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SBS 박수진 기자입니다. 기존 뉴스의 틀에서 벗어나, 시청자와 독자들께 '신뢰할 수 있는 재미'를 전달하는 '뉴스 크리에이터'를 꿈꿉니다.
파편화된 뉴스는 이제 그만, 이슈의 맥락을 읽는 재미를 담았습니다. #체스 천재에겐 비밀이 있었다. 녹색 알약을 먹고 눈을 감으면 체스판이 펼쳐지고 천재는 그 환상 속 체스판에서 자신의 기술을 익힌다. 하지만 성공 가도를 달릴수록 불안과 스트레스는 더 커지고, 승부에 집착할수록 녹색 알약은 한 알에서 수십 알, 수백 알로 늘어난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작가 지망생의 인생에도 투명한 알약이 등장한다.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인생의 끝자락에서 이 약을 먹은 그는 자신의 뇌를 100% 가동하기 시작한다. 주식을 잘해 백만장자가 되고, 정계에 진출해 유명 정치인이 되기도 한다. 눈치챘겠지만 둘 다 가상의 이야기다. 넷플릭스 시리즈 <퀸스 갬빗>의 주인공은 고아원에서 강제로 주던 신경안정제를 과다 복용하며 환영을 보게 된다. 이 영화에서 녹색 알약의 이름은 '잔졸람'. 세상엔 없는 약이다. 영화 <리미트리스>에 나오는 작가 지망생은 뇌를 100% 가동시켜 준다는 'NZT'라는 알약을 먹는다. 이 또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약이다. 주인공들에게 약은 신천지를 선사해 주는 것 같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인생을 지배하고 더 큰 위기로 몰아넣는 '위험'이 된다. 두 영화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 알려진 약이 있다. 바로 애더럴(adderall)이다. 애더럴은 미국에서 주의력결핍과다행동장애(ADHD)나 기면증 치료에 주로 사용된다. 과거에는 우울증 치료제, 월경증후군 치료제 등으로 지금보다 쉽게 처방이 되기도 했지만 오남용 및 중독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현재는 통제 약물(2급 약물)로 분류돼 있다. 애더럴의 주성분은 마약류로 분류되는 암페타민이다. 국내에선 반입, 유통이 모두 금지돼 있다. 미국에서 먼저 시작된 '공부 잘하는 약' 열풍 암페타민 남용의 문제는 미국 사회에서 1930년대부터 이어져 왔지만 미국 대학생들 사이에서 소위 '공부 잘하는 약', '집중 잘 되는 약'으로 인기몰이를 시작한 건 2000년대 초반부터다. '애더럴'은 미국에서 '대학생 전용 마약'이라고 불리며 ADHD 치료와는 무관하게 소비돼 왔다. 2018년에는 미국 사회의 이런 문제를 지적하는 <Take your pills>라는 다큐멘터리도 등장했는데, 이 다큐멘터리에 나온 한 미국 대학생은 "예쁘고 공부 잘하고 싶으면 이 약을 먹으면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학생들이 페이스북이나 SNS에서 불법으로 애더럴을 사고파는 모습도 다큐멘터리에 담겼는데, 현재 국내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ADHD 치료제 오남용과 불법 거래 모습과 흡사하다. 애더럴이 불법인 국내에선 그 자리를 다른 성분의 ADHD 치료제가 채우고 있다. 콘서타, 페니드, 메디키넷 등인데 모두 '메틸페니데이트' 성분이다. 암페타민과 성분적으로는 차이가 있지만 각성 효과가 나타나는 특징은 같다. 1944년 스위스에서 최초로 합성된 후 1950년대부터 기면증, 만성피로 등을 치료하는 각성제로 쓰였다. ADHD 치료제로 처방되기 시작한 건 1960년대 미국으로 알려져 있다. 앞서 언급한 애더럴 만큼은 아니지만 메틸페니데이트도 미국에선 '스터디 드러그(Study drug)'라고 불리며 집중력을 높여주는 약으로 유명하다. 프로포폴, 졸피뎀 제친 메틸페니데이트... 절반은 10대 미국에서 ADHD 치료제가 '대학생의 마약'으로 소비돼 왔다면 국내에선 10대들이 주 소비층이다. 단기간에 집중력을 높여준다는 잘못된 소문이 퍼지면서 시험을 앞둔 청소년들이 보조제처럼 이 약을 먹는 사례들이 늘고 있다. 실제 메틸페니데이트 처방 통계를 봐도 이런 경향은 뚜렷하다. 현재 식약처가 관리하고 있는 의료용 마약류는 효능별로 진통제, 항불안제, 최면진정제, 마취제, 식욕억제제, 진해제, 항뇌전증제, ADHD 치료제로 분류된다. ADHD 치료제의 비중은 이 중 가장 적지만 처방량 증가세는 가장 뚜렷하다. 2022년 ADHD 치료제는 7,312만 정이 처방됐는데 3년 전과 비교해 28.4% 증가했다. 같은 기간 처방량이 증가한 최면진정제(3.1%), 마취제(4%), 항뇌전증제(6.7%)와 비교해 봐도 증가세가 단연 높다. 성분별로 봐도, 졸피뎀이나 프로포폴의 경우 지난해 처방량과 처방 환자 증가율이 전년 대비 6% 이하에 머물렀고, 펜타닐 패치는 관리 감독이 강화되면서 처방량이나 처방 환자가 오히려 7~8% 감소했다. 하지만 메틸페니데이트는 환자 수, 처방량 모두 각각 27%, 28% 증가했다. 메틸페니데이트가 다른 의료용 마약류에 비해 처방 증가세가 뚜렷한 주요 원인은 예상대로 10대다. 올해 1~8월 처방 환자 28만여 명 중 13만여 명이 10대였다. 45%에 달한다. 다른 의료용 마약류가 중증 질환 비율이 높은 고령층을 대상으로 많이 처방되는 점과 비교하면 뚜렷한 차이다. 각성 효과는 학습 능력 향상이 아니다 ADHD 치료제는 어쩌다 공부 잘하는 약이란 오해를 받게 됐을까. 전문가들은 약물 복용 후 나타나는 각성 효과를 학습 능력이 향상된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ADHD가 왜 발병하는지 '병인'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뇌의 신경전달물질 중 각성과 흥분을 일으키는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등이 잘 분비되지 않는 것이 영향을 미친다고 알려져 있다. 집중력과 의욕이 저하되는 것. ADHD 환자들이 주의 집중이 안 되거나, 산만한 모습을 보이거나, 할 일을 잘 마무리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ADHD 치료제는 강제로 도파민 등의 흥분 물질을 분비시켜 준다. 인위적으로 흥분감과 행복감을 만들어주는 셈이다. 뇌에 흥분 자극이 더해지니 감정이 긍정적으로 변하게 되고, 공부든 일이든 좀 더 집중이 잘 되고 수월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뇌 전달물질이 부족한 ADHD 환자들에게는 치료가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비 ADHD 환자)에겐 지나친 자극이 된다. 과한 자극은 중독과 뇌세포 손상의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 ADHD 환자가 아닌 사람이 ADHD 치료제를 복용할 경우 오히려 작업 생산성이 감소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호주 멜버른대학 신경과 연구팀은 ADHD 환자가 아닌 성인 40명에게 일주일 간격으로 총 4회에 걸쳐 ADHD 치료제 3종류(메틸페니데이트, 덱스트로암페타민, 모다피닐)와 위약(플라시보)을 먹도록 했다. 참가자들은 약물을 먹은 후 미션을 수행했는데, <배낭의 무게를 유지하며 최대한 비싼 물건을 담도록 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ADHD 치료제를 복용했을 때 ▲문제를 푸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고 ▲배낭에 물건을 넣거나 빼는 행동을 더 많이 반복한 걸로 나타났다. 또 ▲위약을 먹었을 때 평균 이상의 성과를 보였던 참가자들이 ADHD 치료제를 복용한 후엔 평균 이하로 성과가 하락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연구진은 이 실험을 토대로 ADHD 치료제가 동기 부여를 강화하긴 했지만 노력 대비 성과 개선 효과가 제한적이었다며 "결국 문제 해결의 품질은 낮아졌다"고 결론내렸다. ADHD 치료제를 먹었다고 해서 작업 결과물이 좋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치료제 복용 후 각성 증상이 나타날 수는 있지만 이게 좋은 성적으로 이어지진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청소년기 잘못된 사용이 장애를 촉발한다 전문가들은 ADHD 치료제 남용의 부작용도 경고하고 있다. 비질환자가 약물을 과도하게 복용할 경우 두통, 불면증, 식욕 감소 등의 가벼운 부작용은 물론 환각, 망상, 극심하게는 자살 시도도 나타날 수 있다. 메틸페니데이트가 의료용 마약류로 분류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중독의 위험성이다. 마약류관리에관한법률에서 메틸페니데이트는 '오남용 우려가 심하고 제한적 의료용으로 쓰이며 심한 신체적 또는 정신적 의존성을 일으키는 약물'로 분류돼 있다. 국제질병통계분류(ICD-10) 기준으로도 메틸페니데이트는 '남용의 잠재성이 있는 정신자극제에 의한 중독'에 해당하는데 불법 마약인 메스암페타민(필로폰)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런 중독과 오남용의 우려 때문에 식약처는 메틸페니데이트를 하루 최대 60mg(소아 청소년 기준), 1회 처방 시 3개월 이내로만 처방하도록 하고 있다. 의사의 정확한 진단과 제한된 용량 안에서만 처방을 하도록 하는 조치다. ADHD 환자가 아닌 청소년이 학습 능력 향상 등을 목적으로 약물을 남용했을 경우(비의료적 사용자)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학업 성취가 낮아졌다는 연구도 있다. 2017년 미시간대학교 약물남용센터가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미국 고등학생(18세) 8,362명을 35세까지 추적 관찰한 결과 청소년기에 약물을 오남용한 그룹이 대학 학위를 취득할 가능성이 오남용 경험이 없는 비교군에 비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성인이 돼서도 더 많은 약물 사용 장애(SUD)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기도 했다. 이에 반해 ADHD 진단을 받고 약을 복용한 그룹(의료적 사용자)은 ADHD 진단을 받지 않은 학생들과 비교해 봐도 학업 성취 등의 면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이 연구를 전제로 보면 오히려 ADHD여도 의사의 진료 하에 잘 치료를 받으면 학업 성취나 성인이 된 이후의 삶에도 큰 영향이 없지만, ADHD가 아닌데도 약을 지속 복용하는 경우 장기적인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청소년기 잘못된 사용이 장애를 촉발할 수 있단 경고다. 현실을 바꿔줄 마법의 약은 없다 지난해 4월 서울 강남의 학원가 곳곳에서 음료수병에 마약을 타서 불특정 다수의 10대 학생들에게 나눠주는 사건이 있었다. 범인은 보이스피싱 조직이었는데, 이들은 필로폰과 우유를 섞은 마약 음료를 제조해 학생들에게 마시게 하고 부모에게 전화해 돈을 뜯어낼 생각으로 범행을 계획했다. 당시 학생들이 낯선 사람이 건네는 음료수를 의심 없이 받아 마셨던 이유 중 하나는 음료수병에 적혀 있던 문구였다. '메가 ADHD', '기억력 상승, 집중력 강화'. ADHD 치료제가 이미 청소년들에게 익숙한 학습 보조 수단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란 자조가 나오기도 했다. 실제 국민의힘 한지아 의원실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부터 받은, 2021년부터 올해 8월까지 전국에서 ADHD 치료제를 가장 많이 처방한 상위 병원 30곳 자료를 보면 서울 강남 3구(강남, 서초, 송파구)에 위치한 병원들이 13∼20%를 차지했다. ADHD 치료제 중 가장 많이 처방되는 '콘서타'의 경우 전체 40%가 강남 3구였고, 메디키넷 역시 40%가 강남 3구 병의원으로 나타났다. 강남 일대의 높은 교육열과 무관하지 않다는 평가다. 물론 ADHD 치료제 오남용을 10대, 지나친 교육열 탓으로만 볼 수는 없다. 향정신성의약품을 마약 대용으로 사용하는 수요도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10대 처방이 메틸페니데이트 처방 증가를 견인하는 주요 원인으로까지 커진 만큼 10대들이 의도치 않게 마약류에 중독되는 일을 예방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임은 이견이 없어 보인다. 식약처는 지난해 9월부터 '마약류의 오남용 방지를 위한 조치 기준'에 메틸페니데이트를 신설했고, 처방 현황을 철저히 모니터링해 조치 기준에 벗어나는 처방에 대해 행정 조치하겠다고 밝혔다. 또 메틸페니데이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처방이 불법인 애더럴까지 ADHD 치료제를 불법으로 판매하는 행위에 대한 단속도 강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불완전한 현실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마법의 무언가를 찾는 욕구는 늘 있어 왔다. 체스 천재가 녹색 알약에 의존했듯, 되는 게 하나도 없는 작가 지망생이 뇌를 100% 가동시켜 주는 약의 유혹에 넘어갔듯 말이다. 이런 영화나 소설이 계속 인기를 끄는 이유는 누구나 한 번쯤 같은 생각을 해봤기 때문이 아닐까? 오랜 세월 많은 이들이 같은 꿈을 꿨음에도 이제까지 그런 마법의 약은 발견되지 않았다. 공부 잘하는 약은 없다. *취재 자문 이태엽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자료 출처 해외 논문 <Not so smart? "Smart" drugs increase the level butdecrease the quality of cognitive effort> Elizabeth Bowman1, David Coghill2, Carsten Murawski1, Peter Bossaerts 해외 논문 <Adolescents' Prescription Stimulant Use and Adult Functional Outcomes: A National Prospective Study>, Sean Esteban McCabe, Philip Veliz, Timothy E Wilens, John E Schulenberg. 통계청 통계개발원 <약물로 인한 사망통계 분석(2024.4)>, 식약처 <의료용 마약류 월간 동향(2024.11)>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슈퍼맨 각성제 (Take your pills)> 2018 한겨레 <'집중력 강화 약물'이 우리 아이 성적 올릴 수 있을까> 2019.10.19. 헬스경향 <'공부 잘하는 약'이 뭐길래> 2023.05.26 디자인 : 최혜지
파편화된 뉴스는 이제 그만, 이슈의 맥락을 읽는 재미를 담았습니다. # 인터뷰 약속은 오후 2시. 문자를 받은 건 1시 25분이었습니다. "기사 제목이 '합법도 불법도 아닌 임신중지'로 나간다면 저는 인터뷰하기 곤란합니다."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제도 마련을 촉구해 온 시민단체 관계자였는데, 미리 보낸 질문지에 '합법도 불법도 아닌 임신중지 5년'이라고 적었던 기사 '가제'를 뒤늦게 확인한 듯했습니다. "제목은 정해지지 않았고, 그런 시각으로 보면 안 되는 이유까지 인터뷰에서 설명 부탁한다"라고 답을 보냈고 다행히 인터뷰는 예정대로 진행이 됐습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문자를 보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헌재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 해당 법은 소멸했고, 우리나라에서 낙태는 '비범죄화'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합법도 불법도 아니다'라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 지난 5월 유엔 차별철폐위원회 회의에 참석했던 보건복지부 출산정책과장은 2019년 4월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 한국의 후속 조치를 묻는 유엔 위원 질의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헌법불합치 결정은 위헌 결정과는 구분되는 개념입니다. 형법의 낙태죄는 적합한 수단이지만 임신 유지와 종결에 관한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제한하니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형법상 낙태죄에 대한 전면 폐지는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지난 14일 '임신중지 비범죄화 후속 보건의료 체계 구축과 권리 보장 입법 촉구' 시민사회계 간담회 이유 1. 헌재의 판결 이후 상황을 보는 서로 다른 시각 2019년 4월 헌법재판소가 낙태를 한 여성과 이를 도운 의사를 처벌하는 근거였던 형법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2020년까지 대체 법을 만들라고 했지만 만들지 못했습니다. 헌재 결정을 기준으로는 5년, 대체입법 시효를 기준으로는 4년이 지났습니다. 앞서 언급한 두 사례에서 보듯, 시민사회계와 정부가 헌재 결정 이후의 상황을 보는 시각은 전혀 다릅니다. 시민사회계가 말하는 '비범죄화'라는 말은 헌재가 대체 법을 만들라고 한 2020년 12월 31일 시효를 넘기면서 낙태죄는 완전히 사라졌고, 낙태는 더 이상 법으로 제한하거나 처벌하는 대상이 아니게 됐다는 뜻입니다. 시민사회계가 말하는 '낙태죄 대체입법'은 낙태가 비범죄화된 현재 상황을 법적으로 확정 지어라, 즉 '낙태는 처벌 대상이 아니다'를 명확히 하라는 요구입니다. 하지만 정부의 시각은 다릅니다. 헌재가 정한 2020년 시효가 지나갔지만 대안 입법을 만들어야 하는 건 변함이 없고, 그 방향은 낙태를 처벌하던 기존의 형법을 일부 수정하는 것이지 아예 없애는 게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지난 21대 국회에 정부가 임신 14주까지는 전면 허용, 24주까지는 제한적 허용을 골자로 법안을 발의했던 것도 이런 틀 안에서 이뤄졌습니다. 24주 이후는 (실제 현실에서 처벌이 되는 사례는 이전에도 거의 없긴 했지만) 전면 금지, 처벌의 대상으로 남겨두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시민사회계가 크게 반발했고, 국회에서 공전을 거듭하다 폐기됐습니다. 지난 7월 보건복지부가 개최한 인공임신중절 관련 법 제도 개선 방안 간담회 이유 2. 법 '없어도' 할 수 있다 vs 법이 '없어서' 못 한다 이런 시각 차이는 법을 만드는 문제뿐만 아니라 임신중지와 관련한 현재 보건 정책 시행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시민사회계는 대체입법 여부와 상관없이 정부가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음에도 손을 놓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법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을 법이 없어서 못 한다고 핑계를 대고 있단 뜻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시민사회계는 임신중지도 출산처럼 전면적으로 건강보험을 적용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현재도 친족 간 임신이나 성폭행 등에 의한 임신중지의 경우에는 건강보험 적용이 되지만 개인의 선택에 따른 경우는 대상이 아닙니다. 시민사회계는 일부 임신중지에 대해선 이미 건강보험 적용을 하고 있으니 이 사유를 확대해 전면 적용하는 건 대체입법의 여부와 상관없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국민건강보험 요양급여의 기준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보건복지부 장관이 요양급여 대상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게 주장의 근거입니다. 또 먹는 낙태약, 즉 유산유도제를 도입해 임신중지를 원하는 여성들의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는 요구도 있는데, 이 또한 대체입법과 무관하게 식약처가 절차를 거쳐 승인을 하면 바로 도입이 가능하다는 게 시민사회계의 주장입니다. 하지만 정부는 건강보험 전면 적용, 먹는 유산유도제 도입 모두 '법을 만드는 게 우선'이라는 입장입니다. 실제로 조규홍 보건복지부장관은 지난 23일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이 임신중지 관련한 정부의 상담과 지원이 부족하다고 지적하자 "형법상 어떤 것이 죄가 되고 어떤 것이 죄가 아닌 것이 명확해지면 모자보건법에서 상담과 지원이 더 잘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식약처도 먹는 유산유도제 도입이 지연되는 것에 대한 국회의 질의에 '위해성 관리 계획 등 허가 요건을 갖추지 위해 임신중지 허용 주수가 결정돼야 한다'고 답변을 했습니다. '법이 만들어지면 해결될 것'이라는 논리는 복지부도 식약처도 같았습니다. 이유 3. "어떻게 해도 욕먹을 이슈"... 뒷짐 진 국회 입법의 주체인 '국회'는 그럼 어떤 입장일까요? 올해 5월 개원한 22대 국회에는 관련 법안이 아직 한 건도 발의되지 않았습니다. 이전 21대 국회에선 6개의 형법 개정안과 7개의 모자보건법 개정안이 발의되기도 했지만 단 한 건도 통과되지 못했고 임기 종료와 함께 폐기됐습니다.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임신중지권이 충돌한 결과라는 해석도 많고, 종교계의 반대 때문이라는 원인 분석도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유의 전부는 아닙니다. 지난 2020년, 당시 민주당 의원이었던 권인숙 전 의원은 형법에서 낙태죄를 아예 삭제하고,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허용 한계를 정해놨던 모자보건법 14조를 없애고, 약물 임신 중단도 허용하는 내용의 개정안들을 발의한 바 있습니다. 시민사회계의 요구와 맞닿아있는 내용이었지만 이 법은 민주당 내에서도 전면적 공감을 얻진 못했습니다. 제한 없이 모든 경우의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던 겁니다. 국회가 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합의'는 필수적입니다. 한 사안을 보는 다양한 의견을 취합하고 논의를 거쳐 합의된 안을 만들어 실제 법으로 만드는 것이 국회의 역할입니다. 하지만 낙태, 임신중지의 문제는 그 '사회적 합의' 자체가 난제인 것 같습니다.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주수를 10주는 너무 적으니 20주까지는 늘리자고 한다거나, 전면 허용은 급진적이니 허용 사유를 어느 범위까지만 넓히자는 등의 조율이 어려운 이슈여서입니다. 21대 국회에서 낙태죄 대체입법을 마련하는 과정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기자에게 이런 소회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법을 만들려고 하면 무조건 (주수) 제한이나 규제, 또 이를 위반했을 시 처벌 등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대체입법을) 못 한다기보단 안 한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것", "어떤 결정을 해도 욕먹을 수밖에 없는 이슈 아닌가." 뉴질랜드 DECIDE 홈페이지 메인 페이지 뉴질랜드의 'DECIDE'와 한국의 '토닥톡' 2019년 헌재 결정으로 우리나라는 낙태를 처벌하지 않는 국가가 되었고, 이런 상황은 굉장히 선진적입니다. (모든 범위의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주요 국가는 캐나다, 뉴질랜드 정도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낙태죄가 소멸됐을 뿐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보장 체계는 마련된 것이 없습니다. 앞서 정리한 것처럼 시민사회계와 정부는 '평행선'이고, 국회는 민감한 이슈를 외면하며 '뒷짐'을 지고 있습니다. 사회적 논의의 배경과 전제가 돼야 할 의료계의 전문적인 의견 개진도 의정 갈등 상황이 더해지면서 사실상 전무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없을까요? 'DECIDE'라는 제목의 웹사이트가 있습니다. 이 사이트에 접속하면 상단에 '제공자 찾기(Find a provider)'라는 메뉴가 나옵니다. 이 메뉴로 들어가서 지역을 입력하고 마지막 생리가 시작된 첫날이 언제인지까지 입력하면 본인이 설정한 지역 내에 방문 가능한 병의원의 명단, 제공 가능한 시술 내용, 위치까지 보기 편하게 나옵니다. '토닥톡'이라는 앱이 있습니다. 이 앱에 접속하면 병원 정보 등을 찾을 수 있는 메뉴가 나옵니다. 메뉴를 누르면 '로그인'을 요구합니다. 여성만 가입이 가능합니다. 병원 정보는 서울, 경기, 비수도권으로 나뉘어있고 지역별로 일부 병의원의 명단이 나옵니다. 다른 사람이 남긴 후기를 볼 수 있고, 병원 측과 채팅 및 전화 상담이 바로 가능한 탭도 있습니다. DECIDE(decide.org.nz)는 뉴질랜드 정부가 운영하는 임신중지 정보를 제공하는 웹사이트입니다. 임신중지를 제공하는 병의원 명단뿐만 아니라 접속자가 원하지 않는 임신을 했을 경우 할 수 있는 선택지가 무엇이 있는지, 임신중지를 결정했다면 또는 출산을 결정했다면 어떤 방법들이 있는지, 임신중지 전과 후 상황에서 어떤 일들이 발생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한 설명도 나옵니다. 로그인 할 필요 없고, 무료로 제공됩니다. 뉴질랜드 보건부 홈페이지에서 'abortion'을 입력해도 DECIDE 사이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토닥톡은 한국의 한 민간 업체가 운영하는 임신중지 정보 제공 앱입니다. 병의원 정보뿐만 아니라 실제 임신중지를 한 사람들이 남긴 후기를 볼 수 있고, 임신중지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은 글도 볼 수 있습니다. 가입을 하면 이용은 무료입니다. 단, 이 앱에 노출된 병의원은 운영사 측에 광고비를 지불한 곳들입니다. 서울의 한 산부인과는 이 앱에 이름을 노출하는 비용으로 수백만 원을 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임신중지 관련 정보 앱 '토닥톡'을 사용하는 모습 '우리나라는 뉴질랜드와 같은 정부가 운영하는 임신중지 정보 사이트가 없나요?'라고 물으신다면, 네 없습니다. 기자가 만난, 국내에서 임신중지를 한 여성들이나 고민하는 여성들 대부분은 '경험자의 후기'를 가장 신뢰했습니다.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출산 여부를 고민하는 상황은 우리나라에서도, 뉴질랜드에서도 발생할 수 있지만 이후 접근할 수 있는 정보, 그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 등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임신중지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사항이라는 데 공감한다면, 무분별한 임신중지를 막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발생할 상황에 대한 충분한 정보는 제공돼야 할 겁니다. 전종관 이대목동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기자와 서면 인터뷰에서 "정상적인 진료의 한 과정으로 임신의 종결은 거의 대부분 안전하게 마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안전한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불법적이거나 굉장히 많은 비용을 요구받는 경우들이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런 것은 산모의 건강을 위하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비용이 지출되는 것"이라고 꼬집기도 했습니다. 임신중지가 전면 허용된 뉴질랜드여서 그런 걸까요? 독일은 형법으로 낙태를 금지하고 있는 대표적인 나라 중 한 곳입니다. 최근 12주 이내의 낙태는 허용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고 있지만 아직까진 모두 금지입니다. 다만 지금도 12주 이내의 경우에는 지정된 기관에서 상담을 거치면 처벌을 받지 않습니다. 기자는 지난 6월 독일에서 임신중지를 한 한국 여성을 화상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요, 산부인과에 방문해 자신의 상황을 상담받고 정확한 임신 주수를 확인한 후 의사와 함께 임신중지의 방법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유산유도제를 먹는 방법으로 임신을 종결시키기로 하고, 의사의 처방과 진료 하에 유산유도제를 먹었습니다. 이 여성은 "전 과정에서 나라로부터 보호받는 느낌을 받았고, 정보를 찾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임신중지를 어느 범위까지 허용할지, 처벌의 대상으로 둘지 말지를 정하는 것과 무관하게 이 자체를 여성의 건강권 문제로 접근하면 우리 사회가 '입법 공백'의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일들은 많아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디자인 : 최혜지
"이곳은 공개된 게시판이에요. 여기서 성범죄가 일어날 수는 없어요." "우울증갤러리에 올라오는 글들 자체가 불법적인 건 없어요. 본인들끼리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는 것까지 저희가 어떻게 할 수는 없잖아요." (디시인사이드 인터뷰 중) '우울증갤러리' 운영사인 디시인사이드 관계자는 취재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울증갤러리'에서 발생하는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하는 성착취 범죄와 관련해 예방 대책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우울증갤러리'를 연결고리 삼아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강간 등의 성범죄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SBS 탐사기획팀의 연속보도 이후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디시인사이드에 우울증갤러리의 자율 규제 실태 자료를 제출하라고 통보했다. ▶ 관련 기사 [단독] "친구랑 집으로 오라더니"…우울증갤러리서 성착취 (풀영상) 디시 측은 문제가 있는 게시글을 빠르게 삭제하고 모니터링도 강화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범죄는 우울증갤러리가 아닌 외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며 "그것까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선을 긋고 있다. 우울증갤러리 사건을 취재하고 보도하는 과정에서 사실 취재진도 이 연장선상의 고민을 했다. '우울증갤러리 사건을 디지털 성범죄로 볼 수 있을까.'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디지털 성범죄'는 온라인 공간에 불법 촬영물을 유포하고, 이를 빌미로 협박하고, 딥페이크 등의 기술을 활용한 지인을 능욕하는 등의 범죄로 인식돼 왔다. (물론 우울증갤러리 게시판에도 이런 종류의 게시물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우울증갤러리에서 발생한 성범죄의 경위를 살펴보면 운영사 측의 항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사용자들은 우울증갤러리에서 서로 글을 올리며 존재를 인식한다. '우리 집에 올 사람' 혹은 '나 재워줄 사람' 등의 다소 노골적인 글들도 있지만, 별 내용 없이 자신의 인스타그램 아이디만 남겨놓는 게시글도 많다. 사용자들은 이런 인스타그램 계정을 '울스타'라고 부른다. 서로 아이디를 주고받은 후 본격적인 대화는 인스타그램 채팅 기능을 통해 이뤄졌다고 한다. 일대일 대화도 있고 여러 명이 함께하는 단체 채팅 기능을 이용하기도 한다. 이 대화는 오프라인 만남으로 이어진다. 누군가의 집에서 단둘이 혹은 여러 명이 모이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의제강간 등 성범죄가 발생했고, 졸피뎀 등을 불법 복용하는 마약류관리법 위반 의혹 행위도 있었다. 정리하면, 우울증갤러리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인연을 맺게 된 연결 공간이었고 범죄는 외부에서 벌어졌던 셈이다. 디시 측은 '연결고리가 된 것만으로 우울증갤러리가 범죄의 온상지가 될 수 있느냐'고 항변하고 있다. 이 주장은 얼마나 합리적일까? 소라넷, N번방, 우울증갤러리... '연결고리'의 진화 대한민국 디지털 성범죄 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은 '소라넷'이다. 소라넷은 서버를 해외에 두고 각종 불법 촬영물을 공유하는 국내 최대 불법 음란물 사이트, 1999년에 서비스를 시작했다. 한때 회원이 최대 100만 명에 달했다. 피해자의 사진을 올리는 인증 문화, 그리고 이를 두고 평가를 하는 품평 문화 등의 시작이 소라넷이었다. '초대남 사건'은 소라넷의 범죄화가 극대화됐던 사례다. 여성을 술이나 약물로 취하게 한 뒤 소라넷 회원들에게 장소를 공유해 사람을 불러 여성을 집단 성폭행하던 범죄 행위가 바로 '초대남 사건'이다. 성폭행은 물론 불법 촬영, 유포와 유포 협박 등의 범죄로도 이어졌다. 2006~2007년에는 피해 여성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일이 잇따르기도 했다. 정부가 소라넷의 접속을 차단하고 유해 사이트로 지정하는 등의 조치를 취한 적도 있지만 수사엔 미온적이었다. '서버가 해외에 있어서' 또는 '국제 수사가 어려워서' 등의 이유였다. 결국 수사는 2015년이 돼서야 이뤄졌고, 국제 공조 수사를 통해 네덜란드에 있던 서버가 폐쇄 조치됐다. 다만 운영자 4명 중 1명만 징역 4년을 받았다. 검거를 하지 못한 운영진도 있었다. N번방 사건은 2018년 말부터 2020년까지 발생했다. 강압적으로 찍은 성착취물 유포를 빌미로 미성년자 등 70여 명의 피해자를 성노예처럼 다뤘던 사건이었다. 소라넷이 차단된 지 4년 만이었다. 소라넷 범죄가 해외에 서버를 둔 음란물 불법 공유 사이트를 배경으로 이뤄졌다면, N번방 가해자들은 텔레그램, 디스코드 등의 메신저 앱을 이용했다. 텔레그램은 대화가 자동적으로 삭제되고, 삭제된 후에는 증거를 찾기도 쉽지가 않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IT 기술은 더 발전했고 이를 배경으로 한 범죄도 더 교묘해진 셈이다. 경찰 발표(2020년 3월 기준)에 따르면, 당시 범죄 가담자 규모는 영상 소지, 배포자를 포함해 6만 명 이상이었다. 주범 조주빈은 대법원에서 징역 42년을 받았고 다른 공범들도 처벌을 받았다. N번방 방지법도 만들어졌다. 불법 성적 촬영물을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3년 이하 징역 3천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고, 미성년자 의제강간 기준 연령을 13세에서 16세까지로 높였다. 합동 강간·미성년자 강간 등 중대한 성범죄는 준비하거나 모의하기만 해도 처벌하고, 인터넷 사업자들에게 디지털 성범죄물 유통 방지 및 관리 책임을 강화하는 내용이 골자다. 그로부터 또 4년이 지났다. 이번엔 우울증갤러리다. 온라인 게시판이 연결고리가 됐고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인스타그램, 카카오톡 등의 SNS를 통해 관계를 이어갔다. 오프라인 만남 과정에서 의제강간 등의 성범죄가 있었고, 이 과정에서 촬영된 불법 촬영물이나 능욕 게시글들이 가해자에 의해 다시 우울증갤러리 게시판에 올라가기도 했다. 익명 게시판이라는 점을 악용해 신상도 가감 없이 공개됐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이라는 공간의 기준을 나누는 것이 무색할만큼 우울증갤러리를 연결고리로 일어나는 범죄 행태는 공간 초월적이었다. 취재진이 만난 우울증갤러리 이용자들은 '범죄를 목적으로 우울증갤러리를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발생한 미성년자 성착취 범죄가 알려지면서 역으로 범죄 대상을 찾는 잠재적 가해자들이 더 모이고 있다는 뜻이다. '게시판에 성범죄 글은 올라오지 않는다',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는 것까지 우리가 막을 수는 없지 않느냐'던 디시인사이드 운영진의 항변이 다소 무력하게 들렸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디지털 성범죄'라는 단어가 갖는 한계점 최근에는 딥페이크 기술로 여성의 얼굴을 나체 사진과 합성한 후 단체 대화방에 공유하는 이른바 '딥페이크 성범죄'가 확산하고 있다. 지난 5월 서울대에서 발생했고, 최근에는 인하대에서도 발생해 경찰이 수사 중이다. 여성을 대상으로 딥페이크 합성물을 유포·공유하는 범죄는 비단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해외에서 개봉한 다큐멘터리 <어나더 바디(Another Body)>는 실제 딥페이크 성범죄 피해 여성들이 가해자를 추적했던 실제 사례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다큐멘터리 <어나더 바디(Another Body)> 중 피해 여성은 출신 대학, 얼굴, 주소까지 포르노 사이트에 공개되면서 남성들로부터 '강간하고 싶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받고, 실제 자신이 사는 주소로 사람이 찾아오는 등의 피해를 겪는다. 하지만 수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다. 이유는 합성물이 '실제'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그리고 당시 법 기준으로 '위법'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취재를 하면서 '디지털 성범죄'라는 단어 자체가 갖는 한계점을 느꼈다. 현재 발생하고, 또 진화하고 있는 디지털 성범죄는 그 범죄가 발생하는 과정과 피해 결과 모두 '디지털'이라는 공간에 한정되지 않는다. 온라인 공간의 벽을 넘어 현실 세계에서의 범죄 행위로 이어진다. 또 피해는 한 사람의 일상과 인생을 무너뜨릴 만큼 강력하다. '디지털'이라는 단어가 붙는 이유는 범죄가 생성되는 과정에서 온라인 게시판이, 또 SNS 플랫폼이 이용됐기 때문일 뿐이다. 하지만 수사기관이나 법원에선 디지털 성범죄를 여전히 현실 범죄보다 경미한 범죄로 인식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수사의 방법은 발전하는 기술, 또 그와 같이 진화하는 범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규제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등도 마찬가지다. "특히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 사건 상당 부분이 사실 온라인을 끼고 있어요. 가해자와 피해자들의 어떤 접촉의 시발점이 온라인인 경우가 많고요. 온라인을 범죄의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이런 방식에 되게 익숙해요. 온라인상에서의 어떤 상황들이 알려지고 그 범죄들이 사회에서 공유가 되면 가해자들은 그 공간 안에서 또 굉장한 학습력을 보입니다." (이은의 성범죄 전문 변호사) 제도와 감시가 현실의 한계를 탓하며 무력한 모습을 탓하는 사이 범죄는 기술의 진화와 함께 이를 발 빠르게 학습한다는 것. 이 갭을 빠르게 줄이지 못한다면 소라넷 이후 N번방, N번방 이후 우울증갤러리와 딥페이크 대화방을 목도했듯, 우리는 더욱 진화한 디지털 성범죄를 또다시 마주하게 될 것이다. 디자인 : 최혜지
한 사람과 9년을 연애하고 결혼했습니다. 아이는 결혼 5년 만에 낳았습니다. 결혼은 35살, 출산은 40살. '만혼화' 그리고 '고령 출산', 대한민국의 저출생 원인을 거론할 때면 자주 언급되는 이 두 단어가 모두 제 이야기였습니다. 오랜 시간 연애를 하며 결혼이란 커다란 관문을 넘을 것인지 고민하던 순간마다 '지금은 일을 더 해야지' 혹은 '이직했으니 자리부터 잡아야지' 같은 생각들로 결정이 미뤄졌습니다. 출산까지 5년이 걸린 이유도 비슷합니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또 하나의 관문 앞에서 기권 선언도, 전력 질주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을 보냈습니다. '좋은 엄마가 될 자신이 없다', '나 자신을 잃을까 두렵다'. 임신을 고민하던 시기 일기장엔 이런 글들이 가득했습니다. 두 살 아들을 둔 엄마가 된 지금, 그때의 일기를 다시 읽으면 고작 2년 전인데도 까마득한 옛날 같습니다. 물리적으로 흘러온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의 강을 건너온 느낌입니다. 제 개인사로 서두를 시작한 이유는 대한민국 저출생 주범처럼 거론되는 '결혼 안 하는 사람', '애 안 낳는 사람'이 저였기 때문입니다. 결혼과 출산을 고민했던 당사자로서 우리 사회의 저출생 대책들이 나의 고민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던가를 생각해 보면,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대한민국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각종 대책들을 쏟아냅니다.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2006년부터 5년마다 '저출산˙고령화사회기본계획'을 내놓고 있습니다. 벌써 4차까지 나왔고 내년이면 5차 계획이 나옵니다. 이 예산들만 합쳐도 수백조 원에 달합니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지난 16년간(2006~2021년) 사용한 저출생 대책 예산은 280조 원입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같은 시기 출산율은 계속 곤두박질치고 있습니다. 가임기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를 의미하는 '합계출산율'은 2013년 1.19명에서 2023년 0.72명까지 떨어졌습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수백조 원의 대책은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역대 저출생 대책 주요 내용은? 이제까지 정부가 내놓은 저출생 대책들은 어떤 게 있었을까요? 역대 저출산 고령사회기본계획을 살펴보면 저출생 문제가 심각해질수록 정부의 대책이 구체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양육 부담 완화와 주거 지원 강화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육아휴직 급여의 경우는 2010년까지 월 50만 원 정액제였는데 2011년 정률제로 변경되며 평균 임금의 40%로 바뀌었고 문재인 정부 시절 통상임금의 80%, 월 최대 150만 원까지 늘어나 현재까지 유지 중입니다. 윤석열 정부는 더 나아가 육아휴직 최초 3개월까진 급여를 최대 250만 원까지 지급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외에도 문재인 정부가 도입한, 만 1세 이하 아이 양육 가구에게 월 30만 원씩(2025년부터 50만 원으로 인상) 지급하는 영아수당 등 양육 부담 완화를 이유로 돈을 주는 정책은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주거 지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요, 박근혜 정부는(3차 기본계획) 행복주택의 신혼부부 공급 비율을 늘리고, 서울 및 수도권 일대에 신혼부부 특화 단지를 만들었습니다. 문재인 정부도 이와 유사한 신혼부부 맞춤형 공공주택 '신혼희망타운' 정책을 내세웠고, 여기에 '다자녀가구 공공임대주택' 사업도 진행하며 둘째, 셋째 출산을 독려하기도 했습니다. 신혼부부, 자녀가 있는 가구를 대상으로 한 공급을 늘리는 것과 집을 구할 때 돈을 낮은 금리로 빌릴 수 있게 하는 대책들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윤석열 정부의 신생아 특례 대출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아이를 낳으면 최저 1%대 금리로 5억 원까지 주택 자금을 빌려주는 대출인데 이 대출의 대상 기준을 부부 합산 연봉 2억까지, 한시적으로 2025년에서 2027년은 2억 5천만 원까지 대상을 넓히기로 했습니다. 고소득 맞벌이 부부에게도 집 마련을 위한 대출 문턱을 낮춘 겁니다. 돈을 주면, 집을 쉽게 구하게 해주면, 결혼하고 아이 낳는다? 정말로 이렇게 육아 지원금을 늘리고, 집 대출 금리를 낮춰주면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까요? 저출생의 원인은 워낙 다양하고 사람마다 또 가정마다 상황은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인 답을 하긴 어렵겠지만, 제가 결혼과 출산을 고민했던 이유를 비춰보면 적극적 유인책이 되긴 어렵단 생각입니다. 저도 두 살 아이를 키우고 있어 부모급여, 아동수당 등을 받고 있습니다. 큰 비중은 아니지만 가계 경제에 일부 보탬이 됩니다. 또 1년 3개월간 육아휴직을 하면서 받았던 육아휴직 급여는 회사 월급이 없는 상태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육아휴직 급여는 말 그대로 '육아휴직 시기'에만 적용됩니다. 각종 수당도 시기가 정해져 있습니다. 부모급여는 24개월까지, 영아수당은 만 1세까지입니다. 아이가 클수록 이런 수당은 줄어듭니다. 보육에서 교육의 단계로 넘어가는 5살이 지나가면 정부의 지원금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교육비 지출이 커집니다. 일시적 지원금이 생애 전반에 걸쳐 진행되는 자녀 양육의 부담과 걱정을 덜진 못합니다. 집을 구할 때 대출 이자를 낮춰주는 것은 어떨까요? 신생아 특례 대출이 총 대출액 6조 원에 달할 만큼 인기가 높았던 만큼 어느 정도 효과는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결국 이 정책도 '빚내서 집 사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다 보니 수억 원의 집값, 또 매달 나가는 대출금을 갚을 여력이 있지 않으면 효용이 없습니다. "혜택이 커질수록 빚이 늘어나는 모순적인 상황이 생기게 된다(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저의 경우는 결혼과 출산을 고민한 가장 큰 이유가 경력 단절이었습니다. 일을 그만두는 경력 단절보다는 출산과 육아로 인해 이제껏 쌓아온 경력이 흔들리는 상황을 우려했던 것 같습니다. 육아휴직을 하며 아이를 키우면서도 복직 후의 삶을 걱정했습니다. 아이와 최대한 함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으면서도, 동료들보다 한 발 두 발 늦어지는 것 같은 불안감이 컸던 게 사실입니다. 한국개발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여성의 경력 단절 우려와 출산율 감소' 보고서에 따르면, 30대 여성 중 '무자녀 여성'의 경력 단절 확률은 2014년 32.7%에서 지난해 9.4%로 급감했지만 '자녀가 있는 여성'의 경력 단절 확률은 27.6%에서 23.6%로 줄어드는 데 그쳤습니다. 아직 자녀가 없는 여성이 출산을 포기하면 경력 단절이 될 가능성을 최소 14%포인트 줄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한국개발연구원은 또 2013~2019년까지 25~34세 여성의 합계출산율이 떨어진 이유 중 40%가 여성의 고용상 불이익 때문으로 조사됐다며, 경력 단절에 대한 우려가 실제 출산율 감소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윤석열 정부가 이번에 발표한 대책 중에선 이런 경력 단절, 고용 불이익에 대한 우려를 직접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내용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가장 맞닿아 있는 대책을 꼽으라면 출산휴가 등으로 자리를 비울 때 일을 분담하는 동료에게 업무 지원금을 준다거나, 1년에 2회, 아이 돌봄을 위해 2주짜리 단기 휴직을 쓸 수 있게 한다는 정도입니다. '야간 어린이집', '외국인 가사도우미' 도입하면 출산율이 늘까? 이외에도 지자체 등에서 일부 추진되고 있는 저출생 대책들 중엔 휴일이나 야간에도 아이를 돌봐주는 어린이집을 늘린다거나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도입해 돌봄 인력을 확대하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아이 돌봄이 늘 고민인 맞벌이 부부에게는 부모의 부재 시 돌봄을 맡아줄 대체 시설과 인력을 늘리는 것이니 '긍정적'인 대책일 순 있지만 '근본적'인 대책인지는 물음표입니다. 오후 4시. 어린이집과 유치원의 기본 보육이 끝나는 시간입니다. 4시 이후는 연장 보육으로 들어갑니다. 제가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이 시간이 그렇게 '분주한' 시간인 줄 몰랐습니다. 노란색 어린이집, 유치원 셔틀버스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유아차를 끌고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가는 부모들이 동네 골목길에 가득하고,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근처에 있는 놀이터에는 집에 가기 전 친구들과 뛰노는 아이들과 이를 지켜보는 부모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저희 아이는 빠르면 5시 반, 늦으면 6시가 넘어 어린이집에서 하원을 합니다. 그나마도 일이 좀 빨리 끝나거나, 회사에서 배려를 해줘서 이 시간 픽업이 가능합니다. 남편과 제가, 둘 다 안 되면 양가 부모를 동원해 하원 전쟁을 펼치는데 6시를 넘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그래도 저녁밥은 집에서 주고 싶어서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저와 같은 마음일 겁니다. 야간 또는 휴일에도 운영하는 어린이집이 늘어나는 것도 좋은 일이고, 부모 대신 아이를 돌봐줄 가사도우미 인력이 많아지는 것도 반가운 일이지만 가장 좋은 건 부모가 아이를 직접 하원시킬 수 있고, 저녁 식사도 함께할 수 있고, 휴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대신 함께 온전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 맞벌이 부부들도 이런 일상이 가능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근본적' 대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근무시간 단축은 왜 저출생 대책으로 고려 안 될까요?" "완전 공감합니다!!! 지난달까지 9-4로 육아 단축근무 했었는데요, 단축근무 끝나고 나니 알겠어요... 그때가 천국이었던 걸...... 솔직한 심정으론 급여 조금 삭감되더라도 2시간 단축을 쭉 할 수 있다면 계속하고 싶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저도 정말 4시에 퇴근하려면 눈코 뜰 새 없이 일하고 후다닥 퇴근했었어요~ 아이 키우는 데 그만한 복지는 없는 것 같아요~" 정부의 저출생 대책 관련 인터넷 글 중엔 이런 이유로 근무시간 단축을 요구하는 내용들이 왕왕 눈에 띕니다. 현행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은 만 8세 이하 자녀를 양육하는 경우 주당 15시간 내에 사용할 수 있고 총 기간은 1년 이내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사용하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지만, 유연근무제나 육아를 위한 근무시간 단축의 폭이 더 넓어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취재 과정에서 기자와 만난 국회 복지위 관계자는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노동시간 단축이라고 보고 있다. 부부 중 한 명은 10시에 출근해서 오후 4시에 퇴근할 수 있도록 제도로 뒷받침하는 방향이 필요하단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를 낳는 건 각자의 선택입니다. '자발적 비출산자', 그러니까 인생의 선택지에 출산과 양육이 없는 사람들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대책보단, 아이를 낳을지 말지 혹은 둘째를 낳을지 말지 고민하는 이들을 유인할 수 있는 대책을 논의하는 게 좀 더 효율적일 겁니다. 당장 성과가 보이는 현금성 지원책도 좋지만 이 '출산경계인구'들의 깊은 고민을 해결하는 근본적 대책을 찾는 노력이 좀 더 본질이 아닐까 싶습니다. <참고 자료> 국회예산정책처 <중·장기 재정 현안 분석 인구위기 대응 전략> 2023.11 국회입법조사처 <제4차 저출산고령사회기본계획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 2022.05 한국개발연구원 <여성의 경력 단절 우려와 출산율 감소 보고서> SBS 8뉴스 <연봉 2.5억까지 신생아 특례..그린벨트도 푼다> 2024.06.19 서울신문 <"저출산 정책 시나리오 바꾸면 합계출산율 1.25명 가능"> 2024.06.20 디자인 : 최혜지
얼마 전 우리나라 낙태, 임신 중지 문제에 대한 취재를 하게 됐습니다. 우리나라는 지난 2019년 헌법재판소가 낙태를 하는 당사자와 이를 돕는 의사 등을 처벌하는 기존의 낙태죄가 헌법에 맞지 않는다며 '헌법 불합치' 결정을 한 바 있습니다. 2020년까지 새 법을 만들라고 주문했지만 그 법은 아직까지도 만들어지지 않았고 햇수로 5년째 대한민국 법엔 낙태를 처벌한다는 규정도, 처벌하지 않는다는 규정도 없는 채로 '입법 공백' 상태입니다. 이 입법 공백이 야기하는 부작용은 시간이 갈수록 더 커지고 있었습니다. 낙태를 돈벌이로 인식하는 일부 산부인과는 낙태가 '비급여'라는 현실을 악용해 환자마다 비용을 다르게 받으며 수익을 얻고 있었고, 불법 낙태약 시장은 위기에 몰린 여성들을 상대로 검증도 되지 않은 약을 개당 수십만 원에 팔며 몸집을 불리고 있었습니다. ▶ 관련 영상 뉴스토리 474회 <낙태죄 폐지 후 방치된 '임신 중지'> 헌재는 5년 전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을 하면서 여성의 건강권과 자기결정권을 중요한 가치로 다뤘습니다. 이 두 가지의 권리가 태아의 생명권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국회에 주문했습니다. 하지만 5년 동안 국회와 정부는 사실상 손을 놓았고, 그 시간이 길어지는 사이 여성의 건강권과 자기결정권, 그리고 태아의 생명권은 어느 하나 제대로 보호받지도 존중받지도 못하는 현실입니다. 이 과제는 새롭게 문을 연 22대 국회의 몫이 됐습니다. 하지만 개원 한 달 동안 여야 어디에서도 대체 입법안은 발의되지 않았고, 정부도 새로운 개정안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오랫동안 지켜본 한 인사는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구도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당장 표와 연결되지 않으면 이 민감한 문제를 누가 먼저 나서서 다루려고 하겠어요?" 5년 전 헌재의 결정이 있기까지 한국도 임신 중지를 법으로 금지한 낙태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여성단체와, 법으로 이를 더 보호해야 한다는 종교, 생명단체 간의 치열한 대립이 있었습니다. 이런 목소리를 대면한 정당 간의 입장 차도 명확했습니다. 이런 현실은 비단 우리나라에만 국한돼 있지 않습니다. 낙태죄를 둘러싼 논쟁은 여성권과 생명 존중권이라는 구도 속에 깊은 역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그 역사적 논쟁은 2024년 전 세계의 정치 외교를 흔드는 현실의 이슈로 다시 부각 중입니다. 미국 대선을 흔드는 '낙태권'…'열세' 바이든의 새로운 돌파구? 미국에선 최근까지도 이런 말이 많았습니다. "내일 당장 선거를 한다면 트럼프가 당선될 것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우위를 점하는 경우가 많기도 했고요, 지난 4년 바이든 정권의 성적이 저조했기 때문도 있습니다. 불법 이민자가 늘고 있는 것, 그리고 먹고살기 힘들어지는 현실도 큰 원인 중에 하나지만 바이든 정권에게 가장 뼈아픈 것은 지지층을 등 돌리게 만든 두 개의 전쟁입니다. 바이든 임기 동안 벌어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그리고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고 '세계 평화군'을 자처하는 미국은 별다른 역할을 못 하고 있단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특히 지지층의 실망과 분노를 이끈 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으로 인한 민간인 희생이 속출한 점인데요, 이들은 약자 보호와 평화 지향, 전쟁 반대를 외치며 바이든 정권의 무능력함을 비판했고 바이든 대통령은 안팎으로 위기에 몰려 있었습니다. 그런 바이든 대통령이 최근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비등한 결과를 보이는 등 역전의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지난달 25일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전국 여론조사 지지율 평균을 분석한 결과 바이든과 트럼프가 46%로 동률을 기록했습니다. 지난 9개월간 여론조사에서 바이든이 계속 지고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의미 있는 결과라고 뉴욕타임스는 해석했는데요.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유죄 평결이 있었기도 했고 경쟁률이 비등해진 이유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주요 배경에는 최근 미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낙태권 논쟁이 있습니다. 한국시간 6월 28일,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바이든과 트럼프의 첫 대선 토론회가 이를 방증합니다. 두 후보는 불법 이민자 이슈, 경제 이슈, 전쟁 이슈 등 다양한 현안에 대한 토론을 벌였는데 이 중엔 낙태권 문제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토론을 주최한 CNN 측은 경제 현안과 관세 문제에 이어 세 번째 질문으로 낙태권에 대한 두 후보의 입장을 물었습니다. 첫 질문은 최근 연방대법원이 사용 승인을 한, 먹는 낙태약과 관련한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이었는데요. 트럼프는 '대법원이 사용을 승인했으니 이를 막을 생각은 없다'고 말하며 지난 2022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1973년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뒤집은 사실을 먼저 꺼내 들었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 주요 발언 "51년 전 로 대 웨이드 판결이 있었고 모든 사람은 그것을 주의 결정으로 돌려주고 싶어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했습니다. 지금은 각 주에서 그것을 통제합니다." "낙태는 급진적입니다. 민주당 주지사가 재임하던 주에선 임신 8개월, 9개월 된 아이의 생명도 앗아갑니다. 이제 이 문제에 대해 국가가 함께 논의하기 위해 모이고 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 주요 발언 "당신이 한 일은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정치인들이 여성 건강에 대한 결정을 내리길 원한다는 생각은 터무니없습니다. 어떤 정치인도 그런 결정을 내려선 안 됩니다. 제가 당선된다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부활시킬 겁니다." ▶ 관련 기사 트럼프 전 대통령-바이든 대통령 토론 전문 두 후보가 설전을 벌인 로 대 웨이드 판결은 1973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임신 중단은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라고 인정한, 낙태권 역사에 있어 중요한 판결입니다. 짧게 이 배경을 살펴보면 1970년 미국 텍사스주에 살던 한 여성이 성폭행을 당해 임신한 후 임신 중단을 하려고 했지만 텍사스에서는 낙태가 불가능했고 이를 이유로 텍사스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당시 여성의 가명이 '로'이고 주정부를 대표했던 검사가 '웨이드', 그래서 '로 대 웨이드' 사건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1973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이 사건을 심리했고 그 결과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로 인정하면서 이후 49년 동안 미국 사회는 이 판결을 근거로 낙태권을 존중해 왔습니다. 그러다 2015년 미국 미시시피주가 15주 이후의 임신 중단을 금지하는 주법을 만들겠다고 나섰고, 여성단체 등이 미시시피주를 상대로 위헌 소송을 제기합니다. 이 사건의 연방대법원 결정이 2022년 6월 나왔습니다. "미국 헌법은 임신 중단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고, 헌법 어느 조항도 임신 중단권을 보호하지 않는다." 연방대법원 스스로가 1973년 자신들이 내린 결정을 뒤집은 겁니다. 이 결정 이후 낙태 허용 여부는 각 주의 판단이 기준이 됐습니다. 14개 주에서 낙태가 금지됐고 7개 주는 낙태 허용 기간을 기존 로 대 웨이드 결정 당시 제시했던 기간보다 짧게 규정했습니다. 이런 결정이 시대 퇴행적이라고 비판하는 시민단체와 민주당은 그 탓을 트럼프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트럼프가 재임 시절 연방대법원 대법관을 보수화시키면서 이런 결정이 났다고 보는 겁니다. 이후 미국 각 주에서 여성의 건강권과 자기결정권이 침해되는 결정들이 잇따르면서 낙태권은 미국 사회의 큰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실제 2022년 로 대 웨이드 폐기 판결 이후 치러졌던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했던 전례가 있기 때문에 바이든 측은 이 낙태권을 반등의 무기로 삼고 있고, 트럼프 측은 여론을 감안해 자극적 발언을 가급적 자제하고 있습니다. 논란이 되는 발언을 강조하며 세간의 이목을 끌어온 트럼프의 행보와는 다른 모습입니다. 낙태권이라는 논쟁이 보수-진보의 신념 대결보단 여성의 권리 보장이라는 측면이 강하고, 시대가 변하면서 낙태(abortion)를 임신 중지, 임신 중단(a termination of pregnancy)이라고 바꿔 부를 만큼 시각은 달라졌습니다. 두 후보 모두 기존의 정치 셈법으로만 접근하긴 어려워진 겁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싸우는 이유 지난 6월 이탈리아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선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과 이탈리아 멜로니 총리의 갈등이 가장 관심사였습니다. 이 두 사람의 갈등이 촉발된 표면적 이유는 낙태권이었습니다. G7 정상회의가 발표한 공동성명에는 기존에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던 낙태권이 빠졌습니다. 공동성명 중 성평등 분야에는 "우리는 포괄적인 성(性) 및 생식 건강과 모두를 위한 권리를 포함해 여성을 위한 적절하고 저렴하며 양질의 보건 서비스에 대한 보편적 접근에 대한 히로시마 정상 선언문의 약속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고만 언급됐는데요. 지난해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의 공동성명에는 '안전하고 합법적인 낙태에 관한 접근성'이라는 문구가 있었는데 최종적으론 빠진 겁니다. 마크롱 대통령은 낙태권에 관한 기자들의 질문에 "프랑스는 여성과 남성이 동등해지는 비전을 갖고 있지만 이것이 모든 정치적 입장과 공유되고 있진 않다"고 말했습니다. 멜로니 총리는 이에 대해 "정상회의 같은 소중한 자리를 이용해 선거 캠페인을 벌이는 것은 심히 잘못된 일"이라고 맞받아쳤습니다. 이 발언들의 배경은 무엇일까요? 프랑스는 지난 3월 세계 최초로 여성의 낙태할 자유를 헌법에 명시했습니다. 프랑스 상·하원의 압도적 찬성에 따른 결정이었는데요. 이번 개헌에 따라 프랑스 헌법 제34조에는 '여성이 자발적으로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는 조건을 법으로 정한다'는 조항이 새로 추가됐습니다. 프랑스는 이미 임신 14주 이내 낙태를 전면 허용하고 있지만 낙태권을 헌법에 명문화한 상징성은 큽니다. 마크롱 대통령은 가결 직후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에 "프랑스의 자부심, 전 세계에 보내는 메시지"라고 적기도 했습니다. 낙태권과 관련해 기념비적인 판결로 거론돼온 미국의 '로 대 웨이드' 판결이 폐기된 후 프랑스의 헌법 명시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마크롱이 낙태권에 이렇게 '진심'을 보이는 여러 배경 중 하나는 현재 직면한 정치적 상황도 큰 몫을 차지합니다. 올해 유럽의회 선거에서 마크롱의 집권 여당인 르네상스가 참패하고 극우 성향의 마린 르펜이 이끄는 국민연합이 단독 1당이 되면서 마크롱은 의회 해산을 발표하고 조기 총선을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총선을 앞두고 여러 여론조사에서 극우 성향의 국민연합이 우세하고 있고 이를 저지하려는 반대 세력의 결집도 이뤄지는 모습입니다. 마크롱은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하는 것이 큰 과제가 된 상황인 셈.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가 마크롱을 향해 정상회의에서 선거운동하지 말라고 비판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멜로니 총리는 순수하기만 할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외신에 따르면 G7 정상회의 공동성명에서 낙태권 명시가 빠진 이유는 멜로니 총리 때문입니다. 그가 이 문구의 삭제를 요청했다고 미국의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보도했습니다. 멜로니는 '기독교의 어머니'를 자처하는 매우 보수적인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1973년 이후 낙태권을 인정하며 임신 12주까지 낙태를 전면 허용하고 있는 이탈리아는 멜로니 총리 집권 이후 낙태권을 제한하는 법안을 잇달아 통과시키고 있습니다. 실제 낙태를 시술해주는 클리닉에 낙태 반대 단체들이 접근할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멜로니 총리는 낙태 반대 입장을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참석한 정상회의에 낙태권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내용이 포함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순 없었을 겁니다. 정상회의 이후 마크롱과 멜로니의 갈등은 전 세계의 화제가 됐고, 낙태 합법화 바람이 불고 있던 유럽의 행보에 반기를 든 것이란 평가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정치적·사회적 합의의 영역이 되버린 낙태권, 우리나라는? 주요 국가들에서 이렇게 낙태권에 대한 논쟁이 확산되면 우리나라도 비껴갈 순 없을 겁니다. 당장은 주요 이슈로 떠오르지 않고 있지만, 앞서 밝혔듯 낙태죄 대체입법이 5년째 이뤄지지 않는 것을 더 이상 방치하긴 어렵습니다. 실제로 지난 5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서 한국 정부는 2019년 헌재 판결 이후 실질적인 제도 변화를 하지 않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지적을 받기도 했습니다. 정부는 지난 2020년 입법 예고했던 낙태죄 대체입법안, 즉 형법 모자보건법 개정안에서 임신 14주까진 전면 허용, 24주까지는 제한적으로 허용하도록 했습니다. 다만 낙태를 처벌하는 조항은 그대로 남겨둬 여성단체와 야당 의원들이 크게 반발했고 그 이후 논의는 진척되지 못했습니다. 지난 5월 14일 스위스에서 열린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 회의에서 한 위원이 한국 정부의 낙태죄 폐지 후 입법 부재와 관련한 지적을 하고 있다. 의약계에 종사하며 임신 중절 의약품에 대해 살펴보고 있는 한 전문가는 임신 중지에 대한 여러 사회적 논의를 보며 이런 소회를 밝혔습니다. "더 이상 과학, 의학의 영역이 아닌 사회적 합의의 영역이 된 것 같다." 임신 중지의 권리를 어디까지 보장할 것이냐를 논의하게 되면 낙태를 어느 기간까지 허용할 것이냐라는 논의가 뒤따르게 됩니다. 의사들도 생각하는 기준이 다 다른 영역인 데다, 이런 기준을 만드는 것이 옳냐 그르냐에 대해서도 의견이 다양합니다. 정치적, 사회적 합의의 방식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런 기준을 만들지 않아 입법 공백, 사실상의 '의료 공백'을 방치하는 것보단 낫단 생각도 듭니다. 2024년은 임신 중지의 권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정하는 중요한 결정의 길목이 될 수 있을까요. 디자인 : 최혜지
# A 씨는 2019년부터 2023년까지 4년 동안 세 번의 실업급여를 받았다. 첫 번째 실업급여는 2019년에 6개월 동안 매달 110만 원씩, 두 번째는 2021년에 두 달 동안 매달 150여만 원, 세 번째는 올해 초부터 석 달간 150만 원씩이었다. # B 씨는 2019년부터 2022년까지 3년에 걸쳐 세 번의 실업급여를 받았다. 첫 번째 실업급여는 2019년 말부터 6개월간 170만 원씩 받았다. 두 번째는 2021년 1월부터 5월까지, 세 번째는 2022년 1월부터 5월까지 두 번 다 매달 140여만 원씩 받았다. 실업급여는 고용보험에 가입된 근로자 또는 자영업자 등이 비자발적인 사유로 인해 실업하게 될 경우 생활 안정과 재취업을 위한 구직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고용보험기금에서 지급하는 돈이다. 근로자의 경우는 실직 전 18개월간 180일 이상 근무하면 자신이 받았던 급여를 기준으로 산정된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다. 수급 기간은 120일에서 최대 270일까지다. A 씨와 B 씨도 이런 지급 기준에 근거해 실업급여를 받았다. A 씨가 실업급여로 받은 돈은 4년간 총 1,400여만 원, B 씨는 2년간 총 2,460여만 원이다. 고용노동부는 5년간 실업급여를 2회 이상 반복 수급하는 경우 수급 횟수를 기준으로 지급액을 최대 50% 감액하는 내용의 고용보험법 개정안을 최근 입법예고 했다. 지난 2021년에도 5년 동안 3회 이상 실업급여 수급 시 수급액 50%를 삭감하는 내용의 개정안이 제출됐지만 노동계 등의 반대 속에 21대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하고 폐기됐고 22대 국회 출범에 맞춰 조금 더 강화된 내용의 개정안이 다시 제출된 것. 이 개정안 내용을 근거로 하면 A 씨와 B 씨도 지급액 삭감이 필요한 반복 수급자다. 실업급여는 앞서 말한 것처럼 고용보험기금에서 지급된다. 고용보험기금은 노사가 함께 마련하는 돈이다. 당신이 근로자라면 매달 고용보험기금에 월급의 일부를 낸다. '나는 한 번도 실업급여를 받은 적이 없는데 누구는 여러 번 반복해서 받는다?' 이런 생각을 하면 A 씨와 B 씨 같은 반복 수급자가 불편하게 느껴진다. 자, 여기서 A 씨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겠다. # A 씨는 2013년 대학 졸업 후 2017년 첫 직장을 구했다. 2년 계약직이었다. 그전까진 아버지 일을 잠깐 도왔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첫 직장 2년 계약이 만료된 후 2019년부터 6개월 동안 매달 110만 원씩 실업급여를 받았다. 재취업을 위한 구직 활동을 했지만 6개월 동안 원서를 넣은 곳에서 다 떨어졌다. 한 달, 두 달짜리 일자리를 제안받은 적도 있지만 좀 더 안정적인 취업을 하고 싶었다. 두 번째 직장은 대기업이었다. 특정 프로젝트를 위한 팀이었다. 하지만 6개월 계약직 형태였다. 회사는 A 씨가 근무하는 걸 보고 계약 기간을 연장할지 말지 결정하자고 했다. 한 달 정도 기간이 늘어났지만 결국 사업이 축소되면서 A 씨는 퇴사해야 했다. 이후 두 달 동안 150만 원씩 실업급여를 받았다. "실업급여를 5개월 정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됐지만" 취업을 서둘러 했다. 세 번째 직장은 공공기관이었다. 하지만 여기도 10개월 계약직이었다. 1년 단위 사업 진행을 위한 채용이라고 했다. 지난해 12월 계약이 만료됐다. 세 번째 실업급여 수급으로 2024년을 맞았다. 기자가 A 씨를 만난 건 지난해 12월이었다. 실업급여를 여러 번 받아본 사례자를 찾다가 만나게 됐다. A 씨에게 '현재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단 좀 길게 다닐 수 있는 곳에 들어가는 거, 그게 일단 목표인 것 같아요." ▶ 관련 영상 : 뉴스토리 453회 <실업급여 vs 시럽급여> 4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1,400여만 원의 실업급여를 수급한 A 씨. 그리고 대학 졸업 후 단기 계약직 일자리를 전전하며 퇴사와 재취업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A 씨.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냐에 따라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A 씨가 실업급여 반복 수급자가 된 현실은 과연 누구의 탓일까. B 씨의 이야기도 좀 더 해보자. # 정규직이었던 B 씨는 2019년 말 3년간 다니던 회사를 퇴사했다. "회사가 어려워져서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데 권고사직을 해줄 테니 나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후 6개월 동안 한 달에 170만 원씩 실업급여를 받았다. 재취업을 하려고 했지만 코로나 사태로 쉽지 않았다. 그러다 지인이 운영하는 회사에 이른바 '유령 직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실업급여를 받기 위한 허위 취업이었다. 실업급여 수급을 위한 기본 기간인 180일을 채우고 권고사직 처리를 했다. 이후 5개월간 매달 140만 원씩 720만 원을 받았다. 지인이 운영하는 또 다른 회사에서 같은 수법으로 이듬해 1월부터 5개월간 또 720만 원을 받았다. 세 번의 실업급여 중 첫 번째는 실직으로 인해 받은 게 맞지만 나머지는 부정 수급이었다. A 씨와 B 씨의 사례를 표면적으로만 봤을 때 비슷한 반복 수급자처럼 보이지만 각자의 사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늘과 땅 차이다. B 씨는 정부와 여당이 '일벌백계' 필요성을 강조하는 실업급여 부정 수급자가 맞다. 실제 B 씨는 처벌을 받았다. 그의 부정 수급 사실을 알고 있던 지인이 고용청에 신고했고, 부당하게 수령한 실업급여 원금 1,400여만 원은 물론 3배에 달하는 추징금까지 총 4,300여만 원을 내야 했다. 실업급여를 부정 수급하면 제재 처분이 두 가지다. 5배 이내의 추가 징수금을 내는 행정 처분이 있고, 악의적이고 반복적일 경우는 형사 처벌도 받을 수 있다. 5년 이하의 징역이나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이다. B 씨는 추징금을 즉납하고 반성의 뜻을 적극적으로 알린 덕에 검찰로 송치되지는 않았다. B 씨는 어쩌다 부정 수급의 유혹에 빠져들게 됐을까. 기자의 질문에 그는 예상 밖의 답을 내놨다. "저 처음에 잘렸을 때 회사에서 먼저 권고사직을 제안했잖아요. 그게 실업급여 받게 해준다는 뜻이었거든요. 그때 '아 이런 게 되는구나' 알게 됐고요. 실업급여 받으려면 구직 활동을 매달 열심히 했다는 증거를 내야 하거든요? 제 전공이나 분야랑 무관한 곳에 지원을 막 해도 아무 문제가 없더라고요. 다른 사람들도 실업급여를 최대한 많이 받으려고 자신을 뽑을 것 같지 않은 회사에 막 지원하더라고요. 저도 그렇게 했었고... 지인 회사에 직원으로 허위 등록한 것도, 4대 보험 가입하고 하면 고용청에서 현장 조사까지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거든요." 실업급여를 받은 경험을 통해 제도의 허점을 알게 됐고 결국 그 허점을 이용해 부정 수급을 한 셈이다. B 씨의 잘못을 두둔할 이유는 없지만 제도의 빈틈이 부정을 부추기는 것도 자명한 현실이었다. 실업급여 '반복 수급=부정 수급(?)' 일반화가 위험한 이유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2024년 4월 노동시장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실업급여 지급액은 1조 원을 돌파했다. 4월을 기준으로 보면 2022년 9,722억 원, 2023년 9,617억 원에 비해 크게 늘었다. 수급자는 66만 1천 명으로 2023년 4월과 비교해 4천여 명 늘었다. 월별 실업급여 지급액이 최초로 1조 원을 넘은 것은 코로나가 한창이었던 2020년 5월이었다. 1995년 고용보험제도 도입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1조 원이 넘는 경우는 왕왕 나오고 있다. 실업급여 지급액이 우상향 곡선을 보이면서 실업급여 재정 고갈 우려도 커지고 있다. 실업급여의 재원이 되는 고용보험기금의 재정수지는 2019년 1조 3,802억 원, 2022년은 5,650억 원 적자를 기록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지난해 10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적자가 누적되면서 실업급여 계정의 재정 건전성이 크게 악화됐다"고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여기에 실업급여 부정 수급이 한 해 300억 원에 달한다(2023년)는 통계, 5년간 3회 이상 실업급여를 수급한 반복 수급자가 10만 명(2022년)을 넘어섰다는 통계 등까지 더해지며 실업급여를 여러 번, 자주 수급한 사람은 부정 수급자라는 인식도 짙어졌다. 정부가 반복 수급을 제한하는 개정안을 내놓은 배경에도 이런 인식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반복 수급이 모두 부정 수급은 아니다. 앞서 살펴본 A 씨의 반복 수급은 불안정한 고용시장이 만들어낸 폐해, B 씨의 반복 수급은 실업급여를 악용한 부정의 현실이다. A 씨에게 실업급여는 비자발적인 퇴사와 재취업을 반복하는 동안 생계를 이어가고 또 다른 도전을 할 수 있게 하는 든든한 동아줄이었다. B 씨에게 실업급여는 "못 먹는 놈이 바보"라는 생각이 드는 눈먼 돈, 달달한 '시럽' 같은 공돈이었다. 실업급여 수급 자격 강화 vs. 불안정한 고용 구조 바꾸기 21대 국회가 막을 내리면서 실업급여 개편을 골자로 한 각종 법안들도 모두 폐기됐다. 고용노동부가 반복 수급자의 지급액을 삭감하는 개정안을 다시 내놨으니 지난 국회에서 발의됐던 실업급여 개편 법안들도 속속 재발의될 것으로 보인다. 21대 국회에 발의된 고용보험법 개정안들은 반복 수급자의 지금액을 삭감하는 것과 더불어 ▲현재 최저임금 80%로 설정돼 있는 실업급여 하한액을 없애거나 낮추고 ▲실업급여 수급을 위한 최소 근무 기간 180일을 10개월 또는 1년으로 늘리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반복 수급을 제한하는 것을 넘어 실업급여를 수급할 수 있는 자격 자체를 지금보다 강화하자는 것이다. 사실 노동계가 반복 수급자 지급액 삭감보다 더 민감하게 생각하는 건 하한액 폐지다. 실업급여(구직급여일액)는 실직 전 3개월간 평균 임금의 60%를 지급한다. 그런데 이 금액이 최저임금의 80%보다 적을 경우 최저임금의 80%를 지급한다. 최저임금이 매년 오를수록 이 하한액도 상승하는데 현재 우리나라 실업급여 수급자 10명 중 7명이 이 하한액을 적용받고 있다고 한다. 이 현상을 보는 시각도 양쪽으로 갈린다. "취약계층을 보호하기 위해 하한액 제도를 도입한 것인데 전체 수급자의 70%가 적용받는 건 합리적이지 않다(임영태 경총 고용사회본부장)"는 의견과 "그만큼 노동시장 구조가 취약하다는 증거인데, 최소한도를 없앤다는 건 저임금 불안정 노동자들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다(이정훈 민노총 정책국장)"는 의견이 충돌한다. 실업급여를 더 주냐 덜 주냐, 자격 조건을 강화하느냐 마느냐의 논의보다 한국 사회의 불안정한 고용 구조에 대한 개편이 선행돼야 한다는 근본적인 주장도 있다. 단기 일자리를 전전하지 않아도 되는 안정적인 고용 구조가 갖춰지면 실업급여를 자주, 반복적으로 받을 일 자체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OECD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가 평균 근속 기간, 그러니까 한 노동자가 하나의 직장에서 평균적으로 머무는 기간이 가장 짧습니다. 늘 가장 짧았어요. 그만큼 우리나라 노동 시장이 불안한 겁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자주 실업을 하게 되는 상황인 거예요. 반복 수급이 늘어나는 건 어떤 측면에서 보면 불안정한 일자리에 있지만 여전히 취업을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어요. 열악한 노동시장에서 분투하고 있다는 거죠. 모든 반복 수급자를 도덕적 해이로 보고 정책을 펼칠 것이 아니라 이렇게 분투하는 분들이 가능하면 더 나은 일자리로 취업할 수 있게끔 생계 지원과 직업 훈련 등이 더해져야 하는 게 맞는 거죠." - 남재욱ㅣ한국교원대 교육정책전문대학원 교수 전국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도 최근 발표한 성명을 통해 "5년간 전체 실업급여 지급 건수 중 부정 수급 비중은 0.29~0.66% 사이에 불과했고, 금액으로 봐도 전체 실업급여 지급액 중 0.19~0.6%에 불과하다"며 1%도 되지 않는 부정 수급 사례로 제도의 취지를 훼손해선 안 된다고 우려했다. 실업급여 개편은 윤석열 정부가 힘주고 있는 노동시장 개혁 과제 중 하나다. 지난 국회에서 논의가 공전을 거듭하며 근본적인 고용보험법 개정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법 개정이 없어도 개편이 가능한 부분은 손질이 이뤄지고 있다. 하루 3시간 이하로 일하는 단시간 근로자의 경우 근로시간을 4시간으로 간주하던 근로시간 최소 기준을 지난해 12월부터 폐지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 변화로 단시간 근로자의 경우 월 실업급여 수령 가능 금액이 절반까지 줄었다. 부정 수급, 꼼수 수급 또는 악의적 반복 수급을 옳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실업을 한 노동자가 다시 노동시장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노사가 함께 마련하는 돈이 실업급여 재원이다. 이 돈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 쓰이기 위해서라도 부정은 막아야 한다. 하지만 일부의 부정과 일탈을 막는다고 고용 안전망을 헐겁게 하는 일 또한 경계가 필요하다. 달달한 시럽과 든든한 동아줄 사이, 어느 쪽에도 지나치게 치우지지 않는 어려운 줄타기가 필요해 보인다. 디자인 : 최혜지
"'공복(公僕)'이란 표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취재 중 만난 현직 공무원에게 물었다. 대한민국 헌법 7조는 공무원을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 규정하고 있다. 이런 의미를 담아 흔히 공무원을 국가, 국민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란 의미로 '공복'이라고 왕왕 표현해 왔다. "좋진 않아요. 노예, 종처럼 부려도 된다는 것 같아서." 최근 공무원 사회에선 봉사자보단 종, 노예라는 자조가 나온다. 공무원단체 기자회견에서 스스로를 '공(公)노비'라 부르는 걸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100대 1을 넘나들던 공무원 시험 경쟁률은 올해 21.8대 1(9급 국가직)까지 떨어졌다. 한 때 '신의 직장'은 '공노비'로 추락 중이다. "몇 년 전부터 도는 말이 탈출이 지능 순이라고, 똑똑한 사람이 먼저 탈출해서 다른 일 찾는 거라고 저희끼리 말하거든요. 공무원으로 들어왔을 땐 뭔가 사명감도 있고 보람도 찾고 이런 게 있는데 일을 하면 전혀 그런 걸 못 느껴요. 보람이 없어요. 내가 이 일을 과연 이렇게 20, 30년 동안 할 수 있을까?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 새 직장 찾자 이러면서 좀 많이 도망가는 것 같아요." (김영운 전국공무원노조 청년위원장(7급 지방직)) 실제 입직한 지 5년이 되지 않은 저연차 공무원들의 퇴직은 꾸준히 늘어 전체 퇴직 공무원의 23.7%에 육박하고 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지난 2월 발간한 <신규 임용 공무원의 퇴직 증가 문제> 보고서를 통해 "신규 임용 공무원들의 조기 퇴직이 전체 공무원 퇴직 증가를 견인하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며 "일시적 현상이 아닌 구조적으로 접근해야 할 심각한 사안"이라고 분석했다. 지난 4일 방영된 <뉴스토리> '공무원 퇴사합니다-그들이 떠나는 이유'를 취재하면서 악성민원에 시달리는 공무원들의 현실을 조명하고, 저연차 공무원들이 공직을 떠나는 이유에 대해 살펴본 바 있다. (▶관련 영상: 뉴스토리 469회 <공무원 퇴사합니다…그들이 떠나는 이유>) 기자는 취재 과정에서 15명의 전·현직 공무원들을 대면, 전화, 이메일 인터뷰했다. 대부분이 입직한 지 10년이 되지 않은 공무원들이었고 1명은 이직 준비 중, 2명은 이미 공직을 떠난 상태였다. 이들과 대화하며 '공무원 철밥통이 깨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철밥통은 '잘리지 않고 정년까지 자리를 보전할 수 있다'는 의미로 쓰인다. 외형적으로 이 전제는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균열은 철밥통 안쪽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이번 주 뉴스쉽에서는 이 균열의 원인을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6년 차 8급, 2년 차 9급 공무원의 지난달 월급은? 여기 두 사람의 급여명세서가 있다. 한 사람은 올해 6년 차 8급 국가직 공무원, 또 한 사람은 2년 차 9급 지방직 공무원이다. 한 정부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8급 공무원 A 씨는 지난달 월급으로 220만 2,190원을 받았다. 시간외수당 등 각종 수당과 식비 등이 포함된 금액. 세전 수령액 261만여 원을 기준으로 한 A 씨의 연봉은 3,000만 원 초반대다. A 씨는 6년 전 9급 국가직 공무원으로 입직해 올해 8급 5호봉이다. 6년 전 월급은 세후 기준 160만 원대. 지난 6년 동안 매년 10만 원씩 올랐다. 비수도권의 한 구청에서 일하고 있는 9급 공무원 B 씨는 지난달 188만 8,860원을 받았다. 시간외수당, 특수직무수당 등을 다 포함한 금액이다. 올해 최저임금은 시간당 9,860원, 월급 기준으로는 206만 740원이다. B 씨의 지난달 월급은 최저임금에 미치지 못한 셈이다. 채용사이트 사람인이 2022년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중소기업 대졸 신입 연봉은 2,881만 원, 고졸은 2,634만 원이었다. 이 금액은 세전 기본급을 기준으로 조사 됐다. 6년 차 8급 A 씨의 기본급은 216만 원, 2년 차 9급 B 씨의 기본급은 192만 원. 두 사람 모두 2년 전 중소기업 대졸, 고졸 신입 연봉에 미치지 못한다. 공무원노조에 따르면 민간과의 보수 차이는 점점 더 벌어져 현재는 민간기업 임금 기준 80% 초반대 수준이다. 한국행정연구원 2023년 '공직생활실태조사'에 따르면 공무원의 보수 수준에 대한 만족도는 5점 만점 중 2.27점에 불과했고, 특히 8급과 9급 공무원은 2.13점으로 가장 낮았다. "제가 9급 때 160만 원을 받았는데 서울로 발령나서 자취를 해야 했거든요. 그때 월세가 60만 원이었어요. 공과금 같은 거 내고 나면 한 80만 원 남았고 거기서 절반은 또 식비. 적금을 25만 원씩 넣었더니 15만 원 남더라고요. 그걸로 한 달 쥐 죽은 듯이 살았어요. 교통비 아까워서 걸어 다니고요... 지금 1년에 딱 10만 원씩 오른 거잖아요. 절대 물가 상승률을 따라잡을 수 없어요. 이 월급으로 어떻게 결혼해서 집 사고 애를 먹여 살리지라는 생각이 항상 많이 들어요." (8급 공무원 A 씨) A 씨는 현재 이직을 준비하고 있다. 최근 대기업 공채 두 곳에 지원했지만 떨어졌고, 지난해에는 공기업 채용에도 지원했었다. A 씨와 함께 입직한 동기 160명 중 20명은 이미 그만뒀다. 제2의 직장이 정해져서 그만둔 경우도 있지만 "네일숍에서 일하거나 그냥 편의점 아르바이트 하는" 동기들도 적지 않다. A 씨는 "아직 그렇게 그만 둘 용기는 없어서" 일과 이직 준비를 병행하고 있다. 월급뿐만 아니라 수당 산정 기준에 대한 문제 제기도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시간외근로수당(초과근무)의 경우 일반 노동자는 근로기준법 56조에 따라 통상임금의 1.5배(100분의 50)를 가산하여 지급한다. 통상임금은 고정적으로 지급되는 수당 등이 포함된 임금을 말한다. 하지만 공무원의 수당엔 근로기준법이 아닌 '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을 적용한다. 이 규정에 따르면 시간외근무수당은 매 시간에 대해 '봉급기준액×1/209×150%'을 지급한다고 돼있는데, 이 봉급 기준액은 기준 호봉 봉급액의 55%라고 돼 있다. 쉽게 말해, 호봉액이 100만 원이라고 치면 55만 원으로 깎인 금액을 기준으로 수당을 계산해 준다는 뜻이다. 공무원노조는 "근로기준법 대비 55% 수준에 불과하다"며 공무원 수당 규정 대신 근로기준법을 적용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공무원의 급여 수준이 민간보다 나았던 적은 없다. 과거에도 박봉의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버틸 이유가 있었다. 오늘 받는 월급은 적어도 미래에 받을 '공무원연금'이라는 든든한 보험이 있었다. 그런데 기자가 만난 공무원들은 연금 받기 위해 내는 돈이 아깝다고 했다. 왜일까? 부담만 되는 연금 "선배들 연금 왜 내줘야 하나요?" 앞서 살펴봤던 A 씨와 B 씨의 급여명세서의 공제 내역을 보면 '기여금'이라는 항목이 가장 액수가 크다. 기여금은 훗날 공무원연금을 받기 위해 매달 내야 하는 돈으로 기준소득월액의 9%에 해당한다. A 씨는 24만여 원, B 씨는 22만여 원을 지난달 기여금으로 냈다. 2016년 공무원연금 개혁으로 기여금 부담률은 상승하고 연금 지급액은 떨어졌다. 선배들보다 더 내는데 덜 받게 되는 상황이 된 셈. 게다가 향후 공무원연금 등 직역 연금에 대한 국고 부담이 커지게 돼 추가 개혁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는 만큼 불안정성은 더 커질 수 있다. 저연차 공무원들 입장에선 연금을 기반으로 안정적 노후 설계를 하기 어려워졌다. "언젠가 저 사람이 퇴직하면 저 사람 연금 내가 내줘야 되는 거잖아요. 연금이라는 게 다 퇴직자들을 위해서 내는 건데, 저는 사실 나중에 연금을 받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거든요. 가뜩이나 박봉인 월급에서 몇십만 원씩 매달 떼어 가는 게 부담이 커요. 차라리 기여금 안 내고 월급 더 받으면 좋겠단 생각도 들어요." (9급 지방직 공무원) "저는 한 달에 35~36만 원씩 기여금으로 내거든요. 연봉 자체가 사실 굉장히 적은데 35만 원씩 공제되는 게 부담되죠. 사람들은 '공무원은 연금 많이 받잖아' 이러지만 사실 받는 돈은 많이 줄었고 내는 돈만 늘었어요." (6급 세무직 공무원) 국민연금에서 나타나는 세대 갈등이 공무원연금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김준모 건국대 행정학과 교수는 "과거에 은퇴한 분들은 동일 직급에서 은퇴하더라도 2024년 기준으로 훨씬 많은 연금을 받고 있고 앞으로도 그 기득권이 보호가 된다. 그러다 보니 새로 입직을 하는 젊은 공무원들 입장에서는 내는 것은 많은데 혜택은 국민연금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노후 안정성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갖게 된 것이고 그것이 바로 처우 문제에 대한 불만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사람은 바뀌는데 일하는 방식은 그대로 무조건 돈을 많이 받겠다, 최고의 대우를 해 달라는 건 아니지만 낮은 보수와 불안해진 노후 안정성은 젊은 공무원들의 노동 의욕을 꺾는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었다. 기자가 만난 저연차 공무원들은 처우는 이렇게 열악하게 변해가는데 달라지지 않는 게 하나 있다고 했다. 바로 공직 사회의 일하는 방식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행정 서비스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공무원의 업무는 과거보다 다양해졌다고 한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민원 현장의 경우도 악성 민원이 많아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 배경에는 민원 자체가 과거에 비해 복합화되고, 대민 서비스를 강화하겠다며 민원을 받는 창구는 크게 늘어난 현실이 있다. 민원이 복합화되고 국민이 요구하는 행정서비스 수준이 높아졌다면 공직 사회가 일하는 방식도 변화하고 발전해야 하는데 저연차 공무원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제가 9급으로 입직하고 1년이 안 됐을 때 인허가 담당을 맡았는데, 인허가가 100% 재산권이랑 관련된 일이거든요. 법 자체가 세세하게 쓰여 있지가 않아요. 그런데 인수인계를 3시간인가 4시간 받고 바로 업무를 시작했어요. 당장 처리해야 하는 인허가 건이 있으면 아무리 제가 꼼꼼하게 확인을 해도 '이게 맞는 건가. 내가 실수해서 재산 피해받으면 어떡하지'라는 부담이 있었어요. 제 선임은 7급이었는데 사람이 부족해서 9급 신규였던 제가 그 자리를 맡게 된 거죠." (8년 차에 퇴직한 30대 전 공무원) "연수원에서 민원인을 어떻게 응대해야 하는지, 민원 전화는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이런 거 가르쳐주지 않았거든요. 옆에서 하는 거 보고 따라 하면서 배웠어요. 전임이 자료를 만들어 놓고 갔으면 정말 감사한 거고, 대부분은 그냥 맨땅에 헤딩해요. 신규 직원들이 격무 부서에 가면, 다들 바쁘니까 더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더 힘든 거예요." (7급 사회복지 공무원) '일단 부딪히고 겪어봐라'는 식의 일하는 방식은 과거엔 효율성이 좋다는 평가를 받았을지 몰라도 새롭게 조직에 들어오는 젊은 직원들에겐 부담이 되고 있다. 처음에 힘든 것을 경험해 봐야 빨리 배운다는 취지로 격무 부서, 민원 일선 현장에 경험이 부족한 저연차 공무원을 배치해 온 관행도 신규 임용 공무원들의 이탈을 부추겼다는 평가가 나온다. 조직의 일하는 방식에 환멸을 느껴 입직 6개월 만에 퇴직했다는 한 30대 전 공무원은 "무기 없이 전쟁 최전선에 배치되는 이등병 느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공무원도 노동자다" vs. "공무원은 공복답게" 정부는 지난 3월 '공무원 업무 집중 여건 조성 방안'이라며 저연차 공무원 이탈을 막기 위한 대책을 내놨다. 승진을 더 빠르게 할 수 있게 해 주고, 육아휴직 등을 더 적극적으로 쓸 수 있게 해 주고, 자기 계발을 위해 교육 기회도 더 적극적으로 주겠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하지만 현장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공무원노조는 "돈 안 드는 대책만 있다"고 폄하하기도 했다. 낮은 보수, 불안한 연금, 낡은 조직에 대한 근본 대책은 없다는 이야기다. 공무원노조는 인력 충원과 보수 정상화 등을 주장하고 있다. 현장의 업무 과중은 실제 일하는 인력이 적기 때문이고, 낮은 수준의 급여가 이탈의 주요 원인이라는 이야기다. 근로기준법을 적용해 초과근무수당 등도 일반 노동자와 같은 기준으로 적용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런 주장의 근간에는 '공무원도 노동자'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공무원은 국가공무원법, 지방공무원법을 우선 적용받지만 근로기준법이 말하는 노동자에 포함된다고 우리 법원은 보고 있다. 이 판결은 공무원의 노동자성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노동단체 주장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공무원의 보수를 높이고 인력을 늘리는 일은 국민의 세금과 밀접하게 연결된 일인 만큼 국민 정서가 그만큼 중요하다. 그래서 녹록지 않다. 공무원단체는 공무원이 적다고 말하지만 공무원 인력을 지금보다 더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는 게 사실이다. 윤석열 정부도 매년 1%씩 공무원 인력을 줄이겠다고 공언한 상태. 김준모 교수는 "공무원 숫자를 늘린다는 건 어느 나라나 연금까지 책임져야 되는 사회적 책임이 수반되는 활동이다. 그러다 보니 경제가 어려워질 때는 공무원 수의 감축은 논의가 될지언정 증원 논의는 쉽지 않다. 인구 구조 변화에 따라서 공무원 정원은 어떤 방식으로 조절을 해야 하는지 제도 개선을 숙의할 때"라고 조언했다. 공무원의 복지, 업무 환경에 대한 기사를 쓰면 댓글로 확인되는 여론의 반응은 사실 부정적인 경우가 많다. 그런 모습을 보면 대중의 마음속엔 공무원은 나와 같은 노동자이기보단 나를 위해 좀 더 헌신적으로 일해주길 바라는 봉사자에 가까운 듯하다. 물론 지금의 행정 서비스엔 개선돼야 할 점도 많고, 여전히 부패하고 게으른 일부 공무원들에 대한 불만은 끊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일부의 탈선이 전체를 대변할 수 없고, 공무원이 자신의 일에 좀 더 만족하고 사명감을 가져야 그들이 제공하는 공적 서비스의 질도 나아질 것이다. '공무원이 철밥통 지키려 혈안이구나'라는 관점보다는 '우리 사회의 공적 서비스 품질을 더 높일 수 없을까'라는 관점으로 한번 바라보는 건 어떨까. 디자인 : 최혜지
2024년 3월 9일, 비 오는 금요일 저녁. 브레다 씨 부부는 허름한 호텔 주차장에 들어섰다. 미국 조지아주의 작은 도시 롬(Rome)에 있는 호텔까지 그들은 1시간 반 정도 장대비를 뚫고 달려왔다. "방이 거의 다 찼어요. 지금 결제하면 하루에 149달러예요. 다른 호텔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프런트에 있는 호텔 직원은 연신 울리는 전화를 받으며 같은 말을 반복 중이었다. 브레다 씨 부부가 예약할 때보다 50달러 정도 오른 가격이었다. "미리 예약하길 잘했네." 그들은 말했다. "제가 입은 멋진 티셔츠를 한 번 볼래요?" 한국에서 온 기자라고 밝히자 브레다 씨는 양손에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녀가 입은 상의에는 '2020 It's not over yet'이라고 적혀 있었다. 무슨 의미냐고 묻자 부부는 동시에 답했다. "2020년 대선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트럼프 지지자인 브레다 씨가 지난 대선 결과를 불복하는 내용이 적힌 티셔츠를 취재진에게 보여주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극렬 지지층. 그들을 미국에선 마가(MAGA)라고 부른다. 트럼프의 대선 구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의 앞 글자를 딴 이름이다.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는 바이든에게 패했다. 하지만 트럼프와 지지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2021년 1월 6일, 초유의 국회의사당 난입 사태가 일어났다. 트럼프는 대선 불복 혐의로 수사를 받았고 현재 재판을 앞두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지난 대선을 "도둑맞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기자가 이날 호텔에서 브레다 씨 부부를 만나게 된 건 다음 날 예정된 트럼프의 선거 유세 때문이었다. 오는 11월 대선에서 바이든과 다시 맞붙게 된 트럼프는 매 주말마다 미국 각 지역을 돌며 유세를 하고 있다. 브레다 씨 부부는 유세에 참석하기 위해 하루 전에 이곳에 왔다. 이날 호텔 투숙객 대다수는 브레다 씨와 같은 트럼프 지지자들이었다. 다음 날 트럼프 유세는 오후 3시 시작이었다. 그것도 지역 의원이나 공화당 관계자들의 찬조 연설이 3시부터였던 거고, 트럼프는 오후 5시가 넘어서 연설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실제로 트럼프는 스케줄이 지연돼 오후 6시가 돼서야 등장했다.) 그럼에도 지지자들 대부분은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서 행사장 앞에 줄을 섰다. 행사장 안으로 들어가기 전 보안 검색을 하는 검색대 앞에는 간이 의자, 담요, 깔개 등 오랜 시간 사람들이 기다린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기자도 취재를 위해 낮 1시쯤 유세장에 도착했는데 이미 4천500석 규모의 행사장이 꽉 차 2층 가장 끝자리, 그것도 계단 난간에 겨우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지난달 9일 미국 조지아주 롬에서 열린 트럼프 전 대통령의 선거 유세 현장 취재진은 고도화된 인공지능(AI) 기술이 선거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미국 대선 현장과 유권자들을 취재하기 위해 3월 초 미국을 찾았다. 이미 미국에서는 지난 1월 바이든 대통령의 목소리로 민주당원들에게 걸려온 이른바 '사칭 전화 사건(fake robo call)'으로 선거에 미칠 인공지능 기술의 위협에 대한 우려가 커져 있었다. 이 사칭 전화는 바이든 대통령이 뉴햄프셔주 민주당 예비경선 전날 선거인단에게 투표를 하지 말라고 이야기한 내용인데, 수사 결과 '일레븐랩스'라는 업체의 생성형 음성 AI 기술을 이용해 만든 가짜였다. 이외에도 트럼프, 바이든을 주인공으로 AI가 만들어낸 가짜 사진, 영상 등은 이미 SNS에 넘쳐나고 있다. 고령의 나이로 건강 논란이 늘 이슈인 바이든이 서점에서 치매 책을 보고 있는 영상, 수십 개의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앞두고 있는 트럼프가 경찰에 체포돼 재판을 받고 있는 사진 등 이미 수년 전에 만들어져 계속 회자되고 있는 딥페이크는 물론, 선거를 앞두고 새롭게 확산되고 있는 가짜 콘텐츠들도 속속 나오는 상황. 최근 1년여간 AI 기술이 급진적으로 고도화되면서 딥페이크 기술도 더욱 교묘해졌고, 육안으로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의 AI 생성 콘텐츠가 늘고 있다는 건 이젠 당연한 이야기다. 취재진이 미국까지 찾아간 이유는 이런 교묘한 가짜들이 선거판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유권자들은 정말 영향을 받고 있는지, 그리고 누가 이런 것을 만들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트럼프 유세 현장을 직접 찾아간 이유는 트럼프 지지층 내부에서 이런 가짜 콘텐츠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확산되고 있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대선 앞둔 미국, '딥페이크'는 유권자를 흔들고 있을까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흑인들과 어깨동무를 한 채 화기애애한 모습의 사진. 이 사진은 생성형 AI 기술로 만든 '가짜'다. 이 사진에 등장한 사람들이 실제 존재하는지 알 수 없고 당연히 트럼프도 이런 사진을 찍은 일이 없다. 트럼프 지지자인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가 만든 딥페이크 사진 AI가 만든 사진인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탐지 사이트(truemedia.org)를 이용해 검증해 보니 '100% AI가 생성한 이미지'라는 결과가 나왔다. 가짜라는 걸 알고 보니 어색한 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트럼프의 손가락 끝과 여성의 팔이 닿은 부분의 피부색이 다르다거나, 트럼프의 왼손 두 번째 손가락에 손톱이 없다거나. 하지만 의심 없이 언뜻 보면 가짜라는 걸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이 사진이 AI가 만든 딥페이크임을 추론할 수 있는 오류들. 손가락 끝과 맞닿은 팔의 피부색이 다르거나, 손가락 끝이 잘려 있거나 손톱이 없는 등의 오류가 보인다. 이 사진은 지난해 말부터 트럼프 지지층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는 대표적 사진이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을까? 외신 보도 등을 기반으로 추적해 보니, 지난해 11월 29일 미국 플로리다 잭슨빌 지역의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 '마크 케이(Mark Kaye)'의 페이스북에 처음 등장했다. 마크 케이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극우 성향의 방송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 사진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공개하지 않았다. 다만 이런 글을 함께 올렸다. "미국 전역의 흑인 유권자들은 민주당이 얼마나 인종 차별적이고 분열적인지 깨닫고 있습니다. (중략) 트럼프 대통령은 이제 BLM(Black Lives Matter의 줄임말·흑인인권운동)은 물론 다른 모든 이들이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BLM 운동을 이끌었던 흑인 지도자가 트럼프를 지지했다는 한 매체의 기사를 인용하며 쓴 글인데, 이 글과 함께 가짜 사진을 올린 것. "정말 좋은 뉴스", "더 많은 사람들이 이걸 봤으면 좋겠다"는 댓글들도 이어졌다. 이 사진이 가짜라는 외신 보도들이 나오고 나서야 'AI가 만든 가짜이니 속지 말라는 비판적 댓글들도 달렸지만 그전까진 이 사진이 가짜일 수 있다고 의심하는 내용은 거의 없었다. 마크 케이는 언론 인터뷰에서 "나는 이 사진이 정확하다고 말한 적 없다"며 "페이스북 페이지에 있는 사진 한 장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투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게시물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문제"라고 말했다. 마크 케이는 이 논란으로 소속돼 있던 방송사에서 해고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운영하는 인공지능 정책 감시기구 'OECD·AI Policy Observatory'는 마크 케이가 가짜 사진을 만들어 공유했다가 해고됐다는 외신 기사를 게재하며 AI의 위험을 보여주는 '주요 사건(incident)'으로 분류했다. (참고 : https://oecd.ai/en/incidents/74089) 날로 고도화되는 AI 기술이 유권자들에게 혼동을 주고 선거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기우가 아닌 실제 현실이 되고 있다는 증거가 된 셈이다. 마크 케이가 만든 가짜 사진뿐만 아니라 트럼프 지지자들이 운영하는 SNS에서도 흑인 청년들과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라든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있는 모습 등 유사한 사진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 역시 탐지 사이트를 통해 검증한 결과 AI가 만든 가짜였다. 가짜여도 괜찮다?…유권자들에게 물었다 지지자들 눈엔 어떨까? 트럼프 지지자들에게 마크 케이가 만든 가짜 사진을 직접 보여주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매 주말마다 트럼프 유세를 따라다니며 각종 기념품을 팔고 있는 50대 올랜도 씨는 "훌륭한 사진이다. 나는 트럼프에게서 한 번도 인종 차별을 보지 못했다. 멋진 사진"이라고 말했다. 진짜인지 아닌지 의심이 들진 않느냐고 묻자 "진짜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SNS를 자주 사용하고 AI에 친숙한 젊은 세대들은 어떨까. 부모님을 따라 함께 유세장에 온 10대들에게도 물어봤다. "트럼프가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보여주는 거 아닐까요?" (드류, 15살), "인공지능 같아 보이긴 하는데, 솔직히 저는 꽤 멋있는 것 같아요. (AI 조작이) 너무 지나치지만 않다면 좋아요." (올리비아, 15살) 트럼프 지지자 올랜도 씨가 SBS 뉴스토리팀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인공지능으로 만든 가짜라는 사실을 이야기해도 반응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우리도 흑인 친구들이 많아요. 트럼프도 그렇죠. (이 가짜 사진이) 굉장한 건 아닌 것 같아요. 우리는 (트럼프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보이는 걸 따라갈 겁니다." (게리·완다 부부, 60대) 호텔에서 만났던 브레다 씨에게도 이 사진을 보여주며 의견을 물었다. 그녀는 이 사진을 이미 알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AI로 만들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트럼프가 인종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해요." 모든 지지자를 다 인터뷰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일반화하기는 한계가 있지만 AI가 만든 가짜라는 사실 자체는 지지자들의 믿음에 큰 영향을 주진 못하는 듯했다. 내 신념, 믿음에 부합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면 '가짜 사진'이어도 큰 상관은 없어 보였다.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 성향이 강한 뉴욕에서 바이든을 지지한다고 밝힌 시민들에게 트럼프가 경찰에 체포되고 재판을 받고 있는 딥페이크 사진을 보여주며 의견을 물어봤다. 여러 명의 시민들 중 한 청년의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저는 좀 웃긴 것 같아요. 이게 인공지능이 만든 가짜라는 것을 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약간 카타르시스가 있어요. 왜냐면 트럼프는 몇 년 동안 저를 짜증 나게 했던 사람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정치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박해받는 걸 보는 게 좋은 행동은 아니지만, 자신이(트럼프가) 저지른 행동에 대한 결과를 보는 게 약간 만족스러운 것 같아요." (마이클, 22세) 트럼프 전 대통령이 경찰에 체포되는 것처럼 보이는 딥페이크 사진 이 청년은 바이든이 서점에서 치매 책을 고르는 딥페이크 영상에 대해서는 "바이든을 바보처럼 보이게 하려고 만든 것 같다"며 "정치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답했다. 믿음에 부합하는 가짜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지만, 믿음에 부합하지 않는 가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양극화, 이분화된 정치 틈 파고드는 '교묘한 가짜' 전문가들도 이 점을 지적했다. AI의 기술을 등에 업은 '교묘한 가짜'가 '어설픈 가짜'보단 더 위험한 게 사실이지만, 더 경계해야 할 것은 가짜여도 상관없다는 인식이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다. "가짜 정보든 딥페이크든 어떤 것이든 간에 이런 정보들이 파괴력 있는 경우는 사람들이 원래 갖고 있던 믿음을 재확신시켜 주는 확증 편향의 경우에 강하게 일어납니다. 믿음을 재강화시키는 그런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굉장히 파급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국승민, 미시간주립대 정치학과 교수) "만약 당신이 저에게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라고 말한대도 저는 '상관없어요' 하게 됩니다. 그게 저를 행복하게 하거나 아니면 이전 신념을 더 강하게 하거나, 이미 화가 난 누군가에게 화를 더 낼 수 있게 되니까요. 우리는 좌파, 우파 모두에서 그런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 그 진영에 있게 되면 사실이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믿음을 강화시켜 주는 걸 믿고 싶어 하죠." (클레어 와들, 브라운대학교 정보미래연구소장) 이런 우려는 정치 지형이 지나치게 이분화, 양극화될수록 그 틈을 더 파고들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자신들의 믿음을 강화시켜 주는 콘텐츠만 보게 되고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자정 작용은 줄어들기 때문. 극보수, 극진보를 자처하는 매체들이 양극화된 정치 지형을 기반으로 영향력을 넓히고 검증되지 않은 허위 정보가 확산되는 통로가 되는 것도 같은 이유다. AI의 기술을 기반으로 의심조차 들지 않는 '교묘한 가짜'의 등장은 자정 작용을 더 어렵게 한다. 딥페이크 확산을 막는 법? 결국 사람에게 달렸다 취재를 하면서 가짜 콘텐츠의 생성을 아예 막을 방법은 없는지 많은 전문가들에게 물었지만 모두 고개를 저었다. (가짜를 보고도 진짜라고 생각하는 그 믿음 자체는 바꿀 수 없겠지만) 가짜는 가짜라고 알려주는, 최소한의 방지턱을 만들고 사람들이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입을 모았다. 구체적인 해법을 찾는 과정에서 취재진은 올해 초 미국에 선거, 정치 관련 딥페이크 콘텐츠를 전문적으로 탐지하고 그 결과를 무료로 공개하는 비영리단체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시애틀에 위치한 트루미디어(truemedia.org)라는 단체였다. 가짜로 의심되는 사진, 영상 등이 게재된 링크를 이 단체의 탐지 사이트에 입력하면 몇 퍼센트의 확률로 가짜 혹은 진짜인지 알려준다. 허위 정보를 바로잡는 차원에서 이 탐지 결과를 공공기관, 언론사 등에 무료로 제공한다. 선거, 정치 관련 딥페이크 콘텐츠를 탐지하는 비영리단체 트루미디어(truemedia.org) 홈페이지 AI 생성 기술이 발전할수록 탐지 기술도 발전하고, 탐지를 전문적으로 하는 업체들도 이미 존재한다. 하지만 AI 업계에서는 "생성은 돈이 되지만 탐지는 돈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다. 탐지가 생성의 속도를 넘어설 순 없고 수익을 내기도 어렵다는 뜻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딥페이크 탐지 서비스를 무료로 공공의 영역에 제공하는 비영리단체가 나왔다는 게 흥미로웠다. 트루미디어를 직접 찾아갔다. 단체를 설립한 사람은 미국 인공지능 연구의 선구자로 꼽히는 오렌 에치오니 워싱턴대 교수였다. 오렌 에치오니 교수는,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창립자인 폴 알렌이 2014년에 설립한 비영리 인공지능 연구기관 '앨런 AI 연구소'의 초대 CEO로 10년 가까이 이 조직을 이끌었다. 오랫동안 AI 연구를 해온 오렌 교수는 AI가 인류의 무궁무진한 발전을 가져올 기술임은 명백하지만 선거를 앞두고 AI가 가져올 우려가 큰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선거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사람들을 현혹하기 위한 '가짜'들이 더 많아지는 것을 봐왔습니다. AI는 아주 설득력 있는 가짜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올해는 전 세계에서 선거가 많이 열립니다. 선거는 종종 아슬아슬한데요. AI가 그걸 뒤집을 수 있고요, 한쪽은 딥페이크 때문에 승리를 하게 될 수 있습니다. 아주 우려되는 부분입니다." (오렌 에치오니 , 트루미디어 창립자) 비영리 딥페이크 탐지 단체 '트루미디어'를 창립한 오렌 에치오니 미국 워싱턴대 교수 트루미디어는 딥페이크 탐지 기술을 가진 여러 회사와 파트너십을 맺는 방식으로 9가지 자체 탐지 기술을 확보했다. 고화질 딥페이크 이미지를 생성해내는 최신 기술인 '디퓨전'부터, 기존 얼굴에 입만 바꿔 교묘한 합성을 만들어내는 '립싱킹' 등 다양한 딥페이크 기술을 잡아내기 위함이다. 이 단체의 탐지 기술 총괄은 한국인 엔지니어 김아영 씨가 맡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디텍션(탐지)을 잘하는 3개 업체와 저희가 다 계약을 맺었어요. 각 업체의 기술을 각각 이용하려면 개별적으로 돈도 내야 하잖아요. 저희는 이걸 다 총합해서 무료로 결과를 제공하고 있어요. 가짜로 의심되는 영상이나 사진을 저희 프로그램에 넣으면 9개의 탐지 모델이 동시에 돌아가게 되고,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김아영, 트루미디어 기술 총괄) 비영리 딥페이크 탐지 단체 '트루미디어'의 탐지 기술을 총괄하는 김아영 엔지니어 트루미디어는 서비스 초기임에도 하루 1천여 개의 딥페이크 의심 영상, 사진 등을 탐지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의 주요 언론사와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먼저 서비스를 배포했고 최근 전 세계적으로 서비스 대상을 확장했다. 기자도 사용 권한을 얻어 출처가 모호한 사진이나 영상 자료를 사용할 때 이 사이트를 이용해 검증 해보고 있다. 오렌 에치오니 교수를 비롯해 이번 취재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가짜의 생성을 막는 것보단 확산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결국 사용자들이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신뢰할 만한 출처에서 온 것인지를 확인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한 채 허위 또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정보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소셜미디어에서 공유하는 것의 진실성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지 않을 수 있어요.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에게 정확성에 대한 격려를 했을 때 그들이 공유하는 것의 정확성이 실제로 향상되는 걸로 나타났습니다." (앤디 게스, 프린스턴대 정치홍보학과 교수)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심호흡을 하고 생각을 해볼 수 있도록 교육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잠깐 이게 신뢰할 수 있는 출처에서 나온 걸까, 이게 진짜일까' 할 수 있게 말이죠. 그전에는 우리가 어떤 걸 보았을 때 그게 사실이란 걸 알았습니다. 더 이상 그렇지 않기 때문에 사용자들이 조심하도록 교육이 필요합니다." (오렌 에치오니, 트루미디어 창립자) 디자인 : 최혜지
▶ 20년 전 죽은 ‘해피’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펫로스 증후군’에 고통받는 사람들 반려동물 복제 관련 취재를 한다고 하니 주변에서 두 가지를 궁금해했습니다. 첫 번째는 ‘얼마냐’, 두 번째는 ‘얼마나 닮았나’였습니다. (비용은 지난 편에 소개한 대로 해외 업체는 5만 달러, 국내 업체는 공개된 가격은 없지만 평균 8천~1억 2천만 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논란이 된 유튜버는 8천만 원보다는 낮은 금액이었다고 밝혔습니다.) 동물 복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현재 국내외 동물 복제업체가 주로 사용하는 방식은 체세포를 활용한 복제입니다. 먼저 복제를 원하는 반려동물의 피부 조직을 떼어내 체세포를 채취합니다. 그다음 암컷 동물에게서 수정되지 않은 난자를 추출하고 핵을 제거합니다. (이 암컷 동물은 난자 공여용으로만 쓰입니다.) 이렇게 암컷 동물의 DNA가 지워진 난자에 체세포의 핵을 투입해 수정란을 만듭니다. 분열 과정을 거친 수정란을 대리모 역할을 하는 암컷 동물의 자궁에 착상시킨 뒤 2-3개월 후 정상적으로 출산이 이뤄지면 복제동물이 탄생하는 겁니다. “유전적으로 98% 이상 동일”-“쌍둥이보다 덜 닮아” 이런 과정을 거친 복제 동물은 기존의 동물과 얼마나 비슷할까요? 우선 반려동물 복제 중개업체들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A 중개업체 대표 일단은 유전적으로도 98퍼센트 이상 동일하고 한 마디로 외형이 동일한 거죠. 게다가 같은 견주가 비슷한 환경에서 강아지(복제견)를 키우다 보니 행동 양식도 굉장히 비슷해지는 경우가 많이 있나 봐요. 고객들에게 피드백을 받을 때도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라고 만족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B 중개업체 대표 하나의 난자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닮기만 한 게 아니라 성격도 다 똑같은 아이죠. 다른 생명체이긴 하지만 일란성 쌍둥이보다도 더한 복제니까요. 이런 복제업체들의 설명은 “복제 동물이 기존 동물과 동일한 유전자를 갖고 있으며 이런 동일성은 인간 일란성 쌍둥이에서 관찰된 것과 유사하다”는 2018년 발표된 국내 연구 논문 등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논문에선 “복제견은 체세포를 기증한 기존 개와 해부학적, 생리학적, 신경학적 성장 특성은 물론 유사한 행동패턴을 가지고 있다”며 “복제견은 자연적으로 사육된 개와 비슷한 수명을 가질 수 있다”고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복제견의 유전자 유사성에 대해 신중한 의견을 가진 전문가들도 있었습니다. 구본경 기초과학연구원 유전체교정연구단장은 취재팀과 인터뷰에서 동물 복제에 대한 의견은 다양할 수 있지만,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동물 복제는 ‘복사+붙여넣기’가 아니라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영어로는 클로닝(cloning)이잖아요. 한국말로 ‘복제’라고 번역하는데 저는 단어 선택이 정확하지 않은 것 같아요. 복제라고 하면 카피 앤 페이스트(copy&paste)를 떠올리게 되잖아요. 고민을 해봤는데 가장 정확한 우리말 표현은 ‘꺾꽂이’인 것 같아요. 여러 개의 이파리 중 일부를 떼어서 새로운 식물을 만드는 것인데, 그렇게 만든 식물이 그전 식물과 똑같나요? 동일하진 않잖아요? 동물 복제도 마찬가지거든요. ‘복제’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오해의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체세포 핵을 이용한 복제 과정을 거쳐도 똑같은 생명체가 만들어지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업체들이 설명하는 것처럼 일란성 쌍둥이, 혹은 그보다 더 비슷하다고 봐야할까요? “쌍둥이보다는 좀 다르다고 이야기를 해야 하고, 형제보다는 훨씬 비슷하다고 답을 해야 합니다. 쌍둥이와 형제 사이 정도로 비슷한 생명체가 만들어지는 것은 사실이고요.” 구 단장이 복제견의 유전자 유사성을 좀 더 신중하게 보는 이유는 ‘돌연변이’의 발생, 그리고 핵을 제거한 난자에도 DNA가 남아있을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세포 분열은 반드시 돌연변이를 어느 정도는 수반하게 됩니다. 왜 그러냐면 DNA를 복제하는 우리 생명의 기계가 완벽하지가 않아서 오탈자를 만들어요 거의 항상. 한 사람의 왼손과 오른손에 있는 세포도 엄밀히 이야기하면 DNA가 이미 돌연변이 때문에 달라졌거든요. 그런데 복제를 할 때는 몸 안에 있는 여러 세포 중에 하나를 떼서 그 세포의 핵을 이용하잖아요. 이미 어느 정도 거리가 생기는 거죠.” “또 암컷의 난자를 채취하며 핵을 제거했다고 하더라도 미토콘드리아라고 하는 세포 내 소기관이 남아 있어요. 이 미토콘드리아도 자체적으로 DNA를 갖고 있습니다. 미토콘드리아의 DNA가 핵의 DNA가 갖고 있는 정보보다는 훨씬 적으니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주장도 맞는 말이긴 한데요, 그렇다고 해서 미토콘드리아에 있는 유전자가 질병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기자: 난자공여견이 갖고 있던 어떤 유전적 질병이 미토콘드리아 DNA로 인해 복제된 동물에게 나타날 수도 있단 말씀이네요?) “네 그렇습니다.” ‘복제 기술의 발전’과 ‘무분별한 복제 근절’, 그 경계선은 어디일까 반려동물 복제 관련 기사 댓글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부정적입니다. 복제 과정에 사용되는 대리모 동물, 난자공여 동물들의 희생을 우려하는 의견도 많고 또 복제 자체가 동물에게 의견을 묻지 않는 인간 중심적인 결정이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판매를 목적으로 무분별한 동물 복제가 이뤄지는 것은 당연히 근절돼야 할 일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대한수의사회도 “판매를 목적으로 한 상업적 반려동물 복제에 대해선 반대한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복제 기술 자체의 발전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허주형 대한수의사회장은 인터뷰에서 이런 의견을 내놨습니다. “동물 복제는 사실 오랫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과거 영국의 복제양 돌리도 있었고, 국내에 복제소 영롱이도 있었죠. 유전공학의 발전상으로 봐서는 우리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상업적 목적의 복제는 생명 경시 풍조가 일어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반대를 합니다만, 기술의 발전은 그와는 좀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구 목적의 복제는 유전학 발전을 위해서는 오히려 국가가 조금 더 개입을 해서 연구가 더 활성화되게끔 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황우석 사태 이후 국내 동물 복제 기술이 크게 뒤쳐졌다고 말하는 연구자들도 취재 과정에서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무분별한 동물 복제, 판매를 목적으로 한 복제는 근절하면서도 유전 공학 기술의 발전은 도모할 수 있는, 그 경계선은 어디일까요? 대한수의사회는 우리 사회가 동물 복제를 어느 범위까지 허용할지, 또 상업적 목적의 복제는 어떤 범위 내에서 관리해야 할지를 논의하는 사회적 합의체가 필요하다고 제안했습니다. 유튜버의 반려견 복제 영상이 논란이 된 지 한 달여가 지났습니다. 폭발적인 반응이 나타났던 논란 초기와 달리 이제는 관심이 시들해진 모습입니다. 한순간의 해프닝으로 지나가기보다는 기술과 산업, 그리고 생명윤리가 얽혀있는 어려운 문제를 우리 사회가 적극적으로 풀어나가는 근본적 논의가 이뤄지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 반려견 복제했다는 유튜버도, 업체도, 교수도... 그들이 침묵하는 이유는 뭘까 18살 어느 비 오는 여름날 밤. 아버지는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아버지 뒷모습을 보며 동생과 목 놓아 울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를 붙잡진 못했습니다. 검은 비닐봉지 안엔, 3년 간 키웠던 반려견 ‘해피’의 사체가 담겨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새벽이 돼서야 들어오셨습니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습니다. “해피, 어떻게 했어?” 아버지께 물었지만 아무 답도 듣지 못했습니다. 20년이 넘게 지났지만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그날 밤 이야기를 하신 적이 없습니다. 11살 노견으로 입양 와서 3년의 행복한 시간을 선물해 주고 무지개다리를 건넌 해피. 반려동물이란 단어도 생소하던 시절, 마지막을 어떻게 보내줘야 하는 건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처럼 추모 공간을 마련하며 그리움을 달래는 일은 거의 없던 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해피의 마지막은 제 기억 속에 온몸이 뻣뻣해지며 걷지 못하던 모습, 그리고 아버지 손에 들려있던 검은 봉지로 남아 있습니다. 인생 첫 반려견이었던 해피가 떠난 후 저희 집은 더 이상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았습니다. 이미 희미해진 기억이라 생각했는데, 20년 전 죽은 해피가 기억의 늪을 건너 다시 저를 찾아왔습니다. 반려동물 복제 관련 취재를 하며 ‘펫로스 증후군’으로 고통받는 반려인들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기억 저장소처럼,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서 회색빛으로 변해가던 기억 구슬이 또르르 굴러온 느낌이랄까요. 이렇게 그날의 순간순간을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걸 저 자신도 몰랐습니다. 심용희 수의사|펫로스 증후군 상담사 기자님처럼 한 번 (반려견을) 기르신 다음에 그 아픈 마음 때문에 못 기르시는 경우도 펫로스의 감정이 치유가 안 됐다고 보거든요. 그 감정이 극복되고 지나가면 반려견과 같이 있었을 때 행복했던 감정이 더 느껴지시면서 다른 아이를 데려오시는데 그렇지 못했다면 슬픔이 극복이 안 된 거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공감받지 못하는 슬픔 ‘펫로스 증후군’ 국립국어원은 ‘펫로스(pet loss) 증후군’을 반려동물의 실종이나 죽음으로 상실감, 슬픔, 우울감, 절망감 등을 느끼는 현상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가족처럼 함께했던 반려동물의 갑작스러운 부재로 심각한 우울증을 겪으며 약물이나 병원 치료를 받는 경우도, 일상생활로의 복귀가 힘든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경북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정운선 교수 연구팀은 반려동물의 죽음을 경험한 137명을 대상으로 정신건강 상태를 분석한 결과를 국제학술지 ‘JKMS’ 최근 호에 게재했는데요, 전체의 절반 이상(55%)이 슬픔 반응 평가에서 기준점인 25점을 초과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일반적인 사별의 수준을 넘어 지속해서 심리적 부적응을 초래할 정도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우울증,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 등이 1년 넘게 지속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는데, 연구팀은 조사 대상의 상당수가 정신과적인 개입이 필요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습니다. 심용희 수의사|펫로스 증후군 상담사 반려동물의 수명이 연장되면서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또 과거에는 집에서 개를 키워도 주로 마당에서 지냈죠. 애정을 갖고 돌보는 존재였던 건 같지만 생활권이 분리된 상태에서 살았기 때문에 교감과 애착은 현재 집 안에서 함께 사는 반려견과는 확실하게 차이가 있습니다. 과거와 비교해 교감하고 생활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진 것이죠. 펫로스 증후군은 ‘공감받지 못하는 슬픔’ 또는 ‘인정받지 못하는 비애’ 등으로도 표현됩니다. 비 반려인들은 물론, 반려동물을 함께 키운 가족 간에도 애착 정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반려동물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과 슬픔 공감 정도에도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심용희 수의사|펫로스 증후군 상담사 어떤 사람은 반려동물을 떠나보내고 힘들어하는 걸 아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강아지 한 마리 죽은 걸 갖고 왜 그렇게 유난이냐고 할 수도 있는 거죠. 심지어 가족 간에도 반려동물에 대한 이해와 관계가 다를 수가 있고 공감을 해주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나는 생활이 어려울 만큼 슬픈데 주변에선 공감을 해주지 않으니 그 감정을 꾹꾹 누르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실제 취재 과정에서 펫로스 증후군으로 고통받는 반려인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대인기피증이 생겼다고 말하는 분도 있었고, 정신과에서 상담을 받으며 약물 치료를 받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복제는 펫로스 증후군을 극복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업계에 따르면 반려견 복제나, 복제를 염두에 두고 체세포를 보관하는 고객들 다수가 이런 펫로스 증후군으로 고통받고 있는 경우라고 합니다. 취재 과정에서 반려견 복제를 실제 진행 중인 분, 그리고 언젠가 복제를 염두에 두고 사망한 반려견의 체세포를 보관 중인 분을 만날 수 있었는데 이 두 분 모두 그런 결정을 내린 가장 큰 이유는 15년 가까이 가족처럼 함께 지내온 반려견의 빈자리 때문이었습니다. 표상진|반려견 체세포 보관 홍이(반려견)는 만성 신부전을 앓았어요. 병을 좀 더디게 진행시키려고 한 대에 수십만 원 하는 줄기세포 주사도 맞았습니다. 하지만 신진대사가 다 떨어지다 보니 쇼크가 오더라고요. 결국 무지개다리를 건넜어요. 줄기세포 주사를 맞으면서 복제 이야기를 듣게 됐고, 체세포 보관을 할 수 있단 것도 알 게 됐죠. 체세포 보관을 한 이후에는 마음만 먹으면, 또 환경이 허락만 된다면 얼마든지 다시 홍이를 볼 수 있다 이런 마음이 생겼어요. 그 기회가 있다는 것 만으로 상실감이 굉장히 희석됐어요. 일상생활로의 복귀가 빠르게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예요. 남상구|미국 복제업체에 반려견 복제 의뢰 티코(반려견)가 사망하기 5년 전에 미리 체세포를 보관했어요. 티코가 사망하고 지난해 11월에 복제를 의뢰했어요. 보통 6개월에서 9개월 걸린다고 해요. 오래전부터 계획을 했기 때문에 망설임은 없었고요. (주변에서) 왜 그런 결정을 했느냐, 주변에 다른 유기견도 많은데 비슷한 애 데려다 길러라 이런 말들 제일 많이 하시지만, 저한테는 (다른 동물로) 대체할 수 있는 생명이 아니거든요. 복제되어 오는 아이가 당연히 티코는 아니지만 시간을 되돌려서 티코를 다시 키운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이고 싶어요. 물론 반려동물 복제가 펫로스증후군을 극복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아직은 극소수에 해당하는 사례입니다. 대다수의 반려인들은 무지개다리를 건넌 반려동물의 추모 공간을 마련하거나, 치유모임 등에 참석하고, 충분히 추모할 시간을 갖는 방법으로 슬픔을 이겨냅니다. 취재진이 만난 펫로스 증후군을 겪고 있는 반려인 대부분은 복제를 선택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유지아|펫로스 증후군 경험 반려인 솔직히 저도 생각을 해보긴 했어요. 이 아이가 없으면 정말 못 살 것 같은 그런 마음에 정말 이 복제, 강아지를 복제해서 다시 키울 수만 있는 게 정말 쉬운 일이라고 하면 나도 해보고 싶더라고요. 하지만 내가 마음이 편하자고 복제를 하게 되면 또 다른 강아지들의 희생이 있어야 되잖아요. 외모만 비슷한 강아지일 뿐이지 저와 오랜 시간 유대감을 쌓아온 그 아이는 아니니까. 외모가 같은 다른 강아지이지 않을까요. 앞서 언급한 경북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연구팀은 펫로스 증후군을 겪는 사람들에 대한 연구를 내놓으면서, 반려동물 상실을 경험한 개인의 상당수가 정신과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확인이 된 만큼 사회적인 제도를 마련하는 논의가 필요하단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특히 반려동물을 잃은 후 첫 1년 동안에는 심리적 사회적 지원이 매우 필요하다며 사회적인 이해의 필요성이 강조된다고 밝혔습니다. “체세포 냉동 보존은 제3의 장례” “복제는 치유의 기술”.. 제도는? 반려동물의 죽음을 슬퍼하고 깊이 추모하는 문화가 확산되는 만큼 관련 시장도 성장하고 있습니다. 반려동물의 제사를 지내고, 이들의 장례만을 전문적으로 진행해 주는 업체도 있고, 반려동물 전문 납골당과 추모공원도 있습니다. 반려동물 복제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복제 서비스를 주요 비즈니스로 삼고 있는 국내외 동물 복제 업체들은 펫로스 증후군을 겪는 반려인들을 주요 고객으로 삼고 있습니다. 반려견 체세포 보관 중개 사업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 대표는 취재진과 인터뷰에서 이 사업을 “제3의 장례”라고 표현했습니다. 체세포를 보관하는 데는 초기에 330만 원, 이후 매년 30만 원이 들어갑니다. 유튜버 반려견을 복제했다고 밝힌 동물 복제업체는 홈페이지를 통해 “복제는 치유와 행복을 이어주는 기술”이라고 홍보하기도 합니다. 유튜버를 통해 알려진 복제 비용은 평균 8천만 원 이상. 하지만 실제 자신의 반려견 복제는 그보다 낮은 비용으로 진행했다고 밝혔습니다. 해외 복제업체가 홈페이지에 5만 달러라고 가격을 공개해 놓은 것과 달리 국내 업체는 비용을 공개적으로 밝히진 않고 있습니다. 복제 중개업체, 체세포 채취 및 보관업체, 복제를 실제 진행하는 연구소, 이를 홍보하는 마케팅업체까지. 국내 반려동물 복제 관련 시장은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취재를 하면서 가장 의외였던 지점입니다. 하지만 제도는 한참 뒤처져 있습니다. 연구나 실험 목적이 아닌 상업적 목적의 동물 복제에 대해선 제도나 법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무조건 규제를 하기보단 최소 이런 산업이 제도의 범주 내에서 관리될 필요는 있다는 생각입니다. 다음 편에는 동물을 복제하면 기존 동물과 유전적으로 얼마나 같다고 봐야 하는지, 우리의 복제 기술은 어느 수준까지 와있는지 등 복제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