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매일경제신문 베이징특파원 - 전 매일경제신문 주간국 부국장 - 전 매일경제신문 편집국 사회부장, 국제부장, 과학기술부장, 인터넷부장 - 전 매일경제신문 편집국 산업부, 과학기술부 기자 - 전 미국 클리블랜드 주립대 객원연구원
음식에는 한 나라의 사회 정치 경제가 은연중에 녹아 있다. 중국 음식도 예외가 아닌데 세계로 퍼진 중국 음식 속에는 현지의 문화와 역사까지 곁들어 있다. 지구촌 중국반점의 요리를 통해 중국 본색을 알아보고 세상을 들여다본다. 식빵은 서양 빵 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이다. 이런 식빵과 서민적인 중국 음식이 합쳐지면 어떤 음식이 만들어질까? 예상을 뛰어넘는 독특한 음식이 생겨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과정과 배경이 엉뚱하면서 기발할 때도 있다. 서양 식빵과 중국 음식이 결합해 생겨난 요리 중 대표적인 것은 우리한테도 널리 알려진 멘보샤다. 이름은 빵(麵)이 새우(蝦)를 품었다(包)는 뜻 혹은 식빵(麵包)과 새우(蝦)라는 의미다. 홍콩을 비롯한 광동성에 흔한 깐 새우(蝦仁)를 잘게 다진 후 네 조각으로 자른 식빵에 끼워 중국식으로 튀긴 새우 샌드위치 튀김이다. 식빵에 다진 새우를 넣어 요리하는 멘보샤. 출처 : 게티이미지 멘보샤가 독특한 이유는 맛도 맛이지만 발상의 전환이 눈길을 끌기 때문이다. 홍콩의 동서양 문화가 멘보샤에 반영되어 있고 또 흔하디흔한 서양 식빵과 역시 광동성에서는 값싸게 널린 새우를 결합해 나름 고급스러운 딤섬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멘보샤가 만들어진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유래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유력한 것은 홍콩의 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만들어 퍼뜨렸다는 설이다. 홍콩은 1997년 중국에 반환되기 전까지 영국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음식 문화도 예외가 아니어서 영국에서처럼 애프터눈 티를 마시는 것이 홍콩에서도 일반적이었다. 영국인들은 홍차와 함께 간단한 샌드위치를 먹는 경우가 많았는데 홍콩 사람들한테는 이런 샌드위치가 아쉬웠던 모양이다. 영국 홍차에는 어울려도 홍콩에서 주로 마시는 중국 차와는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호텔 레스토랑에서 홍콩인의 입맛에 맞게 식빵에 다진 새우를 넣고 중국식으로 튀겨낸 것이 멘보샤의 기원이라고 한다. 이런 멘보샤가 한국과 일본으로 건너와 유행하면서 나름의 고급(?) 딤섬이 됐다. 멘보샤. 출처 : 바이두 차오멘싼밍즈(炒麵三明治)라는 음식이 있다. 미국의 중국 음식으로 영어 이름은 초우메인 샌드위치(chowmein Sandwich)로, 풀어서 말하자면 볶음면 샌드위치다. 문자 그대로 식빵 사이에 볶은 국수를 끼워 먹는다. 대부분 듣도 보도 못한 샌드위치일 텐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930년대 매사추세츠주를 비롯한 미국 동부에서 잠깐 유행했던 음식으로 널리 퍼지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현지 중국 레스토랑에 가면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어쨌든 이 볶음면 샌드위치가 생겨난 과정이 특별한데 그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식빵의 역사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초우메인(좌)과 차오멘싼밍즈(우). 출처 : 바이두 우리가 흔하게 먹는 식빵은 19세기 공업화, 기계화의 산물이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으로 만들어낸 빵으로 여느 서양 빵과는 달리 껍질이 무척 얇거나 거의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식빵을 빵드미(pain de mie)라고 한다. 미(mie)는 빵의 속살이라는 뜻이니 이른바 속살 빵이다. 바꿔 말해 재료 낭비를 최소화한 빵이다. 지금처럼 기계로 가지런히 자른 식빵은 1928년 미국에서 빵 자르는 기계가 발명되면서 생겨났다. 덕분에 주부의 가사 노동을 크게 줄여준 동시에 근로자들은 식빵에 간단한 음식을 채운 샌드위치를 만들어 도시락으로 들고 출근했다. 1930년대는 미국에서 중국식 잡탕 요리인 찹수이(chop suey), 중국식 볶음면인 초우메인(chowmein) 등이 널리 퍼졌을 때다. 이 무렵 매서추세츠 남부와 롱아일랜드 등 뉴잉글랜드 지역에는 다수의 방직 공장이 들어섰다. 그리고 주로 폴란드와 아일랜드 그리고 캐나다의 프랑스계 후손인 케이준 등 가난한 이민자들이 공장에서 방직공으로 일했다. 이들은 도시락으로 식빵 몇 조각과 집에서 가져온 음식을 끼운 샌드위치로 식사를 했는데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했기에 햄 조각이나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땅콩버터조차 발라 먹을 수 없었다. 이때 매사추세츠주 폴리버(Fall River)라는 곳의 한 중국 음식점에서 이들을 대상으로 저렴한 볶음면을 만들어 팔았다. 값이 저렴한 데다 즉석에서 조리한 따뜻한 음식이었기에 공장 노동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문제는 식욕이 왕성한 노동자들의 배를 채우기에는 양이 모자랐다는 것이다. 이때 누군가가 부족한 양을 채우기 위해 집에서 가져온 식빵에 볶음면을 채운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고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폴리버의 중국 음식점에서 초우메인 샌드위치, 차오멘싼밍즈를 개발해 퍼뜨렸다고 한다. 볶음면 샌드위치라는 기발한 음식에는 이렇게 유럽과 중국 이민자들의 애환이 서려 있다. 볶음면을 채운 샌드위치, 차오멘싼밍즈. 출처 : 바이두 서양 식빵과 중국 음식의 결합, 어쨌든 음식의 진화와 환경에 적응해야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 전략이 기발하다. 디자인 : 이희문
음식에는 한 나라의 사회 정치 경제가 은연중에 녹아 있다. 중국 음식도 예외가 아닌데 세계로 퍼진 중국 음식 속에는 현지의 문화와 역사까지 곁들어 있다. 지구촌 중국반점의 요리를 통해 중국 본색을 알아보고 세상을 들여다본다. 팔보채는 다양한 재료를 섞어서 맛을 내는 중국 요리다. 전복, 해삼, 새우, 죽순 등 중국인이 좋아하는 여덟 가지 보물 같은 재료가 들어갔다고 해서 이름도 팔보채(八寶菜)가 됐다. 팔보채처럼 여러 재료를 쓰지만 팔보채보다 한 단계 윗등급(?)으로 꼽는 요리가 전가복이다. 많은 경우 전가복을 해물 요리로 알고 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그 이상이다. 원래의 전가복은 하늘을 나는 것(禽), 땅 위에 있는 것(獸), 물속에 사는 것(魚), 산속에서 자라는 것(菜) 중에서 특별히 좋은 것을 골라서 모아 만든 요리라고 한다. 팔보채(좌)와 전가복(우). 출처 : 게티이미지 전가복(全家福)이라는 이름도 가족 전체가 행복해진다는 뜻이다. 이 음식을 먹으면 가족이 왜 행복해진다는 것일까? 단순히 값비싼 재료를 사용해 그만큼 맛이 좋기 때문일까? 전가복이라는 이름이 생긴 배경으로는 다양한 유래설이 있지만 믿을 바는 전혀 못 되고 다만 심심풀이로 알아두면 나쁠 것은 없겠다. 유래설 중 하나로 전가복은 진시황 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진시황 35년에 분서갱유가 일어났다. 서적을 태우고 귀찮게 잔소리하는 유생들을 생매장해 죽인 사건이다. 이때 주현이라는 유생도 땅속에 파묻혔는데 정신을 차린 후 필사적으로 흙을 헤치고 나와 산속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관원의 체포를 피해 낮에는 자고 밤에는 일어나 산속의 야생 과일과 채소를 먹으며 목숨을 연명했다. 몇 년이 지나 진시황이 죽고 그 아들 호해가 즉위하자 주현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예전 집은 폐허가 됐고 아내와 자식은 뿔뿔이 흩어져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비통함에 잠긴 주현은 스스로 강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으려고 했는데 한 어부에 의해 구조됐다. 사연을 들은 어부는 작년에 홍수가 났을 때 한 소년을 구해 준 일이 있는데 그 소년이 근본이 있어 보여 사위로 삼았다며 성이 주 씨니 당신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며 한 번 보기를 권했다. 어부의 집으로 가 보니 과연 주현의 아들이었다. 수년 만에 상봉한 부자는 서로 붙들고 통곡을 했고 이후 주현은 아들 곁에서 고기를 잡으며 생활을 했다. 어느 날 주현이 시장에서 물고기를 팔고 있는데 돌연 사람들 중에서 낯익은 모습이 보여 쫓아가 봤더니 헤어진 아내였다. 마침내 온 가족이 모이게 됐다. 이 모습을 본 어부가 산해진미를 모은 후 이름 있는 요리사를 불러 주 씨 일가족의 해후를 축하하는 잔치를 열었다. 이때 일가족의 비통한 이야기를 들은 주방장이 요리를 만들어 놓고 고심 끝에 전가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전가복. 출처 : 게티이미지 또 다른 유래로 명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가 지은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명 태조 주원장의 넷째 아들로 북경 지역을 다스리는 연왕(燕王)이었던 영락제는 조카였던 2대 황제 건문제로부터 황제 자리를 빼앗은 후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긴다. 황제가 된 영락제는 정월에 황후와 황태자를 거느리고 미복을 한 채 궁궐 밖으로 나가 등불놀이를 구경하다 돌아온 후 시장기를 느끼자 주방에 음식을 장만하라고 시켰다.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 출처 : 바이두 하지만 늦은 시간 모든 재료가 식어 얼어붙은 상황에서 요리사들이 손쓸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차갑게 식은 각종 재료들, 해삼과 전복, 생선 부레, 상어 지느러미, 닭고기, 생선, 새우, 버섯 등 모든 재료들을 냄비에 모아 요리한 후 그 요리를 진상했다. 복잡 다양하고 기묘한 맛 때문에 영락제가 기뻐하며 요리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황급히 음식을 장만하느라 요리 이름을 생각하지 못했던 요리사가 솔직히 대답했다. “황실 온 가족이 함께 즐기시라고 특별히 만든 요리여서 아직 이름을 짓지 못했다”고 하자 “그럼 ‘전가복’이라고 하라”고 해서 만들어진 음식 이름이라고 한다. 또 다른 유래설로는 청나라 때 강희제가 남쪽 지방을 순례하면서 먹어 보고는 그 맛에 감탄해 이 요리를 먹으면 온 가족이 행복해질 것이라며 지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어쨌거나 2300년 전의 진나라 때부터 300년 전의 청나라 때까지 온갖 황제의 일화를 들먹이는 만큼 신빙성은 제로다. 다만 그만큼 맛있었기에 비록 터무니없어도 이런 스토리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어쨌든 여덟 가지 보물로 만들었다는 팔보채보다 온 가족이 행복해진다는 전가복을 상위의 고급 요리로 여긴다는 것도 재미있다. 재료가 고급이고 맛도 좋지만 부귀영화보다는 온 가족의 행복이 더 소중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디자인 : 이희문
음식에는 한 나라의 사회 정치 경제가 은연중에 녹아 있다. 중국 음식도 예외가 아닌데 세계로 퍼진 중국 음식 속에는 현지의 문화와 역사까지 곁들어 있다. 지구촌 중국반점의 요리를 통해 중국 본색을 알아보고 세상을 들여다본다. 맵고 얼얼한 마라탕의 유행 덕분인지 요즘은 매콤새콤한 중국음식 쏸라펀(酸辣粉)도 많이 퍼진 것 같다. 심지어 일부 편의점에는 쏸라펀 컵라면도 있다. 수입품인 듯싶은데 포장지에는 마라탕이라고 쓰여있고 또 쏸라펀이라고도 쓰여있어 정체가 헷갈리지만 실체는 쏸라펀이다. 쏸라펀은 어떤 음식일까? 낯설어하는 이들을 위해 설명을 덧붙이자면 신맛 산(酸) 매울 랄(辣) 자를 쓰니 시고 매운맛 나는 국물, 쏸라탕(酸辣湯)에 당면(粉)을 말아먹는 음식이다. 얼얼하고 매운맛이 나는 마라(麻辣)와는 닮은 듯싶지만 차이가 있다. 쏸라펀. 출처: 바이두 쏸라펀은 중국과 대만 홍콩 등지에서 널리 먹는 거리 음식이다. 주로 시장이나 노점에서 간단하고 편하게 한 끼 식사나 간식 야식으로 먹는다. 그만큼 서민적이고 저렴한 대중음식이다. 뿌리도 거리 음식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알려지기로는 사천성 성도(成都)에서 한 노점상이 고구마 전분으로 만든 당면을 식초와 고추기름간장과 다진 고기 등에 섞어 팔면서 크게 호평을 받았다. 이후 사천성을 떠나 호남성과 귀주성 등 서남지역으로 퍼졌고 지금의 쏸라펀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중국 음식문화사에 비춰보면 반은 맞고 반은 그 배경에 대한 보충적인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먼저 지금은 쏸라펀의 국물인 쏸라탕이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옛날에는 달랐다. 일단 쏸라탕에서 신맛을 내는 재료인 식초는 중국인이 제일 좋아하는 조미료다. 전통적으로 입맛을 돋우며 몸을 따뜻하게 해 주기에 건강에 좋다고 여겼다. 매운맛을 내는 재료인 고추 역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땀을 배출하며 습한 기운을 없애는 효과가 있다. 그런 만큼 청나라 때 쏸라탕은 감기 걸렸을 때 먹는 음식, 입맛 떨어졌을 때 식욕을 북돋아 주는 음식으로 쓰였다. 식재료로 사용되었던 식초(좌)와 고추(우). 출처: 바이두 여기서 고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에 고추가 전해진 것은 17세기 초반인 명말청초 무렵으로 추정한다. 그러니 고추가 전해지기 전에는 조미료로 맵고 자극성 강한 후추나 산초 같은 것들이 쓰였다. 이를테면 중원인 호남성 등지에서 발달한 후라탕(胡辣湯) 같은 음식이다. 후추(胡椒)와 식초를 사용해 쏸라탕처럼 시고 매운맛을 냈다. 후라탕은 12세기 송나라 때 등장한 요리라고 한다. 전설에는 신선이 되려고 도를 닦는 도사들이 먹었던 불사약의 비법을 궁중 요리사가 전수받아 황제에게 만들어 바친 것에서 비롯된 요리라고 한다. 12세기는 중국에서도 후추가 금만큼이나 비싸고 귀했던 향신료였으니 후라탕 역시 황제나 부자들 아니면 맛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후라탕. 출처: 바이두 어쨌든 후추가 들어간 후라탕과 고추가 재료로 쓰인 쏸라탕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많은 다른 음식처럼 값싼 고추가 값비싼 후추를 대체하면서 발달한 음식이 쏸라탕일 가능성이 높다. 쏸라탕에 당면을 말아먹는 음식이 쏸라펀인데 당면을 먹게 된 과정도 흥미롭다. 중국 국수는 재료에 따라 크게 세 종류로 구분한다. 밀가루로 만든 국수는 면(麵), 쌀가루로 만든 쌀국수는 선(線), 녹두나 고구마 감자 전분 등으로 만든 국수는 분(粉), 중국어로 펀이다. 우리가 당면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국수다. 중국에서 당면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300년 전이라고 한다. 대략 18세기 초반쯤일 것으로 추정한다. 산동성 연태 등지에서 발달했다고 하는데 이때는 녹두를 갈아 그 녹말에서 나온 전분으로 당면을 만들었다. 당연히 녹두 당면이나 혹은 완두콩으로 만은 당면은 흔한 식재료가 아니었다. 재료가 귀해서였는지 혹은 산지가 제한되었기 때문인지 중국에서 당면이 널리 퍼진 것은 19세기 후반이라고 한다. 당면이 확산된 데는 고구마의 보급이 큰 역할을 했다. 지금의 필리핀 루손 섬인 여송국(呂宋國)에서 중국 남부 복건성에 전해진 고구마는 18~19세기 산동 하북 하남 등지에 대기근이 들었을 때 구황작물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중국 전역으로 퍼졌다. 바꿔 말하자면 그만큼 싸고 흔한 농작물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뽑은 전분으로 고구마 당면이 만들어지면서 녹두 당면과 달리 당면도 서민들이 쉽게 먹을 수 있는 국수가 됐다. 사천성 성도의 노점상이 고구마 당면을 이미 흔해진 쏸라탕에 말아 싼롸펀을 만들어 퍼트렸다는 유래 설은 이런 과정을 통해 생겨났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옛날에는 고급 음식이었던 후라탕 쏸라탕과 녹두 당면을 부단한 노력을 통해 서민들도 쉽게 먹을 수 있는 대중음식으로 만들어낸 것이 쏸라펀이 아닌가 싶다. 디자인 : 이희문
음식에는 한 나라의 사회 정치 경제가 은연중에 녹아 있다. 중국 음식도 예외가 아닌데 세계로 퍼진 중국 음식 속에는 현지의 문화와 역사까지 곁들어 있다. 지구촌 중국반점의 요리를 통해 중국 본색을 알아보고 세상을 들여다본다. 미국을 대표하는 거리 음식은 햄버거이고 그중에서도 선두 주자는 역시 맥도널드다. 1955년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1호점이 문을 열었고 이후 미국 전역으로 퍼졌다. 그러면 햄버거가 퍼지기 전, 미국에는 어떤 거리 음식, 패스트푸드가 유행했을까? 엉뚱하게도 1920년대 미국을 장악했던 거리 음식은 미국식 중국 음식인 찹수이(Chop Suey)였다. 이 무렵 미국에는 '찹수이 광풍(Chop Suey Craze)'이 불면서 지금의 햄버거에 버금가는 대표 거리 음식이 됐다. 찹수이(Chop Suey). 출처 : 바이두 미국 어바인대학교 역사학 교수가 쓴 『미국의 중국 음식, 찹수이(Chop Suey, USA: The Story of Chinese Food in America)』에 나오는 내용이다. 일부 학자의 주장일 수도 있지만 당시 미국 상황을 보면 고개를 끄덕일 만한 부분도 많다. 찹수이는 미국에서 발달한 중국 잡채다. 하지만 우리 짜장면이나 짬뽕처럼 정작 중국에는 없는 미국식 중국 음식이다. 양배추, 셀러리를 비롯한 채소를 계란과 돼지고기, 닭고기, 새우 등과 함께 볶아서 만든다. 물론 원래는 이런 채소, 저런 채소, 잡다한 채소만을 모아 볶았던 음식이다. 일종의 잡탕 채소볶음으로 문자 그대로 잡채(雜菜)다. 그러니 우리나라 잡채와는 개념이 다르다. 중국 잡채 찹수이. 출처 : 바이두 찹수이라는 이름도 한자로는 섞을 잡(雜) 부술 쇄(碎) 자를 써서 부스러기 채소를 섞어서 볶았다는 뜻이다. 북경어로는 자수이지만 광둥어로 발음해 찹수이가 됐다. 바꿔 말해 미국에 중국식 잡탕 채소볶음을 퍼트린 것은 광동성 출신의 노동자들이었다. 찹수이가 미국에 전해진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미국식 볶음면인 초우메인, 비빔면인 로메인과 마찬가지로 19세기 초 미국 대륙횡단철도 건설 노무자, 골드러시 때 금광 노동자로 들어온 막일꾼 쿠리(苦力)들이 먹었던 음식에서 시작됐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찹수이가 대중화된 배경을 설명하기 위한 또 다른 기원설도 있다. 청나라 말 고위 대신이었던 이홍장 덕분에 만들어졌고 퍼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홍장 찹수이라고도 한다. 이홍장. 출처 : 바이두 1896년 이홍장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 정계와 외교가에서 환대를 받았다. 이에 대한 화답으로 미국 주요 인사를 초청해 파티를 열었다. 이때 수행한 요리사가 미국인과 중국인의 입맛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요리로 만든 것이 다양한 채소와 고기를 함께 볶아낸 잡채 요리였다. 이 요리를 맛본 미국 인사가 요리 이름을 물었고 이홍장이 찹수이라고 대답했다. 이 연회를 계기로 이국적인 요리 맛에 반한 미국인들이 찹수이를 다시 찾으면서 미국에 찹수이 열풍이 불었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다양한 설이 있지만 핵심은 이홍장 때문에 찹수이가 만들어졌고 그의 외교활동 덕분에 미국에 퍼졌다는 것이다. 아마 화교 내지는 중국계 미국인들이 찹수이의 뿌리를 막노동자들의 싸구려 음식이 아닌 고위층 인사가 만든 고급 요리로 격상시키고 싶은 마음에서 만들어 낸 엉터리 기원설의 느낌이 짙다. 하지만 어쨌든 여기서 주목해 볼 부분이 있다. 이홍장 덕분은 아니지만 어바인 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책에서 강조한 것처럼 1920년대 미국에서 찹수이가 전국적으로, 그리고 대중적으로 크게 유행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 곳곳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일례로 '마지막 잎새'로 유명한 미국 소설가 오 헨리의 단편 소설을 읽어 보면 다양한 작품에 찹수이가 등장한다. 대중적인 거리 음식이지만 싸구려 빵 조각보다는 조금은 음식 같은 음식으로 그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활동했던 유명한 재즈 가수 루이 암스트롱이 '코네트 찹수이(Cornet Chop Suey)'라는 곡을 만들어 연주했고 1920년대 여성 잡지에서는 경쟁적으로 찹수이 레시피를 게재했다고 한다. 심지어 미 육군의 급식 메뉴에도 찹수이가 올랐을 정도였다. 지금은 많이 쇠락했지만 뉴욕 차이나타운에 수백 개의 찹수이 전문점이 들어섰고 주말마다 수천 명의 뉴요커들이 찹수이를 먹으러 이곳을 찾았다는 기록도 있다. 뉴욕 차이나타운. 출처 : 게티이미지 20세기 초 미국에 왜 이토록 찹수이 열풍이 불었을까? 여러 분석이 있지만 아직 햄버거 같은 패스트푸드가 등장하기 전, 단순한 빵 조각 대신 즉석에서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그나마 요리다운 따뜻한 음식이었기 때문에 서민들로부터 환영받았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다양한 설명이 있지만 어쨌든 미국에서 거리 음식으로 독일계 햄버거, 이탈리아계 피자와 스파게티에 앞서 중국계 찹수이가 널리 퍼졌다는 사실이 뜻밖이다. 디자인 : 이희문
음식에는 한 나라의 사회 정치 경제가 은연중에 녹아 있다. 중국 음식도 예외가 아닌데 세계로 퍼진 중국 음식 속에는 현지의 문화와 역사까지 곁들어 있다. 지구촌 중국반점의 요리를 통해 중국 본색을 알아보고 세상을 들여다본다. 중국의 볶음국수 차오멘(炒麵)은 세계 곳곳에 퍼져 있다. 우리나라에는 볶음면, 일본에는 야키소바(焼きそば), 미국에는 초우메인(chowmein), 그리고 태국의 팟타이를 비롯해 동남아, 서남아에도 각국의 언어로 부르는 볶음면이 있다. 볶음면이 널리 퍼진 이유는 물론 맛있으니까, 현지 환경에 맞으니까, 또 조리하기도 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볶음면은 사실 국수에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채소를 넣고 기름 두른 팬에서 달달 볶으면 조리 끝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볶음면이 여러 나라에 두루 퍼졌지만 그 전파 과정을 보면 서글픈 측면도 있다. 미국의 중국식 볶음면 초우메인이 그렇고 일본의 야키소바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중국 차오멘이 생겨난 배경에도 역사적 아픔이 있다. 볶음면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 차오멘. 출처 : 바이두 먼저 미국에 초우메인이 전해진 내력이다. 초우메인은 중국어로 차오멘(炒麵)이라고 하는 볶음면의 광동식 발음이다. 미국에 볶음면을 전한 사람들이 광동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초우메인이 미국에 전해진 것은 19세기 초중반 무렵으로 추정한다. 기록으로 처음 보이는 것은 1906년이라지만 그건 기록일 뿐 광동성 출신 노동자들이 미국에 들어온 1820년대부터 초우메인도 함께 퍼진 것으로 본다. 이 무렵 미국에 온 광동 출신 중국인은 대부분 까막눈의 막일꾼이었다. 간신히 노예를 벗어난 수준의 임금을 받고 미국 대륙횡단철도 건설 노무자로, 서부의 골드러시 때 금광 노동자로 일했다. 돈도 없고 고달픈 노동에 시달리던 이들이 먹었던 음식이 초우메인이다. 고향에서 먹던 것처럼 국수에다 주변에 흔한 채소를 이것저것 넣고 어쩌다 구한 돼지고기 닭고기도 넣고 기름에 볶아 먹었던 싸구려 국수였다. 지금은 미국에서 중국식 패스트푸드로 대중화됐지만 처음 전해진 과정은 이렇게 눈물겨웠다. 미국에도 전해진 차오멘(炒麵). 출처 : 바이두 일본의 볶음국수 야키소바도 따지고 보면 애환이 서려 있다. 일본에서는 야키소바의 뿌리를 중국 차오멘으로 본다. 이런 차오멘이 일본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35년 이후로 도쿄 중심부의 음식점에서 선보였다고 한다. 아마 대륙 침략 과정에서 광동 복건 등의 중국 남부로부터 전해져 색다른 별미의 중국 국수로 소개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일본의 볶음국수 야키소바. 출처 : 게티이미지 이랬던 야키소바가 대중적으로 널리 퍼진 것은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이후다. 패전 후 일본은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렸다. 농지는 황폐해진 데다 식량 수입도 끊겼고 초기에는 점령군인 미국의 지원도 신통치 않아 고질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일례로 쌀값은 무려 130배나 폭등했고 굶주림이 계속되면서 패전 후 1949년까지 아사자를 포함해 영양 실조에 걸린 사람이 1,000만 명에 육박했다고 한다. 야키소바는 이런 상황에서 대중화됐다. 값비싼 국수는 조금 넣고 대신 값싼 양배추를 듬뿍 썰어 넣어 간장 등의 소스와 함께 기름에 볶은 야키소바가 포장마차에 등장하면서 배고픈 일본 서민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무심코 맛있게 먹는 야키소바지만 그 이면에는 이런 역사도 있다. 볶음면의 뿌리라고 하는 중국 차오멘도 한족 입장에서는 핍박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차오멘은 쌀국수가 등장하고 이 쌀국수가 광동성, 광서성, 복건성 등 중국 남방으로 퍼지면서 발달했다. 중국에서는 쌀국수가 등장한 시기를 대략 12세기 송나라 때로 보는데 쌀국수가 만들어진 데는 사연이 있다. 국수는 원래 밀가루로 만든다. 그런데 밀 재배 지역인 황하 유역의 중원에 살던 한족이 5세기 무렵부터 북방의 선비 거란 여진 몽골 민족에 밀려 양자강 이남으로 쫓겨 내려온다. 이른바 남북조 시대다. 양자강 이남은 밀 재배가 어려운 벼농사 지역이다. 그렇기에 밀가루로 국수를 만들 수 없었고 대신 만든 것이 쌀국수였다. 이렇게 만든 쌀국수가 남방으로 퍼지며 무덥고 습한 광동성과 동남아 기후에 맞게 채소와 고기 등을 넣고 기름에 볶아 낸 것이 볶음국수, 차오멘의 시작이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차오멘은 한족이 북방 민족에 쫓겨 남쪽으로 밀려 내려오면서 생겨난 국수였던 셈이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맛있게 먹는 볶음면에 담긴 애사(哀史)다. 디자인 : 이희문
음식에는 한 나라의 사회 정치 경제가 은연중에 녹아 있다. 중국 음식도 예외가 아닌데 세계로 퍼진 중국 음식 속에는 현지의 문화와 역사까지 곁들어 있다. 지구촌 중국반점의 요리를 통해 중국 본색을 알아보고 세상을 들여다본다. 우리가 즐겨 먹는 양갱은 팥앙금 혹은 밤앙금을 한천으로 굳혀 만든다. 원래 일본에서 차와 함께 먹는 다과로 발달했지만 우리나라에 전해진 후 한국 과자가 됐다. 이런 양갱, 이름이 특이하다. 한자를 보면 양 양(羊)에 국 갱(羹)자를 쓰니 양고기 국이라는 뜻이다. 팥앙금, 밤앙금으로 만든 과자에 왜 이런 얼토당토않은 이름을 지었을까? 양갱. 출처 : 게티이미지 유래와 관련 있다. 일본에서는 고대 중국에서 양고기 국으로 만들었던 간식이 일본에 전해져 지금의 양갱이 됐다고 말한다. 양고기 국을 은근한 불로 오래 끓이다 식히면 지방과 단백질이 젤라틴처럼 굳어진다. 여기에 갖가지 재료와 향신료를 섞어 만든 간식이 지금 양갱의 원조라는 것이다. 양갱이라는 이름이 생긴 내력이다. 일본에 중국의 양고기 국 간식이 전해진 것은 일본의 중세 시대라고 한다. 중국에 유학 갔던 승려가 귀국할 때 차와 함께 가져왔는데 절에서는 고기를 먹을 수 없는 데다 당시 일본 사회는 육식을 금기시했기에 양고기 국으로 만든 간식을 먹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양고기 국 대신 팥앙금으로 다과를 만들어 차 마실 때 먹은 것이 지금 양갱의 유래라고 한다. 실제 일본 문헌에서 양갱이 보이는 것은 16세기 무렵이다. 서당 학습서인 『정훈왕래(庭訓往来)』에 가을에 먹는 과자로 나온다. 양갱. 출처 : 게티이미지 다만 이 무렵에는 양갱뿐만 아니라 자라 국인 별갱(鱉羹), 돼지고기 국인 저갱(猪羹), 당나귀곱창 국인 여장갱(驢腸羹), 대나무 국인 죽갱(竹羹)이라는 이름도 보인다. 여기서 양갱, 저갱 등 고깃국이라는 이름은 실제 고깃국은 아니고 찹쌀가루에 감미료룰 더해 찐 간식을 담은 그릇의 모양새에 따라 지어진 명칭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일본에서는 팥앙금으로 만든 양갱이 고대 중국의 양고기 국 간식에서 비롯됐다고 하는데 그러면 중국에는 양갱의 원조라고 할 만한 그런 고깃국 간식이 남아 있을까? 웬만하면 우리가 원조라고 주장하는 중국이지만 양고기 국 양갱에 대해서만큼은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하지만 중국에도 옛날 양고기 국 간식, 양갱과 비슷한 음식은 있다. 중국어로 먼즈(燜子)라고 부르는 간식, 내지는 간편 음식(小吃)이다. 먼즈(燜子). 출처 : 바이두 먼즈는 우리말로 민(燜)으로 읽는 한자 의미 그대로 약한 불에서 오랜 시간 뭉근하게 끓여서 익힌 음식이라는 뜻이다.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다는 먼즈로는 산동성 연태(煙台) 지역의 명물 먹거리인 연태 먼즈를 꼽는다. 말랑말랑한 콜라겐 같은 식감이 나는 이 간식은 당면 반죽에 간장, 참깨, 마늘 소스 등을 섞은 후 솥에서 오랜 시간 기름에 지져가면서 만든다. 역사는 100년 남짓 됐다고 한다. 고대의 양고기 국 간식과는 별 관련이 없는 듯 보이지만 그래도 참고할 부분이 있다. 다른 지역 먼즈의 특성 때문이다. 이를테면 하북성 중부 도시 정주(定州)의 명물, 정주 먼즈가 그것이다. 현지에서는 이 음식을 돼지고기 먼즈(猪肉燜子)라고 부른다. 돼지고기 먼즈(猪肉燜子). 출처 : 바이두 엄선한 돼지고기를 뭉근한 불로 오랜 시간 끓이면 고기가 흐물흐물해진다. 여기에 마의 일종인 산약(山藥) 가루를 섞어 굳힌 후 기름에 지져 먹는다. 생긴 모습은 일종의 양갱 내지 소시지처럼 생겼다. 하북성과 하남성 등 화북 지방에는 당나귀국 먼즈(驢湯燜子)라는 음식도 있다. 화북 지역에서 많이 먹는 당나귀고기 국에 당나귀 기름을 넣고 오랜 시간 약한 불로 끓인다. 여기에 전분 등을 넣고 응고시켜 완성한다. 이렇게 만든 당나귀 먼즈는 직접 간식으로 먹거나 혹은 빵 사이에 끼워 식사로 먹는다. 화북 지방의 당나귀 먼즈나 하북성 돼지고기 먼즈는 어딘지 모르게 옛날 양고기 국으로 만들었다는 고대의 양갱과 닮았을 것 같다. 산동성 연태의 당면 먼즈 역시 따지고 보면 고깃국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고 팥앙금만 남은 현대의 양갱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현대 중국의 먼즈와 고대의 양고기 국 양갱과의 상관관계나 현대의 팥앙금 양갱과의 연결고리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중국 먼즈를 통해 우리가 먹는 과자 양갱의 한자 이름 뿌리가 양고기 국 양갱(羊羹)에서 비롯됐다는 황당한(?) 사실에 대한 궁금증은 어느 정도 풀리는 것 같다. 디자인 : 이희문
음식에는 한 나라의 사회 정치 경제가 은연중에 녹아 있다. 중국 음식도 예외가 아닌데 세계로 퍼진 중국 음식 속에는 현지의 문화와 역사까지 곁들어 있다. 지구촌 중국반점의 요리를 통해 중국 본색을 알아보고 세상을 들여다본다. 중국 국수는 세계 여러 나라로 퍼졌는데 나라마다 즐겨 먹는 국수와 전해진 사연은 각각 다르다. 이를테면 한국에는 짜장면과 짬뽕이, 일본에는 지금은 그 뿌리가 중국이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하지만 어쨌든 한때 중화소바(中華そば)라고 불렸던 라멘(ラーメン)이 대표적이다. 그러면 미국에는 어떤 중국 국수가 있을까?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중국 국수는 로메인(lomein)이다. 푸드코트의 중국 패스트푸드점에서 손쉽게 그리고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국수이고 많은 미국인들이 종이박스에 담아 테이크아웃으로 가져가는 국수다.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중국 국수, 로메인. 출처 : 게티이미지 로메인이라니까 낯설게 들리지만 실은 우리한테도 비교적 익숙한 국수다. 우리가 흔히 중국식 볶음면이라고 부르는 국수도 로메인의 한 종류다. 간장 등으로 볶은 채소나 고기, 새우를 국수와 함께 비비거나 혹은 국수와 재료를 볶아서 먹는다. 정확하게 볶음면(炒麵)은 미국에서 초우메인(chowmein)이라고 하고 로메인은 비빔면인데 미국에서는 두 국수의 차이를 헷갈려 하는 것 같다. 실제 미국에서 파는 로메인을 보면 딱히 구분하기도 쉽지 않다. 로메인이라는 미국식 중국 국수, 맛과 모습은 대충 알 것 같다. 그런데 그 정확한 정체는 무엇일까? 중국의 어떤 국수가 미국으로 전해져 로메인이 됐을까? 앞서 살짝 언급한 것처럼 로메인은 비빔국수라는 뜻이다. 중국 본토에서는 반미앤(拌麵) 혹은 라오미앤(撈麵)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반(拌)은 비비다라는 뜻이고 라오(撈)는 섞는다는 의미다. 로메인. 출처 : 바이두 이런 중국 라오미앤이 미국에서 왜 로메인으로 바뀌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로메인은 광동 사투리이고 광동 출신 이민자들이 미국에 퍼뜨린 음식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쿠리(苦力)라고 부르는 고된 일을 하는 광동성 출신 막노동 일꾼들이 먹었던 싸구려 비빔국수가 미국 사회에서 대중화된 것이 로메인이라는 중국식 패스트푸드 국수다. 로메인이 대중적인 국수, 싸구려 국수였다고 해서 원래부터 저렴한 음식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로메인은 족보가 있는 국수였고 근본 있는 지체 높은 음식이었다. 미국 로메인의 원조인 중국 본토의 비빔국수 라오미앤이 세상에 선보인 것은 약 1000년 전인 송나라 무렵이다. 북송의 수도였던 하남성 개봉의 거리 풍경을 묘사한 『동경몽화록』 남송의 수도였던 지금의 절강성 항주의 풍경을 그린 『몽양록』과 비슷한 시기 문헌인 『무림구사』등에 이 국수가 보인다. 물론 라오미앤이라고 콕 집어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채소와 고기 등 여러 재료를 국수에 섞어 먹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송나라 무렵 비빔국수가 처음 등장했다고 보는 이유다. 단순히 1000년 전에 비빔국수를 먹었다고 해서 로메인의 조상이 족보 있는 국수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국수를 비비기 위해서는 말린 국수, 즉 건면(乾麵)이 필요한데 송나라 때를 전후해 비로소 말린 국수가 개발된 것으로 추정한다. 바꿔 말해 비빔국수, 라오미앤은 당시로서는 나름 첨단 국수였던 셈이고 그래서 근본이 있는 국수라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지역별로 다양하고 특색 있는 비빔국수가 발달했다. 천진 라오미앤을 비롯해 산서성, 산동성, 광동성 등지에 특색 있는 비빔국수가 있지만 그중 호북성 무한의 열간면(熱干麵)이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열간면. 출처 : 바이두 이렇게 족보 있는 비빔국수 라오미앤이 어떻게 미국으로 건너가서 대중적인 로메인이 됐을까? 광동 사람들이 로메인이라고 불렀던 라오미앤이 미국에 전해진 것은 19세기 초중반 무렵으로 추정한다. 1820년을 시작으로 미국에는 다수의 중국계 노동자들이 진출했다. 이들은 대부분 광동성 출신으로 까막눈의 막노동자들이었으며 주로 미국 대륙횡단철도, 서부의 골드러시에 따른 금광 노동자로 일했다. 형편없는 임금을 받고 미국으로 온 막노동자들이었던 만큼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돈도 없었다. 그래서 고향에서 먹던 대로 국수에 먹다 남은 채소와 닭고기 돼지고기 등을 넣고 간장으로 비벼 먹거나 볶아 먹었다. 게다가 대부분 독신이었던 만큼 이렇게 만든 국수나마 다른 막일꾼에게 팔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중국식 비빔국수 볶음국수인 로메인과 초우메인이 처음 미국에 퍼지게 된 배경이다. 중국식 패스트푸드 로메인에는 이렇게 초기 광동 출신 중국 이민자들의 땀과 눈물, 애환이 서려 있다. 디자인 : 이희문
음식에는 한 나라의 사회 정치 경제가 은연중에 녹아 있다. 중국 음식도 예외가 아닌데 세계로 퍼진 중국 음식 속에는 현지의 문화와 역사까지 곁들어 있다. 지구촌 중국반점의 요리를 통해 중국 본색을 알아보고 세상을 들여다본다.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중국에서도 게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게보다 더 맛있는 음식은 없다고 말한다. 옛날부터 그랬다. 당나라 시인 이태백은 게 집게발은 영원히 살 수 있는 신선의 불사약(不死藥)과 같다고 했다. 달빛 아래 홀로 술을 마신다는 『월하독작(月下獨酌)』이라는 시에서 호수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술친구로, 게 다리 안주 삼아 술을 마시다 물에 빠져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 신선이 됐다나 뭐라나 그런 전설이 전해진다. 4세기 진(晉)나라 때 재상 필탁은 뱃머리에 술독 가득 싣고 게를 안주 삼아 마시고 먹을 수 있다면 그 이상 만족스러운 인생은 없을 것이라고 했으니 옛사람들의 게 사랑이 정말 진했다. 이들이 맛있다고 먹었던 게는 과연 어떤 게였을까?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게가 있으니 게라고 다 같은 게가 아닐 것인데 그러면 지구상에서 제일 맛있는 게는 어떤 게일까? 시대에 따라 다르고 또 지역에 따라 다를 것이니 딱히 어느 게가 최고라고 꼽을 수는 없겠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서해에서는 꽃게를, 동해에서는 대게를 꼽을 것이고 북한 함경도에서는 털게를 꼽을 것 같다. 또 일본에서는 홋카이도 가니(대게)를, 동남아는 맹그로브 크랩, 미국 서부는 킹크랩, 동부는 블루크랩을 주장할 것이다. 순서대로 꽃게, 털게, 블루크랩. 출처 : 게티이미지 반면 중국에서는 단연코 상해 부근 양징호에서 나오는 민물 게인 대갑게(大甲蟹)가 최고라고 힘주어 말한다. 특히 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늦가을 초겨울이면 그 맛이 최고라고 하는데 중국 경제가 발전한 요즘에는 게 먹으러 가는 도로에 차량이 몰려 주차장으로 바뀐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한테는 낯설지만 사실 상해 대갑게가 맛있기는 맛있다. 크기는 어른 주먹만 한 것이 그다지 크지도 않기에 먹을 것이 별로 없을 것 같지만 얇은 게 껍질 속에 살이 꽉 차 있어 풍부한 데다 게살이 탱글탱글 살아 있어 식감도 좋다. 또한 마치 잘 삶은 밤을 먹는 것 같은 맛과 풍미가 느껴지기에 대게나 꽃게 혹은 털게를 먹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대갑게. 출처 : 바이두 대갑게는 가격도 만만치 않다. 지금은 대량 양식으로 가격이 많이 저렴해졌다고 하던데 꽤 오래전이지만 예전에는 달랐다. 상해의 전문점에서 대갑게를 주문하면 한 접시에 어른 주먹만 한 크기의 대갑게 두 마리가 달랑 놓여있고 새우찜이 곁들여 나왔는데 그 값이 당시 북경의 가정부 반 달 치 월급에 해당됐다. 물론 중국 경제가 아직 도약하기 전인 2000년대 초반의 상황이다. 중국인들이 상해 대갑게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는 그들의 게 먹는 모습에서도 엿볼 수 있다. 껍질에 붙어있는 손톱만 한 크기의 작은 살점마저도 살뜰하게 발라 먹는데 주먹 크기의 대갑게를 다 먹은 후에는 게 껍질만 한 숟가락에 소복이 쌓을 수 있을 정도다. 홍콩에서는 대갑게를 다 먹고 난 후 그 껍질을 붙여 대갑게를 다시 복원해 놓았다는 전설도 있다. 중국인들이 이렇게 애지중지 소중하게 먹는 대갑게인데 중국에서 대갑게가 명성을 떨친 것은 상당히 오래전부터라고 한다. 대갑게. 출처 : 바이두 1000년 전인 송나라 때 문헌 『태평광기』에 양자강(長江) 하류에서 잡히는 다양한 지역 특산 게에 대한 기록이 보이는데 그중에서 대갑게에 대한 내용도 보인다. 다만 이때에는 상해 대갑게보다는 절강성 항주와 강소성 소주의 게가 더 명성을 떨쳤다. 상해 양징호의 대갑게가 유명해진 것은 20세기 초 상해가 경제 중심지로 발돋움하면서부터다. 하지만 정작 중국 전역에서, 또 중화권에서 이름을 떨친 것은 홍콩 덕분이라고 한다. 동시에 중국 공산화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1949년 중국 대륙에 공산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공산정권을 피해 상해의 부자들이, 지식인들이 대거 홍콩으로 이주했다. 이들이 홍콩에서 자리를 잡으면서 늦가을이 되면 고향에서 먹었던 양징호 대갑게의 맛을 그리워했고 대갑게 먹는 계절이 오면 본토에서 수입한 대갑게를 파는 홍콩의 전문점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당시 홍콩이 아시아의 금융 중심지였던 만큼 일본의 부유층까지도 비행기를 타고 날라와 먹었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홍콩에서 이름을 날리던 상해 대갑게는 1978년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심천을 중심으로 먼저 경제가 발전한 광동성 지역으로 퍼졌고 1990년대 이후에는 광동에 이어 상해가 중국 경제의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홍콩의 대갑게 문화가 본고장으로 재수입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됐다. 상해 대갑게도 중국의 정치 경제 격변에 따라 부침을 거듭했다. 디자인 : 이희문
음식에는 한 나라의 사회 정치 경제가 은연중에 녹아 있다. 중국 음식도 예외가 아닌데 세계로 퍼진 중국 음식 속에는 현지의 문화와 역사까지 곁들어 있다. 지구촌 중국반점의 요리를 통해 중국 본색을 알아보고 세상을 들여다본다. 남과병(南瓜餠)은 우리한테는 낯선 듯 익숙한 중국 음식이다. 낯선 이유는 우리나라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익숙한 까닭은 맛이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어로 남과(南瓜)는 호박, 병(餠)은 떡 내지는 빵이니 쉽게 말해 호박빵(떡)이다. 하지만 워낙 형태가 다양해서 우리말로 단정해서 호박빵(떡)이라고 옮기기가 간단치 않다. 때로는 늙은 호박에 찹쌀가루를 섞어 만든 일본 떡 모치 같기도 하고 혹은 우리 호박떡과도 비슷하며 또는 늙은 호박에 밀가루를 섞어 부친 호박 부침개와도 닮았다. 한마디로 만드는 사람 마음대로인 것 같다. 다양한 모양의 남과병. 출처 : 바이두 어쨌든 이 남과병, 달달하고 쫄깃하면서 부드러워 상당히 맛있다. 특히 단 음식과 군것질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는 안성맞춤이다. 게다가 늙은 호박의 풍미까지도 함께 맛볼 수 있으니 중국에서 폭넓게 사랑받는 듯싶다. 이를테면 제대로 격식 갖춘 요리들이 순서대로 나오는 격조 높은 연회상에 마지막 디저트로 나오기도 하고 혹은 고급스럽게 포장해 선물로 주고받기도 하지만 때로는 대중음식점에서, 노점에서 거리 음식으로 먹기도 한다. 이렇듯 광범위하게 사랑받는 간식이어서인지 남과병은 별명도 많다. 청나라 후반 상해에서는 이 남과병을 만년고(萬年高)라고 불렀다. 19세기 후반 상해현의 기록인 『상해현지찰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만년고란 별칭이 나이가 들어 원숙하다는 연고(年高)에서 유래한 것인지 혹은 한 걸음씩 높은 곳으로 오르다(步步高)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축원의 의미가 담긴 것은 분명하다. 남과병 먹으면서 승진을 혹은 원숙해지기를 기도했을지도 모른다. 남과병은 또 금과병(金瓜餠)이라고 했다. 노랗게 익은 늙은 호박이 금 같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지만 찹쌀가루와 섞어 둥글고 노랗게 부친 남과병이 마치 금화를 닮아 먹으며 부자 되기를 소원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남과병이 고급 연회에 디저트로 나온 배경에는 이런 의미도 한몫했을 것이다. 늙은 호박떡 내지는 부침개 하나 놓고 뭐가 이렇게 요란스러울까 싶은데 남과병이 처음부터 격조 높은 대접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남과병이라는 중국 호박 디저트 속에는 호박이 처음 중국에 전해졌을 때 얼마나 심한 구박을 받았는지, 그리고 이후 어떻게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고 마침내 어떻게 고급 요리의 재료가 됐는지 호박의 식용 역사, 한 걸음씩 높은 곳으로 오르는 뿌부까오(步步高)의 과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남미가 원산지인 호박이 유럽을 거쳐 중국에 처음 전해진 것은 대략 16세기 초반 무렵인 것으로 추정한다. 1492년 콜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호박이 중국에 전해진 셈이다. 호박. 출처 : 게티이미지 호박이 중국에 전해진 경로는 그 이름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서역 혹은 오랑캐 땅에서 전해진 박이어서 호(胡)박이라고 하지만 중국에서는 남쪽 나라인 남번(南番)에서 전해진 박(瓜)이어서 남과(南瓜)라고 한다. 혹은 번과(番瓜)라고도 했다. 호박이 전해진 경로는 다양했던 것 같다. 왜과(矮瓜)라고도 했는데 일본을 통해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반과(飯瓜)라고도 불렀다. 아마 흉년이 들었을 때 밥(飯) 대신 먹을 수 있는 박 같은 열매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름은 그럴듯하지만 호박이 전해진 후 상당 기간 동안 중국에서 썩 환영을 받지는 못했던 것 같다. 명나라 후반 의학서인 『본초강목』과 식물 백과사전인 『군방보』등에 삶아서 먹을 수 있다고 했지만 날로는 먹지 못한다고 한 것을 보면 아직 호박 요리법이 확실히 자리 잡지는 못 했던 것 같다. 심지어 청나라 초 『호록경적고』에는 호박은 남쪽에서 왔는데 가난한 집에서 식량 대신 먹는다고 적혀있다. 초창기 호박이 얼마나 구박을 받았는지는 우리 문헌에서 보다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호박이 고추와 함께 16세기 말 임진왜란 무렵 전해졌는데 18세기 문헌인 『성호사설』에는 채소 중에 호박이라는 것이 있는데 농가와 절에서 주로 심어 먹는데 열매가 많이 열리기 때문이라면서 요즘은 사대부들도 심는 사람이 있다고 덧붙였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하층민들이 주로 구황작물로 심어 먹었던 채소였는데 전해진 지 200년 넘게 지나서야 비로소 사대부들도 먹는 채소가 됐다.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백성이 밥 대신 삶아 먹고 쪄 먹던 채소였던 호박이 요리 재료로 탈바꿈한 것은 18세기 후반 내지 19세기 초반이다. 이때부터 각종 문헌과 조리서에 다양한 호박 요리가 보인다. 이를테면 늙은 호박 속을 파내고 찹쌀가루 경단과 고기 등을 채워 넣은 남과고(南瓜蠱)라는 요리가 『조정집』에 보이고 『소식설략』에는 튀겨 만든 호박 경단인 남과단(南瓜團)이 나온다. 지금 중국에서 인기 있는 남과병 또한 18세기 광서제 때 상해와 항주 등지에서 유행했다고 한다. 남과고(좌)와 남과단(우). 출처 : 바이두 이렇듯 지금은 다양한 요리 재료로 쓰이는 채소 호박이 중국에서 폭넓은 사랑을 받게 되기까지 300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디자인 : 이희문
음식에는 한 나라의 사회 정치 경제가 은연중에 녹아 있다. 중국 음식도 예외가 아닌데 세계로 퍼진 중국 음식 속에는 현지의 문화와 역사까지 곁들어 있다. 지구촌 중국반점의 요리를 통해 중국 본색을 알아보고 세상을 들여다본다. 도삭면(刀削麵)은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어렵지 않게 먹을 수 있는 중국 국수다. 물론 아직까지는 대중적으로 널리 퍼진 국수는 아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이 국수, 꽤나 유명하다. 누가 정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른바 5대 명품 국수 중 하나로 꼽힌다. 북경 짜장면, 사천 딴딴면, 광동 이부면(伊府麵), 무한 열간면(熱干麵)과 함께 산서(山西) 도삭면이 여기에 포함된다. 도삭면(刀削麵). 출처 : 바이두 도삭면은 칼 도(刀) 깎을 삭(削) 국수 면(麵)자를 써서 도삭면인데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칼국수의 한 종류다. 그런데 이 도삭면, 여러 측면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먼저 만드는 법이다. 베개만 한 밀가루 반죽을 한 손과 어깨에 끼고 다른 손에 든 쇳조각으로 감자 껍질 벗기듯 반죽을 쳐내면 밀가루 조각이 끓는 육수 속으로 떨어지면서 바로 국수가 된다. 도삭면 만드는 법. 출처 : 바이두 실제 현지에서 도삭면 삶는 모습을 보면 마치 서커스 공연을 보는 것 같다. 산시성 성도인 태원(太原)에서는 도삭면 만들기 경연대회도 열린다. 가장 빠른 사람이 1분에 118번을 쳐냈다고 하니 초당 두 번씩 칼질을 한 셈이다. 도삭면을 만들고 있는 셰프. 출처 : 바이두 도삭면은 음식문화사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초기 형태의 국수와 닮은 꼴이라는 주장이다. 중국에서 만두를 비롯한 밀가루 음식이 발달하기 시작한 시기는 3세기 진(晉)나라 무렵이다. 도삭면의 본고장인 산서성은 진나라의 주요 활동 무대였고 옛날 서역에서 밀이 전해진 경로 중 한 곳이었으며 동시에 밀의 주 재배지였다. 동시에 국수의 발달은 칼로 반죽을 잘라내는 것에서 시작됐으니 그런 면에서 도삭면은 국수 발달의 초기 모델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입증되지 않은 가설일 뿐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도삭면의 유래설이다. 중국에서 전해지는 속설로 도삭면은 초기 형태의 국수가 아니라 12세기 무렵의 원나라 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칭기즈칸의 후손인 몽골인들이 중원을 점령하면서 세운 나라가 원나라다. 소수 민족인 몽골 지배층은 다수의 한족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집집마다 갖고 있는 쇠붙이를 모두 거두어들였다. 무기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인데 심지어 부엌에서 쓰는 식칼조차도 소유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식칼이 없으면 음식을 만들 수 없으니 대신 열 집이 한 개의 식칼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음식을 다 만들면 식칼을 회수해 몽골 관리에게 맡겨 보관토록 했다. 도삭면은 이런 과정에서 생겨났다. 어느 날 산서성의 한 할머니가 국수를 먹으려고 밀가루 반죽을 했는데 마침 식칼이 없었다. 해서 할아버지에게 옆집에 가서 공동으로 쓰는 식칼을 가져오라고 시켰는데 식칼을 이미 몽골 관리에게 반납하고 난 후였다. 낙담을 한 할아버지가 주머니에 몰래 숨겨 두었던 작은 쇳조각을 꺼내 건네며 이걸로 어떻게든 썰어 보라고 했다. 밀반죽을 썰지 못하면 감자 껍질 벗기듯 벗겨내면 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이렇게 국수를 만들었는데 먹어보니 다른 칼국수와는 식감이 또 다른 맛있는 국수가 됐다. 이후 이 국수가 유행하면서 지금의 도삭면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지금의 도삭면. 출처 : 바이두 얼핏 들어도 터무니없는 스토리지만 그래도 짚어볼 부분은 있다. 이 스토리 속에는 먼저 몽골이 지배했던 원나라에 대한 한족의 짙은 원망이 배어 있는데 과연 원나라에서는 한족의 반란이 두려워 식칼을 포함해 일체의 쇠붙이 소유를 금지했을까? 과장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 원나라 때 민간인들이 흉기가 될 만한 쇠붙이를 함부로 소지하지 못하게 했던 규정이 있기는 있었다. 원나라 법전인 『전장(典章)』에 "한인들은 무기 소지를 금지한다. 단 병사는 금지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다. 또 "민간인은 쇠 자, 철 지팡이, 쇠몽둥이 등의 소유를 금지한다"는 규정도 있다. 그러나 주방용 식칼에 대한 금지 조항은 없다. 게다가 민간인의 무기 소지 금지는 원나라뿐만 아니라 송나라 때도 있었다. 송나라 역사를 기록한 『송사(宋史)』에 관련 기록이 보인다. 현대로 치자면 일종의 총기 소지 금지 조항이다. 그러니 원나라의 몽골 지배층이 한족의 반란이 두려워 식칼조차 소유를 금지했다는 이야기는 순 엉터리다. 다만 원나라 때 한족들은 몽골인 색목인 한인 남인(南人)으로 계층을 나누어 심한 차별을 당했으니 몽골에 대한 반발이 도삭면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에서 무심코 먹는 도삭면에는 이렇게 중국의 별별 역사와 중국인의 원한이 뒤섞여 있다. 디자인 : 이희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