 정작 남들보다 더 어렵게 부모되기를 선택해도 소외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장애인들입니다. 지적장애 부모의 육아 이달 초, 인터뷰를 위해 충북에 있는 박형용 이상미 부부의 집을 찾아간 날은 아주 추웠습니다. 집 앞에 다다랐을 때 실내복 차림으로 쓰레기봉투를 버리러 나온 남성을 보고 형용 씨일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아기를 키우는 여느 집처럼, 현관문에는 아기가 깨지 않게 초인종을 누르지 말아 달라는 스티커가 붙어있었습니다. 집안은 예상대로 형용 씨 덕분에 깔끔했습니다. 둘째를 낳은 지 석 달밖에 되지 않은 상미 씨는 남편이 집안일은 물론 아기를 씻기는 일도 도맡아서 한다고 말했습니다. 두 사람은 똑같은 커플 옷을 맞춰 입고 서로를 “착한 사람”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부부는 지적장애 3급입니다. 인지 능력과 사회 적응 능력이 부족하지만, 생후 23개월과 3개월인 두 아이를 돌보는 일을 비롯해 일상생활을 둘만의 힘으로 해내고 있습니다. 가족 없이 외롭게 살아온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모르는 것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해결했습니다. 최근 첫째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아동학대’에 대해 검색해 보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박형용 요즘 아동학대 그런 게 안 좋은 건지 보고 있고. 나쁜 거, 때리는 사람도 있다고 하고. 그래서 그거 잘 봐야 한다고. 학대는 애들한테 안 좋으니까. - 어떻게 잘 보라고 하던가요? 그냥 보다가 (어린이집에) 전화해 보는 거죠. 애는 괜찮나, 아픈 데 없나 다 전화해 보고. 괜찮으면 병원 안 가도 되고. 조금만 아파도 병원 가요, 우리가. 부부는 기초생활수급비와 양육수당 등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형용 씨는 택배 상하차 작업을 하다가 크게 다쳐서 일을 못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물건은 중고거래 앱으로 저렴하게 사거나 무료 나눔을 받아 알뜰하게 마련했습니다. 이날도 난방비를 아끼느라 아기가 지내는 안방을 제외하고 집안은 발이 시릴 만큼 썰렁했습니다. ▶ 관련 기사 : 장애 부모의 쉽지 않은 육아…"인터넷 보고 알았어요" “아기 예방접종이라도 도와줘야 하는데...” 부부와의 인터뷰는 매끄러웠지만, 종종 과거 시간이나 숫자를 떠올릴 땐 헷갈려했습니다. 지적장애가 있는 두 사람에게 문해력이 필요한 서류 작성 같은 건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최근 둘째 아이 출생신고를 하는 과정에서 큰 실수가 있었습니다. 바로잡으려면 법적으로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두 아이가 커갈수록 부부에겐 이렇게 버거운 순간이 더 많아질 겁니다. 이현주 충북여성장애인연대 대표 큰 아이 출생신고를 할 때는 저희 도움이 있었지만, 작은 아이 때는 부부가 다 했거든요. 우리가 장애인 가정에 일주일에 2~3번 가야 하는 걸 1번으로 줄였기 때문에 많은 불편함이 있는 거죠. 지적장애인은 글씨 같은 걸 잘 몰라요. 아이 예방접종을 할 때에도 달력에 ‘병원 가는 날’이라고 적어주고, 병원까지 이동해 주는 도움이 필요해요. 충북여성장애인연대 활동가 6명은 일주일에 한 번씩 형용 씨 부부 같은 장애인 가정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지방자치단체 보조금을 받아하는 지원 사업입니다. 시력장애가 있는 이현주 대표를 비롯해 활동가들은 모두 장애가 있습니다. 지원 가정에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누구보다 잘 알 수밖에 없습니다. 이현주 충북여성장애인연대 대표 같은 동료잖아요, 아픔을 같이 겪었던 사람들이고. 감수성도 확실히 비장애인 하고는 달라요. 저도 중도장애라 집에만 있었거든요. 장애인이 나오기가 되게 힘든 사회잖아요. 제게 ‘나오라’고 한 곳도 충북여성장애인연대였어요. 대부분의 지적 장애인들이 (국가 돌봄 서비스 인력인) 활동지원사 지원을 못 받거든요. 움직이고 활동한다는 이유 만으로요. 이런 가정이 아이 키우고 생활하는 데 엄청 어려워요. 교육도 필요한데 나오지를 못하고요. 그래서 우리가 이런 분들을 위한 돌봄 사업을 하고 있는 거죠. 자녀양육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지만, 장애부모는 일상에서 수시로 한계에 부딪힙니다. 일례로 거동이 불편한 엄마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누워있는 아이를 안을 수도, 기어가는 아이를 쫓아갈 수도 없습니다. 때로는 자신도 돌봄이 필요한 장애부모에게 누군가를 늘 돌봐야 하는 일은 그래서 더 어렵습니다. 가장 큰 고민은 “자녀양육” 현재 장애부모를 지원하는 제도는 주로 출산과 초기 양육이 집중돼 있습니다. 장애여성이 출산을 하면 비용을 지원하고, 집에서 산후관리를 해줍니다. 아이가 자라면 교육비를 지원하는데, 특히 부모에게 감각적 장애(시각·청각·언어·지적·자폐성·뇌병변)가 있는 경우 만 12세 미만 자녀는 언어 재활이나 수어지도 같은 교육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녀양육은 여전히 장애부모의 가장 큰 고민입니다. 만 49세 이하 여성장애인에게 필요한 복지 서비스를 물었더니 ‘자녀양육지원(13.3%)’을 1위로 꼽았습니다. 임신 기간 중 힘들었던 점에 대해서도 ‘본인의 건강 악화(12.6%)’ 다음으로, ‘자녀 양육을 잘할 수 있을지 두려워서(12.3%)’라고 답했습니다. 눈여겨볼 점은 장애 종류에 따라 어려움을 느끼는 상황도 다르단 겁니다. 미성년자 자녀를 기르는 장애부모들에게 물었더니, ‘자녀양육·교육비용 부담(뇌전증·정신장애·지체장애·호흡기장애)’, ‘자녀와 의사소통의 어려움(지적장애)’, ‘주위의 편견 및 시선(안면장애)’ 등 주로 꼽는 어려움이 달랐습니다. 또 부부가 같은 장애를 가진 경우가 많았는데, 같은 생활방식과 문화를 공유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일상의 제약도 같아 상호 보완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장애부모마다 개인별 맞춤형 지원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저마다 삶의 목적을 추구할 수 있게” 호주는 2016년 장애인과 가족, 돌봄 서비스 제공자를 지원하기 위한 ‘국가장애보험(NDIS)’을 도입했습니다. 장애인이 스스로 삶의 목적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필요한 서비스를 지원하기 위한 제도입니다. 전문가의 관점에서 일률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 스스로 목적 달성을 위해 필요한 서비스를 선택하고 제공받는 방식입니다. 영국은 장애부모가 지방정부에서 사회 돌봄 등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인 ‘카운티 카운실(County Council)’에 서비스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자녀 목욕 지원이나 부모 신체 특징에 따라 조정이 가능한 유모차, 집 내부 수리, 자녀 입학 및 등원 지원 같이 구체적인 서비스 목록을 적어 내면 평가를 거쳐 제공합니다. (출처 : 국회입법조사처, ‘장애부모의 자녀 양육지원 제도 현황 및 개선과제’)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 우리나라는 정책을 위에서 정해놔요. ‘이런 제도, 이런 서비스가 있으니까 신청하세요’ 하잖아요. 영국은 카운티 카운실에서 장애가정에 조사를 나가서 면담하면서 어떤 서비스가 필요한지 확인해요. ‘집에 가봤더니 계단이 너무 많아서 공사를 해야 될 것 같다거나, 가벽을 없애야 할 것 같다’는 식으로요. 지금 구체적으로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더라도 이 가정에 필요한 지원을 대단히 유연하게 해주는 거죠. 그래서 이 ‘평가(assessment)’가 되게 중요해요. 이게 모든 복지 절차에 들어가 있어서 대단히 인상 깊었어요. 또 우리는 정부 지원을 받을 때, 빈곤이나 관계를 증명해야 하는 요건이 있잖아요. 호주는 그게 거의 없다시피 해요. 그냥 누군가를 돌보고 있으면, 도움을 받을 수 있어요. 장애인 가족으로서 지원을 받기도 하고, 또 장애부모를 둔 자녀는 영케어러로서 지원을 받기도 해요. 누구나 부모 역할을 할 권리가 있다 누군가는 쉽게 말합니다. “장애가 있는데 아이를 책임질 수 있겠느냐”라고요. 최근 보도한 장애가 있는 부모, 장애가 있는 임산부 기사에도 비슷한 댓글이 달렸습니다. ▶ 관련 기사 : 1명이 소중한 아기… 장애 친화 산부인과 예산 0원 '외면' 장애인의 모성권은 헌법에 보장된 권리입니다. 헌법은 ‘모든 국민이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는 모성의 보호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장애인복지법은 ‘임산부 여성장애인과 아기의 건강을 위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임과 지원제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규제 등에 관한 법률(장애인차별금지법)은 ‘장애인 양육권 보장’을, 장애인 건강권 및 의료접근성 보장에 관한 법률(장애인건강권법)은 ‘장애인의 건강권 보장’을 각각 정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동복지법에 따라 ‘아동은 건강하게 태어나 행복하고 안전하게 자랄 권리’가 있습니다. 장애부모에 대한 지원은 곧 아동에 대한 지원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이런 가치를 위해 ‘다름’은 더 이상 ‘차별’이 되어선 안 됩니다. 장애로 인해 부모역할에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더 세심한 복지 지원과 인식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디자인 : 박수민
“한국 오빠랑 데이트하고 싶어요.” “동네언니들처럼 한국에 시집갈래요.”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국제결혼 홍보 영상의 제목입니다. 결혼중개업체들이 찍어 올린 건데 앳된 얼굴의 외국인 여성들이 자기소개를 합니다. 한국말을 할 줄 몰라 중개업체 관계자가 통역을 해주는 식인데 묻는 건 이름, 나이, 키, 몸무게, 직업, 사는 곳, 부모님 나이, 혼인 경험 유무 등 대동소이합니다. 이들은 대부분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나 갓 성인이 됐습니다. 어느 영상에서 스무 살인 여성이 “30,40대 신랑을 찾는다”라고 하자 중개업체 관계자는 “일하는 게 점점 힘들어진다. 조만간 라오스로 넘어가야 할 것 같다”라고 말합니다. 남자친구를 얼마나 사귀어봤는지, 문신이 있는지 묻는 경우도 많습니다. 국제결혼을 원하는 남성들이 선호하는 여성상을 반영한 질문일 겁니다.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부추기는 영상도 있습니다. “문신이 있는 신부는 절대 다시 생각해 보세요” “베트남 여성의 정조 관념, 성개념은 과연 개방적일까?” “신부의 기숙사 생활 중 방탕한 생활 사례, 어떻게 알아챌 수 있나?” 이 중개업체 대표는 “결혼 주선 시 여성의 산부인과 검사 결과를 제공한다”라며 실제 현지 여성의 결과지를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결과지에 “자궁 크기라든지, 아기가 착상되는 곳의 두께가 나온다”라고 설명합니다. ▶관련 기사: 키·몸무게에 산부인과 검사지… 국제결혼 불법광고 여전 만남부터 결혼까지 ‘5.7일’ 이런 광고는 실제 국제결혼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가장 최근 조사*에 따르면, 결혼중개업체를 통해 국제결혼한 한국인 배우자의 절반(50.5%)이 ‘온라인 광고’를 통해 업체를 알게 됐다고 답했습니다. *여성가족부, ‘2020 결혼중개업 실태조사’ 한국인 배우자는 40대(61.3%)가 가장 많고, 외국인 배우자는 20, 30대(79.5%)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외국인 배우자는 대부분 베트남(83.5%) 출신이었고, 이어 캄보디아(6.8%), 우즈베키스탄(2.7%), 중국(2.3%) 순이었습니다. 이들이 현지에서 처음 만나 결혼식까지 걸린 시간은 평균 5.7일. 그나마 3년 전 조사보다 1.3일 길어진 겁니다. 한국인 배우자가 왕복항공료, 맞선과 결혼 비용을 포함해 결혼중개 수수료로 업체에 내는 돈은 평균 1천372만 원. 반면 외국인 배우자는 중개인에게 성혼수수료 등의 명목으로 평균 69만 원을 냈습니다.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 많은 비용을 부담하며 외국인배우자를 맞는 데는 과거 ‘도농 격차로 인한 성비 불균형’이 시작이었습니다. 1990년대 초 정부는 ‘농촌 총각 결혼시키기’ 사업을 시행하며 국제결혼을 장려했습니다. 지금도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미혼 남성의 국제결혼을 위해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예산으로 매매혼을 조장한다’는 오랜 비판에 지금은 속속 폐지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국제결혼 유행은 2007년 미국 국무부의 ‘인신매매보고서’에 불명예스럽게 기록됩니다. ‘베트남 처녀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 ‘베트남 숫처녀 결혼비용 780만 원’, ‘초·재혼, 장애인 환영, 65세까지 100% 성사’ 같은 현수막 문구를 문제 삼은 겁니다. 당시 국제결혼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셈입니다. 맞아 죽은 신부들 시작부터 기울어진 관계는 결혼이민자를 철저히 ‘을’로 만들었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서 이들은 쉽게 ‘피해자’가 됐습니다.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서 결혼이주여성 920명 중 42.1%가 ‘가정폭력 경험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 ‘결혼이주민의 안정적 체류보장을 위한 실태조사’ 2007년 후인마이 씨가 베트남에서 한국에 온 지 2개월 만에 남편에게 맞아 사망했습니다. 2010년에는 베트남 여성 탓티황옥 씨가 부산에서 남편에게 흉기에 찔려 숨졌습니다. 한국에 들어와 신혼생활을 한 지 일주일 만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남편은 정신분열증으로 8년간 57차례 치료를 받았단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습니다. 화장장으로 들어가는 관을 붙잡고 오열하는 고 탓티황옥 씨의 가족 그해 국제결혼중개업자가 혼인경력, 건강상태, 성폭력·가정폭력·아동학대 등 범죄경력 등을 신랑과 신부의 자국어로 제공하도록 법이 바뀌었지만 비극은 계속됐습니다. 2012년 베트남 여성이 정신질환자 남편에 의해 살해됐고, 중국 동포 2명이 이틀 간격으로 각각 남편의 폭력에 숨졌습니다. 폭력은 최근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2018년 12월에는 경남 양산에서 50대 남성이 필리핀 출신 아내를 흉기로 살해했고, 이듬해 11월 경기 양주에서 50대 남성이 베트남 국적 아내를 살해하고 시신을 암매장했습니다. 베트남 출신 아내를 무차별적으로 폭행한 남편의 동영상이 공개돼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올해 4월에도 한 이주여성이 아들이 보는 앞에서 남편에게 살해됐습니다. ▶관련 기사: 베트남 아내 짓밟은 한국인 남편… 참다못해 몰래 찍었다 결혼이주여성의 체류자격 연장 과정에서 한국인배우자의 신원보증제도를 폐지했지만, 여전히 신원보증을 요구받는 경우가 적지 않고 한국 국적을 취득할 때 한국인배우자의 영향력은 절대적입니다. 폭력 신고를 꺼릴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수사의뢰 ‘0건’ 결혼이주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돼 왔습니다. 정부는 2021년부터 맞선 상대방의 얼굴, 키, 몸무게 등을 공개하는 국제결혼 광고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여성을 상품화하고 인권을 침해한다는 지적 때문입니다. 징역 3년 이하의 형사처벌까지 가능하지만 여전히 유튜브와 온라인 카페, 블로그엔 외국인 여성의 모습을 드러낸 광고가 넘쳐납니다. 허오영숙 │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대표 어떻게 사용될 것인지 알고 촬영에 임했는지는 다른 문제인 것 같아요. 한국의 유튜브나 여러 채널을 통해서 아무나 볼 수 있는 걸로 완벽하게 이해를 하고 동의를 했는지요. 자기가 찍은 영상이 전체 구성에서 어떻게 배치되는지는 또 다른 문제잖아요. 그런 것들을 이해하고 했는지는 확인이 필요한 것 같아요. 결혼 이주 여성들이 한국에 와서 정착하고, 우리의 동료 시민으로 살고 있는데 자꾸 그런 부정적인 모습들이 차별적인 인식을 강화시킨다는 생각이 들어요. 결혼중개업체의 성 차별적이고 인종 차별적인 광고에 대해서 정부가 신경 써서 규제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온라인 불법 광고에 대한 제재는 대부분 행정처분에 그치고 있습니다. 주무부처인 여성가족부는 지난 2020년 불법 광고 68건을 경찰에 수사의뢰한 바 있지만, “URL만 첨부했을 뿐 수사 의뢰 대상자, 위반 내용 등을 기재하지 않았다”라는 이유로 모두 반송됐습니다. 여가부 관계자는 “업체 정보 등을 알기 어려워 특정해 수사 의뢰할 수 없었다”라고 설명했지만, 광고에 버젓이 상담 전화번호와 업체명 등을 공개한 경우도 많습니다. 이후 매년 점검에도 수사의뢰는 0건. 올해는 불법 광고 335건 중 271건을 관할 지방자치단체에 통보하고, 방송심의위원회에 심의 의뢰한 상태입니다. 점검도 허술해 업체 주소지가 바뀐 걸 모르고 엉뚱한 지자체에 조치를 지시하거나, 계정을 비공개 전환하더라도 문제의 영상이 여전히 남아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제재가 약하지만 그나마도 이를 피하기 위한 꼼수 광고가 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브이로그 형식의 국제결혼 광고입니다. 한 중개업체 영상에선 한국인 남성이 해외에서 짝이 된 여성과 여행을 다녀왔다며, 욕조 안에 들어간 여성의 사진을 고스란히 올리기도 했습니다. 김현미 │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광고인지 사적인 삶을 유튜브에 올린 건지 헷갈리게 하는 경우가 많아요. 노골적인 광고라기보다는 국제결혼을 굉장히 아름답게 묘사하고, 실질적인 삶의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영상을 하나하나 봐야 알 수 있거든요. 여성들이 연기를 하는 것인지 실제인지 알 수 없고, 또 불법촬영을 하는 경우도 많아요. 그 여성들은 모르게, “베트남 여성들 이렇게 예쁘다”라면서 길 가다가 말 걸고 막 찍거든요. 찍힌 사람은 자기의 의도와 상관없이 마치 국제결혼의 대상자나 참여자처럼 보이게 하는 거니까, 불법 촬영이죠. 시작부터 불평등한 결혼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 결혼이주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이들은 국제결혼 광고에 대해 “존중받지 못하는 느낌이 든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중개업체에서는 저희한테 예쁜 사진만 달라고, 예쁠수록 더 좋다고 해요. 제 친구는 결혼정보업체에서 맞선 볼 때 섹시하게 입고 오라는 요구받은 적 있어요.” “광고 때문에 (베트남 사람을) 존중하지 않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왠지 물건 갖다 파는 것처럼 느껴져요.” “전에는 어떤 의미인지 잘 몰라서 이상한 생각이 안 들었어요. 지금 보니까 이거는 인권침해예요.” “대한민국에서 (이런 광고를) 보여주는 자체가 (여자) 파는 것처럼 인신매매하는 거잖아요.” 경제력 우위를 이유로 한쪽에 선택권이 쏠린 채 시작된 관계는 평등하기 어렵습니다. 평생을 함께 할 배우자를 구하는 데 있어서 더 그렇습니다. 결혼이주자들은 물론, 한국인배우자, 그리고 이들이 꾸리는 다문화가정이 우리 사회에서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국제결혼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조장하는 불법 중개 광고를 보다 적극적으로 제재할 필요가 있습니다. 디자인 : 김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