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저자. 중국정법대 졸업(경제법), 중국문화평론가·재중 중국 전문 기고가
지피지기 백전불태! 친중(親中), 반중(反中)을 넘어 극중(克中)을 위한 지식충전소! 진짜 중국을 만나러 갑니다! 2만 5천 리를 행군해서 우치현에 도착한 홍군 1군단 중국 공산당과 홍군(紅軍) 주력 부대는 1934년 10월 16일 밤에 장시(江西)성 위두(于都)현을 떠났다. 총연장 2만 5천 리를 행군해서 1935년 10월 19일에 산시(陝西)성 우치(吳起)현에 도착했다. 장정(長征) 기간 홍군은 11개의 성에 진주했고 700여 개의 시·현을 거쳤다. 18개의 고산을 넘었으며 24개의 강을 건넜다. 고산 중 5개는 해발 4천m에 달하는 설산이었다. 또한 인적이 없는 고지대 초원도 가로질렀다. 장정 중 235일은 주간 행군이었고 18일은 야간 행군만 했다. 나머지 115일은 싸웠거나 쉬었다. 옌안에 도착한 중국 공산당과 홍군의 지도자를 묘사한 동상 장정 중 국민당군과 380여 차례의 전투를 벌였다. 이 중 15일은 행군이나 휴식 없이 하루 종일 전투만 했다. 따라서 행군한 날짜만 계산하면 홍군은 하루 평균 40km를 걷는 초인적인 강행군이었다. 이런 여정 때문에 장시를 출발했던 공산당과 홍군 8만 6천여 명 중 3천여 명만 산시에 도착했다. 여기에 장정 도중 보충한 병력 중 5천여 명까지 8천여 명이 산시 땅을 밟았다. 장정 중 사망한 당·군 간부는 430명에 달했고, 평균 연령은 30살이 조금 못 됐다. 368일의 장정은 살아남은 것이 행운인 고난의 행군이었다. 공산혁명의 성지 옌안을 상징하는 바오타산(寶塔山)과 옌허 장정은 공산당과 홍군이 우치현에 도착함으로써 끝났다. 하지만 우치에 머물렀던 기간은 짧았다. 얼마 뒤 바오안(保安)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1936년 7월 시안(西安)에서 기획된 손님이 찾아왔다. 미국의 진보적인 저널리스트 에드가 스노우였다. 이 푸른 눈의 젊은이는 국민당군의 포위를 뚫고 홍군의 심장에 숨어 들어갔다. 3개월여 동안 바오안에 머물면서 마오쩌둥을 비롯한 공산당 및 홍군 지도자를 만나 인터뷰했다. 스노우는 그들의 이야기를 이듬해 영국에서 책으로 출판했으니, 《중국의 붉은 별》이다. 옌안을 취재한 뒤 《중국의 붉은 별》을 출판한 에드가 스노우 《중국의 붉은 별》 덕분에 중국과 전 세계에서 수많은 공산당 추종자를 만들었다. 책에서 묘사한 홍군 지도자의 영웅담과 장정의 숨 막히는 스토리가 감동적이었기 때문이다. 스노우가 바오안을 떠난 지 두 달 뒤인 12월에 시안사변이 일어났다. 공산당 토벌을 독려코자 난징(南京)에서 온 장제스(蔣介石)를 동북군 사령관 장쉐량(張學良)과 서북군 사령관 양후청(楊虎城)이 감금해 버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내전은 중지됐고 2차 국공(國共)합작이 시작됐다. 본래 공산당이 산시에 도착했을 때 앞날은 불투명했다. 저우언라이가 양자링에서 묵었던 구야오식의 야오둥 그러나 바오안에서 운명이 뒤바꿨다. 1937년 1월에 공산당은 혁명 근거지를 옌안(延安)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옌안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국공내전이 격화되는 1947년까지 홍색 수도로 명성을 떨쳤다. 공산당은 옌안에서도 거처를 여러 차례 옮겼다. 그중 양자링(楊家嶺)에서 1938년 11월부터 9년간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다. 현재 양자링에는 마오쩌둥, 저우언라이(周恩來), 주더(朱德) 등이 묵었던 야오둥(窯洞)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야오둥은 중국 황토고원(黃土高原)에만 있는 독특한 주거시설이다. 마오쩌둥이 자오위안(棗園)에서 묵었던 스야오식의 야오동 황토고원은 산시, 허난(河南), 산시(山西), 간쑤(甘肅) 등지에 분포된 해발 1~2천m의 진흙지대다. 수십만 년 전에는 수풀이 우거졌지만, 시간이 흘러 메마른 땅으로 변했다. 여기에 사막지대에서 불어온 모래가 황허와 빗물에 뒤섞여 단단한 진흙층을 형성했다. 그리고 기원전 수천 년 전부터 주민이 굴을 파서 집을 지었다. 처음에는 계곡이나 산 밑에 구멍을 내어 모래를 퍼낸 뒤 물에 적신 황토를 발라 지었다. 이때 천장 격인 야오딩(窯頂)을 아치형으로 만들어 위에서 내리눌리는 압력을 분산시켰다. 야오둥 안에서 일하는 마오쩌둥을 재연한 모습 시간이 흘러 기술이 발전했고 야오둥도 변화했다. 외벽을 황토로 구운 벽돌로 쌓는 구야오(箍窯), 돌로 쌓는 스야오(石窯) 등이 개발됐다. 야오둥을 원용해 평지에 집을 짓고 지붕에 흙을 덮는 양식도 등장했다. 야오둥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했기 때문이다. 야오둥 덕분에 공산당은 막대한 주거비를 아꼈다. 또한 자력갱생으로 당과 군을 정비했다. 마오쩌둥은 수시로 집회를 열어 당원 및 민중을 가르치고 의식화시키는 일에 온 힘을 쏟아부었다. 결국 1938년에는 당권과 군권을 모두 장악하게 됐다. 공산당 7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렸던 양자링 중앙대례당 예부터 옌안은 산시 북부의 중심지였지만, 살기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평균 해발은 1천200m에 달하고 주변은 온통 황토고원이다. 비는 여름에 집중해서 내려 봄에는 가뭄이 극심하고 농사짓기가 어려웠다. 만약 옌안을 가로지르는 황허의 지류 옌허(延河)가 없었다면, 수만 명을 헤아렸던 공산당 대식구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양자링에 있는 중앙대례당은 1942년 완공되어 1945년 4월 공산당 7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린 유서 깊은 장소다. 1928년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6차 대회 이후 17년 만에 개최됐다. 1945년 9월 조선군정학교의 전체 구성원이 옌안에서 찍은 기념사진 대회 결과 공산당은 당헌에 마오쩌둥사상을 삽입했고 당 조직 제도를 도입했다. 마오쩌둥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계승하되 중국 현실에 맞게 재창조한 혁명 사상이다. 특히 농촌을 혁명 근거지로 삼아 유격전을 전개하고 광범위한 통일 전선을 구축해 도시를 공략하는 전술이 채택됐다. 또한 모든 기관과 단체에 당 조직을 설치했다. 이로써 마오쩌둥 우상화와 '당이 곧 국가'라는 중국 사회주의 체제의 기초가 다져졌다. 옌안에는 적지 않은 조선인도 살았다. 뤄자핑(羅家坪)에 조선혁명군정학교가 개교했기 때문이다. 뤄자핑에 세워진 조선혁명군정학교와 조선항일의용군 기념비 군정학교는 조선독립동맹의 무장 조직인 조선항일의용군이 세운 독립투사 양성 터전이었다. 조선독립동맹은 1941년 허베이(河北)성 타이항산(太行山)에서 처음 성립했다. 1944년 4월 조선의용군은 옌안으로 옮겨왔고, 8월 학교 부지를 마련해 12월 개교했다. 오늘날 교사(校舍)는 도로가 건설되면서 사라졌고 기념석만 세워져 있다. 2차 세계대전 종식 후 공산당과 국민당은 1년간 담판을 벌였으나 결렬됐다. 1946년 6월 국공내전이 재발했고, 1947년 3월에 후중난(胡宗南) 장군이 이끄는 국민당군이 옌안을 점령했다. 옌안혁명기념관 중앙홀에 묘사된 1935~1948년의 '옌안 시기' 그러나 공산당이 전략적 목표에 따라 옌안을 떠났기에 가능했다. 공산당은 겉으로 "옌안 수호", "결사항전"을 외쳤지만, 작전상 물러나 화북·동북 지방을 장악하여 내전에서 승리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공산당은 우치현에 도착해 옌안을 떠나기까지 13년의 세월을 보냈다. 오늘날 중국은 이 기간을 '옌안 시기'라고 부른다. 옌안에는 대장정과 옌안 시기의 관련 유물, 자료, 사진 등을 모아놓은 기념관이 있다. 옌안혁명기념관은 중국 최고의 공산혁명 교육센터이자, 공산당원과 군인은 꼭 방문해야 하는 필수 코스다. 옌안혁명기념관을 참관하고 나오는 인민해방군의 영관급 장교 현지의 한 주류업체도 옌안 시기를 모티브로 술 브랜드를 론칭했으니, 2009년 메이수이(美水) 술회사가 내놓은 십삼춘추(十三春秋)다. '춘추'는 나이, 한 해 등을 의미한다. 메이수이는 1970년대 문을 연 국영 양조장이다. 오랫동안 메이수이의 바이주(白酒)는 옌안 주민에게만 사랑받았다. 따라서 옌안 시기를 이용해 시장을 넓히고자 십삼춘추를 내놓았다. 필자는 옌안을 5번 방문했는데, 2010년 이전에는 십삼춘추의 존재를 몰랐다. 하지만 2015년에는 옌안 거리 곳곳이 십삼춘추의 광고판으로 뒤덮여서 이색적이었다. 디자인 : 정유민
지피지기 백전불태! 친중(親中), 반중(反中)을 넘어 극중(克中)을 위한 지식충전소! 진짜 중국을 만나러 갑니다! 허국석방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사방으로 오갈 수 있는 걸작품이다. 안후이(安徽)성 동남쪽 끝자락에 후이저우(徽州)가 있다. 후이저우는 중국 10대 상방 중 최고로 손꼽히는 후이상(徽商)의 고향이다. 후이상은 흥미롭게 '유학자 상인(儒商)'이라고도 불린다. 예부터 후이저우 주민이 주희를 실생활에서 최고의 사표(師表)로 삼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집안마다 《주자가훈》을 두고 인생의 교과서로 읽었다. 후이저우는 주희와 인연도 깊다. 주희는 푸젠(福建)성 요시(尤溪)에서 태어났지만, 선조는 대대로 후이저우의 호족이었다. 아버지가 관직에서 물러나 요시에 은거했을 뿐이다. 서센고성의 정문 격인 남문 그렇기에 주희는 평생 스스로를 '후이저우 사람'이라고 부르면서 여러 차례 후이저우를 방문했다. 후이저우 주민도 주희를 고향 사람으로 여겨 그의 말과 글을 가슴 깊이 새기면서 살았다. 본래 안후이성 주민은 중국 각지로 나가 상업에 종사했다. 명대 말기부터 양쯔강(長江)과 그 지류에 접한 대부분 도시의 상권을 안후이 상인이 장악할 정도였다. 그 대표적인 도시가 장쑤(江蘇)성 양저우(揚州)와 전장(鎭江)이었다. 이 중 양저우는 대운하를 기반으로 당대부터 중국의 남북을 이어주는 교역의 요충지였다. 서센고성은 중국 4대 고성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러나 송·원대에는 항저우(杭州)와 쑤저우(蘇州)에 상업 지위를 내주며 침체에 빠졌다. 이를 명대 후이저우의 염상(鹽商)이 들어가서 중국 최대의 소금 집산지 및 교역시장으로 탈바꿈시켰다. 원래 후이저우 상인이 다루었던 품목은 고향의 특산품인 문방사우와 목재, 차 등이었다. 후이저우에는 벼루와 먹으로 쓸 수 있는 좋은 돌이 많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황산(黃山)에 질 좋은 나무가 많았기에 붓과 종이, 가구를 만들기 쉬웠다. 후이상은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든 특산품을 가지고 팔다가 점차 종류를 늘렸다. 후이저우인은 수리 시설 위량바를 통해 양쯔강 연안 도시로 나갔다. 명대에는 후이상이 양쯔강 연안의 전당포, 목재소, 차가게, 정미소 등을 모두 손아귀에 넣었다. 특히 해안가의 대형 염전을 독차지했다. 후이상이 양쯔강 일대를 집중 공략했던 것은 수로가 발달해서 물자를 운반하기 편리했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집안이나 고향 출신을 불러들이기 쉬웠다. 객지에 나가 성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후이상은 부족한 자본과 인맥을 동족이나 동향으로 메워나갔다. 이렇게 세력을 키워 "후이상이 없으면 도시가 완성되지 않는다(無徽不成鎭)"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입지를 굳혔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이상이 주로 살았던 더우산거리 이런 성장 배경 때문인지 후이상은 족보 편찬에 열성적이었다. 족보에 성공한 조상의 이야기를 담아 정체성과 자긍심을 키웠고, 동족 간의 상호 신뢰를 견고히 했다. 또한 다른 지역의 상인과 달리 어느 정도 돈을 벌고 성공하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한 우물만 파서 해당 업종의 최고가 되려 했지, 투자를 늘려 문어발식으로 확장하지 않았다. 심지어 다른 업종에 눈을 돌리는 일은 상도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후이상 대부분이 타지에서 성공한 사업 기반을 정리해 귀향했고, 극소수만 객지에 눌러앉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이상에 세운 저택 중 가장 큰 후이상대택원(大宅院) 후이상은 장사할 때는 악착같이 절약하고 검소하게 살았지만, 고향에 돌아가서는 경쟁적으로 으리으리한 저택을 지었다. 그것이 잘 보존된 곳이 서셴(歙縣)고성이다. 서센고성은 황산시의 동북부, 신안강(新安江) 상류에 있는 도시다. 진대에 처음 현이 설치됐고, 당대까지는 섭주(歙州)라고 불렸다. 후이저우부가 들어서면서 주변 여섯 개 현을 다스리는 후이저우문화권의 중심지가 됐다. 강을 끼고 있으나 깊이는 얕았다. 후이저우인은 수운을 활성화하기 위해 수심을 높여 위량바(漁梁壩)라는 수리시설을 건설했다. 한 후이상의 저택 대청. 벽마다 서화로 잘 꾸몄다. 당대 처음 만들어졌는데, 명대 초기에 높이 4m, 길이 138m로 중건했다. 따라서 위량바는 후이상이 양쯔강 연안 도시로 나가 장사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서셴고성 안으로 들어서면 멋들어진 석패방이 줄지어 서 있다. 물론 후이저우 곳곳에 다양한 석패방이 세워졌지만, 서센고성의 허국(許國) 석방이 으뜸이다. 허국은 16세기 예부상서와 대학사까지 오른 관료였다. 말년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석패방을 세웠는데, 중국에서 유일하게 사방으로 오갈 수 있다. 서센고성의 또 다른 정수는 좁은 골목길에 있다. 다른 후이상의 집 대청에는 공자를 모시는 제단이 모셔져 있었다. 더우산(頭山)거리에는 외지에 나갔다가 되돌아온 후이상이 세운 저택이 몰려있다. 집집마다 개성 있고 멋들어진 건축 양식을 갖고 있어 '강남 제일의 건축박물관'이라고 불린다. 후이상은 좋은 집을 지어 자녀가 학업에 정진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관계에 몸을 담아야 돈을 벌 수 있었기에 자녀 교육에 열성을 다했다. 후이상은 기존 상권을 장악했던 상방에 도전하는 후발 주자이었기에 든든한 보호막이 필요했다. 이를 관료와의 관시(關係)로 해결했다. 관료와 친분을 쌓아 시장 정보를 얻고 자금 지원을 받았다. 값비싼 침상과 의자로 꾸며놓은 한 후이상의 침실 누구보다 빨리 정보를 빼내어 특정 상품을 대량으로 사두었다가 막대한 시세 차익을 거둬 팔아넘겼다. 이런 매점매석은 관의 도움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는 모험이었다. 게다가 산은 많고 경작할 땅이 적은 자연환경으로 인해 장사했지만, 후이저우인의 마음속에는 상인을 천시하는 선비 의식이 있었다. 벼슬에 올라 입신양명하는 일이 후이저우인의 로망이었다. 그 때문에 후이상은 20~30대에 사업에 성공하고, 불혹에 과거를 보는 이가 적지 않았다. 자신은 급제하지 못해도 자녀는 관료가 되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후이저우 여인에게 극단적인 정절이 강요됐던 역사를 보여주는 '삼계비' 그래서 후이저우 출신 향시 급제자와 진사는 명대 1천100명과 444명, 청대 1천536명과 517명이었다. 이는 안후이 전체의 81%에 달한다. 이렇듯 후이저우에서는 유학자와 상인이 만수산 드렁칡 같았기에, 후이상을 유상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주자학의 맹신은 여러 문제점을 낳았다. 예법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극단적인 일탈행위가 횡행했다. 후이저우아문에서 공연하는 연극 '삼계비(三戒碑)'의 일화가 대표적이다. 명대 말기 한 마을에서 어느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유언비어를 듣게 된다. 서센고성 골목에서는 돌이나 나무로 세워진 열녀문을 쉽게 볼 수 있다. 이에 며느리를 관아에 고발해 고문받게 하고 자살을 강요한다. 며느리는 자결하지만, 얼마 뒤 며느리를 사모한 이웃 남자가 벌인 음모였음이 밝혀진다. 후이저우에서는 과부가 되면 자살하는 일이 여성의 본분이었다. 관청에서는 이들 가문에게 열녀문을 내려 조장했다. 후이상은 사업의 전통과 노하우를 후대에 전수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장사는 과거 급제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을 뿐, 대를 이어 장사하기를 꺼렸다. 그로 인해 20세기 이후 후이저우에서는 크게 성공한 사업가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고 있다. 서셴고성 앞에 흐르는 신안강 필자가 2015년 10월 서센고성에서 후이상의 흥망사를 살펴보면서 마신 술은 금황산(金黃山)이었다. 술을 내놓은 황산주업은 1951년에 지방정부가 서센고성의 모든 양조장을 통합해 설립했던 황산술공장이 전신이다. 당대 안후이 남부 최고의 술로 꼽혔던 사시(沙溪)촌 동빈춘주(洞賓春酒)를 기원으로 두었기에, 술맛이 깨끗하고 부드러웠다. 고량주 특유의 향이 적어 우리 주당에게도 어울릴 듯싶었다. 술맛이 쓰촨(四川) 명주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알고 보니 황산주업의 품주사(品酒師)는 쓰촨 출신이었다. 디자인 : 정유민
지피지기 백전불태! 친중(親中), 반중(反中)을 넘어 극중(克中)을 위한 지식충전소! 진짜 중국을 만나러 갑니다! 후베이성 샹양시 외곽에 있는 고융중의 석패방. 청대에 세워졌다. 234년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서 북벌에 나섰던 제갈량이 산시(陝西)성 치산(岐山)현의 오장원에서 죽었다. 촉군은 제갈량의 시신을 몐(勉)현의 딩쥔산(定軍山)에 급히 묻은 뒤 철수했다. 제갈량이 죽은 뒤에 삼국 중 가장 국력이 약했던 촉나라는 263년에 쳐들어온 위군에게 항복했다. 위는 촉을 멸망시키자마자 방치됐던 제갈량의 봉분을 정리하고 사당을 세웠다. 이것이 중국 최초로 세워진 제갈량의 사당인 무후사(武候祠)다. 여기서 '무후'는 생전에 촉 황제인 유선에게 받은 작위 무향후(武鄕候)에서 비롯됐다. 고융중의 제갈량 초려는 산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유선은 제갈량이 죽자, 충무후로 봉했다. 이에 따라 후세인은 제갈량은 '무후'로 존칭하게 된 것이다. 삼국을 통일한 진나라는 2곳에 무후사를 더 세웠다. 하나는 유비가 제갈량을 찾아 삼고초려했던 허난(河南)성 난양(南陽)이었고, 다른 하나는 촉의 수도였던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였다. 그 뒤로도 중국 각지에서 무후사가 우후죽순처럼 건립됐지만, 중국인은 역사적 의의를 되새겨서 몐현, 난양, 청두의 무후사를 으뜸으로 꼽는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현재 제갈량이 주군으로 모셨던 유비의 사당은 단 한 곳밖에 없다. 청대에 세운 삼고초려를 기념한 삼고당(三顧堂) 그나마 이름마저 제갈량에게 내주었다. 바로 청두의 무후사로, 본래 223년에 유비의 묘로 조성된 한소열묘(漢昭烈廟)였다. 유비가 죽은 뒤에 추존된 시호가 한소열제다. 제갈량이 사망하자, 유선은 청두 외곽에 무후사를 세웠다. 이를 5세기 지방 정권인 성한이 시내로 옮겨왔고, 명대에 한소열묘와 합쳐서 중국사에서 유례없는 군신합묘가 만들어졌다. 그 후 유비보다 제갈량을 더 높게 평가해서 무후사로 불렸다. 실제로 중국인은 청두의 무후사가 제갈량 사당인 것은 알아도 유비의 묘가 함께 있는 사실은 잘 모른다. 제갈량 일가족이 날마다 마신 우물 제갈정으로 육각이 특징이다. 유비의 사당인 유비전으로 들어가는 문의 현판조차 '명랑천고(明良千古)'라고 쓰여 있다. 이는 '명군양신, 유전천고(明君良臣流传千古)'의 줄임말로, 현명한 임금과 어진 신하가 만나 오래도록 모범이 됐다는 뜻이다. 이와 달리 난양의 무후사는 제갈량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중국 내 무후사 중 규모가 가장 크다. 무엇보다 제갈량이 농사를 지으면서 학문에 정진했던 초려(草廬)에 지어졌다. 제갈량은 181년 산둥(山東)성 린난(沂南)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하급 관리였는데 제갈량이 어릴 때 병사했다. 난양 무후사의 산문. 청대 지어진 무후사의 옛 입구다. 그로 인해 제갈량은 작은아버지인 제갈현을 따라 후베이(湖北)성 징저우(荆州)로 옮겨 유소년기를 보냈다. 청소년기에는 샹양(襄陽)에 가서 수경선생으로 불린 사마휘 밑으로 들어가 학업을 닦았다. 이때 같은 문하에는 서서, 석광원 등 쟁쟁한 학우가 있었다. 하지만 제갈량의 지식과 인물 됨됨이가 단연 으뜸이었다. 스승의 곁을 떠난 뒤 제갈량의 행적은 이견이 분분하다. 샹양에서는 융중(隆中)에 남아 10년 동안 살았다고 말하고, 난양에서는 융중에서 지내다가 난양으로 이사해 초려를 짓고 살았다고 반박한다. 난양 무후사에는 역대 시인 및 정치가가 방문해서 남긴 비석이 많다. 두 지역 주민은 이를 두고 수백 년 동안 불꽃 튀는 입씨름을 벌였다. 그 근거로 샹양은 제갈량이 속세로 나오면서 유비에게 바친 융중대책을 내세운다. 융중대책은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로 요약된다.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에는 제갈량이 오나라의 손권을 찾아가 설득한 기록이 있다. "만약 위군을 (유비와 힘 합쳐) 격파하면 조조는 반드시 북쪽으로 돌아가고, 그러면 징저우와 오의 세력이 강대해져 삼국이 솥발처럼 정립하는 형태가 됩니다." 실제로 샹양에서 서남쪽으로 20여km 떨어진 곳에 융중이 있다. 제갈량의 팔괘진을 본떠서 지붕을 8각으로 복원한 초려 명대부터 샹양 주민은 이곳을 정돈해서 '고융중'이라는 제갈량 성지를 조성했다. 이에 반발해서 난양 주민이 내세운 근거는 무후사와 함께 역대 시인 및 정치가가 와룡강(臥龍崗)을 찾아와서 쓴 명문이다. 와룡강은 난양시 중심가에서 멀지 않은 언덕배기다. 무후사는 대문, 석패방, 산문, 대배전, 제갈초려, 영원루 등의 순서로 배치되어 있다. 그 주변에는 제갈량이 직접 농사를 지었던 곳에 세워진 고백정, 제갈량 가족이 식수를 해결했던 우물 제갈정, 제갈량이 책을 읽으면서 학문에 몰입했던 독서대 등을 조성했다. 삼고초려를 방문한 유비와 그를 만나는 제갈량의 모습을 담은 찰흙상 당대 이래 무후사를 방문했던 유명 인사가 글을 남겨놓은 비석을 모은 비랑(碑廊)은 고융중이 따라올 수 없는 역사적 장소다. 특히 당대 시인 유우석이 지은 '누실명(陋室銘)'은 안사의 난을 피해 청두 무후사를 찾아 두보가 지은 '촉상(蜀相)'과 함께 최고의 절창으로 손꼽힌다. '누실명'은 눈에 보이는 초려가 초라해 보이지만 여기서 춘추에 길이 남을 명재상이 나온 사실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초려에서 지식을 배양하고 힘을 키웠던 제갈량처럼 모든 후대인도 공명심을 멀리하고 더욱 학문에 정진할 것을 노래했다. 시에는 제갈량 초려가 난양에 있었음도 명시했다. 대배전 가운데에 제갈량이, 오른쪽에 제갈첨, 왼쪽에 제갈상이 있다. 산이 높지 않더라도 신선이 살면 이름을 얻고,(山不在高, 有仙則名) 물이 깊지 않더라도 용이 살면 영험하다.(水不在深, 有龍則靈) 이 누추한 방에는 오직 내 덕의 향기만 있도다.(斯是陋室, 惟吾德馨) (…) 번잡한 소리에 귀를 어지럽히지 않고 공문서에 몸을 힘들게 하지 않으니,(無絲竹之亂耳, 無案牘之勞形) 난양 제갈량의 초려요, 서촉 자운의 정자로구나.(南陽諸葛盧, 西蜀子雲亭) 공자도 말씀하길, 군자에게 무슨 누추함이 있으리오.(孔子云, 何陋之有) 난양 무후사를 방문해서 출사표를 쓰는 악비를 재연하는 모습 1138년 악비가 와룡강을 방문했다. 악비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침공을 막아낸 남송의 장수였다. 또한 여러 차례 출병해서 금군을 무찔렸다. 악비는 무후사에서 북벌에 나섰던 제갈량을 떠올리며 깊은 동병상련을 느꼈다. 이에 붓과 종이를 꺼내 제갈량이 북벌에 나서기 전 유선에게 바친 출사표(出師表)를 썼다. 반드시 금을 정벌해 제갈량이 못다 이룬 북벌을 완수하겠다는 다짐이었다. 악비가 쓴 출사표는 해서로 단정하게 써나가다가 남송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비분강개한 마음에 뒤로 가면 행서로 바뀐다. 청두의 무후사에 있는 악비가 쓴 출사표. 서체의 처음과 끝이 다르다. 악비는 붓으로 쓴 출사표를 석재에 새겨서 무후사에 남겼다. 이를 청나라 조정이 2개로 복각해서 하나는 난양에 보관했고, 다른 하나는 청두의 무후사로 보냈다. 하지만 이런 악비의 우국충정은 이뤄지지 못했다. 당시 남송 조정의 주도권을 쥔 주화파의 거두 진회가 악비에게 무고한 누명을 덮어 씌어 살해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난양의 무후사는 숨겨진 스토리와 볼거리가 많다. 난양에는 제갈량을 기리는 술까지 있다. 이름부터 제갈량을 가리키는 와룡술공장(臥龍酒廠)이 론칭한 초려대(草廬對)와 와룡옥액(玉液)이다. 대배전 현판도 제갈량을 흠모하는 후대 명사가 남긴 것이다. 본래 와룡술공장은 1939년 즈후이(智慧)주업이라는 술회사로 시작했지만, 금세기 초 제갈량과 무후사의 명성에 기대어 이름을 바꾸었다. 2015년 8월 난양을 찾았던 필자는 와룡옥액을 마셨다. 술맛은 농향형 바이주(白酒)답지 않게 부드러웠다. 평소 청빈하게 살았던 제갈량처럼 맛은 맑고 향기가 은은했다. 술병도 다른 바이주와 달리 엷은 녹색에 투명한 유리병이었다. 와룡술공장은 2006년까지 일개 주류업체에 불과했지만, 2008년부터 와룡옥액을 중심으로 판매량이 급증하면서 현재는 해외로까지 수출한다. 디자인 : 정유민
지피지기 백전불태! 친중(親中), 반중(反中)을 넘어 극중(克中)을 위한 지식충전소! 진짜 중국을 만나러 갑니다! 관우가 성을 쌓아 올린 뒤 명대에 증축한 후베이성의 징저우 고성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에서 자동차로 서쪽으로 3시간을 달리면 형주(荊州, 징저우)가 있다. 형주는 소설 《삼국지》에서 제갈량과 함께 가장 사랑받는 관우가 지켰던 곳이다. 관우의 출생연도는 명확하지 않다. 산시(山西)성 운성에서 태어나서 허베이(河北)성 탁현에서 유비를 만났던 것은 확실하다. 나관중은 관우의 외모를 다음처럼 묘사했다. "키가 9척이고, 수염은 2척이다. 얼굴은 무르익은 대추 같고, 입술은 연지를 칠한 듯 붉다. 봉황의 눈에 누에 모양의 눈썹을 가졌다. 모습이 늠름하고 위풍당당하다." 관우가 생전 사용했던 관저인 관공관에 지어진 관제묘 관우는 도원에서 유비, 장비와 의형제를 맺은 뒤 대륙 곳곳을 누볐다. 하지만 일생에서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던 곳이 형주다. 당시 형주는 오늘날 징저우와 다르다. 후한은 지방 행정조직으로 13개의 주와 서역도호부를 뒀다. 따라서 형주는 후베이와 후난(湖南)의 전부, 산시(陝西)와 허난(湖南)의 남부, 구이저우(貴州)와 광시(廣西)자치구의 북부에 해당하는 7개 군이었다. 징저우는 강릉(江陵)이었다. 208년 적벽대전에서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은 위나라 대군을 물리쳤다. 조조는 패한 뒤 각 군에 심복을 남겨뒀다. 관제묘 정전에는 중앙에 관우가, 양옆에는 주창과 관평이 서 있다. 그러나 유비는 관우, 장비, 조자룡 등을 이끌고 형주 남부의 4군을 함락했다. 주유는 강릉과 이릉을 점령했다. 그러자 손권은 노숙의 권유에 따라 유비를 형주자사로 세웠다. 여동생도 유비에게 시집보내 휘하에 두고자 했다. 형주는 위군의 침입을 막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손권은 무력과 지략을 모두 갖춘 유비 집단이 이를 수행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손권 밑에서 만족할 유비가 아니었다. 213년 유장의 요청과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에 따라 방통, 황충 등을 이끌고 지금의 쓰촨(四川)인 익주로 들어갔다. 관제묘 내전에 서 있는 관우상. 명 만력제가 내린 시호가 아래 있다. 출정에 나서기 전 유비는 관우에게 형주 북부를 지키도록 했다. 이때 관우는 징저우에 성곽을 쌓았다. 214년 유장이 유비의 속셈을 알아채면서 양측 간에 전투가 벌어졌고, 방통이 낙성에서 죽었다. 유비는 제갈량, 장비, 조자룡 등을 호출해서 익주를 차지했다. 215년 유비가 익주를 취한 사실을 알고 손권은 형주를 되찾으려 했다. 손권의 요구에 유비가 응하지 않자, 양측은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에 빠졌다. 이때 위군이 지금의 산시성 한중을 점령하고 친링(秦嶺)산맥을 장악하면서 쓰촨의 코앞까지 내려왔다. 관우의 머리 없는 시신을 모신 후베이성 당양의 관릉 유비는 위의 침략에 전력을 다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형주 남부 3군을 손권에게 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관우는 징저우에 관저를 두고 형주를 지켜 촉나라의 동부를 방어했다. 218년 조조는 눈엣가시 같은 관우를 치기 위해 조인을 파견했다. 조인은 남양에 주둔하며 혹독하게 군졸을 모으고 군량미를 수탈했다. 이에 따라 지방관과 백성의 불만이 팽배해져, 완성태수 후음과 위개가 반란을 일으켰다. 조인은 대군을 앞세워 반란을 진압했다. 이러한 혼란상을 기회라고 여긴 관우는 군사를 일으켜서 위를 공격했다. 관릉의 마전(馬殿)에는 관우와 전장을 누볐던 적토마가 서 있다. 조조는 우금과 방덕을 보냈고 번성 주변에서 양군은 격전을 벌였다. 처음에는 병력이 많은 위군이 압도했지만, 마침 닥친 장마를 이용해 관우는 방덕을 죽이고 우금을 사로잡았다. 관우는 기세를 올려 번성에서 농성 중인 조인마저 압박했다. 위기감을 느낀 조조는 서황을 대장으로 증원군 20만 명을 파견했다. 처음에는 관우가 징저우의 수비군까지 차출해서 위군에 맞섰다. 그러나 점차 위군의 공세에 밀려 패배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몽이 이끈 오나라 군대가 상인과 상선으로 위장해서 징저우를 함락했다. 관릉 침전(寢殿) 안에 서 있는 관우상 위군과 오군의 협공에다 가솔이 오군에게 사로잡힌 관우의 군사들은 진영을 이탈했다. 219년 말 관우는 지금의 허베이성 당양(當陽)인 맥성에서 탈출을 시도했지만, 임저에서 오군에게 사로잡혀 관평과 함께 참수당했다. 관우가 죽자, 징저우 주민은 관우의 관저였던 관공관에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오군은 이런 행동을 눈감아줬다. 그 뒤 세월의 풍파 아래 관공관은 불타버렸다. 이를 1396년 명조가 관우의 사당인 관제묘(關帝廟)로 복원했다. 청조는 관우와 그의 모든 가족까지 모시도록 하면서 규모가 커졌다. 관릉의 관우상은 모두 예술적 가치는 떨어지지만, 전신의 느낌이 강하다. 그러나 중일전쟁 시기 일본군의 포격으로 관제묘는 다시 잿더미로 변했다. 현재의 관제묘는 1987년 옛 유적지 위에 청대 그렸던 건축 도면을 기초로 복원한 것이다. 관제묘는 진한 향불 냄새와 함께 사시사철 관우상을 향해 소원을 비는 중국인으로 들끓는다. 정전에는 관우가 《춘추》를 든 채 앉아 있다. 내전 앞에는 청룡언월도를 든 관우상이 서 있는데, 밑에 '신위원진'이라 쓰여 있다. 이는 명대 만력제가 관우를 '삼계복마대제신위원진천존관성제군(三界伏魔大帝神威遠震天尊關聖帝君)'에 봉한 데에 유래됐다. 소박한 느낌의 관우묘. 정자에 '한수정후묘'라고 새겨진 비를 세웠다. 관우는 역대 황제로부터 수많은 작위를 하사받았다. 청대에는 작호가 26자에 이를 정도로 칭송은 깊어졌다. 역대 봉건왕조의 관우 숭배 열기를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은 징저우에서 1시간 떨어져 있는 당양이다. 관우가 죽은 뒤 손권은 관우의 수급을 잘라 조조에게 바쳤다. 그리고 머리 없는 시신은 제후의 예를 갖춰 당양에 묻었다. 조조도 관우를 형왕(荊王)으로 봉했고, 향나무로 몸을 깎아 만들어 머리를 붙인 뒤 뤄양(洛陽)에 안장했다. '머리는 뤄양을 베개 삼았고, 몸은 당양에 누워 있다'는 것이다. 당양은 《삼국지》 장판파 전투의 무대로, 조자룡이 유선을 구했다. 관우의 시신이 묻힌 곳이 당양의 관릉(關陵)으로, 명 가정제가 하사한 명칭이다. 본래 관우의 시신만 묻은 작은 봉분이었다. 15세기에 중건하면서 면적은 4만 5천㎡에 달했고 4개의 전각, 5개의 정원이 직선으로 겹치도록 했다. 관우의 수급을 묻은 뤄양의 묘는 18세기 청 강희제가 관림(關林)이라는 한층 높은 칭호를 부여했다. 중국에서 '릉'은 황제의 능원에만 붙이고, '림'은 성인의 무덤에만 바친다. 대표적인 사례가 공자의 묘인 공림(孔林)이다. 명대에 황제로 추존된 관우가 청대에는 성인의 경지까지 오른 것이다. 《삼국지》 장판교에서 장비가 위 대군에 맞서는 장면을 묘사한 부조 관우는 '충의의 아이콘'이 됐다. 실제로 중국 전역과 세계 곳곳에는 관우의 사당인 관제묘가 세워졌다. 그 이유는 관우가 임금이 백성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강요하는 데 아주 유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관우는 유비와의 의리만 지켰고 절대적으로 복종했다. 군주 입장에서 민족과 국가의 안위보다 왕조와 임금만 지켜주는 충신이 더욱 반갑고 소중하다. 따라서 역대 봉건왕조는 적극적으로 관제묘를 세웠고 관우 우상화에 매진했다. 게다가 관우는 백성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대장부의 품격과 기상을 갖춘 인물이었다. 관제묘 내전에 있는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상 당양에는 황제나 성인보다 격이 낮지만, 현지 주민에게 친숙한 작위인 '공'을 관우에게 붙여 바이주(白酒) '관공(關公)'을 양조하는 관공방(關公坊) 주업이 있다. 필자가 당양에서 마신 관공은 중저가지만, 입에 닿는 느낌은 맑으며 시원하고 목으로 넘어가니 부드러웠다. 현재 중국에는 관공방 외에 관운장, 관제 등 관우를 브랜드화한 술이 여럿 있다. 하지만 존재감이 미미하고 관우와 관련이 없는 도시에서 생산된다. 그에 반해 당양은 관릉이 있고, 유명한 장판파(長坂坡) 전투의 무대이기에 관우와 인연이 깊다. 디자인 : 정유민
지피지기 백전불태! 친중(親中), 반중(反中)을 넘어 극중(克中)을 위한 지식충전소! 진짜 중국을 만나러 갑니다! '동방의 피라미드'로 불리는 서하왕릉의 능탑 지금으로부터 1900년 전 칭하이(清海)성에서 한 유목민족이 출현했다. 그들은 혈통이 티베트·창족 계열이었으나 알타이어계 언어를 썼다. 칭하이 전역과 간쑤성 서부까지인 암도(安都)에서 살았고 6세기까지 원시 씨족사회를 유지했다. 하늘신을 숭배했고 백색을 숭상했다. 주로 야크, 양 등을 유목하면서 사냥을 즐겼다. 죽은 이는 한족처럼 매장하거나 티베트인처럼 조장하지 않고 화장시켰던 탕구트(Tangut·党項)족이다. 7세기 암도 아래의 티베트고원에서 불세출의 영웅이 등장하면서 탕구트족에게 시련이 닥쳤다. 탕구트족은 티베트인에게 밀려 암도를 떠나 흩어져 살아야 했다. 633년에 송첸캄포가 분열된 티베트 부족을 통합하고 라싸(拉薩)에서 티베트의 첫 통일왕국인 토번(吐蕃)을 세웠다. 뒤이어 대군을 이끌고 암도로 쳐들어갔다. 당시 암도에는 선비족이 세운 토욕혼(吐谷渾)이 있었다. 4세기 중엽부터 탕구트족은 토욕혼의 피지배민으로 선비족과 공존했다. 하지만 663년에 토번이 토욕혼을 멸망시키자, 탕구트족은 정든 고향을 떠났다. 그로부터 탕구트족은 당나라에 귀부해서 300여 년간 지금의 간쑤(甘肅)성 동부, 닝샤(寧夏)자치구 전역, 산시(陝西)성 북부 등지에 흩어져 살았다. 유목민족으로서 강건한 탕구트족의 기백을 보여주는 황금 유물 9세기 들어 탕구르족은 내부 역량을 키워나갔다. 당 지방관의 혹정과 한족 상인의 수탈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는 실패로 끝났지만, 민족의식을 키우는 계기가 됐다. 875년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탕구트의 한 부족장인 탁발사공(拓跋思恭)은 반란군을 진압하며 큰 공을 세웠다. 이에 당조는 탁발사공에게 황실의 이 씨 성을 하사했다. 또한 절도사로 삼아 산시성 북부와 내몽골 서남부를 다스리게 했고, 자손 대대로 직책을 세습시켰다. 탕구트족은 당 말기와 오대십국의 혼란기를 틈타 독립 세력으로 커졌다. 서하왕릉 박물관에 전시 중인 개국황제 이원호의 밀랍상 960년 새로운 제국 송나라가 들어섰지만, 탁발사공의 9대손 이계천은 이를 인정치 않았다. 이덕명은 아버지 이계천과 달리 겉으로는 송에 복종하면서 속으로는 부족 통합에 힘썼다. 어느 정도 기틀이 다져지자, 그의 아들 이원호(李元昊)는 독립왕국 건설에 더욱 매진했다. 1033년 독자적인 연호를 채택했고 궁궐을 지었으며 관료제를 정비했다. 1036년에는 고유 문자를 창제해 국서에 담아 반포했다. 1038년에 이원호는 드디어 대하(大夏)를 개국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도읍지는 지금의 인촨(銀川)으로 정했다. 서하는 송나라뿐만 아니라 요나라 대군을 물리쳐 대륙을 삼분했다. 송은 대하가 영토 서쪽에 있다 하여 '서하'라고 불렀다. 송 인종은 서하의 건국을 인정치 않았다. 대군을 출병시켜 서하 토벌에 나섰다. 서하군은 1040년 삼천구, 1041년 호수천, 1042년 정천채 등지에서 송군과 4차례 맞붙어 모두 이겼다. 이원호는 그 여세를 몰아 요나라로 출격했다. 요 흥종도 친히 10만 대군을 이끌고 나왔다. 양군은 지금의 내몽골 중부인 하곡에서 전투를 벌였다. 10만의 사상자가 난 격전 끝에 서하가 승리했다. 이로써 대륙은 송-요-서하가 삼분했다. 1044년 서하와 송은 평화조약을 맺었다. 서하의 왕궁을 장식했던 금수처마. 서하만의 독특한 문화를 보여준다. 서하는 송에게 신하의 예를 취하기로 했으나 매년 송으로부터 은 7만 2천 냥, 비단 15만 3천 필, 차 5만 근 등을 받기로 했다. 또한 국경에 시장을 개설해 무역 거래를 했다. 이처럼 송은 허울뿐인 위신은 지켰고, 막대한 실익은 서하가 챙겼다. 당시 서하는 한반도의 5배가 넘는 큰 영토의 제국이었다. 건국 초 서하는 송의 관제를 모방했으나 차츰 독자 체제를 정비했다. 관직은 크게 문·무관에 상사, 중사, 하사 3계급으로 나눴다. 지방 행정조직은 4부, 11주, 7군, 6현, 8진을 설치해서 제국 통치를 원활하게 했다. 탕구트족이 유목에서 정주민족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청동소 경제는 탕구트족의 유목 문화를 기반으로 한족의 농경 문화를 적극 흡수했다. 무엇보다 송과 서역의 중간에 자리 잡은 지리적 이점을 십분 활용했다. 실크로드 중계무역로를 독점해서 상업이 발달하여 국력이 부강해졌다. 이를 통해 서하는 200년 동안 전성기를 누렸다. 경제적 풍요를 토대로 서하는 독창적인 서하 문자와 불교 예술을 창조했다. 서하 문자는 이원호의 명을 받아 개국공신인 야리인영이 주도해 3년 만에 창제했다. 야리인영은 유학에 조예가 깊었는데, 한자의 형식을 참조해 표의문자 5천900여 개를 만들었다. 서하 문자로 조판한 불경. 서하 문자는 서하의 독창성이 남긴 유산이다. 서하 문자는 언뜻 보면 한자와 같지만 내용은 큰 차이가 있다. 회의자와 형성자에 편, 방 등을 결합했다. 따라서 획수가 많아 어떤 자는 40획이 넘는다. 이는 한자를 단순하게 원용했던 거란 문자나 여진 문자와 다르다. 서하는 문자 보급을 위해 각자사를 두었고, 모든 분야를 아우른 법전을 서하 문자로 반포했다. 서하 문자는 서하 멸망 후 한동안 쓰일 정도로 생명력이 끈질겼다. 불교는 서하의 국교였다. 황제는 고승을 국사로 모셨고 국정을 자문했다. 승려를 교육해 배출하는 승인공덕사와 출가공덕사를 설치했다. 서하는 티베트 밀교의 인두신조까지 받아들인 다원적인 문화의 나라였다. 인촨에서 25km 떨어져 있고 허란산(賀蘭山) 동쪽 기슭에 있는 서하왕릉에서 번성했던 서하의 불교를 엿볼 수 있다. 이원호의 묘로 추정되는 3호 능원에서는 사람 얼굴에 새의 몸을 한 인두신조(人頭神鳥)상이 발견됐다. 인두신조는 불경에서 히말라야산맥에 살며 특이한 울음을 낸다고 묘사한 '쟈릴핀가'다. 예부터 중국에서는 극락세계를 오가는 전설의 신조인 '묘음새'로 추앙했다. 서하는 이를 발전시켜 모든 건축물에 인두신조를 장식할 정도로 숭상했다. 서하 불교가 티베트 밀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이 제단 터에서 매년 죽은 황제를 위한 제사를 지냈다. 서하왕릉은 황제능원 9곳과 귀족 무덤 200여 개로 조성됐다. 황제능원은 각기 독립된 건축 형태다. 네모꼴에 능탑, 제단, 내성, 외성으로 이뤄졌고 북쪽에 앉아 남쪽을 향했다. 능탑은 거대한 흙덩이가 봉분처럼 솟은 팔각추 모양으로, 가장 큰 것은 지름이 34m에 달한다. 본래 능탑은 5층이나 7층의 목조건물로 둘러쌓았다. 그 밑으로 계단식 통로를 뚫어서 황제 시신과 부장물을 매장했다. 서하왕릉은 유목민의 문화 전통 위에 한족 능원의 장점을 흡수하고 불교 예술을 더해 재창조해서 오늘날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불린다. 몽골군은 서하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과 파괴를 감행했다. 이렇듯 서하는 창조적인 문명 위에 마지막 황제 이현까지 10대에 걸쳐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13세기 들어 몽골이 발흥하면서 종말을 고했다. 특히 몽골이 서하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칭기즈칸이 죽었다. 칭기즈칸은 숨을 거두며 "서하를 섬멸하고 하나도 남기지 말고 죽여버려라"라고 유언했다. 그로 인해 몽골은 이현부터 백성들까지 철저히 도륙했다. 학살과 파괴로 서하는 오랫동안 기록으로만 존재했다. 닝샤에서 서하의 영광을 부흥시키려는 술이 있으니, 1984년에 설립된 서하왕포도주업의 와인 '서하왕'이다. 서하는 스스로 남긴 기록과 유물이 많지 않은 신비의 제국이다. 서하왕포도주업은 서하왕릉에서 가까운 허란산 동쪽 기슭에 와이너리를 처음 조성했다. 허란산은 병풍처럼 매서운 바람을 막아준다. 또한 연간 3천 시간이 넘는 누적 일조량과 200mm가 안 되는 적은 연간 강수량, 북위 38도의 위도 등은 포도의 생육에 적합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 뒤 장위(張裕), 창청(長城) 등 주요 와인기업의 와이너리가 들어서면서 포도밭의 면적은 현재 401㎢에 달했다. 2023년에는 1억 4천만 병에 달하는 와인을 생산했다. 필자가 마신 서하왕의 와인은 향이 향긋하고 맛은 부드러웠다. 디자인 : 이희문
지피지기 백전불태! 친중(親中), 반중(反中)을 넘어 극중(克中)을 위한 지식충전소! 진짜 중국을 만나러 갑니다! 주취안에 보존되어 있는 곽거병이 술을 부은 샘터 기원전(B.C.) 141년 한무제(漢武帝) 유철이 16살로 즉위했다. 당시 한나라는 대외적으로 편치 못했다. 북방의 유목국가가 번영을 구가하며 핍박해 왔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B.C. 209년 묵돌 선우가 제위에 오르면서, 영토를 동으로는 만주에서 서로는 서역까지 확장했다. B.C. 200년 한고조 유방이 이끌고 온 32만 명의 대군도 물리쳤다. B.C. 3세기부터 600여 년 동안 유라시아를 지배했던 초원의 제국 흉노(匈奴)다. 유방은 흉노와 굴욕적인 맹약을 맺었고 숨을 거둘 때는 "절대 흉노와 싸우질 말라"고 유언했다. 란저우의 간쑤성박물관에 흉노족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미니어처 당시 흉노는 묵돌·노상·군신 선우로 이어지는 3대 81년 동안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이에 따라 한무제는 즉위 초기에 화친 정책을 이어갔다. 하지만 B.C. 135년 섭정으로 실권을 장악했던 두태후가 죽자, 거침없는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먼저 국정을 농간하던 두태후 일족과 추종 대신을 숙청했다.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았고, 명당과 태학을 설립했다. 효렴제를 실시해 효행이 뛰어나거나 청렴한 인재를 등용했다. 내정을 다진 한무제는 B.C. 133년에 직접 흉노와의 전쟁에 나섰다. 란저우시 곽거병테마공원. 란저우는 한대에 서역으로 가는 최전선이었다. 그러나 군신 선우는 기병 10만을 이끌고 맞섰지만, 마읍에서 한군 30만 명이 매복하고 있는 걸 눈치챘다. 따라서 선우는 철군을 단행해 피해를 보지 않았다. 한군은 기병이 취약해 추격전을 감행할 처지가 못 됐다. 결국 한무제는 대군을 동원한 데 따른 인적, 물적 손해만 감수했다. 4년 뒤 한무제는 위청, 공손오, 공손하, 이광 등 장군에게 각각 1만의 기병을 주어 흉노를 공격하도록 했다. 본래 화친맹약에 따라 한과 흉노는 진대에 쌓은 만리장성을 국경선으로 정했다. 이때 한군은 처음 장성을 넘어 북진했다. 흉노 정벌을 위해서 출진하는 한나라 장군과 병사 부조물 흉노 땅에 진입했으나 결과는 처참했다. 공손오와 이광은 대패했고, 공손하는 길을 헤매다 돌아왔다. 위청만 작은 전투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흉노 땅을 탐색한 성과는 있었다. 따라서 이듬해 위청은 3만의 기병을 이끌고 가서 수천 명의 흉노군을 참수했다. B.C. 126년 흉노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군신 선우가 죽자, 동생인 이치사가 어린 태자를 쫓아내고 즉위했다. 흉노가 번성한 배경은 선우의 뛰어난 용인술이 한몫했다. 한나라는 패전한 장수를 사형에 처했지만, 흉노는 적장을 포로로 잡아 장군으로 중용했다. 우웨이시에서 출토된 청동기마병용은 한나라 군진 형태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치사 선우는 한 황제와 같은 실수를 하기 시작했다. B.C. 123년 위청은 전군을 이끌고 흉노 정벌에 나섰다. 처음에는 내몽골 전역을 휩쓸며 적군 1만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이치사 선우의 주력 부대와 조우하면서 대패했다. 우장군 소건은 휘하 병사를 모두 잃고 혼자 도망쳤다. 전장군 조신은 전투에서 져서 기병 800명을 이끌고 투항했다. 단지 한 장수가 치고 빠지는 기습 공격을 능란하게 펼치면서 흉노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위청의 생질이자, 18살이던 소년 장수 곽거병(霍去病)이었다. 한나라는 흉노에게 대항하기 위해 기마병을 양성했다. 곽거병은 공주의 시녀였던 위소아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이모가 황후에 오르면서 2살 때 일가족이 모두 귀족이 됐다. 어릴 적 집안이 풍족하진 못했으나, 궁을 자주 드나들며 한무제의 눈에 들었다. 학문에 정진하고 무예를 익혀 16살부터 군대에 몸을 담았다. 18살에는 표요교위로 참전해 위기에 빠졌던 한군을 구출했고, 수하 800명을 이끌고 진격해 흉노군 2천800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한무제는 공로를 인정해 곽거병에게 작위를 내렸다. B.C. 121년에는 표기장군으로 승진시키고 최정예 기병 1만을 주었다. 한대에 왕실과 귀족 사이 기마청동용을 무덤에 부장하는 것이 유행했다. 그에 부응하듯 곽거병은 지금의 간쑤(甘肅)성에 3차례 출격해서 큰 전공을 세웠다. 흉노의 번왕 절란왕과 노호왕을 죽였고, 혼야왕을 항복시켜 기롄산까지 평정했다. 사서는 "흉노의 오른쪽 어깨를 잘랐다"고 적었다. B.C. 119년 한무제는 위청과 곽거병을 쌍익으로 삼아 각각 5만의 기병을 주어 흉노 토벌전에 벌였다. 곽거병은 지금의 허베이(河北)성에서 출병해 1천 리까지 북진하며 흉노의 왼쪽 어깨를 잘랐다. 번왕 3명을 주살했고 장군과 신하 83명을 붙잡았다. 병사는 7만 443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한대에 만든 나는 제비의 등을 밟고 뛰는 말 청동상 마답비연(馬踏飛燕) 곽거병 군대의 진군 속도가 너무 빨라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자, 적의 것을 빼앗아 군량미와 말 먹이로 충당했다. 이렇듯 곽거병은 한무제의 날카로운 비수로 흉노를 난도질했다. 흉노는 제국의 좌우 어깨가 잘려 나갔기에 간쑤성과 내몽골 남부를 완전히 포기했다. 한군의 예봉을 피해 수도를 고비사막 이북으로 옮겼고, 한동안 한나라를 넘보지 못했다. 그러나 곽거병은 불과 23살에 요절했다. 사막과 초원을 전전하면서 풍토병에 걸렸던 것으로 추측된다. 《사기》에 따르면, 곽거병은 생전에 6차례를 출정했다. 한대에는 무덤 안 벽돌에도 무(武)를 숭상하는 그림을 남겼다. 그중 4번은 장군으로 나서서 흉노군 11만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오늘날 중국에서 주목하는 점은 곽거병의 리더십이다. 첫째, 곽거병은 뛰어난 인재를 뽑아 적재적소에 공정히 배치했다. 발탁한 조파노는 유목민 출신으로 흉노에서 살다 한나라로 귀순했다. 조파노는 곽거병이 올린 장계에 따라 작위를 받았고, 훗날 장군까지 되어 활약했다. 둘째, 곽거병은 전쟁터 상황에 맞춰 전술을 펼치는 '언제나 이기는 장군'이었다. 실제로 임기응변의 달인으로 전장을 고려하여 수시로 전술을 바꿔가며 전투를 벌였다. 곽거병묘의 마답흉노(馬踏匈奴)상. 곽거병은 죽어서도 흉노를 제압했다. 셋째, 곽거병은 논공행상을 투명하고 공평하게 했다. 위로는 장수부터 아래로는 말단 군졸까지 전공을 기록해서 한무제에게 보고했다. 공평무사한 일처리 덕분에 휘하 장수와 병사 대부분은 승진하거나 포상을 받았다. 상승장군 밑에서 전투에 이기고 전공도 챙길 수 있었기에 누구나 곽거병 휘하로 들어가기를 갈망했다. 이런 곽거병의 기질을 보여주는 고사가 있다. 곽거병이 간쑤성에서 큰 공을 세우자, 한무제는 어주 한 병을 보내주어 승전을 축하했다. 병사들은 전투에서 이겼으나 몸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곽거병이 술을 부은 샘터는 한나라 때부터 성역화했다. 이에 곽거병은 진영 앞 샘터로 병사를 불러 모았다. 술병을 높이 들고 "이 술은 황제께서 너희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하사하셨으니 우리 모두 함께 마시자"고 외쳤다. 그리고 술을 샘물에 쏟아부었다. 곽거병이 먼저 바가지에 떠서 마셨고 병사들이 돌아가며 샘물을 마셨다. 곧 군영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고 뒤이은 전투에서 연전연승했다. 고작 한 병의 술로 타이밍을 잡아 군심을 움직인 것이다. 이 고사의 현장이 주취안(酒泉)이다. 주취안이라는 지명은 B.C. 106년에 한무제가 곽거병을 기리어 지었다. 곽거병이 병사들과 샘물에 술을 부어 마시는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상. 오늘날 간쑤성은 곽거병과 관련된 유적지를 곳곳에 개발했다. 란저우(蘭州)시는 도심에 곽거병테마공원을 조성했다. 우웨이(武威)시에서 출토된 한대 청동기마병용은 '곽거병 군단'이라 부른다. 하지만 곽거병이 샘물에 술을 부어 나눠 마셨던 주취안시에 비할 수 없다. 샘터는 현재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또한 현지 주류업체인 한무주업은 1997년에 한무어(漢武御)도 론칭했다. 한무어는 '한무제가 내린 어주'라는 뜻이다. 한무어는 양조할 때 쓰이는 밀 누룩을 교외 모래산의 저장고에서 발효해서 맛이 아주 진했다. 디자인 : 이희문
지피지기 백전불태! 친중(親中), 반중(反中)을 넘어 극중(克中)을 위한 지식충전소! 진짜 중국을 만나러 갑니다! 중국에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공자의 고향인 취푸 성곽 나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30세에 자립했고, 40세에 미혹되지 않았고, 50세에 천명을 알았고, 60세에 만사를 이해했고, 70세에 마음이 쫓는 대로 행할지라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从心所欲, 不逾矩) 《논어》 '위정(爲政)'에서 공자가 말년에 자신의 생애를 회고한 말이다. 여기서 스물은 약관, 서른은 이립, 마흔은 불혹, 쉰은 지천명, 예순은 이순, 일흔은 고희라는 새 연령대에 들어섰을 때 나이를 묘사하는 표현이 비롯됐다. 공묘(孔廟) 정문인 영성문(櫺星門)은 공자를 하늘처럼 존경한다는 뜻이다. 물론 《예기》에 나오는 스무 살에 어른으로 갓을 쓰는 성인이 된다는 약관(弱冠)이 더해졌다. 또한 당대 시인 두보의 '곡강시(曲江詩)'에서 '예부터 사람이 70세를 살기는 어렵다(人生七十古來稀)'로 고희가 완성됐다. 회고대로 공자는 평생 학문에 정진하면서 이상을 달성하려 애썼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 산둥(山東)성 취푸(曲阜)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춘추시대 말기로, 주(周)대의 봉건 질서가 무너지고 있었다. 주 왕실은 이름뿐이었고 제후는 유명무실해졌다. 각국에서는 권문세족이 가신을 거느리고 실권을 잡았다. 공묘의 2번째 문인 성시문(聖時門). 1415년 명나라 때 세웠다. 공자가 태어난 곳은 노(魯)나라였다. 노 조정도 세 권문세가(三桓)가 실권을 잡고 군주를 허수아비로 내세워 전횡했다. 본래 공자 가문은 송(宋)의 귀족이었다. 하지만 공자의 6대조 때 궁정 반란을 피해 노로 피난을 왔다. 공자가 태어날 때 가문은 기울어 아버지는 하급 무사였다. 당시는 신분과 관직이 세습됐다. 따라서 공자는 하급 관료밖에 되지 못됐다. 보통 하급 관료의 자제는 의식 집전(禮), 악기 연주(樂), 활쏘기(射), 수레 몰기(御), 글 읽기(書), 숫자 세기(數) 등 육예(六藝)를 익혀 관련 직종에서 일했다. 1504년 명나라 때 재건한 규문각(奎文閣)은 공자와 관련 서책을 보관했다. 그래서 공자는 청소년기에 육예를 열심히 익혔다. 하지만 문학(詩), 역사(書), 외교(禮), 예술(樂) 등 고급 학문을 부단히 공부했다. 서른에는 일정한 명성을 얻어 학문적 이립을 달성했다. 공자는 이런 성취를 바탕으로 현실 정치에 눈을 돌렸다. 평소 삼환의 전횡을 지적하며 정치적 견해를 쏟아냈다. 이에 제(齊) 경공이 노에 왔을 때 공자를 방문해서 천하 대사를 함께 논했다. 마침 공자를 위시한 신진 세력의 지지 속에 노 소공은 삼환을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소공이 제나라로 망명하자 결국 공자도 뒤따라갔다. 공자가 제자에게 강학을 펼쳤던 장소인 행단(杏壇) 제 경공은 공자를 환대하며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 물었다.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정명(正名)론은 당시의 사회적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공자는 사회 성원 각자가 자신의 본분에 맞게 행동해야 국가 질서가 확립된다고 여겼다. 다만 일방적인 순종만 강요하지 않았다. 인과 예를 지켜야 하고, 각자의 본분을 못 지키면 그 책임을 감수한다고 지적했다. 제 경공은 공자를 중용하려 했으나, 줄곧 권신의 반대에 부딪혔다. 1724년에 재건한 대성전(大成殿)은 중국 고대 3대 건축물로 꼽힌다. 세월이 흘러 공자는 마흔이 넘고 소공이 객사하고 정공이 즉위하자, 44세에 노나라로 귀국했다. 그리고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위해 학당을 열었다. 공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군자가 무엇인지 고민했었다. 임금은 단순한 위정자가 아닌 예와 덕을 갖춘 현인으로써 군자라고 결론지었다. 공자는 이런 군자가 나오려면 떠받치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신분 고하를 따지지 않고 제자로 받아들였다. 당시 엄격한 신분제도 아래에서 파격적인 조치였다. 공자 학당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사설 학교였다. 대성전 앞에서 공자를 향해 제를 올리는 중국 여성 공자는 권문세족의 자제부터 천민의 아들까지 제자로 삼아 가르쳤다. 커리큘럼은 육예와 고급 학문, 군자학이었다. 이처럼 종합 학술 교육을 진행하는 학교는 공자 학당이 유일했다. 명성이 날로 높아지자, 정공은 공자에게 벼슬을 내려 52세에 출사했다. 공자는 공정하고 명료하게 업무를 처리했다. 그 덕분에 2년 만에 나라에서 벌어지는 각종 형사 사건을 총괄하는 대사구에 올랐다. 공자는 조정에 나가 회의에 참석하면서 삼환의 국정 농단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정공도 소공과 같은 허수아비라는 현실에 분노했다. 대성전 안에 모셔진 공자상. 청대에 공자의 모습을 상상해서 만들었다. 그래서 공자는 삼환을 몰아내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실권자인 계 씨와 친분을 쌓았다.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삼환의 근거지인 삼도(三都)를 허물 계책을 이행했다. 3년간의 노력 끝에 삼환 스스로 2개의 성을 무너뜨리도록 했다. 그러나 공자의 계략을 눈치챈 삼환은 반격했다. 계 씨도 공자에 대한 신임을 거두었다. 정치적 입지가 좁아지고 암살 위험까지 대두되자, 공자는 어쩔 수 없이 55세에 제자를 데리고 열국주유(列國周遊)에 나섰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처음 방문한 위(衛)나라에서 공자는 국빈 대접을 받았다. 공자가 가장 아꼈던 제자 자공이 심은 나무가 아직 남아 있다. 위 영공은 공자가 노에서 받은 녹봉과 똑같은 식량을 내렸다. 하지만 공자는 정사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또한 권문세족의 견제와 시기를 당했다. 결국 영공마저 공자를 경원시하자, 다른 나라에 갔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59세부터는 조(曺), 송(宋), 정(鄭), 진(陳), 채(蔡), 엽(葉), 초(楚) 등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유세를 펼쳤다. 군주는 공자를 융숭히 접대했다. 하지만 나라의 실권을 군주가 아닌 권문세족이 쥐고 있었다. 권문세족의 과두정치를 타도하고 군주권을 확립하자는 공자의 주장은 심한 견제를 받았다. 사후에 성인으로 추존된 공자의 무덤이 있는 공림의 정문인 공림문 게다가 공자는 군주도 높은 인과 예를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수양해야 한다고 강조해서 환영받지 못했다. 향락과 안일에 젖어있던 군주에게 공자는 그저 말 많은 노인네였다. 67세 때 아내가 병사하자, 이듬해 공자는 14년 동안의 열국주유를 마쳤다. 고향으로 돌아온 뒤 공자는 후학 양성과 고전 정리에 정력을 쏟았다. 비록 열국주유는 실패했지만, 견문을 높일 수 있었고 명성을 방방곡곡에 떨쳐 제자가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공자는 제자를 가르치고 남은 시간은 고급 학문의 교육서를 정리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공림 한복판에 자리 잡은 공자의 묘. 가장 크고 거대하다. 《논어》는 그 과정에서 공자와 제자의 언행을 기록하여 편찬한 책이다. 이에 따라 《시경》, 《서경》, 《예기》, 《악기》를 편찬했고 《역경》, 《춘추》의 기초를 닦아 '육경'을 완성했다. 기원전 479년 공자는 노환으로 73년의 생애를 마감했고, 취푸 북쪽 쓰수이(泗水) 가에 묻었다. 훗날 주변에 공자의 후손까지 묻히면서 공림(孔林)으로 규모가 커졌다. 공자 사후 공 씨 가문은 취푸에서 양조한 술을 제사상에 올렸다. 공부(孔府)를 방문하는 고관대작이 많아지자, 명대부터 직접 빚은 가양주(家釀酒)로 대접했다. 공 씨 가문이 살았던 공부의 살림집 정전 내부 청대에는 공자를 존경했던 건륭제가 취푸를 8차례나 찾아 공부에서 술을 즐겼다. 이에 따라 공부의 가양주는 황실로 진상되는 술이 됐다. 가양주의 맛이 좋았던 이유는 품질이 뛰어난 수수를 원료로 하고, 취푸의 깨끗한 물을 사용하며 보리로 만든 누룩을 당화발효제로 쓰기 때문이다. 공부는 가양주 양조법을 이웃에게 전수했다. 그 덕분에 20세기 초 취푸에 양조장이 9개에 달했다. 사회주의정권이 들어선 뒤 1958년 이를 취푸술공장으로 통폐합했다. 그리고 2004년에 민영화된 것이 공부가주(孔府家酒)주업이다. 디자인 : 이희문
지피지기 백전불태! 친중(親中), 반중(反中)을 넘어 극중(克中)을 위한 지식충전소! 진짜 중국을 만나러 갑니다! 가오궁성조방의 한편에 있는 싼바이주 저장고 필자가 중국에 관심을 가졌던 계기는 중학생 때 읽은 3권의 책 때문이다. 첫째는 한국인의 애독서 중 하나인 《삼국지(三國演義)》다. 둘째는 《중국의 붉은 별》로, 초판본을 우연히 구해서 읽었다. 셋째가 《중국의 붉은 별》로 인해 중국 현대사에 관심이 생겨 읽은 마오둔(茅盾)의 소설인 《식(蝕) 3부작(1930)》이다. 《식 3부작》은 마오둔이 경험했던 정치 활동을 바탕으로 중국 혁명운동의 그늘을 실감 나게 그렸다. '환멸', '동요', '추구' 등 3편의 중편 소설로 구성됐는데, 소설마다 다른 주인공이 등장한다. 우전의 민가는 전형적인 강남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그에 따라 부딪히는 상황이 각기 달라 연작이면서 각 편이 독립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청년 지식인이 혁명에 참여해 내부 모순에 환멸을 느끼고 동요하며, 새로운 인생을 추구하다가 좌절하게 된다. 사실 마오둔의 본명은 선더훙(沈德鴻)으로, 자는 옌빙(雁氷)이다. 이 소설을 발표하면서 국민당 정권이 내린 수배령을 피하고자 필명으로 마오둔을 썼다. 마오둔은 1896년에 저장(浙江)성 퉁샹(桐鄕)시 우전(烏鎭)에서 태어났다. 마오둔의 집은 전형적인 강남 사합원이다. 대지 650㎡에 건평이 450㎡나 된다. 마오둔의 생가로 향하는 우전의 골목길과 민가 마오둔은 10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하지만 방이 10개 넘는 부유한 집안 환경과 지혜로운 어머니의 가르침 덕분에 좋은 교육을 받았다. 어머니는 마오둔이 지적 상상력을 키우도록 독려했다. 이런 보살핌 아래 마오둔은 어릴 때부터 고전 소설에 탐닉했다. 그 때문에 마오둔은 장성한 뒤 자주 "내 삶에서 가장 큰 스승은 어머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1913년 베이징 대학에 입학하면서 마오둔은 고향을 떠났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상하이로 가서 상무인서관에 입사했고 1920년에는 《소설월보》의 편집자로 일했다. 마오둔의 생가는 대표적인 강남 사합원 방식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21년에 '인생을 위한 문학'을 주창하는 문학연구회를 조직했다. 또한 같은 해 7월에는 공산당 창당에도 간여했다. 1924년 제1차 국공합작이 성사되자, 출판사를 그만두고 1926년 국민당 선전부에서 일했다. 하지만 이듬해 장제스(蔣介石)가 쿠데타를 일으켜 좌익 소탕에 나서자, 지하로 숨어들어 갔다. 이 시기에 쓴 소설이 《식 3부작》이다. 원래 창작 활동에 들어설 때 마오둔은 깊은 허무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바탕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투신했다가 참담한 실패를 겪었기 때문이다. 마오둔 가족도 후원의 침실에서 이런 고풍스러운 침상을 사용했다. 그러나 혁명 현장을 떠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거대한 모순의 운명처럼 여겼다. 이에 모(矛) 위에 풀 초(草)를 올려 발음이 똑같은 띠 모(茅)처럼 만들어 필명을 완성했다. 《식 3부작》 이후 마오둔은 왕성한 글쓰기에 몰입했다. 1928년 《무지개(虹)》를 썼고 1930년에 중국좌익작가연맹을 창립했다. 1931년부터 《깊은 밤(子夜)》을 연재했고 1932년 《임씨네 가게(林家鋪子)》, 1933년 《추수(秋收)》 등을 잇달아 발표했다. 마오둔 문학의 특징은 어려운 현실에서 생활하는 인간 군상을 묘사한 사실주의다. 우전 마을 사진을 배경으로 세워진 청소년기의 마오둔 석상 청년 지식인부터 농민까지 다양한 주인공이 등장해 당대의 고민과 삶을 그대로 드러냈다. '농촌 3부작'으로 불리는 《봄에 치는 누에(春蠶)》, 《추수》, 《늦겨울(殘冬)》은 중국 농촌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이는 마오둔이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강남의 농촌마을인 우전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41년에 마오둔은 돌연 소설 창작을 중단했다. 그 뒤에는 극작가와 편집자로 활동했다. 우전 곳곳에는 마오둔의 향취가 남아있다. 본래 우전은 강남 6대 수향(水鄉) 중 하나이자 비단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우전의 수많은 민가는 대부분 수로를 끼고 지어졌다. 강남 6대 수향은 《미션 임파서블 3》에서 마지막 배경 무대로 등장한 시탕(西塘)을 비롯해 퉁리(同里), 저우좡(周莊) 등을 가리킨다. 수향은 대운하 때문에 생겨났다. 운하는 진대부터 조금씩 짓기 시작해서, 남북조시대에는 건설이 상당 부분 진척됐다. 이 시기 남부로 대거 이주한 한족이 강남 개발에 전력을 기울이면서 곳곳에 운하를 건설했다. 그러다가 수나라 때 양제가 기존 운하를 보수하고 연결해 강남에서 장안에 이르는 대운하를 완성했다. 우전은 대운하의 길목에 있기에, 당대에 처음 문헌에 등장한다. 우전의 수각은 수면 위에 항상 떠 있도록 수로의 물 관리를 한다. 당대 말기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우전은 관군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이때 우(烏) 씨 장군이 나타나 마을을 보호했다. 수년 뒤 도적이 쳐들어왔으나 우 장군이 앞장서 물리치고 전사했다. 주민은 그를 기리어 '우 씨의 마을'이라며 이름 지었다. 현재 우전은 크게 동책(東柵)과 서책(西柵)으로 구분된다. 여기서 책은 '울타리 마을'이라는 뜻이다. 두 마을은 십자 형태를 띤다. 수로가 가운데 흐르고 양옆에 민가가 줄지어 지어져 있다. 수로는 과거 그대로로, 여전히 우전과 다른 마을을 연결하는 교통로 역할을 수행한다. 우전 서책에 있는 남인화포 염색장 수로 위에는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돌다리가 놓여 있다. 민가는 명·청대에 지어진 고풍 어린 전통가옥이다. 특히 집 한쪽을 강 위에 나무나 돌로 받침을 박아 놓고 지은 구조로 지었다. 수면에서 30~50cm 높게 떠 있도록 해서, 물 위까지 주거 공간을 넓힌 것이다. 수로의 물 관리가 철저한 덕분이다. 그래서 물 위의 누각(水閣)이라 부른다. 어느 마을이든 수각 옆에는 골목이 있고 다시 민가가 있다. 민가군은 수각과 달리 사합원 구조를 갖추었다. 강남의 사합원은 대문을 중심축으로 하여 전원과 후원으로 나뉜다. 갓 염색한 천이 걸려 있는 남인화포공방은 기념사진을 찍는 성지다. 전원 중앙에는 조당(祖堂)과 대청이 있고, 좌우로 서재와 부엌이 있다. 후원에 침실이 있다. 비단의 고장답게 우전은 잠사와 염색 기술이 발달했다. 누에는 우전 외곽에서 친다. 누에가 번데기가 되어 실을 토해 몸을 감싸 누에고치를 만들면 우전으로 가져온다. 우전 골목길을 누비다 보면 누에고치에서 번데기를 꺼내고 손가락으로 명주실을 뽑는 주민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과거에는 명주실을 나무로 된 직물기로 해서 비단을 짰지만, 지금은 기계가 대신하고 있다. 이와 달리 천을 염색하는 방식은 옛날 그대로다. 어둠이 깔리는 우전은 수로와 민가의 조화가 한 폭의 동양화 같다. 우전은 대표적인 남인화포(藍印花布)의 생산지이기도 하다. 남인화포는 흰 천에 다양한 꽃무늬 그림을 수놓은 뒤 남초에서 추출한 색소로 만든 염료를 물들인 무명천이다. 수백 년 전부터 우전에서는 이 남인화포를 이용해 옷, 신발, 가방 등 각종 수공예품을 생산했다. 염료 공방의 넓은 마당은 갓 염색한 천을 건조하기 위해 긴 장대 위에 걸어놓아 장관을 이룬다. 우전의 또 다른 명소는 1872년 청대 동치제 때에 문을 연 가오궁성조방(高公生糟坊)이다. 앞은 술을 파는 주점이고, 뒤는 싼바이주(三白酒)의 양조장이다. 가오궁성조방은 옛 방식 그대로 싼바이주를 양조하고 있다. 싼바이주는 찹쌀을 원료로 해서 한약재가 가미된 누룩으로 빚는다. 그리고 진흙으로 빚은 항아리에 숙성시켜 3일 뒤면 마실 수 있다. 우전에서는 양기를 보충해 주고 가래를 없애준다고 해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마신다. 실제로 알코올 도수가 아주 다양하다. 55도로 일반 바이주(白酒)와 술맛이 유사한 싼바이주, 12도인 향기가 짙은 쌀술인 바이뤄미주(白糯米酒), 4도로 단맛이 나는 톈바이주(甛白酒) 등 크기 세 종류로 나뉜다. 현지 주민은 음식을 만들 때 싼바이주를 반드시 넣어 요리의 간을 맞출 정도다. 디자인 : 이희문
지피지기 백전불태! 친중(親中), 반중(反中)을 넘어 극중(克中)을 위한 지식충전소! 진짜 중국을 만나러 갑니다! 솟아난 산봉우리와 아름다운 물길의 리장은 한 폭의 산수화와 같다. 성은 좁아 산을 누르려 하고, 강은 넓어 땅이 함께 뜨네. (城窄山將壓, 江寬地共浮) 동남쪽은 먼 지역과 통하고, 서북쪽에는 높은 누각이 있네. (東南通絕域, 西北有高樓) 신이 푸른 단풍 언덕을 보호하니, 용이 흰 돌로 추를 옮기네. (神護青楓岸,龍移白石湫) 고향에서 도대체 무엇에 빌었는지, 피리와 북은 쉴 틈이 없네. (殊鄉竟何禱, 簫鼓不曾休) 이 시는 당대 후기 시인인 이상은의 '구이린(桂林)'이다. 이상은은 평생 관리가 되어 성공하고자 했으나, 우이(牛李) 파벌 당쟁에 휘말려 지방의 한직을 전전했다. 유람선을 타고 리강에 들어서면 마치 무릉도원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든다. 847년에는 관찰사 정아의 요청으로 구이린에 가서 관리로 1년 동안 생활했다. 구이린의 자연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장안을 떠나 남부의 오지에서 일하는 이상은의 마음은 심란했다. 그래서 '구이린'에는 향수에 젖어 고향을 그리워하는 심정이 절절히 담겨 있다. 물론 '즉일(卽日)'에서는 구이린의 자연 속에 편안한 마음도 노래했다. 산이 울리면 침상의 말로 되돌아오고, 꽃이 흩날리면 향기가 난다. (山響匡床語, 花飄度腊香) 언제든 기러기의 발을 만나니, 어디서든 근심걱정이 끊어졌다. (几時逢雁足, 著處斷猿腸) 산이 풍화와 침식 작용을 거치면서 뾰족하게 솟아있는 초평(草坪) 필자는 취재와 휴양을 위해서 구이린을 4번 방문했다. 구이린의 자연환경은 다른 지방에서 보기 힘든 세 가지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쾌적한 날씨다. 구이린의 연평균 기온은 19.8℃로 사계절 내내 따뜻하다. 겨울철에도 산은 녹음으로 우거져 있다. 또한 낙엽이 지고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연 강수량은 1,926mm로 많지도 적지도 않다. 따라서 서리가 끼지 않는 날이 한 해 309일에 달한다. 한데 매년 눈이 한두 차례 내린다. 이는 같은 위도대의 다른 지방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우뚝 솟은 두 봉우리인 양제(楊堤) 아래 자리 잡은 민가 그렇기에 현지인은 구이린을 "사계절 내내 꽃 피고 겨울에 소설을 볼 수 있는(四季常花三冬少雪)" 고장이라고 소개한다. 둘째, 기묘한 카스트 지형이다. 구이린의 산은 다른 지방처럼 거대하거나 웅장하지 않다. 평균 해발이 150m에 불과할 정도로 아담하고 소박하다. 본래 3억 년 전에 구이린은 바다였다. 하지만 히말라야 조산운동으로 바닥에 쌓여있던 석회암이 수면 위로 상승해서 수많은 산봉우리가 생겨났다. 그 뒤로 오랜 세월 동안 풍화와 침식 작용을 거치면서 뾰족하게 솟아올라 있는 형상을 갖추었다. 아홉 개의 말을 절벽에 그린 듯하다고 붙여진 구마화산(九馬畵山) 셋째, 깨끗한 물이다. 광시(廣西)자치구의 젖줄인 리강(漓江)은 싱안(興安)에서 발원해 구이린과 양숴(陽朔)를 거쳐 핑러(平樂)로 흘러간다. 그중 구이린에서 양숴까지 83km 구간은 강 옆 카스트 지형이 연출해 낸 아름다운 산봉우리를 끼고 있어 마치 무릉도원과도 같다.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중국인들은 구이린에서 양숴에 이르는 절경을 배 타고 감상했다. 오늘날 여행객은 구이린 도심에서 선착장까지 버스로 이동한 뒤, 유람선에 갈아타고 본격적인 리강 구경에 나선다. 보통 유람선 관광은 3~4시간이 소요된다. 큰 자연 동굴을 갖고 있는 관암(冠岩) 갑판 위에서 맑은 물과 아름다운 봉우리가 연출하는 풍경에 푹 빠져있다 보면, 뺨을 세차게 때리는 강바람조차 잊게 된다. 리강 변의 산봉우리는 언뜻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각기 다른 모습과 형태를 갖추고 있다. 여기에 형형색색의 기암괴석이 많아서 마치 산수화를 그려놓은 듯하다. 강변에는 녹음으로 우거진 산림과 옹기종기 모여 있는 민가도 있다. 따라서 오래전부터 구이린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소개할 때마다 '구이린의 산수는 천하제일이다(桂林山水甲天下)'라는 글귀가 등장해서 회자하여 내려왔다. 중국 돈 20위안의 뒷면 배경으로 등장하는 흥평(興平) 이것은 13세기 남송의 저명한 문장가 이증백(李曾伯)이 '상남루(湘南樓) 중건기'에서 썼던 "구이린의 산천은 천하제일이라, 3년간 변고의 조짐이 없었다(桂林山川甲天下, 三年間無兵革之警)"에서 비롯됐다. 상남루는 7세기에 처음 지어졌던 구이린의 누각이다. 구이린을 대표하는 명소였으나, 여러 차례 불타고 중축되길 반복하다가 청대에 완전히 소실했다. 그러나 이증백이 남긴 글귀는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수많은 시인과 문객이 변용하여 구이린을 묘사할 때 애송되고, 한국까지 전해져서 구이린을 유명하게 했다. 양숴에는 전통가옥을 개조한 카페거리가 있다. 리강 유람뿐만 아니라 구이린 시내에는 볼거리가 많다. 그중 꼭 찾아야 할 명승지가 샹비산(象鼻山)이다. 샹비산은 리강과 타오화강(桃花江)이 회류하는 지점에 있다. 코끼리가 코를 길게 내밀어 강물을 들이마시고 있는 형상을 갖추고 있어 붙은 이름이다. 실제로 석회암으로 이뤄진 산의 앞부분은 강바닥에 절묘하게 박혀있다. 산의 크기는 아담한 편이라 해발이 200m, 면적은 11만 8,000㎥에 달한다. 코와 몸통 부분만 바윗덩어리고 뒤는 수풀이 우성 졌다. 이 샹비산에 구이린을 대표하는 보물창고가 하나 있다. 코끼리가 코를 길게 내밀어 강물을 들이마시고 있는 듯한 샹비산 미향형(米香型) 소곡주를 대표하는 싼화주(三花酒)의 저장고다. 미향형은 바이주(白酒)의 4대 향형 중 하나로, 쌀을 원료로 만들고 맛이 부드럽고 향이 단아하다. 구이린에서 수수가 아닌 쌀로 바이주를 생산하게 된 것은 원주민인 좡족(壯族)이 도작(稻作)문화의 선수였기 때문이다. 좡족은 산꼭대기까지 벼농사를 지을 정도로 기술이 뛰어나다. 경사가 심한 산지에 다랑논을 일구고 물길을 대어 쌀을 경작했다. 이런 토대 위에 싼화주는 이미 송대에 '상서로운 이슬(瑞露)'이라 불릴 만큼 오랜 양조 역사를 가졌다. 싼화주 저장고는 샹비산의 절벽 아래 자연 동굴을 이용해서 조성했다. 청대에는 원료를 찌고 끓이길 3번 하고, 그 과정에서 요동치는 주액 거품이 마치 '계화 모양 같은 술' 같다며 싼화주라고 불려졌다. 싼화주의 부드럽고 깨끗한 맛은 샹비산 앞 지하에서 치솟는 샘물을 쓰기 때문이다. 샘물은 광물질을 함유하고 있어 순하고 단맛이 난다. 또한 좡족이 생산한 쌀은 입자가 크고 전분 함량이 72%에 달할 만큼 질이 좋다. 누룩을 만들 때 약초 여뀌를 넣어 짙은 향을 배게 한다. 무엇보다 샹비산 저장고는 1년 내내 19도를 유지하고 습도가 높아 싼화주를 만드는 데 화룡점정 역할을 한다. 저장고 안은 축적된 미생물이 있어 싼화주의 맛을 시원하고 진하게 한다. 증류된 술은 항아리에 담겨 저장고에서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30년 이상 숙성된다. 동굴 안에 수백 년 동안 축적된 미생물은 항아리 속에 담긴 술을 깊고 진하게 한다. 이로 인해 싼화주는 시원하면서 짙은 꿀맛이 배어있다. 싼화주는 리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마우지와 얽힌 전설도 갖고 있다. 가마우지는 검은 조류로, 주둥이가 길지만 날개는 작다. 따라서 보통 가마우지의 목 아래를 끈으로 묶은 뒤 강에 풀어 물고기를 낚시한다. 작은 물고기는 가마우지가 삼키고 큰 물고기는 목에 걸려서 어부의 몫이 된다. 가마우지를 태우고 리강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늙은 어부 옛날 한 어부가 가마우지를 배에 태우고 리장에 나가 물고기를 낚으며 날마다 즐겁게 살았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늙어버린 가마우지는 더 이상 사냥하기 힘에 부쳤다. 어부는 가마우지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 예감하고, 어느 날 상을 준비해 강변의 언덕바지에 올랐다. 돗자리를 펴서 싼화주를 올려놓은 뒤 가마우지와 마주 앉았다. 어부는 싼화주를 따라 가마우지 주둥이에 부어주었다. 가마우지는 술맛에 깊이 취해 긴 목을 누이고 깊은 잠에 들었다. 어부는 동고동락한 가마우지의 몸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쏟았다. 디자인 : 이희문
지피지기 백전불태! 친중(親中), 반중(反中)을 넘어 극중(克中)을 위한 지식충전소! 진짜 중국을 만나러 갑니다! 수로는 대수차에서 세 갈래로 나뉘어 다옌전고성 전체를 가로지른다. 이 민족은 간쑤(甘肅)와 칭하이(青海)에 살던 유목 민족이었다. 세월이 흘러 서쪽에선 티베트인, 남쪽에선 창족(羌族), 동쪽에선 한족 등 강대한 민족이 압박해 와 주거지가 축소됐다. 결국 민족의 생존을 위해 새로운 목축지를 찾아 대탈출을 감행했다. 11세기 초 그들은 쓰촨(四川)을 거쳐 윈난(雲南)으로 내려왔다. 초창기 바오산(寶山)에 살다가 점차 리장(麗江)으로 이주했다. 11세기 말에는 규모가 큰 도시 다옌전(大硏鎭)을 건설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남녀 모두 양가죽을 걸치는' 유목민의 복식문화가 남아 있다. 해발 2,418m의 고산에 겹겹층층의 민가를 조성한 다옌전고성 바로 나시족(納西族)이다. 나시족은 여느 소수민족과 다르게 독자적인 언어, 문자, 종교, 예술 등을 간직하고 있다. 티베트·창족어계에 속하는 언어, 뜻과 음을 있는 상형문인 동파(東巴) 문자, 사제인 동파가 주관하는 샤머니즘 동파교, 기본 음계의 악보와 전통악기로 연주하는 나시고악(納西古樂)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2020년 제7차 인구센서스에서 중국 전역에 사는 나시족은 32만 명에 불과했다. 이렇게 적은 소수민족이 수천 년 동안, 역대 왕조의 동화 정책 속에서 독자적인 문화 풍습을 보존한 건 기적에 가깝다. 다옌전고성 어느 집이든 문이나 창문을 열면 수로를 볼 수 있다. 물론 나시족은 몇 차례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었다. 13세기 몽골군의 침략은 거셌다. 몽골군은 윈난의 패자였던 대리국을 정벌하려 먼저 나시족을 공격했다. 나시족은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었고 모든 재부를 약탈당했다. 몽골의 지배는 오래가지 않았으나 유산 하나를 남겼다. 몽골인은 진사강(金沙江) 옆에 있는 분지라며 다옌전과 그 일대를 '리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1382년 리장을 다스리던 지방관 아자아(阿甲阿)는 원을 버리고 일어나던 명에 귀부했다. 이에 명 태조는 아자아 일족에게 목(木)씨 성을 하사했다. 470여 년 동안 리장을 통치했던 목 씨 토사의 궁궐 입구 또한 리장 일대를 통치하는 영주인 토사(士司)로 임명했다. 명대 말기 리장을 찾은 서하객은 “(목 씨) 궁궐이 아름다워 왕이 사는 곳과 같았다”고 적었다. 18세기 청조는 개토귀류(改土歸流)를 시행했다. 개토귀류는 소수민족인 토사를 중앙의 지방관으로 대체하는 정책이다. 이에 470여 년의 목 씨 정권은 종식됐다. 그러나 중앙 통치 아래 나시족은 자신의 언어와 문자, 종교와 문화를 계속 굳건히 지켰다. 리장이 해발 5,596m인 위룽(玉龍)설산 자락에 있고 평균 해발이 2,418m의 고산인 지리적 조건 덕분이었다. 관광객이 원하는 문장을 동파문자로 써주는 나시족 노인 그래서 동파문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사용되는 상형문자로 살아남았다. 동파문자는 현재 1,400여 자로, 글자 수는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단어가 풍부해 인간의 세세한 감정, 복잡한 사건의 기술, 시와 문학의 서술 등까지 기록한다. 대담한 과장과 생략, 요약 등의 기법으로 사물의 뜻과 의미를 생동감 있게 그린다. 예를 들어 고(苦)는 입으로 검은 물체를 밖으로 내뱉고 있는 모습으로, 행복(幸福)을 남녀가 함께 춤을 추고 기뻐하는 형태로 그린다. 나시족은 이미 기원전부터 만물의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 기록했다. 리장박물관에 소장 중인 동파경. 동파문자로 생동감 있게 그려졌다. 이를 점차 뜻과 음을 겸비한 상형문자로 발전시켰다. 그러다가 윈난으로 이주하면서 동파문자는 더욱 풍부하고 다양해졌고, 13~15세기경에 완성됐다. 동파문자를 이용해 나시족은 신화 전설, 종교의례, 천문역법, 민속 풍습 등을 기록한 동파경을 남겼다. 동파경에는 인생과 진리에 대한 고뇌, 현세와 내세에 대한 탐색 등 다양한 철학적인 담론이 담겨 있다. 또한 하늘과 태양, 산과 강, 동물과 새, 물고기와 곤충 등 여러 기록도 담은 백과사전이다. 동파경은 모두 전통 제조법으로 만들어진 목판과 종이에 새겨졌다. 동파교 신전을 재현한 동파신원과 위룽설산 오늘날까지 1만 4,000여 권이 전해지는데, 2003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 리장은 동파문자뿐만 아니라 도시와 민가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수백 년 된 목조 기와집은 쇠못을 안 썼지만 아주 튼튼하다. 기둥과 대들보를 사개맞춤식으로 결합했다. 골목과 수로는 마을 구석구석까지 이어져 주민에 대한 배려가 세심하다. 수로는 다옌전 입구에서 세 갈래로 나뉘어 전체 3.8㎢를 가로질러 흐른다. 어느 집에서든 문이나 창문을 열면 수로를 볼 수 있다. 치밀한 도시 계획으로 조성됐던 것이다. 리장을 찾은 관광객은 동파문자로 쓴 소원첩을 매달아 남긴다. 그렇기에 나시족의 도시와 민가는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중국에서 문화유산과 기록 유산을 함께 등재한 소수민족은 나시족이 유일하다. 하지만 리장이 주목은 받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지진 때문이었다. 1996년 2월 규모 7의 강진이 발생해 293명이 죽고 3,700여 명이 다쳤다. 수많은 건물과 민가도 무너졌다. 지진 수습을 지원하기 위해 각지에서 온 자원봉사자는 리장의 숨은 매력을 발견했다. 지진의 여파로 새로 건설된 신도시는 타격이 컸지만, 전통 민가가 밀집한 다옌전은 피해가 적었다. 다옌전고성의 한복판에서 전통춤을 추는 나시족 여인 치밀한 도시 계획과 사개맞춤의 건축술이 내진의 효과를 발휘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이 중국 전역에 보도되면서 리장은 큰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중국 당국은 지진을 수습하며 관광 개발에 나섰다. 문화유산의 등재도 그 일환의 하나였다. 필자가 리장을 처음 찾은 것은 한창 개발 중이었던 1998년 7월이었다. 하지만 초창기라서 숙박시설을 찾는 데 애를 먹었다. 다행히 리장에 처음 들어와서 식당을 운영 중이던 한국인의 도움으로 숙소를 찾았다. 그 뒤 취재로 10여 차례 리장을 다시 방문하면서 변화상을 지켜봤다. 바이샤(白沙) 마을에서 나시고악을 연주하는 나시족 악단. 1996년에 리장을 찾은 관광객 수는 5,000여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2023년에는 6,808만 명을 넘어서 1만 3,600배나 폭증했다. 리장 전체 주민이 124만 명인 점을 비추어 볼 때, 얼마나 많은 관광객이 찾는지 알 수 있다. 또한 관광객이 뿌린 돈은 1,301억 위안(약 25조 616억 원)에 달했다. 따라서 오늘날 리장은 관광으로 먹고사는 도시가 됐다. 여행업과 유관 산업에 20만여 명이 종사하고, 시정부 재정 수입의 절반 가까이가 관광업에서 나온다. 서비스 산업의 비중도 전체 산업의 52%로 중국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화려한 야경으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다옌전의 거리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나시족의 전통과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서다. 이에 호응하듯, 나시족은 평소 민족의상을 즐겨 입는다. 여인네는 날마다 다옌전 곳곳에 나와 춤을 춘다. 또한 여행자의 카메라 세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런 나시족의 우호적인 태도는 술 문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먼 길을 찾아온 손님을 융숭히 대접하는데, 먼저 술을 권하면서 객고를 풀게 한다. 그 술이 '인주(窨酒)'다. 인주는 보리, 밀, 수수 등을 원료로 만든 발효주다. 술을 빚을 때에 보리누룩을 많이 사용하고 대추를 넣는다. 나시족 친구가 필자를 위해 준비한 나시족 전통요리 술독은 지하에 저장해서 보통 3년에서 길게는 20년까지 숙성시킨다. 이렇게 지하에서 숙성하는 술이라 인주라고 명명됐다. 숙성이 끝난 술 도수는 20도 안팎이 된다. 맛은 달고 부드러우나 오랜 숙성으로 향은 진하다. 포도당과 비타민을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어, 중국에서 영양주로 분류된다. 나시족은 명절이나 축제마다 남녀를 불문하고 식사 전 입맛을 돋우기 위해 인주를 마신다. 일부 마을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인주를 담갔다. 그 자식이 장성해 결혼하면, 담가놓았던 인주를 내놓아 혼례 날에 축하주로 마셨다. 디자인 : 이희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