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넘게 언론인으로 살았다. 앞으로 그만큼의 세월을 작가로 살기를 꿈꾸고 있다. 말하기보다 듣기, 읽기보다 쓰기를 더 좋아한다. 사람에 관심이 많은데 누구한테나 그러는 것은 아니고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둔다. 그 가치는 사실 그때 그때 달라 스스로도 종잡기 어렵다.
'그 사람들'의 더 깊은 이야기, 윤춘호 언론인이자 작가의 심층인물탐구 '그 사람'. 1. 광복절을 전후해 벌어진 역사 논쟁을 보면서 이 사람을 생각했다. 역사가는 어떻게 이 상황을 이해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전공이 서양사, 그중에서도 프랑스 절대왕정 시기를 공부한 사람이다. 전공으로만 보면 이 논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렇지만 반평생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니 남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이번 논쟁을 바라볼 것이다. 역사를 둘러싼 갈등에 뾰족한 해법이 있을 리 없다. 그래도 남의 나라 역사를 통해 깨달은 바가 있겠고 그 깨달음에 비추어 우리 역사를 바라보기도 할 것이다. 역사에 대한 통찰, 또는 역사에 대한 혜안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것을 듣고 싶었다. 프랑스에서 벌어진 격렬한 '역사 교과서 전쟁'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고 프랑스 하면 생각나는 톨레랑스, 즉 관용이라는 단어가 이 유럽 국가에 자리 잡게 된 과정에 대해서도 논문을 썼다. 갈등과 불화가 깊어지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가치가 의견이 다른 상대방에 대한 용인이라고 한다면 그에 대해서도 들을 이야기가 있겠다 싶었다. 마침 파리에서 올림픽이 열리고 있었으니 그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다. 파리 올림픽 개막식은 온갖 문화적 상징과 역사적 경험을 펼쳐 놓은 무대였다. TV 채널을 돌려가면서 봐도 그 개막식이 갖는 의미를 제대로 짚어주는 곳은 찾기 어려웠다. 그때 떠오른 사람이 충남 아산에 있는 선문대학교 사학과 교수 임승휘였다. 프랑스에서 10년 유학을 했고 거기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대학교에서 20년 넘게 서양사를 가르치고 있다. 지난달 한국프랑스사학회 회장직에 취임했고 한국서양사학회에서도 총무이사 등으로 오래 활동했다. 대학에 들어간 이후 알고 지낸 40년 지우다. 할 이야기 못 할 이야기 다 털어놓고 살아왔지만 정작 '역사가 임승휘'에 대해서는 그리 아는 바가 없었다. 역사가는 어떤 사람인지, 역사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 궁금했다. 새삼스럽게 역사가 무엇인지, 역사는 어디에 쓰이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그 질문은 40년 전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그 나라 사람들을 만난 적도 없으면서 서양 역사를 공부하겠다고 나섰던 필자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기도 했다. 인터뷰는 서울 낙성대역 부근에 있는 서양사 연구실에서 지난달 18일 일요일 오후 진행됐다. 필자는 임승휘 교수, 임 교수님이라고 불렀고 이 사람은 필자를 윤 기자님이라고 불렀다. 물론 너, 나로 부르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파리 올림픽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프랑스 역사 전공자로서 파리라는 도시가 주인공이 된 올림픽 개막식에 대한 소회가 역시 남달랐다. "넋을 놓고 봤어요. 재밌다, 참 재밌다. 제 첫 느낌이었습니다. 프랑스의 문화나 예술, 그 나라의 역사에 대해서 모르면 이해가 안 가는 장면들이 많았지요.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냐고 물으면 지독하게 프랑스스럽고 지독하게 파리스럽다고 대답했습니다. 프랑스식 국뽕이 차오르는 개막식이었달까요. 자기네 역사와 문화에 대한 벅차오르는 자부심의 표현이고 여기에 이것을 절제하거나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어요. 본인들은 그거 과장한다고 생각도 안 했을걸요. 적절한 표현 방법이 없어서 그냥 과장된 화려함으로 저는 얘기를 하는 거죠. 진짜 프랑스식 국뽕이 차올랐어요."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그 나라의 과거와 현재를 알고 그 나라의 안과 밖을 두루 살필 줄 아는 것은 역사가만의 특권이다. 개막식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아 그 대목이 그런 뜻이었구나, 그 장면은 그런 역사적 사건을 상징하는 것이구나' 싶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전문가는 역시 다르다 싶었고 역사는 교양인이 되기 위한 필수 과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대 평가된' 올림픽 개최국의 현재에 대한 평가도 빠뜨리지 않았다. "19세기와 20세기 초에 프랑스가 갖고 있던 공화국의 이상이라든가, 프랑스 혁명 이념이 좀 화려해요. 어쩌면 지나치다 싶게 화려하잖아요. 자유 평등 인권 이런 기치들이 프랑스를 상징하는 것이고 관용도 그렇죠. 근데 개막식에서 보여준 그 화려함의 이면에는 사실 곪아터지고 있는 21세기 프랑스의 현실이 있는 거죠... 프랑스는 민주주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나라인데 그런 나라에서 극우 정당들이 지금 판을 치고 있는 거죠... 극우 정당 가운데 재(再)정복당이라는 당이 있거든요. 우리 조국 프랑스를 이주민에게 빼앗겼다. 그러니 이들을 몰아내고 프랑스를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게 재(再)정복당인데 그런 정당들이 30% 이상 표를 얻고 있단 말이에요." 2. 한 케이블 채널의 <벌거벗은 세계사>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에게 꽤 알려졌다. 그 프로그램을 통해서 셀럽 수준의 인기를 얻고 있는 역사학 전공 대학교수들이 몇 명 있다. 이 사람도 그중의 한 명이다. 2021년 7월 태양왕 루이 14세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10번 출연했다. 처음 출연하고 난 뒤 이 사람의 지인이 올린 SNS 댓글이 재미있다. "승휘 형이 이제 결국 뜨시는군요. 그때가 언제일까 늘 궁금했는데..." 이 사람을 알던 사람들에게 임승휘는 '언젠가는 결국 뜰 인물'이었다. 그 이후로 다른 방송과 유튜브에서도 종종 출연하면서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었고 사인을 부탁하는 사람도 가끔 만난다. 지금까지 방송에서 다룬 소재들이 루이 14세, 쟌다르크, 카사노바, 나폴레옹 같은 이름이 귀에 익은 인물도 있지만 여왕 마고, 루이 15세 같은 다소 낯선 인물이나 소재도 적지 않다. 재방송도 많이 돼서 같은 방송을 여러 번 보기도 했는데 지루한 줄 모르고 봤다. '역사 전도사 임승휘'의 탄생을 목격하는 심정이었다. 그 방송을 볼 때마다 역사, 특히 서양사가 드디어 대중들에게 소비되기 시작하는 듯해서 한때 사학도였던 사람으로 흐뭇했다. 역사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지식인의 여기(餘技), 아니면 지적인 호사 같은 느낌도 있다. 중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닌 서양의 역사는 더 멀게 느껴진다. 수십만 명이 치르는 수능에서 세계사를 선택하는 학생들은 2만 명 남짓, 수험생이 가장 적은 과목 중의 하나다. 한국서양사학회 회원 수는 570명 정도, 고고한 자부심과 도저한 자존심으로 무장한 사람들의 모임이지만 대중들과 거리가 멀었고 대중들에게 관심을 받은 적도 없다. 그랬던 그 학문이 드디어(?) 대중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고 거기에는 이 사람의 역할도 적지 않다. -역사, 특히 서양사가 방송에서 인기를 끄는 것을 두고 격세지감, 그다음에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고 표현하셨는데 이렇게 서양사가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이유가 뭘까요? "거시적으로 얘기하면 세계화가 첫 번째 이유겠지만, 그 이전에 우리나라가 갖는 지정학적 위치의 영향도 크다고 봅니다.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 반도에 위치하다 보니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을 기본적으로 키울 수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두 번째는 대한민국이 이제 남의 집 사정에 관심을 기울일 만큼 여유가 좀 있어졌다. 여유 없으면 그런 데 관심을 안 갖잖아요? 이거 안다고 해서 내 삶이 크게 변하고 내 연봉이 올라가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그런 관심이 생기는 거죠. 그것을 교양의 확대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처음부터 이 프로그램과 잘 맞았던 것은 아니다. 프로그램 콘셉트와 관련해 자문을 구하는 제작진을 만났고 그 만남이 출연 요청으로 이어졌다. 처음 출연을 결정하고 대본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못 하겠다고 했다. 흥미 위주 구성에 지엽말단적인 사실에 매달리는 것처럼 보였고 꼭 전달해야 할 사실이 대본에서 빠진 것처럼 보여 영 마땅찮았다. 어찌어찌 첫 방송을 마쳤고 반응이 좋았다. 반응이 좋으니 다시 출연 요청을 받았고 그런 일이 지금까지 반복되고 있다. 이제는 스튜디오가 편하고 프롬프터 보는 것도 어색하지 않다. 시청률을 생각해야 하는 제작진의 고충도 이해한다. 자신은 다섯 시간 녹화하면 끝이지만 하루에 두 편을 찍어야 하는 진행자들 입장까지 헤아릴 여유가 생겼다. 작가들도 이 사람이 이제 물이 올랐다고 표현했다. "임승휘 교수님 강연은 되게 안정적이세요. 저희 진행자들이 주제나 역사적 배경에 전혀 지식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강연을 듣는 게 쉽지 않은데 임 교수님은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강연을 이끌어 가서 흡입력이 크신 분이죠. 또 아이템 선정이나 다른 교수님 섭외 관련해서도 도움을 많이 주시기 때문에 저희도 연락을 자주 드리려고 합니다." -김수진 tvN '벌거벗은 세계사' 작가 출연이 결정되면 온전히 3주는 매달려 준비한다.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대본에 오류가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담당 작가들이 프로그램 한 편을 하면 석사 논문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준비를 철저하게 한다고 이 사람은 평가했지만 언제 어디서 오류가 나올지 모른다. 이 사람이 출연한 것은 아니지만 유럽의 흑사병 등과 관련해 틀린 내용을 전했다는 지적을 받고 제작진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강의와 학생 지도, 학회 활동에 전념하던 사람이다. 학교 아닌 곳에 기웃거린 적 없고 개인 SNS도 별로 하지 않으며 살아왔는데 방송과 유튜브라는 새로운 매체에 적응하면서 느끼는 보람과 재미가 크다. "강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항상 갈증 같은 게 있었거든요. 이 재미난 얘기를, 이 흥미진진하고 유익하고 교훈이 많은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제대로 전달하고 싶은데 제가 의존할 수 있는 거는 제한적이란 말이죠. 기껏해야 눈빛과 표정 제스처 이거밖에 없는 거죠. 제 뒤에 그림이건 영상이건 이런 것이 제가 말할 때마다 쭉 나와줬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 30년 전부터 했던 것 같아요. 역사적 메시지와 그 메시지가 불러일으키는 상상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원했는데, 방송이 그런 걸 해주더라고요." 방송 출연을 계기로 역사의 대중화에 관심을 두게 됐고, 글을 쓰는 자세도 달라졌다. 이전에는 '이것도 몰라, 모르면 읽지 마' 이런 느낌으로 썼다면 이제는 '이 내용은 잘 모르실 것 같은데 조금 설명을 해드리자면'이라는 것이다. 독자에게 좀 더 친절하게 다가서려는 자세의 필요성을, 방송을 준비하고 방송을 만들어 나가면서 배웠다는 것이다. "2002년도 2003년도에 인문학의 위기 이야기 나올 때 글쓰기에 관한 학술대회가 몇 번인가 열렸어요. 서양사학회에서도 열리고 문화사학회라는 데서도 열렸는데 국내 연구자들이 이렇게 많고 논문도 쓰고 책도 내고 하는데 왜 사람들이 이렇게 책을 안 보냐, 연구자들의 글을 쓰는 태도, 글쓰기에도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 이런 취지로 꽤 거창하게 학술대회를 한 기억이 있습니다. 문제가 뭔지는 아는데 해답이 무엇인지 입체적으로 고찰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이 방송을 하면서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시절의 대중적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어쩌면 이 프로그램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한 방에 해결해 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죠." 3. 중고등학교 시절 공부를 잘했고 학력고사 성적도 좋았다. 법대에 가서 법조인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대입을 앞둔 시점까지 역사를 전공할 것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대입 학력고사에서 틀린 문제의 절반이 세계사와 국사였다. 그 생각을 말했을 때 아버지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역사를 전공할 거 아니면 집을 나가라는 호통을 들었다. 아버지에게 역사는 대를 이어서 공부할 만한 학문이었고 역사가라는 호칭은 아들에게 강권하고 싶을 만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말이었다. 아버지(오른쪽)와 어릴 적 찍은 사진 부친 임명방 전 인하대 교수는 1950년대 로마에서 유학한 한국 1세대 서양사학자였다. 할아버지는 인천의 거상이었고 할머니는 집안에서 신부가 나오면 위로 3대, 아래로 3대가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세 아들 중 둘째인 임영방 전 서울대 교수는 파리로, 막내인 임명방은 로마로 유학을 보낸 것은 사제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 집안에서 사제가 나오지는 않았다. 치즈를 먹으며 자랐고 어렸을 때부터 프랑스 요리 푸아그라가 낯설지 않았단다. 선택지로 놓인 서양사, 국사, 동양사 중에서 서양사를 택한 것은 그나마 좀 덜 촌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라지만 집안 내력을 보면 서양사학자의 길은 주어진 길이었다. 그 이후 삶은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와 비슷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에 유학한 것도, 역사학과 교수가 되는 것도 생각했던 것보다 다소 늦기는 했지만 그 역시 정해진 코스였다. 1984년 대학에 들어와서 이 사람을 처음 만났다. 39명 동기 가운데 '서양사'라는 말에 가장 어울리는 외양을 하고 있던 친구였다. 그 시절 파마를 하고 다니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화려한 외양을 한 친구였는데 그 때문에 더욱 눈에 띄었다. 대학 시절은 해도 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의 명확한 기준이 생긴 시절이었다. 그 기준은 아무리 깎아내려 해도 깎아낼 수 없는 바윗덩어리 같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사회적 약자를 등치는 것, 그것만은 말자. 공부깨나 했으니, 제가 하는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뻔히 보이잖아요.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결정을 하는 게 잘난 사람들한테 폐가 되는 건 상관없어요. 근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한테 분명히 해가 갈 게 뻔한데 그런 일을 한다? 그거는 못 하겠더라고요, 아직까지는. 100번을 양보해도 해서는 안 될 게 있고 해도 괜찮은 것들이 있는데 그 기준은 지금도 넘고 싶지도 않고 넘어지지도 않습니다." 1980년대는 정치적 억압의 시대였지만, 다른 의미에서도 억압의 시대였다. 이 사람 표현을 빌리자면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는 것은 눈치가 보이던,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을 다 하지 못한 시절"이었다. 파마를 하는 것도 사실은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다.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고 자신을 표현하며 사는 것을 좋아하고 그런 것에 능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는 것은 눈치가 보이던 시절이다. 대학 시절은 그 이후 세상을 올바르게 사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정서적 억압의 시절이기도 했다. 군 훈련병 시절 아버지 임명방 교수, 어머니 임순중 여사와 함께 1988년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 파리의 공기는 이 사람을 자유롭게 했다. 스코틀랜드 전통 양식의 치마를 사기도 했고 요리학원을 다니며 요리를 배우기도 했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프랑스에 가서 1년 동안은 빵과 라면만 먹었는데 대학 시절 내내 57kg이던 체중이 10kg이나 불었다. 자유의 공기가 체중으로 이어진 모양이다. 유학 시절 본격적으로 패션과 요리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역사가가 아니라 요리사를 했어도 잘했을 것이다. 지금도 가끔 음식점을 하면 어떨지 생각하고 시칠리아 같은 데 가서 음식점 여는 것이 인생의 버킷 리스트다. 얼마 전에는 딸의 권유로 팔에 문신을 했다. 방송할 때 그 문신 때문에 반팔 셔츠를 못 입는 게 불만이다. 공부하는 재미를 알았던 것도 파리 유학 시절이었다. 그 기쁨은 역사가로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것이라서 더욱 각별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책 읽는 재미를 느끼긴 했는데 유학 시절에 통찰을 던져주는 책들, 마치 제 머리를 누가 곡괭이로 때리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주는 책들을 알게 됐죠. 처음에는 그냥 우연인 줄 알았어요. 그런 경험을 반복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이래서 공부를 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료를 보는 작업은 되게 지루하고 의미 없는 단어들이 막 나열되는 것 같은데 그 의미 없는 단어와 숫자들 더미에서 뭔가를 끄집어내서 마치 실에다 구슬을 꿰듯 엮어서 끄집어 올릴 때 정말 희열을 느꼈습니다." 전공은 17세기 프랑스 절대왕정이다. 만약 서울에서 공부를 계속했더라면 이 전공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전공 선택은 파리가 이 사람에게 준 선물 같은 것이었다. 마음이 가는 분야였고 그래서 더 열심히 파고들었다. 역사가는 공부를 한다고 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의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노력이 필요한 일인가 보다. "박사 학위 논문 주제가 17세기 프랑스의 가톨릭 교도들의 정치사상. 한국 사회에서 별로 관심이 없는 주제였어요. 1990년대 파리에 서울대학교 선후배들이 많이 있었거든요. 저랑 같이 다니던 선배들 논문 주제가 프랑스 노동총연맹, 프랑스 사회당 역사 이런 거였어요. 제 프랑스 친구들이 어느 날 저한테 와서 '야 너는 어떻게 한국에서 프랑스로 나올 수 있었어? 뭔 소리야? 그랬더니 너는 노동운동사도 아니고 사회당사도 아닌데 한국에서 어떻게 너 내보내 줬어?'라고 묻더라고요. 그게 그 시절 프랑스 사람들이 한국에 갖고 있던 인식 수준이기도 한데 이제 1980년대에 대학원 진학하고 공부의 길로 간 386세대들의 뭔가 심리적인 부채감의 표현이랄까요, '최소한 공부 주제만큼은 이런 걸 해야 하겠다' 그랬던 거지요. 근데 저는 그런 것조차 없는 놈이었던 거지요." 박사과정 공부가 쉬웠던 것은 아니다. 내가 과연 이 과정을 마칠 수 있을까 회의에 빠지기도 했고 처자식을 둔 가장으로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않았다. 죽어라 프랑스어 공부를 했고, 책을 붙잡고 씨름했고, 공부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해 갔다. 꽤 오랜 시절 만나왔지만 힘들다, 어렵다는 말을 들은 적이 별로 없었는데 이번 만남에서야 유학 시절과 귀국 이후 몇 년 힘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인생 살면서 그 정도 어렵고 힘든 일은 누구나 다 있는 법이고 자신은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받은 게 많고 누린 게 많은 사람이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프랑스 유학 시절 아들 진수 군과 함께 10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것이 1998년, IMF 사태가 터진 직후였다. 인문학의 위기가 본격화된 시점이기도 했다. 그 무렵 박사 학위를 가지고 대학교수 자리를 노리는 같은 과 출신 선후배가 스무 명이 넘었다. 인문학의 위기는 대학교수 자리가 줄어든다는 말이었다. 5년 가까운 시간강사 생활은 인내심을 시험하는 시간이었다. 2003년에야 선문대에 자리를 잡았다. 그나마 자기는 빨리 자리를 잡은 것이라고 했다. 교수 임용이 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명함을 만든 일이었다. 유학을 떠난 1988년부터 대학에 자리를 잡은 2003년까지 15년은 인생의 단맛은 물론 쓴맛과 신맛을 골고루 맛본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통해 얻은 게 박사학위, 교수 자리, 역사가라는 타이틀만은 아니었다. 돈이 궁하다는 게 뭔지, 먹고살기 위해 일한다는 말이 담고 있는 절박함도 깨달았다. 그 이후에도 지방대학 교수로서 비주류의 경험을 심심치 않게 했다. 그런 경험 역시 '역사가 임승휘'를 구성하는 요소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4. 지금까지 몇 권의 중,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를 집필했다. 지난달에도 자신이 주요 집필자로 참여한 중학교용 역사, 고등학교용 세계사 교과서가 각각 교육부 검정을 통과했다. 역사 교과서는 인화성이 높은 예민한 소재다. 필자의 이념적 성향을 따지고 문장과 단어 하나하나가 언론의 관심을 받기도 한다. 역사 교육에서 정치적 중립지대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한 인터뷰에서 역사는 선택지가 다양한 것이 매력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적어도 역사 교과서 집필은 선택지가 하나뿐인 문제를 푸는 느낌도 없지 않다. "저도 중학교 역사 교과서,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를 집필하고 있긴 한데 사실 교과서를 딱 보면 식민지 시기 역사는 침탈의 역사와 독립운동의 역사 딱 두 갭니다. 물론 분량의 제한 때문에 모든 걸 다 담을 수 없다, 그래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담는 건데 그거 딱 두 개인 거죠. 이런 사정을 모르는 외국 사람이 그 교과서를 보면 조선이 몰락하는 그 순간부터 시작해서 해방 때까지의 역사는 극소수의 나쁜 놈 2명은 나라 팔아먹고 나머지 98명은 모두 저항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모든 사람이 저항을 했다고 할 수는 없는 건데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기가 힘든 거예요. 그게 정치적으로 중립지대를 허용하지 않아요. 저도 어디 나가서 이런 얘기 쉽게 못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이 어떻게 해석될지 모르잖아요?" 젊은이들에게 상상력을 키우는 데 역사만큼 유용한 학문은 없다고 했다. 사료와 사료 사이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것은 상상력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역사 교과서 서술에서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문제 삼는 사회적 분위기는 아무래도 답답하다. 마치 대학 시절 못할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는 것은 눈치가 보였던 것처럼 말이다. 최근 논란이 된 광복절 논쟁에 대해서는 누가 옳고 누가 그른 문제는 아니라고 했다. 화제가 됐던 뉴라이트의 대부 안병직 전 서울대 교수의 인터뷰 자료를 보내주고 의견을 물었더니 "생경하다"고 짧게 평가했다. 뉴라이트를 이념적으로 좌, 우 어디로 분류해야 할지 서구 학계 기준으로 보면 헷갈릴 거라고 했다. 이 대목에서 말을 걸러 가면서 하는 느낌이었다. 민족주의가 정치적으로 악용될 위험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민족주의가 정치적으로 선동하기 참 좋거든요. 왜냐하면 세상에서 제일 편한 게 네 편, 내 편 가르는 거예요. 네 편은 나쁜 편, 우리 편은 좋은 편. 어떻게 보면 민족주의는 사이다적인 요소가 강하거든요. 나는 지금 갈증이 나는데 '미지근한 물이 몸에 좋아, 거기다 나뭇잎 띄워 줄게' 그러고 있는데 한쪽에서 그게 뭔 소리야 하면서 사이다 같은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그쪽으로 넘어가기 쉽지요." 건국절 논쟁과 역사 교과서 문제로 여론이 들끓었던 지난 2008년 프랑스 역사 교과서 논란을 다룬 논문을 썼다. 우리와 비슷한 갈등이 프랑스에서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있었다는 것, 그 논쟁이 프랑스를 거의 둘로 쪼개 놓았다는 것, 역사 논쟁에서 정치적 중립지대는 없다는 내용이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논란이 된 역사 교과서 저자들이 생리학 교수와 목사 같은 역사 비전공자들이라는 내용이었다. "정말 그 시절에 프랑스에서 벌어졌던 역사 전쟁 때 그랬습니다. 우리도 지금 그렇잖아요? 훈련받은 역사가들은 그렇게 안 써요. 어쨌든 학계에서 공부하고 석사 박사를 한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쓰진 않습니다. 뉴라이트 하는 사람들 보면 역사학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닌 사람도 꽤 있잖아요. 역사학 하는 사람이 제대로 못 하니까 우리가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프랑스 역사 논쟁 때와 똑같은 이야깁니다." 현안에 대한 다소 신중한 자세는 남의 영역에 대한 언급은 자제하는 학계의 불문율이거나 예의 때문인가 싶기도 했다. 정치적 중립지대가 없는 싸움에 발 담그기를 꺼리는 몸조심일 수도 있는데 필자에게는 그다음에 이어지는 이 말이 더 솔직하게 들렸다. "서양사를 하면서 장점이자 단점. 제가 외국인이니까 당연히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프랑스를 거리를 두고 봅니다. 거기에 대한 예찬도 없고 환상도 없습니다. 그만큼의 거리는 아니지만 서양사를 하다 보니 한국 사회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거리를 두고 보는 겁니다. 돋보기로 들여다보듯 보이지가 않아요." 뉴라이트 진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이인호 전 러시아 대사나 현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박지향은 모두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출신이다. 남의 나라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결국 우리를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 한국사와 서양사는 연구 대상을 달리할 뿐 역사라는 본질은 다르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역사관을 정립하기 위해 거친 싸움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 때로는 역사로 정치를 한다는 비판을 듣는 사람들이다. 동문이자 스승이기도 한 두 사람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피했지만, 생각에서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역사의 다양한 쓸모 가운데 정치적 용도를 빼놓을 수 없다. 역사의 기록과 해석의 권한을 장악한 자가 진정한 권력자였다. 정권이 바뀌면 마치 정해진 과정인 양 역사 교과서가 바뀌는 것은 그런 역사의 잔재라면 잔재겠다. 올여름 광복절 논쟁 역시 그 본질이 역사를 동원한 권력 싸움이라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역사학은 태생적으로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진 학문이고 역사학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게 어떻게 보면 용도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학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건 굉장히 늦게 나온 주장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이러니한 게 역사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이어야 한다를 내세우면서 우리도 독립된 분과 학문으로 인정해 달라라고 해서 역사학이 발전했는데 사실 역사학을 발전시킨 것은 국민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입니다. 우리나라도 4년제 대학에서 국사학과 역사학과가 생긴 게 대부분 다 박정희 시대잖아요? 일부 예외적으로 오래된 대학들 제외하고는. 그러니까 정치적인 필요에 의해서 나왔지만, 막상 그 안에 들어와 있는 종사자들은 그런 정치적인 목적에 휘둘리고 싶지도 않고 또 대부분 시대적인 어떤 특성상 정권을 잡고 있는 사람들과는 정치적으로 반대편 지역에 가 있는 경우가 많았죠." 프랑스 역사에서 꼭 짚어주고 사건이 몇 개 있는데 그중에 첫 번째가 드레퓌스 사건이라고 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1894년 프랑스 군 참모본부 유대인 장교였던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군 기밀을 유출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계기로 벌어진 일이었다. 드레퓌스는 군 기밀을 유출한 적도 없고 이 사건의 진범이 따로 드러나기도 했지만 프랑스 군부는 이 사실을 은폐했다. 프랑스 대중들은 드레퓌스를 비난하고 압도적으로 군부를 지지했다. 12년이 지난 후에야 드레퓌스는 무죄가 확정되었다. 유대인이었던 드레퓌스가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불고 있던 광적인 민족주의 열풍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를 두 동강 낸 사건입니다. 프랑스라는 나라가 이러다가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을 느꼈을 만큼 국론이 분열된 사건이었죠. 프레임에 갇히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드레퓌스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가 뻔히 나오는데도 프랑스 국민들은 무조건 드레퓌스가 유죄라는 겁니다. 심지어 드레퓌스를 다시 재판하는데 파리에서 재판도 못 합니다. 대중들의 반발 때문에 파리에 들어오지도 못한 겁니다. 드레퓌스는 처음에 이제 무죄도 아니고 사면으로 석방됩니다. 죄는 있다, 이걸 부정할 수 없다는 오도된 여론 때문이었습니다. 반대 증거도 나오고 진짜 첩자가 누군지도 밝혀졌지만, 드레퓌스는 절대로 무죄일 수 없다는 거지요. 그게 바로 프레임이거든요." 이 사건은 "나는 고발한다"를 쓴 에밀 졸라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대중들의 광기에 맞서 저항한 사건이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 프랑스에서는 지나치게 국수적인 역사 교과서, 배타적인 민족 감정을 고취하는 교과서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흐름이 생겨났다. -100여 년 전에 있었던 프랑스의 그런 경험을 통해 어떤 통찰을 얻을 수 있을까요? "어떤 것을 배웠으면 좋겠냐 하면 프랑스처럼 저렇게 싸웠으면 좋겠어요. 그게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치열하게 국론이 분열될 정도로 싸웠으면 좋겠는데 지금 그렇게 싸우지는 않잖아요. 대중들의 관심, 국민들의 관심은 잠깐 그러고 나서 사라져 버려요. 저때 프랑스는 진짜 정말 죽일 듯이 싸웠거든요. 그나마 제 기억에 한국에서 역사를 갖고 치열하게 싸웠던 거는 국정교과서 때입니다. 학교에서부터 시작해서 정말 난리가 났어요. 저같이 관심 없는 사람이 저런 논문을 쓸 정도면... 근데 지금은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는 것 같지 않아요. 저 사람들 또 저러다 말겠지 약간 이런 느낌. 그러니까 오히려 전 이게 안 좋은 것 같아요. 권투로 치면 툭 잽을 던질 뿐이지 누가 K.O. 될 때까지 한번 싸워보자 이건 아니거든요. 차라리 그렇게 해서 싸워야 해요... 그 싸우는 과정 자체가 국민들한테는 교육이라고 생각을 하고 거기서 정답이 일시적으로 나올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치열한 싸움 과정에서 그 안에서 역사가 살아요. 근데 관심이 꺼지잖아요, 그러면 역사는 죽는 겁니다." 프랑스가 톨레랑스, 즉 관용의 나라라는 이미지는 지난 4월 고인이 된 홍세화가 쓴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 역할이 크다. 학문적으로 보면 이 사람의 역할도 기억할 만하다. 자신의 전공과도 무관치 않으니 이 부분을 말할 때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넘쳤다. 16세기 프랑스에서 벌어진 신-구교 간의 종교 전쟁은 우리나라 6.25 전쟁하고 겹친다. 프랑스는 성모 마리아한테 존대할 것이냐, 반말로 할 것이냐를 두고 서로를 죽였고 20세기 한국에서는 이데올로기가 다르다고 서로를 죽였다. 프랑스는 그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30년 넘게 치렀고 한국은 3년을 싸웠다. 프랑스는 종교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정치적으로 풀었다. 거기에서 나온 것이 관용이다. 관용은 "승자가 패자만큼 때로는 패자보다 더 잃는 것이 많았다"는 인식 끝에 나온다고 했다. "관용은 종교 문제를 종교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정치적으로 간 것이거든요. '답이 안 나오니까 그럼 현실을 받아들여'라고 한 건데 이게 삶의 원칙이나 철학이 되기는 힘들다는 겁니다. 언제든지 상황이 불안해지면 관용의 원칙은 깨질 수도 있어요... 알베르 카뮈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과거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미래의 범죄를 방조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공화국 프랑스는 관용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지금 이민자를 대하는 프랑스의 모습이나 극우파의 위세를 보면 프랑스라는 국가의 관용에 대한 환상은 갖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말이지만 그런 정도의 관용이라도 필요한 게, 아니 관용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논의라도 해야 하는 게 대한민국의 현실 아닌가 싶다. 점심을 같이하면서 시작한 대화는 오후 6시가 지나서야 마무리되었다. 대화가 끝나기 두 시간 전부터 취조에 가까운 질문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얼굴이 붉게 상기됐고 목에서는 쇳소리가 났다. 코로나19에서 회복 중이라고 했다. 모든 질문에 대해 명쾌한 답을 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질문에 대해서는 답은 길었으되 정리하기는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예민한 문제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는데 그것은 묻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터뷰 녹취록을 보면서 던져야 할 질문을 제대로 던지지 못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보충 질문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주고받은 질문과 답변 안에서 정리했다. 제자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시한 '선생 임승휘'의 모습, 인문학의 실용성과 유용성을 역설하는 '인문학자 임승휘'의 모습, 무엇보다 '자유인 임승휘'의 모습을 이 지면에는 제대로 담지 못했다. 초고가 나온 뒤 원고를 보내면서 틀린 것 외에 혹시 마음에 걸리는 표현이 있으면 말해달라고 했는데 자신이 말한 것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한두 단어 추가하고 숫자 틀린 것만 바로잡아 보내왔다. 올해가 안식년이다. 놀기 바쁘다지만 귀족을 주제로 한 책도 곧 내고 강연 일정도 적지 않다. 내년이면 만 60,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맞게 된다. 이 사람의 삶에는 한 시대의 지문이 남아있다. 비슷한 또래들과 공유하는 지문도 있겠고 이 사람만의 지문도 있을 것이다. 역사가로서 자신만의 지문을 더 많이 남기는 삶을 기대한다. 디자인 : 채지우
1. 왜 지금 강준만인가? 낡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글을 쓰는 동안에도, 글을 책으로 묶어낸 뒤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형 서점의 한복판에 놓여 있는 책을 볼 때는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표지 디자인은 산뜻했지만 AI 챗봇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마당에 진보니 보수니 하는 이념 이야기를 한다는 게 스스로 생각해 봐도 낡았다. 그렇다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 새롭다 할 수 없었고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 역시 새롭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이렇게 낡은 이야기를 이렇게 낡은 방식으로 하고 있다는 자괴감을 숨기기 어려웠다. 이런 이야기를 담은 책을 누가 읽어줄까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판사 <개마고원>으로부터 강준만 교수에 대해 책을 써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별로 망설이지 않았다. 우선 필자가 살아온 시절을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강준만이 공공지식인으로 살아온 세월과 필자가 언론인으로 살아온 세월은 겹친다. 강준만이 처음 월간 <말>지에 글을 쓴 것이 1990년, 그 이듬해 필자는 SBS 기자로 입사했다. 언론사 현역 기자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즈음에 강준만의 삶을 정리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다 싶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고 말 한번 섞은 적 없지만 강준만은 같은 장(場) 안에서 살아온 느낌이 유별나게 강한 사람이다. 같은 시대를 살아왔다는 것, 비슷한 분야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강준만은 다루기에 편한 인물이다. 더군다나 강준만이 살고 있는 전북 전주는 필자의 고향이다.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돈 말고는 그리 부족한 게 없는 남도의 그 도시의 공기는 필자에게 익숙하다. 생각의 다름과 같음과는 무관하게 같은 세상, 같은 시대를 살아왔다는 느낌 때문인지 강준만의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필자의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풀어놓을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럴 수 있기를 기대했다. 강준만은 1990년 이후 근 3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현역으로 살아온 드문 지식인이다. 한 시절의 증언자, 기록자인 동시에 때로는 주요한 플레이어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강준만은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이 사람이 원칙을 가지고 자신의 일관성을 지켜왔다는 것은 누가 뭐라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지식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지식인이라는 말 자체가 남루해진 시대지만 그래도 그 말이 주는 매력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지난 1900년대 이후 시대의 한 특징을 지식인들의 몰락이라고 해도 그리 과하지 않을 것이다. 지식인들이 이렇게 푸대접을 받은 시대가 있었던가 싶다. '지식인의 지식인'으로 불렸던 강준만은 지식인의 영광과 상처를 모두 경험한 드문 인물이다. *이 글은 강준만론이 아니라 최근 필자가 펴낸< 강준만의 투쟁-진보 반동의 시대에 맞서다>의 집필 후기로 읽어주면 좋겠다. 왜 지금 강준만인지, 왜 지금 강준만을 읽어야 하는지 설명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왜 하필이면 강준만을 쓰느냐는 말을 적지 않게 들었다. 강준만이란 인물을 누가, 얼마나 안다고 강준만에 대해 쓰느냐는 말을 듣고 나면 더더욱 기운이 빠졌다. 이제는 정치적으로 별 의미 없는 사람 아니냐는 것이다. 거기에 변절이나 배신이니 하는 말이 후렴처럼 따라붙었다. 그렇게 공을 들여서 쓸 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 말은 필자에 대한 격려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필자에 대한 질책과 비판으로 들리기도 했다. 그럴 때일수록 더더욱 강준만에 대해 제대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다잡곤 했다. 어느 누구든지 할 말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자리의 높고 낮음이나 나이의 많고 적음, 돈과 권력의 많고 적음과도 무관한 것이다. 단지 그런 말을 들어주려는 사람이 없을 뿐이다. 한 사람의 삶에서 그 가치와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는 기록자의 둔함을 탓할 일이지 말하는 이를 타박할 일은 아니다. 더군다나 그 사람이 한 시대의 위선과 정면 승부를 벌여온 사람이라면 더더욱 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강준만의 책을 열심히 본 것은 아니지만 이름 석 자를 모를 수는 없었다. 서점에서 새로 나온 강준만의 신간을 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왔지만 정작 강준만의 책을 읽은 지는 꽤 되었다. 돌이켜보니 2004년 <인물과 사상>이 막을 내린 이후 강준만의 책을 진지하게 본 게 별로 없었다. <그 사람> 시리즈를 연재하는 동안 몇 사람에게 강준만에 대해 써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던 터였다. 한 번 쓰긴 써야 될 텐데 엄청난 저작을 읽을 생각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강준만은 필자에게 미뤄둔 숙제 같은 느낌이었다. 강준만이 얼마나 큰 인물이었는지, 아니 얼마나 유명한 사람이었는지 설명해야 할 때마다 필자는 이렇게 표현하곤 했다. 1995년 이후 10여 년 동안 강준만은 지금으로 치면 유시민과 진중권과 김어준을 합쳐 놓은 정도의 인물이었다고, 김어준까지 더하는 것은 다소 과할지 모르지만 20여 년 전 강준만은 유시민과 진중권을 합쳐 놓은 수준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자랑하던 인물이었다고 말이다. 그것은 과장이 들어가지 않은 표현이다. 강준만은 <김대중 죽이기>, <노무현과 국민 사기극> 등의 책으로 김대중-노무현 두 진보 정권 출범에 기여했다. <인물과 사상> 시리즈로 출판 저널리즘의 새 장을 열고 실명 비판이라는 무기로 지식인 사회는 물론 정치, 언론계를 뒤흔들었다. 안티조선 운동도 사실상 강준만에게서 시작되었다. 강준만의 현재 처지를 몰락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망각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멀쩡한 현역임에도 강준만은 확실히 그 존재감이 급속히 약해졌다. 강준만은 지금까지 잠시도 활동을 멈춘 적이 없다. 심지어는 미국에 교환교수로 갔을 때조차도 일 년에 서너 권씩 책을 써왔다는 점에서 강준만이 대중에게서 잊혀진 속도는 불가사의하다고 할 수 있다. 강준만의 책이나 칼럼에 붙는 댓글들은 욕설과 조롱, 비난 일색이다. 2005년 이후 강준만은 거의 20년 가깝게 그런 정치적, 사회적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박수와 찬사는 거의 없고 비난과 조롱, 무관심을 당연한 것인 양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암묵적인 왕따이자 집단 몰매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궁금했다. 강준만은 왜 이렇게 급속히 몰락(?)했을까? 그에 대한 답을 구하고 싶었다. 2. 태산의 언저리를 헤매는 느낌 어떻게 어떻게 강준만이라는 산을 오르긴 올랐다. 그렇다고 등정이니 정복이니 하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본격적인 집필에 들어간 것은 지난 2023년 9월부터였다. 일 년여 남짓한 시간 동안 강준만 관련 자료를 읽으면서 메모를 했다. 강준만을 직간접적으로 접한 사람들-제자, 출판사 관계자, 정치인, 동료 교수, 시민운동단체 인물, 취재 기자-을 만났다. 그렇게 해둔 메모가 A4 용지 100매 정도가 되었고 인터뷰 자료가 있으니 마음먹고 달려들면 넉넉잡고 석 달이면 원고를 마무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연말이면 원고를 넘기고 가벼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할 수 있을 테고 <그 사람> 연재도 새해부터 시작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예상은 빗나갔다. 자료를 정리하면서 해둔 메모는 다시 읽어보니 중언부언이었다. 덜어내지 않으면 쓸 수가 없는 글이 태반이었다. 글을 덜어내고 정리하는 시간이 쓰는 시간에 못지않게 더 필요했다. 석 달이면 되려니 싶었던 원고 작업은 넉 달로, 다섯 달로 늘어만 갔다. 설 전에는 마무리하겠다고 했다가 그것이 2월 말이 되고 3월 말이 되었다. 결국 완성된 초고를 넘긴 것은 4월 초,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두 배의 시간이 걸렸다. 스스로 세워둔 마감을 지키겠다고 연말 모임도 최소화하고 밥 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도 아껴가면서 작업을 했다. 명절에도 시간을 나눠서 이 책을 쓰는 데 집중했다. 귀한 분들과 약속도 결례인지 잘 알면서도 취소하기도 했다. 책 한두 달 늦게 나온다고 세상이 달라질 것도 아니고, 이 책 나오기를 목 빼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마음으로 그리했는지 모를 일이다. 하여튼 혼자 어지간히 유난을 떨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다만 그 과정이 그리 고통스럽지만은 않았다는 것은 꼭 말해두고 싶다. 강준만에 대해 생각하고 그 생각을 글로 표현하고 그렇게 쓴 글을 출력해서 보면서 다시 손보고 출력한 원고에 다시 가필하고 덜어내는 과정은 즐거웠다. 그런 작업을 할 때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힘들었지만 지루하거나 따분한 작업은 아니었다. 글을 쓰고 다듬는 일이 주는 희열이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다시 확인했다. 거기에 더해 강준만이라는 인물은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강준만은 1인 봉쇄 수도원에 사는 수도자 같은 삶을 살고 있다. 한때는 연구실에 전화도 두지 않고 오로지 팩스만으로 외부와 소통했다. 휴대전화도 미국 연수에 가기 전인 2011년에 처음 장만했다. 언론 인터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지명도에 비하면-특히 전기 지명도에 비하면 언론과의 접촉에 극히 인색한 사람이었다. 300권에 육박하는 강준만 저작을 다 읽을 수는 없었다. 정치, 언론 비평서와 역사책을 주로 읽었다. 훑어보듯 챙겨본 것이 100여 권, 그 가운데 밑줄 쳐가며 꼼꼼하게 읽은 것은 대략 40여 권 남짓이었다. 강준만을 굳이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글로 세상과 승부한 사람이니 필자도 오로지 글로 강준만과 승부를 보고 싶었다. 몇몇 사람들은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기도 했지만 강준만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제자와 지인, 동료들에게 강준만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인간 강준만에 대해 새롭게 알 수 있었다. 외곽에서부터 취재를 하다 보면 강준만이 어느 시점에 가면 먼저 필자에게 만나자는 말을 하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강준만은 필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접촉해 오지 않았다. 다만 필자가 그의 주변 취재를 하는 것에 대해 출판사 개마고원을 통해 심히 불편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그 이후 강준만 지인들과의 연락도 끊어졌다. 최종 원고가 나왔을 때 강준만에게 메일로 원고를 보냈다. 혹시 사실관계가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바로잡고 싶었고 '진보 반동의 시대'에 대한 의견도 듣고 싶었다. 원고를 보내면서 너무 많은 것을 고쳐 달라고 하면 어찌하나 살짝 고민했다. 강준만을 잘 아는 개마고원 대표 장의덕은 아마도 아무 반응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필자의 생각은 기우였고 장의덕의 예상이 맞았다. 강준만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3. 글쓰기의 어려움 글을 쓰면서 가장 고심했던 부분은 공영방송 MBC를 다룬 부분이다. 몇 사람의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이러저러한 인연으로 알게 된 사람들, 선하고 의롭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선함과 의로움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였던 사람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약자의 처지가 아닌 사람들의 얼굴이 글을 쓰면서 수시로 떠올랐다. 이미 유명을 달리한 후배 이용마도 글을 쓰면서 자주 생각이 났다. 선의를 가지고 비판한다는 말이 가능한 것인가 싶기도 했고 글 몇 줄 때문에 좋은 관계가 훼손되지 않을까 두려웠다는 것, 그럼에도 해야 될 말을 삼키지는 않았다는 말도 여기에 밝혀 두고 싶다. 전 MBC 사장 최승호는 필자의 간략한 질문에 대해 성의 있는 긴 서면 답변을 보내왔다. 그 성의가 고마웠고 그 자체로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할 만한 글이기도 했다. 책 말미에 부록으로 실을까도 생각했고, 최대한 글을 요약해서 공영방송 MBC를 다룬 장에 실어볼까도 생각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도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는 편집일 수밖에 없었다. 아깝지만 대폭 덜어낼 수밖에 없었다. 책을 내는 게 처음이 아니지만 여전히 200자 원고지 800매 가까운 글을 쓰다 보면 자신의 글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방향을 잃기 십상이다. 혼자 글을 쓰다 보면 내가 동으로 가는지 서로 가는지 헷갈린다. 때로는 여기가 섬인지 대륙인지, 대양의 어디쯤에 와 있는지 알 수 없다. 강준만과 너무 밀착해 있는 것은 아닌지, 거리 두기에 실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종종 두려웠다. 그럴 때마다 마치 SOS를 치듯 옆자리에 있는 양만희 논설위원에게 조언을 구했다. 양만희 논설위원은 글을 시작할 때부터 글의 방향에 대해 상의하고 조언을 구한 사람이다. 그럴 때마다 그는 적절하고 날카로운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정명원, 심석태, 임승휘도 필자가 조언을 구한 동료이자 친구들인데 그런 친구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 책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만 33년에서 딱 한 달 빠지는 기자 생활을 마감하면서 몇 가지 아쉬운 것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양만희 위원 같은 동료를 일상적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이다. 4. 사람에게도, 시대에게도 충성하지 않은 사람 책을 낸 이후 지인들의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책이 나오기 전 기대를 표시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그런 사람들에게서 시작되는 입소문을 내심 기대했지만 그런 사람들조차 책을 읽은 소감을 전해오지 않았다. 예상했던 반응이라고 해서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진보 반동의 시대>라는 개념이 정교하지는 않지만 화두는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거의 묵살 수준이었다. 그 개념에 다양한 해석이 더해지기를 원했다. 그것은 과욕이었다. 달을 가리키려 했지만 사람들은 손가락을 보기 일쑤였다. 강준만을 통해서 그가 살아온 시대의 가치를 말하고 싶었는데 사람들은 강준만의 영향력을 먼저 보려고 한다. 강준만의 삶과 글을 통해서 내 생각을 말하려고 하였는데 사람들은 강준만이라는 이름 석 자만으로 글을 평가하려고 했다. 강준만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진보의 반동 시대라는 개념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데 사람들은 강준만이라는 이름 석 자에서 좀처럼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강준만의 고립이 처음에는 무기였지만 후기로 갈수록 고립 때문에 강준만이 육지와는 다른 진화 과정을 겪은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봐도 강준만이 전기에 비하면 후기에 들어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데 그 이유를 강준만의 고립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지만 고립과 퇴보가 어떤 논리적인 연결 고리를 갖는 것인지를 밝히지는 못했다. 육지와는 다른 진화 과정을 겪은 것 아니냐고, 강준만이 갈라파고스섬의 새 같은 존재가 된 것 아니냐고 후기에 썼다가 지웠다.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 문제의식은 가지고 있다. 대중과의 불화, 진영 정치의 강화 등을 이유로 들었지만 그런 것들이 꼭 후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기라고 해서 강준만이 대중 친화적이거나 대중들이 듣기 원하는 말만 했던 것도 아니고 그때라고 해서 진영 간의 대결이 지금보다 덜했다고 할 수도 없다. 생각이 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문제는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돈을 따라 생각이 달라지고 권력을 좇아 자신의 입장을 바꾸는 것은 매명이며 매문이라고 할 수 있다. 죄를 지은 사람을 잡아들이고 그들에게 형을 선고하던 사람들이 입장이 달라졌다고 죄지은 자를 변호하는 모습은 아무리 좋게 봐도 아름답지 않다. 같은 입과 같은 손으로 다른 일을 하는 것은 아무리 봐도 박수받을 일은 아니다. 기업을 감시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기업인으로 옷을 갈아입고 어제 했던 자신의 말을 오늘 부인하고 뒤집는 것은 아름답지 못하다. 결국은 정의도 챙기고 돈도 챙기고 권력도 챙기고 거기에 명예까지 챙기려 드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전북대학교에서 퇴임할 무렵 당시 전북대 총장이 강준만에게 석좌교수 자리를 권했다. 석좌교수가 되면 연구실을 제공하고 몇 가지 혜택이 있다. 재직하는 동안 전북대학교를 대표할 만한 업적을 남긴 공로도 인정하고 앞으로 석좌교수로 전북대를 알리는 역할도 기대한 제안이었다. 나름 연구 업적이 있다는 자부하는 퇴임 교수들 중에는 이 타이틀을 얻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예우도 예우지만 석좌교수라는 타이틀 자체가 주는 매력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이 제안을 별로 고민해 보지도 않고 거절했다. 자신의 퇴직 후 직함은 명예교수라는 말로 충분하고 글 쓰고 책 보는 공간은 전주 시내에 있는 개인 연구실이 있으니 굳이 학교에 연구실을 둘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로 윤석열은 대통령이 되었지만 강준만이야말로 사실 이 말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강준만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았다. 김대중에게도 충성하지 않았고 노무현에게도 충성하지 않았고 안철수에게도 충성하지 않았고 문재인에게도 충성하지 않았다. 윤석열에게도 충성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강준만은 시대에도 충성하지 않았고 대중에게도 충성하지 않았다. 강준만의 삶에서 충성의 대상은 오직 이성과 사실뿐이다. 그런 점에서도 강준만은 보기 드문 지식인이디. 이 사람의 삶은 배신의 연속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배신을 당하는 일의 연속이다. 강준만이 신뢰를 보냈던 사람들은 주로 진보 진영 인사들이었다. 박원순, 조국, 문재인 같은 인물에 대해서는 거의 공개적으로 애정을 표현했다. 그런 사람들조차 변하고 달라지는 것에 대해서 강준만은 환멸을 느꼈다.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노무현에 대한 거친 비판 역시 그런 배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강준만의 가치는 일관성보다 그의 정직함에서 찾을 일이다. 기자 생활 정리하는 마당에 인간적인 관계도 해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책을 내는 것이 내심 두려울 때도 있었다. 진보 반동 시대라는 개념 때문이었다. 이런 말을 강준만이 쓴 적도 없고 필자 역시 이 책을 구상하고 집필할 때 이 개념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이 개념이 떠오른 것은 초고를 거의 다 쓸 무렵이었다. 어느 날 문득 강준만이 자신의 입으로 이 말을 생각하거나 글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생각을 했겠다 싶었다. 진보 퇴행의 시대라는 말도 생각했지만 진보 반동이라는 말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2000년대 초반 이후 진보 진영의 행태는 반동이라는 말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강준만이 이 개념에 대해 의견을 주지는 않았지만 강준만의 20여 년이 넘는 외롭고 긴 싸움은 진보 반동과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는 최근 필자가 펴낸 <강준만의 투쟁-진보 반동의 시대에 맞서다> 서문이다. <강준만의 투쟁> 서문 1. '달라진 강준만'을 살펴보는 것으로 '달라진 한국의 진보'를 생각하는 것이 이 책을 쓰는 첫 번째 목적이다. 지금의 진보의 모습, 더 나아가 한국 사회가 과연 바람직한 모습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망설임 없이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지금의 한국 진보는 30년 전 강준만이 대변하려던 그 진보는 아니다. 강준만 역시 <실명 비판>이라는 칼 한 자루로 우리 사회의 <성역과 금기>에 도전하던 그때에 비하면 많이 달라졌다. '진보 논객의 대부' 강준만이 진보 진영 안에서 차지하던 영지는 시간이 갈수록 쪼그라들었다. 이제는 칼 한 자루 꽂을 땅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름 석 자만큼은 우뚝했던 사람인데 그 이름에 먼지가 내려앉더니 존재감조차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강준만이 서 있는 곳이 진보가 아니고, 강준만이 말하는 것이 진보가 아니라면, 그것은 강준만의 변화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진보의 좌표가 변하고 진보의 영역이 줄어들었기 때문 아닐까. '1987년 체제'가 들어선 이후 진보 진영은 세 번 집권했다. 두 번은 기적 같은 신승이었고 한 번은 보수의 자멸 덕분이었다. 진보의 집권은 '반공을 국시'로 하던 대한민국에서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고 그 자체로 대한민국의 성취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권력을 잡고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진보의 민낯이 드러난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돌이켜보면 진보 진영이 정점에 이른 것은 2002년 노무현 집권이었다. 극적으로 진보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고 그 승리의 주인공이 지역주의 타파와 우리 사회 약자들을 위해 기꺼이 소수파의 길을 마다하지 않은 '바보 노무현'이라는 점에서 더욱 극적이었다. 한국 진보 세력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강준만 역시 그 대열에 함께 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진보는 희생과 헌신이라는 말과 동의어였고 오로지 자부심만으로 말할 수 있는 단어였다. 그 이후 진보 진영 엘리트들은 권력 집단으로 변해갔다. 야당일 때도 의회 권력에서 보수 세력에 그리 밀리지 않았고 행정부 권력, 의회 권력, 지방 권력을 동시에 장악한 적도 있다. 친노, 친문, 친명, 586세대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고 조금씩 성격이 달라졌지만, 그 세력이 노무현 참여정부 이후 보인 모습은 희생과 헌신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과거의 헌신과 희생에 대한 보상을 받는 과정이었고 그런 보상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진보 엘리트들이 한국 사회 계급 구조의 상층 구조에 자리 잡은 것을 보면 보상을 받는 기간이었다는 평가가 크게 그르지는 않을 것이다. 계급 구조의 사다리를 오르는 동안 그들이 새로운 비전과 대안을 제시하며 진보 영역을 확장한 것은 아니었다. 남북 문제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에서 일정한 성과를 보였지만 권력에 취해 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들이 적지 않았고, 부동산 정책에서 보듯 그리 유능하지도 못했다.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경제적 불평등, 젠더 갈등, 세대 갈등, 지역 갈등, 인구와 출생률 문제, 환경 이슈 등에서 진보의 비전과 해법을 보여주었다고 하기도 어렵다. 어느 사이 진보는 권력 게임에 능한 정치 집단을 말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줄어들면서 '진보'라는 말이 내포하던 다양하고 풍성한 가치가 '권력'이라는 단조로운 말로 대체되었다. 진보 담론은 권력 담론으로 왜소화됐고 진보=민주당이라는 공식은 시간이 갈수록 공고화되었다. 민주 대 반민주 구도에서 진보 엘리트들은 권력 쟁취를 지고지선의 목표이자 대중들을 위한 자신들의 의무로 받아들였다. 그것이 그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이념과 가치로 뭉쳤던 진보 엘리트그룹은 이제 권력을 중심으로 뭉친 이익집단으로 보인다. 그러니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선거 승리이고 이를 위해서는 못할 일이 없었고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관련해 국민과의 약속을 뒤집는 것도, 두 번씩이나 비례 위성 정당이라는 허수아비 정당을 만드는 것도 선거 승리라는 말 한마디로 정당화되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온몸으로 건너온 사람들에게 진보는 선, 보수는 악이라는 것은 논리 이전에 '몸'이 먼저 기억하고 '몸'이 증언하는 일이다. 그들에게 우리 공동체의 민주주의는 군사독재에 이어 검찰독재라는 광풍 앞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촛불 같은 것이다. 이런 현실 인식과 이분법적 습속에 젖어 있기에 정의를 자신들이 독점한 듯 굴 수 있고 같은 일을 해도 내 편이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우길 수 있고, 언제나 핍박받는 소수로 자처할 수 있는 것이다. 입으로는 소통과 공존을 다짐하고, 그 필요성도 모르지 않지만 상대방을 공존의 대상보다는 척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적으로 볼 때가 훨씬 많다. 지난 20여 년을 지나오면서 적어도 우리 사회의 화해와 소통의 문제에서 진보가 보수보다 앞선 자세를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오히려 상대방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부추기고 조롱하는 일이 훨씬 잦았다. 혐오는 혐오를 낳았고 증오는 더 큰 증오로 돌아왔다. 그런 대결적 행태가 낳은 극단적인 사건이 백주 대낮에 벌어진 정치인에 대한 테러 사건이다. 그런 맥락에서 노무현 참여정부 이후 20여 년을 '진보 반동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권력 만능주의와 정서적 급진주의에 빠져 갈등과 대결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권력을 잡으려 했던 진보 퇴행의 시대, 집권 기간 동안 진보다운 의제 설정이나 문제 해법을 보여주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삶을 더 어렵게 만든 진보 무능의 시대, 조국 사태와 박원순 사건에서 단적으로 드러난 것처럼 자신들에게 적용하는 잣대와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잣대가 다른 진보 위선의 시대. 이 모든 것을 묶어 '진보 반동'이라고 부른다고 강준만이 달리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강준만은 '진보 반동의 시대'에 이 길이 진보의 길이 아니라고, 진보 당신들이 가는 길이 바른 방향이 아니라고 일관되게 말해왔다. 보수 세력이 더 우둔하고 더 퇴행적이고 더 몰가치적이라고 해서 진보가 저절로 더 나아지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선거에서 이기는 것으로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윤석열 정권 등장이 진보에 대한 보수의 우위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지난 22대 총선에서 진보 세력이 승리했다고 해서 진보 반동의 정당성이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노동과 환경의 가치를 말하던 녹색정의당이 20년 만에 원외 정당으로 몰락하고, 더 많은 한을 가지고 더 강한 복수를 말하는 정당이 진보의 한 블록을 확보하면서 원내 제3당의 위치를 차지한 현실이야 말로 '진보 반동'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이제는 전설로 기억되는 <인물과 사상>이 막을 내린 2005년 이후 '후기 강준만'과 '진보 반동의 시대'는 겹치고 병행한다. 강준만은 그 '진보 반동의 시대'에 진보의 위선과 퇴행, 허위의식과 무능을 끊임없이 고발해 왔다. 그늘에 숨지 않고 얼굴을 드러내고 자기 이름 석 자 명토 박아서 고발장을 썼다. 그 덕에 '배신과 변절'이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지금 받고 있는 홀대와 푸대접은 강준만이 '내부고발자'라는 반증인 셈이다. 강준만은 진보 진영의 문제를 주로 지적해 왔다. 진보에 뿌리를 둔 '진보 전문가'로서 그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보 진영이 세 번째 집권한 문재인 정권은 강준만 입장에서는 '진보 반동'이 한층 극심해진, 더는 진보라는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가짜 진보의 시대다. 그 시대에 내부 고발자 역할은 한층 더 격렬한 형태로 진행되었고 강준만을 바라보는 진보의 눈길 역시 그에 비례해서 더욱 차가워졌다. 진보는 강준만을 외면하고 무시하려는 반면, 보수는 진보를 공격하는 일회용 소재로 이용하려 할 뿐이다. 거의 검토되거나 논의된 바 없는 '내부 고발자' 강준만의 모습을 살펴보려는 것도 이 책의 목적 가운데 하나다. 2. 강준만은 '소통 전도사'다. 대략 2005년부터 '독설의 전사'에서 '소통 전도사'로 변신했다. 10:0의 승자독식이 아닌, 서로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51:49의 지혜를 나누자고 말해왔다. 누구보다 독한 언어로 남을 공격하고 공격을 받기도 했던 사람인데 진영 간 소통을 위해 자신의 당파성까지 포기한다고 선언했으니 강준만의 호소를 귀 기울여 들을 만도 하건만 '소통 전도사' 모습은 대중들에게 스며들지 못했다. 오히려 소통을 말할수록 그의 존재감은 줄어들었다. '소통'을 말하기 위해 '진보 싸가지론'을 들고 나오기도 했는데 소통은 온데간데없고 '싸가지'라는 말만 남았다. 사람들은 짐짓 이 사람 글을 외면한다. 글만 아니라 사람도 모른 체하기 일쑤다. 강준만의 글이 불편하고 강준만의 존재가 거북한 것이다. 새천년을 몇 달 앞둔 지난 1999년 7월 당시 한일장신대 교수 김성기는 이렇게 일갈했다. "언론학회니 사회학회니 하는 허다한 지식인 모임에서 단 한 번도 그의 주장을 토론거리로 삼지 않은 것은 명백한 직무 유기다. 그에게 동의하느냐 여부는 별개다. 1990년대 지식인이라면 들뢰즈나 부르디외를 논하기 전에 강준만을 먼저 논해야 한다"<시사저널 1999년 7월> 그런 모습은 '후기' 들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전기' 강준만의 고립과 단절이 자발적인 것이었다면 '후기' 강준만의 고립과 단절은 강요된 느낌이 강하다. '전기' 강준만을 불만에 찬 주변부 지식인 정도로 치부했다면 '후기' 강준만은 한물간 지식인으로 깔아뭉개려 든다. 그런 태도에는 진보, 보수 가릴 것이 없다. 어떤 인터뷰도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숨기지 않았지만 자신을 표현하는데 서투른 것이지 언론 탓을 할 일은 아니다. "언론과 인터뷰하지 않는 걸 원칙으로 삼고 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나를 바라보는 언론의 고정된 '프레임' 때문이다. ... 나는 인터뷰를 몇 번 해보면서 그 어떤 매체도 내 주장의 내용에 초점을 맞춰 주진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 그래서 나는 절대 인터뷰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해 봐야 나만 손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노무현과 국민사기극 77쪽> 필자는 2023년 봄 학기 서울 시내 한 대학 미디어학부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35명의 수강생 가운데 강준만이라는 이름을 아는 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올해 초 언론사에 입사한 기자 다섯 명에게 강준만을 아느냐고 물었는데 이름을 들어봤다는 사람은 한 명, 강준만 책을 읽어봤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김대중-노무현 두 진보 대통령을 만드는데 기여해 킹 메이커라는 말을 들었고 지금까지 300권에 가까운 책을 썼다.* <김대중 죽이기> 같은 수십만 권이 팔린 베스트셀러 작가였고 지금도 정기적으로 일간지에 칼럼을 쓰고 일 년에 서너 권씩 책을 내는 '현역'이지만 강준만은 잊혀진 이름이 되고 있다. *논문 검색 사이트에서 강준만 이름으로 검색되는 책은 277권, 논문은 537편으로 나온다. 강준만을 잊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식인의 지식인'으로 불렸던 그의 존재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성역과 금기를 타파'하고 '성찰과 소통'을 말해온 '지식인다운 지식인'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독설가, 친절한 지식인, 오지랖 넓은 동네 아저씨, 냉철한 싸움꾼, '전북대학교 칸트' 등 강준만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 있지만 딱 이것이다 싶은 표현은 듣지 못했다. 강준만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사진을 찾기 어려운 것처럼 강준만에게 딱 맞는 강준만론을 찾기 힘들다. 남들에게 자신을 보여주는 데 인색하고 자신을 남들에게 어떻게 보여야 될지 잘 모른다. 강준만의 본래 모습을 찾아주는 것도 이 글의 목적이다. 3. 한 지식인의 30년이 훨씬 넘는 노정에 대해서 한 사회가 마땅히 표해야 될 예우가 있다. 강준만 생각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1인 봉쇄 수도원의 수도사'처럼 살고 있다. 돈 앞에서 무릎 걸음을 하지 않았고 권력 앞에서 굴신하지 않고, 고립을 피해 연대를 구하지 않았다. 자신의 존재감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모를 리 없지만 내 자리가 왜 이리 작고 초라한 것이냐고 투덜대지 않는다. 빛나던 자리에 다시 오르겠다고 애쓰는 것 같지 않고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왕년에 말야' 같은 투의 말을 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 사람의 이야기를 정리할 법도 하건만 제대로 모양을 갖춘 '강준만론'이 없다. 변명이 든, 비판이든, 예찬이든 강준만의 삶은 기록되고 정리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래야 마땅할 듯한데 그런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 사회, 특히 지식인 사회가 참 야박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딘 붓을 가진 사람이 먼저 나서기로 했다. 강준만에 대한 연구가 그리 많지 않고, 그리 많지 않은 연구들도 대부분 2000년대 초반, '전기' 강준만에 집중되어 있다. 저널룩 <인물과 사상>이 마지막으로 나온 2004년 말까지다. '전기'를 빼고 강준만을 말할 수 없지만 이 책에는 가급적이면 그 이후 강준만을 많이 담으려고 했다. 강준만을 만나지는 않았다. 말보다 기록에 의지해 쓰는 글의 미덕을 기대했다. 자기 생각에 대해서는 차고 넘치도록 글을 써 놓았으니 무슨 생각을 해왔는지 알고 싶으면 글을 보면 되는 일이었다. 자료가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자료가 너무 많은 게 문제였다. 안 한다 안 한다 했지만 인터뷰 기록도 적지 않다. 궁금한 것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물을 만큼 물었다. 묻는 사람에 따라 답이 달라질 사람은 아니다. 대신 강준만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들- 지인, 제자, 동료 교수, 취재 기자, 시민단체 관계자, 출판사 관계자, 정치인-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다. 집필을 시작하면서 강준만에게 문자를 보내 당신에 대해 책을 쓰기 위해 주변 지인들에 대한 취재를 할 것이라고 알려줬다. 강준만은 취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자 불편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강준만의 모든 저작과 기록을 검토하지는 못했다. 정치 비평서, 역사서 중심으로 책을 봤고 강준만 관련 논문을 최대한 찾아 읽었다. 언론 인터뷰는 거의 빼놓지 않고 봤지만 못 본 자료, 놓친 기록도 적지 않을 것이다. 수백 권의 책을 쓴 사람이니 '당신이 그때 거기서 이런 말 하지 않았느냐'고 공격하자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강준만 입장에서도 '내가 거기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그것도 읽지 않았느냐'고 반박할 수 있다. 예전의 일을 들어 오늘의 자신에 대해 말할 때 난감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강준만의 그 말을 기억하면서 이 책을 썼다. '어제의 말'로 '오늘의 강준만'을 비판하지 않으려고 했고 하나의 사실을 들어 강준만의 열 가지를 설명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한 줄의 글로 한 권의 책을 평가하려는 편협함과 조급함을 피하고 싶었지만 과연 그런 다짐을 제대로 지켰는지 장담하기는 어렵다. 그 부분은 독자들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지식인이라는 말이 남루해진 시대에 그 남루한 단어를 부여잡고 살아온 사람이다. 글 쓰는 일이 초라해지고 글이 무력해진, 대중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움츠러들지도 기죽지도 않고 글을 써왔다. 글의 힘을 믿고 글 무서운 것도 안다. 그런 점에서 영락없는 지식인이다. 글은 무기이자 굴레였고 자신을 세상과 이어주는 유일한 연결 고리였다. 핸드폰 안에 모든 정보가 담겨 있고 클릭 한 번이면 사는 데 필요한 지식을 곧바로 불러낼 수 있고 그래서 내가 남보다 많이 안다고 감히 말하기 어려운 세상에서 지식인의 도리와 삶의 자세를 생각하게 하는 삶이다. 강준만의 삶을 통해 지식인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었다. 디자인 : 채지우
왜 이 사람에게 주목할까 지금 들어도 기억이 나는 광고 문구를 쓴 유명한 카피라이터였고 30대 나이에 대기업 임원이 됐고 여성으로 숱한 최초 기록을 세웠다. 자기 발로 회사를 나온 뒤 책방을 열었고 잘 팔리는 책을 썼다. 올해에만 쉰 번 넘게 강연을 했고 강연 일정이 줄줄이 잡혀 있다. 자랑할 만한 이력이지만 그것만으로 이 사람의 존재감을 설명하기 어렵다. 승진하면 승진했다고, 회사를 그만두면 그만뒀다고 기사가 나왔다. 책방을 연다고, 책방을 열었다고, 책방 연 지 1년이 됐다고, 5년 됐다고 인터뷰를 한다. 올 8월 책방 개업 7년이 됐을 때도 어김없이 기사가 나왔다. 기사가 쏟아지는 것은 대중들이 이 사람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고 이 사람 역시 말할 수 있는 콘텐츠가 있다는 뜻이다. 지난달 25일 오후 약속한 것보다 한 시간 일찍 서울 강남구 선릉역에서 멀지 않은 ‘최인아책방’에 도착했다. 책방은 선릉역 부근 대로변에 있지만 그 앞을 두 번이나 지나쳤다. 길치인 데다 초행길인 탓도 있지만 책방을 알려주는 간판이 작아도 너무 작았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책방 간판이 아닐까 싶었다. 건물 1층이 아닌 4층에 있고 엘리베이터를 타야 갈 수 있으니 길을 가다 우연히 들를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여기에 오려면 이 정도의 수고는 감수하세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책방은 70평 남짓인데 천장이 높아서 훨씬 넓고 훤해 보였다. 화려하고 커다란 샹들리에나 그랜드 피아노 등이 눈에 띄었지만 이 책방을 두고 들었던 온갖 수식어에 비하면 수수했다. 책방 곳곳에서 사람의 손길이 느껴졌다. 책의 선정과 분류, 진열과 배치에 공을 들인 게 한눈에 보였다. 서가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가 다시 꽂을 때도 아무렇게나 꽂아서는 안 될 거 같았다. 책방 안쪽에 회의실로 사용하는 듯한 공간이 있었다. 이 사람이 비스듬히 등을 보이고 뭔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조금 일찍 왔습니다’라고 말을 건네려다 꿀꺽 삼켰다. 자기 영역 안으로 누군가가 불쑥 들어오는 것은 그리 달가워하지 않을 거 같았다. 조금 더 책방을 둘러보다가 약속 시간 10분 전쯤 책방 직원에게 최인아 대표와 만나기로 한 아무개라고 소개하고 그 직원의 안내를 받아 그 회의실에 들어갔다. ‘미스 최’에서 ‘최인아 부사장’까지 화장기 없는 얼굴이 맑았다. 낯색을 꾸미거나 다소 수선스럽게 초면의 방문자를 환영하는 것은 이 사람 스타일이 아니었다. 말과 글이 그렇듯이 태도에도 군더더기가 없었다. 이화여대를 졸업하던 1984년, 제일기획에 카피라이터로 들어갔을 때 ‘미스 최’라고 불렸다. 질문을 던지는 것도 조심스럽게 만들 만큼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이 사람이 미스 최라고 불렸다는 것도, 사람들이 감히(?) 이 사람을 미스 최로 불렀다는 것도, 이 사람이 그런 호칭을 견뎌냈다는 것도 상상하기 힘들었다. 호칭만 그렇게 불렸던 것이 아니다. 선배들 책상을 닦고 보리차를 끓이는 것도 이 사람의 일이었다. 똑같이 대학을 졸업했는데도 남자 동기들보다 직급이 낮고 월급이 적었다. 남자 동기들이 연수원에서 신입사원 합숙 교육을 받을 때 이 사람을 포함한 여자 동기 4명은 회사 회의실에서 따로 교육을 받았다. 남녀는 당연히 동등한 존재라고 배웠고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차별을 경험한 적이 없는 스물세 살 여성에게 세상은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달랐다. 그런 시절과 호칭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이화여대는 페미니즘의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잖아요. 여성학 과목을 두어서 가르치기도 했고 선배들은 싸우라고 가르치는 편이었어요. 근데 저는 그 방식이 효과적이지 않다고 판단을 한 거죠. 남자들 100명 있는 곳에 혼자 뛰어들어갔는데 이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는 게 과연 나한테 이로울까, 차별을 극복하는 효과적인 방법일까? 그건 아니라고 판단을 했고 어차피 시스템이 이렇게 돼 있는데 하루아침에 고치기 어렵다. 그 사람들이 시스템을 고쳐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야 이게 고쳐진다.” 입사한 지 8개월 됐을 때 회사 대표 앞에서 당차게 왜 같이 입사했는데 남자 동기보다 월급이 적고 대우가 다르냐고 항의하기도 했지만 미스 최가 아니라 최인아로 대접받기 위해서는 능력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 조직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꼭 필요한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이 조직에 손해라는 것을 그들이 깨닫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본 것이다. 당신은 카피라이터로 재능이 없는 거 같다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죽으라고 노력했고 조직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입사한 지 7년 만에 쓴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라는 여성복 광고 카피는 이 사람의 고민이 그대로 담겼고 그 시대 젊은 여성들의 요구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1992년 낸 〈프로의 남녀는 차별되지 않는다〉라는 책에서 “한 번도 있어 본 적이 없는 일을 할 때는 점진적으로 해야 한다는 게 철칙”이라고 썼고, 양적인 변화 없이 질적인 변화는 없다고 믿는다. 그런 사람에게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말하는 페미니즘은 어떻게 보일까. “커뮤니케이션은 내가 하는 얘기가 상대방에게 가서 공감을 얻을까? 이게 기본 중의 기본인 것 같아요. 내가 저 경쟁자와 경쟁에서 이긴다는 거는 많은 경우는 1 대 1의 게임이 아니라 늘 심판관이나 보는 사람들이 우리들 손을 들어줘서 그 결과로 내가 이기게 되는 것 같아요. 페미니즘이라는 게 여자들끼리만 하는 얘기가 아니고 남자라는 상대가 있잖아요. 우리가 뭔가 지금보다 더 나은 성취를 하고자 한다면 이 사람들의 협조 내지는 동의, ‘그래 그게 맞겠어’라고 하는 게 저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이쪽에서 많이 얘기되는 경우들을 보면 이거에 대한 고려가 너무 없지 않나…” 1호가 된다는 것의 의미 연차만 차면 되는 대리 진급 때도 50명 입사 동기 중 이 사람만 빠졌고 일 잘한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차장 진급은 늦었다. 숨을 헐떡이면서 남의 뒤를 따라가던 사람이 어느 새인가부터 선두에 나서더니 초고속 승진을 이어갔다. 입사한 지 16년 만인 2000년 기업의 별이라는 임원이 되었다. 만 38살, 삼성그룹 공채 출신 첫 여성 임원이었다. 기뻤느냐고 물었더니 물론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기쁘지도 않았다고 했다. “저는 회사에서 일을 할 때 내가 받는 것보다 내가 내놓는 게 조금이라도 더 있을 때 제가 당당하다고 느끼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래서 임원이 됐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처음 한 생각은 내가 저 자리에 갈 만한가. 두 번째는 사람들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 내가 택도 없는데 여자를 시켜야 되니까 남자들이 가져야 될 기회를 빼앗고 쟤가 갔구나 이렇게 혹시 생각을 하지 않을까. 저는 그런 게 신경 쓰였지 자리 자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삼성 공채 1호 여성 기록은 최초 전무, 최초 부사장으로 이어졌다. 한국일보 선임기자 김지은의 표현대로 “후배 여성 세대의 실재하는 희망”이 되었다. 1호가 된다는 것은 남들보다 더 먼저 어떤 자리에 올랐다는 것 이상의 의미라고 설명했다. “어느 분야에서 최초로 누가 뭘 했다고 하는 거, 1호가 나왔다고 하는 거는 단지 그게 ‘2호 3호보다 순서가 빨랐어’의 뜻이 아니고 그 사람이 그 일을 해 보이기 전까지는 그게 아무도 가능하다고 여기지 않았던 저기에 길이 있다라고,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곳에 길을 낸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뭘 잘했다 이 얘기가 아니에요… 진급을 했을 때 뒤에 오는 후배들에게 ‘저게 가능하구나, 길을 하나 보여줬구나’ 그런 생각은 했죠. 제가 상무가 되고 전무가 되는 게 대단해서가 아니라 여성들이 그럴 기회를 갖지 못했던 시절이 길었기 때문에…” ‘내가 잘하면 여자 전부가 잘하는 것이었고, 내가 기대에 어긋나면 내 후배들까지 희망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거기에서 멈춰 서지 않았다. 여성이라고 차별받는 것도 싫지만 특별한 배려도 원하지 않았다. ‘내가 여자니까 뭘 더 받아야 돼’라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여자를 잊어라, 우리는 여자로 일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일하러 왔는데 여자다, 조직의 호의에 기대지 마라’ 여성들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이다. 이 사람은 여성이라는 갑주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 갑주 없이도 잘 달릴 수 있었고 어쩌면 그런 갑주를 고집하지 않았기에 더 빨리 달렸는지도 모른다. 조직의 리더가 되었을 때 성별을 묻기 전에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라고 요구했다. 자발적으로 선택한 퇴직 2012년 12월 제일기획을 그만뒀다. 그 6개월 전 회사에 사직 의사를 밝혔다. 삼성 그룹에서 여성 사장이 나와야 한다는 삼성 회장 이건희의 언급이 나온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사장이 나온다면 그 자리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라고 말을 들을 때 다 털고 나왔다. 아직 50대 초반, 입사한 지 만 29년이니 30년을 채우고 싶은 마음인들 없었을까. “저는 늘 가치를 내놓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공짜로 뭘 거저 얻고 이런 거 별로 원치 않아요. 나는 거저 받고 뭐 안 생기나 이거는 제가 당당하지 않았어요. 내가 뭔가를 했고 그 결과로 제가 속한 조직을 좀 낫게 하는 것. 그럴 때 저는 좀 이렇게 어깨가 펴지는 것 같은 인간이에요. 그래서 그만두는 게 어렵지 않았던 게 시시때때로 저한테 묻거든요. ‘너는 지금 이거 괜찮니? 이거는 네가 뭐 좀 잘한 것 같니?’ 그 무렵에는 온몸으로 느낌이 왔습니다. ‘이제 다 한 것 같다’” 그 무렵 광고업계의 화두는 디지털 전환이었다. 내가 사장이 된다면 그 일을 잘할 수 있을까? 내가 그 일을 하고 싶어 하나? 둘 다 아니었다. 그러면 결론은 분명했다. -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기업에서 임원으로 10년 이상 지내셨잖아요. 돈만이 아니라 누리는 게 많죠? 그걸 10년 이상 하면 그러면 더 내려놓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저는 그런 것보다 제가 제대로 있는 게 더 중요했어요. 기사 딸린 차를 타는 거 편하고 좋죠. 근데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하지 않았거든요. 내가 운전하면 어때? 그때 이런 일도 있었어요. 직급마다 나오는 차가 다른데 부사장이 되면 그때 에쿠스를 줬어요. 근데 저는 에쿠스 안 탔어요. 그 아래 등급인 제네시스를 탔어요.” - 일부러? “일부러. 그건 제 선택이었어요. 왜 그랬냐? 에쿠스가 너무 버거웠어요. 제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 중에 하나가 저한테 어울린다 안 어울린다, 나랑 맞는다, 안 맞는다인데 그 이따만한 에쿠스가 저한테 안 어울리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나 그거 안 받겠다. 대신 제네시스에서 제일 높은 거 줘라.” 지독한 에고이스트 같다고 했더니 맞다고 했다. 이기적인 게 아니라 자신에게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과 자신이 속한 조직에 조금이라도 누가 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사적인 이유로 공적인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골프를 안 치니 임원들에게 나오는 골프회원권 대신 호텔 헬스클럽 회원권을 달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골프 회원권은 어쨌든 회사에 필요한 접대에 쓰이는 것이지만 헬스클럽은 완전히 개인용 아니냐는 것이다. 이 사람 퇴임식 동영상은 인상적이다. 동영상은 “차갑다, 차갑다 그리 말해놓고 울 때는 다 그 앞에서 울었다”는 자막으로 시작된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특히 후배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보여주는데 2분이면 충분했다. 존재감이 뚜렷했으니 소개가 장황할 필요가 없는 거다. 회사에서 특히 후배들 앞에서는 울지 않았다는 사람이 그날 그 동영상을 보고는 울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진급해서 임원이 되고 조직의 관리자가 되었을 때 선배가 되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냉정하다는 말을 들었고 스스로 남에게 곁을 주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사람이 후배들 일이라면 열일 제치고 나섰다. 자기가 낳은 아이들도 아닌데 내가 왜 이렇게 저 후배들 때문에 속을 끓이고 스트레스를 받나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최선을 다한 것은 관리자로서 자신의 일이기도 했지만 누군가를 도울 때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돌아보니까 내가 내 일을 잘해서 그걸로 제 값을 하고자 하고 살았는데 다시 보니까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돼서 상대방 얼굴이 펴지고 웃는 걸 볼 때 나도 기쁜 사람이구나라는 거를 알았어요. 임원 발표가 나서 어디 사진이 실리고 그걸 기쁘다고 표현하고 싶지 않았어요. 저는 좀 계속 괜찮은 인간이고 싶은 것 같아요. 그게 때로는 선배 역할에서도 나타날 때도 있었겠죠? 그래서 후배들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그걸 피하지 않고 끌어안으면서 스스로 괜찮아지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퇴사 이후 정치권에서 영입 제안이 있을 때나 다른 기업체 스카우트 제안이 있을 때 중요한 판단 기준이 후배들의 시선이었다. 이런 사람이니 후배들이 차갑다 차갑다 하면서도 울 때는 이 사람 앞에서 운 것이다. “정치권에서 두어 번 영입 제안이 있었어요. 저도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는데 내가 이렇게 하는 게 나를 바라봤던 내 후배들에게 괜찮은 결정으로 보일까? 그랬는데 아닌 것 같았어요. 그들이 창피하게 생각할 것 같았어요.” 내려서고 멈추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직장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더 넓은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자신의 시간과 열정을 쏟아서 스스로를 더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일이 회사 밖에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이다. 그것이 이 사람이 가진 최대의 장점, 분별력이다. 개인 이메일 주소가 inotstay. 나는 멈추지 않는다는 뜻이고 실제로 이 사람은 멈추지도, 멈출 생각도 없었다. 최인아 책방의 탄생 - 생각의 숲을 이루다 제2의 인생을 모색하던 이 사람 앞에 놓인 몇 가지 답안지, 예를 들면 공부의 길, 창업의 길, 공직의 길 가운데 책방 창업은 없었다. 온라인 서점에서 구입한 책값으로만 3천만 원 넘게 썼고 늘 책을 곁에 두고 살아왔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임에 틀림없지만 책방 창업은 다른 문제였다. 뜻이 맞는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느닷없는 깨달음이 오듯 책방이 떠올랐고 여덟 달 후인 2016년 8월 책방의 주인장이 되었다. “우선 내가 좋아하고 재미있는 일, 두 번째, 나만 재미있고 끝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게 도움이 되고 의미 있는 일, 세 번째, 안 해봤지만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 그 세 가지가 맞는 게 저한테 책방이었고요.” 지인들은 책방은 돈이 안되는데 망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고 했지만 돈은 이 사람에게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책방을 열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돈을 벌려고 했으면 책방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자는 아니지만 노후를 보낼 정도의 돈은 있어요. 그거보다 더 많은 돈이 생긴다. 그럼 내가 기쁠까? 저는 별로 그럴 것 같지 않아요. 싫지는 않겠지만 그게 저를 더 괜찮은 인간으로 만들어줄 것 같지는 않아요.” 회사라는 울타리를 넘어선 뒤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이 사람 눈에 비친 우리 사회는 비정상적인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어린아이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의대 진학을 준비하는 일이나 젊은이들이 열심히 일하는 것 자체를 백안시하는 풍조를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배울 만큼 배우고 가질 만큼 가진 사람들이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며 시류에 흔들리는 모습은 위태로워 보였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괜찮은 것인지 스스로 묻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책을 통해서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것이 문제의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책방에는 사람 키보다 높은 액자에 이 사람의 출사표가 적혀 있는데 그 마지막 두 줄은 이렇다. ‘최인아책방’은 책을 통해, 책방을 통해 앞으로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자산인 ‘생각의 힘’을 북돋우고 끌어내며 퍼뜨리고자 합니다. 하나의 생각이 또 하나의 생각과 만나 깊고 다양한 생각의 숲을 이루는 과정을 즐겁게 기대하고 상상합니다. 책방에 자신의 이름 석자를 내걸었다. 어차피 사람들에게 누가 하는 것인지 알려질 테니 ‘최인아’라는 당신 이름을 책방 이름으로 쓰자는 동료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만나는 곳이기 때문에 서점이 아니라 책방이다. 노래방, 찜질방이 그렇듯 방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여기에 모여 서로의 생각을 털어놓고 상대방의 이야기도 듣기를 바란다. 북 토크도 하고, 공연도 하고, 강연을 열기도 하는 이유다. 매달 한 권씩 책을 추천하고 보내주는 회원제 북클럽도 운영한다. 〈최인아책방〉은 이제 입소문을 통해 책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러야 될 곳이 되었다. 책 한 권 사서 바로 나가는 사람은 없다. 이 책 저 책 뒤적이면서 한두 시간을 보내고 그러는 동안 책향기에 몸이 젖는 경험 때문에 이곳에 한 번 발을 들인 이는 두 번 찾고 세 번 찾는다. 책방 자리는 연회장이 있던 곳이었다. 원래 있던 그랜드 피아노를 그대로 두는 조건으로 임대 계약을 했다. 화려한 샹들리에도 마찬가지다. 책방 곳곳에 책을 읽고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의자와 소파를 두었다. 여기를 찾는 이들이 우아한 귀족의 저택에서 지식의 향연을 즐기는 느낌을 갖도록 책방을 꾸몄다. 출처: 최인아책방 페이스북 이 책방에는 실용서를 찾아보기 힘들다. ‘생각’을 파는 곳이지 기술이나 노하우를 파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 코너도 없다. 모든 사람들이 같은 책을 읽고 한 방향으로 생각이 쏠리는 것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하룻밤에 읽는 어쩌고 저쩌고 하는 류의 책도 없다. 생각은 시간이 걸리는 발효 과정이기 때문이다. 신간 위주의 진열도 아니다. 나온 지 오래된 책이지만 덜 알려졌거나 더 알려져야 될 책들이 눈에 잘 띄는 곳에 진열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를 것 같다. 일사불란하게 한 방향으로 시간이 흐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제각각 흐르다가 섞이고 굽이치기도 하고 때로는 역류하기도 하지 않을까. 이곳의 책 진열과 배치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여기에 있는 대략 5-6천 권 정도의 책은 개인의 장서 같은 느낌을 준다. 책방 주인장의 지문이 페이지 페이지마다 묻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여기에서 사는 책은 ‘이 책 최인아책방에서 산 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 특별한 책이 되는 것이다. 책을 쓰는 사람이나 책을 펴내는 출판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기가 만든 책이 이 책방 어딘가에 꽂혀 있다면 자부심을 느낄 거 같다. 돈 이야기는 묻지 않았다. 책방을 내는데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매출은 얼마나 되는지, 이익은 나는지, 책방의 지분은 얼마나 되는지 등등. 이런 우아함과 기품을 유지하는 데 도대체 얼마나 돈이 필요한 것인지 궁금하기는 했다. 그런 질문을 통해 뭔가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지만 왠지 그런 것을 묻고 싶지 않았다. 다만 직원 네 명을 포함해 급여가 나가는 사람들이 11명이라는 것, 개업 이후 한동안 괜찮았는데 코로나19로 인해 타격이 커서 매출이 거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지기도 했다는 것, 건물 임대 계약을 갱신할 정도로 유지는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손님으로 오셔서 저하고 가까워진 분 가운데 전업주부 한 분이 계신데 그분이 우리 책방에 발을 디딘 이후에 자기가 많이 바뀌었다고 그래요. 그 말 들을 때 정말 기뻤어요 그럴 때 내 존재가 의미 있고 괜찮다고 느끼는 거 같습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제가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제가 선한 인간이냐?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저는 에고이스트인데 그 ego가 돈 쪽으로 향하고 있지는 않다. 그런 정도에서는 진심입니다.” 지난해 세상을 뜬 이어령은 이곳을 두고 ‘강남의 자존심이자 지식인의 자부심’이라고 표현했다. 글쎄, 책방을 두고 강남의 자존심 운운은 그리 적절해 보이지는 않지만 돈을 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강남’이라는 지역에 돈 아닌 걸로도 돌아가는 곳이 있다는 뜻이라면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겠다. 우리 사회 이대로 괜찮은가요? 지난 4월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이 책을 보고 울었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고 일종의 회심을 경험했다는 수도자도 있다. 제목이 멋지긴 하지만 이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 이대로 괜찮은가요?”라고 해야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위로와 조언도 있지만 우리 사회, 특히 청년들에게 던지는 묵직하고 도발적인 질문이자 고언이다. “왜 저 책을 썼냐 하면 저는 요즘 걱정이 많아요. 우리 사회에서 지금 일에 대해서 퍼져 있는 관점 태도가 괜찮을까? 사회 정치적으로도 그렇고 당사자 개인에게도 그런 관점 그런 태도로 일을 대하는 것이 본인에게 괜찮을까? 제가 돌아보니까 일을 한다는 건 연봉을 받으면서 자기 자산을 쌓아가는 것이기도 한데 근데 그 시간을 저렇게 마치 회사에서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 거지, 최소한을 하면 되는 거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괜찮을까? 이런 질문이 저에게 있었고.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이렇게 생각해 보시면 어때요?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스킬이나 how to가 아닌 소명으로서 일의 본질, 본바탕을 말하려고 한 책이 자기계발서로 분류되는 것이 못내 아쉬운 듯했다. 책 내기로 계약한 지 7년 만에 나왔지만 사실은 이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30년이 넘게 걸렸다. 길지 않은 서문에 ‘1992년 〈프로의 남녀는 차별되지 않는다〉 이후 31년 만에 책을 냅니다’라고 적었다. 30년 넘는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담았다는 뜻이다. 이런 류의 책이 자칫 빠지기 쉬운 ‘내가 해봐서 아는데’의 함정을 건너뛰고 영성과 깨달음까지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눈 밝은 독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우리 공동체에 대한 걱정이 늘어난다는 이 사람에게 당신이 원하는 세상은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꽤 긴 답을 내놨다. “우리들 모두가 신 앞에 책임 있는 하나의 당사자라는 거를 먼저 자각을 하면 좋겠어요. 저는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보는데 우리 사회가 워낙 못 살던 후진국이었기 때문에 앞으로 앞으로만 가다 보니 돌보지 못한 영역이 생긴 것은 맞아요. 그런데 이제 관심이 주로 거기에 가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일을 하지 말자는 게 아니에요. 예를 들면 돌봄 시스템 같은 것은 더 강화 돼야죠. 그런데 ‘내가 두 발로 서겠어, 책임도 내가 지겠어, 그리고 내 주장을 하겠어’라는 자각은 점점 줄어들면서 시스템에 의존하고 이거 해 줘, 저거 해줘 요구하는 것만 강해지는 거 아닌가… 제 어머님이 거동이 불편하세요. 어머님을 보면서 사람이 자기 홀로 서는 것에서 존엄이 시작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게 육체적인 것만 그럴까요? 자기 스스로 서지 않는 그런 상태에서 존엄을 유지한다는 건 참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저는 그런 자각이 좀 분명해지면 좋겠다…” 나의 쓰임새는 무엇일까 동아일보에 객원 논설위원 자격으로 한 달에 한 번 꼴로 칼럼을 쓴다. 외부 필자가 1년 버티기 힘들다는데 2019년 이후 5년째 쓰고 있다. 대장동 사건이 터졌을 때 그 추문에 연루된 법조인들을 질타하는 글을 쓴 적이 있지만 정치적 현안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 일에 자신의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렇다고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치학도였고 한때 유능한 정치부 기자를 꿈꾸었던 사람이다.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 시절 서울역 학생 시위에 참여했고, 1987년 6월 항쟁 당시에도 시위대 안에 있었다. 6.29선언이 나왔을 때 이런 글을 쓰기도 했다. 정말 기뻤다. 카피를 잘 썼다고 받은 칭찬보다 보너스를 많이 받은 때보다 훨씬 기뻤다… 최루탄 매운 연기를 맡으며 시청 앞 데모대에 섞여 한마음이 되었고, 꼴 보기 싫던 권력자가 물러간다는 선언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어느 다방 주인은 이렇게 썼다고 했다. “오늘 차값은 무료입니다” 참 설득력 있는 카피였다. - <프로의 남녀는 차별되지 않는다> 중 2016년 8월 책방 문을 연 직후 그 정신없던 시절에도 광화문 시위에 나갔다. “그전에도 가고 싶었는데 거의 저녁마다 책방에 무슨 행사가 있었어요. 그래서 시간이 계속 겹쳐서 못 가다가 거의 끄트머리쯤에 ‘아유 내가 이거 끝나기 전에 한 번은 가야 된다.’ 이래서 광화문에 나갔어요.” 세 시간 반 가까운 대화 중에 이 사람이 밸런스를 잃은 듯한 모습을 보인 유일한 대목은 정치에 대해 말할 때였다. 딱 필요한 만큼만 목소리를 내던 사람이 이 대목에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분노와 실망이 앞섰을까, 거친 말이 거침없이 나왔다. “아니 그러니까 말이 좋아 당론이지 거수기 노릇을 하는데 저는 그게 궁금해요. 저기 앉아 있는 저 인간들의 내면이, 머릿속이… 공부도 할 만큼 했고 가진 것도 있고 근데 그런 인간들이 선거 때마다 줄을 서서 하라는 대로 움직이고… 저렇게 살고 싶나. 그게 저는 이해가 안 가니까 거기에 뛰어들 수가 없는 거죠.” 소설가, 교수, 기자로 조금씩 꿈이 달라졌지만 글을 쓰는 일이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살아오면서 후회되는 것이 글을 많이 쓰지 못한 것이다. 앞으로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려고 한다. 글이 정교하고 말에 민감했다. 행복했다고 쓸 법한 곳에 기쁘다고 쓴다. 기쁘다와 행복은 분명하게 구별되는 단어인 게다. 대화 중에 이 사람이 가장 많이 쓴 단어는 ‘생각’이라는 말인데 성찰, 사색이라고 바꿔 말하지 않았다. 어감 이상의 차이가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거대 담론을 말하지 않았고 추상적인 단어도 별로 쓰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정의, 평화, 자유, 평등, 민주주의 같은 말들은 듣기 힘들었다. 대신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단어를 입에 올리고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해 말한다. ‘일’이라는 단어가 대표적인 예이겠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고 책임질 수 있는 만큼만 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성큼성큼’이 아니라 ‘한 발 한 발’ 움직이는 점진적 개혁주의자의 면모가 뚜렷했다. 완성된 초고를 이 사람에게 보냈다. 사실 관계가 다르거나 맥락을 오독한 부분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했다. 자기 생각을 꼼꼼하게 달아 원고를 다시 보내왔다. 표현을 바꿔 달라는 것도 있었고 군더더기를 덜어내 달라는 것도 있었고 어떤 부분은 빼 달라고 했다. 이 사람 의견을 반영해 글을 손보고 나니 글이 한결 가벼워지고 의미가 또렷해졌다. 물론 이 사람 의견을 모두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 이 사람이 ‘글의 고수’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여성으로도 그렇고 직장인으로도 그렇고 자영업자로서도 예외적인 성취와 성과를 보인 사람이다. 때때로 이 사람의 이야기가 다소 멀게 느껴진 것도 그런 예외적인 성취 때문이겠다. 다른 사람보다 피의 온도가 1도 정도 낮으려니 싶었는데 말을 하다 보니 피가 뜨거운 사람인가 싶기도 했다. 유쾌한 만남이었고 많이 웃었지만 내심으론 긴장을 늦추기 어려웠다. 2006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800킬로미터를 36일 동안 혼자 걸었다. 오로지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앞으로 자신이 어디에 쓰이면 좋을지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가라앉을 거 가라앉고 떠오를 거 떠오르고 흘러갈 거 흘러간 뒤에 남은 마음을 보았고 그때 절대자의 음성을 들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점, “사안의 핵심을 파악할 줄 안다는 것, 그것들을 글로 쓰고 말할 수 있다는 것, 듣기에 괜찮은 목소리를 가졌고 전달력이 괜찮다는 것”을 어떻게 쓸지는 전적으로 이 사람에게 달렸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와 아무것도 안 할 자유’가 있으니까. 다만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고자 하는 욕망은 무슨 일을 하든 포기하지 않을 사람이다. 녹취 정리 : 박상은 인턴
뼈가 거친 외교관 한국은 꽤 오랫동안 핵개발에 관심을 가졌다. 박정희 정권 당시 핵개발을 추진하다 미국의 반대로 좌절된 것은 잘 알려진 일이지만 그 이후에도 한국원자력연구원을 중심으로 핵에 대한 연구는 계속됐다. 1980년대 초반 플루토늄 추출 실험을 했고 2000년에는 0.2g의 고농축 우라늄을 확보했다. 정부 안에서 대통령을 비롯해 몇 사람만이 아는 극비 사항이었는데 2004년 미국이 이 사실을 눈치챘다. 외교부 장관 반기문은 “핵폭탄이 터졌다”고 표현했다. 미국과의 관계 악화는 말할 것도 없고 유엔 차원의 제재로 이어질 수 있는 심각한 문제였다. 정부는 연구원들이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벌인 일이라며 그 의미를 축소하려 했지만 연구원 몇 명의 일탈 행위로 볼 사안은 아니었다. 미국은 한국 정부가 비밀리에 핵개발에 착수한 것으로 단정짓고 이 문제를 유엔 안보리에 회부하겠다고 압박했다. 당시 그 사건이 미친 파장은 알려진 것 이상으로 크고 깊었다. 국제원자력기구, IAEA가 네 차례에 걸쳐 조사단을 파견하고 한국 정부가 관련자 문책, 장비와 시설의 봉인과 폐기 등 미국 정부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고서야 문제는 겨우 가라앉았다. 그때 미국의 철퇴를 맞은 이후 한국은 핵개발 의지를 완전히 접었다. 그 기억은 한국, 특히 외교안보 정책결정 과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트라우마가 됐다. 북한 핵 보유가 기정사실이 되면서 우리 사회 일부에서 자체 핵무장론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은 비현실적으로 들린다. 미국의 반대를 넘어설 수 있겠느냐, 핵 개발에 대한 국제 사회의 제재를 견딜 수 있겠느냐, 핵무장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있느냐 등등의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때 기억이 일종의 트라우마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핵은 왜 해결되지 않는가, 미국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한국 외교는 왜 존재감이 약한가, 당신이 말하는 잠재적 핵무장론은 현실성 있는 이야기인가 등의 질문을 안고 지난달 20일 전 외교부 장관 송민순을 만났다. 2004년 그 사건이 벌어진 직후 청와대 안보실장, 외교부 장관 등을 지냈으니 그때 이야기부터 들었다. - 2004년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핵물질을 개발하려던 사실이 드러나서 난리가 나지 않았습니까. 그때 경험이 정부의 핵 정책에 크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그건 출발점부터 다른 겁니다. 그땐 비밀리에 하자는 거고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공개적이고 합리적인 절차에 의해 하자는 겁니다. 비밀리에 하는 것은 요즘 세상에 될 수가 없는 겁니다. 미국이 지금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공개적으로 테이블에 올려놓아야 우리가 언제든지 그 불씨를 다시 살릴 수 있는 거지 한번 철퇴를 맞았다고 해서 포기하면 안 되는 거지요… 내가 요새 알아보니까 그 뒤로 원자력 관련 연구원에서 관련 시설이나 장비를 깡그리 치웠다고 하던데 그러면 안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정식으로 해야지요.” 이름이야 많이 들었지만 얼굴을 마주한 것은 처음이다. 자신을 ‘뼈가 거친 사람’이라고 표현했는데 그 말이 절묘하다 싶게 어울렸다. 진지함과 고집스러움이 섞인 얼굴에 웃음이 다소 인색했다. 투박한 표정, 경상도 억양, 말꼬리를 흐리는 어투는 세련된 외교관이라기보다 야전에서 뼈가 굵은 노병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5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런 사람이야말로 외교관이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 사람을 동맹국 외교관이라고 생각하면 큰코 다친다’ 경남 진양에서 태어나 마산고등학교를 졸업했고 1968년 서울대학교 독문과에 입학했다. 시위를 하다 경찰에 붙잡힌 적도 있지만 ‘집안의 기둥’ 역할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니 데모에 앞장서기 힘들었다.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강원도 춘천에서 탄약병으로 근무하면서 매일 같이 총알 숫자를 세는 게 일이었다. 내가 왜 이런 일로 청춘을 보내고 있나 싶었다. 나라가 분단되지 않았다면 군대에 올 리도, 총알이나 헤아리며 살 리도 없었다. 진한 아카시아 향기가 코를 찌르던 어느 날 외교관이 되어 분단을 극복하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걸기로 결심했다. 복학 후 외무고시 준비에 매달렸다. 외무고시는 어학에 대한 재능을 살리는 일이기도 했고 타고난 능력 말고는 기댈 곳이 거의 없던 처지에 입신 양명할 수 있는 명분도 갖춘 선택이었다. 1975년 당시 외무부에 26명의 ‘호랑이 새끼’들이 외무고시라는 관문을 뚫고 들어갔다. 그 가운데 마산 출신의 억센 사투리를 쓰는 이 사람도 있었다. 처음부터 잘 나갔던 것은 아니었다. 분단 도시 서베를린 총영사관이 첫 임지였다. 그다음은 인도 대사관, 그다음은 외교부 서남아과에서 일했으니 외교부에서 말하는 워싱턴 스쿨이나 도쿄 스쿨과는 거리가 멀었다. 외교부 서남아과에서 근무하던 1983년 아웅산 테러 사건이 발생했고 그때 대책반장이었던 이상옥 차관의 눈에 띄어 비서관으로 발탁되었다. 그 이후는 승승장구였다. 워싱턴 주미대사관으로 발령받으면서 외교부에 들어온 지 10년 만에 이른바 워싱턴 스쿨의 일원이 되었다. 외교부 핵심 보직으로 꼽히는 북미1과장, 북미2과장(안보과장), 북미국 심의관, 청와대 외교비서관, 북미국장, 폴란드 대사, 6자회담 수석 대표를 역임했다. 김영삼 정부에서 청와대에 들어가 김대중 정권으로 권력 교체가 이루어진 직후 외교비서관으로 한미일의 대북 정책 협의체인 소위 ‘페리 프로세스’,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이끌어내는데 일조했으니 외교관으로 주류 중의 주류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다. 폴란드에서 2002년 월드컵 홍보행사 당시 자주 외교를 내세운 노무현 정부 초기 이른바 워싱턴 스쿨은 찬밥 신세였다. 폴란드 대사를 마치고 귀임했지만 외교부 안에 이 사람 자리는 없었다. 한동안 경기도 자문대사로 외곽을 돌았다. 외교부 장관이 윤영관에서 반기문으로 바뀌면서 차관보로 기용됐다. 이후 6자회담 수석대표와 청와대 안보실장, 외교부 장관으로 중용되자 출세를 위해 DNA를 친미에서 반미로 바꿨다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자신은 친미도 반미도 아닌 미국통일뿐이라고 했다. 국내의 평가보다 이 사람에 대한 미국의 평가가 더 흥미롭다. 국방부 부차관보로서 이 사람과 SOFA 협상을 벌였던 미국 측 인사는 이런 내용의 송민순 인물파일을 미국 정보기관으로부터 받았다. “송민순을 미국 동맹국의 외교관이라고 생각하면 너희는 큰코 다친다. 그는 때로는 당신과 미국에 대해서도 적대적일 수 있다. 그래도 이 사람하고 협상을 해볼 가치가 있다. 이 친구는 자기가 한 말을 꼭 지킨다.” 외교부 안보과장으로 주한미군 주둔 협정, SOFA 협상을 벌일 때 지킬 수 있는 것만을 약속하고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켰지만 협상 태도는 거칠었다. 미국 측 협상 파트너들은 군인보다 더 군인 같다는 의미로 커널 송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주한미군하고 미국 고문관들이 그때만 해도 우리 국내 고위직까지 다 연결이 되어 있었어요. 특히 고문관들은 한국에 오래 있어서 한국 사정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하도 세게 미국을 몰아붙이니까 이 사람들이 국방부 장관, 국무총리한테까지 ‘외교부 안보과장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호소를 하는 겁니다. 한 번은 이종구 당시 국방장관이 외교부장관에게 ‘안보과장이 운동권 출신이라는데 그런 사람이 주한미군 문제를 다루는 외교부 안보과장 해도 됩니까’라고 한 적도 있어요.” 미국 측 협상 파트너들에게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한미 미사일 협상 과정에서 미국 협상단이 청와대와 직거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자 “백악관이 청와대를 설득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청와대가 우리들을 설득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나온 이야기는 꽤 유명한 일화다. 역사를 우리 손으로 쓴 기억 - 베이징 6자회담 2005년 제4차 6자회담 공동성명 / 출처 : 연합뉴스 2005년 베이징 6자회담은 한국 외교의 존재감이 두드러졌던 드문 장면이다. 그 회담에서 한국 측 수석대표로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 체제 논의 등 북핵 문제의 포괄적 해결 방안을 담은 9.19 합의를 이끌어냈다. 자기감정 표현에 능하지 않은 사람이 타결 직후 현장에서 “남이 써주던 역사를 우리 손으로 쓰고 있다”고 소감을 밝히고 회고록에도 쓴 것을 보면 당시 보람과 기쁨이 정말 컸던 모양이다. 6자 대화의 두 축은 북한과 미국이었으니 합의를 만들어 낸 주역을 굳이 꼽자면 크리스토퍼 힐과 김계관이다. 여기에 의장국인 중국의 역할과 실무적 능력도 협상 타결에 일조했다. 국내에서도 통일부 장관 정동영이 북한과 막후 채널을 총 가동했고 외교부 장관 반기문도 미국 설득에 총력을 다했다. 그러나 회담 현장에서 마지막으로 골을 넣은 사람은 이 사람이다. 당시 협상에서 최대 관건은 경수로 문제였다. 미국은 경수로의 ‘ㄱ’자도 꺼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때 ‘북한이 경수로를 가질 수 있는 기회의 창은 열어 둔다’는 표현으로 틈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미국 대표단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국과 절대로 반대편에 서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늘 미국과 같은 편에 섰던 사람이다. 그런데 미국이 ‘경수로를 가질 수 있는 기회의 창’이라는 표현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이번에는 미국의 반대 편에 설 수밖에 없다.” 이 사람이 만들어낸 ‘기회의 창’이라는 작은 틈으로 빛이 스며들면서 대다수 사람들이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6자간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9.19 합의는 요리에 필요한 재료들을 열거한 것에 불과할 뿐 요리 자체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어떤 순서로 어떤 절차를 거쳐 요리를 만들어낼지 합의한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6자회담이라는 틀 안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성과였고 그 성과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이 사람 역할이 컸던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노무현 정부가 주장하던 한국의 균형외교가 구체적인 결실을 맺은 사례기도 했다. 노무현은 한국대표단에게 베푼 저녁 자리에서 “다른 나라들이 남의 땅에서 다시는 힘겨루기 하지 못하게 하자”며 고양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때부터 노무현은 이 사람을 눈여겨봤고 그다음 해에 외교부 차관보였던 사람을 파격적으로 장관급 청와대 안보실장으로 기용했다. 이 사람 개인적으로는 9.19 합의는 단 1%의 가능성이 있더라도 계속 아이디어를 내고 문을 두드리면 결국 문은 열린다는 ‘1%의 성공 방정식’을 체감한 경험이기도 했다.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자립형 한미 동맹’ ‘잠재적 핵무장론’ 같은 결코 쉬워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워싱턴의 한반도 정책이 서울에서 시작되게 해야 한다” 소신 역시 포함해서 말이다. 6자회담은 합의 직후 미국이 돈세탁 혐의를 이유로 들어 마카오 방코 델타 아시아은행(BDA) 계좌에 있던 북한 자금을 동결하면서 좌초되고 말았다. 9.19 합의는 북한과는 협상을 시작하기도 어렵고, 합의에 이르기는 더 어렵고, 그 합의를 실행하기는 더더욱 어렵다는 교훈만을 남긴 채 사실상 역사의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북핵은 왜 해결되지 않을까 북한은 9.19 합의를 한 지 불과 1년여 만인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청와대 안보실장으로 북한이 레드 라인을 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이 사람의 가장 큰 책무였지만 북한 핵실험을 막는 일에 실패했다. 그 소식을 접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궁금했는데 의외로 담담했단다. 책임을 느끼지 않았을까. “어떻게 이 상황을 수습할 것인가, 거기에만 생각이 쏠려서 책임을 져야겠다는 생각이 그때 들지는 않았습니다. 책임질 일이면 언제든 책임져야 되지만 그런 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어요. 돈세탁 건은 일단 미뤄두고 북한에게 9.19 합의 이행의 기회를 한번 줘보고 그래도 안되면 한미가 공동으로 세게 치고 나가자고 미국에 그렇게 매달렸는데 미국 사람들이 그렇게 미적 미적댔어요. 그게 미국 국내 정치 때문에 안 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미국에 대해서 분통이 터졌어요. 미국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지 않았는데 미국이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절실하게 대응하지 않는 것이 열통이 터졌어요. 북한 정권은 어차피 나쁜 집단이에요. 나쁜 놈을 나쁜 놈이라고 하는 것은 해법이 될 수는 없거든요.” 그 이후에도 북한은 미국과 국제사회가 그어 놓은 레드 라인을 몇 번이나 넘었다. 핵실험을 6번이나 했고 장거리 미사일 시험을 몇 번이나 했는지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와 응징은 백약이 무효다. 한반도의 위기는 일상화되었고 우리는 위기를 일상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북핵 문제는 좌절감을 넘어 체념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천만 민족이 핵전쟁의 위협을 일상으로 여기며 살아야 하는데 누구에게 책임을 묻기도 어렵고 내 책임이라고 손 들고 나서는 사람도 없다. 역대 어느 정권을 콕 찍어서 그 정권이 가장 큰 책임을 져야 된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모두의 책임이니 누구의 책임도 아닌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북핵의 현실적 실질적인 당사자는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인데 그 문제 해결의 우선적인 책임과 역할이 한국이 아닌 미국에 있는 모양새도 사실 당혹스러운 일이다. 북핵 문제에 20년 이상 매달려온 이 사람에게 물었다. -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 왜 북핵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겁니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강대국 정치 때문입니다. 미국이나 중국 모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00% 노력을 하지 않아요. 생각을 해보세요. 이 문제 해결한다고 세계 최강대국이 다 모였잖아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한국도 작은 나라가 아닌데 이런 나라들이 다 모였는데 북한 핵 문제 하나를 해결을 못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안 되는 이유는 그 다섯 나라가 다 뜻이 안 맞기 때문에 그런 거지요. 북한 핵이라는 거는 미국과 중국의 힘의 대립 속에서 생기는 독버섯과 같은 거예요. 그 힘의 균형이 깨지지 않는 한 해결이 안 되는 겁니다. 그걸 더 깊이 들어가면 미국은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기 할 수 있는 100%까지 가지 않습니다. 중국도 마찬가지고요.” 2006년 10월 9일 1차 핵실험을 했을 때 북한은 이 사실을 한 시간 전 중국에 통보했고, 중국 국가주석은 미국 대통령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 이 정보를 공유했다. 한국에게는 주중 대사를 통해 실험 직전 알려줬다. 미국 대통령과 대한민국 대통령 통화는 핵실험이 있은 지 거의 11시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다. 북핵 문제가 강대국 사이에서 어떻게 다루어지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2015년 미국과 영, 불, 독, 러, 중 EU외무장관들이 이란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일 동안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머리를 맞댔다. 이란은 페르시아 제국의 유산을 가진 나라이자 석유라는 강력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 이란의 라이벌인 이스라엘은 유대인 파워를 통해 미국을 움직인다. 이런 이유로 이란 핵문제는 많은 국가들이 온 힘을 다해서 반드시 해결해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매달리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북핵 문제는 미국의 정책 순위에서 밀린다. 우리에게는 생존의 문제이지만 미국에게는 수많은 국제 현안 가운데 하나뿐이다. 북핵은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주로 다룬다. 북한 문제에서 미국 정부 기관이 그렇게 정교하게 손발을 맞추는 것도 아니다. 9.19 합의 좌초의 원인이 된 BDA 북한 계좌 동결 건도 미국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 재무부 등이 따로 놀면서 악화된 측면이 있다. 결국 속이 타는 것은 한국이다. 동맹 강화와 동맹 의존 심화는 다르다 북핵은 이제 현실이다. 이 사람 표현을 빌리면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가 이미 선악과를 먹었는데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한반도 비핵화는 이제 물 건너갔고 핵을 가진 북한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그에 대한 우리의 대책은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라고 했다. 판이 바뀌었으면 생각도 바뀌어야 하고 상을 새로 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은 우리도 핵을 가질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지금 당장 핵무장을 하지는 않더라도 필요하면 언제든지 무기화할 수 있도록 일본이나 독일 수준의 우라늄 농축과 플루토늄 재처리 능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무기화되지 않은 무기 체계’ 전략이다. 선방을 날리듯 기습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논의의 테이블에 올려서 꾸준히 미국에 요구하자는 것이다. “이거는 우리가 미국한테 내 칼끝이 물러지더라도 찌르고 찌르고 이렇게 계속 요구해서 미국도 도저히 안 되겠구나 하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미국이 반대할 명분이 없거든요. 일본과 독일이 하는 우라늄 농축과 재처리를 한국한테만 못하게 할 명분이 없어요. 이걸 못하는 것은 순전히 한국이 겁을 먹어서 못하는 겁니다. 그 겁을 먹는 배경에는 국내 정치적 약점 때문입니다.” -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윤석열 정부가 이 문제를 들고 나오면 미국하고 관계가 다소 매끄럽지 않게 됩니다. 그럼 국내 정치적으로 윤석열 정부한테는 타격이 됩니다. 한미동맹 강화한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더니 쓸데없이 그런 거 미국에 요구해 가지고 당신은 내정도 망치고 외치도 망치고 다 망친다 그런 소리를 듣는 게 두려운 거죠. 정권으로서는 굉장히 부담이 되고 불안한 거죠. 그래서 못하는 겁니다.” 누구보다 미국을 많이 상대한 사람이고 미국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말하는 미국에 대한 이야기는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미국은 우리의 강력한 동맹이지만 동맹이라고 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동맹을 소중히 여기는 것과는 별개로 언제든지 홀로 설 수 있는 태세는 갖추고 있어야 된다고 했다. 의존적 동맹에서 자립적 동맹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협의에서 우리가 준 것은 많은데 받은 것은 별로 없다고 했다. 구체적인 예로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 반도체 지원법에서 우리는 얻어야 할 것을 얻지 못했다고 했다. 지금 정부가 미국에 정색하고 할 말은 하고 요구할 것은 요구하고 있는지 묻는 표정이었다.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담의 결과물은 미국과 일본이 간절하게 원하던 것이었어요. 그런데 그 대가로 우리는 미국으로부터 무엇을 얻었어요? 우리는 얻은 게 별로 없어요.” - 핵협의체(neuclear consultative group)를 얻은 거 아닌가요? “그건 이미 있던 거예요. ‘확장억제 협의체’의 다른 간판 아닙니까.” - 그게 더 정교해진 거 아닙니까. “정교해진 것도 아니에요. 핵우산 자체가 정교해졌다기보다는 미국의 기존 계획을 더 자세히 알려준다는 뜻입니다. 얻은 게 있다면 문재인 정부 시절에 매끄럽지 않았던 한미 관계가 정상화된 거 같은 일종의 반사 효과 정도가 있는 거죠.” 이 대목에서 이런 비유를 들었다. 동생이 나이 들어서도 계속 형에게 의존하고 매달리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이냐는 것이다. 몇 번이나 자립형 동맹 관계를 강조했다. “동맹을 발전시키는 거하고 의존도를 올리는 거하고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Equal이 아닙니다. 동맹을 강화하면서도 의존도를 줄이는 것, 그게 한미 관계를 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책무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게 불가능한 게 아니죠.” - 지금 우리 외교가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까? “내가 보기에는 조금 그 반대쪽으로 가는 것 같아요. 긴 호흡으로 보면 동맹을 발전시키면서 의존도는 줄이는 이런 동맹을 해야 되는데 지금 동맹 강화라는 게 사실 따지고 보면 의존도가 확 올라가는 건데 그거를 지금 사람들이 의식을 하지 않고 있어요. 캠프 데이비드 합의 같은 것도 현재 우리 안보환경이나 정치 사정을 봐서는 그런 합의를 안 할 수 없죠. 그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지만 그 결과물이 반드시 최상의 상태는 아닌 겁니다. 캠프 데이비드 협정은 미국의 관점에서는 한반도 안보에 대한 미국의 부담과 책무를 줄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줄인 만큼의 공간은 일본이 채우도록 하는 겁니다. 미국으로서는 당연히 그래야죠. 미국은 온 세계에 자기가 다 몰입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자꾸 다국적군 만들고 뭐 하는 이유가 그런 거 아닙니까? 그런데 한반도에서 미국이 빠지면서 생길 수 있는 잠재적인 영향력의 공간을 일본이 채운다는 건 미국이 생각하는 거하고 한국이 생각하는 거하고 많이 다르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의식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미국이 손 놓아도 살 수 있는 구명조끼 가져야 미국은 더 큰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한미 동맹이 아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나라이기도하다. 미국이 손을 놓으면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그런 처지에서는 우리의 미래를 제대로 보장하기 어렵고 그럴 경우에 대비한 구명조끼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구명조끼가 잠재적 핵무장론이다. “트럼프가 집권해서 하려고 했던 정책들이 꼭 트럼프 개인의 문제는 아니거든요. 미국 사회 속에서 트럼프 류의 생각이 계속 흐르고 있는 겁니다. 트럼프가 지난번에 이야기했잖아요. ‘방위비 분담으로 1년에 50억 달러씩 내놔라’. 우리가 미국이 시키는 대로 50억 달러 내놓으면 50억 달러로 만족할 것 같습니까? 더 요구하는 거지. ‘시키는 대로 다 해라’. 이런 식이 되면 전 세계에서 한국의 위상이 어떻게 됩니까? 미국에 매달려 ‘살려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얘기가 우리가 핵의 잠재력을 가져야 된다. 그런데 보수는 미국 신경 쓰느라 그 주장 못하고 진보는 북한 눈치 보느라 그 주장을 못하는 겁니다.” 북핵 문제와 관련해 우리가 아직 끝까지 가본 것은 아니라고 했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고 주한미군 철수까지 포함한 한미동맹의 변화, 한반도 평화 체제 논의 등 큰 판에서의 고민을 한 적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2017년 북한이 사용가능한 핵무기를 보유한 이후에는 우리가 더 큰 구도를 만들어야 하는 상태가 되었다고 했다. 그런 논의를 우리 공동체가 과연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의문이지만 이 노회한 외교관의 머릿속에는 한반도의 천변만화를 그리고 있는 듯했다. 외교관들은 그림을 크게 그리려는 사람들이다. 세계지도를 보면서 전략을 구상하고 온 세계를 말판으로 삼아 장기를 두는 것이다. 은퇴한 지 15년이 지났지만 이 사람은 아직도 그런 꿈을 버리지 않고 있는 듯했다. 이 대목에서 노무현이라는 이름 석 자가 소환되었다. ‘고분고분하지는 않지만 일을 맡기면 성과를 내는 사람’이라는 평을 듣던 이 사람을 노무현은 꽤 신임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안보실장으로 취임한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 조찬을 겸한 자리에서 노무현과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문제로 토론을 벌였다. 이 사람 이야기가 대통령이 듣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듣는 사람의 기분을 헤아리지 않는 이 사람 태도 역시 대통령의 심기를 상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대통령은 정색을 하며 “내가 안보실장을 잘못 뽑았네요”라며 식사를 채 마치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서 버렸다. 그때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다음 날 다시 대통령과 조찬을 하면서 오해는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고 대통령의 신임은 두터워졌다. 노무현과 이 사람은 궁합이 잘 맞는 대통령과 관료였다. 잘 나가는 커리어 외교관이면서도 어딘가 마이너리티 정서가 느껴지는 이 사람을 노무현은 인정했고 감싸고 들었다. 안보실장에 이어 외교부 장관으로 중용되면서 외교 안보정책의 원톱이라는 말을 들었다. 대통령 노무현과 3년 정도 더 길게 일할 수 있었다면 한반도의 새로운 집을 지을 수 있는 기초는 세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노무현의 신임이 두터웠고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지만 안보실장과 장관 임기는 25개월에 그쳤고 그나마 정권 임기 말이었다. 2017년 회고록 ‘빙하는 흐른다’를 들고 제일 먼저 찾은 곳이 봉하마을이었다. 노무현에 대한 그리움과 고마움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주류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지만 이 사람 생각이 주류의 생각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사람이 말하는 자립형 동맹, 잠재적 핵무장론은 현실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5년 단임제 정부의 한계 속에서 여-야가 합의할 수 있는 외교안보 정책이 나올 수 있을까, 2년마다 한 번씩 선거를 치르는 미국이 대북 정책의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무엇보다 미국이 가져가라고 하는데도 우리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5년 후, 5년 후를 말하다가 이제는 언제 가져올지 기약도 없는 작전지휘권 문제를 보면 이 사람이 말하는 자립형 동맹 이야기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북한 비난하고 미국에 매달리는 것으로 자기 할 일 다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세계 10위권의 국력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에서 한국 외교의 위상은 축구 FIFA 랭킹보다 낮다는 말을 듣는 게 현실이다. 자립형 동맹 이야기를 들으면서 외교는 국가의 자존심을 다루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주장을 다른 사람들이 했다면, 책임 있는 자리에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했다면 ‘당신 친북 아냐?’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외교관으로 주류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고 미국 측 파트너들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다. 2017년 펴낸 회고록 가운데 노무현 정부의 북한 인권 결의안 부분은 크게 논란이 됐다. 많은 사람들이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왜 노무현 정부 사람이 문재인 후보를 곤란하게 하는 주장을 하느냐고 의아해했다. 이 사람의 입장은 분명했다. 북한과 관련해서 우리가 국제사회의 기준에 맞게 일관된 입장을 가져야 한다는 것, 선거나 정치의 유불리 때문에 자신이 평생 지켜온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의 주장이기에 더욱 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다. 외교관들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인가 외교는 국가의 이익과 존망의 문제를 다루지만 집권자와 극소수 엘리트들의 영역이다. 화려한 의전의 이면과 정제된 표현의 행간 속에서 어떤 줄다리기와 주고받기가 있는 것인지 일반인들은 헤아리기 쉽지 않다. 국익과 상대방이 있다는 이유로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외교관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그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고 무슨 고민을 하는지 알기 어렵다. 그래서 외교관들은 대중과 거리가 멀고 왠지 그들만의 리그에서 그들끼리 어울리며 그들만의 이야기를 하는 사는 사람들로 보인다. 딱히 이 사람이 장막 뒤에서 벌어지는 외교 현장의 내밀한 이야기를 말하거나 외교관의 역할이나 사명감을 강조한 것은 아니지만 만남을 마치고 만나고 남산 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우리 사회에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이런 지점까지 염두에 두고 있구나, 외교관들이란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 남산 연구실 ‘서우재’는 전직 외교관들의 사랑방이다. 한 달에 한 번 전직 고위 외교관들이 모여 외교 현안을 토론한다. 그 모임에 오던 사람 중에는 현 정부 외교 안보 라인의 핵심 인사도 있다. 그 모임에서 자기 생각은 소수일 때가 적지 않다고 했다. 생각은 서로 다를지 모르지만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는 꼭 하고 있어야 될 고민들을 그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다행이다 싶었다. 관저에서 셰퍼드와 / 사하라 사막에서 아내와 / 10년 전 손자와 함께 지금까지 적지 않은 사람을 만났지만 이 사람만큼 개인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인색한 사람은 없었다. 자녀들 이야기도, 부인 이야기도, 형제 이야기도, 친구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자랑하자고 들면 자랑할 이야기가 없지 않을 텐데 무용담 같은 이야기도 거의 하지 않았다. 6자회담 뒷이야기가 대화의 1/3은 차지하겠거니 했는데 그 부분 이야기는 10분 남짓에 불과했다. 자랑이 없는 만큼 반성이나 후회도 적었다. 자신이 해온 일들이 강물 위에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포말처럼 느껴진다는 말을 하기도 했지만 그런 류의 감상적인 말은 극히 적었다.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것이 서투른 사람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외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자리로 알고 나왔으니 외교에 대한 이야기만 하겠다는 자세로 이해했다. 공적인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당치 않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았다. 함께 일하거나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 대해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인물평을 하지 않았다. 그런 쪽으로 질문을 던져도 그 미끼를 물지 않았다. 노무현 정도가 예외였다. 스스로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심하다고 했고 이 사람에 대해서도 주변 평가가 크게 엇갈리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 모습은 의외였다. 외교라는 게 결국 사람들의 이야기일 텐데 사람 이야기가 아닌, 이슈에 집중하는 태도는 특이하면서도 흥미로웠다. 정권 심층부 안에서 대통령의 눈과 귀를 사로잡기 위한 경쟁과 암투가 치열했을 텐데 그런 이야기도 거의 하지 않았다. 오로지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 안보 이야기에 집중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집요하게 성과를 추구하는 인물이라는 평을 듣는가 싶었다. 대화 중간중간 자신이 말한 것을 어떻게 정리할 거냐고 물었다. 자신의 말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거나 오독될 것을 염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미국 눈치를 너무 본다는 말이나 반미를 외치던 사람들이 정착 미국 사람 앞에 가면 할 말을 다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말은 아니지만 한국 외교의 심장부에 있던 사람의 이야기라서 그 무게가 다르게 다가왔다. 세 시간 정도 이야기하자고 약속을 했는데 아침 9시쯤 시작된 대화는 오후 2시를 훌쩍 넘겨 끝났다. 중간에 탕수육과 짜장면을 시켜 먹으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때도 사담 같은 이야기는 없었다. 카메라 앞에서 대화는 점심 전까지였지만 카메라가 있거나 없거나 말의 내용이나 자세가 다르지 않았다. 앞에서 하는 말과 뒤에서 하는 말이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평이 맞다 싶었고, 미국에 하는 말과 중국에 하는 말이 다르지 않아야 한다는 이 사람 소신도 사실이겠다 싶었다. 이 사람이 외교는 펜으로 기록할 뿐 녹음을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밥 먹으면서 하는 대화까지 양해를 구하고 녹음을 했다. 이 사람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녹취 정리 : 박상은 인턴
✏️ 그 사람 '김종인 편' 맛뵈기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를 돕게 됐던 계기는 윤 후보 부인 김건희 여사의 전화를 받은 것이었다고. "그 사람(윤석열)이 정치 참여 선언할 때도 관심 안 가졌었는데 한참 있다가 그 부인이 나한테 '자기 남편 좀 만나달라'고 전화를 했다"며 "본인(윤석열)에게도 만나자고 연락이 와 그 부부를 만났다"고. "그 동안 한 일이 잘못됐다고 판단하는 것 같아서 당내 경선 과정에서 많이 도와준 것"이라면서 그러나 정작 윤석열 본인이 대선 후보로 확정된 직후부터 태도가 확 바뀌었다고 회고. '경제민주화'의 상징적 인물로 당시 여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총선, 대선 승리에 크게 기여했던 것과 관련,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측 핵심인사들과 기싸움을 세게 벌이기도 했다고 털어 놔. '그 사람'- 김종인 편 영상 최초공개, 7월 22일 오후 4시 30분 SBS뉴스 유튜브채널
SNS에 올린 사진 한 장 1992년 5월, 동아일보 파업 투쟁 당시 지난해 이 사람이 페이스북에 사진을 한 장 올렸다. 그 사진을 보고 ‘이게 젊음이구나’ 싶었다. 여드름 자국까지 그대로 드러난 말 그대로 쌩얼, 그 모습이 아름다웠고 그 사진 한 장으로 이 사람의 청춘이 그려졌다. 1992년 동아일보 파업 현장에서 선배 기자가 찍어준 사진이라고 했다. 1989년 동아일보에 입사했으니 그때가 4년 차 기자, 사진만 보면 앳된 대학 초년생 같다. 빛나던 시절의 얼굴을 자랑하는 이 사람,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 산하 SNU 팩트체크센터장 정은령이다. SNU 팩트체크센터 일로 일 년에 서너 차례 얼굴을 본다. 교수들과 현직 기자들이 참석 멤버인 그 모임에서 사안을 맥락에 맞게 정리하고, 논의의 방향을 잡아가는 능력이 인상적이었다. 한국 팩트체크 저널리즘의 중추적인 인물이고 칼럼니스트로 성가도 높다. 그렇지만 언론사에 적을 두고 있지는 않다.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연구도 하지만 대학에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니다. 어느 한 편에 오롯이 속하지는 않은 경계인이자 이 사람 표현을 빌리면 고학력 비정규직 노동자다. SNS에서 젊은 시절 사진을 본 뒤 이 사람은 그 이후 어떻게 살아왔을지 궁금했다. 대략적인 것이야 알고 있었다. 서울대에서 노래 잘하는 것으로 유명한 운동권 학생이었고,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로 활약할 때 지면에서 익히 봤던 이름이고, 잘 나가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유학을 간 이야기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긴데 군데군데 빈 구석이 보였다. 만나면 할 이야기가 적지 않을 듯했다. 국내 유일의 팩트체크 플랫폼 책임자이니 우선 허위정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테고 「GLOBAL FACT 10」이 임박했으니 그 이야기도 들을 수 있을 듯싶었다. 한국 언론이 가장 막강하고 화려했던 1980년대 마지막 해에 언론계에 입문했으니, 끝물이나마 좋았던 시절을 누리기도 했지만 그 이후 언론계의 격동 속에서 마음고생, 몸고생을 했다. 그런 경험들이 이 사람만의 경험으로 머물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인터뷰를 요청하니 예상대로 난색을 표했다. 자신은 자기만의 이야기가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끝내 부탁을 거절하지는 못했다. 서로 얼굴 아는 처지에 한사코 거절하기는 어려웠을 테고, 다음 주 열리는 국제행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던 듯싶다. 그렇게 해서 지난 12일 오후 서울 목동에 있는 한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평소에 말이 많은 사람도 아니었고 풀어놓을 이야기도 많지 않다고 하니 인터뷰는 세 시간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후 2시에 시작한 이 사람과의 대화는 저녁 자리까지 포함해 밤 10시가 다 돼서 끝났다. 글 잘 쓰고 취재 야무지던 문화부 기자 1992년 5월, 동아일보 노조가 파업에 들어갔을 때 노조 노래패였다.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에서 활동했고 서울대 아크로 광장에서 마이크 잡고 노래하던 솜씨를 파업 현장에서 유감없이 발휘했다. 일주일 가까운 파업 기간 내내 손톱이 깨질 만큼 신서사이저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분위기를 띄웠다. 당시 동아일보 고위 인사가 이 사람의 손톱 깨진 이야기를 듣고 “기사를 쓰느라 손톱이 깨져야지. 파업하느라 손톱이 깨진 것이 뭐 자랑이냐.”고 했단다. 1990년, 동아일보 막내기자 시절 1989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이후 주로 문화부에서 문학과 출판을 담당했다. 지금도 정은령 하면 글 잘 쓰는 문화부기자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인터넷에 떠도는 김윤식 서울대 교수 인터뷰 기사 등이 그 무렵 쓴 글이다. 출판 담당 기자들의 주 업무는 매주 쏟아지는 신간 서평을 쓰는 일이다. 반드시 책을 읽고 서평을 쓴다는 원칙을 지켰다. 그 원칙을 지키느라 밤을 새우는 일이 허다했다. “그때 정은령 기자는 흔히 말하는 서평과는 다른 글을 썼어요. 정은령만의 결이 살아 있는 서평이랄까요. 그때는 신문 서평란에 신간이 소개되면 다음 날 주문량이 달라지던 때였거든요. 그래서 출판사는 신문에 어떤 책 서평이 나오는지를 주목하곤 했는데 정은령 기자는 남들이 예상하지 못한 책의 서평을 쓰는 것으로도 유명했어요. 자기가 판단해서 널리 알릴 만하다 싶은 책의 서평을 쓰는 사람이었지요.” - 정은숙, 출판사 마음산책 대표 1년 동안 미국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직후인 2002년 차장으로 진급하면서 「위크엔드」라는 이름의 주말판 팀장을 맡았다. 몇 기수를 훌쩍 뛰어넘는 승진이었고, 부장이 없는 사실상의 팀장 보직이었다.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쉽지 않다는 위기의식 속에서 주말판부터 파격적인 변신을 해보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고 그 일을 이 사람에게 맡긴 것이다. 파격적인 승진에 회사 전체가 주목하는 책무를 맡았으니 어깨가 무거웠다.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연년생 남매의 엄마 노릇을 포기하고 일에 매달렸다. 이 시절이 지나고 보니 꽃시절이었다. 회사를 다니는지 동아리 활동을 하는지 구분이 안 될 만큼 신나게 일했다. 하지만 그런 회사 생활이 길게 가지는 않았다. 동아일보와의 이별 어느 시사 주간지가 ‘동아, 너마저’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을 만큼 2천 년대 초반 동아일보의 급격한 보수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이었다. 그 언론사는 자존심이 강한 조직이었다. 역사와 전통, 성과를 말할 때 두 번째로 언급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조직원 모두가 고심했다. 문제는 그 고심의 방향이 서로 달랐다는 점이다. 당시 논조의 변화를 동아의 자존심을 지키고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독자들에 대한 배신이자 구성원 간에 있었던 묵시적이고 오래된 약속의 파기라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 동아일보라는 거함에 타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느닷없는 변침에 멀미를 느끼고 힘들어했다. 이 사람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 시기가 굉장히 제 안에서 고민이 많았던 시기인 것 같아요. 무엇이 좋은 보도인가에 대한 고민, 그런 것들이 많았었고 내부에서 그런 것들을 같이 고민하던 기자들이 있었습니다.” - 그래서 만든 게 신문연구회인가요? “신문연구회를 어떻게 아시나요? 맞습니다.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과 신문연구회라는 비공개 모임을 만들었고 그래서 내부적으로 목소리도 내고 그랬습니다. 신문연구회를 같이 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많이 밖으로 나갔습니다. 고민을 많이 했던 시기였고, 그 이전부터 해오던 고민들이 더해지면서 결국은 퇴사라는 결정으로 내려진 것이죠.” 만 18년 반을 근무했고 부장 진급을 눈앞에 둔 시점이었다. 그전에도 몇 번 그만두려 한 적이 있고 사표를 내고 2주 정도 회사에 나가지 않은 적도 있지만, 2007년 퇴직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더 이상 그 조직에 남아 있는 것은 기득권에 안주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일하는 엄마 밑에서 자라면서 엄마의 빈자리를 자주 느꼈고 그게 상처로 남았는데 자기 역시 아이들에게 같은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닌가 늘 마음에 걸렸다. 마음이 떠난 조직에서 일을 하느니 내 금쪽같은 아이들과 단 하루라도 더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퇴직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 그런 어려움이나 갈등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아 있지 않습니까? 떠날 때 그다음 자리가 예정이 돼 있던 것 같진 않더라고요. “그러니까 을로 살아본 경험이 거의 없다시피 한 거였죠. 그게 뭘 의미하는지를 그만두고 나서 알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걸 잘 견뎌낼 수 있었냐? 힘들었죠. 제가 후회가 될 때가 한 번 있었어요. 고속터미널 앞을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여럿이 무거운 철근 덩어리를 이렇게 으쌰으쌰 해서 들어 올리더라고요. 그런데 그 순간에 제가 속에서 울컥 눈물이 치솟았습니다. 그게 힘든 일을 같이하는 거잖아요. 서로를 믿으면서 함께 일하는 거를 내가 언제 다시 해볼 수 있을까. 내 생에는 다시는 그런 일은 없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울컥했던 기억이…” 퇴직은 번지점프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렵고 떨리는 일이지만 일단 뛰어내리면 그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열릴 테고, 다소 우여곡절이야 있겠지만 평형과 안정의 순간이 오래지 않아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운동을 빼면 뭐든지 잘하는 사람이었으니 그런 것도 잘할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이 사람의 번지 점프는 당초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진행되었다. 눈 한 번 질끈 감고, 비명 한 번 지르면 순식간에 끝날 일이라고 여겼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떨어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바닥을 바라보는 시간은 더 길었고 다시 올라올 때까지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미국 유학 4년 만에 학위는 받았지만… 미국 메릴랜드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게 2008년, 회사를 그만둔 다음 날 처음 유학 학원을 찾았다니 준비가 철저했던 것은 아니었다. 대학 교수인 남편만 서울에 남고 초등학생 남매를 데리고 떠났다. 미국 미시간 대학에서 1년 동안 연수를 한 적이 있고, 영어에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미국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한국에서는 이름만 대면 알아주는 언론사 기자였지만 미국에서는 뒤늦게 학업을 시작한 40대 아시아 여성일 뿐이었다. 집밖으로 나서면 하루종일 한국말을 입 밖으로 낼 일이 없는 날이 많았다.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고 평생 잊지 못할 좋은 스승과 동료들도 만났지만, 편하고 넉넉하고 행복으로 가득 찬 시간은 아니었다. 학위 과정도 쉽지는 않았지만 공부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유학 기간 동안 자신을 한 사람의 여성으로 응원해 준 시어머니가 돌아가셨고, 하나뿐인 남동생이 고약한 병을 만나 투병 생활을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한국을 떠나는 게 아닌데 싶었다. 아빠 없이 두 아이의 엄마 노릇을 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마음의 균형이 무너졌고, 한 번 무너진 그 균형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2012년 8월, 모교인 메릴랜드 대에서 박사학위 취득 유학 4년 만인 2012년 박사 과정 입학 동기들 중에서는 가장 먼저 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받고 귀국하고 나니 사람들에게 ‘언제 자리를 잡느냐’는 말을 인사처럼 들었다. 귀국해서 논문을 쓰지 못해 연구 실적이 별로 없었다. 무엇보다 학교에 자리를 잡고 싶은 의욕이 강하게 일지 않았다. - 학교에 자리를 잡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을 하셨습니까? 아니면... “적극적으로 노력 안 했어요. 제가 교수 공모에 한 번 지원해 본 거 같아요. 한 번 해보고 떨어졌어요. 왜냐하면 논문이 없으니까 일단 응모할 수가 없고요. 논문이 안 쓰이더라고요. 안 쓰였고, 집중해서 앉아 있지 못하고 그러니까.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잘못 쓴 논문도 아닌데 제 박사학위 논문이 굉장히 부실하다고 저는 생각을 했어요. 근데 그렇게 부실하지도 않았던 거죠. 박사학위 논문을 발췌해서 한글로 쓴 논문이 상도 받고 그랬거든요. 그렇게 형편없는 논문도 아니었는데, 그냥 제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안 해버리고. 그때는 그냥 제가 자존감이 완전히 바닥이라서 저 자신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냥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랬었던 것 같아요.” 서울대와 연세대에서 한두 과목씩 강의를 꾸준히 하긴 했지만 점점 외부와의 소통에 소극적으로 변했다. 서울대 졸업, 20년 가까운 기자 경력, 미국 박사 학위면 뭘 해도 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사람들은 수군거렸지만 그 시절 별로 하고 싶은 게 없었다. 이야기를 듣는데 퍼뜩 ‘이 사람이 많이 아팠구나’ 싶었다. 혹시 마음이 아팠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2년 전에 펴낸 「당신이 잘 있으면, 나도 잘 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군데군데 느꼈던 의문이 풀렸다. ‘아 그랬구나. 그 말이 아팠다는 이야기구나’. “제가 정신적으로 많이 방황했던 시기고요. ‘복구가 힘들 것 같다, 내 인생 복구가 힘들 것 같다’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서 그러던 시기를 지냈습니다. 저 자신에 대해 스스로 책망을 많이 하고 ‘내가 왜 이렇게 약하지’ 자책을 많이 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문만 열고 나가면 되는데 그게 잘 안되더라고요.” 제 발로 떠난 언론계를 다시 기웃거리고 싶지 않았고, 연구자로서 사는 것도 자신이 없었다. 그 무렵 목숨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던 관계를 원점에서 생각해야 하는 경험도 있었다. ‘산들이 움직이고 언덕이 흔들린다 해도’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믿음이 무너지는 경험은 아프던 사람을 더 아프게 했던 모양이다. “제가 그런 과정들을 거치면서 한 가지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은 뭐냐 하면 ‘너 때문이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너 때문이야’라는 말이 한 사람에게 평생의 굴레가 될 수도 있는 말이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저는 그 말을 들었다 하더라도, 상대한테 그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허물이 많은 사람이니까요. 발 밑에 있는 진창에 한번 제대로 넘어져 본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2018년 11월, 서울대 '미래뉴스실습' 수강학생들과 중국 난징으로 떠난 취재 여행 그 시기를 묵묵히 지켜봐 준 남편, 건강하게 자라준 두 아이가 큰 힘이 되었다. 거의 유일한 외부 활동이었던 대학 강의에 성의를 기울였고, 학생들의 강의 평가는 매 학기 좋았다. 젊은 친구들과의 만남이 자신을 더 나쁜 지경으로 빠지는 것을 막아줬기 때문일까. 젊은 세대에 대한 관심이 각별하다. 위로와 치유의 힘을 보여준 칼럼 「공감」 2016년 말, 당시 경향신문 편집국장 김민아가 경향신문에 칼럼을 써볼 것을 제안했다. 1990년대 같은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면서 보았던 이 사람의 글 솜씨를 김민아는 기억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귀국한 이후 별다른 활동이 없긴 했지만 김민아는 이 사람이라면 지면을 맡겨도 된다고 생각했다. 꽤 망설이다가 그 제안을 수락했다. 동아일보를 그만둔 지 10년 만에 쓰는 첫 칼럼이 무척 어려웠다고 했다. 2017년 1월, 「엄마의 커튼콜」이란 제목으로 첫 번째 칼럼을 썼고 그 글이 조용히 화제가 됐다. 글도 글이었지만 정은령이 다시 글을 썼다는 것도 화제였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잘 써야 했다. 그 칼럼은 자존감을 스스로 확인하는 일이었고, 자신이 살아있다는 신호 같은 것이기도 했다. 2017년 1월부터 매달 한 편씩 3년 6개월을 썼다. “오피니언란이 아주 경쟁이 치열한 곳이거든요. 반응이 없으면 몇 번 쓰고 본인이 그만두기도 하고, 저희들이 은근히 그만두도록 하기도 하는데 외부 필진이 1년만 버텨도 대단한 거예요. 3년 이상 쓰는 경우는 사실 진짜 많지 않아요. 예를 들면 열 분 모시면 한두 분 정도가 3년 정도 가려나요. 그러니까 대단한 거죠. 회사 안팎으로 반응이 좋아서 그만두신다고 할 때도 붙잡았는데, 본인이 팩트체크센터 업무 등으로 바빠서 더 이상 쓸 수 없다고 한 것으로 압니다.” - 김민아,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 칼럼을 처음 쓸 때 책상머리 앞에서 손가락만으로 글을 쓰지는 않겠다고 다짐했고 그 다짐을 어기지 않았다. 이 사람의 칼럼에는 반드시 ‘현장’이 있고 ‘사람’이 있다. 포항 지진 현장, 청계천 평화시장, 서울 구의역, 성미산 마을, 경북 성주 사드 배치 현장, 안산 단원고 등이 이 사람이 찾은 현장이다. 이 사람 글에는 남다른 치유의 힘이 있다. 아파본 사람이라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그들에게 깊이 공감한다. 음지에서 살아온 사람은 아니지만 여성으로 겪은 차별, 유학생 시절의 소수자 경험, 고학력 비정규직 노동자의 감수성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서 시작해서 ‘우리’로 이어지는 글을 쓸 수 있고, 남의 아픔을 달래면서 자신의 상처도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들으려고 한다면 풀잎이 스치는 소리도 들을 수 있고 침묵도 들을 수 있다”는 자세로 위안부 할머니, 세월호 엄마, 순직한 집배원 가족, 노동자 아들 잃은 어머니, 이주 노동자,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 우리 사회의 약자들, 소외된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 힘든 사람들을 바라보시더라고요. 어쩌다 한번 눈길을 주는 게 아니라 계속 그런 사람들을 응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관되게 음지를 바라본 이유가 있겠죠? “예를 들자면 경북 성주의 할머니 같은 분들이 제 칼럼을 읽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근데 그 칼럼을 읽을 사람들이 이 문제를 같이 한 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같이 불편했으면 좋겠어’ 그런 마음이 아닐까 싶어요. 제가 평생 이런 생각도 안 하고 살면서, 칼럼 쓸 때 뭐 써야 되니까 이렇게 하는 거 아니야? 왜 그런 마음이 없겠어요. 그래도 칼럼을 쓸 때라도 읽는 사람들이 그 마음을 불편한 곳에 두는 것이 그래도 좀 낫지 않겠는가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허위정보와의 싸움에 나서다 2017년 서울대 교수 윤석민 등이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 산하에 팩트체크 전용 플랫폼을 운영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언론사들이 하나의 플랫폼에서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따져보자는 취지였다. 거짓 정보와의 싸움에는 진보와 보수도, 업계의 구분이 없다는 생각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했다. 네이버가 돈을 대고, 운영은 서울대가 맡고, 제휴 언론사가 팩트체크 기사를 낸다는 구상이었다. 이 플랫폼을 운영할 기구를 「SNU 팩트체크센터」라고 이름 짓고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2017년 3월의 일이다. SNU 팩트체크센터는 2017년 출범한 이후 허위 정보와의 싸움에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출범 당시 14개였던 제휴 언론사는 32개로 늘었고, 지금까지 플랫폼에 올린 팩트 체크 기사는 4천6백 건이 넘는다. 국제적인 위상도 높아졌다. 2020년 이 사람이 IFCN, 국제팩트체킹연맹의 이사가 된데 이어 2023년 6월 28일부터 30일까지 서울에서 전 세계 언론인들과 팩트체커들이 모이는 「GLOBAL FACT 10」 행사를 국제팩트체킹연맹(IFCN)과 함께 개최하는 게 그 단적인 예다. 그 행사의 한국 측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다. 조교 한 명에 학부생 4명으로 시작했는데 이제는 학·석·박사 과정 학생 15명인 조직이 되었고, 오프라인으로 5백 명, 온라인으로도 그만한 인원이 참여하는 대규모 국제행사를 치를 역량을 갖추었다. 혼자 한 일은 아니지만 이 사람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은 필자만의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당신이 이 조직의 성장에 기여한 것이 무엇이냐고 거듭 물었는데 그저 버텨왔을 뿐이라고 했다. 한 때 노래 좀 했다는 것 말고는 자기 자랑이라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 사람다운 답변이었다. - 이런 플랫폼이 없었다면 그 기자들이 팩트 체크에 종사하고, 거기에 의미를 각별하게 두는 기자들이 지금처럼 활동하기도 힘들었겠죠. “네 저는 그 역할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플랫폼이 있기 때문에 견인을 한 부분이 있고요. 저는 4,600개 정도 되는 팩트체크 기사의 양도 중요하지만 제가 중요하게 보는 지표는 검증 근거라든지, 기사 길이 같은 것입니다. 이 플랫폼 안에 올리는 기사들은 검증 근거를 반드시 입력하도록 하거든요. 그게 이른바 ‘저널리즘의 투명성’이라고 하는 것인데, 2017년에는 팩트체크 기사 한 건 당 검증 근거가 한 개가 안 됐어요. 근데 2023년에는 평균 숫자가 한 7개 정도로 늘었어요. 물론 지금도 올라오는 게시물들이 각 사에 따라서 편차가 큽니다. 그런데 잘하는 곳에서는 굉장히 단단한 증거들을 가지고 기사를 많이 써요.” SNU 팩트체크센터가 직접 팩트체킹을 하는 것은 아니다. 불편부당성, 투명성 등의 원칙에 동의하는 언론사들과 제휴 관계를 맺고 각 언론사들이 자율적으로 수행한 팩트체크 기사를 플랫폼에 올려주는 역할을 한다. 팩트체크 대상의 선정이나 구체적인 검증, 판정 등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SNU 팩트체크센터와 제휴를 맺은 32개 언론사의 정치적 스펙트럼은 보수에서 진보까지 다양하다. 검증 대상이 겹칠 경우에는 자연스레 교차 검증이 이루어진다. 극히 드물지만 같은 사안에 대해 어떤 언론사는 사실로, 어떤 언론사는 사실 아님으로 판정한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 서로 다른 결론을 같은 플랫폼 안에 나란히 올려놓고 유저들이 스스로 판단하게 한다. 그런 플랫폼의 운영에 필요한 돈은 지난 6년간 네이버가 지원해 오고 있다. 언론계와 학계, IT 기업이 협업하는 이런 모델은 외국에서는 찾기 힘든 케이스다. 이 모델이 한국 언론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는 만능열쇠는 아니지만 적어도 무엇이 ‘사실’인지를 따지는 공론장은 될 수 있다는 게 이 사람 생각이다. “우리가 (정치적) 입장 차이는 줄일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다만 ‘사실’에 대한 건 우리가 함께 논의할 수 있지 않겠느냐. 지금 많은 뉴스의 이용자들이 언론을 회피하는 가장 큰 이유가 너무 편파적이어서 안 본다고 하는 것들이 많거든요. 그래서 사실조차도 그 편파성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볼 수도 있는데, 그래도 우리가 이 다른 정파적 입장은 모두 다 내려놓고 봤을 때 이 사실만큼은 우리가 같이 동의할 수 있다. 이런 지점들이 우리가 최소한 어떤 논의를 할 수 있는 공역대로서 존재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저희 센터의 역할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처음 센터장 자리를 제안받았을 때 몇 달 하다가 끝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일이 7년째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이 조직이 땅 속 깊숙이 뿌리내린 것은 아니다. 늘 외풍에 시달리고 한 발 앞으로 나가는 일이 쉽지 않은 게 실상에 가깝다. 다만 다니던 언론사를 그만두면서 사람들과 어울려 힘든 일을 함께 할 일이 내 인생에서 또 있을까 싶었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다시 그런 경험을 하고 있다. 강의실보다 거리와 광장에서 보내 시간이 더 많았던 대학시절 아버지는 서울대 공대, 어머니는 숙명여대 약대를 나온 인텔리들이었다. 경남 진해에서 태어나 세 살 때 부모님 따라 서울로 이사를 했지만, 부모님의 고향이고 2005년 타계한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통영을 마음의 고향으로 여긴다. 1985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해서 인류학을 전공했지만 강의실보다는 거리와 광장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1986년 인천 5.3 사태, 1987년 12월 구로구청 점거 농성 같은 주요 시위 현장에 있었고, 방학 때 혼자 서울 창신동 봉제공장에 들어가서 노동자들의 생활을 경험하기도 했으니 영락없는 운동권 학생이었다. 아버지는 당시 국영기업이었던 한국중공업의 고위 임원이었다. 자식이 데모를 하면 아버지가 잘릴 수도 있던 시절이었다. 아버지와의 갈등은 말할 것도 없고 영특한 딸의 성취를 자신의 자랑으로 여기던 어머니와의 갈등은 긴 후유증을 남겼다. 운동권 학생인 것은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그 시절 학원가에서 유행하던 이념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양희은의 「아침이슬」도 좋아했지만 심수봉의 「미워요」도 잘 불렀다. 그때부터 흑과 백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불편했고 스스로 ‘회색인’, ‘경계인’이라고 생각했다. - 센터장님에게 1980년대 후반이라는 시절은 어떤 시절이었습니까? “저는 야만의 시대였다고 생각해요. 야만의 시대였지만 그래도 서로를 믿는 것. 그것이 버텨주던 시절이었다고 생각을 하고요. 그리고 야만의 시대였기 때문에 “짐승과 싸우다가 짐승을 닮아갔다”고 하는 것처럼 그런 폭력적인 문화도 있었던 시기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어 여학생들이 치마만 입고 지나가도 욕을 먹었던 것처럼... 우리 세대가 과연 민주주의 훈련이 잘 된 세대인가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다만 너무 큰 악이 있었기 때문에 그 큰 악과 싸우는 것이 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저는 그런 점에서 n개의 깃발이 휘날리고, n개의 목소리가 나올 수 있는 그런 토대라도 우리 세대가 마련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악을 눈앞에 두고 있던 시대였기 때문에, 아니 거악과 싸워야 할 때 무슨 한가한 소리냐는 비난이 두려워서 그때는 말하지 못했던 것, 예를 들면 여성 인권, 외국 이주민, 성소수자, 청년 문제 등에 기회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발언하려고 한다.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글을 보면서 1980년대 가치들이 더 섬세하고 정교하고 엄격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시절 꿈꿨던 삶이라는 것은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때 미안하다고 말하고,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존중받지 못할 때 참지 않고, 누군가 고통받을 때 거기에서 눈 돌리지 않는 것이었다. 대학 다닐 때 좋아했던 노래 가사를 나직이 읊을 때 이 사람은 여전히 그런 꿈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었다. 내 눈길 닿는 곳 어디나 해맑은 빛이 흐르고 내 가슴 지나는 바람 모두 따스한 향기 머금게 하소서 내 손길 있는 곳 어디나 따스한 손 마주 잡고 내 발길 가는 곳 어디에나 어지런 물결 그치게 하소서 고단한 하늘 저 마루 아래 검게 드리운 어둠도 흐느끼는 강물 시린 바람조차 빛 흐르게 하소서 향기롭게 하소서. - 「내 눈길 닿는 곳 어디나」 中 어쩔 수 없는 기자 지난해 10월 이태원에서 157명이 숨지는 참사가 벌어진 다음 날 방송기자연합회장 양만희에게 사고 현장을 보여주는 방송사들의 뉴스 화면 사용이 문제가 있다며 지금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 제가 그런 문제 제기를 한 것은 우선 보도를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보도 화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거 지금 멈추지 않으면 우리가 세월호 보도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얘기를 했던 거를 또 반복하게 된다. 잘못을 저지르고 난 뒤에 반성하는 거는 아무 필요 없고 지금 당장 할 수 있으면 뭐라도 할 수 있도록 방송기자연합회장이 좀 움직여줬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던 것 같아요.” 방송사 내부적으로 이미 화면 사용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었으니 각 방송사들이 동영상 대신 정지화면을 쓰고 현장음 사용을 자제하는 것에 이 사람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 비슷한 문제 제기를 한 사람들이 이 사람만도 아니다. 다만 자신이 나서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일, 특히 언론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나서야겠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는 점에서는 이 사람에겐 의미가 있다. 자녀들에게도, 제자들에게도 기자 하라고 권하지 않는다. 그래도 좋은 세상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언론이 필수라고 생각한다. 기자를 그만두고 친구들과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용평리조트에 놀러 간 적이 있다. 함께 간 가족들이 한 방에서 나란히 누워 자는데 이 사람이 ‘팩트를 챙겨야지, 팩트를 챙겨야지’ 잠꼬대를 해서 같이 간 친구들의 놀림감이 된 적이 있다. 뼛속까지 기자인 사람이다. 그러니 강의실에서는 학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강의를 할 때마다 학생들에게 빼놓지 않고 말하는 게 ‘사실’에 대한 이야깁니다. 사실 확인이라고 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리고 사실 확인이라고 하는 것들을 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덜 말해야 될 수도 있고 내가 더 모른다고 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수도 있다. 더 말하고 싶은 유혹과 싸워야 될 수도 있다. 그런 얘기를 하죠.” 현직 기자들에게는 이런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것이다. “지금 기자들은 당사자들과 직접 얘기하는 거, 부딪히는 것 이런 것들이 굉장히 적어지는 게 아닌가. 이렇게 육박전을 해보고, 거절당해 보고, 잘 모르겠고, 혼돈 속에 처해져 있고 그런 것들이 기자를 단련시켜 나가는 과정일 텐데 그런 부분들에서 취재력이 약화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기자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무기가 목격자가 되는 것인데, 어느 곳이든지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역할이 대단히 약화되고 있지 않나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카메라 기자가 먼저 철수하고 둘이 더 이야기를 할 때도 말을 편하게 하지 않았다. 정확히 표현하면,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비슷한 시대를 살았고, 같은 언론계 생활을 했고, 한 다리 건너면 누가 누군지 뻔히 아는 처지인데도 남의 말을 쉽게 하지 않았다. 최지향의 표현대로 “함부로 묻지도, 함부로 평하지도, 함부로 조언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여덟 시간에 걸친 대화는 고백과 증언, 고발에 가끔은 강의가 뒤섞여 있었는데 한 마디 한 마디가 오래 가슴에 남았다. ‘저열한 분노와 경멸의 감정이 나를 삼켜버릴까 봐 심호흡을 하는’ 사람답게 스스로를 귀하게 여길 줄 알고, 자신이 가졌던 귀한 가치―그것을 한 마디로 정리한 것이 ‘당신이 잘 있으면 나도 잘 있습니다’라는 말일 것이다―를 지키려고 애쓰고, ‘한국인이 가진 말들 중 극히 몇 개의 조악한 단어만이 공격과 혐오와 타자 부정을 위해 고장 난 녹음기처럼 반복되는 것’에 분노하기 때문에 거짓 정보와의 싸움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말들이 이루는 더 높고 어려우나 귀한 세계도 있다. 그런 세계를 엿보다 보면 내가 혹은 우리가 이보다는 나은 존재인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되고 그렇게 살고 싶은 거다.” - 2019. 6.18. ‘경향신문’ 칼럼 中 자신을 ‘bilingual’이라고 했다. 영어를 우리말처럼 잘한다는 뜻인가 했는데 경상도 사투리를 완벽하게 구사한다는 뜻이라며 웃었다. 절제된 서울말이 아니라 마음의 고향 ‘통영의 언어’로 이야기를 하면 이 사람 표정이 더 밝아지고, 젊은 시절의 그 얼굴에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디자인 : 채지우
이름보다 작품이 더 유명한 사람 지인에게 이 사람을 한 번 취재해 보면 어떻겠느냐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분이 누군데요?”라고 반문했다. 김호석이란 이름 석자가 낯설었다. 인물화의 최고봉, 수묵화의 대가라는 수식어는 진부했고 올해의 작가, 비엔날레 초대작가, 뉴욕 무슨 미술관 초대전 같은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림 한 점을 팔면 1년을 먹고 산다는 말에 조금 호기심이 일었고 100여 종이 넘는 초.중.고 교과서에 작품이 실렸다는 말을 듣고서는 ‘설마 한 사람 그림이 그렇게 많이 실렸을까’ 싶었다. 인터넷에서 그림을 찾아보고 나서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봤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눈에 익은 그림들이었고 이런 다양한 그림을 이 사람이 그렸다는 것도 놀라웠다. 이름보다 작품이 더 유명하다는 말이 작가에게 칭찬일지 욕일지 모르겠다. <수박씨를 뱉고 싶은 날>. 1997 주변 사람들도 화가 김호석은 몰라도 <수박씨를 뱉고 싶은 날> 같은 이 사람 작품을 처음 본다는 사람은 없었다.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따뜻한 시선과 날카로운 필치를 갖고 있는 것일까, 이런 관찰력은 어떻게 얻은 것일까 궁금했다. ‘5월 광주’의 작가이기도 하니 ‘광주’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이미 지인을 통해 부탁을 해서인지 인터뷰 요청에 선뜻 응했다. 5월 11일 오후 세 시에 보기로 했는데 두 시간 정도 시간이 된다고 했다. 단 몇 분이라도 더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30분쯤 일찍 작업실에 갔다. 그림에 문외한이라 어떻게 이야기를 끌고 가야 할지 다소 걱정이 되었는데 그것은 기우였다. 스승과의 불화, 가난과의 싸움 1977년 홍익대 미대에 들어갔다. 교수들에게 불편하고 골치 아픈 학생이었다. 사군자를 그리는 기법에 앞서 왜 난을 치고 대나무를 그려야 하는지 그 이유를 물었다. 바람을 그릴 수는 없는지 흔들림을 그리면 안 되는 것인지 캐물었다. 그런 질문을 할 때마다 ‘날개에 털도 안 나는 놈이 날려고 한다’라는 말만 들었다. 학교 밖으로 답을 찾아 나섰고 그럴수록 교수들에게 미운 털은 더 깊이 박혔다. 1980년대 초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마치던 날 은사가 찾아왔다. 화기애애하게 시작된 두 사람의 대화는 술잔이 박살나고 상이 뒤집어지는 것으로 끝났다. “실력 없는 선생님을 은사로 둔 덕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게 선생님의 공입니다.” “너 같은 놈을 제자라고 믿고 살아온 내가 미친놈이다, 너는 더 이상 내 제자 아니다” “선생님에게 찍힌 제자가 어떻게 작품을 하고 사는지 지켜보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오래 사셔야 합니다”. 예술 세계는 선후배도 없고 스승과 제자도 없다는 이 사람에게 쥐꼬리만한 재주 믿고 날뛰는 오만방자한 놈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이 사람 석사 논문을 보지도 않고 집어던졌던 그 은사와는 훗날 화해하고 잘 지냈지만 그 일화는 권위 같은 것은 깡그리 무시하는 이 사람 성정을 잘 보여준다. 스승과의 갈등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가난과의 싸움이었다. 중학교 때 가세가 기울어 대학생 때 안 해 본 일이 없다. 공사장 막노동은 기본이고 공동묘지에서 무연고 묘 파묘해서 유골을 화장하는 일도 해봤다. 거의 고학으로 대학을 다녔고 학군장교, ROTC를 선택한 것도 돈 때문이었다. 그림 그릴 종이 한 장 살 여유조차 없어 친구들이 쓰고 버린 종이를 잘라서 이어 붙였다. 두께가 다르고 색깔도 제각각이었다. 그 위에 그린 그림이 이 사람을 세상에 처음 알린 <아파트>라는 작품이다. 중앙미술대전에 응모할 때는 심지어 액자를 살 돈도 없어 직접 만든 액자에 구두약을 발라 출품했다. 이 작품으로 1979년 중앙미술대전에서 2등에 해당하는 장려상을 받았다. <아파트>, 1979 “그러한 고통 그러한 노동조차도 나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는 데 굉장히 도움이 됐어요. 노동을 할 때 어디의 힘줄이 움직이고, 어디에 사람의 눈길이 가고, 왜 그리움이 있고 왜 먹고살려고 하는지에 대한 절박함을 그 사람들 눈빛에서 잡아낼 수 있었어요. 나도 절박했으니까. 그래서 내 예술이 그려놓은 모든 것은 최소한 나에게는 재미로 그린 그림이 없어요. 가장 절박하고, 그리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그림을 나는 그리려고 노력해요” 중앙미술대전, 한국일보 대상 등을 휩쓸었고 주목할 만한 전시회에 잇따라 참여하면서 1980년대 초반 20대의 나이에 이른바 수묵화 운동의 기수 역할을 했다. 1986년 네 개의 눈을 가진 ‘황희’ 로 화단을 놀라게 했고 ‘가족화’로 불리는 일련의 인물화 작업을 통해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1999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었다. <함께 가는 길>이 보여준 위로의 힘 〈키재기 - 꿈꾸기〉 1998~1999 1998년 <함께 가는 길>이란 타이틀로 전시회를 열었다. 마침 IMF 외환 위기로 수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고 가정이 해체되던 시기였다. 이 사람의 그림에서 위로를 찾으려는 사람들로 전시회장은 인산인해였다. 얼마나 많은 관람객이 왔던지 전시회가 끝나고 바닥 공사를 다시 해야 할 정도였다. 숱한 관람객 중에서 노숙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때 제가 화랑 주인에게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그림 전시를 합시다’ 그랬더니 ‘안 팔려요’ 그래요. 지금까지 많은 그림을 팔았으니 이번에는 팔리지 않아도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한 전시를 통해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사회적 기능이란 그런 거다. 그랬더니 ‘그림 안 팔아도 되겠습니까?’ 그래서 난 상관없다. 그런데 내가 지금까지 했던 전시 중에서 그때 그림을 가장 많이 팔았어요.” 이때 나온 <마지막 농부의 얼굴> <어휴 이뻐> <어때 시원하지?> 같은 작품은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보면 미소가 절로 지어지고 이 사람이 얼마나 세상을 따뜻하게 보는지 알 수 있다. 초. 중. 고 교과서에 실린 그림들도 주로 이 시절 그림이다. 교과서로 저작권료를 받는 그림이 115점. 미술 교과서만이 아니라 국어, 국사 교과서에 실렸고 영어 교과서에도 한국을 설명하는 자료로 이 사람 그림이 등장한다. 이 사람을 통해 성철과 법정이 우리 곁에 다시 돌아왔다. 1994년 성철 스님 초상화를 그린 것을 계기로 불교 고승들의 그림을 많이 그렸다. 대상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관련된 자료를 섭렵하고 그 사람이 살았던 곳을 찾는다. 그 사람을 아는 사람들을 취재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 사람들이 밟고 살았던 곳의 땅을 가져다 재료로 쓴다. 법정 스님의 유해 일부를 화폭에 바른 이야기는 다소 유난스럽다 싶었지만 작가와 대상의 일체를 추구하는 이 사람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그런 그림은 여기에 아침에 일찍 나와서 가장 맑은 정신에 그려요. 오후에는 다른 일을 해요. 내 스스로가 맑고 투명한 마음을 갖고 있을 때 그림에 집중하는 거죠. 아침에 오다가 험한 뉴스를 듣거나 험한 어떠한 동물의 사체를 보거나 그러면 그날은 그림을 안 그려버렸어요” 그림을 그리는 일은 수행정진이다. 수행하는 곳이니 탁한 기운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작업실에서는 누구도 음주 흡연이 안된다. 이 사람도 생수만을 마신다. 15평 남짓한 작업실은 ‘성스러운 곳’이고 ‘사생결단의 현장’이다. 대상 인물의 기운이 출중하고, 재료를 엄히 고르고, 그리는 장소의 기운, 거기에 붓을 잡는 시간의 기운까지 따져가면서 작업을 했기 때문일까. 법정 스님 초상에서 신기(神氣)가 느껴졌다. 무소유를 주장했던 스님의 무소유를 내가 그림 한 점으로 소유하고 싶다는 이 사람 욕심이 ‘어느 정도’ 표현된 작품이다. “제 친구가 ‘호석아 머리 아프고 여러 가지로 고민스러우면 내가 하는 방법을 너도 해봐. 저 성북동 길상사에 가면 진영각에 법정스님의 그림이 있는데 진짜 잘 그렸어. 두어 시간 정도 스님을 바라보면서 ‘스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은 걸 저한테 들려주십시오’ 하면 어려운 문제도 풀린다는 거예요. 그러니 저한테 가서 앉아서 있으라는 거예요. 제가 그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모르는 친구지요. 그래서 내가 웃으면서 속으로 ‘너는 인마 지금 내 손바닥에서 노는 거야(웃음)” -세수하는 성철 스님 그것도 좋더군요. “그 그림도 처음에는 성철 스님 제자들이 전시회장에서 떼라고 그랬어요. -아니 왜요? <세수하는 성철스님> “천하게 엉덩이를 들고 있다고…저는 어떻게 생각했냐면 성철 스님도 똥을 싸는 사람이야. 그러나 먹는 것만큼 싸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을 성철스님도 똑같이 느끼고 있어. 제가 작가 노트에 이렇게 썼어요. ‘성철 그는 불립문자를 주장했다. 제자들에게 바람에 날려온 신문지조차 보지 못하게 한 분이었지만 진정 그는 아침마다 세수 대야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보며 마음의 빛을 갈고닦았다’ 그랬더니 떼라고 했던 사람이 또 좋다고 또 그래(웃음)” -그림이 사진 하고 다른 특성, 변별력이 뭘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어요? 사진가라면 성철 스님 엉덩이에 그렇게 카메라를 들이대겠어요? “그런 사진 없죠. 예술적 상상력으로 만들어 내야지. 딱 보는 순간에 아 이 사람의 전형성은 무엇일까? 그만이 도달한 정점은 어떤 것일까를 빨리 잡아 내야 돼요. 뭘 그릴 것인가. 성철을 통해서 지금 우리 사회에 던지고 싶은 거대 화두가 무엇일까를 되묻는 방식으로 접근을 했어요” 인물화의 대가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니 이제 사람을 보면 그 사람 인생 전부가 단박에 눈에 들어오지 않을까. 우문 같은 질문에 이런 현답을 내놓았다. “내가 보는 것은 관상이 아니다. 한 사람 눈에서 개인의 삶과 함께 그 사람이 살아온 사회와 역사를 본다. 그래서 내 그림의 인물들은 개인이면서 개인이 아니다. 김호석이 만든 사회의식을 그 사람의 눈 안에 넣는 것이 내 작업의 본질이다.” 나를 가르치는 것은 오직 나일뿐 지금까지 몽골에만 예순 번 넘게 다녀왔다. 초원에 가면 고요의 극치 속에서 자연의 소리가 오감으로 느껴진다.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삶과 죽음, 생명의 시원에 대해 그리기 시작했다. 하나의 죽음이 하나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어떻게 새로운 생명으로 이어지는지 <하늘에서 땅으로> 같은 그림을 예로 들어가며 길게 이야기했다. 이런 그림은 생명으로 들끓는다. 소멸을 그린 그림에서도 들끓는 생명이 느껴진다. <하늘에서 땅으로>, 2005 -거의 모든 작품에 생명이 등장하더군요. 사람의 생명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것의 생명에 대한 관심이 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요. 잘 보셨습니다. 생명이죠. 살아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죽어 있는 것조차도 쓸모없는 것이 없다라는 게 자연을 보는 제 관(觀)입니다. 살아있는 것은 부드럽고 죽어있는 것은 뻣뻣하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이름값을 한다. 그 어떤 것도 근거 없이 생성하지 않았고 소멸하지 않는다” 설명을 듣고 나니 그런 그림이 다시 보이기도 했지만 가족화나 인물화에 비하면 여전히 어렵고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역사와 사람’이 있어야 될 화폭을 ‘신화와 동물’들이 차지하는 것 아니냐는 말도 듣는다. 어떤 작품은 보기 불편했다고 하자 경험치의 차이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의 층위는 수직적이라 했다. 생각의 깊이와 폭에 차이가 있다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작품 마치고 나서 이거 참 참 좋다 흐뭇하다 이랬던 작품이 뭐가 있을까요? “솔직히 하나도 없어요. 그건 없어요. 작품 좋다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저는 전시를 통해서 지금까지 집중했던 작품에 대한 평가를 받는다고 생각해요. 지난 시간의 공부를 점검받는 게 전시회입니다. 그래야 자신을 복제하지 않고 창조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나의 형태가 분명한 그림을 그리지만, 그것이 나의 문제에만 잡힌 그림은 경계해 왔어요. 그건 좋은 작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전시장에 작품을 펼쳐 놓고 보면. ‘좋구나’라는 것보다도 ‘내가 왜 이렇게 허탈하지, 내가 왜 이렇게 부족했지, 내가 왜 이렇게 모자라지, 내가 진짜로 그림을 계속 그려도 될까’라고 하는 자괴감이 먼저 와요. 정말 그래요. 뒤돌아 보면 다 버려야 할 쓰레기들로 보이기도 해요.”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그런 사람이 없단다. Self taught, 자기에게 배운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덧붙였지만 자신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는 자신감으로 들리기도 했다. 동시대 작가 중에 경쟁자로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지만 답을 하지 않았다. 거듭 묻자 독일 작가 오토 딕스( Otto Dix)와 중국 판화작가 자오옌녠을 들었다. 국내 작가는 없느냐는 거듭된 질문에 고암 이응로를 들었고 이우환은 천재라고 했다. 다른 사람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만족하는 작품은 없다면서도 작품에 대한 자부심은 거의 하늘에 닿아 있었다. 자의식, 자존심,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이런 말은 어지간한 자신감 아니면 입밖에 내기 어렵다. “그림을 그리지 않고 그리는 최고의 고단수를 나는 실험하고 있어. 그런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이게 지금 인정하지 않는다? 인정받지 못한다? 좋아, 너희들은 서로의 접점이 다르거나 지향점과 문화 층위가 달라서 내 그림을 이해 못 하지만 10년 지난 뒤에도 이해 못 할까? 천년 뒤에도 이해 못 할까? 나는 천년 지난 뒤에라도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평가하는 평론가, 화가가 나올 거라고 생각해. 그때 지하에서 나는 웃을 거야! 이런 자세로 그리고자 노력합니다.” 그림을 그리지 않고 빈 여백으로 예술이 뭔가를 보여주는 경지, 말하지 않고 말하면서 진리를 전하는 경지를 꿈꾼다. 얼굴이 없고 눈이 없는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얼굴 없는 노무현 그림은 그런 시도 가운데 하나다. “노무현 대통령과 둘이 주고받았던 말들을 어떻게 녹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좀 많이 했고 그런 고민의 결과 ‘얼굴을 그리지 말자, 우리는 지금 권력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노무현을 바라보고 있지만 권력을 놓았을 때 그의 명성과 힘은 마치 거대한 바람에 미세하게 깎여 나가는 먼지처럼 흩날리는 모습을 경험할지 모른다… 먼지처럼 지워 나가는 그이의 모습이 어쩌면 형상보다 더 강한 형상의 이미지를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고도 생각을 했고요.” 그림 값이 비싼 화가다. 그림 한 점을 팔면 1년 먹고살 수 있고, 아들이 미국 유학을 갔을 때는 그림 한 점만 더 팔면 됐다. 그림 값을 양보하지 않는다. 그림이 팔리지 않으면 막노동이라도 해서 먹고살면 그만이라는 자세로 살았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 예술적 성과에 대해서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아야 된다고 믿는다. 그림 값 흥정하려는 사람들과는 두 번 다시 거래하지 않는다. 전시회를 할 때마다 한 사람에게 석 점 이상은 팔지 않는다. 절대 전시장에 나가지 않은 그림은 거래하지 않았다. “팔고 싶지 않은 사람과 팔고 싶지 않은 그림에 대해서는 아무리 좋다고 해도 팔지 않았어요. 그림을 여러 점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경제적 여유를 주게 되어 좋았지만 그것 또한 절제하고자 거절했어요. 딱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되고 약간의 불편함과 결핍은 저를 더 긴장하게 하여 집중하게 했어요. 그리고 특정인이 독점하는 순간이 되면 작가가 망해요.” 전시회가 있을 때마다 석 점씩 사들여 이 사람 작품을 60점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그림을 그려 달라는 사람이 아직 있다. 눈을 그리지 않은 인물화로 유명한 <사유의 경련>은 한 달만 보고 돌려주겠다는 한 기업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가 끝내 되돌려 받지 못했다. “그분이 “김화백. 내가 돌려주려고 마음 먹었으면은 김화백한테 그림 갖고 왔겠어. 내가 갖고 싶네요. 괜찮겠어요?” 그래서 “예 그러시죠” 그냥 심플했어요. 그러고 나서 직원을 시켜서 그림 가격은 어떻게 하느냐 물어봐서 회장님이 주고 싶은 대로만 받겠다” 지금까지 대략 1천 점을 그렸고 5백 점 정도가 팔렸다고 했다. 자신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고 고가에 구입해 주는 사람도 고맙지만 자신의 그림에서 위안을 찾는 장삼이사들의 이야기는 더 반갑고 고맙다. 어느 미장원에서 신문에 실린 <토요 미스테리 극장> 그림을 오려서 거울에 붙여 놨다. 그것을 부인이 보고 울었다. 아내의 마음이 남편의 마음이다. 接神의 경지-내 그림의 핵심은 귀신 神입니다 1957년생, 이제는 눈곱도 끼고 눈이 흐려질 때도 되었건만 눈빛이 형형했다. 접신의 경지를 경험한 사람의 눈빛이 저런 것일까. 미당 서정주는 마흔다섯이면 귀신이 보이는 나이라고 했는데 이 사람은 몇 살에 귀신이 보이기 시작했을까. “내 그림의 핵심은 뭐냐, 그러면 나는 귀신 신(神)이라고 딱 말합니다. 진짜 귀신을 보지 않으면, 귀신을 그리지 않으면 그림에 생명력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사람의 그림을 본 중국 작가 자오옌녠(趙延年)은 ‘神’ 자를 적어 보이며 당신의 그림에서 신기가 느껴진다고 했단다. 이 사람 열광적인 팬 가운데는 종교인들이 많은 것도 그림에서 영성, 신기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 장인은 그 날카로운 눈빛으로 일반인들이 보지 못하는 귀신의 영역을 감지하려고 애쓰고 그 기운이 어느 순간 벼락 치듯 임하면 그 한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그러니 항상 깨어있어야 되고 긴장해야 한다. 자유로운 예술가의 영혼보다는 몸가짐과 마음가짐 단정한 종교인의 기운이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거다.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는 봉쇄수도원 한 수녀가 우연히 이 사람 작품을 알게 됐다. 작품에서 깊은 영성을 느낀 모양이다. 그림 한 점 한 점 묵상하고 그 묵상을 글로 옮겼는데 그 글이 화제가 돼서 세 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마산 트라피스트 봉쇄 수녀원에서 수도 중인 장요세파 수녀가 그 주인공이다. -그 수녀님은 지금 봉쇄수도원에 계시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어떻게 대화를 나누셨습니까? “제 그림을 보고 묵상을 하면 온갖 삼라만상이 느껴진대요. 그 느낀 것을 글로 써서 저한테 보라고 메일로 보내요. 그러면 제가 전화를 해요. 생각이 같을 때가 많지만 제가 못 본 것을 수녀님이 보실 때도 있고 다를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땐 ‘수녀님 제가 볼 때는 이 그림은 이런 느낌이었는데 수녀님 하고 다르네요’ 그러면 수녀님이 ‘저도 그걸 느꼈는데 내가 거짓말인 것 같아서 안 썼어요.“ 죽고 싶을 정도로 어려울 때면 신이 몸 안에 들어와 그림을 계속 그려도 되는지 자기를 시험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지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그러니 죽을 각오로 그린다. 단 하나의 점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정신의 극점까지 가고 싶다고 했다. 정치와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할 때는 세속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이었지만 정신의 극점까지 가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백척간두에 서 있는 작가, 천 길 낭떠러지 앞에 선 예인이었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거기에서 기꺼이 한 발 더 나갈 수 있다는 각오로 산다. 그 모습이 위태롭게 보인 것은 필자만이 아닌 모양이다. “집사람이 제가 작업 도중에 뛰어내릴까 봐서 문을 다 잠그고 졸졸 따라다니고 자동차 운전도 못하게 해요. 근데 나는 그런 생각은 없었어요. 어떻게든 시험에서 내 스스로가 통과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고 그림을 그리면서는 그 생각은 없어요.” 밥값을 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날은 밥을 먹지 않는다. ‘너는 밥 처먹을 자격이 없는 놈이야’라고 스스로 말한다. 그림을 그리고 나면 눈썹이 우수수 빠진다. 지금 이빨 가운데 12개는 자기 이가 아니다. 그렇게 자신을 학대하면서 내가 걸으면 그게 법도가 되고 내 생각이 곧 모본(模本)이 되는 것, 그림을 통해 성인이 되고 군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꾼다. -‘나는 욕심이 많고 꿈이 많은 사람이다. 난 중심이 되고 싶다’라는 표현을 쓴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본질적인 것을 파고들지 않고 주변에 있는 것만 가지고 부화뇌동하는 그런 그림이나, 삶을 살고 싶지 않아요. 남들은 ‘네가 중심이 아니고 껍데기야’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는 되고 싶지 않아요. 그런 점에서 제가 욕심이 많은 것은 사실인데 물욕은 그렇게 없어요.” 이 사람이 말하는 ‘5월 광주’ 1980년 광주 민주화 항쟁 시기 대학교 4학년 ROTC장교 후보생이었다. 혹시 광주에 빚진 마음이 있을까 물었더니 그런 것은 없다고 했다. <광주민주화운동>, 1997 <광주민주화운동사>, 2000 1986년 전남대 출강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광주와 인연을 맺었다. 1997년에 <광주민주화 운동>, 2000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사> 등을 그렸다. ‘광주’를 그리기 위해 1백 명이 훨씬 넘는 관련 인물들을 만나 이야기를 채록했고 광주 어떤 기록 단체보다 더 많은 사진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사진 자료를 얻기 위해 전국의 주요 언론사 자료실을 다 뒤졌고 5.18 직후에는 광주에 있는 유력 신문사 자료실을 뒤져 당시 보도되지 못했던 사진을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린 ‘광주’에 비해 이 사람이 표현하는 ‘광주’는 그리 격렬하지 않다. 부드러움으로 거침을 말하려는 의도 때문인지, 현장을 경험하지 않은 탓일지, 쉽게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날의 현장’보다는 역사 속에서 ‘빛고을 광주’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고민한다. 광주에서 벌어진 만행을 고발하기보다는 광주가 보여준 정신에 대해 더 집중한다. 그래서 이 사람의 광주 그림에서는 선혈이 흐르지도, 함성이 들리지도, 총성이 귀를 찢지도 않는다. 그런 것보다는 누구나 평등했던 대동의 세상과 사람을 그리고자 한다. 지난 5월 17일 광주 시립미술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광주시민들과 작가와의 대화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평일 오전 시간이었지만 주최 측에서 준비한 60개 좌석이 가득 차 보조 의자까지 놓을 정도였다. 미술관 측에서 급히 선풍기 몇 대를 동원해야 할 만큼 세미나실 열기가 뜨거웠다. 광주 항쟁 43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둔 시점, 관심은 역시 5.18이었다. 이 강씨를 비롯해 민주화 운동 관련 인사들이 몇 명 자리를 함께 했고 지정 토론자도 민병로 전남대 5.18연구소장이 나왔다. 이 사람은 점으로 이야기를 시작해서 몽골 초원 여행, 생명에 대한 이야기, 쥐 그림 등을 광주와 연결 지으며 강연을 풀어갔다. 광주는 광주 사람만의 광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광주 항쟁은 서울 부산 마산 전주 등 전국적 의인들이 힘을 합해 만든 일이다, ‘광주’ 그림들은 자신이 그린 것이 아니라 광주 영령들이 자신 속으로 들어와 그려진 것이라고 했다. 은유와 상징이 리얼한 그림보다 더 오래 잔상을 남긴다는 말도 했다.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이 손을 들어 이렇게 물었다. “오늘 강연 중 윤석열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더라, 당신은 광주에 살지 않는다 그러면서 광주를 이야기한다, 동물 그림을 보여주면서 ‘광주’를 말하는데 말과 그림 사이에 괴리가 큰 거 아니냐”는 것이다. 질문자가 굳이 답변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고 이 사람도 “자기 향상의 계기로 삼겠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광주 항쟁, 강경대 열사 장례식 그림 등을 포함해 정치적인 이슈들을 화폭에 담았다. MB 정부 시절 반구대 암각화 보존 운동에 적극 나섰다. 그런 이력 때문인지 이명박 정부 시기 미술계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이러저러한 일을 겪었다. 민중들의 삶을 그리고 역사적 현장을 되살린 대작들을 제작했지만 민중화가라고 불리지도 않고 그렇게 불리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김화백께서는 시대와 역사에 충실한 그림을 많이 그렸지만 어느 한 진영이나 이념에 속하는 것은 아니신 것 같아요. “나는 그것은 굉장히 싫어해요. 왜냐하면 예술가는 특정한 계층만을 위한 그림을 그릴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다름을 인정하지만 저는 달라요. 균형감을 중요시해요. 정치적 당파성을 멀리하고 싶어요. 한국 사회의 어떤 보편적인 현상이랄까 백성을 위한 일이 무엇일까를 먼저 생각하고자 했어요. 만약 그들이 원하는 길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해도 나만을 고집하지 않았어요. 거세게 싸우기도 하지만 기다리고 침묵하고 양보하고 내주면서 조금이라도 일하면서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에게 내 작품이 어떻게 질문하고 답할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대화 중에 여러 명의 유력 정치인의 이름이 이 사람 입에서 나왔다. 여.야 가리지 않고 정치권에 있는 사람들과 교류가 적지 않다. 두 번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김대중 정부 때는 별 관심 없었지만 박근혜 정부 때 비례대표 제안에는 솔깃했다. 문화관광부 특히 문화재청이 하는 일이 얼마나 엉망인지 잘 알아서 국회에 들어가 뜯어고치고 싶었단다. 그래서 이런저런 서류까지 준비했지만 “김화백, 당신 정치권 가면 죽는 거야. 거기는 당신 같은 사람이 갈 곳이 아니”라며 강력히 만류한 친구 말을 들었다. 그 친구가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낸 정종섭이다. 친구의 말을 들은 것이 이 사람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 중의 하나다. 2008년부터 2015년까지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 적을 두었다. 그 시절은 돌이켜보고 싶지 않은 시절이다. 학생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교육자로서 살려고 했지만 회한과 환멸만 남겼다. 강의 시간에 있었던 이 사람 발언을 두고 성희롱 논란이 일었고 그 때문에 학교에서 해직됐다. 행정력에 의한 최악의 교권 침해라는 의견과 강의를 빙자한 성희롱이란 주장이 맞섰다. 법원에 억울함을 호소해서 2심에서 해고 무효 판결을 받아냈지만 학교 측과 송사는 그것으로 마무리되지 않았다. 그 일로 국회에도 몇 번이나 불려 갔다. 소송은 조정으로 마무리됐고 최종 징계 처분은 감봉 3개월, 징계 사유는 ‘성실의무 위반’이었다. 학교는 계약기간 만료 형식으로 2015년 그만두었다. 명예로운 퇴장은 아니었다. 돌아보고 싶지 않다면서도 그 시절 기억은 선명했고 설명은 상세했다. 군자와 성인의 꿈, 그리지 않는 것으로 진리를 전달하는 꿈을 이야기할 때와는 다른 눈빛, 다른 어투였다. 구사하는 단어도 거칠었지만 표정은 더 거칠었다. 그 어느 대목보다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드러냈다. 자신의 작품은 단 한 점도 이 땅에 남기지 않겠다는 생각까지 했고 다시는 제자를 받지 않기로 했다. 여백을 남기는 그림, 여지를 남기지 않는 말 수천수만 번의 붓질 가운데 단 한 번도 같은 붓질이 없다는 자부심으로 살고, 점 하나만 찍어도 작품이 되는 사람이다. 다섯 살 때 조부 앞에서 무릎 꿇고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이래로 화업 60년, 이룬 것이 많은 삶인데 아직도 이루고 싶은 게 많다. 심오함과 현란함이 뒤섞인 말을 거의 쉼표 없이 이어갔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2시간으로 예정했던 대화는 3시간 반을 넘겼다. 여백을 중시하는 작품과는 달리 이 사람 말은 듣는 이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그림에는 여백이 많은데 말에는 여백이 거의 없었다. “일주일 동안 아무도 안 만나고 집에 가서도 말 한마디 안 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 필요에 따라서 기자가 오거나 꼭 필요한 대답을 할 때에는 저는 그동안에 생각했던 말들을 충분히 전달해야 되고 친절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이 사람 작업실 한 쪽에 그리다 만 쥐 그림이 있었고 화실 건물 옥상에는 죽은 쥐 세 마리가 햇볕 속에 놓여 있었다. 이 사람이 키우던 쥐들이다. 쥐 이야기는 엽기적이었지만 어떤 자세로 그림을 그리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쥐 제가 손으로 잡았어요. 손으로 잡고 그립니다. 그러면 쥐가 손을 뭅니다. 피가 질질 나요. 그것을 쥐가 빨아먹습니다. ‘가만히 있어’ 하고 다시 잡습니다. 그러면 다음에 잡았을 땐 물지 않습니다. 쥐가 내 말을 알아 들을 때 함께 그림을 그려 나갑니다.” 타고난 성정이 거짓을 싫어하기도 하지만 굳이 거짓을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축복받은 삶이다. 남 의식하지 않고, 하기 싫은 것 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면서 산다. 그런 면에서도 축복받은 작가다. 분명히 말하고 자신을 드러내려는 사람이다. 어떤 질문에도 우물거리지 않았다 고조부는 일제 감옥에서 스스로 곡기를 끊어 죽음을 선택했다. 그런 선조들의 피가 몸 안에 흐른다. 자기 생각이 분명한 사람들이 대개 그러한 것처럼 비난과 질시 견제도 적지 않다. 미술계에서 주류인 듯 주류가 아니다. 몇 번 대학 교수 자리에 응모했지만 실패한 점이나 홍대 출신이면서 박사 학위는 동국대에서 받은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다. 작가로서, 인간으로서 이 사람이 어디까지 이르고 싶은지 궁금했다. 화실 벽 한 켠에 이러저러한 말들이 마치 낙서처럼 적혀 있었다. ‘노동이 수행이다’ ‘명료하고 단순하게’ ‘고요’, ‘적조’, ‘正直’, ‘약하고 부드럽게’ ‘ ‘세상을 버려라’ ‘ ‘보여지는 대로 봐라’ ‘삶이 그림이다, 그림이 삶이다’ 디자인 : 채지우
코로나19로 맺은 춘포와의 인연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이 시골에 올 리 없었다. 다니던 여행사는 주로 중국 관광객을 유치하던 곳이었다. 코로나가 터지자 중국 관광객이 뚝 끊겼다. 사드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지만 코로나19는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할 일이 없는데 사무실에 나가는 일은 고역이었다. 일이 없으니 급여가 제대로 나올 리가 없었다. 결국 사무실도 문을 닫았다. 이 사태가 하루이틀에 끝날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여행사 대표는 지방으로 가서 게스트 하우스 같은 것을 운영하면서 버텨보자고 제안했다. 그 제안을 받았을 때 지방에 혼자 가서 살 수 있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서울에서 딱히 할 일이 없으면 그렇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같이 사는 고양이 말고는 자신이 직접 챙겨야 될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딱히 잃을 것이 없어서 오기 쉬웠던 것도 있었어요. 제가 여기 오기 전까지 뭔가를 이루어 놓은 상태가 아니었거든요. 직업이 뚜렷했던 것도 아니고 돈을 많이 모아놓은 것도 아니고, 모든 것에서 실패한 느낌이었기 때문에 서울을 떠난다고 제가 포기할 것이 그리 많지 않았어요.” 여행사 대표가 멀지 않은 친척이었고 몇 년 동안 같이 일을 하면서 쌓인 신뢰가 있었다. 새롭게 일을 하게 된 전북 익산 춘포리는 가본 적은 없지만 고향인 익산시에서 차로 20분 거리여서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서울에서 밀려난다는 느낌은 없었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것은 없었다고 했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도 있었고, 서울을 떠나는 게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멀리 여행을 온 듯한 마을, 춘포 전북 익산 만경강 변에 있는 춘포리는 한 세기 전 세워진 교회와 초등학교가 있고,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철도 역사를 비롯해 일제 강점기 유적이 마을 곳곳에 있는 것을 빼면 외양으로는 평범한 시골 농촌 마을이다. 오지는 아니지만 마켓 컬리나 쿠팡의 새벽 배송은 안 되는 곳이다. 전주와 익산의 중간쯤에 자리 잡고 있어 도시에서는 가까운데, 일단 마을에 들어서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멀리 여행을 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40대는 말할 것도 없고 50대 주민도 찾아보기 힘들다. 주민의 대부분이 60-80대이니 동네 주민들이 몇 천 원 주고 커피를 마시는 것은 일 년에 손을 꼽을 정도이고 외지인들이 이 동네를 일부러 찾을 일은 거의 없는 곳이다. 지난해 가을 우연히 그 카페에 들렀다. 한눈에 봐도 도회지 냄새 물씬 풍기는 두 명의 젊은 여성이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여행사, 항공사 직원으로 일하던 사람들이라고 했다. 저런 사람들이 왜 여기 와서 카페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도시 감성의 카페는 한적한 그 동네와는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 뒤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두세 번 더 그곳을 찾았다. 찾을 때마다 카페는 조금씩 달라져 있었고 무엇보다 그 가게 하나로 동네 분위기가 눈에 띄게 달라져 갔다. 여기까지 내려온(?) 청년들이라면 사연이 적지 않을 듯싶었다. 이 사람들을 통해 청년, 지방, 요즘 트렌드라는 귀촌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다 싶었다. 지난 4월 8일 카페 대표 최혁과 두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눴고 그다음 주 토요일인 4월 15일 카페 운영자 최희서를 만났다. <카페 춘포>에 도착할 때까지 마을에서 마주친 사람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로 동네는 한적했다. 인터뷰를 진행한 <카페 춘포>는 주문을 받는 곳, 음료를 마시는 공간, 그리고 회의와 소규모 강연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카페 옆에는 게스트 하우스 <금촌농장>이 있다. 건물이나 인테리어는 소박하고 깔끔했다. 유채꽃이 활짝 핀 텃밭에서 카페 대표 최혁이 구슬땀을 흘리며 땅을 다듬고 있었다. 주말이 역시 가장 바쁜데 3시 반쯤 인터뷰를 시작할 때는 두세 팀의 손님이 보였다. 게스트 하우스와 카페를 최희서와 최희서가 언니라고 부르는 신나영 씨가 함께 운영하고 있다. 나를 치유하고 힐링해 준 동네 <춘포 카페> 공사하는 모습 이 한적한 동네에서 이렇게 바쁘게 살 줄 몰랐단다. 이 마을에 온 것이 2021년 12월, 그때부터 4개월 동안 동료들과 카페와 게스트 하우스 개업 준비를 했다. 카페 건물을 짓고 게스트 하우스 내부를 수리하는 것은 전문가의 손을 빌렸지만 어지간한 것은 최혁, 신나영, 신웅재 등 동료들과 직접 했다. 카페 집기를 구입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실내 인테리어를 직접 챙겼다. 카페 간판을 도안, 제작해서 직접 달았고 마당에 잔디 깔고 디딤석을 만드는 일도 남에게 맡기지 않았다. ‘춘포커피’, ‘쌀라테’ 같은 메뉴 개발은 바리스타 자격증이 있는 신나영의 몫이었고 카페 인테리어는 디자인 담당인 이 사람, 최희서가 주로 맡았다.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재미있고 신이 났다. 카페 개업 준비 과정을 사진과 함께 개인 블로그에 거의 매일 올렸는데 그게 제법 화제가 됐다. “글쎄 여행사 다닐 때는 이렇게 열심히 안 했는데 여기 와서는 열심히 한 거 같아요. 일단 저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잖아요.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또 이거는 정답이 있진 않잖아요. 회사 일은 실수가 있으면 안 되지만 여기 일들은 실패하면 다시 해도 되잖아요. 그리고 어쨌든 우리 거니까 누구 눈치 안 봐도 되고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좀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카페가 문을 연 것이 지난해 4월 하순, 그 직후에 야외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됐다. 개업 타이밍이 좋았던 셈이다. 개업한 지 이제 일 년이니 성과를 말하기에는 이르지만 제법 이름이 알려졌다. 대보둑이라고 불리는 만경강 강둑은 전주에서 익산으로 이어지는 길인데 자전거 라이더들에게 명소로 알려진 곳이다. 만경강 제방 바로 아래 자리 잡고 있는 이 카페는 강둑을 달리는 라이더들의 입을 통해 소리 소문 없이 퍼져갔다. 지난겨울에는 천연기념물인 칡부엉이 일곱 마리가 이 카페 마당 나무에서 서식 중인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이 칡부엉이 사진을 찍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기도 했다. 많은 돈을 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손해는 보지 않는다. 게스트 하우스는 주말에는 예약하기가 힘들 정도고 카페도 손님이 없어 멍하니 보내는 시간은 없다. ‘면사무소 직원, 매일 출근 도장 찍는 택배회사 사장, 춘포 주민 할인해 달라고 소리 지르는 할저씨, 좋은 향기를 풍기는 중년 여인, 사진 찍기 위해 나들이 나온 젊은 커플 등’이 고객이다. 동네 주민은 전체 손님의 10% 정도, 나머지는 소문 듣고 찾아온 외지인들이다. 지난 해만 네 차례 방송에 소개가 되었고 한 유튜브 채널에서 소개된 동영상은 조회수가 150만을 기록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연주회, 기업체 강연회가 열렸고, 청소년 교육 공간, 마을 사람들의 만남의 공간으로도 사용된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를 섭외해서 그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지금까지 모두 세 차례 전시회를 했는데 마을 주민들은 물론 외지인들까지 찾아와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최희서 씨가 제작한 춘포 지도 최희서 씨가 제작한 춘포 지도 카페를 꾸미고 메뉴를 개발하는 것 외에 마을 홍보에도 열심이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경력을 살려 마을 지도와 춘포 관련 포스터를 자기 손으로 만들어 자기 손으로 동네 곳곳에 붙이고 다녔다. 지도에 나온 장소의 특성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까 나름 고민했다. 그런 고민 때문이었는지 이 사람이 그린 지도를 보면서 여기 우리 집 있다고 반가워하며 고맙다고 인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마을을 알리는 스티커, 팸플릿도 제작해서 곳곳에 뿌렸다. 마을의 역사를 알기 위해 동료들과 공부를 하고 전문가를 초청해 강연을 듣기도 했다. 이 카페가 소문이 나면서 이 동네를 찾는 외지인들이 늘고 마을 분위기가 눈에 띄게 변하고 있다. 나도 당신들처럼 귀촌하고 싶은데 조언을 구한다는 말도 종종 듣고, 특히 이곳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에게 당신들 덕분에 우리 동네가 괜찮은 동네라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됐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처음에는 저희 공간을 알리는 것도 목적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전 춘포라는 곳을 진짜 알리고 싶었어요. 여기는 만경강도 옆에 있고, 동네가 조용하고 그냥 깔끔하고 그렇더라고요. 돌아다녀보면은 구석구석 예쁜 곳도 있고.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춘포에 왔으면 하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하기도 했었어요.” 카페에 지분을 가진 것은 아니다. 최혁과 그의 부인 신나영이 이 카페 주인이지만 자신을 종업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급여도 정해진 월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매월 결산을 해서 수익의 일부를 나누는 방식인데, 많을 때도 월 2백만 원을 넘기지 못하고 30만 원이 안된 적도 있다. 최저임금도 안 되는 돈이니 경제적인 것만 생각하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월세 포함해서 고정적으로 나가는 돈이 한 달에 50만 원 정도, 지방이니 그 돈으로 버틸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것에서 보람을 느낀다. 이런 보람은 지금껏 살면서 거의 느껴본 적이 없는 것이다. 이룬 것도, 가진 것도 없던 삶 할아버지는 NCCK, 한국 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와 한국기독교 장로회 총회장을 지낸 한국 기독교계의 거물이었고 아버지는 기자, 어머니는 아나운서로 일했다. 1986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난 뒤 고향과 서울을 오가며 살다가 중학교 때 서울로 간 이후 20년 넘게 서울에서 지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고 학교를 졸업한 후 2010년부터 항공사 승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어렸을 때 꿈이 외교관이었을 만큼 낯선 세상에 대한 관심이 크다. 항공사 승무원은 세상의 곳곳을 누비고 다니고 싶은 마음에 택한 직업이었다. 승무원 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정말 좁은 세상에서, 틀에 박힌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원하던 직업이었지만 자신에게 잘 맞는 직업은 아니었다. 3년 만에 승무원을 그만두었다. 자신이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지만 그 이후 삶은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이 더 많았다. 하고 싶은 일은 많았는데 정작 해낸 일은 많지 않았다. 일도 어려웠고 사람을 만나는 일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 마을로 오기 전까지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고 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시시콜콜 묻지는 않았지만 이러저러한 일로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2015년엔 주로 중국 관광객들을 상대하는 여행사에 들어갔다. 호텔을 예약하고 교통편을 챙기고 관광객 일정을 짜는 게 주된 업무였는데 규모가 작은 여행사여서 내 일, 네 일의 구분이 없었다. 일 자체가 즐거운 것은 아니었지만 거기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뜻이 잘 맞았다. 최혁, 신나영, 김나현 등이 그때 만나서 지금까지 같이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춘포에 온 이후 자신이 달라진 것을 느낀다고 했다. ‘나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같은 부정적인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바쁘기도 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박수 쳐주고 호응하는 사람들이 주는 힘 덕분이기도 하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라는 것,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모처럼 느끼며 산다. 그러니 커피 값 안 깎아준다고 투덜대면서도 찾아오는 주민들도 고맙다. 최희서 씨가 만든 '춘포 길냥이들' 이미지 이 동네가 주는 치유의 효과도 있다. 만경강 강둑에서 춘포 들판을 달리는 기차를 바라볼 때 행복하다. 만경강 낙조를 보고 강변 갈대들이 수런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 여기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또 여섯 마리의 고양이들을 돌본다. 남들에게는 낯을 가리는 춘포의 고양이들이 자기에게 기꺼이 곁을 내주고 자신에게 안길 때 여기를 쉽게 떠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한다. 때맞춰 밥을 챙겨주고 자기 돈 들여 중성화 수술도 시켜줬다. 이 사람이 블로그에 올리는 고양이를 보기 위해 일부러 이 카페를 찾는 손님도 있다. “엄마가 저를 누구보다 잘 아시거든요. 여기 와서 네 얼굴이 훨씬 더 좋다. 그런 이야기 많이 하세요. 저 스스로 봐도 서울에 있을 때는 매일매일 앞날 걱정하면서 우울한 일기를 쓰면서 살았는데 여기 와서는 별로 그런 게 없어요. 여기 와서 치유받고 힐링되는 느낌입니다.” - 혹시 본인이 루저, 패배자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까. “있죠. 엄청 많죠! 저는 사실 자기 비하도 많이 해요. 한때 그런 자기 비하에 빠지는 시기도 있었어요. 근데 여기에 오고는 그 주기가 되게 길어진 것 같아요. 서울에서는 만약에 뭐 6개월에 한 번 그랬으면 여기서는 뭐 아직은 없었던 거 같아요.” 청년들이 동네를 바꾸고, 동네는 청년을 바꿨다 지난가을에는 이 지역에서 생산된 쌀을 팔았다. 정미소에서 받아온 쌀을 카페에 진열해서 팔기도 했고 온라인 판매도 했다. 최혁이 쌀을 팔아보자고 했을 때 우리들에게 누가 쌀을 사겠느냐고 생각했지만 성과가 적지 않았다. 10킬로 포장 쌀 200여 포대를 팔았다. 받아온 가격 그대로 팔았으니 남는 돈은 없다. 오히려 쌀을 사 오고 쌀 포대에 스티커를 제작하고 붙이느라 생고생을 했지만 이 마을을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있어 기뻤다. “처음에는 쌀을 팔아야겠다는 생각이 없었죠. 그런데 동네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맛이 정말 좋더라고요. 이 동네가 원래부터 쌀 맛이 좋기로 유명한 동네였더라고요. 마침 그때 쌀값이 폭락해서 동네 곳곳에 이에 항의하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거든요. 그래서 농민 살리기 차원에서 우리도 뭔가를 하자! 그래서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게스트 하우스를 하면서 코로나 시기를 넘기려던 생각으로 왔던 곳이지만 이제는 이 동네에 조금씩 스며들고 있다. 가끔 인생의 승부를 여기에서 한 번 볼까 싶은 생각까지 한다. 서울이나 경기 같은 곳에 있었다면 이런 관심과 시선을 받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할 때는 냉철했다. - 서울이나 경기도 같은 곳이라면 이런 성과를 못 냈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런 점에서 보면 청년들에게 기회는 지방에 있다 이렇게 말해도 될까요? “맞아요. 지방이니까 가능했고, 저희는 저희 나름의 차별성 있는 스토리가 있는 거 같아요.” - 어떤 점에서 그럴까요? “저희 카페가 그렇게 번쩍번쩍하고 아주 편리하지는 않잖아요. 요즘 돈 많이 들인 카페가 엄청 많은데 여기는 잔디도 저희가 심고 돌도 우리가 깔고. 저희 손으로 직접 한 것들이 많으니까 어설프지만 손님들이 편안한 느낌을 가지시는 것 같기도 하고요. 도시에 있다가 고향으로 다들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약간의 차별성이 있지 않을까요. 여기를 저희가 만들어냈다는 게 좀 뿌듯해요. 번쩍번쩍한 공간은 아니어도 모든 곳에 저희 흔적이 있고, 모든 곳에 약간은 어설프지만 애정이 담긴 공간이라서 그래서 더 여기를 좋아해요.” 이 마을에 대해 알면 알수록 애정이 커졌다. 일제 강점기 개발과 수탈의 한복판에 있던 동네라는 것을 알게 됐고, 이름을 남기지 못한 수많은 조선인들이 몇십 킬로미터의 거대한 둑을 쌓고 강줄기를 바꾸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강둑이 일제 강점기 수백만 명의 눈물과 땀으로 만들어진 것을 알고 난 뒤, 이 사람 눈에 보이는 풍경이 그 이전과 달리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카페가 자리 잡은 터가 일제 강점기 대장촌의 대표적인 지주였던 일본인이 40년 가깝게 살았던 바로 그곳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매일 밟고 다니는 흙조차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 도회지 감성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그 도회지 감성을 이 농촌 마을에 입히려고 한다는 생각도 좀 들었어요. “어쨌든 이 마을이 많이 알려지고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맞습니다. 저희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그런 것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죠. 다만 저는 이 동네가 가지고 있는 분위기를 해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이질적인 느낌을 주고 싶지는 않거든요. 약간의 편리한 뭔가가 생기되, 이 지역과 어우러지는 느낌이 있으면 좋겠다는 게 저희 생각입니다.” 사실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4월만 돼도 커피를 만드는 공간은 덥다 못해 뜨겁다. 한겨울 게스트 하우스에 보일러가 고장이 나서 죽을 고생을 한 적도 있고 새, 고양이 물그릇에 담배꽁초를 버리는 몰상식을 겪기도 한다. 그럴 때는 이렇게 한마디 하고 싶은데 꿀꺽 삼킨다. “담배꽁초 입에 넣고 삼키세요!” 커피 한 잔 값이 뭐 이렇게 비싸냐고 항의하는 사람이나 마을 주민들에게 왜 싸게 주지 않느냐고 항의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여전히 당혹스럽다. 성적인 농담이나 성희롱에 가까운 언사를 내뱉는 사람들도 있다. “서울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제 사생활에 대해 묻는 경우는 거의 없잖아요. 여기서는 가끔 그런 경우가 있는 게 사실이죠, 사실 근데 무례한 거는 서울이나 여기나 다 마찬가지라서 그런 일이 있어도 그냥 언니랑 이런 일이 있었다, 이런 이상한 사람이 있었다. 이렇게 얘기하고 또 며칠 지나면 잊어버리고 그러죠. 근데 저 혼자 있었으면 못 견뎠을 것 같아요. 같이 일하는 사람이 있고 나의 마음을 공감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금방 이런 힘든 일도 털어버리고 지낼 수 있는 거 같아요. 또 시간이 지나니까 무뎌지기도 하고요.” 좋아하는 디저트 카페를 찾기 어렵고 전시회를 비롯한 문화생활공간도 충분치 않다. 가장 아쉬운 것은 친구다. 중학교 때 고향을 떠나 속마음을 털어놓을 친구가 거의 없다. 경험과 지식을 나눌 수 있는 또래들이 이 동네에는 없다. 눈을 익산으로 넓혀봐도 그런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자기에게 어울리는 친구를 만나려면 여기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필요할 수도 있다. 인터뷰를 하던 날 청년 지원 관련 익산시 공모전에 당선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최대 3천만 원을 지원받는다. 카페 옆에 일과 휴식을 같이 할 수 있는 이른바 워케이션 공간을 올해 말까지 만들려고 한다. 지방자치단체 지원은 힘이 되지만 지원을 받으려고 준비할 때마다 번거롭고 짜증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신청 서류 항목에 있는 ‘지역 가치 창출 여부’, ‘사업 의지’, ‘실현 가능성’, ‘실효성’, ‘지속 가능성’ 항목을 채워 넣어야 한다. 그 말이 그 말 같은 것을 채워 넣는 것도 고역이지만 일을 해보려고 하는 사람이 아닌, 서류 잘 꾸미고 발표 잘하는 사람을 뽑으려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춘포는 ‘감성 여행’의 보고 이 카페와 게스트하우스 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사람은 한그루 여행사 대표 최혁이다. 최희서에게 춘포에 같이 가자고 제안한 사람이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영국과 중국에서 공부도 하고 사업도 해봤다. 건물을 올릴 만큼 돈을 벌기도 했고 크게 망해도 봤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여행에 대해서는 전문가라고 자부하는, 외국 소도시 여행이 취미인 사람이다. 그런 최혁의 눈에 춘포는 놓치기 너무 아까운 감성 여행의 보고 같은 곳이다. 고향 부근에서 게스트 하우스를 할 만한 곳을 찾다가 우연히 춘포를 알게 됐다. 자신이 이 동네에 반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이 동네를 한 번 제대로 보기만 하면 이 동네에 반할 것이라고 믿는다. 최혁의 생각은 ‘촌캉스’ ‘워케이션’ ‘감성 여행’이란 말에 다 녹아 있었다. “제가 일본 소도시 여행을 하면서 우리나라도 작은 마을 관광이 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전에는 단체 여행 다니고 구경하러 다녔지만 이제 트렌드가 달라졌습니다. 가족단위로 시골에 가서 자전거 타고 강바람 쐬는 것으로 충분한 거예요. 그게 바로 촌캉스인 거예요. 그런 곳으로 춘포만큼 좋은 곳이 없어요.” - 최혁, <카페 춘포> 대표 우연히 구입한 이 집이 일제 강점기 전북 지역의 유지이자 대지주였던 일본인 이마무라 이치로가 살던 집이라는 것도, 춘포가 일제 강점기 일본인 지주들이 터를 잡은 곳이고 그곳에서 일본인과 조선 농민들이 울타리를 함께 하고 살던 특이한 역사를 지닌 동네라는 것도 여기에 오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다. 최혁은 기꺼이 카페를 관광 안내소로 삼고, 자신은 춘포의 관광 가이드가 되려고 한다. 마을을 위해서라면 누구에게든 기꺼이 고개를 조아리고 허리를 숙일 생각도 있다. “제가 사실 지금까지 그렇게 이웃이나 누구한테 관심 보이고 살아온 사람이 아닙니다.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 한 적도 별로 없고요. 그런데 여기에서는 이장님이 부르면 네 하고 달려가고 ‘제가 뭐 할 게 없을까요’라고 말합니다. 이 동네가 가능성이 있고 제가 그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지요.” - 최혁, <카페 춘포> 대표 지난달 익산시장과 지역주민들의 대화의 자리에서 이 마을의 관광 자원과 미래 비전에 대해 직접 PPT를 제작해 설명한 것도 마을 일에 적극 나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 자리 이후에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한동안 공무원 전화가 빗발쳤지만 요즘은 다시 뜸하다고 했다. 춘포는 한 세기 전 역사가 건물로, 강으로, 제방으로 생생하게 남아 있고 땅 한 삽만 파도 식민지 시절의 저항과 갈등, 공존과 대립이 칡넝쿨처럼 얽혀 있는 곳이다. 그런 이 마을의 역사를 한 꺼풀만 벗겨서 거기에 스토리를 입히고 디자인만 조금 더하면 도시인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관광 명소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최혁은 이 동네의 역사를 살리기로 했다. 그래서 무엇 하나도 버리지 않았고 함부로 바꾸지 않았다. 게스트하우스를 <금촌농장>이라고 붙인 것도 원래 집주인 이마무라(今村)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돌멩이 하나, 담장 하나, 나무 한 그루 베어내지 않았다. 대문을 비롯해서 재활용이 가능한 재료는 최대한 살렸다. 심지어는 이 집의 탱자나무 울타리도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집터의 원래 모양을 손상하지 않기 위해 주차장을 더 넓히자는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같은 시기,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을 하지만 춘포를 바라보는 최혁과 최희서의 시각은 다소 차이가 느껴진다. 최혁이 춘포라는 ‘감성 공간’을 살리기 위해 춘포 전체를 시야에 두고 있다면 최희서는 춘포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다.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잠시 지나가는 곳으로 여겼던 춘포가 두 사람에게 새로운 가능성의 동네로 다가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나 하나 먹고살 곳은 대한민국 어디에나 있다 카페 앞에 <춘포청년회관>이라는 간판을 붙였다. 자기들의 공간이 청년들이 모이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요즘 청년들이 하는 고민을 자기도 했고, 자신 역시 청년으로 고민이 적지 않다. 부동산이 폭등할 때 좌절했고 이제 집을 사는 것은 포기했다는 말을 할 때 최희서의 얼굴은 영락없는 이 시대 청년의 얼굴이었다. 자기처럼 좌절하는 청년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으냐고 하자 뭐라도 일단 시작하면 길이 보이지 않겠느냐고 했다. 대한민국 어디를 가든 나 하나 먹고살 만한 일은 다 있다는 것이다.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서 많이 하는 말 중에 ‘지금 해도 늦은 거는 유아 아동복 모델과 돌잔치뿐이다’ 그런 말이 있더라고요. 근데 맞는 말이잖아요. 저도 항상 그 생각을 하면서 요즘 살고 있어요. 늦지 않았다, 이제라도 뭐든 할 수 있다. 춘포는 제가 온 지 겨우 1년밖에 안 된 곳이지만 저의 제2의 고향이 마음의 고향이 될 것 같은 곳이거든요. 여기서 나의 또 다른 인생을 시작할 수도 있는 거고요. 서울에 있을 때 제가 내 인생은 이렇게 되는 게 없고, 뭐 우울하고 그랬지만 여기서 이렇게 재밌게 지내다 보니 그 마음은 또 없어지고 그러더라고요.” - 혹시 내가 청년으로 여기 지방에서 그냥 소비되는 것 같다는 느낌은 없습니까. “그런 느낌은 사실 아직까지는 크게 받지는 못했어요. 소비되는 느낌이라면 시나 도 같은 곳에서 저희와 함께 뭐라도 해야 그런 느낌이 들 텐데, 저희는 누구의 터치를 받지 않고 저의 힘으로 춘포에서 계속 진행을 하고 있으니까 그런 느낌은 별로 없어요.” - 인생에서 대단히 귀한 시간을 지금 여기에 투자하고 계시는 거잖아요. 스스로 생각하셔도 투자할 만한가요? “네. 일단 제 마음이 편하니까요. 여기서 이렇게 하나하나 뭔가를 우리가 이루어내는 느낌이 있거든요. 천천히 어떻게 보면 빠르게 하나하나 이루어가기도 하고, 또 이렇게 피드백이 또 오기도 하고. 그런 거 보면 우리들의 이런 시간들이 결코 낭비되거나 허투루 쓰이지 않는구나 싶어요.” - 농촌을 보는 시선, 익산을 보는 시선, 서울을 보는 시선에 전혀 차별이 없더라고요. 같은 거리감을 두고 보시는 거 같습니다. 요즘 청년 세대의 특징일까요. “아마 서울을 저의 완전한 고향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또 익산에서 어쨌든 태어났지만 오래 살진 않았어요. 그러니까 약간은 멀리서 바라보게 되는 것 같아요.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기도 해서 전 항상 뭐 다른 지역에서도 살아보고 싶은 마음도 항상 있고요.” - 최혁 대표도 그렇고 여기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결국은 돈을 버는 거 아닐까요. 사업적으로 성공하는 거 그게 목적이겠죠. “네네. 근데 저도 그렇고 최 대표님도 그렇고 진짜, 정말, 솔직히 돈을 좇는 사람들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진짜로 정말 돈이 되려면 이렇게 장사하면 안 되잖아요. 평일에 쉬는 날도 하루만 한다거나 아니면 혼자서 계속 일을 하게 해서 가져가는 돈을 많게 한다든가 해야죠. 이렇게 무턱대고 공간을 넓히지도 않았을 거고요. 저도 그렇고 일단 이 공간 사람들이 남들로부터 약간의 인정과 또 뭔가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힘을 얻는 사람들인 것 같아요. 저도 진짜 돈 생각하면 여기 있으면 안 되죠. 어떻게든 돈 벌려고 서울에 있다거나 아니면 진짜 투잡을 한다거나 해야 될 텐데... 지금 이 삶이 너무 좋고, 과하지도 적지도 않은 일을 하고, 많지도 적지도 않은 돈을 벌고 또 공간도 이렇게 저희 마음대로 운영도 하고 하니까요. 사업가는 맞는데 그냥 돈 못 버는 사업가인 거 같아요.” 서울 생각은 여전하지만… 고양이들에 대해서는 아픈 이야기부터 시작해 모든 이야기를 꼼꼼히 적지만 마을 사람들의 이름이나 표정을 언급하는 이야기는 이 사람 블로그에 많지 않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 같은 주민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주민등록을 옮기거나 집을 구한 것도 아니다. 일은 춘포에서 하지만 차로 20분 거리인 익산 시내에 아파트를 얻어 지낸다. 약간 붕 떠 있는 느낌이라고 했다. 일은 춘포, 사는 곳은 익산시, 짐은 아직도 서울 집에 더 많다. 마을 주민들 속으로 더 녹아드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좋을지도 쉽게 결정하기 어렵다. “가끔 우리 다시 서울 갈 수 있을까? 사실 그 생각은 가끔 해요. 언니도 완전히 서울을 정리하고 온 게 아니고 최 대표님도 완전히 서울을 정리하고 내려온 것도 아니고. 제 짐의 상당한 양은 서울에 아직도 있고 그리고 저도 가족이 다 내려온 게 아니니까요. 또 여전히 여행사를 하고 있으니까 언젠가 여행업 쪽이 잘 되면 또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이 동네에 뼈 묻고 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너희들 여기에서 얼마나 버티는지 한 번 두고 보자는 시선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자기들 앞에서 그런 말하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이 사람도 마음을 정하지 않은 것처럼 마을 주민들도 이 사람들을 어떻게 봐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것이다. 이제 겨우 1년이다. 출발이 나쁘지 않지만 그렇다고 대성공이라고 호들갑 떨 일은 아니다. 손에 개구리를 올려놓고 사진을 찍을 만큼 시골 생활에 익숙해졌지만 어느 날 도시의 냄새가 몸살 나게 그리워서 훌훌 털고 이 동네를 떠난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다.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도 좋겠지만 시골에서 치유받고 새롭게 출발할 힘을 얻어 떠나는 것 역시 나쁜 일은 아니다. 사실 코로나19라고 하는 비상 상황에서 이들에게 시골은 잠시 피해 가는 피란지 같은 곳일 수도 있다. 다시 모든 게 ‘정상화’ 되면 예전 같이 도시의 일상으로 복귀한다 한들 뭐라 할 사람도 없다. 주말 이틀 포함해 일주일에 닷새 카페에서 일을 한다. 주중에 이틀은 쉰다. 휴일이면 전주에도 가고 서울에도 간다. 역시 도시의 공기는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힘이 있다. 전시회도 찾아다니고 맛있는 디저트 카페도 간다. 오래된 다방을 순례하는 취미를 즐기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래 있지 않는다. 차도 많고 사람도 많은 대도시에 오래 있으면 기가 빨리는 느낌이다. 여기가 더 편하다는 것이다. - 여기서 뭘 더 하고 싶으세요. 앞으로 뭘 이루고 싶으세요. “구체적으로 나는 뭘 이걸 해야겠다. 뭐가 되고 싶다 그런 건 없어요. 그냥 지금처럼 춘포에서 뭔가를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의 한 명이면 좋을 것 같아요. 대단한 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춘포라는 공간을 더 널리 알릴 수 있는 역할을 한 사람 중 한 명으로 족할 거 같습니다.” 마흔 살 정도까지는 이런 열정으로 일할 수 있을 거 같다고 했다. 마흔이면 앞으로 3-4년, 그 정도 시간이면 이 사람과 동료들이 춘포라는 동네를 바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기간 동안 이 사람과 동료도 더 많이 달라질 테고.
힘 빼고 쓰니 대박 났어요 누구와 이야기를 하면서 허리가 꺾어지게 웃어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살아온 이력을 보니 진지한 사람일 듯했고 처음 봤을 때도 얼굴에 ‘난 진지한 사람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는데 막상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유쾌하고 또 유쾌한 사람이었다. 지난해 낸 <아버지의 해방일지>라는 책이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도서관에서 그 책 빌리기가 하늘에 별 따기만큼 어렵고 이 사람이 쓴 다른 책도 대부분 대출 중이다. <자본주의의 적> 같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 소설집조차 거의 3주를 기다려 겨우 대출받을 수 있었다. 지난달 23일 어렵게 통화가 돼서 한번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다음 달까지 거의 매일 강연과 독자 사인회 일정이 잡혀 있어 좀처럼 틈을 낼 수 없다며 난감해했다. 몇 개의 날짜를 두고 시간과 장소를 조율한 끝에 주말인 이달 11일 경기도 평택에서 보기로 했다. 그날 거기에서 강연회가 있는데 거기도 좋다면 강연회 전에 시간을 낼 수 있을 거 같다고 했다. 연한 화장에 수수한 차림이었다. 약속한 11시 반에 맞추기 위해 전남 구례에서 아침 6시 반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왔다고 했다. KTX 타면 한 시간 남짓이면 올 수 있으려니 싶었는데 구례에서 평택으로 오는 KTX가 없다고 했다. 거절해도 그만일 수 있는 인터뷰를 위해 새벽밥 먹고 와준 성의가 고마웠다. 잇따르는 언론의 인터뷰 요청과 반복되는 비슷비슷한 질문이 다소 귀찮고 번거롭게 느껴질 법도 한데 자기 책 읽어주는 독자에 대한 서비스 차원에서 만남에 성의를 다하려는 태도가 느껴졌다. “한 번도 주류가 아니었어요” 아버지가 빨치산, 어머니도 빨치산이었다. 아버지 정운창은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조직부부장, 어머니 이옥남은 남부군 정치지도원이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이전부터 전남 지역에서 활동한 유명한 사회주의자였고 어머니도 지리산 등에서 4년 동안 빨치산 생활을 했다. 그 대가로 아버지는 두 차례에 걸쳐 17년, 어머니도 7년 동안 수감 생활을 했다. 평생 사회주의 혁명가의 신념을 포기한 적이 없는 두 사람의 외동딸이 이 사람, 작가 정지아다. ‘지아’라는 이름은 자신들이 빨치산 투쟁을 벌였던 지리산의 ‘지’와 백아산의 ‘아’를 따 지었다. 어머니 나이 마흔, 아버지 나이 서른여덟 살에 본 외동딸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극진했다. 어린 시절 아무리 추운 날에도 차가운 신발을 신은 적이 없다. 어머니는 신발을 가슴에 품어 체온으로 따뜻하게 해 줬다. 아버지는 딸이 좋아하는 채소를 손수 길러 타계하기 직전까지 입 짧은 딸의 먹거리를 챙겼다. 아버지가 ‘빨갱이’이었다는 것을 안 것이 1974년,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반공방첩’, ‘때려잡자 공산당’이라는 구호가 곳곳에 붙어있고 공산당은 머리에 뿔 달린 도깨비로 묘사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가 빨치산이라는 사실을 알고 어머니를 졸라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서울은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곳이었지만 그 대신 가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화장실도 없는 셋집에 살면서 처참한 가난을 경험했다. 그러나 가난은 그다음에 닥친 시련에 비하면 어려움도 아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 역시 빨치산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버지만이 아니라 어머니까지 사회주의자라는 것을 알게 된 사춘기 소녀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하기 쉽지 않다. 공부 잘하고 나가는 백일장마다 상을 독차지하던 똑똑한 ‘백일장 소녀’가 반공이 국시인 나라에서 자신의 미래가 어떠리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나라 전체가 ‘반공만이 살길이다’고 외치던 1970년대 ‘사회주의자’ ‘빨치산’이라는 말은 입에 올리는 것조차 두려운 단어였고 당사자와 그 가족에게 ‘빨갱이’라는 낙인은 벗어날 길 없는 천형이었다. 그 천형에서 벗어나고 싶어 닥치는 대로 책을 봤고 절을 찾고 교회를 다녔다. 그렇지만 누구도, 어디에서도 이 문학소녀의 절망을 위로해 주지도, 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지도 못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부모와의 불화, 좌절과 방황의 시기였다. 학교 성적이 제대로 나올 리 없었다. 재수 끝에 1984년 중앙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외동딸이 법대에 가서 기자가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소망과는 어긋나는 선택이었지만 작가의 길은 어쩌면 운명처럼 예비된 길이었다. 현실적으로 ‘빨치산의 딸’이 선택할 수 있는 길도 많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면서 ‘혁명가’ 부모의 삶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고 부모와도 화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가장 깨끗하고 건강한 핏줄을 이어받은 민중의 딸’이라고 생각했고, 학생 운동은 정해진 길이었다. 1988년 이태가 쓴 <남부군>을 시작으로 한국 현대사에서 잊힌 존재였던 빨치산 관련 수기가 쏟아졌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나온 것도 그즈음이었다. 1988년 실천문학사 대표였던 소설가 송기원이 아버지를 찾아와서 당신들 사연을 소설로 쓰고 싶으니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는 “내 이야기는 내 딸이 쓸 거요”라며 거절했다. 그 무렵 이 사람은 지하 조직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이른바 사노맹의 문학 기관지 <노동해방문학>에서 일하고 있었다. 출판사는 문단에 등단한 적도 없는 이 사람에게 매달 집필료 30만 원에 집필실까지 제공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빨치산의 딸>은 소설의 형식을 빌렸지만 빨치산 출신 아버지와 운동권 딸이 함께 쓴 역사 기록이다. 몇십 년 전 이야기를 어제 일처럼 말하는 아버지의 기억력에 딸이 문학적 표현을 입히고 시대 상황을 더했다. “아버님 기억력이 매우 좋으셨습니다. 그래서 몇 월 며칠 무슨 전투에서 남부군 대대장은 누구 휘하 몇 명 인솔하고 총 몇 정 획득, 이렇게까지 기억을 다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책을 보고 ‘읽을 만은 하더라’고 했고, 어머니는 ‘너무 잘 썼다’면서도 혹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지 염려했다. 자신들의 가장 빛나고 뜨거웠던 청춘을 딸이 기록해 준 것만으로도 부모는 감동했을 테고, 딸은 읽을 만하다는 부모의 말 한마디로 집필의 수고를 보상받았다. <실천문학>에 연재된 이 글은 나올 때마다 화제를 모았고, 1990년 3권으로 출판돼 한 달 만에 10만 권이 팔렸다. 한 순간에 유명인이 되었고 ‘작가님’ 소리를 들었다. “제가 그때 스물다섯 살 어린 나이였는데 세간의 관심을 받아서 여성지 인터뷰도 하고 그랬는데 정말 그런 거 싫었거든요. 그렇지만 조직에서 널리 알려서 책 많이 팔아서 돈 모아야 되니까 하라고 해서 나갔단 말이에요. 사람들이 제 글 좋다고 하고, 저 스스로 소설가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작가님, 작가님이라고 하는데 좀 무서워졌어요. ‘이거는 내 진짜 모습 아니다, 이런 게 필요한 시기에 이런 글이 나왔을 뿐이고 이런데 휘둘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앞으로는 내가 쓰고 싶은 글, 좋은 글만 쓰겠다, 그리고 그것으로 돈을 벌거나 명예를 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20대 청년 시절 혜성 같이 등장했지만 빛나던 시절은 길지 않았다. 이후 출판사에도 다녔고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해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6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정식으로 등단했다. 민족사관고 교사로 교단에 선 적도 있고 중앙대를 비롯해 몇 개 대학에서 꾸준히 강의했고 지금은 조선대학교 초빙교수로 있다. 한번 결혼해서 아들 하나를 두었고 지금은 혼자 지낸다. 본인은 열심히 살았다고 했지만 <빨치산의 딸> 이후 삶은 곳곳이 공백처럼 느껴진다. - 1990년대 이후에는 단체나 조직 활동을 하신 거 같지는 않더군요.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조직 활동은 때로는 원칙을 무시하고 막 깨고 나가야 되는 측면도 있는데 저는 그런 거 하나하나가 굉장히 불편했고요. 저는 삶 속으로 스며들지 않는 이론 이런 게 불편했어요. 그런데 조직에는 그런 사람뿐이더라고요. 조직 활동이 내게는 안 맞는 거 같다, 나는 글로 말하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있고요.” 매년 두세 편의 단편을 발표했고 몇 권의 소설집을 냈지만 다작은 아니었다. 김유정문학상, 이효석문학상, 요산문학상 등을 받았고 평단의 평가도 나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터지기 전까지 흥행에 성공한 작품은 찾기 어렵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나오기 전까지 ‘정지아’ 하면 여전히 <빨치산의 딸>이었다. “저는 글을 많이 써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문학이라는 것만 붙들고 고민하는 것이 저는 조금 아닌 거 같았어요. 저는 ‘문학의 고통은 삶의 고통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사람으로 잘 살면 그 성장이 내 글에 담기겠지 뭐 이런 마음이었어요. 그러니까 뭐 급할 거도 없었고요. 그냥 진짜 쓰고 싶은 거, 내가 세상을 보는데 달라진 것 이런 것들을 일 년에 두 편, 많을 때는 서너 편 쓰면서 세월을 지내왔던 거 같아요” 청소년용 위인전을 많이 썼고 <천국의 이야기꾼 권정생>같이 정성을 기울인 만큼 호평을 받은 책도 있지만 어떤 책들은 돈을 벌기 위해 쓴 것도 사실이다. 이번 책이 뜨기 전까지는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열심히 살았지만 가난했고, 공부를 했지만 대학교수가 되지 못했고, 작가지만 내세울 만한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 무엇보다 빨갱이의 딸이었다. 한 번도 주류인 적이 없었고, 주류일 수도 없었다. -젊은 나이에 대단히 화려하게 등장하신 셈인데 그 이후 30년이 넘는 세월은 크게 이름이 나는 삶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삶이 초라해 보일 수도 있겠다 싶은데 좌절감 같은 것은 없었습니까. “그런 좌절감 같은 것은 별로 안 컸습니다. <빨치산의 딸>이 준 명예 같은 것은 가짜라고 생각했고 그런 것에 휩쓸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 스스로 도망쳤거든요. 제가 만약 그런 명예 같은 것을 원했다면 그런 사회적 이슈를 건드리는 소설들을 계속 발표해서 이름 있는 삶을 살 수 있었겠죠. 그런데 저는 그런 삶을 원했던 적은 한 번도 없는 거 같아요. 부자가 되기를 원했던 적도 없고요. 다만 그때그때 필요한 돈이 있어 열심히 일했습니다.” 진보는 진보해야 지난해 9월 출간한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지금까지 25만 권이 넘게 팔렸다. 1만 권만 팔려도 베스트셀러라는 말을 듣는 시절에 25만 권은 초 대박이다. 아버지 장례식을 소재로 쓴 이 책을 구상한 것은 10년 정도 되었지만 쓰는 데는 두 달 밖에 걸리지 않았다. “2008년 아버님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 10년 가까이 계속 구상을 하고 머릿속으로 계속 수정하여 고치고 아버님 돌아가시고 4,5년쯤 됐을 때 한 200매 썼다가 한 번 버리고 한 번 더 버리고 그런 과정이 있었습니다. 이제 이 책은 머릿속에서 거의 다 정리가 된 상태로 써서 쓰는 시간 자체는 오래 안 걸렸는데 10년 정도 준비 기간이 있었던 거죠.” 가볍고 코믹하게 쓰기 위해 애를 썼다. 책을 쓰는 두 달 내내 매일 두 병씩 소주를 마시며 자신은 물론 진지함 그 자체였던 부모를 ‘우스운 사람’으로 만들었다. -돌아가신 아버님 실제 모습과 이 책에서 그려진 아버님 모습은 사뭇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진지한 사람입니다. 진지한 분인데 그거를 제가 코믹하게 만든 거죠. 그런데 실제로 부모님이 그렇게 싸우긴 하셨어요. ‘자네는 유물론자 아니네’ 맨날 이렇게…근데 아버지는 그거를 정색을 하고 진지하게 하신 거고 그런 말을 진지하게 하는 상황 자체가 저는 우스운 거죠. 그러니까 그거는 결국 그 시대와의 불화가 빚어낸 블랙 코미디일 것인데 그걸 포착해 낸 건 제 시선이지만 실제 모습은 진지한 분이셨죠.” 대학원 졸업할 때 찍은 가족사진에서 이 사람 부모의 모습을 보는 순간 ‘이런 얼굴이 사회주의자의 얼굴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사는 사람의 표정이다. 이런 얼굴을 한 사람들이니 ‘자네는 사회주의자 아니네’ ‘자네는 산에서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같은 대화를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주고받았으리라. -그 사진이 두 분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분은 사진 앞에서 웃을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분은 카메라 들이대는 것 자체를 싫어하시고 카메라를 들이대면 웃어야 된다는 이런 기본적인 생각이 없는 분들이셨습니다. 남에게 보이는 자기 자신을 조금이라도 가공하는 게 1도 없는 분들이셨죠.” <빨치산의 딸>이 온몸에 힘 가득 주고 쓴 ‘이념’과 ‘투쟁’의 기록이라면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힘 빼고 쓴 ‘사람’ 이야기다. “제 아버지 엄마가 보통 사람들보다는 좀 경직돼 있다고 느끼면서 살았거든요. 두 분에게는 일상이 아무 의미가 없고, 일상은 겨우겨우 살아내야 되는 거고, 입만 열면 하는 말이 조국 통일이고 민족 해방이고, 존경할 만한 사람들은 산에서 다 죽었고 찌끄래기들만 남아서 겨우 살아 있다고 하고. 그분들에게는 지금의 삶이 다 덤 같은 것이고 본인들의 마음은 여전히 그 산에 있는 거죠. 저는 어쨌건 그분들의 그런 자세를 평생 보고 살았잖아요. 진지하지 못한 거 못 참고, 가벼운 거 못 참고, 정신을 돌아보지 않는 거 못 참고… 뭐 그래서 못 참는 게 되게 많았어요. 아 이것도 부모님 밑에서 만들어진 무엇이겠구나 생각하고 그런 것들을 떨쳐내려고 굉장히 많이 노력했고요. 뭐 그런 결과물들이 이번 책에 조금은 반영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의 유쾌, 상쾌, 발랄함은 타고난 성정이라기보다 후천적인 노력의 결과인 거다. 몇십 년에 걸친 노력 끝에 그런 재능을 익혔고 그 재능이 있어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나온 것이다. 몇 번인가 장편에 도전했다가 중도에 포기했다. 가리는 게 많고 따지는 게 많아 볼 줄 아는 인간형이 몇 가지밖에 되지 않았고 그래서 장편을 끌고 갈 힘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지난 30년 넘는 세월은 장편을 쓸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시간이었다. -<빨치산의 딸>을 쓸 때 정지아와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쓸 때 정지아는 사뭇 다르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달라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건 25살에 쓴 거고 이건 58살에 쓴 건데요. 사람이 그 세월을 견뎌냈으면 뭔가는 달라져야죠.” -뭐가 달라졌을까요. “많이 달라졌습니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것은 저에게 이데올로기적인 억압으로만 작용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대학 시절에 다 해결했고 특히 <빨치산의 딸>을 쓰고 나서는 제가 다 벗어났다고 생각했어요. <빨치산의 딸>만큼 널리 팔린 책이 안 나왔기 때문에 계속 ‘빨치산의 딸’ 정지아이긴 했습니다. 그걸 넘어서는 책을 써야 되는데 하는 생각은 했지만 그게 특별히 저를 힘들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이제 살아보니까 제가 사람과 관계 맺는 게 되게 서툴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습니다. 왜 서툴까? 저는 굉장히 솔직한 사람인데 사실은 솔직하지 못했던 거죠. 20대 때 제가 <빨치산의 딸>을 쓸 때 제 주변에 부모님이 빨치산인 것을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거든요. 그것을 가까운 사람에게 말하지 못하면 그 관계가 절대로 깊어질 수가 없는 거예요.” 여전히 진보의 가치를 이마에 써 붙이고 사는 사람들도 ‘진보의 원형질’ 같은 인물을 다루고 있는 이 책에 환호할지 모르지만 진보의 가치를 지향했지만 이제는 진보라는 말에 진절머리가 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위안이 될 수 있겠다고 했더니 이렇게 말을 받았다. “진보가 진보해야 될 때인 거 같습니다. 실제로 저와 함께 했던 많은 분들 중에 당신들이 젊음을 바쳤던 그 이념으로부터는 멀어진 분들이 꽤 있죠. 그분들이 주로 대학이나 출판사 같은 데서 일하며 살고 있는데 그분들이 많은 거를 바꾸었거든요. 저는 이게 별거 아닌 거 같지만 이거야말로 세상을 바닥에서부터 바꿔 나가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의 주 독자층은 386세대들이지만 MZ세대들도 적지 않다. MZ세대들이 자기 책을 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저는 처음에 20-30대 독자들은 이 책을 안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한 가지 느낀 게 이 친구들이 이데올로기에 대한 공포나 거부감이 하나도 없어요. 누가 뭐래도 이것은 386세대가 만들어 놓은 장벽 제거의 힘이 아닌가 생각하고 그런 점을 생각해도 386세대가 너무 자괴감에 빠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틀린 꼴 못 보고 옳지 않으면 대들어야 했던 사람 가슴에서도 말이 나오고 머리에서도 말이 나온다. 거기에 유머 감각까지 갖췄다. 제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술 잘 사고 밥 잘 사서만이 아니었다. 1999년 민족사관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어느 날 그 학교에서 문학 담당 교사를 뽑는데 등단한 작가를 우대한다는 공고를 봤다. 반쯤은 호기심으로 원서를 냈는데 덜컥 합격이 되었다. 학생들에게는 인기 만점 선생님이었고 그때 제자들이 지금은 더없이 좋은 친구들이다. 그러나 그 학교 이사장에게 이 사람은 눈엣가시였다. 이사장은 독재자였다. 국어와 국사까지 영어로 강의하라고 지시했고 매일 아침 8시 조회 시간에 4절까지 애국가를 부르게 했다. 자기 지시 안 따를 거면 학교를 그만두라고 했다. 가리는 거 많고, 틀린 꼴 못 보고, 옳지 않으면 대들어야 했던 이 사람이 들려주는 그때 이야기는 사람 배꼽 잡게 하는 블랙 코미디였다. “조회 중간에 이사장에게 끌려갔어요. 자기가 앉길래 내가 앉았거든요. ‘누가 앉으라고 그랬어!’ 그래서 ‘어머 그럼 누울까요?’ 이 양반이 대답을 못해 가지고 ‘아니 앉아!’ ‘근데 왜 반말 쓰십니까?’ 내가 그랬더니 ‘친밀하니까 그렇지’ ‘어머 그러면 나도 친밀한데 이제 나도 말 놓을까’ 막 이래 가지고 완전히 뒤집어졌어요. 그 양반이 사람 이름을 못 외우는데 3년간 제 이름을 외우고 조회 시간마다 얘기를 했대요. 이런 즐거운 일이 있었어요.”<폭소> 적지 않은 월급도 아쉬웠고 무엇보다 자신을 선생님이 아니라 ‘정선생’이라 부르던 제자들과 헤어지는 게 너무 아쉬워서 한 2년 정도 더 다니고 싶었지만 민사고 교사 생활은 9개월 만에 끝났다. 민사고 시절 이야기는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한 이야기였는데 재밌기도 하고 이 사람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하다 싶어 기사로 쓰겠다고 했더니 선선히 그러라고 했다. 다만 그 이사장이 학교에서 한 푼도 가져가지 않은 청렴함은 갖춘 사람이었다는 것, 그때 민사고와 지금의 민사고는 전혀 다른 학교가 되었다는 것을 꼭 적어 달라는 조건을 붙였다. 10년 전쯤 고 최인호 작가의 소개로 한 재벌회장의 자서전을 대필한 적이 있다. 자서전 집필을 위해 수십 차례 그 회장을 인터뷰했고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해외 출장에도 동행 취재했다. 그 재벌 회장은 솔직하고 때로는 대차게 구는 이 사람을 무척이나 아꼈던 모양이다. 두 사람의 마지막은 그리 아름답게 마무리되지 못했다. 자서전 역시 집필은 완성됐지만 출간되지는 않았다. 결국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문제였다. “밤 10시 구례로 내려가고 있는데 전화가 와요. 내일 4시까지 오라고. 그럼 나는 언제 구례 내려가서 쉬고 엄마 밥 차려주고 또 서울 갈 거예요? 그래서 몇 번 안 갔죠. 그리고 저는 그런 태도도 싫었던 거 같아요. 사람하고 약속을 정하는데 괜찮냐고 묻지를 않아요.” -일방적이다 이 거죠? “내일 시간이 됩니까? 이런 거를 묻지를 않아요. 그냥 부르면 오는 거야. 내가 시골에 엄마 모시고 있다는 말을 100번은 한 거 같은데… 그건 네 사정이고…이런 사람들이 장점도 있고 뛰어난 면도 있는데 자주는 못 보겠다. 그냥 이런 생각이 들어서 이제 점점 자주 깠다가…” -까였군요 “괜히 그랬어요” (폭소) 두 번이나 모교에 자리를 잡을 뻔했다가 빨갱이가 싫고 무섭다는 재단 이사장의 반대로 실패한 이야기는 분명 서글픈 사연인데 그 이야기조차 폭소 만발하는 해학으로 풀어냈다. “그렇게 싫다는데 뭐라 할 거야. 제가 요즘 후회하잖아요. ‘회장님 저 안 무서워요’ 이렇게 나왔어야 됐는데 그때는 놀라 가지고 대응을 못했어. 정말 제 얼굴 보면서 ‘나는 빨갱이 무서워, 싫어’ 이러는데 좀 후회했잖아요. ‘회장님 저랑 술 한 잔 마셔봐. 안 무서워’ 이랬어야 되는데...” <폭소> 구례 낙향은 가장 잘한 선택 전남 구례에서 12년째 노모를 봉양하며 살고 있다. ‘그냥이’ ‘저냥이’ ‘애플’ ‘구글이’를 비롯한 고양이 4마리, ‘호랑이’ 치타’라는 이름의 개 두 마리가 함께 산다. 오전 10시, 저녁 6시 하루 두 번 올해 98살 되신 어머니에게 식사 챙겨드리고 반려견이랑 산책하고 나머지 시간은 멍 때리며 머릿속으로 작품 구상하는 게 주로 하는 일이라고 했다. 몇 가지 계절 채소를 집 앞 텃밭에서 직접 길러 먹는다. 노동을 견디지 못하는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노동에 익숙하지 않다고 했는데 유난히 까만 손에서 노동의 흔적이 느껴졌다. 어머님은 평생 체중이 45kg를 넘은 적이 없을 만큼 병약했다. 4년 동안의 빨치산 생활, 7년의 수감 생활이 건강에 도움이 될 리 없었다. 2008년 아버님이 타계하고 홀로 된 어머님을 누군가 돌봐야 했다. 딱히 서울 생활을 고집할 이유도 없었지만 서울을 떠나는 일은 두렵고 힘든 일이었다. 무엇보다 작가로서 잊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컸다. 초등학교 때 떠난 고향은 작가 정지아보다는 누구의 딸이라고 할 때 알아보는 사람이 더 많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과 과거 흔적이 강렬하게 남아있는 곳이었다. 이름은 남겼으되 부모는 평생 가난했고 그 가난은 이 사람에게 이어졌다. 아버지는 유산 대신 빚을 남기고 세상을 떴다. “지아 아버님이 돈 버는 재주는 없으셨어요. 굉장히 똑똑하시고 그러셨는데 돈은 꼭 머리가 좋다고 버는 건 아닌가 봐요. 소도 키워보고 밤나무도 가꾸고 그랬는데 그게 겨우 입에 풀칠하는 정도도 안 됐어요. 어떻게든지 따님을 가르쳐야 된다고 학비를 대야 되니까 두 분이 아주 근검절약하고 사셨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까지도 어려우셨어요. 정지아 작가도 그전에는 입에 풀칠하고 그랬지 그렇게 많이 버는 형편은 아니었고 내내 어렵다가 이제 조금 풀린 거죠. 지금도 집 한 칸이 없잖아요.”/ 류근례 <아버지의 해방일지> 떡집 언니 모델 서울에서 가난했고 구례라고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지금 사는 집은 1년 2백만 원에 세를 산다. 주행거리 30만 킬로가 넘은 자동차를 19년째 타다가 얼마 전 1천만 원을 주고 중고차를 구입했다. 책이 대박이 나면서 인세 수입이 3억 원 남짓, 드라마 판권 등 여타 수입이 더 있을 테고 강연료 수입도 적지 않지만 한 작가가 10여 년을 준비해서 낸 책, 그것도 대박이 났다는 베스트셀러로 버는 돈 치고는 너무 적다. 지금 버는 돈으로 평생 먹고 살 생각을 하고 있다. “저는 가난한 이유가 욕심이 없어서 그래요. 저는 별로 갖고 싶은 게 없어요. 집을 갖고 싶고 좋은 차를 갖고 싶었다면 제자들한테 밥 안 사 먹이고 술 안 사주고 돈을 모아서 샀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집은 17평이 넘으면 청소에 짜증이 나기 시작하더라고요. 좋은 집도 필요 없고 차는 티코만 아니면 된다, 티코가 짜부라진 걸 본 적이 있어서… 차는 조금 안전하기만 하면 돼요. 여행은 젊었을 때 지겨울 만큼 했고 위스키 좋아하지만 그거 맛있다고 먹다 보면 과음하고 속만 상해요. 맛없는 소주 마셔야 적당히 마시다 끊을 수 있어요.” 처음에는 두렵고 망설였던 구례로의 이주가 자신이 한 선택 중에서 가장 잘한 것이라고 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무렵 6-7만을 헤아리던 구례 인구는 이제 2만 5천 명, 지금 살고 있는 구례군 간전면의 지난해 신생아 수는 0명이다. 읍내 한 바퀴를 도는데 20분이면 족한 이곳에서는 서로의 속사정을 뻔히 다 안다. 그러니 허영과 가식이 파고들 여지가 없다. 처음에는 그런 솔직한 관계가 불편했지만 이제는 거기에 익숙해졌다.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살다 보니 더 높이 올라가고 더 유명해지고 이런 게 별로 의미가 없어졌어요. 지금 이대로도 나를 이렇게 걱정해 주고 염려해 주고 충분히 사람으로 잘 대접받고 살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드니까요. 다른 작가들에게 인정받고 뭐 상이라도 좀 받고 싶고 이런 생각들이 어느 순간에 싹 사라지더라고요.” 류근례 씨는 <아버지의 해방일지>에 나오는 떡집 언니의 실제 모델이다. 올해 79살인데 전화통화만으로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이 집안 내력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소상히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이 고생이 만만치 않았던 거 같은데 별로 그런 티가 나지 않는다고 했더니 이렇게 말했다. “제가 보기에는 성격이 긍정적이어서 고생한 티가 안 나지 않나 싶어요. 한 번도 힘들다거나 경제적으로 어렵다거나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 거 같아요. 또 어머님도 그렇고 지아도 그렇고 남을 한 번도 나쁘게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당신이 피해를 당할 때도 그 사람도 사정이 있어서 그렇겠지 이렇게 좋은 쪽으로 생각을 하시지 누구를 원망하거나 서운해하거나 전혀 그러지를 않아요. 제가 생각해도 참 희한한 분들이에요.” 내 글이 달라지는 것, 이것이 가장 기쁘지요 얼마 전부터 매달 구례성당에 암만의 돈을 보낸다. 이 사람에게 적지 않은 돈이다. 어려울 때 성당에서 어머니를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이자 작게라도 나누며 살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욕망의 크기를 줄이고 욕망을 선택하면서 살고 싶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내 글이 달라지는 것, 이게 제일 좋고요. 제가 원하는 건 그거 하나인 거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누구보다 나은 소설을 쓰겠다, 세계적인 상을 받겠다 이런 게 아니고요. 제가 제 글의 한계를 아는데 그 한계를 뛰어넘는 글, 지금보다는 나은 글을 죽는 날까지 쓸 수 있으면 그게 내가 제일 원하는 거다. 그다음에 내가 아는 사람들이 어떤 한계에 부딪혀 있을 때 마음이든 뭐든 조금 도와줄 수 있어서 그들이 나로 인해서 조금이라도 편해지면 참 좋겠다 뭐 이런 정도를 바라지요.” 아버지는 낙관주의자였다. 자신이 추구하던 이념이 실패한 뒤에도 더 좋은 세상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빚과 함께 낙관주의도 물려받은 모양이다. 크게 보면 세상은 나아졌고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변한다고 했다. 자신도 그 대열에 속해 있던 386 세대가 청춘 시절의 그 원대했던 꿈에 비하면 지금의 모습이 초라한 것 아니냐고 하자 이런 말을 했다. “늘 신문에 오르내리는 분들은 반성을 안 하는 거 같고요. 저는 그분들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를 않아요. 오히려 저는 자기 할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삶을 열심히 살면 넘어설 수 없는 것도 넘어서게 되고 그러거든요. 저는 건강하게 생활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 사람은 변화할 수 있고 세상도 당연히 그렇게 변화해 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무엇을 물어도 좋고 자신을 비판해도 되지만 자신의 글과 이름을 빌어 좌든 우든 비판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했다. 2021년 펴낸 단편집 <자본주의의 적> ‘저자의 말’은 “옳은 건 없다. 모르겠다”는 아홉 자가 전부다. ‘가장 건강하고 깨끗한 핏줄을 이어받은 민중의 딸’을 자임하던 사람이 어떤 과정을 거쳐 “옳은 건 없다. 모르겠다.”는 회색빛 인식에 이르렀는지 3시간 정도의 대화로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다만 이 사람이 과거에 비하면 훨씬 깊어지고 넓어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뜰 수 있었고, 사람이 나이 들어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것을 ‘작품’으로 보여준 것이다. 한국의 자본과 노동 문제를 이념이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로 경쾌하게 ‘대하소설’로 풀어내고 싶다고 했고, 부모의 이야기 말고 아직 풀어놓지 않은 이야깃거리 한 보따리가 있다고 했다. 그 보따리 안에는 여태까지 누구 앞에서 울어 본 적이 없고, 누구 앞에서 힘들다는 말을 한 적도 없다는 이 사람 인생이 담겨 있음에 틀림없다. 이제는 어려우면 어렵다는 말도 하면서 살려고 한다는데 평생 안 하던 말이 예순이 낼 모레인 나이에 입 밖으로 나올 수 있을지는 이 사람 다음 작품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이 남달랐던 2인자인 이유 사실 이 사람이 정권의 2인자였을 때 모습은 그저 그랬다. 범접할 수 없는 권력자의 위세가 느껴지기도 했지만 전형적인 2인자의 모습 그 이상은 아니었다. 칼자루를 쥐었을 때 그 칼을 칼집에 담아두지 않았다. 2008년 총선을 앞두고 ‘공천 학살’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 공천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이 이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적어도 여의도에서는 아무도 없었다. 대선 승리 1등 공신이라는 말을 들으며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총선에서 떨어진 것은 이 사람의 오만을 민심이 알아봤기 때문이다. 권력이 사라진 이후 이 사람의 행보는 주목할 만하다. 2인자라고 불리던 사람 중에 그 정권의 처음과 끝을 함께 하는 사람은 드물다. 정권이 끝난 이후까지 책임지겠다는 자세를 보인 사람은 더더욱 드물다. 정권이 어려운 지경에 빠지면 ‘나는 2인자 아니었다, 나는 허세에 불과했고 진짜 실세는 따로 있다’고 말하기 바쁜 게 세상인심이다. 이 사람은 달랐다. 교도소에 가지 않은 정권 2인자였다는 것은 어찌 보면 부차적인 것이다. ‘권력자’가 아니라 ‘권력’에 대해 한결같은 충성을 보여온 사람이다. 그래서 이 사람이야말로 권력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권력을 누려도 봤고 권력과 싸워도 봤고 권력에 짓밟혀 보기도 했다. 권력을 만들었고 그 권력이 무너지는 과정도 지켜봤다. 권력의 무상함을 알지만, 권력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 지도 안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였고 변절이라는 말을 듣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적장의 가랑이 사이도 기었을 사람이고 그렇게 해도 비굴해 보이지 않을 사람이다. 2천 년대 초반 야당 원내 사령탑이던 이 사람을 볼 때면 사나운 맹수 같다는 생각을 했다. 특유의 약간 쉰 듯한 목소리로 의원 총회나 국회 본회의장에서 연설을 할 때면 포효한다는 것이 저런 것이구나 싶었다. 온몸으로 표시하는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에 골수 운동권에서 보수 정당에 입당한 전력이 더해져서 권력욕의 화신처럼 보였다.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현 정부의 행태를 보면서 새삼 도대체 권력이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현 정부의 권력 실세들에 대해 “설쳐댄다” “조폭 똘마니” 같다는 말을 날리고 최고 권력자에 대해서도 오만하다고 일갈하는 이 사람에게 권력이 무엇인지, 권력을 잡은 이들의 심리를 듣고 싶었다. 5선 국회의원에 MB 정부의 넘버 2로 불렸던 이재오를 만난 이유다. 다섯 번 구속된 ‘골수 운동권’ 20대 후반부터 30대 후반까지 인생의 꽃 같은 시절 중 80개월이 넘는 세월을 감방에 갇혀 지냈다. 햇수로 치면 11년이다. 유신과 5공 독재 정권은 물론 세상이 달라졌다고 하는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감방에서 열 달을 보내 모두 5번 교도소 신세를 졌다. 긴급조치, 국가보안법, 반공법 같은 것들이 이 사람을 감옥에 가뒀다. 감옥에서 보낸 시간이 가장 긴 정치인이고 중앙정보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누구에 못지않게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이부영, 김근태, 장기표와 함께 재야 4인방이라 불리던 ‘골수 운동권’이었다. 박정희와 싸우고 전두환, 노태우와 싸우고 김대중과 싸우고 노무현과 싸웠다. 박근혜와는 같은 당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 어떤 정적들보다 더 치열하게 싸웠다. 이들은 정적, 말 그대로 적이었고 이들과의 싸움은 베지 않으면 베이는 싸움이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삶은 늘 치열하고 절박했다. 밖으로는 독재자와 싸웠고 안에서는 동지들과 싸웠다. 누구보다 적과 아군의 구분이 명확했고 중재자나 심판 같은 역할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1987년 양김 단일화 논쟁, 1989년 재야 정치권 진입 논쟁의 한가운데 있었다. 이 사람이 입장을 정하면 피아가 분명해졌고 논점이 선명해졌지만 대립도 격렬해졌다. 1987년 대선 후보 단일화 논쟁을 회고할 때는 영락없이 재야 투사 이재오였다. 이미 30년도 훌쩍 지난 이야기였는데 기억은 선명했고 표현은 날카로웠다. 반독재 민주화 시절 이 사람과 이 사람 가족이 겪은 가난과 고통은 지금 들어도 가슴 아린 이야기다. 아내와 경주에서 며칠 간의 신혼여행을 보낸 뒤 아내는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가고 자신은 검거의 손길을 피해 전국을 떠돌며 도망자 신세로 살았으니 참으로 기가 막힌 신혼이었다. 작은 옷 가게를 하며 바느질로 생계를 꾸려온 아내에게 평생 월급봉투 제대로 갖다 준 적이 없다. 이 사람이 다섯 번이나 감옥에 들락거릴 때 아내는 옥바라지를 하며 아이 셋을 키우고 치매를 앓는 장인을 17년 넘게 돌보았다. 감옥에 있는 동안 딸이 태어나고 아버지가 세상을 떴다. 아이들은 정보과 형사들을 아버지의 친구로 알고 자랐다. 그런 아이들에게 감옥에서 편지를 쓸 때 아빠가 감옥이나 교도소에 있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병원’, ‘대학’에 있다고 했다. 희곡을 쓰고 연출을 해서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가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된 적이 있고 <깃발>이란 소설을 쓴 적도 있다. 등단 절차를 밟지 않았을 뿐 문인이라고 해도 시비 걸 사람 별로 없다. 글 쓰면서 국어 교사로 살아도 어울렸을 사람답게 이 사람이 쓴 책들은 글 읽는 맛이 있다. 1983년 감옥에서 네 번째로 풀려났을 때 38살이었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치매를 앓는 장인과 딸아이 둘, 그리고 9평 집이 전부였다. 집 절반은 가게로, 나머지 절반을 아이와 장인이 나눠 쓰고 있었다. 감옥에서 나왔지만 마땅히 자기 몸 하나 누일 공간이 없는 신세가 기가 막혔다. 마침 집 주변에 재야 활동을 함께 한 나병식이 경영하는 풀빛 출판사가 있었고 거기에서 독서실도 같이 운영하고 있었다. 독서실 한 칸을 빌어 거기에서 기거하며 <해방 후 한국 학생운동사>를 썼다. 그 책에서 나온 인세는 가족들의 생계에도 꽤 도움을 줬고 평가도 좋았다. 그때 처지가 절박했기 때문에 글이 잘 나온 것 같다며 그 책을 대만국립대학에서 교재로 썼다고 자랑했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길은 어떤 면에서 강요된 선택이었다. 경북 영양 산골에서 태어나 가난을 친구 삼아 지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군청 말단 직원으로 특채되었지만 그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골방에 틀어 앉아 석 달 동안 참고서를 줄줄 외워서 중앙대학에 들어갔다. 입학하자마자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앞장섰다가 제적됐다. 군대에 끌려가서 36개월을 보낸 뒤 학교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거부당했다. 그때의 분노가 민주화 투쟁의 원동력이다. 타고난 다혈질 성격과 정의감 거기에 우직한 촌놈 근성도 한몫했다. 1970년대 국어 교사로 살았던 짧은 몇 년이 가장 행복했고 교사가 자신에게 잘 맞는 옷이라는 말도 했지만 이 사람 몸 안에는 정치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심훈의 <상록수>를 읽고 농촌 지도자가 되겠다는 꿈을 꾼 것도, 중고등학교 시절 4H 운동을 한 것도, 경북 영양 그 시골에서 웅변을 익히고 대학에 들어와서 곧바로 학생 운동에 투신한 것도 정치인의 DNA가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다섯 번 당선된 보수 정치인 국회의원 배지가 곧 권력이다. 1990년 민중당을 만들어 제도권 정치에 들어선 것은 그 권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이우재, 장기표, 김문수 등 재야 출신의 나름 쟁쟁한 인물들이 당의 얼굴로 포진하고 있었고 노회찬, 김성식, 김용태 같은 훗날 한국 정치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신진기예들이 허리 역할을 했다. 당의 사무총장으로 민중당 창당을 주도했지만 역부족을 실감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14대 선거에서 야심차게 도전하였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당선자와 2만 표 차이로 낙선했고 민중당은 전체 득표의 1.5%를 얻는 데 그쳐 당이 해산되었다. “민중당으로 선거에서 이긴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손으로 만져보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결과적으로 전멸이었다.” <함박웃음> 중 권력의 불의와 부정을 외친다고 그게 없어지는 게 아니었다. 감옥을 몇 번 가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 ‘하늘의 별’을 따기 위해 1996년 1월,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에 입당했다. 그때 일을 말할 때 변절이라는 말을 애써 안 쓰려고 하는 게 느껴졌다. 불가피하게 그 말을 써야 할 때도 변신, 변화라는 말로 대신했다. 그해 서울 은평을에서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고 같은 지역구에서 5선 의원 경력을 쌓았다. 이 사람의 지역구 관리는 유명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이면 자전거를 타고 호남 출신 유권자가 40%에 이르는 지역구를 돌았다. 경상도 출신은 안되고, 여당은 안된다는 전통이 있는 이 지역구에서 죽을힘을 다해 노력했다. “불광시장 재래시장 있잖아요. 거기 가면 노점상 하는 아줌마도 있고 할머니도 있는데 처음에는 뭐 냉담했지 뭐. 근데 이제 하도 정성으로 내가 인사를 하고 다니니까 사과 박스 있잖아요. 거기에다가 ‘대통령 김대중, 국회의원 이재오’ 써가지고 장바구니 옆에 딱 놓고 있어요. 내가 눈물이 나지. 너무너무 고맙지. 남들 보는데 이걸 왜 써놨어요? 라고 물었더니 자식 얼굴도 일 년에 한두 번 보기 어려운데 국회의원이 맨날 찾아주니 고마워서 그런다는 거야.” 여의도에 들어온 뒤에도 가장 치열한 싸움꾼이었다. 특히 ‘김대중 저격수’로 불리며 DJ 정권과 각을 세웠다. 부자들의 정당 같았던 당시 한나라당을 싸우는 야당으로 변신시킨 것은 이 사람 공이 크다. 홍준표, 김문수, 김홍신, 정형근 같은 전투력이 좋은 대여 공격수들이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서도 이 사람은 눈에 띄었다. 두 차례 원내 사령탑을 지내면서 당시 여당에 대한 공세를 주도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아들의 부패 스캔들을 집중적으로 제기한 것도, 임동원 당시 통일부 장관 불신임 결의안을 통과시켜 이른바 DJP 연대를 무너트린 것도 이 사람이다. 아는 사람이 더한다는 말도 들었고 보수정당에 들어간 것보다 보수정당에 들어간 이후 모습이 더 역겹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고 자리에 따라 얼굴이 달라지는 사람이라는 평가도 있다.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이런 소감을 밝혔다. “이제 내 인생에서 남에게 손가락질받을 일, 정치적으로 남이 못 할 말을 대신해 욕을 먹는 일은 끝났다. 가슴 속에 맺혀있던 무언가가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함박웃음> 중 제도권 정치인으로 살아남고 성공하기 위해서 남이 못한 말을 대신하기도 했다는 속내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권력을 잡는다는 것은 하기 싫은 말은 하지 않는 것, 자신의 본심을 굳이 숨길 필요가 없는 것이기도 한 모양이다. 5선 국회의원 당선이 다섯 번의 구속에 대한 보상 아니냐고 했더니 그렇지 않다고 했다. 민주화 운동은 민주화 운동이고 보수 정치인의 삶은 별개라는 것이다. “내가 10여 년 옥살이하고 7년을 수배당해서 도망을 다니고 했는데 그때 삶을 앗아간 것에 대해서 그 보상은 영원히 안 되는 거지. 그다음에 국회의원 5선 하고 정권 잡고 이런 거는 내가 정당에서 노력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젊었을 때 고문 당한 것을 5선 해서 보상받았다 뭐 그런 차원이 아니고 그건 그거대로 한 청춘을 소모한 거고, 그거는 독재로부터 한 청춘을 앗아간 거고 또 정치하면서 그냥 놀면서 5선 된 게 아니잖아요. 내 전부를 바쳤어. 정치에 전부를 바쳤잖아요.” 2012년 대선 출마를 선언했지만 중간에 뜻을 접었다. 이미 차기 보수 정당 대선 후보는 박근혜로 굳어진 상태에서 별 의미 없는 도전이었다. 2016년에는 늘푸른한국당을 만들어서 다시 한번 대권에 도전했지만 결과는 초라했고 사실상 그것으로 정치 인생은 막을 내렸다. MB와의 인연 이 사람이 없었다면 MB의 인생은 훨씬 더 초라했을 것이다. MB는 이해관계에 밝은 기업인 출신이고 이 사람은 거리의 투사 출신이니 영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1964년 한일 회담 반대 투쟁 때부터 서로 알기는 했지만 학교도 다르고 나이 차도 있어 친한 관계는 아니었다. 1996년 국회에서 한반도 대운하 필요성을 역설하는 이명박을 보고 이런 사람이야말로 대통령감이라고 생각했단다. 반독재 민주화만 외치던 사람에게 MB의 실질적이고 성과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보수정당 주류에 끼기 어려웠던 두 야심가의 결합은 MB의 서울시장과 대통령 당선으로 이어졌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MB 옆에 서 있었고 거의 모든 사람이 전직 대통령의 탐욕을 질타할 때도 이 사람은 열정적인 목소리로 MB를 변호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아쉬운 소리 해서 모은 돈으로 전직 대통령 석방을 요구하는 신문 광고를 몇 차례나 냈다. 끈 떨어지면 언제 알던 사람이냐고 등 돌리는 게 다반사이고 혹시 자기에게 불똥이 튀지 않을까 겁부터 내는 게 인지상정인데 우직하게 MB를 옹호했다. MB가 지난해 말 사면된 이후 가족 아닌 사람들 만나는 것을 조심스러워하지만 자신은 예외라고 했다. 인간적인 정리에 못지않게 그 정권이 자신의 정권이기도 하다는 생각, 정권의 시작과 끝은 물론 그 이후까지도 책임을 지겠다는 태도였다. - 그런데 MB 외로울 때 왜 옆에 계셨어요. 의리 같은 건가요. “어쨌든 내가 MB 하고 같이 해서 정권 만들고 청계천 복원하고 4대강을 했는데 정치적으로 일을 같이하려고 마음먹었으면 그 사람의 끝도 같이 지켜봐야지. 좋은 시절만 같이 하고 끝났다고 해서 떨어지고 그거 하는 거는 정치인 자세가 아니다... 내가 MB 옆에 있어 손해 보는 한이 있어도 내가 같이 있어야지.” - 손해 본다는 생각은 하셨죠. “주변 모든 사람들이 다 나한테 하는 이야기가 너 MB 때문에 신세 망친다고 맨날 그랬지. 그래도 10년 만에 MB와 함께 정권 되찾았는데 그 사람이 뭐 여러 가지 개인 문제로 감옥에 가고 어렵다고 그래서 내가 떠나면, 내가 무슨 권력을 보고 MB를 (대통령) 시킨 것처럼 되잖아요. 그게 아닌데… 그래도 뭐 내가 그래도 MB를 대통령 시킨 것이 죄라면 그 죄로 MB를 지켜야 되는 것 아니냐…” 누구도 우러러보는 기색이 없었다. 적지 않은 기록을 봤지만 누구를 지도자로 모시거나 누구를 추종하거나 충성을 다짐했다는 표현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명박의 장점을 높이 평가하고 각별한 마음을 아끼지 않았지만 동지로서 대하는 것이지 주군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DJ에 대해서도 민주화 운동의 대등한 동지 정도로 생각하는 태도가 역력했다. 고마운 사람은 많지만 추앙하는 사람의 이름은 듣기 어려웠다. - 제일 존경하는 분이 누굽니까 그런 얘기를 어디 안 써놓으셨더라고요. “별로 내가 뭐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 뭐 이거 별로 생각 안 해봤지…70년대 1세대 인권 변호사분들에게 신세 많이 졌고 김상현, 최형우 이런 선배들도 참 고맙지요.” 이명박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정권이기도 했던 MB 정권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MB를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람이 아닌 ‘권력’에 충성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가장 잘한 일은 ‘MB 대통령 만들고 가만히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앞 부분은 누구나 동의할 말이지만 뒷부분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른 사람이 많다. - 대단히 권력 지향적인 인물이셨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재야하다가 야당 10년 하다가 여당 10년 했잖아요. 재야에 있을 때는 반독재 투쟁에 몸을 바쳤고. 국회의원 돼 갖고는 또 야당을 10년 하면서 반여당 투쟁을 해왔으니까 그게 다 권력과 관계되는 거잖아…그러니까 내가 10년 야당과 싸울 때만 본 사람들은 저 이재오 진짜 권력욕이 대단하다 볼 수 있는데 권력욕이 대단하다는 게 맞으려면 정권을 우리가 잡았을 때 그 정권을 갖고 내가 뭘 진짜 장기 집권을 하려고 했든지 아니면 내 개인이 무슨 부를 누렸든지 뭐 했어야 되잖아요. 내 양심을 돌이켜봐도 내가 권력의 자리에 있어서 권력으로 인해서 내가 부끄러운 일을 한 거, 나 별로 없어요.” 이 사람에게 권력이 추상적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구체적인 현실이자 힘이었다. 권력이란 자신을 학교에서 제적하고 고문하고 교도소에 가두는 힘이었다. 그 힘에 억눌려 늘 누군가의 감시를 의식하며 쫓기고 숨어 살아야 했다. 입장이 바뀌었을 때 권력은 공천이나 공직에서 누군가를 배제하는 힘이었고 이전 정권의 최고 권력자를 삶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 것이기도 했다. 시내 한복판의 고가도로를 뜯어내고 보이지 않던 개울을 드러내는 힘이자 나라의 산과 강을 뒤집어엎는 힘이었다. 그런 힘을 잃는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2008년 총선에서 불의의 일격을 맞아 낙선했을 때 이 사람 집에서는 새벽마다 통곡 소리가 들렸다. - 그 이야기 맞습니까. 2008년에 낙선하셨을 때는 새벽마다 그냥 거의 통곡을 하셨다라고 하는 기사가 있던데요. “새벽마다 통곡한 건 아니고 하여튼 아침에 일어나면 눈물이 많이 났지. 왜냐 나는 정말 내 전부를 바쳤는데 무슨 비리에 하나 연루된 게 없고, 정말 국회 끝나면 집에 가서 살고 자전거 하나 갖고 골목골목 다니면서 누구 집 애가 장가가는지 시집가는지까지도 다 알 정도로 누비고 다녔거든. 지역 일도 많이 했거든. 뉴타운도 가져오고. 그랬는데 내가 떨어졌잖아요. 내가 한 것에 비해서 내가 떨어졌다 하는 것이 이게 이해가 안 되는 거지. 그래서 상당 기간 헤어 나오지 못한 점이 있어요.” 선거에서 지는 것은 울음으로밖에 표시할 수 없는 온몸으로 느껴지는 물리적인 고통 그 자체였다. 권력을 잃는 것은 생살을 뜯어내는 고통이었다.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 인터뷰를 하던 날 아내와 다퉜다고 했다. 지금도 5만 원, 10만 원 때문에 아내와 다툰다고 했다. 2016년 재산 신고를 11억 원 했으니 서민 기준으로 보면 가난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5선 의원에 장관급 자리를 두 번이나 거친 사람치고는 많다고 하기도 어렵다. - 지금도 싸우세요? “뭐 지금도 말다툼하지.” - 돈 때문에요? “돈 아니면 우리가 다툼할 게 없어.” - 이 책 <함박웃음>에 보면 부인을 아주 훌륭한 여성으로 그려 놓으셨는데요. “그때는 그랬지(웃음). 요즘은 집사람도 나이가 일흔다섯이잖아. 자기도 늙어가는데 뭐 갑갑하잖아. 맨날 푼돈 걱정해야 되고. 어디 가서 말도 못 하고. 맨날 이럴 줄 알았으면 국회의원 5선 할 때 돈이나 좀 많이 모아놓지… 오늘도 딸내미 어디 가는데 돈 20만 있어야 되는데 그거 없다고 그러고….” 정치인에게 돈을 써야 할 일은 넘쳐나고 권력이 있는 사람에게 돈의 유혹은 다반사다. 팔순을 눈앞에 둔 나이에도 당당하게 자기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은 그런 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평구 구산동에 있는 이 사람 집은 생존 정치인의 집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집이다. 지어진 지 50년이 넘은 23평짜리 집은 이 사람이 살아온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나라당 총재 이회창이 이 집에 다녀가면서 이재오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겠다고 한 이야기는 꽤 알려진 일화다. “유혹이야 좀 많았겠어. 내가 23평짜리 단독주택 지금도 옛날 그 집에 살잖아요. 집을 지어주겠다, 이거를 개발해 주겠다 뭐 온갖 사람들이 다 있었지. 그 말대로 다 들었으면 내가 아파트 아마 열 채도 더 샀을 거야.” 카메라 한 대 사달라는 아이에게 아빠는 그런 것 사줄 능력 없다고 말했고 마땅한 일자리 잡지 못해 고민하는 딸에게 아빠 힘 빌려 어떻게 해볼 생각은 하지 말라고 선을 그었다. 골프도 하지 않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는다. 2009년 미국 연수 가기 전까지 운전면허도 없었다. 나이 예순이 돼서 아이들이 출가하고 나서야 자기 방이 생겼다. 치매를 앓는 장인과 세 자녀와 함께 살았으니 자기 방을 갖는 것은 욕심이었단다. “‘쇼’를 해도 이재오가 하면 다르다.” 요즘이 현역 의원 시절보다 바쁘다. 많을 때는 하루에도 다섯 번 방송을 한다니 제2의 전성기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이 사람 출연한 프로그램 조회 수가 적을 때는 150만, 많을 때는 200만이 넘는다. - 댓글을 보니 반응이 뜨겁더군요. 스스로도 즐기시는 거 같고요. “나도 즐겁게 하고 있어요. 여전히 욕하는 사람도 있지만 칭찬하는 사람들도 늘었고. 우선 좀 재미있고 부담 없이 이야기하니까. 내가 뭐 하고 싶다든지 뭘 또 해야 되겠다든지 그런 욕심을 갖고 있으면 말도 이게 꼬여요. 또 말도 다듬어서 하게 되고, 또 이 말도 계산해서 하게 되고 그런데 우리는 그야말로 자연인이니까 다듬을 필요도 계산할 필요도 없이 그냥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하니까.” 이제는 물러설 줄 알고 놓을 줄도 안다. 굳이 이기려 들지 않는다. 젊은 진행자들의 다소 무례한 질문, 조롱으로 느껴질 법한 이야기에도 화내는 법이 없고 오히려 웃음으로 받아넘긴다. 나이 듦이 주는 선물 같기도 하고 처한 입장이 달라졌으니 그에 충실한 것도 같다. 박지원, 유인태, 이상민 등 정치권 원로들과 같이 나오는 시사 프로그램을 보면 수시로 폭소가 터진다. 정치가 이렇게 재미있는 소재라는 것, 낯 붉히지 않고 인상 쓰지 않고 서로 웃으면서도 자기 말을 다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호통칠 때는 호통치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런 모습을 보노라면 후련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점심시간 포함해 4시간 넘게 이야기하는 내내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나이 듦이 주는 힘,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표정이었다. 이제 선거에 나갈 것도 아니고 돈 벌어 부자가 될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자리 부탁하고 공천 부탁할 것도 없으니 아쉬운 소리 같은 것은 할 필요가 없는 거다. 인터뷰가 끝난 뒤 사진 몇 장 보내달라는 부탁을 했더니 인터넷에서 찾아 쓰라고 했다. 나는 아쉬울 것 없으니 사진이 필요하면 당신들이 구해서 쓰라는 태도였다. 연극을 했기 때문일까, 이 사람 몸짓에서는 연기를 하는 듯한 느낌이 있다. 어떻게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 있는지, 자신의 목소리가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들에게 잘 들릴지 아는 사람이다. 그런 것은 타고난 재능이기도 하지만 웅변과 연극, 교사로서 경험이 더해진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국민권익위원장 시절 자전거를 타고 5천 원짜리 식사를 하면서 현장을 누빌 때나 특임장관 시절 지하철로 출퇴근할 때 쇼를 한다는 말도 있었지만 ‘쇼를 해도 이재오가 하면 다르다’는 말을 들었다. 2010년 보궐 선거에서 당의 지원을 일체 거부하고 단기필마로 지역구를 누비는 기발한 선거운동을 할 때도 사람들은 쇼라고 했지만 유권자들은 그 쇼에 감동했고 표를 줬다. 재야 시절까지 포함하면 50년 넘는 세월을 정치판에서 보낸 사람이니 이 사람 안에 능구렁이 몇 마리는 들었다고 봐야 한다. 지금도 이재오라는 이름만 들어도 이를 가는 사람이 있고 이 사람 하나 부패하지 않고 감옥 가지 않았다고 해서 땅에 떨어졌던 MB정부의 도덕성이 회복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이 사람은 말할 자격이 있고 이런 사람이 있어 다행이다. 자기 같은 사람까지도 입을 다물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쓴소리를 한다고 했다. 대통령이 사과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이태원 참사, UAE 방문 중 나온 이란 주적 발언 등을 예로 들었다. 야당과의 협치를 강조하면서 나온 말이 권력의 오만이었다. “현 정부 들어선 지 벌써 10달이 다 돼 가는데 대통령이 야당의 대표나 야당의 원내대표단이나 야당의 상임위원장단이나 한 번도 만난 일이 없잖아요. 한 번도 야당을 방문해 본 적이 없잖아요. 사적으로도 야당 지도부들하고 술 한 잔 한 적 없잖아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말로만 민생에 여야가 없다, 야당 협조해야 된다 이런 말을 백 번 하면 뭐 하냐 이거예요. 야당이 안 들어주는데. 이거는 권력의 오만입니다.” - 대통령이 참모들의 이야기를 안 듣는다, 참모들이 대통령에게 직언할 분위기가 아니다라고 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대통령이 자기 말만 하고 다른 사람들 이야기 안 듣는다고 하던데 그런데 역대 대통령이 다 자기 말을 많이 하죠. 누구든지 대통령이 되면 세상 다 손바닥만 하게 보이고 모든 게 자기 말 한마디로 그냥 움직이니까 그야말로 땅 위에 살다가 하늘 위에 올라간 그런 기분이죠. 대통령이 되면 그러니까 천상에서 천하를 내다보는 그런 기분이지. 초기에 몇 달은 그런 기분 갖는 건 좋지만 그게 오래 가면 안됩니다…대통령도 성인이 아니니까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할 수 있지만 그런 게 너무 오래 가면 안됩니다. 임기가 5년이잖아요. 5년 해보고 다음에 잘하지, 1년 해보고 그다음에 잘하지 이런 게 아니잖아요.” 자신의 경험을 들어가며 권력자의 오만에 대해 이야기했다. 권력은 오만해질 수밖에 없고 자기 역시 그리 예외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내가 독재 정권과 싸우고 김대중 노무현 정권과 싸우다가 이제 여당이 돼서 권력을 잡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야당 때, 재야에 있을 때 그 어떤 피해의식이나 내가 못 했던 거 이런 거 이제 내가 권력 잡았으니까 내가 생각했던 거 한번 해보자 그런 생각이 들 것 아닙니까. 그럼 자연적으로 권력이 오만할 수밖에 없어요. 권력에 취할 수밖에 없어요. 권력이 자기가 힘을 가지면 힘을 가졌을 때 이 힘을 내 개인의 욕망을 위해서 쓸 것이 아니고 정말 이걸 서민을 위해서 국민들에게 써야 되겠다 이 생각을 가져야 되는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제로는 권력이 오만하게 돼 있어요.” - 대표님도 그러셨습니까. “나도 그 예외가 아니었을 수 있어. 나는 재야를 거쳤기 때문에 그렇게 심하게 그러지는 않지만 그러나 무의식 중에 내 속에 그런 권력 오만이 있을 수도 있죠. 그러나 우리는 이제 아주 엄혹한 시절의 재야를 거쳤기 때문에 도덕성이라든지 이런 것이 몸에 뱄기 때문에 부패라든지 부정이라든지 비리라든지 이런 데는 근처도 안 갔지 그래도.” - 권력이라는 게 뭔가요. 너무 원론적인 질문이지만. “그게 참 쉽고도 어려운 질문인데 권력은 도구예요. 칼 쓰는 사람은 칼이 권력이고 밭 매는 사람은 호미가 권력이지. 정치인들에게는 권력이 도구인데 이게 좋은 말로 말하면 국가와 국민을 살리는 도구지. 권력은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권력을 개인이 사유해 가지고 사고 나잖아요. 맨날 감옥 가고 뭐 하는 게 다 그런 거잖아요. 권력이 도구라는 걸 모르고 권력을 내가 누려야 하는 어떤 힘으로 생각하니까 감옥 가는 거야.” - 후회되는 일은 없으세요. “난 별로 없어. 내가 능력이 부족하거나 몰라서 잘못한 것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 시대 그 자리에서 내게 주어진 역할은 다 했다… 못한 거는 내 능력 부족으로 못 한 거고 내가 머리가 나빠서 못 한 거지 내가 알고 못 한 거야 뭐 있겠냐 그러니까 지금 나는 뭐 별로 후회하는 게 없는데 우리 집사람은 불만이 많지. 국회의원 5선하고 장관이나 두 번 하고 한 사람이 맨날 돈 걱정이나 하고.”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울림이 달라진다. 정치와 권력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모범 답안 같은 말이었고 ‘라떼는 말야’ 같은 말도 적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평가를 포함해서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적지 않았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을 이야기는 없었다. “그러니까 정치라고 하는 건 있는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고, 없는 사람을 위해서 존재해야 되는 거예요. 없는 사람들 더 잘 살게 만드는 게 정치지 있는 사람들의 재산을 지켜주기 위해서 정치가 있는 게 아니라고. 물론 그것도 해야지.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불이익을 당하거나 손해 보면 안 되지만 거기 있는 사람들은 가만둬도 잘 산다 이거야. 상대적으로 정부나 권력이 도와주지 않으면 좋아지는 세상을 누리지 못하는 계층 그 계층을 위해서 정치가 존재하는 거잖아요.” 정치인은 반성해야지 후회하면 안 된다고 했다. 반성과 후회의 차이가 뭘까 궁금했지만 그 차이는 묻지는 않았다. 지금도 새벽에 일어나 산에 가서 서너 시간 운동을 한다. 언젠가는 회고록을 쓸 생각도 있다는데 다시 정치를 해볼 생각은 없느냐고 했더니 그럴 생각이 없다고 했다. 자기가 그래도 명색 정권의 2인자 소리 들었는데 지금 정치하면 밥벌이밖에 더 되겠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