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의 빈 살만 왕세자(37)가 방한했다. 아버지 살만 국왕(86)이 군림하고 있지만 고령에 건강이 좋지않고, 빈 살만이 실질적인 사우디의 통치자이다. 그는 두 얼굴의 군주로 불린다. 먼저, '비판 언론인 카슈끄지 살해 배후'로 알려진 것처럼 정적을 무참히 제거하는 폭군의 이미지가 있다. 반면, 석유와 이슬람 원리주의에서 벗어난 나라를 만들고, 다른 나라와 비슷한 수준의 다양한 활동을 국민에게 보장하려는 개혁군주의 모습도 있다.

일견 모순돼 보이는, 그러나 알고 보면 하나로 통하는 그 두가지 모습을 함께 담고 추진되고 있는 프로젝트가 네옴(NEOM)이다. 네옴은 빈 살만이 그리는 사우디의 미래를 물리적으로 실현하는 개발 프로젝트다. 2017년 10월 그가 직접 계획을 발표했다. 네옴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거대 선형 신도시가 라인(Line)이다.

네옴이 들어설 땅은 사우디아라비아 북서쪽으로, 홍해의 좁은 해협을 서쪽으로 건너면 바로 이집트, 위로는 요르단 이스라엘과 인접한 지역이다. 개발이 덜 된 오지이지만 원주민 부족이 살고 있는데, 이들을 강제로 밀어내는 과정에서 인명피해가 나서 인권 시비가 벌어졌다. 네옴 건설에는 총 5천억 달러가 들 계획인데, 투자는 사우디 국부펀드 PIF가 책임진다. 그들로서는 왕(세자)의 프로젝트에 왕국의 자금을 쓰는 것이다.

사막에 들어설 SF급 신도시...라인은 어떤 모습?
일반적인 도시는 중심에서 외곽으로, 수평으로 확산한다. 주변 면적을 많이 차지한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 선형 도시의 개념이다.

공식 트위터(@NEOM)에는 '대한민국 서울을 위로 쌓는다면?'이라는 컨셉의 그래픽도 올라와 있다. 서울을 비교대상으로 삼은 게 흥미롭다. 네옴의 목표 인구는 9백만 명이다. 서울 인구에 육박한다. 직선도시를 만들면 이 인구를 수용하는데에 서울의 약 1/20 면적(5.6%)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규모가 비현실적이다. 라인은 높이 최고 500미터짜리 건물들을 벽처럼 세워 170km에 이르는 선형 도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잠실 롯데타워 높이가 555미터다. 이에 맞먹는 건물들을 옆으로 이어붙이고 겉면은 미러글라스로 덮겠다는 것이 컨셉 디자인이다.

평행으로 뻗은 두 거울벽 윗쪽은 개방되어 채광과 환기를 돕는다. 두 벽 사이의 거리는 200미터다.

라인 내부는 일상생활의 웬만한 필요를 도보 5분 이내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모듈로 구성한다. 자율주행 모빌리티와 AI기술 등을 총동원해 자동차 없는 도시를 만든다. 라인 전체 길이는 170km인데, 지하에 고속철도를 뚫어서 20분이면 끝에서 끝까지 갈 수 있게 한다. 에너지는 태양광 풍력 그린수소 등 신재생에너지로 충당해 탄소배출 제로를 실현한다. 이런 말대로 구현된다면 거의 SF영화다.

공사는 실제로 시작됐다. 사우디측이 드론 영상을 공개했다.

사우디 항공촬영회사 오트 스카이(Ot Sky)의 드론영상(2022.10.20) 캡처

빈 살만이 '새로운 미래'라는 이름을 지은 이유
빈 살만은 왜 저 허허벌판에 왜 SF적인 신도시를 짓는가. 우선은 '두바이 같은 걸 하나 갖고 싶어서'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두바이는 원래 있던 무역항이 환골탈태한 것이다. 네옴처럼 황무지에 일군 것은 아니다.

빈 살만의 야심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네옴'이라는 이름부터 뜯어봐야 한다. 네옴(NEOM)의 앞 세글자는 ‘새롭다’는 뜻의 그리스어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이름도 같은 네오), 끝글자 M은 미래(future)를 뜻하는 아랍어 단어(Mustaqbal)의 앞글자에서 왔다고 한다. 즉 '네옴'이란 ‘새로운 미래’라는 뜻이다. 아울러 네옴은 지금까지 사우디아라비아를 옭아매 왔던 것들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네옴의 바탕이 되는 생각은, 그보다 1년 전(2016)에 발표된 ‘사우디 비전2030’을 봐야한다. 네옴은 단순한 신도시가 아니라 비전2030을 물리적으로 구현하는 상징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2016년(4월25일) 빈 살만이 직접 발표한 비전2030은 사우디를 석유에 의존하지 않는 나라, 개방되고 정상적인 나라, 젊은이들이 능력을 발휘하고 꿈을 실현하는 나라,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 국제경쟁이 가능하고 투명하며 효율적인 나라로 만들겠다는 비전이다.

주요내용은 문화, 예술, 엔터테인먼트, 건강 등 삶의 질 제고/ 경제에서 민간부문의 비중 증대 / 경쟁과 투명성, 효율성 장려 / 일 잘하는 국민, 사업하기 좋은 제도적 환경 / 여성의 사회활동과 노동참여 제고/ 관광 금융 등 대외개방적 부문 확대 /청년 실업률 낮추기 / 석유 이외 다양한 산업 육성 등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여기 나열된 목표들이 잘 안되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슬람권에서도 종교적 보수주의가 강했던 사우디아라비아에는 2018년까지 관광비자라는 게 없었다고 한다. 확실한 초청자(보증인) 없이는 외부인이 입국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런 사회 체질은 오래 뿌리박힌 문화이므로, 아무리 절대권력자라 해도 몇년 만에 바꾸기는 쉽지 않을 문제였다. 그래서 빈 살만은 자신이 지향하는 국가의 미래상을 집약해 구현한 쇼룸을 만들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게 바로 네옴이다. 기존의 도시들은 기득권 세력에 장악돼 있으니,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것이 네옴 프로젝트의 정치적 의미다.

기존 정치,종교,산업 중심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입지
네옴은 페르시아만의 반대편, 홍해 연안에 자리잡고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최대 적수인 이란, 한때 앙숙이었으나 관계가 개선된 카타르, 그리고 네옴이 뛰어넘어야 할 라이벌 두바이와는 반대편에 자리잡은 것이다. 반면 이집트 요르단 이스라엘과 매우 가깝다. 성공을 위해서는 이들과의 좋은 관계가 필수적인 위치다.

홍해 연안에 짓는다고 할 때, 경제적 타당성을 따져 가장 합리적인 위치는 제다 인근이 아닐까. 제다는 사우디 최대 항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옴의 입지는 제다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970km, 차량으로 11시간이나 올라가야 하는 곳이고, 사우디에서 가장 개발이 덜 된 지역 중 하나다. 제다가 이슬람 성지인 메카, 메디나와 가깝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피한 것으로 보인다. 가까우면 아무래도 이슬람 성직자들의 영향권에 놓이게 될테니까 말이다. 네옴은 수도 리야드, 석유산업 중심지 다란 (아람코 본사 소재지)과도 멀리 떨어져 있다. 기득권 엘리트 세력들의 본거지와 물리적으로 거리를 둠으로써 그들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뜻이 위치선정에서도 엿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2016년에 발표된 비전2030 자료와 2017년 이후 네옴 홍보자료의 톤이 다르다는 점이다. 그가 왕세자가 되기 이전인 2016년에 처음 발표한 비전2030에는 아버지 살만 국왕의 사진이 먼저 크게 나오고, 사우디 아라비아는 이슬람 국가이며 이슬람의 가치에 충실할 것이라는 언명이 본문 앞에 있다. 하지만 네옴 홍보자료에선 어디에도 이슬람의 i, 종교의 ㅈ도 언급되지 않는다.

엘리트 세력 교체와 왕권 강화에 나선 빈 살만
사우디 사회를 지탱하는 엘리트세력이란 왕가(수많은 왕자들과 그 추종세력,이해집단), 이슬람 (성직자들과 율법학자들-그리고 종교경찰들), 석유산업(이건 왕가와 따로 떼어 생각하기 어렵지만) 리더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왕가는 이미 정리가 끝났다. 모하메드 빈 살만은 현 살만 국왕의 아들이지만 처음부터 왕세자였던 것은 아니다. 살만 국왕은 1935년생으로, 2015년 80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그가 7대 국왕인데 사우디의 왕권은 현대 사우디의 초대 국왕 이븐사우드(압둘아지즈)의 아들간에 형제상속으로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살만 국왕은 압둘아지즈 초대국왕의 왕자 중 가장 어린 축에 속하는 25번째 왕자였다.

살만 사우디 국왕(86)이 수도 리야드의 병원에서 검진과 심장박동기 배터리 교체 등을 마친 뒤
퇴원하는 모습. 빈 살만 왕세자가 수행하고 있다. 2022년3월16일.
(사우디 왕실 제공-AP배포)

살만 국왕은 처음엔 조카인 무함마드 빈 나예프(줄여서 MBN)을 세자로 책봉했고, 자신의 아들인 빈 살만은 그 아래 부(副)세자로 두었다. 빈 나예프는 2015년 세자 지명 당시 55세였다. 빈 살만보다 스무살쯤 많은 나이다. 나예프는 군사와 방첩, 대테러 분야 총책으로 잔뼈가 굵은 인물로, 군사적 협력관계인 서방국가에도 지원세력이 많았다.

2015년 3월 백악관을 방문한 당시 사우디 왕세자 빈 나예프 (가운데 손 흔드는 사람).
당시는 부(副)세자 신분인 빈 살만이 수행했다. (사진: Getty image)

살만 국왕은 자신의 아들 중 제왕감으로 점찍어놓은 빈 살만(1985년 8월31일생. 지금 만 37세)이 왕세자로 전면에 나서기에는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빈 살만이 국방장관 등을 거치며 세력과 경험을 쌓자, 2017년 전격적으로 세자를 바꿔버린다.

빈 살만은 세자가 되자마자 거의 스무살이 더 많은 사촌형인 나예프를 가택연금하고 금융계좌를 동결했다. 그리고 수도 리야드의 고급호텔 릿츠칼튼으로 수백 명의 왕자 및 왕가 실력자들을 호출해 감금했다. 이들에게 "부정축재한" 재산을 토해내도록 “설득”하고, 동의한 사람만 풀어줬다.

2020년에는 연금 상태이던 빈 나예프를 아예 반역죄로 체포했다. 현재 빈 나예프는 수감생활 중이며 당뇨병이 심하지만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서히 죽게 만드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조선왕조사를 다룬 사극에서 많이 보던 줄거리가 덜 잔혹한 형태로 (처형하지는 않았으니까)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사우디인 억압해온 종교경찰 억압하는 빈 살만
왕권을 강하게 세우려는 빈 살만의 의지는 종교경찰에 대한 탄압으로도 구체화됐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원래 이슬람 보수주의 색채가 강한 나라인데, 1979년 이란혁명 등으로 중동지역에 이슬람 근본주의 바람이 불면서 종교경찰의 패악질이 심해졌다고 한다. 이들은 무리지어 다니며 사람들의 복장과 언행을 문제삼고 고함치고 때리거나 끌고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결혼식장 등 잔칫집에 쳐들어와 '이슬람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악기를 부순다든지, 여성들의 눈화장이나 복장에 시비를 거는 일도 잦았다.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 되자 음모와 권모술수의 행위자로 나섰다. 이슬람 율법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사적 감정이나 이해관계때문에 사람을 괴롭혔다. 유력자의 사주를 받고 그의 정적을 함정에 빠뜨린다든지 하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졌다고 한다.

* 전통복장의 종교경찰 두 명과 왼쪽의 일반경찰. '무타와(mutawa)'라고 불리는 종교경찰들은 덥수룩한 턱수염이 특징이다. Inside saudi.com캡처 (연도 미상)

그런데 빈 살만이 2016년부터 종교경찰 힘 빼기를 시작했다. 그는 종교경찰이 거리를 다니며 ‘계도활동’을 하거나 사람들을 직접 심문,조사하는 행위를 금지했다. 재판에 대한 영향력 행사도 차단했다. 율법상 죄는 기본적으로 신과 죄 지은 자 사이의 일이지, 종교경찰관이 헤집고 다닐 일이 아니라는 것이 빈 살만의 뜻이었다고 한다.

빈 살만은 또, 사우디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은 이슬람 율법을 겁내지 않고 지내도 된다고 서방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게 선지자 무함마드 시절의 삶의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빈 살만 이전에는 초청자와 함께 있는 외국인 방문객도 여차하면 종교경찰의 단속대상이 되어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었다. 이런 상태로는 ‘외부세계와 정상적으로 교류하는 개방적이고 능력있는 국가’ 실현이 불가하다고 본 빈 살만이 외국인을 종교경찰의 위협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이다.

BTS같은 K-POP스타들의 공연, 서구 힙합 아티스트들의 공연이 사우디에서 열릴 수 있게 된 건 빈 살만의 이런 조치가 선행됐기 때문이다. 안그랬으면 콘서트가 허용되지도 않았겠지만 종교경찰들이 장대를 휘둘러 여성관객들을 쫓아냈을 것이다.

2019년 10월 BTS의 사우디 공연에 환호하는 여성팬들. 아랍뉴스 트위터 캡처

‘아랍뉴스’ 등 중동지역 영문매체들은, 사우디의 도시들에서 종교경찰은 사무실에 앉아 도덕 캠페인 콘텐츠나 만드는 신세로 전락했으며, 의욕을 잃은 종교경찰 종사자들 상당수가 사표를 냈다고 보도했다.

종교경찰 무력화는 빙산의 일각이다. 빈 살만은 한때 왕권(王權)에 도전하던 신권(神權)을 다시 왕권 아래 복속시키는 작업을 하는 중이다. 종교경찰은 사우디의 이슬람 근본주의인 ‘와하비즘’을 사회에 집행하는 공권력이자 물리력이었는데, 종교경찰을 무력화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아예 와하비즘이 사우디 정치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끊는 것이 빈 살만의 목표다.

건국신화부터 다시 쓰는 빈 살만의 ‘역사전쟁’
와하비즘이란 18세기의 이슬람 종교개혁가 ‘와합(Wahhab)’의 이름을 딴 분파다. 그는 이슬람교를 창시한 선지자 무함마드 시절의 ‘순수한’ 믿음과 생활로 돌아갈 것을 설파했다. 자신의 뜻을 지지해줄 세속군주를 찾아 아라비아 반도를 주유하다 디리야(Diriyah) 지역을 다스리던 부족장 모하메드 이븐 사우드를 만나 계약을 맺었다. 모하메드 이븐 사우드는 와합이 종교적 가르침을 전파하는 것을 돕고, 대신 와합은 이븐 사우드에게 신이 선택한 자의 권위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1744년의 일이다.

지금까지 사우디아라비아는 이 1744년을 나라가 세워진 해로 기념해 왔다. 아울러 와합은 사우드 가문이 세운 나라의 종교적 정당성과 권위를 담보해주는 정신적 지주로 받들어져 왔다. 이론적으로는 와합을 왕보다 높은 상징적 위치에 두는 것이자, 국가를 와하비즘 전파 도구로 격하시키는 것이었다.

사우디 아라비아 새 건국절을 축하하는 여성과 아이들, 수도 리야드, 2022년2월, 로이터

그런데 올해 2월, 사우디 아라비아로서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1727년 2월22일을 사우디 건국일로 지정하고 공휴일로 선포한 것이다. 이 날은 사우드 왕가의 시조가 되는 부족장 모하메드 이븐 사우드가 디리야에 자신의 작은 부족국가를 세운 날이다. 와합과 만나 계약을 맺기 17년 전이다. 즉, 건국시점을 1727년으로 앞당겨 기념한다는 것은 사우디아라비아 건국 서사에서 와합과 그의 종교이념(와하비즘)을 배제하고 '사우드 가문'만을 건국의 시조로 세운다는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새 건국절 선포는 빈 살만 왕세자의 아버지, 살만 국왕(86)의 이름으로 이뤄졌다. 평소에는 나서지 않지만 국가정체성의 문제에 관한 것이므로 왕세자가 아닌 국왕의 이름으로 선포한 것으로 보인다.

건국절을 상징하는 깃발도 새로 제정되었다.

이 깃발에는 이슬람 종교를 상징하는 심볼이 없다.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의 술탄 알라메르가 워싱턴 걸프국가 연구소에 기고한 해설에 따르면 오른쪽 원의 중심에는 깃발을 든 남자의 형상이 있고, 그 주위로 아라비아 말, 대추야자, 시장 등의 상징이 배치되어 있다. 이는 생명, 풍요, 용맹, 너그러움, 개방성 등을 상징할 뿐이다. 사우디 국기에 새겨져있는 신앙고백 ‘샤하다’ 구절 ("알라 이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이다")은 적혀있지 않다. 왼쪽의 글자는 “건국절(Foundation Day) — 1727 AD”이라는 뜻이라 한다.

종교를 국가 운영에서 배제하려는 빈 살만의 의도
와하비즘을 사우디의 사실상 ‘국교’와 같은 높은 위치에 두는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사우디 왕가 입장에서도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 술탄 알라메르의 설명에 따르면, 와하비즘 우위의 건국 서사는 국조(國祖) 이븐 사우드의 후손들에게 알라 신으로부터 오는 독점적 권위를 부여해 주었다. 덕분에 이븐 사우드의 후손들은 20세기초 이후 현대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여러 부족들과 맺은 약정에 따르는 부채를 초월할 수 있게 됐다.

현대 사우디아라비아를 만든 압둘아지즈 초대국왕(‘이븐 사우드’로도 불림)이 부족들을 통합해 건국하는 과정에서 경쟁자들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고 한다. 압둘아지즈 국왕은 ‘가장 순수한 이슬람’인 와하비즘의 전파자로 자리매김함으로써 그의 통치를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사실, 종교의 권위를 빌어 경쟁자들을 왕권에 복속시키는 것은 사우디 뿐 아니라 동서고금의 많은 나라에서 -우리나라 삼국시대나 고려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초대 국왕이 외국인과 서 있는 모습. 1930년대 사진.
그는 살만 현 국왕의 아버지다. (Al Arabiya News Publication-Wikipedia)

다만, 왕의 입장에서도 대가는 따랐다. 와하비즘 지도자들은 국왕의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대가로 세속권력의 간섭을 받지 않고 극단적인 주장을 확산해 나갔다. 와하비즘 성직자들이 펴낸 율법 중엔 이런 것도 있었다고 한다. '여성은 베일을 쓰지 않고 TV를 보면 안된다. TV속 남자가 화면을 통해 그 여성을 볼 수 있으므로.' '아무거나 다 먹는 부페식당 금지: 네가 뭘 먹게 될지 모르고 돈을 내는 건 도박이나 마찬가지니까.'

와하비즘의 징표는 비(非)와하비즘 무슬림에 대한 증오다. 사우디 와하비즘이 배출한 가장 유명한 인물이 오사마 빈 라덴이다. ISIS의 과격한 근본주의도 와하비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소총을 겨눠보는 오사마 빈 라덴. 촬영날짜 미상의 동영상에서 2001년 10월 캡처. (Getty Image)

이탈리아 국제정치연구소 웹사이트에 지난 6월 실린 크리스틴 스미스 디완의 기고에 따르면,
와하비즘에 대한 빈 살만의 탄압은 2016년부터 종교경찰 힘 빼기로 시작돼 올해 건국절 선포로 정점에 이르렀다. 빈 살만은 일상생활에서 사법에 이르기까지 사우디를 빠르게 ‘탈 와하비즘’ 국가로 이행시키고 있다. 2017년 국제 투자자들에게 사우디 비전2030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빈 살만 왕세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빈 살만은 2017년부터 이른바 ‘종교개혁가’ 등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을 체포 투옥하거나 영향력있는 자리에서 밀어냈다. 이들을 탄압할 때 쓴 명분은 이들이 ‘사와(Sawah)’라는, 무슬림형제단의 종교부흥운동의 앞잡이였다는 것이었다. 무슬림형제단은 이집트 카타르 시리아 등 여러 국가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한다. 정교일치의 이슬람국가를 지향한다. 여러 원리주의 단체들과도 연계돼 있다. 빈 살만 입장에선 자신이 차지할 왕권에 ‘종교’와 ‘외세’를 끌어들여 이중으로 도전하는 적이다.

빈 살만은 2019년 원리주의 유력 성직자인 아이드 알 카르니(Aid al-Qarni)가 TV에 나와 극단주의를 선동한 죄를 고백하고 사우디에서 사와는 끝났다고 공개사과하도록 했다. 아마도 왕권경쟁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강한 “설득”이 있었을 것이다.

극단주의를 선동한 과거를 공개사죄하는 알 카르니. 2019년5월6일자 Rotana Khalijiyah TV 캡처

하지만 빈 살만은 자신을 '온건 이슬람'이라고 부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디 애틀랜틱의 인터뷰에서 그는 "나를 온건 이슬람이라고 부르는 건 근본주의 테러리스트들에게 ‘저놈들이 이슬람을 훼손한다’는 명분을 주는 것이다. 오히려 나의 방식이 선지자의 원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종교적 정통성 투쟁에서도 원리주의자들에게 이기겠다는 것이다.

석유에 의존하지 않는 사우디를 만들려면 외부의 기업들과 인력들이 자유롭게 들어와 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청년 실업을 극복할 일자리도 생긴다. 그런 사회적 환경을 만들려면 종교가 배타적으로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를 좌지우지해선 안된다.

빈 살만은 사우디가 이란처럼 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이란에선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종교혁명을 일으켜 왕을 쫓아내고 신정국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권력은 신의 사도와도 나누지 않는 것, 오로지 왕만이 갖는 것이라는 게 빈 살만의 생각인 것 같다.

여성 자유 신장, 그러나 여성운동가는 탄압하는 모순
권력에 대한 빈 살만의 의식을 보여주는 또다른 현상은 빈 살만이 주도한 개혁에 따라 여성의 인권이 신장되고 있는데 정작 여성인권 신장을 요구한 운동가는 박해를 받는, 일견 모순되는 상황이다.

사우디에서는 여성들이 밖에서 담배를 피울 수도 있고 직업도 다양하게 가질 수 있다. 누가 뭐래도 빈 살만이 추진한 개혁의 공이다.

히잡을 쓰지않고 거리에서 운동중인 사우디 항구도시 제다의 대학교 여성 교직원.
2018년 6월 Getty Image.

이런 변화를 진작부터 요구해온 사우디 내의 여성운동가들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루자인 알 하툴룰(Loujain al-Hathloul)이다. 여성이 운전할 권리, 남성보호자가 있어야만 공공장소에 나갈 수 있는 법의 폐지 등을 요구하다가 2018년 테러 혐의로 투옥돼 그해 연말 유죄선고를 받았는데, 이때는 이미 빈 살만 왕세자와 그의 아버지 살만 국왕이 여성의 운전과 자유로운 외출을 허용한 뒤였다.

가족들이 외신에 전한 바에 따르면 루자인은 감옥에서 채찍으로 맞고 전기고문을 당했으며 성폭행한 뒤 시신을 갈아서 하수구에 버리겠다는 협박도 받았는데, 시점은 대략 비판언론인 카슈끄지가 살해당기 몇달 전이었다고 한다. 서구 각국이 인권이슈를 제기하며 문제삼자, 결국 사우디 당국은 루자인을 2021년2월 석방했다.

2021년2월, 석방돼 집으로 돌아온 루자인 알 하툴룰(동생 리나가 촬영해 트위터 공개)

그러나 루자인에게는 해외여행 금지, 공적발언 금지 등 제한이 걸려있다. 자유가 확대된 사우디 여성들의 삶과 루자인이 받는 박해는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너희들의 자유는 왕이 주는 것이다. 내가 허락한 것을 너희가 즐겁게 누리는 것은 기꺼이 허락하지만, 마치 맡겨놓은 것 내놓으라는 듯 따지고 드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이런 해석이 맞다면, 21세기에 다른 곳에선 보기 힘든 절대왕정의 사고방식이다.

외부인의 시선으로 보기에, 와하비즘 원리주의자나 여성인권 신장을 요구하는 루자인은 전혀 다른 카테고리에 속한다. 그러나 빈 살만 왕세자의 시각에서 둘은 같을 수 있다. 절대권력인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어차피 하는 개혁인데 왜 인권운동가나 정책비판자들을 풀어주지 않느냐는 디 애틀랜틱의 질문에, 빈 살만은 이런 답을 내놨다. 사면을 요구하는 건 그들 뿐이 아니고 원리주의 테러리스트들도 있다고. 통치자 입장에선 사면권을 공정하게 행사해야 하므로 이쪽을 풀어주면 다른 쪽도 풀어줘야 한다고. 원리주의 테러리스트들이 다시 세상을 활개치고 다니면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정말 보고싶냐고 말이다.

빈 살만은 좋은 권력자인가, 나쁜 권력자인가?

사우디 최초의 여성 레이서 아실 알 하마드(Aseel Al Hamad).
빈 살만의 개혁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재규어 제공, Getty Image배포

빈 살만은 좋은 권력자인가, 나쁜 권력자인가? 쉽게 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누군가 강하게 방향타를 쥐고 있지 않으면 사우디아라비아는 근본주의 이슬람과 석유에 얽매인, 왕자들과 성직자들의 이권으로 범벅된 옛 모습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시민들의 민주주의 역량이 성숙되지 않은 나라에서는 독재적 권력자가 무너진다고 해서 민주주의 사회가 되는 게 아니라 다른 (때로는 더 나쁜) 독재적 권력자가 권좌를 차지하거나, 아니면 혼란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결국 힘을 앞세워 혼란을 잠재우는 자가 다시 독재를 하게 마련이다. 구소련과 중동, 아프리카 등지의 많은 나라들에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올해 37세인 빈 살만은 사우디의 다음 국왕 자리에 올라 앞으로 수십 년간 절대권력자로서 나라를 다스릴 것이다. 과연 그가 이끄는 사우디는 비전2030에서 그려보인 ‘새로운 미래(=네옴,NEOM)’를 실현할 수 있을까?

구성·편집 : 이현식 D콘텐츠제작위원 콘텐츠디자인 : 옥지수, 박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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