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방구석 와인 생활을 지향합니다.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과 <(출간 예정) 와인과 페어링> 저자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가성비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꽤 인복이 많은 편이다. 나에게 연락하고 뭔가를 제안하는 사람 대부분이 선하고 사심 없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왜 이렇게 운이 좋을까 생각해 봤는데, 내가 마르크스주의 책을 쓰는 비주류 작가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먹잘 것 없는 작가에게 굳이 연락하고 만나서 기꺼이 돈 쓰고 시간 쓰는 사람이라니. 최소한 사기꾼일 리는 없지 않은가. 돈도 없고 권력도 없는 게 장점이 되는 순간도 있구나 싶어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지어진다. 그날도 역시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날이었다. 지난번에 이분들께 거하게 얻어먹었는데 매번 신세만 지고 살 수는 없는 법 아닌가. 이번에는 우리 부부가 식당도 예약하고 와인도 준비하겠다고 큰소리쳤다. 상대가 워낙 미식가들이라 와인을 무엇으로 가져가야 할지 고민하다가 냉장고에 보관 중인 한국 와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건 그분들이 안 마셔 봤을 게 확실해. 흥미를 느끼지 않겠어? 모임 당일에 산머루 품종 레드 와인과 청수 품종 화이트 와인을 각각 챙겼다. 산머루 품종 레드 와인 '비원 퓨어'(왼쪽)와 청수 품종 화이트 와인 '라라'(오른쪽) ⓒ 임승수 레드 와인 양조에 사용되는 산머루는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지역에 자생하는 포도과 식물이다. 한국의 추운 겨울과 고온다습한 여름을 잘 견디는 강인한 품종으로, 유럽 포도보다 크기가 작고 신맛과 독특한 향이 강렬하다. 산머루를 사용한 와인은 풍부한 색감과 산미를 특징으로 한다. 화이트 와인 양조에 사용되는 청수는 원래 한국에서 식용 포도로 개발되었으나, 열매가 완전히 익기 전에 쉽게 떨어지는 낙과 현상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또한 껍질이 두껍고 씨앗이 많아 식감 면에서도 식용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은 양조용 품종으로는 강점이 되어, 청수는 와인 생산에 적합한 품종으로 재조명되었다. 두꺼운 껍질은 와인에 깊은 풍미와 구조감을 부여하고, 높은 산미는 깔끔하고 균형 잡힌 와인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 때는 11월 17일 일요일 낮 12시. 우리 부부와 상대 부부는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비건 식당 '유알티'에서 만났다. 이 집의 고사리 들기름 파스타가 워낙 유명한지라 예약을 잡아두었다. 한국형 파스타에 한국 와인의 조합이니 제법 그럴싸하지 않은가. 일단 화이트 와인 체험부터 시작했다. 산막와이너리에서 직접 재배한 청수 포도로 양조한 '라라'를 열어서 잔에 따랐다. 구매 가격은 2만 5천 원. 고사리 들기름 파스타와 페어링 ⓒ 임승수 언론인 강 씨: 고급 와인처럼 다채로운 느낌을 주는 건 아니지만, 외국 와인을 마실 때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상큼하고 신선한 청포도 향이 제법 인상적이다. 어릴 때 먹던 청포도 사탕 향이 나서 재미있다. 입에서는 전혀 달지 않아서 반전이고. 직접 사서 더 마셔 보고 싶다. 드라마작가 박 씨: 와인이 상큼하고 아주 맛있지만, 지금 먹고 있는 고사리 들기름 파스타와의 궁합은 의문이다. 정말 그러하다. 소싯적 청포도 알을 떼어내 손에 즙을 묻혀가며 먹을 때 코에서 감돌던 바로 그 냄새가 난다. 그동안 수많은 화이트 와인을 마셔봤지만, 토종 한국인에게 이렇게나 강렬한 노스텔지어를 느끼게 한 녀석은 처음이다. 파스타와의 궁합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의견도 동감이다. 이날의 파스타는 고사리 특유의 담백하면서 졸깃한 식감에다가 시골 가마솥 누룽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들기름 특유의 구수함이 특징이었고, 거기에 '마카로~니', '모짜렐~라' 같은 찰진 이탈리아어를 떠올리게 만드는 쫀득한 파스타면 또한 기대 이상이었다. 다만 이런 진하고 두툼한 풍미의 음식에는 일반적으로 화이트 와인보다는 레드 와인이 더 잘 어울린다. 그래서인지 청수 와인은 나중에 추가로 주문한 샐러드와 한층 나은 궁합을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레드 와인 차례다. 산막와이너리에서 직접 재배한 산머루로 양조한 '비원 퓨어'를 잔에 따랐다. 가격은 3만 원. 한국 와인으로는 이례적으로 와인 평론가 제임스 서클링으로부터 88점이라는 점수를 받은 이력이 있다. 제임스 서클링 88점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한입 들이켰다. 전혀 달지 않은 데다가 예상보다 훨씬 부드러운 질감. 그러면서도 뒤에 받쳐주는 타닌이 제법 강하다. 코에서는 기존 외국 와인에서는 느끼지 못한 독특한 향이 감지된다. 구성진 판소리와도 같은 구수하고 걸걸한 느낌이랄까. 이게 바로 산머루 향이구나. 고사리 들기름 파스타와의 궁합도 만족스럽다. 산머루 와인의 원초적이고 토속적인 향에다가 들기름과 고사리의 구수함과 담백함이 어우러지니, 참석자 네 명 모두 이구동성으로 칭찬이다. 산막와이너리한테 광고비 받은 것 없으니 솔직하게 얘기해 달라고 해도 직접 사서 다시 마시고 싶을 만큼 인상적이란다. 외국 와인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자기만의 개성을 갖고 있다는 증거다. 드디어 그동안 신세진 걸 음식과 와인 대접으로 갚았다고 한숨 놨건만, 신당동 와인바 '기몽'으로 자리를 옮겨 벌어진 2차 술자리에서 여지없이 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이 와인바의 단골인 언론인 강 씨의 추천으로 샤르도네 품종의 프랑스 스파클링 와인에다가 홍새우 비스크 파스타, 가리비 오븐구이를 곁들여 먹게 되었다. 익숙한 맛의 프랑스 와인에다가 근사한 요리가 어우러지니 앞선 1차 술자리 뺨치는 만족감을 선사한다. 두 차례에 걸쳐 알코올을 흡입하니 맨정신에 나올 수 없는 아무 말 대잔치가 펼쳐진다. 샤르도네 품종의 프랑스 스파클링 와인 '폴 드 코스트 블랑 드 블랑 Paul de Coste Blanc de Blanc'(왼쪽) ⓒ 임승수 나: 내가 말이에요. 내년에 노벨상 받아도 두 분이 전화하면 꼭 받아주겠다 이겁니다. 언론인 강 씨: 그러면 제가 단독으로 인터뷰하는 건가요? 나: 그럼요 그럼요! 그나저나 박 사장님은 왜 나를 배우로 캐스팅 안 합니까? 집에서 연기 연습하고 있단 말이에요. 드라마작가 박 씨: 제가 아직 형님을 모실 준비가 안 되어서 말입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나: 내가 말이에요. 돈도 없고 권력도 없고, 내세울 건 나이밖에 없단 말이에요. 에잇! 드라마작가 박 씨: 동아리방 들어오시면 기립해야 하는 선배 아닙니까! 모두 기립! 아내: 크크크크크크! 헛소리가 세상을 구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한 인간의 두어 시간쯤은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걸 절감한 순간이었다. 조만간 출간될 책이 대박 터져서 강 씨와 박 씨 부부에게 근사한 와인을 대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다.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가성비 와인과 배달 음식의 페어링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지난 10월 27일 오후 2시에 서울 이태원의 몬드리안 호텔에서 와인 직구 업체 위클리와인 주최로 마스터오브와인(MW) 피터 코프와 함께하는 시음회가 열렸다. 마스터오브와인(MW)은 전 세계에 400여 명밖에 없는 최고 수준의 와인 전문가이다. 대한민국 국적자 중에는 MW를 취득한 사람이 아직 없다. 1993년에 MW 자격을 얻은 피터 코프는 유튜브 와인 채널 와인킹, 와인소울 등에 고정 출연해 국내 와인 애호가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위클리와인 이재윤 대표의 인사로 시작된 시음회는 총 6병의 와인을 차례로 시음하며 피터 코프와 참가자가 의견을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유튜브 영상에서 포장마차 막걸리를 떠올릴 만큼 걸쭉한 입담을 자랑하던 코프였지만 시음회에서는 MW로서 차분하고 신중한 발언을 이어갔다. 처음으로 등장한 와인은 Gröhl Cuvée Pure Brut Nature다. 독일의 스파클링 와인인데 코에서는 상큼한 딸기 향과 시큼한 흙 향이 멋스럽게 어우러지고 탄산이 구강 내부를 까슬까슬 자극한다. 3만 원대 가격의 와인인데 놀라운 가성비를 보여주었다. 코프는 역시 전문가답게 스파클링 와인의 제조 방법에서부터 맛과 향의 특징에 이르기까지 조곤조곤 설명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코와 혀가 호강 중이라 청각 쪽 집중력이 확연히 떨어졌다. 코프 씨, 미안합니다. 와인 맛에 익숙해지니 슬슬 코프의 말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스파클링 와인을 마실 때 기다란 플루트 잔을 선호하는지 보울이 넓은 일반 잔을 선호하는지 손을 들어 알려달라고 한다. 보울이 넓은 잔을 선호하는 참가자가 많았지만, 코프는 플루트 잔을 선호한다고 명토 박아 말한다. 자글자글한 기포가 솟구쳐 오르는 그 시각적 아름다움을 그냥 넘길 수 없기 때문이란다. 같은 샴페인을 다양한 잔에 마셔본 적이 있는데, 최악은 쿠페 잔이었다고. 이후 등장한 네 와인은 31년 차 MW의 감식안으로 직접 선정한 와인이었다. 네 와인 중 두 병은 코프가 가장 선호하는 이탈리아 산지오베제 품종이고 나머지 둘은 이탈리아 네비올로다. La Fiorita Brunello di Montalcino 2018 (산지오베제) La Fiorita Brunello di Montalcino Riserva 2018 (산지오베제) Poderi Luigi Einaudi Langhe Nebbiolo 2023 (네비올로) Poderi Luigi Einaudi Barolo Ludo 2020 (네비올로) 사실 나는 항상 궁금했다. 코프가 '섬세하고 우아한' 와인을 선호한다는 말을 유튜브 영상에서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네 병의 와인을 통해 MW가 선호하는 섬세함과 우아함의 구체적인 형상을 확인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차례로 네 와인을 시음해 보니 확실히 일맥상통하는 특징이 있다. 일단 네 와인 모두 진득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콘서트홀을 꽉 채우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의 묵직한 음향이 아니라, 소편성 오케스트라가 반주하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같다고나 할까.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임윤찬 피아니스트가 연주했던 모차르트 협주곡 22번 3악장의 그 '섬세하고 우아한' 선율 말이다. 나는 당시 임윤찬 피아니스트의 그 유명한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연주보다 모차르트가 더욱 기억에 남았다. 코프의 취향이 나와 비슷하다는 확신이 드니 입가에 배시시 미소가 지어졌다. 분명 코프는 의정부 평양면옥 냉면의 그 심심하고 은은한 국물과 살포시 뿌려진 고춧가루를 좋아할 거야. 반가운 마음에 냅다 손을 들어 궁금한 것을 질문했다. "추천하신 와인을 마셔보니 진득하지 않고 하늘하늘 가벼워서 좋았습니다. 저 멀리 안개가 둘린 운치 있는 산을 보는 느낌이었어요. 반면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진득한 와인을 그렇게 좋아한다던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로버트 파커가 높은 점수를 준 와인을 테이스팅 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볼드하고 힘 있는 와인을 좋아하는 그와, 복합미와 우아함을 선호하는 저의 취향이 달라 굳이 찾아서 마시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MW로서 자신의 취향에 확신을 갖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앞으로 유튜브 영상에서 피터 코프가 추천하는 와인은 주저 없이 선택할 수 있겠구나. 개인적으로 네 와인 중에서도 Poderi Luigi Einaudi Barolo Ludo 2020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바롤로는 일반적으로 오래 숙성해야 진가를 보여주지만 이 와인은 포도를 수확하고 4년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부드럽게 꿀떡꿀떡 넘어간다.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와인은 블라인드로 제공되었다. 품종과 재배 국가 및 빈티지를 맞추는 사람에게 선물을 준다고 하니 여기저기서 손이 번쩍 들렸다. 이탈리아 피에몬테 돌체토, 부르고뉴 코트 드 본 피노누아, 남아공 피노타지, 스페인 리오하 템프라니요, 프랑스 보졸레 가메이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지만, 공개된 와인은 Gröhl Hölle Niersteiner Pinot Noir 2020. 놀랍게도 독일 피노 누아 2020 빈티지라고 정확히 맞춘 사람이 있었다. 이런 괴물 같으니! 이어지는 코프의 조언.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할 때는 시각, 후각, 미각을 모두 동원해 추측해야 하는데, 많은 사람이 시각을 간과한다. 색깔이나 농도의 변화에서 의외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세심하게 살펴봐야 한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는 한두 가지 특징만으로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고 적어도 세 가지 특징이 부합할 때 선택하는 게 정답 확률을 높일 수 있다고 조언한다. 참가자들의 질문 공세가 이어지고 하나하나 성심성의껏 답하는 코프. 하지만 나는 잔에 남은 와인을 마시기에 급급하다. 아무리 아는 만큼 보고 느낄 수 있다지만, 나란 녀석은 역시 지식보다는 음식 그 자체가 좋은 본능 덩어리구나, 꿀꺽꿀꺽. 시음회가 끝나고 사인회가 이어졌다. 방한 이후 연이은 일정으로 지칠 만도 한데 한 명 한 명 사인에다가 긴 메시지도 남겨준다. 이렇게 말이다. Dear Lim. Thanks for your interest and participation in our seminar. Good drinking! (임승수님께. 저희 세미나에 관심을 가져주시고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음회였길 바랍니다!)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가성비 와인과 배달 음식의 페어링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을 마시는 이유는 수없이 많지만, 그 목적은 단 하나, 더 나은 기분을 위한 것이다. 직장 상사에게 질책받았을 때, 연인과 다투었을 때,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을 때, 중요한 시험에 합격했을 때, 와인은 나의 위장으로 들어와 죽마고우처럼 세포들을 위로하고 다독이고 격려하고 축하해 준다. 그 과정에서 도파민과 엔도르핀 분비가 촉진되어 혈중 '행복감' 농도가 증가한다. 물론 혈중알코올농도가 동반 상승하는 부작용이 따르지만. 와인을 마시는 이유 중 날씨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날씨의 변화는 인간의 기분에 상당한 수준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심지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해변의 강렬한 햇빛과 무더위로 기분이 나빠져 살인까지 저지르지 않는가. 만약 주인공이 그 유명한 부르고뉴 샤르도네 '뫼르소'를 시원하게 마셔 날씨의 영향을 상쇄했다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계절에 따른 음주량의 변화를 살펴보면, 추운 날씨가 지속되는 겨울철에는 사람들이 실내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음주량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특히 연말연시와 같은 축제 기간에는 음주가 증가한다. 한편 여름에는 따뜻한 날씨와 함께 야외 활동이 늘어나면서 음주 기회가 많아진다. 특히 야외 바비큐, 해변 파티 등에서 음주가 빈번해진다. 또한 기온이 낮을 때 사람들은 음주를 통해 체온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더운 날씨에는 시원한 음료를 찾게 되면서 음주가 증가하기도 한다. 아니 이건 뭐 우울해도 마시고, 슬퍼도 마시고, 기뻐도 마시고, 추워도 마시고, 더워도 마시고, 그야말로 사시사철 에브리데이 마신다는 얘기 아닌가. 몸이 아프면 약을 먹는다는 얘기와 다른 게 뭐가 있나? 써놓고 보니 정말 그렇구나. 물의를 일으켰다면 미안하다. 다만 증세에 따라 처방하는 약이 달라지듯이, 날씨와 기분의 변화에 따라 음용하는 와인이 달라야 함은 한낮의 태양이 뜨거운 것만큼이나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날씨-와인 페어링을 제안하겠다. 비도 오고 뭔가 감정적인 날 돈나푸가타 안씰리아 돈나푸가타 안씰리아 (가격 2만 원대) ⓒ 임승수 와이너리 이름인 돈나푸가타(Donnafugata)는 이탈리아어로 '도망간 여인'이다.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를 의미하는데 19세기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다스리던 페르디난도 4세의 아내다. 남편에게서 도망간 건 아니고 위풍당당한 나폴레옹 군대를 피해 시칠리아의 한 건물에 머물렀는데, 지금의 와이너리 건물이다. 라벨에는 눈물 한 방울을 흘리는 아름다운 여성(마리아 카롤리나)이 그려져 있다. 비도 오고 뭔가 감정적인 날이면 이 와인에다가 부추전, 감바스 알 아히요를 곁들이면 어떨까. 시칠리아 토착 품종인 카타라토와 안소니카가 블렌딩됐는데 사과, 배, 복숭아가 떠오르는 은은한 과실 향에 신선하고 경쾌한 산미가 부추전과 감바스 알 아히요의 기름기를 말끔하고 상큼하게 씻어내린다. 창밖 빗방울을 한참 바라보다가 와인 라벨 속 여인으로 눈길을 돌리면 무려 나폴레옹 군대에 쫓기는 이 사람의 신세보다는 내가 그래도 낫지 않나 싶어 묘한 안도감이 든다. 태풍이 오는 불안한 날 몰리두커 블루 아이드 보이 몰리두커 블루 아이드 보이 (가격 6만 원대) ⓒ 임승수 와인 라벨에 아이 한 명이 등장하는데 몰리두커 와이너리 설립자의 자식이다. 블루 아이드 보이는 파란색 눈이 예쁜 자기 자식을 일컫는 명칭이다. 생각해 보라. 라벨과 명칭에 자식을 새겨넣은 와인을 그 어느 부모가 대충 만들 수 있겠는가. 블랙베리 향과 초콜릿 향, 강렬한 타닌, 높은 알코올 도수가 휘몰아치는 풀바디 와인이다. 호주 시라즈 품종의 매력을 한껏 뽐낸다. 태풍으로 비바람이 몰아쳐 창문 유리창이 깨질까 노심초사하는 저녁 시간. 아이들은 천둥번개 소리가 무섭다고 이불속으로 파고든다. 그럴 때면 진득한 바비큐 소스가 발라진 고기에 이 와인을 즐기면 어떨까. 입안에서 휘몰아치는 맛의 태풍 덕분에 창문 밖 태풍은 어느덧 쭈그리가 된다. 혈중알코올농도 상승으로 라벨 속 아이와 이불속 아이와 겹쳐 보이면 인생에 그 어떤 태풍이 다가오더라도 기필코 견뎌내겠다는 의지가 용솟음친다. 아빠는 남자보다 강하다! 무덥고 습하고 짜증 나는 날 클라우디 베이 소비뇽 블랑 클라우디 베이 소비뇽 블랑 (가격 4만 원대) ⓒ 임승수 대한민국에서 한여름에 카뮈 <이방인>를 읽는 건 주인공 '뫼르소'의 분노와 돌발행동에 공감할 가능성이 높아짐을 의미한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옆 사람과 살짝 스치는 것만으로도 화가 치밀어오르는 후덥지근한 때에는 그저 시원한 화이트 와인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재력이 받쳐준다면 프랑스 부르고뉴 '뫼르소' 지역의 고급 샤르도네 와인을 마시면 좋겠지만 현실은 마트에서 가성비 좋은 녀석을 찾아 헤맬 뿐이다. 마트 와인이라면 역시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 품종이 훌륭한 선택지겠지. 그중에서도 나름 명품인 클라우디 베이의 청량함과 시원함은 한 모금만 영접해도 뿅망치를 피하는 두더지처럼 땀이 다시 땀구멍으로 숨어들 정도다. 더위를 안주 삼아 벌컥벌컥 마셔도 좋고, 출출하다면 차가운 샐러드나 포케와 같이 마셔도 그만이다. 눈 오는 포근한 날 그라함 10년 토니 포트 그라함 10년 토니 포트 (가격 6만 원대) ⓒ 임승수 소중한 사람이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은, 보는 이에게 따뜻한 행복감을 준다. 그것은 종종 감동적인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진하고 알싸한 감정을 자아내는데, 연말이라는 특정한 시기가 되면 유독 그 증상이 증폭되는 느낌이다. 거기다 마침 눈까지 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이럴 땐 촛불이 켜진 케이크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것도 제법 그럴싸한 초콜릿케이크 말이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나누는 초콜릿케이크라니! 그렇다면 '그라함 10년 토니 포트'를 차갑게 해서 함께 마시는 게 좋겠지. 초콜릿과의 찰떡궁합이 워낙 유명하니까. 이 달달한 레드 와인의 알코올 도수는 무려 20%. 캬~ 취한다! 도대체 초콜릿이 한바탕 뒹굴었던 곳에 들어가서 살아남을 음식이 있겠냐고? 아직 포트 와인을 경험하지 않았구나. 달달한 초콜릿을 더욱 달콤하고 상큼한 신맛의 액체로 씻어내는 이 개운함이라니! 소중한 사람과 이런 와인을 나눈다면 영화 속 주인공이 부럽지 않을 듯. 도파민 뿜뿜 화창한 날 샤또 데스클랑 위스퍼링 엔젤 로제 샤또 데스클랑 위스퍼링 엔젤 로제 (가격 2만 원대) ⓒ 임승수 돗자리 챙겨 동네 공원 잔디밭에 깔고 그 위에 누워 푸르른 하늘을 마음껏 바라보고 싶은 날씨에는 누가 뭐라 해도 로제 와인이 떠오른다. 잔디 살랑이는 미풍이라도 불어주면, 구강 내에도 산들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싶은 욕구가 슬며시 고개를 든다. 샤또 데스클랑 위스퍼링 엔젤 로제를 칠링백에 넣어서 가져왔다면 만사 해결. 함께 챙겨온 휴대용 와인잔에 따르니 특유의 투명한 연분홍색이 넘실거린다. 꽃, 딸기, 복숭아를 연상시키는 잔망스러운 향에 풋과일이 연상되는 산뜻한 산미와 은은한 단맛이 수면 전에 듣는 ASMR처럼 감각 세포들을 간드러지게 자극한다. 왜 이 와인의 이름이 '위스퍼링 엔젤(Whispering Angel)'인지 알겠구나. 그렇게 천사의 속삭임에 녹아들다가 대략 7분 후 꿀잠에 빠져든다. 춥고 서러운 날 토마시 아마로네 델라 발폴리첼라 클라시코 토마시 아마로네 델라 발폴리첼라 클라시코 (가격 6만 원대) ⓒ 임승수 날씨가 춥다고 꼭 서러운 건 아니다. 하지만 마음마저 나란히 추운 날에는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다. 되돌아보면 서러운 감정이란 외적인 요인보다는 내면의 문제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더라. 그럴 때는 허물없는 친구를 만나 허심탄회한 일침을 들어도 좋을 것이다. 토마시 아마로네 델라 발폴리첼라 클라시코를 지참하고서 말이다. 건포도로 만든 와인 특유의 농밀함은 막역한 친구의 솔직한 조언과 더불어 스트라이크존 한복판으로 날아온다. 기왕이면 뜨끈한 불판에 한껏 달궈진 고기와 곁들여 먹어보자. 마음이 한결 누근해져 공 받을 준비가 끝난 포수 미트처럼 친구의 조언도 아마로네의 풍미도 온전히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아참! 친구야. 와인은 내가 가져왔으니 고기는 네가 쏘는 걸로? 안 그러면 서러울 것 같아. 흐리고 우울한 날 조셉 페블레 부르고뉴 피노 누아 조셉 페블레 부르고뉴 피노 누아 (가격 4만 원대) ⓒ 임승수 원래 우울했는데 때마침 날씨가 흐린 것인지, 하필이면 날씨가 꿀꿀해 기분이 내려앉은 건지 모르겠다만 어차피 이렇게 된 참에 선후관계가 뭐 그리도 중요하겠나. 어휴. 한숨이 폐부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온다. 이럴 때면 긴급하게 피노 누아 수혈이 필요한 시간이다. 우울한 감정은 그 우울함에 집중할수록 더욱 수렁으로 빠져들게 되니, 일단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감각 자극에 집중해 보자. 피노 누아 와인을 잔에 따르고 전등 밑에서 그 영롱한 루비 레드를 2분 이상 여러 각도로 바라본다. 마시는 액체의 색깔이 이다지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난 정말 몰랐구나. 코에 가져가니 체리, 딸기 향에 약간의 허브 뉘앙스가 깔려있고 입에서는 흙 내음 가득한 산미와 부드러운 타닌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여운을 이어간다. 조용한 사찰에서 감칠맛 가득한 선식을 영접하는 듯한 이 단아함이라니. 음식의 맛 자체가 인간에게 큰 위로가 될 수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나긋한 음악을 틀어놓으면 그 효과는 배가된다).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가성비 와인과 배달 음식의 페어링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한국인의 돼지고기 사랑은 각별해서 1인당 돼지고기 소비량이 중국, 베트남과 더불어 세계 1위를 다툴 정도다. 나 또한 소고기나 닭고기보다 돼지고기를 훨씬 자주 먹는다. 일단 가격이 소고기보다 훨씬 착하기 때문인데, 돼지가 소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번식해 사육 기간이 짧은 데다가 사료비도 적게 들어서 그렇단다. 가격이라면 닭고기가 더 저렴하지 않냐고? 치킨은 별미 느낌이 강하다면 돼지는 집밥 반찬으로 오르는 게 자연스럽지 않은가. 한국인의 일상 식문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다. 그러니 대한민국 와인 애호가로서 돼지고기와 찰떡궁합인 와인을 파악하는 일은 슬기로운 와인 생활에 있어서 관건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와인에 갓 관심을 가지게 된 시절 시도했던 돼지고기와 와인의 페어링은 처참한 실패였다. 당시 나는 미국 나파밸리 카베르네 소비뇽의 매력에 빠져 있었다. 농익은 검붉은 과실 향이 폭발적으로 피어오르는 가운데 입에서는 꽉 찬 바디감을 선사하는 그 원초적 강렬함. 거기다가 초콜릿이나 연유 향이 기분 좋게 배어 있는 게 참으로 요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드 와인에는 고기라는 얘기에만 의존해 무지성으로 삼겹살 구이를 곁들였는데, 나파밸리 와인의 초콜릿 및 연유 향이 삼겹살의 느끼한 풍미와 맞물려 욕지기가 올라올 정도로 거북한 느낌이 들었다. 단선적 지식의 폐해는 우생학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 와인-음식 페어링에도 존재한다는 걸 절감한 순간이었다. 돼지고기의 느끼함을 잡아 줄 와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미치니 눈에 들어온 것은 이탈리아의 레드 와인인 산지오베제였다. 이 와인의 높은 산미와 존재감 있는 타닌은 돼지고기의 기름진 맛을 상큼하고 깔끔하게 중화해 주고, 과하지 않은 바디감은 소고기에 비해 다소 가벼운 돼지고기의 질감과 잘 어우러진다. 예전에는 신맛과 타닌이 도드라지는 산지오베제 와인에서 종종 중간이 비었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축구에 비유하자면 수비(타닌)와 공격(신맛)만 있고 미드필더가 비어있는 뻥축구랄까. 하지만 지금은 이 공간이 음식을 위한 여백임을 안다. 와인은 음식과의 만남을 통해 완전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돼지고기의 영혼의 동반자를 찾아 헤매다가 의외의 카테고리(화이트 와인)에서 찰떡궁합인 녀석을 만나게 되었으니 바로 샤르도네다. 화이트 와인의 대표적인 품종이지만 화이트 와인에는 해산물이라는 판에 박힌 공식에 얽매여 한동안 육류와 함께 마실 생각 자체를 못 했다. 게다가 갓 와인에 빠져들었던 시기에는 와인 하면 역시 레드라는 요상한 통념에 사로잡혀 화이트 와인 자체에 잘 손이 가지 않기도 했고. 샤르도네를 돼지고기와 먹게 된 계기는 와인 관련 앱 덕분이었다. 와인 애호가들이 자주 사용하는 비비노Vivino 앱은 와인을 검색하면 'Food that goes well with this wine'이라는 항목이 따로 있어서 어울리는 음식을 추천해 준다. 마침 구매한 샤르도네 와인을 비비노 앱으로 검색하니 제일 먼저 추천하는 음식이 돼지고기였다. 그렇게 해서 돼지고기와 샤르도네의 궁합을 처음 경험했는데, (주관적인 평가이지만) 산지오베제를 가뿐하게 뛰어넘는 그 놀라운 시너지 효과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돼지고기와 찰떡궁합인 샤르도네 ⓒ 임승수 가스레인지 위에 놓인 불판에 배달앱으로 주문한 모 유명 음식점의 돼지 등심덧살을 한 덩이씩 올려놓는다. 적당하게 익으면 가위로 먹기 좋게 잘라주는데, 어느덧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고기의 온기를 타고 인절미 콩가루처럼 고소한 돼지고기 특유의 냄새가 피어오른다. 일단 고기 자체의 기량을 확인하기 위해 쌈장이나 소금 같은 외부적 요인을 일체 배제하고 순수한 한 점을 입에 투여한 후 수십 년째 단련한 규칙적 저작운동에 돌입한다. 누린 잡내 하나 없이 깔끔하고 고소하다. 냉동이 아닌 냉장고기라서 푸석푸석하지 않고 쫀득쫀득 씹히는 맛이 그만이다. 희한하게도 극미량의 소금으로 간을 한 것 같은 은은한 짠맛이 기분 좋게 배어 있다. 따로 기름장이 필요 없을 정도다. 침샘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면 어느새 입안은 범람 직전의 하천과도 같은 상태다. 시원하게 준비해 놓은 영혼의 동반자는 코노 수르 비씨클레타 언오크트 샤르도네 2020이다. 집 근처 대형마트에서 약 1만 5천 원에 구매했다. 할인하면 9천 원대에 판매하기도 하는 저렴한 와인이다. 유리병과 라벨에 새겨진 자전거가 눈에 들어오는데, 포도를 보호하고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포도밭을 누비는 코노 수르 직원들을 상징한다고 한다. 코노 수르 비씨클레타 언오크트 샤르도네 2020 ⓒ 임승수 뜨끈한 고기를 잘근잘근 씹어 섭취한 후에는 역시 시원한 술 한잔이 그만이다. 오크통 숙성을 하지 않아 신선하고 청량한 과실 향을 그대로 유지한 깔끔한 샤르도네를 한 모금 들이켜자 민트 향 가득한 치약으로 정성껏 칫솔질한 후에나 만끽할 개운함이 구강 내부를 휘돌아 감싼다. 어라? 돼지고기 특유의 느끼함은 도대체 어디로 실종되었지? 입안을 헹군 샤르도네가 식도로 내려가며 함께 데려갔구나. 돼지의 둔중한 고소함에 샤르도네의 경쾌한 산미와 풋풋한 꽃향기가 어우러져 마치 보슬비 온 뒤 산 중턱에 걸린 안개처럼 서늘하게 구강 내부를 감도는데, 과연 미각의 절경이구나 싶다. 그나저나 코노 수르 비씨클레타 언오크트 샤르도네, 이놈 물건이네. 별로 기대하지 않고 마셨다가 가격대를 훌쩍 뛰어넘는 성능에 눈이 동그래졌다. 저가 샤르도네에서 종종 감지되는 쓴맛이나 인위적인 조작 느낌도 없고 목 넘김이 부드러운 데다가 맛의 밸런스가 뛰어나다. 최근 마셨던 1만 원대 화이트 와인들이 대체로 기대 이하였는데 이 녀석은 그야말로 5만 원짜리 로또에 당첨된 정도의 만족감을 준다. 어쩐지 그동안 샀던 로또가 모조리 꽝이다 싶더니, 이 와인에 당첨되려고 그랬나 보다.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가성비 와인과 배달 음식의 페어링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 애호가 커뮤니티에는 갈수록 고가 와인을 겁 없이 구매하는 자기 자신을 성토하는 글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인문·사회 분야의 책을 써서 먹고살다 보니 벌이가 시원치 않은 나도 와인에 막 빠졌던 시절에 이 증세를 심하게 겪었다. 무절제한 구매에 통장이 텅장으로 변해가고, 정신 차리라는 아내의 등짝 스매싱이 구매 독려로 여겨지니, 그야말로 점입가경이었다. 이렇게 주제도 모르고 하이엔드를 지향했던 내가 가성비파로 전향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그래 이거야!'... 전향하게 된 계기 결혼 10주년인 2019년에 큰맘 먹고 보라카이로 가족여행을 갔다. 숙박했던 리조트의 야외 식당이 워낙 유명한 포토존이라 일찌감치 방문해 자리를 잡고 식사 시간까지 뻗치기를 했다. 그냥 앉아 있기가 민망해서 메뉴판에서 가장 싼 화이트 와인을 골라 한 병 주문했는데, 가격은 10달러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별 기대 없이 마셨는데, 예상외로 '오! 이거 괜찮은데?'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무엇보다도 주문한 해산물 음식과 너무나 잘 어울려서 자기 몸값의 몇 배에 달하는 만족감을 우리 부부에게 선사했다. '그래 이거야!' 당시 내가 와인을 대하는 태도는 지금과 사뭇 달라서 와인을 주인으로 모시고 음식을 시종으로 여겼다. 무슨 얘기냐 하면, 일단 '근사한' 와인을 하나 산 후에 그 와인에 어울리는 음식을 준비해서 마시는 식으로 접근한 것이다. 이렇다 보니 와인에 들어가는 돈도 만만치 않았고 곁들여 먹는 음식도 제한적이었다. 레드 와인을 마실 때면 습관적으로 고기를 굽고, 화이트 와인을 마실 때면 판에 박힌 해산물을 준비하는 식이었다. 보라카이에서 저렴한 와인에 궁합이 잘 맞는 음식을 붙였을 때 발생하는 화산 폭발급 시너지 효과를 체험한 후 음식이 주인이 되고 와인이 시종이 되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다. 보쌈을 배달시켜 먹을 거면 보쌈과 잘 어울리는 적당한 와인을 준비하고, 삼겹살을 구워 먹는다면 또 그에 어울리는 와인을 마트에서 구매하는 식으로 말이다. 와인이 음식을 거드는 역할로 물러서니 구매하는 와인의 가격대가 전보다 확연히 낮아졌다. 그렇다고 만족도가 크게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음식과 와인이 제대로 맞아떨어지면 고급 와인을 마실 때와는 또 다른 만족감과 감동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와인 생활에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 일어났다. '음식이 주인, 와인은 시종!' 앞으로 글을 연재하면서 그동안 체험한 가성비 와인-음식 페어링의 경험담을 하나씩 소개하도록 하겠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이야기다. 어쩌다가 와인 책도 썼다 보니 종종 와인 강의를 하는데, 안주로 주꾸미볶음을 준비해달라고 하면 주최 측에서 의아해한다. 아마도 치즈나 카나페 같은 걸 예상했을 것이다. 와인에 어울리는 추천 음식 정보를 보면 대체로 서양식인 경우가 많다. 애호가의 필수 앱인 와인서쳐에서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을 검색하면 'Beef and Venison'을 곁들이라고 추천하는데, Venison은 사슴고기다. 해당 정보를 생산한 사람의 식생활 문화가 반영된 것이다. 솔직히 말해 와인을 즐기겠다고 한국에서 사슴고기를 구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러거나 저러거나 우리가 평소에 즐기는 음식에 어울리는 와인을 찾는 게 바람직한 방향이다. 고추장 갯벌에서 이제 막 기어 나온 듯 시뻘건 색을 띠고서는 질끈 파고든 치아를 탱글탱글한 반발력으로 냅다 밀어낸다. 이 당돌하고 감칠맛 가득한 한국 요리 주꾸미볶음에 어울리는 와인은 무엇일까? 내가 강의 때마다 최우선으로 선택하는 2만 원대 화이트 와인을 공개한다. 참고로 동네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샤토 생 미셸 콜롬비아 밸리 리슬링 샤토 생 미셸 콜롬비아 밸리 리슬링 ⓒ 임승수 청포도 품종인 리슬링은 서늘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데 와인으로 만들었을 때 쨍한 신맛과 달큼한 잔당감의 조화가 일품이다. 당도를 높여 스위트 와인으로 양조하기도 하는데, 그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단맛은 애호가들의 감탄사를 불러일으킨다. 음식과 와인의 궁합이라는 측면에서 평가한다면, 주꾸미볶음과 드라이 리슬링은 내가 경험한 다양한 조합 가운데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다. 제대로 매운 주꾸미볶음이 다녀가 통증 가득한 구강 내부에 시원한 리슬링이 투입되면 미각 세포들이 진정하기 시작한다. 이내 신선한 산미와 상큼한 복숭아향이 구강과 비강으로 퍼져나간다. 뒷맛에서는 은은한 잔당감이 감도는데 낙지볶음 매운맛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느낌이 참으로 절묘하다. 리슬링에게 이 잔망스러운 잔당감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매운 음식 섭취 후 생뚱맞게 시큼한 레몬을 한입 베어 무는 것과도 같은 당혹스러운 조합이 되었을 것이다. 작년 8월에 경기도 파주의 한 도서관에서 와인 강의를 했다. 초보에게 기초 지식을 전달하고 주꾸미볶음에 상큼한 리슬링을 곁들여 참가자와 함께 나누었다. 레드 와인에 치즈라는 스테레오 타입을 예상한 참가자들은 한국 음식과 화이트 와인의 찰떡궁합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예순을 넘은 참가자가 남긴 후기는 당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와인 맛에 먼저 깜짝 놀랐고 안주와의 궁합에 두 번 놀랐으며, 강사가 수시로 음주(?)하며 강연하시는 모습에 세 번 놀랐습니다. ㅎㅎ 시종일관 웃음을 선사해 주시고 행복해 보이셔서 참석자들 모두 즐거워하고 행복한 시간 보냈습니다. 늘 지금처럼 행복하신 모습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도 행복을 전해주시길 바랍니다." 와인을 마신 날, 안 마신 날, 어느 날이 더 기분 좋겠는가. 오늘은 주꾸미볶음에 시원한 리슬링으로 행복의 새로운 색깔을 경험해 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