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자본시장연구소 소장, (前)미래에셋자산중국 대표이사 중국 감독기관 등록 한국인 펀드매니저 1호. 중국 Magnolia Award 금융인 최초 수상
중국인은 역대 왕조의 특징을 나타내는 글자를 더해서 간결하게 부른다. 예를 들면 패진(霸秦), 강한(强漢), 성당(盛唐) 등인데, 전반적으로 이 세 왕조는 그들의 자부심이고, 후대 왕조는 그보다는 못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천하통일 후 진나라 인구는 2,600만 명이었는데, 한나라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5천만 인구 대국이었다. 이 거대한 나라를 무려 54년간 집권한 황제가 바로 한무제(漢武帝) 유철(劉彻)이다. 그는 진시황과 동급으로 '진황한무'(秦皇汉武)로 불리는 중국의 '역대급' 황제이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중앙 권위의 재건이었다. 지방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추은령(推恩令)을 공포하여 지방의 모든 왕들은 여러 아들에게 강제로 땅을 나눠주도록 했는데, 이는 특혜가 아니라 덫이었다. 한 세대 뒤에는 세력과 재력이 흩어져 중앙에 맞설 힘이 저절로 사라지게 한, 신의 한 수였다. 제자백가 중에서 가장 체제 순응적인 집단인 유가를 공식 치국이념으로 정하여 군신, 부자, 충효를 강조하고 반란은 대역죄라고 국민의 의식을 통제하려 했다. 또, 한무제는 선대 황제의 화친 정책을 파기하고, 서쪽 흉노, 동쪽 고조선, 남쪽 베트남 등과 전쟁을 함으로써 내부 결속을 도모하였다. 그를 도와 제도적 개혁을 한 사람이 바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재테크 귀재, 당대 제일의 수학 천재 상홍양(桑弘羊)이다. 그는 재벌가 출신으로 돈을 주고 조정에 들어가서 평생 한무제를 따른다. 상홍양은 그 어렵다는 산업, 유통, 조세 등 3대 개혁을 모두 단행했다. 산업 개혁의 중점은 국유화였다. 소금, 철, 술 등으로 중국 역사상 진정한 첫 번째 국유기업을 세웠다. 제나라 관중은 민간은 생산하고, 국가가 사는 구조였지만, 한무제 때는 국유기업이 직접 철을 만들었다. 국유 방산업체의 철로 제작한 최첨단 고성능 무기로 한나라 병졸 하나가 다섯의 흉노족을 상대했다. 중독성을 가진 술, 차, 소금 등은 다시 찾게 되니 나라의 벌이는 늘어났다. 상홍양은 백성이 쉽게 부유해지지 않으며, 국가 유지를 용이하게 하는 것이 국유기업의 상업적 비밀인 것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유통 분야도 개혁하였다. 지방이 중앙에 바치는 조공은 구매 후 운송 과정에서 유실이 매우 컸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중앙이 각지에 사람을 보내 구매와 유통을 관리한 것이 균수(均输)다. 도매 성격으로 지역 특산품을 전국에 유통을 시켜 큰돈을 벌었다. 평준(平准)이란 물가관리위원회처럼 주요 소매물가와 소비 상품을 통제하는 것이다. 두 정책 시행 후 중앙과 지방의 정부 양곡 창고는 가득 찼고, 황궁 후원에 비단이 쌓여갔다. 한무제는 중앙이 직접 강력히 통제하는 경제 관리 제도를 확립하고, 중앙집권에 필요한 네 가지 기본 제도 중 세 가지를 집대성하여 한나라의 국력과 경제 규모를 압도적인 글로벌 원톱으로 만들었다. 백성이 부유해야 군왕도 부유하다는 기본 사상을 가진 유가는 산업의 국유화를 반대했다, 유가의 수장 동중서(董仲舒)는 한무제에게 낮은 세금, 중농 정책, 인의로 천하를 다스리라 조언했지만, 철혈(鐵血) 황제인 한무제와 재테크 달인 상홍양은 무슨 돈으로 전쟁을 하냐며 철저히 무시했다. 사실 중국 역대 모든 왕조는 유가가 아니라 관중, 상앙, 상홍양, 즉 법가(法家)의 치국을 배워 실천했다. 겉으로는 치국의 합법성 확보에 유리한 유가를 표방하지만, 세부 방법론은 법가를 차용하는 '외유 내법'(外儒內法)이었다. 역대 위정자들은 이상에 치우친 유가로는 현실 국가를 효과적으로 통치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문경(文景之治) 70년간 번성해 온 민간의 상업과 세력이 커진 지방정부를 다시 한무제가 찍어 누르니 지방과 유산계급은 다시 쪼그라드는 중국 역사의 법칙은 다시 확인되었다. 더불어 국유화로 민간 기업이 완전히 소멸되고, 중산층이 무너지는 등 많은 후유증을 남겼다. '산민령'(算緡令)은 자진 신고한 재산의 20%를 세금으로 걷는 것이다. 당연히 부자들은 재산을 숨겼고, 숨긴 자를 고발하면 뺏은 돈의 절반을 상으로 주는 고민령(告緡令)으로 사회는 두 동강이 났다. 부의 재분배를 가장 치졸한 방식으로 한 결과는 모든 중산층 가정을 파산시킨 것이라고 사마천은 사기에 기록하였다. 불만을 품은 대농령(농업부 장관)에게 '복비'(腹诽) 즉, 마음속으로 욕한 죄라고 처형을 하였으니, 아마도 궁예는 관심법을 한무제에게서 배웠을 것이다. 정부가 언제 무슨 방법으로 재산을 압수할지 모르기 때문에 "백성이 저축을 하지 않고 바로 먹고 써 버린다"라고 사기의 '평준서'(平準書)편에 기록한 것처럼, 한나라 이후 청나라 말까지 중국의 부자들은 산해진미를 먹고, 극도의 사치를 하며, 九妾(아홉 명의 첩)을 두는 등 지금 가진 돈으로 오늘만 사는 사회 풍조가 형성되었다. 한무제는 재위 52년 차(사망 2년 전, 기원전 89년)에 '죄기조'(罪己詔)'란 반성문을 썼다. '내가 잘못했다. 즉위한 이래 나라를 거칠게 다스려 천하가 고통받았고, 백성들에게 상처를 입혔으니, 이 모든 것을 탓할 만하다'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황제가 쓴 반성문이었다. 하지만 한무제의 문장은 가혹한 정치로 고통받은 백성들에 대한 연민과 자기 반성은 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최대 실책을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자손만대에 두고두고 후과를 남긴 최대의 잘못은 바로 계약 정신을 부정하여, 향후 중국 대륙과 아시아 국가에서 2000년간 민간 자본이 축적될 수 없는 환경을 만든 것이다. 실제 사례로 명청(明淸) 시대를 풍미한 진상(晋商)의 표호(票号, 환어음 취급 금융기관)가 근대화된 은행에 밀려 사라진 것도 역시 자본의 축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표호 업무로 수백 년간 막대하게 벌어들인 수익을 배당으로 나눠버리고, 방탕하게 쓰면서 자본 형성과 투자를 회피했던 가장 큰 이유는 언제든 돌변하여 재산을 탈취하는 중앙정부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방은 영국 13세기 대헌장(Magna Carta)으로 왕과 귀족의 관계, 더 나아가 시민사회까지도 대등한 관계가 확립되기 시작했지만, 중국은 기원전 1세기에 시작된 불평등한 관계는 오늘날까지 한 번도 대등한 관계로 올라서지 못했다. 중국 역대 왕조가 스물네 번이나 뒤집어 졌지만, 중앙정부와 민간 사이 관계의 재설정은 없었다. 오늘날은 해외로 빼돌리는 등 장소상의 선택이 좀 더 늘었고, 자본시장을 통해 상장시킨 민영 회사 대주주감자를 통한 현금화(cashing out) 등 방식이 더 늘어났을 뿐 근본적인 불안은 여전하다. 이렇듯 수천 년간 이어지는 막대한 영향은 결코 반성문 몇 자로 덮여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잘못한 정치에 대해 반성조차 하지 않는 지도자가 대부분이란 걸 감안하면 인사이트는 부족해도 한무제가 통이 큰 인물인 것은 맞다. 디자인 : 서현중
21세에 진나라 왕에 오른 효공(孝公)은 해외 인재 모집 전형으로 위나라 30세 청년 상앙(商殃)을 중용한다. 이 2030 두 청년이 훗날 진시황 천하 통일의 기반을 닦았을 뿐만 아니라, 2천 년간 중국 정치 경제의 틀을 확정했다. 상앙은 파괴적이고 혁신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기존 제도를 뒤엎고,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 부국강병을 추진했다. 그러나 결국 그 과정에서 기득권을 빼앗긴 귀족들에게 훗날 몸이 찢겨 죽는 참혹한 최후를 맞게 된다. 그는 봉건제도하의 토지 국유제도인 정전제(井田制)를 폐지하고 황무지 개간령을 내리고, 상업적 거래 금지와 물물 교환을 강제하는 등 온 나라를 대농장(大農場)을 만들어 자급자족형 전쟁 국가를 만들어갔다. 이후 진시황 천하 통일(BC 221년)까지 138 년 동안 108번의 전쟁을 치른 진나라는 단 두 개의 직업만 존재했다. 농민 아니면 군인이었다. 상앙의 기획에 따라 진나라는 "호랑지국(虎狼之國, 범과 늑대의 나라)"로 불리며 모든 이웃 나라에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인센티브 제도인 '군공작제(軍功爵制)'를 시행함으로써 과거 봉건제의 전통인 귀족 세습을 깨뜨린다. 노예건 평민이건 전공으로 곡식과 땅, 매끼 식사까지 차등 지급했다. 모두 20단계의 계층 사다리는 오로지 적의 머리를 가져와야 올라갈 수 있었다. 비록 매우 비인간적인 KPI(핵심성과지표)였지만 그 나라에서는 누구에게나 똑같은 룰이 적용된 평민화 사회였다. 또한 중앙의 지방 통제 시스템인 군현제(郡縣制)를 확립한다. 36개 현은 과거 지방 귀족의 세습 적폐를 끊어내고 중앙이 발탁한 관리를 파견하는 혁명적인 조치였으니, 지방 기득권 귀족들의 반감과 저항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으로 확장된 영토는 면적과 인구에 따라 새로 현을 만들었다. 중국의 3천 년간 국가 관리 모델은 부락제, 봉건제, 군현제 3단계로 변화되었는데, 사실 지금도 중앙과 지방(성, 시, 현)의 권력 분배 구조는 군현제의 기본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전국적으로 통일된 명령을 하달하기 위해 도량형, 즉 길이, 중량, 용적 등 차이나 스탠다드(China standard)를 만든 것은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진시황이 만든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미 140년 전 상앙이 먼저 시작하였다. 상하이 박물관에는 '상앙 방승(方升)'이라고 불리는 청동기 량(量)이 전시되어 있다. 엄격한 법 집행으로 사회 통제를 추진하였다. 과거에 많은 특권을 누리던 귀족을 법 앞에 평등하게 만들었다. 위수(渭河)에서 반대하는 귀족과 학자 700명을 모두 죽이니 강물이 붉게 변했다고 한다. '연좌제'로 가정과 군대를 단위별로 묶어 관리하고 죄를 지으면 묶음으로 공동 처벌하자 3년 만에 범죄 없는 나라가 되었다. 또 상업 억제를 위해 민간 여관을 폐쇄하고, 국영 여관에만 호적 신분증으로 숙박하게 하였으니, 현존하는 호적 제도의 원조가 바로 상앙이다. 훗날 효공이 죽고 혜왕(惠王)이 즉위한 후 상앙에게 핍박을 받았던 귀족들이 그를 죽이려 하자 도망가던 중 신분증이 없어 여관 투숙을 거부당한 상앙이 '내가 만든 법으로 이렇게 되는구나'라고 탄식했다고 사기(史記)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건 아마도 사마천의 뇌피셜이었을 것이다. 상앙이 그리 쉽게 자기를 부정하는 말을 했을 리는 없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결국 이미 죽은 그의 몸은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지고, 가족은 몰살되는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다. 사마천은 "혜왕(惠王)이 상앙을 죽였지만, 백성은 전혀 그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적었다. 상앙의 시대에도 중국 역사를 관통하는 4개 이익집단(중앙과 지방정부, 유산과 무산계급)의 싸움은 관찰된다. 그의 개혁으로 중앙정부는 매우 강해졌고, 지방정부는 약화되었으며, 무산계급(농민과 군인)은 커졌고, 유산계급(상인, 지주 등)은 사라졌다. 또 거시 경제는 안정되었지만, 민간 활력은 완전히 상실된 경직된 국가가 되어버린다. 상앙을 죽인 혜왕을 비롯한 역대 진나라 왕들과 기득권층이 아이러니하게도 상앙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진시황 천하 통일의 초석을 만들었다. 만약 상앙이 없었다면 중국은 통일 국가가 아니라, 비슷한 면적의 EU처럼 스물일곱 개 나라로 쪼개졌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래서 모택동이 열아홉에 쓴 <상앙사목입신론>(商鞅徙木立信)에서 중국의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상앙을 첫 손에 꼽은 것 같다. 상앙이 후대에 끼친 경제적 영향도 막대하다. 첫째, 전국시대 이후 2천 년간의 중국의 경제 생태계를 확립하였다. 군공작제(성과급 제도), 호구제도(인구 유동 통제), 도량형 통일(China Standard), 토지 사유화 등은 오랜 시간 동안 뿌리내리면서 오늘날에 이른다. 둘째, BC 4세기 상앙은 약 300년을 먼저 산 관중과 중국 경제 양극단의 기준점을 찍었다. 관중이 상업과 무역을 위해 모든 규제를 풀고, 인프라를 구축하여 제나라를 부유하게 만든 중상(重商)주의자였다면, 상앙은 대내외 상업 거래를 금하고, 식량 자급자족과 전쟁으로 진의 천하 통일의 초석을 닦은 중농(重農)주의자였다. 중국 2,600년 역사 속 십여 차례의 개혁은 애초부터 두 사람이 정해 둔 양극단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좌우로 움직였다. 디자인 : 장지혜
언제는 안 그랬나 싶지만 요사이는 특히나 중국 경제 비관론 일색이다. 지금까지 경제 금융의 도시 상하이에서 20년을 일하며 항상 고민한 문제는 "중국 특유의 경제 현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였다. 그래서 요즘도 현지 경제 지낭(智囊, 싱크탱크)을 만나면 어떤 틀로 경제를 보는지 항상 묻고 배운다. 여기서는 슘페터의 '경제 연구는 이론, 통계 그리고 역사를 통하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라는 통찰을 빌려서, 중국 역사 속의 경제 개혁과 그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중국은 인류 21개 문명중 유일하게 원 모습을 유지 중인 통일된 문화다'라고 말했다. 통일(統一)의 '統'은 총합, '一'은 획일이니, 아마도 그런 영향으로 이곳 사람들은 전제나 독재에 조금 덜 민감한 것 같다. 그 연장선에서 역사 속 모든 개혁은 '통일과 중앙집권'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행해졌다. 통일과 중앙집권을 둘러싼 역사 드라마는 같은 역할의 배우들이 출연 비중만 바꿔 가면서 등장한다. 그 배우들은 바로 중앙과 지방정부, 유산계급, 무산계급의 4개 이익집단이다. 중국 역사는 모두 이 네 집단 간의 헤게모니 싸움이라는 틀에서 보면 더 이해하기 쉽다. 위쪽은 4개 집단의 이상적 균형 상태이지만, 서로를 밟고 올라서야 했던 잔혹한 역사적 현실 속에서 결코 존재하지 않는 구조이다. 현실에서는 위 그림처럼 중앙이 강하면, 지방은 약해지고, 무산계급은 늘어나고, 부자는 줄어들었다. 강한 중앙정부는 초기에는 국가를 안정시키지만, 장기적으로는 결국 부패와 폭정, 기아로 지방 세력들이 곳곳에서 봉기하였다. 위 그림처럼 지방이 득세하면, 중앙은 다시 쪼그라들고, 그 혼란을 틈타서 돈을 버는 부자가 늘고, 가난한 자들의 불만은 다시 변화의 에너지가 된다. 중국 왕의 성씨는 24번 변했지만, 네 집단의 싸움과 그 승패는 위 두 가지 구조로만 수렴했다. 단 하나의 예외는 유산계급이 사라진 30년(1949~1977)이다. 중앙의 통제 하에 대약진, 문혁 등 기괴한 사건들의 결과 이 나라 국민들은 극빈 상태로 완전하게 평등해졌다. 위의 4대 기본제도는 중국 중앙집권을 떠받쳐온 기둥이다. 네 배우들의 역할 비중도 그 틀 속에서만 가능했다. 군현제도는 중앙과 지방 권력배분 모델로, 현재 중국도 중앙이 지방장관을 파견한다. 존유제도는 유교를 통한 사상통제로, 여전히 사회의 도덕적 뿌리와 판단의 기준이다. 과거제도는 엘리트 관리와 통제를 위한 것이며, 지금은 수능과 공무원 시험으로 변형 유지 중이다. 국유제도는 중앙 재정 강화를 위한 중국식 경제 제도의 시그니처로 2,600년간 사라진 적이 없었다. (다만 견고한 세 가지 기둥과 달리 경제 기둥은 불안정하여 여전히 보완이 필요하다.) 이런 중국의 시스템을 서구적 시각으로 보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만들어져 온 역사를 알면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역사적 전환점이 된 주요 개혁을 설계했던 혁신가들이 중국을 보던 틀을 알면 오늘의 중국 경제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근래에는 좀 어려워진 중국이지만 인민이 굶어 죽던 나라를 G2 반열에 오르도록 설계한 사람은 등소평이다. 한데 이미 2,600년 전에 등소평보다 더 담대한 성과를 낸 미스터리한 인물이 있었다. 케인즈를 2,600년 앞선 천재적 경제학자 + 인류 역사상 최대 수익을 낸 CEO 진나라의 천하 통일 이전 BC 8세기 황하 유역에는 봉건시대 왕이 후손 및 공신들에게 땅을 나눠서 형성된 제후국이 1천 개가 넘게 있었다. 그중 춘추오패(五覇)인 제(齊)나라 왕은 스스로 색(色), 식(食), 땅(田)을 좋아하는 三好先生이라 칭한 환공(桓公)이고, 그를 보좌한 재상은 사업을 세 번 말아먹고, 성품도 쪼잔한 탈영병 관중(管仲)이었다. 그저 그래 보이는 이 두 사람의 조합이 중국을 넘어 동북아까지 막대한 영향을 준다. 비즈니스도 크게 실패하고, 경제학조차 접한 적이 없었던 관중이 어떻게 한 세대 만에 변방의 작은 나라를 경제 초강국으로 만들었을까? 첫째, '사농공상(士農工商), 사민분업(四民分業)'이다. 전문가 집단을 만들기 위해 군인, 농민, 제조, 상인은 같은 업종 사람들끼리 동일 지역에 거주하게 했다. 서로 자주 보니 능률이 오르고, 어릴 때부터 가족들에게 배우면서 장인으로 자라났다. 유럽보다 최소 1천 년은 빨리 진행된 사회적 분업으로 제나라의 선진적 제조업 수준은 '고공기'(考工記)란 책에 기록되어 있다. 둘째, 작은 것은 풀어주고(放活微觀) 큰 것만 통제했다(管制宏觀). 온 나라에 단일세를 적용한 자유무역지대로 만들어 원가를 낮추는 등 비즈니스 환경을 확 바꾸었다. 매 30리 거리마다 객사(여관)를 만들고 음식, 말먹이, 물류 창고를 설치하여 외국 상인은 몸만 오면 되었다. 30리 12km 길은 반나절 걷는 거리로 객사 주변에는 자연히 장이 섰다. 외국 상인이 빈 수레 한 대로 오면 공짜 식사를 제공했고, 두 수레면 말먹이를, 세 수레를 끌고 오면 몸종까지 무료 식사를 주었다. 우호적 환경으로 장사치들이 찾는 플랫폼을 만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수도 임치(현재 산동성 즈보어(淄博), 최근 바비큐로 유명)에 기방을 개설했는데, 이 기녀들은 최초의 정부 공인 엔터테이너다. '女阊(여창)'이라고 불린 기방이 300창이었는데, 1창은 25개, 총 7,500개다. 한 업소마다 기녀가 4~5명이라면 수만 명, 술과 음식, 악사, 의복, 화장품 등 관련산업까지 포함하면 오늘날 중국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부동산업만큼 큰 산업이었다. 물론 지금 잣대로는 범죄 도시라 비난할 수 있지만, 그때는 일자리 창출과 소비 활성화를 위한 신성장 동력이었을 것이다. 이후 2천 년 동안 이 업계 사람들은 사업장마다 관중의 상을 두고 수호신(守護神)으로 섬겼다. 반면 백성의 민생과 관련된 거시적인 것은 철저히 통제했다. 식량 관리를 위해 농업세를 부과했는데, 세율은 풍작이면 15%, 중간이면 10%, 나쁘면 5%, 아예 흉년에는 다 면제해 주었다. 자기 사업은 다 실패했던 비즈니스맨이었지만, 흉년이면 어김없이 투기꾼이 나타나서 물가를 교란시켜 민심이 흔들린다는 것도 잘 알았다. 역사상 최초로 국가 식량 저장 시스템을 만들어 식량 가격은 물론 민심까지 관리했다. 셋째, 소비로 경제를 키웠다. 그의 '부자의 사치로 빈자가 일한다(富者靡之, 贫者为之)'는 말 때문에 훗날 유가(儒家)들에게 맹비난을 받았다. 그는 계란도 조각하여 삶아 먹고, 땔감 나무도 조각한 후에 태우는 극단적인 소비를 행했다. 그래야 일자리가 생기니, 능력이 있는 부자는 더 사치와 소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후일 황제들이 흉년에 궁전을 짓거나, 미국의 대공황 후 뉴딜 정책도 같은 맥락이다. 넷째, 무역으로 전쟁을 막았다(以商止战). 자주 시비가 붙던 인접국에는 천을 염색하는 재료인 자초라는 특산품이 있었는데, 제나라는 이를 대량으로 수입한 후, 사신을 보내서 구리로 결제해 줄 테니 자초 생산을 늘려달라고 꼬드겼고, 그 나라 농민들도 귀한 구리를 얻고자 너도나도 농사를 팽개치고 자초 재배에 뛰어들었다. 3년 뒤 제나라가 자초 수입을 막자 식량은 37배 폭등하여 제나라의 경제적 속국이 된다. 노(鲁)와 양(梁)도 무역 상품만 바꾸어 똑같은 방식으로 정리한다. 다섯째, 소금과 철의 국유화(鹽鐵專營)를 시행했다. 제환공은 "나라에 돈이 없으니 세금을 더 많이 거두자"라고 했지만, 관중은 "숨겨서 모르게 걷어야, 백성이 노하지 않는다"(取之于无形, 使人不怒)라는 경제 통치 철학을 끝내 관철시켰다. 산을 둘러치고, 바다를 막아 철과 소금을 국유화했다. 철은 농경과 수렵 등 생산을 위해 필요하고, 소금은 매일 먹고 쓸 수밖에 없다. 모든 생산은 민간이 맡아서 소금은 전량을 나라에 되팔았으며, 철은 30%를 국가에 바쳤다. 법을 어긴 자에게는 혹독했다. 철광산에 왼발이 먼저 들어간 자는 왼발을 끊었고, 오른손으로 훔친 자는 오른손을 잘랐다. 이런 소금과 철의 국유화는 훗날 중국 재정과 조세 방식이 서방과 완전히 달라지는 중대한 분기점이다. 관중의 혁신으로 중국 역대 중앙정부는 기본급인 세금과 국유사업 배당금의 두 개의 돈 주머니를 가지게 되었다. 한무제의 술, 조조의 연지분, 건륭제의 대외무역, 지금의 통신·에너지·희토류 등 절대 망할 수 없는 독점사업, 2,600년 누적 배당금은 얼마나 될까? 누구도 생각조차 안 해본 개념이니, 관련 데이터는 없다. 다만 지난 33년간 중국 A주의 총 누적 배당금은 약 3,000조 원이다. 대략 年 100조 원, 2,600년이면 26경 원, 이걸 또 복리로 계산하면… 재미 삼아서 해본 계산이지만 나는 관중을 인류 역사상 최대 수익사업 모델을 창조한 CEO라 생각한다. 또 앞서 언급한 중국의 통일과 중앙집권 체제에 그는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의 역사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관중의 뒤를 이어 중국을 다른 모습으로 다시 뒤집어 놓은 개혁가는 누가 있을까? 디자인 : 장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