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저자. 중국정법대 졸업(경제법), 중국문화평론가·재중 중국 전문 기고가
지피지기 백전불태! 친중(親中), 반중(反中)을 넘어 극중(克中)을 위한 지식충전소! 진짜 중국을 만나러 갑니다! 위두허 도강 직전 가족과 이별하는 홍군 병사를 묘사한 기록화 1934년 10월 16일 밤 장시(江西)성 위두(于都)현. 8만여 명의 대군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도강은 5일 동안 지속됐다. 공산당과 홍군이 국민당군의 오랜 공세에 루이진(瑞金)을 버리고 탈주에 나선 것이다. 2만 5,000리 '장정(長征)'의 서막이었다. 홍군은 먼저 국민당군의 저지선을 돌파한 뒤 11월 27일 광시(廣西)자치구 상강(湘江)에 도착했다. 다음 날 새벽부터 5일간 국민당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상강을 건넜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2만여 명이 죽거나 다쳤고 6,000명은 포로가 됐으며 2만여 명이 탈영했다. 도강하며 전투를 벌이는 홍군 병사를 묘사한 쭌이회의기념관의 조각상 남은 병력이 3만여 명에 불과할 정도 엄청난 전력 손실을 입었다. 상강전투가 가져다 준 충격은 컸다. 치욕스러운 대패에 공산당 총수였던 보구(博古)는 자살하려 권총을 꺼내 들었다.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나서서 겨우 말렸다. 상강을 건넌 뒤에도 홍군의 시련은 계속됐다. 국민당군의 추격을 피해 먀오얼산(苗儿山)을 넘었다. 먀오얼산은 해발 2,141m로 광시에서 가장 높다. 또한 산세가 아주 험준하다. 홍군은 좁은 절벽 길을 사흘 동안 굶은 채 걸었다. 적지 않은 병사와 말이 발을 헛디뎌 절벽 아래로 사라졌다. 홍군이 장정 중 산속에서 벌였던 전투 광경을 재현한 쭌이회의기념관의 전시 어렵게 구이저우(貴州)성에 들어가 소수민족 거주지를 빠르게 통과했다. 1935년 1월 국민당군으로 위장해서 쭌이(遵義)를 무혈점령했다. 쭌이에서 중국 공산당의 역사가 바뀌었다. 중앙정치국 확대회의가 열려 마오쩌둥(毛澤東)이 당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1927년 마오는 1차 국공합작이 깨지자, 고향인 후난(湖南)성 농촌에서 추수 폭동을 일으켰다. 몇몇 소도시를 점령하는 성과를 거뒀으나 국민당군의 공격을 받아 진압됐다. 그러자 마오는 600명의 잔존 병사를 이끌고 징강산(井岡山)에 들어가 유격전을 벌였다. 장정 중 쭌이에 도착해 물과 차를 마시는 홍군 병사들 징강산을 근거지로 세력을 넓혀서 장시성 남부 전역을 점령했다. 1931년 공산당은 루이진을 수도로 소비에트 공화국을 성립했다. 이때 공이 큰 마오가 국가주석이 됐다. 당시 소비에트는 인구수가 1,000만 명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소련이 코민테른을 통해 막대한 자금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코민테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마오는 권력에서 밀려났다. 모스크바 유학을 다녀온 보구, 당서기인 저우언라이, 코민테른이 파견한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 등 3인단이 실권을 잡았다. 소비에트 공화국의 위세는 커져갔다. 쭌이에 도착한 공산당과 홍군 지도자를 묘사한 동상 그래서 장제스(蔣介石)는 대대적인 공산당 토벌에 나섰다. 홍군은 국민당군의 4차례 공세를 치고 빠지는 유격전으로 물리쳤다. 하지만 국민당군이 진지를 파오며 공격해 오자 대패했다. 이에 3인단은 소비에트를 포기하고 장정을 결정했다. 쭌이에 입성한 뒤 공산당과 홍군은 휴식을 취한 뒤 1월 15일에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개최했다. 회의에는 20명이 참석했다. 먼저 보구는 5차 진지전의 맞대응과 상강전투의 결과를 변명했다. 뒤이어 저우언라이는 그간의 패배가 3인단의 잘못된 판단에 벌어졌다며 자아비판했다.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 참석했던 공산당 지도자를 묘사한 조각상 다음 날 회의에서는 마오쩌둥이 나섰다. 마오는 중국 역사와 고사를 인용하며 "보구와 브라운은 중국 현실을 제대로 모른다"고 비판했다. 본래 마오는 국민당군의 토벌전을 유격전으로 맞서야 한다고 줄곧 주장했다. 진지전 실패와 상강전투 패배를 지적하면서 "중국에서는 중국에 걸맞은 전략과 전술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참석자 대부분이 공감했다. 회의 3일째 되는 날 마오를 중앙정치국 상임위원으로 선출하고 3인단을 해체했다. 또한 저우가 군사지휘권을 행사토록 하되, 마오가 보조를 취하도록 했다. 장정을 완수한 홍군 1군단과 공산당 지도자(위) 사진 이처럼 회의 결과는 마오의 완벽한 승리이자 화려한 부활이었다. 쭌이 회의 전까지 마오는 한 번도 당권을 장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쭌이 회의를 통해 당권을 움켜쥐었고, 1938년에는 군사위원회 주석을 꿰차며 군권까지 장악했다. 또한 쭌이 회의를 기점으로 코민테른의 간섭에서 벗어났다. 마오는 코민테른의 지시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독자노선을 걸었다. 그 뒤 공산당과 홍군은 쭌이를 떠나 마오타이(茅台)진을 가로지르는 츠수이허에 도착했다. 강 맞은편의 국민당군과 전투하면서 4차례의 도강 작전을 벌였다. 마오타이진 주민이 건네주는 술을 마시는 마오쩌둥과 홍군을 묘사한 동상 이 과정에서 마을 주민은 부상당한 병사의 상처를 술로 소독하고 치료해 주었다. 결국 홍군은 도강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홍군은 주민이 건네준 술을 마시며 승리를 자축했다. 마오타이진은 쭌이에서 103km나 떨어져 있고, 해발은 423m에 달하는 산골마을이다. 하지만 마을 입구부터 '중국 제1의 술 고장(中國酒都第一村)'이라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오늘날 중국 최고의 술로 손꼽히는 마오타이주 때문이다. 마오타이주의 역사는 오래됐다. 기원전 2세기 한무제는 남방 정벌을 위해 당몽 장군과 대군을 파견했다. 술을 빚는 장인이 일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석상 당몽은 구이저우를 정벌한 뒤 츠수이허(赤水河) 옆에서 술을 마셨다. 술은 맛과 향이 뛰어났다. 이에 한무제에게 술을 장계와 함께 바쳤다. 당대에는 마오타이진의 술이 조정에 바치는 진상품으로 선정됐다. 그때부터 원대까지 술 생산은 관부가 독점했다. 명말·청초에는 한족 이주민이 마오타이진에 유입되면서 민간 술도가가 늘어났다. 19세기 초 20여 개의 양조장이 성업했고, 1840년에는 한 해 생산량이 170여 톤에 달했다. 마오타이주가 크게 이름을 떨친 것은 191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였다. 츠수이허의 이 부둣가에서 마오타이진의 술이 전국으로 운송됐다. 박람회 초기에는 관람객이 진열된 마오타이주의 단순한 병 모양과 볼품없는 포장을 보고 외면했다. 어느 날 대표단 중 한 사람이 고의로 술병을 깨뜨렸다. 술 향기가 곧 박람회장 전체에 퍼졌고, 관람객은 향기를 따라 마오타이주 코너에 몰려왔다. 따라서 마오타이주는 당당히 금상을 차지했다. 이 소식이 중국에 전해지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마오타이주가 국주(國酒)의 반열에 오른 결정적인 계기는 장정에 나섰던 홍군과의 만남 덕분이었다. 공산당 지도자들은 그 추억을 잊지 못했다. '국주 마오타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 마오타이그룹의 정문 그래서 마오타이주를 정부 공식 연회주로 사용했다. 또한 마오타이주는 5차례 열렸던 전국술품평회에서 줄곧 8대 명주로 등극했다. 마오타이주는 중국 전통 술인 바이주(白酒)에서 소수인 장향형(醬香型)이다. 강한 간장 향기와 부드러운 맛이 특징이다. 장향형 술은 양조가 아주 까다롭다. 마오타이주는 수수를 주원료로 한다. 여기에 밀로 만든 누룩을 발효제로 써서 빚는다. 1년의 세월을 들여, 9번 찌고 8번 발효하며 7번 증류하는 절차를 거친다. 누룩을 수수보다 더 많이 사용하는데 증류할 때는 여러 번 사용한다. 저우언라이 총리와 마오타이주로 건배하는 닉슨 대통령(우), 마오타이주를 선물하자 기뻐하는 김일성 주석(좌) 증류해서 배합된 술은 항아리에 밀봉해 3년을 숙성한다. 항아리 저장소는 위치, 고도, 습도, 채광 등 면밀히 고려해 마련한다. 마오타이진의 지질은 7000만 년 전에 형성된 주사(朱砂)로 이뤄져 미생물의 번식에 유리하다. 또한 산이 사방을 둘러싼 지형이라 바람이 잘 통하지 않기에, 술이 발효되는 데에 최적의 조건이다. 2023년 마오타이그룹의 전체 판매액은 1,505억 위안(약 29조 610억 원)에 달했고 영업이익은 무려 747억 위안(약 14조 4,251억)을 넘어섰다. 마오타이그룹의 주가는 전 세계 주류 업체 중 가장 높다. 디자인 : 이희문
지피지기 백전불태! 친중(親中), 반중(反中)을 넘어 극중(克中)을 위한 지식충전소! 진짜 중국을 만나러 갑니다! 새해 축제를 위해 마을 입구에서 미주로 방문객을 맞이하는 먀오족 여성 이들은 구려(九黎)족을 선조로 삼는다. 구려족은 갑골문에 등장할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녔다. 한때는 지금의 화북(華北)에서 한족의 선조인 화하(華夏)족과 패권을 다툴 정도로 세력이 강대했다. 전설에 따르면, 구려족과 화하족의 인구 비율은 1대 2에 불과할 정도였다. 기원전 3000여 년 전 구려족의 운명을 바꾸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구려족의 영수는 치우(蚩尤)였다. 치우는 구려족을 이끌고 화하족을 통솔한 황제와 허베이(河北)성 장자커우(張家口)에서 격전을 벌였는데, 이를 '탁록(涿鹿)대전'이라고 부른다. 은기로 만든 각종 장신구를 쓰고 달아 방문객을 맞이하는 먀오족 소녀 그러나 구려족은 대패했고 치우는 목이 베였다. 그 뒤 구려족은 황제에 굴복했으나 일부는 동이(東夷)족에게 몸을 맡겼다. 다른 일부는 양쯔강(長江) 이남으로 내려왔다. 이들이 오늘날의 먀오족(苗族)이다. 먀오족은 처음에는 양쯔강 중부 이남에 정착했다. 하지만 계속 남하하는 한족에게 밀려 내려갔다. 이런 한족의 핍박과 다른 민족의 경계 속에 산속 깊숙이 숨어 들어갔다. 이 같은 고난의 역사는 여인네들의 은 투구와 장식에서 잘 드러난다. 집안에 값비싼 재산을 모으지 않고 화려한 여인 장신구를 만들었다. 민가 진입로에서 루성을 불며 방문객을 맞이하는 먀오족 중년 남성 먀오족은 거주지를 계속 이동한 데다, 모계 사회였기 때문이다. 먀오족의 기원설을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유산은 음양력(陰陽曆)이 있다. 음양력은 1년을 365.25일로 나눈다. 따라서 음양력으로 추산된 오늘날 먀오족의 새해 첫날은 음력 10월에 있다. 이날을 먀오족어로는 '니효', 중국어로는 '먀오녠(苗年)'이라 부른다. 사실 음양력은 태양력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태양력은 해의 운행을 기준으로 만든 역법이었다. 고대 이집트인은 해마다 나일강이 범람할 때이면 동쪽 하늘에 일정한 별이 나타나는 사실을 알았다. 먀오족은 집에서 빚은 미주를 방문객에게 먹여 반가움을 표시한다. 이를 통해서 1년을 365일로 하고, 12달을 30일씩, 연말에 5일 더하는 달력을 만들었다. 먀오족은 이 태양력에 태음력을 더해 음양력을 완성했다. 음양력을 사용한 데에는 농경 문화와 관련 깊다. 먀오족은 고대부터 고도의 농경 문화를 꽃피웠다. 대륙에 농경 문화를 퍼뜨린 주역이 자신이라고 주장한다. 구이저우(貴州)에 쫓겨 와서도 먀오족은 농경 문화를 훌륭히 이식했다. 구이저우의 지리 환경은 척박하다. 산이 여덟이고 물이 하나며 전답은 하나뿐이다(八山一水一分田). 실제로 구이저우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평야가 없다. 산을 깎아 계단식으로 집을 지은 시장(西江)의 '천호먀오자이(千戶苗寨)' 전체 면적의 무려 92.5%가 산이나 구릉이다. 평균 해발은 1,100m에 달한다. 이에 따라 먀오족은 산을 깎아 집을 계단식으로 지었다. 산을 개간해 다랑논(梯田)을 조성했다. 계곡의 물을 막아 식수로 사용했다. 먀오족은 자신을 핍박한 한족에 대한 적개심을 오랫동안 표출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영화가 1992년에 개봉했던 《동방불패(東方不敗)》다. 영화에서는 먀오족의 새 리더로 동방불패가 추대되어 일월신교(日月神敎)라는 종교집단을 먼저 장악한다. 그 뒤 일본 낭인을 끌어들여 한족의 명나라에 대항한다. 먀오녠 행사에서 무기로 썼던 대나무와 낫을 들고 나온 먀오족 남성 그러나 내분을 거듭하다 한족 무협인의 도움을 받은 옛 교주 세력에게 반격받아 몰락한다. 《동방불패》는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다르다. 먀오족이 푸젠(福建)성 해안가에 사는 듯 묘사했으나 사실 왜곡이다. 또한 먀오족과 종교집단의 연관성도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한족에 대한 먀오족의 반감은 잘 묘사했다. 동방불패는 명 관리에게 "명 조정은 만주족, 거란족, 먀오족, 티베트족, 몽골족, 회족 등 여섯 민족 중 수가 가장 적은 먀오족을 제일 괴롭혔다"라고 일갈했다. 이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한다. 먀오족은 본래 전쟁터에서 루성을 불어 병사를 고무했다. 명대 초기까지 소수 민족은 거주지에서 지도자인 토사(土司)가 반(半)독립 상태로 통치했다. 하지만 중기부터 개토귀류(改土歸流) 정책을 시행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명조는 토사의 권력을 빼앗고 관리를 파견해 직접 통치했다. 이에 따라 먀오족은 한족의 성씨를 쓰기 시작했다. 또한 한족의 문화 풍습에 동화를 강요당했다. 개토귀류에 반발해 먀오족은 16세기 말부터 구이저우를 중심으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한족이 "먀오족은 30년마다 반란을 도모하고 60년마다 큰 전쟁을 일으킨다"라고 비아냥댈 정도였다. 먀오족의 머리 장식은 한족과는 전혀 다르고, 우리의 족두리와 유사하다. 2020년 현재 중국 내 먀오족은 1,106만 명으로, 인구가 55개 소수 민족 중 네 번째로 많다. 그중 396만 명이 구이저우성에 거주해 가장 많다. 이는 구이저우 전체 소수 민족 중 1/4에 해당하는데, 첸둥난(黔東南)자치주에 주로 몰려 산다. 필자는 2006년에 첸둥난을 처음 찾은 뒤 10여 차례 방문했다. '첸(黔)'은 구이저우를 가리키는 약칭이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먀오족이더라도 다른 성에 사는 먀오족과 만나 소통하는 데는 상당히 어렵다는 거다. 오랜 세월 동안 서로 각기 다른 산골 깊숙이에서 고립되어 살았기 때문이다. 집안에서 자수 놓는 먀오족 노인. 몽족도 같은 방식으로 만든다. 동남아에 먀오족과 같은 DNA, 같은 어족, 같은 문화 풍습을 가진 민족이 있다. 베트남, 라오스, 태국 등지에 흩어져 사는 몽족(Hmong people)이다. 먀오족과 몽족은 부르는 명칭이 다를 뿐, 똑같은 날에 새해 축제를 지낸다. 먀오녠은 전년에 수확한 농작물을 조상에게 바치고 새해의 안녕을 기원했던 종교의식에서 비롯됐다. 첫날 아침 먀오족은 먼저 집안에서 제사를 지낸 뒤 마을 축제를 준비한다. 여성은 마을 입구에 나와 다른 곳에서 오는 친척이나 타지인을 맞이한다. 이때 집에서 담근 미주(米酒)가 등장한다. 전통의상을 입고 마을 한복판에 모여 춤을 추는 먀오족 여성 방문객은 물소 뿔이나 술잔에 따라놓은 미주를 마셔야 마을로 들어갈 수 있다. 입구에서 한 잔, 민가 진입로에서 한 잔, 광장에서 한 잔을 들이켜야 한다. 술을 마실 때는 절대 건네는 잔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 만약 마시길 거부하면 축객령이 떨어진다. 남성은 루성(蘆笙)을 불며 춤을 춘다. 루성은 대나무 피리다. 과거에는 전장에서 군사의 사기를 올렸고, 지금은 분위기를 띄워주는 데에 사용한다. 손님이 들어서면 광장에서 축제가 벌어진다. 주민은 현란한 춤과 주옥같은 노래로 보는 이의 혼을 홀딱 빼놓는다. 먀오녠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온 마을 주민이 모여 추는 대동춤이다. 남성은 기나긴 루성을 들어 장엄한 연주를 하고, 여성은 울긋불긋한 전통의상을 입고 화려한 춤사위를 펼친다. 이들의 공연은 전문 예술인 못지않게 뛰어나다. 먀오족은 먀오녠뿐만 아니라 많은 축제를 즐기기 때문이다. 축제 기간 젊은이에게 다른 마을 사람과의 자유 연애를 적극 장려한다. 이는 고립된 산골에서 사는 주민 간의 근친혼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식사 시간에 장탁연(長卓宴)이 펼쳐진다. 장탁연에서는 집마다 잘하는 음식 하나를 마을 주민과 방문객이 모두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 내놓는다. 장탁연은 1년 내내 평안하라는 뜻으로, 수십m에 달하는 연회상이다. 그 길이가 수십 미터에 달한다. 장탁연에서 상마다 미주는 빠지지 않는다. 식사할 때 먀오족은 술과 노래를 주고받으면서 분위기를 띄운다. 노래 내용은 먀오족의 역사와 문화, 삶의 일상과 애환 등 다양하다. 문자가 없는 먀오족은 노래를 통해 선조의 이야기를 후손에게 전달했다. 필자는 취재 중에 먀오족이 집에서 직접 빚은 다양한 미주를 마셨다. 도수가 20도 내외에 불과해 한족의 술보다 마시기 편하다. 맛도 달짝지근해서 과음을 하곤 했다. 이처럼 먀오녠은 먀오족의 문화 풍습을 만끽할 수 있는 한마당이다. 디자인 : 이희문
지피지기 백전불태! 친중(親中), 반중(反中)을 넘어 극중(克中)을 위한 지식충전소! 진짜 중국을 만나러 갑니다!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이 소장한 명대 영락제 시기의 청화백자 전 세계에서 역사적 가치와 예술성이 뛰어난 중국 도자기를 소장한 곳은 어디일까? 뜻밖에도 대만 타이베이(臺北)의 고궁(故宮)박물원이 주인공이다. 고궁박물원이 소장한 유물은 69만여 점에 달한다. 이 중 서적 21만여 권과 문헌 39만여 건을 제외하고 도자기가 2만 5,595점으로 가장 많다. 모두 송, 원, 명, 청 등 네 왕조가 수집했거나 사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역사가 오래됐고 종류가 다양하고 풍부하다. 중국은 1928년에 '고궁박물원 조직법'을 제정하여 역대 왕조의 유물은 베이징으로 모아 체계적으로 보관했다. 고궁박물원이 소장한 남송대 청자 그러나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베이징은 위험에 노출됐다. 1933년에 일본군이 산하이관(山海關)까지 접근해 오자, 고궁박물원은 유물을 상하이로 옮기기로 했다. 먼저 고궁박물원은 중요 유물을 이송했다. 또한 베이징 내 여러 기관의 주요 유물도 옮겼다. 상하이의 유물은 1936년 난징(南京)에 고궁 분원이 설립되자, 모두 이전했다. 이듬해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고궁박물원은 베이징에 남아있던 유물과 난징 유물을 내륙의 쓰촨(四川)성으로 보내기로 했다. 첫째로는 베이징의 유물을 이송했다. 북송대 도자기의 걸작 중 하나인 청백도운문매병 둘째로는 난징의 유물을 쓰촨으로 옮겼다. 이런 노력 덕분에 귀중한 유물은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안전할 수 있었다. 종전 이후 쓰촨의 유물은 충칭(重慶)으로 이송해서 한데 모은 뒤 수로를 통해 베이징으로 돌려보내졌다. 하지만 1948년 국공 내전이 격화되면서 상황이 엄중해졌다. 그해 10월 고궁박물원은 중요 유물을 대만으로 옮기기로 했다. 1차로 고궁박물원과 중앙박물원 유물을 함선에 실어 대만으로 보냈다. 1949년 1월에 2차로 다시 두 곳의 유물을 이송했다. 이때 여러 기관이 소장했던 유물도 보냈다. 남송대 도자기의 걸작 중 하나인 청자봉이병 같은 달 3차로 남아있는 모든 유물을 이송했다. 이처럼 유물은 오랜 기간 육로와 수로로 운송됐으나 다행히 손상된 것은 아주 적었다. 대륙에서 대만으로 이송한 유물은 모두 60만 8,985점이었다. 방대한 유물 덕분에 고궁박물원은 오늘날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로 손꼽힌다. 도자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흙으로 굽던 토기에서 출발한다. 토기는 노천에서 나무를 사용하여 구웠기 때문에 굽는 온도가 400~700도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철과 구리를 제련하기 위해 가마가 발명되면서, 온도는 1,000도까지 올라갔다. 명·청대 황실에서 쓰던 자기를 생산했던 어요창 그 덕분에 시간이 지나면서 흙이 풀어지거나 물이 새는 토기의 문제점을 해결했다. 이런 도기를 더욱 비약적으로 발견시킨 자기는 중국에서 발명됐다. 점성이 흙보다 높은 고령토를 찾아 사용하고, 1,300~1,400도의 고온에서 구울 수 있는 가마 기술까지 개발했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가 처음 등장한 시기는 당대였다. 전설에 따르면, 7세기 상인인 도옥이 고향 창남(昌南)에서 한 도공이 생산한 자기를 매입해 수도인 장안(長安)에 가져다 팔았다. 자기를 처음 본 장안 주민들은 옥기인 줄 알 만큼 도기와 전혀 달랐다. 고령산에서 채취된 고령석을 자기로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 전시물 그 소식은 곧 조정에 전해졌다. 당 황실은 도옥에게 자기를 대량으로 진상하도록 명령했다. 창남은 오늘날 장시(江西)성 징더전(景德鎮)이다. 진상품이 된 자기는 백자로, 백색 점토에 회(灰)가 주성분인 유약을 발랐다. 당시 자기는 황실과 귀족만 쓸 수 있는 사치품이었다. 왜냐하면 자기의 원료인 백토가 희귀해서 생산량이 적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정은 백토의 생산을 철저히 통제해서 아무나 채취하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당대 말기 징더전에서 49km 떨어진 고령산(高嶺山)에서 엄청난 양의 고령석이 발견됐다. 중국은 자기를 1,300~1,400도의 고온에서 구울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고령석을 분쇄해서 백토로 가공한 것이 고령토다. 고령산의 고령토는 품질이 뛰어났다. 그로 인해 징더전의 자기는 순식간에 천하제일로 발돋움했다. 고령토의 명칭도 고령산에서 따와 이름 지어진 것이다. 송 황실도 징더전의 자기를 아꼈다. 특히 3대 황제인 진종은 밝은 청자를 무척 좋아했다. 1004년에 연호를 경덕(景德)으로 바꿀 정도였다. 그래서 당시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청자를 생산하던 창남에게 '징더전'이라는 마을 이름을 하사했다. 그래도 북송대까지 자기의 패권은 여전히 중국 북부가 갖고 있었다. 징더전에는 자기만 전문으로 생산하는 노동자층이 형성됐다. 1126년 정강의 변으로 북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건국되면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남송 조정은 금나라보다 열악한 군사력을 경제력으로 맞서려고 했다. 그에 따라 해상무역을 강화했고, 해외에서 최고의 인기 품목인 자기를 대량 생산해서 수출했다. 여기서 징더전이 큰 활약을 펼쳤다. 남송대 징더전에는 성 안팎에서 300여 개의 자기 공방이 자신의 브랜드를 가지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또한 제작 과정에서 세분화가 일어나면서, 자기만 전문으로 생산하는 직업과 이를 거래하는 계층이 폭넓게 형성됐다. 미니어처로 복원한 명·청대 어요창의 도자기 제작 과정 이렇게 산업화한 징더전이 쏟아내는 자기는 대륙 곳곳으로 퍼지면서 평민까지 손쉽게 구매해서 사용하게 됐다. 하지만 남송을 정벌한 원나라는 전혀 다른 정책을 시행했다. 1279년 징더전 북부에 부양(浮梁)현을 설치했고, 산하에 자기국(瓷局)을 두어 징더전의 자기 산업을 관리했다. 자기국은 황실에서 쓸 자기를 생산하는 공방을 감독했다. 명조는 원을 멸망시킨 뒤 새로운 정책을 썼다. 1368년에는 자기국을 폐지하고 징더전 주산(珠山)에 어기창(御器廠)을 건립했다. 어기창은 황실에 진상하는 청화백자를 생산했다. 명대 황실 자기를 굽던 어기창의 유적 그렇기에 중국 남부에서 유일하게 설립된 황실 직속의 기구였다. 따라서 규모가 매우 크고 세밀하게 체계화됐다. 어기창에서 생산된 자기는 밑면에 황제의 연호를 새겼다. 초기에는 황실에 진상되는 자기만 연호를 새겼으나, 해외로 수출하는 자기로 범위가 커졌다. 명대 말기에는 수출 허가권을 얻어 생산하는 공방의 자기도 연호를 새겼다. 이는 징더전의 자기가 다른 지방의 것과 차별화된 특징이었다. 이렇듯 황실 진상용과 수출용 자기를 생산하면서 징더전은 명실상부한 중국과 세계 도자기 산업의 메카로 우뚝 섰다. 어요창 지하에서 발굴된 명대 청화백자의 파편을 맞추어 복원했다. 청대 들어서 강희제는 어기창의 이름을 어요창(御窯廠)으로 바꾸었다. 흥미롭게도 어요창에서 생산됐던 자기 중 적지 않은 양을 깨뜨려서 지하에 묻혔다. 그 이유는 불합격한 자기를 시중에 유통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황실에서 쓰는 자기를 일반 대중이 쓰게 한다면 황제에게 불경을 저지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1980년대 초반부터 공사 중인 국영 자기 공장의 지하에서 많은 양의 자기 파편이 발견됐다. 문물 당국이 발굴과 조사를 진행하면서 역사책에만 존재했던 어요창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청대 어요창에서 생산된 자기를 검사하는 과정을 복원한 광경 어요창은 1911년 문을 닫은 뒤 징더전이 난개발되면서 폐허가 됐고 수많은 문헌은 사라진 상태였다. 필자는 어요창 유적을 둘러보고 자기 공방을 살펴보다가, 특이한 술병을 발견했다. 마치 한 점의 자기를 연상케 하는 징더대곡(景德大麯)이었다. 알고 보니 징더전에서 유일한 주류 업체인 징더주업에 생산하는 바이주(白酒)였다. 한 병을 사서 호텔로 돌아와서 마셨는데, 술맛이 부드럽고 깨끗했다. 술을 마시면서 과거 도자기 메카의 명성을 증명하는 유물과 걸작은 아예 없는 징더전의 현실이 안타까웠다. 디자인 : 이희문
지피지기 백전불태! 친중(親中), 반중(反中)을 넘어 극중(克中)을 위한 지식충전소! 진짜 중국을 만나러 갑니다! 푸젠성 융딩(永定)시 추시(初溪)촌에 있는 토루군 중국인이 푸젠(福建)성을 방문하면 반드시 참관하는 건축물이 있으니, 토루(土樓)다. 토루는 흙으로 쌓아 올린 집이라는 뜻이다. 오직 중국에 있는 객가(客家)의 전통 건축물이다. 객가는 중국과 해외 곳곳에 퍼져 산다. 하지만 토루는 푸젠, 광둥(廣東), 장시(江西) 3개 성에만 있다. 겉모습은 원형, 방형, 장방형, 사각형, 타원형 등 다양하다. 흥미롭게도 푸젠의 토루는 다른 곳보다 훨씬 크다. 한 채의 토루가 마치 성채처럼 거대하다. 그 덕분에 토루에는 적게는 수십 가구에서 많게는 200~300여 가구가 생활한다. 토루는 마치 하나의 작은 성채와 같다. 하나의 씨족 공동체가 모두 살 수 있는 큰 규모다. 그 이유는 객가의 이주와 정착 역사에서 비롯됐다. 객가는 본래 북부의 황허(黃河) 중류 일대에서 살았던 한족이었다. 객가의 시작은 흥미롭게도 진시황의 남정(南征)에서 비롯됐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은 남부를 평정하기 위해 60만 대군을 파견했다. 214년에는 추가로 50만 명을 파병했다. 병영에는 군졸의 식솔이 있었다. 가족이 함께 남부로 내려가 둔전을 하며 보급을 해결했다. 적지 않은 병사와 가족은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현지에 남아 최초의 객가가 됐다. 토루가 있는 마을은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하나의 다리를 두었다. 그 뒤 다섯 차례에 걸쳐 객가의 이주가 벌어졌는데, 2~4차는 전란과 내란이 원인이었다. 4세기 북방 유목민족이 대거 침입한 영가의 난, 당대 후기 안사의 난과 황소의 난, 12세기 북송이 금나라에게 패한 정강의 변이 촉발했다. 5~6차는 배경이 전혀 달랐고, 이주 지역도 중국 서남부와 해외로 넓혔다. 명말과 청초에 푸젠과 광둥에는 홍수와 가뭄이 반복해 일어났다. 따라서 객가 공동체에서는 서진(西進) 운동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도 전염병과 자연재해로 인구가 급감했던 쓰촨(四川)으로의 이주를 적극 장려했다. 산속 작은 분지에 하천 옆이나 수맥이 풍부한 곳에 토루를 지었다. 당시 쓰촨으로 갔던 객가의 대표적인 후손이 덩샤오핑(鄧小平)과 주더(朱德)다. 19세기 태평천국운동은 객가와 좡족(壯族)이 주도했다. 그로 인해 청조는 태평천국을 멸망시킨 뒤 객가를 혹독히 탄압했다. 이에 수많은 객가가 대만과 동남아로 이주했다. 그들의 대표적인 후손이 차이잉원(蔡英文)과 리콴유(李光耀)다. 그러나 객가가 이주했던 지역에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토착민을 몰아내고 외지인이 정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객가는 원주민을 피해 산속으로 들어갔고 독자적인 씨족 공동체를 구성했다. 한 씨족이 사는 토루는 성이나 출신지를 붙여 '○○루(樓)'라고 불렀다. 그래서 자신을 원주민과 구분해 '손님'이란 뜻인 객가라고 불렀다. 오늘날 객가는 중국 19개 성·시에 5,000여만 명이 흩어져 살고 있다. 또한 전 세계 80여 개국에 3,000만 명이 거주한다. 객가는 어디에 살던 '진짜배기 한족'이라는 자부심이 강하다. 중원에서 내려와 자신만의 공동체를 구축했고 독특한 문화를 보존했기 때문이다. 객가어는 당·송대 한족 언어의 순수성을 잘 보존했다. 제례의식과 풍습은 1000여 년 동안 변하지 않고 유지했다. 음식 문화도 예부터 계승하면서 이주한 지역 환경과 접목하여 재창조했다. 토루는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단 하나의 문만 갖추었다. 이런 배경에는 토루가 한몫을 톡톡히 했다. 한 토루에 사는 씨족은 성이나 출신지를 붙여 '○○루(樓)'라고 불렀다. 그 안에는 식당, 목욕탕, 서당, 사당 등 시설을 갖추어 자급자족했다. 토루의 침실은 2층부터 4층까지 두는데, 보통 한 가족을 한 단위로 해서 수직적으로 배열했다. 특히 처음 지을 때는 훗날 늘어날 가족을 염두에 두어 규모를 크게 지었다. 따라서 청대에 지어진 원형 토루의 경우 방은 300여 칸에 달했고, 최대 900명이 살 수 있을 정도였다. 또한 전통 풍수지리와 첨단 건축술을 총동원해서 지었다. 토루는 수맥이 풍부한 곳을 찾아지었기에 가장 중요한 시설이 우물이다. 대부분 산에 기대어 있으면서 앞이 트인 작은 분지에 자리 잡고 있다. 전면이나 측면에는 하천이 있거나 지하 수맥이 풍부한 위치가 보통이다. 공사는 단 하나뿐인 대문의 방향을 먼저 정했다. 대문을 기준으로 삼아 원을 그렸다. 그 선에 외벽의 기둥이 될 말뚝을 줄지어 박고 지반을 다졌다. 외벽은 하단을 돌담으로, 그 위는 오리나무와 대나무로 촘촘히 다져 흙벽을 만들었다. 흙벽의 하단 폭은 170cm, 평균 150cm로 웬만한 공격에도 허물어지지 않았다. 안쪽에는 나무의 이음을 정교히 해서 방과 복도를 지었다. 토루의 중앙에는 조상신을 모시는 조당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와로 지붕을 얹혔다. 이처럼 토루는 방어성이 뛰어났다. 옛날에는 산적과 원주민의 약탈이 끊이질 않았고, 야생동물의 공격도 흔했기 때문이다. 모든 토루의 중앙에는 조상신을 모시는 조당(祖堂)이 있다. 모시는 조상은 남방으로 갓 이주해 왔을 때 혹은 토루를 처음 건설했던 선조다. 매년 선조의 생일과 기일에는 온 씨족이 조당에 모여 제사를 지낸다. 이 조상신과 제사의식이 객가의 정신적 지주다. 객가는 토루 주변의 물을 이용해서 쌀, 옥수수, 감자, 채소, 과일 등을 심어 수확해 살았다. 조당에서 조상신에게 절하는 객가 젊은이들 작물 중 쌀과 차는 품질이 아주 뛰어났다. 객가 쌀에는 북방과 남방의 도작 문화가 한데 융합되어 있다. 그렇기에 남부의 여느 쌀보다 윤기가 흐르고 맛있다. 객가 차는 청대에는 최상품으로 쳐줄 만큼 유명했다. 청대 유일한 대외 무역항이었던 광저우(廣州)의 13행을 통해 유럽으로 수출했던 차가 푸젠의 객가 차였다. 푸젠의 객가는 경작한 찹쌀로 '냥주(娘酒)'를 빚는다. 냥주의 양조법은 간단하다. 먼저 찹쌀을 씻은 뒤 물에 담가 하루 동안 불린다. 불린 쌀은 건져서 물기를 빼고 시루에 푹 찐 다음 차게 식힌다. 토루는 보통 4층으로 지어져 수직으로 나눠 한 가족이 한 칸을 사용한다. 여기에 누룩과 고두밥을 섞고 물을 부은 뒤 비비고 증류한 술을 더한다. 그리고 술독에 담아 반나절 정도 일정하게 끊이면 보글거리며 끓는 소리가 난다. 이때 술독 주둥이에 구멍을 내고 다시 이틀 정도 놔둔다. 그러면 냥주가 발효되어 숙성된다. 그렇다면 왜 미주(米酒)라고 부르지 않고 냥주라고 지었을까? 이는 객가의 재미있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앞서 설명했듯이, 객가는 전란을 피해 북방에서 내려왔다. 4차 이주 시기 한 무리의 대가족이 고향을 떠나 수개월 동안 남하한 끝에 푸젠의 산간마을까지 걸어왔다. 토루의 편의시설 중 유일하게 밖에 설치하는 것은 화장실이다.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온 가족은 그야말로 기진맥진해 버렸다. 하지만 원주민은 그들을 적대시했다. 오직 백발의 노파만 달랐다. 노파는 가족에게 커다란 대나무 통에 담긴 술을 건넸다. "어서들 마셔보게나. 금방 기력을 회복할 걸세." 향긋한 냄새가 진동하는 술을 연장자부터 들이켰다. 잠시 후 혼미한 정신이 맑아지고 기력이 점점 되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노파는 "이 술은 찹쌀로 지었다"면서 자세한 양조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그 뒤 가족은 노파를 어머니처럼 받들었고, 술을 '어머니(娘)의 술'이라 명명했다. 냥주는 술독에 담아 반나절 정도 일정하게 끓여야 한다. 객가는 "누구나 술을 빚고 음식을 만든다"고 할 정도로 냥주를 제조한다. 그렇기에 어느 토루를 가든 특색 있는 맛과 향내를 지닌 냥주를 마실 수 있다. 평소 음식을 만들 때 빠져서는 안 되는 조미료다. 뿐만 아니라 전통 명절이나 관혼상제를 거행할 때, 귀한 손님이 방문했을 때도 담가놓았던 냥주를 꺼내어 마신다. 푸젠의 토루는 1960년대까지 지었는데 난징(南靖), 융딩(永定), 화안(華安) 등지에 가장 많다. 현재 토루는 3,000여 개나 보존됐다. 그중에 건축 양식이 뛰어난 46개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디자인 : 이희문
지피지기 백전불태! 친중(親中), 반중(反中)을 넘어 극중(克中)을 위한 지식충전소! 진짜 중국을 만나러 갑니다! 《취권》과 《황비홍》에서 황비홍이 즐겨 마신 주좡쐉정의 술박물관 오랜 중국사에서 명멸했던 인물들 중 중화권 영화와 드라마에서 주인공으로 가장 많이 등장한 이는 무술 고수 황비홍(黃飛鴻)이다. 황비홍은 우리에게 친숙하다. 1991년에 홍콩의 쉬커(徐克) 감독이 제작하고 대륙 출신 리롄제(李連杰)가 주연한 영화가 공전의 히트를 했기 때문이다. 쉬커의 황비홍 시리즈는 6편까지 제작됐고, 다른 이가 제작한 후속작이 뒤를 이었다. 사실 황비홍 영화와 드라마는 100편이 훨씬 넘는다. 그 시초는 1948년 홍콩의 후펑(胡鵬) 감독이 제작한 영화 《황비홍: 편풍멸촉(鞭風滅燭)》이었다. 오랫동안 황비홍 역을 맡았던 배우 관더싱(오른쪽) 주연은 당대 홍콩 최고의 배우인 관더싱(關德興)이 맡았다. 관더싱은 본래 광둥(廣東)의 전통극인 월극(粵劇)의 배우였다. 따라서 정식으로 무술을 배우지 못했다. 다만 무예에 심취해 홀로 홍가권(洪家拳)을 연마했다. 홍가권은 황비홍이 집대성한 무술이다. 첫 황비홍 영화를 촬영할 때 관더싱의 나이는 이미 40대 초반이었다. 그러나 홍가권을 꾸준히 연마해 무극강유권(無極剛柔拳)도 창시할 정도였다. 그 뒤 관더싱은 1950~70년대에 홍콩에서 제작된 80여 편의 황비홍 영화와 드라마의 주연을 대부분 꿰찼다. 《취권》에서 황비홍 역을 맡아 열연했던 청룽. 출처: 바이두 그로 인해 홍콩 주민들은 관더싱을 '황사부'라고 부르며 존경했다. 관더싱이 고희를 넘어 더 이상 배역을 맡기 어려워지자, 홍콩 영화계는 새 주인공을 찾아 나섰다. 그 와중에 1978년 황비홍을 새롭게 해석하고 코믹성을 강화한 영화 《취권(醉拳)》이 제작됐다. 《취권》은 흥행에 크게 성공했고, 주연인 청룽(成龍)은 아시아의 스타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일부 홍콩 언론은 영웅인 황비홍을 너무 가볍게 묘사하고 왜곡시켰다며 맹렬히 비판했다. 그 영향으로 1980년대에는 황비홍 영화가 가뭄에 콩 나듯 제작됐다. 의사로도 활동했던 황비홍의 모습을 그린 1991년작 《황비홍》 한동안 침체에 빠졌던 황비홍 영화 붐을 다시 불러일으킨 것이 리롄제가 주연한 작품이었다. 그렇다면 실제 황비홍의 삶은 어땠을까? 황비홍은 1856년 당시 행정구역으로 난하이(南海)현 포산(佛山)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황기영은 19세기 광둥에서 활약하던 고수 10명(廣東十虎) 중 한 명으로 명성이 높았다. 황기영은 유소년기에 무술을 익혔고 청소년기에 수련 여행을 다니다가, 한 장군의 눈에 들어 포산 주둔군의 교관이 됐다. 틈틈이 익힌 약초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약방을 열어 안정된 생활을 누렸다. 황비홍기념관은 황비홍이 운영하던 무관과 보지림을 고증해서 복원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황비홍은 3살 때부터 무예를 익혔다. 천성적으로 기골이 장대한 데다 총명해서, 13살에 아버지와 함께 군졸을 가르칠 정도로 장족의 발전을 거듭했다. 황비홍은 가전무술인 빠른 발차기를 구사하는 '그림자가 없는 다리(無影腳)' 기술의 달인이었다. 여기에 광둥십호의 절기를 전수받았다. 즉, 양곤으로부터 철선권(鐵線拳)을, 소걸아로부터는 취팔선권(醉八仙拳)을 배웠다. 또한 송휘당의 무영각 기술을 배워 홍가권을 집대성했다. 17살 때에는 광저우(廣州)에 무관을 열고 제자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황비홍기념관에 50대의 황비홍 모습으로 만든 황비홍 동상 황비홍은 광저우에서 차츰 지명도를 쌓으면서 정착했다. 그리하여 지금의 해군사관학교 격인 수사(水師)가 황비홍을 무술 교관으로 초빙했다. 1885년에는 해군 제독이 직접 요청해서 광둥 해군의 교관이 되었기에, 운영하던 무관은 문을 닫았다. 하지만 이듬해 아버지와 해군 제독이 잇달아 죽자 관직을 사직했다. 그 뒤에 개업했던 병원이 보지림(寶芝林)이다. 보지림은 황비홍 관련 영화나 드라마에서 줄곧 등장하는 무대다. 1888년 황비홍은 유영복 장군을 고쳐준 인연으로 흑기군(黑旗軍)의 교관 겸 의관이 됐다. 기념관 안 연무청(演武廳) 마당에서 수련 중인 황비홍의 후예들 유영복은 황의 무예와 의술에 감탄해 '의예정통(醫藝精通)'이라고 쓴 편액을 선물로 주었다. 1894년에 황비홍은 흑기군과 함께 대만에 가서 일본군과 싸웠다. 귀국해서는 주로 보지림에 머물면서 가난한 병자들을 치료했다. 1911년에는 민간인 자위부대의 교관으로 일하기도 했으나, 말년에는 의술에만 전념하면서 1925년에 숨을 거두었다. 이런 삶을 살았던 황비홍은 왜 중국인의 영웅이 됐을까? 황비홍이 무술에서 위대한 업적을 세웠던 일대종사(一代宗師)였고, 인간적인 의사였다는 점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포산의 황비홍기념관에서는 날마다 사자춤 공연이 열린다. 그러나 중국사에서 황비홍보다 뛰어난 무예가는 즐비하다. 또한 황비홍보다 큰 업적을 남긴 명의도 많다. 따라서 일부 중국 언론은 "홍콩이 같은 광둥 문화권 출신인 황비홍을 과대 포장했다"며 비판했다. 사실 무술영화는 전 세계인에게 어필할 수 있는 중국 영화의 장르다. 황비홍은 싸움을 잘하는 무술 고수이자, 인술을 펼쳐 만인을 돌본 협객의 삶을 살았다. 이는 고금을 뛰어넘어 중국인에게 강력히 어필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황비홍이 살던 시절은 중국이 서구 열강에 의해 반식민지로 전락하던 시대였다. 황비홍기념관의 사자춤은 북사와 남사의 특징을 모아 접목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중국은 패배했고 이듬해 굴욕적인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했다. 일본군은 할양받은 대만에 진군했는데, 흑기군은 대만 민중들과 함께 저항했다. 황비홍은 그 항일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투사였다. 이런 황비홍은 1997년 홍콩을, 1999년 마카오를 반환해 식민지 유산을 청산하려는 중국에 아주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게다가 황비홍은 전통연희인 사자춤의 고수였다. 사자춤은 사자가 악귀를 막아주고 길복을 가져다주기 바라며 추었다. 사자탈을 쓴 연기자는 북과 징의 반주에 맞추어 춤을 춘다. 하늘 높이 점프해서 다음 말뚝으로 건너가는 기술은 권법을 응용했다. 북방식인 북사(北獅)와 남방식인 남사(南獅)로 나뉘는데, 북사의 사자탈은 황금빛 털로 꾸미며 위엄을 강조한다. 남사는 눈과 입이 크게 하고 움직여 사자의 희로애락을 표현한다. 북사의 연기자는 바지까지 사자 차림으로 꾸미고, 남사는 평상복을 그대로 입는다. 포산은 남사의 발상지로, 춤사위와 권법을 결합해 호쾌하고 역동적인 사자춤을 추었다. 사자춤의 정수는 차이칭(采靑)이다. 차이칭은 사자춤을 추면서 높이 매달려 있는 물건을 따는 의식이다. 사자춤의 기본동작과 응용기술을 선보이며 빨리 따야 한다. 주좡쐉정은 증류하기 전에 쌀을 2번 찌고 끓였다. 사자가 푸른 구슬을 발견하는 동작, 놀라워하는 동작, 심취하는 동작, 물을 마시는 동작, 구슬을 토해내는 동작 등을 펼쳐야 한다. 황비홍은 생전에 사자춤을 잘 춰서 '광둥 제일의 사자왕'이라고 불렸다. 이런 황비홍의 고향 술이 중국의 3대 미향형(米香型) 바이주(白酒)로 손꼽히는 주좡쐉정(九江雙蒸)이다. 미향형은 쌀을 주원료로 빚는다. 맛은 부드럽고 향은 단아하다. 광둥은 사시사철 온화한 날씨 덕분에 2모작이 가능하다. 따라서 북부와 달리 예부터 수수(高粱)가 아닌 쌀로 바이주를 제조하는 기술이 발달했다. 19세기 말 전통 증류기로 주좡쐉정을 뽑아내는 모습 주좡쐉정은 1820년대 포산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주좡(九江)진에서 한 부부가 술도가를 열면서 시작됐다. 두 차례에 걸쳐 쌀을 찌고 끓였기에(雙蒸), 얼마 안 가 포산을 대표하는 술로 발돋움하여 사랑받았다. 2009년에 문을 연 주장쐉정박물관은 광둥성 유일의 술문화박물관이다. 이곳은 19세기 말 술도가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연했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 박물관 가이드는 "영화 《황비홍》 속 술집에는 주좡쐉정 브랜드를 붙인 술 항아리가 등장한다"면서 "황비홍은 고향술인 주좡쐉정을 즐겨 마셨다"고 자랑했다. 디자인: 이희문
지피지기 백전불태! 친중(親中), 반중(反中)을 넘어 극중(克中)을 위한 지식충전소! 진짜 중국을 만나러 갑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고 웅장한 잉현목탑. 역사가 1천 년 가까이 됐다. 세계에서 가장 높고 웅장한 목탑은 무엇일까? 그 주인공은 산시(山西)성 잉(應)현에 있는 불궁사의 석가탑(釋迦塔)이다. 석가탑은 높이가 67.3m에 달한다. 팔각형 모양을 갖추고 있고, 탑 아래의 지름은 30.2m이다. 석가탑은 밖에서 보면 5층 탑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9층 탑이다. 모두 2,600톤에 달하는 잣나무로 지었는데, 단 하나의 못이나 정을 사용하질 않았다. 지어진 연대는 1천 년 전인 1056년이었다. 당시 중국 화북을 지배했던 나라는 거란족이 세운 요다. 요나라는 916년에 거란족의 영웅 야율아보기가 건국했다. 잉현목탑 1층에 모셔져 있는 대불 야율아보기는 당조의 쇠락과 5대 10국의 혼란을 틈타 세력을 넓혔고 발해를 멸망시켰다. 2대 황제 태종도 대륙의 혼란기를 이용해서 군사적 요충지였던 연운 16주를 얻었다. 연운 16주는 지금의 베이징, 허베이(河北)성, 산시성 북부에 해당한다. 잉현은 16주 중 하나인 응주였다. 요나라는 다른 정복왕조와 달리, 거란족과 한족을 철저히 분리해서 통치했다. 이는 유목민인 거란족이 한화(漢化)되는 것을 막으려는 조치였다. 하지만 중국에서 뿌리내렸던 불교를 받아들였다. 특히 황실과 귀족 여성들이 적극적이었다. 잉현목탑에서는 귀중한 불교 대장경이 발견됐다. 7대 황제 흥종의 황후 소달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1055년에 남편이 죽자,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 석가탑을 짓도록 했다. 당연히 황위에 오른 도종은 어머니의 뜻을 충실히 받들었다. 따라서 당대 최고의 목공들이 동원됐고, 황실과 귀족이 앞다투어 시주했다. 석가탑이 지어진 뒤 불궁사는 황실 사원으로 승격됐다. 흥미롭게도 이런 잉현목탑의 존재나 의미를 아는 중국인이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양쯔강(長江) 이남에 있는 황학루(黃鶴樓), 악양루(岳陽樓), 등왕각(騰王閣)을 강남 3대 누각을 으뜸으로 여긴다. 서산 정상에서 바라본 황학루. 앞의 다리는 장강대교다. 이 중 황학루가 위치한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은 중국의 배꼽에 해당한다. 티베트와 신장(新疆)자치구를 제외하면 지리적으로 중국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황학루는 서산(蛇山) 서쪽 기슭에 있다. 바로 앞에 양쯔강이 흐른다. 본래 황학루는 223년 오의 손권이 유비와의 전쟁을 대비해서 세웠던 망루를 기원으로 한다. 손권은 요충지인 우한에 도시를 건설하며 '무로 나라를 다스려 번창시키려(以武治國而昌)' 했다. 황학루라는 이름은 도교 전진파의 조사인 여동빈과의 인연에서 비롯됐다. 황학루는 강남 3대 누각 중 하나로 중국에서 가장 크다. 당대에 여동빈이 우한에 머물면서 신 씨가 운영하던 술집을 날마다 찾았다. 그리고 1년 동안 돈을 내질 않고 술만 마셔댔다. 하지만 신 씨는 싫은 내색 없이 그를 환대했다. 어느 날 여동빈은 "먼 길을 떠나야 하니 밀린 술값을 내겠다"면서 가게 벽에다 황학 한 마리를 그렸다. 신 씨에게는 "손님이 올 때마다 손뼉을 치면 황학이 나와 춤을 출 것"이라고 일러준 뒤 떠났다. 신 씨는 긴가민가하면서 손뼉을 쳐보았다. 그러자 정말로 황학이 튀어나와 춤을 추었다. 그 후 술집은 유명세를 크게 얻어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황학루 앞에 세워진 황학 동상 큰돈을 번 신 씨는 과거 망루가 있던 자리에 누각을 세웠다. 또한 여동빈과의 인연을 기리면서 이름을 황학루라고 지었다. 몇몇 도교 책에는 여동빈이 훗날 황학루에서 승천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로 인해 황학루는 도교의 성지이자 순례지로 사시사철 신자들이 끊임없이 몰려든다. 오늘날 황학루는 높이가 51.4m로 중국 누각 중 가장 크고 웅장하다. 170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파괴되고 중건되길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규모는 점점 커졌고 건축 양식은 화려해졌다. 1884년에 목조로 만들어졌던 누각이 화재로 소실됐다. 황학루 내에는 여동빈과 황학의 전설을 보여주는 모자이크 벽화가 있다. 그래서 1985년에 돌과 시멘트를 섞고 유리 기와를 얹어 현대식 건축물로 복원하여 우한을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됐다. 지금의 황학루는 원래 자리에서 1km가 떨어진 위치에 있다. 장강대교의 일부가 본래 터를 차지하는 바람에 현재 자리에 중건된 것이다. 황학루는 밖에서 보면 5층이나 실제로는 9층이다. 누각 내부는 72개의 원형 기둥이 받치고 있어 튼튼하고 견고하다. 흥미로운 전설과 뛰어난 풍광을 간직하고 있어 수많은 명인이 황학루를 찾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400여 편의 시와 문장을 남겨서 전해지고 있다. 황학루 8층에서 바라본 황학루 광장과 양쯔강 그중 8세기 당대 관료 최호가 지은 시 '황학루'를 으뜸으로 손꼽는다. 옛사람은 이미 황학을 타고 날아가 버렸고(昔人已乘黃鶴去) 이곳에는 황학루만 홀로 남았구나.(此地空餘黃鶴樓) 황학은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고(黃鶴一去不複返) 흰 구름만 천년을 유유히 떠도네.(白雲千載空悠悠) 맑은 날 강에서 한양의 나무들이 빛나고(晴川歷歷漢陽樹) 향기로운 풀은 무성히 앵무새 섬을 덮었네.(芳草萋萋鸚鵡洲) 날은 저무는데 내 고향은 어드메요(日暮鄕關何處是) 안개 낀 강 위에 수심만 깊어지네.(煙波江上使人愁) 최호의 시 '황학루'를 새겨놓은 시벽 '황학루'는 칠언율시(七言律詩)의 대표작이자, 중국 시문학의 한 획을 그은 절창이다. 칠언율시는 7자로 해서 8구로 이루는 한시 형식이다. 3~6세기 중국 강남의 육조에서 격률이 엄격하고 규칙이 엄정한 율시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당대 초기에는 오언율시가 성행했으나 곧 칠언율시가 대세가 됐다. 칠언율시는 보통 3~4구와 5~6구가 대구(對句) 되는데, '황학루'는 그 구조를 완벽하게 갖추었다. 훗날 남송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엄우가 "당대 칠언율시 가운데 최호가 지은 '황학루'가 제일이다"라고 평가했을 정도다. 수많은 명인이 남긴 시와 문장을 모아놓은 비석 전각과 연못 최호는 40여 편의 시를 남겼으나 시인으로 명성을 얻지 못했다. 젊었을 때는 민간에서 떠도는 가사를 시구에 차용하길 즐겼다. 따라서 초창기 시는 문장만 번지르르하고 내용은 부실했다. 그러나 관직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되어 홀연 자리를 박차고 천하를 20년간 주유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중년에 거침없고 웅장한 시를 썼다. 몇 년 뒤 이백도 황학루를 찾았다. 황학루 주변의 수려한 풍광에 시상이 떠올랐다. 하지만 누대에서 최호의 시를 발견했다. 이백은 "참으로 절묘하구나"라고 탄식하며 붓을 내려놓았다. 이백이 최호의 시를 보고 붓을 내려놓은 일을 기념해 지은 팔각정 이 고사에 감복한 후세인이 황학루 옆에 각필정(擱筆亭)을 세웠다. 각필은 붓을 내려놓다는 뜻이다. 훗날 이백은 '황학루에서 광릉으로 가는 맹호연을 떠나보내다'를 지어 아쉬움을 달랬다. 오랜 벗이 서쪽의 황학루를 떠나(故人西辭黃鶴樓) 봄 안개 지는 춘삼월 광릉으로 내려가네.(煙花三月下揚州) 외로운 돛단배 멀리 푸른 하늘로 사라지고(孤帆遠影碧空盡) 오직 하늘 끝으로 양쯔강만 흐르는구나.(惟見長江天際流) 한편, 황학루는 전국 술 품평회에서 국가명주상을 2번이나 수상한 명주인 '황학루주'도 탄생시켰다. 황학루 8층에서 바라본 서산과 우한 시내 황학루주는 명·청대 우한의 특산 술인 한펀주(漢汾酒)를 전신으로 한다. 누룩을 만들 때는 발로 밟아 반죽한다. 숙성시킬 때는 원주(原酒)를 담은 항아리 위에 석판을 놓아 봉하고 흙벽 옆에 보관한다. 따라서 술 빛깔이 맑고 투명하며, 맛은 진하나 뒤끝이 부드러우면서 달다. 이는 보리와 완두로 발효시킨 누룩에다 주원료인 수수를 더해 다시 당화 시켰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중국 3대 청향형(清香型) 바이주(白酒) 중 하나로 손꼽힌다. 중국에서 유일하게 누각을 브랜드화하고 우한을 대표하는 술로도 명성이 높다. 디자인 : 이희문
지피지기 백전불태! 친중(親中), 반중(反中)을 넘어 극중(克中)을 위한 지식충전소! 진짜 중국을 만나러 갑니다! 보저우에 있는 화타암 내의 화타상 소설 《삼국지》의 한 고사다. 조조가 위나라 왕에 오른 뒤 두통이 갈수록 심해졌다. 좋다는 약을 모두 먹었으나 효과가 없었다. 신하 중 한 명이 민간에서 활약하던 명의를 추천했다. '중국 외과의 비조'로 불리는 화타(華陀)였다. 조조는 즉시 화타를 조정으로 불렀다. 화타는 조조를 진찰한 뒤 "왕의 머릿속에 바람이 도는 풍질(風疾)이 있어 머리가 아픈 것"이라며 "완쾌를 위해서 마비산(麻沸散)을 뿌려 왕을 잠들게 하고 머리를 쪼개 바람기를 걷어내겠다"라고 말했다. 조조는 화타가 자신을 해하려 한다며 의심했다. 보저우의 운병도기념관에 있는 조조와 참모들 밀랍상 그래서 수술을 바로 하는 대신에 화타를 어의로 임명해서 곁에 두었다. 하지만 화타는 의술을 한 사람이 아닌 만백성을 위해 사용하고 싶었다. 또한 조조가 무력으로 왕에 오른 일을 경멸했다. 따라서 부인이 위독하니 고향에 돌아가 돌봐야 한다며 거짓을 고했다. 조조는 이 청을 받아들였고 화타는 조정을 벗어났다. 그 뒤 조조는 사람을 여러 차례 보내 화타에게 돌아오라고 청했다. 그러나 화타는 이런저런 핑계만 댈 뿐 돌아가지 않았다. 결국 조조는 화가 나서 사람을 보내 정탐시켰고, 거짓말은 탄로가 났다. 보저우에 조성된 화타암 조조는 화타는 조정으로 압송하여 곧 죽이려 했으나, 순욱이 나서서 만류했다. 이 소식은 옥중의 화타에게 전해졌다. 화타는 머지않아 처형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몸에 지니고 다녔던 의서를 옥리에게 건네며, 후세인들에게 꼭 전해 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옥리는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 의서를 모두 불태웠다. 며칠 뒤 화타는 고된 옥살이를 견뎌내지 못하고 죽었다. 조조는 병세가 더욱 깊어지는 와중에도 "그놈은 죽어 마땅하다"라며 자위했다. 하지만 아끼던 아들 조충이 중병으로 쓰러졌다. 화타암에는 후세인들이 화타를 칭송하며 남긴 비문이 많다. 온갖 명의를 불러 치료했으나 조충은 요절했다. 그제야 조조는 화타를 죽인 일을 깊이 후회했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정사 《삼국지》에도 기록되어 있다. 다만 소설처럼 자세한 묘사는 없다. 본래 화타가 조조에게 사용하려 했던 마비산은 인도산 대마로 만든 마취제다. 화타는 마비산으로 환자를 전신 혹은 부분 마취한 뒤 다양한 수술을 집도했다. 시술 속도가 워낙 빨라서 환자가 마취에서 깨어나면 아무런 통증을 못 느낄 정도였다. 위장이 절제된 환자가 4~5일 만에 완치된 일화도 전해진다. 보저우의 조조공원에 세워진 조조 석상 화타가 돌아갔던 고향은 안후이(安徽)성 보저우(亳州)다. 흥미로운 점은 조조의 고향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동향인인 것이다. 조조는 환관의 손자였다. 할아버지 조등은 후한의 다섯 황제를 섬기며 황실을 지켰다. 그 덕분에 양자를 들이는 걸 허락받아 조숭을 거둬들였다. 조숭은 양아버지 덕분에 관직에 올랐고 장사를 통해 큰 능력을 발휘했다. 조조는 이런 집안 내력 때문에 조정의 권문세가들로부터 모멸과 멸시를 당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명성을 발판 삼아 관직에 올랐고, 아버지의 재산 덕분에 인재를 모았다. 조조가문묘군에서 발굴된 조숭의 수의. 2,400개의 옥을 은실로 엮었다. 조조는 조등과 조숭이 죽자, 고향에 가묘를 조성했다. 조조가문묘군은 훗날 발굴되어 조조공원과 함께 조성됐다. 조조와 관련된 또 다른 유적은 운병도(運兵道)다. 운병도는 조조의 명에 따라 건설된 지하통로다. 지하에 성곽의 안과 밖을 통로로 연결하여 전투 상황에 따라 군사를 몰래 이동하기 위해 만들었다. 사실 운병도는 여러 지방에 건설했는데, 현재까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보저우 운병도가 유일하다. 전체 길이가 8km가 넘고 높이는 1.7~2.1m, 폭은 0.6~0.9m이다. 일부 구간은 폭과 높이가 2배다. 조조가 건설한 운병도. 고대에 군사적 목적으로 만든 지하통행로다. 《삼국지》는 조조를 화타까지 죽인 효웅(梟雄)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조조는 용인술이 뛰어났던 리더였다. 특히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오직 능력만 봤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뛰어난 재주가 하나 있으면, 출신 성분이나 인격적인 결함에 구애 없이 과감하게 기용했다. 심지어 아내를 고를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부인이 죽자, 첩인 변 씨를 정실로 앉혔다. 변 씨는 기녀 출신이었으나 총명하고 현숙했다. 이런 냉철한 현실 인식을 가졌기에 무력을 앞세워 혼란을 종식하려 했다. 고대 고정공주의 양조장을 재연한 미니어처 또한 법가사상으로 나라를 통치했다. 둔전제, 전매제 등을 실시해서 백성들의 생활 안정과 군비 확충을 도모했다. 또한 전쟁 사상자와 그 유가족, 극빈 가정을 위한 구호정책을 시행했다. 냉혹한 통치자의 모습과 달리 조조는 사서와 시문에 조예가 깊었다. 《손자병법》의 뛰어난 해석가로 전문에 주석을 꼼꼼히 달아 남겼다. 감수성 어린 시인으로 소박한 민요였던 악부(樂府)를 문학의 한 장르로 정착시켰다. 아들인 조비, 조식과 함께 '건안칠자(建安七子)'로 손꼽히며 문단을 이끌었다. 후대인들은 조조의 작품을 '후한 말의 진실한 서사시'로 평가한다. 송대 술을 빚는 데 썼던 우물. 강물의 범람으로 지하 4m 아래 파묻혔다. 조조는 말년에 병이 깊어가자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예감했다. 이에 고향 술을 마시며 흐르는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했다. 당시 지은 '단가행(短歌行)'에는 조조의 심정이 잘 드러나고 있다. 술이 있으니 노래 부르세,(對酒當歌) 인생이 얼마나 되겠는가.(人生幾何) 견주니 아침이슬과 같지만,(譬如朝露) 지난날은 고통스러움이 많았네.(去日苦多) 그걸 생각하니 탄식 않을 수 없고,(慨當以慷) 괴로움을 잊기 어렵네.(幽思難忘) 어찌 근심을 풀 수 있나,(何以解憂) 오직 술만 있을 뿐일세.(惟有杜康) … (중략) … 고정술문화박물관에 보존된 청대 양조장 유적지 산은 높기를 마다 않고,(山不厭高) 물은 깊기를 싫다 하질 않네.(水不厭深) 주공처럼 밥을 뱉어내면,(周公吐哺) 천하의 인심은 돌아오리라.(天下歸心) 조조가 마신 고향 술은 구온춘주(九醞春酒)다. 어느 날 조조는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에게 구온춘주를 바쳤다. 그러면서 이렇게 자랑했다. "이 술에는 누룩 20근을 물 5섬에 쓴다. 섣달 2일에 누룩을 담그고 정월에 해동한다. 좋은 쌀을 골라 쓰며 누룩 찌꺼기를 잘 걸러낸다. 3일에 한 번씩 술밥을 넣고 9번이 되어야 그친다. 따라서 술맛이 달고 마시기 편하다." 옛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고정공주의 누룩 발효지 이것은 6세기에 쓰인 농업기술서인 《제민요술》에 나오는 이야기로, 중국에서 최초로 기록된 주류 제조법이다. 구온춘주를 마신 헌제는 술맛에 감탄해서 즉시 어주로 사용할 것을 명령했다. 이 구온춘주의 후신이 고정공주(古井貢酒)다. 고정공주는 '오래된 우물에서 빚은 황실 진상주'라는 뜻이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조정이 진상주로 지정했고, 오늘날에는 중국 8대 명주로 선정됐다. 고정공주만의 특이한 제조법이 혼증속사(混蒸續渣)다. 그 과정을 보면, 먼저 여러 원료를 혼합한 뒤 큰 시루에 찌면서 술을 받아낸다. 명대부터 사용했던 우물은 현재 덮어서 보존하고 있다. 시루 안에 남은 술지게미는 꺼내 식힌 뒤 누룩에 섞어 구덩이에 넣어 발효한다. 이런 1차 발효를 끝낸 원료를 다른 구덩이에 옮겨 누룩을 더한 뒤 다시 발효한다. 그러면 원료는 죽처럼 되는데, 이것으로 술을 받아내는 방식이 혼증속사다. 과학적 분석에 따르면, 고정공주에는 무려 80여 종의 맛과 향을 내는 물질이 함유되어 있다. 그중에는 적정량의 고급 지방산 에스테르를 지니고 있어, 술맛이 순하고 향기가 부드럽다. 맛과 향이 입안을 감싸고 여운이 도는 느낌을 준다. 그렇기에 한국인 입맛에 맞는 중국 술이다. 디자인 : 이희문
지피지기 백전불태! 친중(親中), 반중(反中)을 넘어 극중(克中)을 위한 지식충전소! 진짜 중국을 만나러 갑니다! 황주박물관 지하 저장고에서 숙성되는 황주 항아리. 기원전 1000여년 양저우(揚州)에서 한 나라가 흥기했다. 하(夏)나라 군주였던 소강의 직계 후손이 세운 월(越)나라였다. 월은 수백 년 뒤 집권세력 간의 분란이 일어나자 도읍지를 콰이지(會稽)로 옮겼다. 콰이지는 콰이지산을 끼고 있는 도시로, 오늘날 저장(浙江)성 샤오싱(紹興)이다. 월이 저장에서 성장했는데 장쑤(江蘇)에서 새 나라가 일어났다. 쑤저우(蘇州)를 도읍지로 한 오(吳)나라였다. 기원전 6세기 오의 6대 왕 합려는 손무와 오자서를 등용해서 국력을 키웠다. 손무는 훗날 《손자병법》을 쓴 전략가다. 황주박물관에 전시된 구천 동상. 출정 직전에 황주를 마시고 있다. 합려는 손무와 오자서의 도움 아래 숙적인 초(楚)나라를 평정했고 ‘춘추오패’로 등극했다. 그러나 기원전 496년 월의 구천(勾踐)이 오를 침략해 왔다. 합려는 예상치 못한 공격에 전투 중 중상을 입어 죽었다. 숨을 거두기 직전 합려는 아들 부차(夫差)를 불러 “월에 꼭 복수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왕위에 오른 부차는 아버지의 유언을 잊지 않았다. 밤마다 장작 위에 누워 자면서 복수를 맹세했다. 또한 오자서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조련했다. 기원전 494년 부차는 군사들을 이끌고 월로 진격해 월군을 대패시켰다. 샤오싱박물관에 전시된 월왕 구천이 사용했던 청동검. 구천은 자결하려 했으나, 대부인 범려가 훗날을 도모하자며 극구 말렸다. 구천은 오의 대부인 백비를 몰래 찾아 뇌물을 바친 뒤에 투항했다. 오자서는 부차에게 구천을 당장 죽여야 한다며 강경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뇌물을 받은 백비의 간언을 받아들여, 부차는 구천을 살려주었다. 그 대신에 구천 부부를 쑤저우로 압송해서 3년 동안 고된 노역에 종사시켰다. 구천은 모진 고초와 갖은 수모를 겪은 뒤 가까스로 샤오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쑤저우에서 당했던 치욕을 잊지 않고자, 구천은 허름한 초가집에 살았다. 범려는 자신의 애첩을 직접 데려가서 부차에게 바쳤다. 또한 끼니마다 곰의 쓸개를 핥으며 복수를 맹세했다. 부차가 장작 위에 누워 자고, 구천이 쓸개를 핥으며 복수를 다짐하여 고사성어 ‘와신상담(臥薪嘗膽)’이 유래했다. 이런 구천의 생활이 오자서의 귀에 들어갔다. 오자서는 월이 더 강대해지기 전에 토벌에 나서자고 부차에게 여러 차례 진언했다. 그러나 부차는 구천이 바친 서시(西施)에게 흠뻑 빠져있었다. 서시는 왕소군, 초선, 양귀비와 함께 고대 중국의 4대 미녀로 손꼽힌다. 본래는 범려의 애첩이었으나, 범려가 부차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과감하게 바쳤다. 샤오싱 도심에 조성된 범려 사당에 모셔진 범려상. 서시의 교태에 흠뻑 빠진 간청 덕분에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계속 무시했다. 심지어 칼을 오자서에게 내려 자살토록 했다. 기원전 473년 구천은 5만 대군을 이끌고 오를 침공했다. 밀려드는 월군을 보고나서야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떠올리며 후회했다. 부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오를 평정한 구천은 ‘춘추오패’의 마지막 패자로 올라섰다. 그 뒤 범려는 미련 없이 샤오싱을 떠났다. 대부인 문종이 말렸지만, “사냥하러 가서 토끼를 잡으면 개는 쓸모가 없게 되어 삶아 먹는다”면서 서시와 함께 사라졌다. 샤오싱의 황주박물관에는 황주를 제조하는 과정을 전시하고 있다. 여기서 유래된 고사성어가 ‘토사구팽(兎死狗烹)’이다. 또한 이웃 나라와 길고 질긴 오월전쟁으로 ‘오월동주(吳越同舟)’가 나왔다. 이 같은 오월동주의 역사는 지금도 명성이 자자한 술을 남겼다. 바로 ‘샤오싱주(紹興酒)’다. 샤오싱주는 중국술 중 황주(黃酒)에 속한다. 황주는 갑골문에 기록이 남아있어 포도주, 맥주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술로 손꼽힌다. 황주의 제조법은 간단하다. 쌀을 쪄서 식힌 다음 보리누룩을 섞어 발효하여 빚는다. 이에 따라 짙은 황색을 띠고, 알코올 도수는 15~20도에 불과하다. 황주의 원료가 잘 숙성되는지 확인하는 품주사(品酒師). 술맛이 진하면서 부드럽고 가격이 싸다. 저장에서는 각종 요리 맛을 내는 조미료로 황주를 쓴다. 구천은 출정하기 직전에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 샤오싱주를 한 사발씩 마시도록 했다. 사실 샤오싱주는 다른 황주와 제조법에서 차이가 난다. 일반 쌀이 아닌 찹쌀을 쪄서 보리누룩과 발효시킨다. 누룩 외에 신맛이 나는 재료나 감초를 섞는다. 또한 물은 샤오싱 교외에 있는 젠후(鑒湖)에서 물을 떠서 사용한다. 젠후의 물은 미네랄이 풍부하다. 이것을 보통 진흙으로 빚은 큰 항아리에다 3년 이상 숙성시킨다. 루쉰이 태어나고 성장한 고향마을인 루쉰고리(魯迅故里). 따라서 오래 숙성될수록 술 향기가 좋아지고 빛깔은 암홍색을 띠게 된다. 오늘날 샤오싱은 황주의 본고장으로 손꼽히면서 여러 종류의 황주를 빚고 있다. 샤오싱주를 외국까지 유명하게 만든 이는 단연 루쉰(魯迅)이다. 1919년에 발표한 단편 소설 《쿵이지(孔乙己)》에 등장한다. 소설은 주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는 어린 소년의 눈으로 서술하지만, 주인공은 쿵이지다. 쿵이지는 가난하게 살면서 육체노동은 수치로 여겼던 봉건적인 지식인이었다.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마을 주민이 맡긴 필사로 근근이 생활했다. 《쿵이지》에 등장하는 술집 셴헝주점. 루쉰이 귀향할 때마다 즐겨 찾았다. 돈 몇 푼을 손에 넣으면 곧바로 술집을 찾아 술을 마셨다. 그런데 필사 일도 제대로 해내질 못해 문제만 일으켰다. 결국 일거리가 끊기자 쿵이지는 도둑질에 손댔다. 어느 날 물건을 훔치다 들켜서 매를 맞고 다리가 부러졌다. 며칠 뒤 부러진 다리를 끌고 손으로 기어서 주점을 찾아왔다. 그게 소년이 쿵이지를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었다. 루쉰은 《쿵이지》를 통해 유교사상의 도덕적 위선과 과거제도의 폐단을 고발했다. 쿵이지가 즐겨 마셨던 술은 샤오싱주이고, 단골로 찾아갔던 술집은 셴헝(咸亨)주점이다. 셴헝주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루쉰의 자택. 셴헝주점은 루쉰의 고향마을에 실제로 있다. 고향마을에는 루쉰과 동생 저우쭤런(周作人)의 저택, 싼웨이(三味)서옥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싼웨이서옥은 루쉰이 12세부터 17세까지 전통적인 유학교육을 받았던 서당이다. 루쉰은 1881년 샤오싱의 한 권세 높은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래 성은 저우(周)이고, 갓 태어날 때 이름은 장서우(樟壽)였다. 어릴 때는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하며 전통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12세 때 할아버지가 뇌물사건으로 투옥되고 아버지가 병을 앓다 죽으면서 집안이 몰락했다. 루쉰과 저우쭤런이 수학했던 싼웨이서옥. 따라서 집 앞 서당에서만 줄곧 공부해야만 했다. 17세에 난징(南京)의 해군 학교에 들어가면서 이름을 수런(樹人)으로 바꾸었다. 1902년 루쉰은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유학을 갔다. 센다이(仙臺) 의학 학교에 들어갔지만, 강의 중 중국인을 처형하는 영화를 보여주자 격분해서 자퇴했다. 그 뒤 도쿄로 가서 외국 작품을 번역하는 일에 전념했다. 하지만 1909년 집안 사정이 어려워져 가족을 돌보기 위해 귀국했다. 그 뒤 교사로 일하다 1912년에 교육부 관리가 되어 일했고 이듬해 거처를 베이징으로 옮겼다. 루쉰고리에는 《쿵이지》를 테마로 하는 상점까지 생겼다. 수년 동안 루쉰은 허무주의에 빠져 고전 연구에 매달렸다. 그러다 한 친구의 조언을 듣고 창작의 길에 들어섰다. 첫 성과물이 1918년 《신청년》에 필명을 루쉰으로 발표했던 《광인일기》다. 이듬해에는 《아큐정전(阿Q正傳)》을 연재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어리석고 불운한 아큐를 통해 중국이 처한 현실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중국인의 못된 습성을 적나라하게 꼬집어서, 오늘날 중국에서 루쉰은 인기가 없다. 교과서에 실린 것을 제외하고 루쉰의 소설을 읽은 중국인이 너무 적어 필자가 놀랄 정도다. 디자인 : 이희문
지피지기 백전불태! 친중(親中), 반중(反中)을 넘어 극중(克中)을 위한 지식충전소! 진짜 중국을 만나러 갑니다! 난징대학살기념관 기념벽. 대학살로 20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은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南京)에 쳐들어갔다. 난징성의 중화문(中華門)을 무너뜨리고 시내로 진입했다. 중국군은 곳곳에서 저항했으나 탱크를 앞세운 일본군에게 무력하게 짓밟혔다. 난징을 점령한 뒤 일본군은 '인간 청소'에 나섰다. 항복한 중국군 포로들과 민가에서 색출한 젊은 남자들을 성 밖의 양쯔강(長江)이나 무푸산(幕府山)으로 끌고 갔다. 일본군은 그들을 일렬종대 혹은 일렬횡대로 세운 뒤 기관총 세례를 퍼부었다. 아직 숨을 쉬는 생존자는 확인 사살하거나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난징대학살기념관 자리에서 발견된 수많은 유해 일부 포로와 민간인은 땅을 파게 한 뒤 산 채로 파묻어 생매장했다. 남자들에 대한 '청소'를 끝마치자, 일본군은 여자들을 강간하기 시작했다. 방식은 집단 윤간, 선간후살(先姦後殺), 시신 훼손 등으로 참혹했다. 대상은 10살이 안 된 어린이부터 70대 노파까지 가리지 않았다. 임신부를 강간한 뒤에는 피해자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어 죽이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훗날 한 일본군 병사는 "우리는 중국 여자들을 옷 벗겨 구경한 뒤 윤간했다. 강간한 뒤에는 그들을 죽였다. 시체는 말할 수 없으니까"라고 회고했다. 양쯔강 변에서 학살된 중국인들. 대부분 강에 버려져 흔적 없이 사라졌다. 난징은 점령된 지 수일 만에 시내 곳곳에 다리를 벌린 채 죽거나 사지가 절단된 여성들의 시체가 쌓였다. 이처럼 살육과 강간은 6주 동안 지속됐다. 학살의 광란 속에 얼마나 많은 중국인들을 죽였는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1948년 도쿄 전범재판은 일본군이 난징에서 20만 명 이상 인명을 학살했다고 판결했다. 일본 전범들은 "양쯔강에 버려진 시체를 포함하지 않았으나 피해자는 10만 명 이상"이라고 자백했다. 일본군이 점령하자 처음 설치한 시설 중 하나가 위안소였다. 특히 리지샹(利濟巷)위안소가 대표적이다. 일본군이 설치했던 위안소 중 가장 컸던 리지샹위안소 위안부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이 식민지나 점령지 여성들을 모집해서 운영했던 성노예 제도다. 일본 정부가 직접 관여했거나 민간에 의뢰했던 전쟁범죄다. 여성들의 국적은 한국, 대만, 중국, 일본, 동남아, 네덜란드 등 다양했다. 위안소는 중국, 홍콩,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미얀마, 태평양제도 등 일본군이 점령했던 대부분 지역에 개설하여 운영했다. 하지만 정확히 얼마나 많은 위안소를 설치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제2차 대전이 끝날 때 일본은 전쟁범죄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대부분 자료를 파기했다.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밝혀 일본의 전쟁범죄를 고발했던 할머니들 그러나 금세기 들어 중국과 동남아 각지에서 위안소 실체가 속속 밝혀졌다. 리지샹위안소는 운영 자료와 근무한 위안부가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난징을 점령해 통치했던 중지나(中支那) 방면군의 마쓰이 이와네 사령관이 주도적으로 국민당 장군의 고급 주택을 개조해서 설치했다. 그 이유는 부녀자의 강간이 지속되어 군기가 무너지고, 성병이 만연되어 전투력이 저하되는 걸 우려했기 때문이다. 위안소의 설치 건은 바로 승인이 났다. 그 뒤 종전까지 난징 일대에서 40여 곳의 위안소를 개설해서 운영했다. 리지샹위안소의 매표소와 벽에 걸린 이용 규정 위안소가 설치됐던 단일 도시 가운데 최대 규모였다. 일본군 병사들이 본토에서 난징을 거쳐서 중국 중남부 전선으로 갔기 때문이다. 리지샹위안소는 건축 면적이 3,000㎡로, 위안소 중 규모가 가장 컸다. 리지샹 2호는 동운(東雲)위안소로 불렀고, 뒤이어 개조한 18호는 고향루(故鄉樓)위안소라고 불렀다. 동운위안소는 2층 건물로, 1층과 2층에 각각 14개의 방이 있었다. 여기에 조선에서 끌려온 여성들이 많았다. 1942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일본 제15사단 군의부가 난징 위안부를 조사한 위생부로 알 수 있다. 박영심 할머니가 일했던 방과 일본군이 강제로 찍었던 벽의 나체 사진 위생부 기록에 따르면, 조선인은 214명이었다. 전체적으로 리지샹을 거쳐 갔던 위안부는 역영란, 김순덕 할머니와 북한 출신 박영심 할머니가 대표적이다. 박영심 할머니는 1939년 19살에 일본 순사에게 끌려서 평양을 거쳐 난징에 왔다. 약 3년 동안 리지샹위안소에서 20명의 조선인 여성들과 일했다. 그가 생전에 밝힌 위안소의 실상은 참혹했다. 하루에 일본군 30명 정도를 받았다. 만약 저항하면 다락방으로 끌려가 발가벗겨진 채 매를 맞았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아서 도망가고 싶었으나 감시가 혹독했다. 쑹산위안소에서의 박영심 할머니(오른쪽에서 첫 번째). 아이는 사산했다. 그러나 더 끔찍한 지옥이 그에게 엄습했다. 박영심은 미얀마로 끌려갔고 중국과 미얀마의 전선인 윈난(雲南)성 쑹산(松山)에 보내졌다. 생전에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진 놈들이 술 먹고 달려들 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1944년 9월 중국군의 공격으로 일본군 수비대가 전멸하면서 박영심은 포로로 잡혔다. 전체 위안부 중 4명만 살아남았고, 나머지는 병에 걸려 죽거나 폭격에 맞아 죽었다. 당시 박영심은 만삭이었는데, 포로수용소에서 보내져서 생활하다가 1946년에야 고향인 북한으로 돌아갔다. 역영란 할머니가 써서 중국 정부에 제출한 탄원서 역영란 할머니는 19살이던 1941년에 조선인 여성 5명과 함께 난징에 왔다. 6명은 낮에는 100명의 군관 의복을 빨아야 했고 밤에는 병사들을 받았다. 24시간 내내 2명의 병사가 그들을 감시했기에, 도망을 가는 건 꿈도 못 꾸었다. 1년여 뒤 6명은 각기 다른 부대를 따라 뿔뿔이 흩어졌다. 역영란은 중국 대륙 곳곳을 전전해야 했다. 가본 곳이 너무 많아 정확히 어디 어디를 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 와중에 생식 기능을 완전히 잃어, 종전 이후 귀국을 포기하고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에서 거주했다. 박영심 할머니를 위시해 위안부들이 겪은 고난을 형상화한 동상 아이를 낳을 수 없었기에 역영란은 혼자 살면서 중국인 전쟁고아를 양자로 거두어 키웠다. 하지만 국적을 중국으로 바꾸지 않았다.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뤄지자, 중국 정부에 북한으로 되어있던 국적을 한국으로 바꾸어 고향으로 귀국시켜 줄 것을 탄원했다. 그 뒤 수년 동안의 노력 끝에 귀국해서 고향인 전라남도에 살고 있었던 가족, 친척과 상봉했다. 본래 난징은 '금릉(金陵)'이라고 불렸던 고도이다. 3세기 <삼국지>에 등장하는 손권이 오나라의 수도로 정했고, 남북조시대에는 남조의 도읍지로 오랫동안 군림했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잠들어 있는 효릉으로 가는 참배로 금릉이 우리에게 뿌리 깊게 인식된 것은 명나라 때이다. 주원장은 원나라를 몽골로 몰아내고 대륙을 차지하면서 금릉을 수도로 삼았다. 당시 한반도도 고려와 조선의 왕조 교체기였다. 이에 따라 새로 들어선 조선은 명나라의 우호를 위해서 사신을 금릉에 자주 파견했다. 그래서 금릉이 중국을 대표하는 도시로 알려졌다. 비록 난징으로 이름이 바뀌긴 했지만, 현지인은 금릉에 대한 애착이 크다. 그렇기에 난징을 대표하는 술도 '금릉춘(金陵春)'이다. 금릉춘의 역사는 당나라로 거슬러 올라가, 이백의 시에 등장했다. 국민당이 난징을 수도로 정해서 통치했던 난징총통부 이백은 '기위남릉빙(寄韋南陵氷)'에서 "당상은 3,000개의 구슬을 신은 손님이고, 항아리 속은 100곡의 금릉춘이구나(堂上三千珠履客, 瓮中百斛金陵春)"라고 읊었다. 당대에 '춘'은 술을 의미했다. 금릉에서 난징으로 이름이 바뀐 뒤에도 술 이름은 유지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명대 시인 고계의 시에서 "100곡의 금릉춘이 없는 것이 한스러워, 봉황대에 올라 흠뻑 취했다(恨無百斛金陵春, 同上鳳凰臺上醉)"에서 잘 드러난다. 필자는 난징을 찾을 때마다 대학살과 위안부를 떠올리며 항상 금릉춘을 마신다. 디자인 : 이희문
지피지기 백전불태! 친중(親中), 반중(反中)을 넘어 극중(克中)을 위한 지식충전소! 진짜 중국을 만나러 갑니다! 카스텔 와이너리 지하 저장고의 와인 오크병과 술병 1861년 청조는 아편전쟁에 충격받아 부국강병을 위해서 양무운동을 시작했다. 이에 동남아에 진출했던 화교의 일부가 호응했다. 중국으로 돌아와서 기업을 세우고 공장을 열었다. 그들 중 장필사(張弼士)가 있었다. 장필사는 본래 광둥(廣東)성 다부(大埔)현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입에 풀칠하기 힘들 정도로 가난했다. 그래서 17살에 화물선을 타고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로 건너갔다. 장필사는 차이나타운의 쌀가게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성실히 일했다. 머리가 총명해 금방 승진하여 창고를 관리하는 책임자가 됐다. 술문화박물관 앞에 세워진 장위의 설립자 장필사 동상 몇 년 뒤 장필사는 돈을 모으자, 황무지를 사들여서 개간했다. 투자는 크게 성공했고 곧이어 증기선 운수회사를 설립했다. 이렇듯 사업을 확장하는 와중에 와인을 맛봤는데, 장필사가 매혹당했다. 마침 1871년에 프랑스 영사관에서 열린 만찬에서 산둥(山東)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프랑스인 영사를 만났다. 영사는 옌타이(煙臺)에 야생 포도가 무수히 많다면서, 품질이 좋아 현지의 외국인들이 주스나 포도주로 만들어 마신다고 말했다. 따라서 장필사는 미래에 옌타이에서 현대식 와이너리(Winery)를 열 것을 다짐했다. 1894년에 세운 양조장을 1992년에 개조한 술문화박물관 그 뒤로도 장필사의 사업체는 더욱 커졌다. 은행을 개설했고 광산 및 부동산 개발에 뛰어들었다. 또한 싱가포르, 방콕, 하노이, 마닐라, 샌프란시스코, 뉴욕 등지에 약국을 열어 큰돈을 벌었다. 1891년 청조는 산둥성에 철로를 개설하고 광산을 개발하기 위해서 장필사를 초빙했다. 옌타이에 관심이 컸기 때문에, 장필사는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장필사는 옌타이에 와서 기후와 토양을 조사했다. 그리고 철로와 광산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옌타이가 와인을 생산하기 알맞은 조건임을 확인했다. 장필사(가운데 앉은이)를 비롯해 장위의 설립에 힘쓴 주역들 따라서 장필사는 이듬해에 300만 량을 투자해서 중국 최초의 현대식 와인 생산업체를 설립했다. 청조는 화교의 투자가 필요했기에, 북양대신인 이홍장이 서명해서 영업허가증을 내줬다. 또한 군기대신인 옹동화가 회사 간판을 써서 내려주었다. 회사명은 사장의 성인 '장'에다, 번영하고 융성하라(昌裕興隆)는 뜻을 더해 '장위(張裕)'라고 지었다. 옌타이는 산둥반도 동북부에 자리 잡은 연해도시다. 온대계절풍기후대로 연강우량은 750~800mm에, 연평균 일조시간은 2,698시간이고, 서리 없는 날은 180일 이상 달한다. 장위 설립 초기 와인을 생산하는 데 쓰인 도구 실제로 옌타이는 '중국 북방 과일의 본고장'으로 불린다. 사시사철 각종 과일 향내로 도시 전체가 향기롭다. 특히 옌타이 사과는 중국을 대표하는 품종이다. 한국과 일본, 싱가포르 등지에 수출될 정도로 품질이 좋다. 옌타이가 자랑하는 또 다른 과일이 포도다. 옌타이가 전형적인 해양성기후에 맑은 날이 많고 서리가 적어 포도 당도가 아주 높다. 뿐만 아니라 옌타이는 물이 잘 빠지는 토양을 갖추고 있다. 일정한 경사에다 햇볕을 잘 받는 남향의 언덕이 많다. 포도를 재배하기에 안성맞춤인 환경과 조건을 갖춘 것이다. 장위 설립 초기 포도주를 생산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모형 게다가 옌타이 시정부는 새로운 포도 품종을 개발하는 연구개발센터를 열어 생산업체들이 고품질의 와인을 생산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그 덕분에 오늘날 옌타이는 중국 최고의 포도주 생산지로 성장했다. 2023년 옌타이의 포도 재배 면적은 19만 묘(畝)이었다. 생산된 와인은 6.3만㎘로, 중국 전체 생산량의 21%에 달했다. 전체 와인 생산업체는 204개이고, 일정한 규모를 갖춘 와이너리는 63개이다. 와인업체의 매출액은 전년보다 8%가 늘어난 26.6억 위안이었다. 이는 중국 전체 매출액의 30%에 해당한다. 장위가 옌타이 베이위자에 카스텔과 합자해 세운 와이너리의 입구 옌타이 와인업체 중 최대 기업은 단연 장위다. 2023년 장위의 매출액은 전년 대비 11.9%가 증가한 43억 8,500만 위안으로, 중국 와인업체 1위였다. 영업이익은 전년보다 24.2%가 늘어난 5억 3,200만 위안으로, 독보적인 탑이었다. 현재 중국 와인산업은 위기다. 코로나19 사태로 당국이 엄격한 도시 봉쇄를 시행하면서 와인 소비가 급감했기 때문이다. 와인은 도시민들이 각종 모임에서 함께 마시면서 즐기는 서구의 문화였다. 하지만 도시 봉쇄로 모임이 불가능해졌다. 엔데믹 이후에는 중국의 경기가 침체했다. 청대 말기 변발을 한 노동자가 포도를 수확하는 동상 그로 인해 2016년 중국 전체 와인 매출액은 464억 위안이었지만, 2023년에는 90억 위안으로 80% 이상 감소했다. 영업이익은 2억 2,000만 위안에 불과했다. 장위의 영업이익보다 못 미친 것이다. 또한 중국 전체 와인 생산량은 30만㎘에 그쳤다. 사실 장위의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와인에서 모두 나오지 않았다. 장위는 10년 전부터 와인 외에 브랜디, 코냑 등 생산하는 술 종류를 다양화했다. 그 덕분에 중국 와인시장의 위기 파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023년 영업이익을 거둔 대형 와인업체는 장위가 유일했다. 카스텔 와이너리에는 중국에서 가장 큰 와인 지하 저장고가 있다. 금세기 들어 와인은 중국인들에게 주목받으며 급성장했다. 특히 레드 와인의 소비가 엄청났다.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붉은색이 행운을 상징한다면서 좋아했기 때문이다. 또한 레드 와인이 건강에 좋다고 인식하며 즐겨 마셨다. 따라서 산둥뿐만 아니라 허베이(河北), 랴오닝(遼寧), 닝샤(寧夏) 등에 와이너리가 생겼다. 이에 와인 생산량이 1만㎘ 이상인 기업이 장위, 창청(長城), 왕차오(王朝), 웨이롱(威龍) 등 여러 개였다. 이 중 장위, 창청, 왕차오가 3대 메이저를 형성하며 중국산 와인 판매량의 52%를 차지했다. 오크통에서 병으로 옮겨져 숙성되는 장위의 와인 그러나 중국에서 인기가 너무 오르면서, 짧은 기간에 전 세계적으로 와인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그 여파로 2018년부터 소비가 감소하기 시작했고, 코로나19 사태에 결정타를 맞았다. 이로 인해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소비가 줄어들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장위가 영업이익을 거두고 있는 것은 탄탄한 내공 덕분이었다. 사실 장위는 1930~40년대 부도에 몰렸고, 문화대혁명 시기 문을 닫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하지만 장필사의 경영 철학을 견지하면서 오늘날 아시아 최대의 와인업체를 일구었다. 와이너리 전시실에는 세계로 수출되는 장위의 와인병을 쌓아놓았다. 장필사는 옌타이에서 와이너리를 짓고 와인을 생산하면서 3필(必) 원칙을 고수했다. 3필 원칙은 ▶원료는 반드시 우수한 것을 쓰고, ▶사람은 반드시 능력 있는 사람을 모셔 오며, ▶설비는 반드시 새로운 것을 설치한다. 또한 장위는 다른 업종으로 확장하지 않고 오직 한 우물만 파왔다. 옌타이에는 이런 장위의 역사를 보여주는 장소가 있다. 바로 술문화박물관과 카스텔(Castel) 와이너리다. 술문화박물관은 1894년에 세운 양조장을 1992년에 개조했다. 1903년 처음 와인을 숙성시켰던 저장고가 보존되어 있다. 포도가 잘 익은 카스텔 와이너리의 전경. 출처 : 장위 SNS 2002년에는 베이위자(北于家)에 프랑스 카스텔과 합작해 중국 최초의 서구식 장원을 지었다. 카스텔 와이너리는 면적이 2,700㎥, 깊이가 4.5m인 중국 최대의 와인 지하 저장고가 있다. 저장고는 와인향이 배어있어 찾는 이의 코끝을 자극한다. 오크통은 1,200여 개인데 프랑스산 통나무로 만들었다. 하나의 오크통에 보통 와인 370병 분량이 들어간다. 가격으로 따지면 10만 위안이나 된다. 장위가 120년 전 유럽으로부터 카베르네 게르니쉬트 포도 품종을 도입하여 끊임없는 개량을 거쳐 중국화시킨 덕분이다. 디자인 : 이희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