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설명하면
사실 최근엔 이른바 '평화협상론'이 탄력을 받아왔습니다. 협상론은 우크라이나나 러시아 어느 쪽도 압승을 기대하기 어려운 만큼 다가올 한겨울에 의미 없는 소모전을 벌이기보다 현실적으로 평화 협상으로 사태 해결을 모색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특히,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러시아로부터 "협상을 원한다는 신호를 받았다"고 밝히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새 국면을 맞을지 주목받았습니다. 우크라이나 영자 매체 키이우 인디펜던트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현지 시간으로 17일 "푸틴이 직접적인 협상을 원한다는 신호를 받았다"며 러시아가 협상에 관심을 드러내고 있음을 시사했습니다.

그동안 미국이 전방위로 협상론을 거론해온 터라 의미심장한 발언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지난 15일에는 미국 중앙정보국, CIA 윌리엄 번스 국장이 우크라이나에 입국해 젤렌스키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정보당국 관계자들을 면담했고, 16일에는 미 군부 최고위급 인사인 마크 밀리 미군 합참의장이 브리핑에서 평화협상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거론하기도 하면서 기대감은 커져갔습니다.

한 걸음 더
그런데 20일부터 흐름이 바뀌는 모습이 감지됩니다. 러시아가 점령 중인 우크라이나 자포리자 원전에 십여 발의 포탄이 떨어진 겁니다. 유럽 최대 원전인 자포리자 원전은 잇따른 포격으로 방사능 유출 우려가 커지고 있는 곳입니다. 심지어 이를 두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서로 상대국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크라이나 측은 엄격한 종전 조건을 제시하고 나섰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지목한 종전 조건은 ▲ 핵 안전 ▲ 식량안보 ▲ 에너지 안보 ▲ 포로 석방 ▲ 유엔 헌장 이행 ▲ 러시아군 철수와 적대행위 중단 ▲ 정의 회복 ▲ 환경 파괴 대처 ▲ 긴장 고조 예방 ▲ 종전 공고화 등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러시아군 철군과 포로 석방이 우선적 요구로 보이는데, 특히 철군 문제가 가장 문젭니다.

우크라이나는 그동안 러시아와의 평화가 가능해지려면 양국이 옛 소련에서 독립한 1991년의 국경이 회복돼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지난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병합한 크름반도는 물론 지난 2월 우크라이나 침공을 통해 새로 점령한 돈바스(도네츠크주와 루한스크주), 자포리자, 헤르손 등 4개 지역도 되돌려 받아야만 종전 합의에 응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번 전쟁을 통해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에서 시작해 흑해 연안의 서부 항구도시 오데사로 이어지는 동남부 회랑지대를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러시아로선 수용하기 어려운 조건입니다.

여기에 양측 모두 추가적인 충돌에 대비하는 듯한 모습도 포착됐습니다. 미 재무부는 현지시간 22일 우크라이나 구호를 위해 45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6조 1천억 원을 추가 지원한다고 밝혔습니다. 재닛 옐런 재무 장관은 "경제적 지원뿐 아니라 재무부와 미국 정부는 제재 동맹을 포함해 푸틴의 전쟁 기계를 약화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사용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러시아에선 2차 동원령 소식이 흘러나왔습니다. 병력 부족에 시달리는 러시아가 2차 동원령을 통해 최대 70만 명을 소집하려 계획하고 있다고 영국 TV 방송 '스카이 뉴스'가 우크라이나 정부 인사를 인용해 현지시간 22일 보도한 겁니다. 보도에 따르면 안톤 게라셴코 우크라이나 내무장관 고문은 "러시아가 내년 1월에 2차 동원령을 발령할 준비를 하고 있다"면서 "50만~70만 명을 동원할 계획"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전쟁이 9개월 동안이나 이어지면서 러시아는 심각한 병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9월 21일 '동원령 발령은 없다'던 러시아 정부의 연이은 발표를 뒤집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예비역 대상 부분 동원령을 발령했습니다. 러시아 국방부는 10월 말까지 한 달 이상 지속된 동원령을 통해 우크라이나 전장에 파견할 군인 약 30만 명을 징집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젠 2차 동원령 소식까지 나오고 있는 겁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

하지만 아직 종전 혹은 최소한 휴전으로 향하는 발걸음과 희망이 완전히 멈춰진 건 아닙니다. 특히 곧 미국과 러시아가 한자리에 앉기로 한 것에, 세계에 이목이 쏠리고 있습니다.

오는 29일, 미국과 러시아가 양국 간 핵통제 조약인 신전략무기감축협정, 즉 뉴스타트 논의를 이집트 카이로에서 재개하기로 한 겁니다. 뉴스타트 협정 관련 사항을 다루는 양자협의위원회(BCC)가 열리는 건데요, BCC는 원래 매년 두 차례 소집되지만, 지난해 10월 마지막으로 열린 뒤로는 1년 넘게 일정이 잡히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뉴스타트 협정에 따라 미국과 러시아는 상대국 핵무기 관련 시설을 주기적으로 사찰해 왔습니다. 하지만 코로나와 대러 제재에 반발한 러시아가 사찰 재개를 허용하지 않겠다고 한 상황입니다.

물론 러시아가 이 자리에서 우크라이나 관련 논의는 하지 않는다는 선을 그은 것으로 전해졌지만, 기본적으로 사찰 재개, 대러 제재 해소 등의 해결에 우크라이나 문제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사안을 아예 떼어두고 논의하긴 어렵다는 게 중론인 겁니다.

우크라이나전 9개월. 우크라이나에서 어린이 437명을 포함한 민간인 8,3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집계가 어려운 동남부 러시아 점령지를 포함하면 희생자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크라이나 정부 자체 집계지만 유엔의 그것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부디 이번 겨울, 죄 없는 생명들의 목숨이 위협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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