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매일경제신문 베이징특파원 - 전 매일경제신문 주간국 부국장 - 전 매일경제신문 편집국 사회부장, 국제부장, 과학기술부장, 인터넷부장 - 전 매일경제신문 편집국 산업부, 과학기술부 기자 - 전 미국 클리블랜드 주립대 객원연구원
음식에는 한 나라의 사회 정치 경제가 은연중에 녹아 있다. 중국 음식도 예외가 아닌데 세계로 퍼진 중국 음식 속에는 현지의 문화와 역사까지 곁들어 있다. 지구촌 중국반점의 요리를 통해 중국 본색을 알아보고 세상을 들여다본다. 중국 국수는 세계 여러 나라로 퍼졌는데 나라마다 즐겨 먹는 국수와 전해진 사연은 각각 다르다. 이를테면 한국에는 짜장면과 짬뽕이, 일본에는 지금은 그 뿌리가 중국이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하지만 어쨌든 한때 중화소바(中華そば)라고 불렸던 라멘(ラーメン)이 대표적이다. 그러면 미국에는 어떤 중국 국수가 있을까?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중국 국수는 로메인(lomein)이다. 푸드코트의 중국 패스트푸드점에서 손쉽게 그리고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국수이고 많은 미국인들이 종이박스에 담아 테이크아웃으로 가져가는 국수다.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중국 국수, 로메인. 출처 : 게티이미지 로메인이라니까 낯설게 들리지만 실은 우리한테도 비교적 익숙한 국수다. 우리가 흔히 중국식 볶음면이라고 부르는 국수도 로메인의 한 종류다. 간장 등으로 볶은 채소나 고기, 새우를 국수와 함께 비비거나 혹은 국수와 재료를 볶아서 먹는다. 정확하게 볶음면(炒麵)은 미국에서 초우메인(chowmein)이라고 하고 로메인은 비빔면인데 미국에서는 두 국수의 차이를 헷갈려 하는 것 같다. 실제 미국에서 파는 로메인을 보면 딱히 구분하기도 쉽지 않다. 로메인이라는 미국식 중국 국수, 맛과 모습은 대충 알 것 같다. 그런데 그 정확한 정체는 무엇일까? 중국의 어떤 국수가 미국으로 전해져 로메인이 됐을까? 앞서 살짝 언급한 것처럼 로메인은 비빔국수라는 뜻이다. 중국 본토에서는 반미앤(拌麵) 혹은 라오미앤(撈麵)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반(拌)은 비비다라는 뜻이고 라오(撈)는 섞는다는 의미다. 로메인. 출처 : 바이두 이런 중국 라오미앤이 미국에서 왜 로메인으로 바뀌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로메인은 광동 사투리이고 광동 출신 이민자들이 미국에 퍼뜨린 음식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쿠리(苦力)라고 부르는 고된 일을 하는 광동성 출신 막노동 일꾼들이 먹었던 싸구려 비빔국수가 미국 사회에서 대중화된 것이 로메인이라는 중국식 패스트푸드 국수다. 로메인이 대중적인 국수, 싸구려 국수였다고 해서 원래부터 저렴한 음식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로메인은 족보가 있는 국수였고 근본 있는 지체 높은 음식이었다. 미국 로메인의 원조인 중국 본토의 비빔국수 라오미앤이 세상에 선보인 것은 약 1000년 전인 송나라 무렵이다. 북송의 수도였던 하남성 개봉의 거리 풍경을 묘사한 『동경몽화록』 남송의 수도였던 지금의 절강성 항주의 풍경을 그린 『몽양록』과 비슷한 시기 문헌인 『무림구사』등에 이 국수가 보인다. 물론 라오미앤이라고 콕 집어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채소와 고기 등 여러 재료를 국수에 섞어 먹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송나라 무렵 비빔국수가 처음 등장했다고 보는 이유다. 단순히 1000년 전에 비빔국수를 먹었다고 해서 로메인의 조상이 족보 있는 국수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국수를 비비기 위해서는 말린 국수, 즉 건면(乾麵)이 필요한데 송나라 때를 전후해 비로소 말린 국수가 개발된 것으로 추정한다. 바꿔 말해 비빔국수, 라오미앤은 당시로서는 나름 첨단 국수였던 셈이고 그래서 근본이 있는 국수라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지역별로 다양하고 특색 있는 비빔국수가 발달했다. 천진 라오미앤을 비롯해 산서성, 산동성, 광동성 등지에 특색 있는 비빔국수가 있지만 그중 호북성 무한의 열간면(熱干麵)이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열간면. 출처 : 바이두 이렇게 족보 있는 비빔국수 라오미앤이 어떻게 미국으로 건너가서 대중적인 로메인이 됐을까? 광동 사람들이 로메인이라고 불렀던 라오미앤이 미국에 전해진 것은 19세기 초중반 무렵으로 추정한다. 1820년을 시작으로 미국에는 다수의 중국계 노동자들이 진출했다. 이들은 대부분 광동성 출신으로 까막눈의 막노동자들이었으며 주로 미국 대륙횡단철도, 서부의 골드러시에 따른 금광 노동자로 일했다. 형편없는 임금을 받고 미국으로 온 막노동자들이었던 만큼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돈도 없었다. 그래서 고향에서 먹던 대로 국수에 먹다 남은 채소와 닭고기 돼지고기 등을 넣고 간장으로 비벼 먹거나 볶아 먹었다. 게다가 대부분 독신이었던 만큼 이렇게 만든 국수나마 다른 막일꾼에게 팔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중국식 비빔국수 볶음국수인 로메인과 초우메인이 처음 미국에 퍼지게 된 배경이다. 중국식 패스트푸드 로메인에는 이렇게 초기 광동 출신 중국 이민자들의 땀과 눈물, 애환이 서려 있다. 디자인 : 이희문
음식에는 한 나라의 사회 정치 경제가 은연중에 녹아 있다. 중국 음식도 예외가 아닌데 세계로 퍼진 중국 음식 속에는 현지의 문화와 역사까지 곁들어 있다. 지구촌 중국반점의 요리를 통해 중국 본색을 알아보고 세상을 들여다본다.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중국에서도 게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게보다 더 맛있는 음식은 없다고 말한다. 옛날부터 그랬다. 당나라 시인 이태백은 게 집게발은 영원히 살 수 있는 신선의 불사약(不死藥)과 같다고 했다. 달빛 아래 홀로 술을 마신다는 『월하독작(月下獨酌)』이라는 시에서 호수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술친구로, 게 다리 안주 삼아 술을 마시다 물에 빠져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 신선이 됐다나 뭐라나 그런 전설이 전해진다. 4세기 진(晉)나라 때 재상 필탁은 뱃머리에 술독 가득 싣고 게를 안주 삼아 마시고 먹을 수 있다면 그 이상 만족스러운 인생은 없을 것이라고 했으니 옛사람들의 게 사랑이 정말 진했다. 이들이 맛있다고 먹었던 게는 과연 어떤 게였을까?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게가 있으니 게라고 다 같은 게가 아닐 것인데 그러면 지구상에서 제일 맛있는 게는 어떤 게일까? 시대에 따라 다르고 또 지역에 따라 다를 것이니 딱히 어느 게가 최고라고 꼽을 수는 없겠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서해에서는 꽃게를, 동해에서는 대게를 꼽을 것이고 북한 함경도에서는 털게를 꼽을 것 같다. 또 일본에서는 홋카이도 가니(대게)를, 동남아는 맹그로브 크랩, 미국 서부는 킹크랩, 동부는 블루크랩을 주장할 것이다. 순서대로 꽃게, 털게, 블루크랩. 출처 : 게티이미지 반면 중국에서는 단연코 상해 부근 양징호에서 나오는 민물 게인 대갑게(大甲蟹)가 최고라고 힘주어 말한다. 특히 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늦가을 초겨울이면 그 맛이 최고라고 하는데 중국 경제가 발전한 요즘에는 게 먹으러 가는 도로에 차량이 몰려 주차장으로 바뀐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한테는 낯설지만 사실 상해 대갑게가 맛있기는 맛있다. 크기는 어른 주먹만 한 것이 그다지 크지도 않기에 먹을 것이 별로 없을 것 같지만 얇은 게 껍질 속에 살이 꽉 차 있어 풍부한 데다 게살이 탱글탱글 살아 있어 식감도 좋다. 또한 마치 잘 삶은 밤을 먹는 것 같은 맛과 풍미가 느껴지기에 대게나 꽃게 혹은 털게를 먹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대갑게. 출처 : 바이두 대갑게는 가격도 만만치 않다. 지금은 대량 양식으로 가격이 많이 저렴해졌다고 하던데 꽤 오래전이지만 예전에는 달랐다. 상해의 전문점에서 대갑게를 주문하면 한 접시에 어른 주먹만 한 크기의 대갑게 두 마리가 달랑 놓여있고 새우찜이 곁들여 나왔는데 그 값이 당시 북경의 가정부 반 달 치 월급에 해당됐다. 물론 중국 경제가 아직 도약하기 전인 2000년대 초반의 상황이다. 중국인들이 상해 대갑게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는 그들의 게 먹는 모습에서도 엿볼 수 있다. 껍질에 붙어있는 손톱만 한 크기의 작은 살점마저도 살뜰하게 발라 먹는데 주먹 크기의 대갑게를 다 먹은 후에는 게 껍질만 한 숟가락에 소복이 쌓을 수 있을 정도다. 홍콩에서는 대갑게를 다 먹고 난 후 그 껍질을 붙여 대갑게를 다시 복원해 놓았다는 전설도 있다. 중국인들이 이렇게 애지중지 소중하게 먹는 대갑게인데 중국에서 대갑게가 명성을 떨친 것은 상당히 오래전부터라고 한다. 대갑게. 출처 : 바이두 1000년 전인 송나라 때 문헌 『태평광기』에 양자강(長江) 하류에서 잡히는 다양한 지역 특산 게에 대한 기록이 보이는데 그중에서 대갑게에 대한 내용도 보인다. 다만 이때에는 상해 대갑게보다는 절강성 항주와 강소성 소주의 게가 더 명성을 떨쳤다. 상해 양징호의 대갑게가 유명해진 것은 20세기 초 상해가 경제 중심지로 발돋움하면서부터다. 하지만 정작 중국 전역에서, 또 중화권에서 이름을 떨친 것은 홍콩 덕분이라고 한다. 동시에 중국 공산화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1949년 중국 대륙에 공산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공산정권을 피해 상해의 부자들이, 지식인들이 대거 홍콩으로 이주했다. 이들이 홍콩에서 자리를 잡으면서 늦가을이 되면 고향에서 먹었던 양징호 대갑게의 맛을 그리워했고 대갑게 먹는 계절이 오면 본토에서 수입한 대갑게를 파는 홍콩의 전문점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당시 홍콩이 아시아의 금융 중심지였던 만큼 일본의 부유층까지도 비행기를 타고 날라와 먹었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홍콩에서 이름을 날리던 상해 대갑게는 1978년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심천을 중심으로 먼저 경제가 발전한 광동성 지역으로 퍼졌고 1990년대 이후에는 광동에 이어 상해가 중국 경제의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홍콩의 대갑게 문화가 본고장으로 재수입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됐다. 상해 대갑게도 중국의 정치 경제 격변에 따라 부침을 거듭했다. 디자인 : 이희문
음식에는 한 나라의 사회 정치 경제가 은연중에 녹아 있다. 중국 음식도 예외가 아닌데 세계로 퍼진 중국 음식 속에는 현지의 문화와 역사까지 곁들어 있다. 지구촌 중국반점의 요리를 통해 중국 본색을 알아보고 세상을 들여다본다. 남과병(南瓜餠)은 우리한테는 낯선 듯 익숙한 중국 음식이다. 낯선 이유는 우리나라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익숙한 까닭은 맛이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어로 남과(南瓜)는 호박, 병(餠)은 떡 내지는 빵이니 쉽게 말해 호박빵(떡)이다. 하지만 워낙 형태가 다양해서 우리말로 단정해서 호박빵(떡)이라고 옮기기가 간단치 않다. 때로는 늙은 호박에 찹쌀가루를 섞어 만든 일본 떡 모치 같기도 하고 혹은 우리 호박떡과도 비슷하며 또는 늙은 호박에 밀가루를 섞어 부친 호박 부침개와도 닮았다. 한마디로 만드는 사람 마음대로인 것 같다. 다양한 모양의 남과병. 출처 : 바이두 어쨌든 이 남과병, 달달하고 쫄깃하면서 부드러워 상당히 맛있다. 특히 단 음식과 군것질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는 안성맞춤이다. 게다가 늙은 호박의 풍미까지도 함께 맛볼 수 있으니 중국에서 폭넓게 사랑받는 듯싶다. 이를테면 제대로 격식 갖춘 요리들이 순서대로 나오는 격조 높은 연회상에 마지막 디저트로 나오기도 하고 혹은 고급스럽게 포장해 선물로 주고받기도 하지만 때로는 대중음식점에서, 노점에서 거리 음식으로 먹기도 한다. 이렇듯 광범위하게 사랑받는 간식이어서인지 남과병은 별명도 많다. 청나라 후반 상해에서는 이 남과병을 만년고(萬年高)라고 불렀다. 19세기 후반 상해현의 기록인 『상해현지찰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만년고란 별칭이 나이가 들어 원숙하다는 연고(年高)에서 유래한 것인지 혹은 한 걸음씩 높은 곳으로 오르다(步步高)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축원의 의미가 담긴 것은 분명하다. 남과병 먹으면서 승진을 혹은 원숙해지기를 기도했을지도 모른다. 남과병은 또 금과병(金瓜餠)이라고 했다. 노랗게 익은 늙은 호박이 금 같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지만 찹쌀가루와 섞어 둥글고 노랗게 부친 남과병이 마치 금화를 닮아 먹으며 부자 되기를 소원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남과병이 고급 연회에 디저트로 나온 배경에는 이런 의미도 한몫했을 것이다. 늙은 호박떡 내지는 부침개 하나 놓고 뭐가 이렇게 요란스러울까 싶은데 남과병이 처음부터 격조 높은 대접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남과병이라는 중국 호박 디저트 속에는 호박이 처음 중국에 전해졌을 때 얼마나 심한 구박을 받았는지, 그리고 이후 어떻게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고 마침내 어떻게 고급 요리의 재료가 됐는지 호박의 식용 역사, 한 걸음씩 높은 곳으로 오르는 뿌부까오(步步高)의 과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남미가 원산지인 호박이 유럽을 거쳐 중국에 처음 전해진 것은 대략 16세기 초반 무렵인 것으로 추정한다. 1492년 콜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호박이 중국에 전해진 셈이다. 호박. 출처 : 게티이미지 호박이 중국에 전해진 경로는 그 이름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서역 혹은 오랑캐 땅에서 전해진 박이어서 호(胡)박이라고 하지만 중국에서는 남쪽 나라인 남번(南番)에서 전해진 박(瓜)이어서 남과(南瓜)라고 한다. 혹은 번과(番瓜)라고도 했다. 호박이 전해진 경로는 다양했던 것 같다. 왜과(矮瓜)라고도 했는데 일본을 통해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반과(飯瓜)라고도 불렀다. 아마 흉년이 들었을 때 밥(飯) 대신 먹을 수 있는 박 같은 열매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름은 그럴듯하지만 호박이 전해진 후 상당 기간 동안 중국에서 썩 환영을 받지는 못했던 것 같다. 명나라 후반 의학서인 『본초강목』과 식물 백과사전인 『군방보』등에 삶아서 먹을 수 있다고 했지만 날로는 먹지 못한다고 한 것을 보면 아직 호박 요리법이 확실히 자리 잡지는 못 했던 것 같다. 심지어 청나라 초 『호록경적고』에는 호박은 남쪽에서 왔는데 가난한 집에서 식량 대신 먹는다고 적혀있다. 초창기 호박이 얼마나 구박을 받았는지는 우리 문헌에서 보다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호박이 고추와 함께 16세기 말 임진왜란 무렵 전해졌는데 18세기 문헌인 『성호사설』에는 채소 중에 호박이라는 것이 있는데 농가와 절에서 주로 심어 먹는데 열매가 많이 열리기 때문이라면서 요즘은 사대부들도 심는 사람이 있다고 덧붙였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하층민들이 주로 구황작물로 심어 먹었던 채소였는데 전해진 지 200년 넘게 지나서야 비로소 사대부들도 먹는 채소가 됐다.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백성이 밥 대신 삶아 먹고 쪄 먹던 채소였던 호박이 요리 재료로 탈바꿈한 것은 18세기 후반 내지 19세기 초반이다. 이때부터 각종 문헌과 조리서에 다양한 호박 요리가 보인다. 이를테면 늙은 호박 속을 파내고 찹쌀가루 경단과 고기 등을 채워 넣은 남과고(南瓜蠱)라는 요리가 『조정집』에 보이고 『소식설략』에는 튀겨 만든 호박 경단인 남과단(南瓜團)이 나온다. 지금 중국에서 인기 있는 남과병 또한 18세기 광서제 때 상해와 항주 등지에서 유행했다고 한다. 남과고(좌)와 남과단(우). 출처 : 바이두 이렇듯 지금은 다양한 요리 재료로 쓰이는 채소 호박이 중국에서 폭넓은 사랑을 받게 되기까지 300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디자인 : 이희문
음식에는 한 나라의 사회 정치 경제가 은연중에 녹아 있다. 중국 음식도 예외가 아닌데 세계로 퍼진 중국 음식 속에는 현지의 문화와 역사까지 곁들어 있다. 지구촌 중국반점의 요리를 통해 중국 본색을 알아보고 세상을 들여다본다. 도삭면(刀削麵)은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어렵지 않게 먹을 수 있는 중국 국수다. 물론 아직까지는 대중적으로 널리 퍼진 국수는 아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이 국수, 꽤나 유명하다. 누가 정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른바 5대 명품 국수 중 하나로 꼽힌다. 북경 짜장면, 사천 딴딴면, 광동 이부면(伊府麵), 무한 열간면(熱干麵)과 함께 산서(山西) 도삭면이 여기에 포함된다. 도삭면(刀削麵). 출처 : 바이두 도삭면은 칼 도(刀) 깎을 삭(削) 국수 면(麵)자를 써서 도삭면인데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칼국수의 한 종류다. 그런데 이 도삭면, 여러 측면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먼저 만드는 법이다. 베개만 한 밀가루 반죽을 한 손과 어깨에 끼고 다른 손에 든 쇳조각으로 감자 껍질 벗기듯 반죽을 쳐내면 밀가루 조각이 끓는 육수 속으로 떨어지면서 바로 국수가 된다. 도삭면 만드는 법. 출처 : 바이두 실제 현지에서 도삭면 삶는 모습을 보면 마치 서커스 공연을 보는 것 같다. 산시성 성도인 태원(太原)에서는 도삭면 만들기 경연대회도 열린다. 가장 빠른 사람이 1분에 118번을 쳐냈다고 하니 초당 두 번씩 칼질을 한 셈이다. 도삭면을 만들고 있는 셰프. 출처 : 바이두 도삭면은 음식문화사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초기 형태의 국수와 닮은 꼴이라는 주장이다. 중국에서 만두를 비롯한 밀가루 음식이 발달하기 시작한 시기는 3세기 진(晉)나라 무렵이다. 도삭면의 본고장인 산서성은 진나라의 주요 활동 무대였고 옛날 서역에서 밀이 전해진 경로 중 한 곳이었으며 동시에 밀의 주 재배지였다. 동시에 국수의 발달은 칼로 반죽을 잘라내는 것에서 시작됐으니 그런 면에서 도삭면은 국수 발달의 초기 모델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입증되지 않은 가설일 뿐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도삭면의 유래설이다. 중국에서 전해지는 속설로 도삭면은 초기 형태의 국수가 아니라 12세기 무렵의 원나라 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칭기즈칸의 후손인 몽골인들이 중원을 점령하면서 세운 나라가 원나라다. 소수 민족인 몽골 지배층은 다수의 한족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집집마다 갖고 있는 쇠붙이를 모두 거두어들였다. 무기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인데 심지어 부엌에서 쓰는 식칼조차도 소유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식칼이 없으면 음식을 만들 수 없으니 대신 열 집이 한 개의 식칼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음식을 다 만들면 식칼을 회수해 몽골 관리에게 맡겨 보관토록 했다. 도삭면은 이런 과정에서 생겨났다. 어느 날 산서성의 한 할머니가 국수를 먹으려고 밀가루 반죽을 했는데 마침 식칼이 없었다. 해서 할아버지에게 옆집에 가서 공동으로 쓰는 식칼을 가져오라고 시켰는데 식칼을 이미 몽골 관리에게 반납하고 난 후였다. 낙담을 한 할아버지가 주머니에 몰래 숨겨 두었던 작은 쇳조각을 꺼내 건네며 이걸로 어떻게든 썰어 보라고 했다. 밀반죽을 썰지 못하면 감자 껍질 벗기듯 벗겨내면 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이렇게 국수를 만들었는데 먹어보니 다른 칼국수와는 식감이 또 다른 맛있는 국수가 됐다. 이후 이 국수가 유행하면서 지금의 도삭면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지금의 도삭면. 출처 : 바이두 얼핏 들어도 터무니없는 스토리지만 그래도 짚어볼 부분은 있다. 이 스토리 속에는 먼저 몽골이 지배했던 원나라에 대한 한족의 짙은 원망이 배어 있는데 과연 원나라에서는 한족의 반란이 두려워 식칼을 포함해 일체의 쇠붙이 소유를 금지했을까? 과장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 원나라 때 민간인들이 흉기가 될 만한 쇠붙이를 함부로 소지하지 못하게 했던 규정이 있기는 있었다. 원나라 법전인 『전장(典章)』에 "한인들은 무기 소지를 금지한다. 단 병사는 금지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다. 또 "민간인은 쇠 자, 철 지팡이, 쇠몽둥이 등의 소유를 금지한다"는 규정도 있다. 그러나 주방용 식칼에 대한 금지 조항은 없다. 게다가 민간인의 무기 소지 금지는 원나라뿐만 아니라 송나라 때도 있었다. 송나라 역사를 기록한 『송사(宋史)』에 관련 기록이 보인다. 현대로 치자면 일종의 총기 소지 금지 조항이다. 그러니 원나라의 몽골 지배층이 한족의 반란이 두려워 식칼조차 소유를 금지했다는 이야기는 순 엉터리다. 다만 원나라 때 한족들은 몽골인 색목인 한인 남인(南人)으로 계층을 나누어 심한 차별을 당했으니 몽골에 대한 반발이 도삭면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에서 무심코 먹는 도삭면에는 이렇게 중국의 별별 역사와 중국인의 원한이 뒤섞여 있다. 디자인 : 이희문
음식에는 한 나라의 사회 정치 경제가 은연중에 녹아 있다. 중국 음식도 예외가 아닌데 세계로 퍼진 중국 음식 속에는 현지의 문화와 역사까지 곁들어 있다. 지구촌 중국반점의 요리를 통해 중국 본색을 알아보고 세상을 들여다본다. 호떡은 한국의 대표적 겨울철 거리 간식이다. K-푸드의 유행에 따라 요즘은 외국에서도 한국의 맛있는 거리 음식으로 그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이런 호떡,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겨났을까? 우리들 중 상당수는 호떡이 중국에서 온 음식인 줄로 알고 있다. 그것도 1882년의 임오군란을 계기로 한반도에 들어온 청나라 군대를 따라온 중국 노동자들이 퍼뜨렸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한국의 대표적 겨울철 거리 간식. 출처 : 바이두 결론부터 말하면 일부만 맞고 상당 부분은 틀렸다. 먼저 호떡이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는 말, 맞지만 틀리다. 동시에 호떡은 중국 음식이면서 아니다. 이렇듯 호떡을 중국 고유의 전통 음식으로 보는 것은 다소 애매한 구석이 있다. 일단 우리 호떡과는 상당 부분 다르지만 중국에도 호떡은 있다. 이름도 우리와 같은 호떡으로 중국어로는 후삥(胡餠)이다. 여기서 호(胡)는 수염이 긴 서역 오랑캐를 뜻하는 한자이니 호떡은 곧 오랑캐 떡, 다시 말해 서역 오랑캐들의 떡이라는 소리다. 중국인들 스스로 후삥, 즉 오랑캐 떡이라고 부르니 중국 고유의 음식이 아님을 인정하는 셈이다. 구운 빵이라는 뜻으로 소병(燒餠)이라고도 한다. 소병(좌)과 후삥(우). 출처 : 바이두 후삥, 즉 오랑캐 떡이니 중국 전통음식은 아니라고 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후삥이 중국에 전해진 것은 기원전 2세기 한 무제 무렵이다. 역사도 깊지만 신강성 위구르 자치구 일대와 중국의 고도인 섬서성 서안을 비롯해 감숙성과 산서성 등지에서는 국수와 만두 이상으로 많이 먹는 주식이다. 이들 지역은 모두 이슬람 전통의 회족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다. 그런 만큼 후삥을 중국 음식이면서 이민족 음식으로 보는 이유다. 어쨌든 호떡은 중국의 회족(回族) 음식 내지는 중앙아시아 음식이다. 다시 말해 그 뿌리는 서역 음식인 셈이다. 이런 호떡이 한반도에 들어온 시기 역시 우리가 아는 상식과는 많이 다르다. 처음 전해진 시기, 그리고 대중적으로 유행한 시기로 구분해 생각해 볼 수 있다. 호떡은 생각보다도 훨씬 빨리 한반도에 전해졌는데 대략 고려 말 내지 조선 초에 이미 들어온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니 중원의 한족 국가인 송이나 명나라보다는 호떡을 주식으로 삼았던 몽골의 원이나 거란의 요나라 등과의 교역을 통해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본다. 문헌상으로는 조선 초에 주로 보이는데 『조선왕조실록』 세종 때와 세조 때 보인다. 세종 때는 대마도주에게 선물로 호떡을 보냈다고 나오고 세조 때는 대마도주가 모친상을 당했는데 이때 부조로 호떡을 보냈다고 기록돼 있다. 원문에는 구운 빵이라는 뜻의 소병(燒餠)으로 적혀 있으니 호떡(胡餠)과는 다른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음식이다. 참고로 이때의 호떡은 지금 우리가 간식으로 먹는 호떡과는 달랐다. 지금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먹는 난(Naan)이나 중국 서안이나 우루무치 등에서 먹는 후삥 혹은 사오빵(燒餠)에 가까운 음식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옛날 호떡은 조선의 왕이 대마도주에게 선물로, 또 조의를 표하는 식품으로 보냈을 정도니 단순한 식품이 아니라 상류층의 특별한 별미였다. 난(Naan). 출처 : 바이두 그러면 이런 호떡이 언제 그리고 어떻게 지금과 같은 대중적인 거리 음식으로 발전했을까? 일단 시기적으로는 1920년 이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24년 발행된 신문 기사에는 지금의 서울시청에 해당되는 경성부 재무국의 자료를 인용해 경성 시내에 설렁탕집은 100곳인 반면 호떡집은 150곳이 넘는다는 기사가 보인다. 그만큼 호떡집이 번창했다는 소리다. 1920년대에 왜 이렇게 호떡이 유행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는데 배경을 알아보기 앞서 먼저 조선 초부터 전해졌던 호떡과 관련이 있을까? 일단 조선 초부터 들어온 호떡이 발전적으로 진화해 20세기 초 호떡의 유행으로 이어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호떡에 대한 인식은 높았기에 시장이 형성되는 효과는 있었을 것이다. 1920년대 호떡이 발전한 배경에는 이 무렵 한반도에 외국 빵 문화가 도입된다. 단팥빵, 곰보빵 등 서양식 일본빵과 제과점이 한반도에 진출한 것이 이 무렵인데 호떡은 일본식 서양빵과 함께 들어온 중국식 동양빵이었던 셈이다. 또 다른 배경으로 설탕과 밀가루의 보급도 빼놓을 수 없다. 1920년 평양에 대일본제당의 설탕공장이 세워진다. 한반도에 최초로 설립된 설탕공장으로 대만에서 가져온 원당을 제당해 조선과 만주에 공급했다. 동시에 이 무렵 일본인 소유의 밀가루 공장이 한반도 곳곳에 세워졌다. 더불어 1920~30년 중국인 노동자들이 한반도에 밀려 들어오면서 이들이 너도나도 호떡 장사에 뛰어들면서 호떡집이 크게 번성했던 것이다. 한국의 대표 거리 간식 호떡에는 이렇게 고려 말 조선 초부터 이어진 음식 교류의 역사, 일제강점기 조선과 일본, 중국의 묘한 관계가 녹아 있다. 디자인 : 이희문
음식에는 한 나라의 사회 정치 경제가 은연중에 녹아 있다. 중국 음식도 예외가 아닌데 세계로 퍼진 중국 음식 속에는 현지의 문화와 역사까지 곁들어 있다. 지구촌 중국반점의 요리를 통해 중국 본색을 알아보고 세상을 들여다본다. 홍콩이나 대만 여행을 가면 하오젠(蠔煎)이라고 하는 굴전을 먹어보는 것도 좋겠다. 굴전이야 우리나라에도 있고 또 굴이라는 해산물이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엇갈리는 음식이니 홍콩 혹은 대만 굴전에 대한 평가도 각각 다르겠지만 어쨌든 한국 굴전과는 또 다른 특이한 맛이 있다. 일단 생김새부터가 우리 굴전과는 달라서 여러 개의 굴을 모아 빈대떡 부치듯 크게 부친 것이 다르고 맛 또한 딥 프라이드(deep fried) 방식으로 기름에 푹 담가 순간적으로 튀겨내는 것이 은근한 불에 지지듯 부치는 우리 굴전과는 차이가 있다. 홍콩 굴전 하오젠(蠔煎). 출처 : 바이두 홍콩이나 대만에서 굴전을 먹을 때면 중국에도 우리와 비슷한 굴전이 있다는 반가움과 동시에 북경이나 상해 등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음식이기에, 그러니 이게 과연 중국음식일까라는 궁금증도 생긴다. 하오젠(蠔煎)이라는 굴전이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 중국음식인 것은 분명하다. 다만 옛날에는 변방이었던 광동성과 복건성을 중심으로 발달한 음식이고 북경이나 남경, 상해 등지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요리였을 뿐이다. 이유는 옛날 기준으로 북경은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고 남경과 상해 부근 바다에서는 굴이 나오지 않았으니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굴은 상어 지느러미나 전복, 해삼처럼 건어물로 만들어 운반 보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기에 굴은, 그리고 굴전은 아는 사람만 아는 별미였고 식도락가들 사이에서 입소문으로만 떠돌던 진미였다. 굴맛을 아는 중국인들이 얼마나 그 맛에 빠져들었는지는 우리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중종 때 중국에서 사신이 왔다. 이 사신이 오는 도중에 굴을 맛있게 먹었던 모양이다. 한양에 도착해서 말하기를 도착하는 곳마다 석화(굴)를 내오기에 한양에 가면 맛있는 석화를 실컷 먹을 수 있겠다며 기대했는데 한양에는 왜 굴이 없냐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23년의 기록이다. 사신으로 와서 굴 타령을 했을 정도였으니 당시 중국에서 굴을 얼마나 진미로 여겼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역사상 중국 최고의 미식가로 꼽히는 11세기 송나라 때 시인 소동파도 굴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모양이다. 멀리 조선에까지 소문이 났으니 정조 때의 실학자 정약용이 귀양살이할 때 굴을 먹으며 지은 시에 그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소동파(좌)와 그가 좋아하던 굴. 출처 : 바이두 사실 소동파의 굴 사랑에는 내력이 있다. 소동파는 송 철종 때 광동성 혜주(惠州)로 귀양을 갔다. 귀양지로 가는 길에 광동성 동관(東莞)을 거쳐 갔는데 옛날 이곳은 정강호(靖康蠔)라는 굴로 유명한 고장이었다. 소동파가 여기서 정강 굴을 먹으며 그 맛을 찬양하는 시를 지었으니 이로 인해 정강 굴은 중국 식도락가들 사이에서 한번 맛봐야 할 음식, 하지만 광동성까지 귀양을 가야만 먹어 볼 수 있는 굴로 소문이 났다. 이런 입소문이 조선 선비들의 귀에까지 전해졌으니 정약용이 귀양지에서 굴을 먹으며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소동파의 굴 예찬을 인용했던 배경이다. 중국에서 굴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해산물이었다. 삼면이 바다인 만큼 굴이 흔한 우리와는 달리 중국에서는 5세기 무렵에야 비로소 굴이라는 해산물을 알게 된다. 동진(東晉) 때의 문헌 『영표이록』에 중국의 영남, 즉 광동 사람들은 굴을 먹고 그 껍질로 담장을 쌓는다며 신기해했다. 이런 먼 곳의 쉽게 맛볼 수 없는 해산물인 데다 소동파를 비롯해 여러 시인 묵객들이 귀양지에서 맛본 굴에 대한 예찬을 쏟아냈으니 굴이 흔한 조선에 온 중국 사신들이 굴 접대를 받아보고는 시도 때도 없이 굴 타령을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 홍콩과 대만의 별미인 굴전, 하오젠도 이런 배경에서 생긴 요리일 것 같지만 중국 굴전의 시작은 완전히 다르다. 홍콩과 대만의 별미 하오젠(蠔煎). 출처 : 바이두 가뭄으로 흉작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기 일보 직전, 배고픔에서 구해준 구황 음식이 굴전이라는 것이다. 물론 입소문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다. 16세기 말 복건성에 큰 가뭄이 들어 땅이 갈라지고 농작물이 타들어갔다. 이때 백성들을 허기에서 구해준 것이 진진룡이라는 복건 상인이 필리핀 마닐라에서 몰래 숨겨 들여온 고구마였고 복건 바닷가에 지천으로 널려 있던 굴이었다. 배고픈 백성들은 굴을 따다가 고구마를 갈아 만든 전분으로 굴전을 부쳐 삶은 고구마와 함께 먹으며 굶주림을 극복한 것이 굴전이 생겨난 배경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굴전이 광동성으로 전해져 홍콩 굴전으로 발전했고 대만으로 건너와 지금의 대만 별미가 됐다는 것이다. 식도락가들의 별미였건 혹은 굴전이 굶주린 백성을 구한 구황 음식이었건 어쨌든 중국 굴에 얽힌 역사가 다채롭다. 디자인 : 이희문
음식에는 한 나라의 사회 정치 경제가 은연중에 녹아 있다. 중국 음식도 예외가 아닌데 세계로 퍼진 중국 음식 속에는 현지의 문화와 역사까지 곁들어 있다. 지구촌 중국반점의 요리를 통해 중국 본색을 알아보고 세상을 들여다본다. 짬뽕은 짜장면과 더불어 한국인이 가장 즐겨 먹는 중국음식이다. 그런데 짬뽕이 진짜 중국음식 맞을까? 뜬금없는 의문 같지만 사실 짬뽕은 정체가 다소 애매하다. 그 뿌리도 그렇고 우리나라에 전해진 경로 역시 한 번쯤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짬뽕은 일단 중국에는 없는 국수다. 한국 짜장면이 철저하게 현지화돼 원래의 중국 짜장면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것처럼 짬뽕 역시 현지화되면서 내용과 이름까지 변형된 것일 수도 있다. 짬뽕. 출처 : 게티이미지 물론 짬뽕의 원조로 추정되는, 혹은 원조라고 주장하는 국수는 있다. 일각에서는 짬뽕이 산동의 초마면(炒碼麵) 혹은 복건의 민면(燜麵)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산동성과 복건성은 지리적으로 엄청 떨어져 있다. 그런데 왜 이 두 지역 국수가 짬뽕의 원조로 거론되는 것일까? 게다가 산동 초마면과 복건 민면은 현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국수다. 그런데 이런 음식이 어떻게 한반도로 건너와 짬뽕이 됐는지도 궁금하다. 초마면(좌)과 민면(우). 출처 : 바이두 짬뽕이라는 음식 이름도 특이하다. 우리는 흔히 이것저것 잡다하게 모아 놓은 것을 짬뽕이라고 하지만 그건 짬뽕의 특성에 비유해 생긴 풀이일 뿐이다. 짬뽕은 일본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일본 말 찬폰(ちゃんぽん)이 변해 짬뽕이 됐다. 중국음식에 웬 일본식 이름일까? 의미도 엉뚱하기 짝이 없다. 안부 인사로 묻는 "밥 먹었니?"라는 말에서 생겼다. 관련해서 전해지는 일화가 있다. 짬뽕은 1890년대 일본 나가사키에서 사해루라는 중국음식집을 운영하던 화교, 천핑순이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나가사키 짬뽕이 유명해진 배경이다. 천핑순은 복건성 출신으로 당시 나가사키에는 중국 유학생과 노동자들이 많았다.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이들은 사해루에 자주 들리곤 했는데 천핑순은 이들에게 고향에서 먹던 국수에 나가사키의 해산물과 채소를 이것저것 넣어 만든 국수를 듬뿍 담아주었다. 그러면서 "밥은 먹었니?"라는 인사를 자주 했는데 중국 표준어로는 츠판(吃飯)이지만 복건성 출신인 만큼 복건 사투리로 찬폰이라고 물었다. 이 말을 들은 일본 손님들이 찬폰을 국수 이름으로 잘못 알아듣고 자기도 찬폰 한 그릇 달라고 주문하면서 찬폰, 즉 짬뽕이 음식 이름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복건성 출신의 나가사키 화교가 고향의 국수를 토대로 만든 찬폰이 일제강점기 한반도에 전해졌고 1960년대 짬뽕이 유행하면서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고추기름과 고춧가루가 더해지면서 지금의 한국 짬뽕으로 진화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그러면 나가사키 화교 천핑순이 토대로 삼았다는 복건성 국수는 어떤 음식일까? 복건성 성도인 복주시에서 주로 먹는 민면(燜麵)이 바탕이 됐다고 하는데 해산물과 채소를 듬뿍 넣은 것이 나가사키 짬뽕과 비슷한 부분이 없지 않다고 한다. 나가사키 짬뽕. 출처 : 게티이미지 하지만 중국에서는 나가사키 짬뽕을 복주 민면의 아류가 아닌 완전히 다른 국수로 보는 것 같다. 그래서 이름을 강봉면(强棒麵)이라고 부르는데 중국어 발음으로는 챵빵면이다. 일본어 찬폰의 중국어 음역으로 추정된다. 강봉면. 출처 : 바이두 짬뽕의 한국 전래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있다. 우리나라 짬뽕과 일본 찬폰, 즉 나가사키 짬뽕은 이름만 비슷할 뿐, 정확하게는 우리 짬뽕이 일본 찬폰에서 이름을 차용했을 뿐 그 뿌리가 다르다는 것이다. 일본 찬폰이 복건성 출신 화교가 복건성의 민면을 토대로 만들어 낸 국수인 반면 우리 짬뽕은 산동성 출신 화교가 산동성 국수인 초마면(炒碼麵)을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초마면은 이름만 봐서는 어떤 국수인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볶을 초(炒)에 보석의 일종인 마노 마(碼)자를 쓰니 보석을 볶은 국수 내지는 돌멩이를 볶은 국수라는 뜻이 되니 엉뚱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산동 사투리에서는 마(碼)가 재료를 뜻하는 료(料)자와 통한다고 하니 곧 모든 재료를 볶아서 만든 국수라는 뜻이다. 중국 위키피디아를 비롯해 다수 중국 인터넷에서는 한국 짬뽕을 초마면 또는 한식 초마면으로 번역한다. 다만 산동 지역 국수라는 초마면에서 변형된 국수가 아닌 한국 짬뽕 그 자체를 초마면이라고 번역한 게 인상적이다. 어쨌든 한국 짬뽕은 산동성에서, 일본 찬폰은 복건성에서 따로따로 전해져 각각의 짬뽕의 됐다는 것인데 아무래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정리하면 짬뽕은 멀리 중국 남쪽, 복건성의 이름도 낯선 국수에서 시작해 또 멀리 일본 남쪽 큐슈의 나가사키를 거쳐 한반도로 전해진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국과 중국, 일본의 맛과 문화와 역사가 녹아들면서 지금의 짬뽕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디자인 : 이희문
음식에는 한 나라의 사회 정치 경제가 은연중에 녹아 있다. 중국 음식도 예외가 아닌데 세계로 퍼진 중국 음식 속에는 현지의 문화와 역사까지 곁들어 있다. 지구촌 중국반점의 요리를 통해 중국 본색을 알아보고 세상을 들여다본다. 꽃빵과 고추잡채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즐겨 먹는 중국 음식 중 하나다. 바늘에 실 따라가듯 고추잡채 먹을 때면 꽃빵도 함께 먹는 경우가 많은데 고추잡채와 꽃빵 중 어느 음식이 중심일까? 이런 의문을 품는다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다는 반응이 대다수일 것 같다. 얼핏 봐도 고추잡채가 메인이고 꽃빵은 보조일 수밖에 없는 것이 요리에 들어가는 재료만 봐도 차원이 다르다. 먼저 고추잡채는 고추와 피망, 파프리카, 양파와 돼지고기 혹은 오리고기, 그리고 갖은양념을 기름에 달달 볶아 조리한다. 반면 꽃빵은 만두도 아니고 찐빵도 아닌 밀가루 덩어리에 불과(?)한 데다 없으면 밥으로 대체해도 그만이다. 꽃빵(좌)과 고추잡채(우). 출처 : 게티이미지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그렇지만 음식의 역사와 음식 문화의 차원에서 보면 또 이야기가 달라진다. 꽃빵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품격 있는 음식인 반면 고추잡채는 누가, 언제부터 먹었는지도 모르는 그저 꽃빵을 맛있게 먹기 위한 보조일 뿐이다. 그러니 꽃빵 입장에서 보면 지금의 꽃빵과 고추잡채는 완전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꽃빵이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호들갑일까 싶지만 사실 꽃빵은 족보가 있는 음식이다. 우리는 꽃처럼 생긴 빵이라고 해서 꽃빵이라고 부르지만 실은 만두의 한 종류다. 한자로는 꽃 화(花), 말 권(卷) 자를 쓰고 중국어로는 화쥐앤(花卷)이라고 하는데 어쨌든 꽃처럼 돌돌 말았다는 뜻이다. 화쥐앤(花卷). 출처 : 바이두 중국에서는 꽃빵의 기원을 당나라 때로 꼽는다. 중국인들 역사상 가장 화려했다는 잔치로 청나라 때 만주 요리와 한족 요리 180가지가 차려졌다는 만한전석(滿漢全席)을 꼽는다. 하지만 만한전석은 최고의 잔치고, 최초의 화려한 잔치는 소미연(燒尾宴)이라는 잔치다. 당나라 중종 때 위거원이라는 인물이 재상인 좌복야로 승진하자 임금을 초대해 열었던 승진 자축 잔치였는데 여기에 차려진 요리 중에 현재의 꽃빵 원조로 추정되는 음식이 보인다. 만한전석. 출처 : 바이두 칠반고(七返膏)라는 음식으로 밀가루를 일곱 번 돌려 말아 둥근 꽃 모양으로 만들어 기름을 발라 찐만두 종류의 음식이다. 영락없는 꽃빵이다. 꽃빵은 이렇듯 당나라 최고의 잔치에 등장했던 초호화 요리였던 것이다. 밀반죽을 일곱 번 말았건 일흔 번 말았건 그래봤자 찐만두 종류인데 이게 왜 초호화 요리일까 싶지만 만두의 역사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중국에서 만두가 처음 퍼진 시기는 대략 3세기 후반으로 추정한다. 삼국지에서 제갈공명이 만두를 발명했다는 이야기는 사실과는 다른 엉터리일 뿐이고 만두라는 단어는 3세기 말 『병부』라는 문헌에 처음 보인다. 여기에서 만두는 음력 정월 초하루 설날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음식으로 나온다. 만두가, 바꿔 말해 밀가루 음식이 그만큼 귀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인 진(晉)나라 때 재상 중에 하증이란 인물이 있었다. 엄청난 부자에다 미식가로 소문난 인물로 1만 냥의 돈을 들여 차린 밥상임에도 젓가락 댈 만한 음식이 없다고 투덜거렸던 인물이다. 역사책인 『진서(晉書)』 「하증열전」에는 발효시켜 찐만두 꼭대기가 열 십(十)로 갈라지지 않으면 손도 대지 않았다고 나온다. 이 무렵 만두는 황제의 제례 때 혹은 진짜 부자 아니면 먹지 못했던 음식이었다. 이런 밀가루 반죽을 얇게 펴서 일곱 번을 말아 꽃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질 좋은 밀가루를 곱게 갈아 섬세하게 제분했다는 것이니 7세기 소미연 잔치에 오른 원조 꽃빵 칠반고를 초호화 요리로 분류하는 이유다. 꽃빵은 이후에도 진화에 진화를 거듭했던 모양이다. 꽃빵, 한자로 화권(花卷)이라는 단어는 명말청초 때의 기술 서적인 『천공개물』에 보이는데 밀을 갈아서 밀가루로 만든다고 했으니 당연한 소리겠는데 그만큼 곱게 갈아 고급스럽게 만든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꽃빵. 출처 : 바이두 이렇게 만든 꽃빵은 청나라 때 최고의 미식가 원매가 쓴 『수원식단』에도 보인다. 무척이나 고운 밀가루를 재료로 썼는지 하얗기가 마치 눈과 같다고 했다. 꽃빵의 역사가 이렇게 깊고 품격이 있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꽃빵이 역사적으로 상류층의 고급 요리였다는 뜻이다. 꽃빵은 사실 그 자체로는 특별한 맛이 없다. 그런 만큼 이 맛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는 또 다른 음식이 필요한데 우리가 밥을 맛있게 먹기 위해 반찬을 먹는 것처럼 고추잡채가 반찬의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별 볼일 없는(?) 꽃빵의 역사가 알고 보니 대단했다. 디자인 : 이희문
음식에는 한 나라의 사회 정치 경제가 은연중에 녹아 있다. 중국 음식도 예외가 아닌데 세계로 퍼진 중국 음식 속에는 현지의 문화와 역사까지 곁들어 있다. 지구촌 중국반점의 요리를 통해 중국 본색을 알아보고 세상을 들여다본다. 홍콩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음식 중에 광둥어로 뽀짜이판(煲仔飯)이라고 부르는 요리가 있다. 와뽀판(瓦煲飯)이라고도 한다. 영어로는 클레이팟 라이스(clay pot rice)라고 한다. 뽀짜이판. 출처 : 바이두 우리나라에서도 어렵지 않게 먹을 수 있다. 홍콩식 딤섬 전문점의 주요 메뉴로 올라와 있는데 앞에 적은 명칭 외에 한국어로 그저 홍콩식 솥밥이라고 표시한 곳도 있다. 어쨌든 보기에 따라서는 요리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것이 적지 않은데 반찬으로 먹을 재료 한 가지를 올려놓고 지은 솥밥일 뿐이다. 사실 이 음식의 핵심은 한자로 냄비 보(煲), 영어로 진흙 냄비라는 뜻의 클레이팟(clay pot)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냄비 밥 내지 도자기 솥밥이라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얼핏 보기에 단순한 도자기 솥밥(냄비 밥)일 뿐인데 홍콩 사람들, 우리가 돌솥밥 즐겨먹듯 이 뽀짜이판을 많이 먹는다. 일부에서는 홍콩인의 소울푸드라고까지 하는데 홍콩에서 뽀짜이판 먹는 모습을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홍콩의 명소 소호거리 골목길에는 갖가지 음식점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점심때가 되면 노천식당 좌판에 직장인들이 모여 앉아 식사를 하는데 뽀짜이판 먹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야시장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 출처 : 바이두 해가 지면 몽콕의 야시장에서도 뽀짜이판과 굴전(蠔煎) 등을 먹으며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보이는데 그만큼 일상에서 뽀짜이판을 자주 먹는 것 같다. 홍콩의 소울푸드라는 소리가 그래서 나온 것 같다. 홍콩 소호거리(좌)와 몽콕 야시장(우). 출처 : 바이두 밥 위에 햄 조각, 혹은 계란프라이, 닭고기 올려놓고 찐 듯한 단순한 도자기 솥밥처럼 보이지만 진해 보이기는 해도 달착지근한 홍콩식 간장 넣고 비벼 먹는 모습이 먹음직스러워 호기심에 맛보면 사실 맛있기는 맛있다. 따지고 보면 뽀짜이판은 조금은 특별한 밥이다. 일단 쌀을 삶고 찌고 뜸 들이는 우리나라 밥, 혹은 삶으면서 찌는 중국 밥과는 밥 짓는 법이 다르다. 도자기 그릇에 기름을 두른 후 씻은 쌀을 얹고 물을 부은 후 뚜껑을 닫고 밥을 한다. 우리 쌀과는 다른 길쭉하고 쌀 향기가 강한 재스민 쌀 혹은 향미(香米)라고 부르는 쌀의 풍미를 최대한 살리는 조리법이다. 쌀의 향기와 뜨거운 밥의 열기가 입속에 그대로 남아 인디카종 쌀밥의 맛이 극대화된다는 것이다. 참고로 이탈리아 리소토, 스페인의 빠에야, 아랍의 필라프 같은 쌀 요리도 비슷한 방식으로 요리하는데 유럽의 쌀밥은 기름에 볶는 볶음밥인 반면 홍콩의 뽀짜이판은 기름 대신 물로 짓는다는 것이 차이다. 뽀짜이판은 함께 먹거나 조리하는 재료에 따라 종류가 다양해진다. 홍콩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뽀짜이판은 스팸 등의 햄이나 건어물 등(臘味)과 함께 먹는 뽀짜이판 혹은 돼지갈비, 소고기, 닭고기 등과 함께 먹는 뽀짜이판이 있지만 이 밖에도 광동 음식답게 버섯은 물론 돼지 간(猪肝), 개구리(田鷄) 고기 뽀짜이판도 있다. 해산물 뽀짜이판(좌)과 치킨 뽀짜이판(우). 출처 : 바이두 개구리 뽀짜이판. 출처: 바이두 홍콩을 포함한 중국 광동성에서는 이런 뽀짜이판에 대해 꽤나 자부심을 갖는 것 같다. 일반적인 밥과는 다른 별미 밥이기 때문인지, 혹은 광동성에서 유래한 독특한 광동요리(粤菜)이기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뿌리를 먼 고대로부터 찾고 있다. 2000년도 훨씬 전인 주나라 때의 『예기주소(禮記注疏)』라는 문헌에 팔진미 중에서 뽀짜이판 조리법과 비슷한 요리법이 있다는 것인데 뽀짜이판 조리법이 여기서 비롯됐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그리고 당나라 측천무후 때 재상이면서 식도락가였던 위거원이 쓴 『식보(食譜)』라는 문헌에 어황왕모반(御黃王母飯)이라는 요리가 있는데 돼지고기와 계란 등을 얹어 밥의 풍미를 더한 요리로 이런 요리가 중원에서 광동성으로 전해져 뽀짜이판으로 발전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참고로 위거원이 썼다는 식보라는 문헌은 현재 존재하지 않으며 『청이록』 등 일부 문헌에 일부 요리가 전해지지만 어황왕모반이라는 요리는 없다. 그러고 보면 여기서도 중국의 독특한 문화(?)를 엿볼 수 있다. 홍콩의 명물 뽀짜이판은 누가 언제 어디서 만들었건 매력 있는 요리다. 그럼에도 애써 있지도 않은 문헌과 인물, 납득할 수 없는 근거를 들면서 역사와 전통이 있는 음식이고 그래서 훌륭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남들이 인정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홍콩식 솥밥 뽀짜이판, 전통을 날조하지 않아도 충분히 맛있다. 디자인 : 이희문
음식에는 한 나라의 사회 정치 경제가 은연중에 녹아 있다. 중국 음식도 예외가 아닌데 세계로 퍼진 중국 음식 속에는 현지의 문화와 역사까지 곁들어 있다. 지구촌 중국반점의 요리를 통해 중국 본색을 알아보고 세상을 들여다본다. 중국의 중추절을 대표하는 음식은 월병이지만 그렇다고 중국인들 중추절에 월병만 먹는 것은 아니다. 월병 이외에도 다양한 중추절 음식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중국 가정에서 주로 장만하는 음식 중 하나가 전(煎)이다. 우리나라는 명절이면 동태전에 호박전, 버섯전, 동그랑땡에 소고기 육전까지 다양한 전을 준비하지만 중국은 우리와 달리 주로 중추절에 연근전을 차린다고 한다. 연근전이라고는 했지만 한자로는 우병(藕餠), 중국어 발음으로는 어우삥이다. 연뿌리로 만든 떡 내지는 빵이라는 뜻이다. 혹은 이런 우병을 전 부치듯 부쳤다고 해서 전우병(煎藕餠)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생김새나 맛은 연근전과 비슷하다. 우병. 출처 : 바이두 가정에서 직접 만들기 힘든 월병과는 달리 연근전인 우병은 주로 집에서 만든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이 우병을 보고 맛은 다르지만 만드는 수고와 공력은 월병과 별 차이가 없다(異曲同工)고 하는데 이를 보면 우리나라 어머니와 며느리들이 명절에 전 부치느라 애썼던 것처럼 중국 가정에서도 연근전인 우병 만드느라 진땀깨나 흘렸던 것 같다. 연근전인 우병은 월병과 달리 중국 전역에서 두루 장만하는 명절 음식은 아니다. 주로 강소성과 절강성, 하남성과 광동성 그리고 산동성 등지에서 마련한다고 한다. 아마 이들 지역에서 연꽃을 많이 재배했기 때문인 듯싶다. 어쨌거나 우리처럼 명절마다 다양한 전을 엄청 많이 부쳐야 하는 것도 아니고 중추절에 달랑 연근전, 다시 말해 우병 하나 부치면서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월병 못지않게 많은 공력을 들여야 한다며 엄살(?)을 부리는 것일까? 게다가 그렇게 힘들면 연근전인 우병, 안 만들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반드시 부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유는 연근전인 우병이 특별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병에는 단원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단원을 한자로는 단순하게 둥글 단(團), 둥글 원(圓) 자를 쓰니 둥글다는 뜻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중국에서 단원(團圓)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재결합, 다시 말해 멀리 떨어져 지내는 가족들이 명절에 다시 모여 합친다는 뜻이 있고 그래서 가족 간의 화합과 화목을 상징한다. 나아가 가족 간 결합과 화합의 차원을 넘어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고 원만하게 이뤄지기를 바라는 염원도 포함돼 있다. 연근전인 우병은 이런 단원의 의미를 담아 중추절 온 가족이 모이는 식탁에 올리는 명절 음식이니 함부로 꾀를 부릴 음식이 아니다. 가족 간의 화합을 상징하는 단원 문화. 출처 : 바이두 그렇다고 해도 겨우 연근전 하나 부치면서 왜 월병 만드는 것 못지않은 공력이 들어간다며 호들갑일까 싶은데 여기에도 이유가 있다. 연근전인 우병에 온갖 상징성을 부여해 놓은 만큼 만들고 부치는데 정성을 쏟아야 한다. 먼저 연근전인 우병이 단원을 상징하게 된 데는 까닭이 있다. 연근은 잘라 놓으면 둥근 모양인 데다 단면 속에도 둥근 구멍이 송송 뚫려 있다. 그러니 연근 자체가 둥글다는 뜻의 단원을 상징한다. 좌측부터 연근과 우병. 출처 : 게티이미지, 바이두 그렇기에 우리나라 연근전처럼 중국 우병 역시 밀가루, 찹쌀가루 옷을 입혀 부치기만 해도 가족의 결합과 화합을 기원하는 음식이 된다. 하지만 중추절 우병은 조금 더 복잡하게 만든다. 얇게 자른 두 개의 연근 사이에 고기와 버섯, 각종 채소 등을 다져 만든 소를 넣은 후 연근 두 개를 붙인다. 마치 연근 샌드위치와 같은 모양새다. 이때 주의할 부분이 있다. 연근을 자르면 끈적끈적한 실이 나온다. 이 실을 끊어지지 않도록 길게 늘인 후 연근 샌드위치 만들 때 반대편 연근에 붙이는 게 중요하다. 끈적근적 늘어난 연근실이 가족 간 유대를 상징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우병을 만드니 월병 만들 때 못지않은 공력이 들어간다고 한 것이 아닐까 싶은데 실제 우병을 만드는 사람, 상당한 정성과 노력을 쏟아만 했을 것이다. 이렇게 만든 연근 샌드위치, 우병은 주로 찹쌀가루 옷을 입힌 후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부치는데 이때도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있다. 황금색이 나도록 노랗게 부쳐야 하니 황금을 좋아하는 중국인들, 중추절에 황금색 연근전 우병을 먹으며 금옥만당(金玉滿堂), 집안에 재물이 가득하기를 기원한다는 것이다. 우병이라는 중추절 연근전 하나에 가족 간 화목과 화합을 담은 단원의 의미와 재물을 기원하는 중국의 민속이 재미있으면서도 요란스럽다. 디자인 : 이희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