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류학을 전공하고 방송작가로 활동, 경성대학교 글로컬문화학부에서 드라마와 웹툰 스토리텔링, 대중문화를 가르치고 연구한다. 요즘은 팬덤 문화와 K-콘텐츠에 심취해 있는 중.
얼마 전 중년 팬덤을 깊이 있게 다룬 두 편의 영상이 방송됐다. EBS의 <PD로그 : 덕질하기 딱 좋은 나이>와 MBN의 <트롯공화국 보고서>. 전자가 조금은 가볍고 말랑말랑한, 마치 소녀시절 일기장을 보듯 발랄하고 통통 튀는 느낌이었다면 후자는 제목 그대로 전통적인 다큐멘터리 기법에 충실하면서 한·일 트로트 팬덤을 비교분석한 이 시대 중년 팬덤에 관한 보고서였다. 이 두 개의 영상이 주목한 공통적인 소재는 코로나 19 이후 대한민국의 가장 독특한 문화현상이 된 트로트 팬덤이다. 한 종편 방송이 쏘아 올린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의 열풍은 트로트를 음악 콘텐츠의 새로운 장르로 급부상시켰고 수용자인 중년 팬덤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K-POP의 한 장르로서 트로트가 비중 있게 자리 잡고 주 소비층이 중장년층으로 확산되며 이들의 응원문화와 소비 형태가 중년 팬덤만의 독특한 문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진 : EBS <덕질하기 딱 좋은 나이>는 <PD 로그>라는 프로그램 제목처럼 일상 속 이슈를 탐구하며 그중 '덕질'에 대한 인간적인 물음에서 출발한다. 어떻게 대한민국의 중년 팬들은 일면식도 없는 대상에게 저렇게 무한 애정을 쏟을 수 있는 걸까?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입사한 지 3년이 갓 넘은 신입 PD는 특유의 호기심과 취재 본능으로 이 희한하고도 독특한 집단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PD 로그>의 미덕은 외부에서 관찰자적 탐색에 그친 것이 아니라 직접 그들의 내부로 들어갔다는 데에 있다. 문화인류학자들이 타문화를 이해하고 연구하기 위해 그 문화 속으로 들어가 참여수행자가 되는 방법을 선택한 것처럼, 영화 <늑대와 춤을>에서 케빈 코스트너가 '주먹 쥐고 일어서'를 만나며 인디언 문화에 서서히 동화되듯이 신입 PD는 영탁 팬클럽 '영탁앤블루스'의 문화 속으로 과감하게 빠져든다. 팬클럽에 가입해 닉네임을 정하고 그다음 단계인 파란색으로 치장하는 비주얼 변신의 환영식을 거친 다음 팬들에게 나눠줄 굿즈를 직접 만드는 과정은 과거 인류학자들이 규명해 낸 자발적 증여와 대가 없는 호혜적 선물교환 이론을 연상하게 만든다. 이 신입 PD는 팬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대신 팬이 된 자신의 모습을 꼼꼼하게 기록한다. 영탁의 팬들과 공연 전날 하룻밤을 같이 자고 노래방을 가보며 떼창을 위해 응원법을 연습하고 나눔에 익숙해진 중년 팬들의 문화를 체험하며 자기 성찰의 셀프 에스노그라피(자기 민족지)를 완성한다. 팬덤 4.0 시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덕질의 대상 없이 팬들끼리 즐겁게 놀 수 있는 느슨하고도 탄탄한 연대를 체험하며 중년 팬덤의 덕질 문화가 문화 충격이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모습은 진정성과 함께 강력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다큐 내레이션의 주인공인 문 PD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았을까? 한 사람을 향한 애정과 사랑의 근원은 명료했다. 나를 웃게 만드는 힘, 인생의 모진 풍파를 헤쳐 온 순례자들이 얻은 것은 결국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었다는 것을. 사진 : MBN 또 한 편의 다큐멘터리 <트롯공화국 보고서>는 언젠가부터 트롯공화국이 되어버린 대한민국의 팬덤 덕질 보고서다. 대중음악과 문화 연구자들의 인터뷰를 통한 학술적 접근과 함께 다양한 트로트 팬덤의 사회적 활동을 보여준다. 노란색, 파란색, 핑크색, 각양각색의 팬덤은 각자의 특성을 유지하며 집단 지성의 힘을 발휘해 선한 영향력의 에너지를 순환시킨다. 중년 팬덤의 활동과 파급력은 단순히 덕질 대상을 응원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기부나 선행, 봉사를 통한 실천적 참여를 통해 꾸준한 역동성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MZ 세대의 덕질과 구분된다. 팬덤이 스타의 이름으로 기부를 하면 스타 역시 팬클럽의 이름으로 기부를 하는 등 상호 작용 현상도 한국의 중년 팬덤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시너지 효과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 집단 응원이 아닌 조용한 방식의 응원 문화를 보여주는 일본의 트로트 팬덤은 반짝 응원 대신 오랜 지속성을 가진다. 엔카 가수 미소라 히바리를 향한 시니어 팬층의 잔잔하지만 절대적인 감정은 전설적 존재를 추앙하고 기억하는 일본 국민 팬덤의 정서와 애정 표현 방식을 보여준다. <트롯공화국 보고서>는 한일 트로트 팬덤의 현재를 비교해서 보여줌으로써 일본 젊은 세대들에게 뒷방 신세가 된 엔카가 다시 세대를 초월해 인기를 얻고 있는 배경에 한국의 트로트 열풍이 그 역할을 하고 있음을 규명한다. 인간의 영혼을 위로하고 쓰다듬는 치유책이 음악이라는 사실은 언어와 문화가 달라도 만고불변의 진리다. 또한 한국의 트로트 중년 팬덤을 비교 문화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다양한 중년 팬덤의 사례를 조명한 다큐 영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동안 중년 팬덤을 깊이 있게 다룬 영상이 많이 없었다는 점에서 두 편의 영상은 중년 팬덤의 본질을 탐구한 질적 연구의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다. 두 편의 중년 팬덤 보고서를 본 감상문의 마지막 장은 이렇게 기록되지 않을까. 오래된 묵은지와 장맛처럼 깊고 뭉근하게 끓어오르는 사랑, 누군가를 순수한 마음으로 응원하는 그 힘이 결국 자신을 구원하리라. 그것이 바로 중년 팬덤의 사랑이라고.
우리 시대, 연민과 애정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괴물을 만든 두 감독이 부산을 찾았다.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과 매기 강 감독. 두 사람 다 몬스터가 등장하는 영화로 엄청난 애정과 지지를 받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에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등장하자 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크리처물 거장의 등장에 감탄과 환호가 터져 나왔고, 수줍게 입장해 반갑게 손을 흔들고 하트를 만드는 미국계 한국인 매기 강 감독에게는 열렬한 박수 세례가 쏟아졌다. 지금 가장 핫한 두 감독의 등장은 부산국제영화제를 달구었고 두 사람은 GV와 포럼, 오픈 토크 등 바쁜 스케줄을 소화했다. 결론적으로 올해 서른 살을 맞은 BIFF(부산국제영화제)는 화제성과 내실, 둘 다 채우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 열기가 식지 않는 '케데헌'의 창작자 매기 강 감독부터 영화 마니아들을 비롯해 다크 판타지의 귀재, 국내 첫 내한인 기예르모 감독을 초대함으로써 화제성도 잡고 영화제 콘텐츠의 질도 높였기 때문이다. 기예르모 감독이 사랑한 결핍과 불완전한 존재들 먼저 <프랑켄슈타인>으로 돌아온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부터 얘기해 볼까. 멕시코 출신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올해 60세가 넘었지만 여전히 에너지 넘치게 괴수물과 판타지 장르에서 독특한 자신만의 크리처를 만들어낸 감독으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 ET를 만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게 이제 우리에게 남은 희망은 기예르모 델 토로뿐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고 <헬보이>, <판의 미로>,<The Shape of Water>까지 시대를 초월한 괴물을 소재로 현대인의 우화 같은 판타지를 만들어냈다. 다크 판타지의 거장이라고 하지만 잔혹하고 파괴적인 괴물 대신 괴물이 가진 심연의 본성을 이끌어내는 그의 능력은 이번 넷플릭스에서 공개될 <프랑켄슈타인>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전작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피노키오>에서도 그랬지만 그가 이물(異物), 몬스터를 바라보는 시선은 지속적으로 진화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신과 인간, 예수와 하나님. 이 모든 거대한 세계를 관통하며 기예르모 델 토로가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모든 괴물이 가지고 있는 결핍과 부재의 서사,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결핍을 가진 히어로와 그에 맞서는 결핍의 몬스터 둘 뿐이라는 듯. <프랑켄슈타인>은 관계와 소통에 대한 이야기다. 신이 되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되지 못했던 한 인간의 이야기. 창조주에게 '왜 나를 만드셨나요' 묻고 싶었던 피조물은 빅터만을 기억하고 빅터를 외치며 그렇게 소멸되었다. 그 괴물의 강렬하고도 선한 눈빛을 창작해 낸 기예르모 델 토로. 그는 여전히 괴물을 사랑하고 괴물에 천착한다. <프랑켄슈타인> 속 빅터의 창조물이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던 엘리자베스와 흐르는 물과 낙엽을 잡으며 교감하려는 장면은 2017년 <쉐이프 오브 워터> 속 아가미로 숨 쉬던 물고기 인간이 농아 여인과 수화로 소통하고 이들이 물속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연상된다. 괴물이 가진 괴수성은 우리 안의 불안과 공포가 만들어내는 것임과 동시에 괴물을 구별 짓기 하는 타자 역시 시작부터가 불완전한 존재라는 기예르모 감독의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취소된 프레스 티켓을 겨우 구해 첫 회 상영을 보러 갔는데 IMAX 영화관의 440석 관객에게 기예르모 감독은 전부 친필 사인을 해주겠다고 선언했고 결국 그 약속을 지켰다. 열정적인 한국 관객들을 향해 '비바 부산!'을 외치며 멕시칸 특유의 흥으로 감사함을 표현하고 글로벌 포럼에서는 그가 가진 깊고 푸른 그레이 칼라의 눈동자만큼 크리에이터로서의 심연의 확장을 보여주었다. 매기 강 감독의 K-몬스터를 향한 연민, 대중적 공감의 핵심 BIFF가 한창 진행 중인 일요일, 야외무대에 '헌트릭스' 루미 스타일의 땋은 머리를 하고 나타난 매기 강 감독은 시종일관 미소를 띠고 관객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소통하며 본인도 이렇게 사랑받게 될지 몰랐다며 마음껏 한국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5살에 부모를 따라 이민을 갔던 꼬마 여자아이는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라는 직업을 가질 만큼 이야기를 좋아했고 <드래곤 길들이기>와 <쿵푸팬더> 등의 작업에 참여하며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 나갔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세계적 흥행과 성공이 특별한 이유는 K-컬처 내부의 작업이 아닌 외부에서 이를 관찰하고 바라본 객관적인 타자에 의한 결과물이라는데 있다. 매기 강 감독 스스로가 한국어를 잊지 않고 한국인임을 끊임없이 자각했고 그녀에게 한국의 문화는 늘 독특하고 새롭고 재미있는 것들이었기에 악령을 퇴치하는 걸그룹의 이야기, 귀마와 대립하는 선한 괴물 진우 캐릭터가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낸 것이다. 두 감독의 공통점은 바로 대중에게 공감을 얻는 몬스터를 만들어냈다는 데 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프랑켄슈타인'이라는 괴수물의 고전이자, 메리 셸리가 창조한 클래식의 가치를 보여주면서도 괴물이 가진 잔혹함이 아닌, 창조자에 대한 분노와 사랑받고 싶어 하는 연민의 존재로 재해석했다는 것, 매기 강이 만든 '사자보이즈' 안의 진우는 자신이 가진 전생의 업보로 인한 기억에 괴로워하면서 벗어나려 애쓰지만 결국 자신이 누군지 깨닫게 해 준 루미를 위해 희생하는 가치를 보여준 괴물이라는 점에서 깊은 공감을 얻은 것이다. 시체 더미에서 꿰매어져 피어난 괴물이든, 비파를 연주하던 악사가 초콜릿 근육질 저승사자 아이돌이 되었든 간에 두 감독이 창작해 낸 크리처는 공통점이 있다. 연민을 자아내는 사연이 있으며, 악한 본성보다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괴물들이라는 점. 두 감독이 맹자의 성선설에 영향을 받았는지 몰라도 괴물의 마음 속에는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는 선한 힘이 있다는 것. 결국 그 힘이 악에서부터 모든 것을 제자리로 되돌리고 모두를 구원한다라는 진리. 하나는 수없이 많은 영화가 만들어졌던 원작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뻔한 클리셰가 많았던 스토리였지만 두 작품은 감독만의 감각을 만나 새로운 크리처로 탄생했다. 고전의 가치를 재해석한 작품과 보편성과 K-문화의 특별함을 녹여낸 두 작품은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을 통해 이 시대, 새로운 괴물을 구현하고 계속해서 만들어나갈 것이다. 넷플릭스에서 일하는 작가가 해준 말이 있다. 넷플릭스의 원픽을 기대하는 한국의 스토리텔러들에게 바라는 건 딱 하나, 이것만 명심하길. 세상 누구나가 공감하는 소재를 한국적으로 녹여낼 것, 조선판 갓 쓴 좀비라든가, 케이팝 아이돌이 사실 퇴마사란 투잡을 뛰고 있든가.
<무빙>과 <조명가게>로 글로벌 OTT 시장에 K-판타지를 소개한 디즈니플러스가 넷플릭스와 또 다른 감성으로 K-콘텐츠 IP의 영상화에 주력하고 있다. 곧 공개될 <북극성>과 <하이퍼나이프>를 비롯, 미스터리 스릴러, 액션 판타지 등 장르물 라인업부터 최근 11부작으로 막을 내린 <파인: 촌뜨기들>(이하 <파인>)까지. 좀 더 대담하고 완성도 높은 서사로 디즈니가 선호하던 가족 위주의 판타지 스토리에서 벗어나 한반도의 특수한 배경과 문화를 담은 다양하고도 독특한 스토리에 집중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디즈니 플러스 채널의 짙푸른 청록색이 주는 로고 이미지는 기존 디즈니의 밝고 알록달록 파스텔톤 색감이 아닌 한없이 어두운 해저로 빨려 들어간 것 같은 인생의 어두운 이면을 보여주는 디즈니의 변화를 상징하는 시도처럼 보인다. 윤태호 원작의 <파인(巴人)>은 10년 전 <미생> 연재를 마치고 차기작으로 2014년 세상에 나왔던 작품이다. <이끼>, <내부자들>, <미생>과 같은 작품에서 보여준 윤태호 작가의 특징은 다양한 인간 군상이 펼치는 탐욕과 광기다. 그 광기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씁쓸함을 통해 잔인하고 추악한 인간을 보여준다. 마지막 말로를 알면서도 그 나락으로 떨어지는 악인들끼리 펼치는 핏빛 사투를 통해 살아남은 자의 공허함을 조명한다. 지리멸렬한 싸움 끝에 승자가 됐지만 '촌뜨기들'이란 부제가 상징하듯 결국 소득 없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간 허무한 결투는 70년대 대한민국,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파인>은 우리의 근과거에서 좀 더 깊숙이 들어간, 반세기 전의 대한민국 70년대가 배경이다. <파인> 시리즈가 전부 공개된 지금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소재로 한 탄탄한 원작 스토리, 강윤성 감독의 검증된 연출력과 연기파 배우들의 대거 출연, 압도적 카리스마의 배우들이 펼친 캐릭터의 향연, 잘 차려진 12첩 반상 같은 진수성찬이다. 그들의 메소드 연기만으로도 매회 꽉 차는 느낌인데, 사실 이 많은 캐릭터의 사연들을 다 풀어가자니 초반 서사는 조금 지루하게 흘러가지만 각각의 사연을 풀어낸 중반부터 바다로 나간 이 고삐 풀린 무지렁이들이 벌이는 배틀은 아주 스릴 있게 전개된다. 이야기 내내 화면을 지배하는 진득하고 눅진한 밤안개 같은 공기와 다들 선수를 자처하지만 실상은 단순 무지 과격한 촌뜨기들이 다 모여든 바다라는 공간은 이제 손을 뻗쳐 첫 희생자를 집어삼키기만을 기다린다. <파인>이 건져 올린 대한민국 70년대 흑백 史 : 아파트 개발 붐, 박치기, 한복과 밴드 속 유흥의 밤에 담긴 녹색과 황색 미장센 대한 늬우스, 박정희 대통령, 건축 첫 삽을 뜨는 여의도 아파트, TV 속 박치기를 하는 프로레슬러와 흑백 예능쇼 프로그램 인서트 화면은 <파인> 속 70년대 대한민국의 사회현상을 고증하는 중요한 자료 화면이자 <파인>의 분위기를 제대로 상승시킨다. 표면적으론 <파인>은 바닷속 보물을 캐러 온 도굴범들의 이야기지만 그릇과 도자기는 맥거핀일 뿐, 1970년대 개발 붐, 기업들의 부정축재의 수단이 된 대학교 설립과 정원외 입학, 새마을 운동, 한강의 기적 등 숨가쁘게 쌓아 올린 바벨탑을 보여준다. 흥백산업 축하연 장면에서 한복 입은 요정의 여인들, 초대 가수 현인과 밴드를 불러 여흥을 즐기는 모습은 70년대 고도성장과 현대화를 이룬 한국의 밀실 정치와 유흥 문화를 보여준다. 촌뜨기들의 그릇 건져 올리기가 주된 서사다 보니 이런 이야기가 배경으로만 부분 부분 등장한 점은 아쉽지만 미장센과 영상 미술팀의 성과로만 놓고 본다면 <파인>은 시대 고증을 통해 세트나 촬영 소품에도 꽤나 공을 들인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목포 행운다방과 흥백산업 영상 전반에 흐르는 탁한 녹색의 이미지는 녹색이 주는 푸릇했던 성장과 안식의 기운을 지나쳐 역류하고 썩어가는 조류처럼 곧 닥칠 비극의 상황을 암시한다. <파인>은 그렇게 진한 녹색과 황토색의 70년대 미장센을 통해 우리의 부서지기 직전 기억 속 매몰된 과거를 발굴해 낸다. "니 골동이 뭔지 아니? 먼저 보고 손에 쥐는 게 골동이야" 니 골동이 뭔지 아니? 먼저 보고 손에 쥐는 게 골동이야. 극 중 송사장이 남긴 명대사다. 골동은 무조건 처음 본 사람이 자기 손에 먼저 넣어야 골동이 된다는 의미다. 골동(骨董)의 한자가 가진 의미는 뼈 골에 바로잡을 동. 어쩌면 골동은 누군가에 의해 그 본체가 만들어지고 바로잡아지기도 할 수 있으니 그 가치를 알지 못하는 자에겐 의미가 될 수 없다. 골동을 향한 무서운 집착과 광기가 느껴지는 <파인>의 주제가 압축된 대사가 아니었을까. 가짜인 줄 모르고 뒤 쫓아가 결국 화상을 입고 죽을 뻔한 경찰 홍기에게도 해당된다. 파국을 향해가며 건져 올린 그릇과 도자기는 맥거핀이 되어 의미를 잃어가고 <파인>의 주제는 이 진흙탕 아비규환 속에서 과연 누가 살아남는가다. 황선장이 바닷속에 뛰어든 벌구를 죽이는 장면이나 살아 올라온 전출을 해머로 내리치는 장면은 섬찟함을 넘어 인간의 잔혹함을 보여준다. 누구 하나 믿을 수 없고 모든 캐릭터들이 다 비열하다. 중반부에 희동과 연대하며 연민을 자아낸 전출도 알고 보니 부산에서 또 다른 처자식과 가정을 꾸렸다는 반전이 밝혀지고 양정숙의 친한 동생인 마릴린 양장점 여사장도 은신처로 도피한 정숙의 정보를 넘겨주는 모습은 돈과 권력 앞에서 누구 하나 믿을 것 없는 아사리판을 제대로 보여준다. 욕심부린 자들은 다 침몰했다 강윤성 감독은 <범죄도시>나 <카지노>를 통해 남성성이 극대화된 범죄 스릴러 속 캐릭터를 보여준 연출자다. 이런 거친 남자들 속에서 선자는 타협하지 않고 끝내 자기 꿈을 이루는 것에 성공했다. 반면 극 중 끝내 욕심을 부리고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은 다 죽었다. 멈춰야 할 타이밍을 알았던 사람들은 피해 갔지만 그러지 못한 자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식상한 권선징악 클리셰라 할지라도 <파인>이 주는 명쾌한 메시지는 확실하다. 욕심부린 자, 죽음에 이를지니. 그릇의 저주였을까? 그릇은 다시 바다로 돌아가고 모든 것들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는 희동의 마지막 내레이션이 <파인>의 주제를 명징하게 전달한다. 시즌2 가능한 골동과 도굴의 세계 : <파인>의 세계관, 확장 가능할까? 요즘 비극적 엔딩의 원작을 가진 OTT 콘텐츠 결말에서 많이 보이는 양상은 비극새드 엔딩이 아닌 열린 결말, 혹은 해피엔딩이다. 왜 그럴까? 너무 해피한 결말도 사람들은 식상함을 느끼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깊이 몰입했던 주인공들이 죽거나 사라지는 것에 대한 좌절과 배신감을 느낀다. 애착을 가진 존재의 소멸이 카타르시스 대신 짜증과 허무함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시청자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 주는 데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관점에서 제작진은 주인공의 죽음이란 결말을 앞두고 수없이 고민할 것이고 <파인> 역시 그 길을 택했다. 관석이 열길 낭떠러지와 불구덩이 속에서도 살아난 불사조란 점이 좀 아쉬웠지만 어쩌겠는가. 그가 주인공이고 옆 동네 마블 캐릭터 날아다니는 여기는 디즈니인 것을. 골동상 3인방 중 부표를 잡고 끈질기게 둥둥 떠 있던 김교수도 캐릭터상 부활할 확률이 백 퍼센트. 이 난리 북새통 지옥 속에서 살아 돌아온 촌뜨기들은 이제 시즌 2에서는 좀 세련되어지려나? 77년 신안 앞바다 유물 도굴사건은 한국의 수중고고학과 매장 문화재 발굴 정책에도 큰 역사적 영향을 미쳤고 50년 뒤 이렇게 OTT 콘텐츠가 되어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시즌 2는 바다가 아니라 경주에서 시작되는 것을 보여준 쿠키 영상은 <파인> 시리즈의 확장성을 보여준다. 세상은 넓고 보물을 노리는 촌뜨기들은 넘쳐날지니, <파인>은 지속 가능한 콘텐츠로서 꽤 쓸만한 이야기 보물을 발굴해내지 않았나 싶다.
영화 <좀비딸>의 기세가 무섭다. 개봉 첫날 관객 수는 43만 명. 오랜만에 가족영화를 보러 아이들과 함께 온 아빠, 엄마들로 극장은 북적이고 스산했던 멀티플렉스 공간은 활기가 넘쳤다. 현재 파죽지세인 예매 스코어는 좀비 아빠 조정석이 미션 임파서블 톰 크루즈를 눌렀다는 기사부터 오랜만에 터진 극장가 티켓 파워와 시너지 넘치는 배우들, 좀비딸 재매개 현상에 대한 분석이 쏟아진다. 7월 26일 열린 부산 센텀시티 무대인사에서는 꼬마 관객들이 좀비딸 역의 최유리 배우를 보고 손 흔들며 '언니, 너무 보고 싶었다'라는 친근감을 표현하고 밤순 할매 역을 맡은 이정은에게도 멋지다는 찬사가 쏟아질 정도로 출연 배우들의 즉석 팬 미팅 같은 현장이 펼쳐지기도 했다. 아빠 역의 조정석은 300만이 넘으면 지금 최고 유행인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소다 팝 챌린지 댄스 공약을 걸기도 했는데 머지않아 곧 정석 버전의 댄스를 보게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이미 애니메이션으로 1차 가공된 원작에 대한 인지도, 원작 내용에 최대한 충실한 각색, 원작 캐릭터와 이질감이 없는 친숙한 싱크로율, 2D인 웹툰이 3D로 영상화될 때 지켜야 할 암묵적인 룰을 지키면서도 2차 IP로서 수많은 대중의 호응을 얻고 있는 <좀비딸>의 흥행 요인은 뭘까? 첫째는 원작에 충실한 각색이다. <좀비딸>의 개그 포인트를 유지하면서 하이라이트 장면들을 잘 재현했다는 점인데 틀니 할머니 좀비라든지 밤순 할매의 효자손 개인기 같은 기존의 웹툰 팬들이라면 재밌게 본 장면들이 빠지지 않고 등장해 원작을 연상시키는 만족도를 선사한다. 작가 이윤창은 기존 작품 '타임인 조선','오즈랜드'에서 외계인이나 잔다르크 같은 역사 속 실존 인물들이 시공을 초월해 겪는 판타지 서사를 써왔는데 좀비딸 역시 '내 딸이 좀비가 되었다면?'이라는 매직 이프의 법칙에서 출발한다. 좀비가 되어버린 딸을 퇴치할 것인지, 길들일 것인지. 정환은 윤리적 갈림길에서 고민하지 않고 후자를 선택한다. 기존 좀비물이 집단의 공포에서 집안 내부라는 제한된 개인 공간으로 옮겨오면서 좀비딸은 밝고 명랑한 코믹물이 되고 영화는 살짝 어둡게 느껴지는 원작의 사회 비판 메시지를 걷어낸 대신 정환과 수아의 관계와 소통에 집중한다. 정환을 번역 작가가 아닌 맹수 조련사라는 직관적인 직업으로 설정해 좀비딸을 길들이는 당위성을 부여하고 원작에 등장하는 연화와 러브라인, 동배와 밤순 할매의 역할을 과감히 축소한 대신 수아가 좀비라는 야수성을 어떻게 스스로 조절하고 기억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에 비중을 할애해서 이야기가 곁가지로 뻗어나가는 것을 차단한다. 그러다 보니 원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신의 딸을 죽인 이장이나 고양이 애용이의 활약이 영화에서 사라진 점이 아쉽다. 아마 애용이의 팬들은 이점을 굉장히 아쉬워할 듯하다. 혼자 상추쌈을 싸 먹거나 119에 전화해서 신고까지 하는 똑똑한 고양이는 영화에서 사라졌지만 쩍벌묘 고양이의 잔잔한 개인기는 잊을만하면 튀어나오는 애용이의 존재감을 부각한다. ※ 지금부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 원작과 가장 큰 차이점은 결말에 있다. 정환이 스스로 수아에게 물려 죽음에 이른 원작의 숭고한 희생과 달리 영화는 딸도 살고 정환도 살게 되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그런 선택으로 가기 위해 공적 시스템에서 희생당하는 개인, 보호받지 못한 개인, 버림과 유기가 만연한 사회 풍조, 좀비지만 수아의 친부를 죽인 살인에 대한 정당성과 같은 원작이 제기했던 사회적 문제들은 사라지고 단순히 따뜻한 파스텔톤 좀비 동화로 마무리된 점은 아쉽지만, 영화가 결국은 우리 모두가 바라는 판타지라는 점에서 어쩌면 대중이 원했던 결말일지도 모른다. 두 번째 포인트는 원작과 싱크로율 높은 배우들의 캐스팅과 연기. 이미 딸 바보로 알려진 조정석의 현실 연기와 핏줄 서는 좀비 분장을 하고 동작, 표정까지 복합적인 역할을 맡은 신예 최유리의 부녀 케미가 찰떡궁합이다. 거기에 <중증외상센터>로 터블리(터프한데 귀여운) 조연의 획을 그은 윤경호의 귀엽고도 소심한 동배 연기와 좀비를 때려잡는 강단도 있지만 허당기도 있는 조여정까지 합세해 그야말로 배우들의 코믹 연기를 보는 재미가 탄탄하니, 웹툰 원작 영상화의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캐스팅은 성공적이었다고 봐도 좋을 듯하다. <좀비딸>이 원작의 사회비판적 메시지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마주한 인간 군상들에 대한 성찰이 많이 희석된 점은 아쉽지만, 늘 피 튀기던 K-좀비물이 무조건 괴물이 된 타자를 낯설게 보고 퇴치하던 구별 짓기에서 벗어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품어나간다는 이야기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자극적이고 폭력적이며 난해한 이야기에 지친 대중에게 '저런 사랑도 있을 수 있겠구나,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생각하게 만들고, 신파를 넘어 결국은 사랑의 힘이라는 보편성의 진리를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좀비딸>이 개봉 첫 주의 입소문으로 흥행하며 얼마나 뒷심을 발휘할지 더 지켜봐야겠지만, 웹툰 원작의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의 차원에서 본다면 장르의 특성을 잘 파악하고 콘텐츠 수용자들의 욕망을 잘 읽은 사례가 될 것 같다. 실제로 이 팍팍한 현실에서 괴물이 되어버린 나의 소중한 존재를 오롯이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이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좀비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당신은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정환이 써 내려간 정답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말하고 싶었던 대답일지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혼자 두지 않는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도대체 라부부가 뭐길래 난리지? 털북숭이 키링을 주렁주렁 가방에 달고 다니고 싶어도 나만 없는 라부부. '남들 다하는 건 절대 안 하지'라고 외쳤지만 좀 귀엽긴 하네. 리셀과 재테크 논리를 펼치며 죽어라 손가락으로 새빨간 앱을 새로 고침 하게 만든 피규어 시장 워너비 아이템이 된 캐릭터 라부부. 4주째 전 세계 넷플릭스 인기 TOP 10에서 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호랑이 캐릭터 더피 역시 영상을 본 팬들이 국립중앙박물관 굿즈샵을 다 털어버릴 기세로 몰려오는 바람에 두 번의 재입고에도 불구하고 몇 시간 만에 동이 나 버렸다. 7월 한 달을 뜨겁게 달군 두 개의 캐릭터, 라부부와 더피. 정체는 토끼귀를 가진 요괴와 까치 호랑이. 불티나게 팔린 캐릭터 속에는 스토리텔링이 숨어 있었고 그 스토리텔링에 마음을 빼앗긴 팬들은 캐릭터 IP 산업을 움직이는 엄청난 콘텐츠 파워를 만들어내고 있다. 라부부 캐릭터의 몬스터적 환상성과 상상력 7월 11일 이른바 카카오 대첩. 세 번의 구매 타임을 미리 공지하고 요즘 MZ세대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나에게 선물하기 작전은 대성공. 아이돌 그룹 피켓팅을 방불케 했던 구매 대란은 수천 명 대기 번호를 뚫고 들어갔어도 결제에 실패하는 난리 북새통 끝에 성공했다는 후기들이 인터넷에 올라왔고 곧바로 기존의 상품까지 적게는 3배에서 40배에 이르는 리셀가로 중고 거래 앱에 올라오기도 했다. 왜 이렇게 갑자기 라부부 캐릭터가 인기를 끌게 됐을까? 홍콩 출신 디자이너 카싱룽이 만든 라부부는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요정 엘프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캐릭터다. 요정이 가진 신비로운 매력 대신 라부부는 아홉 개의 상어 이빨, 귀염뽀짝한 손톱과 발톱, 장난기 가득한 큰 눈에 토끼 귀를 가진 몬스터다. 한마디로 정체를 규정지을 수 없는 하이브리드한 존재이자 친숙함과 낯섦을 동시에 지닌 캐릭터다. 귀엽지만 순둥순둥하지만은 않고 호기심 가득한 엉뚱한 매력의 존재, 괴물이지만 소원을 이루어 줄 것 같은 21세기 MZ세대들의 새로운 부적이 된 것이다. 최근 발매된 몬스터 시리즈는 '빅 인투 에너지'란 이름으로 기원의 의미를 담고 있다. 행운이, 희망이, 충성이, 평온이... 북유럽 엘프가 변형되어 친숙한 장난꾸러기 몬스터가 되어 아시아를 사로잡고 있다. 우리에겐 어피치나 춘식이가 여전히 사랑받고 있지만 개별 캐릭터가 독자적인 세계관 안에서 지속적인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내는 것은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처음엔 일본과 디즈니의 라이선스 캐릭터 위주로 생산하던 팝마트가 어느 순간 꾸준히 자국과 아시아권의 젊은 아트토이 디자이너를 영입하고 컬래버레이션하면서 구매력이 있는 소비자를 대상으로 공격적이고 도전적인 시장을 개척한 것도 성공 이유일 것이다. 한국에서는 팝마트의 뉴 아이템 정도로만 취급받던 라부부가 갑자기 인기를 끌게 된 것은 블랙핑크 리사와 로제의 애장품인 것이 SNS를 통해 알려지고 셀럽들이 명품 가방에 착용한 사진이 퍼지면서부터다. MZ세대들을 중심으로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켰고 최근 중국에서 2억 5천만 원 경매가에 낙찰된 사실 또한 희귀성과 인지도를 올렸다. 좋아하는 대상이 선호하는 아이템을 소유함으로써 애착의 대상과 동일시되는 심리적 현상, 피규어 콜렉터들의 수집 욕구, 확장성 있는 스토리텔링을 가진 아이템으로서 소장 가치, 캐릭터가 가진 귀여움 선호 현상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팬덤이 생겨났다. 다시 말해 라부부 신드롬이 만들어진 것인데 이러한 현상은 그들이 표방하는 세계관과 맞물려 꾸준한 덕후를 양산해 낸다. 장난기 가득한 라부부의 눈을 보고 아이러니하게도 70년대 못난이 인형 시리즈가 생각났다. 서양 문화의 동경을 담아 탄생한 일본의 아기 인형 큐피, 풍족하지 못했던 시절 미의 기준을 풍자한 한국의 못난이 인형, 그리고 베이비 붐을 지나 고소득 맞벌이 난임 부부들의 희망이었을 80년대 미국의 양배추 인형. 어쩌면 우리 가까이에 있는 장난감들은 그 시대상과 문화를 담고 유행은 돌고 돈다. 귀여움, 가와이 문화는 영원하다?! 귀여움이 가진 본질은 나보다 그 대상이 연약하거나 보호본능을 자극함에 있다. 어린아이, 동물, 쉽게 접하지 못하는 존재 같은 귀여움의 대상을 상상해 보라. 순수하고도 무결한 존재들이 대부분이다. 귀여움 속에는 그것을 바라보는 객체를 무장해제시키는 힘이 있고 덩달아 그 존재로 하여금 힐링되며 편안해지는 에너지를 전달한다. 그리고 그 내면에는 보호해야 할 존재에 대한 측은지심이 작동한다. 2024년 4월 한국을 강타했던 푸바오 열풍을 떠올려보라. 엄마 아이바오와 떨어져 본국으로 돌아간, 코로나 직후 태어나 전국민적 사랑을 받았던 털북숭이 판다곰 한 마리가 남긴 것들을. 일본은 우리보다 가와이 문화가 더 일찍 태동했고 발전했다. 지금은 중국의 팝마트에 기세를 빼앗긴 듯하지만 귀여움의 원조는 일본의 산리오다. 헬로우 키티와 마이 멜로디부터 시작해 시나모롤 등. 일본은 지자체 캐릭터인 유루카라 그랑프리 출신 쿠마몬도 귀여움을 어필한다. 일본 피규어 시장에서 반다이와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메디콤 토이의 베어브릭 역시 한정판 발매와 랜덤 뽑기 방식으로 팝마트 시리즈들이 추구하는 귀여움과 희소성 전략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귀여움을 동경하는 문화는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유효하다. 귀여움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 중 어쩌면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자 생명을 지닌 존재들이 가진 최고의 무기가 아닐까. <케이팝 데몬 헌터스> 씬 스틸러 까치 호랑이 더피와 서씨 넷플릭스에 공개된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케이팝 걸그룹이 귀신 사냥꾼으로 활약한다는 상상력에서 출발한 애니메이션인데 웰메이드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유가 있다. 바로 한국 케이팝을 배경으로 아주 디테일한 요소들이 잘 구현됐다는 점이다. 배경부터 공연장인 한국의 남산 타워, 데이트 장면은 한국의 옛 성터, 그리고 진우와 루미를 연결해 주는 메신저로 등장하는 푸른빛의 호랑이 '더피'의 인기가 주인공 못지않게 폭발적이다. 사진 : 넷플릭스 더피는 호랑이기도 하지만 전설 속의 동물인 해태(해치)의 모습과도 닮았다. 더피는 머리 위에 까치 서씨를 얹고 다닌다. 민화 속의 호랑이와 까치는 대립적 성격이 강했지만 <케이팝 데몬 헌터스> 속 둘의 존재는 파트너십이다. 서씨는 더피의 갓을 뺏아 쓴 눈이 3개인 까치인데 재미있는 점은 외국인들이 한국의 전통 모자인 갓에 큰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미 한국의 갓이 이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2019년 넷플릭스 <킹덤> 시리즈부터다. 조선시대 좀비 드라마를 보면서 외국인들은 주인공들이 썼던 다양한 전통 모자에 관심을 가졌고 갓을 기념 굿즈로 만들어주면 안 되겠냐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더피는 처음 본 루미에게 다가가 고양이처럼 머리를 부비기도 하고 진우의 편지를 전해주는 메신저 역할을 하지만 실수로 넘어뜨린 것을 바로 세우려는 집착도 보여줘 웃음을 안긴다. 이런 귀여움의 캐릭터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디테일의 승리. 귀여운 더피와 엉뚱한 서씨의 임팩트 강렬한 출현으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팬들은 한국의 호작도에서 탄생한 더피 캐릭터 인형을 만들어달라고 제작사에 요청하고 넷플릭스에서는 기념품으로 만든 굿즈를 고가에 판매하고 있다니, 요즘은 잘 만든 작품 속 캐릭터 IP가 팬덤을 양산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찌 됐든 한국의 까치 호랑이 민화에서 귀여운 더피와 서씨가 탄생하고 이러한 상상력이 사랑받는 캐릭터가 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포인트다. 애정과 애착이 탄생시킨 캐릭터는 무럭무럭 자라 새로운 콘텐츠 IP로 성장한다. 인간의 상상력과 환상성을 양식 삼아 기분 좋은 귀여움의 문화를 선사하는 이토록 친밀한 존재들, 주위를 둘러본다면 우리와 친해지고 싶은 요괴들이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오빠들이 돌아왔다, 5월의 산들바람과 함께. 이 세 명의 쓰리샷이 무대 위에서 함께 노래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중년의 X세대 입장에서는 눈물 나게 반가운 일이다. 윤상, 김현철, 이현우. 이름만으로도 반가운 뮤지션 세 명이 함께 음원을 내고 전국투어를 한다니. 오 마이 갓. 만사 제치고 이건 꼭 가야 해! 미디어에서 우리는 왜 90년대를 그리워하는가에 대한 분석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요즘, <90년대생들이 온다>라는 책 제목처럼 직장에선 90년대생들과 MZ세대에게 치이고 집에서는 퉁퉁거리는 GenZ와 매일 북새통 속에서 사는 입장에서 이들의 귀환이 유독 반가울 수밖에. '엄마도 니들처럼 좋아했던 오빠들 있었거든, 니들이 이 환상의 트로이카를 알기나 해?' 요즘 아이들에겐 <복면가왕>에 나와 앉아 있는 라이즈 앤톤의 아빠로, 심야 라디오 디스크 쇼의 DJ로, 드라마에서 실장님 담당이던 미식가 출신 배우로 알고 있는 이 오빠들을 어찌 설명해 주랴, 지금 아이돌급 인기는 저리 가라 할 만큼 당대 최고였던 김현철, 윤상, 이현우. 스마트폰도, 인터넷도, OTT도 없던 그 시절, 본격적 아이돌 1세대가 등장한 90년대 중후반 이전에 이미 우리의 아이돌이었고 우리의 슈퍼스타였던 에지 있고 스타일리시했던 이들을. 교회 오빠 김현철, 화실 오빠 윤상, 그리고 미국 오빠 이현우. 이사 갈 때마다 절대 버리지 않고 싸 들고 다녔던 보물 1호 레코드판 속에서 바삭거리는 비닐을 벗기고 턴테이블에 올려본다. 이게 얼마 만이야. 예능 프로에서의 모습 말고 90년대 진짜 내 '취향저격'이었던 이들의 노래를 들으러 출격 준비. X세대가 함께 열광한 무대 : 그래, 이게 바로 90년대 '갬성'이라니까. 쇼케이스와 뮤지컬 공연이 자주 열리는 도심 한복판 1,400석 규모의 공연장에서 그들의 무대가 펼쳐졌다. 지하철에서 내리니 5월의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지만 길게 늘어선 중년의 팬들은 우산을 쓰고 삼삼오오 행복한 얼굴들이었다. 결혼식장 꽃길처럼 꾸며놓은 공연 배너 앞에서 사진을 찍는 모습은 90년대 여학생들로 돌아간 얼굴이었다. 남자 팬들도 꽤 많이 보였는데 아내와 함께 오거나 남자 팬클럽 멤버들끼리 온 조합도 눈에 띄었다. 90년대 내가 유일하게 돈 주고 샀던 LP의 주인공이라거나, 늘어지게 들었던 테이프가 아직도 서랍 속에 있다거나, 중고 사이트에서 이들의 음반과 테이프를 어렵게 구했다는 X세대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태생적으로 덕후 DNA가 풍부한 필자 역시 90년대 20대가 된 뒤론 잠시 덕질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10대 소녀가 대학생이 되고 취직하고 IMF를 겪고 그리고 결혼하고... <응답하라 1994>의 나정이처럼 바삐 살며 잠시 접어두었던 덕질 유전자는 또 한 번의 인생 최대 위기였던 코로나를 만나며 내 안에서 터져 나왔다. 전국민적 사랑을 받았던 트로트 프로그램의 한 가수를 응원하며 삶의 평안을 되찾았고 덕질이 삶의 활력소임을 깨달았건만 이 트로트 스타의 하늘을 찌르는 아이돌급 인기에 공연 티켓팅마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피켓팅을 치르다 보니 몇 년간 단련된 손가락 실력으로 어느새 1열의 포도알(R석 좌석)을 꼭 부여잡고 있었다. 하하... 1열 센터라니. 그래, 오랜만에 레전드 무대를 보러 가는데 1열 정도는 돼야지! 지근거리에서 제대로 감상할 생각을 하니 기분이 설렜다. 콘서트의 시작은 'A Breeze of Memories', 이번 콘서트를 위해 김현철과 윤상이 함께 작곡했고 이현우와 김현철이 사이좋게 작사했다. 그런데 곡 초반에 전주가 흘러나오고 윤상의 보컬을 거쳐, 이현우가 관객석을 보고 감격했는지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자신의 파트를 놓쳤고 라이브로 황급하게 부르는 장면이 연출됐다. 이 또한 라이브 콘서트의 묘미인지라 관객석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를 두고 김현철은 이 영상을 찍으신 분이 계시면 제발 널리 퍼뜨려 달라면서 두고두고 놀렸다. 세 사람의 합은 그만큼 오래된 세월이 있기에 가능했던 장면이었다. 그 덕에 관객들도 즐거워하며 이들의 조합이 가져다주는 반가움과 신선함, 올디스 벗 구디스(Oldies & Goodies)를 맘껏 즐길 수 있었다. 이들의 공연이 의미가 있었던 것은 단순히 90년대 가요사를 추억하는 뮤지션들의 합동 무대가 아니라 현재도 이들의 음악 여정이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Breeze of Memory'의 가사처럼 추억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작고도 큰 모든 것들이 하루하루 모여서 미래의 바람으로 우리에게 불어올 것임을 알기에. 김현철 공식 유튜브 채널 'A Breeze of Memories' 이현우의 재발견, 윤상의 나이테, 윤활유 김현철, 최고의 세션팀 자신의 순서에 나와 노래만 하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김현철이 노래할 때 윤상이 건반을 연주하고 이현우가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할 때는 또 연주와 코러스를 해주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함께 즐기는 모습, 그리고 가수도 뮤지션도, 아티스트로서 그들을 사랑했던 관객들과 함께 중년을 맞이하고 있는 모습, 시간 속에서 팬도 가수도 그 모든 게 함께 어우러진 무대였다. 기타, 베이스, 건반과 드럼 모두 이들과 오랜 시간 공연을 해왔던 최고의 세션 팀과 뮤지션들이 함께하기에 귀가 즐겁다. 김현철은 라디오 DJ를 하면서 음악 작업을 하고 윤상 역시 후배 양성을 하면서 실험적인 음악을 해온 프로듀서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그에 비해 이현우는 배우로서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까닭에 가수로서의 진가를 발견하기 힘들었다면, 이번 기회에 파워풀하고 리듬감 폭발하는 이현우의 락킹한 무대를 만나볼 수 있다. 레게풍의 'My Way'나 발라드 '비가 와요', 한대수 원곡의 '행복의 나라로' 무대는 맏형이지만 폭발적인 에너지와 무대 매너를 보여준 이현우의 재발견이었다. 이 공연의 백미는 마지막 무대. '이별의 그늘'을 불러주지 않아서 앙코르곡으로 아껴두었나 싶었는데 불이 꺼지고 음악이 흐른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윤상의 무대, 마치 구도자처럼 두 손을 꼭 모으고 경건하고도 진지하게 지금까지 걸어온 음악의 나이테를 보여주는 윤상의 무대는 그야말로 다시 못 볼 명장면이다. '달의 몰락'이나 '왜 그래'로 신나는 무대를 만들고 윤활유처럼 이 셋을 연결하는 김현철의 매끄러운 진행 속에서 마지막으로 김현철이 만들고 윤상이 피처링한 곡 '사랑하오'를 셋이 함께 부르며 마무리된 이들의 무대. 레전드는 역시 레전드로 남을 만하다. 프로듀서로서의 모습도 좋지만 이들이 노래하는 무대가 가끔은 이렇게 우리 세대를 찾아와 다독여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낡은 테이프, 레코드판에서 발견한 쪽지, 그 청춘의 기억 : 여전히 사랑하오. 이 세 명의 인연의 접점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이현우의 1집을 작업한 윤상과, 비슷한 시기에 데뷔하며 서로의 존재를 알아본 김현철과 윤상. 1980년대 말 한강 이남 천재 뮤지션이 김현철이라면 강북을 주름잡은 천재 뮤지션은 윤상이란 말이 있었듯 데뷔 후 이들은 활발하게 활동하며 유학도 가고 잠시 음악을 접기도 하면서 자신만의 색을 찾아갔다. 2000년대 초반 윤종신을 포함한 노총각 뮤지션 4인방은 '사색동화'라는 앨범을 내기도 했다. 지금은 모두 결혼을 했고 약속이나 한 듯 셋 다 두 아들의 아빠가 되었다. 지금의 K-POP 아이돌처럼 뜨겁고 빠른 속도로 달구어지는 팬 문화는 아니지만, 1990년대 우리의 사랑은 서툴고 느렸지만 따뜻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지금은 '아재'가 된 오빠들도 자신들만의 속도로 느긋하게, 찬찬히 자신들의 음악 세계를 걸어왔기에 지금은 음악계 수많은 후배에게 '뮤지션의 뮤지션'이라는 헌사와 존경을 받는 대선배로 자리매김하지 않았을까. 잠시나마 1990년대 동네 레코드 가게에 LP를 사러 가던 방송반 열일곱 살 여고생으로 타임머신을 태워준 산들바람에게 감사한다. 63빌딩에서 열렸던 콘서트와 뮤직라이프, 하이틴 잡지, MBC 정동 사옥의 '별이 빛나는 밤에' 공개방송. 80년대가 저물며 한국의 대중문화가 활짝 꽃피던 90년대 혜성처럼 등장했던 분위기 있던 세 명의 오빠들의 보여준 세련된 음악의 클래스는 여전하다. 이들의 음악은 인스턴트와는 급이 다른 위엄이 있다. 동시대를 살았던 뮤지션과 세월을 맞으며 나이 들어간다는 건 이런 기분일까. 행복했던 두 시간 반의 공연. 산들바람에 실려온 청춘, 우리 거기서 다시 만나. 그대, 여전히 사랑하오. 인생은 그렇게 흐른다.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AI 시대, 생성형 AI 시스템을 활용한 영화들이 다양한 경로로 대중에게 공개되고 있다. 정교하고 리얼한 표현, 미학적 미장센을 극대화한 스케일로 뛰어난 몰입감을 주는 영화부터 아직은 표현 기법과 스토리텔링이 아쉽게 느껴지는 영화까지 AI를 활용한 영상 스토리텔링은 계속 진화 중이다. AI 영화가 이렇게 주목을 받는 시대가 되다 보니 가장 재빠르게 반응하는 것은 국내외 영화제들이다. 해외에서도 영화제 경쟁 부문에 AI 섹션을 신설하거나 아예 독립적인 AI 영화제를 출범하기도 한다. 국내에서도 경기도와 부산이 일찌감치 AI 영화제에 뛰어들었다. 경기콘텐츠진흥원이 AI 영화제라는 명칭을 사용하자('대한민국AI국제영화제') 부산은 동일 명칭을 사용할 수 없기에 '부산국제인공지능영화제'를 창설했다. 올해 두 번째 개최되는 두 개의 국제인공지능영화제에서는 상상 그 너머의 이야기들이 또 어떻게 후이늠(걸리버 여행기의 네 번째 여행지인 이상향의 나라)이라는 판타지를 펼쳐놓을지 상상해 본다. 12년 전 영화 <그녀>가 알려준 기계와 인간의 감정 인간과 인공지능과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영화 속 소재로 등장한 계기는 컴퓨터 운영체계인 OS 시스템과 외로운 도시인이 정서적으로 교감하며 사랑을 나눈다는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그녀(Her)>가 아닐까 싶다. 흥미로운 건 <그녀>의 시간적 배경이 제작 당시의 12년 뒤였던 바로 지금, 2025년이라는 사실이다. 영화처럼 2025년을 사는 우리는 <그녀>에서 그려진 인공지능과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교류하는 시대를 살고 있을까. 시스템과 사랑을 속삭이는 스토리는 이제 인공지능의 고전 텍스트가 돼버렸지만 그 후 수많은 OTT 콘텐츠 속에서 tvN <욘더>처럼 인공지능을 이용해 나의 사후세계를 설계하고 영화 <원더랜드>에서 나의 장례식장에서 웃으며 조문객을 맞을 수 있는, 사자(死者)와 감성적인 연결을 할 수 있는 세상을 그린 판타지 스토리텔링을 쉽게 만날 수 있다. CJ ENM이 제작한 AI 영화 <M호텔>은 노인, 소년, 바이킹 근육질 전사, 미소녀 등 다양한 캐릭터의 표현과 게임을 보는 듯한 몰입감으로 한층 자연스러워진 영상미와 더불어 그동안 아쉽거나 부족하게 느껴지던 극의 스토리텔링도 비교적 만족시킨 6분 30초 길이의 영화다. 우연히 주운 호텔 열쇠로 하룻밤 투숙하는 고급 호텔 방에서 자신의 전생을 모두 만나본다는 판타지 서사는 과거 표현력에만 치우쳐 완성도 면에서 떨어졌던 AI 영화의 스토리텔링이 확실히 진일보한 느낌이다. 그중 작년에 제작되어 공개된 AI 영화 중에서 눈에 띄는 건 독특한 역사 판타지 AI 영화 <걸리버 율도국 여행기>다. AI로 재탄생한 <걸리버 율도국 이야기> : 고전과 상상력의 결합 우리에게 익숙한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소인국, 대인국 이야기지만 그 후 3, 4부인 라퓨타와 후이늠은 그 당시 파격적으로 작가가 살던 영국의 현실 비판과 함께 걸리버가 당도한 환상적 공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걸리버가 만약 국내에 표류하게 되고 그곳이 홍길동이 세운 이상 국가 율도국이었다면? 이 내용은 이미 <걸리버 유람기>라는 소설을 발표한 김연수 작가에 의해 세상에 나온 바 있다. 그 소설 속 율도국에 표류한 '걸리버 여행기'를 재해석해 홍길동과 걸리버의 만남, 그들이 함께 이상향을 찾아가는 여정을 스토리텔링하고 AI 영화로 만든 건 고려대학교 박진호 연구교수와 학생들, 그리고 고려대학교 출신의 AIMZ Media의 소휘수 대표다. 그동안 AI 영화의 주된 소재가 SF, 디스토피아 미래와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이 대부분이었지만 인문학, 응용과학 전공자들은 AI 영화의 소재와 스토리텔링을 역사 판타지로 확장해 동서양 소설 속 걸리버와 홍길동의 만남을 판타지 영화로 완성했다. 16분간의 러닝타임 동안 동서양이 바라보는 이상향 유토피아, '율도이즘'으로 대표되는 평화와 평등의 가치, 이 시대 진정한 지도자의 자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과 메시지도 들어있다. 역사 속 공간으로 빨려 들어간 듯 <걸리버 율도국 이야기> 전반부는 지는 석양처럼 전반적인 색감 자체가 따뜻하고 온화하다. 자신을 구해준 율도국 사람들을 위해 걸리버가 나무와 도르래를 사용해 서양에서 쓰는 승강기를 만들어 보답하는 장면은 21세기 도나 해러웨이가 주장한 심포이에시스(Sympoiesis), 공산(共産)의 개념까지 생각하게 만든다. 전반부 평화로운 여행자 걸리버와 지도자 홍길동의 만남에서는 문화재 디지털 복원가로서 활동했던 박진호 감독의 경험과 전문성으로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이 영상으로 재현됐다. 실제로 15~17세기에 중국, 인도와의 무역을 통해 막강한 부를 축적했던 태국의 아유타야를 금빛 왕국으로 묘사한 장면은 문화재 복원가의 실제 고증을 바탕으로 현실감 있는 환상성을 완성한다. 후반부에 들어서며 일본의 와타나베가 평화를 깨고 율도국을 침략하는 스펙터클 전투 씬은 역동성이 부족하고 아쉬운 장면도 눈에 띄지만, 꽤 긴 16분이란 러닝 타임이 끌고 간 서사의 완결성 대비 AI의 기술적 표현 부분의 부족함은 상쇄되는 느낌이다. 그 외에도 아쉬운 점은 보인다. AI가 생성한 동일 인물들은 배경과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른 얼굴을 하고 있어 몰입이 안 되는 몇몇 장면들도 있고 걸리버 같은 경우 조각같이 수려한 외모로 인해 조금은 인간미가 떨어지는 느낌도 든다. 전 세계 모든 잘생긴 배우의 장점만을 조합한 듯한, AI가 완성한 걸리버의 완벽한 얼굴은 일본 장수 와타나베에게도 적용된다. 개성 있는 얼굴을 창조하려면, AI에게도 선택하는 안목이 필요할지 모른다. 이런 몇 가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AI 영화 <걸리버 율도국 여행기>는 후속편을 기대하게 만든다. 걸리버가 돌아간 이후에, 홍길동이 지도자로서 그렇게 떠난 이후에 율도국은 어떻게 됐을까. 제대로 된 지도자와 함께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상향, 율도국은 우리가 만날 수도, 가질 수도 없는 이상향이지만 어쩌면 지금 우리가 가장 간절하게 꿈꾸는 이상향일지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AI가 만들어낸 그 찬란하고 따뜻한 공간은 어쩌면 지금 우리가 가장 강력하게 염원하고 있는 욕망을 담은 판타지 서사가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율도국 이야기>가 걸리버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간 것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또 홍길동의 죽음 이후에 그의 뒤를 이은 지도자가 나타났기를, <율도국 이야기> 시즌2를 기대해 본다. 판타지는 계속되어야 한다. 상상력을 이뤄주는 황금열쇠 되려면 탄탄한 스토리텔링 우선 AI 영화는 지금 시점에서 판타지, 대형 스케일의 전투, 전쟁, 천재지변 등의 장면들을 연출하는 데 비용 절감을 할 수 있는 선택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그 리얼함과 정교함 사이, 인간의 온기가 들어간 연출과의 간극이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도깨비방망이가 뚝딱 만들어준 결과물이 내는 광채와 화려함에 순간 혹할 수 있지만 인간이 공들여 만든 작업물과의 괴리감과 이질감을 앞으로 어떻게 좁혀나갈 것인지가 AI 영화의 과제가 아닐까 싶다. 영상의 표현미는 그렇다 치고, 마지막 스토리텔링은?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는 스토리는 식상함을 넘어서, 종국에 사람들에게 감동의 버튼을 누를 수 있는 의지를 선물한다. 결국 AI 영화로 우리는 수많은 제약에서 벗어나 더 많은 판타지를 만나겠지만 그 판타지 역시 공중에 붕 뜬 불안한 비행이 아닌, 현실에 제대로 착지할 수 있는 안전함을 갖춘 탄탄한 토대의 스토리텔링 서사를 갖추고 있어야 함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닐까. 발전한 AI 기술이 다양함을 제공하는 판타스틱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 안에서 탄탄한 이야기와 감동을 찾는 호모나랜스(Homo narrans; 이야기하는 사람)의 속성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 : 박진호 감독, CJ ENM 제공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여기저기 <폭싹 속았수다>의 이야기가 봄날 제주 유채꽃처럼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스러진다. 누군가는 펑펑 눈물을 쏟았다고 하고 누군가는 너무 내 얘기 같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다시 그만두었던 시를 쓰기 시작했다. 정치적 혼란함으로 어지러운 시국에 들과 산으로 번진 불길이 할퀴고 간 상처에 끝도 없이 속이 타 내려갈 즈음 조용히 시작된 그 제주의 이야기는 그렇게 사람들 가슴 속에 번져갔다. <폭싹 속았수다>는 과연 모두를 구원한 드라마일까? 취향의 차이는 있겠지만 세대 불문 공감의 서사를 펼친 것은 확실해 보인다. 20대들은 학씨 아저씨나 은명이처럼 인정받지 못한 설움과 인생의 페이소스에 열광했고 50대는 IMF를 겪으며 살아온 금명의 이야기에, 6,70대는 가난과 가족의 굴레 속에서 자신을 희생해야 했던 애순을 보며 몰입하고 빠져들었다. 그렇게 살면 살아졌던 시간을 버텨온 이들을 위한 이야기에 우리 모두의 봄이 노오란 유채꽃처럼 팔랑이며 너울너울 스며든다. <폭싹 속았수다>의 세계관 : 청춘의 낙서가 시집이 되었다 임상춘 작가가 새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도대체 이 세계를 창작해 낸 작가의 정체가 밑도 끝도 없이 궁금해진다. 생각할 상(想)에 넉넉할 춘(賰)이라는 필명을 쓰는 작가. 이름처럼 그녀가 창조해 낸 세계는 늘 너울거리듯 넉넉하다. 세파에 찌든 사람들에게 마음껏 울 수 있는 물꼬를 틀어주고 뒤돌아서 '그래, 내가 가진 소중한 것들에 감사해야지'라는 훈계 대신 따뜻한 용기와 포근한 도닥임을 선사하는 의문의 크리에이터. <동백꽃 필 무렵>에서는 옹산, <쌈마이웨이>에서는 호천마을이라는 공간을 통해 특별한 로컬리티를 보여주더니 이제 제주 여인 3대의 서사를 통해 엄마와 딸, 손녀의 이야기를 이렇게 그려낼 줄이야... 가족이라는 연대,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딸과 엄마로 이어지는 거대한 서사는 재미교포 2세대인 이민진 작가도 <파친코>에서 깊이 다루지 못했던 부분이다. 영도와 일본, 미국이라는 공간을 부유하는 한인들의 디아스포라를 다뤘던 <파친코>와 다르게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에 뿌리 내린 여인들의 삶을 글로벌 플랫폼 넷플릭스 안에서 그려냈기에 더 의미 있다. 생존을 위해 바다 밑으로 내려가야 했던 여인들, 살기 위해 결혼을 선택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아이를 죽음으로 떠나보내고 그렇게 "살민 살아진다"며 꾸역꾸역 살아냈던 그들에게 바치는 감사와 존경. 그렇게 그 시대를 살아간 우리들의 할머니, 어머니, 누이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관객은 공감하고 눈물을 흘린다. 성공한 영상 콘텐츠에는 보편성의 진리가 들어있다. 효와 정, 믿음과 의리. 인간이 가장 인간다울 수 있는 타이밍에서 사람들은 감동한다. 매섭게 몰아친 인생이라는 폭우를 건너고 건너온 모든 이들에게 손 내미는 따뜻한 스토리. 이들이 썼던 청춘의 낙서가 일기장이 되고 다시 시집이 되어 모두의 가슴을 적시는 것, <폭싹 속았수다>의 세계관이자 미덕이다. 학씨 아저씨가 알려준 잊고 있던 울 아버지의 모습 <폭싹 속았수다>의 화제성에는 조연들의 연기도 한몫했다. <미생>과 <시그널>의 김원석 감독과 임상춘 작가가 찾아낸 보석 같은 조연들의 연기는 적재적소에서 빛을 발한다. 부산으로 야반도주한 관식과 애순이 묵던 여관 주인으로 얄미울 만큼 실감연기를 보여주던 강말금은 <찬실이는 복도 많지>로 신인상을 휩쓴 배우고, 80년대 패션과 분위기를 완벽하게 재현하며 금명에게 딸의 대리시험을 제안하던 김금순도 독립영화계에선 이미 정평이 나 있는 배우다.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은 학씨 아저씨 부상길 역의 최대훈은 전형적인 악역이 아닌 연민을 자아내는 중년과 노년에 이르는 남자의 삶을 입체적으로 보여주었다. 우리 엄마들의 옆에서 살아온 아버지의 삶은 어떠한가. 허세 가득하고 때론 모질도록 폭력을 휘두르던 그 역시 정에 목마른 인간이었음을, 배 나오고 머리 벗겨진 할아버지가 된 남자의 슬픈 뒷모습에 담긴 부상길이란 캐릭터는 잊고 있던 내 아버지에 대한 상념에 젖게 만든다. 부상길이 황혼 이혼 후 서툴지만 조금씩 그의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모습, 영란과 자전거를 타며 바닷길을 달리는 장면이나 자식에게 선물 받은 관식의 신발을 신어보고 편하다며 달리는 모습에서 느끼게 된다.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찰랑이고 있는, 고여있는 우물처럼 깊은 삶의 아픔과 깊이. 부상길을 보며 오래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던 건 왜일까. 관식이처럼 다정하고 지고지순하며 희생적인 아버지 대신 자식에게, 아내에게 다가가는 법을 몰랐던 서툴고 거칠었던 아버지가 그곳에 있었다.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지만 철이 들면 알게 된다는 것을, 나중에 엄마가 되고 그게 아버지의 표현법이란 것을 알게 된 현숙이는 아버지는 늘 소파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엄마 영란에게 들려준다. 그 장면에서 늦은 밤 소파에서 자고 있던 아버지가 떠오른 것은 과연 나뿐이랴. 어쩌면 우리에게는 애순 같은 엄마도 있었지만 상길이 같은 아버지도 있었다는 것을. 금명이가 입에 달고 있던 '짜증 나'라는 표현은 실상 '미안해, 아빠 나도 사랑해'와 동의어였다는 것을. 세상의 모든 삶은 작고도 크다, 그 고귀함에 대하여 <폭싹 속았수다>를 보면서 문득 루시드폴 8집의 '모든 삶은 작고 크다' 가 떠올랐다. 그 어떤 삶도 소중하지 않은 게 있으랴. 척박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딸이 지어준 '개전복'이란 시 한편을 가슴에 품고 행복해하던 광례의 삶도, 야반도주해 가출한 아들 관식이를 찾자마자 금개구리의 행방부터 묻던 계옥이도, 사위를 곤경에 빠트린 사기꾼을 찾기 위해 자존심도 팽개쳤던 부상길의 인생도, 그렇게 오늘 하루 담벼락에 피어난 패랭이꽃처럼 소중하지 않은 인생이 있을까. 작고도 큰 삶, 크고 작은 모든 삶의 여정은 위대하다고 말해주는 이야기, <폭싹 속았수다>. 그렇게 정말 수고하며 오늘 하루도 무탈하게 살아온 모든 이들의 시간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서 역사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이 드라마에 담긴 두 가지 메시지는 정(情)과 고귀함이다. 애순이가 자신의 존재를, 해녀였던 엄마 광례를, 그리고 자신을 사랑해 준 관식이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면 애순이의 시집은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겼기에 애순의 딸 금명이 역시 자신을 귀하게 여겨준 충섭이를 찾았고 그 충섭의 엄마에게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는다. 충섭이의 엄마가 애순에게 말린 곶감을 보내며 손편지로 썼던 글, "저는 금명이가 그렇게도 예쁩니다". 아마도 수많은 K-며느리들의 눈물샘을 터트리게 한 장면은 바로 이 장면이었을 터, 세상의 그 얼마나 많은 딸들과 며느리가 이 말을 듣고 싶어 할까. 듣고 싶지만 듣기 어렵고 하고 싶지만 쉬이 하기 힘든 말. 그 안에는 상대를 인정하고 배려하며 긍휼히 여기는 태도가 들어있다. 사랑과 자비를 베푼다는 것. 처음에는 '왜 금명이와 애순이는 복도 많지, 남편 복이 참 많구나' 삐딱했다가 결국엔 깨달았다. 고귀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 상대방을 높이고 귀한 사람으로 대해주어야 내게 돌아온다는 것을. 그 고귀함을 품고 작고도 큰 삶을 살아갈 때 귀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폭싹 속았수다>. 비평의 원칙은 대상 텍스트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논하는 것이건만 오늘의 취향저격은 무언가의 뼈를 바르며 해부하는 일 대신 되뇌어 본다. <폭싹 속았수다>가 가르쳐준 우리 삶의 작고도 큰 고귀함에 대하여.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한 분야에서 모두가 인정하는 최고의 레전드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여전히 건재한 가요계의 두 거장, 가황 나훈아와 가왕 조용필.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그들의 노래를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고 있으며 왕성한 에너지로 끊임없이 자신의 노래를 창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영광의 순간에 멈춰 서 있지 않고 현재 진행형인 아티스트로서 경지에 도달한 이들. 요즘 잘파(Zalpha) 세대가 선호하는 크리에이터란 직종의 핵심은 '자신만의 콘텐츠를 보유하고 있는가?'다. 정교하고 디테일하게 만든 창작품이 독보적인 세계관으로 존재할 때 그 창작자는 인정받게 된다. 2024년 나훈아는 은퇴를 선언했다. 1947년 부산 출생, 78세로 팔순을 앞둔 그가 마지막 무대에 서면서 남긴 가장 인상 깊은 한마디는 "평생 구름 위를 걸으며 살아왔으니 이제 들길도 걷고 꽃향기도 맡고 땅에서 걷고 싶다"는 말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스캔들에 기자회견을 하며 당당하게 입장 표명하던 그는 얼마 전 은퇴 공연에서 정치적 발언을 했다가 한동안 이슈 파이터가 됐지만 나훈아의 음악적 성과만을 두고 본다면 한국 대중음악사에 큰 영향력을 미친, 수많은 창작을 한 걸출한 크리에이터임은 틀림없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등록된 발표곡만 1천200여 곡. 그중 90% 가까이 직접 쓰고 만들었다. '홍시', '18세 순이', '사모' 등 나훈아의 노랫말에 담긴 고향과 누이, 우리네 엄마에 관한 이야기는 가슴속 그립고도 울컥한 존재를 꺼내어 쓰다듬는다. 작곡도 작곡이지만 그만의 가사를 귀담아듣고 있으면 역시 나훈아만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그간 만든 노래로도 충분히 활동할 수 있으련만 나훈아의 창작열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2023년 경쾌한 댄스곡 '기장갈매기'를 발표했다. 사랑에 목매지 않는 부산 상남자, B급 감성 가득한 뮤직비디오에서 부산 시골 바다를 배경으로 꽁지 머리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영화 <보안관>에 나올 법한 동네 건달들과 맞장을 뜨며 갈매기 댄스를 추는 나훈아의 열정을 누가 이길 수 있으랴. 나훈아는 창작력 하나로도 가요계 레전드가 될 수 있는 위대한 유산을 남긴 셈이다. 은퇴 공연에서 드론에 마이크를 실어 보내며 '사내' 가사처럼 화끈하게 이별을 선택한 나훈아의 명곡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후배 가수들에게 꾸준히 불리며 가요계 레전드로서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다. MV | 나훈아(Na Hoon-A) - 기장갈매기 | 새벽 (SIX STORIES) 자, 그다음은 조용필. 그 역시 데뷔 후 55년 동안 20집 앨범을 내며 꾸준히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과의 작업을 통해 대중과 소통했다. 전설의 뮤지션이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조용필은 원곡 '돌아와요 충무항에'를 록 창법으로 부르고 개사해 자신만의 노래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항구를 통해 떠났던 1980년대 재일교포에 대한 애틋함을 형제애로 표현해 불렀다. 좋은 가사를 픽하는 안목도 뛰어나 '창밖의 여자'와 '일편단심 민들레'의 노랫말 원작자들과 협업해 실향민의 사랑, 이별의 아픔을 노래했고 '킬리만자로의 표범'과 '꿈'을 통해 꿈을 찾아 도시를 찾아온 이방인의 희망과 좌절을 노래로 풀었다. 그가 만든 곡을 살펴보면 늘 존재에 대한 성찰이 들어있으며 시대정신을 담아 고민한 흔적이 있다. 음유시인이라 칭송받는 '고추잠자리'와 '바람의 노래'의 작사가 김순곤부터 MZ세대의 워너비 작사가 김이나까지 폭넓게 협업하며 '바운스' 같은 집단 창작곡과 '찰나'나 '그래도 돼', '라'를 통해 트렌드에 맞춰 변주하며 시대 불변 희망의 메시지와 거장의 따뜻하고도 세련된 위로를 전한다. 이렇게 그는 은퇴를 선언한 나훈아와 또 다르게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 나훈아와 조용필은 그렇게 창작자로 자신의 콘텐츠를 끊임없이 만들어왔기에 레전드가 되었다. 이들이 애써 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잘 걸어왔던 흔적이 그들을 레전드의 반열에 올린 것이다. 물론 그 길은 쉽지 않아 한 분야의 레전드가 되는 길은 외롭고 고독하며 고통을 수반한다. 자신만의 누에고치 속에서 실을 뽑아내며 작품을 창작하고 고독 속에 침잠하며 노래한다. 꾸준함이 쌓이고 쌓여 평판이 되고 평판은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고 전설로 박제된다. 끊임없이 자신만의 마르지 않는 에너지를 폭발시킬 때 그들은 별로 남아 사람들의 가슴속에 전설이 된다. 마지막으로 엘비스 프레슬리. 그가 떠난 지 반세기가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프레슬리의 추앙자들은 로큰롤, 컨츄리, R&B까지 다양한 장르로 시대를 풍미한 레전드로 그를 기억한다. 레너드 번스타인이 엘비스 프레슬리를 '모든 것에 리듬을 도입한 문화적 혁명'이라고까지 표현했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 혁신적인 크리에이터였다. 엘비스 프레슬리, 조용필과 나훈아. 이들이 레전드가 된 것은 자신이 직접 창작자로서 가슴을 울리는 공감의 음악을 대중에게 전달했다는 데에 있다. 이 셋은 '넘버원'이기도 하지만 유일무이한 '온리원'이기도 했다. 가요계의 레전드인 이들을 굳이 열거한 이유는 그들이 한 무대에 모인 듯한 공연이 바로 2월 끝자락, 지난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훈아, 조용필, 엘비스 프레슬리가 다 있던 탁쇼3 앙코르 현철과 송대관의 부고는 1980년대 트로트 시장을 주도한 1세대가 저물고 트로트 장르의 전폭적인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국악, 성악, 뮤지컬 등 다양한 음악과의 융합과 경계를 넘나드는 시도로 트로트는 젊어졌고, 다양한 음악을 하던 뮤지션들이 그 안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 도전하고 기회를 찾았다. <미스터트롯3>에 출전한 이정과 모세가 천록담과 춘길로, <현역가왕2>에 나온 국악퓨전그룹 '두 번째 달'의 김준수가 그 예다. 이처럼 숨은 실력자들의 대거 등장으로 정글 속 생존처럼 치열해진 트로트계에 일찌감치 출사표를 던지고 여유롭게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는 영탁. <미스터트롯> 선으로 이름을 알린 뒤 현재 그의 위치는 어떨까. 영탁 역시 R&B와 발라드 장르에서 활동했고, 영화 OST로 데뷔한 뒤 수많은 영화 주제곡을 불렀던 가수였다. 2020년 <미스터트롯> 선으로 등장해 '막걸리 한잔'과 '찐이야'로 존재감을 폭발시키고 2라운드에서 이미자의 '내 삶의 이유 있음은'으로 명확한 온도차를 보여주던 가수. 그리고 5년이 흘렀다. 그사이 영탁은 3개의 앨범을 냈고 <탁쇼>라는 세 번의 전국 투어를 했으며, 트로트 장르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대중적이고도 실험적인 음악을 선보였다. 좌절의 시간들도 있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앙코르는 '다시', 그리고 '아직'이라는 뜻의 불어다. 다시 한번 더 그 감동을 전달한다는 의미, 그리고 아직도 보여줄 게 너무나 많다는 의미였을까? 영탁은 탁쇼3 앙코르를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놀라운 퍼포먼스와 가창력을 선사했다. 그동안 걸어온 음악 인생을 표현한 '담'을 시작으로 포문을 연 영탁은 자신의 앙코르 공연 무대의 목표를 10자로 소개했다. '올타임 레전드 탁쇼 쓰리'. 공연의 모든 순간을 레전드로 만들겠다는 자신감과 넘치는 에너지. 지루할 틈 없이 3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중반부에는 오은영 박사 패러디인 오은탁 박사의 솔루션을 받고 엘비스 프레슬리로 변신, 'Can't help Falling in Love', 'Hound Dog'로 이어지는 흥겨운 로큰롤을 남진과 '카사블랑카'까지 연결하며 열정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콘서트는 크게 세 개의 콘셉트로 현재의 영탁, 과거의 영탁, 그리고 미래의 영탁을 보여주었다. 과거의 영탁에서는 안동의 한 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뒤 바로 서울로 와서 오디션을 보며 끊임없이 도전했던 청년 박영탁을 소환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부른 뒤 마이크를 두 손으로 모아 잡고 "스물두 살 박영탁입니다"라고 인사하는 장면은 80년대 젊은 날의 자신과 함께 노래하는 나훈아의 무대를 떠올리게 했다. 가슴 절절한 사모곡 '어매'의 나훈아와 '꿈'을 이루고자 도시를 찾은 조용필이 있었고 엘비스 프레슬리로 완벽하게 변신한 무대를 통해 자신의 근원이 록과 리듬앤블루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잊지 않고 보여준 것이다. 크리에이터로서 영탁의 능력 : 관찰력, 언어 감각, 메시지 영탁이 가진 재능 중 하나는 관찰력에서 비롯된 연기다. 브릿지 영상은 대부분 옷을 갈아입거나 무대 교체를 위해 준비되는 영상이 대부분인데, 아주 제대로 웃길 작정을 하고 만든 패러디 영상이 눈에 띄었다. 전국 투어에서 선보인 <흑백요리사> 속 '요리하는 돌아이'를 패러디한 '노래하는 돌아이'를 보고 있자니 영탁이 제이심포니란 듀오 시절 자신의 앨범 뒤 스페셜 땡큐에 썼던 글인 '더 또라이같이 음악할게요!!'가 생각났다. 이 '똘끼'를 어쩔까나. 이번 앙코르에 처음 등장한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솔루션 패러디인 오은탁 박사는 말투와 행동이 너무 비슷해서 영탁 콘서트에 온 건지, <개그콘서트>에 온 건지 분간이 안 될 정도. 더구나 영탁은 다른 출연자도 없이 혼자 1인 2역을 연기한다. 조만간 배우 영탁이 스크린이나 드라마에서 비중 있는 역할로 '갑툭튀'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소름 끼치는 코믹 연기에 배꼽을 뺐던 시간이었다. 앞자리에 앉은 관람객의 한마디, "저렇게 웃긴다고?" 개그감 인정! 투머치 토커가 되어 관객들과 수다를 떠는 것도 탁쇼의 특징. 영탁이 왜 소통의 제왕인지 팬들과 호흡하고 함께 즐기는 무대를 체험한다면 바로 알 수 있다. 영탁이 가진 대중을 사로잡는 온리원의 힘을. 또 하나, 그의 음악을 접해본 사람이라면 영탁의 언어 감각에 주목했을 것이다. 가사를 보다 보면 늘 나만의 것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영탁을 볼 수 있다. 영탁은 자신만의 음악을 찾는 데 성공했을까? 그의 가사에 답이 있다. 비슷한 줄무늬, 블루케찹, 세모난 바퀴, 사막에 빙어. 세상의 모든 삐딱이와 왼손잡이들을 위한 강력한 메시지는 영탁이 추구하는 음악의 스펙트럼을 확장하고 깊이를 완성시킨다. TAK SHOW의 추구미 : 네 꿈을 응원해, 같이 가자 우리 영탁의 자작곡들이 주로 소개된 기존 공연과 달리 세 번째 탁쇼에서는 공연장에 처음 온 관객들도 같이 따라부를 수 있는 트로트 메들리와 대중적인 곡들이 셋리스트에 추가됐다. '벚꽃 엔딩'과 '붉은 노을', '고속도로 로망스'가 등장하자 객석은 더 신이 날 수밖에. <탁쇼>의 추구미를 한마디로 표현하다면 나훈아, 조용필,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음악계 거장인 대선배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아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면서 탁쇼만의 에너지와 즐거움을 선물했다는 데 있다. '무대 위 카리스마, 음악에 대한 열정, 유쾌한 예능감'. AI가 분석한 영탁의 매력은 앞으로 탁쇼가 추구할 추구미와도 일치하지 않을까. 영탁의 그러한 대중 친화적 성격과 폭넓은 인간관계를 입증하듯 수많은 연예계 인맥들이 공연장을 방문했다. 대선배 인순이는 인스타그램에 '엘비스 프레슬리의 팝송을 부를 때 너무 좋았다'는 멘션을 남겼고 MC 장성규, 배우 지승현, 곽선영 등 동료들과 트로트 선후배들이 공연장을 찾아 그를 응원하고 함께 즐겼다. 영탁이 주는 긍정의 에너지, 폭발하는 도파민과 따뜻한 세로토닌. 행복의 에너지는 영탁이란 20년 차 가수의 정체성을 알리고 그를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든다. '내 꿈은 이랬단다, 포기하지 않고 걸어서 결국 그 꿈을 이뤘단다. 그러니까 너도 꿈꾸고 잘 걸어봐. 이제 내가 네 꿈을 응원할게.' 데뷔 20주년을 맞은 영탁, 레전드로 가는 길 콘서트 오프닝 곡이 끝나면 영탁은 늘 오늘 처음 온 관객을 체크한다. 이집트, 핀란드, 말레이시아, 일본, 타이완 등 다양한 글로벌 팬들이 탁쇼를 찾았다. 이들은 OTT로 한국 콘텐츠를 찾아보다가 영탁의 무대를 보고 팬이 되었다고 말한다. 영탁은 트로트 가수 최초로 팬과 호흡하는 노래를 만들었고 떼창 문화를 리드하고 있다. <탁쇼>를 처음 본 관객들은 가수와 팬이 박자를 딱딱 맞추며 외치는 응원법이 있다는 것에 놀라고 팬들의 함성에 놀란다. 인도네시아 공연장에서 해외 팬들이 떼창 웨이브로 화답하는 것을 목도한 영탁은 2집 '폼 미쳤다'부터 본격적으로 혼자 부르는 노래가 아닌 대중과 호흡하는 노래를 만들었다. 영탁 음악의 세계관은 바로 '나와 너, 그리고 우리 같이 가볼까, 저 너머의 너머를 향해'가 아닐까. 요즘처럼 대중의 취향이 디테일해지고 마이너한 취향도 인정받는 시대, MZ세대는 가사의 메시지보다 직관적으로 들으면 즐겁고 편안한 멜로디를 선호한다. 그러나 50, 60대 팬들은 가사와 가수의 서사에 주목한다. 중년 팬덤에게 음악의 정체성과 스토리텔링이 중요한 이유다. 그런 점에서 영탁은 영민하게 자신의 음악적 정체성과 팬들의 니즈를 절묘하게 결합시켜 놀라운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올해 20주년을 맞은 영탁이 걸어갈 길. 한 사람의 놀라운 성장과 레전드로 가는 길에 함께 탑승하는 것은 분명 즐거운 여행이다. 영탁이 조용필과 나훈아가 될 수 있을지, 어느 한 분야의 넘버원이 될 수 있을지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넘버원은 언제든 바뀌고 탈환되며 새로이 채워진다. 넘버원이 되는 것이 아닌 가요계의 온리원이 되기를 선택한 영탁, 그의 20주년이 기대되는 이유다. [STAGE CLIP] 영탁(YOUNGTAK) 'Brighten' 2024 영탁 단독콘서트 [TAK SHOW3 - ENCORE] 사진 : 어비스컴퍼니, (주)에스이십칠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뮤지컬 <알라딘>이 방학, 명절 특수를 누리며 8개월의 장기 공연에 돌입했다. 브로드웨이 초연 10년 만에 2024년 국내 상륙한 알라딘은 티켓 오픈마다 초 단위로 매진됐고 얼마 전 2월 공연 오픈도 순식간에 매진됐다. K-팝 콘서트나 내한 공연 팝스타들의 콘서트가 아닌 라이선스 뮤지컬도 이제 피 튀기는 '피케팅' 전쟁을 벌여야 하니 알라딘과 자스민이 탄 마법의 양탄자를 보러 가는 여행길은 멀고도 쉽지 않았다. 코로나 종식 이후 공연 문화에 대한 갈증과 욕구는 뮤지컬 N차 관람으로도 이어진다. 다양하고 디테일하게 세분화된 대중의 취향은 익숙하지만 신선하고 재미와 감동이 보장된 스토리텔링을 찾아 나선다. <알라딘>은 디즈니의 독창적인 IP 자산이면서 2019년 실사영화로도 성공한 원작 콘텐츠라는 기대감을 바탕으로 한국을 배경으로 현지화된 대사 번역, 화려한 캐스팅 등 관전 포인트가 입소문 나면서 디즈니 영화를 보고 자란 MZ세대 관객들이 몰려들었고 이에 순항 중이다. 어디 한번 보러 갈까 하고 예매 사이트로 들어가 보니 그럼 그렇지, 2월 말까지 전석 매진. 다시 전략을 짜서 설 명절엔 좀 낫겠지 싶어 예매 대기를 걸어 놓은 결과 띠링~ 드디어 취소표 알람이 울렸다! 강의가 없는 방학이기도 하고 서울 구경도 할 겸 샤롯데씨어터가 있는 롯데월드행 SRT 기차를 탔다. 어쩌다 보니 유연석이 나온 <벽을 뚫는 남자> 이후 뮤지컬 공연으로 꽤나 오랜만의 관람이다. 공연장에 도착하니 방학이라 아이들과 온 가족들, 2·30대 연인들, 캐리어를 끌고 온 외국인들, 유난히 젊은 관객들이 눈길을 끈다. 이들은 <겨울왕국>을 보고 자란 디즈니 키즈고 그의 부모들은 90년대 국내 처음 들어온 <인어공주>와 <미녀와 야수>를 보고 자란, 지금은 중년이 된 X세대들이 대부분인데 <알라딘>은 그들 모두의 추억과 욕구를 채워주는 검증된 이야기임엔 틀림없다. 내가 선택한 회차는 알라딘의 김준수, 지니의 정성화, 쟈스민의 이성경이 출연하는 날이었다. 허스키하고 독특한 음색의 김준수는 뮤지컬계 티켓 파워를 가진 탑 티어급 배우고 코믹과 정극을 오가며 폭풍 연기력을 보여주는 정성화의 수다스러운 지니는 생각만 해도 찰떡궁합. 쟈스민은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정년이>에서 정년이 라이벌이었던 영서의 성악가 언니로 나왔던 민경아 배우와 박열의 후미코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신예 최지혜의 자스민도 궁금했지만 사랑스럽고 도도한 자스민이란 평가를 받고 있는 이성경 배우로 낙점, 티켓 파워 최강의 라인업으로 보게 됐다. 지니 쇼로 기선 잡고 몰입도 선사 : 역동적 장면 펼치는 좁은 공간의 아쉬움 막이 오르면 예상대로 지니의 원맨쇼가 펼쳐진다. 정성화는 능청스럽고 코믹한 지니로 변신해 무대를 휘어잡는 장악력을 보이며 흐름을 잘 리드해 나간다. <알라딘>의 흥행 요소 중 하나를 꼽으라면 150분간 펼쳐지는 공연 내내 지루할 틈 없던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지니의 속사포 랩 같은 대사다. 지니의 대사 속에 <알라딘>의 철학이 있고 고민하는 알라딘의 선택 속에 우리들 인간의 가장 큰 욕망이 숨겨져 있다. 철저히 자신의 욕망을 따를 것인가? 타인의 자유를 위해 이타적 선행을 베풀 것인가? 가장 나다운 모습을 찾아가는 알라딘의 여행은 결국 자신의 갈망을 누르고 타인을 이해하고 함께 갈 때 보상받는다. 대사를 듣다 보면 브로드웨이 버전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아닌 지금 한국 사회의 반영, 주 관객층인 MZ세대의 욕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대본 번역을 참 맛깔스럽게 했다 싶어 프로그램 북을 보니 양주인, 김수빈이란 음악감독과 번역가 두 사람이 한국어 대사와 가사 번역을 했다. 지니가 처음 만난 알라딘에게 소원 3순위를 브리핑하는 장면에서 나오는 최신식 발코니 확장 피라미드 분양권이나 롯데타워 시그니엘에 롯데월드까지 덤으로 얹어 준다는 대사는 뮤지컬 주요 관객인 대한민국의 2·30대 MZ세대가 원하는 부의 가치를 보여준다. 부동산, 주식, 코인, 슈퍼카로 부를 획득하며 하루하루 무사안일과 말초적인 부에 올인하는 세태 풍자 뮤지컬 대사는 꽤 흥미로웠다. 뿐만 아니라 지니가 왕자의 소원인 풀코스 요리를 최고의 유행어인 '이븐하게' 구워준다거나 쥐가 나는 장면에서 '나 쥐나, 이거 쥐니? 지니?'라며 난리법석을 부리는 장면과 알라딘을 '맨살조끼보이', '상자 속의 남자, 상남자'로 부르는 애드리브 빵빵 터지는 유머러스한 대사에 관객석은 한껏 즐거워진다. 한국판 지니의 유머에 덩달아 유쾌해지는 동시에 지니가 나에게 나타난다면 어떤 소원을 빌지 상상하게 되는 판타스틱한 마법의 순간을 선사한다. <알라딘>의 환상성이 극에 달하는 순간은 '흙 속의 다이아몬드'였던 알라딘이 램프를 구하러 사막 속의 동굴에 들어간 장면에서 펼쳐지는 앙상블 단원들의 화려한 집단 군무다. 화려한 의상과 귀에 익숙한 넘버들이 펼쳐지고 여기서 '알라딘'의 하이라이트가 펼쳐진다. 이 멋진 장면을 보면서 아쉬웠던 점은 도입부에서 좀도둑 알라딘이 시장통 세 친구들과 벌이는 추격 장면과 함께 무대 공간이 너무 협소하다는 점이다. 황금 동굴 장면은 그나마 몰입도가 높아서 괜찮았지만 아그라바의 시장에서 알라딘이 무대를 가로지르며 날아다니는 시장통 장면은 배우들의 동선이 좁고 답답해 보여 보는 내내 움직임이 불안해 보였다. 유명 뮤지컬 상시 공연장인 영국 웨스트엔드나 미국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전용 극장도 실제론 아담한 규모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알라딘>은 국내 초연이고 기대치도 높았던 만큼 조금 더 극의 역동성을 활용할 수 있는 무대 공간이었다면 훨씬 멋지고 신나는, 날아다니는 알라딘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더구나 김준수는 춤선이 살아있는 파워풀 아이돌 출신 아닌가. 이 우려는 알라딘과 쟈스민이 양탄자를 타고 날아가는 장면까지 이어졌다. 가장 환상적이고 아름다워야 할 장면에서 양탄자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없었기에 어두운 밤하늘로 표현되며 거의 고정에 가깝게 정지되어 있던 부분은 극의 몰입을 방해하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맘속으로 '제발 날아라! 움직여라!! 양탄자야...' 외쳤지만 양탄자는 요지부동. 주차한 듯 멈춰 있네. 아쉽도다. 샤롯데씨어터의 1, 2, 3층 객석은 모두 1천240여 석으로 계단 단차가 크고 경사가 심한 데다 앞좌석 여유 공간이 좁고 원형으로 커브가 진 1층에 비해 2층에서 보는 시야는 일직선이라 무대가 평면적으로 보이는 단점이 있다. 3천 석의 세종문화회관이나 2천200석의 예술의전당보다는 턱없이 작은 공간에 올려지다 보니 알라딘이란 IP가 가진 환상성과 판타스틱한 연출이 제대로 살지 못한 점은 못내 아쉽다. 물론 무대가 넓어지면 시각적 연출을 위해 소요되는 무대 장치 예산과 비용은 올라가고 제작비가 상승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만 작은 무대에서의 답답함이 해결되면 좋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부분은 7월 이후 부산 공연장인 드림씨어터에서는 좀 더 나아지리라 생각한다. 한국판 '알라딘'의 성공 : 알라딘의 재해석, 만족도 높은 관객 서비스 앞서 말했지만 <알라딘>의 흥행 요소는 볼거리 가득한 원작 IP의 뮤지컬 장르로의 장르 변환, 재매개된 스토리텔링이다. 디즈니 원작 애니메이션이 갖고 있는 집단 군무와 오리지널 넘버의 환상적 요소를 뮤지컬 장르에 걸맞은 집단 군무와 화려한 볼거리로 재탄생시킨 점, 귀에 익숙한 넘버 대표곡들이 주는 흥겨움, 지니와 알라딘이 보여주는 브로맨스, 똘똘하고도 선한 소년미를 보여준 알라딘과 자유를 꿈꾸며 진취적인 여성 초대 술탄이 되는 자스민의 '자신의 꿈'을 이루는 이야기, 강력한 힘을 가진 빌런이 되기를 소망하다 자신의 욕망에 갇혀버리는 자파의 카리스마 있는 연기와 쉴 새 없이 웃음 폭탄을 던지는 자파의 조력자로 탄생한 이아고의 케미는 윤선용과 정열이란 배우의 이름을 찾아보게 만들었다. 6천 원의 유료 서비스지만 좋은 반응을 얻은 알라딘 소품 착장 네 컷 사진 부스, 다양한 굿즈 판매, 알라딘 콘셉트로 매칭시킨 코스 요리 판매, 그리고 지니에게 소원을 써내면 지니 배우의 친필 편지를 전달하는 MZ세대를 겨냥한 영민한 마케팅은 재관람과 N차 관람을 유도하며 뮤지컬 관람객들에게 기분 좋은 체험을 선사하기도 했다. 퀄리티가 있으면 관객들은 찾게 된다 : K-창작 뮤지컬의 발전을 꿈꾸며 국내 뮤지컬 시장이 5천억 시대를 앞두고 있지만 여전히 라이선스 뮤지컬의 흥행에 치우쳐 있고 소규모의 작품들은 단기간에 막을 내리는 대중들의 편중된 선택과 위기론을 전문가들은 지적하기도 한다. 뮤지컬 극단들이 고군분투한 20년. CJ ENM이 창작 뮤지컬을 전략 사업화하고 창작 뮤지컬 시장이 성장하면서 K-뮤지컬은 많은 발전을 하고 있지만 <알라딘>을 바라보며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잘 짜인 이야기는 관객들이 꾸준히 찾을 거라는 믿음이 한 걸음 한 걸음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기를. 우리의 창작 스토리가 가진 힘을 원천 IP 소스로 활용하게 될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 <신과 함께> 뮤지컬은 지금도 무대에 오르고 있으며 얼마 전 드라마로 사랑받았던 여성국극 소재의 <정년이>도 분명 뮤지컬이나 무대에 오를 수 있는 훌륭한 원천 소스다. 한국 만화와 웹툰 원작 IP들이 OTT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면서 주목받고 있는 지금, 만화 원작 <베르사유의 장미>나 록뮤지컬 <선천적 얼간이들> 같은 경우는 반길 만한 시도다. 웹툰이나 만화 원작 기반의 뮤지컬 제작은 인지도 면에서 대중의 호응을 끌어올 수 있는 긍정적인 시도가 될 수 있다. 이런 콘텐츠들이 장르 전환을 하며 양질의 뮤지컬 공연으로 만들어져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건 관객들의 관심과 취향의 확장성을 기반으로 하기에 결국은 잘 만들고 잘 찾아보는 게 방법이란 논리에 다다른다. <알라딘>을 부러워하지만 말고 웰메이드 공연을 올린다면 관객들은 반드시 발길을 향할 것이다. 디즈니를 보고 자란 MZ세대들의 니즈를 정확히 캐치한다면 못 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X세대의 오랜만의 뮤지컬 관람. 대중은 좋은 퀄리티의 콘텐츠에 늘 목이 말라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