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경제부 조윤하 기자입니다. 늘 최선을 다해 보도하겠습니다.
비주류란 이유로, 마이크를 가지지 못했던 사람들의 스피커가 되는 저널리즘. 서울 지하철 1호선을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구로역'을 지나쳤을 겁니다. 서울역을 가든, 시청을 가든 늘 거쳐야 하고, 큰 쇼핑몰과도 연결돼 있어 이용객도 많습니다. 저 역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자주 구로역을 지나가곤 했습니다.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던 '구로역'은 32살 정석현 씨에겐 마지막 일터였습니다. 새벽 근무 도중 6m 아래로 추락해 숨진 정석현 씨 석현 씨는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구로역으로 출근했습니다. 졸업한 지 1년 만에 코레일 전기통신 직렬에 합격한 그는 역사 내 전기·통신과 관련된 설비를 보수하고 점검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지난 9일 새벽에는 '구로역 9번 선로'를 점검했습니다. 동료 2명과 함께 약 6m 높이의 전기모터카 작업대(바스켓)에서 고압 선류를 점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옆 10번 선로를 지나던 선로점검차가 작업대와 부딪혔습니다. 충돌과 동시에 석현 씨는 6m 아래로 추락했습니다. 병원으로 옮겨질 새도 없이 석현 씨는 현장에서 숨졌습니다. 석현 씨와 함께 일했던 31살 윤 모 씨 역시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옮겨졌지만, 결국 숨졌습니다. 함께 일하던 노동자 2명도 다쳤습니다. 30대 노동자 2명이 일터에서 스러진 건 찰나였습니다. 사고가 발생한 지 3주가 되어갑니다. 구로역을 지나는 열차는 새벽 5시부터 밤 12시까지 평소처럼 운행합니다. 마치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말이죠. 구로역에 생긴 간이 추모 공간을 제외하면 달라진 건 없어 보입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어쩌면 청년 2명이 스러진 사고를 너무 빨리 잊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석현 씨의 누나를 통해 석현 씨를 기억해보고자 합니다. 코레일의 고질적인 문제점이 한꺼번에 터졌다 고 정석현 씨 유족 "늘 구멍은 많았습니다. 다만 그전까진 석현이가 그 모든 구멍을 운 좋게 피해 갔는데, 그날은 모든 구멍들이 겹겹이 쌓여서 사고가 터진 것이죠. 지금 생각해 보면 이제까지 사고가 안 난 게 신기할 정도예요." 유족은 축적돼 있던 코레일의 고질적인 문제들이 한꺼번에 터져서 이 사고가 발생했다고 말합니다. 부실한 안전 매뉴얼과 부족한 인력,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소통 등 이전부터 꾸준히 제기돼왔던 문제점이 사고를 야기했다는 지적입니다. 1) "관제 책임자가 달라서"... 부족했던 소통 유족은 ‘9번 선로에서 노동자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왜 열차가 바로 옆 선로를 지나갔는지’ 의문이 많습니다. 5~6m 높이의 작업대에서 일을 하는 건 사실상 공중에서 작업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왜 인근 선로에서 열차가 출발했냐는 겁니다. 하지만 금천구청역에서 구로역으로 향하던 선로 점검차는 출발 당시 금천구청역의 발차 지시를 받고 출발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구로역 9번 선로에서는 노동자 4명이 작업을 벌이고 있었는데도 금천구청역에서는 ‘발차가 가능하다’고 지시한 이유, 해당 선로들의 관제 책임자가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하철 1호선 열차가 지나가는 구로역 5~9번 선로의 관제책임자는 서울교통공사입니다. 무궁화호 열차가 지나가는 구로역 10번 선로의 관제 책임자는 코레일입니다. 이원화된 관리 주체 간 소통이 원활히 이뤄졌다면, 9번 선로에서 노동자가 작업하고 있다는 상황이 사전에 공유됐을 것이고, 10번 선로에 있던 열차는 발차하지 않았을 거라는 게 유족의 설명입니다. 고 정석현 씨 유족 "일단은 관제 책임자가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관리 주체가 달라서 공유가 안 됐다고 하는데, 솔직히 이 시스템 자체가 이해가 안 갔어요. 관제 책임자가 다르다 하더라도 서로 소통이 돼야 하는데 아예 서로 단절돼 있는 시스템 자체가 문제였습니다." 2) 부실한 안전 매뉴얼, 현장과 괴리된 작업계획서 석현 씨가 올라가 있던 작업대는 2년 전에 바뀐 신형 바스켓이었습니다. 이 바스켓은 좌우 180도로, 최대 4m까지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9번 선로와 10번 선로의 거리는 고작 1.5m였습니다. 바스켓이 10번 선로 쪽으로 조금만 틀면 충돌할 수 있다는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석현 씨의 작업계획서에는 작업 구간이 ‘구로구 내 5~9호선’ 이라고만 명시돼있습니다. 석현 씨는 ‘구로역 10번 선로’에서 추락했는데, 정작 사고가 발생한 ‘10번 선로’는 석현 씨의 작업 범위에 포함되지 않은 겁니다. 인접 선로를 지나는 열차와의 충돌 가능성에 대한 언급 역시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선로 간 거리가 가까운 탓에 작업자와 열차 간 충돌 가능성이 있다는 건 예측 가능한데, 작업계획서는 현장과 괴리가 있었습니다. 유족 측을 대리하고 있는 전준철 노무사는 “9번에서 작업하더라도 10번 선로를 넘어서 교체작업을 할 수밖에 없는 작업 환경이었다”고 지적합니다. 바스켓의 이동 반경 상 10번 선로를 반드시 넘게 돼있는데, 작업계획서에는 반영되지 않았던 것이죠. 작업계획서 내 작업구간으로 명시하지 않다 보니 선로 점검차 발차 명령이 내려졌다는 게 전 노무사의 설명입니다. 유족은 ‘공중 작업 시 인접 선로를 차단했어야 했던 것 아니냐’고 토로합니다. 철도노조 역시 이전부터 ‘작업 중인 선로 양쪽으로 인접한 선로는 운행을 중단해야 한다’고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3) 부족한 인력과 허술한 법 유족은 ‘하다못해 고속도로 보수작업을 할 때에도 신호수 역할을 담당하는 인력이 있는데, 선로 작업 때는 왜 해당 인력이 없었는지 답답하다’고 말합니다. 선로 간 간격이 좁고, 인접선로 작업 중단조차 지켜지지 않는데 작업 환경을 관리하는 운행 감시인조차 존재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충돌사고가 발생할 우려가 있는 궤도를 점검하는 경우’에는 열차운행감시인을 배치해야 합니다. 하지만 선로 순회 등 단순점검 작업에는 예외를 두고 있습니다. 철도노조는 이전부터 현장 안전관리 인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지난 2019년 10월, 경부선 밀양역 부근에서 선로작업을 하다 노동자 1명이 숨지고 2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을 때, 철도노조는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적정한 안전인력 확보를 법률에 명시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인력이 부족해 작업 현장에서는 안전 감시업무 담당 노동자가 관리·감독 업무까지 겸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아예 분리해서 별도 안전관리 인력을 두자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법 개정은 없었습니다. 게으른 국회와 현장을 반영하지 않는 법은 수많은 위험으로부터 노동자를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고 정석현 씨 유족 "코레일이라고 하면 안전장치는 물론 시스템도 잘돼 있을 줄 알았어요. 솔직히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2중, 3중을 기대하긴커녕 기본 안전장치도 제대로 돼 있지 않았던 느낌입니다. 늘 사고가 날 수 있는 상황인데 누군가의 기지로 사고를 막았던 거죠. 얼마든지 대형 사고가 터질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일이 보이면 덤벼들어"... 사측 발언에 또다시 무너진 유족 사고 발생 3주가 지나가지만, 유족은 사고 직후 어떤 초동 조치가 이뤄졌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구로역 내 CCTV에는 사고 현장이 찍히지 않았고, 운행하던 선로점검차에 블랙박스가 있었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블랙박스는 전원이 켜지면 2분 간격으로 저장되고, 일주일 동안만 저장되는 장치였습니다. 그러나 사고 발생 나흘 전인 8월 5일 오후부터 사고 당일인 8월 9일 새벽 5시까지 촬영된 영상은 저장되지 않았습니다. CCTV와 블랙박스, 영상 촬영 장치는 있었지만 사고 현장을 기록한 영상은 그 어디에도 없는 겁니다. 고 정석현 씨 유족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 영상이 전혀 없으니 초동 조치가 잘됐는지조차 알 수 없어요. 충돌사인지 추락사인지 석현이가 왜 숨졌는지도 영상을 봐야 제대로 알 수 있는데 지금은 전혀 확인이 안 되니까... 평소에 블랙박스 관리가 전혀 안 된 건가 하는 생각이 들고, 도대체 관리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안 한 건지, 제대로 한 게 뭔지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요." 숨진 노동자를 대하는 코레일의 태도는 유족에게 또다시 상처가 됐습니다. 사고 발생 당일(9일), 한문희 코레일 사장은 유족을 찾아갔습니다. 면담 자리에서 한 사장은 유족을 앞에 두고 ‘일하는 분 입장에선 눈에 일이 보이면 덤벼드는 것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고 책임을 노동자에게서 찾는 듯한 발언을 가족들 앞에서 내뱉은 겁니다. 코레일 한문희 사장 (지난 9일, 유족 면담 자리 中) "몸 잘 아끼고 하라는 얘기를 해도 일하시는 분 입장에서는 눈에 일이 보이면 그걸 막 덤벼들어서 하는 것도 있어요. 그러지 말아야 되는데. (중략) 본인 일을 적극적으로 하는 분들이었던 것 같다. 자기 일을 더 잘해보려고 했던 분들인 것 같아서..." 사고 당일 코레일 사장으로부터 이 발언을 직접 들은 유족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석현 씨 유족은 ‘정말 (석현이가) 실수로, 잘못해서 이 사고가 발생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코레일 측은 “직원의 탓으로 돌리려는 취지는 아니었다”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아들의 죽음을, 동생의 죽음을 마주한 가족에게는 잊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습니다. 유족에 따르면 코레일 측이 유족에 제시한 합의금에는 석현 씨의 퇴직금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석현 씨가 회사를 그만두면 당연히 지급되는 퇴직금이 산업재해 합의금에 담겨있는 겁니다. 또, 사우들이 자발적으로 모은 모금액까지 합의금에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사측이 산업재해 합의금에 석현 씨의 퇴직금과 사우 모금액 등을 넣어 합의금 부풀리기를 시도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고 정석현 씨 유족 "코레일 측에서 사망자가 생겼을 때 부담하는 페널티적인 보상금은 없다고 느껴졌어요. 산재보험금은 보험공단에서, 직원 상해보험금은 보험사에서 내는 거잖아요. 사고가 발생하면 지급되는 금액 외에는 코레일이 추가로 부담하는 비용은 크지 않은 거죠. 이래서 지금까지 코레일이 개선이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껏 수많은 사망사고가 발생했는데 그동안 코레일이 어떤 페널티를 받았는지 모르겠어요." 위험하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석현 씨는 지난 2018년 입사했습니다. 졸업 1년 만에 취업한 거니, 또래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일찍 취업에 성공한 편에 속했습니다. 유족은 ‘그래서 더 (석현 씨가) 자신의 일에 만족하고, 장점을 찾으려고 했었다’고 기억합니다. 석현 씨 누나는 코레일에서 현장 업무를 맡을 수도 있다는 말에 되레 취업을 말렸는데, 코레일에 입사하겠다고 결정한 건 석현 씨였을 만큼 자부심도 강했습니다. 입사한 지 1년이 되던 해, 경남 밀양에서 노동자 사망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때 석현 씨는 누나들에게 '나에게도 비슷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철도 현장이 워낙 위험해서 한 이야기였겠지만, 누나들은 석현 씨의 그 말이 사실이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 했습니다. 고 정석현 씨 유족 "누나들이 잔소리를 하잖아요. 밀양에서 사고가 났다는데 왜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하냐고 하면서 이직을 권했어요. 당장 회사 옮기라고요. 그런데 석현이는 워낙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다 보니까 장점을 찾으려고 하더라고요. 본인도 ‘나도 언제든지 그런 위험에 처할 수 있다’라는 얘기를 하면서도 코레일에 다니는 걸 좋아해서 저희가 말려도 계속 다녔습니다. 그때가 너무 후회스러워요. 그때 다른 회사로 옮기라고 더 강하게 얘기했어야 됐는데... 정말 가족밖에 모르던 아이였거든요. 지금도 아침마다 잠에서 깨면 석현이가 없는 현실이 너무 괴롭고 믿기지 않아 눈을 뜨고 싶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석현이가 ‘누나야, 내가 왜 죽었는지 모르겠다. 나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성실히 일했을 뿐인데’라고 말하는 거 같아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에도 책임지는 사업주 없어 이번 사고는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지난 2022년 1월 이후 발생한 5번째 사망사고입니다. 2022년 3월 대전 차량사업소, 7월 서울 중랑역 승강장, 9월 경기 고양 정발산역, 11월 경기 의왕 오봉역에서 각각 산업재해가 발생해 그 해에만 4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처벌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봉역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와 관련해 나희승 전 코레일 사장과 코레일 안전관리책임자 등이 중대재해처벌법,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입건되긴 했지만, 검찰은 무혐의 처분을 내렸습니다. 공공기관장 중 처음으로 중대재해법으로 입건된 사례였지만, ‘안전보건 조치를 모두 이행했다’는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내린 겁니다. 노동자 사망사고 등 중대한 산업재해가 발생할 경우 사업주나 경영주에 책임을 묻도록 하는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고 있지만, 정작 법적으로 책임지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 실정입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는 지난 12일, 성명서를 내고 “반복되는 중대재해 참사를 멈추기 위해 철저한 원인조사와 함께 진짜 책임자인 사업주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유족 역시 책임자 처벌을 강조했습니다. 꿈 많던 30대 청년 석현 씨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끔, 제2의 정석현이 나오지 않게 해달라는 부탁입니다. 어떤 역이든 누군가의 마지막 일터가 되지 않도록 철도 노동자의 작업환경부터 개선돼야 합니다. 고 정석현 씨 유족 "코레일의 안전 시스템에는 중대한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이번 사고를 그냥 넘어가게 되면 다음 희생자는 누가 될지 모릅니다. 제대로 책임자들이 처벌받아서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아야 해요. 가족인 저희가 해줄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습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던 일상을 깨뜨린 건 유튜브 영상이었습니다. 지난 1일, 유튜브 채널 <나락보관소>는 2004년 밀양 성폭력 사건 가해자의 신상 공개 영상을 게시했습니다. 영상엔 가해자들의 이름과 나이, 직장 등 개인정보가 자세히 담겼습니다. 직장에선 어떤 직급인지, 어떤 차를 몰고 다니는지, 누구와 어떤 관계를 이어오고 있는지 등 가해 사실과는 무관한 가십성 정보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대중은 즉각 반응했습니다. 사건 발생 당시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던 가해자들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꽤 잘 산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분노했습니다. 이제라도 뒤틀린 정의를 바로잡아야 한다며 응징에 나섰습니다. 그 결과, 어떤 가해자는 회사에서 해고됐고, 또 다른 가해자는 사업을 접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성폭력 피해자'는 배제됐습니다. 가해자 신상 공개, 응징에서 비롯된 사적 제재 등 사건 재조명 과정의 주체는 피해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피해자의 의사는 악의적으로 왜곡되고, 철저히 묵살됐습니다. 해당 유튜버는 자신이 피해자와 소통을 진행했고, 피해자 역시 신상 공개에 동의했다고 설명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사건 발생 당시부터 20년 동안 피해자 지원을 이어오고 있는 한국성폭력상담소는 '가해자 44명의 신상을 모두 공개하는 방향에 동의한 바 없다'고 밝혔습니다. 피해자가 영상 삭제를 요청했지만, 유튜버는 이조차도 거부했습니다. '(피해자는 원한 적 없지만) 가해자 신상 공개가 피해자를 위하는 길'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자기 장사를 한 겁니다. 피해자에 대한 존중 없이, 피해자가 원치 않는 방식으로 사건이 재조명된 지금, 피해자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또 사회는 피해자를 어떻게 뒷받침해야 하는지, 피해자를 지원하고 있는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짚어봤습니다. 지난 13일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장. 사진 : 연합뉴스 Q. 피해자가 처음 '가해자 신상 공개'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A. 영상이 게시된 당일, 피해자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영상 게시 하루 이틀 뒤, 지인을 통해서 들어서 이 사실을 알게 됐고요. 신상 공개 영상을 먼저 접한 가족들이 특히 걱정이 컸습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이런 영상이 올라왔어. 조회수가 되게 높아'라고 말하기엔 피해자의 상처가 깊어질까 걱정돼서 피해자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했다고 합니다. 이후 가해자 신상 공개 영상 게시 사실을 뒤늦게 안 피해자는 '신상 공개에 동의한 적 없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유튜버는 피해자, 피해자 가족의 의견 중 자신에게 유리한 의견만 취사선택해서 반영했고요. 피해자는 '가해자가 아닌 사람이 잘못 공표가 돼서 일이 커지면 어떡하지' 하며 놀라기도 하고, 여러 상황이 겹겹이 있기 때문에 긴장하고 두려워하는 상황입니다. 2004년 사건 발생 당시 수사기관이 피해자를 다시 한 번 짓밟았다면, 2024년은 유튜버일지도 모릅니다. 20년 전, 피해자의 동의 없이 이름, 거주지,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노출한 경찰과 검찰. 20년 뒤, 피해자와의 상의 없이 피해자를 재소환해 그저 성폭력 사건을 소비하기만 하는 유튜버. 자신들의 행동이 피해자의 삶을 얼마나 흔들지에 대한 고민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Q. 사건이 다시 재점화된 지금, 피해자는 어떤 방식으로 이 상황이 해결되길 바라나요? A. 많은 분들이 피해자에게 '지금이라도 처벌하길 바라십니까?'라고 많이 물어요. 하지만 피해자 입장에서는 지금 이런 방식은 생각도 못 해본 일이잖아요. 피해자는 지금 여러 가지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마음을 살피고 있어요. 사실 지금은 특정 유튜버가 가해자들을 한 명씩 오픈하는 방식인데, 이 방식에 대해서 '그래, 이게 내가 생각한 해결이었어. 내가 꿈꾸던 거였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올라오는 영상의 댓글 중에는 '피해자는 왜 더 용기를 안 내냐', '피해자가 나서서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이런 댓글도 있거든요. 해결이라는 건 무언가를 꺼낼 수 있는 기회나 제도, 그 가능성이 있을 때 하는 말이잖아요. 지금 이건 피해자 본인이 통제하고 기획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해결되길 바란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애초에 피해자가 준비한 게 아니니 '이제 마음이 후련하십니까? 이걸 원하십니까? 원하지 않으십니까?'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없는 것이죠. 피해자는 신상 공개의 취지를 떠나, 자신의 이야기인데도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았단 점에 분노했다고 김 소장은 전했습니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경청하지 않는 단순 폭로전에 또다시 피해자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Q. 유튜버 신상 폭로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 피해자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피해자의 의견을 본인들의 콘텐츠에 유리한 방식으로 편집해서 공표하는 행동 등을 보니까 뭔가 잘못됐을 때 정정 가능하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어요. '피해자도 예측할 수 없는 절차구나' 싶었고요. 유튜버의 신상 공개는 명확한 룰이 있거나 한 게 아니에요. 유튜버 개인의 최소한의 윤리, 최소한의 상식, 최소한의 배려심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죠. 그래서 예측할 수 없고, 피해자가 계속 매달려야 하는 상황이 이어집니다. 콘텐츠가 올라가면, 마치 불법 촬영물 유포된 사람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그 영상이 내려갈 때까지 계속 새로고침을 하는 시간이 시작되는 거예요. 지난 13일 한국성폭력상담소 기자회견. 사진 : 연합뉴스 유튜버가 신상 공개 영상을 게시하면 기다렸다는 듯 받아쓰는 언론의 문제점도 제기됐습니다. 피해자와 사전에 조율, 소통되지 않은 내용이 유튜브에 게시되고, 이를 기성 언론이 그대로 보도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는 또 한 번 배제됐습니다. A. 유튜브 영상과 기성 언론의 뉴스가 사실 되게 연동되어 있잖아요. '유튜브는 문제고 기성 언론은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인터넷 어딘가에서 밀양 사건 언급되는 게 뭐라도 뜨면 피해자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고 얘기했습니다. 콘텐츠가 될 수도 있고, 거기에 달린 댓글이 될 수도 있고요. 김 소장은 성폭력 피해자가 일상에서 평온할 권리는 국민의 알 권리에 우선하는 생존권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누군가에겐 가십성 폭로, 누군가에겐 장사에 불과하지만 피해자에게는 일상이 파괴되는 문제라는 겁니다. 의도치 않게 다시 재소환된 피해자는 '이 사건이 잠깐 '반짝' 하고 피해자에게 상처만 주고 끝나지 않길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지난 20년간 피해자가 단단해진 만큼, 사회 역시 피해자에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피해자의 일상 회복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고 김 소장은 조언했습니다. Q. 피해자가 겪은 성폭력 피해, 이번 신상 공개로 인한 2차 가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지원이 필요할까요? A. '성폭력 사건'이라고 하면 성적인 피해 자체에 대해서만 생각합니다. 어떤 부분이 끔찍하다는 등 행위를 중심으로 알려지지만, 피해자의 일상 회복 과제는 그보다 더 너릅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피해자는 성폭력 피해에 대한 편견과 통념을 다 만나죠. 피해자 쉼터에 대한 설계, 주거권의 보장, 생계비 보장, 재활 등 장기적인 교육 훈련의 과정, 취약한 10대 시절 성폭력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심리적인 지지망 형성 등을 너르게 설계했으면 좋겠습니다. 밀양 성폭력 피해자는 현재 아르바이트 월급과 기초생활수급비로 생계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학교를 다닐 때는 가해자 부모들이 찾아와 합의를 요청해서 학업을 지속하기 어려웠습니다. 취업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10대 때 겪은 성폭력 피해의 여파는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이런 피해자의 일상 회복을 위해 한국성폭력상담소는 모금을 시작했습니다. 모금을 시작한 지 하루 만에 2,100여 명이 피해자 지원의 뜻을 밝혔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 현재까지 2,891명이 모두 1억 1천여만 원을 후원했습니다. Q. 하루 만에 후원자 2천 명이 모인 건 이례적입니다.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시나요? A. 피해자가 '혼자가 아닌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후원을 하면서 피해자에게 '행복하자' 이런 말을 건네는 분도 많았어요. 후원하신 2천 명 넘는 사람들은 밀양 성폭력 사건이 되게 중요한데, 피해자가 빠져있는 상황에 대해서 불편함을 느끼셨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피해자의 의사, 피해자의 일상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에 기꺼이 공감해 주시는 분이 많았던 것 같아요. 피해자가 혼자 견딘 20년을 수평적으로, 동시대적으로 연대해야 한다고 해야 할까요. 성폭력 가해자들로 인한 1차 가해, 이후 수사기관에 의한 2차 가해까지. 성폭력 범죄 피해자에 대한 일상 회복을 위해서 국가가 나서야 했지만 그 몫을 해내지 못했습니다. 피해자 지원엔 빈틈이 많았고, 섬세하지 못한 제도는 피해자에게 상처만 남겼습니다. 그 사이 피해자 일상 회복 지원은 민간의 영역으로 넘어왔습니다. 20년 만에 밀양 성폭력 사건이 다시 재조명된 지금, 국가 차원에서의 피해자 지원 방안을 논의해야 할 시점입니다. 성폭력 피해자 지원 예산이 확충되고 장기적인 피해자 지원 체계가 마련돼야 합니다. 피해자의 평범한 일상이 지켜지고, 평온한 삶이 존중받는 세상이 되길 바랍니다.
2020년에 개원한 21대 국회가 약 3주 뒤면 막을 내립니다. 4년 동안 발의된 법안은 모두 2만 5,832건으로, 이 중 9,454건만 처리됐습니다(의원 발의, 정부 제출안 포함).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 1만 6,378건은 회기 내에 처리되지 못하면 모두 폐기됩니다. 폐기 위기에 처한 법안 1만 6,378건에는 '낙태죄 폐지' 후속 입법안인 형법 개정안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낙태죄 폐지됐지만 진전 없는 '임신 중지권' 지난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형법상 '낙태죄' 처벌 조항에 대한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보다 우선한다고 판단한 겁니다. 임신 중지는 더 이상 처벌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고, 음지에서 행해지던 임신 중지 시술이 양지로 올라올 계기가 마련됐습니다. 헌재는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리며 '낙태죄 조항을 개정하라'고 국회에 권고했습니다. 헌재가 제시한 개정 시한은 2020년 12월 31일까지였습니다. 후속 입법은 진전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개정 시한은 다가왔고, 낙태죄는 효력을 상실했습니다. 임신 중지에 대한 처벌 역시 폐지됐습니다. 여성 인권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듯했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입법 논의가 미비한 탓에 정작 임신 중지를 해야 하는 여성들에겐 변한 게 없었습니다. 현재까지 형법 개정안 6건, 모자보건법 개정안 7건이 발의됐지만 상임위를 전전하며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했습니다. 실은 의원들이 논의를 하지 않은 것이겠지요. 개정 시한을 넘긴 지 3년 4개월이 지났지만, 이번 국회 내에서도 법안 처리 가능성은 낮습니다. 낮은 정도가 아니라 0에 가깝죠. 헌재의 헌법 불합치 결정 이후에도, 여성의 임신 중지권은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임신 중지 정보 부족으로 '을'이 되는 여성들 #1 지난 2021년 가을, 30대 여성 A 씨는 임신 4주 차에 임신 중지 시술을 받았습니다. 실은, 임신 사실을 안 뒤 약을 복용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고 오랫동안 내원하던 산부인과를 찾아 시술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산부인과 원장은 표정이 싹 바뀌며 시술에 대한 설명조차 해주지 않았습니다. 임신 중지를 거부한 것이지요. 순간 '이런 병원을 내원했다'는 게 후회스러웠다고 합니다. A 씨는 임신한 몸을 이끌고 다른 병원을 찾아 헤맸고, 지인을 통해 믿을 만한 산부인과를 찾았습니다. 거리가 멀었지만, 상담부터 시술까지 그 병원에서 진행했습니다. 모두 100만 원이 들었습니다. A 씨는 이 돈을 모두 현금으로 내야 했습니다. #2 같은 해 여름, 30대 여성 B 씨는 임신 6주 차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인터넷 검색으로 알게 된 판매자에게 약물을 구매해 복용했습니다. 약 구매 가격은 80만 원. 약물 복용 후 여러 신체적 증상 때문에 힘들었지만 도움을 구할 곳은 없었습니다. 약 복용 전, 임신 중지 방법과 비용 등을 병원에 문의하고 싶었지만 병원 측에서 돌아온 답변은 '반드시 보호자를 데려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곤란했던 B 씨는 고민 끝에 자신의 지인을 섭외해서 상황을 모면해야 했습니다. 최근 '모두의 안전한 임신 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가 발간한 <2021년 이후 임신 중지 경험 조사 결과 보고서>에 기재된 실제 사례입니다. 임신 중지를 경험한 여성 6명의 조사를 토대로 작성된 보고서에는 현재 임신 중지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여성의 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해서 어떤 논의가 필요한지 담겨 있습니다. A, B 씨를 포함한 임신 중지 경험자들은 가장 큰 문제로 '정보 부족'과 '값비싼 비용'을 꼽았습니다. 대부분 임신 초기에 임신 중지를 하고자 했지만 인터넷·휴대전화 앱 외에는 정보를 얻을 창구가 없었고, 이 역시 신뢰도가 높지 않았습니다. 특히, 주변 어떤 병원에서 임신 중지가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비용은 얼마이고 얼마만큼 시간이 소요되는지 등 구체적인 정보가 제공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정보를 얻을 곳이 많지 않다 보니, 잘못된 정보가 마치 사실처럼 여겨졌다는 응답도 있었습니다. 임신 중지 약물도 보통 얼마에 판매되는지, 후유증은 없는지, 정품이 맞는지 등 기본적인 정보가 제공되지 않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비용 역시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현재 임신 중지 시술 가격은 병원마다 천차만별입니다. 한 응답자는 병원마다 시술 가격이 10~30만 원까지 차이났다고 답했습니다. 병원에서 부르는 게 값인 셈입니다. 임신 주차마다 진행되는 임신 중지 시술 과정이 다른데도 어떤 병원은 주차에 상관없이 같은 가격을 제시했다는 응답도 있었습니다. 임신 중지 여성 대부분은 시술 비용을 '현금'으로 냈습니다. 카드 결제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죠.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기도 하고, 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를 악용해 무조건적으로 현금을 요구하거나 가격을 의도적으로 높게 책정한 병원도 있었습니다. '을'인 임신 중지 여성이 택할 수 있는 다른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던 거죠. "임신 중지, 의료 서비스로 인정해야" 전문가들은 임신 중지를 의료 체계 범주 안으로 들여와야 한다고 제언합니다. 낙태죄는 엄연히 폐지됐지만 그다지 달라진 게 없는 임신 중지권을 제대로 보장하기 위해선 이를 의료 서비스로 인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21대 국회에서 사실상 방치됐던 낙태죄 대체 입법 논의를 22대 국회에서는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할지, 김선혜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 나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대표에게 들어봤습니다. Q.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은 여성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 나영(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대표) : 임신 중지가 더 이상 불법이 아니라는 사실은 생각보다 영향이 큽니다. 체감 못할 수도 있지만, 임신 중지는 자기결정권을 굉장히 제한하거든요. 낙태죄 효력이 있을 때에는 임신 중지를 하면 '내가 언제든지 처벌당할 수 있고, 고소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많았어요. 이걸 빌미로 남성들이 협박을 할 수도 있었고요. 병원 의료인 역시 자신이 합법적인 일을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임신 중지술에 대한 위축이 있습니다. 의료인들조차 '우리 병원에서 임신 중지가 가능하다'는 얘기를 하지 못했죠. 하지만 (낙태죄 폐지 이후) 시간이 좀 지나면서 점차 '우리 병원에서는 몇 주까지 무슨 방법으로 할 수 있다'고 설명해 주는 병원들이 많아지고 있어요. 이런 얘기들을 공식적으로 들을 수 있고, 파트너에게 협박을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여성은 자기 자신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Q. 낙태죄 폐지 이후 국회에서 대체 입법 논의가 상당히 더뎠습니다. 현재는 어떤 상황인가요? ▶ 김선혜(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 : 불법은 아니게 됐지만 실질적으로 임신 중지에 대한 권리가 보장되고 있진 않습니다. 보통 우리가 아파서 병원을 가면 어떤 처치를 받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보를 얻잖아요. 단순 의료 정보뿐만 아니라 현재 나의 몸의 상태라든가 건강에 대한 정보도 얻죠. 임신 중지에 대한 정보 역시 인터넷에 몰래 찾아봐서 알게 되는 게 아니라, 의료기관을 통해 빠른 시간 내에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질병과 마찬가지로 동등하게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됐을 때, 내 건강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상황이 됐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나영 대표 : 현재 임신 중지는 공식적인 의료 영역으로 여전히 인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각 의료기관에서도 '몇 주 이상이면 안 된다'는 등 모자보건법 한계 안에서 관행들을 계속 유지하고 있죠. 그것과 상관없이 임신 중지 시술을 안전하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요. 의료기관에선 인정되지 않는 불법적인 일을 마치 선심 써서 해주듯 하니 의료비는 높게 책정되고, 병원마다 의료비 차이는 점점 커집니다. 임신 중지 상황에 놓인 여성들은 이런 문제들을 계속 감당을 해왔던 거고요. 그냥 위험하고 비싼 임신 중지가 됐을 뿐이에요. Q. 여성의 안전한 임신 중지를 가로막는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 김선혜 교수 : 건강보험 적용이 안 되는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보험 적용이 안 되기 때문에 관련 가이드라인이 없고, 부르는 게 값인 거죠. 또 다른 문제는 '접근성'입니다. 여성들에게 임신 중지와 관련한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가에 대한 겁니다. 사실 이건 의료 체계에서 바뀌어야 하는 문제인데, 의사들은 이제까지 안 하던 것이기 때문에 별로 하고 싶어하지 않아 합니다. 그래서 정부가 조율해야 하는 문제인데 나 몰라라 하고 있는 상황이고요. (임신 중지) 권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에 대한 법이 만들어지면 좋겠지만 지금 현재는 법이 없기 때문에 정부와 국회 모두 손 놓고 있는 상황이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아요. ▶ 나영 대표 : 임신 중지 서비스를 공식적인 의료 영역에서 제공하고 있는 뉴질랜드나 캐나다, 호주 등은 정부 공식 사이트에서 안전한 임신 중지가 가능한 병원 정보를 제공하고 있어요. 집 가까운 병원에 가면 몇 주까지는 어떤 방법으로 할 수 있고, 건강보험은 어떻게 적용되는지 등 정보들이 공식적으로 제공되는 거죠. 우리가 코로나19 상황에서 정보를 상세히 제공받았던 것처럼요. 그런데 한국은 그런 체계 자체가 없습니다. 입법 책임을 갖고 있는 정부(복지부)와 국회는 개정 입법 시한 몇 개월 앞두고 다른 나라 법을 몇 개 엮어서 대체안을 만들었을 뿐이지, 실질적으로 여성들에게 어떤 정보가 제공돼야 하는지, 이 법은 어떤 영향을 미칠지 등을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Q. 여성의 안전한 임신 중지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22대 국회에서 어떤 점이 중점적으로 논의돼야 할까요? ▶ 김선혜 교수 : 건강보험 적용이 가장 시급하게 이뤄져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보험이 안 되면 의료 서비스로 인식을 잘 안 하거든요. 건강보험 적용이 된다고 하면 '정말 의료적인 문제구나' 생각하죠. 성형수술 등은 불필요한 의료적 처치라고 해서 비급여잖아요. 그런데 임신 중지는 의료적으로 너무 필요한 서비스이고, 누구나 받아야 되는 서비스인데도 건강보험 적용이 안 됩니다. 임신 중지에 대한 사회적인 분위기나 낙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빠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건강보험 적용'입니다. ▶ 나영 대표 : 정부나 국회가 왜 입법 논의를 제대로 하지 않았을까, 그들에게 왜 와 닿지 않았을까를 먼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지금까지 불법의 영역이었으니까 와 닿지 않는 문제인 거죠. 국가 입장에서는 '몇 주까지 하면 된다'는 원칙을 정해놓고 거기에 안 맞는 사람이 걸리면 처벌하면 그만이죠. 그러니까 국가가 할 일이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임신 중지) 비범죄화가 됐다는 건, 그만큼 비어 있던 공백의 영역을 국가의 책임으로서 시행해야 되는 거거든요. 22대에는 완전한 권리 보장을 중심으로 다시 발의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과거에 나왔던 주수 제한이나 사유 제한 등이 포함된 정부안 대신, 권리 보장 중심의 법 체계가 만들어져야 포괄적인 지원이 가능합니다. '어떻게 막을 것인가' 대신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로의 전환 낙태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임신 중지의 비범죄화가 곧바로 안전한 임신 중지권 보장으로 이어지진 않았습니다. 여전히 임신 중지를 원하는 여성들은 혼자서 고군분투할 뿐입니다. 전문가들은 관점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형법상 처벌 대상이었던 임신 중지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시각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어떤 여성이든 어떤 시기에나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어쩌면 거창한 입법 논의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임신 중지가 합법의 영역으로 재편된 이상, 보험 적용 여부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판단해 결정하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시술 비용도 수가가 정해져서 천차만별인 지금보다 나아지겠지요. 몸살감기, 배탈, 골절 등 인간이 겪는 다양한 질병이 모두 법에 명시돼 있진 않습니다. 임신 중지 역시 모든 사안을 법에 의해 하나하나 규제, 규정하려는 시각을 탈피해야 합니다. 여성의 몸, 그리고 그 몸에 대한 결정권은 법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디자인 : 권민재
'여성가족부 폐지'는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1호 공약이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여가부는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며 여가부 폐지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더 이상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 차별은 개인적 문제"라는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여가부 폐지 공약은 윤석열 정부의 110대 국정과제에서 빠졌습니다. 당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정부 조직 개편의 경우 법 개정이 필요해서 새 정부 출범 이후에 논의할 사안'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새 정부 출범 이후에도 별다른 진전은 없었습니다. 지난해 새만금 세계스카우트 '잼버리' 파행 논란으로 한 차례 여가부 폐지 논의가 있었지만 김현숙 전 장관이 사의를 표하면서 어영부영 마무리됐습니다. 김 전 장관 후임자로 지명된 김행 전 여가부 장관 후보자가 '드라마틱하게 엑시트(exit)하겠다'고 밝히면서 다시 속도를 내는 듯했으나 자진사퇴로 역시 일단락됐습니다. 이처럼 지지부진하던 여가부 폐지가 4월 총선을 앞둔 지금, 다시 재점화되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5개월 만에 김현숙 전 장관의 사표를 공식적으로 수리하면서부터입니다. 특히, 여권을 중심으로 여가부 폐지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달 22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현숙 전 장관의 사표 수리는) 여가부 폐지 의지를 확인한 것"이라며 "현실 정치의 역학관계 때문에 폐지 속도가 더뎌졌지만, 그 방향만큼은 타협 없이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 역시 "총선 승리를 통해 여성부 폐지 공약을 반드시 완수하겠다"며 여가부 폐지론에 불을 붙였습니다. '여성가족부 폐지론'의 역사 지난 2001년, 김대중 정부 당시 '여성부'라는 명칭으로 출범한 여성가족부는 늘 존폐 기로에 놓여 있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때 '여성부'에서 '여성가족부'로 확대 개편되면서 여성뿐만 아니라 보육, 가족 분야까지 범위가 넓어졌지만, 확대 기능을 얼마 이어가진 못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정부 조직을 줄이겠다며 '여가부 폐지' 방침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당시 야당과 여성계의 강한 반발로 폐지 추진은 무산됐고, 2008년 여가부 분야 중 가족과 보육 부분을 복지부로 이관하는 수준으로 정리됐습니다. '여성가족부'가 다시 '여성부'로 축소되자 곳곳에 빈틈이 생기고 있다는 지적이 일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가족 관련 정책 수요는 높아지는데, 복지부에서 기존 업무를 수행하면서 이를 감당하기엔 무리라는 비판이었습니다. 당시 정부 역시 "가족 해체, 저출산, 다문화가정 등 현안들에 대해 좀 더 효율적인 대응을 하려면 여성부가 지금보다 좀 더 가족 정책을 수립·수행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며 여성부의 확대 재편 필요성을 인정했습니다. 2년 뒤, 여성부는 복지부의 청소년과 가족 업무를 다시 넘겨받았습니다. 2년 동안 가족·청소년 기능은 두 부처를 오가며 혼선을 빚었습니다. 그 사이 일관성 있는 정책 추진은 기대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여가부를 '양성평등가족부'로 바꾸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성평등이 아닌 '양성평등' 용어를 사용한 탓에 찬반 주장이 극심하게 엇갈렸고, 결국 무산되긴 했습니다.) 부처의 기능보다 존폐 여부가 화두였던 부처 여가부는 늘 부침이 많았습니다. 부처 본연의 기능이나 업무보다는 부처의 존폐가 더 화두였습니다. 하지만 이때마다 필요한 기능 이관 논의는 후순위로 밀렸습니다. 부처 폐지를 논하기 전, 해당 부처가 수행하고 있는 기능을 어떤 부처로 어떻게 옮길 것인지 논의가 선행돼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던 겁니다. 한 부처가 사라지면 그로 인해 발생하는 공백은 어떻게 메울 것인지, 해당 업무를 이관 받은 부처는 어떤 방식으로 인원을 증원하는지 등 구체적인 논의는 진전되지 않았습니다. 현 정부가 제시한 여가부 폐지 방안 역시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2년 전, 정부는 여가부를 폐지하고 보건복지부 산하에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를 만들어 여가부의 주요 기능을 이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여성 고용 관련 업무는 고용노동부로 옮기겠다고 했습니다. 여가부의 기능을 복지부와 고용부로 분배해 넘기겠단 계획입니다. 이후 추가적으로 나온 이관 방안은 없었습니다. 여가부의 여러 기능 중 어떤 업무가 복지부로 넘어가는 건지, 고용부에 이관되는 '여성 고용 관련 업무'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명확하게 설명된 적이 없었죠. 뚜렷한 계획조차 없는 무조건적인 폐지 방침은 여러 의문점을 낳습니다. 여가부가 수행하고 있는 가정폭력·스토킹·성폭력 등 피해자 보호 지원 업무는 어떤 부처로 가게되는 걸까요? 자살이나 자해 등 고위기 청소년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지원 업무는 어디로 이관되는 걸까요? 단순히 '여가부의 주요 기능을 이관하겠다'는 정부의 설명이 충분하지 않아 발생하는 여러 의문입니다. 다시 나온 여가부 폐지론, 총선과 무관하지 않은 이유 2022년 정부가 여가부 폐지 방침을 밝힌 이후, 2년 동안 별다른 진전조차 없던 '여가부 폐지론'이 총선을 앞두고 다시 고개를 들었습니다. 시점이 묘합니다. 선거를 한 달 정도 앞둔 지금, 정치권은 마치 2년간 끊임없는 논의를 해왔던 것처럼 여가부 폐지를 완수하겠다고 열을 내고 있죠. 결국 '표' 때문이라는 비판이 나옵니다. 정부조직법은 여가부를 '여성 정책의 기획·종합, 여성의 권익 증진 등 지위 향상, 청소년 및 가족(다문화가족, 건강가정사업을 위한 아동 업무 포함)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부처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여가부를 폐지하려면 이 법을 개정해야 하는데, 여당은 소수이기 때문에 다수 야당이 반대하면 여가부 폐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여가부 폐지를 위해선 현재 소수인 여당의 의석이 더 많아져야 하고, 이를 위해 유권자들에게 한 표 한 표를 당부한다는 전략인 겁니다. 물론 여가부도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선거 때마다 폐지론이 대두되는 데엔 여가부 역시 본연의 기능을 차질 없이 수행했는지 반추해봐야겠지요. 권력형 성폭력 범죄가 발생했을 때 적절히 대처했는지, 피해자 보호에 최선을 다했는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지적이 여가부 폐지로 이어지는 것은 무리입니다. 저출산부터 성범죄 피해자 보호, 젠더, 소수자 배려, 위기 청소년 보호, 다문화가족 지원 등 여가부가 맡고 있는 역할은 결코 적지 않습니다. 이 분야들이 '개별 부처'가 아닌 보건복지부 산하의 '본부'로 이양된다면 지금과 같은 지원을 기대하긴 어렵겠죠. 복지부나 고용부가 기존에 수행하고 있는 업무가 있기 때문에 여가부 이관 업무는 자연스럽게 주변화될 거라는 우려도 있습니다. 또, 성평등 정책을 추진할 컨트롤타워가 사라진다는 건 정책의 후퇴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총선을 앞두고 다시 대두된 7글자, '여성가족부 폐지'가 총선용 전략이라고 비판받는 이유입니다.
드라마 <더글로리>와 <모범택시2>가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학교폭력 피해자였던 문동은이 오랜 시간 치밀하게 준비해 가해자 박연진에게 직접 복수하고, 힘없고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의 부탁을 받아 무지개운수 멤버들이 대신 가해자들을 응징하며 단죄하는 모습은 시청자로 하여금 통쾌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법과 제도의 도움을 단 한 톨도 받지 못한 이들은 각자 자신만의 방법으로 복수를 이어갑니다. 모두 ‘사적 제재’입니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었을까요. 현실에서의 사적제재는 성공을 논하기도 전에 실행 단계에서 가로막혔습니다. 지난 4일, 대법원은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배드파더스’ 운영자 구본창 씨에 대한 유죄 판결을 확정했습니다. 이혼 뒤 자녀의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부모 신상을 공개하는 ‘배드파더스’ 사이트가 타인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판단한 겁니다. 앞서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1심 재판부는 구 씨가 무죄라고 판단했습니다.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은 부모 신상을 공개한 구 씨의 활동이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인정한 겁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달리 판단했습니다. 수원고법은 “해당 공개행위로 피해자의 인격권과 명예가 과도하게 침해된다고 보여 ‘공공의 이익’보다는 ‘비방의 목적’이 인정된다”고 했습니다. 대법원 역시 ‘비방할 목적’에 무게를 두고 벌금 100만 원의 선고를 유예한 원심판결을 확정했습니다. 이번 판결로 ‘배드파더스’는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이미 2년 전에 폐쇄된 사이트였긴 하지만, 앞으로 추가적인 사적 제재는 기대하기 힘들어졌습니다. 애초에 이혼 후 자녀들에게 양육비를 제대로 지급하도록 강제하는 제도, 법이 제 역할을 했다면 개설조차 안 됐을 사이트입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빈틈이 생겼고, 이 공백을 메워왔던 ‘배드파더스’ 운영자 구본창 씨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선고 유예’ 판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눈앞이 캄캄하죠. 사이트 운영자들은 모두 멘붕입니다. 본인들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양육비를 지급받지 못한 피해자들을 자발적으로 도운 건데, 도왔다고 선고유예가 되고 유죄가 된다고 하면 활동을 하고 싶겠습니까? 분노를 느낍니다.” - 어떤 부분에서 특히 분노를 느끼셨나요? “저도 무책임하고 나쁜 부모라도 그 사람들의 명예가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이의 생존권과 무책임한 부모의 명예, 두 가지가 충돌할 때 ‘어느 것을 우선시해야 하느냐’는 명확한 거 아닌가요? 거꾸로 법이 나쁜 부모의 명예를 보호하는 쪽으로 가는 세상은 잘못된 거 아닙니까? 그런 측면에서 굉장히 분노가 큽니다.” 학원을 운영하던 구 씨는 한국인과 필리핀 사이에서 낳은 아이, ‘코피노’ 엄마의 이야기를 들은 뒤 양육비 미지급자를 돕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코피노 양육비 해결을 돕던 그는 한국에서도 자발적으로 양육비 미지급자 지원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책임감도, 휴머니즘도, 사명감도 아니라는 구 씨는 그저 양육비가 없어서 아이들이 굶는 게 안타까운 마음에서 활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 배드파더스 활동을 시작한 계기가 무엇인가요? “정말 그만두려고 했던 적이 많아요. 제가 배드파더스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특별한 건 없고요, 제가 필리핀에서 특별한 지원 활동을 했잖아요. 그 활동하다가 연결된 거예요. 저도 딸만 둘입니다. 딸만 둘인데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에서 우리 아이들도 양육비 피해자가 될 수 있잖아요. 피해가 생겼을 때 우리 딸들 어떻게 합니까?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 배드파더스의 신상공개 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우선 제보를 받고 검토한 뒤 당사자에게 연락을 취합니다. 신상공개를 하겠다고 하면 대부분 답이 옵니다. 이의 제기를 하니까요. 본인이 안 주려고 하는 게 아니라 형편이 어려워 못 준다고 하죠. 저희는 본인이 정말 형편이 안 좋아서 못 주는 건지 확인을 합니다. 기초수급자로 살고 있다든지, 단칸방에 살고 있다든지 등 절대 빈곤의 상태인지 자료를 보내달라고 합니다. 그럼 자료가 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실제로 양육자들이 상대방이 기초수급자고, 해봐야 양육비를 받을 수 없으면 소송까지 하겠습니까, 애초에?” 3년 전 한부모가족실태조사에 따르면. 비양육부모로부터 양육비를 받지 못한 한부모는 72.1%에 달합니다. 한부모 10명 가운데 7명은 양육비를 홀로 부담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들은 양육비와 교육비가 가장 부담된다고 답했습니다. 지난 2021년, 배드파더스는 사이트를 자체적으로 폐쇄했습니다. 여성가족부가 양육비 채무 불이행자 명단 공개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여가부가 신원을 공개한 양육비 미지급자는 100명도 되지 않습니다. 구 씨는 ‘얼굴 공개 없는 신상공개는 의미가 없다’고 얘기합니다.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 한,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은 당사자를 압박할 수 없다는 겁니다. - 여가부의 명단 공개가 실효성이 있다고 보시나요? “여가부의 명단 공개로 해결된 거는 100건도 안 돼요. 저희가 2018년부터 문 닫을 때까지 3년 정도 해결한 사례가 1천 건이 넘습니다. 그런데 그중 많은 숫자가 다시 양육비 지급을 안 하고 있어요.” ※ 현재 여성가족부 홈페이지에 남아있는 양육비 미지급자는 66명입니다. 재판부는 배드파더스가 사적제재에 해당한다면서도 양육비 미지급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를 공론화하려고 했다는 의도 자체는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익명이 아닌 실명과 직장명, 전화번호까지 공개해 ‘즉시 양육비를 지급하도록 강제할 필요성’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구 씨는 이번 판결을 ‘면죄부’라고 표현했습니다. 아무리 대법원이 선고를 유예하면서 자신을 처벌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유죄로 인정한 것 자체가 국가와 법원이 양육비 미지급자들에게 ‘너희는 돈 안 줘도 된다’고 독려하고 있다는 겁니다. - 배드파더스가 사적 제재에 해당한다는 점에 동의하시나요? “배드파더스는 사회 고발입니다. 이걸 사적 제재라고 판단하면 앞으로 미투나 학교폭력 등 모든 피해자가 입 다물고 있어야 합니다. 이번 판결은 양육비를 지급받지 못한 피해자들이 입을 닫아야 한다는 걸 뜻하죠. 애초에 소송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길에서 두드려 맞고 있는 사람에겐 옆에 직접 가서 막아줘야지, 아프지 말라고 기도해 주거나 덜 다치길 바라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구 씨는 법과 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구제돼야 하냐고 되물었습니다. 변호사 상담 5분만 받으면 양육비를 안 줄 수 있는 방법 수천, 수만 가지를 알 수 있는데, 어떻게 가장 기본적인 양육비를 보장받을 수 있냐는 거죠. 현재 양육비 이행강화와 관련해 발의된 법안은 모두 9건입니다. 하지만 모두 국회에 계류 중이라 곧 폐기될 전망입니다. 구 씨는 “선거에만 급급해 법안 처리할 생각조차 않고 있다”며 답답하다고 말했습니다. 저출산 대책을 논하기 전, 있는 아이를 어떻게 지켜야 할지부터 고민해야 합니다. “더 화가 나는 건, 저출산이 문제라고 외치면서 태어난 아이들조차 지키지 않는다는 겁니다. 태어난 아이들의 권리를 보호하지 않으면서 아이를 낳으라는 게 말이 됩니까? 저출산에다 돈을 쏟아붓고 있는데, 아이들의 권리가 보호돼야 낳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언어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스위스 출신의 세계적인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가 한 말입니다. 대중의 말은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상을 반영한다는 겁니다. 유아차 vs 유아차, 때 아닌 논쟁 유모차(乳母車)가 맞는 건지, 유아차(乳兒車)가 맞는 건지 온라인상에서 논쟁이 뜨겁습니다. 이 논쟁은 2주 전, 한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영상에서 시작됐습니다. 배우 박보영이 유튜브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조카들을 데리고 놀이공원에 가고 하는데도, 제가 밀면 안 봐요”라고 말했고, 진행자 유재석은 “유모차를 밀면?”이라고 물었습니다. 함께 있던 개그맨 조세호는 “중심이 유모차로 되니까”라고 말했죠. 세 사람 모두 ‘유모차’라고 말했는데, 영상 자막엔 ‘유아차’라고 표기됐습니다. 출처 : 유튜브 채널 〈뜬뜬 DdeunDdeun〉 여기서부터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출연진은 유모차로 말했는데, 왜 유아차로 표기됐냐는 겁니다. 몇몇 네티즌은 ‘음성과 자막이 일치하지 않아서 불편하다’고 불만을 표출했습니다. 또, ‘표준어인 유모차를 굳이 유아차로 바꾼 이유가 무엇이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이런 불만과 의문이 일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번졌습니다. (물론, 크게 문제 될 게 없다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두 단어 모두 표준어더라도 유아차가 권장된다면, 권장어를 쓰는 게 맞다’는 겁니다.) 커뮤니티를 통해 번진 논란은 ‘제작진 중 페미니스트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제작진 중에 페미니즘 사상을 가진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의도적으로 '유모차'를 '유아차'로 바꿨다는 주장입니다. 이후 좌표 찍기와 사상검증이 시작됐습니다. 커뮤니티 이용자들은 해당 영상에 ‘싫어요’를 누르며 공격했고, ‘유아차’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공격받아도 마땅한 것처럼 여겨지는 낙인이 이어졌습니다. ‘유모차 vs 유아차’ 논란이 여성혐오로 확산된 겁니다. 유아차, 유모차 모두 표준어... 권장은 ‘유아차’ 유모차와 유아차 모두 국립국어원이 인정하는 표준어입니다. 다만, 국립국어원은 ‘유모차’를 ‘유아차’ 또는 ‘아기차’로 순화해서 사용할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유모차는 젖 유(乳)에 어미 모(母), 수레 차(車)로 이뤄져 있습니다. ‘젖 먹는 아이를 태우고 엄마가 끌고 다니는 차’라는 뜻입니다. 꽤 오래전에 만들어진 단어라 너무 익숙해졌지만, 바뀐 시대상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엄마가 끄는 차’라는 말이 부모의 역할을 한정짓고, 더 나아가 성 고정관념을 공고히 한다는 겁니다. 또, 양육 과정에서 간접적으로 아빠를 배제해 부모의 권리를 동등하게 인정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 지난 2018년,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성평등 언어 사전’을 발표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 중 성차별적인 요소가 있는 단어들은 다른 용어로 바꿔 사용하자는 캠페인이었습니다. 유모차는 유아차로, 학부형은 학부모로, 자매결연은 상호결연으로 말이죠. 처음엔 조금 생소했지만, 이때부터 ‘유아차’란 단어가 꽤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뉴스와 예능 프로그램 등 장르를 불문하고 ‘유아차’ 단어는 자주 사용됐습니다. 이번에 논란이 불거진 유튜브 영상이 나오기 전, 〈유퀴즈〉, 〈라디오스타〉 등 예능에서도 유모차를 곧잘 유아차로 순화해왔습니다. 어쩌면 누군가 어떤 심오한(?) 의도를 갖고 한 일이 아니라, 더 다듬어진 용어이기 때문에 사용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여러 설명에도 불구하고 논란은 국립국어원으로까지 번졌습니다. 국립국어원이 유모차와 유아차 모두 표준어라고 인정한 걸 두고, 일부 커뮤니티 사용자들은 또 ‘국립국어원에도 페미가 있다’, ‘국립국어원이 사상에 점령당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주장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국립국어원 사이트를 찾아가 직접적으로 공격했습니다. 다 같이 찾아가 게시판에 혐오가 가득한 게시글을 도배한 겁니다. 이 논쟁이 보여주는 ‘현주소’ 사실 5년 전,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순화를 권고한 단어는 유모차 말고도 더 있습니다. 자매결연은 상호결연으로, 저출산은 저출생으로, 학부형은 학부모로, 미혼은 비혼으로, 미숙아는 조산아로 바꿔 표현하면 좋다고 말이죠. 차별적인 요소를 줄이고, 성평등에 가까운 용어를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캠페인이었습니다. 유모차를 유아차나 아기차로 다듬어 표현하자는 움직임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암초에 부딪히는 걸 보면, 아직 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해 보입니다. 물론 어떤 건 맞고, 어떤 건 틀린 문제는 아닙니다. 국립국어원이 세 단어 모두를 표준어로 인정한 것처럼 말이죠. 누군가는 별 것 아닌 ‘유모차 vs 유아차’ 논쟁에 기자가 기름을 붓는다고 지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때때로 아주 사소한 논쟁은 시대의 현주소를 보여줍니다. 육아는 부모 공동의 몫이고, 남녀 모두 각각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인식이 보편화 돼 있다지만, 실질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변화하는 속도는 더딥니다. 다듬어진 말이 있는데도 ‘유모차’를 사용하는 것처럼 말이죠. 사소하기 그지없는 논쟁은 우리 사회가 여성을 어떻게 대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예전보다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육아를 여성의 업무로 한정하고, 남성의 참여를 알게 모르게 배제하고 있는 거죠. 법으로 바꾸나?… “첫 발 뗐지만 갈 길 멀어” 국회에서는 유모차를 유아차로 변경하려는 시도가 첫 발을 뗐습니다. 지난 9월 민주당 최혜영의원 등 12명은 〈보행안전 및 편의증진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습니다. ‘어린아이를 태워서 밀고 다니는 수레’란 뜻의 유아차가 본래의 의미와 더 맞닿아있는 만큼, 유모차를 유아차로 바꾸자는 겁니다. 작은 움직임이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법적으로 용어를 변경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제도와 문화 의식을 총체적으로 바꿔나가는 캠페인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여성에게 뭔가를 더 주는 것이 아니라, 남성을 배제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고도 덧붙였습니다. 그러면서 신 교수는 정부 부처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과거에는 여성가족부에서 젠더 인식과 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역할을 했는데, 지금은 비중이 많이 줄었다는 겁니다. 신 교수는 “인식이 바뀌면서 담론이 바뀌고, 그로 인해 의식이 바뀔 때 법이 실효성이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앞서 말했듯, 언어학자 소쉬르는 언어를 거울에 비유했습니다. 시대상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거죠. 지난해 합계출생률은 0.78명으로, 1명이 채 되지 않습니다. 올해 출생률은 이보다 더 낮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태어날 아이가 점점 줄어드는 건 사람들의 인식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시대상을 반영하지 않은 단어로 인해서 ‘성 역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고착화되지 않도록 꾸준한 움직임이 필요합니다.
22살 마흐사 아미니가 숨진 이유 지난해 9월 13일,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한 여성이 갑자기 체포됐습니다. 여성의 이름은 마흐사 아미니. 당시 가족과 함께 테헤란에 있는 친척집에 방문하던 중이었습니다. 아미니는 '공공장소 복장 규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21세기에 '복장 규정 위반'이라니, 생소한 걸 넘어서 '뭔가 잘못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아미니는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아서 체포됐습니다. 히잡을 안 쓰고 있었던 게 아니라, 아미니가 착용한 히잡 아래로 머리카락이 너무 많이 드러났다는 이유였습니다. 체포 사흘 뒤인 9월 16일, 혼수상태에 빠졌던 아미니는 숨졌습니다. 당시 아미니의 나이는 22살이었습니다. 경찰은 "아미니에게 기저질환이 있었고, 이 때문에 사망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정말 아미니는 기저질환이 있었을까요? 유족의 말은 다릅니다. 가족들은 아미니의 머리와 팔, 다리에 구타 흔적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경찰의 각종 고문과 폭행으로 아미니가 숨졌다는 겁니다. 마흐사 아미니 22살 여성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수많은 의문을 남겼고, 곧 분노로 번졌습니다. 아미니의 사망 원인을 두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열렸습니다. 동시에 여성에게 히잡 착용을 강요하지 말라는 시위도 일어났습니다. 이른바 '히잡 시위'입니다. 시위는 주로 여성들이 이끌었습니다. 히잡 시위에 참석한 여성들은 히잡 속에 꽁꽁 감춰뒀던 머리를 보란 듯이 잘랐고, 히잡을 공개적으로 불태웠습니다. '나에게 히잡을 강요하지 말라'는 표현이었죠. 수개월간 이어진 히잡 시위는 반정부 시위로 확대됐습니다.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용기가 이란 전체를 흔들었습니다. 분노가 들끓을수록 이란 정부의 진압은 더 강경해졌습니다. 인권단체들에 따르면 이란 정부의 진압으로 550여 명이 숨지고 2만 2천여 명이 체포됐습니다. 정부의 강경한 진압에 시위는 점점 동력을 잃었고, 서서히 잊혀져 갔습니다. 아미니가 사망한 지 1년이 넘었습니다. 히잡 시위 역시 1주년을 맞았죠. 이란 정부는 히잡 시위 1주년을 맞아 다시 시위가 촉발할 것을 우려해서인지 아미니 유가족에 대한 감시 강도를 높였습니다. 비정부단체 쿠르드인권 네트워크는 이란 정부가 최근 몇 주 동안 아미니의 유가족을 갑자기 소환하거나 체포하고, 위협을 가했다고 밝혔습니다. 아미니를 추모하려는 최소한의 움직임조차 막은 겁니다. 정치적 수단이 되어버린 히잡 이쯤에서 한 가지 궁금해지죠. 이란 정부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또 왜 이렇게까지 히잡 착용을 강요하는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히잡은 '가리다(또는 격리하다)'를 뜻하는 단어에서 파생됐습니다. 이슬람 경전에는 '여성은 아름다운 곳을 드러내지 않도록 하라'라고 돼 있습니다. 남성을 유혹하지 않기 위해서 여성이 천 등으로 신체를 가리라는 겁니다. 히잡은 본인의 종교적 신념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도 쓰였지만, 남성이 유혹에 빠지지 않게끔 여성이 셀프로, 또 알아서 조심하라는 의미도 곁들여져 있었죠. 사실 이란 정부가 이전부터 쭉 히잡 착용을 강요해 왔던 건 아닙니다. 1979년 이슬람 혁명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히잡을 꼭 착용하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짧은 치마를 입어도 아무 상관이 없는 등 현재와 달리 꽤나 자유로웠습니다. 하지만 1979년 발생한 이슬람 혁명으로 모든 게 바뀌었습니다. '서구 문화 철퇴, 이슬람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혁명에 이슬람 신도임을 드러내는 히잡은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었습니다. 국가가 개인의 복장을 규제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4년 뒤인 1983년부터는 공공장소에서 히잡 착용이 의무화됐습니다. 히잡 착용을 강요하는 건 국가가 '개인에 대한 영향력'을 드러낼 수 있는 아주 쉬운 수단이었습니다. 길거리에서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여성에겐 태형 같은 직접적인 처벌이 가해졌습니다. 정부는 길거리에 지도순찰대라고 불리는 도덕경찰을 배치해 여성이 히잡을 제대로 착용했는지 감시했습니다. '히잡을 제대로 착용했는가'를 판단하는 주체는 국가였습니다. 기준도 국가가 정하고, 판단도 국가가 하고, 처벌도 국가가 했습니다. 개인의 선호, 자유는 고려되지 않은 채 말이죠. 히잡 자체가 여성에 대한 억압은 아니었지만, 국가가 여성에게 히잡 착용을 강제하는 것은 억압으로 작용했습니다. 핵심은 자기 결정권이 박탈됐다는 겁니다. 여성에게 히잡을 착용하지 않을 자유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선택도 불가능했습니다. 좋든 싫든, 개인의 의사가 무엇이든 간에 무조건적으로 히잡을 착용해야 했죠. 정부의 '히잡 착용 의무화' 선언 → 위반 시 처벌 의사 밝힘 → 처벌 피하기 위한 개인이 무조건적으로 히잡 착용 이 현상은 정부가 개인, 특히 여성을 어떻게 통제하는지를 보여줍니다. 통제를 강화해 국가의 정치력을 드러내려고 했던 겁니다. 도덕경찰의 부활 국가는 공권력을 이용해 개인에 대한 통제력을 높였습니다. 길거리에는 도덕경찰, 지도순찰대가 배치돼 여성들이 히잡을 착용했는지, 신체를 빈틈없이 가렸는지 감시하고 단속했습니다. '단속'을 앞세운 도덕경찰의 행태는 폭력적이고, 강압적이기로 유명합니다. 길거리에서 히잡을 착용하지 않은 여성을 보면 마구 구타하면서 승합차 안으로 쑤셔 넣기도 합니다. 납치인지, 경찰의 적법한 활동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입니다. 1년 전, 히잡 시위가 한창일 때는 이런 단속 활동이 잠시 완화되기도 했습니다. 히잡 시위가 반정부 시위로 번지고, 유혈사태가 발생하면서 히잡 강제 착용에 대한 온건한 목소리가 나오자 단속 활동을 줄인 겁니다. 이때 도덕경찰의 존립에 대한 논의도 급물살을 탑니다. 반정부 시위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번지자, 도덕경찰 폐지도 거론됐었죠. 폐지 위기에 처한 도덕경찰의 활동이 이때 상당히 위축됐습니다. 하지만 도덕경찰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반정부 시위가 서서히 동력을 잃고, 시위 규모가 축소되자 다시 활동을 시작한 겁니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지난 7월, 사이드 몬타제르 알메흐디 경찰청 대변인은 "공공장소에서 히잡을 착용하지 않은 여성을 단속하고, 이를 어기는 사람을 체포하는 활동을 재개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도덕경찰의 단속 범위는 더 넓어졌습니다. 이전에는 히잡 착용 여부만 감시했다면, 이제는 SNS 게시물도 단속 대상이 됐습니다. 히잡을 쓰지 않은 사진을 SNS에 게시하면 처벌받을 수 있게 된 겁니다. 도덕경찰의 부활과 단속 확대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경험한 정부의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란 정부가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SNS로 시위 영상이 실시간으로 공유되면서 시위가 더 강화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물리적인 공간에 함께 있지 않아도 연대할 수 있음을 확인했을 겁니다. 히잡을 착용하지 않은 사진과 영상을 SNS에 게시하지 못하게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마흐사 아미니 사망 1주기, 무엇이 변했을까 아미니가 숨진 지 1년이 지났습니다. 아미니의 죽음은 국제 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던졌습니다. 국가가 개인을, 여성을 어떻게 통제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낸 이 사건 이후, 많은 논의가 진전될 줄 알았습니다. 시위에 참가한 수많은 사람들도 같은 마음으로 변화를 기대했을 겁니다. 1년이 지난 지금, 이란은 어떨까요? 기대와 달리 이란 정부는 역행했습니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단속은 더 강화됐고, 악랄해졌습니다. 여기에는 기술의 발전이 이용됐습니다. 이란 정부는 스마트 감시 카메라, 쉽게 말해 CCTV로 여성이 히잡을 착용했는지 감시했습니다. 만약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이 CCTV에 적발되면, 벌금을 부과했습니다. CCTV로 어떻게 신원을 특정한다는 걸까요. 이란은 '생체 신분증 제도'를 도입한 국가입니다. 이 신분증에는 안면인식 기술이 이용돼 홍채, 지문, 얼굴정보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CCTV로 얼굴이나 홍채가 인식되면 이걸로 신원을 특정해 그 사람에게 직접 벌금을 부과하는 거죠. 도덕경찰의 단속 강화로는 부족했는지, 국가는 합법적이면서 더 강력한 여성 억압 수단을 만들었습니다. 이란 의회는 최근 〈히잡과 순결에 관한 법안〉을 제정했습니다. 이 법에는 공공장소에서 히잡을 쓰지 않는 등 복장 규정을 4번 이상 위반하면 최대 10년의 징역형이 처한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 돈으로 1천만 원의 벌금도 부과할 수 있다는 내용도 포함됐습니다. 조직적인 방식으로 외국 또는 적대적인 정부, 언론, 단체와 협력하여 복장 규정 위반을 조장하는 사람 역시 최대 10년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는 내용도 담겼습니다. 이 법안에 대해 UN이 '극단적 성차별 정책'이라고 비판했음에도 이란 정부가 제정을 강행한 겁니다. 이란 여성들은 더 대담해졌습니다. BBC는 '한 도덕경찰이 여성에게 다가와 히잡을 제대로 써달라고 요청하자, 여성이 고개를 높이 들고는 '꺼져'라고 대답했다'라고 보도했습니다. 국가의 부당한 억압과 통제에 복종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죠. 대규모 시위를 거치며 분노와 슬픔을 경험한 이란 여성들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히잡 착용 강요가 자신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함께 투쟁하는 문제라는 걸 알게 됐을 겁니다. 마흐사 아미니의 사망 1주기를 맞아 영국, 독일, 인도 등 세계 곳곳에서 시위가 열리기도 했죠. 공감을 넘어 연대를 경험한 여성들은 이제 주저하지 않습니다. 투쟁의 방식이 시위가 아닐지라도, 국가의 억압에 맞서는 일상에서의 불복종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란 여성들의 이야기가 어쩌면 우리에겐 너무 먼 이야기로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히잡 시위 역시 1년 하고도 더 많은 시간이 지나, 서서히 잊히고 있죠.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이란에 있는 누군가는 아주 평범한 자유를 갈망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투쟁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더 많이 가리지 않았다는 게 죽음의 이유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이들의 저항에 귀 기울여야 할 이유입니다. 디자인 : 김정연
지난해 1월 8일, 20대 여성 A 씨는 임신 31주 만에 태어난 아기를 변기 속에 방치했습니다. 숨을 쉬지 못한 아기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숨졌습니다. A 씨는 사실혼 관계인 40대 남성과 함께 지내다가 뒤늦게 임신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남성은 A 씨에게 낙태를 권했지만, 시기가 지나 낙태를 할 수 없었습니다. A 씨는 불법 낙태약을 복용했고, 임신 8개월 차에 조산했습니다. 2018년 11월 3일, 30대 여성 B 씨는 자신의 넷째 아이를 출산했습니다. 출산 이튿날, 집으로 데려와 아이를 살해한 뒤 비닐봉지에 담아 냉동고에 보관했습니다. 약 1년 뒤인 2019년 11월 20일, 다섯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다음 날, B 씨는 다섯째 아이를 살해한 뒤 냉동고에 보관했습니다. B 씨는 경찰 조사에서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더 많은 아이들을 양육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범행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지난 6월, 감사원의 감사로 ‘태어났지만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출산기록은 있지만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미등록 아동은 모두 2,123명. 병원에서 태어나 예방접종을 위한 임시 신생아번호는 받았지만, 출생신고로 이어지지 않은 아이들입니다. 사회는 이 아이들을 ‘유령 아동’, ‘그림자 아동’ 또는 ‘미등록 아동’이라고 불렀습니다. 보건복지부가 이들에 대해 전수조사한 결과, 249명(11.7%)은 이미 사망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생존 사실이 확인된 아이들은 1025명, 나머지 814명은 아직 오리무중 상태입니다. 앞서 언급한 B 씨의 자녀 역시 사망한 249명에 포함돼 있습니다. 이 통계에도 포함되지 않은 아이들이 있습니다. 병원에서 태어나지 않은 탓에, 임시 신생아번호조차 없는 아이들입니다. 통계청 인구동향자료에 따르면 매년 4백여 명의 아이들이 병원 밖에서 태어납니다. 실제로 2021년 출생아 26만 562명 가운데 462명은 ‘병원 밖 출산’이었습니다. 임산부들이 병원 대신 택한 출산 장소는 화장실, 고시원, 방 안이었습니다. 병원 밖에서 출산한 뒤 출생신고도 하지 않으면, ‘병원 밖 출산’ 통계에서도 빠지게 됩니다. 친부와 친모를 제외하고는 아이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겁니다. (친부마저도 모르는 경우가 있죠.) A 씨 역시 집 화장실에서 아이를 낳은, ‘병원 밖 출산’이었습니다. 친모를 향한 분노가 불편한 이유 태어난 아이들을 지키지 못했단 소식에 대중은 분노했습니다. 분노의 화살은 친모에게 향했습니다. 매일 아침 ‘비정한 친모’나 ‘무책임한, 자격 없는 엄마’라는 제목의 기사들이 쏟아졌습니다. 기사에는 ‘배 아파 낳은 자식을 어떻게 죽이냐’, ‘아예 낳지를 말지’라는 비난 섞인 댓글이 달렸습니다. 국회는 재빠르게 움직였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의료기관이 출생 사실을 지자체에 의무적으로 통보하도록 하는 ‘출생통보제’가 여야 합의로 상임위 소위를 통과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시스템적으로 미등록 아동이 생겨나는 걸 막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출생통보제 법안은 15년 동안 국회에 계류돼 있었는데, 이슈가 커지자 일사천리로 법안이 통과됐습니다. 하지만 친모를 ‘비정한 친모’라 부르며 악마화하는 것도, 뒤늦게 출생통보제 법안이 처리된 것도 답답하기만 합니다.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논의가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살해하는 영아살해는 분명한 범죄입니다. 처벌받아 마땅하죠. 그러나 임신한 여성들이 왜 ‘아이를 살해하게 됐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친모는 영아살해 전 ‘낙태’를 두드렸다 영아살해 가해자 즉, 친모들은 자녀를 양육할 수 없는 상태인 경우가 많습니다. 원치 않는 임신인 데다, 낙태는 불가능했고, 출산은 준비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때문에 이들은 영아살해를 저지르기 전, 대부분 ‘낙태’를 시도합니다. 아이를 변기 속에 방치해 살해한 A 씨는 임신 사실을 인지하고 산부인과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임신 후기라 중절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답을 받고는, 180만 원짜리 불법 낙태약을 구매해 복용했습니다. (해당 낙태약은 A 씨와 사실혼 관계인 남성이 인터넷으로 구매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두 아이를 살해한 B 씨 역시 출산 전 임신중절 수술을 알아봤습니다. 하지만 250만 원에 달하는 비용이 부담되자, 낙태를 포기하고 출산을 택했습니다. 4년 전 낙태죄는 폐지... 불법도 합법도 아닌 현실 지난 2019년 4월, 헌법재판소는 낙태죄 조항이 헌법에 합치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태아의 생명권보다 임신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더 우선한다고 판단한 겁니다.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낙태죄는 효력을 잃었고, 낙태는 더 이상 범죄가 아니게 됐습니다. 낙태죄 폐지로 여성의 자기 결정권, 임신중지권이 온전히 보장될 줄 알았지만 현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낙태죄 공백을 메울 입법 논의가 미비한 탓에 아직까지 임신 몇 주까지 낙태가 합법적으로 가능한 건지,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하는지 등 정해진 게 없습니다. 낙태죄는 폐지됐지만, 여전히 합법과 불법 그 사이 어딘가에 ‘애매하게’ 존재하는 겁니다. 여당은 임신 10주까지 낙태를 허용하자는 입장입니다. 서정숙 국민의힘 의원안은 낙태 허용 주수를 ‘임신 후 10주 이내’로 제한하고, 이후에는 임신부에게 건강상의 현저한 침해가 있을 경우에 제한적으로 낙태를 허용합니다. 반면 야당은 사실상 낙태죄를 모두 폐지하자고 주장합니다.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형법 개정안은 낙태죄를 전면 폐지하고 낙태와 관련된 처벌조항을 삭제하는 내용을 포함합니다. 또, 수술과 약물에 의한 임신중단을 모두 허용합니다. 여야 의견 차가 뚜렷하죠. 낙태 허용 주수에 대한 여야 의견 차는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좁히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4년 동안 공청회는 딱 한번 열렸는데, 이 한 번의 공청회마저 참석 의원들이 퇴장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여성의 임신중단권 보장은 제자리 걸음 국회가 제 할 일을 하지 않는 동안,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들에겐 범죄가 다가왔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출산은 임박해졌고, 합법적 낙태는 아득해졌습니다. 자신이 낙태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는 채, 속절없는 시간만 흘렀을 겁니다. 안전한 낙태 방법으로 알려진 먹는 임신중절 약물 ‘미프진’ 도입도 무산돼 임신 여성들에겐 선택지가 더 줄어들었습니다. 4년이란 시간이 있었지만, 여성의 임신중단권은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겁니다. ‘낙태 실패’도 아닌 ‘낙태 거절’을 경험하며,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고립됩니다. 임신 기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여성은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출산을 결정하게 됩니다. 누군가는 병원에서 아이를 낳은 뒤 출생신고를 하지 못하고, 누군가는 병원조차 가지 못한 채 길에서 출산하죠. 이 여성들은 출산 후 영아살해를 떠올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영아살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낙태죄 대체 입법을 서둘러야 합니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들이 영아살해를 고려하지 않게끔, 낙태를 법과 제도 테두리 안으로 들여야 합니다. 국회에서 통과된 출생통보제는 쉬운 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여성의 ‘출산’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출산을 가정한 제도는 출산 자체를 고민하는 여성들에게 명쾌한 해답이 되지 못합니다. 임신한 여성이 고립돼 영아살해로 내몰리지 않도록, 임신한 여성에게 출산 말고 새로운 선택지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미 늦은 만큼, 4년간 멈춘 논의를 하루라도 빨리 다시 시작해야 할 시기입니다.
하루 사이 가격이 600원대에서 1,100원대로 뛴 코인이 있습니다. 2배 가까이 뛴 폭등의 주인공, '리플'이라는 코인입니다. 국내 투자자들에겐 비트코인 다음으로 인기가 많습니다. 치솟는 가격 덕분에 리플은 비트코인, 이더리움, 테더에 이어 가상자산 시가총액 4위로 올라섰고, 다른 코인 가격들도 덩달아 올랐습니다. 무슨 일인데? 리플 가격이 폭등한 건 미국 법원의 판결 때문입니다. 지난 2020년 12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리플의 투자자금 모집 과정에 문제가 있다'며 리플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리플은 공모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은 불법 증권'이라며 '발행사인 리플랩스가 미등록 증권을 발행, 판매했다'고 본 겁니다. 반면 리플랩스는 '리플은 증권이 아닌 상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30개월의 소송 끝에 현지시간으로 지난 13일, 재판부는 리플은 증권이 아니라며 리플 손을 들어줬습니다. 뉴욕지방법원 아날리사 토레스 판사는 '발행사가 헤지펀드 같은 기관투자자에게 판매한 건 증권성이 있지만, 일반 개인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건 증권성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기관투자자에게 판 리플은 기업 자본을 조달하는 역할을 하지만, 개인에게 판매한 건 상품 판매라고 본 겁니다.
(23. 7. 13.) <앵커> 지난달 미국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년여 만에 가장 낮은 3퍼센트를 기록했습니다. 1년 전과 비교해 보면 3분의 1 수준입니다. 가파르게 치솟던 물가가 이제는 진정되고 있다는 이런 통계가 나오면서 미국의 긴축 정책도 곧 끝나는 거 아니냐는 기대 섞인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지난달 물가상승률이 2%대로 떨어졌는데, 한국은행은 이제는 물가보다 경기를 살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보고 오늘(13일) 4차례 연속 기준금리를 동결했습니다. 조윤하 기자가 전하겠습니다. <기자> 지난해 리터당 2천100원을 돌파하면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던 기름값, 현재 휘발유 1천500원대, 경유 1천300원대로 꾸준히 하락세입니다. 실제로 지난달 석유류 가격은 1년 전보다 25% 넘게 떨어졌습니다. 물가 걱정을 덜면서 한국은행은 경기 회복에 방점을 뒀습니다. 수출 부진, 내수 회복 지연에 하반기 성장률 전망은 1.6%에서 1.4%로 낮아졌습니다. 지난 2월부터 4번 연속으로 기준금리를 동결한 배경입니다. 새마을금고발 위기설 등 최근 일부 불안한 금융상황도 고려됐습니다. 또 이달 미국 연준이 금리를 인상할 경우 한미 금리차가 2%P로 벌어진다는 부담이 있지만, 그간 급격한 외국인 투자 이탈은 없었다는 판단도 작용했습니다. 4연속 동결에 시장에서 이제는 금리 인하 시점으로 관심이 옮겨가고 있지만, 이창용 한은 총재는 "연내 금리인하는 시기상조"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이창용/한국은행 총재 : 물가 목표인 2%로 물가가 충분히 수렴하는 과정에 도달했다는 확신이 들 때 저희들이 인하를 논의할 거고요. 아직 금통위원들이 금리 인하를 논의한 분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실제로 지표물가는 하락했다지만 소비자 체감 물가는 여전히 높습니다. 교통비 등 공공요금과 먹거리 물가 고공행진 때문입니다. [최영희/서울 강서구 : 옛날하고 비교하면 하늘과 땅이죠. 너무 비싸요. 뭐 사 먹지를 못해요. 뭐를 사려고 해도 옛날에는 그냥 팍팍 사서 먹었는데, 요새는 한참 고민했다가 (사요.)] [정동건/경기 과천시 : 학교 다닐 때에는 (교통비가) 한 달에 12만 원~15만 원 정도 나왔는데, 더 오르면 조금 부담이 될 거 같아요.] 지난달 사상 최대치를 기록한 가계부채도 불안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한국은행은 가계부채가 예상 밖으로 급격히 늘어날 경우 금리뿐 아니라 거시 건전성 규제로 대응할 거라고 밝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