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과 문화예술에 대한 글을 쓴다. <아무튼, 무대> 출간.
홍세지 봄봄 대표는 런던에서 장(醬), 혹은 소스를 만들어 판다. 봄봄의 제품들은 홀푸드와 셀프리지 백화점에 입점했으며 코스트코를 비롯 영국 대형 온라인 식재료 숍 오카도에 입점 예정이다. 패션잡지 보그의 영국판과 BBC Good Food Magazine에도 소개된 바 있다. 최근에는 한식 요리책을 집필해 영국, 미국, 캐나다 3개국에서 동시에 출간했다. 하지만 그는 정식으로 요리를 배운 적이 없다. 런던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한식 붐은 실제로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생각하시는 만큼 핫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현장에서 체감하는 한식 붐은 어떤가'라는 질문에 한참의 망설임 끝에 돌아온 답이었다. "인식이 바뀐 건 분명해요. 하지만 한국 음식 그 자체로는 안착이 쉽지 않다고 생각해요. 먹는 방식이 너무 다르고, 모던하게 변형하기 힘든 부분도 있어요. 한식 붐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 한식을 시도해 보려는 사람은 1%도 안 된다고 봐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시도조차 해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한식 레스토랑에 가보면 백인은 상대적으로 찾아보기 힘들죠. 그래서 마치 해외에서 한식 장사가 노다지인 것처럼 포장되는 걸 보면 답답합니다." 봄봄은 고추장을 비롯해 '쌈장소스'와 '김치마요'를 출시했다. 모두 식물성 재료만 사용한 비건 식품이다. 세 제품 모두 미식협회(The Guild of Fine Food)로부터 "그레이트 테이스트(great taste)" 별 한 개 또는 두 개를 받았다. 업계 전문가들이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결정하는 이 평가 제도의 최고 등급은 별 세 개이다. 봄봄의 소스를 활용한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 "제가 소스를 택한 이유는 한국 장의 건강한 맛 때문입니다. 특히 채식주의자들에게 좋은 옵션이 될 수 있습니다. 그 풍미를 알거나 활용할 수 있다면 말이죠. 한국 맛이나 소스는 얼마든지 변주가 가능하고, 마케팅 포인트도 충분합니다. 고추장이나 쌈장이란 이름은 생소할지 몰라도 막상 먹어보면 너무 낯설지 않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맛'으로 접근하면 가능성이 많아집니다. 하지만, 우리의 먹는 방식이나 모양새를 그대로 들이대면 한계가 있죠." 충무김밥을 변형한 오징어 고수 초무침 봄봄에서 제작한 비빔밥 브로셔는 냄비밥 짓기부터 설명을 시작한다.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압력밥솥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 쌀조차 찾기 쉽지 않은 이곳에서 밥의 물양은 어떻게 가늠할지, 언제 약불로 낮추어 뜸을 들여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한식의 문턱이 실감되는 순간이다. 비빔밥 고명, 즉 '토핑'은 '클래식'과 '비건' 두 버전으로, 비건용 야채들은 프라이팬에 볶는 대신 오븐에 굽는 방식을 추천한다. 오븐 요리에 더 익숙한 현지인들을 위한 배려다. "이제는 고추장을 아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한국 음식에 먹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당연하죠, 떡볶이 떡을 어디서 매일 사겠어요. 그래서 저희는 영국 사람이 일반적인 식사를 할 때 활용해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블러디 메리 칵테일에 김치 국물을 활용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저도 한국에서 토마토소스에 고춧가루나 고추장을 섞어 먹고는 했습니다." - 어떻게 '장'으로 분야를 좁히게 되었나? "저는 원래 식당을 개업하려고 런던에 왔어요. 먹는 것을 좋아하고 창의적인 요리를 즐기는 가족 덕에 평소 음식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식당 인테리어 디자인까지 마쳤는데 코비드 때문에 락다운이 시작하더라고요. 고심 끝에 식당 계약을 철회하고 그때부터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식당을 준비하면서 1년 정도 서퍼 클럽을 운영했어요. 당시 사람들이 특히 제 소스를 좋아하던 게 생각나 집에서 만들어 시장에 나가 팔기 시작했습니다." 서퍼 클럽은 소셜 다이닝의 한 형태다. 주최자의 집 같은 개인 공간이나 상업 공간을 빌려 소규모로 식사를 준비해 대중의 반응을 살핀다. 식당 개업 전 메뉴를 개발하고 마케팅을 하는 주요 창구로 쓰인다. "석 달 정도 팔았는데 반응이 바로 왔어요. 처음에는 김치마요랑 쌈장으로 시작했죠. 쌈장이 뭔지도 모르면서 금요일에 사 먹어 보고 일요일에 다시 사 가는 사람을 보고 이건 되겠다 싶더라고요. 한국에서 만들려고 공장을 알아봤는데 여기서 만들던 그 맛이 잘 안 났어요. 영국은 락다운 상태라 공장들이 이메일 답장조차 하지 않았고요. 그래서 한국에서 먼저 고추장을 개발해 1,000병을 비행기로 싣고 왔습니다." "고추장을 회사 홈페이지에서, 또 주변에서 알음알음 팔았는데 비행기로 제품을 받다 보니 배송료가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하지만 영국에서 공장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국은 제조업이 발달한 나라가 아니라 공장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또 저희 제품은 모두 참기름이 들어있어 거절을 많이 당했습니다." 영국은 한국과 달리 음식 알레르기를 가진 이들이 흔하다. 특히 견과류와 씨앗 알레르기를 가진 사람이 비교적 많고, 심한 경우 사망에 이를 정도로 치명적이라 음식을 다룰 때 세밀한 주의가 요구된다. 봄봄의 제품을 맡으면 해당 공장에서 만드는 모든 제품에 '참깨를 다루는 시설에서 제조하고 있다'라는 한 줄이 추가로 들어가야 하니, 공장으로서는 생산을 꺼리는 것도 당연하다. 결국 한 달에 한 번 견과류 등의 제품을 제작하는 공장을 찾아 영국 현지에서 생산을 이어갈 수 있었다. 홀푸드, 오카도 같은 이른바 '빅 바이어'들이 봄봄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먼저 접근해 왔다. 팔로워가 수천 명 수준의 계정이었지만 재기발랄한 포스팅, 그리고 제품 자체의 매력이 통했던 것이다. 회사의 규모가 커지며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를 통해 한국의 공장 몇 군데를 소개받았지만,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장벽에 부딪혔다. "수출에 뜻이 있는 공장들이었지만 비건 옵션이 있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영국 기준에 맞는 친환경(bio-degradable) 용기를 갖춘 공장도 없었습니다. 너무 충격적이었요. 이 글로벌한 시대에, 굉장히 답답했습니다." 봄봄이 추구하는 제품을 만들어 줄 공장을 찾는 일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홍세지 대표는 사업 초기부터 철저하게 영국인들을 타깃으로 삼았다. '한국 문화나 K팝을 모르는 평범한 영국인이 집 앞 식료품점에서 장을 보다 봄봄의 고추장 한 병을 구매한다. 그리고 고추장으로 매콤하게 맛을 낸 따뜻한 수프를 해 먹는'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 영국인에게 맞는 맛을 어떻게 찾았나. "계속 음식을 만들고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요리를 하다 보면 쌈장 같은 경우 활용도가 무궁무진했어요. 버거 스프레드, 딥핑 소스, 샐러드 드레싱처럼 말이에요. 쌈장 병에 안내된 '감자튀김용 딥핑 소스'란 조리 예시도 저희 제품을 사 간 사람이 자기가 이렇게 먹었더니 맛있더라며 알려준 거였어요. 저는 이 지점을 계속 생각해요.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레스토랑에서 사 먹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고, 집에서 계속 해 먹을 텐데 여기 사람들 중에 한국 방식 그대로 집에서 해 먹을 사람이 몇 프로나 되겠습니까." 홍 대표의 이런 유연성은 그의 한식 요리책 <하기 쉬운 한국 요리>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현지에서 살 수 있는 재료는 굳이 바꿀 필요 없이 한국 방식 그대로 소개한다. 하지만 구하기 힘든 재료나 요리 방식이 어려운 음식은 현지 사정에 맞게 변형한다. "예를 들어 김치 팬케이크(김치전)는 하나하나 만들어도 좋지만 보통 파티할 때 많이 먹죠. 그래서 한 번에 대량으로 만들 수 있게 오븐에서 구워내는 방식으로 설명했습니다." 요리책이지만 요리법과 더불어 그 음식을 먹는 '맥락'을 안내하고 뉘앙스를 살리는 일에도 부지런하다. 예를 들어 콩나물국의 부제는 '한국 공식 해장국(Korea's Official Hangover Soup)'이다. 한식의 영문 표기 방식도 반갑다. '노리', '미소' 등 서양에 먼저 들어와 이미 굳어진 일식 재료의 이름을 차용하는 대신 'Gim', 'Doenjang'이라고 정확하게 한국 식재료를 소개한다. "이름 짓는 것도 고심을 많이 했어요. 계란말이는 Egg-Mari'라고 소개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익숙한 느낌을 주면서 '말이'라는 우리 음식의 특성이 살아나게 하려고 고민을 많이 했죠. 소스 개발 과정과 같습니다. 현지인들에게 어떻게 쉽게 전달하느냐를 늘 고민합니다." 고객의 취향과 반응을 읽는 그의 특별한 '촉'은 독특한 삶의 이력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홍 대표는 요리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다. 고추장 사업을 시작하기 전 그의 이력은 다채롭다. 한국에서 클래식 음악 작곡을 전공했고, 영국에서 사운드 디자인을 공부했으며, 한국의 광고 회사에서 오디오 PD로 음악 연출을 담당했다. 잠시 와인바를 운영하기도 했고 이후 강단에서 실용음악을 가르쳤다. "싱어송라이터들을 상대로 셀프 프로듀싱을 가르쳤어요. 음악을 비주얼적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찾게 만들었죠. 그렇게 6-7년 정도 일하다 보니 충분히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제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더라고요. 조금만 늦어지면 새로운 걸 못 하겠다는 생각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런던으로 왔습니다." 한번은 지인에게 '뭘 하나를 끝까지 안 한다'는 핀잔을 듣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저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보지 않았거든요. 제가 추구하는 것은 항상 비슷했어요. 사운드를 할 때나, 학교에서 일할 때나 늘 뭔가를 설계하고 구축하는 일을 했습니다. 음악도 하나의 연출이었고, 학교에서도 학과장으로 커리큘럼을 짜는 일을 했었죠. 운영하던 와인바도 미디어아트 공연을 하는 바였어요. 분야가 바뀔 따름이지 저는 늘 창조하고 구조 설계하는 일을 하면서 계속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고 생각합니다." 납득이 간다. 이제 그녀는 '한국의 맛'을 창조하고 설계하는 중이다.
<사람, 장소 그리고 물건(People, Places & Things)>은 중독에 대한 연극이다. 알코올과 약물로 일상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엠마는 재활센터에 입소한다. 새하얀 타일로 둘러싸인 그곳은 독한 소독약 냄새가 객석까지 풍길 듯 황량하고 차갑다. 치료는 몸 안에 쌓인 술과 약을 빼내는 디톡스로 시작된다. 의사는 앞으로 거칠 과정 중 제일 쉬운 단계라 설명했지만 벌써 증상이 심각하다. 엠마의 환각이 시작되면 사이키델릭한 음악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극장을 채운다. 조명이 정신없이 번쩍이는 가운데 여러 엠마들이 벽과 침대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와 구토하고, 경련을 일으키며 바닥을 기어다닌다. 공포영화 <링>의 텔레비전에서 기어 나오는 사다코 같은 모습에 등골이 오싹하다. 이 혼란스럽고 기괴한 무대는 마치 엠마의 머릿속 같다. 디톡스가 끝나면 그룹 테라피에 참여해야 한다. 그룹 테라피는 재활센터의 환자들이 다 같이 둘러앉아 역할극을 통해 중독의 근본 원인을 찾는 시간이다. 그러나 엠마의 태도는 일관되게 냉소적이다. 거듭된 주변의 재촉에 마지못해 일어나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가만, 계속 듣다 보니 어딘지 익숙하다. 그녀가 목소리를 떨며 진솔하게 고백한 사연은 사실 연극 <헤다 가블러>의 줄거리였다. 엠마는 직업배우다. 그리고 영리하다.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처럼 생각하고 행동해 사람들이 진짜라고 믿게 만드는 일에 능하다. 의료진과 동료 환자들은 물론 관객마저 극이 진행될수록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어디부터가 진실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저 눈물이야말로 진짜겠지, 철석같이 믿었다가 또 뒤통수를 맞곤 한다. 연극은 잔인할 정도로 솔직하다. 제작진과 출연진은 재활센터를 찾아가 중독자들과 밀접하게 교류하며 그들이 겪는 문제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 덕분일까, 중독자의 주변인, 특히 가족이 겪는 고통에 대한 장면은 마치 오래된 딱지를 억지로 잡아뗀 자리에 손톱을 세워 꾹 누르는 듯 무자비하다. 주변인들의 이야기는 관객이 일방적으로 중독자들의 사연만 듣고 그들에게 감정이 기우는 것을 막아준다. 이런 장치들 덕에 관객은 엠마를 비롯해 무대 위 중독자들에게 연민을 느꼈다가도 내주었던 마음 한켠을 다시 황급히 챙긴다. 재발과 재활을 반복하던 엠마는 결국 성공적으로 치료를 마치고 그 길로 부모를 찾는다. 재활센터에서 연습한 대로 그간 자신의 잘못을 어렵사리 인정하지만, 비정상적으로 차가운 엠마 부모의 반응에 객석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온다. 이런 괴물 같은 부모 때문에 딸이 결국 중독자가 된 걸까. 그러나 곧 이어지는 단어 하나에 관객은 주먹으로 배를 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인다. 엠마의 중독이 그녀의 부모를 괴물로 만든 걸까? <사람, 장소 그리고 물건>의 대본을 쓴 극작가 덩컨 맥밀런은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에는 훌륭한 여배우들이 정말 많습니다. 나는 그 배우들이 자신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뛰어난 연기를 펼치도록 하는 배역을 아직 만나지 못했을 뿐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런 신념으로 이 희곡을 썼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배역, '엠마'를 움켜쥔 '훌륭한 여배우'가 바로 주연을 맡은 드니스 거프이다. 2015년, 초연 당시 이미 서른 중반이었던 그녀는 당시 배우로 먹고살기 너무 힘들어 커리어를 포기하려던 참이었다. "연극을 할 때면 연출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주어진 의상을 입고 주어진 대사대로 말하면 돼. 지루한 부분은 다 건너뛰고 인생의 가장 강렬한 순간만을 반복해서 살고 박수갈채를 받지. 하지만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알바를 뛰며 생계를 유지하느라 차를 살 수도 없고 주택담보대출을 받을 수도 없어. 그래도 계속하다 보면, 정말 운이 좋으면 비록 지어낸 말이지만 무엇보다도 진실되고 의미 있는 말을 무대에서 할 수 있게 돼. 내 진짜 삶보다 훨씬 진짜 같은 일들을 할 수 있어." 오디션 당시 과제로 주어진 엠마의 독백이 너무도 자기 이야기라 드니스는 오디션 내내 울면서 연기했다고 한다. 이후의 전개는 그야말로 한 편의 연극과도 같다. 드니스는 그야말로 자신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격렬하고 섬세한 엠마를 만들어 냈고, 그해 올리비에 시상식에서 '최고의 여배우' 상을 거머쥐었다. 이후 그녀의 커리어는 급등한다. 이제 그녀는 TV, 연극, 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종횡무진하며 배우들의 배우가 되었다. 그러나 <사람, 장소 그리고 물건>이 재공연될 때면 어김없이 돌아와 다시 엠마가 된다. 톰 행크스, 밥 딜런, 크리스천 루부탱 등 유명 아티스트들이 그녀의 신들린 엠마 연기를 보기 위해 앞다투어 극장을 찾았다. <사람, 장소 그리고 물건>은 우리 시대의 팽배한 문제, 중독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술, 담배, 쇼핑, 게임부터 끊임없는 새로고침과 습관적인 문자 확인 같은 도파민 중독까지, 우리는 무엇인가를 강박적으로 반복하는 일상을 살고 있다. 내 삶이 내 맘대로 굴러가지 않을 때, 세상이 너무 빨리 돌아가 따라잡기는커녕 살아있는 것 자체가 버거울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대처하는가, 무엇에서 즐거움을 찾고 위로를 받을 것인가. 연극은 이 같은 질문을 던지지만 답을 제시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다만 관객 스스로 답을 찾도록 도발할 따름이다. 문제를 회피하거나 사탕발림하지 않고 진지하게 직시하는 것은 선뜩하지만 큰 위안이 된다. 사진 : 영국 국립극장 홈페이지
사진 : 게티이미지 아이가 런던에서 어린이집을 다니던 무렵 생일 파티에 초대받았다. 그런데 초대장에 쓰인 파티 장소가 이상했다. '펍'이라니. 아이 생일 파티를 술집에서? 그런데 알고 보니 펍은 꽤나 일반적인 아이들 생일 파티 장소였다. 영국에서 펍은 단지 술집이 아니다. 물론 술을 팔지만, 술만 팔지 않는다. 혹자는 이웃과 함께 쓰는 거실이라고 펍을 표현한다. 애초에 펍(Pub)이란 이름이 '공공의 집(Public House)'의 줄임말에서 나온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오랫동안 영국인들의 삶 속에 밀착되어 온 펍 문화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다. 직장 동료와 퇴근길에 맥주 한 잔 털어 넣으려 들리기도 하지만 일요일이면 아이와 반려견까지 온 가족이 둘러앉아 선데이 로스트(영국인들이 일요일에 먹는 전통적인 식사)를 즐긴다. 중요한 스포츠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동네 이웃들과 삼삼오오 모여 떠들썩하게 경기 보는 맛에 펍을 찾기도 한다. 펍이 주최하는 당구나 다트, 혹은 퀴즈 대회에 친구들과 함께 참가할 수도 있다. 라이브 공연을 볼 수 있는 펍이 있는가 하면 낮 시간대 코워킹 스페이스를 운영하는 펍도 있다. 이렇듯 다양한 펍의 면면을 짧게나마 엿볼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바로 '펍 투어'에 참가하는 것이다. '펍 투어'는 가이드와 함께 1시간 반 동안 유서 깊은 펍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다양한 문화와 깊은 역사를 밀도 깊게 알아본다. "우리 동네 펍이 전기세와 난방비로 한 달에 얼마내는지 아십니까?"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투어 가이드 셸든이 물었다. 갑작스런 질문에 어리둥절해졌다. "1만 3,000파운드(약 2,200만 원)입니다. 믿어지십니까?" 예상보다 큰 금액에 놀란 투어 참가자들이 웅성거렸다. 최근 몇 년간 난방비와 전기세가 급등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셸던은 작년 한 해 동안 역대 가장 많은 펍들이 문을 닫았다는 설명을 이어갔다. 놀랍지 않았다. 얼마 전 오랜만에 펍에서 무심코 맥주 한 잔을 시켰다가 훌쩍 오른 가격에 화들짝 놀랐다. 브렉시트, 코비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연이은 악재의 여파로 영국의 맥줏값은 최근 몇 년 새 크게 올랐다. 임대료 상승 또한 가파르다. 반면 치솟는 생활비에 소비자들은 더더욱 허리를 졸라매는 상황이 계속되니 견디다 못한 펍들이 하나둘 사라지거나 대규모 식음료 업체에 넘어가는 일들이 부지기수다. 사라져 가는 펍 문화에 대한 우려와 함께 시작한 이 투어는 차링 크로스 기차역 앞 '파이브 가이즈'에서 시작되었다. 미국 햄버거 프랜차이즈의 발랄한 빨간 간판이 고풍스러운 잿빛 건물 사이로 녹아들지 못한 채 멀뚱히 걸려 있었다. 셸든에 따르면 이 햄버거 가게 자리에는 원래 17세기 이래 늘 펍이 있었다고 한다. 사진 : Huy Phan 차링 크로스는 역사적으로 영국 남부의 도시 도버로 가는 기차가 출발하는 역이었다. 도버해협을 건너면 바로 프랑스였으니 이곳이 유럽으로 향하는 관문이었던 셈이다. 소설 <80일간의 세계 일주>에서 주인공들이 여행을 시작하려 도버행 기차를 타는 곳도 바로 이 차링 크로스 역이었다. 교통의 중심지이니만큼 각지에서 여행객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에게 술과 음식을 제공하는 펍이 오래 명맥을 유지해 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도심 개발과 함께 국제선 기차들이 런던 동북쪽으로 옮겨가며 차링 크로스 역은 점차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잃기 시작했다. 마지막 펍인 '벨 & 컴퍼스(Bell & Compass)'가 2011년 문을 닫으면서 작은 역사 한 조각이 사라졌다. '쉽 앤 셔블(The Ship and Shovell)'은 템스강이 주요 교역로로 쓰이던 시대의 산물이다. 배가 여전히 주요 운송수단이던 1852년, 창문에서 강이 보일 정도로 템스강 가까운 곳에 펍을 만든 것이다. '쉽 앤 셔블'은 특히 강변에서 배(Ship)에 실린 석탄을 삽(Shovel)으로 퍼 나르던 노동자들이 한숨 돌리며 다음 하역을 기다리던 장소로 쓰였다. 인근 사보이 호텔 옆에 위치한 또 다른 펍 '콜 홀 (The Coal Hole)'이 석탄 창고라는 이름을 지닌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보이 호텔의 석탄 창고로 쓰이던 이곳은 이후 석탄 하역 인부들이 즐겨 찾는 펍으로 사랑받으며 명맥을 이어왔다. '천국까지 절반(Halfway to Heaven)'이라는 이름의 펍은 트라팔가 광장 바로 맞은편에 있다. 런던 게이들의 성지, 소호에 가까운 만큼 맥주와 함께 드랙 쇼나 캬바레 공연을 라이브로 즐길 수 있는 펍이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장소이다 보니 펍은 오래전부터 구경거리를 풀어 놓는 공간으로 곧잘 쓰여왔다. 인근 '램 앤 플랙(The Lamb & Flag)'의 별명이 '피 한 사발(The Bucket of Blood)'인 것도 19세기 이곳에서 상금이 걸린 주먹싸움을 구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단골고객이던 작가 찰스 디킨스도 파인트 한 잔을 들고 치고받는 선수들을 소리 높여 응원했을 것이다. 현재 '램 앤 플랙'은 손님들에게 주먹싸움 대신 라이브 재즈 공연을 선보인다. '하프(The Harp)'는 진정한 에일(Real Ale)이라 불리는 캐스크 비어 애호가라면 꼭 한 번 가볼 만하다. 좋은 맥주와 펍을 지키려는 소비자단체 CAMRA(Campaign for Real Ale)가 2010년 '올해의 펍'으로 뽑았다. 런던 최초였다. 술에 진심인 펍이라는 설명에 투어가 끝나고 따로 찾아가 보았다. 추천을 부탁하자 친절한 바텐더가 신이 나 이것저것 따라주며 시음을 권했다. 내 반응을 면밀히 살피던 바텐더의 얼굴에서 에일의 세계로 '입덕'을 권하는 '덕후'의 표정이 보였다. 극장들이 몰려 있는 웨스트엔드 쪽으로 옮겨가자 셸던은 새로운 펍을 설명할 때마다 굵직굵직한 이름들을 입에 올렸다. 오스카 와일드, 길버트&설리번, 리처드 버튼과 엘라자베스 테일러 등 아티스트와 그들의 단골 펍에 얽힌 생생한 일화들이 쏟아졌다. 그리고는 자신이 웨스트 엔드의 펍에서 만난 배우들의 이름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어떤 경험은 사람이 바뀌어도 긴 세월을 건너 계속 반복된다. 어느새 투어의 막바지, 셸든이 이끄는 대로 미로 같은 골목길을 걷다가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여기에 이런 곳이? 사람 하나 간신히 통과할 만큼 좁고 어두운 뒷골목에 갑자기 마법처럼 펍 하나가 나타났다. 찰스 2세의 정부이자 유명 배우였던 넬 귄의 이름을 딴 펍, '넬 귄(The Nell Gwynne)'이었다. 마치 나만 그곳을 몰랐던 듯, 술잔 하나씩을 손에 든 채 이야기에 열중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순간 <해리 포터>에 등장하는 펍, '리키 콜드론'이 떠올랐다. 차링 크로스 로드에 있다는 이 가상의 펍 뒷마당에는 마법의 세계로 향하는 입구가 숨겨져 있다. 영국 문화라는 세계를 경험하는 입구 역시 펍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투어의 초반, 셸든이 사라져가는 펍 문화에 대해 왜 그리도 깊은 안타까움을 표했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언더독: 걔 말고 아니 걔도 말고 나머지 브론테 (출처: 영국 국립극장) 영국 국립극장의 연극 <언더독>의 부제는 '걔 말고 아니 걔도 말고 나머지 브론테(Underdog: The Other Other Brontë)'이다. 여기서 '걔도 아니고 걔도 아닌 나머지'는 앤 브론테다. 앤은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의 작가 샬럿 브론테와 에밀리 브론테의 막냇동생. '나머지'라는 단어가 시사하듯 두 언니만큼 유명해지지 못했다. 하지만 앤 역시 작가로서 이름을 떨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맏언니 샬럿의 방해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 연극의 화자는 샬럿이다. 세 자매가 안 된다면 세 형제가 되어 언더독: 걔 말고 아니 걔도 말고 나머지 브론테 (출처: 영국 국립극장) 샬럿은 작가가 되고 싶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작가로 후세에 길이 남기 위해 필사적이다. "나는 밀려나지 않을 거야. 그 방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할 거야. 디킨스, 새커리 (윌리엄 새커리. 19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작가), 바이런과 함께 할 거야." 문제는 그녀가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는 데 있다. 빅토리아 시대(1837-1901) 여성의 역할은 가사와 육아, 그리고 남편 내조에 한정되었다. 출판사에 문의해도 훈계 일색인 일장연설을 들을 따름이다. "문학은 여성이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게다가 생계 문제가 그녀의 목을 졸랐다. 샬럿의 아버지는 가난한 성공회 사제였고, 어머니는 일찌감치 돌아가셨으며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 형제 브란웰은 알코올 중독으로 집안의 빚만 늘리고 다녔다. 직접 돈을 벌려고 해도 당시 여성이 손가락질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가정교사 정도일 뿐이다. 하지만 샬럿은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가정교사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야말로 사면초가다. 샬럿만큼 필사적이지는 않지만, 에밀리와 앤 또한 글을 쓰고 싶었다. 여성의 목소리가 허락되지 않던 시대, 자신을 드러내려면 모습을 감추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세 '자매'는 각기 커러 벨, 엘리스 벨, 액턴 벨이라는 필명을 지어 세 '형제'로 집필 활동을 시작한다. 출판을 목표로 서로의 글을 읽어주고, 비평하며 격려하던 자매들의 우애는 샬럿에 의해 금 가기 시작한다. "우린 시작부터 빌어먹을 하위 장르라고!" 언더독: 걔 말고 아니 걔도 말고 나머지 브론테 (출처: 영국 국립극장) 어떻게든 작가로 성공해야 하는 샬럿에게 자매들은 사실 경쟁자이기도 했다. 편집자가 에밀리와 앤의 소설을 선택하고 자신의 소설 <교수>는 거절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절망을 감출 수 없다. 그러므로 앤의 소설 <아그네스 그레이>의 출판이 한없이 늦춰진 것은 샬럿에게 기회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앤은 상주 가정교사로 5년간 일하며 많은 부조리를 겪었다. 신분제도가 명확한 시대였기 때문에 앤은 주인집 식구들과 대등하게 친교를 나눌 수도, 하인들과 어울릴 수도 없었다.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주인집 아이들을 지도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어떠한 권한도 갖지 못했다. 앤은 이 간극에서 오는 모순을 자전소설의 형태로 생생하게 폭로하고자 했다. 그런데 샬럿이 뒤늦게 써온 소설 속 여주인공이 자신과 꼭 닮은 데다 직업마저 가정교사란 설정이다. 앤은 자신의 책이 나올 때까지만 <제인 에어>의 출판을 늦춰달라고 언니에게 애원하지만 돌아온 것은 변명뿐이다. 원래 작가들이란 늘 비슷한 소재와 주제를 다루기 마련이라고, 책꽂이에 꽂힌 저 수많은 책들을 보라고. 앤은 항변한다. "여자들 이야기는 다르지. 언니도 알잖아. 우리는 시작부터 빌어먹을 하위 장르라고!" 언더독: 걔 말고 아니 걔도 말고 나머지 브론테 (출처: 영국 국립극장) <제인 에어>는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지만, 뒤이어 출간된 <아그네스 그레이>는 앤의 예상했던 대로 <제인 에어>의 아류로 평가절하된다. <제인 에어>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여성' 작가가 아닌 '작가'로서 평가받고 싶다는 샬럿의 꿈은 여전히 요원하다. 작가의 성별을 유추한 비평가들이 여성이 써서는 안 될 저속하고 교양 없는 책이라며 비판의 날을 세웠기 때문이다. 샬럿은 작가로서 자신의 커리어를 지키기에 여념이 없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남동생 브란웰과 에밀리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였다. 늘 자신을 존경하고 사랑하던 앤마저 쓰러졌지만, 집필에 집중하고 싶은 샬럿에게는 동생을 간병하는 일도 짐이다. 그도 잠시, 곧 앤마저 세상을 떠났다. 샬럿은 8개월 만에 모든 형제자매를 잃었다. 샬럿을 위한 변명 제목과 달리 이 연극의 중심에는 막내 앤이 아닌 첫째 샬럿이 있다. 그리고 샬럿은 좋아하기 힘든 주인공이다. 특히 에밀리와 앤이 죽은 후 샬럿의 행동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혼자 남은 샬럿은 작가로서 명성을 지키기 위해 넘지 못할 선이 없었다. 샬럿은 자신의 입맛대로 에밀리의 시집을 꼼꼼히 고친다. 심지어 출판 6주 만에 초판이 매진될 만큼 인기를 끌었던 앤의 마지막 소설 <와일드펠 홀의 세입자>가 재인쇄되는 것도 막는다. 알코올 중독과 가정폭력을 적나라하게 다룬 이 소설이 더 이상 앤의 명성을 더럽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브리티쉬 라이브러리가 보관 중인 <제인 에어>의 친필 원고. 제목 밑으로 샬럿 브론테의 필명 커러 벨이 보인다. (출처: 브리티쉬 라이브러리 페이스북) 연극이 끝난 후 오래간만에 <제인 에어>를 꺼내 보았다. 신분, 외모, 재산 어느 하나 없지만 불합리한 권위에 끝까지 저항하는 제인, 오로지 자신의 지성과 의지만으로 끝내 행복을 쟁취한 제인. 여성을 가정 안에 가두고 현모양처만을 강요하던 빅토리아 시대에 이 소설이 불러 일으켰던 논란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샬럿의 친구로 그녀의 전기까지 쓴 엘리자베스 가스켈마저 정작 자신의 딸에게는 스무 살까지 <제인 에어>를 읽지 못하게 막았다고 한다. 관객은 연극 내내 계속된 변명과 자기 정당화를 늘어놓는 샬럿을 경멸해야 할지, 그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던 시대를 탓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다. 샬럿을 위한 변명은 <제인 에어>가 대신 하도록 두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런던 웨스트엔드의 뮤지컬 <겨울왕국>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아이가 3년째 "레리꼬"를 목청껏 불러왔기 때문이다. 아이들 공연이지만 티켓 가격은 성인 공연과 다르지 않아 5만 원부터 25만 원 선이다. 아이가 아무리 <겨울왕국>을 좋아한다고 한들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아직 단념은 이르니 '마법의 월요일(Magical Mondays) 티켓'을 노리면 된다! 디즈니는 '마법의 월요일'이라는 이름으로 매주 월요일 12시, <라이언 킹>이나 <겨울 왕국> 등 그 주에 공연될 뮤지컬 티켓 수십 장을 저렴한 단일가에 판매한다. 사실 이름과 디테일만 조금씩 다를 뿐, 웨스트엔드의 많은 공연들이 비슷한 형식의 할인 티켓을 제공한다. 공연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이런 전통은 불과 30년 전, 뉴욕 슬럼의 한 가난한 젊은이에게서 시작됐다. 선착순 34명 안에 들기: 러시 티켓 조너선 라슨과 뮤지컬 <렌트> 1996년, 조너선 라슨은 뮤지컬 <렌트>를 세상에 선보였다. 웨이터로 일하면서 어렵게 번 돈으로 7년간 고군분투하며 만든 이 뮤지컬은 라슨과 그 친구들처럼 가난하고 젊은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비록 라슨은 개막 전날 세상을 떠났지만, <렌트>는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4개의 토니상에 퓰리처상까지 수상한 <렌트>의 티켓은 밥 한 끼 사 먹을 돈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뮤지컬 속 청춘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수준의 가격이 아니었다. 제작진은 이 같은 아이러니를 극복하고자 획기적인 결정을 내린다. 공연 2시간 전부터 객석 첫 두 줄, 즉 34장의 티켓을 20달러에 파는 것이다. 선착순 판매였기 때문에 '서두르다, 돌진하다'라는 뜻의 '러시 티켓'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전에도 브로드웨이에 할인 티켓들은 있었지만 이는 주로 '학생'을 위한 제도였다. <렌트>는 그와 달리 할인 티켓을 구매하기 위한 어떠한 자격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 결과 행운을 거머쥐기 위해 극장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기 시작했고, 가장 열광적인 팬들이 극장 맨 앞에 포진하며 자연스레 열정적인 공연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혹자는 영리한 마케팅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공연을 보고 싶은 이들의 간절함에 대한 배려도 한몫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공연의 인기가 늘어갈수록 이 할인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의 줄은 길어져만 갔고, 급기야 통제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텐트를 치고 노숙하는 이들마저 생기자 안전에 대한 우려의 소리 또한 높았다. 결국 1년 후, <렌트>는 할인 티켓의 선착순 판매를 추첨 형식으로 대체하고 이를 '로터리 티켓'이라 이름 지었다. 매일 공연 2시간 전, 극장 박스오피스에 이름을 적어낸 사람들 중에 34명을 뽑아 할인 티켓을 살 수 있게 해준 것이다. '로터리 티켓'의 승자. 출처 : 뉴욕타임스 러시 티켓의 진화: <해밀턴>의 #ham4ham <렌트>의 이런 추첨 방식은 여타 공연에서도 모방하며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21세기 브로드웨이 최고의 히트작이라 불리는 뮤지컬 <해밀턴> 또한 한동안 매일 로터리 티켓을 제공했다. 그들은 단순히 당첨자를 호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즉석 공연을 곁들여서 추첨을 진행했다. 이 작은 축제 같은 행사는 빈약한 주머니로도 어떻게든 공연을 보고 싶어 찾아온 이들에 대한 보답이면서, 떠들썩한 길거리 공연을 통해 뮤지컬을 널리 알리는 수단이기도 했다. #ham4ham이라 불리는 이 공연은<해밀턴> 전용 극장 앞 계단에서 이뤄진다. 지나가던 행인도, 일말의 행운을 기대하며 추첨 용지에 자신의 이름을 적은 이들도 모두 지근거리에서 생생한 이벤트를 즐길 수 있다. 공연은 그날그날 다를 뿐더러 내용이 기상천외해 그 자체로 화제가 되었다. <해밀턴> 출연진들이 남녀 역할을 바꿔 뮤지컬 속 대표 넘버를 장난스럽게 선보인 날도 있었다. 새로 오픈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출연진들이 찾아와 노래로 자신들의 뮤지컬을 홍보하기도 했다. <해밀턴>의 작사, 작곡, 연출, 주연을 맡은 린 마뉴엘 미란다가 전설적인 레아 살롱가와 간소한 멜로디언 반주에 맞춰 뮤지컬 <알라딘>의 "A Whole New World"를 부르는 모습은 영상만으로도 흐뭇하다. 코로나 거치며 '온라인 줄 서기' 코로나 시기를 지나며 공연예술계는 다방면에서 변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러시 티켓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거리두기 등으로 인해 이전 방식을 고수하기에 여러 가지 제약이 뒤따르자 러시 티켓, 로터리 티켓 모두 온라인으로 옮겨왔다. 매일 극장 앞에서 당일 할인 티켓을 추첨해 뽑던 <해밀턴>은 현재 일주일에 한 번, 한 주치의 할인 티켓을 10달러에 판매하는 온라인 로터리 제도를 활용하고 있다. 개인 SNS에 응모 사실을 공유하면 당첨 확률이 높아진다. 극장 앞에 길게 늘어서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던 <렌트>의 줄은 이제 온라인 포스팅으로 입소문을 낸다. 이렇듯 세월과 함께 방식은 바뀌었지만 저렴한 가격에 공연을 볼 수 있는 행운은 여전히 계속된다. 현재 웨스트엔드에서 할인 티켓을 제공하는 공연들은 앞서 언급한 <프로즌>, <라이언 킹>을 비롯해 <하데스 타운>, <백 투 더 퓨처>, <기묘한 이야기> 등 그 리스트가 무척 길다. 나 또한 여러 번의 예행연습과 많은 실패를 거친 결과, 클릭 속도가 관건인 <겨울왕국>의 러시 티켓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정가 15만 원짜리 1층 좌석을 5만 원에 샀으니, 이 정도면 그간의 노력이 아깝지 않다.
사진=로열 오페라 하우스 공식 홈페이지 한 미군이 주둔 중인 아시아 국가에서 현지인 10대 소녀와 사랑을 나눈 후 본국으로 귀환했다. 남겨진 소녀는 미혼모가 되고, 이웃들은 그런 그녀를 차갑게 외면한다. 3년 후 아들의 존재를 알게 된 남자는 미국인 아내와 함께 찾아온다.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소녀는 아들이나마 아빠와 미국에서 보다 나은 미래를 누릴 수 있도록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만일 당신이 20대 소녀라면 자신의 이야기를 러브 스토리라 표현하지 않을 것이다. '주변의 손가락질에도 홀로 아이를 키우며 지고지순하게 기다렸더니, 사실 버림받은 지 오래다. 내 귀에 달과 별을 속삭이던 그 남자는 어느새 본처까지 두었네?' 그러나 이 내러티브는 뮤지컬 <미스 사이공>에서, 그 이전에는 오페라 <나비부인>에서 반복되어 러브 스토리로 포장되어 왔다. <미스 사이공>의 베트남 소녀 킴은 17살, <나비부인>의 일본 소녀 초초상은 그보다 어린 15살이었으며 각각 총과 칼로 자살하는데도 말이다. <미스 사이공>을 둘러싼 논쟁 사실 <미스 사이공>은 공연 초기부터 여러모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1989년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성공적인 초연을 시작으로 1990년 뉴욕 브로드웨이로 진출하려 했을 때 아시아 혼혈 캐릭터를 백인 배우가 연기하는 '옐로우 페이스'에 대한 반대가 컸다. 특히나 인종이 캐릭터의 정체성에 큰 역할을 하는 <미스 사이공> 서사의 특성상 반대의 목소리는 클 수밖에 없었고, 논쟁이 정점에 이르는 1990년 8월에는 뉴욕타임스 1면에 관련 기사가 8건이나 실릴 정도로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제작자 캐머론 맥킨토시는 큰 피해를 무릅쓰고 브로드웨이 공연을 취소하는 것까지 진지하게 고려했지만, 결국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사회가 진보할수록 이 뮤지컬에 내재된 다양한 문제점들이 두드러졌다. 열등하고 정형화된 존재로 아시아인들을 묘사하는 서구의 시선, 엉터리 베트남어 등 타문화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끼어 맞추기식 문화 전용, 수동적인 희생양으로 여성을 그리는 방식, 1막에 출연한 모든 베트남 여성과 2막의 모든 태국 여성을 창녀로 묘사한 점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결국 작년에는 <미스 사이공>의 시대착오적 플롯을 비꼬는 연극 <Untitled F*ck M*ss S**gon>가 한국계 미국인 킴버 리에 의해 집필되어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관련된 내용은 여기) 1989년, 한 토크쇼에 출연해 아시아 혼혈 캐릭터, 엔지니어가 되기 위한 특수 분장을 설명하는 배우 조너선 프라이스 (관련 영상은 여기) 오페라 <나비부인>의 뒤바뀐 피부색 사진=로열 오페라 하우스 공식 홈페이지 오페라 <나비부인>은 <미스 사이공>에 직접적인 영감을 준 작품이다. 배경과 디테일은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얘기다. 짧고 불같은 연애, 떠나간 미국 남자, 혼자 아이를 낳고 끝내 자살하는 동양 여자. 20세기 초 이탈리아 남자의 시각에서 일본을 배경으로 쓰인 <나비부인>에도 현대의 시선에서 부적절한 부분이 <미스 사이공>만큼 많다. 따라서 현대 오페라 극장들은 나름의 대응 방식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일본 문화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거나 제작진에 일본인을 포함시켜 그들의 의견을 직접 듣기도 한다. 현재 영국 로열 오페라 하우스는 지금껏 유례가 없던 뜻밖의 캐스팅으로 <나비부인>을 공연 중이다. 일본 게이샤인 초초상 역에 아르메니아 출신의 소프라노 흐라추이 바센즈가, 미 해병인 핑커튼 역에 한국인 테너 백석종을 선택한 것이다. 극 중 캐릭터의 인종이 뒤바뀐 셈이다. (바리톤에서 테너로 전환하자마자 로열 오페라 하우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등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백석종의 소설 같은 이야기는 일전 인터뷰에서 다룬 바 있다. 인터뷰는 여기) 나비부인 초조상(가운데)과 아들(오른쪽). 그 오른쪽이 핑커톤 역의 한국인 테너 백석종 이런 캐스팅은 <미스 사이공>에서라면 불가능했을 테지만 오페라는 전통적으로 외모에 덜 얽매이는 장르다. 캐릭터의 적합성을 따지는 기준은 눈으로 보는 외모보다 귀로 듣는 목소리다. 가수가 캐릭터의 노래를 소화할 수 있는 음역대와 성량, 역량을 지녔는가, 음색은 어울리는가 등이 캐스팅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그래서 체중이 감소하는 질병, 폐결핵을 시름시름 앓다 죽어가는 여주인공이 무척 건장하다거나 싱그러운 젊은 연인들을 4, 50대의 가수들이 소화하는 경우도 흔하다. 같은 맥락에서 오페라 <나비부인>의 일본인 초초상 역이나 <아이다>의 에티오피아 공주 등을 백인 가수로 캐스팅해도 영화나 뮤지컬에서처럼 '화이트 워싱'이라는 비판을 받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백인 소프라노의 초초상은 수없이 보았지만 동양인 테너가 연기한 핑커튼은 처음이었다. 무대의 이질적인 이미지에 낯설기도 잠시, 시각보다 청각이 중요한 장르니만큼 핑커튼과 초초상의 목소리, 그리고 음악 자체가 외모의 이질감을 단박에 희석시켰다. 정작 감상을 방해한 요소는 다른 것이었다. 아름다운 봄날, 하늘하늘 떨어지는 벚꽃을 악보에 옮겨놓은 듯 아름다운 푸치니의 음악과, 음악으로 드라마를 쌓아가는 그 능란한 기술이 아무리 감탄을 자아내어도, 가사에 덕지덕지 붙어 흐르는 인종 차별과 여성 혐오에 대해서는 도저히 '흐린 눈'을 하기 어려웠다. 초초상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간 우수수 떨어지는 하얀 꽃잎, 극적으로 휘몰아치는 오케스트라로 막이 내렸을 때 관객석에서는 열화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지만, 동양인 여성 관객의 입장에서는 한 호흡 쉬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름답게 극화된 그녀의 죽음에 입안이 썼기 때문이다.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는 훌륭한 음악에 녹아 있어도 어떤 이야기들은 유통기한이 있다.
얼마 전 친구가 깔깔거리며 알리익스프레스에서 2천 원에 산 귀걸이를 내밀었다. 화면상으로는 그럴듯했는데 눈앞의 실물은 딱 인형용 플라스틱 귀걸이였다. '윌리엄 모리스가 이 귀걸이를 봤다면 참 가슴 아팠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윌리엄 모리스(1834-1896)라는 이름은 많은 이들에게 생소할 것이다. 들어본 사람들도 예쁜 벽지 만든 영국인 정도로 치부하기 쉽다. 하지만 그는 19세기 영국 사회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였으며, 그의 이름 뒤에는 디자이너이자 공예예술가, 사업가, 시인, 소설가, 출판인, 사회주의 운동가 그리고 환경보호자라는 긴 타이틀이 달린다. 쓸모없거나 아름답지 않은 물건은 집에 두지 마라 모리스는 부유한 중산층에서 태어나 한적한 시골에서 여유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며 자연에 대한 깊은 애착을 가지게 되었다. 데이지꽃, 인동덩굴, 딸기와 같이 영국 시골길에서 흔히 접하는 소박하고 친근한 식물들은 훗날 그가 디자인한 벽지나 패브릭에 반복하여 등장하는 모티브가 된다. 출처 : rawpixel.com 자연에 대한 사랑은 단순한 영감 이상으로 그의 삶 전체를 추동하는 요인이었다. 모리스는 산업혁명의 모순이 격화되던 시기를 살았다. 대량 생산이 가능해져 물건값은 내려갔지만 하나같이 획일화되어 무미건조한 데다 품질은 형편없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물건을 사들였고, 노동자들은 더 많은 물건을 더 빨리 생산하기 위해 비인간적인 작업 환경을 감내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이 과정에서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자연환경이 급속도로 파괴되어 갔다. 이런 세태에 분노한 그는 디자인 산업 전반, 나아가서는 소비자의 취향까지 영향을 미치겠다는 원대한 뜻을 세운다. 그는 예술과 일상이 공존하는 삶을 꿈꿨고, 사람들이 정성껏 공들여 만든 아름다운 물건들에 둘러싸여 살기를 원했다. 모리스는 직접 시대의 흐름을 바꾸고자 지인들과 인테리어 회사를 설립했다. 그는 입으로만 떠드는 순진한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 자사의 제품 디자인을 맡은 디자이너인 동시에 그 결과물인 상품을 대중에게 판매하는 사업가로서 자신의 역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자신이 디자인한 물건들을 직접 만들 수 있는 제작자이기도 했다. 산업화와 더불어 디자이너와 제작자가 분리되기 시작했지만, 그는 그런 작업 방식에 질색했다. 보다 나은 디자인을 위해서는 자신이 디자인한 모든 제품들을 스스로 제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은 그는 부단히 기술을 연마했다. 윌리엄 모리스의 1875년 벽지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드는 영상. 제작에는 4주의 시간, 15개의 색상, 30개의 블록이 사용된다. 그의 손은 종종 푸른색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파란색의 이상적인 색조를 찾고자 끝없이 염색약을 시험한 결과이다. 그는 침실에 베틀을 놓고 새벽에 일어나 천을 짰으며, 모리스 본인의 기록에 따르면 첫 태피스트리(색실로 그림을 짜 넣는 직물)를 독학으로 완성하는 데 516시간 30분이 걸렸다고 한다. 이렇듯 모든 제작 과정에 밀착하여 관여한 덕에 그는 각 제품의 물성을 잘 알았고, 그에 따라 똑같은 패턴이라도 최종산물이 벽지이냐 직물이냐에 따라 각기 다른 디자인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의 산물들, 즉 벽지뿐 아니라 가구, 직물, 카펫, 스테인드글라스, 타일 등 인테리어와 관련된 전반적인 서비스를 하나의 가게에서 제공한다는, 당시로는 획기적인 비즈니스 계획을 세웠다. 모리스의 끝없는 열정과 과감한 실행력에 재능 있는 사람들을 주변에 모으는 능력이 더해져 회사는 날로 성장했다. 당대 최고의 아티스트들이 장인 정신으로 정성 들여 만든 모리스 회사의 제품들은 곧 영향력 있는 고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윽고 그의 회사는 빅토리아 여왕을 위한 벽지를 만들고,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 내 카페의 전면적인 인테리어를 맡는 등 업계에 새로운 기준을 선보이며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윌리엄 모리스 방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손대는 것마다 모든 것을 쏟아부은 사람 확고한 뜻을 세우고, 그를 실행시킬 회사를 설립해 업계 최고로 키워낸 것만으로도 그의 업적은 충분히 빛난다. 그런데 그는 사실 작가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모교인 옥스퍼드 대학이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쳐 달라고 제안할 만큼 인정받는 시인이었을 뿐 아니라 판타지 소설 작가이기도 했다. 가상의 중세 세계를 배경으로 한 영웅의 모험 이야기 <세상 저편의 숲>과 같은 소설은 <반지의 제왕>의 J.R.R. 톨킨이나 <나니아 연대기>를 집필한 C.S. 루이스 같은 후대 판타지 작가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는 또한 출판인이었다. 평생 디자인을 하고 글을 쓴 사람으로서 출판사를 세워 직접 책을 제작하는 행보는 자연스럽기도 하다. 그런데 어떤 것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는 그는 인테리어 회사를 운영하며 쌓은 심미안과 노하우, 인맥을 모두 쏟아부어 책을 만들었다. 그 결과, 그가 설립한 캠스콧 출판사는 내용 면에서뿐 아니라 형태 면에서도 평생 소장 가치가 있는 책들을 출판했다. 그는 독자적인 서체를 고안하고, 펄프 대신 삼베를 원료로 삼는 15세기의 방식으로 종이를 생산한 후 중세처럼 가죽 표지를 대어 제본했다. 친우이자 당대 최고의 화가 에드워즈 번 존스가 87개의 삽화를 그리고 자신이 직접 여백을 장식한 <초서 작품집>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공예품의 경지에 이른다. 이 책 한 권에 쏟은 모리스의 노력을 가까이서 지켜본 번 존스는 이 책을 "작은 대성당"이라고 일컬었는데 훗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이라고 불리며 컬렉터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어 왔다. ©Kotomi_, flickr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모리스는 평생 예술과 일상이 공존하는 삶, 그를 위해 아름다움과 기능성을 둘 다 지닌 공예품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보다 궁극적으로는 모두에게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그는 평생 열렬한 사회주의 운동가였으며,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좀 더 자유롭고 공정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웠다. 전국을 여행하며 강연을 하기도 하고 체포되는 것도 불사했다. 유적과 자연환경을 보존하는 일에도 에너지를 아끼지 않았다. 윌리엄 모리스가 사망하였을 때 의사는 사인(死因)을 "그저 윌리엄 모리스로 살았기 때문에, 여러 인생에 이룰 법한 업적들을 한 번의 생에 다 쑤셔 넣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업화는 계속되어 지금 우리는 단돈 2천 원에 중국에서 대량 생산된 귀걸이를 받아 볼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미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싸구려 귀걸이의 울퉁불퉁한 매무새를 손끝으로 매만지다 생각했다. 윌리엄 모리스의 이상과 실행력이 필요한 세상은 19세기보다 지금이라고.
처음 런던 내셔널 갤러리를 방문하던 날, 입구에서 지도를 받아 들고 유명 작품들이 걸린 전시실에 재빨리 동그라미를 쳤다. 그리고 종종걸음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하루 종일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래도 이왕 왔는데 미술책에 나온 그림들은 다 봐야겠고. 그렇게 고흐의 '해바라기'를, 다빈치의 '암굴의 성모'를 내 눈으로 직접 봤지만 사실 내가 그 그림에서 정확히 뭘 봤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림을 본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 런던 코톨드 갤러리가 기획한 <마네 재작업하기(Reworking Manet)>를 보고 든 생각이다.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기획된 이 프로그램은 코톨드가 소장한 수많은 명화 중 단 하나의 작품, 에두아르 마네(1832-1883)의 <폴리-베르제르 바(Un bar aux Folies-Bergère)>를 구석구석 들여다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참가자들은 코톨드 교육팀의 도움을 받아 마네가 선택한 그림의 소재와 기법부터 그들의 역사적 문맥까지 다양한 의미들을 찬찬히 읽어 냈다. 한 발 더 나아가 그 경험을 자신의 이야기로 재해석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거쳤다. <마네 재작업하기>는 이 기획으로 탄생한 작품들을 모아 놓은 전시회다. <폴리-베르제르 바>는 어떤 그림? 거대한 샹들리에가 반짝이는 폴리-베르제르는 당시 파리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이었다. 사람들과 어울려 맘껏 술을 즐길 수 있는 데다 서커스, 카바레 등의 쇼가 더해지니 각계각층의 손님들이 앞다투어 이곳을 찾았다. 그야말로 '인스타그램에 올릴 법한 요즘 제일 잘 나가는 핫 플레이스'였던 것이다. 그림 속 빽빽하게 들어찬 손님들, 그들 머리 위로 빼꼼히 보이는 재주꾼의 두 다리에서도 폴리-베르제르의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바 위에 놓인 형형색색의 술병과 유리그릇에 수북하게 담긴 오렌지가 이 공간의 풍족함을 한층 강조한다. 하지만 마네는 흥겨운 저녁 한때를 묘사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풀밭 위의 점심>, <올랭피아> 등의 전작에서 사회 규범을 외면한 도발적 주제와 전통을 벗어난 미술 기법으로 물의를 일으켜왔던 그는 마지막 걸작에서도 당대 미술계가 외면해 온 인물, 여성 노동자를 전면에 내세웠다. 흥겨운 폴리-베르제르의 분위기와 가장 대조되는 사람, 자신의 여흥이 아니라 고객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존재하는 바텐더가 이 그림의 주인공이다. 바텐더 뒤의 대형 거울에 비친 것처럼 그녀는 지금 바를 찾은 고객을 상대하는 중이지만, 공허한 얼굴에는 고단함만이 담겨있을 따름이다. 마네 재작업하기 참가자들은 먼저 <폴리-베르제르의 바>에 대한 이런 배경지식을 얻은 후 그로부터 자신에게 가장 흥미로운 주제를 뽑아냈다. 같은 그림을 함께 보았지만 아이들이 관심을 가진 주제와 표현 방식은 그야말로 제각각이다. 18세의 니콜은 카운터 위에 놓인 오렌지 더미에 시선이 갔다. 바텐더는 돈을 건네는 부유한 고객에게 오렌지를 건넬 수 있지만, 스스로 사 먹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19세기말, 과일은 사치품이었으며 그림 속 오렌지 또한 단순한 과일이 아닌 부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가파른 물가 상승으로 과일을 쉽게 살 수 없게 된 요즘 영국에서처럼 말이다. 레인과 엘리 모두 주인공인 바텐더에 주목했지만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녀를 재해석했다. 레인은 바텐더의 무표정을 사회적 가면으로 읽었다. 오늘날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수많은 여성들이 원치 않는 관심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똑같은 종류의 가면을 착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눈을 파내 감정을 읽어낼 수 없는 바텐더의 초상을 디지털 프린트로, 사회적 가면을 종이 가면으로 만들어 냈다. 엘리는 2023년 버전의 폴리-베르제르 바를 상상했다. 손님을 응대하기 위해 시선을 맞춘 마네의 바텐더와 달리 엘리의 바텐더는 손님의 요구를 묵살하고 자신의 핸드폰만 들여다볼 따름이다. 그림이 다루는 주제와 무관하게 그림 속 감각에 관심을 기울인 아이들도 있었다. 영화 <기생충>이 계급 사이에 그려진 보이지 않는 선을 넘나드는 감각으로 '냄새'에 집중했듯이, 그들은 카운터 뒤에 선 바텐더가 맡았을 법한 냄새를 연구했다. 그들은 전문 조향사와 함께 바텐더 자신의 체취나 거울 속 신사의 콧수염에서 풍겼을 법한 냄새, 오랜 세월 엎질러진 술로 끈적끈적한 바의 달큼함 등 여섯 가지 냄새로 1880년 폴리-베르제르 바를 상상해 냈다. 이라크 출신 카나의 그림은 평범한 청소년의 그것과 많이 달랐다. 마네의 바를 보고 카나가 떠올린 기억은 떠나온 고향마을, 자신의 이웃이었다. 술집 주인이던 그는 ISIS가 우상숭배를 이유로 모술 박물관을 폐허로 만들던 바로 그 해, 어린 자식들만 남긴 채 암살당했다. 카나의 그림에서 바를 지키는 것은 그래서 성숙한 여인이 아닌 어린 여자아이이다. 술병은 바 위에 고스란히 놓여있지 않고 산산조각나 사방에 흩어졌으며, 그 사이로 피가 흥건하다. 모술 박물관과 함께 파괴된 라마수 상(황소의 몸통에 독수리의 날개와 인간의 머리를 지닌 상상 속 존재)은 카날의 고향마을 입구를 지키던 수호신이기도 하다. 모술 박물관의 훼손된 기둥과 함께 등장하여 혼돈과 파괴를 한층 강조한다. '청소년들이 기껏 해봤자'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선 전시였는데, 뒤통수를 세게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마네의 그 그림은 나도 보았었는데, 나의 '봄'은 무엇이었을까. 전시된 청소년들의 작품을 돌아본 뒤, 마네의 '폴리-베르제르 바' 그림 앞으로 다시 돌아가 아예 의자를 펴고 앉았다. 이번에는 오래도록 찬찬히 그림을 들여다볼 것이다. 앉아서 천천히 그림을 감상할 수 있도록 갤러리에 마련된 이동용 의자
한 번은 영국 병원에서 “자, 이제 수술장(Operating Theatre)으로 들어가세요.”라는 안내에 화들짝 놀란 적이 있다. 사전의 1번 의미로 단어를 해석하는 외국인답게 ‘Theatre’라는 단어를 듣고 무대 위에 누운 나와 내 수술을 관람하는 관객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극장 Theatre은 그리스어 ‘보다 Thea’에서 유래되어 ‘보는 곳 Theatron’이라는 뜻을 지닌다. 어원을 생각하면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 이목이 집중되는 장소”에 극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예컨대 수술장 외에 전투가 벌어지는 전역(戰域)을 기술할 때에도 Theatre라는 단어를 쓰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극장의 의미가 잘 드러나는 또 한 곳이 이탈리아 볼로냐의 옛 대학 건물에 있다. 오페라 극장 같은 볼로냐 해부학 극장 볼로냐 대학은 무려 1088년에 설립되었다. 서양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니 ‘학문의 모체(母體)’라는 교호에 밴 자부심이 지나치지 않다. 이 볼로냐 대학이 본관으로 사용하던 아르키진나시오 궁전에 해부학 극장(Teatro Anatomico dell’Archiginnasio)이란 독특한 공간이 있다. 해부학 극장은 이름 그대로 해부를 선보이는 장소이다. 흰 대리석 해부 테이블을 중심으로 계단식 객석이 둘러싸고 있어 원형 극장의 모습을 띤다. 여기에 더해 천정에는 의학의 신 아폴론이 조각되어 있고, 극장의 사면에는 히포클라테스, 갈레노스 등 서양의학 선구자들의 조각상이 둘러서 극장을 내려다본다. 강의실 정면의 조각상이 다시 한번 방의 정체를 주지 시키는데 날개 달린 천사가 해부학을 상징하는 여인에게 꽃 대신 넓적다리뼈(non un fiore, ma un femore)를 부여한다. 기능과 위생에 치중한 차가운 현대 수술실에 비하면 차라리 오페라 극장에 가까운 모양새다. 볼로냐 해부학 극장의 내부 / 출처 : flickr ©Paul Baker 볼로냐의 자유 속에서 싹튼 학문, 해부학 볼로냐에 1000년에 이르는 역사의 대학교가 설립되고, 그 대학이 화려한 해부학 극장을 건축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볼로냐는 유럽 최초의 자유 도시였다. 12세기부터 16세기 초까지 왕이나 교황에게 지배받지 않는 자치국가로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꾸린 공화정이 도시의 운명을 결정해 왔다. 이런 자유로운 풍토를 쫓아 일찌감치 유럽 전역에서 지식인들이 몰려들었고, 중세 교회가 금지했던 인간 신체 해부가 암암리에 이루어졌다. 해부를 통해 인간 신체의 구조와 형태를 관찰하고, 그 결과를 기능에 연결하는 학문, 즉 근대 의학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해부학이 그렇게 볼로냐에서 시작한 것이다. 해부학은 교회의 금지 조치가 풀리며 한층 번창하기 시작했고, 이를 기반으로 다시금 의학이 발전했다. 이제 질병과 의학은 신의 뜻에서 벗어나 과학의 사유 아래 재편성되었다. 해부학 발전의 성과는 의학 분야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알브레히트 뒤러, 라파엘로 등 쟁쟁한 예술가들이 뼈의 형태와 근육의 움직임을 보다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직접 메스를 들었고, 이런 문화 속에 르네상스 회화의 전성기가 탄생하며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같은 거장들이 연이어 등장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510년 경에 스케치한 인간의 어깨 구조. 다빈치는 평생 30 여 구의 시체를 해부했다고 전해진다. 성대한 의식으로 해부를 연출한 볼로냐 해부학 극장 이런 복잡하고 유기적인 문맥 속에서 지어진 공간이 해부학 극장이었다. 그런데 볼로냐 해부학 극장은 처음부터 지식 전달이라는 단일 목적을 위해 설계되지 않았다. 볼로냐 대학은 1년에 한 번 해부학 강의를 대중에게 공개하는 전통을 150여 년 동안 유지해 왔다. 공개 해부 자체는 르네상스 시대 일반적인 관습이었으며, 해부학 극장 또한 유럽 여러 도시에 지어졌다. 그런데 유일무이하게 이 공개 해부를 다듬고 꾸며 공연의 형태로 재탄생시킨 곳이 볼로냐였다. 볼로냐 해부학 극장은 공연에 가까운 공개 해부라는 특성을 드러내기에 적절하도록 특별히 설계되었다. 이는 유럽 내 다른 해부학 극장의 구조와 비교해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가장 먼저 지어져 여타 해부학 극장들의 전형이 된 파두아 해부학 극장에는 좌석이 없다. 모든 참가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선 채로 해부를 지켜봐야 했으며, 이는 그들이 오직 지식을 습득하는데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반면 볼로냐 해부학 극장은 관객이 편하게 앉은 채로 여유롭게 해부를 관람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극장의 형태로 설계되었다. 파두아 해부학 극장 볼로냐 해부학 극장의 공개 해부는 카니발 축제 기간에 이뤄졌다. 1년 중 가장 추워 해부용 시체 보존이 용이했을 뿐 아니라, 카니발을 즐기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도시를 방문했기 때문이다. 이 기간 동안 ‘해부학’ 극장은 그야말로 해부학 ‘극장’이 되었다. 공개 해부학을 알리는 포스터가 공연 홍보물처럼 도시 여기저기 붙었고, 티켓을 구매한 오륙백 명의 관객은 다마스크 천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극장에 앉았다. 10일에서 15일에 걸쳐 진행된 행사의 첫날과 마지막 날은 도시의 모든 고관대작이 차려입고 참여할 정도로 성대했다. 시신의 머리맡과 발치에 놓인 밀랍 횃불이 테이블을 밝혀 관객의 주의를 휘어잡았으며 해부는 연극의 막과 장처럼 주의 깊게 짜였다. 해부에 참석한 학자들이 인간 신체에 대해 다양한 주제로 토론을 벌이는 동안 음악가들은 관객의 여흥을 돋우기 위해 배경음악을 연주했다. 볼로냐 대학은 극장과 공연이 가지는 힘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무대 위에 올리는 대상에 대중의 시선을 집중시킬 뿐 아니라 공연을 기획하는 주체의 권위를 드러내는 장치로서 말이다. 그래서 더욱 많은 사람이 찾아와 해부를 지켜보도록 100년이 넘는 시간과 공을 들여 해부학 극장을 정성껏 짓고, 한 편의 장엄한 공연처럼 연출된 의례를 통해 자신들의 영광을 한층 뽐낼 기회로 삼아왔다. 그들의 탁월한 기획력은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이 공개 해부학을 관람하기 위해 유럽 전역에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해부학 극장은 이들에게 볼거리와 화젯거리를 동시에 제공하는 한편 사교의 중심이 되었다. 심지어 이 공개 해부학에 참여하기 위해 볼로냐 대학에 적을 두었다는 기록마저 남아 있다.
놀이터로 탈바꿈하는 오페라 극장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는 한 달에 한 번, 자신들이 보유한 세계 최고의 전문인력과 막대한 인프라를 오페라나 발레 제작이 아닌 곳에 쏟아붓는다. 바로 〈패밀리 선데이〉다. 〈패밀리 선데이〉가 열리는 일요일이면 오페라 하우스는 어린이들의 놀이터로 변한다. 지하 1층부터 지상 5층까지, 건물 전체가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음악으로 가득 찬다. 매 층마다 다양한 이벤트가 두 시간 반 동안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처음 오페라 하우스를 방문한 아이들은 으레 건물의 화려함에 탄성을 내지른다. 정교한 금빛 장식물과 붉은 융단으로 뒤덮인 극장을 한눈에 담으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고 두리번 거린다. 그러다가도 이내 입맛에 맞는 활동을 찾아 거리낌 없이 극장 안을 돌아다닌다. 15분에서 30분 정도로 짤막하게 구성된 다양한 액티비티에 참여하는 방식은 간단하다. 어슬렁어슬렁 다니다가 재미있어 보이는 곳에 그냥 끼어들면 된다. 그날은 원래 무대 위나 백스테이지, 연습실에 놓여 있을 소품과 세트들이 극장 여기저기 놓인다. 공연 때면 와인잔을 손에 든 관객들로 붐비는 넓은 바 공간에는 댄스 플로어가 깔리고, 지하 로비에는 로열 발레단 연습실에서 가져온 댄스 바가 일렬로 놓인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발레단 출신의 무용수들에게 안무를 배우고 로열 발레 학교 재학생들의 공개 리허설을 구경하기도 한다. 극장 소속 오페라 가수의 진두지휘 아래 목청껏 노래할 수도 있다. 다른 한쪽에는 실제 공연에 쓰이던 오페라, 발레 의상과 소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날만큼은 누구나 그 안의 모든 의상을 마음껏 입어 볼 수 있어, 아이들은 화려한 튜튜를 입고 포즈를 잡기도 하고 늑대 가면을 뒤집어쓰고 으르렁거리기도 한다. 무대 위 격투 장면을 연출하는 전문가에게 진짜 싸우는 것처럼 보이는 연기를 배우는 시간도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다. 반짝반짝한 재킷을 갖춰 입은 페이스 페인팅 전문가들이 일렬로 앉아 있는 방도 있다. 그들은 방에 들어서는 아이들에게 공연 속 캐릭터들의 사진을 내밀며 원하는 캐릭터를 묻고, 대답에 따라 맞춤 분장을 해준다. 직접 손 쓰는 일을 좋아한다면 만들기 코너에서 악기, 꼭두각시 인형, 극장 스태프들이 착용하는 헤드셋 등 공연과 관련된 다양한 아이템을 만들어 본다. 탄탄한 인프라와 전문 인력에 더해 수십, 수백 년의 공연 제작으로 갈고닦은 상상력과 노하우가 합쳐지니 로열 오페라 하우스가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내는 창의적인 액티비티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저 노는데 여념이 없지만, 사실 그 놀이들은 모두 하나의 공통 주제에 부합하도록 세심하게 기획되어 있다. 주제는 그 달 메인 무대에서 선보이는 공연과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발레 〈호두까기〉와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이 무대에 올라가는 12월 〈패밀리 선데이〉에서 배운 춤은 〈호두까기〉 속 실제 안무고, 그들이 부른 노래는 〈헨젤과 그레텔〉 속 아리아다. 신나서 만든 진저 브래드 맨 쿠키와 커다란 마녀의 집은 오페라 3막의 무대 배경이다. 이렇게 아이들은 액티버티들을 통해 하나의 스토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접하고, 그 안의 캐릭터들 만나며 그들을 춤과 노래로, 분장과 의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부지불식간에 배운다. 나중에 우연히 〈패밀리 선데이〉에서 다룬 오페라를 보기라도 하면 아이들은 신이 나 소리친다. “어?! 나 저거 아는 노랜데?” 아이들이 만드는 세계 오페라 극장에서 신나게 하루 놀다 간 아이들은 오페라나 발레, 클래식 음악처럼 소위 말하는 ‘고급문화’에 대한 선입관이나 두려움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단지 재밌는 놀이를 하다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이들이 한 놀이들을 모두 합치면 하나의 공연이 된다. 그렇게 아이들은 멀찌감치서 구경하는 관객에 머물지 않고 직접 노래하고 춤추고, 무대 세트와 소품을 제작하며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예술가와 크리에이터들이 하는 바로 그 일이다. 분장, 연기, 춤, 노래, 소품과 무대 제작에서 의상까지 문화 예술과 관련되어 이렇게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경험을 한 번에 체험해 볼 수 있는 곳은 실제 공연을 제작하는 극장 밖에 없을 것이다. 하루에 두 번 진행되는 패밀리 선데이에는 최대 1,200명의 어린이가 찾아온다. 티켓값은 성인 17,000원, 아이 13,000원 정도로 저렴한 편이니 빠르게 매진된다. 행사의 질과 규모를 생각할 때 티켓이 다 팔렸다고 해서 오페라 극장이 큰 수익을 얻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하지만 그들은 꾸준히 매달 패밀리 선데이를 기획하고 아이들을 불러들인다. 한국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문화 예술 프로그램의 많은 부분을 백화점이나 마트의 문화센터가 담당한다. 상업시설이 문화 예술 교육을 책임지는 한국만의 독특한 현상이 흥미롭기는 하지만, 이제는 극장이 자신의 전문성을 적극 활용하여 그 역할을 되찾아 올 때도 되지 않았을까? 미래의 관객과 예술가들을 가꾸기 위해서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