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SBS 김형래 기자입니다.
지난 12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 사무실 복도에선 고성이 오갔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학살당한 민간인 피해자 유가족 등으로 구성된 '국가폭력피해범국민연대' 회원들이 진실화해위에 항의하기 위해 방문한 겁니다. 회원들은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약 1시간 반 정도 복도에서 농성을 벌였습니다. 이들은 왜 진실화해위에 분노했을까요? 사살자 명단에 적힌 '암살대원' 4글자의 무게 같은 날 진실화해위는 제74차 전원위원회를 열어 1950년 '진도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이하 진도 사건)' 희생자의 피해 사실 인정 여부를 논의했습니다. 진도 사건은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10월부터 석 달 동안 전남 진도군 일대 주민들이 북한 인민군에게 점령당했을 때 부역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재판도 없이 살해당한 사건입니다. 진실화해위는 가해 주체에 대해 진도경찰서, 의신지서, 금갑출장소, 고군지서, 임회지서 소속 경찰이라고 명시하고,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에 희생자와 유족에 대해 공식 사과하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희생자의 숫자입니다. 진실화해위는 조사 대상자 41명 가운데 35명에 대해서만 진실 규명 결정을 내리고, 나머지 6명에 대해서는 '보류'했습니다. 2명은 '증거가 불충분하다', 나머지 4명은 1969년 12월 진도경찰서가 기록한 '사살자 및 동 가족 동향 명부'에 '암살대원'이라는 4글자가 적혀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민간인을 살해한 주체가 살해당한 사람들에 대해 적은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선 글 후반부에 다시 따져보겠습니다. 저 4명은 기록에 적힌 단 4글자만으로 '부역자'가 되고, 국가의 반인권적 폭력에 의해 재판 없이 살해됐지만 피해자로 인정받지도 못했습니다. '진실 규명 뒤 임의 재조사 지시' 결국 형사 고발 9일 뒤인 지난 21일, 국가폭력피해범국민연대 회원들이 이번에는 서초동 중앙지검 앞에 모였습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과거사청산위원회와 국가폭력피해범국민연대 등은 김광동 위원장과 이옥남 진실화해위 상임위원 등을 검찰에 고발했습니다. 이들이 고발장에 적은 혐의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김 위원장이 '전남 함평 민간인 학살 사건(이하 함평 사건)'에 대해 법적 근거 없이 위법한 재조사 지시를 내렸다는 주장입니다. 함평 사건은 1949년 11월부터 1951년 3월까지 전남 함평군에서 경찰과 국군 11사단이 빨치산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여섯 차례에 걸쳐 민간인 500여 명을 학살한 사건입니다. 진실화해위는 지난 2023년 11월 28일 제67차 전체위원회에서 사건 13건에 대해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결정 이후 김 위원장이 희생자 1명에 대해 재조사를 지시했고, 조사관들이 올해 1월 24~25일 대전과 함평 등을 돌면서 이미 의결된 사건에 대한 탐문 조사를 벌였다는 겁니다. 전남 함평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에 관한 진실 규명 결정문에는 그 결정일이 2023년 11월 28일로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에는 2024년 1월 24일자 및 2024년 1월 25일자 참고인 진술 조서가 인용되어 있는 등 굉장히 이상한 형태의 진실 규명 결정문이 진실 규명 신청인들에게 배포되었습니다. 2024. 3. 21. 권태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과거사청산위원장 앞서 김 위원장은 "해당 사건의 가해 주체 등 사실관계 확인이 필요해 거친 절차였다"며, "생년월일과 이름, 날짜 등이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 최종 결재를 하려 했다"고 말했습니다. 해당 사건의 가해 주체는 당초 '적대세력'이었다가 진실화해위 조사 이후 '군경'으로 바뀌었는데 이 과정이 적절했는지 재조사하겠다는 겁니다. 사실상 전체위원회가 이미 의결한 결론을 위원장이 원점으로 돌리려 시도한 셈입니다. 이번 2기 진실화해위의 조사 기간은 지난 1월 말 기간 연장이 확정되면서 내년 5월 26일까지 1년 2개월 정도 남아 있습니다. 반면 올해 1월 9일 기준으로 진실화해위에 접수된 사건 2만 92건 가운데 처리된 사건은 1만 567건(53%)으로 절반을 조금 넘었습니다. 남은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지난 3년간 처리한 사건만큼을 더 처리해야 하는 셈인데, 그 와중에 재조사까지 해야 할 필요성과 여력이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국가폭력 피해자 보상이 '부정의'라고 말하는 진실화해위원장 침략자에 맞서서 전쟁 상태를 평화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 군인과 경찰이 초래시킨 피해에 대해서는 1인당 1억 3,200만 원의 보상을 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부정의'가 펼쳐지는지는 저는 대한민국에서 처음 봤습니다. 침략자에 의해 초래된 희생은 감추고, 침략을 막는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을 '국가범죄, 국가폭력'이라는 이름으로 교육하고 1억 3,200만 원씩 보상해주고 있습니다. 2023. 6. 9.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한국복음주의협의회 월례조찬기도회 강연)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평화 상태로 만들기 위해 초래시킨 피해'라고 치부하는 것부터 피해자에 대한 배상을 '부정의'라고 말하는 것까지, 국가에 의한 폭력과 인권 유린의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자의 명예를 찾아주는 게 책무인 진실화해위원회 수장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발언입니다. 김 위원장은 또 "전시에는 재판 없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도 말했습니다. ▷ 이성만 의원: 한국전쟁 시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족을 만난 자리에서 '전시하에서는 재판 없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이런 발언을 했습니까? ▶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 그런 취지의 발언을 명백하게 했습니다. ▷ 이성만 의원: 사람이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피해자로 인식할 필요가 없다, 이런 뜻입니까? ▶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 적대세력에 가담해서 방화와 살인을 저지르는 가해자에 대해서는 당시 상황에서 즉결처분이 가능했다, 이 말씀입니다. 2023. 10. 13.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국정감사 그렇다면 과연 김광동 위원장이 말하는 "적대세력에 가담해서 방화와 살인을 저지르는 가해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다섯 살 정립분은 정말 '암살·방화범'이었을까 한국전쟁 발발 직후, 경북 영천에서 민간인 600여 명이 국민보도연맹원이나 접경지역 근처에 살고 있어 인민군에게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군경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이후 거의 30년 가까이 지난 1979년, 경북 영천경찰서는 이들의 명단을 정리한 '대공인적위해자 조사표' 처형자 명부에 경북 영천군 화산면 당지동에 살던 1941년생 정립분을 적어 넣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 1기 진실화해위원회 <경북 영천 국민보도연맹사건> 조사보고서 "10.1 당시 요인 암살·방화 등 행위한 자. 50. 7. 10 처형" 10.1은 해방 직후 미 군정기였던 1946년 10월 1일과 2일 대구에서 경찰과 시민의 충돌로 시작된 민중 봉기입니다. 그 당시 정립분은 다섯 살이었습니다. 다섯 살 때 요인 암살과 방화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4년 뒤인 아홉 살에 살해당한 겁니다. 1기 진실화해위 조사관으로 경북 영천 국민보도연맹사건을 직접 조사한 현대사 연구자 김상숙 성공회대 연구교수는 SBS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재판을 받은 기록, 사형을 선고받거나 적법한 절차에 대한 기록이 없는 사람이라면 불법적으로 끌려간 사람들인데, 일단 처형해 놓고 나중에 합리화를 위해 처형 일자와 사유를 살인 방화 등의 무시무시한 범죄로 적어놨을 가능성이 큽니다. 정립분의 죽음에는 다른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1960년 4대 국회에 제출된 '양민피살자신고서'에는 정립분의 친형이 군대에서 탈영했다는 이유로 가족 전원이 적색분자로 몰려 처형됐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실제 김 교수가 현장을 조사하면서 만난 참고인들 역시 정 씨 일가는 아들의 탈영 때문에 처형됐다고 일관되게 진술하기도 했습니다. 출처 : 1기 진실화해위원회 <경북 영천 국민보도연맹사건> 조사보고서 영천 사건에서 진실화해위가 진실규명 보류 결정을 내린 6명도 다른 진술이나 자료들이 다 있어요. 근데 그런 반증들을 다 무시해버려요. 진도도 마찬가지고요. 오로지 처형자 명부에 기록이 있다고 '불능'으로 처리하려다 유족이라든가 야당 추천 의원들이 반발을 하니까 보류만 해 놓은 상태고…. 앞서 설명한 진도 사건 피해자 4명처럼 최근 진실화해위의 진실 규명 '보류' 결정 대부분의 근거는 당시 경찰 작성 자료뿐입니다. 위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가해자의 기록'은 아무리 국가가 작성한 공적 문서라고 해도 보다 면밀한 교차 검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심지어 지난 1980년 내무부 치안국 정보과도 전국 일선 경찰서에 신원 기록을 일제 정비하라고 지시하면서 "6.25 전후 혼란기에 작성된 각종 사상관계기록은 정확성이 결여된 점이 있다"고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국정감사에서 "적대세력에 가담해 방화와 살인을 저지르는 가해자"를 언급했지만, 실제로 정확히 같은 혐의로 처형된 정립분은 겨우 아홉 살이었습니다. 만약 아홉 살 정립분이 살인방화범이 아니라면, 진도 사건 희생자 4명도 실제 암살대원이 맞는지 검증하려는 시도라도 하는 게 진정한 '진실 규명'의 방향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치며 다시 지난 12일 진실화해위 사무실 농성으로 돌아가서, 국가폭력피해자범국민연대 측은 결국 김광동 위원장과 만났지만 돌아온 건 오는 4월 2일 정식 면담을 갖자는 약속뿐이었습니다. 다음 주 면담에서 김 위원장이 국가폭력 피해자들에게 어떤 말을 건넬지 계속 지켜보겠습니다.
인천항에서 북서쪽으로 122km 떨어진 곳에는 연평도라는 섬이 있습니다. 지난 2010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 이후 서해 북방한계선(NLL)의 상징이 돼 버린 이 작은 섬에는 황해도 출신 실향민들과 그들의 후손, 군인 가족 등 주민 2,085명이 살고 있습니다. 이번 '더스피커'는 군사적 긴장감이 고조될 때마다 늘 잊히는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6년 만에 벌어진 남북 포사격 지난 1월 5일 금요일 오전, 북한이 서해 5도 북쪽에서 북방한계선 일대에 포탄 2백여 발을 기습적으로 쐈습니다. 포탄은 NLL 북쪽에 떨어져 한계선을 넘지는 않았지만, 우리 군은 적대행위가 금지된 해상 완충구역에 북한 포탄이 떨어진 만큼 명백한 '도발'로 규정하고 지난 2018년 9.19 군사합의 이후 처음으로 4백여 발의 포 사격으로 맞대응했습니다. 연평도에는 또다시 주민 대피령이 내려졌습니다. ‘군부대에서 해안포 사격을 하니 대피하라’는 마을 방송에 영문도 모른 채 황급히 대피소로 달려간 주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뉴스 속보를 들여다보며 불안에 떨었습니다. 자동차 수리나 병원 치료 등 다양한 이유로 인천에 나갔던 사람들은 연평도와 육지를 잇는 유일한 통로인 여객선이 끊기면서 가족들 걱정에 발만 동동 굴러야 했습니다. 이날 대피령은 약 3시간 반 만에 해제됐지만, 주민들에게는 지독히도 긴 시간이었습니다. 연평도 주민 김정희 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짐 챙길 시간도 없이 달려왔어요. (대피소 내부에서는 어땠나요?) 옛날에 있었던 거, 14년 전에 있었던 폭격 그 얘기들 하시는 거죠, 뭐 다들…” 14년 전의 트라우마 지난 2010년 11월 23일 오후, 북한은 개머리 해안포 기지에서 연평도의 우리 군 해안기지와 마을 중심부를 향해 포 사격을 가했습니다. 선전포고도 없이 갑작스레 쏟아진 포탄에 군인 2명(해병대 서정우 하사, 문광욱 일병)과 연평부대 관사 신축공사를 하던 민간인 2명 등 모두 4명이 숨지고 19명이 다쳤습니다. 그 후 14년이 지났지만, 연평도 주민들은 여전히 6.25 전쟁 정전 협정 이래 처음으로 민간인 거주 구역에 떨어진 포탄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날 사실상 연평도 주민 모두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들에게 계속되는 북한의 도발, 이어지는 우리 군의 대응 사격은 끔찍했던 그날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방아쇠입니다. 포격 사흘 뒤 연평도 경로당에서 만난 주민은 떨리는 목소리로 작은 어선을 타고 알아서 피난해야 했던 그날을 떠올렸습니다. 노창식 / 연평도 주민 그때(지난 2010년) 우리 산으로 일 갔다 왔는데 아유 벌써 그냥 불타고 타고나니까 연기가 날 거 아니야. 마을에 돌아오니까 그렇게 된 거야. 그날 저녁에 인천으로 피난 갔다 왔죠. 어선들 타고 갔다 가서 그날 왔죠. 그러다 보니 대피소 가라고 하면 벌써 이거 뭐 저기 하는 거다 하고 벌써 겁부터 먹게 되잖아. 불안하죠, 걔들이 먼저 쏘기 때문에 그렇게 됐는데 그 생각이 자꾸 나잖아요. 괜찮다가도 자꾸 떨린다고. 그때 워낙 혼이 났으니까… “할아버지가 아파서 못 갔어. 대피한다고 죽을 사람이 안 죽겠어?” 연평도에 대피령이 내려진 건 지난해 5월 31일 북한의 위성 발사 이후 8개월 만입니다. 잊힐 만하면 다시 울리는 사이렌 소리. 여전히 그날의 공포가 생생한데도 제대로 된 피난 매뉴얼은 찾아보기 어렵고, 주민들은 점차 지쳐갑니다. 박영자 / 연평도 주민 그때 폭탄 터질 때 우리 다 앞뒤로 뛰었거든. 이리로 뛰는데 여기서 폭탄 터져, 뒤로 뛰었는데 뒤에서 터져… 산에 나무 심으러 갔다가 그렇게 돼서 뛰어 내려왔는데 마을에 불이 났는데 우리 집이 불이 나는 것 같더라고. 이 집에 지붕 터졌는데 저 집 이 집 때리면서 이 집도 때렸어. 그러니까 불이 같이 붙었을 거 아니야 그 기름이 터져서 내려오는데 드럼통 쫙 세워놓는데 그 파편이 터지면서 탁탁탁탁 튀면서 드럼통에 기름이 탁 흘렀잖아. 그러면 이 바람이 조금만 불었으면 이 마을이 다 없어졌어. 나 (대피소) 못 갔어, 이번에 엊그저께 쏠 때 못 갔어. 할아버지가 아파서 집에 있는 바람에 그냥 집에 있었지 뭐. 겁이 나서… 모두 사람들 보면 대피소 가라 그러는데 맞는 건 똑같아. 대피소 가서 터지나 우리 집에 있다가 터지나. 안 가, 우리 마을 사람들은. 육지에서 이제 들어온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는 이미 다 겪었기 때문에 때리려면 때려라 이러는 거지 뭐. 할 수 없어 뭐 대피한다 그래서 뭐 죽을 사람이 안 죽겠어? 연평도에서 살아간다는 건 연평도 어민 박태원 씨는 지난달 25일 열린 ‘한반도 상황에 대한 접경지역 주민, 종교, 시민사회 기자 간담회’에 이런 글을 보냈습니다. “합동참모본부의 서해안 상설해상사격훈련 계획이 먼저인지 북의 포사격훈련이 먼저인지 저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2010년 연평도 포격 이후 또다시 서해5도(연평·백령·대청·소청·우도) 주민들이 생존의 위협을 받았다는 겁니다.” 연평도의 인구는 2,085명. 주민들은 대부분 어선을 타고 바다에 나가 물고기와 꽃게를 잡거나 섬에서 자영업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민들은 대피령이 떨어지면 내려놓은 통발을 챙기지도 못한 채 조업을 중단해야 하고, 손님이 전부 사라지는 등 단순히 몇 시간 고생하는 정도가 아니라 생계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는다고 하소연합니다. 김영식 / 연평도 주민 그날도 우리가 대피소에서 3시간 반 동안 있었거든요. 여객선도 통제가 됐고. 여객선이라는 거는 우리 교통수단이지 않습니까? 우리 발을 묶어 놓는 건데. 교통수단을 막아 놓으니까 우리가 엄청난 피해를 보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대피소에 가 있는 동안 우리가 생활을 접고 있는데 이거는 누가 보상해 줘요? 예상하건대 앞으로 북한에서 포 사격 연습을 하면 대피소 가야 하고, 우리 군부대에서 포 사격 연습하면 대피소를 또 가야 해요. 앞으로 대피소에 갈 일이 많을 것 같아요. 대피소 가서 있는 동안은 우리 생활을 접고 있는 거 아닙니까? 면적 7제곱킬로미터의 연평도에는 탄약고가 17곳 있습니다. 단순 계산으로 단위면적 0.41㎢, 가로세로 630m의 정사각형마다 탄약고가 하나씩 있다는 겁니다. 지난 2019년 국방부가 민주당 최재성 의원실에 제출한 현황 자료를 보면 이 17개 탄약고 모두가 주거시설 안전거리 기준인 반경 381m를 위반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민간인 거주가 불가능한 지역에 주민들이 살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연평도 주민들의 불안과 고통을 다룬 기사에는 어김없이 “누가 거기 살라고 시켰냐. 본인이 좋아서 사는 거 아니냐”는 댓글이 달립니다. 하지만, 제아무리 ‘누칼협’의 시대라고 해도 섬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을 한순간에 바꾸라는 건 너무나 가혹한 요구가 아닐까요. 그보다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우리 사회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논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