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과 문화예술에 대한 글을 쓴다. <아무튼, 무대> 출간.
언더독: 걔 말고 아니 걔도 말고 나머지 브론테 (출처: 영국 국립극장) 영국 국립극장의 연극 <언더독>의 부제는 '걔 말고 아니 걔도 말고 나머지 브론테(Underdog: The Other Other Brontë)'이다. 여기서 '걔도 아니고 걔도 아닌 나머지'는 앤 브론테다. 앤은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의 작가 샬럿 브론테와 에밀리 브론테의 막냇동생. '나머지'라는 단어가 시사하듯 두 언니만큼 유명해지지 못했다. 하지만 앤 역시 작가로서 이름을 떨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맏언니 샬럿의 방해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 연극의 화자는 샬럿이다. 세 자매가 안 된다면 세 형제가 되어 언더독: 걔 말고 아니 걔도 말고 나머지 브론테 (출처: 영국 국립극장) 샬럿은 작가가 되고 싶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작가로 후세에 길이 남기 위해 필사적이다. "나는 밀려나지 않을 거야. 그 방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할 거야. 디킨스, 새커리 (윌리엄 새커리. 19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작가), 바이런과 함께 할 거야." 문제는 그녀가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는 데 있다. 빅토리아 시대(1837-1901) 여성의 역할은 가사와 육아, 그리고 남편 내조에 한정되었다. 출판사에 문의해도 훈계 일색인 일장연설을 들을 따름이다. "문학은 여성이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게다가 생계 문제가 그녀의 목을 졸랐다. 샬럿의 아버지는 가난한 성공회 사제였고, 어머니는 일찌감치 돌아가셨으며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 형제 브란웰은 알코올 중독으로 집안의 빚만 늘리고 다녔다. 직접 돈을 벌려고 해도 당시 여성이 손가락질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가정교사 정도일 뿐이다. 하지만 샬럿은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가정교사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야말로 사면초가다. 샬럿만큼 필사적이지는 않지만, 에밀리와 앤 또한 글을 쓰고 싶었다. 여성의 목소리가 허락되지 않던 시대, 자신을 드러내려면 모습을 감추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세 '자매'는 각기 커러 벨, 엘리스 벨, 액턴 벨이라는 필명을 지어 세 '형제'로 집필 활동을 시작한다. 출판을 목표로 서로의 글을 읽어주고, 비평하며 격려하던 자매들의 우애는 샬럿에 의해 금 가기 시작한다. "우린 시작부터 빌어먹을 하위 장르라고!" 언더독: 걔 말고 아니 걔도 말고 나머지 브론테 (출처: 영국 국립극장) 어떻게든 작가로 성공해야 하는 샬럿에게 자매들은 사실 경쟁자이기도 했다. 편집자가 에밀리와 앤의 소설을 선택하고 자신의 소설 <교수>는 거절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절망을 감출 수 없다. 그러므로 앤의 소설 <아그네스 그레이>의 출판이 한없이 늦춰진 것은 샬럿에게 기회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앤은 상주 가정교사로 5년간 일하며 많은 부조리를 겪었다. 신분제도가 명확한 시대였기 때문에 앤은 주인집 식구들과 대등하게 친교를 나눌 수도, 하인들과 어울릴 수도 없었다.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주인집 아이들을 지도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어떠한 권한도 갖지 못했다. 앤은 이 간극에서 오는 모순을 자전소설의 형태로 생생하게 폭로하고자 했다. 그런데 샬럿이 뒤늦게 써온 소설 속 여주인공이 자신과 꼭 닮은 데다 직업마저 가정교사란 설정이다. 앤은 자신의 책이 나올 때까지만 <제인 에어>의 출판을 늦춰달라고 언니에게 애원하지만 돌아온 것은 변명뿐이다. 원래 작가들이란 늘 비슷한 소재와 주제를 다루기 마련이라고, 책꽂이에 꽂힌 저 수많은 책들을 보라고. 앤은 항변한다. "여자들 이야기는 다르지. 언니도 알잖아. 우리는 시작부터 빌어먹을 하위 장르라고!" 언더독: 걔 말고 아니 걔도 말고 나머지 브론테 (출처: 영국 국립극장) <제인 에어>는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지만, 뒤이어 출간된 <아그네스 그레이>는 앤의 예상했던 대로 <제인 에어>의 아류로 평가절하된다. <제인 에어>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여성' 작가가 아닌 '작가'로서 평가받고 싶다는 샬럿의 꿈은 여전히 요원하다. 작가의 성별을 유추한 비평가들이 여성이 써서는 안 될 저속하고 교양 없는 책이라며 비판의 날을 세웠기 때문이다. 샬럿은 작가로서 자신의 커리어를 지키기에 여념이 없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남동생 브란웰과 에밀리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였다. 늘 자신을 존경하고 사랑하던 앤마저 쓰러졌지만, 집필에 집중하고 싶은 샬럿에게는 동생을 간병하는 일도 짐이다. 그도 잠시, 곧 앤마저 세상을 떠났다. 샬럿은 8개월 만에 모든 형제자매를 잃었다. 샬럿을 위한 변명 제목과 달리 이 연극의 중심에는 막내 앤이 아닌 첫째 샬럿이 있다. 그리고 샬럿은 좋아하기 힘든 주인공이다. 특히 에밀리와 앤이 죽은 후 샬럿의 행동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혼자 남은 샬럿은 작가로서 명성을 지키기 위해 넘지 못할 선이 없었다. 샬럿은 자신의 입맛대로 에밀리의 시집을 꼼꼼히 고친다. 심지어 출판 6주 만에 초판이 매진될 만큼 인기를 끌었던 앤의 마지막 소설 <와일드펠 홀의 세입자>가 재인쇄되는 것도 막는다. 알코올 중독과 가정폭력을 적나라하게 다룬 이 소설이 더 이상 앤의 명성을 더럽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브리티쉬 라이브러리가 보관 중인 <제인 에어>의 친필 원고. 제목 밑으로 샬럿 브론테의 필명 커러 벨이 보인다. (출처: 브리티쉬 라이브러리 페이스북) 연극이 끝난 후 오래간만에 <제인 에어>를 꺼내 보았다. 신분, 외모, 재산 어느 하나 없지만 불합리한 권위에 끝까지 저항하는 제인, 오로지 자신의 지성과 의지만으로 끝내 행복을 쟁취한 제인. 여성을 가정 안에 가두고 현모양처만을 강요하던 빅토리아 시대에 이 소설이 불러 일으켰던 논란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샬럿의 친구로 그녀의 전기까지 쓴 엘리자베스 가스켈마저 정작 자신의 딸에게는 스무 살까지 <제인 에어>를 읽지 못하게 막았다고 한다. 관객은 연극 내내 계속된 변명과 자기 정당화를 늘어놓는 샬럿을 경멸해야 할지, 그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던 시대를 탓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다. 샬럿을 위한 변명은 <제인 에어>가 대신 하도록 두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런던 웨스트엔드의 뮤지컬 <겨울왕국>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아이가 3년째 "레리꼬"를 목청껏 불러왔기 때문이다. 아이들 공연이지만 티켓 가격은 성인 공연과 다르지 않아 5만 원부터 25만 원 선이다. 아이가 아무리 <겨울왕국>을 좋아한다고 한들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아직 단념은 이르니 '마법의 월요일(Magical Mondays) 티켓'을 노리면 된다! 디즈니는 '마법의 월요일'이라는 이름으로 매주 월요일 12시, <라이언 킹>이나 <겨울 왕국> 등 그 주에 공연될 뮤지컬 티켓 수십 장을 저렴한 단일가에 판매한다. 사실 이름과 디테일만 조금씩 다를 뿐, 웨스트엔드의 많은 공연들이 비슷한 형식의 할인 티켓을 제공한다. 공연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이런 전통은 불과 30년 전, 뉴욕 슬럼의 한 가난한 젊은이에게서 시작됐다. 선착순 34명 안에 들기: 러시 티켓 조너선 라슨과 뮤지컬 <렌트> 1996년, 조너선 라슨은 뮤지컬 <렌트>를 세상에 선보였다. 웨이터로 일하면서 어렵게 번 돈으로 7년간 고군분투하며 만든 이 뮤지컬은 라슨과 그 친구들처럼 가난하고 젊은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비록 라슨은 개막 전날 세상을 떠났지만, <렌트>는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4개의 토니상에 퓰리처상까지 수상한 <렌트>의 티켓은 밥 한 끼 사 먹을 돈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뮤지컬 속 청춘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수준의 가격이 아니었다. 제작진은 이 같은 아이러니를 극복하고자 획기적인 결정을 내린다. 공연 2시간 전부터 객석 첫 두 줄, 즉 34장의 티켓을 20달러에 파는 것이다. 선착순 판매였기 때문에 '서두르다, 돌진하다'라는 뜻의 '러시 티켓'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전에도 브로드웨이에 할인 티켓들은 있었지만 이는 주로 '학생'을 위한 제도였다. <렌트>는 그와 달리 할인 티켓을 구매하기 위한 어떠한 자격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 결과 행운을 거머쥐기 위해 극장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기 시작했고, 가장 열광적인 팬들이 극장 맨 앞에 포진하며 자연스레 열정적인 공연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혹자는 영리한 마케팅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공연을 보고 싶은 이들의 간절함에 대한 배려도 한몫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공연의 인기가 늘어갈수록 이 할인 티켓을 사려는 사람들의 줄은 길어져만 갔고, 급기야 통제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텐트를 치고 노숙하는 이들마저 생기자 안전에 대한 우려의 소리 또한 높았다. 결국 1년 후, <렌트>는 할인 티켓의 선착순 판매를 추첨 형식으로 대체하고 이를 '로터리 티켓'이라 이름 지었다. 매일 공연 2시간 전, 극장 박스오피스에 이름을 적어낸 사람들 중에 34명을 뽑아 할인 티켓을 살 수 있게 해준 것이다. '로터리 티켓'의 승자. 출처 : 뉴욕타임스 러시 티켓의 진화: <해밀턴>의 #ham4ham <렌트>의 이런 추첨 방식은 여타 공연에서도 모방하며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21세기 브로드웨이 최고의 히트작이라 불리는 뮤지컬 <해밀턴> 또한 한동안 매일 로터리 티켓을 제공했다. 그들은 단순히 당첨자를 호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즉석 공연을 곁들여서 추첨을 진행했다. 이 작은 축제 같은 행사는 빈약한 주머니로도 어떻게든 공연을 보고 싶어 찾아온 이들에 대한 보답이면서, 떠들썩한 길거리 공연을 통해 뮤지컬을 널리 알리는 수단이기도 했다. #ham4ham이라 불리는 이 공연은<해밀턴> 전용 극장 앞 계단에서 이뤄진다. 지나가던 행인도, 일말의 행운을 기대하며 추첨 용지에 자신의 이름을 적은 이들도 모두 지근거리에서 생생한 이벤트를 즐길 수 있다. 공연은 그날그날 다를 뿐더러 내용이 기상천외해 그 자체로 화제가 되었다. <해밀턴> 출연진들이 남녀 역할을 바꿔 뮤지컬 속 대표 넘버를 장난스럽게 선보인 날도 있었다. 새로 오픈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출연진들이 찾아와 노래로 자신들의 뮤지컬을 홍보하기도 했다. <해밀턴>의 작사, 작곡, 연출, 주연을 맡은 린 마뉴엘 미란다가 전설적인 레아 살롱가와 간소한 멜로디언 반주에 맞춰 뮤지컬 <알라딘>의 "A Whole New World"를 부르는 모습은 영상만으로도 흐뭇하다. 코로나 거치며 '온라인 줄 서기' 코로나 시기를 지나며 공연예술계는 다방면에서 변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러시 티켓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거리두기 등으로 인해 이전 방식을 고수하기에 여러 가지 제약이 뒤따르자 러시 티켓, 로터리 티켓 모두 온라인으로 옮겨왔다. 매일 극장 앞에서 당일 할인 티켓을 추첨해 뽑던 <해밀턴>은 현재 일주일에 한 번, 한 주치의 할인 티켓을 10달러에 판매하는 온라인 로터리 제도를 활용하고 있다. 개인 SNS에 응모 사실을 공유하면 당첨 확률이 높아진다. 극장 앞에 길게 늘어서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던 <렌트>의 줄은 이제 온라인 포스팅으로 입소문을 낸다. 이렇듯 세월과 함께 방식은 바뀌었지만 저렴한 가격에 공연을 볼 수 있는 행운은 여전히 계속된다. 현재 웨스트엔드에서 할인 티켓을 제공하는 공연들은 앞서 언급한 <프로즌>, <라이언 킹>을 비롯해 <하데스 타운>, <백 투 더 퓨처>, <기묘한 이야기> 등 그 리스트가 무척 길다. 나 또한 여러 번의 예행연습과 많은 실패를 거친 결과, 클릭 속도가 관건인 <겨울왕국>의 러시 티켓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정가 15만 원짜리 1층 좌석을 5만 원에 샀으니, 이 정도면 그간의 노력이 아깝지 않다.
사진=로열 오페라 하우스 공식 홈페이지 한 미군이 주둔 중인 아시아 국가에서 현지인 10대 소녀와 사랑을 나눈 후 본국으로 귀환했다. 남겨진 소녀는 미혼모가 되고, 이웃들은 그런 그녀를 차갑게 외면한다. 3년 후 아들의 존재를 알게 된 남자는 미국인 아내와 함께 찾아온다.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소녀는 아들이나마 아빠와 미국에서 보다 나은 미래를 누릴 수 있도록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만일 당신이 20대 소녀라면 자신의 이야기를 러브 스토리라 표현하지 않을 것이다. '주변의 손가락질에도 홀로 아이를 키우며 지고지순하게 기다렸더니, 사실 버림받은 지 오래다. 내 귀에 달과 별을 속삭이던 그 남자는 어느새 본처까지 두었네?' 그러나 이 내러티브는 뮤지컬 <미스 사이공>에서, 그 이전에는 오페라 <나비부인>에서 반복되어 러브 스토리로 포장되어 왔다. <미스 사이공>의 베트남 소녀 킴은 17살, <나비부인>의 일본 소녀 초초상은 그보다 어린 15살이었으며 각각 총과 칼로 자살하는데도 말이다. <미스 사이공>을 둘러싼 논쟁 사실 <미스 사이공>은 공연 초기부터 여러모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1989년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성공적인 초연을 시작으로 1990년 뉴욕 브로드웨이로 진출하려 했을 때 아시아 혼혈 캐릭터를 백인 배우가 연기하는 '옐로우 페이스'에 대한 반대가 컸다. 특히나 인종이 캐릭터의 정체성에 큰 역할을 하는 <미스 사이공> 서사의 특성상 반대의 목소리는 클 수밖에 없었고, 논쟁이 정점에 이르는 1990년 8월에는 뉴욕타임스 1면에 관련 기사가 8건이나 실릴 정도로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제작자 캐머론 맥킨토시는 큰 피해를 무릅쓰고 브로드웨이 공연을 취소하는 것까지 진지하게 고려했지만, 결국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사회가 진보할수록 이 뮤지컬에 내재된 다양한 문제점들이 두드러졌다. 열등하고 정형화된 존재로 아시아인들을 묘사하는 서구의 시선, 엉터리 베트남어 등 타문화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끼어 맞추기식 문화 전용, 수동적인 희생양으로 여성을 그리는 방식, 1막에 출연한 모든 베트남 여성과 2막의 모든 태국 여성을 창녀로 묘사한 점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결국 작년에는 <미스 사이공>의 시대착오적 플롯을 비꼬는 연극 <Untitled F*ck M*ss S**gon>가 한국계 미국인 킴버 리에 의해 집필되어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관련된 내용은 여기) 1989년, 한 토크쇼에 출연해 아시아 혼혈 캐릭터, 엔지니어가 되기 위한 특수 분장을 설명하는 배우 조너선 프라이스 (관련 영상은 여기) 오페라 <나비부인>의 뒤바뀐 피부색 사진=로열 오페라 하우스 공식 홈페이지 오페라 <나비부인>은 <미스 사이공>에 직접적인 영감을 준 작품이다. 배경과 디테일은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얘기다. 짧고 불같은 연애, 떠나간 미국 남자, 혼자 아이를 낳고 끝내 자살하는 동양 여자. 20세기 초 이탈리아 남자의 시각에서 일본을 배경으로 쓰인 <나비부인>에도 현대의 시선에서 부적절한 부분이 <미스 사이공>만큼 많다. 따라서 현대 오페라 극장들은 나름의 대응 방식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일본 문화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거나 제작진에 일본인을 포함시켜 그들의 의견을 직접 듣기도 한다. 현재 영국 로열 오페라 하우스는 지금껏 유례가 없던 뜻밖의 캐스팅으로 <나비부인>을 공연 중이다. 일본 게이샤인 초초상 역에 아르메니아 출신의 소프라노 흐라추이 바센즈가, 미 해병인 핑커튼 역에 한국인 테너 백석종을 선택한 것이다. 극 중 캐릭터의 인종이 뒤바뀐 셈이다. (바리톤에서 테너로 전환하자마자 로열 오페라 하우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등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백석종의 소설 같은 이야기는 일전 인터뷰에서 다룬 바 있다. 인터뷰는 여기) 나비부인 초조상(가운데)과 아들(오른쪽). 그 오른쪽이 핑커톤 역의 한국인 테너 백석종 이런 캐스팅은 <미스 사이공>에서라면 불가능했을 테지만 오페라는 전통적으로 외모에 덜 얽매이는 장르다. 캐릭터의 적합성을 따지는 기준은 눈으로 보는 외모보다 귀로 듣는 목소리다. 가수가 캐릭터의 노래를 소화할 수 있는 음역대와 성량, 역량을 지녔는가, 음색은 어울리는가 등이 캐스팅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그래서 체중이 감소하는 질병, 폐결핵을 시름시름 앓다 죽어가는 여주인공이 무척 건장하다거나 싱그러운 젊은 연인들을 4, 50대의 가수들이 소화하는 경우도 흔하다. 같은 맥락에서 오페라 <나비부인>의 일본인 초초상 역이나 <아이다>의 에티오피아 공주 등을 백인 가수로 캐스팅해도 영화나 뮤지컬에서처럼 '화이트 워싱'이라는 비판을 받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백인 소프라노의 초초상은 수없이 보았지만 동양인 테너가 연기한 핑커튼은 처음이었다. 무대의 이질적인 이미지에 낯설기도 잠시, 시각보다 청각이 중요한 장르니만큼 핑커튼과 초초상의 목소리, 그리고 음악 자체가 외모의 이질감을 단박에 희석시켰다. 정작 감상을 방해한 요소는 다른 것이었다. 아름다운 봄날, 하늘하늘 떨어지는 벚꽃을 악보에 옮겨놓은 듯 아름다운 푸치니의 음악과, 음악으로 드라마를 쌓아가는 그 능란한 기술이 아무리 감탄을 자아내어도, 가사에 덕지덕지 붙어 흐르는 인종 차별과 여성 혐오에 대해서는 도저히 '흐린 눈'을 하기 어려웠다. 초초상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간 우수수 떨어지는 하얀 꽃잎, 극적으로 휘몰아치는 오케스트라로 막이 내렸을 때 관객석에서는 열화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지만, 동양인 여성 관객의 입장에서는 한 호흡 쉬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름답게 극화된 그녀의 죽음에 입안이 썼기 때문이다.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는 훌륭한 음악에 녹아 있어도 어떤 이야기들은 유통기한이 있다.
얼마 전 친구가 깔깔거리며 알리익스프레스에서 2천 원에 산 귀걸이를 내밀었다. 화면상으로는 그럴듯했는데 눈앞의 실물은 딱 인형용 플라스틱 귀걸이였다. '윌리엄 모리스가 이 귀걸이를 봤다면 참 가슴 아팠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윌리엄 모리스(1834-1896)라는 이름은 많은 이들에게 생소할 것이다. 들어본 사람들도 예쁜 벽지 만든 영국인 정도로 치부하기 쉽다. 하지만 그는 19세기 영국 사회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였으며, 그의 이름 뒤에는 디자이너이자 공예예술가, 사업가, 시인, 소설가, 출판인, 사회주의 운동가 그리고 환경보호자라는 긴 타이틀이 달린다. 쓸모없거나 아름답지 않은 물건은 집에 두지 마라 모리스는 부유한 중산층에서 태어나 한적한 시골에서 여유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며 자연에 대한 깊은 애착을 가지게 되었다. 데이지꽃, 인동덩굴, 딸기와 같이 영국 시골길에서 흔히 접하는 소박하고 친근한 식물들은 훗날 그가 디자인한 벽지나 패브릭에 반복하여 등장하는 모티브가 된다. 출처 : rawpixel.com 자연에 대한 사랑은 단순한 영감 이상으로 그의 삶 전체를 추동하는 요인이었다. 모리스는 산업혁명의 모순이 격화되던 시기를 살았다. 대량 생산이 가능해져 물건값은 내려갔지만 하나같이 획일화되어 무미건조한 데다 품질은 형편없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물건을 사들였고, 노동자들은 더 많은 물건을 더 빨리 생산하기 위해 비인간적인 작업 환경을 감내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이 과정에서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자연환경이 급속도로 파괴되어 갔다. 이런 세태에 분노한 그는 디자인 산업 전반, 나아가서는 소비자의 취향까지 영향을 미치겠다는 원대한 뜻을 세운다. 그는 예술과 일상이 공존하는 삶을 꿈꿨고, 사람들이 정성껏 공들여 만든 아름다운 물건들에 둘러싸여 살기를 원했다. 모리스는 직접 시대의 흐름을 바꾸고자 지인들과 인테리어 회사를 설립했다. 그는 입으로만 떠드는 순진한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 자사의 제품 디자인을 맡은 디자이너인 동시에 그 결과물인 상품을 대중에게 판매하는 사업가로서 자신의 역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자신이 디자인한 물건들을 직접 만들 수 있는 제작자이기도 했다. 산업화와 더불어 디자이너와 제작자가 분리되기 시작했지만, 그는 그런 작업 방식에 질색했다. 보다 나은 디자인을 위해서는 자신이 디자인한 모든 제품들을 스스로 제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은 그는 부단히 기술을 연마했다. 윌리엄 모리스의 1875년 벽지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드는 영상. 제작에는 4주의 시간, 15개의 색상, 30개의 블록이 사용된다. 그의 손은 종종 푸른색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파란색의 이상적인 색조를 찾고자 끝없이 염색약을 시험한 결과이다. 그는 침실에 베틀을 놓고 새벽에 일어나 천을 짰으며, 모리스 본인의 기록에 따르면 첫 태피스트리(색실로 그림을 짜 넣는 직물)를 독학으로 완성하는 데 516시간 30분이 걸렸다고 한다. 이렇듯 모든 제작 과정에 밀착하여 관여한 덕에 그는 각 제품의 물성을 잘 알았고, 그에 따라 똑같은 패턴이라도 최종산물이 벽지이냐 직물이냐에 따라 각기 다른 디자인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의 산물들, 즉 벽지뿐 아니라 가구, 직물, 카펫, 스테인드글라스, 타일 등 인테리어와 관련된 전반적인 서비스를 하나의 가게에서 제공한다는, 당시로는 획기적인 비즈니스 계획을 세웠다. 모리스의 끝없는 열정과 과감한 실행력에 재능 있는 사람들을 주변에 모으는 능력이 더해져 회사는 날로 성장했다. 당대 최고의 아티스트들이 장인 정신으로 정성 들여 만든 모리스 회사의 제품들은 곧 영향력 있는 고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윽고 그의 회사는 빅토리아 여왕을 위한 벽지를 만들고,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 내 카페의 전면적인 인테리어를 맡는 등 업계에 새로운 기준을 선보이며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윌리엄 모리스 방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손대는 것마다 모든 것을 쏟아부은 사람 확고한 뜻을 세우고, 그를 실행시킬 회사를 설립해 업계 최고로 키워낸 것만으로도 그의 업적은 충분히 빛난다. 그런데 그는 사실 작가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모교인 옥스퍼드 대학이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쳐 달라고 제안할 만큼 인정받는 시인이었을 뿐 아니라 판타지 소설 작가이기도 했다. 가상의 중세 세계를 배경으로 한 영웅의 모험 이야기 <세상 저편의 숲>과 같은 소설은 <반지의 제왕>의 J.R.R. 톨킨이나 <나니아 연대기>를 집필한 C.S. 루이스 같은 후대 판타지 작가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는 또한 출판인이었다. 평생 디자인을 하고 글을 쓴 사람으로서 출판사를 세워 직접 책을 제작하는 행보는 자연스럽기도 하다. 그런데 어떤 것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는 그는 인테리어 회사를 운영하며 쌓은 심미안과 노하우, 인맥을 모두 쏟아부어 책을 만들었다. 그 결과, 그가 설립한 캠스콧 출판사는 내용 면에서뿐 아니라 형태 면에서도 평생 소장 가치가 있는 책들을 출판했다. 그는 독자적인 서체를 고안하고, 펄프 대신 삼베를 원료로 삼는 15세기의 방식으로 종이를 생산한 후 중세처럼 가죽 표지를 대어 제본했다. 친우이자 당대 최고의 화가 에드워즈 번 존스가 87개의 삽화를 그리고 자신이 직접 여백을 장식한 <초서 작품집>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공예품의 경지에 이른다. 이 책 한 권에 쏟은 모리스의 노력을 가까이서 지켜본 번 존스는 이 책을 "작은 대성당"이라고 일컬었는데 훗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이라고 불리며 컬렉터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어 왔다. ©Kotomi_, flickr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모리스는 평생 예술과 일상이 공존하는 삶, 그를 위해 아름다움과 기능성을 둘 다 지닌 공예품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보다 궁극적으로는 모두에게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그는 평생 열렬한 사회주의 운동가였으며,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좀 더 자유롭고 공정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웠다. 전국을 여행하며 강연을 하기도 하고 체포되는 것도 불사했다. 유적과 자연환경을 보존하는 일에도 에너지를 아끼지 않았다. 윌리엄 모리스가 사망하였을 때 의사는 사인(死因)을 "그저 윌리엄 모리스로 살았기 때문에, 여러 인생에 이룰 법한 업적들을 한 번의 생에 다 쑤셔 넣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업화는 계속되어 지금 우리는 단돈 2천 원에 중국에서 대량 생산된 귀걸이를 받아 볼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미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싸구려 귀걸이의 울퉁불퉁한 매무새를 손끝으로 매만지다 생각했다. 윌리엄 모리스의 이상과 실행력이 필요한 세상은 19세기보다 지금이라고.
처음 런던 내셔널 갤러리를 방문하던 날, 입구에서 지도를 받아 들고 유명 작품들이 걸린 전시실에 재빨리 동그라미를 쳤다. 그리고 종종걸음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하루 종일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래도 이왕 왔는데 미술책에 나온 그림들은 다 봐야겠고. 그렇게 고흐의 '해바라기'를, 다빈치의 '암굴의 성모'를 내 눈으로 직접 봤지만 사실 내가 그 그림에서 정확히 뭘 봤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림을 본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 런던 코톨드 갤러리가 기획한 <마네 재작업하기(Reworking Manet)>를 보고 든 생각이다.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기획된 이 프로그램은 코톨드가 소장한 수많은 명화 중 단 하나의 작품, 에두아르 마네(1832-1883)의 <폴리-베르제르 바(Un bar aux Folies-Bergère)>를 구석구석 들여다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참가자들은 코톨드 교육팀의 도움을 받아 마네가 선택한 그림의 소재와 기법부터 그들의 역사적 문맥까지 다양한 의미들을 찬찬히 읽어 냈다. 한 발 더 나아가 그 경험을 자신의 이야기로 재해석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거쳤다. <마네 재작업하기>는 이 기획으로 탄생한 작품들을 모아 놓은 전시회다. <폴리-베르제르 바>는 어떤 그림? 거대한 샹들리에가 반짝이는 폴리-베르제르는 당시 파리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이었다. 사람들과 어울려 맘껏 술을 즐길 수 있는 데다 서커스, 카바레 등의 쇼가 더해지니 각계각층의 손님들이 앞다투어 이곳을 찾았다. 그야말로 '인스타그램에 올릴 법한 요즘 제일 잘 나가는 핫 플레이스'였던 것이다. 그림 속 빽빽하게 들어찬 손님들, 그들 머리 위로 빼꼼히 보이는 재주꾼의 두 다리에서도 폴리-베르제르의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바 위에 놓인 형형색색의 술병과 유리그릇에 수북하게 담긴 오렌지가 이 공간의 풍족함을 한층 강조한다. 하지만 마네는 흥겨운 저녁 한때를 묘사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풀밭 위의 점심>, <올랭피아> 등의 전작에서 사회 규범을 외면한 도발적 주제와 전통을 벗어난 미술 기법으로 물의를 일으켜왔던 그는 마지막 걸작에서도 당대 미술계가 외면해 온 인물, 여성 노동자를 전면에 내세웠다. 흥겨운 폴리-베르제르의 분위기와 가장 대조되는 사람, 자신의 여흥이 아니라 고객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존재하는 바텐더가 이 그림의 주인공이다. 바텐더 뒤의 대형 거울에 비친 것처럼 그녀는 지금 바를 찾은 고객을 상대하는 중이지만, 공허한 얼굴에는 고단함만이 담겨있을 따름이다. 마네 재작업하기 참가자들은 먼저 <폴리-베르제르의 바>에 대한 이런 배경지식을 얻은 후 그로부터 자신에게 가장 흥미로운 주제를 뽑아냈다. 같은 그림을 함께 보았지만 아이들이 관심을 가진 주제와 표현 방식은 그야말로 제각각이다. 18세의 니콜은 카운터 위에 놓인 오렌지 더미에 시선이 갔다. 바텐더는 돈을 건네는 부유한 고객에게 오렌지를 건넬 수 있지만, 스스로 사 먹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19세기말, 과일은 사치품이었으며 그림 속 오렌지 또한 단순한 과일이 아닌 부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가파른 물가 상승으로 과일을 쉽게 살 수 없게 된 요즘 영국에서처럼 말이다. 레인과 엘리 모두 주인공인 바텐더에 주목했지만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녀를 재해석했다. 레인은 바텐더의 무표정을 사회적 가면으로 읽었다. 오늘날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수많은 여성들이 원치 않는 관심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똑같은 종류의 가면을 착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눈을 파내 감정을 읽어낼 수 없는 바텐더의 초상을 디지털 프린트로, 사회적 가면을 종이 가면으로 만들어 냈다. 엘리는 2023년 버전의 폴리-베르제르 바를 상상했다. 손님을 응대하기 위해 시선을 맞춘 마네의 바텐더와 달리 엘리의 바텐더는 손님의 요구를 묵살하고 자신의 핸드폰만 들여다볼 따름이다. 그림이 다루는 주제와 무관하게 그림 속 감각에 관심을 기울인 아이들도 있었다. 영화 <기생충>이 계급 사이에 그려진 보이지 않는 선을 넘나드는 감각으로 '냄새'에 집중했듯이, 그들은 카운터 뒤에 선 바텐더가 맡았을 법한 냄새를 연구했다. 그들은 전문 조향사와 함께 바텐더 자신의 체취나 거울 속 신사의 콧수염에서 풍겼을 법한 냄새, 오랜 세월 엎질러진 술로 끈적끈적한 바의 달큼함 등 여섯 가지 냄새로 1880년 폴리-베르제르 바를 상상해 냈다. 이라크 출신 카나의 그림은 평범한 청소년의 그것과 많이 달랐다. 마네의 바를 보고 카나가 떠올린 기억은 떠나온 고향마을, 자신의 이웃이었다. 술집 주인이던 그는 ISIS가 우상숭배를 이유로 모술 박물관을 폐허로 만들던 바로 그 해, 어린 자식들만 남긴 채 암살당했다. 카나의 그림에서 바를 지키는 것은 그래서 성숙한 여인이 아닌 어린 여자아이이다. 술병은 바 위에 고스란히 놓여있지 않고 산산조각나 사방에 흩어졌으며, 그 사이로 피가 흥건하다. 모술 박물관과 함께 파괴된 라마수 상(황소의 몸통에 독수리의 날개와 인간의 머리를 지닌 상상 속 존재)은 카날의 고향마을 입구를 지키던 수호신이기도 하다. 모술 박물관의 훼손된 기둥과 함께 등장하여 혼돈과 파괴를 한층 강조한다. '청소년들이 기껏 해봤자'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선 전시였는데, 뒤통수를 세게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마네의 그 그림은 나도 보았었는데, 나의 '봄'은 무엇이었을까. 전시된 청소년들의 작품을 돌아본 뒤, 마네의 '폴리-베르제르 바' 그림 앞으로 다시 돌아가 아예 의자를 펴고 앉았다. 이번에는 오래도록 찬찬히 그림을 들여다볼 것이다. 앉아서 천천히 그림을 감상할 수 있도록 갤러리에 마련된 이동용 의자
한 번은 영국 병원에서 “자, 이제 수술장(Operating Theatre)으로 들어가세요.”라는 안내에 화들짝 놀란 적이 있다. 사전의 1번 의미로 단어를 해석하는 외국인답게 ‘Theatre’라는 단어를 듣고 무대 위에 누운 나와 내 수술을 관람하는 관객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극장 Theatre은 그리스어 ‘보다 Thea’에서 유래되어 ‘보는 곳 Theatron’이라는 뜻을 지닌다. 어원을 생각하면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 이목이 집중되는 장소”에 극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예컨대 수술장 외에 전투가 벌어지는 전역(戰域)을 기술할 때에도 Theatre라는 단어를 쓰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극장의 의미가 잘 드러나는 또 한 곳이 이탈리아 볼로냐의 옛 대학 건물에 있다. 오페라 극장 같은 볼로냐 해부학 극장 볼로냐 대학은 무려 1088년에 설립되었다. 서양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니 ‘학문의 모체(母體)’라는 교호에 밴 자부심이 지나치지 않다. 이 볼로냐 대학이 본관으로 사용하던 아르키진나시오 궁전에 해부학 극장(Teatro Anatomico dell’Archiginnasio)이란 독특한 공간이 있다. 해부학 극장은 이름 그대로 해부를 선보이는 장소이다. 흰 대리석 해부 테이블을 중심으로 계단식 객석이 둘러싸고 있어 원형 극장의 모습을 띤다. 여기에 더해 천정에는 의학의 신 아폴론이 조각되어 있고, 극장의 사면에는 히포클라테스, 갈레노스 등 서양의학 선구자들의 조각상이 둘러서 극장을 내려다본다. 강의실 정면의 조각상이 다시 한번 방의 정체를 주지 시키는데 날개 달린 천사가 해부학을 상징하는 여인에게 꽃 대신 넓적다리뼈(non un fiore, ma un femore)를 부여한다. 기능과 위생에 치중한 차가운 현대 수술실에 비하면 차라리 오페라 극장에 가까운 모양새다. 볼로냐 해부학 극장의 내부 / 출처 : flickr ©Paul Baker 볼로냐의 자유 속에서 싹튼 학문, 해부학 볼로냐에 1000년에 이르는 역사의 대학교가 설립되고, 그 대학이 화려한 해부학 극장을 건축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볼로냐는 유럽 최초의 자유 도시였다. 12세기부터 16세기 초까지 왕이나 교황에게 지배받지 않는 자치국가로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꾸린 공화정이 도시의 운명을 결정해 왔다. 이런 자유로운 풍토를 쫓아 일찌감치 유럽 전역에서 지식인들이 몰려들었고, 중세 교회가 금지했던 인간 신체 해부가 암암리에 이루어졌다. 해부를 통해 인간 신체의 구조와 형태를 관찰하고, 그 결과를 기능에 연결하는 학문, 즉 근대 의학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해부학이 그렇게 볼로냐에서 시작한 것이다. 해부학은 교회의 금지 조치가 풀리며 한층 번창하기 시작했고, 이를 기반으로 다시금 의학이 발전했다. 이제 질병과 의학은 신의 뜻에서 벗어나 과학의 사유 아래 재편성되었다. 해부학 발전의 성과는 의학 분야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알브레히트 뒤러, 라파엘로 등 쟁쟁한 예술가들이 뼈의 형태와 근육의 움직임을 보다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직접 메스를 들었고, 이런 문화 속에 르네상스 회화의 전성기가 탄생하며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같은 거장들이 연이어 등장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510년 경에 스케치한 인간의 어깨 구조. 다빈치는 평생 30 여 구의 시체를 해부했다고 전해진다. 성대한 의식으로 해부를 연출한 볼로냐 해부학 극장 이런 복잡하고 유기적인 문맥 속에서 지어진 공간이 해부학 극장이었다. 그런데 볼로냐 해부학 극장은 처음부터 지식 전달이라는 단일 목적을 위해 설계되지 않았다. 볼로냐 대학은 1년에 한 번 해부학 강의를 대중에게 공개하는 전통을 150여 년 동안 유지해 왔다. 공개 해부 자체는 르네상스 시대 일반적인 관습이었으며, 해부학 극장 또한 유럽 여러 도시에 지어졌다. 그런데 유일무이하게 이 공개 해부를 다듬고 꾸며 공연의 형태로 재탄생시킨 곳이 볼로냐였다. 볼로냐 해부학 극장은 공연에 가까운 공개 해부라는 특성을 드러내기에 적절하도록 특별히 설계되었다. 이는 유럽 내 다른 해부학 극장의 구조와 비교해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가장 먼저 지어져 여타 해부학 극장들의 전형이 된 파두아 해부학 극장에는 좌석이 없다. 모든 참가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선 채로 해부를 지켜봐야 했으며, 이는 그들이 오직 지식을 습득하는데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반면 볼로냐 해부학 극장은 관객이 편하게 앉은 채로 여유롭게 해부를 관람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극장의 형태로 설계되었다. 파두아 해부학 극장 볼로냐 해부학 극장의 공개 해부는 카니발 축제 기간에 이뤄졌다. 1년 중 가장 추워 해부용 시체 보존이 용이했을 뿐 아니라, 카니발을 즐기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도시를 방문했기 때문이다. 이 기간 동안 ‘해부학’ 극장은 그야말로 해부학 ‘극장’이 되었다. 공개 해부학을 알리는 포스터가 공연 홍보물처럼 도시 여기저기 붙었고, 티켓을 구매한 오륙백 명의 관객은 다마스크 천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극장에 앉았다. 10일에서 15일에 걸쳐 진행된 행사의 첫날과 마지막 날은 도시의 모든 고관대작이 차려입고 참여할 정도로 성대했다. 시신의 머리맡과 발치에 놓인 밀랍 횃불이 테이블을 밝혀 관객의 주의를 휘어잡았으며 해부는 연극의 막과 장처럼 주의 깊게 짜였다. 해부에 참석한 학자들이 인간 신체에 대해 다양한 주제로 토론을 벌이는 동안 음악가들은 관객의 여흥을 돋우기 위해 배경음악을 연주했다. 볼로냐 대학은 극장과 공연이 가지는 힘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무대 위에 올리는 대상에 대중의 시선을 집중시킬 뿐 아니라 공연을 기획하는 주체의 권위를 드러내는 장치로서 말이다. 그래서 더욱 많은 사람이 찾아와 해부를 지켜보도록 100년이 넘는 시간과 공을 들여 해부학 극장을 정성껏 짓고, 한 편의 장엄한 공연처럼 연출된 의례를 통해 자신들의 영광을 한층 뽐낼 기회로 삼아왔다. 그들의 탁월한 기획력은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이 공개 해부학을 관람하기 위해 유럽 전역에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해부학 극장은 이들에게 볼거리와 화젯거리를 동시에 제공하는 한편 사교의 중심이 되었다. 심지어 이 공개 해부학에 참여하기 위해 볼로냐 대학에 적을 두었다는 기록마저 남아 있다.
놀이터로 탈바꿈하는 오페라 극장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는 한 달에 한 번, 자신들이 보유한 세계 최고의 전문인력과 막대한 인프라를 오페라나 발레 제작이 아닌 곳에 쏟아붓는다. 바로 〈패밀리 선데이〉다. 〈패밀리 선데이〉가 열리는 일요일이면 오페라 하우스는 어린이들의 놀이터로 변한다. 지하 1층부터 지상 5층까지, 건물 전체가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음악으로 가득 찬다. 매 층마다 다양한 이벤트가 두 시간 반 동안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처음 오페라 하우스를 방문한 아이들은 으레 건물의 화려함에 탄성을 내지른다. 정교한 금빛 장식물과 붉은 융단으로 뒤덮인 극장을 한눈에 담으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고 두리번 거린다. 그러다가도 이내 입맛에 맞는 활동을 찾아 거리낌 없이 극장 안을 돌아다닌다. 15분에서 30분 정도로 짤막하게 구성된 다양한 액티비티에 참여하는 방식은 간단하다. 어슬렁어슬렁 다니다가 재미있어 보이는 곳에 그냥 끼어들면 된다. 그날은 원래 무대 위나 백스테이지, 연습실에 놓여 있을 소품과 세트들이 극장 여기저기 놓인다. 공연 때면 와인잔을 손에 든 관객들로 붐비는 넓은 바 공간에는 댄스 플로어가 깔리고, 지하 로비에는 로열 발레단 연습실에서 가져온 댄스 바가 일렬로 놓인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발레단 출신의 무용수들에게 안무를 배우고 로열 발레 학교 재학생들의 공개 리허설을 구경하기도 한다. 극장 소속 오페라 가수의 진두지휘 아래 목청껏 노래할 수도 있다. 다른 한쪽에는 실제 공연에 쓰이던 오페라, 발레 의상과 소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날만큼은 누구나 그 안의 모든 의상을 마음껏 입어 볼 수 있어, 아이들은 화려한 튜튜를 입고 포즈를 잡기도 하고 늑대 가면을 뒤집어쓰고 으르렁거리기도 한다. 무대 위 격투 장면을 연출하는 전문가에게 진짜 싸우는 것처럼 보이는 연기를 배우는 시간도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다. 반짝반짝한 재킷을 갖춰 입은 페이스 페인팅 전문가들이 일렬로 앉아 있는 방도 있다. 그들은 방에 들어서는 아이들에게 공연 속 캐릭터들의 사진을 내밀며 원하는 캐릭터를 묻고, 대답에 따라 맞춤 분장을 해준다. 직접 손 쓰는 일을 좋아한다면 만들기 코너에서 악기, 꼭두각시 인형, 극장 스태프들이 착용하는 헤드셋 등 공연과 관련된 다양한 아이템을 만들어 본다. 탄탄한 인프라와 전문 인력에 더해 수십, 수백 년의 공연 제작으로 갈고닦은 상상력과 노하우가 합쳐지니 로열 오페라 하우스가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내는 창의적인 액티비티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저 노는데 여념이 없지만, 사실 그 놀이들은 모두 하나의 공통 주제에 부합하도록 세심하게 기획되어 있다. 주제는 그 달 메인 무대에서 선보이는 공연과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발레 〈호두까기〉와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이 무대에 올라가는 12월 〈패밀리 선데이〉에서 배운 춤은 〈호두까기〉 속 실제 안무고, 그들이 부른 노래는 〈헨젤과 그레텔〉 속 아리아다. 신나서 만든 진저 브래드 맨 쿠키와 커다란 마녀의 집은 오페라 3막의 무대 배경이다. 이렇게 아이들은 액티버티들을 통해 하나의 스토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접하고, 그 안의 캐릭터들 만나며 그들을 춤과 노래로, 분장과 의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부지불식간에 배운다. 나중에 우연히 〈패밀리 선데이〉에서 다룬 오페라를 보기라도 하면 아이들은 신이 나 소리친다. “어?! 나 저거 아는 노랜데?” 아이들이 만드는 세계 오페라 극장에서 신나게 하루 놀다 간 아이들은 오페라나 발레, 클래식 음악처럼 소위 말하는 ‘고급문화’에 대한 선입관이나 두려움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단지 재밌는 놀이를 하다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이들이 한 놀이들을 모두 합치면 하나의 공연이 된다. 그렇게 아이들은 멀찌감치서 구경하는 관객에 머물지 않고 직접 노래하고 춤추고, 무대 세트와 소품을 제작하며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예술가와 크리에이터들이 하는 바로 그 일이다. 분장, 연기, 춤, 노래, 소품과 무대 제작에서 의상까지 문화 예술과 관련되어 이렇게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경험을 한 번에 체험해 볼 수 있는 곳은 실제 공연을 제작하는 극장 밖에 없을 것이다. 하루에 두 번 진행되는 패밀리 선데이에는 최대 1,200명의 어린이가 찾아온다. 티켓값은 성인 17,000원, 아이 13,000원 정도로 저렴한 편이니 빠르게 매진된다. 행사의 질과 규모를 생각할 때 티켓이 다 팔렸다고 해서 오페라 극장이 큰 수익을 얻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하지만 그들은 꾸준히 매달 패밀리 선데이를 기획하고 아이들을 불러들인다. 한국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문화 예술 프로그램의 많은 부분을 백화점이나 마트의 문화센터가 담당한다. 상업시설이 문화 예술 교육을 책임지는 한국만의 독특한 현상이 흥미롭기는 하지만, 이제는 극장이 자신의 전문성을 적극 활용하여 그 역할을 되찾아 올 때도 되지 않았을까? 미래의 관객과 예술가들을 가꾸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출처 : Shakespeare's Globe 공식 유튜브 런던 글로브 극장에서 〈한여름 밤의 꿈〉 공연이 한창이었다. 요정의 왕 부부의 힘겨루기에 휘말린 인간 남녀가 격하게 싸우는 중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소리친다. “꺼져, 이 난쟁이야.” 헉. 놀란 관객들이 일순 숨을 들이마셨다. 긴장감에 터질 듯한 정적만이 이어졌다. 누군가 키 작은 사람을 ‘난쟁이’라 조롱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면 어떤 이들은 불쾌감을 느끼겠지만 웃어넘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타인의 외모를 평가하고 비하하는 방식의 코미디는, 혹은 소위 ‘유머’는 우리 일상에서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연극에는 실제 왜소증―흔히 난쟁이라고 표현되는―을 가진 배우가 캐스팅되었다. 단지 키가 작은 정도를 넘어서 상대 배우의 허리춤에 간신히 닿는 여자에게 ‘난쟁이’에 이어 ‘염주알*’, ‘도토리’ 등의 조롱이 줄줄이 쏟아지자 외모 비하의 악의성은 더욱 두드러졌다. 관객의 시선은 재빨리 그녀를 향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녀의 표정에 관객은 한마음으로 남자에게 분노의 야유를 보냈다. *’염주알’이란 표현은 민음사, 최종철 역의 〈한 여름밤의 꿈〉을 참조했습니다. 난쟁이와 염주알, 도토리는 모두 셰익스피어의 희극 〈한 여름밤의 꿈〉에 실제로 나오는 표현들이다. 1596년에 쓰인 이 작품에는 현대 관객의 시선에서 문제가 될 법한 주제와 표현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글로브 측은 이 작품에 대해 “이 연극은 폭력, 여성 혐오, 인종차별적 언어와 성적인 장면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라는 주의문을 제공해 왔다. 특히 작은 키로 묘사된 캐릭터에 왜소증 배우를 캐스팅한 이후로는 이에 더해 ‘장애인 차별적인 언사’라는 경고 또한 포함시켰다. 출처 : Shakespeare's Globe 공식 홈페이지 공연 주의문, 존재의 이유는? 공연 주의문은 제작사, 혹은 공연장이 제공하는 추가 정보다. ‘쾅’하고 천둥 치는 소리가 들리는 장면이 있다든지, 총이나 대포 소리가 들릴 예정이라는 등 갑작스러운 음향 효과를 미리 경고하는 것처럼 말이다. 번개나 번쩍이는 사이키 조명같이 특수 조명에 대한 주의도 일반적이다. 이런 주의문은 관객이 극을 감상하는데 필요 이상으로 놀라는 것을 미연에 방지한다. 일부 관객에게는 꼭 필요한 정보가 되기도 한다. 깜박이는 불빛이 발작을 유발하는 감광성 간질 환자가 한 예이다. 마찬가지로 흡연 장면에 대한 주의문은 천식 등 호흡기 질환이 있는 관객뿐 아니라 어린이와 함께 할 관객에게도 간과할 수 없는 주요 정보가 된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이런 감각 자극뿐 아니라 공연 내용과 관련된 주의문을 미리 제공하는 관습이 있다. 영국 국립 극장은 이 같은 주의문에 각별히 신경 쓰는 극장이다. 공연 안내 페이지마다 한 줄의 짧은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며, 추가 정보를 클릭하면 아예 별도의 페이지로 연결된다. 거기서는 해당 공연의 주제와 소재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제공한다. 그뿐만 아니라 한 발 더 나아가 공연을 관람한 관객들이 취할 수 있는 후속 행동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기도 한다. 최근 막을 내린 뮤지컬 〈마녀들〉*이 좋은 예이다. 8세 이상 관람가인 이 뮤지컬의 주인공은 사고로 갑자기 부모를 잃은 열 살 소년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함께 살게 된 할머니는 심장이 좋지 않다. 아이가 소화하기 힘들 수도 있는 설정에 이 공연의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주의문이 나온다. “위협, 협박, 사별, 죽음에 대한 주제를 다룹니다.” 이어 사별을 겪은 아이와 청소년들에게 도움을 주는 재단, 죽음으로 인한 상실을 경험한 아이가 읽으면 도움이 될 법한 책들을 소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난민을 주제로 한 연극 〈친족〉의 페이지에는 “인종차별, 외국인 혐오, 강제 이주 그리고 폭력과 죽음에 대한 묘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라는 안내 문구와 함께 여러 난민 후원 단체들을 소개한다. *뮤지컬 〈마녀들〉은 〈찰리와 초콜릿 공장〉, 〈마틸다〉 등을 쓴 작가 로알드 달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이 소설은 한국에서 〈마녀를 잡아라〉로 번역, 출판되어 있다. 공연에서 폭력, 자살, 중독 등 민감하고 어두운 삶의 단편들을 묘사하고 재현하는 것이 극적 장치로 불가피할 때도 있다. 그러나 창작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관객에게 깊은 상처를 줄 수 있어 그 접근은 더욱 신중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장르는 다르지만 드라마 〈나의 아저씨〉 속 이지안 캐릭터가 폭행당하는 구타 장면이나 〈더글로리〉의 학교 폭력 장면이 구설수에 올랐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노골적인 폭력 장면과 적나라하고 잔혹한 묘사가 일부 시청자에게 실제적인 위협이 되거나 괴로운 기억을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미리 제공되는 공연 주의문은 관객으로 하여금 공연의 내용과 주제, 수위를 인지한 상태에서 관람 여부를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돕는다. 구매 전 손으로 만져보거나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공연의 특성상 이런 정보들은 관객이 후회하지 않는 결정을 내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국립극장의 연극 〈최약체〉에 대한 안내 ‘죽음과 비탄, 중독에 관한 내용을 다룹니다. 자살 시도를 묘사하고 있어 관람이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를 읽고 어떤 사람들은 이 공연을 피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돈마 웨어 하우스가 고전 〈맥베스〉를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군인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재해석하며 그와 관련된 주의문을 제공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주의문의 사회적 기능은 하나 더 있다. 제작진과 사회가 암묵적으로 합의하는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을 가시적으로 드러내 준다. ‘인종차별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라고 안내를 하려면 인종차별은 옳지 않다는 사회적 합의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어떤 언행을 인종차별이라고 부를지 자체적으로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기준을 바탕으로 무대 위 인물의 특정 언행을 인종차별이라 규정하고, 그에 합당한 명칭을 부여함으로써 관객에게 해당 행위의 재현은 그를 옹호하고자 함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렇게 과거의 작품은 과거의 산물임을, 그래서 시대의 한계를 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하고 때로는 현대 사회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역할도 한다. 출처 : Shakespeare's Globe 공식 유튜브 앞서의 ‘난쟁이’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무대 위 배우가 그냥 좀 키가 작은 정도였다면 관객은 그 순간을 함께 웃어넘겼을 것이다. 지금껏 늘 그래왔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번 연극에는 작은 키로 묘사된 캐릭터에 실제 왜소증 배우를 캐스팅함으로써 400여 년 동안 되풀이되던 대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해당 장면을 ‘장애인 비하’로 정의한 주의문 덕에 ‘같이 웃자고 하는 가벼운 농담’이라는 변명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화가, 마크 로스코의 <시그램 벽화>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1954년, 주류 회사 시그램은 뉴욕 파크 애비뉴에 권력과 부를 자랑하는 본사 건물을 세우기 위해 미스 반 데어 로에 등 스타 건축가를 기용했다. 시그램 측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1958년, 로스코에게 일련의 그림을 위촉했다. 당시 현대 미술계에서 전례 없던 액수, 3만 5천 달러가 약속되었다. 그림이 걸릴 공간은 빌딩 1층에 입점할 고급 레스토랑. 로스코는 레스토랑의 구조대로 스튜디오를 개조하고 위촉된 일곱 점을 위해 서른 점을 그리는 등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에 임했다. 하지만 사실 그의 의도는 불순했다. 가난과 실패를 오래 경험했고, ‘한 끼에 5달러 이상 쓰는 것은 범죄’라고 말하던 그로서는 호화로운 식당에서 고가의 식사를 누리며 뻐기는 상류층이 적잖이 못마땅했다. 숨 막힐 정도로 깊고 어두운 색조로 시그램 벽화들을 그리며 그는 말했다. “그 방에서 밥 먹는 모든 개자식들의 밥맛을 뚝 떨어뜨렸으면 좋겠어. 레스토랑이 내 벽화들을 걸지 않겠다고 하면 그만한 찬사도 없겠지.” 이듬해인 1959년, 벽화가 걸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치고 난 그는 돌연 계약을 파기했다. 이후 십여 년이 지나 시그램 벽화 중 아홉 점을 테이트 브리튼에 기증했다. 시그램 벽화들이 갤러리 내 특별히 마련된 ‘로스코 전시실’에 걸리던 바로 그날, 로스코는 붉은 피 웅덩이 속에 누워 숨진 채 발견되었다.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팔의 동맥을 잘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로스코는 왜 당대 최고의 커미션을 거부했을까? 연극 <레드> 그날의 식사 후 로스코는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을까. 연극 <레드>는 바로 그 질문에서 태어난 작품이다. 무대는 시그램 벽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인 로스코의 뉴욕 스튜디오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자연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어두운 공간이다. 그림에 대한 완벽한 통제를 원했던 로스코는 실제로 그렇게 철저히 자연광을 막고 조도를 조절했다. 마치 바닷속 잠수함 같은 그곳에서 로스코와 가상의 젊은 조수 켄은 시그램 벽화를 그려간다. 매일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함께 캔버스를 틀에 고정하고, 물감을 섞어 끓이고, 페인트칠을 한다. 간혹 침묵이 흐를 때도 있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아버지와 자식, 스승과 제자, 저무는 세대와 떠오르는 세대 간의 대화다. 연극 <레드>의 한 장면. 출처 신시컴퍼니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 그중에서도 비극에 천착했던 로스코는 니체를 읽으라고 켄에게 훈계하면서도 자신이 멸종되어 가는 공룡이 아닐까 우려한다. 그래도 핫하게 떠오르는 팝 아트의 선두주자, 앤디 워홀의 수프 캔은 절대 예술이 아니다, 그런 천박한 상업미술이 예술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 그에게 켄은 추상 표현주의로 이전 세대인 입체와 짓밟았던 로스코의 젊은 시절을 상기시킨다. “그때는 신났지만 지금 자기 차례가 되니 물러나기 싫다는 거죠?” 로스코가 주장하는 것은 예술의 순수성과 절대성이다. “세상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내 그림을 감상해야 해.” 로스코의 이런 주장에 켄은 집요하게 맞선다. “하지만 선생님은 대기업에 목돈을 받아 고층 빌딩에 들어갈 고급 레스토랑을 위해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까? 소비의 신전에 걸릴 그림을 그리는 현대 미술의 대사제라니, 그만 위선을 인정하시죠!” 그림이 완성되어 갈수록 둘의 대화는 치열한 설전으로 치닫는다. 연극 <레드>의 작가는 <글래디에이터>, <007 스카이폴>의 시나리오 작가 존 로건이다. 그가 이 연극을 집필하게 되는 데에는 뮤지컬 계의 전설 스티븐 손드하임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두 사람은 뮤지컬 <스위니 토드> 영화화 작업을 함께 했다. 그때 손드하임으로부터 연극을 써보라는 강한 권유를 받은 로건은 로스코와 <시그램 벽화>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찾아냈다. 화가 쇠라와 그의 대표작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소재 삼아 뮤지컬을 만든 손드하임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탄생한 <레드>는 최우수 연극 작품상, 연출상 등 6개의 토니상을 거머쥐었으며 세계 30여 개국에서 공연되었다. 로건은 <레드>를 손드하임에게 헌정했다.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의 블록버스터 전시: 마크 로스코 회고전 그리고 2024년, 지금 파리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에서는 마크 로스코의 회고전이 한창이다. 세계 각지에서 로스코의 그림 115점을 공수해 왔으며, 작품을 대여한 기관과 개인의 이름만 적어도 한 페이지가 넘어간다. 현재 로스코 작품의 가치를 고려할 때 세계에서 두 번째로 부유하다는 LVMH 그룹 회장 베르나르 아르노 소유의 미술관이 아니고서는 기획할 수 없는 블록버스터급 전시다. 출처 <마크 로스코 회고전> 공식 홈페이지 이곳에서 접한 <시그램 벽화>들은 로스코의 지시에 따라 극도로 어두운 조명 아래 전시되어 있었다. 좀 더 자세히 그림을 보려 무의식적으로 안간힘을 쓰자 그제야 그림 내부에서 아련히 빛이 떠올랐다. 정확히 로스코의 의도대로 ’세상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내가 그의 그림에 반응하고 있음을 깨닫고 뒤로 펄쩍 뛰었다. 세계적 경매 회사 소더비에 기록된 로스코의 최고가는 1162억 원이다. “‘정말 그 흐릿한 직사각형들, 우리 집 유치원생도 그릴 수 있겠어. 그냥 사기야. 그 사람은 사기꾼이라고.’ …라고 말하면서도 그들은 그림을 사지. 왜냐면 투자니까.” 연극 <레드>에서 자신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일단 사두고 보는 사람들을 경멸하며 로스코가 내뱉는다. 자신의 그림이 예술이 아닌 재화나 장식으로 간주되는 일을 극도로 경계했던 로스코가 살아 있었다면 투자와 자산이란 단어가 따라다니는 미술계의 현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미스 반 데어 로에가 디자인한 시그램 빌딩에 전시되지 않았던 <시그램 벽화>가 지금은 또 다른 스타 건축가 프랑크 게리가 디자인한 루이비통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화려한 루이비통 미술관의 전시실 안, 극도로 어두운 조도 속에 은은히 빛나는 시그램 벽화가 묘한 불협의 감각을 자아내는 이유일 것이다.
새해다. 어디서라도 희망을 얻어 뭐라도 새로 시작하고 싶은 이때, 가슴 벅차게 만드는 뮤지컬을 만났다. 〈작지만 큰 것들 (The Little Big Things)〉은 선데이 타임스의 베스트셀러였던 동명의 회고록을 각색한 뮤지컬이다. 주인공 헨리 프레이저는 열일곱 살의 촉망받는 럭비 선수다. 얼굴을 붉히면서도 첫 데이트 약속을 잡아냈고, 인생에 대한 계획도 차근차근 세워 놓았으니 미래는 장밋빛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소한 행동 하나로 그의 삶은 송두리째 바뀐다. 형제들과 놀러 간 해변에서 바다로 뛰어들었다가 머리를 잘못 부딪쳐 사지가 마비된 것이다. 촉망받는 럭비 선수에서 사지마비로 휠체어에 앉기까지 뮤지컬은 휠체어를 탄 헨리가 무대에 등장, 거두절미하고 자신을 한 줄로 소개하며 시작된다. “내 이름은 헨리 프레이저, 17살 때 바다로 뛰어들었다가 사지가 마비됐어.” 이어 사고가 일어나기 전의 헨리가 등장한다. 두 헨리는 예정된 수순대로 비행기를 타고, 바닷가에서 다이빙을 하며 그 결과 사고를 당한다. 휠체어를 탄 헨리는 과거의 헨리가 하는 선택들을 하나하나 집요하게 되짚는다. 만료된 여권 탓에 비행기 탑승이 거부되었을 때 얌전히 여행을 포기했다면, 그 해변에서 물속으로 뛰어들지만 않았다면, 끈질긴 후회 탓에 쉽사리 잠을 이룰 수 없다. 사고 전 헨리는 미래의 헨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 경기장에서 공을 들고뛰는 대신 휠체어에 앉아 입에 펜을 물고 그림을 그린다니! 10대 소년이 감당하기에 너무 낯설고 가혹한 변화다. 출처 : 뮤지컬 〈작지만 큰 것들〉 공식 SNS 공연의 시작부터 끝까지 두 헨리는 늘 붙어 다니며 함께 서로를 성장시킨다. 자신만의 고통에 빠져 있는 미래의 헨리에게 과거의 헨리는 가족들도 생각하라고 꾸짖는다. 반면 미래의 헨리는 지나간 시간에 매달리는 과거의 헨리를 부드럽게 설득한다. 불가피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에 맞춰 스스로 변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이다. 뮤지컬 〈작지만 큰 것들〉의 깊은 호소력은 물론 원작이 실화라는 사실에서 나온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미래의 헨리를 맡은 에드 라킨과 물리치료사 아그네스 역의 에이미 트릭, 이 두 배우의 호연이야말로 무대를 가로질러 관객의 일상까지 작품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실제적인 힘이 되었다. 에드 라킨은 감당할 수 없는 불행에 무너져 내릴 때의 연약함부터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결연함까지 넓은 감정의 폭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에이미 트릭이 연기한 아그네스는 강인한 멘토다. 헨리가 맞닥뜨린 시련을 이미 스스로 겪어 낸 아그네스는 불필요한 연민은 가차없이 잘라내고 실질적인 도움만을 내민다. 쾌활한 유머를 덤으로 얹어서 말이다. 실제로 휠체어를 쓰는 지체장애인인 이들의 연기는 연기라 생각되지 않을 만큼 생생해 관객은 숨죽여 그들의 대화에 귀 기울였다. 뮤지컬의 말미에 이르러 사고 전 헨리는 휠체어에 앉은 헨리에게 서슴없이 말한다. “빨리 당신이 되었으면 좋겠어!” 장애를 지닌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펼친 자유롭고 아름다운 모습 덕분에 이 압도적인 말은 허황되게 들리지 않았다. 장애인이 주인공이지만 장애가 주제는 아닌 뮤지컬 주인공이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성장한다는 서사는 뮤지컬에서 흔하지만, 그 주인공이 장애인이었던 적은 드물다. 〈작지만 큰 것들〉은 장애인이 주인공을 맡은 첫 웨스트엔드 뮤지컬이기도 하다. 이는 ‘장애’라는 이야기 자체가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잘 다뤄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오래된 웨스트엔드 극장들의 좁은 통로와 많은 계단이 장벽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얼마 전 새로 개관한 극장, 소호 플레이스 덕분에 〈작지만 큰 것들〉 속 휠체어를 탄 배우들은 누구의 도움 없이도 자유자재로 무대를 드나들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인식과 인프라가 발전하면서 이렇게 장애가 무대 중심에 설 수 있었고,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작지만 큰 것들〉은 장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 뮤지컬은 과거를 직면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새로운 시작을 모색하는 한 사람의 여정을 그린다. 그 과정에서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경이로운 힘과 용기가 내 안 어딘가에도 있다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지난해에 아쉬운 일들이 있었을 수 있다. 새해 첫 1주일에 이미 후회가 생겼을 수도 있다. 그건 그것대로 받아들이자. 새로운 시작은 오늘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