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광저우 총영사, 주중문화원장, 문체부 대변인 등 역임 - 베이징 주중대사관, 주상하이 및 주홍콩 총영사관 근무 - 현재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에서 연구활동 중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가라(讀萬卷書, 行萬里路)'고 하였던가? 장자(莊子)의 큰 새(鵬)는 아홉 개의 만 리(萬里)를 날아올랐다.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가장 많이 쓴 두 자(字) 시어(詩語)는 '만 리(萬里)'였다. 만 리 길은 무한한 상상(想像)의 영역인 동시에 현실이자 생활이었다. 20여 년간 중국 땅 위에서 일하고 살면서 시간과 공간의 들어가고 나옴 중에서 마주했던 같음과 다름을 지역과 사람, 문화로 쪼개고 다듬어 '종횡만리, 성시인문(縱橫萬里 城市人文)'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나누고자 한다. 중국의 서남부, 베트남과 인접한 광시성(廣西省)에 허츠(河池)라는 지역이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구이린(桂林, 계림)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독특한 모양의 산과 구릉, 맑고 잔잔한 강과 시내 등 구이린 못지않은 풍광을 자랑한다. 이 허츠시(河池市)의 야오족(瑤族) 자치 지역인 바마현(巴馬縣)은 중국 최고 '장수의 고장(長壽村)'으로 유명하다. 1990년대 인구 센서스에서 약 23만 명의 전체 현 주민 중 80-99세 노인 인구가 1,958명, 135세의 최고령자를 포함한 100세 이상의 '장수 스타(壽星)'가 69명으로 조사되었다. 이는 100세 이상 인구가 10만 명당 30명이 넘는 수치로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것이었다고 한다. 허즈시 바마현 장수촌 장수 인구가 많은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분석이 있는데, 대체로 겨울에도 온화한 기후, 적절한 세기의 햇볕과 일조량, 맑고 깨끗한 공기와 물, 유기질이 풍부한 토양과 여기서 생산되는 곡물과 채소 및 과일, 채식 위주의 식습관 등으로 조사되었다. 장수 노인들은 쌀과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여 야채와 나물, 고구마 등을 주로 먹었고 육류는 소량 섭취하여, 저염, 저당, 저지방, 저동물 단백질, 고섬유의 '4저(低)+1고(高)' 식단을 실천하고 있었다. 일본 연구진의 현지 조사 결과, 토양 중에 망간과 아연의 함량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높았고, 비피더스균과 락토바실러스균도 다량 함유되었다고 한다. 특히, 노인들 머리카락의 아연 함량이 일반인에 비해 10배 이상 높으며, 대부분의 이곳 장수 노인들이 임종까지 뇌혈관이나 심혈관 질환 발생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외에도 음이온, 자기장, 적외선, PH 지수 등이 원인으로 주장되었는데, 과학적 차원에서는 아직 논쟁거리이기도 하다. 이 바마현 중에서도 특히 경관이 좋고 장수 인구가 몰려있는 자좐진(甲篆鎭) 웨포촌(月坡村)은 평소에도 관광객들로 북적이지만, 가을이 되면 중국 전역, 특히 북방 지역에서 지병 치료와 건강 요양을 위해 몇 달씩 이곳에 임시 거주하며 겨울을 나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로 몸살을 앓는다. 이들을 이름하여 중국어로는 '철새 거주자(候鳥人)'라고 한다. 이 마을에 등록된 상주인구 수는 8,466명인데, 매년 겨울을 지내러 오는 이들은 상주인구의 5배에 달하는 4만 명에 이른다. 단기 관광객도 매일 평균 8,000명, 1년에 2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20여 년 전부터 이 장수 마을에 대해 알려졌지만, 특히 최근 들어 건강에 대한 관심과 함께 요양 수요가 늘고, 이 지역에서 요양하며 효과를 봤다는 글과 사진이 SNS를 통해 퍼지면서, 마을에는 때아닌 요양용 주택과 호텔 건축 붐이 불고 외래 인구 대상 식당과 상점도 늘어났다. 현지 지역 발전 차원에서는 좋지만, 작은 지역에 사람이 몰리고 도시화되면 장수 마을을 이루었던 생태계가 파괴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함께 나오고 있다. 바마현과 웨포촌 풍광 허츠시는 인구 335만 명 규모의 도시로 2002년에 시(市)로 독립되었다. 과거 공산혁명 시 광시농민운동이 일어났고 덩샤오핑(鄧小平)이 전투를 이끌었던 지역이다. 지금은 전국 최대 규모의 잠사(蠶絲) 산업과 실크 생산 기지로 성장했다. 전체 시 면적의 65%가 카스트 지형으로 특이한 형태의 지질공원과 자연유산이 산재해 있고, 곳곳에 동굴, 삼림, 습지도 많다. 좡족(壯族), 먀오족(苗族), 야오족(瑤族) 등 여러 민족이 거주하고 있으며, 아열대성 기후 지역으로 연평균 기온이 16~21도이다. 장수 지역이란 특성과 아름다운 풍광으로, 올해 10월 초 국경절 연휴 기간에 시 전체 인구 수를 넘어서는 360만 명의 관광객들이 방문했다. 인근의 성도(省都)인 난닝(南寧)을 통해 베트남 등 동남아 각국과의 교류와 교역도 활발하다. 야오족 전통복장 허츠시 남쪽에 위치한 난단현(南丹縣)은 기네스북에 등재된 세계 최대 규모의 바이주(白酒) 저장 동굴로 유명하다. 이 동굴은 길이 4.5km로, 약 3억 5000만 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1년 내내 일정한 16-17도의 온도와 80-95%의 습도를 유지한다. 중국에서는 우수한 바이주는 '30%의 양조와 70%의 저장으로 결정된다(三分釀, 七分臟)'고들 하는데, 이 동굴은 이런 바이주 원액의 저장과 숙성에 매우 적합한 환경을 제공한다. 동굴 안에서 제조되는 바이주 생산량은 매년 1.5톤, 현재 저장량은 약 8톤 정도로, 시가로 따지면 400억 위안(한화 약 8조 원)에 달한다고 한다. 단촨 바이주의 동굴 저장소 이 술의 이름은 단촨(丹泉)으로, 마오타이(茅台)와 같은 장향주(醬香酒)이다. 중국 명나라 시기 저명한 문인 서하객(徐霞客)이 자신의 여행기(徐霞客遊記)에서 '광시 서쪽의 최고 경치(桂西第一奇勝)'라고 평가했던 난단(南丹) 지역의 산수 환경에서 마오타이와 유사한 제주(制酒)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주원료로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붉은 수수(紅高粱)가 쓰이고, 펑황산(鳳凰山)의 산천수(山泉水)가 사용된다. 술 이름 단촨(丹泉)은 당나라 시인 조당(曺唐)이 지은 시에서 한무제(漢武帝)가 주최한 연회에 등장한다. 술 제조법은 2000여 년이 되었다고 하고, 실제 대량 생산은 1956년 국영 제조사가 설립 운영되면서부터이다. 같은 이름의 브랜드로 '동굴 저장 10년(洞臟10)'부터 '30년(洞臟30)' 등 다양한 제품이 생산 판매되는데, 실제 마셔보면 마오타이와 유사하지만 보다 부드럽고 담백하면서도 술 향이 진하지 않은 특징을 보인다. 허츠는 자연 풍광 외에 밤과 호두, 버섯, 배, 고구마 등 특산품과 돼지, 양, 닭 등을 사용한 현지 특색 음식을 선보이며, 소수민족 특유의 예술 형식과 문화 환경으로 중국의 전국적인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있다. 사진 : 바이두, 디자인 : 이희문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가라(讀萬卷書, 行萬里路)'고 하였던가? 장자(莊子)의 큰 새(鵬)는 아홉 개의 만 리(萬里)를 날아올랐다.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가장 많이 쓴 두 자(字) 시어(詩語)는 '만 리(萬里)'였다. 만 리 길은 무한한 상상(想像)의 영역인 동시에 현실이자 생활이었다. 20여 년간 중국 땅 위에서 일하고 살면서 시간과 공간의 들어가고 나옴 중에서 마주했던 같음과 다름을 지역과 사람, 문화로 쪼개고 다듬어 '종횡만리, 성시인문(縱橫萬里 城市人文)'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나누고자 한다. 세계 전기차용 배터리 시장에서 중국 업계의 성장세가 여전히 거세다. 이런 흐름은 세계 최대 규모의 중국 업체인 CATL이 주도하고 있다. 며칠 전 발표된 관련 업계의 보고서에 따르면, CATL은 금년 1~3분기에 전년 대비 26.5% 성장하여, 전 세계 전기차용 배터리 시장의 36.7%를 차지하면서 점유율 1위를 유지했다. 2위 업체인 중국 BYD도 28% 성장하며 글로벌 점유율 16.4%를 기록했는데,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 등 우리 배터리 3사는 선전했음에도 중국 업체들에 못 미치는 합계 점유율 20.8%에 만족해야 했다. 중국 내수시장을 제외한 글로벌 시장에서의 우리 배터리 3사 점유율은 절반 가까운 46%에 달했으나,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어 전문가들은 LFP 양산, 신흥국 시장 선점 등 우리 업체들의 적극적인 시장 확대 노력이 필요하다고 제언한다. 중국 업체들의 향후 전망도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중국 국내 전기차 시장의 과도한 경쟁과 포화, 미국 트럼프 대통령 당선 및 신정부 출범에 따른 미중관계 및 산업정책 전환으로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그럼 CATL은 어떤 업체이기에 중국뿐 아니라 글로벌 자동차용 배터리 시장 1위에 올라 현재까지 확장세를 유지하고 있을까? CATL의 영어 명칭은 ‘Contemporary Amperex Technology Limited’이다. 단어 중 암페렉스(Amperex)는 전기 용어인 암페어(Ampere)와 탁월하다는 의미의 엑셀런스(excellence)의 합성어라고 한다. CATL은 주로 해외에서 사용하는 명칭으로, 중국 내에서는 CATL이라는 영어명 대신 중국명인 ‘닝더 스다이(寧德時代)’라고 해야 알아듣는다. 우리식 한자어 발음으로 읽으면 ‘영덕 시대’로, 중국어 전체 명칭은 ‘닝더 스다이 신에너지 과학기술 유한공사(寧德時代新能源科技有限公司)’이다. 앞의 ‘닝더(寧德)’는 다름 아닌 이 회사가 설립된 지역의 명칭으로, 중국 남부의 타이완과 마주한 푸젠성의 동북부 지역에 위치한 인구 3백만 명 규모의 도시를 가리킨다. ‘닝더 스다이(CATL)’는 닝더 출신 이학박사이자 사업가인 쩡위췬(曾毓群)에 의해 2011년 설립되었다. 닝더시와 CATL 쩡위친은 1968년 닝더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부모가 아들이 커서 대학에 입학하기만을 염원했다고 한다. 쩡위친은 학업에 정진하여 지역 내에서 가장 좋은 ‘닝더 제1 중고등학교(寧德一中)’에 입학하였고, 전교 1등으로 상하이 교통대학(上海交通大學)의 선박공정학과 입학에 성공한다. 그 후 화난이공대학(華南理工大學)에서 응용물리학 석사, 중국과학원(中國科學院)에서 배터리 연구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석박사 학위에 앞서 대학 졸업 직후, 쩡위췬은 고향 푸젠의 한 국영기업에 배치받았으나 오래 있지 못했고, 1989년 광둥 동관(東莞)에 있는 일본 TDK 계열 전기회사에 입사해 10년을 근무한 후 리튬 배터리 회사인 ATL(Amperex Technology, 新能源科技)을 홍콩에 공동 설립하여 성공을 거둔다. 이어 2011년에는 ATL의 성과를 발판으로 본인의 고향인 푸젠 닝더에 CATL을 창립하게 된다. 창립 직후 독일 BMW와 협업하게 되고, 이를 기반으로 중국 위통(宇通), 창안(長安) 등 자동차 제조사들로부터 러브콜을 받는다. 2017년 쩡위췬은 회장(董事長)직을 맡게 되었고, 삼원계 배터리 기술 노선으로 방향을 잡은 CATL은 LFP계통의 경쟁사 BYD와 차별화하면서 중국은 물론 세계 최대 자동차용 배터리 업체로 도약하게 된다. 2022년에는 미국 포드(Ford), 테슬라(Tesla), 독일 벤츠(Benz) 등 정상급 자동차 제조사에 배터리를 공급하면서, 업계 영향력을 확장했다. 쩡위췬 회장은 평소 조용한 경영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얼마 전인 11월 7일 닝더에서 개최된 ‘세계 배터리 포럼(世界蓄能大會)’에 참석하여 “배터리 업계가 혼란스러워서는 안된다. 늦어서도 안된다. 빠른 속도로 빠르게 기술 발전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쩡 회장은 현재 중국 상공연합회(工商聯) 부회장(副主席) 이자 상하이 교통대학 미래기술대학(溥淵未來技術學院) 명예원장 직도 겸임하고 있으며, 2024년 1,676억 위안(한화 약 32조 원)의 재산으로 중국 일곱 번째 갑부 순위에 올라 있기도 하다. CATL이 있는 닝더 이야기를 더 해보자면, 닝더시는 푸젠 동북부 지역에 위치하여 산지와 구릉이 유난히 많다. 이곳은 옛날 민월족(閩越族)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근현대에는 공산당 혁명의 근거지 중 하나이기도 했으며, 1999년이 되어서야 시(市)로 승격되었다. 역사 이래로 위치가 편벽하고, 지세가 험난하니 거주민들의 생활이 곤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닝더는 중국 정부의 ‘빈곤 탈피(脫貧) 정책’의 주 대상이었다. ‘중국 빈곤 지원 대상 1호 지역(中國扶貧第一村)’이라고 불리는 츠시촌(赤溪村)이 닝더에 있었으며, 1984년 이 지역 1인당 연간 소득은 불과 2백 위안(당시 환율로 한화 약 2만 원) 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의 닝더시는 CATL 등 제조업체 외에 차(茶) 생산과 어업 등 산업 발전에 힘입어 푸젠성 내에서 경제성장이 가장 빠른 지역이 되었다. 닝더 풍광 닝더(寧德)는 시진핑(習近平) 주석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시 주석은 푸젠 샤먼(廈門)시 부시장을 거쳐 1988년 6월 닝더의 당서기로 부임하여, 이후 푸저우(福州)시 당서기로 영전하기까지 약 2년 가까이를 닝더에서 근무했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인근 샤먼시나 푸저우시에 비해 닝더는 당시 시(市)도 아니었고 가장 큰 임무는 주민들의 빈곤 상황 극복과 산업기반의 조성이었다. 이 기간의 기층 근무 경험과 성과는 그가 약 10년 후 닝더, 샤먼, 푸저우를 총괄하는 푸젠성 성장으로 도약하는 기반이 되었다. 중앙당교(中央黨校)에서는 이를 <닝더에서의 시진핑(習近平在寧德)>이라는 단행본으로 별도 발간하며 당원 교육 등에 활용하고 있기도 하다. 닝더는 백차(白茶, 바이차)의 산지로도 유명하다. 백차 제조에 사용되는 어린싹 잎 아래 면에 붙어 있는 솜털이 건조한 후에도 떨어지지 않고 하얗게 되는데 이를 백호(白毫, 바이하오)라 하며, 여기서 백차의 명칭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백차는 약하게 발효를 거친 미발효차(微醱酵茶)로, 뜨거운 불에 덖거나 세게 문지르는 가공 과정 없이 그대로 건조하거나 약한 불을 거친다. 백차를 뜨거운 물에 우려(泡) 찻잔에 따르면 황색과 녹색을 조금 띠는 아주 옅은 빛깔이 도는데 녹차나 홍차 등 다른 차에 비해 거의 색이 없이 투명하다. 성질이 차가워 한꺼번에 많이 마시지 못하며 나누어 오래 장복하게 되는데, 최근 들어 중국에서 차 마니아 층을 중심으로 백차의 수요와 인기가 높다. 닝더시 푸딩(福鼎)에서 생산되는 백차는 당나라 때 문인인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에도 등장할 정도로 백차 중에서도 오랜 역사와 우수한 품질을 자랑한다. 백차와 백차종류 사진 : 바이두, 디자인 : 이희문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가라(讀萬卷書, 行萬里路)'고 하였던가? 장자(莊子)의 큰 새(鵬)는 아홉 개의 만 리(萬里)를 날아올랐다.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가장 많이 쓴 두 자(字) 시어(詩語)는 '만 리(萬里)'였다. 만 리 길은 무한한 상상(想像)의 영역인 동시에 현실이자 생활이었다. 20여 년간 중국 땅 위에서 일하고 살면서 시간과 공간의 들어가고 나옴 중에서 마주했던 같음과 다름을 지역과 사람, 문화로 쪼개고 다듬어 '종횡만리, 성시인문(縱橫萬里 城市人文)'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나누고자 한다. 중국 남부에 있는 큰 고개인 다위링(大庾嶺) 아래쪽에는 매화꽃에서 이름이 유래된 지역이 많다. 대표적인 곳이 도시 이름에 아예 매화를 넣은 광둥성 메이저우(梅州)이다. 메이저우시는 인구 500만의 도시이지만, 이보다 더 많은 약 700만 명의 이 지역 출신 객가(客家) 화교들이 해외에 거주하고 있어 '객가인의 수도(客都)'라고 불리는 특이한 도시이기도 하다. 메이저우에서 북서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다위링은 중국 링난(嶺南) 지역을 구분하는 다섯 개 산맥 중의 하나로, 당나라 시인 장구령(張九齡)은 이곳의 고갯길 양편에 매화나무를 심고 이를 매령(梅嶺)이라고 하였다. 이후 매화꽃이 만발하자 백거이(白居易)는 '매령에 매화가 일만 그루 나무에 피었다(梅嶺花排一萬株)'고 읊었고, 다위링의 '고개 남쪽에는 매화가 피었다 지는데, 북쪽에는 이제야 꽃이 피기 시작한다(南枝旣落,北枝始開)'는 말도 생겨났다. 이 길은 중국 중원(中原) 지역에서 남쪽(嶺南)을 잇는 교통의 요충이기도 하였는데, 송나라 때는 이 고개에 관문을 설치하고 매관(梅關)이라 하였다. 이 매령과 매관은 남쪽 지역으로 유배 가는 관리, 북으로 과거 보러 가는 유생들이 피고 지는 매화꽃 사이로 통과하는 사연 많은 관문이 되었다. 매화꽃 핀 메이저우시 전경 매화의 원산지는 중국 쓰촨(四川), 후베이(湖北), 광둥(廣東) 일대로 알려져 있다. 매화(梅花)만큼 동아시아에서 역사적으로 문화적 함의를 갖는 꽃도 드물다. 추운 겨울 가장 먼저 꽃을 피워 꽃 중의 형(花兄)이라거나 우두머리(花魁)라고 불렸고, 일찍 피는 매화는 동매(冬梅)나 한매(寒梅), 또는 설중매(雪中梅)라 불렀다. 추위와 어려움 속에서 견디는 이미지로 군자와 선비를 상징하여 세한삼우(歲寒三友) 이자 사군자(四君子) 중 하나였으며, 신선과 은자를 상징하여 매선(梅仙), 매은(梅隱)이라는 말도 생겼다. 북송의 은일(隱逸) 시인 임포(林逋)는 매화(梅)를 아내(妻)로, 학(鶴)을 자식(子)으로 삼아 은둔하면서 인생을 유유자적하여 '매처학자(梅妻鶴子)'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소동파(蘇東坡)는 광둥에 귀양 중 매화꽃으로 유명한 뤄푸산(羅浮山)의 매화를 보고 "뤄푸산 아래 마을에 매화꽃이 피었네, 눈을 뼈로 얼음을 혼으로 하였구나(羅浮山下梅花村,玉雪爲骨氷爲魂)"라고 묘사했다. 메이저우 매화 매화꽃이 많은 이 지역이 객가(客家)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 된 데는 연유가 있다. 중국 역사는 어찌 보면 전쟁과 난리로 점철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전쟁사에 따르면 역사에 기록된 것만 약 7,800차례에 달하는 전란을 겪었으며, 기간으로 따지만 5000년에 가까운 기간 중 불과 300년간만 세상이 평안하였다고 한다. 중국 역사에서 유난히 전란으로 어려움을 겪고 피난민으로 떠돌며 고생한 이들이 있는데 바로 객가(客家) 사람들이다. 중국어 표준어로는 '커자(kejia)'라고 하고, 객가어로는 '학카(Hakka)'라고 발음한다. 객가는 혈통에 의해 형성된 민족(民族)의 개념이 아니라 제도에 의한 민계(民系)의 개념이다. 진(晉)나라 때, 호적 제도에서 자기 땅을 갖고 경작하는 지주 가구가 아닌 땅이 없는 소작농들을 객호(客戶)라고 분류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즉, 땅 주인이 주호(主戶)라면 이에 딸린 가구는 객호가 되는 것이다. 이 객호의 대상이 점차 외지인들과 소규모 상인 등으로까지 확장되었고, 전란이 나거나 하면 이들이 가장 먼저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이동하면서 집단화하고 같은 언어와 문화까지 공유하게 된 것이다. 객가 음식 문화 객가어(客家語)는 고대 중국어의 화석(化石)이라고 불리는데, '나'나 '너'와 같은 단어는 현대 중국어의 워(我), 니(你)가 아닌 오(吾), 이(爾)와 같은 고어의 음가(古音)를 사용한다. 이들이 처음 남천(南遷)한 것은 약 1,700년 전으로, 북녘의 흉노와 선비족들의 침략으로 인해 중원(中原) 지역이 오랑캐 세상이 되자 한수(漢水)와 장강(長江)을 따라 후베이(湖北), 안훼이(安徽), 장쑤(江蘇) 등으로 남하하여 정착하였고, 먼 지역으로는 메이저우(梅州)의 땅까지 이동하여 자리를 잡게 된다. 이 시기 장장 170년에 걸쳐 이동한 인구수는 1~200만 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 당나라 안사(安史)의 난 시기, 북송에서 남송으로의 천도 시기, 만주족의 중원 입성 시기 등에 오랜 시간에 걸쳐 각각 중부 지역에서 고개를 넘어 메이저우를 중심으로 한 광둥성과 장시성, 푸젠성 등 일대에 정착한다. 객가인들은 전통을 중시하여 언어도 고대 언어를 사용하는가 하면 충효나 예절과 같은 유가 사상과 집안 교육, 가훈(家訓) 등을 중요시한다. 지금도 메이저우 인근에는 바깥세상과 떨어져 객가 가족들끼리 개간지를 일구며 살았던 웨이우(圍屋)나 투러우(土樓)라 불리는 특유의 주택과 주거 환경을 볼 수 있다. 조상을 기리기 위한 사당(祠堂)이나 궁묘(宮廟)도 지었다. 객가인들의 건축 양식 어려운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전통과 교육, 수신제가(修身齊家) 사상의 훈도를 입어서인지 역사적으로 유난히 걸출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洪秀全), 신중국 혁명가 주더(朱德), 쑨원(孫文)과 그의 부인 쑹칭링(宋慶齡), 대문호 궈모뤄(郭沫若), 공산당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 싱가포르 총리 리콴유(李光耀), 타이완 총통 마잉주(馬英九)와 차이잉원(蔡英文), 타이완 영화감독 허우샤오시엔(侯孝賢), 홍콩 영화배우 장국영(張國榮), 여명(黎明), 종초홍(鐘楚紅) 등도 객가 출신이다. 광둥, 홍콩, 타이완,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 중국과 동남아 및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객가 출신 인구는 약 8,000만 명에서 1억 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메이저우에서 태어나고 자란 객가인으로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썼던 황준헌(黃遵憲)을 들 수 있다. 1848년 출생한 황준헌은 과거를 거쳐 29세 때 청나라의 일본 주재 대사관 참사관으로 부임하였으며, 이어 변법유신(變法維新) 운동에 참여하고 주샌프란시스코 총영사, 주영국대사관 참사관, 주싱가포르 총영사 등을 역임한다. 그가 조선책략을 써서 일본을 방문한 김홍집에게 건넨 것은 32세 때인 1880년의 일이다. 조선책략은 6천 자 분량의 소책자로 "지구상에 아주 큰 나라가 있으니 러시아라고 한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이어 '러시아가 튀르키예 등 유럽의 땅을 차지하려 했으나 번번이 영국과 프랑스 등이 협력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면서, '러시아가 서양을 공략할 수 없게 되자 아시아로 눈을 돌려 일본의 사할린과 중국의 흑룡강 동쪽을 얻었다. 조선의 땅은 실로 아시아의 요충이다. 러시아를 막기 위해 조선은 중국과 가까이(親中國)하고, 일본과 함께(結日本)하며, 미국과 손잡아서(聯美國) 자강(自强)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월이 지났어도 지역 정세와 관련한 그의 통찰은 눈여겨볼 부분이 있다. 매화꽃이 많이 피는 메이저우에 복원된 황준헌의 고택에는 조선책략이 전시되어 아직도 관람객들에게 읽히고 있다. 황준헌 기념관 메이저우는 장수(長壽)의 고장이기도 하다. 100세 이상 노인 수가 858명에 달한다고 하는데, 이는 인구 10만 명당 15명이나 되는 수치이다. 시 정부는 100세 이상 노인들에게 매년 1,200위안(한화 약 20만 원)의 장수 축하금을 수여한다. 메이저우에서는 매년 중국이나 전 세계 객가인들이 참여하는 행사가 자주 개최되며, 2023년에는 광둥성 최초로 '동아시아 문화도시(東亞文化之都)'로 선정되어 우리나라 및 일본과 다채로운 문화 교류 행사를 개최키도 했다. 메이저우 특산 유자(柚子) 메이저우 동아시아 문화도시 포스터 사진 : 바이두, 디자인 : 이희문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가라(讀萬卷書, 行萬里路)'고 하였던가? 장자(莊子)의 큰 새(鵬)는 아홉 개의 만 리(萬里)를 날아올랐다.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가장 많이 쓴 두 자(字) 시어(詩語)는 '만 리(萬里)'였다. 만 리 길은 무한한 상상(想像)의 영역인 동시에 현실이자 생활이었다. 20여 년간 중국 땅 위에서 일하고 살면서 시간과 공간의 들어가고 나옴 중에서 마주했던 같음과 다름을 지역과 사람, 문화로 쪼개고 다듬어 '종횡만리, 성시인문(縱橫萬里 城市人文)'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나누고자 한다. 지난 10월 초 중국 구이저우성(貴州省)에 있는 인구 1천 명의 한 작은 마을이 농구 열기로 전 중국 대륙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름하여 '동네판 엔비에이(NBA)', 중국어로는 '춘비에이(村BA)'라고 부른다. 중국에서 인기가 높은 미국 프로농구 리그 NBA와 중국 프로 리그 CBA(中國職業籃球聯賽)에서 BA를 따오고 그 앞에 마을 촌(村-춘) 자를 붙인 이름이다. 중국에서는 축구(蹴球)를 족구(足球-주치우)로, 농구(籠球)를 '남구(籃球-란치우)'라고 부른다. 남구는 말 그대로 바구니인 바스(basket-籃)에 볼(ball-球) 넣는 게임이다. 관중으로 가득 찬 타이판촌의 춘비에이 야외 농구 경기장 구이저우성 타이장(台江)현 타이판(台盤)촌 야외 특설 농구 경기장에서 10월 4일 저녁 개최된 2024년 전국 '춘비에이(村BA)' 최종 결승전에서 산둥 대표팀(山東匯東)이 간쑤 대표팀(甘肅臨夏)을 101대 71로 물리치고 대망의 우승을 차지했다. 하이난(海南), 허베이(河北), 지린(吉林) 등 동서남북 각지 19개 성의 20개 팀들이 한 달여에 걸친 지역별 예선전을 치르고 타이판에서의 결선에서 맞붙은 결과이다. 열띤 춘비에이 결선 경기 장면 경기가 열린 타이판촌(台盤村)은 272가구, 인구 1,186명의 마을로 대다수인 92%의 주민이 먀오(苗)족이며, 1936년 이래 90년 가까이 매년 동네 농구대회를 개최해 온 전통이 있다. 동네 농구대회는 먀오족 등 소수민족의 전통 명절인 '츠신제(吃新節)'에 개최되는데, 이 명절날에는 중국의 전통 명절 중추절(仲秋節)과 유사하게 가을 추수 시기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새로 수확한 음식을 먹고 춤과 노래, 단체 체육행사를 하면서 즐기게 되며, 음력 7월 7일이자 먀오족의 민족 달력으로는 6월 6일(六月六)에 개최된다고 한다. 동네 축구대회 '춘차오(村超)'로 유명해진 구이저우 롱장(榕江)현과는 약 100킬로미터 거리에 있다. 구이저우성 타이장현 타이판촌 전경 구이저우의 이 작은 마을 농구 경기가 유명해진 것은 수십 년 넘게 매년 한 번씩 개최되어 오던 동네판 시합이 2022년 인터넷으로 중계되면서다. 10대부터 40대까지의 시골 동네 총각과 옆집 아저씨들로 구성된 선수들의 플레이가 예상을 뛰어넘어 진솔하면서도 박진감 있게 진행되자 이것이 큰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유명세를 타고 다음 해인 2023년 3월에는 경기 규모가 전체 성(省) 규모로 확대되어 '제1회 구이저우성 아름다운 향촌 농구 리그전(首屆貴州省美麗鄕村籃球聯賽)'이라는 명칭으로 타이장(台江)에서 개최된다. 곧이어 전국적 관심으로 중앙정부인 농업농촌부(農業農村部), 국가체육총국(國家體育總局), 중국농구협회(中國籃球協會) 등이 나서 전국 규모의 동네 농구대회 '춘비에이'를 탄생시키고, 전국 8개 지역 16개 팀, 500명의 선수들이 참여하는 예선전이 치러졌다. 결선이 개최되자 1천 명 인구의 시골 지역에 2만 명의 관람객들이 몰려들었다. 이렇게 되자 모바일 숏폼과 라이브 전문 플랫폼인 콰이쇼우(快手)가 발 빠르게 나서 2023년부터 구이저우 안순(貴州安順), 닝샤 중웨이(寧夏中衛), 광둥 둥관(廣東東莞) 등 전국 곳곳의 동네 농구를 찾아 공동 주최하고 중계하게 되었다. 게임에 등장하는 지역별 선수들은 시골의 농민이나 학생들이고, 장소는 화려한 조명을 받는 전문 실내 농구 코트가 아닌 동네의 흙바닥이나 콘크리트 코트들이다. 인기에 힘입어 이 플랫폼에서만 라이브 중계 동시 접속자 800만 명, 누적 방문자 9억 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중국 농구 팬들뿐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이미 동네 농구 '춘비에이(村BA)' 열기가 정식 전국 농구리그 '씨비에이(CBA)'의 인기를 능가했다는 것이다. 비결은 역시 순수성과 리얼함에 있다. 프로선수보다 기술이나 체력은 떨어지지만, 경기에 임하는 동네 아마추어 선수들의 진정성이 보는 이들을 끌어들인다. 결선 경기의 입상자들에게는 거액의 상금이 아닌 구이저우 타이판 동네에서 잡은 민물고기나 오리, 쌀, 소수민족의 은관(銀冠) 등이 상품으로 수여된다. 경기 중간 휴식 시간에는 화려한 치어리더 쇼가 아닌 전통 복장의 먀오족 공연단이 나와 관중들과 함께 춤을 추며 행진한다. 경기장 입장료는 없으나 좋은 자리를 위해 몇 시간 전 입장은 필수이고, 인산인해를 이룬 경기장 가장자리 위치에서 시합을 보기 위해서는 개인용 사다리 지참이 요구된다고 한다. 조용한 시골 동네가 관광객으로 북적거리면서 식당, 숙박업은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 다소 갑작스러운 인기에는 정부 관련 기관의 간접적 지원이나 인터넷 매체, 이커머스 업체들의 참여도 영향이 있다고 하겠다. 먀오족 응원 공연 최근 들어서는 구이저우 롱장(榕江)의 동네 축구대회 '춘차오(村超)'와 타이장(台江)의 농구대회 '춘비에이(村BA)' 이어 동네, 시골, 향촌의 의미를 담은 '춘(村-촌)'을 접두어로 한 브랜드의 배구대회 '춘파이(村排 / 하이난 원창)', 장기대회 '춘자(村甲 / 후난 상잉)', 요리대회 '춘추(村廚 / 후난 바오징)' 등으로 이어지며 '춘'자 형제 시리즈의 영역과 장소가 확장되고 있다. 그간 별 관심을 받지 못하던 지방의 작은 이벤트들이 대중화된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해 전국적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이다. 현지 아마추어 스포츠 경기의 인기와 함께 지역 농산물이나 특산품을 라이브 커머스로 판매하여, 문화와 관광의 결합이자 지역 경제 발전에도 도움이 되고 있으나 동시에 바가지요금이나 오버 투어리즘 등의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며칠 전인 10월 26일 자 환구시보(環球時報)는 논평을 싣고 "이번 달 초 국경일 연휴 기간 중 작년부터 동네 축구 춘차오로 유명세를 탄 구이저우 롱장현(인구 30만 명)에 전국의 50만 명 관광객이 몰렸다"면서, "각 지역이 춘(村) 자를 앞에 달고 지방별 특성을 살려 브랜드화하고 경제 사회적 효익을 창출하려면, 개별적으로 임의로 연출하는 것이 아닌 제대로 준비된 홍보와 마케팅 전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춘비에이 기념품 홍보 포스터 사진: 바이두, 디자인: 이희문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가라(讀萬卷書, 行萬里路)'고 하였던가? 장자(莊子)의 큰 새(鵬)는 아홉 개의 만 리(萬里)를 날아올랐다.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가장 많이 쓴 두 자(字) 시어(詩語)는 '만 리(萬里)'였다. 만 리 길은 무한한 상상(想像)의 영역인 동시에 현실이자 생활이었다. 20여 년간 중국 땅 위에서 일하고 살면서 시간과 공간의 들어가고 나옴 중에서 마주했던 같음과 다름을 지역과 사람, 문화로 쪼개고 다듬어 '종횡만리, 성시인문(縱橫萬里 城市人文)'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나누고자 한다. 중화권 최고의 부자를 꼽는다고 하면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람은 리카싱(Li Ka-shing, 李嘉誠)일 것이다. 올해의 '포브스 홍콩 부자 리스트(2024 Forbes Hong Kong's 50 Richest)'에서도 리카싱은 362억 달러의 자산을 기록하며 어김없이 1위를 차지했다. 2018년에 회장직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나서 지금은 '청쿵그룹(長江集團, Cheung Kong Holdings)'의 고문(Senior Advisor)으로 활동하고 있는 리카싱은 1999년 처음 홍콩 최고의 부자로 등극한 이후 20년 넘게 거의 매년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으며, 전 세계 부자 순위로는 38위에 해당한다. 리카싱의 청쿵그룹 빌딩 올해 96세를 맞아 아직도 건강함을 유지하며 활동하고 있는 그는 1928년 광둥성 차오저우(潮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소학교 교장 선생님이었지만 잇단 전란과 가난으로 11살 때 가족들과 함께 고향을 떠나 홍콩으로 이주하게 된다. 홍콩에 온 지 2년 만에 아버지는 시계 공장에서 일하다 사망하게 되고 장남인 그에게 두 동생과 집안 살림까지 맡겨진다. 공장을 전전하다 플라스틱 공장에서 생산과 판매 수완을 익혀 21세에 6,500달러로 '청쿵(長江) 플라스틱' 공장을 설립하고, 이어 부동산, 전기, 항만, 석유 등 여러 영역으로 사업을 확대하며 큰 성공을 거둔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본토에도 팍슨(Parkson, 百家) 백화점, 왓슨스(Watsons, 屈臣氏) 편의점, 왕푸징 오리엔탈 플라자(王府井東方廣場) 콤플렉스 등 유통과 부동산을 비롯한 여러 프로젝트에 선구적으로 진출하였으며, 홍콩 갑부 반열에 오른 이후에는 캐나다의 석유, 영국의 항만과 천연가스, 호주의 에너지 등 세계 유망 기업들을 대상으로 투자를 확장했다. 2007년 아직 적자 상태였던 페이스북(Facebook)에 투자를 결정할 때는 5분도 채 안 걸렸다는 일화도 있다. 아시아의 슈퍼맨(亞洲超人)으로 불리는 그는 자선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리카싱기금회(Li Ka-shing Foundation)'를 통한 기부액이 38억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중국 거대 IT 기업 텐센트(Tencent, 騰訊)의 회장으로 전 세계 부자 리스트 57위에 오른 마화텅(馬化騰)도 같은 차오산(潮汕) 출신이다. 리카싱, 마화텅 등 유난히 많은 유력 기업 경영인들을 배출한 차오산은 홍콩의 동편, 광둥성의 남동쪽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푸젠(福建)성과 접해 있다. 약 8000년 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였다 하며, 역사 이후에는 백월(百越)의 지역이었다. 해상 실크로드의 관문이었으며, 청나라 때 통상항구(通商口岸)로 지정되었다. 근현대를 거치며 인문 지리, 역사 문화 환경을 공유하는 차오산(潮汕) 지역으로 형성되었다. 1981년에는 경제특구(經濟特區)가 설치되었고, 1991년 현재와 같이 3개 도시인 차오저우(潮州), 산터우(汕頭), 제양(揭陽)으로 분리된다. 작년 말 통계로 차오저우시 275만 명, 산터우시 555만 명, 제양시 565만 명으로, 차오산 지역 상주인구의 합은 약 1,400만 명이다. 광둥 등 중국 내 다른 지역 거주자도 1,000만 명, 고향을 떠나 해외에 거주하는 화교 수는 약 1,500만 이상으로 추정된다. 태국에만 50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며 동남아를 중심으로 전 세계에 진출해 있다. 홍콩은 5명 중 한 명이 차오산 출신이다. 태국 최대 재벌인 CP그룹의 회장 타닌 찌야와논(Dhanin Chearavanont; 謝國民)를 비롯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지의 동남아 화교 재벌과 정치인 다수가 이곳 출신이거나 부모가 이곳 출신이다. 이런 성공의 원인은 무엇일까? 차오저우 한강의 광제교 산터우 시내 풍광 차오산 출신들은 일찍이 가난한 어촌마을 환경을 떠나 홍콩과 동남아 등지에 정착하여 동양의 유태인으로 불리며 성실성과 근면성을 밑천으로 비즈니스에 성공한 경우가 많다. 차오산에는 민남어(閔南語)계의 차오산어(潮汕話)라는 고유의 방언이 있어, 이 지역 출신들 간에는 표준 중국어가 아닌 이 언어로 소통한다. 낯선 땅에서 동일한 문화와 풍습을 공유하면서 같은 언어로 소통하고 서로 긴밀히 도우며 발전하는 것이다. 중국의 웬만한 지역이나 동남아 각 곳에는 차오상회(潮商會)라고 불리는 일종의 향우회이자 비즈니스 모임을 결성해 운영한다. 과거 차오산 사람들(潮汕人, Teochew People)은 객가인(客家人, Hokkien People)들과 함께 오랜 세월에 걸쳐 전란과 곤궁을 피해 중원(中原)지역으로부터 이동해 온 사람들이다. 고유의 언어와 풍습을 바탕으로 독특한 음악극(潮劇, Teochew Opera), 무용(英歌, Yingge Dance), 나무 조각(木彫, Wood Carving) 등 다양한 문화예술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홍콩의 가수이자 배우인 저우화젠(周華健), 양첸화(楊千嬅), 정슈원(鄭秀文), 식신 추아람(蔡瀾) 등도 이곳에 원적을 두고 있다. 차오산 건축장식과 조극(潮剧) 문화적 관점에서 보면 한유(韓愈)만큼 차오산(潮汕) 지역에 큰 영향을 준 이도 없다. 한유는 당나라 때 관리이자 문필가로, 원래 허난(河南) 지역 출신이다. 한문공(韓文公), 한창려(韓昌黎)로 불리기도 하며, 류종원(柳宗元)과 같이 고문운동(古文運動)에 나서 함께 한류(韓柳)로 불리기도 한다. 한유는 이부시랑(吏部侍郎)으로 재직하던 시기, 당 현종(唐玄宗)이 석가모니 진신 유골을 직접 영접하려는 계획에 반대하여 <간영불골표(諫迎佛骨表)>라는 글을 상주하였고, 황제의 분노를 사서 폄직(貶職)되어 머나먼 차오저우(潮州) 땅의 자사(刺史)로 가게 된다. 험한 귀양길에 딸을 잃고 한유는 "아침에 조정에 나아가 글 하나 상주했더니, 저녁에 폄직되어 차오저우로 향하는데 길이 팔천 리나 되는구나(一封朝奏九重天,夕貶潮州路八千)"라고 한탄한다. 속죄하는 글을 올려 나은 환경의 위안저우(袁州) 자사로 옮길 때까지 7개월여 동안 한유는 현지에 유가 사상과 학문을 전파하고 교육하였으며, 노비 석방, 농사 개선 등 백성들을 위한 업적을 이룬다. 특히, 악어가 가축을 잡아먹어 폐해가 많은 지역에 악어문(鰐魚文)을 발표하고 악어 퇴치에 나서기도 했다. 그 결과 차오저우 사람들은 "남쪽으로 팔 천리 거리 귀양길이 헛되지 않았네, 강과 산 모두 한 씨 성을 받게 되었으니(不虛南謫八千里,嬴得江山都姓韓)"라고 후일 칭송했다. 실제로 차오산 지역 사람들은 한유를 신(神)의 수준으로 존경했으며, 지역 내 큰 강과 산의 이름에 한유(韓愈)의 성(姓)인 한(韓) 자를 붙여 한강(韓江), 한산(韓山) 등으로 부르고 사당(韓文公祠)을 지어 기리고 있다. 1000년이 지난 지금도 차오산 지역을 가보면 한(韓)으로 시작하는 지명이나 장소를 많이 발견할 수 있는 연유이다. 한유(韩愈)와 한문공사(韩文公祠) 음식 문화로도 유명한데 차오저우 음식(潮州菜)은 광둥요리(粤菜) 중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다른 지역과 달리 아무런 소스를 첨가하지 않고 찌는 생선 요리나 신선한 콩으로 만든 '푸닝(普寧) 두부', 우리 떡과 유사한 미궈(米粿) 등은 새로운 맛의 경지를 보여준다. 차오산 미식과 쿵푸차(功夫茶) 쿵푸차(工夫茶) 문화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당송 시기의 다례(茶禮)가 전승되어 현재도 그 특징을 유지하고 있다. 화로에 숯으로 끓인 차를 주로 이싱(宜興)에서 만들어진 소주잔보다 작은 크기의 도자 찻잔을 사용하여 세 명이 한자의 품(品) 자 형태로 모여 앉아 음미하며 즐긴다. 찻잎으로는 펑황단총(鳳凰單叢) 등 반(半)발효 우롱차(烏龍茶)가 쓰이며, 다른 지역 차보다 훨씬 진한 상태로 주로 식전이나 식후에 한두 잔 마신다. 커피로 치면 에스프레소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실제로 잘 우러난 부드러운 갈색의 단총차를 뜨겁게 한잔 마시면 재스민꽃(茉莉花)이나 벌꿀 같은 강한 풍미와 함께 기분이 전환되는 느낌을 받는다. 사진 : 바이두, 디자인 : 이희문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가라(讀萬卷書, 行萬里路)'고 하였던가? 장자(莊子)의 큰 새(鵬)는 아홉 개의 만 리(萬里)를 날아올랐다.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가장 많이 쓴 두 자(字) 시어(詩語)는 '만 리(萬里)'였다. 만 리 길은 무한한 상상(想像)의 영역인 동시에 현실이자 생활이었다. 20여 년간 중국 땅 위에서 일하고 살면서 시간과 공간의 들어가고 나옴 중에서 마주했던 같음과 다름을 지역과 사람, 문화로 쪼개고 다듬어 '종횡만리, 성시인문(縱橫萬里 城市人文)'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나누고자 한다. 중국의 한 게임사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출시한 '검은 신화, 우콩(Black Myth, Wu Kong; 黑神話悟空)'에 대한 반응이 심상치 않다. 이 게임은 중국의 4대 기서인 서유기(西遊記)의 모티브를 기반으로 하여 텐센트(騰訊) 출신의 펑지(馮驥)와 양치(楊奇)가 설립한 '게임 사이언스(Game Science; 遊戲科學)'사가 개발하여 지난 8월 말 출시하였다. 게임 '검은 신화, 우콩(Black Myth, Wu Kong; 黑神話悟空)' 게임에서는 손오공(孫悟空)의 후손 원숭이인 게이머 ‘천명을 받은 자(天命人)’가 서유기의 내용을 전편(前篇) 스토리로 하여, 죽임을 당한 조상인 손오공의 부활을 위해 요괴들과 맞서면서 서역으로 향하는 모험을 하게 된다. 이 게임은 중국 최초의 3A급 3인칭 액션 롤플레잉 게임(ARPG)으로, 출시 3일 만에 1천만 세트가 판매되며 중국 게임 역사의 새로운 기록을 수립했다. 한 달여 만에 스팀(Steam) 플랫폼에서만 2천만 세트 판매량과 10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으며, 그간 콘솔 게임 개발에서는 불모지와 같던 중국의 게임이 유저(User) 평가에서 96%의 긍정을, 영어 리뷰에서도 93%의 긍정을 받았다고 한다. 사전 공개된 트레일러나 플레이되는 게임을 보면 웬만한 할리우드 영화의 CG보다 낫다는 평가이다. 게임에 등장하는 장면들은 언리얼 엔진(Unreal Engine) 5, 엔비디아(Nvidia) RTX 등 첨단 기술을 채용하고 서유기 관련 중국 각지의 사찰 및 건축물, 경관의 실사 스캔 데이터를 다량 활용하여 게임과 그래픽 효과를 높였다. 실제 항저우의 영은사(靈隱寺), 다퉁의 운강석굴(雲崗石窟) 등 30여 곳이 등장하며, 그중 다수가 몰려있는 산시성(山西省)에는 최근 들어 때아닌 게임 현장 순례 관광객들이 몰려 일부 시설은 관람을 제한키도 했다는 현지발 뉴스이다. 게임과 서유기에는 기이한 배경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재미있는 장소 중 하나로 화염산(火焰山)을 꼽을 수 있다. 서유기 내용 중에서 손오공과 삼장법사 일행이 늦가을 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도중에 서리가 내리는 시기임에도 이상하게 갈수록 더워진다고 느끼게 되었는데 이는 화염산에 가까이 왔기 때문이었다. 사오정은 발에 인두질을 하는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었고, 손오공이 구해온 가짜 파초선(芭蕉扇) 부채로 화염산 불을 끄려 했으나 불길이 더 활활 타올라 세 번째 부채질을 했을 때는 화염이 1만 척 높이로 솟아올랐다고 적고 있다. 화염산 전경 우콩 게임 속의 화염산과 철선공주 철선공주(鐵扇公主)와 우마왕(牛魔王) 등이 등장하는 이 이야기의 장소적 배경이 된 화염산은 중국 서쪽 신장(新疆)의 투루판(吐魯番) 분지(盆地)에 자리하고 있다. 화염산은 주봉의 높이가 해발 831m, 산의 폭이 10km, 길이가 100km에 달한다. 톈산산맥(天山山脈)의 지맥으로 약 5000만 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알려진다. 실제로 여름의 최고 기온은 섭씨 47.8도까지, 지표면 온도는 82.3도까지 오른 기록이 있다고 한다. 1년 평균 강수량은 16mm에 불과하여, 더위와 건조의 극한을 보여준다. 한여름에 차로 현장에 도착하여 문을 열고 내리면 이전에 경험한 적이 없는 극도의 더위를 느끼게 된다. 당나라 때 변새(邊塞) 시인인 잠삼(岑參)은 "불 구름이 산을 가득 에워싸고 있으니, 날아오는 새도 천 리 밖에서 가까이할 엄두를 못 내네(火雲滿山凝未開, 飛鳥千里不敢來)"라고 묘사했다. 산해경(山海經)에는 '염화의 산(炎火之山)'으로 등장하고, 위구르어로는 '붉은 산'으로 부른다고 한다. 화염산은 현재 신장 지역의 주요 관광지이기도 하며, 손오공과 서유기를 배경으로 한 상징물들을 설치해 놓았다. 화염산 표지석과 손오공상 화염산이 위치한 투루판(吐魯番)시는 과거 실크로드 교통 요지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고, 5-7세기 도시국가 고창국(高昌國)이 번성했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그 토성(土城) 유적이 쓸쓸히 남아있다. 고창국은 성내 '인구 3만 중에 승려가 3천이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불교를 숭상했다. 화염산 자락에는 불교 유적으로 베제클리크 천불동(千佛洞)이 남아있다. 베제클리크(柏孜克里克, Bezeklik)는 위구르어로 '장식이 된 집'이라는 뜻으로, 천불동은 13세기 이슬람교의 유입 이전까지 불교 예술의 중심이었다. 현재 50여 개의 동굴과 벽화들이 남아 번성했던 시기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투루판 천불동(좌)과 포도밸리(우) 신장(新疆) 하면 특색 있는 음식으로 청포도와 양고기를 빼놓을 수 없다. 화염산 인근 협곡인 푸타오꺼우(葡萄溝), 포도 밸리에서는 설산(雪山)에서 녹아내린 시냇물이 흘러가는 곁으로 여러 색상, 다양한 품종의 포도가 재배되고 있으며, 관광지로써 양꼬치 요리(羊肉串)를 비롯한 신장 특색의 음식 문화를 즐길 수 있다. 중국은 동서남북 어느 지역이나 동일한 베이징(北京) 표준 시간을 채용하고 있는데, 베이징에서는 저녁 8-9시가 되면 해가 진 컴컴한 밤이지만 신장 지역에서는 햇볕이 쨍쨍하여 아직 대낮 같은 시간에 저녁 식사를 하는 이색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투루판의 미식들: 청포도와 삼색건포도, 양꼬치구이 서유기와 게임 이야기로 돌아와서, 서유기는 중국 명(明)나라 때 관리였던 오승은(吳承恩)이 지은 낭만주의적 장회체(章回體) 소설이다. 마귀들을 빗대어 명나라 사회의 어두운 면을 비판하였으며, 손오공을 통해 봉건 권위에 대한 도전과 영웅 의식 고취도 엿볼 수 있다. 당시 숭도억불(崇道滅佛) 정책에 반해 불교 숭상의 태도를 보여주기도 한다. 서유기는 이후 수많은 버전으로 각색되어 출간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소설 외에 만화,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져 선보이고 있다. 1986년 중국 중앙방송국(CCTV)가 제작 방영한 서유기 드라마 시리즈는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를 끌었고, 영화로는 주성치(周星馳)가 감독하고 황보(黃渤), 서기(舒淇) 등이 출연한 2013년작 '서유기: 모험의 시작(西遊)'과 견자단(甄子丹), 주윤발(周潤發)이 등장하는 2014년작 '몽키킹: 손오공의 탄생(大鬧天宮)', 곽부성(郭富成), 공리(鞏利) 등이 등장하는 2016년작 '몽키킹2, 서유기 : 여정의 시작(孫悟空三打白骨精)' 등 다수가 눈에 띈다. 주성치는 2023년 제작자로 참여해 넷플릭스에 애니메이션 영화 'Monkey King(美猴王)'을 선보이기도 했다. 만화책이나 웹툰, 애니메이션 등까지 포함하면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서유기 소재 중국 영화 포스터들 국내에도 1970년대 제작된 만화영화 '손오공과 별들의 전쟁'에 이어 만화책 '마법 천자문', 허영만 화백의 만화 시리즈 '날아라 슈퍼보드' 등이 큰 인기를 끌었고, 최근의 예능 프로 '신서유기'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손오공과 서유기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다. 일본에서도 '드래곤볼(Dragon Ball)'로 유명하다. 1980년대부터 연재 만화로 소개되어 전 세계 발행 부수 2억 권을 돌파했고, 인기에 힘입어 TV 애니메이션과 할리우드판 극장용 영화 등으로 제작되었다. 중국 게임 '검은 신화, 우콩'의 등장이 주목받는 것은 '대륙의 실수'로 치부되는 고퀄리티 게임이라는 것뿐만이 아니다. 그간 서구에서는 손오공을 영어 표현인 '몽키킹(Monkey King)'이나 드래곤볼의 인기를 기반으로 오공의 일본식 발음인 '고쿠(Goku)'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게임은 손오공의 중국어 발음인 '우콩(Wu Kong)'을 제목으로 내세웠다. 중국은 '문화적 자신감(文化自信)', '중국 스토리를 얘기하라(講中國故事)'라는 모토로 중국 전통문화 코드 발굴과 IP화, 재해석된 전통문화 상품의 해외 진출과 홍보에 계속 공을 들여왔고, 점차 그 성과들을 보이고 있다. 세계는 소프트파워(軟實力) 강화 움직임에 이어, 문화 분야의 무한 경쟁과 문화 안보 상황을 맞고 있다. 트랜스 미디어 시대에 소위 '문화 갈등'이나 '문화 전쟁'의 궁극적 해결 방안은 우리 전통에 대한 보다 폭넓고 깊이 있는 발굴과 연구를 통해 확실한 우리 지적재산권화 하고 이를 기반으로 세계에서 인정받고 사랑받는 수준 높은 작품으로 확장하며 이어가는 길일 것이다. 사진: 바이두, 디자인: 이희문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가라(讀萬卷書, 行萬里路)'고 하였던가? 장자(莊子)의 큰 새(鵬)는 아홉 개의 만 리(萬里)를 날아올랐다.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가장 많이 쓴 두 자(字) 시어(詩語)는 '만리(萬里)'였다. 만리길은 무한한 상상(想像)의 영역인 동시에 현실이자 생활이었다. 20여 년간 중국 땅 위에서 일하고 살면서 시간과 공간의 들어가고 나옴 중에서 마주했던 같음과 다름을 지역과 사람, 문화로 쪼개고 다듬어 '종횡만리, 성시인문(縱橫萬里 城市人文)'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나누고자 한다. 중국의 약 700개에 달하는 도시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 도시는 싼야(三亞)시이다. 겨울에도 따뜻한 아열대성 기후, 하얀 백사장과 야자수의 이국적 풍광으로 우리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휴양지로 알려져 있다. 싼야는 중국 국토 최남단의 섬, 하이난(海南)에서도 가장 남쪽의 바다와 맞닿은 위치로 인해 하늘과 바다의 끝이라는 뜻의 '톈야하이쟈오(天涯海角)'나 낭떠러지 언덕이라는 의미의 '야저우(崖州)'로 불린다. 또 다른 명칭으로는 사슴의 도시-'루청(鹿城)'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 지역의 전설에 연관되는 것이다. 싼야에는 원주민으로 리족(黎族)이 많이 거주하는데, 리족에게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옛적 리족의 청년 궁수가 붉은 머리띠에 활을 들고 아흔아홉 개 산과 아흔아홉 개의 시내를 건너 사슴 한 마리를 쫓아 남으로 남으로 내려왔고, 결국 망망대해에 맞닿은 낭떠러지에 이르렀다. 사슴은 절벽가에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았는데, 청년은 그 순간 사슴의 맑고 애처로운 눈빛에 감동하여 그만 활을 내려놓았고, 사슴은 아름다운 리족 아가씨로 변하였다. 둘은 서로 부부의 연을 맺고 그곳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루회이터우 석상과 석상 언덕에서 바라본 싼야시 이 장소가 '사슴이 뒤를 돌아보다'라는 뜻의 '루회이터우(鹿回頭)'로 불리게 되었고, 시간이 흘러 공원이 조성되고 사슴 농원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전설 속의 사슴은 하이난을 포함한 동남아 일대에 서식하며 중국어로는 '포루(坡鹿)'로 불리는 엘드 사슴으로 현재는 멸종위기종이다. 이 이야기는 중국어 성어인 첫눈에 반하다는 '이젠중칭(一見鐘情)'을 연상하게 하며, 광시 지역의 류싼제(劉三姐) 설화와 윈난의 아스마(阿詩瑪) 설화와 함께 중국 3대 소수민족 설화로 꼽힌다. 설화 속에 나오는 엘드 사슴(坡鹿) 싼야에는 일찍이 당나라 승려가 표류하였다가 불교 경전을 전하기도 하였고, 당송 시기에는 7명의 재상과 관료들이 귀양을 오기도 했다. 귀양을 말하면 하이난섬 북서쪽 단저우(儋州)로 유배되었던 소동파(蘇東坡)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동파거사(東坡居士)로 불리는 소식(蘇軾)은 오대시안(烏臺詩案) 사건으로 58세의 고령에 편벽한 광둥 후이저우(惠州)로 귀양을 떠나게 되었고, 2년 8개월간 곤궁한 유배 생활 중 부인을 여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특유의 호방함과 유쾌함으로 왕성한 저작 활동을 하며 유유자적 지냈다. 그러던 중 소식을 모함한 어렸을 때의 친구 장돈(章惇)이 그가 지었다는 '봄바람 속에 낮잠을 즐기며, 뒷마당 쪽 사원의 종소리를 듣는다'는 내용의 글귀를 보고, 더 고생스러운 곳으로 귀양을 보내기로 결심했다고 린위탕(林語堂)은 전한다. 그곳은 척박한 하이난 중에서도 나름의 인기 유배지였던 싼야도 아닌, 아무도 유배된 적이 없던 단저우였다. 단저우시 전경 소식의 동생 소철(蘇轍)도 귀양 보내졌는데, 자(字)가 자유(子由)였던 동생은 유(由)자와 비슷한 한자 지명을 가진 광둥의 레이저우(雷州)로, 자가 자첨(子瞻)인 소식은 첨(瞻)자와 한자가 유사한 하이난의 단저우(儋州)로 간 것이다. 61세의 소식은 그때 현지 상황을 "먹을 고기도 없고(食無肉), 병이 나면 약도 없으며(病無藥), 거처할 방도 없고(居無室), 만날 친구도 없으며(出無友), 겨울엔 땔 석탄도 없고(冬無炭), 여름엔 마실 우물물도 없다(夏無泉)"고 적었다. 소식은 뭍에서 검은콩을 가져다 약으로 빚어 주민들의 학질을 치료하기도 하고, 우물을 파서 사람들을 돕기도 했다. 또한, 학문을 지역사회에 보급하게 되는데 소식이 단저우를 떠난 지 3년 후부터 진사 급제자가 나오기 시작하여, 청나라 시기 과거가 폐지되기까지 근 800년간 하이난에서 767명의 거인(擧人)과 97명의 진사(進士)가 배출되었으며 '진사 1등도, 꼴찌도 단저우 사람(進士首儋尾亦儋)'이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로 대다수가 단저우 출신이었다고 한다. 소식의 단저우 귀양은 '소식에게는 불행, 하이난에게는 행운(東坡不幸海南幸)'이었다는 말로 회자된다. 지금의 단저우는 시로 승격되어 GDP 규모로는 싼야시(三亞市)를 능가하는 인구 100만의 도시로 변모하였으며, 동파서원(東坡書院) 등 소식의 발자취가 유적으로 복원되어 전해진다. 동파서원 싼야는 일찍이 관광업 개발과 리조트 건설 붐에 따라 해안을 따라 곳곳에 최고급 호텔과 레저 시설이 즐비하며, 호화 요트 계류장, 쇼핑몰과 면세점들이 건설되어 있다. 일제 침략 시기 현지인들에 대한 만인갱(萬人坑), 조선인에 대한 천인갱(千人坑)이라는 만행으로 인한 아픈 역사의 상흔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이난성은 인구 1천만 명 규모로, 1988년 광둥성으로부터 단독의 성(省)으로 분리되었다. 성도(省都)는 북쪽에 위치한 제1의 도시 하이커우(海口)이다. 하이난은 코코넛과 코코넛 음료의 오래된 생산지로 유명하며, 최근 들어 싱롱(興隆) 브랜드 커피 산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원창(文昌)은 우주발사체 발사기지로, 보아오(博鰲)는 국제포럼 개최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이난 특색의 미식들 중국 정부는 싼야를 비롯한 하이난성 전체를 관광 레저와 함께 면세사업 지역으로 발전시키려 하고 있다. 2011년 중국 재정부는 하이난 이도(離島) 면세 쇼핑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2020년에는 개인당 1년간 구매 한도를 10만 위안(약 한화 1,880만 원)으로 상향하였다. 구매 횟수에 제한이 없으며 해당 품목도 전자제품 등 38종에서 45종으로 확대하였다. 내국인들도 하이난에 관광 왔다가 곳곳의 대형 면세 쇼핑몰에서 각종 주류와 화장품 외에 일반 생활용품, 전자제품, 가구 등을 구매해 택배로 배송받기도 한다. 하이난의 이도 면세점 세관 통계에 의하면, 작년 이도 면세 구매액은 437억 위안으로 25.4% 증가했다고 한다. 섬 전체 경제를 면세 정책을 통해 발전시키고, 하이난을 전체 국내 산업과 내수의 실험 구역 및 이커머스의 플랫폼화하려는 의도이다. 중국 내수 시장 진출을 염두에 둔 기업들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물론 향후 지속 확장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는데, 10월 국경절 연휴 등 관광과 쇼핑 시즌에 적극적인 국내외 마케팅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하이난을 자유무역항으로 추진하는 프로젝트(海南自由貿易港, Hainan Free Trade Port)와 연계되어 있기도 하다. 2018년 하이난에서 개최된 보아오포럼(博鰲亞洲論壇)에서 시진핑 주석에 의해 그 추진 계획이 제안되었다. 향후 구체화된 주요 내용은 싼야(三亞)를 중앙 상업구역(中央商務區)으로, 하이커우(海口)를 종합 보세구역(綜合保稅區)이자 인터넷 정보산업기지(互聯網信息産業園)로, 원창(文昌)을 국제 우주기지(國際航天城)로, 보아오러청(博鰲樂城)을 국제 의료관광의 시범 구역(國際醫療旅遊先行區)으로 추진한다는 계획을 포함하고 있다. 사진 : 바이두, 디자인 : 이희문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가라(讀萬卷書, 行萬里路)'고 하였던가? 장자(莊子)의 큰 새(鵬)는 아홉 개의 만 리(萬里)를 날아올랐다.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가장 많이 쓴 두 자(字) 시어(詩語)는 '만리(萬里)'였다. 만리길은 무한한 상상(想像)의 영역인 동시에 현실이자 생활이었다. 20여 년간 중국 땅 위에서 일하고 살면서 시간과 공간의 들어가고 나옴 중에서 마주했던 같음과 다름을 지역과 사람, 문화로 쪼개고 다듬어 '종횡만리, 성시인문(縱橫萬里 城市人文)'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나누고자 한다. 홍콩이 바로 곁에 선전(深圳)을 두고 있듯이, 마카오와 바로 붙어있는 도시로 주하이(珠海)가 있다. 해안 도시인 주하이에는 평소 수많은 젊은 남녀들로 북적거리는 곳이 있는데, 일명 '연인들의 해변' 또는 '연인들의 거리'라고 불리는 칭뤼루(情侶路)이다. 주하이 칭뤼루(珠海 情侣路) 해변 풍경. 출처 : 바이두 이 거리는 고운 모래의 하얀 백사장과 야자수들로 인해 이국적 풍광을 자랑하는 해안도로로 길이가 55킬로미터나 된다. 1990년대 초 당시의 리펑(李鵬) 총리가 주하이를 방문하여 시찰하는 기간 중 어느 날 저녁 주하이시 당서기의 안내로 부인과 해변을 산책하였다고 한다. 총리는 당시 공사 중이던 도로를 보면서 당서기에게 도로 이름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고 물었고, 당서기는 아직 정식 이름을 짓지 못했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에 총리는 자신이 지금 나이 들어서도 부인과 함께 산책하는 생각을 하고 '연인들의 거리'(情侶路)라고 하면 어떠냐고 제안을 했고 이후 그렇게 명명되었다고 한다. 주하이 칭뤼루(珠海 情侣路) 도로와 해변 풍경. 출처 : 바이두 그 후 이곳은 주하이는 물론 중국 전역의 연인들이 많이 찾는 핫플레이스가 되었으며, 이 거리를 함께 거닐었던 연인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헤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퍼지면서 이를 믿고 더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고 한다. 겨울에도 따뜻한 기온과 해풍으로 인해 이삼십 대 젊은 커플들은 물론 나이 지긋한 노년 부부들도 많이 찾는다. 백사장과 도로변에서는 웨딩 사진을 촬영하는 신랑 신부들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 거리 부근에서는 주하이를 상징하는 건축물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주하이 대극원(珠海大劇院)'과 '해녀 조각상(漁女像)'을 들 수 있다. 주하이 대극원(珠海大剧院) 외부 모습. 출처 : 바이두 해녀 조각상(渔女像). 출처 : 바이두 주하이 대극원은 바다 섬 위에 건설된 공연 콤플렉스 건물로 1,600석과 500석 규모의 콘서트홀과 극장 등 공연과 전시 시설을 내부에 갖추고 있다. 두 개의 초대형 조개를 세워놓은 독특한 형상을 하여 보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화가 보티첼리의 명화 '비너스의 탄생'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며, 크기가 다른 두 조개 형상의 건물이 해와 달이 같이 서 있는 모습과 같다 하여 '해와 달 조개 건물(日月貝)'이라고도 불린다. 큰 건물의 높이는 90미터에 이른다. 콘서트홀 내부는 색다른 인테리어와 공간 설계, 뛰어난 음향 시설을 구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위뉘샹(漁女像)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해녀 조각상은 1982년 유명 예술가인 판허(潘鶴)가 70여 개의 화강석을 조합하여 8.7미터 높이로 건립하였다. '진주는 조개에서 나왔고, 조개는 바다로부터 나왔다(珠生於貝, 貝生於海)'는 말이 있는데, 조각상이 위치한 도시인 주하이(珠海)를 상징하듯 어촌 여성 형상의 석상이 머리 위에 진주(珍珠)를 받쳐 들고 있다. 주하이는 광둥 특유의 전통문화, 이국적 자연 풍광, 도시 발전 등을 이유로 중국 내 영화나 드라마, 연예 오락 프로그램의 촬영지로도 각광받는다. 홍콩 영화 '독전(毒戰)'이나 '소림 축구(少林足球)', 중국 본토 드라마 '쾅뱌오(狂飇)' 등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가 일부 또는 상당 장면을 주하이에서 촬영하였고, 작년 중국 CCTV-1에서 방영된 인기 드라마 '청춘의 성(靑春之城)'은 극의 주무대가 주하이로 연인들의 거리(情侶路)도 자주 등장한다. 주하이 대극원(珠海大剧院) 내부 모습. 출처 : 바이두 드라마 청춘의 성(青春之城). 출처 : 바이두 주하이시는 광둥성 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구는 250만 명으로 광둥에서는 비교적 작은 규모에 속한다. 1979년에 시로 승격되었고, 1980년에는 경제특구로 지정되었다. 홍콩-주하이-마카오를 잇는 '강주아오(港珠澳) 대교' 완공 이후, 마카오와 홍콩을 육로와 해로로 동시에 연결하는 지역이 되었다. 매년 '주하이 국제에어쇼(中國國際航空航天博覽會)'가 개최되는 지역으로도 유명하다. 주하이는 특히 광둥-홍콩-마카오의 경제, 사회의 통합을 추진하는 중국의 대형 프로젝트인 '광홍마 메가 베이(粵港澳大灣區)' 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마카오와의 통합 추진에 있어서는 헝친의 역할이 핵심적이다. 헝친(橫琴)은 주하이(珠海) 남쪽 샹저우(香洲)에 위치한 106평방킬로미터 면적의 섬으로 마카오에 인접하고 있으며 주하이시 소재 146개 섬 중 가장 크다. 서울 면적의 1/6 규모이나 마카오 면적의 3배에 달한다. 과거 허허벌판의 땅이 지금은 금융 및 첨단 분야의 기업들이 입주한 마천루들로 가득 들어선 지역이 되었다. 헝친(横琴) 전경. 출처 : 바이두 개혁개방 후인 1992년 광둥성은 헝친 섬을 주요 개발구로 설정하였고, 2000년에는 헝친과 마카오 타이파를 잇는 롄화대교(蓮花大橋, Ponte Flor de Lotus)를 건설하였다. 2009년 당시 국가부주석이었던 시진핑이 방문한 직후, 국무원은 헝친을 톈진(天津) 빈하이(濱海)와 상하이(上海) 푸둥(浦東) 신구에 이은 3번째 국가급 특구로 지정한다. 헝친 특구에는 시진핑 주석이 18차 당대회 이후에만 3차례나 방문했다. 광둥성과 마카오 정부 간 협력이 보다 구체화되면서, 2021년에는 '헝친-광둥-마카오 합작구(橫琴粤澳深度合作區)'로 명명된다. 상주인구는 5만여 명이나 유동인구는 400만 명가량이나 된다고 한다. 렌화대교(莲花大桥). 출처 : 바이두 헝친 합작구 내에서는 요건이 되는 개인 및 기업에 대해 소득세를 중국 내의 20-25%보다 낮은 15%를 적용한다. 마카오 기업이 5천여 개 넘게 입주하여 있고, 최근 경제 규모가 커져 광둥성 중급 도시 GDP를 능가하는 수준에 달했다고 한다. 헝친 합작구는 주로 반도체, 신소재, 신에너지, 빅데이터, 인공지능, 바이오 등 분야의 기업 유치 및 산업 발전을 추구하고 있다. 또한, 전통 중의약(中醫藥) 분야 개발과 발전을 강조하고 있는데, 광둥과 헝친을 기반으로 생산한 의약품을 마카오를 통해 포르투갈어 사용국을 중심으로 한 전 세계에 수출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롄화대교의 동서 양편으로 각각 마카오 공항과 주하이 공항까지 연결되는 경전철이 건설되는 등 생활 편의 시스템의 통합이 가속화되어 가고 있다. 마카오 반환 25주년을 맞은 올해까지 거주와 취업 인구 증대 및 다원화된 경제를 이루고, 반환 30주년이 되는 2029년까지 주하이-헝친-마카오의 일체화를 심화시키며, 2035년에는 일체화 시스템의 완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디자인 : 이희문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가라(讀萬卷書, 行萬里路)'고 하였던가? 장자(莊子)의 큰 새(鵬)는 아홉 개의 만 리(萬里)를 날아올랐다.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가장 많이 쓴 두 자(字) 시어(詩語)는 '만리(萬里)'였다. 만리길은 무한한 상상(想像)의 영역인 동시에 현실이자 생활이었다. 20여 년간 중국 땅 위에서 일하고 살면서 시간과 공간의 들어가고 나옴 중에서 마주했던 같음과 다름을 지역과 사람, 문화로 쪼개고 다듬어 '종횡만리, 성시인문(縱橫萬里 城市人文)'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나누고자 한다. 중국에는 1천300여 개의 4년제 대학이 있고, 전문대 숫자까지 포함하면 3천 개가 훌쩍 넘는다. 그중 가장 아름다운 캠퍼스를 가진 곳은 어디일까? 여론조사나 개인 의견에 따라 다양한 순위가 나오기는 하지만, 대체로 샤먼대학(厦門大學), 우한대학(武漢大學), 칭화대학(淸華大學), 베이징대학(北京大學), 중산대학(中山大學), 해양대학(海洋大學), 저장대학(浙江大學) 등을 꼽는다. 여러 캠퍼스 중 바다와 남국을 배경으로 한 이국적 풍광을 가진 곳을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 샤먼대학일 것이다. 샤먼대학 전경. 출처 : 바이두 샤먼대학은 위치한 지역인 푸젠 샤먼 일대의 아열대성 기후로 인해 캠퍼스 내에 독특한 모양의 꽃과 나무가 많고, 대학 건물 역시 민난(閩南) 지역 특색의 처마가 치켜 올라간 지붕 형식과 서양식 하얀색 석축 형식을 결합하여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특색 있는 형태로 지어졌다. 샤먼대학은 1921년 화교 자본에 의해 사립대학으로 설립되었다. 100년이 넘은 역사를 지녔고, 대학원 시스템을 중국 내에서 최초로 도입한 대학이기도 하다. 최근 대학 순위로는 중국 내에서는 20위권, 세계에서는 2-300위권에 랭크된다. 말레이시아에 분교를 두고 있기도 하다. 샤먼대학 캠퍼스내 풍경. 출처 : 바이두 샤먼대학이 있는 샤먼시는 푸젠성(福建省) 제2의 도시이다. 푸젠의 성도(省都)이자 최대 도시는 푸저우(福州)시이다. 샤먼은 반도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로 바다 건너 진먼섬(金門島)과 멀리 타이완(臺灣)을 마주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푸젠성 남부와 광둥성 동부 일부, 타이완까지 함께 민난(閔南)이라 하여 민족, 언어, 생활, 풍속 등 면에서 독특한 문화 환경을 공유하고 있다. 동남아 화교의 대다수가 이 지역 출신이다. 샤먼은 해외에서는 샤먼(Xiamen)보다는 아모이(Amoy)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데, 샤먼(厦門)의 민난어 발음인 아모이에서 유래했다.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 샤먼의 대표적 전자제품 기업이자 중국 국내에서 인기가 높았던 핸드폰, 음향제품 브랜드, '아모이소닉(Amoisonic, 샤신/厦新)'의 명칭도 여기에서 왔다. 샤먼시내 전경. 출처 : 바이두 푸젠 지역에서 배출된 역사적인 인물이 많은데, 사상적 영향을 많이 미친 이로 주희(朱熹)를 꼽을 수 있다. 주희는 남송시기 장저우(漳州) 지역 지부(知府) 등 벼슬을 거쳤고 신유학(新儒學)이라고 불리는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하였다. '사서집주(四書集註)' 등 유학자 중 가장 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그중 주자가례(朱子家禮) 등의 저서는 조선의 유교와 생활 예법에도 영향을 미쳤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소년은 쉬이 늙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촌각의 시간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 / 권학(勸學) 중' 등의 경구를 비롯한 수많은 문학 작품을 집필했다. 푸젠의 학계는 물론 일반인들도 주희를 존경하는 이로 꼽는 경우가 많고 지금도 그의 저작들이 많이 읽히고 있다. 주희 집안이 뿌리내리고 주희가 성장했던 푸젠 정허(政和)현에서는 최근 그를 기리는 주자서원(朱子書院)을 건립하고 관련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주희. 출처 : 바이두 샤먼시 및 푸젠성과 인연이 있는 정치 지도자로 시진핑(習近平) 주석을 들 수 있다. 시 주석은 1985년부터 3년간 샤먼시의 부시장을 지냈고, 이어 2002년까지 총 17년여를 푸젠성에서 근무했다. 펑리위안(彭麗媛) 여사와의 연애와 결혼, 딸 출생도 이 푸젠 근무 기간 중이었다. 시 주석이 샤먼시에 부임한 1985년은 샤먼시가 특구로 지정되고 얼마 안 된 시점이어서, 그의 주도로 '1985-2000년간의 샤먼시 경제사회 발전 전략'을 수립 추진하였고 이것이 오늘날 샤먼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샤먼을 이야기하면서 구랑위(鼓浪嶼)를 빼놓을 수 없다. 구랑위는 샤먼 서남부에 위치한 여의도 면적 2/3 크기의 섬으로, 2017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샤먼의 대표적 관광지이다. 3천여 년 전 석기시대에 섬으로 형성되었다고 전해진다. 1841년 아편전쟁 시기 영국 함대가 처음 들어와 포대를 설치하였고, 이어 난징조약에 의해 샤먼이 5대 통상항구로 개방되면서 점차 영국, 미국, 독일, 네덜란드, 스웨덴 등 나라들의 영사관과 교회, 병원 등 시설이 섬 안에 건설되면서 '여러 제국들의 조계지(萬國租界)'가 된다. 샤먼대학도 일본 침략 시기 한때 이곳으로 이전키도 했었다. 그 후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색다른 풍취와 예술적 영감을 위해 구랑위를 찾았고, 지금은 그때의 건축물들이 남아 이국적 정취를 느끼려는 국내외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문화예술과 관광의 명소가 되었다. 샤먼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섬에 도착하면 피아노 박물관(鋼琴博物館), 파이프 오르간 박물관(風琴博物館), 정성공 기념관(鄭成功紀念館), 옛 영사관 터, 성당 등과 만나게 된다. 구랑위 전경. 출처 : 바이두 구랑위 섬내 건축물. 출처 : 바이두 샤먼에는 구랑위 외에 지메이(集美)구에도 특이한 여러 교육 문화 예술 시설이 있다. 지메이대학(集美大學)이 있고, 중국 내 최고 사진 전문 미술관인 싼잉탕 예술센터(三影堂攝影藝術中心, Three Shadows Photography Art Centre)가 있다. 매년 프랑스 아를(Arles)과 협조하여 국제 사진전을 개최한다. 몇 년 전 한국 사진작가 작품전을 별도로 개최키도 했다. 지메이에서 역시 구랑위와 비슷한 자유로운 분위기의 문화예술 행사를 만날 수 있다. 푸젠은 인근 광둥성이나 저장성에 비해 경제력 면에서 상대적으로 뒤져 있다. 또한, 지리적으로 타이완과 맞닿아 있어 양안 관계의 경색에 영향을 받는다. 유학의 훈도(薰陶)와 개혁개방의 경험을 거치며 독특한 교육과 문화예술의 틀을 발전시켜 온 샤먼과 푸젠이 향후 어떤 방향의 진로를 보일지 지켜볼 일이다. 싼잉탕 사진예술센터의 조선 백자 사진 전시회. 출처 : 바이두 디자인 : 이희문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가라(讀萬卷書, 行萬里路)'고 하였던가? 장자(莊子)의 큰 새(鵬)는 아홉 개의 만 리(萬里)를 날아올랐다.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가장 많이 쓴 두 자(字) 시어(詩語)는 '만리(萬里)'였다. 만리길은 무한한 상상(想像)의 영역인 동시에 현실이자 생활이었다. 20여 년간 중국 땅 위에서 일하고 살면서 시간과 공간의 들어가고 나옴 중에서 마주했던 같음과 다름을 지역과 사람, 문화로 쪼개고 다듬어 '종횡만리, 성시인문(縱橫萬里 城市人文)'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나누고자 한다. 2024년 8월 22일은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總設計師)라고 불리는 덩샤오핑(鄧小平)의 탄생 120주년이 되는 날이다. 같은 혁명 원로이자 신중국 수립에 큰 역할을 한 마오쩌둥(毛澤東)이 터를 닦고 새 집을 만들었다면 덩샤오핑은 그 집에 가구를 넣고 먹고 살 수 있게 해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덩샤오핑과 가장 밀접한 지역으로는 출생지인 쓰촨 광안(廣安)이나 국공내전 말기의 허베이 시바이포(西柏坡)를 들 수도 있겠으나, 개혁개방의 상징인 경제특구 광둥 선전(深圳)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선전 렌화산 공원의 덩샤오핑 동상. 출처: CCTV 소련과 동구권의 개혁 열풍, 6.4 천안문 사건 등 복잡한 국내외 정치 상황 속에서, 3번 실권했다 3번 부활했던 중국의 지도자 - 오뚜기(不倒翁) 덩샤오핑은 1989년 일선에서 물러난다. 그의 딸 덩롱(鄧榕)이 쓴 회고록(我的父親鄧小平)에 따르면 그가 은퇴한 11월 9일은 아침부터 비가 왔고, 그날 오후 중국 공산당 중앙위 회의에서 덩샤오핑의 군사주석직 사임 요청안을 가결했다. 덩샤오핑이 직접 쓴 사임요청서는 다음 날 당 기관지 인민일보(人民日報)에 게재되었다. 그는 '나의 평생소원은 몸이 아직 건강할 때 직무에서 물러나는 것', '은퇴 후에도 당과 국가의 업무에 충실할 것', '우리의 개혁개방은 이제 걸음마 단계로, 우리의 임무는 무겁고 갈 길은 멀다(任重道遠)'라고 강조했다. 사임요청서 중의 '일선에서 물러나도 역할을 하겠다'는 말을 실천하듯, 그는 약 2년 후인 1992년 1월 17일, 중앙 지도층에는 알리지 않고 군과 공안, 그리고 자신을 맞이할 지방정부의 일부 간부들에게만 알린 채, 부인과 4명의 자녀 등 17명의 일행과 함께 특별기차 편으로 베이징을 떠나 남쪽으로의 여정에 올랐다. 우창(武昌), 선전(深玔), 주하이(珠海)와 상하이(上海)를 한 달 넘게 시찰한 그의 1992년 남순(南巡)은 개혁개방과 중국 현대사에 있어 큰 의미를 지닌다. 마오쩌둥(毛澤東)도 앞서 남순을 했었다. 1965년 마오는 당의 우경화 경향에 불만을 품고 자신의 글을 인민일보(人民日報)에 실으려다 이루지 못하자 상하이 해방일보(解放日報)와 문회보(文匯報)에 게재하고, 71세의 나이에 항저우(杭州)와 고향인 샤오샨(韶山), 우한(武漢)을 차례로 방문한다. 이는 1966년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 우한에서 촉발되는 단서가 된다. 마오 남순의 데자뷔처럼, 은퇴한 덩샤오핑은 1991년 천윈(陳雲) 등 당시 당내 실권파의 보수적 경제 정책에 불만을 품고 인민일보에 자신의 글을 실으려다 이루지 못하자 해방일보에 글을 게재한 후 상하이로 내려갔다. 푸둥(浦東) 지역 개발 등 적극적인 경제 정책과 개혁개방의 시행을 촉진하려 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어 이루어진 1992년 남순 역시 초기에는 주류 언론의 관심 밖이었으나 홍콩 매체와 선전특구보(深玔特區報) 등이 보도하고 광둥 지역민들의 적극적 환대와 지지를 받으면서, 중앙 매체 및 당과 정부가 묵인할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게 된다. 프랑스 유학 시기와 1992년 남순 중의 덩샤오핑. 출처: 바이두 남순 과정에서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의 상징물과도 같은 50층짜리 선전 국제무역센터(深玔國際貿易中心)의 리볼빙 레스토랑 전망대에 올라 지역 내 당 간부들에게 과감한 개혁을 주문했다. 배로 바다를 건너 주하이 생물화학공장, 전자부품공장을 시찰하면서 본인의 생각을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전달했다. 이를 정리하면 6개 분야 18개 경구로 요약된다. '개혁개방은 과감하게 시도하고 대담하게 뛰어넘어야 한다; 혁명도 생산력을 해방시키고 개혁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은 우(右)를 경계해야 하지만 보다 방지해야 할 것은 좌(左)이다; 형식주의는 관료주의다, 시간을 내서 실질적인 일을 해야지 말로만 해서는 안 된다'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문을 하였으며, 이는 남순(南巡)에서 행한 언급(講話), '남순강화(南巡講話)'로 남게 된다. 선전 화창베이 전자상가와 증건거래소. 출처: 바이두 남순 이후 베이징의 인민일보가 지지 논평을 싣고 당과 군부에서도 경제특구를 비롯한 개혁개방 정책에 대한 견지를 천명한다. 국내외 상황 및 당 내부 권력 관계로 지지부진하던 개혁개방이 돌파구를 마련한 것이다. 1993년 14차 당대회와 이어 개최된 전인대는 8-9% 경제 성장과 외자 유치 계획을 인가했으며, 이후 약 10년간 세계 최대 인구대국인 중국이 10%대의 고도 성장을 이룩하는 발판이 된다. 선전 시내 마천루 광경. 출처: 바이두 중국 전문가 에즈라 보겔(Ezra F. Vogel) 교수는 자신의 저서(Deng Xiaoping and the transformation of China)에서 덩샤오핑을 다른 중국 지도자와 달리 마지막까지 정책적 의지를 관철하고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위인으로 평가하였다. 다른 중국학 석학 오빌 쉘(Orville Schell) 교수는 남순의 목적지로 선전을 비롯한 광둥을 택한 이유와 관련, 저서(Mandate of Heaven)에서 '개혁개방의 선도 지역인 남부 특구를 방문해 개혁주의자들에게는 희망을 주고, 강경 보수파에게는 본인이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심을 보여주며, 외국에는 중국 경제가 흔들리지 않고 더욱 빠르게 성장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분석했다. 선전의 소철나무와 市花(시화). 출처: 바이두 선전은 바오안현(寶安縣)에서 1979년 시로 승격되고 이어 1980년 경제특구로 지정되었다. 지금의 선전은 1,780만 명의 인구에, 전체 GDP는 이미 몇 년 전 홍콩을 넘어섰고, 1인당 GDP는 3만 달러에 육박하고 있다. 과거 홍콩에 인접한 작고 가난한 어촌 마을이 개혁개방의 선도 역할을 하면서 가장 큰 수혜자로 눈부신 발전을 이룬 것이다. 이제는 중국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이민의 도시, 유행의 도시, 부유의 도시이다. 1선 도시인 베이상광션(北上廣深: 베이징-상하이-광저우-선전)을 말할 때 베이상션광(北上深廣)이라며 선전을 광저우보다 앞에 언급하기도 한다. 선전에는 중국의 첨단 기술 기업인 텐센트, BYD, 화웨이 외에 다수의 금융회사와 ICT, 문화산업 기업들이 몰려있다. 그러나, 선전 역시 국내외의 상황에 따라 최근 여러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정책 중의 하나가 선전을 포함한 광둥-홍콩-마카오를 통합 발전시키는 이른바 '광홍마 메가베이(Guangdong-Hong Kong-Macao Greater Bay Area) 프로젝트', 중국어로는 웨강아오 따완취(粤港澳大灣區) 전략이다. 선전 시내의 롄화산(蓮華山) 공원에 오르면 선전시 전경을 내려다보는 덩샤오핑의 동상을 마주하게 된다. 동상은 88세였던 남순 당시의 사진을 기준으로 제작되었으며, 아래쪽에는 '선전의 발전은 경제특구 전략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덩샤오핑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선전(深圳)은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향후 중국 경제 발전의 바로미터가 될 상징적 도시이다. 디자인 : 고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