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한국 사회에 번아웃이라는 단어가 낯선 때 부터 성인남녀 4만 4천 여 명을 상담하며 '지치지 않고 지속하는 삶'의 방법을 연구해온 상담가 겸 작가입니다.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 대표를 거쳐 현재는 월간 마음건강 편집장으로 일상 속 마음돌봄의 정보를 큐레이션하고 있습니다. '마이크로 리추얼 : 사소한 것들의 힘' , '리커넥트 : 누구나 한번은 혼자가 된다' 등을 썼습니다.
바쁜 현대인들의 일상 속에서 자신을 돌보는 잠깐의 '틈'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마음을 돌보는 일상의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합니다. 성인 4만 4천 명을 상담했던 장재열 상담가가 자신의 삶에서 소진을 겪었던 전문가를 만나 일상 속 멈춤과 쉼의 비결에 대해 묻습니다. 인터뷰어 : 장재열 (상담가 겸 작가, 월간 마음건강 편집장) 인터뷰이 : 이항심 (건국대 일반대학원 상담심리학과 교수, 미래의일연구소 소장) 여러분은 심리학자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예전에는 심리학자들이 대중들에게 가장 많이 사는 오해가 "내 마음을 꿰뚫어 볼 것 같다"였지요. 독심술사와 심리학자는 다르다고 열심히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낯설기만 하던 심리학자. 그나마 최근에는 그 벽이 제법 허물어진 느낌입니다. 범죄심리학자 출신의 프로파일러가 한창 미디어에 나와 유명해지기도 했고, 심리학 유튜브의 인기, 자기 계발서 열풍 속 인용구로 인해서 '심리학'이라는 세 글자가 이제는 조금 익숙해지긴 했습니다만, 여전히 심리학자라는 단어 속에는 사람 마음을 다 알 것만 같은 초월적인 이미지가 다소간 남아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심리학자를 이렇게 정의하고 싶은데요. "그들은 사람을 다 꿰뚫고 평가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들이 안녕한 마음으로 살기를 바라면서 그 방법을 찾아 나서는 존재다"라고요. 어떤 느낌인지 확 와닿지는 않으신다고요? 아마 오늘의 인터뷰이를 만나고 나면 저의 표현이 확 와닿으실 겁니다. 긍정심리학자, 건국대 이항심 교수입니다. 장재열(이하 장) : 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이항심(이하 이) : 반갑습니다, 건국대학교 일반대학원 상담심리학과 교수이자, 미래의일연구소 소장인 이항심입니다. 장 : 인터뷰 여는 말씀 어떠셨어요? 여전히 사람들이 꿰뚫어 볼 것 같아서 몸을 좀 사리나요? 이 : 저 빵 터졌잖아요. 너무 공감되어서요. 소개팅을 나가도 여전히 그 이야기를 한다니까요. 안심하시라고, 저는 당신의 마음과 생각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 그건 독심술이라고. (웃음) 장 : 그렇죠, 사실 심리학이라는 건 사람을 읽어내서 평가하는 학문은 아니잖아요? 교수님이 생각하기엔 심리학자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이 : 심리학이 사실 세부 분야가 워낙 넓다보니까 한 문장으로 정의하기엔 어려울 듯 하지만... 일단 저의 경우를 말씀 드리면요. 저는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건강하기를 바라는 사람"이죠. 그리고 그 건강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늘 고민하는 사람이고요. 미국 사회도 그렇긴 했지만(그는 한국에 오기 전, 미국 오클라호마주립대학에서 상담심리학과 교수이자 미국심리학회의 구성원으로 활동하였다) 한국에 돌아와보니 특히 개인에게 짐을 지우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환경이 너무나 유해한(toxic) 상태에서, 개인에게만 힘든 마음을 다스리는 테크닉을 알려준다고 해서 사람들이 충분히 건강해질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고 보거든요. 장 : 그 관점에 대해서 완전히 공감해요. 저도 9년 전에 KBS 명견만리라는 프로그램에서 강연했을 때 '지금 우리 사회의 청년 정신건강 문제의 원인을 들여다보면 개인의 우울 기제보다는 집값, 일자리, 블랙 기업, 젠더 갈등 같은 것들이 과반수를 넘는다. 그렇다면 청년들이 심약한 게 원인이 아니라, 기성세대가 쌓아 올린 한국 사회 부조리의 고름이 곪다 곪다 터질 때 태어나서 다 얻어맞는 중인 거 아니냐'라고 이야기했던 적이 있는데, 그 영상이 아직도 유튜브에서 숏츠로 재생산되고 있더라고요. 많은 분들의 공감과 함께요. 이 : 그렇죠. 결국은 개인에만 초점을 둔 웰빙 혹은 삶의 향상(Individual wellbeing)이라는 건 근본적으로 살펴보면 존재하기 어려운 것이거든요. 공동체 안에서의 삶의 향상(collective wellbeing)으로도 시선을 확장시키는 것이 필요한데, 계기가 필요하죠. 저 같은 경우 원래도 이런 생태학적 관점으로 정신건강 및 웰빙을 십여년 넘게 연구해오고 있었지만, 한 번 더 크게 시선의 확장이 일어난 계기가 있었어요. 코로나 팬데믹이 기점이었는데요. 저도 자신의 업에 진심인 사람이라 내가 속한 환경 속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데 많은 시간을 썼었거든요. 미국에 있을 때에도 시속 120km로 달리듯이 살았는데, 한국에 돌아와보니 모두 시속 200km로 달리는 것 같아서 또 그 속에서 적응해나가면서 더 열심히, 더 애쓰면서 살아왔던 것 같아요.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 당시에 폐 쪽에 문제가 생겨서 숨 쉬는 데에도 어려움이 생기고 그 외에도 이런저런 신체적인 문제를 겪게 되었는데요, 꽤나 심각한 상태까지 갔었어서 서울을 떠나 태국 치앙마이에서 한동안 지낸 적이 있어요. 많은 것들을 멈춰야만 했죠. 그런데 멈춤을 통해서 사유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장 : 그 멈춤을 통한 사유의 시간이 무엇을 알려주었나요? 이 : 제 몸이 아팠고, 반강제로 쉼을 하는 이 시간을 통해서 오히려 제가 지향해야 할 바가 뚜렷해졌던 것 같아요. 치앙마이에서 지내는 동안 깨끗한 자연, 좋은 공기 같은 '환경'도 회복에 큰 도움이 되었겠지만 건강한 커뮤니티라는 '환경'을 통해서 서로가 서로를 돕고 지지하는 경험을 충분히 했고, 그러다 생각을 한 거죠. '한국 사회에도 이런 건강한 커뮤니티가 더욱 많아져야겠구나.' 그 이후 건강을 회복하고 돌아와서 다시 일을 시작했을 때, 내가 무엇을 할지 어떻게 할지 뚜렷해지더라고요. 장 : 그러고 보니, 교수님을 처음 뵈면서 의외라고 느꼈던 것 중에 하나가 링커(linker; 연결자) 성향이 강하다는 거였어요. 기존에 선입견이랄까. 학자들은 대부분 자신만의 영역에(그것이 학문적이든, 실제로 물리적인 연구실이든) 머물러서 하나를 파고드는 분들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마치 활동가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거든요. 이 : 원래도 그런 성향이 약간 있었지만, 목적이 뚜렷해지고 나니 더욱 그렇게 되더라고요. 왜냐면 나는 사람들이 마음 건강히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러려면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나 문화가 건강하게 바뀌어야 하고, 그런데 환경이나 문화를 바꾼다는 건 혼자 혹은 특정한 하나의 전공학문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거든요. 환경이라는 것 자체가 다자 간에 공감하고 연대하지 않으면 바꿀 수 없는 것이니까요. 그런 의미로 2021년도에 건국대에 특수 융합연구소인 '미래의일연구소'를 만들게 되었는데요. 슬로건이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 함께 만든다'거든요. 그러니까 시간을 따로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각자 위치에서 우리가 하는 일들이 연결되고 공명하면서 자연히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함께 그려보고 상상하고 함께 만드는 거죠. 그래서 의학, 컴퓨터공학, 뇌신경 과학, 통계학, 심리학, 교육학, 경영학 각 분야의 교수님들을 모셔서 융합연구소로 만들었어요. 누구든 함께 할 수 있는 대신에 모집 기준은 딱 하나였어요. 장 : 뭔가요? 이 : 유쾌한 사람일 것! (웃음) 연구소에서는 연구 이외에도 '골때교'라는 활동을 함께하고 있는데요, '골 때리는 교수'들의 모임이라고, '골때녀'의 교수 버전이랄까요. 우리가 책상에서 서로 학문적인 이야기만 나눌 것이 아니라 미래의 일은 체력이 가장 중요하다! 운동하고 뛰면서 체력도 키우고 서로 일 이야기 말고도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축구를 같이 하고 있어요. 한 달에 두 번 월요일 저녁에 하는데, 한번 참여해 보시겠어요? 장 : 저는 교수가 아닌데도 참여 가능 한건가요? 이 : 그럼요. 학교 밖과도 연결은 항상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거든요. 누구나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웃음). 작년에는 가천대 학생들이 와서 같이 경기하기도 했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쓰는 연구 논문은 사실 시민들 입장에서 접근성이 낮은 자료잖아요. 요즈음은 책도 점점 읽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논문을 직접 찾아서 읽는다는 건 쉽지 않을 수밖에 없죠. 그렇다면 어떻게 세상과 연결될 수 있을까, 우리가 원하는 삶의 환경을 다양한 분들과 공동 창작(co-creating)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그건 울타리를 넘는 일이더라고요. 학자에게 있어서 연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이 문제에 대해서 함께 논의해 봅시다'라고 장을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어요. 그래서 작년부터 오픈 클래스를 열고 있는데요. 장 : 어떤 클래스들이 있었나요? 이 : '개인과 조직을 돌보는 일의 환경'을 만들기 위한 번아웃과 정신건강 워크샵, '나의 다양성과 타인의 다양성을 수용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중요한 미래 역량중 하나인 문화 지능(Cultural Intelligence; CQ) 키우기 워크샵 등등 우리 사회에 지금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들을 골라서 정말 모시기 힘든 국내외 석학을 모셔와서 함께 강의도 듣고 문답 식 대화로 이야기를 듣는데요, 그 이야기를 우리 연구자들끼리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관심 있는 시민 누구라도 접근 가능하게 열어둔 거예요. 장 : 그런 공론장을 만들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고 그러다 보면 다양한 관점을 나눌 수 있을 테니 앞서 말씀하신 대로 '각자가 각자의 일을 통해서 우리가 살고 싶은 사회를 만드는' 기초 단계가 될 수 있겠네요. 그런 관점에서 학교의 문을 여는 것 말고도, 다양한 소셜 미션을 가진 조직들과도 협업을 하시고 있지요? 소셜 벤처, 사회적 기업, 교육기관 등과도 다양한 협업을 하고 있으시다고 들었어요. 이 : 맞아요. 작년에는 인천과 서울에서 관객 참여형 사진전을 열었어요. 저희 미래의일연구소와 인하대 다문화 연구소가 함께 뜻을 모아서 기획하게 되었는데요. 'co-creation : 공존을 향한 포용적인 한국 사회를 위하여'라는 제목이었어요. '한국 사회가 서로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공존하는 사회로 나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라는 주제를 가지고 외국인 유학생들과 한국인 학생들이 직접 사진을 찍고 전시를 할 수 있게 했어요. 그들 각자의 시선에서 공존하는 사회를 위해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들을 카메라에 담아본 거지요. 전시를 보러 온 시민들께서는 공감가는 사진 밑에 포스트잇으로 자신의 생각을 달아주실 수 있게 하고, 다시 공론장을 열어서 다 함께 이 주제에 대해서 대화해 보는 과정을 거쳤는데요. 한국 학생들은 외국인 유학생들의 사진을 보면서 이 친구들의 시각과 경험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구나를 느끼기도 하고, 또 외국인 유학생들은 이런 시간을 통해서 자신의 고립감이나 타국살이의 외로운 경험을 꺼내보면서 서로 연결감을 회복하는 치유의 과정이 되기도 했고, 시민들께는 스쳐 지나갔을법한 주제를 사진을 매개로 화두 삼아 다시한번 생각해보면서 자신의 생각도 나누어 보는 계기가 됐지요. 장 : 사진전으로 선택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사실 저는 학부 전공이 미술이라 전시회 준비에 품이 상당히 많이 든다는 걸 피부로 느끼기 때문에... 특히 예술전공자가 아닌 교수님과 학생들에겐 첫 경험이라 어려운 점도 분명 많으셨을 것 같은데요. 이 : 품이 정말 많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꼭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했어요. 제가 주로 관심을 가지는 주제들이 사회적 환경이나 문화를 보다 더 건강하게 가꾸어 나가기 위한 것이잖아요. 그래서 구성원 서로 간의 공감대 형성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더라고요. 특히나 작년 사진전 주제는 외국인 유학생이라는 어찌 보면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소수자는 소수이기 때문에 그 목소리가 잘 전해지지 않거든요. 그래서 더욱 직관성이 필요했고, 포토 보이스라는 연구방법을 활용하게 됐어요. 장 : 어떤 연구방법인가요? 이 : 말 그대로 사진이 말을 한다는 건데요. 시각적인 이미지가 가진 힘이 굉장히 강력하잖아요. 말로 전달하는 것과는 또 다른 힘이 있고, 또 유학생 당사자들에게도 자신들의 경험을 사진으로 표현해 봄으로서 마음이 치유가 되는 거예요.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모국어가 아닌) 언어 대신에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사진 이미지로 전달하고, 또 내 시선이 트리거가 되어서 사람들과의 이 주제에 대한 논의의 장이 열리고, 그것이 또 필요한 변화를 함께 만들어내는 소셜 활동(Social Action)으로 연결하는 작업이거든요. 그래서 시도해 보게 됐지요. 장 : 결국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에 가장 적합한 방법을 계속 찾아나가시는 거군요? 그 또한 쉽지만은 않은 일, 사실 교수라는 직업에서 안 해도 큰 문제는 없는 일이긴 할 텐데 '품이 드는 일'을 자처해서 하는 이유는 뭘까요? 이 : '개인은 맥락 속에서 존재한다(Self in the context)'는 이야기를 저는 자주 해요. 아까 유해한(toxic) 환경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저는 긍정심리학자의 관점에서 개인과 사회의 건강을 보는 사람이다 보니, 유해한 환경을 없애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해요. 유해한 환경이 없어지면 사람이 안전하게 생존은 할 수 있게 되지요, 하지만 개인의 잠재성이나 가능성이 활짝 꽃피워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생존을 넘어 번영으로(From Surviving to Flourishing)'가 제 연구들 기저의 가치관이자 지향점인데, 꽃이 잘 피어나는 것은 환경이 더욱 비옥해져야 하는 것이잖아요. 저는 결국 유해한 환경을 제거하는 것뿐만 아니라, 더 환경이 비옥해질 수 있도록 연구하고 교육하는 사람인데, 제 논문이나 연구에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을 부여하고 싶어요. 그들에게 손과 발을 달아주고 실제로 작동하고 움직여서 세상이 바뀌는데 기여하는 것까지가 제 역할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페이퍼만 쓰는 것만으로는 세상이 바뀌는 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더라고요, 결국 행동이 필요하다는 걸 느끼게 됐죠. 장 : 그렇다면 분명 교수님의 에너지를 미루어보아 앞서 말한 활동들 외에도 또 다른 손과 발을 달아주고 계실 것 같은데,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이 : 제가 현재 근무하고 있는 건국대학교 안에서는 상담심리학과에 SAP(Scientist–Advocate–Practitioner) 교육모델을 2025년 봄학기부터 우리나라에서 처음 도입했어요. 미국이나 한국에서 상담심리학에서는 오래전부터 SP(Scientist-practitioner) 모델이라고 해서 과학자-상담가 이 두 가지 역량을 키워주는 교육 모델을 중심으로 인재 양성을 했는데요, S-P모델은 60년 넘게 유지되어온 교육 모델이에요.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빠른 기술의 변화와 더불어 환경 문화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다양한 사회문제들이 많아지다 보니, 이 과학자-상담가 모델만으로 훈련받은 심리학자들이 개인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면서 동시에 사람들에게 필요한 '환경의 변화'를 만들어나가도록 돕는데 한계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기존의 모델에 한가지 더 추가를 하게 되었는데요. 사회 옹호자(advocate)예요. 장 : 사회 옹호자요? 상당히 낯선 개념인데요. 이 : 사회 옹호자란 사회 및 환경 변화를 위해 목소리를 함께 내고 액션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쉽게 생각하면 활동가에 가까운 심리학자예요. 다양한 사회 구성원 개인의 정신 건강을 위해 건강한 사회 변화를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하고, 참여하고, 연대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과학자-옹호자-상담가 교육과정을 한국 사회에 맞게 새롭게 만들고 도입한 거죠. 그래서 학생들에게도 아웃리치(밖으로 나가서 직접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보고 사회적으로 필요한 목소리를 함께 내주거나 도움을 주는 것) 활동을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어요. 저 역시도 계속 이런 연결의 활동들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직접 함께 조금씩 만들어갈 수 있는 경험과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고요.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네요. (웃음) 경제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앞서 시각이 가진 힘에 대해 이야기했듯이 사람들은 구체적인 수치를 통해서 설득할 때 가장 직관적이기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단순히 '좋은 세상 함께 만들어요'가 아니라, 사람들이 인간다움을 누리고 나눌 수 있는 더 나은 환경을 만들었을 때 그것으로 우리 사회가 얻는 경제적 이익이 얼마인지 구체적으로 산출하고 설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연구년에 경제학을 공부하러 대학원에 지원을 해보려... 장: 잠깐, 잠깐만요 교수님, 교수님이 다른 학교 대학원생으로 입학을 하신다고요? 이 : 아, 동료 교수님들이 말리셔서 그건 그만뒀어요.(웃음) 어쨌든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게 단순히 '좋은 게 좋은 거'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실질적으로 이로운 일'임을 가시적으로 산출해 내는 거, 중요하지만 보이지 않는 가치들을 눈에 보이는 가치로 연결시켜서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게 하는 거, 그게 올해의 목표예요. 장 : 마지막으로 공통 질문 드릴게요. 요즘 이항심 교수가 가장 마음이 쓰이는 존재가 있다면, 그리고 그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이 : 본연의 자기다움과 잠재력을 어떤 환경적 요인 혹은 외부적인 제약으로 펼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요. 직장인이든 학생이든 노인이든 장애인이든 무엇인가에 막혀 '본연의 나'의 모습으로 살고 있지 못하다는 답답함을 느끼시는 분들에게 마음이 많이 쓰이는데요. 그분들에게는 셀프 지지자 혹은 셀프 옹호자(Self-advocate)라는 개념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우리는 '누군가 나를 믿어주고 이 답답한 상황에서 꺼내주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고 기다리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내가 스스로 나를 믿어주고 내가 나에게 행동을 취할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할 수도 있거든요. 그리고 외부에 필요한 도움이나 지원을 요청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약자라서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나에게 힘이 있기 때문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도움을 요청하고 목소리를 내어야 주변에 같은 경험을 하시는 분들과 지지자분들이 같이 모여서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가 이는 시작점이 될 수 있고요. 여러분 스스로 내 안에 있는 자신의 힘을 잘 알아차려주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보시면 "본연의 나"를 여러분의 삶 속에서 최대한 경험하시면서 살아갈 수 있을거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바쁜 현대인들의 일상 속에서 자신을 돌보는 잠깐의 '틈'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마음을 돌보는 일상의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합니다. 성인 4만 4천 명을 상담했던 장재열 상담가가 자신의 삶에서 소진을 겪었던 전문가를 만나 일상 속 멈춤과 쉼의 비결에 대해 묻습니다. 인터뷰어 : 장재열 (상담가 겸 작가, 월간 마음건강 편집장) 인터뷰이 : 최설민 (<놀면서 배우는 심리학> 유튜브 크리에이터) 오늘의 인터뷰 주인공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우리나라에서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를 가장 많이 만나본 청년"이라고 하고 싶네요. 심리학의 대중화를 목표로 달려온 85만 유튜버, <놀면서 배우는 심리학(놀심)>의 최설민 님입니다. 전문가 유튜버가 자기 지식을 나누는 형태로 진행되는 대부분의 심리학 유튜브와 달리, 놀심은 인터뷰 채널이라는 특징이 있는데요. '평범한 사람'의 시선에서 전문가를 초대해 묻고 경청하는 그의 모습이 우리들과 퍽 닮아서일까요? 놀심은 국내 심리학 관련 채널 중 가장 많은 분께 가장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채널입니다. 그런 그를 이 자리에 모신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전문가를 만났으니 마음 돌봄에 대한 인사이트라면 거의 통달한 수준 아닐까?"라는 생각이었지요. 그럴 만도 하지 않나요? 700개가 넘는 심리학 인터뷰를 진행하며 최근 가장 핫한 인지심리학자 김경일 교수부터 유퀴즈의 정신과의사로 유명한 김지용 전문의, 아침마당으로 기성세대에게 더욱 익숙한 윤대현, 김병후 정신의학 전문의까지 국내의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을 모두 만나본 그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인터뷰를 진행하면 할수록 예상과는 다른, 그러나 그래서 더 좋은 모습을 발견한 시간이었습니다. 심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얼굴은 봤을 사람,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거의 들어본 적 없는 사람, 최설민 님을 만나봤습니다. 장재열(이하 장) : 안녕하세요,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최설민(이하 최) : 안녕하세요, 놀면서 배우는 심리학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최설민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장 : 어떠세요? "우리나라에서 전문가를 가장 많이 만나본 청년" 호칭 마음에 드세요? 최 : 감사합니다. 노코멘트 하겠습니다.(웃음) 인터뷰 콘텐츠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네요. 장 : 그러고 보니 심리학 분야 채널들은 인터뷰 콘텐츠가 흔치 않았잖아요. 대부분 전문가 선생님들께서 직접 나와서 자기 채널을 하시고 그런 경우가 많으니까요. 이런 시도를 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최 : 제 성향인 것 같아요. 처음에는 저도 비슷하게 혼자 나와서 심리학 지식을 설명하는 형태로 해봤는데, 어느 순간 한계가 느껴지는 거예요. 성장의 한계도 느껴지고 제 개인적인 한계도 느껴지고요. 저는 출연자보다는 기획자에 가까운 성향이라 판을 만들고, 이 일을 왜 해야 하는지 방향을 세우고 그런 부분에 흥미가 있는데요. 그런 제가 출연자가 되어서 혼자 화면에 내내 나오는 게 좀 힘든 부분도 있었어요. 어쨌든 그렇게 하면서 약 20만 구독자 정도까지는 성장을 했었는데, 제가 스스로 힘들기도 하고 성장 추이에도 정체가 오고 그랬어요. 장 : 그때 인터뷰 콘텐츠를 시도해 본 거군요? 최 : 네, 그런데 저는 늘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아요. '나는 서포터다.' 라고요. 저는 이 채널을 하기 전부터도 늘 상대방이 주인공인 채로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경청하는 역할이 좋고 저 스스로가 그런 역할에 더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저한테 맞는 옷을 입기 시작하면서 여러분들이 아시는 그 '놀심'의 형태가 갖춰지게 된 거죠. 장 : 20만 구독자도 사실 굉장한 거긴 한데 (웃음), 어쨌든 자기 자신의 성향을 녹여내기 시작하면서 더 성장을 해나갈 수 있었다는 거네요. 그런데 이 유튜브 채널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뭐예요? 상당히 대형 유튜버이신 것 치고는 인터뷰를 많이 안 하셔서 그 히스토리를 접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최 : 안 한 게 아니고, 섭외가 많이 안 온 거긴 합니다. (웃음) 원래부터 심리학에는 관심이 좀 있었어요. 그런데 처음부터 심리학과를 간 건 아니었고, 대학 입시에 실패해서 모든 대학에 떨어졌거든요. 그래서 학점은행제를 거쳐서 영어영문학과에 편입해서 다니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저는 수학을 아주 싫어해서 재수는 자신이 없고, 그런데 편입은 영어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길래 그 길로 간 거죠. 그런데 거기서 한 번 더 편입을 해서 심리학과를 가게 된 거예요. 장 : 아니, 그 어렵다는 편입을 두 번이나. 아니 처음부터 심리학과를 가지 왜 두 번이나 시도를 했나요? 최 : 심리학에 관심은 많았지만, 실제로 제가 그 공부를 하고 그 진로를 택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군 입대 이후였어요. 군 생활 내내 후임들이나 동기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시간이 상당히 많았고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듣는 걸 진로로 삼아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되어서 전역 후 바로 심리학과 편입을 준비했지요. 단 2명 뽑는 데에 60명이 지원을 한 상태였고,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이 편입에 실패할 경우에는 영어영문학과를 1학년부터 다시 다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래도 일단 눈 딱 감고 지원했지요. 장 : 오히려 배수의 진을 친 거군요? 최 : 네 맞아요. 저는 배수의 진을 치면 늘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요. 선택지가 그것뿐이잖아요. 대학 졸업 후에도 취업을 아예 준비하지 않고 맨땅에 헤딩하는 마음으로 바로 제 일을 시작했어요. '심리학의 대중화'를 목표로 오프라인 커뮤니티를 만들었지요. 장 : 요즈음 대세인 '트레바리'나 '넷플연가'같은 커뮤니티형 모임 같은 거네요? 최 : 네 맞아요. 사람들이 꼭 힘들 때 괴로울 때 상담으로 심리학을 접하는 게 아니라 그냥 편안하게 모여서 놀면서도 심리학을 배우고 자기 삶에 적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심리학을 기반으로 한 게임을 만들어서 같이 진행하기도 하고, 워크숍도 하면서 2년을 보냈지요. 장 : 아, 놀면서 배우는 심리학이라는 채널명이 거기서 나온 거군요? 최 : 네 맞아요. 사람들이 공부하듯이 배우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고요. 그런데 2년 정도 오프라인 커뮤니티를 하고 나서 대차게 망한 거예요. 정부 지원을 받아서 심리학 기반의 게임도 만들고 매주 모임을 열어서 50~60명의 사람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하고 그 시간들이 참 의미 있었는데, 사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어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긴 했지만, 확장의 한계가 가장 컸지요. 그때 생각한 게 뭐였냐면 '와, 나와 동료들이 2년 동안 정말 온 힘을 다했는데, 아무도 놀심을 모르네?' 였어요. 오프라인의 한계를 느낀 거죠. 그래서 한계가 없는 영역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일용직을 시작해서 돈을 모으고, 모은 돈으로 다시 올인을 해서 유튜브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장 : 이번에도 배수의 진을 친 거군요. 저만 그러려나요? 독자분들께서도 비슷한 생각 하실 거 같은데 '와, 설민 님은 기본적으로 배짱이 좋은 사람이구나.'라는 느낌이 들거든요 최 : 아니에요. 저도 불안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불안하시면 시도를 안 하거나, 플랜 B, C를 세우시는 경우도 있지만 저는 선택지가 오히려 이것뿐일 때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장 : 이럴 때 저는 사람들이 참 다 다르다고 느껴요. 저의 경우는 반대로 선택지가 여러 개일 때 안정감을 느끼고 도전을 할 수 있거든요. '이거 실패해도 저쪽으로 가면 되니까 괜찮아'라는 마음이 들어야 도전을 할 수 있더라고요. 최 : 저도 그런 면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데요. 유튜브를 시작하기 전에 일용직을 했다고 말씀을 드렸잖아요. 처음엔 물론 익숙지 않았지만 몇 달 해보니까 할만한 거예요. 생각보다는 안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또 실패하면 다시 이 일을 해도 괜찮겠다. 또 모아서 시도해 보면 되겠다. 그런 생각은 있었죠. 장 : 그런데 다행히 지금까지는 실패하지 않고 쭉 잘 걸어왔어요.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최 : 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 그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어서 앞서 말했듯이 저는 서포터를 할 때 더 좋은 사람이고, 무언가를 선택할 때는 배수진을 쳐야 오히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직장 생활보다는 무언가 제 것을 할 때 마음이 편안한 사람이고, 또 저는 긴 호흡의 글보다 짧은 글을 잘 쓰는 편이에요. 함축적으로 어떻게 써야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겠다. 조회수가 잘 나오겠다. 그런 감각을 조금 가지고 있달까요? 그런 부분들이 잘 맞아떨어진 게 아닐까 싶어요. 장 : 말씀 듣고 보니, 저는 반대로 짧은 글에 굉장히 약해서 늘 책 제목이나 슬로건, 이런 인터뷰 제목 짓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네요. 확실히 설민 님은 자기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지만, 자신만의 기준도 확고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어디서 받았냐면, '놀심 채널의 인터뷰 콘텐츠는 돈을 안 받는다'라는 거였어요. 굉장히 많은 전문가들이 유튜브에 출연하시고, 또 그중 절반 이상이 본인들의 저서를 언급하시잖아요. 그래서 당연히 출판사에서 돈을 받고 저자분이 출연하시는 책 광고 콘텐츠겠구나 생각했는데 아니라면서요? 최 : 네 그런 형태로 돈을 벌 계획은 앞으로도 없습니다. 장 : 아니 85만 구독자라면, 콘텐츠 한편에 몇백만 원에서 몇천만 원까지 광고비를 벌 수 있다고 들었는데 그걸 안 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최 : 저는 '상생'이라는 개념을 늘 생각하는데요. 놀심에 나오는 전문가분들은 제 채널에서 좋은 말씀을 해 주시고, 또 저는 하나의 플랫폼이 되어서 그분들의 좋은 책을 소개할 수 있고 그런 부분들이 다 서로 상생이니까요. 저는 늘 마음속에 오프라인으로 다시 사람들과 만나고 교감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는데요, 얼마 전부터 독서 모임을 작게 시작했어요. 그런데 제가 만약 돈을 받으면서 책을 홍보해 드리고 있었던 거라면, 제가 선정하는 책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수도 있잖아요. 저는 늘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연결의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특히나 심리학이 주제라면 자기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더욱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마음이 중요하잖아요. 그 가치를 깨지 않으려면 계속 유튜브는 지금처럼 해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요. 돈을 받지 않더라도 많은 전문가 선생님을 인터뷰하면서 배우는 것만으로도 저한테는 큰 소득이고요. 장 : 그러고 보면 정말 많은 전문가들이 출연하셨고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좋은 말씀들을 들었을 텐데, 이분들을 만나면서 설민 님이 얻은 깨달음이라던가 인사이트가 있나요? 최 : 제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고 중요시하는지를 조금 더 명확하게 알게 된 것 같아요. 모든 전문가 선생님께서 다 귀한 말씀을 해주시지만, 제 개인적으로 더 마음이 가는 이야기나 주제가 있거든요. 그런 것들을 살펴보다 보면 저에 대해 더 알 수 있는데 확실히 저는 연결과 상생이라는 가치를 중요시하는 사람이구나. 함께, WITH 같은 개념들을 늘 생각하는 사람이란 것을 깨닫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서 오프라인에서 사람들이 만나고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을 다시 도전해 보기로 했고요. 장 : 이번에도 유튜브 활동으로 버신 돈을 올인해서 배수진 치셨겠네요? (웃음) 최 : 네 맞아요. 공간을 만들었어요. 하지만 예전처럼 커뮤니티나 모임만을 위한 공간은 아니고요. 이제는 전문가 선생님들도 많이 뵙고 알게 되었고, 저 자신도 조금 더 심리학을 바라보는 시야가 예전보다는 넓어졌으니, 정식으로 심리상담센터를 만들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그런데 기획 단계에서 유튜브가 저다움을 담으면서부터 성장할 수 있었듯이, 공간도 저의 가치관을 담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고민을 많이 했지요. 장 : 상생, 함께 이런 것들이겠군요.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구현했나요? 최 : 공간 디자인이요. 그리 넓지 않은 평수이지만 최대한 그 안에서 구조를 바꾸고 바꾸면서 사람끼리 서로 마주칠 수 있는 공간, 함께 둘러앉을 수 있는 공간을 최대한으로 확보했어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심리상담센터라고 생각하면 소파가 두 개 놓여 있고 1:1로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작은 공간을 생각하잖아요. 그리고 상담받으러 온 사람끼리는 교류가 없이 조용히 자기 순서 기다리다가 상담받고 돌아가고요. 그런데 저는 이 공간에 들어온 모든 사람은 서로 '안전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공감하고 교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상담이 필요한 사람들이라면 상담만이 아니라 누군가와 연결되는 경험, 만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독서 모임 같이 하나의 공간 안에서 사람들이 특정한 매개체를 가지고 부담 없이 어우러질 수 있는 경험들을 만들어가려고 하는 거예요. 장 : 설민 님에게 유튜브라는 도전은 결국 나를 더 잘 알게 만들고, 그를 통해서 오히려 처음 시작했던 그 도전으로 돌아가게 하는 초심의 재발견이 되었군요. 그렇다면 앞으로도 유튜브를 통해서든 상담을 통해서든 또 커뮤니티를 통해서든 가장 만나고 싶은, 내가 가장 마음이 쓰이는 존재가 있다면 어떤 분들인가요? 최 : 늘 저는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청소년에게 마음이 많이 쓰이더라고요. 장 : 그분들에게 지금 이 순간 한마디를 전하신다면? 최 : 어떤 고민 속에 있건,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장 : 마지막 공식 질문입니다. 인간 최설민은 남은 인생을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싶나요? 최 : 형태가 어떻게 달라지든 간에, 남은 인생도 인간에 대해서 공부하고 그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존재로 꾸준히 살아가고 싶네요.
바쁜 현대인들의 일상 속에서 자신을 돌보는 잠깐의 '틈'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마음을 돌보는 일상의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합니다. 성인 4만 4천 명을 상담했던 장재열 상담가가 자신의 삶에서 소진을 겪었던 전문가를 만나 일상 속 멈춤과 쉼의 비결에 대해 묻습니다. 인터뷰어 : 장재열 (상담가 겸 작가, 월간 마음건강 편집장) 인터뷰이 : 나희경 (보사노바 음악가) 선구자라는 단어의 뜻을 정확히 아시나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사람? 자신만의 길을 가는 사람? 왠지 이런 느낌일 것 같지 않으세요? 그런데 백과사전을 보면 선구자라는 단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말을 탄 행렬의 맨 앞장에 선 사람. 2. 어떤 일이나 사상에 있어 그 시대의 다른 사람보다 앞선 사람. 생각보다 꽤 상대적인 개념으로 서술되어 있지요? 다른 사람보다 앞서간다는 말은 결국 다른 사람의 속도와 비교를 해서 나오는 결과니까요. 하지만 막상 실제로 한 분야의 선구자를 만나보면, 누군가보다 앞서 있다는 생각도, 앞서나가고 싶다는 욕망도 전혀 없는 분들이 대다수입니다.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남들보다 앞서고 싶은 욕망이 없는데 가장 앞서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게 말이죠. 오늘 만나볼 인터뷰 주인공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보다 앞선 존재가 되기를 바란 적 없이, 그저 내가 가장 나다울 수 있는 환경을 찾아 떠난 용감한 이십대. 그리고 시간이 흘러 자연스레 한 분야의 선구자라 불리게 된 그녀, 보사노바 아티스트 나희경 님을 만나봤습니다. 장재열(이하 장) : 안녕하세요, 희경님.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나희경(이하 나) : 안녕하세요. 저는 보사노바라는 세계에 빠져 삶을 유랑하고 있는 음악가 나희경입니다. 장 : 삶을 유랑하는 음악가, 너무 좋은데요? 그런데 제가 희경 님에 대한 수식어 중에 가장 놀랐던 것은 '대한민국 보사노바의 선구자적 예술가'라는 말이었어요. 뭔가 선구자라고 하면 지긋한 어른 예술가가 떠오르는데, 아직 젊은 나이시잖아요. 이 수식어, 희경 님 본인은 어떻게 느끼셨어요? 나 : 일단 보사노바는 국내에 하는 사람이 많이 없어서. (웃음) 한국 음악계에서 보사노바만을 본격적으로 하는 예술가가 거의 없긴 했어요. 다만 보사노바를 비롯해 라틴 계열의 소스들을 활용한 노래들은 예전부터 가요계에 꾸준히 있었죠. 예를 들어 윤상 선배님의 <이사>, 김현철 선배님의 <춘천 가는 기차>, 유재하 선배님의 <우울한 편지> 같은 곡들이죠. 그런데 저 같은 경우는 브라질 현지로 직접 건너가서 1950년대부터 활동하시던 보사노바 1세대 선생님들께 사사하고 교류를 하면서 곡을 만들어간 경우이다 보니 그런 수식어를 붙여주신 게 아닌가 싶어요. 장 : 선례가 없었던 거네요. 브라질로 그야말로 혈혈단신 넘어가신 거라고 들었어요. 심지어 처음부터 음악 전공자도 아니셨다고, 심리학을 전공하셨다고 들었거든요. 그 용감함의 원천은 어디에 있을까요? 나 : 원천이라고 하면... 눌려왔던 열망이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강한 열망이라고 해야 할까요. 사실 제가 어릴 때부터 음악 자체는 계속 만들어왔거든요. 초등학생 때부터 미디라는 툴을 통해서 음악을 만들었으니까 굉장히 오래전에 시작을 한 거죠. 제 초등학교 졸업앨범에 보면 장래 희망이 컴뮤지션이라고 적혀있어요. 그때는 잠깐 그런 단어가 유행했었어요. 청소년기에도 밴드를 만들어서 활동했었는데요. 정확히는 퓨전 오케스트라를 만들었어요. 제가 그 학교 1회 졸업생이었거든요. 모든 게 처음이라 다양한 시도를 학교에서 지원해 줬지요. 밴드를 만들고 싶었는데 사실 중1 때 베이스기타, 전자기타를 잘 치는 아이들이 흔치는 않으니까 초등학교 때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배운 아이들을 모으고, 저는 원래 기타를 치고 있었기 때문에 기타를 맡고 그렇게 퓨전이 된 거예요. 사실 음악을 만들고 공부하는 건 부모님께서도 지원을 많이 해주셨어요. 아침마다 음악을 들으며 아침 식사를 하는 분위기였고, 어머니도 피아니스트를 꿈꾸셨으니까요. 그런데 현실적인 이유로 전공까지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반대하셨어요. 제가 가고자 하는 분야는 실용음악 전공이었는데 청소년기에 저의 학업 성적은 꽤 상위권이었거든요. 고등학교 때는 전교 부회장도 하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부모님께서는 공부로 승부를 봐서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좋은 학교를 진학하기를 바라셨어요. 그런데 저는 그러기에는 너무 확고한 자신의 취향과 관점이 있었던 아이였던 거죠. 어릴 때부터 이미 상당히 마니아 성향이 강했거든요. 일례로 청소년기에는 편집 음악 테이프가 유행했었는데요. 맥스라고 해외 팝 편집 테이프를 팔았어요. 그러면 저는 그 곡 중에서도 라틴 계열의 곡들이 그렇게 좋았어요. 다른 친구들이 브리트니 스피어스, 아니면 H.O.T.나 S.E.S. 포스터를 방에 붙여놓을 때 저는 산타나의 <마리아 마리아>라는 곡에 흠뻑 빠져서 (웃음) 제 방안에는 산타나라든가 에릭 클랩튼의 포스터가 붙어있고 그랬지요. 장 : 그 정도의 열망이 있었다면, 심리학과를 진학한 것은 특별한 이유는 없었겠네요? 나 : 아니에요. 저는 원하지 않는 걸 억지로 할 수 있는 타입은 못 돼요. 어떤 전공을 음악이랑 어떻게 같이 하면 시너지를 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 후보로 나온 게 심리학이었는데요. 상담 심리가 아니고 지각인지심리학 분야였어요. 쉽게 말해 음악을 듣는 사람들에게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죠. 저는 실제로도 그게 너무 궁금했거든요. 음악을 들으면서 사람들의 감정이나 마음은 어떻게 변할까, 그걸 알면 더 음악을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래서 고등학생 때 인터넷 검색을 해보다가 우연히 한국음악지각인지학회라는 학회를 발견한 거예요. 그런데 당시 거기 회장님이 김경일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님이었거든요. 그래서 이거다! 하고 아주대 심리학과에 입학했지요. 입학하자마자 오리엔테이션 때 손들고 그거 하러 왔다고 말했어요. 장 : 우리가 아는 '그 김경일' 교수님 말씀이죠? 나 : 네. '그 김경일' 교수님요. 이후로 교수님 따라다니면서 학회 OT도 같이 가고 세미나도 듣고, 그렇게 지각 인지심리학에 푹 빠졌지요. 다만 어릴 때라서 학회에 회장이 선출직으로 2년에 한 번씩 바뀐다는 걸 몰랐어요. (웃음) 장 : 정말 앞서 말씀하신 열망이라는 단어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에피소드들이 많은 것 같은데요. 신입생 때 교수님께 손 번쩍 들고 그런 이야기 하기도 쉽지 않고, 중학교 신입생 때 퓨전 오케스트라를 만든 것도 그렇고... 말씀을 듣다 보니 브라질로 건너가신 것도 두려움 없이 훌쩍 떠나셨을 것만 같기도 한데요. 나 : 오, 또 그렇진 않아요. 많은 예술가가 그런 경향이 있겠지만 저 역시 감각이 예민하고 민감한 편이에요. 자연히 불안한 감정도 자주 느끼면서 살아가거든요. 감정이 다이내믹해서 고저가 있었고 고민도 있었어요. 그런데도 브라질행을 결정하면서 제일 먼저 떠올렸던 것은 뭐랄까요. 사랑이라고 할까요, 순수한 열망 같은 사랑. 그 모든 불안과 걱정을 압도하는 열망이 정말 컸지요. 대학을 졸업하고 부모님께서 늘 말씀하시던 '사회인'이 되어 내가 내 삶의 결정권을 가지게 된 순간, 오랫동안 반대되어 온 '음악'에 대한 포텐이 빵 터졌다고 할까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나는 한번 해봐야겠다. 아무도 안 도와줘? 그럼 내가 혼자 할 거야. 이런 마음이 생겼지요. 하고 싶은 게 있었지만, 현실적인 것들로 인해 아주 눌려왔기 때문에, 그 오래 억눌린 열망을 활용해서 불안을 압도할 수 있었다고 할까요? 장 : 말씀 듣다 보니 그런 말이 떠오르네요. '압력 없이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고요.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반대라는 압력을 경험하셔서 용수철처럼 튕겨 나가듯 브라질행을 용감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결정할 수 있었을 수도 있겠네요. 그게 몇 살 때였죠? 나 : 만 스물두 살이었어요. 2010년 말 데뷔 앨범을 보싸다방이라는 명의로 냈었고요. 앨범을 내자마자 브라질로 바로 갔어요. 사실 앨범을 내면 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저는 근데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음악 활동에 대한 한 문단의 마침표를 찍는 앨범이라고 느껴졌어요. '아, 한 문단이 끝났구나.' 그래서 이 앨범을 녹음하면서 이 앨범을 가지고 어떻게 활동할지 그런 생각은 없었고, 오히려 녹음실에서 아주 좋은 음질로 녹음하다 보니 더욱 브라질에 얼른 가야겠다는 생각이 커지더라고요. 음악감독님께 브라질 음악 샘플들을 들려드리며 녹음 방향을 잡아나가는데, 그 좋은 음질과 환경에서 브라질 음악을 들을수록 '아, 이 디테일은 정말 현장에 가서 배우고 느끼지 않으면 내 안에 녹여낼 수가 없겠구나. 가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겠다' 싶었죠. 이 생각이 든 것도 심리학을 전공한 덕이 정말 컸다고 생각한 게, 인간이 혼자 힘으로 변화하는 건 가장 힘든 일이라는 걸 늘 배우거든요. 하지만 환경을 변화하게 해준다면 정말 많은 변화가 일어나요. 그래서 저 자신도 이 장르의 음악이 만들어지는 환경에 가야겠다. 뭘 배우고 공부하고 이런 걸 다 떠나서 그냥 내가 그 환경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죠. 장 : 그럼 처음부터 음악 공부를 한 것이 아니네요? 나 : 네. 그냥 처음엔 가서 반년 머무르면서 하숙집을 잡고, 영어도 포르투갈어도 할 줄 몰랐지만 일단 그 환경에서 지내봤어요. 관광을 가고 이런 건 거의 안 하고요. 하숙집 아줌마랑 장 보러 다니고, 공연 보러 가고 그랬죠. 그리고 참 좋았던 게 하숙집 아저씨가 전통악기 연주자이셨고 아줌마는 그림 그리는 분이었어요. 그래서 주말마다 예술가들의 파티 같은 게 열려서 자연히 교류하게 됐죠. 그러다 보니 단순히 음악만 배운 게 아니라 표현과 감정을 배우게 되더라고요. 포옹과 키스같이 접촉으로 애정을 주고받는 경험부터 "사랑한다", "당신 멋지다"라고 더 풍부하게 이야기하게 되고, 행복함이 늘어나고, 또 표현이 풍부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니까 나라는 사람의 매력이 늘어나는 게 느껴지고요. 분명히 보사노바 공부를 하고 다음에 안 갈 수 있었을 텐데 이 감각을 느끼러 가게 되고 또 가고 또 가고 그렇게 14년간 브라질과 한국의 양국을 오가고 있네요. 장 : 처음엔 음악에 매료되어서 떠났지만, 그곳의 정서 자체를 사랑하게 된 거네요. 그런데 제가 일전에 희경 님과 차를 마시는 자리였나요? 그때 언뜻 듣기로는 문화가 상당히 달라서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나 : 아, 맞아요. 그 이야기하시는 거죠? 완전 MBTI P만 있는 나라 같다고 제가 말한 거요. 일례로 브라질에서 투어가 잡혀서 준비하는데, 출국 2주 전에 투어 취소됐다는 이야기가 나왔다가 그래도 일단 가기로 했으니 가야겠다 하고 비행기 탑승하려고 보니까 추가로 공연이 두세 개 더 잡혀있고 뭐 그런 일이 다반사예요. 그래서 브라질에 가면 브라질의 흐름에 몸을 맡기죠. 반대로 한국에 와서 활동하는 기간에는 한국 양식으로 세팅이 자동으로 되어요. 이제는. 처음에는 그 균형을 찾는 게 쉽지 않았거든요. 저는 양국에서 다 활동하니까. 특히나 브라질에서 시간을 보내고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우왕좌왕했어요. 브라질에서 연주하고 직접 사사해 온 사람이 제가 처음이었으니까, 많은 음악계의 선배님들이 같이 연주하자고 연락을 주시고 그랬어요. 너무 감사했지요. 만 스물세 살짜리가 대학 교수님인 음악가 선배님들이랑 연주하게 됐는데, 최소 띠동갑이었거든요. 그런데 사실 브라질에서는 띠동갑을 넘어서 완전 할아버지 음악가와도 그냥 함께 어우러져서 친구처럼 연주했단 말이에요. 근데 한국은 문화가 다르잖아요. 이 교수님들께 실례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같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을까, 내가 실수한 건 없나, 뭐가 맞는 거지? 어느 환경에 맞춰야 하는 걸까? 오래 우왕좌왕했어요. 장 : 그 우왕좌왕의 끝에는 어떤 결론이 있었나요? 나 : 어느 환경에 맞추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결론을 냈지요. 나는 음악가로서 "내가 설정한, 그리고 내가 믿는 방식, 내가 대하는 태도로 해나가면 된다"는 게 결론이었어요. 이십대 초반에는 바뀐 환경에 나를 밀어 넣으면 그 환경의 영향으로 내가 바뀔 거라는 생각을 했다면, 이제는 내가 중심을 잡고 나면 내 신념과 내 관점을 기반으로 주변 환경이 바뀐다는 걸 깨닫게 되었죠. 이 깨달음을 얻기까지 한국에서도 나희경답게, 브라질에서도 나희경답게를 찾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우왕좌왕한 시간이 아주 필요했던 순간이라고 봐요. 장 : 그러고 보니 나다움에서 비롯된 또 한 번의 환경 변화가 있었다면서요? 나 : 맞아요. 대학원을 진학했어요. 이번에도 심리학인데요. 얼마 전 면접하러 갔더니 김경일 교수님이 깜짝 놀라서 네가 왜 여기 있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웃음) 장 : 그러게요. 이제는 보사노바 음악가로 온전히 자리를 잡으셨는데, 아니? 얘가 또 왜 심리학 대학원에 온다는 거지? 하셨을 것 같은데요. 나 : 정확해요. 그런데 고3 때 심리학과를 갔던 게 내 음악 활동을 위해서였다면,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공부를 해보고 싶더라고요. 제가 코로나19 기간 브라질을 한동안 못 가고 한국에 오래 머물렀는데, 그 기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그런데 실용음악은 1대1로 가르치는 경우가 많아서 학생들이 꽤 많이 제게 마음을 털어놓게 되거든요. 예술인, 프리랜서들 같이 사회적 공동체 감을 느끼기 어려운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감이 있잖아요. 아, 내가 심리 상담학을 전공하면 이 아이들을 더 도울 수 있겠다. 나아가서 예술인 전반을 도울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장 : 그렇다면 요즘 가장 마음이 쓰이는 유형의 사람은 막 시작하는 주니어 예술인들일까요? 나 : 그들을 포함해서... 요즘에는 고군분투하는 사람 전반에 마음이 쓰여요. 예전보다 더 불투명해진 이 세상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요. 그런 분들께 늘 "삶의 이 순간에 마음을 쓰고 있는 당신 자체가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소중합니다"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어요. 사실 목표가 있고 골을 생각하다 보면 거기까지 도달하는 중에 고군분투하는 모습의 자신은 좋아해 주기 어려워요.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열망하는 대상은 막상 이루고 나면 "정말 바란 게 이거였나?" 싶을 정도로 환희감이 금세 사라지기도 해요. 저 역시 열망을 향해 첨예하게 살아왔지만, 많은 것을 달성한 뒤 이제 와서 느껴지는 것들은 뒤돌아보았을 때 고군분투해온 그 모든 순간이 아름다운 거였구나. 깨닫게 되었죠. 장 : 희경님이 노력했고 다가갔고, 도달한 뒤 뒤돌아보니까 그 과정이 아름다웠구나. 나 : 맞아요 정확해요. 장 : 그럼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희경님은 남은 생을 어떤 존재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나요? 나 : 나를 잃어버리지 않는 삶. 소중한 것들, 소중한 순간, 소중한 사람을 늘 곁에 두고 사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까요?
바쁜 현대인들의 일상 속에서 자신을 돌보는 잠깐의 '틈'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마음을 돌보는 일상의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합니다. 성인 4만 4천 명을 상담했던 장재열 상담가가 자신의 삶에서 소진을 겪었던 전문가를 만나 일상 속 멈춤과 쉼의 비결에 대해 묻습니다. 인터뷰어 : 장재열 (상담가 겸 작가, 월간 마음건강 편집장) 인터뷰이 : 우혜림 (전 원더걸스 멤버, 번역가) 상담가로 살아온 지 12년째, 예전의 저는 이 직업이 '누군가의 가장 어두운 순간'을 만나는 일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요. 조금 더 세월이 지나고 보니 '누군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변곡점'을 목격하는 직업이기도 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두려움과 기대감을 오롯이 함께 느끼는 일, 울타리 밖으로 걸어가고 싶지만,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누군가의 옆에 잠깐 함께 서 있어 주는 일이라는 것도요. 사실 '울타리' 밖을 꿈꾸면서도 주저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직장생활이 길었던 분들, 단단하고 안정된 '브랜드 있는' 울타리에 있었던 분들이라면 더욱 그렇지요. 그런 분들에게 저는 말로 용기와 희망을 전하는 드리는 대신 과제 하나를 드립니다. 당신의 선택에 "희망의 증거"가 될 만한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수집하라는 과제를 말이지요. 지금까지 살던 모습과 전혀 다른 궤적으로 걸어 나간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공통분모가 있으니, 그걸 스스로 찾아 마음 안에 새겨보라고요. 오늘 소개해 드릴 분 역시 그런 희망의 증거 중에 한 사람이 될 겁니다. 원더걸스 출신의 번역가, 우혜림 님입니다. 장재열(이하 장) : 안녕하세요,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우혜림(이하 우) : 반갑습니다. 번역가 우혜림입니다. (웃음) 장 : 아직 혜림 님이 번역가라는 것이 낯선 분들도 계실 텐데, 어떤 작품들을 해오셨는지도 소개해 주시면 어떨까요. 우 : 제일 처음 작업했던 책은 많이들 아시는 작품 <안네의 일기>고요. <곰돌이 푸, 단순한 행복>의 번역도 맡았습니다. 아직 출간은 되지 않았지만 빈센트 반 고흐의 책도 번역 작업을 했었어요. 가장 최근에는 미국에서 출간되어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윌 구다이라의 책 <놀라운 환대> 한국어판을 맡아서 번역했어요. 장 : <곰돌이 푸> 같은 경우는 굉장히 많은 분께 사랑받았던 책이잖아요? 저도 읽어봤는데, 표지에 적힌 '옮긴이 : 우혜림'이 이 혜림 님이라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됐거든요. 아무래도 아이돌이 가는 전형적인 진로가 아니기 때문에 대중의 머릿속에서 쉽게 매칭을 못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우 : 맞아요. 많은 분들이 늘 궁금해하시는 지점이기도 하고요. 아이돌이 번역가라는 진로 자체를 생각한다는 게 흔한 일이 아니긴 하니까요. 저도 처음에는 원더걸스 이후의 삶을 생각할 때, 연기를 해야 하나, 예능을 해야 하나, 솔로를 해야 하나 많은 고민을 했었는데 다 자신 있게 내 길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더라고요. 그럼 나는 어떤 일을 해야 하지? 나는 뭘 좋아하고 잘하지? 돌이켜 봤거든요. 그런데 활동 기간에 많은 곳에서 저를 불러주셨을 때 늘 '언어'에 대한 기회들을 주셨더라고요. 기사도 늘 '4개 국어 혜림' 이렇게 나오고. (웃음) 활동 당시에는 '내가 가수인데 이런 모습만 주목받는 게 맞나?' 혼란도 들었지만, 그런 생각을 다 내려놓고 내가 '언어'를 좋아하는가?라고 물어봤을 때는 좋아하고 잘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러면 억지로 맞지 않는 것 같은 옷을 입으려 하지 말고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기초부터 다시 쌓아보자고 생각했죠. 장 :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해도, 어찌 보면 원더걸스라는 단단한 브랜드 네임을 활용하기에 어려운 전혀 출판 분야로 간다는 선택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사람들의 인식도 쉽게 바뀌지는 않을 수 있고요. 우 : 그래서 천천히 준비하고 쌓아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활동할 때는 이 그룹이 영원할 것으로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지만, 사실 끝이 있잖아요. 늘 박진영 피디님이 이런 말씀을 해 주셨거든요. 최정상에 올랐을 때 내리막을 준비하지 않고 한순간에 떨어지면 사람이 너무 크게 당황하고 좌절하게 된다. 그런 사람을 정말 많이 봤다. 너희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내려갈 텐데 내려가는 것에도 준비가 필요하다고요. 그래서 저는 늘 그 말씀을 염두에 뒀어요. 원더걸스가 아닌 일반인 우혜림으로 살아가는 순간을 미리 꾸준히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계속하면서 나를 탐색했지요. 장 : 대학교 입학도 그 연장선에 있을까요? 우 : 그렇죠. 공부를 체계적으로 하는 게 가장 우선이라고 생각했어요. '원더걸스 이후에는 언어를 살려서 살아가고 싶다. 그럼 어떤 언어가 좋을까?' 생각해 보니, 저는 한국어와 영어 두 가지를 모두 살리고 싶었고, 그래서 통번역 전공을 선택하는 것에 고민이 없었어요. 다만 공부를 더 하다 보니 저는 천천히 생각을 숙고하고, 또 신중하게 언어를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특징을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동시통역사보다는 번역가의 길로 자연스럽게 접어들게 된 것 같아요. 장 : 통역과는 다른 번역만의 매력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우 : 저는 번역가라는 직업이 삶의 경험이 확장된다는 측면에서 너무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번역 작업이 시작되면 마치 배우가 배역에 빠져들 듯이 완전히 다른 인생으로 빠져들거든요. 그리고 단순히 그 입장에만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작품 안에 담긴 지식과 경험이 온전히 내 것으로 흡수가 되어요. 예를 들어 '안네 프랑크? 유명한 사람이지' 이게 아니라 그 2차 대전의 순간으로 들어가서 유대인의 삶을 생생히 겪게 되고요. 빈센트 반 고흐의 책을 할 때는 또 온전히 그 삶을 경험하는 거죠. 그리고 번역을 하면서 나의 언어적인 능력이 더 발전해야 한다는 걸 계속 직면하거든요. 더 공부해야 하고, 더 성장해야 하는구나라는 자극이 되고요. 장 : 제가 마침 딱 성장에 대한 질문을 하고 싶었는데요. 혜림 님이 본격적으로 번역가가 되시기 전에, 제 주변의 작가님들이 만드시는 여러 워크숍이나 강의에서 일반 참여자로 참석한 모습을 인스타로 저는 이미 많이 봤어요. 그때는 활동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때라 지금보다 더 많이들 주목하고 시선에 쏠릴 때였을 텐데, 아랑곳하지 않고 학습자로서 열심히 경청하시는 모습을 다들 입 모아서 칭찬하시더라고요. 우 : 인생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 중이었으니까요. 배움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내게 필요하다 싶으면 당연히 찾아가는 거였죠. 다른 인생 선배님들은 어떻게 살아오셨는지를 통해서 '나'에게는 어떻게 적용할지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배움이 있었고 감사하죠. 늘 저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는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장 : 이번에 번역한 <놀라운 환대>도 그런 성장의 기회였다고요? 우 : 네, 엄청요. 저 이렇게 삽화가 하나도 없이 글만 있는 책은 처음이에요. 진짜 저한테도 도전이었지요(웃음). 제가 앞에서 쓴 책 보면 곰돌이 푸, 안네 프랑크, 다 몽글몽글하고 삽화가 많이 들어가는 책이거든요. 감성적이고. 그런데 이 책은 세계적인 레스토랑 경영자가 쓴 사람들을 환대하고 감동하게 만드는 여정에 대한 책이거든요. 분류도 경제 경영서예요. 그러니까 저한테는 낯선 단어들도 많았어요. 이 책 제목이 Unreasonable Hospitality잖아요? 일단 Unreasonable이라는 단어가 한국어로 바꾸기가 정말 애매한 단어예요. 그리고 Hospitality 역시 '환대'라는 뜻보다는 '병원'이 더 먼저 떠오를 만한 단어고요. 책 속에 있는 내용들 역시 전문용어가 너무 많아서 저한테는 정말 큰 도전이었어요. 장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맡아야지 생각하게 된 이유는 뭐예요? 우 : 출판 기획자분께서 저를 찾아와서 처음 이 책을 제안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환대를 받아본 사람이 환대에 관한 책을 번역해 주면 분명히 다를 것이다"라고요. 생각해 보니 맞는 말 같았어요. 저는 누구보다 대중의 환대 속에서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기 때문에 팬과 대중께서 보내주신 정성과 사랑 속에서 느낀 감동의 경험이 있잖아요. 그래서 번역을 시작했죠. 그리고 막상 시작하고 보니까, 단지 이 책의 단어들이 다소 낯설었던 것이지 내용들은 제 삶에 너무 분명하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태도'에 대한 인사이트들이더라고요. 경영자가 아니어도, 요식업에 종사하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특히 요즘 같은 시대에는 꼭 필요한 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책에 푹 빠져들게 되었죠. 장 : 아까 말씀하신 대로 번역을 한다는 건 혜림 님에겐 그 세계에 완전히 들어가서 몰입을 하고 돌아오는 여정이라는 건데, 이 놀라운 환대의 세계에 몰입해서 알게 된 것들은 뭔가요? 우 : 이 책은 사실 요식업에 관한 책이에요. 뉴욕의 평범한 레스토랑을 맡아서 운영한 저자가 11년 만에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으로 탈바꿈시킨 이야긴데요. 뉴욕의 톱 50 레스토랑에 처음 진입해서 시상식에 참가한 날, 기쁨이 아니라 50위, 즉 제일 낮은 순위였다는 것에 절치부심해서 더 위로 올라가겠다고 다짐하며 떠올린 단어가 "놀라운 환대"였다고 해요. 고객들이 기대하지 못했던 만큼의 환대로 완전한 최고가 되겠다고 결심을 한 거죠. 장 : 사실 세계 톱 50이면 저라면 스스로에게 칭찬을 해줄 만한 순위라고 생각했는데요. 우 : 그럴 수 있죠. 저자가 이렇게 보편적인 사고방식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사람이기도 하고, 또 저는 요식업의 경험이 없기도 해서 처음엔 이 책의 번역이 상당히 도전으로 다가왔어요. 낯설잖아요. 그런데 점점 작업을 하다 보니까 이 책은 요식업에 관한 책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태도에 대한 책이라는 걸 깨닫게 된 거예요. 그리고 나니까 요식업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내 삶에도 너무 필요한 이야기라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사실 우리 일상 곳곳에서 타인을 기쁘게 하는 환대들이 숨어있거든요. 예를 들어, 제가 라디오 진행자로 있을 때, 한 후배 신인 아이돌이 게스트로 출연을 했는데 음악 나가는 몇 분 사이에 잠깐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더라고요. 그런데 손에 젤리가 들려있는 거예요. 제가 음악 나가기 전에 토크할 때 지나가는 말로 젤리를 제일 좋아한다고 말했거든요. 그걸 기억했다가 근처 편의점에 가서 사 온 거예요. 그 어린 아기가(웃음). 얼마나 예뻐요. 그런 마음이 Unreasonable Hospitality잖아요. 생각지도 못했고, 깜짝 놀라게 만드는 환대의 마음. 저 역시도 그런 태도로 삶을 살아가려고 늘 노력하는데, 아주 디테일한 것까지도 저자가 환대를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걸 보면서 내 삶에 적용해 봐야겠다 하는 지점들이 너무 많았지요. 그리고 실력으로 상위권에 오를 수 있지만, 결국 최고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건 환대의 마음과 태도였다는 건, 환대가 단순히 다정함, 따듯함 같은 감정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성공이나 성취, 성장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역량이라는 걸 다시 느끼게 됐죠. 장 : 공감해요. 그런데 Hospitality라는 게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는 것만큼이나, 누군가에게 응원의 마음을 건네는 것도 해당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혹시 지금 혜림 님이 누군가에게 응원의 마음을 건넬 수 있다면, 가장 마음이 쓰이는 존재들은 누군가요? 우 : 저는 타인의 시선을 너무 걱정하는 사람, 그리고 불안이 높은 사람들요. 저는 장재열 작가님 책을 봤는데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거든요. 장 : 앗, 제 책을 보셨어요? 인터뷰이가 인터뷰어를 사전조사 하시다니, 이런 것도 참 생각지 못한 환대네요! (웃음) 우 : <놀라운 환대> 번역가잖아요(웃음). 작가님 책에서 그런 부분이 공감이 가더라고요. 우울증이 왔을 때 나도 모르게 건널목을 건너다가 정신을 깜빡 놓고 다시 들어보니 빨간불로 바뀌어 있었다고. 차들이 빵빵거리는 도로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고. 저도 그랬거든요. 저는 연습생 시절에 늘 뚱뚱하고 부족하다는 생각에 괴로워했던 것 같아요. 늘 불안했고요. 그러다 어느 날은 편의점에서 음식을 먹으려고 전자레인지에 돌려두고는 정신이 잠깐 나가버렸어요. 연기가 막 나고 전자레인지에 불이 나고, 사장님이 소리를 치며 다가오실 때가 되어서야 아차! 싶었지요. 그때의 저도 작가님만큼이나 마음이 힘든 시기를 겪었던 게 아닐까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참 마음이 힘들었던 때구나 생각해요. 그때의 저 같은 사람들이 가장 마음이 쓰이죠. 장 : 그런 분들에게 어떤 말씀을 전하고 싶으신가요? 우 : 사실 저희 아이에게 늘 말해주는 건데요. 저희 아들도 저 닮아서 겁이 정말 많거든요. 항상 아이가 겁낼 때마다 옆에서 다독이면서 말해줘요. '괜찮아. 생각하는 것만큼 무섭지 않아'라고요. 저 자신에게 되뇌는 말이기도 하고요. 여전히 불안하고 겁이 많은데, 그 불안만큼 대비하고 준비해 왔기 때문에 늘 결과는 나쁘지 않았어요. 그 경험이 쌓이면서 저 자신에게도 말할 수 있게 된 거죠. "괜찮아, 생각하는 것만큼 잘못되지 않아"라고요. 두려워하는 마음이 드는 것을 억누르거나 어떻게 하려고 하지 않아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고요. 다만 그것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내 선택이니까요. 장 : 마지막으로 사람 우혜림은 앞으로 어떤 존재로 계속 살아가고 싶나요? 우 : 저는 크리스천인데요. 성경에 9가지 열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사랑, 자비, 온유, 절제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그 9가지의 열매가 고루 맺힌 나무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그것을 저만이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든 아낌없이, 무한히 나누어줄 수 있는 그런 존재. 장 : 그 또한 놀라운 환대의 마음이네요.
바쁜 현대인들의 일상 속에서 자신을 돌보는 잠깐의 '틈'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마음을 돌보는 일상의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합니다. 성인 4만 4천 명을 상담했던 장재열 상담가가 자신의 삶에서 소진을 겪었던 전문가를 만나 일상 속 멈춤과 쉼의 비결에 대해 묻습니다. 인터뷰어 : 장재열 (상담가 겸 작가, 월간 마음건강 편집장) 인터뷰이 : 김태술 (전 국가대표 농구선수, '빈틈의 위로' 저자)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최고의 순간은 언제였나요? 지금일 수도, 아직 오지 않았을 수도, 어쩌면 지나가 버린 게 아닐지 씁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답변 대신 이렇게 되묻겠지요. "아니, 최고의 순간을 꼽는 기준이 뭔가요?" 여러분 생각은 어떠세요? 가장 큰 성취가 있었던 순간일까요? 아니면 가장 근심·걱정 없었던 시절일까요? 아직 정확하게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오늘의 초대 손님과 함께 이야기 나누어보세요. 대화 속에서 작은 힌트를 발견하게 될 겁니다. 세상의 시선에서 가장 최고의 순간으로 보였던 시기에 가장 어두운 마음의 터널을 지나야 했던 사람, 전 농구 국가대표이자 지금은 방송인으로, 그리고 작가로 삶의 새로운 여정을 떠나고 있는 김태술 님을 만나봤습니다. 장재열 (이하 장) :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김태술 (이하 김) : 안녕하세요. 신인 작가로 데뷔한 김태술입니다. (웃음) 장 : 저는 번아웃을 연구해 온 상담가다 보니 관련 서적을 많이 읽게 되거든요. 그런데 김태술이라는 사람이 그 농구선수 김태술이라는 걸 모르고 책을 접하게 되었는데... 글 잘 쓰시던데요? 아주 솔직하게 자신의 내면에 대해 말씀하시더라고요. 김 : 감사합니다. 사실 선수 시절에 글을 써본 적은 없는데, 은퇴 이후에 블로그를 꾸준히 해 왔는데 재미있더라고요. 모든 게 저한테는 새로운 경험이기도 하고요. 장 : 은퇴 후에도 새로운 경험을 하며 바쁘게 지내시나 봐요. 김 : 아뇨 저는 완벽하게 잘 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 : 완벽하게 잘 쉰다는 것, 어떤 의미죠? 김 : 선수 때는 아무래도 계속 1등을 해야 하고, 이겨야 하고, 상대를 누르지 않으면 내가 제압되었기 때문에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은퇴하고 나서 삶의 목표를 새롭게 설정해야 하잖아요. 그때 생각한 게 나는 한 길을 오래 파 온 건 해보았으니, 은퇴 후에 보편적으로 가는 코스로 직행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해보자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내가 안 해본 경험이 뭐가 있을까 쭉 생각하다 보니까 '무언가를 안 하는 것'도 그 다양한 경험 중에 하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제가 21년에 은퇴를 했으니까, 이제 3년이 되었는데요. 21년부터 세상을 새롭게 경험해 나가고 있어요. 아무것도 안 하기를 포함해서 예능 출연도 해보고, 블로그 글도 써보고, 해설위원도 하면서 조금씩 '사람 김태술'을 알아가게 되고, 행복도가 높아져 가더라고요. 그래서 때로는 저는 제가 이제 3살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3살 아이는 모든 것이 궁금하고 신기하잖아요. 장 : 제가 상담을 하면서 운동선수나 연예인처럼 아주 어릴 때부터 오래 한 길만 걸어온 분들, 또는 은퇴한 중장년분들을 뵈면 무한정 시간이 주어졌을 때 "공포스럽다"라는 분들도 종종 계신단 말이죠. 태술 님은 그런 막막함이 없었나요? 어땠어요? 김 : 저는 오히려 선수 시절에 쉬는 시간이 주어지면 막막했어요. 왜냐하면 저를 포함해서 적지 않은 선수가 쉬는 방법을 모르거든요. 쉬는 시간이 주어지면 오전 운동 끝나고 나가서 한잔하고 다음 날은 푹 퍼져 있다가, 오후에는 다시 연습하러 나가고 그런 패턴이 반복되는 경우도 많아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내가 정말 쉴 수 있는 공간은 어디고, 내가 진짜 편안함을 느끼는 행위는 뭔지 알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인지 저는 어느 순간부터 은퇴 후에 이 일에서 파생되는 경험들이 아니라, 아예 완전히 다른 울타리에 가서 나를 한번 밀어 넣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어요. 장 : 그래서 지금은 어떤 울타리에 자신을 밀어 넣었나요? 김 : 울타리 대신에, 물결에 흐름을 맡겼죠. 무언가를 이루려 하지 않고 1등이 되려 하지 않는 채로 있어 보자. 왜냐하면 인생의 이전 시기까지 계속 성취 지향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래서 작위적으로 무얼 하려고 하지 않고 내 눈앞에 주어지면 그걸 최대한 즐기려고 해요. 글을 써보지 않겠냐는 제안받았을 때도 뜻밖이었지만 주어졌을 때 피하지 않고 즐겁게 하고, 오늘 같은 자리도 오면 즐겁게 그리고 솔직하게 다 이야기를 하자. 꼭 일뿐만 아니라 취미나 여가도 마찬가지고요. 장 : 무언가가 주어지지 않았을 때는요? 김 : 진짜 아무것도 안 해요. 그냥 누워서 시간이 흘러가라. 나는 아무것도 안 할 거야라고 스스로 되뇌는 거죠. 적극적인 쉼을 한다고 할까요? 물론 저도 처음엔 너무 안 됐어요. 불안감이 엄습하니까. 또 스스로가 한심해 보이기도 하고요. 장 : 그런데 이 인터뷰를 보시는 분 다수는 직장을 다니시는 경우가 많을 것이고 직장인의 관점에서는 스포츠 스타의 은퇴가 정년퇴직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단 말이죠. 그러면 독자님들 입장에서 예상되는 질문이 "많이 벌었으니까 가능한 거 아니야? 우리도 저럴 수 있을까? 난 목구멍이 포도청인데"라고 생각하실 수 있다는 생각도 들거든요. 김 : 그런데 저는 그런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고요. 사실 책을 쓰게 된 계기이기도 한데, 많은 분이 제가 최고의 기량이던 시기에 갑자기 기량이 뚝 떨어졌다고 생각하시지만, 그 이면에 굉장히 심한 슬럼프가 있었어요. 누군가는 추락이라고도 표현하죠. 목표지향적인 삶을 살다가 그걸 달성하고, 그런데도 내가 상상하는 그 완전한 '상'과는 다르게 인생이 펼쳐지는 걸 경험하고, 추락을 하고, 그리고 다시 삶을 바라보니까요. '아, 빨리 달리는 것, 1등 하는 게 행복해지는 지름길은 아니구나. 그렇다면 반대로 빨리 달리지 않아도, 1등 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도 있겠다'라는 관점의 변화가 컸어요. 그게 저의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지탱해 주고 있는 거고요. 돈은 사실 어느 정도가 있던 불안한 건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계속 줄어들고 있는 건 마찬가지니까요. 그런데 청소년기에는 개인적인 결핍의 경험들 때문에 물질이 내 삶의 안전망이 되어줄 것으로 생각했고, 그걸 위해 성공이 통과의례라고 생각했는데요. 그건 행복이 아니잖아요? 그 순간의 기쁨인데, 그것을 행복으로 뭉뚱그려 생각하고 달렸더라고요. 지속 가능한 기쁨은 다른 데에도 있더라는 거죠. 장 : 이를테면요? 김 : 그것들을 찾아가기 위해서 다양한 경험을 시작했는데, 기타를 배웠었거든요. 굉장히 순수한 기쁨이잖아요. 그리고 카페에 가서 가만히 앉아서 사람들을 봐요. 저에게는 그것이 매우 큰 행복으로 다가오거든요. 오가는 사람들을 보는 거. 왜냐하면 그전에 바라보던 사람은 관중석에 있는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이 새로운 기쁨의 발견들이 저에게는 신생아가 하나씩 세상을 경험하는 과정처럼 느껴지거든요. 와. 이런 게 있구나. 이런 게 즐겁네. 장 : 그렇다면 이제 만 세 살이 된 김태술이 본 나는 어떤 사람인 것 같아요? 김 : 자존감이 높아져 가는 사람인 것 같아요. 사실 선수 시절엔 "할 수 있어! 나는 잘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고 자신감이 있었지만, 자존감이 높다는 느낌은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사람들의 평가 속에서 나의 기쁨과 슬픔이 결정되었거든요. 그렇지만 이제는 생각지 못한 것들을 하나하나 경험하면서, 어? 되네? 즐겁네? 할 수 있네?를 근거 있게 깨달아가다 보니 내면에서 '아, 나는 잘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근거 있는 자존감이 생겨나더라고요. 그러니까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서도 자기 결정권이 생겨난 느낌이 들죠. 조바심 내지 않고요. 제가 최근에 새로 시작한 또 하나의 취미가 골프인데, 제가 선수 출신이잖아요. 어느새 저도 모르게 잘해야 된다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쪼다가도 멈출 수 있게 됐어요. 스스로에게 말하는 거죠. "야, 너 한두 달 하고 그만둘 거야? 2년 3년 꾸준히 할 거 아니야? 그럼, 언젠가 잘하게 될 건데 왜 스트레스받아? 왜 강박을 가져?"라고요. 그러면 다시 즐기는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는 거예요. 장 : 이건 여담인데, 오늘 이야기 나누면서 참 얼굴이 편안하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기장에서 봐 오던 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이랄까. 어라? 김태술 선수가 이렇게 생긴 분이셨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혹시 인생의 어떤 시기로 카톡을 딱 한 줄 보낼 수 있다면 어떤 말을 하고 싶어요? 김 : 인상의 변화는 그렇게 느끼실 수 있어요. 슬럼프를 겪던 때와 지금은 다르니까요. 그때는 그리고 그 터널이 끝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고요. 누구나 번아웃이 오고, 슬럼프가 왔을 때 인생을 핀 조명으로 그 순간에만 초점을 맞춰서 바라보면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운데 결국은 머물러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그런데 그때는 몰랐죠. 그렇기 때문에 이겨내기 위해서 극도로 제 감정을 절제하고 무시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얼른 성공해서 가족들을 편안하게 해줘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고요. 그래서 슬럼프가 오고, 마음의 병이 와도 무시하고 아닌 척하고 알아주지 않으려 했거든요. 나약함을 무시해야 성공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 그 시절에 카톡을 보낼 수 있다면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럽다고 말하고, 울고 싶으면 울고 감정에 솔직해져도 돼>라고, 꼭 말해주고 싶네요. 장 : 그럼 마지막으로 타인에게도 한마디를 건네볼게요. 태술 님이 가장 마음에 쓰이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떤 유형의 사람들일까요? 그리고 어떤 말을 해 주고 싶으세요? 김 : 타인의 시선에 민감한 분들이요. 저는 선수 시절에 매일매일 사람들의 평가 속에서 살았잖아요. 그 평가가 제 모든 감정을 좌지우지하던 시절도 있었고요. 아마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중에도 마찬가지인 분들이 계실 거로 생각해요. 사람들이 날 지켜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거죠. 하지만 정말 대부분의 사람은 나에게 관심이 없거든요. 오히려 사람들이 날 지켜보는 시간보다 내가 날 지켜봐 줘야 하는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어요. 타인의 기준에 맞춘다고 해도 끝끝내 내가 행복해지는 게 아닌데, 그렇다면 시선의 방향을 이제는 안으로 돌려야 하는 게 아닐지 생각합니다. 아니면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을 쓸 거면 아주 극단까지 가는 거예요. 정말 완벽한 나, 누가 봐도 흠집 잡을 수 없는 나까지 가보는 거예요. "나 멋지게 살 거야. 그래 봐. 지켜봐. 내가 얼마나 멋진지"라고요. 근데 그 '멋지게 사는 것'의 핵심은 내가 나에게 집중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멀쩡한 모습이 아니라 허겁지겁 달려와서 슬라이딩으로 무덤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하거든요.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시간에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생의 마지막까지 충실히 사는 거죠. 그리고 "정말 끝내줬다!"라고 말하면서 문 닫히기 직전에 단장할 새도 없이 들어가는 거예요. 무덤에 (웃음) 그렇게 모든 순간 경험을 누리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모두. 오프 더 레코드 : 독자 질문 코너 1. 한 분야에서 정점을 찍는 경험은 아무나 못 하는 거잖아요. 자기 분야에서 미친 듯이 달려서 성공하는 경험이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궁금합니다. 혹시 태술 선수님처럼 그 이후 슬럼프가 오고 소진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번쯤은 경험해 볼만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정점을 찍기 위해 저에게 왔던 수많은 경험과 감정은 삶을 살아가는 데 많은 선물을 준 것 같아서 한번 해 볼 만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가끔 후배들에게 성공으로 가는 길에는 늘 고통과 남들과 비교할 수 없는 노력, 시간 투자가 있어야 한다고 조언해 주곤 했거든요. 이 과정에서 기쁨, 슬픔, 분노, 희망, 깨달음 등 여러 가지 감정과 경험을 하게 되는데요. 이 감정과 경험을 인생의 또 다른 목표에 끼워 넣어 적용하기만 해도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루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결국 남들보다 더 높은 곳을 향해 달려갔던 경험은 다른 목표도 이루게 만들어주는 힘이 되는 거죠. 저 역시 고통스러운 슬럼프가 힘든 시간을 주기도 했지만 결국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러한 경험도 어쩌면 당연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삶을 대하는 태도는 좋은 것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부정적인 일이나 감정도 같이 받아들이려 하는 수용적인 태도로 변할 수 있었고요. 2. 능동적으로 쉰다고 말하고 진짜 쉬는 모습에서 자기 인생의 주인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감명 깊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못 살지 않나 싶어서 그냥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맞아요. 저도 그렇지 못했어요. 늘 불안하고 뭔가를 해야만 할 것 같고 하지 않으면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죠, 하지만 능동적으로 쉰다는 게, 하던 일을 그만두고 쉬는 것이 아니라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겼을 때 불안한 감정이 밀려와도 그 불안함 때문에 다시 벌떡 몸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그 불안함까지 받아들이면서 "그럼에도 쉬는" 연습하다 보면 분명히 잘 쉬는 방법을 알아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3. 인터뷰 보자마자 책 사고 다 읽었어요, 저도 모르게 계속 눈물이 났어요. 3살로 살아가는 새로운 인생에서 책을 쓴 경험은 어땠는지, 또 책을 내실 계획이 있으신지 없으신지, 만약 있다면 어떤 주제로 써보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저는 책을 쓰는 사람으로 계속 살고 싶어요. 사실 저는 자기 계발서를 위주로 독서를 해 왔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만약 다음 책을 쓴다면 저를 성공으로 가게끔 만들어 주었던 마음 1(페르소나)이 어떻게 저를 밀어붙였는지 그 방법에 대한 내용과, 그렇게 살면서도 힘들고 지칠 때 마음 2(내면 자아)가 어떻게 저를 보듬어주어 지치지 않고 지속 가능하게 했는지. 두 마음의 밸런스에 대한 자기 계발서를 한번 써 보고 싶어요, 그리고 늘 사람으로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도 계속하고 있는데, 언젠가 조금 더 뚜렷해진다면 그 이야기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4. 태술 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 1~3위는 무엇인가요? 예전 농구선수 시절과 지금 달라졌는지도 궁금합니다. 현재는 제가 1순위입니다. 사실 예전에는 가족이 1순위다라는 얘기를 종종 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스스로가 행복하고 자존감이 높아져야 가족이든 일이든 잘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지금은 제가 1순위 2순위 3순위입니다^^ 5. 가만히 있는 시간도 오래되다 보면 지루하지 않은지 궁금합니다. 지루하기보다 불안했던 것 같아요. 분명 몸은 편한데 자꾸 불안한 생각이 드는 건 어떻게 조절이 안 되더라고요. 하지만 이것도 계속 연습이 필요한 것 같아요. 연습했더니 지금은 가만히 있는 시간이 도움이 되는 것 같고, 그렇게 채워진 건강한 에너지로 하루하루를 더 가치 있게 살 수 있는 것 같아요. 6. 저도 저에게 쉬는 시간을 줘보자!라고 생각하고 퇴사 후 쉬었는데요, 어느새 무기력해지고 다시 일을 할 생각이 들지 않아서 계속 이러는 거 아닌가 불안하고 막막한 시간을 보냈어요. 태술 작가님은 그런 마음은 없으시나요. 저도 분명히 있습니다. 저는 완전히 다른 필드에 저를 밀어 넣으면서 불안을 제 발로 찾아간 셈인데요. 저는 한동안 저 자신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서 "모든 불안에 대한 자신감"이 생겨났던 것 같아요. 나는 어떤 일이든 주어진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이고, 운동 생활을 하면서 남들보다는 노력에 대한 기준이 높고, 어느 정도 올라가기 위해 어떤 과정을 겪어야 하는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점을 인지했죠. 그래서 불안전한 필드로 저를 밀어 넣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불안은 늘 내 옆에 붙어있지만, 그마저도 인생이라 생각하고요. 불안하기 때문에 어쩌면 내가 움직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의 순기능도 생각이 드네요. 7. 추천해 주고 싶은 책이나 인상적인 책 구절이 있다면 궁금합니다. 저에게 긍정적 마음가짐을 가지게 해 준 책이 있는데 '연금술사'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연금술사는 납을 금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죠. 물론 저도 그런 능력이 있으면 좋겠지만 저는 실제 납과 금 대신에, 삶에서 오는 부정적인 일이나 짜증 나는 일하기 싫은 일 등을 납이라고 생각하고 이것들을 금으로 만들 수 있는 내가 되면 훨씬 더 값지겠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한 일화로 제가 은퇴 후 바로 '뭉쳐야 찬다 2'에 출연했습니다. 평생 손을 쓰면 살아온 저는 축구가 굉장히 어려웠고, 필드보다는 벤치에 앉아서 응원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죠, 스트레스도 많았습니다. 방송이기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응원하는 모습도 많았죠. 그때 당시 소속사 대표님께서 제가 스트레스가 많다고 생각하셨는지 프로그램 하차에 대해서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저는 절대 하차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때 당시 상황이 저에게는 납이었고, 곧 금으로 만들 기회로 보였거든요. 1년간 비공개 계정을 만들어 훈련하는 영상을 올리며 연습했어요. 어느새 주변에서 실력이 많이 늘었다는 평가가 많아졌고, MOM(Man of the Match, 일명 MVP)을 받는 경기까지 생겼습니다. 그렇게 저는 저에게 스트레스를 안겨준 그 상황을 기회로 보고 노력해서 "해낼 수 있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인지하게 만들려고 노력했어요. 그리고 실제로 그 시간은 제게 금이 되었기에, 저는 자칭 김태술사가 되었다고 말하곤 한답니다. 질문을 주신 분께도 긍정의 힘이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8. 태술 님의 책에서는 목표지향적인 마음 1과 내면 깊은 곳에 있는 마음 2의 균형에 대해 들려주신 게 인상적이었어요. 하지만 저는 마음 2의 소리를 잘 못 듣겠어요. 제 안에서는 사라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어떻게 하면 마음 2를 만날 수 있을까요?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면 어떤 노력을 추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저는 어떤 일이든 지금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스스로 마음 2를 만나기 어렵다고 생각하신다면 '아 나는 지금 마음 2를 만나지 못하는구나, 그래도 괜찮아 곧 만나겠지'라고 이야기해 주면 좋을 것 같아요. 이렇게 인정하는 마음이 바로 마음 2라고 생각하거든요. 마음 2를 만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아쉬워하는 나에게 괜찮다고 의식적으로 이야기하는 연습이 필요하기도 할 것 같고요. 분명히 마음 2는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해요. 조바심 내지 마세요. 곧 만나시게 될 겁니다. 아니 이미 옆에 있는데 몰라보고 있을 수도 있어요.
바쁜 현대인들의 일상 속에서 자신을 돌보는 잠깐의 '틈'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마음을 돌보는 일상의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합니다. 성인 4만 4천 명을 상담했던 장재열 상담가가 자신의 삶에서 소진을 겪었던 전문가를 만나 일상 속 멈춤과 쉼의 비결에 대해 묻습니다. 인터뷰어 : 장재열 (상담가 겸 작가, 월간 마음건강 편집장) 인터뷰이 : 이서현 (웹툰 ‘서늘한 여름밤의 내가 느낀 심리학 썰’ 작가, 코칭심리학자)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을 얼마나 자주 들여다보시나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연습이 익숙지 않은 우리들에게, 어느 날부터 동그란 캐릭터 하나가 곁에 다가왔습니다. 트위터에서부터 화제가 되어 9년째 연재되고 있는 심리학 그림일기, ‘서늘한 여름밤 심리학 썰’이죠. 아마 이름은 몰라도 한 번쯤 캐릭터는 만나보신 적 있을 겁니다.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괜찮나 싶을 정도로 가감 없이 자신의 불안과 완벽주의, 그리고 상처와 회복의 과정을 담담히 꺼내어 놓는 그림일기의 작가이자 코칭 심리학자인 서밤 작가, 이서현 님을 만났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수십만 명의 ‘트친’과 ‘인친’에게 자신의 나약함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그 솔직한 고백과 성찰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그리고 그 솔직한 자신과의 대화 속에서 깨달은 것들은 무엇인지 들어봅니다. 장재열(이하 장) : 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이서현(이하 이) : 저는 코칭 심리학을 공부하고, 마음과 관계에 대해서 그림일기를 그리는 작가, 서늘한 여름밤 서밤입니다. 블로그에서부터 시작해서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까지 꾸준히 그림일기를 연재하며 여러분을 뵙고 있네요. 장 : 심리학이나 마음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작가님의 실물은 처음 보더라도 만화 속 캐릭터는 한 번쯤 다들 보셨을 것 같은데요. 이 캐릭터는 어디서 모티브를 딴 건가요? 이 : 사실 제가 미술 전공자가 아니거든요. 심리학 전공자잖아요. 그래서 그림에 익숙지 않다 보니 가장 그리기 쉬운 형태를 찾다가 이렇게 그리게 됐어요. 별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오히려 단순한 형태라서 더 많이들 이입하고 편안하게 느끼시는 것 같아요. 이서현 작가의 만화 캐릭터 장 : 그러고 보면 이 캐릭터를 처음 본 게 2010년대였던 걸로 기억하거든요, 만 9년째 꾸준히 그림일기를 연재하고 계시는 데, 코칭 심리학 박사과정도 하고 계시고, 현직 코치로도 활동하고 계시고, 강연도 다니시고.... 참 바쁜 일상을 살고 계실 텐데. 이 코너명처럼 ‘오프’하는 순간이 있으신가요? 이 : 그럼요. 저는 일상 속의 멈춤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림일기 연재도 연재지만, 박사과정 연구라는 게 참 마라톤 같다고 느껴져서 잠깐씩 멈추지 않으면 오히려 지속하기 힘든 과업이라고 느끼거든요. 그래서 저는 저녁 9시 이후로는 생각 안 하기를 실천하고 있어요. 장 : 생각을 안 해야지, 한다고 바로 되나요? 이 : 물론 쉽지 않아요. 저도 생각 안 하기 훈련을 꾸준히 오래 해왔어요. 저녁 9시가 넘어도 때때로 논문 생각이나 일 생각이 나요. ‘아까 그 부분 이렇게 수정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식으로요. 그럴 때 안 해야지! 하고 멈출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대신 다른 생각으로 덮는 거예요. 업무적인 생각 위에 일상적인 생각을 덧대는 거죠. 넷플릭스 뭐 좀 볼까? 음악을 좀 들을까? 내일 아침에 뭘 차려 먹지? 같은 것들 말이에요. 가장 좋은 건 지금 느껴지는 ‘감각’을 느끼는 건데요. 누워있다면 등의 감각, 앉아 있다면 발의 감각 같은 것들요. 장 : 그림일기를 오래 봐온 독자로서 작가님이 불안도 굉장히 높으신 편이고, 생각이 정말 많은 성격인 거로 알거든요. 처음부터 이렇게 온·오프가 잘 되는 편은 아니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이 : 석사를 졸업하고 한참 심리상담센터의 대표로 제 사업을 할 때는 정말 멈추질 못했어요. 그림일기도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을 때였고, 강연 요청이나 외부의 연락도 많았고 그 가운데서 나에게 쉼을 주질 못했어요. 누군가의 생존을 책임지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잠깐 쉬다가도 ‘내가 쉬어도 돼?’ ‘이러고 있어도 되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밤 11시, 12시까지 매일 계속 일을 했어요. 그러다 번아웃이 온 거죠. 장 : 자신의 번아웃은 어떻게 알아차리게 됐나요? 그리고 가장 먼저 어떻게 대처했나요? 이 : 저는 짜증이 엄청났어요. 정말 만사가 짜증 나(웃음). 사람들이 나에게 조금만 뭐라고 이야기해도 폭발할 것 같고, 남편한테도 정말 짜증을 많이 내고, 밖에서 꾹꾹 참다가 내 주변 사람에게 계속 폭발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나 자신에게 폭발하고 있는 거더라고요. 내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안 들고 짜증이 나더니, 어느 날은 제가 저를 거꾸로 들고 성냥에 불 붙이듯이 아스팔트에 저를 긁어버리는 상상까지 하게 되더라고요. 그때 일차적인 신호를 느꼈죠. ‘아, 나 뭔가 이상한데’라고요. 그리고 또 한 번은 아주 아무 일 없는 보통의 날이었는데, 소파에 잠깐 누웠는데. 못 일어나겠는 거예요. 몇 시간이고 못 일어나겠는 그 느낌에서 또 한 번 ‘나 지금 뭔가 이상하다’라고 신호를 알아차릴 수 있었죠. 그래서 제가 한 것은 그림일기를 계속 그리는 거였어요. 저에게는 가장 일상적인 일이고, 솔직해질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걸로 제 안의 독소를 빼는 과정이랄까요. 또 심리상담도 받았고요. 그 과정에서 ‘나 자신에게 친절해지는 연습이 필요하구나’를 깨닫게 됐어요. 아주 일상적인 표현이지만, 실제로 행하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장 : 정말 그렇네요. 익숙하지만, 막상 하고 있냐? 물어보면 주춤하게 되는 느낌이에요. 그 이유가 머리로는 알겠는데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감’이 안 와서일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나에게 친절해진다는 것, 어떻게 이해하면 좀 더 잘 와닿을 수 있을까요? 이 : 내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떠올려보는 거예요. 그 존재가 지금 나 같은 상황이라면 아는 뭐라고 말해줄까? 그걸 나한테 해주는 거죠. 어떤 분들은 사랑하는 존재를 이야기할 때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하세요. 그러면 저는 반려동물도 좋다. 어떤 존재이든 좋다고 말하거든요. 장 : 그러고 보니 저도 사람보다는 우리 집 반려견 튼튼이를 제일 먼저 떠올렸네요. 이 : 그 튼튼이, 어떻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잘 먹고, 즐겁게 공놀이하고, 산책 자주 하고, 편안하게 살아가길 바라실 거예요. 대단한 걸 바라지 않거든요. 그 정도의 안녕을 나에게도 적용해 주는 거, 그게 저는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거. 아주 기초적인 안녕을 돌봐주는 거요. “밥 잘 먹고, 잘 자고, 똥만 잘 싸도 돼. 그 정도만 해도 이미 잘 지내고 있는 거야. 이미 잘하고 있어.”라고 나에게 관대해지고 친절해지는 건데. 이게 처음에 어려워요. 익숙지 않고, 잘 받아들여지지 않거든요. 그럴 때, 마치 약을 먹다가 잘 안 들으면 용량 올리듯이 더 자주, 빈번하게 하는 거예요. 포스트잇을 사용해서 여기저기 눈 닿는 곳에 붙여두어도 좋거든요. 저는 실제로 사업이 안 좋게 끝나고 접고 나서, 자신을 책망하고 싶었던 시간에 오히려 더 관대해지고, ‘한량’처럼 지내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자신에게 화살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그냥 카페 가고, 그 순간에 뭘 하고 싶은지 욕구를 자꾸 찾으려 하고. 그러면서 생각이 점점 바뀌더라고요. ‘어차피 사업은 망했고, 미래는 알 수 없다. 잘됐다. 어차피 이제 현재만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그냥 시간을 흘려보냈어요. 장 : 그러다가 다시 일하는 나로 궤도에 올라오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이 : 정말 별것 아니었어요. 제 석사과정 동기가 항상 ‘박사는 힘드니까 우리 같이 가서 서로 의지하며 해보자’고 말하곤 했는데, 때마침 같이 가자고 연락이 온 거예요. 사업은 망하면 다른 사람의 인생에까지 피해를 줄 수 있지만, 박사과정은 중도 포기하면 나 혼자 망하는 거잖아요. 아니 망하는 것도 아니죠, 뭐. 안 맞으면 한 학기만 하고 나오자. 이건 언제든 그만둘 수 있잖아,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 오히려 좋았던 점 같아요. 장 : 이 많은 과정에서 그림일기를 연재하는 것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던 것 같은데, 지치거나 힘들었던 순간들이 있진 않았나요? 타인을 실망하게 할지 걱정도 많이 하시고,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신경 쓰시는 작가님의 기질을 자주 엿볼 수 있었거든요. 그런 것 치고는 꾸준히 해나가시는 동력이 궁금했어요. 이 : 세상에서 제 마음대로 되는 게 거의 없어요. 그런데 그림은 하얀 종이 위에 제 마음대로 할 수 있거든요. 결국 저는 ‘자의성’이 사람에겐 정말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자유롭게 마음껏 표현할 수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꾸준히 할 수 있었지요. 물론 댓글에 상처받는 순간은 많아요. 하지만 제 마인드는 “너 나 싫어해? 그럼 난 네 앞에 계속 나타날 거야”거든요 (웃음). 네가 날 망하기를 바란다면 난 네 뜻대로 되어주지 않을 거야. 망하지 않고 여기 계속 있을 거야. 날 좋아하는 사람들은 계속 내 그림일기를 봐줄 거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제가 망하지 않고 계속 존재하면 언젠가 지쳐 사라지겠죠. 웹툰 ‘서늘한 여름밤의 내가 느낀 심리학 썰’ 중에서 장 : 그런데도 언젠가 지쳐서 다시금 멈추고 싶은 순간이 올지도 모르잖아요. 그때엔 더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 작가님만의 노하우가 생겼나요? 이 : 저는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할 거야.라고, 정해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때 원하는 것을 그때도 하려고 해요. 그렇잖아요? 우리 사회는 자기를 규정하는 것에 퍽 익숙하잖아요. 나는 오렌지 주스를 좋아하는 사람이야. 난 이걸 먹어야 행복해. 이게 내 답이야. 하지만 저는 진짜 행복한 사람은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오늘은 스무디가 먹고 싶네’, ‘오늘은 아이스아메리카노가 당기는걸’ 그렇게 삶의 순간마다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날그날, 그 순간순간의 내 결정권을 존중하는 거죠. 지금까지는 제가 그림일기로 심리학 이야기를 하고, 코칭 심리학자로 살고 있지만 평생 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그만두고 싶어지면 그만두는 것.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사는 게 노하우라면 노하우예요. 장 : 그런 현재를 직시하는 작가님이 ‘현재’ 코칭을 하거나 독자와 소통하면서 가장 마음이 쓰이는 분들이 있다면 어떤 분들일까요? 그리고 그런 분들께 작은 변화의 팁을 주신다면? 이 : 완벽주의를 겪는 분들이 가장 마음에 쓰여요. 사실 제 연구 주제이기도 한데요. 제가 완벽주의자여서이기도 해요. 너무 잘하고 싶은 마음 앞에서, ‘이미 충분해요’ 이 말을 저 자신에도 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어요. 완벽주의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기 자비의 마음이더라고요. 자비라는 것은 결국 고통에 대한 연민인데요. 내가 내 힘듦에 대해서 알아차려 주는 거죠. 세 가지 단계로 알아차릴 수 있는데, 예를 들어볼게요. 우리가 길 가다가 미아가 돼서 엉엉 우는 아이를 본다고 칩시다. 그 아이를 도우려면 첫째, 아이를 발견해야 해요. 그리고 둘째, 휴머니티가 필요해요. 아이가 우는데 ‘아이가 우네’라고만 생각하면 지나쳐버리겠죠. 아이가 무언가 힘들구나, 인지하도록 하는 게 휴머니티죠. 그리고 세 번째 실천해야 해요. 도와줘야 하는 거죠. 이게 잘 안될 수 있어요. 자기 자신에게는 혹독해지거든요. ‘고작 이 정도 한 걸 가지고 힘들어하다니’라고 생각이 빠지기 쉬워요. 그럴 땐 아까 말했듯이 나 말고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라면 내가 뭐라고 할까? “차라도 한 잔 마셔” “좀 쉬었다가 해도 돼” 그걸 나에게 적용해 보는 거예요. 그런 것들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꽤 있는데요. 사실 시간이란 건 기본적으로 낭비라는 개념이 없어요. 낭비는 소유했을 때만 할 수 있는 건데, 우리는 시간을 소유하고 있지 않거든요. 시간이 우리 소유라면 오늘은 바쁘니까 48시간을 사용하고, 내일은 10시간만 사용하고 그렇게 ‘재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렇지만 안 되잖아요? 시간은 흘러가고 있고 우리는 우연히 그것을 향유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자본주의적 관점이 시간을 자원이라고 착각하고 강요하고 있는 것뿐이죠. 그러니 애당초 낭비하고 실패하는 시간을 정해두셨으면 좋겠어요. 하루에 잠깐이라도 허송세월 보내는 시간을 가지셨으면 좋겠어요. 장 : 마지막으로, 사람 이서현은 이 삶의 순간들이 쌓여서 어떤 존재가 되고 싶나요? 이 : 저는 흥겨운 존재. 제가 원래 흥이 정말 많거든요. 그 나다운 흥을 이어가고 싶어요. 그냥 전 맛있는 것 먹으면 신나서 남편 옆에서 혼자 춤도 추고 그러고 사는 사람이거든요. 그 나의 흥을 해치지 않고, 장단 맞춰서 살아가고 싶어요. 나답게. 그거 이상 좋은 인생이 있을까요? 오프더레코드 : 독자 참여 질의응답 1. 궁금했던 건데,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 섭외 오신 적 없나요? (by. 진아킴) 앗 첫 질문부터 빵 터졌네요. 없었습니다. (웃음) 2. 요즘 행복하세요? (by. 민경) 요즘 인간인 것 치고는 행복하지 않지만, 다행히 박사생인 것 치고는 행복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행복은 ‘즐거운 경험의 빈도’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졸업 연구를 하면서 쉽지 않은 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일상 속에서 즐거운 경험을 찾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포근한 이불 안에서 뒤척이는 시간, 향초를 켜놓고 음미하는 것,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만끽하는 것처럼요! 덕분에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행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라는 걸 깨달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3. 그림일기 볼 때와 인터뷰로 볼 때 다른 매력이 있으신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울지만 겉으로 명랑한 척 하잖아요. 하지만 서밤님은 명랑함과 불안한 나. 다른 나의 두 모습을 굉장히 잘 다룬다? 잘 꺼내어 쓴다? 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 비결은 뭘까요? (by. he****) 그렇게 봐주시니 정말 기쁘네요 :) 누구나 명랑하면서도 불안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우울하지만 긍정적인 사람이기도 한 것처럼요! 그림일기를 그리며 그 모든 모습이 저라는 걸 아주 천천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면 안 돼!” 라든가, “늘 재미있는 이야기만 하자!”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서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자유롭고 솔직하게 드러내고 싶었답니다. 제 구독자분들은 모두 다면적인 면을 갖춘 입체적인 분들이니, 제가 어떤 모습을 보여드려도 받아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으니까요! 4. 연구하시면서 완벽주의자들의 공통점, 이를테면 자라온 환경이 비슷하다거나 부모의 양육 방식의 공통점이 있다거나, 대체로 맏이라거나 그런 요소들이 있나요? 제가 너무 완벽주의자인데 만약 환경적 요인이 있다면 조금 안심될 것 같아서요. 내 개인의 성격 문제 100%는 아니니까요. (by. 지으니) 당연히! 저는 완벽주의가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사실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완벽주의 경향은 2000년대부터 급격히 증가했다는 연구를 봤어요. 이러한 증가는 세계 경제 위기와도 관련이 있었고요. 경제 상황이 어려워지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실수하면 안 된다’ ‘실패하면 다음 기회가 없다’라는 불안감이 증가하게 되었고, 더불어 완벽주의 경향도 증가하게 된 것 같다는 해석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성격 특성은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며 강화될 수 있어요. 부모의 양육 태도도 마찬가지이고요. 실제로 완벽주의 연구에서는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양육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이들이 완벽주의 성향을 갖기 쉽다는 견해도 많습니다. 그러니 지금 나의 모습이 모두 나의 탓이라고 자책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5. 다시 심리상담센터 등 사업을 하고 싶지는 않으신지 궁금합니다. 앞으로는 작가에 전념하시는 건지도요. (by. 해린) 저는 다시 사업을 할 것입니다. 졸업 후에는 제 코칭심리센터를 본격적으로 운영할 예정이에요. 이미 ‘리다이브’라는 상호로 상표권 등록도 마쳤답니다. 심지어 사무실 보증금과 1년 치 월세도 이미 다 모아놨을 만큼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어요. 진로 고민, 완벽주의에 대해 고민하시는 분들, 창작자, 초기 사업가, 대학원생분들이 믿고 찾아올 수 있는 코칭심리센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6. 코칭심리학과 심리상담학의 차이를 애매하게 알듯 모르겠어요. 주변에 추천할 때 어떤 사람에게 코칭을 받아보라고 하고 어떤 사람에게 심리상담을 받으라고 하면 좋을까요? (by. rubysayruby) 저는 물리치료와 PT(퍼스널 트레이닝)의 차이라고 설명드리는 편이에요. 제가 오십견이 있어서 물리치료를 받은 적이 있어요. 그때 저는 운동보다는 증상을 치료하고 회복하는 게 먼저라고 판단했거든요. 마찬가지로 심리적인 증상으로 힘들고 버겁게 느껴질 때는 심리상담을 우선적으로 찾아가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다만 오십견 증상이 완화되었다고 제가 건강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코칭은 마음 근력을 단련하기 위한 정신건강 서비스라고 생각해요. 혼자 운동해도 좋지만, 전문가와 함께 운동하면 내 몸에 맞는 효과적인 운동법을 더 빨리 찾을 수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코칭도 나를 위한, 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을 전문가와 함께 찾아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7. 흥겨움은 타고난 성격이신건가요? 저도 흥겨운 사람이 되고 싶은데 되고 싶다고 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by. 익명) 저는 솔직히 좀 타고났습니다. 그런데 흥이라는 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외향적인 성격이라 그 흥이 밖으로 많이 표출되는 형태인데 어떤 사람들은 조용히 자신의 리듬을 타는 게 흥의 표현일 수도 있겠죠. 중요한 건 자신의 장단을 찾고, 그 장단을 즐기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맞는 리듬에 귀 기울여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8. 허송세월을 보내다 너무 길게 보내고 정말 삶이 무기력해지면 어떡하지 걱정이 돼요. 좋다는 건 알겠는데, 지혜롭게(?) 허송세월 보내는 법 있을까요? (by. 노래하는어스름) 의식적인 휴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주체적으로 휴식을 선택하고, 그 휴식을 충분히 즐겨주는 것. 그런 시간을 갖는 게 저에게는 충전하는 시간이 되어주었답니다. 솔직히 지겨울 정도로 놀고 나면 몸과 마음이 근질거려서 뭐라도 하고 싶어지잖아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동기부여가 되는 게 건강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렇게 쉬다가 정말 무기력해지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은 내려놓고, “뭘 하면 내가 편안할까?” “지금 어떤 걸 해야 내가 즐거울까?” “지금 쉬는 방식이 나에게 맞는 휴식 방식일까?”라는 질문을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휴식해도 무기력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정신건강 전문가를 만나보시는 걸 추천해 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