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SBS 제희원 기자입니다.
비주류란 이유로, 마이크를 가지지 못했던 사람들의 스피커가 되는 저널리즘. "준혁이는 '딸 같은 아들'이었어요. 항상 어디 가면 제 손을 꼭 잡고 다녔죠. 초등학교 때인가. 길에 돌아다니는 자기 몸집만 한 큰 강아지가 따라온다고 집에 데려와서는 키우고. 길고양이도 보면 캔 사료 사서 꼭 먹여주고. 잔정이 많았죠. 사랑이 많은 아들이었어요." 사고 당일, 오후 5시 9분 사측이 준혁 씨의 어머니에게 보낸 사진. 사측은 의식 잃은 준혁 씨를 햇볕이 내리쬐는 장소에 방치했고 5시 30분쯤 119 신고 '사랑이 많았던 외아들'이 에어컨 설치 회사에 취직한 지 이틀째 되던 지난 8월 13일. 준혁 씨의 어머니는 현장팀장이라는 사람으로부터 한 장의 사진과 함께 '애를 데려가라'는 문자 연락을 받았습니다. 땡볕 화단에 쓰러져 누워있는 아들의 사진이었습니다. 팀장은 "평소 (아이에게) 정신질환이 있었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작업을 하던 급식실에서 땀을 뻘뻘 흘리던 준혁 씨가 밖으로 뛰쳐나간 지 이미 30분이 흐른 뒤였습니다. 사측은 그동안 119에 신고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준혁 씨의 어머니가 "당장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재촉하자, 그제야 동료들은 119에 신고했습니다. 폭염으로 전남 장성의 낮 기온이 34도까지 올랐던 날. 쓰러진 준혁 씨의 체온은 측정이 어려울 정도로 치솟아 있었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숨졌습니다. 출근 이틀째 숨진 아들... "물도 못 마시게 해" 준혁 씨는 삼성전자의 에어컨 설치 하청업체 유진테크시스템에 정규직으로 입사했습니다. 어머니가 주변 소개를 받아 권했던 일이었습니다. 준혁 씨 역시 향후 에어컨 설치 산업의 전망을 고려해 진로를 결정했습니다. 출근한 지 이틀째 되는 날, 건강했던 준혁 씨가 갑자기 쓰러진 겁니다. 출근 첫날, 준혁 씨는 친구에게 "땀을 2L는 흘린 것 같다", "죽을 것 같다"는 카톡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옷 속의 담배가 땀으로 다 젖어 종이처럼 찢어질 정도였습니다. 출근 이틀째, 준혁 씨는 담배가 젖지 않도록 미리 비닐에 싸가기도 했습니다. 준혁 씨는 사측에 '냉각 모자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업계 동료들로부터 다른 사업장에서는 체온을 식혀주는 '쿨링 모자'를 쓰는 곳이 있다는 걸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측으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쓰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고) 전날 준혁이가 퇴근하고 집에 와서 (작업장에서) 물을 못 마시게 했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왜 물을 못 마시게 했냐' 물었더니, (사측이) '너무 많이 (물을) 마시면 탈수 현상이 오니까 물을 못 마시게 했다'고…. 그 말을 했었어요." - 고 양준혁 씨 어머니 '엄마보물♥' 아들이 하늘로... 책임 미루는 사람들 故 양준혁 씨 평소 모습 / 유족 제공 아들이 하늘로 간 지 한 달이 다 되도록 어머니는 검은 상복을 벗지 못했습니다. 아들과 오순도순 둘이 살던 집 대신, 준혁 씨의 어머니는 광주고용노동청 앞에 마련된 아들의 분향소에서 매일 눈물을 쏟아야 했습니다. 하청업체와 원청사, 발주처인 전남교육청까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기 때문입니다. '삼성에어컨 설치 기사 20대 청년 노동자 폭염 사망사고 대책 회의'가 꾸려지고, 시민사회와 정치권 압박이 있은 다음에야 책임자들은 유족을 찾아와 고개를 숙였습니다. 준혁 씨가 일했던 유진테크시스템 대표이사가 분향소를 찾아 유족에게 "죄송하다"며 눈물을 흘렸고, 이 업체와 하청 계약을 맺은 삼성전자의 오치호 한국 총괄 부사장 역시 "이번 사고와 관련한 모든 조사에 임하겠다"며 "폭염 대비 대책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사건을 담당하는 박영민 노무사는 "신입사원이었던 양준혁 군이 입사 전후 '온열질환'에 대한 사전 교육이나 안내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현재 해당 하청업체에는 산업안전보건법상 위반 사항이 적발돼 과태료가 부과된 상태입니다. 사고 29일 만에 고개 숙이고... 길어진 여름 '온열질환' 급증 길어진 여름, 폭염에 고스란히 노출될 수밖에 없는 노동자의 건강권은 해마다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지만, '온열질환'을 대하는 자세는 여전히 안일합니다. 고용노동부 자료를 보면 최근 10년간 6월~8월 (여름철) 평균 기온은 24.2도로 평년(1991년~2020년) 대비 0.5도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000년대 평균 9.1일이었던 폭염일수 역시 올해에는 18.9일까지 늘어났습니다. 고용노동부 폭염 대비 가이드라인 강제성 없는 가이드라인... '폭염 사각지대' 곳곳에 정부도 폭염기 노동과 관련해 두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2022년 산업안전보건기준에 대한 규칙이 개정되면서 '폭염 노출 장소'에서 작업하는 근로자에 대해 사업주가 적절한 휴식을 보장하는 등 의무가 법제화됐습니다. 이를 지키지 않은 사업주는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형사 처벌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이 '적절한 예방조치'인지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고용노동부는 '폭염 단계별 가이드라인'을 해마다 배포하고 있지만, 권고 사항에 그쳐 이것을 위반하더라도 '처벌'받지 않습니다. 고용노동부 가이드라인 '뇌가 익는' 열사병... 사업주 감수성에 맡겨진 노동자의 건강 이진아 노무사는 온열질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온열질환은 노동자들의 건강을 단순히 위협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열사병의 경우, 제때 적절한 조치를 하지 못했을 때 치사율이 80%에 달하는 병입니다. '뇌가 익는다'는 표현까지 쓰는, 사람의 목숨까지 위협하는 치명적인 질환입니다. 노동부는 해마다 여름이면 온열질환 대비 각종 지침과 가이드라인을 발표하지만, 사실상 그 강제성이 부재합니다. '사업주의 감수성이나 문제의식' 없이는 폭염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할 방법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물, 그늘(바람), 휴식. 이 기본적인 원칙만 지켜져도 대부분의 온열질환은 예방할 수 있다는 걸 사실 사업주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업주는 '안전보건조치'를 제대로 이행하는 것을 비용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지요. 기후위기로 해마다 늘고 있는 '폭염 산재'를 고려해, 국회에서는 '폭염시 작업중지권 보장'을 강화하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기후 여건에 따라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에 위해를 끼칠 우려가 크다고 판단되면 작업 중지를 노동부 장관이 명령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골자입니다. 여기에 더해 노동자가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작업중지권의 요건을 '급박한 산업재해 위험'에서 '기상 여건 등으로 인한 사망·부상 또는 질병이 발생할 위험'으로 확대하고, 위험 여부가 불확실할 때는 노동자가 판단할 수 있도록 한 법안(양준혁 법)도 발의됐습니다. 이 법에는 쓰러진 직원을 119 구급대 등에 지체 없이 신고하지 않으면 최고 3천만 원의 과태료를 부과하는 내용도 포함됐습니다. "사진 찍을 시간에 119에 신고만 했어도 아들이 그렇게 고통당하고 죽지 않았을 텐데. 아직도 그 부분이 납득이 안 되어서 그게 제일 힘들어요." 고 양준혁 씨 어머니의 말입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열심히 일한 자'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 류현철 직업환경의학전문의는 온열질환에 대해 사후 처벌보다 '예방적인 관리'가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행정 당국이 기존에는 '장소적 개념'으로 좁게 규정하던 위험을, 예전보다는 폭넓게 인정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 예방과 관련된 조치가 '권고' 수준에 그치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라고 설명합니다. 단순히 '기상청 온도 지수에 따라 물, 그늘, 휴식 조치를 취한다'는 수준을 넘어서 노동자들이 스스로 작업을 중지하거나 사업주가 선제적으로 작업을 중단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미국 안전보건청 우리 몸은 고온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그에 대한 적응 반응이 일어나는데, 이걸 고온 순화라고 부릅니다. 이번에 숨진 양준혁 씨는 입사 이틀 된 신입사원이었습니다. 준혁 씨의 근무 시간은 첫째 날 오전 7시 45분부터 저녁 8시 30분까지 12시간이 넘었고, 둘째 날 역시 같은 시간 출근해 근무하다 오후 4시 40분쯤 쓰러졌습니다. 1년 전 이맘때 취재했던 "폭염 속 일하다 쓰러진 서른 살 청년" 역시 원래 했던 캐셔 업무에서 카트 이동 업무로 작업 환경이 바뀐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숨졌습니다. 몸이 더위에 적응할 시간을 주지 않으면 온열질환이 발생할 가능성이 더 높은 겁니다. 미국 OSHA, 온열질환 예방책으로 '신입 노동자 보호' 이 때문에 미국에서는 온열질환의 주요 대책으로 '신입 노동자 보호'를 제시합니다. 미국 노동부 직업안전보건청(OSHA)은 "온열질환 사망자 4명 중 3명이 '근무 첫 주'에 발생한다"고 경고합니다. 그렇기에 '물, 그늘, 휴식'이라는 포괄적인 원칙 외에도 '작업자가 더위에도 일할 수 있는 내성을 기를 수 있도록 점진적으로 작업량을 늘릴 것'을 해법으로 제시합니다. 예를 들어, 신입 직원은 일을 시작한 첫날 정규 작업량의 20%만 일하고, 힘들지 않으면 그다음 날부터 작업시간을 20%씩 늘리는 식입니다. 이 방식이라면 신입 직원이 폭염기 작업 환경에 완전히 적응하는데 최대 14일 이상 걸릴 수 있다고 OSHA는 설명합니다. 이 밖에도 작업자를 교대로 배치하거나, 교대 근무를 분할하는 등 열에 대한 노출을 최대한 줄이고 작업 부하를 간소화할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미국 안전보건청 한국에서 벌어지는 '폭염 산재'의 가장 큰 문제는 정부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열질환'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류현철 직업환경의학전문의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질병의 원인에 대해 병원체를 지목할 수야 있죠. 하지만 기후 위기 상황에서 '열사병의 원인'이 '뜨거운 태양열'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무책임한 것이죠. 그런 상황에 노출돼 일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고민하지 않는 '행정의 미비'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죠. 우리의 문화가 노동자 건강을 위협하는 위험이 있어도 스스로 작업을 중지하거나 중단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것도 생각해 볼 지점이죠. 사후 대응도 문제예요. 온열질환으로 인한 사고가 발생했을 때, '행정력이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비슷한 위험에 노출된 기업이나 동정 업계가 반응하게 되거든요. 단순히 '열사병'으로 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제도와 문화가 미비한 것이 노동자들을 자꾸 죽게 만드는 것이죠."
일본의 이주노동자 정책을 취재하기 위해 군마현의 반도체 관련 제조기업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이주노동자 정착을 돕기 위한 민간의 노력을 살펴보기 위함이었는데, 가장 놀랐던 점은 외국인 직원 가운데 육아휴직 중인 여성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스리랑카 출신인 28세 아힌사 니루마니는 2016년에 일본에 입국해 이 회사에서 2년간 근무했고, 남자 아기를 출산한 다음 10개월째 육아휴직 중이었습니다. 최근엔 그녀의 남편도 이 회사로 취직해 사내 부부가 됐는데, 육아휴직 기간에도 회사가 제공하는 기숙사에 머물며 아이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아들 시온과 함께 인터뷰에 응한 그녀의 답변에는 선입견으로 가득한 기자의 질문이 부끄러워지는 대목이 많았습니다. 공장을 둘러보는 내내 부끄러움은 저의 몫이었습니다. 이 회사 직원 120명 가운데 20명 정도가 외국인이었는데, 모두 정규직으로 고용되어 있었습니다. 같은 회사 안에서도 위험한 일을 외국인에게 시키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도 완벽한 편견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외국인의 산재 비율이 내국인보다 높다고 기자가 설명하자, 이 회사의 인사 담당자는 오히려 깜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1년만 쓰고 (외국인 직원을)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면 그렇게 할 수 없을 겁니다. 육아휴가제도 역시 일본인과 외국인 직원이 항상 동일하게 적용받습니다. '영주'하고 싶은 사람에 대해 회사가 잘 포착해서 반응하는 게 중요합니다." 임신 중이던 미등록 이주노동자, 강제 출국 후 유산 이 취재 경험을 다시 떠올리게 된 이유는 최근에 본 한 기사 때문이었습니다. 임신 중이던 태국인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단속 과정에서 부상을 입고 본국으로 강제 출국된 다음 유산했다는 기사였습니다. 이 여성은 경북 경주의 한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단속으로 담장을 넘다 발목을 크게 다쳤고 이후 자신이 초기 임산부인 사실을 알렸지만 적절한 조치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단속 하루 만에 출국 조처된 여성은 결국 태국 현지에서 태아를 유산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저출생으로 나라가 소멸할 위기라는 대한민국에서도 '인구에 포섭되지 않는 생명의 탄생'은 환영받지 못합니다.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입국하는 이주노동자의 연령은 대부분 20대에서 30대입니다. 이들은 보통 4년 10개월에서 최대 9년 8개월까지 한국에 머무는데, 이 기간은 생애주기상 결혼과 임신, 출산과도 맞물려 있습니다. 여느 내국인이 그렇듯, 생의 어떤 기간에 '노동'만 하고 사는 인간은 없습니다. 이주노동자 역시 우리나라에 와서 노동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가 가족을 꾸리는 일은 '사업주와의 갈등'과 맞서 싸워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국제인권법과 헌법은 가족과 함께 생활을 영위할 권리로서 가족결합권을 보장하고, 국가는 가족 생활에 관한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한편 그 권리의 실현을 제도적으로 보장할 의무가 있지만, 대한민국에 일하러 온 이주노동자들에게는 먼 얘기입니다. 고용허가제를 통해서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는 내국인과 동등하게 근로자로서의 권리를 보장받아야 합니다. 근로기준법 제74조는 '사용자는 임신 중의 여성에게 출산 전후를 통하여 90일의 출산 전휴 휴가'를 주어야 한다'고 못 박고 있지만, 현실은 잘 지켜지지 않습니다. <깻잎투쟁기: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과 함께한 1500일>의 저자인 우춘희 연구활동가는 "임신했다는 이유로 노골적으로 고용주가 해고하는 일은 드물지만, 이주노동자들이 고용된 사업장이 대부분 5인 미만 사업장이어서 정당한 이유 없이도 해고가 가능하기 때문에 이를 악용하는 사업주가 많다"고 지적합니다. 임신 기간 해고되지 않고 일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해고가 된 이주노동자는 3개월 이내 사업장 취직을 하지 않으면 출국 조치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임신과 출산의 이유로 새로운 사업장에 취직하지 못한다면 지역 고용센터에 '사업장 변경신청기간 연장신청서' 등의 서류를 제출하면 되지만 이 같은 제도를 이주여성노동자가 활용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우춘희 연구활동가는 "이주노동여성은 이주노동자라는 처지에 더불어 젠더적 차별이라는 이중 억압 상황에 놓여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국으로 온 결혼이주여성과 이주여성노동자를 분리해서 보는 시각도 여전한데, 결혼이주여성은 아이를 출산하고 가정을 꾸리는 존재로 '당연히' 인식되는 반면, 이주노동여성은 오롯이 '노동력'으로 취급되는 게 현실이라는 것이지요. "한국 출산율 높여주는 것도 아닌데"…임신 출산은 죄가 된다 대표적인 인력 송출국인 캄보디아의 경우 결혼 적령기가 늦어도 20대 초반입니다. 한국으로 이주하는 시기는 23세~24세가 많다고 하고요. 이 때문에 이미 본국에서 결혼을 한 경우도 있고 내국인 젊은이들처럼 SNS 등을 통해 만나는 등 다양한 루트로 연애를 하기도 합니다. 한국으로 일하러 온 이주여성노동자들은 '노동자'인 동시에 생애주기상 임신과 출산의 기로에 선 '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이 같은 현실은 고려되지 못합니다. 의료기관 접근도 어렵다…"임신과 출산은 후순위로 밀려" 대부분의 이주민들은 의료기관에 대한 접근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사업주가 선의를 베풀지 않으면 진료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기에 이주여성노동자들의 건강권은 더욱 제한적으로 보장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이주여성노동자들은 '노동력'으로 취급될 뿐 임신과 출산이 기대되는 존재들이 아니기에 이들에게 있어 임신과 출산은 어쩌면 '선택지'가 될 수도 없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공식 통계로 잡히지는 않지만 임신 중지를 강요당하거나 임신에 대한 고려 없이 고강도 노동을 지속해서 유산을 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는 것이 현장의 목소리입니다. 화성 향남공감의원을 통해 분만 의료비를 지원받은 베트남 출신 미등록 이주민과 그 아기. 사진 제공 : 공감직업환경의학센터 '국제수가' 문제 심각…"자연분만 비용 1,400만 원 청구" 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는 경우 의료비가 천문학적으로 치솟는 '외국인 국제수가'도 문제입니다. 지역 이주민과 소수자 등을 지원하는 화성 향남공감의원의 박슬기 원장은 "병원마다 매기는 게 값인 외국인 국제수가 때문에 임신과 출산 분야에서도 지원할 수 있는 사람이 너무나 제한적"이라고 말합니다. 건강보험 없이 출산한 베트남 출신 레티하 씨의 경우, 출산 전 아기의 항문이 막힌 것 같다는 진단으로 대학병원에 4일간 입원해 자연분만으로 출산했는데,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으면서 병원비가 1,490만 원 청구됐습니다. 내국인이라면 약 100만 원이었을 의료비의 15배가 나온 겁니다. 레티하 씨의 경우는 지역단체의 미등록 이주민 의료비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 울타리에 들어오지 못하는 이주노동자들이 '너무도 많다'는 게 박슬기 원장의 말입니다. 계층 따라 차별적으로 인정되는 '가족결합권' 더 본질적인 문제는 한국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의 '가족결합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일하는 이주노동자 가운데 가족결합권을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차등적으로' 나뉩니다. 현행 가족이민제도는 가족 구성원을 초청하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동반이 가능한 '가족'의 범위와 체류 기간 등 체류 조건이 달라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재원이나 주한미군 등 이른바 '상류 계층'의 경우 통상 배우자와 미성년인 미혼 자녀의 동반을 허용합니다. 실제 주한외국공관원의 경우, 동성 배우자도 동반을 허용한 사례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숙련 노동자에 해당하는 외국인에 대해서는 국내 출생한 자녀 외에는 가족으로서 동반할 수 있는 체류 자격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주여성노동자들에게 훨씬 더 높은 임신과 출산의 문턱을 고려할 때 사실상 저숙련 이주노동자들의 가족 결합 기회는 차단되고 있는 셈입니다. 정주국가로서의 매력이 떨어지는 나라 임신과 출산을 비롯한 이주민의 건강권을 '인권'이 아닌 '특혜'로 접근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지속되는 한 이주노동자들에게 한국의 매력은 더욱 낮아질 겁니다. 장주영 이민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이주민들이 내국인과 동일한 사회 보장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정부가 이들의 사회 보장을 위한 노력을 할 것인지 로드맵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이주노동자 이주노동자가 가족을 꾸리는 일, 그리고 임신과 출산을 결심하는 일은 지극히 개인의 상황과 선택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그러나 국가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제도적으로 가족의 탄생과 분리를 강제하고 차별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박슬기 원장은 이렇게 지적합니다. "부품 갈아치우듯이 이 사람이 가면 다른 이주노동자로 채우는 방식으로 언제까지 유지가 될 수 있을까요. 일상을 살아가는 존재로서 연애도 하고 가정도 꾸리는 생활이 있고 그걸 전제하는 노동이 있는 거잖아요. 저출생이라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화가 나죠. 임신 출산을 너무나 원하고 가정을 꾸리고자 하는 사람들(이주노동자)에 대해 그 권리를 아무렇지 않게 박탈하는 현실이잖아요. 이주민의 재생산권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사실 염치가 없죠." *참고 문헌 김지혜, <가족이민제도의 계층적 구조와 이주노동자의 가족결합권 제한 비판>, 법제연구, Vol. 58, 2020) 디자인 : 안준석
지난 9일 오전, 경남 고성의 한 조선소에서 하청 노동자 2명이 123톤 선박 블록 구조물에 깔려 숨졌습니다. 그중 1명은 캄보디아 출신 30대 이주노동자였습니다. 그로부터 나흘 뒤 부산의 조선소에서도 용접 작업 중 화재에 휘말린 베트남 국적의 30대 이주노동자가 숨졌습니다. 호황을 맞은 조선업의 부족한 일손을 채우기 위해 한국을 찾았던 외국인들이 연달아 목숨을 잃은 겁니다. 드러나지도 못하고 은폐되는 이주노동자 산재는 이보다 훨씬 많습니다. 한국 정부가 이주노동자 도입 규모를 확대하면서도 열악한 노동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지적이 줄을 잇지만, 정부는 아직까지 적극적으로 해결할 의지가 없어 보입니다. 숙소와 노동 환경 등 기본적인 처우도 내국인에 비해 열등하지만, 이주노동자들이 산재를 겪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도 고통이었습니다. 오늘 <더 스피커>에서는 '산재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위험의 최전선에 내몰린 이주노동자의 목소리를 담습니다. 12년 전 방글라데시에서 입국한 아지트 씨는 경기도의 한 금속 부품 공장에서 일한 지 8개월 만에 몸에 이상을 느꼈습니다. 금속 표면 깎는 일을 했는데, 날리는 쇳가루와 먼지가 눈에 보일 정도였습니다. 보통 11시간 작업 중 6시간을 그라인딩을 했고, 3시간은 사포로 금속 부품을 닦았습니다. 그럼에도 회사에서는 방진 마스크가 아닌 얇은 면 마스크만 지급했습니다. 입사 전 건강검진에서도 문제가 없던 아지트 씨가 얻은 병명은 '간질성 폐질환'. 광부들이 많이 걸리는 병인데 난치성인 데다 암으로도 악화할 수 있는 병입니다. 2년 만에 다시 만난 아지트 씨는 여전히 일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동안 폐 수술을 한 차례 했고, 후유증으로 일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폐 기능의 40% 정도를 잃은 상황. 병원비와 생계는 주변 이주노동자들의 십시일반 도움과 지원 단체에 기댔습니다. 유일한 희망은 산업재해로 인정받는 것이었지만, 2년 3개월 만의 심사 끝에 '불승인'됐습니다. 근로복지공단은 적절한 보호장구 제공 없이 유해물질이 많았던 작업 환경에 노출된 점 등을 종합해 업무와 상병 간 상당 인과관계를 인정하면서도 역학조사 결과 "누적된 금속 분진 노출량이 적고 본국에서 먼지로 인하여 원래 기침을 많이 했고 흡연력이 확인되는 점 등을 종합 고려해" 산재 불승인 판정 결정을 내렸습니다. 결정적으로 작업 환경 조사는 사측이 작업장을 새롭게 단장한 이후, 약 8개월이 흘러서야 이뤄졌고 금속 분진을 마시는 작업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사측의 진술 위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산재 심사 위한 '작업 현장 조사'부터 편향적" 사실 모든 산업재해가 승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나 직업성 질환, 그러니까 일을 하다 병이 생겼다는 것을 입증하기는 더 어려운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아지트 씨의 '불승인' 사례에서 주목할 부분은 발병과 노동 환경 간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명백한 증거들이 대부분 배척됐다는 데 있습니다. 해당 사건을 담당했던 권동희 노무사는 이렇게 지적합니다. "'간질성 폐질환' 자체가 입증하기 어려운 사건인 것은 맞아요. 그래서 근로복지공단 직업환경연구원의 업무상 질병 심의위원회에서도 세 차례 심의를 했는데, 위험 환경 요인은 모두 저평가됐죠. 하루 근무의 약 80% 이상을 금속 작업을 했다는 노동자 주장은 배척되고, 5% 미만이었다는 사측의 주장만 받아들였죠. 게다가 역학조사가 이뤄진 공장은 심지어 아지트 씨가 일했던 곳이 아니라 전혀 다른 환경의 옆 공장이거든요. 굉장히 업무량과 환경을 단순화해서 판단한 거죠. 외국인의 문제도 있죠, 사실. 외국인이다 보니, 이 사업장에서 더욱 배타적으로 산재 인정에 비협조적으로 나온 건 맞죠. 역학조사 갔을 때 공장 관계자들이 제 앞에서도 막 비웃었어요, '여태껏 아무 문제 없었는데 너만 걸려서 왜 난리냐'는 식으로. 만약 문제가 없었으면 그 사업장을 그대로 뒀겠죠. 문제가 있었으니까 지금 완전히 새 걸로 갈아치운 것이고요." 산재 불승인 이후 '해고 통보'…한국은 일하고 싶은 나라일까 아지트 씨는 현재 해고 통보를 받은 상태입니다. 사실상 일을 할 수 없어 빈털터리가 됐고, 가빠진 호흡과 병을 얻은 몸으로 본국에 돌아가기 막막해 한숨을 자주 내쉬었습니다. 아지트 씨를 돕고 있는 김달성 포천이주노동자센터 대표는 이주노동자들의 산재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업주들의 방해가 심해서 산재 신청하는 것도 참 힘들어 하는데 그걸 무릅쓰고 산재 신청을 힘겹게 했을 경우, 터무니없이 비상식적인 판정이 나올 경우 참으로 절망스럽죠. 마지막 믿을 국가가 우리를 보호해 주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 절망은 바닥까지 내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전체 산재 사망 사고 10건 중 1건은 외국인 지난해 산업재해 사고 사망 통계에 따르면 전체 산재 사고 사망자 812명 중 이주노동자 비율은 10.5%였습니다. 국내 노동자 중 이주노동자 비율이 약 3%인 것을 감안하면 산재 사망 사고 비율은 그보다 세 배 이상 높은 수치입니다. 특히 이들이 일하는 환경이 내국인이 기피하는 제조업과 건설업, 농업 등 위험 요인이 많은 곳인 점을 고려하면 드러나지 않은 산재는 더 많을 가능성이 큽니다. 여기에 더해 철저히 갑을 관계인 고용허가제 하에서는 외국인 노동자가 위험을 거부하기도 어렵고, 낯선 법 체계와 서툰 언어로는 산재 손해배상 제도를 활용하기도 쉽지가 않습니다. 고용노동부가 외국인 산재 발굴과 구제에 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산재 만인 사망률 줄었지만…외국인은 그대로 내국인은 지난해 1만 명당 산재 사망자가 줄어 통계 작성 후 처음으로 0.3대에 진입했지만, 이주노동자는 그대로입니다. 이주노동자의 산재 비율은 내국인의 6~7배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위험한 일을 많이 하니까 다치는 일도 많겠지만, 외국인은 아예 산재 신청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 정확한 집계조차 쉽지가 않습니다. 한국에 들어와 일하는 이주노동자는 130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이들 역시 다치지 않고 일할 수 있어야 하고, 다치더라도 보호받는 것이 당연한 우리의 이웃입니다. 디자인 : 권민재
세월호 참사 이후, 오래도록 거리를 뒤덮었던 구호는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이었습니다. 유가족과 시민들의 염원으로 진상 규명을 위한 3개의 위원회가 꾸려졌고 7년에 걸친 진상 조사 활동을 벌였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단일 재난을 다루는 '특별조사위원회'가 탄생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3개 위원회의 조사는 흩어진 사실을 복원하는 성과를 냈지만,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한 한계도 분명했습니다. 참사 이후 조사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는 세력이 안팎에서 진상 규명 활동을 방해했고, 그 사이 '음모론'이 그럴싸한 진실로 둔갑해 유통되기도 했습니다. 다시 돌아온 세월호 10주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세월호의 진실"이 무엇인지 답하기 어려워합니다. 다 같이 기억하는 세월호에 대한 '공적인 재난 서사'가 부재한 상황. 세월호 10주기를 맞아 제대로 고개를 들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사실의 조각'들은 쉴 새 없이 쏟아졌지만, 그 사실이 가리키는 구조적 맥락을 이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세월호를 둘러싼 여러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배경에는 '재난 조사의 실패'가 있습니다. 재난의 책임을 '인격화'하는 데 익숙해진 언론 역시, 특정인의 수사와 기소 여부에 비교적 높은 관심을 두고, 구조적 원인을 분석하는 조사의 쟁점을 검증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소홀했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제기한 많은 질문들을 우리는 왜 제대로 묻지 못하게 되었는가. 2015~2016년 세월호참사특조위 조사관으로, 2018년 선조위 종합보고서 집필진으로 참여한 박상은 씨를 인터뷰했습니다. Q. 세월호 참사가 10주기를 맞았는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의 진실을 묻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A. 세월호 참사는 굉장히 연관된 사람이 많고 사안이 복잡해서 사실을 나열하면 끝도 없어요. 사람들이 단순히 나열된 기사를 본 것만으로 답을 알 수가 없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 다 같이 기억할 수 있는 재난 서사를 공인하는 역할을 조사위원회가 했어야 하는데 그런 방식의 답을 내지 못했죠. 특조위는 아예 종합보고서를 내지 못했고, 선체조사위는 보고서가 2개로 갈라졌다고 하니까 보통 일반인들은 '아직 답이 안 나왔나 보다', '나중에 답이 나오면 읽어봐야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믿음들, 의혹들이 아직도 여전히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Q. 국가와 민간 차원의 세월호 조사 활동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셨는데, 세월호 참사의 구조적 원인은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A. 세월호 참사는 크게 두 국면으로 구성된 참사입니다. 침몰해서는 안 되는 배가 굉장히 좋은 날씨 속에서 급선회를 했고, 그렇다고 해서 넘어져서는 안 되는데 결국 넘어진, 침몰과 관련된 국면 하나. 침몰 이후에도 대피 조치가 잘 됐거나 해경이 유능하게 구조했다면 많은 사람들이 살아올 수 있었을 것인데 구조 실패 혹은 구조 방기라는 국면. 침몰과 구조의 국면 2가지 각각에서 구조적인 원인이 있는 거죠. 침몰 원인의 가장 유력한 가설, 즉 우리가 사실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은 핸들을 돌리면 유입 신호를 줘서 타가 돌아가도록 하는 '솔레노이드 밸브' 부품이 고착이 된 사실입니다. 이 부품이 고장 나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고, 그래서 경험한 선원들이 많이 없죠. 점검 항목 등에도 들어가 있지 않거든요. 그만큼 이런 일이 진짜 가끔 일어날 수 있는데, 설령 그래도 배는 넘어지면 안 돼요. 타가 말을 안 듣고 끝까지 돌아가면 배는 돌게 되는데 배가 그렇게 돌아도 옆으로 침몰을 할 이유는 없거든요. 그 상태로 그냥 떠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세월호는 굉장히 복원성이 나쁜 상태였기 때문에 옆으로 기울어서 점점 침몰했고, 수밀문이 열려있는 상태에서 물이 계속 빠른 속도로 들어찼기 때문에 배가 침몰한 것이죠. 여객선에서 수밀문을 안 닫는 것은 완전히 만연한 관행이었다고 파악되는데, 그런 관행이 만들어진 것, 복원성이 악화된 상태로 증개축을 하고 짐을 많이 실은 상태에서 배를 다니게끔 한 상황. 이것이 침몰의 핵심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 있겠죠. Q. 구조의 국면에서는 어땠나요. A. 해경과 해경 지휘부, 그리고 윗선인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까지 한국의 해양 구조 시스템은 제대로 된 구조 시스템으로서 그때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6천 톤급 세월호에 300여 명이 타고 있었고 그걸 구하러 간 건 100톤짜리 소형 해경정뿐이었는데, 그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죠. 훨씬 더 큰 선박이 왔어야 하고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법적으로 정해진 훈련도 해경은 하지 않았었어요. 원래는 200톤급 배가 근처에 있어서 골든타임 내에 갈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큰 배도 없었죠. 현장에 간 배들도 '이걸 다 구할 수 없다' 이렇게 생각을 하니까 교신 기록을 보면 굉장히 빨리 포기를 해버리거든요. '특수구조대가 와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본인들의 책임을 넘긴 거예요. 해경 조직 자체가 이런 방식으로 계속 운영이 돼왔던 역사적인 과정이 있는 거죠. 이게 구조 실패의 원인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침몰 원인 세월호 참사를 조사한 마지막 공적 조사위원회인 사참위는 팽목항에서 수습 과정과 유가족 사찰, 특조위 조사 방해 등 2014년 4월 16일 이후의 긴 시간까지 조사 대상으로 삼았으며, 종합보고서에도 상당 분량으로 이 결과를 담아냈다. 이에 비해 세월호 참사를 일으킨 역사적, 제도적 조사는 전혀 하지 않았고, 4월 16일 당일에 대해서도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했다. 외력설 입증에 경도된 조사 계획은 세월호의 복원성이 나빴다는 사실조차 언급하기 어려운 조직 내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사참위는 세월호를 외판의 큰 손상 없이 넘어뜨릴 만한 외력도 찾지 못했다. 침몰 원인은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것이 되었다. <세월호 참사 10주기, 재난 조사를 돌아본다> 중 발췌 Q. '세월호 조사의 실패는 조사위원회의 실패이자, 우리 사회의 실패'라고 정의했는데, 10주기를 맞아 재난 조사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조사위원회라는 건 원래 있었던 국가기구가 아니라 재난의 사후 조치,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시민의 요구가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기에 기존의 국가 기구보다 훨씬 사회의 목소리에 귀를 많이 기울입니다. 조사위를 만들어낸 것이 권력기관이 아니라 시민들이었다는 걸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거든요. 특조위 조사 방향이 혼란스러웠던 것과 선체조사위원회 활동 마지막에 외력설이 어떤 가설로 부각되는데 그것은 외부의 사회적인 목소리, 즉 의혹을 부각하는 방식이 굉장히 영향을 많이 줬다고 생각하고 그 상호 작용 속에서 조사위원회의 활동도 있었기 때문에 조사위원회의 실패를 우리 전체의 실패로서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또 하나는, 조사위원회에 들어갔던 '열몇 명의 위원과 백몇 명의 조사관들의 탓이다' 이렇게 하면은 너무 쉽죠. 다음 조사위에서는 더 좋은 사람들로 바꾸고, 법률가 비중을 줄이고 과학자를 늘리면 조사가 괜찮아질까? 성찰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말씀드린 측면도 있습니다. '조사와 수사가 뒤섞인' 한국의 독특한 재난 인식 일찍부터 사고조사위원회가 발전한 영미권과 달리 한국에서는 사고조사위원회 대신 검찰 수사가 그 공백을 메꿔왔다. (중략) 해외의 재난 조사가 기술적 조사와 사법적 조사를 분리하는 원칙을 채택하고 있었다면, 한국의 재난 조사는 사법적 조사가 기술적 조사를 포괄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검찰은 '대중의 이목'이 쏠린 재난에 한정해 현행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해 기속의 범위를 넓히고 형량을 높게 구형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수사기관의 유연한 대처로 구조적 원인 규명 요구를 일부 흡수할 수 있었는데, 이는 국가가 재난을 계기로 사회 시스템 전환의 요구가 부상하지 않도록 재난 서사를 통제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세월호, 우리가 묻지 못한 것> 2장 '우리는 왜 재난을 조사하는가' 중 발췌 Q. '조사와 수사의 분리'를 강조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법적 조사라는 건 이미 만들어진 법이나 매뉴얼, 규칙을 누가 어겼는지 혹은 무시했는지를 따져서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죠. 그런데 애초에 그런 시스템 자체가 없을 수도 있고, 개인이 문제가 아니라 관행이 그렇게 자리매김되었을 수도 있는데도 개인을 대상으로 그냥 '너 법 어겼지?', '너 매뉴얼 어겼지?' 해서 딱 몇 년 형씩 주고 하는 것 이상으로 사회의 문제를 밝혀내려면 조사와 수사가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수사는 딱 그 개인을 처벌할 수 있는 증거를 찾는 데만 특화될 수밖에 없는데, 조사는 훨씬 광범위하게 여러 질문을 할 수도 있고, 법과 매뉴얼이 부족한 지점은 무엇이었는지, 아니면 환경적으로 이걸 지키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다 조사할 수 있기 때문에 굉장히 필요하죠. 잘못된 방향으로의 선회를 보고도 눈감거나 억지로 정당화하는 데는 조사위원회 내외부에서 진영론적 사고가 강화된 탓도 있다. 세월호 참사를 조사한 세 조사위원회 모두, 구체적인 비율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여·야가 상당수의 위원을 각각 추천하도록 되어 있었고, 이렇게 추천을 통해 위원으로 임명된 이들은 추천 정당의 뜻에 따라 발언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세월호특조위에서 이 현상이 극심했는데, 때문에 선조위와 사참위에서도 모든 위원들의 발언이 진상규명에 대한 전문가로서 의견이라기보다 추천 정당의 뜻으로 왜곡되어 받아들여졌다. 국민의힘 추천 위원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이 곧 정의처럼 여겨지고, 근본적·구조적 원인을 밝히는 조사는 뒷전이 되었다. <세월호 참사 10주기, 재난 조사를 돌아본다> 중 발췌 '합법과 불법 구분 짓기'로 재난을 막을 수 있을까 Q. 워낙 충격을 준 사건이다 보니, 더 강력하게 법적인 처벌을 하면 재난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는 암묵적 믿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사'가 아닌 '수사'에 방점이 찍혔던 이유는 뭔가요. A. 특조위에 관여한 법률가 전원이 다 '법적인 처벌을 해야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조사위원회 내부에서도 '우리는 법적인 처벌을 위해서만 구성된 위원회가 아니다'라고 모두 얘기를 해요. 그런데 원래 일을 해왔던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법률가가 다수가 되면 어쩔 수 없이 그걸 따라가는 것 같아요. 조사관들이 올리는 보고서를 검찰 수사 보고서처럼 생각을 하고, 권고사항에 있어서도 재발 방지 대책을 권고할 수 있지만, 법적인 증거로 쓰일 만큼 굉장히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본인들도 생각을 하셨던 것이죠. 특조위에서 결국에는 나오지 못했던 조사 보고서가 있어요. 선내 대기 방송과 관련한 조사 보고서였는데, 진상규명소위원회에서 심의를 할 때 '이 정도 증거로 수사를 요청하는 건 불가능하다' 결국 통과하지 못해서 보고서가 사장된 경우도 있었죠. '아직 침몰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라는 호소가 10주기에도 반복된다. 원인 규명에 진전이 없다는 저 말은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세월호 참사 조사가 필요함을 정당화하는 호소일 수 있지만, 다른 많은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 세월호 참사 조사에 기대를 가졌던 이들도 계속된 조사가 소용이 있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조사를 바라지 않는 세력들은 이런 지점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세월호 참사 10주기, 재난 조사를 돌아본다> 중 발췌 Q. 세월호와 관련된 국가 책임에 대한 논의가 법적-정치적 책임에 집중된 반면, 제도적 책임에 대한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A. 다 아시겠지만 법적 책임은 법정에서 유죄로 선고받는 것이고, 정치적 책임이라면 정치인의 사과나 고위 선출직 혹은 임명직 고위 공무원들의 사퇴일 텐데 보통 이 두 가지 방식으로 우리는 책임을 물어왔죠. 그런데 국가가 어떤 책임을 진다는 것은, 국가는 사람이나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이기 때문에 국가가 시민들의 생명을 사고하는 방식, 즉 안전하게 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대책을 지속적으로 마련해 나가는 것이 제도적인 책임일 텐데 굉장히 모호한 구호로만 남아있고 정부가 세월호 참사 이후 어떤 방식으로 안전 대책을 추진하고 있는지 감시하는 일은 운동 진영에서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재난을 완전히 예방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국에서 최근에 일어난 많은 일들은 예방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유형의 재난이 많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고 그걸 보면 사회의 어떤 시스템이 망가져 있다, 운용이 되지 않고 있다는 걸 많은 국민들도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Q. 한국의 시민들이 사고조사위 활동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던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외국은 어떤가요. A. 후쿠시마 사고조사위의 사례가 있습니다. 대지진 이후에 핵발전소 사고를 규명할 여러 가지 조사위가 만들어졌고, 이들이 쭉 조사를 진행해 왔는데요. 결론적으로 이 조사의 결과로 처벌을 받은 사람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국민들에게 비판 요소가 된 측면이 있기는 합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조사의 방식이었어요. 도쿄전력의 가장 말단 노동자에게는 엄청나게 비밀을 유지하고 이 사람의 증언이 이후 해고로 이어지거나 법적 처벌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약속을 한 다음, 쓰나미가 와서 도저히 통제가 되지 않을 것 같은 순간에 본인이 어떻게 행동하려고 했는지 구체적인 증언을 들으려 했다는 거예요. 반면, 도쿄전력 사장이나 총리는 청문회에 세워 공개적으로 증언을 듣는 방식을 택했죠. 청문회를 전 세계적으로 송출하는 방식으로 공표하는 동시에 이 사람들이 책임자라는 것을 한 번 더 알리는 것이고요. 이후 해당 조사위의 권고가 정말 소용이 있었느냐는 부문은 논란이 있습니다. 다만, 조사위 활동 종료 후에도 조사 보고서를 읽을 수 있는 윤독회를 하기도 했다는 건 잘 기억할 사례인 것 같습니다.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가는 책임 Q. 법적 책임을 묻는 조사가 안전 업무를 담당하는 말단 공무원을 위축시킨다는 지적도 인상적이었습니다. A. 조심스러운 부분인데, 실제 재난을 예방할 수 있는 시스템이나 방안을 마련할 수 있는 사람은 말단 공무원이 아니라 훨씬 고위 공무원들이고 이 사람들은 법적으로 가면 잘 처벌이 안 돼요. 근데 재난 이후에 누군가는 처벌받았으면 좋겠다는 그 욕망을 계속 말단에 넘기거든요. 이 사람들은 법적으로 따지면 책임을 질 수 있단 말이에요. 일선에 서 있었던 사람들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방재 직렬의 공무원이 현재도 굉장히 기피 부서가 되어버렸죠. 방재 업무도 사실 숙련과 노하우가 필요한데, 이 분야의 전문성이 필요한 공무원이 부재하다면 그 피해는 또다시 국민들이 지는 것이거든요. 앞서 후쿠시마 사례처럼 일선에서 일하는 사람은 지키고, 책임을 위로 올리는 방식에 대해서 우리가 좀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계속 법정에서 '책임자를 처벌하라'라고 하면 사람들이 결국 '처벌 가능한 사람'을 계속 찾게 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잘 고민해 볼 필요가 있죠. Q.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우리나라 조사 사례도 있을까요. A. 재난은 아니지만 김용균 산재 사망 사건에 대한 조사위원회 활동을 참고할 만하죠. 당시 김용균 노동자가 숨졌을 때, 회사는 '우리가 시키지 않은 일을 한 노동자 개인의 책임이다'는 논리를 폈어요. 그러나 조사위는 보고서를 통해 구조적으로 계속해서 회사의 지시가 있었고 그렇게 일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노동자들이 놓여있었다는 걸 밝혀냈죠. 이 보고서가 나온 이후 아직 재판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검찰의 기소에도 영향을 줬거든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어떤 개인이 무슨 매뉴얼을 어겨서' 이런 방식으로 따진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노동시장 구조 속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라는 걸 조사위가 잘 밝혀냈고, 이것이 법정의 증거 자료로 쓰이냐 아니냐가 핵심은 아니었던 것이죠. 세월호 10주기, 재난 조사의 실패를 되짚는 이유 Q. 세월호 10주기, 우리가 기억할 교훈은 무엇이 있을까요. A. 두 가지에서 배워야 된다고 생각해요. '재난'이라는 실패 자체에서 배워야 하고, '재난 조사의 실패'에서 배워야 한다. 10년의 시간이 흐르긴 했지만, 처음의 기억을 떠올리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세월호 참사 직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윤리 혹은 일해 왔던 관행이 한국 사회의 위험을 만들어내는 데 영향을 준 것이 아닌가라는 성찰을 했죠. 그런데 어느새 시간이 흐르면서 '저 사람들이 잘못해서 이 참사가 일어났어'라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의 책임과 권력자들의 책임을 분리하는 모습이 나타났고요. 물론, 사회 권력을 쥔 사람들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 이 사회의 구조를 만들어낸 책임에서 완전히 면제될 수 없기 때문에 10년 전 그 마음을 떠올리는 것,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디자인 : 권민재
전세사기로 구속된 임대인들이 경매 전 단기 임대를 놓아 월세 수익을 벌어들이고 있다는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이런 임대인들의 수익활동이 법을 어긴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보증보험이 되어있지 않은 경우, 경매 전까지는 한 푼도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임차인들을 생각하면 이런 임대인들의 행태에 쉽사리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현실적으로 피해자들이 임대인들의 수익을 알기도 어렵고, 설령 알더라도 추징해 돌려받기까지 또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인천 건축업자 남 모씨가 소유한 주택에서도 이런 ‘단기 임대’가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인천 미추홀구에서 가장 많은 피해세대를 낸 임대인이 바로 남 씨였습니다.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대책위에 따르면 전체 피해자는 2,750여 가구, 피해액은 2,00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피해자 중 4명이 세상을 등졌습니다. 남 씨는 최근 1심 선고에서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항소했습니다. '단기 임대'로 얻은 수익은 다 어디로? 남 씨가 구속된 이후에도 단기 월세로 한 달 7~8천만 원이 넘는 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소문은 일대에서 예전부터 파다했습니다. 공식적으로 남 씨로부터 보증금을 돌려받았다는 사람은 1명도 없는 상황. 이 돈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했습니다. 제보 내용은 상당히 구체적이었습니다. 우선 남 씨 가족이 직접 한 달 수익이 평균 2천만 원 가까이 된다고 밝히는 음성 녹취가 존재했습니다. 남 씨의 가족은 “단기 임대를 직접 관리하려고 했지만, 단기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험한 경우가 많아 전부 남성으로 구성된 부동산에 의뢰해 일부 수수료를 주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신탁사 "임대차 계약 동의한 적 없어"... 세입자 2차 피해 우려 남 씨의 의뢰로 단기 임대가 이뤄지고 있는 오피스텔을 찾아가 봤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현재는 남 씨가 아닌 신탁사로 이미 소유권이 넘어간 상태인데, 신탁사 동의 없이 남 씨가 같은 방식으로 단기 임대를 놓아 상당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제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해당 건물 신탁사인 코리아신탁은 “해당 전월세 계약에 필요한 동의서를 내어준 적 없다”고 밝혔습니다. 신탁 동의서가 없는 모든 임대차 계약은 무효이기 때문에 세입자들은 법적 보호를 받기 어렵습니다. 신탁사를 대행하는 법무법인은 150여 명의 세입자들에게 이런 사실이 담긴 내용증명을 보낸 상태입니다. 이를 알지 못하고 해당 오피스텔에 월세로 들어온 임차인은 갑작스러운 퇴거 요청을 받은 상태입니다. 대부분 단기 월세이긴 했지만, 소액이나마 피해를 볼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한 법률 전문가는 "이번에는 신탁이라는 특징이 개입되어있긴 하지만 더 악의적인 방식이다. 불법인데 불법이 아니라고 임대인이 우기고 있다."라고 꼬집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방식이라면 얼마든지 고액의 전세 계약도 이뤄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해당 매물을 전문적으로 중개한 공인중개사는 “단기 렌털 개념이고, 정식으로 임대차 계약을 체결하지 않아서 불법이 아니다”고 항변했지만 이는 맞지 않는 설명입니다. 현재 임대인이 소유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건물에 신탁사 동의 없이 세입자를 들인 것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공인중개사가 이런 사실을 세입자들에게 정확히 설명하지 않고 단기 임대를 중개하고 있는 겁니다. 말하자면 ‘무권한자에 의한 신탁 계약’을 체결한 셈이고 세입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제3자에 월세를 내면서 ‘불법 점유’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건축업자 남 씨 측 해명..."불법 아니고, 피해자들 보증금 갚아줘" 남 씨 측은 기자에게 보낸 입장문에서 ‘형식적 소유권’이 신탁사에 있을 뿐 실제 소유권은 남 씨 측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원래 신탁 주택의 경우 실질적 소유자와 형식적 소유자가 따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임대차 계약은 반드시 신탁사 동의가 필요하고 이를 신탁원부에 기재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남 씨 측은 단기 임대 전 신탁사의 동의 여부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았습니다. 또 남 씨 측은 현재 원금과 이자 상환 능력을 잃었고 이로 인해 우선수익자인 은행도 손실을 보는 상황입니다. 설령 이 신탁주택에 대한 임대차 계약이 이뤄진다고 하더라도, 신탁이나 은행계좌가 아닌 임대인과 부동산이 지정한 제3의 계좌로 입금이 이뤄지는 일은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신탁 전세사기가 기존 집주인인 위탁자가 주택을 신탁회사(수탁자)에 관리만 맡겨놓은 것처럼 설명하고 본인의 주택인양 임대차 계약을 체결하는 데서 벌어집니다. 세입자는 이런 임대인 말만 믿고 계약했다가 ‘무권한자의 계약’으로 인해 아무런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수천만 원의 보증금이 걸려있지 않다고 해서, 퇴거 요청을 받은 세입자들의 상황이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건축업자 남 씨 측은 이렇게 번 월세 수익으로 피해자들의 보증금 회수와 피해대책위를 지원하는 데 썼다고 밝혔습니다. 남 씨 측은 보도 이후 기자에게 보낸 메일에서 “한두 세대씩 정상적으로 전환하면서 보증금이 높은 세대(예: 6천만 원)는 매월 일정액(300만 원씩) 반환하고 있습니다.(실례: ㅇㅇㅇ캐슬 xxx동 1xxx호외 다수)”라고 밝혔습니다. 더불어 “피해자 중 매입 세대는 반환금 부족분을 일부 지원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인천 미추홀구 피해자 대책위가 파악하고 있는 것 가운데 보증금을 전액 돌려받았다는 사람은 단 1명도 없습니다. 남 씨는 피해자 대책위가 아닌 사람들을 지원했다고 했는데 만약 남 씨 측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보증금을 돌려주는 기준은 무엇인지, 왜 이 과정에서 피해자 대책위와의 협의는 없었는지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남 씨 측이 공판에서 밝히겠다고 했습니다.) 또 남 씨 측은 누수 등 피해가 발생하고 있는 건물 수리 등에도 해당 수익을 썼다고 밝혔습니다. 건물 외벽이 떨어지고 천장에서 물이 줄줄 새는 주택에 살고 있는 세입자들이 진정으로 어디에 썼는지 궁금해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입니까" 남 씨 측이 보낸 메일에는 이런 내용도 담겨있습니다. 저는 이 메일을 읽고, 세상을 등진 4명의 피해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형적인 제도를 그대로 둔다면 이 땅에서 ‘전세사기’라는 이름의 지옥은 절대 사라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가 가해자입니까. 누가 피해자입니까. 저희야 사업하던 양반이니 그렇다 치고, 전혀 상관없던 세입자가 쫓겨나게 된 건 저희가 쫓아낸 건가요? 저희는 한 사람이라도 보증금 돌려받게 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보증금 줄이려고 했습니다. 부동산 시세가 급락하고 방해하는 업자들 때문에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지금도 주변에 집 한 채 갖고 있으면서 1~2억 원씩 내줘야 하는 집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역전세가 단순히 이곳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건설업계 전체가 살얼음판이지 않나요? 이 분들이 전부 사기꾼인가요? 건축업자 남 씨 측도 분명 억울한 측면이 있을 겁니다. 바지사장을 내세운 다른 ‘악덕 임대인’과 달리 도망가지도 않았으며, 역전세는 자신들의 과오가 아니라 부동산 경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발생했을 거라는 설명이죠. ‘재력가’라는 말을 믿고 마음껏 대출을 내준 은행과 한 사람이 수천 채의 집을 소유하고 그 보증금을 돌려막기할 수 있었던 구조. 그로 인해 평생 벌어보지도 못한 돈을 삶의 첫 출발선에서 빚으로 짊어져야 했을 사회초년생과 신혼부부들. 달리 말하면, 이걸 어떻게 ‘악성 임대인’ 몇몇의 잘못만으로 볼 수 있냐는 게 남 씨 측의 주장일 겁니다. 부동산 경기 등락과 관계없이 안전하게 보호될 수 있는 전세보증금 보호 장치, 세입자의 주거 불안을 임대인의 탐욕과 맞바꿀 수 없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 마련 없이는 이 땅에 전세사기는 뿌리 뽑기 어려울 겁니다. 특별법 상 피해자로 인정받은 사람만 약 1만 3천 명. 한 전세사기 피해자는 “버티고 있는 스스로가 오히려 죄인이 되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 당당히 묻는 임대인 측 물음과 선명히 대비됩니다. 오는 2월 28일은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자 첫 번째 희생자의 기일입니다.
한 개 이상의 방과 부엌, 독립된 출입구를 갖춘 곳을 한국 정부는 ‘주택’으로 정의합니다. 통계청은 주거 형태를 크게 ‘주택’과 ‘주택 이외의 거처’로 나눕니다. 고시원과 여관 등 숙박업소, 쪽방, 비닐하우스, 컨테이너 등이 주택 이외의 거처로 분류됩니다. 2022년 기준 ‘주택이 아닌 곳’에서 사는 가구는 총 44만 3,126가구, 5년 전보다 약 7만 3천 가구 늘었습니다. 지난해 통계청 주택총조사 결과를 보면, ‘주택 이외의 거처’에 거주하는 가구원은 182만 9,932명으로 1년 전보다 약 2.3%, 4만 1,632명 늘어나 4년 만에 반등했습니다. 집값 상승기와 맞물려 기존의 저렴한 주택에서도 소리 없이 밀려난 저소득층이 상당하다는 얘기입니다. 그중에서도 정치인들이 자주 찾는 쪽방은 한국사회 취약한 거처의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같은 쪽방촌 안에서도 쪽방으로 인정받지 못해 ‘쪽방 주민’이 받는 서비스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더스피커가 다뤄볼 주제는 ‘쪽방에 살지만, 쪽방 주민이 아닌 사람들’입니다. ‘주택이 아닌 곳’에 사는 사람, 4년 만에 증가 사실 ‘쪽방’의 법적 정의는 모호합니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으로 밀려난 도심 빈곤층이 정작한 곳을 쪽방촌이라 부르지만, 쪽방에 대한 공식적인 정의는 없습니다. 그나마 〈노숙인복지법〉에서 ‘노숙인 등’을 구성하는 항목에 ‘상당한 기간 동안 주거로서의 적절성이 현저히 낮은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정책적으로 분류하는 쪽방주민에 대한 정의와 가장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각 지방자치단체도 쪽방에 대한 정의를 뚜렷하게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쪽방에 대한 모호한 정의... ‘누가 쪽방 주민인가’ 문제는 모호한 정의로 인한 복지 서비스와 제도의 공백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누구를 쪽방 주민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하다보니, 존재하지만 누락되는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됩니다. 동자동 쪽방촌에서 12년을 옮겨 다니며 살다 최근 일 년 사이 두 번의 이사를 하게 된 70대 동자동 주민의 사연은 이렇습니다. 지난해 10월, 계약 기간이 남아있는데 주인이 집수리를 한다고 해서 이사를 했습니다. 평소처럼 쪽방 상담소에 동행식당 식권을 받으러 갔는데, 제가 이사한 곳은 쪽방 등록이 안 되어있어서 회원 자격이 박탈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나마 밥 한 끼 식당 가서 먹는 것이었는데 황당했습니다. (중략) 새로 이사한 건물 양 옆과 바로 뒤도 모두 쪽방이기 때문에 새로 이사한 곳도 쪽방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다른 점은 이 집이 화장실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다리가 아픈 저는 그동안 좌식변기로 된 공용 쪽방 화장실 이용이 어려워 집 안에서 용변을 해결했습니다. 화장실만 아니면 다시 쪽방으로 등록된 곳으로 이사를 해서 상담소에서 나눠주는 것들을 받아 생활에 보태고 빨래도 맡기고 싶습니다. - 70대 동자동 주민 이 주민은 결국 화장실이 있어도 쪽방으로 인정되는 곳을 겨우 찾아 이사했습니다. 다만 방 크기는 이전에 살던 곳의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그나마 생필품 등 지원을 다시 받을 수 있게 됐으니 다행이라지만, 위와 같은 사례가 비일비재하다는 게 이동현 홈리스행동 활동가의 말입니다. 쪽방에서 제외된 그 방 역시 여느 쪽방과 다르지 않은 형태입니다. 양팔을 다 뻗지 못할 정도로 작은 방 크기, 열악한 환경도 동일합니다. 어느 쪽방의 경우 화장실과 싱크대를 갖춰 원룸처럼 보이지만 쪽방으로 인정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들쭉날쭉한 기준으로 벌어지는 문제는 단순히 쪽방 상담소의 각종 혜택 여부에 그치지 않습니다. 향후 〈서울역 쪽방촌 주거 환경 개선을 위한 공공주택 및 도시재생사업 추진계획〉에 담긴 공공 임대 아파트 입주자격에서도 배제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단순히 지급되는 물건을 받고, 받지 못하고의 문제를 넘어서 향후 더 나은 주거에 대한 가능성과도 직결되는 겁니다. 밀집된 쪽방촌 중심 지원... ‘보지 않아 사라진 산재된 쪽방’ 서울시가 2017년까지 쪽방으로 인정하고 실태조사를 진행했던 전농1동 사각지대 쪽방 골목. 여인숙 비율이 높다. (좌) 여인숙이 변형된 쪽방. 여느 쪽방처럼 작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우) 같은 쪽방촌 내에서 쪽방 인정 여부가 달라지는 경우도 있지만 아예 동네 자체가 쪽방촌에서 제외되는 사례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서울 청량리역 인근 전농1동 지역입니다. 서울시 쪽방촌 실태조사 보고서에는 돈의동, 창신동, 남대문, 서울역, 영등포를 ‘쪽방밀집지역’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서울시는 2018년 뚜렷한 이유 없이 이 지역을 쪽방에서 제외했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 쪽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계속 존재합니다. 쪽방촌 지원은 대부분 쪽방상담소를 중심으로 이뤄집니다. 쪽방 거주자에 대한 지원 근거는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에서 찾을 수 있는데 현행 제도 하에서는 쪽방상담소가 설치된 지역의 거주자만 동법에 의한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쪽방상담소는 ‘노숙인복지법’ 제16조에 의거해 서울 5개(영등포, 서울역, 돈의동, 남대문, 창신동), 부산 2개(동구, 부산진구), 인천, 대전, 대구에 각 1개 설치되어 있고 2021년 기준으로 10개 쪽방상담소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상자 수는 5,448명이었습니다. 문제는 쪽방과 유사한 환경에 사는 인근 고시원과 여관, 여인숙 등은 이런 지원 대상에서 모두 빠져있고 쪽방상담소에서도 인력 등 한계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국토교통부의 주거실태조사에서 현재 거처를 쪽방으로 인식하는 가구는 78,417 가구였던 것에 비교해 봐도 ‘사각지대’라기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복지 서비스에서 비켜나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약자 동행’이 아닌, ‘약자 배경’이 된 복지 서울 대학동 이동현 홈리스행동 활동가는 이런 상황이 단순한 복지 수급 불균형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서울 전농동처럼 쪽방에서 제외됨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쪽방촌의 경우 전기와 화재 설비 점검을 벌이는데 행정에서 이 동네를 쪽방에서 제외시키면 이런 점검에서도 누락이 되는 거예요. 구로동이나 양평역 근처 벌집도 사실 쪽방과 똑같은 형태이거든요. 고시원이 많은 대학동도 마찬가지고요. 쪽방촌과 한 30초 거리에 있는 고시원도 '쪽방'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거예요. 그곳은 '고시원'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죠. '쪽방 주민'으로 인정받고 싶으면 쪽방으로 가라는 건 개개인의 특성이나 거주 이전의 자유를 무시한 결과죠. 약자가 배경이 아니라 진짜 약자와 동행을 하겠다는 것이라면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없잖아요.” 서울시는 “쪽방의 경우 수익성이 높기 때문에 주택이나 근린생활시설 소유주들이 불법 개축을 통해 쪽방을 양산해 내는 부작용을 막고자 지난 10년간 신규로 쪽방을 지정하지 않고 있다”는 입장입니다. 또 “쪽방 건물을 추가로 지정한다고 해서 예산이 그만큼 비례하여 늘어나는 것은 아님”이라는 입장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동현 활동가는 “서비스 대상자가 늘면 당연히 지원 예산도 늘어야 되는 게 맞거든요. 마치 총량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식으로, 지원 대상이 늘면 지원 서비스가 하향 평준화된다는 식의 이야기는 지자체의 ‘의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고요. 이런 행정의 소극적인 태도가 제도의 사각을 만드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정책 대상을 포괄할 수 있는 '쪽방 규정' 필요 국내 쪽방과 유사한 미국의 SRO(Single Room Occupancy)의 정의는 한국보다 단순하고 유연해 다양한 유형의 주거 형태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뉴욕시 조례는 SRO를 물리적 형태가 아니라 거주자가 공간을 점유하는 방식으로 규정하는데, 이렇게 되면 단순히 화장실의 유무, 공간의 평수를 넘어선 다양한 형태의 ‘쪽방’을 제도 안에 포섭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참고해 우리도 쪽방을 ‘취약계층이 주로 거주하는 쾌적한 주거 생활 유지에 필요한 환경과 시설을 갖추지 못한 좁은 거처’로 정의하자는 제안이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나온 바 있습니다. 지역에 따라 쪽방의 형태가 다양하기 때문에 물리적 특성 등 획일적인 기준으로 정의하기보다 정책 목적에 따라 유연한 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입니다. 또 기존의 쪽방촌이 포함하지 못하는 고시원, 여인숙, 여관 등에 거주하는 주거취약계층에 대한 포괄적인 접근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주거복지 강화 측면에서 사각지대 쪽방 발굴과 지원을 강화하려는 노력이 더해져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습니다. 정치인들은 잊을 만하면 쪽방촌을 찾아 쪽방 주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갑니다. 진짜 약자 복지는 ‘약자를 배경으로 삼는 복지’가 아닌, 이들의 존재를 제대로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최근 5년간 다주택자 1천 명이 4만 4천여 채의 집을 사들였다는 통계와 ‘주택 이외의 거처’에 사는 사람이 다시 늘고 있다는 통계는 한국사회 ‘집’을 둘러싼 불평등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노동부 출입 당시 한 간담회에 초대받아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부끄럽지만 그나마 산재 문제에 관심이 많은 기자로 불려 간 자리였습니다. “왜 언론은 어린이나 청년의 죽음에는 관심이 많으면서 한 가장의 죽음은 잘 다뤄주지 않나요?” 그는 60대 건설 노동자의 죽음도 충분히 한 가정을 파괴하는 비극적인 일인데, 왜 이렇게 언론은 무관심하냐고도 물었습니다. 혹시 광고주의 압력이나 데스크의 압박이 있어서 그런 거냐고, 정말 이유를 알고 싶다는 눈빛으로 물어보던 그에게 뭐라 대답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는 4년 전 부산 경동건설 신축 공사 현장에서 추락해 숨진 고 정순규 씨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생업을 접고 ‘단 한 번도 사과하지 않은’ 경동건설을 상대로 싸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60대 건설 노동자의 죽음을 비롯해 하루가 멀다 하고 반복되는 산재가 뉴스가 되지 않는 이유가 뭘까. ‘산재한 산재’에 대해 노동 담당 기자조차 무뎌져서 그런 것 같다는 말을 그날 그 자리에선 차마 내뱉지 못했습니다. 얘기되는 죽음과 그렇지 않은 죽음을 나도 모르게 평가했던 지난날에 대한 반성도 있었습니다. 고 김용균 그 이후, ‘위험의 외주화’ 얼마나 나아졌나 오는 10일은 5년 전 태안화력발전소 하청노동자 고 김용균 씨가 컨베이어벨트를 점검하다 몸이 끼어 숨진 지 5년이 되는 날입니다. 김 씨의 죽음은 한국 사회 ‘위험의 외주화’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냈고, 그 뒤 ‘일하다 죽지 않을 권리’를 외치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중대재해처벌법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럼에도 정치권에서는 2년간 유예한 50인 미만 사업장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을 또다시 유예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50인 미만 중대재해처벌법, 또다시 적용 유예? 중대재해처벌법은 ‘사업주와 경영책임자 등의 안전 및 보건 확보의무’를 지우고 이를 어길 경우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10억 원 이하의 벌금을 물리는 내용을 골자로 합니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됐지만 산업 현장의 준비 부족 등을 이유로 50인 미만 사업장은 2년을 추가로 유예해 2024년 1월 27일부터 적용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중기부 출입이었던 저는 천안의 한 중소기업을 찾아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둔 중소기업의 고충을 취재하기도 했습니다. 대기업처럼 안전보건 예산 마련 자체가 어렵고, 고용노동부의 중처법 가이드라인이 모호해 법을 지키고 싶어도 지키기 어렵다는 하소연도 있었습니다. 김기문 중기중앙회 회장은 “50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에 대해 준비 시간을 주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결정”이라며 “현장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중대재해처벌법을 시행하면 소규모 사업장은 기업 운영을 포기하거나 범법자만 양산될 우려가 높다”라고 호소하기도 했죠.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또다시 흐른 겁니다. 전체 사업체 중 1.2%만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아래로 고이는 위험 하지만 이미 중대재해의 80% 이상이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이 법의 적용을 다시 유예하겠다는 건 산재를 줄이겠다는 법의 취지를 크게 후퇴시키는 일이라는 지적도 나옵니다. 전체 사업체의 98.8%가 50인 미만 사업장이라는 사실, 다시 말해 중대재해처벌법의 적용을 받고 있는 사업장은 1.2%대에 불과하다는 현실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난 10년간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산재로 숨진 노동자가 12,045명이고, 특히 최근 3년간은 전체 사고 사망의 80%, 중대재해의 80%가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법 제정 당시를 포함해 3년의 유예기간이 주어졌음에도 준비를 못했다는 것은 사실상 준비 부족을 핑계로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적용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깔린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처법 제정 이후 정부는 중대재해처벌법 제정과 관련해 중소기업에 대한 다양 예산을 지원해 왔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안전투자 혁신사업’으로 2020년 4,198억 원이던 예산을 2023년 1조 1,987억 원(자료:민주노총)으로 확대 집행했습니다. 문제는 이 예산의 대부분이 단기성, 일회성 지원 예산으로 쓰여 컨설팅 기업의 1~2회 방문상담에 그쳤다는 겁니다. 공동안전관리자 선임 등 법을 잘 적용할 수 있는 고민은 노동계에서는 안전관리 전문 인력에 대한 비용 부담을 낮출 수 있는 공동안전보건관리자 제도 등의 도입을 요구해 왔습니다. 규모가 작은 중소기업 특성상 한 기업에 한 안전관리자를 무조건 채용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 이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정부가 일정 예산을 지원하고, 1명의 전문가가 여러 개 사업장을 맡아서 공동으로 관리를 하는 방식입니다. 단기성 컨설팅에 그치는 것보다 공동안전관리자를 선임하는 것이 실제 안전 효과 측면에서 사업주도 노동자도 모두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고 김용균 씨와 같은 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인 김영훈 한전 KPS비정규직지회장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김 씨가 일하고 있는 한전 KPS 하청업체 역시 직원이 13명으로 50인 미만 사업장입니다. 중대재해처벌법 유예를 요구하는 주장에 대한 생각에 대해 김 씨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김용균을 기억하는 다섯 번째 겨울, 5주기를 맞아 열린 특별 전시회의 이름은 ‘유감’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산재 사고가 일어나면 책임자들은 ‘유감스럽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습니다. ‘유감’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하거나 불만스럽다”는 뜻입니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 잘못했다거나 반성한다는 말 대신 책임을 미루기 위해 여전히 한국사회에선 습관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글의 첫머리에 언급했던 경동건설 산재 유족 정석채 씨에게도 중대재해처벌법 유예에 대한 생각을 물어봤습니다. 정 씨의 아버지 역시 하청 노동자였습니다. “정부나 기업이 중대재해처벌법 없이 산업안전보건법으로 처벌이 가능하다는 건 거짓말입니다. 여전히 신고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중대재해처벌법을 무서워하는 기업이 여전히 많습니다.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을 소모품으로만 바라보고 죽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기업이 존재하는 한 중대재해처벌법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방송 스타일리스트로 일했던 정석채 씨는 경동건설을 상대로 한 투쟁을 병행하면서 ‘다녀올게’라는 이름의 영화 제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가족을 잃은 사람의 마지막 인사가 대부분 ‘다녀올게’ 였어요. 더 이상 ‘다녀올게’가 누군가의 작별 인사가 되어서는 안 되잖아요.” 디자인 : 김정연
올해 2월 국회에서 열린 깡통전세주택 공공매입 추진 토론회에서 한 청년이 물었습니다. "집이 경공매로 넘어가면서 세입자들이 거리로 쫓겨나고 있습니다. 정부가 경공매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정부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현행 제도로는 중단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방법이 없다는 말을 되풀이하던 정부 담당자에게 그 청년은 더는 되묻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흐른 날, 그 청년은 '정부 대책이 실망스럽다. 더는 버티기 힘들다. 저의 이런 결정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으면 좋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숨졌습니다. 그 후에도 두 명의 청년이 세상을 등진 뒤에야 대통령은 경공매 중단을 지시했습니다. 전세사기 특별법 6개월... 피해 인정 9천 명 "여전히 악몽 속에 살아" 2023년 6월 1일 제정된 전세사기 피해 지원을 위한 특별법은 이런 피해자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현재까지 인정된 피해자는 9천 명 안팎, 올해 말이면 1만 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인정받은 피해자의 71.4%가 이제 사회에 갓 발을 뗀 20~30대였습니다. 특별법 시행 6개월 만에 피해자로 인정받은 사람이 9천 명에 달한다는 사실은 이 문제가 역대 정부가 함께 만들어 낸 사회적 재난이라는 걸 보여줍니다. 피해자 1명이 1인 가구라면 9천 가구, 2~3인 가구라고 보면 전세사기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규모는 훌쩍 커집니다. 등기의 공신력 부재, 임대인-임차인 간 정보 비대칭, 불합리한 채권 우선순위, 국가가 공인한 공인중개사의 책임 부재가 한데 모여 전세사기는 판을 키웠지만, 정부는 여전히 피해 예방에 사실상 손을 놓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피해자로 인정받은 다음에도 제대로 된 구제를 받기 어렵다는 겁니다. 지금의 특별법은 '빚에 빚을 더하라'는 식이어서 보증금 피해를 입은 피해자에게 실질적인 구제책이 되지 못한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LH 피해 주택 매입 0건.. '반쪽짜리 특별법' 보완은? 전세사기 특별법은 만들어질 때부터 '반쪽짜리 법률'이라는 비판이 많았습니다. 피해자들의 핵심 요구였던 공공의 보증금 반환 채권 매입을 통한 '선 구제 후 회수' 방안에 대해선 검토조차 할 수 없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여야는 법을 만들 당시부터 6개월마다 점검과 추가 보완을 약속했습니다. 다음 달 1일이면 약속한 6개월이 다가오지만 국토부와 정부는 아직 별다른 후속 입법 계획을 발표하지 않고 있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피해자가 속출할 때는 전세사기를 '사회적 재난'으로 규정했지만, 여전히 '사인 간의 거래'로 치부하는 정부의 인식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입니다. 그나마 반쪽짜리 특별법의 핵심 구제방안이었던 LH의 피해 주택 매입 및 임대주택전환 역시 한 건도 이뤄지지 않은 걸로 나타났습니다. '피해자 요건 개선' 필요, '사기 의도 요건' 보완해야 특별법에 대한 개정 요구는 이런 방향으로 정리됩니다. 우선 피해자 요건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전세사기 피해를 당했더라도 피해를 증명하는 단계가 너무 까다롭다는 거죠. 보증금 요건을 없애거나 5억 이상으로 상향하고, 전세사기 의도를 피해자들이 입증하기가 어려운 만큼 사기 의도 요건도 삭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사각지대로 몰려있는 신탁사기 피해자 등 보다 폭넓은 피해 인정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피해자들에 대한 구제 방안은 어떻게 손봐야 할까요? 기존 특별법이 대부분 금융 지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이마저도 조건이 까다로워 받기가 어렵다고 피해자들은 입을 모읍니다. 대표적으로 주택도시기금의 '전세사기 피해자 전용' 디딤돌 대출의 경우 8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하고 지역별 최우선 변제금을 제외한 금액만큼만 대출되는 등 한계가 명확합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 중에서 비주거용 오피스텔 등 준주택, 불법건축물에 거주하는 이들은 전혀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현재의 피해 구제책이 보증금 회수보다 대출에 의존하고 있어서 이중 삼중의 고통인 상황인 것이죠. "선순위 부실채권, 공공이 매입해야"... 향후 자금 회수도 가능 임재만 세종대 교수는 금융기관 선순위 부실채권과 임차인 보증금 반환 채권 매입을 통해 피해자를 구제하는 방안을 제안했습니다. 주로 금융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선순위 부실채권을 공공기관인 캠코가 할인 매입해 경매권 실행만 유보해도 해당 주택의 임차인이 계속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보증금 반환 채권 역시 캠코나 허그가 매입해 경매권 실행을 일정기간 유예해 주면 임차인이 해당 주택에 계속 거주할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습니다. 금융기관의 선순위 부실채권 할인 매입 방식은 정부의 재정이 추가로 소요되는 방안이 아니라는 것도 중요한 쟁점입니다. '사인 간의 거래'에 정부 재정을 투입할 수 없다는 논리를 반박할 수 있는 것이지요. 금융기관 부실채권을 정리하는 전문기관인 캠코가 부실채권 인수에 필요한 자금과 경비는 이후 경매를 통해 전액 회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공공의 이러한 노력으로 경매권 실행을 유예하면 피해임차인의 주거 안정 도모 효과가 큽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법이 보호해 줄 거라 믿었는데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냐'고 묻고 있습니다. 임차인의 주거권과 재산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법, 한 임대인이 세입자 보증금으로 집 수백 채를 소유할 수 있었던 제도, 이들을 믿고 대출을 실행해 준 은행, 이런 집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며 소개한 국가가 공인한 공인중개사…. 대규모 세입자가 거리로 내몰리는 불행한 역사는 2023년 대한민국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참고 자료 : 한국도시연구소, <전세사기 깡통전세 피해가구 실태 조사> 자료집, 전세사기 깡통전세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대책위원회,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 설명> 자료집 디자인 : 김정연
두 달 뒤, 전세 계약이 만료되는 A씨는 최근 임대인이 전세사기 범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혹시 몰라 전세반환보증보험에 가입해 뒀지만, 이마저 돌려받기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에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허그에서 보증금을 반환해 줄 때 ‘임차권 등기 명령’을 필수로 요구하는데, 이전 세입자가 먼저 임차권 등기 명령을 신청했기 때문입니다. 민법상 일물일권주의, 즉 한 물건에 두 개의 물권을 중복해 설정할 수 없다는 원칙 때문에 법원과 등기소에선 A씨와 같은 현 세입자의 임차권 등기 명령을 중복으로 받아주지 않고 있습니다. 서울 임차권 등기명령 1년 새 600% 증가.. 세입자 간 갈등도 취재 과정에서 만난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전세사기를 당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총동원했지만 사기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사 당일까지 등기부 등본, 집주인의 신분증과 체납 내역까지 확인했지만 임대인의 사기 의도를 사전에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임대인과 연락이 끊긴 직후, 불안한 마음에 매일 떼본 등기부 등본에 이전 세입자가 선순위 권리자로 올라와 있는 사실을 알게 된 피해자도 있습니다. 임차권 등기는 애초에 세입자의 거주이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목적이 큽니다. 보증금을 못 받은 상황에서 이사 날짜 등을 맞춰야 하는 경우 등기부에 돌려받지 못한 보증금 채권이 남아있다고 명시해 두는 겁니다. 새로 집을 구하는 세입자 입장에서도 등기부 등본을 확인했을 때 임차권 등기가 있으면, 문제가 있는 집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임차권 등기가 세입자들의 보증금 안전장치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문제는 전세 사기가 지속적으로 벌어지면서 한 주택에 의한 피해자가 중복으로, 연속해서 나오는 경우가 생기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사기를 당한 이전 세입자는 임차권 등기를 통해서 거주지를 옮기더라도 대항력을 유지할 수 있고 전세보증금을 우선적으로 돌려받는 권리를 가지게 되는 겁니다. 임차권 등기 신청은 법원에 접수된 후 2주 정도 후에 등기부 등본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사이에 깨끗했던 등본을 확인하고 들어온 현재 세입자는 이 사실을 인지할 방법이 없습니다. 또 이런 빈틈을 악용해 일부러 새로운 세입자가 이주한 직후 임차권 등기를 신청하는 신종 사기 역시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임차권 등기 중복 인정, 가능할까? 선행 임차권 등기가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임차인의 후행 임차권 등기를 인정해 주느냐의 문제는 법률가들 사이에서도 논쟁거리입니다. 등기관은 형식적으로만 판단하기 때문에 앞의 임차권 등기가 있으면 무조건 이후 임차권 등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식입니다. 임차인의 점유시기나 여부 역시 실제 거주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신청인이 적어낸 그대로 등기부에 기재하는 방식입니다. 현 임차인이 법원에 이의신청을 해도 아직까지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례가 많습니다. 판례가 정립되면 따라야겠지만 아직까지는 명확한 선례가 없다는 이유로 실무 관행이 기각 쪽으로 굳혀지는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성실히 법을 지킨’ 현 세입자가 ‘임차인 보호’ 목적으로 만들어진 임차권 등기로 인해 오히려 피해를 보는 상황은 분명 개선이 필요합니다. 등기선례 상으로는 명확한 기준이 없지만 지역에 따라, 판사 재량에 따라 중복 등기가 인정되는 사례도 하나둘씩 나오고 있습니다. 두 명의 임차인 등기를 인정해 준 울산지법의 판례(2017가단8776)는 지금과 같은 임차권을 둘러싼 임차인 간 갈등이 법의 공백에 기인한 것이라고 판시했습니다. 세입자 문제를 오래 다뤄온 이강훈 변호사는“선행 임차권 등기가 대항력이 상실된 상태에서 신청되어 무효인 사정이 분명하다면 후행 임차권 등기 신청을 받아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임차권 등기' 요구하는 허그, 피해 증명 어려운 피해자 사실 임차권 등기가 전세사기 해결의 만능열쇠는 아닙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도 마른하늘 날벼락처럼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에게 임차권 등기는 이미 기울어진 임대차 시장에서 나의 피해 사실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무기인 것이죠. 특히 이들이 더 절박한 이유는 HUG에서 전세보증금반환보증을 해줄 때 임차권 등기를 반드시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허그 측에 앞의 사례처럼 임차권 등기가 어렵지만, 실제 대항력을 유지해 살고 있는 피해자에 대한 다른 구제방법은 없는지 물었습니다. 허그는 "원활한 채권 회수를 위해 임차인이 기존에 취득한 대항력과 약관과 규정에 따라 임차권 등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원론적으로 답변했습니다. 법원에서는 임차권 등기 명령을 거부당하고, 임차권 등기 명령 서류를 내지 못해서 보증금도 못 돌려받는 상황. 전세 사기가 빠져나가기 어려운 지옥으로 변하고 있는 우리 이웃의 현실입니다. 디자인 : 김정연
전세사기 특별 단속 14개월째, 그동안 정부는 5,568명을 검거해 481명을 구속했지만, 최근까지도 전국에서 대규모 전세사기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결국 윤석열 대통령이 나서 “지구 끝까지 추적하겠다”며 엄단을 예고했고, 올해 말 종료 예정이던 단속 기한 역시 무기한 늘리기로 했습니다. 도대체 왜 전세 사기는 근절되지 않는 걸까요? 정말 악인(惡人) 몇몇을 붙잡으면 전세사기는 사라질 걸까요? 왜 피해자들은 정부의 대책이 ‘속 빈 강정’이라고 토로하는 걸까요. 오늘은 ‘전세사기의 진짜 배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빚내서 집 사라'... 마구잡이식 정책의 실패 정부의 대책은 여전히 전세를 둘러싼 ‘제도 개선’ 보다 ‘피해 예방’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당장 피해 세입자들이 경매로 집에서 쫓기는 걸 방지하기 위해 마련한 경매 유예 조처 역시 대부업체 같은 채권자가 거부하면 강제력이 없어 후순위 임차인의 보증금 피해가 속속 현실화하고 있습니다. 올여름 사기를 인지한 피해자 A 씨는 자신이 전세사기 피해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그나마 믿을 구석이었던 전입신고 및 등기부등본 확인, 보증보험 가입 거절 시 계약 해지 같은 특약이 모두 무용지물이었다고 말합니다. 대규모 전세 사기 이후 마련된 대책만으로는 ‘작정하고 사기 치는 사람’을 여전히 거르기 어려워 피눈물을 흘리는 피해자들이 계속 나오는 상황인 거죠. 취재 과정에서 만난 수원 지역 공인중개사는 전세 사기를 부추긴 책임에서 정부와 은행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악성 임대인) 혼자서 한 사기가 될 수 없는 거예요. 은행에서 그 임대인 이름만 대면 대출을 막 해주고, 한 명이 집을 몇 백 채가지고 있어도 정부는 관리도 안 하고. 이건 다 정부에서 판을 깔아준 거예요.” 사기꾼이 활개 칠 수 있는 환경, 전세 제도 자체를 손보자는 논의도 활발합니다. 근본적인 전세제도 개편 없이는 전세사기, 역전세난 문제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김진유 한국주택학회장은 전세 보증금을 매매가의 일정 수준 이하로 규제하는 ‘전세가율 상한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투기 우려가 있는 지역에서 주택담보대출비율(LTV)을 규제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만약 전세가율을 70% 이하로 제한하면 2억 원짜리 주택 매입 시 적어도 임대인이 6천만 원을 들여야 합니다. 10채면 자기 자본 6억, 100채면 60억 원이 필요한 셈이죠. 지금처럼 한 푼도 없이 수백 채를 일으키는 건 불가능해지는 겁니다. 이 주택이 경매로 넘어가면 집주인이 투자한 30%를 포기해야 하기에 보증금 반환을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경우 나머지 30%에 대해서는 임차인이 월세로 내야 하는 부담이 생기지만, 보증보험과 비슷한 수준의 비용으로 사기 예방 효과는 훨씬 뛰어납니다. “사인 간의 자유로운 거래?... 주거는 ‘기본권’으로 접근해야” 물론 반대 논리도 있습니다. ‘자유로운 사인 간의 계약’에 대한 과도한 규제라는 식의 주장이죠. 그러나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임대인 친화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한국의 주택 상황을 고려할 때, 지금과 같은 악성 임대인에 의한 피해자가 끊임없이 양산되는 상황을 정부가 방관하는 건 직무유기입니다. 김진유 주택학회장은 전세가 상한제를 사기 가능성이 높은 ‘3억 이하 또는 5억 이하 비아파트’ 등으로 제한해 도입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향후 주택 공급 부족과 전세가격 등락이 맞물리는 시점에는 또 다른 대규모 피해가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후 피해 구제만큼 사전 예방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겁니다. ‘정보 비대칭 해소’ 필요... ‘악성 임대인 정보’ 공개하는 나라들 있다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선 임대인과 임차인간 정보 비대칭 해소도 시급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등기부로 주택의 기본적인 정보를 확인할 수는 있지만, 임대인의 보증금 반환 능력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임차인 입장에선 전 재산과 같은 돈을 맡기면서도 임대인의 ‘선의’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죠. 전세사기가 근절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피해가 이어지는 핵심 이유일 겁니다. ‘어떻게 더 공평한 임대차 환경을 만들 것인가’ 진미윤 LH 토지주택연구원 정책지원단장은 주택 임대차와 관련한 최근 OECD 정책 기조가 거주 안정성을 강화하는 추세라고 지적합니다. 많은 나라들이 ‘어떻게 임대차 환경을 더 공평하고(Fairer), 더 부담가능하게(More Affordable) 만들 것인가’를 화두로 삼고 있다는 거죠. 지난 2018년부터 영국은 임차인의 권익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법과 제도를 대폭 개편했습니다. 우선 악성 임대인과 갈등에 맞닥뜨렸을 때, 임차인의 문제 제기와 대처를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돕습니다. 비용이 드는 법적 소송은 최후의 보루로 두되, 임차인이 신속하고 저렴하게 법률 구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거죠. 이를 위해 모든 임대인이 옴부즈맨 서비스에 가입하도록 하고, 가입하지 않으면 지자체의 단속 대상이 됩니다. 만약, 임대인이 계약과 달리 열악하고 비좁은 집을 임대했다가는 임대료를 몰수당할 수도 있습니다. 25년의 역사를 가진 주택 행정감찰관(Housing Ombudsman) 제도 역시 대대적으로 강화했습니다. 주택부 산하 비정부 공공기관을 두고 임대인에게 불만을 제기하는 방법과 절차를 교육하고 다양한 임대차 관련 분쟁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영국 불량 임대인 부동산 중개인 데이터베이스 (2018년 4월 도입)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건 정부가 나서서 불량 임대인과 부동산 중개인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공개하고 있다는 겁니다. 지자체는 임대인 정보를 수시로 모니터링하고 관리대상을 예의주시합니다. 임차인은 아주 세밀한 수준의 개인 정보를 제외하고 임대인의 피고발 사유나 체납 유무 등을 정부의 공적 시스템을 통해 인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임차인이 임대인과 관련된 정보를 얻기 위해 ‘등기부 등본’을 떼어보는 것 말고는 임대인이나 중개인의 말에 기대야 하는 것과도 대조적입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영국 정부는 임차인이 임대인에게 건넨 보증금도 감시합니다. 임대차 종료 시 혹시 모를 분쟁에 대비해 임대인은 반드시 정부가 승인한 '임차보증금 보호(TDP)' 제도 보관소에 보증금을 예치해야 하고, 30일 이내 임차인에게 보증금이 어떻게 보호되고 있는지 정보를 제공해야 합니다. 선진국들이 ‘임차인 권익’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주택 정책을 수립하는 이유는 이 문제가 다른 사유재산이 아닌 ‘집’과 관련됐기 때문입니다. 주거에 대한 위협은 생활 기반 전반을 무너뜨리는 기본권에 대한 위협이라는 인식을 구성원 전체가 공유합니다. 영국 정부가 ‘임차인에 대한 강력한 보호’를 정책으로 표방하고 있다는 점은 한시적인 특별법 상 피해자 인정조차 쉽지 않은 우리의 상황과 비교해도 생각해 볼 지점이 많습니다. 전세를 보완하는 방법 대한 생각은 조금씩 달라도 초점은 한 군데로 모아집니다. 피해 지원에 집중된 논의를 이제는 사기를 막을 수 있는 예방 정책마련에도 힘 쏟아야 한다는 거죠. 전세 제도는 60년 넘게 우리 사회가 암묵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운영해 온 제도입니다. 서민들의 ‘주거 사다리’가 ‘썩은 동아줄’로 전락한 배경에는 위험 신호를 외면한 채 다주택 임대사업자에게 날개를 달아준 역대 정부가 있었습니다. 전세사기의 ‘진짜 배후’가 방관하는 사이, 악성 임대인은 지금 이 순간에도 또 다른 피해자를 노리고 있습니다. 디자인 : 옥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