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전형우 기자입니다. 차별과 불평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파편화된 뉴스는 이제 그만, 이슈의 맥락을 읽는 재미를 담았습니다. ✏️ 뉴스쉽 네 줄 요약 · 트럼프 같은 극우 포퓰리즘이 최근 흥행한 것은 세계 정치의 공통적인 흐름입니다. ·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트럼프 당선과 같은 현상을 '브라만 좌파'가 된 진보 정당에 이유를 찾았습니다. ·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주요 선진국에서 1990년대 이후 진보 정당은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는 정당에서 고학력 전문직의 정당으로 변화했습니다. · 진보 정당에서 버림받은 노동 계층이 극우 포퓰리즘에 끌리게 됐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트럼프가 다시 당선됐다. 어떻게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지 분석이 며칠 새 쏟아져 나왔고 앞으로도 더 나올 것이다. 뉴스쉽에서도 '러스트벨트의 화난 힐빌리', 그러니까 쇠락한 제조업 지역의 가난한 백인 노동 계층에서 트럼프 흥행의 원인을 찾은 바 있다. ▷ "구글 해체"도 주장하는, '더 매운 맛' 그 남자... 빅테크 미래는 어떻게 (뉴스쉽, 2024.08.10.) 또 민주당의 패배를 인종 문제나 젠더 이슈 등 '정체성 정치'에 몰두한 탓으로 보는 시각도 짚어봤다. ▷ '정치적 올바름'이 진보를 망쳤다고? '정체성 정치'의 시대는 지나갔나 (뉴스쉽, 2024.09.28) 이번 뉴스쉽에서는 트럼프로 대표되는 극우 포퓰리즘이 어떻게 제도권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게 됐는지 거시적인 시각에서 살펴보려 한다. 특히, 세계적인 인기를 얻어 '록스타 경제학자'로 불리는 프랑스의 토마 피케티의 관점을 통해 극우 포퓰리즘 정치의 흐름을 살펴볼 것이다. 글의 상당수는 그의 신간 ⌜평등의 짧은 역사⌟와 2020년작 ⌜자본과 이데올로기⌟를 참고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도널드 트럼프를 '극우'로 지칭하는 문제에 대해서 짚으려 한다. 통상 극우(Far-right) 정치는 인종이나 성별 등에 덧씌워진 혐오를 동원해 인기를 얻는 방식을 택한다. 극우는 자유무역과 세계화처럼 기존의 보수가 내세웠던 가치가 아니라 자국우선주의와 보호무역을 옹호한다. 또한 극우는 기존 보수를 기득권, 엘리트주의자라고 비판하면서 등장해 자신을 기존의 정치 세력과 달리 다른 새롭고 깨끗한 사람, 기존의 질서를 뒤엎을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점에서 트럼프는 극우라고 정의할 만하다. 노동자의 정당에서 고학력자의 정당이 된 민주당 토마 피케티는 극우 포퓰리즘이 나타나고 득세하게 된 시기를 199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로 봤다. 1950년대에서 1980년대에는 정치에서 부자와 빈자의 '계급'이 중요한 갈등 요인이었는데 1990년대부터 전형적인 좌우 구도에 변화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1990년부터 2020년대로 이어지는 시기 동안 진보 정당은 '브라만 좌파'가 됐고, 보수 정당은 '상인 우파'의 정당이 됐다. 보수 정당은 전통적으로 돈 많은 이들, 자본가, 상인들의 정당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부자의 정당이다. 변화한 건 진보 정당이었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가난한 사람들, 서민, 노동자 계층을 대변하던 진보 정당이 1990년부터는 브라만(사제 계급), 그러니까 고학력자들의 당이 됐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뿐 아니라 프랑스, 영국 등 유럽 각국에서 진행됐다. 토마 피케티는 이런 주장을 데이터를 통해 뒷받침한다. 1950년대와 1960년대 고학력인 사람들 중 다수는 공화당에 투표했다. 그런데 2000년대와 2010년대에 석사, 박사 학위 소지자, 의사나 변호사 자격증을 딴 사람들 중 다수는 민주당을 지지한다. 아래 표는 학력과 민주당에 투표한 비율을 비교한 것이다. 나이나 성별, 가족 사항, 소득, 자산, 인종과 관련해서는 통제 변수를 반영한 그래프다. 대학원에서 고등교육을 받았거나 자격증을 통해 전문직이 된 고학력자들은 1990년대 이후 점차 공화당보다 민주당을 지지하게 됐다. 그러면서 민주당은 '브라만 좌파', 그러니까 고학력 전문직들의 정당이 됐다. '브라만 좌파'는 '상인 우파'와는 차이가 있다. 우선 브라만 좌파는 학력과 지식, 인적자본의 축적을 지향한다. 재능이나 노력을 통해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능력주의(meritocracy)가 이들의 정서에 깔려 있다. 이들은 고학력인 만큼 소득이 높은 편이다. 반면에 상인 우파는 화폐나 금융 자본의 축적에 의존하는 이들이다. 이들 계층은 특히 자산이 높다. 고학력이 좋은 직업으로 이어져 고소득을 얻고, 고소득이 쌓여 자산이 높아진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연결되지만 중점을 두는 부분이 다르다. 단순화하면 브라만 좌파는 변호사나 실리콘밸리의 개발자와 같은 자수성가형 전문직, 상인 우파는 전통적으로 자산이 많았던 자본가, 기업가를 떠올리면 된다. '브라만 좌파'가 트럼프를 만들었다 미국 민주당이 브라만 좌파의 정당이 됐다고 해서 어떤 점이 나쁠까. 토마 피케티는 민주당이 고학력 고소득자의 정당이 되면서 노동자층으로부터 외면받았다고 본다. 2010년대 이후 민주당은 가난하고 불우한 처지에 놓인 이들보다 새로운 고학력 특권 계급에 더 관심을 갖는다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게 됐다. 아래 표를 보면 트럼프가 당선된 2016년 대선이 있던 시기, 미국 역사상 최초로 소득 상위 10% 유권자의 다수가 공화당보다 민주당을 지지하게 됐다. 민주당이 고학력 전문직의 지지를 받으면서 전보다 더 시장 친화적인 정책을 내세우고, 고소득자에게 세금을 많이 걷는 것에는 부담을 느끼게 됐다는 것이다. 민주당이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주저하게 되면서 이를 알아차린 노동 계층이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을 멈추게 됐다는 것이다. 민주당에서 사실상 버림받은 저소득 노동자층에게서 가장 먼저 일어난 현상은 투표를 하지 않게 된 것이다. 공화당과 민주당 어느 쪽도 자신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거나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체념이 커지면서 노동 계층의 투표율은 낮아졌다. 이런 체념이 분노로 변화하던 시기 이들을 동원한 것이 트럼프라고 볼 수 있다. 브라만 좌파에 민주당을 뺏겨 갈 곳 잃은 노동 계급의 마음을 얻은 건 극우 포퓰리즘이었다. 극우 포퓰리즘이 떠오른 건 세계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당제인 유럽에서는 극우 정당이 노동 계층의 지지를 받았다. 프랑스에서는 지난 7월 마린 르펜이 이끄는 극우 정당이 집권을 넘볼 정도의 득표를 받았다. 양당제인 미국에서는 공화당 내에서 주류와는 다른 트럼프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세력이 커졌고, 결국 두 차례나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멈춰 선 '평등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려면 극우 포퓰리즘의 등장을 막기 위한 토마 피케티의 해답은 진보 정당이 다시 계급 문제, 분배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것이다. 경제학자인 그는 진보 정치가 불평등 감소에 나서야 한다고 봤다. 올해 8월에 한국에 출간된 신간 ⌜평등의 짧은 역사⌟에서 토마 피케티는 제목 그대로 인류가 평등을 추구한 역사가 길지 않다고 봤다. 평등이 화두로 떠올라 '대규모 재분배'가 일어난 시기는 1914년부터 1980년 사이의 기간이다. 이 시기에는 1, 2차 세계대전이 있었고 대공황도 있었던 때다. 이 시기 상류층과 하층 사이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이 서양의 주요 국가들(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뿐 아니라 일본, 러시아, 중국, 인도 등에서도 현격히 감소했다. 1800년대까지만 해도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 사이의 불평등이 훨씬 컸는데 1914년 이후 재분배가 일어난 건 '사회적 국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19세기 말부터 사회주의의 이념이 퍼지고 노조가 집단행동을 벌였다. 세계대전과 대공황도 세상을 뒤엎어야 한다는 혁명의 분위기에 불을 지폈다. 피케티는 양차대전의 시기인 1914년부터 1945년까지 노동과 자본의 권력 관계가 이전과는 완전히 뒤바뀌었다고 봤다. 이러한 영향으로 사회적 국가, 복지 국가 이념이 떠오르면서 소득과 상속에 대해 강력한 누진세가 도입됐다. 복지 국가를 지향하는 각국 정부는 잘 살고 잘 버는 사람들에 대해 누진적으로 세금을 걷었고, 걷은 세금을 교육과 의료 분야, 고용보험과 같은 사회보장 정책에 적극적으로 지출을 하게 됐다. 이로 인해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이 완화되었다는 게 피케티의 연구 결과다. 이런 사회적 국가의 불평등 완화로 가장 덕을 본 건 중산층이다. 피케티의 분류에 따르면 상층은 자신의 재산을 대부분 금융 자산으로 가지고 있고, 하층은 대부분을 현금으로 가지고 있다. 중산층은 자신의 재산을 대부분 부동산 자산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금융 자산도 일부 소유하고 있는 계층이다. 괜찮은 일자리에서 하루하루 일하며 월급을 받아서 생활하는 이들이 중산층이라고 볼 수 있는데, 복지 국가의 탄생이 두터운 중산층을 만든 것이다. 문제는 1980년대 이후 불평등이 완화되어 오던 흐름이 멈췄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레이건 대통령, 영국에서는 마거릿 대처가 집권하던 시기인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라고도 불렸던 흐름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피케티는 1980년대 공화당의 레이건 집권 이후에 민주당의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가 집권한 적 있지만 이들도 레이건주의를 기본 전제로 깔고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책을 폈다고 봤다. 이런 점에서 1990년대 이후의 미국 민주당이 브라만 좌파가 됐다고 비판했다. 토마 피케티는 진보 정치가 다시 적극적인 평등을 내세워야 한다면서 추진한 정책으로 더 강력한 누진세와 기본소득, 기본자산을 꼽았다. 현대 선진국은 대부분 어느 정도 누진적인 조세 제도를 사용한다. 피케티는 같은 누진세라도 누진성의 정도에 따라 불평등을 완화하는 효과에 차원이 다르다고 봤다. 미국을 보더라도 1930년대에서 1950년대에는 소득 상위 0.01%의 초고소득자에 7~80%의 누진세를 적용했었는데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흐름에 따라 2020년대까지는 같은 초고소득자에 30% 안팎의 실효세율이 적용된다. 피케티는 다시 정치가 불평등을 완화하는 흐름으로 되돌아가 고소득자에 80%에게 가까운 누진세를 매겨야 한다고 봤다. 누진세를 통해 높은 소득과 높은 자산을 가진 사람들에게 걷은 돈으로는 모든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현금성 지원을 해주는 보편적인 기본소득을 도입해 볼 수 있다고 봤다. 또 기본소득과 함께 25세가 되는 청년에게 기본자산을 주자고 주장했다. 상속에 대해 누진세를 강하게 적용해 걷은 다음에 여기에서 모은 세금을 모든 청년들에게 사회가 일종의 상속을 해주자는 아이디어다. 쉽게 말하면 부모를 잘 만나서 거액을 상속받아 출발점부터 앞서나간 사람들의 돈을 거둬서, 부모가 가난해 사회에 처음 나왔을 때 빈털터리로 시작하는 청년이 없도록 하자는 취지다. 피케티는 프랑스 기준 성인 1인당 평균 자산의 60%에 해당하는 금액(1억 8천만 원가량)을 기본자산으로 청년에게 나눠줄 수 있다고 봤다. 프랑스의 진보적인 경제학자의 주장인 만큼, 이런 아이디어들이 너무 급진적이고 공산주의에 가깝지 않느냐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피케티는 소련이나 중국과 같은 전체주의적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 한결같이 비판한다. 피케티의 연구 방식도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과는 거리가 멀다. 실제 피케티가 말한 대안인 기본소득과 기본자산의 경우 한국의 더불어민주당에서도 유력한 정치인들이 주장하고 논의된 바 있는 만큼 전혀 현실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토마 피케티의 주장의 핵심은 1980년대 이후에 멈춰버린 평등의 역사를 다시 진행시키자는 것이다. 이 과정을 이끌어갈 진보 정치의 역할이 중요하다. 샌더스의 쓴소리 미국 민주당에도 고학력 전문직보다 저소득층, 일하는 이들을 위한 정책을 더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룹은 존재한다. 엘리자베스 워런이나 버니 샌더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같은 정치인이 대표적이다. 특히 스스로를 '민주적 사회주의자'로 규정하는 버니 샌더스의 경우 2016년 대선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힐러리 클린턴이 55%, 버니 샌더스는 43%를 득표하면서 힐러리가 민주당의 대선 후보가 되었고, 본선에서 트럼프에게 패배해 정권을 넘겨주게 됐다. 피케티는 2016년 민주당 경선에서 사회주의자를 자칭하고 민주당 소속이 아닌 무소속으로 정치를 해온 샌더스가 주류 언론의 막강한 지지를 받는 힐러리 클린턴과 거의 대등한 승부를 벌였다는 점에서, 미국 민주당 지지자들에게는 여전히 평등주의적 가치를 지향하는 흐름이 존재한다고 있다고 봤다. 버니 샌더스(좌)와 토마 피케티(우)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가 다시 당선된 직후, 버니 샌더스는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버니 샌더스는 "노동 계급을 버린 민주당이 노동 계급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처음에는 백인 노동 계급이었고 이제는 라틴계, 흑인 노동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버림받았다. 민주당 지도부가 현상 유지를 옹호하는 동안 미국 국민은 분노하고 변화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국민들이 옳다"고 했다. 그러면서 샌더스는 "민주당을 장악하고 있는 돈 많은 이해관계자나 고액 연봉을 받는 정치 컨설턴트들이 비참한 선거를 두고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수천만 명의 미국인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정치적 소외감을 이해할 수 있을까"라고 밝혔다. 앞서 살펴본 토마 피케티와 미국 민주당에 쓴 소리를 한 버니 샌더스는 공통적인 지적을 하고 있다. 하지만 민주당의 주류가 된 브라만(사제 계급)이 트럼프 당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앞으로 정책과 노선의 변화를 이뤄낼지는 미지수다. 디자인 : 최혜지
파편화된 뉴스는 이제 그만, 이슈의 맥락을 읽는 재미를 담았습니다. ✏️ 뉴스쉽 네 줄 요약 · 2010년대 미국에서는 인종 차별, 성 차별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워크(Woke, 깨어있음)'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 여성, 흑인, 성소수자, 장애인 같은 집단 정체성에 기반한 정치를 '정체성 정치'라고 하는데, 미국 민주당에서 정체성 정치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 점차 정치적 올바름을 강조하는 '워크' 운동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뺏는다는 반발이 커졌고, 결국 혐오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기도 했습니다. · 최근 미국 진보 진영에서는 트럼프 당선에 대한 반성으로 '정체성 정치'보다는 다시 경제 문제, 부의 재분배 문제로 돌아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몇 주 전 유명 래퍼 카니예 웨스트(Ye)가 방한해 리스닝 파티를 연 것이 화제가 됐다. 국내 힙합 팬들은 그가 예정에 없던 라이브로 74곡을 부른 것에 환호했지만, 카니예 웨스트는 미국에서 끝없는 설화를 일으켜 많은 이들에게 '캔슬(cancel, 팔로우 취소)'된 바 있다. 카니예 웨스트는 "히틀러와 나치에게도 좋은 점이 있다"라거나 "흑인들이 노예가 되기로 선택했다"는 등 혐오 발언을 해 트위터(현 X)에서 여러 차례 정지됐고, 네티즌의 팔로우 취소는 물론 광고와 콜라보레이션이 줄줄이 끊어졌다. 카니예 웨스트의 사례처럼 미국에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표현을 쓴 사람을 비판하고 사회적으로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배척하는 '캔슬 컬처(취소 문화)'가 존재한다. 여성이나 흑인, 성소수자나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를 차별하고 혐오하는 발언이 비판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양성이 존중받는 현대 사회에서 '정치적 올바름'은 당연히 체화되어야 할 덕목이 됐다. 문제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강조가 극단적으로 갔을 때 반발 또한 크다는 점이다. 미국 정치, 특히 진보 진영에서는 여성이나 흑인처럼 자신의 집단 정체성에 기반하는 '정체성 정치'가 중요한 이슈였다. 이번 뉴스쉽은 '정체성 정치'가 진보 진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다룬다. '워크'와 '캔슬 컬처(취소 문화)' 미국에서 '워크(woke, 깨어있음)'라는 단어는 2010년대와 2020년대를 거치며 인기를 얻었다. 주로 진보 진영이나 인종 차별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2012년부터 시작된 BLM(Black Lives Matter,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시위와 함께 이 단어가 떠올랐는데, 2020년 흑인 남성인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하자 BLM 시위는 극에 달했다. 워크는 인종 차별뿐 아니라 젠더 문제 등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개념으로 확장됐다. 워크가 인기를 얻으면서 대학이나 직장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발언을 한 사람들은 매장당하거나 해고를 당했다. 혐오 발언이나 성희롱을 한 경우 비판을 받거나 징계를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데, 문제는 발언의 기준이 점점 더 높아졌다는 것이다. 「잘못된 단어」의 저자 르네 피스터는 2020년대로 오면서 미국에서 혐오 발언의 범위가 넓어지고, 허용 한계선이 너무 빠르게 바뀌어서 선의를 가진 사람들조차 거의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하나의 사례로 2020년 12월 시카고 일리노이대학 법학 교수인 제이슨 킬본은 강의에서 직장 내 차별을 다뤘다. 한 여성이 직장 동료에게 언어적 모욕을 당한 사례를 들면서 흑인에 대한 욕설을 "n......"이라고 축약했다. 그런데 법학과 흑인대학생회가 축약된 n 워드를 보기만 하는 것도 "정신적 테러"라고 항의했고, 대학은 킬본 교수를 임시 정직시켰다. '정체성 정치'에 몰두해 트럼프 탄생시킨 민주당? 여성단체, 흑인단체 등 당사자 단체가 스스로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목소리 내는 것은 자연스럽다. 역사적인 진보를 이끌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치권, 특히 미국 민주당이 보편적인 갈등인 계급 문제, 불평등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 정치'에 몰두하게 되면서 가져온 부작용은 존재했다.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이라는 문제다. 트럼프라는 독특한 사람이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건 기존의 지지층인 백인 노동계층이 민주당에서 트럼프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하나의 이유로 꼽히는 건 민주당의 '정체성 정치'다. 민주당이 다양성과 인종 문제, 젠더 문제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처럼 다루면서 하층 노동자에게 심리적 반발을 샀다는 관점이다. 트럼프 직전의 대통령이자 민주당 대통령인 오바마는 당선될 당시 흑인 정체성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오바마는 대통령 선거운동에서 백인 미국인이 겁을 먹지 않게 하려고 심할 정도로 주의를 기울였다. 선거운동 중에 오바마는 미국의 흑인 커뮤니티를 비판하기도 했고 그 때문에 인종차별주의자에게 표를 구걸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2008년 오바마는 대통령이 됐고,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됐다. 즉, 오바마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흑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고 흑인 최초의 대통령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거운동에서는 보편적인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려는 화법을 사용했다. 오바마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워크'에 대한 비판을 하기도 했다. 그는 "해시태그를 달고 '나는 이렇게 정치적으로 깨어있다'고 자만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누군가를 잘못됐다고 지적하는게 액티비즘은 아니다"고 지적했다. 역사는 선형적으로 진보하지 않는다. 발전 과정에서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생긴다. 여성이나 흑인, 성소수자의 정체성 정치가 진보 진영에서 화두가 되면서 반작용으로 이에 비판적인 보수의 움직임이 나왔다. 정치적 올바름을 강요하는 게 지나치다, 오히려 여성이나 흑인 등 소수자가 더 대우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백래시(backlash, 반동)'가 생겨났고, 이 흐름이 혐오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도록 만드는 데 일조했다.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또 다른 반작용으로 '워크' 운동을 강화시켰다. 즉, 미국 정치가 정치적 올바름을 강조하는 진보와 이에 질려버려 혐오 발언을 내뱉는 보수로 극단화됐다. 2015년 트럼프 당선 이후 미디어에서 워크 단어에 대한 언급이 급증하기 시작했고,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과 함께 극에 달했다. 2024년에 트럼프는 여전히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됐고, "이민자가 개와 고양이 먹는다"는 혐오 발언을 하고도 당당하다. 진보 유권자 입장에서 트럼프는 마땅히 '캔슬'되어야 할 사람이지만, 트럼프는 미국 인구의 절반 가까운 이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워크' 운동은 정점을 지났다 2015년 트럼프의 대선 출마를 시작으로 트럼프 정부 내내 올라갔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관심이 2021년을 끝으로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코노미스트지가 분석한 내용을 보면 대학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의견을 검열하고 비판하려는 시도가 2022년과 2023년에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인종 문제가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라고 응답한 사람의 비율도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을 정점으로 2022년과 2023년에는 낮아지는 모양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최근의 미국 민주당이 '워크' 운동에 기반한 정책이 유권자들에게 인기가 없고, 특정 인종과 관계없이 여러 인종의 연합으로 승리해 온 민주당에서 '워크'를 강조하는 건 선거적으로 무모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보았다. "문제는 경제야"... 다시 계급 정치로 정치에서 전통적인 균열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가르는 데 있었다. 미국에서 1930년대 이후에는 공화당이 가진 이들, 기업을 주로 대변한다면 민주당은 서민, 일하는 사람의 편이었다. 부자와 서민 혹은 중산층으로 나뉘어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계급 정치'다. 1968년에 유럽과 미국, 일본 등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의 영향으로 더 이상 계급 문제만 중요한 게 아니라 성 차별, 인종 차별 등 생활 속 다양한 이슈도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는데 이걸 '정체성 정치'라고 부른다. 2010년대의 미국 민주당이 정체성 정치에 집중하다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반성은 다시 경제 문제, 그러니까 계급 정치로 우선순위를 전환하려는 움직임을 가져왔다. 정체성 정치는 자신의 정해진 정체성에 기반하기 때문에 분열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을 가진다. 흑인, 여성, 동성애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이 백인, 남성, 이성애자의 지지를 설득해내기는 쉽지 않은 점이 있다. 때문에 정당이라면 보편적인 계급의 문제,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내세우고 국민의 대다수인 노동계층을 포섭하고 설득하려는 전략이 선거공학적으로도 유리하다. 지금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는 여성과 흑인이라는 소수자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부통령 시절 해리스는 이 점을 많이 부각시키는 발언을 했다. 하지만 최근 시카고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해리스는 "지구에서 가장 큰 특권인 미국인"이라며 "미국인으로서 큰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녀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특정 정체성을 두드러지게 내세우지 않고 미국인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또 눈에 띈 건 부통령인 팀 월즈와 전미자동차노조(UAW) 위원장인 숀 페인이었다. 교사와 풋볼 코치로 일했던 팀 월즈는 옆집에 한 명씩 있을 것 같은 평범한 백인 아저씨의 느낌이다. 해리스가 팀 월즈를 부통령으로 선택한 건 러스트벨트의 백인 노동계층 표를 의식해서라는 분석이 많다. 자동차노조 위원장인 숀 페인이 전당대회에서 발언한 건, 지금 미국 민주당에서 노조가 차지하는 위상을 보여줬다. 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60%가 넘는 미국인이 노조 활동에 긍정적이라고 응답해, 미국에서 노조는 1960년대 이후 가장 지지를 받고 있다. 2024년의 미국 민주당은 대선 승리를 위해서 정체성 정치보다는 계급 정치를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92년 빌 클린턴이 대선 캠페인에서 내걸었던 구호로 민주당이 돌아가고 있는 듯하다.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 (It's the economy, stupid.)" 한국의 정체성 정치는? 한국은 아직 정체성 정치가 미국처럼 제도권 정치 전면에 드러나진 않았다. 인종 갈등이나 이민자 문제가 머지않아 최대 이슈가 될 수는 있겠지만 아직 가장 중요한 정치 문제가 된 적은 없다. 하지만 제도권 정치 밖에서는 이미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사회운동이 시작되었다.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에 일어난 시위와 2018년 미투 운동을 거치며 젠더 문제가 이슈로 떠올랐다. 성소수자의 축제인 퀴어퍼레이드에 장소를 내주지 않으려는 서울시와의 갈등과 보수 기독교계의 퍼레이드 반대 시위도 일어났다. 이동권을 보장하라는 장애인단체 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놓고도 시민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이뤄졌다. 국민의힘과 민주당, 거대 양당에서는 아직 가장 중요한 이슈로는 대접받지 못했지만 소수 정당에서는 정체성 정치가 핵심적인 논쟁이 되기도 했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의 경우 전장연의 시위를 비판하면서 박경석 전장연 대표와 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여성이라도 공무원 지원자는 병역을 의무화해야 한다는 등 젠더 이슈에 논쟁거리를 던졌다. 정의당 국회의원이던 류호정, 장혜영의 경우 비동의강간죄 법안을 발의하는 등 여성, 장애인 같은 소수자의 권리 증진에 목소리를 냈다. 정의당이 2024년 총선에서 국회의원을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하면서 실패 원인을 '정체성 정치'에서 찾고, 진보 정당이 노동 중심성을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토마 피케티의 힌트 정치에서 계급이 우선하느냐, 정체성이 우선하느냐하는 문제는 일도양단으로 가를 문제는 아니다. 이전까지 계급 문제가 가장 우선되는 문제라며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나 혐오에 눈 감아온 역사는 오래됐다. 어떻게 해야 정체성 정치와 계급 정치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답은 없지만 토마 피케티의 최근작 <평등의 짧은 역사>에서 힌트를 얻어볼 만하다. 피케티는 젠더에 따라, 인종에 따라 경제적 불평등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통계를 통해 보여준다. 프랑스에서 소득 상위 1%를 얻는 사람들 중에서 여성의 비율은 1995년에 10%였는데 2020년에는 19%가 됐다. 여성의 권리가 높아졌다고 하지만, 상위 1%에서 여성 비율이 남성과 같아지려면 2107년이 되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미국에서 흑인의 평균 소득은 백인의 절반 수준이다. 1950년에 흑인은 백인 평균 소득의 54% 수준을 평균 소득으로 얻었는데, 2018년에는 56% 수준으로 올라갔을 뿐 여전히 평균적인 흑인이 백인에 비해 소득이 매우 적다. 피케티는 정체성에 기반한 차별을 고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할당제 같은 적극적 우대 조치가 필요할 수 있다고 봤다. 하지만 남녀 동수제나 인종별 할당제 같은 경우 자신이 가진 정체성을 고착화시켜 정체성들 간의 분열과 반목을 일으킬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봤다. 따라서, 정체성에 따라 존재하는 차별을 현실에서 없애기 위해서는 좀 더 보편적인 해결책을 사용해야한다는 게 그의 의견이다. 예컨대 대학 입학에서 인종별 할당을 주거나, 정치인 중에서 남녀 동수를 강제하는 정책들은 하층 여성이나 하층에 속한 인종에는 크게 의미가 없다. 대학을 다니지 못하고, 대기업에서 임원으로 오르지도 못하며, 정치인이 될 가능성은 0에 가까운 하층 여성과 흑인들은 계산원으로 웨이트리스로 청소나 가사 노동자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위해서는 할당제가 아닌 부의 재분배가 필요하다는 것이 피케티의 주장이다. 대학이나 직장에서 적극적 우대 조치를 할 때 정체성보다 소득이나 재산에 따라 할당을 하는 정책을 사용하고, 소득을 많이 벌고 자산을 많이 가진 사람과 기업에 누진세를 강하게 적용하자는 것이 그의 대책이다. 결국, 정체성 정치를 극복하는 방법 또한 보편적인 해결책, 그러니까 부의 재분배에 있다는 피케티의 주장을 진보 진영이 한 번 생각해볼 만하다. 디자인 : 최혜지
✏️ 뉴스쉽 네 줄 요약 · 트럼프의 부통령 후보로 지목된 J.D. 밴스는 트럼프와 비슷하지만 또 다릅니다. · '러스트벨트'의 가난한 백인 노동계층 출신인 밴스는 최저임금 상승 등 노동 친화적인 정책을 지지합니다. ·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투자자였던 밴스는 빅테크에 대한 강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봤고, 비트코인을 옹호했습니다. · 트럼프 이후의 공화당을 이끌어갈 밴스의 등장에 미국의 전통적인 보수와 진보 모두 당혹감과 의구심을 보였습니다. 상반기에 끝없이 올랐던 빅테크 주식이 최근 흔들리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트럼프 피격 사건 이후 정치적 불확실성도 미국 증시가 출렁이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이번 뉴스쉽에서는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면 빅테크는 어떻게 될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바이든의 부통령이었던 카멀라 해리스가 대통령이 된다면 바이든 시기의 연장선상에서 빅테크에 대한 반독점 규제가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바이든 행정부가 어떤 식으로 빅테크 규제를 해왔는지는 지난 뉴스쉽에서 다룬 바 있습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다면 빅테크 기업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까요. 바이든 정부가 해오던 기존 반독점 정책의 방향성을 완전히 뒤집을까요. 100년 가까이 이어진 미국의 반독점(Anti-trust) 전통을 이끈 건 주로 민주당이었습니다. 민주당 클린턴 행정부는 마이크로소프트가 독점을 통해 경쟁 기업 진출을 막는다며 반독점 소송을 진행했고, 항소법원까지 승소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거의 해체될 뻔했지만, 공화당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부시 행정부의 법무부는 마이크로소프트를 해체하지 않고 합의를 해주면서 소송을 종결했습니다. 그 뒤로 부시 행정부는 재임 8년 동안 기업에 대한 반독점 사건을 한 건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민주당이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의 성장, 소비자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대기업의 독점 행위를 규제하는 것에 적극적인 반면, 공화당은 상대적으로 대기업의 사업 활성화를 우선하는 스탠스를 취해 왔습니다. 하지만 트럼프는 전통적인 공화당의 정치인과 다릅니다. 그리고 트럼프가 부통령 후보로 지명한 40살의 상원의원 J.D 밴스는 특히 빅테크에 대한 시각이 기존 공화당과 많이 다릅니다. 이번 글에서는 트럼프의 러닝메이트 밴스를 중심으로 공화당과 빅테크의 역학관계를 살펴보려 합니다. 기업가였지만 빅테크 싫어하는 트럼프? 공화당은 일반적으로 기업 친화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트럼프는 빅테크 기업들을 썩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트럼프가 집권했던 1기 행정부의 FTC(연방거래위원회, 한국의 공정거래위원회 격)와 법무부 반독점국은 애플, 구글, 아마존, 메타에 대해 반독점법 위반으로 조사를 해 소송을 건 적이 있습니다. 예컨대 구글의 경우, 스마트폰에 구글 앱을 기본으로 깔아놓고 구글로 검색하도록 만들어 다른 경쟁 업체의 진입을 막았다는 것에 대한 소송이 트럼프 때 시작됐습니다. 트럼프와 지지자들은 이런 반독점에 대한 우려뿐 아니라 구글이 트럼프에 유리한 기사 노출을 줄이고, 정치적인 내용이 담긴 이메일을 차단하는 등 '표현의 자유'를 막는다는 생각도 강합니다. 트럼프는 트위터(현재 X)에 폭력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계정을 차단당한 뒤 자체 SNS인 '트루스 소셜'을 만든 바 있습니다. 이처럼 트럼프가 페이스북(메타)과 트위터, 구글 등 빅테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있는 건 큰 기업을 쪼개고 경쟁을 시켜야 소비자에게 도움이 된다는 반독점 사상의 영향이라기보단 표현의 자유 옹호에 있습니다. '트럼프 현상'은 민주당과 진보에 대한 반발로 터져 나왔습니다. 백인 하층 노동자를 중심으로 흑인과 여성,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대 정책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습니다. 이들이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인 발언을 하면 PC(정치적 올바름)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SNS에서 신고당하거나 차단당했습니다. 이런 분노는 음모론으로 이어졌습니다. 빅테크 기업들이 검열을 통해 진보적인 목소리만 크게 키우고 자신들의 표현을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이 커졌습니다. 워싱턴의 정치인들,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고 있다는 불만이 커져갈 때쯤 트럼프가 등장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비난해왔던 백인 하층 노동자의 요구를 트럼프가 속 시원하게 대변해 줬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정치인은 혐오 발언, 차별적 발언으로 논란이 될까 하지 않았던 얘기도 트럼프는 서슴없이 내뱉었습니다. 백인 하층 노동자들의 지지를 토대로 2017년 트럼프는 대통령이 됐습니다. 트럼프와 그 지지자들은 이러한 이유로 워싱턴의 기존 정치인들, 주류 신문과 방송, 그리고 SNS와 온라인 플랫폼을 운영하는 빅테크 기업들에 대한 불신이 있습니다. 트럼프 이후의 공화당 - '차기 권력' J.D. 밴스 앞서 말한 '트럼프 현상'을 책으로 써서 스타가 된 사람이 트럼프의 부통령 후보 J.D. 밴스입니다. 그가 쓴 자전적 이야기 <힐빌리의 노래>는 어떻게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답을 알려줬습니다. 이 책은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고, 넷플릭스에서 영화화도 됐습니다. 밴스는 스스로가 백인 하층 노동자 출신입니다. 한때 제조업으로 잘 나가던 마을이었지만 사양 산업이 되면서 지역 전체가 쇠락한 '러스트벨트(rust belt)'인 오하이오주 미들타운에서 컸습니다. 이혼으로 아버지의 도움을 받지 못했고, 여러 '새아버지 후보'를 만나면서 마약 중독자가 된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밴스의 할아버지는 지역 경제를 떠받쳤던 암코라는 철강회사를 다니던 호시절도 있었지만, 밴스가 자랄 때쯤 암코가 망하면서 이들 가족은 근근이 먹고살게 됐습니다. 제조업 노동자였던 밴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항상 열렬한 민주당 지지자였습니다. 민주당은 1930년대 F.D.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연합 이후로 '노동자의 당'이었기 때문입니다. 밴스의 할아버지, 할머니 같은 이들이 2016년 대선에서는 트럼프에게 투표했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민주당이 노동자를 위한 당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008년에 당선된 오바마는 트럼프와 극단에 있는 듯 보입니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어서 당선 자체가 역사이자 정의처럼 느껴집니다. 고학력 전문직에 멋진 외모도 더해졌습니다. PC(정치적 올바름)한 언어로 연설까지 유려하게 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하지만 오바마의 연설이 힐빌리(러스트벨트의 백인 하층 노동자)들에게는 와닿지 않았습니다. 밴스는 <힐빌리의 노래>에서 영부인인 미셸 오바마가 어린아이들에게 패스트푸드를 먹이지 말고 채식을 위주로 해야 한다고 발언한 것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러스트벨트에 사는 가난한 백인 노동자들은 점심은 타코벨에서 저녁은 맥도날드에서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설탕에 절여지고 기름진 음식들과 콜라를 매일 마셨습니다. 싸고 맛있고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이들도 자신과 아이들이 먹는 정크푸드가 몸에 좋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대안이 보이지 않고 채식 위주의 건강한 음식을 먹을 경제적,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패스트푸드를 먹을 뿐입니다. 이들에게 미셸 오바마의 발언은 한가한 소리, 현실을 모르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힐빌리들이 생각할 때 '노동자의 당'이었던 민주당은 이제 월스트리트의 금융 종사자, 실리콘밸리의 IT 기업가, 변호사와 의사 같은 '전문직의 당'이 됐습니다. 하버드대학교 로스쿨에서 <하버드 로 리뷰> 편집장을 할 정도로 똑똑하고 유려하게 말을 잘하는 민권 변호사 출신의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이를 상징했습니다. 쇠락한 도시에서 육체노동을 하는 백인 노동계층은 숫자는 많았지만 교육 수준이 낮고, 돈과 권력도 없어 오피니언 리더는 되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보기에 민주당은 브라만(사제계급) 좌파가, 공화당은 상인 우파가 장악했습니다. 민주당은 현대의 사제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 전문직의 당이 됐고, 공화당은 원래부터 잘 사는 기업가들의 당이 됐습니다. 민주당도, 공화당 중 누구도 백인 하층 노동계급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불만이 가득할 때 앞서 말했듯 트럼프가 탄생했습니다. 트럼프는 민주당의 위선을 비난하지만, 기존 공화당 정치인들도 비판했습니다. 미국 공화당 부통령 후보 J.D. 밴스 (사진=AP, 연합뉴스) 워싱턴에 있는 정치 엘리트들은 모두 썩었다는 포퓰리즘, 주류 언론과 SNS를 운영하는 빅테크가 우리의 목소리를 검열하고 차단한다는 음모론, 기존 시스템을 뒤엎어야 한다는 분노가 뒤섞여 미치광이처럼 보일 수 있는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습니다. 트럼프를 뽑은 백인 노동자들이 보기에 민주당은 이제 흑인과 이민자,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같은 '한가한 논쟁'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또한 민주당 정부 때 추진한 복지 정책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정부로부터 돈만 받는 '복지 여왕'이 항상 육체노동을 하지만 궁핍한 자신들보다 더 나아 보인다는 생각도 더해졌습니다. 밴스는 이처럼 민주당을 지지하던 노동계층이 왜 공화당의 트럼프를 지지하게 되었나 하는 설명을 책으로 내놓으면서 유명세를 탔습니다. 지난해에는 자신의 고향 오하이오주의 상원의원이 됐고, 올해는 트럼프의 부통령 후보가 됐습니다. 미국 부통령은 권한은 적고 상징적인 의미에 그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차기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는 '미래 권력'의 의미를 가지기도 합니다. 대통령이 된 바이든은 오바마의 부통령이었고, 대통령 후보가 된 해리스는 바이든의 부통령이었습니다. 게다가 밴스는 40살의 젊은 부통령입니다. 지난해 처음 의원이 된 정치 신인이 트럼프의 부통령이 되면서 이제는 부인할 수 없는 공화당의 차기 권력이 됐습니다. 그래서 밴스가 누구이고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면 트럼프 이후 공화당의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트럼프와 밴스의 공통점 밴스는 트럼프와 마찬가지로 민주당의 위선에 대해 비판합니다. 트럼프의 지지층인 러스트벨트의 백인 노동계층에 지지를 호소합니다. 또 밴스는 트럼프처럼 막말을 하는 편입니다. 기존 정치인이라면 지켜야 할 발언의 선도 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가장 논란이 된 건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게 "자식 없는 캣 레이디(고양이 기르는 여성)"라고 언급했던 겁니다. 민주당의 정치인들이 자식을 낳지 않고 혼자 살면서 반려동물을 기르거나 성소수자로 동성혼을 하는 등 이른바 '정상 가족'을 일궈 공동체에 공헌을 하지 않는다는 비판입니다. 그런데 해리스는 자식이 없지 않습니다. 남편이 전처에게서 낳은 자녀 2명을 함께 기르고 있는데, 자신이 직접 출산한 자녀가 아니라고 "자식이 없다"고 표현한 게 논란이 된 겁니다. 이처럼 밴스의 발언은 PC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또 밴스는 "나는 해병대에서 복무했고, 사업도 시작했는데 해리스는 수표를 모으는 것 말고 대체 무슨 일을 했느냐"며 해리스를 비판했습니다. 흙수저 출신인 밴스는 오하이오 주립대에 들어간 뒤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해병대에서 복무했고, 이라크 파병도 다녀왔습니다. 자신의 남성성과 국가에 대한 공헌을 내세우면서 해리스는 '온실 속 화초'로 깎아내리는 발화 방식을 택했습니다. 밴스의 이런 발언들은 트럼프가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려 내뱉는 말들과 겹쳐 보입니다. 정책적인 측면에서도 밴스는 트럼프처럼 미국 우선주의와 보호무역을 옹호합니다. 정치를 시작하기 이전에 밴스는 트럼프를 두고 '히틀러'라고 비난하기도 했지만, 상원의원이 돼 정치를 시작한 이후 밴스는 '트럼프 주니어'처럼 행동하는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공화당원이 됐습니다. 밴스와 트럼프는 '안티 빅테크(Anti-Bigtech), 프로 크립토(Pro-crypto)'라는 면에서도 공통적입니다. 빅테크를 싫어하고 비트코인 같은 가상화폐를 지지합니다. 사실 대통령 때의 트럼프는 비트코인에 부정적이었는데, 이번 대선 국면에서 갑자기 비트코인 옹호론자가 됐습니다. 트럼프가 친비트코인으로 돌아선 건 실리콘밸리로 대표되는 IT 기업 종사자들의 마음을 사기 위한 정치공학적인 이유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실리콘밸리와 캘리포니아주는 전통적인 민주당 강세 지역입니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는 실리콘밸리에서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들이 나왔습니다. '페이팔 마피아'들 중 일부가 트럼프를 지지한 겁니다. 페이팔을 만든 피터 틸,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유명한 실리콘밸리 팟캐스트 ALL IN의 진행자인 데이비드 삭스가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를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2016년 러스트벨트 백인 하층 노동자의 지지를 업고 대통령이 된 트럼프는 이제 실리콘밸리의 일부도 포섭하려 하고 있습니다. 실리콘밸리 투자자 출신인 J.D. 밴스를 부통령에 앉힌 것도 실리콘밸리의 유권자들을 겨냥한 측면도 존재합니다. 트럼프와 밴스의 차이점 실제의 트럼프는 자신의 지지자들과 간극이 있습니다. 트럼프는 쇠락한 제조업 도시 출신도, 하층 노동계급 출신도 아닙니다. 트럼프는 부동산 재벌의 아들로 뉴욕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러스트벨트의 가난한 백인 노동자들 지지를 받지만, 사실은 태어나면서부터 한 번도 가난을 겪어본 적이 없고 지금도 마라라고의 고급 저택에서 살고 있습니다. 대신 백인 노동자들의 대변인으로 연기를 잘하고 있을 뿐입니다. 반면 밴스는 진짜입니다. 러스트벨트 출신 흙수저로 자랐습니다. 무너져 내린 미국의 제조업과 함께 부서진 가정과 마을 공동체에서 힘겹게 컸습니다. 밴스는 실리콘밸리 출신 정치인이기도 합니다.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됐지만, 주로 실리콘밸리 스타트업과 함께 일하고 투자하는 사업을 해왔습니다. 밴스는 트럼프보다 훨씬 더 매운맛 '안티 빅테크, 프로 크립토'입니다.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투자자 출신인 밴스는 빅테크의 독점을 막고 해체시켜야 신생 스타트업이 성장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거대 기업이 된 구글을 해체할 때가 됐다고 발언을 하면서 빅테크에 대해 더욱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바이든 정부가 임명한 리나 칸 FTC 위원장을 지지해 '칸보수주의자(리나 칸을 지지하는 보수 정치인)'로 불리기도 합니다. 버니 샌더스나 엘리자베스 워렌처럼 민주당 내에서도 진보적인 이들이 지지하는 새로운 반독점 원칙(자세한 내용은 이전 뉴스쉽)에 밴스는 동의하는 겁니다. 가상화폐에 대해서도 트럼프는 실리콘밸리를 사로잡을 정치공학적 이유로 연기를 하는 듯 보이지만, 밴스는 진심입니다. 비트코인에 투자를 하진 않은 것으로 알려진 트럼프와 달리 밴스는 공개된 재산을 보면 10만~25만 달러(1억~3억 5천만 원쯤) 사이의 자산을 비트코인으로 보유하고 있습니다. 트럼프도 밴스도 백인 노동계층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밴스는 친노동 정책에 더 적극적입니다. 공화당과 트럼프는 기본적으로 보수인 만큼 친기업적이고 이는 노동자의 권리 확대와는 상충됩니다. 그런데 밴스는 최저임금을 시간당 20달러로 인상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도 최저임금을 15달러 수준으로 올리려 했고, 민주당에서 가장 진보적인 정치인인 버니 샌더스도 17달러를 요구했는데 그 보다 더 많은 금액을 밴스가 주장한 겁니다. 밴스는 망가진 백인 노동자들의 삶을 되찾기 위해서는 정부가 강하게 개입해야 한다고 봅니다. 밴스는 정부가 일하는 대가를 높여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공화당이 추진하는 노조 권한을 약화하는 법(Right to work Laws)에는 반대합니다. 법인세를 인하해 주는 친기업 정책에도 반대합니다. 전통적인 공화당 정치인뿐 아니라 트럼프보다 훨씬 더 친노동 성향에 가깝습니다. 아마도 '진짜' 백인 노동계층 출신인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진보에겐 '변절자', 보수에겐 '민주당 지지자'…양쪽에서 비판받는 밴스 J.D. 밴스(오른쪽)와 그의 부인 우샤 밴스 (사진=AP, 연합뉴스) 정치권 입문 1년 만에 부통령 후보가 된 밴스는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2016년의 트럼프가 그랬었습니다. 미국 진보에게는 트럼프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건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이었고, 보수에게도 트럼프는 별종이었습니다. 전통적인 공화당 엘리트들에게 트럼프는 너무 가볍고 위험해 보였습니다. 이제 전통적인 보수는 밴스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습니다. 리나 칸처럼 바이든 정부가 임명한 '힙스터 반독점주의자'를 지지하는 밴스가 원래는 민주당 성향이었다고 비판합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밴스가 보인 친노동적 면모, 거대 기업에 대한 반독점 규제 주장이 우려스럽다고 보고 트럼프와도 인식 차이가 있다고 썼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표방하는 미국 보수의 자유시장주의와 정부의 소극적 개입과 밴스의 정치 성향은 분명한 차이가 있긴 합니다. 월스트리트저널과 폭스뉴스 등을 소유하고 있는 '미디어 황제' 루퍼트 머독과 공화당 슈퍼팩(Super PAC, 특별정치활동위원회)의 '큰 손'들이 J.D. 밴스가 부통령 후보로 되지 않도록 트럼프에게 로비를 했다는 보도도 나왔습니다. 진보 진영에서는 밴스를 '변절자'라고 비판합니다. 원래 "트럼프는 미국의 히틀러"라고 할 정도로 트럼프에 비판적이었던 밴스가 상원의원이 되면서 당내 입지를 강화하고 자신의 정치적 영달을 위해 보수로 전향했다는 시각입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8년간 밴스가 트럼프를 보는 시각이 점진적으로 변화해 왔다며, 아내 우샤 밴스와 근무연이 있는 브랫 캐버노를 트럼프가 연방대법관으로 임명한 것도 하나의 계기가 됐다고 지적했습니다. 루퍼트 머독과 월스트리트의 공화당 지지자들과 반대로 밴스를 부통령 후보로 밀어준 건 '실리콘밸리 우파'들입니다. 일론 머스크와 피터 틸 같은 IT 기업가들이 밴스를 강력하게 부통령 후보로 밀었습니다. 실리콘밸리에서 지지하는 공화당 부통령 후보라는 점에서 밴스는 이전에는 없던 캐릭터입니다. 정치권에 등장할 때 공화당의 이단아였던 트럼프가 지금은 당을 장악해 새롭게 바뀌어버렸듯, 트럼프 이후 밴스가 미국 정치와 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진보와 보수 모두 우려와 의심이 섞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문화적으로는 보수적인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지만 경제에서는 좌파적인 정책을 지지하는 J.D. 밴스는 미국 정치에 균열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디자인 : 최혜지
✏️ 뉴스쉽 네 줄 요약 ·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같은 빅테크 기업은 경쟁하지 않고 독점하려는 방식으로 이익을 극대화해 왔습니다. · 바이든 정부 들면서 '아마존 저승사자'와 '구글의 적'으로 불리는 이른바 반독점 3인방이 정부의 반독점 정책을 좌우하게 됐습니다. · 미국은 100년 록펠러 가문의 스탠더드오일 해체를 시작으로 AT&T, IBM, 마이크로소프트 등의 독점 행위를 규제해 온 역사가 있습니다. · 기업이 너무 커져 독점적인 지위를 가지게 되면 정부가 막아서야 신생 기업이 성장하고 혁신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게 미국의 '반독점 전통'입니다. 테무나 알리 같은 'C커머스'(중국 온라인 유통 플랫폼)의 한국 침투가 무섭습니다. C커머스에서 물건을 사려고 보면 이렇게 싼값에 무료 배송을 해주면 어떻게 돈을 버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업 초기에 싼 가격과 편리한 배송으로 고객을 확보하려는 전략은 C커머스가 처음이 아닙니다. 그 전에 쿠팡이 있었고, 미국에는 원조 격인 아마존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적자를 보면서까지 고객을 위한 투자를 늘려 독점적인 지위를 구축하고, 그 지위를 이용해 나중에 돈을 벌어들이는 방식입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싼 가격에 빠른 배송으로 편리하기까지 하니, 이커머스의 이런 전략이 나쁠 건 없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소비자한테 이득이 되면 독점이어도 괜찮다, 혹은 독점이 아니다.' 이것이 미국의 전통적인 반독점법(Antitrust law)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기존의 논리로는 구글, 아마존과 같은 빅테크, 플랫폼 기업의 독점을 포착할 수 없고 견제할 수도 없다는 목소리가 미국에서 커졌습니다. 이런 목소리는 '뉴 브랜다이즈 운동'이라고 불리는데 이번 뉴스쉽은 이 움직임에 대해 다룹니다. 미국 빅테크가 이익을 내는 법 "경쟁하지 말고 독점하라"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메타, 아마존. 주주들이 사랑하는 '매그니피센트 7' 주식 중 대부분이 빅테크 기업이고 온라인 플랫폼 기업입니다. 이들 기업은 필연적으로 독점하려 합니다. 테크 기업의 특성상 남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기술을 혼자 확보해야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온라인 플랫폼 기업은 많은 고객들이 자신의 플랫폼에 오랫동안 머물러야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실리콘밸리를 이끌어가는 '페이팔 마피아'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피터 틸은 저서 <제로 투 원>에서 대놓고 '경쟁하지 말고 독점하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독점은 천문학적인 이익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에 기업은 독점하려 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독점은 시장의 생태계를 파괴하고 경쟁의 순기능을 없애기 때문에 정부는 독점을 막아야 합니다. 정부가 나서서 독점을 막고, 중소기업과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 미국의 반독점법입니다. 유럽에서는 경쟁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국내에선 공정거래법이라고 부릅니다. '아마존 저승사자'와 '구글의 적'…바이든 정부의 반독점 3인방 '빅테크의 독점을 막아야 한다. 마이크로소프트와 메타(페이스북), 아마존의 문어발식 확장을 막아야 한다.' 이런 주장이 미국 정치권에 본격적으로 나온 건 2020년 민주당 대선 경선입니다. 바이든이 당선돼 결국 대선에서 트럼프를 이긴 이 선거에서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이 민주당 경선 후보로 나왔습니다. 엘리자베스 워런은 버니 샌더스만큼 좌파는 아니지만 민주당 내 진보적인 목소리를 담당하면서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으로 활약해 왔습니다. 2020년 민주당 경선 당시 엘리자베스 워런은 아마존을 쪼개는 계획을 대선 공약으로 발표해 호응을 얻었습니다. 학계에서 워런과 입장을 같이 하며 플랫폼에 대한 독점 규제가 필요하다고 외친 3인방이 있었는데, 바이든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들이 미국 정부의 반독점 정책을 좌우하는 자리로 임명됐습니다. '반독점 3인방' 중 첫 번째는 리나 칸입니다. 2021년 당시 32살의 나이로 바이든 정부의 연방거래위원회(FTC, 한국의 공정거래위원회 격) 위원장에 임명됐습니다. 영국 런던에서 파키스탄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리나 칸은 미국으로 이민을 왔고 2017년 예일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했습니다. 로스쿨을 졸업하면서 쓴 박사논문이 리나 칸을 스타로 만들었습니다. '아마존의 반독점 역설(Amazon's Antitrust Paradox)'이라는 제목의 96페이지짜리 논문인데, 2020년 민주당 대선 경선에 나선 엘리자베스 워런이 이 논문을 인용하면서 빅테크 규제를 주장했습니다. 논문의 요지는 아마존의 '약탈적 가격 전략'을 기존의 반독점법 원리가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반독점법 원리는 시카고학파와 법률가인 로버트 보크가 만들어낸 '소비자 후생' 기준을 따랐습니다. 시카고학파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신자유주의 흐름과 함께 미국 경제학의 주류가 됐는데, 반독점법에서도 같은 흐름이 있었습니다. 이들 시카고학파는 독점의 기준을 '소비자 후생'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기준을 세웠습니다. 어떤 기업의 행태가 결과적으로 소비자에게 싼 가격을 가져오면 좋은 것으로 보고, 자신의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가격을 비싸게 올리면 나쁜 것으로 봐서 정부가 규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싼 게 장땡'이라는 시각입니다. 이런 전통적 시각으로 봤을 때 아마존은 독점으로 규제할 필요가 없습니다.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아마존에서 싼 가격에 물건을 구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리나 칸은 소비자 후생, 그리고 싼 가격이라는 기준으로는 플랫폼의 독점이 가져오는 악영향을 포착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마존이 적자를 보면서도 싼 가격에 파는 전략을 사용함으로 인해 경쟁하는 업체들이 살아남지 못하도록 하고 아마존에 입점한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인들에게 정당한 가격을 쳐주지 않고, 플랫폼에서 일하는 근로자에게도 임금을 제대로 치루지 않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아마존의 사업 전략이 나쁠 게 없지만, 시장의 경쟁 시스템을 구조적으로 보고 소비자가 아닌 다른 행위자들의 관점에서는 아마존의 전략이 악영향을 끼친다는 겁니다. 또한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아마존이 적자 전략을 통해 독점적 지위를 구축한 뒤에 소비자 부담을 일방적으로 올릴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합니다. 이런 폐해들을 전통적인 반독점법의 원리가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리나 칸의 논문입니다. 이 논문을 통해 리나 칸은 '아마존 저승사자'로 불렸습니다. 3인방 중 나머지 두 명은 조나단 캔터와 팀 우입니다. 반독점을 전문으로 활동하며 '구글의 적'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던 변호사 조나단 캔터는 바이든 정부에서 법무부 반독점국 국장이 됐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사부장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전속고발권을 가지고 1차 조사를 담당하는 한국과 달리 미국은 반독점과 관련해 연방거래위원회(FTC)와 법무부 반독점국(Anti-Trust Division)으로 이원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연방거래위원회는 행정 처분을 하고, 법무부 반독점국은 수사를 하는 식입니다. 바이든 정부 들면서 정부의 반독점 컨트롤타워 두 곳의 장을 플랫폼 기업 규제를 앞장서 주장해왔던 법률가들이 차지하게 됐습니다. 팀 우는 '뉴 브랜다이즈 운동'의 이론가였습니다. 컬럼비아대학교 로스쿨 교수였던 팀 우는 미국의 반독점 역사를 망라하면서 플랫폼 규제의 필요성을 정리한 저서를 썼습니다. 한국에는 『빅니스』라는 이름으로 번역됐는데 원제는 '거대함의 저주(The curse of Bigness)'입니다. '망 중립성'이라는 개념을 만든 사람이기도 합니다. 바이든은 팀 우 교수를 국가경제위원회(NEC)에서 기술과 반독점 정책을 담당하는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이로서 뉴 브랜다이즈 운동의 대표적인 법률가 3명은 바이든 정부의 반독점 정책을 이끌게 됐습니다. 법원에서 막힌 반독점 소송…트럼프 정부가 들어선다면? 민주당 바이든 정부와 반독점 3인방은 빅테크를 견제했습니다. 연방거래위원회는 아마존이 경쟁을 억제하고 납품 업체에 자신의 서비스만 이용할 것을 강요했다고 보고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법무부 반독점국은 구글이 모든 안드로이드 폰에 앱을 탑재하도록 하고, 경쟁사의 진입을 막았다는 이유로 기소했고, 애플도 아이폰에 다른 기기와 호환이 되지 않는 앱을 깔고 앱스토어를 통해서만 다른 앱을 결제하도록 만든 것은 독점이라며 기소했습니다. 하지만 반독점 3인방의 주장과는 다르게 미국 연방대법원은 아직 시카고학파의 '소비자 후생 기준' 그러니까 전통적인 반독점법 원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때문에, 바이든 정부가 제기한 빅테크에 대한 독점 소송들이 제대로 받아들여진 사례는 아직 잘 없습니다. 또 만약에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돼 공화당 정부가 들어서면 상대적으로 기업 친화적인 정책을 통해 반독점 소송들을 취하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연방대법원에서 독점이라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반독점 3인방의 기소 자체가 빅테크 기업이 독점으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예방 효과가 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조사와 기소 자체가 빅테크로 하여금 적극적인 인수합병을 막고, 눈치를 보게 만들어 독점으로 나아가는 걸 막는다는 겁니다. 100년간 이어진 미국의 '반독점 전통' 미국이 독점 기업을 강하게 규제하는 것은 100년간 이어져 온 전통입니다. 현대에 와서는 민주당 정부가 들어설 때 독점 기업에 대한 반독점 규제를 강하게 하는 경향이 있지만, 반독점법의 본격적인 시작은 공화당의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이끌었습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1901년부터 1909년까지 미국 대통령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독점 기업의 폐해가 막 밝혀지면서 시민들 사이에서 '트러스트(Trust, 한국식으로는 재벌)'에 대한 반감이 커지던 시기였습니다. 이때는 미국에 전국적인 언론이 처음 등장하던 시기기도 합니다. 땅이 넓고 통신과 운송이 아직 발달하지 않은 데다가 연방보다는 주에 대한 정체성이 컸던 당시 미국에는 지역신문만 존재했습니다. 이때 '10센트 잡지'가 등장합니다. 10센트라는 싼 가격에 살 수 있는 잡지들은 미국에서 처음으로 연방 차원의 언론으로 등장합니다. 특히 『매클루어스 매거진』이라는 잡지가 가장 영향력이 컸는데, 여기에 소속된 기자 아이다 타벨은 3년에 걸쳐 스탠더드오일이라는 기업의 독점에 대한 탐사보도를 진행해 기사를 썼습니다. 스탠더드오일은 록펠러 가문이 소유한 석유 기업입니다. 미국 최초의 독점 기업으로 평가되는데, 독점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경쟁 업체를 사들이거나 망하게 만드는 식의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아이다 타벨은 수년에 걸쳐 록펠러 가문과 스탠더드오일의 독점 전략이 끼치는 피해를 지속적으로 보도했고, 시민들은 분노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대통령이 된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현대 미국의 반독점법의 기초를 닦습니다. 이후에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까지 독점 기업을 견제해야 한다는 흐름이 이어지면서 연방거래위원회가 설립되고, 반독점법인 클레이튼법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나치·공산주의에 맞선 미국의 자유주의 미국의 반독점 전통은 2차 대전 시기인 1940년대에도 나타납니다. 1930년대의 대공황으로 오른쪽에선 파시즘이, 왼쪽에선 공산주의가 대안적인 사상으로 떠오르던 시기입니다. 결국 독일에서는 나치가, 소련에는 공산주의가 현실에서 국가를 장악하게 됩니다. 나치와 같은 파시즘이나 공산주의의 공통점은 국가가 돈과 권력의 독점을 방치하거나 오히려 장려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나치 독일은 지멘스에 통신, 철도, 에너지 등 많은 사업을 독점하도록 지원했고, 폭스바겐을 국가를 대표하는 자동차 기업이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즉, 권력을 독점하는 권위주의 정부가 하나의 기업이 독점하도록 몰아주고 키워주는 방식으로 경제 성장을 이끌었습니다. 빠르게 성장하려는 동아시아 국가들도 이런 선택을 했습니다. 일본에는 미쓰비시, 미쓰이 같은 '자이바쯔(재벌)' 기업이 육성됐습니다. 한국의 군부 정권은 기업들을 지원해 국가의 대표 기업으로 성장시켰고, 이들은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재벌'이 됐습니다. 같은 시기 미국은 반대 방식을 택했습니다. 정치에 있어서도 민주주의를 토대로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시스템이었지만, 경제에 있어서도 한 기업이 독점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을 막았습니다. 미국의 선택은 파시즘이나 공산주의처럼 국가가 경제에 완전히 개입하는 것에 반대했지만, 국가가 시장에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는 자유방임과도 다른 흐름입니다. 팀 우 교수는 미국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역할을 '정원사'에 비유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정원사가 돼서 가지치기를 통해 기업이 독점하는 것을 막고, 시장 안에서 자유로운 경쟁을 보호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IBM의 독점에 족쇄를 채운 덕분에 애플이 나왔다 100년간의 반독점 전통 속에 규제를 당한 사례는 많습니다. 미국의 전화 서비스를 장악하고 있던 AT&T는 10년간의 독점 소송 끝에 해체됐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도 윈도우를 깔면 자체 웹브라우저인 익스플로러(explorer)를 사용하도록 만들어, 작은 기업이던 넷스케이프가 만든 웹브라우저인 내비게이터(Navigator)를 밀어냈다가 수년간 독점 소송을 치러야 했습니다. 많은 사례 중에서 정부의 독점 규제가 혁신을 가져온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건 IBM입니다. IBM은 1960년대에 세계에서 제일 큰 컴퓨터 제조업체가 됐습니다. IBM은 기업이나 정부 기관 등 대규모 시설에서 사용하는 컴퓨터 업계를 장악해 독점에 가깝게 납품했습니다. 컴퓨터 하드웨어뿐 아니라 자체 소프트웨어도 만들어 묶음으로 팔기도 했습니다. 미국 법무부는 반독점법 위반으로 IBM을 기소했고 소송이 6년 동안 진행됐습니다. 이 소송은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취하됐지만, IBM은 더 이상 업계를 독점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게 됐습니다. IBM이 엄청난 자금과 시장 지배력을 이용해 기업이나 정부에 납품하는 대형 컴퓨터를 만들려 하는 사이,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 같은 컴퓨터를 좋아하는 괴짜들이 작은 차고에서 개인용 컴퓨터(PC)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IBM이라는 공룡이 반독점법의 족쇄를 달고 휘청거리는 동안 애플과 같은 소규모 신생 기업이 만들어졌고, 이들이 컴퓨터 시장의 틈새를 비집고 PC의 보급이라는 혁신을 가져온 겁니다. '큰 것은 쪼개야 한다'…혁신을 위한 규제 지금까지 미국의 반독점 전통을 짚어봤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상황을 보겠습니다. 미국과 달리 한국은 개발도상국의 특성상 국가가 독점 기업을 지원하며 발전한 역사가 있습니다. 1960년대 이후 군부 정권은 기업들을 지원해 국가의 대표 기업으로 성장시켰고, 이들은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재벌'이 됐습니다. 1981년에 공정거래법이 만들어지고 1994년엔 공정거래위원회가 설립됐지만 한국엔 아직 미국처럼 독점 기업을 강하게 규제하는 전통이 자리 잡진 않았습니다. 반독점과 담합에 대한 조사도 전속고발권을 가진 공정거래위원회만 시작할 수 있어 검찰은 자체적인 수사를 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2015년 서울중앙지검에 처음으로 공정거래조사부(초대 부장 한동훈)가 설립됐지만, 다른 검찰청에는 별도의 부서가 없이 공정거래 사건을 담당하는 검사만 형사부에 지정돼 있을 뿐입니다. 최근 들어 가장 큰 공정거래 사건은 쿠팡의 '랭킹 조작' 의혹입니다. 온라인 플랫폼 쿠팡이 알고리즘을 통해 자체브랜드(PB) 상품을 검색 상위권으로 올렸다는 혐의로 공정거래위원회가 1,400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검찰에 고발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검찰은 사건을 중앙지검 공정거래조사부가 아닌 동부지검으로 보내면서 팀이 아닌 검사 개인이 사건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수사하고 재판에서 공소 유지를 해야 할 공정거래 사건은 많은데 전담 부서는 중앙지검에 하나밖에 없어 쿠팡 사건 처리가 힘들다는 것이 동부지검 배당 이유로 알려졌습니다. 국내는 공정거래 분야, 특히 독점과 관련해서 대형 기업을 해체한 역사나 전통이 빈약합니다. 미국의 역사를 통해 정부가 경쟁법을 통해 큰 기업들의 독점과 지배적 지위 남용을 막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기업들은 경쟁법을 통한 규제가 성장과 혁신을 막는 족쇄가 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혁신을 이끄는 기업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미국엔 어느 국가보다 강한 반독점의 전통이 존재했습니다. 미국 연방제3항소법원 (2003년 3M 반독점 판결) "민주주의가 외부 압력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 자유로운 정치 제도 하에서만 잘 돌아갈 수 있듯, 자본주의 시장경제 역시 시장 지배력이 있는 자들을 끊임없이 감독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것이 반독점법의 목표다." ▶ 참고 자료 - 팀 우, 『빅니스: 거대 기업에 지배당하는 세계』, 조은경 옮김, 소소의책 - 천준범, 『초기업의 시대: 그들은 어떻게 독점시장을 만드는가』, 페이지2북스 - 코가 준이치로, 『아이다 타벨(록펠러 제국을 쓰러뜨린 여성 저널리스트)』, 정수영 옮김, 박이정 - 정영진, "리나 칸 : '반독점 역사의 종말론'과 뉴 브랜다이즈 운동", 경쟁저널(2021) - 지인엽·전주용 "플랫폼 경제와 최근의 미국 내 반독점 관련 논의 : 뉴 브랜다이스 운동을 중심으로", 산업조직연구(2021) - 장민석, "혁신주의 시기 미국의 반독점 담론 형성", 서양사론(2019) 디자인 : 최혜지
✏️ 뉴스쉽 네 줄 요약 · 올해 최저임금위원회에서는 플랫폼 노동자에게도 최저임금을 적용해야 한다는 노동계의 주장이 있었습니다. · 플랫폼을 통해 일하는 사람들은 근로자가 아니라 자영업자로 분류되면서 최저임금을 포함한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 미국에서는 플랫폼 기업을 규제하고 플랫폼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입법이 활발하게 이뤄졌습니다. · 뉴욕시에서는 음식 배달 플랫폼에서 일하는 배달라이더에게 최저보수가 도입됐습니다. 1. 플랫폼 규제의 두 축 – 경쟁법과 노동법 쿠팡이 1,400억 원의 과징금을 맞았다. 주된 이유는 알고리즘을 조작해 PB(자체 브랜드) 상품을 검색 순위 상위권에 노출시켰다는 내용이다. 쿠팡이나 쿠팡이츠에서 배달과 배송일을 하는 플랫폼 노동자에게 최저임금을 적용해야 한다는 논의도 나왔다. 올해 최저임금위원회에서 노동계가 주요하게 주장한 내용이 플랫폼 노동자에게 최저보수를 보장하라는 것이다. 쿠팡 같은 플랫폼 기업은 양쪽에서 도전을 받고 있다. 오른쪽은 경쟁법이고, 왼쪽은 노동법이다. 경쟁법은 공정거래위원회에서 관여한다. 이번 쿠팡의 사례처럼 불공정한 거래 행위를 통해 자유로운 시장의 경쟁을 방해하는 행위를 막는다. 노동법은 주로 고용노동부에서 관여한다. 노동하는 사람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근로 조건을 법적으로 보장한다.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며 플랫폼 산업이 크게 확장됐다. 그러면서 지나치게 커져 독점하거나 갑질하는 플랫폼 기업을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플랫폼 기업을 통해 일하지만 최소한의 근로 조건도 보장받지 못하는 노동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공정위를 중심으로 온라인플랫폼의 시장 지배적 지위 남용을 막는 법안('온플법')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고, 노동부를 중심으로 플랫폼 종사자 보호법의 입법 시도가 있었다. 둘 다 업계의 강력한 반대 등으로 입법이 아직 이뤄지진 않았지만, 앞으로도 언제든 법안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다. 거액의 과징금을 맞은 쿠팡 측은 행정소송을 예고하면서, 제재 때문에 로켓배송을 축소 중단해야 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쉽게 말하면 이렇게 규제를 하면 사업 못 해먹겠다는 것이다. 한국은 경쟁법과 노동법으로 플랫폼 산업을 옥죄고 있는 것일까. 플랫폼과 빅테크, 혁신 기업의 천국인 미국의 경우는 어떨까. 이번 뉴스쉽에서는 플랫폼 산업에 대한 규제, 그중에서도 특히 노동법 분야에 집중해 미국의 사례를 살펴보려고 한다. 글의 상당 부분은 필자의 석사논문(전형우, "미국의 플랫폼 종사자 보호와 노동법의 역할 : 지방정부 입법과 연방법의 관계를 중심으로")을 토대로 작성했다. 2. 미국의 세 가지 길 한 테크 기업의 대표를 만나 대화를 한 적이 있다. 테크 앱을 통해 일을 하는 사람들을 왜 근로자로 고용하지 않는지 물었다. 이 사람들이 없으면 사업 자체가 불가능하고, 이 사람들 또한 이 사업에 의존해 먹고 살고 있는데 고용 계약을 맺으면 사업과 노동력의 공급이 안정적이지 않냐는 질문이다. 답은 절대 고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한 번 근로자로 고용하면 사업이 축소되거나 일시적으로 휘청일 때 해고가 어려워 기민하게 대응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노동법의 보호를 받는 근로자가 아니고 개인사업자여야 회사 입장에서는 편하게 쓸 수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하지만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개인사업자라는 이유로 고용 불안에 시달리거나 한없이 긴 업무시간에도 최저임금보다 더 낮은 돈을 받아도 법이 보호해 주지 않게 된다. 플랫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근로자일까 자영업자일까. 이 질문이 플랫폼 산업을 둘러싸고 화두가 됐다. 한국에서는 이들이 근로자냐 아니냐에 대해 정부나 대법원의 명확한 판단이 나오지 않았다. 플랫폼 노동이라는 명칭으로 묶이지만 앱을 이용해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다양해서 일률적으로 판단하기는 힘들다. 오토바이를 타고 음식을 배달하는 라이더도 플랫폼 노동자지만, 집에서 컴퓨터를 이용해 디자인이나 개발 업무를 하는 프리랜서도 플랫폼 노동자다. 플랫폼 노동자가 근로자냐 아니냐의 질문을 풀지 못한 건 미국도 마찬가지다. 연방정부나 연방대법원은 플랫폼 노동자가 근로자인지 아닌지 아직 판단하지 않고 있다. 연방에서 판단을 미루고 있는데, 보호 필요성은 커지자 지방정부들이 이런 불확실성을 자체적으로 해소하려는 노력을 했다. 캘리포니아주는 전통적으로 민주당이 집권하는 진보적인 곳이다. 캘리포니아주는 'ABC 테스트'라는 걸 도입해 일하는 사람들이 근로자로 분류되기 쉽게 만들었다. A. 통제와 지시에서 자유로운지 B. 고용주의 통상적인 업무 과정 밖에서 일하는지 C. 스스로 독립적인 사업을 운영하는지의 세 가지 조건을 통과하지 못하면 모두 근로자로 간주하는 방식이다. 캘리포니아주 의회가 ABC 테스트를 입법하면서 우버 같은 차량 공유 서비스를 통해 일하는 운전기사나 우버이츠, 그럽허브 같은 음식 배달 플랫폼에서 일하는 배달라이더가 근로자로 분류됐다. 캘리포니아에서는 플랫폼 종사자도 근로자로 분류해서 노동법의 보호를 받고 실업보험, 산재보험, 의료보험 같은 각종 사회보장도 적용되도록 했다. 이런 법안에 플랫폼 기업들이 강하게 반대해 주민발의안을 내면서 아직 법원에서 소송이 진행 중이다. '민주당 버전'이 플랫폼 종사자를 근로자로 만드는 것이라면 '공화당 버전'의 대응도 존재한다. 애리조나와 플로리다, 인디애나, 아이오와, 켄터키, 테네시, 유타 등 7개 주는 공화당이 매번 집권하는 주다. 이 7개 주에서는 플랫폼 종사자를 자영업자로 명시하는 법안이 만들어졌다. 플랫폼 종사자가 근로자냐 아니냐의 불확실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캘리포니아는 근로자로, 공화당이 집권한 주에서는 자영업자로 분류하는 정반대의 입법이 이뤄진 것이다. 플랫폼 기업인 우버(차량 공유)와 핸디(가사 노동) 등과 공화당 정치인들, 시장 자유를 추구하는 단체인 ALEC(미국 입법교류위원회)는 플랫폼 산업에 대응하기 위해서 '노동법 면제 정책'을 개발해 왔다. 이들은 로비 끝에 공화당이 집권한 7개 주에서 플랫폼 종사자가 근로자가 아니라 개인사업자라는 걸 명확히 하도록 서면으로 동의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캘리포니아와 공화당이 집권한 7개 주 사이에 '제3의 길'도 있다. 뉴욕시의 방식이 그렇다. 플랫폼이 활성화되어 있는 '혁신의 도시' 뉴욕시는 플랫폼 노동자가 근로자인지 자영업자인지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대신 근로자로 인정되지 않더라도 플랫폼 노동자에게 노동법에 준하는 여러 가지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입법이 이뤄졌다. 뉴욕에서는 특정한 플랫폼 노동자에게 최저보수가 보장된다. 뉴욕주의 근로자 최저임금은 시간당 15달러인데, 뉴욕시에서 음식 플랫폼을 통해 일하는 배달라이더는 시간당 19.56달러 이상을 받도록 최저보수가 책정됐다. 내년 4월부터는 시간당 19.96달러까지 오른다. 근로자가 아닌 플랫폼 노동자인데 최저보수의 개념을 적용해 보호할 뿐만 아니라 최저임금보다 더 높은 금액을 받는다. 근로자로 인정되지 못해서 의료보험 같은 사회보장을 못 받는 걸 보상해 주고, 기름값이나 오토바이 수리비처럼 배달라이더가 스스로 부담해야 할 비용까지 감안해 계산했기 때문이다. 뉴욕시의 이런 방식은 실용적인 해법이다. 플랫폼 노동자가 근로자냐 아니냐의 판단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급한 불을 끄기 위해 가장 필요한 보호를 제공한 것이다. 원래 뉴욕시의 배달라이더는 주 최저임금보다 훨씬 못한 저임금(팁 제외하면 평균 시급 7달러 수준)에 시달렸고, 2020년부터 3년간 33명이 배달하다 사망했다. 저임금, 고위험의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존재하자 뉴욕시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저보수를 도입한 것이다. 3. 최저보수 도입하면 플랫폼 산업은 망한다? 매년 한국에서 최저임금이 결정되는 시기가 되면, 최저임금을 높이면 자영업자가 망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뉴욕시에서도 배달라이더에게 최저보수를 도입하면 소비자와 식당 부담이 커지고, 결과적으로 플랫폼 산업은 망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뉴욕시가 배달라이더 최저보수 조례를 도입하자 우버와 도어대시, 그럽허브, 릴레이 등 플랫폼 기업들이 이를 막아달라는 소송을 걸었다. 이들이 주요 주장은 첫 번째로 최저시급이 도입되면 배달라이더가 배달을 몇 건 하지 않고 대기만 해도 일정 이상 돈을 받아 갈 수 있어 사업에 타격을 입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소비자들이 내는 배달비가 더 늘어난다는 것이다. 둘 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법원은 뉴욕시의 반박을 받아들이면서, 플랫폼 기업들의 주장을 기각했다. 법원은 앱에 로그인만 하고 배달은 하지 않는 라이더를 막기 위해서, 플랫폼 기업들이 성과를 모니터링하고 인센티브를 주는 시스템을 이미 마련해 두고 있다고 봤다. 뉴욕시는 배달라이더가 생활 가능한 임금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대기시간을 포함한 앱에 접속한 모든 시간에 최저보수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봤는데 법원이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소비자 부담이 늘어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선 뉴욕시와 법원도 그 사실을 인정했다. 실제로 뉴욕시가 경제학자를 통해 분석해 보니 최저보수를 도입하면 소비자가 배달 한 건당 5.18달러를 더 부담해야 한다고 예상됐다. 그럼에도 뉴욕시는 플랫폼 기업이 스스로 부담하는 비율을 조정하고, 생산성 증대를 통해 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뉴욕시가 연구용역을 통해 예측한 결과 최저보수를 도입하더라도 음식 배달 플랫폼은 2025년까지 배달 건수가 35% 증가하는 등 꾸준히 사업이 성장할 것으로 예측됐다. 또 최저보수 도입이 지역사회의 경제 규모를 키우고 소비 증가 효과도 가져올 수 있다고 봤다. 뉴욕시의 결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최저보수 도입이 플랫폼 기업과 소비자, 식당에 일부 부담을 늘릴 수 있다 하더라도, 라이더가 최저임금 이하의 저임금으로 일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점이다. 4. 한국의 플랫폼 노동에도 최저보수 도입이 가능할까 한국에서 음식 배달 플랫폼을 통해 일하는 배달라이더도 뉴욕시와 상황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쿠팡이나 배민에서 배달라이더 일을 해서 한 달에 400~500만 원을 벌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플랫폼 노동이 돈을 괜찮게 버는 일로 인식되기도 한다. 하지만 배달라이더의 경우 기름값과 오토바이 유지비, 단열가방 구매 등 개인이 추가적으로 들여야 하는 비용이 많이 든다. 이처럼 고정비용을 빼버리면 수익이 최저임금보다 더 낮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최저임금위원회의 연구용역으로 나온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시간당 최저임금은 9,160원인데 플랫폼 노동자들의 시급은 이에 못 미쳤다. 돈을 상당히 버는 것으로 알려진 택배기사나 배달라이더조차 최저임금보다 시급이 낮았고, 대리운전 기사나 가사서비스 노동자는 훨씬 더 낮았다. 플랫폼 노동의 문제는 저임금뿐 아니라 고위험도 있다. 2022년과 2023년 산재 승인 건수 1위는 우아한청년들(배달의민족)로 나타났다. 쿠팡이츠도 산재 승인 건수가 2022년 12위, 2023년 14위로 상위권을 차지했다. 기존에 산재 1위는 건설사 몫이었는데 이제 배달 플랫폼이 그 자리를 뺏어갈 만큼, 플랫폼 노동은 위험한 환경에 처해 있다. 매년 최저임금위원회에서 노동계는 최저임금을 '더 높게' 올리기 위해 노력한다. 이번 최저임금위에서 노동계는 '더 높게'뿐 아니라 '더 넓게'도 주장했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해 최저임금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플랫폼 노동자와 특수형태근로종사자에게도 최저임금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경영계는 플랫폼 노동자 등이 최저임금위원회의 논의 대상이 아니라고 반대했다. 전문가로 구성된 공익위원들은 플랫폼 노동자의 최저임금 도입에 대해 논의해 볼 수 있다고 봤지만, 기초 자료가 부족해 추후에 논의를 진행하기로 마무리지었다. 플랫폼 산업이 활성화된 지 5년이 넘어가고, 국내 플랫폼 종사자는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80만 명을 넘어섰다. 정부와 정치권에서 플랫폼 노동에 대한 보호 논의가 시작된 지는 몇 년이 지났지만 후순위로 밀리면서, 여전히 80만 명은 법의 보호 밖에 놓여 있다. 자유의 나라 미국, 혁신의 도시 뉴욕시에서는 이미 플랫폼 노동에 대한 최저보수가 도입됐다는 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 참고자료 - 전형우, "미국의 플랫폼 종사자 보호와 노동법의 역할 - 지방정부 입법과 연방법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2024) 디자인 : 최혜지
✏️ 뉴스쉽 네 줄 요약 · '광주형 일자리'라고 불리는 광주글로벌모터스(GGM)은 현대자동차의 경형 SUV 캐스퍼를 생산합니다. · GGM은 대기업이 부족한 지역에 노사가 상생할 수 있는 좋은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취지로 문재인 정부 당시 '1호'로 만들어졌습니다. · 최근 GGM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상생 협약'을 깨고 노조를 만들고 민주노총에 가입했습니다. · 광주형 일자리는 기획 단계와 달리 추진 과정에서 GGM에서 일할 노동자의 권리를 제약하는 협상이 이뤄졌습니다. 캐스퍼는 현대자동차의 경형 SUV다. 소형 SUV도 아니고 경차도 아닌 '경형 SUV'는 한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귀여운 디자인으로 호평받으며 여성 운전자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었다. 이 차는 광주광역시에서 만들어진다. 최근 가속화되고 있는 지역 소멸의 가장 큰 이유는 질 좋은 일자리가 지역에 없다는 점이다. 특히 자동차 제조 같은 일자리는 값싼 노동력을 제공받을 수 있는 동남아나 중국 등 해외로 나가는 경우가 많다. 대기업 본사는 수도권에 몰려있고, 제조 공장은 동남아와 중국으로 나가면서 지역 청년들은 고향에서 좋은 일자리를 찾지 못하게 됐다. 이를 해결하고자 새로운 노사 관계 모델로 광주에 만들어진 것이 '광주형 일자리'다. 문재인 정부 당시 '1호 상생형 일자리'로 만들어진 광주글로벌모터스(GGM)에서 현대자동차 캐스퍼를 생산한다. 그런데 광주형 일자리는 최근 흔들리고 있다. 만들어질 당시엔 노사가 윈-윈 할 수 있는 좋은 지역 일자리가 탄생했다고 찬사를 받고, 전국으로 상생형 일자리 모델을 퍼뜨리기도 했던 이곳이 왜 노동자가 떠나는 일자리가 됐을까. 앞서 국회와 중앙정부 차원에서 '노동과 불화하는 정치'를 다뤘는데, 이번 뉴스쉽은 시리즈의 마지막 순서로 지역 차원에서의 노동과 정치에 대해 다룬다. <노동과 불화하는 정치> ① '여성, 초선, 비례'가 주로 몰리고 인기도 없는 상임위원회는 바로 여기 ② 노사보다는 정부가 주도하는 '노사정 대화', 존재 이유를 증명하려면 ③ 광주형 일자리 "절대 오지 마"…200명 떠난 GGM 직장인 커뮤니티 블라인드에서 광주글로벌모터스(이하 GGM)는 부정적인 평가가 대부분이다. GGM 이직을 물어보는 글에는 내부 직원을 인증한 사람들이 "절대 오지 말라"거나 "취업 사기에 가깝다"는 취지로 댓글을 달았다. 현대자동차와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지역 시민사회와 노동계의 합의를 통해 만들어진 GGM, 정부가 밀어주는 일자리였던 이곳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현대기아차를 만드는 다른 업체와 비교해 보면 근로 조건 차이가 뚜렷하다. 같은 광주광역시에 있는 기아차 생산공장 직원의 평균 연봉은 1억 원 이상으로 알려져있다. 대기업 생산직은 '킹산직'으로 불릴 만큼 임금이나 근로 조건이 뛰어나고, 강한 노조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광주글로벌모터스에 입사한 직원들은 광주 기아차와 근로 조건을 비교하진 않는다. 그런데 비슷한 포지션에 있는 동희오토와 비교해 봐도 GGM의 임금은 훨씬 낮은 수준이다. 동희오토는 무노조, 무파업, 생산직 전원 비정규직 등 이른바 '3무 공장'을 표방하는 곳으로 기아의 경차 모닝 등을 생산한다. 노동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아서 노사 분규가 있던 동희오토의 임금 수준이 6,000만 원대로 알려진 것에 비해 GGM은 그에 훨씬 못 미치는 3,500만 원 안팎이다. 광주형 일자리를 만들 때 임금이 낮은 대신 공공주택 지원, 직장 어린이집, 건강 증진 사업, 문화 지원 사업 등 각종 복지 프로그램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취업 사기'라는 목소리가 나왔고, 만들어진 지 몇 년 만에 600여 명 중 200명이 넘는 직원이 떠나간 현상이 나오게 된 이유다. 낮은 근로 조건을 참지 못한 직원들이 노조를 만들었고, 최근에는 민주노총 금속노조에 가입했다. 당초 GGM은 노사 상생형 일자리라는 이름을 내걸고, 캐스퍼를 35만 대 만들 때까지 노사민정으로 구성된 협의회가 노조 역할을 대신하기로 하는 협약을 맺은 바 있다. 원래 노조와 회사가 단체협약을 통해서 정해야하는 근로 조건을, 지자체와 시민사회 등 대표자들이 나서서 중재 역할을 하는 식의 모델이다. 하지만 11만 대 생산을 좀 넘는 시점에서 이른바 '35만 대 협약'은 깨졌다. 청와대 들어오면서 현대차가 참여했고 노동은 배제됐다 광주형 일자리는 이론상 노사정 3자가 모두 이익을 볼 수 있는 모델이었다. 지자체와 지역의 시민사회 입장에서 지역에 좋은 일자리를 유치하면 지역 경제가 살아난다. 문제는 어떻게 대기업이 지역에 일자리를 만들도록 하느냐인데, 이걸 지자체가 나서서 해결해 주는 것이다. 만들어지는 일자리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임금을 좀 적게 받는 대신, 각종 복지 혜택을 공적 자금(국비와 시비)을 투입해 어느 정도 충당해 주는 방식이다. 대기업 입장에서는 동남아처럼 싼 노동력은 아니지만 원래 대기업 직원을 고용하는 것보다 싼 임금을 줘서 공장을 운영할 수 있는 데다, 지역에 일자리를 유치해 줬다는 평판을 얻을 수 있다. 또한 대기업 입장에서는 정부나 지자체 등 정치권의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추후 현안이나 규제를 해결하는 데 기대를 해볼 만한 위치에 설 수도 있다. 광주형 일자리가 처음 논의된 건 2014년부터다. 초기 기획 단계에서는 노동계가 주도했다. 민주노총은 불참했고, 한국노총과 광주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했던 주역들이 사업을 이끌었다. 2017년 6월에 사회협약을 통해 적정 임금, 적정 노동시간, 노사 책임경영, 원하청 관계 개선 등 4대 의제를 명문화하며 광주형 일자리가 추구하는 방향을 제시했다. 4년 가까운 시간 동안 광주 지역의 노동계 인사들이 주도하며 '양질의 지역 일자리' 창출을 기획했다. 하지만 현대차 등 투자 기업이 참여에 미온적인 상태에서 광주형 일자리는 수년간 멈춰 서 있었다. 청와대가 들어오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2014년에 기획을 시작한 뒤 실행이 되지 않고 멈춰있던 광주형 일자리가 2017년 취임 첫해인 문재인 정부가 국정과제로 삼고 밀어주면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노동계는 배제됐고, 청와대와 광주시 그리고 현대차가 국면을 주도한 측면이 있었다. 대통령 선거 직전인 2017년 3월, 문재인 후보는 대선 공약으로 '광주형 일자리 모델의 전국화'를 채택했다. 당선된 직후인 2017년 7월에는 광주형 일자리 모델의 전국 확산을 국정과제로 선정했다. 실제 광주형 일자리가 빠르게 진행된 건 2018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였다. 광주형 일자리에 대해 연구한 박상훈 전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은 "청와대는 지방선거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자 광주형 일자리의 가시적 성과를 필요로 했고, 이 때문에 무리해서 현대차로 하여금 투자의향서를 2018년 6월 1일 제출하게 만들었다"고 봤다. 당초 광주형 일자리에 투자하는 것에 대해 현대차와 자동차연합회, 경총은 모두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지방선거를 앞두고 집권 초기인 청와대의 요구가 존재했고, 현대차는 응할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이다. 청와대와 광주시는 성공적으로 현대차가 광주형 일자리에 투자하도록 유도했지만, 대신 노동권을 양보했다. 현대차와 협상 과정에서 노동자 평균 임금은 매우 낮은 수준이 됐고, 노조는커녕 근로자참여 및 협력 증진에 관한 법에서 규정한 노사협의회 정도의 권리마저 갖추지 못한 일자리로 협약이 이뤄졌다. 즉, 현대차 입장에서는 저임금인 데다 노동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직원들을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현대차는 이익은 있지만 책임은 피할 수 있었다. 보통의 기업이 져야 하는 노무 관리 책임, 즉 노조나 근로자 측과 교섭하고 대면하며 협상하는 책임은 광주시와 노사민정협의회가 졌다. 광주글로벌모터스를 만들면서 자본금도 광주시가 21%로 최대 주주가 되고 현대차는 19%를 투자하는 구조로 했다. 현대차는 참여는 하되 책임은 광주시가 지는 구조다. 즉, 현대차는 투자에 참여하는 대신 대주주로서 책임과 노사 관계, 노무 관리에 대한 책임을 광주시에 대행시킬 수 있게 됐다. 결국 현대차의 투자 협약을 얻어내기 위해 배제된 건 노동계였고, 희생되는 건 앞으로 열악한 근로 조건에서 일하면서도 노조를 만들어서 목소리를 내기도 힘든 사업장에 일해야 할 GGM의 노동자였다. 정부와 광주시, 현대차가 비밀리에 이런 협약을 진행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민주노총은 최종적으로 불참하기로 결정했고, 한국노총은 불참 가능성을 언급하며 항의 목소리를 냈지만 지역 사회의 압박이 존재했다. 대기업 일자리를 유치해야 지역 경제가 활성화된다는 큰 목소리에 일할 권리가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다는 목소리는 묻혀버렸다. 윤종해ㅣ한국노총 광주지역본부 의장 (노동계가 불참 선언을 한 이후) 여러 시민단체들이 노동계 참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노동계에 참여하라고 한다. 노동계가 참여하지 않은 게 아니고 광주시가 비밀 협상을 하느라 노동계를 배제했던 것인데, 비난은 노동계로 왔다. 한국노총 광주지역본부는 항의 전화에 시달리고 여직원들은 눈물로 욕설 전화를 받아야 했다. 길에서나 식당에서조차 '왜 합의해 주지 그러냐'는 항의를 받았다. 그만큼 노동의 권리보다 지역 경제를 걱정하는 여론이 압도적이었다. 지방선거 앞두고 '극적 타결'된 광주형 일자리 앞서 언급했듯 현대차는 처음 광주형 일자리에 미온적이었다. 그런데 지방선거 직전인 2018년 6월 1일, 현대차는 광주형 일자리에 투자한다는 의향서를 제출했고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알려졌다. 당시 청와대와 광주시, 현대차는 비밀리에 협상을 하고 협약을 맺었기 때문에 누가 어떤 걸 제시했는지는 자세히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당시 협약의 당사자가 스스로 밝힌 바는 있다. 공영운 당시 현대차 전략기획담당 사장과 정태호 당시 청와대 일자리수석(현 민주당 국회의원)이 광주형 일자리의 협약에 주요한 당사자로 참여했다. (좌) 공영운 (우) 정태호 공영운ㅣ전 현대차 사장 (2024.1.7. 정태호 국회의원 의정보고회 축사) 2019년 1월, 정태호 당시 청와대 일자리수석하고 저하고 광주시장, 광주 시민단체 대표, 광주 한국노총 지회장이 협약식 사인하면서 (광주형 일자리가) 출발했습니다. 현대차 입장에서 보면 자동차 개발에 돈 들고, 실컷 돈 들였는데 합의가 깨지면 안 되기 때문에 당시 현대차 사장으로서 두려움이 컸습니다. 노조도 내부 반대파한테 배신자라고 비판받는 상황이었고, 시민단체도 여러 목소리로 나눠졌습니다. 그 전체를 조율하고 조정하고, 수년 동안 끈기 있게 끌고 나가서 결과를 만든 게 정태호 수석이었습니다. 공영운 전 사장과 정태호 의원은 서울대 1년 선후배 사이로 둘 다 치열하게 학생운동을 해 1985년과 1986년 각각 구속된 전력이 있는 등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영운 전 사장은 올해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공천을 받아 출마하기도 했다. 공영운 당시 현대차 사장과 정태호 당시 청와대 일자리수석은 협상을 통해 광주형 일자리를 이끌어냈다. 2018년 지방선거 직전 현대차의 광주형 일자리 투자 결정으로 청와대나 당시 여당 후보들은 '정치적 성과'를 내세울 수 있었다. 직접적인 연결성을 찾을 수는 없으나 이후 정부는 현대차를 지원해 주는 모습을 보인다. 2018년 12월, 정부는 4년간 표류 중이던 현대차의 삼성동 신사옥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개발에 대한 심의를 통과시켰고, 2019년 1월에는 정부 차원에서 '수소경제 로드맵'을 발표하면서 현대차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문재인 대통령 또한 광주형 일자리에 큰 관심을 가지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대선 공약으로 약속한 광주형 일자리의 전국 확산을 국정과제로 삼았고, 실제 2019년 구미와 울산, 2021년 밀양, 횡성 등으로 광주형 일자리 모델이 확산됐다. 대통령 재직 당시 광주형 일자리에서 만든 차인 캐스퍼를 구매해 직접 타고 다닌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쿠이 보노(Cui Bono).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는가?'라는 라틴어이다. 광주형 일자리의 출범으로 누가 이익을 봤는지 살펴보면 이 일자리의 성격이 뚜렷해진다. 우선 선거를 앞둔 청와대와 정치권이 '정치적 성과'라는 이익을 봤다. 현대차 또한 낮은 임금과 낮은 노무 리스크로 차량을 생산할 수 있다는 이익을 봤다. 이익의 반작용인 손해는 누가 봤을까. 저임금에 일하면서도 '상생'이라는 명목하에 노조를 만들기 쉽지 않아 근로 조건 개선의 목소리를 틀어막힌 GGM의 노동자들이 손해를 봤다. 이런 구조에서 최근에야 터져 나온 것이 GGM의 노조 결성과 민주노총 금속노조 가입 현상이다. 폭스바겐 티구안은 해냈지만, 현대 캐스퍼는 해내지 못한 것 광주형 일자리는 롤모델이 있다. 독일 폭스바겐의 '아우토 5000'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아우토 5000 모델은 불황이던 2001년 폭스바겐사와 금속노조(IG Metall) 하노버 지부의 합의로 탄생했다. 나중에 슈뢰더 정부의 노동시장 개혁인 '하르츠 개혁'을 이끈 폭스바겐의 노동이사 페터 하르츠가 주도했다. 5,000명을 고용해 월급 5,000마르크(300만 원 수준)를 주겠다는 계획인데, 불황기에 일자리를 창출하되 임금은 조금 낮은 수준만 받기로 노사가 합의한 것이다. 아우토 5000이 광주형 일자리와 달랐던 것은 누가 주도했느냐다. 아우토 5000은 전적으로 노사가 이끌어냈는데, 광주형 일자리는 초기 기획과 달리 정부와 지자체가 만들어낸 모델이다. 아우토 5000 유한회사를 만들어낸 폭스바겐과 금속노조는 근로 조건과 노동자들의 숙련 교육에 합의한 것은 물론 독일의 산별노조 체제에서 이뤄지는 노사 공동경영, 공동결정 제도도 그대로 적용했다. 아우토 5000의 핵심은 노사가 책임의 주체로 나섰고, 노동권까지 또한 기존의 기업과 마찬가지로 보장되었다는 점이다. 반면 광주형 일자리는 노동계나 근로자는 이미 합의된 내용에 수동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고, '상생'이라는 이름으로 노조할 권리마저 일부 제약됐다는 점이 다르다. 아우토 5000의 결말은 어떻게 됐을까. 노사 합의로 만들어진 이 사업장은 2007년부터 폭스바겐의 준중형 SUV인 티구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2009년에는 불황이 극복되면서 아우토 5000의 노동자가 모기업인 폭스바겐사의 직원이 됐고,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에 따라 폭스바겐 생산직과 같은 월급을 받게 됐다. 불황에 일자리 만들기 차원에서 일시적으로 낮은 임금의 생산직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불황을 극복하고 대기업 생산직의 높은 임금으로 복귀한 사례가 된 것이다. 아우토 5000을 통합한 폭스바겐 볼프스부르크 공장은 연간 75만 대를 생산하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자동차 공장이 됐다. (좌) 폭스바겐 티구안 (우) 페터 하르츠 광주라는 상징과 아이러니 광주형 일자리에 대해 연구한 박상훈 전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은 개발 독재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었던 광주에서 '권위주의 발전 동맹'이 새로운 형태로 재현됐다는 점에서 "복잡한 마음"이라고 썼다. 즉, 견제받지 않는 정부 권력이 노동의 배제와 착취를 통해 경제 발전을 일으키는 식의 '개발 독재형 모델'이 광주형 일자리라는 이름으로 발현된 것이 아이러니하다는 점이다. '1호 상생형 일자리'의 실험이 광주에서 시작된 건 우연은 아닐 것이다. 튼튼한 노조와 시민사회의 존재가 있기에 광주에서 가장 먼저 '상생형 일자리'가 출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기획 단계를 넘어 추진 과정에서 노동이 배제된 것은 뼈아픈 부분이다. GGM에서 노조가 만들어지며 참다못한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내면서 '2기 광주형 일자리' 기획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시작되고 있다. 갈등을 겪고 있는 GGM이 수정을 통해 노사정이 윈-윈 하는 '진짜 상생' 일자리로 거듭날 수 있을까. 그래서 광주는 또 하나의 상징이 될 수 있을까. ▶ 참고자료 - 박상훈 외, "한국 노동정치의 거버넌스와 정책과정", 국회미래연구원, 2023.12.31. 디자인 : 최혜지
✏️ 뉴스쉽 네 줄 요약 · 이해관계에 따라 갈등할 수밖에 없는 노사 관계를 정부가 중재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곳이 '경제사회노동위원회'입니다. · 경사노위의 전신인 노사정위원회는 IMF 외환위기 당시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을 도입하기 위해서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 민주노총은 1999년에 사회적 대화 테이블에서 탈퇴하기로 한 뒤 25년째 노사정 회의에 불참하고 있습니다. · 경사노위에서는 최근으로 오면서 노사 당사자가 아닌 정부와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뉴스쉽에서는 '노동과 불화하는 정치'를 주제로 세 번에 걸쳐 다룰 예정이다. 지난 3월 23일 뉴스쉽에서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살펴보았다. 이번엔 행정부 차원에서 노동과 정치가 만나는 접점을 짚어보려 한다. 정부가 주도해 노동계와 경영계를 중재하면서 사회적 대화를 이끌어내고자 만들어진 곳이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이하 경사노위)다. 정부 위원회는 2022년 기준 636개로 집계됐다. 위원회라는 명칭이 있다고 해서 다 같은 위원회는 아니다. 크게 행정위원회나 자문위원회로 나뉘고, 전자는 집행 권한을 가지고 있는데 자문위원회는 권한은 적고 말 그대로 자문하는 역할을 한다. 금융위원회나 방송통신위원회처럼 관련 분야 정책을 좌우하는 힘이 센 위원회가 있는가 하면,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처럼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을 하지만 권한이나 예산 면에서 크지 않은 위원회들도 있다. 경사노위는 대통령 소속의 자문위원회다. 즉, 힘이 세지 않다는 뜻이다. 같은 노동 이슈를 다루지만 행정위원회인 중앙노동위원회에 비해 존재감이 크지 않고, 집행 권한도 없다. 중앙노동위의 경우 법원으로 가기 전 노동에 관한 권리 분쟁에 대해 1차적 판단을 내리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권한이 강하진 하지만 경사노위는 중요하다.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노사 간의 쟁점에 대해 정부가 중재하면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예컨대 법정 근로시간을 주 52시간으로 정하려 할 경우, 사용자와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부딪힌다. 노사 양자 간의 협상으로 좀처럼 타협이 힘들 수 있다. 때문에 정부가 나서서 판을 만들고, 노사 양측에 조금씩 양보를 얻어내 합의에 이르도록 만드는 게 이상적인 '노사정 3자 주의'에 입각한 모델이다. 이상은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경사노위에 양대 노총 중 하나인 민주노총은 1999년에 불참을 선언한 이후 한 번도 협상 테이블에 앉지 않았다. 민주노총 내에 경사노위 참여가 정부 노동 정책 추진의 들러리 역할을 할 뿐이라고 보는 시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번 윤석열 정부 들어서는 한국노총마저 경사노위에 불참하면서 사회적 대화가 멈춰선 바 있다. 경찰이 고공 농성 중인 금속노련 김준영 사무처장을 곤봉으로 머리를 내려쳐 쓰러뜨린 뒤 체포하는 사건이 계기였다. 한국노총은 5개월 뒤에야 경사노위에 복귀했고, 지난해 11월부터 멈췄던 사회적 대화가 다시 시작됐다. 1. 외환위기로 시작된 경사노위 경사노위(당시 노사정위원회)의 시작은 김대중 정부였다. 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기업들이 쓰러지는 상황에서 정부는 위기 극복을 위해 노사 간 합의가 필요했고 이를 담당할 노사정위원회가 1998년 설립됐다. 노사정위에서는 기업을 살린다는 명목으로 정리해고 제도를 도입하고 구조조정 방안을 추진했다. 그 대신 노동계에는 교사의 노조 결성권을 보장하고, 노조의 정치 활동을 보장하기로 했다. 즉, 경사노위(노사정위)의 첫 시작은 '노조할 권리'를 보장받는 대신 '고용 유연화'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발한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가 도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99년부터 대화장 밖으로 나갔다. 어떤 조직이 처음 만들어지면 그때가 제일 힘이 세다. 대통령이 의지를 가지고 만들었고, 밀어주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 당시 처음 만들어진 노사정위원회가 그랬고 국가인권위원회도 그런 측면이 있다. 노사정위(현 경사노위)는 역대 정부를 거쳐 갈수록 점차 정치권 지원의 강도가 낮아지고, 노사정 합의의 강도도 낮아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다만, 민주당 정부에서는 노사 간 사회적 대화를 복원하기 위해 경사노위의 구성과 조직을 바꿔보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명칭이 노사정위원회에서 경제사회노동위원회로 바뀐 것도 이러한 시도의 결과다. 노사정의 사회적 대화라는 모델은 서유럽의 코포라티즘(corporatism)에서 따온 것이다. 서유럽의 노사정 대화는 임금이 주된 논의 대상이다. 독일의 사례를 보면 산업별 노조가 사용자단체와 업종별로 임금을 협상한다. 노조가 강하고 많은 근로자가 노조에 가입되어 있어서 노사의 자율적인 협약을 통해 업종 전체의 임금을 정해 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나서서 최저임금을 정할 필요가 없었고, 독일에는 2015년에야 최저임금이 도입됐다. 반면, 국내에서는 산별 노조가 아닌 기업별로 임금 협상이 이뤄진다. 기업별 노조가 개별 기업과 임금을 정하는 식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업종별로 혹은 사회적으로 대화를 통해 임금을 정하기가 힘들다. 서유럽의 코포라티즘과 달리 한국의 경사노위에서는 임금 수준이 주요 의제가 되지 않았다. 역대 정부 거치며 경사노위에서 중요한 의제는 근로시간 단축이었다. 최근 사례를 보면 문재인 정부 당시 주 52시간 제도를 도입하면서 현장 안착을 위해 탄력적 근로시간제 단위 기간 확대 문제가 경사노위에서 논의됐고 합의에 이르렀다. 근로시간 외에도 아래 표와 같이 정부별로 경제 위기 극복이나 일자리 창출을 위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려는 노력들이 존재했다. 2. 누가 경사노위를 이끌까 다음으로는 노사정 세 부문 중 각각 어떤 조직이 참여해 경사노위를 주도할지 살펴보겠다. 우선 노동계에서는 한국노총이다. 민주노총은 1999년에 노사정위(경사노위)를 탈퇴한 이후 25년간 사회적 대화 테이블에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협조적이고 대화 지향적인 한국노총이 대화를 주도해 왔다. 실제 한국노총에서는 경사노위에 참여했던 노조 실무자가 실장, 본부장 거치며 계속해서 경사노위에 참여한 사례들이 많다. 이정식 현 고용노동부 장관의 경우도 김대중, 노무현, 박근혜 정부에 걸쳐 한국노총 국장, 본부장, 처장을 역임하며 근로자위원으로 경사노위에 참여하면서 인적 네트워크와 전문성을 쌓아온 것으로 보인다. 사용자 측에서는 한국경영자총협회(이하 경총)이 경사노위를 주도한다. 원래 경총은 전경련의 노무관리를 담당하는 사업 부서였다. 1970년에 전경련(현 한경협)으로부터 독립해 활동해 왔지만 회원사나 직원, 재정 등 모든 면에서 전경련에 의존했다. 이런 경총이 독립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계기가 경사노위 참여였다고 평가된다. 경총은 노사 문제를 전경련보다 잘 다룰 수 있는 역량을 대중에게 입증하면서 위상을 높여왔는데, 노사정위원회의 전신인 1996년 노사관계개혁위원회가 첫 계기였다. 당시 재벌 기업들은 민주노총을 합법 노조로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전경련은 이런 기업들의 이해관계를 적극 대변했다. 반면 경총은 복수노조 인정이 거스르기 어려운 흐름이라고 보고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고 봤다. 즉, 경총은 내줄 건 내줘야 한다고 본 것이다. 경총은 산별 복수노조를 허용하는 대신 노조 전임자에게 임금을 지급하지 못하도록 하는 걸 얻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재벌 기업들은 이를 수용하지 않으려 했다. 재벌 기업의 요구를 그대로 반영한 전경련이 강경하게 나왔고, 김영삼 정부 당시 정부와 여당에 로비를 통해 1996년 노동법을 날치기로 통과시키도록 만들었다. 이는 민주노총 총파업 사태로 이어지면서 노사관계가 큰 갈등 국면에 처하게 됐는데, 이를 계기로 경총이 전경련보다 경영계가 선택할 전략을 정확하게 판단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이처럼 전경련보다 노사 관계에 있어 전문성을 가지고 상대적으로 협조적인 자세로 대화를 하려고 했던 경총은 경사노위를 무대로 조직의 역량을 입증하고 키워온 것이다. 정부 측면에서는 기재부 등 다른 부처도 경사노위에 일부 관여를 하지만, 이슈 특성상 고용노동부가 주도한다.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 승진과 인사다. 고용노동부의 경우 경사노위가 중요한 승진 경로의 하나로 인식되는데, 기재부 등 다른 부서에서는 그렇지 못한 측면이 있다. 노동부 관료의 경우 국장급으로 경사노위에 참여하다가 승진을 하고 직급을 높여서 경사노위 회의체에 다시 참여하는 사례가 많다. 경사노위에 파견되거나 차관급인 경사노위 상임위원을 거치고 이후에 차관이나 장관으로 승진을 거듭하면서 지속적으로 경사노위에 참여해 온 경우가 많다. 예컨대 박근혜 정부에서 마지막으로 고용노동부 장관을 했던 이기권의 경우, 경사노위 운영국장과 상임위원 등 파견으로 경사노위에 참여한 뒤, 차관과 장관으로 승진해 경사노위에서 계속 활동한 사례다. 반면 기재부의 경우 경제정책국장(2017년 이후 경제구조개혁국장)이 대부분의 경사노위 회의체에 모두 참석하는데, 국장에서 승진한 뒤 더 이상 노사정 회의체에 참석하는 경우가 드물다. 3. 정부가 주도하고 노사는 들러리? 앞서 말한 대로 처음 출범했던 김대중 정부 당시에 노사정위원회는 힘을 가지고 외환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회적 대화를 추진했지만, 역대 정부를 지날수록 경사노위에서 합의와 의결을 하는 비율은 낮아지고 있다. 민주노총이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경사노위 회의체에서 합의를 이끌어내기보다는, 민주노총이 참여할 수 있는 외부 회의를 통해 중요한 사안이 논의될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문재인 정부 당시인 2020년 코로나19 위기가 있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사정 논의 과정에 민주노총이 참여했다. 코로나19를 맞아 민주노총이 원포인트로 사회적 대화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보여 노사정이 논의하는 테이블이 만들어지는 움직임이 있었다. 당시 김명환 위원장이 이끄는 민주노총 지도부는 노사정 대화에 긍정적인 편이었고, 경사노위에 참여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경사노위 참여 안건은 부결되고,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노사정 합의안도 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되면서, 김명환 지도부는 동력을 잃고 사퇴했다. 이처럼 노동계에 비교적 우호적인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면 민주노총을 사회적 대화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25년째 그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총 불참뿐 아니라 경사노위의 또 다른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노사 대표자들이 배제되고, 정부와 정부가 선임한 공익위원들의 비중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노동계와 경영계 당사자가 아닌 교수와 연구자, 정부 관료 등 전문가 중심으로 진행되는 경사노위의 연구회와 포럼이 많아지는 게 최근까지의 추세다. 당사자의 비율과 목소리가 줄어드는 건 원래 경사노위의 모델이었던 서유럽의 경우와는 반대되는 방향이다. 프랑스는 2021년 경제사회환경위원회에 시민 참여가 확대되면서 233명 중 정부 위원은 사라졌고, 전문가 40명을 뺀 나머지는 모두 노사를 포함한 이해관계자로 채워진다. 벨기에는 노사 대표만 의결권을 가지고 참여하는 전국노동위원회를 운영하고, 네덜란드의 사회경제위원회는 노사와 전문가가 같은 숫자로 참여하고 있다. 국내 노조 조직률 자체가 15% 안팎이라 미조직 노동자의 대표성이 떨어지는데, 그마저도 양대 노총 중 한쪽만 참여하는 것이 경사노위다. 이런 상황에서 이뤄지는 사회적 합의는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갈수록 노사의 합의를 이뤄내기 어렵다는 이유로 노사 당사자의 합의를 이뤄내기보다, 전문가들의 권고를 통해 정부의 노동 정책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에만 그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경사노위가 정부 정책 추진의 들러리가 되지 않으려면 의미 있는 노사의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어 조직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참고자료 - 박운·정혜윤 외, "한국 노동정치의 거버넌스와 정책과정", 국회미래연구원, 2023.12.31. 디자인 : 최혜지
✏️ 뉴스쉽 네 줄 요약 · 노동과 정치가 맞닿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대해 분석했습니다. · 환노위는 지역 예산으로 다룰 수 있는 규모가 적은 만큼 의원들이 크게 선호하지 않는 상임위입니다. · 이 때문에 환노위에는 '젊은-여성-초선-비례' 의원이 상대적으로 많습니다. · 최근으로 올수록 노동 관련 법안의 국회 통과 비율은 낮아지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정치는 노동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현대 민주주의의 출발이 보통의 일하는 사람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데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서구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많은 숫자를 토대로 정당을 만들거나 정치에 압력을 가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민주화 이후에도 ‘노동 없는 민주주의’가 지속되어 왔다고 평가됐다.(최장집 교수) 지금도 노동과 정치는 여전히 만나지 못하고 불화하고 있을까. 국회 미래연구원에서 노동과 정치에 관한 한 보고서(정혜윤 외, “한국 노동정치의 거버넌스와 정책과정”, 국회미래연구원, 2023.12.31.)가 나왔다. 이 보고서를 토대로 이번 뉴스쉽은 한국에서 노동과 정치가 맞닿는 지점에 대해 다루려 한다. 환경노동위의 특징 - “예산 규모가 작고, 정책 관할권은 크다” 한국에서 노동과 정치가 만나는 가장 중요한 장소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이하 환노위)다. 하지만 환노위는 일반적으로 비인기 상임위로 분류된다. 왜 그런 것인지는 다른 상임위와 비교를 통해 알 수 있다. 국회의원들에게 인기 있는 상임위는 자신이 속한 지역구의 예산을 따오기 쉬운 곳이다. 상징성이 있어서 정책과 관련한 입장 표명을 하기에 유리한 상임위를 희망하는 의원들도 있다. 지역 예산과 정책 관할권의 크고 작음에 따라 상임위를 4가지로 분류하기도 한다.(김한나, “국회의원의 정치적 목표와 상임위원회 활동의 정치적 결과”, 2018) 지역 예산을 따내기가 유리해 의원들이 업적을 과시하기 좋은 데다 정책 관할권까지 큰 상임위가 의원들에게 인기가 많다. 대표적으로 국토교통위원회나 행정안전위원회가 있다. 정책 관할권은 작지만 지역 예산 규모가 큰 농해수위나 산자위도 지역 민원과 연계성이 커 인기가 있다. 실제로 21대 국회의원들의 희망 상임위 중 1위는 국토위, 2위는 산자위, 3위는 농해수위였다.(KBS, 법안·상임위·개혁 분야…21대 당선인 300명에게 물었습니다, 2020.5.29.) 지역 예산도 작고, 정책 관할권이 큰 곳은 국방위나 외교통일위, 여성가족위가 있는데 매력 요인이 떨어진다. 다만 외통위의 경우 외교문제나 대북관계 등에 입장을 드러내기에 유리해 3선 중진 이상의 ‘거물 정치인’이 선호하기도 한다. 환노위는 어떨까. 지역예산 규모로는 상임위 중 9번째로 작은 편이고, 정책 관할권에서는 4위로 큰 편이다. 보건복지위나 기획재정위와 비슷한 ‘포지션 상임위’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런 유형의 상임위는 지역에 국한된 개발 이슈보다 자신의 입장을 전국적으로 드러내고 주목받기를 원하는 의원들이 선호한다. 즉, 지방 의원보다는 수도권이나 대도시 의원, 지역구 의원보다는 비례대표 의원이 선호할 수 있다. 하지만 비례 의원이라도 지역구 의원으로 재선을 원할 경우가 많은데 환노위처럼 지역예산 규모가 작은 상임위는 선호하지 않는다. 20대 총선 당선자 기준 희망 상임위 순위에서 환노위는 9등을 차지해 하위권이었다. ‘젊은-여성-초선-비례’ 의원이 많다 비인기 상임위인 환노위에는 그렇다면 어떤 의원들이 갈까.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크게 원하지 않지만 정당 내에서 권력 지위가 낮아서 강제로 배정된 의원들, 노동 관련 경력이 있어 환노위에 전문성과 소신을 가지고 지망한 의원들. 두 부류의 의원들이 섞인 결과 국회 전체보다 환노위에 배정된 의원들은 나이가 젊고, 여성이 많고, 다선보다는 초선 비율이 높고, 지역구 의원보다 비례 의원 비율이 높다. 노동 관련 경력을 통해 초선 비례의원으로 환노위에서 활동했지만, 다음 총선에서 지역구 의원으로 재선되지 못하고 사라진 경우가 많다. 환노위가 지역구 예산 민원을 해결하는 데 유리하지 않고, 환노위 활동이 의정 경력을 이어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도 환노위에서 소명의식과 전문성을 가지고 의원 경력을 이어온 사람들은 소수지만 존재한다. 노동법안에 대표발의자로 이름을 올린 사람들을 나열해 보면 대부분 민주당 계열(현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많다. 91건 발의로 압도적으로 많은 노동법안을 대표발의한 한정애 의원의 경우 한국노총 출신으로 19대 국회에 비례대표 의원으로 시작해 지역구에서 3선까지 하며 살아남은 케이스다. 그 외에도 민주당 계열 정당에서는 박광온(3선, 원내대표 역임), 홍영표(4선, 원내대표 및 환노위원장 역임), 김상희(4선, 국회 부의장) 의원 등 굵직한 중진들이 환노위에서 활약하며 노동법안을 발의했다. 보수정당 계열(현 국민의힘)에서는 노동법안 발의자 상위권 의원 중에서 임이자와 김성태 의원이 한국노총 출신으로 정치에 입문해 다선 의원으로 살아남았다. 그 외에는 초선 비례로 환노위에서 활동했지만 대부분은 재선에 성공하지 못했다. 진보정당 계열(현 녹색정의당 등)에서는 민주노총 출신의 심상정 의원이 비례대표를 거쳐 4선을 했고, 나머지 의원들은 환노위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초선 비례에 그쳤다. 한정애, 임이자, 심상정 의원 환노위에서 활동한 의원의 구성을 봐도 알 수 있듯, 노동법안 다수는 민주당 계열 의원들이 발의했다. 19대 국회 이후에는 민주당 계열 의원들이 여당이 됐을 때나 야당일 때와 관계없이 보수정당 계열 의원들보다 2~3배 많은 노동법안을 발의했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노조와 관련되어 있고 노사관계를 규율하는 노조법보다는 근로자 개인의 처지 기준을 마련하는 근로기준법 관련 법안을 발의하는 비중이 컸다. 보수정당 계열 보좌관(보고서에서 인용) “집단법(노조법)은 국민의힘에서 하기가 쉽지 않고 그러다 보니까 국힘에서 그래도 친노동인 척하면서 할 수 있는 법이 개별법(근로기준법) 쪽밖에 없어요. 개별법 쪽에서도 돈 별로 안 쓰고도 할 수 있을 만한 거. 그리고 누가 봐도 이놈은 나쁜 놈이다,라고 해서 국민 여론에 얹혀서 갈 수 있을 만한 거.” 진보정당 의원들의 경우 의원의 숫자 자체가 적지만 환노위에 활발하게 참여하며 많은 노동법안을 발의했다. 특히, 노동조합과 노사관계를 규율하는 노조법과 관련된 법안 비율이 높은 점이 진보정당의 특징으로 나타났다. 한국노총은 거대 양당으로, 민주노총은 진보정당으로 총선마다 각 정당이 내는 비례대표 후보들 중 노동계 몫이 한두 명씩 항상 존재한다. 보수정당 계열이나 민주당 계열, 진보정당 계열 할 것 없이 그러하다. 노동계로 분류하면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출신을 살펴보면 정당별 차이가 존재한다. 국내의 대표적인 두 노조 내셔널 센터 중에서 한국노총은 보수정당과 민주당, 두 거대 양당을 통해 국회에 진입해 왔다. 보수정당에는 임이자, 김성태, 김영주(민주당에서 최근 국민의힘 입당), 장석춘, 최봉홍 등, 민주당에는 김경협, 한정애 등이 있다. 반면 민주노총은 거대 양당과 관계를 맺지 않고, 진보정당을 통해서만 국회의원을 배출하는 경향이 있다. 멀리는 권영길, 단병호, 홍희덕이 있고 21대 국회에는 심상정, 류호정, 강은미, 이은주 등이 있다. 오는 22대 총선에서도 각 당은 노동계 인사를 비례대표 당선권에 배치했다. 한국노총 출신으로는 민주당 계열에 박홍배, 보수정당 계열에 김위상 후보가 존재한다. 민주노총 출신 인사는 진보정당인 녹색정의당에 나순자, 이보라미 후보가 가장 앞선 순위(1,3번)로 배정됐다. 이번 총선에서 특이한 점은 민주노총 출신이 민주당 계열의 정당(더불어민주연합)의 비례대표 후보로도 배정됐다는 점이다. 전종덕과 김영훈 두 후보가 그러한데, 전종덕의 경우 진보당이 민주당의 비례연합정당에 참여하면서 비례 후보가 됐다. 김영훈의 경우 원래 진보정당 계열(정의당)로 정치에 입문했지만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 계열의 비례 후보가 됐다. 이러한 변화는 민주노총이 협력 대상을 진보정당에서 민주당까지 범위를 넓혔다기보다 ‘위성정당’을 만들어낸 선거제도, 진보정당이 스스로의 힘으로 서 있지 못하고 민주당과의 연합을 추구하는 상황, 진보정당 인사가 민주당으로 ‘전향’하면서 생겨난 상황으로 보인다. 즉, 이번 총선 국면에서 나타나는 민주노총 출신의 민주당 참여는 민주노총의 영향력 확대가 아닌 진보정당의 소멸 위기를 보여주는 징후로 읽힌다. 낮아지는 가결률, 나아가는 노동권 최근으로 올수록 국회에서 의원들이 발의하는 법안은 많아진다. 하지만 실제로 통과되는 가결률은 낮아지는 추세다. 노동법안은 어떨까. 노사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히는 만큼, 노동법안이 다른 법안들보다 통과되는 비율이 적다. 특히 18대 국회(2008년~) 이후부터는 노동법안 가결률이 매번 전체 법안의 가결률보다 크게 낮아진 경향을 보인다. 노동과 정치가 만나는 국회 환노위의 특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상대적으로 당내 권력 지위가 약한 ‘젊은-여성-초선-비례’ 의원들이 배치되고, 노동법안의 통과 비율은 해가 갈수록 낮아져 20대 국회에서는 5%에 불과한 수준이 됐다. 양대 노총 중 한쪽인 민주노총은 거대 양당과 협력하지 못하고, 오직 진보정당을 중심으로 국회에 진출해 왔는데 그마저도 21대 총선에서는 혼란을 겪고 있다. 이처럼 한국에서 노동과 정치는 여전히 제대로 손을 맞잡지 못하고 있거나, 오히려 날이 갈수록 불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대 국회 환노위에서 새롭게 제정된 법안을 보면, 노동-정치가 아무런 희망이 없거나 역할을 하지 못한 건 아니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13대 국회에서는 ‘장애인고용법’을, 16대 국회에서는 ‘청년고용법’, 17대 ‘특수형태근로자법’, 18대 ‘학력차별금지법’, 19대의 ‘감정노동자법’, 20대의 ‘직장내괴롭힘법’, 21대 국회에선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됐다. 노사가 서로 양보하기 힘든 갈등적인 사안을 다루는 국회 환노위지만, 여론과 시민사회의 요구가 강하게 있으면 정치권이 그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13대부터 21대 국회까지 긴 흐름으로 봤을 때, 국회 환노위는 시민과 노동계의 요구에 호응해 일할 권리를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만든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 참고자료 - 이상직·고민지·강경희 외, “한국 노동정치의 거버넌스와 정책과정”, 국회미래연구원, 2023.12.31. 디자인 : 최혜지
✏️ 뉴스쉽 네 줄 요약 · 삼성 사건과 사법농단 사건에서 정점에 있는 이재용 회장,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각각 1심에서 무죄를 받았습니다. · 두 사건 모두 무죄가 나오면서 당시 검찰이 '무리한 수사'를 했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 당시 검찰이 어떻게 수사를 했고, 무엇이 이전의 검찰과 달랐는지 복기해 봤습니다. · 법원의 판결이 '국민의 법감정'과 동떨어진 경우가 많은 이유를 짚어봤습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1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에서는 정점에 있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도 1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두 사건 모두 검찰의 수사가 진행된 지 수년이 지난 사건인데 오랜 법정다툼 끝에 이제야 1심 판단이 나왔다. 검찰이 무리한 수사를 한 것일까, 1심 법원이 ‘봐주기’ 판결을 내린 것일까. 알다시피 당시 검찰 수사 지휘부가 지금은 대통령과 여당 비대위원장이 된 만큼, 수사와 판결에 대한 비판에 진영논리가 섞여있는 경우가 많다. 이번 뉴스쉽에서는 필자가 삼성과 사법농단 수사할 당시 법조계를 취재하며 관찰한 바를 몇 년이 지나 1심이 나온 지금 복기해보려 한다. ‘뉴타입’ 검사의 등장 2018년으로 돌아가보자. 국정농단 사건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됐고 문재인 대통령으로 정권이 바뀌었다. 좌천됐던 윤석열 검사가 파격적으로 서울중앙지검장이 됐고, 중앙지검 3차장으로는 한동훈 검사가 보임됐다. 이들은 기존의 검찰과 세 가지 면에서 달랐다. 먼저 검찰 수사의 칼끝이 향하는 대상이 달랐다. 검찰을 출입하는 기자들에게 인식되어 온 불문율을 깨뜨렸다. 정권이 교체된 뒤 직전 정권에 대한 수사는 항상 있어왔다. 그런데 당시 검찰은 전전 정권(박근혜 정부가 아닌 이명박 정부)의 대통령에 대한 수사까지 진행됐다. 범죄를 저지른 판사에 대한 수사는 있어왔지만, 사법부의 재판 결과에 대한 수사는 처음이었다. 전직 대법원장을 구속시킨 수사는 처음 보는 일이었다. 대법원장부터 국내 제1의 대기업 회장까지 수사를 이어가더니 살아있는 정권의 총아이자 현직 법무부장관에 대한 수사까지 진행했다. 옆에서 그리고 밖에서 바라보는 기자의 입장에는 검찰의 수사가 무리할 수는 있을지언정, ‘거악’ 앞에서 칼끝이 무뎌지지 않는다고 느꼈다. 두 번째 다른 점은 수사방식이다. 기업이나 공무원, 정권의 비리를 파헤치는 특수수사는 말단에서부터 윗선으로 타고 올라간다. 제일 직급이 낮은 실무자부터 조사하고 구속시킨 뒤, 윗선의 지시가 있었다고 입을 열면 처벌이 줄어들고 입을 닫으면 본인이 책임을 덮어쓰고 형량이 높아지는 식의 선택을 하도록 한다. 법조계의 컨센서스에서 전통적인 특수수사, 좋은 특수수사는 외과의사처럼 메스로 환부만 도려내는 것이다. 다른 비유를 들자면 전쟁에서 적진에 나아간 뒤 적장을 불러내 일기토를 벌이고 적장만 베고 돌아와 적군의 사기를 꺾어버리는 방식이다. 이에 비해 2018년과 2019년에 이뤄진 이른바 ‘적폐청산’ 수사는 조자룡 헌 칼 쓰듯 진행됐다는 평가가 당시에도 지배적이었다. 적장뿐 아니라 주변에 관련된 모든 이들까지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는 방식의 수사로 비유할 수 있다. 예컨대 사법농단 사건 수사 초기에 주목을 받은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의 사례가 있다. 유 전 연구관이 판사 퇴직 후에 USB에 사건자료를 담아서 반출한 혐의가 검찰 수사 과정에서 알려졌다. 유 전 연구관은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자료를 파기해 증거인멸을 했다는 내용도 당시 화제가 됐다. 당시 검찰은 유 전 연구관을 구속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증거인멸 정황을 강조했고, ‘USB 반출’이라는 구체적인 키워드는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됐다. 유 전 연구관은 이후 재판에서 1,2,3심 모두 무죄를 받았다. 삼심제를 거치며 한 번도 유죄로 인정되지 않을 정도의 공소사실이었지만, 수사 당시에는 사법농단의 핵심적인 인물로 지목됐다. 큰 그림에서 볼 때 사법농단의 핵심 관계자이자 정점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비롯해 고영한, 박병대 전 대법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이민걸 전 기조실장, 이규진 전 양형위 상임위원 정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 검찰 수사는 14명의 판사를 기소했고, 불러서 조사한 판사는 수도 없이 많았다. 공소장은 300쪽에 달하고 기소된 범죄사실은 47개에 달했다. 이처럼 조사받는 상대방을 폐허로 만들어버리는 수사방식이 필요했느냐 아니냐를 떠나서, 새로운 ‘초식(招式)’임은 틀림없었다. “공장 바닥을 뜯으니 서버가 나왔다” 당시 검찰이 기존과 달랐던 세 번째는 언론 대응의 수준이었다. 우선 전통적인 검사의 언론대응 방식을 보자. 수사 상황에 대해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언론대응 업무를 담당했던 차장검사는 구체적으로 답을 내놓지 않고 ‘선문답’식으로 답변을 했다. 예컨대 구속영장 청구시점을 물으면, 봄이 와야 꽃이 핀다고 답변하는 식이다. 차장검사의 말 한마디, 어감에 따라 기사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모호하고 신중하게 답변을 하기 일쑤였다. 실제로 검찰 등 수사에 관한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기소 전에 피의사실을 공표하면 죄가 된다고 정해져 있기도 하다. 2018년과 2019년에 걸친 검찰, 정확히는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는 적극적으로 언론에 대응했다. 당시 언론대응을 담당했던 한동훈 3차장검사는 수사과정에서 언론에 압도적인 양의 정보를 공개적으로 브리핑을 통해 풀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사기 수사 초기 압수수색에서 나왔다. 삼성바이오로직스에 대한 압수수색이 진행되던 날 검찰은 공장 바닥을 뜯으니 숨긴 서버가 나왔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날 이 사건을 보도한 대부분의 언론사의 제목은 ‘공장 바닥에 숨겨진 서버’였다. 공장 바닥에 중요한 파일이 담긴 서버를 숨겨놨다는 메시지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확신을 주게 만들었다. ‘공장 바닥’ 워딩은 국내 1위인 대기업의 계열사 직원들이 이런 짓을 해가면서까지 숨겨야 했던 무언가가 있다고 사건을 접한 사람들의 머릿속에 심어줬다. 당시 사건을 취재하던 기자 입장에서는 검찰이 여론을 만들어가는 능력에 감탄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려도 존재했다. 압수수색은 수사의 가장 초기, 강제수사에 돌입하는 시점에 진행된다. 즉, 앞으로 수사가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 상황이라 ‘올드스쿨’ 검사들은 통상 “어떤 의혹 사건에 대해 거주지와 사무실 등에 대한 압수수색을 진행하였다”라고만 설명한다. 구체적으로 어느 곳을 압수수색했고 어떤 물건을 찾았다는 것을 일일이 설명해주지 않는다. 2019년 5월 7일, 압수수색을 통해 공장 바닥에 숨긴 공용서버와 노트북을 발견한 검찰은 이를 토대로 수사를 진행하고 증거로 제시했다. 2024년 2월 5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사건의 1심 법원은 이날의 압수수색이 절차를 위반했다며 공장 바닥에서 숨긴 서버 등을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검찰이 수사 과정에서 여론을 형성하는 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내부 고발로 ‘삼성 비자금 특검’이 있었지만 칼끝이 닿지 못한 대기업의 총수, ‘BBK특검’이 진행됐지만 연관성을 찾아내지 못하고 결국 대통령이 됐던 사람, ‘성역’으로 취급되며 한 번도 내부를 들여다보지 못했던 사법부의 속살. 나열한 것처럼 부패의 의심이 드는 ‘거악’을 잡기 위해서는 여론이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수사는 꺾이기 쉽다. 수사를 무디게 하라는 외압에서 이겨내기 위해서 언론과 접촉면을 늘리며 수사상황을 귀에 꽂히는 키워드를 이용해 설명하고자 하는 방식이 옳은지 그른지는 논쟁적이다. ‘국민의 법감정’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수사 당시의 검찰을 취재한 기자 개인의 입장에서 살펴보았다. 다음은 법원 판결에 대해 짚어 보려 한다. 조국 전 법무부장관 수사를 기점으로 지금까지 검찰 수사는 물론이고, 법원의 판단에 대해서도 진영논리에 입각해 비판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우리 편이나 상대 편에 대해 법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방향으로 구속 여부나 유무죄를 판단하면, 판사의 개인적 성향이나 출신을 토대로 근거가 부족한 비난을 하기도 한다. 정치가 사법화되면서 대법원에서 확정된 판결까지 신뢰하지 않고, 대법관 구성에 따라 편향적인 판결을 내린다는 비판은 이어졌다. 법원의 판단을 불신하는 첫 번째 이유는 비전문가인 시민의 이해 부족과 그로 인한 오해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사법부에서 설명하는 몇 가지 원칙을 살펴보자. “구속 여부는 유무죄 판단이 아니다.” 불구속 수사의 원칙에 따라 수사를 받고 재판을 받는 사람은 가급적 불구속 상태에서 방어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죄가 의심되더라도 도망가거나 증거를 감출 우려가 없다면 감옥이 아니라 몸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재판을 받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많은 시민들은 구속영장이 발부되면 유죄, 기각되면 무죄라고 인식되는 경향이 크다. “유죄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는 원칙 또한 법정 밖 여론의 재판에서는 크게 의미가 없는 공허한 말이 된다. 여론의 법정에선 일단 기소가 되면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날까’하는 생각으로 유죄로 추정하는 경우가 많다. “징역 5년이면 상당히 무거운 형이다.” 어느 판사에게 들은 말이다. 실제로 양형에 있어서 징역 5년의 실형을 내리면 중형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사회적 관심이 쏠린 사건에서 징역 5년형이 나오면 시민들의 반응은 너무 가벼운 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공분을 사는 사건에서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내리지 않는 이상 ‘솜방망이 판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국민의 법감정으로 자리 잡아 있다. 이처럼 사법부가 실제 작동하는 방식, 이를 떠받치는 원칙과 국민의 법감정 사이에는 큰 골짜기가 존재한다. 시민들이 법원 판결에 의구심을 가지는 또 하나의 이유는 판사 개인이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하는 구조에 있다. 사법부의 판결은 본질적으로 법률 전문가인 판사가 외부의 영향 없이 증거에 따라 스스로 판단하는 엘리트주의에 기반한다. 입법부나 행정부의 수장을 민주적으로 선출하듯이 대중이 심판하거나 개입할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법관은 민주적 통제를 받지 않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다. 이런 원리를 통해 사법부는 변화무쌍한 대중의 심리에 영향을 받아 사람의 목숨(처벌)을 좌우하지 않을 수 있다. 또 약자의 인권에 대해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적 요소가 결여된 사법부의 특성상 판결은 국민의 법감정과 긴장을 일으키는 경우가 생긴다. 세상의 관심이 집중된 판결은 공동체의 정의감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사법부는 국민의 법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법감정’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를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요소로 인식되게 한다. 국민의 법감정을 비전문가인 다수 대중이 감정적으로 내세우는 의견 정도로 생각한다면, 법관은 국민의 법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독립적인 판단을 통해 피의자에게 정확한 형량을 내려야 한다. 하지만 법감정이 독일의 ‘Rechtsgefuhl’의 번역어인데, 핵심적 의미는 ‘정의감’에 가까운 용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재벌 회장이나 정권의 핵심 등 유명인사 형사재판의 결과는 피고인 본인뿐 아니라 국민 전체의 정의감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 재판 과정에서 쟁점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종국적으로 형량이 결정되면 국민에게 메시지가 전달된다. ‘죄를 지은 사람은 그에 걸맞은 벌을 받게 된다’는 믿음이 흔들리는 판결은 사회의 정의감을 흔들 수 있다. 때문에 국민의 법감정을 의미 없고 멀리해야 하는 것이라고 치부한다면, 판결과 법감정의 괴리가 결국 공동체의 신뢰를 저하시킬 수 있다. “재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사람이라면, 납득할 수 있는 판단을 내리는 것이 공판중심주의다.” 사법부는 공판중심주의를 강조한다. 판사가 주재하는 열린 재판정 안에서 증거를 통해 유무죄를 다투고 그 안에서 판단이 이뤄져야 한다는 뜻이다. 전문성이 없는 국민이라도 재판을 지켜본다면 그 판단의 근거와 판결내용에 설득이 될 수 있도록 충실히 재판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나온 표에서 보여주듯 판사보다 AI가 더 신뢰가 간다는 인식이 크고, 판사에 따라 판결이 달라질 거라는 생각이 시민들 사이에는 만연하다.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인식에 사적 보복이나 자경단에 대한 웹툰, 드라마 콘텐츠도 인기를 끌고 있다. 삼성 사건과 사법농단 사건의 1심 판결을 바라보며, 판결을 불신하면 사회의 정의가 흔들린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쉬움이 드는 건 사실이다. 뇌물을 준 것은 유죄가 확정됐는데, 뇌물을 준 목적에 대해선 죄가 아니라는 판단, 실무자는 유죄인데 정점에 있는 대법원장은 무죄로 나온 판단을 국민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과연 공판중심주의가 바로 세워져 법정 안에서 납득이 가도록 증명과 설득이 충분히 이뤄졌는지, 사건을 관심 있게 지켜본 관찰자의 한 사람으로서 혼란스럽다. 디자인 : 최혜지
✏️ 뉴스쉽 네 줄 요약 · 제3당의 성공조건으로는 카리스마적 인물, 새로운 의제 설정, 변화를 갈망하는 사회분위기가 필요합니다. ·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은 혜성처럼 등장해 기존 정치를 뒤흔들었고, 창당 1년 만에 집권했습니다. · 영국 노동당은 산업화로 인해 늘어난 노동자 계층에 호소하는 의제로 100년 가까이 유지되던 양당 구도를 무너뜨렸습니다. · 독일 녹색당은 1968년에 분출된 변화의 에너지를 토대로 환경, 젠더, 평화라는 새로운 이슈를 정치로 끌어들여 확고한 제3당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총선이 다가오자 정치권에서 제3당의 깃발을 올리는 이들이 많아졌다. ‘제3지대’로 불리는 이들을 꼽아보면 국민의힘에서 나온 이준석 신당, 더불어민주당에서 나온 이낙연 신당이 있고 민주당과 정의당에서 갈려 나온 금태섭과 류호정 등의 신당이 있다. 선거를 앞두고 제3당을 만드는 시도는 여러 차례 있었지만 결국 양당으로 흡수 통합되는 역사가 한국에선 반복되어 왔다. 소선거구제라는 선거 제도가 있는 한 양당제는 고정값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제도’ 탓만 하며 새로운 정치 시도는 불가능의 영역으로 남겨둘 수는 없다. 이번 뉴스쉽에서는 유럽 정당의 역사를 통해 제3당의 성공조건을 살펴보려고 한다. 제도를 제외한 제3당의 성공 요소로 인물, 의제, 사회적 분위기를 꼽을 수 있다. 카리스마적 인물 - 프랑스의 마크롱 유럽의 주요국들은 다당제라고 하더라도 대부분 대표적인 보수정당과 진보정당, 양당을 중심으로 연합이 형성된다. 독일에는 기민당과 사민당, 영국에는 보수당과 노동당이 있다. 프랑스도 공화당(전신은 대중운동연합)과 사회당이 양대 정당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1981년부터 1995년까지 15년간 사회당의 미테랑이, 다음 10년간은 공화당의 시라크와 사르코지가, 2012년부터 5년간은 사회당의 올랑드가 번갈아가며 집권해 왔다. 그런데 가장 최근 총선인 2022년의 상황을 보면 프랑스 하원 577석 중 공화당은 61석, 사회당은 26석밖에 얻지 못할 정도로 쇠락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전통적인 양당을 군소정당으로 만든 건 2017년 대선이었다. 혜성처럼 등장한 에마뉘엘 마크롱이 기존의 정치판을 흔들었다. 2017년 대선에서 대통령이 됐고, 같은 해 총선에서 자신이 이끄는 정당 ‘앙 마르슈!(전진, 현재 당명은 르네상스)’를 1당으로 만들었다. 2017년의 선거를 계기로 등장한 마크롱과 르네상스는 양당 중심의 정치 구도를 바꿔놓았고 8년째인 지금까지 이 구도가 이어지고 있다. 제3지대가 등장해 양당 구도를 재편할 수 있었던 성공조건 중 하나는 마크롱이라는 인물의 등장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은 돌연변이다.” 프랑스의 유명 소설가 미셸 우엘벡의 말이다. 젊고 잘생긴 정치인 마크롱은 39살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파리정치대학과 국립행정학교를 나온 엘리트였다. 투자은행에 다니던 금융인이었던 마크롱은 사회당 올랑드 정부의 경제부 장관으로 발탁되며 본격적으로 정치행보를 시작했다. 그가 활약한 2017년은 기존 양당에 대한 불신이 높은 시기였다. 공화당의 사르코지 대통령은 비리로 유죄 선고를 받았고, 사회당의 올랑드 대통령은 무능으로 지지율이 4%까지 떨어졌다. 실업률은 10%가 넘었고, 노조의 불만과 시위가 넘쳐났다. 이민자들의 유입으로 도심에서 테러가 일어나면서 프랑스 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프랑스 국민들은 이전의 ‘강한 프랑스’를 만들어줄 리더를 원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크롱은 프랑스 국민들에게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한 인물로 등장했다. 프랑스 국민들에게는 혁명을 통해 군주를 몰아낸 경험이 내재돼 있지만, 양가적으로 나폴레옹이나 샤를 드 골처럼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한 영웅을 바라는 감정도 가지고 있다는 분석이 있다. 프랑스가 ‘유럽의 병자’로 불리며 사회경제적인 침체를 겪을 때, 상황을 타개할 국민적 영웅을 바라는 시기였고 마크롱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새로운 정치인이 기성 정치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세를 불려 가는 것은 제3당의 자연스러운 공식이다. 그 공식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 건 마크롱이라는 인물에게 그럴 만한 매력과 카리스마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2017년 당시에는 이슬람 원리주의자의 테러(‘샤를리 에브도 사건’) 이후 극우 정당을 이끄는 마린 르 펜이라는 새로운 얼굴도 인기를 얻는 시점이었다. 마크롱은 기존의 정당인 사회당의 장관으로 정치를 시작했지만 곧 올랑드 대통령, 사회당과는 선을 그었다. 새로운 정치를 원하는 분위기에서 2017년 대선은 마린 르 펜을 지지하는 극우파와 프랑수아 피용을 지지하는 보수 우파, 장뤼크 멜랑숑의 극좌파 등 새로운 깃발들이 줄지어 등장했지만, 승자는 ‘진보적 중도’를 표방하는 마크롱이었다. 마크롱은 24살 연상의 교사이자 세 자녀를 가진 여성과의 일편단심 러브스토리를 통해 더욱 개혁의 아이콘으로 이미지를 굳혔다. 집권 후에는 유류세 인상에 반대하는 노란 조끼 시위 등으로 리더십에 타격을 잃고 지지율이 낮아지며 어려움을 겪긴 했다. 하지만 최근 마크롱은 다시 ‘인물’을 내세워 위기를 타개하려고 하고 있다. 34살의 가브리엘 아탈을 역대 최연소 총리로 임명하면서 자신의 후계자로 내세웠다. 가브리엘 아탈은 마크롱과 마찬가지로 잘생기고 젊은 엘리트인 데다 성소수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기존 정치권과 다른 개혁적 이미지를 가졌다. 가브리엘 아탈이 여론조사에서 40% 지지율로 1위를 하면서 마크롱이 만든 정당 르네상스는 여전히 집권 여당을 이어갈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이다. 가브리엘 아탈 프랑스 총리 새로운 의제 - 영국 노동당 프랑스의 사례로 보았듯 제3당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끌어갈 ‘인물’도 중요하지만, 정치를 통해 어떤 것을 하겠다는 ‘의제’가 필요하다. 영국 노동당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려 한다. 영국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1등만 국회의원이 되는 선거제도 때문에 양당제로 귀결되는 정치구조를 가지고 있다. 제3당이 성장하기 힘든 조건이다. 영국의 정치는 토리파와 휘그파에서 이어져 내려와 19세기에는 보수당과 자유당의 양당 구도로 굳어졌다. 근대화가 진행될 시기인 19세기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랬듯 보수정당인 보수당은 지주층의 지지를 받는 정당이었고, 자유주의를 주장하며 당시 진보적인 역할을 맡은 자유당은 금융업, 상업 등에 종사하는 중간계급의 정당이었다. 양당 구도가 100년 가까이 굳어진 상황에서 새롭게 탄생한 제3당인 영국 노동당은 결국 자유당을 밀어내고 집권 가능한 정당이 됐다. 영국 노동당은 노조가 만든 정당이다. 189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유럽에서 산업화와 민주화가 일어났다. 공장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계급으로 자리매김하고, 보통선거제가 도입되면서 국민 누구나 정치에 참여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노조가 정당을 만들어 노동자 계급의 요구를 대변하겠다는 의제로 탄생한 것이 영국 노동당이다. 영국 노동당은 노동자의 ‘계급정치’를 내세우며 최저임금의 도입, 일할 권리, 정부가 철도나 광산을 소유해 관리하는 집산주의 등의 의제를 던지면서 기존에 있던 자유당과 차별화했다. 자유당은 제3당인 노동당이 등장하자 처음엔 연합하며 보수당에 반대하는 ‘진보연합’으로 활동했다. 1차 대전 중이던 1915년 노동당은 처음 자유당의 연립정부에 들어가게 된다. 1924년에는 자유당의 협력으로 처음으로 집권까지 하게 된다. 자유당이 내세웠던 의제는 자유주의였다. 신흥 부르주아로 불리는 금융인, 사업가 등 중간계급의 지지기반으로 한 자유당은 자유무역이나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보수당에 맞서왔다. 그런데 시대가 변화하면서 투표권을 가진 노동자 계급의 급격한 성장을 대변하는 정당이 되지는 못 했다. 당시의 ‘시대정신(zeitgeist)’를 포착해 의제화한 노동당이 결국 자유당을 밀어내고 집권정당이 됐고, 지금까지 영국은 보수당과 노동당의 양당제로 굳어져왔다.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시민들의 불만이 폭발하는 때에, 어떤 의제를 내세우며 ‘다수연합’을 만들어내느냐가 새로운 정당의 성공조건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변화를 갈망하는 분위기 - 독일 녹색당 마지막으로 살펴볼 제3당의 성공조건은 ‘사회 분위기’다. 어느 정당이든 변화를 원하는 사회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성공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영국 노동당이 기존의 자유당을 대체한 사례도 1차 대전이라는 혼란한 상황과 사회주의 혁명의 유행 등 시민들 사이에 변화에 대한 갈망이 존재했던 측면이 크다. 이번엔 독일 녹색당의 사례를 살펴보려 한다. 독일 녹색당은 1980년에 창당됐지만 그 뿌리는 1968년에 일어났던 ‘68운동’에 있다. 역사적으로 1848년과 1968년 두 차례만이 세계 혁명이 일어났던 시기라고 보는 시각도 있던 만큼, 당시는 변화의 에너지가 넘치는 해였다. 68운동은 프랑스 파리의 대학교에서 처음 촉발됐다. 기성세대의 질서를 거부하고 권위주의를 타파하자는 구호로 시작된 대학교의 시위가 성 해방, 인종 차별에 대한 금지, 베트남 전쟁 반대, 소련 전체주의에 대한 반대 등 요구사항으로 번졌다.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게”,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서른이 넘은 사람은 그 누구도 믿지 말라” 등의 구호가 넘쳤다. 프랑스에서는 대학생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불을 지르며 경찰과 충돌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독일에서도 대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고, 이후에는 ‘적군파(RAF)’라는 무장한 투쟁조직까지 나와 폭탄 테러를 하는 극단주의자도 생겨났다. 68운동의 움직임은 아시아와 신대륙까지 번졌다. 같은 시기 일본에서는 ‘전공투(전학공투회의)’라는 이름으로 대학생들이 헬멧과 쇠파이프를 들고 바리케이드를 친 뒤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베트남전 반전 운동을 중심으로 성을 해방하고 마약을 즐기는 등 자유를 외치는 히피문화가 확산됐다. 1969년에 열린 음악축제인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이런 모습을 상징한다. 1968년 일본 전공투 이 시기의 활동들을 ‘신사회운동’으로 부르기도 할 만큼, 젊은 층을 중심으로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분위기가 충만했다. 이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탄생한 정당이 독일의 녹색당이다.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보수정당(기민당)과 노동자 계급정치를 위해 만들어진 진보정당(사민당)의 양당 중심으로 정치가 이뤄졌다. 68운동의 사회분위기를 토대로 만들어진 녹색당은 진보를 표방했지만 기존의 진보정당인 사민당과 다른 의제를 내세웠다. 계급정치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기존의 사민당과 차별화하며, 환경과 생태주의, 젠더 이슈와 탈권위를 정치에서 다뤄야 할 의제로 올렸다. 1968년 프랑스 대학 시위 1980년에 창당한 독일 녹색당은 기존 정치와 기성세대가 낡았다는 사회 분위기에 힘입어 창당 3년 만에 의원을 배출했다. “정당에 반대하는 정당”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앞세워 26명의 독일 연방의원이 선출됐는데, 이들은 기성 정치인처럼 넥타이와 정장 차림을 거부하고 청바지를 입고 의회에 입성했다. 이때 의원이 된 반핵 활동을 하던 젊은 여성 환경운동가인 페트라 켈리가 상징적인 인물이다. 독일은 지금까지도 기민당과 사민당의 양당 중심으로 정치가 이뤄지고 있고 녹색당은 집권당이 되진 못했다. 하지만 독일 녹색당은 사민당의 연립내각에 참여해 일부 부처 장관자리를 얻어내기도 하고, 지속적으로 탈핵 목소리를 내면서 기민당의 메르켈 총리가 원자력 발전을 포기하도록 움직이는 등 제3당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해 왔다. 한국에서 제3당의 성공은 가능할까 제3당의 성공조건 세 가지(인물, 의제, 분위기)는 삼위일체처럼 모두 함께 필요한 요소다. 프랑스의 마크롱, 영국 노동당, 독일 녹색당은 공통적으로 세 가지 요소가 어느 정도씩은 포함되어 있다. 변화를 갈망하는 사회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카리스마적인 인물이 나와, 시대정신을 잘 포착한 의제를 내세울 때 제3당은 성공했다. 제3지대가 이합집산하는 지금의 한국은 성공조건이 갖추어졌을까. 우선 변화를 바라는 사회분위기는 어느 정도 존재한다. 기존의 양당에 대한 불신이 커 정치를 혐오하거나 무관심한 사람들은 있다. 하지만 프랑스의 마크롱이 등장하던 때처럼 도심 테러가 일어나거나, 영국 노동당과 독일 녹색당이 탄생할 때만큼 전쟁과 혁명의 상황보다는 변화에 대한 압력이 크게 낮을 것이다. 제3당이 내세우는 의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여러 신당 움직임 중 의제 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한 정당은 ‘지하철 노인 무임승차 폐지’나 ‘여성 공무원 채용시 군 복무 의무화’ 같은 공약을 내세웠다. 공정성에 대한 요구에 부응하며 주로 2030 남성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있다. 하지만, 이런 공약이 집권을 위한 ‘다수 연합’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인지, 한국 사회에 생산적인 논의와 갈등을 만들어내는 의제 설정인지는 의문스럽다. 인물의 경우 창당과 선거과정을 거치며 매력과 카리스마, 결단력이 새롭게 부각되겠지만, 현재까지는 신당들을 이끌고 있는 면면을 보면 참신하다기보단 익숙한 얼굴들이 많다. 세 가지 조건을 갖추지 못한 제3당은 이번 총선에서 당장 국회의원 몇 명을 배출하더라도, 결국 대선 국면에서는 양당에 흡수 통합될 가능성이 있다. 후일 되돌아봤을 때 한국의 2024년은 역사에 남을 ‘백년 정당’, ‘수권 정당’이 새롭게 태동한 해로 기록될 수 있을까. ▶ 참고자료 - 아담 플로라이트, 마크롱의 시련과 영광, 우진하 옮김, 문학사상(2021) - 안느 풀다, 완벽한 남자 에마뉘엘 마크롱, 김영란 옮김, 황소걸음(2018) - 고세훈, 영국노동당사, 나남출판(1999) 디자인 : 박수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