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여 편의 영화를 번역한 뒤, 영화 이론과 예술치료를 공부했다. 영화 칼럼을 쓰고 방송을 하면서 영화 속에 깔린 심리의 지도를 찾아나가는 중이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였던 영화 <발코니의 여자들>은 영화의 분위기에 맞는 무더운 여름에 맞춰서 7월 9일에 개봉이 결정됐다. 노에미 메를랑 감독이 연출하고 직접 주인공인 엘리즈 역을 맡았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여성 화가를 연기했던 노에미 메를랑은 <발코니의 여자들>에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프랑스의 주요 도시들이 40도가 넘는 폭염으로 끓고 있고, 노약자는 외출을 자제하라는 경고가 TV에서 흘러나오면서 시작되는데, 보기 편한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 폭염 피해 경고는 시작에 불과하다. 히치콕으로 시작해 알모도바르를 스쳐가며 호러와 판타지 장르를 뒤섞고, 신체의 노출과 훼손을 과감하게 보여준다. 공동주택에 사는 각 세대의 모습을 훑고 지나가는 카메라는 히치콕 감독의 <이창>을 연상시킨다. <발코니의 여자들>에서는 폭염 때문에 외출을 못하고 이웃을 훔쳐보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인 니콜(산다 코드레아누), 삼류 여배우인 엘리즈(노에미 메를랑), 캠걸인 루비(스헤일라 야쿠브)는 직업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 상태이고, 이성과 관련해서 각자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발생한 살해사건 때문에 상황이 꼬이면서 여성이라는 범주 안에서 한마음이 된다. <발코니의 여자들>은 여성들이 겪어야 하는 부당한 현실을 코믹하면서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그런데 그 방식은 육체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데미 무어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서브스턴스>를 연상시킨다. <서브스턴스>에서 남성 중심의 사회를 버티어내야 하는 여성의 욕동은 육체적인 아름다움에 있다. 그리고 아름다움이라는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단어는 영화에서 젊은 여성의 탄력 있는 육체로 규정된다. 그러나 <발코니의 여자들>은 그렇게 규정된 육체성에 반기를 들고 육체에 성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한다. 그뿐 아니라 남성의 육체에 대한 환상까지 무너뜨린다. 영화는 여성을 성적 도구로 생각하게 만드는 육체와 관능의 관계를 깨뜨리기 위해 여러 가지 장치를 끌어들인다. 엘리즈는 마릴린 몬로를 흉내 낸 금발머리와 붉은색 원피스를 입고 불안하게 등장하지만 그녀의 행동과 말투는 관능의 아이콘과는 전혀 다르다. 방귀를 뀌는가 하면, 가슴과 성기를 에로틱하지 않게 드러낸다. 산부인과 의사가 생식기를 검사할 때의 시선처럼 바라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작가인 니콜은 맞은편에서 묘한 눈빛으로 남성적인 매력을 과시하는 마냐니(루카스 브라보)를 보고 흥분하면서 멋진 로맨스 소설을 쓸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만 그녀의 환상 역시 산산조각 난다. 감독은 마냐니의 잘린 성기를 니콜이 필요 이상으로 오랫동안 손에 들고 있게 만든다. 남성의 잘린 성기를 바라보는 니콜은 놀라거나 혐오하지 않는다. 그녀의 표정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다.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성적인 대상으로 낙인찍힌 여성은 캠걸인 루비다. 성적인 매력을 무기로 돈을 버는 직업이지만, 루비는 자신을 절대로 수동적인 위치에 놓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남성에게 당하는 일을 용납하지 않는다. 여성의 성기는 남성이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될 신성한 영역이라는 말을 강조할 때, 루비의 표정은 평상시에 보여줬던 냉소와 장난기가 사라지고 가장 진지하다. <발코니의 여자들>은 자신의 몸이지만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조롱거리가 되거나 학대당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여성들이라면 한 번쯤 겪어봤을 일화들을 모아놓았기 때문에 쉽게 공감할 여지가 있지만 영화는 여성과 남성의 영역을 분명하게 갈라놓는다. 여성을 이용하거나 학대하다가 여성의 손에 죽은 남성들은 유령이 된다. 그들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자신이 여성들에게 행했던 행동이 왜 잘못됐는지 깨닫지 못하고 억울해한다. 남성이 자신의 정당성으로 내세우는, 여자가 먼저 유혹을 했다는 주장은 너무나 낯익다. 여성이 가슴을 드러냈다고 해서 남성에게 성적 허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듯이 엔딩 시퀀스에서는 여성들이 자유롭게 가슴을 드러내고 거리를 활보한다. 그 안에는 젊은 여성도 나이 든 여성도 있다. 최근에 아마존 창립자인 베이조스의 수천만 달러짜리 결혼식이 SNS에 빈번하게 노출된다. 더불어 두 번째 배우자인 여성의 지나친 성형이 집중 화살을 맞고 있다. 인공적으로 부푼 가슴이 부자연스럽게 보이지만, 그녀는 배우자가 될 베이조스의 성향에 맞춰 지속적인 성형을 받아왔다고 한다. <서브스턴스>의 여주인공이 그랬듯 여성은 배우자와 사회의 시선에 맞춰 자신을 재단해 왔고 그것은 생존 전략이기도 했다. 굳이 그런 방식이 아니라도 살아갈 수 있지만 욕망은 그 정도에서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을 대상으로 보지 말고 주체적인 존재로 서자는 해묵은 주장을 노에미 메를랑 감독은 색다른 방식으로 반복하고 싶었던 듯하다. <발코니의 여자들>은 코미디와 호러 장르를 통과해, 자유로워진 여성들의 표정을 보여주는 희망적인 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2024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고 화제를 모았던 모함마드 라술로프 감독의 이란 영화, <신성한 나무의 씨앗>이 개봉했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신성한 무화과나무의 생존 방식에 대한 설명이 자막으로 나온다. 무화과나무의 씨앗은 새의 분비물을 통해 땅에 뿌려진 후,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 자라나 주변의 다른 나무를 숙주 삼아 질식시키며 성장한다. 무화과나무의 씨앗은 긍정과 부정의 양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권정치제제로 국민들의 삶을 잠식해 숨통을 조인다는 부정적 의미와, 자유와 여성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변화의 씨앗이라는 긍정적 의미도 있다. 영화는 '이만'이 혁명재판소의 수사판사로 승진하면서 신에게 감사기도를 드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아내인 '나즈메' 역시 진심으로 축하하면서 비장한 표정으로 바뀐다. 수사판사라는 직위는 앞으로 삶의 질이 높아진다는 기대도 주지만, 가족 일원이 매사에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야 한다는 경고를 뜻하기 때문이다. 상영시간이 3시간에 가깝지만 지루하지 않다. 스릴러 형식을 취해 영화가 끝날 때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는 첫 번째 이유 말고도 몰입을 높이는 여러 요소가 있다. 모녀 세 여성과 아버지 캐릭터가 세밀하게 묘사된다. 카메라는 인물들을 주로 클로즈업 샷과 바스트 샷으로 잡고 있다. 영화의 초반에는 대사로 표현될 수 없는 심사가 그들의 표정을 통해 읽힌다. 그리고 후반부로 갈수록 표정이 아닌 행동과 대사를 통해 자신이 결정한 방향을 확실하게 제시한다. 특히 어머니인 나즈메의 표정은 여러 복잡한 심사를 대변해 준다. 나즈메는 이 영화에서 경계선에서 서 있는 캐릭터다. 하지만 자녀들을 보호하고 싶은 나즈메의 욕망은 시종일관 같다. 남편이 승진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보인 첫 반응도 이제 성장한 두 딸이 각방을 쓸 수 있는 큰 집으로 이사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었다. 그 목적을 위해 나즈메는 처음에는 강하게 남편을 지지했지만 후반으로 가면서 자녀의 편으로 이동한다. 자매인 레즈반과 사나는 처음부터 사리에 맞지 않는 강제력을 발휘하는 국가에 반발심을 보인다. 그들은 공영방송에서는 가려졌지만 그들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진실과 정의를 택한다. 반면에 나즈메는 딸들이 주장하는 현실을 부정하고 가장인 남편을 지키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쏜 산탄총에 맞아 얼굴 반쪽이 피투성이가 된 레즈반의 친구를 본 나즈메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지만, 이내 원래의 단호했던 태도를 유지하고 딸의 다친 친구를 자신의 집에서 내보낸다. 하지만 가족보다 자신의 직업과 권위를 더 가치 있게 생각하는 남편의 태도는 그녀의 등을 돌리게 한다. 아버지인 이만과 그가 호신용으로 받은 총은 국가와 가부장제 가장의 권위를 상징한다. 그래서 어느 날 느닷없이 사라진 총은 그의 불안감을 자극하고 극한 폭력적 상황까지 치닫게 한다. 영화는 따뜻한 가족드라마로 보일 정도로 가족끼리 식사하는 장면들을 많이 삽입한다. 어떤 상황이 됐든지, 요리를 준비하고 가족을 위해 식탁을 꾸미는 순간만큼은 평화롭다. 어머니가 마련하는 식탁은 늘 아름답다. 나즈메는 둘째 딸인 사나에게 야채 다듬는 방법을 가르치고, 식재료가 팬에 던져지고 끓어오르는 모습이 클로즈업으로 잡힌다. 음식이 조리되는 장면은 보는 사람에게 위안과 평온함을 준다. 하지만 아름답게 꾸며진 식탁 위에서도 결국 충돌이 일어난다. 아만은 수사판사가 사형선고 도장만 찍는 정권의 허수아비에 불과한 자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괴로워하지만, 자기 정당화를 선택하면서 대학생인 첫째 딸과 충돌한다. 라술로프 감독은 정치성이 강한 영화에 반전까지 넣어 흥미를 끌어올리는 연출력을 발휘한다. 영화에서 반전은 둘째 딸 사나다. 평상시에 아무 생각도 없고 철없어 보였던 사나는 그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대담한 행동을 한다. 심문을 받을 때나 아버지에게 추궁을 당할 때 두려워하거나 분노하는 레즈반과는 달리, 사나의 얼굴에서는 공포나 반항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보낸 즐거운 시간이 담긴 동영상을 캠코더로 보는 사나의 얼굴은 순수해 보이기만 한다. 순수함은 가장 강력한 힘을 숨기고 있다. 사나를 얕잡아본 아버지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매우 자신감 넘치고 당당하다. 강력한 보호자였던 아버지의 몰락은 사나의 현실적인 몰락과도 연결될 가능성이 크지만, 사나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의의 몰락에 비할 수는 없다. 영화의 엔딩 씬에서 아버지는 말 그대로 추락한다. 그리고 이만이 늘 끼고 있던 권위적인 반지가 흙먼지에 쌓인 채 뿌옇게 보인다. 총의 분실이 아버지로 상징되는 악법의 죽음을 예고했다면, 흙먼지로 더러워진 반지의 이미지는 법의 죽음을 선언한다. 이 영화는 촬영 과정이 스릴러 그 자체였다. 라술로프 감독은 실제 구속된 경험도 있고 국가의 감시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비밀리에 영화를 촬영해야 했다. 주인공인 수사판사 이만이 자신의 신분과 얼굴이 SNS에 노출된 후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자신에게 접근하는 모든 사람들을 경계하듯, 라술로프 감독 역시 언제라도 사복 경찰에게 체포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안고 촬영 작업을 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만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그는 믿었고, 구속 직전에 독일로 망명해 편집 작업을 마친 후 칸 영화제까지 진출했다. 출연 배우들도 모두 체포될 위기를 무릅쓰고 완성된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영화의 무거운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2024년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고 올해 상업영화관에서 6월 3일에 개봉해 상영 중이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유치원과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의대 준비반이 생길 정도로 요즈음 한국에서 가장 선호하는 직업은 의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현실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메디컬 드라마도 꾸준히 제작되고 늘 인기 순위를 차지한다. 드라마에서 의사를 대표하는 이미지는 비슷하다. 흰색 가운을 휘날리며 청진기를 걸친 채 병원 복도를 활기차게 걸어가는 모습, 긴장감 도는 수술방에서 돋보이는 날카로운 눈빛과 흐트러짐 없는 손놀림은 의사에 대한 꿈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환상을 심어준다. 피곤함에 지쳐 병원 한구석에서 웅크린 채 졸고 있거나, 호출을 받고 식사를 제대로 끝내지도 못한 채 허겁지겁 달려 나가는 모습까지도 치열한 삶을 사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비친다. 엇비슷한 서사가 반복되고 더 이상 보여줄 게 없을 것 같은데도 메디컬 드라마는 계속해서 꾸준하게 제작되고 있으며, 지루함과 식상함보다는 병원 안에서 또 다른 영역을 탐구하는 느낌을 준다. 다양한 진료과목이 있고 그에 따라 다른 에피소드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 또한 메디컬 드라마의 장점이다. 메디컬 드라마들은 어떤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꾸준히 인기를 모으고 있을까. 최근에 방영된 메디컬 드라마 두 편은 기존 드라마와 또 다른 차별점을 두고 있다. tvN에서 제작된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시즌3까지 나왔을 만큼 인기를 모았다. 과거의 인기에 힘입어 이번에는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이라는 제목으로 방영 중이다. 이번 시리즈는 산부인과를 중심으로 펼쳐진다는 설정부터 차별점의 시작이다. 산부인과는 산모와 아기, 둘의 생명이 걸려 있기 때문에 의사로서 부담이 더 크다. 그리고 둘 중 한 생명만을 살려야 하는 상황과 맞닥뜨리면 갈등과 아픔, 감동이 교차할 수밖에 없다. 제목에서 시사하듯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은 험난한 수련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실수와 질책, 반성과 자신에 대한 회의가 서사를 이루고 있다. 그렇지만 동료 관계에 중점을 둔다는 점은 기존의 슬기로운 시리즈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전공의 오이영(고윤정)은 특이하게도 의사로서 사명감이나 열정이 없어 보인다. 의사라는 직업이 자신에게 맞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시키는 일만 겨우 해내면서 도망갈 구실만 찾는다. 그럼에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려가고, 환자의 가족에게 깊이 공감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의대 수석 졸업, 의사고시 수석 합격으로 욕심과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전공의, 김사비(한예지)는 공감 능력 부족으로 환자에게 외면과 무시를 당해 처음으로 좌절감을 맛본다. 이렇게 의사가 갖춰야 할 여러 면을 이 드라마는 부각한다. 다른 동료들 역시 실수를 반복하고 교수로부터 지적을 당하며 피곤함에 지치고 풀죽은 얼굴을 하고 있다. 심지어 미용실에 간 의사 두 사람은 귀가 얇아서 헤어 관리 제품을 대량 구매하며 만족해하는데, 그 뒤에서 미용사들은 '병원 밖에서는 헛똑똑이들'이라며 놀려댄다. 다른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의사를 향한 클리셰적인 시각이 여기서는 어떻게 달라지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공부 잘하고 똑똑한 의사로서의 능력을 강조하기보다는, 실수를 연발하면서 어떻게 진정한 의사로, 그리고 한 인간으로 성장하는지가 이 드라마에서는 중요하다. 전공의를 지도하는 선배 의사도 메디컬 드라마에서 흔히 보이는 상명하복식의 무조건적인 굴종을 강요하기보다는 실수를 다독이며 현실적인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거나, 이성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꾸짖는다. 그래서 다른 느낌의 공감을 주는 메디컬 드라마가 됐다. 반면 이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파격적인 메디컬 드라마가 있다. 최근에 선보인 디즈니플러스의 <하이퍼나이프>에는 기존 메디컬 드라마에서 나타나는 동료나 선후배 간의 로맨스가 전혀 없다. 천재라는 지나친 자신감으로 인해 타인과 관계에 문제가 있는 두 주인공을 중심에 두고 연쇄살인 서사가 펼쳐진다. 정세옥(박은빈)과 최덕희(설경구)는 의사로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탁월한 능력을 지녔지만 타인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사이코패스 기질도 지녔다. <하이퍼나이프>는 거울처럼 닮은 두 사람의 기묘한 관계를 끝까지 긴장감 있게 그린다. 하지만 일반적인 연쇄살인마 사이코패스 서사와는 정반대로, 두 사람은 자신의 뜻에 어긋나면 살인도 서슴지 않으면서도 속으로는 서로에게 마치 부녀처럼 끈끈한 애증을 느낀다. 두 사람의 관계는 공감을 얻기는 힘들지만 이 드라마가 노리는 지점은 의사로서의 강한 자존심과, 자신의 능력에 대한 집착과 과시, 그리고 반복되는 반전이다.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직업인 의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을 저지르는 비윤리적인 행태와, 환자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수술에 집착하는 모습은 기존의 메디컬 드라마의 전형을 깨뜨린다. 박은빈과 설경구의 조합이 돋보이는 <하이퍼나이프>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관계에서 발생하는 예측 불허의 긴장감이 서사를 끌고 가는 힘이 된다. 평생 아프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가장 친근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가장 만나기가 겁날 수도 있는 전문직이 바로 의사다. 방영되면 대부분 인기 순위 안에 들어오는 메디컬 드라마가 앞으로 어떤 변형으로 대중의 관심을 계속해서 붙잡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더 이상 아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법적으로 어른의 권리도 갖지 못하는 청소년기는 생애주기에서 가장 불안정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시기라 작은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돌발성과 불안정이 있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에서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키기에 좋은 소재가 된다. 청소년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는 스릴러 장르처럼 시종일관 긴장감을 유지하고 반항과 영웅심이 극대화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로 학교폭력, 청소년 범죄, 그리고 정의구현이 주제인 경우가 많다. 학교라는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정의를 실현해 주지 못하고, 정서적으로도 기성세대와 분리되어 있어서 청소년들은 효과가 가장 빠른 방식을 택한다. 폭력을 폭력으로 응징하는 방식이다. 이런 드라마들은 아직은 순수함을 간직한 소년들이 주먹으로 악을 응징하는 순간에 발생하는 강력한 쾌락 때문에 인기 순위를 차지한다. 최근에 인기를 모은 드라마로는 넷플릭스의 <약한 영웅>, 티빙의 <스터디 그룹>을 들 수가 있다. 두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밖에 없는데, 불가피하게 악의 무리와 부딪히는 상황을 그리며 학교 시스템의 무력함을 보여준다. 최근에 사춘기 드라마의 경향성과는 다른 독특한 드라마가 나왔다. 넷플릭스의 4부작 영국 시리즈 <소년의 시간>이다. 평범하고 소심한 소년, 제이미가 주인공이다. 이 드라마가 몰입감이 높은 첫째 이유는 각 에피소드를 원테이크로 촬영해 마치 실시간으로 사건 현장을 보여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각 에피소드마다 카메라는 캐릭터에 밀착해 대화, 말투, 표정을 꼼꼼하게 따라가며 클로즈업 샷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원테이크는 필립 바렌티니 감독이 즐겨 사용하는 촬영 방식이다. 전작인 <보일링 포인트>도 원테이크 촬영으로 전쟁터와도 같은 레스토랑 주방의 현장감을 살려냈다. 카메라는 컷 없이 숨 가쁘게 배우들을 쫓아가며,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여학생 살인 용의자로 체포된 주인공 제이미와 가족의 불안정한 정서를 담아낸다. 자고 있던 제이미는 무장한 채 들이닥친 경찰을 보고 바지에 오줌을 지릴 정도로 충격을 받고 경찰서에 가는 내내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불안해하며, 범행을 강하게 부인한다. 살해 동기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이성과의 관계, SNS의 반응에 따라 존재감을 확인받는 사춘기 정서에 초점을 맞춘다. 수사를 위해 학교를 방문한 루크 경위는 '학교가 동물 우리처럼 보인다'고 말하고 여자 경사는 '왜 모든 학교에서는 끔찍한 냄새가 날까'라고 말한다. 기성세대에게 학교는 피하고 싶은 긴장감과 어색함을 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청소년들은 다루기도 이해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교실을 돌아다니며 협조를 구하던 루크 경위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아들로부터 사건의 핵심을 잘못 짚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소년의 시간>은 SNS와 학교가 주세계인 사춘기 아이들이 어떤 집착을 가지고 그들만의 세계에서 분노하고 절망하는지 보여준다. 십대는 위선적인 속물인 기성세대를 상대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감이 부인당했을 때 모욕감과 분노를 격정적으로 드러낸다. 드라마는 폐쇄적인 청소년의 세계에서 그들의 감정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기성세대와 분리, 청소년을 대하는 어른들의 태도, 그리고 범죄인으로 낙인찍힌 청소년이 있는 가족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에 대해 다면적이고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가족은 범죄자가 된 제이미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지만 이해는 할 수 없다. 그래서 외면하고 잊고 싶은 마음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끌어안고 싶은 마음 사이의 갈등을 드라마는 섬세하게 묘사한다. 제이미는 재판을 기다리며 청소년 보호 훈련 센터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생일에 축하 전화를 걸어 자신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려 든다. 아버지는 겉으로는 아들에게 모진 말을 하지 못하지만 마음은 복잡하고, 아들에 대한 신뢰감은 이미 금이 간 것처럼 보인다. 이 드라마의 클라이맥스인 3화는 재판을 앞두고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제이미를 방문하는 심리상담사와 면담 장면으로 이뤄져 있다. 심리상담사가 제이미와 마주 앉았을 때 제이미는 지금까지 보였던 사춘기 소년의 소심한 태도에서 완전히 벗어나 성인 여성을 조롱하고 통제하려는 마초적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평상시에 숨겨왔던 욕망이다. 제이미는 극단적인 인정욕구를 보인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성찰은 없고 타인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제이미는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권력에만 신경을 쓰면서 사춘기 소년의 모습을 뛰어넘는 영악함을 보인다. 제이미는 상담사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판사에게 전달될 자신의 보고서에만 관심이 있다. 그리고 상담사의 질문에 말려들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이상 증세를 보인다. 상담사는 희생자의 죽음과 관련성을 찾기 위해 제이미가 어떤 여성관을 가지고 있는지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상담은 성공적으로 이뤄지지 못한다. 제이미는 여성 상담사가 자신을 통제한다고 생각해 격하게 반항하면서, 동시에 그녀에게 호감을 받고 싶은 이중성을 보인다. 여러 차례의 위기에도 끝까지 이성을 잃지 않고 상담을 끝낸 후, 상담사가 보이는 눈물은 현실적인 한계를 보여준다. 제이미에게 마지막 보루는 그의 아버지다. 아버지는 남성이고 자기 자신 자체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인 자신을 포기할까 봐 가장 두려워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존재감은 완전히 상실되기 때문이다. 제이미가 구속됐을 때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를 동반 보호자로 선택한 이유도 그 점에 있다. 이 드라마의 의도는 사건에 대한 명확한 결말을 보여주는 데 있지 않다. 제이미로 인해 가족 모두가 피해자가 됐고 예전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기가 이제 힘들어졌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힘을 합치려고 애쓰는 모습이 이 드라마가 시청자에게 보여주는 결론이자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판타지로 대중성과 흥미에 초점을 맞춘 청소년 드라마에도 교훈적인 측면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소년의 시간>만큼 진지함과 현실적인 고민을 담은 청소년 드라마를 찾기는 쉽지 않다. 사진 : 넷플릭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애드리언 브로디가 <브루탈리스트>로 올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2003년에 <피아니스트>로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후 두 번째다. 애드리언 브로디만큼 <브루탈리스트>에서 시종일관 불안정하고 고통스러우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힘을 느끼게 할만한 배우가 있을까 싶다. 이 영화는 19세 이상 관람가로, 예매할 때 성인인증을 하라는 메시지가 뜬다. '그 정도로 야한 영화인가'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객석에 앉았다면 뒤통수를 맞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떤 육체적 쾌락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섹스와 포르노 신들은 육체적·정신적 고통과 정체성의 몰락 위기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미국에 정착하기 위해 애쓰는 헝가리 출신의 건축가 라즐로 토스(애드리언 브로디)는 허물어져 가는 정신과 육체를 붙들기 위해 '야동'을 보고 마약을 한다. 일반적이라면 그 반대여야 할 텐데 이 영화는 그런 일반적인 논리를 뒤집는다. 이 영화는 모든 것을 뒤집고 어긋나게 설정한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미국에 도착한 라즐로는 탄성을 지른다. 그의 눈에 자유의 여신상이 들어온다. 그러나 감독은 미국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을 거꾸로 잡는다. 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서 있어야 할 자유의 여신상이 거꾸로 혹은 옆으로 눕듯 우스꽝스럽게 표현되는 신들은 이 영화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시사하고 있다. 카메라는 수시로 기대가 깨지고 상황이 뒤집히는 순간을 포착한다. 편견과 멸시로 미국 땅에 쉽게 정착하지 못하는 라즐로의 삶처럼 그의 설계는 거부됐다가 인정받고, 건축은 중단됐다가 재개되기를 반복한다. 그처럼 라즐로는 안정적인 느낌을 주지 못하고 늘 부유하는 듯하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그런 불안정한 느낌을 주기 위해 이해하기 힘든 장면들을 연출한다. 천재적인 재능을 인정받은 라즐로가 만찬에 초대됐을 때도 상류층 귀빈들은 마치 라즐로의 존재를 잊은 듯이 행동한다. 라즐로의 말과, 주위에 앉은 손님의 행동은 물과 기름처럼 따로 논다. 파티는 어떤 마찰이나 잡음도 없이 우아하게 진행되고 라즐로는 겉으로는 귀한 대접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소리 없이 움직이는 뱀처럼 소름끼치는 불쾌함이 있다. 종전 후에도 오랫동안 유럽에서 나오지 못해 생이별해야 했던 아내 에르제벳(펠리시티 존스)와 드디어 재회했을 때조차 그는 아내에게 쉽게 접근하지 못한다. 영양실조로 골다공증을 얻어 휠체어를 탄 채 나타난 아내는 우아한 지성인이지만 라즐로처럼 때때로 찾아오는 극심한 육체적 고통 때문에 짐승처럼 울부짖는다. 고통에 울부짖는 아내를 보고 있을 수만 없어 마약을 주입해 진정시킨 뒤에 나누는 두 사람의 섹스는 결코 에로틱하지 않다. 그것은 삶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안간힘처럼 애처롭다. <브루탈리스트>라는 제목은 브루탈리즘이라는 적은 창문 노출과 단순한 형태의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지칭하는 건축 양식에서 비롯됐다. 영화에서 건축물은 주인공의 생명과도 같은 정체성이다. 그래서 라즐로는 건축비를 줄이기 위해 천장 몇 미터를 낮추려는 설계 변경을 용납하지 못한다. 심지어 자신이 사비를 내서라도 원래 계획대로 하겠다고 고집한다. 건축은 그에게 돈을 벌거나 유명해지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성에 대한 증명이기 때문이다. 난관 끝에 결국 완성된, 십자가 표시가 돋보이는 건축물에는 나치 치하 때부터 고통받았던 그의 삶이 그대로 담겨 있다. 돈 많은 미국인 해리슨이 미국을 대표하고 있다면 나치 하의 희생자를 대표하는 라즐로의 아내 에르제벳은 이성적이고 현명한 인물로 묘사된다. 해리슨은 라즐로의 재능을 높이 사 그를 돕는 구원자처럼 보이지만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본색을 드러낸다. 그 자체로 마치 아름다운 건축물처럼 보이는 대리석 채석장을 배경으로 해리슨은 이상한 행동을 한다. 갑자기 사라진 라즐로를 찾던 해리슨은 동굴 한쪽에 쓰러져 있는 라즐로를 보더니 강간하는 듯한 행동을 한다. 동성애자도 아닌 해리슨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그의 행동은 라즐로를 향한 경멸을 보여준다. 그런 식의 모욕적인 경멸은 라즐로에게 익숙하다. 라즐로 사촌의 아내 역시 유사한 행동으로 그를 좌절시킨 적이 있다. 해리슨은 자신의 변태적인 행동을 라즐로가 의식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라즐로는 그의 행동에 대해 끝까지 침묵한다. 그러나 에르제벳은 해리슨을 향해 강간범이라는 비난을 퍼붓고 미국을 혐오한다. 이 영화에서 상징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독특한 캐릭터가 라즐로의 처조카인 조피아다. 유대인이라는 정체성과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조피아는 미국에서 사는 동안 마치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거의 대사를 하지 않는다. 결국 라즐로 부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피아는 이스라엘을 택한다. 조피아의 선택은 영화의 후반부에서 에르제벳에게도 어떤 해답을 제공한다. 힘들지만 먹고 살 수 있는 미국 땅에 정착할 것이냐, 불안정하지만 영혼의 안식을 찾을 수 있는 이스라엘로 갈 것이냐는 선택은 정체성과 자존감이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보여주면서 마침표를 찍는다.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란 그냥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인가. 그래서 어떤 갈등과 마찰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인가. 아니라면 우리는 존재와 정체성을 증명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브루탈리스트>를 연출한 브래디 코베 감독은 예전 방식인 35mm 필름으로 영화를 촬영하면서 영화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아이맥스 급의 웅장하고 화려한 역동성으로, 보는 즐거움을 우선시하는 요즘에 <브루탈리스트>는 215분의 고통스러운 긴 여정에도 불구하고 볼 가치가 충분한 영화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요즈음 가장 인기 있는 드라마는 넷플릭스의 <중증외상센터>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시즌1이 종영된 시점에서, 다른 의학 드라마와 차이점을 들자면 아직까지는 로맨스 서사가 없다는 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신의 손을 가진 의사이면서 투사이기까지 한 백강혁(주지훈)의 영웅성과 천재성에 초점을 맞춘다. 백강혁에게는 환자의 생명 살리기가 최우선이다. 천재적인 실력에 냉철한 판단력,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는 저돌적인 패기까지 갖췄다. 그는 말하자면 의사계의 슈퍼 히어로다. 다른 의학 드라마가 로맨스 서사를 끼워서 딱딱한 분위기를 바꾸는 시도를 하는 반면, <중증외상센터>는 인명보다 수익 창출을 우위에 두는 의사들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는 코믹함을 넣었다. 현실에서는 완벽한 캐릭터를 만나기가 쉽지 않지만 드라마에서 완벽한 캐릭터는 꾸준히 등장한다. 특히 의학 드라마나 법정 드라마의 중심에는 어떠한 불가능도 가능으로 바꿀 만큼 신묘한 재능을 지녔지만, 능력만큼 성격이 매우 불같고 까칠한 캐릭터들이 있다. 그리고 그 캐릭터는 서사 진행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주변인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이렇게 완벽함을 가장 큰 매력으로 설정한 캐릭터는 시청자들의 욕망을 반영한다.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캐릭터 원형 중 하나다. 종영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나 <굿 닥터>에서도 자폐증이 있는 주인공이 서번트 신드롬으로 갖게 된 천재성이 서사를 끌고 가는 원천이 된다. 일반인들은 꿈도 꿀 수 없는 능력을 발휘해, 상황을 시원하게 종결시키는 통쾌함이 카타르시스를 준다. 현재 방영 중인 SBS의 인기 드라마 <나의 완벽한 비서>에서 헤드헌터 회사 대표의 비서로 나오는 은호(이준혁) 역시 같은 성향의 캐릭터다.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먼저 눈치 있게 알아서 대표에게 필요한 모든 자료를 준비해 준다. 업무 보조는 물론이고 사소한 부분까지 일일이 알아서 세심하게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제목 그대로 완벽한 조력자의 모습을 시청자에게 각인시킨다. 헤드헌터라는 직업 역시 각 영역에서 흠 없는 최고의 적임자를 경쟁사보다 먼저 발굴해 내야 한다는 점에서 완벽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시청자들은 심지어 살인자도 완벽하기를 원한다. 쿠팡플레이가 선보인 화제작 <가족계획>은 장면마다 피범벅에 신체 절단이 여과 없이 나와서 거부감이 들 수도 있지만, 신박한 방식으로 시청자를 설득시킨다. 얼굴에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주인공 영수(배두나)에게는 사람의 기억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래서 당한 사람은 고통을 그대로 느끼고 환상에 시달리지만 증거가 없기 때문에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는다. 사회악을 저지르는 악인들에게 끔찍한 벌을 주지만, 처벌자는 어떤 책임도 질 필요가 없으니 완벽한 범죄며 완벽한 사적 복수다. 초능력자들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는 그런 점에서 쾌락이 있다. 그러나 초능력은 양날의 칼과도 같다.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특별하기 때문에 위험 대상으로 취급되고 왕따를 당할 수도 있다. 슈퍼 히어로 영화들의 서사도 비슷하다. 영화 엑스맨 시리즈에서 초능력자들은 비정상인으로 취급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버림받아 사람들을 증오한다. 판타지 장르와는 결이 다르지만 <중증외상센터>와 <나의 완벽한 비서> 같은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완벽한 캐릭터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냉정하게 이성적인 판단을 내린다는 점 외에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이들이 그렇게 냉정한 사람이 되고 일에 몰두하는 이유를 불행한 성장 환경으로 설정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상처를 승화시킨 셈인데 그래도 여전히 트라우마는 남아 있다. 두 드라마에서 주인공 캐릭터는 어린 시절에 부모를 잃고 의지할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오직 자신만을 믿고 성장해 왔기 때문에 철저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 됐다는 배경을 깔고 있다. 그리고 그런 설정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자극한다. 넷플릭스를 선두로 해서 자체 제작만이 살 길이라고 판단한 OTT 플랫폼들은 경쟁적으로 높은 제작비를 투자해 시리즈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일일이 찾아보기도 힘들 만큼 많은 드라마들이 쏟아져 나오고 경쟁은 그만큼 치열해졌다. 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서사란 없다. 너무 낯선 서사는 실패할 가능성이 커서 모험을 피하게 되고, 드라마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하기 때문에 인기 있는 드라마에는 서사의 원형이 존재한다. 어디선가 본 듯하지만 새롭게 느껴지는 서사가 가장 안정적이지만, 식상함을 뛰어넘어 어떻게 새롭게 변형하고 조합하느냐는 쉽지 않다. 드라마에서 완벽한 캐릭터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그만큼 시청자의 욕망에 부응하기 때문이다. 특히 요즈음처럼 불안정한 시국에 완벽한 캐릭터의 등장은 갈증을 느낄 때 마시는 사이다처럼 시청자의 답답함을 달래주기에 충분하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연예인이 이혼을 하면 방송에서 퇴출될 만큼 이혼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탤런트 황정음은 이혼의 원인이 됐던 배우자의 외도를 개그 소재로 활용하면서 거리낌 없이 이혼 사실을 노출시킨다. 이혼을 비정상으로 보고 이혼한 사람을 실패자로 바라봤던 시선은 많이 달라졌지만, 사회는 여전히 이혼의 선택을 최선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참고 결혼을 유지하는 부부를 바람직하게 생각한다. 그러려면 누군가는 희생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묵과된다. 이혼한 커플을 함께 출연시키는 프로그램은 사회가 만든 장벽을 깨뜨린다는 의미에서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종영된 TV조선의 예능 프로그램 <우리 이혼했어요>는 얼굴이 알려진 연예인들이 방송 출연에 동의해, 서로의 상처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파격적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왜 이혼까지 이르게 됐는지 서로 성찰해 보게 하고 재결합 가능성에 대해서도 타진해 보는 방향으로 나갔다. 하지만 서로 상대에게 바라는 바가 다르다는 사실과 한계를 확인하는 결과로 끝남으로써 이 프로그램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됐다. 시청자는 그냥 연예인의 불화와 동상이몽을 지켜보는 관음증적 위치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현재 방영 중인 JTBC의 <이혼숙려캠프>는 4회의 파일럿 프로그램 후 정규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았다. 파일럿 프로그램에서 나왔던 단점들을 보완해, 더 안정적이고 정리된 느낌을 준다. 방송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며, 이혼을 원하는 커플의 파탄적인 일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과감한 시도를 한다. 파일럿 프로그램에서는 실제로 이혼 소송이 진행 중인 커플들로 구성해 사건번호까지 노출시키면서 현실감을 높이고 시청자를 이혼 법정의 방청객 입장에 있도록 의도했다. 정규 프로그램에서는 이혼을 생각하고 있지만 화해의 가능성도 있는 부부들의 신청을 받아 진행하면서, 불필요한 부분들을 제거하고 부부 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노력한 느낌을 준다. 부부의 일상을 담은 녹화 장면은 막장드라마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남편과 아내 측에서 각각 준비한 VCR은 같은 상황에서도 초점을 어디에 두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가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다. 불통과 일방적인 사고방식의 강요가 출연 부부들의 공통적인 문제지만, 이 프로그램의 패널들은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관계가 된 이유를 부부별로 진단하고 분석하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장을 여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심리상담과 역할극을 통해 서로 통찰의 기회를 갖고 눈물을 흘리며 감정의 문을 열었던 부부들도 재산분할 문제가 나오자, 다시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며 이혼 의사가 더 강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자신을 구속하는 배우자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찾을 거라는 희망으로 이혼을 원했던 부부는 위자료, 재산분할, 양육권, 양육비 같은 현실적인 문제와 대면하면서 긴장한다. 이혼이란 단순히 감정적으로 대처할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대개는 출연한 부부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앞으로 달라진 태도로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데 동의하는 결말로 마무리된다. <이혼숙려캠프>의 모티브는 10년 전에 종영한 드라마 <사랑과 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에 판사 역할을 맡은 탤런트 신구와 조정위원들이 등장해, 부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혼 숙려 기간을 주겠다는 선언으로 끝나는 것도 비슷하다. 부부 간의 갈등과 파탄을 주제로 큰 인기를 끌었던 KBS 드라마 <사랑과 전쟁>은 막장드라마로 인식되고 있지만 드라마의 소재를 실제로 이혼한 부부들의 케이스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과장돼 보이지만 막장드라마 같은 일이 현실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사랑과 전쟁>은 고부 간의 갈등과 불륜에 초점을 맞춰 흥미를 끌었으며 단순하게 한쪽을 가해자로 다른 쪽을 피해자로 명확하게 양분해 자극을 극대화시켜 시청률을 높였다. <사랑과 전쟁>은 1999년에 시작해 2014년까지 장수한 드라마지만 현시대의 시각과는 맞지 않다. <이혼숙려캠프>는 부부를 둘러싼 주변 상황보다는 두 사람의 기질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납득하기 힘든 비정상적인 행동들의 밑에 깔린 심리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추적해 내서 공감을 끌어내 소통의 문을 열게 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이혼숙려캠프>는 부부 간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상을 공개해야 하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출연을 결심했다는 것부터가 결혼 유지의 의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몇몇 부부들이 이미 다른 비슷한 고민 상담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전력이 밝혀짐으로써 진정성에 의구심을 갖게 하는 부작용도 나타났다. 한편으로는 한번 어긋난 관계와 각자의 태도가 수정되기는 힘든 현실을 증명하는 현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또한 시청자들을 가상의 증인으로 내세우며, 서로 고칠 점과 결혼에 대한 새로운 각오를 적은 각서가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두 사람에게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는 힘들다. <이혼숙려캠프>는 문제의 시작은 불통이지만 즉각적인 감정적 반응이나 회피, 무관심 모두 위험 신호라는 사실, 그리고 불통의 밑에 깔려 있는 서로의 의도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준다. 프로그램이 시작될 때, 판사 역할의 출연자가 했던 말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도 생각할 일이다. '이혼이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혼이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이혼숙려캠프>가 시청자의 호기심만 자극하거나, 억지스러운 화해를 종용하는 목적의 예능을 뛰어넘는 진정성 있는 프로그램으로 발전하기를 바란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김대우 감독의 <히든페이스>가 상영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우려감이 있었다. 2011년에 상영된 콜롬비아 출신 안드레 바이즈 감독의 <히든페이스>에 대한 인상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리메이크되는 영화들은 많지만 <히든페이스>의 경우에는 배우만 바꿔 원작과 똑같이 만든다면 굳이 볼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스릴러 장르의 스토리가 너무 뻔했다. 최근에 상영됐던 허진호 감독의 리메이크작 <보통의 가족> 역시 이전에 <더 디너>라는 제목의 이탈리아 원작을 할리우드에서 이미 리메이크했으니 세 번째 영화였다. 결말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자식의 성공에 집착하는 한국 부모들의 특성을 잘 담아낸 덕분에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우려와는 달리 <히든페이스>는 원작과 다른 시각으로 다른 욕망을 담고 있다. 누군가를 완전히 소유하고 길들이고 싶은 원초적 욕망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그 욕망의 색깔은 확연하게 다르다. 허진호 감독의 <보통의 가족>을 보면서 '나라면 어떻게 대응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듯이 <히든페이스>의 경우에도 '내가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된다. 비밀의 열쇠에 자신의 생사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벨렌은 지휘자인 안드레아와 연인관계다. 안드레아가 콜롬비아에서 직장을 얻게 되자, 벨렌은 자신이 하던 일을 접고 안드레아와 함께 이사한다. 그런데 문제는 일 년 계약으로 빌린 집에 비밀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시작된다. 영화는 이 화려한 집에 뭔가 숨겨져 있음을 암시하면서, 스릴러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원작의 오프닝 씬에서는 세면대에 받아놓은 물에, 리메이크작에서는 거울에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면서 비밀공간과 연결 지점을 보여준다. 집에 비밀공간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와 긴장감을 자극하기 때문에 스릴러 장르에서 많이 쓰는 장치다.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 내 집에 함께 살고 있고 그가 나를 지켜본다는 설정과도 비슷하다. 내가 하는 행동을 누군가 지켜보고 있고, 상대는 나를 알지만 나는 그의 존재에 대해 모른다면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다. 유령과 함께 사는 느낌이다. 숨겨진 공간은 스릴러에서 익숙한 소재이며 감춰진 욕망을 드러낸다. 김대우 감독은 <히든페이스>를 리메이크하면서 욕망에 원작과 다른 색깔을 덧입혔다. 원작에서는 안드레아를 너무 사랑했던 벨렌이 그의 사랑을 시험하기 위해 비밀의 방에 숨었다가 실수로 갇히게 된다. 한국 영화에서는 계급성과 동성애 코드를 첨가하고 주인공에게 영향을 주는 캐릭터들을 추가해 서사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인 성진(송승헌)은 돈과 지위를 갖춘 교향악단장의 딸인 수연(조여정)과 교제하면서 지휘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두 사람은 결혼까지 약속한다. 악단장이자, 예비 장모인 수연의 어머니(박지영)는 성진을 띄워주는 듯하면서 교묘하게 무시하고 압박하며, 자신과 딸이 우위에 있음을 과시한다. 수연은 타인을 통제하는 쾌락을 즐기는 변태성을 지닌 인물이다. 학창 시절부터 후배인 미주(박지현)를 노예처럼 부리며 서로 깊은 관계를 맺어왔던 수연이 성진과 결혼을 앞두면서 관계가 꼬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원작과는 달리 실수가 아니라, 수연은 미주의 고의로 밀실에 갇히게 된다. 원작에서는 밀실에 갇힌 벨렌이 생사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느끼는 절박함과 긴장감으로 관객의 감정이입을 유도한 반면, 리메이크작에서는 수연이 실종된 상황에서 반응하는 사람들, 즉 수연의 어머니, 성진, 미주의 관계와 심경 묘사에 더 치중한다. <히든페이스>의 밑바닥에는 자신이 상대에게 대체 불가인 존재이기를 바라는 욕망이 있다. 하지만 현실은 욕망대로 되지 않고 빈자리는 금방 메워진다. 그리고 경쟁 상대 역시 자신이 얻은 자리를 되돌려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런 욕망에 성진까지 합세하면서, <히든페이스>는 끝까지 각자가 욕망의 끈을 집요하게 잡은 채로 마무리된다. 원작이 열린 결말로 끝나는 것과는 다르다. <히든페이스>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프인 밀실은 애초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공간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만 상대를 볼 수 있는 우세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원작에서는 나치 전범이었던 주인이, 리메이크작에서는 친일파 선친이 만든 공간으로 설정된다. 바깥의 동태를 살필 수 있도록 만든 유리창은 밖에서 보면 거울이 된다. 밀실의 존재를 아는 캐릭터는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는 동시에 안에 갇힌 상대방이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안다. 그리고 그 둘의 욕망은 같다. 거울을 가운데 두고 서로 상대를 보는 장면은 현실과 많이 닮았다. 거울 속에서 타인의 욕망을 보는 거울의 이중성을 잘 표현해 준다. <히든페이스>는 장르영화에서 볼 수 있는 유령, 거울, 밀실 같은 낯익은 소재들을 색다르게 조합해 욕망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욕망에 충실했던 모두가 결국 피해자가 되지만 결말은 열린 상태로 남겨둔 원작의 매력과는 달리, 김대우 감독은 굳이 한 명의 승자를 만듦으로써 나머지 인물들은 그냥 알면서 속는 역할을 받아들이도록 마무리한다. 원작과는 다른 충격적인 반전을 고민했을 터이지만 그 역시 어디선가 본 듯 익숙하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스페인의 거장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작품이 나올 때마다 기대하게 된다.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항상 평범하지 않았다. 복잡하게 얽힌 사건들을 배경으로 주인공들은 미처 풀어내지 못한 분노와 슬픔을 가슴에 담고 있다. 알모도바르 감독은 억눌린 감정을 엉킨 실타래 풀 듯 조용하면서도 무게감 있게 풀어낸다. 주인공들은 감정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대신 관객에게 넘겨준다. 특히 그의 최신작 <룸 넥스트 도어>는 2024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탔고, 주인공을 맡은 두 여배우가 틸다 스윈튼과 줄리안 무어이기 때문에 더욱 관심이 끌렸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에는 살인, 근친 강간 같은 윤리적인 문제들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제인 존엄사는 다른 영화들에서도 이미 많이 다루어졌고, 기대수명이 현저하게 길어진 현시대에서 윤리성보다는 현실적이고 진지한 고민이라고 말하는 편이 맞다. <룸 넥스트 도어>는 같은 주제를 담은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존엄사의 의사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갈등 부분을 생략하고 오직 조용하고 이성적으로 죽음에 집중하고 있다. 죽음의 시각을 정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장치다. 정확한 시각을 예고하진 않지만, 시계가 재깍재깍 소리를 내면서 흐름을 알리듯, 죽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영화는 감지할 수 없는 죽음의 소리를 잉그리드(줄리안 무어)의 표정을 통해 담아내고 있다. 마사(틸다 스윈튼)가 아침에 자신의 방문이 닫혀 있으면 밤사이에 자신이 죽음을 실행한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잉그리드는 매일 깊이 잠들지 못한 채, 새벽마다 떨리는 마음으로 마사의 방문을 확인한다. 알모도바르 영화의 인장은 존엄사 서사에도 찍혀 있다. 존엄사 서사답지 않게 프레임에 담긴 소품들, 주인공들의 의상, 배경은 아름답고 화려하다. 암에 걸려 죽어가는, 유령처럼 창백한 얼굴의 마사는 마치 크리스마스 파티를 앞둔 사람처럼, 밝고 따듯한 느낌을 주는 원색의 니트를 입고 있다. 유명 작가인 잉그리드가 마사의 투병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아가면서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예기치 않게 바뀐다. 마사는 자신이 죽음을 맞이할 때 옆방에 있어 달라는 생소한 부탁을 한다. 처음에는 그 부탁을 거부했지만, 잉그리드는 금방 마음을 바꾼다. 친구를 위한 최선의 호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서 옆방은 거꾸로 말하자면 죽음을 뜻하기도 한다. 삶과 죽음은 공존한다. 죽음의 그림자가 없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삶 속에 녹아 있는 여러 형태의 죽음을 보여준다. 전쟁에서 돌아와 트라우마로 정신이 나가버린 남자친구가 환청을 들으며 사람을 구하겠다고 불타는 집으로 뛰어 들어가는 모습, 성장하면서 부재한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자신을 구하기 위해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환상을 붙잡고 있는 딸, 서로에게서 이질감을 느끼는 모녀의 관계는 죽음을 지시하고 있다. 그리고 한때 마사와 사귄 적이 있었던 데미안은 노골적으로 지구의 죽음과 인류의 멸망을 이야기한다. 종군기자였던 마사는 평생 죽음의 현장에 있었다. 같은 동료 역시, 죽음에 대한 불안을 잊게 하는 최고의 약이 섹스라고 말한다. 죽음 속의 삶이라고 말하는 편이 맞을 만큼 그녀는 죽음과 대면에 익숙하다. 환경 파괴로 인류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데미안도 마사와의 섹스를 마치 테러리스트와 섹스하는 느낌이었다고 표현함으로써 마사를 죽음의 경계선에 놓는다. 숲에서 새소리가 들리고 겉으로는 아름다운 세상과는 달리, 다크웹이라고 표현한 보이지 않는 추악한 음지의 세계도 죽음을 닮았다. 영화는 마사가 유지하고 싶은 인간의 존엄성이 추악한 세상의 도움이 없이는 이뤄지지 않는다는 모순을 말한다. <룸 넥스트 도어>는 죽음을 환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영화 속 죽음은 너무 이성적이고 아름답다. 어쩌면 매우 이상적인 죽음이다. 대부분이 맞이하는 죽음이란 그렇게 아름답고 고상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실행되기 힘든 일이라고 해도 마사가 선택한 죽음,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잉그리드와 관계는 위안을 준다. 어쩌면 영화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이런 위안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후변화로 계절에 맞지 않게 내리는, 세상의 조명에 반사된 분홍빛 눈이 이 삭막한 상황에서 위로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 위로를 주는 눈은 마지막 장면에서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 찾아온 마사의 딸과 잉그리드가 뒤뜰에 놓인 의자에 나란히 누워 있을 때도 그들 위로 내린다. 최근에 개봉했던 한국 영화 <소풍>이나, 일본 영화 <플랜 75>에서도 힘든 삶을 피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만, <룸 넥스트 도어>처럼 우아하고 따듯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이 영화가 환상적인 죽음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말하는 이유다. 마사가 존엄사를 실행하기 위해 한 달간 빌린 집에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걸려 있다. 고독을 상징하는 호퍼의 그림이 평화롭고 단정한 느낌을 주듯 이 공간도 죽음과 어울리지 않게 평온하고 아름답기만 하다. 이 영화를 비롯해, 존엄사를 다룬 영화들이 존엄사만이 훌륭한 답이라는 단순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은 오롯이 본인만 대면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죽음을 수용하는 일은 남은 자의 몫이다. 가족 혹은 지인의 존엄사 선택은 남은 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라는 질문도 던진다. 원작 소설에는 없는, 마사의 딸인 미셸이 등장하는 엔딩 시퀀스도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삶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죽음의 시계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돌아가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고 산다. 삶의 바다에서는 죽음의 파도가 일정하게 몰아치고 있음을 괴롭지 않게 일깨워주는 영화였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순정남 순정녀의 사랑에 눈물 콧물 짓던 시대에, 사랑은 그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열쇠처럼 보였다. 신분 간 격차를 비롯해 어떤 장애물도 뛰어넘거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라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결말로 끝나는 영화들은 관객의 마음에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러나 이제 그런 사랑의 시대는 끝났다고 영화는 선언한다. 2000년대에 나와서 히트했던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광고는 '이번이야말로 찐사랑'이라고 외치고 싶은 사람들의 심리를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랑은 수많은 문학작품과 영화들을 통해 수없이 묘사됐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으로 남아 있다. 변하는 사랑에 대한 서사는 관객에게 감정이입과 거리감을 넘나들게 만든다. 아무리 반복해도 아직도 할 말이 많이 남아 있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최근에 개봉한 캐나다 출신 모니아 초크리 감독의 <사랑의 탐구>는 상투적일 수도 있는 사랑의 행태를 감독 특유의 감각으로 풀어내고 있다. 공감하는 부분도 있고, 파격적인 부분도 있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왜 그런 결말로 끝냈는지, 감독의 의도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나름의 성공을 거뒀다. 아직 정교수가 되지 못하고 노인 대상으로 철학 강의를 하는 여주인공 소피아는 남편을 비롯해 주변의 지적인 사람들과 친분을 유지하며 별문제 없이 살아간다. 첫 장면부터 식탁에서 열띤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을 통해 소피아가 어떤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는지 보여준다. 소피아가 그런 삶에 특별히 권태감을 느끼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강사이자 주부다. 그러나 별장을 매입하면서 소피아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전부 수리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소피아가 울음을 터트리자, 수리공인 뱅상이 소피아를 위로하면서 둘 사이에 미묘한 관계가 형성된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감정으로 발전한다. 사랑은 사고처럼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로맨스 영화들의 흔한 도입이다. 소피아는 뱅상과 불꽃같은 사랑을 나누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며 행복해한다. 하지만 남편과 뱅상 사이에서 갈등한다. 시댁과 친정 식구들의 관계도 얽혀있기 때문에 칼로 자르듯 깔끔한 결론을 내리기 힘들다. 남편과 뱅상은 하는 일도 성격도 전혀 다른 만큼 가족들의 분위기도 다르다. 열정과 낯섦, 안정과 익숙함은 쌍을 이루면서 그녀의 감정을 공격한다. 영화는 겉으로 드러난 소피아의 감정과는 또 다른 내적 감정이 자리 잡고 있음을 미세하게 보여준다. 결국 관객으로선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결말로 이어진다. 뱅상과 관계에 따라 소피아의 감정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면서 철학 수업의 분위기와 내용도 달라진다. 철학자들이 표현하는 사랑에 대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견해가 소피아의 현재 감정을 대변한다. 고민 끝에 소피아는 남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뱅상을 택한다. 그러나 영화의 엔딩은 감독이 선택한 또 다른 반전이다. 지인들과 모임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뱅상은 무릎을 꿇고 소피아에게 결혼반지를 내밀며 청혼한다. 그런데 마침 설거지를 돕고 있던 소피아는 거품이 묻은 고무장갑 낀 손을 위로 올린 채, 한참 시간을 끌어 뱅상을 당혹하게 만든다. 결국 고무장갑을 힘들게 벗고 반지를 손가락에 끼지만, 짧다고도 길다고도 할 수 없는 그 애매한 시간은 뱅상과 결혼해 아이를 갖고 싶다고 말했던 소피아의 심경을 의심하게 만드는 첫 번째 사건이었고 마지막 장면과도 이어진다. 상대를 향한 열정, 결혼, 임신이 순차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과정이라는 통념이 깨어지는 시대상과 연결되는 느낌이다.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경험했지만, 사고처럼 다가온 열정에 휩싸여 결혼을 깬 경험이 있는 소피아는 이제 결혼을 믿지 않게 된 것일까. 길에 혼자 서서 하늘을 쳐다보는 그녀의 표정은 묘하지만, 그 안에서 왜 고독한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걸까. 올해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사랑에 대해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한다. MZ 세대의 사랑법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로, 주인공인 율리에는 의학도였으나 계속해서 자신의 전공을 바꾼다. 자신의 관심이 끌리는 대로 살기 위해 망설임 없이 다른 길을 택한다. 전공과 함께 이성 취향도 계속 변한다. 20대 후반인 율리에가 40대인 유명 만화가 악셀과 사귀면서 겪는 갈등을 주 서사로 하면서 사랑이라고 느끼는 상황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최적의 파트너라고 생각했던 악셀과 동거하면서 어느 순간 율리에는 허전해진다.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율리에는 만화가로 성공한 악셀을 보며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틈새를 비집고 새로운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두 영화는 분위기도 결도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준다는 착각이 들 때 사랑의 열정이 솟아난다는 사실이다. 영화 속 대사처럼 "너랑 함께 있으면 완전한 내가 돼."라고 착각하는 순간이다. 문제는 자신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확실하게 모른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 영화의 여주인공들은 두 남자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한 상대에게 실망했을 때 비로소 다른 상대의 장점이 보인다. 모두 각자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상황이 변할 때마다 자신과 맞게 느껴지는 상대도 바뀐다. 한 사람과 영원한 사랑이 쉽지 않은 이유다. 현실도 비슷하다. 한번 사랑에 실패했다고 해서 사랑을 버릴 수는 없다. '돌싱글즈'나 '끝사랑' 같은 예능프로그램은 여전히 시청률이 높다. '끝사랑'은 50세 이상을 대상으로 하면서 기존 짝짓기 프로그램과 차별점을 찾았다. 이미 자녀들이 다 성장했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50대들과 90년대생 돌싱즈가 갖는 상대에 대한 기대감은 다를 수밖에 없지만, 설레는 사랑의 감정을 꿈꾼다는 점에서는 같다. 사랑을 확신하기도 힘들지만, 사랑을 포기하기도 힘들다. 현실에서 이뤄지기 힘든 욕망은 영화를 통해 계속 표현된다. 수많은 로맨스 영화는 사랑의 가치와 무의미를 번갈아 묘사할 테고, 사랑의 존재에 대해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고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