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객원교수 - 독서일가 주필 - 전 중앙일보 대기자
궤사(詭使), 협지(挾知), 도언(倒言). 한비자는 군주, 즉 최고 리더의 일곱 가지 정치술(칠술)에 관한 얘기를 했습니다. 앞에서는 꼼꼼히 대조하고, 반드시 상과 벌을 주고, 잘 들어야 하는 기술처럼 교과서 같은 덕목들을 살폈습니다. 여기에 궤사, 협지, 도언도 정치기술에 포함됩니다. 정확한 뜻을 모르더라도 단어에서 왠지 음험함이 느껴질 겁니다. 사실 이런 대목만 찾아 읽다 보면, 왜 '한비자' 하면 권모술수의 대가라느니 냉혹한 법가라느니 하는 말이 나오는지 이해 가는 측면도 있습니다. 먼저 이 말의 뜻부터. '궤사'는 사람을 짐짓 떠보고, 엉뚱한 얘기를 하라는 뜻입니다. '협지'는 알아도 모르는 척하고 질문하는 것이고, '도언'은 일삼아 말을 거꾸로 해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람을 떠보고, 이리저리 시험해 보라는 말이죠.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는 우리의 윤리의식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데 중국의 고전 병서들은 이 같은 '인간의 수단화'를 지혜로운 용인술로 권합니다. 그런 대목은 워낙 많지만, 그 한 예로 태공망(강태공이라고도 불리는 여상)이 권한 '군주의 사람 쓰는 법'에 대해 살짝 살펴볼까요. #1 사람을 임용했더라도 살피지 않으면 사람을 알 수 없다. 군주는 발탁하여 쓰는 사람들의 육수(六守)를 살펴야 한다. 육수는 인(仁)·의(義)·충(忠)·신(信)·용(勇)·모(謨)이다. 이를 살피려면 부유하게 해 준 뒤 법을 범하지 않는지 살피고, 존귀하게 해준 뒤 교만하지 않은지 살피고, 권력을 준 뒤 전횡하지 않는지 살피고, 중요한 사명을 맡기고 위아래를 속이지 않는지 살피고, 위기 상황에 처하게 한 뒤 두려워하지 않는지 살피고, 여러 일을 처리하게 한 뒤 계책이 궁핍하지 않은지 살핀다. - [21세기 군주론: 국민주권시대의 제왕학] 발췌 이처럼 태공망은 아예 대놓고 사람을 시험하는 일을 중단하지 말라고 이릅니다. 사람은 겉과 속이 다르기 때문이죠. 겉모습은 어질지만 실제론 불초한 사람이 있고, 겉으론 온화하고 선량해 보이지만 속내는 도적인 자가 있고, 겉으론 청렴 근신하지만 실은 진정성이 없는 자가 있고, 겉으론 용맹해 보이지만 실은 겁이 많은 자도 있습니다. 겉으론 과감하지만 실은 일을 처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다 일을 망치는 자들도 있지요. 또 겉으론 엄혹해 보이지만 실은 차분하고 성실한 사람도 있고, 겉으론 몸이 약하고 용모는 볼품없어도 일 앞에선 용맹전진하여 못 이루는 일이 없는, 출중한 능력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겉모습과 자질이 다르다는 게, 실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이처럼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의 본질'로 인해 군주에겐 '속임수의 정치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궤사·협지·도언과 같은 속임술은 특히 음험하고 사악한 뒷거래를 밝히거나 예방하는 데 진가를 발휘한다는 게 한비자의 주장입니다. 이런 사례들이죠. #2 방경이라는 현령이 있었는데, 그는 시장을 단속하는 사람을 내보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감독관을 불렀다가 그저 아무 의논도 하지 않은 채 그를 돌려보냈다. 그러고는 잠시 서 있으면서, 아무 말도 없이 단속하는 일을 지켜봤다. 시장 사람들은 현령과 감독관 사이에 뭔가 의논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서로 믿지 못해 나쁜 짓을 하지 못했다. #3 송나라 재상이었던 대환은 밤중에 하인에게 심부름시키며 말했다. "내가 들으니 여러 날 밤마다 덮개 씌운 수레가 옥리의 집에 드나든다고 하니 나 대신 가서 엿보고 오너라." 하인이 돌아와 보고했다. "수레는 보지 못했지만, 상자를 들고 올라가 함께 이야기하는 자는 보았습니다. 조금 있다가 옥리가 그것을 받았습니다." #4 한나라 소후는 기사를 현에 사자로 보냈다. 사자가 보고하자 소후가 물었다. "무엇을 보았는가?" "아무것도 못 보았습니다." "비록 그렇다고 해도 무언가 보지 않았느냐?" "남문 밖에서 누런 송아지가 길 왼쪽에 있는 모종을 먹었습니다." 소후는 사자에게 "내가 그대에게 물어본 것을 절대 말하지 말라"고 말한 뒤 이렇게 영을 내렸다. "모내기 철을 맞아 소와 말이 논에 들어가지 못하게 단속하라고 영을 내렸는데, 관리들이 이를 잘 돌보지 않아 소와 말이 남의 논에 들어가는 일이 매우 많다. 빨리 그 숫자를 조사해 올리도록 하라. 하지 못하면 죄를 가중할 것이다." 이에 세 지방에서 조사해 올렸다. 소후는 "미진하다"고 말하고, 다시 나가 살펴보니 바로 남문 밖에 누런 송아지가 있었다. 관리들은 왕이 밝게 살핀다고 보고, 모두 그 소임에 힘쓰고 감히 비위를 저지르지 못했다. #5 위나라 사공이 사람을 시켜서 나그네 차림으로 관문을 지나도록 했는데, 문지기가 그를 가혹하게 취조했다. 그래서 문지기에게 돈을 주었다. 문지기는 이내 그를 풀어주었다. 사공이 문지기에게 물었다. "언젠가 나그네가 이곳을 통과할 때 너에게 금을 주자 그것을 받고 풀어준 적이 있느냐?" 문지기는 이내 크게 겁에 질렸다. 사람을 제대로 판단한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정치에선 이런 속임수와 같은 수단이 오히려 공익을 지키는 방편으로도 작용한다는 것이 한비자가 하고자 하는 말입니다. 반대로 정치적 인간관계에서 상대는 언제든 나를 속일 준비가 돼 있다는 것도 깨달아야 하지요. 가장 최근인 청나라 때 나온 병법서 '36계'의 첫 계략이 '만천과해(瞞天過海)'입니다. 천자(황제)를 속이고 바다를 건넌다는 말입니다. 천자도 속일 수 있는데 누군들 못 속이겠습니까. 디자인 : 서현중
#1 월왕이 오나라를 치려고 궁리하면서 사람들이 죽음을 가벼이 여기도록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밖에 나갈 때 잔뜩 성을 낸 두꺼비를 보면 경례를 올렸다. 시종이 "왜 그렇게 공경하느냐"고 물었다. 왕은 이렇게 대답했다. "기개가 있지 않으냐." 이듬해 왕에게 자기 머리를 바치겠다고 하는 자가 10여 명이나 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칭찬 한마디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다른 버전도 있다. 월왕 구천이 잔뜩 부풀어 오른 두꺼비를 보고 경례하였다. 이에 시중들던 사람이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어보니 왕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두꺼비가 이처럼 기세가 있으니 어찌 격식을 차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사들이 이를 듣고 말했다. "두꺼비도 기세가 있으면 왕이 격식을 갖춰 존중하는데 하물며 무사들에게 용기가 있다면 더 일러 무엇 하겠는가." 그해 자기 머리를 잘라 바친 자가 있었다. 이에 월왕은 앞으로 오나라에 복수하려고 모범 삼아 보여줬던 것들을 시험해 보고자 했다. 누각에 불을 지르고 북을 쳐서 사람들이 불 속으로 뛰어들게 하려고 상을 불 속에 두었다. 또 강에 가까이 가서 북을 쳐 물속으로 뛰어들게 하려고 상을 물속에 두었다. 전쟁에 임해 사람들이 목이 잘리고 등이 갈라져도 뒤돌아보지 않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은 상이 그 병기 안에 있기 때문이다. #2 월왕 구천이 대부 문종에게 물었다. "내가 오나라를 치려고 한다. 어떠한가?" "가능합니다. 제가 상을 후히 줘서 믿음을 얻고, 벌은 반드시 엄하게 실행토록 하여 기강을 잡겠습니다. 군주께서 이를 확인하고 싶으시다면, 시험 삼아 궁에 불을 질러보십시오." 그래서 일부러 궁에 불을 질렀지만, 그것을 끄려는 사람은 없었다. 이에 곧바로 이런 명령을 내렸다. "불을 끄다 죽으면 전장에서 죽은 자와 같은 상을 내리고, 불을 끄다 살아남으면 적에게 승리한 자에게 주는 상을 줄 것이며, 불을 끄지 않은 자는 항복하거나 도망친 죄에 맞추어 처벌한다." 그러자 몸에 진흙을 바르고 물에 적신 옷을 입고 불길 속으로 달려가는 사람이 좌측으로 삼천 명, 우측으로 삼천 명에 달하였다. 와신상담(臥薪嘗膽), 월의 구천이 오의 부차에게 복수하는 이 이야기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지고, 여기저기서 수없이 인용되는 설화입니다. 출처가 <한비자>입니다. 어쨌든 이 일화는 한비자가 상예(賞譽), 즉 상을 주어 백성들을 고무하는 통치술 편에 등장합니다. 중국 고전에서 '상'이란 요샛말로는 인센티브를 말합니다. 인센티브에는 물질적 보상과 명예, 칭찬, 인정과 같은 정서적 보상이 포함됩니다. 상과 칭찬이 야박하면 아랫사람은 일하지 않고, 상과 칭찬이 후하고 믿을 만하면 아랫사람은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 상예의 통치술입니다. 이 기술을 잘 활용한 사람 중엔 <오자병법>의 오기도 있습니다. #3 오기는 위나라 무후 연간에 서하에서 태수를 했다. 이곳엔 진나라 쪽 접경지에 작은 성채가 있었는데, 오기는 그것을 공격해 없애고 싶었다. 없애지 않으면 성채의 사람들이 농부들에게 크게 위해를 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규군을 징발하기엔 명분이 부족했다. 어느 날, 그는 북문 밖에 수레의 끌채를 세워놓고 이런 명령을 내렸다. "이것을 남문 밖으로 옮겨놓는 자에겐 좋은 밭과 좋은 집을 주겠다." 하지만 그것을 옮기는 자가 없다가 드디어 한 사람이 그것을 옮겨 놓으니 그에게 곧바로 영을 내린 그대로 밭과 집을 주었다. 그러고 나서 어느 날은 붉은 콩 한 석을 동문 밖에 내놓은 뒤 영을 내렸다. "이것을 서문 밖으로 옮기면 전번과 같은 상을 내리겠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것을 옮기기 위해 다투었다. 드디어 그는 명령을 내렸다. "내일 작은 성채를 공격할 것이다. 먼저 오르는 자는 국대부를 삼고, 좋은 밭과 집을 주겠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달려 나갔고, 그 성채를 공격해 아침나절에 함락시켰다. 그러나 상을 잘못 활용하면 아주 나쁜 선례로 작용해 내내 국정에 발목을 잡을 수 있지요. 이런 사례입니다. #4 송나라 숭문에 있는 사람이 부모의 상을 치르느라 몸이 상하고 몹시 말랐다. 군주는 효심이 갸륵하다며 그를 관리로 삼았다. 이듬해 부모상을 치르다 몸이 상해 죽는 사람들이 10여 명이 나왔다. 이 사례에 대해 한비자는 이렇게 일갈합니다. "자식이 부모상을 치르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인데 그것을 상을 주며 권장하다니, 이게 군주가 백성을 위해 한 일이란 말인가?" 상이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기를 쓰는 '사람의 마음'을 활용하는 통치 기법입니다. 자기 이익 혹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 '별짓'을 다하는 게 사람이니까요. 기개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자기 목을 베어 왕에게 바치기까지 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상은 생산성을 높이는 등, 어쨌든 긍정적 효과를 노려 시도해야 하는 통치술입니다. 당연한 일에 착하다는 이유만으로 상을 주면 그 자체가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섬세하게 활용해야 합니다. 디자인 : 서현중
"미친 사람이 동쪽으로 달려가면 그를 쫓는 자들도 동쪽으로 달린다. 그렇게 동쪽으로 달려가는 일은 똑같지만 동으로 달려가서 하려는 일은 다르다." <한비자>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한비자는 "겉으로는 같은 일로 보이더라도 각자의 뜻과 결과가 다르므로 소상하게 살펴보라"고 충고합니다. 실제로 일에는 동기와 뜻이 있고,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이 있고, 결과가 있습니다. 좋은 뜻에 나쁜 결과도 있고, 똑같은 일이라도 다른 동기에 다른 결과도 있지요. 같은 현상이라고 하나로 '퉁'쳐 버릴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잘 듣고, 보고, 판단할 줄 아는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1 위나라 사군은 신하 여이를 중히 여기고, 애첩 세희를 사랑했다. 그러나 이들이 총애를 믿고 자신을 눈과 귀를 가로막을까 두려워해서 다른 신하 박의를 높여 여이와 맞서게 하고, 다른 첩실인 위희를 높여 세희와 맞서도록 하면서 "이렇게 서로 대조해 보는 것이다"고 말했다. 사군은 자신의 이목이 가로막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아랫사람도 윗사람을 비판할 수 있고, 아랫사람이 윗사람과 나란히 앉을 수 있도록 하는 일은 하지 않은 채, 권력이 서로 비슷하게 된 이후에야 서로 비판할 수 있도록 했으니 더욱 군주를 가리고 막는 신하들이 늘어났던 것이다. 사군이 가로막힌 것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군주는 말을 듣는 사람입니다. 그들도 역시 공정하게 듣고 판단하고 싶겠죠. 그러나 군주를 둘러싼 이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군주의 귀를 막기도 하고, 그의 귀에 그럴듯한 달콤한 말로 속삭이기도 합니다. 말을 듣는 기술이야말로 필수 덕목입니다. 그렇다면 물리적 다수의 말이 옳은 말일까요? #2 위나라의 신하 방공이 태자를 따라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에 인질로 가게 되었다. 그는 왕과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지금 한 사람이 시장에 호랑이가 있다고 하면 왕께서는 믿으시겠습니까?" "못 믿는다." "두 사람이 시장에 호랑이가 있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못 믿는다." "세 사람이 시장에 호랑이가 있다고 하면 믿으십니까?" "나는 믿을 것이다." "대체로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한데 세 사람이 말하면, 호랑이는 있는 것이 됩니다. 지금 한단과 위나라의 거리는 시장보다도 멀고, 저를 헐뜯는 자들은 세 사람보다 많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왕께서는 이 점을 살펴주십시오." 이후 방공이 한단에서 돌아왔을 때, 결국은 참언들 때문에 왕을 볼 수 없었다. #3 노나라 애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하면 헤매지 않는다. 지금 과인은 일하면서 여러 신하들과 상의하는데 나라는 더욱 어지러워지니 어쩐 일입니까?"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명군이 신하에게 물으면, 한 사람은 알고 한 사람은 모릅니다. 사정이 이러해서 명군은 윗자리에 있으면서 신하들에게 아래에서 솔직히 논의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지금 노나라의 신하들이 계손 씨(노나라 실권을 장악한 대부)와 말을 하나로 맞추고 행동을 같이하니 노나라가 온통 하나가 되어버렸습니다. 군주께서 비록 경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해도 이 어지러운 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의 말을 들었다고 해서 그 말이 곧 '민심'이라거나 '진정성 있는 말'이라고 믿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군주를 둘러싼 무리의 이야기는 민심과 거리가 먼 경우가 많습니다. 군주에게도 정치의 기술이 있지만, 신하들에게도 기술이 있거든요. 대략 공익보다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달려가는 건 권력 주변 사람들에겐 일상적으로 있는 일이죠. 그러니 자기들끼리 서로 이해를 맞춰 여러 사람이 말을 맞추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죠.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을 갖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한비자는 "군주의 곁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모두 왕의 눈에 훌륭한 태도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속을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군주를 현혹하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런 특별한 재능을 <한비자> 설의 편에 나온 사례로 한번 볼까요. #4 고대 악왕인 걸왕의 신하 후치, 주왕의 신하 승후호 등은 왕의 비서이거나 측근이었는데, 이들에겐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옳은 일을 그른 것 같이 말하고, 그른 일을 옳은 것 같이 말하는 재주. 내심은 음험하여 남을 해치면서도 겉은 얌전하여 착해 보이며, 옛것을 칭송하여 현실의 좋은 일을 못 하도록 막고, 그 군주를 마음대로 움직여 정밀한 음모를 성사시키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써 혼란시켰다. #5 관중이 죽은 후 제환공의 곁을 지킨 수조와 역아 같은 신하들은 소인배의 작은 이득만을 추구하며, 현명하고 충실한 사람들을 가로막아 군주의 눈을 가렸고, 뒤에서는 백관들을 쑤석거려 화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군주를 도와 그의 욕구를 채워주고, 군주가 조금이라도 좋아할 수 있다면 비록 나라가 부서지고 백성을 죽이더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종국엔 제나라 환공을 살해했고, 이들을 임용했던 환공은 몸에서 구더기가 나올 때까지 시신도 거두어지지 못했다. 한비자는 "아첨하는 신하는 웬만한 눈으로는 가려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비자는 언로를 열어놓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다양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하는 '잘 들어주는 군주의 기술'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군주는 열린 귀, 뜨인 눈, 열린 마음, 분석할 줄 아는 머리, 실행하는 손과 발을 필수로 '장착'해야겠죠. '국민주권시대'의 군주는 대통령만이 아닙니다. 대통령은 잠시 위임받은 군주일 뿐입니다. 국민이 군주의 자질을 갖춰야 권력을 잠시 위임할 상대를 제대로 뽑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디자인 : 장지혜
<한비자>는 '제왕학 교과서'라고 합니다. 고전적 용어인 '제왕학'은 요샛말로 하자면 '최고위 리더십론'이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그렇다 보니 리더십이 발휘되어야 할 거의 모든 장면을 실제 사례를 통해 보여줍니다. 이번엔 실패하는 리더십 사례의 두 경우를 살펴볼까 합니다. '최고위 리더가 이렇게 하면 망한다'는 이야기들이죠. 먼저 불신이 가져오는 우환의 사례입니다. 전쟁을 준비하는 장수가 지나치게 긴장감을 조성하면서도 말과 행동으로는 믿음을 얻지 못하면 전쟁에 패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1 이회가 군문의 좌우를 지키는 병사들에게 경계하여 말했다. "부지런히 경계하라. 적들이 조만간 너희를 칠 것이다." 이런 말을 두세 차례 했지만 적은 오지 않았다. 좌우 군문의 병사들은 해이해지고 태만해졌으며, 이회를 불신했다. 수개월이 지나고 진(秦)나라 사람들이 습격하자 그 군대는 거의 전멸했다. 이것이 불신이 초래한 우환이다. 또 다른 일설에 따르면 이회는 진나라와 전투를 할 때에 좌측 군문 병사에게 말하기를 "속히 (성벽 위로) 올라가라. 우측 군문 병사들은 이미 올라가 있다"고 했다. 또 달려가서 우측 군문 병사에게 말하기를 "좌측 군문 병사들은 이미 올라가 있다"고 했다. 이에 좌우 군문의 병사들은 "올라가자"며 모두 다투어 올라갔다. 그러나 이듬해에 진군이 습격해 왔을 때, 군사들은 이회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군대는 거의 전멸하기에 이르렀다. #2 초나라 여왕이 경계를 위해 북을 쳐서 백성과 함께 적의 침략에 대비하기로 했다. 그런데 술을 마시고 취하여 실수로 북을 쳤다. 백성들이 크게 놀라 달려오니 사람을 시켜 "내가 취하여 측근들과 장난하다가 잘못 북을 쳤다"는 말을 전하도록 해서 달려온 백성들을 모두 파하게 했다. 몇 개월 후 경계 상황이 생겨서 북을 쳤으나 백성들은 달려오지 않았다. 이에 거듭 영을 내리고 호령을 명백히 전한 다음에야 백성들이 이를 믿었다. 국난을 경계하기 위해 북을 치거나 봉화를 올리는 일은 대단히 신중해야 합니다. 초나라 여왕의 경우엔 그나마 어찌어찌 수습했지만, 취미 삼아 봉화를 올렸다 망한 나라도 있지요. 주나라 여왕은 사랑하는 아내 포사의 미소를 보기 위해 일삼아 봉화를 올리다 '봉화의 신뢰'를 잃는 바람에 진짜 견융이 쳐들어와 봉화를 올렸을 때는 아무도 오지 않는 상황에 몰렸습니다. 결국 여왕 부자는 도망치다 잡혀 죽었고, 이로써 서주 시대는 끝나고, 동주 시대가 되며 춘추전국시대로 돌입하게 되었죠. 이처럼 사람들이 이미 확립된 약속이라고 믿는 것을 지키지 않는 것은 '신뢰의 위기'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패망으로 이어지게 되는 역사적 사례는 대단히 많습니다. 이회의 경우는 평소에 '긴장감 조성'이 지나쳤죠. 그리고 부화뇌동을 부추기는 얄팍한 수를 씁니다. 믿음도 못 얻은 사람이 리더의 자리에 앉아 있으니, 군사들이 아예 움직이지 않게 되어 전멸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패배를 자초하는 리더의 행태'는 '아는 척 참견하는 리더'입니다. <한비자>엔 유머러스한 일화로 이런 행태를 따끔하게 지적합니다. #3 조나라에서 재상까지 지낸 유세객 우경이 집을 지으며 장인에게 "지붕이 너무 높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목수가 말했다. "이건 새집입니다. 흙은 젖어 있고, 서까래는 생나무입니다. 대체로 젖은 흙은 무겁고 생나무 서까래는 굽습니다. 굽은 서까래가 무거운 흙을 떠받치니 낮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경이 말했다. "아니다. 시일이 오래 지나면 흙은 마르고, 서까래도 건조해진다. 마른 흙은 가벼워지고, 건조한 서까래는 곧게 펴진다. 곧은 서까래로 가벼운 흙을 바치니 더욱 높아질 것이다." 장인이 할 말을 잃고 그 말에 따르자 이내 집이 무너졌다. #4 위나라 소왕이 관리의 일에 관여하고 싶어서 맹상군에게 말했다. "내가 관리의 일에 관여하겠소." "왕께서 관리의 일에 관여하고 싶다면 법전을 숙독해 익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왕은 법전 십여 쪽을 읽다가 졸려서 누워 잤다. 그러고는 왕이 말했다. "나는 이 법은 읽을 수가 없다." 자기가 친히 해야 할, 힘을 보이고 권병을 행사하는 일은 안 하면서 신하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싶다니 졸린 게 당연하지 않겠나. 공자가 말했다. "군주 된 자는 사발과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사발이 모나면 물도 모나고, 사발이 둥글면 물도 둥글다." '오버하는 리더'야말로 국가 안보에 최고 취약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며칠 전 한밤중에 대남전단 살포에 공습 예비경보를 울렸던 걸 보며, 지난해 어느 날 새벽 경계경보에 놀라 가슴이 쿵쾅거렸던 일이 자동으로 연상되면서 이 사례들이 생각나더군요. 디자인 : 장지혜
'상과 벌'. 이는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 활용하는 두 개의 무기입니다. 실은 군주의 통치 무기는 이 두 개가 전부입니다. 현대 경제학에서도 '인센티브와 페널티'가 매사의 관건이 되니 이건 그저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의 근원이라고 해야겠지요. 제왕학에서도 통치의 기술이란 이 두 무기를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가르칩니다. 먼저 '필벌'의 효과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1 은나라 법에는 길거리에 재를 버린 자를 벌하라고 돼 있다. 자공은 이것이 너무 무겁다고 생각해 공자에게 물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다스리는 법을 안 것이다. 대체로 길거리에 재를 버린다면 반드시 사람이 덮어쓸 것이고, 사람이 덮어쓰면 그 사람은 반드시 화를 낼 것이고, 화를 내면 싸우게 된다. 싸우면 반드시 삼족이 서로 살상하게 된다. 이는 바로 온 집안이 살상당하는 일이니, 처벌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중벌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고, 재를 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람에게 쉬운 일이다. 이렇게 쉬운 것을 하도록 해서 싫어하는 것을 버리게 하는 것이 '치도'라 할 것이다." #2 노나라 사람이 북쪽의 늪 지역 적택에 불을 질렀다. 마침 북풍이 불어와 불길이 남으로 향하고 도성을 태울 지경이었다. 애공은 두려워하며 많은 사람을 이끌고 불을 끄려고 했지만 좌우에 사람이 없었고, 사람들은 적택에서 뛰쳐나오는 동물들을 쫓느라 불을 끄지 않았다. 이에 공자를 불러서 물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짐승을 쫓는 일은 즐거운데 벌 받는 것도 아니고, 불을 끄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상 받는 일도 아니니 여기 불을 끌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애공은 "그 말이 옳다"고 하자 공자가 말했다. "일은 급한데, 상을 줄 여유는 없습니다. 불을 끈 자들에게 모두 상을 주면 나라에는 사람들에게 줄 상이 부족하게 됩니다. 다만 처벌만 하십시오." 이에 애공의 허락을 받아 공자가 명령했다. "불을 끄지 못하면 항복하거나 도망친 죄로 다스리고, 짐승을 쫓는 자는 금지에 들어간 죄로 다스릴 것이다." 명령이 내려지자 아직 두루 다 알려진 것도 아닌데 불은 이미 다 꺼졌다. 일을 시키면서 상과 벌을 줄 권한을 주지 않으면, 아무리 유능해도 혼란을 다스리지 못한다는 사례도 있습니다. 작은 집단의 리더라도 꼭두각시 혹은 허수아비로 인식되는 순간 구성원들은 절대로 따르지 않으니까요. #3 중산의 재상 악타가 수레 1백 대를 거느리고 조나라에 사절로 갔다. 그의 식객 중 재주가 있는 사람을 뽑아서 행렬을 지휘하도록 했는데, 가는 도중 혼란이 일어났다. 악타가 말했다. "나는 그대에게 재능이 있어서 행렬을 지휘하도록 했는데 어떻게 중도에 이렇게 난리가 납니까." 그러자 식객은 사의를 표하고 떠나면서 말했다. "공은 다스리는 방법을 모르는군요. 사람을 굴복시킬 수 있는 위엄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도록 할 만한 이익을 주어야 능히 그들을 부릴 수 있습니다. 지금 저는 신분이 낮은 군의 식객일 뿐입니다. 도대체 어린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을 바로잡고,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부리려면 이해의 권한을 잡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이렇게 혼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도 저들 중 좋은 사람을 제가 경상으로 삼을 수 있고, 불순한 인사의 목을 벨 수 있다면 어찌 다스리지 못하겠습니까." 리더가 벌을 주는 데 단호하지 못하거나 경우에 따라 벌을 주거나 말거나 하면서 '랜덤'으로 처리하는 경우에 나라는 혼란에 빠집니다. #4 정나라 재상 자산은 병이 들어 곧 죽게 되었을 때 유길에게 이렇게 일렀다. "내가 죽은 뒤 그대가 반드시 정나라에 임용될 것이다. 그러면 반드시 엄한 자세로 사람을 대하라. 대체로 불의 형태가 엄하니 사람들은 적게 타 죽고, 물의 형체는 유순해 보이니 사람들이 많이 빠져 죽는다. 그대는 반드시 엄한 모습을 보이고, 유하게 해서 물에 빠져 죽는 일이 없도록 하라." 자산이 죽었다. 유길은 엄한 자세로 다니는 걸 참지 못했다. 그러자 정나라 소년들이 패거리로 몰려서 도둑질을 하고, 갈대 늪을 근거지 해서 점점 나라의 화근이 되어가고 있었다. 유길은 전차와 기병을 이끌고 하루 낮밤을 싸워 겨우 이겼다. 유길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내가 일찍 그분의 가르침을 따랐다면 필시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인데." #5 초나라 남쪽 땅 여수의 물속에서는 금이 나오는데, 많은 사람이 몰래 금을 캤다. 금을 캐지 못하게 하는 법에 따르면 붙잡히는 즉시 찢어 죽여서 시장에 내걸도록 했다. 그래도 그런 자들이 너무 많아서 시체가 강물을 막아 양 갈래로 흐를 정도였는데 사람들은 금 캐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찢겨 죽임을 당하고 시장에 내걸리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을 텐데도 그치지 않는 것은 반드시 잡힐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서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대에게 천하를 내주는 대신 죽일 것이다"라고 하면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천하를 갖는 것은 큰 이익이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반드시 죽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붙잡히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면 비록 찢겨 죽는 것을 알아도 금을 훔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반드시 죽을 것을 안다면 천하도 필요 없다. 나라의 평온과 혼란을 좌우하는 한 끗이 바로 '사람들의 죄와 벌을 다루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죄가 있는데 벌이 없는' 건 자애로운 통치가 아니라 혼란의 궁극으로 달려가는 일이라는 것이죠. 디자인 : 서현중
#1 위나라 혜황이 복피에게 물었다. "그대는 나에 대한 평판을 들었을 터인데, 들어보니 어떻던가?" 복피가 말했다. "왕께서는 자애롭고 은혜로운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왕은 아주 기뻐하면서 말했다. "그러하니 앞으로 안정된 상태에 이르지 않겠는가?" 그러자 복피가 대답했다. "왕의 공으로 망하는 데에 이를 것입니다." "백성들은 나를 자애롭고 은혜롭다고 했다. 행동이 선한데 어찌하여 망하는 길로 간다고 하는가?" 왕의 물음에 복피는 이렇게 답했다. "본시 자애로운 자는 측은한 마음을 갖고 은혜로운 자는 베풀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측은하다 하여 죄가 있어도 벌을 주지 않고, 베풀기를 좋아하면 공을 세우지 않아도 상을 줍니다. 과오는 있는데 죄가 없고, 공은 없는데 이득이 주니 비록 망한다 해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한비자는 왕에게 사랑이 넘치면 안 된다고 단단히 경고합니다. <설의>편에선 인의(仁義)의 군주는 나라를 망친다고 노골적으로 표현합니다. 이런 얘기입니다. #2 어린 자식에 대한 애정은 어머니보다 앞설 수 없다. 그러나 자식이 잘못을 하면 스승을 따르게 하고, 병이 들면 의원에게 보낸다. 스승을 따르지 않으면 장차 형벌로 떨어지고, 의원을 따르지 않으면 장차 죽을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아무리 자식을 사랑해도 형벌을 면하거나 죽음을 구하지 못한다. 어머니가 애정으로 집안을 보전할 수 없는데, 어찌 군주가 사랑으로 나라를 지탱하는가. 군주의 사랑이 넘치면 아래가 방자해지고, 요행을 바라게 된다. 특히 나라를 다스리는 데 총애하는 사람에게 결정을 맡기거나 그에 휘둘리는 인상을 주게 되면 신하들은 군주를 가볍게 보고, 총애하는 사람을 중히 여기게 된다고 경계합니다. 이렇게 되면 군주는 주인이 아니라 '손님' 같은 처지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총애하는 신하, 친인척, 지인 등 군주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일화도 많습니다. #3 성환이 제나라 왕에게 말했다. "왕께서는 너무 사랑이 많으시고, 너무 사람을 동정하십니다." 그러자 왕이 되물었다. "크게 사랑하고 크게 동정하니 평판이 좋지 않으냐?" 이에 성환이 말했다. "그것은 신하들에게나 선해야 한다는 것이지 지금 군주가 행하시는 것처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릇 신하들은 반드시 인애를 보여야 그 후에 가히 함께 도모할 수 있고, 남을 동정하는 마음이 있어야 나중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인애가 없으면 함께 도모할 수 없고, 동정하지 못하면 가까이하지 못합니다." 왕이 되물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점이 잘못 인애롭고, 어떤 점이 너무 남을 동정한다는 것인가?" 그러자 성환이 대답했다. "왕께서는 설공(맹상군의 아버지로 왕의 친척)을 크게 사랑하시고, 공실 일족인 전田 씨들을 지나치게 동정합니다. 설공을 지나치게 사랑하시면 그에게 권력이 집중되니 중신들의 권위가 낮아지고, 공실인 전 씨 일족을 지나치게 가엽게 생각하시면 숙부와 사촌과 조카들이 범법을 하게 됩니다. 대신들이 힘을 못 쓰면 외국을 방어해야 할 병사들이 약해질 것이고, 공실 일족이 범법을 하면 국내 정치가 혼란스러워질 것입니다. 외적을 방어할 군대는 약하고, 국내 정치는 어지러운 것을 두고 망국의 원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군주의 사랑은 망국의 원인이 되지만, 그의 작은 관심이라도 받는 이들에겐 이익이 무궁무진합니다. #4 제나라 재상 정곽군이 친구와 함께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었더니 그 친구가 부유해졌다. 또 측근에게 수건을 주었더니 그 측근이 중요한 사람처럼 되었다.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수건을 준 일은 작은 밑천인데도 재상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부를 이루는 기반이 되었다. 한비자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필벌(必罰)'하라고 권합니다. 필벌은 한비자가 권하는 군주의 정치술 '7술'의 둘째 덕목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필벌의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천명하는 것만으로도 나라가 안정되고, 적국도 감히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한다고도 하죠. 그래서 위나라 사군은 자신의 '필벌 의지'를 천명하기 위해서 이웃에 성을 내주겠다고 제안하기도 합니다. #5 위衛나라 사군 때에 죄수 하나가 위魏나라로 도망쳐 양왕 아내의 병을 치료한다고 하였다. 사군이 사람을 시켜 50금을 줄 터이니 그를 팔라고 청했다. 위왕은 다섯 번이나 청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좌 씨라는 성 하나를 내주겠다고 했다. 측근 신하들이 간하였다. "대체 성 하나를 주고 도망친 죄수를 사는 것이 옳겠습니까?" 그러자 왕이 말했다. "대체로 나라는 다스리는 데에는 작은 일이 없고, 난을 대처하는 데에는 큰일이 없다고 했다. 법이 바로 서지 못해서 벌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으면 비록 좌 씨 성이 열 개가 있어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 법을 세워 벌을 반드시 주게 되면. 비록 열 개의 좌 씨 성을 잃더라도 손해가 아니다." 위나라 왕은 이 말을 듣고 "군주가 다스리고자 하는데 이를 들어주지 않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고 말하곤 죄수를 실어서 돌려보내고 아무 보상도 받지 않았다. 죄인을 벌주어 나라를 바로잡는 것이 적국에 땅을 내어주는 것보다 더 시급하다는 일화입니다. 디자인 : 서현중
'역린'(逆鱗)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우리나라에선 같은 제목의 영화까지 나왔을 정도로 많이 알려진 말입니다. 한비자가 끌어낸 개념이죠. 그리고 이 개념을 설명하면서 든 사례가 바로 동성 연인이었던 위(衛) 나라 영공과 미자하 스토리였습니다. 이 커플은 다양한 일화를 남겼는데요. 그중엔 '부뚜막 꿈'을 꾼 광대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1 위나라 영공 때엔 미자하가 총애를 받아 위나라에서 전횡하고 있었다. 군주 앞에서 재롱을 부리는 난쟁이 배우가 영공을 만나 말했다. "제 꿈이 딱 들어맞았습니다." "무슨 꿈이냐?" "꿈에 아궁이를 보았는데, 공을 뵐 징조였나 봅니다." 이 말에 영공은 화가 나서 말했다. "내가 듣기로는 군주를 만나는 자는 꿈에서 해를 본다고 했는데, 어찌하여 꿈에 부엌 아궁이를 보고 나를 보았다는 것이냐?" 그러자 난쟁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대체로 해는 천하를 두루 비추는 것이지요. 물건 하나로는 그것을 가릴 수 없습니다. 군주도 한 나라를 두루 비추지요.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가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궁이는 한 사람이 불을 때면 뒷사람은 그것을 볼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 혹시 한 사람이 군주 앞에서 불을 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가 비록 꿈에 아궁이를 보았다고 해도 맞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 사례는 '한비자' 내저설 상편에 등장합니다. 바로 술(術)에 관해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앞서 법가를 이해하기 위해선 '법(法)·술·세(勢)'의 개념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번엔 '술'에 대해서 말할 차례입니다. 술이란 군주의 기술, 정치의 기술입니다. 한비자는 "군주에게 술이 없으면 윗자리에 앉아서 눈이 가려진다"고 합니다. 술의 기본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 각각의 자리에 딱 맞는 사람들을 골라 앉히는 인사의 능력이지요. 한비자는 '왕이 총애하는 한 사람'으로 인해 왕이 가로막히는 것을 가장 경계합니다. 부뚜막 같은 왕은 만백성에게 골고루 빛을 발하지 못하니까요. 실제로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것은 존망과 치란이 갈리는 계기이고, 술 없이 사람에게 맡기면 실패하지 않는 예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비자는 친절합니다. 군주가 술을 발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며 나열합니다. 이른바 칠술(七術)입니다. 술을 제대로 발휘하려면 일곱 가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 첫째, 참관(參觀)입니다. 이는 진실을 알고 싶다면 다양한 경로로 증거를 모아서 대조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군주가 듣는 일을 '문고리 신하'에게 맡기면 그가 군주에게 들어가야 할 말들을 막게 된다는 것이죠. 게다가 이런 끔찍한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2 숙손은 노나라 재상으로 국정을 제 마음대로 재단하고 있었다. 그가 아끼던 심복으로 수우라는 자가 있었는데, 수우 역시도 숙손의 영을 농단하고 있었다. 수우는 숙손의 아들들을 질투해 그들을 죽일 마음을 먹고 있었다. 한번은 수우가 숙손의 아들 임과 함께 노나라 군주의 행궁으로 놀러 갔다. 노군은 그에게 옥환 노리개를 주었다. 임은 그것을 받고 절했지만, 감히 허리에 차지 못하고, 수우를 시켜 아버지 숙손에게 차도 되는지 허락을 구해달라고 했다. 이에 수우는 거짓말로 말했다. "제가 이미 허락받았으니 그것을 차도 됩니다." 그래서 임은 그것을 허리에 찼다. 그런데 수우는 이 일을 숙손에게 이렇게 아뢨다. "어찌하여 임을 군주와 만나도록 하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숙손은 "어린아이를 어찌 뵙게 하겠느냐"고 했다. 수우는 이에 이렇게 말했다. "임은 이미 수차 군주를 뵈었습니다. 군주께서 옥환 노리개까지 주어서 이미 그것을 차고 있습니다." 이 말에 숙손은 임을 불러서 보니 정말로 허리에 차고 있었다. 이에 숙손은 크게 화를 내며 임을 죽였다. 임의 형은 병이라고 하는데, 수우는 또 그를 질투해 죽이려고 했다. 숙손이 병을 위해 종을 만들었는데 종이 완성되었다. 병은 감히 그것을 치지 못하고, 수우에게 일러 숙손에게 쳐도 되는지 물어달라고 했다. 또 수우는 거짓으로 말했다. "제가 이미 청하여 허락받았으니 쳐도 됩니다." 병은 이 말을 듣고 종을 쳤다. 그러자 숙손이 그것을 듣고 말했다. "병은 종을 쳐도 되는지 내게 물어보지도 않는구나." 그러고는 화가 나서 그를 내쫓았다. 병은 달아나 제나라로 갔다. 1년 후 수우는 병을 사면해달라고 숙손에게 빌었다. 숙손이 수우를 시켜 그를 불러오도록 했다. 그러나 수우는 부르지도 않고 이렇게 보고했다. "제가 불렀는데 병이 크게 화를 내며 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숙손은 크게 화를 내며 사람을 시켜 그를 죽였다. 두 아들은 이미 죽었다. 숙손도 병이 들었다. 수우는 혼자서 그를 돌보며 다른 측근들은 모두 내보내고, 안으로 사람을 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먹을 것도 주지 않고 굶겨 죽였다. 수우는 상도 치르지 않고 금고 안에 있는 귀중한 보물들을 챙겨서 제나라로 도망쳤다. 이 사건에 대한 한비자의 평으로 갈무리하겠습니다. "자신이 믿는다는 자의 말만 듣고 아비와 아들이 남에게 욕을 당했으니 이는 제대로 살피고 맞춰보지 않은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디자인 : 서현중
조짐이란 주로 사람에게서 옵니다. 어떤 사람의 행동을 통해 앞날을 예측할 수 있지요. 주변에 있는 우매하거나 사악한 사람으로 인해 두려운 조짐이 보일 때, 보통은 어떻게 하나요. 두려움에 떨거나 아니면 아예 눈 감아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쁜 예측은 참으로 적중률이 높습니다. #1 은나라 폭군 주왕이 상아 젓가락을 쓰자 그의 신하인 기자는 두려워했다. 상아 젓가락을 쓰려면 필시 질그릇에 국을 담아 먹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서각이나 옥으로 만든 그릇을 쓸 것이다. 옥그릇에 상아 젓가락이면 필시 콩잎 국을 담지는 않을 것이고, 털이 긴 소나 코끼리와 표범의 새끼를 담을 것이다. 털이 긴 소나 코끼리와 표범의 새끼는 반드시 짧은 베옷을 입거나 띠로 만든 지붕 아래에서 먹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아홉 겹의 비단옷을 입고 고대광실에 앉아 먹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어울리는 것을 구하려면 천하에 있는 것으로 부족할 것이다. 성인은 미미한 것을 보고 그 맹아를 알며, 시작을 보고 그 끝을 안다. 그러므로 상아 젓가락만 보고도 불안해한 것은 천하에 만족함이 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은나라 주왕은 포악무도한 왕으로 하나라 마지막 왕인 걸왕과 쌍벽을 이루는 고대 중국의 대표적인 악왕(惡王)입니다. 중국 고전에서 '걸주'(桀紂)라는 말이 나오면, 악왕의 비유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걸왕이 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는 한 단어로 압축된다면, 주왕은 달기라는 애첩과 포락형으로 유명하죠. 포락은 사람을 발가벗겨 달군 쇠기둥을 기어가도록 했다는 가혹한 형벌입니다. 물론 은나라에도 충신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나쁜 조짐을 읽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러시면 아니 되옵니다'라며 충간을 하기도 했죠. 중국 충신의 대명사로 통하는 비간도 충간을 하고 죽임을 당했고, 주왕의 숙부였던 기자 역시 옥에 갇혔습니다. 제후들은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켰죠. 그러나 아무도 그를 말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그가 가두었던 서백(西伯)의 아들 주무왕에게 나라를 빼앗깁니다. 나쁜 조짐은 나쁜 결말을 향해 갑니다. 한비자는 "비간은 군주가 멸망할 것은 알았는데, 자기가 죽을 줄은 몰랐다"며 "일이 돌아가는 추세는 알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알지 못한 때문"이라고 안타까워합니다. 악인에 대한 충성의 결과는 자신의 몰락으로 이어집니다. 또 남의 눈에는 나쁜 결과가 예측되는데 본인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실제로 '충고'라는 건 사람에게 통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특히 명예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죽을 게 뻔해 보여도 부나방처럼 불 속으로 돌진합니다. 공자가 자서를 걱정한 일화처럼 말입니다. #2 공자가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자서(초나라 영윤으로 있던 공자 신)가 저렇게 명성을 얻고자 하는 것에 대해 누가 충고할 수 있겠는가?" 자공이 말했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는 그에게 충고했지만 자서는 개의치 않았다. 공자는 말했다. "관대하여 이익을 좇지 않고, 고결한 성품은 변치 않아 굽은 것을 굽었다 하고, 곧바른 것을 곧바르다 한다. 하지만 자서는 재앙을 면키는 어렵겠다." 그리고 백공의 난이 일어났을 때 자서는 죽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행동이 곧은 사람이라도 명예욕이 앞서면 굽는 행동을 한다." 그렇다면 나쁜 조짐이 보일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소 허무하지만 그 화가 내 몸에 미치지 못하도록 미련을 두지 말고 도망치는 게 상책이라는군요. #3 이웃이 사나워 집을 팔고 피해 가려는 사람이 있었다. 이에 주위 사람이 "그자의 죄는 곧 가득 차서 관이 알아서 처리해 줄 것 같으니 좀 기다려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나는 그것이 나를 가지고 가득 차게 될까 봐 두렵다"고 말하곤 떠났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어떤 일이든 기미가 보이면 지체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지나치게 자신의 총명함을 드러내거나 앞서나가는 것, 그리고 자신의 충성심을 드러내기 위해 보통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는 너무 나가는 행동은 남들에게 나를 경계하도록 하는 조짐으로 작용합니다. 나 자신이 조짐이 되어버리면, 죽을힘을 다해 애를 써도 주위가 배척하니 억울합니다. #4 진진(陳軫)은 위(魏)왕에게서 귀한 대접을 받았다. 혜자가 그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반드시 왕의 측근들에게 잘하시오. 본래 버드나무는 옆으로 심어도 살고, 거꾸로 심어도 살아나며, 꺾어서 심어도 또 살아납니다. 그런데 열 사람이 그것을 심은들 한 사람이 뽑아내면 살아남을 버드나무가 없는 것이지요. 도대체가 열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렇게 잘 살아남는 것을 심는데도 한 사람을 이기지 못하는 건 왜일까요? 심는 것은 어렵지만 뽑아버리는 것은 쉽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비록 스스로 왕 앞에 잘 심어졌지만, 그것을 제거해 버리려는 자들이 많으면 필시 위험해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5 위나라 장수 악양이 군주인 문후와 중산을 공격할 때, 악양의 아들이 중산에 있었다. 중산의 군주는 그 아들을 삶은 국을 보냈다. 악양은 막사에 앉아서 그것을 한 그릇 다 마셨다. 이에 도사찬에게 말하였다. "악양이 나로 인해 아들의 고기를 먹게 되었구나." 도사찬이 이렇게 대꾸했다. "그 아들을 먹었으니 누군들 못 먹겠습니까?" 악양이 중산에서 돌아온 뒤 문후는 그 공을 포상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의심했다. 악양은 정말 억울하겠지요. 아들은 죽고, 의심까지 사게 됐으니 말입니다. 한데 원래 인간 세상엔 지나치게 큰 충성과 친절에 대해선 보상이 없습니다. 디자인 : 장지혜
#1 도도라는 새가 있는데 머리는 무겁고 꼬리는 굽어서 물가에서 물을 마시려고 하면 반드시 뒤집어진다. 그래서 누가 그 날개를 물어줘야 마실 수 있다. 도도처럼 혼자서는 물을 잘 마실 줄 모르는 사람도 있는데 그는 곁에서 도와줄 사람을 찾아야만 한다. 정말 도도라는 새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비자'의 설림(說林) 편에는 두 개의 동물 설화가 나오는데 앞서 소개했던 '훼'라는 뱀과 '도도'라는 새 이야기입니다. 한 몸뚱아리에 두 개의 입을 가진 훼나 머리가 무거워 혼자서는 물을 마시지 못하는 도도는 실존 가능성이 없는 상징적 동물이죠. 여기서 훼는 싸움박질에 이골이 난 정치인들을 비유하는 것이라면, 도도는 최고 리더인 '군주' 혹은 '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의미하는 것을 유추하자면 왕이란 혼자서 모든 걸 할 수 없고, 반드시 주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이겠죠. 서로 협력하거나 도움을 받아야 일이 성사된다는 사례들은 많이 있습니다. #2 관중과 포숙이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군주의 음란이 심하니 반드시 나라를 잃을 것이다. 제나라의 여러 공자 중 보좌할 만한 사람은 외국에 볼모로 가 있는 공자 규와 소백이 있다. 그대와 함께 각자 한 사람씩 맡아 먼저 성공한 사람이 서로 거두기로 하자." 그리하여 관중은 공자 규를 따랐고, 포숙은 소백(훗날 제환공)을 따랐다. 나라 사람들이 결국 군주를 살해했다. 소백이 먼저 들어가 군주가 되었다. 규를 따르던 관중은 노나라 사람에게 붙잡혀 소백에게 바쳐졌다. 그러자 포숙은 소백에게 말하여 관중을 재상으로 삼으라고 천거하여, 소백이 받아들였다. 그래서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용한 무당인 무함이 잘 빌어도 자기의 재앙을 없애지는 못하고, 진나라 의원이 병을 잘 고쳐도 자기 스스로에게 침을 놓지는 못한다." 관중도 포숙의 도움을 기다려야 했다. 이를 두고 시쳇말로 "노예가 갖옷을 팔면 팔리지 않고, 선비가 말솜씨로 자신을 미화해도 믿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관중은 공자 규를 위하여 먼저 제나라로 들어가는 소백에게 활을 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런데 소백은 그런 그를 재상으로 삼지요. 여기엔 포숙의 천거가 주효했습니다. 포숙이 아니었다면 자신에게 화살을 날린 관중을 받아들였을까요. 서로 돕는다는 건 아름다운 일이지만, 아무하고나 상부상조해선 안 됩니다. 바로 그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과 도와야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3 관중과 습붕*은 제환공을 종사해 고죽을 정벌했다. 봄에 가서 겨울에 돌아오다 길을 잃고 헤맸다. 관중은 "늙은 말의 지혜가 쓸 만합니다"고 말하곤 늙은 말을 풀어 그 뒤를 따라가 마침내 길을 찾았다. 산중에서 물이 떨어졌다. 습붕이 말했다. "개미는 겨울에는 산의 양지바른 곳에 살고, 여름에는 음지에 삽니다. 개미집이 한 촌이 넘으면 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이내 땅을 파서 물을 얻었다. 관중의 능력과 습붕의 지혜로도 할 수 없을 땐 늙은 말이나 개미를 스승으로 삼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마음이 어리석어 성인의 지혜를 스승으로 삼을 줄도 모른다. 어찌 잘못되지 않겠는가. *습붕 : 관중이 죽기 직전에 군주인 제환공에게 차기 재상으로 천거했던 제나라 환공 시절의 현명한 신하. 개미나 늙은 말의 지혜까지 빌리는 낮은 자세가 난관을 돌파하거나 자신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지혜라는 것이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상대를 얕잡아 보는 것은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비웃음을 삽니다. 세상일이 똑똑한 한 사람의 자신감과 예단으로 해결될 만큼 그렇게 만만하지 않거든요. #4 초나라에서 지체 높은 공자에게 군을 거느리고 가서 진(陳) 나라를 치도록 했다. 장로가 그를 송별하며 말했다. "진의 배후에 있는 진(晉)은 강합니다. 신중하셔야 합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장로께선 어찌 걱정하십니까. 내가 장로를 위해 진(晉) 나라도 쳐부수지요." 그러자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좋군요. 저는 그렇다면 진(陳)의 남문 밖에 죽은 이를 기리기 위한 초막이나 하나 세워놓지요." 공자는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장로가 대답했다. "나는 월 구천이 한 일을 비웃으려 그럽니다. 그런 일이 이렇게나 쉬운 것인데, 그는 왜 혼자서 10년이나 와신상담하며 그 고생을 했다는 말입니까." 세상일은 다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와신상담할 수 있어야 나랏일을 할 수 있겠지요. 또 최선의 결과를 위해서라면 개미라도 스승으로 모실 수 있을 만큼 열린 마음과 유연한 두뇌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들입니다. 디자인 : 권혜민
바보가 아닌데 바보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은 고도의 처세술에 속합니다. 그런데 '바보 처세'로 위험을 피하거나 목숨을 건진 사람들의 사례는 많습니다. 그만큼 성공하면 먹히는 전술이라는 말입니다. #1 은나라 주왕이 밤이면 술자리를 벌이며 환락에 젖어 날짜까지 잊을 정도였다. 그가 측근에게 물었으나 모두 알지 못했다. 이에 사람을 시켜 기자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기자는 종에게 이렇게 일렀다. "천하의 주인과 그 주인을 섬기는 사람들이 모두 날짜를 잊었다면 천하가 위험해질 것이다. 온 나라 사람이 날짜를 모르는데 나 홀로 안다고 하면 내가 위험해질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도 취해서 알지 못하노라고 해명했다. #2 제나라 대부 습사미가 전성자를 만났다. 전성자는 훗날 제나라 간공을 살해하고 나라 실권을 틀어쥔 인물이다. 습사미는 전성자와 함께 대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았다. 삼면이 시원하게 트였는데, 남쪽을 보니 바로 자기 집 나무가 시야를 가렸다. 전성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광경이 마음에 걸렸던 습사미는 집으로 돌아와 사람을 시켜 그 나무를 베라고 했다. 도끼로 여러 개의 상처가 났을 때, 그는 멈추게 했다. 집안 관리인이 "왜 그리 수시로 변하느냐"고 물었다. 습사미가 이렇게 말했다. "옛말에 이런 게 있다. '연못 속 물고기를 아는 자는 상서롭지 못하다.' 저 전성자는 앞으로 큰일을 낼 것인데 내가 그의 기미를 알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면 필시 나는 위험해질 것이다. 나무를 자르지 않는다고 죄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이 말하지 않은 것을 알아차린다면 그 죄는 크다." 그래서 나무를 베지 않았다. 이러한 조심성 있는 처세의 기반이 되는 것은 '의심'입니다. 우리 문화권에선 어려서부터 '의심하는 건 나쁘다'고 가르치죠. 그러나 '합리적 의심의 기술'을 익히지 못하면 조직 생활에선 백전백패합니다. 또 유권자 혹은 시민들은 정치인들에게 속아 넘어갑니다. 나라를 위태롭게 할 수 있죠. 여기서 합리적 의심이란 한 개인을 향한 병적인 의심증이 아닙니다. 정치적 인간의 본질을 제대로 꿰뚫어 보는 실력에 기반한 의심입니다. 오히려 의심의 기술을 갖추지 못하면 위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조직의 사람들은 아무리 선량한 사람이라도 동료를 위해 자기 월급과 자리를 포기하진 않습니다. 말 한마디 보태주는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도 찾기가 어렵죠. 그러므로 낭만적으로 내 동료를 믿고, 자신의 똑똑함을 과시하는 순진함은 화를 자초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에게 친절한 타인을 믿는다? 사기를 당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진술이 있습니다. "나는 그를 믿었다"는 것이죠. 믿음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이익이나 이해관계와 관련한 문제에서 믿음은 대체로 배신당합니다. 믿지 않아야 화를 피할 수 있다는 우화들은 '한비자' 도처에 등장합니다. #3 조나라 사람 노단은 세 번이나 중산의 군주에게 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의 측근들에게 50금을 뿌렸다. 그리고 다시 중산 군주를 만나자 말을 꺼내기도 전에 군주는 그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친근하게 대했다. 노단이 그길로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중산을 떠나려 했다. 그를 따르던 시종이 "군주가 이제야 우리에게 잘해주기 시작했는데 왜 떠나려 하십니까?"하고 물었다. 노단은 이렇게 대답했다. "남의 말을 들어서 나를 잘 봐주는 것이라면 또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나에게 죄가 있다며 벌을 줄 수도 있다." 그가 아직 국경을 넘지 못했는데, 중산의 공자가 그를 나쁘게 말하며 "조나라를 위해 중산에 간첩으로 온 것"이라고 했다. 군주는 이를 근거로 그를 찾아내 벌을 주었다. #4 증종자는 도검 감정을 잘하는 사람이다. 위(衛) 나라 군주가 오나라 왕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증종자는 "오나라 왕은 검을 좋아하고 저는 칼을 감정하는 사람이니 제가 오왕에게 칼을 감정해 주겠다고 청하여 칼을 보려고 뽑을 때 군주를 위해 그를 찔러 죽이겠습니다"고 했다. 그러자 위군은 이렇게 말하며 그를 쫓아냈다. "그대가 그렇게 하려는 것은 군신 간 의리 때문이 아니라 이익 때문이다. 오나라는 강하고 부유한데 위나라는 약하고 가난하다. 그대가 만일 간다면, 나는 그대가 오왕을 위해 나에게 그 수법을 쓰지 않을까 두렵다." 한비자엔 의심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많이 인용되는 일화이지요. #5 정나라 사람 아들이 벼슬을 하려고 집을 막 떠나면서 집안 사람에게 일러 "무너진 담을 반드시 쌓아놓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좋지 않은 사람이 도둑질을 할 것이다"고 했다. 그 거리에 사는 사람도 역시 같은 말을 했다. 담을 바로 개축하지 않았더니 과연 도둑이 들었다. 그들은 아들은 현명하다고 여기고, 일러준 거리의 사람은 도둑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모르는 사람은 의심하기 쉽습니다. 자연스럽기도 하고, 가책도 없지요. 그런데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사람은 주로 주변에 있습니다. 그게 바로 사람들의 삶을 불안하게 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디자인 : 권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