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저자. 중국정법대 졸업(경제법), 중국문화평론가·재중 중국 전문 기고가
쥐메에 참석하기 위해 이드 카흐 모스크로 모여드는 위구르족 기온이 오르면서 시원한 목넘김이 매력인 맥주 생각이 간절한 분들 많을 것 같아 오늘은 중국 맥주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중국에서 가장 서쪽 끝, 실크로드의 중요 도시인 신장(新疆) 위구르족자치구 카슈가르(喀什)에서 시작해 보자. 이 오아시스 도시 한복판에 자리 잡은 이드 카흐(艾提尕爾) 모스크는 매주 금요일마다 수많은 위구르족이 운집한다. 남자는 한결같이 전통모자인 바담 도바를 쓰고 간다. 여자는 물, 음식, 과일 등을 들고 간다. 이들이 이드 카흐를 찾는 이유는 금요일 합동예배 '쥐메'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위구르족은 독실한 수니파 무슬림이다. 이슬람 세계에서 휴일은 일요일이 아닌 금요일이다. 무슬림에게 있어 가장 신성한 날이기도 하다. 이드 카흐 모스크 입구에서 쥐메를 참석하는 위구르족 이드 카흐는 1442년에 지어진 신장위구르족자치구 최대의 모스크다. 모스크가 수용할 수 있는 인원 수는 최대 2만 명에 달한다. 이슬람교는 신도의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고 모두 평등하게 대한다. 따라서 쥐메에서는 모스크를 먼저 찾은 무슬림이 예배당에 들어갈 수 있다. 그렇다고 뒤늦게 온 신도를 배척하지 않는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위구르족은 모스크 주변에 양탄자를 깔아놓고 쥐메에 참석한다. 오후 3시가 되면 모스크의 스피커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 쥐메가 끝나기 앞서 이드 카흐 모스크 앞에 서있는 위구르족 여성 이슬람교 성직자인 이맘이 외치는 기도 소리다. 아랍어로 진행되는 예배는 스피커를 통해 이드 카흐 광장을 넘어 도시 전체로 퍼져 나간다. 이슬람 교의상 여성들은 모스크나 주변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다. 하지만 위구르족 여성은 나름의 방식으로 쥐메에 참석한다. 그들은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남성의 입가에 물, 음식, 과일 등을 댄다. 그러면 남성은 입에서 성스러운 기운을 불어주어 간접적으로 알라의 은혜를 나눠준다. 다만 이런 풍경은 2009년 7월 우루무치(烏魯木齊) 유혈사태 이후에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밀가루 반죽을 화덕에 구운 낭(饢)을 사고파는 위구르족 나는 1997년 카슈가르를 여행으로 처음 찾았다. 그 뒤 네 번 더 취재가서 30일 가까이 머물렀다. 다른 이슬람 국가에서 쥐메는 낮 12시에 거행된다. 그러나 카슈가르에서는 '하나의 중국(統一中國)' 원칙 때문에 오후 3시에 열린다. 카슈가르는 파키스탄·키르키스스탄과 인접해서, 베이징(北京)과 3시간의 시차가 난다. 중국은 두만강에 있는 투먼(圖們)부터 카슈가르까지 4시간 차이가 나는 시간대를 하나의 베이징시간(北京時間)으로 묶었다. 따라서 여름철 카슈가르에서는 오전 8시가 되어서야 해가 뜬다. 카드미셰해르 앞에서 결혼 기념사진을 찍는 위구르족 신혼부부 비록 중국이 시간대를 하나로 묶어버렸지만, 위구르족은 현지 사정에 맞게 생활한다. 실제로 카슈가르의 일상 업무는 오전 10시부터 시작된다. 카슈가르의 독자성은 먼저 바자르(Bazaar)에서 볼 수 있다. 바자르는 튀르크어로 '시장'이란 뜻이다. 헌데 위구르족에게 바자르는 단순한 시장이 아니다. 이웃과 소통하는 교류의 장이자, 한 주의 피로를 씻는 쉼터다. 바자르가 열리면 위구르족은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간다. 카슈가르에서 바자르는 2000여 년의 역사를 지녔다.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3곳으로 나뉘어 열렸다. 우락 바자르에서 구매하기 전 양의 상태를 점검하는 위구르족 노인 첫째는 중시야(中西亞) 바자르다. 중시야는 2004년 카슈가르시정부가 1억 위안을 투자해서 설립한 현대식 상설시장이다. 면적 19.9㎥에 600여 개의 상점이 입주해 있다. 평소에는 현지 주민들과 관광객들, 중앙아시아에서 온 상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둘째는 역센베 바자르다. 역센베는 위구르어로 일요일로, 일요일마다 열리는 바자르를 일컫는다. 중시야가 개설되기 전에는 도심 바자르가 역센베였다. 하지만 상설시장이 설치되면서 노천시장으로 바뀌었다. 그마저도 지금은 과일을 제외한 물품 거래가 금지됐다. 우락 바자르 한편에서 맛있는 양고기탕을 파는 상인 셋째는 우락 바자르다. '우락'은 위구르어로 가금(家禽)을 가리킨다. 카슈가르 외곽에서 일요일마다 열리는 가축 바자르로, 위구르족의 주식인 소와 양을 위주로 거래한다. 우락은 시정부의 통제와 간섭이 적어 카슈가르 일대의 위구르족이 몰려와 다양한 물품을 사고판다. 그렇기에 가축뿐만 아니라 갓 수확한 과일과 여러 생활용품을 거래한다. 노천식당과 쉼터도 열려 옛 카슈가르 바자르의 정취를 잘 간직하고 있다. 이처럼 카슈가르가 '바자르의 도시'가 된 데는 열악한 자연환경 속에 갇힌 변경이었기 때문이다. 건물 옥상에서 내려다본 카드미셰해르. 현재 이런 장면은 못 찍는다. 카슈가르는 위로는 톈산(天山) 산맥, 아래로는 쿤룬(崑崙) 산맥, 동으로는 타클라마칸 사막, 서로는 파미르 고원에 둘러싸여 있다. 그로 인해 사방 각지에서 쳐들어오는 외부 세력에게 끊임없는 시달림을 당했다. 실제 카슈가르를 점령했던 민족은 유럽계, 중국계, 티베트계, 튀르크계, 키르키스계 등 아주 다양했다. 그러나 카슈가르는 이런 약점을 역이용해서 실크로드 교역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튀르크계인 위구르족이 주인이 된 것은 6세기부터다. 카슈가르는 튀르크어로 '옥(玉)이 모이는 곳', 상업 교류지라는 뜻이다. 마치 미로처럼 되어 있는 카드미셰해르의 골목길 카슈가르의 또 다른 독자성은 위구르족의 전통촌락인 카드미셰해르(老城)에 있다. 카드미셰해르는 이드 카흐 모스크 주변으로 펼쳐진 주민 촌락이다. 공산주의 정권 수립 전 카드미셰해르는 크게 여섯 구역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쿠드자 비쉬(高臺民居)만 남아있다. 쿠드자 비쉬조차 중국 당국의 '전통가옥 개조·정돈 사업' 정책에 따라 철거되고 있다. 당국은 "오래되어 상하수도 건설이 어렵고 가옥은 지진에 취약하다"면서 전통가옥을 철거하고, 위구르족을 현대식 아파트로 이주시켜 주민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쿠드자 비쉬의 집 안 공방에서 전통토기를 만드는 장인 그러나 카드미셰해르 속 전통가옥은 위구르족에게 있어 단순한 주택이 아니다. 위구르족은 집에서는 전통음식과 전통공예품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해 왔다. 골목길에서 장작을 태워 음식을 만들어 바자르로 가져갔다. 그렇기에 카드미셰해르는 모스크, 바자르와 함께 위구르족의 생활상을 잘 보여주는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카드미셰해르는 위구르족의 역사와 도시 계획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전통가옥은 길게는 5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녔다. 보리 짚과 흙을 덧쌓아 지어졌지만,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위구르족의 전통악기인 탄부르(彈撥爾)를 연주하는 악기 제조 장인 이슬람교와 무슬림에 대한 선입견 및 편견과 달리, 카슈가르의 위구르족은 이방인에게 관용적이다. 자신의 종교와 문화를 침범하지 않는 한 다른 나라, 다른 지방에서 온 상대방을 존중한다. 이는 수많은 민족과 나라에게 침략당했던 역사적 체험에서 터득한 나름의 생존법이다. 또한 예부터 실크로드의 핵심 교역도시로 다양한 상인들과 교류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가 위구르족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맥주를 따로 사와 마셔도 개의치 않았다. 나를 초대한 위구르족 친구 가족은 우쑤(烏蘇) 맥주를 준비했다. 신장 맥주로 중국 내에서 유명한 우쑤맥주 ⓒ우쑤맥주 SNS 우쑤맥주는 신장 북부의 우쑤시에서 공장이 세워지고 1986년에 첫 제품을 생산했다. 내가 신장을 처음 찾았던 1997년에는 존재감이 없었다. 하지만 지역 브랜드를 보호하고 성장시키려는 지방 정부의 정책에 따라 현재는 신장 맥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덴마크 칼스버그에게 인수된 뒤에는 맛이 더 깊어지고 중국 전역에서 팔린다. 우쑤맥주는 알코올 농도 ≥4%vol, 맥아즙 농도 ≥11°P로 강렬하고, 용량도 많다. 병은 흡사 샴페인 병처럼 두툼하고 묵직하다. 특히나 신장위구르의 특식인 양꼬치와 가장 잘 어울리는 맥주라는 평가를 받으며 칭다오(靑島) 맥주, 하얼빈(哈尔滨) 맥주, 옌징(燕京) 맥주, 쉐화(雪花) 맥주 등에 이어 명실 공히 5대 맥주로 불리고 있다. 카슈가르에서는 우쑤맥주만 마셨는데, 위구르족 집안에서 마실 때는 묘한 긴장감이 더해지면서 맛이 아주 좋았다. 카슈가르는 위구르족 '마음의 고향'일 뿐만 아니라 내가 다시 가고픈 도시다. *작가 주: 중국어 표기는 국립국어원이 정한 외래어표기법을 원칙으로 하되, 위구르어는 현지 발음을 최대한 살려서 표기했습니다. 디자인 : 서현중
중국 6대 국경 중 하나인 훠얼궈쓰 출입국사무소. 뒤편은 카자흐스탄이다. 중국은 전체 면적이 964만 821㎢로 러시아, 캐나다, 미국에 이어 세계 4위다. 광대한 국토를 가지고 있다 보니, 무려 14개의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나는 오랜 기간 중국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 5개 국가와의 국경선을 방문했다.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이다. 이 중 카자흐스탄, 라오스, 베트남은 버스와 열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방문하기도 했다. 카자흐스탄과 국경을 맞댄 신장(新疆) 위구르족자치구 이리(伊犁) 카자흐족자치주 훠얼궈쓰(霍爾果斯)시는 취재를 위해서 두 번 갔다. 훠얼궈쓰에서 활약하는 소수민족 여성 기마경찰대 대상은 중국과 카자흐스탄이 공동 운영하는 국제변경합작구, 두 국경도시 훠얼궈쓰와 자르켄트(Zharkent)였다. 훠얼궈쓰 국제변경합작구는 2012년에 문을 열었다. 면적 5.6㎢ 중 3.4㎢는 중국 땅이고 2.2㎢는 카자흐스탄 땅이다. 따라서 국제변경합작구에서 영업하는 상인과 방문객은 여권을 소지해야 들어갈 수 있다. 국제변경합작구는 2004년 9월 중국과 카자흐스탄 정부가 설립 협정을 체결하면서 시작됐다. 그 뒤 중국 주도로 240억 위안을 투자해 부지를 닦고 비즈니스센터, 면세센터, 부대시설 등을 세웠다. 국제변경합작구 비즈니스센터. 여권이나 임시통행증이 있어야 들어간다. 그리고 두 나라는 특별조치를 시행했다. 모든 이들에게 국제변경합작구에서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장했다. 투자 기업에게는 최대 10년간 토지 사용료를 면제해 주었고 각종 세제 지원을 부여했다. 관광객은 1,500유로와 50kg 이하 상품을 구매하면 면세 혜택을 주었다. 또한 중국과 카자흐스탄 국민은 30일간 무비자로 상호 출입국이 가능토록 했다. 그렇기에 국제변경합작구에서는 카자흐스탄 번호판을 탄 차량을 쉽게 볼 수 있다. 가깝게는 자르켄트에서, 멀게는 알마티(Almaty)에서 달려와 국경을 넘어온 것이다. 국제변경합작구 내 면세센터 중 가장 큰 중야(中亞) 면세센터 카자흐스탄인들에 대한 중국 세관의 검색은 까다롭지만, 가져가는 물품의 중량이나 종류에 대해서는 제한이 없다. 국제변경합작구 주차장에는 버스를 통째로 렌트해서 방문한 상인들을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에는 짐을 카자흐스탄 내 각 도시로 보내주는 택배회사가 성업 중이다. 카자흐스탄인들이 국제변경합작구에서 물품을 많이 사가는 이유는 가격이 싼 데다, 품종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카자흐스탄은 석유, 천연가스 등 지하 자원이 풍부해서 1인당 GDP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1만 2,306달러에 달한다. 국제변경합작구의 상징물인 중앙탑 그러나 제조업 기반이 취약해서 의류, 생활용품, 전자제품, 기계부품 등 많은 공산품을 중국에서 수입하고 있다. 국제변경합작구가 그 최전선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일어나기 직전인 2019년 국제변경합작구에 입주한 기업과 상점은 5,000개를 넘어섰고, 누적 투자액은 300억 위안을 돌파했다. 또한 방문한 중국과 카자흐스탄 관광객은 전년보다 11.4%가 증가한 660만 명을 넘어섰다. 2019년 훠얼궈쓰를 찾은 중국과 카자흐스탄의 전체 관광객은 777만 명이었다. 110만 명은 방문하지 않았으나 거기에는 원인이 있다. 빨간색 쪽은 중국 땅이고, 파란색 쪽은 카자흐스탄 땅이다. 국제변경합작구는 여권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다. 물론 훠얼궈쓰시 정부는 여권이 없는 중국인을 위해서 임시통행증을 발급해주고 있지만, 절차가 복잡하다. 또한 하루 입출입 시간이 제한되어 14시간만 머물 수 있다. 본래 훠얼궈쓰시는 숙박까지 가능한 24시간 입출입 체제를 시행하여 국제변경합작구를 독립적인 도시로 발돋움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 직전에 코로나19 사태가 터지면서 중국과 카자흐스탄 사이의 국경이 장기간 봉쇄되는 상황을 맞이했다. 그로 인해 2023년 3월에야 국제변경합작구는 운영이 재개됐다. 면세센터 내 대부분 상점 간판은 러시아어나 카자흐어로 표기했다. 국제변경합작구의 덕분에 2019년 훠얼궈쓰의 GDP는 193억 위안에 달했고 투자는 100억 위안을 유치했다. 특히 대외 무역액은 538억 위안으로 신장자치구 전체에서 1위를 차지했다. 등록 인구도 외지로부터 유입되어 6만 5,227명에 달했다. 사실 1980년대만 해도 훠얼궈쓰는 작은 국경마을에 불과했다. 게다가 1969년 중국과 구 소련의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격랑의 한복판에 있었다. 같은 해 8월 소련군은 전차와 헬기를 앞세워 신장자치구 영내에 진입했다. 이에 중국은 소련으로 향하는 모든 국경을 폐쇄했다. 버스를 통째로 렌트해서 온 카자흐스탄 상인들이 귀국을 준비하고 있다. 1983년 두 나라가 출입국사무소를 다시 개설하면서 긴장 국면이 풀렸다. 그러다가 1989년에 이닝(伊寧)에서 카자흐스탄으로 이어지는 철로가 완공되면서 훠얼궈쓰가 주목받았다. 그 덕분에 1992년 훠얼궈쓰는 전면적으로 대외 개방이 됐다. 국제변경합작구를 설치할 수 있게 된 배경도 교통 인프라에 있다. 2009년 이닝에서 훠얼궈쓰까지 이어지는 철로가 개통되면서 우루무치(烏魯木齊)에서 출발하는 687km의 철로가 완성됐다. 2013년에는 우루무치에서 훠얼궈쓰까지 이르는 654km의 고속도로도 개통했다. 짐과 소포를 카자흐스탄 각 도시로 보내주는 택배회사도 있다. 카자흐스탄에서 중국으로 수입되는 물량이 훨씬 많은 현실이 주목된다. 2019년 두 나라의 수출입 물량은 529만 톤인데, 통계에 천연가스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중국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를 훠얼궈쓰로 수입해 와서 중국 내지로 보낸다. 이 프로젝트를 '서기동수(西氣東輸)'라고 부른다. 현재 중앙아시아에서 수입되는 천연가스는 중국 전체 소비량의 25%에 달한다. 중국은 서기동수에 1,422억 위안을 쏟아부어, 매년 300억㎥의 천연가스를 수송하고 있다. 국제변경합작구는 지금도 자족도시를 위해서 여전히 공사 중이다. 내가 훠얼궈쓰를 두 번째로 찾았던 2017년 8월에 우루무치에서 한국 교민들과 저녁 식사를 하며 바이주(白酒)를 많이 마셨다. 바이주는 중국의 전통 증류주를 가리킨다. 다음날 밤기차를 타고 훠얼궈쓰에 온 뒤 오전에 국제변경합작구에 가서 취재했다. 그리고 오후에 국경버스를 타서 카자흐스탄의 국경도시 자르켄트로 갔다. 처음 자르켄트를 방문했을 때 바이주를 사지 못했던 경험을 되새기며, 버스에 타기 전 이리터(伊利特)를 한 병 샀다. 이리터는 훠얼궈쓰가 속한 이리카자흐자치주에서 생산되는 술 브랜드다. 훠얼궈쓰 아래 커커다라시에 있는 이리터의 공장 입구 ⓒ이리터 SNS 본래 1950년대부터 신위안(新源) 현에 있는 이리(伊犁) 술 공장에서는 같은 이름의 브랜드로 바이주를 생산했다. 하지만 1979년 개혁개방 이후 중국이 상표법을 시행하며 현급 이상 행정구역의 지명은 브랜드 이름으로 사용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따라서 회사와 브랜드를 지금의 이리(伊利)로 고쳤다. 1990년대부터는 이리터를 주력 브랜드로 삼아 성장하여 현재는 신장자치구를 대표하는 바이주가 되었다. 실제로 신장자치구에 사는 한국 교민들이 모임을 가질 때 바이주를 마시면 오직 이리터만 찾는다고 한다. 신장자치구를 대표하는 바이주인 이리터 ⓒ이리터 SNS 나도 이리터를 마셔봤으나, 제대로 맛을 본 건 2016년 7월 우루무치에 사는 한국 교민들과 처음 만나 저녁 식사를 여러 차례 같이 하면서부터다. 식사 때마다 다른 종류의 이리터를 마시다 보니, 깨끗한 술맛에 빠져버렸다. 이리터의 술맛이 좋은 이유는 만년설로 뒤덮인 톈산(天山)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사용해 빚기 때문이다. 사실 훠얼궈쓰도 톈산 산맥의 끝자락에 있고 카자흐어로 '강과 물이 흐르는 곳'이다. 이리술 공장은 2020년에 훠얼궈쓰 아래에 있는 커커다라(可克達拉)시로 본사와 공장을 옮겼다. 디자인 : 장지혜
울창한 산림과 벽옥의 시냇물이 아름답게 조화한 유에량완(月亮灣) 중국 31개 성·시·자치구를 모두 가본 나에게 누군가 자연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2곳만 추천해 달라면 단연 쓰촨(四川)성의 주자이거우(九寨溝)·황룽(黃龍)과 신장(新疆)위구르족자치구의 카나쓰(喀納斯)를 손꼽는다. 카나쓰는 푸른 옥 같은 물빛, 녹음을 한껏 뽐내는 산림, 거대한 호수의 설산을 모두 품고 있다. 게다가 고산 초원에서 살아가는 유목민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본래 카나쓰는 '협곡 중의 호수'라는 몽골어에서 유래됐다. 해발 1,374m, 남북 24km, 수심 188.5m에 달하는 중국 최대의 고산 호수다. 용이 잠들어 있는 형상이라 해서 이름 지어진 워룽완(臥龍灣) 행정구역은 신장 최북단인 알타이(阿勒泰) 지구 부얼진(布爾津) 현에 속해 있다. 여기는 알타이산맥의 일부분으로, 면적이 11.8만㎢에 달한다. 알타이지구는 중국에서 유일한 남시베리아계의 생태계다. 알타이산맥은 중국, 몽골, 러시아, 카자흐스탄 4개 국가에 걸쳐 있다. 해발이 1,000~3,000m이고, 가장 높은 벨루하산은 4,506m에 달한다. 지질은 혈암, 녹니편암, 사암 등으로 이뤄져서 납, 아연, 주석, 금, 백금 등 다양한 광물이 매장되어 있다. 따라서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에서는 '루드니(광석이 많은) 알타이'라 부른다. 중국 최대의 고산 호수인 카나쓰 알타이산맥은 전형적인 한대 기후의 고산지대다. 낙엽송과 활엽수가 무성한 숲, 드넓은 고산 초원, 수백 개의 크고 작은 호수, 만년설에 뒤덮인 빙하 등이 산맥 전체를 덮고 있다. 특히 산맥 허리인 1,500~2,500m 지대는 다양한 나무가 울창하게 있다. 이런 산림은 전체 면적의 2/3를 차지한다. 연평균 강수량이 1,000~2,000mm로 적당한 데다 만년설에서 흘러내린 물이 산림을 적셔주기 때문이다. 천연의 자연환경 덕분에 수천 년 전부터 다양한 유목민이 살아왔다. 흉노와 튀르크 민족의 일부도 여기서 발원했다. 필자가 카자흐인 유목민과 2박 3일을 함께 생활했던 카잔춈쿠르 초원 그렇기에 중국에서는 알타이산맥을 '유목민의 요람'이라 부른다. 이런 아름다운 자연과 유목민의 생활을 체험하려는 투어는 중국의 카나쓰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바르나울,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에서도 진행한다. 카나쓰에서는 오래전부터 카자흐(哈薩克)인과 투와(圖瓦)인이 살아왔다. 투와인은 몽골인의 방계로 튀르크계의 언어, 몽골의 종교와 문화, 카자흐의 생활 습관을 갖춘 원시부족이다. 신장 최대 민족인 위구르족은 정주민으로 변해버렸지만, 카자흐인과 투와인은 여전히 유목민의 전통과 생활을 고수하고 있다. 방목한 양 떼를 모는 바인무랏의 둘째 아들 현재 알타이지구 인구 66만 명 중 카자흐인은 절반을 넘는다. 카자흐인은 생김새가 작은 눈에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키가 작아 몽골인과 유사하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중앙아시아 스텝지역에서 살았던 튀르크계 민족으로, 알타이어계의 카자흐어를 쓴다. 지난 1000여 년 동안 카자흐인은 실크로드에서 무역 거래를 했던 상인들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뛰어난 기마술과 불굴의 용맹을 뽐내며 상인들을 노략질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카자흐인은 카자흐스탄과 중국 외에도 러시아, 몽골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올가미를 던져 우리 안에 있는 말을 낚아채는 바인무랏의 큰아들 그런 와중에서 자신의 언어, 문화, 풍습 등을 유지하면서 민족 정체성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여기서 16세기경부터 받아들인 이슬람교는 큰 역할을 한다. 유목민은 목축을 생업으로 풀과 물을 따라 옮겨 다니며 사는 종족 집단을 가리킨다. 오랜 옛날부터 이들은 몽골, 중앙아시아, 등지의 초원과 건조지대에서 드넓게 살아왔다. 또한 스키타이, 흉노, 돌궐, 몽골 등과 같은 대제국을 건국했다. 하지만 오늘날 유목민으로써 정체성과 생활습관을 간직한 민족은 그리 많지 않다. 중국에서도 티베트, 카자흐 등 극소수다. 말을 타며 낙타를 모는 바인무랏. 낙타는 고산초원에서 많이 이용된다. 2007년 9월 내가 찾았던 카나쓰진 북부 카잔춈쿠르 초원은 알타이지구의 유목지 중 하나다. 카잔춈쿠르는 평균 해발 1,600m로, 카자흐스탄에서 1시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다. 카자흐인은 5월 초 중국 당국의 허가 아래 유목에 나선다. 알타이산맥의 울창한 산림과 드넓은 고산초원이 유목민의 전통을 지키게 해 준다. 따라서 부얼진현의 겨울 주거지에서 살림살이를 꾸려서 낙타에 짐을 싣는다. 모든 가족이 친척, 이웃과 함께 무리를 짓는다. 키우던 양, 소, 말 등을 충분하게 먹일 수 있는 목초지를 찾는 게 중요하다. 카자흐인에게 양 도축은 의식을 치르는 듯 경건하다. 짧게는 이틀에서 길게는 4~5일까지 길을 나서서 묵을 곳을 정한다. 그 뒤 온 가족이 생활하고 잘 수 있는 집을 짓는다. 펠트 천으로 만든 둥근 천막 유르트(Yurt)다. 유르트는 겉보기에는 허름한 천막 같지만 안은 따뜻해서 고산의 추위를 막아준다. 유르트 안은 문명의 이기가 골고루 갖춰져 있다. TV, 전기장판, 전화 등을 완비했고 이동식 발전기를 이용해서 전기를 돌린다. 카잔춈쿠르 초원에서 이런 바인무랏 일가족을 만났다. 바인무랏은 부인, 두 아들과 며느리, 손자 셋 등 3대가 함께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전통 빵을 만드는 바인무랏의 부인과 둘째 며느리 키우던 동물은 낙타 6마리, 말 15마리, 소 30마리, 양 200마리 등 넉넉했다. 고산 초원에서 몇몇 가정만 어울려 살아야 하는 유목민에게 다른 나라에서 온 이방객은 반갑고 흥미로운 존재다. 천성이 유쾌한 유목민답게 카자흐인은 융숭하고 극진하게 손님을 맞이한다. 이들은 손님 대접을 위해서 양 한 마리를 통째로 잡는다. 카자흐인은 양고기를 삶거나 구워서 먹는다. 3~4시간 동안 푹 삶는데, 양파와 파를 듬뿍 넣어서 양고기 특유의 냄새를 없앤다. 여기에다 소금과 카자흐 전통 향료를 넣어 요리를 완성한다. 갓 잡은 양의 머리를 굽는 바인무랏의 큰아들. 유목민의 일상은 해가 저물어야 끝난다. 이 때문에 밤 8시가 가까워서야 밥상이 차려진다. 먼저 준비한 양고기를 전통 빵인 낭(饢), 채소 등과 함께 밥상 위에 올린다. 식사 전 빼먹지 않고 행하는 의식이 있는데, 알라께 올리는 예배다. 카자흐인은 매끼마다 코란을 암송하면서 메카를 향해 기도를 올린다. 의식이 끝나면 양고기를 상석에 앉은 손님께 바친다. 만약 손님이 여럿이면, 가장 나이가 많거나 존경할 만한 이에게 구워삶은 양머리를 드린다. 양머리로 어느 정도 배를 채우면 본격적으로 음주를 즐긴다. 마유주를 만들기 위해 소젖을 짜는 바인무랏의 큰며느리 카자흐인의 술은 크므스(Qimiz)다. 크므스는 말젖이나 소젖을 짜서 발효시켜 만든 마유주(馬乳酒)의 일종이다. 알코올 도수가 낮아 유목인에게는 영양음료다. 마유주는 한 차례 발효시킨 뒤 젖을 여러 차례 부어 다시 발효시켜야 맛이 좋아진다. 이때 마유주통에 아래 부분이 넓은 긴 막대를 꽂아두고 쉴 새 없이 저어야 한다. 보통 온 가족이 돌아가며 막대를 젓는다. 젖 속에 있는 지방과 단백질 조직을 깨뜨려 발효를 돕기 위해서다. 숙성이 끝난 마유주는 막걸리처럼 걸쭉한 색감과 3~4도의 알코올을 생성한다. 마유주를 만드는 통. 긴 막대로 쉴 새 없이 저어야 한다. 처음 마실 때는 비린내에 비위가 상하지만, 철 성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쉽게 적응한다. 실제 마실수록 알코올이 섞인 요구르트를 마시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마유주는 몸을 따뜻하게 해서 감기를 이겨내고 식욕을 돋운다. 그렇기에 무슬림인 카자흐인은 마유주를 즐겨 마신다. 유목민은 식사하면서 흥이 나면 노래 부르고 춤춘다. 힘에 부치면 다시 음식을 먹어 영양을 보충한다. 이는 손님을 접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나도 방문한 첫날부터 바인무랏 아들 및 조카와 이야기꽃을 피우며 밤늦게까지 술판을 벌였다. 디자인 : 장지혜
충칭을 대표하는 건축물인 인민대례당 "이곳에서도 살림살이가 궁핍하고 쪼들리기는 마찬가지다. 마을 언저리의 밭에 상추, 호박 따위의 야채를 심었는데 제법 잘 자랐다. 고구마나 옥수수를 심고 가꿀 때는 바로 고향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다." 이 글은 《장강일기(長江日記)》 중 한 구절이다. 1991년 '임시정부의 맏며느리'라 불렸던 정정화 여사가 타계했다. 정 여사는 권문세가 출신으로 대한제국 고위 관료를 지냈던 김가진(1846~1922년) 선생의 며느리였다. 김가진 선생은 3.1운동 직후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중국에 가서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충칭에서 임시정부가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롄화츠 청사 정정화 여사는 연로한 시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해서 중국으로 망명한 뒤 26년 넘게 임정의 안살림꾼 역할을 했다. 정 여사가 돌아가신 뒤 1998년에야 출판된 회고록 《장강일기》에는 임정이 상하이(上海)에서 충칭으로 오기까지 고난의 여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임정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일본의 거센 핍박 때문에 상하이를 떠나 떠돌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전면적인 피난길에 올랐다. 국민당은 임정 요인과 그 가족들에게 배 한 편을 주어 후난성 창사(長沙)로 이동시켰다. 1932년 상하이를 떠나 1940년 충칭에 입성하기까지 임정의 피난 경로 일본군의 진격이 계속되자, 1938년 임정은 창사를 떠났다. 광둥성 광저우(廣州)로 거쳐 다시 포산(佛山), 광시자치구 류저우(柳州), 구이저우성 구이양(貴陽)과 쭌이(遵儀)로 옮겼다. 충칭 바로 아래에 있는 치장(綦江)에 도착한 것은 1939년 3월이었다. 치장 시기 이념으로 갈라진 좌·우익이 합작하는 7당 통일회의가 열려 임정의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이듬해 9월 임정은 당시 중국의 피난 수도인 충칭시 양류제(楊柳街)에 입성했다. 피난길에 오른 지 2년 10개월 만에 안전한 보금자리에 안착했던 것이다. 1941년 6월 질식 사건이 일어났던 자오창커우(較場口) 방공호 입구 그러나 임정은 충칭에서도 청사를 3번이나 더 옮겨야 했다. 일본군은 중국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기 위해서 민간인들이 사는 중심가에 무차별적으로 공습했다. 대공 전력을 갖추지 못한 중국은 방공호를 파서 폭격을 피했다. 방공호는 한꺼번에 수백 명을 수용할 정도로 컸다. 하지만 시설은 열악했고 통풍이 안 됐다. 그로 인해 1941년 6월 방공호로 대피한 시민들이 통로가 막히면서 질식사하는 참사도 일어났다. 이렇듯 일본 공군의 잦은 폭격으로 두 번째 청사가 불타자, 우스예샹(吳師爺巷)으로 이사했다. 지금은 철거되어 사라진 임시정부의 제3청사인 우스예샹 청사 자리 임정은 우스예샹에서 3년 넘게 지냈고,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를 썼다. 1945년 1월에는 국민당 정부가 마련해 준 롄화츠(蓮花池) 38호로 옮겼다. 이곳이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다. 임정 요인과 가족들은 폭격 외에 충칭의 열악한 환경과 싸워야 했다. 충칭은 양쯔강(長江)과 자링강(嘉陵江)이 만나는 지점인 데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때문에 사시사철 습도가 높고 안개가 출몰한다. 이런 기후 조건에다 인구가 급증하고 공해까지 더해지면서, 공기 오염이 심각했고 폐병이 창궐했다. 지금은 철거되어 없어진 광복군 총사령부 청사 자리 비록 국민당의 지원은 있었으나 전시라서 원활하질 못했다. 평소 적은 양의 쌀로 밥을 지어 콩나물국에 소금을 타서 하루 세 끼를 연명할 정도로 생활은 궁핍했다. 때로는 텃밭에 야채와 과일을 심어 자력으로 조달했다. 《장강일기》에 고단했던 임정 가족들의 당시 삶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런 와중에도 임정은 1940년 광복군을 창군하여 대일 항전을 더욱 가열하게 했다. 임정은 광복군 총사령부를 저우룽루(鄒容路)에 따로 두었다. 마침 일본군에 학도병으로 끌려갔던 청년들이 탈출해서 충칭으로 속속 찾아왔다. 아파트 옥상 위에서 찍어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광복군 총사령부 청사 자리 청년들 중에는 해방 후 사회운동가와 언론인으로 활동한 장준하, 고려대 총장이 된 김준엽 등이 있었다. 따라서 광복군 총사령부의 규모는 갈수록 커졌다. 1945년에는 청년들을 시안으로 보내 미국 CIA의 전신인 OSS 특수부대에 참가시켜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진공작전 직전에 일본이 패망해서 해방을 맞이했다. 임정 가족들은 미국의 방침에 따라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그 뒤 충칭시 한복판에 있는 임정 우스예샹 청사는 2013년에 철거됐다. 광복군 총사령부 청사도 2015년에 전격 철거되었다. 양쯔강 케이블카를 타고 맞은편에서 바라본 충칭시 중심가 나는 충칭을 1997년 7월에 처음 찾았다. 낮에 도착해서 롄화츠 청사를 먼저 방문하고 케이블카를 탔다. 당시 충칭에는 중국 도시 중 유일하게 케이블카가 2대나 도심에서 운행되었다. 하나는 양쯔강을 오갔고, 다른 하나는 자링강을 오갔다. 이용 승객의 감소로 자링강 케이블카는 2011년에 운행이 정지되어 철거됐지만, 양쯔강 케이블카는 사정이 다르다. 역시 위기를 맞이했지만, 지금은 충칭을 대표하는 명물로 명성이 드높다. 전체 운행 거리가 1,166m에 달하고 운행 속도는 초당 6m이고 운행 시간은 4분 30초이다. 싼샤의 시발점이자 위안화에 등장하는 취탕샤의 쿠이먼 저녁에는 유람선을 타고 싼샤(三峽)로 떠났다. 싼샤는 충칭 펑제(奉節)에서 후베이성 이창(宜昌)에 이르는 192km의 대협곡이다. 취탕샤(瞿唐峽), 우샤(巫峽), 시링샤(西陵峽)로 이어져 싼샤라고 불린다. 펑제현청에서 10km 떨어진 지점이 쿠이먼(夔門)으로, 취탕샤의 시작점이다. 쿠이먼은 수백m에 달하는 깎아지는 듯한 절벽이 바로 앞 2,000m가 넘는 고산과 어울려 한 폭의 산수화를 연출한다. 위안(元)화에 등장하는 천하제일의 절경이다. 그 앞에 백제성은 유비가 죽기 직전에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했던 현장이다. 백제성 안에는 청대에 '유비탁고(劉備託孤)'를 찰흙상으로 복원했다. 백제성은 유람선 여행 중 2번째로 들렀던 장소다. 유람선을 타기 직전 먹었던 식사는 더욱 뇌리에 남아있다. 충칭을 대표하는 음식인 마라훠궈(麻辣火鍋)다. '마라(麻辣)'는 얼얼하고 맵다는 뜻이다. 얼얼한 맛은 초피나무 열매인 화자오(花椒) 때문이다. 화자오는 작고 동그란데, 하이드록시 알파 산쇼올이 있어 씹으면 입안이 마비될 정도다. 예부터 충칭과 쓰촨(四川)에서는 무덥고 습도 높은 기후를 이겨내기 위해서 음식에 화자오를 넣어서, 땀을 흘려 건강을 유지했다. 명대에는 유럽에서 전래된 고추를 가미했다. 보기만 해도 맵고 얼얼한 마라훠궈. 이것이 마라탕의 원조다. 마라훠궈는 세숫대야만 한 냄비에 고추, 화자오, 유채 기름 등을 넣어 만든 탕이다. 유채 기름은 20여 가지의 재료를 볶아 우려내어 숙성시켜 마라훠궈를 붉은 탕(紅湯)으로 만든다. 충칭 사람들은 탕에 소 천엽, 오리 창자, 돼지고기, 미꾸라지, 야채 등을 넣어서 익혀 먹는다. 얼얼하고 매운 마라훠궈의 맛은 입안을 계속 자극해서 중독성을 갖게 한다. 따라서 처음 먹으면 배탈이 날 정도지만, 계속 먹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수년 전부터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마라탕'은 이 마라훠궈를 한국화한 것이다. 방공호 안에 조성된 식당에서 마라훠궈를 먹는 충칭 시민들 한국에 진출한 중국 술 중 인지도를 점차 높여가는 강소백(江小白)도 충칭에서 나왔다. 강소백은 주류업체에서 일했던 타오스촨(陶石泉)이 2012년에 새로 론칭한 브랜드다. 타오스촨은 처음부터 철저히 젊은 층을 공략 대상으로 삼았다. 이에 술맛은 청량감이 있으면서 가격은 저렴하고자 했다. 따라서 당시에는 드물었던 100g 용량으로 강소백을 내놓았다. 강소백의 도수는 40도이다. 한국 소주에 비하면 높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고량주 세계에서 40도는 과장 좀 보태자면 맹물 축에 속한다. 중국 사람들은 노소를 불물하고 독주에 익숙할 거라 지레 짐작할지 모르지만, 사실 중국의 젊은 층들은 독주를 즐기지 않는다. 맥주를 즐겨 마시거나 아예 술을 입에도 못 대는 젊은이들도 많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한 해, 두 해 즐기는 술의 도수도 높아지는 거다. 그러다보니 중국 주류업계도 젊은 고객 공략을 위해 도수 낮은 고량주 개발에 힘을 쏟아야만 했다. 특히 충칭에서는 마라훠궈를 즐겨 먹는 젊은 층에게 어필하도록 마케팅에 주력했다. 그 덕분에 강소백은 시장에서 빠르게 안착했고 작은 병 용량도 개척했다. 한국 시장에서도 나름 약진하면서 가성비 좋게 마실 수 있는 고량주로 MZ세대 사이에서 나름 인기를 끌고 있다. *작가 주 : 중국어 표기는 국립국어원이 정한 외래어표기법를 원칙으로 하되,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는 한자음 표기를 했습니다. 디자인 : 서현중
단골식당에서 평소 먹는 동파육 솥은 깨끗이 씻고 물은 조금 넣으며,(淨洗鐺, 少著水) 땔감에 불은 붙이나 연기가 나지 않는다.(柴頭罨煙焰不起) 스스로 익기를 기다려 재촉하지 않으니,(待他自熟莫催他) 불을 지피고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익혀진다.(火候足時他自美) 황저우의 좋은 돼지고기는(黄州好猪肉) 값은 진흙처럼 싸다.(價賤如泥土) 부자는 먹으려 하지 않고,(貴者不肯吃) 가난한 이는 요리할 줄 모르니,(貧者不解煮) 아침 일찍 일어나 두 대접에 가득 채워 놓고,(早晨起來打兩碗) 배불리 먹으니 그대는 신경 쓰지 말게나.(餓得自家君莫管) 쓰촨성의 한 농촌 시장에서 돼지고기를 판매하는 구역 이 시는 북송대의 대문호 소동파의 '저육송(猪肉頌)'이다. 소동파는 정치가, 시인, 학자로 명성을 떨쳤으나 미식가로도 유명했다. 그의 시에서 요리와 술이 자주 등장한다. '저육송'은 '동파육(東坡肉)'의 제조법과 배경에 대해서 읊은 시로 지금도 회자된다. 본래 동파육은 중국에서 보편적인 요리인 훙샤오러우(紅燒肉)를 기반으로 한다. 훙샤오러우는 돼지고기의 삼겹살을 잘게 썬 뒤 여러 조미료와 향신료를 넣어 오래 찐 요리다. 삼겹살의 크기, 넣는 조미료와 향신료 등은 지방마다 달라서 조리법이 천차만별이다. 소동파가 태어나고 자랐던 쓰촨(四川) 성 메이산(眉山) 시의 생가 입구 동파육은 이를 항저우(杭州)식으로 변형한 것이다. 그런데 '저육송'에서는 황저우(黄州)의 이야기를 읊고 있다. 황주는 후베이(湖北) 성 황강(黃岡) 시 황저우구를 가리킨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 그 내막은 소동파의 인생 역정에 숨어있다. 소동파의 아버지는 쓰촨(四川) 성 메이산(眉山)이 고향인 소순이다. 소순은 청소년기에는 철이 없었다. 싫증을 잘 내어 글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다. 스무 살이 넘어서 반성하고 공부에 매진했다. 이 기간인 1036년에 소동파가 태어났다. 첫아들을 가진 뒤 글공부에 더욱 열성을 다했다. 소동파와 소철이 어머니와 함께 즐겁게 보낸 어린 시절을 재연한 모습 그리고 3년 뒤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소순은 자식들이 평생 잘 지내기 바랐다. 그래서 큰아들은 식(軾)으로, 둘째 아들은 철(轍)로 지었다. 소식은 소동파의 본명이다. 소순은 산문에 이름의 유래를 설명했다. "'식'은 '수레 앞턱의 가로막이 나무'다. 바퀴, 바퀴살, 덮개, 뒤턱나무 등은 수레에게 없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가로막이 나무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소순은 큰아들이 거친 세상에서 홀로 진실을 지키며 어울리지 못하고 화를 입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화를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식'이라고 지었다. 소순과 소동파, 소철이 생가에서 생활하며 떠 마신 우물 "'철'은 '수레바퀴 자국'이다. 비록 모든 수레는 바퀴 자국을 남기지만, 수레의 공덕을 얘기할 때는 그 자국을 들먹이지 않는다. 또한 수레가 뒤집혀도 바퀴 자국에는 화가 못 미친다." 둘째 아들은 별다른 변고 없이 잘 살기를 기원했다. 이렇듯 형제 이름에는 아버지의 세심한 사랑이 숨어 있다. 소순은 과거에 응시하는 두 아들을 데리고 40대에 수도로 갔다. 그때 구양수를 만나 시문을 인정받았다. 또한 재상의 추천을 받아 벼슬에 올랐다. 소동파와 소철도 진사에 급제했다. 따라서 3부자는 '당송팔대가'로 발돋움했다. 젊은 시절 함께 시를 논하는 소동파와 소철 형제를 재연한 모습 소동파가 출사했던 시기에 황제 신종은 왕안석의 건의를 받아들여 신법을 시행했다. 소동파는 왕안석을 추종하는 신법당의 위선과 탐욕에 신물이 나서 이를 반대했다. 그로 인해 1071년부터 소동파는 지방관으로 발령이 나서 곳곳을 전전했다. 1077년에는 쉬저우(徐州)의 주지사가 되었는데, 부임해서 얼마 안 되어 홍수가 났다. 소동파는 관민을 이끌고 제방을 신속하게 쌓아서 성을 지켰다. 쉬저우 백성들은 소동파의 솔선수범에 감동하여 돼지고기와 양고기를 바쳤다. 소동파가 집에서 이를 훙샤오러우로 만들었다. 소동파가 쉬저우에서 벌인 홍수 극복을 재연한 모습 그리고 요리를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사람들은 '회증육(回贈肉)'이라 부르며 고마워하였다. 1079년부터는 후저우(湖州) 주지사로 근무하면서 신종에게 시로 상소를 올렸는데, 신법당에게 꼬투리를 잡혔다. 이듬해 어사대에 끌려가 큰 고초를 겪으니 '오대시안(鳥臺詩案)'이다. 신법당은 소동파를 죽으려 했으나 신종이 응하지 않았다. 결국 황저우 유배로 마무리되었다. 소동파는 황저우성 밖 언덕에서 손수 농사를 짓고 밥을 해먹었다. 이 시기에 훙샤오러우를 수육 기법으로 만들었고 '저육송'을 지은 것이다. 소동파가 부인과 황저우성 밖 동쪽 언덕에서 농사를 짓는 걸 재연했다. 이곳에서 소동파의 호인 '동파거사(東坡居士)'가 유래되었다. '동파'는 동쪽 언덕이라는 뜻이다. 또한 소동파는 대표작인 '적벽부(赤壁賦)'를 지었다. 오직 강 위에 부는 산들바람과(惟江上之淸風) 산간의 밝은 달만은(與山間之明月) 귀에 들어오면 소리가 되고(耳得之而爲聲) 눈에 닿으면 색깔을 이루네.(目遇之而成色) 아무리 가져도 막지 않고(取之無禁) 써도 써도 없어지지 않으니(用之不竭) 이것은 조물주의 무진장한 보물이라네.(是造物者之無盡藏也) 그러니 나와 그대가 함께 즐겨 보세나.(而吾與者之所共適) 유배 생활 속에 책을 읽는 소동파를 형상화한 모습 '적벽부'의 마지막으로, 적벽대전이 벌어졌던 양쯔강(長江) 전장에서 삼국시대의 고사를 인용하며 손님과 문답하듯이 읊었다. 덧없는 인생살이에서 해탈하여 자연과 하나가 된 심정을 묘사하였다. 소동파 시의 특징인 거침없는 필치로 써 내려가는 호방한 작풍을 그대로 보여준다. 소동파는 음력 7월에 '적벽부'를 지은 뒤에, 10월에 '후적벽부'를 추가로 지었다. '적벽부'에 담긴 무위자연(無爲自然) 인생관과 호연지기 정신은 후대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이들이 같은 이름의 시와 그림을 남겼다. 항저우(杭州)를 대표하는 자연 절경인 시후(西湖) 소동파의 유배 생활은 1085년에 신종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철종이 즉위한 뒤 복직되어 조정으로 돌아갔으나 정권을 잡은 구법당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그로 인해 1089년에 지방관으로 다시 쫓겨나서 항저우 주지사로 발령받았다. 소동파는 부임하자 시후(西湖)에 제방을 쌓고 다리를 놓았다. 그 덕분에 여름에 폭우가 왔으나 시후는 범람하지 않았다. 항저우 백성들은 이를 칭송하면서 공덕을 기리고자 하였다. 소동파가 돼지고기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돼지고기와 술을 마련해서 선물하였다. 삼소사 사당 내 모셔져 있는 소순(왼쪽)과 소동파(오른쪽) 소동파는 고기를 집에서 요리해서 시후 공사에 참여했던 인부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 뒤 항저우 사람들은 소동파의 요리를 동파육이라고 불렀다. 즉, 동파육은 소동파가 쉬저우에서 처음 만들었고, 황저우에서 발전시켜서 항저우에서 완성한 요리였다. 또한 훙샤오러우와 동파육은 내가 오랜 중국 생활 속에서 평소 즐겨 먹는 요리다. 중국 전역을 다니며 먹었던 동파육 중 최고 진미는 메이산시 외곽의 한 식당에서였다. 다른 도시를 가던 중 우연히 들렀는데, 돼지고기의 육질과 향신료의 배합이 아주 일품이었다. 삼소사 뒤편에 있는 소동파 석상.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상징물이다. 사실 쓰촨성은 "쓰촨의 돼지가 천하를 평안케 한다(川猪安天下)"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질이 뛰어나다. 또한 중국 최대의 양돈지로, 2020년에는 5,614만 돈을 출하해서 9.5%를 차지했다. 그렇기에 돼지고기는 쓰촨요리의 주재료다. 메이산시에서 발견한 또 다른 진미는 바이주(白酒)인 소동파주였다. 소동파주는 메이산에 소재한 삼소주업(三蘇酒業)이 소동파를 브랜드화해서 내놓은 술로,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에 맛이 좋았다. '삼소'는 소순과 소동파, 소철을 가리킨다. 현재는 이들의 생가 이름도 '삼소사(三蘇祠)'다. 디자인 : 서현중
장요(江油)시 칭롄(靑蓮)진 이백고리(李白故里)의 '월하독작' 석상 두보와 함께 당나라를 대표하는 시인 이백은 태어난 고향이 어디인지 논란이 많다. 중국의 여러 지방정부가 자기 땅에서 출생했다고 우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 기록을 고증해 보면, 이백은 당이 지배했던 서역의 안서도호부 수이예청(碎葉城)에서 태어났다. 수이예청은 지금의 키르기스스탄 토크마크에 해당한다. 그 뒤 4살 때 쓰촨(四川)성 장요(江油)로 이주해서 성장했다. 이백의 호인 청련거사(靑蓮居士)는 이백이 살았던 장요시 칭롄(靑蓮)진에서 따왔다. 이백은 천하를 주유하면서도 고향인 장요를 잊지 못했다. 청나라 때 복원된 이백의 고택인 롱서원(隴西院) 26살 때 양저우(揚州)에서 지은 '정야사(靜夜思)'에 이런 애틋한 마음이 잘 녹아있다. 정야사는 떠난 고향을 그리워하는 나그네의 마음을 잘 표현한 최고의 망향시(望鄕詩)로 손꼽힌다. 침상 앞 달빛을 바라보니(牀前看月光) 땅 위에 내린 서리가 아닌가.(疑是地上霜) 머리를 들어 산에 뜬 달을 보라보니(擧頭望山月) 고향 생각에 고개가 숙여지네.(低頭思故鄕) 이백은 한평생을 방랑으로 지냈으나, 자신의 재능을 조정에서 펼치기를 바랐다. 42살에 도사 오균의 천거로 현종의 부름을 받아서 장안(長安)으로 들어갔다. 이백의 고택 롱서원 앞에 세워진 소년 시절을 형상화한 인물상 현종에게 총애를 받았으나 궁정시인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했다. 정치적 야망을 펼칠 수 없어 절망하며 술에 빠져 지냈다. 거침없던 성격의 이백은 결국 조정 대신들의 미움을 사서 쫓겨났다. 잠시 장요로 돌아왔다가 양쯔강(長江)을 통해 천하를 주유했다. 이렇듯 이백은 정치적으로 불우했기에 음주로 인생의 무상함을 달랬다. 수많은 술 예찬시를 남겼는데, '월하독작(月下獨酌)'이 백미로 손꼽힌다. 꽃 사이에 술 한 병 놓고,(花間一壺酒) 벗 없이 혼자 마시노라.(獨酌無相親) 잔 들어 밝은 달을 맞이하니,(舉杯邀明月) 배를 타고 쓰촨성을 벗어나는 청년 시절의 이백을 형상화한 모습 그림자 비추어 세 사람이 되었구나.(對影成三人) 달은 본래 술 마실 줄 모르고,(月旣不解飮) 그림자는 그저 흉내만 내네.(影徒隨我身) 잠시 달을 벗하고 그림자를 거느리고,(暫伴月將影) 이 봄을 마음껏 즐겨보세.(行樂需及春) 내가 노래하니 달도 서성이고,(我歌月徘徊) 내가 춤추니 그림자도 어지럽구나.(我舞影零亂) 취하기 전엔 함께 즐기지만,(醒時同交歡) 취하고 나면 각자 흩어지겠지.(醉後各分散) 영원히 정에 얽매이지 않는 우정을 맺어,(永結無情遊) 아득한 은하수에서 만나기를 기약하세.(相期邈雲漢) 이백고리에 만들어진 '장진주' 시벽과 이백의 중년의 모습 이백은 또 다른 술 예찬시 '장진주(將進酒)'까지 지어 후대인에게 '주선(酒仙)'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이때를 마지막으로 이백은 장요를 다시 찾지 못했다. 오늘날 칭롄진에는 당대의 유적은 하나도 남아 있질 않다. 단지 청대 복원된 이백의 고택 롱서원(隴西院)이 있다. 또한 이백의 시로 석상, 시비, 시벽 등을 세운 태백비림(碑林)이 조성되었다. 장요에서의 젊은 시절 이백의 행적은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일화가 장요에서 70여km가 떨어져 있는 멘주(綿竹)와 관련되어 있다. 지진 이후 조성한 젠난(劍南) 옛 거리. 길 옆 건물은 모두 양조장이다. 어느날 이백은 명주의 고장으로 명성 높은 멘주를 찾아갔다. 젠난소춘(劍南燒春)이 너무나 맛있어 입고 있던 모피옷을 저당 잡혀서 한 항아리나 통째로 마셨다. 고대 중국 술은 대부분 황주(黃酒) 계열이었기에 술 빛깔이 황록색을 띠었다. 황록색은 봄을 상징하고 술을 마시면 기운이 나게 했다. 이에 착안해서 중국인들은 '춘'을 더해 술 이름을 지었다. 특히 당대에 이런 작명법이 유행했다. 북송의 시인 소동파가 "당대에는 '춘'자가 들어간 술이 많았다. 금릉춘, 죽엽춘, 곡미춘 등 한두 개가 아니었다"고 언급했다. 양조장에서 증기가 나오는 판 위에서 오곡과 누룩을 배합하는 노동자 사실 멘주에서 술은 5세기부터 빚기 시작했다. 1985년 멘주시 외곽에서 고대 양조장 유적이 발굴됐는데, 남제(南齊) 시기 명문이 새겨진 꽃무늬 벽돌이 발견되었다. 유물뿐만 아니라 당대의 여러 사서에는 젠난소춘에 대해서 언급되어 있다. 《후당서》에는 8세기말 덕종 때 젠난소춘을 궁중어주로 지정했다고 기록이 있다. 이런 젠난소춘의 명성을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에 이백이 등장했던 것이다. 당대 이후에도 멘주는 명주의 고장이라는 명성을 줄곧 유지하였다. 청대부터는 대곡주(大麯酒)를 주로 생산하였다. 증류기에 오곡과 누룩을 넣고 평평하게 다지는 노동자 특히 19세기 말 멘주의 젠난소춘은 청 황실에 진상되는 공주(貢酒)로 다시 지정되었다. 당시에는 17개의 양조장이 영업하면서 번성했다. 이때 술 이름도 '젠난춘(劍南春)'으로 바뀌었다. 여기서 대곡주는 밀에다 약간의 완두콩을 넣어 만든 누룩을 더해서 양조되는 술이다. 오랜 시간 동안 발효시킨 큰 누룩 덩어리를 배합해서 효소와 효모균이 풍부하다. 젠난춘은 수수, 밀, 옥수수, 쌀, 찹쌀 등에 이 대곡을 더해서 만든 증류주다. 유명한 쓰촨성의 또 다른 명주인 우량예(五糧液)와 원료 및 양조법에서 유사하다. 청대에 사용했던 옛 증류기. 오늘날에는 이를 자동화했을 뿐이다. 두 술은 쓰촨의 대지 위에 풍부한 물을 공급받아 자란 양질의 곡물을 쓴다. 다만 두 술은 물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우량예가 강변에 위치해서 강물이 스며든 지하수를 쓰는 데 반해, 젠난춘은 룽먼(龍門) 산맥에서 지하수를 끌어와 술을 빚는다. 롱먼산맥은 세계의 지붕인 칭짱(靑藏) 고원의 동단으로 칼슘, 탄산 등 천연 광물질이 풍부한 지하수를 품고 있다. 젠난춘은 이 지하수를 퍼와서 빚은 술이기에 맛이 아주 깨끗하다. 내가 원주(原酒) 창고에서 맛봤던 60도 원액은 도수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부드러웠다. 누룩은 구덩이 속에 넣어 다진 뒤 진흙으로 덮어 90일간 발효시킨다. 1949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을 때 멘주의 양조장은 200개가 넘어섰다. 이를 1951년에 통합해서 국영 멘주 술 공장으로 만들었고, 1958년에 회사 이름을 젠난춘 술 공장으로 바꾸었다. 젠난춘이 중국 최고의 반열에 오른 것은 1979년이었다. 제3회 전국술평가대회(評酒會)에서 중국 8대 명주 중 하나로 뽑혔던 것이다. 이때 함께 선정된 명주가 마오타이(茅臺), 우량예 등이었다. 따라서 중국에서 세 명주를 '우마오젠(五茅劍)'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젠난춘은 2008년 8월에 일어난 쓰촨 대지진으로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중국에서 최대 규모인 젠난춘의 제1원주(原酒) 창고 지진이 멘주시를 강타하면서 시내 서쪽에 위치한 젠난춘 양조장의 일부는 폐허로 변했다. 지반이 심하게 흔들리면서 원주 창고에 보관됐던 술독 대부분이 서로 부딪치고 깨졌다. 원주는 바이주(白酒)의 원액으로, 이를 숙성시켜 도수를 낮추고 블렌딩하여 가치를 높인다. 당시 젠난춘의 13곳 원주 창고에 있던 항아리의 술이 쏟아져 나오면서 멘주시는 1주일 넘게 술 냄새로 진동하였다. 바닥에 쏟아진 술은 전체 보관량 중 40%에 달했다. 그로 인해서 젠난춘 그룹은 8억 위안(약 1,476억 원)의 직접적인 피해를 받았다. 쓰촨 대지진 때 항아리가 넘어져 깨져서 그 뒤에는 땅속에 파놓았다. 양조장과 원주 창고를 재건하기 위해서 투입된 공사비까지 합치면 20억 위안의 손실을 입었다. 다행히 수년 동안의 복구를 거쳐 현재는 원주 창고가 1개 더 늘어났다. 제1 원주 창고는 1980년대에 세워져 가장 오래되었고 면적이 5만㎡에 달한다. 1,000ℓ의 술을 담을 수 있는 항아리를 2만 3,000여 개나 보관하고 있다. 따라서 규모나 양에 있어서 중국에서 가장 큰 술 저장고다. 또한 지진으로 파괴되었던 양조장의 외관은 명·청대 양식으로 바꾸었다. 그 주변은 전통거리로 정비해서 젠난 옛 거리(老街)로 조성하였다. 디자인 : 권혜민
랑중고성은 당대의 도로 양옆으로 수백 년 된 민가가 잘 보존되어 있다. 동서양의 고전을 막론하고《삼국지》 만큼 오래도록 사랑을 받아 온 작품도 드물다. 오늘은 《삼국지》를 빛낸 한 영웅을 떠올리며 음미할 만한 중국 명주를 소개하려 한다. 쓰촨(四川) 성 동북부에 자리 잡은 랑중(閬中)은 산시(陝西) 성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청두(成都)처럼 2300년 전 이름이 지어졌고, 2천 년 가까이 쓰촨 북부의 행정과 산업의 중심지로 군림했다. 산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고 가운데를 자링강(嘉陵江)이 S자형으로 꿰뚫어 흐른다. 그 지형이 흡사 태극의 형상과 흡사하다. 자링강 북쪽으로 랑중고성이 자리 잡고 있다. 랑중고성은 청대에 지어진 성곽 안에 당대 기본 골격이 짜인 도로와 수백 년 된 민가들이 원형대로 남아있는 중국 고대 도시계획의 활화석이다. 랑중고성은 옆으로 자링강이 흘러 자연풍광이 빼어나다. 고성을 둘러싼 주변의 자연풍광도 아름다워 수많은 문인들이 찾아왔다. 안사의 난을 피해서 쓰촨에 정착했던 시인 두보는 랑중을 방문한 뒤 다음과 같이 읊었다. '삼면으로 흐르는 강이 성벽을 껴안고, 주위의 산세가 노을을 가두다(三面江光抱城廓, 四圍山勢鎖煙霞).' 주변 산하에 둘러싸여 조화를 이룬 랑중의 매력을 멋들어지게 표현한 시구다. 이런 역사와 환경을 지닌 랑중고성은 오늘날 산시(山西) 성 핑야오(平遙), 윈난(雲南) 성 리장(麗江), 안후이(安徽) 성 서센(歙縣) 등과 더불어 중국 4대 고성으로 손꼽힌다. 그림자극은 배우가 스크린 뒤에서 인형으로 공연한다. 랑중에는 고성뿐만 아니라 옛 문화예술이 잘 보존되어 있다. 실제로 랑중고성을 걷다 보면 전통과 풍습이 살아 쉬고 있는 체감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유산이 그림자극(皮影戱)이다. 그림자극은 소가죽으로 만든 인형을 배우가 스크린 뒤에서 조명을 받아 움직여서 공연하는 연극이다. 배우는 막대기로 인형을 조종할 뿐만 아니라 대사를 하고 노래를 부르며, 때로는 악기까지 연주한다. 그렇기에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기예의 연마가 필요하다. 또한 그림자극은 중국 전통연희 중 드물게 오래전부터 세계화되었다. 배우는 스토리에 맞춰 인형을 바꿔 가며 공연한다. 그림자극은 대략 서한(西漢) 대에 시작되었다. 그 뒤 실크로드를 통해서 아시아 곳곳을 퍼졌고 터키, 그리스, 프랑스 등 유럽까지 전파됐다. 오늘날 중국 내에서는 10대 그림자극 유파가 번성하고 있다. 이 중 랑중을 중심으로 발달한 쓰촨 북부 그림자극은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배우가 직접 인형을 만든다. 다른 유파에서는 인형만 전문으로 만드는 장인이 따로 있다. 둘째, 인형의 얼굴형이나 손발을 둥글게 깎아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그에 반해 다른 지방은 인형은 코, 턱, 손 등이 뾰족하고 날카롭다. 랑중 그림자극단 배우는 직접 인형을 제작해 사용한다. 셋째, 고전소설 《삼국지》 속 촉한(蜀漢)의 인물이나 사건 혹은 지역의 전설이나 민간 설화를 레퍼토리로 삼아 공연한다. 특히 랑중 그림자극단은 오직 장비와 관련된 스토리만을 주제로 무대에 올린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장비와 랑중의 인연을 짚어봐야 한다. 211년 유비는 유장의 요청으로 익주(益州·쓰촨)에 들어갔다. 3년 뒤 유비는 유장을 몰아내고 청두에서 촉한을 건국했다. 뒤이어 위나라의 공략을 막기 위해 장비를 파서(巴西) 태수로 임명했다. 이에 장비는 랑중에 주둔하면서 7년 동안 생활했다. 죽은 장비를 옥황상제처럼 모신 장환후사 내 사당. 장비가 술을 마시면 자주 실수했기에, 유비는 태수로 지내면서 술을 멀리하라고 엄명했다. 장비도 마음을 잡고 음주를 줄였다. 또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고 병사들을 엄격하게 조련했다. 그 같은 노력 덕분에 218년 위의 장수 장합이 랑중에 쳐들어오자,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 격퇴했다. 이듬해 10여 년 동안 형주(荊州)를 지켰던 관우가 위와 오의 협공을 받는 와중에 여몽의 습격으로 죽었다. 도원결의를 통해 한날한시에 같이 죽을 것을 약속했던 유비와 장비는 분노했으나,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다. 장환후사의 묘당 양 옆 저승사자에게 끌려가는 범강과 장달의 찰흙상. 221년 유비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 본격적으로 오나라 정벌에 나섰다. 유비의 동원령을 손꼽아 기다렸던 장비는 곧바로 출정을 준비했다. 장수들에게 병사들이 입을 흰 갑옷과 흰 기를 사흘 안에 만들라고 명령했다. 범강과 장달이 나서서 "짧은 기일 내에 많은 갑옷과 기를 마련할 수 없으니 출정 날짜를 좀 늦춰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장비는 크게 노하며 두 사람을 심하게 매질했다. 이에 두 사람은 군령을 지키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 데다 앙심까지 품었다. 따라서 숙소에서 술에 취해 잠든 장비를 살해했다. 장환후사 내 묘소에는 수급 없이 장비의 몸통만 묻혔다. 이때가 장비의 나이 쉰다섯이었다. 천하를 호령했던 맹장의 죽음으로는 너무나 허무했다. 범강과 장달은 암살에 성공하자, 장비의 머리를 베어 수하들과 오나라로 도망쳤다. 수급 없이 남은 시신은 랑중 백성들이 수습해서 숙소 뒤에 봉분을 조성하여 묻었다. 그 뒤 촉한의 후주가 된 유선이 장비를 환후에 봉했고, 묘소를 정비했으며 사당도 지었다. 이것이 랑중고성 한복판에 있는 장환후사(張桓侯祠)다. 장환후사는 장비를 모신 대전, 장비의 아들과 수하를 모신 적만루(敵萬樓), 묘소와 묘당 등으로 구성됐다. 장환후사 한편에는 《삼국지》의 장비 고사를 형상화한 동상을 세웠다. 사실 처음 세워진 뒤 장환후사는 불타고 다시 지어지길 반복하다, 청대에 지금처럼 중건했다. 청조는 어느 왕조보다 유비, 관우, 장비와 관련된 유적의 정비에 힘썼다. 그 이유는 역사적 정통성을 잇고 민심을 얻기 위해서였다. 남송 이후 중국에서는 촉한정통론이 조위(曹魏)정통론을 압도했다. 백성들 사이에서 《삼국지》나 삼국지 전통연희가 유행하면서 이를 더욱 부채질했다. 랑중에서 장비와 관련된 그림자극이 성행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청조는 명나라를 대체했으나 한족이 아닌 만주족이 건국한 나라였다. 야외 퍼포먼스를 위해 준비한 인형. 맨 오른쪽이 유비고, 그 옆이 장비다. 따라서 중국 역대 왕조의 정통성을 잇는 사업을 굉장히 중시했다. 이전 왕조인 명나라의 역사서를 편찬해서 간행했고, 명 황제들의 능원을 단장하여 관리했다. 중국 역대 왕조 중 민중들이 가장 좋아했던 촉한의 유적도 관리 대상 1호였다. 이것은 이민족의 왕조였던 청조가 피지배민인 한족의 민심을 얻으려는 일환책이었다. 장비가 죽은 지 1700여 년이나 지났지만, 오늘날 랑중 주민들은 여전히 그를 도시의 수호신으로 모신다. 또한 장비가 랑중을 다스리면서 남긴 전설과 설화 10여 가지도 구전하여 보존했다. 장비가 군사들의 군량미로 개발했다는 장비우육(張飛牛肉). 랑중 그림자극의 일인자인 왕 씨 극단이 이런 현실을 놓칠 리 없었다. 3대째 가업을 이어오는 왕뱌오(王彪) 씨는 자녀 및 동생 가족과 함께 장비에 관한 고사를 모티브로 해서 공연했다. 왕 씨 극단은 전통적인 방식뿐만 아니라 《삼국지》의 촉한 영웅들의 인형을 야외에서 들고 춤추는 퍼포먼스도 창작해 냈다. 2012년 10월 내가 랑중에서 취재하면서 왕 씨의 권유로 마신 술이 바오링야주(保寧壓酒)였다. 바오닝은 랑중이 한때 사용했던 이름이다. 바오닝야주는 108개의 약재로 만든 누룩을 증류 과정에 넣은 술이다. 랑중의 또 다른 특산물인 바오닝추(保寧醋)를 판매하는 상점. 약재에는 천마(天麻), 육계(肉桂), 구기자, 반하(半夏) 등이 있다. 따라서 정통 바이주(白酒)가 아닌 약술로 분류된다. 중국에서는 약술을 '보건주(保健酒)'라고 부른다. 증류된 바오닝야주의 원주(原酒)에는 꽃가루와 얼음 설탕을 더한다. 그리고 저장고에 보관해서 1~3년간 숙성시킨다. 그러면 알코올 도수는 16~30도로 떨어지고 술 빛깔은 짙으면서 투명한 황색을 가진다. 내가 마신 바오닝야주의 냄새는 향긋했고 맛은 부드러우면서도 깊었다. 랑중은 전통 식초인 추(醋)의 대표적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디자인 : 서현중)
중국 술 좀 아시는 분이라면 ‘우마오젠(五茅劍)’이라고 들어보셨을 거다. 중국 사람들이 당신에게 중국 명주의 순위를 아느냐고 물었을 때 ‘우마오젠’을 거론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깊은 호의와 친밀감을 표할 것이다. 우마오젠은 우량예(五糧液), 마오타이(茅台), 젠난춘(劍南春)의 앞글자를 모은 말이다. 중국 국주로 불린 마오타이와 전통의 강호인 젠난춘을 제치고 빅3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술이 바로 쓰촨의 자존심 우량예다. 쓰촨(四川)성 이빈(宜賓)시에 있는 우량예(五糧液) 술공장의 입구 쓰촨(四川)성 이빈(宜賓)시 남부에는 가파른 절벽에 시신을 안치한 나무관을 매달아 놓은 무덤이 있다. 나무관을 받침대 역할을 하는 2~3개의 막대 위에 얹혀 놓은 ‘현관장(懸棺葬)’이다. 현관장은 예부터 중국 서남부에서 유행했다. 시신을 하늘의 신과 원활히 소통토록 하고 짐승에게서 보호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특히 박인(僰人)이 주로 사용했다. 박인은 기원전부터 쓰촨 남부, 윈난(雲南) 동북부, 구이저우(貴州) 서북부 일대에서 살았다. 12세기에 이르러서는 큰 세력을 형성해서 봉기를 일으켰고, 북송 군대와 일전을 벌였다. 박인이 남긴 현관장 방식은 쓰촨 남부와 충칭에서 볼 수 있다. 봉기는 실패했고 박인은 북송의 철저한 통제 아래 들어갔다. 명대에 세력을 키운 박인은 봉기를 다시 일으켰으나 무위로 돌아갔다. 결국 명대 말기에는 다른 민족에게 흡수되면서 지금은 존재마저 알 수 없다. 하지만 박인이 빚었던 독특한 술 제조법을 바탕으로 희대의 명주가 탄생하니 그것이 바로 우량예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마오타이보다 더 많이 팔린다는 우량예는 다섯 가지 곡식을 원료로 배합해서 제조한 술이다. 곡식의 배합 비율은 수수 36%, 쌀 22%, 찹쌀 18%, 밀 16%, 옥수수 8%이다. 북송대 이빈의 여러 술도가가 호황을 누린 모습을 기록한 그림 이런 우량예의 양조법이 북송대 박인이 빚었던 잡량주(雜糧酒)가 시초다. 잡량주는 여러 잡곡을 섞어 빚은 술이라는 박인의 양조법을 비하했던 작명법이다. 중국의 전통적인 양조법과 달랐기 때문이다. 송대까지 한족의 술은 황주(黃酒)와 고량주(高粱酒)로 나뉘었다. 황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술 중 하나로, 쌀과 찹쌀에 보리누룩을 가미해서 빚었다. 보리누룩 때문에 짙은 황색을 띠고 알코올 도수는 15~20도로 낮다. 하지만 술맛이 진하면서 부드러워, 중국에서는 각종 요리 맛을 내는 조미료로도 사용됐다. 새롭게 복원한 온덕양에서 누룩을 발효시키는 우량예 노동자 고량주는 말 그대로 수수를 주원료로 빚은 술이다. 제조 과정에서 수수를 100% 썼거나 향과 맛의 조절을 위해서 보리, 밀 등을 조금 배합해서 빚었다. 고량주는 원대에 아라비아에서 증류법이 전래되면서 제조되었다. 그러나 이전부터 중국에서 수수로 고량주를 빚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증류법의 전래 이후 고태(固態) 발효법을 발전시켰다. 고태 발효법은 누룩을 구덩이에 넣은 뒤 발효시켜 딱딱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누룩이 얼마나 특색 있고 다양한 미생물이 생성되느냐에 따라 술의 맛과 향이 달라진다. 우량예그룹의 모태인 리천영의 덩쯔쥔(오른쪽)과 관련 인물 석상 그에 반해서 박인은 여러 곡식을 균등한 비율로 넣어 양조했다는 점에서 아주 파격적이다. 이런 박인의 잡량주는 증류법이 대륙 전역에 퍼지면서 빛을 발했다. 증류와 숙성을 통해서 여러 곡식의 잡내나 침전물이 없어지면서 술맛이 좋아지고 숙취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명대에는 천(陳)씨 가문에서 운영하던 온덕양(溫德羊)에서 잡량주 양조법과 야오(姚)씨 가문 술도가의 기술을 더해, 오늘날의 바이주(白酒)를 탄생시켰다. 청대 말기 온덕양은 덩쯔쥔(鄧子均)에게 넘겨지고 양조법은 자오밍성(趙銘盛)에게 전수됐다. 우량예술공장 앞에 자리 잡은 우량예그룹의 본사 건물 덩쯔쥔은 온덕양을 이천영(利川永)으로 개명하고 자오밍성을 스승으로 성심껏 모셨다. 덩쯔쥔의 열의에 감복한 자오밍성은 온덕양의 양조비법을 모두 덩쯔쥔에게 전수했다. 본래 잡량주는 수많은 곡식을 넣어 빚었다. 하지만 덩쯔쥔은 새 양조법을 끊임없이 접목시켜 다섯 곡식으로 정형화하였다. 그렇게 증류한 술을 1909년에 처음 선보이면서 ‘우량예’라고 지었다. 그리고 우량예는 1915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파나마만국박람회에서 금상을 획득한 이래 국제박람회나 경연대회에서 40여 차례나 수상했다. 루저우(瀘州)에서의 오랜 양조 역사를 보여주는 부조벽 이빈에서 105㎞ 떨어져 있는 루저우(瀘州)도 술의 도시(酒城)다. 실제로 크고 작은 술회사가 수십 개나 산재해 있다. 그중 루저우라오자오(瀘州老窖)와 랑주(郞酒)는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명주다. 중국정부가 지정한 17개의 국가명주 중 한 도시가 2개의 브랜드를 지닌 곳은 루저우와 구이저우성 쭌이(遵義)가 유일하다. 특히 루저우라오자오는 중국인들이 ‘농향(濃香)형 바이주의 비조(鼻祖)’ ‘술의 우두머리(酒中泰斗)’라고 부를 만큼 명성이 자자하다. 이런 루저우에서 술을 빚기 시작한 것은 후한대 말기다. ‘오래된 구덩이’가 있고 루저우라오자오를 양조하는 저장고 225년 제갈량이 루저우 일대에 출병했다가 군사를 시켜 누룩을 빚게 했다. 당시 유행했던 역병을 고치기 위해서 누룩과 술을 이용했던 것이다. 주류업이 괄목할 만큼 성장한 시기는 송대이었다. 《송사》에는 1070년 루저우에서 생산된 술이 3만 7500㎏에 달했고 소주(小酒)와 대주(大酒)를 모두 빚었다고 적혀있다. 루저우가 술의 도시로 자리매김한 것은 명대이다. 16세기 대곡주(大麯酒)의 양조기술이 확립되었고, 큰 규모의 양조장이 등장했다. 특히 1657년 청대 순치제 때 서취원조방(舒聚源糟坊)이 문을 열었다. 400여 년 동안 마르지 않고 뿜어져 나오는 용천정(龍泉井) 서취원조방은 발효 구덩이 6개로 시작해서 1750년에 4개를 더 만들었다. 그 뒤 이름을 온영성조방(溫永盛糟坊)으로 바꾸었다. 청대 말기 루저우에는 온영성조방을 비롯해 600여 개의 크고 작은 양조장이 성업했다. 1949년 사회주의정권이 들어선 뒤 온영성조방이 대부분의 큰 양조장을 흡수하여 지금의 루저우라오자오술공장(酒廠)이 되었다. ‘라오자오(老窖)’는 오래된 구덩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루저우의 특이한 지역 환경을 이용한 독창적인 양조법에서 비롯됐다. 예부터 루저우에서는 붉은 찰수수가 생산되었다. 저장고에 운반되어 온 루저우라오자오의 원료인 붉은 찰수수와 밀 찰수수는 껍질이 윤기 나며 알갱이는 알차고 촘촘하다. 영양소가 풍부해서 전분 함량이 62.8%나 된다. 따라서 술을 양조하는 원료로 최상품이다. 루저우 사람들은 찰수수를 수확하면 먼저 창고에 두어 숙성시킨다. 숙성된 찰수수는 펑황산(鳳凰山) 아래 저장고에서 용천정(龍泉井) 지하수를 이용해서 다른 원료와 배합한다. 펑황산은 양쯔강(長江)에서 1㎞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산속에 흐르는 산천수와 양쯔강의 강물이 혼합되면서, 산성이 적고 단맛이 돌아 효모를 발육하고 번식시키는 용천정 물을 생성했다. 저장고에는 용천정 물과 원료를 배합해서 만든 누룩을 발효시킨다. 용천정 옆에 발효 저장고가 있다. 저장고에는 600여 종의 미생물이 숨 쉬고 있다. 1573년부터 배합된 누룩이 바닥과 벽에 침투하면서 깊고 짙은 향과 풍부한 미생물을 생성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용천정의 물과 황토를 반죽해서 누룩 위에 바른 진흙은 미생물의 활동을 촉진한다. 바닥에 판 구덩이에 담긴 누룩은 짧게는 2~3년에서, 길게는 30년 이상 발효된다. 심지어 50~100년 발효된 누룩도 있다. 이렇게 오래된 발효 구덩이가 라오자오다. 펑황산 저장고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누룩 발효지로 인정되었다. 저장고의 중앙에서는 구덩이에서 파낸 누룩으로 원료를 더해 증류한다. 현재 중국에서 가장 비싼 농향형 바이주인 ‘궈자오(國窖)1573’은 여기서 탄생했다. 궈자오1573는 루저우라오자오가 1999년에 개발하여 론칭한 최고급 바이주다. 농향형 바이주의 비조답게 궈자오1573의 술맛은 아주 깊고 진하다. 오래된 구덩이에서 발효된 누룩을 이용해서 증류한 원주(原酒)를 춘양(春陽) 동굴에서 숙성시켰기 때문이다. 춘양동굴에는 7647개의 원주 항아리가 있는데, 대부분 수십 년의 역사를 가졌다. 동굴은 20도의 온도와 90도의 습도를 유지해서 원주에 극음의 기운을 불어넣어 술을 완성시킨다.
“드넓은 영토, 오래된 역사, 14억 명의 인구와 56갈래의 민족을 가진 중국은 각 지방, 도시, 마을마다 고유의 술 브랜드를 갖고 있다. 그 술은 현지의 역사, 사회, 문화, 예술 등에서 시작됐고 서로 어울리면서 발전해 왔다. 또한 현지와 관련 있는 걸출한 인물에 모티브를 두기도 했다. 이런 현실에 착안해서 대륙 곳곳의 사정과 그 속에 숨어있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필자가 현지에서 직접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높이 66㎝, 너비 138㎝로 세계에서 가장 큰 싼싱두이의 청동 면구. 중국 역사상 쓰촨(四川)성에서 흥성한 국가 중 ‘촉(蜀)’으로 불린 나라는 둘이었다. 하나는 3000여 년 전에 잠총이 세운 촉이고, 다른 하나는 221년 유비가 세운 ‘촉한(蜀漢)’이다. 오늘날 전자를 ‘고촉(古蜀)’이라고 부른다. 고촉은 광한(廣漢)시에서 화려한 문명을 꽃피웠다. 그 흔적이 1934년에 처음 발견되어 지금까지 발굴 중인 싼싱두이(三星堆)다. 싼싱두이의 유물은 황허(黃河) 문명과는 전혀 다른 고촉의 문화적 특징을 갖고 있다. 특히 쏟아져 나온 청동 면구와 인두는 한족 얼굴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싼싱두이 청동 인두에는 구름 모양의 큰 귀를 갖고 있고 귓불에 구멍이 나 있다. 따라서 쓰촨이 중국문명과 완전히 결합하게 된 시기는 기원전 316년 진나라의 대군이 고촉을 멸망시킨 이후다. 훗날 진시황에 의해 첫 통일제국으로 발돋움하는 진은 쓰촨에 큰 선물을 안겨주었다. 기원전 3세기 중반 태수 이빙(李泳)이 건설했던 두장옌(都江堰)이다. 두장옌은 청두(成都) 서쪽에 흐르던 민강(岷江)을 막아서 여러 갈래로 흐르게 한 수리관개시설이다. 중국 고대 수리사업의 효시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두장옌에서 갈라져 나온 물줄기는 거대한 청두평야를 비옥하게 만들었다. 촉나라 수도였던 청두를 오늘날처럼 번성케 한 고대 수리시설 두장옌. 기름진 땅에서 풍부하고 다양한 물산이 나오자, 중국인들은 쓰촨을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고 불렀다. 본래 사마천이 《사기》에서 시안(西安) 일대의 관중평야를 일컫는 말이었으나, 두장옌이 타이틀을 빼앗아 와서 쓰촨에 안겨다 주었다. 고촉 말기의 수도였던 청두는 기원전부터 이름 지어진 오랜 도시다. 3세기 혼란기 삼고초려 끝에 출사한 제갈량이 유비에게 천하삼분책을 내놓았던 것은 천부지국인 쓰촨의 중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비가 세운 촉한은 가장 작은 영토를 가졌지만 43년 동안 번성했다. 무후사의 유비전은 청나라 때 지금처럼 세워져 조성된 것이다. 제갈량은 유비와 유선 두 임금을 모시는 동안 천하통일의 대업을 못 이루었다. 하지만 그의 충심과 기개는 지금도 청두의 무후사(武侯祠)에 남아있다. 본래 제갈량은 북벌 중 죽고 시신은 산시(陝西)성 몐(勉)현 딩준산(定軍山)에 묻혔다. 그러자 유선이 청두 외곽에 제갈량 사당을 조성했는데, 이를 5세기 초에 시내로 옮겨왔다. 그 뒤 명대에 유비의 묘인 한소열묘(漢昭烈廟)와 합치면서 지금처럼 성역화했다. 세월이 흘러 후대인들은 유비보다 제갈량을 높이 더 평가하면서 이곳도 한소열묘보다 무후사로 불렸다. 무후사 내 가장 깊숙한 곳에 모셔져 있는 제갈량상. 759년 안사의 난을 피해서 두보(杜甫)가 청두로 이주했다. 개울가 옆에 초당을 지어 살았다. 초당은 열악했고 생활은 어려웠지만, 무후사를 자주 찾으면서 마음을 달랬다. 두보가 제갈량을 기리어 남긴 시가 ‘촉상(蜀相)’이다. 세 번 다시 찾게 한 번거로움은 천하를 위한 계책으로(三顧頻煩天下計) 두 임금을 섬겨 나라를 구하려던 노신의 마음으로 나타났네.(兩朝開濟老臣心) 전쟁에 나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어(出師未捷身先死) 후세의 영웅들로 하여금 눈물을 옷깃에 적시게 하네.(長使英雄淚滿襟) 수정방박물관에 재연해서 전시한 청대 취안싱양조장 주변의 풍경. 무후사에서 동남쪽으로 걸어가면 두장옌에서 갈려 나온 진강(錦江)이 흐른다. 그리고 진강 변에는 오늘날 한국 술꾼들이 가장 좋아하는 중국 술인 수정방(水井坊)의 유적지가 있다. 수정방을 생산하는 업체의 본래 이름은 취안싱(全興)주업이었다. 취안싱은 1993년 쓰촨제약이 청두술공장(酒廠)을 통합한 국유기업이었다. 청두술공장은 1951년에 설립된 주류업체로, ‘취안싱대곡(大曲)’이라는 술을 생산했다. 취안싱대곡은 1786년에 문을 연 취안싱양조장에서 빚었다. 1949년 이후 국영화된 회사가 청두술공장이다. 수정방 유적지에서는 각기 다른 지층에서 시대별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취안싱대곡은 1963년 중국 전역의 술이 자웅을 겨루던 전국술평가대회(評酒會) 2회 대회에서 8대 명주로 선정됐다. 1984년과 1988년의 4회와 5회 술품평회에서도 국가명주로 뽑혔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다른 도시의 명주가 개선된 도로 사정과 물류 환경을 발판으로 청두시장을 잠식했다. 홈그라운드에서도 점유율이 떨어지자, 청두시정부는 청두술공장을 취안싱으로 통합해서 몸집을 키웠다. 하지만 시장을 잠식당하는 상황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청두인만 마시는 서민 술로 고정된 브랜드 이미지가 문제였다. 수정방 유적지에서는 수정방의 원료인 누룩이 묻혀 발효되고 있다. 취안싱은 1996년 증시 상장을 통해 모은 자금을 기반으로 고급 바이주(白酒) 개발에 나섰다. 바이주는 주원료에 수수(高粱)나 쌀이 반드시 들어가고, 전통 증류법으로 제조하는 중국 술을 가리킨다. 당시 신상품 개발의 총지휘자는 라이덩이(賴登燡) 취안싱 부사장이자 공장장이었다. 라이 부사장은 10대부터 품주사(品酒師)로 일하며 40년 이상 술과 함께 살아왔다. 품주사는 바이주를 제조하고 관리하는 양조 장인이다. 새 술을 개발할 뿐만 아니라 등급이 나눠지는 블랜딩, 원주(原酒)의 숙성 등도 품주사가 담당한다. 유적지 옆에서 수수 등과 누룩을 섞어 증류기로 수정방 원주를 뽑아낸다. 라이 부사장은 취안싱 최고이자 중국정부가 지정한 국가 1급 품주사였다. 나는 2008년 6월 수정방을 처음 취재하면서 라이 부사장을 만났다. 라이 부사장은 “1997년부터 4년의 시간과 1억 위안(약 185억 원)을 투입해 고급술을 개발했다”고 말했다. 때마침 수정방 유적이 발견됐다. 1998년 8월 취안싱의 낡은 공장 시설을 보수하던 중 곡식 발효지, 아궁이 터, 술 저장고, 나무기둥과 주춧돌 등 고대 양조장이 드러난 것이었다. 유적의 각기 다른 지층에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가장 오래된 유물은 800년이나 됐다. 수정방박물관은 청대 양조장에서 품주사가 블랜딩하는 모습을 재연했다. 1999년 국가문물국은 수정방 유적지를 ‘중국 10대 고고학 발굴’로 선정했고, 2001년 6월 전국중점유적지로 지정했다. 취안싱은 이 유적지에서 누룩을 발효하고 개발한 고급술을 양조하기로 결정했다. 라이 부사장은 “조사 결과 유적지는 풍부한 미생물의 보고로 판명됐다”고 소개했다. 이렇게 해서 2000년에 새로운 고급술 수정방이 론칭됐다. 취안싱은 고급 브랜드 전략에 따라 일정한 규모와 수준을 갖춘 도매상과 판매점에만 수정방을 공급했다. 또한 신문과 잡지, 디스플레이 등 평면 광고에 주력했다. 수정방 본사에서 새로 개발한 술을 맛보는 라이덩이 부사장(가장 왼쪽). 이런 치밀한 브랜드 메이킹 덕분에 수정방은 단숨에 명주 반열로 올라섰다. 게다가 수정방은 독특한 맛과 향을 가졌다. 맛은 부드러우면서 입에 달라붙고, 향은 은은하며 향긋했다. 2009년 취안싱은 회사 이름을 아예 수정방으로 고쳤다. 2012년에는 영국 주류업체 디아지오가 수정방을 사들였다. 중국에서 외국기업이 국영 주류기업을 M&A한 것은 수정방이 처음이었다. 디아지오의 공격적인 마케팅을 힘입어 수정방은 인천공항을 비롯한 전 세계 대형 공항 면세점에 속속 입점했고, 기내에서도 팔려나갔다. 해외를 오가던 한국인 애주가들의 눈과 혀를 사로잡은 수정방은 바야흐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됐다. 수정방과 맺은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취재는 3차례나 더 했고, 수정방은 매번 신제품이 나오기 전마다 나에게 시음용 술을 보내온다. 청대 취안싱양조장은 이 우물에서 시작되어 수정방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수정방은 주인이 바뀐 뒤 일부 직원들이 사직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철밥통’이었던 국영기업에서 외자기업으로 신분 변화에 따른 불안감이 작용했다. 무엇보다 2013년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집권한 이래 강력한 반부패 운동을 벌이면서 수정방의 실적은 수년 동안 정체됐다. 단기간 동안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훨씬 비싼 고급 상품만 잇달아 내놓는 판매 전략에 치중했기 때문이다. 서슬 퍼런 사정정국에서 사치품으로 간주된 수정방 고급 라인은 주 고객이던 공무원이나 기업인들의 소비 목록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2019년부터 상황이 호전되면서, 2023년에는 매출액 49억 위안(약 9천1백억 원), 영업이익 12억 위안(약 3천5백억 원)으로 추산된다. 2022년 말 시가총액 기준 중국 백주 기업들 가운데 수정방의 순위는 11위였다. * 작가 주: 중국어 표기는 국립국어원이 정한 외래어표기법을 원칙으로 하되,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는 한자음 표기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