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참수-사망-이혼-참수-생존.

잉글랜드 튜더 왕조의 군주 헨리 8세(1491-1547)의 여섯 왕비들 운명을 요약한 키워드입니다. 헨리 8세 왕비들은 이혼당하거나, 목이 잘리거나, 아니면 출산하다가 죽거나, 정말 기구한 삶을 살았습니다. 여섯 번째 왕비만 헨리 8세의 말년을 함께 하고 살아남았습니다.

헨리 8세는 영국 왕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왕을 꼽으라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름입니다. 학창 시절 역사 시간에 영국의 종교 개혁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왕의 이혼 문제가 발단이 되었다고 배웠는데, 그 왕이 바로 헨리 8세입니다. 헨리 8세가 첫 번째 부인과 이혼하려 하는데 교황청에서 허락해 주지 않자, 교황청과 관계를 끊고 영국 국교회를 설립해 자신이 국교회 수장이 됩니다. 그는 또 메리 여왕과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부친이기도 하죠.

영국에선 종교 개혁의 발단이 헨리 8세의 이혼 문제였던 것에서 알 수 있듯, 헨리 8세는 여섯 번 결혼에 얽힌 수많은 스캔들 때문에 역사책뿐 아니라 드라마 영화 소설 등에 자주 등장합니다.

“18살이 되기도 전에 그녀는 왕을 만났다. 천일 동안 펼쳐지는 역사상 가장 열정적이고 충격적인 러브 스토리”

저도 어린 시절 역사책보다는 이런 카피를 내세운 영화 ‘천일의 앤(Anne of the Thousand Days)’ 덕분에 헨리 8세를 알게 되었습니다. ‘천일의 앤’이 바로 헨리 8세의 두 번째 부인 앤 불린이죠,

헨리 8세의 첫 번째 부인은 아라곤(지금의 스페인)의 캐서린입니다. 캐서린은 원래 헨리 8세의 형수였습니다. 어떻게 형수가 시동생과 결혼하게 되었을까요? 헨리 8세의 아버지가 큰 아들이 결혼한 지 얼마 안돼 요절하자, 며느리를 친정에 돌려보내지 않고 붙들어 놨다가 후일 헨리 8세가 되는 둘째 아들과 결혼시킨 겁니다. 이렇게 해서 캐서린이 가져온 막대한 지참금을 돌려줄 필요도 없고 혼인 동맹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큰 아들이 병약해 부부관계가 없었으니 캐서린이 처음 했던 결혼은 무효라는 논리를 내세웠죠.

헨리 8세와 캐서린은 20년 이상 함께 살면서 딸(후일 메리 1세)만 하나 뒀습니다. 왕위를 계승할 아들을 원했던 헨리 8세는 캐서린의 시녀였던 젊고 매력적인 앤 불린에게 푹 빠져 교황청과 결별하면서 나이 많은 캐서린과 이혼합니다. 결혼 당시 앤 불린은 임신한 상태였고 헨리 8세는 앤 불린이 아들을 낳아줄 걸로 기대했지만 태어난 아기는 딸(후일 엘리자베스 1세)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사이는 급격히 멀어지고, 앤 불린은 급기야 간통죄로 런던탑에 갇혔다가 참수형에 처해집니다. 이 과정이 영화 ‘천일의 앤’의 주요 내용이죠.

헨리 8세의 결혼은 이후에도 대부분 파탄으로 끝났습니다. 영국에서도 왕위를 계승할 아들을 낳는 건 중요한 문제였는데, 세 번째 왕비 제인 시모어는 아들을 낳았지만, 며칠 후 산욕열로 사망했습니다.

덧붙이자면 제인 시모어의 아들이 바로 ‘왕자와 거지’의 모델이 되기도 한 에드워드 6세입니다. 어려서부터 병약해 9살에 즉위했지만 6년 만에 사망하죠. 에드워드 6세의 조카인 제인이 후계자로 지명됐지만 9일 만에 폐위되고 이복 누이인 메리 1세(헨리 8세 첫 번째 부인 캐서린의 딸)와 엘리자베스 1세(두 번째 부인 앤 불린의 딸)가 잇따라 왕위에 오릅니다. 푸대접받았던 딸들이 결국은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메리 1세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에 가톨릭을 복권시키고 개신교도들을 심하게 탄압하며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악명을 떨치게 됩니다. 왕위를 이어받을 자식이 없었던 메리 여왕이 죽자 다음 왕위는 엘리자베스에게 돌아갔고, 엘리자베스 1세 치세 아래 잉글랜드는 ‘대영제국’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이복자매인 메리와 엘리자베스의 복잡 미묘한 관계에도 이야깃거리가 많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헨리 8세의 다섯 번째 왕비, 클레페의 안나는 독일에서 데려왔는데 초상화와 다르다는 이유로 이혼당하고, 다섯 번째 왕비 캐서린 하워드는 간통죄로 참수형 당합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 왕비 캐서린 파만 헨리 8세와 결혼생활을 순탄하게 마치고 살아남았습니다.

이 여섯 왕비들이 화제의 뮤지컬 ‘식스(six)’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구구절절 파란만장한 여섯 왕비들의 이야기를 신나는 팝 콘서트 형식으로 풀어내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뮤지컬 동아리에서 만들어 2017년 에든버러 프린지에서 초연한 작품인데,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웨스트엔드, 브로드웨이까지 진출했고, 권위 있는 토니상까지 받으면서 각광받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영국 공연팀의 내한공연에 이어 한국 배우들이 출연하는 라이선스 공연이 열리고 있는데요, 저는 내한공연과 라이선스 공연을 다 재미있게 봤고 골라듣는뉴스룸 커튼콜에 이 공연의 협력연출을 맡은 연출가 김태형 씨를 초대해, 이 공연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다음은 팟캐스트 내용을 요약 재구성하고 제 생각을 덧붙인 것입니다.

헨리 8세 왕비들의 ‘이혼 참수 라이브’

Q. 뮤지컬 ‘식스(six)’는 어떤 공연인가

A. 16세기 영국 왕인 헨리 8세에게 왕비가 6명이나 있었는데, 그 여섯 왕비의 이야기를 담은 공연이다. ‘식스’는 왕비 여섯 명을 뜻한다. 얼핏 튜더 왕조 시대 영국의 이야기를 담은 정통 사극 같은 느낌을 풍기지만, 공연은 6명의 왕비가 각각 팝 콘서트 무대의 디바인 것처럼, 자기 노래를 한 곡씩 부르면서 사연을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이뤄진다.

죽은 왕비들이 되살아나서 이제부터 우리가 콘서트를 할 거야! 하는 느낌인데, 심지어 그걸 ‘이혼 참수 라이브(Divorced Beheade Live)’라고 한다. 이혼당하고 목이 잘린 왕비들이 모여서 라이브 공연을 하는 거다. 시작할 때는 지금부터 누가 헨리 8세에게 끔찍한 취급을 당했나, 누구 인생이 더 꼬였나 우리가 지금부터 보여줄 건데, 그중 1등이 우리 ‘식스’ 그룹의 리더가 될 거야. 그러니까 누가 제일 불행했는지 뽑아줘, 한다. 그런 식으로 여섯 왕비들이 각자 자기 사연을 노래로 들려주며 대결을 벌이는 거다.

6명의 캐릭터는 비욘세라든가 브리트니 스피어스, 에이브릴 라빈, 아델, 이런 팝스타들을 모델로 만들어졌다. 음악은 그들의 음악 스타일과 비슷한 느낌으로, 관객들에게 친숙한 팝 음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신나게 콘서트를 보다 보면 후반부에는 이야기를 뒤집어서 전혀 다른 맥락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기존에 이 왕비들을 다뤘던 방식에 비해서 아주 새롭고 신선하다. 이 공연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다.

Q. 뮤지컬 ‘식스’의 한국 공연은 어떻게 이뤄졌나.

A. ‘식스’는 한국 제작사에서 초기부터 투자를 한 작품이다. 이 공연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한국 제작사 정인석 대표가 알고 지내던 영국 프로듀서로부터 공연을 소개받았고, 잘 될 거라고 확신해 다른 영국 프로듀서들과 함께 투자했다고 한다. 웨스트엔드 브로드웨이까지 갔고 토니상도 받았으니 성공적인 투자를 한 셈이다.

이 공연은 원래 2020년에 한국에서 공연될 예정이었다. 이 공연이 브로드웨이에 가기 전, 토니상을 받기도 전이었다. 2020년 공연은 ‘레플리카’(번역한 대사를 쓰는 것 외에는 오리지널 공연과 똑같이 만드는 방식)가 아니라 ‘스몰 라이선스’로, 음악과 대본만 가져오고 나머지는 한국에서 다시 만드는 방식으로 추진했었다. 그런데 당시 영국 오리지널팀이 미국 브로드웨이에 진출하고 호응을 얻어 정식 개막 하려는데 코로나 때문에 뉴욕 전체 극장이 봉쇄돼서 공연을 중단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한국 공연 계획이 무산됐다.

그러다가 영국에서 공연이 재개되면서 한국 공연도 다시 추진됐는데, 이번에는 영국의 오리지널 팀이 와서 먼저 공연하고 이후에 한국어 라이선스 공연도 하는 방식으로 하게 됐다. 그래서 영국의 오리지널 프로덕션 스태프들도 참여하는 한국어 라이선스 공연 제작에 협력연출로 참여했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뮤지컬 동아리 작품이 토니상까지

‘식스’는 케임브리지 대학 동창생, 1994년생 토비 말로우와 루시 모스가 공동으로 창작한 작품입니다. 2017년 에든버러 프린지 공연 이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2018년 아트시어터 시험 공연을 시작으로 2019년 웨스트엔드에서 공식 개막했습니다. 2020년 웨스트엔드의 다른 극장으로 옮겨 장기 공연할 계획이었으나 코로나 때문에 중단됐다가 2021년 공연을 재개했고, 지금도 런던 보더빌시어터에서 공연되고 있습니다. 뉴욕 브로드웨이 공연은 리나 혼 시어터에서 열리고 있죠.

‘식스’는 2019년 영국 올리비에 어워드 5개 부문 후보로 지명됐고, 2022년 토니상에서 작곡상(Best Original Score)과 의상 디자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뮤지컬의 공동 창작자이자 연출가인 루시 모스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사상 최연소 여성 연출가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루시 모스는 에든버러 초연 때 안무를 맡기도 했고, 아역 배우 활동 경험도 있는 토비 말로우는 여섯 번째 왕비 역 배우가 사정이 생겨 출연하지 못하게 되자 직접 이 역을 연기한 적도 있습니다. 토비 말로우-루시 모스는 이후에도 각자, 혹은 함께 다양한 작업을 하면서 계속 주목받고 있습니다. 미국 타임(TIME)지는 이들이 '극장의 장벽을 무너뜨렸다'고 평가하며, 신드롬을 일으킨 차세대 100인 (TIME NEXT 100 – Phenoms)에 선정했습니다.

Q. 처음 이 작품을 접했을 때 어떤 느낌을 받았나.

A. 나는 연극으로 시작해서 드라마가 뚜렷하고 선명한 걸 좋아하기 때문에, 이 뮤지컬 대본만 처음 봤을 때는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영국에서 온 협력 연출가와 함께 작업하면서 아, 이건 이런 의미구나, 이건 이렇게 패러디한 거구나, 이건 어떤 역사적 사건에서 나온 대사구나, 이런 식으로 이해가 됐다.

음악을 들으니 한결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음악들이 다 친숙하게 들리는데, 어떤 곡들은 영국 전통 민요라든지 기존 곡을 패러디했고, 어떤 곡들은 팝스타들의 음악에서 코드 구성이나 구조 같은 것을 참고해서 만들어졌다.

이 뮤지컬은 정말 신나는 팝 콘서트처럼 진행됩니다. 김태형 씨도 언급했지만, 각 캐릭터마다 참고한 팝스타들이 있습니다.

1. 아라곤의 캐서린-비욘세, 제니퍼 로페즈, 제니퍼 허드슨
2. 앤 불린-마일리 사이러스, 에이브릴 라빈
3. 제인 시모어-아델, 시아 셀린 디온
4. 클레페의 앤-니키 미나즈, 리아나
5. 캐서린 하워드-브리트니 스피어스, 아리아나 그란데
6. 캐서린 파-알리샤 키스, 에밀리 산데

뮤지컬 넘버들이 흡인력 있는데, 특히 아라곤 캐서린이 부르는 ‘No Way’나 앤 불린이 부르는 ‘안 미안해서 참 미안해(Sorry not sorry about what I said)’ 같은 노래들은 공연이 끝나고 나서도 계속 뇌리에 남고 흥얼거리게 되더라고요.

DBDDBS는 영국판 '태정태세문단세'
Q. 그런데 헨리 8세가 진짜 유명한가 보다.

A. 영국인들한테는 정말 유명한 왕인 것 같다. 내가 연출했던 ‘히스토리 보이즈’라는 연극에서도 헨리 8세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왔다. 종교적으로는 기존의 가톨릭과 결별해서 성공회를 새로 만들었는데, 영국의 수도원을 해산하고 재산을 다 몰수하며 종교를 확 뒤집어엎었다. 대륙에 진출하고 영국을 강대국으로 만든 정책을 시행했다. 이렇게 영국 역사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왕이다. 이 과정에서 여섯 번이나 결혼해서 유명하기도 하다.

역사책에 나오는 헨리 8세와 콘텐츠에 나오는 헨리 8세는 이미지가 다르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도 친숙한 드라마 ‘튜더스’나 ‘천일의 스캔들’에서는 젊었을 때 왕이 되었고 잘 생겼고 욕망에 넘치는 남자, 그렇지만 말년에 조금씩 뭔가 잘못되어 가는 이미지로 많이 그려지는 것 같다.

뮤지컬 식스에서는 헨리 8세가 한 번도 등장하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언급된다. 공연장 중간에 헨리 8세 초상화가 걸려 있다거나, 저기에 헨리 8세가 있다는 설정으로, 배우들이 가끔 헨리 8세를 똑바로 쳐다보거나 이야기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뮤지컬 식스의 헨리 8세는 정말 한심하고 볼품없고 형편없는 남자다.

*‘튜더스’는 지금도 여러 OTT에서 볼 수 있는 인기 드라마이고, ‘천일의 스캔들’은 헨리 8세와 불린 자매가 등장하는 영화입니다. 원제가 ‘The other Boleyn Girl’이죠. 헨리 8세는 왕비 외에도 공공연히 애인을 두고 바람을 피웠고 혼외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도 많았다고 합니다. 헨리 8세가 바람을 피운 여자들 중에는 앤 불린과 자매지간인 메리 불린도 있었습니다.

앤 불린은 메리 불린이 왕의 애인이었다가 버림받는 걸 보고, 헨리 8세의 요구에도 잠자리를 거부하며 정식 결혼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는 메리 불린이 앤 불린의 동생으로 나오지만, 메리 불린이 언니였다는 설이 더 유력합니다. 영화의 앤 불린은 나탈리 포트만, 메리 불린은 스칼렛 요한슨이 맡아 한 남자를 사랑한 자매의 ‘스캔들’을 그려냅니다.

공연 시작하면 캐릭터들이 환호성을 받으며 등장하고 이혼! 참수! 사망! 이혼! 참수! 생존! 이렇게 얘기한다. 영어로는 ‘Divorced! Beheaded! Died! Divorced! Beheaded! Survived!’가 된다. 영국에서 이 여섯 왕비를 이렇게 외운다고 한다. DBDDBS, 우리로 치면 ‘태정태세문단세~’ 같은 거다. 이렇게 하면 6명이 금방 외워진다. 첫 번째 여왕은 이혼을 한 아라곤의 캐서린, 두 번째는 참수당한 앤 불린, 이런 식으로 영국 역사시간에 공부한다고 한다.

Q. 이 뮤지컬 대사로 처음 쓴 게 아니라 원래 있는 말이라는 건가.

A. 그렇다. 이 뮤지컬에는 그런 요소들이 많다. 그래서 공연 만드는 과정에서 배우들과 이런 얘기를 많이 나눴고, 영국에서 온 협력 연출가한테 잘 이해 안 되는 부분을 물어보면 “아이고, 이건 영국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건데 미리 얘기를 못해줬네. 미안하다” 하며 알려주곤 했다.

“사실 영국인들도 이 여섯 명의 왕비를 다 잘 알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이 뮤지컬에서 역사를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주지 않고 쭉쭉 넘어가도 걱정할 필요 없다, 관객들이 다 이해하고 받아들인다”고 하더라. 그런데 영국인들이 잘 모른다고 할 때 그 ‘모름’의 수준이 다른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자면 누군가 ‘저에게는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하면 한국인들은 다 무슨 얘기인지 안다. 복잡한 생각 안 하고도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더 진지하게 접근하려는 건지, 농담으로 패러디해서 뒤집으려고 하는 건지, 알아차릴 수 있다. 이순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는 몰라도 이순신, 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는 거다.

마찬가지로 영국인들은 정확한 사정은 몰라도 ‘앤 불린’이라고 하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뮤지컬 식스는 그걸 더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를 비틀거나 뒤집어서 보여준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원래 이미지가 어떤 건지 잘 모르니까 이를 어떻게 커버해야 할까, 이게 한국 공연팀의 큰 고민이었다.

고민 끝에 이걸 굳이 우리말로 더 설명해 주고 풀어주려고 하지 말고, 그냥 이 공연에서 만들어낸 이미지를 밀어붙여보자, 굳이 따로 설명하지 말자, 이렇게 결정했다. 이게 통할지 노심초사했는데, 내한공연을 보고 우리 관객들이 환호하고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걸 보면서 안심했다. 이미 기존의 이미지를 알고 있는 영국인들만큼 이 공연의 콘셉트를 받아들이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우리 관객들도 이 공연에서 보여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기고 있더라.

문란해서 참수형, 못 생겨서 이혼? 숨겨진 이야기들
Q. 두 번째 부인까지는 대략 알고 있었는데, 그 이후에도 사연이 많다는 걸 이 뮤지컬을 보면서 알았다. 이전에 몰랐어도 왕비들의 캐릭터가 어떤 이미지였고, 이걸 어떻게 비틀었겠구나, 하는 게 약간은 감이 오더라.

A. 그렇다. 대표적인 캐릭터가 다섯 번째 왕비 캐서린 하워드다. 굉장히 젊고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되었으니 헨리 8세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영국인들에게는 문란하고 남성 편력이 심하고 남자를 밝히는 캐릭터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우리 관객들은 다섯 번째 왕비가 있었다는 것도, 그 왕비에게 그런 이미지가 있다는 것도 대부분 모른다.

우리 공연에서는 이 캐릭터 이야기를 가장 예쁘고 가장 섹시하고 젊고 아름다운, 약간 백치미가 있는 여성인 것처럼 시작한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사실은 성적 대상화되어 있는 여성이 어떻게 자기 정체성을 깨닫고 성장하고 변화되고 어떤 아픔을 겪었는지 굉장히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어떻게 보면 성폭력의 희생자 같은 느낌으로 그려지는데, 전에는 ‘발랑 까진 문란한 여자’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자라났고, 당시 궁정 문화와 질서 안에서 어떻게 희생될 수밖에 없었는지 보여준다. ”예쁘고 섹시하고 춤 잘 추고 노래 잘하네”, 그런 느낌으로 보다가, 노래가 진행될수록 “이게 뭐지? 이렇게 고통스럽게 끝나는구나. 처음에 쟤 섹시하고 예쁘네, 했던 게 약간 미안해지는데” 하는 정도까지 간다.

이 공연은 각각의 캐릭터들에 대해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이미지는 이런 것이죠?” 하고 소개하기도 하고, 숨기기도 하다가 “하지만 아마 이런 모습이었을 겁니다. 혹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이런 근사하고 멋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이렇게 알려주려는 듯 진행된다.

Q, 네 번째 왕비 얘기도 흥미롭다. 초상화를 보고 예뻐서 데려왔는데, 실제 생긴 게 초상화와 다르다는 이유로 이혼당했다고 하는데, 공연에선 이혼 후에 굉장히 행복했다고 나오더라.

A. 역사책에서는 ‘클레페의 안나가 이혼하고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고 기록하지는 않았을 거다. 이 캐릭터도 정말 재미있다. 초상화만 보고 데려왔는데 헨리 8세가 보자마자 실망했고, 잠자리도 한 번 같이 안 했다는 설도 있다. 그래서 이혼했는데, 앤 불린 이후로 이혼 절차가 바뀌어서 쉽게 이혼할 수 있었다. 이전에 가톨릭 치하에서는 이혼이 쉽지 않았다.

Q, 네 번째 왕비도 ‘이혼’인데 아주 순조롭게 들린다.

A. 실제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뮤지컬에서도 네 번째 왕비가 가장 혁신적인 넘버들, 힙합 넘버를 부르고 아주 행복해 보인다. 이 왕비는 사실 못 생겼다고 이혼당한 셈인데, 헨리 8세가 이혼하며 준 재산이 남은 생을 사는 데 충분했다고 한다. 당시 영국은 남편이 없는 여자는 재산권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없어 아버지 혹은 남편이 있어야 사회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는데, 네 번째 왕비는 공식적으로 이혼하고 자기를 돌봐주는 남자 없이도 충분히 권리를 행사하며 살 수 있게 된 거다. 이혼한 이후에도 궁정에 파티 있으면 놀러 다니면서 오히려 왕비보다 더 행복하게 지냈다고 한다.

여섯 왕비의 '불행 배틀', 끝에는 반전이

Q. 가장 애착이 가는 캐릭터는 누구인가.

A. 마지막에 등장하는 캐서린 파가 개인적으로는 가장 의미 있고 힘 있고 감동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이전에 5명의 캐릭터는 사실 계속 ‘불행 배틀’을 한다. 누가 더 불행하냐, 나는 이런 일을 겪었다, 나는 이런 일까지 겪었다, 이런 식이다. 또 “내가 정말 행복하고 사랑받았다고 생각하지? 그런데 나는 이런 힘든 일도 겪었어” 하는 사람도 있다.

다섯 번째 캐서린 하워드까지 가면, 좀 더 경쟁이 격화되면서 “내가 왕비일 때 헨리는 몇 명이랑 바람피웠어!” “나는 몇 번이나 유산했어!” 이런 얘기까지 나온다.

그런데 캐서린 파는 ”잠깐, 이건 좀 아니잖아. 우리 선을 넘은 것 같아. 우리 중 누가 불행한지, 누구 트라우마가 더 센지 경쟁하고 있는 거 좀 이상해” 하고 이야기한다. 캐서린 파의 이야기와 노래를 듣다 보면 이 공연의 주제 의식이 나온다. 이런 거다.

“우리가 식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건 헨리 8세라는 왕의 여섯 명의 부인이기 때문이잖아. 그래서 이렇게 한 카테고리로 묶여서 알려진 것인데, 너희들은 방금 각자의 이야기를 다 펼치지 않았어? 우리 다 한 명 한 명 너무 다르고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인데, 왜 우리가 하나로 묶여야 해? 왜 우리가 남편에게 더 끔찍한 일을 당했는지 자랑하고, 비교하고, 경쟁해야 해? 그거 너무 이상하지 않니?”

이게 이 공연이 애초에 의도했던 목소리이고 성취하고자 했던 결과인 것 같다. 대본에서는 이게 이렇게 급하게 훅 넘어가도 전달이 될까 싶었는데, 음악과 분위기상 실제 공연에서는 충분히 납득 가능하게 만들어져 있다. 굉장히 신나는 콘서트 형식이지만, 공연 후반부에 가면 울컥하며 ‘맞아, 맞아’ 하는 깨달음이 온다.

Q. 캐릭터별 넘버 중에 가장 인상적인 곡은?

A. 네 번째 클레페가 부르는 넘버가 가장 흥미롭다. 힙합 넘버 같기도 하고, 니키 미나즈를 모델 삼아서 만든 느낌이 굉장히 재미있다. 여섯 여왕이 각자 부르는 넘버가 아닌 곡들도 몇 개 있다. 오프닝 곡이나, 다 같이 부르는 ‘식스’ 같은 곡들인데, 그중에서 클레페 넘버 나오기 전에 불리는 ‘하우스 오브 홀바인’이라는 넘버가 정말 재미있다.

한스 홀바인이라는 유명한 화가의 작업실이라는 콘셉트인데, 이 화가가 클레페를 실제보다 훨씬 예쁘게 그려줬다는 거다. 블랙라이트 쓰고 선글라스에 형광색 프릴을 두르고 나와서 춤추며 노래하는 장면인데, 굉장히 코믹하고 재치 넘친다. 배우들은 보그 같은 패션 잡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처럼, 패션모델처럼, 각자 개성에 맞는 포즈로 연기하도록 했다.

네 번째 왕비는 독일에서 왔으니까 영국이나 미국에서 보기엔 뭔가 이색적인 문화권 아닌가. 그래서 독일어 가사도 쓰고 쿨하고 신선하고 뭔가 자기네 문화와 다른 모습으로 연출했다. 현대의 관객이 보기엔 클럽 같기도 하다.

가사나 연기에 패러디가 많고, 끊임없이 외모에 대한 얘기, 예쁘게 보여야 된다는 얘기를 하면서, 왕비를 고를 때 처음 한두 명 정도는 탈락하고 클레페가 합격하는데, 그 장면은 ‘틴더’라는 데이팅 앱을 그대로 패러디한 거다. 헨리 8세가 새로운 왕비를 구하는 과정을 마치 틴더 앱으로 데이트 상대를 고르는 것처럼 만들었다. 헨리 8세를 틴더 앱을 쓰는 것처럼 가볍고 우스꽝스럽게 그리면서 비판한 것이다.

Q. 드라마 ‘튜더스’ 얘기도 나왔지만, 이 뮤지컬이 의도적으로 ‘튜더스’의 이미지를 뒤집으려 했다던데.

A. 맞다. 사실 여섯 왕비 중에 가장 유명한 캐릭터는 앤 불린이다. 앤 불린을 바라보는 시각은 정말 다양하다. 왕을 유혹해서 조강지처를 버리게 한 요부로 그려지기도 하고, 또 다른 시각으로는 시대를 앞선 새로운 사상에 유연했던 여성이기도 하고. 앤 불린은 프랑스 궁전에서 자랐고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었다. 왕비의 시녀였는데, 영국 왕실의 시녀는 노비나 머슴이 아니라 귀족 자제들이 하는 명예직이었다.

아라곤의 캐서린은 끝까지 이혼을 원하지 않았는데 앤 불린이 어떤 수단을 써서 이혼시키고 왕비가 되었나, 이게 호사가들에게 인기 있는 소재였다. 그 과정에서 앤 불린이 희대의 악녀 혹은 요부 이미지를 갖게 된 것 같다. 앤 불린의 이런 이미지는 드라마 ‘튜더스’로 더욱 강화되었다. 섹스 심벌 같은 아주 에로틱한 캐릭터로 그려진다. 심지어 이 드라마에서 앤 불린을 맡았던 유명 배우가 나중에 ‘나는 촬영장에서도 그런 여자 취급을 받았다’고 고백했을 정도다.

그런데 뮤지컬 ‘식스’는 여성스러운 에너지를 발산하며 남성을 유혹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천방지축 발랄하고 왈가닥 펑크 스타 같은 느낌으로 앤 불린을 그려낸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하는, ‘뭐 어때? 그냥 내버려 둬’ 이런 느낌으로 달려가는 캐릭터로 만들어졌다.

시작할 때 앤 불린을 소개하는 짧은 넘버가 있는데, 이 넘버는 처음부터 ‘튜더스’ 광고 같은 느낌으로 기획되었다. 근사한 목소리의 남자 성우가 ‘영국 역사의 가장 위대한 왕! 정부!’ 이러면서 굉장히 진지한 느낌으로 화면이 확확 스쳐 지나가고 대사들이 나오는 2000년대 초반 광고 스타일인데 그걸 패러디해서 웃게 만들어놓았다.

여자 배우들이 ‘미스터리! 히스토리!’ 하고 소개하고, 앤 불린도 우아하거나 섹시하게 등장하는 게 아니라 셀카 찍다가 ‘어머 미안해. 내 타임 놓쳤네’ 하면서 놀이를 시작하는 것처럼 등장하게 만들었다.

여왕들의 이야기, 우리들의 이야기

Q. 영국 역사에 굉장히 중요한 순간을 한국 관객들은 모르는데. 연출가로서 어떤 부분을 신경 쓰셨나.

A. 쭉 말씀드린 이런 역사적 사건들이나 맥락이 음악과 노래 안에 들어가 있긴 하지만 굉장히 압축되거나, 혹은 유머나 패러디처럼 처리하는 게 많아서 다 받아들이긴 어렵다. 그런데 이 공연은 역사를 이해하고 서사를 이해하는 공연은 아니다.

이 작품은 여성주의적인 입장에서 각각의 캐릭터가 놓인 상황들을 다양한 각도로 보여준다. 쭉 보고 나면 이게 여왕들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금 여기 살아가고 있는 여러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결정적으로 마지막 주자 캐서린 파에 가면 직설적으로 얘기한다. 캐서린 파는 간호사처럼 막판에 죽어가는 헨리 8세를 보필하고 간병해 주고 임종을 함께 한다. 헨리 8세가 죽은 지 얼마 안 돼 다른 남자와 재혼하는데, 중요한 건 캐서린 파가 영국 여성 최초로 책을 써서 출판했다는 사실이다. 책 내용 자체는 보수적이지만, 여성의 이름으로 여성들이 읽는 책을 썼고 여성들도 교육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당시 여성들은 대부분 교육받지 못했는데 캐서린 파는 가정환경 덕분에 굉장히 교양 있고 많이 배웠던 사람이다. 당시 초상화는 모두 남자들이 그리는 거였고, 특히 왕가의 초상화는 모두 남자 화가가 그렸다. 그런데 캐서린 파의 초상화는 여자 화가가 그렸다. 뮤지컬에서도 잠깐 언급되는데, 이런 면을 보면 캐서린 파는 굉장히 진취적인 캐릭터이다.

Q. 캐릭터 한 명 한 명이 각자 노래를 하지만, 그때마다 다른 캐릭터들이 옆에서 다 코러스로 받쳐주고 있더라. 이것부터 벌써 이게 경쟁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

A. 이 뮤지컬은 한 캐릭터가 자기 넘버를 부를 때 다른 배우들이 각자 자기 캐릭터를 하거나, 혹은 노래 안에 등장하는 하인들이나 남자들, 친구들 같은 캐릭터로서 서포트해 주고 응원해 주는 느낌으로 진행된다. 그러니까 경쟁하고 있지만, 또 서로 도와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인상적인 구간이 제인 시모어의 넘버에 나오는데, 여기서 굉장히 고음으로 확 치고 가는 부분이 있다. 이 노래에 대해 영국에서 온 협력 연출가가 얘기한 게 있는데, “아이를 낳고 죽게 되고 고통을 느끼는 캐릭터의 에너지로, 내가 뻗은 손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수백 년 전에 죽은 진짜 제인 시모어, 그리고 영국에서 혹은 뉴욕에서 이 장면을 연기하는 또 다른 배우들, 또는 아이를 잃거나 아이 때문에 죽은 수많은 여성들과 함께 손을 잡는다고 생각하고 노래를 불러보자”고 했다.

이건 여성 연출가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일 수 있겠다 생각하면서, 저도 이해가 잘 되었고, 이후에 그 장면의 밀도와 에너지가 확 달라지는 걸 느꼈다.

한국 배우 최고, ‘국뽕’ 아닙니다

Q. 내한공연과 라이선스공연이 이어졌는데, 차이가 있다면.

A. 라이선스 공연도 ‘레플리카’ 프로덕션이니 오리지널 공연과 거의 똑같은데, 가사를 자막으로 보느냐 우리말로 듣느냐의 차이가 있다. 우리가 자막 보면서 따라가는 데 익숙하긴 하지만, 가사가 배우의 말과 목소리로 들릴 때 조금 더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가사 번역 작업에 공을 많이 들였다.

가사가 흥미롭고 라임이 많아서, 영어로 부르는 걸 듣고 있으면 뜻은 몰라도 ‘야, 이렇게까지 라임을 맞춘다고?’ 할 정도로 운율이 딱딱 맞는데, 우리말로 옮기는 게 쉽지 않았다. 맞출 건 맞추고 포기할 건 포기하고, 막판까지 계속 연구했다. 황석희 번역가가 끝까지 수고해 주셨고, 여러 사람들이 매달려 꽤 오랜 시간 동안 가사 작업을 했다. 실제로 부르면 어떻게 되나 보고 수정하고, 이런 작업을 두세 달 동안 계속하며 한 곡 한 곡 가사를 다듬었다.

연습을 시작하고 나서는 영국에서 온 연출가와 함께 듣다 보니 ‘이 가사가 원래는 이런 의도였구나’ 해서 또다시 바뀐 경우도 있다. 한국어 가사로 바꾸는 게 어려웠고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오리지널 연출팀에서 한국팀 번역이 더 좋다고 한 부분도 있었다.

Q, 어떤 부분이었나.

A. 예를 들자면 ‘하우스 오브 홀바인’ 넘버에서 ‘다스 이스트 굿’이라는 문장이 계속 나온다. 영어로는 ‘That is good’ 이라는 뜻인데, 이 부분이 원래 대본에는 더 많은 독일어 단어로 채워져 있었지만,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그냥 ‘다스 이스트 굿’으로 다 바꾸고, 라임을 글자 맞춰서 넣어 놨더니, 이게 더 재미있다고 하더라.

그런 작업들이 좀 어려웠지만 꾸준히 노력을 했고, 그래서 한국 배우들이 이걸 하고 있는 걸 보면 개인적으로 훨씬 더 좀 감동이 있는 것 같다. 저 배우들이 지금 저렇게 무대를 채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동적이다. 여배우 6명에 밴드 멤버들도 모두 여성이고, 그러니까 10명의 여성이 무대를 채우고 있다는 게 지금이 2023년인데 그렇게 감격스러운 일인가 싶기도 하지만, 당연히 앞으로 저런 일들이 더 많아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리고 이게 처음 있는 일도 아니지만, 저렇게 배우들이 신나게 행복하게 화려하게 노래 부르고 있다는 게 감동적이다. 그런 부분들을 한국 배우들이 더 잘 표현하는 것 같다.

특히 다 같이 ‘우리를 하나로 묶을 수 없어, 내 삶 내 영광 이제 되찾을 거야’ 이런 노래를 할 때 가사를 정말 소중하게 불러주는 느낌이다. 이게 여섯 여왕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각자 배우들 자신의 이야기들인 것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고, 그것들이 관객들에게 잘 전달되기를 원하는 이야기라서, 조금 더 감격스럽게 느껴진다.

공연을 통해 한국 배우들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더 커졌다. 처음엔 한국 배우들이 이걸 잘할 수 있을까 걱정도 많이 했는데 훌륭하게 기대 이상으로 해냈기 때문에, ‘국뽕’이 아니라, 정말 한국 뮤지컬 배우들 독하구나, 정말 열심히 하는구나, 생각했다.

김태형 씨는 대화 내내 ‘왕비’와 ‘여왕’이라는 단어를 혼용했습니다. 사실 ‘Queen’은 ‘왕비’라는 뜻도, ‘여왕’이라는 뜻도 다 갖고 있습니다. ‘식스’ 주인공들은 헨리 8세의 ‘왕비’이면서, 무대 위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노래하며 빛나는 ‘여왕’이기도 합니다.

창작자인 토비 말로우와 루시 모스가 한국을 다녀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요, 이들은 한국 공연을 보는 내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고 극찬했습니다. 토비는 ‘왜 많은 작품 속 주요 넘버들은 남성 캐릭터에게 주어지고 여성 캐릭터의 곡은 상대를 향한 사랑 노래에 그치는가’라는 질문에서 작업이 시작됐다고 했습니다. 또 루시는 '여섯 왕비들에 대한 인식을 높이려는 게 관심사가 아니라, 역사가 여섯 왕비들을 기록하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하죠.

대학생들이 만들었던 작품이 이렇게 ‘대박’을 터뜨려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까지 진출하고 한국 공연까지 이뤄졌다니. 자칫 ‘궁중 암투극’이 되기 쉬운 헨리 8세의 왕비 이야기를 이렇게 기발하게 뒤집었다니. 역시 예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게 이렇게 ‘뒤집어 보기’와 ‘다시 보기’인 것 같습니다. 뮤지컬 ‘식스’는 가볍고 유쾌하고 발랄하지만,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여운을 남깁니다. 우리 역사 속에도 소재는 무궁무진한데 재미있는 공연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뮤지컬 ‘식스’를 보고 나서 여성국극 이야기를 다룬 창극 ‘정년이’, 그리고 ‘흥보 마누라 이혼소송 사건’을 봤는데, 장르도 다르고 내용도 다르지만, 왠지 비슷한 맥락으로 다가왔습니다. 밴드 멤버들까지 모두 여성이 등장하는 ‘식스’는 여성국극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한때 엄청난 인기를 누렸지만 역사에서 지워지거나 폄훼됐던 ‘여성국극’을 ‘정년이’가 다시 무대 위로 불러낸 것처럼, ‘식스’도 역사가 여섯 왕비들을 기록한 방식에 의문을 갖고 새로운 관점의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또 생활력 없는 흥보 대신 생계 유지를 위해 온갖 고생을 다했으면서도 이름조차 잃어버린 ‘흥보 마누라’는 ‘헨리 8세의 여자들’이라는 한 꾸러미로 엮여 고정된 이미지에 갇혀 있던 왕비들과 비슷한 처지 아닐까 싶었습니다.

김태형 씨가 출연한 팟캐스트에는 글로 다 적지 못한 생생한 얘기들, 그리고 한국 공연 장면들을 맛보기로 즐길 수 있습니다. 관심 있으시면 직접 보셔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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