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 5개 대형 병원을 비롯한 전국 병원의 의대 교수들이 이번 주부터 일주일에 하루 진료와 수술을 중단합니다. 의사협회에서는 임현택 회장 당선인이 모레(1일)부터 새 협회장으로 임기를 시작합니다. 의대 증원을 백지화하지 않으면 어떤 협상에도 나서지 않겠다는 강경파입니다. 무슨 상황인데? 정부의 의대 증원 방침에 대한 의사들의 반발 속에, 이번 주에도 의료 현장에는 혼란이 이어질 전망입니다. 내일 그리고 다음 달 3일 이른바 '빅5' 대형 병원 중 4곳이 휴진하기로 한 데다, 전국의대교수 비대위에서 이번 주를 시작으로 '당직 후 24시간 휴식 확보'를 위한 주 1회 정기 휴진을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서울대병원과 세브란스병원은 화요일(30일), 서울아산병원과 서울성모병원은 금요일(5월3일) 각각 휴진합니다. 삼성서울병원 교수들은 진료와 수술이 없는 날을 골라 하루 쉬기로 했습니다. 각 의대 교수 비대위 차원의 결정으로, 동참 여부는 각 교수가 자율적으로 결정합니다. 휴진하더라도 응급-중증 환자와 입원 환자에 대한 진료는 유지됩니다. 의대 교수 비대위는 정부가 의대 증원을 고집할 경우 휴진 기간에 대해 '다시 논의할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매주 1회'인 휴진을 더 늘릴 수도 있다는 겁니다. 사직 날짜를 공개한 서울의대 비대위 수뇌부를 시작으로, 교수들의 사직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단체로 수업을 거부하고 있는 의대생들이 무더기 유급을 피할 마지노선도 임박했습니다. 좀 더 설명하면 의사협회가 비상대책위원회를 해산하고, 대표적 강경파인 임현택 회장 당선인 체제로 전환하는 것도 변수가 될 전망입니다. 임현택 의사협회 회장 당선인은 어제 대의원 총회에서, 한국 의료가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치고 있다며 정부를 강도 높게 비난했습니다. 임현택 당선인은 "최전선에서 사투하는 전투병의 심정으로 결연하고 강하게" "죽을 각오로" 정부를 막아내겠다며 투쟁 수위를 높일 가능성을 시사했습니다. 임 당선인은 2천 명 의대 증원 방침과 필수의료 패키지 정책을 백지화하라며, "그 다음에야 원점에서 논의를 재개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떠한 협상에도 응하지 않을 것"이라며 정부가 백기를 들 것을 압박했습니다. 의사협회 의결기구인 대의원회의는 의대 증원 전면 백지화, 행정 처분 철회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습니다. 한 걸음 더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오늘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정부는 국민만을 바라보고 필수·지역 의료를 살리기 위한 의료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며 "사회 각계각층과 더 많이 소통하고 협력하면서 흔들림 없이 나아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의료 현장 모니터링과 의료인력 추가 파견 등 대책을 내놨지만, 의료계 집단행동을 자제해 달라고 당부하는 것 외에 뾰족한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의료계를 달래기 위한 필수의료 보상 강화 방안의 일환으로, 혈관 스텐트 수가 2배 인상안을 내놨습니다. 스텐트(심장혈관 중재시술)는 급성심근경색증 등 중증 심장질환자에게 긴급하게 시행해야 하는 대표적인 필수의료 행위입니다. 응급·당직 시술이 잦은 의료진에게도 정당한 보상이 갈 수 있도록 일반 시술의 1.5배 수가가 적용되는 '응급시술' 대상을 임상 현장에 맞게 확대한다는 계획도 내놨습니다. 하지만 의사협회 지도부가 일단 '증원 백지화'를 대화의 선결 요건으로 요구하며 투쟁 수위를 높여가는 상황이어서, 이런 '당근' 제시가 위기 완화에 도움이 될 지는 미지수입니다. 사진 : 연합뉴스
한 국회의원이 있다. 나름 성실한 다선 의원이긴 하지만 그다지 주목받지는 못하는 사람이었다. 여야 극한 대립 속에 자신의 당 소속이던 국회의장이 갈려 나갔다. 당내 강경파는 이 의원을 의장으로 밀어 올린다. 자신들의 어젠다에 충실한 사람이면서, '자기 정치' 욕심이 별로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강경파는 은근한 압력을 가한다. '전임 의장 날아가는 거 봤지? 당신이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우리 뜻대로 의정 운영 안 하면 재미없을 줄 알아.' 이 신임 국회의장 앞에 어떤 논쟁적인 법안이 올라온다. 자신의 평소 지론과는 반대되는 내용의 법안이었다. 당내의 보다 합리적인 사람들, 그리고 해당 분야 전문가들은 '이미 너무 오래 기다렸다. 법안 통과가 세상을 위해 시급히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을 의장으로 밀어줬던 당내 강경파는 '그 법안을 통과시킨다면 당신을 의장직에서 몰아낼 것'이라고 윽박지른다. 신과 역사 앞에서 '무엇이 옳은 일인가'를 고심한 끝에, 의장은 법안을 통과시키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상대 당에 도움을 청한다. 당내 강경파의 반대를 넘어서기 위해서다. 국가 서열 3위인 국회의장직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이 나라와 세상을 위해 바른 결정이라는 양심의 소리를 따르는 것이다. 이런 정치, 가능할까? 그런데,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미국 이야기다. 지난달까지 잘 몰랐던 미국 서열 3위…마이크 존슨은 누구 마이크 존슨. 1972년생으로 올해 52세다. 2017년부터 루이지애나주의 연방 하원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하원의원 임기는 2년이므로 현재 4선째다. 트럼프와 같은 공화당 소속이다. 헌법 전문 변호사 출신인 마이크 존슨은 공화당 내에서도 보수 강경파로 꼽히던 인물이다. 복음주의 보수 기독교 신자로서, 여성의 임신 중지권 폐지와 동성애 반대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기자회견 중인 마이크 존슨 미 하원의장. 지난 16일. 사진 : 게티이미지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두 차례의 탄핵심판 당시엔 트럼프 변호인단에 참여했다. 트럼프가 2020년 대선 패배(당시 바이든 승리)를 부정하는 법적 논리 개발에도 관여했다. 지금도 트럼프와 가장 가까운 의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반대했다. 하원 군사위원회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우크라이나 지원을 포함한 국방 예산에 두 차례 반대표를 던졌다. 미국 연방정부 셧다운을 두고 공화당과 민주당이 충돌하던 2023년 10월, 하원 의장 공석 상태가 길어지던 혼란 속에 어쩌다 하원의장직을 맡게 됐다. 하원 다수당인 공화당에서 후보 세 명이 나섰지만 다들 득표에 실패해 22일간이나 의장 공백 상태가 이어진 뒤였다. 기독교 우파 이념과 트럼프에게 충실했던 이력, 적이 별로 없는 온화한 성격과 부드러운 언행 덕이라는 평이 돌았다. 첫 마가(MAGA, Make America Great Again, 트럼프의 캠페인 구호) 의장이라는 말도 들었다. 하원의장에 당선돼 축하받는 마이크 존슨. 2023년 10월 25일. 사진 : 게티이미지 하원의장은 미국의 국가 서열 3위로 꼽히는 고위직이다. 미국 대통령 유고시 승계 순위는 부통령(상원의장을 겸함)이 제일 먼저고, 그 다음이 하원의장이다. 막강하다면 막강한 자리지만, 마이크 존슨이 '마가' 진영의 뜻을 거슬러 자기 정치를 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이크 존슨이 하원의장으로 있는 한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무슨 상황인데 ① 하원에서 우크라이나 지원 방안이 통과되기 어려웠던 이유 우크라이나는 올 들어 러시아에 점점 밀리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싸우려고 해도 탄약이 절대 부족하다. 러시아군이 쏘는 양의 1/10밖에 응사하지 못한다는 외신 보도가 나왔다. 방공망도 무력화돼, 발전소와 도시 등이 러시아군의 공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러시아군 공습으로 파괴된 우크라이나의 TV 송신탑. 하르키우, 지난 22일. 사진 : AFP·연합 바이든 행정부와 여당 민주당은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자금을 더 지원해주려고 애썼지만 지원안의 의회 승인을 받아낼 수가 없었다. 하원은 공화당이 다수당인데, 그 공화당 안에서 가장 목소리가 큰 마가(MAGA) 의원들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강력한 지지 세력이기도 한 이들은 고립주의를 표방한다. '미국도 (진보 세력 때문에) 망해가는 판국인데 누굴 돕는다는 거냐. 우크라이나 일은 유럽이 알아서 하라'는 거다. 트럼프도 이들의 표심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내가 재선되면 당장 그 전쟁을 끝낼 것", 즉, 푸틴이 점령한 우크라이나 동부를 러시아 몫으로 인정해주고 우크라이나에 휴전을 강요할 거라고 말한 바 있다. 우크라이나 병사가 '하르키우를 위하여'라고 쓴 호위처 포탄을 소중하게 나르고 있다. 4월 5일. 사진 : 로이터·연합 이들은 바이든 대통령이 미국 남부 국경의 불법 이민자 난입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미국과는 상관도 없는 먼 나라 전쟁에 돈을 쓴다고 비난해 왔다. 바이든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지원안을 들이밀 때마다 '남부 국경 대책이나 갖고 오라'며 어깃장을 놓았다. 바이든이 국경 통제 강화 방안을 내놓지 않은 건 아니지만, 트럼프가 마가(MAGA) 의원들에게 '통과시켜 주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불법 이민자 유입으로 인한 혼란 사태가 지속돼야 자신의 대통령 선거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무슨 상황인데 ② 공화당 하원 강경파(MAGA)는 얼마나 센가 '꼴통'이라는 비속어는 기사에서 쓰면 안 되지만, 마가(MAGA) 강경파 의원들을 묘사하기에 이보다 적절한 단어도 찾기 어렵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념적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걸핏하면 연방정부를 셧다운시키겠다고 위협한다. 제대로 미국을 운영할 수 있는 세력이 맞느냐는 비판을 당내 중도파에게서도 듣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이들이 공화당 내에서 가장 입김이 세다는 것이다. 2023년 9월 연방정부 셧다운 위기 때, 당시 하원의장 케빈 매카시(공화당)는 '그래도 나라는 돌아가야 하지 않겠냐'며 민주당과 타협해 정부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마가(MAGA)의원들은 매카시가 공화당을 민주당에 팔아넘겼다며 하원의장 해임 투표를 밀어붙였고, 결국 그를 의장직에서 끌어내렸다. 해임 투표 4일 전의 케빈 매카시 당시 하원의장. 2023년 9월 30일. 사진 : 게티이미지 그렇지 않아도 목소리가 큰 이들의 기세는 더욱 등등해졌고, 공화당 내에서 누구도 이들에 맞서려 들지 않았다. 그런데 뭐가 달라졌길래... 진영의 입장에 얽매이지 않고 사실과 데이터, 양심에 기반해 판단을 수정한다는 것. 우리 정치에서 쉽게 보기 어려운 미덕을 마이크 존슨이 보여줬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존슨은 원래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에 반대표를 던졌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대통령직 승계 순위 2위(부통령 다음)의 자리에 오르자, 국가 안보 분야의 다양한 기관에서 기밀 자료를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윌리엄 번즈 CIA 국장. 마이크 존슨의 판단 변화를 위한 정보를 제공한 인물로 꼽힌다. 사진은 지난 3월 하원 정보위원회. 게티이미지 러시아의 공세와 우크라이나의 무기 부족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우크라이나 동부 전선이 무너지면 그다음 푸틴이 취할 행보는 무엇인지, 그 결과 유럽은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는지, 그때 미국은 얼마나 더 큰 부담을 져야 하는지 정보기관들의 상세한 설명을 들은 존슨은 고민에 빠졌다. 범 공화당계 안보전문가들도 존슨에게 우크라이나 지원 필요성을 설명했다. 트럼프가 대통령일 때 국무장관을 지낸 마이크 폼페이오도 존슨을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 이상 지원을 늦췄다간 정말 우크라이나가 무너질 수 있겠다는 위기감이 높아지면서, 공화당 내 국제주의자들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푸틴이 야욕을 채우게 놓아둔다면 히틀러의 동유럽 침공을 묵인했다가 큰 대가를 치러야 했던 역사가 되풀이될 거라며 존슨에게 우크라이나 지원안 통과를 요청하고 나섰다. 역사를 위해 무엇이 옳은가…고심 끝에 입장을 바꾸다 존슨의 입장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계기 중 하나는 지난 2월 백악관에서 열린 CIA의 정보 브리핑이었다고 뉴욕타임스는 보도했다. 윌리엄 번즈 CIA 국장의 기밀 보고가 있었고, 공화당 원로인 미치 맥코널 상원 원내대표도 우크라이나 지원 필요성을 역설했다는 것이다. 백악관 밀실에서 윌리엄 번즈 CIA 국장(맨 왼쪽 흰머리)이 바이든 대통령 등 정부 수뇌부에게 정보 브리핑을 하는 모습. 지난 13일. 사진 : 백악관 제공, AP·연합 존슨 의장은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이제 지역구의 대변자가 아니라 하원 전체와 미국 전체를 대표하는 정치인이 됐다"며 부담감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역사를 위해, 미국을 위해 무엇이 더 나은 결정인지 고뇌한 끝에, 그는 우크라이나 지원 방안을 통과시키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상대 당인 민주당 하원 지도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자신의 소속 정당인 공화당에서 반대표가 상당수 나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CNN은 존슨이 이란의 이스라엘 공습 다음 날(지난 15일)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 하킴 제프리스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고 보도했다. 닷새 뒤인 지난 20일, 결국 우크라이나 지원 법안은 이스라엘 지원 법안, 틱톡 금지 법안 등과 함께 하원 표결을 통과했다. 표결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고, 존슨은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중국·이란은 우리의 번영과 안보에 대한 국제적 위협이다. 그들의 약진이 자유세계를 위험으로 몰어넣고 있다. 미국의 리더십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우리가 등을 돌린다면 그 결과는 궤멸적일 것이다. … 하원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나는 정보기관들의 보고를 진실로 믿는다. 푸틴은 유럽으로 계속 진격할 것이다. 다음은 발트해 연안 국가들일 것이고, 폴란드나 다른 나토 동맹국들과도 겨루려고 할 것이다." 사실, 이 말 자체도 공화당 강경파는 일종의 배신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연방정부의 정보기관들이 '딥 스테이트(Deep State)'의 일부라는 음모론을 믿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 문제는 존슨에겐 개인적인 고민거리이기도 했다. 그는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크라이나에 미국의 아들들을 보내기보다는 총알을 보내는 편이 낫지 않나. 내 아들도 올가을에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군대에 갈 아들을 둔) 다른 많은 가족들처럼, 나에게 이건 실사격 훈련 같은 문제다. (정치) 게임이 아니다. 농담이 아니라고." 2차대전의 교훈…체임벌린이 아니라 처칠의 길로 우크라이나를 도와 러시아의 진격을 막아야 한다는 데에 뜻을 같이 한 의원들은 2차 세계대전의 교훈을 언급하며 마이크 존슨 의장의 결단을 옹호했다. 불에 탄 히틀러의 관저를 둘러보는 윈스턴 처칠. 히틀러가 쓰던 의자 앞에 서 있다. 1945년 베를린. 사진 : 게티이미지 하원 외교위원장 마이클 맥콜(공화당/텍사스)은 투표를 며칠 앞두고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계에 불이 붙은 형국이다. 역사는 훗날 우리에게 이렇게 물을 것이다. 당신은 체임벌린(2차대전 발발 직전의 영국 총리)이었는가, 처칠이었는가." 민주당 하킴 제프리스 하원 원내대표도 같은 비유를 썼다. 공화당 강경 보수파 원로인 뉴트 깅그리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처칠의 순간에 와 있다. 처칠은 우리에게 푸틴을 막는 것과 이란을 막는 것이 서방의 생존을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것이다." 이들은 왜 지금 처칠을 말하는가. 1930년대 후반, 서유럽과 미국은 히틀러의 독일과 싸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1938년 뮌헨으로 히틀러를 찾아가 협정을 맺고, 나치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일부 점령을 묵인한다. 독일과의 전쟁을 막겠다며 히틀러를 찾아간 영국 체임벌린 총리. 1938년 9월 24일, 독일 고데스베르크. 사진 : 게티이미지 독일이 1차대전 종전협정을 위반했지만 더 이상의 침략 행위를 하지 않으면 영국도 군사적 응징에 나서지 않겠다는 거래였다. 체임벌린은 영국으로 돌아와 '전쟁을 막았다, 평화를 지켰다'며 기뻐하는 시민들의 환대를 받았다. 히틀러와 함께 서명한 협정문을 들어보이며 '우리 시대의 평화'를 가져왔다고 환영 군중에게 연설하는 체임벌린 당시 영국 총리. 1938년 9월 30일, 런던 헤스톤 공항. 사진 : 게티이미지 히틀러에게 속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히틀러는 전체 유럽 점령의 길로 나아갔고 영국 상륙을 위해 대대적인 공습을 가했다. 후임 총리 윈스턴 처칠은 영국의 항전을 이끄는 한편, 나치 독일에 맞서길 주저하던 세계 각국을 반 독일 대오에 동참시켰다. 미국의 2차대전 참전도 상당 부분 처칠의 설득에 의한 것이었다. 처칠이 아니었다면 지금 우리는 매우 다른 모습의 세계에 살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승리의 V 사인'을 들어보이는 처칠. 1948년. 사진 : 게티이미지 그런데, 마이크 존슨의 이번 우크라이나 법안 통과가 '역사와 양심 앞에서의 고뇌', '처칠같은 불굴의 의지'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존슨 나름대로 상당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한 타협과 설득의 결과였다. 존슨, 트럼프를 설득하다 존슨은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에 반대하는 당내 인사들을 설득하는 데 오랜 시간과 공을 들였다. 가장 결정적인 건 트럼프를 설득한 것이었다.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의 방문을 받은 뒤 기자회견하는 트럼프 (왼쪽이 존슨). 지난 12일, 플로리다 마라라고 리조트. 사진 : 게티이미지 존슨은 투표 전주인 지난 12일, 플로리다 마라라고 리조트로 트럼프를 찾아갔다. 대화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트럼프는 18일 자신의 소셜미디어인 '트루스 소셜'에 이런 게시물을 올렸다. 하원 투표 이틀 전이었다. 이 문장 앞뒤에 평소 트럼프의 지론대로 '유럽이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붙어있었기 때문에 당시엔 별 이슈가 안됐는데, 나중에 보니 "하지만 우리에게도 중요하다!"가 중요한 문장이었다.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에 대한 트럼프의 입장이 '반대'에서 '묵인'으로 바뀌었음을 시사한 것이다. 실제로 트럼프는 지금까지도 우크라이나 지원안 통과에 대해 별다른 반발을 보이지 않고 있다. 트럼프를 믿고 '존슨을 하원의장직에서 끌어내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강경파 의원들은 좀 뻘쭘하게 됐다. 존슨이 통과시킨 우크라이나 지원 방안은 상원 원안과는 다른 점들을 담고 있기도 하다. 하원 공화당 내 반대파들을 설득하기 위해 존슨이 수정한 것이다. 이를테면, 미국의 지원금이 우크라이나인들의 연금이나 복지수당 등으로 새지 않도록 제약을 걸고, 상당부분을 '주고 끝나는' 원조가 아니라 '융자(loan)'의 형식을 취하도록 했다. (미국 대통령이 탕감해 줄 수 있다는 조건이 붙어있다.) 존슨, 당내 강경파에 의해 하원의장직에서 밀려날까 공화당 하원 MAGA파에서도 가장 강성인 인물은 마저리 테일러 그린 의원이다. 그린은 2023년 9월 연방정부 셧다운 국면에서 민주당과 야합했다는 이유로 케빈 매카시를 하원의장직에서 몰아내는 데 앞장선 장본인이다. 이번 우크라이나 지원안 통과를 놓고도 그린은 "미국과 아무 상관도 없는 전쟁에 지원이라니, 말이 되나. 공화당을 배신했다!"고 분통을 터뜨리며 존슨 의장을 몰아내는 투표를 추진하겠다고 공언했다. 과연 마이크 존슨도 케빈 매카시처럼 축출당하는 운명을 맞게 될까. 마조리 테일러 그린 의원. 지난 18일, 워싱턴DC 의사당. 사진 : 게티이미지 의외로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직을 건 승부수가 통하면서, 마이크 존슨의 위상이 예전보다 강화됐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지원안의 하원 투표 직후, 그러니까 이번 주는 유태인들의 유월절 주간으로, 의회가 휴회에 들어가고 의원들은 지역구 활동 중이다. 마저리 테일러 그린은 휴회 전에 존슨 의장 해임 요구안을 제출하지 못했다. 공화당 내 최대 권력자인 트럼프가 마이크 존슨 해임에 힘을 실어주지 않을 것임을 감지했고, 동원할 수 있는 표를 따져볼 때 존슨 해임안 통과를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만일 해임안 투표를 밀어붙였다가 존슨 축출에 실패하면 오히려 자신이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된다. 그린은 오는 29일 의회가 다시 열리면 존슨 해임안을 어쨌든 꺼내 들려 하겠지만, 다수의 의원들은 그만 다음 이슈로 넘어가고 싶어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존슨 축출에 성공한다 한들, 후임 의장 선출도 난제다. 이미 지난해 10월 케빈 매카시 해임-존슨 의장 선출 과정을 거치면서, 공화당 내에는 하원의장에 오를 만한 다른 후보가 마땅치 않다는 사실이 드러난 상태다. 마저리 테일러 그린 본인은 워낙 적이 많은 인물이라, 남을 끌어내릴 순 있어도 자신이 의장이 될 순 없다. 하킴 제프리스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 지난 3월, 사진 : 게티이미지 공화당 소속인 존슨의 의장직 유지를 위해 민주당 하원들이 나설까? 그럴 가능성이 높다. 우크라이나 지원안이 통과된 것은 민주당이 원하던 일이고, 바이든 대통령에게 호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원 민주당은 아직 당 차원에서 존슨을 돕겠다 말겠다 말을 하지 않고 있다. 미국엔 "적이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을 땐 방해하지 말라"는 격언이 있기 때문이다. 하원 공화당에서 또 자기들끼리 치고받느라 의회가 마비되면 유권자들은 '어휴... 나라를 맡길 수 없는 사람들'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될 거고, 민주당은 반사이익을 볼 가능성이 있다. 심지어는 다수당도 아닌 민주당의 하킴 제프리스 원내대표가 어부지리로 하원의장 자리를 가져가는 일도 벌어질 수 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 미국의 민주주의 시스템은 작동했다 이번 우크라이나 지원안 통과를 두고 서구에서 새삼 회자되는 유명한 말이 있다. "미국인들은 결국 옳은 선택을 한다. 다른 모든 옵션을 소진한 후에." 윈스턴 처칠이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근거를 찾을 수는 없다고 한다. 처칠이 실제로 저런 말을 남겼든 아니든, 미국은 이번에도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믿는 길에 발을 들여놓았다. 미국의 민주주의 시스템은 국가가 표방하는 가치와 국익을 함께 지키는 결정을 이끌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아무튼 미국은 그랬다. 디자인 : 고결
도쿄 올림픽 여자 계영 800m에서 1위에 오른 중국 대표팀. 사진 : 게티이미지 각종 스캔들로 몸살을 앓는 중국 체육계와 관련해 또 다른 논란이 터져 나왔습니다. 중국이, 금지약물(도핑) 검사를 통과하지 못한 자국 수영선수들을 지난 2021년 여름 도쿄 올림픽에 대거 출전시켰다는 겁니다. 중국은 당시 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 등 메달 6개를 획득했습니다. 도핑 위반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긴 것이 확인된다면, 중국이 땄던 2020 올림픽 메달 가운데 일부가 취소될 거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무슨 상황인데? 문제의 논란은 뉴욕타임스의 현지시간 20일 자 보도로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실제로는 2021년에 열린 2020 도쿄올림픽을 7개월 앞둔 시점에, 중국의 정상급 수영 선수 23명이 금지약물 양성 반응을 보였지만, 중국 고위 관리들이 이를 덮었다는 겁니다. 금지약물 검사를 담당하는 국제기구인 세계도핑방지기구, WADA가 이를 보고받고도 묵인했기 때문에 문제 선수들이 올림픽에 출전했고, 일부는 메달까지 따게 됐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23명은 당시 중국 올림픽 수영 선수단의 절반에 이르는 숫자입니다. 금지약물 양성 반응을 보였던 선수로는 장유페이(도쿄 올림픽에서 금 2, 은 2), 왕순(개인혼영 200m 금), 친하이양(지난해 세계수영선수권에서 평영 200m 세계 신기록) 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이번 사안은 올해 7~8월 파리 올림픽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이라 더욱 주목받고 있습니다. 당시 금지약물 양성 반응을 보였던 선수들 중 여럿이 다시 이번 올림픽에 중국 대표팀으로 출전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좀 더 설명하면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자료사진입니다. 문제가 된 약물은 트리메타지딘(TMZ)입니다. 협심증 치료제의 하나로, 혈류량을 늘려 체내 산소 공급을 원활하게 합니다. 체력과 지구력을 높이고 회복 시간을 앞당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작용도 커서, 세계도핑방지기구(WADA)가 스포츠 선수의 사용을 금지했습니다. 중국 수영 스타 쑨양, 러시아 피겨 스타 카밀라 발리예바가 이 약물을 썼다가 들통나 징계를 받았습니다. 중국도핑방지위원회(CHINADA)는 올림픽을 7개월여 앞둔 시점에 자체 조사에서 문제의 약물(TMZ)을 검출했습니다. 하지만 '숙소의 음식을 통해 선수들이 자신도 모르게 극소량 섭취한 것'이라며 '문제없으니 올림픽에 출전시키겠다'고 세계도핑방지기구(WADA)에 알렸습니다. WADA 내부의 일부 전문가와 미국 도핑방지기구의 여러 관계자가 “해당 선수들의 선수 자격을 일시 정지하고 추가 조사를 시작해야 한다. 선수들의 신원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WADA는 "선수들이 도핑 규정을 준수하지 않았다는 근거가 부족하다"며 중국 선수들의 올림픽 출전을 허락했습니다. 미국 도핑방지위원회의 트래비스 타이가트 최고경영자(CEO)는 "이미 2020년부터 중국 수영의 도핑 혐의를 세계도핑방지기구(WADA)에 여러 차례 제보했지만, 모두 묵살당했다"며 "모든 증거를 묻어버리고 용기 있는 내부 고발자의 목소리를 억압한 데 연루된 모든 사람들에게 최대한의 책임을 지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한 걸음 더 미국 수영 전문매체 스윔스왬은 20일(한국시간) "도쿄올림픽 여자 계영 800m에 출전했던 미국 수영 선수들이 미국도핑방지위원회(USADA)로부터 '중국이 계주 멤버의 도핑 규정 위반으로 금메달을 박탈당한다. 미국이 금메달을 승계받는다'고 통보받았다"고 보도했습니다. 미국 수영 선수들도 소셜미디어를 통해 '금지 약물 쓴 선수들의 영구 제명'을 요구하는 등 비판에 가세하고 있어서,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입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 겉으로 드러나는 순위를 위해 스포츠 윤리를 위반하는 행위가 중국 체육계에서 종종 벌어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베이징 하프마라톤 대회에서 승부 조작 행위가 드러났습니다. 중국 선수를 1위로 만들어 주기 위해서, 아프리카 선수들이 일부러 속도를 늦추고 중국 선수의 레이스를 도와준 겁니다. ▷ 관련 기사 중국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 중립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할 국제기구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데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던 당시, 세계보건기구(WHO)가 중국의 영향력에 좌지우지돼 객관적이고 시의적절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는 논란이 벌어진 바 있습니다.
이란이 이스라엘 본토를 사상 처음으로 직접 공습한 데 따라 중동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본격 보복에 나설 경우 중동 전체 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동 지역 긴장 고조는 바로 국제 유가 급등으로 이어져 우리나라를 포함한 각국 경제에 충격을 줄 수 있습니다. 이런 우려 때문에 오늘(15일) 오전 아시아 각국 증시가 동반 약세를 보였습니다. 무슨 상황인데? 이란이 13일(현지 시간) 심야에, 드론과 미사일 수백 기를 이스라엘 본토로 날려 보냈습니다. 다음 날 새벽까지 약 5시간 동안 적어도 185대의 드론, 36기의 순항미사일, 110기의 지대지미사일이 예루살렘 등에 떨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이언돔' 방공망으로 이를 대부분 요격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스라엘 방공 시스템 '아이언돔'이 이란 미사일과 드론 요격하는 모습 (사진=AP) 이란의 공습은 이달 초 이스라엘군이 시리아 주재 이란영사관을 폭격한 데 따른 보복입니다. 이란혁명수비대(IRGC)는 공습 시작 직후 성명에서 "지난 1일 시리아 다마스쿠스 주재 이란영사관에 대한 공격과 이란군 지휘관 사망 등 사악한 시온주의자 정권(이스라엘)의 수많은 범죄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란이 친이란계 무장세력들을 배후에서 움직여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대행시킨다고 보고 그 뿌리를 친다는 개념으로 폭격을 단행했던 걸로 알려졌습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보복해서 사태가 확전으로 치달을까요? 미국은 바이든 대통령, 오스틴 국방장관 등이 전방위로 네타냐후 정부를 설득하고 있습니다. 가자지구 전쟁만으로도 상황이 어려운데, 이번 이란 공격에 감정적으로 보복했다간 지옥문을 열게 되니까 참으라는 겁니다. 미국은 확전할 경우 이스라엘에 군사 지원을 하지 않을 뜻도 비쳤습니다. 미국의 무기 지원이 없으면, 이스라엘로서도 이란을 상대로 확대된 군사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전시내각은 현지 시간 14일 보복 방안을 논의했지만, 미국의 강경한 입장 때문에 일단 보류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우리 시간으로 오늘내일 중 제한된 군사행동이 나올 가능성은 열려 있습니다. 미국 등에서 "이르면 15일(현지 시간) 중 이스라엘의 대응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좀 더 설명하면 이란의 이번 이스라엘 공격은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것을 꺼린 '계산된 도발'이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이란의 공격은 군사적 목표물만 겨냥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 전쟁이 애초에 지난해 10월 7일 하마스의 비인도적이고 야만적인 민간인 공격으로 촉발됐다는 사실을 감안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란이 여러 경로를 통해 미국에 '이번에 실시할 공격은 자국 영사관이 폭격당한 것에 대해 대응하는 것일 뿐이며, 그 이상 진행되지 않을 것. 확전은 원치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한 사실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로이터통신은, 이란이 미리 튀르키예를 통해 미국에 그런 뜻을 전했다고 14일 외교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습니다. 로이터는, 미국이 이에 대해 "작전은 일정 한도 내에서만 이뤄져야 한다"고 이란 측에 주문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란 입장에선 자국 외교 공관이 이스라엘의 폭격을 당한 마당에 뭔가 대응 행동을 취해야 했지만, 이스라엘과 전면적인 전쟁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마이클 싱 전 미국 국가안보회의(NSC) 중동 담당 선임국장은 "이렇게 명시적으로 긴장 완화를 원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평가했습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 이란과 관련된 국제 정세 불안은 호르무즈 해협의 유조선 물류에 영향을 주면서 바로 국제 유가 급등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가뜩이나 인플레가 여전히 세계 경제를 짓누르는 상황이라 유가 급등은 또 다른 충격으로 각국 경제를 강타할 수 있습니다. 일단 오늘(15일) 현재 국제 원유시장은 패닉 양상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물밑에서 벌어지는 외교의 흐름상 심각한 확전은 없을 것으로 보기 때문인지, 서부텍사스중질유(WTI)와 브렌트유 가격은 오히려 0.3% 정도 하락한 모습입니다. 관건은 네타냐후 총리가 이스라엘 내부의 강경 대응 목소리를 어떻게 설득할지입니다. 지금 약한 모습을 보이면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권의 공격이 더 늘어날 테니 본때를 보여야 한다는 여론도 이스라엘 내부에는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비행 중인 여객기의 벽체가 떨어져 나간다. 이륙하려고 달리던 여객기의 바퀴가 빠진다. 이륙 중에 엔진 덮개가 떨어지더니 날개를 친다. 이 중 하나라도 내가 겪는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이 세 사고는 미국 보잉(Boeing)이 만든 여객기들에서 최근 석 달 사이 벌어진 일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6년 전 보잉 여객기 2대가 연속으로 추락한 이후 '안전 제일', '품질 회복'을 다짐하는 가운데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비행기를 어떻게 만들고 있길래 그럴까? 미국에선, 보잉의 기업 문화와 경영 철학에 문제가 생겼다는 지적이 많이 나온다. 머리부터 썩어들어간 생선에 비유하기도 한다. 미국의 항공산업 전문가들은 보잉이 지난 20여 년간 '잭 웰치(Jack Welch)식 경영의 부작용으로 깊은 병에 걸린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맞다. 경영의 신으로 불리던 GE의 잭 웰치, 그 사람이다.) 무슨 얘기일까. 사고들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여객기 타기 무섭다…비행기를 어떻게 만들고 있길래 지난 4월 7일 오전(현지 시간), 미국 사우스웨스트항공의 보잉 737-800 여객기가 휴스턴으로 가기 위해 덴버 공항에서 이륙했다. 그런데 우측 창가에 앉은 승객들의 눈에 황당한 장면이 포착됐다. 날개 밑 엔진을 덮은 금속판이 뜯겨 너덜거리다가 날개를 친 뒤 날아가 버린 것이다. 미국 ABC 뉴스 캡처 비행기는 이 상태로 활주로를 달려 이륙한 뒤, 날개 위에 엔진 덮개 금속판이 걸친 채로 1만 피트까지 상승했다. 그사이 기장과 관제탑은 교신을 통해 항공기 작동 상태를 점검하고 25분 만에 안전하게 회항하는 데 성공했다. 승객들은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 달 전인 지난 3월 7일에는 샌프란시스코 공항을 이륙하던 유나이티드에어라인의 보잉 777-200 여객기에서 랜딩기어 부품이 떨어져 나갔다. 부품은 공항 직원주차장으로 떨어졌고, 세워져 있던 차량이 박살났다. 타이어 하나가 유실됐지만 나머지 타이어들이 있어서 해당 항공기는 목적지에는 무사히 착륙했다. 이륙 중 빠진 보잉 여객기의 타이어, CBS 뉴스 캡처 떨어진 랜딩기어 부품에 부서진 차량. 샌프란시스코 공항 직원주차장. 사진=AP 위 두 사고도 황당하지만, 1월 5일(현지 시간)의 사건은 더욱 위험했다. 1만 6천 피트 상공을 날던 비행기의 벽체가 뜯겨 나간 것이다. 하마터면 창가 승객이 허공으로 빨려 나가는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질 뻔했다. 사진=로이터, 연합 뜯겨나간 부분은 '도어플러그'라고 부른다. 기사 쓰기 복잡해서 '문짝'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문짝은 아니고, 문이 달릴 자리에 - 그러나 당장은 문이 필요 없어서 - 막아놓은 문짝 모양 부품이다. (그래서 '플러그'라 부른다.) 떨어져 나간 도어플러그는 가정집 뒷마당에서 수거했다. 하마터면 애먼 사람이 이것에 맞아 희생될 뻔했다. 사진=로이터, 연합 항공안전당국이 수거한 도어플러그와 뜯겨나간 기체를 정밀 조사했는데, 뜯겨나갔다는 것보다 더 황당한 사실이 드러났다. 도어플러그를 동체에 고정해 두고 있어야 할 나사 4개가 애초에 안 박혀 있었다는 것이다. "나사 빠진"이라는 말이, 비유가 아니라 팩트였던 셈이다. 이 사안에 대해 단독 보도를 이어가고 있는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사정은 이러했다. 해당 항공기는 시애틀 외곽의 렌튼 공장에서 만들어지는데, 동체 부분은 협력사인 '스피릿에어로시스템즈'에서 만든다. 아예 스피릿에어로 측 인원들이 보잉 공장에 들어와서 일을 한다. 보잉 측 작업자는 도어플러그의 나사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를 제거한 뒤 스피릿 측에 제대로 된 나사를 박아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계속 날짜가 지연됐다. 납품 일정을 맞춰야 하니 동체는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하지만, 제대로 된 나사가 제자리에 박혔는지 누구도 사후 점검을 정확히 하지 않은 것이다. 보잉 737 맥스8 생산라인. 2019년 3월 어안렌즈로 촬영. 사진=AP, 연합 여기까지는 제조상의 문제지만, 아예 설계 자체가 잘못돼서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내기도 했다. 2018년 10월 29일, 인도네시아 라이온(Lion) 에어가 운용하는 보잉 737 맥스(Max) 여객기가 추락해 189명이 숨졌다. 채 다섯 달이 안 된 2019년 3월 10일, 이번엔 에티오피아 항공사가 운용하는 737 맥스8 여객기가 추락해 157명이 산화했다. 에티오피아에서 추락한 보잉 사고기 잔해. 2019년 3월, 게티이미지 이 두 건의 사고는 원인이 같았다. 비행기가 조종사의 의사에 반해 스스로 코를 땅으로 처박아 추락한 것이다. 737 맥스는 기존 737의 프레임에 더 크고 강력한 엔진을 달았다. 그 영향으로, 이륙 시 비행기 앞부분이 더 많이 들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에어버스(A-320)와의 경쟁 때문에 빨리 이 비행기를 시장에 내놓고 싶었던 보잉은 소프트웨어가 자동으로 비행기 앞부분을 잡아 내리는 시스템(MCAS)을 탑재한다. 그런데 비행기의 자세를 감지하는 센서에 문제가 있었다. 센서 하나에 문제가 있을 경우 이를 보완할 백업 센서도 없었다. 실제보다 더 기체 앞부분이 들린 걸로 오인한 MCAS 시스템은 비행기가 정상적으로 날고 있는데도 비행기 앞머리를 숙였다. 기장은 당황해서 수동으로 비행기의 고개를 들려 했지만, 그럴수록 시스템은 더욱 강한 힘으로 비행기의 앞머리를 끌어내렸고, 결국 추락하고 말았다. 인도네시아 보잉기 추락 사고 희생자 가족들이 유해를 전달받고 오열하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 보잉은 조종사들, 그리고 인도네시아와 에티오피아의 후진성을 들먹이며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했지만, 설계시 안전을 위한 충분한 고려를 하지 않았고, 고객사(항공사)에 대해 충분한 교육도 제공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매뉴얼엔 MCAS 자동 기능에 대한 설명이 없었고, 이 기종을 구입한 라이온에어가 '조종사들을 위한 시뮬레이터 교육'을 요구하자 '그런 거 필요 없다. 기존 737처럼 몰면 된다'고 일축했던 것이다. 보잉이 처음부터 이런 회사였던 것은 아니다. 문제가 생긴 건 1997년에 맥도널 더글러스(McDonnell Douglas)와 합병한 이후부터라고, 항공산업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보잉은 원래 어떤 회사였나 보잉은 1916년 시애틀에서 윌리엄 보잉이 창업한 회사다. 시애틀은 미국 북서쪽 태평양 연안에 위치하고 있다. 할리우드가 있는 LA, 실리콘밸리가 있는 샌프란시스코(SF) 권역을 지나 북쪽으로 쭉 올라가면 캐나다 거의 다 가서 있다. 지적이고 자유로운 풍토를 갖고 있어서, 시애틀 권역에선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스타벅스 등 세계적인 기업들이 많이 나왔다. 보잉은 가족 같은 분위기, 여유로운 근로 문화를 자랑하는 직장이었고, 항공 엔지니어들의 꿈의 회사였다. 그런 엔지니어들 가운데서 성장한 사람들이 경영자가 됐다. 최고경영진과 일선 엔지니어들 간에 권위주의적인 문화도 별로 없었다고 한다. 시애틀 지역의 분위기가 그대로 회사에도 녹아 있었다. 시애틀 교외 렌튼의 보잉 공장 전경. 2023년 4월. 위키피디아 돈은 알아서 벌리는 거고, 하늘을 나는 멋진 기계를 만들어보자는 엔지니어들의 낭만으로 이뤄진 조직이었다는 게 1990년대 이전의 보잉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다. 그게 가능했던 건, 시대상과 관련이 있다. 1960~70년대에는 보잉이 비용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새 비행기를 만들어도 별 문제가 없었다. 고객인 항공사에 청구하면 항공사들도 군소리 없이 돈을 줬기 때문이다. 당시는 미국도 항공산업에 규제가 강력하고 경쟁이 별로 없어서, 항공사들도 땅짚고 헤엄치기하는 시장이었다고 한다. 1980년대 들어서 산업의 지형이 보다 경쟁적으로 바뀐다. 카터 대통령과 레이건 대통령이 규제 완화와 경쟁 촉진 정책을 편다. 여행객들이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항공편을 골라 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항공사들은 이전처럼 비용을 여행객들에게 전가하기 어려워졌다. 푯값을 내려 경쟁을 벌여야 했다. 보잉과 같은 제조사들도 이제 비행기를 만들 때 항공사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야 했다. 미국 항공기 제조업의 강자 가운데 하나였던 맥도널 더글러스는 1990년대 들어서면서 민간항공기 부문이 죽을 쑤고 있었다. 나중엔 군용기 경쟁에서까지 보잉과 록히드 마틴에 밀리면서, 결국 1997년에 보잉에 합병된다. 분명히 보잉이 맥도널 더글러스(MD)를 합병한 거래였는데, 이후 상황은 마치 MD가 보잉을 잡아먹은 것처럼 흘러가기 시작한다. 박힌 돌 뽑아낸 '굴러온 돌'…보잉의 기업 문화가 바뀌기 시작하다 1997년 합병 당시 보잉의 CEO는 필 콘딧(Phil Condit)이었다. 그는 앞서 설명한 보잉의 전통에 따라 내부에서 양성된 엔지니어 출신이었다. 기존 보잉의 문화를 대변하던 사람이었다. 맥도널 더글러스의 CEO였던 해리 스톤사이퍼(Harry Stonecipher)는 합병 과정에서 보잉의 주식을 상당량 받고 COO(최고운영책임자)로 합류했다. 그는 GE에서 잔뼈가 굵어 대형 엔진 부문 사장까지 지낸, 잭 웰치의 제자였다. 스톤사이퍼가 경영에 합류하면서, 보잉에선 '문화전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해리 스톤사이퍼. 2004년 5월, 사진=게티이미지 스톤사이퍼는 '기업은 돈 벌기 위한 조직이며, 경영자는 주가 상승에 대한 기여로 평가받는다'는 잭 웰치식 경영 철학의 신봉자였다. 그는 보잉의 기존 엔지니어 출신 간부들을 "기업 경영을 모르면서 취미로 비행기 만드는 자들"이라고 비난하며 구조조정과 아웃소싱, 비용 절감의 드라이브를 걸었다. 직원들에 대한 태도도 달랐다. 스톤사이퍼에게 직원들은 '자본이 생산수단으로서 고용한 노동력'일 따름이었다. 스톤사이퍼가 합류한 뒤 경영자의 위상과 권위가 높아진 것에 대해 필 콘딧은 별 불만이 없었다. 매출 등의 숫자도 급격히 좋아졌다. 2003년, 스톤사이퍼는 보잉의 CEO 자리를 넘겨받는다. 그는 동체 제조 부문을 통째로 사모펀드에 팔았다. 그게 '스피릿에어로시스템즈'가 된다. (올해 1월 비행 중에 도어플러그가 떨어져 나간 그 동체를 만든 회사다.) 짐 맥너니 보잉 CEO, 2012년 게티이미지 후임으로 들어선 CEO도 GE에서 잭 웰치에게 경영을 배운, 잭 웰치 신봉자였다. 짐 맥너니(Jim McNerney)는 보잉을 '월가 투자가들에게 사랑받는 현금 창출 기계'로 만드는 것이 경영자로서 자신의 사명이라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스톤사이퍼 시절에 이어 외주화와 협력업체 단가 후려치기가 계속됐다. 그는 2011년, 회사의 운명에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2000년대 들어 보잉은 에어버스의 A320에게 빠르게 시장을 잠식당하고 있었다. 엔지니어들은 737 모델의 수명이 다했다고 보고, 747처럼 시장을 선도할 새로운 여객기를 개발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맥너니가 보기에, 백지부터 설계하는 방식(이른바 '클린 시트' 개발)은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더 적은 인풋으로 더 많은 아웃풋을, 그래서 더 많은 이익을 내야 하는 게 잭 웰치의 제자이자 사도인 그의 경영 철학이었다. '기존 737 프레임에 엔진만 더 큰 걸 얹어라.' 그가 엔지니어들에게 내린 방침이었다. 그렇게 하면 250억 달러나 소요될 개발비를 1/10로 줄일 수 있다는 거였다. 맥너니와 경영진은 새 모델을 시장에 더 빨리 내놓아야 한다고 독촉했다. 그 결과로 737 맥스는 설계의 안전성을 충분히 검증하지 못한 채 출시됐고, 결과는 앞서 설명한 2018년과 2019년의 비극적인 추락 사고였다. 데니스 뮬렌버그. 2019년 당시 보잉 CEO. 사진=게티이미지 그 사고의 책임을 떠안은 건 맥너니가 아니라 데니스 뮬렌버그 CEO였다. 맥너니는 2014년에 585억 달러의 보상 패키지를 받고 이미 퇴직했기 때문이다. 뮬렌버그는 군용기 입찰 부문에서 일하던 사람이지만 제조공정 비용 절감이 특기였고, 주주들에게 현금 수익을 제공하는 게 CEO의 임무라는 맥너니의 경영 철학을 충실히 따르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2013년에서 2018년 사이, 보잉은 자사주 매입에 415억 달러를 썼다. 뮬렌버그가 CEO로 재직하는 동안 보잉 주가는 3배가 됐다. 그러나 맥너니가 뿌려놓은 비극의 씨앗은 결국 2018, 2019년의 추락 참사로 터졌다. 뮬렌버그는 보잉 잘못이 아니라 조종사와 항공사의 실수라는 식의 대응으로 일관했지만, 여론뿐 아니라 시장의 반응까지 나빠지자 결국 2019년 말에 물러나야 했다. 데이빗 칼훈, 현재 보잉 CEO. 사진=게티이미지 그 후임으로 들어와 지금까지 CEO 자리에 앉아 있는 인물이 데이비드 칼훈(David Calhoun)이다. 칼훈도 GE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해 GE 이사회 멤버까지 오른 잭 웰치 경영의 신봉자였다. 그는 2009년부터 보잉의 이사회 일원이었다. 맥너니와 뮬렌버그가 비용 절감과 수익 증대, 주주 가치 제고를 항공기 안전보다 우위에 두고 경영할 때 그들을 지원하는 인물이었다. CEO가 된 칼훈의 임무는 2018, 2019년 추락 사고를 낳은 안전불감증이 재발하지 않도록 보잉의 시스템을 뜯어고치는 것이었지만, 이미 문제의 일부인 그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올들어서도 잇따른 황당한 사고들이 그걸 증명한다. 경영진의 또 다른 실수…노조 영향 줄이려다 생산직 인력의 질 하락 회사 문화가 이렇게 바뀌는 동안, 보잉의 직원들이 그냥 보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2000년, 보잉의 본산인 시애틀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구호는 "너드(엔지니어)가 없으면 비행기도 없다! (No nerds, no birds!). 비용과 이익만 따지는 GE 출신 경영인들에 대한 시애틀 엔지니어 노조원들의 반발이었다. 경영진은 본사를 시카고로 옮기는 것으로 대응했다. (2022년엔 우주 부문과 국방 부문 정부 입찰을 위해 워싱턴DC 인근 버지니아로 다시 옮겼다.) 2011년엔 노조 없는 남부 주(사우스캐롤라이나)에 공장을 대거 증설하고, 시애틀 일대에 있던 787 드림라이너 생산라인을 이리로 옮겼다. 2019년부터 2년간은 추락 사고를 조사하는 미국 연방정부의 명령으로 사고 기종은 아예 팔지 못하게 됐고, 항공사들의 주문도 줄었다. 코로나19까지 터지자, 경영진은 대량 해고와 조기 명퇴로 대응했다. 나이와 경험이 많은 직원들이 대거 생산 현장을 떠났다. 보잉 737 맥스9 생산라인. 2017년 2월, 워싱턴주 렌튼. 사진=로이터, 연합 코로나 국면이 끝나고 항공기 주문이 늘기 시작하자, 경영진은 노조가 약한 지역에서 저임금 신규근로자를 대규모로 충원했다. 과거 시애틀에서는 회사의 문화와 현장 업무 노하우가 지역사회를 통해 자연스럽게 다음 세대로 전승됐지만, 이제는 그런 효과가 일어나지 않았다. 2022년 이후 새로 충원된 직원들은 작업 숙련도와 공정 이해도가 상대적으로 낮았다. 그렇지만 경영진은 2년간 벌지 못한 돈을 빨리 벌어야 했고, 에어버스와의 경쟁도 있었기 때문에 여객기 출하 속도를 높여야 했다. 조립이 잘못된 부분이 발견돼도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올해 1월 '나사 빠진 문짝' 사태도 그래서 벌어졌다. 내부 고발 잇따랐지만… 보잉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으며, 항공기라는 제품의 특성상 불량 문제는 결국 인명 피해로 이어질 거라는 경고는 내부에서 끊임없이 나왔다. 그때마다 이익과 주가를 앞세우는 경영진은 내부고발자들을 배신자나 조직 부적응자로 몰았고, 법의 힘을 빌어 괴롭혔다. 사우스캐롤라이나 공장에서 787 드림라이너 생산라인의 품질 관리자로 일하던 존 바넷(62)은, 생산 일정 압박에 시달리는 작업자들이 결함 있는 부품을 그대로 항공기 제작에 쓰고 있다며 언론에 폭로했다. 2017년 은퇴 전까지 30여 년간 보잉에서 근무한 그는 내부고발자 소송에서 증거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달, 갑자기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자살로 발표했지만, 그의 지인들은 바넷이 "내가 죽거든 자살이라는 발표를 절대 믿지 말라"고 말했다며 반발하고 있다. 존 바넷, 보잉 내부제보자. 사진=위키피디아 살아서 계속 싸움을 이어가는 내부고발자도 있다. 미 해군 장교 출신으로, 시애틀 교외 렌튼 공장의 737 생산라인 안전 책임자였던 에드 피어슨은 2018년 6월 어느날, 경영진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737 맥스 생산 일정 독촉에 시달린 직원들이 만성피로에 시달리고 있고 품질 불량이 발생해도 그냥 넘어가는 일이 늘고 있다며, 이대로 가면 큰 문제가 생길 것이니 생산을 중단하고 시스템을 재점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군에서는 그렇게 한다면서, 피어슨은 "내 안의 모든 경고벨이 울리고 있다" "내 평생 처음으로, 내 가족을 보잉 항공기에 태우는 것이 주저된다"고 썼다. 경영진은, '군은 이익을 내야 하는 조직이 아니지 않느냐'며 피어슨의 생산 중단 요구를 묵살했다. 넉달 뒤인 2018년 10월, 피어슨의 걱정은 현실이 됐다. 인도네시아 라이온항공이 운행하던 보잉 737 맥스 여객기가 추락한 것이다. 이후 피어슨은 회사를 나와 의회 증언, 미디어 출연 등을 이어가며 보잉의 문화를 바꾸기 위한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돈, 돈 했지만… 올해 초, 보잉은 2023년 4분기에 3천만 달러의 순손실을 봤다고 발표했다. 1년 전의 6억 6천300만 달러보다는 줄어든 수치였다. 올해 1분기에는 문짝 사고를 겪은 알래스카항공에 손실보상금으로 1억 6천만 달러를 지급했다. 우리 속담에 "게도 구럭도 다 잃었다"는 말이 있다. 어떤 일을 하려다 목적도 이루지 못하고 가지고 있던 것조차 다 잃었다는 뜻이다. 보잉의 지난 20여 년이 딱 그 짝이다. 안전보다 이익과 주가를 앞세웠지만, 핵심 가치인 안전을 잃고 나니 이익도 주가도 날아갔다. 지난 3월, 미국 내 항공사 CEO들이 이례적으로 보잉 이사회에 집단으로 항의를 제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보잉 비행기를 다수 운용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서, 불안해서 못살겠다는 아우성이었다. 보잉 이사회는 안전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겠다며 머리를 조아리고, 데이빗 칼훈 CEO를 올해 말로 퇴진시키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GE 마크 앞에서 연설하는 생전의 잭 웰치. 게티이미지 미국 항공업계 전문가들은, 보잉이 초심, 즉 엔지니어들의 이상주의와 품질 중심주의 중심으로 회사의 문화를 복원할 새로운 경영진을 구성하지 못하면 안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거라고 보고 있다. 잭 웰치의 사도들이라는 GE 출신 경영진들이 지난 20년간 반면교사로 보여준 게 있기 때문이다. 디자인 : 최혜지
보잉(Boeing)은 세계적인 항공기 제조기업이죠. 우리도 국내외 여행을 할 때 보잉이 만든 여객기를 많이 탑니다. 그런데, 그 보잉이 만든 여객기들에서 비행 중 부품이 떨어져 날아가는 등의 사고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밤사이 그런 일이 미국에서 또 벌어졌네요. 무슨 상황인데? 미국 사우스웨스트항공 소속 보잉 737-800 여객기가 이륙 도중 엔진 덮개가 떨어져 나가는 사고로 회항했습니다. AP와 로이터 등 외신들에 따르면, 현지시간 7일 오전 7시 50분쯤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 공항을 이륙해 휴스턴으로 가려던 여객기가 이륙하는 과정에서 엔진 덮개가 분리된 뒤 날개를 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문제의 여객기는 이륙 후 1만 피트 상공까지 상승했다가 25분 만에 안전하게 회항했다고 사우스웨스트항공은 밝혔습니다. 이 여객기에는 승객 135명과 승무원 6명 등 총 141명이 탑승하고 있었으며, 사고로 인해 다친 사람은 없었다고 알려졌습니다.
트럼프가 자신의 소셜미디어 '트루스 소셜(Truth Social)' 우회 상장으로 6조 원대 돈방석에 앉게 됐다는 기사가 많이 나왔다. 게다가 뉴욕주 사기 사건 항소를 위한 공탁금을 많이 감면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부동산 재벌이라는 트럼프에겐 돈 걱정 할 일이 없어보인다. 겉보기로는 그렇다. 실제로는 다르다. 트럼프는 선거자금이 충분치 않다. 각종 민·형사 재판으로 인한 변호사비 지출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복잡한 모금 기구들을 통해 나름대로 후원금을 끌어모으고 있지만 그중 상당 부분이 법률 비용으로 나가고 있어서 유세활동도 축소했다고 미국의 정치 전문 언론들이 보도하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갖고 있는 골프장이나 회사 지분, 뉴욕의 빌딩 하나만 팔아도 해결될 텐데?"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문제는, 트럼프에겐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대통령직을 이용해 재산을 불리는 데에 관심이 있지(실제로 1기 임기 때 그랬다), 다시 대통령이 되기 위해 자기 재산을 쓸 생각은 없는 사람이 트럼프다. 과거에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든 선거자금은 주로 소액 풀뿌리 모금에서 나왔다. 그런데 2024 대선을 앞두고는 소액 후원자 숫자와 그들이 내는 돈의 액수가 크게 줄어든 것으로, 최근 공개된 정치자금 신고 내역을 통해 드러났다. 전통적으로 공화당의 큰 선거를 뒷받침해 온 거액 후원자들은 아직 트럼프에게 지갑을 열지 않고 있다. 2020 대선에서 트럼프 캠프는 막판에 심한 자금난을 겪었고, 결국 바이든에게 백악관을 내줬다. 이번엔 어떨까? 바이든 캠프가 2배 이상 많은 현금 보유 바이든과 트럼프, 양측 선거캠프는 법에 따라 지난 20일, 2월 말 현재의 정치자금 사정을 연방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했다. 주요 매체들이 일제히 분석 기사를 쏟아냈는데, 요약하자면 2월 말 현재 바이든 캠프의 보유 현금이 트럼프 캠프보다 2배 이상 많은 것으로 보인다. 위 그래프에서 트럼프 측의 보유 현금에는, 트럼프의 모금 기구 가운데 변호사비 지출을 담당하는 '세이브 아메리카 팩(Save America PAC)'의 돈이 포함되어 있다. 트럼프의 소속 정당인 공화당은 돈이 많지 않다. 바이든 쪽은 이달 초 국정연설(State of the Union)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지지자들의 불안감을 누그러뜨리면서 모금액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위 그래프에는 빠져있는데, 민주당 전국위원회(DNC)가 들고 있는 선거자금을 합치면 바이든 측의 가용 자금은 1억 5,500만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원래는 '부자들의 정당' 이미지를 가진 공화당이 돈이 더 많았다는데,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2022년경부터 자금 사정이 역전됐다. 트럼프 캠프는 그래서 비용 통제에 열심이다. 재선에 실패한 2020 대선에서, 막판에 파산에 가까운 자금난에 몰려 손발이 묶였던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당내 경선 초기,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가 직접 캠페인 비용보다 전세기 이용료로 더 많은 돈을 쓰고 실패한 사례도 반면교사로 삼고 있다. 트럼프 캠프 관계자들은 우버 차량을 부를 때도 기본형만 이용해야 하고 사무실 집기와 비품도 최대한 저렴한 것이나 중고품을 활용하는 중이다. 지난 3월16일 오하이오 주에서의 트럼프 집회. 이후 트럼프는 소규모 모임 위주로 선거운동을 전환한 것으로 알려졌다. 게티이미지 이런 상황은 선거운동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원래 트럼프의 장기는 록 콘서트를 방불하는 대규모 대중집회에서 지지자들을 흥분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대규모 집회는 장소 대관료, 운영요원 인건비, 질서 유지와 청소를 위해 경찰과 미화원들에게 써야 하는 돈 등 엄청난 비용이 소요된다. 이런 이유로, 트럼프 캠프는 이달 중순 이후 대규모 집회를 잡지 않고 있다. 당내 경선이 마무리된 탓도 있지만 '돈 때문'이라고 한다. 트럼프는 원래 후원자들에게 돈 달라는 전화를 걸거나 돈 내줘서 고맙다는 인사하는 걸 귀찮아하는 사람인데 이번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유력 언론들이 캠프 관계자들을 취재해 보도했다. 풀뿌리가 말라간다…소액 후원자들의 이탈 정치의 바깥에서 혜성처럼 등장해 대통령의 자리까지 올랐던 트럼프를 받친 힘은, 기득권층에 의해 불이익을 당했다고 믿는 보수 백인 서민들의 풀뿌리 모금이었다. 그런데, 이번 대선을 앞두고 그 풀뿌리가 마르고 있다. 트럼프가 현직 대통령으로서 방어전을 치렀던(결국 실패한) 2020 대선 때와 이번을 비교해 보면 확연하다. 선거 1년 전 소액(200달러 이하) 후원자들에게서 모금한 액수를 보면, 2019년의 트럼프는 7,200만 달러를 끌어들였다. 2023년에는 2,700만 달러에 불과했다. 62.5%나 감소한 것이다. 선거 당해년도(2020/2024)로 비교해봐도 상황은 심각하다. CNBC에 따르면, 트럼프 캠페인은 2020년 1월부터 연말까지 소액 기부자들(200달러 이하)로부터 2억 6,400만 달러를 모금했다. 올해 1월 트럼프 캠페인이 소액 기부자들로부터 걷은 후원금은 300만 달러다. 12개월로 곱해봤자 3,600만 달러로, 패배로 귀결된 지난 대선때에 비해서도 한참 부족하다. 당내 경선이 사실상 끝난 2월에는 모금액이 늘었고 본선거가 가까워질수록 더 늘긴 하겠지만, 캠프 관계자들이 위기감을 느낄 만하다. 트럼프에게 기부금을 내는 사람의 숫자도 줄었다. 파이낸셜리뷰의 지난달 분석 기사에 따르면, 트럼프에게 후원금을 내는 사람 수는 2020년보다 20만 명 적었으며, 증가세도 2020 대선 때보다 둔하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트럼프는 모금 액수 총액뿐 아니라 후원금을 내는 사람의 숫자에서도 바이든에게 지난해 11월부터 역전당했다. 이는 트럼프 지지자들의 연령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과도 관련이 있다. CNBC에 따르면, 트럼프가 2020 대선을 치르면서 받은 후원금 가운데 자신을 '은퇴자(retired)'라고 밝힌 사람들에게서 나온 액수는 2억 5,500만 달러로, 당시 후원금 총액의 1/3에 이른다. 그들은 트럼프가 처음 대통령이 되던 2016년부터 거의 9년째 자동이체로 매월 돈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2년간의 인플레이션이 연금 수입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생계에 상당한 부담이 되었던지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가고 있는 줄도 몰랐다'며 후원금 자동이체를 끊는 사람들이 지난해부터 늘고 있다는 게 트럼프 캠프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거액 후원자들의 닫힌 지갑 공화당 경선에서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를 후원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트럼프 쪽으로 넘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애초에 디샌티스는 '미니 트럼프'로 통하던 정치인이다. 트럼프와 표방하는 어젠다는 같은데, 트럼프식 막말이나 불법-탈법 행위는 하지 않는다는 걸 내세웠다. 그러니 디샌티스 후원자들은 트럼프로 말을 갈아타는 데에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니키 헤일리를 지지했던 공화당의 전통적 후원세력은 트럼프에게 심리적 저항감을 느끼고 있다. 그들은 미국 정치-경제-사회를 지탱하는 엘리트 시스템의 존속을 원하는 사람들인 관계로, 트럼프의 반(反)시스템적 언행과 음모론, 예측 불가능성에 불안감을 느낀다. 이런 이유로 니키 헤일리는 모금 액수에서 트럼프를 앞설 수 있었고, 트럼프는 그런 헤일리와 후원자들을 비난하고 협박했다. 이제 와서 그들의 마음을 돌려보려 애쓰고 있지만, 아직 별다른 성과는 없다. 미국 정치권 최대 돈줄 가운데 하나인 코크(Koch) 형제. 공화당 경선에서 니키 헤일리를 후원했고, 트럼프를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낸 돈이 공화당을 위해, 선거를 위해 지출되는 게 아니라 트럼프의 변호사비로 쓰이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과 불만도, 전통적인 공화당 후원자들이 지갑을 열지 않는 이유라고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한다. 스스로 갑부라고 자랑하면서 사기, 성범죄, 피해자 명예훼손 같은 사건의 변호사 비용까지 남의 돈으로 해결하려는 트럼프가 꼴불견이라는 정서가 퍼져있다는 얘기다. 트럼프 캠프의 최대 지출 항목은 '변호사비' 트럼프에겐 여러 개의 모금 기구(PAC)가 있는데, 이 가운데 '세이브 아메리카(Save America)'라는 '팩'을 통해 변호사비를 지불하고 있다. (참고 : '팩'은 'PAC, Political Action Committee'의 약자로, '정치활동위원회'라는 뜻이다. 미국 선거법상 정치자금을 모금할 수 있는 창구인데, 몇 가지 종류와 각각에 따른 제약이 있다.) '세이브 아메리카 PAC'은 트럼프가 2020년 대선에서 패배한 직후 만들어졌다. 트럼프를 구하는 게 미국을 구하는 거라는 뜻이 담긴 작명이다. 이 기구는 그 이후 2억 달러 이상을 모금했는데, 그중 6,400만 달러를 지난해까지 트럼프의 법률 비용으로 썼다. 단일 항목으로는 최대다. (트럼프 부인의 옷값 등도 이 기구에서 나갔다. 초기에는 트럼프를 추종하는 정치인들의 후원금 용도로도 일부 자금을 집행했다.) 특히, 각종 법률 리스크가 불거지기 시작한 2022년부터 2023년으로 넘어오면서 법률 비용 지출액은 3배로 늘었다. 지난 2월에는 560만 달러를 변호사비로 지출했는데, 이는 2월 수입 금액(500만 달러)보다도 많은 금액이었다. 그러고도 아직 뉴욕주 사기 사건 담당 로펌에 53만 불을 못 준 상태다. USA투데이와 CNN, AP 등은, '세이브 아메리카 PAC'의 지출 가운데 85%가량이 변호사비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 기구의 모금은 주로 소액 기부자들의 주머니에서 나온다. 2023년에만 5,050만 달러가 200달러 이하의 후원으로 모인 것으로 알려졌다. '세이브 아메리카'는 PAC의 여러 종류 가운데 '리더십 PAC'으로 분류된다. 리더십 PAC은 원래 양당 지도부 중진들이 자신을 따르는 정치인들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생겨난 것인데, 관련 규정에 구멍이 있어서 사실상 정치인들의 비자금 주머니로 쓰이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래서 이를 통해 걷은 후원금을 트럼프 개인 변호사들에게 지출해도 탈이 없는 것이다. 대신, 한 후원자에게서 5,000달러 이상 받을 수 없다는 제한이 따른다. 트럼프는 모금액 상한선 제한이 없는 '수퍼 PAC'을 통해 거액 모금을 할 수 있지만, 그 돈을 바로 선거와 직접 관련이 없는 사건의 변호사비로 쓰는 데는 법적 문제가 따를 수 있어서 '세이브 아메리카' 쪽으로 변호사비 지출을 몰아놓은 것으로, 미국 매체들은 분석하고 있다. 트럼프의 마가(Make America Great Again) 집회. 2023년 4월 뉴햄프셔주, 게티이미지 트럼프는 현재 '마가(MAGA) Inc.'라는 수퍼 PAC을 두어 그쪽으로도 후원금을 받고 있다.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그런데, 이 '마가 Inc.'의 최대 지출 항목이 '세이브 아메리카'에 대한 자금 지원인 실정이다. 트럼프는 추가로 후원금을 끌어모으기 위해 자신의 개인 캠프와 공화당 전국위원회 조직 합동으로 '트럼프 47 위원회'라는 새로운 모금기구를 조직했다. 그런데 이 기구에 후원금을 내면 1) 트럼프 캠프 2) 세이브 아메리카 PAC 순으로 돈이 할당되고, 남는 돈이 있으면 공화당 전국위원회(RNC)로 들어가도록 돼 있다. 각 지역 현장에서 선거운동 실무를 담당할 정당 조직보다 변호사비 지불 기구가 우선 돈을 받도록 해 놓은 것이다. 당 돈도 내 돈? 며느리를 당 전국위원회 의장에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정치인의 모금 루트는 크게 두 가지다. 후보 캠프를 통해서 받는 것과 당 조직이 받는 것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트럼프는 이미 지난해부터 후원금 조달이 심상치 않다는 징후를 느끼고 공화당의 모금 메커니즘도 자신의 개인 캠프가 접수하도록 결정했다. 트럼프는 니키 헤일리가 이미 경선의 승부가 기운 뒤에도 버티는 것에 대해 굉장히 짜증을 냈는데, 돈 문제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헤일리가 경선 포기를 선언하고 자신이 당의 공식 후보가 돼야 당 조직, 정확히는 당의 돈줄을 완전히 접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아들 에릭과 며느리 라라. 지난 3월, 게티이미지 실제로 트럼프는 후보직을 확정한 지 며칠 만에 공화당 전국위원회(RNC) 기존 지도부를 몰아내고 자신의 며느리 라라 트럼프를 공동의장으로 앉혔다. 라라는 당의 조직책 거의 전원을 해고하거나 사표를 받은 뒤 트럼프에 대한 충성도를 따져 재신임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이때문에 공화당 조직은 현장에서 트럼프 선거운동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유력매체들이 보도하고 있다. 트럼프와 그의 며느리가 이런 무리수를 두는 건, 역시 돈 때문으로 봐야 한다. 라라 트럼프는 지난달 경선 과정에서 여러 차례 '공화당 지지자들은 트럼프의 변호사비를 후원하길 원한다. 트럼프가 당하는 정치적 박해는 곧 자신들이 당하는 박해이기 때문'이라고 발언했다. 하지만 후원자들 사이에서 "트럼프 돈 많잖아? 변호사비는 자기 돈으로 내야지!"라는 불만이 제기되자, 일단 이 발언을 공식적으로는 철회했다. 그런데, 이런 식이다. "아니, 후원금 낸 중에서 극히 일부만 법률 비용 지원에 쓴다는데도 그게 그렇게 싫다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허용하겠다." (라라 트럼프, NBC 투데이 쇼 인터뷰) 미국 정치권과 언론에선, 결국 공화당으로 들어오는 돈도 트럼프가 변호사 비용으로 끌어다 쓸 것임을 기정사실로 보고 있다. 트럼프가 사법 리스크로 엎어지면 결국 공화당의 올해 대선이 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조지아주 구치소 출두 당시 트럼프의 머그샷. 2023년 8월, 게티이미지 돈 되는 건 뭐든지…신발, 향수도 파는 트럼프 자기 자산 매각해서 선거 치를 생각은 추호도 없는 트럼프는, 돈 되는 거라면 뭐든지 한다. 본인의 이미지를 '창의적인 기업가'로 만들어놓은 김에 유명한 'MAGA' 모자 외에도 다양한 '굿즈'를 팔고 있다. 올들어 주목받은 건 한 켤레에 399달러의 가격이 붙은 황금색 스니커(운동화)다. 이걸 신고 다녀도 되나 싶을 만큼 온통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이 신발은 발목 부분에 성조기가 새겨져 있다. 트럼프의 이니셜(T)이 새겨진 황금색 스니커. 게티이미지 트럼프는 올해 2월 신발업계 대형 박람회인 '스니커 콘(Sneaker Con)'에 직접 등장해 제품을 홍보했다. 판매 사이트에선 선주문으로 1,000켤레가 팔려나가 재고가 없다고 게시해 놓았다. 황금색 스니커를 직접 홍보하는 트럼프. 올해 2월, 게티이미지 돈도 돈이지만, 황금색 농구화는 흑인 남성 유권자들에게 어필하기 위한 기획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흑인 남성은 원래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 성향이었는데, 이번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 지지로 기우는 유권자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트럼프의 마초 성향 때문이다. 트럼프 측은 '승리의 감각을 미리 느껴보라'며 한 병에 99달러짜리 트럼프 향수도 팔고 있다. 남성용 향수병의 뚜껑은 트럼프 머리 모양이다. 사진 출처 : 공식 판매 사이트 이런 '굿즈'들은 실제로 선거자금에 도움이 된다기보다는 지지자들의 '감성에 먹히는' 일종의 엔터테인먼트 상품이라는 시각도 있다. 기업 상장으로 6조 원대 돈방석에 앉았다더니? 트럼프가 트위터(현재 'X')에서 쫓겨난 뒤 자신의 주장을 전파하기 위해 만든 소셜미디어 '트루스 소셜(Truth Social)'. 그 서비스를 운영하는 기업의 우회 상장으로 일단 트럼프의 보유 자산은 크게 불어나게 됐다. 문제는, 그 주식을 팔든지 그걸 담보로 돈을 빌려야 선거자금 운용과 변호사비 납부에 숨통이 트일 거라는 점이다. 현재 트럼프는 트루스소셜 운영사와 맺은 '록업(lock-up)' 협약상 6개월간 보유 지분을 매각하거나 지분을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없다. 그 기간이 풀리면 대선 턱밑이 된다. 회사 이사회에 트럼프 쪽 사람들이 들어가 있으므로 설득해서 유예 조치를 받아낼 수는 있겠지만, 트럼프 입장에선 별로 득이 안 되는 일이다. 주가에 악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트루스 소셜'의 트럼프 게시물. AFP, 연합 트루스 소셜은 돈을 못 버는 회사다. 상장 당시 자료에 따르면 트루스 소셜은 지난해 1~9월 광고 매출이 330만 달러인 반면 적자는 4,900만 달러나 되는 부실 기업이다. 지금의 높은 주가는 트럼프 지지자들이 정치적 지원의 의미로 떠밀어 올린 위에, 일종의 '밈(meme) 주식'으로 각광받으면서 개미 투자자들이 몰린 탓이다. 게임스톱(Game Stop)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밈 주식은 오를 때는 무섭다. 게임스톱 주가가 꺾이는 쪽에 베팅했던 월가 펀드가 망할 정도였다. 하지만 실적이 뒷받침되지 않는 밈 주식의 주가는 결국 제자리를 찾아 내려오게 마련이다. 만일 섣불리 현금화를 시도했다가 주가가 꺾이면 트럼프 본인이 손해를 보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개미들의 원성이 모두 트럼프에게 몰릴 수 있다. 트럼프 입장에선 그런 위험을 감수하느니, 남의 돈 걷어서 변호사비 내고 선거 치르는 게 낫다. 자금 사정 유리한 바이든이 이긴다? 그렇게 예단하기 어렵다. 바이든이 선거자금 모금에서 트럼프를 압도한 건 이미 지난해 가을부터인데, 지지율은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달 초부터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트럼프는 사법 리스크가 가중되면서 대규모 집회를 열지 못하고 중도 확장성에서도 문제를 드러낸 반면, 바이든은 국정연설 이벤트를 기운차게 마친 이후 지지층의 우려를 조금 누그러뜨리면서 활발한 유세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3월 8일~11일 사이에 실시된 서포크 대학과 USA투데이 공동 조사에서는 트럼프 40, 바이든 38로 지지율이 나왔다. 한때 격차가 5%P 이상으로 벌어졌다가 다시 좁혀진 것이다. 응답자의 1/4은 투표 전에 마음이 바뀔 수 있다고 응답했다. 블룸버그-모닝컨설트의 8~15일 조사(26일 공개)에서는 바이든의 지지율이 7개 경합주 가운데 조지아를 제외한 6곳에서 상승세를 보였다. 중부 경합주인 위스콘신의 경우 바이든의 지지율(46%)이 트럼프(45%)를 앞서고, 미시간과 펜실베이니아에선 45% 동률까지 따라붙은 것으로 나왔다. 오는 11월 본선에서도 결국 승부는 몇몇 경합주에서 적은 표차로 갈리게 될 거라는 전망이 많다. 지금은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등 제3후보를 지지한다는 사람들도 투표일이 임박하면 바이든-트럼프 중 어느 한쪽으로 투표하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이런 초접전에서는 정치 광고의 물량, 그리고 집집마다 발로 뛰는 현장요원들의 활약이 승부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 싸움에서 돈은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발휘한다. (물론, 어떤 핵심 메시지를 유권자들에게 전달하느냐도 돈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점에선 바이든이 아직 뚜렷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20 대선의 경우, 바이든이 총 모금액(10억 달러)에서 당시 대통령이던 트럼프(7억 7,500만 달러)를 앞섰고, 결국 백악관의 주인이 되었다. 바이든 캠프는 지금도 트럼프 캠프보다 3,000만 달러 이상의 현금을 갖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 3년간 소송 비용으로 6,400만 달러를 썼다. 그 돈을 선거 캠페인에 썼다면 올해 선거, 어떻게 달라졌을까. 디자인 : 최혜지
미국 테크 업계에서 가장 유명한 두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와 샘 올트먼 오픈AI CEO가 소송전에 휘말렸다. 머스크가 오픈AI와 그 공동창업자 겸 CEO인 샘 올트먼을 캘리포니아 법원에 제소한 것이다. 머스크와 올트먼의 관계는 '브로맨스'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관계였다. 올트먼은 머스크를 존경했다. 오픈AI를 함께 설립하는 과정에 두 사람은 많은 대화를 했다. 머스크는 오픈AI의 안착을 위해 거의 5천만 달러를 썼다. 초기 이사회 멤버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쩌다 소송을 걸게 됐을까. 하기야 백년가약 맺은 부부도 이혼을 하고 부모자식도 재산 다툼에 휘말리는 게 세상 일이라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머스크와 올트먼은 온라인에서 오픈AI의 과거 현재 미래를 놓고 조롱과 폭로의 개싸움을 벌이는 중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개싸움'은 비속어가 아니다.) 누구 말이 어디까지 옳을까. 일론 머스크가 자신의 X 계정에 올린 샘 올트먼 합성 사진. 출입증 속 'Open AI'를 'Closed AI'로 바꿔놓았다. '새로운 오픈AI 로고'라며 일론 머스크가 올린 이미지. OPEN AI라는 이름 속에 '거짓말'이라는 단어가 가득하다. 샘 올트먼 측은 머스크가 거짓 주장을 한다며 과거 이메일 폭로로 맞섰다. 소송의 개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원고: 일론 머스크 개인 2. 피고: 오픈AI 조직 전체와 샘 올트먼, 그렉 브록먼. 두 사람은 일론 머스크와 함께 오픈 AI를 공동창업한 최고경영진이다. 3. 청구 취지 - 피고는 원고와 합의한 오픈AI 설립 당시의 합의(The Founding Agreement)를 어겼다. 오픈AI는 비영리, 오픈소스로 운영하여 인류 전체에 이익을 주기 위해 설립된 법인인데, 지금은 사실상 마이크로소프트의 계열사가 되어 돈벌이에 앞장선다. - 그러니, 오픈AI의 연구 성과물을 오픈소스로 공개해 인류 전체를 위해 쓰이도록 해 달라. 마이크로소프트가 GPT-4를 독점하지 못하게 해 달라. - 오픈AI 경영진이 그 연구 성과로 금전적 이익을 취하지 못하게 해 달라. - 오픈AI는 설립취지 약속을 지키든지, 아니면 일론 머스크가 제공한 자금 가운데 그 약속에 맞지 않게 쓰인 돈을 되돌려 달라. 피고들이 부당하게 번 돈도 환수해 달라. 올트맨과 머스크, 브로맨스적 관계의 시작은 두 사람이 친해진 건 2010년대 초로 알려져 있다. 실리콘밸리를 오래 취재한 미국 전문기자들의 보도에 따르면, 먼저 다가간 건 샘 올트먼이었다고 한다. 당시 올트먼은 자신이 창업한 회사를 매각한 뒤, 스타트업을 키우는 'Y 콤비네이터'에 합류해 점차 중요한 인물로 떠오르는 중이었다. 그러나 2010년대 초의 올트먼은 아직 거물이라 하기엔 일렀다. 그는 거대한 아이디어를 실현해 세상을 바꾸는 큰 인물이 되고 싶었고, 자신의 롤 모델을 한 기업가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일론 머스크다. 페이팔(Paypal) 창업으로 온라인 결제의 혁명을 일으킨 머스크는 거기서 번 돈으로 스페이스X와 테슬라를 일으켜 '인류의 운명을 바꾸는' 일에 도전하고 있었다. (당시 머스크는 스페이스X를 '인류의 화성 이주를 준비하는 기업', 테슬라는 '인류가 에너지를 이용하는 방식을 바꾸는 기업'이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올트먼은 스페이스X 공장으로 머스크를 여러 번 찾아가 기업가로서의 고민을 나눴고, 중후장대한 로켓 제조공정을 둘러보며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구글의 AI 지배를 막자'…두 사람의 의기투합 2014년, 머스크와 올트먼은 인공지능에 대해 여러 차례 의견을 교환했다. 두 사람은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기계지능(SMI, superhuman machine intelligence)이 도래할 것이며, 그것은 우려스러운 일이지만 막을 수는 없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했다. '막을 수 없다면 우리가 하는 게 낫다'는 공감대도 형성됐다. 두 사람이 가장 걱정했던 것은, 인간을 뛰어넘는 인공지능을 구글이 독점하는 사태였다. 구글은 이미 전 세계의 정보를 손에 쥐고 있으면서, 당시 인공지능 개발에서 가장 앞서있는 것으로 평가되던 '딥마인드(DeepMind)'까지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머스크는 2013년, 자신이 딥마인드를 인수하려고 딥마인드 창업자 데미스 허사비스를 설득하려 애썼지만 실패했다. 딥마인드의 인공지능 '알파고'와 대국 중인 이세돌9단 (2016). 사진=게티이미지 2015년 말, 올트먼은 머스크에게 '힘을 합쳐서, 구글에 맞설 비영리 연구조직을 만들자'는 제안을 한다. 그 제안을 머스크가 받아들여 '오픈AI'를 함께 설립하게 된다. 오픈AI 설립 합의…'비영리', '인류 공영을 위해' '오픈소스' 2015년 12월에 오픈AI를 세우면서, 공동창업자들은 다음과 같은 설립 원칙에 합의(The Founding Agreement)했다고, 머스크는 소장에서 주장한다. a) 인류의 공영(benefit of humanity)을 위해 인공일반지능(AGI)을 개발하는 비영리조직(non-profit)으로 한다. 주주 이익 극대화를 목적으로 하는 영리법인으로 운영하지 않는다. b) 이 법인이 개발한 테크놀로지는 오픈소스를 지향하며, 상업적 목적을 위해 폐쇄적으로 이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원칙은 오픈AI의 법인 인증서에도 명문화되어 있다고 머스크는 여러차례 강조하고, 인증서 사본을 소장에 첨부했다.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면 소장 본문과는 표현이 세부적으로 다르다. 이를테면, 법인인증서에는 '오픈소스' 앞에 '적용 가능한 경우(When applicable)' 라는 단서가 붙어있다.) 머스크는, 중간에 올트먼과 그 일파가 오픈AI의 영리화를 시도해서 자신이 강하게 반대했고, 그러자 올트먼 측이 '비영리성을 유지하겠다'고 약속한 적도 있다고 주장했다. 머스크 "오픈AI가 존재하는 건 바로 내 덕분" 머스크가 법원에 낸 소장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오픈AI의 설립에서 챗GPT 개발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지 밝힌 것이다. 머스크는 지난해 CNBC 인터뷰에서도 "오픈AI가 존재하는 건 내 덕분"이라고 말한 바 있다. 머스크의 주장에 따르면, "오픈AI"라는 이름을 지은 사람이 바로 자신이다. 오픈AI가 성공하기까지 돈을 댄 것도 자신이라며 액수를 구체적으로 밝혔다. 2016년에서 2020년 9월까지 총 4천4백만 달러를 댔다는 것이다. 2016년 한 해에 1천5백만 달러 이상을 내서 최대 기부자가 되었다. 2017년에도 2천만 달러 이상을 기부한 최대 기부자였다. 여기서 잠깐. 왜 '기부금'이냐고? 당시의 오픈AI는 주식회사가 아니고 비영리 연구법인이었기 때문이다.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를 하고 지분을 받는 형태가 아니었으므로, 머스크가 낸 돈은 '투자금'이 아니라 '기부금(contribution)'으로 처리되었다. 당시에는 머스크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부분도 나중에 논란이 된다.) 머스크는 오픈AI의 사무실도 자기 돈으로 얻어다 줬다고 한다. 자신의 개인회사인 머스크 인더스트리(Musk Industries LLC)를 통해서 샌프란시스코의 빌딩을 임차해 오픈AI 사무실로 제공했다는 것이다. 뒤에서 설명할 우여곡절을 거쳐 2018년 2월, 머스크는 오픈AI 이사회를 떠나게 되는데, 그 후에도 350만 불 정도를 추가로 기부했다고 한다. '설립 합의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게 그가 밝힌 이유다. (자신은 최대한의 성의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한다'는 설립정신을 지키려 했는데, 올트먼은 그런 자신을 배신하고 폐쇄적인 돈벌이의 길로 빠졌다는게 머스크의 지속적인 주장이다.) 머스크는 이런 경제적 지원에 그치지 않고, 오픈AI의 인공지능 연구에 방향을 제시하는 등 지속적으로 관여했다고 밝혔다. 오픈AI에서 챗GPT와 GPT-4 개발을 이끈 수석과학자 일리야 수츠케버. 구글에 있던 사람을 머스크가 오픈AI로 데려왔다. 출처: 스탠포드대학 특히, 인공지능 분야의 뛰어난 과학자들을 오픈AI로 끌어오는 데에 자신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구글이 워낙 막강한 자금력과 인지도로 인재를 쓸어가고 있어서, 머스크 자신의 이름값이 아니었다면 천재급 과학자들을 데려올 수 없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구글에서 텐서플로우와 알파고 연구를 지휘하던 스타 과학자 일리야 수츠케버를 영입한 일이다. (2020년 이전의 오픈AI는 별로 내세울 게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머스크의 이런 주장은 수긍할 만하다고 실리콘밸리의 미국 전문기자들은 말한다.) 머스크 입장에선 이렇게 이름도 주고 돈도 주고 재능도 퍼준 오픈AI가 나중에 사실상 마이크로소프트에 넘어갔으니 속이 쓰린 것이다. 그런데 왜 오픈AI를 떠나게 됐을까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유는 오픈AI의 영리화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인데, 이에 대한 머스크의 설명과 올트먼의 설명이 다르다. 그리고,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는 이유가 있다. 먼저, 머스크가 소장에 적은 경위는 이렇다. 2017년에 접어들자 오픈AI 공동설립자 샘 올트먼과 그렉 브록먼 등은 머스크에게, 오픈AI를 영리법인으로 전환하자는 제안을 한다. 몇주간의 논의 끝에, 머스크는 "당신들끼리 나가서 새로 뭘 하든지, 아니면 오픈AI를 비영리로 그냥 두라"고 통보한다. "비영리로 유지하겠다는 약속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더이상 돈을 대지 않겠다. 안 그러면 나는 그저 스타트업 회사에 (지분도 안 받고) 공짜 자금을 준 바보가 되는 거 아니냐. 토론 끝." 이것이 당시 머스크가 보낸 최후통첩의 내용이다. 한국 영화 <타짜>의 명대사를 빌리자면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그런 표현을 알았더라면 머스크도 그렇게 썼을지 모른다. 2017년이면 머스크가 오픈AI의 최대 돈줄이던 시절이다. 그 한 해에만 2천만 달러를 댔다. 올트먼은 그런 머스크의 뜻을 거역하고 오픈AI를 영리법인으로 전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머스크가 공개한 바에 따르면, 올트먼은 "비영리 구조를 열심으로 유지하겠다!"는 답신을 보냈다. 2018년 2월21일, 머스크는 자신이 공동창립한 오픈AI의 이사회 공동의장직을 사임한다. 머스크는 비영리 공익활동에 대한 소신 때문이었다는 식으로 그 이유를 댔지만, 사실은 다른 사연이 있었다고 올트먼 측은 폭로했다. 머스크는 오픈AI를 영리화해서 테슬라에 합치고 자신이 완전한 통제권을 가지려고 했는데, 그게 무산되자 떠났다는 것이다. 오픈AI는 회사 블로그에 다음과 같이 그 경위를 적었다. "일론 머스크와 우리(올트먼, 브록먼)는 AI 개발을 위해 엄청난 투자금이 필요하며, 결국 영리법인 구조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 그 방법으로, 일론은 우리가 테슬라에 합치거나 자신이 완전한 통제권을 갖길 원했다. 일론은 오픈AI를 떠나면서, 구글/딥마인드에 의미있는 경쟁자가 필요하며 자신이 그 역할을 직접 맡길 원한다고 했다. 2017년 우리와 일론은, 영리활동을 할 수 있는 별도의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일론은 최대 주주 지분, 이사회에 대한 통제권, CEO 자리를 원했다. 이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금 지원을 중단했다. 리드 호프먼(링크드인 공동창업자)이 직원들의 급여와 회사 운영 경비를 메워줬다. 우리는 영리법인 구조에 대해 일론과 의견 일치를 볼 수가 없었다. 어떤 특정 개인이 오픈AI에 대한 전적인 지배권을 갖는다는 건 오픈AI의 미션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그는 오픈AI를 테슬라에 합병하자고 제안했다. 2018년 2월 초 그는 우리에게 오픈AI를 "테슬라에 캐시카우로서 갖다붙이자(attach to Tesla as its cash cow)"는 (다른 사람의) 이메일을 포워딩하며 "전적으로 옳은 말"이라고 했다. 그리고 결국 2018년 2월, 오픈AI의 성공 가능성은 0이라면서 우리를 떠났다." 이는 머스크가 낸 소송의 취지를 정면으로 뒤집는 내용이다. "머스크도 동의했던 일" 이메일 폭로 올트먼 측은 몇몇 이메일의 원문도 공개했다. 머스크는 사임 20일 전 오픈AI 최고경영진에 보낸 이메일에서 "구글에 맞서 촛불이라도 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테슬라다. 그런다 하더라도(오픈AI를 테슬라에 합친다 하더라도), 구글을 견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작다. 단지 0이 아닐 뿐이다"라고 적었다. 출처: 오픈AI 회사 블로그. 황색 밑줄은 원문에는 없으며 편집 과정에 추가한 것임. 구글/딥마인드에 맞서 내놓을 만한 성과가 나오지 않자 조바심이 난 머스크는 오픈AI의 엔지니어들에게 직접 명령을 시도했으나 반발에 부딪혔다고 한다. 사실 머스크는 이사회 공동의장이지만 CEO가 아니었으니 직접 명령을 할 위치는 아니었다. 게다가 머스크는 성질이 급하고 태도도 고압적인 것으로 유명했는데, 제조업을 하는 테슬라나 스페이스X의 직원들과 달리 소프트웨어 연구조직인 오픈AI 직원들은 그런 머스크를 뜨악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올트먼 측이 공개한 또다른 이메일을 보면, 머스크는 오픈AI가 구글에 대적할 만한 자금을 끌어모으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매우 좌절하고 있었다. 아래 이메일에서 머스크는, "실행과 자원에서 극적인 변화가 없다면, 오픈AI가 구글 딥마인드와 의미 있는 경쟁을 할 가능성은 0%다, 1%도 아니고 0%라는 게 나의 평가"라고 썼다. 그러면서 "수억 달러로도 부족하고, 즉시 매년 수십억 달러를 끌어모으지 못하면 관둬야" 한다고 덧붙였다. 장사해서 이익을 남기고 주가를 올려주는 회사도 아닌데 그렇게 많은 돈을 누가 대겠는가. 대안은 어떤 식으로든 영리법인화하는 것 뿐이었고, '이 시점의 머스크는 영리화라는 방향에 동의하고 있었다, 다만, 머스크는 영리화된 오픈AI를 자기가 배타적으로 지배하고자 했다'는 것이 올트먼 측의 폭로 취지다. 두 메일과 당시의 정황을 종합해보면, 머스크가 오픈AI에서 떠나게 된 진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당초 기대와 달리, 오픈AI는 자기가 쓴 돈에 비해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구글을 꺾을 수도 없었고, '인류를 위한 큰 성과'라고 자랑할 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테슬라로 흡수해 자기 것으로 만들 수도 없었다. 그러니 차차 손을 떼게 된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 기자들은 자체 팟캐스트에서, 머스크가 오픈AI를 떠난 이후로도 상당 기간 샘 올트먼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고 말했다. 실리콘밸리의 각종 파티나 행사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였고, 뭣보다 자금 지원도 계속 해줬다는 것이다. 실제로 머스크는 2019년에도 348만 달러를 오픈AI에 기부했고 사무실 임대료도 내줬다고 한다. 그런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2020년부터였다. 2020년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오픈AI, 마이크로소프트의 손을 잡다 2019년에 오픈AI의 CEO로서 일선 경영을 책임지게 된 샘 올트먼은 머스크도 개탄한 바 있는 연구자금 확보 문제에 본격적으로 매진한다. 머스크가 강조한 '설립 합의'를 명시적으로 어기지 않으면서도 문제를 해결할 묘안으로 올트먼이 고안한 방법은, 비영리법인을 지배구조 최상위에 그대로 두고, 그 산하에 영리법인을 따로 만들어서 투자도 받고 돈도 버는 것이었다. 2020년 9월22일, 오픈AI 영리법인은 마이크로소프트(MS)와 기술 라이센싱 협약을 체결한다. GPT-3 모델을 MS에 독점제공한다는 것이었다. 돈도 돈이지만, 오픈AI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제공하는 방대한 컴퓨터 자원을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 자사 AI 모델을 훈련시키는 데 숨통이 트이게 되었다. 샘 올트먼 오픈AI CEO(왼쪽), 사티야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CEO. 사진=게티이미지 그런데, 오픈AI와 MS의 라이센싱 협약에는 특이한 단서가 달려있다. 오픈AI가 개발한 기술 가운데 '인공일반지능(AGI, 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이전 단계의 기술만 제공한다는 것이다. '인공일반지능(AGI)'는 길 찾기, 바둑 두기 등 특정한 과업에 얽매이지 않고 이것저것 학습해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 수준의 인공지능을 말하는데, 이것은 너무나 강력한 기술이므로 특정한 한 기업이 배타적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는 오픈AI 설립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머스크는 소송 취지를 담은 소장에서 이 점을 문제 삼는다. 최신 버전인 GPT-4는 이미 AGI 수준에 도달했으므로, 마이크로소프트가 이 기술을 독점적으로 제공받는 건 라이센싱 협정 위반이라는 것이다. 머스크는 또, GPT-3 단계에서는 이 모델의 설계와 훈련 과정을 공개했던 오픈AI가 GPT-4에 관해서는 꽁꽁 숨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GPT-4가 MS의 상업용 소프트웨어를 위한 '비법 소스'로 전락했으며, 이는 오픈AI 설립 취지에 대한 최초 합의를 어긴 것이므로 GPT-4의 기술이 모두에게 공개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오픈AI 측은, 머스크가 본인도 믿지 않는 걸 주장한다고 반박했다. 모든 연구 성과를 오픈소스로 공개할 수 없다는 점에 대해서 머스크도 흔쾌히 동의했다는 과거 이메일을 공개한 것이다. 2016년 1월 초 이메일에서, 당시 기술 개발을 책임지고 있던 일리야 수츠케버는 일론 머스크에게 "비양심적이고 무원칙한 자들이 안전하지 않은 AI를 만들기 쉽게 해 줄 것"이라며 기술정보 전면공개의 위험성을 제기한다. 핵폭탄 만드는 기술을 몽땅 공개하면 악한 세력이 핵무기를 쉽게 보유하게 될 거라는 것과 같은 얘기다. 수츠케버는 이어서, "오픈AI의 'Open'은 AI 모델이 만들어진 뒤 그 결과물로 인한 혜택을 모두가 누리면 달성되는 것이다. 그 이면의 과학을 모조리 공유하지 않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썼다. 이에 대해 머스크는 단답으로 회신했다. "Yup." (그래. 맞아.) GPT-4의 기술 내용을 오픈소스로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의 순수성을 의심하는 시각도 있다. 머스크는 2023년 3월, 자신의 인공지능 개발 스타트업 X.AI (xAI)를 창업했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X(구 트위터)의 프리미엄 구독자용 AI 챗봇 '그록(Grok)'을 내놓았지만 챗GPT의 대항마라는 지향과는 달리 시장에서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오픈AI 없어져도 우리가 다 할 수 있다"…MS의 호언장담 "죽 쒀서 개 준다"는 한국 속담을 머스크가 알았더라면, 오픈AI에 관한 자신의 처지를 이 속담이 찰떡같이 표현한다고 무릎을 쳤을 것이다. 자기가 돈 대고 이름 지어주고 사람 몰아줘서 살려놓은 오픈 AI가 사실상 마이크로소프트에 넘어간 형국이기 때문이다.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모델의 훈련에는 대규모의 데이터 학습이 수반되므로 엄청난 컴퓨팅 파워가 필요하다. 챗GPT는 마이크로소프트에 점차 의존하게 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사티야 나델라 CEO가 샘 올트먼 오픈AI CEO의 후견인처럼 대중 앞에 등장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2023년 11월 6일, 오픈AI의 첫 개발자 컨퍼런스에서 마이크로소프트 CEO 사티야 나델라가 연설하고 있다. 왼쪽은 샘 올트먼. 사진=게티이미지 2023년 11월 중순 비영리 오픈AI 이사회가 샘 올트먼 CEO를 전격 해고했다가 며칠 만에 되치기당한 사건은, 오픈AI가 얼마나 마이크로소프트와 깊게 결합되어 있는지를 세상에 드러냈다. 당시 사티야 나델라 MS CEO는 올트먼뿐 아니라 오픈AI의 주요 엔지니어 거의 전부를 마이크로소프트로 데려와서 새로운 AI 연구조직을 만들려고 했다. 2023년 11월 20일 사티야 나델라는, 오픈AI이사회에 의해 축출된 샘 올트먼과 그렉 브록먼을 '채용'했으며, 이들이 MS에서 새로운 AI 연구팀을 이끌 것이라고 발표하기까지 했다. 그 다음 날(11월 21일) 사티야 나델라는 실리콘밸리의 대표적 저널리스트 캐라 스위셔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픈AI가 내일 사라지더라도, 우리 고객들은 걱정하지 않길 바란다. 솔직하게 터놓고 말하자면, 혁신을 계속할 모든 권리를 우리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오픈AI의) 제품을 제공하는 것 뿐 아니라, 파트너십으로 해오던 일을 우리가 직접 들어가서 바로 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람, 컴퓨팅, 데이터… 모든 것을 갖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오픈AI에 모두 130억 달러를 투자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나델라는 부인하지 않으면서, "(MS는) 그에 합당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답한다. 그리고는 "우리(MS)는 그 안에 있다" "그들(오픈AI)의 아래에, 위에, 둘레에 있다"고 말한다. 오픈AI의 인공지능 모델이 실제로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고 수많은 이용자들의 요청을 받아서 처리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컴퓨터 작업을 마이크로소프트가 다 해왔다는 것이다. 머스크가 쓴 돈과 마이크로소프트가 쓴 돈은 5천만 달러 vs. 130억 달러로, 비교 불가 수준이다. 그렇더라도 지금의 오픈AI를 바라보는 머스크의 속이 쓰릴 것임은 익히 짐작할 수 있다. 왜 이제 소송을 내게 됐을까 2020년 9월 오픈AI가 마이크로소프트와 독점 라이센싱 협약을 맺었다고는 하지만, 그때까진 눈에 띄는 결과물이 없었다. 하지만 챗GPT가 혜성처럼 나타나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자 얘기가 달라졌다. 머스크를 형님처럼 따르던 샘 올트먼은 AI 업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스타가 돼서 국가원수들을 만나고 다니는 레벨로 올라섰다. 2023년 11월 AI 안전 정상회의에서 영국 리시 수낵 총리와 대화중인 올트먼(왼쪽) 오픈AI의 기술을 검색이나 업무용 소프트웨어에 통합할 수 있게 된 마이크로소프트(MS)는 일약 AI 업계의 가장 주목받는 기업으로 떠올랐고 주가도 크게 뛰었다. 2023년에는 기존 모델보다 더욱 성능이 향상된 GPT-4가 발표되었다. 이때부터 오픈AI는 GPT-3와 달리 세부적인 기술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쟁사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머스크가 이끄는 기업들은 마이크로소프트와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경쟁하지는 않지만, 이는 머스크에게 타격이 되었다. 테슬라 때문이다. 테슬라 주가가 다른 전기차 업체들보다 월등히 높은 이유는, 차량들이 주행하며 수집한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AI 회사'로 투자자들이 인식했기 때문이다. 챗GPT가 세상에 등장하기 이전까지, 테슬라는 구글과 함께 가장 앞선 AI 기업 중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시장의 모든 관심이 챗GPT와 MS로 쏠리게 되었다. 반면 테슬라가 수년 전부터 공언했던 AI 완전자율주행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2023년 하반기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무인택시들이 각종 사고를 일으키며 AI 차량과 자율주행의 미래가 기대만큼 가깝지 않음을 드러냈고, 이것도 테슬라에 별 도움이 안됐다. AI 프리미엄을 덜어낸다면 테슬라 주가는 지금보다 한참 낮아져야 하는데, 이는 머스크에게 큰 문제가 된다. 트위터(현 X) 인수과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테슬라 주식은 일론 머스크 제국의 부(wealth)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오픈AI를 테슬라의 캐시카우로 만들려다 실패했던 머스크는, 오픈AI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캐시카우가 된 현실과 직면하게 됐다. 그는 지난해 CNBC 인터뷰에서 '내가 바보가 됐다'고 쓴웃음을 지으며 이런 비유를 했다. "아마존 열대우림 보존하라고 환경단체에 기부금을 냈더니 목재회사를 만들어서 숲을 벌채해 내다 판 격이다." 재판, 어떻게 될까 머스크가 줄창 거론하는 '오픈AI 설립 합의'는 양 당사자가 서명한 계약서가 아니므로 소송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다고, 미국 언론들은 보도했다. 인공일반지능(AGI)의 개념도 문제다. 머스크는 GPT-4가 각종 시험에서 평균적인 인간을 넘는 점수를 받는 등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 인공일반지능 수준에 도달했으므로, 이를 마이크로소프트가 배타적으로 제공받는 건 안 된다(MS-오픈AI 간 기술라이센싱 협약 위반이다), 그러니 오픈소스로 공개하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AGI의 법률적 개념이 확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머스크의 주장을 받아줄지 말지 판사가 결정하려면 '어떤 기준이 충족되어야 AGI라고 볼 수 있는지'부터 법률 논쟁을 벌여야 할 판이다. 의회에 나와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 시달리는 샘 올트먼 오픈AI CEO. 사진=게티이미지 하지만 머스크가 소송을 내며 폭로한 내용에는 말이 되는 것, 올트먼 측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내용도 적지 않다. GPT 최신 모델이 AGI에 도달했는지 아닌지를 외부 전문가그룹이 아니라 오픈AI 스스로 결정하게 되어있어서 문제라는 지적도 그 중 하나다. 머스크에 따르면, 오픈AI는 마이크로소프트와의 상업적 결합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기 위해, 앞으로 업그레이드된 AI 모델을 내놓을 때도 "아직 AGI에 도달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된다. GPT-4에 이르자 GPT-3 때와는 달리 기술을 비밀에 부친 것에 대한 머스크의 비판에 공감하는 실리콘밸리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샘 올트먼은 신경이 많이 쓰일 것이다. 법률적 PR적으로 대비해야 하고, 혹시 이 사안이 정식 재판으로 갈 가능성을 고려하면 앞으로 오픈AI의 성과와 계획에 대해 발언하는 게 조심스러워질 수 밖에 없다. 올트먼이 "서글프다"고 말하는 이유 머스크로서는 '내가 갖지 못한다면 부숴버릴 거야'를 시전하는 셈이다. 승소 가능성이 없더라도 소송을 걸어 상대의 집중력과 시간과 자금을 소진하는 건, 머스크처럼 돈이 아주 많은 자들이 경쟁자의 발목을 잡기 위해 애용하는 전법이다. 이런 경우에 영어에서 쓰는 표현이 있다. "내가 왜 이러냐고? 왜냐하면, 할 수 있으니까! (Because I can!)" 생각에 잠긴 샘 올트먼. 사진=게티이미지 올트먼 측은 서글프다는 반응을 보였다. 오픈AI는 회사 블로그에 이런 글을 올렸다. "이런 결말에 이르게 되었다는 게 슬프다. 한때 우리가 깊이 추앙했던 - 우리가 더 높은 곳을 지향하도록 영감을 주었던 사람이(머스크를 말함) 우리에게 '실패할 거야'라고 말하고, 경쟁 회사(X.AI)를 만들고, 우리가 그(머스크) 없이 오픈AI의 미션을 향해 의미있는 진전을 이루기 시작하자 고소를 하다니." 되지도 않을 소송으로 발목잡지 말고, 자신 있으면 AI 기술력으로 제대로 붙어보자는 것이다. 디자인: 최혜지
미국 대선 '슈퍼 화요일'을 거치면서 트럼프 vs. 바이든 본선의 불이 붙었다. 슈퍼 화요일에 즈음해 미국 주요 언론들이 전국 단위 여론조사를 돌렸더니, 트럼프와 바이든의 격차가 더 커진 것으로 나타났다. 두어 달 전까지 2%P 안팎으로 트럼프가 앞서고 있었는데, 이제 트럼프의 우세가 5%P까지 확대된 것이다. (뉴욕타임스 조사에서 트럼프 48% : 바이든 43%) 이변이 없는 한 트럼프가 백악관에 다시 입성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많은 국제정치분석가들은 그게 올해 세계의 'No.1 리스크'라고 꼽고 있다. 트럼프의 당선이 국제 질서에 미칠 후폭풍 때문이다. 현존 세계 최강인 두 나라,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트럼프는 '60% 관세 부과'를 공언해 왔는데, 정말 할까? 러시아보고 '돈 안내는 유럽, 혼 좀 내주라'는 트럼프가, "미국의 반도체 산업을 빼앗아간" 대만을 중국에 넘겨주고 댓가를 얻어내려 하지는 않을까? 스브스프리미엄 〈뉴스쉽〉과 스프/비디오머그 〈교양이를 부탁해〉 공동 기획 두 번째 글은 이런 질문들을 다뤄보기로 한다. 1편 읽기: 중국 경제 짓누르는 '4D'…시진핑 체제가 극복할 수 있을까 중국산 제품에 60% 관세…정말 때릴까? 북한 김정은을 '로켓 맨'이라고 불렀던 트럼프. 자기 자신에게는 '태리프 맨(Tariff man)' 즉 '관세의 사나이'라는 닉네임을 붙였다. 2018년초, 중국산 철강에 25%의 고율 관세를 부과하면서 미중 무역 전쟁의 시동을 걸었던 게 트럼프다. 스스로를 '관세의 사나이'라 부르며 보호무역주의를 천명한 2018년 트럼프의 트윗 트럼프는 자신이 재집권하면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크게 올려 미국 산업을 보호하고 미국 국민들의 세금을 낮춰주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보편적인 10% 관세'를 거의 모든 수입품에 부과하되, 중국에 대해서는 무려 60%의 고율 관세를 특별 부과하겠다는 게 핵심 공약 중 하나다. 그의 공약집 '어젠다47'(이번에 당선되면 47대 대통령이 됨)에선 다음과 같은 주장을 제시한다. "미국은 원래 95%의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했다. 1816년부터 1947년까지 미국이 성장하던 시기에, 평균 관세율이 37%였다." "수십년간, 미국 정부는 세입의 80%를 수입품 관세에서 얻었고, 미국인들에게는 세 부담을 별로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후 미국의 관세가 크게 낮아졌고, 미국은 가장 수입품 의존도가 높은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발생하는 엄청난 무역 적자를 미국민이 세금으로 메워왔는데, 이제는 다른 나라들에 관세를 무겁게 매겨서 재정을 충당하겠다는 게 트럼프의 공약이다. 그동안 중국을 필두로 세계 각국이 미국의 부를 벗겨 먹었으니, 이제 그 값을 치르라는 거다. 그런데… 정말 할까? 2018년 그의 1기 임기 때도 중국이 무역 보복에 나서면서 미국 산업 또한 상당한 타격을 입은 바 있다. 60% 관세를 두들겨 맞으면 중국도 반격에 나설 것이다. 게다가 이번엔 미국의 동맹국도 가리지 않고 10%의 보편적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것이니, 거의 모든 나라들이 아우성을 칠 것이다. 그래도 할 것으로 보인다. 그게 '트럼프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미-멕시코 국경에 세운 장벽. 2023 게티이미지 트럼프 정권 1기때 불법 이민자 유입을 막겠다며 남쪽 국경에 세웠던 장벽을 생각해보면 된다. 국경 통제 강화에 찬성하는 전문가들조차도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반신반의했지만, 트럼프는 실제로 장벽을 일부나마 지어서 보여줬다. 지금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 장벽을 가리키며 "그래도 트럼프는 말만 번드르르하게 하지 않고 실제로 뭐라도 한다", "트럼프 뜻대로 장벽을 완공했으면 지금처럼 불법이민자가 밀려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공장이 중국으로 떠나간 뒤 하위 계층으로 추락한 사람들은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이다. 그들에게 '60% 관세'는 트럼프의 대표 공약 가운데 하나가 되어있다. 엘리트 경제학자들이 뭐라고 비판을 하든, 트럼프 입장에선 그들에게 뭐라도 보여줘야 한다. 아니, 엘리트 경제학자들이 비판을 하면 할수록 트럼프는 정치적으로 유리하다. "여러분을 지켜주는 건 나뿐"이라고 지지자들에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미국에서 번 돈을 미국 상대 대리전쟁에 대주는 나라" 트럼프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중국이 미국을 상대로 부당이익을 취하고 있으며, 관세로 저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대선 공약집에는 강력한 보호무역주의를 담은 문장이 가득하다. 이런 식이다. "현재 중국의 (미국에 대한) 평균 관세율은 미국보다 341%나 높다. 유럽의 관세율은 미국보다 50% 높다. 세계 평균 관세율은 미국의 2배 이상이다." "중국이 특혜를 받으면서 전세계에서 미국의 국가 안보 이익을 잠식하는 걸 멈춰야 한다. 트럼프가 재선되면 중국의 최혜국 대우를 박탈할 것이다." 최혜국 대우란, 국제 무역 체제에서 상대방 국가를 다른 국가들과 똑같이 대우한다는 원칙이다. 중국에 대해 이 대우를 철회하겠다는 건 중국에 대해 유독 무거운 관세를 물리겠다는 뜻이다. 특히 눈여겨볼 점은, 이 사안을 국가 안보와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 안보는 국가 안보"라는 건 트럼프가 대선 캠페인에서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는 소신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주장은 로버트 라이트하이저의 저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전 USTR 대표. 게티이미지 라이트하이저는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로서 대중 무역 전쟁을 수행했던 사람이다. 지금도 관세 전쟁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며 트럼프의 무역 관련 공약을 총괄하는 중요 인물이다. 그는 저서 <자유무역은 없다 (No Trade is Free)>에서, "미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라이벌에게 강성해지라고 돈을 대주는 나라", "균형 잃은 자유무역의 댓가는 수백만의 보통 미국인들이 대신 치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라이트하이저는 <포린어페어스>에서 자신의 책을 비판하는 경제학자와 서면 논쟁을 벌이면서도 이렇게 주장했다. "중국은 미국의 기술을 훔치고, 지속적으로 간첩 작전을 벌이며, 펜타닐을 미국에 들여보내 미국인들을 중독시키고, 미국을 상대로 번 돈을 미국을 상대로 한 2개의 대리전쟁에 지원하고 있다." (2개의 대리전쟁이란 1)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2) 하마스 및 기타 친이란 무장세력들의 이스라엘/미군 공격을 가리킨다.) 미국 소비자와 기업들도 타격? -라이트하이저의 반론 이런 사고를 바탕으로 중국산 수입품에 고율 관세를 매기면 당장 미국 소비자들의 부담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중국에서 완제품 형태로 들어오는 각종 공산품의 가격이 오르는 것은 물론이고, 주택 건설 비용이나 자동차 수리비, 농축산물 생산 비용 등도 오를 것이다. 그런 업종들에서도 중국에서 생산된 설비나 자재, 부품, 소모품을 많이 쓰기 때문이다. 애플처럼 중국 공장에서 생산한 물건을 미국에 들여와 판매하는 미국 기업들도 타격을 입을 전망이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이런 이유를 들어 '고율의 관세를 통한 보호무역은 결국 돌고 돌아 미국 경제에 손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트럼프 무역정책을 세우고 집행할 라이트하이저는 요지부동이다. 트럼프의 무역 관련 기자회견에 배석한 라이트하이저(사진 왼쪽). 사진 오른쪽은 트럼프의 핵심 측근인 사위 재릿 쿠쉬너. 2018년 게티이미지 라이트하이저는, 무역에서의 비교우위란 한 나라가 처한 입지나 자연환경, 역사적 특성 등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산업정책과 보조금, 무역 제한 등을 통해서 만들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한국의 예를 든다. 한국은 철광석이 많이 나지도 않고 제철공장을 돌릴 에너지도 수입해와야 하지만 정부의 산업정책을 통해 매우 경쟁력 있는 제철산업을 육성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미국은 제조업에 비교우위가 없으니 해외에서 값싸게 제조된 물품을 수입하고 대신 고부가가치 서비스산업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을 비판한다. 제조업 공동화로 잃어버린 것들을 서비스산업이 채워줄 수는 없다는 거다. 라이트하이저는 "제조업은 경제학 그 이상에 관한 문제다"라고 주장한다. 자신의 저서 <자유무역은 없다(No Trade is Free)>에 대한 <포린 어페어스> 서면 논쟁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라이트하이저의 저서 표지 "미국 노동자의 2/3는 대학 졸업장이 없다. 이들을 위해서는 서비스업 일자리보다 제조업 일자리가 더 나은 소득과 삶을 제공한다. 공장 하나가 떠나면 지역 전체가 고통을 겪는다." "제조업 일자리 1개가 생기면 다른 부문에 7~12개의 일자리가 생긴다. 제조업체는 연구개발 과학자나 기타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의 소중한 고객이 되기도 한다." "자원 배분 최적화, 생산성 효율화, 기업 이익 같은 것만 중요한 게 아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가정의 안정, 강한 공동체, 소득의 불균형 해소, 노동자의 자존감과 만족도 같은 요소들이다. (그래서 제조업이 중요하다.)" "미국의 안보를 위해서도, 다른 나라, 특히 적대적인 나라의 제조업 능력에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다. 코로나 팬데믹은 그런 위험의 일단을 보여줬다. (미국은 코로나19 초기에 방역복, 마스크 등을 제조하지 못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전쟁이 시작되고 나면 제조업 능력을 육성하는 건 이미 늦은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고율의 관세는, 미국을 떠났던 공장들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이다. 관세가 모든 걸 해결해주지는 못하지만, 그것조차 하지 않으면 어쩌냐는 것이다. 그는 1980년대 일본차의 미국 점령을 거론하면서, 레이건이 강력한 보호무역정책을 펴자 일본 기업들이 미국에 공장을 짓고 많은 미국인을 고용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한다. 유세에 앞서 자동차 부품공장을 시찰하는 트럼프. 2023년 9월 미시건주. 게티이미지 자신의 책에서 라이트하이저는, 고율의 관세가 미국 기업이나 소비자에게 일정 정도 손해를 끼치겠지만, "결국에는" 컴퓨터나 휴대폰 등의 생산도 미국이나 동맹국으로 넘어오게 될 것이며, 그것은 결국 미국 노동자들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고 썼다. 책에서 그는 이렇게 일갈한다. "중국이 문제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중국에 대한) 혼란 없는 어떤 마술적 해법이 있을 거라고 주장하는 자는, 거짓말쟁이거나 바보거나 부정직한 악당이거나, 구제불능의 글로벌리스트거나, 이 중 몇 가지를 합친 거다." 뉴욕타임스의 지난해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당신이 추구하는 게 경제적 효율이 전부라면 - 실업선상에서 40인치 TV 3대 갖고 사는 게 일을 하면서 TV 2대만 있는 삶보다 더 낫다고 주장한다면 -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경제학자 중에서는) 소비가 최종 목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 견해로는 생산이 최종 목표다. 그리고, 안전하고 행복한 공동체가 최종 목표다. 그걸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2020년 상원에서 증언하는 라이트하이저. 게티이미지 어떤가. 트럼프 핵심 실세의 '보호무역주의 진심'이 느껴지시는지. 사실, 미국은 이런 정책을 밀어붙이기에 그래도 유럽보다 훨씬 나은 입장에 있다. 미국은 멕시코의 공장들로부터 저렴한 물건을 수입할 수도 있다. 이미 적지않은 중국 기업들이 멕시코에 공장을 지었거나 짓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 그 덕에 멕시코는 미국을 상대로 수출하는 국가들 중 처음으로 중국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라이트하이저는 중국에 대한 고율 관세 정책의 효과로 각종 제품의 생산이 미국과 그 동맹국들로 이전될 것이라고 전망했는데, 한국은 여기서 기회를 도모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는 독재자 좋아하던데…시진핑과 관계를 개선하지 않을까? 트럼프는 독재자를 좋아하긴 한다. 민주주의랍시고 자신에게 따지고 대드는 걸 싫어한다. 그래서인지, 김정은에 대해 개인적인 친밀감을 표시했고, 푸틴과 시진핑에 대해서도 여러차례 호감을 드러낸 바 있다. 특히 푸틴과 시진핑에 대해서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Make ______ Great Again (_____을 다시 위대하게)"를 추진하는 리더라는 점에서 어떤 '동질감'을 느끼는 것 같다. 빈칸에 들어가는 나라 이름이 China 또는 Russia로 다르긴 하지만. 지난 2월 4일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중국이 잘 되길 바란다. 진짜로. 그리고, 나는 시진핑 주석을 많이 좋아한다. 내 대통령 임기 동안 그는 아주 좋은 친구였다." 2017년 11월의 트럼프와 시진핑. 게티이미지 실제로, 2016년부터 2020년까지였던 트럼프의 임기 동안 시진핑은 트럼프를 잘 달래야 하는 입장이었고, 공세를 취한 건 트럼프였다. 트럼프는 어느 나라하고든 전쟁을 벌일 것처럼 좌충우돌하는 예측불허의 스트롱맨이었고 시진핑은 2013년 권좌에 올라 권력을 다져가는 중이었다. 트럼프가 시진핑과의 만남을 좋게 기억하는 건 당시의 그런 역학관계 때문일 수 있다.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해서 시진핑과 다시 만나도 시진핑이 같은 태도일지는 미지수다. 당시와 달리 지금의 시진핑은 3기 집권에 접어든 사실상의 황제인데다, 밀리는 인상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여유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튼, 트럼프가 시진핑에 대해 지금 보여주는 '친한 척'은 개인 간의 관계에 국한될 가능성이 크다. 김정은에 대해서도 그랬다. 그의 친서를 '러브레터'라 부르고 김정은을 자신의 차에 태우려고 할 정도로 친밀감을 보였지만, 나라 간의 이해관계가 걸린 정상회담에서 자신이 '바보같은 딜에 도장찍은' 대통령이 될 위험에 처하자 미련없이 협상판을 엎어버렸다.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2차 회담에서 냉랭한 분위기의 김정은과 트럼프. 이 직후 회담은 결렬됐다. 2019년 2월 28일, 게티이미지 트럼프는 시진핑에 대해 보이는 개인적 친밀감과 관계없이, 중국에 대한 강력한 압박 스탠스는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자신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잘 아는 영리한 정치인이다. 그를 지지하는 세력은 중국에 대한 반감이 강하다. 트럼프를 따르는 공화당 의원들도 반중 성향을 보인다. 그들이 우크라이나 지원에 뜸을 들이면서 내세우는 명분 가운데 하나는, 그 돈과 물자를 아껴서 중국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공약집 <어젠다 47>로 돌아가 보면, 트럼프는 "모든 주요 분야에서 중국에 대한 의존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일련의 대담한 개혁을 실시할 것"이라며 디커플링 의지를 강력히 천명하고 있다. "전자제품에서 철강, 제약에 이르기까지, 모든 필수 품목에서 중국산 수입품을 단계적으로 몰아내기 위한 4개년 계획을 집행"하겠다는 것이다. (대통령 임기가 4년이니, 임기 내내 추진하겠다는 얘기다.) 트럼프가 중국에서 '천건국(川建国) 동지'로 불리는 이유…중국은 바이든이 이기길 바랄까? 그러면 중국은 차라리 바이든이 이기길 더 바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바이든이나 트럼프나 기본적으로 대중 압박 전략을 펴는 건 마찬가지인데, 트럼프 쪽이 중국 입장에서 대응하기가 차라리 쉽기 때문이다. <포린 폴리시>는 최근 "중국은 왜 트럼프를 응원하는가(Why China is rooting for Trump)"라는 분석 기사에서, 트럼프가 초래할 국제 질서 변화가 중국이 서방 자유주의 국가들을 상대로 벌이는 장기전(long game)에 더 유리하다고 썼다. 2017년 11월 베이징을 방문한 트럼프를 환영하는 시진핑. 게티이미지 트럼프는 벌써부터 유럽연합-나토(NATO)와 갈등을 빚고 있다. 바이든이 대통령을 하는 동안, 유럽은 미국과 한편에 서서 중국을 압박해 왔다. 트럼프가 재집권하면 미국과 유럽 간에 균열이 커질 것이다. 그러면 중국으로선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이 커진다. 트럼프의 거친 미국 우선주의에 불만을 품은 국가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당길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트럼프가 푸틴의 러시아에 우호적이라는 점도 중국에겐 플러스다. 트럼프가 만일 러시아에 대한 각종 제재를 경감해준다면, 지금은 미국의 2차 제재('세컨더리 보이콧')에 걸릴까봐 러시아와의 거래를 꺼리는 중국 기업들이 보다 과감하게 대러 사업과 투자에 나설 수 있다. 좌충우돌하는 특성상, 트럼프는 갑작스럽게 어떤 나라에 대해 경제 제재를 부과할 수 있는데, 이를 두려워하는 나라들이 대안적 국제 결제망을 찾을 수 있다. 이는 위안화를 '글로벌 사우스'의 국제 결제 통화로 만들려는 중국의 야심에 부합한다. 희토류를 생산하는 아프리카나 중남미의 개도국들이 트럼프의 미국과 사이가 나빠질 수 있다는 점도 전기차 및 2차 전지 산업을 더욱 키우려는 중국 입장에선 희망적이다. 트럼프가 바이든과 달리 대만 수호 의지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는 점도, 중국이 바이든보다 트럼프를 선호할 좋은 이유가 된다. 트럼프에게 중국 군복을 합성한 이미지. 트위터(현 X)에서 트럼프가 중국에 도움될 것이라는 '川建国' 게시물에 쓰이는 이미지. 그래서 중국 인터넷에선 요즘 트럼프를 '천건국 동지(川建国 同志) ' 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천(추앤)'은 Trump의 중국어 발음과 비슷해서 음차한 글자다. '건국(지앤구오)'은 글자 그대로 나라를 일으켜 세운다는 뜻이다. 트럼프가 취할 정책이 중국을 다시 일으켜 세워줄 거라는 중국 네티즌의 '대중의 지혜'가 담긴 닉네임이다. 트럼프, 대만을 중국에게 넘겨줄까? 중국이 대만을 무력으로 통일하려 할 경우 미국은 어떻게 할까. 트럼프를 따르는 공화당 의원들은 대만을 중국에 넘겨줘선 안 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이 문제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트럼프가 대만에 대해 명확히 자신의 뜻을 밝힌 적이 있긴 하다. 반도체는 원래 미국의 산업인데 대만이 빼앗아 갔다는 거다. 그는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대만은 우리 미국의 반도체 산업을 몽땅 가져갔다. 원래는 우리가 우리 반도체 다 만들었는데, 이제는 대만이 90%를 만든다"고 불평했다. (그런데 이는 사실과 다른 주장이다. 대만을 반도체 기지로 키운 건, 저렴한 생산기지가 필요했던 미국 기업들이기 때문이다. 대만이 빼앗아 간 게 아니다.) 대만 TSMC 공장. SBS 자료사진 트럼프의 이런 발언이 나온 건,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그것이 중국과의 전쟁을 의미하더라도 대만을 지킬 것이냐"는 앵커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였다. 트럼프는 위의 발언을 하기에 앞서 이렇게 한 자락을 깔았다. "그 질문에 답을 하면 나의 협상 포지션이 매우 나빠진다." 대만을 중국에 넘겨준다 만다 분명하게 말을 하지 않는 게 중국과 대만을 다루는 데 있어서 더 유리하다는 뜻이다. 트럼프는 대만에 대해 이런 생각을 품고 있는지 모른다. '중국에 넘겨주긴 아까우니 지켜주긴 하겠지만, 그러면 돈을 더 내고, 반도체 공장도 미국에 지어라.' 그런데 이건 빌딩 사고 파는 비즈니스가 아니다. 국가 안보를 다루는 일이다. 중국은 트럼프의 모호한 태도로 인한 균열을 이용하려 들 것이다. 중국 정부에서 대만 문제를 담당하는 국무원 대만판공실의 천빈화 대변인은 실제로 지난 1월 말 기자회견에서 이런 논평을 내놨다. 이게 대변인 수준의 외교전에 그치면 다행인데, 시진핑이 실제로 미국의 의중을 오판하고 대만에 대한 무력 행사를 결심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미국 보수세력 내에서도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트럼프가 표방하는 '중국 꺾어놓기'를 위해서라도, 대만을 중국에 넘겨주는 건 최악의 수라는 것이다. 사실, 트럼프가 대만을 '중국 맘대로 하라고 내버려 두겠다'고 말한 적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지난해 9월 NBC-TV의 특별 인터뷰에서, 대만을 지키기 위해 "미군을 보내는 방안도 배제하지는 않는다"고 말한 적은 있다. 대만이 중국으로 넘어간다는 건, 단지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업 중 하나인 TSMC를 중국이 가져간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중국의 군사력이 태평양으로 쏟아져나오는 걸 막아주던 마개가 뽑힌다는 걸 의미한다. 그러면 아시아에서 미국의 최대 보루인 일본이 위험해지고 호주도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 두 나라가 미국 말을 잘 안 듣고 중국 눈치를 보는 경우가 늘어날 수 있다. 트럼프도 대통령을 해봤으니만큼, 대만을 중국이 가져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백악관에 있는 동안 안보보좌관과 관련 장관들의 보고를 많이 받았을 테니까. 트럼프의 개인 성격을 봐도 그렇다. 그는 승부욕이 강하고, 남한테 지는 걸 못 참는 사람이다. 중국의 대만 무력 통일을 용인하는 대가로 미국이 받아낼 것도 딱히 없다. 반도체 공장에 대한 트럼프의 애착은 무척 강하다.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삼성전자 반도체단지를 헬기로 돌아보며 미국으로 갖고 가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만일 TSMC가 시진핑 손아귀로 넘어간다면, 트럼프는 차라리 TSMC에 대한 폭격을 명령할 사람이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안보전문가들이 실제로 미국에 있다.) 저성장 중국과 트럼프의 조합이 오히려 위험할 수도 트럼프는 체질적으로, '함께 잘 가자. 너도 크게 해줄게' 이런 식의 화법이 잘 안 맞는 사람이다. 공약집에 나오는 그의 중국 압박 기조는, 시진핑 개인에 대한 호감 표시와는 별개로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모호함이 자신의 협상력을 높여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더욱 그렇다. 미국 47대 대통령의 임기 동안, 중국은 앞선 1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력이 확 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망하지도 않는 저성장 상태로 계속 갈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는 게 전쟁의 역사를 연구한 정치학자들의 얘기다. 패권국에 도전하는 나라의 입장에서, '시간은 더 이상 우리 편이 아니다.',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국력 차이가 커진다'고 판단하게 되면 오히려 모험적인 도발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게다가 시진핑의 중국은 푸틴의 러시아처럼, 독재자 1인이 전쟁을 결심할 경우 견제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고장난 나라다. 인민해방군 사열하는 시진핑. 2023년 11월 게티이미지 한편 트럼프도 '더 강력한 미군'의 재건을 <어젠다47>에 명시하고 있어, 미중 충돌의 가능성은 지금보다 결코 낮아지지 않을 것이다. 연구자들의 입장에서, 전쟁은 지진 같은 것이라고 한다. 나기는 날지, 나면 언제 날지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지만, 발생의 가능성이 고조되는 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중 갈등의 최전선에 선 미국의 동맹국인 우리는, 저게 남의 일이 아니라 다 우리 일이라는 관점을 갖고, 국제 질서 변화를 객관적으로 주시해야 한다. 디자인 : 최혜지
나라 안 상황이 의대 증원과 총선 공천으로 어수선하다. 이런 문제들도 의사가 되거나 정치에 나서지 않는 보통 사람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주지만, 무역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 사람들 삶에는 어쩌면 나라밖 환경이 간접적이지만 더 큰 영향을 준다고 할 수 있다. 설도 대보름도 지나고 올해의 1분기도 막바지로 접어드는 이때, 우리나라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두 강대국 중국과 미국은 어떤 상황일까. 스브스프리미엄 〈뉴스쉽〉과 스프/비디오머그 〈교양이를 부탁해〉 공동기획으로 중국경제 전망과 트럼프 재선시 미중관계를 2부에 걸쳐 짚어보기로 한다. 5% 성장이라지만… 소비 침체된 중국 중국은 지난 1월 17일, 2023년 경제성장률 5.2%를 달성했다고 발표했다. 그전 해(2022년)에 코로나19 봉쇄로 워낙 경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기저효과를 감안하면 그리 높은 수치는 아니다. 중국은 원래 7% 성장은 해야 사회가 제대로 굴러간다고 하던 나라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당국이 내놓는 숫자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 경제 전문가들은 실제로 어떤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지, 사례들(anecdotes)을 수집하며 지표적 현상에 주목한다. 중국의 경기가 숫자보다 더 나쁘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들은 적지 않다. 상하이와 선전 등 경제중심도시의 번화가에 사람이 눈에 띄게 줄었다는 얘기가 나오고, 실제로 해당 도시들의 지하철 이용객 수가 크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소비자들의 경제활동이 둔화된 것이다. 춘제 연휴기간 돌아다닌 사람들은 많지만 1인당 소비지출액은 전년 대비 5% (중국 경제매체 차이신)~ 9.5% (로이터 통신)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다. 이를 반영하듯, 중국의 물가지수는 디플레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경제가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면 물가는 완만하게 오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가지수가 마이너스라는 얘기는 민간경제의 활력이 떨어졌다는 얘기고, 사람으로 치면 저혈압이나 저체온증이 의심된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회사나 가게는 사람을 감원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부자 가난한 자 가릴 것 없이 중국을 떠나려는 몸부림이 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부자들은 홍콩이나 싱가포르를 통해 자산을 미국, 영국, 일본, 캐나다 등으로 반출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 가난한 이들은 수만 km 떨어진 중남미까지 가서 위험한 정글을 건너 멕시코 국경을 통해 미국 밀입국을 시도한다. 2023년 1~9월까지 그렇게 미국에 들어가는 데 성공해서 난민 자격을 신청한 사람만 2만 2천 명을 넘는 것으로 집계됐고, 위험한 행렬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멕시코 국경을 통해 미국 텍사스로 넘어오는 데 성공한 난민들. 중남미인들 사이에 중국인들의 얼굴이 보인다. 올해 2월 2일, AP=연합. 이게 의미하는 바가 뭘까. 답은 어렵지 않다. 시진핑 영도하의 중국에서 삶이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과 신뢰가 바닥나고 있다는 뜻이다. 중국 경제, 왜 이렇게 됐나 코로나19가 끝나면 다시 활황을 맞을 줄 알았던 중국 경제가 왜 이럴까. 지금까지 온 과정을 되짚어보는 건 앞으로를 전망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그동안 중국이 국가 주도 건설투자를 통해 내수를 끌어올려 왔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건설에 돈을 부어도 너무 많이 부었다. 〈포린 폴리시〉는 중국경제를 분석한 심층기사에서, ‘미국 은행들이 150년 걸려 내보낸 부동산 대출보다, 중국은행들이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5년간 내보낸 대출이 더 많다’고 썼다. 그러다 보니 수익성이 떨어지는 주택, 공장, 인프라가 많아졌고, 부실채권이 쌓여갔다. 몇 차례 이를 정리하고 경제 체질을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어물쩍 넘어갔다. 코로나19 봉쇄로 텅 빈 상하이 주거지역의 거리. 2022년 4월 1일, AFP=연합. 그러다 코로나19가 터졌다. 강력한 봉쇄정책 속에 많은 회사와 가게들이 일을 제대로 못했고, 결국 망했다. 도시에서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일자리를 제공하던 빅테크 플랫폼, 엔터, 사교육 등의 기업들은 공산당의 ‘공동부유’ 지도를 받고 기가 꺾였다. 미국 등 서구 국가들은 코로나19 기간 동안 일단 돈을 엄청나게 풀어서 경제가 침체되는 걸 막았지만 중국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14억 인구에게 대체 얼마씩 꽂아줘야 하며, 무슨 기준으로 액수를 산정할 것인가. 게다가 시진핑 주석에겐 더 시급한 국정과제(미국과의 대결과 대만문제 해결)가 있어서, 국부를 그런 데 쓰는 걸 허용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리오프닝’을 했는데도 사람들은 보복소비를 할 여력이 없었다. 지자체들은 코로나 검사와 방역 비용으로 재정을 탕진해서 돈이 바닥났다. 공무원 월급도 제대로 못주는 사례들이 심심치 않게 보도된다. 내수를 지탱하던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고, 거대한 부동산기업들이 쓰러졌다. 분양받은 집주인의 권리를 보호해 달라는 시위문구가 붙은 차량. 컨트리가든 아파트건설 현장. 2023년 8월, AP=연합 나라 안 사정이 이러면 밖에서라도 열심히 벌어야 경제에 숨통이 터질텐데, 중국은 코로나19 이후 서방과의 관계가 극도로 나빠졌다. 팬데믹 발원지 논란으로 미국, 유럽, 호주 등과 얼굴을 붉히고 싸우다가, 2022년에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편들면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서구에서 ‘디커플링/디리스킹’이 유행어처럼 회자됐고, 이들은 중국 투자를 거둬들이고, 중국산 상품을 덜 사기 시작했다. 화기애애한 푸틴과 시진핑. 2023년 10월 베이징 일대일로 정상회의에서. 로이터=연합. 최근 중국 외환관리국(SAFE)은 지난해 중국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FDI) 금액이 330억 달러(약 44조 원)로 전년(1천802억 달러·약 240조 원) 대비 82% 감소했다고 밝혔다. 2년 사이 중국에 대한 외국인투자가 10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지난해 3분기에는 투자유입액에서 유출액을 뺀 ‘순투자액’이 1998년 이후 최초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외국기업들이 중국에 들어와 공장을 늘려도 시원찮을 판에, 중국 공장들이 살 길을 찾아 오히려 멕시코나 베트남, 인도로 떠나는 현상도 늘고 있다. 이로 인해 미국에 가장 많은 물자를 수출하는 나라로 멕시코가 처음으로 중국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금리 계속 내리는 중국... 효과가 있을까? 주요 서방 국가들은 코로나19때 풀려나간 돈을 거둬들이느라 금리를 계속 올렸는데, 중국은 반대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경기가 가라앉으니 금리를 자꾸 내린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할 거라는 관측이 다수다. 부동산 기업들의 연쇄 도산 같은 사태를 막는 데는 어느정도 도움이 될지 모르나, 경제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면 더 강력하고 광범위한 부양책으로 민간 소비를 자극해야 한다는 거다. 청소할 때를 생각해 보면 된다. 오물을 씻어내려면 충분한 양의 물을 왕창 부어야지, 찔끔 부어서는 별 효과가 없다. 게다가, 중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생각하면 소폭의 금리인하는 언발에 오줌누기에 불과하다. 중국 부동산 시장에 매물이 쌓이고 민간 소비가 안 돌아가는 게 금리가 높아서인가? 그보다는, 자국 경제에 대한 중국 인민들의 자신감이 땅에 떨어졌기 때문으로 봐야 한다. 시진핑 주석의 국가운영에서, 내수활성화와 소비진작은 최우선 과제가 아니다. 미국과의 전략경쟁, 반도체 굴기, 대만 통일, 내부불만 제압과 권력 공고화, 학생들의 사상교육 강화 같은 것들이 그에게는 더 중요해 보인다. 홍해 통과 화물선을 나포하는 후티 반군. 후티 측이 직접 촬영해 배포. 게티이미지. 2023년 11월. 시 주석의 공산당에게 경제보다 다른 게 더 중요해 보이는 사례로, 수에즈 운하와 후티 반군 사태를 들 수 있다.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화물선을 후티 반군이 공격하는 사태로 인해 가장 많은 피해를 보는 건 유럽이다. 중국에서 수입하는 각종 공산품이 최단거리인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지 못하고 저 멀리 아프리카 남쪽 끝까지 돌아서 와야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중국의 수출기업들도 그만큼 손해를 본다. 민간경제를 가장 중시하는 정부라면, 당연히 팔을 걷어붙이고 이 사태의 해결에 총력을 기울이는 게 맞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후티 반군의 배후인 이란에게 비공개적으로 ‘자제시켜 줄 것’을 요청했을 뿐이다. 이 문제가 가자지구 사태와 관련해 미국을 곤혹스럽게 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에 더 이상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는 것이다. 시진핑 주석의 국정 기조를 바꿔야 하는데…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서 필요한 대책은 대부분 시진핑 주석의 기존 국정운영 기조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필요로 한다. 자유와 창의를 높이고, 민간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외부세계와 더 자유롭게 교류해야 한다. 하지만 시진핑의 중국은 반대로 가고 있다. 외국기업을 유치해도 모자랄 판에 반간첩법을 내세워 외국 기업인들을 겁준다. 경제의 생리를 알고 현실적인 해법을 내놓을 줄 아는 전문가 집단이 중국이라고 해서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집단의 수장 격이던 리커창 전 총리는 핵심권부에서 밀려난 지 1년 만인 지난해 가을 68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중국 안팎에선 사망을 ‘당한 것 아니냐’고 수군거렸다. 2022년 10월 22일 중국공산당 제20차 당대회 폐막식에서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이 끌려나갈 때의 리커창 당시 총리 (사진 왼쪽). 이 행사를 마지막으로 리커창도 권력 중심부에서 밀려났고, 1년 뒤 사망했다. 시진핑 체제가 지금과 같은 양상으로 계속되는 한, 중국 경제는 그다지 달라질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중국의 민간 경제주체들은 나라 안팎으로 양수겸장을 당한 답답한 형국이다. 디플레 조짐을 보이는 물가지수나 소비감소 지표 등은 그러한 상황의 수치적 반영일 따름이다. 중국 경제 짓누르는 ‘4D’ 〈포린 폴리시〉는 최근 중국 심층분석 시리즈에서, 중국 경제를 짓누르는 요인으로 4개의 D를 꼽았다. 이는 부채(Debt), 수요(Demand)의 부진, 감소세로 접어든 인구(Demography), 그리고 디커플링(Decoupling)이다. 앞의 3가지 D를 해결하는 건 중국 지도부의 능력에 달린 문제다. 넷째 D는 조금 다르다. 이는 능력보다도 의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디커플링(요즘은 ‘디리스킹’)이라는 말을 각국 수도의 유행어로 만들고 이 개념에 따른 일련의 정책을 집행하는 건 최근 2-3년 사이 미국과 유럽이 한 일이다. 하지만 디커플링에 해당하는 개념을 먼저 세우고 추진한 건 러시아와 중국이었다. 얘기는 2010년대 초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는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침공한 뒤 미국과 유럽의 경제 제재를 받았다. 푸틴은 이때 각료들을 모아놓고, 보다 전면적인 제재를 받을 경우 과연 러시아 경제가 견딜 수 있는지 점검했다고 한다. 결론은 '어렵다'는 것이었다. 아연실색한 푸틴은 식량, 에너지, 국제금융 등에서 서방의 제재를 받더라도 버틸 수 있는 쪽으로 러시아의 체질을 보강했고, 그 준비가 어느 정도 이뤄졌다고 판단되자 2022년에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했다. 크림반도에 진입해 우크라이나 주민들을 위협하는 러시아군. 2014년 3월, 게티이미지. 중국은 러시아보다 더 앞서 이런 고민을 시작했다. 유럽외교협회(ECFR)의 제재 및 수출통제 전문가 아가테 데마라이스는 중국이 이미 1980년대부터 안보 목적으로 반도체 독자생산을 추진했다면서 이렇게 강조한다. “중국은 기술, 교역, 금융 등에서 서방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것에 관해 러시아보다 더 긴 역사를 갖고 있다. 디커플링/디리스킹을 발명한 세계 선두주자가 있다면 그건 어느 모로 봐도 베이징이다.” 중국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준비하며 제재에 대비하는 과정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크림반도 사태 이듬해인 2015년, 시진핑 정부는 ‘중국제조 2025’라는 국가산업계획을 발표한다. 서방의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도 미국과 경쟁할 수 있는 산업기술력을 확보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계획이었다. 2013년에 시진핑이 제안한 ‘일대일로’ 계획도 본격화한다. 미국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육로를 통해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 중동 유럽을 잇는 수송로를 확보하고, 미국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해상통로를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확보한다는 복안이었다. 이는 미국이 지배하는 세계와는 별개로 작동할 수 있는, 중국이 지배하는 대안적 질서(alternative world order)를 구축하겠다는 뜻이었다. 세계시장에 편입시켜 돈맛을 보여주면 중국이 자유민주주의 세계의 일원으로 순치될 것이라 기대했던 미국은 뒤늦게 ‘중국의 본색’을 깨달았고, 2010년대 후반부터 대중국 전략을 바꾼다. ‘디커플링’ 원조는 중국 중국은 그 후로도 대안적 국제질서의 구축을 꾸준히 추구했다. ‘디커플링’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을 뿐이다. 2020년대 이후의 행보를 관찰해 봐도, 중국은 미국-EU 주도의 세계와는 별개로 작동하는 체제의 주인이 되려는 조치들을 강화하고 있다. 위안화를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 간의 국제결제 통화, 특히 석유 거래의 결제대금으로 인정받게 하려는 노력도 그중 하나다. 이러한 행보가 반전의 계기를 내부에서 찾기 힘든 중국 경제의 숨통을 틔워줄 수 있을까. 그렇지도 않겠지만 더 중요한 건, 시진핑 주석에겐 그게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점이다.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중국이 ‘4D’로 요약되는 제약을 극복하고 다시 경제를 활기차게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중국 경제가 속된 말로 ‘망할 것’이라고 전망하는 건 아니다. 중국 부동산 시장이 엉망이라고는 하지만, 2007~2008년 월스트리트 상황과 같은 ‘금융 시스템 붕괴(melt down)’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금융시스템의 근간을 이루는 은행들은 국가 소유인 데다, 중국 자본시장이 국제 자본시장과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국 중앙은행인 중국인민은행. 지난 20일, AP. 중국 공산당의 국정 기조가 전면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중국은 지금처럼 답답한 상태로, 숫자로는 5%보다 조금 낮은 정도의 (중국 입장에선) 저성장 국면을 상당기간 이어갈 것으로 보는 서구 전문가들이 많다. 그렇다면, 올해 11월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트럼프가 재선 될 경우엔 중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트럼프는 중국에 대해 무려 60%의 고율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언했는데, 정말 할까? 트럼프가 재집권하면 미중 관계에서 대만 문제는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 다음 편에서는 이런 문제들을 다뤄 볼 예정이다. 디자인 : 최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