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경제, 정치, 선거기획, 탐사보도부 등을 거쳐 디지털 콘텐츠기획팀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삶의 단층 속 새로운 통찰을 발견하는 데서 기쁨을 느낍니다. 좋은 농담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산책과 고양이를 좋아합니다.
외교 안보 뉴스를 정밀타격하듯 풀어드리는 벙커버스터입니다. 이번 편은 삼엄한 경비와 철통 같은 보안으로 정동의 작은 크렘린이라고까지 불리는 주한 러시아 대사관에서 시작합니다. 매우 까다로운 보안 규정을 적용해 지은 이 건물은 CCTV와 도청 감지 장치는 물론, 직원들이 머무를 수 있는 집과 병원, 학교까지 갖추고 있어 사실상 건물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도록 만든 ‘요새’로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이번 벙커버스터는 복잡하고 또 미묘한 2024년의 한반도와 러시아 관계를 집중적으로 다뤄보려 합니다. 마치 빨간불이 켜진 것 같은 한러 관계와 이와 반대로 갈수록 밀착을 가속화하고 있는 북한과 러시아.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신임 러시아 대사의 단독 인터뷰를 중심으로 심층 분석해드리겠습니다. 푸틴 답방 임박했나... 꽃다발 받은 최선희 ‘신냉전’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미국과 러시아를 두 축으로 하는 극동아시아의 블록화가 진행되고 있는 지금, 가장 큰 관심사는 아무래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북한 답방 여부입니다. 2박 3일 간의 러시아 방문에서 북한 최선희 외무상의 미션이 바로 푸틴 대통령의 방북 일정을 매듭짓는 것이란 추측이 무성합니다. 사실 푸틴 대통령의 방북은 이제 무르익을 대로 익었다고 봐야 합니다. 조선중앙TV (지난해 9월 14일) 푸틴 대통령은 초청을 쾌히 수락하면서 러·북 친선의 역사와 전통을 변함없이 이어갈 의지를 다시금 표명했습니다. 이미 두 차례 러시아를 방문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초청에 지난해 9월에도 한 번 수락을 한 데다, 이번엔 외무상이 러시아를 방문하면서까지 초청을 거듭한 상황이라 외교 프로토콜을 따져봐도 거절하긴 영 쉽지 않은 상황이죠. 최선희|북한 외무상(1월 17일) 푸틴 대통령 동지가 편리한 시기에 우리나라를 방문하실 것을 초청하셨습니다. 특히 한반도 관계 단절에 본격적으로 나선 북한으로선, 푸틴의 방북으로 완성되는 러시아와의 연대가 절실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방북의 구체적인 일정엔 5선에 도전하는 푸틴 대통령의 올 3월 러시아 대선이 변수가 될 수 있습니다. 두진호|한국국방연구원 국제전략연구실장 푸틴 대통령 입장에서는 내치에 좀 더 집중을 해야 하는 상황이고 선거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두 달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평양을 방문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24년 만에 푸틴의 북한 방문이 성사되면 우리를 포함한 극동 아시아엔 무시 못 할 상징적 사건이 됩니다. 양국 간 경제, 정치, 안보 등 전역에서의 매우 긴밀한 교류와 협력이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역사적인 북러의 밀착 국면에서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죠, 바로 무기 거래 의혹입니다. 한글 써진 무기 떡하니.. “국제규범 어긴 적 없다” 우크라이나를 공격할 때 쓰였던 미사일, 그 잔해에서 눈길을 끌 무언가가 발견됩니다. 미사일 몸통에 선명하게 새겨진 한글인데요. 김정은이 직접 순시한 공장에서 제작되던 KN 23과 유사한 형태의 무기가 우크라이나서도 발견되고 러시아군과 연계된 텔레그램 채널에선 “북한 동지들이 장거리 다연장로켓을 제공했다”는 설명과 함께 한 병사가 "우리의 친구들이 새로운 탄약을 제공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의혹이 점차 짙어지는 상황에서 미국은 러시아가 북한제 미사일을 사용한 증거를 찾았다며 제재에 나섰습니다. 러시아의 전쟁 수행을 지원한 제3국 인사와 기업도 제재에 포함됐는데, 여기엔 나토 동맹인 튀르키예는 물론, 사상 최초로 한국인 1명도 포함됐죠. 존 커비|미 국가안보회의 전략소통조정관(1월 4일) 북한은 미사일 지원 대가로 러시아로부터 이와 같은 것들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전투기, 지대공 미사일, 장갑차, 탄도 미사일 생산 장비나 물자 및 기타 첨단 기술을 포함한 군사적 지원입니다. 우리 국정원과 국방부도 미국의 주장이 신빙성이 높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당사자인 러시아와 북한은 극구 부인하고 있습니다. 바실리 네벤즈야|주유엔 러시아대사(1월 10일) 미국은 사전에 확인하지도 않고 잘못된 정보를 의도적으로 퍼뜨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최근 크렘린궁이 입장이 미묘하게 바뀌었습니다. 바로 현지시간 9일 드미트리 페스코프 대변인이 러시아가 북 미사일을 사용했단 미국 발표에 대한 러시아 입장을 묻는 질문에 논평 없이 넘어가겠다고 발표한 건데요. 늘 부인만 하던 러시아가 혹시나 에둘러 인정하려는 신호를 보낸 것은 아닐까, 러시아 외무부 내에서도 ‘아시아통’으로 알려진 지노비예프 신임 주한 러시아 대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노비예프|주한 러시아대사 우리가 확인하지도 않은 (무기 거래에 관한) 의혹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미국 쪽에서 주장하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합니다. 저는 그런 주장과 비난이 완전히 근거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노비예프 대사는 SBS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와 북한이 무기를 대가로 모종의 거래를 하고 있다는 의혹에 대해 8번이나 부인했는데요. 지노비예프|주한 러시아대사 제 생각엔 (크렘린 노코멘트 발언의 이유는) 이미 아주 많이 대답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오늘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제가 코멘트하지 않을 지점을 계속 질문하실 것 같은데, 저 역시 거듭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 지칩니다. 하지만 다시, 러시아는 국제 규범을 준수하고 있고 문제제기는 적절한 방식을 통해 취해져야 한다는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군요. 결국 여덟 번이나 반복해 말한 러시아의 입장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현재 나오는 의혹들은 모두 근거가 부실하다, 문제제기를 하려면 공신력 있는 국제기구에서 따져야 한다, 더 이상 입 아프니 같은 말을 반복하긴 어렵다, 라는 겁니다. 실제로 미국 등 8개국이 규탄 성명을 냈을 때, 헝가리 등 친러 국가들은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성명 동참을 거부했었죠. 하지만 최근 최선희 외무상 방러 수행원이 들고 있던 서류철에서 ‘우주 기술’이라는 단어가 포착되면서 양국 간 정찰 위성 등 군사 협력에 대한 의심은 더 커지는 상황입니다. 두진호|한국국방연구원 국제전략연구실장 국제기구에 올라가더라도 개별 국가 간에 기관에서 합의가 이뤄지지 않을 것이고 상당한 진통과 논쟁이 수반될 것이기 때문에 지연시키는 과정 안에서 전략 환경은 변화될 것이거든요. 최근에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압승했는데 이런 전략 환경들이 러시아에 유리하게 작용할수록 국제기구를 통해 어떤 문제 해결이 되는 속도는 더더욱 늦어질 것이고. 불편한 한-러 관계... 14만 원에 철수한 현대차 러시아와 북한의 무기 거래 의혹이 갈수록 짙어지는 상황에서 지금의 한러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4100억 원짜리 공장을 단 14만 원에 파는 거래, 이게 가능할까 싶지만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부품 조달 어려움으로 조업을 중단한 현대차가 단돈 1만 루블에 러시아 업체에 공장을 넘긴 건데요. 2년 내에 되살 수 있는 조건이 달리긴 했지만 우리 기업이 이런 막대한 손실을 감당하게 된 이유는 역시 전쟁의 리스크 때문입니다. 우리 정부도 군사목적 전용 가능성이 높은 품목을 러시아 수출 제한 대상에 추가하는 등 미국의 대러 제재에 동참하자, 러시아는 “한국 경제와 산업에 피해를 줄 것이다”라는 이례적이고 과격한 보복 대응을 예고하기도 했죠. 하지만 속내는 조금 다릅니다. 지노비예프|주한 러시아대사 러시아는 한국 기업들이 러시아 시장에서 떠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국 기업들은 다른 나라보다 러시아에서 환영을 받을 거라 생각합니다. 서방 기업들이 떠남으로 인해 러시아엔 틈새 시장이 많이 열려 있습니다. 결국 전쟁 중에는 북한과, 하지만 그 이후의 상황에선 한국도 중요한 경제적 협력 동반자로서 놓치고 싶지 않은건데 미국 주도의 전방위적인 제재 하에서 전쟁 이후 협력 가능한 상대 국가가 중국 하나만 남는 상황을 러시아로서도 부담스러워하는 것으로 풀이됩니다. 푸틴 “친애하는 대사님”... 비우호국 중 우호국이란? 활짝 웃으며 최선희 외무상을 맞이한 푸틴 대통령, 하지만 그에 앞서 한국에 대해서도 조금 특별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푸틴|러시아 대통령(지난해 12월) 존경하는 대사님, 러시아는 이(파트너 관계 회복)를 위한 준비가 돼 있음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지난해 12월 러시아로 부임한 이도훈 대사가 푸틴 앞에 신임장을 받으러 선 그 순간, 21명의 대사 중 유일하게 쓴 ‘존경하는 대사’라는 표현. 지노비예프 대사도 이런 푸틴 대통령의 생각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지노비예프|주한 러시아대사 우리에게 사실상 비우호적인 국가나 민족들과는 한국이 명백히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쪽에서 부과하지 않은 제재 그리고 직항로 단절이 복원되길 기대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내일이라도 복원하면 좋겠습니다. 다만 본격적인 한러 관계 개선을 위해 러시아가 ‘넘지 않아야 할 선’이라고 분명히 강조하는 것도 있습니다. 지노비예프|주한 러시아대사 가장 큰 걱정은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공급해선 안 된다는 점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양국 관계는 큰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자유주의와 권위주의 국가들 간의 대립으로 블록화가 이뤄지는 구조적 변화 속에서 실리만 추구할 환경이 아니다, 막 취임한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진단한 지금의 국제 정세는 이렇습니다. 전쟁이 해소되지 않는 한 획기적인 관계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고 예측가능하도록 안정적으로 관리해나가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의 선택지라는 얘기인데, 러시아 역시 생각이 다르지 않은 듯 합니다. 결국 한반도의 두 나라와 러시아 사이에 가장 큰 변수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장기화 조짐을 보이는 전쟁이 점차 소강 상태로 접어들지, 아니면 또다른 변수가 불거질진 조금 더 지켜봐야 할 듯합니다.
'꿈의 물질'로 불리는 초전도체가 연일 뜨거운 관심의 중심에 있습니다. 특히 초전도체의 '미지성'이 더 호기심을 자극하는 모양새입니다. 관련 학계 종사자들이 아니면 말 자체를 처음 듣는 분들도 많을 테고, 또 현재는 실시간으로 검증이 이뤄지고 있는 과정이기 때문에 국내 연구진들이 내놓은 물질('LK-99'로 불립니다)의 '전망'에 대해 그 누구도 확실한 대답을 내놓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왜 중요한데? 며칠 동안 도대체 초전도체가 뭐고, 왜 중요하냐고 묻는 분들에게 가장 이해하기 쉬운 비유로 거론되는 예시가 바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영화 '아바타'입니다. 이 영화의 강력한 이미지는 아무래도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섬 같은 산일 텐데요. 영화에서는 이렇게 물질을 떠오르게 할 수 있는 강한 자기장을 지닌 물질이('언옵테늄'으로 불렸습니다) 바로 초전도체였습니다. 결국 서사의 큰 얼개를 이루는 인간과 나비족의 전쟁은 판도라 행성의 초전도체를 차지하기 위해 벌어집니다. 그만큼 귀한 물질이라는 겁니다. 초전도 현상은 특정한 온도에서 전류 저항이 급격하게 낮아지는 것을 이릅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을 나타내는 물질이 초전도체입니다. 즉 '저항'으로 인해 손실되는 전기의 낭비 없이 에너지를 고스란히 전해줄 수 있는 물질입니다. 다만 이 물질이 '꿈의 물질'로 격상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영하 200도 이하의 기온이나 높은 압력 같은 인위적으로 조성되어야 하는 환경적 제약 없이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상온, 상압의 환경에서도 그런 현상을 띠어야 한다는 겁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뭔가 하나에 집중하는 일, 장편 소설을 읽는 일, 그것도 아니라면 잠시라도 휴대전화 알림에서 눈을 떼는 일이 버겁다고 느껴지는 분이 있나요? 몰입할 수 있는 에너지가 분명히 예전만 못하다고 호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주의 산만과 결핍도 과중한 업무만큼이나 괴롭다는 사실, 공감하는 분들 많으시죠? 그러다 보니 ‘나도 성인 ADHD가 아닐까’하는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부쩍 많습니다. 최근 여러 심리 상담 프로그램에서 전문가들이 무기력증과 집중력 저하를 호소하는 유명 연예인이나 탤런트에게 ‘성인 ADHD’를 진단하는 사례가 부쩍 늘면서 이런 의문이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급속도로 번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국내 주요 54개 언론사의 데이터를 모아 통계를 제공하고 있는 빅카인즈에 따르면 ‘성인+ADHD’ 키워드 언급량은 1990년대 전무하다시피 했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두 자릿수로 늘었고 2010년대부터는 평균 100회 이상으로 늘었습니다. 올해는 6월 기준으로 이미 120건 이상 언급됐습니다. 실제로 지난 2월 국민건강보험공단의 건강보험 진료데이터에 따르면 국내 ADHD 환자 수가 4년 새 92% 이상 급증했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남성은 2017년 대비 2021년이 70.4%, 여성은 182.8% 증가한 수치입니다. 연령대별로 10대가 1.39배 증가한 데 비해 20대는 3.84배, 30대는 6.43배 증가했습니다. 40~60대 환자는 약 4배가 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과거에는 어린이를 양육하는 보호자들이 주로 관심을 가졌던 증세인 ‘ADHD’가 어쩌다 성인들에게까지도 주목을 끌게 되었을까요? 그동안 현대인들의 주의력과 집중력엔 정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고 있었던 걸까요? 주의력 빈곤의 시대? 현대인들은 어쩌다 인스타그램에 해시태그 ‘ADHD’를 입력하면 360만 건의 게시물이 검색됩니다. 한국인만이 아니라 전 세계 네티즌들이 이미 수많은 밈을 제작해 유통하고 있습니다. “ADHD 환자들이 집안일을 하는 법”, “ADHD 환자가 너에게 답장을 하지 않는 이유”, “ADHD 환자가 일상을 보내는 법” 등. 대체로 이런 밈에서는 어느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중간에 다른 일을 하게 되거나, 마치 단기적으로 기억을 상실한 것처럼 눈에 띄는 모든 지형지물에 주의를 빼앗기는 식의 모습을 과장하며 웃음을 유발하고 있습니다. ‘자신도 그렇다’며 공감하는 댓글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밈이 대량 유통될 정도로 상당히 많이 알려진 ADHD의 정식 명칭은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ttention Deficit / Hyperactivity Disorder)’입니다. 전문가들이 밝힌 ADHD 진단의 기준은 언뜻 보면 이런 밈에서 묘사하는 증세들과 맥락이 비슷해 보입니다. 과업을 체계화하지 못한다거나, 정상적인 일상 및 업무의 수행이 불가능한 수준에 이를 정도의 주의력 결핍 증상이 나타난 경우. 또 충동성이 높아 ‘인내심’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가령 타인의 말을 조금도 기다리지 못하거나 차례를 기다리지 못하는 경우, 이로 인해 사회생활에 중대한 불편함을 겪는 경우 등의 증상이 적어도 6개월 이상 지속되는 경우 등이 ADHD 진단 기준에 포함돼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전문가들이 진단을 내릴 때 고려하게 되는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7세 이전 유아기 때에도 이와 같은 비슷한 증상이 있었는지 여부입니다. 정신과 전문의이자 전 서울아산병원 정신의학과장 김창윤 원장에 따르면 통상의 성인 ADHD는 소아기 때부터 보이던 증상이 지속된 것으로 판단해 진단합니다. 물론 당시 ADHD라는 전문의의 진단을 받았거나 내원한 기록이 있으면 성인 ADHD로 진단받을 확률이 높아지지만, 병원 기록이 없는 경우에는 더 면밀한 임상 진단이 필요합니다. 자칫 다른 정신과적 질환을 ADHD로 오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게 우울증입니다. 우울증이라는 건 곧 의식에서 쓸 수 있는 에너지가 결여돼 있다는 뜻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무언가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건 각성 상태가 유지되면서 어떤 대상에 관심이나 흥미가 있어야 하는 건데, 우울증 환자들은 주의를 기울일 에너지가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특히 본인이 우울하다는 느낌을 호소하지 않고,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또 기분이 좋아지는 ‘양극성 우울증’ 등 비전형적 우울증의 경우엔 단순히 주의력 결핍 증세 하나로만 ADHD로 판단할 가능성이 있는데 이 경우엔 ADHD 치료를 받아도 쉽게 호전되지 않습니다.” 특히 더 큰 문제는 스스로를 성인 ADHD라고 믿고 우울증 치료를 받지 않을 때 병세가 급격하게 악화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김 원장은 “콘서타 같은 ADHD 치료제는 향정신성 의약품에 속해있는 약제로서, 우울할 때 집중력이 좋아지는 느낌을 줄 수 있으나 부적절하게 들뜨거나 과민해지는 조증을 유발할 수 있다. 양극성 우울증의 경우 계속 콘서타를 복용할 경우엔 조증이 생길 수도 있어 진단 역시 주의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섣부른 자가진단 주의.. 증세 악화 부작용도 스스로 ADHD 여부를 판단할 수 있도록 한 ‘자가진단’ 설문지는 일반인도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제시한 성인용 ADHD 자기 보고 척도(ASRS v 1.1)가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설문 문항들을 보면 사실 누구든 ADHD를 피해 가기 어렵다 싶은 수준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6번까지의 항목 중 음영이 있는 부분에 체크한 항목이 총 4개 이상일 경우 성인 ADHD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7번부터 18번까지는 증상에 대한 추가적인 단서를 알아보기 위해 수행되는 설문이며, 성인 ADHD 가능성을 진단하는 데 주효한 항목은 6번까지입니다. 저의 경우엔 “골치 아픈 일은 피하거나 미루는 경우가 있습니까”, “오래 앉아 있을 때 손을 만지작거리거나 발을 꼼지락거리는 경우가 있습니까”에서 “매우 자주 그렇다” 항목을 체크했는데요. 이 설문에 따르면 저도 100% ADHD입니다. 그렇다 보니 2021년 한 연구(Chanmverlain S 등, Comprehensive Psychiatry)는 이 자기 보고 척도를 사용했을 때 ADHD로 진단되는 경우가 실제 내려진 임상적 진단보다 7~10배 더 많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즉 성격, 당시의 건강 상태, 스트레스를 주는 환경 여부, 또는 정말로 성인 ADHD인 경우까지 스스로 주의력 결핍을 느끼는 요인이 다양하기 때문에 이 자기 보고형 설문을 통해서는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현재 성인 ADHD 임상 진단의 주요 고려 요소엔 소아기의 ADHD 증세가 성인기까지 그대로 지속될 경우의 조건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2015년 미국 듀크대 연구진이 1972년-73년에 태어난 소아 1037명을 38년에 걸쳐 추적 관찰한 장기 연구에 따르면, 성인 ADHD 증세에 부합하는 이들의 90%가 소아기에 증세를 나타낸 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현행 성인 ADHD의 진단 기준과 개념 자체에 대한 재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는 이유입니다. 출처: HHS Public Access 소아 ADHD의 발병 원인과 기제 역시 명확하게 파악된 건 아닙니다. 뇌 내부의 미묘한 발달상 문제로 추측하고 있을 뿐인데, 통상 도파민 등 신경전달 물질의 균형이 깨진 것으로 판단해 이 균형을 맞추는 약제를 치료제로 쓰고 있습니다. 김 원장은 “보통 주의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일정 수준의 도파민 레벨이 유지돼야 한다고 본다. 도파민이 올라가야 의미를 부여하는 현상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 레벨이 너무 높거나 낮거나 두 경우 모두 주의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 도파민이 높아지면 평소에 진부하게 느껴지던 것도 영감이 되는 특별한 것처럼 여겨지게 하는 효과를 주는데 이게 지나치면 조증이나 정신병적 증상으로 연결된다.”고 말했습니다. 즉 ADHD 치료제의 부작용과 오진으로 인한 병세 악화를 막기 위해 임상 경력이 많은 전문의의 병력 청취가 필수적이라는 의견입니다. 성인 ADHD로 여겨지는 일상 속 불편함은 어쩌면 우울증, 과도한 스트레스, 타고난 성격, 몸의 피로, 생활 습관, 과로로 인한 번아웃 등 여러 가지가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집중력을 도둑맞았다면, 도둑은 누구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집중력의 한계와 주의력 결핍을 호소하고 있는 건 분명한 ‘현상’입니다. 현대인들에게 만연한 집중력 한계 증상을 단순히 ‘성인 ADHD’라고 일반화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디서 이 현상을 이해하고 또 해결할 수 있을까요? 시의 적절하게 출간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 요한 하리가 쓴 『도둑맞은 집중력(원제: Stolen Focus, 2023)』가 그 실마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도(道)를 찾아 수행하는 구도자처럼 전 세계 각국에 있는 석학을 만나 자신이 겪는 집중력 위기의 해답을 찾고자 합니다. 하루에 수 십 번씩 트위터와 이메일을 확인하는 동안 수도 없이 집중이 깨졌고, 다시 원래 일로 돌아오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는 걸 발견합니다. 인터넷이 되지 않는 곳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아날로그 생활에 몸을 적응시키는 개인 차원의 노력을 병행해 봤지만 ‘연결 중독’은 더 강력한 금단현상으로 저자를 괴롭게 합니다. 그리고 이내 이른바 ‘디지털 디톡스’에 명백한 한계가 있다는 걸 곧 깨닫습니다. “일주일에 이틀씩 바깥에서 방독면을 쓰는 노력이 환경오염의 해결책이 아니다.” 책 안에 소개된 『나의 빛을 가리지 말라(원제: Stand out of Our Light, 2018)』의 저자 제임스 윌리엄스의 말입니다. 제임스 윌리엄스는 구글 본사에서 10년 동안 전략가로 일하면서 기술 윤리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윤리 자문으로 자신의 이력을 바꿨습니다. 그에 따르면 그간 자신을 비롯한 많은 IT기술 설계자들의 성과 달성 목표(KPI)는 ‘사람들의 주의력을 되도록 더 많이 빼앗는 것’이었고, 그 결과 일상적으로 현대인들의 집중력이 낮아지는 ‘디지털 주의력 경제’가 탄생했다는 겁니다. 그에 따르면 디지털 주의력 경제 구조 하에서는 악의 없이, 전 세계 유수의 엘리트 집단들이 경쟁적으로 주의 분산 시스템을 고도화하고 있고, 이 흐름에 맞서 자신의 삶을 아날로그로 되돌리려는 개인의 노력은 반드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즉 하루에도 수십 번 울리는 알람 소리 속에 갇혀 사는 현대인들에게 ‘스스로 왜 스위치를 끄지 않았느냐’는 비판은 타당하지 않다는 겁니다. 실제로 『도둑맞은 집중력』에서는 알 만한 실리콘밸리의 IT기업들을 세운 엔지니어 출신 창업가들이 그들이 수학한 공과대학에서부터 인간을 어떻게 설득하며 원하는 대로 행동을 하게 만들 수 있는지, 즉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주의 집중력을 이끌 수 있는지에 대한 심리학 수업을 수강하는 과정이 세밀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두 저자와 같이 이 구조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이들은 지금의 디지털 경제 구조를 뒷받침하고 있는 설계자와 사용자 모두가 ‘문제성’을 우선 각성해야 하며, 적극적으로 ‘주의 분산 시스템’에 반기를 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몰입은 인간의 본능적 행복 상태” 주의력과 집중력이 낮아지는 것이 문제인 이유는 일단 이런 현상이 바로 인간의 ‘불행’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하고 있는 일에 너무 푹 빠진 나머지 모든 자아 감각을 잃은 상태, 시간이 사라진 것 같은 상태, 경험 그 자체의 흐름을 탄 상태. 가장 깊은 형태의 집중이라 할 수 있는 ‘몰입’은 바로 인간이 본능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행복’이라고 심리학자이자 피터 드러커 경영대학 ‘삶의 질 연구소’ 소장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몰입 조건의 첫 번째는 바로 ‘한 가지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명확하게 정의된 목표를 선택하고 다른 것은 모두 접어두고 바로 그것만 할 때 비로소 몰입의 순간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이른바 ‘멀티태스킹의 신화’ 속에서 ‘좋아요’, ‘리트윗’ 같이 나를 찾는 알람이 여기저기서 울리는 환경에서는 이런 몰입 상태에 이르기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유례없는 기후변화와 더불어 인류세(인류가 지구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친 시점부터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주의력’은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중요한 자원이라고 저자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여느 때보다도 인간들이 생존을 위해 공동의 목표를 세워 문제 해결을 위한 최상의 능력을 발휘해야 할 때라는 겁니다. 2014년 기획자 아자 래스킨에 의해 끝없이 새로운 콘텐츠를 노출시켜 주는 ‘무한 스크롤’ 기술이 발명되면서 지금껏 사용자들이 새로 페이지에 머무르는 시간에 약 20만 명분의 인생(태어나서부터 사망할 때까지의 전체 인생)이 사용되었다는 내용은 꽤 섬뜩하기도 하죠. 결국 우리의 본질적 행복뿐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도 ‘집중력 저하’ 현상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는 결론입니다. 정신과 전문의 김창윤 원장은 인터뷰 말미에 “어제도 청년 두 명이 스스로 성인 ADHD가 의심된다고 내원했다”며 한국에서도 빈번하게 나타나는 전 방위적 집중력 저하 현상에 대해 “단시간 만에 뇌 구조가 어떤 형태로 바뀌거나 진화했을 것 같진 않다. 다만 우리가 집중할 수 있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는데 불필요한 정보, 그러나 현대인들을 자극하는 정보량이 급격히 많아졌다”고 말했습니다. “복잡한 정보는 많은 에너지를 요합니다. 그다지 의미 있는 자극이 아닌 것에도 예민하다는 건 곧 주의를 기울일 부분에 쓸 에너지를 다른 곳에 소진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 가지 일을 한 번에 수행해야 한다는 스트레스 역시 이런 에너지 소진에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본인의 성격적 특성이 본질에 집중하는 직관형인지, 주변 환경에 예민한 감각형인지를 잘 생각해 보고 필요한 경우 꼭 전문의와 임상 진단을 통해 불편함을 해소하길 바랍니다.” 우리의 시간과 행복, 나아가 생존까지도 좌우할 수 있는 ‘집중력’을 어떻게 하면 되찾아올 수 있을까요? 당신의 생각을 공유해 주세요. 디자인 : 강이경 ▶ 참고문헌 - Terrie E. Moffitt 외, Is adult ADHD a childhood-onset neurodevelopmental disorder? Evidence from a 4-decade longitudinal cohort study, 2015. - 박장호 외, Clinical Use of Continuous Performance Tests to Diagnose Children With ADHD, 2019. - Samuel R. Chamberlain 외, Screening for adult ADHD using brief rating tools: What can we conclude from a positive screen? Some caveats, 2021. - 요한 하리, 『도둑맞은 집중력』, 2023. - 제임스 윌리엄스, 『나의 빛을 가리지 말라』, 2022.
어제(21일)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에서 영아 시신 두 구가 한 가정집 냉장고에서 발견됐습니다. 시신을 유기한 혐의를 받고 있는 건 30대의 생모로 현장에서 긴급체포돼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무슨 일인데? 경기남부경찰청 여성청소년과는 30대 A씨를 영아 살해 및 시신 유기 혐의로 21일 체포했습니다. A씨는 2018년 11월과 2019년 11월 각각 아기를 출산하고 바로 살해한 뒤 자신이 사는 수원 장안구의 한 아파트 세대 내 냉장고에 시신을 유기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아기의 성별은 남녀 1명씩이었습니다. 첫 번째 살해 피해자인 아기는 무려 4년 7개월이나 냉장고 안에 있었던 것으로 경찰은 파악했습니다. 남편 사이에 이미 3명의 자녀를 두고 있던 A씨는 경찰 조사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살해했다"고 범행 동기를 진술했습니다. 남편에겐 아이들을 임신했을 때 낙태를 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만 나이 통일법'이 이번 달 28일부터 시행됩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몇 살이라도 어려진다니, 근래 들어 보기 드문 마음 따뜻해지는 뉴스로 여기실 분들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만 나이 통일은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공약 중 하나인데요. 한국식 나이 계산법이 워낙 여러가지다보니 뒤섞여 쓰이며 생기는 각종 분쟁 및 혼선들을 해소하고 또 국제 기준에 맞춘다는 취지에서 고안됐습니다. 무슨 상황인데? 이번 개정안의 가장 큰 효용은 통상 한국 사회에서 쓰는 "몇 살이냐"라는 질문에 대답할 나이를 합법적으로 낮출 수 있는 명분이 마련된다는 점입니다. 으레 통성명에 쓰이던 '한국식 나이'는 태어나자마자 한 살을 먹는 것으로 여겨, 12월 31일에 태어난 아기도 그다음 해 1월 1일이 되면 2살이 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었죠. 앞으로는 여기서 최대 두 살까지 깎으실 수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법은 바뀌지만, 엄밀히 말해 우리 생활이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겁니다. 바뀌는 건 행정 사법 분야의 나이를 '만 나이'로 통일한다는 내용을 담은 민법 및 행정기본법 개정안이 시행된다는 겁니다. 지금도 초등학교 취학 의무 연령이라든지, 연금 수급시기와 정년은 만 나이를 따르고 있기 때문인데, 차근차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다소 K-콘텐츠 진흥 및 홍보 관계자 같은 질문을 하나 던져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한국에서도 '해리포터 시리즈' 같은 메가 히트작이 탄생할 수 있을까요? 기대에 비해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글을 읽는 사람, 그것도 긴 글을 집중해서 읽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통계가 ‘출판업계’에 강한 비관적 전망을 드리우는 시대입니다. ‘뇌피셜’이 아니라 통계로도 나타나고 있죠. 문화체육관광부가 펴낸 ‘국민 독서실태 조사’에 따르면 종이책, 전자책, 웹소설, 오디오북을 포함한 서울 성인의 연간 독서율은 2013년 81.4%에서 2021년 54.7%로 대폭 하락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영원하다’는 지조로 한국의 J. K. 롤링을 찾을 것이라 호언하며 출판 산업의 미래에 베팅하는 ‘스웩(Swag)’을 보여주는 회사가 있다면 어떨까요? ‘모든 이야기들의 안식처’ 안전가옥... 직원들은 ‘PD’ 어떤 이야기라도 안전하게 보호하는 안식처가 되겠다는 포부를 담은 출판사, 아니 ‘스토리 프로덕션’ 안전가옥이 주인공입니다. 2019년 본격적으로 ‘출판업’으로 사업 방향을 틀어 올 3월 말 기준 출간 도서가 60권에 이르렀습니다. 세로로 길쭉한 형태로 한 손에 잡히는 판형으로 제작돼 눈길을 끌었던 ‘쇼트 시리즈’에선 15쇄를 찍은 『칵테일, 러브, 좀비 (조예은, 2020)』 같은 베스트셀러도 배출했습니다. 안전가옥이 만드는 이야기들 중엔 추리, 판타지, 호러, 스릴러, 각종 형이상학적 소재와 배경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런데 모인 이야기들을 단순 출판에서 끝내는 게 아닙니다. 일단 출간 가능한 소설 형태의 스토리 IP(저작권)가 확보되면 영상, 영화, 웹툰 등의 제작 유통사와 2차 판권의 사업화를 추진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웨이브 오리지널 드라마 SF8에 「우주인 조안」과 「증강 콩깍지」가 단편 드라마로 만들어졌고, 「뒤틀린 집」의 경우 단행본 출간 전 줄거리만 있는 단계에서 영화화가 결정돼 지난 2021년 영화로 개봉하기도 했습니다. 기존 ‘출판사’의 이미지를 깨고 원천 확보된 이야기들로 다른 매체로의 제작 프로덕션 역할까지 맡는 그야말로 ‘기획사’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통상 출판사 에디터의 일이라 하면 작가, 그것도 소설가의 초고를 바탕으로 방향을 가다듬거나 수정하고, 오탈자 교열 정도의 역할에 그친다고 생각하지만 안전가옥은 좀 다릅니다. 일단 구성원들의 직함부터 조금 특이합니다. 대표를 포함해 모두 16명이서 일을 하는데, 대다수 직함이 ‘PD’입니다. 소설의 단초와 메시지를 제공하는 건 작가이지만 그 과정을 이 PD들이 함께 풀어나갑니다. 트리트먼트 작업을 돕는 ‘크리에이티브’ 영역엔 개발팀 소속 이른바 ‘스토리 PD’ 8명이 있습니다. MBC에서 지난 2009년 방영된 드라마 「탐나는도다」 극본을 쓴 이지향 PD가 스토리팀 총괄을 맡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스토리가 어떤 매체와 작업할 수 있고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는지는 이른바 유통과 사업 PD들이 고민하고 협력사를 구하러 다닙니다. “단편을 쓸 때에는 필수적이지는 않지만 장편을 쓸 때에는 트리트먼트(본편을 쓰기 전에 구체화한 줄거리)를 함께 만들어갑니다. 에이포로 한 3-40장 정도 되는 이야기의 디테일한 설계도를 만드는 건데, 실제로 문장만 쓰면 책이 나올 수 있는 수준까지 사건을 기술합니다.” 안전가옥 김홍익 대표의 말입니다. 김 대표는 ‘공동작업’이 되는 만큼 작가의 자율성이 떨어질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는 작가의 메시지, 그러니까 정수(essence)를 작가에게만 뽑아내라고 맡기는 건 일종의 방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작가에게 너무 많은 책임을 지우는 거죠. 작가는 자기가 진짜 생각해야 하는 것들만 생각하게 돕고, 나머지 것들은 피디와의 또는 다른 작업자들이 도울 수 있는 거죠. 오히려 이 과정에서 작가의 개성이나 창의성을 해치는 게 아니라 반대로 더 살려줄 여지가 크다고 생각해요. 피디가 절대 할 수 없는 고유한 일을 작가님들은 하는 거고, 저희는 그 영역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은 가장 비즈니스 친화적인 제조업.. 스토리는 영원하다 ‘CJ ENM’이나 ‘스튜디오드래곤’같은 대형기획제작사와 비슷한 구조와 역할을 ‘출판사’가 갖춘다는 아이디어는 창업자인 김홍익 대표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삼성전자 기획자에서 2012년 카카오로 둥지를 옮긴 김 대표는 당시 카카오 성장기에 김범수 의장과 인수합병 업무를 하던 전략팀 출신입니다. 우연히 대학 동창이자 같은 ‘글쓰기 동아리’에서 수학한 친구인 HGI 정경선 의장으로부터 창작자를 전문 육성하는 사업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의와 투자를 받았던 것이 안전가옥의 시작이었습니다. “여러 대기업을 거치면서 느낀 건 ‘올드스쿨 플레이어들’이 잘할 수 있는 판은 이제 끝나가는 것 같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바뀌지 않을까를 고민했을 때 떠오른 건 ‘스토리텔링’과 ‘이야기’의 원천이었어요. 이 코어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러면 이 코어를 만들어내는 것에서 무엇이 가장 핵심일지를 떠올려보니 돈과 창작자더라고요. 창작자를 육성해 보자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2017년 성수동 공장단지에 넓은 공간을 마련해 두고 시작한 오프라인 살롱이 ‘안전가옥’이었습니다. 당시 창작자들이 오프라인 공간에서 자유롭게 소통하는 공간으로 주목받으며 지금은 폐업한 ‘취향관’, 현재도 활발하게 사업을 이어가고 있는 ‘트레바리’와 함께 자주 거론되곤 했었는데요. 2년 만에 오프라인 살롱을 접고 ‘출판업’ 등록을 하면서 사업을 피봇하게 된 건 커뮤니티의 뾰족한 구심점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면 동시대 예술인들이 모여 함께 어울리던 살롱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는 거트루드 스타인이 있기 때문이거든요. 그런 구심점이 있어야 충분히 강력한 커뮤니티가 생성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먼저 콘텐츠를 실제로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하자라는 거였고. 지금은 한국에 J. K. 롤링 같은 사람이 나타날 수 있다면 어떻게 하면 우리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스토리’ 중심 기획 제작사의 전진 기지로 ‘출판업’을 선택한 데엔 어떤 이유가 있을까. 김 대표는 ‘비즈니스적 관점이 주효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책이 사업적으로 다루기 용이한 매체라고 생각해요. 영상은 아이템이 표류하고 있을 때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바이어가 결정을 하는 거지 셀러가 ‘가격을 깎을게’ 하고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책은 언제 내보낼지, 얼마에 책정할지 그리고 몇 부나 만들어서 어디에 유통할지를 정할 수 있다는 말인데요. 일종의 제조업입니다. 그래서 소설이야말로 사업적으로 유의미하다고 생각하고, 저희가 버틸 수 있는 기반이 됩니다.” 특히 지금처럼 유례없는 한국 콘텐츠 활황기에 해외 사업자들과 판권을 계약할 때도 ‘소설’ 형태의 IP는 오히려 영상물보다 더 경쟁력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영상 판권을 거래하는 글로벌 마켓이 있는데 웹툰이나 웹소설은 거래되기가 어려워요. 해외에선 워낙 생소한 개념이거든요. 유럽이나 미국이나 영상 마켓의 경우에도 이미 한국에서 영상으로 제작된 경우가 아니면 그리고 어느 정도 한국에서 성공을 거둔 경우가 아니면 그 시장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책의 출판권을 가진 상태에서는 훨씬 더 용이하게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글로벌에서 ‘텍스트’는 유의미한 단위라 확장 가능성도 더 크다고 봐요.” “‘장르’는 이야기를 맛있게 하는 레시피.. ‘스토리계의 AOMG’가 목표” 안전가옥은 특히 ‘장르소설’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주로 추리, 스릴러, SF로 분류되는 작품이 대다수인데, 2020년엔 SF작가이자 영화평론가인 ‘듀나’와 협업한 단편소설집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주로 공모를 통해 신진 작가들과 출간할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굴하는데, 공모전 주제가 독특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현재는 ‘로맨스 도파민’이라는 주제로 소설 공모를 받고 있습니다. 장르라면 일가견 있는 PD들이 공모전 등을 통해 모집한 작가의 아이디어에서 소설적 세계관을 어느 규모로 확장해 나갈 수 있을 것인지 판단하고 상의합니다. 2019년 ‘대스타’를 키워드로 한 공모전에 응한 이경희 작가의 경우 대서사극의 판타지 세계관을 쓰기에도 적격이라는 판단에, 애초에 공모를 받은 단편소설에서 더 확장해 현재는 전체 7-8권 규모의 연작을 계약한 상태입니다. 경제특구로 과학 기술에 제약이 없어진 경기도 평택에서 벌어지는 인간 복제, 인체 개조 등과 관련한 첨단 범죄 서사라고 합니다. “저희가 이야기하는 장르는 다른 무언가와 구분되는 배타적인 무언가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다만 이야기를 더 재미있게 즐기기 위한 어떤 약속, 더 투박하게는 ‘레시피’로 표현할 수 있겠네요. 창의적인 요리를 하는 사람도 중식, 양식, 일식 이런 구분을 하긴 하잖아요. 가령 ‘마라’라는 이름이 들어가면 얼얼하고 매울 것이라는 예상치가 있는 것이고. 매운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찾고, 매운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면 상대적으로 덜 찾게 되겠죠. 그래서 우주, 판타지 이런 배경이 꼭 장르의 선제조건이라기보다는 어떤 사람의 내면을 좀 더 파고 들어가고 사람 사이의 관계 자체에 엄청 깊이 들어가는 것도 하나의 장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사적 쾌감과 흥미로운 사건들을 발굴해 내기 위한 ‘이야기 스터디’는 따로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만 공모전을 거칠 때마다 팀원들이 모여 창작과 이야기에 대한 더 밀도 있는 논의를 나누면서 ‘안전가옥’만의 색채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김 대표는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저희는, 어디선 못할 것 같은데 안전가옥에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 이런 느낌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차별성이 조금씩 인지되고 있는 것 같고요. 규모가 아닌 유의미한 레이블로 인식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말 하면 직원들이 반응이 그닥.. 일 것 같긴 하지만, 스토리계의 ‘AOMG’ 레이블이 되는 거죠.” 김 대표는 아직은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대형 작가와도 안전가옥만의 색깔을 담은 이야기를 작업해, 내년 초에는 출간할 수 있을 예정이라고 귀띔해 줬습니다. ‘출판사’가 할 수 있는 다양한 영역에 도전해, 아직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존재감을 점차 다지고 있는 ‘안전가옥’의 행보를 앞으로도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이아몬드만큼 영원한 그리고 꺾이지 않을 ‘스토리’의 무궁무진한 가능성도 즐겁게 지켜보면서요. 디자인 : 고결
더불어민주당 김남국 의원이 소유한 가상자산 규모에 국민적 관심이 뜨겁습니다. 김 의원은 5월 9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대국민 사과문에서 “모든 거래는 실명 인증된 계좌를 통해 제 지갑으로만 투명하게 거래”했고, “미공개 정보를 이용했거나 상속 증여받았다는 것 역시 터무니없는 허위사실”이라고 주장하며 가상자산을 매각하라는 당의 권고와 진상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밝혔는데요. 이 사과문이 오히려 논란을 키웠습니다. 해소되지 않은 의혹들이 많고, 또 문제가 되는 자금의 액수가 크기 때문이겠죠.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의혹들이 우후죽순처럼 제기되고 있는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왜 중요한데? - 사고, 팔고, 남은 건 얼마인가 아무래도 이번 일련의 사태를 더 생소하고 복잡하게 느껴지게 하는 건 의혹의 중심에 소위 ‘코인’으로 불리는 가상자산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상자산 계좌며, 거래소며, 이체며 어려우시죠? 그러나 곁가지들을 쳐내고 핵심적인 의혹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프랑스 예술가 고갱의 작품이 생각나는 한 줄입니다. 김남국 의원의 코인 대금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갔는가, 그리고 지금 남은 건 얼마인가.
“거하!” 오픈 카톡방에 입장하자 기존 참여자들의 경쾌한 인사가 쏟아집니다. ‘거지 하이’라는 뜻입니다. 세간의 화제라는 이른바 ‘거지방’입니다. 고물가 시대에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의 소비 내역 또는 소비 충동을 자백하고 서로가 서로의 절제를 돕는 이른바 무지출 챌린지의 일환입니다. ‘거지방’으로 오픈 카톡방 수백 개가 검색되지만, 참여자 수가 제한 인원에 이른 ‘풀(Full) 방’이 여전히 많습니다. 절약과 무지출에 대한 요즘 사람들의 관심이 뜨겁다는 걸 보여주는 방증이랄까요. 취지는 ‘절약’이지만 다소 과격하게 ‘거지방’으로 부릅니다. 무절제한 소비로 거지가 되기 싫은 사람들이 모이는 방 또는 이미 소비 여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더 이상 쓰면 안 되는 사람들이 모인 방이기 때문입니다. 참여자들은 닉네임에 월간 누적 소비액수를 수시로 업데이트하고, 그때그때 어떤 품목에 돈을 썼는지 고백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돈 써도 될까요?” “기각합니다” 거지방 등장 챗방에 이모티콘을 쓰면 “다른 사람들에게 소비를 유도하지 말라”는 경고가 날아오고 이윽고 누군가가 해당 이모티콘을 어설프게 따라 그린 그림을 올리면서 “이건 공짜니 이걸 쓰라”고 말합니다. 속옷에 구멍이 나 새로 샀다고 소비 내역을 올리면 “바느질을 배우라”거나 “물려받아 입으라”는 조언이 날아오기도 합니다. ‘무지출 챌린지’에 걸맞게 소비라면 사정없이 꽂히는 비난과, 또 지출을 반려하는 다른 사람들의 잔소리(?) 때문에 소비 내역을 애써 위장하는 대화들도 ‘거지방’의 매력 포인트입니다. “사회적 품격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 1만 5천 원”, “똑바로 말하세요”, “친구한테 커피랑 조각 케이크 사줬습니다”, “더 나은 나를 위한 한 발자국 20만 원”, “구체적으로 쓰세요”, “옷입니다” 등. 지난 3월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4.2%를 기록했고, 또 외식 물가 상승률은 7.4%에 이르렀습니다. 원자재 가격, 가공비, 인건비, 물류비 오르지 않은 게 없죠. 그러다 보니 실생활에서 체감하는 경기가 매우 팍팍하기 그지없습니다. 매월 급속도로 줄어드는 잔고를 지켜보고 있으면 ‘이대로 살다 간 거지꼴 면하기 어렵다’는 말이 바로 이해됩니다. 혹독한 경기에 대응하기 위해 소비를 줄여야 하는 사람들에게 ‘거지방’은 유쾌한 무지출 챌린지로 명성을 떨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오픈 카톡방에서 가장 많이, 자주 접하는 건 바로 소비와 관련된 정보입니다. ‘거지방’에서 명품 소비 고백.. 변종 소비문화? 약 열흘 간 5개의 거지방에 참여해 참가자들의 대화를 지켜봤는데요. 쓸 것이냐, 말 것이냐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이용자들에겐 단호하게 ‘쓰지 말 것’을 주문하는 집단지성은 잘 통하지만, 이미 써버리고 소비 내역을 익살스럽게 통보하는 경우엔 오히려 ‘소비 정보방’이 되어 버리고 만다는 점도 특징입니다. “보라카이 여행 전까지 허리띠를 졸라매겠다”며 거지방에 들어온 포부를 밝히는가 하면, 어버이날을 맞이해 부모님께 수백만 원의 명품가방을 사드렸다는 ‘넘사벽’ 고백이 인증 사진과 함께 이어지고, “부모님이 나에게 수 억 원을 쓰셨는데 이 정도는 해드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설명엔 그럴 수 있다, 소비를 용인한다, 인정하는 분위기로 흘러가는 식입니다. 20만 원어치 영양제를 샀다는 고백엔 무작정 나무라는 대신, 비슷한 함량의 더 싼 제품을 소개해주기도 합니다. 영양제엔 관심도 없었지만 그 정보를 보니 솔깃합니다. 이쯤 되면 ‘소비 정보방’ 맞나요? 무지출과 절제를 요구받는 썩 유쾌하지 않은 상황에서 함께 절약할 수 있는 ‘거지방’이 우후죽순 만들어지고 있지만, 첫 유행이 시작된 지 2주 차에 접어든 지금은 소비를 엄격하게 제지받기 위함이라는 애초의 목적보다 ‘소비여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였다’는 동질감과 안도감을 느끼려는 용도가 더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돈이 (충분히) 없다”는 한탄을 그야말로 하루 종일 해도 그 누구도 눈총을 주지 않는 대화방이니까요. 하지만 ‘거지방’이 아무리 유행이라 해도 사회 전체적으로 허리띠를 졸라매는 분위기라 보긴 어렵습니다. 여행업계에 따르면 5월 해외여행 수요는 전년 동월 대비 많게는 3000%, 적게는 1000% 이상 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국내 고급호텔 ‘호캉스’ 수요 역시 폭증했습니다. 각종 해외 브랜드 명품업체들은 가격 인상에도 식지 않는 ‘오픈 런’ 소비를 등에 업고 한국 영업이익을 연일 역대 최대치로 갈아치우고 있죠. 이렇듯 한편엔 극도로 소비를 절제하며 3천 원 미만의 편의점 도시락 매출을 올리는 ‘거지방’ 등의 무지출 챌린지가 있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에선 그동안 억눌린 소비욕구를 마구 분출하는 럭셔리 ‘보복소비’의 이분화 된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빈곤은 절대적이면서도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SNS를 통해 타인이 전시하는 보복소비 내역에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또 욕망의 전파가 쉽게 일어나는 지금, 스스로를 ‘거지’라 자조하며 소비를 억제하려는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빈곤’으로 인식하고 있을까요? OECD는 2019년 중산층의 기준을 중위소득의 75~200%으로 정해두고 각 국가별로 비중을 계산해 비교하고 있는데요. 지난해 NH투자증권에서 낸 이른바 ‘중산층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이 ‘중산층’에 해당하는 소득 범위는 월 385만~1천20만 원입니다. 그런데 이 기준에 따라 중산층인 사람들도 절반에 가까운 45.6%가 스스로를 ‘하위층’이라고 답했습니다. 이들의 셈법에 따르면 한 달 소득은 686만 원, 또 한 달 소비 지출이 427만 원가량은 되어야 중산층입니다. 이들이 평균치라 생각하는 지출 수준은 그러나, 상위 9%에서나 가능한 수준입니다. 세상은 과시 소비와 전시로 가득한데 나의 가처분소득은 그에 미치지 못하니 만성적 빈곤 상태로 스스로를 인식합니다. 우리는 얼마를 가져야 행복할까 중요한 건 절제와 절약을 통해 참여자들이 달성하고자 하는 ‘행복’입니다. 왜 갑자기 행복이냐고요? ‘거지방’ 참여자분들이 인용하셔도 좋을 새로운 연구가 나와서 이 기회에 소개를 해드리려 합니다. 말하자면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면 당신이 돈이 부족한 게 아닌지 생각해 보라’라는 인터넷 격언(?)을 증명하는 연구인데요. 사실 지난 2010년 프린스턴대학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 교수와 앵거스 디튼 교수가 미국인 45만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당시 기준으로 연 소득 7만 5천 달러가 되면(우리로는 연봉 1억 원 정도입니다) 그 이상의 소득을 벌어도 매일의 행복감에 큰 차이가 없다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 뒤로 10년간 거의 정설로 굳어졌었죠. 그런데 카너먼 교수 본인이 최근 10여 년 전 냈던 논문을 수정한 논문을 다시 내놨습니다. 자신의 논문을 반박한 펜실베이니아대학 와튼스쿨의 킬링스워스 교수와 공동연구한 결과인데요. 가장 큰 차이는 행복감의 임계치가 된 숫자가 7만 5천 달러에서 50만 달러로 크게 늘었다는 점입니다. 우리 돈으로 치면 연봉 약 1억 원에서 약 6억 5천만 원 정도로 오른 셈입니다. 그러니까 연봉 6억 원까지는 ‘돈으로 행복을 충분히 살 수 있다’는 뜻이죠. 다만 새 논문에도 버는 돈과 상관없이 영원히 불행할 수밖에 없는 소수의 그룹도 존재했습니다. 마음에 큰 상처가 있거나, 심적으로 우울감을 느끼거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상실을 겪은 사람들은 아무리 연봉이 높아져도 안타깝게도 불행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죠. 결국 이 논문은 절약하고 모으고 불려서 목표치를 달성하더라도 ‘행복할 수 있는 태도’를 갖춘 사람만이 그 과실을 따먹을 수 있다는 교훈을 주기도 합니다. 욕망을 공유하고, 가끔 뻔뻔하게 자랑도 하면서, 서로를 북돋아주는 ‘거지방’의 유쾌한 챌린지를 경험하며 느낀 점은 바로 모든 무지출 챌린지의 목표는 역시, 지출이라는 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언젠가 ‘정말로’ 값지다고 생각하는 무언가를 ‘지르는’ 그날을 위해 현재의 욕망을 억누르고 또 절제합니다. ‘소비’는 여전히 많은 이들의 삶의 활력소이며 이해하기 쉬운 삶의 의미입니다. 대다수 ‘거지방’에서 결국 소비는 무조건적인 배격의 대상이 아닌 ‘더 의미 있어야 하는 행위’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 참고 자료 <Income and emotional well-being: A conflict resolved>, 2022. <High income improves evaluation of life but not emotional well-being>, 2010. 글: 정혜경 디자인: 고결
지난번 <어쩌다>에서 진화하는 스냅사진에 대해 다뤘습니다. 특히 ‘가성비’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웨딩업계에서 확실한 수요층을 찾고, ‘폭풍 성장’ 중인 스냅 시장이 예약 전쟁과 오픈 런의 최첨단에 놓여있다고도 말씀드렸는데요. 사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담은 기록에 대한 욕구와, 또 그 욕구와 직결되는 소비심리는 결혼이나 생일 같이 이른바 중대사(?)에만 몰리는 것은 아닙니다. SNS가 현대인들의 중요한 소통 창구가 되면서 매 순간 스스로를 어떻게 기록하고, 과시하는지가 중요해졌고 특별한 날이 아닌 보통의 삶, 즉 ‘일상’ 그 자체가 콘텐츠로 소비되고 있습니다. 인스타그램의 ‘일상’ 해시태그가 달린 게시물은 2.6억 개에 이르고, ‘일상스냅’으로 검색되는 게시물도 69만 개에 이릅니다. “이성에게 ‘선톡’ 오는 프로필 사진 찍어드려요” 욕망할 만한 타인이라는 존재가 ‘인플루언서’라는 직업으로 규정되기 시작하면서 ‘자기 PR’과 ‘셀프브랜딩’ 영역 역시 수익을 거두는 부가가치 사업으로 성장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상품이 있습니다. 이른바 ‘인생 샷’으로 불리는 사진을 찍어주는 상품입니다. 다만 소중한 순간을 기억될 만한 사진으로 남긴다는 의미보다, 가공된 ‘일상’의 모습을 통해 특수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는 마케팅으로 시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가의 장비가 아닌 휴대전화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데, 원하는 목적에 따라 사진의 배경이 되는 장소와 포즈, 스타일링 등 맞춤식으로 조언하는 이른바 이미지 컨설팅 사업으로 스스로를 정체화하고 있습니다. 각 업체들은 상품 이용의 다양한 목적으로 ‘전문직 등 소득이 높은 이성에게 먼저 연락이 오게 하기 위함’, ‘헤어진 연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함’, ‘대외 비즈니스에서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함’ 등을 제시하고 있는데요. 1년 동안 계절별로 메신저의 프로필 사진을 찍어주는 세트 상품이 160만 원대에 팔리고 있고,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는 ‘일상룩’을 만들기 위해 사진에 필요한 헤어 메이크업 등 뷰티 사업 제휴도 있습니다. 모두 ‘그럴듯한 일상’을 만들기 위한 세트들입니다. 단순히 외모가 잘 나오게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한 업체는 인물 사진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고급 호텔’임을 은근히 입증할 수 있는 ‘호텔 라운지 프로필 사진’ 상품을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기본 음료 2잔을 주문하고 사진을 찍을 경우는 40만 원, 주문 메뉴가 ‘에프터눈티 세트’일 경우는 사진을 찍어주는 업체에 50만 원을 지불해야 합니다. 지금 당신이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충분히 포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실제의 모습보다 타인이 인식하는 모습이 더 큰 가치를 가진다는 속삭임이 이런 기이한 변종 스냅사진 업(?)의 확장 동력입니다. 시즌 예약이 개시되면 수요가 폭증해 금세 매진되곤 한다는 이런 업체들은 “외모지상주의를 겸허히 인정하고 사진 관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스스로 대접받고자 하는 욕망에 솔직한 사람”을 신청자의 요건(?)으로 못 박아두기도 합니다. 일상이 콘텐츠? 나르시시즘 권하는 사회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수입 명품과 쉽게 방문하기 어려운 장소, 돈이 많이 드는 취향이 마치 별 것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은 앵글. 특별한 경험임에도 호들갑 떨 것 없다는 태도와 포즈. 이러한 ‘이른바 일상 콘텐츠’는 하루에도 무수히 벌어지는 생활 최전선의 지리멸렬한 일들을 잘 숨겨두고 있기 마련입니다. 요컨대, 콘텐츠가 될 수 있는 일상은 대개 긍정적입니다. 학자들은 현대인에 만연한 ‘나르시시즘’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자기애’로도 해석되는 나르시시즘은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 대해 느끼는 중요성과 특별함에 집중하는 마음뿐 아니라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과 그로 인한 민감성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다 보니 나르시시스트는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드러낸 자신에 대한 타인의 구체적인 반응에 갈증을 느낍니다. 지난 2014년에 출간된 한 논문(이선경‧팔로마 베나비데스‧허용희‧박선웅)이 흥미로워서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연구진이 총 28개 연구 집단에 포함되었던 13,450명의 자료를 대상으로 시계열별로 가중치를 곱해 분석해 보니, 한국 대학생들의 나르시시즘이 지난 15년간 지속적으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NPI 지수(Narcissistic Personality Inventory)는 40개의 강제 선택 문항으로 이뤄져 있고, 참여자들에게 두 가지 문항 중 자신을 더 잘 설명하는 문항을 택하도록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령 “나는 다른 사람과 비슷하다”, “나는 비범하다” 중에 하나를 택하는 등의 방식입니다. 물론 한국 대학생들만의 현상은 아닙니다. 미국에서도 인기 팝송의 가사나 책과 논문 같은 저술에서 주어의 형태와 비중, 출산율 등 사람들이 직접 사용하는 언어를 활용해 나르시시즘 연구를 하고 있는데, 지난 2009년 측정한 미국 청년 세대의 나르시시즘 성향은 1982년보다 약 58%가량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디지털 디바이스의 접근성과 숙련도, 낮은 출산율과 양육 과정에서 다인 가족의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살아온 성장환경, 개인주의적 가치관의 확산 등 이런 현상의 이면엔 선후와 인과관계가 뒤섞인 다층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자기 전시는 인생의 낭비? 목적에 따라 다르다 물론 전시형 SNS와 여기서 촉발되는 나르시시즘의 긍정적 면을 연구한 논문들도 있습니다. 적극적인 자기 노출이 타인과의 사회적 관계를 유지, 발전시키고 긍정적 감정과 사회적 지지감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건데요. ‘느슨한 연결’이라고 하죠. 실제 만나서 깊은 수준의 대화나 친밀감을 나누지 않더라도 필요에 의해 또는 적당한 호의를 가지고 서로의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하기에 대략의 생활상을 서로 노출하고 공유하는 SNS는 최적의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긍정과 부정 이미지를 모두 담는 ‘기록적 자기 노출’과 삶의 긍정적 부분을 화려하게 과장하고 과시욕을 충족시키는 ‘과시적 자기노출’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타인의 반응’이 행복감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입니다. 신선화‧서미혜(2020)가 인스타그램을 사용하는 2-30대 남녀 434명을 온라인 조사한 결과, 인스타그램을 얼마나 자주 사용하고 또 사진을 올리는지보다 무슨 목적으로 사용하는지가 사용자의 행복감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과시의 목적일 경우 타인들의 반응(좋아요, 하트)이 저조할수록 확연히 더 행복지수가 떨어졌거든요. 반(反)인스타그램 SNS.. 생생한 나를 담을 수 있을까 자기 브랜딩과 자기 PR이라는 무한 경쟁에 피로감을 느끼고, 그렇게 가공된 이미지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기존 인스타그램 방식의 전시형 SNS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친구들과 공유하자는 취지의 앱도 출현했습니다. 2019년 출시 당시부터 야금야금 입소문을 타다가 2022년 들어 본격 미국과 유럽을 강타한 ‘비리얼(BeReal)’이 대표주자인데요. 지난 2022년 3월 프랑스 앱 스토어에서 다운로드 1위를 기록했고, 최근엔 하루 이용자 수가 평균 1천만 명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참고로 인스타그램 일평균 이용자 수도 현재 1천20만 명이 조금 넘는 수준입니다. 앱 이름부터가 ‘진솔해져라’라는 뜻인데요. 사진을 꾸밀 수 있는 보정 필터 없이 하루에 한 번 정해진 시간에 알람이 가면 그 순간의 자기 자신을 촬영해 친구들에게 공유하도록 하는 ‘타임 어택’ 형태의 SNS입니다. 그 외에도 친구들과의 ‘긍정 피드백’을 강화하게 만드는 ‘슬레이(Slay)’, 내가 아닌 남이 찍은 내 사진으로만 피드를 구성할 수 있게 한 ‘포파라치(Poparazzi)’, 하루에 하나만 사진을 올릴 수 있는 ‘디스포’ 등 다양한 대안 SNS들이 출현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앱들 역시 SNS가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나르시시즘을 부추기는 경향을 막기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진짜(Real)’ 모습을 입증할 수 있는 장벽이 더 견고해질수록 이미지 조작과 가공에 들어가는 피로도가 오히려 더 높아질 수 있다는 겁니다. 가령 비리얼 앱이 활성화된 유럽에선, 앱의 특성상 촬영 알람은 하루 중 무작위로 가지만, 사진을 올릴 수 있는 제한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연출’에 공을 들이는 사람들이 많다는 기사가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찰나의 진실을 포착하는 어원적 의미의 스냅사진 역시 ‘작가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떠올리면, 피사체가 된 자신을 가급적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포착하려는 노력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죠. 하지만 이런 심리를 자극해 실제 모습과의 괴리를 넓히는 데 쓰이는 과시 소비는 더 큰 심리적 타격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PR이 필수가 된 시대라는 압박감이 밀려들더라도 이것은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기록인가를 늘 반추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참고 자료 1. <인스타그램 이용자의 나르시시즘이 자기 노출을 거쳐 주관적 안녕감에 미치는 영향과 긍정적 피드백의 조절효과: 기록적, 과시적 자기노출의 차이를 중심으로>, 신선화‧서미혜, 2020. 2. <SNS 사용자의 자기 노출 행동 등가요인>, 박지영‧곽기영, 2019. 3. <SNS 사용자의 외로움, 자기 노출, 사회적 지지 그리고 삶의 만족도에 관한 실증연구>, 이경탁‧노미진‧권미옥‧이희욱, 2013. 4. <한국 대학생들의 나르시시즘 증가: 시교차적 메타분석(1999-2014)>, 이선경‧팔로마 베나비데스‧허용희‧박선웅, 2014. 글: 정혜경 디자인: 고결 인턴: 김미랑
<예언자들>을 사랑해 주신 독자들께. 안녕하세요 저는 <예언자들>을 기획한 SBS 정혜경 기자입니다. <예언자들>은 각 분야에서 연구 중인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들이 특정 시점을 전제로 미래를 예측해 쓰는 가상의 에세이를 담은 코너로, 지난해 11월 김승겸 교수의 <수직 메트로폴리스>를 시작으로 매주 수요일마다 연재됐습니다. 카이스트에서 선정한 각 분야 최일선 총 스무 명의 교수진이 현재 연구 성과와 미래 실현 가능성을 고려해 길게는 100년, 짧게는 10년 앞으로 다가온 '개연성 있는 미래'의 모습을 전했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매일을 고민했을 100년 전, 10년 전 과학자들의 고민을 지금 우리 세대 과학자들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고 여겨져도 언젠가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생활'이 되어있을 과학의 '생얼'은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하면서요.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가 되기 위해 필요했던 건 '미래'라는 시제였습니다. 본격 연재에 앞서 직접 만나 인터뷰한 참여 필진들은 실제 본인들이 구현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진 탐구자들이었습니다. 에세이는 때로 유토피아기도, 디스토피아기도 했지만 모든 글이 지금 현재의 우리가 미래의 모습을 바꿀 수 있다는 낙관을 품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감각하고 예지할 수 있는 내 주변과 사회의 '문제'들이 곧 우리의 미래 모습과 직결될 수 있다는 걸 코너 기획자로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딥페이크 기술이 진실과 거짓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발달한 미래에도 정치와, 선거제도는 존재할 것이며(20년 뒤 대통령 후보자 A의 하루), 폭발의 예비 징후들이 거듭 언급되고 있는 백두산 화산 이후 삶을 예비할 필요 역시 언젠가 대두될지도 모릅니다(할머니의 내 집 마련 꿈을 풀어준 지하 '집 열쇠'). 현재도 일어나고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보안 기술의 허점 때문에 많은 세계인들을 비탄에 빠뜨릴 제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이 상존하고(2032년! 자율주행 아니라 '안티' 자율주행이 필요하다니), 자율주행 기술의 발달로 운전을 하지 않아도 되는 편의는 얻었을지라도 이제 그 시간까지 노동에 할애해야 하는 굴레에 빠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2040년 나의 이동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늘 새로운 기록을 갈아치우며 전 인류에게 엄습해 오는 기후변화의 시대에 접어들었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삶은 이어질 것이고(점점 북쪽으로 내몰리는 2050년의 인류), 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우리의 주거 형태도 매우 다른 모습으로 바뀔지도 모릅니다(수직 메트로폴리스). 하지만 데이터 예측 기술로 미처 지금의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사회 문제를 확인해 해결할 수 있는 따뜻한 미래의 모습도 있습니다(나는 오늘, 낫을 든 사람을 만나러 간다). 침습적 방식이 아닌 날숨에서 미래의 내가 걸릴 질병을 파악해 내는 간편한 세상이 도래하면(킁킁.. 냄새 맡으면 무슨 병에 걸렸는지 알 수 있다?), 부족한 신체 기능을 보완해 줄 로봇 옷을 입은 채('오늘은 무슨 로봇 입을까' 2043년 아침의 고민), 여껏 질병의 예방과 치료에 쏟았던 시간과 비용을 AI 베이스, 보컬 연주자와 함께 밴드 합주를 하는 데 쓸 수도 있겠죠(캐나다 휘슬러 스키장에 있을 남편에게). 아카데미 7관왕에 오른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는 우리 세계의 주인공 '에블린'이 미처 몰랐던 무한우주 속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각각의 실마리로부터 무한히 뻗어나간 가능성의 세계 속에 있는 자신의 존재로부터 힘을 얻어 우주의 균형을 깨뜨리고자 하는 적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입니다. 극 중에서 왜 이 막중한 임무를 다른 세계의 그 어떤 자신들보다 능력도 부족하고 불운한 자신이 맡게 되었는지 물어보는 주인공에게 조력자 레이먼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의 당신이 있기에, 당신과 다른 선택을 함으로써 존재하게 된 다양한 가능 세계들의 당신들이 각각 빛날 수 있었다"고요. 이처럼 현재 우리의 선택과 관심은 예측하기 어려운 무한히 다양한 미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현재 우리 곁에서 각 분야의 최첨단, 말 그대로 미세하고 뾰족한 연구과제에 열정과 생을 바치는 과학자들은 우리들에게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채롭게 펼쳐질 가능세계의 문을 열어줍니다. 10년, 100년 후가 될지 모르는 그날 우리는 깨닫게 될지도 모르죠. 가지 끝에서 돋은 싹이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을진 나무가 다 자라 봐야 그제야 알게 되는 것처럼요. 과학의 미래는 곧 우리의 가능성이며, 우리 자신이라는 말로 연재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무한 우주의 순간의 빛일지라도, 그 빛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진실을 탐구하는 모든 학자들의 건투를 빕니다! ※ 기획에 참여해 주신 모든 필진들과 여러 가지 도움을 주신 민현숙 홍보팀장 외 직원분들, 그리고 예언자들 기획에 격려와 지지를 아끼지 않은 카이스트 이광형 총장께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디자인 : 박수민