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경제부 조윤하 기자입니다. 늘 최선을 다해 보도하겠습니다.
2020년에 개원한 21대 국회가 약 3주 뒤면 막을 내립니다. 4년 동안 발의된 법안은 모두 2만 5,832건으로, 이 중 9,454건만 처리됐습니다(의원 발의, 정부 제출안 포함).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 1만 6,378건은 회기 내에 처리되지 못하면 모두 폐기됩니다. 폐기 위기에 처한 법안 1만 6,378건에는 '낙태죄 폐지' 후속 입법안인 형법 개정안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낙태죄 폐지됐지만 진전 없는 '임신 중지권' 지난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형법상 '낙태죄' 처벌 조항에 대한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보다 우선한다고 판단한 겁니다. 임신 중지는 더 이상 처벌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고, 음지에서 행해지던 임신 중지 시술이 양지로 올라올 계기가 마련됐습니다. 헌재는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리며 '낙태죄 조항을 개정하라'고 국회에 권고했습니다. 헌재가 제시한 개정 시한은 2020년 12월 31일까지였습니다. 후속 입법은 진전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개정 시한은 다가왔고, 낙태죄는 효력을 상실했습니다. 임신 중지에 대한 처벌 역시 폐지됐습니다. 여성 인권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듯했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입법 논의가 미비한 탓에 정작 임신 중지를 해야 하는 여성들에겐 변한 게 없었습니다. 현재까지 형법 개정안 6건, 모자보건법 개정안 7건이 발의됐지만 상임위를 전전하며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했습니다. 실은 의원들이 논의를 하지 않은 것이겠지요. 개정 시한을 넘긴 지 3년 4개월이 지났지만, 이번 국회 내에서도 법안 처리 가능성은 낮습니다. 낮은 정도가 아니라 0에 가깝죠. 헌재의 헌법 불합치 결정 이후에도, 여성의 임신 중지권은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임신 중지 정보 부족으로 '을'이 되는 여성들 #1 지난 2021년 가을, 30대 여성 A 씨는 임신 4주 차에 임신 중지 시술을 받았습니다. 실은, 임신 사실을 안 뒤 약을 복용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고 오랫동안 내원하던 산부인과를 찾아 시술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산부인과 원장은 표정이 싹 바뀌며 시술에 대한 설명조차 해주지 않았습니다. 임신 중지를 거부한 것이지요. 순간 '이런 병원을 내원했다'는 게 후회스러웠다고 합니다. A 씨는 임신한 몸을 이끌고 다른 병원을 찾아 헤맸고, 지인을 통해 믿을 만한 산부인과를 찾았습니다. 거리가 멀었지만, 상담부터 시술까지 그 병원에서 진행했습니다. 모두 100만 원이 들었습니다. A 씨는 이 돈을 모두 현금으로 내야 했습니다. #2 같은 해 여름, 30대 여성 B 씨는 임신 6주 차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인터넷 검색으로 알게 된 판매자에게 약물을 구매해 복용했습니다. 약 구매 가격은 80만 원. 약물 복용 후 여러 신체적 증상 때문에 힘들었지만 도움을 구할 곳은 없었습니다. 약 복용 전, 임신 중지 방법과 비용 등을 병원에 문의하고 싶었지만 병원 측에서 돌아온 답변은 '반드시 보호자를 데려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곤란했던 B 씨는 고민 끝에 자신의 지인을 섭외해서 상황을 모면해야 했습니다. 최근 '모두의 안전한 임신 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가 발간한 <2021년 이후 임신 중지 경험 조사 결과 보고서>에 기재된 실제 사례입니다. 임신 중지를 경험한 여성 6명의 조사를 토대로 작성된 보고서에는 현재 임신 중지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여성의 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해서 어떤 논의가 필요한지 담겨 있습니다. A, B 씨를 포함한 임신 중지 경험자들은 가장 큰 문제로 '정보 부족'과 '값비싼 비용'을 꼽았습니다. 대부분 임신 초기에 임신 중지를 하고자 했지만 인터넷·휴대전화 앱 외에는 정보를 얻을 창구가 없었고, 이 역시 신뢰도가 높지 않았습니다. 특히, 주변 어떤 병원에서 임신 중지가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비용은 얼마이고 얼마만큼 시간이 소요되는지 등 구체적인 정보가 제공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정보를 얻을 곳이 많지 않다 보니, 잘못된 정보가 마치 사실처럼 여겨졌다는 응답도 있었습니다. 임신 중지 약물도 보통 얼마에 판매되는지, 후유증은 없는지, 정품이 맞는지 등 기본적인 정보가 제공되지 않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비용 역시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현재 임신 중지 시술 가격은 병원마다 천차만별입니다. 한 응답자는 병원마다 시술 가격이 10~30만 원까지 차이났다고 답했습니다. 병원에서 부르는 게 값인 셈입니다. 임신 주차마다 진행되는 임신 중지 시술 과정이 다른데도 어떤 병원은 주차에 상관없이 같은 가격을 제시했다는 응답도 있었습니다. 임신 중지 여성 대부분은 시술 비용을 '현금'으로 냈습니다. 카드 결제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죠.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기도 하고, 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를 악용해 무조건적으로 현금을 요구하거나 가격을 의도적으로 높게 책정한 병원도 있었습니다. '을'인 임신 중지 여성이 택할 수 있는 다른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던 거죠. "임신 중지, 의료 서비스로 인정해야" 전문가들은 임신 중지를 의료 체계 범주 안으로 들여와야 한다고 제언합니다. 낙태죄는 엄연히 폐지됐지만 그다지 달라진 게 없는 임신 중지권을 제대로 보장하기 위해선 이를 의료 서비스로 인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21대 국회에서 사실상 방치됐던 낙태죄 대체 입법 논의를 22대 국회에서는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할지, 김선혜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 나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대표에게 들어봤습니다. Q.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은 여성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 나영(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대표) : 임신 중지가 더 이상 불법이 아니라는 사실은 생각보다 영향이 큽니다. 체감 못할 수도 있지만, 임신 중지는 자기결정권을 굉장히 제한하거든요. 낙태죄 효력이 있을 때에는 임신 중지를 하면 '내가 언제든지 처벌당할 수 있고, 고소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많았어요. 이걸 빌미로 남성들이 협박을 할 수도 있었고요. 병원 의료인 역시 자신이 합법적인 일을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임신 중지술에 대한 위축이 있습니다. 의료인들조차 '우리 병원에서 임신 중지가 가능하다'는 얘기를 하지 못했죠. 하지만 (낙태죄 폐지 이후) 시간이 좀 지나면서 점차 '우리 병원에서는 몇 주까지 무슨 방법으로 할 수 있다'고 설명해 주는 병원들이 많아지고 있어요. 이런 얘기들을 공식적으로 들을 수 있고, 파트너에게 협박을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여성은 자기 자신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Q. 낙태죄 폐지 이후 국회에서 대체 입법 논의가 상당히 더뎠습니다. 현재는 어떤 상황인가요? ▶ 김선혜(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 : 불법은 아니게 됐지만 실질적으로 임신 중지에 대한 권리가 보장되고 있진 않습니다. 보통 우리가 아파서 병원을 가면 어떤 처치를 받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보를 얻잖아요. 단순 의료 정보뿐만 아니라 현재 나의 몸의 상태라든가 건강에 대한 정보도 얻죠. 임신 중지에 대한 정보 역시 인터넷에 몰래 찾아봐서 알게 되는 게 아니라, 의료기관을 통해 빠른 시간 내에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질병과 마찬가지로 동등하게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됐을 때, 내 건강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상황이 됐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나영 대표 : 현재 임신 중지는 공식적인 의료 영역으로 여전히 인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각 의료기관에서도 '몇 주 이상이면 안 된다'는 등 모자보건법 한계 안에서 관행들을 계속 유지하고 있죠. 그것과 상관없이 임신 중지 시술을 안전하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요. 의료기관에선 인정되지 않는 불법적인 일을 마치 선심 써서 해주듯 하니 의료비는 높게 책정되고, 병원마다 의료비 차이는 점점 커집니다. 임신 중지 상황에 놓인 여성들은 이런 문제들을 계속 감당을 해왔던 거고요. 그냥 위험하고 비싼 임신 중지가 됐을 뿐이에요. Q. 여성의 안전한 임신 중지를 가로막는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 김선혜 교수 : 건강보험 적용이 안 되는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보험 적용이 안 되기 때문에 관련 가이드라인이 없고, 부르는 게 값인 거죠. 또 다른 문제는 '접근성'입니다. 여성들에게 임신 중지와 관련한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가에 대한 겁니다. 사실 이건 의료 체계에서 바뀌어야 하는 문제인데, 의사들은 이제까지 안 하던 것이기 때문에 별로 하고 싶어하지 않아 합니다. 그래서 정부가 조율해야 하는 문제인데 나 몰라라 하고 있는 상황이고요. (임신 중지) 권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에 대한 법이 만들어지면 좋겠지만 지금 현재는 법이 없기 때문에 정부와 국회 모두 손 놓고 있는 상황이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아요. ▶ 나영 대표 : 임신 중지 서비스를 공식적인 의료 영역에서 제공하고 있는 뉴질랜드나 캐나다, 호주 등은 정부 공식 사이트에서 안전한 임신 중지가 가능한 병원 정보를 제공하고 있어요. 집 가까운 병원에 가면 몇 주까지는 어떤 방법으로 할 수 있고, 건강보험은 어떻게 적용되는지 등 정보들이 공식적으로 제공되는 거죠. 우리가 코로나19 상황에서 정보를 상세히 제공받았던 것처럼요. 그런데 한국은 그런 체계 자체가 없습니다. 입법 책임을 갖고 있는 정부(복지부)와 국회는 개정 입법 시한 몇 개월 앞두고 다른 나라 법을 몇 개 엮어서 대체안을 만들었을 뿐이지, 실질적으로 여성들에게 어떤 정보가 제공돼야 하는지, 이 법은 어떤 영향을 미칠지 등을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Q. 여성의 안전한 임신 중지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22대 국회에서 어떤 점이 중점적으로 논의돼야 할까요? ▶ 김선혜 교수 : 건강보험 적용이 가장 시급하게 이뤄져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보험이 안 되면 의료 서비스로 인식을 잘 안 하거든요. 건강보험 적용이 된다고 하면 '정말 의료적인 문제구나' 생각하죠. 성형수술 등은 불필요한 의료적 처치라고 해서 비급여잖아요. 그런데 임신 중지는 의료적으로 너무 필요한 서비스이고, 누구나 받아야 되는 서비스인데도 건강보험 적용이 안 됩니다. 임신 중지에 대한 사회적인 분위기나 낙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빠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건강보험 적용'입니다. ▶ 나영 대표 : 정부나 국회가 왜 입법 논의를 제대로 하지 않았을까, 그들에게 왜 와 닿지 않았을까를 먼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지금까지 불법의 영역이었으니까 와 닿지 않는 문제인 거죠. 국가 입장에서는 '몇 주까지 하면 된다'는 원칙을 정해놓고 거기에 안 맞는 사람이 걸리면 처벌하면 그만이죠. 그러니까 국가가 할 일이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임신 중지) 비범죄화가 됐다는 건, 그만큼 비어 있던 공백의 영역을 국가의 책임으로서 시행해야 되는 거거든요. 22대에는 완전한 권리 보장을 중심으로 다시 발의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과거에 나왔던 주수 제한이나 사유 제한 등이 포함된 정부안 대신, 권리 보장 중심의 법 체계가 만들어져야 포괄적인 지원이 가능합니다. '어떻게 막을 것인가' 대신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로의 전환 낙태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임신 중지의 비범죄화가 곧바로 안전한 임신 중지권 보장으로 이어지진 않았습니다. 여전히 임신 중지를 원하는 여성들은 혼자서 고군분투할 뿐입니다. 전문가들은 관점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형법상 처벌 대상이었던 임신 중지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시각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어떤 여성이든 어떤 시기에나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어쩌면 거창한 입법 논의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임신 중지가 합법의 영역으로 재편된 이상, 보험 적용 여부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판단해 결정하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시술 비용도 수가가 정해져서 천차만별인 지금보다 나아지겠지요. 몸살감기, 배탈, 골절 등 인간이 겪는 다양한 질병이 모두 법에 명시돼 있진 않습니다. 임신 중지 역시 모든 사안을 법에 의해 하나하나 규제, 규정하려는 시각을 탈피해야 합니다. 여성의 몸, 그리고 그 몸에 대한 결정권은 법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디자인 : 권민재
'여성가족부 폐지'는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1호 공약이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여가부는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며 여가부 폐지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더 이상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 차별은 개인적 문제"라는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여가부 폐지 공약은 윤석열 정부의 110대 국정과제에서 빠졌습니다. 당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정부 조직 개편의 경우 법 개정이 필요해서 새 정부 출범 이후에 논의할 사안'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새 정부 출범 이후에도 별다른 진전은 없었습니다. 지난해 새만금 세계스카우트 '잼버리' 파행 논란으로 한 차례 여가부 폐지 논의가 있었지만 김현숙 전 장관이 사의를 표하면서 어영부영 마무리됐습니다. 김 전 장관 후임자로 지명된 김행 전 여가부 장관 후보자가 '드라마틱하게 엑시트(exit)하겠다'고 밝히면서 다시 속도를 내는 듯했으나 자진사퇴로 역시 일단락됐습니다. 이처럼 지지부진하던 여가부 폐지가 4월 총선을 앞둔 지금, 다시 재점화되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5개월 만에 김현숙 전 장관의 사표를 공식적으로 수리하면서부터입니다. 특히, 여권을 중심으로 여가부 폐지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달 22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현숙 전 장관의 사표 수리는) 여가부 폐지 의지를 확인한 것"이라며 "현실 정치의 역학관계 때문에 폐지 속도가 더뎌졌지만, 그 방향만큼은 타협 없이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 역시 "총선 승리를 통해 여성부 폐지 공약을 반드시 완수하겠다"며 여가부 폐지론에 불을 붙였습니다. '여성가족부 폐지론'의 역사 지난 2001년, 김대중 정부 당시 '여성부'라는 명칭으로 출범한 여성가족부는 늘 존폐 기로에 놓여 있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때 '여성부'에서 '여성가족부'로 확대 개편되면서 여성뿐만 아니라 보육, 가족 분야까지 범위가 넓어졌지만, 확대 기능을 얼마 이어가진 못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정부 조직을 줄이겠다며 '여가부 폐지' 방침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당시 야당과 여성계의 강한 반발로 폐지 추진은 무산됐고, 2008년 여가부 분야 중 가족과 보육 부분을 복지부로 이관하는 수준으로 정리됐습니다. '여성가족부'가 다시 '여성부'로 축소되자 곳곳에 빈틈이 생기고 있다는 지적이 일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가족 관련 정책 수요는 높아지는데, 복지부에서 기존 업무를 수행하면서 이를 감당하기엔 무리라는 비판이었습니다. 당시 정부 역시 "가족 해체, 저출산, 다문화가정 등 현안들에 대해 좀 더 효율적인 대응을 하려면 여성부가 지금보다 좀 더 가족 정책을 수립·수행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며 여성부의 확대 재편 필요성을 인정했습니다. 2년 뒤, 여성부는 복지부의 청소년과 가족 업무를 다시 넘겨받았습니다. 2년 동안 가족·청소년 기능은 두 부처를 오가며 혼선을 빚었습니다. 그 사이 일관성 있는 정책 추진은 기대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여가부를 '양성평등가족부'로 바꾸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성평등이 아닌 '양성평등' 용어를 사용한 탓에 찬반 주장이 극심하게 엇갈렸고, 결국 무산되긴 했습니다.) 부처의 기능보다 존폐 여부가 화두였던 부처 여가부는 늘 부침이 많았습니다. 부처 본연의 기능이나 업무보다는 부처의 존폐가 더 화두였습니다. 하지만 이때마다 필요한 기능 이관 논의는 후순위로 밀렸습니다. 부처 폐지를 논하기 전, 해당 부처가 수행하고 있는 기능을 어떤 부처로 어떻게 옮길 것인지 논의가 선행돼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던 겁니다. 한 부처가 사라지면 그로 인해 발생하는 공백은 어떻게 메울 것인지, 해당 업무를 이관 받은 부처는 어떤 방식으로 인원을 증원하는지 등 구체적인 논의는 진전되지 않았습니다. 현 정부가 제시한 여가부 폐지 방안 역시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2년 전, 정부는 여가부를 폐지하고 보건복지부 산하에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를 만들어 여가부의 주요 기능을 이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여성 고용 관련 업무는 고용노동부로 옮기겠다고 했습니다. 여가부의 기능을 복지부와 고용부로 분배해 넘기겠단 계획입니다. 이후 추가적으로 나온 이관 방안은 없었습니다. 여가부의 여러 기능 중 어떤 업무가 복지부로 넘어가는 건지, 고용부에 이관되는 '여성 고용 관련 업무'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명확하게 설명된 적이 없었죠. 뚜렷한 계획조차 없는 무조건적인 폐지 방침은 여러 의문점을 낳습니다. 여가부가 수행하고 있는 가정폭력·스토킹·성폭력 등 피해자 보호 지원 업무는 어떤 부처로 가게되는 걸까요? 자살이나 자해 등 고위기 청소년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지원 업무는 어디로 이관되는 걸까요? 단순히 '여가부의 주요 기능을 이관하겠다'는 정부의 설명이 충분하지 않아 발생하는 여러 의문입니다. 다시 나온 여가부 폐지론, 총선과 무관하지 않은 이유 2022년 정부가 여가부 폐지 방침을 밝힌 이후, 2년 동안 별다른 진전조차 없던 '여가부 폐지론'이 총선을 앞두고 다시 고개를 들었습니다. 시점이 묘합니다. 선거를 한 달 정도 앞둔 지금, 정치권은 마치 2년간 끊임없는 논의를 해왔던 것처럼 여가부 폐지를 완수하겠다고 열을 내고 있죠. 결국 '표' 때문이라는 비판이 나옵니다. 정부조직법은 여가부를 '여성 정책의 기획·종합, 여성의 권익 증진 등 지위 향상, 청소년 및 가족(다문화가족, 건강가정사업을 위한 아동 업무 포함)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부처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여가부를 폐지하려면 이 법을 개정해야 하는데, 여당은 소수이기 때문에 다수 야당이 반대하면 여가부 폐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여가부 폐지를 위해선 현재 소수인 여당의 의석이 더 많아져야 하고, 이를 위해 유권자들에게 한 표 한 표를 당부한다는 전략인 겁니다. 물론 여가부도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선거 때마다 폐지론이 대두되는 데엔 여가부 역시 본연의 기능을 차질 없이 수행했는지 반추해봐야겠지요. 권력형 성폭력 범죄가 발생했을 때 적절히 대처했는지, 피해자 보호에 최선을 다했는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지적이 여가부 폐지로 이어지는 것은 무리입니다. 저출산부터 성범죄 피해자 보호, 젠더, 소수자 배려, 위기 청소년 보호, 다문화가족 지원 등 여가부가 맡고 있는 역할은 결코 적지 않습니다. 이 분야들이 '개별 부처'가 아닌 보건복지부 산하의 '본부'로 이양된다면 지금과 같은 지원을 기대하긴 어렵겠죠. 복지부나 고용부가 기존에 수행하고 있는 업무가 있기 때문에 여가부 이관 업무는 자연스럽게 주변화될 거라는 우려도 있습니다. 또, 성평등 정책을 추진할 컨트롤타워가 사라진다는 건 정책의 후퇴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총선을 앞두고 다시 대두된 7글자, '여성가족부 폐지'가 총선용 전략이라고 비판받는 이유입니다.
드라마 <더글로리>와 <모범택시2>가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학교폭력 피해자였던 문동은이 오랜 시간 치밀하게 준비해 가해자 박연진에게 직접 복수하고, 힘없고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의 부탁을 받아 무지개운수 멤버들이 대신 가해자들을 응징하며 단죄하는 모습은 시청자로 하여금 통쾌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법과 제도의 도움을 단 한 톨도 받지 못한 이들은 각자 자신만의 방법으로 복수를 이어갑니다. 모두 ‘사적 제재’입니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었을까요. 현실에서의 사적제재는 성공을 논하기도 전에 실행 단계에서 가로막혔습니다. 지난 4일, 대법원은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배드파더스’ 운영자 구본창 씨에 대한 유죄 판결을 확정했습니다. 이혼 뒤 자녀의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부모 신상을 공개하는 ‘배드파더스’ 사이트가 타인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판단한 겁니다. 앞서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1심 재판부는 구 씨가 무죄라고 판단했습니다.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은 부모 신상을 공개한 구 씨의 활동이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인정한 겁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달리 판단했습니다. 수원고법은 “해당 공개행위로 피해자의 인격권과 명예가 과도하게 침해된다고 보여 ‘공공의 이익’보다는 ‘비방의 목적’이 인정된다”고 했습니다. 대법원 역시 ‘비방할 목적’에 무게를 두고 벌금 100만 원의 선고를 유예한 원심판결을 확정했습니다. 이번 판결로 ‘배드파더스’는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이미 2년 전에 폐쇄된 사이트였긴 하지만, 앞으로 추가적인 사적 제재는 기대하기 힘들어졌습니다. 애초에 이혼 후 자녀들에게 양육비를 제대로 지급하도록 강제하는 제도, 법이 제 역할을 했다면 개설조차 안 됐을 사이트입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빈틈이 생겼고, 이 공백을 메워왔던 ‘배드파더스’ 운영자 구본창 씨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선고 유예’ 판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눈앞이 캄캄하죠. 사이트 운영자들은 모두 멘붕입니다. 본인들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양육비를 지급받지 못한 피해자들을 자발적으로 도운 건데, 도왔다고 선고유예가 되고 유죄가 된다고 하면 활동을 하고 싶겠습니까? 분노를 느낍니다.” - 어떤 부분에서 특히 분노를 느끼셨나요? “저도 무책임하고 나쁜 부모라도 그 사람들의 명예가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이의 생존권과 무책임한 부모의 명예, 두 가지가 충돌할 때 ‘어느 것을 우선시해야 하느냐’는 명확한 거 아닌가요? 거꾸로 법이 나쁜 부모의 명예를 보호하는 쪽으로 가는 세상은 잘못된 거 아닙니까? 그런 측면에서 굉장히 분노가 큽니다.” 학원을 운영하던 구 씨는 한국인과 필리핀 사이에서 낳은 아이, ‘코피노’ 엄마의 이야기를 들은 뒤 양육비 미지급자를 돕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코피노 양육비 해결을 돕던 그는 한국에서도 자발적으로 양육비 미지급자 지원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책임감도, 휴머니즘도, 사명감도 아니라는 구 씨는 그저 양육비가 없어서 아이들이 굶는 게 안타까운 마음에서 활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 배드파더스 활동을 시작한 계기가 무엇인가요? “정말 그만두려고 했던 적이 많아요. 제가 배드파더스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특별한 건 없고요, 제가 필리핀에서 특별한 지원 활동을 했잖아요. 그 활동하다가 연결된 거예요. 저도 딸만 둘입니다. 딸만 둘인데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에서 우리 아이들도 양육비 피해자가 될 수 있잖아요. 피해가 생겼을 때 우리 딸들 어떻게 합니까?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 배드파더스의 신상공개 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우선 제보를 받고 검토한 뒤 당사자에게 연락을 취합니다. 신상공개를 하겠다고 하면 대부분 답이 옵니다. 이의 제기를 하니까요. 본인이 안 주려고 하는 게 아니라 형편이 어려워 못 준다고 하죠. 저희는 본인이 정말 형편이 안 좋아서 못 주는 건지 확인을 합니다. 기초수급자로 살고 있다든지, 단칸방에 살고 있다든지 등 절대 빈곤의 상태인지 자료를 보내달라고 합니다. 그럼 자료가 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실제로 양육자들이 상대방이 기초수급자고, 해봐야 양육비를 받을 수 없으면 소송까지 하겠습니까, 애초에?” 3년 전 한부모가족실태조사에 따르면. 비양육부모로부터 양육비를 받지 못한 한부모는 72.1%에 달합니다. 한부모 10명 가운데 7명은 양육비를 홀로 부담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들은 양육비와 교육비가 가장 부담된다고 답했습니다. 지난 2021년, 배드파더스는 사이트를 자체적으로 폐쇄했습니다. 여성가족부가 양육비 채무 불이행자 명단 공개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여가부가 신원을 공개한 양육비 미지급자는 100명도 되지 않습니다. 구 씨는 ‘얼굴 공개 없는 신상공개는 의미가 없다’고 얘기합니다.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 한,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은 당사자를 압박할 수 없다는 겁니다. - 여가부의 명단 공개가 실효성이 있다고 보시나요? “여가부의 명단 공개로 해결된 거는 100건도 안 돼요. 저희가 2018년부터 문 닫을 때까지 3년 정도 해결한 사례가 1천 건이 넘습니다. 그런데 그중 많은 숫자가 다시 양육비 지급을 안 하고 있어요.” ※ 현재 여성가족부 홈페이지에 남아있는 양육비 미지급자는 66명입니다. 재판부는 배드파더스가 사적제재에 해당한다면서도 양육비 미지급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를 공론화하려고 했다는 의도 자체는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익명이 아닌 실명과 직장명, 전화번호까지 공개해 ‘즉시 양육비를 지급하도록 강제할 필요성’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구 씨는 이번 판결을 ‘면죄부’라고 표현했습니다. 아무리 대법원이 선고를 유예하면서 자신을 처벌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유죄로 인정한 것 자체가 국가와 법원이 양육비 미지급자들에게 ‘너희는 돈 안 줘도 된다’고 독려하고 있다는 겁니다. - 배드파더스가 사적 제재에 해당한다는 점에 동의하시나요? “배드파더스는 사회 고발입니다. 이걸 사적 제재라고 판단하면 앞으로 미투나 학교폭력 등 모든 피해자가 입 다물고 있어야 합니다. 이번 판결은 양육비를 지급받지 못한 피해자들이 입을 닫아야 한다는 걸 뜻하죠. 애초에 소송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길에서 두드려 맞고 있는 사람에겐 옆에 직접 가서 막아줘야지, 아프지 말라고 기도해 주거나 덜 다치길 바라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구 씨는 법과 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구제돼야 하냐고 되물었습니다. 변호사 상담 5분만 받으면 양육비를 안 줄 수 있는 방법 수천, 수만 가지를 알 수 있는데, 어떻게 가장 기본적인 양육비를 보장받을 수 있냐는 거죠. 현재 양육비 이행강화와 관련해 발의된 법안은 모두 9건입니다. 하지만 모두 국회에 계류 중이라 곧 폐기될 전망입니다. 구 씨는 “선거에만 급급해 법안 처리할 생각조차 않고 있다”며 답답하다고 말했습니다. 저출산 대책을 논하기 전, 있는 아이를 어떻게 지켜야 할지부터 고민해야 합니다. “더 화가 나는 건, 저출산이 문제라고 외치면서 태어난 아이들조차 지키지 않는다는 겁니다. 태어난 아이들의 권리를 보호하지 않으면서 아이를 낳으라는 게 말이 됩니까? 저출산에다 돈을 쏟아붓고 있는데, 아이들의 권리가 보호돼야 낳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언어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스위스 출신의 세계적인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가 한 말입니다. 대중의 말은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상을 반영한다는 겁니다. 유아차 vs 유아차, 때 아닌 논쟁 유모차(乳母車)가 맞는 건지, 유아차(乳兒車)가 맞는 건지 온라인상에서 논쟁이 뜨겁습니다. 이 논쟁은 2주 전, 한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영상에서 시작됐습니다. 배우 박보영이 유튜브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조카들을 데리고 놀이공원에 가고 하는데도, 제가 밀면 안 봐요”라고 말했고, 진행자 유재석은 “유모차를 밀면?”이라고 물었습니다. 함께 있던 개그맨 조세호는 “중심이 유모차로 되니까”라고 말했죠. 세 사람 모두 ‘유모차’라고 말했는데, 영상 자막엔 ‘유아차’라고 표기됐습니다. 출처 : 유튜브 채널 〈뜬뜬 DdeunDdeun〉 여기서부터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출연진은 유모차로 말했는데, 왜 유아차로 표기됐냐는 겁니다. 몇몇 네티즌은 ‘음성과 자막이 일치하지 않아서 불편하다’고 불만을 표출했습니다. 또, ‘표준어인 유모차를 굳이 유아차로 바꾼 이유가 무엇이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이런 불만과 의문이 일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번졌습니다. (물론, 크게 문제 될 게 없다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두 단어 모두 표준어더라도 유아차가 권장된다면, 권장어를 쓰는 게 맞다’는 겁니다.) 커뮤니티를 통해 번진 논란은 ‘제작진 중 페미니스트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제작진 중에 페미니즘 사상을 가진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의도적으로 '유모차'를 '유아차'로 바꿨다는 주장입니다. 이후 좌표 찍기와 사상검증이 시작됐습니다. 커뮤니티 이용자들은 해당 영상에 ‘싫어요’를 누르며 공격했고, ‘유아차’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공격받아도 마땅한 것처럼 여겨지는 낙인이 이어졌습니다. ‘유모차 vs 유아차’ 논란이 여성혐오로 확산된 겁니다. 유아차, 유모차 모두 표준어... 권장은 ‘유아차’ 유모차와 유아차 모두 국립국어원이 인정하는 표준어입니다. 다만, 국립국어원은 ‘유모차’를 ‘유아차’ 또는 ‘아기차’로 순화해서 사용할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유모차는 젖 유(乳)에 어미 모(母), 수레 차(車)로 이뤄져 있습니다. ‘젖 먹는 아이를 태우고 엄마가 끌고 다니는 차’라는 뜻입니다. 꽤 오래전에 만들어진 단어라 너무 익숙해졌지만, 바뀐 시대상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엄마가 끄는 차’라는 말이 부모의 역할을 한정짓고, 더 나아가 성 고정관념을 공고히 한다는 겁니다. 또, 양육 과정에서 간접적으로 아빠를 배제해 부모의 권리를 동등하게 인정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 지난 2018년,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성평등 언어 사전’을 발표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 중 성차별적인 요소가 있는 단어들은 다른 용어로 바꿔 사용하자는 캠페인이었습니다. 유모차는 유아차로, 학부형은 학부모로, 자매결연은 상호결연으로 말이죠. 처음엔 조금 생소했지만, 이때부터 ‘유아차’란 단어가 꽤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뉴스와 예능 프로그램 등 장르를 불문하고 ‘유아차’ 단어는 자주 사용됐습니다. 이번에 논란이 불거진 유튜브 영상이 나오기 전, 〈유퀴즈〉, 〈라디오스타〉 등 예능에서도 유모차를 곧잘 유아차로 순화해왔습니다. 어쩌면 누군가 어떤 심오한(?) 의도를 갖고 한 일이 아니라, 더 다듬어진 용어이기 때문에 사용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여러 설명에도 불구하고 논란은 국립국어원으로까지 번졌습니다. 국립국어원이 유모차와 유아차 모두 표준어라고 인정한 걸 두고, 일부 커뮤니티 사용자들은 또 ‘국립국어원에도 페미가 있다’, ‘국립국어원이 사상에 점령당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주장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국립국어원 사이트를 찾아가 직접적으로 공격했습니다. 다 같이 찾아가 게시판에 혐오가 가득한 게시글을 도배한 겁니다. 이 논쟁이 보여주는 ‘현주소’ 사실 5년 전,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순화를 권고한 단어는 유모차 말고도 더 있습니다. 자매결연은 상호결연으로, 저출산은 저출생으로, 학부형은 학부모로, 미혼은 비혼으로, 미숙아는 조산아로 바꿔 표현하면 좋다고 말이죠. 차별적인 요소를 줄이고, 성평등에 가까운 용어를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캠페인이었습니다. 유모차를 유아차나 아기차로 다듬어 표현하자는 움직임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암초에 부딪히는 걸 보면, 아직 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해 보입니다. 물론 어떤 건 맞고, 어떤 건 틀린 문제는 아닙니다. 국립국어원이 세 단어 모두를 표준어로 인정한 것처럼 말이죠. 누군가는 별 것 아닌 ‘유모차 vs 유아차’ 논쟁에 기자가 기름을 붓는다고 지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때때로 아주 사소한 논쟁은 시대의 현주소를 보여줍니다. 육아는 부모 공동의 몫이고, 남녀 모두 각각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인식이 보편화 돼 있다지만, 실질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변화하는 속도는 더딥니다. 다듬어진 말이 있는데도 ‘유모차’를 사용하는 것처럼 말이죠. 사소하기 그지없는 논쟁은 우리 사회가 여성을 어떻게 대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예전보다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육아를 여성의 업무로 한정하고, 남성의 참여를 알게 모르게 배제하고 있는 거죠. 법으로 바꾸나?… “첫 발 뗐지만 갈 길 멀어” 국회에서는 유모차를 유아차로 변경하려는 시도가 첫 발을 뗐습니다. 지난 9월 민주당 최혜영의원 등 12명은 〈보행안전 및 편의증진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습니다. ‘어린아이를 태워서 밀고 다니는 수레’란 뜻의 유아차가 본래의 의미와 더 맞닿아있는 만큼, 유모차를 유아차로 바꾸자는 겁니다. 작은 움직임이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법적으로 용어를 변경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제도와 문화 의식을 총체적으로 바꿔나가는 캠페인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여성에게 뭔가를 더 주는 것이 아니라, 남성을 배제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고도 덧붙였습니다. 그러면서 신 교수는 정부 부처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과거에는 여성가족부에서 젠더 인식과 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역할을 했는데, 지금은 비중이 많이 줄었다는 겁니다. 신 교수는 “인식이 바뀌면서 담론이 바뀌고, 그로 인해 의식이 바뀔 때 법이 실효성이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앞서 말했듯, 언어학자 소쉬르는 언어를 거울에 비유했습니다. 시대상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거죠. 지난해 합계출생률은 0.78명으로, 1명이 채 되지 않습니다. 올해 출생률은 이보다 더 낮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태어날 아이가 점점 줄어드는 건 사람들의 인식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시대상을 반영하지 않은 단어로 인해서 ‘성 역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고착화되지 않도록 꾸준한 움직임이 필요합니다.
22살 마흐사 아미니가 숨진 이유 지난해 9월 13일,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한 여성이 갑자기 체포됐습니다. 여성의 이름은 마흐사 아미니. 당시 가족과 함께 테헤란에 있는 친척집에 방문하던 중이었습니다. 아미니는 '공공장소 복장 규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21세기에 '복장 규정 위반'이라니, 생소한 걸 넘어서 '뭔가 잘못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아미니는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아서 체포됐습니다. 히잡을 안 쓰고 있었던 게 아니라, 아미니가 착용한 히잡 아래로 머리카락이 너무 많이 드러났다는 이유였습니다. 체포 사흘 뒤인 9월 16일, 혼수상태에 빠졌던 아미니는 숨졌습니다. 당시 아미니의 나이는 22살이었습니다. 경찰은 "아미니에게 기저질환이 있었고, 이 때문에 사망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정말 아미니는 기저질환이 있었을까요? 유족의 말은 다릅니다. 가족들은 아미니의 머리와 팔, 다리에 구타 흔적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경찰의 각종 고문과 폭행으로 아미니가 숨졌다는 겁니다. 마흐사 아미니 22살 여성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수많은 의문을 남겼고, 곧 분노로 번졌습니다. 아미니의 사망 원인을 두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열렸습니다. 동시에 여성에게 히잡 착용을 강요하지 말라는 시위도 일어났습니다. 이른바 '히잡 시위'입니다. 시위는 주로 여성들이 이끌었습니다. 히잡 시위에 참석한 여성들은 히잡 속에 꽁꽁 감춰뒀던 머리를 보란 듯이 잘랐고, 히잡을 공개적으로 불태웠습니다. '나에게 히잡을 강요하지 말라'는 표현이었죠. 수개월간 이어진 히잡 시위는 반정부 시위로 확대됐습니다.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용기가 이란 전체를 흔들었습니다. 분노가 들끓을수록 이란 정부의 진압은 더 강경해졌습니다. 인권단체들에 따르면 이란 정부의 진압으로 550여 명이 숨지고 2만 2천여 명이 체포됐습니다. 정부의 강경한 진압에 시위는 점점 동력을 잃었고, 서서히 잊혀져 갔습니다. 아미니가 사망한 지 1년이 넘었습니다. 히잡 시위 역시 1주년을 맞았죠. 이란 정부는 히잡 시위 1주년을 맞아 다시 시위가 촉발할 것을 우려해서인지 아미니 유가족에 대한 감시 강도를 높였습니다. 비정부단체 쿠르드인권 네트워크는 이란 정부가 최근 몇 주 동안 아미니의 유가족을 갑자기 소환하거나 체포하고, 위협을 가했다고 밝혔습니다. 아미니를 추모하려는 최소한의 움직임조차 막은 겁니다. 정치적 수단이 되어버린 히잡 이쯤에서 한 가지 궁금해지죠. 이란 정부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또 왜 이렇게까지 히잡 착용을 강요하는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히잡은 '가리다(또는 격리하다)'를 뜻하는 단어에서 파생됐습니다. 이슬람 경전에는 '여성은 아름다운 곳을 드러내지 않도록 하라'라고 돼 있습니다. 남성을 유혹하지 않기 위해서 여성이 천 등으로 신체를 가리라는 겁니다. 히잡은 본인의 종교적 신념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도 쓰였지만, 남성이 유혹에 빠지지 않게끔 여성이 셀프로, 또 알아서 조심하라는 의미도 곁들여져 있었죠. 사실 이란 정부가 이전부터 쭉 히잡 착용을 강요해 왔던 건 아닙니다. 1979년 이슬람 혁명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히잡을 꼭 착용하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짧은 치마를 입어도 아무 상관이 없는 등 현재와 달리 꽤나 자유로웠습니다. 하지만 1979년 발생한 이슬람 혁명으로 모든 게 바뀌었습니다. '서구 문화 철퇴, 이슬람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혁명에 이슬람 신도임을 드러내는 히잡은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었습니다. 국가가 개인의 복장을 규제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4년 뒤인 1983년부터는 공공장소에서 히잡 착용이 의무화됐습니다. 히잡 착용을 강요하는 건 국가가 '개인에 대한 영향력'을 드러낼 수 있는 아주 쉬운 수단이었습니다. 길거리에서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여성에겐 태형 같은 직접적인 처벌이 가해졌습니다. 정부는 길거리에 지도순찰대라고 불리는 도덕경찰을 배치해 여성이 히잡을 제대로 착용했는지 감시했습니다. '히잡을 제대로 착용했는가'를 판단하는 주체는 국가였습니다. 기준도 국가가 정하고, 판단도 국가가 하고, 처벌도 국가가 했습니다. 개인의 선호, 자유는 고려되지 않은 채 말이죠. 히잡 자체가 여성에 대한 억압은 아니었지만, 국가가 여성에게 히잡 착용을 강제하는 것은 억압으로 작용했습니다. 핵심은 자기 결정권이 박탈됐다는 겁니다. 여성에게 히잡을 착용하지 않을 자유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선택도 불가능했습니다. 좋든 싫든, 개인의 의사가 무엇이든 간에 무조건적으로 히잡을 착용해야 했죠. 정부의 '히잡 착용 의무화' 선언 → 위반 시 처벌 의사 밝힘 → 처벌 피하기 위한 개인이 무조건적으로 히잡 착용 이 현상은 정부가 개인, 특히 여성을 어떻게 통제하는지를 보여줍니다. 통제를 강화해 국가의 정치력을 드러내려고 했던 겁니다. 도덕경찰의 부활 국가는 공권력을 이용해 개인에 대한 통제력을 높였습니다. 길거리에는 도덕경찰, 지도순찰대가 배치돼 여성들이 히잡을 착용했는지, 신체를 빈틈없이 가렸는지 감시하고 단속했습니다. '단속'을 앞세운 도덕경찰의 행태는 폭력적이고, 강압적이기로 유명합니다. 길거리에서 히잡을 착용하지 않은 여성을 보면 마구 구타하면서 승합차 안으로 쑤셔 넣기도 합니다. 납치인지, 경찰의 적법한 활동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입니다. 1년 전, 히잡 시위가 한창일 때는 이런 단속 활동이 잠시 완화되기도 했습니다. 히잡 시위가 반정부 시위로 번지고, 유혈사태가 발생하면서 히잡 강제 착용에 대한 온건한 목소리가 나오자 단속 활동을 줄인 겁니다. 이때 도덕경찰의 존립에 대한 논의도 급물살을 탑니다. 반정부 시위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번지자, 도덕경찰 폐지도 거론됐었죠. 폐지 위기에 처한 도덕경찰의 활동이 이때 상당히 위축됐습니다. 하지만 도덕경찰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반정부 시위가 서서히 동력을 잃고, 시위 규모가 축소되자 다시 활동을 시작한 겁니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지난 7월, 사이드 몬타제르 알메흐디 경찰청 대변인은 "공공장소에서 히잡을 착용하지 않은 여성을 단속하고, 이를 어기는 사람을 체포하는 활동을 재개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도덕경찰의 단속 범위는 더 넓어졌습니다. 이전에는 히잡 착용 여부만 감시했다면, 이제는 SNS 게시물도 단속 대상이 됐습니다. 히잡을 쓰지 않은 사진을 SNS에 게시하면 처벌받을 수 있게 된 겁니다. 도덕경찰의 부활과 단속 확대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경험한 정부의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란 정부가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SNS로 시위 영상이 실시간으로 공유되면서 시위가 더 강화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물리적인 공간에 함께 있지 않아도 연대할 수 있음을 확인했을 겁니다. 히잡을 착용하지 않은 사진과 영상을 SNS에 게시하지 못하게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마흐사 아미니 사망 1주기, 무엇이 변했을까 아미니가 숨진 지 1년이 지났습니다. 아미니의 죽음은 국제 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던졌습니다. 국가가 개인을, 여성을 어떻게 통제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낸 이 사건 이후, 많은 논의가 진전될 줄 알았습니다. 시위에 참가한 수많은 사람들도 같은 마음으로 변화를 기대했을 겁니다. 1년이 지난 지금, 이란은 어떨까요? 기대와 달리 이란 정부는 역행했습니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단속은 더 강화됐고, 악랄해졌습니다. 여기에는 기술의 발전이 이용됐습니다. 이란 정부는 스마트 감시 카메라, 쉽게 말해 CCTV로 여성이 히잡을 착용했는지 감시했습니다. 만약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이 CCTV에 적발되면, 벌금을 부과했습니다. CCTV로 어떻게 신원을 특정한다는 걸까요. 이란은 '생체 신분증 제도'를 도입한 국가입니다. 이 신분증에는 안면인식 기술이 이용돼 홍채, 지문, 얼굴정보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CCTV로 얼굴이나 홍채가 인식되면 이걸로 신원을 특정해 그 사람에게 직접 벌금을 부과하는 거죠. 도덕경찰의 단속 강화로는 부족했는지, 국가는 합법적이면서 더 강력한 여성 억압 수단을 만들었습니다. 이란 의회는 최근 〈히잡과 순결에 관한 법안〉을 제정했습니다. 이 법에는 공공장소에서 히잡을 쓰지 않는 등 복장 규정을 4번 이상 위반하면 최대 10년의 징역형이 처한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 돈으로 1천만 원의 벌금도 부과할 수 있다는 내용도 포함됐습니다. 조직적인 방식으로 외국 또는 적대적인 정부, 언론, 단체와 협력하여 복장 규정 위반을 조장하는 사람 역시 최대 10년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는 내용도 담겼습니다. 이 법안에 대해 UN이 '극단적 성차별 정책'이라고 비판했음에도 이란 정부가 제정을 강행한 겁니다. 이란 여성들은 더 대담해졌습니다. BBC는 '한 도덕경찰이 여성에게 다가와 히잡을 제대로 써달라고 요청하자, 여성이 고개를 높이 들고는 '꺼져'라고 대답했다'라고 보도했습니다. 국가의 부당한 억압과 통제에 복종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죠. 대규모 시위를 거치며 분노와 슬픔을 경험한 이란 여성들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히잡 착용 강요가 자신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함께 투쟁하는 문제라는 걸 알게 됐을 겁니다. 마흐사 아미니의 사망 1주기를 맞아 영국, 독일, 인도 등 세계 곳곳에서 시위가 열리기도 했죠. 공감을 넘어 연대를 경험한 여성들은 이제 주저하지 않습니다. 투쟁의 방식이 시위가 아닐지라도, 국가의 억압에 맞서는 일상에서의 불복종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란 여성들의 이야기가 어쩌면 우리에겐 너무 먼 이야기로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히잡 시위 역시 1년 하고도 더 많은 시간이 지나, 서서히 잊히고 있죠.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이란에 있는 누군가는 아주 평범한 자유를 갈망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투쟁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더 많이 가리지 않았다는 게 죽음의 이유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이들의 저항에 귀 기울여야 할 이유입니다. 디자인 : 김정연
지난해 1월 8일, 20대 여성 A 씨는 임신 31주 만에 태어난 아기를 변기 속에 방치했습니다. 숨을 쉬지 못한 아기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숨졌습니다. A 씨는 사실혼 관계인 40대 남성과 함께 지내다가 뒤늦게 임신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남성은 A 씨에게 낙태를 권했지만, 시기가 지나 낙태를 할 수 없었습니다. A 씨는 불법 낙태약을 복용했고, 임신 8개월 차에 조산했습니다. 2018년 11월 3일, 30대 여성 B 씨는 자신의 넷째 아이를 출산했습니다. 출산 이튿날, 집으로 데려와 아이를 살해한 뒤 비닐봉지에 담아 냉동고에 보관했습니다. 약 1년 뒤인 2019년 11월 20일, 다섯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다음 날, B 씨는 다섯째 아이를 살해한 뒤 냉동고에 보관했습니다. B 씨는 경찰 조사에서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더 많은 아이들을 양육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범행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지난 6월, 감사원의 감사로 ‘태어났지만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출산기록은 있지만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미등록 아동은 모두 2,123명. 병원에서 태어나 예방접종을 위한 임시 신생아번호는 받았지만, 출생신고로 이어지지 않은 아이들입니다. 사회는 이 아이들을 ‘유령 아동’, ‘그림자 아동’ 또는 ‘미등록 아동’이라고 불렀습니다. 보건복지부가 이들에 대해 전수조사한 결과, 249명(11.7%)은 이미 사망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생존 사실이 확인된 아이들은 1025명, 나머지 814명은 아직 오리무중 상태입니다. 앞서 언급한 B 씨의 자녀 역시 사망한 249명에 포함돼 있습니다. 이 통계에도 포함되지 않은 아이들이 있습니다. 병원에서 태어나지 않은 탓에, 임시 신생아번호조차 없는 아이들입니다. 통계청 인구동향자료에 따르면 매년 4백여 명의 아이들이 병원 밖에서 태어납니다. 실제로 2021년 출생아 26만 562명 가운데 462명은 ‘병원 밖 출산’이었습니다. 임산부들이 병원 대신 택한 출산 장소는 화장실, 고시원, 방 안이었습니다. 병원 밖에서 출산한 뒤 출생신고도 하지 않으면, ‘병원 밖 출산’ 통계에서도 빠지게 됩니다. 친부와 친모를 제외하고는 아이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겁니다. (친부마저도 모르는 경우가 있죠.) A 씨 역시 집 화장실에서 아이를 낳은, ‘병원 밖 출산’이었습니다. 친모를 향한 분노가 불편한 이유 태어난 아이들을 지키지 못했단 소식에 대중은 분노했습니다. 분노의 화살은 친모에게 향했습니다. 매일 아침 ‘비정한 친모’나 ‘무책임한, 자격 없는 엄마’라는 제목의 기사들이 쏟아졌습니다. 기사에는 ‘배 아파 낳은 자식을 어떻게 죽이냐’, ‘아예 낳지를 말지’라는 비난 섞인 댓글이 달렸습니다. 국회는 재빠르게 움직였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의료기관이 출생 사실을 지자체에 의무적으로 통보하도록 하는 ‘출생통보제’가 여야 합의로 상임위 소위를 통과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시스템적으로 미등록 아동이 생겨나는 걸 막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출생통보제 법안은 15년 동안 국회에 계류돼 있었는데, 이슈가 커지자 일사천리로 법안이 통과됐습니다. 하지만 친모를 ‘비정한 친모’라 부르며 악마화하는 것도, 뒤늦게 출생통보제 법안이 처리된 것도 답답하기만 합니다.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논의가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살해하는 영아살해는 분명한 범죄입니다. 처벌받아 마땅하죠. 그러나 임신한 여성들이 왜 ‘아이를 살해하게 됐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친모는 영아살해 전 ‘낙태’를 두드렸다 영아살해 가해자 즉, 친모들은 자녀를 양육할 수 없는 상태인 경우가 많습니다. 원치 않는 임신인 데다, 낙태는 불가능했고, 출산은 준비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때문에 이들은 영아살해를 저지르기 전, 대부분 ‘낙태’를 시도합니다. 아이를 변기 속에 방치해 살해한 A 씨는 임신 사실을 인지하고 산부인과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임신 후기라 중절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답을 받고는, 180만 원짜리 불법 낙태약을 구매해 복용했습니다. (해당 낙태약은 A 씨와 사실혼 관계인 남성이 인터넷으로 구매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두 아이를 살해한 B 씨 역시 출산 전 임신중절 수술을 알아봤습니다. 하지만 250만 원에 달하는 비용이 부담되자, 낙태를 포기하고 출산을 택했습니다. 4년 전 낙태죄는 폐지... 불법도 합법도 아닌 현실 지난 2019년 4월, 헌법재판소는 낙태죄 조항이 헌법에 합치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태아의 생명권보다 임신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더 우선한다고 판단한 겁니다.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낙태죄는 효력을 잃었고, 낙태는 더 이상 범죄가 아니게 됐습니다. 낙태죄 폐지로 여성의 자기 결정권, 임신중지권이 온전히 보장될 줄 알았지만 현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낙태죄 공백을 메울 입법 논의가 미비한 탓에 아직까지 임신 몇 주까지 낙태가 합법적으로 가능한 건지,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하는지 등 정해진 게 없습니다. 낙태죄는 폐지됐지만, 여전히 합법과 불법 그 사이 어딘가에 ‘애매하게’ 존재하는 겁니다. 여당은 임신 10주까지 낙태를 허용하자는 입장입니다. 서정숙 국민의힘 의원안은 낙태 허용 주수를 ‘임신 후 10주 이내’로 제한하고, 이후에는 임신부에게 건강상의 현저한 침해가 있을 경우에 제한적으로 낙태를 허용합니다. 반면 야당은 사실상 낙태죄를 모두 폐지하자고 주장합니다.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형법 개정안은 낙태죄를 전면 폐지하고 낙태와 관련된 처벌조항을 삭제하는 내용을 포함합니다. 또, 수술과 약물에 의한 임신중단을 모두 허용합니다. 여야 의견 차가 뚜렷하죠. 낙태 허용 주수에 대한 여야 의견 차는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좁히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4년 동안 공청회는 딱 한번 열렸는데, 이 한 번의 공청회마저 참석 의원들이 퇴장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여성의 임신중단권 보장은 제자리 걸음 국회가 제 할 일을 하지 않는 동안,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들에겐 범죄가 다가왔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출산은 임박해졌고, 합법적 낙태는 아득해졌습니다. 자신이 낙태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는 채, 속절없는 시간만 흘렀을 겁니다. 안전한 낙태 방법으로 알려진 먹는 임신중절 약물 ‘미프진’ 도입도 무산돼 임신 여성들에겐 선택지가 더 줄어들었습니다. 4년이란 시간이 있었지만, 여성의 임신중단권은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겁니다. ‘낙태 실패’도 아닌 ‘낙태 거절’을 경험하며,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고립됩니다. 임신 기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여성은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출산을 결정하게 됩니다. 누군가는 병원에서 아이를 낳은 뒤 출생신고를 하지 못하고, 누군가는 병원조차 가지 못한 채 길에서 출산하죠. 이 여성들은 출산 후 영아살해를 떠올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영아살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낙태죄 대체 입법을 서둘러야 합니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들이 영아살해를 고려하지 않게끔, 낙태를 법과 제도 테두리 안으로 들여야 합니다. 국회에서 통과된 출생통보제는 쉬운 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여성의 ‘출산’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출산을 가정한 제도는 출산 자체를 고민하는 여성들에게 명쾌한 해답이 되지 못합니다. 임신한 여성이 고립돼 영아살해로 내몰리지 않도록, 임신한 여성에게 출산 말고 새로운 선택지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미 늦은 만큼, 4년간 멈춘 논의를 하루라도 빨리 다시 시작해야 할 시기입니다.
하루 사이 가격이 600원대에서 1,100원대로 뛴 코인이 있습니다. 2배 가까이 뛴 폭등의 주인공, '리플'이라는 코인입니다. 국내 투자자들에겐 비트코인 다음으로 인기가 많습니다. 치솟는 가격 덕분에 리플은 비트코인, 이더리움, 테더에 이어 가상자산 시가총액 4위로 올라섰고, 다른 코인 가격들도 덩달아 올랐습니다. 무슨 일인데? 리플 가격이 폭등한 건 미국 법원의 판결 때문입니다. 지난 2020년 12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리플의 투자자금 모집 과정에 문제가 있다'며 리플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리플은 공모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은 불법 증권'이라며 '발행사인 리플랩스가 미등록 증권을 발행, 판매했다'고 본 겁니다. 반면 리플랩스는 '리플은 증권이 아닌 상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30개월의 소송 끝에 현지시간으로 지난 13일, 재판부는 리플은 증권이 아니라며 리플 손을 들어줬습니다. 뉴욕지방법원 아날리사 토레스 판사는 '발행사가 헤지펀드 같은 기관투자자에게 판매한 건 증권성이 있지만, 일반 개인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건 증권성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기관투자자에게 판 리플은 기업 자본을 조달하는 역할을 하지만, 개인에게 판매한 건 상품 판매라고 본 겁니다.
(23. 7. 13.) <앵커> 지난달 미국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년여 만에 가장 낮은 3퍼센트를 기록했습니다. 1년 전과 비교해 보면 3분의 1 수준입니다. 가파르게 치솟던 물가가 이제는 진정되고 있다는 이런 통계가 나오면서 미국의 긴축 정책도 곧 끝나는 거 아니냐는 기대 섞인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지난달 물가상승률이 2%대로 떨어졌는데, 한국은행은 이제는 물가보다 경기를 살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보고 오늘(13일) 4차례 연속 기준금리를 동결했습니다. 조윤하 기자가 전하겠습니다. <기자> 지난해 리터당 2천100원을 돌파하면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던 기름값, 현재 휘발유 1천500원대, 경유 1천300원대로 꾸준히 하락세입니다. 실제로 지난달 석유류 가격은 1년 전보다 25% 넘게 떨어졌습니다. 물가 걱정을 덜면서 한국은행은 경기 회복에 방점을 뒀습니다. 수출 부진, 내수 회복 지연에 하반기 성장률 전망은 1.6%에서 1.4%로 낮아졌습니다. 지난 2월부터 4번 연속으로 기준금리를 동결한 배경입니다. 새마을금고발 위기설 등 최근 일부 불안한 금융상황도 고려됐습니다. 또 이달 미국 연준이 금리를 인상할 경우 한미 금리차가 2%P로 벌어진다는 부담이 있지만, 그간 급격한 외국인 투자 이탈은 없었다는 판단도 작용했습니다. 4연속 동결에 시장에서 이제는 금리 인하 시점으로 관심이 옮겨가고 있지만, 이창용 한은 총재는 "연내 금리인하는 시기상조"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이창용/한국은행 총재 : 물가 목표인 2%로 물가가 충분히 수렴하는 과정에 도달했다는 확신이 들 때 저희들이 인하를 논의할 거고요. 아직 금통위원들이 금리 인하를 논의한 분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실제로 지표물가는 하락했다지만 소비자 체감 물가는 여전히 높습니다. 교통비 등 공공요금과 먹거리 물가 고공행진 때문입니다. [최영희/서울 강서구 : 옛날하고 비교하면 하늘과 땅이죠. 너무 비싸요. 뭐 사 먹지를 못해요. 뭐를 사려고 해도 옛날에는 그냥 팍팍 사서 먹었는데, 요새는 한참 고민했다가 (사요.)] [정동건/경기 과천시 : 학교 다닐 때에는 (교통비가) 한 달에 12만 원~15만 원 정도 나왔는데, 더 오르면 조금 부담이 될 거 같아요.] 지난달 사상 최대치를 기록한 가계부채도 불안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한국은행은 가계부채가 예상 밖으로 급격히 늘어날 경우 금리뿐 아니라 거시 건전성 규제로 대응할 거라고 밝혔습니다.
4월 17일, 인천 미추홀구에서 30대 여성 A 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세사기 피해자였던 A 씨는 집주인(‘건축왕’ 남 모 씨)으로부터 보증금 9천만 원을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앞서 14일에는 전세사기 피해자 20대 B 씨가, 지난 2월에는 보증금 7천만 원을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 30대가 극단적 선택으로 숨졌습니다. 벌써 3번째 죽음입니다. 전세사기에 스러진 청춘들을 애도할 새도 없이 또 다른 전세사기가 터졌습니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 인천 미추홀구에 이어 경기 화성 동탄에서도 전세사기가 발생했습니다. 무슨 상황인데? 화성 동탄신도시 일대에서 오피스텔 250여 채를 갖고 있던 집주인 부부가 최근 파산했습니다. 이들 부부는 세입자들에게 ‘세금 미납 문제로 전세보증금을 돌려주기 어렵다’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들은 주로 부동산을 통해서 전세계약을 진행했는데, 계약을 주도했던 부동산 역시 지난달 이미 문을 닫았습니다. 집주인은 ‘전세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으니 (오피스텔) 소유권을 이전해 주겠다’고 했지만, 세입자들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해당 오피스텔은 매매가가 전세가보다 낮은 역전세 매물이기 때문입니다. 세입자가 오피스텔 소유권을 떠안으면 2천만 원~5천만 원 손해는 물론, 집주인이 체납한 세금까지 부담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경찰에 접수된 피해 신고는 60건 가까이 되는데 피해 규모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서울, 인천, 경기 외에도 전세사기는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최근 대전에 다가구주택이 밀집돼 있는 도마동과 괴정동에서도 50억 원대 전세사기가 발생해 경찰이 수사에 나섰습니다. 앞서 부산에서도 80억 원대 전세사기를 벌인 30대 남성이 구속됐습니다. 전국이 전세사기 지뢰밭인 겁니다.
‘빌라왕’, ‘빌라의 신’ 등 여러 전세사기범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수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몇몇은 이미 숨졌고, 몇몇은 구속돼 수사를 받고 있습니다. 이들이 잡혀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법망을 피해 가는, 수사기관의 눈을 피해 가는 전세사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변종 전세사기’가 출몰한 겁니다. 예전엔 한 명이 수백, 수천 채를 소유했다면, 이제는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수백, 수천 명이 1~2채를 나눠 갖고 있습니다. 모두 세입자들에게 보증금을 돌려줄 여력이 없는 바지 사장들입니다. 무주택자인 척하는 바지 사장을 구해서 많게는 2채까지만 명의를 넘겨주고, 이들을 관리하며 모집책들은 리베이트를 받는 겁니다. 지금까지 연루된 바지 사장만 93명, 피해 주택은 전국에 152채입니다. (변종 전세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빌라왕-국] 9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같은 빌라로 두 번 사기 치는 ‘변종 전세사기범’ ‘변종 전세사기’ 바지 사장들은 전국에 빌라 152채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모두 전세사기에 이용된 빌라입니다. 그런데 취재진이 확인해보니, 이 중 32채는 또 다른 사기에도 쓰였습니다. 전세사기 일당이 빌라 한 채로 사기를 두 번이나 친 겁니다. 일당은 한 번 전세사기를 벌인 깡통빌라를 담보로 제3자에게 돈을 빌렸습니다. 하지만 바지 사장이 임대인으로 돼 있는 집에는 대부분 세입자가 직접 살고 있습니다. 세입자로부터 받은 전세금이 곧 빌라 매매대금이 되는 구조니, 빈 집으로 놔둘 수 없는 거죠. 그런데 일당은 세입자가 살고 있는데도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속였습니다. ‘세입자가 없다’면서 빌라를 담보로 돈을 빌린 겁니다. 세대주가 없으니 1순위로 돈을 돌려받을 수 있다고 말이죠. 일당은 주로 노인을 노렸습니다. 갖고 있는 현금이 많은 노인들에게 접근해서 ‘더 많은 이자를 줄 테니 돈을 빌려 달라’고 속였습니다. 취재진은 일당에게 돈을 빌려준 사기 피해자를 한 명 만났습니다. 서울 강북구에 살고 있는 70대 할아버지였습니다. 할아버지는 2년 전, 지인의 소개로 건너 건너 일당을 알게 됐다고 합니다. 빌라를 담보로 월 2%의 이자를 주겠다는 일당의 제안에 1억 2천만 원을 빌려줬습니다. 빌라에 누군가 살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합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일당이 할아버지에게 보여준 전입세대 열람 내역서에는 ‘세대주가 없다’고 나옵니다. '구 주소 열람하면 세입자 안 나와'... 정부 시스템 허점 노린 일당 전입신고까지 한 세입자가 버젓이 살고 있는데, 어떻게 ‘세대주가 없다’고 속인 걸까요? 이들은 정부 시스템의 허점을 파고들었습니다. 같은 집이라도 도로명 주소인 신 주소와 지번 주소인 구 주소로 전입세대를 열람할 때 결과가 다르다는 점을 악용했습니다. 신 주소로 열람하면 전입 신고한 세입자가 나오지만, 구 주소로 열람하면 세입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걸 노린 겁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집의 전입세대를 확인해 봤습니다. (저도 전입신고를 하고 살고 있습니다.) 우선 주민센터 직원에게 전입세대를 열람하겠다고 하니, 직원이 ‘구 주소와 신 주소로 모두 주겠다’고 했습니다. A4용지 두 장을 받았습니다. <서울 서대문구 서소문로>로 돼 있는 신 주소 열람 내역서에는 제 이름이 나오는데, <서울 서대문구 합동> 구 주소 열람 내역서에는 ‘세대주가 없다’고 나옵니다. 제가 멀쩡히 살고 있는데도 말이죠. 일당은 구 주소, 신 주소로 세대주를 열람한 뒤 돈을 빌릴 땐 ‘세대주가 없다’고 뜨는 구 주소 열람 내역서만 보여줬습니다. 피해자가 받아본 서류도 바로 이겁니다. 두 장의 서류를 따로 주니, 한 장(도로명주소)을 감추고 한 장(지번 주소)만 사기에 활용했습니다. 허술한 관리가 키운 사기 범죄 지난 2011년, 정부는 도로명주소를 도입했습니다. 이전까지는 동, 리, 지번을 활용했다면 2011년부터는 도로에 이름을, 건물에 번호를 부여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전입신고도 신 주소, 즉 도로명주소로 받았습니다. 이때부터 어떤 주소를 입력하느냐에 따라 세대주가 있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겁니다. 실제로 2011년 이후 지어진 주택은 구 주소로 입력하면 전입세대가 없다고 나옵니다. 보도 이후, 행정안전부는 개선책을 내놨습니다. 전입세대 확인서를 발급할 때 ‘도로명주소와 지번주소를 조회한 결과를 모두 확인해달라’는 안내 문구를 서류에 기재하기로 했습니다. 이전에는 동사무소 직원이 ‘도로명주소와 지번주소 조회 결과 두 장을 준다’고 구두로만 안내했는데, 서류 자체에 명시하기로 한 겁니다. 또, 전세사기에 전입세대 확인서를 악용하는 사례가 없도록 구체적인 제도 개선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했습니다. ‘변종 전세사기’ 일당은 시스템의 허점을 노렸습니다. 이미 전세사기를 친 빌라로, 또 다른 사기를 벌였습니다. 1차 전세사기 피해자는 대부분 20대와 30대, 2차 사기 피해자는 70대와 80대였습니다. 정부도 책임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이제라도 안내 문구를 추가로 기재하기로 한 건 다행이지만,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합니다. 전세사기 일당이 정부 대책을 비웃듯 ‘변종 전세사기’를 벌이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이들이 노릴 ‘허점’이 존재하지 않는, 빈틈없는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