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이번에 닻을 올리는 스프에 파트너로 참여하게 되어 무척 설렙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할 예정입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정치 양극화' 미국 중간선거
뉴스페퍼민트가 오늘 소개하는 첫 번째 글의 주제는 스프 출범일이 11월 14일로 결정된 순간 이미 정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미국 중간선거에 관한 글이죠. 11월 들어 뉴욕타임스에 올라온 칼럼의 2/3는 예상대로 중간선거에 관한 글이었습니다.

미국 중간선거(midterm election)는 대통령의 4년 임기 한가운데 치르는 전국 단위 선거입니다. 미국에서는 4의 배수인 해마다 대통령 선거가 있고, 올해 2022년처럼 4의 배수가 아닌 짝수 해에는 중간선거를 치릅니다. 중간선거에서 임기가 2년인 하원은 전체 의석 435석을 새로 뽑고, 6년 임기인 상원은 전체 100석의 1/3을 새로 뽑습니다. (이번에는 오클라호마주의 연방 상원 보궐선거까지 총 35석을 두고 선거를 치렀습니다.) 이 밖에 주지사와 (우리나라 선관위원장 역할을 하는) 주무장관 등 주 정부의 요직을 중간선거 때 선출하는 주도 많습니다.

역사적으로 중간선거에서는 이른바 ‘여당 심판론’이 크게 작용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4년 전 2018년 중간선거일 겁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첫 2년을 겪고 나서 치른 선거에서 미국 유권자들은 100년 만에 중간선거 기준으로 가장 높은 투표율을 기록합니다. 보통 중간선거 투표율은 40%대 초반에 그치는데, 2018년 투표율은 무려 49.4%나 됐습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에게 실망하거나 분노한 민주당 지지자들이 대거 결집한 결과 민주당은 8년 만에 하원 다수당 자리를 되찾았죠. 미국 정당을 대표하는 색깔로 민주당은 파란색, 공화당은 빨간색을 씁니다. 2018년 중간선거는 푸른 파도(blue wave)가 미국을 뒤덮은 해로 기록됐습니다.

이번 중간선거를 앞두고는 4년 전과 반대로 붉은 파도(red wave)가 크게 일 거라는 예상이 많았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은 40% 안팎에 머물렀고, 수십 년 만에 가장 심각한 인플레이션, 팬데믹 이후 더딘 회복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비롯된 국제 에너지 위기 등 경제 지표도 여당인 민주당에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2024년 대선에 다시 도전할 거로 보이는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퇴임 후 치러진 중간선거에 당내 경선 과정부터 적극적으로 개입해 공화당 후보들을 자신의 지지자로 채워 넣으며, 붉은 파도에 올라탈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붉은 파도는 일지 않았습니다. 선거 이튿날인 9일 밤 현재 공화당은 하원 다수당이 될 것이 확실시되지만, 의석수는 기대치를 밑돌 것으로 보입니다. 민주당보다 40석 가까이 많은 의석을 차지할 거란 예상도 있었지만, 지금 개표 상황을 보면 두 당의 하원 의석수 차이는 20석 이하일 것으로 보입니다. 상원은 예상과 달리 민주당이 다수당 지위를 지킬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는 한 달 뒤 결선투표를 치르게 된 조지아주 상원 선거 결과에 달렸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의 인기가 4년 전 트럼프 대통령의 인기에도 못 미쳤던 걸 생각하면 어쨌든 민주당으로선 가슴을 쓸어내릴 만한 결과입니다.

트럼프주의(Trumpism)는 아직도?
선거 결과에 대한 분석이나 미국 정치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 소개, 앞으로의 정치 지형을 내다보는 글은 다음에 쓰기로 하고, 오늘은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유권자 지형과 표심의 변화를 들여다보려 합니다.

이번 선거에서도 정치적 양극화 추세는 어김없이 드러났습니다. 거칠게 요약하면 도시에서는 대체로 민주당이 승리했고, 반대로 근교, 시골로 갈수록 공화당이 더 많은 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가지 뚜렷한 표심의 이동이 눈에 띕니다. 바로 세계화, 자유무역, 기술 발달로 조성된 새로운 경제 체제에서 경제적으로 뒤처진 노동자 계급이 빠른 속도로 민주당을 저버리고 있는 겁니다.

2016년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른바 "러스트벨트(rust belt, 중서부 제조업 중심지로 1980년대 이후 경제적으로 쇠락한 지역)의 백인 노동자들"은 지금도 트럼프 지지층의 한 축을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이들이 겪은 경제적 어려움은 기름값이나 장바구니 물가처럼 올해 들어 나타난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어려움보다 훨씬 더 뿌리가 깊습니다. 바이든 행정부가 인플레이션을 완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이들이 다시 예전처럼 민주당에 마음을 열어줄지는 미지수라는 말입니다.(1970년대까지만 해도 러스트벨트의 노동자들은 비교적 잘 조직된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민주당의 든든한 지지층을 이뤘습니다.) 심지어 트럼프를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민주주의의 적,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고 매도하는 건 이들이 처한 어려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수권정당답지 못한 행동일 겁니다.

이번 선거에서는 바람을 일으키는 데 실패했지만, 트럼프주의(Trumpism)에 아직 기회는 여러 번 더 있습니다. 게다가 미국은 2년마다 한 번씩 선거가 있는 나라입니다. 공식 선거운동 기간도 없고, 대통령 경선은 거의 1년 가까이 전국을 돌며 하는 미국에서 2년은 생각보다 금방 지나갑니다. 민주당으로서는 다음번에도 붉은 파도를 막으려면, 유권자들이 왜 민주당에 등을 돌렸는지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선거를 앞두고 올라온 많은 칼럼 가운데 이런 흐름을 가장 잘 짚어낸 토마스 에드살(Thomas B. Edsall)의 칼럼을 우선 번역했습니다. 에드살은 정치학자,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학회에 공부하러 오는 언론인"으로 유명합니다. 칼럼에 등장하는 인터뷰이들도 정치학, 경제학계의 올스타 라인업입니다.

*토마스 에드살(Thomas B. Edsall)은 워싱턴 D.C.에서 매주 한 편씩 정치, 인구 구조, 불평등에 관한 칼럼을 쓴다.

텍사스주 롭스타운에서 도널드 트럼프를 기다리고 있는 지지자들. 지지자들이 맞춰 입은 티셔츠에 “RED WAVE 2022”라는 문구가 선명히 보인다. 사진=Jordan Vonderhaar/뉴욕타임스

중간선거를 앞두고 미국의 경제는 계속 저점을 벗어나지 못했다. 백인 노동자의 표심은 점점 더 야당인 보수 공화당으로 쏠리고 있다. 표심의 변화 폭이 예상보다는 크지 않아 보이지만, 전체 유권자 가운데 아주 중요한 집단인 백인 노동자들이 민주당을 향해 느끼는 적대감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한다. 이들에게 민주당은 점점 좋아할 수 없는, 그래서 도저히 표를 줄 수 없는 정당이 되어가고 있다.

MIT 경제학과의 다론 아체모글루(Daron Acemoglu) 교수는 필자와 이메일로 나눈 인터뷰에서 "지금껏 민주당이 보인 행보를 언급하지 않고서는 노동자 계층의 보수화, 우경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생산 공정의 급격한 자동화, 중국과의 자유무역 등 특히 4년제 대학 학위가 없는 노동자들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정책은 대부분 민주당 정부가 입안하고 추진했습니다. 민주당 정치인들은 이 정책들을 도입하면서 자신의 치적으로 삼을 생각만 하는 듯했어요. 대학 학위가 없는 백인 노동자들의 눈에 민주당 정치인들은 자기들이 맞닥뜨린 곤경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을 겁니다. 유권자가 표로 정치인을 심판할 수 있는 선거를 앞두고 이는 민주당에 치명적인 악재라고 할 수 있죠."
다론 아체모글루, MIT 경제학과 교수

백인 노동자 계층 사이에서 민주당의 인기가 계속 떨어지는 것은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드러난다. 지난 10월 22일 미국기업연구소(AEI, American Enterprise Institute)가 펴낸 보고서가 인용한 수치를 살펴보자. 대학 학위 유무에 따라 백인 유권자들이 선호하는 정당은 계속 선명하게 갈라지고 있다. 지난 대선 이후 처음으로 두 집단의 정당 지지율 차이가 무려 40%P로 벌어졌다. 2020년 대선 때 이 차이는 33%P였다. 대학 학위가 있는 백인 유권자 사이에서는 민주당의 지지율이 공화당보다 13.6%P 높다. 그런데 대학 학위가 없는 백인 유권자 사이에선 공화당이 민주당을 27%P 이상 앞선다. 대학 학위가 없는 백인 유권자 사이에서 민주당의 지지율은 줄곧 30% 초반에 머물러 있다. 중간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온 이번 달(10월) 발표된 여론조사에서 단 한 번도 34%를 넘지 못했다. 아마도 민주당이 2020년 바이든 대통령이 기록한 37% 득표율을 재현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MIT 경제학과의 데이비드 오터(David Autor) 교수는 자유무역이 불러온 충격파가 백인 노동자들이 공화당 지지로 돌아서는 데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에 관해 많은 논문을 썼다. 오터 교수는 현재 여론조사에서 드러나는 유권자들의 표심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중국과의 자유무역으로 인해 발생한 계급적, 문화적 분노 현상은 이제 백인 노동자들 사이에서 더는 주변부 정서가 아니라 일종의 주류 정서가 됐습니다. 여기에는 기술적, 문화적, 정치적 요인도 있었는데, 저는 이 분노가 쉬이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산불이 났을 때처럼 지금 백인 노동자들의 분노, 불만은 계속해서 스스로 바람을 일으켜 불씨를 나르고 사방으로 번지고 있어요. 그동안 경제가 상대적으로 괜찮았을 때는 그 분노가 잠잠해 보였지만, 지금은 경제적인 상황도 좋지 않죠. 이글이글 타는 불길 근처에 연료가 될 만한 게 너무 많아 보입니다."
데이비드 오터, MIT 경제학과 교수

오터 교수는 "지난 2년간 팬데믹으로 인해 소득 불평등이 급격히 줄어든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주로 제조업에 종사하는 대학 학위 없는 노동자들이 상대적 임금 감소 탓에 느끼던 박탈감과 불만도 줄어들지 않을까? 오터 교수는 이 점이 민주당에 호재로 작용할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정도는 크지 않을 거라고 선을 그었다.

"불평등이 감소했다고 해도 너무 급격한 인플레이션 때문에 내 주머니 사정이 나아졌다고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예요. 오히려 소득 기준으로 보면 중상층 노동자들의 소득이 (저소득층 노동자들의 소득에 비해) 급감했죠. 그러니까 불평등이 완화되고 격차가 줄어든 게 내 소득이 높아져서가 아니라 내 소득이 줄어드는 사이 다른 사람의 소득은 더 많이 줄어서 그렇게 된 거라면 별로 좋아할 일이 아니죠."
데이비드 오터, MIT 경제학과 교수

MIT는 2020년에 "미래의 일자리(The Work of the Future)"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펴냈다. 전체 제목은 "미래의 일자리: 지능적인 기계의 시대에 더 좋은 일자리 만들기"였다. 경제학자인 오터 교수와 함께 기계공학과의 데이비드 민델(David Mindell) 교수, MIT 산업진흥연구소의 엘리자베스 레이놀즈(Elisabeth Reynolds) 사무총장이 저자로 참여했다. 보고서는 기술의 변화가 노동자들에게 미친 부정적인 영향에 맞서 미국이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한 점을 지적하며, 주요 선진국 가운데 기술 변화에 따르는 대응책을 마련하는 데 완전히 실패한 나라는 미국이 유일하다고 꼬집었다.

미국 정부가 내놓은 제도와 정책들은 기술 변화가 노동시장에 미치는 압력을 상쇄하지 못했고, 어떤 경우에는 문제를 악화시키기도 했다. 이 점에서 미국은 다른 나라들과 뚜렷이 구별된다. 미국은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통로가 사라질 때 이를 대체하거나 보완하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 그 결과 연방 최저임금은 유명무실한 수준에서 방치됐다.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해주던 장치는 아무런 대안 없이 사라졌다. 그러는 사이 미국 정부는 중국, 멕시코 등 개발도상국과의 자유무역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자유무역으로 인해 창출된 부와 이윤 가운데 최소한 일부는 미국 내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거나 이들의 재취업을 돕는 데 쓰여야 했지만, 미국 정부는 그러지 않았다.

[보고서] 미래의 일자리 / MIT

아체모글루 교수는 이메일에서 "엘리트들이 대학 학위 없는 노동자뿐 아니라 대다수 노동자에게 매우 불리한 선택을 독단적으로 내린 것이 문제를 키웠다"고 꼬집으면서, 앞으로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로봇이나 인공지능이 발전하면서 점점 더 많은 직업이 자동화될 겁니다. 자동화는 그동안 대학 학위가 없는 노동자들이 종사하던 ‘괜찮은 직업’을 꾸준히 파괴해 왔죠. 이제 다음 차례는 4년제 대학 학위는 있지만, 석사 이상 학위는 없는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될지 모릅니다. 그럼 결국, 전반적인 불평등은 더욱 심화하겠죠."
다론 아체모글루, MIT 경제학과 교수

아체모글루 교수는 미국 산업 현장 곳곳에 로봇이 더 많이 도입될 거라면서도 “대학 학위 없는 노동자들의 일자리는 이미 상당 부분 사라졌으므로, 새로운 자동화가 이들의 일자리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은 근본적으로 더 큰 영향을 미칠 겁니다. 자동화도 중요하지만, 노동자를 감시하는 체계가 구축되는 점도 문제입니다. 디지털 기술은 노동자들의 근태 등 다양한 부분을 감독하고 관리하는 데 점점 더 많이 쓰이고 있으며, 이미 노동자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다론 아체모글루, MIT 경제학과 교수

아체모글루 교수가 보스턴 대학교의 경제학자 파스쿠알 레스트레포(Pascual Restrepo) 교수와 지난 9월 펴낸 "작업, 자동화, 미국 임금 불평등의 심화"라는 제목의 논문을 보면, 1980~2016년 일어난 임금 구조의 변화 가운데 50%는 자동화로 인해 일어났다. 그 사이 고등학교를 중퇴한 노동자들의 임금은 남성 8.8%, 여성 2.3% 감소했다.

아체모글루, 레스트레포 교수는 사람이 하던 일이 기계로 대체되는 작업 대체(task displacement)로 인해 다양한 부작용이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1980~2016년 데이터를 토대로 살펴보면, 작업 대체율이 10%P 오를 때마다 고용률이 4.4% 감소했고, 구직 자체를 포기하는 사람의 비율도 3.5%P 늘었다."

하버드대학교 케네디 스쿨의 경제학자 대니 로드릭(Dani Rodrik) 교수는 필자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제조업 분야에서 일자리가 다시 늘어나는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8월 서명한 "반도체산업 육성법(CHIPS and Science Act)" 덕분에 제조업 생산 공장 일부를 다시 미국에 짓게 됐지만, 로드릭 교수는 그로 인한 고용 효과는 아주 미미할 거라고 내다봤다.

"반도체산업 육성법은 대학 학위가 없는 미국 노동자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창출해내지 못할 거예요. 반도체 등 첨단 제조업 분야는 자본 집약도가 높고, 주로 숙련도가 높은 노동자가 필요한 분야라서 인력 투자도 그쪽에 집중됩니다. 지정학적으로 국지적인 이득을 누리는 곳은 있을지 모르지만, 현재 미국 안에서 좋은 일자리가 부족한 곳의 일자리 수요를 늘리는 데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정책입니다."
대니 로드릭, 하버드대학교 케네디 스쿨 교수

로드릭 교수는 이어 제조업 분야의 세계화가 일자리와 경제, 나아가 정치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미국의 경쟁국 중에는 GDP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을 꾸준히 늘려온 나라들이 있습니다. 대만이나 한국이 대표적이죠. 그러나 이 나라들을 보면, GDP에서 제조업 비중은 늘어났어도 제조업의 고용 효과는 갈수록 떨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주요 선진국 가운데 전체 고용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지 않은 나라가 없어요."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 곳곳에서도 세계화가 노동시장에 미친 충격파는 우파 포퓰리즘이 세를 불리는 데 결정적인 원인이 됐습니다. 경제적인 충격은 대개 문화나 정체성에 관한 논쟁에 불을 붙이면서 정치적인 폭발력을 얻곤 합니다. 다시 말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유권자들 사이에서는 외부인에 대한 반감이 커집니다. 사회적으로 정체성과 문화적 분열의 골이 깊어질수록 우파 성향 후보들이 국수주의에 호소에 표를 모으기는 더 쉬워지죠."
대니 로드릭, 하버드대학교 케네디 스쿨 교수

로드릭 교수가 2021년 4월 펴낸 논문 "세계화는 어떻게 포퓰리즘을 추동하는가?: 경제, 문화, 그리고 우파 포퓰리즘의 부상"에는 2016년 대선에서 (지난번 대선과) 지지 후보를 바꾼 사람들에 관한 분석이 나온다.

2012년에 오바마를 찍었지만, 2016년에는 트럼프를 찍은 유권자들을 살펴보면, 기존 공화당 지지자들과 조금 다른 특징이 나타난다. 보통 공화당 지지자들은 부유하고 사회적 계층이나 계급도 높은 경우가 많다. 그런데 2016년 트럼프를 찍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닥쳤거나 닥칠 경제적 위기를 걱정하며, 스스로 사회적으로 상류층에 속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전통적인 공화당 지지자들과 자신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 새로 유입된 트럼프 지지자들은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처지를 크게 우려하는 동시에 무역, 이민, 금융 등 세계화와 관련 있는 모든 것들을 극도로 혐오한다.

[논문] 세계화는 어떻게 포퓰리즘을 추동하는가? 경제, 문화, 그리고 우파 포퓰리즘의 부상 / 대니 로드릭 하버드대학교 케네디 스쿨 교수

나는 하버드 케네디 스쿨에서 도시 정책을 연구하는 고든 핸슨(Gordon Hanson) 교수에게 이런 부작용, 즉 세계화가 노동자 계층에 미치는 악영향이 완화될 가능성이 있는지 물었다. 핸슨 교수는 "적어도 한동안은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지금 자유무역과 동의어나 다름없는 정당으로 인식되고 있어요. 클린턴 행정부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추진해 성사했고, 중국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시켰죠. 오바마 행정부는 환태평양 경제동반자협정(TPP, Trans-Pacific Partnership)에 집중했고요. 자유무역의 산물들은 제조업 일자리를 앗아간 주범으로 여겨지고 있어요."
고든 핸슨, 하버드대학교 교수

핸슨 교수는 대학 교육을 받은 적 없는 이들의 보수화, 우경화가 제조업 일자리가 빠르게 사라진 2000년대 초반부터 두드러졌다고 지적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공화당 내에서 보수적인 색깔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정치인들이 점점 더 많은 지지를 받기 시작했어요. 이때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져 타격을 받은 지역은 대부분 2010년대 들어서도 경제 회복이 더뎠거든요. 그 말은 곧 이때 공화당으로 갈아탄 대학 학위 없는 노동자들이 다시 민주당에 마음을 줄 이유가 별로 없다는 뜻이죠. 그동안 대학 학위 없는 저숙련 노동자들의 우경화를 부추길 만한 사건이 또 일어나지는 않았어요. 그렇다고 민주당이 다시 지지세를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만큼 이들이 처한 경제적 상황이 나아지지도 않았어요. 해외로 이전한 공장을 몇 개 다시 미국에 열어봤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할 거예요."
고든 핸슨, 하버드대학교 교수

핸슨 교수는 2024년에 공화당은 "2016년에 써먹은 전략과 메시지를 그대로 써도 될 것"으로 예측했다. 반면 민주당은 세계화의 피해를 본 지역에 사는 유권자들에게 효과적으로 내놓을 만한 메시지를 만들지 못할 것으로 내다봤다.

오터 교수는 2022년 7월에 "기술 변화가 노동시장에 미친 영향: 절대적인 기대에서 일리 있는 낙관론으로, 또다시 막막한 불확실성의 영역으로"라는 논문을 펴냈다. 논문에서 오터 교수는 인공지능이 로봇과 자동화로 할 수 있는 것들의 영역을 얼마나 넓혔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기계는 이제 사람이 하던 단순한 반복 작업을 대체할 뿐 아니라, 훨씬 더 복잡한 업무도 처리할 수 있다. "어떤 작업의 원칙과 절차를 빠짐없이, 분명하게 쓸 수 있다면 그 작업은 기계에는 단순한 반복 작업이 된다. 이런 작업의 원칙과 절차를 컴퓨터 소프트웨어에 입력해 놓으면, 기계는 소프트웨어의 명령에 따라 그 작업을 훌륭히 처리한다."

반대로 "자전거 타기, 위트 있는 농담 하기처럼 애매한 지식을 기준으로 하는 작업"은 기계가 프로그램화해서 수행하기 쉽지 않다. 즉, 작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각각의 원칙과 절차가 명확히 정의되지 않고, 다들 암묵적으로 아는 것에 기대는 경우 기계가 그 절차를 파악하기 어렵다.

오터 교수는 인공지능의 등장이 기계가 업무 지침을 이해하고 수행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고 설명한다. "특히 원칙과 절차를 명시해 둔 단순한 반복 작업만 할 수 있던 기존의 제약을 인공지능은 넘어섰다. 소프트웨어와 프로그램 코드에 명확히 쓰여 있지 않은 지식이라도 인공지능이 스스로 그 행간의 ‘애매한 지식’을 찾아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오터 교수는 의자를 만드는 작업을 예로 들었다.

"의자를 명확하게 정의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특히 의자를 제조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정의는 끝도 없다. 예를 들어 의자라면 다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의자 다리가 몇 개 있어야 하나? 등받이도 있어야 하는데, 등받이는 어느 정도 크기에 어떤 모양이 적당한가? 의자는 모름지기 앉았을 때 편안해야 하는데, 어떤 의자가 편안한 의자인가? 이 기준을 객관적으로 명확하게 정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너무 엄격하게 정의하면 등받이가 없는 스툴이나 흔들의자는 의자의 범주에서 빠질 테고, 반대로 너무 느슨하게 기준을 정하면 탁자나 부엌의 조리대도 의자로 분류될 것이다."
데이비드 오터, MIT 경제학과 교수

오터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인공지능은 이 문제를 귀납적인 방식으로 푼다. 인공지능은 의자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연연하지 않는다.

"인공지능은 사례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본다. 단 인공지능이 들여다보는 이미지(사진)에 정확한 이름이 붙어있어야 하고, 충분한 처리 능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두 가지 요건만 충족되면, 인공지능은 아주 빠른 속도로 수많은 사진을 들여다본 뒤 “의자”를 통계적으로 유추해낸다. 즉, 흔들의자나 스툴은 “의자”로, 반대로 탁자나 조리대는 “의자가 아님”이라고 인식할 수 있게 정확히 이름표를 달아둔 사진을 수백만 장 보고 나면, 인공지능은 다리가 몇 개, 등받이 유무 같은 조건이 없어도 처음 보는 사진 속 물건이 의자인지 아닌지 상당히 정확하게 가려낼 수 있다."

"이 과정을 학습이라고 부르는데, 인공지능이 정확히 어떤 기준으로 물건을 가려내는지 인간은 모른다. 인공지능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애매한 지식’을 찾아내는 셈이다. 학습 과정 어디에도 인공지능이 의자를 가려내기 위해 명시적으로 짜둔 코드나 분류 기준, 원칙이 없다. 대신 인공지능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통계적 연관성을 반복적으로 유추, 학습해 구축한 분류 체계를 토대로 결정을 내린다."
데이비드 오터, MIT 경제학과 교수

오터 교수는 앞서 공정 자동화로 주로 대학 학위가 없는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사라졌던 데 비해 인공지능이 초래할 공정의 변화는 상대적으로 고학력, 고숙련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위협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공지능은 경영 전반이나 의사결정을 내리는 각종 업무를 대체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위협받을 일자리는 지금까지 주로 대학 학사 이상의 학위가 있어야 잡을 수 있던 일자리다. 변호사가 대표적이다. 그래서 앞으로 부상할 인공지능을 지금껏 우리가 알던 인공지능과 똑같이 취급해선 안 된다. 지난 40년간 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업무 자동화는 전문직과 경영자들에게는 축복이었고, 반대로 블루칼라 생산직 노동자와 화이트칼라 가운데 사무직, 행정직 노동자들에게는 대체로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새로운 인공지능 시대에는 1980년대부터 꾸준히 높게 유지된 대학 졸업장의 프리미엄이 떨어질 수 있다."

"세일즈나 요식업, 일반적인 고객 대응 업무, 기술 관련 민원 처리 등에서 사람을 직접 상대하던 일자리가 인공지능의 발전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반대로 사람이 직접 하는 청소, 병간호, 미화와 같은 노동은 지금으로선 인공지능 때문에 사라질 가능성이 가장 작다. 해당 노동을 기계로 대체하는 데는 너무 큰 비용이 들어서 사람이 하는 편이 여전히 더 싸기 때문이다. 물론 인공지능을 접목한 기계가 사람의 노동을 완전히 대체하는 대신 정교한 기술과 창의력이 필요한 인간의 고숙련 노동을 돕는 긍정적인 사례도 있을 것이다. 인간을 효과적으로 보조하는 인공지능의 이용 사례가 얼마나 많을까? 안타깝게도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어 보인다."
데이비드 오터, MIT 경제학과 교수

오터 교수는 아체모글루 교수와 마찬가지로 정책결정자들이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 방향과 속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인공지능은 어디든 쓰일 수 있는 범용 기술이다. 잘만 쓰이면 가치 있는 목적을 이루는 데 소중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비용은 획기적으로 줄이면서 의료의 질과 접근성을 높일 수 있고, 더 많은 사람에게 양질의 교육을 효과적으로, 싼값에 제공할 수 있으며, 건설, 유지, 보수 분야에서는 작업 중인 노동자에게 실시간으로 정확한 작업 지침을 내릴 수도 있다. 혁신적인 치료법을 개발하거나 세계적인 질병을 퇴치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농업 분야에서도,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데도 쓰일 수 있다."
데이비드 오터, MIT 경제학과 교수

긍정적인 이용 사례를 나열하면 끝도 없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잘못 쓰이면 끔찍한 역효과,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은 빈틈없는 감시 체계를 만드는 데 쓰일 수 있다.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수준의 감시 체계를 구축하고 관리하는 빅브라더는 (중국처럼) 국가일 수도 있고, (미국처럼) 민간 부문의 빅테크 기업들일 수도 있다. 인공지능 기술이 본디 감시 체계에 이용되기 쉬운 건 아니다. 사람이 기술 가운데 어떤 특징을 개발하고, 그 기술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렸다는 말이다. 지금 미국을 보면, 인공지능 부문의 투자는 대개 맞춤형 광고를 잘 팔고 사람의 노동을 대체하는 목표에 집중돼 있다. 이 목표를 달성해 투자금을 회수하고 이윤을 낸다면, 이를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지금 우리는 안 하느니만 못한 일을 목표로 삼고 거기를 향해 달리고 있다."
데이비드 오터, MIT 경제학과 교수

스탠포드대학교 인간 중심 인공지능연구소의 에릭 브린졸프슨(Erik Brynjolfsson) 교수는 2022년 5월 "튜링의 덫: 인간을 닮은 인공지능의 빛과 그늘"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브린졸프슨 교수의 경고를 한 줄로 줄이면 "지금처럼 사람과 비슷한 인공지능을 개발해 배포하는 데만 과도하게 집중하면 안 된다"는 거다.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더 잘 대체하면 할수록 우리는 덫에 빠진다. 노동자는 경제적으로 궁핍해지고, 정치적으로 발언권이 줄어들며, 기술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권력에 점점 더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브린졸프슨 교수는 덫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한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흉내 내고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대신 인간의 능력을 증강하고 인간의 노동을 보완하는 데 집중하면 된다. 그러면 인간은 창출한 가치 가운데 노동이 기여한 몫을 정당하게 챙겨 갈 수 있다. 또한,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늘어난 인간의 능력으로 새로운 서비스와 제품을 만든다면, 단순히 인간을 닮은 인공지능을 활용할 때보다 훨씬 큰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기술 전문가든 경영자든 정책결정자든 인간을 돕고 보완하는 인공지능보다는 인간을 닮은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데만 매달려 있다. 이는 인공지능의 잠재력을 십분 끌어내는 방향이 아니다.

튜링의 덫: 인간을 닮은 인공지능의 빛과 그늘 / 에릭 브린졸프슨, 스탠포드대학교 교수

브린졸프슨 교수는 지금처럼 균형을 잃은 인공지능 기술 개발이 가져올 정치적 역효과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현재 기술 엘리트들은 기술 개발을 주도하고 기술 개발로 얻은 경제적 혜택을 독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치적 권력마저 손에 넣고자 경주하고 있다. 기술의 혜택에서 배제된 대다수 서민의 불만이 쌓이는 건 당연하다. 자유무역의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지 않았을 때 우리는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이라는 후폭풍을 목도했다. 한쪽에서 경제적 혜택을 누리는 이들이 정치적 권력마저 손에 넣는 사이 반대쪽에는 경제적으로 궁핍해진 이들의 정치적인 불만이 쌓이고 있다.

자유무역 때문에 삶이 힘겨워진 이들은 관세 장벽을 세우거나 자유무역에 반대하는 정책을 내세운 포퓰리스트를 지지했다. 지금 인공지능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점점 더 많은 미국인과 전 세계 노동자들은 새로운 기술과 함께 등장한 신흥 억만장자 계급에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더 많은 기술이 지금처럼 인간을 돕는 대신 인간을 대체하는 데만 집중된다면, 다양한 부문의 격차는 점점 더 커질 테고, 불만은 계속 쌓여 분노가 폭발하기에 이를 것이다. 이런 분노는 분열과 파괴의 정치를 키우는 자양분이 된다.

튜링의 덫: 인간을 닮은 인공지능의 빛과 그늘 / 에릭 브린졸프슨, 스탠포드대학교 교수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고 존중해야 하며, 자동화로 얻은 이윤과 혜택을 모두가 골고루 나눠 가져야 한다는 브린졸프슨 교수의 주장은 폭넓은 지지를 받는다. 그의 주장은 기술 발전 자체를 멈추자는 게 아니다. 대신 그 방향을 다시 설정하자는 거다. 즉, 인간을 돕는 데는 관심이 없고, 인간을 대체하는 기술에만 몰두하게 하는 지금의 인센티브 구조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자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정치권에서는 인센티브 구조를 고치는 데 필요한 논의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자연히 인공지능과 자동화 기술 개발을 주도하는 엘리트들도 목표를 수정하거나 재고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설상가상으로 정치적 양극화가 심해진 지금의 정치 지형은 기술 개발의 방향에 관해 논의를 시작할 여지조차 주지 않고 있다.

**원문: ‘Elites Are Making Choices That Are Not Good News’**

정치와 경제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정치경제학자들이 하는 말을 좀 더 들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칼럼에서도 가장 먼저 소개된 다론 아체모글루 교수가 지난해 프랑스 툴루즈 경제대학원에서 주최한 공공재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내용을 살펴봅시다. 아체모글루 교수는 현재 가장 왕성하게 연구하고 있는 정치경제학자 가운데 한 명입니다.

아체모글루 교수는 괜찮은 일자리가 사라지는 점을 일자리 양극화의 가장 큰 문제로 꼽습니다. 그러면서 지나치게 비대해진 자본의 권력과 영향력, 협상력을 사회가 적절히 제한하지 못하면 괜찮은 일자리는 점점 더 사라져 중산층이 줄어들고 양극화가 심해지는 추세를 되돌릴 수 없다고 경고합니다. (지금 미국의 상황이 그렇다고 할 수 있겠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약 35년 동안 미국과 서유럽 국가에는 좋은 일자리가 많았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는 노동자들도 넉넉한 임금이 보장된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아주 튼튼했던 시절이었고, 경제는 빠르게, 그러나 동시에 안정적으로 성장했습니다. 교육 수준을 비롯한 사회경제적 출신 배경이 다른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고루 올랐습니다. 광산이든 사무실이든 시장이든, 공장 생산라인이든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대체로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내가 노동을 통해 사회에 이바지하고 있다고 생각했죠."

"오늘날 상황은 여러모로 2차대전 이후와 다릅니다. 대학 졸업장이 없는 노동자들에게 허락된 일자리 가운데 좋은 일자리로 분류할 만한 일자리는 극히 드뭅니다. 갈수록 기준이 높아져서 이제는 괜찮은 일자리 가운데 석사나 박사 학위를 요구하는 경우도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미국에서는 교육 수준이 낮은 저학력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정체되거나 꾸준히 줄고 있습니다. 사회보장제도가 잘 갖춰진 프랑스와 서유럽에선 임금이 미국처럼 급감하지 않지만, 대신 일자리 자체가 줄어들어 저학력 노동자들의 실업률이 높아졌습니다."
아체모글루, 프랑스 툴루즈 경제대학원 교수

아체모글루 교수는 자동화, 새로운 기술이 필연적으로 일자리를 없애는 건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로봇, 소프트웨어,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자동화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경쟁력이 없는 기존 일자리들은 사라지는 게 당연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저는 이런 시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기술 변화도 결국은 우리가 치열한 논의를 거쳐 선택한 길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1950, 60년대만 해도 대부분 기업은 노동자를 제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자원이자 이해관계자로 여겼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죠. 여기에는 세계화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그보다 사상의 조류가 변한 것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이 등장해 시장을 지배하게 된 건데, 바로 기업은 경영자와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입니다. 기업의 목표가 주주와 경영자의 이익을 최대한 많이 내는 데 있다면 그때부터 노동자는 중요한 자원이나 이해관계자가 아니라, 비용이자 짐으로 인식됩니다. 주주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아낄 수만 있다면 여러 비용을 아끼는 게 좋겠죠. 노동자를 고용하는 데 드는 인건비도 그중에 하나가 됩니다."

"이런 생각이 보편적으로 자리를 잡게 된 1990년대부터 기업들은 이윤이 났을 때 이를 나누는 대상을 확 좁혔습니다. 이해관계자 가운데 주주와 경영자의 수익은 급증했고, 노동자들의 임금은 정체되거나 깎입니다. 비용을 줄이는 행위에 혁신이란 이름표가 붙으면서 해고도 쉬워졌습니다."
아체모글루, 프랑스 툴루즈 경제대학원 교수

특히 미국은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자 자동화에 기댄 기업에 너무 많은 기회와 혜택을 줬습니다. 자동화로 인한 승자와 패자가 지금처럼 극단적으로 나뉜 데는 이른바 '노동 없는 성장'을 너무 빨리 이룩하도록 방치한 미국 정부의 책임도 있다는 겁니다. 이는 미국의 세제에서도 드러납니다. (링크는 아체모글루 교수가 브루킹스 연구소에 기고한 글입니다.)

미국은 지금 노동과 비교했을 때 자본에 사실상 거의 세금을 매기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 기업은 자동화 기계나 소프트웨어를 들였을 때 여기에 5%도 안 되는 세금을 냅니다. 반대로 노동자를 고용하면 여기에는 적어도 25%, 때로는 35%에 이르는 돈을 세금으로 냅니다. 이런 상황에서 상식적으로 산출량이 같다면 비용을 줄이는 쪽을 선택해야 하는 회사에 왜 사람을 덜 뽑고 기계를 들여놓느냐고 비난할 수 있을까요?

지나친 자동화를 되돌리고 공공재를 복원할 방법이 있을까요? 문제의 핵심 중에 하나로 지적한 세제를 개편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세제를 고치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자본은 강력한 협상력을 이용해 전방위 로비를 펼 수 있고, 디지털 시대에 조세 회피처로 돈을 옮기기도 쉬워졌습니다. 그래서 세제 개편은 전 세계적으로 가능한 한 많은 나라가 공조할 때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혁신은 새로운 기술이 등장한다고 알아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정부의 역할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선 우선 노동을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기업 경영은 물론 사회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핵심 자산으로 인정하고 그에 걸맞게 대우해야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경제 질서를 어떻게 구성할지, 또 새로운 기술을 이용해 어떤 미래를 맞이할지에 관해 기업들은 물론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의견과 관점을 두루 반영한 사회적인 논의를 계속해야 합니다.

브루킹스 연구소 기고 / 아체모글루, 프랑스 툴루즈 경제대학원 교수

아체모글루 교수의 연구와 주장을 살펴보면, 인공지능이나 자동화 기술 개발을 주도하는 지금의 엘리트들에게도 얼마든지 더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2년에 한 번씩 선거를 치러야 하는 정치인들이 구조나 체질을 바꿔 한참 기다려야 효과가 나는 변화보다 당장 표심을 좌우하는 문제에 관심을 더 쏟을 수밖에 없는 건 어느 정도 이해는 갑니다. 그렇더라도 지금처럼 경제적으로 궁핍해졌을 뿐 아니라, 가정과 공동체가 무너지는 등 “삶의 해체”를 겪으며 점점 더 벼랑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을 방치하면 정당, 진영을 막론하고 정부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중간선거를 앞두고 오바마 전 대통령이 팟세이브 아메리카(Pod Save America)에 출연해 1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여기서 오바마 대통령은 "(트럼프식 포퓰리즘에 맞서려면) 민주당이 무엇보다도 유권자들의 일상에 필요한 것들을 가져다주고, 어려울 때 손을 내밀어주고, 가려운 데를 긁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지금처럼 경제가 좋지 않을 때 "우리가 상대편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확신을 심어줘야 유권자들이 표를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분명 트럼프 전 대통령과 지금의 공화당은 노동자들의 삶이 힘겨워진 이유를 중국 탓, 자유무역 탓, 세계화 등 표면적인 데서만 찾고 있습니다. 이들의 지지를 받고는 있다지만, 제대로 된 해결책을 내놓아서가 아니라 그저 상황이 너무 나빠진 데 대한 분노의 반사이익을 누리는 데 가깝죠. 하지만 민주당도 마땅한 해결책은커녕 문제의 원인조차 제대로 짚지 못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지금의 교착상태에 이르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민주당은 과연 생산의 몫을 더 많은 사람이 공정하게 나눠 갖는 경제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아니면 또 한 번 허송세월한 뒤 다음번 선거를 앞두고도 또 오바마나 바이든이 나와서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는 말을 되풀이하게 될까요? 앞으로 미국 선거를 앞두고 경제 지표를 살펴볼 때는 물가, 국제 유가 등 소비 지표뿐 아니라 다양한 불평등 지수를 눈여겨보면 유권자의 표심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사실 유색인종이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저숙련 노동자 계층의 투표율이 매우 낮은 것도 문제입니다. 계급, 계층에 따른 정치적 발언권의 차이, 정당이 보통 유권자나 당원보다 막대한 후원금을 내는 부자들의 눈치만 보는 문제 등 미국 민주주의의 현주소에 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글을 통해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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