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에서 세상을 배운 이들이 많아질 때 그 사회가 더 건강해진다는 신념이 있습니다. 스포츠 기자가 된 뒤 이 일이 제 천직이라는 점만큼은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마라톤 2시간 벽 돌파에 도전했던 '브레이킹 2' 프로젝트를 기억하는가. 2017년, 사상 최고의 마라토너로 꼽히는 엘리우드 킵초게는 날씨, 페이스메이커부터 신발, 의류 등에 이르는 '최적의 상황' 속에서 인류의 한계를 향해 거침없이 내달렸다. 그리고 8년이 지나, 다시 한번 위대한 도전을 위한 출발선이 마련됐다. 이번엔 '브레이킹 4'다. 브레이킹 4..'포미닛 마일' 종목은 1마일 달리기. 목표는 4분이다. 1마일 달리기는 국내엔 다소 낯선 종목이다. 올림픽 종목도 아니다. 하지만 영미권에선 삶과 문화에 깊이 녹아 있는 단위가 '마일'이다. 노력을 독려할 때 관용적으로 '몇 마일 더 가보자(Go to the extra mile)'고 하는 게 대표적이다. 1마일 달리기는 미터법이 세계 표준이 되기 전, 2차 세계대전 이전 가장 인기 있는 육상 종목 중 하나였다. 1940년대 스웨덴의 라이벌, 군데르 해그가 3차례, 아르네 안데르손이 3차례 경쟁적으로 세계기록을 경신하며 '4분 1초'까지 당길 때만 해도, 3분 대 진입은 눈앞의 일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4분 벽'이 깨지기까진 이로부터 무려 9년이 더 걸렸다. 1954년, 영국 옥스퍼드에서 주인공은 영국의 로저 배니스터였다. 3분 59초 4. 미국의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트가 당시, 올해의 스포츠맨 초대 수상자로 배니스터를 선정했을 정도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유산소(지구력)와 무산소(스피드) 능력이 모두 필요한 종목 이후 1마일 달리기는 올림픽 종목인 1500m 달리기로 빠르게 대체됐다. 실제로 1마일은 1500m보다 109m 정도 더 길 뿐이어서 성격이 비슷하다. 400m 육상 트랙을 4바퀴 정도 뛰면 돼 생활 체육인도 부담 없이 도전할 수 있는 거리지만 난도는 높다. 단거리 경기처럼 전력질주 하기에는 너무 길고, 지구력으로 달리기엔 너무 짧다. 중장거리 선수들처럼 산소가 충분한 상태에서 레이스를 운영하다가, 마지막 직선 구간에선 단거리 선수처럼 죽을힘을 다해 밀어붙여야 한다. 결승선을 통과하자마자 선수들이 주저앉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페이스 키프예곤 이번 도전자는 케냐의 페이스 키프예곤(31)이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중장거리 여성 주자로 꼽힌다. 특히, 올림픽 1500m 종목에선 리우 대회를 시작으로, 도쿄에 이어 파리까지 3회 연속 금메달을 차지하며 남녀 통틀어 이 종목 최초의 '올림픽 3연패' 역사를 썼다. 2024년 7월, 파리에서 3분 49초 04의 기록으로 1500m 세계기록을 세웠고, 1마일에선 이보다 1년 전인 2023년 7월, 4분 7초 64로 세계 기록을 작성했다. 2018년 딸 앨린을 출산 한 뒤에도 끊임없이 한계를 뛰어넘었던 키프예곤은 1마일, 4분 벽을 돌파한 최초의 여성이 되기 위해 출발선에 서기로 했다. 7초의 벽. 과연 깰 수 있을까? 좀 더 보편적인 1500m에서 또 다른 한계에 도전할 수도 있었지만 1마일, 4분 벽을 두드리기로 결심한 배경에 대해 키프예곤은 "세 번이나 올림픽 금메달을 따고, 세계육상선수권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이제 뭘 또 이룰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1마일 4분 벽은, 1954년 배니스터가 처음 깬 뒤, 70년 동안 여성이 도전해 온 '한계'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쉽지 않다. 키프예곤은 자신의 최고 기록을 무려 7초 65 이상 줄여야 한다. 400m 트랙을 한 바퀴에 2초 정도 더 빨리 달려야 가능한 셈이다. 앞서 키프예곤이 4분 15초 대의 세계기록(파울라 이반, 4분 15초 61)을 8초가량 줄이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34년이었다. 2025년 6월 파리에서..'다시 뜨겁게!' 공기역학, 생리학적인 요소부터 심리 지원에 이르기까지. 어떤 부분도 놓치지 않겠다는 게 이 프로젝트의 '디테일'이다. 키프예곤의 발 모양에 최적화된 신발 개발과 이동에 따른 피로도 역시 고려 대상이었다. 결국 결전지는 키프예곤이 1500m 세계기록을 세운 장소이자, 올림픽 3관왕을 달성한 '역사의 땅' 파리로 결정됐다. D-DAY는 6월 26일. 카운트다운은 시작됐다.
러닝의 시대 아침 7시 샹젤리제의 공기는 상쾌하고 청량했습니다. 한낮이면 따가울 정도로 강렬한 햇살도 적당히 따사로웠고, 아직은 너무 분주하지는 않은, 그래서 달리기엔 더할 나위 없는 시간이었죠. 지구촌 최대 '스포츠 축제' 파리 올림픽 취재가 시작되고 20일. 기대를 크게 웃도는 우리 선수단의 '금빛 낭보'를 연일 전하며 즐거움과 피로가 절정에 이르는 시기지만 러닝화로 갈아 신을 때만큼은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바야흐로 러닝의 시대입니다. 출장이 잦은 편인데, 이제 다른 짐을 줄여서라도 러닝화는 꼭 챙깁니다. 낯선 도시를 달리는 일은 그 자체로 훌륭한 여행입니다. 차로 이동할 땐 스쳐 지나는 걸 좀 더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고, 걸을 때보단 좀 더 많은 것들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낭만의 도시 파리에선 뛰다 잠시 멈춰 추억을 남기기도 좋지요. 비슷한 마음들이 모였습니다. 다양한 국적의 기자들이 삼삼오오 함께 뛰기 시작했습니다. 관광객이 드문 이른 아침, 샹젤리제 거리에서 출발해 개선문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고, 페이스를 높여 몽쏘 공원으로 향했습니다. 나이키 페가수스41은 도로에서도, 흙길에서도 편안했고 안정적이었습니다. 아끼고 또 아끼며 곱게만 신는 알파플라이3를 챙겨 오긴 했지만 숙소에 모셔(?)두고, 페가수스41을 신고 달린 건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발도 발이지만 마음이 편했습니다. 러닝화 열풍... 전쟁을 방불케 하는 '혁신' 경쟁 러닝의 시대를 맞아 러닝화 시장엔 열풍, 아니 광풍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인스타그램 등 각종 소셜미디어와 러너들 사이에선 '러닝화 계급도'가 수시로 업데이트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수퍼 슈즈'를 소개하며 '수퍼 카'에 비유했는데, 이를 둘러싼 '끝없는' 논쟁도 닮았습니다. ▷ 지난 스프 글 보기 트랙 혹은 공도에 특화된 차가 다르듯, 러너들 역시 달리는 환경, 거리, 스펙 등을 꼼꼼히 비교합니다. 특히 알파플라이3를 필두로 한 카본화를 향한 관심은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공식 홈페이지에선 발매와 동시에 매진되는 일이 반복되고, 일부 오프라인 매장 입고 정보가 '커뮤니티'와 '오픈채팅방'을 중심으로 공유되면 '오픈런'을 위한 '전력 질주'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알파플라이3 '명품 거리' 샹젤리제는 그 전쟁터가 됐습니다.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들이 '혁신의 결과물'들을 앞다퉈 내놓고, 이 거리에 전시하고 있습니다. 최근 급부상한 스위스 브랜드는 파리 올림픽 시기에 맞춰 이곳에 매장을 새로 열고 '참전'을 선포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번 올림픽, 철인 3종 경기 남자부 경기에선 메달리스트의 카본화 브랜드가 모두 달랐습니다. 알파플라이3를 신고 뛴 뉴질랜드의 헤이든 와일드는 은메달을 차지했습니다. 파리 올림픽 철인 3종 경기 메달리스트. 헤이든 와일드는 은메달을 차지했다. 사진 : 게티이미지 최근 나이키의 '혁신 DNA'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도 사실이지만 적어도 '알파플라이3'에 대해서는 한목소리로 '인정'하는 분위기입니다. 저 역시, 알파플라이3를 신고 생애 처음으로 10K에서 50분 벽을 깼습니다. '버킷리스트'인 '풀코스 완주'에 대한 용기도 생겼습니다. 지난달 26일을 시작으로 오는 11일까지, 파리 올림픽 기간 나이키는 전 세계 기자들을 상대로 매일 아침 2시간, 러닝 세션을 진행했는데, 이렇게 샹젤리제 거리를 달리며 한편으론 '러너'로서 의지를 다졌고, 다른 한편으론 '기자'로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혁신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파리에서 진행된 러닝 세션 선수의, 선수에 의한, 선수를 위한 '애슬릿 하우스' 지난 5일, 애슬릿 하우스에서 그 궁금증이 살짝 풀렸습니다. 애슬릿 하우스는 나이키가 올림픽 기간 선수들의 경기 준비와 휴식, 그리고 회복을 돕기 위해 마련한 일종의 복지 공간입니다. 육상 경기가 열리는 스타드 드 프랑스 맞은편에 자리한 애슬릿 하우스, 그 입구에는 '킹' 르브론 제임스와 '로켓맘' 프레이저 프라이스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실내는 선수와 가족이 편히 머물 수 있는 공간, 또 개성을 드러내며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는 미용실, 세계 최고 수준의 물리 치료 및 회복 시설을 갖춘 공간 등으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선수의, 선수에 의한, 선수를 위한 시설입니다. 애슬릿 하우스 입구(좌)와 스타일링 공간(우) 인상적이었던 건 치료실 앞에서 발견한 부츠와 조끼였습니다. '헬스케어' 브랜드, 하이퍼아이스와 협업해 개발한 제품으로 아직 일부 선수들만 사용해 본 '실험작'입니다. 나이키와 하이퍼아이스가 협업해 만든 부츠와 조끼 부츠는 열과 압박, 마사지로 경기 전후 회복을 돕는 신발로, 신고 가볍게 이동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실제 사용해 본 골프선수 김주형은 "착용 후 발이 훨씬 가벼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고, 르브론 제임스는 "이건 마법의 부츠다"고 극찬했습니다. 조끼는 얼음이나 액체 없이 발열과 냉각이 가능해 워밍업 혹은 쿨다운 때 체온을 조절을 돕는 기능을 합니다. 실제 착용해 발열 기능을 써보니 한여름임에도 기분 좋게 따뜻해지면서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더군요. 하이퍼아이스의 사장인 앤서니 카츠는 "선수의 경기력 향상과 회복을 목표로 나이키와 수년간 노력한 결과"라고 소개했습니다. 시작은 경청에서... 혁신에 'Finish Line'은 없다 이곳에서 만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1996, 2000, 2004) 출신 미국 여자 농구 '전설' 돈 스탤리는 "혁신은 선수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말했습니다. 자신과 국가의 한계, 나아가 인류의 한계에 도전하는 선수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어떻게 극복해 왔는지, 잘 듣고 정확히 이해하는 데서 첫발을 떼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도 알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애슬릿 하우스 하이퍼아이스 공간(좌)과 커피 공간(우) 애슬릿 하우스 역시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짧게는 4년, 길게는 평생을, 오직 경기일에 맞춰 모든 걸 쏟아내는 선수들에게, 현재의 '선수촌'은 한계가 있습니다. 1924년 파리 올림픽에 처음 선수촌 개념이 도입된 후 정확히 100년이 지나도록 많은 발전이 이뤄졌지만, 1만 4,000여 명을 동시에 수용하는 공간엔 불편함이 공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골판지 침대, 에어컨 논쟁이 대회 직전 뜨거운 관심을 받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특히 프로스포츠로서 산업화가 이뤄진 종목의 선수들의 경우, 올림픽 기간 오히려 평소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관리를 받게 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이때 나온 불만에 대해 '올림픽에선 어쩔 수 없다', '모두가 같은 환경이다', '이런 데 적응하는 것도 능력이다'고 애써 자위하는 대신,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선 겁니다. 공교롭게도 애슬릿 하우스가 세계 각국의 취재진에게 공개된 그날, 여자 배드민턴 단식 금메달리스트 안세영 선수는 그동안 쌓인 '분노'를 쏟아냈습니다. 자신의 부상에 안일하게 대처해 온 협회에 대한 불만이 컸던 겁니다. 내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 기성 체제에 맞서기 위해 이를 악물었던 겁니다. 올림픽, 또 스포츠가 지금같이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전해주기 위해선, 선수를 향한 지원과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이 필수적입니다. 나이키는 이번에 처음 시도한 애슬릿 하우스 지원을 앞으로 확대해 갈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개선점을 찾는 건, 이번에도 선수들의 이야기를 듣는 데서 시작할 겁니다. 그리고 그다음, 목표에 대해선 나이키 설립자 필 나이트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혁신에는 Finish Line(결승선)이 없어요."
“Disciplined” 박주호와 구자철, 그리고 김민재를 지도한 토마스 투헬 감독이 꼽은 '한국 선수'들의 특징입니다. '규율'이 잘 잡혀있다는 뜻으로, 훈련과 일상생활에서부터 이른바 '각 잡힌' 자세로 모범이 되고, 경기장 안에선 '조직적'인 움직임이 뛰어나다는 평가입니다. 출처 : 게티이미지코리아 '조직력'을 최우선하는 알렉스 퍼거슨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이 중요한 경기에서 박지성을 중용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축구에선 ‘조직력’이 사실상 전부 축구 감독은 야구 감독처럼 선수 교체나 작전 지시 등으로 경기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기회가 적습니다. 농구 감독처럼 타임을 불러 흐름을 끊거나 약속된 패턴을 다양하게 준비할 수도 없습니다. 휘슬이 울리고 나면 그라운드 위 선수 22명은 '이성적 판단'보단 '본능'에 따라 경기를 풀어가게 됩니다. 축구의 역설은 '11명이 90분 내내 각자 본능적으로 움직이면서도 조직력이 깨지지 않아야 이길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훈련으로 본능을 통제하고 조직력을 완성해야 하는 축구 감독으로선 어떤 방식으로든 개개인의 삶에 깊숙이 관여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시안컵 대표팀의 ‘규율’... 경기장 안팎에서 와르르 아시안컵 대표팀은 6경기에서 단 한 번도 '클린시트'를 기록하지 못하고 무려 10골이나 허용했습니다. 23살의 '차세대 에이스'는 단합을 강조하던 '주장'과 식사 시간에 몸싸움을 벌였습니다. 클린스만 감독 그런데도 클린스만 감독은 '4강에 든 성공적인 대회'였다고 자화자찬했습니다. 전술적인 준비, 근무지 논란과 같은 태도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이런 인식으론 한국 축구를 더 이끌기에 부적절했습니다. 자율을 강조했지만 방임에 가까웠고, 장점으로 꼽힌 선수단 관리 능력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새 사령탑을 찾는 과정.. ‘무너진 규율을 누가 세울 거냐’ 3월 A매치만 맡는 임시 사령탑보단 2026 북중미 월드컵까지 이끌 정식 감독 선임에, 우리 선수들 파악에 시간이 필요한 외국인 사령탑보단 국내 지도자에게 무게가 쏠리는 배경입니다. 그러면서 정해성 전력강화위원장은 "현재 상황에서 MZ세대 성향에 따라 어떤 리더십을 가지느냐가 중요하다"라고 했습니다. 규율이 무너진 배경을 세대 특성으로 규정한다면, 출발부터 발이 꼬일 수 있습니다. 1981년생으로 밀레니얼 세대인 박지성부터 1996년생으로 Z세대 수비수 김민재까지 '잘 잡힌 규율'은 '한국 선수'들의 강점입니다. ‘누가’만큼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과거에도 한국 축구의 화두가 '규율 잡기'였던 적이 있습니다. 2013년 대표팀 핵심 선수였던 기성용이 소셜미디어 비공개 계정에서 당시 사령탑이었던 최강희 감독을 '저격'한 게 드러났을 때가 대표적입니다. '요즘 선수들'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습니다. 소방수로 투입된 홍명보 감독은 기강부터 바로 세우겠다면서 '대표팀에 소집될 땐 정장을 입으라'고 했었지요. 팀 스포츠, 특히 축구에서 규율이 중요한 건 불변의 진리입니다. 다만, 이를 위한 리더십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변해왔습니다. 전력강화위원회는 이 복잡한 문제를 치열한 고민과 토론으로 풀어야 합니다. 방점은 ‘조속히’보다는 ‘제대로’에 찍히길 바랍니다.
'신발에 미친 괴짜' 슈독(Shoe dog)의 혁신 DNA 1993년이었다. 그 시절 내게 '에어(AIR)'는 꿈이었다. 방에는 '에어 조던'이 하늘을 나는 브로마이드가 붙어있었고, 어느 일요일은 텔레비전을 '6번'에 맞춰놓고 시카고 불스의 3연패 (three-peat) 달성에 열광했다. 하얀 실내화에 '나이키 모양(스우시)'을 매직으로 그리고는 쉬는 시간이면 교실 책상 위를 날아다녔다. 누군가 처음으로 뒤꿈치 아래 ‘에어’가 장착된 진짜 나이키를 신고 학교에 왔을 때, 우리는 모두 몰려가 손가락으로 그 공기주머니를 눌러보며 놀라워했다. 출처 : 이베이 1985년 나이키 첫 번째 에어 조던(Air Jordan) 지면 광고. / 출처 : 운동화 전문 매거진 ‘스니커 프리커Sneaker Freaker’ 공식 인스타그램, nike '에어'를 운동화 바닥에 넣을 생각을 한 사람은 프랭크 루디, 1977년의 일이었다. 항공우주공학자 출신인 루디는 과학적인 근거로 나이키 창업자, 필 나이트를 설득했다. 나이트도 처음엔 의심했다. "인류가 신발을 신기 시작한 뒤, 기본적인 디자인은 지난 4만 년 동안 크게 변하지 않았어요. 19세기 후반 구두 장인들이 오른쪽 신발과 왼쪽 신발을 다르게 만들고, 고무 회사에서 밑창을 만든 게 사실상 마지막 혁신이었죠." 하지만 육상 선수 출신인 나이트는 그 자리에서 시제품을 신고 6마일(약 10km)을 달려본 뒤 생각을 바꿨다. 혁신은 그렇게 시작됐다. '신발에 미친 괴짜'라는 뜻의 '슈독(Shoe dog)'은 이제 필 나이트와, 나이키 운동화의 혁신을 이끌어온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 됐다. 켈빈 키프텀이 생애 세 번째 풀코스 완주 끝에 세계 신기록을 작성하며 시카고 마라톤을 제패한 뒤 활짝 웃고 있다. (사진 출처=시카고 트리뷴 AP 연합뉴스) 나이키의 혁신은 신발, 그중에서도 러닝화가 중심이다. 지난 10월 4일, 또 한 번의 혁신이 빛을 봤다. 케냐의 켈빈 키프텀이 2시간 00분 35초에 42.195km를 달려 세계 기록을 갈아치웠다. '꿈의 기록' 2시간 벽 돌파가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다. 기록만큼이나 주목을 받은 건 키프텀이 신은 신발이었다. 발 앞부분에 달린 '에어'와 뒤꿈치 부분의 높은 쿠션이 눈길을 끌었다. 앞서 풀코스 완주 경험이 두 차례밖에 없었던 23살의 신예는 1시간 00분 23초 만에 반환점을 돈 뒤, 후반부에 오히려 속도를 더 높였다. 결승선을 통과하고도 힘이 남는 듯 국기를 두르고 코스를 역주행하는 모습에 육상계는 이 신발이 '게임 체인저'라며 흥분했다. '21세기판 에어' 탄소섬유판... '수퍼 슈즈' 시장을 개척하다 결승선 통과하는 엘리우드 킵초게 (사진 출처=AP 연합뉴스) '게임 체임저'의 이름은 '알파플라이3'. '알파플라이 넥스트%'에서 이어진 후속작이다. 알파플라이 넥스트%는 2019년 엘리우드 킵초게가 '역사를 쓴 신발'이다. 킵초게는 자신에게 '특화'된 맞춤 신발을 신고, 1시간 59분 40초 만에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했다. 코스와 습도, 기온은 물론 급수와 페이스메이커 등 모든 환경을 과학적으로 통제하고 세운 성과라 공식 기록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불가능을 넘은 순간'으로 기록됐다. '알파플라이3'는 진화를 거듭한 결과물이다. 개발을 주도한 브렛 스쿨미스터는 필 나이트처럼 육상 선수 출신이다. 지난 11월 21일, 화상으로 만난 스쿨미스터는 '혁신'을 이렇게 정의했다. "나이키에서 혁신이란, 선수들의 경험을 개선하는 겁니다. 프랭크 루디가 처음 '에어' 아이디어를 냈을 때도, 수많은 회의론이 있었지만 직접 신고 뛰어본 뒤엔 '바로 이거다'고 생각을 바꿨죠. 냉정하게도 선수들은 '혁신' 그 자체엔 관심이 없어요. 자신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 생각하죠. 우린 거기에 집중합니다." 브렛은 미국, 케냐, 서유럽에서 동아시아까지, 300명이 넘는 선수들과 시험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시험 주행한 거리는 총 3만 2000km, 역대 나이키 러닝화 중 최장이다. 공학, 운동 역학, 스포츠과학, 소재, 디자인 전문가가 합작했다. 사진 출처 : NIKE 공식 홈페이지 경쟁사들도 앞 다퉈 개발에 뛰어들면서 새로운 시장이 탄생했다. 기존 스포츠카 성능을 뛰어넘는 '수퍼 카' 세그멘트가 만들어진 것처럼 '수퍼 슈즈'라는 ‘신 영역’이 만들어졌다. 200g 남짓 초경량, 넉넉한 쿠션, 그리고 '21세기판 에어'라 부를만한 '탄소 섬유판' 이 내재된 게 기본 특징이다. 탄소 섬유판은 스프링 같은 역할을 하는데 혁신의 핵심으로 꼽힌다. 2023년, 올 한 해 400m부터 100km 울트라 마라톤에 이르기까지, 14개의 세계 기록이 모두 '수퍼 슈즈' 덕을 봤다. 혁신이 일으킨 논쟁! 혁신에도 규제가 필요할까 나이키 에어 줌 알파플라이 넥스트% (사진 출처 : NIKE 공식 홈페이지) '수퍼 슈즈'의 등장은 공정성 논란을 야기했다. 킵초게가 오직 자신만을 위해 제작된 첫 알파플라이를 신고 새 이정표를 세우자 세계육상연맹(WA)이 곧 제동을 걸었다. "특정 선수만을 위해 특별 제작한 운동화는 공식 대회에서 사용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이는 한편으론 '알파플라이'를 비롯한 '수퍼 슈즈'가 얼마나 큰 이득을 주는지 반증이기도 하다. 이른바 '기술 도핑'이란 주장까지 나왔다. 운동 능력 향상 대신 '치트키(게임에서 이기기 위한 속임수)'에 가까운 장비로 기록 향상을 노리는 게 스포츠 정신에 올바른가, 윤리적인 비판이 뒤따랐다. 이런 논란은 전에도 있었다. 2009년, 로마 수영세계선수권에선 '전신 수영복'을 입은 선수들이 무려 43개의 세계 기록을 쏟아냈다. 이에 수영 연맹은 이듬해 전신 수영복을 기술 도핑으로 간주해 퇴출했다. 일부 기록은 14년이 흐른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이렇게 '혁신에도 규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이 있는 반면, 지나친 규제가 관련 산업을 위축시키고, 경기력 향상과 보는 즐거움을 제한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스쿨미스터는 이와 관련해 "우리는 규정을 준수하기 위해 세계육상연맹과 긴밀히 협조하고 있다"며 "규정 안에서 더 가볍게, 또 에너지 손실은 최소화하고, 안정감을 극대화해 선수들에게 최대한 이익을 돌려주고 싶은 마음뿐이다"고 강조했다. 현재 육상연맹은 밑창 두께를 최대 40mm로 제한하고, 탄소섬유판은 1장만 넣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거지처럼 입더라도, 신발은 왕처럼! '수퍼 카'는 부의 상징이지만, 수퍼 슈즈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육상 연맹의 규제 이후 누구든 킵초게, 키프텀과 같은 신발을 신고 달릴 수 있게 됐다. 물론 30만 원대 가격으로 보통의 러닝화보다는 비싼 편이지만, 그 효과는 엘리트 선수들보다 아마추어에게 더 크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장거리 선수 출신인 김영복 베가베리 러닝팀 감독은 "옷은 거지처럼 입더라도, 신발은 왕처럼 신자"고 동호인들에게 제안한다. 김 감독은 "옷 때문에 다쳐 수술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신발 때문에 다치는 경우는 굉장히 많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탄소 섬유가 들어간 '수퍼 슈즈'에 대해 "반발력이 너무 좋아서 부상 원인이 된다고 걱정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건 강하게 지면을 때리는 잘못된 습관 때문이다"라며 "적은 힘으로도 빠르게 달릴 수 있기 때문에 오래 달릴수록 같은 시간, 다른 운동화를 신고 뛰었을 때에 비해 피로도와 다리에 쌓이는 충격과 부상 위험이 적다"고 말했다. 나이키 알파플라이2 (사진 출처 : NIKE 공식 홈페이지) 나이키 알파플라이3 (사진 출처 : NIKE 공식 인스타그램) 스쿨미스터 역시, 알파플라이3는 4시간 넘게 달리는 동호인들에게 효과가 더 큰 신발이라고 강조했다. "이전의 수퍼 슈즈는 엘리트 선수들에게 더 적합했습니다. 하지만 '에어'가 충격을 흡수하고, 그 에너지를 다시 러너에게 돌려주는 효율이 좋아지면서 아마추어 선수들에게 더 필요한 '보호 기능'이 향상됐습니다. 또 탄소 섬유판의 추진력과 안정성 때문에 오랜 시간 달릴 때 이득은 커집니다. 남자 선수보다 여자 선수들이 더 큰 효과를 보는 것도 같은 배경입니다." 역대 최경량, 가벼운 무게도 중요한 요소다. 알파플라이3는 260mm를 기준으로 176g에 불과하다. 전작인 알파플라이2에 비해 15% 가벼워졌다. 2016년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신발 무게 100g을 줄이면 에너지 소모가 1%가량 줄어든다. 단순히 경기 기록을 줄이는 것뿐 아니라, 훈련에서부터 효율을 높이고,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스쿨미스터는 "내구성을 높이기 위해서도 노력을 쏟았다"면서 "다른 수퍼 슈즈는 마라톤 한 번만 완주해도 기능이 다소 떨어지는 경향이 있지만 새 신발은 400~450km가량을 뛸 때까지 성능이 유지된다"고 덧붙였다. 2023년의 마지막 달. 종종 한강변을 달리는 내게, 가장 힘든 순간은 칼바람이 부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신발을 신는 '결심의 순간'이다. 일단 나가서는 5분에 1km를 뛰는 페이스를 유지하려 노력한다. 최근 10K 기록은 50분 51초. 스쿨미스터의 표현을 빌리면 '오래 뛰는 러너'다. 그와 대화하며 호기심이 생겼다. '수퍼 슈즈'를 신으면 어쩌면 50분 벽을 깰 수 있지 않을까. 정확히 30 년 전, 친구의 신발 속 '에어'를 처음 만졌을 때 그 촉감이 여전히 생생한 지금, 수퍼 슈즈의 느낌이 궁금해졌다. '인류 한계'에 도전하는 괴짜들의 혁신이 모든 러너들의 꿈을 키워준 셈이다. 서울하프마라톤에 참가한 이정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