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광저우 총영사, 주중문화원장, 문체부 대변인 등 역임 - 베이징 주중대사관, 주상하이 및 주홍콩 총영사관 근무 - 현재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에서 연구활동 중
지난 4월 16일 세계 인터넷 대회(World Internet Conference; 世界因特網大會)의 디지털 실크로드 발전 포럼이 시안(西安)에서 개최되었다. 중국이 주도한 이 행사는 천년고도이자 육상 실크로드의 시발점인 시안을 미래 디지털 경제의 핵심 도시로 발전시키고자 마련되었다. 시안은 서주(西周)부터 진(秦), 한(漢), 당(唐) 등 13개 조대(朝代), 총 1100년간 수도로써 호경(鎬京), 장안(長安), 서경(西京) 등으로 불리면서 중국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서역과의 교류의 간두(竿頭) 역할을 했었다. 진시황(秦始皇)의 아방궁(阿房宮)이나 병마용(兵馬俑), 양귀비(楊貴妃)의 화청지(華淸池) 등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역사 속의 고대 도시가 지금 과학 기술과 인터넷을 통한 뉴실크로드의 번영을 꿈꾸며 환연일신(煥然一新)하고 있다. 시안이 중심이 되는 샨시성(陝西省) 지역의 작년 디지털 경제 규모는 전체 GDP의 40%를 돌파하여 총 1조 4,000억 위안(한화 약 260조 원)을 기록했다. '장안 삼만리' 포스터. 출처 : 바이두 디지털 시안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촉발시킨 것은 작년 7월 중국 전역에서 개봉된 중국 국산 애니메이션 영화 '장안 삼만리(長安三萬里, 창안싼완리)'이다. 이 영화는 당나라 시기 시인(詩人)들 간의 스토리를 다룬 역사물이자 러닝타임 2시간 48분이나 되는 긴 분량의 장편임에도 4,400만 명의 관객과 18억 위안(한화 약 3,400억 원)이 넘는 박스오피스 매출을 기록하며 중국 역대 애니메이션 흥행 성적 2위에 랭크되었다. 영화는 시인이자 검남서천(劍南西川) 절도사였던 고적(高適)이 '안록산의 난' 후 토번(吐蕃)의 공격으로부터 임지를 방어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그와 이백(李白), 두보(杜甫)와의 교유(交遊)를 회상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당시(唐詩) 48수가 영화 속에 소개되고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 왕창령(王昌齡) 등 24명의 시인들이 등장한다. 영화 속 고적, 이백, 두보 캐릭터 영화의 흥행 요인은 먼저 작화의 수준이나 영상 플레이 면에서 기술적, 미학적으로 세계적 기준에 손색이 없고, 책을 통해 멀게만 느껴졌던 1300년 전의 시인들이 친근한 애니메이션 속의 젊은 청년 캐릭터로 현신하여 현대 중국의 젊은 세대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인생과 우정, 이상의 추구, 국가와 사회라는 화두를 던지며 스토리 속으로 빨려 들게 했다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특히, 성당(盛唐) 시기의 화려한 도시와 이를 배경으로 한 문화와 예술을 AI 등 첨단 기술을 동원한 3D의 다채롭고 박진감 넘치는 영상으로 재현하였다. 영화를 감독한 쩌우징(鄒靖)은 등장인물에 대한 재해석, 이백과 고적 간의 감정 묘사, 현대 사회에서도 맞닥뜨릴 수 있는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을 성공 원인으로 분석했다. SNS상의 시안 영화 자체의 인기 못지않게 사회, 경제적인 후속 영향과 효과도 컸다. 개봉 직후부터 영화 속 당시(唐詩)들을 수록한 시집 매출이 3,000퍼센트나 오르고, 영화 속 배경과 관련된 시안(西安) 대당불야성(大唐不夜城)나 우한(武漢) 황학루(黃鶴樓) 등지에는 관광객들이 몰려 북새통을 이루었다. 특히 중국에서 Z세대로 불리는 젊은 층들이 직접 현장을 방문하고 샤오홍슈(小紅書) 등 SNS에 글과 사진을 올리고 퍼 나르면서 화제를 증폭시켰다. 그 결과 작년 시안을 방문한 국내외 관광객 수와 관광 수입은 전년 대비 각각 33%와 65% 증가한 2억 7,000만 명과 3,350억 위안(한화 약 60조 원)에 달했다. 대당불야성, 시안 성벽, 시안 미식 최근 Z세대들이 시안을 많이 찾는 이유는 밀가루나 양고기, 돼지고기가 많이 사용되는 현지 특색의 다양한 시베이(西北) 먹거리(小吃)도 들 수 있고,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이 2006년부터 연출하기 시작한 대형 야외 무대극 '장한가(長恨歌)'도 들 수 있겠으나, 가장 인기 많은 핫스팟(打卡点)은 다른 곳 아닌 박물관이다. 최근 중국의 박물관들은 과거의 고리타분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AI 등 첨단 기술을 활용한 참신(嶄新)한 면모로 변신하고 있다. 시안박물관(西安博物院), 비림박물관(碑林博物舘), 진시황제릉박물관(秦始皇帝陵博物院) 등 시안의 주요 박물관들은 '알리바바 클라우드(阿里雲)', '넷이즈 야오타이(網易瑤臺)' 등의 테크 기업들과 협력하여 전시물들을 관람자들에게 VR, AR 등을 통해 입체적으로 체감토록 하고, 메타버스 박물관(元宇宙博物館) 공간을 별도로 만들어 참여자들이 진나라나 당나라 때로 돌아가 역사의 현장 속에서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장한가' 공연 시안박물관 AR 체험 뉴스 시안시 당국은 AI와 빅데이터 기술을 활용하여 관광객이 몰리는 시내 고성과 성곽에 대한 유동성, 밀집도 분석과 교통 통제를 하기도 한다. 사실 문화와 관광 분야에서 AI 활용은 이미 보편화되어 시안뿐 아니라 상하이, 하이난 등 대부분 지방 정부들이 AI 생성 기술을 이용한 홍보 동영상을 제작하여 활용하고 있다. AI 생성 주요 도시의 홍보영상들 '장안 삼만리'의 흥행이나 문화와 관광의 접목은 중국 정부의 정책적 배경과도 관계가 있다. 국제적 소프트파워 제고나 문화 영향력 확장을 위해 대외적으로 '중국을 스토리텔링(講中國故事)'하고 국내적으로는 문화 산업 지원과 육성을 통해 국민들의 '문화적 자부심(文化自信)'을 높이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2018년에는 기존 문화부와 관광청(旅遊局)을 통합시켜 문화관광부(文化旅遊部)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중국에서 '시와 먼 곳(詩和遠方)'이라고 비유되는 문화와 관광을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지향하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현 문화체육관광부 전신으로 2005년 문화관광부가 출범한 바 있다.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와서, '장안 삼만리'에서 메인 캐릭터 역할을 하는 고적은 20세 때 동정호(洞庭湖) 부근에서 이백을 운명적으로 만났다고 회고한다. 젊은 시절 순탄치 못한 인생 역정 속에서 고적과 이백은 각각 시종 진지하게 노력하는 모습과 세상을 초탈한 호방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씨줄과 날줄처럼 인생길에서 여러 차례 만나고 헤어지고 서로 돕고 격려하기도 하지만 마음속으로 경쟁하기도 한다. 고적은 30세 때 그의 불후의 명시 '동대를 떠나보내며(別董大)'를 짓는다. "십리 길 누런 구름에 햇살은 가려 어둡고, 북풍 바람 속 기러기 나는데 눈발이 흩뿌리네(十里黃雲白日曛, 北風吹雁雪紛紛). 가려는 앞길에 아는 이 없다고 걱정하지 마시게나, 세상 천하에 그 누군들 자네를 몰라 보겠는가?(莫愁前路無知己, 天下誰人不識君)".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중국 문화 산업이 구름과 바람 속에서 자국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인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시안이 과거 세계 수준의 영화(榮華)를 되찾아 디지털 도시로 거듭날 수 있을지는 지켜볼 일이다. 디자인 : 서현중
흔히 양귀비로 알려진 당나라 현종의 귀비(貴妃) 양옥환(楊玉環)은 중국 고전 미인의 대명사이다. 현종과 귀비와의 비극적 애정 스토리는 그녀의 미모에 대한 묘사와 함께 백거이(白居易)의 840자에 달하는 장편 서사시 '장한가(長恨歌)'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그녀가 미용 비책(祕策)으로 쓰던 것으로는 뽕나무잎 등 약재를 넣은 온천 목욕과 손바닥으로 얼굴 피부 가볍게 때리기, 목단피 등 자연 성분의 화장품 쓰기, 인삼 복용 등이 알려져 있다. 그중 최애 아이템 하나를 꼽으라면 리쯔(荔枝,여지)를 즐겨 먹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리쯔(lychee)는 아열대성 과일로 중국 남부인 푸젠(福建), 광시(廣西), 하이난(海南) 등에서도 생산되는데 중국 생산량의 절반 이상이 광둥(廣東) 성에서 나온다. 중국은 리쯔의 원산지이자 생산량이 세계에서 가장 많다. 중국의 특색 있는 과일 하면 리쯔가 떠오르는 이유이다. 4월쯤 꽃이 피고 5월부터 8월까지가 수확기이다. 갓 딴 리쯔와 리쯔 종류 리쯔라는 명칭은 서한(西漢) 시기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책에서 무성한 가지를 떼어낸다는 의미의 이지(離枝)라는 명칭으로 처음 등장하여, 동한(東漢) 시기에는 여지(荔枝)로 변화하였다 한다. 양귀비와 관련된 내용은 '신당서, 양귀비전'에 나오는데, 그녀가 '리쯔를 좋아하여 이를 신선하게 먹고자, 기마로 수천 리를 수송해 왔으며, 수도에 도착해서도 맛이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리쯔만 따서 운송한 것이 아니라 신선도 유지를 위해 아예 나무 뿌리째 뽑아 과실과 가지가 마르지 않게 겉을 싸서 수분을 조절하며 운송하였을 것으로 후세 사람들은 추정한다. 만당(晩唐) 시인 두목(杜牧)은 '화청궁(華淸宫)을 지나며'라는 시에서 '말 한 마리가 붉은 먼지를 내며 달려오니 귀비가 웃는데, 아무도 리쯔가 도착한 것은 모르는구나'라고 풍자했다. 당나라 때의 한 문헌에서는 양귀비가 수천 리를 달려 가져온 리쯔가 광둥 일대의 남방 지역에서 생산된 것이라고 보았는데, 송대에 소동파(蘇東坡)는 양귀비의 출생지인 촉(蜀) 땅에서도 리쯔가 생산되었으므로 지금의 쓰촨(四川) 지역에서 시안(西安, 당시의 長安)으로 운송해 갔을 것이라고 보았다. 소동파는 리쯔와 관련해 광둥 유배 시절 '하루에 리쯔 300알을 먹는다면, 계속 남방 사람으로 살라고 해도 마다치 않겠네(日啖荔枝三百顆, 不辭長作嶺南人)'라고 호방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소동파와 연관된 도시를 얘기하면 주로 항저우(杭州)와 항저우의 서호(西湖)를 얘기한다. 하지만 소동파에게 있어 후이저우(惠州)와 후이저우 서호(西湖) 역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실 서호는 서쪽의 호수란 의미의 일반명사이다. 항저우의 서호가 워낙 유명해 중국에서 '시후(西湖, 서호)'라고 하면 항저우의 서호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현재 중국에는 구이린(桂林), 푸저우(福州), 션양(瀋陽), 란저우(蘭州), 하이커우(海口) 등지에 도합 31개의 서호가 있다. 소동파도 그 시절 '천하에 36개나 되는 서호 중 최고는 항저우 서호'라고 적은 바 있다. 그럼 후이저우 서호와 소동파는 어떤 인연이 있을까? 후이저우 시내와 서호 소동파는 왕안석(王安石) 등의 신법파의 개혁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박해를 받고 지방에 유배되었다 복권되었다를 반복한다. 후이저우(惠州)는 그가 58세 때인 1094년 9월 도착하여 1097년 4월 지금의 하이난(海南) 섬인 단저우(儋州)로 다시 유배되기까지 2년 8개월간 머문 곳이다. 이 기간 동안 587편의 작품을 남기면서 첫 번째 유배되었던 황저우(黃州, 753편)에 못지않은 왕성한 문학 창작 활동을 하였다. 후이저우에는 소동파와 조운(朝雲, 짜오윈)간의 이야기와 함께 관련된 유적도 많다. 조운은 본명이 왕조운(王朝雲)으로 집안이 빈한하여 가녀(歌女)가 되었으나 12세 때 소동파가 시녀로 받아들였고, 그 후 소동파의 세 번째 부인이 된다. 소동파가 오태시안(烏臺詩案)이란 사건으로 황저우(黃州), 후이저우(惠州) 등지에서 유배 생활로 어려웠을 때 따라와 지기(知己)처럼 곁을 지켰다. 황저우 유배 기간 중 소동파의 넷째 아이를 낳았으나 반년 만에 잃었고, 후이저우로 유배와서는 2년이 채 안 되어 본인이 34세로 요절하는 운명을 맞는다. 소동파는 27세로 일찍 사별한 첫째 부인 왕불(王弗)을 기리며 "삶과 죽음으로 나뉜 10년, 서로 아득하기만 한데, 생각지 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구나(十年生死兩茫茫, 不思量, 自難忘)"로 시작되는 불후의 추도시(追悼詩)를 남겼다. 어려서부터 본인 곁에 있었고 특히 어려운 시기를 함께해 준 조운에게도 애틋한 감정을 갖고 비롯한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시대와의 불화 속에 유일하게 나를 이해하는 이, 홀로 옛 곡조를 타는데 저녁에 내리는 비가 그리움을 더욱 사무치게 하네(不合時宜, 惟有能識我; 獨彈古調, 每逢暮雨倍思卿)"라는 대련(對聯)은 대표적이다. 아울러 역병으로 먼저 떠난 그녀를 기리면서 함께 했던 후이저우 서호 주변에 탑과 제방을 쌓고, 매화나무를 심어 기렸다. 서호 야경과 서호변의 조운 기념상과 정자 그 후 서호변에는 조운의 묘지를 비롯한 소동파와 그녀의 유적들이 조성 및 복원되었고 현재도 많은 관광객들과 문학 애호가들이 찾고 있다. 후이저우 서호는 그 규모는 작지만 호수 위 섬들과 다양한 종의 초목과 희귀한 조류들이 서식하면서, 화려하게 개발된 항저우 서호와는 또 다른 한적하고 고매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소동파는 후이저우를 비롯한 유배 생활과 관련해 이런 명문을 남겼다. "마음은 이미 재가된 나무요, 몸은 줄을 매지 않은 배와 같네(心似已灰之木,身如不系之舟); 내게 평생 이룬 것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황저우 후이저우 단저우 라고 답하리(問汝平生功業,黃州惠州儋州)." 다시 리쯔 얘기로 돌아와서, 본초강목(本草綱目)에 따르면 리쯔는 간을 보호하고 보혈, 진통의 기능이 있다하여 한약재로 쓰이기도 했다. 현대적 성분 분석에 의하면 포도당, 자당과 단백질, 지방, 각종 비타민 및 엽산 등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어 신진대사 촉진이나 불면증 예방, 노화 방지, 피부 미용에도 좋다고 하며, 다만 당분이 많아 당뇨 환자 등은 섭취에 유의해야 한다고 한다. 리쯔를 언뜻 보면 다 비슷비슷하게 보이지만 사실 그 종류가 10가지가 넘는다. 일반적으로 여름 출하 시기에는 가격이 1kg에 약 100위안(한화 약 2만 원) 정도 하지만, 희귀하거나 우수한 품종의 경우에는 고급 백화점에서 한 알당 100위안 내외에 판매되기도 한다, 광둥 쩡청(增城)의 시위안(西園) 꽈뤼(掛綠) 종은 2002년 경매에서 한 알에 55만 위안(한화 약 1억 원)에 판매되어 기네스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리쯔 문화제와 교역시장 후이저우시는 리쯔의 주요 산지 중 하나로, 기존의 1차 산업으로서의 생산 모식을 뛰어넘어 제조업과 관광업으로의 확대를 꾀하고 있다. 관광객들이 리쯔 생산지를 직접 방문해 수확하고 즐기는 여행 서비스가 인기를 얻고 있으며, 시 정부 주최 행사에 리쯔를 원료로 한 아이스와인이나 브랜디가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500ml 한 병을 얻기 위해 최소 50kg 이상의 리쯔가 들어간다는 도수 70도의 백주는 2천 위안(한화 약 40만 원)이라는 가격에 판매되기도 한다. 후이저우시는 작년 6월에는 지역 최대 규모의 RCEP 리쯔 상품교역센터를 설립하고, 원과(原果) 외에 가공식품과 음료, 주류 등으로 상품 판매와 수출을 확대코자 하고 있다. 리쯔로 만든 와인과 백주 현재의 후이저우는 인구 600만 명 규모로 홍콩, 마카오, 광둥을 잇는 중추 도시이자 지속가능한 발전을 지향하는 환경과 교육의 도시이다. 과거 랴오중카이(廖仲愷), 예팅(葉挺) 등 수재들을 많이 배출했고, 요즘도 중국의 수능인 까오카오(高考)에서 광둥성 지역의 수석이 자주 배출된다. 또한 중국내 경제가 가장 발달한 광둥성에서도 최근 가장 빠르게 발전하는 도시이자, 중국 남부 지역 중 유일하게 우리 기업들이 다수 진출한 한중산업단지(中韓産業園)가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한중산업단지 입구 리쯔를 하루에 300알도 먹을 수 있다던 소동파. 그와 조운이 거닐고 생활하던 후이저우 서호. 역사는 흐름을 따라 탈태와 변모를 거듭한다. 본인이 사랑하던 리쯔가 1300년이 지난 지금 후이저우 등지에서 대량 생산되어 중국과 여러 나라 사람들이 즐기는 과일이자 지역 경제 발전의 한 아이템이 된 것을 양귀비는 알런지? 디자인 : 서현중
지난 4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5주년 기념일이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조국 땅이 아닌 상하이(上海)에 세워진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땅에서도 일제의 핍박과 추적을 피해 항저우(杭州), 전쟝(鎭江), 창샤(長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 치쟝(綦江), 충칭(重慶) 등 여러 곳을 전전해야 했다. 임시정부가 거쳐 간 중국 현지를 직접 가보거나 관련 기록이나 문헌 자료를 보면 그날의 신고(辛苦)가 생생하게 다가온다. 어느 한 날, 어느 한 곳 어렵지 않은 시간과 장소가 없었을 테지만, 상하이나 충칭에 비해 베트남과 인접한 먼 지역인 광시(廣西) 류저우(柳州)에서의 고행과 분투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류저우 임시정부 복원 청사, 뒤쪽으로 위펑샨이 보인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커우(虹口) 공원 폭탄 투척 의거 이후 일제는 프랑스 조계지에서까지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인사들을 체포했으며, 임시정부는 부득이 상하이를 떠나야만 했다. 이후 여러 곳으로 거쳐 1938년 7월에는 광둥성 광저우로 이동, 정착코자 하였으나, 일본군의 공세가 심해짐에 따라 그곳에서도 오래 체류하지 못하고 떠나게 된다.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들은 사정상 세 그룹으로 나누어졌고, 이동녕, 이시영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과 독립운동 청년들, 김구 선생의 80세 노모와 두 아들 등 가족까지 포함한 약 120명의 일행은 함께 류저우로 이동하게 된다. 9월 19일 광저우를 출발한 요인과 가족들은 기차와 배, 도보와 자동차 등을 번갈아 가며 11월 30일에야 류저우에 도착한다. 지금은 차로 몇 시간밖에 안 걸리는 거리를 선상 생활 20여 일을 포함하여 장기간 어렵게도 이동한 것이다. 포샨(佛山)에서 기차를 탈 때는 일본군이 기차역이 가까운 시내까지 진격하는 긴박한 상황이 있었고, 샨수이(山水)라는 곳에서부터 물길을 따라 이동할 때는 돛단배나 예인선을 타고 이동하였다. 밤에는 먹을 것을 찾아 배에서 내려 뭍에 올라야 했고, 남녀노소가 비좁은 배 안에서 함께 밥을 해 먹고 몸을 움츠리며 잠을 청해야 했다. 늦가을에 강에 수량이 줄어 여울을 만나게 되면 배가 멈춰 모두 내려서 사람의 힘으로 배를 끌어야 했다. 당시 고난의 이야기는 그 고행길에 함께 한 임시정부 요인 양우조 선생과 부인이 갓 태어난 큰 딸의 이름을 따서 8년간 기록한 '제시의 일기' 속에 생생히 담겨 있다. 류저우에 도착한 날도 모두 지쳐서 짐을 옮기고 있는데 일본군의 공습으로 인한 대피경보가 울렸다고 전한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가 류저우 떠나기 전 현지 인사들과의 기념 촬영 및 군인 위문 유예대회 가상화 (자료 출처 : 국립서울현충원 블로그) 류저우는 당시 일본군 공습이 수시로 있었고 인근 광둥(廣東)과 후난(湖南) 등지에서 온 현지 피난민들로 넘쳐났다. 재정 문제를 비롯해 임시정부 상황도 녹록지 않았지만,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들은 적극적인 대외 활동을 전개했다. 청년 독립운동가들은 1939년 2월에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를 결성하였다. 당시 피난민이 많이 유입되어 인구가 팽창한 류저우에는 극장이나 공원에서의 공연이 느는 추세였는데, 현지 항전단체들과 연합하여 연극이나 노래 등 문화를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34명의 대원들은 청색의 미군식 군복에 배 모양의 모자를 쓰고 몸에 원형 리본을 달았다고 한다. 주로 시내 류허우 공원(柳侯公園)에서 모여 회의도 하고 대중을 대상으로 한 공연 활동도 하였다. 류허우츠와 류허우공원 1939년 3월 1일에는 3.1 운동 20주년 기념식을 류허우 공원 인근 롱청중학(龍城中學)에서 개최하였다. 임시정부 요인들과 류저우 각계 대표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원들은 무대에서 애국가를 제창하였고 이어 한국독립선언 20주년 기념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역만리의 고난 속에서도 3.1 운동의 뜻을 기리고 조국을 되찾기 위한 의지를 표출한 것이다. 저녁에는 열띤 호응 속에 우리 민요 가창 등 감동적인 기념 공연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또한, 3월 4일과 5일에는 항일전쟁에서 부상당한 중국 군인들을 위문하고 모금하기 위한 공연인 유예대회(遊藝大會)를 개최하였고, 먼 타지에서 온 이들의 헌신적 노력과 봉사는 현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이들의 활발한 활동들은 침체되어 있던 임시정부 행보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류저우일보(柳州日報) 같은 현지 언론들이 100여 차례 넘게 크게 보도하는 등 중국 내 지원 여론 형성을 이루어 내었다. 임시정부는 6개월여의 체류를 마치고 1939년 4월 류저우 시민들의 아쉬움과 열렬한 환송 속에 다시 충칭으로의 이동 길에 오른다. 1930년대 류장 포구 풍경(위) 및 최근 류저우 시내와 류장 사진(아래) (출처 : 바이두) 현재의 류저우(柳州)는 같은 광시성의 수도인 난닝(南寧)이나 우리에게도 익숙한 관광지인 구이린(桂林, 계림)에 비해 잘 안 알려진 지역이다. 신중국 성립 이후 남부 지역 중공업 발전에 핵심 지역이었고, 중-베트남 전쟁의 주요 보급기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현재도 해저 케이블이나 중장비, 기계 설비 등 공업이 발달해 있으며, 중국 내 5대 자동차 생산지이다. 주로 작은 크기의 전기차를 많이 생산한다. 지리적 위치상 아세안 지역과의 교역도 활발한 지역이다. 중국 젊은이들에게는 최근 들어 마라탕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는 음식인 뤄스펀(柳州螺螄粉)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뤄스펀은 다슬기 등을 매운 국물에 넣은 국수의 일종으로 눅눅하게 삭은 냄새와 중독성 강한 매운맛이 특징이다. 류저우 뤄스펀 과거에는 목관(木棺) 제작으로 유명했다. 중국인들이 흔히 쓰는 말 중에 '먹는 것은 광저우에서, 입는 것은 쑤저우에서, 노는 것은 항저우에서, 죽는 것은 류저우에서(吃在廣州, 穿在蘇州, 玩在杭州, 死在柳州)'라는 말이 있다. 각각 광저우의 음식, 쑤저우의 비단, 항저우의 경치, 류저우의 목관을 찬양하는 말이다. 이 말은 당송팔대가인 류종원(柳宗元)과 관련이 있다. 한유(韓愈)와 함께 한류(韓柳)라고 불리며 당나라 때 고문(古文) 운동으로 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류종원은 815년 폄직 되어 류저우 자사(柳州刺史)로 부임한다. 장안(長安)을 떠나 3개월 만에 류저우에 도착한 그는 4년여간 낙후되었던 지역에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작물을 심게 하여 기근을 해결하였고, 학당을 세워 교육을 진흥하였으며, 여성 노비들을 사면하는 등 선정(善政)을 폈다. 백성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았음에도 자신에 대한 복권 명령이 난 직후에 47세의 나이로 타지 류저우에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다. 부친이 현지에서 남목(楠木)으로 관을 짜서 아들 시신을 고향인 샨시(山西)까지 몇 개월에 거쳐 운반하였는데, 시신이 산 사람처럼 그대로였으며 그 후 류저우 목관이 유명해졌다고 한다. 사실 류저우에서 류종원의 영향은 현재까지도 크다. 시내에 류종원을 기리기 위해 사당인 류후사(柳侯祠, 휴허우츠)가 당나라 때 건립되었고, 이어 류허우공원(柳侯公園)도 청나라 때 만들어졌다. 임시정부 청년공작대가 문화공연 등 활동을 하던 주무대도 이 류허우공원이다. 3.1 운동 20주년 기념식을 거행한 롱청중학(龍城中學)의 롱청은 류저우의 별칭으로 류저우를 굽이도는 류강(柳江)이 용의 모양과 같다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사실 류저우라는 명칭도 류강에서 유래되었는데, 강가에 버드나무가 많아 류강이라고 불렸고 시내를 흐르는 이 강의 이름이 도시의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류종원은 본인의 시(種柳戱題)에서 '류주에 류자사가 있어, 버드나무인 류나무를 류강 강변에 심었네(柳州柳刺史, 種柳柳江邊)'라며 재미있게 묘사한다. 류 씨 성의 류종원이 폄적되어 류저우로 와서 벼슬을 하면서 류저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류유주(柳柳州, 류류저우) 이기도 하다. 위펑샨과 류싼제 류저우에 체류하게 된 임시정부 사람들은 잦은 일본군 공습 때에는 사무실 부근에 있는 위펑샨(魚峰山)의 동굴로 피신하고는 하였다고 한다. 현재 복원된 임시정부 청사의 지근거리에 위치한 위펑샨은 88m 높이의 작은 동산으로 구이린(계림) 사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종 모양의 형태를 띠고 있다. 지금은 관광지가 된 위펑샨에는 유명한 전설이 있는데 노래의 신선(歌仙)으로 불리는 류 씨네 셋째 딸, 류싼제(劉三姐) 얘기다. 전설은 여러 버전이 있는데 대체로 당나라 때 좡족(壯族)으로 태어난 류싼제가 부모를 잃고 그를 탐하는 지역 부호를 피해 위펑샨에 들어와 살다 물고기를 타고 승천했다는 내용이다. 그녀의 착한 마음씨와 아름다운 외모, 낭랑한 목청과 애절한 노래가락은 광시(廣西) 외에 링난(嶺南) 지역 전반의 사랑을 받으며 민간 전설로 자리 잡고 있다. 일찍이 영화로 제작되기도 하였으며 최근에는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이 '인샹-류산제(印象劉三姐)'라는 제목의 대형 음악극으로 제작하여 공연키도 했다. 주상하이문화원 임시정부 기념 전시 및 공연 당시 류저우에서의 임시정부 사람들의 고난과 활약상은 한중 양국 정부와 현지 기관들의 협조로 2004년 시내에 복원된 류저우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大韓民國臨時政府抗日鬪爭活動陳列舘)에 살아남아 그 유지를 전하고 있다. 상하이 주재 한국문화원에서는 지난달인 3월 말부터 5월 초까지 '제시의 일기'를 비롯한 자료 전시와 각종 공연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5주년을 기념하는 문화행사를 중국 현지인과 우리 교민들을 대상으로 개최하고 있다. 나라 잃은 슬픔을 품에 안고 멀고 먼 낯선 타향 땅에서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전통의 민요와 춤을 통해 우리 문화를 알리고 해외의 힘까지 모아 조국의 자랑스러운 독립을 쟁취코자 했던 선조들의 뜻을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즈음하여 함께 되새겨 본다. 디자인 : 장지혜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가라(讀萬卷書, 行萬里路)'고 하였던가? 장자(莊子)의 큰 새(鵬)는 아홉 개의 만 리(萬里)를 날아올랐다.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가장 많이 쓴 두 자(字) 시어(詩語)는 '만리(萬里)'였다. 만리길은 무한한 상상(想像)의 영역인 동시에 현실이자 생활이었다. 20여 년간 중국 땅 위에서 일하고 살면서 시간과 공간의 들어가고 나옴 중에서 마주했던 같음과 다름을 지역과 사람, 문화로 쪼개고 다듬어 '종횡만리, 성시인문(縱橫萬里 城市人文)'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나누고자 한다. 해외에서 우리 한식에 대한 관심이 높다. 얼마 전에는 라면 수출액이 사상 최고액을 기록하였으며 올해 10억 달러 돌파가 예상된다는 뉴스가 있었다. 수출 대상국은 미국과 중국이 1, 2위를 차지했다. 라면 외에 중국 내에서 비빔밥, 삼계탕, 떡볶이 같은 한식과 과자, 식품류가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국내에서는 MZ세대를 중심으로 마라탕(麻辣燙)과 탕후루(糖葫蘆) 같은 새로운 중국 음식을 많이 찾고 있다. 위생 문제 같은 지적에도 매콤한 중독성 맛에 인기가 계속되는 마라탕, 중국에서도 인기 음식일까? 바이두(百度)의 중국 내 배달음식 검색량 분석에 의하면, 마라탕이 37%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식 찜닭덮밥(黃燜鷄米飯)이 23%로 2위, 농촌식 고기볶음(農家小炒肉)이 9%로 3위, 어향 고기요리(魚香肉絲)가 6%로 그 뒤를 잇는다. 어메이샨(峨眉山)과 러샨 대불(乐山大佛대불) (사진 출처=바이두) 마라탕의 고향은 짐작할 수 있듯이 매운맛의 본고장 쓰촨(四川)이다. 쓰촨 중에서도 중심지인 청뚜(成都)에서 140km 남쪽에 있는 도시 러샨(樂山)이다. 러샨시는 불교 성지인 어메이샨(峨眉山)과 71미터 높이의 러샨대불(樂山大佛)로 유명하다. 한때 고도 성장에 따른 오염 문제가 있었지만 원래 물 좋고 산 좋은 지역이다. 쓰촨은 파촉(巴蜀) 문화의 지역으로 이곳 사람들은 낙관적 인생관으로 술과 담배, 차를 즐기며, 수려한 풍광과 문학과 예술, 역사의 고장이기도 하다. 당초 마라탕은 강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에 매운 향신료를 넣고 먹는 마오차이(冒菜)에서 비롯되었는데 한기(寒氣)나 습기(濕氣)를 없애는 효능과 더불어 민강(岷江)을 따라 주변으로 퍼지게 되었으며, 이후 동북(東北) 지역에서의 변형을 거쳐 오늘날의 마라탕으로 진화하게 되었다고 한다. 러샨(乐山) 의 꼬치식 마라탕(串串香) (사진 출처=바이두) 마(麻)는 얼얼하다, 라(辣)는 맵다는 뜻이며, 탕(燙)은 국물 탕(湯)이 아닌 뜨겁다 혹은 뜨거운 물에 살짝 담가 익힌다는 의미이다. 화초(花椒), 정향(丁香), 팔각(八角), 계피(桂皮) 등 10가지 향신료가 들어간다. 러샨시에는 원조 마라탕 집이 많은데, 우리가 먹는 마라탕과는 조금 다르게 꼬치에 끼운 고기나 두부 등을 매운 국물에 데쳐 먹는 형태(串串香)다. 순서대로 보자면 원조 마라탕에서 훠궈(火鍋)로 파생되었다 하겠다. 매운맛은 원래 그에 익숙하지 않은 중국 남부 지역에서도 유행이었다. 10여 년 전 홍콩 근무할 때 한식 떡볶이와 치맥이 한류 드라마 바람을 타고 현지 젊은 층에게 갑자기 인기를 얻었는데, 좋아하는 이유를 물으니 후텁지근한 날 퇴근해 매운 음식을 먹고 땀을 내면 직장 스트레스가 다 해소된다고 하였다. 최근 동남아 지역에서의 우리 매운맛 라면 인기의 비결일 것이다. 러샨 바로 옆에는 러샨시에서 분리되어 나온 메이샨(眉山) 시가 있다. '천하의 쓰촨요리, 맛의 중심은 메이샨(天下川菜, 味在眉山)'이라고 한다. 옛 이름이 메이저우(眉州)인 이곳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 삼부자(三父子)의 고향이자, 송(宋) 나라 때 880여 명의 진사를 배출했다 하여 '팔백진사(八百進士)'의 고을, '인문제일의 고장(人文第一州)'으로도 불린다. 메이저우 시민들의 소식(소동파, 蘇東坡)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은 유별나서 그가 살던 지역의 구 명칭을 동파구(東坡區)로 하였고 시 홍보 로고에도 그의 초상화를 쓰고 있다. (좌) 소동파를 넣은 메이샨시 홍보 로고, (우) 소순, 소동파, 소철이 태어난 곳이자 그들을 기념하는 삼소사(三苏祠) (사진 출처=바이두) 중국 전역에 100여 개의 체인점을 거느린 대형 사천요리 음식점인 '메이저우동포(眉州東坡酒樓)' 식당은 우리에게 익숙한 동파육(東坡肉) 등 소동파가 발명했거나 그와 관련 있는 요리 메뉴 여러 가지에 그의 이름을 붙여 선보이며 인기를 얻고 있다. 소동파는 대문호(大文豪)였지만 관료이자 서예가, 화가, 미식가(吃貨, 츠훠)이자 음식발명가로도 유명한데, 중국에서 동파육 못지않게 인기 있는 요리인 양고기탕 - '양셰즈(羊蝎子)'도 그의 발명품이다. 양시에즈(羊蝎子) (사진 출처=바이두) 이는 그가 음식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던 이유도 있지만, 지방 관리나 유배 시절 주변의 빈궁한 주민들을 보고 그들을 위해 못 먹고 버리던 식재료를 먹기 쉽게 조리법을 연구 개발했기 때문이다. 음식뿐 아니라 뤄푸춘(羅富春, 구이지우(桂酒) 등 4종의 술을 직접 양조하기도 했다. 중국 음식은 대개 4대 요리, 8대 요리로 분류된다. 오래전에는 쌀과 밀의 산지를 기준으로 남(南)과 북(北)의 차이만 있었으나 경제가 발전하고 물산이 풍부해지는 송나라 때부터 원, 명, 청과 민국을 지나며 소위 음식 계보(菜系)가 형성되어 4대 요리는 쓰촨요리(川菜), 산둥요리(魯菜), 광둥요리(粵菜), 장쑤요리(蘇菜 또는 淮陽菜), 8대 요리는 4대 요리에 푸젠요리(閩菜), 저쟝요리(浙菜), 후난요리(湘菜), 안훼이요리(徽菜)를 덧붙인다. 그중 중국 사람들에게 가장 선호하는 요리 1, 2위를 꼽으라면 쓰촨요리와 광둥요리일 것이다. 웨차이(粵菜)라고도 불리는 광둥요리는 하나의 음식 계파 같지만 사실 워낙 지역도 넓고 물산이 풍부하기 때문에 같은 광둥요리라도 다시 4가지로 나뉜다. 광저우를 중심으로 한 정통적 광푸(廣府) 요리, 해산물이 풍부한 동남부 해변가의 챠오샨(潮汕) 요리, 동북부 이주정착민 중심의 커쟈(客家) 요리, 서부 지역의 웨시(粵西) 요리 등으로 나뉜다. 실제로 접해보면 같은 광둥요리라 하더라도 주요 요리나 맛 면에서 독특한 개성들을 갖고 있다. 광둥 음식에서 빠질 수 없는 지역이 있다. 슌더(順德)이다. 슌더는 포샨시(佛山市)의 구(區) 중의 하나에 불과하지만, 중국 내에서는 어떤 면에서는 포샨보다 더 알려져 있다. 280만 명이 거주하는 지역인데, 광둥과 중국 전역은 물론 홍콩과 미국, 캐나다, 호주, 유럽에까지 진출해 활동하는 다수의 실력파 셰프들이 이곳 출신이다. '광저우에서 음식을 먹으면, 그 음식 조리사는 펑청(슌더의 별칭)에서 온 사람이다'라는 말(食在廣州, 廚出鳳城)이 오래전부터 회자되기도 한다. 슌더에는 8천 개의 식음료 관련 업체가 있고, 직업 조리사가 8만 명이나 된다. 전체 주민 30명 중에 1명꼴로 전문 직업 요리사가 있는 셈이다. 시내에는 곳곳에 요리사 양성 학원이 보인다. (좌) 유네스코 미식의 도시 지정 기념 관련 슌더 거리행사, (우) 슌더 요리학원 홍보 사진 (사진 출처=바이두) 중국 CCTV를 통해 인기리에 방영된 '중국 미식 탐구(舌尖上的中國)' 프로그램이나 미국 내셔널지오그래픽 등 여러 영상 채널을 통해 슌더 출신 요리사들이 오이에 칼집을 고르게 내어 끊어지지 않고 아코디언처럼 만드는 장면, 기예에 가까울 정도의 야채와 과일의 카빙 실력을 선보이는 장면 등이 소개되기도 했다. 사실 전문 직업인뿐 아니라 슌더의 일반 가정집을 방문해 보면 다른 지역에 비해 요리가 일상화되어 있고, 남녀노소 모두 웬만한 요리 몇 가지쯤은 쉽게 만들어 내놓는 경우가 많다. 어려서부터 성장 과정 중 부모로부터 자연스럽게 식재료를 사고, 준비하고, 요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슌더 셰프들의 오이 칼 솜씨 (사진 출처=바이두) 이런 문화가 형성된 원인에는 여러 분석이 있다. 먼저, 슌더(順德)라는 지명처럼 '하늘에 순응하고 덕을 밝힌다(順天明德)'와 같은 성실한 지역 사람들의 품성이 어려운 과정을 이겨내야 하는 조리장 수련 과정에 맞는다고 분석한다. 또한, 아열대성 지역에서 나는 풍부한 곡물과 야채, 과일, 육류 및 가까운 바다에서의 해산물 등 풍부한 식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고, 지리적 위치상 일찍이 홍콩 등 해외와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물산이나 음식을 접촉하고 또한 요리사로서 홍콩이나 해외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던 것 또한 원인으로 들 수 있겠다. 슌더는 2014년 유네스코(UNESCO)의 '세계 미식의 도시(世界美食之都 - City of Gastronomy, Member of the UNESCO Creative Cities)'로 지정되었다. 도시를 대상으로 함에도 포샨시가 아닌 슌더구가 지정된 것이다. 2023년 말까지 지정된 50여 개의 세계 각국 미식 도시 중 중국에서는 청뚜(成都, 2010년), 슌더(順德, 2014년), 마카오(澳門, 2017년), 양저우(揚州, 2019년), 후이안(淮安, 2021년), 챠오저우(潮州, 2023년) 등 6개 지역이 올랐다. 우리나라에서는 전주와 강릉이 지정된 바 있다. 최근 들어 중국에서는 한식의 세계화 같은 중국 음식의 세계 시장 홍보와 진출을 적극 장려 중이다. 음식을 통해 새로운 문화도 접하며 그 속의 역사와 가치관도 이해할 수 있는 동시에 경제적 부의 창출도 이루게 된다. 국내에 다양한 세계 음식이 소개되는 동시에 우리 음식이 중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계속 소개되도록 해야 하는 이유다. 디자인 : 서현중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가라(讀萬卷書, 行萬里路)'고 하였던가? 장자(莊子)의 큰 새(鵬)는 아홉 개의 만 리(萬里)를 날아올랐다.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가장 많이 쓴 두 자(字) 시어(詩語)는 '만리(萬里)'였다. 만리길은 무한한 상상(想像)의 영역인 동시에 현실이자 생활이었다. 20여 년간 중국 땅 위에서 일하고 살면서 시간과 공간의 들어가고 나옴 중에서 마주했던 같음과 다름을 지역과 사람, 문화로 쪼개고 다듬어 '종횡만리, 성시인문(縱橫萬里 城市人文)'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나누고자 한다. 3월 하순에 접어들면서 우리 주변에 봄기운이 완연하다. 봄이라 하면 떠오르는 것은 단연 꽃일 것이다. 봄볕과 함께 이제는 주위에 탐스러운 꽃봉오리들과 활짝 개화한 꽃, 기분 좋게 향긋한 꽃내음도 자주 접하게 된다. 여의도 봄꽃축제, 광양 매화축제, 소백산 철쭉제, 진해 군항제, 우리나라 곳곳에서 꽃 축제가 펼쳐진다. 중국 또한 꽃 종류도 많고 역사적으로 꽃과 관련된 이야기도 많다. 최근 중국의 한 전문사이트(國學寶典)에 따르면, 당나라 때 시를 모아놓은 전당시(全唐詩) 9백 권을 분석한 결과 가장 많이 나온 한자는 '사람 인(人)'으로 21,022회, 그에 이어 '꽃 화(花)'가 11,355차례 등장한다고 한다. 자주 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술 주(酒)'의 4,994회보다 두 배 이상 많다. 그만큼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꽃에 대한 관심과 감정이 많다는 반증이겠다. 오죽하면 이백(李白)은 명시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서 '복숭아꽃, 오얏꽃 핀 향기 나는 정원에 모여서', 시간이 아까워 '옛사람들이 봄밤에 촛불까지 켜고' 꽃구경 놀이를 한 이유가 있다고 하였을까. 그런 경향은 세월이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아서, 실제로 중국에 살아보면 주변에서 봄이 되어 꽃구경 나들이를 하는 이웃들을 쉽게 만나게 된다. 중국에 오래전부터 꽃의 도시라는 뜻의 '화청(花城)'이라고 불리는 도시가 있다. 중국 남부 광둥성의 성도인 광저우(廣州)다. 중국 내에서 3대 도시를 꼽으라 하면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광저우일 것이다. 각각 역사, 문화, 사회, 경제적으로 중국의 북쪽, 동쪽, 남쪽인 화베이(華北), 화동(華東), 화난(華南)을 대표한다. 중국 저명 인문학자인 이중톈(易中天) 교수는 저서 '중국 도시 이야기(讀城記)'에서 베이징은 성(北京城), 상하이는 탄(上海灘), 광저우는 시(廣州市)라고 각각 도성(城), 해변(灘), 시장(市)의 한 글자로 도시의 특성을 압축하여 개괄하였다. 사람이 많이 모이고 상업이 발달한 의미의 시(市) 자 한 글자로 광저우를 표현한 것이다. 한국인들에게 광저우는 상대적으로 익숙지 않은 도시이다. 베이징이나 상하이, 심지어 시안(西安)이나 항저우(杭州), 칭다오(靑島), 선전(深玔)보다도 낯선 경우가 많고, 거주하거나 방문한 경우가 아니라면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이나 영어 이름인 캔톤(canton)을 들어본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중국 내에서 정치경제, 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광저우는 과거와 현재 매우 영향력이 크고 중요한 도시이다. 광저우를 중심으로 한 광둥성은 중국의 30여 개 성(省) 중에서 인구가 가장 많고 경제가 가장 발달한 지역이다. 2022년 말 현재 인구는 1억 2,656만 명이다. 광둥성의 경제 규모는 1989년 이래로, 대외무역액은 1986년 이래로 30여 년 넘게 줄곧 중국 내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 발전의 기관차(火車頭)이자 선도양(領頭羊)이라고 불리는 이유이다. 대외교류와 개혁개방의 선구 지역이자 중국의 남대문이라 불리기도 한다. 양의 도시(羊城, 양청)라는 별칭도 있는데, 주(周) 나라 때 광저우 일대에 가뭄과 기근이 들었을 때 남쪽 바다에서 신선이 다섯 마리의 양들을 이끌고 나타나 백성들에게 벼 이삭을 나눠주어 기근을 해결케 하고 사라졌고 양들은 석상으로 변해 남게 되었다고 고서(廣州府誌)는 전설을 전한다. 이 이야기는 우양카이타이(五羊開泰)라는 단어로 축약되었고 실제 석상으로 조각되어 시내에 광저우를 상징하는 조형물로 서있다. 사실 우양카이타이(五羊開泰)라는 말은 주역의 금, 목, 수, 화, 토 5가지 양기(陽氣)가 모두 모여 길함과 번영을 기원하는 우양카이타이(五陽開泰)에서 온 말로 양(陽)과 발음이 같으면서 친근한 동물 양(羊)으로 단어를 대체하여 쓰게 된 것이다. 현재에도 광저우는 중국의 대학생들이 졸업 후 취업 및 정주에 가장 많이 선호하는 지역 중 하나이기도 하다. 조사에 따르면 베이징, 선전, 상하이 등과 함께 선호도 최상위권에 속한다. '꽃의 도시(花城)'라는 별칭답게 광저우 시내 도로변이나 공원에서는 1년 내내 매우 각양각색의 색깔과 특이한 모양의 이국적인 꽃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시내를 30분쯤 산책하면서 유심히 세어보면 수십 종의 꽃들과 쉽사리 마주하고는 한다. 조사에 따르면 서울의 남산과 유사한 광저우 시내의 바이윈산(白雲山) 공원에만 9백여 종의 꽃이 핀다고 한다. 이는 아열대성 기후라 꽃이 많을 수밖에 없는 특성도 있지만 일찍이 해외와의 교역 등으로 새로운 품종도 많이 들어오게 되었고 또한 오래전부터 꽃을 감상하고 선물하거나 사서 집을 치장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는 것에서도 기인한다. 송(宋) 나라 때 기록에 의하면 음력설을 앞두고 감과 귤, 잣나무가지를 함께 꽂아 집에 장식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잣(柏, 바이), 감(柿, 스), 귤(橘, 쥐)의 중국어 발음이 '모든 일이 길하다'라는 백사길(百事吉. 바이스지)의 발음과 유사하여 한 해 모든 일이 다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오래전부터 같은 음의 다른 한자를 차용하여 활용하는 우의(寓意)를 선호하는 중국인들의 풍속에서 비롯되었다. 지금도 음력설 전후에 유난히 많은 귤이 탐스럽게 많이 달린 화분을 서로 선물하기도 한다. 광둥성은 안사(安史)의 난을 비롯하여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중원(中原) 지역 인구가 이주하여 정착한 객가(客家)를 비롯한 이주민들의 정착지이기도 하여, 아직도 여러 지역에서 유교적 관습과 생활방식을 비롯한 오래된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요즘도 시청과 구청 등 각급 지방정부는 때가 되면 대로변이나 빌딩 사이, 공원 등 시내 곳곳의 꽃을 교체하거나 가꾼다. 일반 서민 가정집들도 부근 꽃가게나 길거리 상인들에게 사서 정기적으로 꽃을 꽂아놓거나 장식하는 집이 많다. 매년 2월경에는 시내에 화스(花市)라 불리는 꽃시장이 지역별로 곳곳에 열린다. 그간 코로나로 계속 연기되었던 꽃시장이 지난달 열려 구별로 독특한 꽃들을 선보였다고 SNS를 통해 전해지기도 했다. 환갑이 다 되어 유배되어 광저우 인근 후이저우(惠州)에서 생활했던 소동파(蘇軾)는 '봄날 밤 십여분은 천금과도 같이 귀한 것'(春宵一刻値千金)이라고 하기도 하고, 배꽃이 핀 아름다운 풍광을 읊으면서 '인생에서 봄날을 몇 번이나 더 볼까나'(人生看得幾淸明)라고 탄식하기도 하였다. 얼마 전인 3월 21일은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 시의 날이었다. 봄기운이 완연할 때 꽃 나들이를 하거나 오랜만에 꽃시장에 나가 사 온 꽃으로 집안을 꾸며 한 권 시집과 함께 천금 가치의 봄날 정취를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디자인 : 성재은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가라(讀萬卷書, 行萬里路)'고 하였던가? 장자(莊子)의 큰 새(鵬)는 아홉 개의 만 리(萬里)를 날아올랐다.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가장 많이 쓴 두 자(字) 시어(詩語)는 '만리(萬里)'였다. 만리길은 무한한 상상(想像)의 영역인 동시에 현실이자 생활이었다. 20여 년간 중국 땅 위에서 일하고 살면서 시간과 공간의 들어가고 나옴 중에서 마주했던 같음과 다름을 지역과 사람, 문화로 쪼개고 다듬어 '종횡만리, 성시인문(縱橫萬里 城市人文)'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나누고자 한다. 국내에서는 최근 서울, 부산, 충청권 등 지역의 메가시티 논의가 뜨겁다. 중국에서도 몇 년 전부터 도시 간 통합 및 메가시티 형태로의 지역 발전을 꾀하자는 논의가 있어왔고 현재도 진행형이다. 대표적 사례가 광둥성, 홍콩, 마카오를 연결하는 광홍마 프로젝트이다. 중국어로는 '웨강아오 따완취(粤港奧大灣區)' 규획이라고 부르지만, 우리의 부울경 메가시티 명칭처럼 광홍마 프로젝트라고 부르는 게 쉬울 듯하다. 이 프로젝트는 중국 개혁개방의 선도기지로서 30여 년간 중국 내 경제 규모 1위를 줄곧 유지해 온 광둥(廣東) 지역과 아시아의 진주(珍珠)라 불리며 동서양 문화를 통합해 경제 발전을 이룩한 홍콩 및 마카오를 결합하여 세계와 지역 경제에서 중국이 주도적 역할을 해 나가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광둥성에서는 소속 21개 대형 시(市) 중에서 광저우(廣州), 선전(深圳), 주하이(珠海), 포샨(佛山), 후이저우(惠州), 둥관(東莞), 중산(中山), 쟝먼(江門), 짜오칭(肇慶) 등 9개 주요 시가 참여한다. 중국 중앙정부가 직접 결정하여 추진하고 있는 국가 전략으로 경제 사회적 목적도 있지만 정치적으로도 과거 서방 제국주의 침략에 유린당한 역사에서 탈피하여 영국과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홍콩과 마카오를 중국 본토와 완전체화하면서 남부 지역의 전면적 통합을 이루고 중국의 자부심을 보여준다는 목적도 겸하고 있다. 광홍마 메가베이가 광둥, 홍콩, 마카오의 세 곳의 결합이라 한다면, 난샤(南沙), 첸하이(前海), 헝친(橫琴)은 각각을 연결하면서 선구적이자 실험적으로 융합과 발전을 이루어 나가는 삼두마차와 같은 특구이다.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주강과 그 하구를 중심으로 놓았을 때, 가운데이자 북쪽에는 광저우의 난샤가, 오른편에는 홍콩에 인접하여 첸하이가, 왼편에는 마카오에 붙은 헝친이 자리하고 있다. 세 곳은 선도, 융합, 실험이라는 공통점과 함께 명칭이나 역할면에서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광홍마 메가베이의 개념은 오래전부터 학술계를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었다. 홍콩과기대(香港科技大) 우쟈웨이(Chia-Wei Woo) 총장이 1994년 당시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을 언급하며 주강 삼각주 지역을 이처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016년 3월 중국 정부는 제13차 5개년 규획요강을 발표하면서 광홍마 메가 프로젝트의 탄생을 공식화하였다. 2017년 3월에는 '광홍마 메가베이(粤港奧大灣區, 웨강아오따완취)'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국무원의 정부업무보고(政府工作報告)에 등장하였다. 이어 7월 1일 홍콩 반환 20주년 계기로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취임 후 처음 홍콩을 방문하여 캐리 람(林鄭月娥) 홍콩 행정수반, 페르난도 추이(崔世安) 마카오 행정수반, 마싱루이(馬興瑞) 광둥성 성장 등이 임석한 가운데 광홍마 메가 프로젝트 추진 협의에 서명하고 본격 추진하게 된다. 2019년 2월에는 보다 구체화된 제도적인 뒷받침을 위하여 중국 공산당 중앙과 국무원이 구체 계획을 발표하였는데, 광홍마 지역을 활력이 넘치는 세계 최고 수준의 도시군이자 국제 과학기술의 창업과 혁신의 새로운 센터로 건설하여, 거주와 기업 경영 및 관광에 있어 최고 수준의 모범 생활권으로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2022년 기준 광홍마 메가베이 지역의 전체 GDP는 13조 인민폐(한화 약 2,500조 원)에 달했으며, 전자, 통신, 신에너지, 자동차, 드론, 로봇, 석유화학, 섬유와 패션 분야뿐 아니라 식음료와 각종 가공업 분야에서도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이 지역 면적은 약 5만 6,000평방미터, 인구는 약 7,000만 명으로 영국과 비교한다면 1/4 정도 면적에 비슷한 규모의 인구수를 갖고 있다. 중국 전체로 보면 면적으로는 1%에 불과하지만 GDP로는 12% 정도를 분담한다. 이 수치는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 GDP의 두 배에 달하는 규모이다. 2018년 10월에는 상징적인 인프라 건설 결과로 홍콩, 주하이, 마카오를 잇는 강주아오(港珠奧) 대교가 완성되었다. 6.7킬로미터의 해저터널을 포함해 총연장 55킬로미터에 달하며 광홍마 메가베이를 중심부를 바다 건너 연결하였다. 이어 그 북쪽 위치에서 동서(東西)로 선전과 중산 사이 바다를 잇는 24킬로미터 길이의 선중통도(深中通道)도 금년 중 개통을 앞두고 있다. 주하이, 홍콩, 마카오를 연결하는 강주아오(港珠澳) 대교는 광홍마 메가베이를 관통하여 연결시키는 대형 건설 프로젝트 였으나, 중국 사회 각 분야에의 반향도 컸다. 대교 건설을 소재로 제작된 CCTV의 다큐멘터리는 중국 시청자들의 관심과 함께 여러 프로그램 상을 수상하였다. 중국에서는 흔히 4대 도시로 '베이-상-광-선(北上廣深)'이라 하여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선전을 들고, 또한 중국 3대 경제권으로 베이징과 톈진, 허베이성 지역의 '수도권(京津冀, 징진지)', 상하이 일대의 '창장(長江) 삼각주', 광둥, 홍콩, 마카오의 '주장(珠江) 삼각주'를 든다. 수도 베이징 중심의 징진지 발전 계획이나 상하이와 항저우, 쑤저우 중심의 창장 삼각주 발전 방안도 매우 중요하며 큰 의미가 있으나, 주강 삼각주와 광홍마 메가베이 발전 방안은 정치, 경제, 사회 여러 면에서 독특하면서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광홍마 메가베이 연구원(粤港奧大灣區硏究院)' 이사장인 중국의 석학 쩡융녠(鄭永年)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2000년 WTO 가입 후 우호적인 국제 무역 환경 속에서 두 자릿수 발전을 하던 중국 경제가 슈퍼 국제화와 중미 갈등 등 상황으로 이제는 내수 활성화와 국내-국제를 아우르는 쌍순환으로 이를 극복해야 한다며, 그중 지리적 위치나 인구, 경제력, 산업 구조, 개방성 등 여러 면에서 광홍마 메가베이가 이 쌍순환 전략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다며 그 탄생 배경을 설명했다. 1998년 선전(深玔)에서 창업해 굴지의 IT 기업 텐센트(騰訊)를 일구어 낸 마화텅(馬化騰)도 저서에서, 과거 개혁개방 초기 선전에서 생산하여 홍콩에서 판매하는 '앞 점포, 뒤 공장(前店後廠)' 발전 방식에서 출발하여 얼마 전부터는 이 지역 전체를 중국의 실리콘밸리로 발전시키자는 논의가 진행되어 왔다며, '인터넷 플러스(互聯網+)' 시대에 맞는 광홍마 프로젝트의 성과를 기대했다. 이 프로젝트가 관심을 끄는 이유는 개혁개방 이후 30여 년간 중국 경제와 무역에서 부동의 1위를 유지해 온 1억 2,000여만 명 인구의 광둥성과 지금은 정체 위기를 맞고 있기는 하지만 장기간 금융과 교역의 지역 허브 역할의 홍콩 및 마카오가 실질적 사회·경제 통합되면서 거둘 시너지 효과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다. 선전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는 텐센트, 화웨이를 비롯한 ICT 기업, 전통적 전자 기업 외에 중국의 실리콘밸리라 불릴 정도로 수많은 신규 창업기업들이 운집해 있으며, 게임, 영화, 애니메이션 등 문화산업도 발전한 지역이다. 특히, 비야디(BYD), 샤오펑(xpeng) 등 유력 전기차 생산 공장과 CATL 배터리 생산 공장을 한데 묶는 방식의 대규모 생산 클러스터를 곳곳에 설치하고 있기도 하다. 광홍마 메가베이는 2030년 4.62억 달러의 GDP를 달성하여, 도쿄 베이의 3.24억 달러와 뉴욕 베이의 2.18억 달러를 돌파하여 세계 최대 규모의 메가베이(GBA) 도약을 목표로 한다. 광홍마 메가베이의 핵심 도시 중 하나인 광저우시. 시내 거리 풍경과 바이윈산(白云山)에서 본 시 전경 사진들 이 지역은 지금은 가장 부유한 곳이지만 사실 개혁개방 이전인 1978년 광둥성의 1인당 GDP는 400위안, 당시 환율로 한화 4만 원 수준에 불과했다. 중국 국내 평균 GDP보다도 20위안 낮았다. 당시 홍콩 경제는 토지, 원자재, 노동력 가격의 상승으로 경제의 변환 시기를 맞고 있었고, 중국 본토에서 마침 실시된 개혁개방 정책이 홍콩과 인근 광둥의 경제에 전기를 가져왔다. 문화 대혁명의 후유증이 아직 남아있는 데다, 홍콩과 광둥 사이에는 엄격한 통제로 왕래가 어려워 선전 등지에서 헤엄쳐 홍콩으로 넘어가던 대륙 사람들이 홍콩 당국에 붙잡혀 송환되던 뉴스가 심심치 않았었다. 역사적으로 이 지역은 진시황(秦始皇)이 정벌한 후 한 무제(武帝) 시기 이후에 해상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청말(淸末)에는 개명한 사상가들이 다수 출현하며 개혁 사상과 실천의 본거지가 되었다. 아편전쟁의 개시와 중화 번영의 굴욕을 겪은 곳이자 동시에 변법자강(變法自疆)과 민주사상(民主思想)의 발아(發芽) 지역이었다. 반제 반봉건(反帝反封建)의 열기 속에서 민주혁명의 선구인 쑨원(孫中山)에 의해 수천 년 중화 제국(帝國)이 막을 내리고 민국(民國)을 탄생시킨 곳이었다. 오늘날 광둥 번영의 밑바탕에는 독특하고 풍부한 역사문화적 축적과 저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이를 광둥 정신(廣東精神)이라고 부른다. 구체적으로는 '남보다 먼저(敢於人先)', '진취적이고 실질적(務實進取)', '개방과 포용(開放兼容)', '성실과 봉사(敬業奉獻)', '빠른 실행(敏於行)' 등의 특징을 들 수 있다. 베이징 정신(北京精神) - '애국(愛國)', '창조와 혁신(創新)', '포용(包容)', '후덕(厚德)'과는 사뭇 다른 결임을 느낄 수 있다. 중국 내에서 외국과의 무역, 외국으로부터의 투자 유치도 많은 지역이다. 화남(華南) 지역은 미중 무역 및 미국의 중국 내 투자의 약 40% 규모를 차지한다. 최근의 미중 관계로 투자나 교역 규모가 영향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실질적 협력은 지속되고 있다. 화남 지역 미국기업 연합회(AmCham, South China)의 할리 세예딘(Harley Seyedin) 회장은 작년 말 차이나데일리(China Daily) 기고문을 통해 "화남 지역에는 2,300여 미국 기업 회원사들이 향후 3-5년 사이 추가 투자를 위한 180억 달러 규모 자금을 비축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미국의 10억 달러 대중 투자가 180배에 달하는 GDP 증대 효과를 가져온다는 조사가 있다"며 미중 경제 협력 및 이를 위한 양국 간 전략적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선전에서 출발하는 페리를 타고 본 주강 하구와 홍콩 쪽 육지 광홍마 메가베이 프로젝트의 미래가 밝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 경제의 변화와 공급망 재편 문제, 미중 관계를 필두로 한 지연정치(地緣政治)의 영향 등 외부적 요인 외에, 구역 내 홍콩을 비롯한 각 지역 간의 화학적 융합 문제 등 극복해야 할 과제들이 많다. 선전대학(深玔大學)의 당대경제연구소(當代經濟硏究所) 궈스핑(國世平) 소장은 저서에서 행정 주도에 의존하는 성장, 지역별 불협화음, 노동력 비용 증대, 토지 공급의 부족, 지역별 상호보완력의 약화 등 5가지를 꼽았다. 우리와의 관계도 깊다. 상하이에서 시작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38년 창샤(長沙)를 거쳐 체류한 곳이며, 항일독립 투쟁 의사들이 수학한 황포군관학교(黃浦軍官學校)가 소재했던 곳이기도 하다. 최근까지 우리 반도체 수출을 비롯한 한중 간 전체 무역액의 1/4가량을 담당하고 있고, 한중산업단지 외에 현대자동차, LG 디스플레이 등 우리 기업과 교민들이 진출해 있다. 광홍마 메가베이 추진의 배경과 환경, 발전 방향은 우리의 메가시티 환경 및 전략과 상이한 점이 많다. 동시에 참고하고 협력할 부분도 많다고 하겠다. 광홍마 메가베이 지역의 변화와 함께 국익 차원의 우리 메가시티들과의 교류와 협력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