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이현정 기자입니다.
지난 몇 년간 코로나19 유행으로 모두가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청년층의 우울과 자살 문제는 특히 도드라졌습니다. 이는 수치로도 증명됩니다. 지난해 말, 정부는 청년들의 정신건강 문제에 집중하는 내용을 담은 정책을 발표했습니다. 그날 저는 서울의 한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에서 30대 여성 환자 A 씨를 만났는데, 그는 치료 과정에서 느낀 어려움과 아쉬움을 진솔하게 털어놨습니다. 정부 정책에는 미처 담기지 않은 내용이 많았습니다. <더 스피커>는 A 씨의 사례를 통해 우리 사회가 '청년들의 정신건강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병원에 가야 하는데 돈 때문에..." A 씨가 우울증 진단을 받은 건 20대 중반의 일이었습니다. 우울한 감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어느 날, '나는 쓸모가 없다. 사라지고 싶다. 죽고 싶다'라는 생각에까지 미치자 그는 스스로 병원을 찾았습니다. 현명한 결단이었지만,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약을 챙겨 먹으며 몇 년을 지내다가, 자살 시도로 한 달 넘게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습니다. 자해와 자살 시도가 빈번해지면서 A 씨는 경계성 인격장애 진단까지 받았습니다. "약의 부작용이 있다 보니까, '약을 끊고 싶다' '병원을 그만 가고 싶다'라는 생각이 강해요. 지금은 관리해야 하는 병이라고 생각하고, 당뇨처럼 생각하고 계속 약을 병행하고 하지만 사실 불편하거든요. 약을 안 먹으면 활동이 안 되니까요." 치료에 대한 의지가 강하고, 주위의 지지를 받고 있는 A 씨조차도 머뭇거리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부담스러운 치료비 때문입니다. "입원하면 당장 나가고 싶어요, 돈 때문에. 너무 비싸요. 집중 치료를 하는 게 입원병동만한 데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엄두가 안 나요. 병동에서 만난 친구는 저처럼 경계성 장애여서 입·퇴원이 잦았는데, 자해를 하면 흥분도가 굉장히 높은 상태에서 응급실로 실려가거든요. 그 상황이 잦은 사람은 응급입원비가 부담이 돼요." 밤에 찾아오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더 위태롭습니다. A 씨는 그때마다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기보다 의료진을 찾아가 치료를 받는 게 효과적이란 사실을 알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저 스스로 119를 눌러서 '제가 지금 죽고 싶은 상황이라 상태가 안 좋으니 병원에 좀 데려가 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기존에 그 병원에서 외래진료를 받지 않았으면, 약 처방이 안 돼요. 약을 먹지 못한 상황에서 계속 대기하다가, 응급실이니까 피검사나 심전도 검사 같은 걸 필수로 하잖아요. 결국 아무것도 처치받지 못하고 비용만 10만 원 넘게 나와서, 나중에는 응급실도 안 가게 되죠." 팬데믹에 급증한 청년 자살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부동의 1위입니다. 삶의 만족도와 주관적 건강 상태는 최하위입니다. 특히 A 씨 같은 청년층의 정신건강 문제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대 우울증 환자 수는 2018년 9만 9,796명에서 2022년 19만 4,322명으로 2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국립중앙의료원과 중앙응급의료센터에 따르면, 2022년 전국 응급실 이용자의 0.56%는 자해·자살 시도자(4만 3,268건)였습니다. 이 중 46%가 10~20대로, 이들 세대의 자해·자살 시도는 최근 수년간 급증하는 추세입니다. 코로나19 유행으로 청년층의 정신건강은 사회적 상황에 취약하다는 사실이 극명히 드러났습니다. 팬데믹은 진정됐지만, 그 영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A 씨가 다니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에도 청년층 환자가 많습니다. 대부분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불면 등을 겪고 있습니다. "젊은 분들은 아무래도 취업 준비하면서 많이 와요. 취업을 해도 문제인 게, 사회초년생이다 보니까 '내가 잘하고 있는 게 맞나' 이런 생각도 많이 하고요. SNS가 발달해 있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스트레스받아서 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요즘에는 선택지가 너무 많고, 상황이 불확실하다 보니까 과거보다 더 사람을 힘들게 만들 수 있는 거죠.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고 느끼는 게, 회사에서 '여기 괜찮으니까 가봐라'라고 해서 같은 회사분들이 정신과에 같이 다니는 경우도 있어요." (허규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심각성을 인지한 정부는 최근 '20~34세 청년층의 정신건강검진 주기를 기존 10년에서 2년으로 단축해 조기에 개입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건강검진을 할 때 2년에 한 번씩 우울증·조현병·조울증 등에 대한 검사 문항을 추가해, 위험군으로 분류되면 심층 검사를 진행하는 방식입니다. 보건복지부는 청년층을 우선 대상으로 삼은 이유에 대해 "조울증·조현병 등 발병 시기가 20~30대이고, 조기 발견 시 적절한 치료를 거쳐 회복할 수 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더 취약한 청년들 전문가들은 지난 몇 년간 관찰된 청년들의 정신건강의 문제를 코로나19 유행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합니다. 독립·결혼·직업선택 같은 발달과업을 마주하는 청년기 특성에 더해 경제 불황과 취업난, 낮은 고용 지위, 상대적 박탈감 같은 다양한 사회적 요인이 원인으로 거론됩니다. 팬데믹 이후 여러 전문가들과 청년 자살에 대한 책을 쓴 김현수 서울시 자살예방센터장(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교수)은 최근 다른 나라에서도 청년 정신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말합니다. '1인 청년 가구'가 늘어난 점도 눈여겨봐야 합니다. 요샌 형제자매가 없는 경우가 많은 데다, 부모의 이혼이나 별거로 홀로 고립되는 청년이 많단 겁니다.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을 위한 우리의 정책은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사회적 문제라는 인식 앞서 언급한 A 씨는 오랜 정신과 치료로 일을 그만둔 상태였습니다. 상태가 조금 괜찮다 싶으면 몸이 아파 병원을 드나들어야 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은 A 씨를 더 힘들게 했습니다. "치료 내내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더라고요. 결국에는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로 계속 병원만 다니게 된 것 같아요." - 생계에 지장을 받으시나요? "많이 받죠. 그것 때문에 또 죽고 싶다고 생각하니까요. 경제활동을 할 수가 없으니 결국 부모님의 돈으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어요." '88만 원 세대', 'N포 세대', '수저 계급론' 같은 우울한 수식이 따라붙는 지금의 청년들에게 우울은 더 이상 개인의 일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사회·경제적 기반이 약한 이들에게 정신적 어려움은 곧 생존의 문제가 됩니다. 청년들이 건강한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디자인 : 권민재
2019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N번방' 등 텔레그램 대화방 성착취 사건 이후에도 디지털 성범죄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불법 촬영', '유포 협박' 같은 몇 가지 단어를 검색하면 매일같이 최신 기사가 쏟아집니다. "짧은 바지 또는 원피스를 입은 여성들에게 접근해 휴대전화로 치마 밑을 불법 촬영하고…" "교실에서 교사 신체 부위를 44차례에 걸쳐 촬영하고, 여교사 전용 화장실에 불법 카메라를 설치해…" "모델로 채용할 것처럼 속여 점차 노출 정도를 높인 사진을 요구하고, 모텔로 오라는 강요에 피해자가 거부하자 지인에게 노출 사진을 전송해…" "성관계하는 장면 등을 동의 없이 촬영하고 온라인에 게시한 데 이어 다른 이용자들에게 이를 내려받고 재배포하길 권유해…" "여학생들을 몰래 찍거나 SNS에서 사진을 다운받은 뒤 '딥페이크 봇'이 합성해 만든 신체 노출 사진을 친구들에게 전송하고…" 불법 촬영 피해는 그 자체로 수치스러운 경험이지만, 온라인에 유포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낳습니다. '완전한 삭제'가 힘든 디지털 성범죄의 특성은 피해자가 목소리를 내기 어렵게 만듭니다. 특정 사건이 회자되는 것만으로도 해당 불법 촬영물을 주고받으려는 시도가 늘기 때문입니다. <더 스피커>는 전면에 나서기 어려운 피해자들의 작은 목소리에 집중했습니다. 피해 사실을 부각하기보다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에 집중하기 위해, 특정 사건 피해 당사자가 아닌 수많은 피해자를 지원해 온 전문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난해에만 24만 5천여 건의 디지털 성범죄 영상을 삭제한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의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이하 디성센터) 강명숙 상담연계팀장입니다. 전 세계 사이트를 추적한다 Q. 어디까지가 '디지털 성범죄'인가요? A. 저희는 법적으로 처벌되는 걸 '디지털 성범죄'라고 명명하고 있어요. 디지털 기기를 이용해서 불법 촬영을 하거나, 그걸 유포, 합성·편집, 유포 협박, 시청·소지·저장하는 것까지 포괄합니다. 즉, 디지털 기기를 이용해서 사람의 신체를 촬영하거나 그 촬영물을 가지고 생산, 유통, 소비하는 것 자체가 다 '디지털 성범죄'입니다. Q. 뉴스에 나오는 사건들이 워낙 충격적이지만, 그외 일상에서도 디지털 성범죄가 많이 벌어지고 있죠? A. 예전에는 많은 분들이 '디지털 성범죄가 내 일상에 침투했다'라고 생각을 안 한 것 같아요. N번방 사건 이후 '나도 이런 범죄에 노출될 수 있다'라는 사회적 인식이 높아졌어요. 숙박업소를 가거나, 뭔가 촬영기기가 반짝거리는 걸 본 경험을 했을 때 '나도 혹시 피해에 노출된 게 아닐까' 하고 연락을 주는 분들이 있어요. 실제로 유포 협박을 당하거나, 친밀한 관계에서 불법 촬영 피해를 경험해 상담 요청을 하는 경우도 굉장히 많습니다. Q. 센터로 상담 요청이 오면, 유포된 불법 촬영물을 찾아내서 삭제까지 한다고요. 온라인에서 그런 촬영물은 어떻게 찾는 건가요? A. 기술적으로 찾아내는 방법이 있고, 숙련된 삭제 지원자들이 노하우를 바탕으로 삭제하는 방법이 있어요. 저희가 영상 DNA 분석 기술이 탑재된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는데, '피해 촬영물'과 온라인에 '유포된 촬영물'의 DNA를 분석해서 유포 여부를 검출해내는 게 기술적 조치에요. 그걸로 찾아낼 수 있는 건 극히 일부분이고요. 나머지는 삭제 담당자들이 각각의 사이트에 들어가서 유포가 됐는지 확인하고, '피해 촬영물'과 '유포물'을 비교합니다. Q. 영상 DNA란 게 뭔가요? 피해 영상 원본을 갖고 있어야 유포물과 DNA도 대조할 수 있겠네요? A. 사람의 몸에 DNA가 있는 것처럼 영상에도 고유한 값이 있어요. 그걸 '영상 DNA'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저희 피해 지원 기준 자체가 영상 확보가 원칙이에요. 피해자가 URL(사이트 내 피해 촬영물이 게시된 게시물 등의 구체적인 주소)을 주면, 저희가 어떤 방식으로든 영상 원본을 확보한 이후 지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피해자가 '남자친구 휴대전화에 내 촬영물이 있다'라고 하면, 경찰 신고 후 경찰이 촬영물을 확보하고, 저희에게 촬영물을 전송해 줍니다. Q. 영상을 편집하거나 합성하는 식으로 변형하면 DNA 값도 바뀔 텐데, 그것도 찾아낼 수 있나요? A. 저희가 갖고 있는 기술로 약간의 값이 바뀌더라도 그 비율(%)을 설정해서 찾아낼 수 있어요. 요즘 디지털 성범죄가 진화되고 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찾아낼 수 있는 부분은 한계가 있다 보니, 인력이 직접 찾아내서 비교하고 삭제 조치까지 하고 있습니다. 삭제팀 인력이 숙련된 노하우를 가지려면 적어도 몇 년 정도는 업무를 진행해야 돼요. 새로 들어오는 분들한테도 교육을 깊이 있게 하고 있어요. Q.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듯 찾는 거네요. 성인 사이트, 웹하드 같은 데를 일일이 들어가 찾는 건가요? A. 웹하드는 작년에 유포가 0건이에요. 저희가 2019~2020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함께 웹하드에서 촬영물을 찾아낼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서 계속 모니터링하고 있어요. 현재는 웹하드에 촬영물을 올렸을 때 자신의 가해 행위가 특정되기 때문에 거기에 올리는 사람은 없어요. '텔레그램 성착취(N번방 사건)' 이후 법이 개정되면서 국내에서는 유포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어요. 저희는 '해외 서버로의 이민'이라고 부르는데, 지금은 국내법 적용을 받지 않는 해외 성인 사이트에서의 유포가 더 심각합니다. 다른 피해자의 촬영물을 삭제하려고 성인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거기에 다수의 피해자들이 있는 걸 발견하고 삭제를 하기도 합니다. Q. 해외 사이트에 올린 걸 삭제하려면 그 나라 협조가 필요하겠네요? A. 해외 불법 사이트라고 하더라도 저희가 삭제 요청을 했을 때 바로 조치하는 사업자가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불법 사이트를 관리하는 호스팅 사업자에게 '이 사이트에 불법성이 있으니 우리의 피해 촬영물을 삭제할 수 있게 강제 조치를 해 달라'고 해요. 그것도 불응하는 경우, 사이트의 서버지를 분석합니다. 어느 나라인지 IP를 확인해서, 해당 국가에 협력 요청을 하는 거죠. 국가도 불응하면 해당 국가 피해 지원 기관과 접촉해 조치 방안을 함께 모색합니다. Q. 해외 서버를 자주 옮겨 다니면서 촬영물을 퍼뜨린다고 들었는데, 최근에 많이 이용하는 곳이 있나요? A. 계속 서버지 IP를 옮겨 다니고 있기 때문에 오늘은 미국이었다가 내일은 중동, 이런 식으로 바뀌는 상황이에요. 아동·청소년의 경우 모든 나라가 보호의 대상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피해 조치를 해요. 유포물에 대한 삭제 요청에 협력이 잘 되는 편인데, 성인의 경우 각 국가의 정책과 법이 다르다 보니 협력에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올해 7월에 유엔여성기구(UN WOMEN)와 공동으로 아동·청소년 성착취뿐 아니라 성인 불법 촬영물에 대한 지원 필요성에 대해 발표를 준비하고 있어요. Q. 우리나라는 불법 촬영의 피해 형태가 좀 다른가요? A. 우리나라는 워낙 인터넷 사용률이나 인구 밀도가 높잖아요. 피해 촬영물이 유포됐을 때 '누가 이걸로 나를 알아보겠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상담을 해보면 유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주변에서 '이거 너 아니냐'라고 연락받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고 해요. 직장생활을 할 수 없어서 실직하거나 퇴사하고, 다른 회사에 재취업하더라도 거래처 사람이 알아본다든가 해서 또다시 회사생활을 하는 게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불법 촬영물을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 Q. 디지털 성범죄 촬영물을 완전히 삭제하는 게 가능한가요? A. 불법 촬영물이라는 게 1건이 유포돼 1분 뒤에 삭제됐다 하더라도, 1분 안에 누군가는 다운로드를 받았을 거고, 그게 몇 년 뒤 재유포되는 상황도 발생하거든요. 완전한 삭제라는 건 정말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피해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도 '끝이 없다'라는 것, 이 피해가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거예요. 오프라인 성폭력은 피해가 종결되고서 지원을 받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디지털 성범죄는 가해자가 이미 집행유예로 처벌이 끝났더라도, 피해 촬영물은 여전히 유포되고 있어요. 피해자들이 '다시 한번 힘을 내서 일상생활을 해야겠다'라고 생각해도, 누군가는 또 '피해 촬영물을 봤다'라고 연락해 오는 상황이 반복되는 거예요. 이 촬영물을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피해자들을 굉장히 힘들게 합니다. "그 영상을 딱 접하자마자 나는 이제 끝났구나, 이제 내 인생은 끝났구나. 이제 나는 어떻게 살지라는 생각을 모든 생존자가 할 텐데 저도 당시에 그랬어요. 정말 너무 난 이제 끝났구나. 결혼은 고사하고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못 하겠구나. 나는 사회생활 자체를 못 하고 밖에 나돌아 다니지 못하겠구나." "어쩌다 한 번씩 남자친구를 사귀더라도 '얘도 알까', 아니면 직장 동료랑 친해졌을 때 '이 사람도 그때 봤을까, 나를 알아봤는데 모른 척하는 건가, 아니면 그때 봤는데 너무 오래돼서 까먹은 건가,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건가', 그냥 그런 생각들을 누군가를 만날 때 한 번씩은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누군가가 나를 건드는 것 자체가 공포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런 게 조금 많이 무서워서 사람을 만나는 건 아직까지는 많이 못 하고. 사람 많은 곳에 가는 지하철을 탄다거나 할 때는 저는 눈을 감고 그냥 있거든요."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디지털 성범죄 유포 및 유포 불안 피해 경험에 관한 연구> 중에서) Q. 피해자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지원이 뭔가요? A. 작년에 유포 피해자 100명에게 설문조사를 했어요. 가장 필요로 하는 건 '완벽한 삭제'였고, 그와 거의 차이가 없는 게 '강력한 처벌'이었어요. 3~4년이 지나도 계속 피해가 발생하고 있는데 가해자들은 집행유예를 받았다든가, 1년 뒤에 출소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피해자는 마음이 무너질 거예요. '강력한 처벌'이 아니라 '피해에 상응하는 처벌'이 됐으면 좋겠다는 게 피해자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처벌은 강화됐습니다. 2020년 개정된 성폭력처벌법은 '카메라로 타인의 의사에 반해 신체를 촬영하거나, 촬영물 또는 복제물을 반포·판매·임대·제공·전시·상영하면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기존 5년 또는 3천만 원 이하)에 처합니다. 불법 성적 촬영물을 소지·구입·저장·시청하는 것에 대한 처벌 규정도 신설했습니다. 검찰은 성착취물을 가지고 있으면 원칙적으로 징역형을 구형하기로 했습니다. Q. 아직은 처벌 수위가 낮다고 생각하세요? A. 'N번방' 이후에 법적 처벌이 상향됐지만, 법적 실효성 확보가 필요합니다. 피해가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피해자가 재취업을 하더라도 일을 할 수 없는 요소가 곳곳에 숨어있어요. 지금부터는 경제적 지원에 대한 방안도 논의할 단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Q. 피해자의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는 것 같아요. 요즘은 학교 폭력이 디지털 촬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A. 오프라인 폭력이 곧 디지털화돼서 디지털 범죄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2018~2019년에 피해자 중 10대가 10% 내외였는데, 2023년에는 거의 25% 정도예요. 피해자 4명 중 1명은 10대인 거죠. 10대는 피해가 발생해도 정말 급박한 상황이 아니면 상담 요청을 잘 하지 않는 편이에요. 가해자가 온라인 그루밍(심리적 지배)으로 영상물을 탈취하고 나면 유포·협박 수위가 굉장히 높아져요. 대부분은 '그냥 빨리 주고 끝내자' 하면서 영상물을 계속 찍어서 보내는데, 그러다 너무 힘든 경우 저희 센터로 전화를 해요. 저희는 그 전화 이후에는 피해자들이 도움 요청을 안 한다는 걸 알거든요. 그래서 전화 한 통화에 심리적 안정화를 지원하고, 증거 확보 방안을 설명하고, 바로 피해 접수를 통해서 삭제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요. 예전에는 아동·청소년이 피해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부모 동의가 있어야만 했어요. 2020년 'N번방' 사건 이후로 아동·청소년이 부모 동의 없이도 지원 요청을 할 수 있게끔 체계를 많이 바꿨어요. Q. 피해자가 여성만 있는 것은 아닐 텐데, 남성의 피해 사례는 어떻게 지원하고 있나요? A. 피해자 중 여성이 75%, 남성이 25% 정도예요. 남성 피해 유형의 70% 정도가 '몸캠 피싱'이에요. 신체 촬영물을 찍게 하고 그걸 빌미로 금전 협박을 하는 건데, 지인들에게 유포하기 때문에 인터넷상에 유포되는 비율은 극히 낮아요. 그래서 남성 피해자들은 협박이 지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피해라고까지 생각을 안 하기 때문에, 단기 상담 위주로 대처 방법을 말씀드리고 있어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이름으로 Q. 하루종일 피해자 상담하고, 불법 촬영물을 봐야 하는 게 참 힘든 일일 것 같아요. A. 피해자들을 지원하겠다고 마음먹은 분들이라, 일이 많아서 힘들다는 생각은 안 하는 것 같아요. 힘든 건 정말 어렵게 삭제 창구를 만들었는데 하루아침에 사라져서 삭제를 할 수 없게 되거나, 플랫폼 사업자의 정책이 바뀌어서 삭제가 이행되지 않을 때예요. 그때마다 굉장히 무력감을 느끼지만, 다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 없으니 빨리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라고 말해요. Q. 지금도 수사기관이나 정부 부처의 기술적 지원을 받고 있는데, 좀 더 협조가 필요하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A. 국내에서 초소형 카메라 같은 불법 촬영기기에 대해 관리가 필요하단 생각이 들어요. 피해자들이 경찰 신고를 굉장히 고민하는데, 그 이유가 신고 이후 가해자 조사 전까지 유포되지 않을까 하는 거거든요. 신고 후 촬영물이나 유포물에 대한 임시 조치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디지털 성범죄는 평생 재유포되면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피해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와 협력해서 아동·청소년뿐 아니라 성인 피해에 대한 대안도 마련했으면 좋겠습니다. 또 이런 범죄에 대해선 끝까지 국가가 지원할 거라는 메시지를 주는 게 굉장히 중요할 것 같아요. 피해자의 불안감을 낮추고, 가해자는 언젠가 잡힌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준다면 조금이나마 범죄가 줄지 않을까요. Q. 특정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면 그 피해 영상을 찾아보려는 사람들이 늘어서, 널리 알려야 하는 문제임에도 알릴 수 없다는 딜레마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디지털 성범죄 사건이 회자되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보세요? A. 네, 문제가 많다고 생각해요. 디지털 성범죄는 사건명 하나만으로도 촬영물을 찾는 키워드가 될 수 있어요. 피해자의 단서가 하나라도 나오는 건 지양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많은 정보가 노출되지 않았으면, 피해에 집중하기보다 가해자에 대해 조명했으면, '가해자 누구의 사건' 이런 식으로 이름을 바꿨으면 좋겠어요. 얼마 전 기사를 보니 한 불법촬영 용의자가 공개 수배되자 지인이 그걸 알아봤고, 결국 용의자가 자수를 했더라고요. 저희가 아침에 받는 상담 전화 대부분은, 전날 밤 누군가가 피해자의 촬영물을 보고 연락을 해서 피해자가 패닉에 빠진 거예요. 피해자에게 '이거 너 아니야?'라고 할 게 아니라, 가해자를 찾는 전단지가 더 많이 부착됐으면 합니다. "모든 생존자들,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숨어요. 자기의 목소리를 내지도 않고 모든 걸 바꾸려고 하고 이름도 얼굴도 번호도 친구들도 싹 다 끊고, 그냥 정말 아무런 생활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는 생존자들도 너무 많아요. 저는 하고 싶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온 거였고 저 같은 생존자들이 또 생기지 않길 바라기도 하고 생겼다고 해도 보호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어요."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디지털 성범죄 유포 및 유포 불안 피해 경험에 관한 연구> 중에서) ※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라면 누구나 지원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상담과 삭제 모두 무료이고, 지원 기간에 제한이 없습니다. 수사 과정과 의료, 법률 지원도 연계합니다.
아파트에서 만난 70대 청소노동자 “내 나이가 70대인데 누가 써주노. 청소일밖에 할 수가 없는데, 이것도 이제 나이 많다고 그만 나오라고 그러면...” 아파트 청소를 하는 1954년생 여성은 음력설이 지나 만 70세가 됐습니다. 이 일을 시작한 건 재작년 겨울. 휴대전화 애플리케이션으로 은행 거래를 하다가 우연히 구인 광고를 보고 지원했습니다. 그전까진 자식 여럿을 키우느라 돈벌이를 해본 적이 없어서 일자리를 어디서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 막막했습니다. 잠시 공공근로도 해봤지만, 젊은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나이든 사람은 적게 일하고 적게 받는 자리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매일 점심시간을 포함해 하루 7시간 아파트 한 동을 혼자 청소합니다. 층마다 걸레질을 반복하다 보면 겨울에도 내복이 땀에 젖습니다. 140만 원 남짓한 월급을 받을 때면 너무 적다 싶으면서도, 언제까지 이 일을 시켜줄지 걱정입니다. “전에 본사에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쓰라고 해서, 내가 우리 월급을 좀 올려달라고 그랬어요. 한 200만 원은 받았으면 싶어서. 그런데 그거는 내 생각이지 뭐. 이제 내가 만 70살이잖아요. 전에 70살 넘은 사람 확 다 잘랐다 그러더라고.” 당장 일이 없으면 매달 국가에서 받는 기초연금 33만 원으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데, 월세를 내면 끝입니다. 국민연금은 한 달에 2만 원 남짓 내다가 진즉 중단하고 찾아 썼습니다. 먹고살기가 빠듯하니 최소가입기간(10년)을 채우는 일은 사치였습니다. 이렇게 노후준비가 되지 않은 노인에게 일자리는 당장 생존의 문제입니다. 연금으로 여생을 보낸다는 ‘꿈같은 이야기’ 노인 3명 중 1명이 일을 하지만, 이들은 젊은 노동자들과 달리 일자리를 잃어도 실업급여를 받지 못합니다. 고용보험법상 ‘65세 이후에 고용된 사람’은 적용 제외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노인 단체들은 고령노동자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나라는 65세 이상 취업률이 굉장히 높고, 일하고 싶어 해요. 노후 소득 보장이 돼 있지 않으니까 뭔가를 해서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거죠. 그 사람들이 어찌 보면 가장 취약한 계층이잖아요. 사회 보험에서 보호해줘야 하는 주요한 대상인데 정작 그 부분들이 빠져 있는 거죠.” (이상학 노후희망유니온 정책위원장) 지난 2018년 헌법재판소에서 이 문제를 판단한 적이 있습니다. 만 68세에 입사해 7년 뒤 퇴사한 고령노동자 A씨는 근로복지공단에 실업급여를 신청했다가 거부당하자 헌법소원을 제기했습니다. 고용보험법의 적용 제외 조항이 ‘65세 이전에 고용된 사람’과 ‘65세 이후에 고용된 사람’을 합리적 이유 없이 차별해 평등권을 침해하고, 과잉금지원칙을 위반해 재산권과 근로 권리를 침해했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근로의 의사와 능력이 있는지를 일정한 연령을 기준으로 하는 게 특별히 불합리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우리 사회보장체계는 65세 이후 ‘소득상실’이라는 사회적 위험이 보편적으로 발생한다고 보고, 고용에 대한 지원이나 보장보다 노령연금이나 기초연금 같은 사회보장급여 체계를 통해 노후생활이 안정될 수 있도록 설계됐다는 설명입니다. 쉽게 말해 65세가 넘으면 실업급여 대신 연금으로 어느 정도 소득을 보장하는 만큼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처음 언급한 70대 청소노동자처럼 현실 속 고령노동자의 삶은 결코 ‘안정적’이지 않습니다. 통계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은 2009년부터 OECD 국가 중 줄곧 1위, 특히 한국 여성 노인은 남성보다 더 가난합니다. 주로 돈을 벌었던 남성에 비해 연금 급여는 적고, 기대수명은 길기 때문입니다. 노인의 가처분소득이 적다 보니, 일자리에 뛰어든 사람은 많습니다. 65~69세 고용률은 50.4%로 일본(50.9%)에 이어 두 번째로 높았는데, OECD 평균의 두 배가 넘습니다. OECD는 “한국의 연금 제도가 아직 미성숙하며, 고령 노인이 받는 연금은 매우 낮은 수준”이라고 평가했는데, 실제로 연금의 소득대체율은 31.6%에 불과합니다. 일할 때 벌었던 평균소득의 3분의 1도 안 되는 돈으로 살아야 하는 겁니다. 실제로 연금을 받는 노인의 77.3%가 월 60만 원 미만의 적은 금액을 받는 데 그칩니다. 그나마도 노인 4명 중 1명은 노령연금을 받지 못합니다. 노후가 불안정하다 보니 노인 자살률은 OECD 평균의 2.7배로 높습니다. “노인 빈곤은 시급한 인권 현안”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는 “노인 빈곤 해소는 시급히 개선해야 할 인권 현안”이라며 정부에 대책 마련을 권고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고용보험법상 실업급여 수급자 연령을 높이는 겁니다. 앞서 연령 제한을 만 65세에서 70세로 늦추거나 아예 폐지하는 내용의 고용보험법 개정안이 여러 건 발의됐지만 국회에 머물러 있습니다. 고용노동부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단 입장입니다. 외국의 사례를 보더라도 실업급여는 공적연금을 받기 시작하는 때까지만 주고 있다는 겁니다. 법에 65세로 연령 제한을 둔 게 1996년인 만큼, 내년부터 국민 5명 중 1명이 노인인 초고령사회를 맞는 현실을 고려해야 한단 반론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복지가 잘 돼 있는 유럽 국가와 단순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연금만 받아도 생활이 되는데 우리는 그게 안 되는데다 아예 못 받는 사람도 있거든요. 65세 이상이라고 고용보험을 적용하지 않는 건 차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보험의 기본적인 역할, 국가의 역할을 재검토해야 합니다.” (이상학 노후희망유니온 정책위원장) “65세 이상 고령자들의 고용이 대체로 비정규직 또는 저소득 직종에서 간접 고용 형태로 이뤄지고 있음을 감안하면, 65세 이후에 실업급여를 받더라도 최소한의 생활수준을 보장받기는 어려울 겁니다. 부족한 소득을 고용을 통해 보충해야 되는 상황에서 ‘국민연금이냐, 실업급여냐’ 양자 간 선택을 하도록 하는 제도는 상당히 부적절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박은정 인제대 법학과 교수) 실업급여와 공적 연금 모두 ‘국민의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라는 점을 다시 한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도가 미처 껴안지 못한 가난한 노인은 엄연히 존재하고, 노후를 버텨야 하는 이들에게 밥벌이는 ‘생존’ 그 자체입니다. “고령자들이 실업 문제에 놓이는 건 결국 적절한 은퇴 연령이라는 게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노동시장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65세 이상의 고령자가 증가하게 된 거죠. 소득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인 겁니다. 따라서 65세 이상 고령자에게 실업급여를 지급해야 하느냐에 문제의 핵심이 있는 게 아닙니다. 연령으로 인해 ‘소득 상실’이라는 사회적 위험을 맞이하는 고령자들에게 실효적인 사회보장 체제가 현재 충분한가, 실업급여 제도를 확대해야 되는가를 논의해야 합니다.” (박은정 인제대 법학과 교수) 디자인 : 김정연
지금 대한민국은 전 세계가 주목할 만큼 ‘아이를 낳지 않는 나라’입니다. 출산율은 매번 신기록을 세우며 바닥을 찍고 있고, 앞으로 펼쳐질 인구감소는 ‘중세 흑사병’에 비유될 정도입니다. 그러니 아이를 낳겠단 의지만 있으면 어떻게든 돕겠단 게 우리 사회 분위기인데, 정작 남들보다 더 어렵게 부모되기를 선택해도 소외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장애인들입니다. 지적장애 부모의 육아 이달 초, 인터뷰를 위해 충북에 있는 박형용 이상미 부부의 집을 찾아간 날은 아주 추웠습니다. 집 앞에 다다랐을 때 실내복 차림으로 쓰레기봉투를 버리러 나온 남성을 보고 형용 씨일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아기를 키우는 여느 집처럼, 현관문에는 아기가 깨지 않게 초인종을 누르지 말아 달라는 스티커가 붙어있었습니다. 집안은 예상대로 형용 씨 덕분에 깔끔했습니다. 둘째를 낳은 지 석 달밖에 되지 않은 상미 씨는 남편이 집안일은 물론 아기를 씻기는 일도 도맡아서 한다고 말했습니다. 두 사람은 똑같은 커플 옷을 맞춰 입고 서로를 “착한 사람”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부부는 지적장애 3급입니다. 인지 능력과 사회 적응 능력이 부족하지만, 생후 23개월과 3개월인 두 아이를 돌보는 일을 비롯해 일상생활을 둘만의 힘으로 해내고 있습니다. 가족 없이 외롭게 살아온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모르는 것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해결했습니다. 최근 첫째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아동학대’에 대해 검색해 보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박형용 요즘 아동학대 그런 게 안 좋은 건지 보고 있고. 나쁜 거, 때리는 사람도 있다고 하고. 그래서 그거 잘 봐야 한다고. 학대는 애들한테 안 좋으니까. - 어떻게 잘 보라고 하던가요? 그냥 보다가 (어린이집에) 전화해 보는 거죠. 애는 괜찮나, 아픈 데 없나 다 전화해 보고. 괜찮으면 병원 안 가도 되고. 조금만 아파도 병원 가요, 우리가. 부부는 기초생활수급비와 양육수당 등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형용 씨는 택배 상하차 작업을 하다가 크게 다쳐서 일을 못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물건은 중고거래 앱으로 저렴하게 사거나 무료 나눔을 받아 알뜰하게 마련했습니다. 이날도 난방비를 아끼느라 아기가 지내는 안방을 제외하고 집안은 발이 시릴 만큼 썰렁했습니다. ▶ 관련 기사 : 장애 부모의 쉽지 않은 육아…"인터넷 보고 알았어요" “아기 예방접종이라도 도와줘야 하는데...” 부부와의 인터뷰는 매끄러웠지만, 종종 과거 시간이나 숫자를 떠올릴 땐 헷갈려했습니다. 지적장애가 있는 두 사람에게 문해력이 필요한 서류 작성 같은 건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최근 둘째 아이 출생신고를 하는 과정에서 큰 실수가 있었습니다. 바로잡으려면 법적으로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두 아이가 커갈수록 부부에겐 이렇게 버거운 순간이 더 많아질 겁니다. 이현주 충북여성장애인연대 대표 큰 아이 출생신고를 할 때는 저희 도움이 있었지만, 작은 아이 때는 부부가 다 했거든요. 우리가 장애인 가정에 일주일에 2~3번 가야 하는 걸 1번으로 줄였기 때문에 많은 불편함이 있는 거죠. 지적장애인은 글씨 같은 걸 잘 몰라요. 아이 예방접종을 할 때에도 달력에 ‘병원 가는 날’이라고 적어주고, 병원까지 이동해 주는 도움이 필요해요. 충북여성장애인연대 활동가 6명은 일주일에 한 번씩 형용 씨 부부 같은 장애인 가정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지방자치단체 보조금을 받아하는 지원 사업입니다. 시력장애가 있는 이현주 대표를 비롯해 활동가들은 모두 장애가 있습니다. 지원 가정에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누구보다 잘 알 수밖에 없습니다. 이현주 충북여성장애인연대 대표 같은 동료잖아요, 아픔을 같이 겪었던 사람들이고. 감수성도 확실히 비장애인 하고는 달라요. 저도 중도장애라 집에만 있었거든요. 장애인이 나오기가 되게 힘든 사회잖아요. 제게 ‘나오라’고 한 곳도 충북여성장애인연대였어요. 대부분의 지적 장애인들이 (국가 돌봄 서비스 인력인) 활동지원사 지원을 못 받거든요. 움직이고 활동한다는 이유 만으로요. 이런 가정이 아이 키우고 생활하는 데 엄청 어려워요. 교육도 필요한데 나오지를 못하고요. 그래서 우리가 이런 분들을 위한 돌봄 사업을 하고 있는 거죠. 자녀양육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지만, 장애부모는 일상에서 수시로 한계에 부딪힙니다. 일례로 거동이 불편한 엄마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누워있는 아이를 안을 수도, 기어가는 아이를 쫓아갈 수도 없습니다. 때로는 자신도 돌봄이 필요한 장애부모에게 누군가를 늘 돌봐야 하는 일은 그래서 더 어렵습니다. 가장 큰 고민은 “자녀양육” 현재 장애부모를 지원하는 제도는 주로 출산과 초기 양육이 집중돼 있습니다. 장애여성이 출산을 하면 비용을 지원하고, 집에서 산후관리를 해줍니다. 아이가 자라면 교육비를 지원하는데, 특히 부모에게 감각적 장애(시각·청각·언어·지적·자폐성·뇌병변)가 있는 경우 만 12세 미만 자녀는 언어 재활이나 수어지도 같은 교육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녀양육은 여전히 장애부모의 가장 큰 고민입니다. 만 49세 이하 여성장애인에게 필요한 복지 서비스를 물었더니 ‘자녀양육지원(13.3%)’을 1위로 꼽았습니다. 임신 기간 중 힘들었던 점에 대해서도 ‘본인의 건강 악화(12.6%)’ 다음으로, ‘자녀 양육을 잘할 수 있을지 두려워서(12.3%)’라고 답했습니다. 눈여겨볼 점은 장애 종류에 따라 어려움을 느끼는 상황도 다르단 겁니다. 미성년자 자녀를 기르는 장애부모들에게 물었더니, ‘자녀양육·교육비용 부담(뇌전증·정신장애·지체장애·호흡기장애)’, ‘자녀와 의사소통의 어려움(지적장애)’, ‘주위의 편견 및 시선(안면장애)’ 등 주로 꼽는 어려움이 달랐습니다. 또 부부가 같은 장애를 가진 경우가 많았는데, 같은 생활방식과 문화를 공유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일상의 제약도 같아 상호 보완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장애부모마다 개인별 맞춤형 지원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저마다 삶의 목적을 추구할 수 있게” 호주는 2016년 장애인과 가족, 돌봄 서비스 제공자를 지원하기 위한 ‘국가장애보험(NDIS)’을 도입했습니다. 장애인이 스스로 삶의 목적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필요한 서비스를 지원하기 위한 제도입니다. 전문가의 관점에서 일률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 스스로 목적 달성을 위해 필요한 서비스를 선택하고 제공받는 방식입니다. 영국은 장애부모가 지방정부에서 사회 돌봄 등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인 ‘카운티 카운실(County Council)’에 서비스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자녀 목욕 지원이나 부모 신체 특징에 따라 조정이 가능한 유모차, 집 내부 수리, 자녀 입학 및 등원 지원 같이 구체적인 서비스 목록을 적어 내면 평가를 거쳐 제공합니다. (출처 : 국회입법조사처, ‘장애부모의 자녀 양육지원 제도 현황 및 개선과제’)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 우리나라는 정책을 위에서 정해놔요. ‘이런 제도, 이런 서비스가 있으니까 신청하세요’ 하잖아요. 영국은 카운티 카운실에서 장애가정에 조사를 나가서 면담하면서 어떤 서비스가 필요한지 확인해요. ‘집에 가봤더니 계단이 너무 많아서 공사를 해야 될 것 같다거나, 가벽을 없애야 할 것 같다’는 식으로요. 지금 구체적으로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더라도 이 가정에 필요한 지원을 대단히 유연하게 해주는 거죠. 그래서 이 ‘평가(assessment)’가 되게 중요해요. 이게 모든 복지 절차에 들어가 있어서 대단히 인상 깊었어요. 또 우리는 정부 지원을 받을 때, 빈곤이나 관계를 증명해야 하는 요건이 있잖아요. 호주는 그게 거의 없다시피 해요. 그냥 누군가를 돌보고 있으면, 도움을 받을 수 있어요. 장애인 가족으로서 지원을 받기도 하고, 또 장애부모를 둔 자녀는 영케어러로서 지원을 받기도 해요. 누구나 부모 역할을 할 권리가 있다 누군가는 쉽게 말합니다. “장애가 있는데 아이를 책임질 수 있겠느냐”라고요. 최근 보도한 장애가 있는 부모, 장애가 있는 임산부 기사에도 비슷한 댓글이 달렸습니다. ▶ 관련 기사 : 1명이 소중한 아기… 장애 친화 산부인과 예산 0원 '외면' 장애인의 모성권은 헌법에 보장된 권리입니다. 헌법은 ‘모든 국민이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는 모성의 보호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장애인복지법은 ‘임산부 여성장애인과 아기의 건강을 위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임과 지원제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규제 등에 관한 법률(장애인차별금지법)은 ‘장애인 양육권 보장’을, 장애인 건강권 및 의료접근성 보장에 관한 법률(장애인건강권법)은 ‘장애인의 건강권 보장’을 각각 정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동복지법에 따라 ‘아동은 건강하게 태어나 행복하고 안전하게 자랄 권리’가 있습니다. 장애부모에 대한 지원은 곧 아동에 대한 지원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이런 가치를 위해 ‘다름’은 더 이상 ‘차별’이 되어선 안 됩니다. 장애로 인해 부모역할에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더 세심한 복지 지원과 인식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디자인 : 박수민
“한국 오빠랑 데이트하고 싶어요.” “동네언니들처럼 한국에 시집갈래요.”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국제결혼 홍보 영상의 제목입니다. 결혼중개업체들이 찍어 올린 건데 앳된 얼굴의 외국인 여성들이 자기소개를 합니다. 한국말을 할 줄 몰라 중개업체 관계자가 통역을 해주는 식인데 묻는 건 이름, 나이, 키, 몸무게, 직업, 사는 곳, 부모님 나이, 혼인 경험 유무 등 대동소이합니다. 이들은 대부분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나 갓 성인이 됐습니다. 어느 영상에서 스무 살인 여성이 “30,40대 신랑을 찾는다”라고 하자 중개업체 관계자는 “일하는 게 점점 힘들어진다. 조만간 라오스로 넘어가야 할 것 같다”라고 말합니다. 남자친구를 얼마나 사귀어봤는지, 문신이 있는지 묻는 경우도 많습니다. 국제결혼을 원하는 남성들이 선호하는 여성상을 반영한 질문일 겁니다.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부추기는 영상도 있습니다. “문신이 있는 신부는 절대 다시 생각해 보세요” “베트남 여성의 정조 관념, 성개념은 과연 개방적일까?” “신부의 기숙사 생활 중 방탕한 생활 사례, 어떻게 알아챌 수 있나?” 이 중개업체 대표는 “결혼 주선 시 여성의 산부인과 검사 결과를 제공한다”라며 실제 현지 여성의 결과지를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결과지에 “자궁 크기라든지, 아기가 착상되는 곳의 두께가 나온다”라고 설명합니다. ▶관련 기사: 키·몸무게에 산부인과 검사지… 국제결혼 불법광고 여전 만남부터 결혼까지 ‘5.7일’ 이런 광고는 실제 국제결혼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가장 최근 조사*에 따르면, 결혼중개업체를 통해 국제결혼한 한국인 배우자의 절반(50.5%)이 ‘온라인 광고’를 통해 업체를 알게 됐다고 답했습니다. *여성가족부, ‘2020 결혼중개업 실태조사’ 한국인 배우자는 40대(61.3%)가 가장 많고, 외국인 배우자는 20, 30대(79.5%)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외국인 배우자는 대부분 베트남(83.5%) 출신이었고, 이어 캄보디아(6.8%), 우즈베키스탄(2.7%), 중국(2.3%) 순이었습니다. 이들이 현지에서 처음 만나 결혼식까지 걸린 시간은 평균 5.7일. 그나마 3년 전 조사보다 1.3일 길어진 겁니다. 한국인 배우자가 왕복항공료, 맞선과 결혼 비용을 포함해 결혼중개 수수료로 업체에 내는 돈은 평균 1천372만 원. 반면 외국인 배우자는 중개인에게 성혼수수료 등의 명목으로 평균 69만 원을 냈습니다.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 많은 비용을 부담하며 외국인배우자를 맞는 데는 과거 ‘도농 격차로 인한 성비 불균형’이 시작이었습니다. 1990년대 초 정부는 ‘농촌 총각 결혼시키기’ 사업을 시행하며 국제결혼을 장려했습니다. 지금도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미혼 남성의 국제결혼을 위해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예산으로 매매혼을 조장한다’는 오랜 비판에 지금은 속속 폐지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국제결혼 유행은 2007년 미국 국무부의 ‘인신매매보고서’에 불명예스럽게 기록됩니다. ‘베트남 처녀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 ‘베트남 숫처녀 결혼비용 780만 원’, ‘초·재혼, 장애인 환영, 65세까지 100% 성사’ 같은 현수막 문구를 문제 삼은 겁니다. 당시 국제결혼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셈입니다. 맞아 죽은 신부들 시작부터 기울어진 관계는 결혼이민자를 철저히 ‘을’로 만들었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서 이들은 쉽게 ‘피해자’가 됐습니다.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서 결혼이주여성 920명 중 42.1%가 ‘가정폭력 경험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 ‘결혼이주민의 안정적 체류보장을 위한 실태조사’ 2007년 후인마이 씨가 베트남에서 한국에 온 지 2개월 만에 남편에게 맞아 사망했습니다. 2010년에는 베트남 여성 탓티황옥 씨가 부산에서 남편에게 흉기에 찔려 숨졌습니다. 한국에 들어와 신혼생활을 한 지 일주일 만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남편은 정신분열증으로 8년간 57차례 치료를 받았단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습니다. 화장장으로 들어가는 관을 붙잡고 오열하는 고 탓티황옥 씨의 가족 그해 국제결혼중개업자가 혼인경력, 건강상태, 성폭력·가정폭력·아동학대 등 범죄경력 등을 신랑과 신부의 자국어로 제공하도록 법이 바뀌었지만 비극은 계속됐습니다. 2012년 베트남 여성이 정신질환자 남편에 의해 살해됐고, 중국 동포 2명이 이틀 간격으로 각각 남편의 폭력에 숨졌습니다. 폭력은 최근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2018년 12월에는 경남 양산에서 50대 남성이 필리핀 출신 아내를 흉기로 살해했고, 이듬해 11월 경기 양주에서 50대 남성이 베트남 국적 아내를 살해하고 시신을 암매장했습니다. 베트남 출신 아내를 무차별적으로 폭행한 남편의 동영상이 공개돼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올해 4월에도 한 이주여성이 아들이 보는 앞에서 남편에게 살해됐습니다. ▶관련 기사: 베트남 아내 짓밟은 한국인 남편… 참다못해 몰래 찍었다 결혼이주여성의 체류자격 연장 과정에서 한국인배우자의 신원보증제도를 폐지했지만, 여전히 신원보증을 요구받는 경우가 적지 않고 한국 국적을 취득할 때 한국인배우자의 영향력은 절대적입니다. 폭력 신고를 꺼릴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수사의뢰 ‘0건’ 결혼이주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돼 왔습니다. 정부는 2021년부터 맞선 상대방의 얼굴, 키, 몸무게 등을 공개하는 국제결혼 광고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여성을 상품화하고 인권을 침해한다는 지적 때문입니다. 징역 3년 이하의 형사처벌까지 가능하지만 여전히 유튜브와 온라인 카페, 블로그엔 외국인 여성의 모습을 드러낸 광고가 넘쳐납니다. 허오영숙 │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대표 어떻게 사용될 것인지 알고 촬영에 임했는지는 다른 문제인 것 같아요. 한국의 유튜브나 여러 채널을 통해서 아무나 볼 수 있는 걸로 완벽하게 이해를 하고 동의를 했는지요. 자기가 찍은 영상이 전체 구성에서 어떻게 배치되는지는 또 다른 문제잖아요. 그런 것들을 이해하고 했는지는 확인이 필요한 것 같아요. 결혼 이주 여성들이 한국에 와서 정착하고, 우리의 동료 시민으로 살고 있는데 자꾸 그런 부정적인 모습들이 차별적인 인식을 강화시킨다는 생각이 들어요. 결혼중개업체의 성 차별적이고 인종 차별적인 광고에 대해서 정부가 신경 써서 규제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온라인 불법 광고에 대한 제재는 대부분 행정처분에 그치고 있습니다. 주무부처인 여성가족부는 지난 2020년 불법 광고 68건을 경찰에 수사의뢰한 바 있지만, “URL만 첨부했을 뿐 수사 의뢰 대상자, 위반 내용 등을 기재하지 않았다”라는 이유로 모두 반송됐습니다. 여가부 관계자는 “업체 정보 등을 알기 어려워 특정해 수사 의뢰할 수 없었다”라고 설명했지만, 광고에 버젓이 상담 전화번호와 업체명 등을 공개한 경우도 많습니다. 이후 매년 점검에도 수사의뢰는 0건. 올해는 불법 광고 335건 중 271건을 관할 지방자치단체에 통보하고, 방송심의위원회에 심의 의뢰한 상태입니다. 점검도 허술해 업체 주소지가 바뀐 걸 모르고 엉뚱한 지자체에 조치를 지시하거나, 계정을 비공개 전환하더라도 문제의 영상이 여전히 남아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제재가 약하지만 그나마도 이를 피하기 위한 꼼수 광고가 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브이로그 형식의 국제결혼 광고입니다. 한 중개업체 영상에선 한국인 남성이 해외에서 짝이 된 여성과 여행을 다녀왔다며, 욕조 안에 들어간 여성의 사진을 고스란히 올리기도 했습니다. 김현미 │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광고인지 사적인 삶을 유튜브에 올린 건지 헷갈리게 하는 경우가 많아요. 노골적인 광고라기보다는 국제결혼을 굉장히 아름답게 묘사하고, 실질적인 삶의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영상을 하나하나 봐야 알 수 있거든요. 여성들이 연기를 하는 것인지 실제인지 알 수 없고, 또 불법촬영을 하는 경우도 많아요. 그 여성들은 모르게, “베트남 여성들 이렇게 예쁘다”라면서 길 가다가 말 걸고 막 찍거든요. 찍힌 사람은 자기의 의도와 상관없이 마치 국제결혼의 대상자나 참여자처럼 보이게 하는 거니까, 불법 촬영이죠. 시작부터 불평등한 결혼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 결혼이주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이들은 국제결혼 광고에 대해 “존중받지 못하는 느낌이 든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중개업체에서는 저희한테 예쁜 사진만 달라고, 예쁠수록 더 좋다고 해요. 제 친구는 결혼정보업체에서 맞선 볼 때 섹시하게 입고 오라는 요구받은 적 있어요.” “광고 때문에 (베트남 사람을) 존중하지 않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왠지 물건 갖다 파는 것처럼 느껴져요.” “전에는 어떤 의미인지 잘 몰라서 이상한 생각이 안 들었어요. 지금 보니까 이거는 인권침해예요.” “대한민국에서 (이런 광고를) 보여주는 자체가 (여자) 파는 것처럼 인신매매하는 거잖아요.” 경제력 우위를 이유로 한쪽에 선택권이 쏠린 채 시작된 관계는 평등하기 어렵습니다. 평생을 함께 할 배우자를 구하는 데 있어서 더 그렇습니다. 결혼이주자들은 물론, 한국인배우자, 그리고 이들이 꾸리는 다문화가정이 우리 사회에서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국제결혼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조장하는 불법 중개 광고를 보다 적극적으로 제재할 필요가 있습니다. 디자인 : 김정연
이태원 참사 트라우마에 대해 들어보고자 했을 때 생각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날 밤 SBS 보도국에서 참사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취재진입니다. 영상취재팀 김태훈 기자가 밤새 촬영한 그날의 장면은 꽤 오래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었습니다. 생존자, 목격자, 구급대원, 경찰, 의료진만큼 현장 취재진도 트라우마 위험군에 해당됩니다. 카메라 앞에 앉는 것은 처음이라는, 17년 차 영상취재기자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물었습니다. 야근 중 쏟아진 제보 지난해 10월 29일 밤. 야간 당직이었던 김태훈 기자는 경찰의 마약 단속 합동 취재를 위해 이태원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함께 이동하던 취재기자에게 “이태원 일대에서 응급환자가 다수 발생했다”는 제보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사고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응급환자는 심정지 환자”라는 소식이 이어지며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습니다. 환자가 몇십 명 단위가 되면 저 혼자 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일단 회사에 상황을 전파하고 인력 충원을 요청했어요. 삼각지역에 다다랐을 때 이미 차량 소통이 안 됐어요. 거기서부터 녹사평역까지 장비를 들고 그냥 뛰어갔습니다. 녹사평역에서 한강진역까지, 이태원 거리는 마비된 상태였습니다. 인파를 뚫고 들어가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처참했습니다. 119 구급차가 급하게 나오고, 도로 위에 5~10명 단위의 사람들이 앉아서 계속 CPR을 하고 있었어요.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더미처럼 눕혀져 있었어요. 그나마 CPR을 하는 건 생체 반응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아닌 사람들은 한쪽으로 빼놓은 상황이었고요. 정말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순간 무슨 생각을 했나요?) 현장이 너무 처참하고 광범위했기 때문에 ‘혼자서 이걸 커버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을 제일 많이 했고. 인파가 많이 몰려서 전화가 잘 안 되는 상황이다 보니까 취재기자와도 떨어져서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냥 각자 위치에서 역할을 다할 뿐이었고, 그렇게 취재를 정말 정신없이 밤새도록 했던 것 같아요. 몰려온 후유증 김 기자는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꼬박 10시간 가까이 현장을 취재했습니다. 9킬로그램짜리 카메라를 밤새 어깨에 걸쳐 메고 있으면서도 하도 정신이 없어서 무거운 줄도 몰랐다고 합니다. 교대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지만 도통 잠들 수 없었습니다. 씻고 쉬는데 자꾸 그 생각이 나는 겁니다. 몸은 녹초가 돼 있는데 정신이 너무 멀쩡한 거죠. 잊기 위해서 음악도 듣고, 멍 때리기도 하고, 애들이랑 놀이터 가서 놀기도 했는데 계속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때 한 선배가 전화로 “며칠 쉬는 게 어떻겠냐”라고 하더라고요. 이 상황이 지속되면 정말 이 일을 더 못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되는 거예요. 짧은 휴식 끝에 평정심을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후유증은 생각보다 컸습니다. 한동안 보지 않기로 다짐했던 뉴스를 다시 보는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계속 나는 거예요. 여러 가지 복합적인, 표현할 수 없는 거였는데. 뭐 때문에 눈물이 나는지 알았으면 제어를 할 텐데 그냥 하염없이 눈물이 났던 것 같아요. 휴가가 끝나고 그런 상황을 회사에 보고했고, 이후 이태원 참사와 관련된 현장은 되도록 안 가도록 업무를 배정해 줬어요. 수많은 사고 현장을 취재했지만 김 기자는 입사 후 광우병 집회, 쌍용차 사태, 연평도 포격 사건,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 같은 대형 사건사고 현장을 취재했습니다. 2018년엔 한강에서 구조작업 중 실종된 소방관 시신을 해상취재 과정에서 발견해 기자상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그런 경험들이 쌓일수록 상처도 남았습니다. 세월호 참사 때 제가 있던 곳이 진도 체육관이었습니다. 실종자 가족들이 거기서 대기를 하다가 신원이 확인된 실종자가 발견되면 ‘몇 번 실종자 누구’라고 호명이 돼요. 그럼 오열하면서 가족들이 팽목항으로 가는 거예요. 오열하는 모습을 봤을 때 굉장히 큰 아픔이고 상처라고 생각하거든요. 참혹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마주한 이태원 참사는 그래서 충격이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가 취재하는 현장은 초기 대응이 끝난 상황이 많거든요. 응급 환자들은 이송하고, 시신은 수습한 뒤 현장 잔해라든가 사고 원인을 취재하지 이렇게 다 노출된 상황은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심지어 세월호 참사 때도 수습된 시신은 소방에서 담요로 가림막을 쳐서 운구되는 모습만 제한적으로 취재했어요. 트라우마가 남긴 것 김 기자는 여전히 이태원 참사 뉴스를 보지도, 이태원 주변을 가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상처만 남은 것은 아닙니다. 참사 현장의 사람들을 더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게 됐습니다. 몇 년 전 받은 언론인 대상 트라우마 이해 교육도 도움이 됐습니다. 예전에는 참사 현장에 가면 목격자한테 인터뷰를 막 요청했던 것 같아요. 우리 일이 우선이라는 생각으로 접근하고... 세월호 참사 이후 자성 노력으로 재난보도 준칙도 마련했고, 이태원 참사 때도 목격자 인터뷰를 시도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거든요. 제가 언론인 트라우마 교육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그들도 우리도 모두 사람이다"라는 말이에요. 피해자나, 그 가족들이나, 현장을 취재하는 언론인이나, 뉴스를 소비하는 이용자들이나 모두 다 사람인 거고 인권을 존중해야 된다는 거였어요. 그런 교육이나 제도를 통해서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트라우마는 정신력만으로 이겨낼 수 없다".. 트라우마 Q&A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전례 없는 대규모 참사는 트라우마의 강도 또한 컸습니다. 실제로 이태원 사고 통합심리지원단을 통해 상담을 받은 사람은 유가족(1880건)과 부상자(1041건) 못지않게 목격자(1818건)나 일반국민(2049건)이 많았습니다. 조금씩 일상을 회복했더라도 참사 1주기를 기점으로 심리적 고통이 되살아날 수 있고, 사건 발생 1년이 지나도록 고통과 몰입이 극심한 경우 '지속성 복합 애도 장애'에 해당돼 적절한 도움이 필요합니다. 다음은 심민영 국가트라우마센터장과의 일문일답. Q. 지난 1년간 생존자와 유가족들을 직접 만나보니 어떤가요? A.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회복으로 가는 분도 있고, 후유증이 장기적으로 고착되는 분도 있어요. 저희가 모니터링 차원에서 초기에 위기에 개입하고, 병원이나 지역의 정신건강복지센터를 연계했어요. 사건 현장에 계셨던 목격자들도 굉장히 트라우마가 강하고 어려움을 호소했어요. 맞닥뜨린 장면의 처참함이라든가 참혹함의 강도가 굉장히 셌고, 일상생활에서 예상할 수 있는 그런 장면이 아니잖아요. ‘사건 이후 며칠 동안 굉장히 멍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증상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라고 표현을 하세요. 심폐소생술이라든가 구조 활동을 같이하셨던 분들은 좋은 의도에서 참여를 했지만 또 그러는 바람에 고스란히 노출이 된 거거든요. Q. 유독 더 힘들어하는 분들의 특징이나 공통점이 있을까요? A. 이유를 한두 가지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첫째는 처음 노출됐던 트라우마가 너무 컸던 경우예요. 가까이서 봤거나, 사망자를 지속적으로 봐야 했거나, 오랜 시간 현장에 머물렀거나요. 충격의 정도는 노출과 정확하게 비례하거든요. 둘째는 ‘2차 스트레스’입니다. 2차 스트레스가 더해지는 경우 초반에 받은 충격이나 슬픔이 잘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어려움이 가중돼요. 2차 스트레스라는 게 대표적으로 사회의 부정적인 반응이라든가, 갈등이라든가, 여러 분쟁 상황이에요. Q. 어느 정도 일상을 회복했더라도, 1주기를 앞두고 고통이 심해질 수 있다고요? A. 트라우마는 시간이 가면 완화되지만, 계속 좋아지기만 하는 건 아니에요. 그 사고나 상황을 연상시키는, 또 고인을 연상시키는 것이 있을 때, 이를테면 고인의 생일이나 가족들의 기념일이나 명절일 수도 있겠죠. 그리고 대표적인 게 사고가 있던 그날입니다. 내가 머리로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몸으로 나타나는 분들이 많아요. 이상하게 몸이 되게 아프다든지,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하고 잠이 안 온다든지, 굉장히 불안하고 예민해지는 느낌을 가진다든지. 생각해 보면 그 사고가 있던 즈음인 거죠. Q. 주위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이상 징후가 있을까요? A. 애도라는 건 평생 살면서 계속되는 여정이거든요. 어느 순간에 ‘이제 다 끝났다' 이런 건 없습니다.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 갑자기 없어졌다는 건 내 삶도 굉장히 큰 변화가 일어나는 거고 계속 적응해 나가는 거예요. 그런데 ‘애도의 과정이 뭔가 잘 진행되고 있지 않다’라고 알아챌 수 있는 힌트가, 고인의 물건을 정리하는 양상을 보면 알 수 있거든요. 그날로 바로 물건을 다 없애고 흔적을 없앤다든가, 아니면 반대로 고인의 물건을 아무것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든가. 또 고인의 사진을 쳐다보지도 못한다든지, 아니면 고인의 방에 들어가서 하루 종일 나오지 않는다든지 하는 겁니다. Q. 1년이 지나도록 일상을 살아내기가 힘든 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교과서적으로는 1년을 어떤 기점으로 보거든요. 1년이 지나도록 고인에 대한 극심한 그리움과 비통함과 분노, 특히 분노가 자기를 향해서 너무 큰 자책이나 고인을 따라가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힌다든지, 이런 사실 자체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거꾸로 돌리고 싶은 생각에 너무 사로잡혀 있다든지. 이렇게 되면 문제가 있다고 보거든요. 즐겁게 생활하고 두 발 뻗고 자는 걸 죄책감 느낀다고 표현하는데, 울 땐 울더라도 밥을 잘 먹어야 하는 거고,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도 보내야 하고, 재미있는 프로그램도 보고, 웃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고인에 대한 얘기도 많이 해요. 고인을 단지 비극적인 사건에 희생된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행복하고 건강하게 식구들과 살았던, 그런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잘 기억하실 수 있게끔 합니다. 점차 고통이 옅어지고, 본인 마음속에서 잘 간직한 채로, 또 나의 남은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거죠. 심민영 국가트라우마센터장 Q. 약물 치료를 병행하는 경우가 많나요? A. 우울하고 잠 못 자고 불안한, 그런 증상들이 굉장히 괴롭거든요. 그런 경우에는 약물 치료를 통해서 완화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Q. 고통이 신체적 질환으로 발현되는 분들도 있다고요? A. 매년 연구 결과를 보면 세월호 유족들 중에서 상당수가 신체적 질환으로까지 이행이 되고, 여러 건강 관련 지표가 안 좋아진다고 하거든요. 단순히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강력한 스트레스나 충격이 우리 몸의 건강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상담 현장에서도 쉽게 접해요. 원형 탈모부터 호르몬 계통의 질환, 당뇨 수치가 악화된다든지 없던 당뇨가 생긴다든지, 자율신경 계통, 심혈관계 계통의 혈압 변화라든가 악화라든가, 통증과 관련된 질환이 새로 생긴다든지. 충격을 많이 받은 분들의 신체적인 의료 지원도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Q. 집회에 나선 유가족들은 울분 같은 감정이 계속 쌓이는 거 같아요. A. 진상 규명이나 분쟁이 길어지는 게 굉장히 큰 스트레스거든요. 해결 속도가 빨라진다면 그건 정말 도움이 되죠. 근데 꼭 그래야지만 회복이 되는 건 아니에요. 많은 분들이 자기를 돌보거나 상담하는 걸 뒤로 미루는 이유로, ‘나는 이것만 되면 다 회복될 것 같다’ 이런 말씀을 많이 하거든요.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다고 해서 울화나 트라우마가 다 해소되느냐 하면 그건 아니에요. 진상규명 활동은 그거대로 하지만, 또 잘하기 위해선 자기를 돌보고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걸 꼭 병행해야 합니다. Q. 목격자 중에서도 직업적으로 참사 현장에 노출되는 사람들이 있다고요? A. 대표적으로 소방, 경찰, 의료진, 취재진들이에요. 업무 종사자이기 때문에 이번 일이 있기 전에도 차곡차곡 비슷한 경험들이 쌓였을 거란 말이에요. 적당히 눌러놓고 괜찮다고 생각했을 텐데, 사실 그런 충격은 어디 가는 게 아니에요. 안에 고스란히 있다가 뭔가 연상시키는 것이 있을 때 갑자기 확 터질 수도 있는 거거든요. 그래서 저는 시한폭탄이라고 표현하곤 하는데, 지금 괜찮다고 해서 앞으로도 괜찮은 법은 없는 거예요. 트라우마는 내가 정신력으로 이겨낼 수 없는 거예요. 우리의 안전과 관련된 굉장히 본능적인 걸 건드리는 경험이기 때문에, 트라우마 때문에 고통받는 게 절대 마음이 약한 거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 같은 현장에 있었어도 개인의 경험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바는 달라요. 그래서 개인에 따라 이해가 필요하고 치료가 이루어져야 되는 거예요. Q. 1주기를 맞아 유족이나 생존자들을 위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제일 도움이 되는 건 공감의 말이에요. ‘이런 시기에는 다 그렇게 힘들다고 하더라’ 같은 인정해 주는 말이나, ‘이런 시기를 같이 잘 넘겨보자’ 같은 격려나 응원의 말이요.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도 되게 중요해요. 고통이 심할 때는 일상생활 하는 게 되게 어려워지거든요. 직장 동료들은 직장 일, 가족들은 가정 일을 도와준다면, ‘내가 정말로 응원을 받는다’는 느낌을 받겠죠. 환영하는 말도 좋습니다. 사고 얘기를 어렵게 꺼냈을 때 ‘그런 얘기를 나눠줘서 고맙다’라든지, 큰맘 먹고 모임에 나왔을 때 ‘이렇게 와줘서 고맙다’라든지. 지금 이분들의 회복에 필요한 건 연결감이거든요.
정부가 2025년 입시부터 의과대학 정원을 얼마나 늘릴지를 두고 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재 전국 의대 정원은 3,058명으로 2006년 이후 18년째 유지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매년 적게는 350여 명, 많게는 1천 명 이상 더 뽑는 안이 거론되고 있는데 의료계는 물론 교육계와 정치권까지 들썩이고 있습니다. 무슨 상황인데? - 증원 논의의 시작 최근 진료받을 곳을 찾지 못해 환자가 숨지는 ‘응급실 뺑뺑이’, 의료진 기피로 소아과 진료받기가 하늘의 별따기가 된 ‘소아과 오픈런’ 등 무너진 필수의료체계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대안 중 하나로 의사 수를 늘려야 한단 게 정부 주장인데, 이런 증원 방침은 전 정부에서도 내세운 바 있습니다. 지난 2020년 문재인 정부는 매년 400명씩 10년 간 4,000명을 추가 양성하는 ‘의대 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신설’을 추진했습니다. 이에 반대해 전공의들은 집단 휴진에 돌입했고 의대생들은 국가고시를 거부했습니다. 한 달간 대치 끝에 정부와 의사협회는 '의정협의체'를 꾸려 대화에 나섰지만, 코로나19 유행으로 논의는 중단됐습니다. 올해 1월 협의가 다시 시작됐고, 지금까지 14차례에 걸쳐 ‘필수의료 강화와 의료체계 개선’을 위한 다양한 논의가 이뤄졌습니다. 의대 정원 확대도 안건 중 하나였습니다. 이런 논의를 토대로 지난 6월 보건복지부는 ‘의사 인력 수급’을 계산하는 전문가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드러난 정부와 의협의 상황 인식은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매년 9월 첫째 주는 ‘양성평등주간’입니다. 양성평등은 우리 헌법에 명시된 이념이자, 법(양성평등기본법)으로 국가의 책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양성평등 실태를 파악하는 각종 지표가 발표됐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성별 격차는 줄고 있지만 차이는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지난해 여성은 남성에 비해 고용률이 낮고, 비정규직이 많고, 임금이 적고, 집안일을 더 많이 했습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각종 성범죄와 가정폭력도 여전히 많았습니다. 통계는 숫자 뒤에 가려진 다양한 삶의 모습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가 꾸준히 양성평등을 위한 제도를 도입해 왔고, 관련 지표에 영향을 미쳤단 점에서 분명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는 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별이 삶의 조건을 결정짓는 불리한 요소가 되지 않으려면 무엇이 더 달라져야 할까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을 향한 여성단체들의 목소리를 들어봤습니다. 모두에게 '돌봄'을 허하라 2023년 9월 7일 한국여성단체연합 '지속가능한 성평등 사회를 위한 총선 젠더정책' 발표 토론회 여성단체들은 “모든 출산 여성에게 출산전후휴가 급여를, 일하는 모든 부모와 양육자에게 육아휴직급여를 지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극초저출산’ 사회입니다. 여성 한 명이 가임기간(15~49세)에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가 0.7명대에 불과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국가 존립이 어려울 정도라지만, 처우는 어떨까요. 지난 2021년 26만여 명의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출산전후휴가를 사용한 여성은 7만여 명에 불과합니다. 여성 고용률이 51.2%인걸 감안해도, 휴가를 못 쓴 여성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출산전후휴가 90일은 근로기준법에 정한 권리입니다. 출산전후휴가 급여를 받으려면 고용보험에 가입돼 있어야 하고, 사업주가 출산 후에도 고용을 지속해줘야 합니다. 이 혜택을 받지 못했다는 건, 많은 여성들이 일을 하지만 노동자로 인정되지 않거나 4대 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임신과 출산 때문에 퇴사를 강요받거나 계약 해지를 당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여성들에겐 임신과 출산이 생존을 위협하는 일인 겁니다. 육아휴직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 없는 특수고용, 플랫폼, 프리랜서 노동자들에겐 원천적으로 배제된 권리입니다. (고용보험이 없어도 지원대상 자격이 되면 출산휴가 급여를 주는 정부 제도가 있지만 금액에 제한이 있습니다. 참고로 국제노동기구(ILO)는 '모성보호협약'에서 최소 14주, 회원국은 최소 18주 이상의 출산휴가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중 산후 6주의 휴가기간은 반드시 보장하도록 했습니다. 출산휴가와 관련된 수당은 산모와 자녀의 건강과 기초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수준의 현금수당을 지급해야 하고, 이전 소득의 3분의 2 이상이 돼야 한다고 정했습니다. 또 임신 중이거나 휴가 중, 휴가 후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성을 다른 중대한 사유가 없는 한 해고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여성단체들은 이밖에도 '돌봄기본법' 제정, 법정 노동시간 '주 35시간제' 도입 등을 요구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코로나19를 통해 돌봄은 어떤 상황에서도 멈출 수 없는 사회적 필수노동임이 드러났지만 여전히 재평가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좋은 돌봄을 받을 권리와 돌봄을 할 권리를 시민의 기본권으로 안착시켜야 합니다. 노동시간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의 휴식권' 관점에서만 논의돼 왔는데, 이제 '돌봄권'의 문제로 접근하는 게 필요합니다. 노동시간은 돌봄시간과 정확한 상관관계를 가집니다. 노동시간이 길어질수록 개인의 돌봄 노동할 시간은 줄어듭니다. 이는 여성에게 부담으로 떠넘겨지는 구조입니다. -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 ‘보편적 양육비 대지급제 도입’도 여성단체가 요구하는 과제입니다. 지난해 한부모 가구 중 ‘여성’ 한부모 가구는 75.6%에 달합니다. 18세 이하 자녀를 키우는 미혼모는 미혼부의 3배가 넘습니다. 2021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한부모 가구의 72.1%가 ‘양육비를 한 번도 받은 적 없다’고 답했습니다. 홀로 자녀를 양육하며 동시에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국내 한부모 가구 아동의 빈곤율은 47.7%로 OECD 국가 중 네 번째로 높습니다. 양육비를 받을 방법은 소송뿐이지만 절차가 오래 걸리고 승소하더라도 돈을 받으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돈을 안 주고 버티는 비양육자를 상대로 다시 감치(유치장 등에 가둠) 소송을 해야 하는데, 위장전입이나 잠적으로 우편송달을 거부하면 재판을 열기도 어렵습니다. 운전면허 정지나 출국금지, 신상 공개, 형사처벌 같은 조치는 ‘감치명령을 받고 1년 이내에 양육비를 집행하지 않았을 때’에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국가가 양육비를 주지 않는 부·모를 대신해 양육자에게 지급해 아동의 빈곤을 막고, 이후 비양육자에게 구상권을 행사해 강제 회수해야 한단 주장입니다. 일터에서 불리하지 않게 앞서 언급했듯 노동시장의 성별 통계는 그 자체로 양성불평등의 근거가 되지만, 여성이 돌봄의 부담을 더 많이 지는 사회구조에서 당연시된 측면이 있습니다. 여성이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회에서 생계유지를 위한 일자리는 남성에게 주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겁니다. 하지만 1인 가구의 비중이 늘고 있는 만큼 노동시장의 성별 격차는 불평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당 15시간 미만 일하는 ‘초단시간 노동자’는 여성을 중심으로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2000~2021년 초단시간 노동자는 남성이 38만 6천 명, 여성이 71만 9천 명 늘었습니다. 이들은 주휴수당, 4대 보험, 무기계약 전환 간주, 퇴직금 등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합니다. 여성단체들은 "근로기준법, 고용보험법,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에서 초단시간 노동자를 제외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산업재해를 인정받는 데 있어서 여성노동자가 더 불리하단 지적도 있습니다. 정지윤 직업환경의학 전문의가 최근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2021년 산재신청자는 남성(10만 6천 명)이 여성(3만 5천 명)의 3배가 넘습니다. 고용보험 가입자의 남녀 비율이 각각 56%, 44%인 걸 감안하면 성별 차이가 뚜렷하단 겁니다. 산재 관련 성별 통계가 없어 추정컨대 애초 산재보험에 가입된 여성노동자 자체가 적거나, 여성노동자의 산재신청 자체가 적거나, 여성노동자의 산재 인정률이 낮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성단체들은 “여성노동자는 남성노동자에 비해 불안정한 일자리에 놓일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에, 산재보험을 받는 데 성별 불평등이 심화될 수 있다”며 “산재 적용 대상을 더 확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여성이 많은 일터의 산업안전기준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미용업은 유해화학물질 사용이 많고, 생활폐기물처리 시설에선 노동자들이 유해가스와 분진에 대한 위협을 느낍니다. 학교급식노동자들은 폐암에 노출돼 있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여성들이 집중적으로 일하는 곳은 위험하다고 판단하지 않아 위험성 기준 자체가 없습니다. 여성의 신체를 기준으로 산업안전기준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산업재해법 자체도 남성이 중심적으로 일하는 제조업·건설업 등의 현장 위주로 만들어져 있어, 여성들이 다쳤을 때 산재를 신청하고 인정받을 확률이 굉장히 낮습니다. -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 국회가 손 놓은 과제들 법의 공백을 메워야 하는 과제도 쌓여있습니다. 지난해 9월 대법원은 주한미군을 상대로 한 기지촌(基地村)에서 성매매에 종사한 여성들에게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습니다. 원고들은 정전 후 한국에 미군이 주둔한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전국 곳곳의 기지촌에서 ‘미군 위안부’로 동원됐습니다. 기지촌에 끌려온 여성 대부분은 인신매매의 피해자였습니다. 국가는 이들을 관리하며 막대한 수익을 올렸습니다. 1970년 미국 정부는 한국이 미군 주둔에 따른 성매매 등 사업으로 연간 1억 6천만 달러를 벌어들인다고 집계했습니다. 법원은 “정부가 기지촌 내 성매매 방치·묵인을 넘어 적극적으로 조장·정당화했다”며 “원고들의 성적 자기 결정권과 나아가 성으로 표상되는 이들의 인격 자체를 국가적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여성단체들은 '군 주둔지역 성 착취 방지 및 피해자보호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합니다. 정부는 미군 위안부들이 국가폭력 피해자임이 밝혀졌음에도 아직까지 어떠한 사과조차 없으며 국가 폭력 피해 회복을 위한 지원 확대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피해자가 외국인 여성으로 대체됐을 뿐 지금도 기지촌에서는 인신매매와 폭력 범죄 피해, 성 착취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미군 위안부들이 겪은 고통이 후대의 여성과 아동에게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선 국가와 군대에 의해 자행된 범죄를 낱낱이 밝히고,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를 실질적으로 보호할 수 있도록 제도가 마련돼야 합니다. - 이하영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 공동대표 2022년 9월 29일 '한국 내 기지촌 미군위안부 국가손해배상 청구소송 판결 기자회견' / 출처 : 한국여성단체연합 4년 넘게 답보 상태인 ‘낙태죄’ 논의도 시급합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2019년 낙태죄를 헌법불합치 결정하고, 2020년 말까지 대체입법을 요구했습니다. 낙태 허용 기준을 두고 국회가 임신 14주, 임신 24주, 전면 허용 등 접점을 찾지 못하는 사이 여성들은 위험에 내몰렸습니다. 올해 감사원 감사로 출생 신고가 안 된 영아가 살해·유기된 사례가 잇따라 드러나면서 제도 마련의 필요성은 더 커졌습니다. 2023년 4월 9일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열린 '낙태죄 폐지 2주년 4.9 공동행동' / 출처 : 한국여성단체연합 ▶ 참고 기사들 - 아직도 법 테두리 밖…"마약처럼 낙태약 구한다" - '돌봄 · 관리' 없는 임신 중절 여전히… - 임신 중절, 부작용 조사도 없다…'자발적 중절' 시기부터 갈등보단 평등으로 여성계가 오랫동안 주장해 온 젠더폭력 대책도 정책으로 제안했습니다. ▲형법상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폭행 또는 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개정,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가정보호가 아닌 피해자 인권 중심의 ‘가정폭력처벌법’ 전면 개정, ▲성매매·성산업 확산을 막기 위한 법 개정 및 강력한 집행, ▲사이버 공간 내 성적 괴롭힘의 입법공백 보완책 마련 등입니다. 상담사례 중 가정폭력으로 뼈가 부러지고 피멍이 들어도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라고 해서 가해자가 입건조차 되지 않는 사례가 여전히 많습니다. 피해자가 사법절차를 진행하더라도 안전이 전혀 확보되지 않고, 보복 위험에 놓이거나 고소 취하를 종용당하기 쉽습니다. 피해자가 말하는 처벌불원 의사는 불가피한 선택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형사처벌에 대한 의사결정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피해자 의사 존중' 관련 내용은 법에 반드시 삭제돼야 합니다. 또 데이트 상대·배우자·동거인·친족 등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여성 폭력은 죄질이 매우 나쁜 범죄이기 때문에, 가중처벌 규정을 마련해야 합니다. - 최유연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장 7개월 앞으로 다가온 22대 총선은 향후 4년을 책임질 국민의 대표자들을 뽑는 일입니다. 성별 갈등을 조장하는 정치 구호보다 양성평등을 고민하는 정책 경쟁이 이뤄지길 바랍니다. 디자인 : 김정연
*이 글에 등장하는 과거 성폭력 사건들은 피해자의 이름과 얼굴이 널리 공개된 바 있습니다. 피해자 보호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뀐 점을 감안해, 이 글에서는 익명으로 다뤘음을 미리 밝힙니다. ‘혀’만도 못한 방어 한 여자가 늦은 밤 길에서 두 남자에게 성폭력을 당한다. 저항하던 여자는 남자의 혀를 물어 상황을 벗어나지만, 혀가 잘린 남자에게 고소당해 구속까지 된다. 여자는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겪은 모욕, 남편 등 주위 사람들의 불신으로 고통받은 여자는 도움을 자청한 여성변호사와 함께 법정 다툼을 이어간다. 2심 재판 중 여자의 과거 사생활이 밝혀지면서 그는 남편과 갈등을 빚고 자살을 기도한다. 가까스로 회복한 여자는 결국 사건 현장에 있었던 시누이의 위증 번복으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받는다. - 영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1990년 개봉한 영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의 줄거리입니다. 1988년 A 씨가 겪은 실화가 배경입니다. 혀를 물어뜯긴 남자는 A 씨에게 위자료를 요구하며 상해죄로 고소했고, A 씨는 남자들을 강간치상죄로 맞고소했습니다. 남자는 술에 취한 A 씨를 부축하던 중 호기심으로 입을 맞추려다 혀를 물린 거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A 씨는 남자 둘에게 끌려가 성추행을 당했고, 반항하자 무릎으로 차였고, 강제로 입을 맞추기에 혀를 물었다고 항변했습니다. A 씨는 상해 혐의, 남자들은 강제추행치상 혐의로 각각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1심 판단은 세 사람 모두 ‘유죄’. 남자들의 범행을 인정하면서도 피해자인 A 씨에게까지 죄를 물은 건, A 씨가 혀를 물어 자른 게 ‘정당방위를 벗어난 과잉방위’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범행 장소가 상가가 밀집돼 있고 범인이 흉기를 소지하지 않았다는 점 등에 비추어 볼 때 A 피고인이 당황하거나 공포에 떨어 혀를 깨물었다고 보기 힘들다. (중략) 강제키스를 피하기 위해 상대의 혀를 깨무는 행위와 물어뜯는 행위의 2단계로 나눠볼 때 A 피고인의 경우 깨무는 정도로 충분히 저지할 수 있는데도 물어뜯어 혀의 3분의 1을 절단한 것은 방위행위로서 한계를 뛰어넘은 과잉 행위다. - 1심 판결 중 성폭력 정당방위 사건 대응 / 출처 : 한국여성의전화 여성단체는 기자회견을 열고 판결에 항의했습니다. 항소심을 위한 7명의 공동변호인단도 꾸려졌습니다. 사회적 관심 속에 2심 재판부는 A 씨의 정당방위를 인정하고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이 판결은 ‘그동안 죽어 있던 정당방위의 법정신을 되살려 부활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자신의 성적순결 및 신체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어하기 위한 상당한 행위로서 이는 법률상 범죄의 성립을 조각하는 사유인 정당방위에 해당한다. A 피고인이 당시 술을 먹었다거나, 식당을 경영한다거나, 밤늦게 혼자 다녔다거나 하는 등의 사정이 정당방위의 성립을 저해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 2심 판결 중 판결문에도 적었듯 ‘피해자다움’에 대한 세간의 가혹한 잣대는 엄연히 존재했습니다. 이 사건은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에 대한 사회적 논쟁을 일으켰고 의미 있는 판결을 이끌어 냈지만, 성폭력 피해자가 기어코 법정에 섰을 땐 더한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현실도 적나라하게 보여줬습니다. 당시 ‘성폭력 사건이 벌어졌을 때 피해자 100명 중 2명만 신고를 한다’는 연구결과는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동네사람들이 밤늦게까지 찾아와서 그동안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인사를 해줘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A 씨는 억울하게 4개월간 감옥에 있었을 때와 재판정에서 사건 당시에 술을 마셨다는 부분을 계속 추궁당하면서 ‘강간당해 마땅한 상황’으로 몰고 가려는 검사와 가해자 쪽 변호사들의 태도가 제일 견디기 힘들었다고 밝힌다. - 1989년 1월 22일 자 한겨레 신문, 2심 선고 후 A 씨 인터뷰 “짐승을 죽였다” : 법을 만든 사건들 오랜 성폭력 피해자가 가해자를 살해한 사건이 연이어 벌어졌습니다. B 씨는 9살 때 이웃집 아저씨에게 성폭력을 당했습니다. 가족에게도 이 일을 말하지 못했던 B 씨는 이후 정신분열증과 결혼생활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21년 만인 1991년, 아저씨를 찾아가 살해했습니다. “나는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짐승을 죽였다”라던 B 씨의 말은 한 사람의 인생을 파괴하는 어린이 성폭력의 잔혹함을 드러냈습니다. 피고인은 밤새 법률서적을 뒤지며 9살 때 강간당한 것을 고소하겠다고 하여 남편이 소용없다고 하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울기도 하더니 몰래 친정집에 가서는 피해자를 불러놓고 보상으로 금 7억 원을 요구하는 등 위 피해자만 만나면 사기가 왕성하여 청산유수로 말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여 (중략) 당시의 증상은 부적절한 분노, 난폭행동, 고립위축양상, 피해망상, 자책망상, 비논리적 언어, 심한 적막감 등으로 정신분열증의 진단을 받았으며…. - 2심 판결 중 이듬해에는 대학생 C 씨가 남자친구와 함께 자신의 의붓아버지를 살해했습니다. C 씨는 9살 때부터 의붓아버지에게 성폭력을 당했습니다.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 금기시 됐던 근친 성폭력의 실상은 참혹했습니다. 오랜 기간 계속됐던 의붓아버지의 변태적인 범행, 그의 사회적 지위, 어린 연인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C 양은 가정 내 폭력과 강간 피해자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폭력의 노예화’ 과정을 거치면서 특수한 정신질환에 빠져 살인을 계획하거나 실행에 옮길 정신적 능력은 없다. C 양의 경우 가혹하고 반복적인 폭력의 결과, 구타 강간 천재지변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만성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상태를 보이고 있다. C 양이 대학생이라는 표면적인 신분만으로 정신상태가 정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며, 지적기능과 인지기능은 성인이지만 감정처리와 의지-행동 기능은 유아 수준에 머물러 있다. - 2심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김광일 한양대 의대 교수의 진술 비극적인 두 사건은 1994년 1월 성폭력 특별법(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는 데 직접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특별법이 마련되면서 당시 형법으로는 처벌할 수 없었던, 예를 들어 공공밀집장소에서의 성추행이나 전화·컴퓨터 등 통신매체를 통한 음란행위 같은, 새로운 유형의 성범죄를 처벌할 수 있게 됐습니다. ‘성폭력 가해자의 보호관찰’, ‘피해자에 대한 비밀 누설 금지’, ‘심리 비공개’처럼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조치도 가능해졌습니다. 1993년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대한 여성계 입장 기자회견 / 출처 : 한국여성의전화 하지만 여성계에서 전면폐지를 요구해 왔던 ‘친고죄(피해자가 고소해야 기소 가능한 범죄)’는 첨예한 찬반 끝에 ‘근친 강간과 시설수용여성 강간, 장애인 강간, 미성년자 강간 등’에만 폐지됐습니다. B 씨나 C 씨 같은 사례가 아닌, 수많은 성인 여성이 당하는 ‘대다수의 강간’은 여전히 본인의 고소 없이는 처벌이 불가능하단 뜻입니다. 고소기한도 종전보다 6개월 늘어난 1년에 그쳤습니다. ‘친고죄’, 그 무거운 짐 특별법이 마련된 뒤 형법도 조금씩 시대를 반영해 개정됐습니다. 1995년 말 형법에 성폭력 범죄를 규정하는 부분(297조~306조)의 제목을 ‘정조에 관한 죄’에서 ‘강간과 추행의 죄’로 바꿨습니다.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는 정조를 잃은 것’이란, 수많은 피해 여성들을 옥죄어 온 믿음을 깨뜨린 상징적인 변화였습니다. 2012년 말 개정에선 성폭력 범죄의 피해자를 ‘부녀’에서 ‘사람’으로 확대했습니다.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자신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당하면, 죄를 물을 수 있게 된 겁니다. 이후 이별을 통보한 남성에게 성폭력을 하려 한 여성이 강간 미수 등 혐의로 처음 재판에 넘겨지기도 했습니다. 2013년 6월 '60년 만의 성폭력 친고죄 폐지' 뉴스 / 출처 : SBS뉴스 ▶ 관련 기사 : '친고죄' 폐지… 미성년 대상 성범죄 처벌 강화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모든 성범죄에 대한 친고죄를 폐지한 겁니다. 여성계는 오랜 시간 피해자가 나서야만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게 한 ‘친고죄’ 폐지를 주장해 왔지만, ‘피해 여성의 사생활과 명예’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가로막혔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1994년 성폭력 특별법을 만들면서 장애인·미성년자 등 일부에 대해선 친고죄를 폐지했지만, 그마저도 실제로는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법원이 ‘장애인 강간’의 조건을 좁게 해석하면서, 법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장애인 피해자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2008~2010년 미성년자에게 성폭력을 한 〈조두순 사건〉, 〈김길태 사건〉, 〈김수철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고, 2011년 영화 〈도가니〉로 광주 인화학교 내 장애인 성폭력 사건이 주목받으면서 분노한 여론이 법 개정을 이끌어냈습니다. 이번에도 변화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의 불행을 딛고 이뤄졌습니다. 친고죄 폐지 후 수사 방식, 처벌 기준, 2차 피해에 대한 인식이 확연히 바뀌었습니다. 과거엔 성범죄를 저질러도 피해자를 입막음하면 처벌받지 않았지만 이제 고소가 없어도, 고소가 취소돼도 끝까지 처벌을 받게 된 겁니다. 친고죄 조항 때문에 스토킹에 가까운 수준의 합의종용에 시달리는 피해자가 많다. 피해자가 합의종용이 너무 괴롭기도 하고, 합의금을 받으면 돈을 바라고 고소한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어 합의금을 받지 않고 합의하는 사례도 많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조금씩 친고죄 규정이 폐지되어 가고 있는데, 여성운동계에서는 20년 전부터 성범죄 전반에 걸쳐 친고죄 폐지를 주장해 왔다. 그때 좀 더 사회에서 귀를 기울였다면 지금 이러한 문제는 없었을 거다. - 2011년 11월 대법원 양형위원회 공개토론회에서 이윤상 한국성폭력상담소장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의 “미투” 2018년 3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34회 한국여성대회'에서 '미투'가 적힌 손팻말을 든 참가자들 2017년 전 세계를 뒤흔든 ‘미투’ 운동은 국내에서도 각계 유력 인사들에 대한 폭로로 이어졌습니다. 전례 없는 진실공방은 법정 다툼으로 이어졌고, 법원 판결 이후에도 논쟁은 계속 됐습니다. 한순간에 추락한 유명 인사를 바라보는 저마다의 평가, 낯선 폭로자를 마주한 대중들의 엇갈린 시선 속에 진실은 더 멀어졌습니다. 지목한 사람과 지목된 사람 모두 법의 심판으로 명예가 회복되길 원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법부가 모든 진실을 구원할 수는 없단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더 힘 있고 유명한 사람에 대해 폭로할수록 대중의 관심이 쏠렸지만 그럴수록 ‘왜 저항하지 않았는지, 진작 문제 삼지 않았는지’ 물음이 따라붙었습니다. 권위자, 스승, 상사, 선배 같은 이의 지위에 억눌려 원치 않은 일을 겪은 이들은 피해자임에도 자신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했습니다. 동의하지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저항하지도 않았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결국 성폭력의 판단 기준은 ‘동의’ 여부가 돼야 한단 오랜 주장이 다시 힘을 얻었습니다. 실제로 영국, 스웨덴, 독일, 아일랜드, 캐나다, 호주, 미국, 일본 등에선 ‘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강간을 판단하도록 바뀌었습니다. 현행 형법 제297조 강간죄는 ‘폭행 또는 협박’을 구성요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동안 판례는 강간죄가 성립하기 위한 ‘폭행 또는 협박’의 정도를 ‘상대방의 반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하게 곤란’하게 하는 경우로 한정하는 ‘최협의설’에 근거하여 성폭력을 매우 엄격하게 판단해 왔다. 과거 성폭력의 보호법익을 여성의 ‘정조’로 규정하고 피해자를 ‘보호할만한 여성’과 ‘보호할 가치가 없는 여성’으로 구분했던 시절부터 이어져 온 구시대적 관행의 잔재이다. (중략) #미투 운동은 성폭력을 ‘폭행 또는 협박’ 여부로 협소하게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현실과 괴리되는지 세상에 알렸다. - 2019년 3월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 미투 운동 당시 20대 국회에서 5개 정당이 ‘비동의 강간죄’ 신설을 위한 10개 개정안을 냈지만, 회기 만료로 모두 자동 폐기 됐습니다. 21대 국회에도 법안이 발의됐지만 논의는 멈춰있습니다. 대통령이 폐지를 공약한 여성가족부에선 비동의 강간죄 도입에 손을 놓은 상태입니다. 미투 운동은 성폭력의 심각성을 만천하에 드러냈지만, 억울하게 가해자로 몰릴 수 있다는 ‘무고’의 불안은 어느 때보다 커졌습니다. 불안은 ‘타인의 동의 없이 성행위를 하는 것은 그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기본 명제를 흔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성폭력범의 ‘혀’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 논쟁을 이끈 A 씨 사건이 있기 24년 전, 이미 꼭 닮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1964년 18살이었던 최말자 씨는 자신에게 강제로 입을 맞춘 남성의 혀를 물어 잘랐단 이유로 구속수사를 받았습니다. 재판이 시작되자 최 씨는 가해자와 함께 동네 한복판에서 현장검증을 해야 했고, 정신감정도 받아야 했습니다. 최 씨는 남자의 혀를 자른 중상해죄로 1심에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최 씨 집을 찾아와 행패를 부린 남자는 특수주거침입과 특수협박죄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강간미수 혐의는 묻지도 않고, 오히려 최 씨에게 더 무거운 처벌을 한 겁니다. 피고인(최 씨)이 본건 범행 장소까지 간 것은 전혀 동녀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에 의한 것이고, 이것은 심리적으로 살핀다면 사춘기에 있는 동녀의 이성에 대한 호기심의 소치인 것으로도 인정할 수 있고 (중략) 혀를 넣었다는 것 뿐이지 그와 같은 강제키스가 반항을 못하도록 꼼짝 못하게 해놓고 한 짓은 아니라 할 것이므로…. - 1심 판결 중 세월이 흘러 2018년 최 씨는 한 여성단체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늦깎이 공부를 하던 중 자신이 겪은 일을 다시 보게 된 겁니다. 2020년 변호인단이 구성됐고,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최 씨의 행위를 정당방위로 인정해, 상해죄를 무죄로 판단해 달란 겁니다. ‘56년 만의 미투’는 그렇게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1심과 2심 법원은 재심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2023년 5월 대법원 앞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개시 촉구 기자회견'에서 최말자 씨 / 출처 : 한국여성의전화 ▶ 관련 기사 : [뉴블더] "결혼하면 해결돼"…'성폭행범 혀 절단' 사건의 전말 석방 판결을 받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고 싶은 심정으로 어두운 밤, 구속 당시 입었던 옷을 입고 아버지 뒤를 따라 들판과 산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사건은 전혀 사소하지 않았습니다. 국가로부터 받은 폭력은 평생 죄인이라는 꼬리표로 저를 따라다녔고, 매일이 억울함과 분노의 시간이었습니다. (중략) 너무 긴 시간에 몸이 지치다 보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후손들을 떠올리면서 지금 바로 잡지 못하면 이런 일이 또 되풀이될 것이고, 성폭력 피해 여성들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2023년 5월 최말자 씨 기자회견문 60여 년 전, 바닥에 떨어진 남자의 잘린 혀는 최 씨가 ‘동의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였습니다. 최 씨가 성폭력의 위협 앞에서 자신을 보호할 권리 역시 당시 법에 분명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사법기관 어느 곳에서도 최 씨를 법으로 보호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법원은 ‘무죄 등을 인정할 새로운 증거가 없고, 검사의 불법구금 등을 증명할 자료가 없다’며 이 사건을 다시 재판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최 씨는 이제 대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법이 진실을 지켜낼 때 지금 이 순간에도 성폭력은 벌어지고, 피해자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 성폭력 사건들을 다시 끄집어낸 이유입니다. ‘혀 잘린 총각과 옥중처녀의 현장검증’을 ‘제2 정조 공방전’으로 그린 과거 신문기사에서, 수정을 거듭한 법조문과 판례에서, 때마다 시대상을 담아낸 여성단체들의 성명서에서, 성폭력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더디지만 분명한 변화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동의 없는 성관계는 성폭력’이라거나 ‘피해자의 모습은 다양하다’는 주장은 여전히 벽에 부딪힙니다. 미투 운동이 지나간 지금까지도 성폭력 피해자들은 과거 최말자 씨의 외침을 반복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성폭력에 대한 상식과 정의를 바로 세울 때, 온전한 법과 제도로 범죄를 막고 피해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최말자 씨의 재심과 비동의 강간죄 도입 움직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