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매일경제신문 베이징특파원 - 전 매일경제신문 주간국 부국장 - 전 매일경제신문 편집국 사회부장, 국제부장, 과학기술부장, 인터넷부장 - 전 매일경제신문 편집국 산업부, 과학기술부 기자 - 전 미국 클리블랜드 주립대 객원연구원
음식에는 한 나라의 사회 정치 경제가 은연중에 녹아 있다. 중국 음식도 예외가 아닌데 세계로 퍼진 중국 음식 속에는 현지의 문화와 역사까지 곁들어 있다. 지구촌 중국반점의 요리를 통해 중국 본색을 알아보고 세상을 들여다본다. 딤섬의 4대 만두로 꼽는 것이 차슈바오와 하가우, 그리고 쇼마이와 샤오롱바오다.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과 홍콩이나 대만에서도 가장 인기가 높다. (좌) 차슈바오(叉燒包), (우) 하가우(蝦餃). 출처 : 바이두 이 중 차슈바오(叉燒包)와 하가우(蝦餃)는 광둥어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광둥음식이다. 쇼마이(稍麥)는 조금 애매모호하다. 역시 광둥음식 같지만 뿌리는 원나라 때 유행했던 중국 북방 만두에서 비롯됐다. 다만 만두 끝에 껍질 깐 새우(蝦仁)가 들어있는 쇼마이는 광둥음식(粤菜)으로 분류한다. 쇼마이. 출처 : 바이두 샤오롱바오(小籠包)는 또 다르다. 중국 표준어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중국 본토, 그것도 상하이에서 홍콩으로 건너와 딤섬의 대표 만두가 됐다. 탈바꿈의 배경은 중국 공산화다. 상하이의 부자, 요리사들이 당시 영국 지배 아래 있던 홍콩으로 탈출하면서 샤오롱바오가 홍콩 딤섬 음식들 사이에 끼어들게 됐다. 그런데 샤오롱바오에는 그 이상의 복잡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 샤오롱바오. 출처 : 게티이미지 샤오롱바오는 작은 대나무 바구니(小籠)에 담아 찐 포자(包子) 만두라는 뜻이다. 유래 역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청나라 말인 1871년 상하이 부근의 남상진(南翔鎭)에 위치한 한 음식점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남상진의 대나무 찜통 만두가 맛있다고 소문나면서 1900년 사촌동생이 상하이 시내에 분점을 냈고 이후 상하이가 샤오롱바오의 본고장으로 알려지게 됐다. 남상진. 출처 : 바이두 샤오롱바오의 유래설, 반은 맞지만 나머지까지 정확한 것은 아니다. 샤오롱바오의 핵심은 얇은 밀가루 반죽으로 싼 만두 속에 뜨거운 국물인 탕즙(湯汁)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밀반죽 속으로 스며들지 않은 국물을 온전히 맛본 후 촉촉한 만두피를 먹는 것이 샤오롱바오의 본질이다. 작은 대나무 바구니에 쪘다는 것은 부수적인 방법일 뿐이다. 샤오롱바오. 출처 : 게티이미지 그런데 얇은 만두피 속에 뜨거운 국물이 들어 있는 만두는 상하이뿐만이 아니라 중국 곳곳에 있다. 이런 만두를 관장만두(灌漿饅頭) 혹은 관탕포(灌湯包)라고 하는데 관(灌)은 물을 댄다 혹은 물을 붓는다는 뜻이고 장(漿)은 액체니까 만두 속에 즙을 넣은 것이 관장만두다. 탕(湯) 역시 뜨거운 국물이라는 뜻의 한자니까 관탕포는 뜨거운 국물을 주입한 포자만두가 된다. 샤오롱바오와 이름만 다를 뿐 내용과 생김새는 거의 비슷한 이런 만두는 북송의 수도였던 허난성 개봉(開封)의 개봉 관탕포를 비롯해 산시성의 가삼(賈三) 관탕포, 장쑤성 남경의 용포(龍袍) 관탕포, 상주와 양주 일대의 해황(蟹黃) 관탕포 등 이루 다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다. (좌) 해황(蟹黃) 관탕포, (우) 관장만두. 출처 : 바이두 이 중에서도 해황 관탕포는 게살을 녹여 즙을 만들었으니 얼핏 들어도 고급 만두임을 알 수 있고 다른 관탕포는 주로 돼지비계와 껍질 또는 닭고기 등으로 소를 넣어 쪄낼 때 녹아 즙이 되도록 만든다고 한다. 이들 관탕포, 관장만두는 많은 경우 만두 하나가 접시만하지만 샤오롱바오는 중국 숟가락에 올려 먹을 수 있도록 작게 만들어 찐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그런데 샤오롱바오가 됐건 관탕포 혹은 관장만두가 됐건 뜨거운 즙이 들어 있는 만두가 왜 중국 전역에 두루 퍼져있는 것일까? 샤오롱바오의 원조가 되는 관장만두, 관탕포는 실은 북방 만두에서 비롯됐고 중국 왕조의 변천사와 함께 중국에 퍼졌다. 속에 뜨거운 육즙이 들어있는 만두는 다른 중국 만두와 마찬가지로 그 뿌리가 옛날 중국의 서역을 비롯해 북방 민족의 만두에서 기원해 중원으로 흘러들어온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다 11세기를 전후한 북송 때 송나라 황실과 상류층에서 발달해 퍼지는데 문헌에 보이는 대표적인 만두가 산동매화포자(山洞梅花包子)다. 이름만 전해지니 요리법은 알 수 없지만 산속 동굴에 매화가 핀 것처럼 육즙이 들어있는 만두로 추정한다. 그리고 북송이 금나라에 쫓겨 항주로 천도해 남송이 시작될 때 이런 관장만두도 함께 전해져 양자강 이남의 강남 일대에 퍼졌다고 한다. 바꿔 말하면 중원의 한족이 북방 요나라의 거란과 금나라의 여진, 원나라의 몽골 민족에 쫓겨 남쪽으로 밀려 내려오면서 후난성과 장쑤성, 저장성 등지로 전파됐다가 상하이에서 샤오롱바오라는 대중음식으로 꽃을 피웠다. 그리고 20세기 들어 공산당을 피해 홍콩으로 피난 온 상하이 출신들에 의해 홍콩 딤섬으로 발전해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됐다. 파란만장한 곡절을 겪었던 샤오롱바오의 역사다. 디자인 : 서현중
음식에는 한 나라의 사회 정치 경제가 은연중에 녹아 있다. 중국 음식도 예외가 아닌데 세계로 퍼진 중국 음식 속에는 현지의 문화와 역사까지 곁들어 있다. 지구촌 중국반점의 요리를 통해 중국 본색을 알아보고 세상을 들여다본다. 탕수육은 한국과 일본에서 흔하게 먹는 중국 요리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맛보기 쉽지 않다. 더군다나 파인애플 조각을 넣어 맛과 향을 더한 파인애플 탕수육은 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이유는 탕수육이 한국과 일본에서 현지화된 중국 음식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뭔 소리냐? 중국에 새콤달콤한 탕추(糖醋)소스로 조리한 돼지 등갈비인 탕추리지(糖醋里脊), 돼지갈비 탕추파이구(糖醋排骨)를 비롯해 탕추 소스를 뿌린 생선 요리인 탕추잉어(糖醋鯉魚), 탕추조기(糖醋黃魚) 등등의 탕수 요리가 얼마나 많은데 원조 나라인 중국에 탕수육이 없다고 하냐며 반박할 수도 있겠다. (위) 탕추파이구, (아래) 탕추잉어. 출처 : 바이두 사실 중국의 탕추 소스는 역사도 깊다. 사탕수수가 퍼지고 여기서 설탕을 뽑는 제당 기술이 발달한 10세기를 전후해 당송 시대에 생겨난 것으로 추정한다. 이런 탕추 요리법은 진작에 조선을 비롯한 주변국에도 전해졌다. 우리나라의 경우 19세기 초 순조 때의 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당초장(糖醋醬) 만드는 법이 보인다. 엿과 식초로 새콤달콤한 양념을 만든다는 것인데 우리 전통 요리법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중국 탕추 소스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중국의 탕추 소스 역사가 깊고 중국에 다양한 탕추 요리가 있음에도 탕수육처럼 돼지고기에 전분으로 옷을 입혀 튀겨낸 음식은 중국 본토에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래서 나온 것이 탕수육 유래설이다. 흔히 탕수육은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중국인들이 영국 사람 입맛에 맞추기 위해 만들어낸 음식이라고 말한다. 중국 음식에 익숙하지 않은 서양 사람들이 먹기 좋도록 고기 튀김에 달콤하고 새콤한 소스를 만들어 부은 것이 탕수육의 유래라는 것이다. 재미삼아 떠도는 이야기지만 중국의 굴욕을 강조하고 음식까지도 승자의 입맛에 맞춰야 했던 근대 중국의 비굴을 조롱하는 뉘앙스가 없지 않다. 좌) 1830-1843 시기에 파리에서 발행됐던 프랑스 일간지에 수록된 풍자화 우)아편전쟁 묘사한 삽화. 출처 : 게티이미지 어쨌든 얼핏 들어도 엉터리 같은데 그러면 탕수육은 어떻게 만들어진 중국 음식일까? 고기나 채소에 튀김옷을 입혀 순간적으로 튀기는(deep-fried) 것은 전통적인 일본 요리법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16~17세기 포르투갈에서 전해진 튀김 요리가 일본에서 변형해 생긴 일본 튀김 덴부라(てんぷら)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중국의 탕추리지나 탕추파이구 요리가 일본에 전해지면서 그 위에 튀김옷이 입혀진 일본식 탕수육, 스부타(すぶた)로 변한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다시 한국식 탕수육으로 변했다. 그렇기에 탕수육이 아편전쟁의 결과로 생겨났다는 유래설 역시 일본에서 생겨나 퍼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탕추리지. 출처 : 바이두 그런데 그냥 탕수육만 먹기 아쉬워서인지 언제부터인가 탕수육에 파인애플을 넣은 파인애플 탕수육도 널리 퍼졌다. 이런 탕수육은 또 누가 처음 만들었을까? 여러 유래설이 있지만 그중 하나는 중국이 열강들에 의해 산산조각 점령당했을 때 상하이의 영국과 프랑스 조계지에서 서양인 입맛에 맞게 파인애플을 넣었다는 것이다. 파인애플을 넣으면 고기가 훨씬 부드러워지는 데다 과일 향기로 맛이 훨씬 더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19세기의 파인애플은 최고급 과일이었다. 그렇기에 당시 파인애플은 아무나 먹을 수 없는 과일이었다. 돈 많은 서양인들 아니면 먹을 수 없는 과일이었기에 상하이 조계지에서 이들을 위해 파인애플 탕수육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알려진 파인애플 탕수육 유래설에도 또한 근대 중국의 굴욕적인 역사를 꼬집는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러면 실제 파인애플 탕수육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일본에 주둔한 미군의 입맛에 맞춰 만들어진 음식이라고 한다. 지금도 도쿄에서 영업 중인 남국주가(南國酒家)라는 일본 중국음식점이 처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무렵에는 파인애플이 이미 널리 퍼졌고 더군다나 미군들에게 파인애플 통조림이 보급될 때였기에 이를 활용해 만든 것이 파인애플 탕수육이었다. 남국주가. 출처 : 바이두 그러고 보면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일본에서 미군을 상대로 일본식 중국 음식인 파인애플 탕수육을 만들어 팔면서 패전국의 굴욕을 중국에 뒤집어씌운 것이 아닐까 싶다. 탕수육과 파인애플 탕수육 하나에 묘한 역사와 감정이 뒤섞여 있다. 디자인 : 서현중
음식에는 한 나라의 사회 정치 경제가 은연중에 녹아 있다. 중국 음식도 예외가 아닌데 세계로 퍼진 중국 음식 속에는 현지의 문화와 역사까지 곁들어 있다. 지구촌 중국반점의 요리를 통해 중국 본색을 알아보고 세상을 들여다본다. 사천(四川)성에서 시작된 마파두부는 중국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에 골고루 퍼져 있다. 한국과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과 유럽, 남미의 중국 음식점에도 있다. 당연히 현지의 입맛을 반영해 나라마다 맛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만두, 볶음밥과 함께 지구촌에 광범위하게 퍼진 중국 요리 중 하나다. 마파두부, 왜 이렇게 널리 퍼졌을까? 마파두부가 세계 각지에서 사랑받는 기본적인 이유는 맛 때문일 것이다. 중국에서 말하는, 얼얼하고(麻) 맵고(辣) 산뜻하고(鮮) 향미가 있으며(香) 뜨거우면서(燙) 부드럽고(嫩) 농후하며(酥) 촉촉한(涃) 맛이 다 들어있다고 요란떨 것까지는 아니어도 나름 독특한 풍미가 있다. 이런저런 여러 이유에 더해 마파두부가 널리 퍼진 데는 중국에 불었던 역사의 광풍(狂風)도 큰 몫을 했다. 인생에 비유해 말하자면 사실 마파두부만큼 험난한 질곡을 견디며 버텨온 음식도 많지 않다. 마파두부는 알고 있는 것처럼 사천성 성도(成都)에 살았던 곰보 아줌마가 만들어 팔았기에 생긴 이름이다. 마파라는 말 자체가 마(麻)는 중국어로 마마, 속칭 곰보라는 뜻이고 파(婆)는 부인, 아줌마, 할머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마파두부는 곰보 아줌마가 파는 두부가 된다. 마파두부는 시작부터가 기구했다. 진 씨라는 곰보 아줌마 남편이 사고로 사망했다. 생계가 막막해진 진 씨가 시누이와 함께 남편 동료를 상대로 두부에 고추와 화쟈오(花椒), 양고기와 고추기름을 섞어 맵고 얼얼한 두부요리를 만들어 팔았다. 청나라 말인 1862년 무렵이다. 곧이어 진 씨네 두부요리가 맛있다는 소문이 성도 시내에 퍼졌다. 1920년대 사천성 출신의 공산주의자이자 작가로 활동했던 곽말약(郭沫若)이 마파두부를 예찬하는 글을 쓰고 비슷한 시기에 등소평이 프랑스에서 활동할 당시 두부장사와 함께 마파두부를 만들어 팔았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1920년대에는 마파두부가 대중적인 음식으로 사천성 전체에 전파됐던 것으로 짐작된다. 사천성. 출처 : 바이두 사천성의 지방 특산음식이었던 마파두부는 1930~40년대 중국 전역으로 알려졌는데 엉뚱하게도 일본과 깊은 관련이 있다. 북경의 노구교에서 발생한 중국군과의 충돌을 핑계 삼아 중일전쟁을 일으킨 제국주의 일본은 전쟁을 중국 전역으로 확대하면서 북경과 천진, 남경, 상해 등 대도시를 차례차례 공략했다. 이에 국민당 정부는 1938년 당시 수도를 남경에서 사천성 중경으로 옮겼고 고위 관료, 부자를 비롯해 수많은 피난민들이 임시 수도인 중경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전쟁을 피해 온 중경과 성도 등지에서 마파두부를 먹어 본 피난민들이 전선이 안정돼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값싸고 맛있는 마파두부 조리법도 중국 전역으로 퍼지게 됐다. 마파두부가 중국을 넘어 세계로 뻗어나간(?) 계기는 중국 공산화와 관련 있다. 제2차 대전이 끝난 후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국공내전을 벌이다 1949년 대륙이 공산화됐다. 그러자 관리와 자본가, 지주들이 타이완, 홍콩을 비롯해 해외로 빠져나갔는데 이들을 따라간 요리사와 피난민들이 현지에 중국 음식점을 열며 마파두부가 세계적으로 퍼졌다. 진마파두부 외관. 출처 : 바이두 중국 밖에서 마파두부가 식객의 입맛을 사로잡을 때 중국 안에서 마파두부는 공산화로 인해 진짜 미친 바람을 맞았다. 민간 기업을 공기업과 합쳐 경영한다는 '공사합영(公私合營)'이라는 이름으로 번창했던 성도의 진마파두부 본점이 국유화됐다. 워낙 유명했기에 음식점을 없애지는 않고 상호를 그대로 유지했지만 소유권은 인정되지 않았다. 공산화된 중국에서 국영기업은 손익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기에 그저 이름만 이어갔다. 드라마 <삼체> 출처 : 넷플릭스 문화대혁명. 출처 : 바이두 하지만 그나마 이어갔던 명맥도 1966년 문화혁명의 시작과 함께 마파두부라는 이름마저 버려야 했다. 홍위병이 낡은 사상과 낡은 문화, 옛 풍속과 낡은 습관을 모조리 파괴해야 한다(破四舊)며 구시대 잔재의 청산을 외쳤을 때 애꿎게 마파두부도 그 대상이 됐다. 그 결과로 마파두부 이름이 '문승(文勝)두부'로 바뀌었는데 문화혁명의 승리를 기원하는 두부라는 뜻이다. 홍위병의 광기가 음식 하나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참고로 마파두부가 되살아난 것은 개혁개방 이후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도입되면서부터다. 디자인 : 장지혜
음식에는 한 나라의 사회 정치 경제가 은연중에 녹아 있다. 중국 음식도 예외가 아닌데 세계로 퍼진 중국 음식 속에는 현지의 문화와 역사까지 곁들어 있다. 지구촌 중국반점의 요리를 통해 중국 본색을 알아보고 세상을 들여다본다. 불도장은 직접 먹어보지는 않았어도 대부분 그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중국 요리다. 이른바 중국인들이 최고의 보양식으로 꼽는다는 음식이다. 얼마나 맛있는지 많이 알려진 것처럼 수행 중이던 스님이 풍기는 냄새에 이끌려 담장을 넘어 음식을 맛보고는 파계를 했다는 스토리가 전해진다. 그래서 이름이 스님을 의미하는 부처 불(佛), 뛸 도(跳), 담장 장(墻)자를 써서 불도장이 됐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청나라 황제들이 즐겨 먹었다는 여름 보양식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날씨가 더워질 무렵이면 유명 중식당에서 고객을 유혹하는 계절 음식으로 선보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맛있고 몸에 좋은 식재료로 요리했다는 말이겠는데 어쨌든 스님이 담장을 뛰어넘어 맛보았다는 불도장의 유래나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보양식이라는 광고는 모두 엉터리다. 일단 불도장 이름은 맛에 반한 손님이 지은 시 구절에서 비롯됐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청나라 황제들이 여름 보양식으로 먹기는커녕 이름조차도 들어보지 못했던 음식이다. 일단 정사가 됐건 야사가 됐건 기록이 한 줄도 없는 데다 실제 불도장은 청나라 말 자금성에서 멀리 떨어진 복건성에서 생겨난 요리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우리가 아는 불도장 관련 소문은 만들어진 허상이다. 하지만 이런 불도장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국 요리로 알려진 데는 나름 곱씹어볼 배경과 의미가 있다. 일단 불도장이라는 이름처럼 맛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맛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 요소가 강하니까 말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들어가는 식재료만큼은 분명 대단하다. 출처 : 바이두 불도장은 원래 상어 지느러미와 말린 해삼, 전복, 위춘(魚脣)이라는 생선 입술과 중국인들이 최고 보양식으로 꼽는 자라 등등 고대의 산해진미에 더해 닭과 오리고기, 버섯과 죽순, 구기자까지 하늘, 땅, 바다에서 나오는 진기한 재료를 모두 모아 중국 전통 명주인 소흥주 항아리에 담은 후 연잎으로 밀봉해 장시간 넘게 고아서 만든다. 그런데 이런 요리, 누가 만들었을까? 불도장은 청나라 말 관은국(官銀局)이라는 복건성 금융기관의 책임자가 상급 관청 감독관을 접대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속된 말로 감독관을 구워삶으려니 온갖 최고 재료를 동원해 한번 맛보면 반할 수밖에 없는 요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청이 망한 후 관청 소속 요리사가 독립해 음식점을 차리며 일반인에게 알려졌다. 불도장 스토리의 핵심은 스님이 담장을 뛰어넘을 정도의 맛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사여탈권을 쥔 감독관을 감동시키려고 음식 하나에도 최선을 다했다는 점이다. 복건성. 출처 : 게티이미지 어쨌든 복건성 지방 요리에 불과했던 불도장이 유명해진 것은 개혁개방 시기의 중국 외교 덕분이다. 1972년 미중 화해 당시 샥스핀과 제비집 요리로 닉슨 전 대통령의 환심을 사고 세계의 이목을 끌었던 중국은 이후 만찬외교에 정성을 다했다. 이때 지방을 샅샅이 뒤져 알려지지 않은 명품 요리로 발굴한 것이 불도장이다. 이 요리는 1984년 로날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방중 때 영빈관인 조어대의 만찬과 1986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방중 오찬, 그리고 시아누크 캄보디아 국왕의 중국 방문 때 만찬 요리로 나왔는데 나름 외교적 배경이 있다. (좌) 1986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방중. (우) 1984년 로날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방중. 출처 : 바이두 레이건이 중국을 찾았을 때는 중국이 개혁개방 선언에 이어 1980년 심천 등의 4대 경제특구를 만들었음에도 외국 자본이 중국 투자에 관심을 보이지 않아 미국의 도움이 필요했을 때다. 영국 여왕의 방중은 1997년 홍콩 반환이 결정되기 이전이기에 영국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었고 캄보디아 국왕은 1979년 중월전쟁의 여파로 인도차이나에서 우군 확보가 절실했을 무렵이다. 그러니 불도장을 대접했던 등소평의 마음이 청나라 말 복건성 관은국 책임자의 심정과 크게 달랐을 것 같지 않다. 이랬던 중국이 2008년 북경올림픽 이후에는 국빈 만찬의 음식 수를 줄여 국 요리 하나, 주요리 셋(一湯三菜)으로 공식화했고 2017년에는 외국 정상을 초청해 혼밥 논란이 일도록 무례를 저질렀다. 한국인이 기억하는 바로 그 일이다. 지금 중국이 겪는 상황, 초심을 잃었기에 생긴 결과일까, 섣불리 본색을 드러냈기 때문일까? 등소평의 불도장을 보며 떠오르는 생각이다. 디자인 : 권혜민
음식에는 한 나라의 사회 정치 경제가 은연중에 녹아 있다. 중국 음식도 예외가 아닌데 세계로 퍼진 중국 음식 속에는 현지의 문화와 역사까지 곁들어 있다. 지구촌 중국반점의 요리를 통해 중국 본색을 알아보고 세상을 들여다본다. 모두 알다시피 우리나라 짜장면은 중국에서 기원해 한국에서 현지화된 음식이다. 그런 만큼 중국 짜장면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중국의 경우 삶은 국수에 숙주나물과 가늘게 썬 오이, 무, 배추 등의 갖가지 채소를 얹고 볶은 듯 안 볶은 듯한 된장으로 비벼 먹는다. 일종의 중국식 막국수인 셈인데 우리 입맛에는 맞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반면 한국 짜장면을 먹어 본 중국인들 상당수는 좋고 싫고를 떠나 이건 진정한 짜장면이 아니라고 말한다. 북경 짜장면(北京 炸醬麵). 출처 바이두 짜장면이 중국에서 언제 한국으로 전해져 어떻게 발전했는지는 그 발자취가 비교적 자세히 알려져 있다. 일단 1883년 지금의 인천광역시인 제물포를 개항했을 때 청나라에서 들어온 산둥성 출신 노무자들인 쿠리(苦力)들이 먹었던 싸구려 음식이다. 이랬던 짜장면이 1905년 공화춘이라는 청요릿집 메뉴에 오른다. 이후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바뀌면서 초등학교 졸업식 음식, 이삿날 먹는 필수 음식으로 퍼지며 한국인에게 도시 서민의 향수를 자극하는 국민음식으로 자리매김했다. 덕분에 최초로 짜장면을 퍼뜨렸다는 공화춘은 문화재 246호로 등록됐다. 현재는 짜장면 박물관으로 사용 중인 옛 공화춘 건물 '도루묵 전설' 중국판은 서태후의 짜장면? 원조라는 중국에서 짜장면은 어떤 음식일까? 중국, 특히 북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옛 북경 짜장면(老北京 炸醬麵)이라는 간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중국인의 마음속에서도 그리움을 자극하는, 특별한 정서가 깃든 음식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짜장면에 담긴 중국적 서정을 이해하려면 짜장면이 언제 생겨나 누가 어떻게 먹었는지 그 역사를 짚어볼 필요가 있겠는데 중국 짜장면은 다른 음식과는 달리 전해지는 관련 기록이 거의 없다. 이유가 무엇일까? 일단 전해지는 말로 북경에 짜장면이 퍼진 계기는 청나라 말의 서태후와 관련 있다. 1900년 의화단의 난 때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8개국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했다. 그러자 서태후가 광서제와 함께 자금성을 버리고 서안으로 피난을 떠났는데 도중 너무나 배가 고파 길가 농부 집에서 짜장면 한 그릇을 얻어 맛있게 먹었다. 청나라 말 서태후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길에서 도루묵을 맛있게 먹었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다만 차이는 궁으로 돌아온 선조가 다시 먹어 보고는 맛이 없어 도로 묵이라고 부르라고 한 것과 달리 서태후는 환궁 후에도 열심히 짜장면을 찾았다. 그러자 신하들도 짜장면을 자주 먹었고 덕분에 짜장면이 크게 유행했다는 것이다. 선조의 도루묵 전설처럼 서태후의 짜장면 이야기도 근거는 없지만 그래도 시사점은 있다. 옛날 짜장면은 가난한 농부들이 막 먹는 국수였지만 청나라 말 최고 권력자였던 서태후가 다시 찾아 먹었다는 이야기로 끝날 만큼 중국인들한테는 나름 향수어린 음식이라는 점이다. 옛날 우리 시골 밥상의 꽁보리밥 같은 음식이 아니었나 싶다. 이런 음식이었기 때문인지 중국 문헌에서는 짜장면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조차 어렵다. 1894년에 나온 무협소설(永慶升平后傳)에 간신히 짜장면이 보인다. 그리고 아큐정전의 작가인 루쉰이 1936년에 출판한 소설 『고사신편(故事新编)』에 보이니 어쩌다 드문드문 있을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1883년 제물포 개항 때 전해지고 1905년 중국음식점 공화춘에서 처음 음식으로 팔기 시작한 우리나라와 별반 차이가 없다. 미루어 짐작건대 중국에서도 짜장면이 중국인들의 주장과는 달리 19세기를 전후한 근대에 생겨난 국수이거나 아니면 음식 문화를 기록한 중상층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가난한 농부와 막노동 일꾼이 먹던 중국판 막국수였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몰론 훨씬 이전인 원나라 무렵에 생긴 국수라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중국 서민들이 짜장면을 추억의 옛날 국수라고 말하는 심정도 이해할 수 있다. 중국 국수의 종류와 역사를 조명한 『중국면조집금(中國麵條集錦)』에서는 짜장면이 북방의 대표 국수라고 나온다. 북방은 쌀이 아닌 밀 문화권이지만 그렇다고 가난한 농민이나 빈민들까지 국수와 만두를 쉽게 먹지는 못했다. 국수는 생일, 만두는 춘절에나 먹는 음식이었다. 국수를 먹을 수 있게 된 후에도 함께 먹을 고기나 양념은 없었기에 밭에서 따온 채소와 함께 된장에 비벼 먹으며 행복해했던 것이 옛 짜장면에 담긴 향수다. 한국과 중국 짜장면에 담긴 정서, 어딘지 모르게 다른 듯 닮았다. 디자인 : 장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