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전형우 기자입니다. 차별과 불평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 뉴스쉽 네 줄 요약 · 이해관계에 따라 갈등할 수밖에 없는 노사 관계를 정부가 중재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곳이 '경제사회노동위원회'입니다. · 경사노위의 전신인 노사정위원회는 IMF 외환위기 당시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을 도입하기 위해서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 민주노총은 1999년에 사회적 대화 테이블에서 탈퇴하기로 한 뒤 25년째 노사정 회의에 불참하고 있습니다. · 경사노위에서는 최근으로 오면서 노사 당사자가 아닌 정부와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뉴스쉽에서는 '노동과 불화하는 정치'를 주제로 세 번에 걸쳐 다룰 예정이다. 지난 3월 23일 뉴스쉽에서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살펴보았다. 이번엔 행정부 차원에서 노동과 정치가 만나는 접점을 짚어보려 한다. 정부가 주도해 노동계와 경영계를 중재하면서 사회적 대화를 이끌어내고자 만들어진 곳이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이하 경사노위)다. 정부 위원회는 2022년 기준 636개로 집계됐다. 위원회라는 명칭이 있다고 해서 다 같은 위원회는 아니다. 크게 행정위원회나 자문위원회로 나뉘고, 전자는 집행 권한을 가지고 있는데 자문위원회는 권한은 적고 말 그대로 자문하는 역할을 한다. 금융위원회나 방송통신위원회처럼 관련 분야 정책을 좌우하는 힘이 센 위원회가 있는가 하면,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처럼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을 하지만 권한이나 예산 면에서 크지 않은 위원회들도 있다. 경사노위는 대통령 소속의 자문위원회다. 즉, 힘이 세지 않다는 뜻이다. 같은 노동 이슈를 다루지만 행정위원회인 중앙노동위원회에 비해 존재감이 크지 않고, 집행 권한도 없다. 중앙노동위의 경우 법원으로 가기 전 노동에 관한 권리 분쟁에 대해 1차적 판단을 내리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권한이 강하진 하지만 경사노위는 중요하다.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노사 간의 쟁점에 대해 정부가 중재하면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예컨대 법정 근로시간을 주 52시간으로 정하려 할 경우, 사용자와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부딪힌다. 노사 양자 간의 협상으로 좀처럼 타협이 힘들 수 있다. 때문에 정부가 나서서 판을 만들고, 노사 양측에 조금씩 양보를 얻어내 합의에 이르도록 만드는 게 이상적인 '노사정 3자 주의'에 입각한 모델이다. 이상은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경사노위에 양대 노총 중 하나인 민주노총은 1999년에 불참을 선언한 이후 한 번도 협상 테이블에 앉지 않았다. 민주노총 내에 경사노위 참여가 정부 노동 정책 추진의 들러리 역할을 할 뿐이라고 보는 시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번 윤석열 정부 들어서는 한국노총마저 경사노위에 불참하면서 사회적 대화가 멈춰선 바 있다. 경찰이 고공 농성 중인 금속노련 김준영 사무처장을 곤봉으로 머리를 내려쳐 쓰러뜨린 뒤 체포하는 사건이 계기였다. 한국노총은 5개월 뒤에야 경사노위에 복귀했고, 지난해 11월부터 멈췄던 사회적 대화가 다시 시작됐다. 1. 외환위기로 시작된 경사노위 경사노위(당시 노사정위원회)의 시작은 김대중 정부였다. 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기업들이 쓰러지는 상황에서 정부는 위기 극복을 위해 노사 간 합의가 필요했고 이를 담당할 노사정위원회가 1998년 설립됐다. 노사정위에서는 기업을 살린다는 명목으로 정리해고 제도를 도입하고 구조조정 방안을 추진했다. 그 대신 노동계에는 교사의 노조 결성권을 보장하고, 노조의 정치 활동을 보장하기로 했다. 즉, 경사노위(노사정위)의 첫 시작은 '노조할 권리'를 보장받는 대신 '고용 유연화'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발한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가 도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99년부터 대화장 밖으로 나갔다. 어떤 조직이 처음 만들어지면 그때가 제일 힘이 세다. 대통령이 의지를 가지고 만들었고, 밀어주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 당시 처음 만들어진 노사정위원회가 그랬고 국가인권위원회도 그런 측면이 있다. 노사정위(현 경사노위)는 역대 정부를 거쳐 갈수록 점차 정치권 지원의 강도가 낮아지고, 노사정 합의의 강도도 낮아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다만, 민주당 정부에서는 노사 간 사회적 대화를 복원하기 위해 경사노위의 구성과 조직을 바꿔보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명칭이 노사정위원회에서 경제사회노동위원회로 바뀐 것도 이러한 시도의 결과다. 노사정의 사회적 대화라는 모델은 서유럽의 코포라티즘(corporatism)에서 따온 것이다. 서유럽의 노사정 대화는 임금이 주된 논의 대상이다. 독일의 사례를 보면 산업별 노조가 사용자단체와 업종별로 임금을 협상한다. 노조가 강하고 많은 근로자가 노조에 가입되어 있어서 노사의 자율적인 협약을 통해 업종 전체의 임금을 정해 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나서서 최저임금을 정할 필요가 없었고, 독일에는 2015년에야 최저임금이 도입됐다. 반면, 국내에서는 산별 노조가 아닌 기업별로 임금 협상이 이뤄진다. 기업별 노조가 개별 기업과 임금을 정하는 식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업종별로 혹은 사회적으로 대화를 통해 임금을 정하기가 힘들다. 서유럽의 코포라티즘과 달리 한국의 경사노위에서는 임금 수준이 주요 의제가 되지 않았다. 역대 정부 거치며 경사노위에서 중요한 의제는 근로시간 단축이었다. 최근 사례를 보면 문재인 정부 당시 주 52시간 제도를 도입하면서 현장 안착을 위해 탄력적 근로시간제 단위 기간 확대 문제가 경사노위에서 논의됐고 합의에 이르렀다. 근로시간 외에도 아래 표와 같이 정부별로 경제 위기 극복이나 일자리 창출을 위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려는 노력들이 존재했다. 2. 누가 경사노위를 이끌까 다음으로는 노사정 세 부문 중 각각 어떤 조직이 참여해 경사노위를 주도할지 살펴보겠다. 우선 노동계에서는 한국노총이다. 민주노총은 1999년에 노사정위(경사노위)를 탈퇴한 이후 25년간 사회적 대화 테이블에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협조적이고 대화 지향적인 한국노총이 대화를 주도해 왔다. 실제 한국노총에서는 경사노위에 참여했던 노조 실무자가 실장, 본부장 거치며 계속해서 경사노위에 참여한 사례들이 많다. 이정식 현 고용노동부 장관의 경우도 김대중, 노무현, 박근혜 정부에 걸쳐 한국노총 국장, 본부장, 처장을 역임하며 근로자위원으로 경사노위에 참여하면서 인적 네트워크와 전문성을 쌓아온 것으로 보인다. 사용자 측에서는 한국경영자총협회(이하 경총)이 경사노위를 주도한다. 원래 경총은 전경련의 노무관리를 담당하는 사업 부서였다. 1970년에 전경련(현 한경협)으로부터 독립해 활동해 왔지만 회원사나 직원, 재정 등 모든 면에서 전경련에 의존했다. 이런 경총이 독립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계기가 경사노위 참여였다고 평가된다. 경총은 노사 문제를 전경련보다 잘 다룰 수 있는 역량을 대중에게 입증하면서 위상을 높여왔는데, 노사정위원회의 전신인 1996년 노사관계개혁위원회가 첫 계기였다. 당시 재벌 기업들은 민주노총을 합법 노조로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전경련은 이런 기업들의 이해관계를 적극 대변했다. 반면 경총은 복수노조 인정이 거스르기 어려운 흐름이라고 보고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고 봤다. 즉, 경총은 내줄 건 내줘야 한다고 본 것이다. 경총은 산별 복수노조를 허용하는 대신 노조 전임자에게 임금을 지급하지 못하도록 하는 걸 얻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재벌 기업들은 이를 수용하지 않으려 했다. 재벌 기업의 요구를 그대로 반영한 전경련이 강경하게 나왔고, 김영삼 정부 당시 정부와 여당에 로비를 통해 1996년 노동법을 날치기로 통과시키도록 만들었다. 이는 민주노총 총파업 사태로 이어지면서 노사관계가 큰 갈등 국면에 처하게 됐는데, 이를 계기로 경총이 전경련보다 경영계가 선택할 전략을 정확하게 판단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이처럼 전경련보다 노사 관계에 있어 전문성을 가지고 상대적으로 협조적인 자세로 대화를 하려고 했던 경총은 경사노위를 무대로 조직의 역량을 입증하고 키워온 것이다. 정부 측면에서는 기재부 등 다른 부처도 경사노위에 일부 관여를 하지만, 이슈 특성상 고용노동부가 주도한다.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 승진과 인사다. 고용노동부의 경우 경사노위가 중요한 승진 경로의 하나로 인식되는데, 기재부 등 다른 부서에서는 그렇지 못한 측면이 있다. 노동부 관료의 경우 국장급으로 경사노위에 참여하다가 승진을 하고 직급을 높여서 경사노위 회의체에 다시 참여하는 사례가 많다. 경사노위에 파견되거나 차관급인 경사노위 상임위원을 거치고 이후에 차관이나 장관으로 승진을 거듭하면서 지속적으로 경사노위에 참여해 온 경우가 많다. 예컨대 박근혜 정부에서 마지막으로 고용노동부 장관을 했던 이기권의 경우, 경사노위 운영국장과 상임위원 등 파견으로 경사노위에 참여한 뒤, 차관과 장관으로 승진해 경사노위에서 계속 활동한 사례다. 반면 기재부의 경우 경제정책국장(2017년 이후 경제구조개혁국장)이 대부분의 경사노위 회의체에 모두 참석하는데, 국장에서 승진한 뒤 더 이상 노사정 회의체에 참석하는 경우가 드물다. 3. 정부가 주도하고 노사는 들러리? 앞서 말한 대로 처음 출범했던 김대중 정부 당시에 노사정위원회는 힘을 가지고 외환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회적 대화를 추진했지만, 역대 정부를 지날수록 경사노위에서 합의와 의결을 하는 비율은 낮아지고 있다. 민주노총이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경사노위 회의체에서 합의를 이끌어내기보다는, 민주노총이 참여할 수 있는 외부 회의를 통해 중요한 사안이 논의될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문재인 정부 당시인 2020년 코로나19 위기가 있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사정 논의 과정에 민주노총이 참여했다. 코로나19를 맞아 민주노총이 원포인트로 사회적 대화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보여 노사정이 논의하는 테이블이 만들어지는 움직임이 있었다. 당시 김명환 위원장이 이끄는 민주노총 지도부는 노사정 대화에 긍정적인 편이었고, 경사노위에 참여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경사노위 참여 안건은 부결되고,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노사정 합의안도 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되면서, 김명환 지도부는 동력을 잃고 사퇴했다. 이처럼 노동계에 비교적 우호적인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면 민주노총을 사회적 대화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25년째 그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총 불참뿐 아니라 경사노위의 또 다른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노사 대표자들이 배제되고, 정부와 정부가 선임한 공익위원들의 비중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노동계와 경영계 당사자가 아닌 교수와 연구자, 정부 관료 등 전문가 중심으로 진행되는 경사노위의 연구회와 포럼이 많아지는 게 최근까지의 추세다. 당사자의 비율과 목소리가 줄어드는 건 원래 경사노위의 모델이었던 서유럽의 경우와는 반대되는 방향이다. 프랑스는 2021년 경제사회환경위원회에 시민 참여가 확대되면서 233명 중 정부 위원은 사라졌고, 전문가 40명을 뺀 나머지는 모두 노사를 포함한 이해관계자로 채워진다. 벨기에는 노사 대표만 의결권을 가지고 참여하는 전국노동위원회를 운영하고, 네덜란드의 사회경제위원회는 노사와 전문가가 같은 숫자로 참여하고 있다. 국내 노조 조직률 자체가 15% 안팎이라 미조직 노동자의 대표성이 떨어지는데, 그마저도 양대 노총 중 한쪽만 참여하는 것이 경사노위다. 이런 상황에서 이뤄지는 사회적 합의는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갈수록 노사의 합의를 이뤄내기 어렵다는 이유로 노사 당사자의 합의를 이뤄내기보다, 전문가들의 권고를 통해 정부의 노동 정책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에만 그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경사노위가 정부 정책 추진의 들러리가 되지 않으려면 의미 있는 노사의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어 조직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참고자료 - 박운·정혜윤 외, "한국 노동정치의 거버넌스와 정책과정", 국회미래연구원, 2023.12.31. 디자인 : 최혜지
✏️ 뉴스쉽 네 줄 요약 · 노동과 정치가 맞닿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대해 분석했습니다. · 환노위는 지역 예산으로 다룰 수 있는 규모가 적은 만큼 의원들이 크게 선호하지 않는 상임위입니다. · 이 때문에 환노위에는 '젊은-여성-초선-비례' 의원이 상대적으로 많습니다. · 최근으로 올수록 노동 관련 법안의 국회 통과 비율은 낮아지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정치는 노동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현대 민주주의의 출발이 보통의 일하는 사람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데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서구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많은 숫자를 토대로 정당을 만들거나 정치에 압력을 가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민주화 이후에도 ‘노동 없는 민주주의’가 지속되어 왔다고 평가됐다.(최장집 교수) 지금도 노동과 정치는 여전히 만나지 못하고 불화하고 있을까. 국회 미래연구원에서 노동과 정치에 관한 한 보고서(정혜윤 외, “한국 노동정치의 거버넌스와 정책과정”, 국회미래연구원, 2023.12.31.)가 나왔다. 이 보고서를 토대로 이번 뉴스쉽은 한국에서 노동과 정치가 맞닿는 지점에 대해 다루려 한다. 환경노동위의 특징 - “예산 규모가 작고, 정책 관할권은 크다” 한국에서 노동과 정치가 만나는 가장 중요한 장소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이하 환노위)다. 하지만 환노위는 일반적으로 비인기 상임위로 분류된다. 왜 그런 것인지는 다른 상임위와 비교를 통해 알 수 있다. 국회의원들에게 인기 있는 상임위는 자신이 속한 지역구의 예산을 따오기 쉬운 곳이다. 상징성이 있어서 정책과 관련한 입장 표명을 하기에 유리한 상임위를 희망하는 의원들도 있다. 지역 예산과 정책 관할권의 크고 작음에 따라 상임위를 4가지로 분류하기도 한다.(김한나, “국회의원의 정치적 목표와 상임위원회 활동의 정치적 결과”, 2018) 지역 예산을 따내기가 유리해 의원들이 업적을 과시하기 좋은 데다 정책 관할권까지 큰 상임위가 의원들에게 인기가 많다. 대표적으로 국토교통위원회나 행정안전위원회가 있다. 정책 관할권은 작지만 지역 예산 규모가 큰 농해수위나 산자위도 지역 민원과 연계성이 커 인기가 있다. 실제로 21대 국회의원들의 희망 상임위 중 1위는 국토위, 2위는 산자위, 3위는 농해수위였다.(KBS, 법안·상임위·개혁 분야…21대 당선인 300명에게 물었습니다, 2020.5.29.) 지역 예산도 작고, 정책 관할권이 큰 곳은 국방위나 외교통일위, 여성가족위가 있는데 매력 요인이 떨어진다. 다만 외통위의 경우 외교문제나 대북관계 등에 입장을 드러내기에 유리해 3선 중진 이상의 ‘거물 정치인’이 선호하기도 한다. 환노위는 어떨까. 지역예산 규모로는 상임위 중 9번째로 작은 편이고, 정책 관할권에서는 4위로 큰 편이다. 보건복지위나 기획재정위와 비슷한 ‘포지션 상임위’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런 유형의 상임위는 지역에 국한된 개발 이슈보다 자신의 입장을 전국적으로 드러내고 주목받기를 원하는 의원들이 선호한다. 즉, 지방 의원보다는 수도권이나 대도시 의원, 지역구 의원보다는 비례대표 의원이 선호할 수 있다. 하지만 비례 의원이라도 지역구 의원으로 재선을 원할 경우가 많은데 환노위처럼 지역예산 규모가 작은 상임위는 선호하지 않는다. 20대 총선 당선자 기준 희망 상임위 순위에서 환노위는 9등을 차지해 하위권이었다. ‘젊은-여성-초선-비례’ 의원이 많다 비인기 상임위인 환노위에는 그렇다면 어떤 의원들이 갈까.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크게 원하지 않지만 정당 내에서 권력 지위가 낮아서 강제로 배정된 의원들, 노동 관련 경력이 있어 환노위에 전문성과 소신을 가지고 지망한 의원들. 두 부류의 의원들이 섞인 결과 국회 전체보다 환노위에 배정된 의원들은 나이가 젊고, 여성이 많고, 다선보다는 초선 비율이 높고, 지역구 의원보다 비례 의원 비율이 높다. 노동 관련 경력을 통해 초선 비례의원으로 환노위에서 활동했지만, 다음 총선에서 지역구 의원으로 재선되지 못하고 사라진 경우가 많다. 환노위가 지역구 예산 민원을 해결하는 데 유리하지 않고, 환노위 활동이 의정 경력을 이어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도 환노위에서 소명의식과 전문성을 가지고 의원 경력을 이어온 사람들은 소수지만 존재한다. 노동법안에 대표발의자로 이름을 올린 사람들을 나열해 보면 대부분 민주당 계열(현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많다. 91건 발의로 압도적으로 많은 노동법안을 대표발의한 한정애 의원의 경우 한국노총 출신으로 19대 국회에 비례대표 의원으로 시작해 지역구에서 3선까지 하며 살아남은 케이스다. 그 외에도 민주당 계열 정당에서는 박광온(3선, 원내대표 역임), 홍영표(4선, 원내대표 및 환노위원장 역임), 김상희(4선, 국회 부의장) 의원 등 굵직한 중진들이 환노위에서 활약하며 노동법안을 발의했다. 보수정당 계열(현 국민의힘)에서는 노동법안 발의자 상위권 의원 중에서 임이자와 김성태 의원이 한국노총 출신으로 정치에 입문해 다선 의원으로 살아남았다. 그 외에는 초선 비례로 환노위에서 활동했지만 대부분은 재선에 성공하지 못했다. 진보정당 계열(현 녹색정의당 등)에서는 민주노총 출신의 심상정 의원이 비례대표를 거쳐 4선을 했고, 나머지 의원들은 환노위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초선 비례에 그쳤다. 한정애, 임이자, 심상정 의원 환노위에서 활동한 의원의 구성을 봐도 알 수 있듯, 노동법안 다수는 민주당 계열 의원들이 발의했다. 19대 국회 이후에는 민주당 계열 의원들이 여당이 됐을 때나 야당일 때와 관계없이 보수정당 계열 의원들보다 2~3배 많은 노동법안을 발의했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노조와 관련되어 있고 노사관계를 규율하는 노조법보다는 근로자 개인의 처지 기준을 마련하는 근로기준법 관련 법안을 발의하는 비중이 컸다. 보수정당 계열 보좌관(보고서에서 인용) “집단법(노조법)은 국민의힘에서 하기가 쉽지 않고 그러다 보니까 국힘에서 그래도 친노동인 척하면서 할 수 있는 법이 개별법(근로기준법) 쪽밖에 없어요. 개별법 쪽에서도 돈 별로 안 쓰고도 할 수 있을 만한 거. 그리고 누가 봐도 이놈은 나쁜 놈이다,라고 해서 국민 여론에 얹혀서 갈 수 있을 만한 거.” 진보정당 의원들의 경우 의원의 숫자 자체가 적지만 환노위에 활발하게 참여하며 많은 노동법안을 발의했다. 특히, 노동조합과 노사관계를 규율하는 노조법과 관련된 법안 비율이 높은 점이 진보정당의 특징으로 나타났다. 한국노총은 거대 양당으로, 민주노총은 진보정당으로 총선마다 각 정당이 내는 비례대표 후보들 중 노동계 몫이 한두 명씩 항상 존재한다. 보수정당 계열이나 민주당 계열, 진보정당 계열 할 것 없이 그러하다. 노동계로 분류하면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출신을 살펴보면 정당별 차이가 존재한다. 국내의 대표적인 두 노조 내셔널 센터 중에서 한국노총은 보수정당과 민주당, 두 거대 양당을 통해 국회에 진입해 왔다. 보수정당에는 임이자, 김성태, 김영주(민주당에서 최근 국민의힘 입당), 장석춘, 최봉홍 등, 민주당에는 김경협, 한정애 등이 있다. 반면 민주노총은 거대 양당과 관계를 맺지 않고, 진보정당을 통해서만 국회의원을 배출하는 경향이 있다. 멀리는 권영길, 단병호, 홍희덕이 있고 21대 국회에는 심상정, 류호정, 강은미, 이은주 등이 있다. 오는 22대 총선에서도 각 당은 노동계 인사를 비례대표 당선권에 배치했다. 한국노총 출신으로는 민주당 계열에 박홍배, 보수정당 계열에 김위상 후보가 존재한다. 민주노총 출신 인사는 진보정당인 녹색정의당에 나순자, 이보라미 후보가 가장 앞선 순위(1,3번)로 배정됐다. 이번 총선에서 특이한 점은 민주노총 출신이 민주당 계열의 정당(더불어민주연합)의 비례대표 후보로도 배정됐다는 점이다. 전종덕과 김영훈 두 후보가 그러한데, 전종덕의 경우 진보당이 민주당의 비례연합정당에 참여하면서 비례 후보가 됐다. 김영훈의 경우 원래 진보정당 계열(정의당)로 정치에 입문했지만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 계열의 비례 후보가 됐다. 이러한 변화는 민주노총이 협력 대상을 진보정당에서 민주당까지 범위를 넓혔다기보다 ‘위성정당’을 만들어낸 선거제도, 진보정당이 스스로의 힘으로 서 있지 못하고 민주당과의 연합을 추구하는 상황, 진보정당 인사가 민주당으로 ‘전향’하면서 생겨난 상황으로 보인다. 즉, 이번 총선 국면에서 나타나는 민주노총 출신의 민주당 참여는 민주노총의 영향력 확대가 아닌 진보정당의 소멸 위기를 보여주는 징후로 읽힌다. 낮아지는 가결률, 나아가는 노동권 최근으로 올수록 국회에서 의원들이 발의하는 법안은 많아진다. 하지만 실제로 통과되는 가결률은 낮아지는 추세다. 노동법안은 어떨까. 노사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히는 만큼, 노동법안이 다른 법안들보다 통과되는 비율이 적다. 특히 18대 국회(2008년~) 이후부터는 노동법안 가결률이 매번 전체 법안의 가결률보다 크게 낮아진 경향을 보인다. 노동과 정치가 만나는 국회 환노위의 특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상대적으로 당내 권력 지위가 약한 ‘젊은-여성-초선-비례’ 의원들이 배치되고, 노동법안의 통과 비율은 해가 갈수록 낮아져 20대 국회에서는 5%에 불과한 수준이 됐다. 양대 노총 중 한쪽인 민주노총은 거대 양당과 협력하지 못하고, 오직 진보정당을 중심으로 국회에 진출해 왔는데 그마저도 21대 총선에서는 혼란을 겪고 있다. 이처럼 한국에서 노동과 정치는 여전히 제대로 손을 맞잡지 못하고 있거나, 오히려 날이 갈수록 불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대 국회 환노위에서 새롭게 제정된 법안을 보면, 노동-정치가 아무런 희망이 없거나 역할을 하지 못한 건 아니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13대 국회에서는 ‘장애인고용법’을, 16대 국회에서는 ‘청년고용법’, 17대 ‘특수형태근로자법’, 18대 ‘학력차별금지법’, 19대의 ‘감정노동자법’, 20대의 ‘직장내괴롭힘법’, 21대 국회에선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됐다. 노사가 서로 양보하기 힘든 갈등적인 사안을 다루는 국회 환노위지만, 여론과 시민사회의 요구가 강하게 있으면 정치권이 그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13대부터 21대 국회까지 긴 흐름으로 봤을 때, 국회 환노위는 시민과 노동계의 요구에 호응해 일할 권리를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만든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 참고자료 - 이상직·고민지·강경희 외, “한국 노동정치의 거버넌스와 정책과정”, 국회미래연구원, 2023.12.31. 디자인 : 최혜지
✏️ 뉴스쉽 네 줄 요약 · 삼성 사건과 사법농단 사건에서 정점에 있는 이재용 회장,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각각 1심에서 무죄를 받았습니다. · 두 사건 모두 무죄가 나오면서 당시 검찰이 '무리한 수사'를 했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 당시 검찰이 어떻게 수사를 했고, 무엇이 이전의 검찰과 달랐는지 복기해 봤습니다. · 법원의 판결이 '국민의 법감정'과 동떨어진 경우가 많은 이유를 짚어봤습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1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에서는 정점에 있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도 1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두 사건 모두 검찰의 수사가 진행된 지 수년이 지난 사건인데 오랜 법정다툼 끝에 이제야 1심 판단이 나왔다. 검찰이 무리한 수사를 한 것일까, 1심 법원이 ‘봐주기’ 판결을 내린 것일까. 알다시피 당시 검찰 수사 지휘부가 지금은 대통령과 여당 비대위원장이 된 만큼, 수사와 판결에 대한 비판에 진영논리가 섞여있는 경우가 많다. 이번 뉴스쉽에서는 필자가 삼성과 사법농단 수사할 당시 법조계를 취재하며 관찰한 바를 몇 년이 지나 1심이 나온 지금 복기해보려 한다. ‘뉴타입’ 검사의 등장 2018년으로 돌아가보자. 국정농단 사건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됐고 문재인 대통령으로 정권이 바뀌었다. 좌천됐던 윤석열 검사가 파격적으로 서울중앙지검장이 됐고, 중앙지검 3차장으로는 한동훈 검사가 보임됐다. 이들은 기존의 검찰과 세 가지 면에서 달랐다. 먼저 검찰 수사의 칼끝이 향하는 대상이 달랐다. 검찰을 출입하는 기자들에게 인식되어 온 불문율을 깨뜨렸다. 정권이 교체된 뒤 직전 정권에 대한 수사는 항상 있어왔다. 그런데 당시 검찰은 전전 정권(박근혜 정부가 아닌 이명박 정부)의 대통령에 대한 수사까지 진행됐다. 범죄를 저지른 판사에 대한 수사는 있어왔지만, 사법부의 재판 결과에 대한 수사는 처음이었다. 전직 대법원장을 구속시킨 수사는 처음 보는 일이었다. 대법원장부터 국내 제1의 대기업 회장까지 수사를 이어가더니 살아있는 정권의 총아이자 현직 법무부장관에 대한 수사까지 진행했다. 옆에서 그리고 밖에서 바라보는 기자의 입장에는 검찰의 수사가 무리할 수는 있을지언정, ‘거악’ 앞에서 칼끝이 무뎌지지 않는다고 느꼈다. 두 번째 다른 점은 수사방식이다. 기업이나 공무원, 정권의 비리를 파헤치는 특수수사는 말단에서부터 윗선으로 타고 올라간다. 제일 직급이 낮은 실무자부터 조사하고 구속시킨 뒤, 윗선의 지시가 있었다고 입을 열면 처벌이 줄어들고 입을 닫으면 본인이 책임을 덮어쓰고 형량이 높아지는 식의 선택을 하도록 한다. 법조계의 컨센서스에서 전통적인 특수수사, 좋은 특수수사는 외과의사처럼 메스로 환부만 도려내는 것이다. 다른 비유를 들자면 전쟁에서 적진에 나아간 뒤 적장을 불러내 일기토를 벌이고 적장만 베고 돌아와 적군의 사기를 꺾어버리는 방식이다. 이에 비해 2018년과 2019년에 이뤄진 이른바 ‘적폐청산’ 수사는 조자룡 헌 칼 쓰듯 진행됐다는 평가가 당시에도 지배적이었다. 적장뿐 아니라 주변에 관련된 모든 이들까지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는 방식의 수사로 비유할 수 있다. 예컨대 사법농단 사건 수사 초기에 주목을 받은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의 사례가 있다. 유 전 연구관이 판사 퇴직 후에 USB에 사건자료를 담아서 반출한 혐의가 검찰 수사 과정에서 알려졌다. 유 전 연구관은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자료를 파기해 증거인멸을 했다는 내용도 당시 화제가 됐다. 당시 검찰은 유 전 연구관을 구속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증거인멸 정황을 강조했고, ‘USB 반출’이라는 구체적인 키워드는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됐다. 유 전 연구관은 이후 재판에서 1,2,3심 모두 무죄를 받았다. 삼심제를 거치며 한 번도 유죄로 인정되지 않을 정도의 공소사실이었지만, 수사 당시에는 사법농단의 핵심적인 인물로 지목됐다. 큰 그림에서 볼 때 사법농단의 핵심 관계자이자 정점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비롯해 고영한, 박병대 전 대법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이민걸 전 기조실장, 이규진 전 양형위 상임위원 정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 검찰 수사는 14명의 판사를 기소했고, 불러서 조사한 판사는 수도 없이 많았다. 공소장은 300쪽에 달하고 기소된 범죄사실은 47개에 달했다. 이처럼 조사받는 상대방을 폐허로 만들어버리는 수사방식이 필요했느냐 아니냐를 떠나서, 새로운 ‘초식(招式)’임은 틀림없었다. “공장 바닥을 뜯으니 서버가 나왔다” 당시 검찰이 기존과 달랐던 세 번째는 언론 대응의 수준이었다. 우선 전통적인 검사의 언론대응 방식을 보자. 수사 상황에 대해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언론대응 업무를 담당했던 차장검사는 구체적으로 답을 내놓지 않고 ‘선문답’식으로 답변을 했다. 예컨대 구속영장 청구시점을 물으면, 봄이 와야 꽃이 핀다고 답변하는 식이다. 차장검사의 말 한마디, 어감에 따라 기사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모호하고 신중하게 답변을 하기 일쑤였다. 실제로 검찰 등 수사에 관한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기소 전에 피의사실을 공표하면 죄가 된다고 정해져 있기도 하다. 2018년과 2019년에 걸친 검찰, 정확히는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는 적극적으로 언론에 대응했다. 당시 언론대응을 담당했던 한동훈 3차장검사는 수사과정에서 언론에 압도적인 양의 정보를 공개적으로 브리핑을 통해 풀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사기 수사 초기 압수수색에서 나왔다. 삼성바이오로직스에 대한 압수수색이 진행되던 날 검찰은 공장 바닥을 뜯으니 숨긴 서버가 나왔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날 이 사건을 보도한 대부분의 언론사의 제목은 ‘공장 바닥에 숨겨진 서버’였다. 공장 바닥에 중요한 파일이 담긴 서버를 숨겨놨다는 메시지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확신을 주게 만들었다. ‘공장 바닥’ 워딩은 국내 1위인 대기업의 계열사 직원들이 이런 짓을 해가면서까지 숨겨야 했던 무언가가 있다고 사건을 접한 사람들의 머릿속에 심어줬다. 당시 사건을 취재하던 기자 입장에서는 검찰이 여론을 만들어가는 능력에 감탄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려도 존재했다. 압수수색은 수사의 가장 초기, 강제수사에 돌입하는 시점에 진행된다. 즉, 앞으로 수사가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 상황이라 ‘올드스쿨’ 검사들은 통상 “어떤 의혹 사건에 대해 거주지와 사무실 등에 대한 압수수색을 진행하였다”라고만 설명한다. 구체적으로 어느 곳을 압수수색했고 어떤 물건을 찾았다는 것을 일일이 설명해주지 않는다. 2019년 5월 7일, 압수수색을 통해 공장 바닥에 숨긴 공용서버와 노트북을 발견한 검찰은 이를 토대로 수사를 진행하고 증거로 제시했다. 2024년 2월 5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사건의 1심 법원은 이날의 압수수색이 절차를 위반했다며 공장 바닥에서 숨긴 서버 등을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검찰이 수사 과정에서 여론을 형성하는 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내부 고발로 ‘삼성 비자금 특검’이 있었지만 칼끝이 닿지 못한 대기업의 총수, ‘BBK특검’이 진행됐지만 연관성을 찾아내지 못하고 결국 대통령이 됐던 사람, ‘성역’으로 취급되며 한 번도 내부를 들여다보지 못했던 사법부의 속살. 나열한 것처럼 부패의 의심이 드는 ‘거악’을 잡기 위해서는 여론이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수사는 꺾이기 쉽다. 수사를 무디게 하라는 외압에서 이겨내기 위해서 언론과 접촉면을 늘리며 수사상황을 귀에 꽂히는 키워드를 이용해 설명하고자 하는 방식이 옳은지 그른지는 논쟁적이다. ‘국민의 법감정’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수사 당시의 검찰을 취재한 기자 개인의 입장에서 살펴보았다. 다음은 법원 판결에 대해 짚어 보려 한다. 조국 전 법무부장관 수사를 기점으로 지금까지 검찰 수사는 물론이고, 법원의 판단에 대해서도 진영논리에 입각해 비판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우리 편이나 상대 편에 대해 법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방향으로 구속 여부나 유무죄를 판단하면, 판사의 개인적 성향이나 출신을 토대로 근거가 부족한 비난을 하기도 한다. 정치가 사법화되면서 대법원에서 확정된 판결까지 신뢰하지 않고, 대법관 구성에 따라 편향적인 판결을 내린다는 비판은 이어졌다. 법원의 판단을 불신하는 첫 번째 이유는 비전문가인 시민의 이해 부족과 그로 인한 오해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사법부에서 설명하는 몇 가지 원칙을 살펴보자. “구속 여부는 유무죄 판단이 아니다.” 불구속 수사의 원칙에 따라 수사를 받고 재판을 받는 사람은 가급적 불구속 상태에서 방어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죄가 의심되더라도 도망가거나 증거를 감출 우려가 없다면 감옥이 아니라 몸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재판을 받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많은 시민들은 구속영장이 발부되면 유죄, 기각되면 무죄라고 인식되는 경향이 크다. “유죄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는 원칙 또한 법정 밖 여론의 재판에서는 크게 의미가 없는 공허한 말이 된다. 여론의 법정에선 일단 기소가 되면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날까’하는 생각으로 유죄로 추정하는 경우가 많다. “징역 5년이면 상당히 무거운 형이다.” 어느 판사에게 들은 말이다. 실제로 양형에 있어서 징역 5년의 실형을 내리면 중형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사회적 관심이 쏠린 사건에서 징역 5년형이 나오면 시민들의 반응은 너무 가벼운 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공분을 사는 사건에서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내리지 않는 이상 ‘솜방망이 판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국민의 법감정으로 자리 잡아 있다. 이처럼 사법부가 실제 작동하는 방식, 이를 떠받치는 원칙과 국민의 법감정 사이에는 큰 골짜기가 존재한다. 시민들이 법원 판결에 의구심을 가지는 또 하나의 이유는 판사 개인이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하는 구조에 있다. 사법부의 판결은 본질적으로 법률 전문가인 판사가 외부의 영향 없이 증거에 따라 스스로 판단하는 엘리트주의에 기반한다. 입법부나 행정부의 수장을 민주적으로 선출하듯이 대중이 심판하거나 개입할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법관은 민주적 통제를 받지 않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다. 이런 원리를 통해 사법부는 변화무쌍한 대중의 심리에 영향을 받아 사람의 목숨(처벌)을 좌우하지 않을 수 있다. 또 약자의 인권에 대해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적 요소가 결여된 사법부의 특성상 판결은 국민의 법감정과 긴장을 일으키는 경우가 생긴다. 세상의 관심이 집중된 판결은 공동체의 정의감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사법부는 국민의 법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법감정’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를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요소로 인식되게 한다. 국민의 법감정을 비전문가인 다수 대중이 감정적으로 내세우는 의견 정도로 생각한다면, 법관은 국민의 법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독립적인 판단을 통해 피의자에게 정확한 형량을 내려야 한다. 하지만 법감정이 독일의 ‘Rechtsgefuhl’의 번역어인데, 핵심적 의미는 ‘정의감’에 가까운 용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재벌 회장이나 정권의 핵심 등 유명인사 형사재판의 결과는 피고인 본인뿐 아니라 국민 전체의 정의감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 재판 과정에서 쟁점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종국적으로 형량이 결정되면 국민에게 메시지가 전달된다. ‘죄를 지은 사람은 그에 걸맞은 벌을 받게 된다’는 믿음이 흔들리는 판결은 사회의 정의감을 흔들 수 있다. 때문에 국민의 법감정을 의미 없고 멀리해야 하는 것이라고 치부한다면, 판결과 법감정의 괴리가 결국 공동체의 신뢰를 저하시킬 수 있다. “재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사람이라면, 납득할 수 있는 판단을 내리는 것이 공판중심주의다.” 사법부는 공판중심주의를 강조한다. 판사가 주재하는 열린 재판정 안에서 증거를 통해 유무죄를 다투고 그 안에서 판단이 이뤄져야 한다는 뜻이다. 전문성이 없는 국민이라도 재판을 지켜본다면 그 판단의 근거와 판결내용에 설득이 될 수 있도록 충실히 재판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나온 표에서 보여주듯 판사보다 AI가 더 신뢰가 간다는 인식이 크고, 판사에 따라 판결이 달라질 거라는 생각이 시민들 사이에는 만연하다.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인식에 사적 보복이나 자경단에 대한 웹툰, 드라마 콘텐츠도 인기를 끌고 있다. 삼성 사건과 사법농단 사건의 1심 판결을 바라보며, 판결을 불신하면 사회의 정의가 흔들린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쉬움이 드는 건 사실이다. 뇌물을 준 것은 유죄가 확정됐는데, 뇌물을 준 목적에 대해선 죄가 아니라는 판단, 실무자는 유죄인데 정점에 있는 대법원장은 무죄로 나온 판단을 국민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과연 공판중심주의가 바로 세워져 법정 안에서 납득이 가도록 증명과 설득이 충분히 이뤄졌는지, 사건을 관심 있게 지켜본 관찰자의 한 사람으로서 혼란스럽다. 디자인 : 최혜지
✏️ 뉴스쉽 네 줄 요약 · 제3당의 성공조건으로는 카리스마적 인물, 새로운 의제 설정, 변화를 갈망하는 사회분위기가 필요합니다. ·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은 혜성처럼 등장해 기존 정치를 뒤흔들었고, 창당 1년 만에 집권했습니다. · 영국 노동당은 산업화로 인해 늘어난 노동자 계층에 호소하는 의제로 100년 가까이 유지되던 양당 구도를 무너뜨렸습니다. · 독일 녹색당은 1968년에 분출된 변화의 에너지를 토대로 환경, 젠더, 평화라는 새로운 이슈를 정치로 끌어들여 확고한 제3당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총선이 다가오자 정치권에서 제3당의 깃발을 올리는 이들이 많아졌다. ‘제3지대’로 불리는 이들을 꼽아보면 국민의힘에서 나온 이준석 신당, 더불어민주당에서 나온 이낙연 신당이 있고 민주당과 정의당에서 갈려 나온 금태섭과 류호정 등의 신당이 있다. 선거를 앞두고 제3당을 만드는 시도는 여러 차례 있었지만 결국 양당으로 흡수 통합되는 역사가 한국에선 반복되어 왔다. 소선거구제라는 선거 제도가 있는 한 양당제는 고정값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제도’ 탓만 하며 새로운 정치 시도는 불가능의 영역으로 남겨둘 수는 없다. 이번 뉴스쉽에서는 유럽 정당의 역사를 통해 제3당의 성공조건을 살펴보려고 한다. 제도를 제외한 제3당의 성공 요소로 인물, 의제, 사회적 분위기를 꼽을 수 있다. 카리스마적 인물 - 프랑스의 마크롱 유럽의 주요국들은 다당제라고 하더라도 대부분 대표적인 보수정당과 진보정당, 양당을 중심으로 연합이 형성된다. 독일에는 기민당과 사민당, 영국에는 보수당과 노동당이 있다. 프랑스도 공화당(전신은 대중운동연합)과 사회당이 양대 정당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1981년부터 1995년까지 15년간 사회당의 미테랑이, 다음 10년간은 공화당의 시라크와 사르코지가, 2012년부터 5년간은 사회당의 올랑드가 번갈아가며 집권해 왔다. 그런데 가장 최근 총선인 2022년의 상황을 보면 프랑스 하원 577석 중 공화당은 61석, 사회당은 26석밖에 얻지 못할 정도로 쇠락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전통적인 양당을 군소정당으로 만든 건 2017년 대선이었다. 혜성처럼 등장한 에마뉘엘 마크롱이 기존의 정치판을 흔들었다. 2017년 대선에서 대통령이 됐고, 같은 해 총선에서 자신이 이끄는 정당 ‘앙 마르슈!(전진, 현재 당명은 르네상스)’를 1당으로 만들었다. 2017년의 선거를 계기로 등장한 마크롱과 르네상스는 양당 중심의 정치 구도를 바꿔놓았고 8년째인 지금까지 이 구도가 이어지고 있다. 제3지대가 등장해 양당 구도를 재편할 수 있었던 성공조건 중 하나는 마크롱이라는 인물의 등장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은 돌연변이다.” 프랑스의 유명 소설가 미셸 우엘벡의 말이다. 젊고 잘생긴 정치인 마크롱은 39살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파리정치대학과 국립행정학교를 나온 엘리트였다. 투자은행에 다니던 금융인이었던 마크롱은 사회당 올랑드 정부의 경제부 장관으로 발탁되며 본격적으로 정치행보를 시작했다. 그가 활약한 2017년은 기존 양당에 대한 불신이 높은 시기였다. 공화당의 사르코지 대통령은 비리로 유죄 선고를 받았고, 사회당의 올랑드 대통령은 무능으로 지지율이 4%까지 떨어졌다. 실업률은 10%가 넘었고, 노조의 불만과 시위가 넘쳐났다. 이민자들의 유입으로 도심에서 테러가 일어나면서 프랑스 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프랑스 국민들은 이전의 ‘강한 프랑스’를 만들어줄 리더를 원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크롱은 프랑스 국민들에게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한 인물로 등장했다. 프랑스 국민들에게는 혁명을 통해 군주를 몰아낸 경험이 내재돼 있지만, 양가적으로 나폴레옹이나 샤를 드 골처럼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한 영웅을 바라는 감정도 가지고 있다는 분석이 있다. 프랑스가 ‘유럽의 병자’로 불리며 사회경제적인 침체를 겪을 때, 상황을 타개할 국민적 영웅을 바라는 시기였고 마크롱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새로운 정치인이 기성 정치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세를 불려 가는 것은 제3당의 자연스러운 공식이다. 그 공식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 건 마크롱이라는 인물에게 그럴 만한 매력과 카리스마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2017년 당시에는 이슬람 원리주의자의 테러(‘샤를리 에브도 사건’) 이후 극우 정당을 이끄는 마린 르 펜이라는 새로운 얼굴도 인기를 얻는 시점이었다. 마크롱은 기존의 정당인 사회당의 장관으로 정치를 시작했지만 곧 올랑드 대통령, 사회당과는 선을 그었다. 새로운 정치를 원하는 분위기에서 2017년 대선은 마린 르 펜을 지지하는 극우파와 프랑수아 피용을 지지하는 보수 우파, 장뤼크 멜랑숑의 극좌파 등 새로운 깃발들이 줄지어 등장했지만, 승자는 ‘진보적 중도’를 표방하는 마크롱이었다. 마크롱은 24살 연상의 교사이자 세 자녀를 가진 여성과의 일편단심 러브스토리를 통해 더욱 개혁의 아이콘으로 이미지를 굳혔다. 집권 후에는 유류세 인상에 반대하는 노란 조끼 시위 등으로 리더십에 타격을 잃고 지지율이 낮아지며 어려움을 겪긴 했다. 하지만 최근 마크롱은 다시 ‘인물’을 내세워 위기를 타개하려고 하고 있다. 34살의 가브리엘 아탈을 역대 최연소 총리로 임명하면서 자신의 후계자로 내세웠다. 가브리엘 아탈은 마크롱과 마찬가지로 잘생기고 젊은 엘리트인 데다 성소수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기존 정치권과 다른 개혁적 이미지를 가졌다. 가브리엘 아탈이 여론조사에서 40% 지지율로 1위를 하면서 마크롱이 만든 정당 르네상스는 여전히 집권 여당을 이어갈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이다. 가브리엘 아탈 프랑스 총리 새로운 의제 - 영국 노동당 프랑스의 사례로 보았듯 제3당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끌어갈 ‘인물’도 중요하지만, 정치를 통해 어떤 것을 하겠다는 ‘의제’가 필요하다. 영국 노동당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려 한다. 영국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1등만 국회의원이 되는 선거제도 때문에 양당제로 귀결되는 정치구조를 가지고 있다. 제3당이 성장하기 힘든 조건이다. 영국의 정치는 토리파와 휘그파에서 이어져 내려와 19세기에는 보수당과 자유당의 양당 구도로 굳어졌다. 근대화가 진행될 시기인 19세기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랬듯 보수정당인 보수당은 지주층의 지지를 받는 정당이었고, 자유주의를 주장하며 당시 진보적인 역할을 맡은 자유당은 금융업, 상업 등에 종사하는 중간계급의 정당이었다. 양당 구도가 100년 가까이 굳어진 상황에서 새롭게 탄생한 제3당인 영국 노동당은 결국 자유당을 밀어내고 집권 가능한 정당이 됐다. 영국 노동당은 노조가 만든 정당이다. 189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유럽에서 산업화와 민주화가 일어났다. 공장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계급으로 자리매김하고, 보통선거제가 도입되면서 국민 누구나 정치에 참여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노조가 정당을 만들어 노동자 계급의 요구를 대변하겠다는 의제로 탄생한 것이 영국 노동당이다. 영국 노동당은 노동자의 ‘계급정치’를 내세우며 최저임금의 도입, 일할 권리, 정부가 철도나 광산을 소유해 관리하는 집산주의 등의 의제를 던지면서 기존에 있던 자유당과 차별화했다. 자유당은 제3당인 노동당이 등장하자 처음엔 연합하며 보수당에 반대하는 ‘진보연합’으로 활동했다. 1차 대전 중이던 1915년 노동당은 처음 자유당의 연립정부에 들어가게 된다. 1924년에는 자유당의 협력으로 처음으로 집권까지 하게 된다. 자유당이 내세웠던 의제는 자유주의였다. 신흥 부르주아로 불리는 금융인, 사업가 등 중간계급의 지지기반으로 한 자유당은 자유무역이나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보수당에 맞서왔다. 그런데 시대가 변화하면서 투표권을 가진 노동자 계급의 급격한 성장을 대변하는 정당이 되지는 못 했다. 당시의 ‘시대정신(zeitgeist)’를 포착해 의제화한 노동당이 결국 자유당을 밀어내고 집권정당이 됐고, 지금까지 영국은 보수당과 노동당의 양당제로 굳어져왔다.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시민들의 불만이 폭발하는 때에, 어떤 의제를 내세우며 ‘다수연합’을 만들어내느냐가 새로운 정당의 성공조건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변화를 갈망하는 분위기 - 독일 녹색당 마지막으로 살펴볼 제3당의 성공조건은 ‘사회 분위기’다. 어느 정당이든 변화를 원하는 사회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성공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영국 노동당이 기존의 자유당을 대체한 사례도 1차 대전이라는 혼란한 상황과 사회주의 혁명의 유행 등 시민들 사이에 변화에 대한 갈망이 존재했던 측면이 크다. 이번엔 독일 녹색당의 사례를 살펴보려 한다. 독일 녹색당은 1980년에 창당됐지만 그 뿌리는 1968년에 일어났던 ‘68운동’에 있다. 역사적으로 1848년과 1968년 두 차례만이 세계 혁명이 일어났던 시기라고 보는 시각도 있던 만큼, 당시는 변화의 에너지가 넘치는 해였다. 68운동은 프랑스 파리의 대학교에서 처음 촉발됐다. 기성세대의 질서를 거부하고 권위주의를 타파하자는 구호로 시작된 대학교의 시위가 성 해방, 인종 차별에 대한 금지, 베트남 전쟁 반대, 소련 전체주의에 대한 반대 등 요구사항으로 번졌다.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게”,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서른이 넘은 사람은 그 누구도 믿지 말라” 등의 구호가 넘쳤다. 프랑스에서는 대학생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불을 지르며 경찰과 충돌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독일에서도 대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고, 이후에는 ‘적군파(RAF)’라는 무장한 투쟁조직까지 나와 폭탄 테러를 하는 극단주의자도 생겨났다. 68운동의 움직임은 아시아와 신대륙까지 번졌다. 같은 시기 일본에서는 ‘전공투(전학공투회의)’라는 이름으로 대학생들이 헬멧과 쇠파이프를 들고 바리케이드를 친 뒤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베트남전 반전 운동을 중심으로 성을 해방하고 마약을 즐기는 등 자유를 외치는 히피문화가 확산됐다. 1969년에 열린 음악축제인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이런 모습을 상징한다. 1968년 일본 전공투 이 시기의 활동들을 ‘신사회운동’으로 부르기도 할 만큼, 젊은 층을 중심으로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분위기가 충만했다. 이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탄생한 정당이 독일의 녹색당이다.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보수정당(기민당)과 노동자 계급정치를 위해 만들어진 진보정당(사민당)의 양당 중심으로 정치가 이뤄졌다. 68운동의 사회분위기를 토대로 만들어진 녹색당은 진보를 표방했지만 기존의 진보정당인 사민당과 다른 의제를 내세웠다. 계급정치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기존의 사민당과 차별화하며, 환경과 생태주의, 젠더 이슈와 탈권위를 정치에서 다뤄야 할 의제로 올렸다. 1968년 프랑스 대학 시위 1980년에 창당한 독일 녹색당은 기존 정치와 기성세대가 낡았다는 사회 분위기에 힘입어 창당 3년 만에 의원을 배출했다. “정당에 반대하는 정당”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앞세워 26명의 독일 연방의원이 선출됐는데, 이들은 기성 정치인처럼 넥타이와 정장 차림을 거부하고 청바지를 입고 의회에 입성했다. 이때 의원이 된 반핵 활동을 하던 젊은 여성 환경운동가인 페트라 켈리가 상징적인 인물이다. 독일은 지금까지도 기민당과 사민당의 양당 중심으로 정치가 이뤄지고 있고 녹색당은 집권당이 되진 못했다. 하지만 독일 녹색당은 사민당의 연립내각에 참여해 일부 부처 장관자리를 얻어내기도 하고, 지속적으로 탈핵 목소리를 내면서 기민당의 메르켈 총리가 원자력 발전을 포기하도록 움직이는 등 제3당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해 왔다. 한국에서 제3당의 성공은 가능할까 제3당의 성공조건 세 가지(인물, 의제, 분위기)는 삼위일체처럼 모두 함께 필요한 요소다. 프랑스의 마크롱, 영국 노동당, 독일 녹색당은 공통적으로 세 가지 요소가 어느 정도씩은 포함되어 있다. 변화를 갈망하는 사회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카리스마적인 인물이 나와, 시대정신을 잘 포착한 의제를 내세울 때 제3당은 성공했다. 제3지대가 이합집산하는 지금의 한국은 성공조건이 갖추어졌을까. 우선 변화를 바라는 사회분위기는 어느 정도 존재한다. 기존의 양당에 대한 불신이 커 정치를 혐오하거나 무관심한 사람들은 있다. 하지만 프랑스의 마크롱이 등장하던 때처럼 도심 테러가 일어나거나, 영국 노동당과 독일 녹색당이 탄생할 때만큼 전쟁과 혁명의 상황보다는 변화에 대한 압력이 크게 낮을 것이다. 제3당이 내세우는 의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여러 신당 움직임 중 의제 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한 정당은 ‘지하철 노인 무임승차 폐지’나 ‘여성 공무원 채용시 군 복무 의무화’ 같은 공약을 내세웠다. 공정성에 대한 요구에 부응하며 주로 2030 남성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있다. 하지만, 이런 공약이 집권을 위한 ‘다수 연합’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인지, 한국 사회에 생산적인 논의와 갈등을 만들어내는 의제 설정인지는 의문스럽다. 인물의 경우 창당과 선거과정을 거치며 매력과 카리스마, 결단력이 새롭게 부각되겠지만, 현재까지는 신당들을 이끌고 있는 면면을 보면 참신하다기보단 익숙한 얼굴들이 많다. 세 가지 조건을 갖추지 못한 제3당은 이번 총선에서 당장 국회의원 몇 명을 배출하더라도, 결국 대선 국면에서는 양당에 흡수 통합될 가능성이 있다. 후일 되돌아봤을 때 한국의 2024년은 역사에 남을 ‘백년 정당’, ‘수권 정당’이 새롭게 태동한 해로 기록될 수 있을까. ▶ 참고자료 - 아담 플로라이트, 마크롱의 시련과 영광, 우진하 옮김, 문학사상(2021) - 안느 풀다, 완벽한 남자 에마뉘엘 마크롱, 김영란 옮김, 황소걸음(2018) - 고세훈, 영국노동당사, 나남출판(1999) 디자인 : 박수민
✏️ 뉴스쉽 네 줄 요약 · 2023년은 AI 시대였습니다. AI시대에 육체노동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 2015년을 정점으로 중국 노동인구의 성장이 꺾이면서 미국 등 주요 선진국은 노동력이 부족해졌습니다. · AI기술의 발달이 고소득-고학력-전문직의 업무를 대체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저소득-비숙련-육체노동이 귀해졌습니다. · 국내에서도 젊은 세대 중 일부가 사무직을 그만두고 '블루칼라 프리랜서'가 되는 경향도 나타났습니다. 2023년은 AI의 시대였습니다. AI 관련 기업들의 매출과 주가가 이를 증명합니다. 챗GPT를 개발한 OpenAI의 지난해 매출은 2조 원을 돌파했습니다. 엔비디아의 CEO 젠슨 황은 자산 57조 원으로 블룸버그 억만장자 순위 29위에 올랐는데, 지난해 1년 동안 늘어난 자산이 40조 원입니다. AI 반도체를 생산하는 엔비디아 주식이 한 해 239% 상승한 영향입니다. 주식 시장은 AI가 가져올 장밋빛 미래에 초점을 맞췄지만, 한편으로는 AI가 가져올 디스토피아적인 측면도 주목을 받았습니다. 멀게는 AI가 인간을 지배할 것이라는 공포에서, 가깝게는 AI로 인해 여러 직업이 사라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습니다. 이번 뉴스쉽은 AI와 일의 미래에 대해 다뤄보려고 합니다. 중국의 ‘성장 정체’가 미국에 ‘불평등 해소’를 가져왔다 지난 12월 둘째 주 영국 이코노미스트지(The Economist) 커버스토리는 ‘블루칼라 보난자(Blue-collar bonanza)’였습니다. 육체노동자의 황금기가 왔다는 겁니다. 디지털화가 진행되는 지금 시기에 왜 육체노동이 각광받게 됐을까요. 이코노미스트지는 인구와 AI, 두 가지를 이유로 꼽았습니다. 2010년대는 노동자에게 끔찍한 시기였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회복하던 시기에 OECD 국가의 노동인구 중 7%가 실업 상태였고, 임금 상승률은 낮았습니다. 경제가 좋지 않으니 일자리가 줄고, 일할 사람이 남아도니 저임금에 시달리던 노동의 암흑기였습니다. 이때 중요한 요소는 세계 인구의 증가 추세였습니다. 중국의 노동가능인구(15~64세) 숫자는 2000년대와 2010년대를 거치며 급증했고, 2015년에 9억 9800만 명으로 정점을 찍었습니다. 중국이 풍부한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주요 선진국들의 노동자에겐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미국 등 선진국 기업들은 공장을 중국으로 옮겨 값싼 노동력을 공급받을 수 있는 대안이 있었고, 중국 업체와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이유로 자국 노동자에게 값싼 임금을 유지했습니다. MIT 경제학과 David Autor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 노동인구의 증가가 미국의 노동자, 특히 저임금 노동자의 임금을 하락시키는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세계 인구, 특히 중국 노동인구의 상승 추세는 2015년 이후 꺾였습니다. 미중 갈등과 지정학적 리스크로 중국에 공장을 이전하는 것도 주저하고 있습니다. 중국 노동인구 숫자가 꺾이자 세계의 노동인구 상승도 완만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2020년대에 노동자의 황금기가 시작됐습니다. 즉, 중국의 인구 증가가 멈추면서 노동력이 감소했고 주요 선진국에서는 일할 사람이 부족한 현상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면서 일하는 사람에 대한 대우(임금 등)가 상승했다는 겁니다. 인구학뿐만 아니라 2020년대 들어 선진국들의 거시경제 정책도 노동자의 황금기에 한몫했습니다. 미국 등 주요 선진국은 높은 인플레이션에도 재정을 많이 투입했습니다. 특히 코로나19가 발생하자 각국 정부가 돈줄을 풀었습니다. 미국은 불황이나 전쟁 상황에서 볼 수 있는 적자를 지속하면서까지 돈을 풀어왔습니다. 노동 인구가 정점을 지나 증가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선진국의 실업률은 5% 미만으로 역사상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독일이나 일본은 노동력 부족으로 이민을 적극 받아들여 노동력을 충당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며 미국에서는 하위 10% 계층의 시간당 임금이 상위 10%의 시간당 임금보다 큰 폭으로 상승했습니다. 노동력의 품귀 현상이 저임금 노동자의 임금 상승을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임금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AI가 가져온 육체노동의 황금기 저임금, 하위 10%의 임금 상승은 결국 육체노동자의 임금 상승을 뜻하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AI와 일의 디지털화가 하나의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기술 발전은 특정한 일자리를 대체합니다. 기계와 로봇의 등장은 육체노동을 일부 대체했습니다. 하지만 기계와 로봇에 대체될 수 없는 고숙련 노동자는 오히려 임금 상승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기술 발전이 특정 업무를 대체하면서 일자리의 감소를 가져오지만, 대체되지 않은 ‘살아남은’ 일자리들은 오히려 임금과 처우가 상승한다는 겁니다. 로봇이 학력 수준이 낮은(고등학교 졸업자) 노동자의 업무를 대체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AI는 반대로 학력 수준이 높은 노동자의 업무를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구글이나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빅테크 기업에서 AI로 대체가능한 고임금 화이트칼라 인력을 줄이고 있다는 소식도 나왔습니다. AI 혁명으로 대체되지 않는 일자리는 ‘스펙’이 상대적으로 낮은 육체노동이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한국은행이 분석한 보고서에 따르면 고소득, 고학력 노동자가 AI에 더 많이 대체될 수 있습니다. AI가 반복적이지 않고, 분석하는 업무를 대체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입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AI 노출 지수가 높은 건 일반 의사(상위 1%), 전문의(상위 7%), 회계사(상위 19%), 자산운용가(상위 19%), 변호사(상위 21%) 순으로 고소득 전문직일수록 AI에 업무가 대체될 가능성이 높게 나왔습니다. 반면에 요식업 관련 단순 종사자나 식음료 서비스 종사자, 운송 서비스 종사자는 AI 노출 지수가 낮게 나왔습니다. 사람이 몸을 통해 물건을 만들거나 옮기는 업무, 사람을 대면해서 해야 하는 업무는 AI가 대체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특징 때문에 AI는 결과적으로 노동시장의 임금 불평등을 일부 해소하고 있습니다. AI로 대체할 수 없는 육체노동이 기존에는 저소득, 저스펙, 비숙련의 값싼 일자리였는데, 이제 이런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귀해지기 때문입니다.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의 공급은 줄어드는데(중국의 노동인구 감소), 수요는 더 많아지면서(AI로 대체될 수 없는 업무) ‘블루칼라 보난자(육체노동의 황금기)’가 왔습니다. ‘MZ세대’의 육체노동 유턴? 국내에서도 젊은 층이 일반적인 화이트칼라 직장을 때려치우고 육체노동으로 직업을 바꾸는 경우가 최근 들어 자주 보입니다. 4년제 대학교에서 공부를 한 뒤에 전혀 상관없는 육체노동으로 직업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학교를 수석 졸업한 20대 여성이 도배사가 됐다는 스토리(유튜버 김스튜), IT업계에서 일하다 제주로 가서 해녀가 된 30대 여성의 이야기가 화제가 된 바 있습니다. 지역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며 글을 쓰는 청년의 이야기(천현우 〈쇳밥일지〉)도 주요 언론에 소개됐습니다. 젊은 목수나 청년농부 등 자신의 몸을 써서 일하는 전통적인 직업의 긍정적인 측면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런 직업들의 특징은 ‘자유로움’에 있습니다. 최근 조명되는 육체노동은 대기업 제조업체에 다니는 정규직 블루칼라가 아니라 프리랜서로 자유롭게 일하는 모습들입니다. 일하고 싶은 장소와 시간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이 젊은 층을 끌어들이는 요인으로 보입니다. ‘황금기’는 언제까지 이어질까 이코노미스트지에서 말하지 않은 부분은 있습니다. 이코노미스트는 ‘황금기’를 부각시키며 AI가 가져올 유토피아적 측면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해당 기사에는 한국의 55~79세 인구 중 일하는 비율이 10년 전 53%에서 59%까지 늘어난 점을 지적했습니다. 그 이유로 AI와 디지털 전환으로 인해 노동력이 부족해졌다는 점을 꼽았습니다. 하지만, 국내에서 노년층이 일하는 이유에는 노동력 부족의 측면보다 일하지 않으면 생계를 이어가기 힘든 구조도 존재합니다. 노후를 제대로 준비해놓지 않은 경제적 환경에서 공적 연금이나 사회보장만으로는 생계를 이어갈 수 없는 노인들이 국내에 많습니다. OECD 국가 중 노인 빈곤율 1위인 한국에서 노년층이 계속 노동을 이어가는 이유는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코노미스트는 기사의 결론에서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건 허상이라고 주장합니다. 앞서 말했듯 2020년대 저소득층 육체노동자들의 임금 상승에 주목하면서 세계적인 불평등이 완화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에도 정치인들이 자유 시장경제를 의심하며 불평등 심화를 해소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내고 있다며 비판했습니다. 미국의 경우도 바이든이 정부의 시장 개입을 주장하고, 트럼프 또한 포퓰리즘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려 한다는 것이 해당 기사의 시각입니다.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정치가 시장에 개입해야 한다”는 프로파간다가 유행하고 있다는 겁니다. 영미권의 경제적 자유주의를 대변하는 이코노미스트지의 결론은 지금 이어지는 육체노동의 황금기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정치가 시장에 족쇄를 채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처럼 육체노동은 정말 황금기를 맞은 것일까요. 국내에서는 코로나19를 계기로 음식 배달라이더와 택배기사 등 운송 관련 육체노동 산업이 크게 늘었습니다. 대기업 제조공장에 정규직으로 채용돼 정년까지 일을 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육체노동입니다. 데이터가 보여주는 대로 노동인구의 감소는 실제 육체노동자의 임금 인상을 이끄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임금이 높아지는 것 외에도 긴 근로시간, 육체노동에서 오는 산업재해 위험, 새로운 일자리가 가져온 고용불안정에 대해 이코노미스트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육체노동의 황금기는 얼마나 지속가능할까요. AI가 가져올 일자리의 미래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어느 쪽에 가까울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디자인 : 옥지수, 최혜지
✏️ 뉴스쉽 네 줄 요약 · 진보정당 위기론은 지난해 대선과 지방선거, 최근 이뤄진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를 치르며 극에 달했습니다. · 지난 3번의 총선을 통해 분석해보면, 젊은 층의 진보정당 지지가 줄어들고 지역구 의석 수가 크게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 정의당 내부에서는 진보당과 연합하느냐 '금태섭 신당'과 함께하느냐를 두고 갈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 지지율 하락과 연합에 대한 논쟁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진보정당의 정체성과 세계관이 흔들리면서 나왔습니다. 공적인 것의 몰락 이 사회에 노조와 시민단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만연한 것으로 보인다. 정의나 명예로움 같은 공적인 가치는 비어있는 것으로 느끼고, 돈이 되는지가 우선적인 잣대가 됐다. 거기에 더해 노조와 시민단체를 포함한 ‘진보’에 대해서는 공적인 가치가 아니라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지 하는 의심까지 덧씌워졌다. 어느 순간부터 진보는 멋지지 않다는 인식이 젊은 층을 위주로 자리 잡혔다. 대중적인 지지와 지원이 공적인 활동을 하는 조직에 중요하지만 노조나 시민단체보다 진보정당은 특히 더 민감하다. 정당은 표를 얻어야 하고 주기적으로 선거를 통해 대중적인 인기를 평가받기 때문이다. 공적인 것이 퇴색하고 진보가 인기를 잃으면서 진보정당은 위기를 맞았다. 선거의 계절이 가까워지면서 각 정당은 혁신위나 비대위라는 이름으로 조직을 출범시켰다. 이대로 가다가는 선거에서 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정의당도 비대위를 만들었다. 국민의힘, 민주당과 달리 정의당의 고민은 좀 더 심각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소멸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내부에서도 외부에서도 모두가 진보정당의 위기라고 말한다. 얼마나 위기인지 데이터로 살펴보려 한다. 실제로 얼마나 위기인가 박스권에 머무르는 의석 수 1등이 모든 걸 차지하는 선거제도는 양당제로 수렴한다. 승자독식의 대표적 제도인 대통령 선거에서 제3당인 진보정당은 양당의 구도에 따라 지지율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양당 후보가 팽팽하게 대결을 벌이면 진보정당 득표는 낮아지거나 단일화 압박을 크게 받는다.(2012년, 2022년 대선) 양당 후보가 차이가 안정적으로 벌어지면 평소 진보정당을 응원하는 이들이 소신 있게 투표를 해 진보정당 득표율이 높아진다.(2017년 대선) 따라서 대통령 선거는 진보정당의 노력과 역량을 제대로 평가하기는 힘들다. 가장 뚜렷하게 진보정당 지지를 확인할 수 있는 투표는 총선이므로 시기별 총선을 통해 진보정당 위기론을 살펴보려 한다.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첫 선거에서 10석이라는 쾌거를 이뤄내고, 2012년에는 크게 세 가지 정파의 연합으로 만든 통합진보당이 13석을 얻는 등 성공적인 의석 수를 확보했다. 진보정당의 교섭단체 구성(20석)도 불가능한 목표가 아닌 듯 보였다. 하지만 2012년 총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파들이 갈등하며 분당되는 사태가 일어났고, 2014년 통합진보당은 헌법재판소의 위헌정당해산 심판을 받는다. 통합진보당 분당 과정에서 비당권파들이 추슬러서 만든 정의당은 2016년, 2020년 총선에서 6석을 유지했다. 6석이라는 박스권에 갇혀있긴 하지만 진보정당의 다수를 차지했던 세력과 분리돼 독자적인 정당을 만든 점을 감안했을 때 나쁘지 않은 의석 수를 유지하고 있다. 떨어지는 젊은 층의 지지 위기의 징후는 의석 수보다 젊은 층의 지지율 하락에서 나타난다. "20대에 진보가 아니면 심장이 없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 진보정당의 지지층은 젊은 층이 많았다. 선거관리위원회는 역대 선거와 관련해 연령별 정당 지지에 대한 통계는 제공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20대와 30대 비율이 높은 동네를 선정해 진보정당 지지율의 차이를 살펴봤다. 서울에서 2030비율이 가장 높은 동네는 대학가다. 관악구 신림동(66%), 광진구 화양동(65%), 서대문구 신촌동(60%), 관악구 낙성대동(56%) 네 곳은 2030세대의 비율이 전체의 절반이 넘는 곳들이다.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통계, 2023년 10월 기준) 4곳의 진보정당 지지율을 분석해 봤다. 2012년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은 전국에서 10%의 비례대표 득표율을 기록했다. 같은 선거에서 젊은 층 비율이 높은 동네의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득표율은 좀 더 높다. 신림동이 15.4%, 화양동이 13%, 신촌동이 14.3%, 낙성대동이 16.8%로 평균 14.8%의 득표율이 나왔다. 전국(10%)보다 젊은 층 비율이 높은 동네(14.8%)에서 4.8% 더 높은 지지를 받았다. 같은 방식으로 2016년 총선에서 정의당을 살펴보자. 전국은 7% 득표를 했는데 동네 4곳 평균은 10.8%를 얻었다. 젊은 층 비율이 높은 동네에서 3.8%만큼 더 높은 지지를 얻은 것이다. 가장 최근 이뤄진 2020년 총선의 정의당은 어떨까. 전국적으로 9.2% 득표를 했는데 동네 4곳 평균 10.8% 지지를 얻었다. 전국과 젊은 층 비율 높은 동네의 차이가 1.6%로 줄어들었다. 이처럼 2012년에서 2020년까지 총선에서 ‘전국 득표’와 ‘젊은 동네’의 격차는 4.8%에서 3.8%, 1.6%까지 줄어들었다. 이를 통해 젊은 층에서의 진보정당에 대한 지지 이탈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줄어드는 지역구 의석.. 비례대표에 의존 또 하나의 문제는 비례대표는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되지만 지역구 의석 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2012년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은 지역구에서만 7석을 얻었다. 소선거구 단순다수제에서 양당이 아닌 진보정당이 1등을 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탄탄한 지역조직이 있거나 전국적으로 알려진 정도의 인지도가 있어야 어렵게 가능한 일이다. 2012년 통합진보당은 수도권에서 4석(노회찬-서울 노원병 / 이상규-서울 관악을/ 심상정-경기 고양덕양갑 / 김미희- 경기 성남중원)을 얻었고 호남에서 3석(강동원-전북 남원순창 / 오병윤-광주 서구을 / 김선동-전남 순천곡성)을 얻었다. 2016년 총선에서 지역구는 2석으로 줄었다. 진보정당의 상징적인 얼굴인 심상정(경기 고양갑)과 노회찬(경남 창원성산)만 지역에서 당선될 수 있었다. 2020년 총선에서는 그마저 1석으로 줄었다. 진보정당의 간판을 달고 지역에서 1위를 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심상정(경기 고양갑) 의원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다. 민주노동당이 창당된 24년 전부터 주축이었던 심상정 이후로 지역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될 만한 ‘전국구 스타’가 배출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진보정당의 위기를 보여준다. 최근 들어 더 악화된 지지도 진보정당의 진짜 위기는 2020년 총선 이후라고 말한다.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 최근의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진보정당은 의미 있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다만 앞서 말했듯 대선과 강서구청장 선거처럼 1등을 뽑는 선거에서는 제3당의 실질적인 지지율보다 양당의 구도가 우선적으로 작용한다. 때문에 최근 진보정당에 대한 지지율을 가늠하기 위해 여론조사를 활용해 살펴보겠다. 스브스프리미엄 Poliscore는 여론조사 전수 데이터를 수집해 여론통합 지표를 메일 업데이트하고 있다. 분석에 활용된 여론조사 원자료는 해당 사이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Poliscore를 통해 정의당의 여론조사 지지율을 분석해 봤다. 올해 6월 19일 3%를 기록했던 정의당 지지율은 최근 11월 10일에는 2%까지 떨어졌다. 정의당이 유의미한 활동을 보여주지 못하거나 분열하는 모습이 나오면서 여론조사에서 지지도의 하향 추세가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지지율 너머의 위기의식 진보정당 스스로의 위기의식은 지지율이나 의석 수가 보여주는 것보다 크다. 지지율과 의석 수가 흔들리더라도 가고자 하는 방향이 확실하고 내부적으로 뭉쳐있으면 언제든 돌파가 가능하다. 지지율과 의석 수가 정당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진보정당이 아닌 거대양당으로 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진보정당이 느끼는 위기는 대중적 지지뿐 아니라 미래의 희망과 앞으로의 방향성이 흔들리는 데에서 오는 측면이 있다. 외부에서 비판하고 평가하거나 대책을 제시하기는 쉽지만, 내부에서 실제로 이뤄내는 건 어렵다. 그래서 진보정당 내부자 5명의 이야기를 들었다. 선정기준은 진보정당에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건 사람들이지만 국회의원을 하지 않은 사람들로 했다. 20년 가까이 진보정당에 투신했지만 스포트라이트를 잘 받지 못하면서도 진보정당 운동을 이어왔던 이들에게 물었다. 5명은 모두 지금이 진보정당의 큰 위기라고 말했다. 통합진보당 분당 사태 때와 비견할 만한 혹은 그보다 더 심각한 위기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이동영 “지난해 대선, 지방선거 참패 이후 지금까지가 가장 위기라고 생각한다. 진보 정치에 대해서 효능감이나 존재 이유를 상실하면서 지지기반이 붕괴돼 있고 비호감도가 높아진 상황들이 중첩되어 왔다.” 나경채 “2020년 총선에서는 10%에 가까운 득표율을 얻었는데, 2022년 대선에서는 2.3%, 같은 해 지방선거에서는 광역 비례를 기준으로 4.1%를 받았다. 올해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는 1.8%를 받았다. 득표율만 보더라도 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영감님의 전성기는 언제였나요?" 지금이 가장 큰 위기라면 진보정당이 가장 빛났던 시기는 언제였을까. 한국 진보정당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56년 창당한 조봉암의 진보당이 나온다.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임명돼 농지개혁을 이끌었던 조봉암은 평화통일과 대중의 권익 실현을 표방하면서 진보당을 만들었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은 23.8%의 높은 지지율을 받았지만, 조봉암과 진보당은 이승만 정권에 의해 사라지게 된다. 당시 정부는 평화통일론이 국시에 위배되고 북한의 간첩과 접선했다는 이유 등을 들어 진보당 간부를 일제 검거하고 정당 등록을 취소했다. 조봉암은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59년에 사형이 집행됐다. 조봉암은 2011년에야 대법원에서 재심이 이뤄져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진보당 사건 이후 민주화 이전까지는 진보정당이 합법적인 공간에서 활동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 동안의 역사적 단절이 있은 뒤 1987년의 민주화 운동과 그 해 7·8·9월의 노동자 대투쟁과 12월 첫 직선제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진보정당 운동은 다시 시작되었다. 1987년부터 2000년까지 수많은 이름의 진보정당이 생겼다 사라지며 맹아를 틔웠지만,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진보정당의 뿌리는 2000년에 창당한 민주노동당으로 볼 수 있다. 민주노동당은 창당 뒤 치른 첫 총선에서 10석을 얻는 돌풍을 일으켰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농민·빈민·중소상공인의 정당이며여성·청년·학생·진보적 지식인의 정당이다.” -민주노동당 창당선언문(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 당시 심상정, 권영길, 노회찬 전 의원 2002년 대선 후보로 나온 권영길은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말로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2004년 총선 비례대표 후보로 나온 노회찬은 TV토론 프로그램에서 ‘삼겹살 불판’을 갈아야 한다며 50년 동안 양당이 만들어온 정치를 비유했다. 인터뷰한 5명 모두 2004년을 전후한 민주노동당 시기가 진보정치의 황금기였다는 데 동의했다. 이 시기 민주노동당은 무상의료와 무상급식, 무상교육 등 ‘무상시리즈’를 정책으로 내세웠다. 부자들의 불로소득에 세금을 더 걷자는 ‘부유세 도입’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한국이 복지국가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으로 일부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인터뷰이 중 일부는 두 번째 전성기로 2016년부터 2020년까지의 시기를 꼽았다. 통합진보당 분당 이후 진보정치의 다수파였던 ‘NL(자주파)’과는 어느 정도 분리된 이들이 모여 정의당을 만들고 총선에서 6석을 얻었던 시기다. 이병길 “심상정 후보가 나섰던 2017년 대선부터 경남 창원 보궐선거에서 여영국 후보가 당선됐던 2019년까지를 전성기라고 생각한다. 정의당이 260만 표를 득표하고 지지율이 18%까지 오르던 때이기도 하다. 2020년 총선 전까지 정의당은 창당 이후 성장을 멈추지 않는 정당이었다.” 조성주 “이전까지는 ‘운동권 정당’의 느낌이었다면 2016년 전후에는 의회에서의 조율과 타협의 역할을 진보정당이 할 수 있었다. 정치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명확한 문제의식이 있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산업안전보건법도 개정(‘김용균법’)해내고 주52시간제 도입 과정에서도 정의당이 역량을 잘 발휘했다고 생각한다.” 2017년 대선 심상정 후보 선거유세 2017년 대선 당시 유세현장에서 심상정 후보를 만난 여성들이 포옹을 하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상징적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진보정당은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해 주는 역할과 이미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20대 국회 전반기와 촛불정국으로 만들어진 대선까지는 진보정당이 성장하고 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종된 진보정치 3세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진보정당은 흔들렸다. 정부·민주당과의 관계 정립에서 진보정당 안에서도 잡음이 나왔다. 21대 총선과 지난해 대선, 지방선거를 거치면서 지금처럼 ‘최대 위기’를 맞게 됐다. 이 위기는 진보정당의 정체성이 흔들리면서 나왔다. 정의당 부대표였던 이기중은 최근 정치를 은퇴했다. 1999년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학생운동을 하던 그는 2000년에 민주노동당이 만들어지면서 입당을 했다. 이후 학교가 있는 관악구에서 지역 기반을 다지면서 진보정당 이름으로 지방선거에 출마를 해왔다. 2010년과 2014년의 낙선을 딛고 2018년 세 번째 도전에서 관악구의원으로 당선됐다. 2022년에는 정의당 당직선거에서 부대표에 당선됐다. 스물한 살 때부터 40대 초반이 될 때까지 20여 년간 진보정당에 몸담았지만 이제는 진보정치에서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기중은 그 이유로 “이 시기가 지나면 나아질 거라 위무하며 스스로 믿지 않는 정치를 해나갈 의지가, 제겐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그렇다고 과거를 등지고 이상을 좇을 용기도 없다. 무엇도 택하지 않고 관조하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다.”고 썼다. 지금의 정의당 지도부가 추진하는 방향이 자신이 하고 싶은 정치는 아니라고 덧붙였다. 이기중 “지지율의 위기가 제일 크지만 정체성의 위기도 있다. 1987년에 학생운동에서 나왔던 담론들이 지금까지 크게 업데이트된 것이 없고 결국 유효기간을 다했는데, 여전히 낡은 사고방식에 빠져서 극복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민주당도 똑같이 낡았는데 민주당은 세력이 더 클 뿐이고 지금의 진보정당은 언럭키(unlucky) 민주당 같은 것으로 보이게 됐다. 진영 논리에 갇혀서 무조건 검찰은 나쁘고 권한을 뺏어야 한다고 보거나 조국 사태가 일어났을 때 도덕적인 문제들을 감싸는 것이 진보인지, 실제로 사회적 약자들에게 도움이 됐는지 의문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조성주는 당을 떠날지 고민하고 있다. 비례대표 의원인 류호정, 장혜영 의원과 조직을 만들어 같이 움직이고 있다. 이들은 정의당을 해체한 뒤 새롭게 신당을 창당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최근에는 금태섭 신당과 함께하며 ‘제3지대’로 가야 한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당내에서 주류, 다수가 되지 못했다. 지난 5월에는 장혜영, 류호정 의원이 원내대표와 부대표로 순번상 할 차례가 왔지만 당의 주류는 이미 두 번이나 했던 배진교 의원을 원내대표로 선출했다. 조성주는 진보정당 내부적으로 변화가 어렵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40대 초반인 이기중과 조성주는 ‘진보정치 2세대’라고 볼 수 있다. 진보정치의 첫 세대가 1980년대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을 거치며 형성됐다면, 2세대는 2000년 초반에 만들어졌다. 이들은 20대 초반인 대학생일 때 학생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민주노동당에 합류했고, 이후 20년 가까이 진보정당에 몸담았다. 50대 이상의 나이가 된 진보정치 1세대는 생물학적 연령으로 보아도 새로운 길을 선택하기가 힘들다. 기존에 맺어왔던 네트워크와 역사, 가치관을 새롭게 바꾸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40대 초반인 진보정치 2세대는 이대로 하던 대로 가기엔 애매하다. 남은 사회적 활동 기간도 20년은 남아있는 상태다. 이대로 계속 갈 수도,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이기중은 정치를 떠났고, 조성주는 정당을 떠나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 좌) 류호정 정의당 의원 우)장혜영 정의당 의원 더 큰 문제는 진보정치의 3세대가 사실상 없다는 점이다. 더 이상 학생운동에서 진보정당으로의 유입 구조는 유의미하게 존재하지 않다. 2000년대를 거치며 2세대가 ‘마지막 운동권’이었고, 이제 대학가에는 운동권과 비운동권 구분도 의미가 크게 없을 정도로 학생운동이 쇠락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30대의 나이로 비례대표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류호정, 장혜영 등이 있지만, 세대라고 하기에는 특출한 개인이 튀어나온 측면이 있다. 조직(한총련, 21세기 등)이 없고, 세대 경험(민주화 운동과 노동자대투쟁 등)이 없다는 점에서 ‘3세대’라고 하기는 어렵다. 젊은 층 중에 똑똑한 사람과 능력 있는 사람이 진보정당에 충원이 안 되고 있다는 평이 나온 지 오래다. 학생운동에서 진보정당으로 넘어와 경험을 쌓고 지역에서 운동을 하며 기반을 다지며 출마를 하는 경우는 점차 사라졌고, 비례대표 공천에 뽑혀 ‘한 방에’ 국회의원이 되는 경로만 남았다. 이병길 “2020년 총선부터 비례대표 선거에 당력을 모두 쏟아붓게 되면서 40명이 넘는 후보가 난립했다. 지역구 후보자는 ‘헌신하는 사람’이라는 프레임이 생겨서 이들의 지원을 위해 당은 수십억의 빚을 떠안게 됐다. ‘비례정당’이라는 오명 아닌 오명을 떠안은 것은 스스로였다.” 목적과 수단 중에 우선하는 것 지금 정의당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통합을 고민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쪽과 합치느냐를 두고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갈등을 겪고 있다. 앞서 말한 조성주와 류호정, 장혜영 의원 등은 금태섭 의원을 중심으로 만든 새로운 선택과 함께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정미 지도부를 포함한 정의당의 주류는 진보당, 녹색당, 노동당, 민주노총 등과 함께 선거연합정당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간단히 말하면 ‘NL’과 다시 합치느냐 ‘리버럴(자유주의자)’와 함께 하느냐를 두고 논쟁이 진행 중이다. 리버럴과 함께 양당과는 다른 제3지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쪽은 비교적 젊은 층 중심이다. 기존의 진보정당이 민주당에 대해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한 점이 위기를 불러온 큰 이유라고 판단하고 있다. 상징적인 것이 조국 사태였다. 당시 정의당 지도부는 조국 사태에 대해 비판 목소리를 명확히 내지 못하고 협조를 해서 얻을 것을 얻는 전략을 취한 면이 있다. 또 진보정당 내부에는 국민의힘 측을 ‘냉전반공주의 세력’으로 보면서 이들의 집권을 막기 위해서 민주세력이 연합해야 한다는 입장은 항상 존재해 왔다. 진보당으로 대표되는 NL 정파들이 주로 그러한 입장을 보였다. 제3지대를 지지하는 이들은 민주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끊어내고 진영논리와 팬덤정치에 비판적인 세력이 뭉쳐야 한다는 의견이다. 이들은 민주당이 추구하는 방향성에서 진보정당과 더 가깝다 하더라도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 민주당의 비윤리적인 행태나 패권적인 방식에 목소리를 내지 않는 건 진보정당의 길이 아니라고 봤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인식이다. 이기중 “진보당의 성격 자체가 결국 민주당의 하위 파트너로 가는 게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진영논리에 갇혀서 이재명 체포 동의안을 반대하고 조국 사태가 일어났을 때 도덕적인 문제를 감싸는 게 진보인가 의문이 든다.” 반면 진보당과 연합해야 한다는 쪽은 정의당의 주류이고 다수다. 진보당을 포함한 세력과 선거연합정당을 추진하다는 것에 대해 정의당 전국위원회는 75명 중 56명의 찬성으로 가결시켰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금태섭 의원이나 양향자 의원 등 ‘리버럴’은 진보정치의 대상은 아니다. 금태섭 의원은 지난 대선 국면에서 민주당의 행태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국민의힘에 힘을 실어주는 모습을 보인 면이 있다. 양향자 의원 또한 삼성전자 임원 출신으로 민주당을 나간 뒤에는 국민의힘에서 반도체위원장을 맡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이번 정부가 검찰 국가를 만들고 노조에 대한 탄압을 진행해 왔다고 보는 세계관에서는 정권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였던 ‘제3지대’는 진보정치를 같이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남북문제와 노동 이슈,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 강화 등 진보정치의 ‘목적’을 위해서는 일시적으로는 상대적으로 가까운 민주당과의 전략적 연합도 고려할 수 있다. 노동자, 농민, 여성, 장애인 등 소수자와 약자가 처한 현실을 바꿔내기 위해서는 ‘수단’이 가장 중요한 판단기준은 아니다. 이처럼 두 가지 다른 방향성이 맞서는 상황에서 최근 만들어진 정의당 비대위원회가 교통정리에 나섰다. 김준우 정의당 비대위원장은 선거연합정당을 추진하되 제3지대와도 연합 가능성을 열어놓겠다고 밝혔다. 다만 신당 가능성이 나오고 있는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와는 연대가능성에 선을 그었다. 명백한 보수 세력과는 함께하지 않는 최소 원칙하에 가능한 진보의 외연을 확장하는 최대 연합을 추구하겠다는 방향이다. 역사적으로 진보정당이 힘을 받을 때는 통합이 이뤄졌을 때였다.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시도하며 민주노총의 지지를 기반으로 여러 조직과 정파를 합쳐서 만든 2000년의 민주노동당이 그랬다. NL과 PD, 그리고 참여계라고 불리는 친노무현 성향의 정파와 연합해서 만든 2012년의 통합진보당이 그랬다. 분당과 정당해산 사태를 겪으며 분열된 진보를 수습해 4자 통합을 이뤄낸 정의당의 2016년이 그랬다. 2023년의 위기에서 정의당 비대위가 또 한 번의 통합을 이뤄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세계관의 파산 그 이후 진보정당 내부적으로는 연합 상대를 두고 치열한 논쟁 중이지만, 대중의 마음을 얻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연합이 선거공학으로 비쳐지거나 도로 통합진보당 정도로 보인다면 통합이 성공해도 성과는 따라오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진보정당의 존재 이유를 뒷받침해 온 세계관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조성주 “진보정당의 세계관은 1987년의 민주화와 노동자대투쟁에서 나온 세계관이다. 우리 사회가 자본과 재벌, 보수 세력이 독점하고 있어서 적폐를 청산하고 악을 척결해야 세상이 좋아진다는 생각이다. 이 세계관은 이제 유효기간이 끝난 것 같다.” 이병길 “정당의 본령인 ‘집권 의지’가 사라졌다. 정당이 정당으로써 가져야 할 꿈이 사라졌다. 소수정당으로 자신의 역할만 하면 된다는 생각만 남았다. 그러면서 시대의 변화에 조응할 생각이 없는 정당처럼 비쳐졌다. 정당 시스템, 선거방식, 이슈 파이팅, 시민 커뮤니케이션과 같은 것에서 거대양당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뒤쳐지면서 젊은 정당이라는 이미지가 사라진지 오래다.” 지난 20년 동안은 위에서 인터뷰한 5명처럼 진보정당에 모든 것을 바친 이들이 존재했다. 정치에 참여하되 거대 양당이 아니라 배가 고프고 가능성도 희박한 길에 인생을 건 이유는 가슴을 뛰게 하는 세계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이 창당할 때 선언했던 것처럼 2023년의 진보정당은 노동자·농민·빈민·중소상공인과 여성·청년·학생·진보적 지식인의 마음을 이끌리게 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옛것은 사라졌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디자인 : 옥지수
✏️ 뉴스쉽 네 줄 요약 · 서울시가 무제한 대중교통 이용권을 내놨습니다. 월 6만 5천 원으로 지하철과 시내버스, 따릉이까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 독일을 포함해 선전국들이 앞다퉈 교통패스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와 고물가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 무제한 교통이용권 같은 보편적 복지 정책은 정치인의 '레거시 남기기'로 도입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 서울시의 교통패스가 공공 교통으로의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오는 시작점이 될지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통패스, 얼마나 타야 본전일까? 서울시가 한 달에 6만 5천 원을 내면 대중교통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카드를 만들었습니다. 내년 1월부터 4개월간 시범운영을 하고 하반기에는 본 시행을 할 예정입니다. ‘기후동행카드’라는 이름의 교통패스는 지하철과 시내버스, 마을버스, 공공자전거 따릉이까지 연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6만 5천 원이라는 가격이 책정된 만큼, 출퇴근용으로 이 카드를 사용하면 이득일지 계산이 필요합니다. 시내버스를 한 달에 44번 넘게 탄다면 교통패스를 이용하는 게 유리합니다. 지하철은 기본요금만 내도 되는 10km 이내 거리로 출퇴근한다면, 46번 넘게 탈 경우 구매하는 게 낫습니다. 10km를 넘으면 5km마다 기본요금 1400원에서 100원씩 추가되기 때문에, 출퇴근 거리가 긴 경우 한 달 평균 교통요금과 6만 5천 원을 비교해봐야 합니다. 서울시의 교통패스는 인천과 경기에서 출퇴근하는 사람은 사용이 어렵습니다. 서울시에서 승차해서 인천과 경기도에 하차하는 건 이 패스에 포함되는데, 인천과 경기에서 승차하는 건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광역버스도 이용할 수 없습니다. 가격이 많이 저렴한 편은 아니라 이용효과가 극대화되진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 이용객도 수도권을 포괄하지 못하고 서울시민에 국한될 가능성이 커서 한계는 보입니다. 하지만 서울시가 ‘대중교통 무제한 정기이용권’을 도입했다는 건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기후위기, 불평등 해결"... 교통패스 도입하는 국가들 무제한 교통패스를 도입하는 건 세계적인 추세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최근의 고물가로 인한 불평등 심화와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정책으로 교통패스를 도입하는 실험이 각국에서 이어졌습니다. 값싼 대중교통 무제한 이용권을 통해 자동차 사용을 줄여 탄소배출을 막고, 자동차를 타기 힘든 사회적 약자에게는 싼 값에 이동할 권리를 보장한다는 원리입니다. 자가용에서 대중교통으로 교통수단을 전환(Modal Shift)시키는 것에 선진국은 나서고 있습니다. 그 방식도 무제한 정기이용권뿐 아니라 다양합니다. 스페인은 지난해 9월부터 올해까지 국영철도 요금을 무료로 제공했습니다. 재원은 에너지기업에 부과한 횡재세로 충당했습니다. 유가상승으로 크게 이득을 본 정유회사 등 에너지기업에게 세금을 걷은 뒤, 고물가에 시달리는 시민들에게 무료 대중교통 정책으로 돌려준 겁니다. 영국도 올해 상반기, 대중교통 요금을 최대 2파운드(3,300원 수준) 상한을 설정해 싼 값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도록 했습니다. 전면 무료화, 상한선 설정 등 여러 방식이 있지만 ‘무제한 정기이용권’ 방식을 택한 곳 중 가장 의미 있는 효과를 본 곳은 독일입니다. 기후위기와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독일은 지난해 6월부터 3개월 동안 9유로(1만 2천 원 수준) 짜리 무제한 교통패스(도이칠란트 티켓)를 도입했습니다. 9유로 티켓의 실험이 끝난 뒤 올해 5월부터는 49유로 티켓을 만들어 무제한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게 했습니다. 3개월 간 실시된 9유로 티켓의 효과는 즉각적이었습니다. 교통패스의 도입으로 물가상승률은 0.7% 감소하고 대중교통 이용은 25% 증가했습니다. 180만 톤의 탄소배출이 줄어들면서 대기오염이 6% 감소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저소득층에 대한 이동권 보장과 복잡한 교통 요금체계의 단순화라는 의미도 가져왔습니다. 서울시는 기후동행카드 도입으로 1년 동안 승용차 이용이 1만 3천대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온실가스를 3만 2천 톤 감축하고, 시민 한 명당 교통요금을 34만 원 이상 할인받는 효과가 있다고 봤습니다. 복지정책과 정치 교통패스와 같은 복지정책, 특히 큰 전환을 가져올 만한 보편적 복지는 어떻게 도입될까요. 정치인이 본인의 레거시(유산)를 남기기 위해 도입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1천만 명에 가까운 시민을 이끌고 행정을 책임지는 서울시장은 그 자체로도 상징성이 있지만, 대통령으로 가기 위한 전 단계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때문에 시민들에게 각인되도록 재임기간 중 상징적인 정책을 남기고 싶다는 동기가 강하게 작용합니다. 이명박 시장의 청계천 복원과 버스 전용차로, 박원순 시장의 따릉이 도입 등이 그러한 정책입니다. 지난해 7월 취임한 오세훈 시장은 올해 2월 무제한 교통이용권 도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정치인의 ‘업적 남기기’로 복지정책이 도입되지만, 같은 이유로 복지정책은 한계에 부딪힙니다. 이번 서울시의 기후동행카드는 경기도민과 인천시민이 출퇴근에 이용하기 어렵습니다. 서울시는 경기도와 인천시도 기후동행카드에 함께 하기를 원한다고 했지만 결국 서울시민을 위한 교통패스에 그쳤습니다. 경기도와 인천시가 서울시와 함께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체적인 교통패스를 만들겠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더 경기패스’를 자체 도입해 교통비의 20%를 환급해 주는 방식을 내놓았습니다. 인천시도 자체적인 대중교통 정책을 내놓는다는 입장입니다. 정치인들이 서로 업적을 남기려고 하는 상황에서, 정당마저 다른 지자체장이 이끄는 대표적 정책에 협조하기란 어렵습니다. ‘남 좋은 일’ 보다는 본인 이름으로 남겨질 자체 정책을 택하겠다는 모습입니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묘사한 것처럼 경기도와 인천에서 서울까지 출퇴근하는 수많은 수도권 사람들은 정당의 색깔과 지역의 경계가 갈라놓은 정기이용권이 아쉬울 겁니다. 보편적 복지 정책은 항상 포퓰리즘 논란과 재원 문제에 시달립니다. 내년 5개월 시범기간에 기후동행카드로 인한 비용은 750억 원입니다. 한 달에 150억 원씩 재원이 드는 셈인데, 시가 50%를 부담하고, 운송기관이 50%를 부담하기로 했습니다. 카드의 가격을 6만 5천 원으로 책정한 것도 이러한 재원 소요를 최소화하면서 효과를 낼 수 있는 금액을 고민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보편적 복지는 보통 ‘왼쪽으로부터의 감염(contagion from left)’에서 옵니다. 시민사회와 노조, 진보정당이 처음 문제제기를 하고 상당 시간 동안 시민들에 설득되고 요구가 증폭되는 시기를 지납니다. 그 뒤 양대 정당의 유력 정치인이 자신의 상징적인 업적을 남기기 위해 이 정책을 흡수하는 모양새를 띕니다. 2000년대 민주노동당의 ‘무상 시리즈’ 중 무상급식이 2011년 서울시에서 논쟁으로 떠올랐습니다. 오세훈 시장은 보편적 복지가 아닌 선별적 복지가 필요하다며 시장직을 걸었습니다. 결과는 민주당의 박원순 서울시장을 만들었고, 결국 전면적 무상급식이 도입됐습니다. 시민들에게 현금성 지원을 해주는 기본소득 정책 또한 그런 모습을 띕니다. 지금은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상징적인 정책이 됐지만, 처음부터 수권정당에서 논의되던 정책은 아니었습니다. 2009년 이후 진보정당과 진보 경제학계에서 논의되어 오던 기본소득 논의를 2016년 성남시장이던 이재명 대표가 청년에게 한시적으로 현금성 지원을 도입하는 식으로 현실정치에 적용했습니다. 그 뒤 이 대표가 경기도지사를 거치며 경기도로 기본소득이 확대됐고, 민주당 대표이자 대통령 후보가 되면서 중앙정치에서도 기본소득이 논의대상에 올랐습니다. 서울시에서 도입한 무제한 정기이용권 또한 진보정당과 환경단체가 먼저 제기한 의제였습니다. 올해 초부터 환경단체들은 독일의 D티켓을 차용해 기후위기와 고물가에 대응하기 위해 ‘월 1만 원 교통패스’를 도입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정의당은 이를 받아들여 3만 원 교통패스 법안을 발의하는 등 무제한 대중교통 이용권을 의제화하려고 했습니다. 서울시는 이들의 정책을 차용하되 좀 더 제한적이고 재원이 덜 소요되는 방식으로 가져왔습니다. ‘왼쪽으로부터의 감염’과정에서 양대 정당은 원래 정책의 아이디어를 가져오되, 내용을 일부만 실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에 서울시에서 도입한 교통패스에 대해서도 환경단체와 진보정당은 취지는 좋지만 내용면에서 우려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정의당은 서울시가 시내버스와 지하철 요금을 각각 300원, 150원 인상시켜 놓고 6만 5천 원 패스를 내놓은 것은 조삼모사라고 지적했습니다. 환경단체나 진보정당이 요구한 1만 원, 3만 원 교통패스의 경우 정부의 재정 투입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평일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이 전국 평균 900만 명에 달하는 만큼, 월 1만 원 교통패스를 도입하면 전국에 매달 5천억 원이 드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3만 원 교통패스의 경우 매달 3,300억 원, 연간 4조 원의 재원이 필요합니다. 공공 교통으로의 전환이 가지는 의미 교통패스는 정치적입니다. 세금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와 직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3년간 코로나19로 대중교통 이용은 크게 줄고 승용차 이용이 크게 늘었습니다. 밀집공간을 피하려는 측면이 큰데, 정부 정책도 작용했습니다. 정부는 고물가, 특히 유가상승의 대응책으로 ‘유류세 감면’을 택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10개월간 유류세 인하조치를 했습니다. 이번 정부는 2021년부터 2년간 유류세 인하 조치를 이어갔습니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1년 동안 유류세 감면으로 인해 8조 원의 세금이 덜 걷혔습니다. 8조 원은 전국적으로 3만 원 교통패스를 도입했을 때 2년 간 운영할 수 있는 액수입니다. 독일이나 스페인 정부와는 다르게 한국 정부는 이 정도의 예산을 ‘무제한 대중교통 이용’에 투입하기보다는 유류세 인하에 투입했습니다. 유류세 인하의 경우 자가용이 없는 사람에게는 혜택이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대중교통보다 자가용 이용을 장려하는 쪽으로 유인하게 됩니다. 즉, 기후위기에 역행할뿐더러, 인플레이션 해결에 있어서도 차를 가진 사람들에게 역진적인 혜택을 준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세금을 어디에 투입할지 판단에서 지금까지 정부가 보인 모습은 ‘자동차 타는 중산층’에 더 초점을 맞췄습니다. 각국에서 도입하기 시작한 무제한 대중교통 이용권은 이 초점을 저소득층과 사회적 약자로 전환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대중교통은 공공성을 가지고 있는 만큼, 여기에 재정을 투입하는 것은 단순히 교통을 편리하게 하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65세 이상 어르신에게 무료로 지하철을 이용하는 정책을 봐도 그렇습니다. 1980년 시작돼 1984년에 완전 무료로 자리 잡은 이 정책은 수십 년간 지하철을 ‘만성적자’로 만든다는 논란을 가져왔습니다. 1980년 당시 이 정책을 도입한 차흥봉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하철 무료이용이 노인세대에게 가져오는 건강효과가 4천억 원에 달한다고 말합니다. (▶ 관련 기사 : "출퇴근 땐 지하철 피하고"… 한국 노인에게 '무료승차'란) 우리나라 노인들이 지하철을 이용함으로써 얻는 건강 효과를 돈으로 계산한 게 있는데 한 4천억 원쯤 됩니다. 볼일을 보러 가기도 하고, 놀러 가기도 하고, 국가적으로 보면 노인 의료비를 절감하는 데 굉장히 큰 효과가 있는 거죠. - 차흥봉, 전 보건복지부 장관 서울시의 교통패스 이름은 ‘기후동행카드’입니다. 오세훈 시장은 발표하는 자리에서 이름에 교통패스가 가지는 모든 의미를 담았다고 밝혔습니다. 기후동행카드가 대중교통으로의 대규모 전환을 가져와 기후위기를 늦추고, 약자와 동행하며 더 많은 이동권을 보장해 줄 수 있을까요. 경기와 인천 주민이 쓰기 힘든 카드, 시내버스는 되고 광역버스는 안 되는 카드, 월 6만 5천 원이라 몇 번 이하로 타면 본전 생각나는 카드라면 무제한 교통패스의 온전한 효과는 가져오기 힘들 수 있습니다. 정부 차원에서도 기존에 도입한 알뜰교통카드나 K-패스를 넘어 기후위기와 고물가에 대응하는 ‘공공교통 전환’ 정책을 검토해 볼 시점입니다. 디자인 : 옥지수
✏️ 뉴스쉽 네 줄 요약 · 미국 케이블 뉴스는 트럼프에 대응하면서 더욱 정파적인 모습을 보이며 양극단으로 나아갔습니다. · 트럼프와 싸우던 CNN은 7년 만에 트럼프 토론회를 기획했다가 리더십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 폭스뉴스는 트럼프의 '부정선거 음모론'에 편승했다가 1조 원을 배상하게 됐습니다. 해고된 간판 앵커는 폭스뉴스 밖에서 트럼프 단독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 정부가 언론에 개입하지 않고 자유롭게 놓아둘 때, 언론은 경쟁적으로 진실을 세상에 알립니다. 가짜뉴스를 때려잡겠다던 대통령이 있다. 자신에게 비판적인 보도를 한 방송사는 인터뷰를 거절했다. 질문하는 기자에게는 윽박지르고 ‘끔찍한 인간’이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트럼프 이야기다. 트럼프는 대통령일 당시 CNN은 가짜뉴스라며 "CNN의 질문은 안 받는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트럼프의 ‘가짜뉴스’ 레토릭은 스스로에 대한 비판의 본질을 흐리려는 의도가 가득하다. 그는 본인의 성폭력에 대해서 부인하거나 피해자를 비난하는가 하면, 부정선거 음모론을 부추겼다. 정권을 잃자 지지자들이 국회의사당을 무력으로 점거하는 전례 없는 일이 일어나도록 만들었다. 기존 소셜미디어가 자신을 포함한 다양한 발언을 검열한다며 ‘트루스 소셜(Truth Social)’이라는 소셜미디어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자신에 반대되는 의견은 ‘가짜’로 몰고, 자신과 지지하는 이들의 발언은 '진실(Truth)'이라는 방식은 파시즘과 포퓰리즘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최근 자신이 저지른 여러 혐의로 기소를 당하면서 머그샷을 찍었는데 오히려 탄압받는다는 이미지를 이용하고 있다. 트럼프는 미국의 민주주의에 전례 없는 일들을 가져왔다. 미국 언론, 특히 방송들은 이런 대통령의 발언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혼란에 빠졌다. 트럼프가 차기 대선의 유력한 후보가 되면서 이 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정치적 양극화 심해진 케이블 뉴스 미국은 지상파 방송사인 CBS, ABC, NBC 외에 케이블 뉴스 채널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게 폭스뉴스와 CNN, MSNBC다. 케이블 뉴스 채널이 등장한 초기인 1990년대까지는 세 방송사의 정치적 성향이 뚜렷하지 않았다. 세 방송사가 정파적 미디어로 변모하기 시작한 건 2000년대부터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전을 거치며 케이블 뉴스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특히 폭스뉴스가 그랬다. 폭스뉴스를 본 시청자는 이라크와 알카에다가 연계되어 있고, 대량살상무기가 발견됐다고 믿는 경향이 높게 나타났다. 또 국제적인 여론이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지지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폭스뉴스 시청자에게 나타났다. 이라크전을 거치며 2010년대까지 폭스뉴스는 점차 더 보수화된 정치 성향을 내비쳤고, MSNBC는 진보 성향, CNN은 중도 진보적 성향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사들은 트럼프라는 독특한 캐릭터의 대통령을 맞이하게 된다. 2016년 대선과 트럼프 당선을 거치며 폭스뉴스는 확실한 트럼프의 옹호자로, CNN은 트럼프의 비판자로 스탠스를 설정했다. 그 후의 상황은 앞서 언급했듯 CNN은 트럼프에게 가짜뉴스로 몰리는 수모를 당했지만, 정권의 비판자 역할을 자처하면서 시청률과 신뢰도에서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2016년 대선 토론에서 트럼프가 나오자 2,400만 명이 폭스뉴스를 봤고 2,100만 명이 CNN을 봤다. 포스트 트럼프 시대 CNN의 위기 문제는 트럼프의 재임기간이 끝난 이후였다. 트럼프 대통령과 코로나19 팬데믹이 겹치며 케이블 뉴스는 시청률의 황금기를 맞았다. 하지만 트럼프가 연임에 실패하며 민주당 바이든이 당선됐고, 코로나19도 잦아든 2021년부터 시청률은 급락했다. 케이블방송은 운명을 트럼프와 같이하는 듯 보였다. CNN은 악재가 겹쳤다. 10년간 CNN을 이끌던 CEO 제프 저커는 부사장과의 불륜으로 사임했다. 스타 앵커 크리스 쿠오모도 윤리 기준을 위반했고 성추행 의혹이 일면서 물러났다. 2022년 새로 부임한 CEO는 PD 출신인 크리스 릭트였다. 그에게는 트럼프와 코로나 시대 이후 낮아진 시청률을 되살려야 하는 임무가 부여됐다. 크리스 릭트의 일성은 CNN을 다시 신뢰받는 저널리즘으로 되돌리겠다는 것이었다. 트럼프의 노골적인 CNN 공격에 맞서 강대강으로 들이받았던 때와 달리 비판하되 절제된 방식으로 하자는 것이다. 트럼프가 언론인들의 분노를 유도해 방송이 ‘분노 포르노’가 되게끔 자극했는데 여기에 휘말려 들어가면서 CNN이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게 됐다는 게 릭트의 입장이었다. 크리스 릭트는 신뢰와 저널리즘을 말했지만 결국 좌편향됐던 CNN을 다시 중도로 돌리자는 것이었다. 트럼프를 미치광이로 치부하는 전략이 아니라 말과 행동에 따라 단계적으로 비판하는 방식을 추구했다. 릭트의 CNN은 마음을 돌린 공화당 지지자를 시청층으로 되찾으려고 했다. 이런 기조 하에 크리스 릭트의 CNN은 2023년 5월 ‘트럼프 타운홀 미팅’을 기획했다. CNN과는 인터뷰도 하지 않는다는 트럼프를 출연하도록 설득해야만 했다. 트럼프와 CNN의 앵커 케이틀란 콜린스가 1:1로 토론을 진행하되 청중은 공화당 지지자로 가득 채우도록 했다. 결국 트럼프는 7년 만에 CNN 방송에 출연했다. 타운홀 미팅 방송에서 트럼프는 부정선거로 대선에서 졌다는 주장을 반복했다. 재판 중인 자신의 성폭력 사건에 대해 피해자를 비하하기도 했다. 또 밀입국자를 강제추방하는 정책을 다시 추진하겠다고도 했다. 트럼프의 부적절한 발언은 CNN을 통해 중계됐다. 트럼프는 진행자인 케이틀란 콜린스를 ‘불쾌한 사람’이라고 몰아세웠다. 콜린스는 트럼프가 대통령에 있을 때 백악관 출입기자였다. 백악관 브리핑에서 그녀가 불편한 질문을 하자 트럼프는 '앞 좌석에 앉지 말고 뒷자리 기자와 좌석을 바꾸라'라고 하기도 했다. 케이틀란 콜린스는 트럼프 시기 백악관 출입을 거친 뒤 CNN의 간판 앵커가 됐다. CNN을 대표하는 콜린스는 이 타운홀 미팅에서 트럼프와 그 지지자들에게 처참하게 몰아세워졌다. 트럼프가 콜린스를 공격할 때마다 지지자들은 시끄러운 야유를 보냈다. 콜린스는 진행자이자 토론자로서 역할을 모두 해야 했고, 300 대 1로 싸워야 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CNN 타운홀 미팅에 출연한 트럼프 타운홀 미팅이 방송된 이후 크리스 릭트 CEO에 대한 CNN 내부 구성원의 불만은 폭발했다. 그의 ‘우클릭’에 동의하지 않았던 대부분의 기자들이 크리스 릭트에게서 돌아섰고, 리더십은 흔들렸다. 정파성을 비치던 CNN을 다시 불편부당한 저널리즘으로 돌려놓겠다는 방향성은 맞았을지 몰라도 방식은 크게 잘못되었다. CNN의 안방에 들어온 트럼프는 방송국을 헤집어놓고 떠났다. 이 기획을 기점으로 크리스 릭트는 13개월 만에 CEO에서 해임됐고, CNN은 여전히 시청률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의 후임으로는 뉴욕타임스에서 2012년부터 2020년까지 CEO를 지낸 마크 톰슨이 내정됐다. 뉴욕타임스에서 디지털 전환을 성공시키며 900만 명의 유료구독자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마크 톰슨이 침체와 혼란에 빠진 CNN을 구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 크리스 릭트 전 CNN CEO 차기 CNN CEO로 내정된 마크 톰슨 폭스뉴스를 시청할수록 공화당 득표율이 오른다 ‘폭스 효과(Fox effect)’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폭스뉴스는 다른 케이블 뉴스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폭스뉴스를 오래 시청할수록 공화당 득표율이 오른다는 연구결과는 꾸준히 나왔다. UC버클리의 경제학자들은 2006년 논문에서 폭스뉴스가 대선에서 공화당 득표율을 0.4~0.7%까지 상승시켰다고 발표했다. 전국적으로 20만 명이 폭스뉴스 때문에 공화당을 지지하는 투표를 했다는 것이다. 2017년 에머리와 스탠퍼드 대학의 학자가 진행한 연구에서도 폭스뉴스의 투표 효과는 두드러졌다. 다른 케이블 뉴스인 CNN, MSNBC에 비해 폭스뉴스는 훨씬 더 시청자들의 정치적 성향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나타난다. 2008년 민주당 유권자 평균 수준의 정치성향을 가진 시청자가 매주 3분씩 폭스뉴스를 더 시청할 경우 공화당에 투표할 가능성이 1.03%p 늘어나는 것으로 계산됐다. 이처럼 폭스뉴스가 유권자에게 영향을 끼치는 이유는 미디어 전략도 한몫하는 것으로 보인다. 방송사의 경우 통상 중도적인 다수의 시청층을 대상으로 콘텐츠를 만들어야 시청률이 높아진다. 그런데 폭스뉴스는 시청률 최대화 전략이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택했다. 시청률에서 좀 더 손해를 보더라도 보수층에 호소하는 콘텐츠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고, 공화당 득표율에 도움이 되는 선택이다. 이 전략을 택한 데에는 폭스뉴스라는 미디어의 정체성과 사주인 루퍼트 머독의 생각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폭스뉴스는 경제학적으로 봤을 때도 방송사, 언론사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로 행동하며 미국 정치에 개입하려는 모습을 보여왔다. 전 폭스뉴스 앵커 터커 칼슨 트럼프와 밀월 관계를 이어간 폭스뉴스는 2020년 대선에서 언론사로서는 큰 오점을 남기게 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주장한 부정선거 음모론에 올라타 선거 결과가 조작됐다는 가짜뉴스를 방송에 내보낸다. 결국 선거개표 업체 도미니언과의 소송 끝에 폭스뉴스는 1조 원이라는 거액을 배상하게 됐다. 선거부정 음모론을 폭스뉴스에서 설파하던 앵커 터커 칼슨도 이 소송과 함께 해고됐다. 하지만 터커 칼슨은 소셜미디어 X(구 트위터)에서 트럼프와 단독 인터뷰를 진행했다. 공화당 대선 후보로서 압도적인 지지율을 받고 있는 트럼프는 공화당과 폭스뉴스가 진행한 방송토론에는 나가지 않고, 터커 칼슨과의 인터뷰를 선택했다. 폭스뉴스는 트럼프와 터커 칼슨의 빈자리에 시청률에서 큰 하락을 겪고 있다. 자유로운 경쟁이 진실을 드러내게 만든다 대통령과 정부가 언론을 장악하거나 개입하려는 건 트럼프만의 일이 아니다. 언론이 특정 진영의 치어리더 역할을 하는 것도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만은 아니다. 모든 대통령은 어느 정도는 언론을 불편해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자유와 경쟁을 옹호하는 이들도 표현과 사상에서는 다른 잣대를 들이밀곤 한다. 자유민주주의를 말하면서도 표현과 사상의 자유는 규제하고 틀어막으려는 이들이 있다. 특히 정권에 부담이 되는 진실을 폭로하려 하면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서 막으려고 하거나, 가짜뉴스라는 이름을 붙여 신뢰도를 떨어뜨리려는 시도는 자주 있었다. 언론에 대해 정부가 개입을 최소화하고 자유로운 경쟁이 일어나도록 놓아둘 때, 언론이 본연의 역할을 잘하게 된다는 연구가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펜타곤 페이퍼’ 보도다. 1971년 뉴욕타임스는 미국 정부가 베트남전에 개입한 1급 기밀문서인 펜타곤 페이퍼를 입수했다. 닉슨 대통령은 국가안보와 군사기밀을 이유로 뉴욕타임스가 보도하지 못하도록 소송을 걸었다. 가처분을 통해 뉴욕타임스가 입막음당한 사이, 워싱턴포스트는 뒤늦게 취재를 시작한다. 펜타곤페이퍼의 제보자는 워싱턴포스트에 문서를 제공했고, 보도까지 나아간다. 워싱턴포스트가 정부의 압박과 처벌 위협에도 보도로 이끈 건 경쟁 때문이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 보도를 통해 언론 자유의 선봉장의 이미지를 얻었다. 결국 뉴욕타임스에 비해 알려지지 않았던 워싱턴포스트는 이 보도 이후 뉴욕타임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미국 최고의 언론사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2018년 개봉한 영화 〈더 포스트〉(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 메릴 스트립, 톰 행크스 출연)에 잘 나타나있다. 언론은 정부의 기밀과 비리 등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먼저 보도하려는 동기가 있다. 감춰진 정보를 누가 먼저 터뜨리냐에 따라 언론사의 명성이 올라가고 시청률과 구독자 수에 영향을 미친다. 내가 가진 정보를 터뜨리지 않다가 다른 언론이 냄새를 맡고 먼저 보도를 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런 구조 때문에 정부가 개입하지 않는 자유시장에서 언론은 진실을 찾아 나서게 된다. 결국 언론의 존재 이유는 누가 먼저 중요한 진실을 파헤쳐서 보도하는 지다. 이런 언론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사회와 민주주의에 이익을 가져온다. 1970년대 CBS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 정부가 방송에 개입해선 안 되듯이, 방송도 정파성을 띄고 운명을 정권과 같이 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건 건강하지 않다. 미국 방송계에는 전설적인 앵커가 있다.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TV저널리즘을 이끌었던 월터 크롱카이트다. 그는 앵커로서 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 사건에 이르기까지 민감한 사안에 대한 논평을 적극적으로 냈다. 하지만 철저히 중립적인 입장에서 정파적인 발언은 지양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런 태도로 월터 크롱카이트는 미국 국민들에게 높은 신뢰를 얻었다. 그가 베트남전을 비판하는 코멘트를 하자 당시 존슨 대통령은 “크롱카이트를 잃는 것은 미국 중산층을 모두 잃는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를 둘러싸고 흔들리는 미국 방송사들을 보며 다시 월터 크롱카이트를 떠올린다. 언론은 정부의 비밀을 폭로하고, 국민에게 알릴 수 있도록 보호받아야 한다. 자유롭고 제약 없는 언론만이 정부의 기만을 효과적으로 폭로할 수 있다. - 휴고 블랙 대법관, 뉴욕타임스 대 미국 정부의 ‘펜타곤 페이퍼’ 소송에서 ▶ 참고자료 - Bias in Cable News, Gregory J. Martin and Ali Yurukoglu, American Economic Review, 2017. - The Partisan Delivery of News : A content analysis of CNN and FOX, Kathy Ensor, 2018. - Competition and Truth in the Market for News, Mattew Gentzkow and Jesse M. Shapiro, Journal of Economic Perspectives, 2008. - New york Times, puck news, The Atlantic. 디자인 : 옥지수
✏️ 뉴스쉽 네 줄 요약 · 오펜하이머가 활약했던 때는 미국에서 공산주의가 융성했던 유일한 시기였다. · 당시 미국 민주당은 ‘뉴딜 연합’을 통해 20년 장기집권에 성공했다. · 원자폭탄 투하가 전범국 일본에 ‘피해자 의식’을 불러일으켰다는 주장도 있다. · 원폭 투하 이후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은 ‘핵 군축’을 바랐다.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전쟁승리를 가져온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추앙받았다. 전쟁이 끝난 뒤엔 수소폭탄 개발은 위험하다며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에 반대 목소리를 냈다. 그로 인해 소련의 스파이로 몰려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원자폭탄의 이중성만큼 그 스스로가 복잡하고 양면적인 면을 가진 인물이다. 핵무기는 세계에 평화를 가져온 것일까, 파멸을 앞당긴 것일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이 복잡한 인물에 대한 영화 〈오펜하이머〉를 만들었다. 이번 뉴스쉽에서는 네 가지 질문을 통해 영화 오펜하이머의 배경이 되는 맥락을 살펴보려 한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영화라 결말은 알려져 있지만, 영화의 내용과 줄거리가 글에 일부 담겨 있다. 오펜하이머는 왜 공산주의자로 몰렸을까 “나는 뉴딜 민주당원입니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스스로 공산주의자임을 부인하는 대사가 나온다. 실제로 오펜하이머는 공산당원은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그는 공산주의자이자 소련에 원자폭탄 기술을 넘긴 스파이로 의심받아 청문회를 받았다. 미국은 공산주의가 성행하기 힘든 나라다. 프로테스탄티즘을 기반으로 세워져 자본주의와 자유의 상징이 된 미국과 공산주의는 대척점에 있다. 소련과 냉전을 거치면서 공산주의는 더욱 미국에서 발붙일 수 없는 조건이 됐다. 미국 공산당(Communist Party USA)이 1919년부터 100년 넘게 존속하고 있지만 현실정치에 의미 있는 진출을 한 적은 없다. 그런 미국 공산당이 세가 그나마 강했던 유일한 시기가 있었다. 대공황 직후인 1930년대부터 매카시즘 광풍이 불던 1950년대 전까지다. 이때가 바로 오펜하이머가 활동했던 시기다. 역사적으로 불황과 전쟁은 공산주의를 키우고 혁명의 불씨를 가져온다. 1차 대전으로 독일에서 11월 혁명이 일어났고, 러시아에서는 1917년 혁명이 일어났다. 대공황과 전쟁이 가져온 1930년대의 ‘붉은 물결’은 미국에 국한된 건 아니었다. 상징적인 사건이 스페인 내전이다. 쿠데타를 일으켜 스페인을 장악한 프랑코의 파시즘에 대항해 공화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가 뒤섞여서 ‘인민전선(Frente Popular)’을 형성해 맞서 싸운 사건이다. 인민전선에 전 세계의 지식인들이 관심을 가졌고 직접 참전하기도 했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은 의용군으로 참전했다가 목에 총을 맞는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종군기자로 스페인 내전을 기록했다. 젊은 시절의 오펜하이머 이런 분위기에서 미국도 공산주의가 활발하게 유행했다. 특히 캘리포니아 주의 대학교가 좌파의 요람이 되었다. 당시 오펜하이머는 하버드를 3년 만에 졸업한 뒤 유럽으로 가 영국 캠브리지와 독일 괴팅겐에서 공부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오펜하이머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과 UC 버클리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는 자리를 얻었다. 캘리포니아 주와 버클리는 미국에서 진보적인 목소리를 대변하는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다. 1930년대엔 대학 교수나 과학자들 중 상당수가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가 됐다. 오펜하이머도 자연스럽게 주변에 있는 많은 공산주의자들과 교류했다. 그는 흑인 인종차별 폐지와 노동권을 지지했고, 스페인 내전 중인 반파시스트 세력에 돈을 지원했다. 아내 키티는 공산당원이었고, 애인이었던 진 또한 공산주의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스스로 공산당원이 된 적은 없었다. 에드거 후버가 이끌던 FBI는 캐비닛에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교수들을 뒷조사한 자료를 모아놓았다. 오펜하이머도 그중 한 명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오펜하이머가 거론됐을 때 FBI 자료를 바탕으로 군부에서 반대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프로젝트의 군부 책임자 그로브스는 실용주의자였고 오펜하이머보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적합한 사람은 없다고 판단했다. ‘좌파’로 묶인다 해도 모두가 생각이 일관되진 않다. 당시에는 특히 소련 공산당에 대한 평가가 사람마다 크게 달랐다. 소련의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무정부주의자나 사회주의자가 있었고, 공산주의 혁명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노조를 만들 권리를 주장하고 불평등 해소를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오펜하이머 또한 공산당원은 아니었고 노조 조직화를 지지하거나 주변에 공산주의자들과 교류하는 정도의 의견을 지닌 사람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1930년대 당시에는 공산주의 혹은 공산당을 지지했었더라도 이후에 스탈린의 숙청이나 러시아 중심주의 같은 소련 공산당의 행태에 크게 실망하고 강력한 비판자로 돌아선 사회주의자들도 존재했다. 앞서 언급한 조지 오웰은 소설 〈동물농장〉과 〈1984〉로 ‘반공작가’로 인식되어 왔지만 사회주의자였다. 사회주의자의 정체성과 소련,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은 양립 가능한 문제였다. 미국에서 1950년대부터 진행된 냉전과 매카시즘은 이런 성향의 이들까지도 싸잡아서 ‘소련의 스파이’로 규정지었고 감시하거나 처벌하고 명예를 빼앗아갔다. 오펜하이머도 그중 한 명이었다. 미국 민주당은 어떻게 20년 집권에 성공했나 공산주의는 미국 상원과 하원 안으로 진출하지는 못 했다. 다만 개혁과 진보의 흐름이 미국 정치를 재편했다. 자본주의와 국가를 “뒤엎자”는 공산주의보다 자본주의를 “고쳐 쓰자”는 방식의 개혁이 힘을 받았다. 그 중심에 미국 민주당과 ‘뉴딜 연합’이 있었다. 원자폭탄 개발을 지시한 민주당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4번을 연임했다. 그가 시작한 뉴딜 연합으로 민주당은 20년을 장기집권하게 된다. 1930년대 이전의 미국 정치는 공화당이 30년간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1896년 이후 북부와 중서부 산업 지대의 도시 노동계급이 공화당을 지지하고 있었다. 민주당은 남부 지역에서 흑인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는 농장주들이 지지 기반이었다. 1896년부터 1930년까지의 민주당은 확장성이 없었다. 이 30년 동안 공화당은 9차례 대통령 선거에서 7번을 집권했고, 의회 선거 18번 중 17번을 이기며 다수당을 차지했다. 공화당 일변도였던 미국 정치에 새로운 균열을 내 완전히 다른 정당 체계로 ‘재정렬(realignment)’ 한 것이 루스벨트와 뉴딜 연합이었다. 뉴딜 연합은 민주당의 지지 기반을 새롭게 만드는 전략이었다. 루스벨트와 민주당은 남부 백인 지주 중심의 정당을 도시 노동자, 이민자와 흑인, 유대인, 가톨릭교도 그리고 중산층 자유주의자들의 정당으로 만들었다. 특히 급격하게 인구가 성장하는 도시의 노동자가 민주당의 핵심 지지층이 됐다. 공화당은 기업가와 전문직의 지지를 받았지만, 인구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노동자의 마음을 얻지 못했고 20년 간 집권할 수 없었다. 민주당과 루스벨트는 어떻게 이들을 결집하게 만들었을까. 민주당은 계급 이슈를 정치의 한복판으로 가져오는 방식을 택했다. 대공황에서 빠르게 벗어나기 위해 정부가 주도해서 대규모 토건 사업을 벌여 공공 일자리를 만들었다. 미국을 복지국가로 만드는 여러 개혁 법안도 통과시켰는데 대표적인 것이 노조 만들 권리를 명문화하는 노동법(Wagner Act)과 노령연금, 실업보험을 도입한 사회보장법이다. 루스벨트는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면서 라디오를 통해 직접 국민들에게 설득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 방식은 화롯가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편안하게 설명한다고 해서 ‘노변정담’으로 불렸다. 대공황과 2차 대전이라는 위기를 맞은 시기에 집권해 미국을 개혁한 루스벨트는 단순히 대통령을 뛰어넘어 국민을 이끄는 총사령관이었다. 하지만 2차 대전이 마무리되기 전 루스벨트가 갑작스럽게 숨지면서 부통령이던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이어받는다. 유럽에서 연합군 승리가 임박할 무렵이었고, 태평양 전쟁은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다. 원자폭탄이 일본에 투하되기 116일 전이었는데, 그제야 대통령이 된 해리 트루먼은 극비로 진행되던 ‘맨해튼 프로젝트’의 존재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 원자폭탄을 지시한 건 루스벨트였지만 실행한 건 트루먼이었다. 루스벨트와 트루먼으로 이어지는 민주당의 20년 장기집권은 1950년대에 제동이 걸린다. 1950년대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시작됐고, 매카시즘으로 불리는 마녀사냥이 이뤄졌다. 반공주의가 1930년대부터 이어온 붉은 물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공산 전체주의’에 대한 안티테제를 중심으로 국가 운영이 이뤄졌다. 다른 목소리를 내는 시민은 적과 내통하는 스파이로 의심받고 감시당했다. 1960년대 존 F. 케네디가 당선되고, 흑인 민권 운동과 베트남전 반전 운동으로 대변되는 학생들의 ‘68 운동’으로 새로운 흐름이 다시 피어나기 전까지 미국 진보의 암흑기는 이어졌다. 1950년대 반공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공화당의 아이젠하워가 집권한다. 새롭게 집권한 공화당 행정부와 군부는 미국의 핵 능력을 증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시기 ‘원자폭탄의 아버지’에서 ‘군축의 아버지’로 변모한 오펜하이머는 미국이 핵무기 의존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수소폭탄 개발에도 반대했다. 정부 정책에 비판의 목소리를 낸 대가로 오펜하이머는 애국심을 의심받았고, 청문회에서 공산주의자가 아닌지 검증을 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일본은 피해자인가 영화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쌍둥이 영화다. 두 영화 모두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연출했는데, 2차 대전 당시 일본 이오지마섬 전투를 그린다. 〈아버지의 깃발〉은 섬을 점령하는 미국 군대의 모습을,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필사적으로 이를 막는 일본군의 입장을 담았다.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팻 맨'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들과는 다르게 〈오펜하이머〉는 한쪽의 고민만을 그린다. 영화에서는 일본과 일본인을 보여주지 않는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폭탄이 투하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그저 성공적이었다는 전화를 받은 오펜하이머와 환호하는 로스앨러모스의 과학자들만 보여준다. 영화에서 담기지 않은 일본의 상황은 어땠을까. 로스앨러모스에서 오펜하이머와 그로브스 장군 원자폭탄 준비가 한창이던 1945년, 4월 30일 히틀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독일은 일주일 뒤 항복했다.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이 났지만 일본은 여전히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원자폭탄을 만들라고 지시한 루스벨트도, 원자폭탄을 맞아야 할 히틀러도 사라진 시점에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과학자들과 그로브스 장군 등 군부는 고민을 하게 된다. 원자폭탄을 일본에 사용하는 것이 옳을까. 결론은 원자폭탄을 통해 효과적인 충격을 준다면 지지부진한 재래식 전쟁에서 생길 인명피해를 몇 분의 1로 줄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미군 사망자뿐 아니라 일본군 사망자도 줄일 수 있어 일본 국민에게도 오히려 좋다는 논리였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히로시마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터진 원자폭탄으로 22만 명이 숨졌다. 그중 95%는 민간인이었던 것으로 추산됐다. 천황제를 유지해야 한다며 결사 항전하던 일본은 원자폭탄 2발을 맞은 지 며칠 뒤인 8월 15일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원자폭탄이 가져온 일본의 비참한 상황이 미국 국민들에게 바로 알려지진 않았다. 폭탄이 투하된 지 1년 뒤인 1946년 8월 〈뉴요커〉지의 종군기자 존 허시는 히로시마에 한 달간 머물면서 원폭 생존자를 인터뷰했다. 뉴요커는 히로시마 원폭피해에 관한 긴 기사를 잡지 한 호에 통째로 담았고, 이 잡지를 읽은 미국인들이 핵무기의 비참함을 깨달으면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은 온통 불에 데었고, 눈구멍은 비었으며, 녹아버린 눈에서 흘러나온 것들이 뺨으로 흘러내렸다. - 1946년 8월, 〈뉴요커〉지 두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진 나가사키의 상황은 나가사키 의과대학의 교수로 있던 나가이 다카시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가이 다카시는 원자폭탄이 투하됐을 때 본인도 다쳤지만 의사로서 생존한 환자들을 돌봤다. 폭발로 바로 숨지지 않은 나가사키의 사람들은 서서히 죽어갔다. 나가이 다카시는 환자를 도우며 죽어가는 모습을 기록했다. 처음 폭발 후 3시간부터 방사능 숙취가 나타나고, 24시간 후에 최고조에 이르러 점차 증상이 가벼워진다. 3일째부터 소화기 장애가 나타나 대개는 일주일 후쯤에 사망하였다. 2주 차에는 출혈을 하기 시작했으며 이 경우 혈액 장애로 대개 사망하였다. 4주 차에는 백혈구 감소에 따른 위독한 상태가 되어 다수가 사망하였다. 탈모는 3주경부터 나타난다. 생식선 장애는 초기부터 10주 이상 계속되었다. - 나가이 다카시의 기록 일본에 사용한 원자폭탄의 정당성에 관해서는 논쟁이 있었다. 2차 대전이 마무리되고 냉전이 시작되는 시기에 원자폭탄 투하가 소련을 향한 경고의 역할로 작용했다는 주장이 있다. 미국이 소련의 일본 전쟁 참전을 막고 아시아에서 영향력 저지하기 위해 빠른 종전을 위한 수단으로 원자폭탄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독일이 아닌 일본에 원자폭탄을 사용함으로써 일본인에게 ‘피해자의식’을 심어줬다는 주장도 있다. 전쟁 책임에 대해 사과를 거듭하는 독일과 달리 일본이 제대로 사과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들은 원자폭탄을 맞은 피해자라는 생각 때문이라는 거다. 원자폭탄으로 한 순간에 20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고, 생존자들도 죽을 때까지 그리고 2세대에 이르기까지 피해가 이어졌던 것을 감안하면 일본 국민은 참혹한 피해를 당한 것이 사실이다. 다만 피해를 당한 국민과 전쟁을 주도한 군부와 지도자의 책임은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다. 일본 내에서도 ‘피해자의식’을 강조하며 사과하지 않는 것은 극우 세력의 일부로 알려져 있다. 나가이 다카시 같은 원폭 피해자는 오히려 강한 어조로 일본의 전쟁 책임을 비판하고 평화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원폭 피해자를 돌보다 결국 자신도 후유증으로 6년 뒤 숨진 그가 자녀들에게 남긴 유언에는 반전, 평화에 대한 단호한 목소리가 담겨있다. 설령 너희들이 최후의 두 사람으로 남게 된다 하더라도, 어떤 비난이나 폭력을 당하더라도 단호하게 “전쟁 절대반대!”를 계속 외쳐 주기를 바란다. 설혹 비겁자라고 멸시를 당하고 배신자라고 두들겨 맞더라도 “전쟁 절대반대!”의 외침을 끝까지 고수해 나가기 바란다. 사랑받는 것은 멸망하지 않는다. 사랑으로 몸을 닦고, 사랑으로 나라를 세우고, 사랑으로 인류의 손을 잡아야만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계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마라. 사랑하는 아이들아. 사랑하면 사랑받는다. 사랑을 받으면 멸망당하지 않는다. 사랑의 세계에 적은 없다. 적이 없으면 전쟁도 일어나지 않는다. - 나가이 다카시가 자녀에게 남긴 유언 핵무기가 세계 평화를 가져다줄까 미국에 이어 1949년에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면서 ‘MAD(Mutual Assured Destruction, 상호확증파괴)’라는 새로운 국가안보 원칙이 자리를 잡았다. 양 진영이 핵무기를 보유한 상황에서 핵 공격을 시작하면 어느 쪽도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미국과 소련 모두 핵 공격을 감행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게 ‘핵 억제’ 이론이다. 한국은 일본에 이어 핵폭탄을 맞는 두 번째 나라가 될 수 있었다. 한국전쟁 초기부터 트루먼은 핵무기 사용을 고려했다. 특히 중국군이 압록강을 넘어 내려오면서 위기에 몰렸을 때, 맥아더 장군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핵무기 사용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일본에 원자폭탄 사용 결정을 내린 트루먼은 고작 몇 년 뒤 일어난 한국전쟁에서는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 성격인 한국전쟁이 일어났지만 한반도에서의 국지전에 머물렀고 미국 본토의 위협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소련과의 전면전이 일어나고 미국에 대한 핵공격 가능성도 있었다. 실제 핵 억제력이 작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원자폭탄 투하 이후 8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강대국 간의 전면전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핵이 제3차 세계대전을 막고 있는 평화의 사도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오펜하이머의 예상대로 핵무기는 어느 정도의 비용과 시간을 투여하면 어느 국가든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인도와 파키스탄, 이스라엘 같은 분쟁 지역으로 핵무기가 퍼져나갔고, 한국 또한 머리 위에 핵무기를 가진 독재국가를 짊어지게 됐다. 푸틴과 김정은 같은 독재자의 손에 핵무기가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몰락을 막으려고 언제 핵무기를 사용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존재한다. 독재가 아닌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포퓰리즘적인 정치인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는 핵무기가 어느 정도 평화를 유지하는데 역할을 했을지 모르지만, 어느 순간 인류의 공멸로 가는 도구로 바뀔지 모른다.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는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들은 일본의 원폭투하 이후 핵무기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군축을 주장해 왔다. 실제로 2차 대전 뒤 국가들이 모여 핵을 억제하고 군축을 논의하는 단체가 생겨나고 조약도 맺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핵 보유국들은 완전히 핵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오펜하이머는 핵 보유국 사이의 균형을 통한 세계 평화는 허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원자폭탄의 아버지였지만, 아들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참고자료 - 카이 버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특별판』, 최형섭, 사이언스북스, 2023 - 크리스티 앤더슨, 『진보는 어떻게 다수파가 되는가』, 이철희, 후마니타스, 2019 - 크리스 월리스, 『카운트다운 1945』, 이재황, 책과함께, 2020 - 나가이 다카시, 『그날 나가사키에 무슨 일이 있었나』, 김재일, 섬, 2011 디자인 : 옥지수
✏️ 뉴스쉽 네 줄 요약 내년 최저임금을 결정하기 위한 논의가 진행 중입니다. 경영계는 최저임금을 인상하면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이 파산할 것이라 주장하는 반면 노동계는 임금 인상이 일자리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노사 합의가 어렵다 보니 그동안 최저임금 결정은 정부가 위촉한 공익위원들이 이른바 ‘공익위원 계산식’을 통해 정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 공식을 통해 도출해보면 내년도 최저임금 인상률은 3.8%, 시급은 9,980원대 안팎입니다. 노사 합의를 통해 정해져야 바람직한 최저임금이 정부의 방향성에 좌우된다는 우려가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