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여 편의 영화를 번역한 뒤, 영화 이론과 예술치료를 공부했다. 영화 칼럼을 쓰고 방송을 하면서 영화 속에 깔린 심리의 지도를 찾아나가는 중이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스페인의 거장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작품이 나올 때마다 기대하게 된다.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항상 평범하지 않았다. 복잡하게 얽힌 사건들을 배경으로 주인공들은 미처 풀어내지 못한 분노와 슬픔을 가슴에 담고 있다. 알모도바르 감독은 억눌린 감정을 엉킨 실타래 풀 듯 조용하면서도 무게감 있게 풀어낸다. 주인공들은 감정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대신 관객에게 넘겨준다. 특히 그의 최신작 <룸 넥스트 도어>는 2024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탔고, 주인공을 맡은 두 여배우가 틸다 스윈튼과 줄리안 무어이기 때문에 더욱 관심이 끌렸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에는 살인, 근친 강간 같은 윤리적인 문제들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제인 존엄사는 다른 영화들에서도 이미 많이 다루어졌고, 기대수명이 현저하게 길어진 현시대에서 윤리성보다는 현실적이고 진지한 고민이라고 말하는 편이 맞다. <룸 넥스트 도어>는 같은 주제를 담은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존엄사의 의사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갈등 부분을 생략하고 오직 조용하고 이성적으로 죽음에 집중하고 있다. 죽음의 시각을 정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장치다. 정확한 시각을 예고하진 않지만, 시계가 재깍재깍 소리를 내면서 흐름을 알리듯, 죽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영화는 감지할 수 없는 죽음의 소리를 잉그리드(줄리안 무어)의 표정을 통해 담아내고 있다. 마사(틸다 스윈튼)가 아침에 자신의 방문이 닫혀 있으면 밤사이에 자신이 죽음을 실행한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잉그리드는 매일 깊이 잠들지 못한 채, 새벽마다 떨리는 마음으로 마사의 방문을 확인한다. 알모도바르 영화의 인장은 존엄사 서사에도 찍혀 있다. 존엄사 서사답지 않게 프레임에 담긴 소품들, 주인공들의 의상, 배경은 아름답고 화려하다. 암에 걸려 죽어가는, 유령처럼 창백한 얼굴의 마사는 마치 크리스마스 파티를 앞둔 사람처럼, 밝고 따듯한 느낌을 주는 원색의 니트를 입고 있다. 유명 작가인 잉그리드가 마사의 투병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아가면서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예기치 않게 바뀐다. 마사는 자신이 죽음을 맞이할 때 옆방에 있어 달라는 생소한 부탁을 한다. 처음에는 그 부탁을 거부했지만, 잉그리드는 금방 마음을 바꾼다. 친구를 위한 최선의 호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서 옆방은 거꾸로 말하자면 죽음을 뜻하기도 한다. 삶과 죽음은 공존한다. 죽음의 그림자가 없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삶 속에 녹아 있는 여러 형태의 죽음을 보여준다. 전쟁에서 돌아와 트라우마로 정신이 나가버린 남자친구가 환청을 들으며 사람을 구하겠다고 불타는 집으로 뛰어 들어가는 모습, 성장하면서 부재한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자신을 구하기 위해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환상을 붙잡고 있는 딸, 서로에게서 이질감을 느끼는 모녀의 관계는 죽음을 지시하고 있다. 그리고 한때 마사와 사귄 적이 있었던 데미안은 노골적으로 지구의 죽음과 인류의 멸망을 이야기한다. 종군기자였던 마사는 평생 죽음의 현장에 있었다. 같은 동료 역시, 죽음에 대한 불안을 잊게 하는 최고의 약이 섹스라고 말한다. 죽음 속의 삶이라고 말하는 편이 맞을 만큼 그녀는 죽음과 대면에 익숙하다. 환경 파괴로 인류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데미안도 마사와의 섹스를 마치 테러리스트와 섹스하는 느낌이었다고 표현함으로써 마사를 죽음의 경계선에 놓는다. 숲에서 새소리가 들리고 겉으로는 아름다운 세상과는 달리, 다크웹이라고 표현한 보이지 않는 추악한 음지의 세계도 죽음을 닮았다. 영화는 마사가 유지하고 싶은 인간의 존엄성이 추악한 세상의 도움이 없이는 이뤄지지 않는다는 모순을 말한다. <룸 넥스트 도어>는 죽음을 환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영화 속 죽음은 너무 이성적이고 아름답다. 어쩌면 매우 이상적인 죽음이다. 대부분이 맞이하는 죽음이란 그렇게 아름답고 고상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실행되기 힘든 일이라고 해도 마사가 선택한 죽음,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잉그리드와 관계는 위안을 준다. 어쩌면 영화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이런 위안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후변화로 계절에 맞지 않게 내리는, 세상의 조명에 반사된 분홍빛 눈이 이 삭막한 상황에서 위로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 위로를 주는 눈은 마지막 장면에서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 찾아온 마사의 딸과 잉그리드가 뒤뜰에 놓인 의자에 나란히 누워 있을 때도 그들 위로 내린다. 최근에 개봉했던 한국 영화 <소풍>이나, 일본 영화 <플랜 75>에서도 힘든 삶을 피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만, <룸 넥스트 도어>처럼 우아하고 따듯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이 영화가 환상적인 죽음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말하는 이유다. 마사가 존엄사를 실행하기 위해 한 달간 빌린 집에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걸려 있다. 고독을 상징하는 호퍼의 그림이 평화롭고 단정한 느낌을 주듯 이 공간도 죽음과 어울리지 않게 평온하고 아름답기만 하다. 이 영화를 비롯해, 존엄사를 다룬 영화들이 존엄사만이 훌륭한 답이라는 단순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은 오롯이 본인만 대면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죽음을 수용하는 일은 남은 자의 몫이다. 가족 혹은 지인의 존엄사 선택은 남은 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라는 질문도 던진다. 원작 소설에는 없는, 마사의 딸인 미셸이 등장하는 엔딩 시퀀스도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삶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죽음의 시계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돌아가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고 산다. 삶의 바다에서는 죽음의 파도가 일정하게 몰아치고 있음을 괴롭지 않게 일깨워주는 영화였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순정남 순정녀의 사랑에 눈물 콧물 짓던 시대에, 사랑은 그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열쇠처럼 보였다. 신분 간 격차를 비롯해 어떤 장애물도 뛰어넘거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라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결말로 끝나는 영화들은 관객의 마음에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러나 이제 그런 사랑의 시대는 끝났다고 영화는 선언한다. 2000년대에 나와서 히트했던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광고는 '이번이야말로 찐사랑'이라고 외치고 싶은 사람들의 심리를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랑은 수많은 문학작품과 영화들을 통해 수없이 묘사됐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으로 남아 있다. 변하는 사랑에 대한 서사는 관객에게 감정이입과 거리감을 넘나들게 만든다. 아무리 반복해도 아직도 할 말이 많이 남아 있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최근에 개봉한 캐나다 출신 모니아 초크리 감독의 <사랑의 탐구>는 상투적일 수도 있는 사랑의 행태를 감독 특유의 감각으로 풀어내고 있다. 공감하는 부분도 있고, 파격적인 부분도 있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왜 그런 결말로 끝냈는지, 감독의 의도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나름의 성공을 거뒀다. 아직 정교수가 되지 못하고 노인 대상으로 철학 강의를 하는 여주인공 소피아는 남편을 비롯해 주변의 지적인 사람들과 친분을 유지하며 별문제 없이 살아간다. 첫 장면부터 식탁에서 열띤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을 통해 소피아가 어떤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는지 보여준다. 소피아가 그런 삶에 특별히 권태감을 느끼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강사이자 주부다. 그러나 별장을 매입하면서 소피아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전부 수리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소피아가 울음을 터트리자, 수리공인 뱅상이 소피아를 위로하면서 둘 사이에 미묘한 관계가 형성된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감정으로 발전한다. 사랑은 사고처럼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로맨스 영화들의 흔한 도입이다. 소피아는 뱅상과 불꽃같은 사랑을 나누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며 행복해한다. 하지만 남편과 뱅상 사이에서 갈등한다. 시댁과 친정 식구들의 관계도 얽혀있기 때문에 칼로 자르듯 깔끔한 결론을 내리기 힘들다. 남편과 뱅상은 하는 일도 성격도 전혀 다른 만큼 가족들의 분위기도 다르다. 열정과 낯섦, 안정과 익숙함은 쌍을 이루면서 그녀의 감정을 공격한다. 영화는 겉으로 드러난 소피아의 감정과는 또 다른 내적 감정이 자리 잡고 있음을 미세하게 보여준다. 결국 관객으로선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결말로 이어진다. 뱅상과 관계에 따라 소피아의 감정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면서 철학 수업의 분위기와 내용도 달라진다. 철학자들이 표현하는 사랑에 대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견해가 소피아의 현재 감정을 대변한다. 고민 끝에 소피아는 남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뱅상을 택한다. 그러나 영화의 엔딩은 감독이 선택한 또 다른 반전이다. 지인들과 모임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뱅상은 무릎을 꿇고 소피아에게 결혼반지를 내밀며 청혼한다. 그런데 마침 설거지를 돕고 있던 소피아는 거품이 묻은 고무장갑 낀 손을 위로 올린 채, 한참 시간을 끌어 뱅상을 당혹하게 만든다. 결국 고무장갑을 힘들게 벗고 반지를 손가락에 끼지만, 짧다고도 길다고도 할 수 없는 그 애매한 시간은 뱅상과 결혼해 아이를 갖고 싶다고 말했던 소피아의 심경을 의심하게 만드는 첫 번째 사건이었고 마지막 장면과도 이어진다. 상대를 향한 열정, 결혼, 임신이 순차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과정이라는 통념이 깨어지는 시대상과 연결되는 느낌이다.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경험했지만, 사고처럼 다가온 열정에 휩싸여 결혼을 깬 경험이 있는 소피아는 이제 결혼을 믿지 않게 된 것일까. 길에 혼자 서서 하늘을 쳐다보는 그녀의 표정은 묘하지만, 그 안에서 왜 고독한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걸까. 올해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사랑에 대해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한다. MZ 세대의 사랑법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로, 주인공인 율리에는 의학도였으나 계속해서 자신의 전공을 바꾼다. 자신의 관심이 끌리는 대로 살기 위해 망설임 없이 다른 길을 택한다. 전공과 함께 이성 취향도 계속 변한다. 20대 후반인 율리에가 40대인 유명 만화가 악셀과 사귀면서 겪는 갈등을 주 서사로 하면서 사랑이라고 느끼는 상황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최적의 파트너라고 생각했던 악셀과 동거하면서 어느 순간 율리에는 허전해진다.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율리에는 만화가로 성공한 악셀을 보며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틈새를 비집고 새로운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두 영화는 분위기도 결도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준다는 착각이 들 때 사랑의 열정이 솟아난다는 사실이다. 영화 속 대사처럼 "너랑 함께 있으면 완전한 내가 돼."라고 착각하는 순간이다. 문제는 자신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확실하게 모른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 영화의 여주인공들은 두 남자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한 상대에게 실망했을 때 비로소 다른 상대의 장점이 보인다. 모두 각자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상황이 변할 때마다 자신과 맞게 느껴지는 상대도 바뀐다. 한 사람과 영원한 사랑이 쉽지 않은 이유다. 현실도 비슷하다. 한번 사랑에 실패했다고 해서 사랑을 버릴 수는 없다. '돌싱글즈'나 '끝사랑' 같은 예능프로그램은 여전히 시청률이 높다. '끝사랑'은 50세 이상을 대상으로 하면서 기존 짝짓기 프로그램과 차별점을 찾았다. 이미 자녀들이 다 성장했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50대들과 90년대생 돌싱즈가 갖는 상대에 대한 기대감은 다를 수밖에 없지만, 설레는 사랑의 감정을 꿈꾼다는 점에서는 같다. 사랑을 확신하기도 힘들지만, 사랑을 포기하기도 힘들다. 현실에서 이뤄지기 힘든 욕망은 영화를 통해 계속 표현된다. 수많은 로맨스 영화는 사랑의 가치와 무의미를 번갈아 묘사할 테고, 사랑의 존재에 대해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고민할 것이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올해로 21회를 맞이한 EBS국제다큐영화제는 장편 극영화와는 다른 매력을 담은 여러 주제의 다큐 영화를 선보였다. 그중에서도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고독감, 혹은 자발적으로 택한 고독에 대한 다큐가 눈에 들어왔다. 인간에게 고독은 평생 채워진 적이 없는 마음속 빈 호수와도 같다. 그래서 고독은 극영화에서도 다양한 연출을 통해 끊임없이 표현되는 주제다. 극영화의 서사는 대개 기승전결 식으로 전개되고 극적 긴장을 위해 필수적으로 갈등 요소가 들어간다. 극영화는 창작성의 범위가 넓은 만큼 다소 과장된 극적 전개도 용납된다. 철저한 고독이라는 주제로 가장 인상 깊었던 극영화로 안드레아 팔라오로 감독의 <한나>가 떠오른다. 샬롯 램플링이 연기한 한나는 처음부터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고 오로지 혼자다. 그래서 카메라는 그녀 내부의 갈등 묘사에 초점을 맞춘다. 다큐가 보여주는 고독감은 그 결이 다를 수밖에 없다. 다큐는 실제 현장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바탕으로 연출되기 때문이다. 고화질로 자연의 절경과 동물들이 사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세상사에서 잠시 벗어나 힐링을 주는 다큐는 많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촬영된 자연다큐 영화에서 인간이 느끼는 고독은 없다. 인간은 그냥 관찰자에 불과하다. 그런데 자연과 인간의 고독이 함께 얽혀 조화를 이룬 영화들을 이번 다큐영화제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산불 전망대 위에서>는 캐나다에서 일하는 산불 감시원들의 삶을 보여준다. 1년에 최대 6개월을 일하며 산불의 40퍼센트를 조기 발견하는 산불 감시원들은 산 위에 있는 15미터, 30미터 높이의 탑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며 연기가 나는 곳이 있는지 망원경으로 주시한다. 주변은 온통 나무들밖에 보이지 않는다. 무료하고 외로울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들에게는 힘이 느껴진다. 그들이 지닌 힘이 이 다큐의 주제인 셈이다. 고독감을 대하는 그들만의 특별한 방식이 없다면 견딜 수 없는 직업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고독 대처법은 그들의 성격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어떤 사람은 파리에게 브루노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교류한다. 대부분은 독신인데 가정생활과 병행하기 힘든 직업이라 이해가 간다. 그들은 원래 혼자 지내는 것을 즐기고 다른 이들의 간섭을 싫어한다는 특성이 있지만, 고독에 대한 자신만의 확실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구름, 새, 벌레 등 자연의 모든 것을 친구로 삼을 수 있으며, 혼자 즐길 수 있는 취미를 갖는 것도 외로움을 이기는 방법의 하나다. 인간은 타인과 소통을 통해, 그리고 타인들의 인정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받는다. 그러면서 고독감에서 벗어나지만 잠시일 뿐이다. 고독감은 수시로 침투한다. 산불 감시원의 삶을 담은 이 다큐는 현대 사회에서는 사회적 교류가 필수라고 생각하는 일반인들에게는 고독의 의미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준다. 군중 속의 고독이 더 힘들다고 말하지만, 산불 감시원처럼 말 그대로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타인에게 단 한마디의 따듯한 위로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을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그들의 생존 방식은 인간의 절대 고독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자제력을 유지하고 자신이 스스로 자기 편이 되라고 이야기한다. 오랜 시간 혼자만 있으면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반추하게 되고 후회, 원망 같은 감정들도 밀려올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편에 서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다. 또한 무료함이 주는 장점에 대해서도 말한다. 심심해야 창의성이 발휘된다는 말은 마치 뒤통수를 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복잡한 삶 속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놓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우리는 그대로 둬도 괜찮은 삶의 구멍들을 억지로 메우려고 애쓰면서 살았던 게 아니었을까. 6개월의 시간을 보낸 후, 사회로 복귀하면서 그들은 오히려 답답함을 느낀다. 또 다른 다큐 <늑대와 함께>에서 보여주는 고독은 자연 친화적이다. 그들은 자연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하는 듯이 보인다. 허허벌판에 세워진 오두막에서 두 사람이 함께 지내지만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그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말도 속삭이듯이 하는 이유가 있다. 그곳에 있는 목적은 늑대를 관찰하기 위해서다. 예민한 감각을 지닌 늑대는 멀리서도 인기척을 감지한다. 그래서 어딘가에 분명히 있지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은 숨죽이며 종일 늑대를 기다린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다림의 고독한 시간을 보내면서 그들은 서서히 자연의 일부가 되어간다. 한밤중에 멀리서 들려오는 늑대의 울음소리를 그들은 아름답고 환상적이라고 표현한다. 늑대는 이중성의 의미를 지닌 동물이다. 인간은 늑대를 악과 위험의 상징으로 혐오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용맹하고 영험한 존재로 추앙했다. 서식지 파괴와 박멸로 멸종위기에 처한 늑대는 이제 더 신비로운 존재가 됐다.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그토록 기다리던 늑대 가족무리가 나타났을 때 느꼈을 그들의 희열이 영상 속에서 그대로 전달된다. 펑펑 쏟아지는 눈발 속에서 탐스러운 털을 휘날리며 늠름하게 걷는 늑대들의 모습은 환상적이다. 관찰자는 늑대들에게 이름을 지어준다. 늑대들은 자신에게 이름이 생겼다는 사실을 모르겠지만 관객에게는 더 친근한 느낌으로 바뀐다. 어느 순간 대장 늑대가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할 때, 숨이 멎는 기분이 된다. 그는 어딘가에 숨어 자신을 관찰하는 인간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다큐를 보면서 늑대의 눈으로 인간을 바라보게 된다. 앞서 말한 두 편의 다큐는 자연을 대상으로 한 관찰자이자 자연 속 일부인 주체로서 인간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마지막을 준비하는 환자와 가족의 모습을 통해 결국에는 혼자서 맞이할 수밖에 없는 삶의 마감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완벽한 하루>라는 제목의 다큐도 있다. 모두 소개하지 못해서 아쉽지만, D-BOX 사이트에서 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상영됐던 영화들을 볼 수 있다. 사진 출처 : EBS국제다큐영화제 공식 채널
잊을 만하면 나오는 드라마 장르가 법정 드라마와 의학 드라마다. 그만큼 인기가 있고 시청률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장르다. 어떤 식으로 서사가 진행될지 그림이 먼저 그려지는 장르이기도 하다. 드라마 작가는 기존 드라마의 서사를 뛰어넘어 시청자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고 싶겠지만 드라마 시리즈는 대부분 원형을 바탕으로 변주한다. 그래서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들고 비슷한 결말이 예상되는 경우가 많다. 갈등이 고조되면서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졌다가 기적 같은 반전으로 바뀔 때의 쾌감을 기대하면서 보게 된다. 법정 드라마와 의학 드라마는 그런 효과에 많이 기대는 장르다. 이런 장르에는 주인공의 천재적인 재능이 드라마를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 그래서 법정 드라마에는 스타 변호사가, 의학 드라마에는 스타 의사가 있다. 그런 천재성이 얼마만큼 설득력과 친화력을 얻느냐가 드라마 성공의 관건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나 <굿 닥터>의 주인공은 자폐인이지만 자폐 자체보다는 서번트 신드롬의 천재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최근에 SBS에서 방영을 시작한 드라마 <굿파트너>는 여러 형태의 이혼 소송을 다루면서 법정 드라마의 정석대로 전개되고 있다. 작년에 JTBC에서 방영했던 조승우 주연의 <신성한 이혼>도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 비교가 된다. 의학 드라마처럼 법정 드라마도 같은 장르의 기존 드라마와 차별되는 포인트를 둔다. <신성한 이혼>은 불리한 상황에 있는 이혼 소송을 기적적으로 승소로 이끄는 데 초점을 맞췄다는 점에서는 다른 법정 드라마와 비슷하지만 코믹한 요소를 가미해 재미를 주고 엄마를 잃은 조카에 대한 삼촌의 애틋한 사랑으로 감동을 노렸다면, <굿파트너>도 여러 이혼 소송을 성공적으로 진행하는 동시에 이혼 전문 변호사가 본인의 이혼 소송을 시작하며 겪게 되는 감정 변화를 보여준다는 차별점을 두고 있다. <굿파트너>에서는 승률 최고인 스타 변호사 차은경(장나라)이 중심에 있고 신입 변호사 한유리(남지현)가 들어오면서 작은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매스컴에도 자주 출연하는 스타 변호사 차은경은 일 중독이고 그녀의 관심은 오직 승소에 있다. 그러나 아직 사회의 때가 묻지 않은 신입 한유리 변호사는 갈등한다. 소송을 맡아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의뢰인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지만, 승소를 위해 모른 척하고 변호해야 했기 때문이다. 법정 드라마에서 직업으로서 변호사가 아닌 개인으로 갖게 되는 양심적인 갈등은 클리셰지만 현실적이기도 하다. 변호사의 임무는 소송에서 고객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게 온갖 전략을 짜내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이 다 진실이라고 할 수 없다. 어떻게 주장하고 재판부가 어떻게 의뢰인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도록 유도하느냐가 관건이다. 특히 이혼 소송은 다른 영역과 다르게 더 애매하다. 부부간의 일은 부부만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객관적 증거 확보가 힘들다. 두 사람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가족의 의견도 객관적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 누구로부터 문제가 시작된 것인지, 누가 더 유책자인지 증명하기도 힘들다. 부부 간의 갈등은 때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처럼 그 시작점이 모호할 때도 많다. 부부 간에 서로 말이 다르고 서로 기억하는 부분도 다르다. 그래서 드라마에서 이혼 전문 변호사가 짜는 전략은 파격적이고 더 흥미롭다. 차은경 변호사가 자신과는 성향이 다른 신입 한유리에게 자신의 이혼 소송을 맡기면서 진짜 게임이 시작된다. 어떤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완벽하고 냉정한 변호사 차은경은 자신의 비서와 남편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냉정하게 득실을 따져서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참을 수 있는 한도를 넘었다는 판단이 서자, 마음을 바꾸고 이혼 소송에 돌입한다. 그리고 차은경은 자신이 원고가 되자, 그동안 숱한 이혼 소송에서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복수심을 피할 수 없음을 시인한다. 의뢰인의 사건을 맡았을 때와 다른 태도가 흥미를 돋우는 원천이 된다. 차은경과 남편이 서로를 향해 공격의 강도를 높이면서 시청률도 함께 올라갈 것으로 예상된다. 두 사람의 경우는 정략결혼도 아니었고, 초기에는 서로에게 진심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그런데 남편은 아내가 일에만 몰두했기 때문에 육아를 포함한 결혼 생활을 혼자 했다는 이유를 들면서 아내의 비서와 사랑에 빠지게 됐다고 주장한다. 더군다나 아직 이혼도 하지 않았으면서 불륜 상대와 웨딩사진까지 찍어 차은경에게 들킨다는 설정도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소송이 진행되면서 펼치게 될 남편 쪽 주장이 어느 정도 공감을 얻게 될지 지켜볼 일이다. 그리고 이혼 전문 변호사가 자신의 소송에서 이성을 잃지 않고 어떻게 전략적으로 대처해 나갈지 기대된다. 또한 차은경과는 반대의 관점을 가진 한유리가 담당 변호사로서 어떻게 신박한 전략을 짤 것인가에도 관심이 집중된다. 맞벌이를 하는 여성들은 가정일과 병행하기가 힘든 상황을 수도 없이 맞게 된다. 그렇다고 둘 중 한 명에게 일을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다. 맞벌이 부부가 많아지고 있는 현실에서 이런 문제는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통계적으로 봤을 때 불륜도 피하기 힘들 것 같다. 인간의 감정이란 변할 수밖에 없고 부부 사이에 별문제가 없다고 해도 초기의 열렬했던 감정이 지속되기란 힘들다. 이혼율이 증가하는 현실을 생각해 볼 때, 결혼에서 사랑하는 감정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약속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더 중요한가, 결혼이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서로 감정을 속이면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도 제기될 수 있다. <굿파트너>는 초반부에서 이제 중반부로 돌입하는 중이다. <사랑과 전쟁>처럼 다소 과장되고 자극적인 상황 묘사에 치중하는 드라마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란다. 차은경 변호사의 이혼 사건이 어떤 결말을 맞게 될지가 중심이 되면서 흥미를 끄는 이혼 사례들도 함께 다루는 방식으로 전개될 것이다. 현직 변호사가 직접 극본을 썼다고 하니 이해타산을 따지며 결혼을 기피하는 시대에 결혼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는 현실적이고 차별적인 드라마가 되기를 기대한다.
살면서 '오늘은 퍼펙트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며칠이나 될까. 있다면 그날은 누가 보기에도 완벽한 날이었을까. 완벽이라는 평가는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 타인에게 완벽해 보이는 삶이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퍼펙트 데이즈>는 그런 모순적일 수도 있는 의미가 자연스레 받아들여지는 영화다. <퍼펙트 데이즈>는 로드 무비의 거장인 빔 벤더스 감독이 연출했고, 주인공인 히라야마 역을 일본의 국민배우 격인 야쿠쇼 코지가 맡았다. 야쿠쇼 코지는 이 영화로 2023년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야쿠쇼 코지가 아니었다면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우러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도쿄의 공중화장실 청소부로 일하는 히라야마는 자신이 정한 규칙에 따라 정확하고 절도 있게 움직인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다다미방에 놓인 이불을 개고 세수를 하고 도쿄 청소부라는 글씨가 등에 찍혀 있는 작업복을 입고, 가지런히 순서대로 놓인 사물을 챙겨서 집을 나선다. 그리고 자판기에서 커피캔을 뽑고 청소도구가 가득 실린 차의 운전석에 앉는다. 일이 끝난 후, 목욕탕에 들렀다가 단골 술집에서 술 한 잔 하는 일정도 매일 똑같다. 여러 가지 형태의 화장실이 등장하고 히라야마가 변기와 세면대를 매우 꼼꼼하게 청소하는 장면이 꽤 오래 나온다. 화장실 청소 도중, 볼일을 보러 들어오는 사람들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고 밖에서 기다리는 히라야마의 표정은 마치 즐거운 일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그런 묘한 미소는 영화 내내 나온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하늘을 쳐다볼 때, 점심으로 준비해 온 샌드위치를 공원 벤치에 앉아서 먹으면서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눈인사를 보낼 때도 입가에 미소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는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스며드는 순간을 항상 아날로그 카메라로 찍는다. 현상한 사진을 간직할지 없앨지 분류하는 작업도 의식을 치르듯 규칙적으로 한다. 7, 80년대에 유행했던 팝송 카세트테이프를 듣고, 자기 전에 소설책을 읽는 그가 어쩌다가 청소부가 됐는지, 과거에는 무슨 일을 했으며, 왜 혼자 살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혼자만의 세계에서 완벽한 하루를 보내는 히라야마의, 삶의 리듬이 깨지는 순간이 두 번 온다. 삼촌이라고 부르면서 그를 찾아온 여동생의 딸이 나타났을 때와 함께 일을 나눠서 하던 동료가 제멋대로 일을 그만뒀을 때다. 러닝타임 중 3분의 2 정도가 지난 후에야 비로소 그의 배경에 대한 실마리를 엿보게 하는 조카가 등장한다. 그리고 뒤이어 여동생이 딸을 데리러 나타났을 때, 그가 가족과 갈등으로 홀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살아왔음을 짐작하게 된다. 여동생을 포옹으로 작별한 뒤, 늘 밝은 표정을 유지했던 그는 처음으로 오열한다. 그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정확하게 짐작하기는 어렵다. 영화는 어떤 단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지금까지 유지했던 자신의 세계를 전혀 바꿀 생각이 없어 보일 뿐이다. 그러나 잠에 빠져드는 순간,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꿈결은 흑백화면으로 처리되는데, 과거와 현재가 뒤엉켜 있다. 나뭇잎들 사이로 누군가의 얼굴이 보일 듯 말 듯한다. 그의 말처럼 이 세상은 수많은 다른 세상으로 이뤄져 있고 서로 연결돼 있기도, 아니기도 하지만 꿈에서만큼은 그 경계가 흐릿해지고 뒤섞인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예기치 못하게 타인과 얽히고 일이 꼬이는 순간이 온다. 매일 정해진 순서대로 일과를 마치는 행복이 깨지는 순간이다. 그만둔 동료의 후임이 며칠 만에 배정됐을 때, 그가 짓는 미소는 다시 완벽한 하루로 돌아갈 수 있게 됐음을 뜻한다. 그런데 주인공은 왜 하필 화장실 청소부였을까. 일본의 투명한 공중화장실을 보고 영화를 구상했다는 감독의 인터뷰가 있지만, 영화에서 히라야마가 화장실 청소부여야 하는 이유를 찾게 된다. 가장 더러운 곳이면서 가장 깨끗해야 하는 장소가 바로 화장실이다. 모두가 기피하지만, 꼭 필요하며 급할 때 가장 간절하게 찾게 되는 곳이다.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며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을 그는 택했을지 모른다. 그가 타인들과 교류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사적으로 긴밀한 교류는 거부하지만 히라야마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타인들과 어울리고 있기 때문에 늘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가족과 만남 후에, 그의 미소는 달라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 눈은 점점 붉게 물든 채 눈물이 고인다. 마치 금방이라도 터질지 모르는 울음을 꽉 다문 입술의 미소로 막고 있는 듯이 보이기까지 한다. 그는 수시로 하늘을 쳐다본다. 그의 시야 안에 들어오는 사물은 주로 바람결에 조금씩 움직이는 나뭇잎들이다. 그리고 흑백 화면으로 처리된 그의 꿈에서도 나뭇잎 형상이 등장한다. 영화가 끝난 후 자막으로 코모레비라는 일본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말하는데 '다시는 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이라는 속뜻이 있다. 영화는 순간과 영원의 차이를 무화시킨다. 조카가 "(삼촌이 말하는) 다음이 언제야"라고 물었을 때, 그는 "다음은 다음이고 지금은 지금이야"라면서 답을 피한다. 그에게 다음이란 큰 의미가 없다. 지금의 연속일 뿐이다. 아픈 과거를 딛고 올라선 듯한 그의 미소는 짧은 지금 이 순간을 완전하게 혼자 소유하는 날들의 연속이 행복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만든다. 우리 모두 늘 행복할 수 있는데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영화는 말하는 듯하다.
지난 5월 1일부터 10일까지 개최됐던 전주영화제, 특히 동시대 젊은이들의 고뇌를 담은 영화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삶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나답게 산다는 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사는 동안 평생에 걸쳐 이어진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삶의 궤도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는 중장년에 비해 정체성이 확고하게 정해지지 않은 청년이 갖는 불안감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다. 박정미 감독의 다큐멘터리 <담요를 입은 사람>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군인 출신인 박정미 감독은 원래 영화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고 다큐를 만들 목적으로 촬영을 한 것도 아니었다. 이 다큐는 박정미 감독이 치열한 삶을 요구하는 사회에 회의를 느껴 세운 프로젝트로부터 시작됐다. 프로젝트의 제목은 '1년 동안 돈 쓰지 않고 영국에서 살아남기'다. 철없어 보이는 이 프로젝트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촬영 후 편집을 거쳐 영화로 탄생하기까지 수년이 걸렸다. 처음에는 영화가 될 가능성이나 확신이 없는 채로 단지 자신이 세운 프로젝트를 기록으로 남길 목적이었다. 세계 곳곳에 있는 공동체 네트워크의 도움으로 수많은 위기를 한 고비 넘겨내는 과정이 흥미롭게 진행된다. 살기 위해서는 주거할 곳과 음식은 필수다. 그것만 해결되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보인다. 자전거를 기증받고, 한 달간 보트를 무료로 사용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으면서부터 무료 여행은 시작된다. 음식점과 시장에서는 팔다 남은 멀쩡한 음식과 채소를 그대로 쓰레기 봉지에 담아 내놓기 때문에 잘만 고르면 성찬을 누릴 수도 있다. 쓰레기 봉지를 뒤지는 일은 생각보다 용기를 필요로 한다. 혼자서는 엄두를 못 냈지만 박정미 감독은 공동체 일원의 도움을 받아 버려진 음식 챙기기에 성공한다.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불안정한 상황을 견디어내는 삶은 어떤 느낌일까. 운이 나쁘면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녀는 세계 곳곳에서 자유롭고 자연 친화적인 특별한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의 도움으로 숙식 문제를 해결해 간다. 특히 이란에서는 찾아온 손님을 친절하게 대접하는 종교적 문화 덕분에 순탄한 여행이 되는 듯했지만 위기가 찾아온다. 히치하이킹은 여성에게 특히 위험하다. 실제로 돈다발을 내밀며 섹스를 요구하는 운전자도 있었다. 친절한 사람들의 천국처럼 느껴졌던 이란에서 오토바이를 얻어 탔다가 목숨을 위협당하는 위기를 겪는다. 목적지와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걸 보고 뛰어내릴 생각까지 했는데 남자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알라를 외친 덕분에 죽을 고비를 넘긴 일화를 감독은 덤덤하게 이야기한다. 무사히 프로젝트에 성공한 그녀는 자신감과 성취감으로 행복을 만끽했을까. 프로젝트를 마칠 무렵 그녀는 여전히 불안정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한다. 프로젝트에 성공했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며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 미지수다. 그렇다면 그녀가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다큐를 보면 그 안에서 답을 찾을 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 벽이 앞을 가로막는다고 생각됐을 때도 어딘가에 출구가 생긴다. 그러다가 곧 또 다른 벽이 나타나지만 그 느낌은 처음처럼 그렇게 막막하지는 않다. 싱가포르 출신 숀 네오 감독의 <끝없는 기다림의 날들>과 앤서니 첸 감독의 중국영화 <브레이킹 아이스>에서도 비슷한 정서를 느낄 수 있다. 제목에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듯이 이 두 영화에 등장하는 젊은이들은 불안하다. <끝없는 기다림의 날들>이라고 번역된 제목처럼 끝없이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브레이킹 아이스>에서처럼 얼음이 깨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인지, 반대로 얼음을 깨고 싶어 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주인공들은 무언가를 찾기 위해 방황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고,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힘겨운 발걸음을 옮기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자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해결책이 존재하기나 하는지 본인도 알지 못한다. <끝없는 기다림의 날들>은 숀 네오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다. 주인공인 미쓰에는 새로운 삶을 찾아 싱가포르로 갔지만 방황 끝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음을 보여준다. 고향의 설경에 파묻힌 그녀의 모습은 미완성처럼 보이지만 안정감이 느껴진다. 숀 네오 감독은 불확실한 정체성으로 방황했던 자전적 스토리를 바탕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구하는 인생을 묘사한 듯한 영화를 보면서 관객은 자신 안에 있는 벽과 한계를 가늠할지도 모른다. 앤서니 첸 감독의 <브레이킹 아이스>에서는 세 명의 젊은이가 등장한다.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에서 안생역으로 친숙한 배우 주동우가 여주인공을 맡았다. 두 남자와 한 여자는 우연히 여정을 함께 하게 됐는데 각자 문제를 가슴에 안고 있다. 영화는 간접적으로 그들의 문제를 드러낸다. 여성이 지닌 우울감의 정체는 영상을 통해 짐작하게 된다. 피겨스케이터였던 여성은 부상으로 인해 꿈을 접어야 했다. 그러나 우연히 만난 한 남성의 문제점은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열심히 공부하고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성공을 향해 질주했고 이제 연봉 높은 회사에 취직해 목표에 도달한 듯 보이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다. 여성은 처음 만난 그에게서 자신의 가슴에 뚫려 있는 구멍을 발견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여성은 자신을 오랫동안 짝사랑해 왔던 다른 한 남성의 마음을 알면서도 새로 만난 남성과 사랑의 행위를 한다. 세 사람은 미묘한 관계가 됐지만 내색하지 않고 여정을 함께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언급한 세 영화들을 비슷한 나잇대의 젊은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영원히 변치 않는 안정된 삶이란 존재하기 힘들기 때문에 인간에게 불안감은 피할 수 없는 감정이다. 영화는 인간이 지닌 근원적인 감정인 불안감을 여러 방식을 통해 늘 보여줬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은 행운일 수도, 불행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됐든 그들은 살아갈 방법을 찾아낼 것이고 삶은 계속 이어지게 된다는 평범함과 각자만의 특별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영화들이다.
나이가 차면 의무처럼 결혼과 독립이 동시에 이뤄지던 시대와는 달리,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평균 결혼 연령이 올라가고 이혼율과 재혼율도 상승했다. 하지만 결혼에 대한 관심은 여전함을 보여주는 프로그램들이 많이 있다. 오락성이 있는 예능 프로그램의 일부이지만, 자신과 미래를 함께 할 상대를 원하는 진지함도 있다. 시청자 입장에서는 싱글 남녀 사이에서 발생하는 은밀한 밀당을 엿보는 관음증적 재미도 짝짓기 프로그램의 인기 비결이다. 엠넷에서 방영됐던 짝짓기 예능 프로그램, <커플팰리스>가 시즌 원을 끝내고 시즌 투를 예고했다. 각 방송사에서 진행해 왔던 짝짓기 프로그램은 현재까지도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커플 매칭 프로그램은 1994년 MBC의 '사랑의 스튜디오'로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형태로 발전해 왔다. 개인정보가 노출되고 공개적으로 데이트 상대를 고르기 때문에 출연자들이 가질 수 있는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짝짓기 프로그램은 꾸준하게 관심을 끌어왔다. 특히 2011년부터 3년간 방송됐던 SBS의 '짝'은 새로운 방식으로 인기를 모은 프로그램이었다. 일반인들이 며칠간 숙소에서 함께 지내며 상대에 대한 솔직한 심경을 카메라 앞에서 말하는 방식이 그 당시 기존 프로그램과 차별을 보였다. 출처 : Mnet TV <커플팰리스>는 소수의 남녀가 출연했던 기존 프로그램들과 달리, 남녀 50명씩 총 100명의 싱글이 출연해 선택의 범위를 넓혔다. 일반적으로 나이와 이름, 직업 정도를 밝히고 시작하는 기존 프로그램과는 달리, 짝이 정해져 커플팰리스에 입성하는 순간까지 나이와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대신 첫 소개 때, 자신이 상대에게 바라는 특징을 문구로 내걸면서 자신이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상상하게 한다. 특히 <커플팰리스>는 목표 지점이 단순한 데이트가 아닌 결혼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시작한다. 그래서 처음부터 결혼의 현실적인 조건인 자신의 직업과 연봉, 재산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부모의 직업이나, 집안의 재산까지도 장점으로 내세우면서, 결혼하면 아버지가 강남에 있는 아파트를 줄 거라는 조건까지 당당하게 밝히고 그 조건에 마음이 흔들리는 이성의 모습도 솔직하게 보여준다. 결혼정보회사의 커플 매니저들도 합세해서 이성에게 어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조언을 주고 이상적인 결혼 상대의 순위까지 매긴다. 배우자감을 서열화하고 계산적인 느낌을 주지만, 결혼 역시 인생에서 가장 큰 비즈니스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거부감은 들지 않는다.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반전의 재미가 쏠쏠하다. 처음부터 순조롭게 이뤄지고 거의 확정된 것처럼 보였던 커플들이 깨지고, 후반부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다른 상대와 새롭게 매칭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그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결혼을 목표로 했을 때 사람의 마음을 가장 흔들리게 하는 부분이 어떤 것인지도 파악하게 된다. 결혼 상대에 대한 기대감과 현실이 부딪히는 순간이 분명히 온다. 이런 문제는 결혼 후에도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출연자들은 최종 결정을 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속으로 수십 번 자신의 결정을 번복한다. 출처 : Mnet TV 다른 프로그램과는 달리, 커플이 된 사람들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사진을 찍고 신혼여행을 온 것처럼 한 방에서 구체적으로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청첩장도 쓰고 상견례까지 진행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은 가상이지만 더 신중하고 진지한 선택을 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긴장과 압박감을 주는 효과를 발휘한다. 호감형의 외모를 가진 상대에게 표가 몰리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가 생긴다. 커플이 깨지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최종 결정까지 이어질 거라고 믿었던 상대가 다른 이성이 보내는 신호에 마음이 흔들렸다는 사실을 눈치채면서 신뢰에 금이 가고, 커플존에 있던 커플은 다시 싱글존으로 옮기거나 커플팰리스를 떠난다. 두 번째는 자신의 경제력에 비해 상대의 기대가 너무 커서 큰 부담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결정이 끝난 듯이 보이는 커플을 향한 방해 공작도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상대만 보기보다는 여러 상대를 만남으로써 좀 더 신중한 선택을 유도하기 위한 의도라고 좋게 해석할 수도 있지만 시청률 상승을 위해 긴장감과 반전을 노린 전략으로 보인다. 짝짓기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듯이, 결혼이 사랑의 결실에서 현실과 타협으로 변질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결혼이란 애초부터 매우 현실적인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남녀 간의 경제력이 비등해지고 결혼이라는 현실에 이상적인 환상이 스며들 수 있는 여유가 생기면서 선택이 더 까다로워졌다는 생각이 든다. 출처 : Mnet TV 잘 어울리는 커플이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성공하고 행복해하는 결말의 영화나 드라마를 선호하는 것은 실현이 쉽지 않은 환상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커플팰리스>에서 첫눈에 끌린 커플이 끝까지 가는 경우는 상대에 대한 안정감과 신뢰감이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일단 이성적인 끌림이 먼저다. 출연자들은 '자신의 이상형에 가까운'이라는 말을 자주 언급한다. 그리고 그다음은 신뢰와 안정감이다. 편하지만 설렘이 없거나 끌림이 있지만 상대가 확신을 주지 않는 경우에는 성사가 되지 않았다. 결혼은 이제 필수가 아닌 선택의 시대가 됐다. 그리고 적절한 혼기라는 단어 자체가 무의미할 만큼 결혼 시기도 다양해졌으며 <커플팰리스>에서 보여준 것처럼 여성이 남성보다 나이가 더 많거나 돌싱인 경우도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혼 역시 안정감과 구속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으며 한 가지를 얻으면 다른 한 가지는 희생된다. 다른 한 가지를 희생시킬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판단이 결혼 의사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80회 베니스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영화를 만든 하마구치 류스케는 현재 주목을 가장 많이 받는 일본 감독이다. 호평을 받았던 그의 전작들 <해피 아워>, <아사코>, <우연과 상상>,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면서 감독의 색깔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관객은 그의 최신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할 것 같다. 이 영화는 하마구치 류스케는 대체 어떤 색깔을 지닌 감독인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영어 제목도 의도적으로 매우 강렬하게 등장시킨다. 처음에는 악이 존재한다는 것처럼 읽히게 만들다가 not이 가장 나중에 강조하듯 빨간색으로 꽂힌다. 마치 악이 존재한다고 했다가 아니라고 태도를 바꾸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인지, 그렇지 않다는 것인지 혼란스럽다. 하지만 강렬한 느낌을 주는 제목에 비해 영화는 큰 변화 없이 조용하게 진행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류스케 감독의 기존 영화와 결이 다르다. 이전의 영화에서는 대사를 통한 언어유희를 많이 사용했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는 연출가이면서 배우이기도 한 주인공이 연극 대사를 계속 연습하면서 마치 현실의 상황을 대변하는 듯이 느껴지게 하고, <우연과 상상>, <해피 아워>처럼 캐릭터들이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으며 자신의 욕망을 꺼내놓기도 하고, 반대로 상대방의 말에 자극을 받아 숨겨진 욕망을 발견하기도 하는 방식이 특히 여성 관객들로부터 공감을 받아왔던 반면 이번 신작은 그런 기대감을 배신한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인 타쿠미는 시종일관 표정의 변화가 없다. 그런데 그 무표정이 관객에게 전달되는 느낌이 살아있다는 것 또한 독특하다. 그의 얼굴은 무심한 자연을 닮았다. 제목이 등장할 때 '악이 존재한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로 바뀌었듯이, 영화는 감춤과 드러냄을 반복하면서 오히려 존재성을 강조한다. 건망증이 심한 타쿠미는 딸인 하나의 하교 시간을 자주 놓치기 때문에 하나는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하고, 자주 언급되는 사슴도 직접 드러내기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를 인식시킨다. 예를 들면 하나를 찾아 타쿠미가 혼자서 숲길을 걸어가는 장면을 롱테이크로 찍는데, 잠시 언덕에 가려져 보이지 않다가 다시 나타날 때는 타쿠미가 하나를 업고 걸어가는 모습이 나온다. 그 사이에 타쿠미가 하나를 찾았다는 어떤 힌트도 주지 않는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장면이다. 영화엔 이렇게 뒤통수를 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가장 논란이 되는 장면은 타쿠미가 갑자기 기획사 직원인 타카하시의 목을 조를 때이다. 총에 맞은 새끼 사슴과 어미 사슴 앞에 서 있는 하나를 구하기 위해 달려가던 타카하시를 왜 막았으며 죽이려고까지 했을까. 타카하시는 악인이라고 할 수는 없는 평범한 사람이며 기획사를 그만두고 글램핑장의 관리자가 될 생각까지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성공을 위한 계획이었지, 타쿠미가 주장하는 자연과 균형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타쿠미가 '사슴이 다니는 길에 글램핑장이 생기면 사슴은 어디로 가죠'라고 물었을 때도 '어디론가 가겠죠'라는 무책임한 대답을 한다. 가장 피해가 예상되는 우동 가게에서 식사를 대접받았을 때도 주인에게 "덕분에 몸이 따듯해졌네요"라는 인사말을 한다. 그 말에 주인은 "맛에 대한 칭찬은 아니네요."라고 지적한다. 타카하시의 중심은 상대나 주변이 아닌 자신에게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악은 대단한 것이 아닌 평범한 이기적 욕구로부터 비롯될 수 있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이지만, 그 반대를 뜻할 수도 있다. 타쿠미는 자연의 균형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하나의 운명을 자연에 맡긴 것인지, 사슴과 교류를 꿈꿨던 하나의 기대가 잘못됐음을 보여주는 것인지, 하나와 타카하시가 사망한 것인지도 영화는 확실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타쿠미가 피를 흘리며 쓰러진 하나를 안고서 숲 속을 향하는 장면만 보여준다. 자주 언급되는 사슴은 어떤 의미일까. 자연의 일부이면서, 영화에서는 자연을 대표하는 사슴은 인간과 교류하지 않는다. 사슴의 존재성은 총소리와 흔적으로 드러난다. 눈 위에 찍힌 발자국과 총을 맞고 죽어 뼈만 남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특히 사슴이 물을 마시는 장소는 영화에서 몇 번씩 등장하는데 여러 각도에서 매우 아름답게 잡고 있다. 사슴이 직접 물을 마시는 장면은 없지만 평화로운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타쿠미의 딸인 하나 역시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숲에 있는 수많은 나무들의 이름을 알고 있으며 자연스레 사슴의 자취를 따라간다. 아래를 향해 굽이쳐 내려가는 물줄기도 자주 등장한다. 글램핑장 건설 설명회 때, 마지막으로 마이크를 잡은 이 마을의 어르신은 물은 아래로 흐른다는 말을 화두로 꺼내면서 이 사업의 윤리성을 문제 삼는다. 타쿠미는 집에서 함께 놀아달라는 딸의 요구를 무시하면서 종이에 '물은 아래로 흐른다'라는 문장을 쓴다. 이 말은 악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아무리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를 내세워도 상층에 있는 부류는 계획을 바꿀 생각이 없다. 그들의 존재성은 자본에 있기 때문이다. 타쿠미가 자연과 상생을 주장하면서 내세운 균형이란 단어는 양보와 희생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화상 미팅을 통해 나누는 사장과 마을 사람들의 의견을 전달하는 기획사 직원들의 대화를 보면 그런 균형은 불가능해 보인다. 결국 아래쪽 부류만 희생된다.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악은 그 순간에 생성될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이 지닌 속뜻을 생각하게 한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새 영화, <메이 디셈버>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토드 헤인즈 감독이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그가 지금까지 만든 영화들의 성향을 봤을 때 당연하게 생각된다. 그는 주류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소수자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을 만들어왔다. 하지만 그가 소수자들을 서사화하는 방식은 비슷한 관심을 가진 다른 감독들과 차이가 있다. 사회가 비정상이라는 범주로 몰아넣은 캐릭터들을 묘사하면서, 누가 과연 비정상인지 모호하게 만든다. 토드 헤인즈는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주류 사회의 습성을 비꼰다. 그는 무엇이 정상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왔다. <메이 디셈버>를 보면서 토드 헤인즈의 인기작, <캐롤>을 떠올린 이유는 매혹적인 긴장감 때문이었다. 토드 헤인즈는 겉으로 평온해 보이는 세계가 어느 한순간 파괴될 것 같은 불안감을 매혹적으로 표현하는 감독이다. <메이 디셈버>는 도입부터 스릴러 느낌을 주는 배경 음악을 깔고 있다. 영화 제목인 <메이 디셈버>는 나이 차이가 큰 커플을 뜻한다. 23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24년간 결혼생활을 지속해온 그레이시(줄리안 무어)와 조(찰스 멜튼)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고, 자녀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듯 보인다. 그들 사이에 유명 여배우, 엘리자베스(나탈리 포트만)가 끼어들면서 분위기가 달라진다. 독립영화에서 그레이시 역을 맡은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 가족과 며칠간 함께 생활하면서 인터뷰를 한다. 엘리자베스는 캐릭터의 내면을 이해해야 진실에 가까운 연기가 나온다고 생각하는 배우다. 하지만 영화는 진실에 접근하고 싶어하기보다는 진실의 존재 가능성을 비웃는다. 그레이시와 첫 만남을 가진 엘리자베스는 당황한다. 그레이시는 13살에 불과한 아들의 친구와 성관계를 가졌던 과거에 대해 일말의 가책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음과 모호함은 그녀에게 소유의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 되기에 집착한다. 영화는 그레이시와 엘리자베스를 의도적으로 한 화면에 잡아 닮은 모습으로 묘사한다. 엘리자베스는 사회에서 용인되지 않거나, 회색지대에 있어서 연기하기 힘든 캐릭터에 관심이 많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레이시와 조가 첫 관계를 맺었던 펫샵의 지하실을 찾아가 그 당시 그레이시의 모습을 재현하거나, 어린 시절의 조를 섹시하다고 표현하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은 위태로워 보인다. 자신감과 확신으로 질서를 주장하는 사람은 오히려 그레이시다. 고등학생인 아들에게 우유를 억지로 먹이려 들고, 집안의 전통이라면서 딸에게는 체중계를 선물한다. 그리고 체중계가 없으면 어떤 삶이 될지 아냐고 경고한다. 체중계는 절제를 의미한다. 정작 본인은 욕망을 절제하지 못해 전 남편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에게 충격을 줬는데도, 진정한 사랑이라는 틀을 만들어 정당화한다. 세상 사람들의 인식과는 달리 피해를 본 쪽은 조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암시까지 한다. 주요 세 캐릭터는 자신의 정체성을 붙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엘리자베스의 배우로서 정체성은 그레이시를 완벽하게 연기해야 완성되기 때문에 그레이시의 내면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한다. 그레이시는 24년간 동안 유지되어온 결혼생활이 그들의 사랑을 증명해줬고 그래서 비정상에서 정상의 궤도로 넘어왔다고 믿는다. 그러나 조의 생각은 다르다. 너무 어렸을 때 했던 선택이 옳았는지 흔들린다. 현재의 조를 지지해주는 정체성은 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이다. 그래서 자녀의 독립은 그를 불안하게 만든다. 그가 빈 둥지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고 쌍둥이의 고교 졸업식 때 눈물을 흘리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그레이시의 전 남편인 톰, 그리고 현재 남편인 조와 친구면서 그레이시의 아들이기도 한 조지 역시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해왔음을 보여준다. 조지는 엘리자베스에게 그레이시가 친오빠들로부터 성폭행을 당했음을 시사하는 말을 하는데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레이시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내야 조지가 받은 충격이 완화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엘리자베스 역시 그 말을 듣고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그레이시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잡혔다고 생각해서다. 영화는 상황이 이해됐다고 믿는 순간, 그 믿음을 깨뜨리면서 여러 질문을 던진다. 과거의 축적이 현재의 나를 만든 것일까. 반대로 현재 나의 모습이 과거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 그레이시와 조의 현재는 과거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것일까. 아니면 현재의 모습은 과거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일까. 누가 누구를 속이고 있는 걸까. 실제와 연기의 경계 역시 모호하다. 엘리자베스는 섹스 장면을 찍을 때 자신이 쾌락을 연기하는지, 쾌락을 느끼지 않는 척 연기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실화가 영화로 제작됐을 때 실제 인물에 얼마나 근접하게 묘사될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레이시의 마지막 대사, '내 자아는 탄탄하다'는 단호한 선언은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서사를 비튼다. 그때 혼란스러워하는 엘리자베스의 표정은 그레이시가 지탱해온 모호한 세계의 베일이 벗겨지기를 바랐던 관객의 반응이기도 하다. 토드 헤인즈가 영화를 통해 던지는 질문은 자신을 정상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정상이란 존재하는가. 당신의 정체성은 굳건한가.
후회가 없을 만큼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가는 게 가능할까.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사는 것도 쉽지 않지만, 설사 그렇게 살았다고 해도 회한이 전혀 남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실수하지 않는 인간은 없고, 미래를 미리 알 수도 없기 때문에 옳은 선택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은 채워질 수 없는 심리적 공간을 향한다. 과거를 바꾸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상담에서는 과거의 경험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도록 유도해서 내담자의 마음에 쌓인 회한을 풀어준다. 그러나 영화나 드라마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과거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기있는 드라마를 보면 보편적인 욕망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있다. 재미가 있다고 느끼는 건 시청자의 욕망이 자극되고 충족되는 과정이 펼쳐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래 전부터 반복 돼왔던 서사임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는 같은 테마의 변주곡을 듣는 기분으로 즐긴다. 과거로부터 결코 해방될 수 없는 나의 삶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 한번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생각을 한 번쯤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과거 회귀의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이어진다. tvN의 <내 남편과 결혼해줘>는 이런 욕망을 제대로 겨냥한 드라마다. 실패한 결혼과 불륜이라는 뻔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의 진행 방식은 쾌락을 연장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드라마에서 시청률이 상승하는 시기는 주인공이 온갖 핍박과 불평등을 참아내는 인고의 세월을 보내다가 드디어 복수의 칼을 꺼내는 반전이 일어나는 회차가 나올 때이다. <내 남편과 결혼해줘>는 자신에게 상처를 줬던 중요한 일화를 하나씩 교정해 가면서 매회 소소한 부분에서부터 짜릿한 복수의 쾌락을 선사한다. 강지원(박민영 분)은 정수민(송하윤 분)과 학창 시절부터 단짝 친구로 서로의 휴대폰에 반쪽이라는 이름으로 저장해 놓았을 정도다. 늘 다정하게 굴면서 너밖에 없다고 말해왔던 정수민이 사실은 뒤로 자신을 모함해 왔고 왕따를 당하게 했던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지내왔던 강지원은 암에 걸려 시한부 판정을 받은 후, 남편과 정수민이 불륜관계였으며 자신이 죽은 후 받게 될 거액의 보험료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절규한다. 남편에게 떠밀려 머리를 부딪힌 후 사망하게 된 강지원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신이 십 년 전 과거로 되돌아간 채 깨어났음을 알게 된다. 모든 기억을 그대로 간직한 채 과거로 돌아간 강지원은 둘을 향한 복수를 시작한다. 극 중에서 최고 명문대를 나온 것으로 설정된 강지원은 첫 생애에서 왜 늘 정수민과 남편에게 당하기만 했을까. 그 안에서 가스라이팅이라는 중요한 문제가 들어 있다.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사람은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런데 강지원은 과연 그 오랜 시간 동안 정말로 정수민이 자신에게 진실한 친구일 거라는 믿음에 조그마한 의혹도 없었을까. 그전까지 두 사람이 그렇게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남편과 관계도 마찬가지다. 피해자의 내면에는 현재 상황이 바뀌었을 때의 두려움이 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너 없인 안 돼’라는 믿음이다. 복수의 쾌락을 목표로 하는 드라마의 특성상 가해자와 피해자를 극과 극으로 나누어 선악의 경계를 선명하게 만들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애증관계가 잠깐씩 나온다. 제2의 삶을 살게 된 강지원은 치를 떨면서 치밀한 복수를 시작한 후에도, 자신을 향한 정수민의 눈빛, 그리고 변한 강지원 때문에 죽을 작정을 하는 정수민의 태도에 찰나지만 흔들리는 모습이 살짝 나온다. 가스라이팅은 피해자가 일방적으로 당하면서 점점 무력해지고 자신조차 믿지 못하는 상황까지 가는 극단적인 심리적 학대 행위를 의미하지만, 상대에게 심리를 조종당하면서 상대의 뜻이 마치 자신의 뜻인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가벼운 가스라이팅은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피해자가 동조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말하자면 피해를 보면서도 그로 인해 누리는 심리적 안정감이 있기 때문에 현재 상황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내 남편과 결혼해줘>에서 강지원의 복수는 ‘너 없이도 난 잘 살 수 있어.’라면서 가스라이팅의 고리를 과감하게 끊는 작업을 의미한다. 극에서 설정된 ‘과거로의 회귀’는 자신을 망치게 한 부정적인 생각과 습성을 바꾸려는 과감한 시도를 할 용기를 뜻하기도 한다. 나의 삶이 어디부터 잘못된 것인지 반추하고 현재 삶을 바꾸고 싶은 욕망을 반영한 서사는 많다. 최근에 방영이 종료된 또 다른 드라마 <이재, 곧 죽습니다>도 비슷하다. 일이 잘 풀리지 않고 낙오자로 살아가는 데 지친 주인공 서이재는 친한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날린 뒤, 빌딩에서 떨어져 자살한다. 하지만 죽은 후에, 인격화된 모습으로 나타난 죽음과 만나게 되고 죽음을 모욕한 죄로 12번 다시 태어났다가 죽는 경험을 하게 된다. 서이재는 여러 조건의 삶을 만나보지만 공허하기만 하다. 그가 마지막으로 절실하게 원한 것은 원래 자신의 정체성으로 다시 한번 살아갈 기회를 갖는 것이었다. 비록 낙오자의 삶이었을지언정 자신의 삶이란 다시 살아볼 욕망을 불러일으키기에 가장 매력적이다. 보는 사람의 욕망이 있기에 과거로 회귀하는 서사는 자극성이 가미된 변주를 통해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