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비 내려오면
처마 밑의 한 아이 울고 서있네
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
으으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세찬 바람 불어오면
벌판의 한 아이 달려가네
그 더운 가슴에 바람 안으면
으으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새하얀 눈 내려오면
산 위의 한 아이 우뚝 서있네
그 고운 마음에 노래 울리면
으으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그이는 아름다운 사람이어라

아름다운 사람. 이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객석은 술렁였습니다. 담담하고 따뜻한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김민기. 하지만 무대 위에 김민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김민기의 목소리에 따라 무대 위 정재일이 기타를 치고 피아노를 연주했습니다. 지난달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정재일 콘서트 '리슨(Listen)'의 한 장면입니다.

‘기생충’ ‘오징어게임’의 음악감독으로 잘 알려진 정재일은 지난해 영국의 유명 클래식 음반사 데카(Decca)에서 앨범 ‘리슨(Listen)을 발표했고, 지난해 10월 런던 바비칸센터에서 명문 오케스트라인 런던 심포니와 협연했습니다. 세종문화회관 공연은 런던 관객들이 기립했던 그 공연과 비슷한 프로그램으로 꾸며졌습니다. ▶ 정재일 출연 골라듣는뉴스룸 커튼콜 보기

이 날 공연은 ‘기생충’ ‘오징어게임’ OST는 물론이고, 정재일의 피아노 곡, 국악 연주자들과 함께 한 곡들까지, 전방위 음악가로서 정재일의 면모를 유감없이 담았는데요. 공연의 앙코르이자 하이라이트는 바로 김민기의 목소리에 정재일이 반주한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김민기 목소리 정재일 반주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은 김민기가 1971년에 쓴 곡으로, 김민기 1집에 실렸습니다. 김민기의 서울대 미대 후배인 ‘현경와 영애’가 처음 불러 이들의 1974년 앨범에도 실려 있습니다. 이후에도 많은 가수들이 즐겨 불렀던 노래입니다. 노랫말과 선율이 서정적이고 따뜻한데, 그 시대의 아픔이 넌지시 담겨 있다는 느낌도 듭니다. ▶ '아름다운 사람' 원곡 듣기

‘어두운 비’(혹은 어두운 현실)를 직시하며 슬퍼하고, 세찬 바람도 ‘더운 가슴으로’ 맞으며 나아가고, 눈 내린 산을 올라 우뚝 서는 아이. 청년 김민기가 생각했던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오랜만에 들은 이 노래는 김민기의 암 투병, 학전의 폐관 예정 소식까지 전해진 터라 더욱 먹먹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김민기는 자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던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정재일이 객석에 앉아있는 김민기에게 헌정하는 곡이었던 겁니다. 김민기는 정재일 콘서트를 보기 위해 투병 중에 쉽지 않은 외출을 했습니다.

조용히 다녀가서 알아본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저는 공연장 로비로 나서다가 안면 있는 학전의 식구와 마주쳤던 덕분에, 김민기와 잠시 인사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2019년,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배우 오디션을 취재하며 그와 인터뷰한 적이 있으니, 4년여 만의 만남이었죠. ▶ 2019년 당시 8뉴스 영상 보기

오랜만에 만난 그는 지팡이를 짚었고 쇠약해진 모습이었지만, 낮고 친근한 목소리와 너털웃음은 여전했습니다. 공연을 마치자마자 김민기에게 인사하러 온 정재일은 다소 쑥스러워하는 기색으로 “선생님 목소리 허락 안 받고 썼어요" 하며 웃었습니다. 김민기는 “그거 무단도용이야! 응?" 하고 장난스러운 어조로 응수했습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정재일이 김민기를 얼마나 존경하고 신뢰하는지, 김민기가 정재일을 얼마나 아끼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엔 정재일과 ‘긱스’에서 같이 활동했던 가수 이적도 찾아와 인사를 나눴습니다.

정재일과 김민기, 그리고 학전

김민기와 정재일의 인연은 오래됐습니다. 김민기는 아들뻘 정재일에게 자신의 노래극 ‘공장의 불빛(1978)’을 마음대로 다시 만들어보라고 맡겼고, 26년 만에 정재일의 감각으로 다시 해석한 ‘공장의 불빛’ 리메이크 음반(2004)이 그렇게 나왔습니다. 정재일은 김민기가 이끄는 학전에서 여러 공연의 음악감독으로 활약했고 학전 라이브 밴드에서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오래전 학전에서 ‘못 다루는 악기가 없고, 작곡 편곡까지 잘하는 천재 소년’ 정재일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정재일은 김민기가 자신의 ‘아버지’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는 2000년대 초 ‘긱스’ 시절, 이적이 들려줬던 김민기의 '백구'에 ‘벼락 맞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당시 정재일은 음악을 멋지고 심오하고 장대하게 하는 데 심취해 있었는데, 김민기의 음악은 ‘기타 하나 목소리 하나로 100명의 오케스트라를 뛰어넘는 감동’을 줬다는 겁니다. (*2019년 정재일은 JTBC ‘너의 노래는’에서 이적과 함께 김민기와 그의 음악에 대해 얘기하고 연주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공연에서 들었던 ‘아름다운 사람’ 역시 그랬습니다. 정재일의 편곡 반주(정재일의 기타 연주는 김민기가 원곡에서 한 것과 똑같았다고 합니다)와 김민기의 목소리로 100명의 오케스트라를 넘는 감동을 줬으니까요. 김민기가 곧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민기는 ‘아름다운 사람’이 오늘 최고의 무대였다고 얘기한 저에게 ‘학전만 좋아하는 편파 기자’라고 농담을 던지고 떠났습니다. 제가 학전‘만’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학전이 저에게도 특별한 곳인 건 사실입니다. 저에게 학전은 곧 김민기였습니다. 문화부에서 일하기 시작했던 1998년 가을, 학전은 제가 대학로에서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었습니다. 때론 취재기자로, 때론 관객으로 오랫동안 드나들면서 학전과 연관된 추억이 저에게도 많습니다.

황정민 조승우.... 수많은 스타 배출한 학전의 폐관 결정

학전은 ‘아침이슬’, ‘상록수’ 등으로 7, 80년대 청년문화, 저항문화의 상징이 된 김민기가 1991년 대학로에 연 소극장이자 극단 이름입니다. 학전은 ‘학전 독수리 5형제’로 불리는 황정민 김윤석 설경구 장현성 조승우를 비롯해 방은진 배해선 이정은 등 수많은 스타 배우들을 길러냈습니다. 이곳에서 1000회 공연을 한 고 김광석, 그리고 윤도현 나윤선 같은 가수들도 빼놓을 수 없고요. 김민기는 김광석추모사업회 회장이기도 한데, 매년 학전에서는 김광석의 기일인 1월 6일에 ‘김광석 다시 부르기’ 행사가 열려왔습니다.

학전은 90년대 수많은 가수들이 섰던 라이브 콘서트 문화의 발원지이며, 뮤지컬 ‘지하철1호선’ 같은 대표작이 탄생한 대학로 소극장 뮤지컬의 상징입니다. 또 ‘우리는 친구다’ ‘슈퍼맨처럼’ ‘고추장 떡볶이’ 등 수작을 잇따라 내놓은 어린이 공연 중심 극장이기도 합니다.

학전은 2013년, 두 곳으로 나눠 운영하던 소극장 중 한 곳인 학전 그린이 세 들었던 건물이 팔리며 문을 닫고 나서는, 현재의 학전 블루 소극장에서 ‘학전 어린이 무대’에 집중해 왔습니다. 적자를 감수하면서도 누군가는 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돈 안 되는 어린이 청소년극에 매진해 온 거죠. 어린이 공연 한 편에 수십 명이 몇 달간 매달려 공들이면서도, 더 많은 어린이들이 볼 수 있도록 티켓 값을 계속 1~2만 원대로 유지했습니다.

학전 어게인 프로젝트-퇴장도 학전답게
학전은 현재 2024년 3월 15일 문을 닫기로 하고 대부분의 직원들을 내보낸 상태입니다. 오랜 경영난이 팬데믹을 거치며 악화됐고 김민기의 위암 투병까지 겹쳐 내린 결정입니다. 그동안 김민기는 사재를 털어가며 학전을 운영해 왔지만 ‘극장 운영의 짐을 누구한테 떠넘길 수 있겠느냐’며 폐관을 결정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다만 김광석의 모습이 새겨진 노래비가 있는 극장 바깥 벽체는 그대로 남아 기억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합니다.

2013년 학전 그린 소극장이 문을 닫을 때 저도 큰 감회에 젖어 취재파일 '굿바이 학전 그린' 을 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33년간 대학로를 지켜온 학전 블루 소극장까지 문을 닫는다니……안타까움 같은 단어로만 형용하기는 어려운, 뭔가 한 시대가 막을 내리는 것 같다는 느낌에 휩싸이게 됩니다.

학전은 지금 퇴장을 앞두고 학전의 중심축이었던 뮤지컬 ‘지하철 1호선’과 어린이 공연, 라이브 콘서트로 관객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습니다. ‘지하철 1호선’을 지난해 마지막 날까지 공연했고, 6일에는 김광석 노래 부르기 경연대회가 열렸고, 12일에는 어린이 뮤지컬 ‘고추장 떡볶이’가 개막해 2월 24일까지 계속됩니다. 2월 28일부터 3월 14일까지는 학전을 거쳐간 가수와 배우들이 자발적으로 기획한 ‘학전 어게인’ 프로젝트 릴레이 콘서트가 열립니다. 문을 닫게 되더라도 학전의 정신을 다시 돌아보고 잊지 않겠다는 선언이고, 학전다운 퇴장입니다.

‘학전 어게인’ 프로젝트에 나선 가수 박학기는 ‘학전을 지켜달라’는 것보다는 ‘학전에서 출발한 우리가 이렇게 잘하고 있고,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은 거라고 했습니다. 수익금은 학전의 부채를 청산하고 직원들의 퇴직금을 지급하는 데 쓰일 예정입니다. 연극 '고추장 떡볶이'가 개막한 12일에는 배우 이정은을 비롯한 학전의 선배 배우들이 극장을 찾아 공연 준비를 돕고, 공연이 끝난 후에는 관객들에게 떡볶이를 '서빙'했습니다.

(2006년 지하철 1호선 3000회 공연 당시 8뉴스, 취재파일 ‘조승우 황정민 망가지다-지하철 1호선 3000회 공연,을 보시면 학전을 거친 배우들의 학전과 김민기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습니다. 학전 30주년을 앞두고 2019년에도 전인권, 박학기, 윤도현, 강산에, 권진원 등등 가수들이 총출동해 '학전 어게인' 릴레이 콘서트가 열린 적이 있는데요, 당시 비디오머그 영상도 참고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학전의 폐관을 안타까워하는 여론이 일면서 문화예술위원회는 학전이 세든 건물을 임대해, 공공 극장으로 유지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어떤 방향이 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학전이 지켜온 소중한 가치와 정신을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사람’ 김민기의 회복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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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감독 정재일 콘서트에 울려퍼진 ‘아름다운 사람’ 김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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