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SBS 제희원 기자입니다.
지난 9일 오전, 경남 고성의 한 조선소에서 하청 노동자 2명이 123톤 선박 블록 구조물에 깔려 숨졌습니다. 그중 1명은 캄보디아 출신 30대 이주노동자였습니다. 그로부터 나흘 뒤 부산의 조선소에서도 용접 작업 중 화재에 휘말린 베트남 국적의 30대 이주노동자가 숨졌습니다. 호황을 맞은 조선업의 부족한 일손을 채우기 위해 한국을 찾았던 외국인들이 연달아 목숨을 잃은 겁니다. 드러나지도 못하고 은폐되는 이주노동자 산재는 이보다 훨씬 많습니다. 한국 정부가 이주노동자 도입 규모를 확대하면서도 열악한 노동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지적이 줄을 잇지만, 정부는 아직까지 적극적으로 해결할 의지가 없어 보입니다. 숙소와 노동 환경 등 기본적인 처우도 내국인에 비해 열등하지만, 이주노동자들이 산재를 겪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도 고통이었습니다. 오늘 <더 스피커>에서는 '산재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위험의 최전선에 내몰린 이주노동자의 목소리를 담습니다. 12년 전 방글라데시에서 입국한 아지트 씨는 경기도의 한 금속 부품 공장에서 일한 지 8개월 만에 몸에 이상을 느꼈습니다. 금속 표면 깎는 일을 했는데, 날리는 쇳가루와 먼지가 눈에 보일 정도였습니다. 보통 11시간 작업 중 6시간을 그라인딩을 했고, 3시간은 사포로 금속 부품을 닦았습니다. 그럼에도 회사에서는 방진 마스크가 아닌 얇은 면 마스크만 지급했습니다. 입사 전 건강검진에서도 문제가 없던 아지트 씨가 얻은 병명은 '간질성 폐질환'. 광부들이 많이 걸리는 병인데 난치성인 데다 암으로도 악화할 수 있는 병입니다. 2년 만에 다시 만난 아지트 씨는 여전히 일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동안 폐 수술을 한 차례 했고, 후유증으로 일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폐 기능의 40% 정도를 잃은 상황. 병원비와 생계는 주변 이주노동자들의 십시일반 도움과 지원 단체에 기댔습니다. 유일한 희망은 산업재해로 인정받는 것이었지만, 2년 3개월 만의 심사 끝에 '불승인'됐습니다. 근로복지공단은 적절한 보호장구 제공 없이 유해물질이 많았던 작업 환경에 노출된 점 등을 종합해 업무와 상병 간 상당 인과관계를 인정하면서도 역학조사 결과 "누적된 금속 분진 노출량이 적고 본국에서 먼지로 인하여 원래 기침을 많이 했고 흡연력이 확인되는 점 등을 종합 고려해" 산재 불승인 판정 결정을 내렸습니다. 결정적으로 작업 환경 조사는 사측이 작업장을 새롭게 단장한 이후, 약 8개월이 흘러서야 이뤄졌고 금속 분진을 마시는 작업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사측의 진술 위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산재 심사 위한 '작업 현장 조사'부터 편향적" 사실 모든 산업재해가 승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나 직업성 질환, 그러니까 일을 하다 병이 생겼다는 것을 입증하기는 더 어려운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아지트 씨의 '불승인' 사례에서 주목할 부분은 발병과 노동 환경 간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명백한 증거들이 대부분 배척됐다는 데 있습니다. 해당 사건을 담당했던 권동희 노무사는 이렇게 지적합니다. "'간질성 폐질환' 자체가 입증하기 어려운 사건인 것은 맞아요. 그래서 근로복지공단 직업환경연구원의 업무상 질병 심의위원회에서도 세 차례 심의를 했는데, 위험 환경 요인은 모두 저평가됐죠. 하루 근무의 약 80% 이상을 금속 작업을 했다는 노동자 주장은 배척되고, 5% 미만이었다는 사측의 주장만 받아들였죠. 게다가 역학조사가 이뤄진 공장은 심지어 아지트 씨가 일했던 곳이 아니라 전혀 다른 환경의 옆 공장이거든요. 굉장히 업무량과 환경을 단순화해서 판단한 거죠. 외국인의 문제도 있죠, 사실. 외국인이다 보니, 이 사업장에서 더욱 배타적으로 산재 인정에 비협조적으로 나온 건 맞죠. 역학조사 갔을 때 공장 관계자들이 제 앞에서도 막 비웃었어요, '여태껏 아무 문제 없었는데 너만 걸려서 왜 난리냐'는 식으로. 만약 문제가 없었으면 그 사업장을 그대로 뒀겠죠. 문제가 있었으니까 지금 완전히 새 걸로 갈아치운 것이고요." 산재 불승인 이후 '해고 통보'…한국은 일하고 싶은 나라일까 아지트 씨는 현재 해고 통보를 받은 상태입니다. 사실상 일을 할 수 없어 빈털터리가 됐고, 가빠진 호흡과 병을 얻은 몸으로 본국에 돌아가기 막막해 한숨을 자주 내쉬었습니다. 아지트 씨를 돕고 있는 김달성 포천이주노동자센터 대표는 이주노동자들의 산재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업주들의 방해가 심해서 산재 신청하는 것도 참 힘들어 하는데 그걸 무릅쓰고 산재 신청을 힘겹게 했을 경우, 터무니없이 비상식적인 판정이 나올 경우 참으로 절망스럽죠. 마지막 믿을 국가가 우리를 보호해 주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 절망은 바닥까지 내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전체 산재 사망 사고 10건 중 1건은 외국인 지난해 산업재해 사고 사망 통계에 따르면 전체 산재 사고 사망자 812명 중 이주노동자 비율은 10.5%였습니다. 국내 노동자 중 이주노동자 비율이 약 3%인 것을 감안하면 산재 사망 사고 비율은 그보다 세 배 이상 높은 수치입니다. 특히 이들이 일하는 환경이 내국인이 기피하는 제조업과 건설업, 농업 등 위험 요인이 많은 곳인 점을 고려하면 드러나지 않은 산재는 더 많을 가능성이 큽니다. 여기에 더해 철저히 갑을 관계인 고용허가제 하에서는 외국인 노동자가 위험을 거부하기도 어렵고, 낯선 법 체계와 서툰 언어로는 산재 손해배상 제도를 활용하기도 쉽지가 않습니다. 고용노동부가 외국인 산재 발굴과 구제에 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산재 만인 사망률 줄었지만…외국인은 그대로 내국인은 지난해 1만 명당 산재 사망자가 줄어 통계 작성 후 처음으로 0.3대에 진입했지만, 이주노동자는 그대로입니다. 이주노동자의 산재 비율은 내국인의 6~7배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위험한 일을 많이 하니까 다치는 일도 많겠지만, 외국인은 아예 산재 신청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 정확한 집계조차 쉽지가 않습니다. 한국에 들어와 일하는 이주노동자는 130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이들 역시 다치지 않고 일할 수 있어야 하고, 다치더라도 보호받는 것이 당연한 우리의 이웃입니다. 디자인 : 권민재
세월호 참사 이후, 오래도록 거리를 뒤덮었던 구호는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이었습니다. 유가족과 시민들의 염원으로 진상 규명을 위한 3개의 위원회가 꾸려졌고 7년에 걸친 진상 조사 활동을 벌였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단일 재난을 다루는 '특별조사위원회'가 탄생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3개 위원회의 조사는 흩어진 사실을 복원하는 성과를 냈지만,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한 한계도 분명했습니다. 참사 이후 조사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는 세력이 안팎에서 진상 규명 활동을 방해했고, 그 사이 '음모론'이 그럴싸한 진실로 둔갑해 유통되기도 했습니다. 다시 돌아온 세월호 10주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세월호의 진실"이 무엇인지 답하기 어려워합니다. 다 같이 기억하는 세월호에 대한 '공적인 재난 서사'가 부재한 상황. 세월호 10주기를 맞아 제대로 고개를 들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사실의 조각'들은 쉴 새 없이 쏟아졌지만, 그 사실이 가리키는 구조적 맥락을 이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세월호를 둘러싼 여러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배경에는 '재난 조사의 실패'가 있습니다. 재난의 책임을 '인격화'하는 데 익숙해진 언론 역시, 특정인의 수사와 기소 여부에 비교적 높은 관심을 두고, 구조적 원인을 분석하는 조사의 쟁점을 검증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소홀했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제기한 많은 질문들을 우리는 왜 제대로 묻지 못하게 되었는가. 2015~2016년 세월호참사특조위 조사관으로, 2018년 선조위 종합보고서 집필진으로 참여한 박상은 씨를 인터뷰했습니다. Q. 세월호 참사가 10주기를 맞았는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의 진실을 묻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A. 세월호 참사는 굉장히 연관된 사람이 많고 사안이 복잡해서 사실을 나열하면 끝도 없어요. 사람들이 단순히 나열된 기사를 본 것만으로 답을 알 수가 없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 다 같이 기억할 수 있는 재난 서사를 공인하는 역할을 조사위원회가 했어야 하는데 그런 방식의 답을 내지 못했죠. 특조위는 아예 종합보고서를 내지 못했고, 선체조사위는 보고서가 2개로 갈라졌다고 하니까 보통 일반인들은 '아직 답이 안 나왔나 보다', '나중에 답이 나오면 읽어봐야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믿음들, 의혹들이 아직도 여전히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Q. 국가와 민간 차원의 세월호 조사 활동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셨는데, 세월호 참사의 구조적 원인은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A. 세월호 참사는 크게 두 국면으로 구성된 참사입니다. 침몰해서는 안 되는 배가 굉장히 좋은 날씨 속에서 급선회를 했고, 그렇다고 해서 넘어져서는 안 되는데 결국 넘어진, 침몰과 관련된 국면 하나. 침몰 이후에도 대피 조치가 잘 됐거나 해경이 유능하게 구조했다면 많은 사람들이 살아올 수 있었을 것인데 구조 실패 혹은 구조 방기라는 국면. 침몰과 구조의 국면 2가지 각각에서 구조적인 원인이 있는 거죠. 침몰 원인의 가장 유력한 가설, 즉 우리가 사실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은 핸들을 돌리면 유입 신호를 줘서 타가 돌아가도록 하는 '솔레노이드 밸브' 부품이 고착이 된 사실입니다. 이 부품이 고장 나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고, 그래서 경험한 선원들이 많이 없죠. 점검 항목 등에도 들어가 있지 않거든요. 그만큼 이런 일이 진짜 가끔 일어날 수 있는데, 설령 그래도 배는 넘어지면 안 돼요. 타가 말을 안 듣고 끝까지 돌아가면 배는 돌게 되는데 배가 그렇게 돌아도 옆으로 침몰을 할 이유는 없거든요. 그 상태로 그냥 떠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세월호는 굉장히 복원성이 나쁜 상태였기 때문에 옆으로 기울어서 점점 침몰했고, 수밀문이 열려있는 상태에서 물이 계속 빠른 속도로 들어찼기 때문에 배가 침몰한 것이죠. 여객선에서 수밀문을 안 닫는 것은 완전히 만연한 관행이었다고 파악되는데, 그런 관행이 만들어진 것, 복원성이 악화된 상태로 증개축을 하고 짐을 많이 실은 상태에서 배를 다니게끔 한 상황. 이것이 침몰의 핵심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 있겠죠. Q. 구조의 국면에서는 어땠나요. A. 해경과 해경 지휘부, 그리고 윗선인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까지 한국의 해양 구조 시스템은 제대로 된 구조 시스템으로서 그때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6천 톤급 세월호에 300여 명이 타고 있었고 그걸 구하러 간 건 100톤짜리 소형 해경정뿐이었는데, 그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죠. 훨씬 더 큰 선박이 왔어야 하고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법적으로 정해진 훈련도 해경은 하지 않았었어요. 원래는 200톤급 배가 근처에 있어서 골든타임 내에 갈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큰 배도 없었죠. 현장에 간 배들도 '이걸 다 구할 수 없다' 이렇게 생각을 하니까 교신 기록을 보면 굉장히 빨리 포기를 해버리거든요. '특수구조대가 와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본인들의 책임을 넘긴 거예요. 해경 조직 자체가 이런 방식으로 계속 운영이 돼왔던 역사적인 과정이 있는 거죠. 이게 구조 실패의 원인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침몰 원인 세월호 참사를 조사한 마지막 공적 조사위원회인 사참위는 팽목항에서 수습 과정과 유가족 사찰, 특조위 조사 방해 등 2014년 4월 16일 이후의 긴 시간까지 조사 대상으로 삼았으며, 종합보고서에도 상당 분량으로 이 결과를 담아냈다. 이에 비해 세월호 참사를 일으킨 역사적, 제도적 조사는 전혀 하지 않았고, 4월 16일 당일에 대해서도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했다. 외력설 입증에 경도된 조사 계획은 세월호의 복원성이 나빴다는 사실조차 언급하기 어려운 조직 내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사참위는 세월호를 외판의 큰 손상 없이 넘어뜨릴 만한 외력도 찾지 못했다. 침몰 원인은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것이 되었다. <세월호 참사 10주기, 재난 조사를 돌아본다> 중 발췌 Q. '세월호 조사의 실패는 조사위원회의 실패이자, 우리 사회의 실패'라고 정의했는데, 10주기를 맞아 재난 조사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조사위원회라는 건 원래 있었던 국가기구가 아니라 재난의 사후 조치,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시민의 요구가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기에 기존의 국가 기구보다 훨씬 사회의 목소리에 귀를 많이 기울입니다. 조사위를 만들어낸 것이 권력기관이 아니라 시민들이었다는 걸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거든요. 특조위 조사 방향이 혼란스러웠던 것과 선체조사위원회 활동 마지막에 외력설이 어떤 가설로 부각되는데 그것은 외부의 사회적인 목소리, 즉 의혹을 부각하는 방식이 굉장히 영향을 많이 줬다고 생각하고 그 상호 작용 속에서 조사위원회의 활동도 있었기 때문에 조사위원회의 실패를 우리 전체의 실패로서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또 하나는, 조사위원회에 들어갔던 '열몇 명의 위원과 백몇 명의 조사관들의 탓이다' 이렇게 하면은 너무 쉽죠. 다음 조사위에서는 더 좋은 사람들로 바꾸고, 법률가 비중을 줄이고 과학자를 늘리면 조사가 괜찮아질까? 성찰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말씀드린 측면도 있습니다. '조사와 수사가 뒤섞인' 한국의 독특한 재난 인식 일찍부터 사고조사위원회가 발전한 영미권과 달리 한국에서는 사고조사위원회 대신 검찰 수사가 그 공백을 메꿔왔다. (중략) 해외의 재난 조사가 기술적 조사와 사법적 조사를 분리하는 원칙을 채택하고 있었다면, 한국의 재난 조사는 사법적 조사가 기술적 조사를 포괄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검찰은 '대중의 이목'이 쏠린 재난에 한정해 현행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해 기속의 범위를 넓히고 형량을 높게 구형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수사기관의 유연한 대처로 구조적 원인 규명 요구를 일부 흡수할 수 있었는데, 이는 국가가 재난을 계기로 사회 시스템 전환의 요구가 부상하지 않도록 재난 서사를 통제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세월호, 우리가 묻지 못한 것> 2장 '우리는 왜 재난을 조사하는가' 중 발췌 Q. '조사와 수사의 분리'를 강조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법적 조사라는 건 이미 만들어진 법이나 매뉴얼, 규칙을 누가 어겼는지 혹은 무시했는지를 따져서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죠. 그런데 애초에 그런 시스템 자체가 없을 수도 있고, 개인이 문제가 아니라 관행이 그렇게 자리매김되었을 수도 있는데도 개인을 대상으로 그냥 '너 법 어겼지?', '너 매뉴얼 어겼지?' 해서 딱 몇 년 형씩 주고 하는 것 이상으로 사회의 문제를 밝혀내려면 조사와 수사가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수사는 딱 그 개인을 처벌할 수 있는 증거를 찾는 데만 특화될 수밖에 없는데, 조사는 훨씬 광범위하게 여러 질문을 할 수도 있고, 법과 매뉴얼이 부족한 지점은 무엇이었는지, 아니면 환경적으로 이걸 지키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다 조사할 수 있기 때문에 굉장히 필요하죠. 잘못된 방향으로의 선회를 보고도 눈감거나 억지로 정당화하는 데는 조사위원회 내외부에서 진영론적 사고가 강화된 탓도 있다. 세월호 참사를 조사한 세 조사위원회 모두, 구체적인 비율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여·야가 상당수의 위원을 각각 추천하도록 되어 있었고, 이렇게 추천을 통해 위원으로 임명된 이들은 추천 정당의 뜻에 따라 발언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세월호특조위에서 이 현상이 극심했는데, 때문에 선조위와 사참위에서도 모든 위원들의 발언이 진상규명에 대한 전문가로서 의견이라기보다 추천 정당의 뜻으로 왜곡되어 받아들여졌다. 국민의힘 추천 위원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이 곧 정의처럼 여겨지고, 근본적·구조적 원인을 밝히는 조사는 뒷전이 되었다. <세월호 참사 10주기, 재난 조사를 돌아본다> 중 발췌 '합법과 불법 구분 짓기'로 재난을 막을 수 있을까 Q. 워낙 충격을 준 사건이다 보니, 더 강력하게 법적인 처벌을 하면 재난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는 암묵적 믿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사'가 아닌 '수사'에 방점이 찍혔던 이유는 뭔가요. A. 특조위에 관여한 법률가 전원이 다 '법적인 처벌을 해야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조사위원회 내부에서도 '우리는 법적인 처벌을 위해서만 구성된 위원회가 아니다'라고 모두 얘기를 해요. 그런데 원래 일을 해왔던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법률가가 다수가 되면 어쩔 수 없이 그걸 따라가는 것 같아요. 조사관들이 올리는 보고서를 검찰 수사 보고서처럼 생각을 하고, 권고사항에 있어서도 재발 방지 대책을 권고할 수 있지만, 법적인 증거로 쓰일 만큼 굉장히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본인들도 생각을 하셨던 것이죠. 특조위에서 결국에는 나오지 못했던 조사 보고서가 있어요. 선내 대기 방송과 관련한 조사 보고서였는데, 진상규명소위원회에서 심의를 할 때 '이 정도 증거로 수사를 요청하는 건 불가능하다' 결국 통과하지 못해서 보고서가 사장된 경우도 있었죠. '아직 침몰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라는 호소가 10주기에도 반복된다. 원인 규명에 진전이 없다는 저 말은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세월호 참사 조사가 필요함을 정당화하는 호소일 수 있지만, 다른 많은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 세월호 참사 조사에 기대를 가졌던 이들도 계속된 조사가 소용이 있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조사를 바라지 않는 세력들은 이런 지점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세월호 참사 10주기, 재난 조사를 돌아본다> 중 발췌 Q. 세월호와 관련된 국가 책임에 대한 논의가 법적-정치적 책임에 집중된 반면, 제도적 책임에 대한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A. 다 아시겠지만 법적 책임은 법정에서 유죄로 선고받는 것이고, 정치적 책임이라면 정치인의 사과나 고위 선출직 혹은 임명직 고위 공무원들의 사퇴일 텐데 보통 이 두 가지 방식으로 우리는 책임을 물어왔죠. 그런데 국가가 어떤 책임을 진다는 것은, 국가는 사람이나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이기 때문에 국가가 시민들의 생명을 사고하는 방식, 즉 안전하게 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대책을 지속적으로 마련해 나가는 것이 제도적인 책임일 텐데 굉장히 모호한 구호로만 남아있고 정부가 세월호 참사 이후 어떤 방식으로 안전 대책을 추진하고 있는지 감시하는 일은 운동 진영에서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재난을 완전히 예방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국에서 최근에 일어난 많은 일들은 예방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유형의 재난이 많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고 그걸 보면 사회의 어떤 시스템이 망가져 있다, 운용이 되지 않고 있다는 걸 많은 국민들도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Q. 한국의 시민들이 사고조사위 활동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던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외국은 어떤가요. A. 후쿠시마 사고조사위의 사례가 있습니다. 대지진 이후에 핵발전소 사고를 규명할 여러 가지 조사위가 만들어졌고, 이들이 쭉 조사를 진행해 왔는데요. 결론적으로 이 조사의 결과로 처벌을 받은 사람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국민들에게 비판 요소가 된 측면이 있기는 합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조사의 방식이었어요. 도쿄전력의 가장 말단 노동자에게는 엄청나게 비밀을 유지하고 이 사람의 증언이 이후 해고로 이어지거나 법적 처벌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약속을 한 다음, 쓰나미가 와서 도저히 통제가 되지 않을 것 같은 순간에 본인이 어떻게 행동하려고 했는지 구체적인 증언을 들으려 했다는 거예요. 반면, 도쿄전력 사장이나 총리는 청문회에 세워 공개적으로 증언을 듣는 방식을 택했죠. 청문회를 전 세계적으로 송출하는 방식으로 공표하는 동시에 이 사람들이 책임자라는 것을 한 번 더 알리는 것이고요. 이후 해당 조사위의 권고가 정말 소용이 있었느냐는 부문은 논란이 있습니다. 다만, 조사위 활동 종료 후에도 조사 보고서를 읽을 수 있는 윤독회를 하기도 했다는 건 잘 기억할 사례인 것 같습니다.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가는 책임 Q. 법적 책임을 묻는 조사가 안전 업무를 담당하는 말단 공무원을 위축시킨다는 지적도 인상적이었습니다. A. 조심스러운 부분인데, 실제 재난을 예방할 수 있는 시스템이나 방안을 마련할 수 있는 사람은 말단 공무원이 아니라 훨씬 고위 공무원들이고 이 사람들은 법적으로 가면 잘 처벌이 안 돼요. 근데 재난 이후에 누군가는 처벌받았으면 좋겠다는 그 욕망을 계속 말단에 넘기거든요. 이 사람들은 법적으로 따지면 책임을 질 수 있단 말이에요. 일선에 서 있었던 사람들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방재 직렬의 공무원이 현재도 굉장히 기피 부서가 되어버렸죠. 방재 업무도 사실 숙련과 노하우가 필요한데, 이 분야의 전문성이 필요한 공무원이 부재하다면 그 피해는 또다시 국민들이 지는 것이거든요. 앞서 후쿠시마 사례처럼 일선에서 일하는 사람은 지키고, 책임을 위로 올리는 방식에 대해서 우리가 좀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계속 법정에서 '책임자를 처벌하라'라고 하면 사람들이 결국 '처벌 가능한 사람'을 계속 찾게 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잘 고민해 볼 필요가 있죠. Q.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우리나라 조사 사례도 있을까요. A. 재난은 아니지만 김용균 산재 사망 사건에 대한 조사위원회 활동을 참고할 만하죠. 당시 김용균 노동자가 숨졌을 때, 회사는 '우리가 시키지 않은 일을 한 노동자 개인의 책임이다'는 논리를 폈어요. 그러나 조사위는 보고서를 통해 구조적으로 계속해서 회사의 지시가 있었고 그렇게 일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노동자들이 놓여있었다는 걸 밝혀냈죠. 이 보고서가 나온 이후 아직 재판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검찰의 기소에도 영향을 줬거든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어떤 개인이 무슨 매뉴얼을 어겨서' 이런 방식으로 따진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노동시장 구조 속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라는 걸 조사위가 잘 밝혀냈고, 이것이 법정의 증거 자료로 쓰이냐 아니냐가 핵심은 아니었던 것이죠. 세월호 10주기, 재난 조사의 실패를 되짚는 이유 Q. 세월호 10주기, 우리가 기억할 교훈은 무엇이 있을까요. A. 두 가지에서 배워야 된다고 생각해요. '재난'이라는 실패 자체에서 배워야 하고, '재난 조사의 실패'에서 배워야 한다. 10년의 시간이 흐르긴 했지만, 처음의 기억을 떠올리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세월호 참사 직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윤리 혹은 일해 왔던 관행이 한국 사회의 위험을 만들어내는 데 영향을 준 것이 아닌가라는 성찰을 했죠. 그런데 어느새 시간이 흐르면서 '저 사람들이 잘못해서 이 참사가 일어났어'라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의 책임과 권력자들의 책임을 분리하는 모습이 나타났고요. 물론, 사회 권력을 쥔 사람들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 이 사회의 구조를 만들어낸 책임에서 완전히 면제될 수 없기 때문에 10년 전 그 마음을 떠올리는 것,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디자인 : 권민재
전세사기로 구속된 임대인들이 경매 전 단기 임대를 놓아 월세 수익을 벌어들이고 있다는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이런 임대인들의 수익활동이 법을 어긴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보증보험이 되어있지 않은 경우, 경매 전까지는 한 푼도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임차인들을 생각하면 이런 임대인들의 행태에 쉽사리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현실적으로 피해자들이 임대인들의 수익을 알기도 어렵고, 설령 알더라도 추징해 돌려받기까지 또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인천 건축업자 남 모씨가 소유한 주택에서도 이런 ‘단기 임대’가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인천 미추홀구에서 가장 많은 피해세대를 낸 임대인이 바로 남 씨였습니다.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대책위에 따르면 전체 피해자는 2,750여 가구, 피해액은 2,00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피해자 중 4명이 세상을 등졌습니다. 남 씨는 최근 1심 선고에서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항소했습니다. '단기 임대'로 얻은 수익은 다 어디로? 남 씨가 구속된 이후에도 단기 월세로 한 달 7~8천만 원이 넘는 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소문은 일대에서 예전부터 파다했습니다. 공식적으로 남 씨로부터 보증금을 돌려받았다는 사람은 1명도 없는 상황. 이 돈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했습니다. 제보 내용은 상당히 구체적이었습니다. 우선 남 씨 가족이 직접 한 달 수익이 평균 2천만 원 가까이 된다고 밝히는 음성 녹취가 존재했습니다. 남 씨의 가족은 “단기 임대를 직접 관리하려고 했지만, 단기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험한 경우가 많아 전부 남성으로 구성된 부동산에 의뢰해 일부 수수료를 주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신탁사 "임대차 계약 동의한 적 없어"... 세입자 2차 피해 우려 남 씨의 의뢰로 단기 임대가 이뤄지고 있는 오피스텔을 찾아가 봤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현재는 남 씨가 아닌 신탁사로 이미 소유권이 넘어간 상태인데, 신탁사 동의 없이 남 씨가 같은 방식으로 단기 임대를 놓아 상당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제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해당 건물 신탁사인 코리아신탁은 “해당 전월세 계약에 필요한 동의서를 내어준 적 없다”고 밝혔습니다. 신탁 동의서가 없는 모든 임대차 계약은 무효이기 때문에 세입자들은 법적 보호를 받기 어렵습니다. 신탁사를 대행하는 법무법인은 150여 명의 세입자들에게 이런 사실이 담긴 내용증명을 보낸 상태입니다. 이를 알지 못하고 해당 오피스텔에 월세로 들어온 임차인은 갑작스러운 퇴거 요청을 받은 상태입니다. 대부분 단기 월세이긴 했지만, 소액이나마 피해를 볼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한 법률 전문가는 "이번에는 신탁이라는 특징이 개입되어있긴 하지만 더 악의적인 방식이다. 불법인데 불법이 아니라고 임대인이 우기고 있다."라고 꼬집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방식이라면 얼마든지 고액의 전세 계약도 이뤄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해당 매물을 전문적으로 중개한 공인중개사는 “단기 렌털 개념이고, 정식으로 임대차 계약을 체결하지 않아서 불법이 아니다”고 항변했지만 이는 맞지 않는 설명입니다. 현재 임대인이 소유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건물에 신탁사 동의 없이 세입자를 들인 것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공인중개사가 이런 사실을 세입자들에게 정확히 설명하지 않고 단기 임대를 중개하고 있는 겁니다. 말하자면 ‘무권한자에 의한 신탁 계약’을 체결한 셈이고 세입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제3자에 월세를 내면서 ‘불법 점유’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건축업자 남 씨 측 해명..."불법 아니고, 피해자들 보증금 갚아줘" 남 씨 측은 기자에게 보낸 입장문에서 ‘형식적 소유권’이 신탁사에 있을 뿐 실제 소유권은 남 씨 측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원래 신탁 주택의 경우 실질적 소유자와 형식적 소유자가 따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임대차 계약은 반드시 신탁사 동의가 필요하고 이를 신탁원부에 기재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남 씨 측은 단기 임대 전 신탁사의 동의 여부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았습니다. 또 남 씨 측은 현재 원금과 이자 상환 능력을 잃었고 이로 인해 우선수익자인 은행도 손실을 보는 상황입니다. 설령 이 신탁주택에 대한 임대차 계약이 이뤄진다고 하더라도, 신탁이나 은행계좌가 아닌 임대인과 부동산이 지정한 제3의 계좌로 입금이 이뤄지는 일은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신탁 전세사기가 기존 집주인인 위탁자가 주택을 신탁회사(수탁자)에 관리만 맡겨놓은 것처럼 설명하고 본인의 주택인양 임대차 계약을 체결하는 데서 벌어집니다. 세입자는 이런 임대인 말만 믿고 계약했다가 ‘무권한자의 계약’으로 인해 아무런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수천만 원의 보증금이 걸려있지 않다고 해서, 퇴거 요청을 받은 세입자들의 상황이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건축업자 남 씨 측은 이렇게 번 월세 수익으로 피해자들의 보증금 회수와 피해대책위를 지원하는 데 썼다고 밝혔습니다. 남 씨 측은 보도 이후 기자에게 보낸 메일에서 “한두 세대씩 정상적으로 전환하면서 보증금이 높은 세대(예: 6천만 원)는 매월 일정액(300만 원씩) 반환하고 있습니다.(실례: ㅇㅇㅇ캐슬 xxx동 1xxx호외 다수)”라고 밝혔습니다. 더불어 “피해자 중 매입 세대는 반환금 부족분을 일부 지원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인천 미추홀구 피해자 대책위가 파악하고 있는 것 가운데 보증금을 전액 돌려받았다는 사람은 단 1명도 없습니다. 남 씨는 피해자 대책위가 아닌 사람들을 지원했다고 했는데 만약 남 씨 측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보증금을 돌려주는 기준은 무엇인지, 왜 이 과정에서 피해자 대책위와의 협의는 없었는지 명백히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남 씨 측이 공판에서 밝히겠다고 했습니다.) 또 남 씨 측은 누수 등 피해가 발생하고 있는 건물 수리 등에도 해당 수익을 썼다고 밝혔습니다. 건물 외벽이 떨어지고 천장에서 물이 줄줄 새는 주택에 살고 있는 세입자들이 진정으로 어디에 썼는지 궁금해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입니까" 남 씨 측이 보낸 메일에는 이런 내용도 담겨있습니다. 저는 이 메일을 읽고, 세상을 등진 4명의 피해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형적인 제도를 그대로 둔다면 이 땅에서 ‘전세사기’라는 이름의 지옥은 절대 사라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가 가해자입니까. 누가 피해자입니까. 저희야 사업하던 양반이니 그렇다 치고, 전혀 상관없던 세입자가 쫓겨나게 된 건 저희가 쫓아낸 건가요? 저희는 한 사람이라도 보증금 돌려받게 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보증금 줄이려고 했습니다. 부동산 시세가 급락하고 방해하는 업자들 때문에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지금도 주변에 집 한 채 갖고 있으면서 1~2억 원씩 내줘야 하는 집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역전세가 단순히 이곳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건설업계 전체가 살얼음판이지 않나요? 이 분들이 전부 사기꾼인가요? 건축업자 남 씨 측도 분명 억울한 측면이 있을 겁니다. 바지사장을 내세운 다른 ‘악덕 임대인’과 달리 도망가지도 않았으며, 역전세는 자신들의 과오가 아니라 부동산 경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발생했을 거라는 설명이죠. ‘재력가’라는 말을 믿고 마음껏 대출을 내준 은행과 한 사람이 수천 채의 집을 소유하고 그 보증금을 돌려막기할 수 있었던 구조. 그로 인해 평생 벌어보지도 못한 돈을 삶의 첫 출발선에서 빚으로 짊어져야 했을 사회초년생과 신혼부부들. 달리 말하면, 이걸 어떻게 ‘악성 임대인’ 몇몇의 잘못만으로 볼 수 있냐는 게 남 씨 측의 주장일 겁니다. 부동산 경기 등락과 관계없이 안전하게 보호될 수 있는 전세보증금 보호 장치, 세입자의 주거 불안을 임대인의 탐욕과 맞바꿀 수 없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 마련 없이는 이 땅에 전세사기는 뿌리 뽑기 어려울 겁니다. 특별법 상 피해자로 인정받은 사람만 약 1만 3천 명. 한 전세사기 피해자는 “버티고 있는 스스로가 오히려 죄인이 되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 당당히 묻는 임대인 측 물음과 선명히 대비됩니다. 오는 2월 28일은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자 첫 번째 희생자의 기일입니다.
한 개 이상의 방과 부엌, 독립된 출입구를 갖춘 곳을 한국 정부는 ‘주택’으로 정의합니다. 통계청은 주거 형태를 크게 ‘주택’과 ‘주택 이외의 거처’로 나눕니다. 고시원과 여관 등 숙박업소, 쪽방, 비닐하우스, 컨테이너 등이 주택 이외의 거처로 분류됩니다. 2022년 기준 ‘주택이 아닌 곳’에서 사는 가구는 총 44만 3,126가구, 5년 전보다 약 7만 3천 가구 늘었습니다. 지난해 통계청 주택총조사 결과를 보면, ‘주택 이외의 거처’에 거주하는 가구원은 182만 9,932명으로 1년 전보다 약 2.3%, 4만 1,632명 늘어나 4년 만에 반등했습니다. 집값 상승기와 맞물려 기존의 저렴한 주택에서도 소리 없이 밀려난 저소득층이 상당하다는 얘기입니다. 그중에서도 정치인들이 자주 찾는 쪽방은 한국사회 취약한 거처의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같은 쪽방촌 안에서도 쪽방으로 인정받지 못해 ‘쪽방 주민’이 받는 서비스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더스피커가 다뤄볼 주제는 ‘쪽방에 살지만, 쪽방 주민이 아닌 사람들’입니다. ‘주택이 아닌 곳’에 사는 사람, 4년 만에 증가 사실 ‘쪽방’의 법적 정의는 모호합니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으로 밀려난 도심 빈곤층이 정작한 곳을 쪽방촌이라 부르지만, 쪽방에 대한 공식적인 정의는 없습니다. 그나마 〈노숙인복지법〉에서 ‘노숙인 등’을 구성하는 항목에 ‘상당한 기간 동안 주거로서의 적절성이 현저히 낮은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정책적으로 분류하는 쪽방주민에 대한 정의와 가장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각 지방자치단체도 쪽방에 대한 정의를 뚜렷하게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쪽방에 대한 모호한 정의... ‘누가 쪽방 주민인가’ 문제는 모호한 정의로 인한 복지 서비스와 제도의 공백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누구를 쪽방 주민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하다보니, 존재하지만 누락되는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됩니다. 동자동 쪽방촌에서 12년을 옮겨 다니며 살다 최근 일 년 사이 두 번의 이사를 하게 된 70대 동자동 주민의 사연은 이렇습니다. 지난해 10월, 계약 기간이 남아있는데 주인이 집수리를 한다고 해서 이사를 했습니다. 평소처럼 쪽방 상담소에 동행식당 식권을 받으러 갔는데, 제가 이사한 곳은 쪽방 등록이 안 되어있어서 회원 자격이 박탈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나마 밥 한 끼 식당 가서 먹는 것이었는데 황당했습니다. (중략) 새로 이사한 건물 양 옆과 바로 뒤도 모두 쪽방이기 때문에 새로 이사한 곳도 쪽방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다른 점은 이 집이 화장실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다리가 아픈 저는 그동안 좌식변기로 된 공용 쪽방 화장실 이용이 어려워 집 안에서 용변을 해결했습니다. 화장실만 아니면 다시 쪽방으로 등록된 곳으로 이사를 해서 상담소에서 나눠주는 것들을 받아 생활에 보태고 빨래도 맡기고 싶습니다. - 70대 동자동 주민 이 주민은 결국 화장실이 있어도 쪽방으로 인정되는 곳을 겨우 찾아 이사했습니다. 다만 방 크기는 이전에 살던 곳의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그나마 생필품 등 지원을 다시 받을 수 있게 됐으니 다행이라지만, 위와 같은 사례가 비일비재하다는 게 이동현 홈리스행동 활동가의 말입니다. 쪽방에서 제외된 그 방 역시 여느 쪽방과 다르지 않은 형태입니다. 양팔을 다 뻗지 못할 정도로 작은 방 크기, 열악한 환경도 동일합니다. 어느 쪽방의 경우 화장실과 싱크대를 갖춰 원룸처럼 보이지만 쪽방으로 인정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들쭉날쭉한 기준으로 벌어지는 문제는 단순히 쪽방 상담소의 각종 혜택 여부에 그치지 않습니다. 향후 〈서울역 쪽방촌 주거 환경 개선을 위한 공공주택 및 도시재생사업 추진계획〉에 담긴 공공 임대 아파트 입주자격에서도 배제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단순히 지급되는 물건을 받고, 받지 못하고의 문제를 넘어서 향후 더 나은 주거에 대한 가능성과도 직결되는 겁니다. 밀집된 쪽방촌 중심 지원... ‘보지 않아 사라진 산재된 쪽방’ 서울시가 2017년까지 쪽방으로 인정하고 실태조사를 진행했던 전농1동 사각지대 쪽방 골목. 여인숙 비율이 높다. (좌) 여인숙이 변형된 쪽방. 여느 쪽방처럼 작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우) 같은 쪽방촌 내에서 쪽방 인정 여부가 달라지는 경우도 있지만 아예 동네 자체가 쪽방촌에서 제외되는 사례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서울 청량리역 인근 전농1동 지역입니다. 서울시 쪽방촌 실태조사 보고서에는 돈의동, 창신동, 남대문, 서울역, 영등포를 ‘쪽방밀집지역’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서울시는 2018년 뚜렷한 이유 없이 이 지역을 쪽방에서 제외했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 쪽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계속 존재합니다. 쪽방촌 지원은 대부분 쪽방상담소를 중심으로 이뤄집니다. 쪽방 거주자에 대한 지원 근거는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에서 찾을 수 있는데 현행 제도 하에서는 쪽방상담소가 설치된 지역의 거주자만 동법에 의한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쪽방상담소는 ‘노숙인복지법’ 제16조에 의거해 서울 5개(영등포, 서울역, 돈의동, 남대문, 창신동), 부산 2개(동구, 부산진구), 인천, 대전, 대구에 각 1개 설치되어 있고 2021년 기준으로 10개 쪽방상담소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상자 수는 5,448명이었습니다. 문제는 쪽방과 유사한 환경에 사는 인근 고시원과 여관, 여인숙 등은 이런 지원 대상에서 모두 빠져있고 쪽방상담소에서도 인력 등 한계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국토교통부의 주거실태조사에서 현재 거처를 쪽방으로 인식하는 가구는 78,417 가구였던 것에 비교해 봐도 ‘사각지대’라기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복지 서비스에서 비켜나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약자 동행’이 아닌, ‘약자 배경’이 된 복지 서울 대학동 이동현 홈리스행동 활동가는 이런 상황이 단순한 복지 수급 불균형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서울 전농동처럼 쪽방에서 제외됨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쪽방촌의 경우 전기와 화재 설비 점검을 벌이는데 행정에서 이 동네를 쪽방에서 제외시키면 이런 점검에서도 누락이 되는 거예요. 구로동이나 양평역 근처 벌집도 사실 쪽방과 똑같은 형태이거든요. 고시원이 많은 대학동도 마찬가지고요. 쪽방촌과 한 30초 거리에 있는 고시원도 '쪽방'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거예요. 그곳은 '고시원'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죠. '쪽방 주민'으로 인정받고 싶으면 쪽방으로 가라는 건 개개인의 특성이나 거주 이전의 자유를 무시한 결과죠. 약자가 배경이 아니라 진짜 약자와 동행을 하겠다는 것이라면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없잖아요.” 서울시는 “쪽방의 경우 수익성이 높기 때문에 주택이나 근린생활시설 소유주들이 불법 개축을 통해 쪽방을 양산해 내는 부작용을 막고자 지난 10년간 신규로 쪽방을 지정하지 않고 있다”는 입장입니다. 또 “쪽방 건물을 추가로 지정한다고 해서 예산이 그만큼 비례하여 늘어나는 것은 아님”이라는 입장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동현 활동가는 “서비스 대상자가 늘면 당연히 지원 예산도 늘어야 되는 게 맞거든요. 마치 총량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식으로, 지원 대상이 늘면 지원 서비스가 하향 평준화된다는 식의 이야기는 지자체의 ‘의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고요. 이런 행정의 소극적인 태도가 제도의 사각을 만드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정책 대상을 포괄할 수 있는 '쪽방 규정' 필요 국내 쪽방과 유사한 미국의 SRO(Single Room Occupancy)의 정의는 한국보다 단순하고 유연해 다양한 유형의 주거 형태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뉴욕시 조례는 SRO를 물리적 형태가 아니라 거주자가 공간을 점유하는 방식으로 규정하는데, 이렇게 되면 단순히 화장실의 유무, 공간의 평수를 넘어선 다양한 형태의 ‘쪽방’을 제도 안에 포섭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참고해 우리도 쪽방을 ‘취약계층이 주로 거주하는 쾌적한 주거 생활 유지에 필요한 환경과 시설을 갖추지 못한 좁은 거처’로 정의하자는 제안이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나온 바 있습니다. 지역에 따라 쪽방의 형태가 다양하기 때문에 물리적 특성 등 획일적인 기준으로 정의하기보다 정책 목적에 따라 유연한 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입니다. 또 기존의 쪽방촌이 포함하지 못하는 고시원, 여인숙, 여관 등에 거주하는 주거취약계층에 대한 포괄적인 접근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주거복지 강화 측면에서 사각지대 쪽방 발굴과 지원을 강화하려는 노력이 더해져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습니다. 정치인들은 잊을 만하면 쪽방촌을 찾아 쪽방 주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갑니다. 진짜 약자 복지는 ‘약자를 배경으로 삼는 복지’가 아닌, 이들의 존재를 제대로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최근 5년간 다주택자 1천 명이 4만 4천여 채의 집을 사들였다는 통계와 ‘주택 이외의 거처’에 사는 사람이 다시 늘고 있다는 통계는 한국사회 ‘집’을 둘러싼 불평등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노동부 출입 당시 한 간담회에 초대받아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부끄럽지만 그나마 산재 문제에 관심이 많은 기자로 불려 간 자리였습니다. “왜 언론은 어린이나 청년의 죽음에는 관심이 많으면서 한 가장의 죽음은 잘 다뤄주지 않나요?” 그는 60대 건설 노동자의 죽음도 충분히 한 가정을 파괴하는 비극적인 일인데, 왜 이렇게 언론은 무관심하냐고도 물었습니다. 혹시 광고주의 압력이나 데스크의 압박이 있어서 그런 거냐고, 정말 이유를 알고 싶다는 눈빛으로 물어보던 그에게 뭐라 대답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는 4년 전 부산 경동건설 신축 공사 현장에서 추락해 숨진 고 정순규 씨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생업을 접고 ‘단 한 번도 사과하지 않은’ 경동건설을 상대로 싸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60대 건설 노동자의 죽음을 비롯해 하루가 멀다 하고 반복되는 산재가 뉴스가 되지 않는 이유가 뭘까. ‘산재한 산재’에 대해 노동 담당 기자조차 무뎌져서 그런 것 같다는 말을 그날 그 자리에선 차마 내뱉지 못했습니다. 얘기되는 죽음과 그렇지 않은 죽음을 나도 모르게 평가했던 지난날에 대한 반성도 있었습니다. 고 김용균 그 이후, ‘위험의 외주화’ 얼마나 나아졌나 오는 10일은 5년 전 태안화력발전소 하청노동자 고 김용균 씨가 컨베이어벨트를 점검하다 몸이 끼어 숨진 지 5년이 되는 날입니다. 김 씨의 죽음은 한국 사회 ‘위험의 외주화’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냈고, 그 뒤 ‘일하다 죽지 않을 권리’를 외치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중대재해처벌법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럼에도 정치권에서는 2년간 유예한 50인 미만 사업장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을 또다시 유예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50인 미만 중대재해처벌법, 또다시 적용 유예? 중대재해처벌법은 ‘사업주와 경영책임자 등의 안전 및 보건 확보의무’를 지우고 이를 어길 경우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10억 원 이하의 벌금을 물리는 내용을 골자로 합니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됐지만 산업 현장의 준비 부족 등을 이유로 50인 미만 사업장은 2년을 추가로 유예해 2024년 1월 27일부터 적용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중기부 출입이었던 저는 천안의 한 중소기업을 찾아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둔 중소기업의 고충을 취재하기도 했습니다. 대기업처럼 안전보건 예산 마련 자체가 어렵고, 고용노동부의 중처법 가이드라인이 모호해 법을 지키고 싶어도 지키기 어렵다는 하소연도 있었습니다. 김기문 중기중앙회 회장은 “50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에 대해 준비 시간을 주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결정”이라며 “현장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중대재해처벌법을 시행하면 소규모 사업장은 기업 운영을 포기하거나 범법자만 양산될 우려가 높다”라고 호소하기도 했죠.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또다시 흐른 겁니다. 전체 사업체 중 1.2%만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아래로 고이는 위험 하지만 이미 중대재해의 80% 이상이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이 법의 적용을 다시 유예하겠다는 건 산재를 줄이겠다는 법의 취지를 크게 후퇴시키는 일이라는 지적도 나옵니다. 전체 사업체의 98.8%가 50인 미만 사업장이라는 사실, 다시 말해 중대재해처벌법의 적용을 받고 있는 사업장은 1.2%대에 불과하다는 현실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난 10년간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산재로 숨진 노동자가 12,045명이고, 특히 최근 3년간은 전체 사고 사망의 80%, 중대재해의 80%가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법 제정 당시를 포함해 3년의 유예기간이 주어졌음에도 준비를 못했다는 것은 사실상 준비 부족을 핑계로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적용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깔린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처법 제정 이후 정부는 중대재해처벌법 제정과 관련해 중소기업에 대한 다양 예산을 지원해 왔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안전투자 혁신사업’으로 2020년 4,198억 원이던 예산을 2023년 1조 1,987억 원(자료:민주노총)으로 확대 집행했습니다. 문제는 이 예산의 대부분이 단기성, 일회성 지원 예산으로 쓰여 컨설팅 기업의 1~2회 방문상담에 그쳤다는 겁니다. 공동안전관리자 선임 등 법을 잘 적용할 수 있는 고민은 노동계에서는 안전관리 전문 인력에 대한 비용 부담을 낮출 수 있는 공동안전보건관리자 제도 등의 도입을 요구해 왔습니다. 규모가 작은 중소기업 특성상 한 기업에 한 안전관리자를 무조건 채용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 이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정부가 일정 예산을 지원하고, 1명의 전문가가 여러 개 사업장을 맡아서 공동으로 관리를 하는 방식입니다. 단기성 컨설팅에 그치는 것보다 공동안전관리자를 선임하는 것이 실제 안전 효과 측면에서 사업주도 노동자도 모두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고 김용균 씨와 같은 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인 김영훈 한전 KPS비정규직지회장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김 씨가 일하고 있는 한전 KPS 하청업체 역시 직원이 13명으로 50인 미만 사업장입니다. 중대재해처벌법 유예를 요구하는 주장에 대한 생각에 대해 김 씨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김용균을 기억하는 다섯 번째 겨울, 5주기를 맞아 열린 특별 전시회의 이름은 ‘유감’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산재 사고가 일어나면 책임자들은 ‘유감스럽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습니다. ‘유감’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하거나 불만스럽다”는 뜻입니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 잘못했다거나 반성한다는 말 대신 책임을 미루기 위해 여전히 한국사회에선 습관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글의 첫머리에 언급했던 경동건설 산재 유족 정석채 씨에게도 중대재해처벌법 유예에 대한 생각을 물어봤습니다. 정 씨의 아버지 역시 하청 노동자였습니다. “정부나 기업이 중대재해처벌법 없이 산업안전보건법으로 처벌이 가능하다는 건 거짓말입니다. 여전히 신고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중대재해처벌법을 무서워하는 기업이 여전히 많습니다.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을 소모품으로만 바라보고 죽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기업이 존재하는 한 중대재해처벌법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방송 스타일리스트로 일했던 정석채 씨는 경동건설을 상대로 한 투쟁을 병행하면서 ‘다녀올게’라는 이름의 영화 제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가족을 잃은 사람의 마지막 인사가 대부분 ‘다녀올게’ 였어요. 더 이상 ‘다녀올게’가 누군가의 작별 인사가 되어서는 안 되잖아요.” 디자인 : 김정연
올해 2월 국회에서 열린 깡통전세주택 공공매입 추진 토론회에서 한 청년이 물었습니다. "집이 경공매로 넘어가면서 세입자들이 거리로 쫓겨나고 있습니다. 정부가 경공매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정부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현행 제도로는 중단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방법이 없다는 말을 되풀이하던 정부 담당자에게 그 청년은 더는 되묻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흐른 날, 그 청년은 '정부 대책이 실망스럽다. 더는 버티기 힘들다. 저의 이런 결정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으면 좋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숨졌습니다. 그 후에도 두 명의 청년이 세상을 등진 뒤에야 대통령은 경공매 중단을 지시했습니다. 전세사기 특별법 6개월... 피해 인정 9천 명 "여전히 악몽 속에 살아" 2023년 6월 1일 제정된 전세사기 피해 지원을 위한 특별법은 이런 피해자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현재까지 인정된 피해자는 9천 명 안팎, 올해 말이면 1만 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인정받은 피해자의 71.4%가 이제 사회에 갓 발을 뗀 20~30대였습니다. 특별법 시행 6개월 만에 피해자로 인정받은 사람이 9천 명에 달한다는 사실은 이 문제가 역대 정부가 함께 만들어 낸 사회적 재난이라는 걸 보여줍니다. 피해자 1명이 1인 가구라면 9천 가구, 2~3인 가구라고 보면 전세사기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규모는 훌쩍 커집니다. 등기의 공신력 부재, 임대인-임차인 간 정보 비대칭, 불합리한 채권 우선순위, 국가가 공인한 공인중개사의 책임 부재가 한데 모여 전세사기는 판을 키웠지만, 정부는 여전히 피해 예방에 사실상 손을 놓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피해자로 인정받은 다음에도 제대로 된 구제를 받기 어렵다는 겁니다. 지금의 특별법은 '빚에 빚을 더하라'는 식이어서 보증금 피해를 입은 피해자에게 실질적인 구제책이 되지 못한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LH 피해 주택 매입 0건.. '반쪽짜리 특별법' 보완은? 전세사기 특별법은 만들어질 때부터 '반쪽짜리 법률'이라는 비판이 많았습니다. 피해자들의 핵심 요구였던 공공의 보증금 반환 채권 매입을 통한 '선 구제 후 회수' 방안에 대해선 검토조차 할 수 없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여야는 법을 만들 당시부터 6개월마다 점검과 추가 보완을 약속했습니다. 다음 달 1일이면 약속한 6개월이 다가오지만 국토부와 정부는 아직 별다른 후속 입법 계획을 발표하지 않고 있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피해자가 속출할 때는 전세사기를 '사회적 재난'으로 규정했지만, 여전히 '사인 간의 거래'로 치부하는 정부의 인식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입니다. 그나마 반쪽짜리 특별법의 핵심 구제방안이었던 LH의 피해 주택 매입 및 임대주택전환 역시 한 건도 이뤄지지 않은 걸로 나타났습니다. '피해자 요건 개선' 필요, '사기 의도 요건' 보완해야 특별법에 대한 개정 요구는 이런 방향으로 정리됩니다. 우선 피해자 요건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전세사기 피해를 당했더라도 피해를 증명하는 단계가 너무 까다롭다는 거죠. 보증금 요건을 없애거나 5억 이상으로 상향하고, 전세사기 의도를 피해자들이 입증하기가 어려운 만큼 사기 의도 요건도 삭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사각지대로 몰려있는 신탁사기 피해자 등 보다 폭넓은 피해 인정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피해자들에 대한 구제 방안은 어떻게 손봐야 할까요? 기존 특별법이 대부분 금융 지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이마저도 조건이 까다로워 받기가 어렵다고 피해자들은 입을 모읍니다. 대표적으로 주택도시기금의 '전세사기 피해자 전용' 디딤돌 대출의 경우 8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하고 지역별 최우선 변제금을 제외한 금액만큼만 대출되는 등 한계가 명확합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 중에서 비주거용 오피스텔 등 준주택, 불법건축물에 거주하는 이들은 전혀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현재의 피해 구제책이 보증금 회수보다 대출에 의존하고 있어서 이중 삼중의 고통인 상황인 것이죠. "선순위 부실채권, 공공이 매입해야"... 향후 자금 회수도 가능 임재만 세종대 교수는 금융기관 선순위 부실채권과 임차인 보증금 반환 채권 매입을 통해 피해자를 구제하는 방안을 제안했습니다. 주로 금융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선순위 부실채권을 공공기관인 캠코가 할인 매입해 경매권 실행만 유보해도 해당 주택의 임차인이 계속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보증금 반환 채권 역시 캠코나 허그가 매입해 경매권 실행을 일정기간 유예해 주면 임차인이 해당 주택에 계속 거주할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습니다. 금융기관의 선순위 부실채권 할인 매입 방식은 정부의 재정이 추가로 소요되는 방안이 아니라는 것도 중요한 쟁점입니다. '사인 간의 거래'에 정부 재정을 투입할 수 없다는 논리를 반박할 수 있는 것이지요. 금융기관 부실채권을 정리하는 전문기관인 캠코가 부실채권 인수에 필요한 자금과 경비는 이후 경매를 통해 전액 회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공공의 이러한 노력으로 경매권 실행을 유예하면 피해임차인의 주거 안정 도모 효과가 큽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법이 보호해 줄 거라 믿었는데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냐'고 묻고 있습니다. 임차인의 주거권과 재산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법, 한 임대인이 세입자 보증금으로 집 수백 채를 소유할 수 있었던 제도, 이들을 믿고 대출을 실행해 준 은행, 이런 집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며 소개한 국가가 공인한 공인중개사…. 대규모 세입자가 거리로 내몰리는 불행한 역사는 2023년 대한민국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참고 자료 : 한국도시연구소, <전세사기 깡통전세 피해가구 실태 조사> 자료집, 전세사기 깡통전세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대책위원회,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 설명> 자료집 디자인 : 김정연
두 달 뒤, 전세 계약이 만료되는 A씨는 최근 임대인이 전세사기 범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혹시 몰라 전세반환보증보험에 가입해 뒀지만, 이마저 돌려받기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에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허그에서 보증금을 반환해 줄 때 ‘임차권 등기 명령’을 필수로 요구하는데, 이전 세입자가 먼저 임차권 등기 명령을 신청했기 때문입니다. 민법상 일물일권주의, 즉 한 물건에 두 개의 물권을 중복해 설정할 수 없다는 원칙 때문에 법원과 등기소에선 A씨와 같은 현 세입자의 임차권 등기 명령을 중복으로 받아주지 않고 있습니다. 서울 임차권 등기명령 1년 새 600% 증가.. 세입자 간 갈등도 취재 과정에서 만난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전세사기를 당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총동원했지만 사기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사 당일까지 등기부 등본, 집주인의 신분증과 체납 내역까지 확인했지만 임대인의 사기 의도를 사전에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임대인과 연락이 끊긴 직후, 불안한 마음에 매일 떼본 등기부 등본에 이전 세입자가 선순위 권리자로 올라와 있는 사실을 알게 된 피해자도 있습니다. 임차권 등기는 애초에 세입자의 거주이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목적이 큽니다. 보증금을 못 받은 상황에서 이사 날짜 등을 맞춰야 하는 경우 등기부에 돌려받지 못한 보증금 채권이 남아있다고 명시해 두는 겁니다. 새로 집을 구하는 세입자 입장에서도 등기부 등본을 확인했을 때 임차권 등기가 있으면, 문제가 있는 집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임차권 등기가 세입자들의 보증금 안전장치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문제는 전세 사기가 지속적으로 벌어지면서 한 주택에 의한 피해자가 중복으로, 연속해서 나오는 경우가 생기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사기를 당한 이전 세입자는 임차권 등기를 통해서 거주지를 옮기더라도 대항력을 유지할 수 있고 전세보증금을 우선적으로 돌려받는 권리를 가지게 되는 겁니다. 임차권 등기 신청은 법원에 접수된 후 2주 정도 후에 등기부 등본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사이에 깨끗했던 등본을 확인하고 들어온 현재 세입자는 이 사실을 인지할 방법이 없습니다. 또 이런 빈틈을 악용해 일부러 새로운 세입자가 이주한 직후 임차권 등기를 신청하는 신종 사기 역시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임차권 등기 중복 인정, 가능할까? 선행 임차권 등기가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임차인의 후행 임차권 등기를 인정해 주느냐의 문제는 법률가들 사이에서도 논쟁거리입니다. 등기관은 형식적으로만 판단하기 때문에 앞의 임차권 등기가 있으면 무조건 이후 임차권 등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식입니다. 임차인의 점유시기나 여부 역시 실제 거주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신청인이 적어낸 그대로 등기부에 기재하는 방식입니다. 현 임차인이 법원에 이의신청을 해도 아직까지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례가 많습니다. 판례가 정립되면 따라야겠지만 아직까지는 명확한 선례가 없다는 이유로 실무 관행이 기각 쪽으로 굳혀지는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성실히 법을 지킨’ 현 세입자가 ‘임차인 보호’ 목적으로 만들어진 임차권 등기로 인해 오히려 피해를 보는 상황은 분명 개선이 필요합니다. 등기선례 상으로는 명확한 기준이 없지만 지역에 따라, 판사 재량에 따라 중복 등기가 인정되는 사례도 하나둘씩 나오고 있습니다. 두 명의 임차인 등기를 인정해 준 울산지법의 판례(2017가단8776)는 지금과 같은 임차권을 둘러싼 임차인 간 갈등이 법의 공백에 기인한 것이라고 판시했습니다. 세입자 문제를 오래 다뤄온 이강훈 변호사는“선행 임차권 등기가 대항력이 상실된 상태에서 신청되어 무효인 사정이 분명하다면 후행 임차권 등기 신청을 받아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임차권 등기' 요구하는 허그, 피해 증명 어려운 피해자 사실 임차권 등기가 전세사기 해결의 만능열쇠는 아닙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도 마른하늘 날벼락처럼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에게 임차권 등기는 이미 기울어진 임대차 시장에서 나의 피해 사실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무기인 것이죠. 특히 이들이 더 절박한 이유는 HUG에서 전세보증금반환보증을 해줄 때 임차권 등기를 반드시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허그 측에 앞의 사례처럼 임차권 등기가 어렵지만, 실제 대항력을 유지해 살고 있는 피해자에 대한 다른 구제방법은 없는지 물었습니다. 허그는 "원활한 채권 회수를 위해 임차인이 기존에 취득한 대항력과 약관과 규정에 따라 임차권 등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원론적으로 답변했습니다. 법원에서는 임차권 등기 명령을 거부당하고, 임차권 등기 명령 서류를 내지 못해서 보증금도 못 돌려받는 상황. 전세 사기가 빠져나가기 어려운 지옥으로 변하고 있는 우리 이웃의 현실입니다. 디자인 : 김정연
전세사기 특별 단속 14개월째, 그동안 정부는 5,568명을 검거해 481명을 구속했지만, 최근까지도 전국에서 대규모 전세사기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결국 윤석열 대통령이 나서 “지구 끝까지 추적하겠다”며 엄단을 예고했고, 올해 말 종료 예정이던 단속 기한 역시 무기한 늘리기로 했습니다. 도대체 왜 전세 사기는 근절되지 않는 걸까요? 정말 악인(惡人) 몇몇을 붙잡으면 전세사기는 사라질 걸까요? 왜 피해자들은 정부의 대책이 ‘속 빈 강정’이라고 토로하는 걸까요. 오늘은 ‘전세사기의 진짜 배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빚내서 집 사라'... 마구잡이식 정책의 실패 정부의 대책은 여전히 전세를 둘러싼 ‘제도 개선’ 보다 ‘피해 예방’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당장 피해 세입자들이 경매로 집에서 쫓기는 걸 방지하기 위해 마련한 경매 유예 조처 역시 대부업체 같은 채권자가 거부하면 강제력이 없어 후순위 임차인의 보증금 피해가 속속 현실화하고 있습니다. 올여름 사기를 인지한 피해자 A 씨는 자신이 전세사기 피해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그나마 믿을 구석이었던 전입신고 및 등기부등본 확인, 보증보험 가입 거절 시 계약 해지 같은 특약이 모두 무용지물이었다고 말합니다. 대규모 전세 사기 이후 마련된 대책만으로는 ‘작정하고 사기 치는 사람’을 여전히 거르기 어려워 피눈물을 흘리는 피해자들이 계속 나오는 상황인 거죠. 취재 과정에서 만난 수원 지역 공인중개사는 전세 사기를 부추긴 책임에서 정부와 은행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악성 임대인) 혼자서 한 사기가 될 수 없는 거예요. 은행에서 그 임대인 이름만 대면 대출을 막 해주고, 한 명이 집을 몇 백 채가지고 있어도 정부는 관리도 안 하고. 이건 다 정부에서 판을 깔아준 거예요.” 사기꾼이 활개 칠 수 있는 환경, 전세 제도 자체를 손보자는 논의도 활발합니다. 근본적인 전세제도 개편 없이는 전세사기, 역전세난 문제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김진유 한국주택학회장은 전세 보증금을 매매가의 일정 수준 이하로 규제하는 ‘전세가율 상한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투기 우려가 있는 지역에서 주택담보대출비율(LTV)을 규제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만약 전세가율을 70% 이하로 제한하면 2억 원짜리 주택 매입 시 적어도 임대인이 6천만 원을 들여야 합니다. 10채면 자기 자본 6억, 100채면 60억 원이 필요한 셈이죠. 지금처럼 한 푼도 없이 수백 채를 일으키는 건 불가능해지는 겁니다. 이 주택이 경매로 넘어가면 집주인이 투자한 30%를 포기해야 하기에 보증금 반환을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경우 나머지 30%에 대해서는 임차인이 월세로 내야 하는 부담이 생기지만, 보증보험과 비슷한 수준의 비용으로 사기 예방 효과는 훨씬 뛰어납니다. “사인 간의 자유로운 거래?... 주거는 ‘기본권’으로 접근해야” 물론 반대 논리도 있습니다. ‘자유로운 사인 간의 계약’에 대한 과도한 규제라는 식의 주장이죠. 그러나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임대인 친화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한국의 주택 상황을 고려할 때, 지금과 같은 악성 임대인에 의한 피해자가 끊임없이 양산되는 상황을 정부가 방관하는 건 직무유기입니다. 김진유 주택학회장은 전세가 상한제를 사기 가능성이 높은 ‘3억 이하 또는 5억 이하 비아파트’ 등으로 제한해 도입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향후 주택 공급 부족과 전세가격 등락이 맞물리는 시점에는 또 다른 대규모 피해가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후 피해 구제만큼 사전 예방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겁니다. ‘정보 비대칭 해소’ 필요... ‘악성 임대인 정보’ 공개하는 나라들 있다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선 임대인과 임차인간 정보 비대칭 해소도 시급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등기부로 주택의 기본적인 정보를 확인할 수는 있지만, 임대인의 보증금 반환 능력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임차인 입장에선 전 재산과 같은 돈을 맡기면서도 임대인의 ‘선의’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죠. 전세사기가 근절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피해가 이어지는 핵심 이유일 겁니다. ‘어떻게 더 공평한 임대차 환경을 만들 것인가’ 진미윤 LH 토지주택연구원 정책지원단장은 주택 임대차와 관련한 최근 OECD 정책 기조가 거주 안정성을 강화하는 추세라고 지적합니다. 많은 나라들이 ‘어떻게 임대차 환경을 더 공평하고(Fairer), 더 부담가능하게(More Affordable) 만들 것인가’를 화두로 삼고 있다는 거죠. 지난 2018년부터 영국은 임차인의 권익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법과 제도를 대폭 개편했습니다. 우선 악성 임대인과 갈등에 맞닥뜨렸을 때, 임차인의 문제 제기와 대처를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돕습니다. 비용이 드는 법적 소송은 최후의 보루로 두되, 임차인이 신속하고 저렴하게 법률 구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거죠. 이를 위해 모든 임대인이 옴부즈맨 서비스에 가입하도록 하고, 가입하지 않으면 지자체의 단속 대상이 됩니다. 만약, 임대인이 계약과 달리 열악하고 비좁은 집을 임대했다가는 임대료를 몰수당할 수도 있습니다. 25년의 역사를 가진 주택 행정감찰관(Housing Ombudsman) 제도 역시 대대적으로 강화했습니다. 주택부 산하 비정부 공공기관을 두고 임대인에게 불만을 제기하는 방법과 절차를 교육하고 다양한 임대차 관련 분쟁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영국 불량 임대인 부동산 중개인 데이터베이스 (2018년 4월 도입)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건 정부가 나서서 불량 임대인과 부동산 중개인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공개하고 있다는 겁니다. 지자체는 임대인 정보를 수시로 모니터링하고 관리대상을 예의주시합니다. 임차인은 아주 세밀한 수준의 개인 정보를 제외하고 임대인의 피고발 사유나 체납 유무 등을 정부의 공적 시스템을 통해 인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임차인이 임대인과 관련된 정보를 얻기 위해 ‘등기부 등본’을 떼어보는 것 말고는 임대인이나 중개인의 말에 기대야 하는 것과도 대조적입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영국 정부는 임차인이 임대인에게 건넨 보증금도 감시합니다. 임대차 종료 시 혹시 모를 분쟁에 대비해 임대인은 반드시 정부가 승인한 '임차보증금 보호(TDP)' 제도 보관소에 보증금을 예치해야 하고, 30일 이내 임차인에게 보증금이 어떻게 보호되고 있는지 정보를 제공해야 합니다. 선진국들이 ‘임차인 권익’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주택 정책을 수립하는 이유는 이 문제가 다른 사유재산이 아닌 ‘집’과 관련됐기 때문입니다. 주거에 대한 위협은 생활 기반 전반을 무너뜨리는 기본권에 대한 위협이라는 인식을 구성원 전체가 공유합니다. 영국 정부가 ‘임차인에 대한 강력한 보호’를 정책으로 표방하고 있다는 점은 한시적인 특별법 상 피해자 인정조차 쉽지 않은 우리의 상황과 비교해도 생각해 볼 지점이 많습니다. 전세를 보완하는 방법 대한 생각은 조금씩 달라도 초점은 한 군데로 모아집니다. 피해 지원에 집중된 논의를 이제는 사기를 막을 수 있는 예방 정책마련에도 힘 쏟아야 한다는 거죠. 전세 제도는 60년 넘게 우리 사회가 암묵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운영해 온 제도입니다. 서민들의 ‘주거 사다리’가 ‘썩은 동아줄’로 전락한 배경에는 위험 신호를 외면한 채 다주택 임대사업자에게 날개를 달아준 역대 정부가 있었습니다. 전세사기의 ‘진짜 배후’가 방관하는 사이, 악성 임대인은 지금 이 순간에도 또 다른 피해자를 노리고 있습니다. 디자인 : 옥지수
돌이켜보면 비극이 있기 전에는 늘 위험을 알리는 신호가 있었습니다. 2022년 10월 29일 토요일 밤 대한민국 수도 서울 번화가 한복판에서 159명의 청년들이 목숨을 잃은 날도 그랬습니다. 압사 우려가 있다는 신고가 빗발쳤지만 대응은 안일했습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제대로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시 계절이 바뀌어 1주기를 앞두고 있지만, 독립된 조사 기구조차 아직 꾸리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애도가 줄어든 만큼 피해자들을 향한 무분별한 비난과 혐오는 커졌습니다. MZ세대라고 호명된 피해자들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크게 부각됐습니다. 참사 피해자와 생존자에게 ‘그곳에 왜 갔느냐’는 말들이 비수가 되어 꽂혔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이후에도 달라진 게 없다는 냉소 역시, 이태원 유가족과 생존자들로 하여금 소리 없는 눈물을 삼키게 했습니다. 희생자 또래인 형제자매들이 겪은 ‘참사 그 이후’ 이태원 참사 희생자 다수는 2~30대 청년층이었습니다. 보통 참사 이후 마이크를 잡는 건 부모님들이었지만, 다른 참사와 달리 유가족협의회 안에서 형제자매 유가족들의 활동이 매우 두드러졌습니다. 이들은 슬픔에 힘겨워하는 부모들 사이에서 의견을 내고, 시민을 불러 모았습니다. 이들은 학업과 취업, 노동과 자립 등 현재를 살아내는 동시에 사라진 형제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고민했습니다. 올해 2월 꾸려진 〈이태원 참사 작가기록단〉은 희생자의 또래인 형제자매들이 어떻게 이 참사를 겪어냈는지 주목했습니다. 전국에 분포한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기록하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세상을 일구던 활동가와 변호사, 작가들이 모여 희생자의 형제자매, 연인, 생존자 등 14명을 인터뷰했습니다. 피해자의 서사를 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우리 사회 전체가 어떤 목격자 혹은 피해자일지 질문했습니다. 책 제목은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 (출판사 창비)〉. 제목이 된 문장은 참사 당일 피해자들과 생존자들이 가장 많이 가족들과 주고받았던 말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여전히 참사가 해결되지 않은 ‘현재 진행형’이라는 뜻도 담겨있습니다. 손재주 좋았던 웹디자이너 동생의 죽음... “참사 한 달 지나 다른 유족의 삶에 관심” 웹디자이너였던 고 이주영 씨는 참사 당일, 출장으로 오랜만에 만난 예비신랑과 함께 이태원에 데이트를 하러 갔다가 인파에 휩쓸려 결국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동생 주영 씨와 선한 눈매가 꼭 닮은 진우 씨는 네 살 터울 동생에게 그리 살가운 오빠는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있던 주영 씨와 진우 씨는 보통의 남매들처럼 데면데면했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도 부모님과 함께 같은 집에서 얼굴을 맞대고 살았습니다. 하고 싶은 걸 꼭 해내는 성격이었던 주영 씨는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 민트와 초코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 출시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주영 씨가 쓰던 달력에는 11월 말까지 예정된 일정이 빼곡히 적혀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주영 씨를 포함해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 삶의 궤적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었던 주영 씨의 오빠, 이진우 씨를 인터뷰했습니다. Q. 이주영 씨는 어떤 동생이었나요. A. 원래 회사를 다녔어요. 웹디자인 회사였는데, 본인이 나와서 공부를 해보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마침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고 있었거든요. 민트랑 초코 해서 민초단인데 둘을 모티브로 본인이 디자인을 하기 시작하더라고요. 웹사이트도 만들고 고양이 관련 박람회가 열리면 부스 만들어서 판매하는 작업도 하더라고요. Q. 원래 주영 씨가 어릴 때부터 미술을 잘했어요? A. 만들고 이런 거를 잘했던 것 같아요. 요리나 이런 것도 곧잘 하더라고요. 손으로 하는 재주가 있어서. Q. 지난 1년이 가족들에게는 어떤 시간이었나요. A. 어떻게 보면 시간이 되게 느리게 간 것 같기도 하고 (1주기가) 엄청 빨리 온 것 같기도 해요. 처음 한 달은 거의 정신을 빼놓고 산 수준이었던 것 같고, 한 달 지나서 조금씩 주변을 둘러보게 됐던 것 같아요. 가족끼리 억누르는 것만 해도 굉장히 힘이 많이 들었거든요.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나서 보니까 저희 가족 말고 다른 가족분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가 궁금해진 거예요. 모임이 있다고 들어서 연락을 하게 됐고, 여기까지 오게 되긴 했네요. 이진우 씨가 유가족협의회에서 활동을 하며 기준으로 삼고 있는 건 ‘여기서 내가 제일 힘들고 아픈 사람은 아니다’라는 생각입니다. 자신의 고통과 아픔을 보듬는 것에 멈추지 않고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하면서 다른 종류의 아픔에도 눈을 돌리게 됐습니다. Q. 이런 질문이 참 송구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부모님은 지금 어떻게 이 시기를 보내고 계신지요. 아버님과 어머님도 같이 유가족협의회 활동을 하셨나요? A. 돌이켜보면 어머니가 오히려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어머니가 더 먼저 무너질 줄 알았거든요. 근데 어머니가 오히려 강인하게 집의 기둥이 됐다고 할까.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엄마가 여기 딱 지키고 있을 테니까 동생 위해서 아빠랑 너랑 활동 잘하고 와. 집에 돌아오면 다시 우리끼리 시간을 보내자’. 이런 느낌.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저희 가족이 1년을 버티면서 크게 안 무너지고 올 수 있었던 건 엄마의 역할이 굉장히 크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요. 이진우 씨는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에서 ‘만능 일꾼’으로 통합니다. 간단한 사무나 회계 업무부터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취합하고, 형제자매 모임의 주축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Q. 직장생활과 활동을 병행하는 게 힘들지 않았나요? 책에는 ‘5개의 가면’을 쓴 것 같다는 표현도 나오는데 그럼에도 활동을 이어간 이유는 뭔가요. A. 적극적으로 활동에 참여하는 유가족과 그렇지 않은 유가족의 차이가 무엇일까 고민을 해봤는데 제가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은 참사 당일 현장을 봤냐, 안 봤냐의 차이가 컸던 것 같아요. 저한테 이 모든 상황의 트라우마의 가장 핵심이기도 하고요. 트라우마를 이겨내기 위한 수단으로써 저는 이 활동을 계속해왔던 것 같거든요. 참사 1주기가 다 되도록 ‘제대로 된 설명’ 없는 정부 Q. ‘정부가 하겠다는 약속이 지켜진 게 없어서 화나고 속상했다’고 언급했는데, 지난 1년간 정부의 대응은 어떻게 평가하나요? A. 제가 너무 낙천적으로 생각했던 걸 수도 있는데 저는 공공의 역할을 하는 기관이 충분한 설명을 해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설명을 절대 하지 않더라고요. 단 한 번도 정부가 공식적으로 왜 이런 상황이 펼쳐졌는지, 이런 상황에서 각각의 희생자들이 어떤 식으로 병원에 이송됐는지, 어떻게 사망했는지 원인부터 결과까지 일련의 과정에 대한 설명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요. 그리고나서는 늘 ‘언론을 통해 얘기 나오지 않았느냐’, ‘경찰 조사가 되고 있지 않냐’고 하는데 그게 저희한테 제대로 된 설명은 아니거든요. 아직도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지난 19일 유엔의 제5차 자유권규약 심의에서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경찰의 특별수사본부 수사 및 국정 조사 등 대대적 조사와 수사를 통해 대부분의 진상을 규명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시민사회와 법조계 생각은 다릅니다. 1주기를 맞이할 때까지 숱한 과제들이 미완의 상태로 방기돼 있다는 겁니다. 시민사회단체는 10.29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과제 보고회를 열고 30개의 주요 과제와 173개의 세부 과제를 발표했습니다. 지금까지 이뤄진 정부 조사만으로는 다음에 있을지 모를 참사에 대비하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Q. 이태원 유가족들에게 시청 앞 분향소가 갖는 의미가 특별하다고 들었습니다. A. 녹사평 분향소에는 희생자들의 영정과 위패를 세웠다는 의미가 있었는데, 일부 보수 시민단체에서 끊임없이 와서 부모님들한테 ‘자식들 시체 팔아서 돈 얼마나 벌려고 지금 여기 나와서 이러고 있느냐’, 토씨 그대로 이렇게 얘기를 많이 했었어요. 그래서 가족들도 당시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심리적으로 위축돼 있었는데 시청 분향소가 만들어지고 더 많은 시민들을 만나면서 진심으로 추모해 주는 분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고요. 가족들이 좀 더 힘을 차릴 수 있는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정박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Q. 이태원에 왜 갔느냐는 질문보다 왜 돌아오지 못했느냐는 질문이 필요하다는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정말 ‘왜 동생이 거기에 갔어?’라는 질문을 많이 들었나요? A. 다들 쉽게 물어보지는 못하지만 궁금해하는 부분이기도 했어요. 동생은 올해 결혼을 앞두고 있었어요. 이미 결혼식 예정 날짜는 지나긴 했지만. 예비신랑이 출장 갔다가 오랜만에 와서 같이 밥을 먹고 소화시킬 겸 구경하자고 돌아다니다가 사람이 워낙 많아서 나오는 길에 그렇게 됐거든요. 근데 (사람들은) 그런 상황을 잘 몰라요. 그냥 단순히 나쁘게 얘기하면 ‘술 먹으러 놀러 갔다’, ‘이성을 꼬시러 갔다’ 이런 얘기들을 하지만 대체적으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 상황은 제가 만나서 들었던 가족들 얘기로는 거의 없음에 수렴해요. 그렇다면 왜 이 친구들이 돌아오지 못했는지를 물어보는 게 맞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더 들어요. ‘피해자’를 향한 비난의 말들 Q. 앞의 질문과 이어지는 맥락입니다. 이태원 참사 이후에는 유난히 피해자를 비난하는 말들이 많았습니다. 이태원이 가지는 공간적 특성 때문인지도 모르겠는데요. 희생자의 형제자매들도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보았을까요? A. 이태원은 저한테도 친구들과 맥주 한 잔 할 수 있는 굉장히 즐겁고 좋은 기억이 있는 곳이었거든요. 그 공간 자체가 그나마 젊은 친구들이 자유롭게 얘기하고 놀 수 있는 공간인데 뭔가 굉장히 나쁜 공간, 정상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는 공간이라는 식으로 몰아간 측면이 있었어요. 개인적으로는 이런 부분이 많이 안타까웠고요. 1주기를 앞두고 지구촌 축제 등을 두고도 의견이 분분하잖아요. 제 생각에는 축제는 열리고 그 축제에 대해 사람들이 즐기는 게 오히려 좋다고 생각해요. 왜곡된 생각을 하는 건 그 공간에 가보지 못한 사람들의 편견이라고 봐요. Q. 앞으로 이태원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도 분분합니다. A. 저는 과거와 똑같이 자유롭고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다만 이곳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기억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슬픈 일이 일어났던 곳이긴 하지만 여전히 예술과 자유가 넘치는 공간이라는 성격을 다 함유할 수 있는 곳으로 발전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제일 힘들고 아픈 사람은 아니라는 다짐’ Q. 진우 씨는 이태원 참사를 겪으면서 ‘내가 제일 힘들고 아픈 사람은 아니라는 다짐’을 자주 했다고 했어요. 어떤 의미일까요. A. 저희도 굉장히 힘들고 아프지만 다른 종류의 아픔과 슬픔도 많더라고요. 참사 전후가 많이 다른 게 그전에는 관심이 없던 부분도 더 눈에 밟히고 더 눈에 많이 보여요. 그래서 지금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정말 미약하기는 하지만 뭔가 도움이 되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것 같아요. Q. 이태원 참사 1주기를 앞두고 있는데 사람들이 어떤 걸 기억해 줬으면 하나요? A. 백 마디 말보다는 그날 이 친구들이 세상을 떠났던 그 공간을 한번 가보시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증을 가지게 될 거예요. 그 공간을 한번 가보시면 ‘왜 거기 갔느냐’가 아니라 ‘왜 돌아오지 못했냐’에 대한 답을 조금이나마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태원이라는 공간이 어떤 공간인지 몸소 느껴주셨으면 좋겠어요. 희생자들이 세상을 떠난 그곳이 정말 일상적인 공간이고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는 걸 눈으로 보면 느낄 수밖에 없거든요. 수많은 재난 참사에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바꿨나 10·29 이태원 참사 작가기록단 중 한 명인 유해정 인권기록센터 사이 활동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태원 참사 이후 피해자들을 책망하는 말들이 많았어요. 대표적인 질문이 "거기 왜 갔어"라는 것이고요. 그런데 피해자를 책망하는 것으로는 사회는 변화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이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고 제대로 된 책임을 물어야 하는 건 사실 돌아가신 분들에게는 어떤 이득이 되는 행위가 아니거든요. 일상의 공간을 살아갈 우리 모두의 안전과 존엄을 위한 일이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반복되는 참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예비 피해자가 아닌 사람은 과연 누굴까요. 수많은 재난 참사에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바꿨나 하는 자괴감은 비단 유가족과 생존자들의 것만은 아닐 겁니다.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이질감 없는 문장 앞에 한 단어가 붙으면 낯설어집니다. 바로 ‘장애인’입니다. 문장이 현실로 옮겨진 풍경을 눈앞에 마주하면 마음은 더 복잡해집니다. ‘오전 7시 30분 출근길 혜화역 승강장, 나와 함께 지하철을 타기 위해 탑승장에 모인 한 무리의 휠체어 장애인들’. 지난해부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벌인 시위의 명칭이 바로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였습니다. 전장연은 9월 정기국회까지 ‘휴전’을 선포한 상태입니다. 시위를 잠깐 멈추고, 이동권 예산이 제대로 반영되는지 지켜보겠다고 했습니다. 바꿔 말하면 책임 있는 정치 주체의 행보에 따라 언제든지 출근길 갈등이 재점화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순종’에서 ‘불복종’ 으로... 장애시민 변재원의 탄생 누군가에겐 숨 쉬듯 당연한 권리가 ‘요구의 주체’에 따라 논란의 소재가 됐습니다. ‘비장애인이 무정차로 지나갔던’ 장애인의 시민권 탑승 요구에 대해서는 침묵하던 언론도 출근길 탑승 시위를 둘러싼 갈등에 대해선 떠들썩하게 보도했습니다. 시위의 목적보다 ‘떼쓰는 장애인’ vs ‘시민 불편’ 같은 대립 양상에 집중한 보도가 많았습니다. “왜 전장연 장애인들은 욕을 먹으면서 법을 어깁니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모호했습니다. ‘순종’에서 ‘불복종’으로. 오랜 시간 ‘우수한 일등 시민’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엘리트 장애인’ 변재원이 ‘나쁜 장애인’으로 탄생하는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보기로 했습니다. 한예종, 서울대, 구글코리아를 거쳐 전장연 정책국장으로 활동한 변재원의 서사에 한국 사회가 놓치고 있던 질문과 답이 있지 않을까. 변재원 작가는 지난달 〈장애시민 불복종〉 (창비)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장애인들이 왜 데모를 하는 거지?’... 한국 사회에 던져진 가장 윤리적인 질문 Q. 출간한 지 한 달 만에 3쇄까지 찍으셨다고요. 책이 반향을 일으키는 이유가 뭘까요? A. 저도 그게 좀 궁금해요. 지금 정치사회면 지형도를 정리해 봐도 사실 이 책은 크게 주목받기 어려운 책이에요. 아마 장애인 당사자 분들이 많이 사서 읽겠지만 그것보다도 저는 작년 한 해 한국 사회에서 가장 많은 질문, 윤리적인 질문을 던졌던 게 무엇일까라고 생각하면 한 줄로 ‘장애인들이 왜 데모를 하는 거지?’였던 것 같아요. 장애인들이 왜 거리로 나선 걸까. 왜 그렇게 아스팔트에서 투쟁이라는 무서운 단어를 외치는 걸까.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았다고 추측해요. 실제 전장연 지하철 시위의 발단은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설 명절, 아들을 보러 가던 장애인 노부부가 오이도역 지하철 리프트에서 추락해 1명이 숨지고 1명이 크게 다쳤습니다. 장애인들이 ‘비장애인이 이용하는 버스와 지하철을 막아서는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게 이때부터입니다.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라’는 외침이 공허한 메아리로 울린 지 20년, 2021년 겨울부터 마침내 출근길 지하철에 타게 됐습니다. Q. 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선 게 최근의 일만은 아니잖아요. 왜 최근 들어 이슈가 됐을까요? A. 장애운동은 88년 서울 올림픽 때도 있었고요. 2천 년대 초반, 21세기가 시작될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의제화가 된 건 2022년부터예요. 한 40년을 켜켜이 묵혀 있다가 작년에 ’빵‘하고 터진 거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준석 전 국민의힘 당대표와 박경석 전장연 대표 간의 방송토론이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이후에도 새 정부가 ‘시민단체 이권 카르텔과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전장연이 언급되기도 했죠. 정치권의 언어 속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발음된 건 최근 2년의 일인 것 같아요. 좀 아이러니하죠. 일단 의제화가 이뤄졌다는 점에서는 좋은 것 같지만, 마치 장애인들이 호주머니 챙기는 식의 오염된 사회운동처럼 비추어지는 측면에 대해선 걱정이 많죠. ‘생존 게임’이 된 사회에서 최약체로 산다는 것 Q. 한예종에서 서울대학원, 구글코리아 인턴까지, 소위 ‘착한 장애인’ 시절 성공에 대한 욕망이 컸다고 고백하기도 했죠. A. 장애를 갖고 산다는 건요 약간 이런 거예요. 예를 들면 이 사회가 커다란 서바이벌 게임, 오징어 게임 같은 거라고 생각을 한다면 저는 그 안에서 최약체인 거예요. 그래서 저한테 어떤 손에 무기랄까요? 뭔가 대단한 게 쥐어지지 않으면 저는 다음 게임에서 탈락할 게 분명한 사람인 거죠. 탈락하지 않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어요. 첫 번째는 무기를 쥐고 살아남아서 다음 게임까지 올라가는 거. 두 번째는 다 같이 그 게임을 포기해 버리면 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면 참여자들이 ’왜 누굴 죽여야만 누구를 살 수 있냐‘라는 그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버리면 되는 거거든요. 이런 비유가 굉장히 우화적이고 유치하다고 느끼시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그게 현실이라고 봐요. ‘착한 장애인 시절’의 저는 ‘내 손에 무기를 쥐자 전략’을 택했던 거예요. 한국사회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고민해 보면 제일 쉬운 건 더 좋은 학력과 더 좋은 직업. 이거 두 가지 정도면 제가 봤을 때 최고의 무기를 쥐는 거거든요. 돈을 진짜 많이 주는 곳에 가는 것과 명예로움을 얻는 것이 오랜 시간 동안 제 삶의 큰 생존의 전략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그런 걸 꽤 잘 따라가는 사람이었어요. 작가 변재원은 ‘나 같은 장애인이 몫을 챙기는 길은 투쟁이 아니라 성공에 있다’고 믿었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다 석사 학위 논문 주제로 〈장애인의 공공시설 접근성〉을 택했고, ‘몇 번 들르고 말 공공시설’에 대해 진정으로 악성 민원을 넣는 장애인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생의 행로를 바꿨습니다. Q. 한예종과 구글코리아 시절의 변재원은 어땠나요. A. 한예종 다닐 때 공공기관 에너지 절약 정책이라고 해서 건물이 5층이면 엘리베이터가 2층과 4층에만 섰던 시절이 있어요. 근데 장애학생들은 이러면 수업을 들을 수가 없거든요. 그 과정에서 저는 원치 않아도 문제제기를 해야만 하는 거예요. 구글에서도 마찬가지죠. 당시 ‘헤비도어 이슈’라고 했는데 보안과 화재예방을 이유로 문이 무거웠어요. 문제는 제가 출근을 했는데 문이 무거워 열 수가 없어서 사무실에 못 들어가는 상황이 생기는 거예요. 이 무거운 문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가지고 한바탕 소동이 있었죠. Q. 소위 ‘엘리트 장애인’ 시절에도 싸울 수밖에 없었군요. A. 밖에서 봤을 때는 평온해 보였겠지만 그때부터 어떤 씨앗이 있었던 것 같아요. 대학생들 로망이 배낭여행이잖아요. 근데 제가 라오스를 갔다가 귀국하는 비행기를 타려는데 항공사에서 서약서를 내미는 거예요. ‘비행기 운항에 있어서 당신의 존재로 차질이 생길 시 모든 금전적인 문제를 배상한다’라는 내용이었어요. 이 서약서에 사인을 해야만 탈 수 있다고. 내가 목발을 짚는다는 이유로 모든 비행기 운항 차질에 대해 배상할 책임은 저는 없다고 보거든요. 그래서 항의를 했더니 항공사 답변은 간단해요. ‘그러면 타지 마세요’라고. 정말 안 타려고 보니 나중에 비자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울며 겨자 먹기로 비행기를 타긴 탔죠. 서약서 사인하는 곳에 사유를 쓰게 돼 있는데 ‘모르겠음. 설마 장애인이라는 이유로?’라고 썼죠. 정말 모르겠으니까.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의 존재는 이런 식이에요. 첫 번째는 일단 거부한다. 두 번째는 그래 받아줄게, 하지만 조건부 승인이라고 할까요. ‘내가 널 받아줌으로써 생기는 모든 책임은 다 너의 거야.’ 그게 왜 장애인에게만 요구되는가라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렇게 합리적이지는 않죠. Q. 전장연 활동 전과 후, 가장 달라진 관점은 무엇인가요. A. 어떤 사회적 약자성을 갖고 사는 사람들의 선택지는 결국 두 가지인 것 같아요. 소위 ‘주류층’이 되기 위해서 극복하거나 혹은 연대하거나. 극복의 전략을 택하면 단순히 내가 더 좋아지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해요. 다른 사람을 짓밟고 올라가야 내가 빛이 나고 탁월해지는 거죠. 이걸 택하면 제 삶을 경유하는 단어는 ‘이기심, 경쟁, 승리’ 같은 단어들이에요. 그러니 세상이 다 전쟁터가 되는 거예요.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 시기질투하는 마음도 함께 오죠. 그런데 연대의 전략을 택하면 관점이 달라져요. 상대가 잘 된다는 건, 그러니까 나와 같이 연대한 사람이 잘 된다는 건 나도 같이 잘 될 가능성이 굉장히 커지는 거예요. 연대의 관점에서 보면 ‘내 팀원이 잘 되고 있네, 나도 잘 되겠네’라는 생각을 갖게 될 수 있는 거예요. 공동체적 사고가 좀 더 가능해지거든요. 그때부터 저에게 떠오르는 단어들은 ‘협력, 연대, 공동체, 사회’ 같은 것들이었어요. Q. 한국사회에서 장애운동은 어떻게 인식되고 있다고 보시나요. A. 인종, 성차별 반대 같은 민권운동이 겪었던 그 역사적 갈등들을 장애 운동도 그대로 겪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 장애인 너희들 이렇게 도움이 필요한 거 알겠어. 근데 너희 왜 그런 고집을 부려? 왜 하필 시위를 하냐?“라는 질문은 장애인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고 역사 속 소수자가 숱한 권리를 찾아가는 과정 중에 발생한 잡음이라고 생각해요. 누가 법을 어기고 있는가 Q. “왜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면서” 혹은 “왜 불법적인 방법으로 싸우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답변할 수 있을까요. A. 장애인들이 집회시위 하는 것이 정말 못마땅한 사람도 있죠. 하지만 그 속에는 정말 이해하고 싶어서 질문하는 사람도 있다고 보거든요. 역설적이지만 장애인들이 지하철을 타려고 하는 순간부터 이동권 논의가 시작돼요. 더 정확히 말하면, 장애인의 출근길 시위로 비장애인 시민들이 피해를 호소하는 순간부터 이동권 정책에 대한 법과 예산이 논의되기 시작해요. 이게 정말 딜레마 같은 상황인 거예요. 백날 장애인끼리 모여서 국회의원 사무실에 가고, 대통령실 앞에 가서 “장애인 이동권은 중요합니다. 교통약자 지하철, 엘리베이터, 저상버스 설치해 주세요”라고 외쳐도 세상이 안 움직여요. 그런데 비장애인 승객이 “이거 언제까지 우리 이러고 살아야 되냐, 국가가 나서서 해결을 하라”고 얘기하는 순간부터 국가가 움직이기 시작해요. 전장연은 지난 7월 “장애인 특별교통수단 차량 1대당 운전원 2명, 하루 16시간 이상 운행 요구에 대해 수용” 입장을 공문으로 밝힌 경기도에 한해서 ‘출근길 지하철 탑승 투쟁’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동권 예상 증액에 대한 약속을 명문화했기 때문입니다. 이밖에도 전장연 홈페이지에는 ’출근길 투쟁 시위‘를 알리는 공지보다 ‘선전전으로 대체’한다거나 정치권의 응답을 ’기다린다‘는 보도자료가 숱하게 많았습니다. Q. “비장애인인 내가 당신들의 시위로 출근길에 30분 지각하면, 뭐가 달라지나”에 대한 답변은. A. 어려운데요. 실제로 들은 질문으로 바꿔볼게요. “어머니가 서울대병원에 예약을 했는데 당신들 지하철 집회로 늦었습니다. 진료를 다음으로 미뤄야 했습니다. 당신들이 대체 뭔데?”라는 얘기를 들은 적 있어요. 답변이 어려운 이유는 저희가 이렇게 대답할 수 없다는 거예요. “어머니가 좀 늦으면 어떻습니까? 한국 사회가 변해야 되는데.”라고요.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죄송합니다” 밖에 없어요. 그다음부터는 너무 구차하고 힘든 상황인데 저희들 얘기를 할 수밖에 없거든요. 장애인이 종로 3가에서 환승할 때 평균 50분이 걸려요. 리프트를 타니까요. 그런데 저는 비장애인이 환승하는데 50분 걸렸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장애인이 하루 일과 마치고 콜택시를 기다릴 때 2시간 이상 걸렸다는 사람이 허다하거든요. 장애인이 출퇴근 시간에 나설 수가 없어서 직업을 구하지 못한다는 얘기를 무수히 많이 들어요. 근데 비장애인이, 출퇴근 시간이 짜증은 나지만 탑승할 수 없어서 직업과 생계를 포기한다는 얘기를 듣지는 못했어요. 정말 전장연이 ‘나쁜 장애인’이기만 할까? Q. ‘나쁜 장애인’으로의 삶을 택한 이유가 뭔가요. A. 예전에 “착한 장애인은 개인의 삶을 바꾸지만, 나쁜 장애인은 제도를 바꾼다”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그 얘기가 제가 살아왔던 얘기이기도 한데, 돌이켜보면 저는 착한 장애인 시절이 돈도 더 많이 벌고. (웃음) 그리고 경찰서에서 전화도 안 오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되게 좋았던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훨씬 좋았던 것 같은데. 이렇게 딱 뒤를 돌아서 봤더니 바뀐 게 없는 거예요. 개인인 저는 바뀌었어요. 좋은 직장에 가는 게 조금 더 쉬워지고, 아마 좋은 직장에 있다 보면 더 많은 돈을 버는 게 조금 더 쉬워지고 가속도가 붙는 달까요. 근데 이건 어디까지나 제 얘기예요. 다른 장애인에 대한 얘기는 아니에요. 근데 이렇게 해서 개인의 삶을 아무리 바꿔도 딱 뒤돌아보면 사회는 그대로예요. 차별받는 사람은 계속 차별받죠. ‘이렇게 사는 게 맞나?’라는 생각이 들 때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저 사람들 진짜 빨갱이 아니야?’하면서 박경석 대표나 다른 사람들을 지켜봤죠. 그 사람들은 삶이 좀 구차하거든요. 막 구치소도 갔다 오고 막 어디서 호소도 하고, 그런데 딱 뒤를 돌아보면 그 사람들이 바꾼 사회가 정확히 보여요. 어? 한국 사회 진짜 엘리베이터가 생겼네? 한국사회 저상버스가 서울 기준으로 10대 중 거의 절반까지는 생겼네? 한국 사회에 진짜 특수학교가 생기고 특수반이 좀 더 보급되기 시작했네? 그때 제가 느꼈던 건 ‘아, 이 사람들 되게 나쁜 장애인 같은데, 이 사람들은 제도를 바꾸고 있구나. 개인의 삶이 윤택해지지는 않았지만 제도를 바꾸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저는 늘 거기서 갈팡질팡하거든요. 그래도 ‘적어도 나만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은 그만하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장애인들의 외침은 장애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성찰도 있습니다. 한국 사회 교통약자 숫자는 1,250만 명, 넷 중 한 명이 이동에 제약을 받습니다. 이들의 외출을 보장하기 위한 저상버스 도입은 20년간의 투쟁 끝에 신규 도입이 의무화됐습니다. 유아차를 타는 영유아, 다리가 아픈 노인, 다친 사람들을 위한 교통수단이 마련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Q. 장애인들의 이동권 투쟁이 비장애인들에게는 실질적으로 어떤 도움이 될까요. A. 지하철 엘리베이터가 생기면 누가 제일 좋을까가 궁금했던 적이 있어요. 서울역 플랫폼에서 엘리베이터 타는 사람들 많이 관찰했거든요. 답이 딱 나오더라고요. 첫 번째, 외국인 관광객분들. 엘리베이터 뒤로 줄을 그렇게 많이 서 계세요. 왜냐면 캐리어를 끌고 다니니까.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해 설치된 엘리베이터는 한국 관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는 거죠. 두 번째는 짐 옮기시는 택배 기사 분들. 노동현장의 생산효율성도 높이는 거예요. 세 번째로는 유아차를 타는 영유아와 보호자들이 혜택을 봐요. 아이와 짐이 있으면 계단은 상상도 못 하죠.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달라고 장애인이 외쳤을 때 가장 많이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노약자인 거죠. 시민들이 인내한 결과는 ‘장애인 휠체어를 탈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생겼습니다.’뿐만이 아니라는 거예요. 노동 효율성의 발전, 저출생의 문제, 노령화에 대한 문제까지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장애인들이 깃발 들고 나서서 이동권 보장을 외쳤지만 그 수혜자가 장애인만은 아니라는 거죠. ‘모든 국민들이 누릴 수 있는 보편적인 교통수단을 국가가 책임져서 빨리 만들라’라는 요구의 결과로 만들어진 공공 인프라의 수혜자는 모든 국민들인 거죠. 우리에게 필요한 건 ‘불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목소리’ 미국 장애인들은 자신을 수혜자로 취급하는 문제에 저항하기 위해 ‘우리 없이 우리를 논하지 말라(Nothing about us, without us)’라는 구호를 만들어 거리에 나섰다. 그들의 적극적인 외침이 미국 장애인법을 제정하는 계기가 되었고, 탈시설과 자립생활의 권리를 이루어 오늘날 배리어프리 사회로 향하는 초석이 되었다. 영국의 장애인들은 ‘동정심에 오줌을 갈겨라(Piss on pity)’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국가에 시혜와 동정의 콩고물이 아니라 정당한 권리를 요구했다. - 변재원, 〈장애시민 불복종〉 중 일부 Q. 원래 책 제목이 〈장애시민 불복종〉이 아니라 ‘어떻게 질 것인가’였다고요. A. 한국 사회에서 전장연 운동이 비치는 방식은 ‘생떼를 쓴다’ 혹은 거의 ‘반국가 조직이다’ 이런 식의 논의가 많은 것 같아요. 근데 제가 내부에서 봤을 땐 그게 아니었어요. 가령 출근길에 꼭 그렇게 막아서야 하나? 이런 의문을 가지고 들여다보니 이 장애 당사자들이 너무 절박한 거예요. 2001년 오이도역 추락사 이후에 20년 넘게 요구해오고 있는 거예요. 국가의 이동권이 바뀔 때까지 계속 싸워야 할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니 이들은 ‘어떻게 이겨먹을까’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이것이 바뀔 때까지 우리가 지치면 안 되는데 어떻게 잘 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었어요. 저는 책에 그걸 ‘성대한 패배’라고 썼는데요. 어떻게 더 성대하게 패배해야만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갖고 지지를 해줄까. 너무 역설적인 거예요. 이 사람들은 이기기 전에 질 생각을 하고 있구나. 그런데 어느 순간 이해가 됐어요. 세상에는 다 이길 수 있는 싸움만 하는 건 아니구나. 어떤 사람들은 자기 삶의 과정에서는 질 지라도 역사 속에서는 결국 이기기 위한, 한 발 후퇴하고 두 발 앞으로 나아가는 그 정신을 담아서 ‘어떻게 질 것인가’로 하고 싶었죠.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멈추는 방법 전장연의 성명서에는 대화에 나서야 하는 책임 있는 주체들이 구체적으로 언급돼 있습니다.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를 무력화 한 서울시, 3,350억 원의 장애인특별교통수단 예산 반영의 주체인 기획재정부 등입니다. 전장연 홈페이지에 투쟁에 돌입한다는 보도자료보다 정부와 지자체의 입장을 촉구하고 기다린다는 보도자료가 더 많은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전장연은 내년도 정부예산안이 상정될 때까지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연착 투쟁을 멈췄습니다. ‘휴전 상태’로 멈춘 장애인 권리 예산 편성 논의가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지, 이제 공은 국회와 정부로 넘어갔습니다. 세상에 목소리 없는 자란 없다. 다만 듣지 않는 자, 듣지 않으려는 자가 있을 뿐이다. - 고병권, 묵묵 디자인 : 김정연 스크립터 : 서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