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평론가. 칼럼니스트. 경향신문 <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시사인 등을 연재했고 다양한 매체에 칼럼을 기고 중이다. <서울국제드라마어워즈>, <한국방송대상> 등 유수의 콘텐츠 시상식 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SBS와 MBC시청자평가원을 비롯해 다수의 TV 비평 프로그램 출연 및 진행 경력이 있다. 공저 .
박찬욱 감독의 첫 TV 시리즈 연출작 <리틀 드러머 걸>(BBC, AMC, 2018)은 스파이 문학의 거장 존 르카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이스라엘 정보국의 비밀 작전에 연루된 무명 배우와 요원들의 첩보전을 그린 이 작품은 박찬욱 감독 특유의 감각적인 미장센과 지적인 각색으로 호평받았다. 그로부터 6년 뒤, 박찬욱 감독이 다시 스파이물로 돌아왔다. 이번엔 이중스파이다. 미국 HBO와 국내 OTT 쿠팡플레이에서 공개된 두 번째 TV 시리즈 연출작 <동조자>는 1970년대 베트남전 당시 남베트남군 스파이로 위장해 방첩 활동을 펼친 북베트남군의 이중 첩보극을 그린다. 스파이물의 어떤 점이 박찬욱 감독을 매료시키는 걸까. <동조자>의 국내 방영을 앞두고 열린 기자간담회 당시 박 감독은 영화감독과 스파이의 공통점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스파이들의 정교한 공작 시나리오와 그 실행 과정이 영화감독의 디렉팅과 유사하다는 이야기다. 박 감독의 이같은 생각은 그의 스파이물에서도 잘 드러난다. 가령 <리틀 드러머 걸>에서는 첩보 활동 전체가 이스라엘 정보국 모사드에 캐스팅당한 배우 찰리(플로렌스 퓨)의 연극 공연처럼 묘사된다. 그 각본이 너무도 섬세한 나머지, 찰리는 역할에 완전히 몰입하다 팔레스타인 해방군들과 동화되기까지 한다. 박찬욱 감독은 그렇게 적과 아군의 구분이 뚜렷한 이분법적 세계 속에서 양 진영을 오가는 경계인으로서 스파이의 특성에 각별히 주목한다. 그 양면적이고 모순적인 정체성의 고뇌야말로 박찬욱 스파이물의 특징이자 매력이다. 이는 <동조자>에서 한층 더 두드러진다. 주인공(호아 쉬안데)의 진술로 시작되는 작품의 첫 내레이션부터가 의미심장하다. "나는 스파이, 고정간첩, 밀정, 두 얼굴의 남자입니다. 모든 일의 양면을 보는 저주를 받았죠." 이름도 없이 '대위'라는 직급으로 불리는 주인공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을 오가는 이중간첩이자 동양인과 서양인의 피가 반반씩 섞인 혼혈인이다. 이분법적 세계관이 극에 달한 냉전 시대에, 이 경계인으로서 정체성은 대위가 어느 한쪽 세계에 완전히 소속될 수 없도록 만드는 동시에 양쪽을 다 이해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예컨대 대위는 북베트남의 혁명을 지지하면서도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원하는 남베트남인들의 마음에도 공감한다. 사이공 함락 뒤, 남베트남의 거물 장군(토란 레)을 감시하기 위해 함께 미국에 체류할 당시에는 인종 차별에 분노하는 한편 그 풍요로운 문화에도 매혹을 느낀다. '양면을 보는 저주'로 표현된 이 다중의 정체성은 대위를 끊임없이 갈등 속으로 몰아넣지만, 극단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힘으로도 작용한다. <동조자>는 그렇게 냉전 시대의 모순을 온몸으로 통과하는 경계인을 통해서 이분법적 구도의 폭력을 비판하고 있다. 박찬욱 감독 특유의 연출도 여전히 매혹적이다. <리틀 드러머 걸>의 스파이 임무가 한 편의 연극 공연 같았다면, <동조자>의 그것은 마치 영화 촬영에 가깝게 그려진다. 박찬욱 감독은 리와인드(되감기) 기법과 부드럽게 화면을 전환하는 매치컷 기법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대위의 진술서를 "헐리우드식" 시나리오처럼 묘사한다. 실제로 4회는 아예 영화 촬영 에피소드로 전개된다. 시청자들은 이 과정에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허구인지 그 경계선에 더 집중하게 되고, 그 선을 넘나드는 대위의 갈등과 고뇌도 이해하게 된다. 배우들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제일 화제가 되는 것은 1인 4역을 소화해 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열연이다. 그가 맡은 IA 요원, 미국의 동양학 교수, 하원 의원, 작가주의 영화감독 등은 백인 남성 엘리트 그룹으로 모두 미국의 패권주의를 상징한다. 산드라 오, 존 조 등 국내 시청자들에게 익숙한 한국계 배우들의 등장도 반갑다. 특히 존 조는 특별출연인 만큼 할리우드의 동양인 캐릭터 활용 클리셰를 풍자하는 역할로 등장해 씁씁한 웃음을 선사한다. 주연을 맡은 호아 쉬안데는 낯선 첫인상이 금세 지워질 정도로 강렬한 연기를 선보여 박찬욱 감독의 배우 보는 눈을 또 한 번 증명했다. 사진 : 쿠팡플레이 예고편
현재 글로벌 시장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K-드라마의 양대 장르는 로맨스와 디스토피아물이다. 이중 K-디스토피아는, 한류 열풍 초기부터 꾸준히 사랑받아 온 K-로맨스와 달리 몇 년 사이 급부상했다. 영화 <부산행>(2016),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2019) 등 서구의 아포칼립스물을 한국적 환경으로 옮겨온 작품들이 잇단 성공을 거두며 주목받기 시작한 K-디스토피아는, <오징어게임>(2020, 넷플릭스)의 흥행 이후 자본주의 사회 하에서의 암울한 세계관을 그린 작품들까지 포함하면서 더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조선시대 좀비, 전래놀이의 데스게임화 같이 장르적 관습의 신선한 변주, 지구적 현상인 사회 불평등 심화에 관한 문제의식 등이 이 장르의 핵심 호평 요인으로 분석된다. 드라마 <해피니스>(2021, tvN), <지옥>(2021, 넷플릭스), <지금 우리 학교는>(2022, 넷플릭스), <택배기사>(2023, 넷플릭스), 영화 <사냥의 시간>(2020),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 등이 대표적 사례다. 넷플릭스가 4월 26일, 또 한 편의 디스토피아물을 선보였다. 소행성과의 충돌을 앞둔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 12부작 드라마 <종말의 바보>가 그것이다. 일본 작가 이사카 코타로의 동명 원작을 극화한 이 작품은 색다른 K-디스토피아를 제시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원작이 생존 투쟁, 재난 극복 등 아포칼립스 장르물의 전형적 서사를 벗어나 죽음을 수용한 이들의 담담한 일상을 그려 호평받은 바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계의 두 대가인 정성주 작가(<아줌마>, <밀회>, <풍문으로 들었소> 등)와 김진민 감독(<개와 늑대의 시간>, <인간수업>, <마이 네임> 등)이 의기투합한 점도 신뢰도를 높였다. 하지만 기대 속에 뚜껑을 열어 본 결과, 성적표는 그리 좋지 않다. 시청 시간과 평점 기록 모두 넷플릭스 역대 한국 오리지널 드라마 중 최저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주연 배우의 출연 분량을 덜어내느라 편집이 부자연스러워진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각색 문제가 완성도 저하의 근본적 원인으로 보인다. 드라마는 8개 단편으로 구성된 원작을 시리즈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인 교사 세경(안은진)이 아동 인신매매 범죄로부터 학생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핵심 플롯의 하나로 내세웠다. 긴장감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었겠지만, 범죄스릴러 성격이 부각됨에 따라 원작의 차별적 매력이 희미해진 결과가 못내 아쉽다. 그럼에도 <종말의 바보>를 단지 실패작으로만 규정하기에는 아까운 지점들이 있다. 적어도 이 작품이 K-디스토피아물의 서사적 지평을 확대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돌이켜보면, K-디스토피아의 등장 배경에는 2010년대 초중반 유행한 '헬조선'의 정서가 자리한다. 만연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분노와 절망의 '헬조선' 정서가 K-디스토피아를 탄생시켰고, 여기에 '코로나 디바이드'라는 신조어가 생길 만큼 양극화를 심화시킨 팬데믹이 겹쳐지면서 '헬지구' 정서로 확대된 것이다. 이처럼 K-디스토피아를 관통하는 갈등 구도, 즉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적 서사는 글로벌 시장에서 호평받는 요인으로 작용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반복에 따른 도식화의 우려도 따랐다. 이런 와중에 <종말의 바보>는 '헬조선'의 절망과 분노가 아니라 역설적인 희망과 위로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주목받을 만하다. 드라마는 소행성과의 충돌이 확실시되는 한반도에서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그로 인한 대규모 소요가 지나간 뒤의 이야기를 그린다. 중심 배경인 소도시 웅천에서는 소요 당시 아동 집단 납치 살해 사건이 일어나 더욱 큰 충격에 휩싸였다. <종말의 바보>는 이 잔혹한 재난에서 살아남은 시민들이 멸망의 공포와 지독한 상실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로 의지하고 연대하며 최후를 준비하는 모습을 그려나간다. 납치 사건으로 학생 대부분을 잃은 세경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도 남은 아이들을 끝까지 지키고, 아들을 떠나보낸 미령(김여진)은 마트를 꿋꿋이 운영하면서 시민들에게 필수품을 제공해 준다. 주임 신부가 사라진 뒤 웅천시 유일의 사제가 된 성재(전성우)는 불안해하는 신도들을 보살피고, 군인인 인아(김윤혜)는 무너진 치안 시스템을 지키려 애쓴다. 한쪽에서는 아동들을 납치해 팔아넘기는 범죄가 판을 치지만,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이타적 정신을 발휘하는 이들이 있기에 웅천시의 마지막 나날들은 오히려 아름답게 그려진다. <종말의 바보> 속 웅천시민들의 모습은 세계적인 작가 레베카 솔닛의 저서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 나오는 재난 공동체를 연상시킨다. "이 시대의 잠재적 낙원의 문은 지옥 속에 있다"는 책 속의 문장처럼 재난 속의 연대적 공동체는 폐허를 유토피아로 만들 수도 있다. 드라마에서 소행성이 비껴간다거나 하는 기적은 끝내 일어나지 않지만, 남은 시간을 의미있게 살아가려 하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이미 기적과도 같다. 주연 배우 논란으로 편집된 듯 보이는 '웅천시민 일생 기록 프로젝트'가 제대로 묘사되었더라면 드라마의 이 같은 메시지도 한층 힘을 받았을 것이다. K-디스토피아가 그동안 부조리한 현실에 분노하고 좌절한 이들에게 대리만족을 안겨주었다면, <종말의 바보>는 절망을 딛고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답을 구하는 이들에게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황폐한 평점 속에서도 메시지만큼은 빛나는 작품이다.
인간의 몸은 다양하지만, 미디어가 주목하는 몸은 한정적이다. 미디어는 획일화된 미의 기준에 따라 이상적인 신체를 선별하고 전시한다. 그 과정에서 몸은 보기 좋은 '몸매'의 의미로 축소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피지컬 100>이 호평받은 것은, 이처럼 기존의 미디어가 왜곡시킨 몸에 대해 다양하고 진지한 접근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성별, 나이, 체급, 인종을 불문하고 다양한 퀘스트를 통해 가장 완벽한 몸을 찾아가는 이 피지컬 서바이벌은, 단순한 예능을 넘어선 사회적 화두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국 예능 최초로 넷플릭스 월드 차트 1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재미와 더불어 의미를 잡은 덕이 크다. '소포모어 징크스' 우려 떨쳐낼 수 있었던 건… 그리고 이달 초, 세계적인 관심 속에서 <피지컬 100> 두 번째 시즌의 전체 에피소드가 공개됐다. 전작이 워낙 큰 성공을 거뒀기에 소포모어 징크스에 관한 우려도 없지 않았지만, 시즌2는 시리즈를 관통하는 '완벽한 몸의 탐구'라는 주제를 한층 진화한 세계관 속에 담아내면서 글로벌 흥행을 이어갔다. 시즌1이 고대 그리스를 모티브로 했다면, 시즌2는 '언더 그라운드'라는 부제대로 지하 광산을 배경으로 한다. 시리즈를 기획한 장호기 프로듀서는 제작발표회에서 "한정된 시간, 자원을 두고 협동과 경쟁이 동시에 벌어지는 공간이자 삶과 죽음이 교차하기도 하는 아슬아슬한 공간"으로서의 지하 광산에 주목하며, '부조리에 저항하는 인간'을 퀘스트 테마로 설정했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시즌2의 지하 광산은 거친 폐쇄성이 두드러지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참가자들의 사투는 세계와 존재의 한계에 맞선 투쟁처럼 그려진다. 이는 프리 퀘스트인 '무동력 트레드밀 달리기'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제한 시간 안에 가장 많이 달린 참가자가 퀘스트 우승자가 되는 게임이다. 100개의 트레드밀을 한 곳에 옮겨놓은 퀘스트 공간은 시선을 압도하는 규모를 자랑하지만, 막상 참가자들은 각자의 트레드밀 위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달릴수록 이동 거리의 수치는 늘어나는데 실제 움직인 범위는 제자리인 퀘스트의 아이러니는 <피지컬 100> 시즌2의 세계관과 주제를 압축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그렇게 체력, 스피드, 지구력 등 단순히 신체의 능력을 평가하는 서바이벌의 성격을 넘어, 첫 회의 부제와 같이 세계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질주'하는 인간들의 감동적인 서사가 된다. "할 수 있었던 게 그냥 계속 쉬지 않는 것뿐" 두 번째 퀘스트이자 첫 번째 팀전인 '미로 점령전'도 같은 성격을 띤다. 참가자들은 주어진 시간 안에 미로 속 점령지 세 곳에 상대 팀보다 많은 모래 포대를 쌓아 올려야 한다. 폐쇄성이 극대화된 미로 속에서 자주 방향을 잃고 흔들리면서도, 참가자들은 묵묵히 자기 몫의 짐을 나른다. "점점 시간이 흘러갈수록 정말 불안했다. 그래서 할 수 있었던 게 그냥 계속 쉬지 않는 거밖에 없었다"는 한 승리팀 참가자의 심경 인터뷰는 이 퀘스트가 의도했던 관전 포인트를 정확히 말해준다. 이 퀘스트가 포함된 에피소드의 부제는 '벽'이었다. <피지컬 100> 시즌2는 참가자들을 계속해서 한계 상황 앞에 세우고 그 불굴의 의지와 도전 정신이 신체에 아로새겨지는 순간들을 포착하고자 한다. 일각에서는 '최고의 몸'을 찾는 피지컬 서바이벌에서 단체전을 시도하는 구성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피지컬 100>은 단지 신체 조건과 물리적 능력만 평가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다양한 극한 퀘스트는 신체 능력 못지않게 책임감, 협동심, 의지력 등 여러 정신적 능력을 요구한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고대 그리스인의 가치관이 올림픽을 탄생시켰듯, <피지컬 100> 역시 그 근본적인 철학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부조리에 저항하는 인간'은 바로 그러한 철학을 반영한 테마이며, 여기서 다른 서바이벌과 <피지컬 100>의 궁극적 차별점이 드러난다. 기본적으로 승자 독식 게임인 다른 서바이벌 프로그램들과 달리, <피지컬 100>은 최종 우승자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집중시키기보다 신체 능력과 정신력의 조화를 통해 '완벽한 몸'이라는 이상에 조금씩 다가가는 과정에 더 초점을 맞춘다. <피지컬 100> 시즌2가 올해 가장 흥미진진한 드라마 중 하나가 된 이유다. 사진 : 넷플릭스
올해 예능계 트렌드를 가장 빠르게 선도하는 장르는 추리 예능이다. 이 장르의 레전드라 불리는 <크라임씬> 시리즈가 7년 만에 돌아왔고, <런닝맨> 제작진의 새 추리 예능 <아파트 404>(tvN)가 블랙핑크의 제니, 유재석 등 화려한 출연진을 앞세워 해외 시장 공략에 나섰다. 여기에 MZ세대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여고추리반> 시즌3와 넷플릭스 새 오리지널 <미스터리 수사단>이 2분기 방영을 앞두고 있어 추리 예능 열풍은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생소했던 추리 예능이 하나의 장르로 자리하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 <크라임씬> 시리즈의 공이 크다. 2014년 JTBC에서 첫 방영된 <크라임씬>은 범죄 사건 현장에서 수집한 단서를 토대로 진범을 추적하는 미스터리 구성에, 출연진이 각각 범인과 용의자 역할을 연기하는 롤플레잉 방식을 더해 화제를 모았다. 이 같은 포맷은 추리의 재미는 물론이고,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내려는 출연자들 간의 치열한 심리전과 연기 등 다채로운 관전 포인트를 만들어내며 프로그램의 인기를 견인했다. <크라임씬>이라는 제목대로 범죄 현장을 독특하게 구현한 세트도 눈길을 사로잡은 요소였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 <도그빌>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세트는, '모든 답은 현장에 있다'는 모토와 함께 사건 관련 장소가 한눈에 들어오도록 구현했다. 그 안에서 출연진이 단서를 얻고 추리하는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면서 시청자들의 몰입감도 높일 수 있었다. <크라임씬>을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팬덤층이 형성된 이유다. 이외 휴스턴 영화 영상 페스티벌 금상을 비롯한 유수의 해외 시상식 수상과 성공적인 포맷 수출이 <크라임씬>의 획기적인 성취를 뒷받침한다. 7년 만에 <크라임씬 리턴즈>로 귀환한 이 시리즈는 휴식기의 시차만큼 변화한 콘텐츠 환경의 트렌드를 적극 반영하면서 호평을 이어간다. 이전 시즌과의 눈에 띄는 차이점은 OTT인 티빙의 독점 공개작이라는 점이다. 이 시리즈는 범죄 사건이라는 소재의 특성상 검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OTT 환경에 더 걸맞다. 실제로 <크라임씬 리턴즈>의 범행 수법은 한층 잔혹해졌고 사체 구현도 더 리얼해져 장르 마니아들의 이목을 끌었다. 에피소드 전개 방식도 OTT 환경이 유리하다. 가령 한 사건이 2회에 걸쳐 전개될 경우, 지상파에서는 진범을 알기 위해서 일주일을 더 기다려야 했지만, 편성이 좀 더 유연한 OTT를 만난 <크라임씬 리턴즈>는 한 주에 두 편을 동시에 공개하며 시청자들의 집중력을 유지시킬 수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같은 편성 방식이 <크라임씬 리턴즈>의 핵심 성공 요인인 서사의 강화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편성 전략은 서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단적인 예로, 유명 작가 패멀라 더글러스가 <넷플릭스 시대의 글쓰기>에서 분석한 것처럼 넷플릭스의 '몰아보기' 편성 전략은 서사의 밀도를 끌어올려 오리지널 시리즈의 성공을 이끌어냈다. <크라임씬 리턴즈> 역시 사건당 2회라는 충분한 시간을 확보함으로써 좀 더 스케일 큰 이야기를 한층 탄탄하게 구성할 수 있게 됐다. <크라임씬 리턴즈>는 공항 살인 사건, 고시원 살인 사건, 법원 살인 사건, 교주 살인 사건, 풍무회장 살인 사건 등 총 5개 에피소드를 10부작으로 펼쳐낸다. 그리고 최종회에 이르면, 별개의 독립적 사건으로 보였던 에피소드들이 하나의 거대한 유니버스 안에 속한 이야기였음이 드러난다. 메인 플롯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된 에피소드를 선보이는 범죄 수사 드라마의 서사 전략을 도입해 '극성'을 극대화한 것이다. 이로써 추리에 집중하던 시청자들은 정주행을 완료한 뒤, 메인 서사의 퍼즐 조각을 찾아 1회부터 복습하면서 한편의 장르 드라마를 보는 듯한 또 다른 재미를 느끼게 된다. <크라임씬 리턴즈>의 서사 강화 전략은 최근 추리 예능의 주 경향이기도 하다. <여고추리반>은 이미 시즌1과 2에서 연속 드라마 같은 구성을 시도했고, <아파트 404> 역시 '실화 추적극'을 정체성으로 내세우면서 과거 사건의 큰 그림을 완성하는 전개에 주력한다. 넷플릭스가 2분기 공개 예정인 <미스터리 수사단> 또한 극적 설정이 뚜렷하다. 특수 사건 전담반이 기묘한 사건을 추적해 가는 '이야기'를 표방하기 때문이다. 주목할 점은 <크라임씬 리턴즈>의 성공이 단순히 재미만을 위한 스토리텔링에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이 작품 메인 서사의 주제 의식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경성크리처>, 영화 <파묘> 등의 최근 흥행 콘텐츠가 공유하는 정서와도 맞닿아 있어 더욱 흡인력이 컸다. 흥미만을 위한 스토리 구성이 아니라 시대정신을 읽어낸 서사였다는 의미다. 이후의 추리 예능이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사진 : TVING
2024년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라인업의 첫 주자는 <킬러들의 쇼핑몰>이다. 지난해 <무빙>, <카지노>, <최악의 악>, <비질란테> 등의 웰메이드 드라마로 호평을 얻어낸 디즈니+가 올해의 첫인상을 각인시킬 작품으로 <킬러들의 쇼핑몰>을 선보인 것은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스타일리시 뉴웨이브 액션’을 표방한 작품답게 화려한 액션은 기본이고, 곳곳에 다채로운 관전포인트가 넘쳐난다. 시작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지극히 평범한 시골 마을에 난데없이 완전무장한 사내들이 몰려드는 수상쩍은 오프닝을 지나면, 대뜸 주인공 정진만(이동욱)이 사망하면서 충격을 안겨준다. 또 다른 주인공 정지안(김혜준)은 삼촌 진만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낯선 킬러들과 전쟁을 펼친다. <킬러들의 쇼핑몰>은 그렇게 어디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저격수의 총알처럼 예측하기 어려운 전개로 시청자들의 이목을 사로잡는다. 신선하고 강렬하다. 가장 두드러지는 관전포인트는 역시 액션이다. 정진만의 부고에 그가 운영하던 무기 쇼핑몰을 빼앗으려 혹은 지키고자 모여든 킬러들의 불꽃같은 격투신이 화면을 화려하게 수놓는다. 전투 분야를 가리지 않는 전천후 킬러 소민혜(금해나), 정교한 실력의 최상급 스나이퍼 이성조(서현우), 무에타이 고수 파신(김민)과 같이 저마다의 개성을 지닌 킬러들이 맞붙을 때마다 격투 스타일이 달라지면서 액션마니아들을 열광시킨다. 베테랑 킬러들 사이에서 서서히 킬러 본능에 눈뜨게 되는 지안의 모습도 주목할 지점이다. 죽음의 위기 속에서, 지안은 그동안 피곤하게만 생각했던 진만의 교육이 특급 생존 기술이었음을 깨닫고, 전략과 기술을 동원해 적들에 맞선다. 그 성장 액션이 더없는 짜릿함을 안겨준다. 액션신 최고의 명장면은 뭐니 해도 세계관 최강자 정진만과 베일(조한선)의 격투다. 이 모든 전쟁의 시초가 된 14년 전의 과거 시점에서, 용병들의 리더 진만은 살인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베일과 갈등을 빚는다. 둘 사이를 오가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긴장감은 마지막 작전 지역에서 폭발한다. 시한폭탄이 설치된 폐쇄건물에서 펼쳐지는 진만과 베일의 대결은 세계관 최강자들의 격투답게 기교 섞인 연출이 아닌 정공법으로 그려진다. 짧은 컷 위주의 편집과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음악 대신, 전투에 최적화된 용병들 특유의 빠르고 정교한 기술 자체에 집중하는 연출이 더 고도의 몰입력을 이끌어낸다. 캐릭터뿐 아니라 공간에 따라 달라지는 액션도 백미다. 격투의 주 무대인 정진만의 집은 겉으로는 평범한 시골집이지만, 실은 곳곳에 비기가 감춰진 요새다. 방어막, 탈출로, 부비트랩이 치밀하게 구축되어 있고, 지하에는 대규모 창고와 무기 쇼핑몰이 있다. 거실, 침실과 같은 좁은 공간에서의 맨몸 격투와 넓은 이층 구조 창고에서의 총격전 등 공간을 이동하면서 펼쳐지는 다채로운 액션이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또 다른 중요 관전포인트는 서사 기법에 있다. 이 드라마의 플롯은 정교하게 설계된 정진만의 집 구조와 꼭 닮았다. 순차적 시간선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를 오가고 그 과거도 다시 회상으로 쪼개지는 여러 개의 타임라인을 가지고 있다. 그 타임라인의 교차 속에서 주요 인물들의 서사가 하나하나씩 드러나는 과정이, 정진만의 집 안에서 숨겨진 비기가 하나씩 발견되는 양상과 비슷하다. 언뜻 복잡해 보일 수 있지만, 그 전체적인 구도가 드러나는 순간 그 치밀한 설계도에 감탄하게 된다. 스쳐가는 듯했던 대사도 뒤에 더 중요한 서사로 되돌아온다. 흔한 삼촌의 잔소리라 생각했던 진만의 입버릇, “잘 들어, 정지안”과 같은 말이 8회의 부제목으로 이어지는 지점이 대표적이다. <킬러들의 쇼핑몰>은 강지영 작가의 소설 <살인자의 쇼핑몰>을 원작으로 했다. 원작의 핵심 설정은 그대로 가져가면서도 인물들의 과거사와 캐릭터 보완이 이뤄지며 성공적인 각색 사례로 호평받고 있다. ‘뉴웨이브’라는 수식어가 자화자찬으로 들리지 않을 만큼 액션, 플롯 등 여러 면에서 높은 창의성과 완성도를 갖춘 작품이다. 세계 최대의 영화, 드라마 정보 사이트 IMDB에서도 고평점을 기록 중이다. 후기 좋은 쇼핑몰의 택배 상자를 하나씩 언박싱하는 듯한 이 드라마의 매력을 알아보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