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 없이 듣고 정직하게 쓰겠습니다.
이번 22대 총선에서 민주당(171석)과 국민의힘(108석), 조국혁신당(12석), 개혁신당·진보당(각 3석), 새로운미래·기본소득당·사회민주당(각 1석) 등 총 8개 정당이 국회에 입성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국회 운영은 전체 의석의 93%를 차지한 민주당과 국민의힘, 거대 양당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나머지 정당들은 최소 20석이 필요한 교섭단체 구성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원내에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를 두고 1등만 살아남는 소선거구제 때문에 양당 정치가 고착화돼 국회가 다양한 사회적 균열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실제 22대 총선에서 조국혁신당과 개혁신당, 새로운미래 세 정당이 받은 비례대표 득표율을 합치면 약 30%에 달하지만, 이들이 얻은 의석수는 5% 수준인 16석에 불과해 표와 의석수의 불비례성이 심각한 수준입니다. 비례대표 의석수가 46석에 불과한 데다 소수정당의 국회 진출을 명분으로 도입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거대 양당의 위성정당 창당으로 유명무실해졌습니다. 소수정당들은 국민들의 지지에 한참 못 미치는 의석 수를 받은 것도 억울한데, 국회 운영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있다고 토로합니다. 20석이라는 교섭단체 기준을 하루빨리 낮춰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지난달 12일 비교섭단체 6개 야당 원내대표 모임에서 공동교섭단체를 구성하자는 제안이 나왔지만, 각 정당의 정체성이 달라 쉽사리 추진력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내에 입성한 소수정당들의 현실적인 고민과 속내를 살펴봤습니다. 소수정당의 비애…“회의 일정도 모르는 게 어떻게 국회의원이냐” 소수정당 관계자들은 회의가 언제 열리는지, 어떤 안건이 다뤄지는지도 모른 채 끌려 다닌다고 토로했습니다. 국회 본회의 운영은 교섭단체 원내대표 간의 회동 자리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비교섭단체 의원들은 논의 사항을 알 수 없습니다. 한 소수정당 관계자는 “양당 원내대표가 주요 사항을 결정한 뒤 양당 의원들에게 그 내용을 알리는데, 비교섭단체 의원들은 누가 설명해주지도 않고 논의과정에 참여도 하지 못하면서 패싱된다. 그 과정에서 굉장한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고 토로했습니다. 상임위 활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상임위는 교섭단체 간사들의 협의로 운영되는데, 위원장이나 간사는 오로지 교섭단체의 몫입니다. 새로운미래 김종민 원내대표는 “상임위에서 어떤 안건을 다룰 건지 소수정당 의원들은 전혀 모르는 데다 의견을 제출할 수도 없다”며 “소수정당이 다 모이면 국회의원 21명인데 사실상 국회 운영에 전혀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개별 의원들이 자기 역량의 반도 발휘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김 원내대표는 “각 상임위의 법안소위에 소수정당은 참여시켜 주지 않는다”며 지난달 조국혁신당 박은정 의원이 정청래 법사위원장에게 법사위 고유법안을 다루는 법안심사 1소위 배정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는 “검찰을 개혁하기 위해 의원이 됐는데 검찰개혁을 다루는 1소위에 들어가지 못하는 게 납득이 되냐”며 “법안소위에서 논의할 법안을 양당 간사들이 결정하기 때문에 소수정당의 목소리를 반영할 방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국회 본회의와 상임위 운영과정에서 배제된 의원들이 유권자에게 공약한 법과 정책을 만들어내는 건 쉽지 않습니다. 조국혁신당 A의원은 “통과시키고 싶은 법안, 부처에 요구하고 싶은 정책이 있어도 교섭단체가 아니면 어려운 상황”이라며 “의원 21명이 무기력하게 국회 운영에서 배제되는 것은 그들을 국회로 보낸 유권자의 뜻에 반하는 일”이라고 꼬집었습니다. 개혁신당 이기인 최고위원도 “회의 일정조차 통보받지 못하고 있는데 이게 어떻게 국회의원이냐”며 “국회의원 배지만 달았지 아무런 권한이 없다. 국회에서의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선거법에서 소수정당의 원내 진출을 위해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선택하고 있는데, 정작 국회에 들어와서는 소수정당이 기를 못 펴게 하는 국회법의 모순을 누가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논의 착수에 주저하는 이유…“지지층 이탈 우려” 소수정당들이 같은 고민을 공유하고 있는데도 공동교섭단체 구성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지 못하는 것은 서로 다른 정체성 때문입니다. 추구하는 가치가 다른 데도 실리만 챙기려고 합친다는 비판과 함께 지지층이 이탈할 가능성을 우려하는 겁니다. 실제로 이번 총선을 앞두고 제3지대 ‘빅텐트’ 통합을 시도했던 개혁신당과 새로운미래는 지지층의 거센 반발과 함께 결국 결별했습니다. 20대 국회에서 민주평화당과 정의당이 만든 ‘평화와 정의 모임’도 구성과정에서 명분 없는 야합이라는 공격을 받은 바 있습니다. 비교섭단체 6개 정당 중 5개 정당은 범진보 진영에 속해 연대하기 용이하지만, 3석을 가진 개혁신당의 동의 없이는 공동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개혁신당 지지층 상당수가 조국혁신당이나 진보당과 함께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어 아직은 동의를 이끌어내기 어려워 보입니다. 개혁신당 이기인 전 최고위원 실제로 개혁신당 이기인 최고위원은 당대표 후보로 출마한 뒤 교섭단체 구성 논의에 착수하겠다는 공약을 냈다가 당원들의 비판을 받고 공약을 일부 수정한 바 있습니다. 개혁신당의 한 관계자는 “우리는 보수 야당이지만 다른 소수정당들은 진보 야당들이라 나름의 울타리를 만드는 순간 벗어나기 쉽지 않다”면서 “한 당으로 합치는 게 아니라고 이야기하더라도 뭉쳐서 하나의 의견을 조율해야 하는 상황에 대해 좋은 해석이 나올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지금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공동교섭단체를 구성한다고 해서 타개책이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며 “우리는 이미 한 번 합당을 하면서 매를 맞았던 적이 있다. 공동교섭단체 구성은 어려워 보인다”고 바라봤습니다. 조국혁신당 A의원도 “당원들이 공동교섭단체를 합당 수준으로 오인해 반발하면서 지지기반이 급격히 동요할 우려가 있다”며 “각 당의 지지자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동의하기 전에는 구성 논의에 착수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지지층 설득이 급선무…“합당과는 다르다” 공동교섭단체를 구성하려면 합당과 달리 개별 정당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지지층을 설득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조국혁신당 A의원은 “공동교섭단체를 만든다면 공통의 입법과제, 정책과제만 추린 뒤, 조금이라도 이견이 있는 부분은 각 당이 알아서 하도록 해야 할 것”이라면서 “교섭단체와 달리 공동교섭단체는 국고보조금이 늘어나지도 않는다. 합당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국회 운영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새로운미래 김종민 원내대표는 지난달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교섭단체는 정당이 아니다. 정치적 노선이나 정책적 견해가 같지 않더라도 민주적이고 효율적인 국회 운영을 위해 같이 목소리 내자는 게 공동교섭단체의 취지”라고 강조했습니다. 김 원내대표는 “21명의 의원이 유권자들에게 위임받은 권한을 제대로 행사해서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려면 교섭단체를 구성하는 게 당연한 선택”이라며 “비교섭단체 의원들이 이대로는 안 되겠다, 이건 우리를 뽑아준 유권자에게 정말 예의가 아니다, 그런 걸 확인하는 때가 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정기 국회가 열리기 전에도 교섭단체 구성이 될 가능성이 있다”며 “아무리 늦어도 올해 안에는 결성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디자인 : 안준석
21대 국회 임기가 끝나는 5월 29일, 정의당이 걸어온 원내 진보정당 20년 역사도 막을 내린다. 지난 총선, 10% 가까운 비례대표 정당 지지를 받았던 정의당은 이번 총선에선 3% 문턱을 넘지 못했다. 총선 실패의 대가는 냉혹하다. 언론의 주목도, 당의 위상은 쪼그라들었다. 30억 원 넘는 부채에 정당보조금이 대폭 줄면서 당직자 열 명 중 아홉 명은 실직자가 될 거란 이야기도 나온다. 등록하는 후보가 없어 당대표 선거 일정이 밀릴 지경이다. 사실 실패는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다.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 참패한 뒤 당의 방향성을 고민하던 이들이 총선을 앞두고 뿔뿔이 흩어진 것만 봐도 그렇다. 조성주·류호정은 새로운선택을 거쳐 개혁신당에, 박원석·배복주는 새로운미래에 합류했다. 일부는 사회민주당이나 한국농어민당으로 갔다. 조국혁신당에서 원내 입성에 성공한 신장식 정도를 제외하면 정의당을 떠난 이들의 선택이 효과적이었는지 의문이지만 말이다. 아예 정치를 떠난 정의당 지도부도 있다. 양당이 독식하던 서울 관악구의회에 입성하며 청년 정치인으로 주목받았던 이기중 당시 정의당 부대표 이야기다. 이 전 부대표는 제3지대론을 주장하던 '세 번째 권력'에 참여하다 지난해 11월 돌연 정계 은퇴를 발표했다. 당시 이 전 부대표가 남긴 글에서 변화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고민과 좌절을 엿볼 수 있다. 일찌감치 정의당의 실패를 예감했던 이 전 부대표는 정치를 떠나 노무사 겸 라이더로 생활하고 있다. 그와 함께 정의당이 실패한 이유를 복기해 봤다. Q. 언제, 왜 정치를 그만뒀나? A. 지난해 11월 지도부 총사퇴가 결정되면서 부대표직을 내려놓고 정치를 떠났습니다. 페이스북에서 제 글을 봐주는 이들이 있고 관악구 출마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은퇴한 것에 대해 소명하기 위해 공식 선언으로 남겼어요. 정의당 재창당 과정에서 당이 제3지대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녹색당과 선거 연합을 하겠다는 게 당내 다수 의견이었습니다. Q. 총선 참패, 예상했나? A. 부대표가 됐을 때부터 지도부 안에서는 이번 총선 의석 수는 0~2석이다, 3% 지지율이 간당간당한 정도라고 생각했어요. 21대 총선에서 10% 가까운 지지를 받았지만 이후 4년 동안 정의당이 캐스팅보트 잡을 상황은 아니었어요. 유력한 스피커가 심상정 의원밖에 안 남았는데 그 발언력이 약해진 측면도 있어요. 정의당의 여러 실책이 있지만 일단 언론에 나오지 않는 게 제일 컸어요. 정의당이 가장 좋았을 때가 2017년 대선입니다. 문재인 후보 당선이 확실시되는 상황서 정의당이 민주당의 보완재 역할을 자임했고 거기에 많은 국민들이 동의하면서 이후 지지율이 괜찮게 나왔죠. 그러나 조국 사태 이후 민주당이 도덕적 문제점을 노출했을 때 정의당은 이쪽 편을 들 거냐 말 거냐 질문에 계속 놓였고 항상 명확한 선택을 하지 못했어요. 이쪽에선 민주당 2중대, 저쪽에선 국민의힘 2중대란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반보수 전선에서 복무하기를 원했던 범민주진보 성향을 가진 사람들과 양당에서 독립적인 제3세력 역할을 해주길 바랬던 중도층의 지지를 동시에 다 잃었습니다. Q. 총선 전략의 문제는 없었나? A. 이번 총선의 실패는 4년 전 총선에서 이미 시작됐다고 봐요. 애초 4년간 쌓인 문제들이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도 극복하긴 어려웠다고 판단해요. 4년 전 실패는 선거제를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바꾸면서 의석이 많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민주당이 위성정당을 만들지 않을 거라고 오판한 거죠. 사실 청년에 비례 1, 2번을 할당한 것도 10명 이상 당선될 거라고 상정했기 때문이에요. 당시 비례 후보만 37명이 당내 경선에 출마했는데 많이 당선될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2000년대부터 활동한 당 활동가들은 정치인으로서 성장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고, 생계 문제도 있는 거죠. 당시 비례 경선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실망하고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 그때부터 이미 실패는 노정됐다고 볼 수밖에 없겠죠. 그렇게 해서 떠난 사람들과 지지자들의 원망과 원한 같은 게 청년 의원들에게 집중이 됐고, 그러면서 당내 분열과 갈등이 지속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Q. 정의당은 계속된 위기에 어떻게 대응했나? A. 현실성 있으면서도 구체적인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현장에서 더 열심히 하자, 지역과 노동을 강화하자. 이런 이야기는 굉장히 게으르고 원론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매번 어떤 위기가 올 때마다 평가를 하면 그런 이야기가 계속 반복됐어요. 그런 건 하면 좋은 건데 못하는 상황이라는 게 있는 거고, 정의당이 괜찮을 때도 그런 건 잘 못했어요, 구조 자체가 이미 안 되는 상황인데 그런 평가와 대안들은 굉장히 공허했다고 생각해요. 포지션 전략이 굉장히 중요했다고 생각해요. 민주당과 차별화된 노선이나 정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지금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에 있는 무엇을 하는 당이냐는 것을 보여줘야 해요. 당의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것은 정책 노선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땅이 어디냐, 다른 정당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Q. 구체적인 사례를 들자면? A. 정의당은 조국 사태 이후 끊임없이 흔들리면서 반성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했는데, 뭐가 잘못이었고 왜 그런 판단을 했는지 고민했다면 이후로는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죠. 그러나 똑같은 오류를 반복했어요. 민주당과 손잡고 간다고 빨리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계속 고민하는 모습만 보이다가 마지막에 결정할 때는 늘 민주당의 손을 들어주는 식으로 하니까, 대중이 보기에 도대체 이 당은 뭐 하는 당이냐는 생각이 드는 거죠.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심상정 의원 득표보다 적은 표차로 당선됐을 때 교차투표층의 대거 이탈은 예정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독자 노선을 갔어야 했는데, 이후 검수완박에 손을 들면서 돌아오지 않을 교차투표층에게 손을 내밀고 중도층은 내쳤죠. 총선 전 이재명 대표가 현행 선거법을 유지하되 위성정당을 만들겠다고 이야기했을 때 정의당의 메시지는 '그 고민을 이해한다'가 일성이었어요. 참여할지 여부를 놓고 한참 내부 논의를 한 뒤 참여하지 않겠다고 판단했어요. 원칙이 아니라고 판단했다면 처음부터 강하게 비판했어야죠. 2020년에는 강하게 위성정당을 비판하며 정의당은 원칙을 지키는 정당이다, 민주당에 뒤통수를 맞았다, 이 전략으로 총선에서 10% 가까이 받았잖아요. 그런데 이번에는 위성정당을 제대로 비판하지도 못하고, 할까 말까 고민하는 모습만 보였어요. 원칙을 지켰다지만 그걸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거예요. 결국, 정의당이 포지션을 분명히 선택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Q. 왜 확실한 포지션을 선택하지 못했나? A. 현실적으로 당내에서 그 두 가지 포지션에 대해서 각각 지지하는 사람들이 거의 반반이었는데, 그랬기 때문에 더욱 결정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지도부에 선택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어요. 물론, 한쪽을 선택하면 다른 한쪽이 떠나 당이 깨지는 거니까 쉽진 않았지만요. 지금까지 당 지도부와 주요 정파들은 당을 깨지 않기 위한 선택을 하다가 함께 넘어지게 된 겁니다. Q. 세 번째 권력과 함께 제3지대론을 주장했는데. A. 진보정당이 80년대 운동에서 내걸었던 사회주의, 사민주의, 복지국가 이런 것들은 이미 민주당에 많이 흡수됐습니다. 우리가 처음 진보정당을 시작할 때 이야기한 진보라는 게 어느 정도 시효를 다한 것 아닌가, 또 한편으로는 민주당이 진보로 불리는 상황에서 정의당이 민주당과 같이 진보로 묶이면서 조국 사태 등 민주당 쪽에 도덕적인 문제가 발생해도 정의당이 편을 들어줘야 하는 이런 상황들. 그래서 진보라는 게 어떤 가치가 아니라 이제는 그냥 하나의 지명을 의미하게 된 것이 아닌가, 옛날 운동권 동창회 같은. 그런 고민 끝에 새로운 가치와 정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Q. 막상 제3지대에 합류하지는 않았다. A. 정의당의 부대표이고 지도부였기 때문에 당이 내가 주장하는 길로 가지 않는다고 해서 나 혼자 이탈해서 가는 것은 책임지는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정의당 자체가 제3지대 재편에 역할을 하길 바란 건데 결국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제3지대 상황 자체가 원래 생각했던 이상적인 모습으로 굴러가지 않을 것 같아서 결국 이쪽도 실패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민주당이나 국민의힘에서 일부 세력이 이탈한다고 하더라도 계파 간의 갈등, 인물 간의 갈등으로 인한 분화이지 가치에 대한 것은 아닌 것 같았어요. 2014년 6회 지방선거를 앞두고 고 노회찬 전 의원은 이기중 전 정의당 부대표의 유세에 함께 했다. 이 전 부대표는 2010년과 2014년 두 차례 낙선 끝에 2018년 서울 관악구의원(삼성동·대학동)으로 당선됐다. 이 전 부대표는 자신의 결혼식 주례를 섰던 노 전 의원을 회고하며 "소수정당의 정치인으로 외롭고 힘든 싸움을 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란 걸 매일 절감한다"고 적었다. Q. 제3지대에서 진보적 가치가 실현가능한가? A. 진보가 시효를 다한 것에는, 우리가 왜 민주당이 도덕적이지 못하고 개혁적이지도 못한 사안에 대해서도 편을 들어줘야 하냐는 회의가 있었어요. 노회찬 의원은 민주노동당이 처음 생겼을 때 '민노당과 민주당 사이에는 한강이 흐르고, 민주당과 한나라당 사이에는 실개천이 흐른다'고 말했고, 통합진보당 이후 야권 연대 노선을 가면서는 '외계인이 쳐들어오면 한국과 일본도 손을 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진보정당이 처음 생겼을 때는 민주당을 보수정당으로 치부하면서 두 거대 정당의 차이보다 우리와의 차이가 더 크다고 이야기했고 실제로도 그런 노선을 걷기도 했어요. 그런데 지금 와서는 그런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정의당은 민주당과 편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잖아요. 80년대식의 반독재 사고방식으로 봤을 때 국민의힘과는 멀고 민주당과는 가까운 것으로 느끼겠지만, 조국 사태라거나 검수완박 같은 것을 봤을 때 오히려 이준석 같은 사람 하고도 말이 더 잘 통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다만, 당을 같이 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있었고요. Q. 어떤 정책과 가치를 제시하려고 했나? A. 정책과 가치라는 건 거의 모든 정당들이 다 일치해가고 있다고 봐요. 심지어 박근혜 후보도 대선 때는 경제민주화나 복지국가 뭐 이런 이야기를 다 했죠. 정책에 있어서는 말로는 큰 틀에서 합의가 이뤄진 거고, 오히려 진영 논리와 서로 잡아넣기 위해서만 치열하게 싸움이 이뤄졌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타파하기 위해서 다당제와 제3지대가 필요하다고 봤고 기존의 진영 논리를 넘어서는 세력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진보에서 내놓은 정책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새로 평가해 봐야 하는 것 아닌가. 대표적으로 최저임금 인상, 공수처, 검수완박 등은 실제 어떤 결과 낳았는지 제대로 된 평가가 없었다고 봐요. 제대로 작동했는지 냉정하게 평가하고 반성할 부분은 반성했어야 하지만 이뤄지지 않았어요. Q. 제3지대 빅텐트 과정은 어떻게 평가하나? A. 제3지대가 이낙연·이준석이라는 정치인 두 명으로 상징되도록 판이 만들어져 버렸고, 민주당 비명계에서 일부 계파가 나온 정도였죠. 사실 정의당이 이 안에서 어떤 일정한 정치세력으로서 역할을 했다면 좀 다른 판이 만들어질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어요. 이낙연·이준석과 다 같이 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제3지대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겠다, 우리가 생각하는 제3지대는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그 과정에 개입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예 정의당이 빠져버린 게 제일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이낙연·이준석도 새로운 가치나 다당제를 제시했다기보다는 결국 자기가 있던 당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어 살기 위해 한 것 아니냐 이렇게 비치면서 제3지대 자체가 쪼그라들었어요. Q. 조국혁신당은 정의당을 대체하는 진보정당인가? A. 조국이라는 사람에 대한 호오와는 별개로 조국혁신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정치세력이라는 것은 결국 기존에 정의당이 해왔던 역할이 맞다고 봐요, 100%는 아니지만요. 정의당은 진보정당으로 사회적 약자를 위해 노동 등 정책 펼친다는 측면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반보수 전선에서 민주당보다 더 선명하게 싸우는 정당이란 이미지가 있었죠. 평가를 떠나 그걸 좋아해서 지지해 주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누가 윤석열 대통령과 가장 제대로 싸울 사람이냐, 가장 철천지원수가 누구냐고 했을 때 조국이라고 보고 선택한 거죠. 다만, 조국혁신당이 정책과 노선에서 앞으로 어떻게 갈지는 여전히 미지수라고 봐요. 조국 대표가 이재명 대표를 만났을 때 민주당은 몸이 무거우니 우리가 더 선명하게 싸우겠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민주당도 그 덩치에 비해서 굉장히 세게 나가고 있거든요?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의 선명성 경쟁은 진보적인 정책이나 약자를 위한 정치라기보다, 윤석열을 어떻게 끌어내리고 검찰을 어떻게 해체할 것이냐 이런 경쟁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정의당은 21대 국회 임기 종료를 앞두고 지난 2일부터 10대 입법 과제를 위한 천막 농성에 들어갔다. 10대 입법 과제에는 임신중지 보완 입법, 이민사회기본법, 초단기계약방지법 등 거대 양당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의제들이 포함돼 있다. 헌법재판소가 형법상 '낙태죄'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한 지 5년이 지났지만 이번 총선에서 임신중지를 공약한 원내정당은 정의당뿐이다. Q. 정의당이 국회에서 사라지면 걱정되는 점은? A. 민주당이나 조국혁신당이 과연 얼마나 노동 의제에 대해서 진정성을 가지고 할지, 젠더나 소수자 문제에 대해서도 얼마나 의지를 가지고 할지 모르겠어요. 정의당이 소수였긴 하지만 노동 관련 법안을 먼저 이야기하고 운동단체들과 먼저 연대하며 민주당을 압박해 만들어낸 일들이 있었던 건데, 이제는 어떻게 될지 모르죠. Q. 정의당이 원외로 나가면 받을 타격은? 살아날 방법은? A. 예전부터 빚이 있었는데 앞으로 갚기가 어려워지겠죠. 국가보조금이 이제 안 나오니까 당비로만 운영을 해야 하니 수입이 엄청나게 줄어들겠죠. 또 국회의원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은 스피커가 사라지다는 거예요. 당장 총선 이후에 여론조사에서도 아예 안 잡히는 상황이 됐어요. 옛 원외정당 시절처럼 열심히 하자, 진보당처럼 하면 되지 않냐 이야기하지만 정의당 체질이 그런 건 아니기 때문에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확실한 스피커를 한 명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해 보입니다. Q. 진보정치에 남겨진 공간이 있을까? 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죠. 선거제 자체가 양당제를 강제하는 측면이 있잖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선거 때마다 끊임없이 제3의 세력, 제3의 인물이 등장한 것은 양당제를 극복하고 싶은 대중의 열망과 수요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제도 때문에 계속해서 실패했지만, 도전은 계속될 거고 장기적으론 모르는 거죠. Q. 정의당을 떠난 심정은? A. 2000년 민주노동당에 입당해 지역 조직에서 계속 활동했고, 2010년 처음 선거에 출마하며 정치 활동을 해왔습니다. 20년 넘게 당 활동가로 살아온 건데 아쉬움이 많죠. 이 당이라는 게 나에게는 어떤 존재일까, 정치인으로 산 게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보면, 맨 처음 우리가 하고 싶었던 정치와는 정치적 지형도 그렇고 당이 많이 멀어져 있는 상황 같아요. 그런 점에선 떠나는 게 맞았다고 생각지만 그건 이성적으로 그런 것이고, 마음은 고향과 가족들을 다 떠나게 된 심정입니다. 노회찬 의원의 곁에 섰던 청년 정치인 이기중은 진보정치가 새로 발 디딜 공간을 고민하다 멈춰 섰고, 민주노동당에서 정의당으로 이어지는 원내 진보정당 20년 역사는 막을 내렸다. 심상정 의원은 정계를 떠났고, 홍세화 선생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들이 대변하고자 했던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가 앞으로 거대 양당을 통해 얼마나 대변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진보정당이 사라진 시대, 여전히 진보정치의 재구성이 필요한 이유다. 이 전 부대표는 예정된 패배 앞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정치를 떠나며 남긴 글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마무리했다. "이 길을 벗어나면 어찌 살까 생각해 본 적도 없지만, 또 살다보면 살아지겠지요. 여전히 용기와 의지를 품고 현실을 견디며 이상을 좇는 모든 분들에게, 존경과 응원을 보내며." 디자인 : 권민재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아침 통근 버스를 몰고 도로를 달리던 기사 K 씨에게 들려온 외침이다. 출입국사무소 직원들이 차량으로 버스 앞을 가로막은 뒤 올라타자, 버스에 탄 36명의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당황한 K 씨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K 씨에게 그들은 친구 같고, 또 동생 같은 동료들이다. 어릴 때부터 집을 나와 생활했기에, 만리타국에서 일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 것인지 잘 알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K 씨는 급히 2m 후진했고, 버스 좌측을 가로막은 승용차 범퍼와 충돌한 뒤 내달렸다. 150m 남짓 달린 뒤 출입국사무소 차량들이 다시 가로막았다. 앞뒤 차량을 들이받았고, 버스 문을 열어 외국인 한 명을 보내줬다. K 씨는 현장에서 체포됐고, 나머지 이주노동자 대부분은 본국으로 추방됐다. 이 과정에서 이주여성 1명은 쇄골뼈에 금이 가 병원으로 후송됐다. 지난해 8월 대구에서 벌어진 일이다. K 씨가 품은 측은지심의 대가는 징역 3년, 실형 선고였다. 공무집행을 거부하는 과정에서 단속 공무원 11명에게 전치 2~3주의 부상을 입히고, 출입국사무소 차량 3대를 파손시킨 혐의가 적용됐다. 단속에 놀라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점, 단속 공무원들의 부상이 중하지 않은 점, 피해 회복을 위해 노력한 점이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됐다. 반면, 과격한 범행으로 불법체류 단속 업무에 장애가 발생한 점, 단속 공무원 11명이 다치고 단속 차량들의 파손이 상당한 점은 불리한 정상이었다. "절망에 빠진 이를 도운 사마리아인"…7천 명 넘게 선처 탄원 강단에 선 고명숙 이주와가치 대표 K 씨를 접견한 뒤 발벗고 나선 고명숙 이주와가치 대표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면서도 "무차별적인 강제 단속이 이뤄지면서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불안에 떠는 상황을 고려해 달라"고 2심을 맡은 대구고등법원에 탄원했다. 고 대표는 K 씨가 20년 동안 공장일을 하면서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당황한 데다, 평소 친숙한 동료들이 울부짖으며 도와달라고 하니 머릿속이 하얗게 되며 일단 후진한 것이라고 했다. 단속 차량들이 뒤따라온 것을 미처 알지 못했던 상황에서 차량을 박게 되니 그 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어떠한 이득도 취한 것 없이, 그저 절망에 빠진 이들을 도우려 한 마음을 헤아려 달라고 했다. 전국의 이주단체들도 힘을 보탰다. 제출된 탄원서에는 7,400명 넘는 이들이 이름을 올렸다. 친한 동료의 울부짖음에 이성적 판단이 힘들었을 것이라며 선처를 호소하는 글이 많았다. 탄원서 중에 인상적인 구절은 다음과 같다. 경북북부이주노동자센터 "사마리아인이 가던 길을 멈추고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본 가장 큰 이유는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입니다. 일하는 노동력이 아닌 '사람'을 만났던 K 씨는 그동안 실정법에 의한 처벌을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차를 후진한 것은 아닙니다. 이주노동자에게 동료애를 갖고 있는 노동자로서 인권침해적 단속 때문에 두려워 울부짖는 동료를 외면할 수 없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경주이주노동자센터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은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특히, 경주, 대구 지역은 출입국사무소의 집중적인 단속이 이루어지는 지역이었습니다. 출근해서 일하고 일을 마치면 숙소에 들어와 집 밖에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모든 생활을 해결하면서 지냈습니다. 어떤 민간인이 수시로 동네 골목과 시장, 사업장 인근을 다니며 이주노동자들에게 폭력적으로 등록증을 요구하고 경찰에 신고해 강제 출국당하는 일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버스 안 노동자들의 상황은 말 그대로 공포였을 것입니다. 삶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날아갈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들의 비명과 오열이 버스 안에 울렸을 것입니다." 토끼몰이식 단속에…옥상서 떨어지고, 쓰러져 숨지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는 무리한 단속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법무부 훈령인 인권보호 준칙과 판례에 따르면 단속 공무원은 단속 시 관리자의 동의를 받아야 하지만 그렇지 않아 애초 위법한 단속이었다는 것이다. 단속 장소로 기재했던 공장이 아닌 도로상에서 중앙선을 침범하는 추격전을 벌이면서까지 강제 단속을 할 정도로 긴급성이 요구되는 상황은 아니라고 봤다. 나아가 민변은 법무부가 지난해 역대 가장 많은 3만 8,000명의 불법체류자를 단속한 것을 큰 실적인 것처럼 홍보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권침해 문제에 대한 고려는 충분히 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한다. 지난달 단속 공무원을 피해 도망가던 미등록 외국인이 건물 옥상에서 떨어졌고, 단속 차량을 보고 달아나다 쓰러진 미등록 외국인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숨진 일을 예시로 들었다. 적법한 체류자격을 갖추지 못했을 뿐 범죄행위를 하고 있지 않은데도 마치 중대한 범죄를 범한 채 도주 중인 사람을 긴급체포하듯이 단속하는 방식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K 씨와 변호인단이 무죄를 주장하진 않는다. 다만, 실정법과 양심의 목소리가 어긋나는 딜레마 상황을 감안해 달라는 주장이다.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아야 하지만, 윤리적 심판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1955년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의 경우가 그랬다. 그녀는 퇴근 후 버스에 올랐다가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녀는 거절했고, 흑백 분리법인 '짐 크로법' 위반 혐의로 체포돼 감옥에 갇혔다. 범속한 그녀가 거대한 투쟁의 출발점이 되는 순간이다. 이후 인종 분리는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왔고, 인종 차별을 금지한 민권법이 제정됐다. 부당하다는 목소리가 실정법의 변화보다 앞설 수 있다. 민간단체가 불심검문에 체포까지…드라마 속 '화살촉'이 현실로 이런 일이 대구에서 벌어진 것은 우연이 아닐 수 있다. 대구의 이주단체들은 당국의 강제 단속이 유독 심해졌다고 말한다. 최고의 단속 실적을 세웠다는 지난해 초부터 강제 단속이 일상화됐다는 것이다. 나아가 반이민단체의 민간인들이 길가는 외국인들을 붙잡아 불심검문하는 일까지 생겼다. 이번 총선에 군소정당 예비후보로 등록한 대구 출마자 P 씨는 전국을 돌며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직접 체포하고 있다. 그는 체포 장면을 촬영한 뒤 SNS 계정에 올려 인기를 누리고 있는데, 영상에는 "불법체류자 뿌리 뽑자" "불법체류자 검거"와 같은 글이 적혔다. 영상을 보면 촬영 당하는 외국인의 인권은 찾아보기 힘들다. 길가는 차량이나 오토바이에 탄 외국인에게 서류를 달라고 위협하거나, 건장한 남성들이 외국인을 붙잡아 끌고 가는 모습도 있다. 한 영상에서는 한국인 남성 세 명이 한 외국인 남성을 붙잡고 겉옷을 벗기며 "야야, 이리와" 같은 반말을 서슴지 않는다. 멱살을 잡힌 외국인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아니에요"를 반복하다 도망가는데, 경찰차에 올라타는 영상으로 넘어간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을까. P 씨의 수많은 영상 속 경찰들은 이주민을 잡아가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상대가 한국 말을 제대로 못 하는, 불리한 여건에 있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사적 폭력을 동원하는 이들에게 그 절차를 제대로 따져 물었는지 의문이다. 지역 언론에는 P 씨가 신고해 경찰에 넘긴 미등록 외국인만 수천 명에 이른다는 주장이 언급됐다. 이런 상황에서 추격전을 벌이면서까지 출근 버스를 멈추는 단속 공무원이 이주노동자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지 추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진실 규명의 때를 놓치면 뒤늦게 바로잡거나 피해를 회복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현재 확인된 것만 1,262명이 숨지고 5,691명이 피해를 입은 가습기살균제 문제가 바로 그 사례입니다. (신고 기준 1,835명 사망, 7,877명 피해) 가습기살균제는 1994년부터 유통됐지만 2011년 피해 사실이 공론화됐고 배보상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문제 해결이 지연된 가장 큰 이유는 가습기살균제 업체들에게 신속히 책임을 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옥시의 전직 대표는 과실치사 등 혐의로 2018년 징역 6년이 확정됐지만, 같은 혐의를 받는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의 전직 대표들은 3년 전 1심에서 무죄를 받았습니다. 이들에 대해 지난 11일 2심 법원은 “전 국민을 상대로 가습기살균제의 만성 흡입독성 시험이 행해진 사건”이라며 금고 4년형을 선고했지만, 피해자들은 충분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기업의 책임은 무엇인지, 왜 이렇게까지 오랜 시일이 걸리고 있는 것인지, 그 이유를 살펴봤습니다. ‘인체무해’라는 거짓말...“안전성 검사 없었다” 아기를 위해, 온 가족의 건강을 위해 가습기엔 꼭 살균제를 넣자는 광고들입니다. 1994년 유공(현 SK이노베이션)에서 ‘가습기메이트’라는 제품을 출시하며 낸 일간지 광고인데, 인체에 무해하다는 문구가 선명합니다. 그러나 가습기살균제는 인체에 유해했고, 광고를 믿은 소비자들은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입었습니다. 1월 11일 2심 법원은 “어떠한 안전성 검사도 하지 않은 채 상품화 결정을 내려 업무상 과실이 모두 인정된다”며 “불특정 다수가 원인을 모르는 상태에서 큰 고통을 겪었고 상당수 피해자는 사망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참혹한 피해를 입는 등 존엄성을 침해당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재판부에 따르면 유공은 독성 시험을 해야 한다는 내부 의견을 무시하며 CMIT·MIT 성분 제품을 출시했고, 서울대에서 문제 소지가 있어 실험이 더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음에도 제품을 계속 판매했습니다. 1심 무죄 판결을 뒤엎고 SK케미칼 등 전직 대표들의 형사 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지만 피해자들은 임직원 개인의 책임을 묻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16일 기자회견을 연 피해자단체는 “SK는 여러 종류의 제품을 만들어 팔았고 PHMG와 CMIT 성분 제품의 살균원료를 공급한 참사의 주범”이라면서 “그룹 하수인만이 아니라 SK그룹 차원의 책임을 묻겠다”고 했습니다. 동시에 참사의 또 다른 주체인 정부책임자들에 대해서는 단 한 명도 책임을 묻지 않고 있다며 정부의 책임 규명이 필요하다고 요구했습니다. 박혜정 |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미국에서는 수돗물도 초음파 가습기로 분무해 흡입하면 위험하다고 증류수를 쓰게 했다고 해요. 흡입하면 독성이 있는데도 원료 특허를 내준 정부도 잘못이고, 특허 내고 원료를 만들어 공급한 SK 측과 판매한 모든 기업들에게 책임이 있죠.” “참사 초기 PHMG 성분, 외국계 기업, 폐질환 등 일부 피해에 초점이 맞춰졌어요. 이 문제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정부나 가해 기업의 책임이 축소됐고, 특히 국내 기업들이 면죄부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2심에선 유죄가 나왔지만 SK 측이 바로 상고해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2천여 명이 숨졌는데 금고 4년에 법정구속도 하지 않은 건 이해가 되지 않고요, 검찰이 맞상고하지 않으면 오히려 형이 줄어들까 걱정됩니다.” SK케미칼 사내 벤처 홈페이지에 게재된 가습기살균제 설명. “저독성을 인정받은 항균제를 사용해 인체에 안전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정부 늑장에 사라진 기업의 ‘허위 광고’ 책임” 왜 이렇게 책임 규명에 오랜 기간이 걸린 것일까. 과거 공정위 재직 시절 가습기살균제 조사 관련 문제제기에 나섰던 유선주 전 공정위 심판관리관에게 물었습니다. Q. 가습기살균제 참사 책임 규명이 늦어진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정부가 이리저리 쪼개고 시간을 끌며 그 책임을 희석시켰다고 생각해요. 2011년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수면으로 떠올랐을 때 규제 대상이 외국 기업, 피해자는 폐 질환, 성분은 PHMG로만 축소되고 쪼개지며 나머지가 무력화됐습니다. 피해자와 가습기살균제, 성분 관련 정보를 가지고 있던 정부가 전방위 조사에 나섰어야 해요. 가령 제가 사용했던 고체형 가습기살균제는 조사에서 아예 빠졌는데, 나중에 성분 자료를 보니 더 유해하더라고요. 성분 자료에 위험성이 적혀 있었는데도 아이에게 안전하다고 광고했으니 표시광고법 위반인데, 실험이나 광고 조사가 일부 성분에만 국한됐습니다. Q. 허위광고 책임을 제대로 묻지 못했나요? A. 공정위 재직 당시 공소시효 도과 전에 허위광고 여부를 빨리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과실치사 혐의로 형사처벌하면 되지 않냐는 소리를 들었어요. 공정위는 2016년 8월 시효 만료 직전 SK케미칼 등의 책임 여부를 따질 수 없다며 심의를 종결했고, 이후 비판이 거세지자 2018년 과징금 부과와 함께 검찰에 고발했습니다. 모두 위험하단 표시를 하지 않았다는 걸 문제삼은 거라 허위광고와는 별개입니다. Q. 이후 헌법재판소가 위헌 판결을 했다고요? A. 공정위는 안전한 성분을 써서 인체에 무해하다는 내용의 인터넷 기사 3건에 대해 기사는 광고가 아니라는 논리와 시효가 지났다며 2016년 심사대상에서 제외했고, 허위광고를 사전조사하고 전수 조사를 해야 한다는 법 규정은 모른 척했습니다. 이후 한 피해자가 이에 불복해 헌법소원을 냈다가 2022년 위헌판결을 받았습니다. 헌법재판소는 홍보성 인터넷 기사를 광고로 보고, 삭제되지 않았다면 광고행위가 계속된 것이란 논리로 공소시효 문제를 극복했어요. 공정위는 그때서야 헌재에서 문제삼은 내용만 고발했습니다. 허위광고 여부를 진작 전방위적으로 조사했어야 합니다. Q. 과실치사 처벌로 된 것 아닌가요? A. 형사처벌은 대표이사로 세워져 있던 2인자들, 개인에 대한 처벌일 뿐입니다. 반면, 허위광고 문제로 책임을 물었다면, 책임자는 기업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후 피해자들이 기업에 손해배상 책임을 묻기 용이했겠죠. 그냥 민사소송을 내면 피해자가 인과관계를 직접 증명해야 해 쉽지 않으니까요. Q. 업체들의 배상 책임은? A. 지난해 대법원은 가습기살균제 업체의 배상 책임을 처음 인정했습니다. 옥시 제품을 사용했지만 인과관계가 부족하다는 ‘3등급’ 피해자에게 위자료로 500만 원을 줬는데, 엄청나게 의미 있는 판결입니다. 표시광고법은 입증책임이 기업에 있고요. 설명의무 위반이나 허위광고로 고통을 당한 개인마다 각각 위자료 500만 원을 주라는 기준을 제시한 건데, 우리 사회의 정직한 책임 문화를 키워 나가는 데 필요한 기준 판례가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참사 초기 실험 설계 제대로 했어야”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지원에 주력해 온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에게도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인지 물었습니다. Q. SK는 왜 이제야 유죄가 선고된 걸까요? A. 우선, 정부가 참사 초기부터 원료 공급자인 SK에 대해 초점을 맞추지 않았어요. 이번에 SK가 유죄받은 것도 원료 공급자의 책임이 아니라 최초 제품 개발자로서 과실치사상 책임을 물은 것입니다. 원료 공급 책임에 대해서는 형사재판이 진행 중이고, 이번 사건과 마찬가지로 3년 전 1심에서 무죄 판결이 나왔습니다. 이번 판결이 해당 사건 2심에도 상당한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됩니다. 즉, SK의 책임은 아직 절반 밖에 묻지 못한 겁니다. Q. 제때 수사가 되지 못했다고요? A. 우선, 2016년 검찰의 1차 수사 때 PHMG 성분, 옥시 계열 제품만 재판에 넘겼고, CMIT 성분, SK케미칼과 애경 제품은 포함하지 않았어요. 질병관리본부와 환경부 조사에서 CMIT의 독성, 즉 폐손상이 확인되지 않았단 이유였어요. 당시 CMIT 제품을 사용한 피해자들이 막 생겨나고 확인되던 과정인데 그걸 뺀 게 이상했죠. 반쪽짜리 수사를 했던 검찰은 사회적참사조사위원회가 CMIT를 주요 조사 대상으로 삼자 2018년 말 2차 수사에 나섰습니다. Q. 1심 재판에선 무죄가 나왔죠? A. 검찰의 1심 재판 대응이 소홀했다는 비판도 나옵니다. 형사재판은 검찰이 유죄를 끌어내야 하는 건데요, 1심에서는 사건 내용을 잘 모르는 공판검사만 투입해 허술하다는 지적이 많이 나왔어요. 여론의 비판이 쏟아지자 2심에서는 수사검사를 투입해 좀 더 적극적으로 임한 것으로 보입니다. Q. 책임 규명이 왜 이리 오래 걸린 걸까요? A. 환경부와 질본은 2011~2013년 피해를 입증하고 확인하는 동물 실험 과정에서 CMIT 성분을 누락하는 등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CMIT 독성을 제때 확인했다면 2016년 SK 등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었을 겁니다. 1심 판결도 CMIT의 독성이 제대로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죄로 판단했던 거죠. 1심 재판 중에도 동물실험 결과들을 추가로 제출했지만, 재판부가 황당하게도 독성이 나올 때까지 조작한 연구결과라는 식의 기업들 주장을 받아들였어요. CMIT 성분 제품을 써서 죽고 다친 사람이 나온 거라 동물실험 결과는 사실 보조자료에 불과했는데요. 어찌 됐든 1심 패소의 빌미를 환경부와 질본이 준 겁니다. 초기 동물실험 설계를 제대로 하지 않아 CMIT를 놓치고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환경부가 초기 피해 신고 접수에 서두르지 않았던 것도 문제입니다. 제대로 신고를 받기 시작한 건 2013년인데요, CMIT 피해 사례가 뒤늦게 확인되면서 피해 판정이나 관련 판결도 늦어졌습니다. 가습기살균제로 사용으로 인한 질환이 다양한데 피해 인정 범위가 지금처럼 넓어진 것도 불과 3,4년 밖에 안됩니다. Q. 기업들의 책임은? A. 기업들의 배보상도 결국 제대로 안 됐어요. 옥시 측에서는 SK의 책임을 키워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원료공급업자로서 SK의 책임을 늘려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옥시의 책임을 줄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 조정안에 대해서도 상당히 많은 피해자들이 불만이 있는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힌 옥시의 몫을 줄여주라는 건 말이 안 돼요. SK의 책임은 플러스 알파로, 전체 규모를 늘려야 합니다. “끝나지 않은 참사... 기업과 국가의 책임 물어야”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은 전 국민을 상대로 한 허위광고로 2천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기업들의 책임을 충분히 묻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또 참사를 예방하는 데 실패하고, 부실한 조사와 수사로 재판을 지연시킨 국가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가습기살균제가 세상에 나온 지 30년, 피해가 공론화된 지 13년이 지났지만, 참사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입니다.
“경기도 포천의 한 농원. 숙소로 쓰는 비닐하우스 농막에서 지난 20일 캄보디아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4년 전 취업비자를 받고 입국해 농원에서 일해오던 30살 A 씨였습니다. 체류기간이 끝나 다음 달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귀국 비행기 표까지 끊어 놓고 갑자기 숨진 건데, 코로나19로 장례식을 열 수 없어 유골만 가족 품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이주단체는 한파로 인한 동사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 <2020년 12월 23일 8뉴스> ▶ 관련 기사 : 한파 속 비닐하우스서 자던 이주노동자 사망 ▶ 관련 기사 : ‘비닐하우스 숙소’ 국가가 묵인..열악한 환경 외면 3년 전 크리스마스 연휴를 앞두고 취재했던 SBS 8뉴스 기사 내용입니다. 이상고온 현상이 나타난 올겨울과 달리 유독 추웠던 그해 겨울, 이주여성 노동자 속헹 씨는 난방이 멈춘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습니다. 이주단체는 동사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경찰은 부검 결과 사인을 ‘간경화로 인한 혈관 파열’로 발표했고, 노동부는 개인질병에 의한 사망이라며 중대재해 조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근로복지공단은 산재 승인을 결정하며 속헹 씨의 죽음을 ‘사회적 죽음’으로 인정했습니다. 속헹 씨 사건을 널리 알렸던 포천이주노동자센터 대표 김달성 목사가 사망 3주기를 앞두고 이주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 〈얼어붙은 속헹〉 (밥북)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그에게 3년 동안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남은 과제는 무엇인지 물어봤습니다. 김달성 목사 속헹 씨 사망 3년... “비닐하우스는 집이 아니다” Q. 3년 전 속헹 씨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진 계기는 무엇이었요? A. 캄보디아인 여성 노동자 속헹 씨가 안타까운 사망에 이르게 된 때는 2020년 12월 20일입니다. 그때 포천 지역에 한파가 연일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사망 다음날 소식을 듣고 동료 노동자들을 접촉해 생생한 증언을 듣게 됐는데, 사망 이틀 전부터 불법 건축물 기숙사에 난방이 가동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난방 스위치를 올려도 계속 떨어지자 동료들은 추위를 피해 친구들 집에 갔지만 속헹 씨는 계속 숙소에 머무르다 안타깝게 사망했습니다. 이런 내용을 23일 제 SNS상에 올리면서 언론 보도가 이어졌고, 우리 포천이주노동자센터를 비롯해 60여 개 NGO 단체들이 이주노동자 기숙사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항의에 나섰습니다. Q. 사망 이유는 밝혀졌나요? A. 국과수 부검결과 1차 소견은 간질환 합병증에 의한 사망이라고 나왔습니다. 대책위에서는 동료 노동자들의 증언을 신뢰하면서 불법 건축물 기숙사의 열악한 주거 환경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큰 사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대책위 차원에서 산재 신청을 해 사망 1년 반 뒤에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 승인을 받았습니다. 승인 사유를 요약하면 속헹 씨의 죽음과 그의 노동 환경, 특히 열악한 주거 환경과 연관성이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Q. 이후 정부는 어떤 대책을 내놨나요? A. 대책위가 강력 대응에 나서고 언론 보도가 이어지자, 고용노동부는 사망 2주 만인 다음 해 1월 6일 이주노동자 기숙사 개정안을 내놨습니다. 앞으로 불법 건축물을 기숙사로 제공하는 사업장에는 외국인 노동자 고용을 허가하지 않겠다며, 불법 건축물 기숙사에 기거하는 이주 노동자가 기숙사 문제로 사업장 변경을 신청하면 노동부가 고용주의 사인 없이도 직권으로 변경해 주겠다는 내용입니다. 이에 따라 주거 환경 개선을 하는 사업장들이 생겼습니다. 불법 건축물 기숙사를 폐쇄하고 근처 원룸 등을 얻어 숙소로 제공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지자체들은 지자체 예산을 확보해 외국인 노동자 기숙사를 건축한 곳도 있습니다. 경기도는 내년 포천 등 지자체 5곳에 외국인 노동자 30~50명 규모 기숙사를 지을 계획입니다. 올해 정부는 전국 지자체 16군데를 선정해 공공형 계절근로자제도를 시행하고 있는데요, 농협이 지자체 지원을 받아 외국인 노동자의 고용주 역할을 하면서 기숙사를 반드시 합법적인 건물로 확보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주거환경 개선이 이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부실한 부분도 많습니다. 2022년 3월 파주시 한 식품공장 컨테이너 기숙사 화재로 인도인 이주노동자 사망 여전히 판치는 비닐하우스 움막... “관리감독 부족” Q. 여전히 불법 가건물 숙소가 판치고 있다던데요? A. 포천만 보더라도 사업주들이 편법과 불법으로 고용 알선을 받아 여전히 불법 건축물 기숙사에 외국인 노동자를 기거시키는 사례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농장주가 노동부에 외국인 노동자 고용 신청을 할 때 주택을 제공한다고 표시하고는, 허가를 받은 뒤에는 비닐하우스 움막에 지내도록 하는 사례가 부지기수입니다. 최근에는 숙소 미제공이라고 허가를 받아 놓곤 불법 건축물에 지내게 하는 꼼수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고용허가제에서는 사업주가 이주 노동자에게 기숙사를 제공할 의무가 없어요. 이걸 악용해서 숙소 미제공이라고 허가를 받은 뒤, 외국인 노동자가 오면 “숙소 정했냐”고 묻는 거죠. 한국말, 한국법을 잘 모르는 노동자가 당황하고 있으면, “여기 움막에서 그냥 살자” 이렇게 하는 사례가 늘었습니다. 불법이 난무하고 있지만 사후 단속이나 관리감독 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Q. 담당 기관의 의지 부족인가요? A. 컨테이너 기숙사에 지내던 포천의 공장 노동자가 얼어 죽겠다며 노동부 고용지원센터에 가서 사업장 변경 신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담당자가 노동자에게 사장님하고 잘 협의하라며 접수를 받아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계속 신청하니까 그 컨테이너 숙소가 불법인지 아닌지 서류를 떼오라고 했어요. 이런 신청이 들어오면 숙소가 불법인지 아닌지 심사하는 건 정부 기관에서 해야 될 일이죠. 그런데 한국말도 한국법도 한국 지리도 잘 모르는 노동자에게 가서 불법인지 아닌지 서류를 떼어와라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의지가 없는 겁니다. Q.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A. 정부가 만들어진 개정안을 강력하게 집행하고, 새 기숙사를 마련하려는 사업주들에게 재정적 정책적 지원을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고용허가제에 사업주가 이주 노동자에게 기숙사를 제공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을 넣을 필요도 있습니다. 과거 외국인 노동자를 들여오기 위해 있던 산업연수생 제도에는 의무조항이 있었는데, 2004년 고용허가제로 바꾸면서 그 의무조항을 빼 버렸어요. 많은 사업주들이 이 허점을 이용해 숙소 미제공이라고 신고하는 방식으로 불법 가건물 숙소를 계속 활용하고 있습니다. Q. 외국 노동자를 위한 주거환경 개선이 필요한 이유는? A. 우선 인간의 보편적인 주거 기본권을 최소한 보장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고요. 사업주를 위해서라도 이주 노동자에게 안전하고 쾌적한 주거 환경을 제공할 필요가 있습니다. 3D 업종에서 장시간 고강도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편하게 휴식하고 잘 수 있는 안전한 숙소를 제공해야 노동 생산성도 더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여성이주 노동자들의 경우 더욱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고 있습니다. 불법 건축물 기숙사에 잠금장치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성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이 더 높아요. 농장 기숙사 태반은 화장실이 바깥에 있는데 해가 지면 캄캄한 농장에 멀리 떨어진 화장실을 다녀야 하니 방범에 얼마나 취약하겠어요? 이주여성 노동자들에게 성범죄 피해 여부를 조사하면 보통 10%에서 30% 가까이 경험했다고 나와요.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열악한 주거 환경입니다. 산재 신청하자 협박... “고용허가제 독소조항 없애야” 경기북부 채소농장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 (사진 왼쪽) 비닐하우스에서 9년간 쪼그려 앉아 일하다 무릎 연골이 파열된 이주여성노동자 (사진 오른쪽) Q. 책에 다룬 이주여성 노동자 사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A. 채소 농장에서 고용허가를 받아 9년 일한 캄보디아 여성 노동자 스레위 나위(가명) 씨 이야기입니다. 채소농장에서 하루 10시간씩 매일 쪼그려 앉아 작업을 하다 보니 무릎 연골이 파열됐어요. 산재 신청을 하자고 설득해 신청하자마자 근로복지공단에서 보험비 체납금 등 800만 원을 내라고 고용주에게 고지했어요. 그러자 이 농장주가 펄펄 뛰었습니다. 산재 신청한 것 자체를 문제 삼으면서 폭언을 하고 협박했습니다. 스레위 나위(가명) 씨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겁을 먹고 출국을 하게 됐는데, 농장주가 200만 원을 건네며 백지에 사인하라고 했어요. 영수증인가 보다 하고 사인을 했는데, 나중에 농장주가 산재 신청을 취소한다는 허위 서류를 만들어 근로복지공단에 냈습니다. 결국 산재 승인까지 나서 보상도 수술도 받을 수 있게 됐지만, 스레위 나위(가명) 씨는 두렵다며 입국을 꺼리고 있습니다. Q.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거죠? A. 고용허가제에는 독소 조항이 있습니다. 고용 연장이나 재입국취업을 위한 권한을 고용주가 다 가지고 있어요. 사업장을 바꾸고 싶으면 고용주 사인이 필요합니다. 사업주와 이주 노동자 사이를 철저한 주종 관계로 만들기 때문에 이주 노동자가 노동조건과 환경이 열악해도 문제제기를 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사업주에게 밉보이면 당하는 불이익이 너무 크기 때문이죠. 산재 피해 노동자에게 가장 기본적인 권리라고 할 수 있는 산재 보상조차 받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을 수 있는 배경에는 사업주에게 절대군주 같은 권한을 주는 고용허가제가 있습니다. 2020년 1월 양주시 한 가죽공장 보일러 폭발사고로 대파된 건물 Q. 동료가 사망한 사고로 PTSD가 온 이주 노동자에게 사업장 변경을 거부하기도 했네요? A. 2020년 1월 양주시 가죽공장에서 벌어진 보일러 폭발사고로 2명이 죽고 10명이 크게 다쳤어요. 생존한 노동자 3명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극심해서 사업장 변경 신청을 했는데 사측에서 역시 폭언과 협박을 했습니다. 그래서 노동부에 찾아갔더니 사장 사인을 받아야 처리해 준다는 말만 했습니다. 이주 단체들의 지원으로 몇 달 만에 간신히 사업장 변경을 했는데요, 우리 같은 단체로부터 지원을 받는 노동자는 만에 하나입니다. 나머지는 전부 계속 강제 노동을 하다 다치거나 죽기도 하는 거죠. 우리도 비준한 ILO의 강제노동금지 핵심협약에 맞춰 강제노동을 유발하는 고용허가제를 개정해야 합니다. “제도 개선 없이 도입 규모만 늘려... 사회적 재앙 우려” Q. 정부는 고용허가제 인력을 대폭 늘린다는데요? A. 정부는 내년에 E-9(고용허가제) 비자로 16만 5천 명의 이주 노동자를 데려올 계획입니다. 급격한 인구 감소로 인한 인력난을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외국인 노동자를 마구잡이로 데려오고 있는데 신중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프랑스 같은 경우 우리보다 훨씬 더 포용 정책을 펼치는 데도 불구하고 이주민 폭동이 일어나고 있어요. 정부는 고용허가제를 오히려 퇴행시키고 개악하고 있습니다. 지난 7월 노동부가 내놓은 사업장 변경제도 개정안을 보면, 이주 노동자가 사업장 변경을 할 때 변경 지역을 제한하고, 사업장 변경 사유와 이력을 노동부가 수집해서 구인하는 사업주들에게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노동부는 예시로 태업 등의 사유를 들었는데, 이주 노동자들의 권리 찾기 활동을 원천 봉쇄하겠다는 방침으로 보입니다. 사업주들로 하여금 이주 노동자들의 블랙리스트를 만들게 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개악을 하면서 이주 노동자를 대거 유입하면 장기적으로 우리 사회에 큰 불행과 재앙을 가져올 수 있어요. 외국인 노동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건, 단지 인력이나 노동력이 오는 게 아니라, 사람이 들어오는 겁니다. 그들을 사람으로 보고 정책과 제도를 만들어 시행해야 합니다.
“하루 더 일했으니 퇴직금 못 드립니다” 경남 산청의 딸기농장에서 3년간 일한 캄보디아인 춘킴스량 씨가 농장주에게 떼인 퇴직금을 청구하자 보험사가 내놓은 답변입니다. SGI서울보증은 이주노동자들의 임금 체불 피해를 막기 위한 보험을 운영하고 있는데, 근로계약 기간보다 하루 더 일해 보험기간을 벗어났다는 이유로 1원도 지급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고용 허가를 받고 들어와 3년간 성실하게 일한 춘킴스량 씨 입장에서는 하루만 더 일해 달라는 농장주의 요청을 들어줬다가 퇴직금을 전부 날리게 된 셈입니다. 지난 4월 SBS가 취재에 나서자 SGI서울보증은 “하루나 이틀 차이로 보상을 못 받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며 제도 정비에 나섰습니다. (▶관련 기사) 의정부 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에서 인터뷰 중인 춘킴스량 씨 우리말이나 법 체계에 익숙하지 않은 이주노동자가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은 ‘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의 도움 덕분이었습니다. 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는 다국어 상담원이 상주하며 외국인노동자의 애로사항을 듣고 문제 해결을 돕는 기관입니다. 한국어나 한국 법을 교육하고 공동체 행사를 지원하는 등 한국 생활 적응을 돕는 역할도 담당합니다. 지원센터가 춘킴스량 씨의 호소를 듣고 법률 상담과 함께 보험사에 공문을 보내는 등 자기 일처럼 나서주지 않았다면 계약기간을 꽉 채운 성실한 이주노동자들이 퇴직금을 떼여도 보상받지 못하는 일들이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20년 버팀목' 됐던 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 전부 문 닫는다 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는 이주노동자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찾아가 도움을 호소할 수 있는 창구 역할을 20년째 수행해 왔습니다. 고용노동부가 민간단체에 위탁해 전국 9개의 거점센터와 35개 소지역센터를 운영해 왔는데, 내년에는 전부 문을 닫습니다. 한해 70억 원가량 들어가는 예산을 정부가 내년부터 전액 삭감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내년부터 일자리를 잃게 생긴 직원들은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지난달 22일에는 이주노동단체들과 함께 노동부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실에 항의서한을 전달했습니다. 기자회견에 나온 김재업 창원 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장은 “노동부가 어떠한 사전 논의도 없이 내년 예산을 전액 삭감해 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 폐지를 일방적으로 통보했다”며 “외국인노동자의 국내 유입은 획기적으로 늘었는데 외국인노동자들의 교류 공간이자 고충을 함께 나눌 소통 공간을 없애는 것은 시대에 역행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지난달 23일 열린 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 폐지 철회 촉구 고용노동부 규탄 기자회견 졸속 결정이란 비판이 이어지자 고용노동부는 민간단체에 위탁했던 사업을 노동부와 산업인력공단이 직접 수행하도록 지원 방식을 바꾼 것일 뿐, 관련 기능과 예산이 아예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습니다. 교육 기능은 산업인력공단으로 일원화하고, 상담 기능은 노동부 지방관서로 이관해 필요한 조치까지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개선’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동부 설명이 충분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20년 노하우의 기존 전문 인력들이 일시에 사라지는 건데, 그들의 빈자리를 메꿀 만큼 노동부 지방관서에 충분한 인력 보충이 바로 이뤄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주노동단체들은 노동부 지방관서에 업무 과부하가 걸릴 것이라며, 노동부가 졸속으로 예산 삭감 결정을 내려놓곤 핑계를 대고 있다고 말합니다. 상담과 교육 기능을 쪼개 이전하는 것만으로는 지원센터라는 공간 자체를 대신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지원센터는 이주노동자들이 편히 방문해 서로 교류하며 한국 생활 적응을 돕는 일종의 커뮤니티로 존재하고 있는데, 심리적 문턱이 높은 노동관서에 상담팀 명패만 건다고 그러한 역할을 하긴 어려워 보입니다. “정책적으로 상당한 의미” 평가해 놓고 폐지 결정 정부의 예산 전액 삭감 결정은 기재부 스스로 지원센터의 역할에 대해 높게 평가했던 것과 모순됩니다. 지난달 기획재정부 보조사업평가단이 제출한 ‘국고보조사업 연장평가 보고서’에는 기존 국고보조금 사업들에 대한 평가가 담겼는데, 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 지원 사업이 받은 점수는 79.1점입니다. 비록 통과 기준인 85점에는 못 미치나, 노동부 국고보조사업 중에서는 가장 높은 점수입니다. 보고서는 “향후 이민자와 이주근로자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돼 지원센터 사업이 정책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용자 만족도가 높고 이용자 수도 2020년 42만 9천 명에서 2022년 52만 9천 명으로 꾸준히 증가했다며 “성과지표도 우수하다”고 봤습니다. 또 “타지의 낯선 환경에서 생활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의 인권 보호를 지원하는 기능을 수행하므로 사회적 가치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바가 인정된다”고 했습니다. 이런 내부 평가에도 ‘사업방식변경’이라는 사실상의 폐지 결정을 내린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원스톱 서비스를 위한 개편’이라는 노동부 설명보다는 역대급 세수 펑크로 국고보조금 지출을 줄이는 과정에서 오랜 논의나 고민 없이 일괄 삭감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것입니다. 올해 갑자기 예산이 삭감된 이유를 묻자 한 노동부 관계자는 “예산 당국과 협의 과정에서 전체적인 긴축 재정으로 인한 부분 등을 함께 고려해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기재부는 8월 말 배포한 2024년 예산안 홍보자료에서 주요 투자 방향 중 하나로 해외인력 유치를 내세우며 “인력난 해소를 위해 외국인력 도입을 원활히 지원하고 외국인 직무훈련 강화로 국내 조기 정착을 지원하겠다”고 적었습니다. 인력난 해소를 위해 외국인력을 대폭 늘리겠다는 건데, 이에 동반되어야 할 지원 체계 강화에는 지나치게 인색한 것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디자인: 김정연
“여학생 때리고 속옷 훌러덩” 지난달 웹툰 작가 주호민 측이 특수교사를 아동학대 혐의로 신고한 이후 이런 제목의 기사들이 쏟아졌습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주 씨 자녀의 돌발행동 사실을 강조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주 씨에게서 돌아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저 또한 제 아이가 이런 일을 겪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두려움부터 느꼈습니다. 하지만 장애인 단체에선 이런 방식의 언론보도와 여론재판은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아동학대 신고자의 신상을 까발려선 안 될뿐더러, 발달장애 아동의 행동특성을 선정적으로 부각해 장애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장애 아동 부모와 특수교사가 외로운 싸움을 벌이기 전에 미리 조정하고 중재해야 할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주호민 작가 논란에 대한 장애인 당사자와 부모, 아동학대 관련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들어봤습니다. 그것은 학대였나 훈육이었나... “승자 없는 싸움” 공개된 경위서에 따르면 해당 특수교사는 “2차 피해를 막고자 단호한 어조로 말한 것이고, 정서적으로 학대할 의도가 없었다”는 입장입니다. 특수교육 전문가인 류재연 교수 또한 녹취록 분석 결과, 부정적인 표현들이 받아쓰기 수업과 훈육 과정에서 쓰인 것이라 학대로 보기 어렵다는 의견입니다. 그러나 검찰 기소 후 유죄율이 90%를 넘는다는 점에서 유죄 판단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아동보호기관의 전문가들은 “언어적인 모욕은 정서적 학대에 해당한다”면서 “실제 목소리의 높낮이나 발화 상황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실제 녹음 속 억양, 말투, 사용한 어휘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봐야 하기 때문에 학대 유무를 함부로 단정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런 사안이 법정에 간 것 자체가 비극이라는 지적도 나옵니다. 한 아동학대 전문 변호사는 “학대 정황이 있지만 강력한 처벌이 필요한 수준의 불법인지는 의문”이라면서 “장애 아동 부모들이 문제제기를 했다가 불이익을 보는 경우가 많고, 이런 소송에서 아무도 이득을 얻는 사람이 없어 고소를 말리는 편”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검찰이 특수교사들의 힘든 상황을 알고 있어 경미한 학대 행위는 시민 기소위원회를 거쳐 기소유예하거나 형사조정으로 합의하도록 하는 경우가 많다며 “녹취 파일이 있어서인지 중재 노력 없이 이례적으로 빨리 기소된 케이스”라고 했습니다. 이 변호사는 주 씨 아들의 피해에 대해 아무도 주목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학대 피해를 신고한 발달장애 아동을 성범죄자인 것처럼 전제하고 신상을 노출하는 2차 가해가 공공연하게 이뤄지는 것은 심각한 문제란 겁니다. 제 역할 못한 갈등 중재 시스템... “골든타임 놓쳤다” 특수교육 현장에서는 장애 아동의 돌발행동이 문제 되거나, 부모와 특수교사 간에 감정의 골이 생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갈등이 소송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육(지원)청 특수교육지원센터에 설치된 ‘장애학생 인권지원단’이 피해를 예방하고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권지원단은 장애아동 관련 내외부 전문가들이 모여 특수교사 혼자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를 돕고 대안을 제시합니다. 뇌병변 장애 당사자이자 서울 지역 장애학생 인권지원단 외부전문위원인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총장은 주호민 작가가 소송에 나서기 전 이런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장애 아동이 부적절한 행동을 했을 때부터 교육청에 즉각 보고하고 인권지원단과 함께 논의했어야 하는데, 양측의 입장문 등을 종합하면 교육청이 조기에 개입한 정황이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김형수 사무총장은 “녹음기를 넣거나 교사가 장애 아동에게 욕을 하는 이런 일들이 드물지 않아 특이한 사건도 아니다”라며 “인권지원단이 빨리 나섰다면 사법적 판단까지 갈 문제는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건에서는 상호 소통을 유도해 부적절한 언사나 감정적인 대응을 한 교사에게 인권 교육을 하거나 녹음 등 과도하게 대응한 장애 학생 부모가 교사에게 사과하도록 중재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습니다. 교육청이 직접 개입해 예산을 지원하며 성교육 등을 실시할 수 있도록 지원하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며, 특수교사 한 명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학교와 교육청이 문제 해결과정에서 제대로 소통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주호민 작가는 2차 입장문에서 “교장실에 찾아가 녹음을 들어달라고 했지만 교장선생님이 거절했다“며 “교사의 교체는 신고를 통해야만 가능하다고 들었고 사법처리 외 다른 방법을 안내받지 못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김 총장은 이에 대해 “녹음 파일을 듣는 순간 교장에게도 아동학대 신고 의무가 발생한다고 판단해 듣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며 “학교의 장애 인권의식과 교육청의 관리 감독 문제를 면밀히 확인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용인교육지원청에 인권지원단 개입 여부 및 시점 등을 물었지만 개인정보 문제라는 이유로 답변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김 사무총장은 특수교사의 짐을 덜어주는 것으로 해결해야 할 일을 장애 아동과 부모에 대한 공격으로 해소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일반학교에서 홀로 고립된 특수교사들의 과로와 감정노동을 줄이려면, 교사 인력을 확충하고 휴식을 보장하는 것이 방법이란 것입니다. 장애 부모와 학교 관계자들에 대한 교육과 교육청의 적극적인 개입, 악성 민원에 대한 무고죄 대응 등도 대안으로 제시했습니다. 김 사무총장은 “이번 사건이 크게 이슈화되기 전에 해결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 있었는데 왜 놓쳤을까, 왜 두 분이 외롭게 싸움을 해야 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학교와 교육청, 지역사회가 함께 했더라면 특수교사나 장애 아동 모두 상처받지 않고 통합교육을 이어나갈 수 있었을 것이란 후회입니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 24조 “당사국은 장애인의 교육을 받을 권리를 인정한다. 당사국은 이러한 권리를 균등한 기회에 기초하여 차별 없이 실현하기 위하여, 모든 수준에서의 통합적인 교육제도와 평생교육을 보장한다.” 한국정부에 대한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의 2, 3차 최종견해 (2022년 9월) "특수학교의 수가 꾸준히 증가하여 여전히 분리된 특수교육을 받는 자폐성, 지적, 심리사회적 또는 중복 장애를 포함하는 장애 아동의 수가 증가하는 점을 우려한다" 장애인에게 책임을 묻는 혐오의 물결 이번 사건과 관련해 뉴스 포털과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댓글들입니다. 발달장애 아동의 돌발행동에 대한 두려움이 확산되면서 통합교육 대신 분리교육을 요구하는 목소리까지 등장했습니다. 발달장애 아동과 특수교사 간의 갈등이 중재 시스템을 거치치 못한 채 온라인을 통해 생중계되면서 “발달장애인은 무섭다”는 공포만 자극했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지난 7일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등 18개 단체가 모여 혐오를 멈춰달라는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이 자리에 나온 발달장애 당사자 김대범 활동가는 장애 아동이 바지를 내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바지가 이유일 것 같아요. 바지가 꽉 끼었거나, 흘러내렸거나, 더웠거나.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왜 그런지 이야기를 해봤어야 할 것 같아요. 왜 그런 거래요?” 물론 그런 이야기는 언론보도에 나오지 않습니다. 의사소통이 명확하지 않은 초등학교 2학년 발달장애 아동에게 성범죄의 고의가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너무 섣부르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입니다. '결박 의자' 부활?.. 국가의 책임은 어디로 가나 발달장애 자녀가 있는 김수정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부회장은 “장애 학생의 특성이나 어려움을 고려하지 않는 교육 시스템이 특수교사와 부모 간에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면서 “장애인에 대한 지원이 부족한 현실은 다 빼버리고 장애 아동의 돌발행동만 선정적으로 부각하는 언론 보도 때문에 발달장애 아동에 대한 학부모 시선이 급격히 나빠졌다”고 말합니다. “주호민 작가의 자녀가 학교를 떠난 것도 비장애 학생 부모들의 반발로 특수학급 증설이 좌초됐기 때문”이라면서 “특수학교나 특수학급을 잘 만들어 주지도 않으면서 떠나라는 요구만 하고 있다”고 토로했습니다. 김수정 부회장은 우리 사회가 특수교육 현장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설계하기는커녕 발달장애 아동의 권리를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우려합니다. 실제로 교육부는 지난 17일 특수교육 대상자에게 자신이나 타인에게 위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경우 보호자의 동의를 받아 보호장구를 착용할 수 있도록 하는 대책을 발표했습니다. 자해를 하는 학생들에게 헬멧이나 장갑 등을 활용할 것으로 보이는데, 과거 장애 학생들을 편하게 관리하기 위해 묶어두던 ‘결박 의자’가 부활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옵니다. 이에 대해 장애인 단체들은 “아동의 행동을 제지하는 행위 자체가 아동학대인 점에서 경악스럽다”는 반응입니다. ‘누칼협’, ‘악깡버’로 대표되는 각자도생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비장애 학생들에게 위협이 되니 장애 학생을 분리하자거나, 장애 아동은 그 부모가 알아서 책임지라는 식의 접근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장애 아동이나 그 부모에게 책임을 묻기에 앞서, 우리 사회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전세사기 대란의 출발점은 2017년 정부가 내놨던 임대사업자 활성화 정책입니다. 앞서 SBS 전세사기 특별취재팀은 주택 100채 이상 악성 임대인 49명의 주택 매입 시기를 전수 분석한 결과, 이들의 연간 주택 매입량이 2018년 2배 이상 뛰어올라 2020년까지 급증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빌라왕-국] 6편에서 설명한 것처럼, 임대사업자에게 각종 세제 혜택을 주면서 통제 방안은 제대로 만들지 않은 게 문제였습니다. 이 때문에 피해자들은 이른바 ‘빌라왕’들이 임대 사업자 자격을 유지하며 범행을 이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100억 이상’ 보증사고 19명, 전세금 5,800억 떼먹었다 SBS 전세사기 특별취재팀은 지난해 6월 기준 주택도시보증공사 HUG의 2건 이상 전세 보증사고 임대인 669명 명단을 입수해 그 실태를 보도한 바 있습니다. 최근 김승남 의원실을 통해 지난해 11월 기준 보증사고 현황을 추가로 입수했는데, 그 결과는 더욱 충격적입니다. 2건 이상 보증사고를 낸 임대인 수가 754명으로 늘었고, 이들의 보증사고 총액도 1조1898억 원으로 크게 증가했습니다. 지난해 11월 기준 가장 많은 사고를 낸 악성 임대인은 ‘발리의 신’과 함께 ‘2400조직’에 소속된 40대 박 모 씨입니다. 보증사고 건수 293건, 사고 금액은 646억 원입니다. 박 씨를 포함해 모두 19명의 임대인이 100억 원 넘는 보증사고를 냈는데 이들의 사고 총액은 5,879억 원에 달합니다. 보증사고 금액 대부분은 허그가 먼저 변제해준 뒤 구상권을 청구하는데, ‘100억 이상’ 사고 임대인의 경우 겨우 8.2%만 돌려받았습니다. 이처럼 전세사기 피해의 절반가량은 100채 이상 주택을 사들인 ‘빌라왕’들이 벌인 짓이었습니다. 이들이 임대사업자 자격으로 각종 혜택을 받으며 범행을 이어 나가는 것을 왜 막지 못했냐는 것이 피해자들의 지적입니다. [A 씨 / 전세사기 피해자] 이미 피해자분들이 계셔서 지자체와 주택도시보증공사 측에 빌라왕의 임대 사업자 박탈 등을 요청했을 때 불가하다는 내용을 들었고. 피해자가 지금까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걸 지켜보기만 하니까 정말 분통이…. 전세금 안 줘도 자격 말소 3건뿐…법 규정 ‘유명무실’ 세제 혜택 등을 받지 못하게 악성 임대 사업자의 자격을 박탈하는 법 규정은 이미 있습니다. 2020년 말 이후 임대 사업자가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는 등 피해가 발생하면 지자체장이 자격을 박탈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민철 의원실을 통해 국토부에 확인한 결과,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아 자격이 박탈된 임대 사업자는 지금까지 단 3명뿐이었습니다. 2021년 대구와 경기 양주시, 지난해 경북 경산시에서 보증금 반환 등 판결로 임대 사업자 등록이 말소됐는데, 이들은 주택 1~3채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빌라왕으로 지목된 악성 임대인 중에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아 임대 사업자 자격이 박탈된 사람은 없습니다. 시행령에 정한 말소 조건이 지나치게 까다로운 게 문제입니다. 보증금을 돌려주라는 법원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악성 임대인이 계속 상소할 경우 몇 년이 걸릴지 가늠하기 어려운 대법원 판결까지 받아내야 하니 전세사기 피해가 커지는 것을 조기에 막을 수 없습니다. 판결이 나온다고 임대사업자 말소로 이어진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정부와 법원, 지자체 사이 전달 체계가 없어 세입자가 판결문을 제출하면 그제서야 지자체가 검토를 시작하는 식이기 때문입니다. 말소 담당자인 지자체 건축과 공무원 입장에서는 누가 어디에서 어떤 판결을 받았는지 알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악성 임대인이 대규모 전세사기 피해를 일으킬 경우 누군가 나서 중단시켜야 할 텐데, 그 책임을 국가가 아닌 피해자에게 떠넘기고 있는 겁니다. 법원 판결이 아닌 임대차 분쟁조정위원회를 통해 악성 임대사업자의 등록이 말소된 경우는 아예 없었습니다. 조정안을 수락한 뒤에도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을 경우 말소가 가능하지만, 애초 임대인이 조정을 거부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김민철 의원실 확인 결과, 지난해 분쟁조정위에 ‘빌라왕’ 김 모 씨와 ‘빌라의 신’ 권 모 씨에 대한 조정 신청이 접수됐지만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전세사기 예방한다며…임대사업자 재활성화 추진 지난 2일 정부는 전세사기 종합대책을 발표했습니다. SBS 전세사기 특별취재팀이 지적했던 전세금 반환보증 개선, 정보제공 강화, 공인중개사 책임 강화 등이 대책에 포함돼 피해 예방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정부 대책에 악성 임대사업자의 자격 말소 등 직접적인 통제 방안이 제대로 담기지 않은 것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사기죄로 금고 이상 실형이 확정된 전세사기범의 임대사업자 자격을 말소하는 법안(김학용 의원)이 지난해 12월 발의됐지만, 판결이 확정되기 전 피해를 방지할 수 없다는 문제점은 그대로입니다. 정부가 수십 채 이상 임대사업자는 집중 모니터링해서 문제가 발견되면 선제적으로 자격을 박탈하는 식으로 관리 체계를 만들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정부가 한쪽으로는 전세사기 예방 대책을 내놓으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임대사업자 재활성화를 위해 규제를 대폭 완화하고 있어 정책이 상충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발표한 ‘2023년 경제정책방향’에서 2020년 7.10대책으로 폐지됐던 아파트 임대사업 등록을 재개하고 세제 인센티브를 복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전세사기라는 부작용은 막으면서 건전한 임대사업자를 육성하겠다는 계획인데, 대규모 임대사업자에 대한 관리 체계 없이 세입자의 ‘알 권리’만 강화하는 것으로 충분할지 의문입니다. 정부의 전세사기 예방 대책이 제대로 법으로 만들어지는지, 임대사업자 재활성화 정책이 또 다른 부작용을 초래하지 않을지 계속 지켜봐야겠습니다. ▶ 관련 기사 [단독] 법 따로 행정 따로…'전세 보증사고 명단' 공개 왜 안 되나? ※ 이른바 '빌라왕'은 전세사기 범죄 생태계의 꼬리에 불과합니다. SBS 경제부 전세사기 특별취재팀은 '빌라왕-국'이란 이름으로 이어지는 보도를 통해 정부는 전세사기 대란을 왜 막지 못했는지, 그리고 그 책임은 어디에 있는지 끝까지 규명해 나가겠습니다. *[스프] '전세 사기 배후 추적단'에 자신이나 지인이 당한 전세 사기 피해 사례나 정보를 알려주세요. SBS 전세 사기 취재팀이 함께 추적하겠습니다. (아래 배너 클릭)
“전세사기 방지대책 발표” “빌라왕 방지법 발의” ‘빌라왕’에 대해 쏟아지는 정부 대책과 법안들을 보면 전세사기 문제가 해결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아직 안심하긴 이릅니다. 정부 대책은 근거 법령을 마련하지 못하면 공수표이고, 국회의원들이 내놓는 법안 중 실제 법으로 만들어지는 건 극히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20대와 21대 국회에서 발의한 전세 관련 법 개정안 236건을 전수 분석한 결과 77건이 전세 사기와 연관된 것이었는데, 그중 17건이 임기 만료로 폐기됐고 48건은 상임위 등에 머물러 있습니다. 살펴보니 악성 임대인 명단 공개와 같은 꼭 필요한 법안을 국회에서 발목 잡거나 무관심 속에 방치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전세사기 방지의 타이밍을 놓친 입법 실패의 역사를 정리해 봤습니다. 입법 실패① 원희룡 “빌라왕 명단 공개!”…여당 의원 “효과 있겠냐?” 전세 사기 피해가 연이어 터져 나오자 지난해 9월 1일 정부는 악성 임대인 명단을 공개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악성 임대인 명단 공개는 세입자들의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가장 시급한 대책으로 꼽힙니다. [원희룡 / 국토교통부 장관 (지난해 9월 1일)] 악성 임대인 명단 등 임차인들에 꼭 필요한 정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자가진단 안심전세 어플을 구축해 1월 중 출시하겠습니다. 그러나 내일(2월 1일) 출시 예정인 이 앱에는 악성 임대인 명단이 담기지 못합니다. 근거 법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2021년 5월 보증금 반환 지연을 이유로 임대사업자 등록이 말소된 임대인 명단을 공개하는 법안(소병훈 의원), 2021년 9월 주택도시보증공사가 전세금을 대신 갚아준 임대인 명단을 공개하는 법안(김상훈 의원)이 발의됐는데도 말입니다. 정작 명단 공개를 막아선 건 여당인 국민의힘 소속 의원이었습니다. 원희룡 국토부 장관이 명단을 공개하겠다고 발표한 지 3주 뒤 열린 국토위 법안소위에서 국토부 관료 출신 국민의힘 A 의원이 “실효성이 있겠냐”며 반대한 겁니다. 두 법안은 결국 소위를 통과하지 못했고 이후 추가 논의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정부와 여당 의원의 입법 엇박자에 핵심 대책 마련이 지연된 겁니다. 지난해 7월(김승남 의원), 12월(장철민 의원) 추가 발의된 법안까지 합치면 현재 국회에 계류된 명단 공개 관련 법안은 총 4개입니다.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조속한 입법을 기대합니다. 입법 실패② “집주인 바뀌면 세입자 통보”…5번 발의에도 본회의 못 가 전세 사기 피해자들은 집주인이 빌라왕 내지 바지 사장으로 바뀐 사실을 뒤늦게 알고 분통을 터트린 경우가 많습니다. 집주인이 바뀐 사실을 알아야 피해 여부를 판단하고 대응에 나설 수 있을 텐데, 세입자에게 아무런 정보가 제공되지 않고 있는 겁니다. 대법원은 임차인이 임대인의 주택 양도 사실을 안 때로부터 상당한 기간 내에 이의를 제기하면 계약 관계를 벗어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데, 이를 알려 줄 장치가 법에 빠진 겁니다. 법안 발의가 부족했던 게 아닙니다. 집주인이 바뀐 경우 세입자에게 통지하도록 한 법안은 20대와 21대 국회에서 5번이나 발의됐지만 입법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2016년 9월(김현아 전 의원)과 2017년 7월(제윤경 전 의원) 발의된 법안은 국회 본회의에 오르지 못한 채 20대 국회가 끝나면서 자동으로 폐기됐습니다. 21대 국회에서는 2020년 11월(소병훈 의원), 지난해 11월(김학용 의원), 지난 20일(박상혁 의원) 등 3번 발의됐지만 여태 상임위인 법사위에서 논의조차 되지 못했습니다. 국회가 제때 일을 했다면 전세 사기 피해자들의 답답함을 조금은 덜었을 겁니다. 2016년 9월 김현아 전 의원 발의 법안은 집주인이 주택 매매 계약 시 세입자에게 통보하도록 한 것에서 더 나아가 세입자의 계약 해지 권한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이 법안은 법사위에 상정됐지만 탄핵 국면을 맞아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고 이후 상임위 문턱을 넘지 못한 채 임기 만료로 폐기됐습니다. 바지 사장을 막을 수 있는 핵심 대책이 국회의 무관심 속에 결실을 맺지 못한 겁니다. 입법 실패③ 꼭 필요했지만.. 아깝게 묻힌 입법안들 정부 대책이 과거 법안 재탕인 경우도 많습니다. 국토부가 지난해 11월부터 입법 예고한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은, 전세 계약 전 세입자가 임대인에게 체납세액 등 정보를 요청하면 정당한 사유가 없는 한 응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계약 전 피해 방지를 위해 필요한 법안인데, 알고 보니 2019년 4월(정인화 전 의원) 똑같은 내용의 법안이 발의됐지만 상임위 상정도 안 됐습니다. 전세 사기 방지를 위해 꼭 필요했던 법안들이 제대로 논의도 되지 않고 국회에서 잠자고 있었던 것은 왜일까요? 국회의원들이 문제가 터지고 나서야 우후죽순 법안을 발의하며 본인 이름을 알리기 급급할 뿐, 법안을 심사하고 조정하는 이후 과정에는 제대로 힘을 쏟지 않은 게 아닐까요? 국회의 입법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사이 전세 사기 피해는 눈덩이가 됐습니다. 피해자들은 정부와 국회가 왜 진작 전세 사기 대책을 내놓지 않았는지 그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전세사기 피해자 (지난 10일 정부 간담회)] (빌라왕은) 법을 어겼음에도 임대 사업자로서의 지위로 계속해서 주택을 매매하고 임차 계약을 하는 행위를 지속했어요. 왜 나라에서는 이걸 막지 못하셨죠? 파악이 안 되셨나요? ▶ 관련 기사 [단독] '나쁜 집주인 공개' 누가 막았나 ※ 이른바 '빌라왕'은 전세사기 범죄 생태계의 꼬리에 불과합니다. SBS 경제부 전세사기 특별취재팀은 '빌라왕-국'이란 이름으로 이어지는 보도를 통해 정부는 전세사기 대란을 왜 막지 못했는지, 그리고 그 책임은 어디에 있는지 끝까지 규명해 나가겠습니다. *[스프] '전세 사기 배후 추적단'에 자신이나 지인이 당한 전세 사기 피해 사례나 정보를 알려주세요. SBS 전세 사기 취재팀이 함께 추적하겠습니다. (아래 배너 클릭) 디자인 : 방명환
“빌라왕 사망” “빌라왕 배후 구속” ‘빌라왕’에 대해 쏟아지는 기사들을 보면 이미 전세사기 사태가 해결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앞서 [빌라왕-국] 1편에서 설명드린 것처럼 빌라왕은 전세사기 범죄 생태계의 꼬리에 불과합니다. 빌라왕 몇 명 처벌한다고 문제가 해결되긴 어렵다는 뜻입니다. SBS 전세사기 특별취재팀은 전세사기가 언제, 왜 늘어났는지 알아내기 위해 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과 함께,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은 주택 100채 이상 악성 임대인 49명의 주택 매입 시기를 전수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악성 임대인들이 지난 2017년 정부가 내놨던 임대사업자 정책의 허점을 악용해 집을 빠르게 늘려간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전세사기 대란은 정부의 정책 실패에서 출발한 겁니다.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우려면 실패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SBS 전세사기 특별취재팀은 악성 임대인 추적 데이터와 전문가 분석을 종합해 전세사기 대란을 초래한 원인을 세 가지로 정리해 봤습니다. 정책 실패 ① : 통제 장치 없는 임대사업자 활성화 2017년 8.2 부동산 대책이 다주택자에게 던진 메시지는 집을 팔거나 민간 임대사업자로 등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해 12.13 대책은 ‘집주인과 세입자가 상생하는 임대주택 등록 활성화 방안’이라는 이름으로 임대사업자에게 종합부동산세 합산 배제, 양도소득세 감면 등의 혜택을 제시했습니다. 이미 소형주택 취득세 면제 등 혜택이 있는 상황에서 보유비용까지 확 줄여준 겁니다. 악성 임대인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2015년 358채, 2016년 450채, 2017년 550채 등 매년 수백 채의 주택을 사들이던 악성 임대인 49명은 2018년 1,335채, 2019년 3,309채, 2020년 4,141채, 2021년 2,326채로 매년 수천 채를 더 사들였습니다. 아파트값이 비싸져 빌라 수요가 급증한 부분, 매매자금 대출은 막고 전세자금 대출을 크게 확대한 것도 배경으로 지목됩니다. 실제로 2012년 23조 원 규모에 불과하던 전세자금 대출은 전세가 상승과 전세자금 관련 지원이 확대되면서 2016년 이후 가파르게 증가해 2021년 말 180조 원까지 증가했습니다. [조정흔 /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토지주택위원장] “전세자금 대출이 기름을 더 붓지 않았나 싶어요. 업자들이 아예 조직적으로 붙어서 빌라를 지어도 분양이 안 되거나 전세가 안 나갈 염려가 없으니까. 전세자금 대출이 수요를 탄탄하게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에, 위험이 없는 사업이 돼버린 거죠.” 전체 임대주택이 급증한 것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민간 임대사업자들의 연간 주택 매입량은 2015년 12만 채, 2016년 10만 채, 2017년 16만 채 수준에서 2018년 29만 채 수준으로 뛰어오른 뒤 2019년과 2020년 각각 21만 채, 2021년 10만 채 수준으로 다시 줄었습니다. 활성화 대책으로 2018년 반짝 상승했을 뿐 증가세는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악성 임대인들의 연간 주택 매입량이 2020년 정점을 찍으며 2017년의 7배 수준까지 급격히 치솟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2017년 임대사업자 활성화 정책은 민간임대주택 전체 공급량을 늘리기보다 악성 임대인들의 주택 매입에 더 큰 효과를 낸 것으로 보입니다. 집값 상승기에 악성 임대인에 대한 통제 방안 없이 임대사업자 제도를 급격하게 확대한 게 부작용을 키웠습니다. [김진유 / 한국 주택학회장] “5채 이렇게 임대하는 사업자와 100채, 1,000채를 임대하는 사업자는 전혀 성격이 다르거든요. (그런데) 아무런 규정들이 없었던 거죠. 이를테면 재원이 어떻게 되느냐, 회계 감사 이런 걸 받도록 했어야 했는데 그런 것도 없었죠. 자금조달계획서를 제출하게 하고 불분명하면 세무조사를 해서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거나 이런 방법으로 해결했어야 합니다.” 정책 실패② : 역전세 초래한 HUG 전세 보증…“정책 엇박자”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전세금 반환보증제도에서 공시가의 150%까지 주택가격으로 보증해 준 점도 허점으로 지적됩니다. 쉽게 말해 HUG는 시세 2억 5천만 원, 공시가 2억 원의 빌라의 경우 공시가의 150%인 3억 원까지 매매가로 인정받아 전세 보증을 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를 악용한 전세 사기꾼들은 “전세 보증보험 가입 가능” “2년 치 이자 지원” 등을 내세우며 최대 3억 원까지 전세가를 받은 뒤, 높여 받은 돈을 부동산컨설팅 브로커, 공인중개사, 바지 사장 등에게 리베이트로 뿌렸습니다. 집 명의는 돈 없는 바지 사장에게 넘겨 세입자는 전세금을 돌려받을 수 없게 됐습니다. 허술한 전세 보증 제도가 전세 사기꾼들이 제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큰돈을 벌 수 있도록 해준 겁니다. HUG가 공시가의 150%까지 전세 보증을 해준 건 2015년부터입니다. 그런데 왜 2017년 임대사업자 활성화 대책 이후 유독 문제가 됐을까요? 전문가들은 전세가와 매매가 사이 갭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전세 보증 한도를 그대로 유지한 게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김진유/한국 주택학회장] “세입자들에 대한 전세 보증보험이 좀 더 타이트하게 운영이 됐어야 하는데, 세입자 보호를 명목으로 해서 이걸 너무 열어놨던 게 악용된 측면이 강합니다. 보증 한도를 타이트하게 조정해서 갭을, 쿠션을 만들었어야 하거든요? 이걸 너무 풀어준 건 시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HUG의 전세 보증 정책이 지난 정부가 추진한 공시지가 현실화 정책과 상충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시세 대비 공시지가의 수준을 나타내는 공시지가 현실화율은 2018년 62.6%, 2019년 64.8%, 2020년 65.5%, 2021년 68.4%, 2022년 71.4%로 높아졌습니다. 2022년 주택 시세를 100이라고 치면 공시지가는 71.4인데, 여기에 보증 비율 150%를 곱하면 107.1까지 전세 보증을 받을 수 있는 걸로 나옵니다. 시세가 100인데 전세가를 107.1까지 받을 수 있으니 ‘역전세’가 성립하는 겁니다. HUG는 최근에야 보증 한도를 140%로 줄였지만 늦어도 너무 늦었습니다. [김진유/한국 주택학회장] “가격이 움직이면서 불안정한 상황에서 공시가격 현실화율을 높이니까요. 예전 150%는 공시가격이 시세보다 많이 낮았을 때 기준인데, 이제 시세에 근접하는 공시가격에서 150%를 보증하니까 시세보다 높아진 거잖아요. 그 부분만큼 전세 사기 세력들이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거죠.” 정책 실패③ : 빌라 두고 아파트만 임대사업제 폐지…“풍선 효과” 2020년은 악성 임대인들의 주택 매입이 정점을 찍은 해입니다. 2020년 악성 임대인 49명이 사들인 주택은 무려 4,141채, 1인 평균 84채에 달합니다. 그러나 정부가 내놓은 2020년 7.1 대책은 아파트 임대사업자 제도는 폐지하면서 빌라는 그대로 뒀습니다. 아파트값 상승을 막는 데 정책 목표가 맞춰졌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미 2019년부터 1세대 전세 사기꾼들에 의한 대규모 갭 투기 실태가 드러난 상황에서 아쉬운 판단입니다. 악성 임대인들은 또다시 제도의 허점을 공략했습니다. 매달 200여 채를 사들이던 악성 임대인들이 정책 발표 후 몇 달간 매달 500여 채를 사들였습니다. 7.10대책에서 세입자 보호를 위해 전세 보증보험 가입을 의무화하긴 했지만, 심사 자체가 부실했기 때문에 이들을 제대로 걸러내지 못했습니다. 2020년 하반기 정점을 찍은 악성 임대인들의 주택 매입은 2년 뒤 전세 만기 시점인 2022년 하반기 전세 사기 대란으로 이어졌습니다. [김진유/한국 주택학회장] "풍선 효과죠. 비아파트는 시세가 불투명하고 불분명하기 때문에 속이기가 쉽습니다. 그러니까 이쪽으로 많이 넘어간 거죠. 세입자 보호라든지 이런 대의에만 너무 치중하다 보니까 막을 수 있던 기회를 놓친 겁니다." ▶ 관련 기사 [단독] 허점에 마구잡이 매입…정책이 시장에 기름 부었다 ▶ 관련 기사 [빌라왕국] ① 빌라왕도 족보가 있다?… 전세사기의 모든 것 ※ 이른바 '빌라왕'은 전세사기 범죄 생태계의 꼬리에 불과합니다. SBS 경제부 전세사기 특별취재팀은 '빌라왕-국'이란 이름으로 이어지는 보도를 통해 정부는 전세사기 대란을 왜 막지 못했는지, 그리고 그 책임은 어디에 있는지 끝까지 규명해 나가겠습니다. *[스프] '전세 사기 배후 추적단'에 자신이나 지인이 당한 전세 사기 피해 사례나 정보를 알려주세요. SBS 전세 사기 취재팀이 함께 추적하겠습니다. (아래 배너 클릭) 디자인 : 방명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