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방구석 와인 생활을 지향합니다.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과 <와인과 페어링> 저자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와인과 페어링>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소믈리에는 와인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람이다. 주로 레스토랑, 호텔, 와인 바 등에서 일하며 손님에게 음식과 어울리는 와인을 추천하고 제공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를 위해 산지, 품종, 생산자, 빈티지 등 와인에 관한 폭넓은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음식과 와인의 조화에 대한 깊은 이해도 요구된다. 소비자는 소믈리에의 도움을 통해 방대한 와인 리스트 앞에서 느끼는 부담을 덜고, 자신의 취향이나 식사 메뉴에 어울리는 와인을 더 쉽게 선택할 수 있다. 또한 음식과 와인의 조화를 고려한 추천을 통해 식사의 만족도가 높아지고, 와인에 대한 이해도 함께 넓어진다. 하지만 집에서 직접 요리를 해 먹거나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을 때는 상황이 다르다. 무슨 와인이 좋을지, 과연 고른 와인이 음식과 어울릴지, 하나부터 열까지 막막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소믈리에 출장 서비스를 이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럴 때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도구가 있다. 바로 챗GPT다. 챗GPT는 세계 각국의 와인 생산지, 포도 품종, 양조 방식, 빈티지 차이, 생산자별 특성은 물론이고, 음식과의 페어링, 서빙 온도, 디캔팅 여부 등 실전에서 필요한 실무 지식까지 폭넓게 학습했다. 지식량으로만 따지자면 마스터 소믈리에 뺨치는 수준이다. 이름이 어려운 이탈리아 토착 품종이나 한정 생산 내추럴 와인, 오래된 빈티지의 특이한 기후 조건까지도 설명할 수 있으며, 초보자를 위한 쉬운 설명부터 애호가를 위한 심화 정보까지 폭넓게 제공할 수 있다. 무엇보다 24시간 상시 대기 중인 소믈리에라는 점에서, 그 편의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렇다면 일상에서 챗GPT를 어떻게 소믈리에처럼 활용할 수 있을까? 구체적인 상황별 예시를 통해 살펴보자. 오늘 온 가족이 삼겹살 구이를 먹을 예정인데 어떤 와인이 좋을까? 삼겹살은 이미 해동 중이고, 상추와 마늘도 넉넉히 준비해 두었다. 그런데 와인이 문제다. 막상 곁들일 만한 와인이 집에 없다. 마트에 가서 하나 사 올까 싶지만, 어떤 와인을 골라야 할지 막막하다. 고기니까 레드 와인? 돼지고기는 화이트 와인이 낫다는 말도 들은 것 같은데… 뭘 고르지? 이럴 때야말로 챗GPT 앱을 구동해서 음성 대화 기능을 켜고 물어보면 될 일이다. "너 와인 좀 알지? 한국인의 소울푸드 삼겹살 구이를 먹으려고 해. 그런데 어떤 와인을 곁들여야 좋은지 모르겠어. 네가 몇 가지 추천해 줄래? 실패하면 구독 취소할 거야!" 그러면 챗GPT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삼겹살처럼 기름진 돼지고기에는 산도가 살아 있는 와인이 잘 어울려요. 예를 들어 화이트 와인인 독일 모젤 지역의 드라이 리슬링은 고기의 느끼함을 깔끔하게 잡아주고, 상큼한 과일 향이 입맛을 돋워줍니다. 같은 화이트 와인 중에서는 샤르도네도 좋은 선택이에요. 고소한 삼겹살의 풍미와 잘 어울리고, 입안을 산뜻하게 정리해 줘서 전반적인 밸런스를 잡아줍니다. 레드 와인을 원한다면 이탈리아의 산지오베제를 추천할 수 있어요. 산도가 높고 탄닌은 부드러워서 삼겹살의 기름기와 잘 어울리고, 마늘이나 고추 같은 양념과도 조화를 이룹니다.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대안으로는 칠레산 피노 누아, 프리미티보, 또는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도 괜찮아요. 그리고 한 가지 팁! 와인을 살짝 차갑게 칠링 해서 마시면 삼겹살과의 조화가 훨씬 더 좋아집니다." 선물로 들어온 와인이 있는데, 어떤 음식하고 먹어야 하지? 라벨에 뭔가 잔뜩 쓰여 있는데, 와인 문외한 입장에선 외계어 같다. Gewürztraminer? 이건 사람 이름인가, 회사 이름인가? 길쭉하니 병은 멋져 보이는데, 도대체 무슨 맛이고, 뭘 곁들여야 하는지도 감이 안 잡힌다. 괜히 잘못 먹었다가 와인만 버리는 건 아닐지 걱정도 든다. 챗GPT 음성 대화 기능을 켜고 카메라로 병 라벨을 비추며 물었다. "이거. 무슨 와인이야? 나 그냥 삼겹살이랑 먹으려고 하는데… 괜찮은 선택이야?" 챗GPT는 화면 속 라벨을 순식간에 알아보더니, 마치 전문 소믈리에처럼 조곤조곤 설명을 시작했다. "이 와인은 Hugel Classic Gewürztraminer예요. 프랑스 알자스 지역의 대표적인 와인 생산자인 위겔(Hugel) 가문에서 만든 와인이죠. 위겔은 1600년대부터 알자스에서 와인을 만들어온 명문 생산자예요. 특히 게뷔르츠트라미너, 리슬링, 피노 그리 같은 아로마틱 화이트 와인으로 유명하죠. 이 와인의 품종인 게뷔르츠트라미너(Gewürztraminer)는 향이 아주 풍부한 화이트 와인입니다. 리치, 장미, 열대 과일 같은 향이 특징이고, 단맛이 은근히 있으면서도 도수가 높은 편이에요. 산도는 낮고 향이 강해서, 담백한 음식보다는 향신료가 강하거나 매운 음식, 또는 부드럽고 향이 있는 치즈와 잘 어울립니다. 예를 들어 태국식 커리, 인도식 버터치킨, 김치찜, 중국식 마라 요리처럼 풍미가 복합적인 음식과 함께하면, 와인의 향이 음식과 어우러지며 더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어요. 단, 회, 샐러드, 소금구이 삼겹살처럼 향이 약하고 깔끔한 음식과는 잘 어울리지 않으니 주의하세요." 때는 2024년 2월 영등포 타임스퀘어에 있는 한 태국 음식점. 챗GPT의 고견을 받아들여 와인을 들고 방문했다. 윤슬이 보일 듯 반짝이는 연노랑 게뷔르츠트라미너가 잔 속에서 일렁인다. 코를 대고 숨을 들이켜는데, 감귤 느낌의 신선한 과실 향에 은은한 연기 향이 피어오른다. 한 모금 머금으니 적당히 떫은 타닌과 연기 뉘앙스 사이로 은은한 단맛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다. 이거 기대 이상인걸? 와인과 만나 침이 가득 고인 구강이 어서 빨리 음식을 투척하라고 재촉한다. 마침 와인과 비슷한 색을 띤 푸팟퐁커리가 눈앞에 먹음직스럽게 놓여있다. 바삭바삭 아삭아삭 튀겨진 작은 게를 집어 들어서 연노랑 커리에 푹 담가 웅덩이 물처럼 고여 있는 침 위에 덩그러니 올려놓았다. 와우! 부드러운 튀김옷 안에는 치아가 약한 어린아이도 무리 없이 씹어댈 수준의 앙증맞은 바삭함이 숨어 있다. 커리 특유의 향신료 향이 게뷔르츠트라미너의 개성 있는 타닌, 매캐한 연기 향, 은은한 단맛과 끝내주게 어우러진다. 24시간 상시 대기하는 소믈리에에게 고마움을 표하러 챗GPT 앱을 구동했다. "이야. 게뷔르츠트라미너랑 푸팟퐁커리 조합이 죽이는걸? 네 덕분이야! 앞으로도 잘 부탁해!" "언제든 말씀만 주세요. 와인은 제가 고를 테니, 당신은 그냥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와인과 페어링>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인간은 기계를 통해 자연을 통제하고, 기술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설계할 수 있다는 믿음을 키워왔다. 자연의 우연성과 시간의 느긋한 흐름보다는, 예측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빠른 결과가 더 중시되었다. 규격화와 대량생산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농업에서는 '녹색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기계, 화학비료, 농약이 빠르게 보급되었고, 수확량을 늘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떠올랐다. 이전 시대의 전통적인 농법은 '비효율적'이고 '뒤처진 방식'으로 여겨졌다. 식문화도 비슷한 궤적을 따라갔다. 천천히 끓이고, 제철을 기다리고, 서로의 입맛을 살피던 식사는 시나브로 사라지고, 계량화된 레시피와 표준화된 맛의 가공식품이 '편리함'이라는 이름으로 식탁 점유율을 높이기 시작했다. 거주 공간도 그러해서, 시공간을 효율적으로 나누고 구조와 재료를 표준화한 아파트식 주거 모델이 도시의 기본 단위가 되었다. 와인의 세계도 예외는 아니다. 생산 효율을 높이기 위해 포도는 단일 품종으로 재배되고, 비료와 제초제, 살충제로 통제 및 관리되며, 비용 절감을 위해 기계로 수확된다. 양조 과정에서도 상업 효모, 이산화황, 필터링과 오크통 숙성 등 각종 기술이 동원되어, 와인은 점점 균일하고 예측 가능한 풍미의 공산품으로 변화해 갔다. 해마다 맛이 달라지는 것은 결함으로 여겨지고, 일관된 품질과 익숙한 풍미를 재현하는 능력이 '좋은 와인'의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개입과 통제, 효율 중심의 시대에 피로를 느끼는 이들이 점차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슬로푸드 운동은 빠르고 표준화된 음식 문화에 대한 반발로 등장했고, 지역성과 계절성, 덜 가공된 식재료를 중시하는 흐름은 유기농 열풍과 자연주의 생활 방식으로 확산되었다. 예술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감지됐다. 디지털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사람들은 오히려 붓질의 흔적이 남은 회화, 거친 질감, 작가의 손길이 드러나는 표현에 끌리기 시작했다. 음악에선 완벽한 믹싱 대신 날것의 현장성과 실수까지 미학으로 수용하는 로파이(Lo-Fi) 스타일이 주목받았다. 정제된 것보다 덜 정제된 것, 예측 가능한 것보다 우연히 발생한 감각에 더 큰 애정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은 와인에도 영향을 미쳤다. 현대 와인 산업이 발전시킨 정밀한 양조 기술을 일부러 내려놓고, 포도와 자연의 발효 과정에 주도권을 넘기는 와인. 그렇게 해서 1980~90년대, '내추럴 와인'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흐름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내추럴 와인은 말 그대로 자연에 최대한 맡긴 와인이다. 인간의 개입을 줄이는 철학은 포도밭부터 시작된다. 대부분의 내추럴 와인은 유기농 또는 바이오다이내믹 방식으로 재배된 포도를 사용하며, 농약, 제초제,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기계를 사용하기보다 사람이 직접 손으로 돌본다. 수확 역시 손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양조 과정에서도 인위적인 조작을 최소화한다. 상업용 배양 효모 대신 포도 껍질이나 양조장 주변 공기 중에 있는 야생효모로 발효를 유도하고, 정제와 여과를 하지 않으며, 보존제인 이산화황(SO₂)도 극미량을 사용하거나 아예 넣지 않는다. 이 때문에 해마다, 그리고 병마다 맛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고, 균일함보다는 매번 다른 개성과 생동감을 체험하게 된다. 잘 만든 내추럴 와인은 흔히 즙이 터지는 듯한 과일의 생생함, 입안에서 살아 있는 듯한 질감, 그리고 시간이 만든 자연스러운 복합미로 묘사된다. 어떤 병에서는 발효된 과일 껍질의 향, 어떤 병에서는 흙과 짚, 바람에 실린 허브 향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정제되지 않은 만큼 표현의 폭이 넓고, 병 속에서 계속해서 맛이 변화하는 경우도 있어, 한 병을 마시는 시간이 곧 관찰이자 모험이 되기도 한다. 내추럴 와인은 1980~90년대 프랑스 보졸레와 루아르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상업적인 맛의 표준화에 지친 일부 생산자들이 자발적으로 기술적 개입을 줄이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와인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주류 업계에서 다소 괴짜 취급을 받았지만, 2000년대 중후반부터 파리의 젊은 셰프와 소믈리에 사이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얻기 시작했고, 201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도쿄, 뉴욕, 런던, 서울 등 대도시에 '내추럴 와인 바'가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며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내추럴 와인에 대한 찬사만 있는 건 아니다. 하나의 '철학'으로 자리 잡고, 또 '문화적 현상'으로까지 확산되면서, 자연스럽게 반발도 생겨났다. 가장 흔한 비판은 '결함도 개성으로 둔갑한다'는 지적이었다. 산화, 불안정한 발효, 탁한 질감, 휘발산 같은 문제들이 때로는 '내추럴이라서 그런 것'이라며 정당화되곤 했다. 그렇다 보니 '맛이 이상한데도 괜찮다고 해야 하는 분위기', '결함을 미학으로 포장하는 말장난'이라는 반응도 적지 않다. 내추럴 와인 특유의 불균일함도 문제였다. 같은 생산자의 같은 와인인데도 병에 따라 맛이 다르거나, 한 병 안에서도 시간이 흐르며 급격히 변질되는 일이 있었다. 내추럴 와인을 마시는 취향이 종종 하나의 '신념'이나 '정치적 올바름'으로 포장되면서, 내추럴 애호가들을 '힙스터 엘리트'라고 냉소하는 시선도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내추럴 와인의 맛에 관해 가장 민감한 주제는 브렛(Brettanomyces)이다. 브렛은 야생효모의 일종으로, 발효 과정에서 두엄, 마구간 같은 동물적인 느낌의 향을 만들어낸다.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이들은 '똥내'라고 하기도 한다. 브렛이 내추럴 와인에서 유독 자주 발견되는 것은, 이산화황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상업 효모 대신 야생 효모를 쓰며, 여과도 생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이 향에서 자연 발효의 야생성과 복합미를 느끼지만, 또 어떤 이들은 그것을 도저히 마실 수 없는 결함으로 받아들인다. 브렛은 내추럴 와인의 감각적 매력을 좌우하는 요소이자, 가장 극단적으로 호불호가 갈리는 향미 중 하나다. 심지어 논쟁 과정에서 내가 옳다느니 네가 그르니 하며 감정적으로 격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브렛에 대한 나의 견해는 어떠하냐고? 2025년 5월 12일, 히로시마 시내의 와인바 Le Clos Blanc. 나와 아내의 눈앞에는 내추럴 와인 한 병이 놓여 있었다. Domaine Jean Foillard Morgon Côte du Py 2021. 프랑스 보졸레 지역을 대표하는 내추럴 와인으로, 생산자인 장 포이야드(Jean Foillard)는 1980년대 보졸레에서 내추럴 와인 운동을 이끈 'Gang of Four'의 일원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포도는 모르공(Morgon) 지역의 일급 포도밭 '코트 뒤 피(Côte du Py)'에서 재배되었으며, 내추럴 와인 가운데서도 상대적으로 브렛 향이 심하지 않다고 평가받는다. "이 와인 향기 어때?" "헉. 무슨 거름 냄새 같은 게 심하게 나네." "마시기에 괜찮아?" "아냐. 굳이 마시고 싶지 않아." "그래? 난 향기가 아주 매력적인데…." 참고로 나와 아내는 와인 경험치가 거의 비슷하다. 늘 한 병을 반씩 나눠 마셔왔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평가가 이렇게나 극명하게 갈린다. 혹시나 해서, 옆자리에 있던 미성년자 두 딸에게 향만 맡게 해 봤다. 평소에도 맛과 향에 민감한 첫째는 딱히 이상한 걸 모르겠다고 했고, 오히려 아무거나 잘 먹는 둘째가 "똥내 나는데?"라고 한다. 그렇다. 내추럴 와인을 좋아한다고 감식안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싫어한다고 감각이 둔한 것도 아니다. 그저 취향의 문제다. 새우깡이 입에 안 맞는다고 해서, 누가 그 사람의 미각을 비웃는 일은 없지 않은가. 그러니 "이 맛을 모르면 무지한 거야", "그걸 맛이라고 마시냐" 두 가지 모두 지양해야 할 태도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 와인을 마시는 내 입보다 남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더 믿을 순 없는 노릇이다. 내추럴 와인은 그 단순한 진실을, 때로는 극적으로,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일깨워준다. 결국 와인의 가치는 병에 담긴 액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는 감각의 순간에 있는 것이니까. 사진 : 게티이미지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와인과 페어링>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샴페인 한 잔 주세요." 와인바, 호텔 뷔페,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말하는 사람은 버블이 올라오는 화려한 와인을 떠올리며 웃고 있지만, 듣는 사람은 '어떤 걸 갖다 줘야 하나?' 잠시 망설이게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샴페인은 스파클링 와인을 일컫는 통칭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파클링 와인을 떠올리며 샴페인을 말한다면, 그건 모든 자동차를 '벤츠'라 부르는 것과 비슷한 오류다. 오늘은 그 오해의 실타래를 함께 풀어보자. 샴페인은 대체 어떤 술이며, 스파클링 와인은 어떤 세계를 품고 있는 걸까. 우선 정리부터 해보자. 스파클링 와인이란 말 그대로 '거품이 이는 와인', 즉 탄산이 들어 있는 와인의 총칭이다. 병을 열면 '뻥!' 하는 소리가 나고, 잔에 따르면 기포가 올라오며 입안을 간질이는 바로 그 와인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스파클링 와인을 너무 자주,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샴페인'이라고 부른다는 데 있다. 법적으로, 그리고 와인 세계의 관점에서 샴페인은 '샹파뉴 지방에서 전통 방식으로 만든 스파클링 와인'만을 지칭한다. 이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면 아무리 비싸고 화려해도 '샴페인'이란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이는 프랑스뿐 아니라 EU, 미국 등 다수의 국가에서 엄격하게 지켜지는 원칙이다. 샴페인은 주로 샤르도네, 피노 누아, 피노 뮈니에 세 가지 품종을 블렌딩해 만든다. 각각 산도, 구조감, 과일 향에서 서로 다른 개성을 지녀, 이들의 조화가 샴페인의 복합성과 균형을 이끈다. 최근에는 '블랑 드 블랑(Blanc de Blancs)'이나 '블랑 드 누아(Blanc de Noirs)' 같은 단일 품종 샴페인도 많이 선보이고 있다. 샴페인이 와인 애호가들에게 특별하게 취급받는 이유는 단지 브랜드의 힘 때문만은 아니다. 실제로 샴페인은 다른 스파클링 와인들과 비교해 구조, 향, 질감 면에서 유별나게 섬세하고 깊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산도다. 샹파뉴 지방은 프랑스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한 와인 산지다. 이곳의 서늘한 기후 덕분에 포도는 천천히 익고, 높은 산도를 유지한 채 수확된다. 이 산도는 샴페인에 긴장감 있는 맛의 선을 그어주며, 장기 숙성에서도 와인의 생기를 유지한다. 두 번째는 양조 방식이다. 샴페인은 2차 발효를 특징으로 하는 '전통 방식(Méthode Traditionnelle)'으로 만든다. 2차 발효는 기본 와인(1차 발효를 마친 와인)에 설탕과 효모를 더해 병 안에서 다시 발효를 일으키는 과정을 뜻한다. 1차 발효가 포도즙을 알코올로 바꾸는 과정이라면, 2차 발효는 그 알코올 와인에 탄산을 입히는 결정적인 단계다. 이때 생긴 이산화탄소가 병 속에 갇히며 와인에 자연스러운 거품이 생기고, 효모 찌꺼기와 오랜 시간 접촉하며 구운 빵이나 브리오슈 같은 복합적인 풍미도 함께 만들어진다. 병을 거꾸로 세워 효모 찌꺼기를 목 쪽으로 모으고, 그것을 제거하는 '르뮈아주(remuage)'와 '데고르주망(dégorgement)'이라는 공정도 이 샴페인의 탄생을 구성하는 중요한 의식이다. 이렇게 정성을 들이니 당연히 가격도 만만치 않다. 좋은 샴페인은 단순히 탄산음료처럼 톡 쏘는 와인이 아니라, 시간과 기술이 쌓여 만들어낸 예술적인 음료다. 그렇다고 해서 샴페인 아닌 스파클링 와인을 외면할 필요는 없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등에는 샴페인 못지않게 정성스럽게 만든 스파클링 와인이 즐비하다. 이름은 저마다 다르지만, 풍미도 훌륭하고, 개성도 뚜렷하다. 크레망(Crémant) 샹파뉴 외 프랑스 곳곳에서 전통 방식으로 만드는 스파클링 와인이다. '크레망 드 부르고뉴', '크레망 드 알자스' 등이 대표적이며, 지역 특유의 품종과 토양 덕분에 샴페인보다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 드는 경우도 많다. 가격도 합리적이다. 카바 (Cava) 스페인의 대표적인 스파클링 와인이다. 주로 카탈루냐 지방에서 생산되며, 샴페인과 마찬가지로 병 내 2차 발효 방식을 따른다. 품종은 마카베오, 파렐라다, 사렐로 같은 토착 품종을 사용하고, 최근엔 샤르도네나 피노 누아도 종종 섞인다. 카바는 대체로 산도가 부드럽고, 가격 대비 품질이 좋아 '가성비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다. 일상적으로 스파클링 와인을 즐기고 싶은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다. 프로세코 (Prosecco) 이탈리아 북부 베네토 지방에서 만들어지는 프로세코는 '샤르마 방식(Charmat)'이라고 불리는 대형 탱크 발효 방식으로 생산된다. 덕분에 가격이 저렴하고 과일 향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거품은 샴페인보다 크고 거칠 수 있지만, 오히려 이 '라이트함'이 브런치, 애피타이저, 칵테일 베이스로 적합하다. 벨리니, 스프리츠 같은 유명한 칵테일의 재료로도 많이 쓰인다. 프란치아코르타 (Franciacorta)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지방에서 만들어지는 프란치아코르타는 샴페인과 동일한 전통 방식으로 생산된다. 샤르도네, 피노 누아, 피노 블랑 등을 사용하며, 최소 18개월 이상 효모 숙성을 거치는 까다로운 와인이다. 프란치아코르타는 '이탈리아의 샴페인'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품질이 뛰어나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애호가들은 오히려 '숨겨진 보석'이라 부르기도 한다. 젝트 (Sekt) 한때는 값싼 스파클링 와인의 대명사였던 독일의 젝트는, 최근엔 고급화 바람을 타고 품질을 끌어올리고 있다. 특히 '빈트저 젝트(Winzersekt)'는 독일 와인법상 최고 수준의 젝트로, 전통 방식과 고급 품종을 사용한다. 리슬링으로 만든 드라이한 젝트는 산도와 향이 살아 있는 멋진 와인이다. 이들은 각자 고유한 개성과 스타일을 갖고 있으면서도, '샴페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과소평가되곤 한다. 하지만 한 번 눈을 돌려보면, 이들 와인은 가격 대비 훨씬 풍부한 세계를 열어줄 수 있다. 이쯤에서 질문이 생긴다. 왜 우리는 스파클링 와인을 전부 샴페인이라 부르게 된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샴페인이 그만큼 '먼저 자리 잡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마케팅, 이미지, 가격, 그리고 오랜 시간 쌓아온 문화 자산까지, 샴페인은 스파클링 와인의 대표주자로 기억되고 있다. 18세기 말 루이 16세 시대부터 샴페인은 귀족들과 상류층 사이에서 특별한 음료로 여겨졌고,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전쟁 승리나 왕실 결혼식, 신년 축하 같은 공식 행사에서 빠질 수 없는 축하용 술로 자리 잡았다. 미디어의 영향도 크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축하 장면이 나오면, 으레 금박 라벨이 반짝이는 샴페인이 터진다. 이리하여 '샴페인=스파클링 와인'이라는 등식이 굳어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다양한 이름을 알아가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와인의 세계는 한층 넓어진다. 이름을 안다는 건, 단순한 정보 습득을 넘어 '존중의 시작'이다. 샴페인은 샴페인이고, 카바는 카바이며, 프로세코는 프로세코다. 모두 제 이름이 있고, 각자의 방식과 풍미가 있다. 와인도 사람처럼,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그 존재가 다가오는 법이다. 다음에 누군가 "샴페인 한 잔 주세요"라고 말하면, 이렇게 되물어보자. "혹시, 진짜 샴페인 원해요? 아니면 가볍고 향긋한 프로세코 어때요?" 이 작은 질문 하나로, 누군가는 와인의 세계에 한 걸음 더 들어설지도 모른다.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와인과 페어링>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와인 라벨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빠지지 않고 적혀 있는 숫자가 있다. "2010", "2016", "2021"처럼 4자리로 된 연도다. 우리는 그것을 '빈티지(vintage)'라고 부른다. 와인 초심자에게는 단순히 포도를 수확한 해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와인을 조금이라도 깊이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안다. 이 숫자가 때로는 와인의 품질과 개성, 나아가 가격까지 결정짓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사실을. 왜일까? 와인은 결국 농산물이다. 땅에서 자라고, 비와 바람과 햇살을 받아 익는다. 포도 품질의 상당 부분은 날씨에 달려 있는데 기후는 해마다 달라진다. 그러니 같은 밭, 같은 품종, 같은 양조자가 만든 와인이라도 해마다 맛과 향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떤 해에는 따뜻한 봄과 긴 여름 덕분에 포도가 충분히 익고, 어떤 해에는 초가을의 비로 인해 수확이 지연되거나, 포도알이 희미하게 물러질 수도 있으니. 포도의 품질에 영향을 미치는 기후적 요소는 일조량, 온도, 강수량, 습도, 바람, 서리, 우박 등 다양하다. 포도는 이런 조건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라는데, 그 미묘한 기후 차이가 와인의 당도, 산도, 탄닌, 향, 구조, 밸런스에 빠짐없이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빈티지는 포도가 한 해를 어떻게 견뎠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와인은 그 이야기를 맛으로 들려주는 매개체다. 이 특징이 가장 두드러진 와인 산지가 프랑스의 보르도와 부르고뉴다. 보르도의 2009년, 2010년, 2016년은 '위대한 빈티지'로 불린다. 포도가 적절하게 익고, 수확기에도 큰비가 오지 않아 와인이 균형 잡히고 숙성 잠재력도 풍부하다. 반면 2013년은 냉해와 잦은 강수로 인해 포도가 제대로 익지 못했고, 그 탓에 구조가 약하고 숙성 잠재력이 떨어진다. 와인 평론가들도 2013년 보르도를 평가할 때는 "장기 보관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곤 한다. 현시점에서 같은 샤토의 와인을 마시더라도 2010 빈티지는 여전히 단단하고 깊은 여운을 남기지만, 2013 빈티지는 이미 피크를 넘긴 인상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부르고뉴에서는 이 빈티지 차이가 더욱 민감하게 드러난다. 보르도에서는 여러 포도 품종의 블렌딩 비율을 조절하여 기후의 영향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지만, 부르고뉴는 단일 품종(피노 누아 또는 샤르도네)을 사용하는 만큼 그해의 기후 조건이 와인의 맛과 향에서 한층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어떤 해에는 화사한 꽃 향이 피어나고 어떤 해에는 흙 내음이 지배적인데, 마치 같은 피아노곡을 다른 연주자가 치는 것처럼 해마다 와인의 뉘앙스는 달라진다. 빈티지 차이는 애호가의 구매 선택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어떤 소비자는 지금 당장 마시기 좋은 와인을 찾는다. 이 경우에는 숙성 잠재력이 큰 해보다는, 비교적 일찍 맛과 향이 만개하는 평범한 빈티지를 선택하는 게 나을 수 있다. '위대한 빈티지'에 비해서 가격도 저렴하지 않은가. 반면 셀러에 넣어두고 10년, 20년 뒤를 기약하며 맛의 극치를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장기 숙성 잠재력이 뛰어난 '위대한 빈티지'를 선택해야 한다. 와인 수집가들에게도 빈티지는 매우 중요한 고려 사항이다. 같은 와인이라도 빈티지에 따라 경매 가격이 몇 배씩 차이 나기 때문이다. 일례로 샤토 무통 로칠드 2000 빈티지는 현재 수백만 원을 호가하지만, 1994 빈티지는 그 절반에도 못 미친다. 기후 변화로 인해 해마다 와인 품질이 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빈티지의 와인을 블렌딩해서 일정한 맛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샴페인의 논 빈티지(non-vintage) 제품들이다. 샴페인 하우스들은 해마다 와인의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수년 치 와인을 섞는다. 그렇다고 샴페인 하우스들이 빈티지를 마냥 무시하는 건 아니다. 특정 연도에 기후 조건이 뛰어나고 포도의 품질이 탁월하다고 판단되면, 그해 수확한 포도만을 사용해 '빈티지 샴페인(vintage champagne)'을 별도로 생산한다. 해당 연도만의 개성을 담은 샴페인인데 논 빈티지 제품보다 숙성 잠재력도 크고 가격 역시 훨씬 높다. 진지한 와인 애호가들은 같은 와인을 빈티지 별로 준비해 비교 시음하기도 한다. 와인 동호회나 시음회에서 자주 등장하는 "수직 시음(vertical tasting)"인데, 같은 생산자의 같은 밭에서 나오는 와인을 여러 해에 걸쳐 맛보며 빈티지 차이를 체험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의 뮤지컬을 다양한 배우들의 연기로 감상하는 것과 같아서, 누군가는 2009 빈티지의 풍성함을 좋아하고, 또 다른 이는 2008의 절제된 우아함에 끌리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2024년 3월 6일 에노테카코리아 주최 행사에서 샤토 랭쉬 바쥬의 소유주인 장샤를 카즈(Jean-Charles Cazes)와 와인 시음 시간을 가졌던 일이 떠오른다. 그가 소유한 또 다른 와이너리인 샤토 오 바타이 2017, 2018 비교 시음이었다. 장샤를 카즈는 참가자들에게 떼루아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시음하라고 조언했다. 떼루아는 천지인(天地人), 그러니까 기후(天), 땅(地), 사람(人)처럼 와인을 만드는 데 영향을 끼치는 제반 요소를 일컫는 말이다. 어차피 땅도 같고, 만든 사람도 같으니, 2017년과 2018년의 기후 차이가 결정적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빈티지별로 블렌딩 비율이 달라서 2017은 카베르네 소비뇽 66%에 메를로 34%이며, 2018은 카베르네 소비뇽 59%에 메를로 41%이다. 평론가들은 대체로 2018 빈티지를 더 높게 평가했는데, 두 와인의 향과 맛을 비교해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2017에 비해 2018의 향이 더 강하고 화사하며 묵직하다. '2017년보다 2018년 날씨가 더 좋았구나.' 그래도 1년 선배라고 2017 빈티지가 조금 더 숙성되어 마시기 편한 느낌이었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주저 없이 2018 빈티지를 잡을 정도로 기량 차이가 컸다. 최근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 변화는 와인 업계에 큰 도전이다. 포도가 예전보다 더 일찍 익다 보니 수확 시기를 앞당기거나 변화된 기후 조건에 맞춰 품종을 바꾸는 시도도 늘고 있다. 보르도는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등 전통적인 품종 외에 새로운 품종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샴페인에 쓰이는 피노 누아와 샤르도네 품종이 예전보다 더 잘 자라면서 스파클링 와인 산지로 급부상하고 있다. 독일 모젤 지역은 과거에는 포도가 덜 익는 것이 문제였지만, 이제는 오히려 지나치게 잘 익는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모든 게 그렇듯, 와인도 아는 만큼 보이기 마련이다. 빈티지를 안다는 건 와인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관심과 태도다. 포도에는 그해의 태양, 바람, 비, 인간의 손길, 기다림이 고스란히 녹아 있으며, 와인은 그것을 온전히 담아낸 산물이다. 그러니 와인을 마신다는 건 그해의 자연과 사람을 함께 음미하는 문화적 경험이다. 이 어찌 설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진 : 게티이미지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와인과 페어링>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와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코르크 마개일 것이다. 맨손으로 손쉽게 뚜껑을 열어 마실 수 있는 음료가 넘쳐나는 세상에, 그 옛적 장판교의 장비처럼 최전선에서 홀몸으로 와인병 입구를 틀어막고 있다. 와인을 마시려면 이 녀석을 제거해야 하는데, 무력이 장비 뺨치는지라 빼내는 데 여간 애를 먹는 게 아니다. 맨손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고 장팔사모를 연상시키는 꼬불꼬불한 소용돌이 꼬챙이를 박아 넣어 힘껏 뽑아야 한다. 알다시피 코르크 마개는 불에 잘 타지 않고 썩지도 않는 데다가 특유의 신축성과 탄력으로 병 입구에 꼭 밀착해 외부 공기의 유입을 차단한다. 덕분에 와인을 오랜 기간 보관하는 게 가능해졌고, 10년 이상 숙성된 고급 와인의 놀라운 매력을 즐길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유리병과 코르크 마개 조합이 보편화되기 전에는 샤토 라피트 로칠드를 2·30년씩 숙성해서 마시는 일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코르크 마개는 코르크나무의 껍질을 가공해 만들어진다. 주로 포르투갈, 스페인 등에서 생산되는 이 나무는 껍질을 벗겨도 다시 자라기 때문에 9~12년 주기로 채취가 가능하다. 제조 과정은 먼저 코르크나무의 껍질을 벗겨낸 후 6개월~1년간 자연 건조하며, 이후 뜨거운 물에 삶아 불순물을 제거하고 유연성을 높인다. 이렇게 처리된 코르크는 원하는 크기로 절단된 뒤, 다양한 방식으로 가공된다. 고급 와인에는 천연 코르크(마개 크기로 절단한 것)가 사용되며, 저가 와인이나 스파클링 와인에는 압축 코르크(잘게 부순 코르크를 접착제로 압착한 것)가 사용된다. 마지막으로, 소독 및 품질 검사를 거쳐 병에 사용될 준비를 마친다. 수백 년 동안 애용된 코르크 마개지만 단점이 없는 건 아니어서 TCA(Trichloroanisole·트리클로로아니솔) 오염 문제는 꽤 심각한 문제다. TCA는 곰팡이와 염소 화합물이 반응하여 생성되는 물질로, 극미량만으로도 와인의 풍미를 망칠 수 있다. 코르크나무가 자라는 과정 혹은 작업장 환경을 통해 곰팡이가 자리 잡을 수 있으며, 이 곰팡이가 가공 과정에서 염소 화합물과 반응하면 TCA가 생성될 위험이 커진다. TCA에 오염된 와인은 특유의 퀴퀴한 냄새를 띠는데, 젖은 종이, 곰팡이 핀 지하실, 눅눅한 판자 냄새와 비슷한 냄새가 난다. 오염이 심한 경우 누구나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맛과 향이 변질된다. 다만 미세한 수준으로 오염된 경우는 과실 향이 다소 둔화하거나, 풍미가 살짝 밋밋하게 느껴지는 정도로만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일반적인 소비자는 물론, 일부 전문가들도 감지하기 어렵다. 소비자가 단순히 '이 와인은 맛이 별로네?'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고, 심지어 와인 생산자조차 '올해 와인은 이런 스타일이구나'라고 판단한다. 심한 TCA 오염이 아니라면 마셔도 건강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지만, 와인이 원래 지닌 개성과 복합미가 손상되는 것이 문제다. 사실 TCA 오염은 코르크 마개뿐만 아니라 와이너리 내부의 나무 배럴이나 포장재, 저장고, 심지어는 와인을 담는 탱크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최근에는 스크류캡이 급부상하며 코르크 마개의 지위를 위협하고 있다. 스크류캡은 코르크 마개와 비교해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다. 가장 큰 장점은 개봉이 쉽다는 점이다. 코르크 마개는 반드시 와인 오프너가 필요하지만, 스크류캡은 손으로 돌려서 간단하게 열 수 있다. 앞서 언급했던 TCA 오염으로 인한 와인 변질 위험이 없으며 보관과 유통 과정에서 코르크 마개보다 온도와 습도 영향을 덜 받는다. 코르크 마개는 건조한 환경에서는 수축해 외부 공기가 유입될 위험이 있다. 그런 이유로 코르크 마개 와인의 경우 코르크가 젖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병을 반드시 눕혀 보관해야 하지만, 스크류캡은 세워서 보관해도 문제없다. 게다가 스크류캡은 코르크 마개보다 생산 비용이 낮아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유리하다. 고품질의 천연 코르크 마개는 개당 수백 원에서 수천 원까지도 해, 수십만, 수백만 병을 생산하는 와이너리 입장에서는 상당한 비용 부담이 된다. 반면 스크류캡은 알루미늄과 플라스틱을 사용해 대량 생산이 가능하며 단가가 훨씬 낮다. 일반적으로 스크류캡 비용은 천연 코르크의 절반 이하 수준이며, 일부 저가형 코르크(압축 코르크)와 비교해도 가격 경쟁력이 높다. 또한 코르크 마개는 제조 후 품질 검사를 거쳐야 하고, 오염 가능성을 줄이기 위한 추가적인 관리가 필요하지만, 스크류캡은 이런 과정이 필요하지 않아 전체적인 비용 절감 효과가 크다. 이러한 여러 장점 때문에 대량 생산이 필요한 대중적인 테이블 와인이나 가성비 와인을 생산하는 와이너리에서 스크류캡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뉴질랜드와 호주 같은 지역에서는 고급 와인도 스크류캡을 적극적으로 채택하고 있으며, 프랑스, 이탈리아 등 전통적인 와인 생산국에서도 점차 스크류캡을 사용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스크류캡에도 약점이 있다. 아무래도 와인 특유의 전통적인 감성과 이미지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적지 않은 와인 애호가는 코르크 마개를 여는 의례적인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고급 와인은 여전히 코르크 마개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때문에 스크류캡이 사용된 와인은 여전히 저렴한 테이블 와인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 스크류캡 와인을 열지 못해서 애먹었던 일이 생각난다. 그냥 돌리면 되는 것 아니냐고? 일단 들어보시라.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저렴이 호주 와인이 스크류캡이었다. 소주병 따듯이 윗부분을 잡고 돌리는데, 아무리 용을 써도 안 돌아가는 것 아닌가. 참이슬 딸 때는 쉽게 돌아가던 놈이 웬일인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억지로 힘을 주면 병이 깨지겠다 싶어, 펜치와 니퍼를 사용해 스크류캡을 뜯어내고 씩씩대며 마셨는데 심지어 와인이 맛도 없었다. 알고 보니 소주병과는 여는 방식이 다른 것 아닌가. 스크류캡 구조물 전체를 감싸 쥐고 돌려야 열리는 구조였다. 어느 날 와인 관련 문의 사항이 있을 때만 주로 나한테 연락하는 모 방송인의 전화번호가 스마트폰에 찍혔다. "형님! 제가 와인을 샀는데 스크류캡으로 되어 있더라고요. 그런데 이게 아무리 돌려도 안 열리는 거예요. 펜치로 억지로 뜯어내고 마시는 중인데요. 이거 불량품 아닌가요?" "그거 소주처럼 따면 안 되고 스크류캡 구조물 전체를 손으로 감싸 쥐고 돌려야 열리는 거예요." "아이고! 그렇군요." 나만 삽질하는 게 아니었구나. 그야말로 힐링의 순간이었다. 사진 : 게티이미지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와인과 페어링>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욕망이 꿈틀대는 곳에는 돈이 몰린다. 돈이 몰리는 곳은 사기와 협잡이 똬리를 틀기 마련이다. 와인도 역시 예외일 수가 없어서 한 병에 수백만 원이 훌쩍 넘는 고급 와인은 마치 명화 모나리자처럼 여기저기서 위조되기도 한다. 위조 와인 문제는 다큐멘터리가 제작될 정도로 상당히 진지하고 심각한 사안이다. 2016년에 공개된 다큐멘터리 <신 포도(Sour Grapes)>는 위조 와인으로 미국 와인업계를 발칵 뒤집은 인도네시아인 루디 쿠르니아완(Rudy Kurniawan)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루디 쿠르니아완(Rudy Kurniawan) 1990년대에 닷컴 붐이 일면서 부유한 수집가들 사이에서 와인 경매에 참여하는 문화가 발달했다. 와인이 상당히 훌륭한 투자 상품이라는 인식이 퍼진 것이다. 당시 와인 경매장에서 단연 주목을 받던 이는 루디 쿠르니아완이었다. 한 달에 100만 달러씩 와인 구매에 쓰는 재력에, 놀라운 미각과 풍부한 지식을 가진 이 젊은 남자는 단번에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중국 전체 하이네켄 판매 독점권을 루디 가족이 소유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누구도 루디 쿠르니아완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루디와 와인 모임을 함께했던 영화감독 제프리 레비(Jefery Levy)는 다큐멘터리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지식의 폭이 놀라울 정도였어요. 제게 거의 모든 것을 가르칠 정도였으니까요. 추종자가 생길 정도였고 루디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루디의 신화가 만들어진 이유 중 하나는 그가 탁월한 미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제가 만나본 사람 중 미각이 가장 뛰어났어요. 캘리포니아에서 프랑스까지 어떤 종류의 와인도 루디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확하게 맞혔으니까요." 루디는 특히 프랑스 부르고뉴의 대표 와인 로마네 콩티를 매우 좋아해서 닥터 콩티(Dr. Conti)로 불리기도 했다. 와인 경매에서 루디의 영향력은 대단해서, 그가 등장한 이후 희귀 와인이나 부르고뉴의 올드 빈티지 와인 가격이 급등할 정도였다. 루디는 2006년에 와인 경매에 자신이 수집한 와인 일부를 2회에 걸쳐 3천540만 달러에 판매해 와인 경매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승승장구도 여기까지. 슬슬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억만장자 수집가 빌 코크(Bill Koch)는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소장했다는 보르도 와인을 경매에서 여러 병 구매했는데(루디에게 산 와인은 아니다), 나중에 분석해 보니 와인 병이 최근에 제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위조 와인이었던 것이다. 충격을 받은 빌 코크는 전문가를 고용해 와인 저장고에 있는 43,000병을 일일이 확인하며 위조품을 색출했는데. 명백하게 위조로 판명 난 것만도 400병이 넘었으며 해당 와인의 구매가가 400만 달러에 이를 정도였다. 빌 코크(Bill Koch) 특히 희귀 와인 위조가 두드러졌다. 예컨대 빌 코크는 페트뤼스(Pétrus) 1921 빈티지 매그넘(1.5리터)을 2만 5천 달러에 구입했는데, 알고 보니 그해에는 페트뤼스 매그넘 사이즈가 출시되지 않았다. 1858년산 와인에서는 한참 뒤에야 생산된 접착제 성분이 검출되었다. 빌 코크는 경매에서 루디의 와인도 사들였는데 그중에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위조품들이 있었다. 부자가 한을 품으면 일 년 내내 서리가 내린다고 했던가. 빌 코크는 개인 탐정을 통해 루디 쿠르니아완의 뒤를 캐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또 다른 문제가 터졌다. 이번에는 더 심각했다. 2008년 4월 뉴욕의 와인 경매에서 루디가 도멘 퐁소(Domaine Ponsot)의 끌로 드 라 로쉬(Clos de la Roche) 와인과 끌로 생 드니(Clos Saint-Denis) 와인을 내놓았는데, 그게 문제가 된 것이다. 도멘 퐁소의 소유주였던 로랑 퐁소(Laurent Ponsot)는 다큐멘터리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2008년 4월 뉴욕 경매 당시의 카탈로그예요. 이건 도멘 퐁소인데 사진을 보면 1929년산 끌로 드 라 로쉬라고 나와 있어요. 퐁소 라벨은 1934년부터 제작됐죠. 그러니 위조품이 이미 카탈로그에도 오른 거예요. 여기 있는 것도 모두 위조품이고요. 이런 포일도 사용한 적이 없어요. 니콜라에 와인을 판매한 적도 없죠. 라벨 외에 이런 모양을 입힌 적도 없어요. 모두 끌로 생 드니인데 45년, 49년, 66년, 71년산으로 표기됐지만 시판된 건 1982년이에요. 여기 평점 99점을 줬다는 전문가는 바로 경매인인 존 케이폰(John Kapon)이고요. 어떻게 5만 달러, 7만 달러나 하는 와인에 이렇게 좋은 평점을 주게 됐을까요? 경매인은 20퍼센트 수수료를 챙기기 때문이에요. 이틀 후 비행기를 타고 (경매가 열리는) 뉴욕으로 건너갔어요." 경매를 중지시킨 로랑 퐁소는 루디를 만나 와인을 어디서 샀는지 캐물었다. 위조 와인의 출처를 밝혀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루디는 자신이 와인을 너무 많이 구입하기 때문에 확인이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나중에 로랑은 루디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는데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와인을 샀으며 판매자 이름은 팩 헨드라(Pak Hendra)라는 거였다. 그 후 루디로부터 추가로 팩 헨드라의 연락처라며 전화번호 2개를 받았는데, 확인해 보니 한 번호는 라이언 에어라는 인도네시아 항공사 번호였고 다른 번호는 와인과는 무관한 인도네시아 상점의 번호였다. 게다가 '팩'은 인도네시아어로 '씨'라는 존칭이고 '헨드라'는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흔한 성이다. 루디는 '서울의 김 씨에게 와인을 샀다'고 얘기를 한 셈이다. 결국 이 문제를 주시하던 FBI가 수사에 들어갔고 루디의 자택에서 돈다발처럼 묶여 있는 엄청난 수량의 위조 라벨, 코르크 추출 기구와 재밀봉 기구, 라벨이 부착되지 않은 빈 병, 라벨 분리 중인 병 등 다수의 와인 위조 증거품을 발견했다. 그중 흥미로운 물품은 반쯤 채워진 병에 손글씨를 쓴 것이었는데, 'M-45'와 그 제조법이 적혀 있었다. M-45는 세기의 와인으로 불리는 샤토 무통 로칠드 1945를 의미하는 표식이다. 여러 와인을 섞어 자신이 마신 샤토 무통 로칠드 1945의 맛을 비슷하게 재현하려 노력한 것이다. 실제 루디의 위조 와인은 라벨에 적힌 와인의 특징을 꽤 잘 살렸다고 한다. 참고로 루디의 외가 사람들, 구체적으로 어머니의 형제들은 인도네시아 역사상 최악의 금융 사기범들이라고 한다. 그들이 훔친 액수는 7억 8천만 달러에 달하며 그중 회수된 금액은 10퍼센트도 안 된다는데, 루디의 재력은 외가의 금융 범죄에서 기인했을 거라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루디는 항상 돈에 쪼들렸다고 한다. 신용카드 사용액이 1천600만 달러에 달하고 대저택에 여러 대의 고급 차도 소유했으며, 유명 화가인 데미언 허스트나 앤디 워홀의 작품도 구매할 정도로 소비욕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한쪽에서 돈을 빌려 다른 쪽에 갚는 식으로 모자란 돈을 메꾸기 일쑤였고, 결국 자신의 뛰어난 재능을 살려 와인 위조에 손을 댄 것으로 보인다. 정황상 와인 위조에 루디 집안 전체가 연루되었을 거라는 의혹이 강했다. 실제 라벨에 사용된 종이의 일부는 인도네시아에서 왔으며, 루디는 2007년에 와인 판매로 얻은 1천700만 달러의 수입을 홍콩과 인도네시아에 있는 형제들에게 송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증거가 불충분해 루디만 기소되었으며 결국 위조 와인 판매로 2013년 12월 재판에서 징역 10년 형을 받고 감옥에 갇혔다. 향후 피해자들에게 2천840만 달러를 지급해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2020년 11월 6일에 석방됐는데, 이제는 아예 '합법적' 위조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와인 애호가 부자들의 폐쇄적인 모임에서 로마네 꽁띠, 페트뤼스, 르팽, 슈발 블랑, 도멘 자크 프레데릭 뮈니에 르 뮈지니 같은 고가의 와인 진품을 루디가 제조한 위조품과 블라인드로 대결시키는 이벤트를 벌인다고 하는데, 종종 루디가 만든 위조품이 진품보다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단다. 그야말로 요지경 세상이다.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와인과 페어링>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아주 오래전 일이다. 외국인이 본 조선 시대의 모습이 궁금해 <하멜 표류기>를 찾아 정독한 적이 있다. 초반부를 읽어 내려가던 중, 서양 와인을 난생처음 마시고 크게 만족한 조선 관리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와인 애호가가 되기 훨씬 전이고, 심지어 술을 좋아하지도 않았던 시절이었지만, 유독 그 대목이 인상 깊었다. 도대체 조선의 관리는 무슨 이유로 물 건너온 와인을 마시게 되었을까? 하멜 일행의 관점에서 그 자세한 내막을 살펴보겠다.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 있는 하멜기념비. 사진 : 비짓제주(Visit Jeju) 핸드릭 하멜은 1630년 네덜란드 호르쿰에서 태어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직원으로 일했다. 1653년 8월 16일, 화물을 실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 스페르베르 호는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거센 풍랑을 만나 제주도 인근 바다에서 난파되어 산산조각 났다. 64명의 선원 중 36명만이 살아남았다. 이들은 자신들이 도달한 곳이 일본이라고 착각했다. 암스테르담 출신의 선장 레이니어 에흐버츠는 바닷물에서 2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팔베개를 한 채 죽어 있었다. 추가로 예닐곱 명의 선원 시신을 발견한 하멜 일행은 이들을 매장했다.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 며칠 동안 제대로 식사도 못 한 상태에서 해안으로 떠밀려온 난파선 물품이 그들에게 작은 희망이 되었다. 밀가루 한 포대, 고기 한 통, 베이컨, 그리고 스페인 레드 와인이 담긴 나무통이었다. 일단 비를 피하려고 돛으로 천막을 쳤다. 다음 날인 8월 17일, 하멜 일행은 도움을 요청할 사람을 찾아 나섰다. 배와 구명보트가 산산조각 난 상황이라 더는 수리가 불가능했다. 정오쯤, 200~300미터 떨어진 곳에서 한 사람을 발견했지만, 손짓하자 도망갔다. 정오가 지나 또 세 사람을 발견했으나, 아무리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았다. 선원 중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다가가 총을 들이대고서야 불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이들은 일본인 복장을 하고 있지 않았다. 선원들 사이에 불안감이 감돌았다. 저녁 무렵, 약 100명 정도의 무장한 남성이 천막 주변으로 모여들어 선원들의 인원을 세고 밤새 감시했다. 8월 18일 아침, 선원들은 더 큰 천막을 치느라 분주했지만, 정오 무렵 상황은 급변했다. 1천여 명의 군졸과 기병이 갑자기 몰려와 천막을 포위하고 서기, 일등항해사, 이등갑판장, 사환을 지휘관에게 연행했다. 지휘관은 이들의 목에 쇠사슬을 감고 꿇어 엎드리게 했다. 군사들은 천둥 같은 소리로 위압감을 조성했다. 천막 안에 있던 나머지 선원들도 무릎을 꿇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지휘관은 뭔가를 물었지만,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손짓과 발짓으로 일본 나가사키를 목적지라고 설명했지만, 소용없었다. 지휘관은 선원들에게 술 한 잔씩을 주고 천막으로 돌려보냈다. 군졸들은 선원들이 기거하는 천막에 식량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지휘관에게 알렸고, 1시간 뒤 죽이 지급되었다. 오랫동안 굶은 선원들의 건강을 고려한 조치였다. 오후에는 군졸들이 밧줄을 가져오자 선원들은 자신들이 묶여 죽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들은 난파선으로 가서 쓸 만한 물건들을 모아 묶는 데 사용했다. 저녁이 되자 쌀밥이 지급되었다. 이날 오후, 일등항해사 헨드릭 얀스는 관측을 통해 자신들이 제주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멜기념비 앞 제주 사계리 바다 풍경. 사진 : 비짓제주(Visit Jeju) 8월 19일, 난파 후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군졸들은 부유물을 해안으로 옮기고 쇠붙이가 붙어 있는 나무를 태우는 작업을 계속했다. 하멜 일행은 절망감과 공포 속에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선물 공세를 펼치기로 했다. 드디어 문제의 와인이 등장할 차례다. 상급 선원들은 망원경, 스페인 레드 와인, 은으로 된 잔을 준비했다. 지휘관과 병마절도사가 좋아할 만한 물건이었다. 이들이 챙긴 와인은 무엇이었을까? 스페인 남부에서 생산된 셰리(Sherry) 와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셰리는 17세기 유럽과 아시아 간 해상 무역 품목 중 하나였다. 증류주를 첨가해 알코올 도수를 높였기 때문에 부패하지 않아 장거리 운송에 적합했다. 셰리는 화이트 와인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색상 구분이 지금처럼 명확하지 않았다. 포도 품종 및 숙성 정도에 따라 짙은 색을 띤 셰리 와인도 있었으니, 레드 와인이라고 부르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사진 : 게티이미지 하멜의 기록에 따르면 지휘관과 병마절도사는 와인 맛을 보고는 크게 만족하며 연거푸 마셨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고, 받았던 은잔도 다시 돌려주고 심지어 천막까지 바래다주었다고 한다. 굳이 은잔을 돌려받았다고 기록한 걸 보면 조선 관리의 청렴함에 깊은 인상을 받은 건 아닐까. 다만 망원경을 돌려받았다는 기록은 없는데... 이틀 뒤인 8월 21일. 난파선에서 물건을 훔친 조선인 도둑들이 발각되었고, 그들은 병마절도사의 명령으로 길이 1미터쯤 되는 몽둥이로 발바닥을 수십 대 맞는 처벌을 받았다. 몇몇은 발가락이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 앞으로 선원들의 물건이 도난당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안심시키려는 의도였겠지만, 선원들은 그 장면을 보며 과연 마음을 놓았을까? 오히려 공포에 떨지는 않았을지. 언젠가 제주도를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스페인산 셰리 와인을 들고 하멜이 당도했던 해변에 서서 한 잔을 마시며, 절망 속에서도 생존을 위해 노력했던 그들의 심정을 곱씹어 보고 싶다.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와인과 페어링>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가성비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때는 2024년 11월 10일 일요일. 고양이에 몹시 진심인 초등학교 5학년 둘째를 위해 온 가족이 인천 옹진군 영흥면 '고양이역' 카페를 방문했다. 둘째의 하루 아니 일주일 치 행복 총량을 가득 채운 후 오후 5시에 서울로 귀가하는 길이었다. 운전 중 차창 밖으로 어마어마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태초의 지구에서나 볼 법한 광활한 갯벌 한 가운데에는 성경 속 최초의 인류 아담처럼 섬 하나가 고독하게 솟아 있었다. 이미 자동차는 그곳을 스치고 지나 수 분이 지났건만 지금 보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아내와 눈빛을 교환한 후 차를 돌려 무작정 섬으로 향했다. 마침 갯벌 가까이에 영업을 마친 조개구이집 주차장이 있어서 잠시 차를 대었다. 귀찮아하는 아이들은 차에 두고서 아내와 나는 (옷을 입었다는 점만 제외하고는) 태초의 아담과 이브가 된 듯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진 갯벌로 무작정 향했다. 그때 찍은 사진이다. 목섬 석양 사진 ⓒ 임승수 그날의 시각적 만족감과 포만감은 극한에 달했다. 시간 날 때마다 사진을 찾아보며 감동을 되새기는 일이 며칠간 계속됐을 정도니까. 하지만,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지. 슬슬 시각 자극에 익숙해지고 물리기 시작하자 문득 그날 차를 주차했던 조개구이집이 떠올랐다. 아! 그러고 보니 조개구이를 먹어줘야 하는 시즌이 됐구나. 인천까지 다시 가는 건 좀 오버다 싶어 집에서 가까운 장소를 물색하다가 영등포역 인근 '하와이조개'를 발견했다. 11월 29일 오후 5시 30분. 가족을 이끌고 하와이조개에 들어선 나의 손에는 해산물과 영혼의 동반자라 불리는 '루이 자도 샤블리'가 들려 있다. 샤블리는 프랑스 부르고뉴 북부 샤블리 마을에서 생산되는 샤르도네(Chardonnay) 포도로 만든 화이트 와인이다. 특유의 청량한 산도와 조개껍데기를 핥는 듯한 미네랄 풍미는 샤블리를 다른 샤르도네와 구별 짓는 특징이다. 그나저나 목섬 갯벌을 거닐며 태초의 분위기를 만끽했다고 깝죽댔지만 기실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한 건 고작 20만 년 전이다. 오늘 불판 위에 영접할 조개님께서는 무려 5억 년 전에 등장하신 대선배 아닌가. 한참 후배인 포도조차 6천만 년이나 됐으니 그야말로 인류는 '응애'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수준이다. 45억 년 먹으신 지구 어머니가 조개와 포도라는 모유로 우리를 먹이시는구나. 감사합니다! 주문하니 이내 굴, 가리비에다가 입을 꽉 다문 갖가지 조개가 담긴 접시를 들고 직원이 왔다. 불판 위에 조개를 올려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개껍데기가 거멓게 그슬리기 시작하면 드세요." "조갯살을 그냥 불판 위에 올려서 구워도 되나요?" "그러면 수분이 날아가서 말라버리거든요." ⓒ 임승수 직원분의 조언을 직장 상사의 명령처럼 받들며 젓가락을 들고 뚫어져라 조개껍데기만 쳐다보았다. 어느덧 조갯살에서 스며 나온 육즙이 껍질 안에서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더니 하얀 껍질 한켠에서부터 검은색이 스멀스멀 번진다. 이제 괜찮겠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냉큼 가리비 하나를 젓가락으로 집어 구강으로 투하했다. 소파처럼 푹신하면서도 탱탱볼처럼 탄력 있는 식감, 해수를 떠올리게 만드는 원초적 짭짤함, 연기 향 가득한 불맛, 촉촉하면서도 뜨끈한 기운이 입안을 가득 채우는데, 역시 조개는 찜보다 구이구나! 환장하겠네. 나는 사회적으로 가치를 인정받는 비싼 진주보다는 조갯살 그 자체가 더 좋다. 생각해 보라. 무인도에서 조개를 만나면 진주가 반갑겠나 조갯살이 반갑겠나. 나는야 태초의 인간 아담! 주변을 둘러보니 아내도 아이들도 태초의 인간이 되어 미각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 우리 부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와인을 잔에 따라 건배하고 마셨다. 샤블리의 이 상큼하고 청량한 짭짤함이라니! 조갯살의 탱글졸깃한 짭짤함과 어딘가 묘하게 겹쳐 보인다. 진화의 원류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생명수의 뿌리에서 조우하게 되어 그런 걸까? ⓒ 임승수 샤블리 와인에서 짭짤한 맛이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챗GPT에게 물어보면 포도밭의 토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샤블리 지역 포도밭 토양은 쥐라기 시대의 해양 퇴적물로 형성되었는데, 약 1억 5천만 년 전에 이 지역은 바다였으며 해양 생물(주로 조개와 연체동물) 화석이 퇴적되면서 지금의 석회암 토양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5억 년의 시간을 간직한 조개, 쥐라기 시대의 흔적을 먹고 자란 샤블리의 짭짤한 콜라보라니! 수억 년 전 바다에까지 가닿는 한 편의 서사시 아닌가. 원초적 짠맛 위로 샤블리 특유의 청량하고 상큼한 신맛이 약동한다. 미각을 매혹하는 이 신맛은 와인을 양조하며 인간이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발효'를 통해 조율되고 가다듬어진다.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이 연주하는 예리하고 선명한 선율처럼, 이 우아한 산미가 나의 미각을 전후좌우로 뒤흔든다. 태곳적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낸 은은한 짠맛, 인류 문명의 손길이 느껴지는 우아한 신맛, 수억 년 간극을 훌쩍 뛰어넘는 이 두 맛의 조화에 나와 아내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서로의 잔을 부딪쳤다. 어이구야. 누가 보면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에서 수백만 원에 달하는 코쉬 듀리 뫼르소를 마시는 줄 알겠다고? 고작 조개구이에 고만고만한 화이트 와인 마시는 주제에 오두방정에 호들갑 떨어 미안하다만, 몰랐는가? 와인은 호들갑이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술인 것을. 돈 많은 부자 나리께서 수백만 원짜리 코쉬 듀리, 르플레이브, 르루아 도브네를 마시든 말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 그저 지금 내 입에 들어가는 음식과 와인, 그리고 함께 먹고 마시는 가족이 소중할 따름이다. 더 많은 사람이 이렇게 호들갑을 떨수록 국민 행복 총량이 늘어나지 않겠는가. '하와이조개'는 라면사리가 무한 리필이다. 이제 홍합탕 국물에다가 라면 오지게 끓여야 하니, 그럼 이만.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가성비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꽤 인복이 많은 편이다. 나에게 연락하고 뭔가를 제안하는 사람 대부분이 선하고 사심 없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왜 이렇게 운이 좋을까 생각해 봤는데, 내가 마르크스주의 책을 쓰는 비주류 작가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먹잘 것 없는 작가에게 굳이 연락하고 만나서 기꺼이 돈 쓰고 시간 쓰는 사람이라니. 최소한 사기꾼일 리는 없지 않은가. 돈도 없고 권력도 없는 게 장점이 되는 순간도 있구나 싶어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지어진다. 그날도 역시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날이었다. 지난번에 이분들께 거하게 얻어먹었는데 매번 신세만 지고 살 수는 없는 법 아닌가. 이번에는 우리 부부가 식당도 예약하고 와인도 준비하겠다고 큰소리쳤다. 상대가 워낙 미식가들이라 와인을 무엇으로 가져가야 할지 고민하다가 냉장고에 보관 중인 한국 와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건 그분들이 안 마셔 봤을 게 확실해. 흥미를 느끼지 않겠어? 모임 당일에 산머루 품종 레드 와인과 청수 품종 화이트 와인을 각각 챙겼다. 산머루 품종 레드 와인 '비원 퓨어'(왼쪽)와 청수 품종 화이트 와인 '라라'(오른쪽) ⓒ 임승수 레드 와인 양조에 사용되는 산머루는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지역에 자생하는 포도과 식물이다. 한국의 추운 겨울과 고온다습한 여름을 잘 견디는 강인한 품종으로, 유럽 포도보다 크기가 작고 신맛과 독특한 향이 강렬하다. 산머루를 사용한 와인은 풍부한 색감과 산미를 특징으로 한다. 화이트 와인 양조에 사용되는 청수는 원래 한국에서 식용 포도로 개발되었으나, 열매가 완전히 익기 전에 쉽게 떨어지는 낙과 현상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또한 껍질이 두껍고 씨앗이 많아 식감 면에서도 식용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은 양조용 품종으로는 강점이 되어, 청수는 와인 생산에 적합한 품종으로 재조명되었다. 두꺼운 껍질은 와인에 깊은 풍미와 구조감을 부여하고, 높은 산미는 깔끔하고 균형 잡힌 와인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 때는 11월 17일 일요일 낮 12시. 우리 부부와 상대 부부는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비건 식당 '유알티'에서 만났다. 이 집의 고사리 들기름 파스타가 워낙 유명한지라 예약을 잡아두었다. 한국형 파스타에 한국 와인의 조합이니 제법 그럴싸하지 않은가. 일단 화이트 와인 체험부터 시작했다. 산막와이너리에서 직접 재배한 청수 포도로 양조한 '라라'를 열어서 잔에 따랐다. 구매 가격은 2만 5천 원. 고사리 들기름 파스타와 페어링 ⓒ 임승수 언론인 강 씨: 고급 와인처럼 다채로운 느낌을 주는 건 아니지만, 외국 와인을 마실 때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상큼하고 신선한 청포도 향이 제법 인상적이다. 어릴 때 먹던 청포도 사탕 향이 나서 재미있다. 입에서는 전혀 달지 않아서 반전이고. 직접 사서 더 마셔 보고 싶다. 드라마작가 박 씨: 와인이 상큼하고 아주 맛있지만, 지금 먹고 있는 고사리 들기름 파스타와의 궁합은 의문이다. 정말 그러하다. 소싯적 청포도 알을 떼어내 손에 즙을 묻혀가며 먹을 때 코에서 감돌던 바로 그 냄새가 난다. 그동안 수많은 화이트 와인을 마셔봤지만, 토종 한국인에게 이렇게나 강렬한 노스텔지어를 느끼게 한 녀석은 처음이다. 파스타와의 궁합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의견도 동감이다. 이날의 파스타는 고사리 특유의 담백하면서 졸깃한 식감에다가 시골 가마솥 누룽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들기름 특유의 구수함이 특징이었고, 거기에 '마카로~니', '모짜렐~라' 같은 찰진 이탈리아어를 떠올리게 만드는 쫀득한 파스타면 또한 기대 이상이었다. 다만 이런 진하고 두툼한 풍미의 음식에는 일반적으로 화이트 와인보다는 레드 와인이 더 잘 어울린다. 그래서인지 청수 와인은 나중에 추가로 주문한 샐러드와 한층 나은 궁합을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레드 와인 차례다. 산막와이너리에서 직접 재배한 산머루로 양조한 '비원 퓨어'를 잔에 따랐다. 가격은 3만 원. 한국 와인으로는 이례적으로 와인 평론가 제임스 서클링으로부터 88점이라는 점수를 받은 이력이 있다. 제임스 서클링 88점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한입 들이켰다. 전혀 달지 않은 데다가 예상보다 훨씬 부드러운 질감. 그러면서도 뒤에 받쳐주는 타닌이 제법 강하다. 코에서는 기존 외국 와인에서는 느끼지 못한 독특한 향이 감지된다. 구성진 판소리와도 같은 구수하고 걸걸한 느낌이랄까. 이게 바로 산머루 향이구나. 고사리 들기름 파스타와의 궁합도 만족스럽다. 산머루 와인의 원초적이고 토속적인 향에다가 들기름과 고사리의 구수함과 담백함이 어우러지니, 참석자 네 명 모두 이구동성으로 칭찬이다. 산막와이너리한테 광고비 받은 것 없으니 솔직하게 얘기해 달라고 해도 직접 사서 다시 마시고 싶을 만큼 인상적이란다. 외국 와인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자기만의 개성을 갖고 있다는 증거다. 드디어 그동안 신세진 걸 음식과 와인 대접으로 갚았다고 한숨 놨건만, 신당동 와인바 '기몽'으로 자리를 옮겨 벌어진 2차 술자리에서 여지없이 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이 와인바의 단골인 언론인 강 씨의 추천으로 샤르도네 품종의 프랑스 스파클링 와인에다가 홍새우 비스크 파스타, 가리비 오븐구이를 곁들여 먹게 되었다. 익숙한 맛의 프랑스 와인에다가 근사한 요리가 어우러지니 앞선 1차 술자리 뺨치는 만족감을 선사한다. 두 차례에 걸쳐 알코올을 흡입하니 맨정신에 나올 수 없는 아무 말 대잔치가 펼쳐진다. 샤르도네 품종의 프랑스 스파클링 와인 '폴 드 코스트 블랑 드 블랑 Paul de Coste Blanc de Blanc'(왼쪽) ⓒ 임승수 나: 내가 말이에요. 내년에 노벨상 받아도 두 분이 전화하면 꼭 받아주겠다 이겁니다. 언론인 강 씨: 그러면 제가 단독으로 인터뷰하는 건가요? 나: 그럼요 그럼요! 그나저나 박 사장님은 왜 나를 배우로 캐스팅 안 합니까? 집에서 연기 연습하고 있단 말이에요. 드라마작가 박 씨: 제가 아직 형님을 모실 준비가 안 되어서 말입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나: 내가 말이에요. 돈도 없고 권력도 없고, 내세울 건 나이밖에 없단 말이에요. 에잇! 드라마작가 박 씨: 동아리방 들어오시면 기립해야 하는 선배 아닙니까! 모두 기립! 아내: 크크크크크크! 헛소리가 세상을 구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한 인간의 두어 시간쯤은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걸 절감한 순간이었다. 조만간 출간될 책이 대박 터져서 강 씨와 박 씨 부부에게 근사한 와인을 대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다.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가성비 와인과 배달 음식의 페어링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지난 10월 27일 오후 2시에 서울 이태원의 몬드리안 호텔에서 와인 직구 업체 위클리와인 주최로 마스터오브와인(MW) 피터 코프와 함께하는 시음회가 열렸다. 마스터오브와인(MW)은 전 세계에 400여 명밖에 없는 최고 수준의 와인 전문가이다. 대한민국 국적자 중에는 MW를 취득한 사람이 아직 없다. 1993년에 MW 자격을 얻은 피터 코프는 유튜브 와인 채널 와인킹, 와인소울 등에 고정 출연해 국내 와인 애호가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위클리와인 이재윤 대표의 인사로 시작된 시음회는 총 6병의 와인을 차례로 시음하며 피터 코프와 참가자가 의견을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유튜브 영상에서 포장마차 막걸리를 떠올릴 만큼 걸쭉한 입담을 자랑하던 코프였지만 시음회에서는 MW로서 차분하고 신중한 발언을 이어갔다. 처음으로 등장한 와인은 Gröhl Cuvée Pure Brut Nature다. 독일의 스파클링 와인인데 코에서는 상큼한 딸기 향과 시큼한 흙 향이 멋스럽게 어우러지고 탄산이 구강 내부를 까슬까슬 자극한다. 3만 원대 가격의 와인인데 놀라운 가성비를 보여주었다. 코프는 역시 전문가답게 스파클링 와인의 제조 방법에서부터 맛과 향의 특징에 이르기까지 조곤조곤 설명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코와 혀가 호강 중이라 청각 쪽 집중력이 확연히 떨어졌다. 코프 씨, 미안합니다. 와인 맛에 익숙해지니 슬슬 코프의 말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스파클링 와인을 마실 때 기다란 플루트 잔을 선호하는지 보울이 넓은 일반 잔을 선호하는지 손을 들어 알려달라고 한다. 보울이 넓은 잔을 선호하는 참가자가 많았지만, 코프는 플루트 잔을 선호한다고 명토 박아 말한다. 자글자글한 기포가 솟구쳐 오르는 그 시각적 아름다움을 그냥 넘길 수 없기 때문이란다. 같은 샴페인을 다양한 잔에 마셔본 적이 있는데, 최악은 쿠페 잔이었다고. 이후 등장한 네 와인은 31년 차 MW의 감식안으로 직접 선정한 와인이었다. 네 와인 중 두 병은 코프가 가장 선호하는 이탈리아 산지오베제 품종이고 나머지 둘은 이탈리아 네비올로다. La Fiorita Brunello di Montalcino 2018 (산지오베제) La Fiorita Brunello di Montalcino Riserva 2018 (산지오베제) Poderi Luigi Einaudi Langhe Nebbiolo 2023 (네비올로) Poderi Luigi Einaudi Barolo Ludo 2020 (네비올로) 사실 나는 항상 궁금했다. 코프가 '섬세하고 우아한' 와인을 선호한다는 말을 유튜브 영상에서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네 병의 와인을 통해 MW가 선호하는 섬세함과 우아함의 구체적인 형상을 확인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차례로 네 와인을 시음해 보니 확실히 일맥상통하는 특징이 있다. 일단 네 와인 모두 진득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콘서트홀을 꽉 채우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의 묵직한 음향이 아니라, 소편성 오케스트라가 반주하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같다고나 할까.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임윤찬 피아니스트가 연주했던 모차르트 협주곡 22번 3악장의 그 '섬세하고 우아한' 선율 말이다. 나는 당시 임윤찬 피아니스트의 그 유명한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연주보다 모차르트가 더욱 기억에 남았다. 코프의 취향이 나와 비슷하다는 확신이 드니 입가에 배시시 미소가 지어졌다. 분명 코프는 의정부 평양면옥 냉면의 그 심심하고 은은한 국물과 살포시 뿌려진 고춧가루를 좋아할 거야. 반가운 마음에 냅다 손을 들어 궁금한 것을 질문했다. "추천하신 와인을 마셔보니 진득하지 않고 하늘하늘 가벼워서 좋았습니다. 저 멀리 안개가 둘린 운치 있는 산을 보는 느낌이었어요. 반면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진득한 와인을 그렇게 좋아한다던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로버트 파커가 높은 점수를 준 와인을 테이스팅 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볼드하고 힘 있는 와인을 좋아하는 그와, 복합미와 우아함을 선호하는 저의 취향이 달라 굳이 찾아서 마시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MW로서 자신의 취향에 확신을 갖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앞으로 유튜브 영상에서 피터 코프가 추천하는 와인은 주저 없이 선택할 수 있겠구나. 개인적으로 네 와인 중에서도 Poderi Luigi Einaudi Barolo Ludo 2020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바롤로는 일반적으로 오래 숙성해야 진가를 보여주지만 이 와인은 포도를 수확하고 4년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부드럽게 꿀떡꿀떡 넘어간다.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와인은 블라인드로 제공되었다. 품종과 재배 국가 및 빈티지를 맞추는 사람에게 선물을 준다고 하니 여기저기서 손이 번쩍 들렸다. 이탈리아 피에몬테 돌체토, 부르고뉴 코트 드 본 피노누아, 남아공 피노타지, 스페인 리오하 템프라니요, 프랑스 보졸레 가메이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지만, 공개된 와인은 Gröhl Hölle Niersteiner Pinot Noir 2020. 놀랍게도 독일 피노 누아 2020 빈티지라고 정확히 맞춘 사람이 있었다. 이런 괴물 같으니! 이어지는 코프의 조언.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할 때는 시각, 후각, 미각을 모두 동원해 추측해야 하는데, 많은 사람이 시각을 간과한다. 색깔이나 농도의 변화에서 의외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세심하게 살펴봐야 한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는 한두 가지 특징만으로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고 적어도 세 가지 특징이 부합할 때 선택하는 게 정답 확률을 높일 수 있다고 조언한다. 참가자들의 질문 공세가 이어지고 하나하나 성심성의껏 답하는 코프. 하지만 나는 잔에 남은 와인을 마시기에 급급하다. 아무리 아는 만큼 보고 느낄 수 있다지만, 나란 녀석은 역시 지식보다는 음식 그 자체가 좋은 본능 덩어리구나, 꿀꺽꿀꺽. 시음회가 끝나고 사인회가 이어졌다. 방한 이후 연이은 일정으로 지칠 만도 한데 한 명 한 명 사인에다가 긴 메시지도 남겨준다. 이렇게 말이다. Dear Lim. Thanks for your interest and participation in our seminar. Good drinking! (임승수님께. 저희 세미나에 관심을 가져주시고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음회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