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경제부 안상우 기자입니다.
파편화된 뉴스는 이제 그만, 이슈의 맥락을 읽는 재미를 담았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마약과 이민자 문제를 문제 삼아 멕시코와 캐나다에 보편 관세 25%를 부과하겠다고 큰소리쳤습니다. 지난 1일 행정명령에 서명까지 마쳤지만, 발효를 불과 몇 시간 앞두고 관세 부과를 30일 유예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멕시코와 캐나다가 마약과 이민자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제안을 내놨기 때문입니다. 지난 1기 행정부 때와 마찬가지로 관세를 무기 삼아 원하는 바를 쟁취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탁월한 협상가적 면모가 드러난 순간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트럼프가 받아낸 약속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전혀 새롭지 않았습니다. 멕시코의 '군 병력 1만 명 국경 배치' 약속은 지난 2021년 바이든 행정부와 이미 합의한 사항이었고, 캐나다는 트럼프의 관세 위협 전부터 13억 달러 규모의 국경 강화 계획을 시행 중이었습니다. 외신을 중심으로 정말 트럼프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귀환을 알리는 단순 협박용 이벤트였을까요? 아니면, 트럼프 본인만 알고 있는 다른 노림수가 있는 걸까요? 그나마 확실한 것은 2기 트럼프에서 관세는 더 변화무쌍하고 역동적으로 작동할 것이고, 우리는 그 영향권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란 점입니다. 그래서 시즌2를 맞은 트럼프발 관세 열차의 목적지는 어디일지,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달콤했던 '한국산 세탁기'의 추억 지난달 27일,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소유한 골프클럽에서 열린 공화당 연방 하원 콘퍼런스에 참석했습니다. 취임 일주일이 되는 날인 만큼 이 자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2기 행정부에서 펼쳐질 정책들에 대해 1시간 넘게 연설했습니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별안간 한국산 세탁기 사례를 소개했습니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국내 가격보다 더 저렴하게 미국 시장에서 덤핑 가격으로 수출했기 때문에 자신이 강도 높게 관세를 부과했고 고사 위기에 처했던 미국 회사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단 것입니다. 관세 정책의 성공 사례로 꼽은 것인데, 이런 트럼프의 주장은 대부분 근거가 없거나 사실이 아닙니다. 미국 정부는 삼성전자와 LG전자 세탁기가 덤핑 판매되고 있다며 지난 2013년부터 10% 수준의 반덤핑 관세를 부과했었는데, WTO는 3년 만인 2016년 근거 없는 반덤핑 관세 조치라며 우리 손을 들어줬기 때문입니다. 이듬해 취임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은, 반덤핑 관세에 제동이 걸리자 '세이프가드'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한국산 세탁기의 급격한 수입 증가로 자국 산업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며 긴급수입제한 조치를 발동했습니다. 이로 인해 2018년부터 5년간 한국산 세탁기 수입량은 연간 120만 대로 제한됐고(관세 20%), 이를 초과할 경우 최대 50%의 관세가 적용됐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WTO는 부당하다며 우리 손을 들어줬습니다. 한국산 세탁기가 덤핑 판매되고 있었다거나, 이로 인해 미국의 경쟁 회사들이 심각한 위협에 처했다는 증거나 근거도 없이 관세를 물리다가 제지당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산 세탁기를 자신의 업적처럼 내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통상 분쟁에서는 연달아 패소했지만, 분쟁 내내 이어진 관세 조치 덕분에 미국이 이익을 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세이프가드가 시작된 2018년을 기준으로 한국산 세탁기의 대미 수출 규모는 관세 조치가 없었던 2012년과 비교하면 무려 70% 가까이 급감했고, 결국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미국에 연간 100만 대 이상의 생산 능력을 가진 공장을 신설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트럼프가 굳이 한국산 세탁기를 언급한 이유는 국제 질서를 어지럽히고 혼란스럽게 하더라도 미국에 이익이 된다면 얼마든지 관세를 무기처럼 사용할 것이란 강력한 의지를 대내외에 공표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트럼프의 깊고도 깊은 '관세 사랑'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에 눈을 뜬 건 언제부터일까.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미국 대통령을 막상 해보니 관세만큼 주변국들을 손쉽게 좌지우지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없단 걸 경험적으로 학습했기 때문일까요? 트럼프의 관세 사랑은 그가 정계에 본격 입문하기도 훨씬 전인 1980년대에도 진하게 묻어났습니다. 실제로, 지난 1989년 한 방송 인터뷰에선 다음과 같이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트럼프가 인터뷰를 했을 당시는 플라자 합의* 후 미국 경제가 자유무역에 힘입어 이른바 '골디락스'로 나아가고 있던 시점입니다만, 이런 순간에도 트럼프는 관세를 앞세운 보호무역을 주장하고 있던 것입니다. *플라자 합의 :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G5 재무장관이 지난 1985년 9월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달러 가치 하락을 위한 환율 조정 합의 당시 발언에서 '일본산'을 '중국산'으로 바꾸면, 정확히 오늘날 트럼프 대통령이 주장하는 바와 일치합니다. 그렇습니다. 관세를 향한 사랑은 대통령이 되기 훨씬 전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는 신앙과도 같은 것입니다. "값싼 텔레비전이 미국 공장보다 더 가치 있나?" 많고 많은 것 중에 하필이면 왜 관세와 사랑에 빠진 걸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로버트 라이트하이저라는 인물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트럼프 1기 행정부 내내 미국의 무역대표부 대표를 역임하며 사실상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 정책을 직접 설계한 인물입니다. 라이트하이저는 자신의 저서 <자유무역이라는 환상>을 통해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 정책을 관통하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제기합니다. 그 질문은 바로 '값싼 텔레비전이 미국의 공장보다 더 가치 있을까?'입니다. 1기 행정부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무역대표부 대표 앞서 짧게 언급했지만 미국 경제는 글로벌 자유무역에 힘입어 1990년대에 호황을 누립니다. 경제학 용어로 골디락스라고 부르는데, 성장세는 꾸준하고 실업률도 높지 않은 가운데 물가도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시기를 뜻합니다. 하지만, 라이트하이저가 보기에, 골디락스는 신기루였을 뿐이며 미국 경제는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지난 2000년 미국으로부터 관세 등 각종 무역 장벽을 면제받는 최혜국 대우를 받고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중국은 저렴한 노동력을 앞세워 자동차부터 전자제품 등 각종 소비재를 생산해 미국 등 선진국에 수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미국의 소비자들은 더 싼값에 소비할 수 있게 됐지만, 제조업 일자리는 중국 등 인건비가 저렴한 나라들도 흡수됐고 미국의 무역 적자는 점차 확대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군가는 미국은 반도체와 인공지능 등 첨단 고부가가치 산업에 집중 투자해 이 분야들을 선도하고 있는 만큼 줄어든 제조업 일자리와 늘어난 무역 적자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반론을 펼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라이트하이저는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받아치고 있습니다. 자신의 책 제목처럼, 라이트하이저에게 자유무역은 다국적 기업의 득세, 더 나은 소비 환경, 효율적인 시장 등 그럴싸한 환상만을 보여주고, 실상은 양질의 제조업 일자리 감소, 노동자 계층의 빈곤, 무역 적자의 급등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그의 입장에서 이를 바로 잡을 유일한 해결책은 관세를 앞세운 보호무역으로 잃어버린 일자리를 되찾는 것입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 정책은 철저하게 이런 문제의식에서 설계되고 다듬어졌습니다. USMCA : 트럼프가 동맹국에게 요구하는 것 트럼프 행정부 통상 정책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사례를 꼽으라고 한다면, 중국에 대한 강도 높은 관세 조치일 것입니다. 하지만 동맹국을 상대할 때 트럼프 행정부의 특징은 멕시코, 캐나다와의 자유무역협정 재협상 과정에서 더 잘 드러납니다. 1기 트럼프 행정부는 NAFTA*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역대 최악의 협정"이라고 평가했고 NAFTA를 종료시키거나 재협상하는 게 주요 공약 사항 중 하나였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강한 거부감을 갖는 이유는 NAFTA가 미국 내 제조업 일자리를 희생시켜가면서 소수 기업이나 특정 지역에 혜택을 몰아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NAFTA : 1994년부터 발효된 미국, 멕시코, 캐나다 3개국의 북미자유무역협정 NAFTA를 계기로 미국의 대표 자동차 제조사인 GM과 포드 등 글로벌 자동차 회사들은 저렴한 노동력을 찾아 멕시코에 공장을 신설했습니다. 멕시코에서 낮은 가격으로 차를 만든 다음 관세 혜택을 받고 미국으로 수출했던 것입니다. 덕분에 미국 소비자들은 더 싼값에 자동차를 구매할 수 있었지만, 그 반대급부로 상당수 제조업 일자리는 미국 노동자의 손을 떠났습니다. 더구나 NAFTA의 엄격하지 않은 원산지 규정 탓에 중국 등에서 생산된 자동차 부품을 멕시코 공장으로 들여와 조립만 하면 '북미산'으로 둔갑시킬 수 있었습니다. 북미 이외 지역의 자동차 회사들도 멕시코를 미국 시장 진출의 우회로로 활용할 수 있게 됐고, 미국의 무역 적자는 점점 더 크게 증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기 트럼프 행정부는 캐나다와 멕시코를 협상장에 앉힌 다음 1년 넘게 치열한 줄다리기를 했습니다. 캐나다와 멕시코가 협조적이지 않을 땐 무역법 232조를 앞세워 두 나라에서 수입되는 철강과 알루미늄에 관세를 부과하겠다며 윽박질렀고, 자동차 부문에 대한 조사도 진행하겠다고 겁을 줬습니다. 결과적으로 세 나라는 26년 만에 NAFTA를 USMCA*라는 새로운 협정으로 대체하게 됐습니다. *USMCA : NAFTA를 대체하는 미국, 멕시코, 캐나다의 새로운 무역협정. 2020년부터 시행 USMCA는 NAFTA와 달리 엄격한 원산지 규정을 갖고 있고, 원산지 요건을 기존 65%에서 75%로 상향했습니다. 또한, 자동차의 40%, 트럭의 45%는 미국 부품 제조업체의 통상임금에 해당하는 시간당 16달러 이상을 받는 근로자가 만들어야 한다는 새로운 요건을 포함시켰습니다. 무역협정에 임금 조건을 내걸어 미국 내 제조업 일자리는 보호하면서, 값싼 중국산 부품과 멕시코의 저렴한 노동력으로 만든 차를 미국으로 수출하는 우회로를 차단하기 위함입니다. USMCA 체결식 덕분에 미국산 고부가가치 핵심 부품이 멕시코의 공장으로 수출되고, 멕시코의 값싼 노동력으로 부품을 조립해 미국 소비자에게 다시 완성차를 수출하는 공급망이 자리 잡을 수 있게 됐습니다. 미국 내 제조업 일자리를 지키는 동시에 미국의 무역 적자를 줄이기 위한 '트럼프식 자유무역'인 것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USMCA를 "미국의 일자리와 번영, 성장을 유지시켜줄 공정하고 상호적인 무역협정"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는 동맹국을 대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일관된 전략과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동맹국이 미국의 이익(제조업 일자리 보호 + 무역 적자 감소)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관세 폭탄을 맞을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달라진 초식 : 이민과 마약, 그리고 보편 관세 지금까지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에 대해서 어떤 신념을 갖고 있고, 지난 1기 행정부를 거쳐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됐는지를 살펴봤습니다. 이제는 2기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 현재 상황을 진단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 (왼쪽부터) 2기 행정부는 시작부터 달라진 초식을 보여줬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서두에서 언급한 멕시코와 캐나다에 대한 보편 관세 25%입니다.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차이가 있는데, 첫 번째로 트럼프는 적어도 동맹국을 상대할 때는 철저하게 제조업 일자리 보호와 무역 적자 감소라는 목적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전면에 내세운 건 이민과 마약이란 화두였습니다. 두 번째는 바로 관세 부과 방식입니다. 트럼프가 관세를 무기 삼아 동맹국을 좌지우지해 왔지만, 대부분은 미국이 느끼기에 무역 불균형이 발생하는 분야나 품목을 표적 삼아 이뤄졌습니다. 이런 타겟팅 방식은 상대 국가로 하여금 미국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해서 결과적으로 미국이 원하는 답을 효과적으로 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패권 경쟁국인 중국에게 활용했던 보편 관세 카드를 동맹국에게도 꺼내 들었습니다. 관세는 2기 트럼프 행정부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활용될 것입니다. 제조업 일자리와 무역 적자가 아니더라도 미국에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 동맹국에 관세를 부과해 압박할 수 있고 특정 산업이나 품목이 아니라 보편 관세를 부과해 수위를 전보다 더 높일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은 다시 위대해질 수 있을까? 전미경제연구소(NBER)는 미국 내 경제학 분야 석학들이 소속된 미국 최고의 연구기관입니다. 여담이지만, 미국이 경제 침체에 빠졌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주체는 바로 전미경제연구소입니다. 미국 대통령, 미 연준 의장, 미 재무장관이 아니라고 해도 전미경제연구소가 경기 침체라고 선언하면 끝입니다. Make America Great Again? 이 정도 권위를 가진 전미경제연구소에서 지난 2016년 한 연구 결과(<The China Shock : Learning From Labor Market Adjustment To Large Changes In Trade, 2016>)를 발표합니다. 내용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해 보면, 중국과의 자유무역으로 인해 발생한 노동시장 충격이 시간이 지나도 쉽게 회복되지 않았단 것입니다.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논리는 이렇습니다 : "중국으로 공장이 옮겨가서 일시적으로 미국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을 순 있다. 하지만 재교육 등을 통해 실업자들은 미국이 비교 우위를 갖고 있는 분야에서 새롭게 직장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연구진들이 보기엔 노동시장이 입은 충격(일자리 수 감소, 실업률 증가 등)이 시간이 지나도 메워지지 않았습니다. 트럼프의 주장과 정확히 일치한 이 연구는 훗날 트럼프의 당선을 도왔다는 평가까지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연구진이 8년 만에 새로운 연구 결과(<Help For The Heartland? : The Employment and Electoral Effects of The Trump Tariffs In The US, 2024>)를 발표했습니다. 트럼프가 신봉했던 관세가 정말 미국에 일자리를 가져다줬는지를 분석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수입 관세는 미국이 보호하고자 했던 분야의 고용 수준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고, 보복 관세는 고용에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준 걸로 나타났습니다. 트럼프가 택한 관세 카드는 정작 제조업 일자리 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았단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역 적자는 어떻게 됐을까요?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기 전인 2016년에는 미국의 무역 적자는 약 4천800억 달러 규모였지만, 1기 트럼프 행정부의 임기 마지막 해인 2020년에는 6천500억 달러까지 불어났습니다. 이후 바이든 행정부도 상당 부분 트럼프의 관세 정책을 유지했음에도 무역 적자는 계속해서 불어나 재작년에는 처음으로 9천400억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지난 2016년과 비교하면 2배 가까이 증가한 셈입니다. 트럼프가 시작한 관세를 앞세운 보호무역주의는, 결과만 보면, 미국에 일자리를 가져다주지 못했고, 무역 적자를 줄이지도 못했습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목표와 달리 미국은 더욱 곤경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트럼프가 위대하게 만든 건 무엇일까. 앞서 소개한 전미경제연구소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트럼프의 관세 정책에 영향을 받은 지역(미국 중서부, 남부 등)에선 트럼프와 공화당의 지지도가 더 커졌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미국이 아닌 트럼프 본인이 최대 수혜자였던 것입니다. 데이비드 던 취리히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바보야, 중요한 건 경제야'라는 문구는 매우 유명합니다. 마침 미국이 무역 전쟁을 벌이는 동안 미국 경제는 강력한 성장세를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왜 경제 성장을 한 것인지 유권자가 구분해 내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정부의 통상 정책 덕분에 경제가 성장한 것인지, 아니면 정부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성장한 것인지 말입니다." (뉴욕타임스) 시동 켠 트럼프발 관세 열차, 그 종착역은 어디일까? 2기를 맞은 트럼프 행정부는 더욱 노골적으로 관세를 무기처럼 활용힐 걸로 전망됩니다. '미국을 더욱 위대하게'라는 명분을 앞세우고 있지만, 정작 트럼프 자신과 공화당, 그리고 열성 지지자들에게만 우호적인 결과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이에 따른 청구서는 미국과 그 동맹국이 부담할 걸로 예상됩니다. 2기 트럼프 행정부가 터트릴 관세 폭탄은 진정세에 접어든 미국 물가를 다시 자극해 경착륙에 대한 위기감을 고조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다자 협정을 통해 안정시켜놓은 자유무역 질서가 다시 흔들리면서 동맹국들은 심각한 불확실성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대응 전략을 마련해야 하는 걸까요? 법무법인 광장의 국제통상그룹 공동팀장을 맡고 있는 정기창 변호사는 미국의 일자리와 무역 적자는 물론, 기술 안보와 정치적 셈법까지 고려한 선제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설명합니다. 정기창 법무법인 광장 국제통상그룹 팀장 "우리나라처럼 수출을 많이 하는 나라들은 WTO와 같은 다자주의 협정이 건강하게 유지될 때 유리합니다. 하지만, 캐나다와 멕시코의 사례를 보면 2기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의 이익을 위해 다자 체제를 존중하는 자세를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미국 내에서 제조업 기반이 약화하고 실직자가 많이 발생하거나 트럼프가 정치 세력화할 수 있는 지역 혹은 산업에 대해 우리가 선제적으로 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작가 : 김효진, 인턴 : 배시진, 디자인 : 최혜지
파편화된 뉴스는 이제 그만, 이슈의 맥락을 읽는 재미를 담았습니다. 지난 12일, 대국민 담화에 나선 윤석열 대통령은 계엄 선포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부정선거 가능성을 언급했습니다. 민주주의 제도를 지탱하는 선거 시스템이 위협에 처했음에도 헌법기관이란 이유로 선관위가 협조하지 않고 있어 비상계엄이 불가피했다는 것입니다. 윤 대통령이 부정선거 카드를 꺼내자 즉각 이른바 '극우 세력'이 똘똘 뭉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선관위와 언론까지 나서 한목소리로 부정선거 주장의 허구성을 설득하려 했지만, 부정선거 담론은 되풀이될 뿐입니다. 부정선거 담론을 이토록 단단하게 지탱하는 건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파악하기 위해 SBS 팩트체크 <사실은> 팀은 윤 대통령의 지난 12일 담화 내용은 물론, 부정선거 주장을 확산시키고 있는 극우 유튜버의 콘텐츠를 직접 분석해 봤습니다. 부정선거 담론의 근거가 된 국가정보원 지난 12일 윤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는 총 28분 30초 분량으로 이 가운데 부정선거 관련 내용은 3분 30초가 조금 넘었습니다. 당시 윤 대통령은 "국민께 그동안 차마 밝히지 못했던 더 심각한 일이 있다"라고 운을 뗀 뒤에 선거의 공정성이 위협받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상당히 충격적인 주장이었는데, 근거로 내세운 건 지난해 10월 국가정보원이 발표한 <중앙선관위 보안정보시스템 컨설팅 결과>, 하나뿐입니다. 당시 국정원이 어떤 내용을 발표했기에 대통령까지 부정선거 주장을 하게 된 걸까요? 지난해 7월부터 9월까지 국정원과 선관위, KISA는 선관위의 보안시스템에 대한 합동 점검을 실시했습니다. 결과 발표는 한 달 뒤인 지난해 10월 10일 이뤄졌습니다. 주요 발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국정원이 제공한 도돌이표 악보 지난해 10월, 국정원이 이 같은 내용을 발표하자 선관위는 즉각 반박 자료를 냈습니다. 국정원의 보안 점검은 부정선거 방지를 위한 여러 장치를 배제하고 기술적인 부분에 한정해서 실시했던 것이며, 설령 기술적으로 해킹이 가능하다고 해도 실물 투표지를 바꿔치기하는 게 아니라면 선거 결과를 조작할 수는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선관위의 설명은 아이러니하게도 윤 대통령과 극우 세력에게는 선관위가 정말 해킹 공격에 취약해 선거 시스템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줬습니다. 즉, 선관위가 어떤 해명을 하더라도 극우 세력들은 '해킹', '취약', '조작' 등 단어들로 점철된 국정원의 발표 내용으로 다시 돌아와 부정선거를 주장한 것입니다. 실제로, 윤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고, 특수부대원들이 선관위로 진입했던 지난 4일 새벽 이후 극우 유튜버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쏟아냈습니다. 부정선거 가능성이 있으니 선관위로 계엄군이 투입될 수밖에 없었단 논리인데, 어딘가 익숙합니다. 앞서 살펴봤던 지난 12일 윤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에서 나온 내용과 판박이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극우 세력들이나 하는 주장을 따라 하고 있다며 언론이 나서 일제히 비판했는데, 그 배경에는 바로 국정원의 보안 점검 결과 발표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12일 담화 직후에도 선관위는 반박 자료를 냈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윤 대통령 스스로가 선거 제도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며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극우 유튜버들은 수긍하기보다는 다시 국정원의 발표 내용으로 돌아와 부정선거 담론을 되풀이했습니다. 사실상, 국정원의 발표 내용이 부정선거 담론에 도돌이표 악보를 제공하고 있는 셈입니다. 극우에 영감을 준 건 누구의 책임일까? 부정선거 담론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기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합니다. 정당한 선거 위에 구축됐던 질서들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 밖에서 그 해결책을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부정선거를 사실로 믿었던 윤 대통령이 꺼내 든 카드는 의회를 내란 세력으로 규정한, 반헌법적인 12.3 계엄 선포였습니다. 따라서 부정선거 담론이 되풀이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 근거는 정말 합당한 것인지를 반드시 밝혀내야 합니다. 앞서, 그 이유 중 하나가 국정원의 선관위에 대한 보안 점검 결과라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일은 국정원의 발표 내용이 정말 사실에 부합하는지 따져보는 것입니다. 문을 따고 들어간 것인가? 문을 안에서 열어준 것인가? 선관위에 따르면, 지난해 이뤄진 합동 보안 점검에는 선관위 직원 12명과 국정원 측 15명, KISA 측 3명이 참여했고 보안 점검 결과 역시 서로 공유됐습니다. 즉, 국정원만 알고 선관위는 모르는, 아니면 선관위만 알고 국정원은 모르는 내용은 없다는 게 선관위의 설명입니다. 선관위와 같은 보안 시설은 통상 외부망과 내부망을 구분합니다. 직원마다 외부 인터넷과 연결된 PC 1대와 외부와 연결은 단절된 채 오로지 내부망만 사용하는 PC 1대, 이렇게 2대가 지급됩니다. 지난해 이뤄진 점검은 국정원 측 모의 해커가 선관위 내부망에서 보안 취약점을 찾아본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① 통합선거인명부시스템 탈취 및 조작 가능, ② 이를 통해서 존재하지 않는 '유령 유권자' 등록 가능, ③ 사전투표 결과 조작 가능, ④ 사전투표 용지에 날인되는 청인 및 사인 파일 탈취 가능, ⑤ 사전투표 용지와 QR 코드가 같은 투표지 무단 인쇄 가능, ⑥ 투표지 분류기에 해킹 프로그램 연결해 개표 결과 조작 가능 등의 취약점이 발견됐습니다. 이런 결과에 대해선 국정원과 선관위 모두 동의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국정원과 선관위의 입장 차이가 분명한 부분도 있습니다. 국정원은 지난해 10월 보안 점검 발표 과정에서 "국제 해킹 조직이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해킹 수법을 통해 선관위 시스템에 침투할 수 있었다. 북한 등 외부 세력이 의도할 경우 어느 때라도 공격이 가능한 상황"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즉, 국정원의 모의 해커가 손쉽게 선관위의 보안관제시스템을 뚫고 내부망으로 들어가 보안 취약점들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반면, 선관위에 따르면 보안 점검에 앞서 국정원은 선관위에 공문을 보내 선관위 시스템 구성도, 정보 자산 현황, 시스템 접속 계정 등 정보와 국정원의 모의 해커가 내부망에 침입하더라도 이를 탐지하고 차단하지 않도록 하는 보안 예외 조치를 사전에 요청했다는 것입니다. 즉, 국정원의 모의 해커가 내부망에 침투할 수 있도록 보안관제시스템을 사실상 열어준 상태에서 점검이 이뤄졌단 것입니다. '해커 내부망 침투'만 쏙 빼고 돌아온 답변 보안 점검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보안관제시스템을 평상시처럼 유지한 상태에서 해킹 침투 시도에 잘 대응하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선관위는 지난 2005년 말 '주요통신기반시설'로 지정돼 매년 정부가 인증한 보안서비스 업체로부터 보안 수준을 유지한 상태에서 모의 해킹 등 점검을 받고 있습니다. 선관위는 점검 과정에서 보안관제시스템이 뚫린 적은 없다고 밝혔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100%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간 공개된 적 없는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뚫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해커가 침투했다는 전제하에 취약점을 점검하기도 합니다. 가령, 세계 최고의 도둑이 난공불락처럼 여겨졌던 보안시스템을 뚫고 집 내부에 들어왔더라도 금고 등 다른 장비를 설치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게 대비하고 있는지를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중앙선관위의 선거정보시스템 보안자문위원회 위원장인 김승주 고려대학교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강도 높은 보안 점검이 필요할 때는 전자보다 후자의 방식을 택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국정원이 지난해 선관위를 점검한 것도 바로 이런 방식을 따른 것이라 밝혔습니다. 김승주ㅣ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선관위 보안자문위원회 위원장) "100% 완벽한 보안 관제라는 건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보통은 보안관제시스템을 켠 상태에서 외부에서 뚫고 들어오는 테스트도 하지만, 조금 더 강도 높은 점검을 진행하려면 관제 시스템이 뚫렸다는 전제하에 테스트를 합니다. 국가정보원은 그 후자의 테스트를 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앞뒤 맥락을 다 생략하고 국정원의 모의 해커가 원격으로 선관위의 보안관제시스템을 무력화시켜 내부망을 뚫고 침투한 것처럼 얘기한 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국정원은 어떤 이유에서 모의 해커가 선관위 시스템을 침투했다고 발표한 것일까요? SBS 팩트체크 <사실은> 팀은 이와 관련해 국정원에 공식적으로 질의했습니다. 국정원은 다음과 같은 답변을 내놨습니다. SBS 팩트체크 <사실은> 팀 "국정원은 지난해 10월 선관위 보안 점검 결과 발표에서 '국제 해킹 조직이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해킹 수법을 통해 선관위 시스템에 침투할 수 있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점검 과정에서 국정원은 선관위에 국정원 소속 모의 해커 IP에 대해서 만큼은 선관위 내부망에 침투하더라도 이를 탐지해 차단하지 말 것을 요구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에 대해 국정원은 어떤 입장인가요?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의 해커가 선관위 시스템을 침투했다고 발표한 근거는 무엇인가요?" 국가정보원 "국정원이 지난해 선거인 명부 시스템·개표 시스템·사전투표 시스템 등을 점검한 결과, '사전투표한 인원을 투표하지 않은 사람으로 표시하거나 사전 투표하지 않은 인원을 투표한 사람으로 표시' 할 수 있는 등 다수의 해킹 취약점을 발견해 선관위에 개선 조치를 권고한 바 있음." 짧고, 원론적인 답변을 내놓음으로써 국정원은 사실상 SBS가 묻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1년 전과 온도 차이는 분명했습니다. 왜냐하면 지난해 발표에 있었던 '국정원의 모의 해커가 선관위 내부망을 침투했다'는 내용은 쏙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보안 취약점만 발표한 국정원 국정원이 지적한 취약점에 대해 선관위는 22대 총선을 앞두고 모두 보완을 마쳤습니다. 올해 초 두 차례나 보완 사항에 대해 국정원으로부터 추가 점검을 받았고, 외부 전문가들을 불러 보안자문위원회를 구성한 다음 한 차례 더 점검을 받아 '문제가 없다'는 판단을 받아냈습니다. 그러나 국정원은 보안 취약점을 공개해 놓고, 후속 보완 조치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실제로, SBS 팩트체크 <사실은> 팀은 선관위의 후속 보완 조치에 대한 국정원이 파악하고 있는 사실관계와 입장을 물었지만 아예 답하지 않았습니다. 보안 전문가들은 이런 초식이 매우 이례적이며, 상식에도 반한다고 설명합니다. 보안 점검 결과는 그 자체도 보안이 지켜져야 할 내용이기 때문에 관계 기관에만 통보되기 때문입니다. 설령,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국정원이 점검 결과를 공개했다면, 자신들이 들춰낸 보안 취약점이 총선을 앞두고 제대로 보완됐는지 역시 마땅히 밝혀야 했습니다. 김승주ㅣ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선관위 보안자문위원회 위원장) "보안 점검 결과를 해당 기관에만 통보해 주지 그걸 공식적으로 언론에 발표하진 않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 그랬던 사례는 없습니다. 굉장히 잘못된 일이고 이례적인 일입니다." 5%의 의미 계엄 선포 이후 부정선거에 주장이 더 확산하자 국정원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냈습니다. 국가정보원 "국정원의 선관위 보안 점검 범위가 전체 IT 장비 6,400여 대 중 317대(5%)에 국한돼 부정선거 여부에 대해서는 판단을 내릴 수 없었고, 이런 국정원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음." 언론은 일제히 국정원조차 부정선거에 대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며 부정선거를 주장했던 윤 대통령을 반박했습니다. 그러나 극우의 해석은 달랐습니다. 선관위가 점검 과정에서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해 전체 장비의 5%밖에 조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정선거 여부를 밝혀낼 수 없었다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한 문장짜리 입장문이 정반대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마땅히 들어갔어야 할 설명이 빠져있는 것도 한몫을 했습니다. 선관위 전체 직원이 3,000명 규모라 업무용 PC는 6,000여 대에 달합니다(1인당 2대). 여기에 선거정보시스템 서버 등 주요 전산장비 400여 대를 더하면 국정원이 언급한 전체 장비 6,400여 대가 됩니다. 그런데, 선관위는 미사용 전산장비 12대를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장비에 대한 점검 권한을 국정원에 부여했다고 밝혔습니다. 선관위가 5%만 국정원에 내준 게 아니라, 국정원이 전체 장비 중 점검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장비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선관위가 국정원 점검에 제대로 응하지 않고 부정선거를 은폐하고 있다는 주장 역시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승주ㅣ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선관위 보안자문위원회 위원장) "선관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선거정보시스템'이고, 그다음이 '재외선거관리시스템'입니다. 그런데 선관위는 이런 시스템들을 완전히 개방해서 국정원이 점검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5%라는 단순 비율만 갖고 따져서는 안 됩니다." 침묵이 길어지면, 위기도 깊어진다 우리 현대사에서 부정선거 주장이 제기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또 극우가 부정선거 주장을 처음으로 제기한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선거에서 이긴 정치인 또는 정당이 권력을 독식하는 지금의 권력 구조에서는 부정선거에 대한 우려가 부산물처럼 계속해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대통령까지 나서 부정선거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고, 비상계엄까지 선포한 끝에 우리 민주주의는 송두리째 흔들릴 위기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배경 중 하나가 국정원의 <선관위 보안시스템 컨설팅 결과> 발표였습니다. SBS 팩트체크 <사실은> 팀은 국정원이 부정선거 담론을 부추기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이와 관련한 어떠한 근거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또, 지난해 이뤄진 국정원의 보안 점검은 더 나은 선거를 위해서 꼭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표 내용을 윤 대통령, 또는 극우 세력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해 이용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 대해서는 국정원의 책임이 있다고 판단합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답해야 할 질문들 앞에서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목소리는 커지고 우리 민주주의의 위기는 더 깊어질 것입니다. 작가 : 김효진, 인턴 : 배시진, 디자인 : 최혜지
이슈는 스프링이다! 스프링처럼 통통 튀는 이슈를 핵심만 골라 정리해드립니다. 지난 15일 드디어 비만 치료제 위고비가 국내에 출시됐습니다. 허가는 지난해 났지만, 국제적인 인기와 그에 따른 공급 물량 부족 탓에 1년 6개월 만에 우리나라에 상륙한 것입니다. 이처럼 큰 인기를 끄는 이유는 일주일에 한 번 맞기만 하면 살이 쏙 빠지는 기적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기적에는 증인이 필요합니다.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가 바로 그 증인입니다. 위고비를 맞아서 무려 13kg이나 살을 빼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무슨 상황인데? 기적이 이뤄지고 나면 사람들이 몰립니다. 위고비는 고도비만(비만 지수 30 이상) 또는 체중 관련 질환을 가진 과체중(비만 지수 27 이상~30 미만) 환자를 대상으로 허가가 이뤄진 약입니다만, 기적을 목격한 사람 중 살 좀 빼겠다는 정상 체중의 성인들도 몰려들고 있는 것입니다. 일선 병원에서는 이처럼 기적을 바라는 정상 체중의 성인에게 위고비를 처방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SBS 팩트체크 <사실은> 팀에서 직접 병원 3곳을 찾았는데, 1곳에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처방해 줬습니다. 심지어 상담자는 비만 지수가 19로 저체중에 가까운 상황이었지만, 별문제가 없다며 처방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처방이 문제가 없는 걸까요? 우선, 이렇게 식약처의 허가 사항과 다르게 처방해 주는 것을 '오프라벨(off-label) 처방'이라 불립니다.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지만 의료진의 판단에 따라 충분히 허용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암과 같은 치료가 어려운 질환의 경우 오프라벨 처방을 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좀 더 설명하면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면, 안전상의 위험은 어떨까요? 위고비의 가장 잘 알려진 부작용은 메스꺼움이나 구토와 같은 위장 질환입니다. 자살 충동을 유발한다는 보고도 있었지만, 미국과 유럽의 보건당국은 구체적인 인과관계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지난 4월 밝혔습니다.* *다만, 그 이후에 뉴욕 주커힐사이드병원 게오르기오스 쇼레차니티스 등 연구진이 WHO 데이터를 바탕으로 진행한 연구에서 위고비의 주요 성분인 세마글루타이드를 사용했을 때 '자살 사고 보고 위험'이 유의미하게 상승한 걸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런 부작용은 모두 비만이나 과체중 환자를 대상으로 한 제약사의 임상시험 등에서 보고된 것입니다. 위고비 제조사인 노보 노디스크는 정상 체중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진행한 적이 없습니다. 즉, 정상 체중의 성인이 위고비를 맞을 경우 안전한지에 대한 검증이 제대로 이뤄진 적은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제라도 안전성을 검증해 보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상 체중의 사람들에게 위고비를 맞게 하고 문제가 나타나는지 살펴보는 시험이나 연구는 연구 윤리를 심각하게 위반합니다. 즉, 그동안 이뤄진 적 없고 앞으로도 이뤄지기 힘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그렇다면, 법적으로 문제가 없으니 심각한 부작용이 보고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정상 체중의 성인에게도 처방해 주는 것이 맞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위고비가 출시된 다른 나라의 대응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영국에서는 이달 중순쯤 언론 인터뷰를 통해 웨스 스트리팅 보건장관이 직접 미용 목적으로 단순 체중 감량을 위해 위고비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법적인 구속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보건당국의 수장까지 나서 사용 자제를 촉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습니다. 위고비가 세계에서 가장 먼저 판매되기 시작한 미국에선 지난해 말 정상 체중의 성인에게 위고비 처방을 피해야 한다는 연구 논문*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 논문은 위고비가 거식증과 같은 섭식 장애를 유발하거나 악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위고비는 포만감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인 GLP-1과 유사한 성분으로 이뤄져 있는데, 오남용할 경우 지나친 식욕 저하를 일으킬 수 있고 먹는 것에 대한 병적인 거부감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Use of glucacon-like peptide-1 receptor agonists in eating disorder populations(2023.11) 이웃 나라인 일본에서는 약물로 부작용이 나타날 경우 심의를 거쳐 나라에서 구제하기도 하는데, 애초에 약물 오남용으로 인한 경우에는 구제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우리도 제약사들로부터 분담금을 걷어 예기치 못한 부작용이 발생할 경우 인과성이 인정되면 피해 구제 급여를 지급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약물 오남용으로 인한 부작용은 제외됩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 <사실은> 팀은 위고비의 제조사인 '노보 노디스크'에도 정상 체중의 성인이 위고비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입장을 질의했습니다. 제조사 측은 "전문의약품인 만큼 허가 외 방식으로 사용할 경우 건강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서 "적정 용량과 용법이 아닌 방식의 사용을 보증하거나 권장하지 않는다"라고 답변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보건당국도, 전문가도, 제조사도 한목소리로 위고비의 오프라벨 처방만큼은 권장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치료가 필요한 이들에게 위고비는 기적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치료가 필요 없는 정상 체중의 성인에게는 자칫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청소년 중에 스스로 스마트폰 사용 시간을 조절할 수 없어 과도하게 스마트폰을 사용해 신체적, 심리적 문제 등을 경험하고 있는 이른바 ‘스마트폰 과의존 위험군’이 전체의 40.1%라고 합니다. 성인이나 유아 등 다른 연령대의 스마트폰 사용자보다 2배 가까이 높은 수준입니다. 학교와 사회에서는 나름의 대책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먼저 학교에서는 학칙을 개정해 스마트폰을 등교 시 일괄 수거한 다음 하교 때 다시 돌려주는 방식으로 스마트폰 의존도를 낮추려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스마트폰을 일괄 수거하는 학교는 전체의 58% 수준입니다. (중·고등학교 기준, 2023년) 지난달 국회에서는 아예 스마트폰을 교내에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자거나 SNS 사용 시간도 제한하고, 국가와 지자체가 청소년들의 스마트폰 중독 예방 대책을 마련하도록 하는 법안들도 잇따라 발의됐습니다. 그런데 국가인권위원회는 학교에서 학생들의 스마트폰 사용을 금지하는 조치는 인권침해라는 판단을 내리고 또 유지하고 있어 논란입니다. 어떤 이유에서 이런 판단이 내려졌고, 다른 나라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까요? 무슨 상황인데? 우선, 인권위는 왜 교내 스마트폰 사용 제한 조치가 인권 침해라고 본 것일까요? 시간 중에 학생들이 휴대폰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것에 대해서는 인권위도 충분히 필요한 조치라고 보고 있습니다. 다만, 수업 방해를 우려한다면 수업 시간에만 사용을 제한하면 될 일이지, 수업 외 시간인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까지 사용을 막는 건 지나치다는 겁니다. “정규수업 시간 중에만 그 사용을 제한하고 휴식시간 및 점심시간에는 사용을 허용하는 등 학생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교육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고려할 수 있음에도, 피진정학교는 등교 시간부터 종례 시간까지 휴대전화 사용을 전면 제한하고 있어 헌법이 요구하는 과잉금지 원칙에 반할 소지가 크다.” - 국가인권위원회 시정 권고 결정문 중 발췌 이런 이유로 인권위는 지난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무려 307건이나 개별 학교들에 시정 권고를 내렸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시정 권고를 받은 학교 3곳 중 1곳은 권고를 따르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교사들은 수업 시간에는 걷고 다시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는 나눠주는 방식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른다고 호소합니다. “급식 시간 종 울리면 밥 빨리 먹으려고 뛰어갈 준비를 하는 것처럼 쉬는 시간 5분 전부터 다리를 책상 밖으로 빼내고 수거함에서 스마트폰을 뺄 준비를 해요. 당연히 수업 집중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죠. 그리고 점심시간에는 교실에서 학생들이 나가지도 않고 계속 게임만 해요. 이런 문제들 때부터 차라리 일과 시간 내내 걷는 게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해요.” - 신현중학교 교사 김지은 좀 더 설명하면 다른 나라들은 상황이 어떨까요? 놀랍게도 전 세계 국가 중 약 25% 정도가 법이나 교육 지침 등을 통해 교내 스마트폰 사용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프랑스입니다. 프랑스는 이미 지난 2018년부터 법을 통해서 교내 스마트폰 사용을 제한하기 시작했고, 올해부터는 199개 중학교에서 등교 시 스마트폰을 수거해 하교 때 돌려주는 시범 정책을 시행 중입니다. 우리는 인권침해 논란으로 제동이 걸렸는데, 프랑스는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건 서로가 집중하는 포인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권위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교육적 목적을 달성하는 가운데 사용 제한이 최소한으로 이뤄지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교육적 목적은 물론, 학생들의 건강권까지도 주요하게 보고 있습니다. 지난해 유니세프는 지나친 스마트 기기 노출이 학생들의 학습 능력뿐만 아니라 정신 건강 자체에도 부정적 영향을 준다면서 교내 스마트폰 사용을 교육 목적으로 한정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미취학 아동과 초등생의 경우에는 지나친 스마트 기기의 노출이 성인과 달리 우울증과 수면 장애, 근시 등을 유발할 수 있는 걸로 나타났습니다. 즉, 스마트폰을 비롯한 스마트기기 노출 시간 자체를 줄이는 게 학생들을 위한 것이라 보고 프랑스 등은 수업 외 시간까지도 스마트폰 사용을 제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우리나라 학생들이 스마트폰, 태블릿 PC, 데스크톱, 랩톱 등 스마트 기기에 하루 평균 노출되는 시간은 4시간 43분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미 지나친 스마트 기기 노출의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법과 정책으로 교내 사용 제한을 두고 있는 프랑스와 비교하면 1시간 반 이상 긴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학습권 측면에서 스마트폰 사용을 제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학생의 건강권을 비롯해 사이버 괴롭힘을 통한 학교 폭력, 딥페이크와 불법 도박 등 청소년 범죄로도 시야를 넓혀 스마트폰 사용 제한 규제를 바라봐야 함을 의미합니다. 다행히 인권위는 “앞으로는 학생의 기본권과 건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권고 방향을 살펴보겠다.”라고 SBS에 밝혔습니다. 누구보다 학생이 보호받을 수 있는 긍정적 방향으로 논의가 시작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가수 김호중 씨의 음주 뺑소니 사고 이후, 비슷한 모방 범죄들이 잇따라 있습니다. 이른바 '술타기'라 불리는 이 범행 수법은 음주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낼 경우 현장에서 도주해 붙잡히기 전에 추가로 술을 마셔, 사고 당시 정확한 혈중알코올농도 측정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이후 국회에선 이런 술타기 수법을 차단하기 위해 도로교통법 개정안을 잇달아 발의했습니다. 정치권과 언론에선 이 법안을 '김호중 방지법'이라 불렀는데, 이게 또 다른 논란을 불러왔습니다. 아무리 좋은 법이라도 가해자 혹은 법 적용 대상자의 이름을 넣을 경우, '중대한 인격 모욕' 또는 '명예훼손' 아니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내용의 항의성 댓글은 관련 발의안에 수천 개가 달렸습니다. 어긋난 팬심일 수도 있지만, 법에서 금지하는 행위가 될 수 있는 만큼 팩트체크 <사실은> 코너에서 확인해 봤습니다. 무슨 상황인데? 우선, '김호중 방지법'이라 불리는 법 발의안의 진짜 이름은 '도로교통법 일부개정법률안'입니다. 즉 실제 법안에는 '김호중'이라는 이름이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그저 편의상 정치권과 언론에서 김호중 방지법이라 부르는 것이지 실제 법 이름에 '김호중'이 들어가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정치권과 언론에서 이렇게 부르는 건 명예훼손이나 모욕에 해당할까요? 우선, 형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명예훼손은 구체적인 사실을 적시하거나 아니면 허위로 사실을 퍼뜨려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입니다. 현직 변호사 5명에게 문의했더니, 4명은 단순히 이름을 언급한 것만으로는 명예훼손 행위가 되긴 어렵다고 봤습니다. '○○○ 방지법'이라는 부정적인 뉘앙스의 명칭 속에 누군가의 이름이 들어가면 당연히 기분이 나쁘고 불쾌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체적인 사실을 적시하거나 허위 사실을 퍼뜨려서 명예를 훼손한 걸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변호사 5명 중 1명만 법에서 금지하는 명예훼손 행위에 해당할 수 있다는 의견을 밝혔지만, 이마저도 공익성이 인정돼 실제 처벌로 이어지진 않을 것이라 답했습니다. 그러니까, 변호사 5명 모두 명예훼손죄란 이유로 처벌하거나 금지할 사안은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또, 변호사 5명 모두 모욕죄 역시 마찬가지 이유로 적용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단순히 이름을 언급한 것만으로는 모욕적인 표현이 있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약해 보면, '김호중 방지법'이란 명칭이 가수 김호중 씨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고 심한 경우 사회적 낙인으로까지 작용할 수도 있지만, 법에서 처벌·금지 대상으로 삼고 있는 명예훼손이나 모욕 행위는 아니라는 게 법 전문가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좀 더 설명하면 실명법안은 미국에서 주로 사용됐고, 우리나라는 2000년대 초반부터 매스컴에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김호중 방지법'처럼 특정 사건의 가해자나 아니면 법 적용 대상자의 이름을 딴 사례도 있지만, 피해자나 희생자(정인이법, 구하라법 등) 아니면 법안 발의자(김영란법 등)의 이름을 딴 사례도 있습니다. 이런 실명법안이 죄가 되지는 않지만, 2차 가해 또는 사회적 낙인 등의 우려도 분명히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사용되고 있는 이유는 법안에 대한 쉬운 이해와 공감을 도와 법안 처리에 긍정적인 효과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지난 21대 국회(2020~2024)에서 일반 법안의 처리율은 35% 수준에 그쳤지만, 실명법안은 2건 중 1건꼴로 처리됐을 정도로 처리율이 상대적으로 높았습니다. 그렇다면, 명예훼손도 아니고 법안 처리율도 높으니까 앞으로 '○○○ 방지법'과 같은 실명법안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것이 정답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으려면 실명법안이 우리보다 앞서 등장한 미국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미국의 경우에는 재발을 막고자 하는 사건 혹은 사고의 피해자, 아니면 법안 발의자의 이름을 주로 활용합니다. 법무법인 율촌의 신동찬 미국 변호사는 실제로 미국에서 법을 만들 때 '가해자'의 이름을 사용해 이슈가 된 사례는 찾기 어렵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우리는 법안을 편의상 부를 때 이름을 활용하지만, 미국은 법안명에 피해자 혹은 법안 발의자의 이름을 직접 넣습니다. 일례로, 미국에서 1890년대에 만들어진 반독점법의 이름은 '셔먼 반독점법(The Sherman Antitrust Act)'인데, 여기서 셔먼은 바로 이 법안을 발의한 인물의 이름입니다. 또, '애덤 월시 어린이 보호법(The Adam Walsh Child Protection and Safety Act)'에서도 애덤 월시는 실종 사건 희생자의 이름입니다. 이처럼 미국에서 피해자나 법안 발의자의 이름을 주로 활용하는 건 희생을 기리고 재발 방지를 통한 피해 회복의 상징성, 법안에 대한 책임성 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가해자·법 적용 대상자의 이름을 넣는 사례가 더 많습니다. 실제로, 지난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실명법안 16건 중 12건은 가해자나 법 적용 대상자의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 미국과 달리 가해자나 법 적용 대상자의 이름을 딴 실명법안을 더 많이 사용하는 이유는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미국은 피해 회복과 책임에 방점이 찍혔다면, 우리는 실명법안을 통한 사회적 처벌에 초점이 맞춰진 걸로 보입니다. 그렇기에 미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실명법안에 대한 반발도 일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반발을 긍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긋난 팬심에서 비롯된 심각한 입법 방해 행동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교화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는 사회적 낙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굳이 불필요한 반발과 우려는 피하면서 실명법안이 갖는 입법 효과는 계속해서 누릴 수 있는 대안적 명칭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데요. 전문가들은 'n번방 방지법'처럼 차단해야 할 범행에 초점을 맞춰 부를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대한축구협회가 지난 13일 국가대표 축구팀의 새 사령탑으로 홍명보 HD울산현대 감독을 선임했습니다. 기자회견에 나선 이임생 축구협회 기술총괄이사는 "절차대로 진행해 선임 과정에 문제는 없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박주호 전력강화위원의 폭로로 파문이 커졌고, 정부가 칼을 빼들었습니다. 감독 선임 과정에 대한 감사에 착수하기로 한 겁니다. 정부가 축구협회를 직접 감사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협회 내부에선 즉각 반발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정부 감사가 FIFA 제재로 이어져 월드컵 출전까지 막힐 수 있단 내용이었습니다. 무슨 상황인데? 물론, 이런 주장을 내놓은 건 익명의 축구협회 고위 관계자입니다. 협회 측은 공식 입장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그럼에도 감사를 앞두고 FIFA 제재를 운운하는 건 자칫 감사 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는 만큼 일리가 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대한축구협회는 매년 300억 원 넘는 지원금을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습니다. 지난해 말에는 인사혁신처가 협회를 '공직 유관단체'로 지정했고, 올해부터 문화체육관광부 자체 감사 대상에 포함됐습니다. 최근 논란이 된 감독 선임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축구협회를 상대로 감사를 진행하는 건 정부 고유의 권한이자 의무인 셈입니다. 한편, FIFA의 정관*에는 각 회원국 협회의 독립성에 대한 규정이 있습니다. 이 규정의 핵심은 정부와 같은 제3자의 부당한 영향 없이 독립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단 내용입니다. 그리고 FIFA는 이 조항이 위반됐다고 판단되면 즉각 회원국 자격 정지와 같은 제재를 내렸습니다. 즉, 정부의 감사 활동을 '독립성 훼손'으로 본다면 축구협회 고위 관계자의 주장처럼 출전 정지와 같은 제재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FIFA STATUES(2024) 19조 1항 각 회원 협회는 제3자의 부당한 영향 없이 독립적으로 사무를 관리해야 한다. 좀 더 설명하면 이제 남은 쟁점은 '과연 FIFA가 우리 정부의 감사 활동을 부당한 개입으로 볼 것인가'입니다. 이에 대한 판단을 위해선 FIFA가 그동안 어떤 사례들에 대해 제재를 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쿠웨이트입니다. FIFA는 지난 2015년 10월, 쿠웨이트의 회원국 자격을 정지한 바 있습니다. 이로 인해 쿠웨이트는 2016 리우 올림픽, 2018 러시아 월드컵, 2019 아랍에미리트 아시안컵까지 모두 출전할 수 없었습니다. FIFA가 이처럼 쿠웨이트의 회원국 자격을 정지시킨 건 당시 쿠웨이트 정부가 통과시킬 '체육법' 때문이었습니다. 체육법은 쿠웨이트 정보부 장관이 자국 내 모든 스포츠기구 및 연맹을 관장하고 인사권과 재정적 사안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FIFA는 이런 법이 시행되면 축구협회의 독립성은 훼손될 수밖에 없다고 본 것입니다. 쿠웨이트 사례 이외에도 지난 10년 간 FIFA가 회원국 자격을 정지시킨 사례는 6건이 더 있었는데, 자국 축구협회를 아예 해산시키거나 직접 관리 또는 협회 선거에 개입한 경우였습니다. 이처럼 FIFA는 정부가 협회 선거 또는 협회 집행부 구성에 영향을 미쳐 운영을 좌지우지하려 할 때 회원국 자격 정지라는 강도 높은 제재를 내렸습니다. 실제로, FIFA는 협회 선거나 선출기구 구성에 대한 '정부 개입(Government Interference)'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습니다.(LEGAL HANDBOOK, 2023) 한 걸음 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우리 정부는 최근 논란이 된 대표팀 감독 선임 과정에 대한 감사에 착수했습니다. 이를 두고 협회 내부에선 FIFA 제재로 이어질 수 있다며 불만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FIFA가 엄격히 금지하는 정부 개입은 협회의 선거나 선거를 통해 선출된 집행 기구의 구성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었습니다. 즉, 감독 선임 과정과 운영 전반에 대한 감사 자체만으로 FIFA의 제재 대상이라 단정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실제로, 지난 2005년 국회는 사상 처음으로 대한축구협회에 대한 국정감사를 열고 본프레레 대표팀 감독 경질과 아드보카트 감독 선임 과정에 대해 조사했지만, FIFA는 지금까지도 이를 문제 삼은 적은 없습니다. 정유성 FIFA 에이전트·변호사 정유성 변호사(FIFA 에이전트)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과거의 제재 사례들과 FIFA 정관 규정을 종합해보면, 정부 등 외부 기관이 협회의 집행기구 구성에 관여를 함으로써 경영 전반에 영향을 미칠 때 이런 경우에 '부당한 개입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FIFA가 새로운 판단을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정부 감사가 제재 사례 수준에 이르지 않으면 회원 자격 정지와 같은 제재를 받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도 이번 감사가 FIFA 정관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보고 예정대로 감사 일정을 진행할 방침입니다.
✏️ 뉴스쉽 네 줄 요약 · 비트코인 현물 ETF의 미국 거래소 상장 승인이 이뤄지면서, 비트코인은 투자재로서 확고한 지위를 인정받게 됐습니다. · 그러나 '비트코인의 창시자' 사토시 나카모트는 비트코인이 가치 저장 수단이 아니라 기존 금융 체계를 대체할 수 있는 디지털 화폐가 되기를 꿈꿨습니다. · 비트코인의 실패한 비상을 이어받아 페이스북과 nChain 등 글로벌 기업들이 디지털 화폐를 향한 도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이런 도전이 성공한다면, 디지털 황금으로서의 비트코인의 미래 역시 180도 뒤바뀔 수 있습니다. 비트코인이 지난 11일 역사적인 하루를 맞았습니다. 미국 증시에서 현물 ETF로서 상장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동안 거래소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머물렀던 비트코인은 주식시장으로 영역을 확장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비트코인을 소유하지 않고도 투자할 수 있게 됐습니다.* 비트코인의 가격 변동성에 따라 수익률이 결정되는 비트코인 현물 ETF에 투자하면, 실제 비트코인에 투자한 것처럼 수익을 보거나 손실을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 덕분에 이제 막대한 자본을 가진 기관투자자들이 자신들의 포트폴리오에 비트코인 현물 ETF를 추가할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다만, 금융당국의 조치로 국내에서는 비트코인 현물 ETF 투자가 불가능합니다. 스탠다드차타드(SC)는 올해에만 최대 1,000억 달러(우리 돈 130조 원) 규모의 자금이 비트코인 현물 ETF로 유입될 걸로 내다봤습니다. 전 세계 ETF 운용자산 규모가 약 10조 달러 중 1%만 비트코인 현물 ETF에 투자만 돼도 1,000억 달러인 것입니다. 이런 기대감을 반영하듯 상장 첫날 무려 46억 달러(우리 돈 약 6조 600억 원)의 자금이 몰렸습니다. 지난해 1월 16,000달러 수준이던 비트코인 시세는 현물 ETF 상장 승인 직전 47,000달러를 넘어섰습니다. 상장 승인에 대한 기대감에 1년 만에 무려 3배 가까이 상승한 건데, 실제 승인으로 이어진 만큼 올해 안에 10만 달러 선도 거뜬히 돌파할 것이란 예상도 나옵니다. 이쯤 되니, 지난 2008년 비트코인을 처음 세상에 소개한 사토시 나카모토가 상당히 무안해질 것도 같습니다. 그가 펴낸 백서의 제목은 ‘비트코인 : 개인 간 전자 화폐 시스템(Bitcoin : A Peer-to-Peer Electronic Cash System)’이었습니다. 즉, 종이 화폐는 물론, 기존 금융 체계를 대체할 전자 지급결제 수단을 만들어놨더니, 10여 년 만에 투자재로서 우뚝 선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트코인 현물 ETF 상장 승인 소식과 투자재로서 치솟는 가치와 위상은 사토시 나카모토의 꿈에 대한 종언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오늘 뉴스쉽에서는 희미해진 사토시 나카모토의 꿈에 대해 다뤄보려 합니다. 비트코인이 화폐 아닌 ‘디지털 금’으로 전락한 이유 8천7백 종이 넘는 전 세계 코인 가운데서도 비트코인은 압도적인 시가총액 1위입니다. 인기와 선호, 신뢰도 모두 업계 최고지만 어디까지나 가치저장 수단일 때의 이야기입니다. 디지털 화폐로서의 비트코인에는 늘 의문표가 뒤따릅니다. 비싸고, 느리고, 수수료도 높기 때문입니다. 코인을 지탱하는 건 ‘블록체인 기술’입니다. 기존 금융체계에서 장부는 은행과 같은 중앙화 금융기관이 갖고 있습니다. 은행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제3자가 무단으로 장부에 접근해 위변조 할 수 없도록 보안 조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트코인은 이런 노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장부[블록]가 네트워크에 분산돼 있고 거래 기록(Transaction)은 이 분산된 장부에 새겨지는데, 장부들이 서로 연결[체인]돼 있어 위변조 가능성을 원천 차단할 수 있습니다. 가령, A가 B에게 1 BTC를 준다고 해서 곧장 거래가 효력을 갖는 게 아닙니다. A가 1 BTC를 지급했다는 거래 기록을 다른 누군가(채굴자)가 장부인 블록에 추가해야 해야 합니다. 이런 ‘채굴(Mining)’ 작업을 거쳐 매 10분마다 새로운 거래 기록이 담긴 블록이 생성되고 이 블록은 네트워크에 분산돼 있던 다른 블록들과 연결됩니다. 이렇게 거래 기록이 블록에 새겨진 뒤에야 비로소 거래는 효력을 갖습니다. 채굴 작업이 없다면 비트코인은 사실상 거래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채굴자에게는 채굴에 따른 보상이 주어집니다. 초기에는 블록을 채굴할 때마다 보상으로 50 BTC를 줬는데, 이런 보상은 4년마다 절반으로 줄어드는 반감기를 맞습니다. 첫 번째 반감기는 지난 2012년이었습니다. 이어서 2016년과 2020년까지 반감기가 세 차례 찾아왔습니다. 그 결과 채굴 보상은 6.25 BTC까지 줄었습니다. 올해부터는 절반이 더 줄어든 3.125 BTC가 보상으로 주어질 예정입니다. 이처럼 반감기를 거칠 때마다 공급량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비트코인 가격은 큰 폭으로 뛰었는데, 이는 지난해부터 시작된 가격 폭등의 배경 중 하나입니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비트코인 가격 덕분에 블록을 하나만 채굴해도 약 1억 8천만 원(3.125 BTC) 상당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블록의 크기는 1MB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10분에 하나씩 생기는 블록에는 4,000건의 거래 기록밖에 담기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10분이라는 시간 동안 4,000건이 훌쩍 넘는 거래가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때는 채굴자들이 수수료를 더 많이 내는 사람의 거래 기록부터 블록에 새겨 넣습니다. 때문에, 거래 기록이 몰릴수록 수수료는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비트코인을 통한 NFT 발행이 가능해지면서 지난해부터 블록에 새겨야 할 거래 기록이 급증했고, 이에 따라 거래 당 평균 수수료가 지난달 중순 37.4달러, 우리 돈으로 5만 원까지 치솟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대표 지급결제 수단인 비자카드는 10분마다 평균 4천만 건이 넘는 거래를 거뜬히 소화합니다. 1MB짜리 블록으로 비트코인이 처리할 수 있는 거래량의 1만 배에 달합니다. 이는 금융위기 이후 기존 금융 체계를 탈바꿈하겠다며 등장한 비트코인이 날개 잃은 천사처럼 지급결제 수단으로서의 도약을 포기하고 가치 저장 수단인 ‘디지털 금’으로 전락한 이유입니다. 달러에 전쟁을 선포했던 ‘리브라’ 비트코인의 실패한 비상을 이어받은 건 페이스북(메타)였습니다. 지금은 비트코인 현물 ETF 상장 뉴스가 코인 업계의 최대 화두지만, 불과 몇 년 전에는 다른 뉴스가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지난 2019년 6월 페이스북은 ‘리브라’라는 이름의 코인을 만들겠다고 밝혔는데, 이 소식에 코인판은 물론 미국 등 주요국까지도 크게 동요했습니다. “페이스북의 리브라 프로젝트는 마스터카드, 비자 등 20개가 넘는 글로벌 기업이 함께 했다.” 페이스북은 가입자끼리 자유롭게 주고받을 수 있는 ‘리브라’라는 이름의 코인을 만들려 했습니다. 특히, 리브라는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주요국의 통화 가치에 고정된 ‘스테이블 코인’이었습니다. 덕분에 국경에 관계없이 서로 주고받을 수 있으며, 결제도 할 수 있고 환전도 할 수 있도록 설계됐습니다. 그러나 달러 패권을 송두리째 잃을 수 있었던 미국의 반대가 거셌습니다. 개인정보도 문제가 됐습니다. 가입자의 인적사항 정보를 꿰고 있는 페이스북이 가입자의 금융 정보, 즉 언제-어디서-무엇을-얼마나 구매하는지까지 쥐고 흔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리브라 프로젝트 공개 한 달 만에 미 의회는 페이스북을 상대로 청문회까지 열었습니다. 리브라 프로젝트는 이름을 ‘디엠(Diem)’으로 바꾼 다음 어떻게든 미 당국과 타협하며 생명력을 이어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2022년 1월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은행 실버게이트캐피털에 관련 기술을 2억 달러에 매각하기로 하고 끝내 청산됐습니다. 또 다른 전쟁의 서막 페이스북은 사토시 나카모토가 꿈꿨던 미래에 매우 근접했었습니다. 리브라가 실현됐다면 해외여행을 갈 땐 이제 달러나 유로가 아닌 리브라를 충전하고, 페이스북이 발행하는 리브라가 미 중앙은행에서 찍어낸 달러보다 통화 정책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경제 생태계가 도래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의문점도 남습니다. 비트코인이 실패했던 영역, 그러니까 수천만 건의 거래 기록들이 실시간으로 쏟아졌더라도 리브라는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페이스북은 지급결제 수단으로서 암호화폐가 쓰일 수 있도록 얼마만큼 기술적 진보를 이룩했을까요?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에서 페이스북이 리브라 프로젝트 청산 나흘 만에 COPA(Crypto Open Patent Alliance)에 가입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COPA는 트위터의 창업자인 잭 도시를 중심으로 지난 2020년 설립된 단체로 코인베이스, 크라켄, 유니스왑 등 암호화폐 업계에서 내로라하는 기업들의 연합체입니다. 블록체인 기술들이 각종 특허나 지적재산으로 발목 잡히는 일 없도록 특허 개방을 추구합니다. 메타는 COPA의 이사진으로도 합류하면서 자신들의 특허를 다른 회원들이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메타는 디엠 매각과 함께 암호화폐 관련 기술을 이미 실버게이트캐피털에 매각한 상태였습니다. 모든 특허를 자유롭게 나누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페이스북이 합류한 이후 새롭게 개발된 기술로 COPA가 주목을 받은 사례는 찾기 어려웠습니다. 대신, COPA는 크레이그 라이트라는 인물에게 제기한 소송으로 더 주목을 받고 있었습니다. 사기꾼에게 왜 소송을 제기했을까? 크레이그 라이트는 ‘사토시 호소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난 2015년 미국의 IT전문매체 <와이어드>와 <기즈모도>에 의해 처음 노출된 이후 스스로를 사토시 나카모토라고 주장해왔지만, 그가 제시한 증거를 두고 다른 전문가들은 거짓이라며 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실제로, 세계 최대 규모 암호화폐 거래소인 바이낸스의 창업자인 창펑자오는 그를 “사기꾼”이라 비판했고, 이더리움을 만든 비탈릭 부테린은 그의 주장을 “헛소리”라고 평가했습니다. “호주 출신 IT 전문가로 스스로를 비트코인의 창시자 ‘사토시 나카모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 출처: craigwright.net 사기꾼으로 몰리고 있지만, 비트코인 백서의 저작권은 정작 크레이그 라이트에게 있습니다. 미국 저작권청은 지난 2019년 5월 비트코인의 오리지널 코드와 비트코인 백서에 대한 크레이그 라이트의 저작권 등록 신청을 받아들였습니다. 크레이그 라이트가 정말 사토시 나카모토인지 확인 절차를 거친 것은 아닙니다만, 어쨌든 저작권 등록자명에 사토시 나카모토와 크레이그 라이트의 이름이 함께 기재돼 있습니다. 이후 크레이그 라이트는 비트코인 백서에 대한 저작권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COPA 창립 멤버인 잭 도시의 회사 ‘블록(Block)’ 홈페이지에 백서가 올라온 것을 보고는 크레이그 라이트 측에서 저작권을 주장하는 서한을 지난 2021년 1월 보냈습니다. 이런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COPA는 크레이그 라이트가 사토시 나카모토가 아닐 경우 백서의 저작권이 그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해 줄 것을 법원에 요청했고 소송전이 시작됐습니다. 페이스북이 COPA에 합류한 건 소 제기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입니다. 준비 서면 등 절차를 마친 크레이그 라이트와 COPA의 소송은 다음 달(2024년 2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 소송의 재판부인 영국 고등법원의 멜러(Mellor) 판사는 크레이그 라이트가 비트코인을 만든 사토시 나카모토가 맞는지를 가리는 정체성 이슈가 이번 소송의 핵심이라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정체성 다툼은 시작일 뿐, 그 뒤에는 더 큰 싸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특허 부자 크레이그 라이트 사기꾼 취급받지만, 크레이그 라이트는 블록체인 관련 기술 특허를 다수 보유하는 의외(?)의 면모도 갖고 있습니다. 지난해 7월 <포브스> 보도에 따르면, 크레이그 라이트는 2012년 가을부터 비트코인과 관련한 특허를 신청하기 시작해 현재는 블록체인 관련 특허를 800개나 갖고 있고, 3천여 개의 특허는 출원 단계에 있습니다. 이처럼 특허를 쌓아 올리는 데에는 그가 지난 2015년 공동 창업한 ‘nChain’이라는 IT 회사가 중추적 역할을 했습니다. 재작년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블록체인 관련 특허를 가장 많이 가진 기업은 소프트뱅크 그룹으로, 모두 4,001개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약 92%는 당시는 계열사였던 중국 알리바바 그룹의 것이었습니다. 사실상 중국 기업이 1위인 것입니다. 2위 평안보험과 5위 텐센트 역시 중국 기업입니다. 보유 특허 3위 기업은 IBM이고, 네 번째가 바로 nChain입니다. 이처럼 nChain은 중국과 미국의 거대 기업들이 주도하는 블록체인 기술 경쟁에서 당당히 이름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글로벌 특허정보업체 ‘렉시스넥시스(LexisNexis)’가 재작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한 ‘Innovation-Momentum Report’에 nChain은 2년째 선정됐습니다. 글로벌 기업들이 출원하는 특허의 질적 수준을 매년 평가해 업계에서 혁신을 주도하는 100대 기업을 선정하는 건데, AI 기술 혁신을 주도하고 있는 엔비디아를 비롯해 삼성과 애플, 인텔, 알파벳, 메타, ASML, CATL, 화이자 등 분야를 막론하고 시장을 이끌고 있는 기업들이 포함돼 있습니다. 이름도 생경한 nChain이란 회사가 업계 최고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BSV의 아버지 크레이그 라이트 사단의 이런 기술력과 특허는 BSV 개발로도 이어졌습니다. BSV는 ‘비트코인 사토시 비전(Bitcoin Satoshi Vision)’의 줄임말입니다. 시장에서는 비트코인(BTC)의 이름을 팔아 한 몫 챙겨보려는 ‘비트코인의 아류 코인’ 정도로 이해되고 있지만, BSV는 BTC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앞서, 비트코인의 블록 크기가 1MB에 불과해 높은 수수료와 느린 거래 속도 등 여러 한계를 노출했다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BTC 개발자 사이에서도 블록 크기를 더 키워야 하는 것 아니냐는 논쟁들이 이어져 왔고, 결국 업데이트를 진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원래 거래 기록에는 소유자의 전자 서명도 포함돼 있는데, 용량을 줄이기 위해 거래 기록과 전자 서명을 서로 분리하기로 한 것입니다. 즉, 거래 기록은 전처럼 블록에 새기고 전자 서명은 블록이 아닌 다른 곳에 보관함으로써 거래 처리량을 조금이라도 늘리는 것입니다. ‘Segregated witness(분리된 증인)’ 또는 줄여서 ‘Segwit’이라 불리는 이 업데이트는 2017년 8월 이뤄졌습니다. 그런데 BTC 개발자 모두가 이 업데이트에 찬성을 한 건 아닙니다. 특히, 크레이그 라이트를 포함한 개발자 일부는 마치 이중장부처럼 거래 기록과 전자 서명이 분리되면서 거래의 투명성이 떨어지고 자금 세탁에 활용될 위험성은 커질 것을 우려했습니다. 이처럼 Segwit 업데이트를 받아들일 수 없는 개발자들은 따로 떨어져 나와 ‘비트코인 캐시(BCH)’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BCH 내부에서도 이견이 드러나며 2018년 11월 한 차례 더 분리가 이뤄졌고 크레이그 라이트 주도로 비트코인 사토시 비전, BSV가 탄생했습니다. BTC vs BSV 그렇다면 BSV는 BTC와 어떻게 다른 걸까요? 우선, 생태계의 규칙 자체가 다릅니다. BTC의 경우, A가 B에게 비트코인을 지급하더라도 이 거래 기록(Transaction)이 장부 역할을 하는 블록에 새겨진 뒤에야 효력이 생깁니다. 이런 합의 때문에 A와 B는 거래 기록이 블록에 새겨질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이에 반해 BSV는 거래 기록(Transaction) 그 자체가 효력을 갖는다고 봅니다. 즉, 거래 기록이 블록에 새겨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A가 B에게 비트코인을 지급한 내역만 있다면 효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거래 기록에는 전자 서명도 포함돼 있어 위조나 변조 여부를 어느 정도 가려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거래가 이뤄진 뒤에야 채굴자들에게 거래 기록을 전파하고, 블록에 새기는 채굴 작업은 그다음에 이뤄집니다. 이를 통해 BSV는 수수료는 낮은데 거래 속도가 빠른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BSV 생태계에서도 블록은 10분마다 새롭게 생성됩니다. 그러나 블록의 최대 크기는 4.3GB입니다. BSV 진영에서는 더 커진 블록 크기 덕분에 초당 거래량도 5만 건까지 처리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BSV 채굴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nChain의 목표는 조만간 1TB까지 블록을 키우는 것입니다. 디지털 화폐가 되기 위한 경쟁에서 더 앞서 나가기 위함인데, 크레이그 라이트는 지난 2019년 한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자신감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사토시 나카모토는 반드시 돌아온다 결론적으로, 앞서 소개한 크레이그 라이트와 COPA 사이의 소송은 사토시의 정체성을 놓고 벌이는 싸움인 동시에 비트코인(BTC) 진영과 비트코인 사토시 비전(BSV) 진영이 벌이는 치열한 정통성 다툼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미래의 디지털 화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블록체인 특허 전쟁의 전초전이라 볼 수 있습니다. 소송 선고는 이르면 오는 3월쯤 나올 전망입니다만, 크레이그 라이트가 승소한다고 해서 곧장 BSV가 BTC를 대체하고 BTC가 휴지조각이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BTC는 이미 현물 ETF 상장 승인 결정으로 투자재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인정받고 자본시장에 편입됐기 때문입니다. 다만, 법원이 크레이그 라이트를 ‘비트코인 창시자’ 사토시 나카모토로 인정한다면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선, 크레이그 라이트가 “진정한 비트코인은 BSV”라고 주장하며 BTC에게서 ‘비트코인’ 이름을 박탈할 수 있습니다. 또, 비트코인 파일 형식과 블록체인 데이터베이스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BTC 운영 자체를 제한하려 들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크레이그 라이트는 재작년에 이미 BTC 진영을 상대로도 저작권 소송을 제기했고, COPA가 제기한 ‘사토시 정체성’ 소송과 합병돼 함께 심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크레이그 라이트가 패소한다고 해도 사토시 나카모토의 이상은 멈추지 않고 전진할 것입니다. 페이스북의 실패를 바로 옆에서 보았던 페이팔도 지난해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하며 디지털 화폐를 위한 전쟁에 뛰어들었고, 이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블록체인 특허 경쟁은 더 속도를 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도전 끝에 사토시의 꿈이 마침내 실현된다면, 황금이 돼버린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의 미래는 어떻게 바뀔까요?! 우리가 여전히 사토시의 귀환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디자인 : 최혜지
공매도 제도를 금융당국이 중단시킨 지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글로벌 투자은행(IB)의 불법적인 무차입 공매도 관행 때문에 시작됐지만, 당국은 공매도 제도 자체를 손보려 하고 있습니다. 불법이 만연하기 때문에 제도 전반에 대해 개선이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이복현 금융감독원장, 2023년 11월) 그렇다면, 무엇이 어떻게 개선돼야 공매도가 재개될 수 있을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이 질문에 금융 당국은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매도가 중단되기에 앞서, 저는 공매도가 특정 종목의 주가 하락을 초래한다는 주장과 공매도가 오히려 주가 급락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한다는 주장도 각각 소개했습니다.* 이처럼 상반된 주장을 굳이 비교했던 이유는 둘 다 일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관련기사 : <‘공매도와의 전쟁’이라는데…공매도는 주가 급락의 원흉? 방파제?> 당국이 답을 내놓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공매도 제도가 정말 주가 하락의 주범일까? 아니면 주가 급락을 막는 방파제일까?’라는 질문은 덮어둔 채 제도 개선에 나섰기 때문에 물음표가 남는 것입니다. 이에 SBS 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과 함께 공매도가 중단된 한 달 동안 주식시장에 나타난 변화들을 직접 분석해 봤습니다. 이를 통해 당국이 답하지 않은 질문에 대한 답을 직접 찾아보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공매도 제도 개선 방향에 대한 고민까지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공매도는 주가 하락의 주범일까? 우리 주식시장에서 개인투자자 비중은 코스피의 경우 55%, 코스닥의 경우 80%에 육박합니다. 미국과 일본이 20% 수준으로 추산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는 개인투자자의 비중이 높습니다.(금융위원회, 2023년 11월) 그렇다면, 공매도를 주가 하락 주범으로 지목하는 건 개인투자자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일까요? 미국에서도 개인 투자자들은 자본력을 갖춘 기관들이 공매도를 통해 개인 투자자들에게 손실을 안겨주고, 그만큼 이익을 챙긴다고 의심합니다. 그런 의심에서 시작된 사건이 바로 ‘게임스탑(GameStop) 사태’입니다. ‘멜빈 캐피탈(Melvin Capital)’라는 미국 헤지펀드가 코로나가 한창이던 재작년 초 비디오 게임 소매업체인 게임스탑의 주식을 대규모 공매도하자 이에 대항해 개인 투자자들이 똘똘 뭉쳐 게임스탑 주식을 대량으로 매수하며 주가를 끌어올렸고, 멜빈 캐피탈은 천문학적 손실을 피하지 못하고 끝내 파산했습니다. ‘게임스탑 사태’를 계기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공매도에 대한 규제를 더 강화했다. 국경을 막론하고 개인투자자들이 이처럼 공매도를 주가 하락 주범으로 지목하는 이유는 손익 구조와 관련이 깊습니다. 공매도는 앞으로 주가가 떨어질 걸로 예상되는 종목의 주식을 빌려 매도하고, 나중에 주가가 떨어졌을 때 사들여 되갚는 투자 방식입니다. 주가가 떨어져야 이익을 얻는 구조인 것입니다. 때문에, 막대한 자본과 정보력, 시장 지배력을 지닌 기관 투자자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매도한 종목의 주가를 떨어뜨려 이익을 챙길 것으로 개인투자자들은 의심하고 있습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인지 확인하기 위해 공매도와 주가의 관계를 직접 확인해 봤습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공매도를 위해 주식을 빌려놓고 아직 갚지 않은 미상환 물량을 ‘공매도 잔고’라 하는데, 이 잔고가 늘었다는 건 시장에서 해당 종목을 공매도한 다음 주가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투자자가 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잔고가 늘었을 때 1거래일 뒤에 수익률이 상승하는지 아니면 하락하는지 살펴본다면 공매도와 주가 사이의 상관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로 전면 중단됐던 공매도는 재작년 5월부터 코스피200-코스닥150 종목에 한해서 재개됐습니다. 때문에, 분석 대상은 이들 350개 종목입니다. 분석 기간은 지난달 공매도를 중단하기 직전 6개월(2023년 5월 2일 ~ 2023년 11월 3일)로 잡았습니다. 즉, 지난 반년 동안 350개 종목 별로 공매도 잔고와 수익률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는 것입니다. X축은 공매도 잔고(T 거래일)이고 Y축은 주가 수익률(T+1거래일)인 그래프 위에 각 종목별로 점을 찍어보면 관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점을 다 찍고 나면 추세선을 그려볼 수 있는데, 이때 추세선의 기울기가 공매도 잔고와 수익률 사이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가령, 유한양행의 경우 추세선 기울기는 –0.28입니다. 이는 공매도 잔고가 늘면 수익률이 떨어지는 음의 관계가 나타났단 의미입니다. 반대로, ISC의 추세선 기울기는 +0.32입니다. 공매도 잔고가 늘 때 수익률이 오르는 양의 관계가 나타났단 뜻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350개 종목별로 추세선의 기울기(상관 계수)를 구해보니, 213개 종목에서 음의 관계가 나타났고 나머지 137개 종목에서 양의 관계가 나타났습니다. 모든 종목에서 공매도 잔고가 늘었을 때 주가가 하락하는 음의 관계가 나타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 공매도로 주가가 크게 하락했을 걸로 의심받던 에코프로비엠은 공매도 잔고가 늘 때 오히려 수익률도 오르는 양의 관계가 나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0%가 넘는 종목에서 음의 관계가 나타났습니다. 이는 지난 반년 간 우리 주식시장에서 공매도와 주가 하락의 사이의 상관성이 확인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추가 분석 분석 기간 동안 코스피(-6.2%)와 코스닥(-8.6%) 모두 하향 곡선을 그렸습니다. 미국발 고금리 긴축 조치로 우리 주식시장이 힘을 쓰지 못하며 약세장에 머물렀기 때문에 공매도 잔고와 무관하게 수익률이 하락한 것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지수 수익률이 –5%를 기록한 날에 특정 종목의 수익률이 –4%였다면, 실질적으로 이 종목은 +1%만큼 수익률을 기록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선 분석에서는 반영되진 않았습니다. 이런 시장 상황까지 반영하기 위해서는 ‘시장조정 수익률’이란 개념을 도입하면 됩니다. 방법은 이번에도 간단합니다. 종목 수익률에서 해당 종목이 포함된 지수의 수익률을 뺀 값을 '시장조정 수익률'로 보고, 공매도 잔고(T 거래일)와 시장 조정 수익률(T+1 거래일) 사이의 상관관계를 분석하는 것입니다. 분석 결과, 음의 관계가 나타난 종목은 199개로 소폭 줄었고, 양의 상관관계가 나타난 종목은 151개로 조금 늘었습니다. 수치상의 변화는 있었지만 여전히 둘 사이에는 10%가 넘는 간극이 있을 정도로 공매도와 주가 사이에는 음의 관계가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추가 분석에서도 공매도와 주가 하락 사이의 상관성이 드러난 건데, 그렇다면 “공매도가 주가 하락의 주범이 맞다.”라고 결론 내릴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전상경 한양대학교 파이낸스경영학과 교수는 “공매도가 주범은 아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다만, 우리 주식시장에선 공매도 이후 추종 매도가 강력하게 뒤따르고 있어 결과적으로 공매도가 쏟아진 종목은 주가 하락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합니다. 전상경 │ 한양대학교 파이낸스경영학과 교수 “공매도 물량이 전체 거래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공매도만으로 주가 수익률에 영향을 주기는 어렵단 뜻입니다. 그럼에도 공매도와 주가 하락 사이의 상관성이 나타나는 이유는 공매도 잔고의 증감을 보고 개인 투자자들이 매매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공매도 잔고가 늘어난 모습을 보고 ‘외국 및 기관 투자자의 매도세가 더 강하겠구나.’라고 생각을 해서 덩달아 추종 매도에 나서고, 공매도 잔고가 줄 때는 ‘공매도 세력이 빌린 주식을 상환하고 있어 매수세가 나타나겠구나.’라고 생각해 추종 매수에 나서면서 음의 관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공매도는 주가 급락의 방파제일까? 공매도의 순기능을 지지하는 쪽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공매도란 정보력을 갖춘 기관 투자자들이 ‘이 종목은 고평가 돼 있음이 심히 의심된다.’라며 써 보낸 경고장에 해당합니다. 덕분에 과열됐던 시장의 열기는 진정되고 거품처럼 치솟았던 주가는 적정 수준으로 회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매도 이후 주가가 떨어지는 건 정보력을 갖춘 기관 투자자들이 내린 판단이 맞았음을 뜻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공매도가 제한된다면 이런 순기능은 사라지고 시세 조종이나 과도한 투자 쏠림 현상 등에 의해 주가가 불나방처럼 치솟을 때 견제할 수단이 없어집니다. 실제로, 공매도 제외 종목인 영풍제지는 주가조작 세력의 먹잇감으로 전락해 불과 1년 만에 20배나 가격이 폭등했다가 검찰 수사 이후 6거래일 연속 하한가를 기록하며 바닥을 쳤습니다. 공매도라는 방파제가 뚫리면, 시장은 위아래로 더 크게 출렁이며 혼란만 가중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공매도 제외 종목인 영풍제지의 주가는 1년 사이에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크게 출렁였다. 이런 주장이 일리가 있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공매도 중단 이후 시장의 변동성을 직접 확인해 봤습니다. 방법은 역시 간단합니다. 코스피200-코스닥150 종목 별로 공매도 중단 이전 한 달(10/6~11/3, 총 20거래일) 동안 주가의 변동성을 구합니다. 그리고 공매도 중단 이후 한 달(11/6~12/1, 총 20거래일) 동안의 변동성도 구해 둘을 비교하면 끝입니다. 각 종목의 수익률을 거래일별로 기록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첫째 날은 +4%, 둘째 날은 +2%, 셋째 날은 –1%, …….” 이렇게 기록하다 보면 수익률 평균치를 구할 수도 있고, 평균치로부터 각각의 값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나타내는 표준편차도 구할 수 있습니다. 이때 산출된 표준편차 값이 바로 변동성*에 해당합니다. 가령, LG에너지솔루션의 경우 공매도 중단 후 변동성 값이 중단 전보다 더 커졌는데, 이는 변동성이 심해졌음을 뜻합니다. 공매도 중단 이후 변동성 값이 감소한 LG 화학은 변동성이 줄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 나오는 변동성 값은 일별 표준편차 값을 연율화(Annualization)한 수치입니다. 분석 대상인 코스피200–코스닥 150 총 350개 종목의 변동성을 모두 비교한 결과, 공매도 중단 이후 변동성이 커진 종목은 모두 165개였고, 중단 이후 오히려 변동성이 줄어든 종목은 185개였습니다. 공매도 순기능을 지지하던 전문가들의 예상과 달리, 변동성이 감소한 종목의 수가 더 많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매도 순기능은 허구에 불과한 주장일까요? 전문가들은 둘 사이의 격차가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는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공매도의 순기능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것입니다. 추가 분석 공매도 중단 조치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을 집단은 직전까지 공매도가 활발하게 이뤄졌던 종목들입니다. 반대로, 공매도가 별로 이뤄지지 않았던 종목들은 공매도 중단 조치로부터 큰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중단 조치에 영향을 크게 받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을 구분한 다음 둘의 변동성 변화를 서로 비교*해본다면, 공매도 중단 조치가 변동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과 효과를 분석할 때 사용되는 이중차분법(DID, Difference In Difference). 공매도 중단에 크게 영향을 받았을 집단을 A라고 하겠습니다. A 집단에는 공매도 잔액 상위 50개 종목을 포함시켰습니다. 실제로, A 집단의 공매도 잔액은 전체 350개 종목 공매도 잔액의 74%를 차지할 정도로 공매도가 집중적으로 이뤄졌습니다. 따라서 공매도 중단 조치에 다른 종목들보다 더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매도 중단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을 집단(B)에는 공매도 잔액 비중이 0.6%에 불과한 하위 50개 종목을 포함시켰습니다. 거듭 설명하지만, B 집단은 공매도 중단 조치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을 종목으로 이뤄졌습니다. 반면에 A 집단은 공매도 중단 조치에 크게 영향을 받았을 종목으로 구성됐습니다. 따라서 둘 사이에서 발생하는 차이는 공매도 중단 조치로 인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공매도 중단 조치에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을 B 집단부터 살펴보겠습니다. B 집단에 포함된 종목들은 공매도 중단 이후 평균적으로 3.7%만큼 변동성이 커진 걸로 나타났습니다. 공매도가 저조했던 종목들인 만큼 이 결과는 공매도 중단 조치와는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의 물가상승률 둔화, 긴축 마무리 시그널 등이 공교롭게도 공매도 중단 조치 후 쏟아지며 시장 전반적으로 변동성이 커졌는데, 이 영향으로 B 집단의 변동성이 확대된 걸로 풀이됩니다. 반면, 공매도가 활발하게 이뤄졌던 A 집단은 공매도 중단 조치 이후 변동성이 8.1%나 커졌습니다. A와 B, 두 집단 모두 공매도 중단 조치 이후 변동성이 확대됐지만, A 집단의 변동성이 B 집단보다 4.4% 포인트 더 높게 나타났습니다. 이런 증가폭 차이는 곧, 공매도 중단 결정에 따른 결과물인 것입니다. 공매도 중단 조치는 정말로 변동성을 더욱 키운 걸까요? 빈기범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고평가 된 종목의 주가 급등을 견제할 수 있는 공매도를 갑자기 중단시켜 버렸기 때문에 단기적으로는 주가 변동성이 더 커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빈기범 │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금융 위기나 코로나 위기처럼 금융 시장이 불안정할 때 공매도를 일시적으로 중단하면 안정을 찾아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국은 위기 상황이 아닌데도 ‘공매도가 주가 하락 주범’이라는 일부 개인 투자자들의 극성스러운 요구를 받아들여 공매도를 중단시켰습니다. 그 결과 분석 기간 동안 주식 시장의 변동성은 더욱 커졌음이 드러났습니다. 어느 땐 급등했다가 한눈팔면 떨어질 정도로 변동성이 과도한 시장에선 개인 투자자들은 손실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됩니다. 시장과 투자자, 당국 모두에게 결코 좋은 시장은 아닌 것입니다.” 어느 쪽으로든 기울지 않은 운동장이 필요하다 앞선 분석들은 여러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받아 설계한 결과지만, 연구 논문에 준할 정도로 정교한 분석들은 아닙니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변화를 직접 나서 분석한 이유는 공매도를 둘러싼 질문들에 당국이 여전히 답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무엇이며, 또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요? 첫 번째 분석에서 공매도 잔고가 늘면 주가 수익률이 하락하는 음의 관계가 나타났습니다. 개인 투자자들의 주장처럼 기관 투자자들로 구성된 이른바 공매도 카르텔 세력이 공매도로 이득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가 하락을 유도했기 때문인 것인지, 아니면 해당 종목이 단순히 고평가돼 기관 투자자들의 예상대로 시장에서 조정을 거치며 주가가 적정 수준으로 내려온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공매도 잔고 변화에 따른 추종매매 경향이 유독 우리 시장에서 강하게 나타나 주가가 하락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인과 관계가 어떻든 공매도가 집중된 종목은 주가가 하락하는 경향성을 보였습니다. 인위적인 주가 하락에 공매도가 악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예방할 대책이 마련돼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처럼 공매도를 갑자기 중단시켜 완전히 틀어막고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겠다며 일방적으로 판을 뒤집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 분석에서 나타난 것처럼 공매도의 순기능이 마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공매도 잔고가 많은 종목일수록 그렇지 않은 종목보다 공매도 중단 조치 이후 변동성 증가폭이 더 컸습니다. 고작 한 달, 20거래일 동안의 변화를 비교한 것이지만 중단 기간이 기약 없이 더 길어진다면 변동성 증가폭은 더 커질 수 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장의 모든 주체들에게 돌아갑니다. 공매도의 순기능이 원활히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이번 기회에 확실히 마련돼야 하는 것입니다. 공매도가 우리 주식시장의 적인지, 아군이지 피아식별이 어려웠던 것은 모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매도를 적으로 몰아세우는 마녀사냥 식의 대책도, 공매도 제도가 알아서 잘 시행되기를 시장에 그저 맡겨두는 식의 대책도 아닙니다. 공매도를 둘러싼 부정적 우려와 긍정적 기대를 모두 충족할 수 있는 개선책이 마련돼야 합니다. 디자인 : 옥지수, 최혜지
연일 ‘홍콩 ELS’에서 내년 상반기에 수조 원대 대규모 손실이 예상된다는 뉴스가 나옵니다. ELS(Equity-Linked Securities)는 특정 종목이나 주가 지수를 기초자산으로 삼고, 이 기초자산의 추이에 따라 수익률이 연계되는 증권입니다. 때문에 홍콩 ELS란 홍콩 주가 지수와 연계된 증권을 뜻합니다. ELS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경한 이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2017년만 해도 대한민국 부자들이 재테크를 위해 가장 투자하고 싶어 하던 금융상품이었습니다.(하나금융경영연구소, 2017) 미국과 홍콩 등에서 1980년대부터 시작됐던 ELS는 우리나라엔 지난 2003년 처음 들어왔습니다. 그 이후 20년 동안 ELS는 650조 원 넘게 발행되며 대표 재테크 수단으로 자리 잡았습니다.(금융투자협회) 결국, ‘홍콩 ELS 수조 원 손실’ 뉴스의 골자는 투자 좀 해보려 했던 개인들이 조 단위 손실 위험에 처했단 이야깁니다. 아니, 어떤 상품이기에 이렇게 큰 손실이 나는 걸까요? 그런 상품에는 도대체 누가 돈을 투자하는 걸까요? 그리고 큰 손실이 날 수도 있음에도 왜 계약에 나선 것일까요? 이 뉴스가 궁금했던 모두를 위해 묻고 답하며 한 걸음씩 들어가 보려 합니다. ✏️ 뉴스쉽 네 줄 요약 홍콩 ELS 상품을 은행에서 계약했던 고객들이 수조 원대 손실 위험에 뉴스가 연일 등장하고 있는데, 내용의 핵심은 바로 불완전 판매 논란입니다. 홍콩H지수에 연계된 홍콩 ELS 상품은 홍콩 지수가 폭락할 경우 손실이 불가피한 초고위험 금융상품임에도 정기 예금이나 적금처럼 안전한 상품으로 둔갑돼 판매됐기 때문입니다. 앞서, 수천억 원의 투자 손실을 초래한 DLF 불완전 판매 사태를 계기로 <금융소비자보호법>까지 제정됐음에도 불완전 판매 논란이 반복되는 건 형식에만 치우쳐 실질적으로 투자자들을 보호하는 일에는 소홀히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번 사태의 결론에 따라 수익에 눈이 먼 은행권이 고객을 사지로 내모는 행위에 제동이 걸릴 수도, 아니면 금융자본주의가 초래하는 비극이 계속해서 반복될 수도 있습니다. “홍콩 ELS, 수조 원대 손실” 이 기사는 어제 나온 것도, 지난주에 보도된 것도 아닙니다. 무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2016년 2월 15일(월) 머니투데이 신문 1면에 나온 기사입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처럼 불과 몇 년 전에도 홍콩 지수가 급락하며 홍콩 ELS 투자자들이 수조 원대 손실 위험에 처한 적이 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ELS를 설명하기에 앞서 이 기사를 소개한 건 ELS 상품이 고위험 파생상품이란 점을 가장 먼저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ELS는 우량한 종목(테슬라, 삼성전자 등)의 주가나 홍콩H지수(HSCEI)*, S&P500 지수, EUROSTOXX50 지수 등 해외 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하고, 이 기초자산 움직임에 따라 손익이 결정됩니다. 요즘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홍콩 ELS’는 이 가운데 홍콩H지수를 포함한 해외 지수 3개 정도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상품입니다. *홍콩H지수(HSCEI) : 중국본토기업이 발행했지만 홍콩 거래소에 상장돼 거래되고 있는 주식(H-Shares) 중 시가총액, 거래량 등의 기준에 의해 분류한 40개 종목으로 구성된 지수 상품마다 차이가 있지만, 통상 홍콩 ELS 상품의 만기는 3년입니다. 즉, 3년 뒤 만기 시점에 홍콩H지수를 포함해 기초자산으로 삼은 지수 중 하나라도 판매자와 투자자가 사전에 서로 합의한 수준 밑으로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원금에 더해 수익을 보장받는 것입니다. 이때, 지수가 폭등한다고 해서 수익률이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대신, 만기 시점에 지수가 폭락을 거듭하며 사전에 합의한 수준을 밑돌고 있다면, 하락한 만큼 원금도 손실을 입습니다. 주가 상승보다는 하락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는 상품인 것입니다. 3년 만기가 도래하기 전에 투자금을 회수할 수도 있습니다. ELS 상품은 6개월마다 조기 상환 기회를 갖습니다. 이때도 방식은 똑같습니다. 조기 상환 시점에 기초자산으로 삼은 지수들이 판매자와 투자자가 사전에 합의한 수준을 밑돌지 않으면 ‘원금+수익’이 보장됩니다. 단기에 투자금을 회수하는 것이기에 만기를 채웠을 때보다는 수익은 줄어듭니다. 판매자와 투자자가 사전에 합의한 기준보다 지수가 높다면 원금과 수익을 보장받기 때문에, 이 기준을 ‘배리어’라고 부릅니다. 통상 6개월과 1년 뒤 조기 상환 시점에는 배리어가 90% 수준입니다. 즉, ELS 계약 시점보다 기초자산으로 삼은 지수 중 어느 하나도 90%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다면 이 시점에 원금과 수익을 조기 상환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배리어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낮아집니다. 계약 이후 1년 6개월 또는 2년이 되는 시점에는 80%까지 내려가고, 2년 6개월이 되는 시점에는 70%, 3년 만기를 다 채운 시점에는 55%까지 떨어집니다.(배리어는 상품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ELS에 투자한 시점에 경기 침체가 발생해 기초자산 지수들이 계약 당시의 60%까지 하락했더라도 지수들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3년 만기를 채우면 투자 원금과 약정한 수익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ELS 상품에 배리어를 하나 더 추가한 것이 바로 ‘Knock-in’형 ELS 상품(이하 ‘녹인형 ELS’)입니다. 이 상품에는 기존 배리어 밑에 녹인(Knock-in) 구간(통상, 계약당시 지수의 50% 수준)이 존재합니다. 1번 사례처럼 만기까지 한 번도 배리어를 넘지 못하더라도 녹인 구간에 진입하지 않았다면 원금과 약정한 수익을 모두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녹인형 ELS 상품의 특징인데, 투자자에게 항상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기초자산으로 삼은 지수가 한 번이라도 계약 당시보다 50%를 밑돌아 녹인 구간에 진입했다면 원금과 수익을 받기 위해서는 2번 사례처럼 반드시 배리어를 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녹인형 ELS의 배리어는 다른 상품들보다 더 높게 형성돼 있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ELS는 2016년에도, 지금도 투자자들을 수조 원대 손실 위험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녹인형이든 아니든 ELS는 막연한 확률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야바위 게임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야바위는 뒤집었을 때 나오는 카드 숫자가 중요하다면, ELS는 내가 어떤 지수를 선택했고 그 지수가 얼마나 하락할지가 중요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야바위 게임에 어쩌다 투자자들이 내몰렸을까요? “한 번도 손실난 적 없습니다” 홍콩 ELS 상품을 설계하고 발행하는 주체는 증권사라면, 은행은 이 상품을 고객에게 판매하는 창구 역할을 합니다. 홍콩 ELS 상품 열에 아홉은 은행에서 계약됐습니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상품 계약자들은 수익률이 그나마 괜찮은 예금이나 적금 상품을 알아보려 은행을 방문했다가 ELS 상품을 권유받았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때마다 이들이 은행 직원으로부터 들었던 말은 “지금까지 손실난 적 없어요.”였습니다. 예금이나 적금 정도로 생각하고 가입한 투자자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야바위 같은 ELS 상품을 두고 ‘손실난 적 없는 금융상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지난 2015년 홍콩H지수는 14,801까지 치솟았지만 불과 6~8개월 만에 49%나 급락했습니다. 이에 따라 앞서 살펴본 신문 기사처럼 무려 10조 원에 달하는 투자 손실이 발생할 뻔했습니다. 그러나 불과 6개월 만에 지수는 다시 1만 선을 회복하며 대규모 손실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물론, 이 사이에 만기가 도래해 손실을 본 투자자들도 있습니다.) 그 이후, 2017년부터 2020년 말까지 홍콩H지수는 40% 이상 급락하거나 급등하는 일 없이 횡보기를 갖습니다. 그 결과 홍콩H지수를 기초자산으로 삼은 ELS 상품의 경우 손실 위험이 급격히 낮아졌습니다. 덕분에 홍콩 ELS 상품은 이제 손실난 적 없는 안전한, 그러면서도 상대적으로 수익률이 높은 금융 상품으로 둔갑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 기간 매년 홍콩H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ELS 상품은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대규모 손실 위험을 겪었던 2016년에는 발행금액이 5조 원에 불과했지만, 2017년에는 3배 정도 늘어 16조 원 넘게 발행됐고, 2018년에는 또 3배 늘어 50조 원 가까이 발행됐습니다. 2019년에도 상승세가 이어지며 50조 원 넘는 홍콩 ELS 상품이 발행됐습니다. 코로나 락다운 위기를 맞았던 2020년에도 홍콩 ELS 상품은 무려 19조 원 넘게 발행됐습니다. ELS의 민낯이 드러나다 안전한 금융 상품처럼 행세하던 홍콩 ELS의 실체는 지난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코로나 위기 대응과정에서 중국은 철저한 방역과 봉쇄를 선택했고, 이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미국 등 주요 국가들이 이전 지출을 늘린 것과 달리 중국은 돈을 풀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더해 미국이 동맹국을 총동원한 ‘디리스킹’* 전략을 앞세워 중국을 전방위 압박했습니다. 그 결과 엔데믹 이후에도 중국 기업들은 힘을 쓰지 못했고 홍콩H지수는 폭락했습니다. *참고 기사 보기 - 미국과 중국 사이 어딘가에...‘디커플링’보다 더 무시무시한 ‘디리스킹’ (뉴스쉽) - 싸우자는 건가 말자는 건가, 중국 ‘디리스킹’ 말하는 미국의 속내는? (뉴스쉽) 폭락한 홍콩H지수는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복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내년 상반기까지 이대로 유지된다면 2021년 상반기에 홍콩H지수를 기초자산으로 삼은 ELS 상품은 손실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지난해 10월 고점 대비 40%까지 폭락한 탓에 녹인형 홍콩 ELS 상품 대부분은 녹인 구간에 진입했습니다. 배리어가 더 높게 형성돼 있는 녹인형 ELS 상품의 경우 원금과 수익을 보장받기가 더 어려워진 것입니다. 내년 상반기에 만기가 도래하는 홍콩 ELS(총 9조 5,873억 원) 가운데 무려 5조 6,809억 원이 녹인 구간에 진입했습니다. 이 가운데 82.5%에 달하는 4조 6,867억 원이 은행에서 계약됐고, 나머지 9,942억 원은 증권사를 통해 판매가 됐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녹인 구간에 진입한 홍콩 ELS 잔액 대부분이 KB국민은행에 집중돼 있다는 점입니다. KB국민은행이 판매한 홍콩 ELS 상품 중 이미 녹인 구간에 진입한 잔액은 4조 6,434억 원입니다.(내년 상반기 만기 도래 상품 기준) 녹인 구간에 집입한 은행권 판매 잔액의 99%입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녹인형 홍콩 ELS 상품만 따져본 금액이란 사실입니다. 녹인형이 아닌 ELS 상품은 배리어가 상대적으로 낮게 형성돼 있긴 하지만 지금처럼 홍콩H지수가 회복되지 못하고 유지된다면 마찬가지로 원금 손실 위험이 큽니다. 즉, KB국민은행에서 집중적으로 판매한 녹인형 ELS 상품 말고도 다른 은행에서 판매한 ELS 상품들에서도 손실이 발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고점 대비 50%에 불과한 홍콩H지수가 지금처럼 유지된다면 내년 상반기 4.6조 원 규모의 손실이 발생할 걸로 추정됩니다. (5대 은행 기준, 은행연합회) 엔데믹 이후 중국 기업들의 실적 부진은 홍콩H지수 폭락으로 이어졌고, 초고위험 상품으로서 ELS의 민낯이 드러나면서 투자자들은 수조 원대 투자 손실 위험에 직면하게 됐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무엇일까요? 다음 질문은 ‘어쩌다 은행권에서 이렇게 많은 ELS 상품을 판매하게 된 것일까?’, 그리고 ‘왜 판매량이 특정 은행에 집중됐는가?’입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다 ELS 잔혹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많은 면에서 서로 유사했던 ‘DLF 불완전판매 사태’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DLF(Derivative Linked Fund)는 독일과 영국, 미국 등의 국고채 금리를 기초자산으로 한 파생결합펀드 상품입니다. 홍콩 ELS가 홍콩H지수의 움직임에 따라 손익이 결정됐다면, DLF는 독일 등의 국고채 금리 움직임에 따라 수익이 결정됩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우리은행과 하나은행은 당시 초고위험상품에 해당하는 DLF를 ‘손실확률 0%’라고 강조하며 고객에게 손실 가능성은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고(설명의무* 위반), 잘못된 설명을 듣고 고객이 DLF 가입을 결정하면 그제야 서류상 고객의 투자성향을 ‘공격 투자형’으로 임의 작성(적합성원칙** 위반)하는 등 방식으로 총 피해 투자자 2,875명에게 DLF 상품을 불완전 판매해 4,500억 원에 달하는 대규모 투자 손실을 초래했습니다. *설명의무 : 상품의 내용과 위험 등을 투자자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할 의무. **적합성원칙 : 금융소비자에게 적합하지 않은 계약 체결을 권유하지 않는 원칙. DLF 불완전 판매로 투자 손실을 입은 고객들이 금융감독원 앞에서 시위하는 모습 사실상, 은행이 고객을 기만해 위험에 내몰고 그 대가로 이익을 챙긴 사례입니다. DLF 사태 이후 서둘러 대책 마련에 나섰던 금융위원회는 2019년 11월 〈투자자 보호 강화 방안〉이란 특단의 조치를 내놓았습니다. 파생상품처럼 복잡해 투자자의 이해가 어렵고, 최대 원금 손실 가능성이 20%를 넘는 상품을 ‘고난도 금융상품’으로 규정하고, 은행에서 이런 상품들을 판매하는 것을 제한하기로 한 것입니다. 금융위원회의 초안에는 ELS 상품도 은행에서 취급할 수 없는 고난도 금융상품 목록에 포함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저금리 시기에 비이자수익이 절실했던 은행권은 ELS 상품만큼은 계속해서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며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당국은 한 달 만에 입장을 바꿔 5개 대표지수(KOSPI200, S&P500, EUROSTOXX50, HSCEI, NIKKEI225)로 구성된 ELS 상품은 은행 판매를 허용하기로 했습니다. 은행들의 놀이터가 된 ELS 은행에 ELS 판매를 터준 당국은 판매 한도를 각 은행의 2019년 11월 말 기준 신탁상품 잔액으로 묶어놨습니다. KB국민은행은 당시 신탁 잔액이 13조 원 규모로 은행들 가운데 판매 한도가 가장 높았고, 뒤이어 하나은행 6조 원, 신한은행 5조 원, 우리은행 4조 원 순이었습니다. 덕분에 KB국민은행은 다른 은행들에 비해 ELS 상품을 많이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포트폴리오가 녹인형 ELS 상품에 집중돼 있었습니다. 이는 최근 홍콩H지수 폭락으로 녹인 구간에 진입한 상품 대부분이 KB국민은행에서 판매된 이유입니다. 당국이 나름 한도를 정하긴 했지만,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 동안 4대 시중은행(KB국민, 신한, 우리, 하나)은 ELS 상품을 매년 20조 원 넘게 판매했습니다. 통상 ELS 상품 판매 수수료가 1% 수준인 점을 감안하면 최대 6000억 원에 달하는 수수료 이익을 챙긴 것입니다. 그 대신에 은행을 믿고 ELS 상품을 계약했던 고객들은 지금 수조 원대 손실 위험에 처했습니다.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이야기입니다만, 당국의 결정으로 고객들의 투자 손실과 은행의 수수료 이익이 서로 맞바꿔진 셈입니다. 면죄부가 된 ‘금융소비자보호법’ ELS 발행 기관인 증권사보다 은행들이 더 많이 판매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는 은행은 고객의 예금을 취급하는 금융기관이란 점입니다. 고객들은 돈을 들고 은행을 찾습니다. 은행은 증권사보다 잠재적인 ELS 상품 고객층에 대한 접근성이 훨씬 높습니다. 덕분에 ‘뭐 수익률 좋은 적금이나 예금 상품 없나?’라며 은행을 찾아왔던 고객에게 은행은 홍콩 ELS 상품을 권유할 수 있고, 고객들은 굳이 증권사를 찾지 않더라도 손쉽게 ELS 상품에 가입할 수 있습니다. 다만, 고객들은 은행이 고위험 금융상품을 판매하는 곳이 아니라 원금 보장을 전제로 예‧적금 상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인식합니다. 또 은행은 고객의 예금 가운데 얼마가 어디에 묶여 있는지, 그래서 지금 얼마가 투자가능한 상황인지 등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은행 창구에서 DLF나 ELS같은 고위험 상품이 불완전 판매될 개연성도 높습니다. 원금이 보장될 것이라 굳게 믿는 고객에게 은행이 마구잡이로 고위험 상품을 판매하도록 놔둔다면 DLF 사태는 언제든 반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당국도 이런 가능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은행들에게 ELS 판로를 열어주되, 〈금융소비자 보호법〉*과 같은 투자자 보호 방안을 제정해 불완전 판매를 차단하려 했습니다. *DLF 사태 이후 2020년 3월 제정돼 2021년 3월부터 시행 고위험 금융상품 투자자 보호 강화 방안 발표(2019년 11월 14일) 이 법의 취지는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말자.'입니다. 금융기관은 고객에게 부당하게 상품을 권유하지 말고(부당권유 금지 원칙), 상품의 위험성 등을 충실하게 설명하고(설명의무 준수), 적합하지 않은 상품은 권유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적합성 원칙 준수)는 원칙은 이미 〈자본시장법〉에 규정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만 원칙을 준수함으로써 법의 취지를 형해화시켰고, 수천 명의 피해자와 투자 손실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앞으로는 투자자 보호를 위한 원칙을 실질적으로 준수하지 않는다면 강도 높게 책임을 묻겠다며 새로 법을 만든 겁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은행 등 금융기관들은 고객의 투자성향을 먼저 분석한 다음 ‘공격 투자형’*으로 나올 때만 ELS 같은 고위험 상품을 판매할 수 있게 됐고(적합성원칙), ELS 상품에 가입하려는 고객에게는 투자 위험성이 담긴 핵심 설명서를 교부해야 하며, 판매 과정을 녹음해야 하고, 2영업일 간의 숙려기간도 의무화했습니다.(설명의무) 또한, 이런 원칙을 지키지 않아 고객에게 손실이 발생할 경우 손해배상책임을 규정하고 있고, 이때 고의로 원칙을 위반한 게 아니라는 점을 금융기관 스스로 입증하도록 했습니다.(손해배상 및 입증 책임) *공격 투자형 : 시장 수익률을 훨씬 넘어서는 투자수익을 추구하며 투자자금 대부분을 위험자산에 투자할 의향이 있는 유형으로 총 5개의 투자 유형(공격 투자형, 적극 투자형, 위험 중립형, 안정 추구형, 안정형) 가운데 가장 공격적인 성향으로 분류. 그러나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던 법을 아이러니하게도 금융 기관들이 면죄부처럼 이용하면서 작금의 홍콩 ELS 불완전 판매 논란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VIP룸으로 들어오세요.” 〈금융소비자보호법〉의 시행을 이틀 앞둔 지난 2021년 3월 23일, ‘KB국민은행이 AI 금융상담시스템을 구축했다.’라는 뉴스가 보도됐습니다. 이 시스템은 금융투자상품 판매 시 고객에게 정확한 상품 설명과 함께 소비자 보호 의무에 따른 적법한 판매 절차를 준수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KB국민은행 측은 “신규 프로세스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불완전 판매를 차단하는 기능은 은행권 최초”라며 자사의 AI 금융상담시스템을 추켜세웠습니다. 그렇다면, AI금융상담시스템은 정말 불완전 판매를 잡아냈을까요? 〈금융소비자보호법〉 출시를 앞두고 KB국민은행은 AI 상담시스템을 은행권 최초 도입 70대 A 씨는 노후 자금 9억 원을 맡기기 위해 지난 2021년 6월 은행을 찾았습니다. VIP실로 안내를 받은 A 씨의 최대 관심사는 원금 보장이었습니다. 평생에 걸쳐 모은 노후자금을 걸고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판매 직원은 원금이 보장되는 상품은 사실상 없다고 A 씨에게 설명했다고 합니다. 정기예금이라 해도 은행이 파산하면 법적으로 보호받는 건 최대 5천만 원에 불과하단 이유에서입니다. 판매 직원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러면서 제안한 상품이 바로 홍콩 ELS였습니다. 지금까지 손실난 적이 없으니 6개월 뒤면 원금과 수익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설명에 A 씨는 가입을 결정했다고 취재진에게 말했습니다. 녹인형 홍콩ELS 상품에 노후자금 9억 원을 투자한 70대 A 씨 그렇게 상품 가입을 결정하자, 돌연 판매 직원은 AI 금융상담시스템을 꺼내 들었습니다. AI는 빠르게 상품의 이름과 상품을 구성하는 지수, 배리어 수준, 손실 위험 등을 설명했습니다. "손실난 적이 없는 상품이다.", "반년 뒤에는 원금을 받을 것이다."와 같은 설명은 쏙 빠져있었습니다. 설명 중간마다 A 씨는 “네.” 또는 “이해했습니다.”라고 답해야 했고, 마지막에는 A 씨 스스로 상품명을 말하고, 이 상품의 손실 가능성 등을 모두 이해했다고 말했습니다. AI 금융상담시스템은 이 모든 과정을 녹음했습니다. 6개월 뒤 원금을 찾기 위해 다시 은행을 방문한 A 씨는 그제야 자신이 홍콩H지수에 연계된 ELS 상품에 가입했고, 홍콩H지수가 폭락해 6개월이 지난 시점에 조기 상환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습니다. 이런 순간에도 은행 판매 직원은 “이 상품은 손실이 난 적 없다”라며 A 씨를 안심시켰습니다. 그러나 의심스러운 마음에 계약서 일체를 요구한 A 씨는 자신의 투자 성향이 ‘공격 투자형’으로 기재됐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연령부터 연간소득, 전체 자산 중 금융자산의 비중, 투자 경험, ELS와 같은 파생결합증권상품 가입 경험 등에 대한 총 10가지 설문에 고객이 응답하면, 이를 근거로 고객의 투자정보에 대한 분석이 이뤄지고 투자 성향이 결정됩니다. A 씨의 투자정보 분석 결과표에는 금융 자산이 전체 자산의 10% 이내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A 씨가 적어도 90억 대 자산가이고, 그 가운데 10% 수준인 9억 원을 ELS 상품에 투자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또, A 씨가 그동안 선물이나 옵션, 주식 신용거래 등 투자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오고, ELS와 같은 파생결합증권상품에 투자한 지는 3년이 더 된 걸로도 나옵니다. A 씨는 모든 게 사실과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참고 기사 보기 : “고객님 ‘공격 투자형’ 나오셔야 돼요”...규제 강화에 ‘꼼수’? 재산 수준이나 투자 경험 등이 사실과 다르게 조사돼 ‘공격 투자형’으로 나왔고, 이에 근거해 은행에서 초고위험 상품인 홍콩 ELS 상품을 판매한 것이라면 명백한 불완전 판매 사례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AI 금융상담시스템은 이런 점을 포착하지 못했습니다. A 씨가 상품 설명과 위험도 등에 대해 이해했다고 답하는 내용만 녹음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녹음 내용은 은행들이 법을 지켰고, 따라서 불완전 판매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비단 A 씨만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만난 40대 가정주부, 50대 가장 모두 은행으로부터 지금 통장에 놀고 있는 예금을 투자할 좋은 상품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고, 은행을 방문하면 VIP룸으로 안내를 받았으며, 원금 손실난 적 없지만 수익률은 높은 상품이라며 홍콩 ELS 상품을 소개받았다고 설명합니다. AI의 설명에는 시키는 대로 답하면 가입 절차가 끝이 났는데, 지나고 보니 그때 했던 대답들이 은행들에게는 면피 수단이 됐다고 호소합니다. 비극은 반복될까 DLF부터 홍콩ELS까지, 대규모 투자 손실 위험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불완전판매가 근절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상품의 내용과 위험성을 충분히 이해했다면 투자하지 않았을 고객들까지 홍콩ELS 상품으로 대거 몰리면서 또다시 금융 재난의 서막이 오른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과거 DLF 사태보다 상황이 더 복잡합니다. DLF 사태로 제정된 〈금융소비자보호법〉이 투자자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금융기관의 면죄부처럼 역할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투자 손실이 현실화되든 아니든 이번 사태의 결론이 어떻게 맺어지는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수익에 눈이 먼 은행들이 교묘하게 고객들을 위험로 내모는 행태에 제동이 걸릴 수도, 그게 아니면 금융자본주의의 약탈적 비극이 계속해서 반복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디자인 : 옥지수
✏️ 뉴스쉽 네 줄 요약 · 불법 공매도가 현실로 드러나면서 제도 개선에 대한 요구는 그 어느 때보다 거세졌고, '한시적 공매도 금지'와 같은 전례없이 강도 높은 개선안 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 하지만 공매도 제도를 무리하게 손질할 경우 고평가 된 주식을 적정 가격으로 수렴시켜 인위적인 주가 부양이나 주가 급락을 막는 공매도의 순기능이 작동을 멈출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 반면 우리 주식시장처럼 다양성과 깊이가 충분치 않을 때 공매도는 주가 하락을 더 부추기며 시세 조종 등에 악용될 수 있는 만큼 이번 기회에 제도 개선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 결국, 공매도가 주가 하락의 원흉인지, 아니면 급락의 방파제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면 공매도와의 전쟁은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로 끝이 날 수 있습니다. 지난달 4일, 미국의 국채 금리가 치솟으면서 우리 주가 시장은 6개월 만에 2400대로 내려앉았습니다. 지난 3월 이후 6개월 만이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10년 만기 미 국채 금리가 4.8%를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미 국고채의 금리가 치솟으면, 우리나라에 머물고 있던 외국 자본이 빠져나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가장 안전한 투자 자산으로 꼽히는 미 국채가 수익률까지 5%에 육박한다면, 거부하기 힘들 정도로 매력적인 투자 자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인 투자자들은 다른 지표를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냅니다. 그건 바로 공매도 거래대금입니다. 6개월 만에 코스피가 2400대로 내려앉은 날, 참으로 공교롭게도 공매도 거래대금이 직전 거래일보다 4,500억 넘게 치솟았습니다. 오비이락일까요? 아니면, 개인투자자들의 뿌리 깊은 의심처럼 외국인 및 기관 투자자들의 공매도가 주가 하락의 원흉인 걸까요? 이처럼 논란만 일으킨다면 공매도는 도대체 왜 존재하는 것일까요? 이번 뉴스쉽에선 공매도를 둘러싼 논란에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려 합니다. “기울어진 운동장, 공매도” 기자가 된 이후, 장롱 면허에서 탈출하기 위해 도로운전 연수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느릿느릿 이동하는 차 안에서 운전 연수를 도와주던 선생님은 대뜸 제게 무슨 일을 하는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운전이 서툰 탓에 짧게 “사회부 기자입니다.”라고 답했는데, 예상치 못한 성토가 시작됐습니다. 그 대상은 바로 ‘공매도’였습니다. 5년도 더 된 이야기지만, 여전히 공매도는 논란의 중심에 있습니다. 공매도는 특정 종목의 주가 하락에 베팅하는 투자 기법입니다. 가령, 잘 나가던 특정 종목에서 주가 하락의 신호들이 나타날 때 누군가로부터 해당 종목의 주식을 차입해 매도한 다음 실제 주가가 하락하면 다시 주식을 사서 갚고 차액만큼 수익을 챙기는 것입니다. 딱 봐도 복잡해 보이는데, 이걸 왜 하는 걸까? 통상, 공매도는 특정 종목이 자신의 실제 가치보다 시장에서 더 고평가 받고 있다고 여겨질 때 ‘조만간 주가가 하락할 것’이라는 예상에 기초해 이뤄지는 투자입니다. 실제로 주가가 하락한다면 하락한 만큼 수익을 챙길 수 있지만, 반대로 예상과 달리 주가가 계속 상승한다면 그만큼 손실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항상 이기는 투자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투자자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만약 막대한 자본을 가진 외국‧기관 투자자들이 특정 종목을 향해 대규모로 공매도 주문을 넣는다면 멀쩡한 종목조차도 주가가 하락하면서 이들 투자자들만 이득을 챙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식을 판다는 사람이 급격히 늘어나면, 수요-공급 원칙에 따라 주가는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투자의 승패가 이미 결정됐다는 의미로 공매도를 ‘기울어진 운동장’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실제로, 우리 주식시장에서 공매도에 참여하는 개인투자자는 전체의 1~2%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외국 또는 기관 투자자에 의해서 이뤄집니다. 또한, 개인은 공매도 상환 기간이 90일로 제한돼 있는 데 반해, 기관과 외국인은 상환 기간에 제한이 없고, 담보비율 역시 개인은 120%인데 반해 기관과 외국인은 105%입니다. 이런 차이에서 비롯된 차별적 효과는 시장을 왜곡시켜 누군가의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신을 부추기는 ‘무차입 공매도’ 공매도를 향한 불신을 더 크게 부추기는 건 바로 ‘무차입 공매도’입니다. 공매도를 위해서는 우선 주식을 빌려야 합니다. 이렇게 먼저 빌린 다음 매도 주문을 넣는 방식을 ‘차입 공매도’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양을 빌리더라도 차입 공매도는 불법이 아닙니다. 그러나 빌리지도 않고 매도 주문부터 넣는 ‘무차입 공매도’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무차입 공매도는 존재하지도 않는 주식으로 매도 주문을 넣는 것입니다. 무차입 공매도가 만연할 경우 매도 주문량이 유통 가능 주식 수량을 초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매도량을 부풀린다면, 주가 하락을 더욱 부추길 것입니다. 무차입 공매도는 은행 거래와 달리 주식 거래는 ‘T+2 결제제도’를 따른다는 점을 악용합니다. 주식 거래는 매도 주문을 넣더라도 결제는 거래일(Transaction Date)로부터 2거래일 뒤에 이뤄지기 때문에 매도 주문과 결제 사이에 잽싸게 공매도 주문량만큼 사후 차입하는 것입니다. 실제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20년도 더 된 이야기입니다만, 당시만 해도 ‘명동 백할머니’로 알려진 투자의 대모 백희엽 일가가 세운 ‘우풍상호신용금고(이하 우풍금고)’가 있었습니다. 잘 나가던 우풍금고는 2000년 3월 29일 대우증권을 통해 코스닥 종목인 성도이엔지의 주식 15만 주를 공매도했습니다. 주식을 갖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증권사에 먼저 매도 주문을 넣고, 결제일 이전에 시장에서 15만 주를 구해 대우증권에 상환할 계획이었습니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15만 주는 성도이엔지의 유통 가능 주식 수의 절반에 달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양이지만 한꺼번에 공매도 주문을 넣고 주가가 떨어지면 차익만큼 수익을 챙기려 했던 건데 변수가 발생했습니다. 공매도 주문량만큼 주식을 시장에서 구하지 못한 것입니다. 실제로, 결제일이 다가왔음에도 우풍금고는 13만 주나 결제하지 못했습니다. (‘우풍금고 공매도 미결제 사태’) 수익은 고사하고 미결제 사태가 알려지면서 고객들은 너도나도 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했고 이내 영업정지 처분이 내려졌습니다. 우풍금고 영업정지 당일, 내부 모습 같은 해 11월, 금융감독원은 이 사태를 대규모 무차입 공매도로 시세 차익을 노리다가 실패한 주가조작 사건으로 결론 내렸고, 무차입 공매도 금지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지난 2020년에는 무차입 공매도 등 불법 공매도에 대해선 1년 이상의 징역형(최대 30년)에 처하도록 법이 개정됐습니다. 지난해부터는 불법 공매도 조사 전담 조직까지 설치해 불법 공매도 적발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개인 투자자들은 지금까지도 외국인과 기관 투자자의 의한 무차입 공매도가 조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고, 이로 인해 공매도로 인한 주가 하락의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나면서 개인 투자자의 손실로 이어지고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물론, 무차입 공매도가 만연한 것처럼 호도하는 음모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심은 현실로 드러났습니다. 글로벌 투자은행(IB)에서 장기간 관행적으로 이뤄진 무차입 공매도 행태가 적발된 것입니다. 의심이 현실로 전에도 불법 공매도를 적발한 사례는 있었지만, 이번 사례는 특별했습니다. 그동안은 과실이나 착오라고 소명하며 빠져나갔다면, 이번엔 투자은행(BNP파리바, HSBC)의 의도적인 수백억 규모 무차입 공매도 관행을 발뺌하기 어려울 정도로 ‘빼박’ 적발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식시장은 코로나 사태가 터지자 공매도를 전격 금지했고, 재작년 5월부터 부분적으로 재개했습니다. (2021년 5월 3일, 코스피200지수, 코스닥150지수 종목에 한해 공매도 재개) BNP파리바는 공매도 재개 이후인 지난 2021년 9월부터 지난해 5월까지 카카오 등 101개 종목에 대해 400억 원 규모로 무차입 공매도 주문을 한 걸로 조사됐습니다. 부서 간 내부거래 과정에서 소유 주식을 중복 계산해 부풀린 다음에 과다 표시된 잔고를 기초로 공매도를 한 것입니다. 매매 거래 다음날마다 부풀린 주문량만큼 결제 수량이 부족하다는 걸 인지했음에도 개선하지 않고 사후 차입하며 무차입 공매도를 방치했다고 금감원은 판단했습니다. HSBC도 지난 2021년 8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호텔 신라 등 9개 종목에 대해 160억 원 상당의 무차입 공매도 주문을 해 온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이들도 공매도 주문을 먼저 넣어놓고 결제일 이전에 사후 차입해 온 걸로 금감원은 보고 있습니다. 시세 조종 행위에 이용될 수 있다는 우려에 법으로 금지되면서 무차입 공매도는 그렇게 시장에서 사라진 걸로만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이번 조사로 여전히 관행적으로 이뤄지고 있음이 드러났고 규제 당국도 이제는 전향적으로 입장을 바꿨습니다. 이제 전선은 공매도 제도 자체로 확대됐습니다. 국회에선 여야를 가리지 않고 공매도를 한시적으로 금지하고 대대적 개선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급기야, 금감원은 이달부터 <공매도 특별조사단>을 만들어 글로벌 투자은행들의 공매도 거래를 전수 조사해 무차입 공매도는 물론, 시세 조종 등 제도 악용 여부까지 면밀히 살펴보겠다고 밝혔습니다. 의심이 현실로 드러나자 공매도와의 전면전 시작된 것입니다. "김포 다음 공매도로"... 송언석 국민의힘 감사가 국회에서 국민의힘 장동혁 원내대변인에 보낸 메시지 공매도는 주가 급락의 원흉인가? 전쟁을 앞두고 피아식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매도 자체를 적으로 삼을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개인 투자자들의 오랜 의심처럼 공매도를 주도하는 ‘카르텔’이 있고, 이들의 결정에 따라 특정 종목의 주가가 폭락하며 시장이 왜곡된다고 전제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학계와 업계에서는 바로 잡아야 할 문제는 불법 공매도라는 입장입니다. 오히려 근거 없는 의심 때문에 공매도 자체를 무리하게 손질할 경우 빈대(불법 공매도)를 잡으려다 초가삼간(시장)을 다 태울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공매도 나름의 순기능 때문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순기능은 ‘가격발견기능’입니다. 공매도가 금지된 주식 시장을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 시장에 어느 날 매일매일 주가가 오르는 종목이 나타났습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다가도 상승세가 지속된다면 너도나도 추격 매수에 나설 것입니다. 주가가 계속해서 오른다는 것 자체가 ‘해당 기업이 오를만한 가치가 있다’는 긍정적 정보로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매도가 가능했다면 누군가는 해당 주식이 고평가됐다고 판단해 공매도 주문을 넣었을 수도 있습니다. 덕분에 다른 시장 참여자들도 해당 주식이 고평가 된 건 아닌지 고민하며 추격 매수를 멈추고 추종매도에 나설 수도 있습니다. 즉, 공매도는 부정적인 기업정보가 주가에 반영되는 주요 채널 중 하나로서 시장에서 적정 수준 가격으로 조정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자본시장연구원에서 지난 8월 발표한 <공매도 규제효과 분석(김준석, 황세운)> 연구보고서 역시 이런 순기능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에선 지난 2020년 3월 코로나 위기로 공매도 전면 금지 시기(2020.03~2021.05)와 공매도 허용 시기(2020.03 이전, 2021.05 이후)를 서로 비교했습니다. 그 결과 공매도를 금지했을 때 극단적 수익률 발생빈도가 더 많이 나타났고, 이로 인해 가격 변동성도 더 크게 나타났습니다. 공매도 금지로 부정적 정보 반영이 가로막히면 가격 조정이 제대로 이뤄지기 어렵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악재라도 발생한다면 고평가가 이뤄진 만큼 주가는 급격히 떨어집니다. 이 연구에서도 공매도를 금지했을 때 가격 상승은 물론 하락도 더 급격하게 나타났습니다. 개인 투자자들의 의심과 달리 공매도는 가격발견기능 덕에 주가 급락의 방파제 역할까지 한 셈입니다. 최근 주가조작 세력의 먹잇감으로 전락한 영풍제지는 공매도 순기능의 또 다른 예입니다. 주가조작 세력에 의해 지난해 11월부터 별다른 호재 없이도 주가가 15배나 뛰었는데, 영풍제지가 공매도 금지 종목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공매도 주문이 가능했다면 인위적인 가격 부양 시도 때마다 공매도 주문이 이뤄지며 시장에서는 가격 조정이 이뤄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풍제지는 거래 재개 이후 6거래일 연속 하한가를 기록했습니다. 1년 동안 끌어올린 상승분을 불과 일주일 만에 다 까먹은 것입니다. 지난 6월 ‘바른 투자연구소 주가조작 사건’에 연루된 5개 종목도 모두 공매도가 불가능했는데, 양상은 비슷했습니다. 지난 4월 ‘라덕연 주가조작 사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연루된 8개 종목 가운데 5개는 공매도를 할 수 없었고, 주가 조작이란 악재가 터진 뒤로 주가는 곤두박질치며 뒤늦은 정산이 이뤄졌습니다. 공매도는 주가 급락의 방파제인가? 하지만, 이번 기회에 공매도 제도의 한계점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공매도 제도의 필요성과 순기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고평가 된 주식을 적정 가격으로 조정하는 공매도의 순기능은 이상적인 시장 상황과 거래 조건에서 구현되는 것이지 우리 현실과는 맞지 않는 만큼 개선이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 지난 2021년 한양대학교 임은아 박사와 전상경 교수는 <공매도와 신용거래의 투자성과>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는 2016년 6월부터 3년 동안 우리 시장을 횡보기와 상승기, 하락기로 나눈 다음 각 시기의 일별, 종목별 데이터를 기반으로 공매도와 신용 거래의 수익률을 비교했습니다. 공매도는 주로 외국 및 기관 투자자들이 주가가 고평가 된 주식을 빌려 매도하는 투자 방식이라면, 신용 매수는 주로 개인투자자들이 증권사로부터 돈을 빌려 주식을 매수하는 투자 방식입니다. 따라서 공매도와 신용 거래 비교는 사실상 외국 및 기관투자자와 개인 투자자의 수익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공매도는 신용 거래에 비해 거래량은 6배나 적고, 거래 금액은 절반 수준에 불과하지만 수익률은 극명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공매도 때문에 주가가 하락했고, 이로 인해 외국 및 기관 투자자들이 더 높은 수익률을 올리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논문의 저자인 전상경 교수는 공매도만으로 주가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란 입장을 나타냈습니다. 거래량이나 거래 금액 측면에서 공매도가 주가의 영향을 미칠 정도로 크지 않았기 때문에, 공매도 자체만으로 주가가 떨어졌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다만, 전상경 교수는 공매도 자체가 부정적인 정보로 작용해 다른 투자자들이 매수를 꺼리거나 추종 매도에 나서면서 주가는 적정 가격 밑으로 더 떨어질 수 있다고 부연했습니다. 실제로, 전상경 교수는 <Do Short Selling and Margin Trading Affect Price Randomness?>이라는 또 다른 논문을 통해 공매도의 순기능은 종목의 다양성과 깊이, 유동성 등이 충분치 않은 우리 주식시장에선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즉, 공매도가 고평가 된 주가를 그때그때 조정하며 가격 효율성을 높이는 게 아니라, 적어도 우리 주식시장에서는 공매도 자체가 악재처럼 작용하며 주가 하락을 더 부추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식시장에서는 최근에도 전상경 교수의 주장과 비슷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지난 8월 17일, 장이 마감된 뒤 셀트리온과 셀트리온헬스케어의 합병 결정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간 저평가를 초래했던 매출 부풀리기나 일감 몰아주기 등 논란이 해결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셀트리온 합병 소식은 시장에서는 호재로 인식됐고, 다음날 셀트리온의 주가는 전날보다 5% 가까이 급등했습니다. 그런데, 장 마감 직후 공매도가 쏟아졌습니다. 그 결과 무려 총 87만 2천여 건의 공매도 주문이 하루 만에 체결됐습니다. 그전까지 가장 많이 체결된 일일 공매도 주문량은 16만 8천여 건이었습니다. 무려 5배 가까운 공매도 주문이 몰린 것입니다. 직후 3거래일 걸쳐 셀트리온의 주가는 떨어졌습니다. 결국, 합병 소식 발표 전보다 주가는 더 낮아졌습니다. 합병이란 호재를 공매도 폭탄이란 악재가 덮어버리면서 주가는 합병 발표 전보다 더 떨어졌습니다. 전상경 교수는 이처럼 공매도의 가격 조정 기능(공매도→추종 매도→주가 조정)이 적어도 우리 주식시장에서는 순기능이 아닌 역기능으로 작용하며 악용될 수도 있다고 경고합니다. 전상경 │ 한양대학교 파이낸스경영학과 교수 “공매도는 시장가격을 내재가치에 수렴시키는 순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순기능이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시장의 깊이가 깊고 시세추종 경향이 상대적으로 약해야 합니다. 이런 환경이 제대로 조성돼 있지 않다면 공매도는 시장가격을 내재가치에 수렴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괴리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자본시장의 선진화를 위해 공매도 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한계점을 계속해서 방치한다면 주가 하락을 노리는 시세 조종 행위에 악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공매도를 둘러싼 불법은 물론, 탈법 행위에 대해서도 감독을 강화해야 그 순기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습니다.” 피아식별이 성패를 좌우한다 공매도와의 전쟁을 위해 호기롭게 칼은 뽑았지만, 어디로 휘둘러야 할지 감을 잡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공매도가 주가 급락의 원흉인지, 방파제인지에 대해 서로 다른 연구 결과들이 공존하며 제도 개선 방향성을 가늠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매도 자체에 문제가 없고 불법 공매도만 잡으면 된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가는 ‘당국이 여전히 외국 및 기관 투자자의 이익을 옹호한다.’는 여론의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반대로 공매도를 한시적으로 중지시키고 전면적인 제도 개선에 나서기에는 순기능마저 제한돼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커질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한 정부 관계자는 “공매도에 대한 개선 방향을 검토하고 있지만, 무엇을 어떻게 바꿀지에 대한 고민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면서 “무리하게 제도 개선에 나설 경우 신뢰도 하락과 ‘코리아 디스카운트’에 대한 우려도 있다.”고 지금의 상황을 전했습니다. 결국 이번 전쟁의 성패는 정확한 피아식별에 달려있습니다. 우리 주식시장에서 공매도가 갖는 역할과 기능과 함께 한계점까지 명확하게 파악하고 저울질하며 개선 대상과 방향성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노력 대신 정치권의 요구에만 귀기울이고 쫓아가기에 급급하다면 이 전쟁은 시작도 하기 전부터 실패한 전쟁이 될 것입니다. 디자인 : 옥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