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탈출한 푸틴의 첫 총리, 미하일 카시야노프

미하일 카시야노프는 러시아 내부에서도 독특한 정치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옐친의 최측근으로 재무 장관을 역임한 뒤, 푸틴이 대통령이 되자 그가 임명한 첫 국무총리가 됐습니다. 2000년부터 2004년까지 러시아 국정의 이인자로 개혁 정책을 진두지휘하던 인사였습니다. 푸틴 대통령이 취임 초기에는 각료들과 스킨십이 지금보다 많았기 때문에 카시야노프와 푸틴이 함께 있는 영상 자료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정책 이견 때문에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 그는 러시아 야당인 인민 자유당 대표가 됐습니다. 푸틴이 독재자로 악명이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푸틴이 '가장 죽이고 싶어 하는 야당 인사'로 외신에 자주 이름이 거론됐습니다. 그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에는 러시아를 탈출했습니다. 정부 비판을 한 사람들에게 최대 징역 15년형으로 처벌할 수 있는 법이 통과되면서부터였습니다.

그를 인상적으로 본 건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 BBC에서 했던 한 다큐멘터리였습니다.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카시야노프는 푸틴에 대해 누구보다 자세한 설명을 했습니다. 그는 푸틴의 얘기를 전언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의 생각과 행동 방식에 대해서 자신이 관찰하고 함께 일했던 경험을 가지고 말하는 아주 드문 취재원이기도 했습니다. 푸틴 행정부의 넘버 2이자, 야당 지도자로 러시아 여론까지 꿰뚫고 있는 카시야노프의 시각은 우리 독자들에게도 소개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연락하는 일은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인민 자유당 홈페이지를 통해 연락을 했는데, 공보 담당자의 이메일함이 가득 차 있다는 회신이 돌아왔습니다. 정당 기능이 사실상 마비됐을 것이라는 짐작을 할 뿐이었습니다.

그동안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계속 취재하면서 인터뷰를 했던 러시아 인사들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요즘은 유튜브를 통해서 러시아 인사들도 방송 내용에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조회 수를 통해서는 국내 여론에 미치는 영향까지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그동안 취재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줬던 러시아 인사들이 동유럽에 은신 중인 카시야노프와 연락을 하고 있었습니다. 카시야노프를 수소문하던 제게 직접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줬고, 그 덕분에 그와 메신저앱으로 연락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한국 기자의 취재 요청을 흥미롭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동안 제가 방송했던 인터뷰 기사 내용을 유튜브로 보내줬는데, 그는 내용을 보더니 '당신과 인터뷰를 하겠다'라고 답장을 보냈습니다. 이제는 동유럽에 은신 중인 인사와도 취재 의사만 확인되면 화상으로 인터뷰할 수 있는 세상이 됐습니다. 그는 질문을 사전에 보내달라는 요청도 없이 즉석에서 쏟아지는 질문에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카시야노프와 장시간 줌 인터뷰를 했는데 그 내용은 기록할 가치가 있었습니다.

푸틴이 국방 장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방법
헤르손 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 점령한 유일한 주도였습니다. 그만큼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헤르손주는 자포리자, 도네츠크, 루한스크 등과 함께 가짜 주민 투표를 통해 러시아 영토에 강제 합병된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지난 9월 30일, 푸틴 대통령은 모스크바에서 대대적인 합병 자축 행사를 열고 합병된 지역은 '영원한 러시아 영토'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헤르손 시는 그때 당시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동안 인터뷰했던 벤 호지스 전 유럽주둔 미군 사령관은 물론 커트 볼커 전 미국 국무부 우크라이나 특별대표, 레시아 바실렌코 우크라이나 국회의원 모두 헤르손시는 곧 우크라이나의 손에 들어온다고 전망했던 바 있습니다. 헤르손 시는 오른쪽에 드니프로 강이 흐르고 있어 도시를 방어하려면 배수의 진을 치는 구조가 됩니다. 우크라이나군은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서두르지 않고 드니프로 강 서쪽 편을 에워싸는 방식으로 러시아군을 고립시켰습니다. 러시아군은 마리우폴을 점령할 때 도시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면서 점령했습니다. 그들은 정복이라는 목적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에 도시 기능을 완전히 파괴하는 걸 개의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가 헤르손을 장악한 방식은 러시아 방식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도시 기능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러시아가 지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랬더니 실제로 러시아가 제풀에 지쳐 철수했던 겁니다.

김수형
러시아 군대는 왜 이렇게 굴욕적인 철수 결정을 한 건가요?

카시야노프
저는 이번 일이 푸틴에게 굴욕적인 일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우크라이나군에 밀려서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입니다. 해당 (헤르손) 지역의 러시아군은 병참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우크라이나 군대는 너무나 용맹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이번 승리는 심리적인 측면의 성과가 큽니다. 사실 우크라이나는 미국과 서방 국가들로부터 고성능 전쟁 무기를 지원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군대는 러시아군에 필적할 만한 수준이 됐습니다.

그런데 러시아군의 헤르손 철수 작전은 좀 이상한 곳이 있습니다. 지난 9일 군사 작전 결정 과정이 러시아 국영 TV를 통해서 러시아 전역에 중계됐습니다. '알레포의 도살자'로 불리는 수로비킨 우크라전 총사령관이 헤르손 방어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쇼이구 국방장관이 이에 동의하면서 철수를 승인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군인들이 고뇌에 찬 결정을 연기하며 TV로 내보내는 건 대단히 이례적인 일임에 분명합니다.

김수형
이런 영상을 러시아는 왜 TV로 내보낸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카시야노프
이번 결정은 푸틴의 평판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책임을 쇼이구 국방장관에게 돌리기 위해서 영상을 공개한 것입니다. 저는 (영상 공개가) 푸틴은 후퇴를 원하지 않았고 장관이 내린 결정이라는 것을 러시아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선전 선동 조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푸틴 대통령이 이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김수형
헤르손을 점령했으니 우크라이나는 이제 크름 반도를 목표로 할 수 있게 됐는데, 이 영토를 곧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까?

카시야노프
우크라이나군이 매우 성공적이고 매우 조심스럽게 작전을 전개할 것입니다. 가까운 미래에 크름 반도 영토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김수형
우크라이나의 승리에는 크름반도를 되찾는 게 포함되는 건가요?

카시야노프
물론입니다. 우크라이나가 빼앗겼던 크름 반도를 포함한 모든 영토를 되찾아야 합니다. 그게 매우 공평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꾸 '푸틴에게 굴욕을 주지 말자'라고 하면서 뭔가를 포기하자고 합니다. 그러면서 푸틴에게 영토를 양보하자고 합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은 이런 영토 문제를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김수형
그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 어떤 협상이 가능할까요?

카시야노프
간단합니다. 우크라이나가 영토를 되찾는 겁니다. 이건 매우 공평하고 당연한 일입니다. 푸틴은 군사 행동을 중단하고 어떻게 안전하게 군대를 철수해야 할지 협상해야 합니다. 젤렌스키는 영토를 되찾는 과정에서 러시아군이 안전하게 퇴각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합니다. 저는 그게 지금 협상에서 논의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푸틴 지지자들도 등 돌렸다"… 급변하는 러시아 여론
지난 9월 말, 러시아에 부분 군 동원령이 내려지면서 징집을 피해 젊은이들이 다른 나라로 썰물처럼 빠져나갔습니다. 이전까지 러시아는 이번 전쟁을 특별 군사 작전이라고 부르면서, 일반 국민들과는 관련 없는 일처럼 선전했었습니다. 하지만 군 동원령 이후로 러시아 전역에는 전쟁의 공포가 급속도로 확산했습니다.

김수형
러시아 여론은 얼마나 나빠진 겁니까? 그게 군 동원령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 건가요?

카시야노프
그렇습니다. 푸틴 대통령은 만만치 않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는 매우 위험한 결정입니다. 전쟁에 동원될 사람들은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징집 대상자 중 다수는 이미 러시아를 떠나 주변 국가로 탈출해서 동원되는 것을 피했습니다. 이미 러시아 국민 다수가 분명히 푸틴에게 화가 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전쟁을 찬성하면서 푸틴 대통령을 지지했거나 중립적이었던 사람들이 이러한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여론의 분위기는 이미 매우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저는 내년 빠른 시일 내에 러시아군이 패배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푸틴 정권은 패배를 시인하는 순간 오래 지속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번 전쟁에서) 패배는 러시아의 모든 문제에 방아쇠를 당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정권 교체가 곧 다가올 것입니다.

김수형
그렇게 여론이 계속 나빠지면, 쿠데타가 일어날 수도 있는 건가요?

카시야노프
저는 그게 쿠데타 방식으로 생길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일반인들은 물론 푸틴의 사람들조차도 현 상황을 모면할 방법과 그들 스스로를 방어할 계획을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결코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겠지만, 푸틴 대통령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푸틴 정부는 제 기능을 못할 것입니다.

핵무기 사용이 물 건너갔다고 보는 이유
푸틴 대통령은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언급하며 "허세가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인 바 있습니다. 국제 사회에 러시아의 핵무기가 강력하다는 걸 여러 차례 상기시킨 바 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도 아마겟돈(인류 최후의 전쟁)을 언급하며 인류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경고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러시아의 핵 위협이 잦아들었습니다. 핵사용과 관련해 다소 수위 조절을 하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습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지난 6일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핵 사용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 니콜라이 파트루셰프 국가안전보장회의 서기 등과 비밀 회담을 가졌다고 보도했습니다. 설리번 보좌관은 러시아와 대화 채널을 통해 소통하고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김수형
푸틴이 점점 궁지에 몰리고 있는데, 핵무기 사용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요?

카시야노프
저는 푸틴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미국과 서방 국가로부터 아주 강한 경고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핵무기를 사용하면) 푸틴에게 재앙적인 결과가 일어날 것입니다. 사실 핵무기를 사용해도 전장의 상황을 바꾸지는 못할 것입니다. 핵무기는 푸틴을 승리로 이끌 수 없습니다. 심지어 그의 군대도 핵무기에 대해 부정적 반응을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푸틴과 그의 권력 핵심층이 핵무기를 사용하는 게 무의미하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생각합니다.

김수형
그래도 러시아가 핵무기를 사용하게 되면 어떤 재앙적인 결과가 일어나는 건가요?

카시야노프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 미국, 영국, 프랑스가 핵을 사용해서 대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핵 확산과 핵무기 사용에 매우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또 중국을 언급해야 합니다. 중국은 분명히 핵무기 사용에 반대합니다. 중국은 푸틴 정부가 핵무기 사용을 고려하는 전체 스토리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핵을 쓰게 되면 그 결과는 러시아 군대와 러시아 국가는 물론 푸틴 개인에게도 재앙적으로 미칠 것입니다. 그래서 핵 옵션은 푸틴의 손에서 떠났다고 생각합니다.

'현상 유지'가 푸틴의 마지막 카드
푸틴은 개전 초기 키이우까지 진격해 젤렌스키 정권을 교체하는 걸 목표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 작전에 실패한 이후 도대체 러시아가 왜 전쟁을 하는지 알 수 없게 됐습니다.

김수형
푸틴은 젤렌스키 정권의 교체를 원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왜 그런 목표를 세웠던 겁니까?

카시야노프
그건 가장 먼저 세웠던 목표였습니다. 왜냐하면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보통 국가로 번영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크라이나가 민주주의 국가로 남게 되는 반면 러시아인들은 독재 국가에서 매일 인권 침해가 일어나는 일이 벌어지는 상태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럴 가능성을 없애려고 우크라이나 정권 교체를 하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가능성은 영원히 없어졌습니다.

김수형
그렇다면 러시아의 출구 전략은 무엇입니까?

카시야노프
두 번째 목표는 그냥 크름 반도를 지키고, 크름과 돈바스를 연결하는 육지 통로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러시아가 협상을 하자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러시아는 지금처럼 상황을 동결시키길 원합니다. 강제합병은 전 세계가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몇 년 후에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고, 또 다른 침략이 앞으로 더 있을 것이며, 푸틴을 막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의 승리는 전 세계의 승리가 됐습니다.

카시야노프와의 단독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한 '김수형의 글로벌 인사이트'는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디자인: 옥지수, 박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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