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경제부 안상우 기자입니다.
이슈는 스프링이다! 스프링처럼 통통 튀는 이슈를 핵심만 골라 정리해드립니다. 지난 15일 드디어 비만 치료제 위고비가 국내에 출시됐습니다. 허가는 지난해 났지만, 국제적인 인기와 그에 따른 공급 물량 부족 탓에 1년 6개월 만에 우리나라에 상륙한 것입니다. 이처럼 큰 인기를 끄는 이유는 일주일에 한 번 맞기만 하면 살이 쏙 빠지는 기적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기적에는 증인이 필요합니다.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가 바로 그 증인입니다. 위고비를 맞아서 무려 13kg이나 살을 빼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무슨 상황인데? 기적이 이뤄지고 나면 사람들이 몰립니다. 위고비는 고도비만(비만 지수 30 이상) 또는 체중 관련 질환을 가진 과체중(비만 지수 27 이상~30 미만) 환자를 대상으로 허가가 이뤄진 약입니다만, 기적을 목격한 사람 중 살 좀 빼겠다는 정상 체중의 성인들도 몰려들고 있는 것입니다. 일선 병원에서는 이처럼 기적을 바라는 정상 체중의 성인에게 위고비를 처방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SBS 팩트체크 <사실은> 팀에서 직접 병원 3곳을 찾았는데, 1곳에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처방해 줬습니다. 심지어 상담자는 비만 지수가 19로 저체중에 가까운 상황이었지만, 별문제가 없다며 처방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처방이 문제가 없는 걸까요? 우선, 이렇게 식약처의 허가 사항과 다르게 처방해 주는 것을 '오프라벨(off-label) 처방'이라 불립니다.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지만 의료진의 판단에 따라 충분히 허용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암과 같은 치료가 어려운 질환의 경우 오프라벨 처방을 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좀 더 설명하면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면, 안전상의 위험은 어떨까요? 위고비의 가장 잘 알려진 부작용은 메스꺼움이나 구토와 같은 위장 질환입니다. 자살 충동을 유발한다는 보고도 있었지만, 미국과 유럽의 보건당국은 구체적인 인과관계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지난 4월 밝혔습니다.* *다만, 그 이후에 뉴욕 주커힐사이드병원 게오르기오스 쇼레차니티스 등 연구진이 WHO 데이터를 바탕으로 진행한 연구에서 위고비의 주요 성분인 세마글루타이드를 사용했을 때 '자살 사고 보고 위험'이 유의미하게 상승한 걸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런 부작용은 모두 비만이나 과체중 환자를 대상으로 한 제약사의 임상시험 등에서 보고된 것입니다. 위고비 제조사인 노보 노디스크는 정상 체중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진행한 적이 없습니다. 즉, 정상 체중의 성인이 위고비를 맞을 경우 안전한지에 대한 검증이 제대로 이뤄진 적은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제라도 안전성을 검증해 보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상 체중의 사람들에게 위고비를 맞게 하고 문제가 나타나는지 살펴보는 시험이나 연구는 연구 윤리를 심각하게 위반합니다. 즉, 그동안 이뤄진 적 없고 앞으로도 이뤄지기 힘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그렇다면, 법적으로 문제가 없으니 심각한 부작용이 보고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정상 체중의 성인에게도 처방해 주는 것이 맞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위고비가 출시된 다른 나라의 대응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영국에서는 이달 중순쯤 언론 인터뷰를 통해 웨스 스트리팅 보건장관이 직접 미용 목적으로 단순 체중 감량을 위해 위고비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법적인 구속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보건당국의 수장까지 나서 사용 자제를 촉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습니다. 위고비가 세계에서 가장 먼저 판매되기 시작한 미국에선 지난해 말 정상 체중의 성인에게 위고비 처방을 피해야 한다는 연구 논문*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 논문은 위고비가 거식증과 같은 섭식 장애를 유발하거나 악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위고비는 포만감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인 GLP-1과 유사한 성분으로 이뤄져 있는데, 오남용할 경우 지나친 식욕 저하를 일으킬 수 있고 먹는 것에 대한 병적인 거부감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Use of glucacon-like peptide-1 receptor agonists in eating disorder populations(2023.11) 이웃 나라인 일본에서는 약물로 부작용이 나타날 경우 심의를 거쳐 나라에서 구제하기도 하는데, 애초에 약물 오남용으로 인한 경우에는 구제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우리도 제약사들로부터 분담금을 걷어 예기치 못한 부작용이 발생할 경우 인과성이 인정되면 피해 구제 급여를 지급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약물 오남용으로 인한 부작용은 제외됩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 <사실은> 팀은 위고비의 제조사인 '노보 노디스크'에도 정상 체중의 성인이 위고비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입장을 질의했습니다. 제조사 측은 "전문의약품인 만큼 허가 외 방식으로 사용할 경우 건강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서 "적정 용량과 용법이 아닌 방식의 사용을 보증하거나 권장하지 않는다"라고 답변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보건당국도, 전문가도, 제조사도 한목소리로 위고비의 오프라벨 처방만큼은 권장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치료가 필요한 이들에게 위고비는 기적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치료가 필요 없는 정상 체중의 성인에게는 자칫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청소년 중에 스스로 스마트폰 사용 시간을 조절할 수 없어 과도하게 스마트폰을 사용해 신체적, 심리적 문제 등을 경험하고 있는 이른바 ‘스마트폰 과의존 위험군’이 전체의 40.1%라고 합니다. 성인이나 유아 등 다른 연령대의 스마트폰 사용자보다 2배 가까이 높은 수준입니다. 학교와 사회에서는 나름의 대책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먼저 학교에서는 학칙을 개정해 스마트폰을 등교 시 일괄 수거한 다음 하교 때 다시 돌려주는 방식으로 스마트폰 의존도를 낮추려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스마트폰을 일괄 수거하는 학교는 전체의 58% 수준입니다. (중·고등학교 기준, 2023년) 지난달 국회에서는 아예 스마트폰을 교내에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자거나 SNS 사용 시간도 제한하고, 국가와 지자체가 청소년들의 스마트폰 중독 예방 대책을 마련하도록 하는 법안들도 잇따라 발의됐습니다. 그런데 국가인권위원회는 학교에서 학생들의 스마트폰 사용을 금지하는 조치는 인권침해라는 판단을 내리고 또 유지하고 있어 논란입니다. 어떤 이유에서 이런 판단이 내려졌고, 다른 나라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까요? 무슨 상황인데? 우선, 인권위는 왜 교내 스마트폰 사용 제한 조치가 인권 침해라고 본 것일까요? 시간 중에 학생들이 휴대폰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것에 대해서는 인권위도 충분히 필요한 조치라고 보고 있습니다. 다만, 수업 방해를 우려한다면 수업 시간에만 사용을 제한하면 될 일이지, 수업 외 시간인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까지 사용을 막는 건 지나치다는 겁니다. “정규수업 시간 중에만 그 사용을 제한하고 휴식시간 및 점심시간에는 사용을 허용하는 등 학생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교육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고려할 수 있음에도, 피진정학교는 등교 시간부터 종례 시간까지 휴대전화 사용을 전면 제한하고 있어 헌법이 요구하는 과잉금지 원칙에 반할 소지가 크다.” - 국가인권위원회 시정 권고 결정문 중 발췌 이런 이유로 인권위는 지난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무려 307건이나 개별 학교들에 시정 권고를 내렸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시정 권고를 받은 학교 3곳 중 1곳은 권고를 따르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교사들은 수업 시간에는 걷고 다시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는 나눠주는 방식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른다고 호소합니다. “급식 시간 종 울리면 밥 빨리 먹으려고 뛰어갈 준비를 하는 것처럼 쉬는 시간 5분 전부터 다리를 책상 밖으로 빼내고 수거함에서 스마트폰을 뺄 준비를 해요. 당연히 수업 집중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죠. 그리고 점심시간에는 교실에서 학생들이 나가지도 않고 계속 게임만 해요. 이런 문제들 때부터 차라리 일과 시간 내내 걷는 게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해요.” - 신현중학교 교사 김지은 좀 더 설명하면 다른 나라들은 상황이 어떨까요? 놀랍게도 전 세계 국가 중 약 25% 정도가 법이나 교육 지침 등을 통해 교내 스마트폰 사용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프랑스입니다. 프랑스는 이미 지난 2018년부터 법을 통해서 교내 스마트폰 사용을 제한하기 시작했고, 올해부터는 199개 중학교에서 등교 시 스마트폰을 수거해 하교 때 돌려주는 시범 정책을 시행 중입니다. 우리는 인권침해 논란으로 제동이 걸렸는데, 프랑스는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건 서로가 집중하는 포인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권위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교육적 목적을 달성하는 가운데 사용 제한이 최소한으로 이뤄지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교육적 목적은 물론, 학생들의 건강권까지도 주요하게 보고 있습니다. 지난해 유니세프는 지나친 스마트 기기 노출이 학생들의 학습 능력뿐만 아니라 정신 건강 자체에도 부정적 영향을 준다면서 교내 스마트폰 사용을 교육 목적으로 한정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미취학 아동과 초등생의 경우에는 지나친 스마트 기기의 노출이 성인과 달리 우울증과 수면 장애, 근시 등을 유발할 수 있는 걸로 나타났습니다. 즉, 스마트폰을 비롯한 스마트기기 노출 시간 자체를 줄이는 게 학생들을 위한 것이라 보고 프랑스 등은 수업 외 시간까지도 스마트폰 사용을 제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우리나라 학생들이 스마트폰, 태블릿 PC, 데스크톱, 랩톱 등 스마트 기기에 하루 평균 노출되는 시간은 4시간 43분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미 지나친 스마트 기기 노출의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법과 정책으로 교내 사용 제한을 두고 있는 프랑스와 비교하면 1시간 반 이상 긴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학습권 측면에서 스마트폰 사용을 제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학생의 건강권을 비롯해 사이버 괴롭힘을 통한 학교 폭력, 딥페이크와 불법 도박 등 청소년 범죄로도 시야를 넓혀 스마트폰 사용 제한 규제를 바라봐야 함을 의미합니다. 다행히 인권위는 “앞으로는 학생의 기본권과 건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권고 방향을 살펴보겠다.”라고 SBS에 밝혔습니다. 누구보다 학생이 보호받을 수 있는 긍정적 방향으로 논의가 시작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가수 김호중 씨의 음주 뺑소니 사고 이후, 비슷한 모방 범죄들이 잇따라 있습니다. 이른바 '술타기'라 불리는 이 범행 수법은 음주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낼 경우 현장에서 도주해 붙잡히기 전에 추가로 술을 마셔, 사고 당시 정확한 혈중알코올농도 측정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이후 국회에선 이런 술타기 수법을 차단하기 위해 도로교통법 개정안을 잇달아 발의했습니다. 정치권과 언론에선 이 법안을 '김호중 방지법'이라 불렀는데, 이게 또 다른 논란을 불러왔습니다. 아무리 좋은 법이라도 가해자 혹은 법 적용 대상자의 이름을 넣을 경우, '중대한 인격 모욕' 또는 '명예훼손' 아니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내용의 항의성 댓글은 관련 발의안에 수천 개가 달렸습니다. 어긋난 팬심일 수도 있지만, 법에서 금지하는 행위가 될 수 있는 만큼 팩트체크 <사실은> 코너에서 확인해 봤습니다. 무슨 상황인데? 우선, '김호중 방지법'이라 불리는 법 발의안의 진짜 이름은 '도로교통법 일부개정법률안'입니다. 즉 실제 법안에는 '김호중'이라는 이름이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그저 편의상 정치권과 언론에서 김호중 방지법이라 부르는 것이지 실제 법 이름에 '김호중'이 들어가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정치권과 언론에서 이렇게 부르는 건 명예훼손이나 모욕에 해당할까요? 우선, 형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명예훼손은 구체적인 사실을 적시하거나 아니면 허위로 사실을 퍼뜨려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입니다. 현직 변호사 5명에게 문의했더니, 4명은 단순히 이름을 언급한 것만으로는 명예훼손 행위가 되긴 어렵다고 봤습니다. '○○○ 방지법'이라는 부정적인 뉘앙스의 명칭 속에 누군가의 이름이 들어가면 당연히 기분이 나쁘고 불쾌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체적인 사실을 적시하거나 허위 사실을 퍼뜨려서 명예를 훼손한 걸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변호사 5명 중 1명만 법에서 금지하는 명예훼손 행위에 해당할 수 있다는 의견을 밝혔지만, 이마저도 공익성이 인정돼 실제 처벌로 이어지진 않을 것이라 답했습니다. 그러니까, 변호사 5명 모두 명예훼손죄란 이유로 처벌하거나 금지할 사안은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또, 변호사 5명 모두 모욕죄 역시 마찬가지 이유로 적용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단순히 이름을 언급한 것만으로는 모욕적인 표현이 있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약해 보면, '김호중 방지법'이란 명칭이 가수 김호중 씨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고 심한 경우 사회적 낙인으로까지 작용할 수도 있지만, 법에서 처벌·금지 대상으로 삼고 있는 명예훼손이나 모욕 행위는 아니라는 게 법 전문가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좀 더 설명하면 실명법안은 미국에서 주로 사용됐고, 우리나라는 2000년대 초반부터 매스컴에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김호중 방지법'처럼 특정 사건의 가해자나 아니면 법 적용 대상자의 이름을 딴 사례도 있지만, 피해자나 희생자(정인이법, 구하라법 등) 아니면 법안 발의자(김영란법 등)의 이름을 딴 사례도 있습니다. 이런 실명법안이 죄가 되지는 않지만, 2차 가해 또는 사회적 낙인 등의 우려도 분명히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사용되고 있는 이유는 법안에 대한 쉬운 이해와 공감을 도와 법안 처리에 긍정적인 효과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지난 21대 국회(2020~2024)에서 일반 법안의 처리율은 35% 수준에 그쳤지만, 실명법안은 2건 중 1건꼴로 처리됐을 정도로 처리율이 상대적으로 높았습니다. 그렇다면, 명예훼손도 아니고 법안 처리율도 높으니까 앞으로 '○○○ 방지법'과 같은 실명법안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것이 정답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으려면 실명법안이 우리보다 앞서 등장한 미국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미국의 경우에는 재발을 막고자 하는 사건 혹은 사고의 피해자, 아니면 법안 발의자의 이름을 주로 활용합니다. 법무법인 율촌의 신동찬 미국 변호사는 실제로 미국에서 법을 만들 때 '가해자'의 이름을 사용해 이슈가 된 사례는 찾기 어렵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우리는 법안을 편의상 부를 때 이름을 활용하지만, 미국은 법안명에 피해자 혹은 법안 발의자의 이름을 직접 넣습니다. 일례로, 미국에서 1890년대에 만들어진 반독점법의 이름은 '셔먼 반독점법(The Sherman Antitrust Act)'인데, 여기서 셔먼은 바로 이 법안을 발의한 인물의 이름입니다. 또, '애덤 월시 어린이 보호법(The Adam Walsh Child Protection and Safety Act)'에서도 애덤 월시는 실종 사건 희생자의 이름입니다. 이처럼 미국에서 피해자나 법안 발의자의 이름을 주로 활용하는 건 희생을 기리고 재발 방지를 통한 피해 회복의 상징성, 법안에 대한 책임성 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가해자·법 적용 대상자의 이름을 넣는 사례가 더 많습니다. 실제로, 지난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실명법안 16건 중 12건은 가해자나 법 적용 대상자의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 미국과 달리 가해자나 법 적용 대상자의 이름을 딴 실명법안을 더 많이 사용하는 이유는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미국은 피해 회복과 책임에 방점이 찍혔다면, 우리는 실명법안을 통한 사회적 처벌에 초점이 맞춰진 걸로 보입니다. 그렇기에 미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실명법안에 대한 반발도 일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반발을 긍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긋난 팬심에서 비롯된 심각한 입법 방해 행동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교화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는 사회적 낙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굳이 불필요한 반발과 우려는 피하면서 실명법안이 갖는 입법 효과는 계속해서 누릴 수 있는 대안적 명칭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데요. 전문가들은 'n번방 방지법'처럼 차단해야 할 범행에 초점을 맞춰 부를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대한축구협회가 지난 13일 국가대표 축구팀의 새 사령탑으로 홍명보 HD울산현대 감독을 선임했습니다. 기자회견에 나선 이임생 축구협회 기술총괄이사는 "절차대로 진행해 선임 과정에 문제는 없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박주호 전력강화위원의 폭로로 파문이 커졌고, 정부가 칼을 빼들었습니다. 감독 선임 과정에 대한 감사에 착수하기로 한 겁니다. 정부가 축구협회를 직접 감사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협회 내부에선 즉각 반발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정부 감사가 FIFA 제재로 이어져 월드컵 출전까지 막힐 수 있단 내용이었습니다. 무슨 상황인데? 물론, 이런 주장을 내놓은 건 익명의 축구협회 고위 관계자입니다. 협회 측은 공식 입장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그럼에도 감사를 앞두고 FIFA 제재를 운운하는 건 자칫 감사 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는 만큼 일리가 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대한축구협회는 매년 300억 원 넘는 지원금을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습니다. 지난해 말에는 인사혁신처가 협회를 '공직 유관단체'로 지정했고, 올해부터 문화체육관광부 자체 감사 대상에 포함됐습니다. 최근 논란이 된 감독 선임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축구협회를 상대로 감사를 진행하는 건 정부 고유의 권한이자 의무인 셈입니다. 한편, FIFA의 정관*에는 각 회원국 협회의 독립성에 대한 규정이 있습니다. 이 규정의 핵심은 정부와 같은 제3자의 부당한 영향 없이 독립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단 내용입니다. 그리고 FIFA는 이 조항이 위반됐다고 판단되면 즉각 회원국 자격 정지와 같은 제재를 내렸습니다. 즉, 정부의 감사 활동을 '독립성 훼손'으로 본다면 축구협회 고위 관계자의 주장처럼 출전 정지와 같은 제재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FIFA STATUES(2024) 19조 1항 각 회원 협회는 제3자의 부당한 영향 없이 독립적으로 사무를 관리해야 한다. 좀 더 설명하면 이제 남은 쟁점은 '과연 FIFA가 우리 정부의 감사 활동을 부당한 개입으로 볼 것인가'입니다. 이에 대한 판단을 위해선 FIFA가 그동안 어떤 사례들에 대해 제재를 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쿠웨이트입니다. FIFA는 지난 2015년 10월, 쿠웨이트의 회원국 자격을 정지한 바 있습니다. 이로 인해 쿠웨이트는 2016 리우 올림픽, 2018 러시아 월드컵, 2019 아랍에미리트 아시안컵까지 모두 출전할 수 없었습니다. FIFA가 이처럼 쿠웨이트의 회원국 자격을 정지시킨 건 당시 쿠웨이트 정부가 통과시킬 '체육법' 때문이었습니다. 체육법은 쿠웨이트 정보부 장관이 자국 내 모든 스포츠기구 및 연맹을 관장하고 인사권과 재정적 사안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FIFA는 이런 법이 시행되면 축구협회의 독립성은 훼손될 수밖에 없다고 본 것입니다. 쿠웨이트 사례 이외에도 지난 10년 간 FIFA가 회원국 자격을 정지시킨 사례는 6건이 더 있었는데, 자국 축구협회를 아예 해산시키거나 직접 관리 또는 협회 선거에 개입한 경우였습니다. 이처럼 FIFA는 정부가 협회 선거 또는 협회 집행부 구성에 영향을 미쳐 운영을 좌지우지하려 할 때 회원국 자격 정지라는 강도 높은 제재를 내렸습니다. 실제로, FIFA는 협회 선거나 선출기구 구성에 대한 '정부 개입(Government Interference)'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습니다.(LEGAL HANDBOOK, 2023) 한 걸음 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우리 정부는 최근 논란이 된 대표팀 감독 선임 과정에 대한 감사에 착수했습니다. 이를 두고 협회 내부에선 FIFA 제재로 이어질 수 있다며 불만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FIFA가 엄격히 금지하는 정부 개입은 협회의 선거나 선거를 통해 선출된 집행 기구의 구성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었습니다. 즉, 감독 선임 과정과 운영 전반에 대한 감사 자체만으로 FIFA의 제재 대상이라 단정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실제로, 지난 2005년 국회는 사상 처음으로 대한축구협회에 대한 국정감사를 열고 본프레레 대표팀 감독 경질과 아드보카트 감독 선임 과정에 대해 조사했지만, FIFA는 지금까지도 이를 문제 삼은 적은 없습니다. 정유성 FIFA 에이전트·변호사 정유성 변호사(FIFA 에이전트)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과거의 제재 사례들과 FIFA 정관 규정을 종합해보면, 정부 등 외부 기관이 협회의 집행기구 구성에 관여를 함으로써 경영 전반에 영향을 미칠 때 이런 경우에 '부당한 개입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FIFA가 새로운 판단을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정부 감사가 제재 사례 수준에 이르지 않으면 회원 자격 정지와 같은 제재를 받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도 이번 감사가 FIFA 정관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보고 예정대로 감사 일정을 진행할 방침입니다.
✏️ 뉴스쉽 네 줄 요약 · 비트코인 현물 ETF의 미국 거래소 상장 승인이 이뤄지면서, 비트코인은 투자재로서 확고한 지위를 인정받게 됐습니다. · 그러나 '비트코인의 창시자' 사토시 나카모트는 비트코인이 가치 저장 수단이 아니라 기존 금융 체계를 대체할 수 있는 디지털 화폐가 되기를 꿈꿨습니다. · 비트코인의 실패한 비상을 이어받아 페이스북과 nChain 등 글로벌 기업들이 디지털 화폐를 향한 도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이런 도전이 성공한다면, 디지털 황금으로서의 비트코인의 미래 역시 180도 뒤바뀔 수 있습니다. 비트코인이 지난 11일 역사적인 하루를 맞았습니다. 미국 증시에서 현물 ETF로서 상장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동안 거래소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머물렀던 비트코인은 주식시장으로 영역을 확장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비트코인을 소유하지 않고도 투자할 수 있게 됐습니다.* 비트코인의 가격 변동성에 따라 수익률이 결정되는 비트코인 현물 ETF에 투자하면, 실제 비트코인에 투자한 것처럼 수익을 보거나 손실을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 덕분에 이제 막대한 자본을 가진 기관투자자들이 자신들의 포트폴리오에 비트코인 현물 ETF를 추가할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다만, 금융당국의 조치로 국내에서는 비트코인 현물 ETF 투자가 불가능합니다. 스탠다드차타드(SC)는 올해에만 최대 1,000억 달러(우리 돈 130조 원) 규모의 자금이 비트코인 현물 ETF로 유입될 걸로 내다봤습니다. 전 세계 ETF 운용자산 규모가 약 10조 달러 중 1%만 비트코인 현물 ETF에 투자만 돼도 1,000억 달러인 것입니다. 이런 기대감을 반영하듯 상장 첫날 무려 46억 달러(우리 돈 약 6조 600억 원)의 자금이 몰렸습니다. 지난해 1월 16,000달러 수준이던 비트코인 시세는 현물 ETF 상장 승인 직전 47,000달러를 넘어섰습니다. 상장 승인에 대한 기대감에 1년 만에 무려 3배 가까이 상승한 건데, 실제 승인으로 이어진 만큼 올해 안에 10만 달러 선도 거뜬히 돌파할 것이란 예상도 나옵니다. 이쯤 되니, 지난 2008년 비트코인을 처음 세상에 소개한 사토시 나카모토가 상당히 무안해질 것도 같습니다. 그가 펴낸 백서의 제목은 ‘비트코인 : 개인 간 전자 화폐 시스템(Bitcoin : A Peer-to-Peer Electronic Cash System)’이었습니다. 즉, 종이 화폐는 물론, 기존 금융 체계를 대체할 전자 지급결제 수단을 만들어놨더니, 10여 년 만에 투자재로서 우뚝 선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트코인 현물 ETF 상장 승인 소식과 투자재로서 치솟는 가치와 위상은 사토시 나카모토의 꿈에 대한 종언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오늘 뉴스쉽에서는 희미해진 사토시 나카모토의 꿈에 대해 다뤄보려 합니다. 비트코인이 화폐 아닌 ‘디지털 금’으로 전락한 이유 8천7백 종이 넘는 전 세계 코인 가운데서도 비트코인은 압도적인 시가총액 1위입니다. 인기와 선호, 신뢰도 모두 업계 최고지만 어디까지나 가치저장 수단일 때의 이야기입니다. 디지털 화폐로서의 비트코인에는 늘 의문표가 뒤따릅니다. 비싸고, 느리고, 수수료도 높기 때문입니다. 코인을 지탱하는 건 ‘블록체인 기술’입니다. 기존 금융체계에서 장부는 은행과 같은 중앙화 금융기관이 갖고 있습니다. 은행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제3자가 무단으로 장부에 접근해 위변조 할 수 없도록 보안 조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트코인은 이런 노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장부[블록]가 네트워크에 분산돼 있고 거래 기록(Transaction)은 이 분산된 장부에 새겨지는데, 장부들이 서로 연결[체인]돼 있어 위변조 가능성을 원천 차단할 수 있습니다. 가령, A가 B에게 1 BTC를 준다고 해서 곧장 거래가 효력을 갖는 게 아닙니다. A가 1 BTC를 지급했다는 거래 기록을 다른 누군가(채굴자)가 장부인 블록에 추가해야 해야 합니다. 이런 ‘채굴(Mining)’ 작업을 거쳐 매 10분마다 새로운 거래 기록이 담긴 블록이 생성되고 이 블록은 네트워크에 분산돼 있던 다른 블록들과 연결됩니다. 이렇게 거래 기록이 블록에 새겨진 뒤에야 비로소 거래는 효력을 갖습니다. 채굴 작업이 없다면 비트코인은 사실상 거래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채굴자에게는 채굴에 따른 보상이 주어집니다. 초기에는 블록을 채굴할 때마다 보상으로 50 BTC를 줬는데, 이런 보상은 4년마다 절반으로 줄어드는 반감기를 맞습니다. 첫 번째 반감기는 지난 2012년이었습니다. 이어서 2016년과 2020년까지 반감기가 세 차례 찾아왔습니다. 그 결과 채굴 보상은 6.25 BTC까지 줄었습니다. 올해부터는 절반이 더 줄어든 3.125 BTC가 보상으로 주어질 예정입니다. 이처럼 반감기를 거칠 때마다 공급량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비트코인 가격은 큰 폭으로 뛰었는데, 이는 지난해부터 시작된 가격 폭등의 배경 중 하나입니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비트코인 가격 덕분에 블록을 하나만 채굴해도 약 1억 8천만 원(3.125 BTC) 상당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블록의 크기는 1MB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10분에 하나씩 생기는 블록에는 4,000건의 거래 기록밖에 담기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10분이라는 시간 동안 4,000건이 훌쩍 넘는 거래가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때는 채굴자들이 수수료를 더 많이 내는 사람의 거래 기록부터 블록에 새겨 넣습니다. 때문에, 거래 기록이 몰릴수록 수수료는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비트코인을 통한 NFT 발행이 가능해지면서 지난해부터 블록에 새겨야 할 거래 기록이 급증했고, 이에 따라 거래 당 평균 수수료가 지난달 중순 37.4달러, 우리 돈으로 5만 원까지 치솟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대표 지급결제 수단인 비자카드는 10분마다 평균 4천만 건이 넘는 거래를 거뜬히 소화합니다. 1MB짜리 블록으로 비트코인이 처리할 수 있는 거래량의 1만 배에 달합니다. 이는 금융위기 이후 기존 금융 체계를 탈바꿈하겠다며 등장한 비트코인이 날개 잃은 천사처럼 지급결제 수단으로서의 도약을 포기하고 가치 저장 수단인 ‘디지털 금’으로 전락한 이유입니다. 달러에 전쟁을 선포했던 ‘리브라’ 비트코인의 실패한 비상을 이어받은 건 페이스북(메타)였습니다. 지금은 비트코인 현물 ETF 상장 뉴스가 코인 업계의 최대 화두지만, 불과 몇 년 전에는 다른 뉴스가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지난 2019년 6월 페이스북은 ‘리브라’라는 이름의 코인을 만들겠다고 밝혔는데, 이 소식에 코인판은 물론 미국 등 주요국까지도 크게 동요했습니다. “페이스북의 리브라 프로젝트는 마스터카드, 비자 등 20개가 넘는 글로벌 기업이 함께 했다.” 페이스북은 가입자끼리 자유롭게 주고받을 수 있는 ‘리브라’라는 이름의 코인을 만들려 했습니다. 특히, 리브라는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주요국의 통화 가치에 고정된 ‘스테이블 코인’이었습니다. 덕분에 국경에 관계없이 서로 주고받을 수 있으며, 결제도 할 수 있고 환전도 할 수 있도록 설계됐습니다. 그러나 달러 패권을 송두리째 잃을 수 있었던 미국의 반대가 거셌습니다. 개인정보도 문제가 됐습니다. 가입자의 인적사항 정보를 꿰고 있는 페이스북이 가입자의 금융 정보, 즉 언제-어디서-무엇을-얼마나 구매하는지까지 쥐고 흔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리브라 프로젝트 공개 한 달 만에 미 의회는 페이스북을 상대로 청문회까지 열었습니다. 리브라 프로젝트는 이름을 ‘디엠(Diem)’으로 바꾼 다음 어떻게든 미 당국과 타협하며 생명력을 이어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2022년 1월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은행 실버게이트캐피털에 관련 기술을 2억 달러에 매각하기로 하고 끝내 청산됐습니다. 또 다른 전쟁의 서막 페이스북은 사토시 나카모토가 꿈꿨던 미래에 매우 근접했었습니다. 리브라가 실현됐다면 해외여행을 갈 땐 이제 달러나 유로가 아닌 리브라를 충전하고, 페이스북이 발행하는 리브라가 미 중앙은행에서 찍어낸 달러보다 통화 정책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경제 생태계가 도래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의문점도 남습니다. 비트코인이 실패했던 영역, 그러니까 수천만 건의 거래 기록들이 실시간으로 쏟아졌더라도 리브라는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페이스북은 지급결제 수단으로서 암호화폐가 쓰일 수 있도록 얼마만큼 기술적 진보를 이룩했을까요?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에서 페이스북이 리브라 프로젝트 청산 나흘 만에 COPA(Crypto Open Patent Alliance)에 가입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COPA는 트위터의 창업자인 잭 도시를 중심으로 지난 2020년 설립된 단체로 코인베이스, 크라켄, 유니스왑 등 암호화폐 업계에서 내로라하는 기업들의 연합체입니다. 블록체인 기술들이 각종 특허나 지적재산으로 발목 잡히는 일 없도록 특허 개방을 추구합니다. 메타는 COPA의 이사진으로도 합류하면서 자신들의 특허를 다른 회원들이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메타는 디엠 매각과 함께 암호화폐 관련 기술을 이미 실버게이트캐피털에 매각한 상태였습니다. 모든 특허를 자유롭게 나누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페이스북이 합류한 이후 새롭게 개발된 기술로 COPA가 주목을 받은 사례는 찾기 어려웠습니다. 대신, COPA는 크레이그 라이트라는 인물에게 제기한 소송으로 더 주목을 받고 있었습니다. 사기꾼에게 왜 소송을 제기했을까? 크레이그 라이트는 ‘사토시 호소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난 2015년 미국의 IT전문매체 <와이어드>와 <기즈모도>에 의해 처음 노출된 이후 스스로를 사토시 나카모토라고 주장해왔지만, 그가 제시한 증거를 두고 다른 전문가들은 거짓이라며 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실제로, 세계 최대 규모 암호화폐 거래소인 바이낸스의 창업자인 창펑자오는 그를 “사기꾼”이라 비판했고, 이더리움을 만든 비탈릭 부테린은 그의 주장을 “헛소리”라고 평가했습니다. “호주 출신 IT 전문가로 스스로를 비트코인의 창시자 ‘사토시 나카모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 출처: craigwright.net 사기꾼으로 몰리고 있지만, 비트코인 백서의 저작권은 정작 크레이그 라이트에게 있습니다. 미국 저작권청은 지난 2019년 5월 비트코인의 오리지널 코드와 비트코인 백서에 대한 크레이그 라이트의 저작권 등록 신청을 받아들였습니다. 크레이그 라이트가 정말 사토시 나카모토인지 확인 절차를 거친 것은 아닙니다만, 어쨌든 저작권 등록자명에 사토시 나카모토와 크레이그 라이트의 이름이 함께 기재돼 있습니다. 이후 크레이그 라이트는 비트코인 백서에 대한 저작권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COPA 창립 멤버인 잭 도시의 회사 ‘블록(Block)’ 홈페이지에 백서가 올라온 것을 보고는 크레이그 라이트 측에서 저작권을 주장하는 서한을 지난 2021년 1월 보냈습니다. 이런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COPA는 크레이그 라이트가 사토시 나카모토가 아닐 경우 백서의 저작권이 그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해 줄 것을 법원에 요청했고 소송전이 시작됐습니다. 페이스북이 COPA에 합류한 건 소 제기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입니다. 준비 서면 등 절차를 마친 크레이그 라이트와 COPA의 소송은 다음 달(2024년 2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 소송의 재판부인 영국 고등법원의 멜러(Mellor) 판사는 크레이그 라이트가 비트코인을 만든 사토시 나카모토가 맞는지를 가리는 정체성 이슈가 이번 소송의 핵심이라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정체성 다툼은 시작일 뿐, 그 뒤에는 더 큰 싸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특허 부자 크레이그 라이트 사기꾼 취급받지만, 크레이그 라이트는 블록체인 관련 기술 특허를 다수 보유하는 의외(?)의 면모도 갖고 있습니다. 지난해 7월 <포브스> 보도에 따르면, 크레이그 라이트는 2012년 가을부터 비트코인과 관련한 특허를 신청하기 시작해 현재는 블록체인 관련 특허를 800개나 갖고 있고, 3천여 개의 특허는 출원 단계에 있습니다. 이처럼 특허를 쌓아 올리는 데에는 그가 지난 2015년 공동 창업한 ‘nChain’이라는 IT 회사가 중추적 역할을 했습니다. 재작년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블록체인 관련 특허를 가장 많이 가진 기업은 소프트뱅크 그룹으로, 모두 4,001개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약 92%는 당시는 계열사였던 중국 알리바바 그룹의 것이었습니다. 사실상 중국 기업이 1위인 것입니다. 2위 평안보험과 5위 텐센트 역시 중국 기업입니다. 보유 특허 3위 기업은 IBM이고, 네 번째가 바로 nChain입니다. 이처럼 nChain은 중국과 미국의 거대 기업들이 주도하는 블록체인 기술 경쟁에서 당당히 이름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글로벌 특허정보업체 ‘렉시스넥시스(LexisNexis)’가 재작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한 ‘Innovation-Momentum Report’에 nChain은 2년째 선정됐습니다. 글로벌 기업들이 출원하는 특허의 질적 수준을 매년 평가해 업계에서 혁신을 주도하는 100대 기업을 선정하는 건데, AI 기술 혁신을 주도하고 있는 엔비디아를 비롯해 삼성과 애플, 인텔, 알파벳, 메타, ASML, CATL, 화이자 등 분야를 막론하고 시장을 이끌고 있는 기업들이 포함돼 있습니다. 이름도 생경한 nChain이란 회사가 업계 최고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BSV의 아버지 크레이그 라이트 사단의 이런 기술력과 특허는 BSV 개발로도 이어졌습니다. BSV는 ‘비트코인 사토시 비전(Bitcoin Satoshi Vision)’의 줄임말입니다. 시장에서는 비트코인(BTC)의 이름을 팔아 한 몫 챙겨보려는 ‘비트코인의 아류 코인’ 정도로 이해되고 있지만, BSV는 BTC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앞서, 비트코인의 블록 크기가 1MB에 불과해 높은 수수료와 느린 거래 속도 등 여러 한계를 노출했다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BTC 개발자 사이에서도 블록 크기를 더 키워야 하는 것 아니냐는 논쟁들이 이어져 왔고, 결국 업데이트를 진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원래 거래 기록에는 소유자의 전자 서명도 포함돼 있는데, 용량을 줄이기 위해 거래 기록과 전자 서명을 서로 분리하기로 한 것입니다. 즉, 거래 기록은 전처럼 블록에 새기고 전자 서명은 블록이 아닌 다른 곳에 보관함으로써 거래 처리량을 조금이라도 늘리는 것입니다. ‘Segregated witness(분리된 증인)’ 또는 줄여서 ‘Segwit’이라 불리는 이 업데이트는 2017년 8월 이뤄졌습니다. 그런데 BTC 개발자 모두가 이 업데이트에 찬성을 한 건 아닙니다. 특히, 크레이그 라이트를 포함한 개발자 일부는 마치 이중장부처럼 거래 기록과 전자 서명이 분리되면서 거래의 투명성이 떨어지고 자금 세탁에 활용될 위험성은 커질 것을 우려했습니다. 이처럼 Segwit 업데이트를 받아들일 수 없는 개발자들은 따로 떨어져 나와 ‘비트코인 캐시(BCH)’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BCH 내부에서도 이견이 드러나며 2018년 11월 한 차례 더 분리가 이뤄졌고 크레이그 라이트 주도로 비트코인 사토시 비전, BSV가 탄생했습니다. BTC vs BSV 그렇다면 BSV는 BTC와 어떻게 다른 걸까요? 우선, 생태계의 규칙 자체가 다릅니다. BTC의 경우, A가 B에게 비트코인을 지급하더라도 이 거래 기록(Transaction)이 장부 역할을 하는 블록에 새겨진 뒤에야 효력이 생깁니다. 이런 합의 때문에 A와 B는 거래 기록이 블록에 새겨질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이에 반해 BSV는 거래 기록(Transaction) 그 자체가 효력을 갖는다고 봅니다. 즉, 거래 기록이 블록에 새겨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A가 B에게 비트코인을 지급한 내역만 있다면 효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거래 기록에는 전자 서명도 포함돼 있어 위조나 변조 여부를 어느 정도 가려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거래가 이뤄진 뒤에야 채굴자들에게 거래 기록을 전파하고, 블록에 새기는 채굴 작업은 그다음에 이뤄집니다. 이를 통해 BSV는 수수료는 낮은데 거래 속도가 빠른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BSV 생태계에서도 블록은 10분마다 새롭게 생성됩니다. 그러나 블록의 최대 크기는 4.3GB입니다. BSV 진영에서는 더 커진 블록 크기 덕분에 초당 거래량도 5만 건까지 처리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BSV 채굴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nChain의 목표는 조만간 1TB까지 블록을 키우는 것입니다. 디지털 화폐가 되기 위한 경쟁에서 더 앞서 나가기 위함인데, 크레이그 라이트는 지난 2019년 한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자신감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사토시 나카모토는 반드시 돌아온다 결론적으로, 앞서 소개한 크레이그 라이트와 COPA 사이의 소송은 사토시의 정체성을 놓고 벌이는 싸움인 동시에 비트코인(BTC) 진영과 비트코인 사토시 비전(BSV) 진영이 벌이는 치열한 정통성 다툼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미래의 디지털 화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블록체인 특허 전쟁의 전초전이라 볼 수 있습니다. 소송 선고는 이르면 오는 3월쯤 나올 전망입니다만, 크레이그 라이트가 승소한다고 해서 곧장 BSV가 BTC를 대체하고 BTC가 휴지조각이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BTC는 이미 현물 ETF 상장 승인 결정으로 투자재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인정받고 자본시장에 편입됐기 때문입니다. 다만, 법원이 크레이그 라이트를 ‘비트코인 창시자’ 사토시 나카모토로 인정한다면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선, 크레이그 라이트가 “진정한 비트코인은 BSV”라고 주장하며 BTC에게서 ‘비트코인’ 이름을 박탈할 수 있습니다. 또, 비트코인 파일 형식과 블록체인 데이터베이스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BTC 운영 자체를 제한하려 들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크레이그 라이트는 재작년에 이미 BTC 진영을 상대로도 저작권 소송을 제기했고, COPA가 제기한 ‘사토시 정체성’ 소송과 합병돼 함께 심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크레이그 라이트가 패소한다고 해도 사토시 나카모토의 이상은 멈추지 않고 전진할 것입니다. 페이스북의 실패를 바로 옆에서 보았던 페이팔도 지난해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하며 디지털 화폐를 위한 전쟁에 뛰어들었고, 이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블록체인 특허 경쟁은 더 속도를 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도전 끝에 사토시의 꿈이 마침내 실현된다면, 황금이 돼버린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의 미래는 어떻게 바뀔까요?! 우리가 여전히 사토시의 귀환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디자인 : 최혜지
공매도 제도를 금융당국이 중단시킨 지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글로벌 투자은행(IB)의 불법적인 무차입 공매도 관행 때문에 시작됐지만, 당국은 공매도 제도 자체를 손보려 하고 있습니다. 불법이 만연하기 때문에 제도 전반에 대해 개선이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이복현 금융감독원장, 2023년 11월) 그렇다면, 무엇이 어떻게 개선돼야 공매도가 재개될 수 있을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이 질문에 금융 당국은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매도가 중단되기에 앞서, 저는 공매도가 특정 종목의 주가 하락을 초래한다는 주장과 공매도가 오히려 주가 급락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한다는 주장도 각각 소개했습니다.* 이처럼 상반된 주장을 굳이 비교했던 이유는 둘 다 일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관련기사 : <‘공매도와의 전쟁’이라는데…공매도는 주가 급락의 원흉? 방파제?> 당국이 답을 내놓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공매도 제도가 정말 주가 하락의 주범일까? 아니면 주가 급락을 막는 방파제일까?’라는 질문은 덮어둔 채 제도 개선에 나섰기 때문에 물음표가 남는 것입니다. 이에 SBS 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과 함께 공매도가 중단된 한 달 동안 주식시장에 나타난 변화들을 직접 분석해 봤습니다. 이를 통해 당국이 답하지 않은 질문에 대한 답을 직접 찾아보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공매도 제도 개선 방향에 대한 고민까지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공매도는 주가 하락의 주범일까? 우리 주식시장에서 개인투자자 비중은 코스피의 경우 55%, 코스닥의 경우 80%에 육박합니다. 미국과 일본이 20% 수준으로 추산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는 개인투자자의 비중이 높습니다.(금융위원회, 2023년 11월) 그렇다면, 공매도를 주가 하락 주범으로 지목하는 건 개인투자자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일까요? 미국에서도 개인 투자자들은 자본력을 갖춘 기관들이 공매도를 통해 개인 투자자들에게 손실을 안겨주고, 그만큼 이익을 챙긴다고 의심합니다. 그런 의심에서 시작된 사건이 바로 ‘게임스탑(GameStop) 사태’입니다. ‘멜빈 캐피탈(Melvin Capital)’라는 미국 헤지펀드가 코로나가 한창이던 재작년 초 비디오 게임 소매업체인 게임스탑의 주식을 대규모 공매도하자 이에 대항해 개인 투자자들이 똘똘 뭉쳐 게임스탑 주식을 대량으로 매수하며 주가를 끌어올렸고, 멜빈 캐피탈은 천문학적 손실을 피하지 못하고 끝내 파산했습니다. ‘게임스탑 사태’를 계기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공매도에 대한 규제를 더 강화했다. 국경을 막론하고 개인투자자들이 이처럼 공매도를 주가 하락 주범으로 지목하는 이유는 손익 구조와 관련이 깊습니다. 공매도는 앞으로 주가가 떨어질 걸로 예상되는 종목의 주식을 빌려 매도하고, 나중에 주가가 떨어졌을 때 사들여 되갚는 투자 방식입니다. 주가가 떨어져야 이익을 얻는 구조인 것입니다. 때문에, 막대한 자본과 정보력, 시장 지배력을 지닌 기관 투자자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매도한 종목의 주가를 떨어뜨려 이익을 챙길 것으로 개인투자자들은 의심하고 있습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인지 확인하기 위해 공매도와 주가의 관계를 직접 확인해 봤습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공매도를 위해 주식을 빌려놓고 아직 갚지 않은 미상환 물량을 ‘공매도 잔고’라 하는데, 이 잔고가 늘었다는 건 시장에서 해당 종목을 공매도한 다음 주가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투자자가 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잔고가 늘었을 때 1거래일 뒤에 수익률이 상승하는지 아니면 하락하는지 살펴본다면 공매도와 주가 사이의 상관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로 전면 중단됐던 공매도는 재작년 5월부터 코스피200-코스닥150 종목에 한해서 재개됐습니다. 때문에, 분석 대상은 이들 350개 종목입니다. 분석 기간은 지난달 공매도를 중단하기 직전 6개월(2023년 5월 2일 ~ 2023년 11월 3일)로 잡았습니다. 즉, 지난 반년 동안 350개 종목 별로 공매도 잔고와 수익률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는 것입니다. X축은 공매도 잔고(T 거래일)이고 Y축은 주가 수익률(T+1거래일)인 그래프 위에 각 종목별로 점을 찍어보면 관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점을 다 찍고 나면 추세선을 그려볼 수 있는데, 이때 추세선의 기울기가 공매도 잔고와 수익률 사이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가령, 유한양행의 경우 추세선 기울기는 –0.28입니다. 이는 공매도 잔고가 늘면 수익률이 떨어지는 음의 관계가 나타났단 의미입니다. 반대로, ISC의 추세선 기울기는 +0.32입니다. 공매도 잔고가 늘 때 수익률이 오르는 양의 관계가 나타났단 뜻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350개 종목별로 추세선의 기울기(상관 계수)를 구해보니, 213개 종목에서 음의 관계가 나타났고 나머지 137개 종목에서 양의 관계가 나타났습니다. 모든 종목에서 공매도 잔고가 늘었을 때 주가가 하락하는 음의 관계가 나타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 공매도로 주가가 크게 하락했을 걸로 의심받던 에코프로비엠은 공매도 잔고가 늘 때 오히려 수익률도 오르는 양의 관계가 나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0%가 넘는 종목에서 음의 관계가 나타났습니다. 이는 지난 반년 간 우리 주식시장에서 공매도와 주가 하락의 사이의 상관성이 확인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추가 분석 분석 기간 동안 코스피(-6.2%)와 코스닥(-8.6%) 모두 하향 곡선을 그렸습니다. 미국발 고금리 긴축 조치로 우리 주식시장이 힘을 쓰지 못하며 약세장에 머물렀기 때문에 공매도 잔고와 무관하게 수익률이 하락한 것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지수 수익률이 –5%를 기록한 날에 특정 종목의 수익률이 –4%였다면, 실질적으로 이 종목은 +1%만큼 수익률을 기록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선 분석에서는 반영되진 않았습니다. 이런 시장 상황까지 반영하기 위해서는 ‘시장조정 수익률’이란 개념을 도입하면 됩니다. 방법은 이번에도 간단합니다. 종목 수익률에서 해당 종목이 포함된 지수의 수익률을 뺀 값을 '시장조정 수익률'로 보고, 공매도 잔고(T 거래일)와 시장 조정 수익률(T+1 거래일) 사이의 상관관계를 분석하는 것입니다. 분석 결과, 음의 관계가 나타난 종목은 199개로 소폭 줄었고, 양의 상관관계가 나타난 종목은 151개로 조금 늘었습니다. 수치상의 변화는 있었지만 여전히 둘 사이에는 10%가 넘는 간극이 있을 정도로 공매도와 주가 사이에는 음의 관계가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추가 분석에서도 공매도와 주가 하락 사이의 상관성이 드러난 건데, 그렇다면 “공매도가 주가 하락의 주범이 맞다.”라고 결론 내릴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전상경 한양대학교 파이낸스경영학과 교수는 “공매도가 주범은 아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다만, 우리 주식시장에선 공매도 이후 추종 매도가 강력하게 뒤따르고 있어 결과적으로 공매도가 쏟아진 종목은 주가 하락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합니다. 전상경 │ 한양대학교 파이낸스경영학과 교수 “공매도 물량이 전체 거래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공매도만으로 주가 수익률에 영향을 주기는 어렵단 뜻입니다. 그럼에도 공매도와 주가 하락 사이의 상관성이 나타나는 이유는 공매도 잔고의 증감을 보고 개인 투자자들이 매매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공매도 잔고가 늘어난 모습을 보고 ‘외국 및 기관 투자자의 매도세가 더 강하겠구나.’라고 생각을 해서 덩달아 추종 매도에 나서고, 공매도 잔고가 줄 때는 ‘공매도 세력이 빌린 주식을 상환하고 있어 매수세가 나타나겠구나.’라고 생각해 추종 매수에 나서면서 음의 관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공매도는 주가 급락의 방파제일까? 공매도의 순기능을 지지하는 쪽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공매도란 정보력을 갖춘 기관 투자자들이 ‘이 종목은 고평가 돼 있음이 심히 의심된다.’라며 써 보낸 경고장에 해당합니다. 덕분에 과열됐던 시장의 열기는 진정되고 거품처럼 치솟았던 주가는 적정 수준으로 회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매도 이후 주가가 떨어지는 건 정보력을 갖춘 기관 투자자들이 내린 판단이 맞았음을 뜻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공매도가 제한된다면 이런 순기능은 사라지고 시세 조종이나 과도한 투자 쏠림 현상 등에 의해 주가가 불나방처럼 치솟을 때 견제할 수단이 없어집니다. 실제로, 공매도 제외 종목인 영풍제지는 주가조작 세력의 먹잇감으로 전락해 불과 1년 만에 20배나 가격이 폭등했다가 검찰 수사 이후 6거래일 연속 하한가를 기록하며 바닥을 쳤습니다. 공매도라는 방파제가 뚫리면, 시장은 위아래로 더 크게 출렁이며 혼란만 가중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공매도 제외 종목인 영풍제지의 주가는 1년 사이에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크게 출렁였다. 이런 주장이 일리가 있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공매도 중단 이후 시장의 변동성을 직접 확인해 봤습니다. 방법은 역시 간단합니다. 코스피200-코스닥150 종목 별로 공매도 중단 이전 한 달(10/6~11/3, 총 20거래일) 동안 주가의 변동성을 구합니다. 그리고 공매도 중단 이후 한 달(11/6~12/1, 총 20거래일) 동안의 변동성도 구해 둘을 비교하면 끝입니다. 각 종목의 수익률을 거래일별로 기록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첫째 날은 +4%, 둘째 날은 +2%, 셋째 날은 –1%, …….” 이렇게 기록하다 보면 수익률 평균치를 구할 수도 있고, 평균치로부터 각각의 값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나타내는 표준편차도 구할 수 있습니다. 이때 산출된 표준편차 값이 바로 변동성*에 해당합니다. 가령, LG에너지솔루션의 경우 공매도 중단 후 변동성 값이 중단 전보다 더 커졌는데, 이는 변동성이 심해졌음을 뜻합니다. 공매도 중단 이후 변동성 값이 감소한 LG 화학은 변동성이 줄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 나오는 변동성 값은 일별 표준편차 값을 연율화(Annualization)한 수치입니다. 분석 대상인 코스피200–코스닥 150 총 350개 종목의 변동성을 모두 비교한 결과, 공매도 중단 이후 변동성이 커진 종목은 모두 165개였고, 중단 이후 오히려 변동성이 줄어든 종목은 185개였습니다. 공매도 순기능을 지지하던 전문가들의 예상과 달리, 변동성이 감소한 종목의 수가 더 많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매도 순기능은 허구에 불과한 주장일까요? 전문가들은 둘 사이의 격차가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는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공매도의 순기능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것입니다. 추가 분석 공매도 중단 조치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을 집단은 직전까지 공매도가 활발하게 이뤄졌던 종목들입니다. 반대로, 공매도가 별로 이뤄지지 않았던 종목들은 공매도 중단 조치로부터 큰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중단 조치에 영향을 크게 받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을 구분한 다음 둘의 변동성 변화를 서로 비교*해본다면, 공매도 중단 조치가 변동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과 효과를 분석할 때 사용되는 이중차분법(DID, Difference In Difference). 공매도 중단에 크게 영향을 받았을 집단을 A라고 하겠습니다. A 집단에는 공매도 잔액 상위 50개 종목을 포함시켰습니다. 실제로, A 집단의 공매도 잔액은 전체 350개 종목 공매도 잔액의 74%를 차지할 정도로 공매도가 집중적으로 이뤄졌습니다. 따라서 공매도 중단 조치에 다른 종목들보다 더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매도 중단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을 집단(B)에는 공매도 잔액 비중이 0.6%에 불과한 하위 50개 종목을 포함시켰습니다. 거듭 설명하지만, B 집단은 공매도 중단 조치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을 종목으로 이뤄졌습니다. 반면에 A 집단은 공매도 중단 조치에 크게 영향을 받았을 종목으로 구성됐습니다. 따라서 둘 사이에서 발생하는 차이는 공매도 중단 조치로 인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공매도 중단 조치에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을 B 집단부터 살펴보겠습니다. B 집단에 포함된 종목들은 공매도 중단 이후 평균적으로 3.7%만큼 변동성이 커진 걸로 나타났습니다. 공매도가 저조했던 종목들인 만큼 이 결과는 공매도 중단 조치와는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의 물가상승률 둔화, 긴축 마무리 시그널 등이 공교롭게도 공매도 중단 조치 후 쏟아지며 시장 전반적으로 변동성이 커졌는데, 이 영향으로 B 집단의 변동성이 확대된 걸로 풀이됩니다. 반면, 공매도가 활발하게 이뤄졌던 A 집단은 공매도 중단 조치 이후 변동성이 8.1%나 커졌습니다. A와 B, 두 집단 모두 공매도 중단 조치 이후 변동성이 확대됐지만, A 집단의 변동성이 B 집단보다 4.4% 포인트 더 높게 나타났습니다. 이런 증가폭 차이는 곧, 공매도 중단 결정에 따른 결과물인 것입니다. 공매도 중단 조치는 정말로 변동성을 더욱 키운 걸까요? 빈기범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고평가 된 종목의 주가 급등을 견제할 수 있는 공매도를 갑자기 중단시켜 버렸기 때문에 단기적으로는 주가 변동성이 더 커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빈기범 │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금융 위기나 코로나 위기처럼 금융 시장이 불안정할 때 공매도를 일시적으로 중단하면 안정을 찾아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국은 위기 상황이 아닌데도 ‘공매도가 주가 하락 주범’이라는 일부 개인 투자자들의 극성스러운 요구를 받아들여 공매도를 중단시켰습니다. 그 결과 분석 기간 동안 주식 시장의 변동성은 더욱 커졌음이 드러났습니다. 어느 땐 급등했다가 한눈팔면 떨어질 정도로 변동성이 과도한 시장에선 개인 투자자들은 손실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됩니다. 시장과 투자자, 당국 모두에게 결코 좋은 시장은 아닌 것입니다.” 어느 쪽으로든 기울지 않은 운동장이 필요하다 앞선 분석들은 여러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받아 설계한 결과지만, 연구 논문에 준할 정도로 정교한 분석들은 아닙니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변화를 직접 나서 분석한 이유는 공매도를 둘러싼 질문들에 당국이 여전히 답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무엇이며, 또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요? 첫 번째 분석에서 공매도 잔고가 늘면 주가 수익률이 하락하는 음의 관계가 나타났습니다. 개인 투자자들의 주장처럼 기관 투자자들로 구성된 이른바 공매도 카르텔 세력이 공매도로 이득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가 하락을 유도했기 때문인 것인지, 아니면 해당 종목이 단순히 고평가돼 기관 투자자들의 예상대로 시장에서 조정을 거치며 주가가 적정 수준으로 내려온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공매도 잔고 변화에 따른 추종매매 경향이 유독 우리 시장에서 강하게 나타나 주가가 하락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인과 관계가 어떻든 공매도가 집중된 종목은 주가가 하락하는 경향성을 보였습니다. 인위적인 주가 하락에 공매도가 악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예방할 대책이 마련돼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처럼 공매도를 갑자기 중단시켜 완전히 틀어막고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겠다며 일방적으로 판을 뒤집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 분석에서 나타난 것처럼 공매도의 순기능이 마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공매도 잔고가 많은 종목일수록 그렇지 않은 종목보다 공매도 중단 조치 이후 변동성 증가폭이 더 컸습니다. 고작 한 달, 20거래일 동안의 변화를 비교한 것이지만 중단 기간이 기약 없이 더 길어진다면 변동성 증가폭은 더 커질 수 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장의 모든 주체들에게 돌아갑니다. 공매도의 순기능이 원활히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이번 기회에 확실히 마련돼야 하는 것입니다. 공매도가 우리 주식시장의 적인지, 아군이지 피아식별이 어려웠던 것은 모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매도를 적으로 몰아세우는 마녀사냥 식의 대책도, 공매도 제도가 알아서 잘 시행되기를 시장에 그저 맡겨두는 식의 대책도 아닙니다. 공매도를 둘러싼 부정적 우려와 긍정적 기대를 모두 충족할 수 있는 개선책이 마련돼야 합니다. 디자인 : 옥지수, 최혜지
연일 ‘홍콩 ELS’에서 내년 상반기에 수조 원대 대규모 손실이 예상된다는 뉴스가 나옵니다. ELS(Equity-Linked Securities)는 특정 종목이나 주가 지수를 기초자산으로 삼고, 이 기초자산의 추이에 따라 수익률이 연계되는 증권입니다. 때문에 홍콩 ELS란 홍콩 주가 지수와 연계된 증권을 뜻합니다. ELS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경한 이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2017년만 해도 대한민국 부자들이 재테크를 위해 가장 투자하고 싶어 하던 금융상품이었습니다.(하나금융경영연구소, 2017) 미국과 홍콩 등에서 1980년대부터 시작됐던 ELS는 우리나라엔 지난 2003년 처음 들어왔습니다. 그 이후 20년 동안 ELS는 650조 원 넘게 발행되며 대표 재테크 수단으로 자리 잡았습니다.(금융투자협회) 결국, ‘홍콩 ELS 수조 원 손실’ 뉴스의 골자는 투자 좀 해보려 했던 개인들이 조 단위 손실 위험에 처했단 이야깁니다. 아니, 어떤 상품이기에 이렇게 큰 손실이 나는 걸까요? 그런 상품에는 도대체 누가 돈을 투자하는 걸까요? 그리고 큰 손실이 날 수도 있음에도 왜 계약에 나선 것일까요? 이 뉴스가 궁금했던 모두를 위해 묻고 답하며 한 걸음씩 들어가 보려 합니다. ✏️ 뉴스쉽 네 줄 요약 홍콩 ELS 상품을 은행에서 계약했던 고객들이 수조 원대 손실 위험에 뉴스가 연일 등장하고 있는데, 내용의 핵심은 바로 불완전 판매 논란입니다. 홍콩H지수에 연계된 홍콩 ELS 상품은 홍콩 지수가 폭락할 경우 손실이 불가피한 초고위험 금융상품임에도 정기 예금이나 적금처럼 안전한 상품으로 둔갑돼 판매됐기 때문입니다. 앞서, 수천억 원의 투자 손실을 초래한 DLF 불완전 판매 사태를 계기로 <금융소비자보호법>까지 제정됐음에도 불완전 판매 논란이 반복되는 건 형식에만 치우쳐 실질적으로 투자자들을 보호하는 일에는 소홀히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번 사태의 결론에 따라 수익에 눈이 먼 은행권이 고객을 사지로 내모는 행위에 제동이 걸릴 수도, 아니면 금융자본주의가 초래하는 비극이 계속해서 반복될 수도 있습니다. “홍콩 ELS, 수조 원대 손실” 이 기사는 어제 나온 것도, 지난주에 보도된 것도 아닙니다. 무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2016년 2월 15일(월) 머니투데이 신문 1면에 나온 기사입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처럼 불과 몇 년 전에도 홍콩 지수가 급락하며 홍콩 ELS 투자자들이 수조 원대 손실 위험에 처한 적이 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ELS를 설명하기에 앞서 이 기사를 소개한 건 ELS 상품이 고위험 파생상품이란 점을 가장 먼저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ELS는 우량한 종목(테슬라, 삼성전자 등)의 주가나 홍콩H지수(HSCEI)*, S&P500 지수, EUROSTOXX50 지수 등 해외 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하고, 이 기초자산 움직임에 따라 손익이 결정됩니다. 요즘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홍콩 ELS’는 이 가운데 홍콩H지수를 포함한 해외 지수 3개 정도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상품입니다. *홍콩H지수(HSCEI) : 중국본토기업이 발행했지만 홍콩 거래소에 상장돼 거래되고 있는 주식(H-Shares) 중 시가총액, 거래량 등의 기준에 의해 분류한 40개 종목으로 구성된 지수 상품마다 차이가 있지만, 통상 홍콩 ELS 상품의 만기는 3년입니다. 즉, 3년 뒤 만기 시점에 홍콩H지수를 포함해 기초자산으로 삼은 지수 중 하나라도 판매자와 투자자가 사전에 서로 합의한 수준 밑으로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원금에 더해 수익을 보장받는 것입니다. 이때, 지수가 폭등한다고 해서 수익률이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대신, 만기 시점에 지수가 폭락을 거듭하며 사전에 합의한 수준을 밑돌고 있다면, 하락한 만큼 원금도 손실을 입습니다. 주가 상승보다는 하락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는 상품인 것입니다. 3년 만기가 도래하기 전에 투자금을 회수할 수도 있습니다. ELS 상품은 6개월마다 조기 상환 기회를 갖습니다. 이때도 방식은 똑같습니다. 조기 상환 시점에 기초자산으로 삼은 지수들이 판매자와 투자자가 사전에 합의한 수준을 밑돌지 않으면 ‘원금+수익’이 보장됩니다. 단기에 투자금을 회수하는 것이기에 만기를 채웠을 때보다는 수익은 줄어듭니다. 판매자와 투자자가 사전에 합의한 기준보다 지수가 높다면 원금과 수익을 보장받기 때문에, 이 기준을 ‘배리어’라고 부릅니다. 통상 6개월과 1년 뒤 조기 상환 시점에는 배리어가 90% 수준입니다. 즉, ELS 계약 시점보다 기초자산으로 삼은 지수 중 어느 하나도 90%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다면 이 시점에 원금과 수익을 조기 상환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배리어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낮아집니다. 계약 이후 1년 6개월 또는 2년이 되는 시점에는 80%까지 내려가고, 2년 6개월이 되는 시점에는 70%, 3년 만기를 다 채운 시점에는 55%까지 떨어집니다.(배리어는 상품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ELS에 투자한 시점에 경기 침체가 발생해 기초자산 지수들이 계약 당시의 60%까지 하락했더라도 지수들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3년 만기를 채우면 투자 원금과 약정한 수익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ELS 상품에 배리어를 하나 더 추가한 것이 바로 ‘Knock-in’형 ELS 상품(이하 ‘녹인형 ELS’)입니다. 이 상품에는 기존 배리어 밑에 녹인(Knock-in) 구간(통상, 계약당시 지수의 50% 수준)이 존재합니다. 1번 사례처럼 만기까지 한 번도 배리어를 넘지 못하더라도 녹인 구간에 진입하지 않았다면 원금과 약정한 수익을 모두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녹인형 ELS 상품의 특징인데, 투자자에게 항상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기초자산으로 삼은 지수가 한 번이라도 계약 당시보다 50%를 밑돌아 녹인 구간에 진입했다면 원금과 수익을 받기 위해서는 2번 사례처럼 반드시 배리어를 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녹인형 ELS의 배리어는 다른 상품들보다 더 높게 형성돼 있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ELS는 2016년에도, 지금도 투자자들을 수조 원대 손실 위험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녹인형이든 아니든 ELS는 막연한 확률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야바위 게임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야바위는 뒤집었을 때 나오는 카드 숫자가 중요하다면, ELS는 내가 어떤 지수를 선택했고 그 지수가 얼마나 하락할지가 중요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야바위 게임에 어쩌다 투자자들이 내몰렸을까요? “한 번도 손실난 적 없습니다” 홍콩 ELS 상품을 설계하고 발행하는 주체는 증권사라면, 은행은 이 상품을 고객에게 판매하는 창구 역할을 합니다. 홍콩 ELS 상품 열에 아홉은 은행에서 계약됐습니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상품 계약자들은 수익률이 그나마 괜찮은 예금이나 적금 상품을 알아보려 은행을 방문했다가 ELS 상품을 권유받았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때마다 이들이 은행 직원으로부터 들었던 말은 “지금까지 손실난 적 없어요.”였습니다. 예금이나 적금 정도로 생각하고 가입한 투자자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야바위 같은 ELS 상품을 두고 ‘손실난 적 없는 금융상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지난 2015년 홍콩H지수는 14,801까지 치솟았지만 불과 6~8개월 만에 49%나 급락했습니다. 이에 따라 앞서 살펴본 신문 기사처럼 무려 10조 원에 달하는 투자 손실이 발생할 뻔했습니다. 그러나 불과 6개월 만에 지수는 다시 1만 선을 회복하며 대규모 손실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물론, 이 사이에 만기가 도래해 손실을 본 투자자들도 있습니다.) 그 이후, 2017년부터 2020년 말까지 홍콩H지수는 40% 이상 급락하거나 급등하는 일 없이 횡보기를 갖습니다. 그 결과 홍콩H지수를 기초자산으로 삼은 ELS 상품의 경우 손실 위험이 급격히 낮아졌습니다. 덕분에 홍콩 ELS 상품은 이제 손실난 적 없는 안전한, 그러면서도 상대적으로 수익률이 높은 금융 상품으로 둔갑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 기간 매년 홍콩H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ELS 상품은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대규모 손실 위험을 겪었던 2016년에는 발행금액이 5조 원에 불과했지만, 2017년에는 3배 정도 늘어 16조 원 넘게 발행됐고, 2018년에는 또 3배 늘어 50조 원 가까이 발행됐습니다. 2019년에도 상승세가 이어지며 50조 원 넘는 홍콩 ELS 상품이 발행됐습니다. 코로나 락다운 위기를 맞았던 2020년에도 홍콩 ELS 상품은 무려 19조 원 넘게 발행됐습니다. ELS의 민낯이 드러나다 안전한 금융 상품처럼 행세하던 홍콩 ELS의 실체는 지난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코로나 위기 대응과정에서 중국은 철저한 방역과 봉쇄를 선택했고, 이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미국 등 주요 국가들이 이전 지출을 늘린 것과 달리 중국은 돈을 풀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더해 미국이 동맹국을 총동원한 ‘디리스킹’* 전략을 앞세워 중국을 전방위 압박했습니다. 그 결과 엔데믹 이후에도 중국 기업들은 힘을 쓰지 못했고 홍콩H지수는 폭락했습니다. *참고 기사 보기 - 미국과 중국 사이 어딘가에...‘디커플링’보다 더 무시무시한 ‘디리스킹’ (뉴스쉽) - 싸우자는 건가 말자는 건가, 중국 ‘디리스킹’ 말하는 미국의 속내는? (뉴스쉽) 폭락한 홍콩H지수는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복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내년 상반기까지 이대로 유지된다면 2021년 상반기에 홍콩H지수를 기초자산으로 삼은 ELS 상품은 손실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지난해 10월 고점 대비 40%까지 폭락한 탓에 녹인형 홍콩 ELS 상품 대부분은 녹인 구간에 진입했습니다. 배리어가 더 높게 형성돼 있는 녹인형 ELS 상품의 경우 원금과 수익을 보장받기가 더 어려워진 것입니다. 내년 상반기에 만기가 도래하는 홍콩 ELS(총 9조 5,873억 원) 가운데 무려 5조 6,809억 원이 녹인 구간에 진입했습니다. 이 가운데 82.5%에 달하는 4조 6,867억 원이 은행에서 계약됐고, 나머지 9,942억 원은 증권사를 통해 판매가 됐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녹인 구간에 진입한 홍콩 ELS 잔액 대부분이 KB국민은행에 집중돼 있다는 점입니다. KB국민은행이 판매한 홍콩 ELS 상품 중 이미 녹인 구간에 진입한 잔액은 4조 6,434억 원입니다.(내년 상반기 만기 도래 상품 기준) 녹인 구간에 집입한 은행권 판매 잔액의 99%입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녹인형 홍콩 ELS 상품만 따져본 금액이란 사실입니다. 녹인형이 아닌 ELS 상품은 배리어가 상대적으로 낮게 형성돼 있긴 하지만 지금처럼 홍콩H지수가 회복되지 못하고 유지된다면 마찬가지로 원금 손실 위험이 큽니다. 즉, KB국민은행에서 집중적으로 판매한 녹인형 ELS 상품 말고도 다른 은행에서 판매한 ELS 상품들에서도 손실이 발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고점 대비 50%에 불과한 홍콩H지수가 지금처럼 유지된다면 내년 상반기 4.6조 원 규모의 손실이 발생할 걸로 추정됩니다. (5대 은행 기준, 은행연합회) 엔데믹 이후 중국 기업들의 실적 부진은 홍콩H지수 폭락으로 이어졌고, 초고위험 상품으로서 ELS의 민낯이 드러나면서 투자자들은 수조 원대 투자 손실 위험에 직면하게 됐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무엇일까요? 다음 질문은 ‘어쩌다 은행권에서 이렇게 많은 ELS 상품을 판매하게 된 것일까?’, 그리고 ‘왜 판매량이 특정 은행에 집중됐는가?’입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다 ELS 잔혹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많은 면에서 서로 유사했던 ‘DLF 불완전판매 사태’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DLF(Derivative Linked Fund)는 독일과 영국, 미국 등의 국고채 금리를 기초자산으로 한 파생결합펀드 상품입니다. 홍콩 ELS가 홍콩H지수의 움직임에 따라 손익이 결정됐다면, DLF는 독일 등의 국고채 금리 움직임에 따라 수익이 결정됩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우리은행과 하나은행은 당시 초고위험상품에 해당하는 DLF를 ‘손실확률 0%’라고 강조하며 고객에게 손실 가능성은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고(설명의무* 위반), 잘못된 설명을 듣고 고객이 DLF 가입을 결정하면 그제야 서류상 고객의 투자성향을 ‘공격 투자형’으로 임의 작성(적합성원칙** 위반)하는 등 방식으로 총 피해 투자자 2,875명에게 DLF 상품을 불완전 판매해 4,500억 원에 달하는 대규모 투자 손실을 초래했습니다. *설명의무 : 상품의 내용과 위험 등을 투자자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할 의무. **적합성원칙 : 금융소비자에게 적합하지 않은 계약 체결을 권유하지 않는 원칙. DLF 불완전 판매로 투자 손실을 입은 고객들이 금융감독원 앞에서 시위하는 모습 사실상, 은행이 고객을 기만해 위험에 내몰고 그 대가로 이익을 챙긴 사례입니다. DLF 사태 이후 서둘러 대책 마련에 나섰던 금융위원회는 2019년 11월 〈투자자 보호 강화 방안〉이란 특단의 조치를 내놓았습니다. 파생상품처럼 복잡해 투자자의 이해가 어렵고, 최대 원금 손실 가능성이 20%를 넘는 상품을 ‘고난도 금융상품’으로 규정하고, 은행에서 이런 상품들을 판매하는 것을 제한하기로 한 것입니다. 금융위원회의 초안에는 ELS 상품도 은행에서 취급할 수 없는 고난도 금융상품 목록에 포함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저금리 시기에 비이자수익이 절실했던 은행권은 ELS 상품만큼은 계속해서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며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당국은 한 달 만에 입장을 바꿔 5개 대표지수(KOSPI200, S&P500, EUROSTOXX50, HSCEI, NIKKEI225)로 구성된 ELS 상품은 은행 판매를 허용하기로 했습니다. 은행들의 놀이터가 된 ELS 은행에 ELS 판매를 터준 당국은 판매 한도를 각 은행의 2019년 11월 말 기준 신탁상품 잔액으로 묶어놨습니다. KB국민은행은 당시 신탁 잔액이 13조 원 규모로 은행들 가운데 판매 한도가 가장 높았고, 뒤이어 하나은행 6조 원, 신한은행 5조 원, 우리은행 4조 원 순이었습니다. 덕분에 KB국민은행은 다른 은행들에 비해 ELS 상품을 많이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포트폴리오가 녹인형 ELS 상품에 집중돼 있었습니다. 이는 최근 홍콩H지수 폭락으로 녹인 구간에 진입한 상품 대부분이 KB국민은행에서 판매된 이유입니다. 당국이 나름 한도를 정하긴 했지만,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 동안 4대 시중은행(KB국민, 신한, 우리, 하나)은 ELS 상품을 매년 20조 원 넘게 판매했습니다. 통상 ELS 상품 판매 수수료가 1% 수준인 점을 감안하면 최대 6000억 원에 달하는 수수료 이익을 챙긴 것입니다. 그 대신에 은행을 믿고 ELS 상품을 계약했던 고객들은 지금 수조 원대 손실 위험에 처했습니다.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이야기입니다만, 당국의 결정으로 고객들의 투자 손실과 은행의 수수료 이익이 서로 맞바꿔진 셈입니다. 면죄부가 된 ‘금융소비자보호법’ ELS 발행 기관인 증권사보다 은행들이 더 많이 판매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는 은행은 고객의 예금을 취급하는 금융기관이란 점입니다. 고객들은 돈을 들고 은행을 찾습니다. 은행은 증권사보다 잠재적인 ELS 상품 고객층에 대한 접근성이 훨씬 높습니다. 덕분에 ‘뭐 수익률 좋은 적금이나 예금 상품 없나?’라며 은행을 찾아왔던 고객에게 은행은 홍콩 ELS 상품을 권유할 수 있고, 고객들은 굳이 증권사를 찾지 않더라도 손쉽게 ELS 상품에 가입할 수 있습니다. 다만, 고객들은 은행이 고위험 금융상품을 판매하는 곳이 아니라 원금 보장을 전제로 예‧적금 상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인식합니다. 또 은행은 고객의 예금 가운데 얼마가 어디에 묶여 있는지, 그래서 지금 얼마가 투자가능한 상황인지 등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은행 창구에서 DLF나 ELS같은 고위험 상품이 불완전 판매될 개연성도 높습니다. 원금이 보장될 것이라 굳게 믿는 고객에게 은행이 마구잡이로 고위험 상품을 판매하도록 놔둔다면 DLF 사태는 언제든 반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당국도 이런 가능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은행들에게 ELS 판로를 열어주되, 〈금융소비자 보호법〉*과 같은 투자자 보호 방안을 제정해 불완전 판매를 차단하려 했습니다. *DLF 사태 이후 2020년 3월 제정돼 2021년 3월부터 시행 고위험 금융상품 투자자 보호 강화 방안 발표(2019년 11월 14일) 이 법의 취지는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말자.'입니다. 금융기관은 고객에게 부당하게 상품을 권유하지 말고(부당권유 금지 원칙), 상품의 위험성 등을 충실하게 설명하고(설명의무 준수), 적합하지 않은 상품은 권유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적합성 원칙 준수)는 원칙은 이미 〈자본시장법〉에 규정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만 원칙을 준수함으로써 법의 취지를 형해화시켰고, 수천 명의 피해자와 투자 손실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앞으로는 투자자 보호를 위한 원칙을 실질적으로 준수하지 않는다면 강도 높게 책임을 묻겠다며 새로 법을 만든 겁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은행 등 금융기관들은 고객의 투자성향을 먼저 분석한 다음 ‘공격 투자형’*으로 나올 때만 ELS 같은 고위험 상품을 판매할 수 있게 됐고(적합성원칙), ELS 상품에 가입하려는 고객에게는 투자 위험성이 담긴 핵심 설명서를 교부해야 하며, 판매 과정을 녹음해야 하고, 2영업일 간의 숙려기간도 의무화했습니다.(설명의무) 또한, 이런 원칙을 지키지 않아 고객에게 손실이 발생할 경우 손해배상책임을 규정하고 있고, 이때 고의로 원칙을 위반한 게 아니라는 점을 금융기관 스스로 입증하도록 했습니다.(손해배상 및 입증 책임) *공격 투자형 : 시장 수익률을 훨씬 넘어서는 투자수익을 추구하며 투자자금 대부분을 위험자산에 투자할 의향이 있는 유형으로 총 5개의 투자 유형(공격 투자형, 적극 투자형, 위험 중립형, 안정 추구형, 안정형) 가운데 가장 공격적인 성향으로 분류. 그러나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던 법을 아이러니하게도 금융 기관들이 면죄부처럼 이용하면서 작금의 홍콩 ELS 불완전 판매 논란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VIP룸으로 들어오세요.” 〈금융소비자보호법〉의 시행을 이틀 앞둔 지난 2021년 3월 23일, ‘KB국민은행이 AI 금융상담시스템을 구축했다.’라는 뉴스가 보도됐습니다. 이 시스템은 금융투자상품 판매 시 고객에게 정확한 상품 설명과 함께 소비자 보호 의무에 따른 적법한 판매 절차를 준수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KB국민은행 측은 “신규 프로세스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불완전 판매를 차단하는 기능은 은행권 최초”라며 자사의 AI 금융상담시스템을 추켜세웠습니다. 그렇다면, AI금융상담시스템은 정말 불완전 판매를 잡아냈을까요? 〈금융소비자보호법〉 출시를 앞두고 KB국민은행은 AI 상담시스템을 은행권 최초 도입 70대 A 씨는 노후 자금 9억 원을 맡기기 위해 지난 2021년 6월 은행을 찾았습니다. VIP실로 안내를 받은 A 씨의 최대 관심사는 원금 보장이었습니다. 평생에 걸쳐 모은 노후자금을 걸고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판매 직원은 원금이 보장되는 상품은 사실상 없다고 A 씨에게 설명했다고 합니다. 정기예금이라 해도 은행이 파산하면 법적으로 보호받는 건 최대 5천만 원에 불과하단 이유에서입니다. 판매 직원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러면서 제안한 상품이 바로 홍콩 ELS였습니다. 지금까지 손실난 적이 없으니 6개월 뒤면 원금과 수익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설명에 A 씨는 가입을 결정했다고 취재진에게 말했습니다. 녹인형 홍콩ELS 상품에 노후자금 9억 원을 투자한 70대 A 씨 그렇게 상품 가입을 결정하자, 돌연 판매 직원은 AI 금융상담시스템을 꺼내 들었습니다. AI는 빠르게 상품의 이름과 상품을 구성하는 지수, 배리어 수준, 손실 위험 등을 설명했습니다. "손실난 적이 없는 상품이다.", "반년 뒤에는 원금을 받을 것이다."와 같은 설명은 쏙 빠져있었습니다. 설명 중간마다 A 씨는 “네.” 또는 “이해했습니다.”라고 답해야 했고, 마지막에는 A 씨 스스로 상품명을 말하고, 이 상품의 손실 가능성 등을 모두 이해했다고 말했습니다. AI 금융상담시스템은 이 모든 과정을 녹음했습니다. 6개월 뒤 원금을 찾기 위해 다시 은행을 방문한 A 씨는 그제야 자신이 홍콩H지수에 연계된 ELS 상품에 가입했고, 홍콩H지수가 폭락해 6개월이 지난 시점에 조기 상환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습니다. 이런 순간에도 은행 판매 직원은 “이 상품은 손실이 난 적 없다”라며 A 씨를 안심시켰습니다. 그러나 의심스러운 마음에 계약서 일체를 요구한 A 씨는 자신의 투자 성향이 ‘공격 투자형’으로 기재됐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연령부터 연간소득, 전체 자산 중 금융자산의 비중, 투자 경험, ELS와 같은 파생결합증권상품 가입 경험 등에 대한 총 10가지 설문에 고객이 응답하면, 이를 근거로 고객의 투자정보에 대한 분석이 이뤄지고 투자 성향이 결정됩니다. A 씨의 투자정보 분석 결과표에는 금융 자산이 전체 자산의 10% 이내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A 씨가 적어도 90억 대 자산가이고, 그 가운데 10% 수준인 9억 원을 ELS 상품에 투자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또, A 씨가 그동안 선물이나 옵션, 주식 신용거래 등 투자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오고, ELS와 같은 파생결합증권상품에 투자한 지는 3년이 더 된 걸로도 나옵니다. A 씨는 모든 게 사실과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참고 기사 보기 : “고객님 ‘공격 투자형’ 나오셔야 돼요”...규제 강화에 ‘꼼수’? 재산 수준이나 투자 경험 등이 사실과 다르게 조사돼 ‘공격 투자형’으로 나왔고, 이에 근거해 은행에서 초고위험 상품인 홍콩 ELS 상품을 판매한 것이라면 명백한 불완전 판매 사례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AI 금융상담시스템은 이런 점을 포착하지 못했습니다. A 씨가 상품 설명과 위험도 등에 대해 이해했다고 답하는 내용만 녹음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녹음 내용은 은행들이 법을 지켰고, 따라서 불완전 판매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비단 A 씨만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만난 40대 가정주부, 50대 가장 모두 은행으로부터 지금 통장에 놀고 있는 예금을 투자할 좋은 상품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고, 은행을 방문하면 VIP룸으로 안내를 받았으며, 원금 손실난 적 없지만 수익률은 높은 상품이라며 홍콩 ELS 상품을 소개받았다고 설명합니다. AI의 설명에는 시키는 대로 답하면 가입 절차가 끝이 났는데, 지나고 보니 그때 했던 대답들이 은행들에게는 면피 수단이 됐다고 호소합니다. 비극은 반복될까 DLF부터 홍콩ELS까지, 대규모 투자 손실 위험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불완전판매가 근절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상품의 내용과 위험성을 충분히 이해했다면 투자하지 않았을 고객들까지 홍콩ELS 상품으로 대거 몰리면서 또다시 금융 재난의 서막이 오른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과거 DLF 사태보다 상황이 더 복잡합니다. DLF 사태로 제정된 〈금융소비자보호법〉이 투자자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금융기관의 면죄부처럼 역할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투자 손실이 현실화되든 아니든 이번 사태의 결론이 어떻게 맺어지는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수익에 눈이 먼 은행들이 교묘하게 고객들을 위험로 내모는 행태에 제동이 걸릴 수도, 그게 아니면 금융자본주의의 약탈적 비극이 계속해서 반복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디자인 : 옥지수
✏️ 뉴스쉽 네 줄 요약 · 불법 공매도가 현실로 드러나면서 제도 개선에 대한 요구는 그 어느 때보다 거세졌고, '한시적 공매도 금지'와 같은 전례없이 강도 높은 개선안 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 하지만 공매도 제도를 무리하게 손질할 경우 고평가 된 주식을 적정 가격으로 수렴시켜 인위적인 주가 부양이나 주가 급락을 막는 공매도의 순기능이 작동을 멈출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 반면 우리 주식시장처럼 다양성과 깊이가 충분치 않을 때 공매도는 주가 하락을 더 부추기며 시세 조종 등에 악용될 수 있는 만큼 이번 기회에 제도 개선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 결국, 공매도가 주가 하락의 원흉인지, 아니면 급락의 방파제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면 공매도와의 전쟁은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로 끝이 날 수 있습니다. 지난달 4일, 미국의 국채 금리가 치솟으면서 우리 주가 시장은 6개월 만에 2400대로 내려앉았습니다. 지난 3월 이후 6개월 만이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10년 만기 미 국채 금리가 4.8%를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미 국고채의 금리가 치솟으면, 우리나라에 머물고 있던 외국 자본이 빠져나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가장 안전한 투자 자산으로 꼽히는 미 국채가 수익률까지 5%에 육박한다면, 거부하기 힘들 정도로 매력적인 투자 자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인 투자자들은 다른 지표를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냅니다. 그건 바로 공매도 거래대금입니다. 6개월 만에 코스피가 2400대로 내려앉은 날, 참으로 공교롭게도 공매도 거래대금이 직전 거래일보다 4,500억 넘게 치솟았습니다. 오비이락일까요? 아니면, 개인투자자들의 뿌리 깊은 의심처럼 외국인 및 기관 투자자들의 공매도가 주가 하락의 원흉인 걸까요? 이처럼 논란만 일으킨다면 공매도는 도대체 왜 존재하는 것일까요? 이번 뉴스쉽에선 공매도를 둘러싼 논란에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려 합니다. “기울어진 운동장, 공매도” 기자가 된 이후, 장롱 면허에서 탈출하기 위해 도로운전 연수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느릿느릿 이동하는 차 안에서 운전 연수를 도와주던 선생님은 대뜸 제게 무슨 일을 하는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운전이 서툰 탓에 짧게 “사회부 기자입니다.”라고 답했는데, 예상치 못한 성토가 시작됐습니다. 그 대상은 바로 ‘공매도’였습니다. 5년도 더 된 이야기지만, 여전히 공매도는 논란의 중심에 있습니다. 공매도는 특정 종목의 주가 하락에 베팅하는 투자 기법입니다. 가령, 잘 나가던 특정 종목에서 주가 하락의 신호들이 나타날 때 누군가로부터 해당 종목의 주식을 차입해 매도한 다음 실제 주가가 하락하면 다시 주식을 사서 갚고 차액만큼 수익을 챙기는 것입니다. 딱 봐도 복잡해 보이는데, 이걸 왜 하는 걸까? 통상, 공매도는 특정 종목이 자신의 실제 가치보다 시장에서 더 고평가 받고 있다고 여겨질 때 ‘조만간 주가가 하락할 것’이라는 예상에 기초해 이뤄지는 투자입니다. 실제로 주가가 하락한다면 하락한 만큼 수익을 챙길 수 있지만, 반대로 예상과 달리 주가가 계속 상승한다면 그만큼 손실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항상 이기는 투자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투자자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만약 막대한 자본을 가진 외국‧기관 투자자들이 특정 종목을 향해 대규모로 공매도 주문을 넣는다면 멀쩡한 종목조차도 주가가 하락하면서 이들 투자자들만 이득을 챙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식을 판다는 사람이 급격히 늘어나면, 수요-공급 원칙에 따라 주가는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투자의 승패가 이미 결정됐다는 의미로 공매도를 ‘기울어진 운동장’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실제로, 우리 주식시장에서 공매도에 참여하는 개인투자자는 전체의 1~2%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외국 또는 기관 투자자에 의해서 이뤄집니다. 또한, 개인은 공매도 상환 기간이 90일로 제한돼 있는 데 반해, 기관과 외국인은 상환 기간에 제한이 없고, 담보비율 역시 개인은 120%인데 반해 기관과 외국인은 105%입니다. 이런 차이에서 비롯된 차별적 효과는 시장을 왜곡시켜 누군가의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신을 부추기는 ‘무차입 공매도’ 공매도를 향한 불신을 더 크게 부추기는 건 바로 ‘무차입 공매도’입니다. 공매도를 위해서는 우선 주식을 빌려야 합니다. 이렇게 먼저 빌린 다음 매도 주문을 넣는 방식을 ‘차입 공매도’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양을 빌리더라도 차입 공매도는 불법이 아닙니다. 그러나 빌리지도 않고 매도 주문부터 넣는 ‘무차입 공매도’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무차입 공매도는 존재하지도 않는 주식으로 매도 주문을 넣는 것입니다. 무차입 공매도가 만연할 경우 매도 주문량이 유통 가능 주식 수량을 초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매도량을 부풀린다면, 주가 하락을 더욱 부추길 것입니다. 무차입 공매도는 은행 거래와 달리 주식 거래는 ‘T+2 결제제도’를 따른다는 점을 악용합니다. 주식 거래는 매도 주문을 넣더라도 결제는 거래일(Transaction Date)로부터 2거래일 뒤에 이뤄지기 때문에 매도 주문과 결제 사이에 잽싸게 공매도 주문량만큼 사후 차입하는 것입니다. 실제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20년도 더 된 이야기입니다만, 당시만 해도 ‘명동 백할머니’로 알려진 투자의 대모 백희엽 일가가 세운 ‘우풍상호신용금고(이하 우풍금고)’가 있었습니다. 잘 나가던 우풍금고는 2000년 3월 29일 대우증권을 통해 코스닥 종목인 성도이엔지의 주식 15만 주를 공매도했습니다. 주식을 갖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증권사에 먼저 매도 주문을 넣고, 결제일 이전에 시장에서 15만 주를 구해 대우증권에 상환할 계획이었습니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15만 주는 성도이엔지의 유통 가능 주식 수의 절반에 달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양이지만 한꺼번에 공매도 주문을 넣고 주가가 떨어지면 차익만큼 수익을 챙기려 했던 건데 변수가 발생했습니다. 공매도 주문량만큼 주식을 시장에서 구하지 못한 것입니다. 실제로, 결제일이 다가왔음에도 우풍금고는 13만 주나 결제하지 못했습니다. (‘우풍금고 공매도 미결제 사태’) 수익은 고사하고 미결제 사태가 알려지면서 고객들은 너도나도 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했고 이내 영업정지 처분이 내려졌습니다. 우풍금고 영업정지 당일, 내부 모습 같은 해 11월, 금융감독원은 이 사태를 대규모 무차입 공매도로 시세 차익을 노리다가 실패한 주가조작 사건으로 결론 내렸고, 무차입 공매도 금지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지난 2020년에는 무차입 공매도 등 불법 공매도에 대해선 1년 이상의 징역형(최대 30년)에 처하도록 법이 개정됐습니다. 지난해부터는 불법 공매도 조사 전담 조직까지 설치해 불법 공매도 적발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개인 투자자들은 지금까지도 외국인과 기관 투자자의 의한 무차입 공매도가 조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고, 이로 인해 공매도로 인한 주가 하락의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나면서 개인 투자자의 손실로 이어지고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물론, 무차입 공매도가 만연한 것처럼 호도하는 음모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심은 현실로 드러났습니다. 글로벌 투자은행(IB)에서 장기간 관행적으로 이뤄진 무차입 공매도 행태가 적발된 것입니다. 의심이 현실로 전에도 불법 공매도를 적발한 사례는 있었지만, 이번 사례는 특별했습니다. 그동안은 과실이나 착오라고 소명하며 빠져나갔다면, 이번엔 투자은행(BNP파리바, HSBC)의 의도적인 수백억 규모 무차입 공매도 관행을 발뺌하기 어려울 정도로 ‘빼박’ 적발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식시장은 코로나 사태가 터지자 공매도를 전격 금지했고, 재작년 5월부터 부분적으로 재개했습니다. (2021년 5월 3일, 코스피200지수, 코스닥150지수 종목에 한해 공매도 재개) BNP파리바는 공매도 재개 이후인 지난 2021년 9월부터 지난해 5월까지 카카오 등 101개 종목에 대해 400억 원 규모로 무차입 공매도 주문을 한 걸로 조사됐습니다. 부서 간 내부거래 과정에서 소유 주식을 중복 계산해 부풀린 다음에 과다 표시된 잔고를 기초로 공매도를 한 것입니다. 매매 거래 다음날마다 부풀린 주문량만큼 결제 수량이 부족하다는 걸 인지했음에도 개선하지 않고 사후 차입하며 무차입 공매도를 방치했다고 금감원은 판단했습니다. HSBC도 지난 2021년 8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호텔 신라 등 9개 종목에 대해 160억 원 상당의 무차입 공매도 주문을 해 온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이들도 공매도 주문을 먼저 넣어놓고 결제일 이전에 사후 차입해 온 걸로 금감원은 보고 있습니다. 시세 조종 행위에 이용될 수 있다는 우려에 법으로 금지되면서 무차입 공매도는 그렇게 시장에서 사라진 걸로만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이번 조사로 여전히 관행적으로 이뤄지고 있음이 드러났고 규제 당국도 이제는 전향적으로 입장을 바꿨습니다. 이제 전선은 공매도 제도 자체로 확대됐습니다. 국회에선 여야를 가리지 않고 공매도를 한시적으로 금지하고 대대적 개선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급기야, 금감원은 이달부터 <공매도 특별조사단>을 만들어 글로벌 투자은행들의 공매도 거래를 전수 조사해 무차입 공매도는 물론, 시세 조종 등 제도 악용 여부까지 면밀히 살펴보겠다고 밝혔습니다. 의심이 현실로 드러나자 공매도와의 전면전 시작된 것입니다. "김포 다음 공매도로"... 송언석 국민의힘 감사가 국회에서 국민의힘 장동혁 원내대변인에 보낸 메시지 공매도는 주가 급락의 원흉인가? 전쟁을 앞두고 피아식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매도 자체를 적으로 삼을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개인 투자자들의 오랜 의심처럼 공매도를 주도하는 ‘카르텔’이 있고, 이들의 결정에 따라 특정 종목의 주가가 폭락하며 시장이 왜곡된다고 전제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학계와 업계에서는 바로 잡아야 할 문제는 불법 공매도라는 입장입니다. 오히려 근거 없는 의심 때문에 공매도 자체를 무리하게 손질할 경우 빈대(불법 공매도)를 잡으려다 초가삼간(시장)을 다 태울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공매도 나름의 순기능 때문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순기능은 ‘가격발견기능’입니다. 공매도가 금지된 주식 시장을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 시장에 어느 날 매일매일 주가가 오르는 종목이 나타났습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다가도 상승세가 지속된다면 너도나도 추격 매수에 나설 것입니다. 주가가 계속해서 오른다는 것 자체가 ‘해당 기업이 오를만한 가치가 있다’는 긍정적 정보로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매도가 가능했다면 누군가는 해당 주식이 고평가됐다고 판단해 공매도 주문을 넣었을 수도 있습니다. 덕분에 다른 시장 참여자들도 해당 주식이 고평가 된 건 아닌지 고민하며 추격 매수를 멈추고 추종매도에 나설 수도 있습니다. 즉, 공매도는 부정적인 기업정보가 주가에 반영되는 주요 채널 중 하나로서 시장에서 적정 수준 가격으로 조정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자본시장연구원에서 지난 8월 발표한 <공매도 규제효과 분석(김준석, 황세운)> 연구보고서 역시 이런 순기능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에선 지난 2020년 3월 코로나 위기로 공매도 전면 금지 시기(2020.03~2021.05)와 공매도 허용 시기(2020.03 이전, 2021.05 이후)를 서로 비교했습니다. 그 결과 공매도를 금지했을 때 극단적 수익률 발생빈도가 더 많이 나타났고, 이로 인해 가격 변동성도 더 크게 나타났습니다. 공매도 금지로 부정적 정보 반영이 가로막히면 가격 조정이 제대로 이뤄지기 어렵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악재라도 발생한다면 고평가가 이뤄진 만큼 주가는 급격히 떨어집니다. 이 연구에서도 공매도를 금지했을 때 가격 상승은 물론 하락도 더 급격하게 나타났습니다. 개인 투자자들의 의심과 달리 공매도는 가격발견기능 덕에 주가 급락의 방파제 역할까지 한 셈입니다. 최근 주가조작 세력의 먹잇감으로 전락한 영풍제지는 공매도 순기능의 또 다른 예입니다. 주가조작 세력에 의해 지난해 11월부터 별다른 호재 없이도 주가가 15배나 뛰었는데, 영풍제지가 공매도 금지 종목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공매도 주문이 가능했다면 인위적인 가격 부양 시도 때마다 공매도 주문이 이뤄지며 시장에서는 가격 조정이 이뤄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풍제지는 거래 재개 이후 6거래일 연속 하한가를 기록했습니다. 1년 동안 끌어올린 상승분을 불과 일주일 만에 다 까먹은 것입니다. 지난 6월 ‘바른 투자연구소 주가조작 사건’에 연루된 5개 종목도 모두 공매도가 불가능했는데, 양상은 비슷했습니다. 지난 4월 ‘라덕연 주가조작 사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연루된 8개 종목 가운데 5개는 공매도를 할 수 없었고, 주가 조작이란 악재가 터진 뒤로 주가는 곤두박질치며 뒤늦은 정산이 이뤄졌습니다. 공매도는 주가 급락의 방파제인가? 하지만, 이번 기회에 공매도 제도의 한계점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공매도 제도의 필요성과 순기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고평가 된 주식을 적정 가격으로 조정하는 공매도의 순기능은 이상적인 시장 상황과 거래 조건에서 구현되는 것이지 우리 현실과는 맞지 않는 만큼 개선이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 지난 2021년 한양대학교 임은아 박사와 전상경 교수는 <공매도와 신용거래의 투자성과>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는 2016년 6월부터 3년 동안 우리 시장을 횡보기와 상승기, 하락기로 나눈 다음 각 시기의 일별, 종목별 데이터를 기반으로 공매도와 신용 거래의 수익률을 비교했습니다. 공매도는 주로 외국 및 기관 투자자들이 주가가 고평가 된 주식을 빌려 매도하는 투자 방식이라면, 신용 매수는 주로 개인투자자들이 증권사로부터 돈을 빌려 주식을 매수하는 투자 방식입니다. 따라서 공매도와 신용 거래 비교는 사실상 외국 및 기관투자자와 개인 투자자의 수익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공매도는 신용 거래에 비해 거래량은 6배나 적고, 거래 금액은 절반 수준에 불과하지만 수익률은 극명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공매도 때문에 주가가 하락했고, 이로 인해 외국 및 기관 투자자들이 더 높은 수익률을 올리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논문의 저자인 전상경 교수는 공매도만으로 주가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란 입장을 나타냈습니다. 거래량이나 거래 금액 측면에서 공매도가 주가의 영향을 미칠 정도로 크지 않았기 때문에, 공매도 자체만으로 주가가 떨어졌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다만, 전상경 교수는 공매도 자체가 부정적인 정보로 작용해 다른 투자자들이 매수를 꺼리거나 추종 매도에 나서면서 주가는 적정 가격 밑으로 더 떨어질 수 있다고 부연했습니다. 실제로, 전상경 교수는 <Do Short Selling and Margin Trading Affect Price Randomness?>이라는 또 다른 논문을 통해 공매도의 순기능은 종목의 다양성과 깊이, 유동성 등이 충분치 않은 우리 주식시장에선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즉, 공매도가 고평가 된 주가를 그때그때 조정하며 가격 효율성을 높이는 게 아니라, 적어도 우리 주식시장에서는 공매도 자체가 악재처럼 작용하며 주가 하락을 더 부추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식시장에서는 최근에도 전상경 교수의 주장과 비슷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지난 8월 17일, 장이 마감된 뒤 셀트리온과 셀트리온헬스케어의 합병 결정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간 저평가를 초래했던 매출 부풀리기나 일감 몰아주기 등 논란이 해결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셀트리온 합병 소식은 시장에서는 호재로 인식됐고, 다음날 셀트리온의 주가는 전날보다 5% 가까이 급등했습니다. 그런데, 장 마감 직후 공매도가 쏟아졌습니다. 그 결과 무려 총 87만 2천여 건의 공매도 주문이 하루 만에 체결됐습니다. 그전까지 가장 많이 체결된 일일 공매도 주문량은 16만 8천여 건이었습니다. 무려 5배 가까운 공매도 주문이 몰린 것입니다. 직후 3거래일 걸쳐 셀트리온의 주가는 떨어졌습니다. 결국, 합병 소식 발표 전보다 주가는 더 낮아졌습니다. 합병이란 호재를 공매도 폭탄이란 악재가 덮어버리면서 주가는 합병 발표 전보다 더 떨어졌습니다. 전상경 교수는 이처럼 공매도의 가격 조정 기능(공매도→추종 매도→주가 조정)이 적어도 우리 주식시장에서는 순기능이 아닌 역기능으로 작용하며 악용될 수도 있다고 경고합니다. 전상경 │ 한양대학교 파이낸스경영학과 교수 “공매도는 시장가격을 내재가치에 수렴시키는 순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순기능이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시장의 깊이가 깊고 시세추종 경향이 상대적으로 약해야 합니다. 이런 환경이 제대로 조성돼 있지 않다면 공매도는 시장가격을 내재가치에 수렴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괴리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자본시장의 선진화를 위해 공매도 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한계점을 계속해서 방치한다면 주가 하락을 노리는 시세 조종 행위에 악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공매도를 둘러싼 불법은 물론, 탈법 행위에 대해서도 감독을 강화해야 그 순기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습니다.” 피아식별이 성패를 좌우한다 공매도와의 전쟁을 위해 호기롭게 칼은 뽑았지만, 어디로 휘둘러야 할지 감을 잡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공매도가 주가 급락의 원흉인지, 방파제인지에 대해 서로 다른 연구 결과들이 공존하며 제도 개선 방향성을 가늠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매도 자체에 문제가 없고 불법 공매도만 잡으면 된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가는 ‘당국이 여전히 외국 및 기관 투자자의 이익을 옹호한다.’는 여론의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반대로 공매도를 한시적으로 중지시키고 전면적인 제도 개선에 나서기에는 순기능마저 제한돼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커질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한 정부 관계자는 “공매도에 대한 개선 방향을 검토하고 있지만, 무엇을 어떻게 바꿀지에 대한 고민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면서 “무리하게 제도 개선에 나설 경우 신뢰도 하락과 ‘코리아 디스카운트’에 대한 우려도 있다.”고 지금의 상황을 전했습니다. 결국 이번 전쟁의 성패는 정확한 피아식별에 달려있습니다. 우리 주식시장에서 공매도가 갖는 역할과 기능과 함께 한계점까지 명확하게 파악하고 저울질하며 개선 대상과 방향성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노력 대신 정치권의 요구에만 귀기울이고 쫓아가기에 급급하다면 이 전쟁은 시작도 하기 전부터 실패한 전쟁이 될 것입니다. 디자인 : 옥지수
✏️ 뉴스쉽 네 줄 요약 · 지난 수요일, 10년 만기 미 국채 금리가 16년 만에 최고치인 4.8%까지 치솟자 우리 국채 금리와 환율도 덩달아 상승하며 우리 금융시장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 지난 9월 FOMC에서 고금리 장기화(Higher for Longer) 기조를 선언한 것은 전세계적 국채 금리 급등의 주요 배경입니다. · 각종 인플레이션 관련 지표가 개선되고 있음에도 당시 미 FOMC가 더 오랜 기간 고금리를 유지하겠다고 발표한 건 미국의 중립금리가 전망치보다 더 높아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미국의 중립금리 상승은 ‘제로금리시대’의 종언을 뜻하며, 민간 부채 디레버리징에 성공하지 못할 경우 임계치를 넘어선 부채 폭탄이 돼 우리 경제를 집어삼킬 수도 있습니다. 긴 연휴를 뒤로하고 맞이한 10월의 첫 거래일(지난 4일 수요일), 성적표는 처참했습니다. 우리나라의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연 4.35%까지 상승해 지난해 11월 이후 가장 높았습니다. 달러 대비 원화 환율도 급등해 1,363.5원에 마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난해 11월 이후 최고치였습니다. 고금리‧고환율에 이어 주식시장도 충격을 피하지 못해 6개월 만에 코스피는 2,400선으로 하락한 채 마감했습니다. 겹겹이 들이닥친 충격의 진원지는 바로 미국입니다. 지난 수요일 기준으로 10년 만기 미국 국채 금리는 4.8%를 넘어서며 우리 금융시장에까지 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 미 국채 금리는 치솟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미국 기준금리랑 국채 금리는 서로 다른 걸까요? 그리고 저 멀리 미국의 국채 금리가 오른 것이 우리 경제랑 무슨 관련이 있어서 충격이 전이된 것일까요? 무엇보다, 앞으로 우리 경제는 정말 괜찮은 것일까요? 검은 수요일을 겪으면서 누구나 느꼈을 궁금증들을 이번 뉴스쉽에서 함께 풀어가고자 합니다. FOMC에서 무슨 일이? 미 국채 금리는 지난 7월부터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은행은 지난달 낸 〈통화신용정책보고서〉에서 그 배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분석을 내놨습니다.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막겠다며 미 중앙은행(연준)은 지난해부터 기준금리를 끌어올리며 긴축 조치를 이어왔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물가가 잘 안 잡히면서 이러한 통화긴축 기조가 길어질 것이란 전망이 시장에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지금과 같은 고금리가 오랜 시간 유지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우려는 미 재무부가 발행한 장기 채권(10년물 등)의 수요를 떨어뜨렸습니다. 여기에 더해 미 재무부가 3분기 국채 발행 규모를 7천억 달러에서 1조 달러로 확대(공급 증가)하면서 채권 가격은 하락하고, 대신 수익률(금리)은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 중앙은행(연방준비제도)의 9월 FOMC 성명 발표(9월 20일) 직후 상승세에 휘발유라도 부은 듯 미 국채 금리는 더 높게 치솟았습니다. 이런 급등세가 우리 금융시장에까지 충격을 주면서 ‘검은 수요일’을 초래한 것인데, 도대체 FOMC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Higher for Longer! : 긴축 장기화 미국의 기준 금리 수준을 논의해 결정하는 곳이 바로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ederal Open Market Committee, FOMC)입니다. 지금 우리가 고금리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미 FOMC에서 자기들 인플레이션을 잡아보겠다고 지난해부터 1년여 만에 기준 금리를 5.25%~5.5%로 인상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지난 9월 FOMC에서는 기준금리를 추가로 인상하지 않고 동결했습니다. 그런데 FOMC에선 금리 인상 여부만 논의하는 게 아닙니다. FOMC는 1년에 딱 8번 열립니다. 지난 9월에 열린 FOMC는 6번째였습니다. 8번 중에서도 4번(3월, 6월, 9월, 12월)은 FOMC 참석자들의 경제전망(Summary of Economic Projections, SEP)을 공개합니다. 참석자들이 각자가 생각하는 내년, 내후년, 장기 전망 등을 점도표 형태로 표시하면 이를 회의가 끝나고 대중에 알리는 것입니다. 총 19명의 참석자가 각자 전망을 써 내려가지만, 시장에서는 이 전망치의 중간값을 통해 FOMC가 앞으로 금리를 얼마나 더 올릴지, 언제쯤 금리 인상을 멈출지, 언제부터 금리를 내릴지를 가늠합니다. 지난 6월에 나온 전망치의 중간값에 따르면, 미국의 기준금리는 올해 5.6% 수준에서 머물다가 내년에는 4% 중반까지 떨어지고 내후년에는 3% 수준까지 내려갈 것으로 예측됐습니다. 이를 토대로 지금과 같은 살인적인 고금리는 길어봤자 내년까지고, 향후 1~2년 안에 고금리 기조가 전환될 것으로 시장은 내다봤습니다. 하지만, 지난달 나온 전망치 중간값에는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내년과 내후년의 적정 기준금리 수준이 각각 0.5%씩 더 오른 것입니다. 이 전망대로라면 미국은 내년도 지금과 비슷한 5%대 기준 금리가 계속되고, 내후년으로 가더라도 상당 기간은 4%대 금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9월 FOMC에서 기준금리는 동결했지만, 고금리(긴축 조치)를 예상보다 더 오래 유지할 것(Higher for Longer, 고금리 장기화)을 사실상 선언하면서 시장에 충격을 준 것입니다. ‘상승’의 도미노 9월 FOMC의 충격은 생각보다 컸습니다. 고금리가 당분간 지속되더라도 적어도 내년 중반부터는 기준금리 인하가 시작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지만, 9월 FOMC를 거치며 인하 시점도 내년 후반으로 밀리고, 인하 폭도 크지 않을 것이란 불안한 전망이 우세해졌습니다. 이는 이미 높은 수준이던 미 국채(10년물, 20년물, 30년물 등 장기 채권 중심으로)의 금리를 더 밀어 올렸고, 가장 안전한 투자 대상인 미 국채의 금리가 오르자 시장은 요동쳤습니다. 미 국채의 금리(=수익률)가 오르면 당연히 달러화 자산으로 돈이 몰립니다. 원화 가치는 떨어지고 환율은 위협적인 수준으로 오릅니다. 또, 미 국채 금리가 높아지면 우리나라와 같은 주변국 국채 금리도 덩달아 오릅니다. ‘미 국채보다 안전성이나 수익률이 떨어지는 다른 나라 국채에 왜 투자해?’라는 의문이 시장에 퍼지면 순식간에 투자자로부터 외면받기 때문입니다. 우리 국채 금리가 오르면 도미노처럼 기업들이 발행하는 회사채나 은행들이 발행하는 은행채 등의 금리도 연쇄적으로 오릅니다. 이는 기업과 은행의 자금조달 비용 상승으로 이어지고, 결과적으로 기업과 가계 등 경제 주체가 그 부담을 나눕니다. 그렇기에 미 국채 금리는 바다 건너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이슈인 것입니다. “Higher Forever” : 제로금리시대의 종언 미국의 기준금리가 올해는 물론, 내년까지도 5%대 밑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란 지난달 미 FOMC의 전망, 이런 전망이 기폭제가 돼 높게 유지되던 미 국채 금리는 더 높게 치솟았고, 세계 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 놓인 다음 질문은 ‘도대체 언제까지 고금리 기조가 유지될 것인가’입니다. 고금리 장기화(Higher for Longer)는 알겠는데, 그게 얼마나 오랜 기간인지를 따져보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힌트 역시 지난달 있었던 미 FOMC에서 나왔습니다. 기준금리는 각 나라의 중앙은행이 금융기관에 돈을 빌려줄 때 받는 금리 수준을 뜻합니다. 이 금리에 기초해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예금 및 대출 금리가 결정됩니다. 또, 기준금리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국채나 회사채, 은행채 금리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때문에, 시장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고금리가 유지될지를 가늠해 보려면 중앙은행의 기준금리가 언제쯤 정상 떨어질지를 알아야 합니다. 중앙은행의 가장 큰 책무는 물가안정과 완전고용입니다. 때문에, 중앙은행은 물가상승률 2%라는 목표를 실현하면서도 고용을 억누르지 않는 이상적인 금리 수준을 언제나 고민합니다. 이런 금리를 ‘중립금리(Neutral rate)’라고 부릅니다만, 이론적이고 추상적 개념이라 GDP나 물가지수처럼 파악(observation)할 수 없고 각자의 방식으로 추정(estimation)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중립금리는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합니다. 만약, 경제가 침체 위기에 놓여 있다면, 중앙은행은 중립금리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기준금리를 설정해서 경기를 부양하는 데 힘씁니다. 요즘처럼 경기가 과열돼 물가가 너무 오른다면, 중앙은행은 반대로 중립금리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기준금리를 설정하는 긴축을 택합니다. FOMC 참가자들의 ‘적정 기준금리 전망치(Longer Run FOMC SEP for the Fed Funds Rate)’의 중간값이 통상 미국의 중립금리로 여겨집니다. 이에 따라 2020년 이후에는 줄곧 중립금리는 2.5%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는 걸로 추정됩니다. 실제로, 코로나로 인한 팬데믹 위기 상황에서 미국은 중립금리보다 낮게 기준금리를 낮추며 ‘부양 카드’를 꺼냈고, 경기 과열로 인플레이션이 심화되자 지난해부터 중립금리보다 기준금리를 높여 ‘긴축 카드’를 택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9월 FOMC에서 파월은 미국의 중립금리가 FOMC 전망치보다 더 높아졌다고 설명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파월의 발언이 굉장히 이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파월은 그동안 중립금리의 구체적인 수준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경제 전문가들은 미국의 중립금리가 2.5%가 아니라 3~4%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처럼 중립금리가 올랐다는 것은 미국 경제가 정상화돼 긴축이 종료되더라도 기준금리는 과거와 같은 초저금리로 회귀하지 않고 중립금리 수준인 3~4%대에서 머물 것을 의미합니다. 줄곧, 중립금리에 대한 지적을 이어왔던 월스트리트저널(WSJ)도 FOMC 직후 “고금리는 영원히 지속될 것(Higher Interest Rates Not Just for Longer, but Maybe Forever)”이란 암울한 전망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세계경제의 구조적 전환(Structural Shifts in the Global Economy)’ 일시적으로 중립금리가 올랐다가 다시 떨어져서 지금의 예측은 나중 가면 별 의미가 없을 것이란 반론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중립금리는 점점 떨어질 것이란 정반대의 예상도 나올 수 있습니다. 실제로, IMF는 지난 4월 펴낸 〈World Economic Outlook: A Rocky Recovery〉에서 최근의 긴축 조치로 일시적으로 오른 주요 국가들의 자연금리(Natural rate)*는 다시 팬데믹 이전 수준으로 낮게 유지될 것이란 전망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자연금리’와 ‘중립금리’는 학술적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이 글에서는 같은 개념으로 사용. 다만, IMF도 이런 전망에 변수가 있음을 설명했습니다. 가령, 예상치를 웃도는 성장세가 나타난다면 당연히 중립 금리는 더 높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9월 FOMC에서 파월 의장이 중립금리가 높아졌다고 인정한 배경에도 예상을 뛰어넘는 미국 경제의 성장세가 있었습니다. 적자 재정에 기초한 부양책 역시 중립 금리를 위로 끌어올립니다. 대표적인 예가 친환경 에너지 분야입니다. 미국은 지난해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통해 3,690억 달러, 우리 돈 500조 원에 달하는 국가 재정을 에너지 안보 및 기후 변화 분야에 투입하기로 한 상황입니다. 특히, IMF는 이 과정에서 정부 부채가 급증하지만 해당 정부가 발행한 채권이 전과 같은 프리미엄을 상실한다면 70bp(0.7%p)까지 중립금리가 오를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점점 심화하는 미‧중간 패권 경쟁도 중립금리에 영향을 미칩니다. 세계화가 한창일 땐 미국은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에 낮은 금리로 국채를 팔았습니다. 실제로, 중국이 1995년부터 2010년 사이에 1조 1천억 달러 규모의 미 국채를 매입하면서 5년 만기 미 국채 이자율을 2%나 낮춘 걸로 분석됐습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금융 자산이 하루아침에 동결되는 걸 지켜본 중국은 미 국채를 팔아치우기 시작해 보유량을 2/3 수준까지 줄였습니다. IMF에 따르면, 이러한 미‧중간 단절은 중립금리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이로 인해 20bp(0.2%p)나 중립금리가 오를 걸로 추정됩니다. 잭슨홀 미팅에서 연설하는 제롬 파월 미 중앙은행(연준) 의장 / 출처 : 연합 급증하는 정부 부채와 친환경 에너지 전환, 미‧중간 패권경쟁 등은 시장 금리와 생산 비용을 높였고 중립금리까지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이런 거시적인 흐름과 변화들이 미국 경제가 예상치를 웃도는 성장세를 보이면서 고금리 시대가 더 길어진 구조적 배경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FOMC를 한 달 앞둔 지난 8월 파월 의장은 잭슨홀 미팅*에서 인플레이션은 점차 진정되고 있지만 강력한 미국 경제의 성장세가 복병이 될 수 있음을 암시했는데, 당시 주제 역시 ‘세계경제의 구조적 전환(Structural Shifts in the Global Economy)’이었습니다. *잭슨홀 미팅 : 매년 8월 미국 와이오밍주 휴양지인 잭슨홀에서 개최되는 경제정책 심포지엄. 딜레마에 빠진 한국 경제 환영받지 못하는 미국 경제 성장 이면에는 중립 금리의 상승이 있었습니다. 파월 의장도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밝혔지만, 중요한 건 이런 상승세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인 변화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질문은 ‘우리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입니다. 미국의 FOMC처럼 우리나라도 한국은행 총재가 의장으로 있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통화정책방향 결정회의’를 열고 기준 금리를 결정합니다. 우리나라의 금융 상황뿐만 아니라 미국의 중립금리 변화까지도 당연히 주시하며 논의 및 결정 과정에 반영합니다. 실제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8월 회의에서 미국의 중립금리가 오른다면, 우리는 딜레마에 빠질 것이라며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미국보다 우리의 기준 금리가 더 낮음에도 우리 물가가 더 일찍 진정되고 금융시장도 더 빠르게 안정을 찾는다면, 미국보다 먼저 금리를 인하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중립금리 상승으로 고금리 기조를 계속해서 이어갈 경우, 금리를 섣불리 내리기 어려워집니다. 한‧미 간 금리 격차가 더 커져 그 자체로 시장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미국의 중립금리 상승은 우리에게는 커다란 딜레마가 되는 것입니다. 9월 FOMC를 거치면서 이런 딜레마는 이제 현실이 됐습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금리를 내려야 하는 상황이 코앞에 닥쳤음에도 미국이 고금리(긴축) 기조를 유지함에 따라 내리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이는 높은 이자에 빚에 허덕이고 있는 가계와 기업의 고통과 시름만 더 길어짐을 의미합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경제규모에 비해 민간부채가 많은 편입니다. 올해 2분기 기준으로 명목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01.7%, 기업부채 비율은 124.1%입니다. 가계부채 비율이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임계치는 통상 명목 GDP 대비 80% 수준이며, 기업부채의 임계치는 통상 명목 GDP 대비 90% 수준입니다. 이미 가계와 기업 모두 임계치를 넘겼을 정도로 금융불균형이 심각한 상황에서 필요 이상으로 높은 금리를 오랫동안 유지한다면 실물 경제를 위축시킬 뿐 아니라 신용 위기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이런 딜레마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국의 고금리 기조와 우리의 금리 인하 필요성이 상충하기 전에 부채를 조정하는 것(디레버리징, De-Leveraging)입니다. 이런 디레비러징 기조는 현 정부의 방향성과도 일치합니다. 이복현 금감원장도 최근 “명목성장률 대비 가계부채 증가율이 떨어져야 한다는 게 이번 정부의 대원칙"이라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이마저도 녹록치 않다는 점입니다. 진짜 디레버리징이 필요하다 미 국채 금리의 폭등과 우리 금융시장의 '검은 수요일'. 그 이면에는 미국 경제의 중립금리 상승이라는 구조적 배경이 있었고, 이로 인해 우리 경제는 심각한 딜레마에 직면했습니다. 우선, 고금리를 오랜 기간 유지하려는 미국을 뒤로하고 금리를 먼저 내리는 것이 어려워졌습니다. 미국과의 금리 격차가 벌어지면서 환율 급등 등의 문제가 불거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처럼 금리를 올리거나, 아니면 그냥 현상을 유지하는 결정 역시 또 다른 위기로 이어질 수 있어 옴짝달싹도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유일한 탈출구는 침체를 초래하지 않으면서 디레버리징에 성공하는 것입니다. 하준경 한양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지금처럼 시장이 저금리 시대가 돌아올 것이란 막연한 기대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고, 이런 시장에 당국이 경종을 울리지 못한다면 디레버리징은 시작도 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가계와 기업, 국가의 부채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가계 분야입니다만, 디레버리징이 필요한 순간 정부는 부동산 경착륙과 그로 인한 충격을 예방하겠다며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리레버리징(Re-Leveraging) 카드를 꺼냈습니다. 실제로, DSR(총부재원리금상환비율)과 같은 엄격한 규제도 적용받지 않는 ‘특례보금자리론’으로 40조 원이나 시장에 공급됐는데, 이는 가계소득 보다 가계부채가 더 빠르게 증가하는 배경이 됐습니다. 지금이라도 ‘소득 수준에 맞게 대출한다’는 기본 원칙에 충실한 ‘진짜 디레버리징’에 나서야 가계 부채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디자인 : 박수민
✏️ 뉴스쉽 네 줄 요약 · 부동산 시장을 위협하던 ‘경착륙 위기론’은 가고, ‘집값 바닥론’이 힘을 받고 있습니다. · 이를 반영하듯 곳곳에서 신(新)고가 거래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만, 이 가운데에는 가격 상승기마다 나타나 거품을 부추기는 시세 조종용 허위 거래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문제는 정부의 각종 대책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세조종용 거래를 구분하기가 여전히 어렵다는 점입니다. · 설령, 그 수가 적다고 해도 시세 조종을 목적으로 한 허위 거래는 거품을 초래하며 전세사기나 역전세와 같은 고질적인 문제점을 또다시 초래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하락하던 아파트값이 최근 반등하고 있습니다. 서울, 그것도 강남권을 중심으로 나타나던 가격 회복세는 이제 수도권을 넘어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몇 년 전 우리가 경험했던 것처럼 자고 일어나면 또 집값이 오르던 상승세가 다시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입니다만, 최악의 국면을 지났다는 ‘집값 바닥론’이 시장 전반에 퍼져 다시금 소비 심리를 자극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시장에 온기가 돌 때 불쏘시개처럼 시장을 자극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건 바로, ‘신(新)고가 거래’입니다. 실제로, 부동산 호황기에 정점을 찍었던 거래 가격보다 더 비싼 값을 치르고 매매계약을 맺었다는 신고가 거래 소식들이 최근 뉴스를 통해 자주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근 등장하는 신고가 거래는 시장의 미래를 남들보다 빠르게 읽고 예측해 지불한 합리적 가격이라고 봐야 할까요? 아니면 거품을 부추기며 내 집 마련의 꿈을 위협하는 시장의 망령쯤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는 신고가 이면에 있는 시장의 현실을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고가 더 비싼 시장 가까운 친구가 중고차를 구매하려는데, 신차보다 더 비싼 가격에 산다고 한다면 우리 모두는 뜯어말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희소성을 갖고 있는 몇몇 모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경우 중고차가 신차보다 더 비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차 가격이 중고차보다 당연히 더 비쌉니다. 그 이유는 자동차를 타면 탈수록 각종 부품이 마모되고, 이에 따른 기능 저하나 고장 우려가 커지기 때문입니다. 이를 경제 용어로 표현하면 ‘감가상각’입니다. 즉, 사용 기간에 따라 발생하는 가치 소모량을 측정(감가상각)해서 신차 값에서 빼야 중고차 가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지극히 당연한 경제 논리를 무시하는 게 바로, 부동산 시장입니다. 가령, 최근 입주를 시작한 서울 서초구 반포동의 래미안원베일리는 분양 당시(2021년) 가격이 3.3㎡당 평균 5,600만 원을 넘어섰습니다. 역대 최고 수준으로 전용면적 59㎡ 아파트의 분양가는 14억 원대였습니다. 하지만, 바로 옆 아파트 단지에선 동일 면적 아파트가 26억 원이 넘는 가격에 거래됐습니다. 입주한 지 10년도 더 된 아파트였지만 곧 공급될 신축 아파트보다 10억 넘게 비쌌던 것입니다. 부동산 시장의 망령, ‘신고가 거래’ 기업이 내놓는 신제품은 새로운 기능과 디자인을 시장에 선보이면서 가격 결정기능도 갖습니다. 그러나 부동산 시장에서는 신제품이 가격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래미안원베일리의 분양 가격을 기준으로 인근 아파트를 사겠다는 사람도, 팔겠다는 사람도 없었으니 말입니다. 반면, 시장에서는 분양 당첨만 되면 인근 단지 거래가격과 비슷한 수준에 되팔아 10억 넘는 시세 차익을 볼 수 있다며 ‘로또 청약’이라 불렀습니다. 이런 로또 청약이 가능한 이유는 부동산 시장에서는 중고 제품들이 가격 결정 기능을 갖기 때문입니다. 시장 참여자들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건 신축 아파트[신제품]의 분양가가 아니라 비슷한 입지 조건과 면적을 가진 기존 아파트[중고]의 실거래 가격인 것입니다. 문제는 부동산 시장의 이런 특성을 역이용해 시장 가격을 교란시키는 게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지난 2021년 12월, 부산에서 전용면적 54㎡짜리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던 법인이 소속 직원과 3억 4천만 원에 거래했다며 지자체에 신고했습니다. 3개월 전에 있었던 직전 거래보다 2천만 원이나 비싼 가격에 거래가 되며 당시 신고가를 기록했습니다. 물론, 이 거래는 가격 띄우기 목적의 허위 거래로 국토교통부 조사 결과 드러났습니다. 통상 집값의 일부를 먼저 계약금으로 내고, 나중에 나머지 대금(잔금)까지 치릅니다. 그렇게 돈을 다 주고 나면 법적으로 소유권을 이전받기 위한 등기 절차를 마무리합니다. 이렇게 해야 완전히 소유권이 바뀝니다. 하지만, 이들은 계약서만 쓰고 거래 신고를 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돈을 주고받는 일 없이 10개월이 지나 돌연 거래 해제 신고를 했습니다. 거래 해제 신고가 이뤄지면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조회 시스템에 반영되고 시장 참여자들은 그제야 이런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바꿔 말하면, 해제 전까지 시장 참여자들은 이 거래가 진짜 실거래라고 믿고 참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3억 4천만 원에 이뤄진 신고가 거래 나온 이후 집을 팔려고 했던 사람도, 집을 사려했던 사람도 3억 4천만 원을 기준점으로 삼았습니다. 그 결과 몇 개월 뒤 동일한 가격(3억 4천만 원)에 다른 매물이 팔려나갔습니다. 신고가 거래 금액만큼 시장 시세가 오른 것입니다. 거래 해제와 함께 신고가 거래는 유령처럼 사라졌지만, 시장의 가격 체계는 왜곡됐습니다. 대책 : ‘찐 거래’를 알려줄게 모든 신고가 거래가 시장의 망령은 아닙니다. 그중에는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거쳐 신고가를 지불한 ‘찐 거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장참여자 입장에서는 망령인지 실재인지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국은 올해 1월 1일 이후 이뤄진 실거래 데이터를 제공할 때, 소유권 이전 등기까지 완료됐는지에 대한 정보를 추가로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등기를 마쳤다는 의미는 단순히 거래 신고만 한 것이 아니라 계약금과 잔금을 모두 치르고 해당 아파트에 대한 소유권 이전 절차를 모두 마쳤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등기 완료 여부만 확인하면 이제 시장에서 망령에 속거나 망령을 쫓을 필요가 없다는 게 당국의 설명입니다. 미등기 거래 전수분석 : 망령은 여전하다 국토교통부가 제공하는 실거래가 조회 시스템에서 등기 정보가 함께 공개되기 시작한 건 지난 7월 25일부터입니다. SBS 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은 등기 정보 공개 직후 국토교통부로부터 올해 1월부터 7월 말까지의 전국 아파트 실거래 자료를 제공받아 분석했습니다. 분석의 첫 목표는 미등기 거래의 규모입니다. 물론, 7월 초에 아파트 매매 계약을 했다면 분석 시점인 7월 말에는 소유권 이전 등기가 이뤄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계약일로부터 소유권 이전 등기까지 통상 4개월 정도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약일로부터 4개월 이상 지났지만, 소유권 이전 등기가 이뤄지지 않은 거래들을 추려봤습니다. 이를 위해서 분석 대상을 지난 1월부터 4월 사이에 이뤄진 아파트 매매 거래에 한정한 다음 이 거래들 가운데 거래 신고만 하고 계약일로부터 4개월이 지나도록 소유권 이전 등기가 이뤄지지 않은 미등기 거래를 추려봤습니다. 분석 결과, 전체 거래 12만 4,940건 가운데 미등기 거래는 20,594건에 달했습니다. 실거래가와 함께 등기 여부도 공개하면서 국토교통부는 ‘집값 띄우기’를 막겠다고 각오를 다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미등기 거래는 상당수가 시장에 남아 있습니다. 특히, 이들 미등기 거래의 평균 가격은 등기를 정상적으로 마친 일반 거래들보다 유의미하게 높게 나타났습니다. 미등기 거래가 시장에 여전히 많은 데다 정상 거래(등기 완료 거래)들보다 평균적으로 높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건, ‘등기 정보 공개’라는 정부 대책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부동산 시장의 가격 체계가 위협받고 있음을 뜻합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시장을 흐린다 이번엔 거래 신고만 이뤄지고 4개월 이상 소유권 이전 등기가 이뤄지지 않은 미등기 거래 가운데 시세 조종 의심 거래처럼 보이는 것들을 추가로 추려봤습니다. 판단 기준은 간단합니다. 동일 아파트, 동일 면적의 일반 거래(등기 완료 거래)보다 1억 원 넘게 비싸게 거래된 건들만 골라냈습니다. 그 결과, 지난 1월부터 4월까지 전국에서 총 189건의 시세 조종 의심 거래가 발견됐습니다. 수도권에서만 136건의 시세 조종 의심거래가 지난 4개월 동안 집중됐는데, 이들 거래는 소유권 이전 등기까지 마친 일반 거래보다 평균 2억 원이나 높게 가격이 형성됐습니다. 비수도권에선 53건의 시세 조종 의심거래가 나타났는데, 이들도 일반 거래에 비해 1억 5천만 원 높게 가격이 형성됐습니다. 물론 지금까지의 내용을 보고 크게 두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① 신고가 거래가 아니라도 시장 가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나?, ② 전체 거래량의 1%도 되지 않는 소수 거래가 시장 가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나? 신고가 거래가 아니더라도 기존 거래가격보다 높다라면 충분히 시세에 영향을 미칩니다. 시세 조종 거래의 본질은 허위 거래 기록을 통해 직전 거래들보다 높은 가격에 거래가 이뤄진 것처럼 믿도록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같은 단지의 아파트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입지를 공유하고 있다면 서로의 시세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각 지역의 ‘대장 아파트’ 실거래 기록을 통해 인근 단지 시세를 헤아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강물을 흐리듯, 소수의 시세 조종 거래가 시장 가격을 왜곡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절대 수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가격 차이 그리고 시장 변화에 의미를 둡니다. 딱 한 건이 거래됐다고 해도 시장이 변화할 것이라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거래된 한 건의 가격이 직전 거래보다 올랐다면 앞으로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신호로 받아들입니다. 게다가 한국 아파트는 매우 유사하게 표준화돼 있어서 한 건의 거래로 구 전체가 움직일 수 있습니다. 시세 조종 의심 거래량이 적다고 해서 영향이 크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 이광수 전 미래에셋 애널리스트 ‘집값 바닥론’, 허상일까? 그렇다면, 최근 부동산 시장이 이제 바닥을 찍고 회복세에 접어들었다는 ‘집값 바닥론’은 시세 조종 의심 거래가 만들어낸 허상일까요? 전문가들은 ‘시세 조종’ 거래로도 시장의 흐름을 바꿀 수는 없다고 단언합니다. 하락하는 집값을 오르는 것처럼 만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더디게 회복하고 있는 시장을 급격히 반등하는 것처럼은 만들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특히, 시장이 정말 반등하는 것인지를 모두가 반신반의하며 지켜보고 있을 때 직전 거래보다 더 비싼 ‘가격 띄우기용’ 계약이 등장한다면, 시장에서는 실제 회복속도보다 더 빠르게 시장이 반등하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시장이 상승장에 접어들 때 시세 조종 거래들은 모습을 드러내며 진폭을 더 키웁니다. 실제로, 국토교통부는 지난 2020년부터 올해까지 약 3년 동안 이뤄진 아파트 거래 가운데 신고가 거래 신고를 하고 나중에 시간이 지나 해제한 거래나 특정인이 반복해서 신고가 거래 후 해제한 거래 등 1,086건을 대상으로 직접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모두 32건이 시세 조종 의심 거래로 적발됐는데, 대부분은 아파트 가격 급상승기였던 지난 2021년 말부터 2022년 말 사이에 집중돼 있었습니다. 급매물이 나와도 팔리지 않는 하락장에서는 시세 조종 목적의 허위 거래는 나타나지도 않고, 설령 나타난다고 해도 큰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하지만, 오랜 하락장을 지나 시장이 상승장에 들어설 때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시장 회복의 시그널로 받아들여져 여기저기서 추격 매수에 나선다면 시장은 본래의 상승 동력보다 더 크게 힘을 받아 과열될 수밖에 없고, 이는 곧 부동산 시장의 거품으로 이어집니다. 가격 상승기에 시세 조종 거래로 상승폭을 키운다면, 향후에 인위적으로 올린 만큼 하락폭이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지난 2021년에 급격하게 올랐던 부동산 시장 가격이 1년 만에 거품이 꺼지면서 경착륙 위기론과 역전세 위험을 초래한 것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불확실성은 커지고 그로 인한 피해는 정말 집을 필요로 하는 무주택 실수요자에게 돌아갑니다. - 이광수 전 미래에셋 애널리스트 다시 울려 퍼지는 거품의 전주곡 모든 신고가 거래가 시세 조종 목적의 허위 거래는 아닙니다. 상당수는 소유권 이전 등기까지 마친 정상 거래일 확률이 높습니다. 문제는 그 가운데서 일부라도 허위 거래가 나타난다면 시장 참여자들은 진위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허위 거래 기록을 기준점으로 삼을 수밖에 없고, 이는 곧 가격 왜곡과 거품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요즘처럼 시장이 바닥을 찍고 반등하려는 순간, 시세 조종 목적의 허위 거래들은 다시 시장에 모습을 드러내며 시장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이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할 경우 우리는 똑같은 과오를 범할 수 있습니다. 만연한 거품은 바지사장을 앞세운 전세사기 같은 또 다른 민생 범죄를 낳을 수 있고, 거품이 꺼지면 역전세와 주거 불안이라는 문제에 또 직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부동산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데이터는 바로 실거래 가격입니다. 하지만, 그 데이터의 신뢰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를 방관하다면 시장은 난장판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시세 조종과 같이 시장을 왜곡시켜 이득을 취하려는 행위에 대한 감독 수단과 처벌 수위를 적어도 주식시장과 같은 수준으로 강화해야 합니다. - 이광수 전 미래에셋 애널리스트 디자인 : 박수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