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부와 정치부, 탐사보도부를 거쳐, 지금은 팩트체크 코너 <사실은>의 팩트체커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완벽한 사실은 존재하기 어렵다. 하지만, 취재 과정과 맥락을 있는 그대로 시청자 분들께 보여드리면 사실에 조금씩 다가갈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 뉴스쉽 네 줄 요약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은 처리되지 못한 방사능 잔해물, 오염수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2016년부터 지층 주입, 해양 방류, 수증기 배출 등 5가지의 방안을 검토했다. 그리고 2021년 4월, 후쿠시마 오염수의 해양 방류를 공식 결정했다. 1973년 스리마일섬 원전 사고 이후 미국은 오염수를 수증기 형태로 증발시키고 남은 방사능 물질을 응고해 폐기시키는 방식을 선택했다. 다만 스리마일과 후쿠시마는 사고 규모가 다르고 국제 정치적 상황도 달라서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IAEA와 주요 강대국들은 일본의 방류 계획을 신뢰한다고 결론을 냈다. 현실이 냉정하다면 우리의 대응도 냉정하는 만큼 강력한 방사성 물질 제거가 제대로 이뤄지는지 기술적 검증과 모니터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수마가 할퀴고 간 자리는 참혹했습니다. 지난 9일부터 전국을 휩쓴 집중호우로 50명의 사망자와 실종자가 발생했습니다. 피해를 본 농작물 면적은 3만 5000ha, 가축은 88만 마리가 폐사했습니다. 왜 중요한데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여름철 수해 피해는 어제오늘 얘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비 오는 패턴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한 번 내릴 때 그만큼 많은 양의 비를 쏟아낸다는 겁니다. 지난해 8월 기억하실 겁니다. 서울 동작구와 구로구에 시간당 141mm의 역대 최고 강도의 폭우가 내렸습니다. 올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폭우 피해가 컸던 지난 주말만 하더라도 충남 부여는 14일 새벽 4시 47분부터 1시간 동안 57.7㎜, 전북 군산은 14일 오후 3시 23분부터 1시간 동안 54.1㎜의 비가 쏟아졌습니다. 패턴이 달라진 만큼 예전처럼 대처해서는 피해를 막거나 줄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가 임박했다고 한다. 당장 우리 수산물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다. 그도 그럴 것이 방사능은 참 무섭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내가 피폭됐는지 알기도 어렵고, 그러는 사이 우리 몸은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한쪽에서는 오염수 방류가 위험하다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괴담 선동이라고 맞선다. 오염수 방류 문제를 두고 여야가 거친 말을 주고받은 게 벌써 몇 달 째다. 정치권 갈등은 거세지만, 실제로 오염수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떤 정화 과정을 거쳐 어떻게 방류되는지 세세히 아는 것은 쉽지 않다. 오염수 관련 뉴스만 봐도 그렇다. 삼중수소, 알프스, 핵종, 베크렐, 밀리시버트… 어려운 말들이 넘쳐난다. 맥락을 읽는 재미를 지향하는 ‘뉴스쉽’은 오늘 오염수 생성에서 방류까지 13년의 궤적을 최대한 자세하고 쉽게 풀어써보려고 애썼다. 독자 분들이 오염수 방류 문제와 관련해 적확한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의 현재 모습 참사의 서막 "큰일 났습니다! 폭발 사고가 났어요!" 동일본 대지진 다음 날인 2011년 3월 12일. 요시다 마사오 후쿠시마 원전소장의 다급한 목소리는 녹취록으로 남아 있다. 21세기 최악의 원전 사고, 후쿠시마 참사의 서막이었다. 후쿠시마 원전 측은 전날인 11일, 큰 지진이 났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원자로 작동을 급히 정지시켰다. 매뉴얼 대로였다. 그런데 지진 52분 뒤, 높이 13m의 쓰나미가 발전소를 덮쳤다. 발전소 설계 당시 예상했던 쓰나미 높이는 5m. 이를 3배 가까이 넘기는 거대 해일이었다. 결국 원전 안에 전기를 만드는 발전기가 침수됐다. 원자로 안전을 유지하는 최소 전력마저 사라진 블랙아웃 상태. 전기가 없으니 냉각수 펌프도 작동을 멈췄다. 원자로 노심은 무척 뜨겁기 때문에 열기를 식히는 냉각수를 계속 부어줘야 한다. 그런데 냉각수 주입이 멈춘 것이다. 노심 온도는 1,200℃까지 올라갔고, 기존 냉각수는 열기 때문에 다 증발해 버렸다. 방호벽 역할을 하는 철제 압력용기마저 녹았고, 구멍까지 뚫렸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핵연료 온도가 너무 올라가게 되면 수소를 만드는 데, 이 수소가 고온 고압의 상태를 견뎌내지 못했다. 결국, 발전소는 폭발하고 말았다. 3월 12일 오후 3시 36분, 원전 1호기 폭발. 3월 14일 오전 11시 1분, 원전 3호기 폭발. 3월 15일 오전 6시 14분, 원전 2호기 폭발. 후쿠시마 원전 폭발 당시 모습 폭발 이전에 바닷물이라도 끌어와 원자로를 식혔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도쿄전력은 쉽사리 의사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30시간 가까이 망설였다. 원자로는 예민한 장비다. 소금물을 원자로에 집어넣으면 그 원자로는 폐기 처분된다. 원전 손실 막겠다며 바닷물 유입 결정을 미룬 게 이 같은 참사로 이어지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원전을 지키기는커녕, 천문학적인 피해로 이어진 소탐대실의 판단이었다. 요시다 원전소장의 증언록은 당시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지휘체계는 무너졌으며, 그 누구도 적확한 의사결정을 내리려 하지 않았다. 요시다 소장은 2013년 7월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오염수의 탄생 원전 폭발은 원자로에 있던 방사성 물질이 대거 유출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유엔 방사선영향과학조사위원회(UNSCEAR)가 발표하는 「2020/2021 리포트」에는 당시 방사성 물질이 바다로 얼마나 유출됐는지 추정한 결과가 담겼다. 대표적인 방사성 물질은 세슘, 스트론튬, 요오드, 삼중수소 등인데, 이 가운데 세슘-137은 배출량이 가장 많고 측정이 쉬워서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했다. - 후쿠시마 폭발 직후 석 달 기준, 바다에 직접 배출된 세슘-137의 양 : 3천 조~6천 조 Bq(베크렐). - 대기로 배출된 이후 바다 표면에 침전된 세슘-137의 양 : 5천 조~1경 1조 Bq. 이걸 합치면 8천 조~1경 7천 조 Bq. 2023년 현재 후쿠시마 오염수 안에 담겨 있는 세슘-137의 양이 5,341억 Bq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 수치의 1만 5천 배에서 3만 2천 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불과 석 달 동안, 이 엄청난 양의 세슘이 태평양으로 흘러들어 간 것이다. 석 달간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원자로에는 처리되지 못한 방사능 잔해물이 남아 있다. 하지만 치우기도 어렵다. 방사선량이 너무 높아서 사람이 근처에 갈 수조차 없다. 실제 2015년 4월, 도쿄전력은 로봇을 투입해보기도 했지만 투입 5시간 만에 로봇이 고장이 났다. 2015년 4월, 후쿠시마 원전 원자로 격납용기에 처음으로 투입된 로봇(위). 지름 10cm 정도의 배관으로 집어넣고, 안에선 ㄷ자 모양으로 변신해 방사능을 측정하고 내부를 촬영했다. 아래 사진은 로봇이 촬영한 원자로 내부 사진. 방사선량이 시간당 24.9Sv라고 써져 있는데, 인간의 '연간' 방사선량 한도의 2만 5천 배 정도 수치다. 보통 피폭량이 10Sv를 넘어가면 중추신경 마비로 1~2일 내에 사망한다. 원자로는 여전히 뜨거운 상태다. 도쿄전력은 이를 식히기 위해 끊임없이 냉각수를 부어왔고, 그 과정에서 방사성 물질이 섞인 물들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이를 ‘오염수’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냉각수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물은 사방에서 흘러 들어갔다. 비가 오면 원자로에 빗물이 샜다. 특히, 지하수는 산을 타고 후쿠시마 원전 지하를 거쳐 바다로 흘러들어 갔는데, 폭발 사고로 원자로는 균열이 많이 생겼다. 지하수는 이 틈을 비집고 들어갔고, 그렇게 핵연료와 지하수가 만나 방사성 물질 가득한 오염수가 됐다. 보통 하루 1,000t의 지하수가 바다로 흘러갔는데, 이 가운데 400t이 원전에 유입된 것으로 분석됐다. 태풍이 올 때는 더 심각해졌다. 2013년 9월 16일, 태풍 마니의 영향으로 폭우가 내리고, 그렇게 오염수가 급증하자 도쿄전력은 물 1,300t을 바다에 방류하기도 했다. 당시 얼마나 많은 방사성 물질이 바다로 흘러갔는지는 추정치도 없다. 도쿄전력은 부랴부랴 강철벽을 만들어 방류를 막고 쌓이는 오염수를 수조에 보관했지만, 늘어나는 오염수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 대안은 철제 탱크였다. 우리가 후쿠시마 원전 뉴스를 볼 때 가장 많이 봤던 탱크다. 2023년 6월 현재까지 탱크에 저장된 오염수는 133만t 정도다.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수 탱크 이제 저장 용량이 한계에 달했다고 판단한 일본은 2021년 4월, 해양 방류 방침을 전 세계에 공표하며 방류 수순에 돌입했다. 그간 알음알음 방류했던 오염수를, 국제사회의 공인을 얻어 합법적으로 방류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오염수 방류 프로세스 일본은 오염수를 방류해도 안전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자신들의 방식대로 하면 환경에 별 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수산물에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쿄전력은 오염수 안에 있는 방사성 물질을 어떻게 제거하고, 어떤 방식으로 흘려보내겠다는 것일까. 오염수를 모아 정화를 거쳐 방류하는 전 과정을 그래픽으로 나타내봤다. 먼저 ①번. 오염수가 발생하는 단계. 이미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주로 지하수가 원자로로 새어 들어가고, 핵연료와 접촉하면서 오염수가 생겼다. 도쿄전력은 하루 평균 90t의 오염수가 만들어진다고 보고 있다. 오염수는 오염처리설비를 거쳐 ②번, 오염수 탱크로 이동한다. 그런데 오염수들이 계속 탱크 안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오염수 저장 탱크들은 수많은 배관들로 연결돼 있고, 오염수에서 방사성 세슘, 요오드, 스트론튬과 같은 방사성 물질의 농도를 낮추는 과정을 거치도록 설계돼 있다. 언론에 많이 나왔던 다핵종제거설비, ALPS가 그 역할을 한다. 위 그래픽 ③번에 있다. 초기에는 기설 ALPS에서 그 일을 주로 했다면, 지금은 증설 ALPS가 더 많이 활용되고 있다. 일본은 탱크 안에 있는 오염수 대부분은 이런 처리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오염수가 아닌 ‘처리수’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핵종제거설비(ALPS) 하지만, ALPS 장비가 있다고 안전성을 보장할 수는 없다. 가령 방사성 물질이 너무 많은 오염수의 경우, ALPS 과정을 여러 차례 거치더라도 기준치를 넘는 경우가 많다. 오염수 방류 반대의 주요 논거가 됐다. 특히 오염수에 방사성 물질이 얼마나 담겼는지 측정하려면 샘플조사를 해야 하는데, 탱크마다 방사성 물질 양이 천차만별이라, 측정 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는 비판도 나왔다. 그러자 일본은 오염수 탱크의 방사성 물질 농도를 비슷하게 맞추는 대책을 내놨다. 오염수를 ‘균질화’시키는 방안이다. 농도가 매우 높은 오염수와 비교적 낮은 오염수를 섞어주면 정화 작업도 수월해지고, 특히 샘플 조사의 신뢰도도 높아진다는 판단에서다. 그 역할은 ④번 K4 탱크에서 담당한다. K4 탱크의 모습 K4 탱크에서는 ALPS로 처리한 오염수를 빈 탱크로 끌어온 뒤, 교반 장비와 순환 펌프를 사용해 섞는 ‘로테이션’ 과정을 거쳐 들쑥날쑥한 오염수를 균질화하는 작업을 한다. 그런 뒤 물이 방출 기준을 충족하는지 확인해 샘플을 채취해 측정하고, 기준을 충족하면 이송 펌프를 통해 다음 단계로 넘기는 식이다. 즉, ALPS로 걸러진 오염수를 한데 섞어 방사성 물질 농도를 비슷하게 맞춘 뒤, 이걸 다시 측정해 기준치를 넘으면 또다시 ALPS 과정을 거치고, 기준치를 넘기지 않으면 배출하겠다는 계획이다. 그렇게 기준이 충족되면 오염수는 ⑤번 배관을 타고 바다 쪽을 향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방사성 물질 가운데 삼중수소는 ALPS 장비로 걸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간 오염수 방류 논란에서 삼중수소 문제가 자주 거론된 이유이기도 하다. 삼중수소가 우리 몸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문제제기가 계속 나왔다. 삼중수소가 유기물질과 결합하면 유기결합삼중수소(OBT)가 만들어지는데, 그간 OBT가 우리 몸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주류 학계에서는 삼중수소의 위험성이 매우 낮다는 데 의견이 모인다. 이 때문에 삼중수소와 관련해 엄격한 국제적 기준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마시는 물의 삼중수소 기준을 1ℓ에 1만 Bq로 권고하고 있는 게 눈에 띄지만, 한국의 경우 음용 기준은 없고, 원전의 삼중수소 배출을 1ℓ에 4만 Bq 이하로 관리하고 있다. 일본의 삼중수소 배출기준은 1ℓ에 6만 Bq인데, 일본은 삼중수소를 1,500 Bq 정도로 바닷물에 희석시켜 배출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픽의 ⑥번이 삼중수소를 희석시키기 위한 바닷물이 모이는 곳이다. 희석용 해수가 유입되는 수조 그렇게 유입된 바닷물은 배수관을 타고 ⑦번 수조로 보내진다. 처리된 오염수와 바닷물이 섞이는 공간이다. 여기서 삼중 수소를 측정해 기준에 맞으면 ⑧번 해저 배수터널을 거쳐, 해안선에서 1km 떨어진 지점의 방출구, ⑨번에서 최종적으로 방류한다. 복잡한 방류 프로세스, 무엇을 들여다봐야 하는가 한국 입장에서는 일본이 오염수를 내보내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비록 안전하다고 해도, 해수 흐름상 별 다른 영향이 없다고 해도, 인접국 사고 원전이 오염수를 내보낸다는 것만으로도 불편한 일이다. 방류를 하지 않는 건 ‘현상 유지’겠지만, 방류를 하는 것은 극단적인 경우라도 리스크가 존재한다. 하지만 일본의 오염수 방류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마땅히 없는 게 현실이다. 국제사회가 힘을 합쳐야겠지만, 또 그게 쉽지만은 않다. 가령, 앞서 설명한 대로 ALPS는 삼중수소를 걸러내지 못하는데, 일각에서는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하며 방류를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원전을 운용하는 국가들은 모두 바다에 삼중수소를 내보내고 있다. 미국 디아블로캐년 원전은 한 해 40조 Bq, 영국 헤이샴 원전은 229조 Bq, 중국 푸징 원전은 281조 Bq, 한국 한울 원전은 54조 Bq을 방류하는 식이다. 일본은 한해 22조 Bq을 내보낸다는 계획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회원국들, 특히 힘 있는 선진국들이 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힘을 모아 삼중수소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그린피스와 같은 환경단체를 제외하고, 삼중수소 문제에 대한 정부 차원의 문제 제기가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지난해부터 한국을 포함한 각국 전문가들이 검증단 TF를 구성해 후쿠시마 오염수 처리 및 방류 과정을 조사해 왔는데, TF가 여러 차례 낸 보고서를 보면 사실상 방류를 지지하는 분위기가 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가 문제가 되는 것은 정상 원전이 아닌 사고 원전 오염수 방류의 ‘첫 사례’이기 때문이다. 오늘 뉴스쉽이 지난하게 설명한 오염수 방류 프로세스가 함축하는 바는, 삼중수소를 제외한 세슘, 요오드, 스트론튬 같은 강력한 방사성 물질을 걸러내는 게 핵심이라는 것이다. 정상 원전에서는 이런 물질들이 거의 배출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앞으로 30년 동안 이런 위험한 방사성 물질이 배출되지 않는다는 기술적 확신이 있는가, 이 부분이 핵심 쟁점이 돼야 한다. 정부는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고 그 결과를 알기 쉽게 국민들에게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한두 번 할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해야 한다. 선동, 괴담이 판친다는 식의 공격적 화법으로는 국민들이 느끼는 불안감을 잠재울 수 없기 때문이다. 디자인 : 옥지수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가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소비자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오염수가 해류를 타고 우리 해역까지 도달하면, 국내 수산물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까닭입니다. 최근 그 직격탄을 소금이 맞았습니다. 일부 소비자들이 오염수 방류 전에 소금을 확보해둬야 한다며 많이 사들이고 있다는 보도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최근 소금값이 많이 올랐다고 합니다. 또 소금 사재기가 시작됐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졌습니다. 치솟는 소금 가격, 정말 소금 사재기가 시작된 걸까요? 무슨 상황인데 일단 소금 가격이 얼마나 올랐는지 확인해봤습니다. 천일염 산지 판매 가격 1포(20kg) 기준으로 분석했습니다. 4월 평균 가격은 1만 3,740원이었는데, 6월 첫째 주 1만 7,807원, 무려 29.6%가 올랐습니다. 불과 한두 달 새, 이렇게 소금 값이 치솟는 경우는 이례적입니다. 사재기를 의심할만합니다.
인사(人事)는 만사(萬事)다. 어느 조직이든 좋은 인재를 잘 추려내 적재적소에 잘 배치해야 미래가 있다. 당연한 말이다. 자연히 국정 운영의 정점에는 대통령 '인사'가 있다. 대통령의 인사는 국정 운영의 방향성을 함축한다. 인재들의 철학을 세심히 파악한 뒤 쓰임새가 있다고 판단되면, 그들이 정책의 장을 펼칠 수 있게 감투를 씌워 판을 깔아준다. 우리는 이를 '임명'이라고 부른다. 대통령이 모든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까닭이다. 대통령은 그들에게 신뢰를 보내며 의사결정을 '하청'하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질 뿐이다. 이런 면에서 대통령의 인사는 국가 전체의 만사다. 또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 인사는 늘 평가의 대상이 되며, 되어야만 한다. 동질적인 사람으로 권력의 핵심부가 구성된다면 국정 방향을 읽어내기 쉬울지 몰라도, 이견이 질식될 위험성 역시 공존한다. 그 부메랑은 격렬한 사회 갈등이다. 대통령의 인사는 권력 배분의 문제와도 맞닿아 있기 때문에 누군가는 만족하지만 누군가는 또 억울해한다. 인선 행위를 통해 이 복잡다난한 문제를 가운데서 조율한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의 뉴스쉽은 윤석열 정부의 인사를 심층 분석하고 인사 다양성의 의미를 따져보려고 한다. 때 마침, 지난 10일이 윤석열 정부 출범 1주년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임명해, 지금 시점 현직에 있는 장관과 차관, 장관급과 차관급 고위 공무원 114명을 기준으로 분석했다. 행정안전부가 펴내는 행정통계연보 분류 방식을 따랐다. 임명 기간은 2022년 5월 10일부터 2023년 5월 9월까지다. 서울대, 50대, 남성… '서오남'이 대세였을까 어떤 정부든 '코드 인사' 논란이 있었다. 이명박 정부 때는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 박근혜 정부 때는 성시경(성균관대·고시·경기고 출신), 문재인 정부 때는 캠코더(캠프, 코드 인사, 더불어민주당) 일색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윤석열 대통령 임기 초도 그랬다. 이른바 '서오남'(서울대, 오십대, 남성) 편중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정부 출범 1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먼저, 성별 비율부터 확인했다. 윤석열 정부의 장·차관급 여성 인사는 12명으로 전체의 10.5%였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 이영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한화진 환경부 장관 등이 포함돼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한 지 딱 '한 달' 됐을 때는 8명이었는데, 그때보다 4명 늘었다. 다만, 임기 한 달 차 임명이 진행된 장·차관급 인사는 77명 정도라,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0.4%로 전체 비율은 지금과 비슷했다. 문재인 정부 때 여성 비율은 14.3% 수준이었다. 그때와 큰 차이는 없다고 볼 수 있다. 이번에는 세대별로 분류했다. 논란이 된 50대는 57.9%, 60대 이상은 41.2%였다. 40대는 한 명으로, 저출산고령화사회위원회 김영미 부위원장이었다. 지난해 5월 17일 임명 당시 법무부 한동훈 장관도 만 나이 기준 40대였지만(1973년생), 현재 나이 기준으로 따졌기 때문에 이번 분석에서는 50대로 분류됐다. 문재인 정부와 비교해 보면 40대 1.9%, 50대 61.9%, 60대 이상 36.2%였다. 성별과 세대는 지난 정부와 비교했을 때 큰 차이는 없었다. 다만, 출신 대학에서는 변화가 컸다. 서울대 출신이 많이 늘어난 것으로 분석됐다. 윤석열 정부 1년 차 서울대 출신 인사는 54.4%로 문재인 정부 1년 차 41.9%보다 많았다. 특히, 윤 정부 한 달 차에는 50.6%였는데, 정부 출범 1년인 지금 그 비율은 소폭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즉, 남성과 50대 중심의 인사라는 점에서 문재인 정부와 비슷하지만, 서울대 출신 인사는 더 많아졌다고 볼 수 있다. 검피아, 모피아… '검사'와 '경제관료'에 편중됐을까 윤석열 정부 인사의 또 다른 논란, 그 중심에는 '검사'가 있다. 검사 출신 인사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정치 경험 없는 검사 출신이다 보니, 인재풀이 검사 중심으로 이뤄질 것이란 예측이 많았고, 실제로 주요 보직에 검사 출신 인사가 임명됐다는 뉴스가 자주 나왔다. 한편에서는 그런 비판이 과하다는 반박이 맞섰다. 지난해 5월 임명된 법무부 한동훈 장관 분석 결과는 어땠을까. 윤석열 정부 1년 차, 검사 출신 장·차관급 인사는 총 13명으로 전체의 11.4%였다. 윤석열 정부 출범 한 달 차는 8명이었는데, 그때보다 5명 늘었다.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0.4%로 비슷했다. 문재인 정부 1년 차, 당시 검사 출신을 살펴보니 2.9%였다. 전 정부와 비교하면 4배 가까이 늘어난 것으로 계산됐다. 윤석열 정부 검사 출신 인사에는 법무부 한동훈 장관, 금융감독원 이복현 원장, 국가정보원 김남우 기획조정실장 등이 포함돼 있다. 다만, 국토교통부 원희룡 장관, 국가보훈처 박민식 처장, 통일부 권영세 장관 등도 검사 출신으로 분류됐다. 정치 경력이 긴 다선 정치인 출신인 만큼, 순수한 검사 출신 인사를 인선했다고 보는 것은 착시라는 해석도 가능해 보인다. 경제관료 출신이 너무 많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른바 '모피아' 논란이었다. 사실 밖에서는 검찰이나 국회 권력이 더 막강해 보일 수 있지만, 정부 부처의 돈줄을 쥐고 있는 기재부 권력은 국가 정책을 사실상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국가 예산만 하더라도 국회가 건드리는 규모는 3~4% 남짓일 뿐, 대부분 기획재정부가 짜놓은 대로 흘러간다. 관료 엘리트의 정점인 만큼, 굳이 논란이 없더라도 이들의 장악력을 분석하는 작업은 늘 필요하다. 기재부 관료 출신 비율은 이전 정부와 비교할 때 큰 차이는 없었다. 문재인 정부 1년차 7.6%, 윤석열 정부 1년차 10.5%였다. 윤석열 정부 출범 1달 차에는 13.0%였는데 소폭 줄어든 것으로 분석됐다. 고시(5급 이상) 출신은 크게 늘었다. 문재인 정부 1년 차 당시 41.0%였는데, 윤석열 정부는 61.4%에 달했다.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에 비해 관료 출신 인사가 많아졌다는 해석도 가능해 보인다. 고려대 최장집 교수는 그의 책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지 못하는 정치인들은 점차 관료에 의존하게 되고, 곧 관료에 포획되는 관계로 바뀌게 될 수 있음을 역설했다. 새 정부 출범 직후 정치 엘리트들은 늘 국정 운영의 우선권을 쥐었지만, 임기가 지날수록 힘이 빠지면서 관료 엘리트의 관성에 의탁하는 정치 역학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고시 중심의 인선이 강화됐다는 것은 이런 부분에 취약할 수 있음을 함축한다. 선출직 도전 여부도 따졌다. 실제로 선거에 출마한 경험이 있는 인사들이 얼마나 되는지, 쉽게 말해, 정치권에 계속 관심을 두고 활동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기 위한 취지다. 윤석열 정부 15.8%로 문재인 정부 16.2%와 비교하면 거의 비슷했다. 이번에는 출신 지역 분석이다. 한국 사회는 동서 지역갈등이 크다. 자연히 인사에서 '지역 안배' 문제가 늘 거론된다. 분석 결과, 출신 지역 분석에서는 과거와 큰 차이가 있었다. 윤석열 정부 1년 차, 영남권이 39.5%로 가장 많았고, 수도권과 충청권이 그 뒤를 이었다. 문재인 정부 1년 차 역시 영남권이 가장 많았던 것은 같았다. 다만, 호남권과 수도권이 그다음이었다. 호남권 인사가 크게 줄어든 것으로 분석됐다. 과거 청와대에서 인사 검증업무를 했던 현역 정치인에게 경위를 물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국민의힘은 영남, 더불어민주당은 호남이라는 지역적 색채를 강하게 품고 있고, 자연히 인재풀도 연동되기 마련이다. 국정 철학에 맞다면 특정 지역 출신이라고 의도적으로 배제할 이유가 없다. 정부의 한계라기보다는 우리 정치의 한계로 봐야 할 문제"라고 귀띔했다. 인사 다양성의 의미 솔직히 위와 같은 분석 틀은 도식적이고 기계적으로 보일 수 있다. 성별, 나이, 출신대학, 출신지역, 출신직군은 이력의 일부일 뿐, 개인의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내는 변수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기계적 안배가 능력을 담보한다고 말하는 것은 비약일 수 있다. 여성과 청년 장관 많다고 질 좋은 여성, 청년 정책이 나온다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민주주의 공동체는 다양한 인사에서 다양한 정책이 나올 수 있고, 그렇게 사회는 진보한다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인사의 다양성은 민주주의 발전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권력 중심에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 포진해 있는지 꼽아보는 작업은 늘 필요하다. 미국 주요 언론은 주기적으로 행정부 인사 분포를 검증하고 있다. 성별과 대학은 늘 중요한 기준이다. 미국 사회의 가장 예민한 현안이 인종 문제인 만큼, 인종 비율은 정부 인사를 평가하는 매우 중요한 척도로 통용된다. 심지어 우리보다 더 기계적이며 더 도식적이기까지 하다. 행정부 인사들의 인종 비율과 국가 전체의 인종 비율을 단순 비교하는 보도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바이든 행정부 인선을 검증한 CNN 보도. 행정부의 인종 비율과, 미국 전체의 인종 비율을 비교하고 있다. 이런 공감대는 제도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미국 국무부는 최근 인사 다양성을 위해 새로운 직위를 신설했다. 2021년 4월 신설된 다양성·포용성최고책임자(CDIO)다. 미국 외교관과 본부 직원 등 2만 4천 명의 소속 공무원은 물론, 미국 공직사회 전체에 파급력이 적지 않은 상징적 조치였다. 초대 CDIO는 흑인 외교관 출신의 지나 애버크롬비-윈스탠리가 임명됐다. 윈스탠리는 국가안보회의(NSC)에서 근무한 뒤, 사우디아라비아 최초 여성총영사, 몰타 주재 미국 대사 등을 지냈다. 국무부 토니 블링컨 장관은 윈슨탠리의 임명 배경을 "다양성은 우리를 더 강하고 현명하며 창조적으로 만든다. 지나는 차별에 대해 용기 있고 거침없는 목소리를 내왔다"라고 밝혔다. 미국 국무부의 지나 애버크롬비-윈스탠리 다양성·포용성최고책임자(CDIO) 다양한 인선을 추구하다가 능력주의를 소홀할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윤석열 대통령도 대선 후보와 당선인 시절, 인사 문제와 관련해 "지역 안배나 여성 할당 등은 하지 않겠다"라고 반복적으로 밝힌 바 있다. 능력을 우선하겠다는 국정 철학을 강조하면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윈스탠리 책임자는 다양성에 기초한 인사가 오히려 효율성에 기여한다고 말한다. "(다양성 증진) 그 자체가 미국의 능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 이런 선택이 때로 편하지 않은 도전일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를 더 낫게 만든다. 업무에서 나와는 매우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을 내놓는다. 서로의 빈틈을 채워 줄 수 있다. 우리는 성공을 위한 대안들을 그렇게 확장시켜 나간다." - 미국 국무부 애버크롬비-윈스탠리 다양성·포용성 최고책임자(CDIO), 동아일보 인터뷰, 2022년 6월 22일 자 우리가 인사 다양성을 추앙하는 이유, 단순히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고결한 개념이라서만은 아닐 것이다. 다양성이라는 개념은 언뜻 추상적으로 읽히긴 해도, 공동체에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도움을 줬기 때문이었다. 정치적 올바름, 이른바 PC(political correctness)함에 대한 반감이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해진 우리 시대, 그럼에도 우리가 다양성을 힘주어 말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 1년, 인사 다양성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남은 4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적어도 인사 다양성만큼은 잘 해냈다는 평가를 들었으면 좋겠다. 인사는 만사이기 때문이다. 디자인 : 옥지수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워싱턴포스트와 인터뷰 과정에서 나온 발언이 논란이 됐습니다. "100년 전 일로 일본에 무조건 무릎 꿇으라는 건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야당은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과거사 인식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며, 일본 총리 발언 같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무슨 상황인데? 그러자 4월 24일 저녁, 국민의힘 유상범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이 다음과 같은 논평을 냈습니다. 대통령실이 공개한 한국어 인터뷰를 보면 윤석열 대통령은 유럽의 미래 지향적 협력을 강조하며, 주어를 생략한 채 해당 문장을 사용했다. 그리고 해당 문장은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으라고 하는 것은 (일본이) 받아들일 수 없다"로 해석해야 한다. 바로 뒤에 "이는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고 말한 것을 보면 이것이 상식적이다. 그러니까, 언론이 인터뷰를 잘못 해석했다, 원래 인터뷰 내용은 100년 전 일로 일본에 무조건 무릎 꿇으라는 건 '대통령이'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 아니라, '일본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미였다는 겁니다.
"생산량은 많은데 팔리지 않아요. 이거 다 출하해야 하는데…" (멍게 양식업자) "고객들이 '이거 국내산 맞느냐'고 물어요. 작년에는 안 그랬거든요." (멍게 판매상인) 멍게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이맘때 출하되는 멍게는 맛도 좋고 가격도 저렴해 '없어서 못 판다'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특히 올해는 지난해 대비 두 배 가까이 생산량이 늘어난 멍게 풍년이라 업계 기대가 컸습니다. 그런데 멍게 업계가 울상이라고 합니다. 값을 내려도 팔 곳이 마땅치 않다고 합니다. 멍게수협 통계를 보니까, 지난달 남해안 멍게 생산량은 지난해 대비 두 배 넘게 늘었는데, 알멍게 기준 단가는 40% 가까이 떨어졌습니다. 업계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논란을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아직 오염수 방류가 되지 않은 상황인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무슨 상황인데? 온라인 공간에서 멍게 안전성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먹을거리 안전에 관심이 많은 누리꾼들 중심으로, "후쿠시마산 멍게가 팔리고 있다", "멍게 먹으면 안 되겠다"는 식의 말이 퍼지고 있었습니다. SBS 팩트체크 사실은팀이 온라인에 떠도는 소문을 꼼꼼히 들여다보니까, 정치권이 불쏘시개 역할을 했습니다. 지난달 윤석열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일본 측에서 후쿠시마산 멍게 수입 재개를 요청했다는 현지 보도 기억하실 겁니다. 논란이 컸습니다. 이 소식이 한국에도 알려지면서 멍게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졌는데, 외교 논란과 얽히고설켜 여야 공방으로 흘러갔습니다. 결정적으로 민주당은 윤 대통령의 양곡법 거부권 행사를 비판하기 위해 "후쿠시마 멍게는 사주고, 우리 쌀은 못 사준다고?" 현수막을 전국 곳곳에 게시했습니다. 현수막 내용이 잘못 와전되면서, 이 같은 소문이 퍼진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온라인 공간에는 더불어민주당이 내건 "후쿠시마 멍게는 사주고, 우리 쌀은 못 사준다고?"라는 현수막 사진을 함께 올린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난 5일, 식목일에는 비가 내렸다. 사흘간 전국 53건의 동시다발 산불을 잠재운 단비였다. 하지만 "그래도 다행"이란 말을 하기에는 화마(火魔)가 지나간 자리가 너무 참혹했다. 충남 홍성 산불이 유독 컸다. 정확한 피해는 여전히 조사 중이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피해 면적은 1,454ha(헥타르), 가축 10만 마리 정도가 폐사했고 2백 곳 가까운 시설물이 잿더미가 됐다. 사실 도시 사람들은 산불의 무서움을 잘 알지 못한다. 뉴스로 보는 게 전부다. 큰 산불 소식은 늘 톱뉴스로 다뤄지지만, 불 꺼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별 일 없이 지나간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산불 문제는 심각하다. 올해 3월까지 발생한 산불은 342건. 역대 최악이라 불렸던 지난해 301건 보다 많았다. 도시 사람들의 편의적인 생각은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를 연상하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기후 변화로 봄이 유독 건조해지면서 나무는 메말랐고, 산을 훨씬 잘 타게 만들었다. 도시 언론은 이런 생각들을 반영한다. 이맘때쯤이면 산불 통계, 기후 변화 실태와 같은 데이터 파편을 긁어모아 꽤 괜찮은 기획 기사를 출고한다. 하지만, 이게 전부일까. 파편화된 뉴스가 아닌, 이슈의 맥락을 읽어 내는 <뉴스쉽>, 오늘은 화마가 할퀴고 간 자리에서 지금껏 소환되지 않았던 도시의 욕망을 마주해보려고 한다. 과연 우리 산림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니, 정확히는, 우리 도시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최근 10년 5,610건의 산불 전수 분석 역대 최악의 산불은 지난해 3월에 있었다. 경북 울진 산불은 피해 면적만 1만 6,302ha, 서울 면적의 3분의 1에 달했다. 강원 강릉 산불과 경남 합천 산불까지, 지난해는 1986년 산불 통계 집계 이후 산불 피해 규모가 가장 큰 해로 기록됐다. 그렇다면, 이는 통계적 '이상치'일까 아니면 '추세'일까. <뉴스쉽>은 지난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최근 10년 동안의 산불 데이터를 한 데 모아 점으로 나타내 봤다. 총 5,610건의 산불이다. 오른쪽으로 갈수록 최근이고, 위로 갈수록 큰 산불이다. 산불 피해 규모는 워낙 편차가 커서 0~10ha, 10~100ha, 100~1,000ha를 같은 크기로 나타냈다. 최근을 뜻하는 오른쪽 부분에 큰 피해를 준 산불이 모여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구체적 데이터로 다시 정리했다. 일반적으로 피해 면적이 100ha 이상일 때 '대형 산불'로 분류된다. 최근 10년 100ha 이상 피해를 준 산불의 횟수다. 불과 10년 새, 대형 산불이 잦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에는 20년 치 데이터로 외연을 넓혔다. 좀 더 종합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취지다. 먼저 산불 횟수를 정리했다. 추세선은 우상향이다. 전체적으로 증가 추세임을 나타낸다. 다음으로 산불 한 건 당 피해규모 평균을 계산해 그 추이를 살폈다. 총 피해규모를 횟수로 나누는 식이다. 다만, 1000ha 이상 피해를 준 초대형 산불은 통계적 이상치로 보고 제외했다. 가령, 지난해 울진 산불과 강릉 산불의 피해 규모는 각각 16,302ha와 4,190ha로 전체 평균치를 워낙 높여놨다. 이는 전체적인 추세를 분석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 역시 추세선은 우상향 하고 있다. 불과 10~20년의 지표로도 산불의 평균 피해 규모도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산불은 확실히 잦아지고 있고, 지독해지고 있다. 하지만, 산불 원인은 연도별 큰 차이가 없었다. 최근 10년, 산불의 원인을 분석해 보면 입산자 실화 34%, 쓰레기 소각 8%, 담뱃불 실화와 주택 화재 비화가 각각 7%였다. 한국의 산불은 대부분 사람 때문에 생긴다. 불과 10년 새 사람이 더 사악해진 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는 무엇을 주목해야 하는가. 산림도 양극화되고 있다 도시는 더 높고, 더 넓은 개발을 원한다. 도시의 욕망은 고층 건물을 올렸고, 아파트 단지로 뻗어나갔다. 자연히 산림을 침범하며 세를 불렸고, 그렇게 산림은 도시가 됐다. 개발의 시대, 이른바 '산지 활용도'를 높이는 정책들이 앞다퉈 나왔다. 데이터 관점에서 보면 '산림면적 통계'가 그 욕망의 추이를 보여준다. 산림 면적은 우하향,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도시는 자연을 욕망했다. 숲이 더 울창해지기를 원했다. 잠시나마 도시에서 벗어나 나뭇잎 사이 스며드는 볕 아래 텐트를 치며 자연을 누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산림욕'은 유행처럼 번졌다. 그렇게 도시는 지역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지구 온난화, 기후 변화 담론은 나무가 많아져야 할 명분까지 제공했다. 데이터 관점에서 보면 '임목축적 통계'가 도시의 또 다른 욕망을 방증한다. 임목 축적은 산지에 뿌리를 박고 생육하고 있는 모든 나무의 부피를 뜻한다. 2005년과 2015년, 임목축적은 5억 600만㎥에서 10억 3800만㎥로 두 배 넘게 증가했다. 그렇게 숲은 더욱 무성해졌고, 앞으로도 더욱 무성해질 예정이다. 2020년 정부는 '2050 탄소 중립'을 선언하고, 산림을 통해 탄소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했다. 30년간 30억 그루의 나무를 심겠다는 계획이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산림은 서서히 비좁아졌지만, 나무는 급속히 빼곡해졌다. 이제 산림마저 양극화되고 있다. 나무와 나무는 더욱 가깝게 이웃했고, 이파리는 함께 뒤엉켰으며, 낙엽은 한데 모이며 높게 쌓였다. 화마에 이 보다 좋은 연료는 없었다. 누군가 던진 나무꽁초에 낙엽이 탔고, 눈 깜짝할 새 나무줄기로 옮겨 붙었으며, 금세 다른 나무로 번져나가며 대형 산불이 됐다. 양극화된 산림은 크고 독해진 산불의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더 넓고 더 높은 개발을 위해 산림을 침범했던 도시의 욕망, 그 맞은편에는 울창한 산림으로 여가를 꿈꿨던 또 다른 욕망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상반된 두 욕망은 그렇게 거울상(像)으로 공존했다. 산불의 책임을 온전히 지구 온난화로 찾는 일련의 화법들은 이런 까닭에 무책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간결하고 세련돼 보이는 진상 규명은 도시 언론이 글로 풀어내기 좋은 구석이 있지만, 구체적일 수 있는 도시의 책임을 공동체 모두의 책임으로 뭉뚱 거리며 추상화시키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불편하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산불의 재앙은 최근 들어 급증하고 있으며, 자연히 '최근'의 문제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지구 온난화는 수백 년 전부터 서서히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산림을 줄이자는 말인가?" 혹은 "나무를 심지 말자는 말인가?" 물론 아니다. 나무가 밀집해 금세 번지니 그만 심자고 하는 건, 교통사고가 급증하니 차를 없애자는 말처럼 어리석은 말이다. 여전히 나무는 부족하다. 나무는 많아져야 한다. 다들 사는 게 힘들어서 그렇지, 사실 우리나라 비교적 잘 사는 나라다. 나무 심는 목표량을 정하면 돈을 들여서 충분히 해낼 수 있다. 앞으로도 나무 심기 실적표는 꽤 괜찮을 것이다. 정부는 주기적으로 실적을 홍보할 것이며, 우리의 나무 통계는 더욱 푸르러질 것이다. 문제는 나무가 '어떻게' 많아져야 하는 가다. 그 푸르러질 통계 뒤에 숨겨진 도시의 욕망을 우리 스스로 돌아봤으면 좋겠다. 정책의 방향은 이 지점에서 시작될 수 있다. 도시의 산림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지역에 '하청' 주는 방식은 또 다른 재앙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최근의 여러 초대형 산불이 여실히 보여줬다고 믿는다. 당장 나무를 몇 그루 심을 것인가가 아닌, 산림 면적을 어떻게 늘려나갈 것인가, 나아가 나무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를 우선순위에 놨으면 좋겠다. 끝으로 산불 전문가에게 제도적으로 가장 시급한 문제 한 가지를 짚어달라고 했다. 산불 진화대 고령화 문제를 지적했다. 대부분 노인들이라고 했다. 산림청에 구체적인 자료를 요청했는데, 산불감시원의 72.3%(8,808명), 산불진화대의 66.4%(6,740명)가 60대 이상이었다. 산불이 많이 나는 지역에 젊은이가 없다고 했다. 누군가는 늘 산 주변에 머물러야 하는데, 다들 도시로 모여드는 사이 지역에서는 산불 끌 사람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역시 젊은 노동을 끌어당기는 도시의 또 다른 욕망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디자인 : 옥지수, 안지현, 권혜민
국민의힘 전당대회가 지난 8일 막을 내렸다. 신임 당 대표에 김기현 후보가, 최고위원에는 김재원, 김병민, 조수진, 태영호, 장예찬 후보가 선출됐다. 친윤(親尹)으로 분류되거나 친윤을 자처하는 사람들이었다. 전당대회는 당내 권력의 우위와 열위를 판가름하는 박진감 넘치는 공간이다. 특히, 이번은 친윤계와 비윤(非尹)계, 누가 당의 중심 권력인지를 '인증'하는 자리였다. 전통적으로 여당의 전당대회는 대통령과 손잡고 가느냐, 아니면 일정 거리를 유지하느냐, 그 정치적 역설 속에서 수위를 조절하는 과정이었다. 친이(親李)계와 친박(親朴)계가 그랬고, 친박계 비박(非朴)계가 그랬다. 이번 역시 대통령과 가까운 사람들과 멀리 있는 사람들이 경쟁했고, 전자가 주도권을 쥐었다. 바야흐로 친윤의 시대가 개막됐음을 선언했다. 언론은 당권 경쟁의 치열함을 좋아한다. 그런데 그 치열한 생존 스포츠의 장막을 걷어내면, 의회 민주주의의 작동 방식을 보여주는 설계도가 드러난다. 의회 민주주의 중심에 정당이 존재하고, 그 정당의 의사 결정은 당권에 의존하며, 결국 당내 권력 지형은 의회 민주주의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전당대회가 결코 '그들만의 리그'가 아닌 이유다. 그렇다. 전당대회에서 드러나는 당권 경쟁은, 곧 우리 공동체 의회 민주주의가 돌아가는 방식 그 자체이며, 나아가 우리 민주주의 품격을 가늠하는 리트머스지다. 지난 8일 열린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된 김기현 의원이 손을 들어 올리고 있다 이번 <뉴스쉽>은 이런 차원에서 국민의힘 전당대회 역사를 톺아보기로 했다. 이명박 정부부터 지금 윤석열 정부 때까지 15년 동안의 전당대회를 중심으로 분석했다. 그간 국민의힘 당내 권력 지형이 전당대회를 통해 어떻게 구현됐는지, 또 그 맥락 속에 어떤 공식이 존재하는지 되짚는다. 민주당 전당대회 역사도 만만치 않게 복잡하고 혼탁했지만, 이건 나중에 민주당 전당대회 기간에 다뤄보겠다. 친이(親李)의 부흥과 몰락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이 국회에서 열린 제17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고 있다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내부 친이계-친박계의 격한 갈등은 친이계 수장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08년 2월 취임했을 때부터 예고됐는지도 모른다. 두 계파 간의 갈등은 이미 곪을 대로 곪아있었다. 대선 경선 때부터 치열했다. 박근혜, 이명박은 두 전직 대통령 임기 내내, 아니 임기 이후에도 발목을 잡았던 BBK, 최태민 일가 논란이 이때 나왔다. 하지만, 대통령제 국가에서 대통령은 막강하다. 이 전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당내 권력 지형은 친이계를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됐다. 정부 출범 직후 치러진 허니문 선거였던 18대 총선, 친이계의 힘자랑이 시작됐다. 친이계 이방호 당시 사무총장이 주도한 공천 과정에서 박근혜 경선 캠프를 이끌었던 김무성, 서청원, 홍사덕 의원 등 중진 의원이 대거 탈락했다. 언론은 이를 '친박 공천 학살'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당원들은 공천 문제에 별다른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해 7월 전당대회에서 당원들은 친이계 박희태 후보를 대표 자리로 낙점했다. 친박계 대표 주자였던 허태열 당시 후보는 3위에 그쳤다. 친이 강경파라고 불렸던 공성진 당시 후보는 4위로 최고위원에 올랐다. 친이계가 당내 권력의 중심에 있음을 확고히 했다. 전당대회는 이렇게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당내 권력 구도를 계량화하는 지표이자 판결문이다. 2년 뒤 열린 전당대회도 비슷했다. 친이계가 주류 권력임을 재확인하는 자리였다. 친이계 핵심 안상수 당시 후보가 대표로 선출됐다. 범친이계 혹은 중립으로 분류되거나 됐었던, 적어도 친박계는 아니었던 홍준표, 나경원, 정두언 당시 후보가 최고위원이 됐다. 친박계 최고위원은 3선의 서병수 당시 후보 정도였다. 미국산 쇠고기 파동,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등 여러 불리한 변수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절반 넘게 남은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를 보란 듯, 친이계는 당내 권력 수성에 성공했다. 하지만, 당내 권력의 위세는 선거 결과에 연동한다. 선거에서 패하면 비난은 주류 권력을 향하고, 자연히 지도부는 도전에 직면한다. 2011년 4월 재보궐 선거가 그랬다. 국회의원 세 명, 그리고 광역단체장인 강원도지사가 걸려 있었던 꽤 큰 선거였다. 결과는 한나라당의 참패. 국회의원 한 명 당선에 그쳤다. 한나라당 텃밭이었던 성남 분당을과 강원도지사 자리마저 민주당에 내줬다. 분당을은 강재섭 전 대표가 손학규 민주당 후보에게 패했다. 대선이 2년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안상수 대표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해 7월, 다시 당 대표를 뽑는 전당대회가 열렸다. 친박과 친이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홍준표 후보가 대표가 됐다. 최고위원 자리에는 친박계로 분류됐던 유승민, 친이계가 지지했던 원희룡 후보가 꿰찼다. 친박계 우세 지도부는 아니었지만, 친이계의 힘이 빠져가고 있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2011년 7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에 선출된 홍준표 당시 후보가 손을 흔들고 있다 하지만, 홍준표 체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 사퇴로 치러진 10월 보궐선거에서 야권 단일 후보인 박원순 당시 후보에게 자리를 내준 것에 이어, 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 공격, 이른바 디도스 사태로 홍준표 지도부는 출범 5달 만에 와해되고 말았다. 그 공백을 메운 건, 친박계였다. 그렇게 친박의 시대가 시작됐다. 친박(親朴)의 부흥과 몰락 한나라당은 2011년 12월 박근혜 비대위 체제가 됐다. 이름도 새누리당으로 바꿨다. 새누리당의 역사는 박근혜의 역사 그 자체였으며, 친박 흥망성쇠의 궤적이었다. 역사는 역시나 반복되는 것일까. 이제 총선 공천은 권력을 쥔 친박계가 주도할 차례였다. 언론이 붙인 명칭은 '친이 공천 학살'이었다. 당대표를 지낸 안상수 전 의원,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진수희 전 의원, 친이계 핵심인 박형준 전 의원, 이동관 전 청와대 대변인 등이 나가떨어졌다. 4년 전의 친박 공천 학살은 '친이 공천 학살'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 문양은 다르지 않았다. 2012년 12월,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통령 당선이 결정된 직후, 서울 여의도 당사 상황실을 방문하는 모습 중요한 선거의 공식. 대통령 임기 말 선거는 여당에게 불리하다는 것. 정권 심판 구호를 늘 맞닥뜨려야 한다. 하지만, 19대 총선은 아니었다. 새누리당은 의석 과반을 차지했다. 민주화 이후 첫 과반 득표율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선거의 여왕 대관식을 올렸다. 이어진 전당대회는 보나마나였다. 친박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황우여 당시 후보가 대표가 됐고, 최고위원도 심재철 후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친박계 인사들로 채워졌다. 새누리당 첫 전당대회는, 친이의 시대에서 친박의 시대로 완전히 재편됐음을 공식화하는 포고문이었다. 선거의 여왕은 다음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고, 12월 대선에서 대권을 거머쥐었다. 친박의 응집력은 박 전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율만큼이나 견고하고 단단했다. 달리 말하면, 친박의 위세가 커져갈수록, 주류 권력에서 이탈된 이들의 불만도 커져갔다. 언론은 이들을 비박계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친박이 아닌 사람들. 박근혜라는 존재와의 밀착도는 중심 권력과 주변 권력을 구획하는 전선이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치러진 7월 전당대회는 비박의 부상을 알리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다음 총선 공천권을 행사할 당 대표를 선출하는 중요한 전당대회였다. 이른바 공천 학살의 경험이 있는 친박계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전당대회가 중요했다. 서청원 당시 후보는 친박계의 지지를 받았고, 박근혜 대통령과 사이가 멀어진 김무성 당시 후보는 비박계의 대표 주자로 분류됐다. 박근혜의 마음, 이른바 박심(朴心) 마케팅, 청와대 의중 논란이 이어졌다. 그 어느 전당대회보다 치열했고 뜨거웠다. 2014년 7월 열린 새누리당 3차 전당대회 그런데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당원들은 비박계 김무성 후보의 손을 들어줬다. 친박계 홍문종 후보는 지도부 문턱을 넘지도 못했다. 친박계 입장에서는 친박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비박계를 보듬고 가느냐, 아니면 더욱 공세적으로 나가느냐. 친박계의 선택은 후자였다. 이듬해 7월, 비박계로 돌아선 유승민 원내대표는 박 전 대통령에게 배신자 낙인이 찍히며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명분은 야당에게 득이 되는 국회법 개정안을 받아줬다는 것이었지만, 이듬해 총선을 앞두고 친박과 비박 간의 본격적인 공천 경쟁이 시작됐다는 해석이 나왔다. 2016년 총선, 당내 갈등은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공천을 심사하는 공천관리위원회는 친박계가 장악했지만, 최종 결정을 가진 당 대표는 비박계 김무성 당시 대표였다. 김무성 당시 대표가 공관위의 공천 추천에 직인 날인을 거부했던, 이른바 '옥새 들고 나르샤' 사태는 친박과 비박의 갈등이 얼마나 극심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국민들이 이를 좋게 볼 리 없었다. 야권 분열로 새누리당에 유리한 판이 깔렸음에도, 1당 자리를 내줘야 했다. 사실상 참패나 마찬가지였다. 김무성 대표는 자리에서 물러났고, 김희옥 비대위 체제로 재편됐다. 총선 후유증은 컸다.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2016년 8월 열린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이정현 당시 후보가 신임 대표에 선출된 뒤 환호하고 있다 이어진 8월 전당대회. 비박계 입장에서는 서서히 저물어 가는 친박 주류 권력에 맞서 '굳히기'가 필요했다. 주호영 당시 후보로 비박계 단일화까지 이뤄냈다. 하지만, 결과는 되치기였다. 친박계 이정현 후보가 대표에 당선됐고, 최고위원 대부분이 친박계로 채워지는 결과가 나왔다. 언론은 '도로 친박당'이라고 썼다. 돌이켜보면, 이때의 전당대회는 친박의 마지막 몸부림에 가까웠다. 그해 10월 말, 거대한 폭풍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이른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그리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었다. 결국, 박근혜 정부는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져버렸다. 박근혜 없이는 친박이 존재할 수 없었다. 친박은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친홍(親洪), 친황(親黃)… 무주공산, 각자도생의 시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당내 권력은 사실상 공백 상태였다. 쇄신을 위해서라도 개명은 불가피했다. 당명을 자유한국당으로 바꾸고, 탄핵으로 치러지는 '장미 대선' 후보로 비주류였던 홍준표 전 대표를 내세웠다. 하지만, 정치적 파산 상태에서 대선 승리는 쉬울 리 없었다. 이미 일부 비박계는 당을 나와 바른정당을 창당했다. 안으로는 와해된 분위기를 추슬러야 했고, 밖으로는 바른정당과 보수 적통 경쟁을 벌여야 했다. 예상대로 19대 대선에서 패했고, 고된 야당 생활이 시작됐다. 홍준표 대표는 대선에서는 졌지만, 비교적 선전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게 7월 열린 전당대회, 홍준표 체제가 구축됐다. 당시 최고위원으로 선출된 이철우, 류여해, 이재영 후보는 '친홍계'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하지만, 친박계로 분류된 김태흠, 이재만 후보 역시 최고위원이 되면서 친홍계와 친박계가 균형을 이뤘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후 홍준표 대표는 바른정당 출신 의원들 복당을 승인하는 등 친박계 견제에 나서며 조금씩 세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거에서 대패하면 지도부는 도리가 없다. 2018년 6월 지방선거, 보수정당 지방선거 역사상 이런 참패는 없었다. 경북지사와 대구시장 말고 모든 광역자치단체장 자리를 내줬다. 홍준표 대표는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친홍계는 힘을 써보지도 못하고 유야무야 희석되고 말았다. 이어진 비대위 체제 속 각자도생이 시작됐다. 유명 정치인을 중심으로 계파가 형성됐던 당의 역사는 잠시 휴지기를 맞았다. 2019년 2월, 3차 전당대회에서 황교안 체제가 만들어졌다. 드문드문 친황(親黃)이라는 말이 나왔지만, 주류 세력으로 보기에는 세가 약했다. 2019년 2월, 자유한국당 전당대회에서 새 당 대표로 선출된 황교안 당시 후보 미래통합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이어진 2020년 4월 21대 총선. 300석 가운데 103석. 또 역사적 패배였고, 대표는 또 사퇴했으며, 또 비대위 체제로 재편됐다. 그해 9월, 당명은 또 국민의힘으로 바뀌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친박계가 새누리당이라는 당명과 흥망성쇠를 함께 했던 것과는 달리, 자유한국당에서 미래통합당, 미래통합당에서 국민의힘으로 이어지는 잦은 개명은 당의 복잡 다난한 상황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세력이라 할 만큼 응집력이 있는 계파는 존재할 수 없었다. 문재인 정부 시절 야당인 국민의힘은 주류 권력과 비주류 권력을 분류하는 게 별로 의미가 없었다. 2021년 6월 전당대회는 그 상징적 장면과 같았다. 당시 후보들은 서로를 향해 배후에 계파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준석 후보는 친유(親劉:친유승민), 나경원 후보는 친박, 주호영 후보는 친이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식이었다. 물론 당사자들은 부인했다. 과거를 풍미했던 계파들이 소환되며 공격 소재가 됐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주류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무주공산 상태임을 의미했다. 말은 많았지만, 계파 담론은 별 효능감도 없었다. 2021년 6월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된 이준석 대표가 당기를 흔들고 있다 결과는 이준석 대표 체제 탄생. 헌정사상 최초의 30대 교섭단체 대표 탄생이라는 혁신과, 젠더 갈등을 조장했다는 비판이 공존했지만, 간만에 보수정당 전당대회가 주목을 끌었다. 나름 흥행한 전당대회로 평가받았다. 이준석 체제는 보궐 선거에서 서울시장을 되찾아오며 순항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같은 해 11월 대선 후보를 결정하는 전당대회는 이준석 체제 붕괴의 서막을 알렸다. 두 사람은 지지층부터 간극이 컸다. 이준석 당시 대표는 젊은 층, 윤석열 당시 후보는 노년층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당원들의 선택은 윤석열 당시 후보였고, 불협화음은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준석 당시 대표는 자신을 공격하는 윤석열 당시 후보의 측근들, 이른바 친윤(親尹)계 일부를 '윤핵관'이라고 부르며 불쾌감을 나타냈다. 대선 승리의 전리품은 달콤하다. 어떻게든 선거는 치러야 하고 이겨야 한다. 둘은 서로 벌어졌다가 봉합하는 걸 반복하며 어떻게든 대선을 치렀고, 정권 탈환에 성공했다. 하지만, 앙금은 어쩔 수 없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 이후, 당의 무게 중심이 친윤계로 이동하면서 이준석 전 대표의 앞날에도 먹구름이 끼었다. 결국, 이준석 대표가 성상납 은폐 의혹으로 징계를 받고, 뒤이어 수립된 비대위를 통해 사실상 축출당하며 두 정치인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윤 대통령은 '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대표'라는 텔레그램 대화 내용이 유출 사태로 속내를 들켜버리는 일까지 생겼다. 친윤(親尹)의 시대, 그리고… 지난해 2월,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 당시 주먹을 쥐며 선거 유세를 하고 있다 이번 국민의힘 전당대회는 대통령을 위시한 친윤계가 주류 권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지, 그 가늠자의 성격이 강했다. 결국, 친윤은 우위를 점했다. 반면, 이준석 전 대표의 지원을 받은 천아용인(천아람, 허은아, 김용태, 이기인)은 모두 낙선했다. 윤석열 대통령 친정 체제가 구축돼 당정관계는 당분간 큰 갈등 없이 순항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하지만, 이번 뉴스쉽에서 국민의힘 전당대회 15년 사(史)를 훑어본 이유. 전당대회라는 망원경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학습할 수 있는가. 역시 대한민국 대통령의 힘은 세다. 여당, 특히 보수 여당은 결국 대통령을 통해 뭉친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위기를 맞은 보수 정당은 공중분해, 각자도생, 이합집산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친홍, 친황은 구심력도, 충성도도 약했다. 하지만, 여당이 된 뒤로 당내 권력 전선은 친윤과 비윤으로 뚜렷해졌다. 안정적인 링이 형성됐음을 의미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는 이를 '정치적 안정성'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하지만,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말했다. 모든 것은 모순을 잉태하며, 모순을 품고 운동하기 때문에 활동성을 지닐 수 있다고. 정반합의 원리, 그 유명한 변증법이다. 어쩌면 권력이란 이런 것이다. 권력의 위세, 그 뒤안길에는 늘 저항이 싹트고, 또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 역동성이 존재한다. 결국, 관건은 저항을 잉태할 수밖에 없는 주류 권력이, 그 저항들을 처리하는 방식일 것이다. 여러모로 이번 전당대회는 2014년 7월 새누리당 전당대회를 상기시킨다. 두 전당대회 모두 다음 총선 공천권을 행사하는 지도부를 선출한다는 점에서 치열함을 예고했다. 그 치열함은 당내 계파 갈등을 통해 표출됐다. 당시 친박과 비박의 대결 구도는 이번 친윤과 비윤의 당권 경쟁과 거울상이다. 물론 그 중심에는 대통령이 있었다. 언론은 두 전당대회 모두 대통령 권력을 가늠하는 중간고사쯤으로 여겼다. 자연히 대통령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대통령의 '의중'은 소환될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 스스로 전당대회에 참석 안 할 수 없었다. 당내 화합을 강조하는 메시지는 비슷했지만, 최고 권력자의 참석이라는 '의례'의 정치적 의미는 작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한 갈등 뒤 교통정리를 위해 등장하는 계파 갈등 치안권자의 이미지, 결국 친박이든 비박이든, 친윤이든 비윤이든, 계파의 한 편이 아니라, 그 위에 대통령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초월적 메시지 같은 것. 2014년 7월 새누리당 전당대회에 참석한 박근혜 전 대통령 당과 당원 여러분께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국민을 위해 한 마음으로 노력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을 모아 국가혁신을 이뤄내지 못한다면 결코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치열한 경선과정에서 주고받은 서운한 감정은 모두 잊고, 새로운 지도부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모든 것을 새로운 에너지로 승화시켜 경제 살리기와 국민행복시대를 열어 갑시다! - 박근혜 전 대통령, 2014년 7월 새누리당 전당대회 연설 사랑하고 존경하는 당원동지 여러분, 새로 선출될 지도부와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국민의힘 당내 선거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없습니다. 우리 당 구성원 모두 첫째도 국민, 둘째도 국민, 셋째도 국민만을 생각하고 함께 전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당원동지 여러분,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다시 대한민국, 새로운 국민의 나라를 만들어 갑시다. 감사합니다. - 윤석열 대통령, 지난 8일, 국민의힘 전당대회 연설 지난 8일 열린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연설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때보다 더 노골적이라는 평가도 공존했다. 비윤계 나경원, 유승민 전 의원은 결국 전당대회 출마를 포기했다. 사실상 출마가 봉쇄됐다는 해석이 나왔다. 안철수 의원은 대통령과의 거리 좁히기를 하다가 공개적인 면박을 당했다. 막판에는 대통령실 행정관이 관여한 ‘김이 이김’ 채팅방이 논란이 됐다. 용산이 직접 나서 친윤 후보에 대해 사실상 선거운동을 했다는 뜻으로 읽혔다. 문제는 전당대회 이후일 것이다. 2014년 전당대회는 친박과 비박 계파 갈등이 본격적으로 점화하는 계기였고, 점점 불이 번져나가다 2016년 4월 총선에서 대형 화재로 비화하고 말았다. 결국,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를 거치며 당은 잿더미가 됐다. 재건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그 결과물이 친윤과 비윤이라는 또 다른 계파 갈등이었고, 그 갈등은 전당대회라는 정치 이벤트를 통해 다시금 점화하고 말았다. 총선을 1년 앞둔 지금, 그때처럼 계파 살생부가 등장할 거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최근 옥새파동 당사자인 김무성 전 대표가 "총선에서 지역구에 손을 대 죄 없는 동지들의 목을 치면, 우리 정치사의 비극은 계속될 것"이라고 경고한 이유이기도 하다. 친윤의 시대가 친박의 시대와 비슷한 궤적을 밟아가는 것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걸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건 우리 공동체 민주주의의 문제다. 의회 민주주의는 정당에 의존하고, 정당은 내부 권력 지형에 따라 달리 조형된다. 국민의힘 전당대회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품격을 좌우한다. 전당대회가 왜곡되면, 당의 미래가 엇나가고, 민주주의가 방황한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정당의 문지기(gatekeeping) 기능을 강조했다. 정당 내부에서 좋은 정치인을 추려나가는 것이 민주주의의 성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정당 내부의 권력 배분은 민주주의 문지기 과정 그 자체이며, 그 과정을 제도화시킨 게 전당대회다. 우리가 국민의힘을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관심을 기울이고 심지어 감시해야 하는 이유다. 디자인 : 옥지수
지난달 19일 새벽 5시 반, 갑자기 눈이 떠졌다. 습관처럼 휴대전화를 켰는데 알람 하나가 떠 있었다. 영국 위그모어홀에서 열린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라이브 공연 알람이었다. 당시 동시 접속자는 4천 명을 훌쩍 넘었다. 밤늦은 시각도 아니고 평일 출근을 앞둔 시간, 그것도 클래식 음악 라이브 공연에 이 정도 수치라니. 밤새워 기다렸거나 새벽에 깨어나는 수고를 감수한 사람이 이렇게 많았다는 거다. 라이브가 이 정도였으니 영상 조회 수는 말해 뭐 할까. 위그모어홀 공연 20일 정도가 지난 지금, 영상을 본 사람이 40만 명을 넘었다. 다시 말하지만, 클래식 공연이다. 임윤찬 공연은 늘 팬들로 북적인다. 공연을 예매하는 것조차 하늘의 별따기다. 지난해 6월,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혜성같이 등장한 임윤찬은 K팝 스타만큼의 주목을 받고 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한 그의 결선 영상은 '천만' 조회 수를 앞두고 있다. 그렇게 이어진 이번 위그모어홀 공연은 임윤찬에게 콩쿠르만큼이나 중요한 시험대였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는 세계 음악계에 제대로 안착하고 있다. 이른바 '임윤찬 현상'이라 불리는 팬덤과 함께. <뉴스쉽>은 "파편화된 뉴스가 아닌 이슈의 맥락을 제대로 읽는 재미"를 지향한다. 현안에 대한 다양한 층위를 짚어내기 위한 코너물이다. 임윤찬 현상의 맥락과 층위를 이렇게 정색하고 쓸 일인지 고민도 되지만, 임윤찬이 너무 좋아서 그냥 쓰기로 했다. 개인적 소회를 감히 싣는 게 무례해 보인다면, 독자 여러분들께 미리 양해를 구한다. 그렇다. 오늘의 <뉴스쉽>은 지난해 반 클라이번 콩쿠르 이후 반년 넘게 계속된, 기자 개인의 '임윤찬 덕질' 그 결과물인 것이다. 위그모어홀 공연, 왜 중요했을까 피아니스트 임윤찬. 목프로덕션 제공. 임윤찬이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한 이후 가장 많이 나왔던 말, 콩쿠르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 진부하지만 이보다 더 적확한 표현은 없는 것 같다. 콩쿠르에서 입상하고 나면 여기저기서 입질이 오기 시작한다. 기회가 생긴다. 하지만, 프로의 세계는 냉혹하다. 힘들게 얻어낸 기회는 매일매일 치러야 하는 시험과도 같다. 콩쿠르는 경연에 참여한 또래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들과 겨루지만, 프로의 세계는 예프게니 키신, 다닐 트리포노프, 랑랑과 같은 정상급 연주자들과 경쟁해야 한다. 그렇게 늘 비교당하고 평가당한다. 예술과 경쟁, 참 어울리지 않는 단어지만 현실이 그렇다. "프로의 세계는 냉혹하다"는 말은 당위적 훈계가 아니라, 콩쿠르만큼이나 고된 경쟁이 즐비하다는 구체적 경험의 발로다. 그렇게 좋은 평가가 축적되면 유명 오케스트라, 유명 지휘자, 유명 음반사, 유명 공연장의 부름을 받는다. 주목도가 높은 공연장에는 역시 주목도가 높은 평론가들이 있다. 그들은 눈을 부릅뜨고 연주자의 예술을 낱낱이 해부하는 모진 사람들이다. 연주자의 표현과 의도를 도마 위에 올려 해체 쇼를 벌이고, 그 결과물을 클래식 애호가들이 많이 드나드는 시장 한복판 문장 형태로 전시한다. 프로 새내기에 대한 관용? 그런 건 없다. 막 뜨기 시작한 연주자들한테는 되레 매몰차다. 하지만, 그들에게 또 좋은 평가를 들어야 입소문이 나고 또 그래야 다른 기회가 생긴다. 동양계 음악가의 경우 보수적인 클래식 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유리 천장까지 뚫어야 한다는 건 덤이다. 위대한 연주자들은 이 지난하고 고된 관문을 통과한 흔치 않은 사람들이다. 보는 우리는 예술에 감동받고 찬사를 보내지만, 예술가들은 그 고된 과정에 영혼이 축나기도 한다. 그래서 예술은 잔인하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이 과정을 착실히 버텨내고 있는 연주자다. 지난 2015년 쇼팽 콩쿠르 우승 이후 조성진의 활약은 부침이 없었다. 클래식 음악의 대표적 음반사 도이치 그라모폰(DG)과 전속 계약도 맺었고, 영국 위그모어홀과 미국 카네기홀 무대에도 올랐다. 세계 유수 오케스트라의 부름을 받더니, 양대 산맥 베를린 필, 빈 필과 협연도 했다. 건강 문제로 공연을 취소한 중국의 랑랑, 친 푸틴 성향이 알려지며 하차한 러시아의 데니스 마추예프의 대타로 협연했지만, 거장으로 가는 길목에는 늘 대타 연주가 있었다. 2018년과 이듬해, 세계 음악계 올스타가 모인다는 스위스 베르비에 페스티벌에도 섰다. 예프게니 키신, 미하엘 플레트네프, 다닐 트리프노프, 안드라스 쉬프 등 굴지의 피아니스트들이 한 무대에서 함께 연주하는 것도 마냥 신기한데 여기에 조성진이 있다니. 한국 클래식 애호가들에게는 꿈같은 일이었다. 그래서 임윤찬의 이번 위그모어홀 공연은 중요했다. 위그모어홀은 공연을 직접 기획해 적합한 연주자를 선택한다. 클래식 음악을 선도하는 스타 음악가들의 필수 관문처럼 평가받는다. 클래식 음악 기획자, 연주자, 비평가, 애호가의 시선이 모이는 공간이기도 하다. 임윤찬 입장에서는 반 클라이번 콩쿠르 이후 가장 큰 시험대였다. 여기서 좋은 평가를 받으면 또 다른 기회가 생기고, 그렇게 연주자로서의 근육은 더욱 단단해진다. 임윤찬 역시 콩쿠르 우승 8개월 전 한 음악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영국 위그모어홀에 서보는 게 꿈"이라고 했다. 콩쿠르로 화려하게 데뷔하고 이내 사그라지는 연주자들이 어디 한둘인가. 하지만, 임윤찬의 위그모어홀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대성공'은 언론사 기자들이 관행적으로 쓰는 형식적 수사가 아니다. 임윤찬은 클래식 유명 평론가들의 환호와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영국 클래식 음악계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유력 평론가들이다. 클래식 음악도 영화처럼 별 다섯 평점을 매기기도 하는데, 별 다섯 개가 넘친다. 이 정도면 봉준호 영화 급이다. 평론가들은 임윤찬이 콩쿠르에서 입증했던 뛰어난 테크닉에 환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를 빌미 삼아 공격할 마음의 준비를 했던 모양이다. 콩쿠르 때처럼 연주만 해봐라, 칼춤을 춰주겠다, 이런 식으로. 하지만, 임윤찬의 연주는 평론가들의 이런 공격 의지를 꺾어놔 버렸다. 우려는 기우에 그쳤다. 임윤찬이 위그모어홀 공연에 배치했던 주요 프로그램은 바흐의 <신포니아>와 베토벤의 <7개의 바가텔>, <에로이카 변주곡>이었다. 에로이카 변주곡은 반 클라이번 콩쿠르 예선에서 선보이긴 했는데, 바흐의 신포니아는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곡은 아니다. 임윤찬을 상징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이 화려한 질주로 듣는 이의 혼을 빼놓는다면, 신포니아는 사유를 통해 바흐 예술의 이상에 서서히 도달하는 순례적인 소품이다. 콩쿠르 공간의 임윤찬이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장악하며 호령했던 장군님이었다면, 위그모어홀 공간의 임윤찬은 스스로를 신중히 성찰하는 구도자였다. 그야말로 극적인 태세 전환이다. 이브닝스탠다드 부편집장, 꽤 악명 높은 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의 평가를 보탠다. 그의 독설은 시대적 거장들도 피해 가지 않았다. 야사 하이페츠와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바이올린),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피아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첼로) 같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연주자들도 어떤 음반에서는 그의 악평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런 까닭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주목도가 큰 평론가다. 그는 자신의 웹사이트에서 임윤찬의 연주를 이렇게 짧고 굵게 규정했다. 임윤찬은 테크닉 이상의, 음악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연주자라는 평가를 함께 받았다. 사실, 클래식 음악의 본토 유럽에서는 랑랑과 유자왕으로 대표되는 동양 연주자들이 테크닉에 치중한다는 고정관념 같은 게 있다. 동양 연주자들의 부상을 경계하기 위한 의도적 구분 짓기라고 믿지만, 또 이런 편견이 동양 연주자들에게는 제약이 되기도 한다. 앞으로 더 지켜봐야겠지만, 임윤찬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런 편견에 맞서고 있다는 점은 꽤나 고마운 일이다. 그렇다. 혹시라도 '임윤찬 현상'이 국뽕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렇지 않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세계 음악계에서 융숭하게 대접받는 연주자이며, 그렇게 큰 연주자로 향하는 지난한 과정을 안정적으로 밟아가고 있다. 임윤찬에 대한 과한 해석들 임윤찬 현상 덕에 수혜를 보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 가령, 임윤찬은 음악 유튜버들의 단골 소재다. 비단 한국 유튜버뿐만 아니다. 외국 음악 유튜버들도 한국말 제목과 자막을 달며 임윤찬 관련 콘텐츠를 업로드한다. 한 주에 올라오는 임윤찬 관련 영상이 수십 개에 달한다. 음악 유튜버들이 '임윤찬 팔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음악 비전공자 입장에서는 음악 유튜버들이 전달하는 정보들이 꽤 유익할 때가 많다. 임윤찬 콘텐츠를 지렛대 삼아 클래식 음악의 확장에 기여하는 측면도 분명 있다. 대부분 임윤찬의 음악적 해석과 예술성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디테일하게 풀어내는 내용들이다. 가령,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의 악보를 보여주면서, 원래 악보는 이렇게 돼 있지만 임윤찬은 연주를 저렇게 했다는 식이다. 실제로 임윤찬의 해석은 기존의 보편적 해석에서 벗어난 부분이 여럿 있다. 수많은 음표들로 가득한 3번 협주곡, 그간 돋보이지 않았던 음표를 꺼내 들며, 그것도 힘차게 타건을 누르며 당당히 전시하는 기개가 대단하다. 그런데, 또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라흐마니노프도 좋아할 것 같다. 임윤찬은 보편적인 해석에 안주하기보다는 자신만의 상상력을 펼쳐내는 도전적인 피아니스트다. 하지만, 임윤찬 연주에 대한 불편한 분석들이 가끔 있다. 왜곡까지는 아니더라도 과장에 가까운 내용들이다. 가령, 임윤찬이 위그모어홀에서 연주한 바흐 신포니아는 총 15개 곡으로 구성돼 있는데, 1번의 경우 악보와 다르게 마무리한다. 임윤찬이 혁명적인 마무리를 했다는 찬사가 나왔다. 악보에서는 '도'로 끝나지만, 임윤찬은 '미'로 끝내기 때문이다. 바흐 시대의 구조적 엄정함을 연상한다면 피아니스트가, 그것도 10대 연주자가, 다름 아닌 바흐의 악보를 변형해 연주하는 것은 꽤 큰 용기가 필요하다. ☞ 임윤찬 위그모어홀 공연 : 바흐 신포니아 1번 마무리 부분 들어보기 하지만, 이런 식의 종지감은 임윤찬이 처음 시도했던 것은 아니다. 크리스토프 에센바흐의 1974년 음반, 예프게니 코롤료프 1999년 음반 역시 임윤찬과 같은 종지를 취하고 있다. ☞ 예프게니 코롤료프 음반(1999년) : 바흐 신포니아 1번 마무리 부분 들어보기 유명 평론가들이 한 입 모아 말하는 것처럼, 임윤찬의 바흐 신포니아는 특별하다. 음 하나하나를 세공해 명징함을 더하면서도 음표 사이 여백 속에서는 처연함이 느껴진다. 불과 한 마디를 고쳐 쓴 것에 불과하지만, '도'가 아닌 '미'로 끝내는 종지감은 임윤찬이 만들어내는 신포니아의 뉘앙스에 찰떡 같이 부합하며 여운을 증폭한다. 달리 말하면, 임윤찬은 그간 역사에 없었던 종지를 혁명적으로 '창조'했다기보다는, 자신이 지향하는 바흐의 신포니아에 걸맞은 종지를 영리하게 '차용'했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오히려 세간의 여러 분석들과는 달리, 과거에 비해 악보에 더 충실해진 부분도 있었다. 가령, 6번의 경우, 곡이 갑자기 중단되는 부분이 있다. 이른바 '페르마타 구간'이라고 일컬어지는 데, 갑작스러운 휴지(休止)감이 어색한 모양인지 꽤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이 구간에서 카덴차처럼 자신만의 독창적인 연주로 매우기도 한다. 음악계에서도 이 부분의 악보를 변형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분위기다. 바흐 연주에 일가견이 있는 안드라스 쉬프가 대표적이다. 임윤찬은 만 16세였던 2020년 당시 금호영재오프닝 콘서트에서 바흐 신포니아를 연주하면서 페르마타 구간에 트릴과 함께 꽤 많은 음표를 채워 넣었다. 하지만, 위그모어홀 공연에서는 약간의 꾸밈음 정도로 갈음하며 상대적으로 악보에 충실한 모습을 보였다. ☞ 임윤찬 위그모어홀 공연 : 바흐 신포니아 6번 페르마타 구간 들어보기 ☞ 임윤찬 금호영재오프닝콘서트(2020년) : 바흐 신포니아 6번 페르마타 구간 들어보기 아르페지오(화음을 동시에 연주하지 않고 빠르게 펼쳐놓는 것)가 넘쳐나는 15번 B단조의 경우도 비슷했다. 금호영재오프닝 콘서트에서는 악보와 달리 화려한 아르페지오를 넣어 마무리했지만, 위그모어홀 공연에서는 악보를 존중하며 담담히 끝냈다. 임윤찬이 자의적으로 악보를 바꾸는 데 열심인 연주자만은 아니란 얘기다. 임윤찬의 신포니아는 3년 전 연주에 비해 힘을 뺐고, 침착했으며, 투명했고, 처연해졌다. 불과 3년의 짧은 시간, 바흐를 끊임없이 탐구한 결과일 것이다. 임윤찬에게 나이에 걸맞지 않은 '구도자적 예술가'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다. 그 정점에는 '수난곡'으로 불리는 9번 F단조가 있다. 임윤찬은 1번부터 15번까지 순서대로 연주하지 않고 엇갈리게 연주하다 9번으로 마무리한다. 이 역시 임윤찬 스스로 창조해 낸 배열이 아니라, 바흐의 선각자적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연주를 오마주한 것이다. 하지만 신포니아 9번을 바라보는 시선은 사뭇 다르다. 굴드는 긴장을 조이다 눈에서 조금씩 멀어지듯 신포니아를 서서히, 묵묵히 퇴장시키지만, 임윤찬은 신포니아에 날개를 달아 조심스레 하늘로 띄운다. 중간중간 특정한 음을 불쑥 쿡 누르는 모습은 마치 신포니아를 이렇게는 끝내고 싶지 않다는 미련을 남기는 것 같다. 굴드의 신포니아는 미련 없이 담담히 퇴장하지만, 임윤찬의 신포니아는 미련을 남기며 처연히 승천한다. 굴드를 오마주 했던 임윤찬의 신포니아는 굴드와 또 그렇게 달랐다. 무엇이 좋은지 호불호는 개인의 몫이지만, 임윤찬이 자신의 예술을 창의적으로 조형할 줄 아는 연주자임은 분명하다. 9번은 신포니아 가운데 4분에 가까운 가장 긴 곡이다. 신포니아의 백미인 이 곡을 굴드의 해석과 비교해 들어봐도 좋을 것 같다. ☞ 임윤찬 위그모어홀 공연 : 바흐 신포니아 9번 들어보기 ☞ 글렌 굴드 1964년 앨범 : 바흐 신포니아 9번 들어보기 임윤찬은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 반 클라이번 재단 이사장 겸 CEO 자크 마퀴는 지난해 반 클라이번 콩쿠르가 끝나고 캐나다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결승전 이틀 뒤 뉴욕 카네기 홀에서 바로 전화가 오더니, 이이서 뉴욕 필과 위그모어 홀에서 연락이 왔다" 그렇게 지난 1월 위그모어홀 공연이 성사됐고, 오는 5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일정도 잡혔다. 임윤찬을 향한 러브콜은 현재 진행형이다. 공연이 끝나고 나오는 현지 언론의 리뷰 기사는 임윤찬에 대한 찬사로 가득하다. 예프게니 키신이 갖고 있는 카네기홀 최연소 리사이틀 데뷔 기록(만 18세)을 임윤찬이 깨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한국이 아니라 외국 애호가들 사이에서 나왔다. 임윤찬은 다음 달 20일, 만 19세가 된다. 그깟 기록 깨지 못하면 어떤가. 그 어린 나이에, 시대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키신에 비견된다는 것부터가 놀라운 일이다. 달리 말하면, 임윤찬이 맞닥뜨려야 할 시험은 앞으로 계속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해 6월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임윤찬. 반 클라이번 콩쿠르 제공. 공자님 말씀 같지만, 이 삭막하고 가혹한 프로의 세계 속에서 임윤찬이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직 만 18세, 시간은 아직 충분하니까. 대신 바흐의 신포니아에서 보여줬던 예술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다. 이례적 사례지만 1960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마우리치오 폴리니는 우승 직후 공연을 자제하고 학습의 시간을 가졌다. 스승 아르투로 미켈란젤리의 가르침에 여백을 매우며 예술가로서의 근육을 다졌다. 20세기 최대 피아니스트라는 수식어가 달리 생긴 건 아닐 것이다. 자크 마퀴 이사장이 인터뷰에서 "우리는 임윤찬이 연습하고 발전할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너무 많은 공연을 하지 않도록 했다"라고 말한 대목이 고맙게 느껴진다. 임윤찬 팬덤도 그를 닦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성에 차지 않는 비평이 나와도 불쾌해할 필요도 없다. 임윤찬은 여전히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윤찬 역시 자신에 대한 비판 섞인 평론을 좋아할 거라고 믿는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임윤찬이 만들어내는 예술을 묵묵히 지켜봐 줬으면 좋겠다. 단호한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임윤찬 공연의 열정적인 분위기가 되레 아쉽다는 푸념도 나오는 모양이다. 기침소리조차 견디기 어려워하고, 곡이 끝나고 박수가 나오기까지 그 찰나의 여운을 애착하는 예민한 애호가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때로는 격렬한 박수와 환호성보다는 담담한 관망이 예술가에게 깊은 영감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그의 예술을 믿고 맡겼으면 좋겠다. 이게 그를 행복한 피아니스트로 만드는 일일 테니까. 디자인 : 옥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